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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아빌레네
!Abilhnhv
아빌레네 abilene||아빌레네는 신약성경에서 눅 3:1에 한번 나온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는 세례(침례) 요한이 그의 사역을 시작했을 당시의 루사니아(Lysanias)의 영지이다. 그 지역의 이름은 그 수도 아빌라(abila)에서 유래했다. Itinerarium Antonini에 따르면 다마스커스(Damascus)에서 바알벡(Baalbek)이라는 로마 제국의 도시까지 가는 도중, 약 3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곳은 Suk Wadi Barada(Adana)의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그 근처에, 성벽을 세우고 성전을 건축한 "영주 루사니아의 자주성"이라고 그리스말로 된 비문과 "아빌레네인들의 경비로" 길을 보수한 것을 라틴어로 기록한 또 하나의 비문과 함께 중요한 고대의 유적들이 있다. 고대의 명칭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아벨의 무덤이 신전의 폐허가 있는 인근의 고지대에 있다고 하는 이슬람의 전설에 남아있다. 요세푸스는 이것을 "뤼산니아스의 아빌라(the Abila of Lysanias)"라고 부름으로 이것을 같은 이름의 다른 도시들과 구별한다; 그리고 Ptolemy의 시대(약 A.D. 170)처럼 늦은 시기에 루사니아의 이름이 그것에 결합된다.|아빌레네의 영토는 Ituraean 왕국의 지역인데 루사니아 왕이 Mark Antony에 의해 약 35 B.C.에 피살되었을 때 해체되었다. 아빌레네가 별개의 영지가 된 정황은 전체적으로 분명치 않으며 루사니아 영주에 대해서도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Josephus Ant. xix. 5. 1; xx. 7. 1). A.D. 37에 그 영지는 다른 지역과 함께 아그립바 1세에게 양도되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 A.D. 44년에 그것은 53년까지 로마 행정 장관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53년 클라우디우스는 인근의 영토와 함께 그 영지를 아그립바 12세에게 주었다. 1세기 말이 가까울 무렵 아그립바가 사망했을 때 그의 왕국은 시리아의 주로 편입되었다.(C. H. Thomson).
선대하다
ajgaqopoievw
선을 행하다 do good.||#1. 일반 헬라어의 용법||동사 아가도포이에오는 아가도스($18: 선한)와 포이에오($4160: 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선을 행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아가도포이에오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오며, 야타브 히필형(좋게 하다, 잘하다, 기쁘게 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민 10:32; 삿 17:13).||#3. 신약성경의 용법||아가도포이에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아가도포이에오는 '선을 행하다'를 의미한다.|① 막 3:4에서 유익한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기독론적, 윤리적 타당성을 나타낸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병행구, 눅 6:9).|② 행 14:17에서 자신의 친절(자선)을 베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③ 눅 6:33, 눅 6:35에서 은혜를 베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b) 아가도포이에오는 '잘(행)하다, 올바르게 행하다, 옳은 일을 하다'를 의미한다. 벧전 2:15, 벧전 2:20; 벧전 3:6, 벧전 3:17; 요삼 1:11에서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묘사하였다.|(참조: J.H.Thayer; W.Grundmann; E.Beyreuther).
