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아도니 베섹 정복]
(주);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이것은 본서의 서론적 표현으로서 사사기의 시대적 배경을 나타낸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라는 말로 시작되는 여호수아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전에 모세가 죽었을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인해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호수아는 110년을 향수하였는데(수 24:29), 그동안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통치권과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나안 땅 분배에 중추적역할을 담당하였다(수 14-21장). 그로써 자신의 직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여호수아는백성들에 대한 권면을 마지막으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수 23:1 - 24:31).그런데문제는 막상 여호수아가 죽고나자 그를 이을 적당한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사기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여 기록되었다. 즉 여호수아 사후 강력한 통치자가 없던 이스라엘은 주변 열강들과 미처 정복치 못한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한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한 이들이 곧사사인 바, 사사기는 이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서가 여호수하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8,9에는 다시금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이와 관련, 학자들 간에서는 1:1 - 2:9에 기록된 사건들이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의 사건들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사건들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나뉘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1-20 강해, '본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 사건의 발생 시기 문제'를 참조하라.
(주);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 이는 곧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사사기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타난다(별18:5;20:18,23,28:삼상 10:22;22:10;23:2).구약시대에는 주로 대제사장들이 우림과 둠밈으로 여호와의 뜻을 구했는데(출 28:30;민27:21;삼상28:6), 아마 이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여호와께 물었을 것이다(Keil,Delitzsch).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사후 하나님의 뜻을 물은 이유는 여호수하가 남긴 유업을 마저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즉 비록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에 안식을 가졌다 주었지만(수11:23;21:44;23:1) 아직도 가나안 땅에는 미정복지와 잔존 원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우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문에 가나안 땅을 마저 정복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여호수아의 사후 이스라엘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수24:22-24).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였고 하나님께 그 뜻을 물은 것이다.
(주);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싸우리까 - '올라가서'에 해당하는 원어 '알라'(*)는 단순히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대신 이는 수 8: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싸움터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Lange,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 p. 250) 때문에 Living Bible은 이를 '전쟁에 나가다'(go to war)로 분명히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질문 속에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던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아직도 여전히 미정복 상태로 남아 있는 많은 지역(수 13:1-7 등)을 정벌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민족적 대과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 먼저 가나안 족속의 정벌에 나서서 백성들의 사기를 복돋워 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선봉에 나서라고 일러주셨다(2절).
(주); 가나안 사람 - 정확히 얘기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당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에 거주하던 '초기 원주민들'(창 2: 5, 6)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을 참조하라.
성 경: [삿1:2]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아도니 베섹 정복]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즉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질문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여호와께 물은 행위가 옳았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사 시대 전반에 걸쳐 되풀이 되던 극심한 타락상과는 달리 사사 시대 초기에는 그래도 여호와 신앙이 유지되었음을 보여 주는 일례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동안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2:7)는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 된다.
(주);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 여기서 '유다'란 '유다 지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미정복지 정벌 전쟁에 이스라엘 여러 지파 등 유다 지파가 먼저 출전토록 명하신 까닭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우선 이스라엘 지파들 중 유다 지파의 수효가 가장 많았기 때문(민 1:27 ; 26:22)일 것이다(MathewHenry's Commentary, Vol. II, p.121). (2)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의 예언(창 49:8-12)을 통해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 가장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리라 축복하셨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251). 그러므로 본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우선 출전 명령과 함께 과거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것(수 13:1)과 같은 승리의 약속도 함께 주고 계시는 것이다.
(주); 이 땅 - 이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해 주었으나 그들이 미처 정복하지 못한 탓에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미정복지를 가리킨다(수 13:1-7). 그런데 혹자는 이를 유다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던 땅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Bertheau),그 것은 지나치게 의미를 축소시킨 견해이다.
(주); 그 손에 붙였노라 - '붙였노라'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은 '넘겨 주다' 또는 '양도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미 하나님의 작정하에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도록 계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경에는 비단 민족간의 전쟁
뿐아니라(민21:2) 개인의 생명(16:23)도 하나님께서 상대방의 손에 붙이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개인의 생명과 더불어 모든 국가의 장래도 곧
하나님의 주권하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삿1:3]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아도니 베섹 정복]
(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함께...싸우자 - 이처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가나안 미정복지 정벌 전쟁에 함께 출전할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기업 중에서 자신의 분깃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수 19:1-9). 그러므로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와 행동을 같이 하여 자신들의 기업을 얻을 필요성이 있었다. 한편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분깃을 나누어 받게 된 까닭은 야곱 당시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과거 시므온은 자기 누이 디나가 세겜 추장에게 강간당하자 그에 대한 복수로 과도하게 세겜 사람들을 멸한 일이 있었다(창 34:25-29). 그러자 야곱은 이에 대한 징벌로 시므온 자손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흩어질 것을 예언하였다(창 49:5-7).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는바,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 직전에 실시한 인구조사(민 26:14) 때 그 수가 가장 적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축복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신 33장). 그리고 그 결과 시므온 지파는 독립된 기업을 얻지 못하고 유다 지파의 기업 중 일부만을 자신의 몫으로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수19:1-9). 하지만 본절 이하에 의하면 이처럼 열세한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므온 지파는 불평 불만에만 빠져 있지 않고, 유다 지파와 협력하여 가나안 미정복지를 성공적으로 정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 지파는 가장 수가 많고 강한 지파였으나(민 1:27;26:22) 미약한 시므온 지파를 무시해 버리지 아니하고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잘 유지했음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사사 시대 초기 당시는 아직 말기적 현상(20장)과는 달리 각 지파간의 관계가 돈독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벌에 대한 열망으로 서로의 마음도 똘똘 뭉쳐져 있었다고 하겠다.
(주); 제비뽑아 얻은 땅 - 일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줄때 제비뽑기를 통하여 실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각 지파에게 분배될 땅의 상태가 좋고 나쁜 데 따르는 시비를 사전에 방지할 뿐 아니라 제비로 결정된 땅은 곧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기업이란 점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민 26:52-56 강해, '제비 뽑기'를 참조하라.
성 경: [삿1:4]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아도니 베섹 정복]
(주); 가나안 사람 - 1절에도 같은 말이 나오지만 그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즉 이말은 성경에서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가지 경우로 사용되고 있다. 그중 넓은 의미로는 1절에서와 같이 가나안에 거주하는 모든 족속을 가리킨다(창 10:19).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시돈과 두로의 베니게 지역 해변가와 요단 강계곡 및 평원에 살았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 중 한 종족을 가리킨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족속들>. 여기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 브리스사람 - 이 역시 가나안 후기 원주민 중 하나이다(수 3:10;11:3; 17:15;24:1). 한편 '브리스'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지'(*)는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는 장소'라는 뜻의 '페라조트'(*)와 어원이 같다(겔 38:11). 이로 보아 브리스 사람이란 요새화된 성이나 성벽이 없는 성읍, 또는 작은 마을에 살았던 가나안의 한 종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이 성벽을 세우지 않은 것은 그들의 거주지가 주로 산지였으므로(수 17:15) 그 지형 자체가 충분한 요새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Kalisch).
(주); 베섹 - 이 지명은 본절 외에 삼상 11:8에 딱 한번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베섹은 기브아와 길르앗의 야베스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곳은 유다 지파의 땅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베섹'과 동일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올라간 베섹은 유다 지파의 기업 내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Rosenmuller). 따라서 여기서 오늘날의 '베즈카'(Bezqa)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혹자(Lange,P. Cassel)는 '베섹'(*)이라는 지명의 뜻을 '빛'(겔 1:14에는 '번개'로 번역되어 있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베섹'이란모래가 많아 태양 빛에 반사되는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약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성 경: [삿1:5]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아도니 베섹 정복]
(주); 아도니 베섹 - '베섹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개인 이름이 아닌 베섹 성읍 통치자의 칭호이다. 이같은 칭호로는 애굽 왕을 가리키는
'바로'(출 1:11), 그랄 왕을 가리키는 '아비멜렉'(창20:2) 등이 있다. 창26:1 주석 참조. 한편 혹자(G.E.Wright)는 이 아도니 베섹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수10:1)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 않다.
성 경: [삿1:6]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아도니 베섹 정복]
(주); 그 수족의 엄지 가락을 끊으매 -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 포로를 다룸에 있어서 이처럼 불구로 만들거나 눈을 뽑아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민16:14;삼상11:2;왕하25:7). 이러한 형벌은 상대방에게 수치를 주기 위함이었음은 물론, 실제적인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즉 엄지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무기를 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엄지 발가락을 자르는 것은 도망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MatthewHenry's
Commentary, Vol. II, p.122). 그리고 눈을 뽑는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실례로는
일찍이 페르시아 제국이 망하여(B.C. 331) 헬라의 포로가 되었을 때, 헬라인들이 포로들의 수족과귀 따위를 잘랐던 사건을 들 수 있다(Lange).
아무튼 본절에서 아도니 베섹이 이같은 형벌을 당한 까닭은 일찍이 그가 동일한 방법으로 70명의 군왕들을 능욕했기 때문이다(7절).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삿1:7]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아도니 베섹 정복]
(주); 칠십 왕 -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왕에' 해당하는 '멜레크'(*)는 종종 일개 성읍의 통치자를 가리키기도 한다(창 14:1,2 ; 수10:3;12:9-24). 따라서 이들은 아도니 베섹 당시 각기 가나안의 군소 성읍을 관장하던 군왕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 마치 개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행위(마15:27)를 가리킨다. 이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비참하기도 굴욕적인 대접 중 하나에 다름 아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 253).
(주);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 타인에게 가한 손상만큼 가해자에게도 동일한 형벌이 주어지게 하는 동해 보복법(Rex Talionis)은 모세 율법 이외에 함무라비 법전에도 언급되어 있다<출 21:18-36 강해, 동해 보복법>.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아도니 베섹의 이 한탄의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한 말이라기 보다는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인과 응보(因果應報)적 사상에 따라 자신이 처한 곤고한 상태를 한탄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이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간 사실은 아도니 베섹이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5절>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라이트(G.E.Wright)같은 학자는 예루살렘이 아도니 베섹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유다 연합군이 그를 그곳으로 끌고 간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적 견해일 뿐 뒷받침될 만한 객관적
증거가없다.
성 경: [삿1:8]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예루살렘과 헤브론 정복]
(주);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 예루살렘은 이미 여호수아 군대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수 10:23,26)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도 유다 자손이 그 성읍을 치고 불살랐으나 역시 완전히 정복되지는 않았다(21절). 이러한 미정복 상태는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다윗이 이를 정복함으로 비로소 끝이 났다(삼하 5:6-9). 그런데 혹자는 이와는 약간 다른 견해를 표명하기도 한다. 즉
본시점에서 예루살렘은 유다 연합군에게 완전히 점령되었으나 유다와 시므온 두 지파의 인구가 전지역을 장악할 만큼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곧 다시
여부스 족속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해 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A.E.Cundall).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19절의 기록에
의거하여 여부스 족속 중 평지 거민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유다 지파가 그 성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는것이 더 타당하다.
아무튼 예루살렘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히 정복되었으며, 그곳에 성전이 건립됨으로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수도로 부상하였다(삼하5:9).
성 경: [삿1:9]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예루살렘과 헤브론 정복]
(주); 내려가서 - 유다 지경(地境)의 북단 경계에 해당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남쪽 경계인 네게브(Negeb)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주); 산지와 남방과 평지 - 유다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 지경(수5:1-12)의 지형상 특징 및 구조를 나타내 주고 있는 말이다. 이 중 산지,
즉 유다 산지는 해발 약800m에 달하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지경 내의 산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남방'은 헤브론과 가데스바네아 사이의
반사막(semi-arid) 지대로서, 일명 '네게브'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평지'는 히브리어로 '쉐펠라'(*)라고 불리우는 저지대로서, 곧 지중해변의
해안 평야와 팔레스탄 중앙 산맥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성 경: [삿1:10]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예루살렘과 헤브론 정복]
(주); 헤브론 -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해발 910여m 정도의 고도(古都)이다. 오늘날 '엘 칼릴'(el-Khalil)로 불리우는 도시인데 상공업으로 유명하다. 한편 일찍이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창 13:18) 아브라함과 사라가 매장된 곳이기도 하다(창 23:19 ; 25:9). 그리고 후에는 다윗의 통치 초기 7년 동안 유다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삼하 5:5). 또한 '연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이 고대 도시는 이스라엘에 정복된 후 이스라엘의 여섯 도피성 중 하나가 된다(수 20:7)). 한편 헤브론은 갈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20절;수 14:6-15), 그 이유는 아마 헤브론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탐 때에 갈렙의 책임 지역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민 13:22 이하).
(주);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 - 헤브론에 거하던 거인족 아낙의 세 자손이다(20절;민 13가22;수 15:14). 이 중 '세새'는 '애굽 왕 시삭' (왕상 14:25)처럼 '태양'을 의미하고 '아히만'은 이방 신인 '므니'(Meni)의 친구(사 65:11)를 의미한다. 그리고 '달매'는 밭고랑을 각각 의미한다. 한편 일찍이 헤브론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파괴되고 헤브론왕 호함도 죽임당했었다(수 10:1-27,36,37), 그리고 드빌(11절), 아납 및 기타 산지의 성읍들도 헤브론과 마찬가지로 파괴되었었다(수 11:21-23). 그러나 본절에 따르면 그 후에 아낙 자손으로 된 이 세 씨족이 헤브론을 재탈환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를 다시금 정복해야 했었는데, 유다 지파 갈렙의 군대가 이를 재정복한 것으로 나와 있다(수 15:13,14). 한편 이 세 씨족의 이름들은 당시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의 이름에서 본딴 것으로 가나안 땅에 우상 숭배가 얼마나 만연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주); 기럇 아르바 - 헤브론의 본래 이름으로 '넷으로 된 성읍'(테트라폴리스,Tetrapolis)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은 당시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네 성읍이 하나로 연합한 데서 유래된 듯하다(Lange). 그래서 아브라함 때에 이 기럇아르바는 '연합' 또는 '연맹'이란 뜻의 '헤브론'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창 23:20).
성 경: [삿1:11]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옷니엘의 승리]
(주); 드빌...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 '드빌'은 헤브론의 남서쪽 약20km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븍 당시
이곳에는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수 11:21). 이곳은 오늘날 '히르벳 라붇(Hirbet Rabud)으로 불려지는 지역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1968년부터 모쉐 코카비(Moshe Kokhavy) 탐사반이 이곳을 발굴한 결과 가나안 정복 당시의 상황을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유물들이 대량 발견되었다
한다. 한편 '드빌'의 본명인 '기럇 세벧'은 '책의 도시' 또는 '기록의 도시'란 뜻이다. 드빌이 본래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웠던 까닭은 그곳에 큰
도서관이나 문서 보관 창고 따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수 15 : 15 주석 참조.
성 경: [삿1:12]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옷니엘의 승리]
(주);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 갈렙이 이처럼 드빌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고대의 포상(褒賞) 관습(삼상
17:25;18:17,27)을 따른 것이긴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신앙의 용사를 사위로 맞이하려 한 갈렙의 신앙제일주의 사상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15:1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1:13]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옷니엘의 승리]
(주);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 - 본절을 그대로 번역할 경우, 옷니엘은 갈렙의 동생이 되며 갈렙은 그나스의 아들이 된다. 이러한
견해는 KJV,NIV,RSV과 같은 영어 성경도 따르는 바이다(Othniel the son of Kenaz,Caleb's younger brother). 그러나 공동 번역은 본절을 '갈렙의
동생 크나즈의 아들인 오드니엘'로 번역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가 되며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자 옷니엘의 아비가 된다.
이는 Living Bible이 취하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Caleb's nephew, Othniel,son of his younger brother Kenaz). 이러한 서로 다른 해석은 성경의
원문이 그 어느쪽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때문에 학자들 간에는 옷니엘이 갈렙과 정확히 어떠한
관계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이 중 대표적인 견해를 들자면 곧 다음과 같다. (1) 옷니엘은 갈렙의 이복(異腹)동생이라는
견해(Bertheau):이는 갈렙이 '여분네의 아들'(민 13:6;수 14:14)인 데 반해 본절에서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2)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라는 견해(De Wette, Ewald, Pulpit Commentary) : 이는 갈렙과 옷니엘간의 현격한 연령 차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옷니엘이 드빌을 정복하고서 갈렙의 딸을 아내로 맞이할때, 갈렙의 나이는 85세였다(수 14:10). 그러나 당시 옷니엘은혈기 왕성한 젊은
용사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형제간이 아니라 숙부와 조카 간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옷니엘과 갈렙은 다같이 그나스
집안의 사람들로서 친척이라는 견해(Lange) : 이는 민32:12에 갈렙이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로 나와 있으며 본절에선 옷니엘이 '그나스의
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 근거한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세 견해 중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는 두번째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5 : 1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성경에는 그나스란 이름과 관련하여 동명 이인(同名異人)으로 에돔 사람
'그나스'(창36:11)가 나온다. 따라서 이 자를 옷니엘의 아비인 '그나스'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 경: [삿1:14]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옷니엘의 승리]
(주); 악사가 출가할 때에...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 이는 이스라엘의 '모하르'(*) 풍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모하르'란 시집가는 딸에게
아비가 주는 결혼 선물, 또는 남자가 처녀를 아내로 데려갈 때 장인에게 치루는 '대가'를 가리킨다. 성경에선 대개 이 둘중 전자를 가리켜
'빙물'(聘物)이라 하고 후자를 가리켜 '빙폐'(聘弊)라 한다<1 : 1-20 강해,빙폐와 빙물>. 물론 부모가 결혼하는 딸에게 '모하르'를 주는 경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악사는 옷니엘에게로 출가하면서 이 '모하르' 관습에 따라 아비에게 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악사가 요구한 밭이 어느 곳의 어떠한 밭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에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대개는 여타 밭과는 다른 특정한 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5: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1:15]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옷니엘의 승리]
(주);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 KJV는 이를 '당신께서 내게 남쪽 땅을 주셨으니'(for thou hast given me a south land)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악사가 밭을 요구한 데 대하여(14절) 갈렙이 '남방', 즉 '네게브'(Negeb) 땅을 준 것으로 이해하고서 행한 번역이다. 어쨌든 악사가 출가하여 옷니엘과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곳은 네게브 지역이었는데, 그곳이 '드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12절).
(주); 샘물도 내게 주소서 - 남방(Negeb)은 거의 사막과 같은 곳이었다(9절 주석 참조). 때문에 급수(給水)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자들에게 있어 절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악사였기에 그녀는 현명하게 아비에게 샘물도 요구한 것이다.
(주);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두었더라 - 이 샘들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혹자는 헤브론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Robinson).
그곳은 아마 옷니엘이 싸워 정복한 드빌 땅과 헤브론 지역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는 헤브론 남방 약 9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에서 두 샘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Wycliffe). 아무튼 재치있고 현명한악사로
말미암아 본래 가난한자였던 옷니엘은(Raschi)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후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그 위치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같다(3 : 9)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15 : 19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1:16]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의 전투]
본절은 모세의 장인이 속했던 겐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음을 보여 준다. 민 10:29,30에 따르면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또는 르우엘)와 처남 호밥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자고 요청했으나 호밥은 처음에 이를 거절했었다. 그러나 본절을 통해서 볼 때 호밥은 후에 이같은 청을 수락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다.
(주);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 모세의 장인 이드로와 그의 처남 호밥은 원래 가나안 원주민이 아니라 미디안 족속 중 하나인 겐 족(Kenites)이다. 이 겐 사람에 대한 최초의 성서 기록은 창 15:19에 나타나며 발람의 신탁 속에 등장하는 '가인 사람'도 역시 겐 족을 가리키는 말이다(민 24:21,22). 이들은 주로 홍해 부근, 즉 엘란(Elan) 만 동부 지역인 아카바(Aqaba) 만 일대에 거주했었는데 점차 모압 경계선 북부(민 21:4),팔레스틴 남부 산악 지대에까지 북상하였다. 아무튼 모세 이후부터 이들 겐 사람은 히브리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출 2:15-22)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삼상 15:6;30:29). 그리고 본절에서는 이 겐 족이 유다 지파의 지경내(地境內)에 거하므로서 이스라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주); 종려나무 성읍 - 일명 '향기의 도시', '달(月)의 도시'로도 불리웠던 여리고를 가리킨다(신 34:3;대하28:15). 예루살렘 동북방 약27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인데, 종려나무의 산지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종려나무 성읍'(the City of palms)으로 불리웠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최초로 정복한 성읍이기도 한 바, 이에 대하여서는 수6장을 참조하라. 한편 혹자들은 겐 족이 유다 지파와 처음부터 함께 아랏 남방의 헤브론과 드빌로 갔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종려나무 성읍은 헤브론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여리고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Cundall). 그러나 본절에 보면 겐 족이 처음에 머문 곳은 분명히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이며 그 후에 유다와 시므온이 남방을 정벌할 때 아랏 남방으로 내려가 유다 백성과 함께 거주한 것임을 알 수 있다(Hervey).
(주); 아랏 남방 - 아랏은 헤브론 정남쪽 2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성읍이다. 넓고 완만하게 경사진 황무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곳은 아브라함 당시 이미 문명이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다(N.Glueck). 한편 아랏과 여리고는 약 85km 가량 떨어진 먼 거리이므로 겐 족의 이주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 혹자는 '백성'에 해당하는 원어 '암'(*)이 '아말렉'과 첫 두 자음이 일치하며, 겐 족속이 아말렉(*)과 깊은 연판이
있는 족속이라는 사실을 들어(삼상 15:6), 여기서 '그 백성'이란 아말렉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Cundall). 그러나 이미 앞에서 유다가
언급되었고 '암'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덧붙어 있으므로 '그 백성'이란 유다 지파를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역사적으로도 겐 족이
다윗시대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처음의 주장은 분명히 옳지 않다(삼상 30:29).
성 경: [삿1:17]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의 전투]
(주); 스밧...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 스밧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오늘날의 '텔 엘 밀'(Tell-ei-Milh)이거나 '텔
에쉬세리아'(Tellesh-Sheriah)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자는 브엘세바에서 약 10km 정도, 후자는 약2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은 스밧을 진멸한 뒤 '호르마'라 칭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파괴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읍의 파괴가 신들에게 언약의
맹세를 표하는 하나의 종교적 예식임을 암시하는 말로서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행해지던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진멸은 잔인한 면도 있으나
전쟁에 뒤따르기 쉬운 것들, 즉 예를 들면 강간, 약탈 등의 추한 행위들을 미리 예방해 주는 이점도 있었다. 특히 유다 지파의 이러한 철저한
도륙은 그 땅에 뿌리박고 있던 우상과 이방 종교의 척결이란 점에서 오히려 의미가 깊다. 한편 호르마라고 불리우는 이 스밧은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지경내에서 얻은 시므온 지파의 기업이었다(수 19:4).
성 경: [삿1:18]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의 전투]
(주); 가사...아스글론...에그론 - 아스돗, 가드와 더불어 블레셋의 5대 성읍으로 꼽히던 도시들이다(수 13:3). 이 중 가사(Gaza)는 예루살렘
남서쪽 80km, 지중해에서 내륙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아스글론(Ashkelon)은 가사 북쪽, 아스돗 남쪽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마지막으로 에글론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가장 북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은 남쪽에서부터 점차 북쪽으로
북상하면서 블레셋 성읍들을 정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그곳의 거민들을 완전히 진멸하지 못하였는 바, 이들 성읍들은 다시금 블레셋의
장중에 들어갔으며 이후 이스라엘을 고질적으로 괴롭히는 대적이 되었다(14:19;삼상 5:1,10;7:7,8).
성 경: [삿1:19]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의 전투]
본절에서는 두가지 대조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유다 지파가 신앙적으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산지(9절)거민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앙적으로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골짜기의 거민들을 쫓아 내지 못한 사건이다.
(주); 철병거가 있으므로 - 인류가 철을 생산하여 사용한 것은 헷 족속(Hittites)에 의해서 였다(성경 총론,'구약과 고대 근동 문화' 참조). 그들 중 일부는 일찍부터 가나안땅에 이주해 온 듯하며(창 23:3 ; 26:34) 합금 기술의 개발을 통해 다른 어느 부족보다 더 막강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 철재 무기는 사울 왕 시대에 블레셋의 기술에 의존하여 사용한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당시 철재 무기는 매우 구하기 힘들었다(삼상 13:22).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철병거로 무장한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한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의능력으로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던 그들이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불신앙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에 여호수아는 가나안족들에게 철병거가 있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요셉 지파에서 주지시켰던 적이 있었다.(수 17:16-18). 그리고 실제로 사사 시대에 드보라와 바락은 철병거 9백승을 가진 야빈 왕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적도 있다(4:13-16). 따라서 유다 지파가 철병거를 가진 적에 대해 미리 겁을 집어먹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정복 사업을 완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주);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로 레호리쉬'(*)는 능력이 없어서 쫓아내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능력이
있으면서도쫓아내지 아니한 직무 유기 내지는 고의적 회피 행위를 의미한다. 족 유다 지파는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내 보려고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미리 겁을 집어 먹고 아예 이 일을 포기했던 것이다(Lange).
성 경: [삿1:20]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의 전투]
(주); 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 일찍이 모세의 가나안 정탐꾼 파송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과거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모세에게 회의적인 보고를 하였었다(민 13장).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만은 이스라엘이 능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민14:6-9). 그러자 모세는 갈렙에게 축복하기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수14:9)고 하였다. 그같은 약속에 근거해 갈렙은 여호수아 생존 당시 헤브론을 요구, 기업으로 받았었던 것이다(수14:13-15). 본절은 바로 그 사건을 다시금 얘기하고 있는것이다.
(주); 아낙의 세 아들 - 이미 10절에서 언급된 아낙 자손의 세 씨족인 세새, 아히만, 달매를 가리킨다. 한편 갈렙을 대장으로한 유다 자손이 이들을
무찌른 기사는 수 15:13,14에 상세히 나와 있다. 그러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1:21]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의 전투]
본절에는 베냐민 자손이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수 15:63에는 유다 자손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기록은 서로 상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베냐민과 유다의 경계는 벤 힌놈 골짜기와 예루살렘 남쪽 지역에서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수 15:8 ; 18:28). 그러므로 여부스 사람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지 못한 책임은 이 두 지파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15: 63주석을 참조하라.
(주); 여부스 사람 - 가나안 일곱 족속 중 한 족속으로서(창 10:16). 예루살렘 산악 지대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그래서 고대에는 예루살렘을 '여부스'라고도 불렀다(19:10 ; 수 15:18 ; 18:28 ; 대상 11:4 등). 한편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의 이같은 공격 실패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사사 시대 동안 이스라엘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19:10-12), 그러다가 다윗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완전히 정복된다(삼하 5 : 6-10). 그러나 다윗의 정복 이후에도 부분적이나마 여부스 사람의 예루살렘 거주는 계속 허용된 듯하다 (삼하 24:16).
(주);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당하고 여부스 족이 축출 당한 때는 다윗 시대이다. 따라서 여기서 가리키는
'오늘날'이란 B.C.1050-1000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본서의 기록 연대를 추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바, 본서의 기록 연대 역시 이
시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사기 서론 참조.
성 경: [삿1:22]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벧엘 정복]
본절은 베냐민 지파와는 달리 요셉 지파가 믿음으로 정복 사업에 나아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 요셉 족속 - 여기서 '요셉 족속'이라 함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통틀어 칭하는 말이다(수 17:17). 그들은 유다와 시므온처럼 기업을 함께 할당받았기 때문에(수16:1-4) 연합하여 벧엘 정복에 나섰음이 틀림없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 258).
(주); 벧엘 -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베이틴(Beitin)이다. 이곳에는 좋은 샘들이 많아 고대로부터 유목민들의 각광을 받았었다. 본래의 이름은 '루스'(23절)인데, 야곱에 의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로 바뀌었다(창 28:16-19). 한편 이러한 벧엘은 본래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땅(수 18:22)이었으나 요셉 족속의 남쪽 경계선과도 서로 맞물려 있었다(수 16:1,2). 따라서 요셉 족속도 벧엘에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인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요셉 족속이 벧엘 정복에 나선 것이다. 한편 벧엘 정복에 관한 기사는 성경상에 상세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정복한 후(수 8장) 곧 이어 벧엘도 일시 정복했던 것같다(수12:16). 그러나 벧엘은 다시금 가나안 원주민들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이에 본절에서 요셉 족속이 재차 정복에 나선 것 같다(Goslinga). 아무튼 이러한 벧엘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벧엘은 왕정 시대 당시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2:26-33; 왕하 17:27-33 ; 렘 48:13).
(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 요셉 족속이 벧엘을 성공적으로 정복하게 된 동인(動因)이 근본적으로 여호와께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구절이다(삼상 17:47).
성 경: [삿1:23]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벧엘 정복]
(주);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 여기서 '정탐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투르'(*)는 '경비가 엄한 지역을 몰래 살피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모세가 가나안에 염탐꾼들을 보냈던것(민 13:1-20)과 비슷한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즉 요셉 족속의 이런 신중한 태도는 그들이 참으로 믿음 가운데 서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주); 루스 - '벧엘'의 본명이다.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이란 이름은 야곱이 처음 붙인 것이며(창 28:19) 가나안 족들은 그곳을 '루스'라
했다. '루스'(*)란 '왜곡되다', '떠나다'라는 뜻인데 벧엘의 우상 숭배 역사와 잘 부합되는 이름이다. 한편 수 16:2에는 "벧엘에서부터 루스가
나아가"라는 언급이 있다. 이는 마치 벧엘과 루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다른지역인 것처럼 생각케 해준다. 때문에 혹자는 루스의 남쪽을 '벧엘'로
보고 있기도 하다(Cassel).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껏 살펴보아 왔듯이 '루스'와 '벧엘'은 동일한 지역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16: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1:24]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벧엘 정복]
본절에 기록된 사건은 여리고 정탐시에 기생 라합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하다(수 2장). 아무튼 이는 요셉 족속이 어떻게 견고한 요새 벧엘을 정복하게 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또 벧엘 정복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셉 족속과 함께 하셨음(22절)도 잘 보여 준다.
(주); 성읍의 입구 - 이것은 성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벧엘 사람들이 요셉 족속의 성문 출입을 허용 할리 만무하다. 따라서 이는 요새화된 벧엘에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비밀 루트(root)나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259).
(주); 선대하리라 - 원문을 직역하면 '자비를 보이겠다'. '은혜를 베풀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비', '은혜'에 해당하는 원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 또는 인간과 인간 간의 '변함없는 신뢰'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창19:19; 삼하16:17 ; 시59:17). 여기서는 정탐꾼이
벧엘 거민에게 제시한 '약속을 어기지 않고 반드시 이행하겠다'는 강조적 의미로 쓰였다.
성 경: [삿1:25]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벧엘 정복]
(주);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 이 벧엘 사람은 요셉 족속의 정탐꾼으로 말미암아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므로 이처럼 성읍의 입구를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탐꾼이 그에게 정중히 도움을 요청한 점으로보아(9절) 자발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즉 그는 여리고 성의 라합처럼(수2:8-11). 이미 하나님께서 요셉 족속과 함께 하심(22절)을 감지했기 때문에 정탐꾼의 요청에 협조했을 것이다.
(주);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 라합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켰다(수6:17). 이와 같이 한 사람의
행동 여하에 따라 전가족의 구원과 멸망이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대표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과거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오늘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된 것이다(롬5:18). 물론 구원은 최종적으로 개개인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타인의 구원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쳐 구원에로 인도할 수는 있으므로, 성도의 힘쓸 의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고후 2:15, 16 ; 딤후 4:2).
성 경: [삿1:26]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벧엘 정복]
(주); 헷 사람의 땅 - 헷 족속은 인도 유로피안(Indo-European) 족이다. 이들은 B.C.1800-1200년 사이에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역에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었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참조).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모세 율법시대에 일어난 사건들과 헷 족속의 법률이나 관습들, 특히 이들의 종주권계약(suzerainty treaties)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한편 시리아 지역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헷 족속의 온 땅'으로 불리워졌다(수1:4). 따라서 본절에서 벧엘 거민이 이주하였다는 '헷 사람의 땅'은 시리아의 어느 한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주);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 이 사람은 자신의 새로운 정착지에 다가 벧엘의 옛이름인 '루스'라는 칭호를 붙였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떠나다'라는 뜻 외에도<23절> '편도나무'(almond)라는 뜻을 지닌 '루스'라는이름에 근거해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즉
편도나무로 유명했던 고대 헷 족속의 땅으로는 북부시리아의 '쿠프로스'가 있으므로 이곳이 곧 루스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Cassel).
성 경: [삿1:27]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본절은 벧엘의 운명과는 대조적으로 므낫세의 영토내에 있는 많은 가나안 인들의 성읍들이 그대로 존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들 성읍들은 '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스르엘과 에스드렐론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편 이 도시들 중 몇몇은 여호수아에 의해 정븍되었으나(수12:21,23), 나머지 성읍들에 대한 정복기사는 아무 데도 없다. 아마 그들은 철병거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쉽게 이스라엘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Goslinga). 그리고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된 성읍들까지도 곧 독립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본절의 끝 부분에 나오는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라는 말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저항이 막강하였음을 의미한다.
(주); 벧스안 - 요단 계곡과 이스라엘 골짜기의 교차 지점, 곧 요단 강 서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주요 요새이다. 라암세스 3세 때(B.C.1175-1144)까지 이곳에 애굽 수비대가 상주했었으며, 그 후 블레셋이 이곳을 점령했었다.
(주); 그 향리 - 즉 큰성읍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형성되었던 촌락이나 위성 도시를 가리킨다.
(주); 다아낙 - 므깃도 남동쪽 8km 지점에 위치한 가나안의 주요 성읍이다. 역사상 이 성읍은 당시 에스드렐론 계곡에서 샤론 평야에 이르는 남서 통로를 지배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주); 돌 - 가이사랴 북방 약 13km 지점의 갈멜 산 남쪽, 팔레스틴 해안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읍이다. 이곳에는 그 해안을 따라 자주빛 물감의 원료가 되는 조개가 많이 났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해 살았었다. 한편 솔로몬 당시 돌과 그 인근지역은 솔로몬 왕국의 제4행정 구역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 이블르암 - 샤론 평야 동쪽,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에 위치한 가나안의 주요 성읍이다. 오늘날에 '길벳 빌 암메'(Khirbet Billameh)와 동일시 되는데, 이는 므깃도 남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주); 므깃도 - 하이퍼 남동쪽 약 30km 지점의 이스르엘 평원에 위치한 고대 도시이다. 이곳은 B.C. 12세기 중반까지 애굽의 지배 하에 있었다.
고고학자 스트라툼(Stratum)7세는 므깃도가 갑자기 멸망당했음을 밝혀냈는데, 그것은 5 : 19에서 암시하고 있는 드보라의 숭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Albright)
성 경: [삿1:28]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본절에서 사사기 기자는 므낫세 뿐만아니라 다른 지파까지 포함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가나안 인들을 그 땅에서다 쫓아내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강성해져 충분히 가나안 인들을 쫓아낼 수 있을 즈음에는, 가나안인들을 쫓아내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부려먹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즉 강성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라 보다 가나안 인들의 사역을 통하여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 - 정확히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물른 이스라엘의 국력이 최고로 신장(伸長)된 때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시기(B.C.1005-931)이다. 그러나 사사 시대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꾸준히 국력을 길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때는 이스라엘이 충분히 가나안 인들을 다 쫓아낼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신장된 때임에 만은 분명하다.
(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 이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인들을 사역시킨 경우는 이미 여호수아 당시에도 있었던 일이다. 즉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속여 화친 조약을 맺었던 기브온 거민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았었던 것이다(수9:22-27). 또한 솔로몬은 자신의 건축 사업에 가나안
인들을 동원, 인부로 사용하기도 했었다(왕상9:19-2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가나안땅에서 모든 원주민들을 멸하고
쫓아내는 것이었지(신20:16-18) 결코 그들을 남겨, 이용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잘못이 있었는 바, 이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이방 우상 숭배 종료와 사악한 풍습에 점차 물들어 가고 말았던 것이다.
성 경: [삿1:29]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주); 게셀 - '쉐펠라', 즉 가나안 평지<9절>의 돌출부에 위치한 전략 도시로서 예루살렘 서쪽 3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특히 에브라임의 영토 중
최남서쪽 경계와 맞물려 있는 이곳은 지중해변에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주요 길목이기도 하다. 한편 이 게셀은 애굽의 문서들에서도 여러번
언급되고 있는데, 애굽의 바로가 솔로몬에게 결혼 선물로 이 성읍을 줄때까지(왕상9:15-17) 이 성읍은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았었다.
성 경: [삿1:30]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스불론의 영토에 있는 두 성읍 기드론과 나할롤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바가 없다.
(주); 기드론 - 예루살렘과 감람 산 사이를 흐르는 시내인 '기드론'(삼하1:23)과는 엄연히 틀린 곳이다. 하이퍼(Haifa)의 남동쪽에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엘 파르(Tell el-Far)인 듯하다.
(주); 나할롤 - 또는 '나할랄'으로도 불리우던 성읍이다(수19:15 ; 21:35). 아크레 평원 남단, 하이파 동쪽 8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엔
나흘(Tell en-Nahl)로 추측된다(Albright).
성 경: [삿1:31]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본절에 언급된 성읍 중에서 악고, 시돈, 알랍, 악십은 모두 갈멜 산 북쪽 해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 거민들은 다른 지역의 가나안 인들과는 달리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후에 이곳은 중요한 해양 국가인 베니게(Phoenicia)로 발전하였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삼하5:11 ; 왕상5:1-12).
그런데 레니게의 공주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에 바알 우상을 들여옴으로써(왕상16:31-34) 이스라엘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아셀 지파의 성읍들을 간략히 도표화하여 살펴보면 곧 다음과 같다.
┌──┬───────────────────────────────────┐
│이름│ 비 고 │
│ │ │
├──┼───────────────────────────────────┤
│악고│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갈멜 북쪽 6km 지점의 지중해 연변에 위치. 사도 │
│ │바울 당시에는 '돌레마이'(행 21:7)로 불리웠음. │
├──┼───────────────────────────────────┤
│시돈│두로 북쪽 약 35km, 베이루트 남쪽 약 35km 지점에 위치한 베니게의 중요 │
│ │항구 도시. 솔로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돈의 우상 신 '아스다롯'을 │
│ │숭배하였음(왕상 11:5,33). │
├──┼───────────────────────────────────┤
│알랍│두로 북동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성읍. 이름의 뜻은 '비옥함', '풍성 │
│ │함'으로서 당시 경제적으로 상당히 윤택한 도시였음을 짐작케 해줌. │
├──┼───────────────────────────────────┤
│악십│악고에서 두로에 이르는 도로상에 위치한 지중해 연변 도시 악고 동남쪽 약│
│ │11 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키산'(Tell Kisan)과 동일시됨. │
├──┼───────────────────────────────────┤
│헬바│정확한 위치 불명. 일명'알람'(Ahlab)으로도 불리운 듯함. │
├──┼───────────────────────────────────┤
│아빅│일명 '아벡(Aphek)으로도 불리웠음(수 19:30). 하이퍼(Heifar) 만에서 4.8 │
│ │km 정도 떨어진 악고 평원에 위치. 베니게와 애굽을 잇는 도로상의 전략적 │
│ │요충지이기도 함. │
├──┼───────────────────────────────────┤
│르홉│악고 평원 동남방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엘-갈비'(Tell el │
│ │Gharbi). │
└──┴───────────────────────────────────┘
성 경: [삿1:32]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주);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증에 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에브라임과 스불론 지파의
경우(29,30절)와는 대조되는 기록이다. 즉 위의 두 지파는 가나안 거민들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하였으나 그들이 점령한 땅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아셀 및 납달리 지파(33절)는 오히려 그들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아셀과 납달리
지파의 지경 내에서는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마 그 까닭은 가나안 사람들이 숫적으로 우세하며 아셀
지파나 납달리 지파가 그들에게 대하여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성 경: [삿1:33]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주); 벧세메스 - '태양의 집'이란 뜻, 이것은 이곳에 태양 신을 섬기던 신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갈릴리 고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한편 성경에는 '벧세메스'란 이름은 같으나 서로 다른 지역인 곳이몇 군데 더 나온다. 그중 하나는 법궤 사건으로 유명한 유다 지파의 북쪽 경계(수15:10)인 벧세메스이고(삼상6:10-16) 다른 하나는 잇사갈 지파의 경계지인 벧세메스이다(수19:22).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애굽의 성읍인 벧세메스이다(렘43:13)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납달리 지파의 벧세메스를 이들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 벧아낫 - '아낫의 집'이란 뜻이다. 이로 보아 이곳에는 피요의 여신이며 바알의 아내인 '아낫'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
'아낫'(Anath)은 우가릿(Ugarit)의 전쟁의 여신이었다. 한편 이곳 역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다만 밸세메스 부근에 위치하였던 것으로만
추정할 수 있다.
성 경: [삿1:34]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본절에서는 단 지파가 아셀 지파나 납달리 지파와는 달리(31-33절) 가나안인 가운데 거하지도 못하고 아모리 족속에 의해 산지로 쫓겨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단지파의 일부는 아모리 족속을 피해 유다의 영역이나 팔레스틴 최북단 지역의 라이스(Laish)로 이주해야만 했다(18:1-31).
(주); 아모리 사람 -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까지 그곳에 거주하던 모든 가나안 족속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창15:16). 그러나 엄격히 구분하면 주로 팔레스틴 계곡이나 해안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가나안인'이라 일컬은 데 반해 팔레스틴 산지에 주로 거주하던 자들을 '아모리인'이라했다. 이들은 본래 팔레스틴, 시리아, 바벨론 등지에 널리 흩어져 살았었다. 그러나 팔레스틴 내에서는 당시 에게 해 연안 출신으로서, 가나안 남서부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오던 블레셋에게 쫓겨 골짜기나 산지로 밀려나고 말았다. 따라서 단지파가 산지로 쫓겨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때문이다.
(주);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 단 지파가 본래 기업으로 받은 땅은 가나안의 서부지역 산간과 해변에 이르는 비옥한 땅이었다(수19:40-46).
그러나 이들은 아모리 사람들에게 밀려 산지로 쫓겨났고 급기야는 그곳에서조차 정착치 못하고 결국 '라이스'에로까지 이주해야만 했다(수 18장).
성 경: [삿1:35]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주); 헤레스 산 - '태양의 산'이란 뜻으로서, 이곳 역시 우상 신전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이곳은 수19:41에 나오는 '이르세메스'(태양의 성읍)와 동일한 곳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아인 세메스'(Ain Shemes)라 불리우고 있다(Keil, Goslinga등). 한편 이스라엘이 정복하는 데 실패한 도시들의 이름이 대부분 우상과 관련된 것으로 볼 때<33절>. 이스라엘의 실패는 단지 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앙적인 차원에서 설명이되어야 할 것 같다.
(주); 아얄론 - 여리고와 지중해 사이의 고지에 위치한 성읍. 오늘날의 '얄로'(Yalo)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호수아가 아모리족을 격퇴할 당시 야얄론 골짜기에 달이 머문 사건으로 유명하다(수10:12).
(주); 사알빔 - 예루살렘 서쪽 약 24km 지점, 아얄론 부근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의 '셀비트'(Selbit)로 추정된다. 솔로몬 당시 이곳은 식량 공급을 위한 행정중심지였다(왕상4:9).
(주);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사역을 하였으며 - 단 자손들은 대부분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쫓겨나고 산지에서
조차 아모리인들의 공격으로 고난을 받았었다. 그러나 훗날 요셉 족속, 엄밀히 말하면 에브라임 지파는 단 지파의 영토에까지 새력을 확장,
아모리인들로 하여금 사역케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모리인들이 비록 단 지파의 지경에서 단 지파를 쫓아 내긴 했으나 그 지역이 결국에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영토로 회복되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삿1:36]
주제1: [가나안 정착의 초기 역사]
주제2: [미 정복된 가나안 성읍]
아모리 족속이 단 지파의 영토를 차지한 것(34,35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도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잔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이를 위해 본절은 당시 아모리 족속이 거주하던 땅의 남쪽 경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곧 유다 족속이 기업으로 분배받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와 일치한다(수15:1-4).
(주);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더라 - '아그랍빔'이란 '전갈'이란 뜻이다. 아마도 이 지역에 전갈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Pulpit Commentary).이 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민34:4과 수15:3에 의거하면 사해 남쪽지역에서부터 브엘세바, 즉
유다 남부 구릉 지역의 평지까지 이르는 가파른 절벽 지대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바위'에 해당하는 원어 '하쎌라'(*)는 헬라어로
'페트라'(Petra)에 해당된다. 민34:3과 수15:1에 의거할 때 이는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에돔 지경(地境)의 산악 지대를 가리키는 듯하다(Lange,
Wycliffe). 그러나 혹자는 '하쎌라'를 에돔 지경의 산악지대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아닌 그냥 바위가 많은 지역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이해하기도한다(Keil). 마지막으로 여기서 '그 위'란 서쪽 지중 해변을 가리키는 바, 이는 민 34:5 ; 수 15:4에 의거할 때 지중해로 흘러드는 '애굽
시내' 부근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삿2:1]
(주); 여호와의 사자가 갈길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여호와의 사자"(* )는 실상 여호와 자신이시다. 그것은,
그가친히 "내가 너희를...내가...내가"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가 그 자신이심을 밝히신 말씀이 알려준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 자신으로서 구약 시대에 제시(提示)되신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말 3:1에는"언약의 사자"(*)라고 하였으며, 히 3:1에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라고 하였다. "길갈"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서 가나안의 산악지방을 정복할 동안 머물렀던 근거지이다.
그리고 "보김"은 "벧엘"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70인역(LXX)은 "보김"이란 땅 이름에 "벧엘"(* )이란 말을 첨부하였다. "보김"은 "벧엘"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5 절). 전에는 법궤가 길갈에 있었지만(수 5:9), 이 때에는
벧엘로 옮겨진 것이 사실이다(20:26-27). 그러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길갈"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할례(割禮)로 언약을 확고히 하신 그가(수 5:9, 13-15) 이제 "보김"에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그가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창 13:14-15) 그들을 인도하여 그 땅을 주신 것은, (1) 그의 진실성을 증명하며,
(2) 그의 구원의 능력을 실증하며, (3) 그의 사랑을 보여준다(사 43:1-4). 그러므로 그는 절대로 믿을 만한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만큼 그가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내용(창 17:8)의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니,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의 자비는
무궁하시다. 애 3:22참조.
성 경: [삿2:2]
(주);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 하나님께서 일찌기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민족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경고하여 주셨다(출 23:32-33, 34:12, 16; 신 7:2; 수 23:12-13).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족속과 교류하며, 그들의 우상 숭배를 용납하는 의미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리어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 제단을 파괴해야 된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나안 족속의 제단을 파괴하려면 전쟁의
강한 정신이 요구된다. 오늘날 기독자들이 이 세상의 그 무엇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그에게 우상이다. 그들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도 전쟁하는 심리로만 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해야 된다고 가르친다(히 12:4).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하여는 희생, 용기, 결단, 수고, 또는 죽음까지라도 각오하는 심각한 전투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성 경: [삿2:3]
(주);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언약을 세우는 경우에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 민족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어 주시지
않겠다고 이미 경고하신 바 있었다(수 23:12-13). 여기 이른 바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란 말은 그들이 죄를 용납한 결과로 당하게 될 화(禍)를
의미한다. 기독자들도 죄와 싸우지 않는 때에 그 죄가 가시처럼 그들을 괴롭히며 덫처럼 그들을 잡아 거꾸러지게 만든다.
성 경: [삿2:4,5]
하나님("여호와의 사자")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지적하시고(2절), 그들이 그 불순종한 죄값으로 가나안에서 화를 당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실
때에 그들은 저희의 죄를 뉘우치고 큰 소리로 울었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로 임하신 영(靈)이시니 만큼 그들의
심령에 압도적으로 큰 충격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니 만큼 그들도 통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곳 이름을 "보김"(* ), 곧 우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으니, 그것은 그들의 죄악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속죄제(贖罪祭)였을 것이다. 그들이 통회(痛悔)한
것도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한 저희의 죄악을 원통히 여기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것은 죄악 문제에 대한 해결책, 곧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속죄의 제도에 순종한 신앙인 것이다. 기독 신자들도 그들의 죄악 문제에 대하여 원통한
느낌을 가지는 것만으로 해결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믿음으로 만족한 회개를 이룬다. 이스라엘이 여기서
회개하고 믿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믿음을 오래 동안 지속하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
씨 뿌리는 비유에 있어서 돌밭에 뿌리운 씨의 나타남과 같은 것이다. 곧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쉽게 말라버림과
같은 것이다(마 13:20-21). 또한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와 같다고도 할 수 있으니, 곧 말씀을 듣고 반응을 보이다가 세상 염려 때문에 결실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마 13:22). 참된 경건은 좋은 밭에 뿌리운 씨와 같아서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다(눅 8:15).
성 경: [삿2:6-10]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또 하나님의 기적적 구원을 목도한 지도자들("장로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잘 섬겨왔다. 이 사실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교회에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영향력이란 것은 인간적인 어떤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적 운동은 하나님의 영력의 간섭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적 능력도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서 실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롬 10:17 에는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세우신 기관은 역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도하시며 다스리심에 있어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않고 천사들을 통하여 각 개인을 지도하신다면 더욱 더 효과적이 아닐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특별히 세워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영적으로 더욱 유력하게 일하시는 방면이 있다. (1) 그것은, 지도자를 모본으로 세워주셔서 그들의 신앙 생활이 구체화되도록 함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연약한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영력을 받아 구원 받는 것을 볼 때에 자기들도 그렇게 되고자 하는 용기를 얻는다. 성경은 확실히 이 방면을 제시하여 준다. 곧, 성경이 우리에게 기도의 용기를 주기 위하여 말씀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약 5:17-18). (2)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는 또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한 체휼(體恤) 때문이다. 지도자의 눈물이 피지도자들의 눈물을 발생시키고, 지도자의 사랑의 수고가 지도를 받는 자들의 마음 속 깊이에 아름다둔 덕행의 동기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오직 인간인 지도자를 통로(通路)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사들은 고난 당하는 일도 없고 눈물도 없다.
(주);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 (10 절 상반) 곧, 여호수아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뜻이다. 정통 학자들 중에서 이 문구를 내세(來世)과 관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곧,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그세대 사람들이 죽어서 그 영혼으로 앞서 간 성도들이 가 있는 복된 세계로 들어갔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 (10절 중간) 이것을보면 인생은 올바른 영적 교육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된다. 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라고 하여 그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거나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국가적, 또는
사회적 교육 기관이 참된 종교 교육을 보장하는 일도 매우 드물다. 어떤 시대에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잘 공경하도록 권장하는 일이 있게 되면 그
때에 부모된 자들이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착실히 실시해야 된다. 그렇게 못하면, 그 부모들이 별세한 뒤에 그들의 사회는 불신앙과 세속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실시함은 하나님의 명령이다(신 6:6-7; 시 78;5-8). 이 일에 대해서도 원천적으로 지도할 자는
교회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 시대만 책임진 것이 아니고 장래 세대에 대해서도 책임지고 일해야 된다. 딤후 2:2에 말하기를,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성 경: [삿2:11-13]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하여 말한다. (1) 그들이 참된 신, 곧 그들을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살아 계신 여호와를 버렸음.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는,선을 악이라 하고 빛을 어두움이라고 하는 강퍅한 행동이다. 이렇게 행한 자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사 5:20). (2)
그들이 다른민족들의 신(神)들을 따름. 곧, 그들이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섬겼으니, "바알과 아스다롯"이었다. "바알"(* )은
소유주(owner)란 뜻인데 이스라엘주위에 있는 민족들이 섬기는(예컨대 베니게 족속들과 아람 족속들이 섬기는) 신이었다. 그리고 "아스다롯"(* )은
역시 그들이 섬기는 여신(母性神)이었다. 그들이 이 두 가지 우상을 농신(農神-풍년 들게 하는 신)으로 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찌하여 그렇게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서 이런 미신(迷信)으로 타락했던가? 이것은 우리로서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 몇가지 원인을 알 때에 이 의문이 풀린다. (1)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효과적인 증거와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10절). 인간은 특별히종교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제시(提示)를 보수(保守)하지 않는 한(限), 어두운 미신에 빠지지 않을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혼이 조상 때부터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하나님을 떠난 것이 곧 죽음임) 어두워졌기 때문이다(엡 2:1). (2) 음란의 미혹에 빠진
원인도 있었다(민 25:1-3). 겔 16:17, 20:30, 23:3참조. 이 참조 귀절들에 지적된 말씀은 영적 음행, 곧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따름에 대한
비유적 언사이다. 그때의 우상당(偶像堂)에는 창녀(娼女)가 배속되어 있어서 그 우상 숭배 행위의 한 순서로 음행도 들어 있었다.
성 경: [삿2:14]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셨으므로 그들이 즉시 이방 세력에게 삼키웠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현상은 신약 교회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 신약 교회도 하나님을 떠나면 속화(俗化)되는 법이다.
성 경: [삿2:15]
(주);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 "어디를 가든지"란 문구에 있어서 "가든지"란 말(* )은 전쟁터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왕하 18:7 ; 신 28:25
참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패전하게 되리라는 것은 일찌기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바이다. 신 28:15, 25 참조. 본서의 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계약신(契約神) 성격을 역설(力說)하여 하나님의 진실성을 지적한다.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는 언제든지 먼저 예언하신 것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절대적 신앙의 대사응로 계시(啓示)되어 계신다. 누구든지 그를 믿지 않는 것은 발뒤꿈치로 송곳을 차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성 경: [삿2:16,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지도자로 "사사"(士師)를 세워 주셨으나 그들이 극히 타락했을 때에는 사사의 지도도 순종하지 않았다. "사사"란 말의 히브리어(* )는 재판하는 자를 가리키지만(D.K. Budde, der Grundbegriff dafurist Recht schaffen), 이는 일반 국가 행정에 속하는 재판장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어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을 "사사"라고 번역함보다는 구원자란 뜻을 내포하는 "심판자"라고 함이 옳다고 생각된다.
(주);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쫓아" - (17절 상반)란 문구의 히브리어(*)는 "다른 신들을 쫓아 음란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음란하여"란 말(* )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정절을 지키니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섬기는 자를 가리켜서 음란한자라고 하시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있다.(1) 참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시니 만큼, 신자가 마땅히 섬겨야 할 분은 여호와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만 섬겨야 된다(신 6:5). (2)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신자를 사랑하시되 마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함 같이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것(엡 5:25). 그러므로 그는 신자도 그렇게 전심 전력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신자가 하나님을 그렇게 전심으로 사랑하지않을 때에 그는 질투하신다고 하였다(출 20:5). 이것은 신자에게 대한 그의 사랑이 불붙듯하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주); 속히 치우쳐 - (17절 하반). 여기 "속히"(* )란 말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얼마 전까지 하나님 여호와를 공경하던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속히 타락했을까 함이다.그러나 이 난제는 쉽게 해결된다. 인류가 아담의 타락 후 이미 종교적으로는 타락되어있으니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는 그의 부패성이 발동하게 된다. "치우쳐"란 말(* )은 배반함(turned aside)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쫓는 배신 행위를 가리킨다.
(주);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 (17절 끝). 곧, 사사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즐이 그들의 신실했던 선조들처럼 행치 아니하였다는 뜻이다.
성 경: [삿2:18]
(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였으니 - 곧, 사사의 구원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지적한다.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사사기의 이 말씀은, 그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가 지도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도자 없이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보통으로는 하나님께서 교회에(사회에도) 지도자들을 세워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역시하시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동기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가 사사를 세우신 동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 때문에 일어난 그의 긍휼이었다. "슬피 부르짖으므로." 곧, 그들이 애달프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큰 죄인이라도 그 지은 죄를 진실히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호 6:6).
성 경: [삿2:19-21]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지도자가 별세한 뒤에는 또 다시 우상을 섬기며 범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
(19절 끝)란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강퍅해진 사실을 지적한다. 사람의 일반적 범죄는 성령을 근심케 하고(엡4:30), 그의 강퍅성은
벌을 초래한다.(창 6:5-7).
성 경: [삿2:22,23]
이 부분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의 거민, 곧 여호수아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던 그 족속들을 더 이상 쫓아내 주시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시는
목적을 밝혀준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 (22절 하반)고하였다. 여기 "시험"이란
말(* )은 시련(試鍊)을 의미한다. "시험하려 함이라"고 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할 때에 그 땅에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으로 인하여
연단을 받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잘 믿는 신자들의 주위에도 가시와 같이 괴롭게 하는
시험거리들을 남겨두신다. 그가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역시 그들을 시련하시려는데 있다. 신자들은 시련을 통하여 성화(聖化)되어 간다. 벧전1:6-7;
욥 23:10 참조.
성 경: [삿3:1]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남겨진 열국(列國)]
(주);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 '가나안 전쟁'은 B.C. 1405년경부터 약 5년간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창12:7;출3:8)에 들어가기 위해 수행했던 정복 전쟁을 가리킨다. 이 엄청난 전쟁은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신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과거에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큰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동시대에 살았던 장로들이 죽은 뒤 그들을 이은 세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러한 큰 일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었다(2:10). 그래서 이 전후(戰後) 세대는 그 선조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몸소 향유하면서도 전쟁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그들의 주와 왕이 되시니, 이스라엘은 마땅히 그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섬겨야 했다(출 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새 세대는 그렇지 못하였으니 본절은 이를 암암리에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주); 시험하려 하시며 - 전쟁의 경험이 없는 여호수아 이후 세대들에게 전쟁을 친히 겪게 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경험하게 하려는 것을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삿3:2]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이 활약]
주제2: [남겨진 열국(列國)]
(주);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 '그것'이란 1절에 언급된 '전쟁'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신 본래 이유와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놓으신 이유는 분명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이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본절에서는 가나안 족속을 남겨 놓은 이유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의 경험을 쌓게 하려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전쟁을 경험해 보지 않은 유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의 기술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전쟁을 통해 하나님 당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알리시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호수아 당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전쟁의 승패가 사람 수의 많고 적음이나 병기(兵器)의 우수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삼상 17:47)을 익히 체험하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사후 세대들에게도 남아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통해 오직 그들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모든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데 있음을 가르쳐 주려 한 것이다(A.C.Hervey, A.E.Cundall,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274).