알파
A
|#1. 일반 헬라어의 용법||(a) 헬라어 알파벳의 첫문자로, '처음, 첫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헬라어 마지막 문자는 오메가($5598)이다.||(b) 숫자로 사용할 때, %107 = 1; %108= 1000 이다.||(c) 알파(A)는 한 분리할 수 없는 음절로, 단어 앞에 붙었을 때,|① 결성어로서 A가 접두 되어 있는 단어에 부정적 의미를 가하거나 그 단어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② 계합사(copulative)로서 불변사 하마($260:..와 함께)와 유사하며, 아델포스($80: 형제)와 같이 공동체와 교제를 지적한다.|③ 강의어(intensive)로서 말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2. 신약성경의 용법||계시록의 독특한 표현인 알파($1)와 오메가($5598)는 계 1:8과 계 21:6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계 22:13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계 1:11TR). 이 표현은 "처음과 나중" 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어 그 의미를 확정한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시작하시고 끝맺으신다.|이 표현은 아마도 헬레니즘적인 사고로부터 이어 받고 팔레스틴 유대교를 경유하여 취하였으나 그 본질적 내용은 구약성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것은 "오실 이"라는 어구와 연결되어 새로운 속성을 부여받는다.|"처음과 나중"은 사 41:4[7O인 역본]; 44:6[MT]; 48:12[MT]에 나오며, 또한 만대 병행구(Mandaean parallel)도 나온다. 랍비 유대교와 헬레니즘에서 숫자의 상징으로 나온다. 랍비 유대교는 '완전(성)'을 나타내는데 알파벳의 처음과 맨 마지막 글자를 사용하거나 혹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이 숫자를 사용한다. 처음 글자만 단독으로 쓰일 때에는 '최상의 것'을 나타낸다.|진리(에메트)는 하나님의 봉인이며, 이는 그것이 처음 글자(알렢)와 중간 글자(멤), 그리고 마지막 글자(타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과 나중"과의 연결과 사 44:6의 언급(헬라어 본문이 아닌 히브리어 본문의 사 44:6)을 고려해 볼 때, 요한 계시록은 아마도 그 표현을 팔레스틴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것 같다.|( 참조: Walter Baure; J.H.Thayer; G. Kittel).
가증한 것
bdevlugma
가증한 것, 몹시 미운 것.||#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브델뤼그마(Aesop. pab. 45p)는 브델륏소($948)에서 유래했으며, 성경과 교회 용어로, '더러운 것, 가증한 것, 몹시 미운 것' 곧 혐오의 대상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브델뤼그마는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주로 토에바와 쉭쿠츠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토에바/ 브델뤼그마는 '가증스러운 것'(관습이나 사물),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증한 것은 일반적인 것, 제의적 혹은 윤리적인 것일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가증스럽게 여겨지는 것, 사람에게 가증스럽게 여겨지는 것일 수 있다. 애굽인들은 히브리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창 43:32),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출 8:22)을 싫어했다.|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은 동성애와 기타 성도착(레 18:22-30; 20:13), 우상 숭배(신 7:25), 인신 제사(신 12:31), 의식적으로 부정한 동물을 먹는 것(신 14:3), 흠있는 제물(신 17:1), 마술(신 18:9-14), 부정직한 거래(신 25:13-16), 제의적 매음(왕상 14:23 이하) 등이다.|토에바는 우상과 동의어로 사용되며(사 44:19 이하), 왕하 23:13에서 밀곰은 암몬 자손의 가증한 것이라고 한다.|쉭쿠츠/ 브델뤼그마는 '몹시 싫은 것, 가증한 것, 우상'을 의미하며, 항상 우상 숭배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되며, 하나님 보시기에 밉고 가증한 것이라는 뜻으로서 우상 그 자체를 언급할 때나 또는 우상 숭배 의식과 관련된 어떤 것을 언급할 때 쓰인다. 우상은 일반적으로 가증한 것이며(렘 16:18; 겔 5:11; 7:20; 대하 15:8; 기타), 우상만이 가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상에 예배하는 자들도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한 것이다(참조: 호 9:10).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우상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단 11:31에 예언된대로 성전에 제우스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 이것이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라 불린다. 즉 제단의 진정한 목적을 파괴하는,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도 성전에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다. 즉 거짓된 귀신 예배 행위를 뜻한다(단 9:27; 12:11).|나 3:6의 쉭쿠츠는 "가증하고 더러운 것"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브델뤼그마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눅 16:15에서 브델뤼그마는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그 실상과 반대이면서 사람들 가운데서 매우 높임을 받으려는 자와 관련하여 우상 숭배와 연관성은 사람들 가운데서 매우 높임을 받으려는 것이나 받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우상을 만드는 것임을 암시한다.||(b) 계 21:27에서 '부정한 자들', 혹은 '가증한 일과 거짓말 하는 자'들은 거룩한 도성의 출입이 금지된다.||(c) 계 17:4에서 브델뤼그마는 악한 여인의 손에 있는 금잔의 내용물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브델뤼그마는 혐오스러운 어떤 것을 의미하나 구약에서처럼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여기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계 17:5에서 그 악한 여자 이름 중 하나는 "땅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 나타난다.|음녀 로마의 잔은 온갖 가증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단지 기독교인의 편견이 아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가 로마를 일러 '세계 도처로부터 온갖 잔학하고 추악한 것들이 흘러 들어오고 그런 것이 환영받는 곳'이라고 하였다. 로마의 대철학가 세네카도 로마를 '냄새나는 하수도'라고 불렀다. 로마의 메살리나(Messalina) 왕비가 일반 사창가에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타락한 생활을 했다면 로마 도성의 추악함이 어떠 했는지 짐작이 간다. 로마에 대한 요한의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로마인 자신들이 그들의 문명에 관해 언급한 것에 비교하면 오히려 억제한 것이다. 이 문명으로 기독교가 들어간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부터 사람들이 단정한 행위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십자가의 기적이며, 또한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W. Barclay).||(d) 막 13:14; 마 24:15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을 표현한다. 다음 항목에서 설명한다.|||#토 브델뤼그마 테스 에레모시스(946+2050)|멸망의 가증한 것||#1. 고전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막 13:14과 병행구, 마 24:15에 토 브델뤼그마 테스 에레모시스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문구는 70인역본 단 12:11에서 인용된 것이며, 단 9:27, 단 11:31과 마카베오일서 1:54 이하에서는 이 문구가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다니엘서에서 이렇게 번역되는 히브리어(쉭쿠츠 쇼멤)는 "(영적) 멸망의 원인이 되는 가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이것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혐오감을 일으키거나 영적 파멸의 외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구약성경에서 가증한 것은 주로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 특히 의례법에 비춰볼 때, 죄를 범하게 하는 대상을 뜻하며, 그래서 이 말은 흔히 우상숭배의 대상들을 나타내곤 한다(쉭쿠츠는 토에바와 동의어이며, 겔 5:11에서 이 두 용어들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우상들을 의미한다. "가증한 것들"을 숭배함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혐오감을 생생하게 예증해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에스겔 8장을 참조).|넷슬은(E. Nestle, ZATW 1884의 한 논문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문구가 이방신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유대 용어로서 생겨난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하늘의 주"(바알 샤마임, 흔히 바알 샤멤이라고 발음됨)라는 칭호가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에게 수여되었다. 유대인들이 그런 말로 제우스를 시인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그들은 제우스를 바알 샤멤이 아니라 쉭쿠츠 쇼멤으로, 즉 "천상의 주"가 아니라 "멸망케하는 가증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런 상황은 마카베오1서 1:54 이하에 서술되어 있으며, 이 구절에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 BC. 175-164)가 예루살렘 성전의 대 제단 위에 이교 제단을 세우게 했으며, 이 이교 제단이 "멸망의 가증한 것" 으로 묘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이 제단과 함께 제우스(안티오쿠스는 제우스의 대리자라고 자처하였다)의 형상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증거가 있다. 물론 이리하여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에 대한 혐오감은 더욱 극렬해졌다(참조: C. C. Torrey, Documents of the primitive Church ). 이렇게하여 하나님의 성전은 이교 신전으로 바뀌어졌다. 예루살렘과 그 외의 지방에서 그런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이 발해졌기 때문에 결국 마카비 봉기가 일어나고 다니엘 예언서가 쓰여지게 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마 13:14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말은 널리 알려진 말이었기 때문인지, 아무런 설명없이 언급되었다. 많은 주석가들은 "가증한 것"의 성(gender)이 중성이나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란 분사의 성이 남성이란 점을 고찰하고 나서, 가증한 것이란 하나님을 위해 예비된 자리를 차지한 적그리스도라고 결론지었다(참조: 살후 2:4). 만일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적하는 힘을 의미하는데까지 확장된다면, 이 말이 이 문맥에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계 13장과 17장 같이 나중에 발달된 교리가 막13:14의 뜻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우상숭배를 염두에 두고 "가증한 것"이란 말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이란 말로 바꿔썼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눅 21:20).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예수님의 의도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 왜냐하면 로마 군인들은 군기에 우상의 형상을 새겨서 밤에는 그것을 땅에 세워 놓고 숭배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과의 협정에 따라 이 군기들이 결코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 요새안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만일 이 군기가 성스러운 곳에 세워진 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폭력의 결과 때문일 것이며, 여기에는 목숨을 내건 전쟁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이 "가증한 것"은 성읍과 지성소에 대한 신성모독을 불러 일으켜서 마침내 파멸적인 전쟁을 야기시키고 말았으며 그래서 예수님이 막13:2에 나와 있는 예언을 하신 것 같다. 이런 해석은 다니엘서에 있는 구절의 의미와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민족과 예루살렘에 내릴 재앙을 예상하고서 행하신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들과 부합된다(참조: 마 23:35이하; 눅 13:1이하; 눅 19:41이하; 눅 23:28이하). 예수님께서 이 성전 및 성읍에 대한 신성모독과 궁극적인 파괴를 나타낼 때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말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그 이전의 구약시대 선지자들, 그리고 특히 이 가증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건을 주의 날에 비추어 고찰하셨음을 나타내준다.|(참조: G. R. Beasley - Murray ).