(주); 남겨 두신 열국 - 곧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미처 완전히 진멸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호수아 사후에도 가나안에 존속하고 있던
원주민들을 가리킨다(3,5절). 그런데 본절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열국을 남겨 두신데에도 깊은 경륜(經綸)이 담겨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당시 이스라엘은 분명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 역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로운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거해주는 일례이다(사 55:8,9).
성 경: [삿3:3]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남겨진 열국(列國)]
(주); 블레셋 - 그레데(Crete)에서 가나안 남부 해안 지대로 이주해 온 자들이다. 이들은 인종학상 노아의 둘째 아들 함(Ham)을 조상으로 하고 있는 '가슬루힘' 지파(창 10:14)에 속한다. 이들은 사사 시대는 물론(10:7 ; 13:1-16:31), 사울과 다윗 때(삼상13:19-22 ; 14:52)와 남북 분열 왕조 동안 내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왕상 15:27 ; 사9:8-12). 이후 이들은 성경에 예언된(슥 9:5-7)대로 알렉산더대왕 때에 완전히 멸망당했다(B.C. 332).
(주); 다섯 방백 - 블레셋의 5대 성읍인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드, 가사의 방백들을 의미한다(수 13:3). 여기서 '방백'(*, 사레네이)이란 호칭은 그리이스의 군주를 가리키는 명칭인 '코이라노스'(*), 또는 '타이라노스'(*)등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이는 곧 블레셋인들이 그리이스 지방으로부터 이주해 온 족속임을 간접적으로 증거해 준다. 성경에서 '사레네이' 또는 이에 준하는 '세렌'(*)이란 호칭은 오직 블레셋 족속에게만 사용되어졌다(16:5 ; 수 13:3 ; 삼상 5:8 ; 6:4 ; 7:7 ; 29:3,9 ; 대상 12:19). 한편 아브라함 시대에 이미 가나안 땅에 이주해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블레셋인들의 초기 중심지는 그랄(Gerar)이었다(창 20:1,2 ; 21:32,34). 그러나 이후에는 아스돗 등 다섯 도시의 방백들이 중심이 되어 블레셋을 이끌었다.
(주); 가나안 모든 사람 - 여호수아가 미처 다 정복하지 못했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들을 가리킨다. 1:1주석 참조. 당시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땅의 경계에 대해서는 수13:1-7에 상세히 언급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주); 시돈 사람 - 시돈은 두로의 북쪽 32km, 베이루트(Beirut)의 남쪽 32km 지점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서, B.C. 2750여 년경 함의 아들 가나안이 낳은 장남 '시돈'(창 10:15)에 의해 건립된 도시라 알려지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주로 이웃 도시인 두로(Tyre)와 함께 언급되고 있다(마 11:21 ; 눅 10:13). 이 당시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이후에 이들은 베니게인(Phoenicians)이라고 불려졌으며, 이들이 거하던 베니게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행 11:19 ; 15:3). 1:31 주석 참조.
(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 '바알 헤르몬'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수 11:17 ; 13:5에 근거해 팔레스틴 최북방 헤르몬 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 일 것으로 추정한다(Lange Commentary, Keil&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275). 다음으로 '하말어구' 역시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다메섹 북부 약 200km 지점의 오론테스 강을 끼고 있는 수리아 성읍 '하맛'(Hamath) 부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Rawlinson). 그러나 대개는 '하맛에 들어가는곳'(수 13:5). 즉 레바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바알갓의 맞은편 북동쪽에 위치한 '르보(*, 어구)-하맛'일 것으로 추정한다(Pulpit Commentary).
(주); 히위 사람 - 히위 족속은 가나안의 후손으로서 일반적으로(창 10:17 ; 대상 1:15) '가나안 후기 원주민'으로 분류되어 진다.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참조. 그런데 이들 히위 족속은 대체적으로 호리 족속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히위'(*)의 '와우'(*)와
'호리'(*)의 '레쉬'(*)가 혼동되어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에서의 아내 오흘리바마가 창36:2에서는 히위 족속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금 뒤에 가서는(창 36:20,25) 호리 족속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아무튼 이들은 아마르나 시대(AmarnaAge, B.C.
15세기~14세기) 동안에 북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미탄니(Mitanni)라는 매우 중요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미탄니 왕국은 당시 이집트의 가장 강력한
대적이 되었고, 레바논 산지와 하맛 어구(수 11:3 ; 삼하 24:7). 그리고 기브온과 그 주변 도성에까지이주해 살면서 가나안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끼친 그러한 영향력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여부스인 중 한 지도자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삼하 24:16에 '아라우나'라고 하는
어떤 여부스인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때의 '아라우나'(*)는 '지도자'란 뜻을 가진 히위인들의 호칭이었다(IDB).
성 경: [삿3:4]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남겨진 열국(列國)]
(주);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 여기서 말하는 시험의 뜻은 1절에서 말하는 시험의 뜻과는 다르다. 1절 주석 참조. 즉 여기서 '시험'이란 2:22에서 의미하듯 열국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괴롭혀 그들의 신앙을 재확립케 하는 연단 내지 검증 과정을 가리킨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2:22 주석을 참조하라.
(주); 모세로...명하신 명령들 - 2:22에 나오는 '여호와의 도'와 같은 말이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 2:22 주석 참조.
성 경: [삿3:5]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이스라엘의 통혼 죄(通婚罪)]
(주); 마침내...거하여 -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수없이 반복하여 주신 말씀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 그곳에 있는 족속들을 다 진멸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거나 통혼치 말며 우상 숭배치 말라는 것이었다(출 34:10-17 ; 신7:1-5 ; 수 23:11-26). 그리고 그에 불순종할 시 따르는 징벌에 대해서도 익히 일러주셨다(신 28:15-68). 그러나 이 모든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려하던 죄악에 빠지고 만다. 즉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용납한 결과(1:19,21,27-36) 자연히 우상 숭배에 빠지고 이방인과 통혼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6절).
(주); 가나안 사람과...여브스 사람 - '기르가스 족속'(신 7:1)을 합하여 소위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라 불리우던 자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때 그곳에 거주하던 자들로서 '가나안 후기 원주민'으로도 불리웠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과 수 9:1-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참조하라.
성 경: [삿3:6]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이스라엘의 통혼 죄(通婚罪)]
(주);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 과거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금지 조항을 이제 이스라엘이 여기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 조항이란 곧 신 7:3,4에 나오는 이방인과의 통혼(通婚) 금지 명령이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이방 결혼을 금한 이유와 그것을 어졌을 경우의 결과가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먼저 이방 결혼을 금한 이유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므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신을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다음 그 금지 조항을 어긴 데 대한 대가는 하나님의 진노와 이스라엘의 돌연한 멸망이다. 사실 그릇된 결혼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불행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사항이다. 심지어 성경은 지혜의 왕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이한 결과그들이 갖고 온 우상을 섬기고 마는 과오에 빠졌음을 보여 준다(왕상 11:1-8). 또한창 6:1-5은 당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사모하여 결혼한 결과 세상에 관영한 죄악에 물들고 말았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신약 시대에 이러서도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는 권도(勸導)가 주어지는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다(고후 6:14).
(주); 그들의 신들 - 이스라엘에 커다란 영향을 준 가나안 종교는 1929년 발굴된 우가리트 문서, 즉 라스 솨마라서판(Ras Shamra)을 통해 보다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여러 신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신들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엘'(El) 신, 그의 아들인 '바알'(Baal) 신, 바알의 누이이며 아내인 '아낫'(Anath) 신이 있다. 그리고 일명 '호론'(Horon)으로도 불리운 바알의 원수인 '못'(Mot)과 바다를 주관하는 '얌'(Yam) 일명 '리워야단'(Lotan) 신이 있다. 또한 아낫과 함께 가나안의 3대 여신이라 불리우는 '아세라'(Asherah)와 '아스다롯'(Astaroth)신 등도 언급되어 있다(F. M. Cross). 그 외에도 그곳에 기록되어 있는 다른 중요한 가나안 신으로서는 블레셋인들이 섬기던 '다곤'(Dagon) 신이 있다. 이는 곡물의 신으로서 바알 신과 그 성격이 비슷하여 바알과 이명 동신(異名同神)이 아닌가 추측된다. 라스 솨마라 지방에서 바알신을 '다곤신의 아들'(The Son of Dagon)로 부르기도 했던 점은 이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I.D.B.). 또한 라스솨마라 서판에는 '그모스'(Chemosh, 삿 11:24) 혹은 '몰렉'(Molech, 레 18:21), '밀곰'(Milcom, 왕상 11:5) 등으로도 불리운 암몬 신이 언급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제반 신들에 관해서는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과 본서 2:11-23 강해, '고대 근동의 신들'을 보다 참조하라. 아뭏든 이처럼 다양한이방 신들이 숭배되던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순수한 여호와 종교를 보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나안인과의 통혼을 엄격히 금지하는것도 한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주); 섬겼더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아바드'(*)는 단지 생각이나 말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고, 몸과 인격 전체를 바쳐 섬기는 종교적인
섬김(Service)을 의미한다(Lange). 그러므로 70인역(LXX)은 이 말을 종교적인 의미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인 '레이투르게인'(*) 즉
'예배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삿3:7]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옷니엘의 활약]
(주);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 '잊어버리다'에 해당하는 원어 '솨카흐'(*)의 기본 뜻은 '잘못 놓다'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않고 마음 바깥에 내다 놓으므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망각한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마음 중심에 여호와가 아닌 다른 것을 모시고 살 때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교훈을 잊어버릴 수 밖에 없다.
(주); 바알들과 아세라들 - 여기서 '바알'은 '풍요'와 '다산'(多産)을 관장하던 가나안의 고위 신이다. 그리고 '아세라'는 엘(El)의 아내이자
바알을 포함한 70명의 신의 어머니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들의 이름이
이처럼 복수형으로 쓰여지고 있는 까닭에 대하여서는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장엄 복수형으로서 신의 이름에 흔히
사용되던 히브리어법의 한 형태이다. 즉 신의 존엄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복수형으로서 모양은 복수지만 그 뜻은 단수로 쓰인 경우이다. 그 한
예로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로힘'(*)을 들 수있다. 이는 복수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창
1:1 주석 참조. 둘째, 이것은 여러 모양,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섬겨지던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복수형이다. 본문의 문맥상
위의 두 가지 이유 가운데 후자의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스라엘은 당시 지역에 따라 여러 모앙, 여러 이름으로 섬겨지던 바알과 아세라를
자기의 이웃들과 더불어 섬겼던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3:8]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옷니엘의 활약]
(주); 메소보다미아 - 메소보다미아는 '두 강사이'라는 뜻으로서 유브라데(Euphrates) 강과 티그리스(Tigris) 강 사이의 광대하고도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의 메소보다미아를 그처럼 북방에 한정시킨다면, 이곳의 왕인 구산 리사다임이'팔레스틴' 가장 남쪽 지파인 유다의 지도자 옷니엘과 싸우기에는 그 거리상 지나치게 멀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9,10절). 때문에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곧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문서들이 메소보다미아를 가리킬 때 주로 북방 메소보다미아를 의미했지만 간흑 그것은 오론테스(Orontes)강이 있는 하맛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틴 북방 지역에까지 확대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문의 메소보다미아를 오론테스 강 유역으로 보면 구산 리사다임 왕과 옷니엘의 싸움에 별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주); 구산 리사다임 - 이 왕에 대한 기록을 성경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리사다임'에 해당하는 원어 '리쉬아타임'(*)은 '두 배나 악하다'는 뜻인데, 아마도 이스라엘이 그에게 붙여 준 칭호인 듯하다. 그리고 '구산'이란 이름은 바벨론왕 '니므롯'의 부친인 '구스'(창 10:8)란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ary, Vol. II, p. 293).
(주); 손에 파셨으므로 - '팔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마카르'(*)로서 사람을 노예로 파는 것(신 21:14 ; 28:68)을 가리킨다. 2:14 주석 참조.
그런데 이 말은 간혹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될 때에도 사용되었다(사 50:1).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상과 달리 '항복하게 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산 리사다임의 지배하에 놓이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삿3:9]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옷니엘의 활약]
(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 '부르짖다'에 해당하는 원어 '자아크'(*)는 '힘을 다해 외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이것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것을 의미한다(Lange). 과거에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바로의 압제로 인해 힘든 노역을 할 때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은 적이 있다(출 2:23).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그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이방 우상 숭배죄의 잘못을 깊이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그러한 회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다시금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는 것이다.
(주); 한 구원자를 세워 - 여기서 구원자라 함은 사사(Judge)를 의미한다. 그런데 본서에서 사사들에 대해 구원자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사사들이 문자 그대로 단순히 재판만을 수행하는 재판관(4:5)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주위의 적들로부터 구해 주는 구원자의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15절;5:14;8:22).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6 주석을 참조하라.
(주);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 - 옷니엘(Othniel)이 정확히 갈렙의 아우인지 아니면 조카인지 하는 학자들간의 이견에 대해서는 이미
1:13에서 살펴보았었다. 그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3:10]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옷니엘의 활약]
(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 여기서 '여호와의 신'(*, 루아흐 예호와)이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여러 모로 활동 하셨던 성령을 가리킨다. 창 1:2 주석 참조. 그런데 이러한 성령이 옷니엘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과 능력이 그에게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특별한 소명이란 이스라엘 백성을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지혜롭게 다스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능력이란 그러한 소명을 잘 감당할 수있는 힘을 가리킨다. 한편 옷니엘에게 임한 성령은 구약 시대의 여러 인물들에게도 임했던 적이 있다(6:34;11:29;13:25;삼상 10:9,10;16:13;대상 12:18). 여호와의 신은 가끔 백성들 가운데 몇몇 사람에게도 임했으며(민 27:18;단 4:8),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한 봉사를 수행토록 하기 위해서 임하기도 했다(출 31:3;35:31;민 11:25). 이는 오순절 이후로(행 2:1-5) 성령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심령에 영원히 내주하시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요 14:17).
(주); 여호와께서...그 손에 붙이시매 - 옷니엘이 구산 리사다임에게서 거둔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주관적인 능력과 역사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자 즉각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뻗치신 하나님의 사랑의 한 표현이기도하다(9절).
성 경: [삿3:11]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옷니엘의 활약]
(주); 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옷니엘이 죽었더라 - 이와 같은 표현은 다른 사사들의 행적을 마무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30절 ; 5:31 ;
8:28). 아무튼 본절은 옷니엘의 활약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그치고 정치적, 종교적으로 평안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백성들은
옷니엘이 죽자 또다시 죄악을 범하는 전철(前轍)을 되밟는데 그 결과 모압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12-14절).
성 경: [삿3:12]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모압의 압제]
(주); 이스라엘 자손이...악을 행하니라 - 이로 볼 때 이스라엘은 40여년에 걸친 평화로운 세월을 구가하는 동안(11절) 구산 리사다임의 수하에서 8년간이나 노예 생활하던 때의 비참함(8절)을 까맣게 잊어버렸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잘못과 죄의 악순환은 사사기 전반에 걸쳐 되풀이되는 바 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그리고 길이참으심을 멸시하는 완악한 백성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은 오늘날 우리들도 범할 수 있다. 즉 평안하고 안락한 여건 가운데서 살다 보면 우리도 자칫 향락과 정욕, 각종 죄악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그러한 때일수록 더욱더 경성하여 자신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빌 1:20).
(주); 모압 -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롯의 딸 간의 근친 상간(近親相姦)에 의해 태어난 '모압'의 후손이다(창 19:30-38). 그들의 거주 지역은 사해 동쪽에 위치한 고원 지대로서 해발 약 1,300m에 이른다. 한편 과거 그들은 출애굽 과정에 있던 이스라엘이 그 지경을 통과하고자 요청할 때 이를 거절했었다(11:17). 그리고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케 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우상 앞에서 음란히 행하도록 만들었다(민 23:11 ; 24:10 ; 25:1-3).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암몬과 모압 사람을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다(신 23:3-6).
(주); 에글론 - 이름의 뜻은 '젊은 황소'이다.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 초기 당시 모압의 왕이었던 자로서 여리고 부근의 요단 강서부 지역을 한때 강점(强占)하였었다(13절).
(주); 강성케 하사...대적하게 하시매 - 여기서 '강성케 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하자크'(*)는 '돕다', '붙잡다'는 뜻이다. 이는 곧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붙들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도리어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시려고 잡은 손을 놓으시고 대신 모압을 권능의 손으로 붙드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삿3:13]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모압의 압제]
(주); 암몬 - 롯과 그 둘째딸 사이에서 난 '암몬'(창 19:38)을 조상으로 하는 족속이다. 따라서 모압 족속(12절)과는 형제국이 된다. 이들은 모압 북방의 랍바를 중심한 지역에 거주하였는데 곧 요단 동편 지방이다(신 3:11). 이들은 역사상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삼상 11:1-3 ; 왕하 24:2) 일찍이 모압 족속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군을 저지하려 방해하기도 하였다(신 23:3-6).
(주); 아말렉 자손 -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을 조상으로 하는 족속이다(창 36:15,16). 이들의 거주지는 팔레스틴 남방에서 시내 반도에까지 이르는 광야지대였다. 이들은 사사 시대 동안 미디안과 화합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기드온에게 격멸당하고 만 역사도 지니고 있다(6:1-7:25).
(주); 종려나무 성읍 - 여리고 성을 의미한다(신 34:3 ; 대하 28:15).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6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모압과 암몬,
그리고 아말렉 연합군이 여리고 성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성읍이 여호수아 이후 얼마동안 강력한 요새로 재건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선 이후 그곳을 재건치 못하도록 저주를 선언했었다(수 6:26). 때문에 이후 여리고는 외적의 침입을
방비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히 재건되지 못하였고 그 탓에 에글론의 연합군에게 쉽게 점령당하였을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295). 아무튼 이들이 이처럼 여리고 성을 점령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모압 북쪽에 인접해 있던 르우벤 지파를 쳤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그
결과 그들은 이스라엘이 거주하던 요단 서편도 점령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한 셈이 된다.
성 경: [삿3:14]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모압의 압제]
(주); 이스라엘 자손이...십 팔 년을 섬기니라 - 모압이 점령한 땅은 여리고 성뿐이다. 그런데 본절은 이스라엘 전체가 '모압 왕 에글론'을 섬긴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비록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에글론을 섬긴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적 특성 때문에 그처럼 표현한 듯하다. 즉
이스라엘은 비록 몇몇 개인이나 지파가 범죄하였어도 연대 책임을 강조,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으로 곧잘 간주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삿3:15]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베냐민 사람...에훗 - 이스라엘의 제2대 사사인 '에훗'이 베냐민 출신이란 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 에글론의 압제하에 있던 여리고 성이 곧 베냐민지파에게 기업으로 할당되었던 성읍이기 때문이다(수 18:21).
(주); 왼손잡이 - 원어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는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자'란 뜻이다. 때문에 혹자는 이를 오른손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70인역(LXX)을 이를 '암포테로덱씨오스'(*), 즉 '양손잡이'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비해 왼손이 발달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이 같은 사실은 베냐민 지파 중에 왼손잡이가 700명이나 있었던 점(20:16)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Lange, MatthewHen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p. 295 f).
(주); 그를 의탁하여...공물을 바칠 때에 - 여기서 '그를 의탁하여'란 말은 '베야도'(*)로서 '그의 감독하에' 또는 '그를 통하여'란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공물바치는 일을 에홋이 관리, 감독하였음을 의미한다(Keil & DelitzschCommantary, Vol. II, p. 296).
(주); 공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미느하'(*)의 원뜻은 '예물', '선물'이다(KJV). 그러나 여기서는 속국의 백성들이 종주국에게 바치는
'조공'(朝貢)을 가리킨다(RSV, NIV).
성 경: [삿3:16]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한 규빗 - 히브리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길이의 기준 단위인 규빗(Cubit)은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규빗에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곧 일반 규빗과 성전 규빗이다. 그중 일반 규빗은 신약 시대에도 널리 사용되던 단위로 한 규빗은 45.6cm였다. 그리고 성전 규빗은 일반 규빗보다 손바닥 폭만큼 더긴 53.2cm였다(겔 40:5). 본절에서는 에훗이 칼을 오른쪽 다리 옷 속에 숨겼다가 왼손으로 빼어 사용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칼은 일반 규빗으로 한 규빗인 칼이었던것 같다.
(주); 좌우에 날선 칼 - '칼'에 해당하는 '헤레브'(*)는 장검(sword) 뿐 아니라 단검(dagger)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예리한 도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에훗이 준비한 칼도 예리하게 양날을 세운 일종의 단검이었다.
성 경: [삿3:17]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비둔한 자 - '비둔한'에 해당하는 원어 '바리'(*)는 '통통한', '배부른', '풍성한' 등의 뜻으로 살이 비정상적으로 찐 상태를
의미한다. 에글론은 참으로 비만한 자였는데 그것은 그가 에훗의 칼에 찔렸을 때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던 점으로서도 알 수 있다(22절). 그런데
사사 시대 후기의 제사장 엘리도 심히 비둔한 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에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와 관련 성경 기자는 엘리가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 때문이라고 언급하였다(삼상 4:18).
성 경: [삿3:19]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길갈 - 성경에는 이름은 같으나 실제로는 다른 곳인 '길갈'이 여러 곳 나온다. 즉여리고 근처의 길갈(수 4:19)이 있는가 하면 갈릴리 지역의 길갈(수 12:23), 유다 경계지의 길갈(신 15:7)도 있다. 그 뿐 아니라 에발 산 근처의 길갈(신 11:30) 및 엘리야와 엘리사가 관계된 길갈(왕하 2:1)도 있다. 여기서는 그가운데 사무엘의 순회 통치지이기도 하였던(삼상 7:16) 여리고 근처의 길갈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 돌 뜨는 곳 -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페실림'(*)의 기본 뜻은 '새기다'이다. 그러나 정작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이를 크게 분류하면 3가지로 집약되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채석장의 의미 : KJV와 Living Bible은 이 해석을 취한다. 이것은 '돌을 뜨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파살'(*)에 따른 번역이다(Keil). (2) 기념 비석의 의미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강을 건넜으므로 이를 기념키 위해 여호수아는 길갈에 돌을 세운 적이있다(수 4:19-24). 그래서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잘 알려진 곳이 되었는테 '페실림'은 바로 그곳에 세워진 기념비석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A.E. Cundall). (3) RSV, NIV, 공동번역에는 '페실림'이 '새겨진 돌' 또는 '우상들'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서도 '페실림'이 '우상'의 의미로 사용된 곳이 있다(신 7:25 ; 사 21:9 ; 렘 8:19). 이 세 가지 해석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세번째 견해이다. 그 이유는 '페실림'이란 단어가 성경 다른 곳에서 대개 '우상'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단어의 단수형 '페셀'(*) 역시 '새겨진 형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Lange, C.F.Pulipit Commentary).
(주); 은밀한 일 - 공동 번역은 이를 '은밀히 드릴 말'로 번역하고 있다. 즉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되는 '비밀 정보' 곧 보안을 필요로 하는
중대사(重大事)를 가리킨다.
성 경: [삿3:20]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서늘한 다락방 - 고대 근동 지방의 건축 양식에 따르면 지붕 위에 통풍이 잘 되도록 여러 개의 창문을 낸 다락방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 낮의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했던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었던 장소도 이러한 다락방이었다(막 14:15). 오늘날까지도 근동 지방에서는 지붕 위에 이러한 다락방을 만들어 쉬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Shaw, Wycliffe Commentary).
(주);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고할 일이 있나이다 - 에훗이 실제로 에글론에게 전달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에홋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로 세우실 때, 이미 그에게 에글론을 죽이고 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것이다(15절).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명'이란 바로 그러한 명령을 가리킨다고 본다면 에홋은 단순히 에글론을 암살키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MatthewHenry). 에훗이 모압과의 전투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사람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28절)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같은 소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 혹자(Bertheau)는 에글론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해석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297). 그러나 본문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 그는 에글론이 말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하여 일어났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에훗의 말이 매우 비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여 더욱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에홋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좌석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삿3:21]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에훗이...왕의 몸을 찌르매 - 이에 대하여 메튜 헨리(Matthew Henry)는 에글론에게 전달될 하나님의 명령(20절)이 에글론의 귀가 아닌
가슴(heart)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말 그대로 전달되었다고 강해하였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136).
성 경: [삿3:22]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칼자루도...등뒤까지 나갔고 -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칼날이 에훗에 의해 힘있게 에글론의 몸에 꼽혔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주); 칼을...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 이 역시 하나님께서 에글론에게 내리신 심판을 거두지 아니하시므로 죽음의 저주가 끝까지 에글론과 함께
하였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한편 혹자는 이상과 같은 에훗의 암살 행위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의문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에홋의 행위는 성경에
나오는 여타 암살 행위(삼하 2:27 ; 4:6)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즉 일반적으로 암살 행위는 사적 원한과 야비한 정치욕(政治慾)에서 비롯된 것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에홋은 엄연한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에글론을 응징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에훗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성 경: [삿3:23]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다락문들을 닫아 잠그니라 - 에홋은 암살을 은폐하기 위해서 다락방에 있는 문들을 닫아 잠갔다. 다락방 안에 왕이 있을지라도 문이 잠겨
있으면 신하들이 왕의 허락없이 출입할 수 없다는 점(24절)을 에훗은 십분 이용한 것이다.
성 경: [삿3:24]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발을 가리우신다 - 이러한 말은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으로 사람의 생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즉 이 말은 '용변을 보다'
또는 '잠을 자다', '휴식을 취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삼상 24:8에서도 이 같은 말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용변을 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모압 왕 에글론이 발을 가리운 곳이 다락방으로 기술되어 있으므로, '잠을 자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다락방은 담화
장소(삼상 9:25)나 기도처(단 6:10) 이외에 거실로도 사용된 곳이었다(행 1:13).
성 경: [삿3:25]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 성경 원문(*, 와야히루 아드 보쉬)에는 '그리고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And they tarried till theywere ashamed)로 나와 있다. 이는 곧 왕이 너무 오래동안 지체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서 자신들이 방심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 자기 주가 이미 죽어 - 신하들은 왕이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과연 에글론은 영원한 잠을 자고 있었다(Matthew Henry).
성 경: [삿3:26]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스이라 - 본절 외에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지명이다. 따라서 '스이라'는 그 말의 뜻대로 '삼림' 지역을 의미하는 것
같다(Hervey). 27절은 그곳이 에브라임 산지의 어느 한 곳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그곳은 에훗이 추적자들로부터 피하기 쉬운 곳이다.
성 경: [삿3:27]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에브라임 산지 -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중 울창한 삼림이 있는 구릉 지대를 일컫는다. 이곳은 가나안 중부에 위치한 곳으로 대개 에스드랠론 평지에서부터 유다 산지와 맞닿는 지점까지의 지역을 가리킨다(수 16:1). 비교적 토양이 비옥한 곳이었으므로 수확물도 많이 났었다고 한다.
(주); 나팔을 불매 - 이처럼 에훗이 나팔을 분 것은 백성들을 소집할 뿐 아니라(6:34;삼상 13:3) 동시에 전쟁과 같은 비상 사태를 선포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성 경: [삿3:28]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붙이셨느니라 - 이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권능을 확신한 지도자 에홋이 이스라엘을 통솔한 것은 당시 이미 자기들의 왕 에글론을 잃고 지휘 체제를 갖추지 못한 모압군과는 대조적인 장면이다. 이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스라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고 할 수있는데 실제로 이스라엘은 모압군 일만명 가량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29절).
(주); 요단 강 나루를...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 여기서 말하는 '요단 강 나루'는 모압땅 맞은 편, 여리고 앞의 요단 강 어느 한 지점일 것이다.
한편 에훗이 이처럼 요단강 나루를 지킨 데에는 이중 목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있던 모압군(13절)이 강을 건너 모압땅으로
도망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압 본토에서부터 소식을 들은 모압인들이 원군(援軍)은 형성, 요단 강을 넘어오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에훗의 봉쇄 작전은 주효(奏效)하였는바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침입하였던 모압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29,30절).
성 경: [삿3:29]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다 역사요 용사라 - 여기서 '역사'는 원어로 '솨멘'(*)으로서 '신체적으로 강한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용사'는 '하일'(*)로 전쟁에 능한
'용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재산이나 권세 같은 것을 갖추어서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도 의미한다(룻 2:1).
성 경: [삿3:30]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에훗의 활약]
(주);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 이는 이스라엘이 사사 옷니엘의 치하에서 누렸던 태평 시대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11절). 그리고 전
사사 시대를 걸쳐서도 한 사사밑에서 가장 긴 평화를 누렸던 기간이기도 하다(5:31;8:28;10:2, 3;12:7-15;16:31).
성 경: [삿3:31]
주제1: [사사 옷니엘과 에훗의 활약]
주제2: [삼갈의 활약]
(주); 삼갈 -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과 더불어 6인의 소사사로 불리우는 자이다. 본서 서론, '이스라엘의 사사들' 참조. 한편 삼갈에 대해서는 본절 외에 여자 사사 드보라의 노래에서 한번 더 언급된다(5:6). 그렇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대의 형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에홋의 뒤를 잇는 사사로서 드보라의 활동 시기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에홋 당시 이스라엘은 80년 동안 태평했으니(30절) 아마 삼갈은 에훗이 죽고 난 후 드보라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의 일시적 혼란기, 즉 일부 블레셋인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힐때에 잠시 사사로 활동했던 것 같다.
(주); 소 모는 막대기 - 당시 팔레스틴이나 수리아에서는 밭을 갈 때 길이 약 2.5m 정도되는 둥글고 두꺼운 막대기를 사용하였다 한다. 그 막대기의
한쪽 끝은 뾰족해서 소를 몰 때 찌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며 다른 쪽 끝에는 조그마한 삽이 달려 있어서 밭을 손질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299).그런데 삼갈이 이처럼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막대기를 가지고 600명의 블레셋인들을
물리쳤다는 것은 또 다시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큰 능력을 증거해준다.
성 경: [삿4:1]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야빈의 압제]
(주); 에훗의 죽은 후에 - 에훗의 죽음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능력을 대행한 지도자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또 다시 이스라엘이 타락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니 에훗의 치하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평화(3:30) 역시 끝나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주); 또...악을 행하매 - 사사 시대의 일반적 사회 현상(2:19)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3:9)이
이처럼 또다시 죄악의 길에 빠져 든 것은 마치 방금 목욕한 돼지가 다시금 오물탕 속에서 뒹구는 것과 같이 어리석고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는 한번 빠져 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죄의 속성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삼가 자신을 살펴 무릇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살전 5:22).
성 경: [삿4:2]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야빈의 압제]
(주);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 - '하솔'(Hazor)은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속하는 북부 가나안 성읍 중 하나(수 19:36)로서 가장 강력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에 해당하였다(A.E. Cundall).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이곳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메롬 호수(수 11:5,7)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이전에 이미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후 납달리 지파의 지배하에 있었다(수 11:1-14). 한편 여호수아가 그곳을 점령할 때도 '야빈'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으나(수 11:1), 본절의 야빈은 그 당시의 왕과 동일 인물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때로부터 벌써 1세기가 훨씬 넘은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솔을 다스렸던 '야빈'이라는 칭호의 또 다른 왕으로 보아야 한다. 아마 '야빈'(Jabin)이란 말은 애굽 왕의 공식 칭호인 '바로'(Pharaoh)나 블레셋 왕의 공식 칭호인 '아비멜렉'(Abimelech)처럼 하솔 왕을 가리키는 공식 칭호였던 것 같다. 한편 그가 여호수아 군대로부터 하솔성을 어떻게 되찾아 세력을 키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남아 있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을(1:33) 중심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것 같다.
(주); 이방 하로셋 - '이방'에 해당하는 원어 '고임'(*)은 '열국'(nations)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어떤 백성이나 지명에 대한
고유 명사인지, 아니면 여러 족속의 집단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개역 성경 창 14:1과 수12:23에서는 이 단어를 고유 명사로 생각하여
문자 그대로 '고임'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 9:1에서는 '고임'을 '갈릴리' 지역과 동의어로 보고 '갈릴리'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고임'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므로 이는 고유 명사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임'이란 당시 '하로셋'에 거하던 가나안 여러 족속을
지칭하는듯하다. 한편 하로셋(Harosheth)이란 지명은 성경 중 이곳에만 나온다. 따라서 이곳역시 그 위치가 분명치 않은데, 디베랴 호수 남쪽의
갈릴리 평원 어느 한 지점이었던것 같다.
성 경: [삿4:3]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야빈의 압제]
(주); 철병거 - 고대 전투에서 철제 병기의 사용은 전략 전술에 못지 않게 승리의 관건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무기를 가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철병거를 지닌 가나안 거민 중 많은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1:19).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평야 지대를 많이 점령치 못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철병거'는 산악 지대에서는 사용될 수 없고 오직 평야 지대에서만 사용되는 전투 장비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 당시 가나안인들이 향유했던 철제 문화에 관해서는 1:19 주석을 참조하라.
(주);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란 전체 12지파를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하솔을 중심한 일대(2절)의
납달리지파 내지 그 지파를 중심한 북부 지역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6,10절). 왜냐하면 당시 야빈이 철병거 900승으로 이스라엘 12지파
전체를 점령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학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라하츠'(*)는 '비틀어 짜다'는 뜻이다. 이는
곧 포도즙을 짜기 위해 밟아 으깨듯 이스라엘에 대한 야빈의 압제가 매우 혹독했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삿4:4]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드보라와 바락의 전략]
(주); 랍비돗의 아내...드보라 - 랍비돗이 어떠한 자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상에 언급이 없다. 다만 그 이름의 뜻은 밝혀졌는데 곧 '번개' 또는 '횃불'이다. 때문에 일부 유대 주석가 및 몇몇 학자(Wellhausen, 1844-1918, 독일의 신학자)들은 '랍비돗'이 바로 '바락'(6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바락'이란 이름의 뜻 역시 '번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드보라는 곧 바락의 아내인 셈이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서도 드보라가 바락의 아내로, 바락이 드보라의 남편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상의 견해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 한편 또 다른 학자(Lange)는 '랍비돗'의 뜻이 '횃불'인 점을 중시 '랍비돗의 아내'란 말을 '드보라'를 수식해 주는 수식어로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를 '불꽃과 같은 여인...드보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역시 '아내'란 말을 '여인'으로 대치하는 등 지나치게 의도적인 해석이 강하다. 따라서 우리는 랍비돗을 문자 그대로 드보라의 남편으로 보아야한다. 다만 성경상에서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까닭은 그가 이미 죽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주); 여선지 - 성경에서 여자로서 선지자직을 감당한 자로는 드보라 외에도 모세의 누이 미리암(출 15:20)과 훌다(왕하 22:14)을 들 수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자적 기능을 은사로 받았던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 당시 선지자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등에 관해서는 삼하
12:1-14 강해, '선지자의 사명'을 참조하라.
성 경: [삿4:5]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드보라와 바락의 전략]
(주); 에브라임 산지 라마 -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속한 '라마'(수 19:36)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곳이다. 본절의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수 18:25) 예루살렘 북쪽 약9km지점에 위치해 있다. 훗날 예레미야 선지자가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 31:15;마 2:18)라고 읊었던 라마가 바로 이곳이다.
(주);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 '드보라의 종려나무'란 이름은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서 재판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본서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에도 그 나무가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그렇게 칭하였을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드보라가 그 종려나무 있는 곳에서 살았다는 것인지, 그곳에 앉아 재판만을 주관했다는 것인지 하는 점에 있다. 본문의 문맥만으로서는 잘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브'(*)가 '거주하다'란 의미와 '앉다'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려나무'가 드보라의 재판과 관련하여 언급되었으므로, 이는 그녀가 재판시마다 그곳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더 낫다.
(주); 재판을 받더라 - 사사 시대 당시 재판하는 일은 사사의 임무 중 하나였다. 2:16 주석 참조. 즉 사사는 전쟁시에 자기 민족의 구원자 역할을
담당했지만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시행될 수있도록 했다. 특별히 드보라는
여자로서 사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대언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저자는 드보라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 '여선지'(*, 이솨 네비아)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4절).
성 경: [삿4:6]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드보라와 바락의 전략]
(주); 드보라가 보내어...불러다가 - 당시 드보라는 팔레스틴 남쪽 지방인 에브라임 산지에 거처하였었다(5절). 그런데 그녀가 멀리 북쪽 지방인 납달리 게데스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바락을 부른 것은 곧 지파간을 초월한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 준다. 즉 드보라는 비록 자기 지파가 아니었지만 당시 납달리 및 북쪽 지방의 지파들이 야빈의 압제하에 당하는 고통을 간과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납달리 출신의 사사 바락을 불러 문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주); 납달리 게데스 - 납달리 지파가 얻은 견고한 성읍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성 중 하나이다(수 19:37). 이것은 유다 지파에 속한 '게데스'와 구별되는데(수 15:23), 야빈의 도성인 하솔 성에서 동북쪽 4.8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주); 너는...가라 - 이처럼 드보라가 바락을 불러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을 수행토룩 한 까닭은 그 자신이 여자였기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 추측컨대 이들은 하솔 왕 야빈으로부터 가장 많은 괴로움을 당한 지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대적을 치는 데 선봉장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는 이 두 지파 외에 다른 지파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전투에는 납달리, 스불론 지파와 인접한 잇사갈 지파도 참여했음에 분명하다(5:15).
(주); 다볼 산 - 해발 약 528km 되는 산이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이스르엘 골짜기에 속해 있다. 초대 교회
전승(A.D. 4세기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그 모습이 변형되셨던 변화산(마 17:1-8;막 9:2-8;눅 9:28-36)이 바로 이다볼 산이라고 하는데 분명치
않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p.302). 드보라가 야빈과의 접전지(接戰地)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마 그곳이 하솔 왕 야빈의
철병거(3절)가 다다를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삿4:7]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드보라와 바락의 전략]
(주); 기손 강 - 다볼 산과 그 부근 지역에서부터 발원하여 이스르엘 꼴짜기를 따라 흐르다가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따라서 이 강은 잇사갈, 스불론 그리고 아셀 지파의 지경(地境)을 모두 거쳐 흐른 셈인데, 총 연장 길이는 약 40km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겨울의 강우기에는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이곳 물이 범람하므로 행인들의 통행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다. 특히 이 강 주변에는 넓은 평야인 이스르엘 평지가 있어 철병거가 움직이기 용이하였으니 시스라가 이곳에 그의 군대를 집결시키리라는것은 쉽게 예상되어진 것이었다.
(주);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 여기서 '붙이다'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은 '꼼짝못하게 하다' 또는 '패하게 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대적에게 내어 주시어 패하고 종노릇하게 한 것을 '팔다'라는 말로써 나타낸 것과 같은 표현이다(3:8). 즉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완전히 패하였듯이 이제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꼼짝없이 이스라엘에게 패하고 말리라는 강조적 표현이다.
성 경: [삿4:8]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드보라와 바락의 전략]
(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 이와 같이 바락은 반드시 전쟁에 드보라와 함께 출전(出戰)하겠다고 고집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견해가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견해로 압축된다. (1)바락이 드보라의 예언을 믿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Bertheau). (2)바락은 대적들과 전쟁하는 것이 두려워 예언의 능력을 지닌 여선지 드보라와 동행하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G. Bush). (3)바락이
하나님께 받은 소명에 대하여 자신이 그 소명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드보라와 동행하기를 요청했을 것이다(Keil, Lange).
이상과 같은 세 견해 중 가장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견해는 세번째 해석이다. 왜냐하면 모세도 과거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약점을 앞세워 거절하고자 시도했으며(출 4:10), 사사 기드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자신의 비천함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6:15). 사실 만약 바락이 불신앙적이거나 대적들을 정말로 두려워 했다면 결코 하나님과 드보라에 의해 야빈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선봉장으로 선택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삿4:9]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드보라와 바락의 전략]
(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 이처럼 드보라가 순순히 바락과의 동행을 허락한 까닭은 물론 바락을 격려하며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함이었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아마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지시와 명령을 받아 바락에게 대언하기 위함이였을 것이다(Matthew Henry).
(주);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그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 어떤 이는 드보라가 바락의 요구(8절)로 인해 불쾌하여 본절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한다(A.E. Cundall).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본절 전후 문맥 어느 곳에서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본절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와 싸워 승리할 것이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여인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7-2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이나 훌륭한 병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에 달려 있음을 바락에게 깨닫게 해주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삼상 17:47).
(주); 게데스로 가니라 - 혹자는 여기에 언급된 '게데스'는 '납달리 게데스'(6절)와 동일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A.E.Cundall). 왜냐하면 드보라와
바락이 현재 만나서 이야기 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이 '납달리 게데스'인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라마와 벧엘 사이에
거하고 있던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납달리 게데스에 살로 있던 바락을 불러온 것으로 되어 있다(6절). 따라서 이 드보라와 바락이 군사를 모아
다볼 산으로 출전하기 위해(12절) 우선 납달리 게데스로 올라간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 경: [삿4:10]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드보라와 바락의 전략]
(주);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부르니 -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바락은 가나안 북부지방의 이스라엘 지파를 통치하였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바락의 권위는 분명 군사를 모집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주); 그를 따라 올라가고 -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알라(*)는 군대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에는 전투가 예상되는 어떤 장소로 그 군대가
진격하는 것을 가리킨다(수 7:2;삼상 24:22;왕상 9:16;14:25;20:1;대하 35:20).
성 경: [삿4:11]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겐 사람 헤벨]
(주); 모세의 장인 호밥 - 성경상에서 혼란을 일으켜 주기 쉬운 구절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곳에는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르우엘'(출 2:18;민 10:29) 또는 '이드로'(출3:1;4:18:18:1)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르우엘이 본명이며 이드로는 모세의 장인이 제사장이 된 후에 얻은 공식 존호(尊號)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호밥'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 대개의 학자들은 모세의 처남인 것으로 본다. 그 근거는 '장인'과 '처남'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모두 동일한 '호텐'(*)이기 때문인데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민 20:29 주석을 참조하라.
(주); 겐 사람 헤벨 - 모세의 장인이 바로 이 겐족 출신인데(1:16), 성경 다른 곳에서는 미디안 출신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출 2:16;3:1;민 10:29). 이로 볼 때 겐족과 미디안족은 일찍부터 상호 친밀한 유대 관계를 이루었거나 아니면 서로 동화되어 한 민족을 이룬 것 같다. 아무튼 '겐 사람'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6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드보라와 바락에 관한 기사 도중 갑작스레 겐 사람 헤벨이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이후 전개되는 시스라와의 전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자가 바로 이 '헤벨'의 아내인 '야엘'이기 때문이다(17-24절). 즉 본절은 헤벨의 아내 야엘의 가문과 신원을 미리 소개할 목적으로 삽입된 것이다.
(주); 자기 족속을 떠나 -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자손들은 팔레스틴으로 이주 후 유다 지파의 경내에서 거주했다(1:16). 그런데 헤벨은 그 가족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납달리지파의 경내인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등지고 이스라엘의 압제자 하솔 왕 야빈과 손을 잡았다(1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러한 헤벨의 아내를 들어 쓰사 시스라를 죽였으니 인간이 미처 헤아리기 어려운 깊고 오묘한 섭리를 잘 드러내 준다.
(주);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 문자적으로 이 말은 '사아난님에 있는 상수리 나무'란 뜻이다. 무슨 사연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나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한편 '사아난님'(Zaanaim)은 납달리 지파의 남쪽 변경에 위치한 한장소이다(수 19:33). 오늘날 '칸
엣 투잘'(Khan et Tujjar)로 불리우고 있는데 아다미(Adami) 남동쪽 약 6.4km 지점의 '벧스안-다메섹 도로'의 중도에 위치해 있다.
성 경: [삿4:12]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바락의 승리]
(주); 다볼 산에 오른 것 - 바락과 그의 군사 일만 명이 다볼 산을 거점으로 전투 태세를 취한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삿4:13]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바락의 승리]
(주); 시스라가...온 군사를...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 이것은 드보라의 예언이(7절)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기손 강'은 겨울
우기를 제외하고 다른 때에는 거의 말라 있는 건조천(Wadi)이며, 그 주위에는 평지가 형성되므로 시스라가 철병거를 배치시키기에 적당하였을
것이다. 7절 주석 참조.
성 경: [삿4:14]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바락의 승리]
(주); 일어나라 - 이것은 '마음을 굳게 하여 전투에 임하라'는 의미이다(수 8:7). 일반적으로 이 말은 어떤 일로 인해 심령이 위축된 사람에게 '힘을 내라'는 격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수 7:10). 그런데 드보라가 이처럼 바락에게 담대히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친히 인도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즉 드보라는 과거 출애굽 노정에서도 이스라엘을 위해 앞장서서 싸우시고 앞길을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시스라와의 싸움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해 주시리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출 13:21;14:14).
(주); 이는...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 즉 오늘이 20년 동안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받았던 압제(3절)에서 해방되는 날이며, 그 위대한 역사는 바락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시스라를 죽인 자는 바락이 아닌 야엘(21절)인데 이는 이미 드보라가 예언한 바이다(9절).
(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적인 장군은 바락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을 대행하여 전쟁을 수행하던 자인 바락에게 큰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바락이 수행하는 전쟁에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그 전쟁이 단순히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하솔을 징계하기 위한 전쟁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하솔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임을 시사해 준다(신 9:3;삼하 5:24;시 68:7;사 52:12). 이와 관련해서는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을 보다 참조하라.
(주); 바락이...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 드보라와 바락의 탁월한 전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즉 그들은 시스라의 군대가 기손 강 평지에 집결한
것을 보고서는(13절) 다볼산 고지에 매복시켜 두었던 일만 명의 군사들로 하여금 일시에 기습 작전을 감행토록한 것이다.
성 경: [삿4:15]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바락의 승리]
(주); 패하게 하시매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와야함'(*)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에 의해 그 군대가 참패당하는 것을 의미한다(출 23:27;수 10:10;시 144:6). 즉 이는 과거 하나님께서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홍해에 수장(水葬) 시키셨듯이(출14:23-31) 이적적으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신 것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Commentary, Vol.II.p.304). 이같은 사실은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행하시고 있다는 드보라의 말(14절)과 매우 잘 어울린다.
(주);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 이처럼 시스라가 병거를 버리고 도망친 까닭에 대해서는 5:21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기손 강을 범람케하사 그 주변 평지에 집결해 있던 시스라의 철병거와 군사들을 휩쓸어 버리게 하신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 자연 진흙탕이 된 평지에서 철병거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버렸고 시스라는 도보로라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초자연적 방법으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셨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성 경: [삿4:16]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바락의 승리]
(주);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 기손 강이 범람한 물로 인하여 바닥이 질펀해지자 기동력이 떨어지고 만 시스라의 군대와 그 철병거들을 바락의 군대가 일일이 추격하여 다 격멸시키려 한것을 가리킨다.
(주);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 시스라의 패잔병들이 도망간 곳은 '이방 하로셋'으로 시스라가 거주하던 장소였다. 2절 주석 참조. 이로 보건데
시스라의 군대는 자기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도망쳐 원군과 합세하여 바락의 군대와 싸울 작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바락의 군대를 대항한다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었다.
성 경: [삿4:17]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활약]
(주); 시스라가...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 헤벨의 가정이 거주한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은 게데스와 인접해 있었으므로(11절) 당연히 야빈이 거주하던 하솔과도 매우 근접해 있었을 것이다. 6절 주석 참조. 따라서 시스라가 이곳까지 도망한 것은 하솔 왕야빈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시스라가 헤벨의 가정을 찾아갔을 때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를 알아본 점으로 미루어 보아 헤벨의 가정은 하솔 왕 야빈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유력한 인물들과도 늘 알고 지낼 만큼 그 지역에서 세력있는 집안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헤벨은 자기 동족 겐 족속을 보호해 주고 가나안땅에 기업을 준 이스라엘 백성(1:16)과 나아가서는 그 기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배반하고 자기만을 위해 간사하게도 이스라엘의 대적 야빈과 손을 잡고 살았음에 틀림없다. 11절 주석 참조.
(주); 화평이 있음이라 - 비록 공수 동맹(攻守同盟) 관계는 아니지만 야빈과 헤벨 사이에 두터운 친교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서로 다툼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II.p.143).
성 경: [삿4:18]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활약]
(주); 나의 주 - '주'에 해당하는 원어 '아돈'(*)은 '주권자', '최고 통치자' 또는 '주인'이란 뜻으로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 말이다(신 10:17;시 136:3;사1:24). 여기서 야엘이 시스라를 가리켜 '나의 주'라고 말한 것도 그가 곧 자신의 생명까지 관장할 수있는 자기 집안의 최고 통치자라는 뜻이 있는 바 이는 시스라에 대한 최고의 호칭이 아닐 수 없다.
(주); 두려워하지 마소서 - 이러한 말만으로써는 야엘이 처음부터 시스라를 속이려 든 것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시스라를 환대하며 그의
처지를 위로하였으나 뒤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마음을 돌이켜 먹고 시스라를 죽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야엘은 시스라를 안심시키며 그에게
최상의 접대를 베풀었는데 이는 결정적으로 시스라가 방심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II.p.143).
성 경: [삿4:19]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활약]
(주);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 바락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느라 시스라가 얼마나 기진한 채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가 범죄한 결과 이 땅에서도 이처럼 갈증을 느꼈는데, 하물며 죽은 후에 겪을 영원한 갈증이 어느 정도일런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눅 16:24).
(주); 젖부대 -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부대 속에 있는 우유는 상한 것 즉 이미 변하여 시큼한 맛이 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탄훔(R.
Tanchum)은 이 젖부대 속에 있는 우유는 완전히 지쳐 있는 사람이 먹을 때 그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p.305). 그러나 드보라의 노래에 나타나있듯이(5:25) 이것은 엉긴 우유 곧 반쯤 '버터'가 된 최고급 우유임에 틀림없다(A. E.
Cundall). 그리고 그 우유를 담은 부대는 유목민들이 여행시 포도주나 물, 우유 등을 넣어 가지고 다니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인 듯하다.
성 경: [삿4:20]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활약]
(주); 장막문 - 헤벨은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장막을 지어 거주했는데(11,18절),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직업이 유목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본절의 '장막문'은 아브라함이 유목 생활을 할 때 장막을 치고 장막문 앞에서 쉬었듯이(창 18:1) 유목 생활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주); 네게 묻기를...없다 하라 - 이처럼 시스라가 헤벨, 즉 남자의 거실을 피해 야엘의 장막(17절) 곧 여자의 거실에 숨어 들고서도 또다시 보안을
지켜 주도록 부탁한 것은 그가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있음을 반증해 준다. 그러나 정작 그가 안심하고 몸을 의탁한 야엘의 거실이 바로
그의 사형 집행대가 될 줄이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나(롬 8:28) 반대로 하나님의
미움을 입은 자는 모든 일이 엉켜서 악을 낳기 마련이다. 즉 시스라는 야엘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찾아내어 심판하신 것이다(시 139:7,8).
성 경: [삿4:21]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활약]
본절에서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자기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시스라를 죽인 것은 그의 남편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인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속죄하는 의미가 내포된 행동이라고 여겨진다.
(주);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 127:2). 그러나 여기 시스라의 잠은 평안한 휴식을 취하는 잠이 아니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의 잠을 앞에 놓고서 육신의 잠을 자고 만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가 배 밑창에서 곤히 잠을 잔 것과 흡사하다(욘 1:5).
(주);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 혹자에 따르면 고대 근동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장막 세우는 일은 주로 여인들이 하던 일이므로 여인들은 망치로 말뚝을 박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한다(G.F.Moore). 그렇다면 야엘이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의 살쩍, 즉 머리의 관자놀이(temple) 부분을 꿰뚫은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나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야엘은 시스라를 추격하는 바락에게 잠든 시스라를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직접 그를 죽인 까닭은 아마 바락의 도착이 지연되는 동안 시스라가 원기를 회복하여 도망친 후 다시금 힘을 규합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할 것을 염려했던 데서 비롯되었음에 틀림없다.
(주);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 여기서 '기절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에프'(*)는 '탈진하다'는 뜻이다. 즉 시스라는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힌
즉시로 까무러쳤으며 그 후 발악과 더불어 죽어 갔던 것이다. 이로써 드보라의 예언(9절)은 온전히 성취되었다. 한편 혹자는 야엘이 시스라를
안심시켜 깊이 잠들게 한 후 아주 잔인 무도한 방법으로 그를 죽였다 하여 그녀의 행동이 사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문맥과는 상치되는 주장인데 곧 야엘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야엘의 마음을 주장하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구원, 악인에 대한 심판을 위해 이 일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따라서 거기에는 어떠한 미움이나 사악함 그리고 개인적인
복수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드보라와 바락도 그의 '감사 노래'(5장)에서 야엘의 신앙과 용기를 칭송한 것이다(5:24-27).
성 경: [삿4:22]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활약]
(주); 바락이 시스라를 따를 때에 - 즉 바락이 시스라가 도망친 것을 알고서는 그 뒤를 추격, 이방 하로셋과 그 일대를 수색하던 때를 가리킨다(16절).
(주); 바락이...보니 시스라가 죽어 누웠고 - 이로써 바락 역시 드보라의 예언(9절)대로 시스라를 죽이는 영예는 자신이 취하지 못하고 한갓 여인에
불과한 야엘에게 넘어갔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성 경: [삿4:23]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야빈의 멸망]
(주); 하나님이...패하게 하신지라 - 전쟁의 모든 과정에서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야엘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활약
때문에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방인을 징계하며 언약의 백성을 구원한 장본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니 그분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서 저자는 본절을 삽입시켜 그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다.
성 경: [삿4:24]
주제1: [여사사 드보라의 활약]
주제2: [야빈의 멸망]
(주); 마침내...진멸하였더라 - 이스라엘이 정확히 언제 가나안 왕 야빈을 완전히 격멸시켰는지는 성경상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후로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는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보아 가나안 왕 야빈의 진멸 사건은 가나안인들이 힘을 잃고
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성 경: [삿5:1]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주);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 본절만으로는 본장에 기록된 찬송이 '드보라'와 '바락'의 공동 저작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3, 7절에서 본 찬송의 1인칭 주어가 '드보라'인 점을 고려할 때, 이 노래는 '드보라'의 저작임에 분명하다(Keil, Hervey, Lange,
Matthew Henry). 그렇다면 본절에서는 왜 두 사람이 노래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는가?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즉 드보라는 야빈
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실을 기념하여 바락은 물론이고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었다. 그리하여 히브리 노래의 한
유형인 화답송(和答頌)의 형태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한편 성경에는 여인들이 지은 노래로 본장 외에 '미리암의 노래'(출 15:21), '한나의
노래'(삼상 2:1-10), '마리아의 노래'(눅1:46-55) 등이 있다.
성 경: [삿5:4]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여호와 찬양]
(주); 주께서...진행하실 때에 - 여기서 드보라는 자기 선조들의 출애굽 노정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역사적인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 강림하셨다'는 모세의 회상과 연관지어(신 33:2), 드보라는 야빈과의 전쟁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주); 세일...에돔 들 - 둘 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 지나온 사해 남동쪽의 에돔인의 산지를 가리킨다. 신 33:2 주석 참조.
(주); 땅이 진동하고 - 출애굽 당시에 나타난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권능과 기이하신 역사를 가리키는 말이다(Matthew Henry). 이와 같이 드보라는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권위 앞에 모든 피조물들이 두려워하며 떨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하였다(삼하 22:8;시 68:8;77:18;나 1:5;합 3:6).
(주);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 것을 뜻하는 시적 표현이다. 이는 노아 홍수를 연상케 한다. 즉 노아 홍수
때에도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땅의 샘이 터져 40주야 비가 쏟아졌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창 7:11,12). 이처럼 드보라는 하나님의 기이하신
능력을 찬양함에 있어서 과거 실제적으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노래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생함을 더해주고 있다.
성 경: [삿5:2]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여호와 찬양]
(주);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 본절에 해당하는 원문은 '비페로아 페라오트베 이스라엘'(*)이다. 70인역(LXX)은 이를 개역 성경과 거의 동일한 의미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인도로'(*, 엔 토 아르크사스타이 아르케구스 엔 이스라엘)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몇몇 학자들도 받아들이는 해석이다(S.R.Driver, C.A.Briggs). 그런데 본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비페로아'와 '페라오트'의 동사형 '파라'(*)는 '석방시키다', '(머리카락을) 풀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곧 상징적 의미로서, 그 정확한 뜻은 '힘을 과시하다', '힘을 발휘하다'이다. 이에 따라 본문을다시 번역하면 '이스라엘의 힘 있는 자들이 힘을 다했고'란 의미가 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p.308). 즉 이 말은 이스라엘의 두령들, 방백들(9절)이 힘을 다해 충성했음을 가리킨다. 더욱이 이러한 해석은 이스라엘 시문서의 한 특징인 '평행법'(parallelism)과도 잘 조화된다. 왜냐하면 본절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지도자들의 헌신과 대비되는 백성들의 헌신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Cundall).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해석 중 그 어느 쪽을 취하여도 상관은 없는데, 그 까닭은 둘 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헌신과 솔선 수범적 행위를 잘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기꺼이 헌신하여 전투에 참가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바락이 군사를 모집하자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일만명이 지원한 것(4:10)과 그외 여러 지파도 적극 조력한 사실(4,15절)에서 잘 나타난다.
(주); 여호와를 찬송하라 - 본시(本詩) 전체의 내용은 언뜻 볼 때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과 용기 그리고 연합에 대하여 노래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친히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3,5,11,13절).
성 경: [삿5:3]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여호와 찬양]
(주);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 본절에도 역시 강조를 위한 '평행법'이 사용되어 본문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왕들'과 '방백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지칭한 말이 아니다. 그 근거로는 (1)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나 방백이 없었다는 점(17:6; 18:1;19:1;21:25)을 들 수 있다. 또한 (2)'왕'이란 단어가 복수 형태를 취하여 여러 나라의 왕들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열방의 통치자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며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유일하신 최고 통치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라 하겠다(Keil,Lange, Wycliffe).