퀴리오스
kuvrio"
주님 Lord, 주인 lord.||#1. 고전 헬라어의 용법.||퀴리오스는 퀴로스(%1063: 힘, 권위)에서 유래했으며,||(a) 형용사로는|① '힘이 있는, 권세(력)을 가진, 권한을 부여 받은, 권위 있는, 유효한'을 뜻한다. 여기서 힘이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지배력을 뜻하며, 법의 경우에는 유효하다를 뜻하며,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권위 있거나 자격이 있다는 뜻이며, 통치자의 경우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를 의미한다.|② '중요한, 결정적인, 주요한'을 의미한다.||(b) 명사로 초기에 드물게 사용되었으나 두가지 고정된 의미|① 종, 집, 시민의 주인,|② 아내나 여자 아이의 법적 보호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이 두 의미 모두 합법성과 권위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그러나 아테네에서는 데스포테스($1203: 주, 주인, 소유자)라는 단어가 더 흔하게 사용되었다. 코이네 헬라어에서 퀴리오스가 법률적인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니고, 소유권보다 처분권에 더 강조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두 단어는 거의 서로 교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약시대에 가까워질수록 법률적인 요소가 더 강조되게 되었고 데스포테스가 퀴리오스로 점점 대체되는 경향이 있었다.||(c) 처음에 공직자들은 퀴리오이(복수)라고 불리지 않았지만 점점 그 칭호를 붙이는 관습으로 발전 되었고, 나중에는 퀴리오스가 철학자, 의사, 청중들, 남편(아내가 부를 때), 아버지(자식이 부를 때)에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누구든 아주 일반적으로 퀴리오스로 일컬어지고 퀴리에(여성형), 퀴리아($2959)라고 불리워졌다.||(d) 초기 시대에는 퀴리오스가 왕들이나 신들의 칭호로 사용되지 않았다. 헬라 시대에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왕들(통치자들)이나 신들에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 였다(참조: W. Foerster).|퀴리오스 바실류스(주, 왕)는 주전 64년과 50년 사이에 자주 사용되었다. 주전 12년에 이집트에서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데오스 카이 퀴리오스(하나님과 주)라고 일컬어졌다(BGU, 1197, I, 15). 상부 이집트에서 여왕 간다게(참조: 행 8:27)는 헤 퀴리아 바실릿사(여주인, 여왕)으로 불리워 졌다. 퀴리오스라는 명칭은 헤롯 대왕(약 73 ~ 4 B.C), 아그립바 1세(약 10 B.C ~ A.D 44), 아그립바 2세(A.D 27 ~ 약 100)에게도 사용되었다. 통치자들 외에, 고관들도 이 칭호를 받았으며,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총독이 이 칭호를 받았다. 시리아에서도 사정은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양에서도 군주를 퀴리오스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퀴리오스 데오스(주와 통치자)와 같은 칭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퀴리오스는 신들에게 사용되어 그 시대에 유행했던 사상과 언어에서도 신들을 주(lord)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퀴리오스는 기초가 되는 셈어의 상당어구(예: 아돈, 마라, 여성형 랍바트)를 번역한 것이다. 이런 용어들에는 항상 인칭 대명사(나의, 우리의 등)가 첨가되어 신의 이름 앞에 붙여졌다. 퀴리오스를 신에게 사용했을 경우, 이 말을 사용한 종은 그 신에 대한 인격적인 책임 관계에 있게 되며 이때 신은 개인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의 아돈이 권력을 가진 주를 의미할 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상당어는 당연히 퀴리오스이다. 각 신들은 그들에게 제사하는 공동체의 주(lord)로써, 그리고 그 공동체에 속한 각 구성원들의 주 lord로써 숭배 받았다. 다른 주 lord(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배제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신들 중 어느 하나도 우주적인 주로서 형성화되거나 숭배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e)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B.C. 31 ~ A.D. 14)와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 ~ 37)는 로마인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동방 형태의 군주정치를 거부했으며, 그와 더불어 퀴리오스라는 칭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칼리굴라(Caligula, A.D 37 ~ 41)는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매력적인 칭호임을 인식하였다. 네로의 비문에는 호 투 판토스 코스무 퀴리오스(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 SIG 814, 31)가 묘사되어 있는데 네로(Nero, A.D 54 ~ 68) 이후에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더욱 더 자주 사용되었다. 가장 오래된 예문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25:26이다.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도미티안(Domitian, A.D 81 ~ 96)에 의해서 다시 평판이 나빠졌는데, 이는 그가 공식적인 서한에서 자기 자신을 도미누스 엣 데우스 노스테르(우리의 주와 하나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Suetonius, De Vita Caesarum, 13, 2). 도미티안의 사후에 이 칭호는 그에 대한 기억(담나티오 메모리아에)과 더불어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나중에 다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본래부터 저절로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황제를 신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였다. 그가 신으로 숭배될 때 주라는 칭호도 신의 속성으로 간주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전체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거부한 것은 곧 지나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이런 종교적 주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하나님을 처음으로 퀴리오스라고 부르는 용법은 70인역본에서 나타난다(참조: H. Bietenhard).||#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퀴리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9000회 이상 나오며, 24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퀴리오스는 히브리어 아돈(주, 주인)의 역어로 190회, 바알(주 Lord)의 역어로 15회 사용되었는데, 결혼과 재산법에서 바알이 아내나 토지의 주인을 의미하는 반면(호 2:18; 삿 19:22; 삿 19:23 등), 아돈은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결정되며 한 단체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우두머리인 명령자를 의미한다(삼상 25장).||(b) 퀴리오스는 또한 게비르(지휘관, 사령관), 아람어 마라(주 lord), 샬리트(통치자, 지배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c) 그러나 많은 경우에(약 6000회 이상) 퀴리오스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고유명사, 즉 신성 4문자 YHWH를 대신한다.|여호와는 창조자이시며, 전 우주와 인류의 주, 또는 주인이시며, 생명과 사망의 주(인) Lord이시다. 무엇보다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즉, 그의 언약의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를 뜻하는 말로 퀴리오스를 선택함으로써 70인역본 헬라어 본문도 법적인 권위에 관한 사상을 강조했다.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자기 소유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합법적인 주 Lord이다. 세상의 창조주로서 그는 또한 세상을 무한히 통할하는 세상의 합법적인 주이기도 하다.|퀴리오스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인 아도나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창 18:27-32).||#3. 신약성경의 용법.||퀴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725회 나오며, 그 중 대부분 누가의 기록(210회)과 바울서신(275회)에 사용되었다.||(a) 퀴리오스의 통속적인 용법.|신약성경에서 퀴리오스는 포도원의 주인(막 12:9과 병행구절), 나귀(눅 19:33)와 개의 소유자(마 15:27), 청지기의 주인(눅 16:3), 종들의 주인(행 16:16; 행 16:19; 엡 6:5; 엡 6:9; 골 3:22; 골 4:1)을 의미한다.