(주); 내가...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여기서 '찬송하다'에 해당하는 '자마르'(*)는 '연주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단순히 노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악기를 사용하여 찬송하는 것을 가리킨다(시 33:2;71:22;98:5;147:7;149:3). 이스라엘인들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찬앙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그에 화답하여 노래 부르는 예배법이 발달되어 있었다(출 15:20;삼하 6:5). 이와 관련하여서는 대하 5:11-22강해, '공중
예배에 있어서의 음악과 악기'를 참조하라.
성 경: [삿5:5]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여호와 찬양]
(주); 시내 산도...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 '시내 산'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의 율법을 베푸신 장소였다(출 19:18).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모세와 대면하실 때 그 주위는 연기로 자욱함과 동시에 온 산이 진동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위엄과 영광과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다. 출 19:16-19 주석 참조. 그런데 드보라가 여기서 그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최근에 드볼 산과 기손 강을 중심으로
시스라와 싸워 대승한 사실(4:12-16) 역시 그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는 사건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 경: [삿5:6]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참상]
(주); 삼갈의 날...야엘의 날 -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족과 하솔 왕 야빈의 압제 하에서 고통당하던 때를 가리킨다. 이때 '삼갈'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블레셋 사람 600명을 소 모는 막대기로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했었다(3:31). 그리고 '야엘'은 이스라엘의 압제자 야빈 왕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지혜롭게 처치했었다(4:17-22).
(주);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 당시 이스라엘의 황폐상을 표현한 것이다. 즉 당시에는 블레셋족과 야빈의 압제가 극심하여
상거래(商去來)도 없었으며 법질서도 마비되어 있었기에 노상(路上)에서 약탈 행위가 빈번히 자행되었다. 때문에 약탈, 폭행 등을 피하여 행인들은
큰길로 다니지 않고 소로로 다녀야 할 형편에 처해 있었다. 다시말해 블레셋족과 야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은 경제가 핍절되었으며, 무법 천지가
되어 백성들에게 평안이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삿5:7]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참상]
(주);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 KJV는 이를 '이스라엘에 마을 주민들이 끊어지고 끊어졌다'(The inhabitants of the villages ceased, they ceased in Israel)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KJV는 '관원'에 해당하는 원어 '페라존'(*)을 성벽이 없는 마을의 주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주민들은 튼튼한 성벽이 있는 성읍으로 피신하기 위하여 마을을 떠난 셈이 된다(Lange,Wycliffe).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페라존'을 '능력자'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것으로 본다(Gesenius, Teller). 이는 70인역(LXX)도 '페라존'을 '능력 있는 자들', '힘 있는 자들'(*, 뒤나토이)로 번역하고 있는것에 의해 뒷받침된다. 따라서 본절을 뒷부분과 연결시켜 이해한다면, 당시 이스라엘에 강력한 지도자들이 없었음으로 부득불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뜻이 된다(Keil& Delitzsch Commentary, Vol.II.p.311).
(주); 나 드보라가...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 야빈의 학정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에는 참된 지도자가 없었는데, 드보라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특히 여기서 '어미'라는 표현은 욥이 자기에게 의탁하던 자들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빈궁한 자의 아비'라고 고백한
것과(욥 29:16)같이 하나님께서 보낸 '보호자'란 의미를 지닌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p.312) 다만 드보라는 자신이 여성이므로
'어미'란 표현을 사용했으며, 욥은 자신이 남성이므로 '아비'란 표현을 사용했을 따름이다.
성 경: [삿5:8]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압제받던 이스라엘의 참상]
(주);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 이스라엘에 이방인의 압제와 전쟁의 참화(慘禍)가 임하게 된 원인이다. 즉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과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킨 탓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여기서 우상과 이방신들을 가리켜 '새신들'(new gods)이라 표현한 것은 그것들이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신 32:17)이기 때문이다(Keil, Lange). 즉 이스라엘은 영원하시고 참된 신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마치 새 옷 입기를 즐기는 어린 아이처럼 새 신(神)들을 섬긴 것이다(2:17;3:6,7).
(주);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 드보라는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에워싸고 곧 공략하려 드는 일촉 즉발의 위기 상황을 '전쟁이 성문에 미쳤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에겐 적을 방어하거나 공격할 무기가 변변찮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철병거를 지닌 하솔 군을 격멸시켰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이적과 권능을 베풀어 이스라엘을 도우셨기 때문이다(4:12-16,23,24). 따라서 드보라가 당시 이스라엘에 무기가 있었느냐고 반문한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주); 이스라엘 사만 명 - 시스라와의 싸움을 위해 출전하였던 이스라엘의 주력군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군사 일만 명이었다(4:10).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만 명'은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 이는 이들 주력군을 도와 같이 전쟁에 참전하였던 이스라엘 여러 지파의 병력을 합한 대략적
수효일 것이다. 즉 14,15절을 보면 시스라와의 싸움에는 비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뿐 아니라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반, 잇사갈 지파등이
참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삿5:9]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을 선포한 여호와 찬양]
앞 부분에서의 분위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구절이다. 즉 6-8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중단하므로 압제자의 멍에에서 신음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본절에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고서 기뻐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Goslinga). 더욱이 본절에서 드보라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이스라엘 방백들이 시스라와의 전투에 즐거이 헌신한 사실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사실의 재차 반복이다. 2절 주석 참조.
(주); 내 마음이...사모함은 - 이처럼 드보라가 이스라엘 방백들을 사모하였다는 말에 대하여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를 다음과 같은 뜻으로
보았다. "나는 참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그들은 영원토록 내 마음을 차지하였다. 나는 결단코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Vol.II.p.147). 즉 이는 곧 이스라엘의 방백과 두령들이 자신을 도와 전쟁에 적극 참여하고, 솔선 수범한 것에 대하여 드보라가 깊이
감사하고 있는 말이다.
성 경: [삿5:10]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을 선포한 여호와 찬양]
(주); 흰 나귀를 탄 자들 -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어린 나귀를 탄 것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상류층에 속한 신분임을 암시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10:4;12:14). 고대 근동에서 나귀는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다(창22:3;수 9:4;느 13:15). 그런데 흰색의 나귀는 좀처럼 드문 짐승이니, 이것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 아닐 수 없었다(Keil, P.Cassel).
(주); 화문석에 앉은 자들 - '화문석'은 오늘날에도 평민들이 구하기 힘든 귀하고 비싼 물건이다. 따라서 '화문석에 앉은 자들'이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유하고 여유있는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주); 길에 행하는 자들 - 일반 평민 또는 행상(行商)을 가리킨다. 이들은 압제자의 시대에는 마음놓고 길을 갈수 없었으나(6절),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을 훼파하셨으니(4:12-24) 이제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었다. 한편 이상과 같은 흰나귀 탄 자, 화문석에 앉은 자, 길에 행하는 자들이란 결국 이스라엘 모든 계층,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 선파할지어다 - 본문에는 어떤 사실을 선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다음에 이어지는 드보라의 노래 중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11절)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드보라는 백성들에게 압제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라고 가르친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삿5:11]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을 선포한 여호와 찬양]
(주);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 여기서 '활 쏘는 자'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심하게 괴롭혔는지는 4:3에 잘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대적들의 압제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을 진멸하셨으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든 것이다(10절).
(주); 물 긷는 곳에서도...칭술하라 - 여기서 '물 긷는 곳'이란 우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통 고대 근동 지역의 우물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요 4:5-8,28). 그래서 이스라엘 이적의 압제 하에 있을 때에는 마음놓고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적들을 분쇄해 주셨으니 안심하고 물을 길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드보라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두고서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한 것이다.
(주);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백성들의 주요 회합(會合) 장소였다. 그곳에선 비단 상거래 뿐 아니라 공식
재판, 중요 사항 공지, 친교등이 이루어졌었다(창 19:1;신 21:19;느 13:19). 그러나 이스라엘이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와 전쟁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회합이 이루어질 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4:12-24) 다시금 팔레스틴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백성들은 생활의 주요 무대인 성문으로 모여들 수 있었는데, 본절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성 경: [삿5:12]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을 선포한 여호와 찬양]
(주);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노래할지어다 - 드보라가 이처럼 스스로에 대하여 네번이나 '깰지어다'는 말을 반복한 것은 자신을 향해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즉 그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앞에서 영적으로 깨어 그 놀라움과 영광을 힘있게 찬송할 지도자적 책임이 있었다(Matthew Henry).
(주); 바락이여...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 여기서 '사로잡은 자'란 바락이 시스라군을 진멸할 때 생포한 포로들을 가리킨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이제 그들을 끌고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가라 하였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Lange, Matthew Henry).
성 경: [삿5:13]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을 선포한 여호와 찬양]
(주);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 야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정에 시달렸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가족을 외국으로 피신시키거나 아니면 그 와중에서 적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0년 동안 야빈의 압제 하에서도(4:3) 굳건히 살아남은 백성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곧 시스라와의 전투에 참여한 것을 가리킨다(4:6-10).
(주); 여호와께서...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 여기서 '용사'란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와 그의 군사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대적과 싸우시기 위해 나서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여호와께서 강림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눈에 보이게 이
땅에 임하신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는 그분이 초자연적인 이적으로 적들을 패퇴시키며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을 가리킬 뿐이다(4:15).
성 경: [삿5:14]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 지파들]
(주);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요 - 에브라임 지파 중 이번 전투에 참가한 자들은 전에 아말렉 족속이 거주했던 지역(12:15)의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70인역에 따라 RSV와 공동 번역에는 이 '아말렉'이 '골짜기'로 번역되어 있다. 아마 이는 과거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 내에서 아말렉 족속이 거주했던 지역이 에브라임 산지와 그 골짜기 주변이었던 점에 근거한 번역일 것이다.
(주);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 - 본절을 통해 볼 때 베냐민 사람들은 일개 지파의 자격으로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여러 지파들 틈에 섞여 일개인적으로 참전(參戰)했던것 같다. 이는 아마 그들이 팔레스틴 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북부 지역의 지파들과는 달리 야빈의 압제를 덜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그들은 야빈과의 전쟁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자연히 일부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것이다.
(주);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왔고 - '마길'은 므낫세의 독자였다(창 50:23). 그런데 이 '마길'의 자손, 곧 므낫세 지파 중 절반은 요단 동편에 정착하였으며(수13:29-31) 나머지는 요단 서편에 들어갔다(수 17:1-13). 따라서 본절에서 '마길'이라는 표현은 이 중 요단 서편에 거한 므낫세 반 지파만을 의미한다. 이 지파는 아셀, 스불론 그리고 잇사갈 지파와 북쪽 경계를 이루며 살았으므로 잇사갈 지파의 경내에 있는 다볼 산(4:12)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다스리는 자들'이란 군대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이는 곧 므낫세 지파에서는 군 지휘관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왔음을 알려 준다.
(주);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 - '대장군'에 해당하는 원어 '소페르'(*)는 '계수하는 자' 또는 '서기관' 등의
뜻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 단어이다(Keil). 그런데 '대장군의 지팡이'가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즉 RSV, NIV, Living Bible, 공동번역 등은 모두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으나 KJV에서만은 '작가의 붓'(pen ofthe writer)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KJV의 번역을 지지하여, 스불론 사람들은 시돈 사람들처럼 상업에 능하고 장사를 전문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도 전쟁 경비를 계산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고 주장한다(P. Cassel). 그러나 이 해석은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서기관'은 전시에 국민을
초모(招募)하는 일도 맡아 보았으니(왕하25:19;렘 52:25), 스불론 지파는 그 전쟁에 있어서 서기관의 직무를 담당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성 경: [삿5:15]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 지파들]
(주);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하니 - 잇사갈 지파도 스불론, 납달리 지파(4:6,10)를 돕기 위해 드보라와 행동을 같이 하였으며 친히 방백들이 자기 지파를 인솔해 나온 것을 가리킨다.
(주);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 - 즉 바락이 잇사갈 지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을 가리킨다. RSV는 이를 '잇사갈이 바락에게 충실하였다'(Issachar faithfulto Barak)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준해 공동 번역도 '잇사갈도 바락에게 충성을 바쳐'로 번역하고 있다.
(주); 그 발을 좇아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 잇사갈 지파가 바락의 군사와 더불어 시스라 군대를 치기 위해 다볼 산에서 기손 강가로 내려간 것을 의미한다(4:14,15).
(주);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 르우벤 지파가 차지한 요단 동편 땅에는 시내가 많이 있었고, 그에 따라 목초지가 널려 있었다(수
13:15-23). 따라서 드보라가 르우벤 지파의 지경(地境)을 가리켜 '르우벤의 시냇가'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이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 의거하면
르우벤 지파는 타지파로부터 전쟁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큰 결심'이란
표현은 16절의 '마음에 크게 살핌'(*, 히크레 레브)이란 표현처럼 그들이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토론이 있었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성 경: [삿5:16]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 지파들]
본절은 르우벤 지파가 다른 지파의 전쟁 소식을 듣고도 평안한 목자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음을 비꼬는 내용이다. 즉 다른 지파들은 전쟁의 나팔 소리를 듣고 모두들 참전, 전쟁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4,15절) 르우벤 지파는 편안히 목자의 저(笛)부는 소리를 들으며, 단지 탁상 공론(卓上空論)만을 벌였다는 것이다.
(주);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 기록에 의하면 르우벤 지파는 갓 지파와 더불어 이스라엘 여러 지파 중에서도 특히 많은 가축들을 소유하고 있었다(민 32:1). 그들이 요단 서편 땅에서 기업을 차지하지 않고 요단 동편의 모압 북방 지역을 기업으로 차지한 까닭도 그 때문으로서, 그곳은 목축(牧畜)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목축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을 터인데, 본절은 바로 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주);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들음 - 이는 곧 르우벤 지파가 한가로운 목가적(牧歌的)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즉 저들은 요단 강 건너편의 소식과는 무관한 채 목자들이 가축을 치면서 부는 피리 소리나 들을 정도로 평안을 구가하셨던 것이다.
(주); 마음을 크게 살핌이 있도다 - 공동 번역은 이를 '끝도 없이 토론이나 벌이는구나'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15절의 '큰 결심이 있었도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성 경: [삿5:17]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 지파들]
(주); 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 '길르앗'(Gilead)은 넓은 의미에서 요단 강 동편의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중심부는 갓 지파가 차지하고 있지만 북쪽으로는 므낫세 반 지파, 남쪽으로는 르우벤 지파의 지경에까지 뻗쳐있는 요단 동편의 산지가 곧길르앗이다. 그런데 이 중 르우벤 지파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으니(15,16절), 여기서 '길르앗'이란 갓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드보라는 이들지파 역시 요단 동편땅에 거하면서 동족의 전쟁에 조력지 않았음을 책망하고 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p.319).
(주);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 이 표현은 단 지파도 르우벤 지파나 갓, 므낫세 반지파와 같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기적인 생활을 즐기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특히 '배에 머무르다'라는 표현은 단 지파가 뱃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베니게 사람들과 함께 욥바에서(수 19:46) 무역을 했다는 의미이다(Goslinga). 이것으로 보아 단 지파는 이때까지는 아모리족에 밀려 팔레스틴 최북방의 라이스 지방으로 쫓겨나지 않은 것 같다(18장).
(주); 아셀은 해빈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 여기서 '해빈'과 '시냇가'는 각기 지중해변을 가리킨다. '아셀 지파'는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야빈의 압제가 가장 심했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연접해 있었다(수 19:24-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 동족들의
전투에 무관심하며 자기들의 생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성 경: [삿5:18]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 지파들]
(주); 들의 높은 곳 - 납달리 지파가 거주하던 게네사렛 호수 북서쪽의 산악 지역(수19:32-39)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정예 부대 만 명이 집결했던 다볼 산을 가리킨다(4:6,12). 그곳에서 스불론, 납달리 지파는 시스라 군을 맞이하여 일사 각오의 정신으로
용감히 싸웠던 것이다.
성 경: [삿5:19]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다이낙 전투]
(주);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 '열왕'은 북부 가나안의 여러 동맹군을 지휘하여 싸우러온 시스라(4:13) 및 동맹군들의 군사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여호수아 때에도 하솔 왕야빈은 북부 가나안 지경에 거주하던 열왕들과 동맹군을 형성해서 여호수아의 군대와 메롬 물가에서 싸운 적이 있었다(수 11:1-9).
(주); 므깃도 물가 다아낙 - '므깃도 물가'는 므깃도와 남쪽 산지 사이, 즉 므깃도 후방의 분지로 흘러 들어가는 마른 계곡인 '와디'(Wadi)를 가리킨다. 이곳은 우기(雨期)때 비가 와야만 물이 흐른다. 이러한 사실은 14세기의 유대인 학자 에쉬토리 하파리(Eshtori Haparhi)에 의해서 밝혀졌다. 따라서 '므깃도 물가'는 기손 강(4:7)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4:7,15 주석 참조. 한편 '다아낙'은 '므깃도'에서 불과 8km도 채 안되는 이스르엘 계곡의 남쪽에 위치한 성읍이었다(수 12:21). 기손 강은 평지를 지나 므깃도와 다아낙의 북부로 흘러 들어갔다.
(주);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 '돈'에 해당하는 '케세프'(*)는 구약 시대 당시 화폐로 통용되었던 '은'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쟁시
취하는 전리품이나 노획물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Keil, Lange). 즉, 시스라와 그 동맹군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고자 하였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진멸당하고 말았던 것이다(4:15,16, 23,24).
성 경: [삿5:20]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다이낙 전투]
(주); 별들이...시스라와 싸웠도다 - 칼데아역(The Chaldee)은 본절을 '하늘로부터 별들이 나오는 곳에서 시스라에 대항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로
번역하고 있다(Matthew Henry Commentary, Vol.II.p.149). 그러나 이 역시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 요세푸스(Josephus)는
본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군대 앞에서 일으키신 바람과 벼락, 폭풍우와 우뢰로 인하여 원수들이 진멸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Lange, Pulpit Commentary).이러한 견해는 본장이 곧 시스라와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 주신 사실에 대한 노래인 점(21절;4:15)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타당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에 찬동한다(Keil,
Goslinga, Hervey, Matthew Henry, Cundall). 즉 본절은 하나님께서 대자연의 힘을 빌어 이스라엘을 도우신 사실에 대한 시적 표현인 것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파하기 위해 사용하신 자연 현상들은 바람, 하수, 뇌성, 우박, 숯불, 번개등 아주 다양하다(출
14:27;15:10;수 10:11;삼상 7:10;시 18:13,14).
성 경: [삿5:21]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다이낙 전투]
(주);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 '기손 강'은 겨울 우기를 제외하고서는 보통 메말라 있었으므로 시스라의 군대가 그 주변에 주둔할 수 있었다. 4:13 주석 참조.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강을 범람케 하셨으니 시스라의 무리들은 표류(漂流)할 수 밖에 없었다. 즉 그때 시스라의 군대는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인해 우왕 좌왕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군대를 칼로 쳐 파했었다(4:15).
(주); 기손 강은 옛 강이라 - 이처럼 드보라가 '기손 강'을 '옛 강'이라 부른 이유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오래 전부터 고대 역사가들이나 시인들이 그곳을 찬양해 왔거나 아니면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시스라군을 멸하시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주장한다(Matthew Henry). 그리고 어떤 학자는 그 강 가에서 옛부터 무수한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강이 옛날부터 유명해진 탓으로 추정한다(Gosinga, Hervey). 그밖에 단지 기손 강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흘러 내려온 오래된 강이기 때문에 '옛 강'으로 불리웠다는 주장도 있다(Keil). 이상과 같은 견해를 종합해볼 때 기손 강은 드보라 시대에 이미 옛날의 어떤 사건들과 연관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 본절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개역 성경과 KJV, 그리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밟았다'고
해석한 공동번역 등은 본절을 시스라 군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4:12-24)를 노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밟았도다'에 해당하는
원어 '티드레키'(*)가 명령형인 점에 근거, 다른 영역본들은 이를 달리 번역하고 있다. 즉 RSV, NIV, Living Bible 등은 본절을 '내 영혼아 힘차게
진군하라'(March on, my soul;be strong !)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시스라와의 전쟁 당시 드보라가 힘차게 이스라엘군을 격려했던 사실을
노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본절은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용맹히 싸웠던 백성들을 치하하는 것이므로, 양 견해 중 그 어느 쪽을 택하여도
무방하다.
성 경: [삿5:22]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다이낙 전투]
(주); 군마가 빨리 달리니...땅을 울리도다 - 시스라 군이 패퇴하여 급히 도망치는 것 뿐 아니라 이스라엘 군이 그 뒤를 맹렬히 추격한
것(4:15,16)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이다. 즉 시스라 군은 목숨을 부지(扶支)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도망친 반면 이스라엘 군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진멸하기 위하여 말발굽 소리도 드높게 그 뒤를 추격한 것이다.
성 경: [삿5:23]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다이낙 전투]
(주);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 '메로스'에 대한 저주와 '야엘'에 대한 축복(24절)은 드보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대언한 것일 뿐임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한편 '여호와의사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주); 메로스를 저주하라...치지 아니함이니라 - '메로스'란 지명은 본절 외에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아 마땅한 메로스의 죄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메로스'는 기손 강 부근에 위치해 있었던 마을임에는 분명하다. 혹자는
이를 사마리아 북방 약 20km지점에 위치한 '메루스'(Merrus)일 것으로 추정한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또 다른 이는 다볼 산 남방에 위치한
'케플 무슬'(Kefr Musr)일 것으로도 추정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아무튼메로스 거민은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받고자 싸우는 이스라엘을
도와줄 의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메로스의 주민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돕지 아니하므로 간집적이나마 폐해를 끼쳤었다.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메로스를 저주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운 탓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엘(24-27절)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성 경: [삿5:24]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시스라의 죽음]
(주); 겐 사람 헤벨 - 모세의 장인인 르우엘과는 일족(一族)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4:11 주석을 참조하라.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 야엘에 대한 축복은 '메로스에 대한 저주'와 완전이 대조된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압제자와 사귀고 있었고 자신 또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4:11)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야엘의 행동에 대하여서는 앞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4:17-22). 따라서 그
의의 및 제반 사항에 대하여서는 4:2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5:25]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시스라의 죽음]
(주); 우유...곧 엉긴 젖 - 여기서 '엉긴 젖'에 해당하는 원어 '헤므아'(*)는 '두껍게 엉긴 젖'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급 우유를 의미하는
'할라브'(*)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Keil, Lange). 한편 여기서 '우유'와 '엉긴 젖'은 같은 의미를 지니면서 서로의 뜻을 강조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히브리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행법적 표현이다.
성 경: [삿5:26,27]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시스라의 죽음]
4:21에 언급된 장면의 반복 기사이긴 하나 사건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드보라가 야엘의 의거(義擧)를 노래하고 있는 것은 가냘픈 여인이 한때 이스라엘 백성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인 사실을 부각시켜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 살쩍 - 사람 얼굴의 귀와 눈 사이에 태양혈(太陽穴)이 있는 부분, 즉 '관자놀이'(temple)를 가리킨다.
(주); 죽었도다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솨다드'(*)는 '완전히 파괴된 것',즉 전혀 소생할 가망성이 없이 완전히 죽은 상태에 이르른 것을 가리킨다.
이로써 시스라는 그 목숨 뿐 아니라 권력과 영광도 다하고 만 것이다.
성 경: [삿5:28]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시스라의 죽음]
(주); 창문으로 바라보며 살창에서 부르짖기를 - 이 말은 자식을 전쟁에 보낸 후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안타까이 기다리는 어머니의 일반적인 심정을 나타낸다.
(주); 살창 - 원어 '에쉬나브'(*)는 '틈을 남기다'라는 말에서 온 단어로 좁은 나무나 쇠창살을 사이사이에 박아 만든 창문을 가리킨다. KJV는 이를 '격자창'(lattice)으로 번역하였다.
(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고 - 처음에 시스라의 어미는 승전의 소식을 실은 아들의 병거가 늦게 오는 것에 대하여 이러한 말로
불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스라의 귀가가 한없이 늦어지자 그녀의 불평은 오히려 불안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찌하여 병거가
더디 오는고'라는 말을 반복하며 근심과 걱정에 쌓였던것이다.
성 경: [삿5:29]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시스라의 죽음]
(주);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 드보라가 시스라의 어미를 위로한 시녀들을 가리켜 '지혜로운 시녀들'이라고 언급한 것은 역설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그녀들은 시스라가 전리품을 많이 탈취하느라고 이렇게 늦을 것이라는 말로써 시스라의 어미를 위로하였다(30절). 하지만
정작 시스라는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이미 죽고 말았으니 그녀들의 생각과 위로의 말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삿5:30]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시스라의 죽음]
(주);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 시스라가 적들과의 싸움에서 당연히 승리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시스라는 전쟁 때마다 승승 장구하여 많은 전리품을 갖고 돌아왔었기에 시스라의 어미와 시녀들은 이번에도 그가 굉장한 전리품을 가지고 오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아무튼 드보라는 이 표현을 통해 시스라가 전쟁에 능한 자임을 설명하면서 그러한 그를 죽인 야엘의 용기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와동시에 그러한 시스라와의 싸움에서 이긴 이스라엘의 승리가 매우 값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주); 사람마다 한 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 전쟁시 여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노예로 삼거나 아니면 첩으로 삼는 경우는 고대에 흔히 있던 일이다(신 21:10-14). 그런데 시스라의 모든 병사들이 제각기 한 두 명의 여인을 포로로 얻지 못하였겠느냐는 말은 곧 시스라군이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굉장한 전과(戰果)를 올렸을 것이라는 뜻이다.
(주); 양편에 수놓은 채색옷 - '채색옷'에 해당하는 '리크마'(*)는 다앙한 색깔의 자수품(刺繡品)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옷감의 안팎을 손이나 베틀로 수놓아 만든 옷을 가리키는데 고대에는 매우 값비싸 주로 상류 계층 사람들만 착용 했었다(창 37:3).
(주); 노략한 자의 목 - 혹자는 '노략한 자'에 해당하는 '솨랄'(*)이 '여왕'이라는 뜻을 지닌 '쉐갈'(*)에 대한 필사자의 실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략한 자의 목'이란 '시스라 아내의 목'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Ewald).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원본을 뚜렷한 이유 없이 바꾸어 버린
것으로 타당치 않다. 한편 또 다른 이는 '노략한 자'를 '노략물'로 해석하여 시스라가 각 노략물 곧 약대나 나귀, 말 등과 같은 짐승에 채색옷을
두른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rvey). 그러나 이러한 해석 역시 전후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노략한 자'는 시스라를 가리키며 그가
승리를 기념하여 채색옷을 감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삿5:31]
주제1: [드보라의 개선가]
주제2: [마지막 간구]
본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즉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하나님의 대적인 시스라를 망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모든 대적들을 그와같이 처리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자들에 대해서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이 미래가 영광스럽게 되도록 축복해 달라는 의미이다.
(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 이것은 전쟁의 결과를 요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은 전쟁 이후 드보라가 살았던
기간이며(비교, 2:1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았던 기간을 지칭하기도 한다.
성 경: [삿6:1]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미디안의 압제]
(주);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행한 악은 어떤 도덕적인 범죄라기 보다 우상 숭배였다(2:17). 그들은 강력한 지도자인 사사들이 살아 있을 동안 우상 숭배에서 멀어졌던 것 같으나 사사의 치리 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 우상 숭배에 빠졌다. 이처럼 타락, 하나님의 징계, 이스라엘의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순환적으로 반복되던 역사가 곧 사사 시대였다.
(주); 미디안 -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에게서 난 후손들이다(창 25:1-4). 그들은 유목민이었으며 외국과도 무역을 했다. 요셉이 바로 이러한
생활을 하던 미디안 족속에게 팔렸다(창 37:28). 한편 이러한 미디안 족속이 거하던 땅은 모세와 아주 중요한 연관을 맺기도 하였다. 즉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해 도망친 곳이 곧 미디안 땅인데 그는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었다(출 2:15-22). 미디안 땅의
경계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개 엘란(Elan) 만 동부 지역인 아카바만 일대이다. 그런데 간혹 모압 경계선 북부(민 22:4,7)나 시내 반도 부근으로까지
그 경계가 확장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미디안족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시에 모압 족속과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대패를 당하고 만다(민31:1-12). 그런 자들이 본문에서처럼 다시 세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침공했으니 비록 7년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느 때보다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성 경: [삿6:2]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미디안의 압제]
(주); 산에서 구멍과 굴...만들었으며 - 팔레스틴 땅은 대체로 석회석으로 되어 있어서 천연 동굴이 많았으며 또한 인위적으로 굴을 파기도 쉬웠다.
이떠한 굴은 창고나 무덤(마 27:60)뿐 아니라 일시적 거처나 피신처로도 곧잘 사용되었다(삼상 22:1). 그러기에 이와 관련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했다고 언급했다(히 11:38).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도 핍박을 피해 동굴생활을
했으며 유대 종파 중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쿰란 동굴에서 생활했다. 이와같이 사람들이 산속의 구멍이나 굴에서 생활했던
이유는 인적을 피할수 있고 타인의 공격을 쉽게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의 침략을 받아 패퇴(敗退)하자
그곳으로 도망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즉 그들은 적을 대항할 힘이 없었으므로 적의 눈에 잘 띄지 않고 설령 적이 온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 쉽게
방어할수 있는 높은 산의 동굴로 피신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은 당시 미디안으로 인해 입은 그들의 고통이 매우 컸음을 잘
나타내준다. 그 뿐 아니라 과거 그들이 하나님 편에 섰을 때에는 능히 미디안 족을 물리쳤던 것(민 31:1-12)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들도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탈할 때에는 사면에서 에워싸는 원수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하게될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Matthew Henry).
성 경: [삿6:3]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미디안의 압제]
(주);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 - 우리 나라와는 달리 팔레스틴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여름철(5-9월경)에 비가 없는 건조기가 계속된다. 그러다가 10월에 들어서서 '이른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때에 그곳 사람들은 파종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파종된 씨앗은 겨울 우기(12-2월경) 동안 자라나 결실을 맺고 대개 3,4월 경에 추수하게 된다<성경 총론, '팔레스틴의 기후'>. 그런데 본절에 의하면 미디안과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들은 파종한 겨울 철에서 추수기까지에 걸쳐 이스라엘을 약탈했던것 같다. 특히 유목민인 미디안 사람들은 곡식이 싹을 내어 한창 자랄 때에 가축을 몰고 와서 그곡식을 뜯게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 자라 이삭이 여물은 곡식마저 빼앗아 갔으니 이스라엘에 양식이 남아 있을 날이 없었다(4절).
(주); 아말렉 사람 -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와 그의 첩 딥나 사이에서 난 '아말렉'의 후손을 가리킨다(창 36:12). 그들은 과거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을 르비딤에서 공격한 적이 있는데 오히려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분투한 이스라엘에게 크게 패하였었다(출17:8-16). 이때 하나님께서는 장차 아말렉을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지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히스기야왕 때에 이르러 그들은 시므온 자손에 의해 멸절당했다(대상4:42,43). 이들은 계속 존속하는 동안 이스라엘을 매우 괴롭힌 것으로 악명높다(3:13;삼상 15:7,8;27:8,9). 3:13 주석 참조.
(주); 동방 사람 - 창 29:1에서 처음 언급된 족속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족속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야곱이 갔던 곳이
밧단아람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창 29:1에서 가리키는 '동방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지역 사람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동방 사람'은 이스라엘 남부와 남동부에 자리를 잡고 있던 아말렉 및 미디안과 동맹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여기서 가리키는
'동방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족속들은 아닌 듯하다. 추측컨데 아마도 이는 미디안과 인접해 있는 시리아 사막 지역의 이말렉 족속 중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Wycliffe).
성 경: [삿6:4]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미디안의 압제]
(주); 진을 치고 - 본절에서는 미디안과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들이 어느 곳으로 올라와서 어디에 진을 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뒤에 기드온과 싸우려 할 때에는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골짜기에 진친 것으로 나와 있다(33절). 그래서 혹자는 그들이 가사에 이르도록 이스라엘 지경(地境)을 황폐화시킨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번에도 요단을 건너와서 점점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Keil). 왜냐하면 '가사'는 이스르엘 골짜기보다 훨씬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가사 - 유다 지경에 속한 블레셋인들의 5대 성읍 중 하나이다. 1:18 주석 참조.
(주); 토지 소산을 멸하여...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 미디안 연합군이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적으로 쳤을 뿐아니라 그에 병행하여 생계 수단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초토화시키고 갔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 생계 문제로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는데 이는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었음을 알 수
있다(1절). 한편 이상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기드온처럼(11절) 노략꾼들에게 들키지 않게 감추어 둔
곡식이나마 조금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삿6:5]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미디안의 압제]
(주);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 미디안족은 유목민들이었으므로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초지를 찾아 떠돌아 다녔다. 특히 그들은 약대가 있었으므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하였는바 가나안의 곡식이 자랄 때 쯤이면 나타나 곡식 밭에 자기들이 몰고 온 짐승들을 방목하고 장막을 지어 장기간 체류였다. 한편 여기서 '올라와서'라는 표현은 반드시 남쪽에서 북쪽으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이동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이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방 땅에서 나아오는 것을 의미한다(왕하17:3;24:1;사 36:1).
(주); 메뚜기떼 같이 들어오니 - 성경에서 메뚜기 떼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재앙을 상징한다(출 10:4;신 28:42;시 105:34;욜 2:25). 여기서도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특히 대적들의 수효가 엄청났다는 점과 그들로 말미암은 피해가 막심하였음을 강조해 준다.
(주);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 미디안족은 떠돌아 다니면서 유목 외에 무역도 했으므로 약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고대 근동에서는 짐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이 약대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왕상 10:2;사 30:6).
성 경: [삿6:6]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미디안의 압제]
(주); 이스라엘이...미약함이 심한지라 - '미약하다'에 해당하는 '와이달'(*)은'쇠하게되다'(be brought low)란 뜻 외에도 어원적으로 '가난하게 되다'(beimpoverished)란 의미도 있다. 그래서 KJV와 NIV. Living Bible등은 이를 '가난하게 되다'(was impoverished)로 번역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입자들로 인해 모든 곡식과 짐승을 빼앗겼으므로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절). 그런데 공동 번역은 이와 달리 '와이달'을 '황폐하게 되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그 단어의 근본 뜻과도 밀접한 연관이 없으며 본절의 본래적인 의도와도 조금 다르다. 물론 침입자들로 인해 이스라엘 땅이 황폐하게 되었으나 본문에서는 횡폐하게 된 사실에서 한걸음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곤궁(困窮)한 처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7년 동안 계속되었으니(1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매우 심했음은 말할나위없다.
(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선조들이 애굽의 압제에 못이겨 고통으로 신음할 때와 같이(출 3:7)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이처럼 주위의 열국들을 이용, 타락한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시어 그 타락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비단 사사기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님의 전형적 섭리이다.
성 경: [삿6:7]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주); 부르짖은 고로 - '부르짖다'에 해당하는 '자아크'(*)는 위험이나 고민거리에 직면했을때 소리 외쳐 구원자를 청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하에 심히 곤궁하자 구원자 '하나님'을 애타게 찾은 것이다.
성 경: [삿6:8]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주); 한 선지자를 보내사 - 모세 시대까지가 신현현(Theophany) 시대라면 사무엘 이후부터 말라기 선지자까지는 선지자(prophet)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간의 사사시대는 신현현 시대와 선지자 시대의 과도기적 상황으로서 특별히 어떠한 시대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통로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본절에서처럼 선지자를 보내시거나 아니면 사사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시는가 하면 직접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기도 하셨다(11절;2:1;13:3). 한편 선지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하 12:1-14 강해, '선지자의 사명'을 참조하라.
(주);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역사를 다시 상기시켜 주신 까닭은 가나안 땅에 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된 것이 온전히 당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했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출애굽 과정에서 맺은
당신과의 언약(출 19:5-8)도 상기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본절은 배은 망덕한 이스라엘 백성의 허물을 교훈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있다.
성 경: [삿6:9]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 -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시 모두들 들고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던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그 땅에서 쫓겨났으나 약간의 세력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배역(背逆)하고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남은 자들을 사용하여 타락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겠다고 경고하신 적이 있다(2:19-23). 그 경고가
실제로 성취된 사례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인데 이스라엘은 모압 왕 에글론에 의해 18년 동안(3:14), 그리고 가나안 왕 야빈에 의해 20여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었다(4:3).
성 경: [삿6:10]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 일찍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 구절이다. 즉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면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출6:7;19:5,6)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후 이스라엘은 그 같은 언약에 충실할 의무가 있었는데 오히려 그들은 틈만 있으면 이를 거스르는 죄악을 저지르곤 하였다.
(주);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 성경에서 '아모리 사람'은 종종 '가나안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창 15:16;수 24:15).
본절 역시 동일한 경우인바 '아모리 사람의 땅'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한편 이 가나안 땅에는 국가 신(수호신)을 비롯해서 인간의 행.불행과
관련된 신들 등 여러 종류의 신들이있었다. 그중 성경에 언급된 가장 대표적인 신들을 보면, 가나안의 바알과 시돈의 아스다롯을 들
수있다(2:13;10:6;삼상 12:10;왕상 16:31;18:18). 그리고 모압의 그모스(11:24;민21:29;왕상 11:7,33;렘 48:7)와 암몬의 몰록(왕상 11:7), 및
블레셋의 다곤(16:23;삼상 5:2-7) 등도 들수 있다. 다음으로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가나안 땅에 유행했던 신들은 만신전의 우두머리인
'엘', 전쟁신 '아낫' 그리고 죽음의 신 '못'이 대표적이다. 그외에도 몇몇을 들자면 헷족속의 폭풍우의 신 '테슛', 모신(母神) '한나한나',
시리아의 폭풍우의 신 '아닷' 등이 있다. 3:7 주석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땅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러한 우상들을 섬김과 동시에 여호와도
같이 섬겨 종교적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져 있었다. 한편 이러한 신들은 조각품에 지나지 않고 사람이 고안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민은 그 우상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신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가나안 열국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결과 그러한 신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열국들의 침략에 대해서도 속수 무책이었다.
성 경: [삿6:11]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택정(擇定)된 기드온]
(주); 여호와의 사자 - 구약 시대에도 현현하시어 당신 백성을 권념(眷念)하시며 부단히 활동하셨던 성육신(成肉身) 이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1 주석 참조.
(주);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 - '아비에셀'은 므낫세 지파 중 한 가족의 조상이었다. 따라서 '아비에셀 사람'이란 므낫세 지파 중 '아비아셀'의 가계에 속한 자들을 가리킨다(수 17:2). 한편 '요아스'는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의 아비인바 본절은 기드온의 출신을 밝혀 주는 의의를 지닌다. 오브라 - 이곳의 위치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소유인 '오브라'와는 분명히 구별된다(수 18:23). 혹자는 샤론 평야 부근의 오늘날의 엘파이(Erfai)가 이 오브라인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p.331).
(주); 상수리 나무 - 성경에서 이 '상수리 나무'는 종종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나타난다(사 44:14,15). 기드온이 자기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 중 목신(木神)인 아세라를 찍어 불태운 것으로 보아(25,26절) 기드온의 아비 요아스 역시 이 나무를 숭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주);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땅에 큰 구덩이를 파서 포도주 틀을 만들었던 것 같다(사 5:2). 한편 이처럼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자로 부르심을 받을 기드온이 몰래 숨어서 밀 타작을 하고 있었다는 아이러니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압제의 정도가 매우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밀 타작은 마당이나 넓은 들판에서 타작용
마차나 황소의 발굽을 이용하여 하였으나, 기드온은 미디안 족의 눈을 피해 좁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중이었다. (2)기드온의 타작 행위는 그가
장차 이루게 될 큰일을 암시하고 있다. 고기 잡는 어부를 불러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마 4:19), 밀 타작하고 있던 기드온을 택하사
미디안 대적을 타작하게 하신 것이다(사 41:15). 오늘날 성도들도 기드온처럼, 생계에 연연해 하던 상태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명을 자각하는
상태로 변모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왜냐하면 시대는 달라도 수행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일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일하지 않고 버려두어도 좋을 곳은 세상에 한 치도 없다.
성 경: [삿6:12]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택정(擇定)된 기드온]
(주); 큰 용사여 - 이에 해당하는 '깁보르 헤하일'(*)은 문법적으로 '능력있는 용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룻 2:1에서는 '유력한 자'곧 '재산과 덕망
그리고 세력을 겸비한 사람'으로도 번역되었다. 한편 혹자는 본절과 관련, 기도온이 실제로 '깁보르 헤하일'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주의 능력으로 큰 용사가 된 것으로 이해한다(Keil, Goslinga), 다시 말해 기도온은 본래 연약하며 작은 자였지만(15절)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큰 용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사들을불러 세우셨던 제반 유형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견해이다. 2:11-23 강해,
'사사들의 입지(立志)' 참조.
성 경: [삿6:13]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택정(擇定)된 기드온]
(주); 나의 주여 - 이 말은 기드온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자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아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낯선 사람에 대한 예우로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기드온이 처음에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서 분명히 알수 있다(P.Cassel).
(주);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 기드온은 자기 백성이 미디안으로부터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백성들을 징계하고 돌이키시기 위해 미디안 사람들을 보내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고통당하는 중에도 여전히 함께하셨던 것이다(출 3:7).
(주);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다면 미디안 사람의 손에서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심지어
그들이 쳐들어 와도 출애굽시에 행하셨던 놀라온 이적으로 그 대적들을 물리쳤을 것으로 믿었다. 다시말해 기드온은 고통의 원인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임을 깨닫지 못하고 거듭 하나님께서 함께계시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성 경: [삿6:14]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택정(擇定)된 기드온]
(주);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 '이 네 힘'은 단순히 기드온 자신의 힘을 기리키지 않는다. 대신 이는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계셔서 주시는
힘을 의미한다(Keil,Goslinga). 용사라도 자기 힘을 의지하면 실패하지만 연약하고 작은 자라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승리한다(시 3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기도온에게 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보증해
주셨다.
성 경: [삿6:15]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택정(擇定)된 기드온]
(주);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 아직 기드온은 자신이 의지할 인간적인 요소나 가시적인 요소가 있어야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삼상 17:47)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여리고 성과 같이 견고한 성도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치 않고 쉽게 무너뜨려 정복할 수있게 하심을 그는 망각했던 것이다(수 6:1-21). 뿐만 아니라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요 11:40).
(주); 나의 집은...극히 약하고...제일 작은 자니이다 - 본절은 기드온이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 사람과 대적하기에는 자신이 역부족임을 고백한
것이다. 여기서 아직까지 기드온이 인간적인 방편을 의지하려는 모습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의 고백처럼 기드온의 가정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지도적 위치에 있기는 커녕 매우 보잘것 없는 위치에 있었음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가정의 기드온을 들어쓰사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신 것은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해 준다. (1)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일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도 교만할 수 없다는
점이다. (2)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고전 1:26-31).
성 경: [삿6:16]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택정(擇定)된 기드온]
(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와 동일한 약속하에 모세와 함께 하셨고(출 3:12)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셨다(수 1:5).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큰능력을 행하셨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역사하셨던 것처럼 이제 기드온과도 함께 하사 그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임을 알수 있다.
(주);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 미디안 사람은 메뚜기 떼처럼 많다(5절).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 사람을 치듯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매우 쉽게 멸망시킬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이러한 표현은 민 14:15에서 하나님께서 배은 망덕한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려 한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 적이 있다. 이는 곧 누구든 한번 하나님의 심판의 장중에 빠져 들면 헤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멸절되고
말 뿐임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삿6:17]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주);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 본절은 여호와에 대한 기드온의 불신앙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문맥은 단지 그러한 시각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즉 본절은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통하여 주어진 자신의
소명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를 확실히 알고 싶어 요구한것으로 보는게 자연스럽다. 사실 과거 모세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통해, 그리고 모세의 손을
통해 표징을 보여주셨다(출 4:1-8). 또한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소명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을 아이와
같은 미약한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에 손을 대시는 표징으로써 그에게 소명을 확신시켜 주셨다(렘1:4-9).
성 경: [삿6:18]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주); 예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미느하'(*)는 '선물', '조공', '제물'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가 '제물'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주로 '소제'(grain offering)와 관련되어 사용된다(사 66:20;말 1:11). 한편 다음 절에 보면 기드온은 하나님을 위해 '미느하'로 염소새끼와 가루 한 에바로 만든 무교 전병과 국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19절). 이와 유사하게 과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사자들을 위해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요리와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반죽하여 만든 떡과 버터와 우유를 가져와서 대접했던 적이 있다(창 18:6-8). 따라서 본절의 '미느하'는 NIV의 번역처럼 '제물'(offering)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 '선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주);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 아마도 기드온이 땅에 구덩이를 파 만든 포도주 틀은 자신의 집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
어귀의 상수리나무 부근이었던 것 같다(11,12절). 때문에 그가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준비해 돌아오기 까지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자리를 뜨지 말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성 경: [삿6:19]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본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께 바친 예물이 언급되어 있다. 그 예물은 미디안 족속의 압제로 인해 매우 곤궁한 살림을 하던 기드온(4,11절)에게는 매우 귀중하고 값진 것임에 틀림없다.
(주); 가루 한 에바 - 약 23리터, 즉 약 12되 정도되는 부피를 의미한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이러한 양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위해 가져왔던 가루 세 스아와 같은 부피이다(창 18:6). 왜냐하면 한 에바(Ephah)는 세 스아(Seah)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주); 무교전병 - 효소의 역할을 하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이나 떡을 가리킨다. 이것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을 신령한 음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편 이것은 출애굽 사건과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출 1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6:20]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주); 하나님의 사자 - '여호와의 사자'(11절)와 같은 말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문서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문서를 나눌 때 신(神) 명칭인 '여호와'와 '엘로힘'의 사용에 따라 구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두 이름이 한책 안에서 교호적(交互的)으로
발견되면 '여호와' 문서와 '엘로힘' 문서가 혼합되어 편집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그러한 생각은 본장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까닭은
본장에 '여호와의 사자'란 말과 '하나님의 사자'란 말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서설의 허구성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더군다나 일관된 흐름을 보여 주고 있는 본장의 이야기는 편집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모세 오경
개론, '문서설'을 참조하라.
성 경: [삿6:21]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주);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 훗날 삼손의 부모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 두었을 때도 하나님의
사자는 이와 동일한 이적을 행하셨다(13:19,20). 또한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시기 위해 불로써 제물을 태우셨다(왕상 18:38). 이처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불로써 제물을 태우신 것은
한편으로는 기도온의 헌신을 열납하신 증거이며(레 9:24), 다른 한편으로는 징표를 구한 기도온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Pulpit Commentary,
Matthew Henry).
성 경: [삿6:22]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 이제야 기드온은 자기에게 나타나 위로와(12절) 소명과(14절) 확신을(16절)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의 사자' 곧 '여호와'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가 그들 바로 곁에 동행하셨던 예수님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눈이 밝아진' 후에야 깨달은 것과(눅 24:13-32) 유사한예이다. 이처럼 우리도 항상 곁에 계시며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도무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때가 많이 있다.
(주); 슬프도소이다 -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아하흐'(*)는 특정한 의미를 나타낼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단지 슬픔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그런데 이 말은 '주 여호와'란 단어와 연결되어 주로 사용되었다(수 7:7;렘 1:6;4:10; 14:13;32:17;겔4:14;9:8;11:13). 한편 기드온이 이렇게
탄식의 소리를 발했던 것은 사람이 여호와를 대면하여 볼 수 없고, 또한 보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출20:19;33:20;신 5:25).
성 경: [삿6:23]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주); 너는...죽지 아니하리라 - 이처럼 기드온이 하나님을 보고서도 죽지 아니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본체를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출 33:20, 23 주석 참조. 주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형상을 취하사 '여호와의 사자'로 기드온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후에 삼손의 부모가 하나님을 뵙고서도 죽지 않은 것 역시 이러한 연유에서이다(13:22,23).
(주);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 히브리인들은 동의어 대구법(同義語對句法)을 사용하여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하거나 강조하는 습관이 있다. 본절 역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위로하시면서 슬퍼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해 '동의어 대구법'을 사용하신 경우이다.
성 경: [삿6:24]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주); 거기서 - '상수리 나무 아래서'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는 상수리 나무 아래에 있는 반석에서 기드온의 예물을 태웠으며(19-21절), 그곳에서 기드온과 대화했기 때문이다(22,23절).
(주); 단을 쌓고 - 과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한 후 헤브론에서 단을 쌓았다(창 13:18). 그리고 야곱도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후 그곳에서 단을 쌓았다(창 28:16-19).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단을 쌓는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열심과 헌신을 의미했다.
(주); 여호와 살롬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예호와 솰롬'(*)은 '여호와는 평강이시다' 또는 '평강의 여호와'란 의미이다. 앞서 여호와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는데(23절), 이 말의 원어 역시 '솰롬', 곧 '평강'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본절에서
기드온이 쌓은 단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제단이요 구원의 제단이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 속성 중 하나를 평강이라 하였고(롬
14:17),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평강의 왕이라 불리운 것 같이(사 9:6), 평강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의 귀한 은총으로서 성경 전편에 걸쳐 흐르고 있다.
그런데 특히 불안과 혼란이 팽배해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과(눅 8:48) 가정과(고전 7:15)나아가 전세계가(왕상 4:24)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목된 관계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시 29:11;갈 1:3).
성 경: [삿6:25]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우상을 훼파하는 기드온]
(주); 수소 곧 칠년 된 둘째 수소 - 본절은 약간 난해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원문상으로 본절은 '수소와 칠 년 된 둘째 수소'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수소'는 기드온이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 바쳤고, '칠 년 된 둘째 수소'는 온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바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Matthew Henry's Commentary,Vol.II.p.160). 그러나 사실상 기드온이 제물로 드린 것은 '그 둘째 수소' 밖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26,28절). 즉 본문에는 두 마리 수소가 바쳐졌다는 암시가 그 어디에도 없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영어 성경 역시 본절을 개역 성경과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bull, the second bull seven years old;KJV, RSV, NUV). 따라서 본절의 '수소' 는'칠 년 된 둘째 수소'와 동의어로 보아야 한다(Pulpit Commentary , Keil & Delitzsch) 한편 하나님께서 굳이 번제물로 7년 된 수소를 취하라고 하신 까닭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7년간의 미디안의 압제(1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려 하신 당신의 의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 - 이 단은 본래 오브라에 모여 살던 아비에셀 사람들(11절)의 공동 소유이나 특별히 기드온의 아비가 관리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 (1)기드온이 자기 아비의 바알.단을 훼파하면서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했다는 점(27절), (2)'단'이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점, (3)이튿날 아침에 백성들이 바알의 단이 훼파된 것을 알 정도로 그 단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28절).
(주); 아세라 상 - 가나안의 최고 신인 엘(El)의 아내이자 바알(Baal)의 어미이다. 간혹 '아스다롯'(Ashtaroth)과 동일신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엄연히 구별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을 참조하라.
성 경: [삿6:26]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우상을 훼파하는 기드온]
(주); 이 견고한 성 위에 - 이에 해당하는 원문 '로쉬 하마오즈 하제'(*)는 '이 견고한 것의 끝에'란 의미이다. 이것을 NIV는 원문의 의미와는 달리'적절한 종류의'(a proper kind of)로 번역했으며, KJV는 '이 바위의 끝에'(the topof this rock)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이 언덕 위에'(on this hill)로번역하였으며 RSV는 개역 성경처럼 각각 번역했다(the top of the stronghold). 이러한 차이는 '로쉬 하마오즈 하제'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이곳은 성읍 사람들이 모두 다 쳐다 볼 수 있는 성읍의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는 듯하다.
(주); 규례대로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정돈되게'라는 의미로서, 기드온이 단을 쌓음에 있어서 정성을 들였음을 보여 준다(Lange).
(주); 아세라 나무 - 이로 미루어보아 아세라 여신상은 통나무로 만들어 세운 목상(木像)이었음을 알 수 있다(왕하 21:7).
(주); 번제 -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과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기구(祈求)하는 마음에서 드리던 자발적인 제사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 1:3-9 강해, '번제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삿6:27]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우상을 훼파하는 기드온]
(주); 기드온이...두려워하므로 - '바알'은 농경물의 수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신이다. 2:13 주석 참조. 따라서 바알 우상 훼파 소식이 그
신봉자들의 귀에 들어갈 경우, 자신들의 소득이 격감되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그들이 격노할 것은 자명하다. 기드온이 두려워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태였을 것이다.
성 경: [삿6:28]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쟁론]
(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장소는 동네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26절 주석 참조. 그렇지 않았다면 성읍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 단이 훼파되었는지를 금방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록 기드온과 그의 종들이 밤중에 신상과 산당을 훼파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을지라도(26,27절) 그곳이 마을 가까이 위치했다면
성읍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삿6:29]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쟁론]
(주); 서로 물어 가로되...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 이로 보건대 기드온의 종 열(27절)중에 누군가가 마을 사람들에게 기드온이 바로 범인
임을 자백하거나 고해 바친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삿6:30]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쟁론]
(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를 훼파한 일 때문에 성읍 백성들이 그를 죽이려 한 점은 기드온의 부친이 소유한 바알과
아세라가 그의 가족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증거해 준다. 4절 주석 참조. 한편 이들 성읍 주민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우상을
숭배하여 십계명을 범했으면서도 무너진 우상의 제단과 신상을 보고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지 못했다. 도리어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 상을 훼파한
기드온을 죽이려 하였다. 즉 하나님 앞에서 정작 죽임을 당할 자들은 자신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처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성 경: [삿6:31]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쟁론]
(주); 바알이...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 마을 사람들은 우상을 파괴한 기드온에게 분노를 품고 그 아버지에게 사형을 요구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아버지 요아스는 그 아들의 행위를 꾸짖기는 커녕 도리어 그를 위해 변호하였다. 기드온의 심령을 비추었던 하나님의 영이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감화시켰던 것 같다. 적과 동조하리라 예상했던 아버지가 지금 자기 편이되어 주니, 기드온의 감사한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이렇듯 하나님의 편에
서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자는 언제나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불의와 악한 세력은 생각보다 약하고, 정의와 진리는 무쇠처럼 강하다.
요아스는 참신과 거짓 우상, 진리와 오류를 구별하는 길을 마을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즉 참 신은 징계하나 거짓 우상은 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진리는 그 자신을 증명한다. 후에 바리새인으로서 뭇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았던 교법사 가말리엘도 같은 논법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였다(행 5:34 이하).
성 경: [삿6:32]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백성들의 쟁론]
(주);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였으니 -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은 '바알에게 대항하다'는 뜻이다. 이 이름에는 기드온이 바알을
쳐부쉈으되 바알은 기드온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못한 사실을 조롱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로써 바알은 허구의 산물이며 헛된 우상임이
밝혀진 셈이다. 한편 삼하 11:21에서는 '여룹바알'이 '여룹베셋'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때 '베셋'은 바알의 별명인 '보셋'과 동일한 말로서
'부끄러움', '수치'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룹베셋이라는 이름도 바알의 수치를 드러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삿6:33]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기드온의 출전 준비]
(주); 때에 - 원문에는 이 말이 없이 단순히 '그리고' 또는 '그런데'를 의미하는 접속사 '우'(*)만이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접속사 '우'만으로는 본절과 앞의 사건이 시간적으로 어느정도의 간격이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주);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 '이스르엘 골짜기'는 요단 강에서 길보아 산(삼상 28:4)부근을 거쳐 갈멜 산(사 33:9) 부근을 지나며
지중해에까지 뻗쳐 있는 비교적 큰 계곡이다. 따라서 이 골짜기는 므낫세 반 지파와 잇사갈, 스불론, 아셀 지파의 땅에 걸쳐 있는 셈인데, 그곳에는
기손강이 흐른다. 4:7 주석 참조. 한편 본절에서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기 위함이라기 보다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한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먼저 기습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그에 대한 방어나 어떠한 군사 행동(34,35절)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MatthewHenry's Commentary,Vol.II.p.162).
성 경: [삿6:34]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기드온의 출전 준비]
본절에는 성령이 임한 기드온의 신호에 따라 '아비에셀 족속'이 순종하면서 모여 그를 좇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지극히 심하게 우상을 숭배했던 자들이었으나 성령이 강하게 임한 기드온을 따랐다. 초대 사사 옷니엘도 하나님의 신이 임했을때 구산 리사다임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다(3:10).
(주);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 '강림하시니'로 번역된 원어 '라바쉬'(*)는 '옷을 입히다'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옷입히시듯 혹은 무거운 장비로 온통 감싸시듯 하여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셨음을 의미한다(11:29;13:25;14:6;사 11:2;요
20:22;행 13:2;고전 12:4). 이처럼 신앙 생활에서는 붙잡는 것보다 붙잡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도륵 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지혜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신앙의 열매도 하나님께로부터의 은혜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이 특별히 임하였을 때에는 명철과 지혜(창 41:38,39), 예언(민 11:25,26), 비상한 체력(14:6,19)등이 나타났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보혜사로서 함께 하신다(요15:26). 따라서 우리는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아니 되며, 육신의 정욕을 누그러뜨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다 충만히 받기 위해 힘써야 한다(엡5:18).
본절에서는 바야흐로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므로서 그가 때마침 침략한 대적들로부터(33절)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
받는 장면이 나온다.
성 경: [삿6:35]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기드온의 출전 준비]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의 아비에셀 족속 출신이다. 11절 주석 참조. 따라서 자기가 속한 므낫세 지파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취해 그들의 힘을 규합했다. 그러자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와 접경 지대를 기업으로 받은 므낫세 지파는 기드온의 부름에 쉽게 응했다. 33절 주석 참조.
(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 - 이들 역시 이스르엘 골짜기와 인접해 있고 적
들의 약탈과 위협에 처해 있었기에 기드온의 부름에 응했다. 33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 중 '아셀'은 드보라 시대에는 압제자의 영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출전치 않아 드보라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 지파다(5:17).