|퀴리오스는 또한 어떤 것, 예를 들면 추수(마 9:38) 또는 안식일(막 2:28)을 주관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퀴리오스의 공손한 어법은 눅 1:43에 나오고, 벧전 3:6; 막 12:36-37; 행 25:26에서는 우월성을 암시한다. 종들이나 일군들은 퀴리에(참조: 눅 13:8)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마 27:63에서 빌라도에게 같은 호칭을 사용했고, 마리아는 요 20:15에서 동산지기에게, 간수장은 행 16:30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참조: 또한 마 21:29; 행 10:4).|퀴리오스의 형태는 팔레스타인 용법과 일치하며, 마 7:21-22; 마 25:11; 눅 6:46에 나타난다. 고전 2:8("영광의 주")과 살후 3:16("평강의 주")에서는 속격과 결합되어 나온다.|퀴리오스는 천사들을 칭할 때도 사용되었으며(행 10:4; 계 7:14), 다메섹 밖에서 하늘의 환상을 볼 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사용되었다(행 9:5; 행 22:8; 행 22:10; 행 26:15).||(b) 퀴리오스이신 하나님.|헬라 회당에서 사용하던 용법에 따라, 하나님을 종종 퀴리오스라고 칭하였으며, 특히 여호와를 뜻하는 말로 퀴리오스를 사용하는 수많은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그러했다. 공식적으로 성경을 봉독할 때에 신성 4문자 대신 퀴리오스를 사용하는 관습과 일치한다(예: 롬 4:8 = 시 32:2;시 9:28이하. = 사 10:22이하.; 사 10:16 = 사 53:1; 사 11:3; 눅 19:10; 눅 11:34 = 사 40:13; 사 14:11 = 사 45:23; 사 15:11 = 시 117:1; 고전 3:20; 시 94:11; 시 14:21 = 사 28:11이하.).|퀴리오스는 자주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다(예: 눅 1:32; 눅 2:9).|퀴리오스가 속격으로 나와 다른 단어와 함께 쓰이는 형태는 구약성경의 용법과 일치하는데 예를 들면 퀴리오스의 손(눅 1:66; 행 11:21); 퀴리오스의 천사(마 1:20; 마 2:13; 마 28:2; 눅 1:11; 눅 2:9; 행 5:19;행 8:26; 행 12:7); 퀴리오스의 이름(약 5:10; 약 5:14); 퀴리오스의 영(행 5:9; 행 8:39); 퀴리오스의 말(행 8:25; 행 12:24; 행 13:48이하.; 행 15:35이하.)등이다.|"퀴리오스가 말씀하시니라"라는 공식 문구(롬 12:19 = 신 32:35; 고후 6:17; 사 52:11; 계 1:8 참조: 출 3:14)도 역시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표현이다.|요한계시록의 기자는 때때로 "주 하나님"(퀴리오스 호 데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어구에 강조적인 엄숙한 단어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이)를 첨가한다(계 1:8; 계 4:8; 계 11:17; 계 16:7; 계 19:6; 계 21:22).|우리 주 우리 하나님(호 퀴리오스 카이 호 데오스 헤몬) 이라는 공식 문구는 도미티안이 채택하여 사용했던 칭호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참조: 요 20:28).|계 11:15; 계 22:6에 나오는 예배의식상의 공식 문구는 주목해 볼만하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하늘과 땅의 퀴리오스"(마 11:25; 눅 10:21; 참조: 히 1:2; 집회서 51:1; 토빗 7:18)라고 했을 때 그는 유대식의 언어 형태를 채택한 것이다.|마 9:38에 보면 하나님은 (종말론적인) 추수의 퀴리오스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통치자이시며 왕중의 왕이시며 만주의 퀴리오스이시다(참조: 단 2:47), 그는 우리의 퀴리오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실 분이시다(딤전 6:15).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따라서 만물의 주이시다(행 17:24). 하나님을 퀴리오스라고 부르며 또한 그렇게 인정함으로서 신약성경은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과 역사 속에서 나타난 그의 능력, 그리고 그의 공정한 우주 지배권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에 대한 믿음과 구약성경의 믿음과의 연속성을 고백하고 있다.||(c) 퀴리오스이신 예수님|① 퀴리오스이신 지상의 예수님. 지상에 계신 예수님에게 사용된 퀴리오스는 처음에는 정중한 형태의 호칭이었다(마 17:4, 퀴리에: 요 6:34; 요 13:6). 이런 호칭의 형태도 예수님을 지도자로서 인정하며 그에게 기꺼이 순종한다는 뜻을 내포한다(마 7:21; 마 21:29 이하; 눅 6:46). 인자(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의 퀴리오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날을 다스린다(막 2:28 이하). 그의 죽음과 부활 후에도 지상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기독교 공동체의 무한한 권위를 지닌다. 바울은 최종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퀴리오스의 말씀들에 호소했다(고전 7:10; 고전 12:25; 살전 4:15; 참조: 행 11:16; 행 20:35).||② 퀴리오스이신 높임 받으신 예수님. 예배에 사용된 신앙 고백적인 외침인 퀴리오스 이에수스(예수는 주이시다)는 의심할 바 없이 바울 이전의 헬라 기독교 공동체에서 유래했다. 이 고백이 가장 오래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신조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고백으로 신약 공동체는 자신을 주님께 복종했지만 동시에 그를 세상의 통치자라고도 고백했다(롬 10:9; 고전 12:3; 빌 2:11).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그를 만민의 퀴리오스라는 자리로 높이 올리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자기 자신의 이름인 주라는 이름을 "주셨으며"(빌 2:9 이하.; 참조: 사 45:23 이하) 그와 아울러 그 이름에 적합한 지위도 주셨다(빌 2:5-11). 높임을 받은 퀴리오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다스린다(롬 14:9). 그밖에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왕들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만주의 주로, 만왕의 왕 King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에 암시되어 있다(계 17:14; 계 19:16). 이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영예의 칭호를 받았다(딤전 6:15; 참조: 단 2:47). 그 당시의 유대 사상에 따르면, 자연과 역사에 있어서 세상의 다른 영역은 천사들의 힘으로 다스려졌다. 그리스도가 이제 퀴리오스의 지위로 높여졌으므로, 모든 권세들이 그에게 예속되었으며 또한 그를 섬겨야 한다(골 2:6; 참조: 엡 1:20이하.). 한 하나님과 한 퀴리오스이신 예수님은 이교 세계의 수많은 신들 및 주들과 반대된다(고전 8:5이하.; 엡 4:5이하).|예수님의 높이심과 주로써 취임한 것에 관한 성경적인 근거는 시편 110:1에 나와있다(참조: 마 22:44; 막 12:36; 막 16:19; 눅 20:42이하.; 행 2:34). 시편에서 따온 이 구절의 유대적인 해석은 메시야적 미래를 기대했으나 - 메시야적인 해석은 교회를 반대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은폐되어 있었다 - 기독교인의 믿음 안에서 이 소망은 현재의 것으로 전이되었다. 메시야인 예수님의 주권은 현재적인 실재이다. 그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을 감추어진 방법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종말론적인 미래에는 메시야의 통치가 완성될 것이다. 이 믿음은 도마의 신앙고백(요 20:28),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 무(나의 주 나의 하나님)에서 분명해졌다. 원시 기독교는 예수님을 주로 세우는 것을 일신교에 위배된다고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신교를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고전 8:6; 엡 4:5; 빌 2:11). 주 예수님을 높이셔서(행 2:36) 그를 만물의 주로 삼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③ 퀴리오스와 주의 만찬. 퀴리오스는 주의 만찬과 관련된 표현에 자주 나온다. "주의 상"(고전 10:21); "주의 죽으심"(고전 11:26); "주의 잔"(고전 10:21; 고전 11:27);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전 10:22),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고전 16:22); "주의 만찬"(고전 11:20),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고전 11:32),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 이런 다른 여러 가지 표현들은 주의 만찬이 기독교 공동체가 특별한 방법으로 퀴리오스의 구원의 사역을 따르며 또한 퀴리오스의 몸과 능력을 나누어 받는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다.||④ 퀴리오스와 성령.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에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라고 훈계했다(고전 12:3).