(주); 올라와서 -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알라'(*)는 반드시 '올라가다'란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는 어느 중요한 지점으로
나아가거나(스 7:6) 전쟁을 위해 진군하는 것(왕하 17:3;24:1;대하 36:23;나 2:1)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 단어이다. 이 중 본절에서는 '알라'가
전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삿6:36]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승리의 표징]
(주);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 기드온은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께 아뢰기 전에 이미 이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셨던
바를(16절) 먼저 언급했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자신의 요구가 앞서의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삿6:37]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승리의 표징]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불렀음을 표징으로 보여 주셨던 적이 있다(20,2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이 다시 하나님께 표적을 구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한 의심 때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성에서 비롯된 것이다(Keil). 이미 그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충만히 임해 있었으나(34절), 그는 자신의 연약한 힘으로써 메뚜기 떼 같은 대적들과(5절) 싸워 이긴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좀더 확실한 하나님의 표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 근동지방은 강우량이 적은 대신 밤에 이슬이 많이 내려 식물을 자라게 한다. 성경 총론,
'팔레스틴의 기후' 참조. 따라서 기드온 자신이 준비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사면 땅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기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삿6:38]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승리의 표징]
(주);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 밤새 이슬이 사면 땅에 내리는 대신에 기드온이 준비한 양털에만 비가 와서 젖은 것처럼 많이 내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마치 어린애 장난과 같은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개념치 않으시고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셨는데
이로써 기드온은 어느정도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분이 덧입혀 주실 능력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삿6:39]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승리의 표징]
(주); 양털만 마르고...하옵소서 - 이러한 기드온의 요구는 앞에서 언급한 요구와 정반대된다(38절). 그렇지만 이 요구가 앞의 표적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서 기드온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이는 앞의 이적을 보다 더 확증하기 위한 목적에서 청한 요구일 뿐이다.
성 경: [삿6:40]
주제1: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소명]
주제2: [승리의 표징]
(주); 하나님 -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용된 신(神) 명칭 중 '여호와'가 고유 명사라면 '엘로힘'(하나님)은 보통 명사이다. 이 중 '여호와'란 명칭은
다른 이방신과 구별된 하나님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반면 '엘로힘'은 보다더 넓은 범위로서 이방신까지 포함한 모든 신중의 신이신
하나님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장면(36-40절)에서는 '여호와'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대신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기드온을 부르신 여호와께서(12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까지도 주장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표현인 듯하다(Goslinga).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7:1]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300 용사]
(주); 여룹바알 - '바알과 논쟁하다', '바알에게 대항하다'는 뜻으로 기드온이 바알(Baal)의 단을 훼파하고서 얻은 이름이다. 6:32 주석 참조.
(주); 하롯샘 -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얄룻'(Jalud) 샘으로 알려져 있다(Cundall,Hervey). 이 샘은 '이스르엘 골짜기'의 바로 북쪽 길보아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하롯'이란 지명은 다윗의 30인 용사 중 '삼훗'과 '엘리가'의 출신지로(삼하23:25) 언급된 것 외에는 성경에 더 이상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블레셋 군대가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기 위해 진 친 곳이 '이스르엘에 있는 샘'곁이었는데(삼상 29:1), 이것이 하롯샘과 동일한 샘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스르엘 골짜기 주변에는 샘을 끼고 있으면서 군대가 진을 치기에 적당한 장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주); 모레산 -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모레'(Moreh)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이 있는 '세겜'에 속한 한 지역이다(창 12:6;신 11:30). 그런데
이 지역은 전투 장소로 묘사된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에 떨어져 위치하고 있으므로 '모레 산'과 동일시 될 수 없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자는 모레 산은 높은 곳이므로 북쪽이며 하롯 샘은 낮은 곳이니 남쪽이라는 주장을 편다(Cassel). 그러나 이것은 막연한 주장일 뿐 위치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을 못준다. 따라서 다만 '모레 산'은 '하롯 샘' 북쪽의 어느 한 곳일 것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성 경: [삿7:2]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300 용사]
(주);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 사실상 기드온을 좇은 이스라엘 백성은 32,000명으로(3절) 메뚜기 떼 같은 적들과 비교할 때(12절;6:5) 그렇게 많은 수효는 아니다. 왜냐하면 무기가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사람의 수효와 훈련 정도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거의 판가름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36,000명의 알렉산더대제(Alexander the Great)의 군대가 60만의 바사 왕 고레스 3세(Cyrus III)의 군대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이긴 적도 역사적으로 실제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분명 그리 많지않은 수의 이스라엘군이 엄청난 병력의 미디안 연합군을 상대하기란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수효를 줄일 것을 명하셨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가지에서였다. 즉 (1)구원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고 (2)믿음의 정예(精銳) 용사를 뽑기 위해서였다.
(주);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세우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 한 목적은 단순히 이방의 압제를 그치게 하려는 데
국한되지 않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성시켜(6:7-16)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주요 목적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투 인원을 극소수로 제한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1)겸손히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였고 (2)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삼상 14:6).
성 경: [삿7:3]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300 용사]
(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과 싸움에 있어서 '두려워서 떤다'는 사실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통하여 영광받으시기를 거절하셨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을 돌아가게 하셨다. 만일 이들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 커녕 스스로 자긍할 자들임에 틀림없다.
(주);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 여기서 '길르앗 산'은 요단 동편의 갓,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의 지경(地境)에 걸쳐 넓게 퍼져 있는 길르앗
산지를 가리킨다. 5:17주석 참조. 때문에 혹자는 본절의 길르앗은 '길르앗'(*)이 아니라 '길보아'(*)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한다(Clericus,
Bertheau, Cassel, Cundall). 왜냐하면 현재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는 곳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산지가 아니라 길보아 산기슭의 하롯샘 곁(1절)이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p.341). 그러나 본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길르앗'이라
하면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를 일컫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서'란 말은 '-으로'라고 번역하여, 본절을 '길르앗 산으로 떠나 돌아가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기드온을 따른 사람들 중에는 그와 같은 지파인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며, 많았던 점에
의거할 때(6:35) '길르앗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자연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영역 성경 RSV도 이를 '집으로
돌아가라'(let-return home)는 의미로 의역하고 있다.
성 경: [삿7:4]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300 용사]
(주);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 아마 1차 관문을 통과하고 남은 이들 백성 중에는 '졸장부'라는 비난이 두려워서 남아 있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전쟁의 승리 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을 불신앙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아 있는 1만 명도 많게 보시고 다시금 재감군(再減軍)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주);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다(약 1:13). 그런데 본절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시험하신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각각의 문맥에 따라 해결될 수 있다. 즉 야고보 사도가 말한 시험은 인간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어 인간 스스로 고난에 빠진 것을 의미하며, 본문에서의 시험은 하나님께서 전쟁에 합당한 자를 고르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해서는
2:11-23 강해, '시험의 종류와 목적'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삿7:5]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300 용사]
(주); 그 혀로 물을 핥는 자 - 6절에서는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라고 언급되어있다. 카일(Keil)의 말대로 이들은 서서 물을 움켜 조금씩 핥았던 자들이다. 그런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들이 평소와는 달리 마음 놓고 물을 마시지 못한 것으로 보아 겁장이들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II,p.342). 한편 혹자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보다 훨씬 재빠르므로 전쟁에 보다 적합한 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Goslinga). 아무튼 이들은 서서 혀로 물을 핥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주위를 경계하면서, 방심하지 않는 자들임에 틀림 없다. 따라서 이들은 매우 조심성이 요구되는 횃불 작전(15-23절)에 적합했을 것이다(Wycliffe).
(주);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 - 전쟁에 임할 자들 치고는 너무도 태평스러운 자세를 취한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조심스러운 작전에는 적합하지
않다.
성 경: [삿7:6]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300 용사]
(주); 삼백 명 - 이처럼 최종적으로 선발된 삼백 용사의 특징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장차 맞게 될 전투에 대한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3절). 즉 비록 수효면에서는 엄청난 열세에 몰려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민족에 대한 소명으로 굳게 무장되었기에 담대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철저한 임전 태세(臨戰態勢)를 갖춘 자들이었다(6,7절). 비록 소수일망정 확고한 목표 아래 한 마음 한 뜻으로
강력하게 결집될 때 위대한 성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성 경: [삿7:7]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300 용사]
(주);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 이 승리의 약속은 이미 이전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주셨던 바 있다(6:16).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산당을
제거하게 하시고(6:25,26)군대를 선발하시는 등 모든 절차를 끝내신 후 비로소 기드온에게 승리를 다시 확증시키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군대 중 불신앙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하시고 오직 당신의 사역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 선발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본격적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9-25절).
성 경: [삿7:8]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300 용사]
(주);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 여기에서 '나팔'에 해당하는 단어인 '쇼파르'(*)는 대개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가리킨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나팔'이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나팔'은 예배나 축제때에 악기로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고(레 25:9;민
10:10;왕상 1:34) 전쟁이나 기타 비상시에 신호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민 10:9;31:6;수 6:4;삼상 13:3).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은
돌아가는 길에 양식을 구할 수 있으므로 '양식'도 거의 필요치 않다. 따라서 본절의 '백성'은 선발된 300명임에 틀림없다. 히브리 본문 역시 '그
백성이 그들의 손에 있는 양식과 그들의 나팔을 취했다'라는 뜻인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같은 사실은 더욱 분명하다.
성 경: [삿7:9]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적병의 꿈 이야기]
(주); 이 밤에 - 문자적으로 '그리고 바로 그 밤에 그것이 있었더라'는 뜻이다. 이는 곧 정예 300명을 뽑고 그 나머지 사람들을 돌려 보낸 그날
밤에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즉시 명령을 내리신 것은 아마 적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군대의 수효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삿7:10]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적병의 꿈 이야기]
(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300명을 남겼으나 수많은 적들을 생각할 때 아직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3번씩이나 표징을 구했었던 바 있으므로(6:17,36-40) 적을 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두려워
망설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또 다른 표적(13,14절)을 보여 주실 필요가 없었다.
성 경: [삿7:11]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적병의 꿈 이야기]
(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믿음 약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오직 믿음으로써 적과 싸울 수 있는 담력을 그에게 주시고자 원하셨다. 그 이유는 전쟁의 승리가 기드온과 그의 백성들의 용기와 지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영광 받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주); 군대가 있는 - 문자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있는'이라는 의미이다(Pulpit Commentary). 이것은 적들이 순수한 병사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유목민들이므로 여인들과 아이들도 데리고 있었음을 암시 해 준다. 아마 그들은 무장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진과 마주 대하여
배치했을 것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짐승과 더불어 안전한 곳에 배치시켰을 것이다(Goslinga).
성 경: [삿7:12]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적병의 꿈 이야기]
(주); 미디안 사람과...동방의 모든 사람 - 이들 미디안 연합군들이 어떠한 자들인지에 대하여서는 6:3 주석을 참조하라.
(주); 골짜기에 누웠는데 - 기드온이 부하 부라와 함께 적의 진지로 정탐하러 간 때가 밤이었으므로(9절) 적군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누워 있다'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여기서 '골짜기'는 '모레산 앞 꼴짜기'(1절)를 의미한다. 한편 이처럼 적들은 이스라엘 군대를 가까이에 두고도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깊은 잠을 자고 있었기에 기드온의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에 정신이 없어 자기들끼리 서로 싸웠을 정도이다(22절). 더욱이 기드온이 정탐하러 갔을 때는 아무리 늦어도 이경 초 곧 밤 10시에서 11시 이전이었다(1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수효가 메뚜기 떼같이 많은 것만을 믿고서 정신 상태가 해이해져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주);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 무수한 메뚜기 떼는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상징하였다. 6:5 주석 참조.
(주); 그 약대의 무수함 - 약대는 유목민들이 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운송 수단이다. 특히 미디안의 침략에는 이 약대가 병기로
사용되었다. 그것들은 전투시에 상당한 기동력을 발휘했을 것이고 그 위용면에서도 상대방을 크게 위압했을 것이다. 전쟁에서 약대를 사용한 예는
여기서 처음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적절한 무기였음에 틀림없다. 6:5 주석 참조.
성 경: [삿7:13]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적병의 꿈 이야기]
(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 꿈이란 한갖 생리적 현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함부로 해몽(解夢) 운운하는 것은 매우 터무니 없는 일이다(전 5: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에 꿈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기도 하셨다(민 12:6;욥 7:14;렘 23:28). 기드온과 부라가 적진으로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을 때, 두명의 적병이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만일 기드온이 그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14절과 같이 해몽하였다고 할 때과연 그것이 기드온에게 큰 확신을 주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면 그 해몽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할것이기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 일행이 잠복한 때에 꼭 맞춰 꿈과 해몽을 적병의 입을 빌어 들려주심으로써, 의혹의 여지를 남기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는 창 40:5-19 강해, '구약에 나타난 꿈과 하나님의 계시'를 보다 참조하라.
(주); 보리떡 한 덩어리 -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장 흔했던 음식으로 '비천함'을 상징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인바 이 '보리떡'은 넓은 의미로 당시 가난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는 비천한 가문 출신인(6:15) 기드온을 상징한다(14절).
(주); 한 장막 - 이는 대표 단수로 미디안 전체 장막을 의미한다. 특히 '장막'이라는 표현은 유목민의 거주지이므로 미디안인들에게 잘 어울리는
용어 이다.
성 경: [삿7:14]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적병의 꿈 이야기]
(주);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 문자적으로 '이는-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란 의미이다. 즉 이것은 어떤 사실을 단정적으로 확증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동료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 미디안 사람이 이처럼 판정적인 표현을 사용한것은 은연 중에나마 미디안 진영에 '기드온'이란 인물에 대한 두려움이 퍼져 있음을 보여준다.
(주); 하나님 - 원어로는 '엘로힘'(*)이다. 이처럼 미디안 사람이 신명칭으로보통 명사인 '엘로힘'을 사용한 것은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엘로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자신들의 '신'을 가리키던 명칭이기 때문이다. 6:40 주석 참조.
성 경: [삿7:15]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주);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 기드온은 그들의 꿈과 해몽이 정확한지 아닌지를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리라 약속했던 또 하나의 증표였기 때문이다(9-11절). 따라서 그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미디안 사람들을 자기에게 붙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Goslinga). 사실 전쟁을 수행할 때에는 장비와 훈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그 군대의 정신력이 더욱중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의 전투력이 두려움으로 인해 매우저하되어 있음을 감지하고 싸움에서의 승리를 확신한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II,pp.166 f).
(주); 미디안 군대 -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의 연합 군대를 가리킨다(12절;6:33).
성 경: [삿7:16]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주);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 기드온이 수립한 횃불 작전(19-23절)은 비밀스럽게 적진 가까이 가서 적들을 당황하게 만들어 그 와중에 뛰어들어 싸우는 것이었다. 기드온이 본절에서 자신의 용사 300명을 100명씩 세 대로 나눈 것도 보다 비밀을 잘 유지할수 있고, 적들이 방어할 채비를 갖추기도 전에 한꺼번에 기습 공격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사실 병사를 세 대로 나누어 미디안을 공략하는 것은 골짜기에 위치한 미디안 사람들(12절)을 공격하는데도 보다 용이했을 것이다.
(주); 나팔과...횃불을 감추게 하고 - 기드온 군대의 주무기는 이처럼 나팔과 항아리 그리고 횃불이었다. 이는 전쟁 무기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다음과 같은 목적에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무기였음에 틀림없다. (1)나팔을 붊으로써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의 대 공격을 알리는 신호인
듯한 위협을 주고자 하였다. 이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천사들을 통해 들릴 나팔 소리를 상기케 한다(계 8:2). (2)항아리는 횃불을 감추는 데에
사용되었음은 물론, 깨뜨려질 때의 그 요란한 소리는 마치 적군을 짓밟아부수는 듯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3)야밤에 횃불을 한꺼번에 밝힘으로써
군대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게 보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드온 군대는 갑자기 기습하여 대적들의 장막을 불태우려는 계산도 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도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복음의 횃불을 밝히 들고 나가야 할 것이다.
성 경: [삿7:17]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주);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되 - 횃불 작전은 한 두 사람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실패하게 된다. 이에 따라 기드온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호에 따라서만 움직이도록 명령했다.
성 경: [삿7:18]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주); 여호와를 위하라 - 20절에는 '여호와를 위한 칼이여'라고 하여 '칼'(*, 헤렙)이 추가되어 있다. 그래서 몇몇 히브리어 사본과 시리아 역본
등은 본절에도 '칼'이란 단어를 삽입시켰다. 또한 영역 성경 KJV도 이러한 견해를 취하여 '칼'(sword)을 삽입시켰다. 이러한 견해를 따라 혹자는
'칼'이란 단어가 본절에서 누락된 것으로 추정하였다(Hervey, Cassel).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추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본절은 기드온이
용사들에게 함성의 군호(軍號)를 주었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고, 20절은 300명이 기드온의 신호에 따라 어떻게 함성을 질렀는가하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을 뿐이다.
성 경: [삿7:19]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주); 이경 초에 - 구약 시대에 히브리인들의 밤 시간 계산은 해지는 시각과 해뜨는 시각을 중심으로 하여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즉 해질때부터 밤 10시경이 초경(애 2:19)이며, 10시경부터 2시까지가 이경, 그리고 2시부터 해뜰때까지가 삼경이다. 따라서 '이경 초'라 함은 밤 10시에서 11시 사이를 가리킨다. 한편 신약시대에 와서 이러한 시간 구분법은 좀더 세분되어 일, 이, 삼, 사경으로 나뉜다(마 14:25;막 6:48). 이는 곧 유대인들이 당시 로마인들의 시간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주); 번병의 체번할 때라 - 보초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기점으로 하여 기드온 군대는 공격을 개시했다. 그 시각은 근무 교대를 위해 인수 인계를
함으로 말미암아 아무래도 외부 경계에 소홀히 하기 쉽다.
성 경: [삿7:20]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본절에는 기드온의 군대가 '횃불'과 '나팔 소리' 그리고 '함성 소리'로 보초 교대중에 있는 미디안 사람 뿐 아니라 편히 잠자고있는 약대 떼까지 놀라게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있다. 그곳은 골짜기였으므로(12절) 미디안 사람들에게는 평지보다 나팔 소리와 함성 소리가 더욱 크고 우렁차게 들렸을 것이다.
(주);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 이 함성의 표현은 이스라엘 군대의 대표가 누구인지를 보여 준다. 즉 이스라엘 군대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출 14:13,14)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구성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대표자는 바로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기드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종으로서 그분을 대리할 뿐이다. 한편 기드온은 300명 용사들에게 이 함성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미 이 이름들로 인해 두려워 떨었던 미디안 군대를(14절)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이다.
성 경: [삿7:21]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주); 각기 당처에 서서...에워싸매 - 기드온의 용사들은 포위망을 좁히지 않고, 단지 적진의 사면을 에워싸고서 계속하여 나팔을 불며 횃불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서 있었다. 그러자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의 나팔 소리와 함성에 의해 무너졌던 것처럼, 미디안 군인들의 마음은 무너져 버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들은 혼비 백산하여 도주하기에 급급하였다. 요컨대, 이스라엘의 승리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날선 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계 19:21).
성 경: [삿7:22]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주);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 불의와 비리는 스스로 자멸하기 때문에 구태여 손을 써서 패망시킬 필요조차 없을 때가 많다. 이 때 성도의 할일은 다만 진리의 빛을 발하고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일 뿐이다.
(주); 스레라의 벧싯다 - 아직까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지명이다. 혹자는 '스레라'를 수 3:16과 왕상 7:46에 언급된 '사르단'과 동일시한다(Keil). '사르단'은 여리고 북방20km 지점의 요단 강 기슭에 있던 성읍이다. 이곳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여리고 가까운 요단 나루 턱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그 부근에는 '아벨므홀라'가 있다. 이곳으로 도망하는 미디안 사람들을 추격하기 위해 므낫세 남쪽에 있는 에브라임 지파가 동원된 점으로 보아(24절) '스레라'가 '사르단'과 동일한 성읍일 가능성이 크다.
(주); 답밧 - 요단 강 건너편, 즉 동쪽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점 외에는 달리 정확한 위치를 획인할 수 없다. 혹자는 길르앗 산지의 '라스 아부 타밧'(Ras Abu Tabat)일 것으로도 추정한다.
(주); 아벨므홀라 - 이 역시 요단 동편의 답밧부근에 위치했었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왕상 19:16에는 엘리사의 고향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동일 지명인지도 분명치 않다. 유세비우스(Eusebius)와 제롬(Jerome)은 벤산 남쪽 16km 지점의 요단강 서편의 한 유적지가 바로 이
'아벨므홀라'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Wycliffe).
성 경: [삿7:23]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기드온의 큰 승리]
(주);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 곧 '이들 지파들의 지경(地境)에서부터'란 뜻이다. 6:35 주석 참조.
성 경: [삿7:24]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죽임당한 오렙과 스엡]
(주); 에브라임 온 산지 -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의 지경 남쪽에 넓게 펼쳐진 산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경계를 이루었다(수 16,17장). 이 지파는 처음에는 전쟁에 소집되지 않았으나(8:1) 도망치는 미디안 사람들을 추격하기 위해 후에 소집되었다. 이로 보아 미디안 사람들이 주로 도망해 간 곳은 가나안 남부 지역임이 분명하다.
(주); 벧 바라 - 이곳의 위치는 확실치 않다. 다만 문맥상으로 보아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요단 나루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 그 나루턱을 취하고 - 문자적으로는 '그 물들을(the waters) 취하고'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벧 바라에서 여리고 동편 요단 나루턱까지
이르는 모든 나루터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로 하여금 이 나루턱들을 지키게 한 것은 적들이 요단을 건너 동편땅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6:33).
성 경: [삿7:25]
주제1: [기드온의 삼백 용사와 궤멸되는 미디안군]
주제2: [죽임당한 오렙과 스엡]
(주); 미디안 두 방백 오렙과 스엡 - 이들은 미디안 연합군의 군사 지도자 중 일원이었지 미디안 족속의 최고 통치자들은 아니었다. 이것은 8:5에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가 언급된 점으로 보아서도 확증된다. 왜냐하면 한 족속에 두 왕이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 오렙 바위...스엡 포도주 틀 - 본 전투에서 '오렙'과 '스엡'이 죽임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알려진 지명이므로 사 10:26 외에는 성경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오렙'은 '갈가마귀'를 '스엡'은 '늑대'를 뜻한다는 것 외에 달리 그것들이 어디에 위치하였던 바위이며 포도주
틀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Lange).
성 경: [삿8:1]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에브라임 지파의 원망]
(주); 에브라임 사람들 - 이들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가장 불평 불만이 많은 지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여호수아 당시 므낫세 지파와 더불어 자기들이 기업으로 받은 영토가 다른지파에 비해 좁다고 불평했던 적이 있다. 또한 훗날에도 그들은 본절에서 기드온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사사 입다에게도 하면서 다투었던 적이 있다(12:1). 이러한 저들의 소위(所爲)는 거의 고질적이었는데 훗날 이스라엘 왕국을 분절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여로보암 역시 이 에브라임 사람이다(왕상 11:26).
(주);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이 어쩜이뇨 -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 빠진 지파는 비단 에브라임 한지파 뿐만 아니라 여러 지파들이 었다(6:35).
더군다나 에브라임 지파는 전쟁 말기에서나마 참전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러한
말로 비난한 것은 이스라엘 전체 지파 중에서 자신들이 주도권(hegemony)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높여 주면서 그들의 노를 풀었던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2,3절).
성 경: [삿8:2]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에브라임 지파의 원망]
(주); 나의 이제 행한 일이...비교되겠느냐 - 이 대답에서 기드온의 성품이 드러난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하여 명예와 영광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의 분별력은 뛰어나 에브라임 사람들의 불평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내부의 분열위험을 감지하고 지혜롭게 예방책을 강구하였다(잠 15:1).
(주);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낫지 아니하냐 - '끝물 포도'는 '맏물 포도'를 거둔 후 남은 포도를 의미한다(사 24:13). 때문에 KJV, NIV,
RSV등은 본절을 '에브라임의 포도 찌꺼기가 아비에셀의 수확한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포도 찌꺼기'즉 '끝물 포도'는
'맏물 포도'보다 맛이 시고 질도 훨씬 뒤떨어진다. 그런데도 기드온이 에브라임 산지의 '끝물 포도'가 자기 고향에서 생산되는 '맏물 포도'보다
훨씬 좋다고 말한 것은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기드온 집안 사람들인 아비에셀(6:11)이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 공로보다 전쟁의 막바지에 참여한
에브라임 지파의 공로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물론 에브라임 사람들은 미디안의 두 방백을 죽였을 뿐 아니라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음에는 틀림없다(7:24,25). 그러나 아무리 낮게 평가하여도 싸움의 전과정을 주도했던 기드온과 그의 소속
가문의 업적은 에브라임 지파의 것에 비해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뒤떨어질리 없다. 그런데도 기드온이 이처럼 겸허한 태도를 취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심때문이었다. 즉 그는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지파들간에 분열이 생기는 것은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는 반목(反目)보다는
화평을 추구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신앙의 정도(正道)에 자신을 승복시켰던 것이다(마 5:9; 빌 2:3).
성 경: [삿8:3]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에브라임 지파의 원망]
(주); 하나님이...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 미디안 연합군이 기드온의 군대에게 쫓겨 도망갈 때 요단 나루터에서 그 길목을 지키고 있던 에브라임 지파가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 7:25 주석 참조. 그런데 기드온이 이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이...너희 손에 붙이셨으니'라고 한 것은 곧 '하나님께서 너희로 하여금 그토록 명예로운 일을 하게 하시지 않았느냐? 는 일종의 반문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1.2,pp.170f).
(주); 나의 한 일이 어찌...비교되겠느냐 - 즉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지파로 하여금 미디안 두 방백을 죽이는 명예로운 전과(戰果)를 올리게 하신 이상, 그밖에 기드온 자신이 행한 모든 일들은 그 같은 영광에 비하면 하찮은 것들에 블과하다는 말이다.
(주); 이 말을 하매 그들의 노가 풀리니라 -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는 교훈이 꼭 들어맞은
경우이다. 만일 기드온이 자신의 지도자적 권위에 도전해 온 에브라임 지파를 용납치 아니하고 또한 저들의 시비를 공박하려고만 들었다면 이처럼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러지 아니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이었다(빌 2:3).
성 경: [삿8:4]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명이...피곤하나 - 사실 이들은 '모레 산 앞 골짜기'(7:1), 즉 이스르엘 골짜기에서부터 적과 싸우며 요단 나루턱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적군을 추격하였으니 매우 지쳐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이는 기드온이 자신과 병사들을 위하여 체면 불구하고 숙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요청한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5절).
(주); 따르며 - 기드온과 그의 정예병 삼백 인은 비록 피곤하고 지쳤으나 끝까지 적을 추격했다. 이들이야말로 충실한 정병(精兵)이며, 최후까지
긴장하여 희생적 봉사에 참여한 순교적 투사들이었다. 승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잠시 출전하여 다행히 두 적장을 죽인 공로를 내세워 이익과 명예를
얻으려 했던 에브라임 사람들과는 그유가 다른 충성이었다. 애굽의 모든 영화와 부귀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당하기를 더 원했던 모세의 신앙과 가히 비견될 만하다(히11:23-26).
성 경: [삿8:5]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숙곳 사람들 - '숙곳'(Succoth)은 요단 동편의 갓 지파가 기업으로 차지한 성읍이다(수13:27). 이곳은 얍복 강에서 북쪽으로 약 16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 '숙곳 사람들'이란 그곳에 거하는 이스라엘 거민인지 가나안 원주민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런데 기드온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게 스스럼없이 떡덩이를 요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 거민은 갓 자손들일 것이다.
(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 - 본절에는 '세바'와 '살문나' 두 사람이 모두 미디안 왕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은 각기 '미디안'과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의 왕 중 어느 한 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미디안 두 왕'이라 칭한
까닭은 아마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이 연합하여 미디안 연합군을 이루었기 때문인 듯하다(6:3). 즉 세바와 살문나는 미디안 연합군의
두왕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두 왕은 '오렙'과 '스엡'이 에브라임 사람들과 싸우는 중에(7:25) 요단 강을 건너 도망쳤을 것이다.
성 경: [삿8:6]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숙곳 방백들 - '숙곳' 거민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떡을 주겠느냐 - 기드온이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해서 싸워 이길 수 있을지
어떨지 잘 모르므로 떡을 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즉 숙곳 방백들은 기드온의 300명 용사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드온의 군대가 미디안에게
패할 경우 미디안으로부터 받게 될지 모를 보복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기드온에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동족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한 이기주의적이며 기회주의적인 태도였으니 응징받아 마땅했다(Wycliffe,Keil & Delitzsch).
성 경: [삿8:7]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여호와께서...내 손에 붙이신 후에 - 모래 산 앞 골짜기에 진쳤던 대적들을 기습한 이래(7:19이하) 계속된 추격전으로 인해 기드온의 용사들은 기진 맥진한 상태였다(4절). 거기다가 예상 밖의 푸대접을 받은 터였지만, 기드온은 전의(戰意)를 상실하지 않고 오혀려 승리의 확신을 더욱 굳게 다지고 있다. 오늘날 주의 일을 하는 데에도 이와 유사한 어려움이 많이 닥친다. 응당 협력해야 할 사람이 의외로 냉담한 태도를 보일 때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여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고후 4:8; 빌 3:14).
(주);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살을 찢으리라 - '들가시'는 광야에서 자라는 매우 딱딱한 가시를 의미한다. 히브리 원문에서도 이것은 '광야의
가시'(*, 코체 하미드바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찢으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타작하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표현을
'기드온이 그들을 돌가시와 찔레 위에 눕혀 놓고 타작용 기구로 그들 위에 눌러 끌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undall). 또한 어떤 학자들은
'타작하다'란 맡을 '가혹한 형벌을 가하다'란 의미의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한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Bertheau). 아무튼 본절은
기드온이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방백들의 살을 타작하듯이 징벌하겠다는 의미로 기드온의 극도로 분노한 상태를 보여준다. 그 까닭은 지금 기드온이
수행하고 있는 전쟁이 하나님의 성전(聖戰)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5:13-15 강해, '성전'(聖戰)을 참조하라. 한편
오늘날도 사단과의 영적 전투에서 관망만 하고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정죄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적극 동참하는 까닭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승리가 불을 보듯 명확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 경: [삿8:8]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브누엘 - '브니엘'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숙곳 동쪽 약 9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에드 다합 에쉬 쉐르퀴예'(Tell edh-Dhahab
esh-Sherqiyeh)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숙곳과 마찬가지로 얍복 강 바로 위에 있는 갓 지파의 성읍이었다.이 '브니엘'이란 명칭은 야곱이 얍복
나루를 건너기 전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다하여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 칭했던데서 비롯되었다(창 32:30).
성 경: [삿8:9]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 - 기드온은 숙곳 방백들에게는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라고 말했다(7절). 따라서 이는 '적들을 완전히 섬멸시킨 후 자신이 평안히 돌아오는 때'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 이 망대를 헐리라 - '망대'는 성읍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파수꾼들은 이 곳에서 적의 침입을 관찰하고, 적의 침입이 있을 때 나팔을
불어 전 성읍에 위험을 알린다. 따라서 이러한 망대가 무너지면 그 성읍이 적에게 점령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이 '망대'를 헐어
버리겠다고 브누엘 사람들에게 위협한 것은 그 성읍을 파괴해 버리겠다는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삿8:10]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갈골 -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 유세비우스(Eusebius)와 제롬(Jerome)은 카르카리아(Carcaria) 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카르카리아' 성은 사해 동쪽의 '페트라'(Petra)에서 남쪽으로 하루 길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모압 사람의 지경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속은 갓 지파의 영역에 있는 '노바와 욕브하'(11절)와 멀리 떨어져 있는곳이므로 '갈골'의 위치로는 적당하지 않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1. 2, p.353). 한편 히브리 본문에는 '갈골'을 보통 '울타리로 쳐진 곳'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는 '양의 우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모세 당시 갓 자손은 '욕브하'와 그 근처 성읍을 점령하여 그곳에 양의 우리를 지은 적이 있다(민32:35,36). 그러므로 본문의 '갈골'은 고유명사로 취급하기 보다는 보통 명사로 취급하여 '노바'와 '욕브하' 근처에 있는 '양의 우리로 지어진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할 것이다.
(주);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 지금까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의 연합군을 대표적으로 말할 때에는 '미디안 사람'으로 칭했다(6:14;7:1,14,15,24). 그러나 본절에서는 '동방 사람'으로 언급되어 있다. 아마 이것은 미디안 사람이 거의 전멸하고 동방 사람들이 많이 살아 남았든지 아니면 그들이 진치고 잇는 곳이 동방 사람이 거하던 곳과 인접해 있던 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주); 십 이만 명이 죽었고 그남은 일만 오천명 가량 - 전사자(戰死者) 십 이만명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수효였다. 그리고 패잔병에 해당하는
일만 오천 명 또한 기드온 삼백 용사에 비하면 무려 50배에 달한다. 따라서 그들은 갈골에 이르러 진영을 가다듬어 일전(一戰)을 준비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호와의 크신 권능을 체험한 바 있는 기드온 용사들의 사기는 의기 충천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패잔병들은 위축되어 또다시
도주하기에 급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성 경: [삿8:11]
주제1: [기드온으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안연히 있는 중에 - 이말은 세바와 살문나가 군대의 호위 가운데서 안전하게 거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바와 살문나를 호위하고 있는 군사들 역시 기드온의 손에서 벗어났음을 확신하며 안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그들을 치자 그들은 예기치 않은 공격에 놀라 전의(戰意)를 상실했을 것이다.
(주); 노바와 욕브하 동편 장막에 거한 자의 길 - 노바와 욕브하 동편에 거주하는 유목민들에게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아마 이곳은 갓 지파와 동방
사람들이 사는 지경의 경계 지역일 것이다. 한편 '노바'와 '욕브하'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한 성읍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헤스본 부근에
위치한 성읍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곧 길르앗 산지의 어느 한 지점이다.
성 경: [삿8:12]
주제1: [기드온으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미디안 군]
(주); 온 군대를 파하니라 - '파하다'에 해당하는 '하라드'(*)는 '공포에 떨게하다', '당황하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기드온에게 세바와
살문나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미디안 연합군이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潰滅)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상으로 7장에서부터 계속되었던 기드온군과 미디안 연합군과의 싸움은 끝이 난다.
성 경: [삿8:13]
주제1: [기드온으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숙곳 족속]
(주);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 KJV는 이를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해가 뜨기 전에 전장에서 돌아오다가'로 번역하였다. 그
까닭은 '헤레스 비탈'에 해당하는 원어 '밀마아레 헤하레스'(*)를 '해가 뜨기 전'이란 뜻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몇몇 학자들도 지지하는
견해이다(Luther, Hervey). 그러나 본절을 굳이 이처럼 의역(意譯)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 '헤레스 비탈'이란 말은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과
싸워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았던 곳인 '갈골'(10-12절)에 대하여 보충 설명해 주는 말로 봄이 더 낫다.
성 경: [삿8:14]
주제1: [기드온으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숙곳 족속]
(주); 한 소년 - '소년'에 해당하는 '나아르'(*)는 '사환'(삼하 9:10), '어린 아이'(출 2:6), '청년'(출 24:5; 33:11) 등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그가 숙곳 방백과 장로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청년'으로 해석하는 편이 좋다.
(주); 신문하매...기록한지라 - 사로잡힌 소년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숙곳의 방백과 장로 칠십 칠인의 명단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숙곳의 방백과 장로들은 동족에게로부터까지 버림을 받는 지경에 당도한 셈이다.
(주); 숙곳 방백과 장로 칠십 칠 인 - 이들은 숙곳 성읍을 다스리며 재판을 총괄하는 그 성읍의 대표자들이다. 6절에서는 방백들만이 기드온을
조롱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절에서 기드온이 보복하고자 한 사람 중에는 장로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몇몇 방백들의 말이라 해도 그
성읍 대표 모두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연대성(Solidarity)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삿8:15]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숙곡 족속]
(주);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 기드온은 숙곳 방백들에게 자기를 조롱한 것(6절)이 얼마나 어리석었었가를 보여 주기 위해, 그 증거로 전쟁에서
사로잡은 미디안 두 왕(12절)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숙곳 방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쫓기고 있는 적들이 또다시 힘을 키워 보복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또한 자기 동족의 고통을 같이 나누지 않은 숙곳 방백들은 이제 세바와 살문나처럼 자기 손에
사로잡힌 바 된 것을 시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성 경: [삿8:16]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숙곳 족속]
(주);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 이 표현은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을 죽인 것이 그들의 죄에 대한 징계임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6,7절). 즉 기드온이
그들을 죽인 것은 사소한 개인적인 악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와 관계된 그들의 죄에 대한 징계로서 뚜렷한 대의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삿8:16]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숙곳 족속]
(주); 브누엘 망대를 헐며 - 기드온에 의해 브누엘 성읍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의미한다. 9절 주석 참조.
성 경: [삿8:18]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죽임당한 미디안 두 왕]
(주);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 - 여기서 '다볼'(Tabor)은 이스라엘 골짜기에 위치한 '다볼 산'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곳은 일전에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진쳤던 곳이다. 4:6 주석 참조. 그런데 지금까지는 세바와 살문나가 다볼에서 어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전혀 언급이 없었다. 아마 이는 세바와 살문나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치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탈할 때(7:1) 그 중 일부를 죽인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이때 죽임을 당한 자들은 다름아닌 기드온의 형제들이었다(19절).
(주); 모두 왕자 같더라 - 이로 미루어 볼 때 기드온의 형제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삿8:19]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죽임당한 미디안 두 왕]
(주); 그들은 내 형제 내 어머니의 아들이니라 - 공동 번역은 이를 '그들은 한 어머니에게서 난 내 형제들이다'로 번역하였다. 이는 세바와 살문나에게 죽임 당한 자들이 단순히 기드온과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분명히 기드온의 친형제였음을 나타내 준다.
(주);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면 나도...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 이는 곧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에 대하여 '피의 복수'를 하겠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누군가가 피살당한 경우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족이 복수자가 되어 살인자의 생명을 요구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노아 시대 이래 '피를 흘리게한 자는 그자역시 피를 흘려야 한다'는 율법 사상에 근거한 규례였다(창 9:6). 따라서 본절의 기드온의 보복
행위 역시 사사로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의(公義)의 심판을 가하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죄의 복수'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신 19:6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8:20]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죽임당한 미디안 두 왕]
(주); 그 장자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 이처럼 미디안 연합군을 지휘하던 대장이자 왕이었던 세바와 살문나가 적장(敵將)은 물론 용사도 아닌 한갖 소년 여델에 의해 죽임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 그 소년이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 이처럼 기드온의 장자 여델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세바와 살문나를 죽일 만큼 용기있는 소년은
아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처형한 것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아들은 어려서
300명 용사 안에 분명히 포함되지 못하고 집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7:2-8).
성 경: [삿8:21]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진멸당한 숙곳 족속]
(주); 사람이 어떠하면 그 힘도 그러하니라 - 이 말은 기드온의 장자 여델이 나이 어리기 때문에 그의 힘과 용기도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기드온이 직접 자기들을 죽여 달라는 역설적인 의미의 호소이다. 한편 그들이 이와 같이 기드온에게 직접 죽고자 자청한 것은 힘도 없는 어린 아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용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편이 덜 수치스럽다는 생각에서였음이 분명하다(Keil, Wycliffe).
(주); 새 달 형상의 장식 - 금이나 은으로 된(26절) 반달 형상의 장신구이다(사 3:18). 미디안족들은 월신(月神)을 숭배하던 관습에 따라서 반달
모양의 장식품을 항상 몸에지니고 다녔다. 기드온은 이 장식물을 세바와 샅문나를 쳐서 승리한 기념으로 취했던 것이다. 한편 이외에 그와 함께
출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미디안 사람을 친 후 여러 가지 장식물을 노략물로 가져왔다(24절). 이와 같이 전쟁에 승리하여 적국의 물건들을
노략물로 취하는 것은 고대 전쟁에 있어서 보편적인 일이었다.
성 경: [삿8:22]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과오]
(주);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 이 말은 기드온의 집안대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달라는 요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요구한 것은 당시 고대 근동에 왕위 세습 제도가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당시의사사 제도는 아직 미분화된
이스라엘의 통치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과도기적 체제였다. 그리고 왕정(王政)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지시하신 바 있다(신
17:14-20).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구원한 기드온의 인간적 용맹과 지도력에 의존하여 안전을 확보해 보려는
의도에서 그를 왕으로삼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때가 이르러 왕을 택하시고 세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행위이다. 이스라엘이 진정 왕정이 도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다면, 백성들은 하나님께 간구했어야 마땅하였다. 따라서 임의로 왕을 세우고자
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왕되신 하나님(삼상 8:7; 12:12)을 경홀히 여기는 불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삿8:23]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과오]
(주);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모든 영광을 그분이
받아야 마땅하다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또한 기드온이 했던 이 말은 백성들로 하여금 인간 지도자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하는
교훈도 담고 있다.
성 경: [삿8:24]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과오]
(주);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귀고리가 있었음이라 -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처 사라의 몸종인 하갈이 낳은 아들이다(창 16:15). 그
후손인 이스마엘족은 시내 반도 북동쪽에 있는 바란 광야를 중심으로 유목 생활과 대상(隊商)을 하였으며,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인 미디안
족속(창 25:2)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본서의 저자는 이스마엘과 미디안을 같이 생각했던 것 같은데 실상 별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스마엘 사람'은 아라비아의 유목민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이며 넓게는 미디안족도 이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들은 항상
이동하면서 생활했으므로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물건과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귀중품 특히 금을 많이 지니고 다녔다.
성 경: [삿8:25]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과오]
(주); 겉옷 - 이에 해당하는 '시믈라'(*)는 대개 사막 지대 사람들이 낮에는 겉옷으로,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던 긴 '외투'를 가리킨다.
(주); 귀고리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실상 '귀고리'가 아닌 '코걸이'였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당시 아라비아 일대의 유목민들은 많은
장식품들로 코를 단장하는 풍습이 성행했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풍습은 오늘날에도 일부 근동 지방에서 볼 수 있다(A.C.Hervey). 그러나
'귀고리'에서 해당하는 '네젬'(*)은 일반적인 '장식용 보석'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귀고리와 코걸이를 막론한 모든 종류의
장신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좋을 것 같다(Lange).
성 경: [삿8:26]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과오]
(주); 금 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 칠백 세겔이요 - 한 세겔(Shekel)은 약 11.4g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사람에게서 노략한 금의 무게는 21.38kg 가량 되었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주); 자색 의복 - 고대 애굽 및 팔레스틴 일대에서는 지중해의 조개에서 추출한 액으로 붉은 보라 빛 염료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 자색 염료로
염색한 천이나 의복은 매우 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대개 귀족이나 왕족들만 착용하였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체포한 후 그에게 붉은 홍포를
입힌 까닭도 곧 '자색'이 당시 '왕'을 상징하는 색깔이었기 때문이다(마 27:27,28).
성 경: [삿8:27]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과오]
(주);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 '에봇'(Ephod)은 본래 대제사장의 의복으로서 앞으로는 가슴을, 뒤로는 등을 덮었던 조끼 모양의 상의(上衣)였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할 때에 대제사장은 이 옷을 입고 우림과 둠밈으로 판결을 구하였다(출 28:6-30). 그런데 기드온은 금으로 이 예봇 형상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둠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즉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에 있는 성막의 제사에 집중하지 않고, 오브라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함으로써 무질서 속에서 점차 우상 숭배의 길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주); 자기의 성읍 오브라 - 베냐민 지파의 성읍 '오브라'(수 18:23)와는 구별되는 곳으로 기드온의 집안이 거주하던 성읍이다. 6:11 주석 참조.
(주);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 '음란'이란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사용된 용어이다(겔 16:58; 23:27,29).
즉 이스라엘 백성은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우상을 섬기듯이 섬긴 것이다.
성 경: [삿8:28]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과오]
(주); 미디안...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 이 말은 미디안 사람이 기드온으로부터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그 세력이 매우 약화되었음을 가리킨다. 사실상 미디안 사람들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살아 남았으며 유목생활도 계속 유지하였지만(사 60:6)더 이상 이스라엘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주); 사십 년에 그땅이 태평하였더라 - 7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미디안 세력이 철저히 진멸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평화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적 평화 이면에는 타락의 움직임이 음틀거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드온 생전에도 에봇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등
가증한 행실을 버리지 못하였으며(27절) 기드온의 사후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알을 열렬히 숭배하기 시작하였다(33절). 요컨대 그들은 자유와
평화를 신앙 성숙의 기회로 삼지 않고 도리어 육신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갈 5:13). 우리는 이러한 기사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은 우상 숭배 욕망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굳이 새겨진 이방 신의 형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전 세계에
만연해 있는 황금 만능주의, 출세 제일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등도 우상 숭배나 다름이 없다(사 60:6).
성 경: [삿8:29]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타락]
(주); 여룹바알이...자기 집에 거하였는데 - 기드온이 노년(老年)에는 사사로서의 공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집에 머물면서 여생을 보낸것을
가리킨다(Wycliffe).
성 경: [삿8:30]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타락]
본절은 기드온이 아내를 많이 얻어 7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었을 만큼 이스라엘 사회에서 큰 지위를 얻었던 사실을 암시한다. 특히 이것은 기드온이 비록 왕위를 거절했으나 왕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 기드온이 말년에 영적으로 매우 타락했음도 시사해 주고있다.
(주); 아내가 많으므로...아들이 칠십 인이었고 - 기드온은 많은 아내들 뿐만 아니라 최소한 한명 이상의 첩(妾)을 거느리고(31절) 마치 큰 방백과
같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던 것 같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일부 일처 제도를 세우셨으나(창 2:18-25)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 주변 여러 나라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일부 다처 제도를 공공연하게 실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드온은 사사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방 악습을
따랐으며, 그로 인해 70명의 아들이 거의 몰살당하는 징벌을 받게 되었다(9:5). 이와 관련해서는 창 4:16-24 강해, '일부 다처제' 및 창 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을 참조하라.
성 경: [삿8:31]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타락]
(주); 세겜에 있는 첩 - 기드온의 본래 거주지는 '오브라'였다(6:11). 그런데 그는 첩을 세겜에도 두고 있었다. 이 사실은 기드온이 첩들을 여러 지역에 많이 두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한편 '세겜'(Shechem)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50Km 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성읍이다(수 20:7).
(주); 아비메렉 - 이 이름의 뜻은 '왕의 아비' 또는 '아버지는 왕이시다'란 의미이다. 이 이름은 그의 아버지 기드온의 지위에 따라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기드온이 낳은 70명의 아들 중 유독 이 '아비멜렉'이 언급된 것은 훗날 그가 왕위 찬탈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9장).
성 경: [삿8:32]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타락]
(주); 아비에셀 사람 - 므낫세 지파 중 아비에셀의 가계(家系)에 속한 자들을 가리킨다(수 17:2). 기드온과 그 아비 요아스도 이 아비에셀
사람이다. 6:11 주석 참조.
성 경: [삿8:33]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타락]
(주);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 사사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과 직결되었다(2:19; 3:12; 4:1; 6:1).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은 주로 우상 숭배였으며, 이에 따라 여호와 종교는 그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 전체 역사 가운데 가장 심각한 우상 종교는 바알 종교로서 이스라엘의 분열 왕국 이후에도 계속될 정도로 그 뿌리가 깊었다(왕하 10:18,28; 21:3).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할 때도 이 종교는 이스라엘 가운데 잔존해 있었다(렘 2:8).
(주); 바알브릿 - 구약시대 당시 세겜 지역에 존속했던 가나안인들의 바알 신이다. 그 뜻은 '언약의 바알'로 곧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바알과 언약을 맺었음을 보여 준다. 즉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매우 열렬히 숭배했음을 가리킨다. 한편 '바알브릿'은
'엘브릿'(언약의 엘, 또는 언약의 하나님)으로도 알려졌는데(9:46),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며 그와 언약을 맺었음을 의미한다(34절). 이처럼 '바알브릿'이란 말은 이스라엘 사회에 우상 숭배가 극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용어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1.2.p. 176).
성 경: [삿8:34]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타락]
(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 이는 곧 저들이 일전에 하나님 앞에서 패역하여 대적들의 손에 빠졌던 것(6:1-5)은 물론 그들이
부르짖자 기드온을 통해 구원해 주셨던 역사(6:6-7:25)마저 모조리 잊어버린 것을 가리킨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과거를 조금이라도 기억하였더라면
사사기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타락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삿8:35]
주제1: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주제2: [기드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타락]
(주);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더라 -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진 이후 이전에 바알 단을 파괴하였던 여룹바알(6:25-32) 곧 기드온의
가정을 선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과거 기드온에게 대대로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로 그의 집에 충성을
보였던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자세이다(22절). 바로 이러한 점은 훗날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 거민들과 공모하여 반역을 도모하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9장).
성 경: [삿9:1]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반역]
(주); 여룹바알 - 기드온이 바알 단을 훼파한 일로 인하여 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이름이다. 6:32 주석 참조. 그런데 본장에서는 '기드온'이란 본래의 이름 대신 이 이름만이 사용되고 있다(2,5,16,19,24,28,57절). 그래서 혹자는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본장이 다른 장의 자료와는 다른 문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문서설'을 주장한다(Hervey). 그러나 본장에서 '여룹바알' 이란 이름만이 사용된 것은 본장의 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사건은 다름아닌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바알을 극심히 섬기는 자기 친족들과 더불어(4절)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하여 동족 상잔(同族相殘)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6절). 그리하여 본서의 저자는 일찍이 바알 단을 훼파한 기드온의 행동과 정반대되는 그의 아들 아비멜렉의 소위(所爲), 즉 바알 추종 세력들과 결탁하여 악을 도모한 행위를 대조시키기 위해 '여룹바알'이란 이름만을 사용했던 것이다. 한편 '문서설'에 대해서는 모세 오경 개론, '문서설'을 참조하라.
(주); 아비멜렉 - 기드온과 그의 첩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그 이름의 뜻은 '아버지는 왕이시다'로 본장의 왕위 찬탈 사건과 잘 부합된다. 8:31 주석 참조.
(주); 세겜 - 예루살렘 북방 약 50km 지점의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한 성읍이다. 8:31 주석 참조. 이곳은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창 12:1-7). 이곳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으로 분배되었으나(수 17:7-9) 그 후 다시금 도피성으로 구별되어 래위인의 성읍이 되었다(수 20:7;21:20,2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총회를 이곳에서 개최한 점으로 미루어보아(수 24:1) 당시 세겜 성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성읍이었을 것이다(Matthew Henry, Cassel).
(주); 그 어미의 형제...외조부의 온 가족 - 아비멜렉이 아비 기드온의 가계(家系)와 그의 어미의 가계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말이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의 아비에셀 가문 출신이다. 6:11 주석 참조. 그러나 아비멜렉의 어미는 세겜 사람이다(8:31). 세겜성이 가나안 정복 후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으로 분배되었던 점에 의거할 때(수17:7-9) 당시 세검 성에 거주하던 아비멜렉의 어미와 그 외가(外家) 사람들은 에브라임
지파였을 가능성이 크다(Lange).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아직껏 그곳에 잔존하고 있던 히위 족속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1.2,p.361). 왜냐하면 세겜 성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전에 히위 족속 하몰과그 아들 세겜이 차지하고서 가꾸었던 성읍이기
때문이다(창 33:18-20; 34:2). 이중 전자의 견해를 취한다면 아비멜렉은 부계(父系)로든 모계(母系)로든 완전한 이스라엘인이니 그가 벌인 왕위
찬탈전은 동족간의 싸움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취한다면 아비멜렉은 히브리인과 히위인 간의 혼혈아인 셈이니 그 싸움은 이스라엘과 가나안
원주민 간의 싸움이 된다.
성 경: [삿9:2]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반역]
(주); 여룹바알의 아들...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 아비멜렉은 자기의 형제들이 한결같이 왕권을 탐하고 있다고 전제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사실 무근(事實無根)한 것이며 그의 지나친 피해 의식으로부터 연유되었다고 여겨진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사악한 야욕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도 동일한 생각을 지녔을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형제들로부터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先手)를 침으로써 화근을 아예 제거하고자 결심하였다. 요컨대, 아비멜렉의 경우는 스스로의 탐욕에 취하여 무고한 형제를 의심하고 나아가서 살해까지 하였으나(5절) 필경 칼의 보응을 받아처단되고 만다는 전형적인 악인의 행로를 보여 주고 있다(54절). 반면에 그리스도의제자된 성도들은 대립과 의혹과 투쟁으로 팽배해진 상황에서라도 오혀려 먼저 선을 베풀므로써 불화의 싹을 미연에 없애 버리고 화해의 무드를 조성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롬 2:7; 살전 5:15; 벧전 3:13).
(주);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 아비멜렉은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세겜을 음모의 근거지로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세겜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혈연에다 호소하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혈연은 이성보다 강하다'는 속담이 있듯이, 결국 세겜인들의 마음은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졌을 뿐만 아니라 바알브릿 신당의 수입금으로 아비멜렉을 지원하였다(4절). 그리고 아비멜렉은 그 지원금으로 건달패를
고용하여 요담 외의 모든 형제들을 살해하고 세겜의 왕이 되었다(5,6절).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아비멜렉은 그 아비 기드온의 후광(後光)과 어미의
혈연 및 지연 관계를 교묘히이용하여 자신의 발판을 구축하였던 셈이다. 이같은 왕위 찬탈 음모와 살상은 이스라엘 왕국은 물론 이방 왕정의 역사에
두루 점철되어 있다(왕상 16:10).
성 경: [삿9:3]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반역]
(주); 기울어서 - 이에 해당하는 '나타'(*)는 (손을) '뻗다', '돌아서다' 또는 '기울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지지하다'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이는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 기드온 가문에서부터 '돌아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는 일에 대하여 '지지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삿9:4]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반역]
(주); 바알브릿 묘 - 여기서 '묘'에 해당하는 '바이트'(*)는 '집', '지하 감옥','궁전', '감옥' 등을 뜻한다. 이를 KJV, RSV는 '집'(house)로 번역하였으며, VIN,Living Bible, 공동번역 등은 '신전'(temple)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언약을 맺은 바알브릿의 신당을 가리킨다. 8:33 주석 참조.
(주); 은 칠십 개 - 일반적으로 은 70세겔에 해당한다(NIV). 그러므로 이것을 무게로 따질 경우 약 800g 곧 210돈 정도의 무게가 된다. 왜냐하면 1세겔(Shekl)은 11.4g에 해당하는 무게이기 때문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주); 방탕하고 경박한 유 - '방탕한'에 해당하는 '레크'(*)는 '허무한', '무가치한'이란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무익한' 것을 추구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경박한'에 해당하는 '파하즈'(*)는 '자기 멋대로의', '방탕한', '억제할 수 없는'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성 경: [삿9:5]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반역]
(주);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 - '오브라'는 에브라임 지파의 북쪽 경계에 가까운 므낫세 지파의 성읍이다. 요세푸스(Josephus)는 오늘날의 '에브란'(Ephran)일 것으로 추정하나 위치가 정확치 않다(Keil & delitzsch). 6:11 주석 참조.
(주);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본래 기드온이 많은 부인을 두었던 탓이다(8:30,31).
다윗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다윗은 많은 처와 첩을 거느렸다(삼하 5:13). 그 결과 왕위 계승권을 빼앗기 위해 집안 싸움이 두 번씩이나
있었다(삼하 15:7-18; 왕상 1:25). 이러한 일부 다처제및 축첩 제도의 폐단에 관해서는 창 4:16-24 강해, '일부 다처제'와 창 16:1-6 강해.'축첩
제도의 부당성'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사람이 욕심을 품으면 자기 형제조차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을 서슴치 않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마도 야고보사도는 이러한 일을 두고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는지 모른다.
성 경: [삿9:6]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반역]
(주); 밀로 모든 족속 - 일반적으로 '밀로'는 다윗이 여부스 사람으로부터 빼앗은 다윗성에 속한 지역이다(삼하 5:7-9). 그러나 그곳은 세겜 성과 위치상으로 많이 떨어져있는 곳이며 다윗 때까지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곳이므로 본절의 '밀로'와 동일시 될수 없다. 오히려 본절에 해당하는 원어 '칼 벧 밀로'(*)는 문자적으로 '밀로의 모든 집'이니 이는 '밀로'라는 어떤 가문을 총체적으로 암시하는 말인듯하다. 그렇다면 아마 이는 아비멜렉의 외조부 전체 가문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1절). 그렇지 않다면 세겜 사람과 함께 이 가문이 특별히 언급될 이유가 없다. 한편 이밖에도 혹자는 '밀로'가 세겜 근방에 있는 요새나 망대일 것으로 추정하여 46,47절의망대와 동일시한다(Keil, Hervey, Cundall).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분명 세겜족이니 '밀로 모든 족속'과는 구분된다.
(주); 기둥 상수리나무 - '기둥'에 해당하는 '무찹'(*)은 '어떤 것을 세우다'란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념물' 내지 '기념비'를 의미한다(Keil).
고대 근동 지방에서나무는 우상 숭배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도 오래된 나무를 섬기는 무속 종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아마 세겜의 이
상수리 나무는 과거에 야곱이 자기 가족의 모든 우상을 그 밑에 파묻어 버렸던 상수리 나무일지 모른다(창 35:4). 아니면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베푼 것을 기념하여 그 아래에 기념비를 세웠던 여호와 성소 곁의 상수리 나무일지도 모른다(수 24:25,26).
성 경: [삿9:7]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그리심 산 - 세겜 남서쪽에 인접해 있으면서 북동쪽에 있는 에발 산과 마주보고 있는 산으로 해발 854km이다. 신 11:29 주석 참조. 이 산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을 향해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수 8:33-35). 그러나 참화(慘禍)를 면한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5절)이 이곳에서 그의 형제 아비멜렉과 그를 추종하는 세겜 사람들을 향해 저주를 선포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칼(ironical)한 일이다.
(주); 세겜 사람들아...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 - 본문에 밝혀져 있듯이 요담은 형제들을 복수하기 위해 은밀히 군사를
양성한다든가 하지 않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취했다(롬 12:19). 이로 보건대 아비멜렉의 선동적 언변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난다(2절). 한편 요담은 매우 창의적인 우화를 사용하여 논지를 전개하였는데(8-15절) 이러한 우화는 일종의 비유 문학으로 다수 대중을
설득시키기에 좋은 방법이었다. 즉 이후 전개되는 내용 중 8-13절은 왕이 되기를 거절한 나무들의 우화로서 기드온의 처신을 상기시킨다(8:22,23).