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퀴리오스이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고백함으로써, 새로운 언약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한 영의 세계에 속하여 더 이상 옛 언약과 그 문자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⑤ 서신의 문안에 나오는 퀴리오스. 바울 서신의 처음 인사말(마지막 부분에는 그렇지 않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글귀 옆에 자주 언급된다(롬 1:7; 고전 1:3; 고후 1:3; 갈 1:3; 빌 1:2;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몬 1:3). 마지막 인사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혹은 너희 심령과, 또는 너희 모든 사람에게]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바울 이전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 전통의 궁극적 기원은 아마도 주의 만찬에 있었던 것 같다(참조: 고전 16:23; 고후 13:13; 몬 1:25; 계 22:17-21).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방기독교 헬라 공동체로 소급되어야 한다(롬 15:6; 고후 1:3; 고후 11:31; 참조: 벧전 1:3; 엡 1:3; 엡 1:17; 골 1:3). 이 공식 문구가 본래의 유대 문맥(하나님에 대한 찬양) 속으로 삽입되었다. 이방 세계의 많은 퀴리오이들과 대조되고 창조의 대행자(고전 8:6)로 인정된 단 한분 퀴리오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에서 고백하는,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전파하는 한 분이신 하나님과 일치하는 분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뿐만 아니라 퀴리오스이신 예수님도 믿으라고 촉구했다(행 5:14; 행 18:8).||(d) 퀴리오스의 주권.|① 퀴리오스이신 예수님 앞에서의 기독 공동체(교회)의 활동.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 관한 모든 표현들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는 권위를 가지고 그것을 공동체에 행사하는 퀴리오스 앞에 서있다(고전 4:19; 고전 14:36; 고전 16:7). 그는 그 공동체를 성장하게 하며(살전 3:12 이하) 사도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고후 10:8; 고후 13:10) 그의 몸의 지체들에게 서로 다른 직책을 부여한다(고전 3:5; 고전 7:17; 고전 12:5). 퀴리오스는 환상과 계시를 제시해준다(고후 12:1). 기독교 공동체의 삶 전체가 공동체와 퀴리오스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롬 14:8). 몸 즉 완전히 지상적인 기독교인의 존재는 퀴리오스에게 속한 것이다(고전 6:13). 이러한 사실이 음란한 행동들을 못하게 한다. 퀴리오스는 각 사람에게 맞는 양의 믿음을 준다(고전 3:5; 고전 7:17; 엡 4:7). 그는 평화의 퀴리오스이시므로 평강을 주시며(살후 3:16) 자비를 베푸시고(딤후 1:16) 총명을 주신다(딤후 2:7). 퀴리오스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는 심지어 주인과 종의 세속적 관계조차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세상의 퀴리오이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곧 교회의 퀴리오스를 섬기는 것이다(골 3:22이하.; 참조: 벧전 2:13).||② '퀴리오스를 통하여, 퀴리오스 안에'라는 문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공식문구는 감사(롬 7:25; 고전 15:57); 찬양(롬 5:11); 권고(롬 15:30; 살전 4:2)라는 매우 다양한 문맥에 나온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퀴리오스라는 단어는 교회의 생활과 개인의 생활에 대해 가지는 높임 받은 주님의 능력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주 안에서"라는 문구는 특별히 바울서신에 자주 나온다(예: 고후 2:12; 엡 4:17; 살전 4:1; 롬 14:14; 롬 16:2; 빌 2:29; 빌 3:1; 빌 4:1; 롬 16:21; 롬 16:22; 고전 16:19).||③ 재림에 관한 구절들(고후 5:6; 고후 5:8; 살전 4:17; 고전 1:8; 고전 5:5; 고후 1:14; 살전 5:2; 살후 2:2; 고전 1:7; 살후 2:1; 딤전 6:14; 고전 4:5; 빌 4:5; 살전 6:16이하,; 약 5:7; 살후 1:9; 살후 2:8; 빌 3:20등). (참조: H. Bietenhard).|(참조: W. Foerster; H. Bietenhard;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