여기서 등장하는 감람 나무, 무화과 나무, 그리고 포도 나무 등은 나름대로의 귀한 재능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며, 분수를 넘어 과욕에 빠지지 않는
겸허한 인간상(人間像)을 대변하고 있다(롬12:3). 반면 14,15절에 등장하는 가시 나무는 아무런 자격이나 재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협박 공갈로
왕위를 서슴없이 가로챈 아비멜렉을 비유하고 있다(시 12:8; 전10:6). 요담의 이러한 경고는 그대로 성취되었다(22절 이하).
성 경: [삿9:8]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감람나무 - 즉 '올리브 나무'(olive)를 가리킨다(공동번역). 그 열매는 식료품, 연료, 목공품, 의약품 등 일상 생활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이 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은 왕과 제사장의 임직식 때 그들의 머리에 부어졌고 성막의 등대를 밝히는 데에도 사용되었다(민 4:16;
왕하 9:6). 그리고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감람 나무에 비유되기도 하였다(호 14:6). 이처럼 감람 나무는 매우 귀하고 유용하였기 때문에, 나무들 중
왕이 될 만한 자질을 충분히 구비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굳이 왕을 뽑을진대 감람 나무를 먼저 천거하는 것이 순리(順理)라 할 수 있었다.
성 경: [삿9:9]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 확실히 감람 나무에서 나는 올리브 기름은 하나님께 제사할 때 드려졌으며 (레 2:1-16), 왕과 제사장의 성직 수임식때 그들의 머리에 부어졌고, 성막의 등대를 밝히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출 27:20; 레24:2; 민 35:25; 삼상 10:1). 그러니 감람 나무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영화롭게 될 만한 일에 사용되었다.
(주); 내가...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 '요동하다'에 해당하는 '누아'(*)는 '떨다', '요동하다'라는 뜻 외에 '휘두르다'란 뜻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누아'는 '지배권'을 보여 주는 용어이다. 즉 감람 나무는 본절에서 자기가 모든 나무의 왕이 되어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성 경: [삿9:10]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무화과 나무 - 오늘날에도 팔레스틴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중의 하나이다. 그 열매는 흔히 식용으로 사용되나 일부는
약재(藥材)로도 사용된다. 팔레스틴에서는 1년에 9개월 내지 10개월 이상 계속해서 그 열매를 딸 수 있다. 더군다나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는 넓고
무성해서 더운 지방에서는 고마운 그늘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신약 시대 예수님의 비유에도 이 무화과 나무가 등장함은 우리가 익혀 아는
바이다(마24:32,33).
성 경: [삿9:11]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 - 무화과 열매는 그 당도(糖度)가 높다. 때문에 설탕이 귀했던 고대에는 설탕 대용으로 음식을 달게 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성 경: [삿9:12]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포도 나무 - 팔레스틴 지방에서 감람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같이 가장 많이 재배되는 수종(樹種)이다. 이곳에서 수확되는 포도는 품질도 아주
좋아 주변 여러 나라로 수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식수 사정이 좋지 못한 팔레스틴에선 중요한 음료수 역할을 한다.
성 경: [삿9:13]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 - 고대로부터 팔레스틴 및 시리아 지방은 포도주의 질이 좋고 양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헤브론 일대는 손꼽히는 포도주 산지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새로운 가르침을 '새 포도주'에 비유할 정도로(마 9:17) 이 포도주는
팔레스틴 지방민들의 일상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잔치 때는 물론(요 2:1-11) 평상시의 식사 때에도 음료수 삼아 포도주를
마신다. 이와 관련 시편 기자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 104:15)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이 포도주는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주(祭酒)로도 바쳐졌다(삼상 1:24; 10:3). 그밖에도 포도주는 곤비한 자들에게 활력을 주며(삼하 16:2) '비위와 자주 나는
병'(딤전 5:23)에 약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소독하는 소독약 대용으로도 쓰였다(눅 10:34). 이상과 같은 점에서 가히 포도주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술'이라 칭할 수 있다.
성 경: [삿9:14]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가시나무 - '들 가시'뿐 아니라(8:16) 가시 있는 관목(灌木)을 총칭한다. 이 나무는 저주를 상징하는 나무로서(창 3:18) 무화과 나무나 포도 나무처럼 식용으로 사용될 열매도 없고, 감람 나무와 같이 여러 용도로 소용되는 기름도 없다. 오히려 이 가시는 사람을 찌르며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요담은 이 가시 나무를,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하여 방탕하고 경박한 유를 사서 형제 70인을 죽인 아비멜렉(4,5절)에 비유하고 있다.
(주);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 이처럼 모든 나무들이 가시나무의 무익성과 그 해악에도 블구하고 굳이 가시 나무더러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배제하고 인간적 취향과 욕구에 따라스스로 절대적 보호망을
만들고자하는 부단한 인본주의적 노력을 상징한다. 역사상으로 그러한 보호망은 이념, 체제, 국가, 이방 종교, 재물 그리고 심지어는 예술 등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무모한 요청에 대해 가시 나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나섰으며 심지어 위협하는
자세를 보이기까지 했다(15절). 이처럼 지극히 우매하고 무모한 대중들의 여망(輿望)은 자기 분수도 모르는 파렴치한 지도자의 허세와 결탁하여
피차의 멸망을 초래케 하는 것이다.
성 경: [삿9:15]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내 그늘에 피하라 - 가시 나무는 본래 그늘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 가시 나무 밑 그늘에 피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 가시에 찔리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왕 삼은 것이 그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Moore).
(주); 레바논의 백향목 - 근동 지방에서 가장 값진 나무로 최고급의 건축 재료이다. 레14:4 주석 참조. 본절에서 이것은 특별히 세겜 성읍의
지도자들을 상징한다.
성 경: [삿9:16]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기드온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하나님 한 분 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8:22,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왕을 삼은 것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함이었다(2,3절). 따라서 이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결코 진실되거나 의로운 행동이 될 수 없다. 요담은 그들에게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주); 이것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 여기서 '보답'에 해당하는 '그물'(*)은 선악에 대한 보상, 답례 등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개인이나 민족의 선악 행위가 현실적으로 그대로 보응받는다고 하는 보응관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수 23:9-16). 이는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독특한 면모를 반영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현세적으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종국적으로 모든
것을 합당하게 갚아 주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소망을 지니고 있다(롬12:19). 한편 세겜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은공을
악행으로 갚았다(1-6절). 때문에 요담은 본절에서 이러한 잘못된 보응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현실적 정책이 다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잇는 것이다.
성 경: [삿9:17]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었거늘 - 이는 곧 기드온이 7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미디안(6:1)과 그 연합군들(6:3; 7:12)을 격멸하고
백성들을 구원한 것(7:19-21)을 가리킨다. 이처럼 요담은 자기 아버지 기드온의 공적을 언급함으로써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이
기드온의 공로를 무시한 처사임을 지적하고있다. 즉 세겜 사람들은 기드온의 가족들에게 은혜를 갚기는 커녕 그의 가족을 파멸시켰으니(4,5절) 배은
망덕한 죄를 범한 것이다.
성 경: [삿9:18]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고 - 기드온이 70 아들 중 막내인 요담만 유일하게 피신에 성공하였다(5절). 따라서 실제로 살해된 수는 69명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살인 미수죄 또한 살인죄나 다름없다. 따라서 70인을 죽였다는 말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주); 세겜 사람의 왕 - 이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동의하여 세운 왕이 아니라 세겜 사람들이 임의로 세운 왕이란 사실을 비꼬아 한 말이다. 또한
이는 아비멜렉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세겜 지역의 왕 노릇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저주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성 경: [삿9:19,20]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여기서는 세겜 사람들의 행위가 자신들이 행한 대로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요담의 예언이 언급되어 있다. 즉 이 예언은 진실과 의로움 없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세겜 사람들 사이에 반드시 분쟁이 발생하여 자멸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주);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 즉 세겜 족들이 기드온의 아들들을 몰살시킨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것이 전혀 사심(私心)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은 행위였다면 하나님께서 세겜족은 물론 아비멜렉도 형통케 하사 서로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세겜족의 소위(所謂)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한 이기적 행위였다. 16절 주석 참조.
(주);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 이는 이미 아비멜렉 스스로가 세겜족들에게 협박한 내용이다(15절). 즉 아비멜렉은 세겜족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경우 오히려 자신이 그들을 괴롭히리라고 위협했었다.
(주);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 즉 세겜족과 밀로족이 아비멜렉에 대항하여 오히려 그들 군박(窘迫)하게 만들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요담의 예언은 삼년 후 그대로 성취된다(22-27절).
성 경: [삿9:21]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요담의 우화]
(주); 브엘 - '우물'(well)이란 뜻이다. 민 21:16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시기로 약속한 후 말씀대로 물을 주신 우물이 있었던
곳으로 '브엘'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그곳은 요단 동편의 모압 족속 지경(地境)이다. 따라서 요담이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도망한 곳인 이곳
'브엘'과 동일한 곳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요담이 그리심 산(7절)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요단 동편 모압 지경에 까지 도망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벧엘 남쪽 '엘비레'(El-Bireh)와 동일시 하지만(Hervey, Goslinga), 이 역시 확실한
근거가 없다.
성 경: [삿9:22]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삼년에 - 본절에서 '다스리다'에 해당하는 '야사르'(*)는 사사들의 재판을 의미하는 '솨파트'(*)나 왕의
통치를 의미하는 '말라크'(*)와 다르다. 이는 방백들이 백성을 다스리며 지도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 사용된 용어이다(Keil & delitzsch). 따라서
본서의 저자가 '야사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3년 동안 밖에 다스리지 못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성 경: [삿9:23]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하나님이...악한 신을 보내시매 - 공동번역과 RSV는 '악한 신'을 '악령가'(evil spirit)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악한 성품이 없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악한 신을 보내신 것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의 근원이 되지 아니하시며 다만 당신의 주권적 섭리하에서만 악한 세력의 활동을 용인하고 계실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는 악이 조금도 있을 수 없다(요일 1:5). 다만 본절은 욥기에서와 같이(욥 1:12),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험당하신 장면에서와 같이(마4:1) 악령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활동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Matthew Henry, Lange, Pulpit Commentary).
(주); 세겜 사람들 - 여기서부터는 '세겜 사람과 밀로 족속'을 모두 일컫는 말이다(1절).
(주);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 요담의 예언대로(19,20절) 마침내 아비멜렉과 세겜 주민들 간에 깊은 반목이 조성되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아비멜렉은 자칭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아루마(41절)를 수도로 삼고서 점차 세력을 확충시키기에 여념이 없었을것이다. 한편 세겜 주민들은
아비멜렉으로부터 특별한 배려를 받지 못함은 물론 오히려 억압만 당하게 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비멜렉의 비열하고
포악한 성격으로 미루어 그가 세겜인들을 이익의 도구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정책하시는 섭리로
말미암아 그들간에 쟁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성 경: [삿9:24]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악한 일을 갚되 -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율법적인 심판을 위해 행해진 것이다(신32:35). 따라서 본절은 요담의 저주(19,20절)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주);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 아비멜렉은 역심(逆心)을 품고서 아비 집으로부터 등을 돌려 형제 70인을 살해한 장본인으로서의 죄를 면할 수 없었다(1-5절).
(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세겜 사람 - 세겜인은 아비멜렉의 역모(逆謀)에 동조하여 거사(擧事) 자금을 빌려 주었으며(4절) 또한 그를 왕으로
추대한 죄(6절)를 면할 수 없었다.
성 경: [삿9:25]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산들 꼭대기 - 그리심 산과 에발 산 및 세겜을 둘러싼 기타 산들을 가리킨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세겜으로 듸어오는 길목에 있는 산들이다. 7절 주석 참조.
(주); 그 길로 지나는 자를 다 겁탈하게 하니 - 아비멜렉에 대항한 세겜 사람들은 산적생활과 같이 산에 매복하여 있다가 아비멜렉의 세력에
비공식적으로 도전했다. 이로 보아 아비멜렉이 세겜 성을 다스리는 동안 결코 훌륭한 통치를 하지 못했음을 알 수있다. 왜냐하면 산적 떼는 과거의
역사에서 정치와 종교가 부패되어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나라에서 매우 많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삿9:26]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에벳의 아들 가알 - 본장에서 분열되어 가는 세겜 성의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정권욕을 채워 보려한 인물로만 언급되어 있을 뿐 그 외에 그에 대해서는 성경상에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그의 아비 이름인 '에벳'(*)이 '종' 또는 '노예'라는 뜻인 점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천민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 세겜 사람들이 그를 의뢰하니라 - 다시 말해 세겜 사람들이 가알을 아비멜렉에 대항하기 위한 대표로 생각했다는 의미이다.
성 경: [삿9:27]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그 신당 - '바알브릿'(4절) 또는 '엘브릿'(46절) 신당을 의미한다. 고대 제사 의식에서는 신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그곳에서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다. 특히 포도 수확기는 가장 즐거운 계절 중 하나였으므로(사 16:9; 렘25:30) 신당에서 배설(排說)된 연회는
축제 분위기였음에 틀림없다.
성 경: [삿9:28]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 이 표현은 아비멜렉과 세겜 성이 아무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다.
(주);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 가알은 기드온의 이름을 '여룹바알'로 부름으로써 우상 숭배에 빠진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을 더욱 적대시하도록 유도했다. 즉 '여룹바알'은 기드온이 바알단을 훼파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니(6:25-32) 이 사실을 기억한 세겜인들은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에 대하여 더욱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주);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 '하몰'은 히위 족속의 사람으로 그의 아들 세겜은 아브라함 당시 세겜 성의 추장이었다(창 34:2).
따라서 본절의 표현은 이방인의 후손을 섬기는 것이 차라리 아비멜렉을 섬기는 것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즉 가알이 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몰락하여 타족속들 사이에 흡수되어 버린 하몰의 후예와 아비멜렉을 비교하여 아비멜렉의 지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말이다. 한편 공동번역과 RSV는
본절을 '그 여룹바알의 아들과 그의 심복 스불이 도리어 세겜의 조상인 하몰 집안 사람들을 섬겨야 할 것 아닙니까'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세겜
성 거민들을 히위족 하몰의 후예들로서 당시까지도 그곳에 잔존하고 있던 무리로 본 데서 비롯된 번역이다. 1절 주석 참조. 그렇다면 이는 곧 세겜
성은 어디까지나 세겜 원주민이 다스려야 한다는 정통성(正統性)을 강조한 말로 볼 수 있다.
성 경: [삿9:29]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군대를 더하고 나오라 - 가알이 아비멜렉에게 선전 포고(宣戰布告)하는 장면이다(Keil & Delitzsch). 이 말은 가알의 추종자가 아비멜렉의
추종자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알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반역하는 일에 용기를 가지도록
했다(Goslinga).
성 경: [삿9:30]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그 성읍 장관 - '장관'에 해당하는 원어 '사르'(*)는 일반적으로 '방백' 또는 '통치자'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런데 28절에서 '장관'으로
번역된 원어는 '파키드'(*)로서 '대리인'(deputy) 또는 '감독자'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두 단어가 아비멜렉을 추종하는 스불에게 적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스불'은 아비멜렉을 대신해서 세겜 성을 다스린 관리였던 것 같다. 만일 그가 군대 장관이었다면 아비멜렉의 도움없이 자기의
힘만으로도 아직 완전히 규합되지 않은 가알을 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삿9:31]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사자를...가만히 보내어. 스불은 아비멜렉 휘하에서 그 성읍의 장관이었기 때문에 세겜의 정황을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불의 세력이 가알의 영향력을 꺾기에는 다소 부족하였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은밀하게 밀사를 보내어 아비멜렉에게 세겜의 상황을 알렸던 것이다.
(주); 성읍 무리를 충동하여 당신을 대적하게 하나니 - 가알이 세겜 사람이 베푼 연회석에 참석하여(26,27절) 반역을 도모했지만 아직 그들의
세력이 완전히 규합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스불은 그들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아비멜렉에게 가알과 그의 형제들에 의한 반역의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성 경: [삿9:32]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밭에 매복하였다가 - 본래 매복(埋伏)은 적의 공격을 기습적으로 반격하기 위한 전술이다(수 8:10-17). 그러나 여기서는 아침 일찍 세겜 성을
공격하기 위해 밤에 미리 세겜성 앞에 있는 밭에 숨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33절). 이러한 매복 작전은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전술 중의 하나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 당시, 아이성 전투에서 이 전술로 크게 성공을 거둔 바 있다(수 8:1-23). 한편 '밭'은 세겜 성읍 백성들이 농사짓는
곳으로, 그 성 밖에 있었다(42절).
성 경: [삿9:33]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의 반역]
(주); 아침 해 뜰 때에...엄습하면 - '엄습하다'에 해당하는 '파솨트'(*)는 본래'돌진하다', '가죽을 벗기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순간적으로 기습하여 닥치는대로 살육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스불이 아비멜렉에게 이른 아침 동틀 무렵에 이러한 기습 작전을 펴도록 충고한
것은 그때가 잠에 취했던 적들이 이제 막 깨어날 무렵인 바 미처 아무런 전투 태세를 갖추지 못한 적들을 쉽게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40절).
성 경: [삿9:34]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밤에 일어나 - 아비멜렉은 스불의 말에 따라 군대를 비밀리 이동하기 위해 밤을 이용했다. 밤에 이동함으로써 아비멜렉과 그의 추종자들은 손쉽게 세겜 성과 인접한 곳에 이를 수 있었다.
(주); 네 떼로 나눠 - 이처럼 많은 수의 군대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은 전술상의 이점이 있다. (1) 지휘하는 자가 그 대원을 통솔하기
쉽다. (2) 각각의 소단위 부대는 전투시 기동력을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 적에게 포위당할 위험이 적다. (4) 그리고 매복 공격도 쉽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아비멜렉은 기동력을 살려 군사의 이동을 신속하게 하고자 자기 부대를 네 떼로 나눈 것 같다.
성 경: [삿9:35]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가알이 나와서 성읍문 입구에 설 때에 - 본문에는 가알이 무슨 이유로 아침 일찍부터 성읍 문 앞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 행차(行次)에는 스불 뿐 아니라 일부 병사들도 동행하였을 것이다(36,39절). 추정컨대 아마도 앞서 아비멜렉에게 선전 포고를 하였던
가알(29절)은 적정(敵情)을 살펴보려고 성읍 문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도리어 아비멜렉이 가알을 치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성 경: [삿9:36]
주제1: [아베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가알이...스불에게 이르되 - 가알은 세겜 성읍의 장관인 스불을 따라 성읍 문 앞으로 나간 것 같다. 이로 보아 가알은 스불이 아비멜렉 편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음에 분명하다. 만일 스불이 아비멜렉의 대리권을 행사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가알은 그와 함께 아침부터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 백성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따른 무리 중 한 떼에 불과하다(34절). 이 무리들은
세겜 성에서 볼 때 가장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서 내려왔으므로 가장 먼저 언급되었다.
성 경: [삿9:37]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밭 가운데로 - 이 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달리 해석하고 있다. (1) '그 땅 가운데로' 또는 '그 땅의 중앙에'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KJV, RSV, NIV). 그 이유는 '가운데'에 해당하는 원어 '타부르'(*)가 '중앙으로'란 뜻이기 때문이다(겔 38:12). (2)'밭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타부르 하아레츠'(*)를 '그 땅의 중심'(Navel of the Land)이라는 의미를 지닌 지명으로 보는 견해이다(Goslinga, Hervey, Cundall). 그래서 혹자는 이곳을 '그리심 산'으로 주장하며(Goslinga), 또 어떤 사람은 세겜 앞의 특별한 언덕 지대의 지명으로 주장한다(Hervey, Cundall). 그러나 이 두번째 견해는 첫번째 견해에 비해 그리 타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타부르 하아레츠'란 말은 가알이 세겜 성문 입구에서 보았을 때 한 떼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고 있었으머(36절), 그 산 중앙으로 또 한 떼가 내려왔던 것과 연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주); 므오느님 상수리 나무 - 문자적으로 '점장이의 상수리 나무'란 뜻이다. 아마 이곳은 점장이가 그 상수리 나무에 앉아 점을 쳤기 대문에 이런
식의 이름으로 특별히 알려진 장소인 듯하다. 그러나 '므오느님'(Meonenim)은 세겜 성 인접지였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알 수 있는 사항이 없다.
성 경: [삿9:38]
주제1: [아비멜렉의 죄막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 다시 말해 아비멜렉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했던 그 용기(29절)가 어디 있느냐란 의미이다. 스불은 가알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가알의 자존심을 자극시켰다.
(주);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 - 만일 가알이 성문을 굳게 잠근 채 수비에만 전력을 기울였다면, 아비멜렉의 세겜 성 공략은 몇 배나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잘 알았던 스불은 의도적으로 가알의 자존심을 부추겨 정면 대결로 유도하였다.
성 경: [삿9:39]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압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세겜 사람들의 앞서 나가서 - 공동번역은 이를 '세겜의 어른들을 거느리고 앞장서 나가'로 번역하였다. 이는 곧 가알이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사태에 빠진 세겜 사람들을 추스리며 몸소 그들의 선두에 서서 싸움을 지휘하는 것을 가리킨다(PulpitCommentary).
성 경: [삿9:40]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서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 가알은 아비멜렉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자신의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나아갔을
것이다(39절). 그러나 이른 아침에 불시(不時)의 습격을 받은 그들은 전투를 위해 사전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출전했으므로
아비멜렉이 이끄는 네 떼의 사람들을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인명 손실을 내고 세겜 성문 입구까지 아비멜렉군에
의해 쫓겨왔던 것이다.
성 경: [삿9:41]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하고 - 아비멜렉이 이번 기회에 세겜 성 내부에까지 공격해 들어가지 않고 자기가 거하던 곳으로 되돌아간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돌아간 후 다시금 세겜 성을 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42-45절). 아마 이번에는 성내로 들어가서
싸우게 되면 자신의 군대가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할 것으로 판단했기에 되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루마'(Arumah)는 '높이', '높다'란
뜻이다. 이 역시 세겜 부근인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어쩌면 여호야김의 모친의 출신지인 '루마'(Rumah)와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왕하 23:26).
성 경: [삿9:42]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세겜 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이처럼 밭으로 나온 것은 아비멜렉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Keil). 이것은 아비멜렉이 더 이상 그 성을 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세겜 성 사람들이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그들의 성읍 방어는 허술했을 것이다.
성 경: [삿9:43]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아비멜렉이...그 들을 치되 - 아비멜렉은 일단 반역의 주동자를 제거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아루마로 퇴각하였다(41절). 그런데
이튿날 세겜의 백성들이 밭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42절) 그들 모두를 제거하여 후한을 없애버리기로 결의한듯하다. 아비멜렉은 이번에는 전술을
달리하여 군사를 세 떼로 나누어 매복시켰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 모두 성에서 나온 후 한 떼는 성문을 차단하고 나머지 두 떼는 성밖의 세겜
사람들을 무참하게 도륙(屠戮)하게 하였다(4절).
성 경: [삿9:44]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아비멜렉과 그를 좇는 떼는...성문 입구에 서고 - 아비멜렉이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한 목적은 그 성에서 나오는 자들을 칠 태세를 취한것 뿐
아니라 밖에서 그의 군대에게 쫓긴 자들이 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밖으로 나온 성읍 백성들을 제외하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밖에 있는 자들만 치면 성을 점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비멜렉은 바로
이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성 경: [삿9:45]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 아비멜렉이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자인 세겜의 장관 스불(31-33절)은 미처 그를 돕지 못한 듯하다. 만일 성내에 거하던 스불이 아비멜렉을 도왔다면 아비멜렉은 성읍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을텐데, 오히려 그는 끈질기게 저항하는 성읍 주민들로 인해 고전을 했다.
(주);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 소금은 식물의 결실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비멜렉의 이러한 행위는 그 성읍에 대해 영원한
멸망의 저주(신 29:23)를 선고하는 것을 상징한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일찍이 여호수아도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 그 무너진 성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저주를 선고한 적이 있다(수 6:26). 그리고 로마의 디도(Titus)장군도 A.D.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 성을 완전히 헐었던 적이있다.
성 경: [삿9:46]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세겜 망대의 사람들 - 많은 학자들은 이들을 밀로 족속(6,20절)과 동일시한다(Keil, Goslinga, Hervey).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망대'는 세겜 사람들이 포도밭에 세워 둔 막대를 의미하는 것 같다(사 5:2). 망대는 그 성읍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 파수막 역할을 하였다. 세겜 망대는 세겜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천 여 명도 거뜬히 운신할 수 있는 견고한 요새였던 것 같다(49절). 그래서 쉽게 점령할 수 없었던 아비멜렉은 화공법(火攻法)을 사용하여 공격하였던 것이다(6절).
(주); 엘브릿 신당의 보장 - '엘브릿'은 '계약의 신'이라는 뜻으로 '바알브릿'(4절;8:33)과 같은 의미이다. 8:33 주석 참조. 그리고 '보장'에 해당하는 원어 '체리아흐'(*)는 '동굴'이나 '지하 방'과 같은 은밀한 장소를 가리킨다. 공동번역은 이를 '밀실'로, RSV와 NIV는 '요새'(stronghold), Living Bible은 '은신처'(refuge)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주); 들어갔더니 - 이처럼 세겜성으로부터 세겜 망대로 피한 사람들은 다시 위기를 느끼고 엘브릿 신당의 은밀한 곳을 도피처로 삼았다. 즉
거기에는 바알의 도움이 있어 안전할 줄로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피처로 삼은 보장이 결국 그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47-49절). 악인의
종국은 이처럼 처참하고 가련하다(잠 3:25). 정녕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에 그들의 신 바알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반면에 주
여호와께서는 재앙의 날에 피난처가 되시며(렘 17:17), 구원의 산성이 되신다(시 28:8).
성 경: [삿9:47]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모든 사람의 모인 것이...들리매 - 본래 유능한 전술가는 적들을 한 곳으로 유인, 그곳에 모인 적들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작전을 편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은 스스로 가한 곳에 모였으니 이를 전해 들은 아비멜렉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성 경: [삿9:48]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살몬 산 - 지명의 뜻이 '그늘'인 점으로 보아 울창한 숲으로 덮힌 산인 듯하다(Luther, keil, Hervey). 혹자는 에발산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 그리심 산과 관련된 산꼭대기로 오늘날의 셀만(Selman)이라고도 한다(Goslinga). 그러나 성경에 달리 언급된
사항이 없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성 경: [삿9:49]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가알과 세겜을 진멸한 아비멜렉]
(주); 그곳에 불을 놓으매 - 아비멜렉과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꺾어 온 나무 가지로(48절) 신당 보장(保障) 앞에 불을 놓았다. 이것은 보장에 불을 붙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태워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불타는 나무의 연기로 질식시켜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연기로 견디다 못해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도 손쉽게 죽이기 위함이기도하다. 반면에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굴로 들어가게 되면 도리어 자기들이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좁은 굴 입구를 통해 굴 속으로 들어갈 수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굴 속에 있는자들은 방어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주); 남녀가 대략 일천 명이었더라 - 이로 보아 그 보장은 비록 지하이지만 매우 넓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그들은 항상 종교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우상숭배에 따른 음란한 행위도 벌어졌을 것이다.
성 경: [삿9:50]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최후]
(주); 데베스 - 세겜 북동쪽에서 약 18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이다. 혹자는 이곳을 오늘날의 '투바스'(Tubas)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Wycliffe, Robinson). 이곳 사람들도 세겜 사람들과 함께 아비멜렉에 대항하여 반역을 도모했음에 틀림었다.
성 경: [삿9:51]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최후]
(주); 성중에 견고한 망대 - '성 안에 있는 견고한 요새'란 뜻으로 데베스 성의 최후의 보루를 가리킨다.
(주); 그 성 백성의 남녀 - 단순히 '그성 백성들'이라 하지 않고 '남녀'란 말이 첨가되어 있는 점에 유의하여 혹자는 이들이 그 성에서 구별된
사람들 곧 그 성의 지도자들이라고 추정한다(Goslinga). 그러나 본절에서 특별히 남녀가 구별되어 언급된 것은 아비멜렉이 여인의 손에 죽게 된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성중의 모든 백성이 그 견고한 망대로 피했는데 그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은 후에 아비멜렉이 여인의 손에
죽게 되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53절).
성 경: [삿9:52]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최후]
(주); 불사르려 하더니 - 세겜인들을 공략할 때 사용하였던 것과 꼭 같은 화공법(火功法)을 사용하려는 것을 가리킨다. 49절 주석 참조.
성 경: [삿9:53]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최후]
(주); 한 여인이 - 남자들이 활과 창과 칼로써 항쟁하는 동안에 여인들도 그 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접근하는 적에게 돌을 떨어뜨림으로써 그 투쟁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주); 맷돌 윗짝 - 맷돌은 고대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가정 필수품이었다. 여인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곡식을 빻아 음식을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여인들은 그 망대로 피할 때에 이 맷돌을 가지고 갔던것 같다.
(주); 그 두골을 깨뜨리니 - 영역 성경 KJV는 조금 더 과장된 표현을 사용, '그의 두골을 완전히 부수니'(all to brake his skull)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머리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54절).
성 경: [삿9:54]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최후]
(주); 병기 잡은 소년 - 좀더 정확히 말해서 '병기 잡은 신복'이다. '소년'에 해당하는 '나아르'(*)는 '아이', '청년', '사환' 등을 의미하지만, 본절에서는 전쟁에 참가할 만큼 나이가 들었고 주인을 따르는 자이므로 '사환' 또는 '종'의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다윗도 사울의 병기 잡은 자로 그를 따라 다닌 적이 있다(삼상 16:21).
(주);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 할까하노라 - 용사가 힘 없는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매우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죽어 가는
그 순간에서도 명예로운 죽음을 원했던 것이다(Wycliffe, Pulpit Commentary). 이와 유사하게 블레셋과 싸움을 하던 사울은 치명상을 입은 후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자기의 병기든 자로 하여금 자기를 치게 한 일이 있다(삼상 31:4).
성 경: [삿9:55]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최후]
아비멜렉을 추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목격한 후 더 이상 싸워야할 명분이 없으므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아비멜렉의 죽음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주); 이스라엘 사람들이...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 지도자를 잃은 아비멜렉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처럼 명분이 정당하지 못한 집단은
한때 흥왕하는 듯하여도 쉬 와해되기 마련이다. 반면에 진리 안에서 모인 무리들의 결속력은 가히 영구적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인 무리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심지어 핍박을 당하여 소멸되기도 하지만, 진리는 영원하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또 다시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이는 우리 성도들은 자칫 모임의 순수성이 흐려지지 않도록 늘 힘써야 할 것이다. 한편 아비멜렉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동안 세겜인과 아비멜렉 간에 진행되었던 내분(內紛)은 끝이 난다.
성 경: [삿9:56,57]
주제1: [아비멜렉의 죄악과 최후]
주제2: [아비멜렉의 최후]
여기에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아비멜렉의 악행과 그를 추종한 세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주);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 -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가문에 대한 세겜 사람들의 반감(反感)을 고조시키기 위해 짐짓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여룹바알'로 부르는 악을 범했었다(9:2). 또한 그는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자기 아버지 기드온이 거절한 왕위를 차지하므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악을 저질렀었다(9:2-6).
성 경: [삿10:1]
주제1: [아스라엘의 범죄]
주제2: [사사 돌라와 아일]
(주); 부아의 아들 돌라 - '부아'는 '입', '말'이란 뜻이다. 그리고 '돌라'는 '곤충','벌레'란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소사사(小士師)인 '돌라'(tola)와 그의 아비 '부아'(Puah)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성경에 달리 언급된 것이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사항은 '부아'와 '돌라'라는 이름은 '잇사갈'이 낳은 두 아들의 이름과 같다는 점이다(창46:13). 이와 같은 현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기 자식들의 이름을 이미 족보에 실려 있는 선조의 이름을 따라 지어 주던 풍습에서 기인된 것이다(눅 1:61).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25:19-26 강해, '이름 짓기'를 참조하라.
(주);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 돌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어떤 대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는지 본절에는 아무 언급이 없다. 아마 아비멜렉으로 인한 종족끼리의 분쟁이든지(Hervey) 아니면 사소한 국지전(局地戰)이었을 것이다(Goslinga).
(주); 에브라임 산지 사밀 - 돌라는 잇사갈 지파에 속해 있으면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살았다. 돌라가 왜 자기의 기업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혹자는 미디안인들의 압제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들이 에브라임 산지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지만(Goslinga) 확실치 않은 주장이다. 한편
'사밀'이 '사마레이아'(*)로 변역되어 잇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후대의 '사마리아'(Samaria)와 동일 지역이 아닌가 추정된다. 아무튼 본절에서
저자가 '에브라임 산지'란 말을 덧붙인 것은 '유다 산지 사밀'(수 15:48)과 구별하기 위함이며, 돌라가 자기 기업의 땅을 떠나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우거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성 경: [삿10:2]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사사 돌라와 야일]
(주); 사사가 된 지...죽으매 - 이처럼 돌라의 업적이 지극히 간략하게 소개된 후 곧바로 그의 죽음이 언급되고 잇는 까닭은 본서 기자가
구속사(救速史)의 흐름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 사건들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삿10:3]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사사 돌라와 야일]
(주); 그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아하라이우'(*)는 '그 사람 다음에'란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돌라를 이어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단어만으로 돌라가 죽자 곧바로 야일이 사사가 되었는지의 여부를 파악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이 시간적인 연속을 나타내기 보다는 계승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길르앗 사람 야일 - '길르앗'(Gilead)은 요단 동편 지역의 영토, 혹은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이
시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되었다(수 32:33-42). 5:17 주석 참조. 그러나 성경에서 '길르앗 가족'(민
26:29)의 후손을 가리킨다. 따라서 돌라를 이은 사사 '야일'은 길르앗 원주민이 아니라 므낫세 지파 출신이다. 한편 야일(Jair) 역시 돌라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소사사'로 그의 행적에 대한 별다른 성경적 기록이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의 뜻은 '비추는 자', 깨우치는 자'이다.
성 경: [삿10:4]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사사 돌라와 야일]
(주); 어린 나귀 삼십 - 고대 근동 지방에서 어떤 사람이 나귀를 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5:10; 12:14). 따라서 야일의 아들 30명이 각기 자기 소유의 어린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은 당시 야일이 사사로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부와 명예를 얻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성읍 삼십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더욱 입증된다.
(주); 하봇야일 - '야일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과거 모세 당시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길르앗의 촌락들을 점령한 뒤 그곳 성읍들에 붙인
새로운 이름이다(민32:41; 신 3:14). 따라서 사사 야일은 자기 선조 '야일'이 취하여 '하봇야일'이라 부른 그 성들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 결코
'하봇야일'이라는 이름이 사사 야일 당시에 붙여진 새로운 지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 경: [삿10:5]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사사 돌라와 야일]
(주); 가몬 -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phus)의 주장에 따르면 '가몬'(Camon)은 길르앗의 한 성읍일 것이다(Hervey). 뿐만 아니라 이성읍은
야일이 소유하고 있는 30성읍(4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Lange, Keil & Delitzsch). 그러나 이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갈릴리 호수 동남쪽의
'캄'(Qamm)이나 동북쪽의 '쿠메임'(Qumeim)이 바로 이 '가몬'일 것으로도 추정한다.
성 경: [삿10:6]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
(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 '다시'에 해당하는 '야사프'(*)는 '증가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패역해져 갔음을 의미한다. 아무튼 본절은 사사 시대의 시대적 정황(情況)이 어떠하였는지를 여실히 증거해 준다. 그리고 사사 야일이 죽은 후 그의 뒤를 잇는 사사가 나오지 않으므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종교적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음도 보여 준다(2:18,19).
(주); 바알들과 아스다롯 - 가나안 지방의 대표적인 신들이다. 즉 '바알'들은 가나안 당의 남성 신을 가르키며, '아스다롯'은 여성 신을 대표적으로 가리킨다. 혹자는 '아스다롯'을 '아세라'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엄연히 구분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3과 3:7 주석을 참조하라.
(주); 아람의 신들 - '아람'(Aram)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의 영토 전역에 걸쳐 살고 있었던 셈족의 한 부류인 아람족과 그들의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대개는 좁은 의미로 시리아 지역과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가리키는 바 대부분의 영역본들은이를 '시리아'(Syria)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이 아람 사람들은 대체로 가나안의 헷족속이 섬기던 신들을 섬기었다. 그 대표적인 신들로는 폭풍신 '아닷'과 '테슛, 그리고 태양여신 '아린나' 등이 있다. 2:11-23 강해, '고대 근동의 신들' 참조.
(주); 시돈의 신들 - '시돈'(Zidon)dms enfh(Tyre) 북쪽 36km 지점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이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아스다롯'과 '에쉬문'(Eshmun)을 섬겼었다. 그런데 이중 '에쉬문'은 두로의 '멜카르트'(Melqart)와 더불어 근동 지방에서 많이 숭배되던 '풍요의 신'이었다.
(주); 모압의 신들 - 모압의 신으로는 전쟁의 신인 '그모스'가 유명하다(민 21:29; 왕상11:7; 렘 48:7).
(주); 암몬 자손의 신들 - 암몬의 국가 신은 '몰록'(Moloch)으로, 일명 '말감'(Malcam)또는 '밀곰'(Milcom)으로도 불리웠다(왕상 11:5,7,33; 습 1:5; 렘 49:1).
(주); 블레셋 사람의 신들 - 블레셋의 국가신으로 성경에 언급된 것은 '다곤'(Dagon)이다(16:23; 삼상 5:2-7). 이상과 관련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1-23 강해, '고대 근동의 신들'을 참조하라.
성 경: [삿10:7]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
(주);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 여기에서 '손에 팔다'는 말은 '손에 붙이다'는 표현과 더불어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통한
'심판의 형벌'을 나타내는 말이다. 2:14 주석 참조. 한편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들어 쓰신 열국은 주로 팔레스틴 북방
지역의 민족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 중 북쪽 지역 사람들이, 곧 납달리, 아셀, 스불론, 잇사갈, 므낫세 지파가 고통을
당했었다(3:8; 4:2; 6:33). 그러나 이제는 블레셋과 암몬 같은 팔레스틴 남방지역의 민족들을 들어 쓰고 계시는데, 이로 인해 이제는 주로 남쪽
지역에 사는 지파곧 유다와 베냐민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가 압제를 당하게 되었다(9절). 특히 암몬 사람들은 이전에 모압 왕 에글론 및 아말렉
사람들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압제한 적이 있었다(3:13). 그리고 블레셋은 이제부터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나라로
등장한다(13:1).
성 경: [삿10:8]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
(주);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 - 이는 요단 강 동편에서 르우벤, 갓, 므낫세반 지파가 그 곳 거민을 쫓아내고 기업으로 취한 땅을 가리킨다. 3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 족속들을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창 15:16).
(주); 학대를 당하였고 - 이 말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을)흩어 압제했다' 라는 의미이다. 즉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혹독한 압제를 가하였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제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삿10:9]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
(주); 암몬 자손이 또...에브라임 족속을 치므로 - 이처럼 암몬족이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하던 이스라엘 지파들을 졈령한 후 다시금 요단 강을 건너와 팔레스틴 남부를 점령한 것은 당시 저들의 세력이 한참 흥왕하던 때였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본래 이들 암몬족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자손들로서(창 19:38) 이스라엘과는 서로 화평할 수있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나라는 역사상 계속적으로 심한 반목(反目)과 적대 관계를 이루었다.
(주);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단 서편에서는 블레셋에 의해, 동편에서는 암몬 자손에 의해 공격받아 압제를
당했으므로 더욱 심한 고통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곤고가 심하였더라'에 해당하는 '야차르'(*)는 '짓누르다', '쥐어 짜다'라는 의미로
적들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학대받은 것을 가리킨다. 이는 곧 과거 한일 합방 이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압제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성 경: [삿10:10]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이스라엘의 회개]
(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 여기서 '바알들'은 단순히 가나안의 남성 신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언급된 여러 나라의 신들을 모두 의미한다(6절). 한편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호소할 때 단순히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라는
표현만이 사용되었으나(3:9; 4:3; 6:6), 본절에서는 이와 관련 그들의 죄목이 상세히 언급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다른 때보다 더 간절했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삿10:11]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이스라엘의 회개]
(주); 애굽 사람 - 여기서 '애굽 사람'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신 사건(출 1-14장)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Matthew Henry).
(주); 아모리 사람 - 이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노정 가운데 정복한 족속 중 하나이다(민 21:21-26).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노정(路程)을 방해하였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이스라엘에 의해 격멸당했었다.
(주); 암몬 자손 - 모압 왕 에글론과 동맹을 하여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사람들이다(3:13). 그러나 이때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에홋을 보내사 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3:15-30).
(주); 블레셋 사람 - 이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마 에훗의 뒤이은 사사 삼갈이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던 사건과 관련된 듯하다(3:31).
성 경: [삿10:12]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이스라엘의 회개]
(주); 시돈 사람 - 이들은 사사 시대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적도, 이스라엘에 의해 공격당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여기서 이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적으로 아셀과 납달리 북쪽에 거주했던 이들은 아마 하솔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압제할 때(4:1-3) 그를 도왔던 것 같다(Keil, goslinga, Hervey). 장차 이스라엘을 압제할 열국 가운데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까닭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3:3).
(주); 아말렉 사람 -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그들을 대적했던 족속으로(출17:8-13) 사사 시대에도 미디안 족속과 함께 이스라엘을 압제한 적이 었다(6:3).
(주); 마온 사람 - 70인역(LXX)에는 '마디암'(*), 즉 '미디안'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1.2,p.376). 그런데 수
15:55에서 '마온'은 유다 지파의 기업에 속해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삼상 23:24에서도 그와 같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대하
26:7에서는 이곳이 사해 남쪽과 페트라 동쪽 지역으로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의 '마온' 역시 유다 지경에 속한 '마온'이 아니라 요단 동편
사해 남쪽에 있는 '마온' 곧 미디안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마온'과 '미디안'을 동일시한다(Keil,Goslinga, Hervey,
Cundall). 물론 혹자는 이 '마온'을 미디안이 아니라 아말렉 족속과 같은 유목민 중 한 부족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Cassel) 그 근거는 회박하다.
성 경: [삿10:13]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이스라엘의 회개]
(주);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매우 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자
다시금 사사 입다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11장). 따라서 본절의 말씀은 우상 숭배에 젖을 대로 젖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강한
경고(히 6:4-6)로 이해될 수 있는데, 궁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간섭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성 경: [삿10:14]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이스라엘의 회개]
(주);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 본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은 우상 숭배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즉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우상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환란 가운데서 구원할 수 없는 헛된 것들임을 강조한다(Wycliffe). 모세도 우상들은 헛되며, 인생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것들이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신 32:37,38).
성 경: [삿10:15]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이스라엘의 회개]
(주);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 이러한 고백은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깊이 깨닫고 있음과 (2) 자기들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싶을 깊이 인지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이제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려 한 자세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진정한 회개의 마음을 갖게 되었음을 증거해 준다.
(주); 오늘날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 - 지금 막 하나님의 어떠한 처벌이든지 달게 받겠다고 고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적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조금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압제를 당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본절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대신 이는 자신들을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영광받게 해달라는 간구인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성 경: [삿10:16]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이스라엘의 회개]
(주);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1)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다(10절). 그것도 죄를 고백하되 아주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2)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15절). (3) 그리고 죄의 고백과 더불어 한 걸음 더나아가 자신들이 고백한 그 죄로부터 떠났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거친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6-18절 강해, '참된 회개의 본'을 참조하라.
(주); 여호와께서...마음에 근심하시니라 -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원수의 압제를 당하는 그들의 곤고한 삶을 보시고서
그들을 구원하시려 마음 먹으신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근심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차르'(*)는 '견디지 못하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그들의 곤고한 삶을 보시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성 경: [삿10:17]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암몬과의 전투]
(주);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쳤으므로 - 이처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와서 전쟁 준비를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18년 동안 암몬 사람들에게 복종하며 그들을 섬기다가(8,9절) 이제 반역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으로도 피정복민들이 정복 군주에게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면 그 군주는 군사를 이끌고 와서 피정복민들을 재차 공격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왕하 17:3-6; 24:1-3).
(주); 미스바 - 성경에는 지명은 동일하나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는 '미스바'가 대여섯군데나 있다(수 11:3,8; 15:38; 18:26; 삼상 22:3).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미스바'는 사사 입다가 거주하던 곳이다(11:34).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얍복 강 북쪽에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이곳은 과거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과의 언약을 기념하여 '증거비'를 세웠던 곳인 '미스바'와 동일지일 가능성이 크다(창 31:49).
성 경: [삿10:18]
주제1: [이스라엘의 범죄]
주제2: [암몬과의 전투]
(주);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할꼬 - 암몬 사람들과 대치 상태에 들어갔으나 길르앗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막상 선두에 나서서 그들과 싸울 만한 인물이 없었다. 고대 전쟁에서는 선두에서 백성들에게 싸울 용기를 북돋아 주는 장군이 반드시 요청되었다. 그리고 그 장군이 전쟁 중 죽게 되면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도망하게 된다(삼상 17:50-52). 이러한 이유로 길르앗 백성들은 암몬 사람과 제일먼저 나가서 싸움을 시작할 만한 인물을 찾았던 것이다.
(주); 그가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나아가 암몬 사람과 싸워 이기는 사람을 길르앗 땅의 우두머리로
삼겠다는 의미이다.
성 경: [삿11:1-3]
(주);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 (1절) 버네이(C.F. Burney)는 말하기를, "여기서 지방 이름("길르앗")이
입다의 아버지로 인격화(人格化) 되어 나온 것을 보면, 1절 하반에서 2절까지는 후대인의 삽입구이고 본래의 원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Here the district is personified as father of Jephtha-a mark of late for vv. I -2, which can have formed no part of the original
narrative.-The Book of Judges, with Introduction and Notes, 1970, p.308). 그러나 버네이의 이와 같은 추측은 합당치 않다. 사람의 이름이 지방
이름과 같은 실례는 역사상에 많이 있다. 특별히 민 26:29, 32:40을 참조하라. 그러면 "입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1) 기생의
아들이요(1절), (2) 이복(異腹) 형제들에게서 축출된 자요(2절), (3)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하류배(下流輩)와 함께 사는 자였다(3절). "돕"(*
)이란 땅은 요단강 동쪽에 있는 곳이다. 삼하 10:6, 8 참조. "잡류"란 말(* )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이 말이 생활 안정을 얻지 못하고 유리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실정이 입다의 처지와 같기 때문에 그들이 그와 동조했을 것이다. 삼상
22:1-2 참조.
성 경: [삿11:4-9]
(주); 당신이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 (6절 끝) 암몬 족속의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길르앗 장로들" "입다"를 그들의 "장관"(* ), 곧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였다.여기 이른 바 "장로"는 인도자를 가리켰을 것이다.
(주);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 (9절 하반) 입다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는 진실한 신자였다(11절 하반). 진실한 신자가
사람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고 고독한 중에 신앙을 지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시는 한 때가 오는 법이다. 그를 박대하던 자들이
그에게 절하게도 된다. 미 7:7-8; 계 3:9 참조. 요셉을 이방인들에게 팔아버린 그 형들은 마침내 그에게 찾아와서 그에게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다(창 37:27-28, 42:6). 입다는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였다. (1) 그는 길르앗 장로들의 약속을 신중히 취급하며 그들의 진실성을
검토하였음.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란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라고 하였다(7절). 그 장로들은 길르앗의 정치적 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입다의 형제들이 그를 내어쫓는 불의한 처사를 알고도
그대로 방임, 혹은 찬동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임을 추궁하는 입다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입다를저희의 최고 지도자로 삼겠다고 다시 약속한 것이다(8절). 그들은 변동 없이 끝까지입다를 최고
지도자로 삼을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다(10절). (2) 그는 "큰 용사"였으나 자기힘으로 승리할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였음.
그는 믿음으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9절 하반). 이 말은, 그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믿은 증거이다. 삼상 17:47 참조. (3) 그는 암몬 족속과 전쟁 할 책임을 지고 하나님께 그의 사정을 고하며 기도하였음. 그는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4) 그는 암몬 자손을 반격하기 전에 먼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하여 암몬 왕에게
사신(使臣)을 보냈다(12-27). 그러므로 봉크(C. Vonk)는 말하기를, "입다는 신앙이 진실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Jefta nietalleen eengelooig - man was--maar ook een wijs en voorzichtig man.-De Voorzeide Leer, Deel I, De Heilige Schrift,
Inleiding op De Profeten, Jdzua, 1973, p.563).
성 경: [삿11:12-28]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전쟁 없이 외교(外交)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암몬 왕은 "아르논에서 부터 얍복과 요단까지"의 영토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고 하면서 그땅을 반환하라고 주장하였다(13절). 그 때에 입다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길게 변론하였다. (1) 이스라엘은 언제나다른 민족들을 침략한 적이 없다고 함(16-18). 이스라엘이 일찌기 광야를 통과하던 때에도 에돔에게나 모압에게나 화평스럽게 행했다고 하였다. 민 20:14-22; 신 2:9 참조. (2)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과도 이스라엘은전쟁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그가 선제공격(先制攻擊)으로 이스라엘을 침해하였다는 것(19-22). 그때 전쟁의 책임은 헤스본 왕 시혼에게 있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하여 시혼왕의 땅(아르논에서 얍복, 요단까지)을 취하도록 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 땅은 암몬 족속의 소유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유라고 설명하였다(23-27).
(주);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가하냐 - (23절 하반) 여기 "네가"란 말(* )은 역설체(力設體)인데 암몬 왕을 힘있게 지적하는 것이다. 이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암몬 왕 "네가" 차지할 권리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주);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 (24절 상반) "그모스"(* )는 모압 신(神)인데(민 21:29; 왕상 11:7, 33; 렘
48:7, 13, 46), 그때의 암몬 왕이 혹시 모압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암몬 족속의 신 "밀곰"(*)(왕상 11:5)을 관설하지 않고, 모압의 신
"그모스"(* )를 관설한 듯하다. 여기서 입다가 그모스 신을 믿을 만한 신이라고 간주하는 뜻에서 관설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모스에 대한 그의
관설에 있어서 그의 중심에는 그것을 헛된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다만 이론을 위하여 그것을 관설한 것 뿐이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다(27절).
성 경: [삿11:29-32]
(주);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 (31절) 이것은 입다가
서원(誓願)하는 말이다. 그는 암몬 족속과 전쟁하기에 앞서 여호와께 이와 같은 서원을 올렸다. 여호와께서 이번 전쟁에 승리케 해주시면 집에
돌아가서 가장 먼저 영접 나온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 자 "번제"(* )는 반드시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기서는 그저 바쳐 올리우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한 것이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엄금되었다(레 18:21,20:2-5; 신 12:31, 18:10). 입다는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혹은 "밀곰"이라고도 함,
왕상 11:5,33)을 섬겼는데(왕상 11:7), 저희 자녀를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다. 그 때에 입다가 암몬을 대적하면서
저런 미신도 미워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성 경: [삿11:35,36]
(주);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 (35절) 입다가 승전하고 집으로 돌와왔을 때에 그의 외딸("무남독녀")이 누구부다도 먼저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이 때에 입다는 그의 서원한 것 때문에 걱정하였다. 여기 이른 바 "슬프다"란 감탄사(感歎詞)는 히브리어로 "아하"(* )인데 그저 염려를 나타내는 말이다. "슬프다"는 말은 너무 심각한 불행을 표현하므로 여기서 적당한 번역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너는 나를 당황케 만드는구나"라고. 우리 한역의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번역은 역시 너무 심각한 불행에 대한 표현이다. 35절 상반의 히브리어를 보면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죽임이 될 지경의 불행을 염두에 둔것이 아닌 것 같다.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성전 봉사에 평생 바침이 되어 그(입다)의 기업이 계승되지 못하게 됨을 그 중점으로 하였을 것이다.
(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 (36절) 입다의 딸은 이 말로써 그
자신의 인격을 보여 주었다.(1)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며, (2)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효도를 행하였고, (3) 의리(義理)를 위하여는 자신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성 경: [삿11:37-39]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입다의 딸이 죽어 번제물이 되었는가 함이다. 37절 하반과 38절 하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 )은, 실상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또 39절 하반의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 한 말(* )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 이되었다는 것(31절의 "번제"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 출 38:8참조. 중세대(15세기) 이전에는 입다의 서원 실행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중세대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도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입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할 인물이 아닌 까닭이다. 그는 자기를
등용하려고 찾아 온 길르앗 장로들의 청원도 신중히 검토한 후에 받아 들였었다(7절). 9절 참조. (2) 입다가 암몬 왕에게 전한 말(15-26)을 미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적(事蹟)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만큼, 그가 구약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구약
율법에 자녀를 불로 태워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되어 있다(레 18:21, 20:2-5). (3) 입다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인물이었으니
만큼(9절 끝, 11절 끝), 그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죄악을 범했을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일 입다가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죄를 범하였다면 그는 레
20:2-5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사사(士師)로서 6년 간이나 역사하고 죽었다(12:7). (4)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이 입다를 신앙 인물로 칭찬하기 때문이다(히 11:32). 우리는 입다의 행적에서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
용감하게 실행한 그의 진실성과 및 그의 신앙 용단이다(35절 하반, 39절 하반). 그리고 그의 실행력(實行力)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딸도 경건의
법에 잘 순종한 사실이다(36절 상반). 시 15:4 참조.
성 경: [삿11:40]
(주); 나흘씩 애곡하더라 - 델리취(Delitzsch)는 여기 이른 바 "애곡하더라"란 말의 히브리어(* )를 "찬송하더라"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하였다.
버네이(Burney)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한 것은, 신화적(神話的) 근거에 의하여 지켜진 축제(祝祭)였다고
한다(The Book of judges wiht Introductionand Notes, 1970, pp.332-224).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구약 성경의 역사성(歷史性)을 그대로 받지
않는 잘못된 학설이다.
성 경: [삿12:1]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에브라임과 길르앗 족속 간의 전쟁]
(주); 북으로 가서 - 이의 원어 '야아보르 차포나'(*)는 '북쪽으로 건너서' 또는 '사본으로 건너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차포나'의 명사형인 원어'차폰'(*)은 '북쪽'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유 명사로서 '사본'(Zaphon)이라는도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KJV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과 공동번역은 '차포나'를 '사본으로'라고 번역했다(RSV, NIV, Ling Bible). 이것은 '사본으로'(*, 에이스 세피나)라고 번역한 70인역(LXX)의 전통을 따른 번역임에 틀림없다. 한편 '사본'은 갓 지파의 땅인 숙곳(Succoth)근처에 위치해 있다(수13:27). 이곳은 미스바(11:34)와도 별로 멀어지지 않은 곳이니 본절을 '사본으로 가서'로 번역해도 큰 무리는 없다(Wycliffe, 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Commentary, Vo1. 2,p. 396).
(주);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 에브라임 사람들은 사사 기드온에게 했던대로 압제자를 쫓아낸 입다에게도 시비를 걸어왔다(8:1). 여기서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의 승리와 온 길르앗의 머리로서(11:11) 받는 그의 명성을 시기했다(Goslinga). 다시 말해 그들은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하는 욕망에서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주);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와 싸워 그가 길르앗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지 못하도록 멸하겠다는
의미이다. 특히 '불'이란 말은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의 우화에서도 '싸움'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9:15), 성경 전체에서는 종종 '징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8; 수 6:24; 7:25; 8:19; 11:9,11). 아무튼 본절은 당시 에브라임 지파의 타락된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들은 마치 대적을
진멸하려고 나서는 원정군인양 무리를 지어 먼길을 행군해 왔을 뿐 아니라 입다에게 다짜고짜로 잔혹한 협박을 가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삿12:2]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에브라임과 길르앗 족속 간의 전쟁]
(주); 내가 너희를 부르되 - 11장에서는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우기 전 에브라임 지파를 소집했다는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혹자는 에브라임 지파가 암몬과의 싸움에 소집통고를 받았으나 입다가 전군대의 지휘관이 되었으므로 이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Keil, Hervey). 항상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에브라임 지파의 성격으로 보아 이러한 해석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주);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하므로 - 사실상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이러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1) 암몬
자손과의 싸움은 암몬자손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받고 있던 요단 동편 지파들에 의해 주도되어야 했으며,(2) 반드시 입다가 에브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호소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잘못을 확실하게 지적해 주기 위해서 본절과같이 말했던
것이다(Matthew Henry). 한편 본절은 의미상 '너희는 내가 바라던 도움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다'로 해석될 수 있다(Living Bible).
성 경: [삿12:3]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에브라임과 길르앗 족속 간의 전쟁]
(주);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 입다와 암몬족 간의 전쟁이 매우 치열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입다는 여유있게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사력(死力)을 다해 싸워야만 했다. 따라서 그가 얻은 승리와 영예는 고된 싸움 끝에 얻는 정말로 값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입다는 겸손히 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이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서도 입다의 영광을 시기한 에브라임 지파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손에 붙이셨거늘 - 입다는 그의 승리에 대한 근본 원인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에브라임 사람들의 질투심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말은 입다가 그들의 입을 막는 최후의 진술로서 매우 적절했다.
성 경: [삿12:4]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에브라임과 길르앗 족속 간의 전쟁]
(주);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 아마도 길르앗 사람들은 암몬족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 제각기 고향으로 흩어졌을 것이다(11:32-34). 따라서 입다가 에브라임 지파의 도전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그들을 소집하는 일이 필요하였을 것이다(Wycliffe).
(주); 너희 길르앗 사람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 본질은 (1)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에서 도망친 분파주의자 또는
망명자들이라는 의미와, (2) 길르앗 사람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근거없는 트집으로서
길르앗 사람들을 무시한 처사이므로 길르앗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므낫세 지파의 한 분파로서 마길의
아들 길르앗의 후손이지(민 26:29) 결코 에브라임 지파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받은 길르앗
사람들은 대동 단결하여 에브라임 지파를 단호히 응징하였던 것이다(5,6절).
성 경: [삿12:5]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에브라임과 길르앗 족속 간의 전쟁]
(주); 요단 나루턱 - '나루턱'은 나룻배가 들어와서 닿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에 사용된 원어 '아바라'(*)는 배로 건너는 나루(ferry)가 아니라 수심이 얕아 배 없이 건널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종의 여울(ford)과 같은 곳이다. 당시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 강은 그 폭이 27m가량, 깊이가 1-3m가량이었다. 따라서 아주 얕은 곳은 배 없이도 충분히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주);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페리테 에프라임'(*)은 '에브라임으로부터 도망하는 자'란 의미로서 4절의
'에브라임에서도망한자'와 같은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와 관련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에게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고 말한 것으로
추정한다(Gosinga, Hervey).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되면 길르앗 사람들이 나루턱을 건너 에브라임 지파 땅으로 도망치려는 사람이 아닌 단순히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처치했다는 결론이 나온다(6절). 그러므로 위와 같은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저자는 길르앗 사람을
'도망자'로 비난했던 에브라임 사람들(4절)이 그들의 비난과는 반대로 도리어 자기들이 도망자가 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본절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삿12:6]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에브라임과 길르앗 족속 간의 전쟁]
(주); 십볼렛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쉽볼렛'(*)은 '시내' 또는 '곡식 이삭'을의미한다. 여기서는 요단 강의 여울목에서 발생된 사건과 관련이 있으므로 '시내'란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1. 2, p. 397).
(주); 씹볼렛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십볼렛'(*)은 특정한 의미가 없다. 혹자는 이것이 '무거운 짐'을 뜻할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분명치 않다. 여기서는 단지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내의 의미인 십볼렛'을 발음할 때 '쉰'(*)을 발음하지 못하고 '사멕'(*)으로 발음한 것일 뿐이다(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이와 같은 동일어에 대한 발음상의 차이는 이스라엘의 경우에서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각 지방의 특징적인 발음이 전통적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서도 표준말 '의'가 어떤지방에서는 '어'로, 또 어떤 지방에서는 '으이'로 발음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 요단 나루턱에서 이 정도의 에브라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며 여러 차례의 간헐적(間歇的)인 혈전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첫번째 인구 조사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장정
수는 45,000명이었다(민 1:33). 그리고 2차 조사에서는 그보다 줄어든 32,500명이었다(민 26:37). 따라서 그 이후부터 입다 당시까지 300여년이
흐르는 동안(11:26) 각 지파마다 인구가 많이 증가했을 것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에브라임의 장정 42,000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에브라임 지파에 있어서는 매우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삿12:7]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입다의 죽음]
(주); 입다가...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 본절의 서술 형식은 다른 '소사사들'(Minor Judges)의 생애에 대한 서술 형식과 꼭 같다. 그
형식이란 곧 사사로서의 통치기간, 죽음, 매장지 등의 순서이다(10:2,5; 12:10,12,15). 한편 본절에서 '길르앗 한성읍'으로 번역되어 있는 구절은
각 번역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즉 공동 번역은 이를 '길르앗에 있는 자기의 성읍 미스바'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RSV는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his city in Gilead)으로, 70인역(LXX)의 한 사본은 '그의 성읍 길르앗에서'(*, 엔 테 폴레이 아우투 갈라드)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히브리 원문의 애매 모호함 때문이다. 즉 원문 '베아레길르앗'(*)은 '길르앗의 그 도시들에서'란 뜻이다. 여기서 '그 도시들'이란
복수형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입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미스바였고 또한 그의 고향 역시 그곳이었던 점에 의거할
때(11:9,34) 길르앗이 장사(葬事)된 '길르앗 한 성읍'은 '미스바'일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성 경: [삿12:8]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사사 입산]
(주); 베들레헴 입산 -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과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이 있으므로(수 19:5) 어떤 지파의 성읍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본절의 베들레헴을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으로 주장하지만 특별한 근거가 없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일반적으로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은 '유다 베들레헴'(17:7,9) 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미 5:2)로 불리워졌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사 대부분은 북부 지파의 출신들이었다. 본서 서론 '이스라엘의 사사들' 참조. 이로 미루어 보아 본절의 베들레헴은 스불론
지파에 속한 베들레헴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므깃도에서 약 18km정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이곳 출신 입산(Ibzan) 역시 돌라(10:1,2),
야일(10:3-5), 엘론(8-10절), 압돈(11,12절)과 더불어 두드러진 공적이 없는 이스라엘의 '소사사'였다.
성 경: [삿12:9]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사사 입산]
(주); 그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었더니 - 입산은 입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11:34) 기드온이나(8:30,31) 야일과 같이(10:4) 자녀를 많이 두었다. 이것은 입산이 누리는 부와 권세를 상징해 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식을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시 127:3).
(주); 타국으로 시집보내었고 - '타국으로'에 해당하는 '하후차'(*)는 '외국'이라는 뜻과 함께 단순히 '바깥'(outside)이라는 의미도 지닌다(B. D. B). 입산은 사사였으므로 자기의 아들과 딸을 위해 이방인과 교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타국'이란 말은 '다른 가문' 또는 '다른 지파'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공동 번역은 이를 '일가 아닌 사람들에게'로 번역했으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그의 가문 밖으로'(outside his clan)라고 번역했다(RSV, NIV, Living Bible).
(주);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 여기서 우리는 입산이 자기의 아들과 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른 지파 사람들과 결혼시킨 것은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는 각 지파간의 유대 관계를 강화시키고자 자신의 아들과 딸을 다른 지파 사람들의 아들과,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시켰을 것이다.
성 경: [삿12:10]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사사 입산]
(주); 입산이...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 이처럼 묘지를 고인(故人)이 생전에 거주하던 주거지나 고향, 연고지 근처에 마련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일반적 관습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요셉의 뼈가 애굽에서부터 고향땅 세겜으로 돌아온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수 24:32).
성 경: [삿12:11]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과]
주제2: [사사 엘론]
(주); 스불론 사람 엘론 - 엘론에 대한 기록은 사사들의 사적(事蹟) 중 가장 간단하다. 아마 사사 입다 이후에서 사사 압돈까지(13절) 이스라엘에는
특별히 큰 대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그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호와
종교가 계속적으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성 경: [삿12:12]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사사 엘론]
(주); 스불론 땅 아알론 - 단 지파의 땅인 아얄론과는(수 10:12; 19:42) 분명히 구별되는 곳이다. 이 아얄론(*)은 히브리어 자음만으로는 사사
엘론(*)과 같은 철자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70인역(LXX)과 공동번역은 아예 '아얄론'을'엘론'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은 사사
엘론이 건축한 성읍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혹자들은 이곳을 오늘날의 야룬(Jalun)과 동일시 하지만(Keil, Hervey)확실한 근거가 없다. 추측컨대
갈릴리 호수 서쪽 15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엘부메'(Tell el-Butmeh)가 바로 이 '아얄론'이 아닌가 사료된다.
성 경: [삿12:13]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과]
주제2: [사사 압돈]
(주);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 - '비라돈'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 중 아말렉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15절; 5:14). 이곳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마카비 서와 요세푸스의 글에 나오는 '파라톤'(*)과 같은 곳이다. 오늘날에는 '파라타'(Farata)로 알려져 있는데(Keil, goslinga,
Hervey, Cundall) 현재 세겜 서남쪽 약10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압돈(Abdon)은 입산이나 엘론과 달리 그의 신분이'힐렐(Hillel)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아마 이는 베냐민 지파의 계보에 나오는 '압돈'(대상 8:23,30; 9:36)과는 구별하기 위함인 듯하다.
성 경: [삿12:14]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사사 압돈]
압돈이 사사로서 누린 부와 권위는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 그리고 '어린 나귀 칠십 필'이란 내용 속에 잘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린 나귀를
탄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5:10; 10:4. 주석 참조.
성 경: [삿12:15]
주제1: [에브라임 지파의 시기와 그 결국]
주제2: [사사 압돈]
(주);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 5:14에 이어 본절에서도 아말렉 족속이 에브라임 땅과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에브라임
땅은 과거에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던 곳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사사 시대 초기에 유목민인 아말렉 족속 중 소수의 무리가 남쪽에서부터 이동해 와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무튼 본절은 에브라임 땅이 아말렉 사람들과 어떠한 식으로든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삿13:1]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블레셋의 압제]
(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 본 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례(3:7; 10:6)에 의거 할때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 숭배 죄를 범했음에 분명하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죄에 대하여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출 20:5)에게 징벌하리라고 경고하셨다(Wycliffe).
(주);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 블레셋이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것은 이미 이전에도 있던
일이다(3:31; 10:7).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붙이시사 본격적으로 고통당하게 하신 것은 이때부터이다. 한편
블레셋족(Philistines)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적 생활과 중계 무역을 하던 사람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사람을 잡아 주로 애굽에 노예로 팔기도
했던 악랄한 집단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들은 그레데(Crete)와 에게해의 섬들로부터 남부팔레스틴 해안 지대로 이주해 와서는 '가나안의 후기
원주민'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참조. 따라서 이러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다른 여느 때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6년 기간은 정확히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삼손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이스라엘은 블레셋으로부터 괴롭힘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5절). 그리고 블레셋
치하에서 삼손이 사사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20년 밖에 안 되며(15:20) 삼손 이후에도 블레셋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이다(삼상 4장;
17:1-5 삼하 5:17-25). 그러나 사무엘의 통치 말엽 경에 블레셋의 압제가 일시 소강 상태를 이루었던 점으로 보아 이때까지의 기간을 대략40년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이후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도 블레셋은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다윗 왕이 저들을 정복하므로서(삼하 8:1) 마침내
블레셋의 압제는 끝이 난다(Pulpit Commentry).
성 경: [삿13:2]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삼손의 출생예고]
(주); 소라 땅 - 이곳은 처음에 유다 지파의 기업이었으나(수 15:33) 이후 단 지파에게로 넘어갔다(수 19:41). 그러나 왕국 시대에 이르러 유다의 세력이 강성해졌을 때 다시 그 땅은 유다 지파에게로 반환되었다(대하 11:10). 이처럼 소라 땅이 두 지파의 기업으로 왔다갔다한 이유는 아마 그곳이 두 지파의 경계선에 위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사사시대 동안은 계속 단 지파의 기업으로 존재했었다. 한편 이곳 소라(Zorah)는 현대의 '사라'(Sorah)와 동일시되는 곳으로 벧세메스 북쪽 그리고 예루살렘 서쪽 약 20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Goslinga, Garstang, Cundall).
(주); 단 지파의 가족 - 다른 지파와는 달리 이 단 지파에는 여러 가문이 없고 '수함 가족'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민 26:42, 43). 따라서 '지파의 가족'이란 말이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 Goslinga, Hervey).
(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 본문에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늙었다는 언급은 없다. 다만 3절에 의거할 때 마노아의 아내는 처음부터
불임(不姙)여성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마노아 부부는 일찍부터 자녀를 생산하는것에 대한 소망을 단념하였을 것이다(Golinga). 또한 그들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큰 수치와 슬픔 가운데 살았을 것이다(삼상 1:5, 6). 그러나 그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강권적,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사 마노아 아내의
태(胎)를 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3절).
성 경: [삿13:3]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삼손의 출생예고]
(주); 여호와의 사자 - 사사 시대에는 주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지만(2:1-5; 6:11-24) 선지자가 나타날 때도 있었다(4:4; 6:8). 이러한 현상은 사사시대가 신현현(theophany) 시대에서 선지자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왕정 시대를 지나면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했는 바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구약 성경에 언급된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적으로 성육신(成肉身)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이는 본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주); 이때 잉태하여 아들을낳으리 - 이러한 수태 고지(受胎告知)는 삼손의 경우 외에 성경에서 4 번 더 있었다. 곧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창
17:19; 18:10,14), 한나(삼상1:17), 엘리사벳(눅 1:13),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눅 1:31)에게 주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수태
고지는 구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수태 고지를 통해 당신이 몸소 장차
태어날 아이의 출생을 관장하시며, 특별히 그 아이를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 경: [삿13:4]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삼손의 출생예고]
(주); 너는 삼가서... 먹지 말지니라 - 마노아의 아내는 나실인이 아니다. 다만 그녀에게서 태어날 삼손만 나실인이다(5절). 그런데도 그녀에게 삼손에게 요구되는 것과 꼭 같은 규례가 요구된 것은 태아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서이다. 또한 그녀 역시 하나님의 구속(救贖) 계획을 이루는 한 도구로 성별되었음을 각성시키기 위함이다.
(주); 포도주와 독주 - 모든 '술'을 대표한 용어이다. 그러나 굳이 구별하자만 '포도주'에 해당하는 '야인'(*)은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는 상용어이다(레 10:9; 사22:13). 그리고 '독주'에 해당하는 '쉐칼'(*)은 과실주나 곡주(穀酒)는 물론사람을 취하게 하는 도수 높은 술을 의미한다. 한편 성경에서 이러한 술을 금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창 9:18절 강해, '술에 대한 바른 태도'를 보다 참조하라.
(주); 부정한 것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벡성에게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규정하신 부정한 짐승(레 11장)이나 시체등올 가리킨다. 따라서 나실인
역시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접하지 못하도록 엄히 규제되는 것은 당연한 조처였다(민 6장).
성 경: [삿13:5]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삼손의 출생예고]
(주);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됨이라 - 어떤 사람이 일정 기간동안 나실인으로 지내려면 그 기간 동안 머리를 깍을 수 없었다(민 6; 5). 그러나 그가 다시금 일반인의 신분으로 되돌아 갔을 때에는 머리를 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태중에서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된 자는 일평생 동안 머리털을 밀 수 없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한 나실인'으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본절도 이처럼 삼손이'영원한 나실인'이 될 것임을 뜻하는데 이에는 삼손 외에도 요한(눅 1:13-17)이 더 있다(Matthew Henary, Pulpit Commentary).
(주); 나실인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지르'(*)는 '바치다', '거룩하게 하다','구별하다'는 뜻의 동사 '나자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거룩하게 구별된자'를 의미한다. 이 '나실인'에 대한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을 출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다(민 9:12). 그리고 '나실인'은 포도 나무에서나는 것과 독주를 먹을 수 없으며,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하고, 시체를 가까이하여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도 안 되었다(민 6:1-21). 이러한 나실인의 규례는 구속사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제사로 자신을 드려 헌신, 봉사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1-8절 강해, '나실인'을 참조하라.
(주);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친 것은 다윗 왕이 블레셋의 모성(母城) 메덱암마를 쳐서
빼앗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삼하 8:1). 따라서 삼손의 등장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서막에
불과했다(Wycliffe). 한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기간인 40년의 마지막은 다윗 때가 아니라 사무엘 때였다(삼상 7:12-14). 1절 주석 참조.
성 경: [삿13:6]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삼손의 출생 예고]
(주); 하나님의 사람 - 이 말은 '여호와의 사자'(3절) 란 용어와 다른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주로 선지자들에게 붙여진 명칭으로(Cundall, Millar) 모세나(신 33:1) 엘리사(왕하 4:9, 40)와 같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Keil, Goslinga). 따라서 삼손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사자' 곧 하나님을 모세와 같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라고 말한 표현에서도잘 나타나 있다. 즉 그녀는 자신에게 나타나 놀라운 소식을 알려 준 장본인이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용모를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했을 뿐 하나님의 사자 그 자체로서는 믿지 못했던 것이다.
(주); 심히 두려우므로 - 여기서 '두려워하다'에 해당하는 '야레'(*)는 어떤 공포(terror)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경외심이나 도덕적인
숭배감 등을 의미한다(창 28:17).
성 경: [삿13:7]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삼손의 출생 예고]
(주); 이 아이는... 죽을 날까지... 나실인이 됨이라 -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가 들려준 말을 정확히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그녀는 "태어나서 나옴으로부터... 나실인이 됨이라"(5절)는 말이 곧 '영원한 나실인'을 뜻하는 것으로 분명히 이해하였던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성 경: [삿13:8]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미노아와 여호와의 사자 간의 대화]
(주);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 마노아는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사자가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아기의 양육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아마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가 했던 말이 너무도 심각하고 중요한 말이었기에 태어나게 될 아들을 어떻게 양육시킬 것인지 더욱 자세하게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알아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는 마노아의 돈독한 신앙을 잘 드러내 준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마노아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처럼
우연이 아니다. 과거 모세도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신실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었다(출 2:1-10).
성 경: [삿13:9]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미노아와 여호와의 사자 간의 대화]
(주);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의미이다(Living Bible). 한편 본장에서는 신명칭이 '여호와'(1,8, 16,23, 24, 25절)와 '하나님'(5, 7, 22절) 두 가지가 상호 교환되어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본장의 내용이 마노아의 가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 블레셋과도 관련되어 있으므로 협의의 의미인 '여호와'와 넓은 의미인 '하나님'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된 것 갈다. 창 1:1 주석 참조.
(주);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두번씩이나 먼저 나타난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노아보다 그의
아내가 진리를 께닫는 지혜가 많은 것(22, 23절)으로 추정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마노아가 그의 아내가 전해준 하나님의 사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인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점(8절)으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추정은 사실과 다름을 알수 있다. 아마도 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난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녀의 지혜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 경: [삿13:10]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마노아와 여호와의 사자간의 대화]
(주);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 마노아의 아내는 다시금 여호와의 사자를 뵙게 되자 이처럼 급히 남편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순간적으로 남편이 간절히 기도하던 모습이 떠올랐으며(8절) 그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9절). 그래서 그녀는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로 고심(苦心)하고 있을 남편에게로 달려가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것을 알려준 것이다.
성 경: [삿13:11]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마노아와 여호와의 사자간의 대화]
(주);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한 사람입니까 - 카일(Keil)은 이 말을 '3-5절에서 언급한 내용이 무엇입니까?'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의
해석과 같은 내용이 다음절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마노아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나타났었던 바로 그 사람인지 아닌지를 한번 확인해본 것이다. 한편 이로 보아 마노아도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와 같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21절).
성 경: [삿13:12]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마노아와 여호와의 사자간의 대화]
(주);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이 말은 단순한 소망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마노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을 듣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의 소식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Matthew Henry).
(주);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 '기르다'에 해당하는 '미쉬파트'(*)는 '재판', '관습'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그 아이의 관습(규례)은 무엇이 된 것입니까?' 란 의미이다. 즉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에게 독특하게 적용될 생활방식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물었던 것이다(Rosenm ller, Keil). 그는 아마 민 6:2-20에 언급된 나실인의 규례 외에 그 아이에게 적용될 자세한 내용을 더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주);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까 - 본절은 문자적으로 '그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란 의미이다. 개역성경은 영역 성경 중 KJV의 번역에 따랐으나
원문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번역되었다. RSV와 NIV 그리고 공동번역 및 70인 역(LXX) 등은 원문에 충실하게 '그의 일들이 무엇입니까?'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둘 중 후자의 번역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의 의미는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에 대하여 어떠한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한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노아 부부가 행할 일에 관해서는 이미 방금
앞에서 질문되었다.
성 경: [삿13:13]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마노아와 여호아의 사자간의 대화]
(주);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 - 이는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 중 금해야 할 것(4절)과 장차 태어날 아이가 금해야 할 것(5절) 모두를 가리킨다.
(주); 그가 다 삼가서 - 이 것은 태어날 아기 곧 삼손의 어미가 금지해야할 사항에 대한 말이다. 원문상으로도 본절은 '그녀로 하여금 주의하게
하라'로 나와 있다. 때문에 모든 영어 성경들은 '그'를 '그녀'(She)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자녀양육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당시 어머니에 의해 주도된 이스라엘의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는
수24:14-28강해, '기독교 가정에서의 부무의 책임'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삿13:14]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마노아와 여호와의 사자간의 대화]
(주); 포도 나무의 소산 - 민수기 6장 3, 4절에 따르면 이에는 포도주와 포도주의 초 그리고 포도즙, 생포도와 건포도 뿐만 아니라 포도씨와
껍질까지 포함된다. 보다시피 이중에는 취하게 하는 포도주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먹음으로써 자연스럽게 포도주도
마시게 될 것을 염려하여 그것들도 금지한 것이다. 이는 곧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교훈의 선례이다(살전 5:22).
성 경: [삿13:15]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 다음 절에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아직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염소를 대접하고자 한 것 같다. 아마 그는 염소를 잡아 자기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을
것이다. 염소는 유목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중요한 재산이었으며(삼상 25:2; 눅 15:29), 염소를 잡는 것은 손님에 대한 후대(厚待)의
표시였다.
성 경: [삿13:16]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 기드온의 경우와 똑같은 사례이다. 즉 앞서 기드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도 기드온이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고 번제물로 불살랐었다(6:19-21). 이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나 기드온이 바친 음식을 먹지 않은 까닭은 그들에게 자신의 참 모습을 깨우쳐 주려는 데 있었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근본 하나님이신바 인간이 취하는 것과 같은 음식을 취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 혹자는 본절을 근거로 마노아가 처음부터 마음속에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염소를 준비하려 의도했다고 주장한다(Augustine, Cundall). 그러나 사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다만 기쁜 소식을 전해 준데 대하여 감사의 예물로 염소 새끼를 드리려 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는 그 소식으로 인해 자신이 감사 받기를 거절하면서 마노아에게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그 감사를 나타내라는 의미로 본절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않고 마노아가 미리 번제를 그 사람을 위해 준비하려고 의도했다면 그것은 경건한 그의 신앙과 모순된다.
(주);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 이 말속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염소 새끼를 먼저 하나님께 바치라고 권면하고 있음이 잘 나타난다.
이로써 그는 자기가 전해준 기쁜 소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삿13:17]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까 - 혹자는 마노아가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의 신분을 알고 싶어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고 주장한다(Cundall). 그러나 이 말은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가 지닌 신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이름만을 물은 것이다. 즉 마노아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여 그의 예언이 이루어질 때 그를 찾을 수 있거나 그에게 예물을 드리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 빛나게 하기위해서 이름을 물었을 뿐이다(Goslinga).
(주); 말씀이 이룰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 이 말 가운데 마노아가 자기를 방문한 사람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 그 사람의 신분이나 정체를
알고자 의도했던 것이 아님이 분명히 드러난다. 즉 마노아는 그 사람의 예언이 성취될 때 그 사람의 뛰어난 영적 능력을 자신뿐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널리 알려 존경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성 경: [삿13:18]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내 이름은 기묘니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 대상의 본질이나 특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창 25:19-26 강해,
'이름짓기' 참조.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이름을 '기묘'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기묘'에 해당하는 '필리'(*)는 '기묘자에 해당하는 '펠레'(*)의
형용사형으로 '이해를 초월한'(NIV,beyond understanding)또는 '놀라운'(RSV, wwonderful)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 탄생 예언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사 9:6). 따라서 마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다(Cassel,
Lange, Matthew Henry).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16:7-16 강해, '여호와의 사자'를 참조하라.
성 경: [삿13:19]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 - 일전에 기드온은 번제로 '염소 새끼 하나와 무교 전병과 국'(6:19)을 취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마노아가 바친 소제물도 아마 기드온이 바친것과 유사한 종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제물로는 발효된 식품과 꿀이 섞인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레 2:11). 따라서 마노아의 소제물은 본문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화덕에 구은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이었음에 틀림없다(레2:4). 이와 관련해서는 레 2:1-4강해, '소제에 대하여'를 보다 참조하라.
(주);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 여기 사용된 '이적'이라는 용어는 역시 앞 절의 '기묘'를 뜻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자의 행동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만큼 놀라왔다'로 된다. 이 이적의 내용은 20절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이적은 잉태하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들을낳게 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24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또한 역사상의 이적에 그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정녀 탄생(마 1:23), 하나님의 성육신(요1:14), 그리스도의 부활(마 28:7; 고전 15:13) 등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문학적 비유 내지 신화가 아니라 엄연히 역사상으로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인 것이다. 오늘날 합리주의를 숭배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초자연적 요소들을 제외시키고다만 자유, 평화, 헌신 등과 같은 소위 '예수의 정신'만을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코자 하는 지극히 불순한행위이다(롬 10:6, 7).
성 경: [삿13:20]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 혹자는 19절을 근거로 하여 마노아가 번제물에 불을 붙였으며 다만 하나님의 사자가 그 불꽃을 타고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라고 주장한다(Goslinga, Cundall). 그러나 19절에는 마노아가 번제물에 불을 붙였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따라서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6:21), 이번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이적으로 번제물을 태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Keil). 이때 나온 불은 더러운 것을태우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암시한다(히 12:29). 또 이 불은 제물을 태우면서하늘로 올라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꽃을 타고서 여호와의 사자가 승천(昇天)한 것은 그가 마노아 부부와 관련된 일을 모두 마치셨음과 또한 그 자신이 정작 하나님이셨음을 시사해 준다.
(주);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창 17:3; 수 5:14; 단 8:17; 겔 1:28; 3:23; 43:3; 44:4). 즉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제서야 자기들과 대화한 사람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성 경: [삿13:21]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여호아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알고 - 마노아 부부가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사람을 '여호와의 사자', 즉 하나님으로 인지한
것(22절)은 번제단 이적 사건으로 인해서이다(20절). 그런데 본절은 마치 그 후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므로 인해 그때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후의 사실을 추가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더욱 더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이었음을
확증하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인식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삿13:22]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 죄악에 물들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경우에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출 33:20).
따라서 이사야도 여호와의 영광을 뵈온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으며(사 6:5), 야곱과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기 때문에 죽을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다(6:22, 23; 창 32:30).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10:19, 20).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피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터
놓으신 것이다(히 9:14, 15).
성 경: [삿13:23]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 본절로 보아 마노아의 아내는 상당히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공포심에 휩싸여 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남편을 위로하였다. 그 위로의 내용인즉 여호와께서는 전혀 자신들을 죽일 의향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그녀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제물을 열납하셨으며, 이적을 베풀어 보이셨고, 자신들과 대화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타당한 추론이다. 일전에 기드온도 하나님을 뵈었지만죽지 않았다(6:22; 23).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한 목적에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취하사 그 본체의 영광을 가리우고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6:23 주석 참조. 따라서 마노아와 그 아내도 비록 하나님을 뵈었지만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주); 이 모든 일 - 여호와의 사자가 친히 현현(顯現)하신 것(3, 9절)과 번제단 불꽃 이적(20절)을 행해 보이신 것 등을 가리킨다.
(주); 이런 말씀 - 삼손의 탄생을 예고해주신 것(3절) 및 마노아의 아내가 지켜야 할 일(4, 14절), 삼손의 양육법(5절) 등에 대하여 일러주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삿13:24]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손'이란 이름이 '태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세메쉬'(*)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Goslinga, Cassel, Cundall, Matteww Henry, Wycliffe). 만일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이는 삼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여 광명을 주기 시작하는 것과(5절) 연관이 있다. 그런데 혹자는 '삼손'이라는 이름이 '봉사하다'란 의미의 갈대아어 '쉐마쉬'(*)에서 유래했다고도 주장한다(Hervey). 이 주장에 따르면 '삼손'이라는 이름은 그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사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이러한 추론도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 한편 그밖에도 A. D.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나 카일(Keil)은 삼손이란 이름이 '강하다' 또는 '귀하게 여기다'란 의미를 지닌 '쉬므쉠'(*)과 연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앞의 두 가지 주장보다 어원적, 역사적으로 그 근거가 빈약하다(Cassel).
(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 삼손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서 성장했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사무엘이 성장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았었으며(삼상 2:26)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하나님과 사람들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성장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눅 2:52).
성 경: [삿13:25]
주제1: [삼손의 탄생]
주제2: [번제를 드리는 마노아]
(주); 소라 - 2절 주석 참조.
(주); 에스다올 - 예루살렘 북서쪽 약 23Km 지점에 위치한 단 지파의 성읍이다(수19:41).
(주); 마하네단 - 문자적으로 '단의 진'이란 뜻이다. 이곳은 삼손이 활동하며 생활 거점으로 삼은 곳으로 이주한 것 같다(16:31). 이곳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부모들이 거주했던 '소라'(2절)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며 조그마한 성읍일 것이다. 18:12에는 이곳이 기럇여아림 뒷편,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의 지역인 것으로 나와있다.
(주);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 '감동하다'에 해당하는 '파암'(*)은 '강하게 밀다'또는 '몰아넣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번민하다'란 의미로 두 번 사용되었던 적이 있으나(창 41:8; 단 2:3) 성령의 감동과 연관되어서는 본절에서 유일하게 한 번 사용되었다. 즉
여기서는 성령께서 삼손에게 강하게 임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Goslinga). 아무튼 이로써 삼손은 그 마음과 몸을 주장하시는 성령께
사로 잡힌바 되어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성령의 감동은 지혜, 예언 등 다양하게 나타나나 특히 삼손에게는
영웅적인 완력으로 나타났다(14:6, 19; 15:4, 15).
성 경: [삿14:1]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블러셋 여인을 취하려는 삼손]
(주); 딤나 - 본래 단 지파에게 할당된 기업이었으나(수 19:34) 단 지파가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난 이후부터 블레셋에게 복속된 것 같다. 이곳은 현재의 딥네(Tibne)와 동일시되는 곳으로 소라 남서쪽 약 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 내려가서 - 이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딤나((timnath)는 해발 약 350m에 불과하나 삼손의 고향 소라(Zorah)는 해발 약 250m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손이 자기 고향 땅에서 딤나로 간 것은 자연히 '내려간' 것일 수밖에 없다. 2절의 '올라와서'란 말 역시 이러한 고도(高度)의
차이를 반영한 표현으로 볼 수있다.
성 경: [삿14:2]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블레셋 여인을 취하려는 삼손]
(주);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여자를...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 삼손은 자신의 혼인 문제를 부모님과 상의했다. 나실인으로 여호와에 대한 신앙
가운데서 자란 삼손이 이처럼 자기의 결혼 문제를 두고 부모와 상의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특히 이스라엘사회에서는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
결혼 지참금이 필요했다. 이 결혼 지참금은 신랑될 사람의 아버지의 손을 통해서 나와야 했으므로 그 당시 아들이 결혼 문제로 부모와 상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창 34:1-12 강해, '빙물과 예물' 참조. 한편 삼손이 블레셋 땅 딤나를 자유스럽게 왕래할 수 있었으며 그곳의 처녀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했으나 인간적인 교류를 막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삿14:3]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블레셋 여인을 취하려는 삼손]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이는 모세의 율법이 엄격히 금지하는 조항이었기 때문이다(출 34:15, 16; 신 7:3, 4). 또한 과거 이스라엘의 선조들 역시 동족끼리의 결혼을 바람직하게 생각했으며 또 그렇게 시행하여 왔기 때문이다(창 24:3; 26:34, 35; 27:46; 28; 1, 8; 34:14; 36:6). 특히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나실인이기에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더욱 반대했을 것이다(13:5).
(주);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 본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본문은 '키히 야쉐라 베에나'(*)로서 이를 직역하면 '그 여자가 내 눈 앞에서
즐거워하므로'이다. 그러나 이를 의역하면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하므로' 또는 '그 여자가 나를 즐겁게 하므로'(KJV, RSV)라는 의미로도 해석 된다.
이로 보아 삼손은 그 여인의 신앙 상태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목과 육신의 정욕을 충족시켜 줄 만한 그 여인의 외모에만 매료당하여 결혼을
고집하였던 것 같다. 이는 결혼의 심오한 의의를 무시하는 지극히 경솔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4절에 의거할 때 삼손이 이처럼 경박하게
행동한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곧 그 여자를 통해 블레셋을 칠 틈을 노리는 것이다.
성 경: [삿14:4]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블레셋 여인을 취하려는 삼손]
(주);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 본절을 통해 볼 때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여 블레셋과 화친한 것처럼 위장해 그들을 칠 기회를 엿보고자 의도한 것 같다. 이러한 삼손의 의도는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12,19절).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본문의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불레셋을 순식간에 진멸시킬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허물 많은 삼손에게 그 일을 맡기셨다. 이는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일에 인간을 동참시키고자 하시는 놀라운 계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롬 13:6). (2)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 블레셋을 격퇴코자 한 목적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계획이었으나 삼손이 굳이 이방 여인과 불순한 혼인을 하면서까지 그 일을 도모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삼손은 자신이 사용했던 불순한 방법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16:21, 30).
(주);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 -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고자 의도했던 바가 바람직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 것은 상호 모순되어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여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분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본 절을 잘 이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즉 본 절은 앞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연속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서 저자의
설명에 불과하다.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고자 의도한 사실과 그것을 이용하여 블레셋을 치고자 한 점 등을 순전히 삼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블레셋을 치려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삼손의 결혼 그 자체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성 경: [삿14:5]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사자와 꿀]
(주);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지르는 지라 - 구약 시대에는 팔레스틴 지역에 사자가 자주 출몰했던 것 같다(삼상 17:34; 삼하 23:20; 사 30:6;
렘 49:19). 특히 삼손이 딤나의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난 것은 그 사자가 포도원에 굴을 파고 사는 여우를 쫓고 있을 때일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본절에 언급된 '사자'는 새끼와 같이 아주 어린 것이 아니라 다른 짐승을 사냥하기에 충분히 자란 사자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삿14:6]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사자와 꿀]
(주);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 - 이처럼 삼손이 백수(百獸)의 왕이라 할 만한 사자를 맨 손으로 찢어 죽인 사건은, 장차 블레셋인들을 크게 패망시킬 것을 암시하는 전조(前兆)로 보인다. 삼손의 엄청난 힘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은사로 주어진 것이다(13: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대행할 일꾼들에게 각종 은사를 부여하시는데(고전 12:4) 특별히 삼손에게는 어마어마한 완력을 허락하셨다.
(주);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 5절에 의하면 삼손은 그의 부모와 동행하던 중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모가 삼손에게 일어난 일을 몰랐다는 사실은 본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Cassel). 그러나그러한 사실에 대해 자세한 정보가
없을 뿐이지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할 만한 점이 본절에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도 저자는 본절에서 삼손이 사자를 죽였다는 사실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수수께끼 사건(8-20절)을 연관짓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으므로 삼손이 사자을 만나게 된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측컨대 삼손이 처음 길을 나설 때에는 부모와 동행하였으나 워낙 삼손의 걸음이 빠르다보니 부모를 앞질러서 가게 되었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가
딤나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에는 혼자 있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삿14:7]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사자와 꿀]
(주);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낸 것을 의미한다. 특히 '그를 기뻐하였더라'는
말은 3절에서와 같이 '그 여자가 그를 기쁘게 하였더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 절은 삼손과 그 여인이 서로 좋아했음을 보여 주다. 한편 공동
번역은 삼손이 그 여자와 이야기한 내용이 사자를 찢어죽인 것에 관한 대화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같은 해석은 전후 문맥과
상치된다. 왜냐하면 만일 삼손이 그 여인에게 사자를 죽인 일을 말해 주었다면 그녀가 나중에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7일 동안 전전 긍긍했을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12-17절). 아마도 여기서 삼손이 그 여자와 대화한 내용은 일상사(日常事)와 자신들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성 경: [삿14:8]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사자와 꿀]
(주); 얼마 후에 - 이 말만 가지고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사자의 시체에 벌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있다. 즉 부패된 상태의 사자 시체에는 결코 집을 짓지 않는 것이 벌의 생리이다. 따라서 상당한 기간이 경과하여 가죽과 뼈가 바싹 마른 사자의 주검에 그 벌들이 집을 짓고 서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벌이 그곳에다 꿀을 모아 나르는 데에도 상당 시간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손이 그 여인을 취하기 위해 딤나로 다시 간 것은 꽤오랜 기간이 경과되었을 것이다.
(주); 그 여자를 취하려고 - 삼손이 부모와 함께 처음 딤나로 내려 갔던 것(5절)은 약혼을 위한 것으로 추정되다. 따라서 이번에는 정식으로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다시 딤나로 내려갔을 것이다.
성 경: [삿14:9]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사자와 꿀]
(주); 그 부모에게 이르러...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 공동 번역은 '그 부모' 앞에 '돌아오는 길에는'이란 말을 첨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동
번역은 삼손이 딤나로 가는 길에(8절) 사자의 시체에 꿀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선 취하여 먹고, 다시금 고향인 소라로돌아오는 길에 그 꿀 얼마를
취하여 소라에 계시는 그의 부모에게 갖다 준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스링가(Goslinga) 같은 이는 8-10절을 같은 시점의 사건으로
보아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다시 내려가던 중 꿀을 떠와서 부모에게도 그것을 주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상의 두 견해는 어디까지나
독단적 주장이긴 하지만본문의 전후 문맥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도움이 된다. 한편 삼손은 사자의 주검에서꿀을 취하여 그것을 부모에게
드리면서도 그 꿀의 올바른 출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삼손은 그 꿀을 사자의
주검에서 얻었으므로 부모가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여 먹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실인으로서 죽은 시체를 만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민 6:6, 7) 삼손은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부모에게 숨겼을 것이다. (2) 삼손은 자기가 잔치 중 제시할 수수께끼의
내용(14절)을 미리 사자의 주검에서 나온 꿀을 주제로 할 것을 구상했기에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부모에게도 숨겼을 것이다.
성 경: [삿14:10]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삼손의 수수께끼]
(주);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 여기서 '여자'에 해당하는 '이솨'(*)는 주로 결혼한 여인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에서는 처녀에게 '베툴라'(*)란 단어가 사용된다. 그런데 '이솨란 용어가 여기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1절부터 계속 블레셋 여인에게 사용되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손이 결혼하고자 한 블레셋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 결혼했던 적이 있는 과부나 이혼녀일 가능성도 있다. 한편 삼손의 아버지가 삼손의 결혼을 위해 딤나로 내려간것은 그의 결혼식이 이스라엘의 풍습에 따른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풍습을 따른 것인듯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의 결혼을 위해 신랑의 부모가 신부의 부모에게 결혼 지참금을 지불한 후 대개 신부를 데려와서 결혼식을 올리기 때문이다(창24장).
(주);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 이스라엘의 결혼 관습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간혹 신부집에서 혼인 잔치를 베풀기도 하지만(마
25:1-13) 대개는 신부를 신랑 집으로 데려온 후 그곳에서 혼인 잔치를 베풀었다(마 22; 2-10). 그러나 블레셋인들에게는 신랑을 위하여 신부집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R. D VauxP. Cassel). 이로 보건대 삼손은 이러한 블레셋의 결혼 관습을 철저히 따랐던 것 같다. 이는 곧 삼손이
블레셋의 풍습을 철저히 따르는 것처럼 행동하여 그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삼손 자신이 의도했던
바대로 블레셋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면서 그들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4절).
성 경: [삿14:11]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삼손의 수수께끼]
(주); 무리... 함께 하게 한지라 - 블레셋인들이 신부 집에 30명의 젊은 사람들을 청해 삼손의 친구가 되게 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들이
삼손을 경계해서라기 보다는 신랑된 삼손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랑의 친구로 초대되어 7일간의 잔치에
참석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부측은 블레셋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던 것 같다. 한편 삼손에게 이토록 많은 친구들이 제공된 것은 삼손이
블레셋 땅에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이 많은 친구들을 데리고 오게 되면 그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미리 삼손에게 조치를 취했던 것 같다.
성 경: [삿14:12]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삼손의 수수께끼]
(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 여기서 '수수께끼'에 해당하는 '후드'(*)는 '어려운 문제'(왕상 10:1), '오묘한 말'(시 49:4; 잠 1:6), '은밀한 말'(민12:8)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연회의 흥을 더욱 돋우기 위해 제출된 '수수께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대 근동 뿐 아니라 그리이스에서는 연회 때 수수께끼를 제출하여 연회의 흥을 돋우는 풍습이 있었다(Cassel, Keil & DelitzschCommentary, VOL 2, p, 411). 삼손은 이제 이러한 관습을 이용하여 블레셋을 칠 기회를 찾았던 듯하다.
(주);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 - '베옷'에 해당하는 '세디님'(*)은 일상적인 옷을 가리키기도 하지만(Cassel) 좀 더 정확하게는 잠 31:24과 사
3:23에서처럼 '세마포 속옷'을 가리킨다(Keil, Hervey, Cundall, Millar). 그리고 '겉옷'(*, 베가딤)은 일상복이 아니라 특별한 행사나 축제를 위한
고급스러운의복을 가리킨다(창 45:22; 왕하 5; 5, 22, 23). 그래서 영역 성경 가운데 RSV는 이를 '축제 예복'(festval garments)으로 번역했다.
성 경: [삿14:13]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삼손의 수수께끼]
(주);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 블레셋 사람들은 30명이 함께 머리를 짜내면 충분히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손의 제안은 국가적인 자존심의 문제이므로 그들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삼손은 바로 이 점을
노려 수수께끼 게임을 제안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삿14:14]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삼손의 수수께끼]
(주); 먹는 자에게서... 강한 자에게서 - 삼손이 제출한 수수께끼의 내용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블레셋 청년들이 그 내용을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편 삼손의 수수께끼는 일반적인 히브리 시(詩)의 형태로서 평행법에 의한 것이다. 즉 '먹는 자'와 '강한 자'는
같은 것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내용을 보충하는 것이고, '먹는 것'과 '단것'도 같은 의미이면서 서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있다.
따라서 이를 도표화해서 기호로 풀면 그 해답이 쉽게 드러나게 된다. 즉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동물 중에서 강한 동물은 무엇이며, 먹는 식물(食物)
중에서 가장 단음식은 무엇이냐는 문제였던 것이다(18절).
┌────┐ ┌────┐ ┌───┐
│먹는 자 │ = │강한 자 │ ---> │사 자 │
└────┘ └────┘ └───┘
┌────┐ ┌────┐ ┌───┐
│먹는 것 │ = │ 단 것 │ ---> │ 꿀 │
└────┘ └────┘ └───┘
성 경: [삿14:15]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수수께끼의 누설]
(주); 제 칠 일에 - 해석하기에 상당히 어려운 난해 구절이다. 왜냐하면 삼손이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그녀에게 수수께끼의 의미를 풀어 준 것이 제 7일이므로(17절) 본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그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한 시점은 결코 제7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 앞절에서도 그들이 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것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70인역(LXX))과 시리아 역본은 이를 '제 4일에'로 고쳐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영역 성경 중 RSV, NIV, Living Bible도 그와 같이 번역하였다. 사실 히브리어에 있어서 '7'(*, 쉐비이)이란 단어와 '4'(*, 레비이)란 단어는 자음 하나의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 필사자가 실수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Goslinga).
(주);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 이와 같이 블레셋 사람들은 매우 비겁하고 간교한 방법을 동원하여 삼손이 내놓은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고자 했다. 즉 블레셋 여인의의 집을 멸망시키겠다는 블레셋 사람들의 협박은 여자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여인의
약점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아내의 말에 약한 남자의 약점을 동시에 이용하고자 했다(Matthew, Henry).
성 경: [삿14:16]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수수께끼의 누설]
(주);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 여기서 '미워하다'와 '사랑하지 아니하다'는 말은 똑같은 의미의 말을 긍정과 부정의 형식으로 되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말의 강도를 한층 더 높여 주는 강조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을 의역한다면 당신이 내게 수수께끼의 뜻을 알려 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신이 나를 무척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어요'가 된다. 이처럼 블레셋 여인은 삼손이 수수께끼의 뜻을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공박함으로써 삼손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주);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 블레셋 여인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제출한 수수께끼의 의미를 자신이 알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것은 그녀가 그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는 것을 감추고자 했음을 암시한다.
(주);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 삼손의 이러한 말속에는 그가 여인의 말처럼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나
있다. 즉 블레셋 여인은 삼손의 사랑에 호소하여 그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고자 했으나, 삼손은 자기 부모에게도 비밀로 했음을 말함으로써 사랑의
순서에 있어서 그 여인이 삼손의 부모보다 못함을 드러냈던 것이다.
성 경: [삿14:17]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수수께끼의 누설]
(주);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 혹자는 15절의 '제 칠 일'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삼손의 아내가 블레셋 사람의 협박을 받은
것은 제 7일이며, 그 전에는 그녀 스스로가 호기심으로 인해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뜻을 알려 주도록 간청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블레셋인들로부터
협박을 받은 그녀는 바로 그날인 제 7일에 삼손에게 울면서 그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고자 간청했다고 한다(Keil). 그러나 본절은 분명 그녀가 삼손
앞에서 몇 일동안 지속적으로 울며 간청한 것을 뜻하므로(KJV, RSV, NIV), 그러한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여기서 '칠 일 잔치할 동안'은 분명 그
기간 중의 어느한 시점을 가리킨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삼 일 동안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여(14절) 그 다음날인 제 4일에 삼손의 아내를 협박했고
그녀는 그 날부터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날마다 삼손에게 간청했던 것이다. 15절 주석 참조.
성 경: [삿14:18]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수수께끼의 누설]
(주);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면... 풀지 못하였으리라 - 삼손은 블레셋인들이 수수께끼의 해석을 자기 아내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음을 간파했다. 왜냐하면 그수수께끼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그의 아내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그 동안 수수께끼릍 풀지 못했던
자들이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려 준 이후에 나타나 그수수께끼를 풀이했기 때문이다. 이에 삼손은 본절에서처럼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비유로 비꼬았다. 즉 본절은 그들이 삼손의 아내를 비겁한 방법으로 협박하여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감추고 손해를 막아보고자 한 사실을 비난한
말이다. 본절에서 '내 암송아지'란 분명 삼손이 자기의 아내를 비유적으로 일컬은 말이다. '암소'는 흔히 생식, 노동, 복종 등의 이미지로
부각된다(신 28:2; 욥 21:10). 그리고 당시 히브리인들의 여성관에 의하면 여자는 마땅히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집안 일을 잘 돌보며 남자에게
철저히 순종하여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삼손이 자기 아내를 '암송아지'로 비유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성 경: [삿14:19]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삼손의 진노]
(주);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 '아스글론'은 블레셋의 중요한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딤나(1절) 남서쪽 그리고 가드(Gath) 서남쪽 해변가 곧 지중해에서 약 40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블레셋의 땅 중 가장 깊숙한 성읍이다. 따라서 삼손이 홀로 이곳까지 내려가서 블레셋인들을 대적한 것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삼손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주); 노략하여 - 이 말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간교한 술책에 대해 삼손이 징계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Cassel). 그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또 규칙을 위반하여 삼손이 내놓은 수수께끼를 풀었으므로 삼손은 그들에게 한 약속(12절)을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징계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동족을 쳐죽이고 그들로부터 노략한 것으로 약속된 옷을 주었다.
성 경: [삿14:20]
주제1: [삼손의 잘못된 결혼]
주제2: [아내를 잃은 삼손]
(주); 삼손의 아내는... 동무에게 준 바 되었더라 - 이처럼 삼손의 아내가 삼손과 사귀었던 30명(11절) 중 한 사람에게 다시 시집을 간 것은 삼손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장인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15:6). 즉 장인되는 사람은 삼손이 화가 나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여 자기 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삼손을 다시금 격분하였는데, 이는 곧 삼손이 재차 블레셋을 칠
빌미로 작용하였다(15:3-5절).
성 경: [삿15:1]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보복]
(주);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 팔레스틴 지방의 밀 추수는 대개 양력 5월 경에 있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추수 시기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보리는 유월절(양력3, 4월)에, 밀은 오순절(양력 5,6월)에, 그리고 무화과나, 포도, 올리브 등은 장막절(양력 9, 10월)에 거두어 들인다(성경 총론, '성경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그러므로 삼손이 다시 그의 아내와 동거하기위해 아비 집 소라 땅(13:2; 14:19)에서 딤나(14; 1, 5)로 돌아온 시기는 5월에서 6월 초순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Cundall).
(주);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 염소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귀한 재산이었다. 13:15주석 참조. 때문에 이는 화해의 예물이나, 약조물(約條物) 또는 처가에 찾아갈 때의 선물등으로 곧잘 이용되었다(창 38:17, 20, 23). 본절에서도 삼손이그의 아내와 화해하고 다시 동거하기 위해 귀한 선물인 염소를 가지고 처가를 방문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로 볼때 삼손의 결혼은 사디카(Sadiqa) 결혼이었던 것 같다. 사디카 결혼이란 우리 나라의 데릴 사위제도와 비슷한 것으로, 고대 근동에서 유행되었던 가모장적(家母長的) 혼인의 한 형태이다. 이 혼인에는 (1) 결혼 후 신랑이 신부집에 게속적으로 거주하는 비나(beana)혼과 (2) 신랑이 신부 집에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모타(Mota)등 두 종류가 있다(R. de Vaux).
(주); 내가...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 이로 보아 삼손은 아내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과거 그녀와 동족들이 저지른 잘못(14:15-18)을 용서하고
아내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려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계획과 호의(好意)는 곧 그의 장인에 의해 산산이 부숴지고 만다(2절).
성 경: [삿15:2]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보복]
본절에서는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동생을 아내로 취할 것을 권고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장인의 행동은 삼손의 급한 성격때문에 임시 조치로 급하게 제시된 방안이거나, 아니면 삼손으로부터 다시 혼수감을 받기 위한 그의 탐욕에 기인한 잔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삼손의 마음은 블레셋 족속 전체에 대한 증오심으로 재차 불타게 된 것이다.
(주);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 만일 삼손의 장인이 삼손과 그의 딸이 하나님앞에서 엄숙히 맺어진 사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러한 변명은 도저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삼손으로부터 병폐(病幣)를 받고서 그의 딸을 내주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으니(14:20) 그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있다. 1:1-20 강해, '병폐와 빙물' 참조.
(주); 그 동생이...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 얼핏 생각하면 삼손 장인의 이같은 제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삼손의 권리를 인정한 데서
나온 제의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 라반이 레아를 라헬인 양 꾸며 야곱을 속이고 그에게서 노동력을 착취한 것과 같은
행위이다(창 29:15-30). 즉 이같은 제의는 다름 아닌 삼손의 장인이 삼손에게 또 다른 병폐를 기대하고서 제시한, 탐욕적 저의가 깔린 제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삼손은 그러한 장인의 간악한 면모를 한 눈에 간파하고서 일언지하에 그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Pulpit COmmentay).
성 경: [삿15:3]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보복]
(주);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 삼손은 장인의 간악한 처사(2절)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블레셋 사람의 일반적인 태도로 간주하고
장인의 가족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 블레셋인들에게 복수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독한 족속들에게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민 32:2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삼손을 사용하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시작하셨는가(13:5)를 발견하게 된다.
성 경: [삿15:4]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보복]
(주);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 여기서 '여우'로 번역된 '슈알'(*)은 '승냥이'(jackal)를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Wycliffe, Hervey, Keill &Delitzsch). 왜냐하면 여우는 보통 군거(群居)하지 않고 단독으로 다니며, 곤충, 과일,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는 반면 승냥이는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 생활을 하는 여우를 300마리나 잡는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삼손이 잡은 300마리 짐승은 승냥이임에 분명하다.
(주);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 여기서 '홰'란 흡수력이 강한 나무 막대기에 기름을 듬뿍 묻혀서 불에 잘 타게끔 만들어 놓은 막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전체 여우 수가 300마리였으니 여우 2마리씩을 연결한 후 한 개의 채를 꽂았다 해도 최소한 150개의 채가 필요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삿15:5]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보복]
(주);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 고래(古來)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역사성(歷史性)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러나 본 사건은 상식적인 견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즉 약 150개의 홰에 불이 붙자 300마리의 여우들은 뜨거움에 놀라서 내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우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온통 불바다를 이루자 여우들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곳만을 찾아내 숨어들려고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곡식 밭은 순식간에 전소(全燒)하게 되었을 것이다(Matthew Henry). 이와같이 곡식단을 불사르는 방법은 고대 농경 사회에는 흔히 있던보복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보복 행위는 그 지역의 한 해 경제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이다.
(주); 감람원 - 이에 해당하는 '케렘 자이트'(*)는 '포도원과 감람원'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같은 번역을 취하는 성경으로는 70인역(LXX), KJV,
NIV, 공동번역 등이 있다. 한편 이는 당시 딤나 지방에 포도원이 많았던 점(14:5)에 비추어 볼 때 그리 무리한 번역은 아니다.
성 경: [삿15:6]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보복]
(주); 블레셋 사람 - 딤나 주민은 물론 그밖의 다른 지역에 거하던 블레셋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딤나 주민들만이 삼손을 응징하려 들었다면 그들이 삼손의 장인을 가리켜 굳이 '딤나 사람'이라고 표현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라든가 아니면 '우리 지역에 사는 사람' 등으로 표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 삼손의 보복 행위로 말미암아 한 해 수확물을 몽땅 소실(燒失)당한 블레셋인들은 극도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정작 삼손을 잡아 처벌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의 처가 식구들을 처벌하는 것이 쉬웠으므로, 이에 그들은 삼손의 장인과 그의 아내를 잡아 불로 태워 죽였던 것이다.
(주);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 - 고대 근동에서 불로 태워 사형시키는 것은 간간이 있던 일로서 성경에서도 간음한 자에게 이같은 형벌을
내릴 것을 명하고 있다.(창 38:24; 레 20:14; 21:9). 신 25:1-4 강해. '성경에 나타난 형벌의 종류' 참조. 한편 어떤 헬라어 사본이나 시리아어
사본에는 이 부분을 '그녀와 그녀의 아비집을 불살랐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8:15에 기록된 블레셋 청년들의 협박과 그내용이
일치한다(Cundall). 아무튼 삼손의 아내와 장인은 자기 동족들의 손에 의해 이처럼 끔찍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그들이 일신상의 안일만을
도모하여 삼손을 배신하고 일종의 간음죄를 저지른 데 대한 당연한 형벌이다. 특히 삼손의 아내는 블레셋 청년들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남편을
배신하고 동족의 편에 붙기까지 하였지만(14:15-17), 결국 그 협박의 내용대로 죽임당하고 말았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오묘함을 엿볼 수 있다.
성 경: [삿15:7]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보복]
(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처가에 행한 처사(6절)에 대한 삼손의 태도 표명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간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견해는 곧 다음 두가지이다. (1) KJV는 본절을 '비록 너희가 이 일을 하기는 했으되'(though ye
have done this)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딤나 여인의 간음 행위에 대한 블레셋인들의 응징에 대해서는 삼손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2) 개역 성경에서 처럼 '이것이 너희가 나를 대하는 것이라면 나도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행하겠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이다(Henvey).
그런데 사실 블레셋 사람들이 특별히 삼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비록 그들이 삼손의 처가를 징벌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응징이지 삼손에게 호의를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4-6절). 따라서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블레셋의 처사는 오히려 삼손의 증오심만 자극한 결과를 빚고 만 것이다.
성 경: [삿15:8]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보복]
(주); 크게 도륙하고 - 삼손의 처가에 대한 블레셋의 처사는 이처럼 삼손으로 하여금 블레셋을 칠 빌미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한편 여기서 '도륙하고'에 해당되는 원문은 문자적으로 '넓적다리 위의 다리'(쇼크 알 야레크, * )를 쳤다는 뜻이다. 즉 직역하면 '넓적다리 위의 엉덩이'(hip on thigh)를 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상대방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역 성경의 의역(意譯)이 적절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Wylciffe,pulpit Commentary).
(주);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 대하 11:6에는 베들레헴 근방에 위치한 에담(Etam)이 나온다. 그러나 그곳은 딤나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본절의 사건과 무관한 것같다. 한편 대상 4:32에 따르면 시므온 지파내에도 에담이란 지역이 있는데 본절의 에담은 바로 이곳인 것 같다. 더욱이
9절에서 블레셋사람들이 시므온 지파가 함께 거하고 있는 유다(수 19:1)에 진을 친 것으로 보아 그곳이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로 보아 삼손은
자기 고향 소라에서도 안전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것 같다. 아니면 자기로 인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이곳 에담으로
피신한지도 모른다.
성 경: [삿15:9]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을 넘겨 주려는 유다 족속]
(주);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편만한지라 -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당한 일(8절)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하여 삼손이 숨어 있는 유다 지역을 칠
작정으로 레히(Lehi)에 진을 쳤다. 그런데 이곳 레히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딤나나 소라, 에담 그리고 블레셋
접경(接境)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이곳을 브엘세바에서 6.4Km 지점에 있는 요새 엘 레히(el lechieh)인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2 p, 415). 반면 또 어떤 이는 벧세메스 부근에 있는 오늘날의 '킬벳 에시아그'(Khirbet es -
Siyygh)일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성 경: [삿15:10]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을 넘겨 주려는 유다 족속]
(주); 유다 사람들이 가로되 - 여기에서 우리는 블레셋의 압제하에서 그들의 눈치만 살피며 삼손의 모험의 결과들을 두려워하는 비참한 유다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갈렙을 필두로 하여 가나안 정착 초기에 보여준 유다 지파의 용맹성에 비해 볼 때(1장) 본절에 나타난 이러한 유다
지파의 모습은 가히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갖는 전형적인 실태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삿15:11]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을 넘겨 주려는 유다 족속]
(주); 유다 사람 삼천 명이...삼손에게 이르되 - 5절에 따르면 당시 블레셋 군대는 약 1천명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삼천 명이 동원되어 삼손을 잡으러 나섰다. 이는 당시 삼손의 힘이 어느 정도로 세었는지를 잘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당시 유다 지파가 얼마나 노예적 근성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있다. 만일 유다 사람들이 삼손과 힘을 합쳐 블레셋에 대항했더라면 블레셋으로부터 독립할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삼손을 잡아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범하고 만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단지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배반 행위까지도 종종 범하게 된다(마12:30).
(주);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긴 했으나 굳이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은 현실 안주내지는 무사 안일(無事安逸)을 지향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위대한 사명을 망각해 버렸던
것이다(출 19:6). 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진취적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했던 광야 노정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흡사하다(출 16:2, 3).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노예적 굴종읕 벗어 던지고자 했던 삼손의 궐기(蹶起)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성가신 만용 정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본절에서 유다인들이 삼손을 다그치는 것도 곧 '왜 쓸데없이 부스럼을
긁어 상처를 크게 만드느냐'는 무사 안일적 힐난이었다.
성 경: [삿15:12]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을 넘겨 주려는 유다 족속]
(주);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왔노라 - 이처럼 이제 삼손이 동족들의 손에 묶임을 당해 이방 대적에게 넘기어지게 된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이다. 그런데 이는 무릇 경건한 자기 핍박을 받으며(딤후 3:12),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사실(마13:57)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삼손을 묶어 블레셋인에게 넘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허다하게 발견된다. 마치 안일한 생존이 최상의 행복인 양 몸을 사리기만 하며, 보다 숭고한 진리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 조소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부지 기수인 것이다. 그러나 영원을 사모하는 귀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되, 종속되지 아니하고 진리로 세상을 극복하는 진취적 신앙을 늘 유지 함양해야 할 것이다(전 3:11; 요 16:33; 18:36).
(주); 너희는 친히 나를 찾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 여기서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는 삼손의 위대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비열한 유다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분노하며 책망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삼손은 오히려 그 마음을 블레셋에게로 돌려 자신의 동족으로 하여금 그토록
비굴해지도록 만든 블레셋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불태웠다. 그래서 삼손은 동족의 손에 순순히 이끌리어 블레셋인들에게 넘기어진 후 여호와께서
주신 완력으로 블레셋인들을 쳐부수기로 마음먹고 이와같은 맹세를 유다 사람들에게 촉구한 것이다.
성 경: [삿15:13]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을 넘겨 주려는 유다 족속]
(주); 새 줄 둘로 결박하고...그를 끌어내니라 - 그토륵 엄청난 힘을 소유한 삼손은 마치 어린 양처럼 순순히 동족에게 포박되어 블레셋 사람들
앞에까지 끌려 간다. 이는 곧 그가 대적할 대상이 동족이 아닌 블레셋 족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원수 로마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행 8:32; 롬 8:36).
성 경: [삿15:14]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라맛 레히 사건]
(주);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소리 지르는 동시에 -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결박된 채 오는 모습을 보고선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는 장면이다. 즉 그들은 이제까지 겪어 본 중에 가장 힘센 사람이므로 어떻게 손 써 볼 수 없었던 삼손이 꽁꽁 묶여서 오는 모습을 보자 그의 주변으로 몰려 들며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Wycliffe,Matthew Henry)
(주);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 여기서 '여호와의 신'은 곧 성령을 가리킨다. 3:10주석 참조. 즉 원수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
승리의 환호성을 지를 때 삼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고, 포박된 줄은 불탄 삼과 같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결박을 푸시고
죄의 사슬을 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습을 상기하게 된다(히 2:14).
성 경: [삿15:15]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맹활약]
(주); 라맛 레히 사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 여기서 '나귀의 새 턱뼈'라는 것은 죽은 지 얼마 안된나귀의 턱뼈를 가리킨다. 이것은 오래되고 마른 턱뼈보다 더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으므로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서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안성 마춤이었다(Lange).
(주); 그것으로 일천 명을죽이고 - 실로 피 튀기는 대학살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단 한 줄로 요약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서 환호하며 뛰어오던 모습(14절)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즉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대적들은 순식간에 고통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죽어갔던 것이다.
성 경: [삿15:16]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라맛 레히 사건]
(주);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 삼손이 혼자 몸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무찌르고서 이제 자신의 승리를 2행시로 노래하는 장면이다. 이 시에서
'나귀'(*, 하모르)와 '더미'(*, 하모르)는 동의어로서 언어 유희를 담은 시이다(Matthew Henry). 이것은 신 32:30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삼손이 자신의 승리로 인해 이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삿15:17]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라맛 레히 사건]
(주);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여기서 '라맛 레히'(Ramath -Lehi)는 '턱의 산'이라는 뜻이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나귀의 턱뼈를 던져 떨어진 곳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던 것이다. 아마 9, 14절에 언급된 '레히'라는 지명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삿15:18]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라맛 레히 사건]
(주);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 이로 볼때 삼손이 블레셋 일천 명과 대항하여 싸울 때(15절)에 유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삼손이 싸우는 동안 모두 도망가 버렸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일천명과 상대하여 싸운 삼손은 이제 지치고 갈증이 나서 기진 맥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갈증으로 인하여 죽음 직전에 이른 삼손은,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만이 참 삶을 얻는다는 진리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주);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 이 때의 삼손은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을 이기고 이스라엘 광야에까지 도망갔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던 그러한 심정이었을 것이다(왕상 19:4). 그렇지만 그는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1) 삼손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한 위대한 구원의 체험을
상기함과 동시에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시30:10; 39:4). (2) 그는 스스로를 종으로 표현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고 계심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에 더불어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갔다(롬 6:13). (3)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만일 삼손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죽게 된다면 라맛 레히에서 빛나게
했던 하나님의 명예까지도 더럽히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시 23:3)을
간구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삿15:19]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라맛 레히 사건]
(주);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 여기서 '한 우묵한 곳'에 해당하는 '함마크테쉬'(*)는 '절구' 또는 '절구형태로 된 구멍'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고대의 주석가들LXX, Vulgate, KJV, Luther)은 나귀 턱뼈(15-17절) 모양이 이 절구 모양과 비슷하므로 하나님께서 턱뼈의 우묵한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란 단어에는 구체적인 대상을 나타내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점과
엔학고레라는 이름이 본서 저자의 시대에까지 알려져 있다는 사실등을 볼 때 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옳지 않음이 분명하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나귀턱 뼈와 같은 모양의 뾰족한 절벽 사이 구멍에서 물이 흘러 나오게 하여 삼손의 갈증을 해갈해 주셨을 것이다(Keil, Lange, Studer).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위를 가르셔서 물이 흘러나오게 한 사건은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출 17: 6; 민 20:8, 11). 그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하는 이적들이다.
성 경: [삿15:20]
주제1: [삼손의 맹활약]
주제2: [삼손의 맹활약]
라맛 레히 사건 본절에서는 '레히'에서 대승리를 거둔 삼손이 이제서야 비로소 동족의 냉대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인정받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건축자들에 의해 버려진 돌처럼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과 같이 승귀(昇貴)되신 것을 연상케 한다(시 118:22).
(주); 블레셋 사람의 때에 - 사사기의 기록은 엄격하게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기 보다는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연대별 순서가 무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사들의 활동 범위가 국지적(局地的)이었기 때문에 연대적으로 둘 이상의 사사들이 동시대에 활동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삼손의 경우에도 그 활동 연대를 추정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그에 관한 기록들과 본절을 참고할 때 삼손의 사사직은 블레셋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과 결부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B.C.1080-1060년에 걸쳐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Cundall). 이렇게 볼때 삼손은 입다와 동시대인이면서 사무엘의 활동 시기와도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이다. 한편 그의 활동 반경은 단 지파와 유다 지파에만 국한되었다.
(주);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 '레히'에서 블레셋족을 격멸한 일로 인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의 사사로 정식 인정받은 삼손이 이후 20년 동안
사사로서의 공적 활동을 하였음을 부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20년간은 블레셋의 이스라엘 압제 기간 40년(13:1)의 절반 밖에 못 미치는
기간이므로 삼손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3:1 주석 참조.
성 경: [삿16:1]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삼손의 괴력]
(주); 삼손이 가사에 가서 - '가사'(Gaza)는 가드,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과 더불어 블레셋의 주요 다섯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도 가장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가사에는 애굽에서 서아시아로 통하는 상업로가 있어 중요한 전략 도시로 알려져 있다.이 도시는 가나안 정복시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었으나(1:18) 해안에 있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곧 블레셋에 의해 재탈환되고 말았다. 한편 가사는 삼손의 주요 활동지인 소라에서(13:2) 약 60Km가량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해서 삼손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추측컨대 레히에서의 삼손의 활약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몹시 두려워 하였고 삼손도 어느 정도 자신의 힘을 믿고 교만해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땅을 맘대로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15:14-17). 이것이 삼손을 실족케 하고 비참한 종말을 가져온 것이다.
(주); 한 기생을 보고 - 여기서 삼손은 또 다시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14:1) 죄의 늪에서 헤매이게 된다. 한편 여기서 기생에 해당하는
'조나'(*)는 '매춘부' 라는 뜻이다(창 38:15; 수 2:1). 그런데 아람 탈굼역에는 이 '조나'가 '여관의 여주인'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렇다면 삼손은
기생으로 인하여 음욕에 사로잡혀 그녀와 동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여관에서 잠을 잔 셈이 된다(Cassel). 그러나 '조나'는 분명히 '창녀',
'매춘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동 번역과 KJV, RSV등 대부분의 역본들도 이를 '매춘부'(Harlot)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삼손이 가사에
어떤 일로 갔다가 매춘부의 유혹을 받고 그녀와 동침하였다는 의미이다. 삼손의 이러한 행위는 (1)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악이며 특히
이스라엘의 사사 위치에 있는 자로서는 도저히 취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2) 한편으로는 당시 이스라엘 사사의 일반적 풍조가 매우 문란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러한 죄악된 습성은 더 자라기 전에 근절되어야 마땅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 필경 엄청난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는 삼손의
경우에서 잘 입증되었다.
성 경: [삿16:2]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삼손의 괴력]
(주);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얼마나 두려운 존재로 여겼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사 사람들은 삼손의 출현 자체를 거리낌과 위해(危害)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삼손을 죽이려고 했다.
(주); 곧 그를 에워싸고 - '에워싸다'에 해당하는 '사바브'(*)는 '주위를 돌다','주위에 포진(布陣)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블레셋인들이 성문 입구에 복병을 배치하고 또한 삼손을 감시하기 위해 기생집 부근에 파수꾼을 파견한 것을 의미한다.
(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 블레셋 병사들은 삼손이 있는 기생집을 에워싸며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새벽을 기다렸다. 그들은 삼손이
두려웠기 때문에 정면대결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기습 공격할수 있는 기회만을 노렸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삼손이 성문을 나설 때 뒤에서
기습 공격을 하려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본절 문맥의 전후 상황을 볼 때 이 기생 집은 가나안 정탐시의 기생 라합의 집과 같이 성벽
위나 성문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다(수 2:15).
성 경: [삿16:3]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삼손의 괴력]
(주);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 본절은 삼손이 밤에 깊이 잠들었다가 문득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온 것을 알고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본절에는 삼손이 어떻게 하여 가사 사람들의 흉계를 알아차리고 밤중에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 기생 라합의 경우처럼 기생이 삼손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는지도 모른다(수 2;16).
(주);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 삼손은 성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과 병사들의 눈을 피해 성문 전체를 뽑아 메고 헤브론까지 가버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문은 그 성읍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민족의 국력(國力)을 상징한다(창 22:17; 24:60).따라서 삼손이 가사의 성문을 유다의 중심지인 헤브론으로 옮겼다는 것은 블레셋의 권세가 유다에게 복속(服屬)될 것을 상징한다(Lange).
(주);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 헤브론(Hebron)은 가사에서 동쪽으로 약6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이다(수 15:13).
따라서 삼손이 성문들을 메고 약 62Km나 되는 먼 거리를 옮겼다는 것은 그의 힘이 얼마나 엄청났는가를 가히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카일(keil) 등과 같은 학자들은 삼손이 그 성문을 메고 실제로 헤브론까지 간 것이 아니라 가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 꼭대기까지 간
것이라고 주장한다(Cundall, Hervey). 하지만 삼손이 성문을 그런 언덕으로 옮길 수 있었다면 헤브론까지도 충분히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삼손은 헤브론이 유다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유다 사람(15:10, 11)과 더불어 완전한 승리를 만끽하려고 가사 성문을 헤브론 앞 산까지 옮겨
놓았을 것이다(Cassel).
성 경: [삿16:4]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유혹]
(주); 삼손이...여인을 사랑하매 - 가사에서 기생집에 들렀다가 큰 변을 당할뻔 했던 삼손(1-3절)은 이처럼 다시 육신의 정욕에 빠져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다'는 말은 삼손이 들릴라와 합법적인 결혼을 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추측컨대 들릴라의 신분은 기생이거나 적어도 그다지 도덕적인 여인은 아닌 것 같다. 한편 본문을 통해서는 들릴라가 블레셋 여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들릴라'라는 이름이 '음탕한' 또는 '연약한'이란 뜻의 셈어이고(Cundall) 그녀의 거주지가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렉 골짜기인 것으로 보아(Eusebius) 유다 여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당시 블레셋 치하에서 유대인과 이방 인간의 통혼이 횡행하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들릴라는 블레셋사람과 결혼한 여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그녀가 블레셋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던 것(5절)으로 보아 충분히 타당한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주); 소렉 골짜기 - '좋은 포도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서남쪽 약 21Km지점에서 지중 해변의 서북 방향으로 약 32Km나 뻗어 있는
골짜기이다. 오늘날 '와디 에스 사랄'(Wadi es-sarar)로 불리우고 있는데 그 부근에는 소라, 딤나, 레히 같은 성읍이 위치해 있다(Wycliffe).
성 경: [삿16:5]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유혹]
(주); 들릴라의 유혹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 - 여기서 '방백들'이라 함은 3:3에 언급된 것처럼 블레셋의 주요 다섯 도시인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의 다섯 방백을 가리킨다(Cundall, Hervey). 여기서 우리는 블레셋족이 삼손의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힘이 있는지 - 블레셋의 방백들은 삼손의 초자연적인 힘이 당시의 이방인들이 지니고 다니던 호신패(護身牌)나 부적(符籍)과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미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유행되고 있던 것이다(Cassel).
(주); 은 일천 일백 - 곧 '은 천 백 세걸'을 가리킨다(공동 번역).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를 설득하고 은 일천
일백 세겔로 모종의 계약을 체결했다. 일반적으로 은 한 세겔(Shekel)은 일반 노동자의 4일간의 품삯에 해당된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그러므로 들릴라에게 있어서 은 일천 일백은 그녀가 십 년동안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한다 해도 모으기 힘든 엄청난 액수이다.
들릴라는 이와 같이 엄청난 재물에 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경우에 당할 보복이 두려워
어떻게든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고 애쓴다(6-17절).
성 경: [삿16:6]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유혹]
(주); 어떻게 하면...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 여기서 '곤고케 하다'에 해당하는 '아나'(*)는 '억압하다', '비천케 하다'라는 뜻이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삼손에게 이와 같이 직설적인 표현으로 질문한 것으로 보아 들릴라는 상당히 우둔한 여자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 삼손은 세번씩
거짓말을 하면서 그녀의 질문에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회피했다(7, 11, 13절). 그리고 또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이 그 당시 블레셋인들과 같이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눈치채고 그럴듯한 미신적인 투로 대답을 한다.
성 경: [삿16:7,8]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유혹]
(주); 푸른 칡 일곱으로 - 여기서 '칡'에 해당하는 '예테르'(*)는 현악기의 현이나 활시위(시 11:2) 또는 동물의 심줄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Hervet, Keill &Delitzsch, Wycliffe). 따라서 정확히 어떤 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미신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들릴라나 블레셋 방백들에게는 삼손의 대답이 신빙성있게 보였던 것같다. 더욱이 당시 히브리인들은 '일곱'이라는 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창 2:2, 3) 삼손의 대답은 더욱 그럴 듯하게 보였을 것이다.
(주);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 당시 블레셋인들이 삼손을 보통의 인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화 속의 인물들처럼 생각했음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
아무튼 그들이 이러한 삼손의 대답을 얼마나 신빙성있게 받아들였는가는 이어지는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성 경: [삿16:9]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유혹]
(주); 이미 사람을 내실에 매복시켰으므로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매복한 사람이 내실에 앉아 있었고'이다. 여기서 '매복한 사람'에 해당하는 '하오렙'(*)은 단수형이지만 집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Hervey). 즉 들릴라는 삼손을 이미 일곱 개의 칡 줄로 묶어 두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불러들여 내실에 매복시켰던 것이다.
(주);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 - 삼손은 저의(底意)를 감춘 채 이렇게 자기에게 위험을 알려 준 들릴라에 대하여 호의를
품었을런지 모른다. 아니면 들릴라의 음모를 알고도 육적인 욕망에 깊이 빠져 있어서 그녀를 포기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삼손은 이와
같이 위험을 당하고도 여전히 들릴라를 가까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10절 이하). 이처럼 죄의 유혹은 눈을 멀게 하고 현명한 판단력을 상실케 만드는
것이다.
성 경: [삿16:10]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유혹]
(주);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 여기서 '희롱하여'에 해당하는 '헤탈르타'(*)는 '엉덩이를 치켜 세우다'라는 뜻의 동사 '탈랄'(*)의
사역형능동태로서 '속임수에 의해서 심한 모욕감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 속에서 들릴라의 우둔함과 여성으로서의 귀염성을 느낄 수 있는데
아마 삼손은 이러한 들릴라의 매력에 매료되어 더욱 죄악 속 깊이 빠져 들어간 듯하다.
성 경: [삿16:11,12]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두번째 유혹]
(주);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 여기서 '줄'이란 비틀어 꼰 밧줄을 가리키는데 15:13에도 동일한 어휘가 사용되었다. 한편 본절과
같은 삼손의 대답도 들릴라에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럴 듯하게 여겨졌을 것이다(7, 8절). 그러나 사실은 이번에도 삼손이 자신의 강함을 믿고서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들릴라를 희롱한 것과 다름없다. 삼손의 비참한 종말은 바로 이러한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대적의 계교에 무방비 상태로 안일하게 자신의 힘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삼손은 실족케 되고만 것이다(15-22절).
성 경: [삿16:13]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두 번째 유혹]
(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 애초에 삼손은 들릴라의 계획적인 질문을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그도 역시 농담로
답변하였다(7절).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결박 사건으로 미루어(8, 9절) 삼손은 여인의 간청속에 블레셋인들의 계교가 담겨 있음을 충분히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들릴라의 질문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정욕에 빠져 삼손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유
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아 들릴라는 끈질기게 유혹의 손길을 뻗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절에 나타난 세번째 대답은 이전의 두 대답에 비해 더욱
사실에 가까와졌다. 즉 삼손은 나실인의 특징이자 자신의 힘의 근원인 머리털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인간의 본질 저
밑바탕을 잠식함으로써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짠다는 것은 베틀에 있는 선 사이에 머리털을
집어넣고 옷을 짜듯이 짜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하고 나면 삼손의 머리털은 모두 일곱가닥씩 가지런히 짜여지게 될 것이다.
성 경: [삿16:14]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들릴라의 두 번째 유혹]
(주); 들릴라의 두 번째 유혹 바디 - '바디' (*, 야테드)는 대나무로 바늘처럼 만들어 베를 짤 때 베실을 낱낱이 꿰어 짜는 데 사용하는 제구(製具)이다.
(주); 직조틀의 바디와 위선을 다 빼어내니라 - 본절의 상황으로 볼 때 삼손의 머리털은 모두 베틀에 묶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도 삼손을 완전히 결박하지는 못했다. 한편 당시에는 애굽을 중심으로 하여 베짜는 기술이 베니게 해안 지역에 널리 유행하였다. 이와
관련, 애굽의 한 비문은 베짜는 여인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Cassel).
성 경: [삿16:15]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유혹에 넘어간 삼손]
(주);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 삼손에게 세 번씩이나 속은 들릴라는 이제 최후로 사랑을 빙자한 간책(奸策)을 동원한다. 딤나 여인의
간청에 있어서도, 삼손은 본절의 경우와 똑같이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수수께끼의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14:16). 눈물과 사랑에 호소하는
들릴라의 집요한 유혹으로 말미암아 이제 삼손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16절). 아무튼 이상으로도 우리는 삼손이 얼마나 들릴라에게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첫번째 아내를 떠난 후 아직 혼자 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15;1-8).
성 경: [삿16:16]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유혹에 넘어간 삼손]
(주); 날마다 그 말로...마음이 번뇌하여 - 삼손이 이처럼 번뇌한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그래도 아직 하나님께로부터 구별받은 나실인이라는 자각이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떠난 자는 양심의 힘으로도 악의 손길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법이다(고전 8:7,12 ). 그러므로 결국 삼손도 들릴라에게 자신의 힘의 근원을 털어놓고 만다(17절).
(주); 번뇌하여 - 원어 '카차르'(*)는 '잘게 자르다', '찢다'는 뜻이다. 이는 삼손이 극심한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혀 마치 그 마음이 찢어질 듯한
상태임을 잘 나타내준다.
성 경: [삿16:17]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유혹에 넘어간 삼손]
(주);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 결국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의 게명을 끝까지 고수하기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욕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즉
삼손은 사자를 찢어 죽일 만큼 강하였으나(14:6) 사랑의 유혹에는 약했고 일천명의 블레셋인들을 나귀턱 뼈로 쳐죽일 수 있었으나(15:15) 사랑의
올무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싸움에서 삼손은 육에게 지고 만 셈이다(롬 8 :3-11).
성 경: [삿16:18]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사로잡힌 삼손]
(주); 이 제 한번만 올라오라 - 이것으로 볼 때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에게 거의 신임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 인들도 더 이상
삼손의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거의 포기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번 게임이 삼손에게는 마지막 승부에서 돈에 대해 강한
욕망을 가진 들릴라가 삼손을 이긴 것이다. 결국 삼손은 육욕에 눈이 어두워 신앙을 저버린 것이다.
성 경: [삿16:19]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사로 잡힌 삼손]
(주);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 지금까지 들릴라는 삼손이 가르쳐 준 대로 그의 힘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스스로는
한번도 정말 그의 힘이 없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또 한번의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직접 삼손을 시험하여 그의
힘이 없어졌는가를 확인하는 신중성을 나타냈다. 한편 삼손의 힘은 외적인 머리카락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실인으로서의
성별(聖別)의 상징이며 증거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이 힘이 사라진 때는 그의 머리카락이 잘리운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들릴라에게 진정을
토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때에 사라졌다고 할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성 경: [삿16:20]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사로잡힌 삼손]
(주);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 구약 성경에서 이보다 슬픈 장면을 묘사한 구절은 없다. 민 14:40-45에는 이와
유사하게 모세가 자기 민족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42절)고 한
장면이 나온다. 아무튼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털을 깎이운 삼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도 더 이상
그에게 머물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위기에 처한 삼손은 예전의 힘을 과시해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기력해진
자신과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이방 대적들의 능욕거리로 전락한 스스로를 발견하고 절망과 회한 가운데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케 만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본 장면을 통해 다음 몇가지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성도들이 타락의 길로 들어서면 불신자들보다 더욱 비참한 형벌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방 나라
백성들보다 더높은 도덕 수준의 행실이 요구되었는데 특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2)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나서 자라고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리심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시 51:5 롬 3:23). 그러나 죄인들을 대신하여 버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거룩한 나라의 시민들로 인정받게 되었다(마 27:46; 빌 3:20). (3)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먹는' 식으로 구습(舊習)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할 것이다(잠 26:11 빌 3:13).
성 경: [삿16:21]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사로잡힌 삼손]
(주); 그 눈을 빼고 -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승리자가 패한 자에게 이같이 잔인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민 16:14; 왕하 25:7).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Zedekiah)도 느부갓네살에게 잡혔을 때 두 눈을 뽑히우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일이 있다(왕하 25:7). 한편으로 삼손이 당한 이런 형벌은 그가 눈으로 여인을 '보므로' 죄악에 빠진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4:1; 16:1). 이와 관련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고 하셨다.
(주);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니 - 본래 조그마한 맷돌은 가정에서 여인들이 돌리었다. 그러나 가축을 사용하여야만 돌릴 수 있는 정도의 큰 맷돌을
돌리는 일은 대개 노예가 맡아 하였는데 이는 노예의 사역 중에서도 가장 고된 일로서 천히 여기던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형벌은 로마와 헬라
시대에 유행하였다(Lange, Hervey, Keil & DelitzschCommentary, Vol, 2, pp, 423 f).
성 경: [삿16:22]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사로잡힌 삼손]
(주);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 '시작하다'라는 단어는 이미 13:5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본서 기자는 이 단어를
통하여 삼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또 육의 눈을 잃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중에 삼손이 서서히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하였음도 암시해 주고 있다.
성 경: [삿16:23]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사로잡힌 삼손]
(주); 블레셋의 다곤 축제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 다곤(Dagon)은 블레셋의 주신(主神)으로서 '날씨의 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곡물의 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명칭은 곡물을 뜻하는 '다간'(*)에서 온 것이다(Philo). 그런데 중세 율법학자들은 가사(Gaza) 지역이 해안 지방인 것으로 보아 다곤은 '바다의 신'이며 그 명칭은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그 같은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바 오늘날에도 그런 견해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일부 있다(Hervey, Cassel, Keil).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토지를 황폐화시킨 삼손(15:4, 5)을 다곤 신이 자기들의 손에 붙였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곤은 곡물 신임이 분명하다. 한편 이 다곤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중에서도 널리 유행되었는데 벧산(삼상 5:2-7) 지역에서 특히 많았고 다곤의 이름을 딴 도시도 있었다(벧다곤, 수 19: 2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26:1-13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을 참조하라.
(주); 즐거워하고 - 이에 해당하는 '사마흐'(*)는 '원기를 돋우다'는 뜻으로 대개 종교적 축제와 연관되어 사용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블레셋인들은 다곤에게 제사를 드린 후 축제를 베풀었음에 분명하다.
성 경: [삿16:24]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블레셋의 다곤 축제]
(주);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 레셋에게 큰 골치거리였던 삼손이 잡히므로 말미암아 이제 거국적(擧國的)인 감사 축제가 블레셋에서 열렸다.
이것으로 볼 때 그 동안 반블레셋적인 삼손의 행위에 따른 블레셋인들의 피해가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짐작케 된다.
성 경: [삿16:25]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블레셋의 다곤 축제]
(주);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 대개 큰 축제에는 많은 술이 제공되어 흥청거리기 마련이다. 여기서 '마음이 즐거울 때'에 해당되는 '토브 리밤'(*)도 흔히 '술에 취해 마음이 흥분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18:20 ;19:6; 삼상 25:36 ;삼하 13:28). 블레셋인들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한때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삼손을 끌어내어 재주를 부리게하여 즐기는 등 온갖 모욕을 주었다.
(주); 재주를 부리게 하자 - 문자적 뜻은 '희롱하자'(잠 26:19)이다 . 그러나 삼상 18:7과 삼하 6: 5에서는 노래와 악기에 맞춰 춤을 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로 볼 때 블레셋인들은 앞을 못보는 삼손으로 하여금 음악만 듣고 춤을 추게 하고선 그것을 보고 즐긴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주);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 삼손이 춤을 추다가 기둥 사이에 세워지게 된 것은 그에게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거나 아니면
블레셋인들이 거기서 삼손을 더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삿16:26]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블레셋의 다곤 축제]
(주); 이 집을 버린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 본절로 볼 때 삼손은 이전부터 이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는 잠간의 휴식 시간을 통해 옆에 있던 소년으로 하여금 그 건물 전체 또는 지붕을 바치고 있는 기둥을 찾아서 그것에 의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의지하게'에 해당되는 '솨안'(*)은 '조용히 쉬게 하다'라는 뜻이다(Living Bible). 즉 삼손은 피곤한체 하면서 버팀
기둥에로 자연스럽게 접근해 간 것이다.
성 경: [삿16:27]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블레셋의 다곤 축제]
(주); 그 집에는...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 여기서 본서 기자는 당시 그 건물의 구조를 대충 묘사해 보임으로써 삼손이 행한 이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즉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옥의 형태는 대개 앞쪽에 넓은 마당이 있고 단층의 가옥일 때는 거실 위에 평평한 지붕이
있다. 그리고 2층 이상의 가옥일 때는 거실은 2층에, 아래층은 하인들의 방과 창고로 되어 있다. 반면 그보다 더 큰 회당의 경우에는 지붕이 넓어서
3천명 이상이 올라갈 수도 있었으며 지붕은 대개 목재로 된 두 개의 버팀대로 받쳐져 있었다. 따라서 이 버팀대를 빼버릴 경우에 지붕의 가운데
부분은 파괴되어 위에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 삼손이 단번에 수많은 블레셋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었던 것(29, 30절)도 바로 그같은 가옥 구조 덕분이었다.
성 경: [삿16:28]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삼손의 장렬한 최후]
(주);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 삼손은 '엔학고레'(15:19)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그때의 심정으로 다시 한번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본절에 기록된 삼손의 기도는 그가 사용한 하나님의 명칭 세 가지와 더불어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 주(*, 아도나이):이것은 삼손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주장하시는 분은 곧 주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슬로 맨 블레셋이 주(主)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영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이심을 보여 준다. (2) 여호와(*,예호와):이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뿐이심을 말하는 삼손의 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3) 하나님(*, 하엘로힘):여기서 관사 '하'(*)가 붙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신들 중의 신임을 나타낸다. 이로 볼때 삼손은 이 싸움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열방의 신들과의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숭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주); 나를 생각하옵소서 - 여기서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자카르'(*)는 '기억해내기 위해 표를 해두다'는 뜻이다. 즉 삼손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종'으로 구별해 주신 것(13:2-5)에 의거, 다시금 자기를 권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의 장중(掌中)에 다시 한번 사로잡히기를 소원하는 삼손의 심경을 잘 나타내 준다.
(주);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 이러한 삼손의 기도는 마치 자신을 불구로 만든 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삼손이 정말로 그러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그것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롬12:19; 히 10:20)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여기서의 강조점은 '원수'인 블레셋에게 있다. 즉 삼손의 기도는 자신의 두 눈을 위해서 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고통을 준 원수들인 블레셋족에 대하여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삼손의 민족적 정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삿16:29]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삼손의 장렬한 최후]
(주); 삼손의 장렬한 최후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 삼손은 이처럼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완력으로 그 건물의 버팀대를 두 팔로 하나씩 끌어
안고 밀기 시작했다. 기도 후에 잇따른 이러한 즉각적인 행동 개시는 확신에 찬 믿음의 발로이다.
성 경: [삿16:30]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삼손의 장렬한 최후]
(주);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 자기 한 몸을 던져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는 이러한 삼손의 살신 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라고 말한 에스더의 정신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또 이러한 죽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이
된다. 한편 이와 관련 우리는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전사(戰死)였다. 즉 삼손은 최후의 장렬한 죽음으로써 블레셋의 신 다곤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
것이다(Keil).
성 경: [삿16:31]
주제1: [삼손의 최후]
주제2: [삼손의 장렬한 최후]
(주);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 삼손은 독자(獨子)였다(13:2, 3). 때문에 여기서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라 함은 이스라엘 동포나 삼손의 부족들을 가리키는 것이다(Cundall). 한편 고대에는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의 왕이나 지도자가 죽은 뒤 그 시신을 처치하는 태도나 방법에 따라 생전의 업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손을 당대의 지도자로 예우를 다하기 위하여 가사(Gaza)의 무너진 블레셋 신전으로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갔음을 보게 된다. 한편 본절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아무런 방해없이 무너진 선전에서 블레셋인들의 시신들과 섞여 있는 삼손의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당시 그 주변의 블레셋인들은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모두 도망가 버린 것 같다.
(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들어 쓰신 자이자 기간이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3:7-11 강해, 이스라엘의 구원자 사사 참조. 한편 이상으로 파란 만장(波瀾萬丈)한 삼손의 생애는 모두 끝난다. 이제 그의
주요 행적을 지도상으로 간략히 나타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성 경: [삿17:1]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를 위한 신상(神像)]
본장에서부터 시작되어 다음 장까지 연결되는 우상 숭배 및 제사장 사건은 그 정확한 발생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삼손 이후가 아닌 사사 시대 초기로 보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개 사사 옷니엘(3:9 -11) 당시인 것으로 본다(keil, Wycliffe, Pulpit Commentary).
(주); 에브라임 산지 -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고 있었던 팔레스틴 중부의 구릉(丘陵) 지대를 가리킨다. 이곳에는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인 실로(Shiloh))및 벧엘(bethel)도 위치해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3:27 주석을 참조하라.
(주); 미가 - 이 이름은 '미카예후'(*)의 단축형으로 그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이다. 성경에는 서로 인물은 틀리나 이와 같은 이름을
소유하였던 자들이 여럿 나온다(삼하 9:12; 대상 5: 5; 대하 34:20; 느 10:11; 미 1:1).
성 경: [삿17:2]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를 위한 신상(神像)]
어미에게서 많은 돈을 훔친 미가가 그 어미의 저주의 말을 듣고 돈을 다시 되돌려 주는 장면이다.
(주); 어머니께서...저주하시고 - 여기서 '저주하다'에 해당하는 '알라'(*)는 본래 신에게 '탄원하다', '간청하다'는 뜻이다. 미가는 어미가 돈을 잃고서 신께 탄원한 이 같은 간구 자체에 어떤 주술적 신통력이 있는 줄로 굳게 믿고 있었다.
(주); 은 일천 일백 - 삼손을 유혹하는 대가로 들릴라가 블레셋 방백들에게서 받기로 약속한 돈의 액수와 동일하다. 16:5 주석 참조. 미가가 레위 소년에게 일년에 은 열을 주겠다고 약조한 것만 보더라도(10절) 이 은 일천 일백은 엄청난 금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 미가는 어떤 용도를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으나 처음에는 어미의 수중에서부터 거액의 돈을 훔치고서도 회개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어미가 자기 돈을 훔친 도둑에게 저주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처럼 어미에게 돈을 돌려주며 자신이
도둑임을 자백했다. 고대 사회에서 저주는 하늘의 심판으로 여겨졌으며 단순히 입술을 통하여 난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 원하는 것을 그대로
성취시켜주는 대리자로 여겨졌다(J.V. Motyer). 그리고 다들 저주는 그에 상응하는 축복의 말을 함으로써 저주의 덫에서 풀려지게 되는 줄로
믿었다. 본절에서 미가의 어미가'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한 것도 그녀의 여호와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고대의 주술적인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분명 이는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저주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1-6절
강해, '저주에 대하여' 및 신 28:15-19 강해, '저주와 시련의 차이점'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삿17:3]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를 위한 신상(神像)]
(주); 내가...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 이처럼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을 저주의 덫에서 풀어내기 위해 가증스러운 신상(神像)을 만들어 숭배하면서도, 그것을 여호와에 대한 간절한 신앙의 표현인 양 여겼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행위이며(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가증스러운 범죄였다(롬1:23). 아뭏든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며 부패해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주);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 우상이 하나인지 아니면 둘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여기서 '한 신상을
새기며'에 해당되는 '페셀'(*)은 돌이나 나무를 깎아 새긴 우상을 가리킨다(신 7;25).그리고 '한 신상을 부어'에 해당되는 '마세카'(*)는 아론의
송아지 우상처럼 주조하여 만든 우상을 가리킨다(출 32:4). 이로 볼 때 미가의 어미는 분명 두 개의 우상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Hervey). 그러나
이와 관련 4절에서 '그 신상'이라고 하여 단수로 표현되어 있고 18:20, 30에서도 '새긴 우상'이라 하여 단수로 표현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면 미가의
어미가 만든 우상은 하나 뿐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Cundall, Keil). 따라서 혹자는 이 양자의 견해를 절충, 미가의 어미가 먼저 은으로 주조한
뒤에 끌로 다듬고 조각하여 하나의 우상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뭏든 그 우상은 암송아지 형상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론의
금송아지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훗날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도 이러한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단과
벧엘에 각각 하나씩 세운 적이 있다(왕상 12:28-30).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론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겨왔던 금송아지는 불가시적인
여호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구체화한 것으로 본다. 어쨌든 그 같은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짓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이것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다(출 20:4, 23; 신 4:16).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친히 천지 만물을
조성(조성)하신 분이긴 하나 그분은 그 어떠한 형상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참된 신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같은 하나님을 지상의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 나타낸 것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가 되지 못하였다. (2) 여호와를 송아지 형상으로 만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애굽의 아피스(Apis)신과 같은 여타 신들 중의 하나로 본 것이니 이는 일종의 불경죄(不敬罪)에 해당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32: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17:4]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를 위한 신상(神像)]
(주);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 미가는 훔친 돈 은 일천 일백을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레 6:5에 의하면 도적이 훔친 것을 주인에게 돌려줄 때는 훔친 것에다가 1/5가치를 더하여 돌려주도룩 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은 200세겔은 미가가 은 일천 일백에 더하여 속죄금으로 지불한 바로 그 돈일 것으로 추정한다(Bertheau).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 은 200세겔은 미가가 어미에게 되돌려 준 은 일천 일백 가운데서 떼어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Cassel). 즉 그들은 레 5:24의 율법이 여기에 적용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Keill). 전후 문맥상 이 두 견해중 보다 더 타당한 견해는 후자로 볼 수 있다.
(주); 은장색 - 원어 '차라프'(*)는 '제련하는자', '세공하는 자'란 뜻이다. 곧은을 재료로 하여 여러 가지 장신구나 물건을 만들어 내는
장인(匠人)을 의미하는 말이다.
성 경: [삿17:5]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 숭배]
(주);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 미가의 신당은 하나님의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실로(수 18:1; 삼상 4:3, 4)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었다. 1절 주석 참조. 이것은 그 당시에 실로가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그리고 미가가 하나님의 성소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파행적으로 개인적인 신당을 소지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문란했던가를 입증해 준다.
(주);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 '에봇'(ephod)은 금실,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로 짜 어깨에 걸치는 의복으로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이다(출 28:6-8). 그런데 이 에봇이 우상처럼 숭배된 것은 기드온 때이다(삿 8:27).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서 전리품으로 취한 모든 금으로써 에봇을 만들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기념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기드온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음란히 섬겼던 것이다(삿8:27). 본문에서 미가가 다시 에봇을 만들어 우상 숭배에 사용한 것도 아마 그 같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드라빔'(teraphim)은 가정의 수호신 상으로서 고대로부터 근동 지방의 각 가정에서 숭배되던 우상이었다(창 31:19; 삼상 19:13, 16 ;왕하 23:24; 호 3:4, 5). 에스겔은 바벨론 왕이 점을 칠 때 이 드라빔을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으며(겔 21:21), 스가랴는 이 드라빔에서 거짓 예언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슥 10:2). 이로 볼 때 드라빔은 미가가 세운 제사장이 점을 치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것 같다(Mattew Henry).
(주);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으로서 레위 지파 아론의 자손들이 그 직분을
세습토록 되어있다(출 28:1). 그런데도 에브라임 사람 미가가 이처럼 독단적으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하여 월권(越權)
행위를 저지른 것일 뿐 아니라 죽어 마땅한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도 우리는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 사회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성 경: [삿17:6]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 숭배]
(주); 그때에는 이스라엘 왕이 없으므로 - 이러한 표현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18:1; 19:1; 21:25) 여기에는 왕정 제도에 대한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1) 부정적 측면:당시 이스라엘에는 전민족을 통솔하는 정치 지도자가 없었으나, 통치법(統治法)은
있었다. 그 통치법은 바로 율법이었고 입법자는 하나님 당신 자신이셨다. 이는, 이스라엘의 궁극적 통치자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응당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그 통치에 순응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때 전백성의 결속은 자연히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늘 함께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진 않고 단지 이방 나라들의 세속적 왕정(王政)제도를 통해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2) 긍정적 측면 :시일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늘어가고 그로 인해 여러 부차적 문제들이 증가함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구체적으로 대행할 지도자가 실제적으로는 강력히 요청되었다. 왜냐하면 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한 마음 한 뜻으로 결집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더 잘 아셨기 때문이다(히4:15). 요컨데 이러한 요청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정을 허락하였으나, 당신의 우려하신 바대로 이스라엘의 왕정사(王政史)는 수많은 오점들로 얼룩지게 되었다.
성 경: [삿17:7]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제사장]
본절에서 13절까지는 미가가 자기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5절)을 폐기하고 대신 한 레위인 소년을 제사장으로 삼은 경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주); 유다 가족에 속한...레위인 -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레위인들에게는 여섯 도피성과 40여개의 성읍을 각 지파에서 떼어 주도록 되어 있다(민
35:6; 수 21:1). 그러나 사사기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무질서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이 제대로 시행될리가 없었다. 그래서 본래
유다 지파의 땅에 살고 있던 이 레위인 소년도 자신이 거할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하여 이곳 저곳으로 방랑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서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생계의 방도를 찾기에만 급급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율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타락하거나 곤욕을 당하게 되기 마련이다(Matthew Henry).
성 경: [삿17:8]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제사장]
(주); 미가의 집에 이르매 - 한때 베들레헴에 우거하던 이 레위인은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여행하던 중 우연히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된다. 아마도 미가의 신당은 큰 길가에 있어서 여행자들의 눈에 쉽게 띄었는지도 모른다.
성 경: [삿17:9]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제사장]
(주);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 베들레헴은 본래 레위인들에게 할당된 성읍들 중에 하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레위인 소년이 베들레헴에서
살게 된 것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땅이 당시 블레셋의 치하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Goslinga). 그러나 혹자는 이를 근거로 하여 그가 레위인이
아니었으며 다만 레위인과 같은 역할을 베들레헴에서 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Cundall). 그러면서 이에 대한 실증적인 예를 들기를 사무엘은
에브라임 태생이지만(삼상 1:1) 실로의 성전에서 제사장의 교육을 받아 레위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분명 레위 지파 중 고핫 가문의 사람이니 그 아들 사무엘도 당연히 레위인이 되기 때문이다(대상 6:16-34).
따라서 우리는 본절에 나오는 소년도 레위인임이 분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만일 이 소년이 베들레헴에서 교육을 받아 레위인 행세를 했다면
굳이 그가 베들레헴을 떠났을 이유가 없다. 또한 그가 단지 레위인으로서의 역할만 행했던 비레위인이었다면 미가가 자기 아들을 폐위하고 대신
그를 제사장으로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가가 그를 제사장으로 세우고 지극히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바로 율법에 정한 그
레위인이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11-13절).
성 경: [삿17:10]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제사장]
(주);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 여기서 '아비'는 '우두머리'란 뜻으로 남을 지도하며 권고하는 위치에 있는 자를 높여 칭하는 말이다(Hrvey, Gosilinga). 창 45:8에서는 요셉에게, 왕하 6:21에서는 엘리사에게, 그리고 사 22:21에서는 엘리아김에게 이 '아비'라는 호칭이 사용되었었다. 반면 이에 상대적인 용어는 '아들'인데 이것은 피교육자를 지칭하는 것이다(왕하 8: 9; 잠 4:10, 20). 한편 예수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마 23:9)고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보다 인간을 높이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한편 본절에서 '아비'와 '제사장'이란 말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코헨, * )이라는 말 속에는 바로 시민의 지도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바(삼하 8:18; 20:26; 왕상 4:5; 대상 18:17; 욥 12:19 의미가 '아비'라는 개념 속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 내가...주리라 - 일정한 거처 없이 생계에 곤란을 느꼈던 이 소년에게 해마다 일정한 봉급이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만족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돈으로 성직자를 고용하거나 고용되는 일은 물질 만능적인 타락한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시대를 막론하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성직자들은 보수보다 일 자체에 관심과 기쁨과 보람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비록 보수가 적더라도 그일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해야한다. 여기 레위 소년은 그러한 사명감과는 상관없이 보수에만 관심을 둔 타락한 성직자였으니 이에서 역으로 경성(警省)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주); 의복 한벌 - '한벌'에 해당하는 '에레크'(*)는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것을 가리키며 출 40:23에서는 '진설병'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에레크'를 옷의 단위로 보고 열두 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KJV나 개역 성경처럼 이는 곧 상의와
하의 한 벌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성 경: [삿17:11]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제사장]
(주); 미가의 아들 중 하나같이 됨이라 - 혹자는 본절의 의미를 레위인 소년이 미가의 아들(5절)과 같은 종류의 비정상적인 제사장이 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본절의 의미는 레위 소년이 미가의 아들처럼 호의적인 대접을 받고 그의 집에서 편히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 경: [삿17:12]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제사장]
(주);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미가가 레위인의 손을 채웠다'라는 뜻이 된다. 이로 보아 아마 미가는 출
29:24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제사장의 임명에 따른 성별 의식을 이 레위 소년에게 행한것으로 생각된다(Lange). 그러나 제사장의 성결 의식만을
흉내낸 이러한 임명식은 완전히 율법에서 어긋난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여기서도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율법에 무지했던가를
발견하게 된다.
성 경: [삿17:13]
주제1: [미가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제사장]
(주);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 이러한 미가의 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하나님을 가나안의 우상과 동일 선상에서
미신적인 대상으로 섬겼음을 분명히 알수 있다. 미가는 파행적인 방법으로 세운 레위인을 합법적인 제사장으로 여겼을뿐만 아니라 12절과 같이 행한
제사장 임명식을 정당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비록 아론의 자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가 있다 할지라도(출 28:1; 민 17장) 미가는
레위인이면 모두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레위인을 통하여 미가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받은 저주(2절)가 자기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자기 가정을 번영케 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즉 미가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드라빔과 같은 일개 가정의 수호신에
불과하였다(Goslinga).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우상 숭배로 인한 혼합주의에 의하여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
성 경: [삿18:1]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이주할 곳을 찾는 단 지파]
(주);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 17:6에 이어 본서 기자는 여기서 또다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간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앞서 17:6에서는 개개인의 종교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했었다. 반면 본절에서는 자기 기업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밀려나는 약한 지파를 왕정제도에 의해 강대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온전케 보존 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6 주석을 참조하라.
(주);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 생존 시에 기업을 분배 받았었다(수 19:40-46). 그러나 가나안 정착
초기에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난 타 지파의 땅에 분산 거주하거나 새로운 정착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1:34). 한편 1:34에서 본서 기자는 단이 분배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요셉 족속이나 유다 지파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암시했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그 이유를 왕이 없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따라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본서
기자의 주석이 아니라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견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삿18:2]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이주할 곳을 찾는 단 지파]
(주);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 삼손의 고향이자(13:2-5, 24) 단 지파의 기업이던 소라와 에스다올(수 19:41)은 유다 지파와 단 지파의 경계 지역이다. 이 중 소라는 예루살렘 동쪽 약 6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며 에스다올은 소라의 동북쪽 약2.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본래 이 소라와 에스다올은 유다 지파의 기업이었는데(수 15:33) 훗날 기업을 재조정하면서 단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단 지파는 이곳에 안주(安住)치 못하고 많은 수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하였는데(11절)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아모리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1:34 주석 참조.
(주);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 단 지파는 그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땅을 찾기 위해 그들의 씨족 가운데서 용맹한 다섯 사람을 미리
정탐꾼으로 파견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아마도 단 지파는 이러한 준비를 하면서 마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재현하는 듯한
꿈에 젖었는지도 모른다(수 2:1). 하지만 약속의 유업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자들이 신개척지를 얻는다 하여 거기서 신실한 언약 백성의 모습을
존속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으로 남겨질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의구심 그대로 그들의 불순하고 패역한 자태는 본장에 확연히
기록되고 있다(5, 30절등). 한편 단 지파의 북쪽 이주에 대한 기사를 요약하고 있는 수 19:47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단 지파의 지경이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경: [삿18:3]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이주할 곳을 찾는 단 지파]
(주); 레위 소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 정탐꾼들은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북쪽으로 가던 도중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신당(17:1, 5)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레위 소년의 음성을 듣고 발을 멈추게 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레위 소년의 음성을 금방 알아들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다음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 이 레위 소년이 베들레헴을 떠날 때(17:8) 소라와 에스다올 지역을 지나쳐 왔기 때문에 정탐꾼들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Wycliffe, Matthew Henry). (2) 에브라임의 방언은 특색이 있는데(12:6) 이 소년은 에브라임 방언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졌을가능성도 있다(A.C. Hervey). 한편 이 밖에도 혹자는 단 사람들이 밤에 미가의 집에서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종소리(출 28:35)를 듣고 레위인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으로 추측한다(Cassel). 그러나 본절은 분명히 단 사람들이 미가 집을 발견하고선 그곳에 유숙하러 가다가 레위 소년을 만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 같은 추측은 개연성(蓋然性)이 없다.
(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 이 구절로 볼 때 단 사람들은 레위 소년이 생계 수단을 구하기 위해 떠돌아 다녔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는 정탐꾼들이 레위 소년을 금방 알아본 이유가 이전에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을 한층 짙게 해준다.
성 경: [삿18:4]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이주할 곳을 찾는 단 지파]
(주); 나를 고빙하여 - 여기서 '고빙하다'에 해당되는 '사카르'(*)는 임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본절에서 레위 소년은 자신이 삯을
받고서 제사장으로 고용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종교인들이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즉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세우심을 받는 성직(聖職)인데도 불구하고 레위 소년은 이에 대하여 천박한 직업 의식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 또한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성스러운 일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있다(마 28:19;벧전 2:9).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상업적 이해 관계가개입되어서는 아니되며, 다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피차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이 요청된다(고후 8:14). 왜냐하면 성도들이 누리는 복음은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9:18).
특히 교회의 교직자(敎職者)들은 자칫 천박한 직업 의식에 빠져 거룩한 복음 사역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삯꾼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
봉사하기를 힘써야 한다(요 10:11, 12). 그리고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은 교직자로 하여금 복음 사역에 전무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행 6:4).
성 경: [삿18:5]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이주할 곳을 찾는 단 지파]
(주);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 1:1에서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신탁을 구했는데 본절에서는 단 사람들이
'엘로힘'(*)께 신탁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이 레위 소년이 에봇과 드라빔(17:5)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Cassel). 한편 단
사람들이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 레위인이 섬기는 신이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가나안의 어떤 신인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Goslinga). '여호와'와 '엘로힘'이란 신명(神名)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창 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18:6]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이주할 곳을 찾는 단 지파]
(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 단 사람들과 달리 이 레위 소년은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간접적이나마 단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호와께 신탁을 구할 자격이 있는 합법적인 제사장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한편 여기서 '그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그 길을 주장하고 계시니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는 뜻이다(Matthew Henry). 공동 번역은 이를 '그들이 가는
길이 환히 트이도록 야훼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라'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삿18:7]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정탐꾼들의 보고]
(주); 라이스에 이르러 - 라이스(Laish) 또는 레센(Leshen, 수 19:47)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 카디'(Tell el Qadi)에 해당된다. 팔레스틴 최북단에 위치한 이곳은 헬몬 산에 가려 아람과 단절되어 있고, 레바논 지역에 의해서 페니키아와도 단절되어 있어서 외침(外侵)을 받을 염려가 거의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그리고 요단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하여 용수(用水) 또한 충분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단 지파의 정착지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더욱이 원주민들은 이러한 천연적인 조건에 타성이 젖어 외침에 대해 무방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빈약했으므로 단 지파가 정복하기에는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주);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 여기서 '한가하다'에 해당하는 '쉐케트'(*)는 '풍족한 가운데 여유를 즐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공동 번역은 이를 '아쉬운 것 없이'로 번역하고 있다. 실제로 시돈인들은 동서 교역의 중개지로서 또한 상아 제품 제조 산업 따위로 많은 부(富)를 벌어 들여 풍족한 경제 생활을 구가하였다. 따라서 라이스 거민들이 이러한 시돈 사람 같은 경제 생활을 누렸다함은 그들이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음을 의미한다(Goslinga, Pulpit Commentary).
(주);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 여기서 라이스 사람이 한가하고 평안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권세 잡은 자가 없음을 들고 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왕들은 대체로 세습에 의한 독재자들이었고 이들은 외침을 막고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이유로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사람들을 징용에 끌어 넣었다. 그러나 라이스는 천연적인 요새(要塞)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이다.
(주);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 당시 라이스는 시돈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시돈은 레바논 산맥의 장애로 인해 라이스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세를 누렸으므로 굳이 라이스에까지 간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라이스는 천연
방벽을 의지하여 사실상 독립된 생활을 누리고는 있었으나 자체 내의 방어 체제를 구비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뒤에 가서 단 자손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28절).
성 경: [삿18:8,9]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정탐꾼들의 보고]
(주); 일어나서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매우 좋더라 - 본절에서는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 동기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제시한 가나안 정벌의 신앙적 동기(민 14:6-9)와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 외형적으로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 땅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신앙이 없는 자들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되는
것이다.
성 경: [삿18:10]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정탐꾼들의 보고]
(주); 평안한 백성 - 이에 해당하는 '암보테하'(*)는 '방심한 백성'이란 뜻이다. 이는 라이스 거민들이 물질적 풍요와 천연적 방어벽을 과신하여 안이한 심경에 젖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주);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 일반적인 성전(聖戰)의 구호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1:2;2:13;수 2:24;6:2;10:8;삼상 7:8)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 사람들은 '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레위 소년에게 신탁을 구한 것과 관계 있을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에 기록된 성전 구호는 단순히 형식만 따랐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의 성전 구호와 비길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 지파의 전쟁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욕을 쫓아 행하는 전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저버리고(11절)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0, 31절) 마치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수행하고 있는 양 행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라는 표어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전 10:31). 그러나
현실의 복잡 다양한 제반 상황들에 적응하다 보면 그러한 표어가 한갖 공허한 추상적 원리로 머물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와 전혀 상반되는 일을
하면서도 그 표어대로 살고 있는 양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러한 표어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함께 하사 모든 대적들을 성도의 손에 붙이게 될
것이다(고후 10:4).
성 경: [삿18:11]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단 지파 가족 중 - 여기서 '지파'와 '가족'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 지파에는 오직 한 가족, 즉 '수함 가족'(민 26:42)만
있었기 때문이다. 13:2 주석 참조. 육백 명이 병기를 띠고 여기서 600명은 병기를 가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장정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로서 이들 앞에 가도록 되어 있었다(21절). 따라서 현재 라이스 정복 길에 나선 단 지파의 총 인원은 어림잡아 이, 삼천명
정도였던 것 같다(Hervey). 이와 같이 단 지파의 인구 수가 과거 장정만 6만 여명가량(민 1:39;26:43)에서 이토록 현저히 줄어든 것은 아마 그동안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들의 압박에 의해 인원이 크게 축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는 아직소라나 에스다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수는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구 수가 급격히 즐어들었다고 해도 그 차이가 심한 것으로 보아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더 타당성 있는 견해라 하겠다(Matthew Henry).
성 경: [삿18:12]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유다 기럇여아림에 진치니 - 단 지파가 라이스를 향하여 북쪽으로 길을 떠난 뒤 처음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머문 곳은 예루살렘에서 몇
시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이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도로상에서 약 14.4km 떨어진 지점이다.
일찍이 이곳 기럇여아림은 교활한 간계로 여호수아와 동맹을 맺어 멸망을 피했던 기브온족의 네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수 9:17). 이 지역은 단
지파에 의해 '마하네단'(Mahaneh-dan), 즉 '단의 장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유다 지경 내에 위치한 이곳은 삼손이
처음 여호와의 신께 감동되었던 곳이기도 하다(13:25). 한편 혹자는 본절과 관련 단 지파가 이곳에서 상당 기간 정착했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본절 이후의 사건은 본절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사건인 점에 비추어 볼 때 단 지파는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내 라이스 정복길에
나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삿18:13]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거기서 떠나서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니라 - 기럇여아림에서 미가의 집이 있는 에브라임까지는 약 20km 정도의 거리이다. 이는 곧
걸어서 5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성 경: [삿18:14]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이 집에 - 이에 해당하는 '바바팀'(*)은 복수형이다. 그래서 KJV, NIV,RSV 등은 이를 '이 집들에'(in these house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미가의 집이 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집이었음을 시사해 준다(Goslinga).
(주); 에봇과...부어 만든 신상 - 미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던 각종 우상들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3, 5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18:15]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소년 레위 사람의 집...이르러 - 미가의 집 중에서도 레위 소년이 머물고 있던 집은 따로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은 아마 미가의 신당일 것이다(17:5). 본절을 통해서 보더라도 미가의 집은 많은 건물들로 상당히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있다.
(주); 문안하고 -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들은 이전에 레위 소년을 만났었기 때문에(3-6절) 그의 건강을 묻는 등 우호적인 표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루어 들이닥친 자신들 때문에(16, 17절) 레위 소년이 놀라지 않도록 안심시켰을 것이다.
성 경: [삿18:16]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문 입구에 서니라 - 본절에서 18절까지는 도적떼의 모습을 생생하게 연상시켜 준다. 문 입구에 선 무장한 600명의 단 사람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들의 동료들이 일을 마치고 미가의 집을 나올 때까지 파수하고 있었다. 한편 이로 볼 때 미가는 어느 정도 군사력이 있는 소부족의
부족장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22절에서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단 지파의 뒤를 좇았던 것도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성 경: [삿18:17]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그리로 들어가서 - 다섯 사람의 정탐꾼들은 레위 소년을 잘 설득하여 동료들이 있는 문 밖으로 내보내어 함께 있게 하고 신당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1절). 한편 여기서 '들어가서'에 해당되는 원어는 '알라'(*)로서 '올라가다'라는 뜻이다. 왕하23:12이나 렘 19:13을 보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제단이 있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미가의 신당도 다락방이나 2층 건물에 있었음이 분명하다(Keil, Hervey).
(주); 문 입구에 섰더니 - 여기서 '섰더니'에 해당하는 원어 '나차브'(*)는 '배치하다'라는 뜻도 지닌다. 이로 보아 단 자손들은 미가의 우상을
강탈하기 위해 600명의 군사로 삼엄한 경계를 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삿18:18]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 단 사람이 신당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레위 소년이 자기 주인의 우상들을
다 집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이제 놀라서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아마 이전까지는 단 사람들이 미가의 신을 경배하려고 신당에 들어간
줄로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이에 대해 이 레위 소년은 돈으로 고용된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미가의 신상에 함부로 손 댄 것을
불경하게 여기지 않고 단지 도의적으로 주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탓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Cassel).
성 경: [삿18:19]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네 손을 입에 대라 - '잠잠하다'는 말의 반복으로 '아무말도 하지 말라'(Don't saya word, NIV)는 뜻이다.
(주);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 본서 기자는 단 사람들의 이러한 제안을 적기 이전에 벌써 17절과 18절에서 레위 소년을 '제사장'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단 사람들이 레위 소년을 문안할 때부터(15절) 이미 그를 '제사장'으로 깍듯이 예우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아비'에
대해서는 17:10 주석을 참조하라. 이는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어이다.
성 경: [삿18:20]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신상을 강탈한 단 지파]
(주);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 여기서 레위 제사장의 타락한 본성을 또다시 보게 된다. 처음에 그는 생계를 잇기조차 궁색한 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던 미가의 제안에 감격하여 한 개인의 제사장으로도 크게 만족했었다. 그리고 이 레위 소년은 미가에게서 아들과 같은 사랑도 받았었다(17:10, 11). 그러나, 단 사람들의 새로운 제안은 단순히 경제적인 충족 뿐만 아니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명예까지 부여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번 물질에 혹했던 사람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자기 욕구를 채워 줄 대상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이전의 은인까지도 배반하는 법이다.
(주); 에봇과 드라빔과 생긴 우상을 취하고 - 이처럼 보다 나은 조건에 미혹된 제사장은 본래 주인과의 의리와 계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기가
앞장서서 우상과 종교 기물들을 훔쳐 낸다. 그리고 단 지파와 동행한다. 이렇게 하여 미가의 가정을 타락시켰던 이 제사장은 이제 한 지파 전체를
잘못된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30,31절).
성 경: [삿18:21]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추격과 단 지파의 협박]
(주); 그들이 돌이켜서...진행하더니 - 단 지파는 다시 라이스 땅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미가와 그의 이웃들이 뒤에서 따라와 공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한 조치였을 것이다(22절).
(주);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 - 여기서 '어린아이들'에 해당되는 '하타프'(*)는 실족할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자와 노인들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다음으로 '물품'에 해당되는 '케부다'(*)는 시 45:13에서와
같이 '값진 것' 또는 '영화로운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KJV에서는 이것을 '탈 것'(carriage)으로 번역하고 있고, RSV에서는 한글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물품'(goods)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혹자는 '케부다'라는 단어가 '무거운', '힘든'이라는 뜻의 '카베드'(*)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귀중한 물건을 가리키기 보다는 무거운 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Cassel). 어쨌든, 이 물품들은 수레 같은 운반 수단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삿18:22]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추격과 단 지파의 협박]
(주);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 미가는 제사장과 자기 신상이 없어진 것을 한참 후에 알고는 곧장 추격대를 조직하여 단 자손을 따라갔다.
배경은 다르지만 이 장면은 마치 라반이 야곱을 추적하는 장면(창 31장)과 유사하다. 특히 둘 다 가정의 수호신을 훔쳐갔다는 점(창 31:19)어서
그러하다. 아무튼 미가는 추적길에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단 사람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 사람들이 어린아이들과 짐승들과 물품들로
인해(21절) 빨리 진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삿18:23]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추격과 단 지파의 협박]
(주);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지고 왔느냐 - 여기서 '모아가지고'에 해당하는 원어는 '도움을 호소하다'라는 뜻의 동사 '자아크'(*)의
수동태로서 '함께 부름을 받다' 또는 '함께 모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가지고 왔느냐'라는 단 사람들의
질문의 뜻은 '우리가 너희를 부르지도 않았고 너희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모여왔느냐'라는 뜻이다(Pulpit Commentary). 이것은 미가가
자신들의 뒤를 추격해 온 이유를 잘 알면서도 단 사람들이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삿18:24]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추격과 단 지파의 협박]
(주); 나의 지은 신들 - 이처럼 미가는 은으로 만든 신상과 에봇, 가정의 수호인이 드라빔(17:4,5)들을 가리켜 스스럼없이 '나의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치 못한 영적 무지의 발로(發露)로 볼 수 있다. 7:2,3 주석 참조.
성 경: [삿18:25]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추격과 단 지파의 협박]
(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 여기서 '노한 자들'이란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금방이라도 공격해 올 것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삼하 17:8). 단
지파 사람들은 힘의 우위를 내세워 자신들이 미가의 소유물 뿐만 아니라 미가와 추격대 전원의 생명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삿18:26]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미가의 추격과 단 지파의 협박]
(주);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 본래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이 단지 자기 손으로 만든 신상을 소유하는 것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던 미가(17:13)였기때문에 이처럼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와 대적하면서까지 신상을 되찾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현세적인 복에
몰두했던 미가로서는 자신의 목숨에 대해 남다른 애착심을 가졌을 것이다.
성 경: [삿18:27]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주);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 본서 기자는 라이스 거주민들에 대해서 거듭 이와같은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7절 주석 참조. 아마도 이것은 본서 기자가 그러한 라이스 거민들을 습격한 단 지파의 잔인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인 듯해 보인다(Hervey). 한편 '...을 만나'에 해당되는 '보 알'(*)은 어떤 사람을 갑자기 덮치는 것을 가리킨다(창 34:25).
(주);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때 수행하던 성전(聖戰)의 전형적인 표현이다(수
6:4;8:19;11:11). 단 지파는 처음 라이스를 향하여 출발할 때부터 이 전쟁을 '성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바(10절) 라이스를 정복할 때도
철저히 그러한 의식으로 수행한 듯하다. 한편 이에 대하여 수19:47에서는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서 기자는
여기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적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라이스 당은 본래 단 지파의 영토가 아니므로 그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정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본래 기업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약한 민족을 공격하는 침략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 단 지파의 타락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삿18:28]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다시 라이스의 지형적 여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라이스에 대한 단의 뜻 아니한 침략이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주);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 '베드 르홉'(Beth-rehob)이란 지명의 뜻은 '르홉의 집'이다. 민 13:21과 삼하 10:6에 따르면 이 지명은 소바 왕 하닷에셀의 아비 르홉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아셀 지파의 지경(地境)인 훌레(Huleh) 평지 윗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골짜기를 통하여 흐르는 물은 요단 강에 이르게 된다.
(주);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 여기서 '상종하다'에 해당하는 '다바르'는 '친밀히 교제하다'는 뜻 외에도 '사업상 교류하다'는 뜻이 있다.
이로 보아 라이스 거민들은 지형상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국가간의 외교적 친선 도모나 경제적 교류 따위를 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성 경: [삿18:29]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 이곳 라이스는 가나안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7절 주석 참조. 그래서 이곳을 단이라고 칭한 이후 부터는
이스라엘의 전영토의 경계를 말할 때에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란 말을 쓰게 되었다(20:1). 여기서 '브엘세바'는 팔레스틴 최남단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기업이다(수 15:28). 한편 이때부터 실제로 단 지파는 단 지역의 사람과 소라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로 분리되게 된 듯하다. 11절 주석
참조. 아무튼 이후로 성경에선 이들 지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든데 역대기에도 단 지파에 속한 인물에 대해서는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Cassel).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열 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7장).결국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이분(二分)되었던 단 지파는 영적인 이스라엘의 족보에서조차 사라진 셈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단지파의 거족적인 우상
숭배 탓으로 이해하고들 있다.
성 경: [삿18:30]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본절에서는 단이 라이스에 정착한 이후 독자적으로 행한 우상 숭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주);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 - 여기서 '요나단'은 본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었으나 후에 단 지파의 제의를 받고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레위 소년'(14-20절)이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없다(Wycliffe, Keil & Delitzsch). 그런데 그 외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본문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므낫세'로 읽도록 모세(*)라는 히브리어 문자 사이에 작은 문자 '눈'(*)을 삽입하여 므나쉐(*)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본절을 '므낫세의 손자'(theson of Manasseh)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탈무드나 70인역(LXX), 수리아역 등을 볼때 이것은 분명히 '모세의 아들'(the son of Moses)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Keil). 한편 히브리어 성경 필경사들이 이와 같이 '모세'를 '므낫세'로 읽도록 '눈'(*)을 첨가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1) 모세의 이름을 신성시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란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명기함으로써 불경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Wycliffe). (2) 단 지파를 우상 숭배죄로 몰고 간 요나단을 모세와 같은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주);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 본절의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간에는 상당한 이견(異見)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유수나 디글랏 빌레셀에 의한 앗수르 포로 유수로 생각한다(왕하 15:29;17:6; 25:8). 그러나 유대인 학자 데이빗 킴치(David Kimchi)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엘리 시대 때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해 갈 때(삼상 4:17)로 생각한다(Keil, Hervey, Lange). 그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일리가 있다. (1) 31절에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라는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로의 회막은 여호수아
때에 세워진 것으로(수 18:1) 사무엘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삼상 1, 3장;4:3) 사울 때에는 놉에(삼상 21장), 그리고 다윗 때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상 16:39;21:29). (2) 미가의 새긴 우상이 앗수르의 침략 때까지 계속 해서 그곳에 있었다면 분열 왕국 시대에 여로보암이 그곳에 다시
금송아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이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미가의 전통을 따라 행한 것이다(Keil). 17:3 주석
참조.(3) 이스라엘의 기강이 바로 잡힌 사무엘, 다윗, 솔로몬 시대에까지 한 지파 전체가 그러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도록 용납되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사로잡힌 날'이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해 법궤가 빼앗기고 이스라엘이 내외적으로 연약해졌을 때를 가리킴에
분명하다.
성 경: [삿18:31]
주제1: [단 지파의 우상 숭배]
주제2: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 이러한 본절의 기록은 본서가 사무엘 시대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Goslinga). 왜냐하면 회막이 엘리 시대까지는 실로에 있었으나 블레셋에 의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이후부터(삼상 4:21, 22) 실로에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사무엘에 의해 실로의 회막이 라마로 옮겨졌을 것이라 보고 있으나(삼상 7:17) 확실치는 않다(Hervey).
(주);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는 성막이 보관되어 있던 실로였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정한
절기 때에나 기타 개인적으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있을 때에 실로에 모였다(삼상 3:21). 이러한 관습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으로서,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동일한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실로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심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단에 신상을 세우고 섬긴 것은 언약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수22:16).
성 경: [삿19:1]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 간 레위인]
(주);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 17:6 및 18:1과 유사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때에'라고 한 것은 본장의 배경이 17, 18장과 동일한 시대임을 암시해 준다.그런데 본서 기자가 이미 왕정 제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점으로 보아 본장의 사건을 기록하던 시기는 사사기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이 지난 때임을 알 수 있다(Goslinga).
(주);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 전장(前章)에 이어 본장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레위인이란 점은 당시 극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한편 여기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Shiloh)의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Keil). 그런데 레위인이 그곳에 '우거'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레위인도 전장(前章)에 나오는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18:30)처럼 에브라임 산지를 떠도는 나그네였음이 틀림없다(Pulpit Commentary).
(주);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 17:7에 나오는 레위 소년도 유다 베들레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곳에는 레위인들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한편이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는데, 고대 사회에서 첩을 취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첩
때문에 기드온의 가정이 파멸된 것처럼(8:31) 본장에서도 이 레위인이 첩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창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을 참조하라.
성 경: [삿19:2]
주제1: [타락한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주);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 여기서 '행음하다'에 해당되는 원어 '자나'(*)는 주로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란 행위나 또는 그와 같은
성향의 행음(行淫)을 가리킨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자나'뒤에 '그에게 대항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알라이우'(*)가있어서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그같은 행음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아마 이 레위인이 먼저 동일한 행음을 범하므로서 자기 첩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음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Moore). 다음으로 여기서 '남편을 떠나'라는 말은 그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양자 간에 불화(不和)하여 서로 헤어진 것을
가리킨다(Cassel). 한편 레 21:7에 따르면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 부정한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하케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레위인이 이같이 행한 것은 당시의 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성 경: [삿19:3]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주);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녀의 마음에 말하고'이다. 이것은 레위인이 진정으로 그녀와 다시 화해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Wycliffe). 한편 율법상으로 살인죄(민 35:31), 간음죄(레 20:10) 부모를 치는 죄(출 21:15) 등은 어떠한 제믈로도 속(贖)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본문의 레위인은 자기 첩이 넉 달 동안(2절)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오히려 그녀를 연모하므로 다시 그녀를 데려오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거의 무시되고 있어 사회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음이 분명하다(Matthew Henry).
(주);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 나귀 두 필 중에 한필은 그의 첩을 태워 데리고 오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그 여자가 다시금
남편을 따라 나서게 된 것도 그 같은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동해서였을 것이다(Hervey).
성 경: [삿19:4]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 간 레위인]
(주); 그 첩 장인 곧 여자가 아비의 그를 머물리매 - 여기서 '머물리다'에 해당하는 '하자크'(*)는 `붙잡다', `제지하다'는 뜻으로 강권(强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금방 그를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강권하여 몇 일 처가댁에 머물도록 종용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집에
머물도록 권하는 것은 대단한 예우이며 친절의 표시이다(창 18:5). 이로 볼 때 레위인은 처와 화해하는 일 뿐만 아니라 장인의 사랑을 얻는 데도
성공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삼일 동안 그녀와 함께 목고 마시며 편히 쉴 수 있었다.
성 경: [삿19:5]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주);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마음을 쾌활케한 후에'가 된다(창18:5). 여기서 `쾌활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세아드'(*)는 `(마음을) 신선케 하다'라는 뜻의 동사 `사아드'(*)의 명령형으로서, 여기에는 강한 권고의 뜻이 담겨 있다. 한편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부를 데려올 때 일정 기간 동안 처가댁에서 머문 후에 데려오는 풍습이 있었다(창24:55). 따라서 레위인의 장인이
어떻게든 레위인을 그의 집에서 하루라도 더 유숙케 하려한 것은 아마 이같은 풍습에서 였을 것이다.
성 경: [삿19:6]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주);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 이처럼 레위인의 장인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연일 잔치를 베푸는 이면(裏面)에는 사위에게 자기
딸을 부탁하는 당부의 마음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과년한 딸이 아비의 집에 계속 머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근심거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은 행음하고서 남편과 헤어진 상태였으니(2절) 그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 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장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위가 자기 딸을 버리지 아니하고 잘 살아주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성 경: [삿19:7]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주); 그 사람이...다시 유숙하더니 - 레위인 장인의 과민한 노파심과 레위인의 우유 부단한 성격을 보여 주고있는 구절이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아직도 자신이 사위의 환심을 살 정도로 충분히 대접치 못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계속 사위를 집에 머물게 하려했을 것이다. 반면 레위인은 장인의
호의틀 떨쳐 버릴 정도로 심지(心志)가 굳지 못하였기 때문예 계속 장인에게 이끌림 당했을 것이다.
성 경: [삿19:8]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주);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해가 기울도톡 머물라 - 여기서 `해가 기울도록'이란 말은 `한낮이 지나도록'이라는 뜻이다(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Vol.2,p.443). 대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고 아침 일찍이 떠나는 법이다. 그런데도 레위인의 장인은
낮 동안 층분히 휴식한 후 오후에 길을 떠나라고 말한다. 추측컨대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베들레헴에서 레위인이 거주하는 에브라임 산지까지는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늦게 출발해도 괜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삿19:9]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주);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 오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레위인은 그의 장인과 먹고 마시는 동안 그만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밤이 되고 말았다.
(주); 집으로 돌아가라 - 문자적 뜻은 `장막으로 돌아가라'이다. 한편 `장막`(Tent)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이다(20:8;왕상
12:16).
성 경: [삿19:10]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귀로(歸路)에 오른 레위인]
(주);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아니하여 일어나 떠나서 - 이처럼 레위인이 밤중에라도 집으로 돌아가려 한 것은 아마 그 다음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였으므로 안식일에는 성소에서 봉사하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
(주);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 여기서`여부스 맞은편'은 예루살렘의 서쪽을 가리킨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까지는걸어서 약 1시간 반
거리이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세겜 쪽의 에브라임 산지로 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서쪽에 있는 도로틀 반드시 지나야 한다. 한편
여부스(Jebus)라는 이름은 여부스 족이 다윗 시대까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삼하5: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11:4-9 강해, `예루살렘'을 참조하라.
성 경: [삿19:11]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귀로(歸路)에 오른 레위인]
(주);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 레위인 일행이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미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그러자 레위인의 종은 이처럼
레위인에게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들어가 밤을 지내자고 간청한다. 왜냐하면 밤 에는 들짐승이나 도적때의 공격을 받기가 쉬우므로 더이상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인은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종의 청을 거부했다.
성 경: [삿19:12]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귀로(歸路)에 오른 레위인]
(주);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 -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가나안을 정복하였지만 아직 미 정복지가 남아 있었듯이(1:19-21,27-36) 예루살렘 역시 다윗시대까지 가나안 후기 원주민인 여부스족(Jebusites)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1:21 주석참조.
(주);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 기브아(Gibeah)는 예루살렴 북쪽 약6.4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베냐민 지파의 지경이다(수 18:28).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삼상 10:26).
성 경: [삿19:13]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귀로(歸路)에 오른 레위인]
(주); 라마 -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수 18:25). 현재의 엘람(er-Ram)으로서, 과거 여사사 드보라의 고향이자(4:5)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이기도 했다(삼상 7:17).
성 경: [삿19:14]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귀로(歸路)에 오른 레위인]
(주); 해가 진지라 - 레위인 일행이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완전히 져버려 더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라마 까지 가지
못하고 베냐민 땅 기브아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성 경: [삿19:15]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귀로(歸路)에 오른 레위인]
(주);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 레위인 일행이 앉아 있던 거리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공회(公會)를 열거나 재판을 행하기도 하며 장사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창 19:1 주석 참조.
(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 레위인 일행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들을
환대하는 기본적인 예절을 보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기브아 사람들의 성품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준다(창18:3-8;19:2,3;
마25:43;벧전4:9).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이었는데도(신10:19) 그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레위인과 그의 첩과 하인은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에서 머물기를 마다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성읍까지 오면서 가졌던 기대를
한꺼번에 잊어버리고 낙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Wycliffe).
성 경: [삿19:16]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에서의 유숙]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레위인 일행에게 친절을 베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기브아 성읍에는 타지(他地)에서 온 이 한 사람 외에는 정직한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 우거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는 '나그네(손님)로서 체류(거주)하다'는 뜻의 '구르'(*)에서 온 말로, 타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성 경: [삿19:17,18]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에서의 유숙]
(주);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 노인이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레위인은 이처럼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중'이라고 대답을 했다. 당시 `여호와의 집` 즉 `회막'은 실로에 있었다(수 18:1;삼상4:3,4). 그런데 실로는 레위인의 집이 있던 에브라임 산지(1절)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본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학자간에 서로 견해가 다르다. 먼저 혹자는 본절을 `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그의 첩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화목제를 드리러 실제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한다(Cundall). 반면, 또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단지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Cassel).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를 `나의집으로'로 번역하고 있어서 카일(Keil)의 주장이 옳음을 반증해 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위인이 `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간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의도를 가졌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레위인 일행은 그 노인으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았었기 때문이다(19, 20절).
(주);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프'(*)는 `받아들이다'는 뜻으로. 가벼운 선심을 쓰거나 계산에
의거하여 일정한 혜택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뜨거운 마음으로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가리키는 `카라'(*)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로 보아 레위인 일행은 기브아에서 숙박비를 제공하려 해도 유숙할 장소를 얻지 못했던 것 같다(15절).
성 경: [삿19:19]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에서의 유숙]
(주); 우리에게는...부족함이 없나이다 - 레위인은 노인이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도륵 하기 위하여 나귀 두 마리와 자신과 자기 첩과 종이 먹을
양식과 짚은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 속에는 기브아 사람들에게 단지 하룻밤 묵고 갈 숙소만을 요구했는데도 그들이 받아주지 일았다는
탄식이 내포되어 있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삿19:20]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에서의 유숙]
(주); 그대는 안심하라 - 이 노인은 레위인의 염려를 이해하고 안심시켰다. 여기서 `안심하라'에 해당하는 원어는 `솰롬'(*)으로서, 평안을 기원하는 히브리인의 인사이다. 이러한 히브리 인사에서 우리는 지난날 애굽의 종살이나 광야의 방황생활 중에서 히브리인이 얼마나 평안을 희구(希求)했는지를 알 수있다.
(주);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 옛부터 거리에 앉아 있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후히 대접하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창18:1-8; 19:1-3). 만일 그렇지 않을 때는 공회 앞에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신10:19;욥 31:32). 따라서 그 노인은 전통적
관습대로 나그네가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상관없이 자기 양식으로 그들을 대접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 경: [삿19:21]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에서의 유숙]
이 노인은 레위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귀도 잘먹였다. 이는 곧 그가 진정한 마음으로 나그네들을 사랑하고 대접하였음을 잘 드러내준다.
(주); 발을 씻고 - 고대 근동에서는 여행자들이 주로 샌달을 신고 흙먼지 길을 다녔다. 그러므로 손님을 영접하는 주인은 반드시 발씻을 물을
내어놓는 것이 예의였다(창18:4;24:32;43:24;요13:5-14).
성 경: [삿19:22]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 비류(匪類)들의 악행]
레위인과 노인의 만남(16:21절)을 다룬 본장의 이야기는 룻이 소돔 성에서 천사를 만난 이야기(창 19장)와 유사하다. 특히 본문22-24에 기록된 기사는 창19:4-8절의 기사와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혹자는 본서 기자가 창9장의 기사를 인용하여 본문 속에 삽입한 것(interpolation)이라고도 주장한다.(Wellhausen). 그러나 전후 문맥이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또한 시대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으므로 본문의 사건을 결코 삽입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Cassel).
(주); 그 성읍의 비류들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베네 벨리알'(*)로서 `벨리알의 자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벨리알'은 `무익한', `무가치한'이라는 뜻의 형용사로서 주로 사람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삼상 1:16에서는 `악한 여자'로, 삼상25:25에서는 `불량한 사람', 삼하 16:7에서는`비루한 자'로 각기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 벨리알을 사단이나 거짓 예언자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 여기서 `두들기며'에 해당되는 원어 `미테두페킴'(*)은 강조행 동사로 `스스로 흥분하여 매우 세게 문을 두드리는' 모습를 묘사한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이렇게도 번역했다. "그 비류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갈 모양으로 문에 달려들어 두들기고 있었다"(G. R. Driver). 이와 같이 기브아 비류들이 온건한 태도로서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레위인을 끌어내리려 했기 때문에 집주인은 문을 열고 그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23,24절).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듣지 않았는데(25절), 이런 일이 후에 기브아와 통치자들에 의해 어떠한 정죄함이나 책벌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브아 성읍 백성들 전체가 암묵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음이 분명하다.
(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 여기서 `상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는 분명 `성 관계를 가지다'는 뜻이다. 즉 기브아 비류들은 레위인을
끌어내어 남색(男色)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소돔 사건의 재현인 듯한 인상을 준다. 과거 소돔인들의 음란한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을
초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사해(死海)가 형성되었다(창 19:4-26). 한편 이 사해는 기브아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기브아
사람들은 자주 그곳을 지나 다녔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소돔보다 더 악하게 행하려 하였던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2, p.239).
성 경: [삿19:23]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 비류(匪類)들의 악행]
(주);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하네발라'(*) 역시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7)이나
비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신 22:21)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성적 범죄를 지칭한다(삼하 13:12).
성 경: [삿19:24]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 비류(匪類)들의 악행]
(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있은즉 - 노인은 기브아의 비류들이 워낙 완악하여 말로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자기 딸과 그 레위인의 첩올 그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말했다.이는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를 잘 반영해 주는
실례이다. 당시에는 남성의 권위로 말미암아 여성이 학대받거나 능욕을 당한다 해도 여성은 말없이 순종하여야 했다(11:39,40). 그러나 노인이 취한
방책은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 즉 하나의 악을 막기 위해 또다른 악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공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상황논리에 급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끝까지 비류들을 대항했어야 옳았던것이다.
성 경: [삿19:25]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 비류(匪類)들의 악행]
(주);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 자신의 딸을 내어 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은 비류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같은 경내(境內)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는 해를 끼치려 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그들은 남녀간의 성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비정상적인 남색(男色) 행위에만 관심을 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레 18:1-5 강해, `성경에 나타난 성범죄의 이해'를 참조하라.
(주);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그사람'은 노인을 가리킨다고 본다(Keil, Goslinga).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여기서 `그 사람'이란 분명히 `그 레위인'을 가리킨다. 그 레위인은 노인의 제안이 거절 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자신과 자기의 첩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즉 비록 사랑을 고백하며 설득하여 장인에게 데려온 아내였지만 (3-10절) 이 레위인은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비류들에게 내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이기주의 성향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반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사랑은 없을 것이라고 교훈하셨다(요15:13).
(주);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 기브아 비류들이 요구 한것은 레위인의 첩이아니라 레위인이었다(22절).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의 첩에게만 행음하고 만족하였는지 의문시된다. 아마 그 비류들은 그의가 첩의 뛰어난 미모에 만족하였을 지도 모른다(Cassel).
(주); 욕보이다가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알랄'(*)은 `지나치게 하다' `철저히 실행하다'는 뜻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교대로 겁탈했다'(taking
turns raping her)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삿19:26]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기브아 비류(匪類)들의 악행]
(주); 그 주인의 우거한...문에 이르러 - 밤새도록 비류들에게 욕을 당한 그 첩은 거의 초죽음이 된 자신의 육신을 끌고 가까스로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 문 앞에까지 기어와서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비록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분노때문에 행음하였으나(2절주석 참조), 여기서 볼 때 그녀가
그 레위인보다 더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였음을 알 수있다. 즉 비록 자신을 내어버린 남편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이같이
사력을 다했던 것이다(Hervey).
성 경: [삿19:27]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악행에 대한 고발]
(주);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내어 몰았던 이 비정한 레위인은 간밤에 당한 공포스런 일을 생각하며 일찌기 그 성읍을 떠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최소한의 관심 조차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레위인에게는 그의 첩에 대한 육적인 사랑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사랑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앞서 그의 장인이 계속해서 떠나려는 이 레위인 사위로 하여금 자기 집에 하루라도 더 묵도록 한 것도 아마 자기 딸에 대한 이 레위인 사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8절).
(주);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 새벽 미명에 홀로 도주하려고 허겁지겁 하던 레위인은 그의 아내가 엎드러져 그 두 손을 문지방에
올려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문지방에 손을 올려 놓는 행위는 당시 고대 근동의 미신적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즉 당시 가나안 인들은 문지방
밑에 그 집안 사람들을 보호하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었다. 따라서 이런 미신을 잘알고 있던 레위인의 첩은 거의 초죽음이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 손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으면서 자신이 소생(蘇生)하기를 바랬을것이다. 삼상 5:4 주석 참조.
성 경: [삿19:28]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악행에 대한 고발]
(주);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 레위인은 눈으로 보아 그의 아내가 죽은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아내와 동일한 미신적 사고
방식에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깨웠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가 비참한 모습으로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 자기 아내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성 경: [삿19:29]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악행에 대한 고발]
(주); 그 마디를 찍어 열 두 덩이에 나누고 -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즉시 아내의 시신을 각을 뜨듯이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냈다. 이같이 시체를 절단하여 지파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 이스라엘 앞에 공개하며 응당한
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Keil and delizsch). 사울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소 한 겨리를 각을 떠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성을 촉구한 적이
있다(삼상 11:7). 이와같이 이것은 당시 중앙 통제 기구가 없었던 시절에 본문과 같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즉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고대 그리이스에서 볼 수 있었던 인보 동맹(隣保同盟)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지파 간의 결속이 해이해지고 중앙
통제 기구가 결여된 상태였기 때문에 본문의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고소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따라서 그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12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류들의 죄상을 강력히 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마7:3-5).
성 경: [삿19:30]
주제1: [타락한 레위인 가정의 비극]
주제2: [악행에 대한 고발]
(주);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 레위인이 전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는 전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이런 엄청난 죄악은 소돔 성에서 일어난 사건(창19장)과 유사하였기에 더욱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에 보다 신중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의 총회(總會)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주); 상의한 후에 말하자 - 혹자는 이 구절을 레위인이 이스라엘 각 지파에 사자들을 보낼 때 그 사자들이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같은
해석은 본문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절은 어디까지나 레위인의 사자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말로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서 '말하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베루'(*)는 복수 명령형으로서 권고의 뜻이 있다. 그리고 이것의 원형 동사 '다바르'(*)의 기본 의미는
'말하다'이지만 파생적인 의미로 종종 '파괴하다','인도하다'라는, '심판'의 뜻도 가진다. 따라서 여기서의 '말하자'는 베냐민 사람에 대한 거국적
차원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기브아 사람들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회개 운동을 일키지 않으면 안되었다(20장). 훗날 선지자 호세아가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타락의 극치로 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볼때(호9:9;10:9) 기브아 사람들의 행악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삿20:1]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이스라엘 총회에 고발된 악행]
(주);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17:6과 18:1;19:1의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은 오직 '여호와'한 분 뿐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인 것은 지도자들의 통솔하에 각 지파 간을 연결하는 연락 조직에 의해 된 것이지만, 본서 기자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을 부각시키므로써 여호와의 통치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은 가나안 최북단의 성읍이고(18:29) 브엘세바는 최남단의 성읍이다(창21:31). 따라서 본절과 같은 표현은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 전역(全域)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삼상3:20;삼하3:10; 24:2;대상21:2;대하30:5). 한편 '단'(Dan)의 본명은 '라이스'(Laish)이다. 그런데 단 지파가 이곳을 정복한 후자기 조상의 이름을 따라 '단'으로 개칭하였다((18:29). 따라서 본장에 나오는 사건은 적어도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사건 보다는 이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 길르앗 땅 - 이것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과 상대적인 것으로서 요단 동편의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0:3 주석을 참조하라.
(주); 미스바 - '망대'(watchtower)이라 뜻을 가진 이 지명이 가리키는 곳은 두 곳이다. 한 곳은 길르앗 땅의 미스바이고(10:17;11:11,29,34), 다른
한 곳은 베냐민 지파 변방에 위치한 미스바이다(수18:26). 10:17주석 참조. 본절의 미스바는 물론 후자이며 기브아 북쪽 7.5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 이곳은 '네비 삼월'(Nebi-Samwil)로 불리우고 있다. 한편 혹자는 왜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는가에 대하여 답하기를 미스바에 적당한
예배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Goslinga). 그러나 카일(Keil)은 실로의 성막(수18:1;삼상4:3,4)이 그곳으로 옮겨진 것은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
어쨌든 이후로 미스바는 국가적 총회 장소로 자주 나타나는데 사무엘시대에도 그러했고(삼상7:5-12,16), 왕조 시대 말기(왕하25:23)나 마카비
시대에 도 이곳에서 전체 회중의 총회가 열렸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모은 또 다른 이유는 미스바가 기브아에서
가까왔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에게 크게 위협을 가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삿20:2]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이스라엘 총회에 고발된 악행]
본절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인 본질적이 이유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즉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재판하고 응징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주); 모든 지파의 어른들 - 여기서 '어른들'에 해당되는 원어 '피노트'(*)는'모퉁이돌'(corner stones)이란 뜻이다. 이는 비유적으로 '지도자들', 또는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장'(chief)들을 가리킨다(삼상14:38;사19:13). 따라서 여기서 어른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로서 40만의 보병들을 지휘하는 장군의 역할을 수행했던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Hervey, Mattew Henry).
(주);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 - 이처럼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모인 군사의 수가 40만이었다는 것은 출애굽시 장정의
수가 60만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민26:51) 실로 엄청난 것이다. 또한, 훗날 사울이 암몬과 싸우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였을 때 그 수가
33만이었던 것만 보더라도(삼상11:8) 여기에 모인 수는 이스라엘 장정 전체가 다 모인 수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삿20:3]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이스라엘 총회에 고발된 악행]
(주);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 이것은 베냐민 자손들이 기브아 비류들의 사건(19:22-26)을 이제 듣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미스바에서 총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이제 들었다는 뜻이다. 앞서 레위인이 베냐민 지파에게도 시신한 덩이를 보냈을 터이니(19:29), 그들은 이미 사건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Keil & Delizsch,Lange). 그러나 각 지파들이 총회를 가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베냐민 지파들이 총회를 가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베냐민 지파에게는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은 이제서야 총회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방안을 그들 나름대로 연구하였을 것이다. 한편 13절에 나타난 베냐민 사람들의 태도를 볼 때, 이때 베냐민 사람들은 그 총회에 대해 강경히 대처하기로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주);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 총회는 기브아 비류들의 사건에 대해 신중히 대처하기 위하여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전체 회중 앞에서 다시 한번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레위 사람으로 하여금 자초지종을 말하게 했다.
성 경: [삿20:4]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이스라엘 총회에 고발된 악행]
(주);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 본절에서 7절까지에 기록된 레위인의 보고(報告)에서 이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실제로 노린 것은 그의
목숨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대신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19:25). 여기서
은근히 자신의 죄를 감추려는 레위인의 교활함을 발견하게 된다.
성 경: [삿20:5]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이스라엘 총회에 고발된 악행]
(주);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 이처럼 본문에 나타난 레위인의 이야기의 초점은 오직 기브아 사람들이 '그의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하였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오직 기브아 사라들이 '그의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하였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청중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도록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특히 여기서 '욕보여서'(*, 인누)는 강조형 능동태 동사로서 '여성을 무지막지하게 능욕하다'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말 역시 청중들의 분노를 끊어오르게 하기에 더욱 충분하였을 것이다.
성 경: [삿20:6]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이스라엘 총회에 고발된 악행]
(주); 이는...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 여기서 이 레위인은 자신이 첩의 시체를 쪼개어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내게 된 이유를 강조함으로써, 사람의
시체를 각뜬 자신의 잔인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부 기브아 비류들의 행위를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악행인 양 과장하여, 이것이 전 이스라엘 지파에 대한 범죄임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국가적 대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이 과장된 레위인의 보고 속에는 자신의 죄를 감추고 사적(私的)인 분노를 민족적인 분노로 미화시키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 경: [삿20:7]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이스라엘 총회에 고발된 악행]
(주);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 여기서 이 레위인이 요구한 것은 레 18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음란죄에 대한 형벌이다. 만일 이레위인의
말대로 기브아 사람들 전체가 그러한 범죄를 행했다면 그들은 이스라엘 지파에서 끊쳐져야 할 것이다(레18:29).
성 경: [삿20:8]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총회의 결의]
(주);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장 일치로 베냐민 지파를 징벌할 것을 가결했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다'에
해당하는 '쿰'(*)은 성전(聖戰)의 출전이나 어떤 직무나 의무 수행에 있어서의 예비적 동작을 가리킨다(신17:8:수3:16:왕상8:20).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결연한 행위는 한 지파의 범죄를 징벌하기 위한 심판적 태도라고 볼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심판적 직무 수행을 마칠
때까지 결단코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겠다고 결의했다.
성 경: [삿20:9]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총회의 결의]
(주); 제비 뽑아서 그들을 치되 - 여기서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위하여 제비 뽑았는지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의견들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기브아를 치는 대는 전체 보병 40만(2절)이 다 동원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가운데
1/10을 제비 뽑아 기브아를 치게 하고 나머지는 그들을 위해 군량미를 준비케 하거나 사상자가 생길 때 병력을 보충케 하였다는 견해가
있다(Hervey, Cassel, Wycliffe, Mattdw, Henry). 둘째, 여기서 제비 뽑은 이유는 가나안을 정복할 때와 같이 기브아를 정복했을 때 각 지파가 그
땅을 나누어 취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가 있다(Keil, Goslinga). 그러나 본절 이후에 나타난 제비 뽑은 결과를 보면 땅분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후자의 견해는 옳지 않다. 한편 70인역은 본절과 관련, '제비 뽑아서'와 '그들을 치되 '사이에 '우리가 올라가리이다'라는
말이 빠진 것으로 보고 있다(Pulpit Commentaty). 그러므로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 뽑은 것은 기브아 땅의 분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브아를 칠 자들을 선출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삿20:10]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총회의 결의]
(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취하고 - 앞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미정복지를 정복하러 올라갈 때에는 자기에게 분배된 기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 지파별로 올라갔다(1장). 그런데 본절에서는 기브아 비류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지파가 공동으로 각 지파중에서 사분의 일씩 선발하여 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온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사람들의 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혼연일치 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이스라엘 내에서 죄악을 제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한 열 한 지파의 궐기는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신13:5;17:7;19:19). 그러나 그들은 형제 지파를 매몰차게 정죄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통절히 느껴야 했고,그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민족 현실을 두고서 회개해야 했다. 오늘날도, 교회와 사회에 내재해 있는 여러 문제들을 보고 의분을 느끼고 비판하는 자는 많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곧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부터 개혁시키고자'하는 진정한 개혁자는 그리 많지 않다(마7:3-5).
(주); 망령된 일을 행한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네발라'(*)는 '무분별하다', '어리석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마틴노드(MartinNoth)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을 표현할 때 쓰는 전문적 용어로 보았다(삼상 25:2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 비류들이 저지른 윤간 행위(19:25)를 하나님의 법을 어긴 심각한 범죄 행위로 보고, 기브아 비류들을 징계하려 했음을 알수있다. 사실 각종
성 범죄는 인간의 영혼과 그 기본 인격을 파괴하시는 죄악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중차대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레
18:1-5 강해, '성경에 나타난 성범죄의 이해' 참조.
성 경: [삿20:11]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총회의 결의]
(주); 하나같이 합심하여 - 8-11절에 대한 본서 기자의 주석이다. 본서 기자는 본 사건을 다루면서 이전의 사사기 시대 동안에는 볼 수 없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체감과 협동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래로 이와 같은 일체감을 보여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지파간에 반목이나 비협동적인 모습이 자주나타나 있다(5:17;12:1). 따라서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그 집단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단합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단합은 대항해야 할 공동의 적이나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뚜렷할수록더욱 강하게 요청되는 법이다. 이와 관련,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 중의 하나로서 우리는 교파 간의 분열 혹은 동일
교파 내의 또 다른 분열을 들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이간시켜 소원(疏遠)해지도록 하는 것 사단의 주 임무임을
고려하건대(창3:1-5;갈5:20), 우리에게 있어 교회의 '하나됨'은 그 무엇보다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할 것이다(엡4:4-6). 물론 이러한 일치 운동이
자칫하면 맹목적 획일 주의로 흐르거나 변질된 복음을 낳게 할 위험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의 일치를 위한 탐구와 노력은
다각적인 안목에서 부단히 전개되어야 한다.
성 경: [삿20:12]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완악함]
(주);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 여기서 '온 지파'라고 한 것은 아마 베냐민 지파에 속한 '온 가족들'을 가리키는것 같다. 이처럼
'가족'을 '지파'라고 기록한 것은 베냐민 지파 내에서도 여러 가족들이 개별로 가문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민26:38-41)으로
보인다(Goslinga).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의 온가족들에게 이같이 공식적인 전갈을 보낸 것은 베냐민 지파 중에서 한 가족이라도 회개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Cundall). 이로 볼때 이스라엘의 열 한 지파는 처음부터 베냐민 모든 지파를 36-48절에 나타난 바와같이 완전히
진멸할 작정이 아니었음을 알 수있다.
성 경: [삿20:13]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완악함]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기브아의 비류들을 징벌하여 이스라엘이 도덕적 순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요청은 신13:12-16에 기록된 율법에 근거한 것으로, 그 율법에는 가증한 일을 행한 성읍만을 징벌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자기 지파 내에 가증한 일을 행한 성읍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치 않았다. 아마도 이는 그들이 미스바에 모인 40만 대군을 보고서 분개하였거나(2절), 아니면 지파적 자존심과 배타심에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 여기서 '제하다'에 해당하는 '바아르'(*)는 '불로 소멸시키다', '없애다'는 뜻이다. 이는 곧 불로 태워 없애듯 이스라엘 가운데서 죄악을 철저히 근절시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기브아 비류들의 범죄는 십계명 중 6,7,10 계명을 범한 것으로, 사형의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출29:13,14,17;레20:13;신22:22). 만일 그 죄인들의 행위가 묵과되면 율법의 권위가 실추되어 백성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내부의 죄악을 스스로 제거하지 않을 시에는 공동체 전체에 대해 하나님의 질책이 불가피하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레18:26-28).
(주); 베냐민 자손이... 듣지 아니하고 - 완악해진 인간의 마음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들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부추기기까지 한다(롬1:32).
성 경: [삿20:14]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완악함]
(주); 도리어 각 성읍에서 기브아에 모이고 - 수 18:21-28에 따르면 베냐민 지파의 성읍은 모두26개 였다. 그리고 각 성읍들은 한 가족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주); 기브아 -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다. 19:12 주석 참조.
성 경: [삿20:15,16]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완악함]
본절에서는 기므아 성읍에 모인 베냐민 지파의 군사들의 수효를 기록하고 있다. 기브아 외의 다른 성읍에서 모인 병력은 26,000명이고 기브아 성읍의 병력은 700명이다.이 수효는 26,700명이다. 이 수효는 광야에서의 1차 계수 때 35,400명(민1:36,37), 2차 계수 때 45,600명(26:41)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줄어든 수이다.
(주); 택한 칠백명은 다 왼손잡이라 - 여기서 따로 700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기브아 성읍의 군대가 가장 막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Cassel). 한편 이들700명은 모두 왼손잡이로서 물매를 사용하는데 명수였다. 이는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냐민'이라는 지파 명을 고려해 볼 때 매우 아이러니컬(ironical)하다. 사실 대상12:2에 따르면 이들은 왼손 뿐만 아니라 오른 손도 잘 쓰는 양손잡이들이었으며 싸움에 있어서 매우 용맹했다. 사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약 15배에 가까운 이스라엘 연맹군에 대항하여 과감히 전쟁을 일으킨 것은 타고난 그들의 용맹성에 기인한 것으로, 이미 야곱의 예언에도 나타나 있다(창49:27).
(주); 물매 - 조그만 가죽이나 천 따위로 만들어 그 속에 돌이나 자갈을 끼운후에 휘들러 던질 수 있도록 고안된 무기의 일종이다. 일개 목동에
불과하였던 다윗이 이 물매로써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쳐죽인 일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삼상17:49).
성 경: [삿20:17]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첫번째 접전]
(주); 이스라엘 사람의...수는 사십만 명이니 - 이 수효는 이미 2절에서 언급했었다. 한편 본절에서는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사람중 칼을 빼는 자의
수효가 40만명이라고 했는데 21:9에 따르면 여기에는 길르앗 야베스의 군대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아무튼 광야에서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수할 때 1차는 601,730명이었던(민26:51)것과 비교해 볼 때 길르앗야베스 사람들 이외의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배경이 베냐민과의 전쟁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내전(內戰)의 심각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여실히 증거해 준다.
성 경: [삿20:18]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첫번째 접전]
(주); 벧엘에 올라가서 - 이스라엘 자손들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기 전에 누가 먼저 베냐민 지파와 싸울 것인지를 하나님께 묻기 위해 벧엘로 올라갔다. 이는 비록 형식적이나마 아직도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여호와 신앙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압제하에 시달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3:8, 9;4:1-3;6:7)도 그나마 이처럼 여호와 신앙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벧엘'(*)의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의 집'이다. 따라서 라틴 벌겟(Vulgate)역과 KJV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벧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갔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집'을 표현할 때는 '벧하엘로힘'(*)으로 기록하며 '벧엘'(*)은 항상 지명을 나타낸다(Pulpit Conmmentary).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간 곳은 실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벧엘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Keil). 아마 이들이 벧엘로 간 것은 실로보다 벧엘이 기브아에서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벧엘에는 산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거리상으로 벧엘은 실로와 기브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고 벧엘에서 기브아까지는 약 15km 정도이다. 아무튼 이스라엘 역사상 벧엘이 종교적 구심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아마 이때부터일 것이다(25, 26절;삼상 10:3;왕상12:28-13:5;왕하 2:3). 물론 과거에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처음 제단을 쌓았고(창 12:8) 야곱이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천사를 보기도 했지만(창 28:10-22)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을 뿐이다.
(주);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 전쟁 전에 하나님께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관례적인 것이다(1:1). 즉 그들은 대적과 싸움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시는 방법대로 수행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이다.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 참조.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를 가나안 족속과 동일한 대적으로 취급하였을 뿐 한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한 형제의 범죄에 대해 진정한 회개를 기대하기 보다는 마치 이방인과 싸우는 것처럼 승리만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베냐민과의 첫번째 전쟁에서 크게 패하게 된 것(19-23절)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주); 유다가 먼저일지니라 -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질문에 대하여 이같이 답변하신 것은 분명 이스라엘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유다 지파의 지도자적
위치(창 49:8)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삿20:19,20]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첫번째 접전]
(주); 나가서 항오를 벌이고 - 여기서 '항오를 벌이고'에 해당되는 원어 '와야아르쿠'(*)는 '병력을 배치하다'라는 뜻의 '아라크'(*)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가장자리를 향하여 선 전투 대형을 가리킨다(Cassel). 그런데 이와 같이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투 대형을 취할 때에는
반드시 병력의 수효나 전투력에 있어서 상대편보다 막강히 우세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연맹군은 베냐민 지파의 병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나
분명한 작전도 없이 무턱대고 베냐민 군을 포위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그것은 아마 전체 지파를 통솔할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교만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삿20:21]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첫번째 접전]
(주); 기브아에서 나와서...엎드러뜨렸으나 - 부주의하고 오만했던 이스라엘 연맹군은 기브아 용사들이 매복해 있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기브아
성읍을 포위하려다가 이처럼 베냐민군대의 갑작스런 공격에 큰 참패를 당하고 병력 22,000명을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연맹군이 패하게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크게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다. (1) 이스라엘의 연맹 세력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었기는 하지만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죄악을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다(19:1-21:25). 즉 그들은 동족 상잔의 엄청난 비극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통감하고
회개했어야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에 대해 일방적으로 심판관으로서의 자세만을 취하는 교만과 우(愚)를 범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2) 베냐민 군사들은 그 전쟁에 패하는 것이 곧 멸망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강한 위기 의식 속에서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반면에 연맹군은 수효만 믿고 방심하였거나, 막상 싸움에 힘하여서는 서로 타지파의 눈치를 보며 꽁무니를 빼는 소극적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성 경: [삿20:22,23]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첫번째 접전]
혹자는 23절과 22절의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Hervey). 그러나 고대 히브리어 사본들은 모두 본문과 동일한 순서로 두 절을 배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다(Goslinga). 한편 22절의 '첫날 항오를 벌였던 곳에 다시 항오를 벌였다'는 기록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묻기 이전에(23절) 싸움부터 먼저 벌인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실제로 처음 전쟁이 끝 난후(19-21절) 다음날에도 연거푸 전쟁을 수행했다고 해석하는 주석가도 있다(Cassel). 그러나 22절은 이스라엘이 재차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전투 형태만 다시 갖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나서 이스라엘은 실제적인 싸움을 하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울며 다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주); 스스로 용기를 내어 - 즉 어떻게 해서든 첫날의 패배를 만회해 보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굳게 다져 먹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저들은 아직까지 근본적인 패배의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후 전투에서도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24, 25절).
성 경: [삿20:24,25]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두번째 접전]
(주); 다시 이스라엘 자손...땅에 엎드러뜨렸으니 - 이처럼 본절은 두번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이 패배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흘린 눈물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패배로 인하여
여호와를 원망하는 눈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한번의 패배를 통해서도 바른 자각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실수와 범죄를 반복한 것이다.
21절 주석 참조.
성 경: [삿20:26]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두번째 접전]
거듭 패배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자손들은 보다 근원적으로 패인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아 교만하고 완악했던 모습들을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전까지는 병력의 수효만을 믿고 하나의 요식(要式) 행위로 하나님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모든 해결책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겸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즉 그들은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상들을 직시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시 119:71;히 5:8).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비운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지혜와 위로로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시 107:9;약 2:5).
(주); 벧엘에 이르러 - 18절 주석 참조.
(주); 저물도록 금식하고 - 첫번째 전투에서 패했을 때에 그들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에 앞서 '스스로 항오를 벌였다'(22절). 반면에 이번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즉 그들이 또다시 힘으로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려고 했다면 힘을 쇠잔케 하는 금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성경에는 회개를 위해 금식한 경우가 많이 있으며(삼상 7:6;욜 2:13;행 9:9),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 금식한 예도 여러 번 있다(출 34:28;욜 1:14). 에 4:1-3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주); 번제와 화목제 - '번제'(Burnt Offerings)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기원하며 드리는 제사이다. 그리고 '화목제'(Peace
Offerings)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목과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한편 이 두 제사는 모두 예배자가 자원하여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성 경: [삿20:27]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두번째 접전]
(주); 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 혹자는 본절을 근거로 하여 사사 시대에 이미 실로의 성막이 영구히 벧엘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 18:1;삼상1:3;2:14;3:21;4:3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 당시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길 때까지 실로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실로에서 벧엘로 옮긴 것임이 분명하다(Hengstenberg, Keil
& Delitzsch, Lange). 한편 그들이 언제 하나님의 법궤을 그곳에 옮겼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두 번의 전쟁 패배 이후에 실로에서
벧엘로 옮겨온 듯하다(Hengstenberg).
성 경: [삿20:28]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두번째 접전]
(주);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 본 절에 등장하는 비느하스(Phinehas)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부디엘의 딸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다(출 6:25).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이미 활동하기 시작했다(민 25:7). 때문에 그가 제사장으로 지낼 때는 사사 시대 초기임이 분명하다. 이로 볼 때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의 발생 연대 역시 사사 시대 초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 세번째 전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증하는 이같은 약속을 주신 것은 2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화목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회개하고
서원함으로 드려진다. 그러므로 본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승리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삿20:29]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세번째 접전]
(주); 군사를 매복하니라 - 이스라엘 연맹군들은 두 번의 패배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현명하게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사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는 저들이 더 이상 베냐민 지파를 얕보는 것과 같은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한 증거이다. 이는 마치 과거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략할 때 사전 준비를 갖춘 것과 흡사하다(수8:4).
성 경: [삿20:30]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세번째 접전]
(주); 제 삼일에...전과 같이 - 이스라엘 연맹군은 군사를 매복한 것을 베냐민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전날과 같이 항오를
벌였다. 즉 그들은 베냐민 군을 기만하기 위하여 지난 번과 다름없는 전투 대형을 갖추었던 것이다. 19, 20 절 주석 참조.
성 경: [삿20:31,32]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세번째 접전]
(주);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 본절에 묘사된 전투의 양상은 수 8:3-28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아이 성 전투의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 즉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유인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기세 등등하게 기브아 성읍을 떠난 이스라엘 연맹군을 추격했던 것이다.
성 경: [삿20:33]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세번째 접전]
(주); 바알다말 - 지명의 뜻은 '종려나무의 주인'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유명한 종려 나무의 산지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 기브아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혹자는 이를 라마와 벧엘 사이에 있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숲'과 동일한 장소인 것으로도 추정한다(4:5).
(주); 기브아 초장 - 여기서 '초장'에 해당하는 원어 '마아레'(*)는 나무나 풀이없는 황량한 벌판을 가리킨다. 이러한 곳에는 웅덩이가 많기 때문에
복병들이 숨기에 적합하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454).
성 경: [삿20:34]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세번째 접전]
(주); 기브아에 이르러 - '기브아(베냐민)의 군대에 대항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베냐민 앞에서 거짓 패주하며 그들을 기브아 성읍으로부터 유인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이제 급히 돌이켜 복병과 더불어 베냐민 군에게 협공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 바알 다말에서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 베냐민 사람들은 기브아에 매복해 있던 복병들(29, 33절)이
자기들의 후미를 공격하는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성 경: [삿20:35]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세번째 접전]
(주);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일백을 죽였으니 - 베냐민 지파의 전체 군대 수효는 26,700명이었다(15절), 그런데 본절에서 죽은 베냐민 사람이
25,100명이며, 47절에서 죽지 않고 도망한 사람이 600명이었다. 그렇다면 그 수는 전체 25,700명으로 15절의 수치와 차이가 난다. 그래서
70인역(LXX)에서는 15절의 수치를 25,700으로 수정하여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합리적인 계산에 의한 수정일 뿐 그에 대한 분명한
근거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1000명을 첫번째 전투나 두번째 전투에서 이미 죽은 자들의 수효로 이해하여야 한다(Goslinga).
성 경: [삿20:36]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 여기서 '깨닫다'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보다'는 뜻으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거나 몸소 체험한 후 비로소
사태를 직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삿20:37]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복병이 급히...쳤음이더라 - 33절의 내용을 보다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매복한 곳으로부터 급하게 쏟아져 나온 복병들은 작전상
후퇴하는 아군들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하여 신속하게 기브아 성읍을 공격한 것이다.
성 경: [삿20:38]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큰 연기가 치미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 여기서 '군호를 삼자'에 해당되는 원어는 '크게 하다', '많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 '라바'(*)의
명령형(*, 헤레브)으로서 연기가 올라올 때에 베냐민 자손을 치는 것을 '크게 하라'는 뜻이다. 한편 70인역(LXX)은 본문의 '헤레브'(*)를 '칼'이란
뜻의 '헤레브'(*)로 오인, '마카이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칼을 가지고 올라가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도 전후 문맥에 크게 상치되는
번역은 아니다.
성 경: [삿20:39]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본절은 31, 32절과 동일한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앞뒤 문맥과 연관시켜 볼 때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31, 32절은 사건의 발생 순서와 전체적인 상황의 진척을 따라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본절은 베냐민 자손이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가 하는 일관된 관점 속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벨도우(Bertheau)가 36-46절의 내용을 베냐민과 이스라엘 백성의 싸움이 아닌 다른 전투 상황을 삽입한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문과 같이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건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먼저 기록한 뒤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 뒤에 다시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는 독특한 역사 기록 방법을 가지고 있다(Keil).
(주); 싸우다가 물러가고 - 즉 이스라엘 연맹군이 베냐민 자손을 유인하기 위하여 짐짓 패배한 척하며 후퇴한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삿20:40]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베냐민 사람이 사람이 돌아보매 - 여기서 '보매'에 해당하는 원어 '힌네'(*)는 슬픔과 탄식어린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감탄사이다. 이
단어는 36절의 '깨달았으니'에 해당되는 동사 '라아'(*)와 마찬가지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한 후 비로소 사태를 직시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즉 베냐민 자손이 자기의 패한 것을 깨달은 시기는 기브아 성읍 전체에서 피어오르는 구름 기둥 같은 연기를 보았을때이다(41절).
성 경: [삿20:41]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화가 자기에세 미친 것을 보고 - 베냐민 사람들은 도망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돌이켜 자신들을 공격하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하였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화'(*, 라아)는 사나운 짐승(레 26:6)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천사들(시 78:49), 기근(겔 5:16),
질병(신 7:15) 등의 재난을 통해 인간에게 고통이 찾아드는 악한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미치다'(*, 나가)는 말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다다른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타격을 가하다', '압도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아마 이때에서야 비로소 베냐민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줄로 깨달았을 것이다.
성 경: [삿20:42]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몸을 돌이켜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 여기서 말하는 광야 길이란 수 16:1에 나오는 기브아에서 여리고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력 부대는 기브아 서편에 있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는 동쪽 광야 길로 도망하는 것이 살아날 가망성이 컸다. 특히, 그리하여 요단 계곡에 이르기만 하면 숨을 수 있는 굴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Goslinga).
(주);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서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베냐민 각 성읍에서 모인 베냐민 사람들(14, 15절)로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죽였다고 해석한다(Keil, Cassel). 반면 또 다른 주석가는 본절의 '각 성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단수로 수정하여 이는 기브아 성읍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Cundall). 그러나 여기서 '각 성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분명히 복수이며, 거기에서 나온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숨겨 놓은 복병들(29, 33, 37절)을 의미한다(Goslinga).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의 '각 성읍에서 나온자를'은 '각 성읍에서 나온 자가'로, 목적격 조사를 주격 조사로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주); 그 가운데서 진멸하니라 - 이것은 추격하는 이스라엘 군사와 숨어있던 복병들이 포위한 가운데서 베냐민 사람을 진멸하였음을 가리킨다. 43,
44절은 이에 대한 상황을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성 경: [삿20:43,44]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기브아 앞 동편 - 분명치는 않으나 기브아 북동쪽 약 6km 지점에 있는 게바(Geba)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본래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훗날 레위 지파에게 기업으로 양도된 곳이다(수 21:17).
(주);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 베냐민 사람들은 간신히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기브아 앞 동편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하던
그곳이 바로 그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으니, 이때에 죽은 베냐민 용사는 모두 18,000명이었다. 한편 '그 쉬는 곳'에 해당하는 원어 '누하'(*)가
70인역에서는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 명사 '노바'(Nova)로 번역되어 있다. 한편 대상 8:2에 베냐민의 넷째 아들 '노하'(Nohah)가 나오는데, 이
지명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Cundall).
성 경: [삿20:45]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림몬 바위 - 림몬(Rimmon)은 기브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11km 정도 떨어진, 벧엘과 요단 계곡 사이에 위치해 있는 바위가 많은 산지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곳을 오늘날의 '람문'(Rammun)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 이곳은 18,000명의 베냐민 용사들이 죽은 곳으로 추정되는 게바(43, 44절)에서도 약 2.4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아니한 곳이다. 한편 림몬 바위에는 6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동굴이 있었는데, 이곳으로 가던 도중에 7천명이 죽고 이 곳에 피한 사람은 겨우 6백명에 지나지 않았다(47절). 그 동굴은 해발 757m의 언덕에 위치한 것으로, 오늘날 고고학적 탐사 결과 그곳에는 식수(食水)를 공급할 샘도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주); 기돔 - 이곳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림몬 바위 가까운 곳일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성 경: [삿20:46]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모두 이만 오천이니 - 35절에는 25,100명으로 본절보다 더욱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약 100명 정도 기록상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이미 앞에서 정확한 수를 밝혔기 때문에 다시 정확히 언급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2) 36-46절의 기록은 정확한
자료 소개 보다는 베냐민 자손의 멸망에 초점을 맞춘 기록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삿20:47]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육백 명이...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 - 무사히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은 21:13절 이하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4개월간을
지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백명을 남겨 두신 것은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대한 당신의 언약을 잊지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기인한 것이었다(창 35:12;49:28;출 24:4;민 1:5-15;수4:3, 4; 마 19:28;약 1:1;계 7:4). 만일 당시에 베냐민 지파가 전멸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 지파의 후손인 사도 바울(롬 11:1)의 이름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삿20:48]
주제1: [이스라엘의 내전(內戰)]
주제2: [베냐민 지파의 전멸]
(주); 이스라엘 사람이...돌아와서 - 이스라엘 사람들은 림몬 바위 동굴에 숨은 600명을 색출해 내는 대신에 베냐민 성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선
그곳에 있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모두 죽이고, 성읍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인들이 이같이 베냐민 거민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베냐민 각 성읍이 기브아 사람들을 옹호하며 동일한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그에 곱하여 몇 배로 거둔 셈이 되었다.
성 경: [삿21:1]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로 인한 애곡]
(주);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 본절은 5절과 더불어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 총회에서 맹세하여 가결하였던 사항들(20:1-11) 중에서 미처 밝히지 않았던 사항을 회상하여 기록함으로써 본장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에 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기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맹세하였던 두 가지 사항이다. 첫째는 자기 딸을 베냐민 자손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것과, 둘째는 온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미스바 총회에 참석치 아니한 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5절) 등이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이 두 맹세를 이행치 않을 수 없었는데 이로써 또 다른 살상(8-12절)과 무모한 납치극(13-25절)이 벌어진다(Pulpit Commentary).
(주);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기시하여 왔었다(창 28:6-9). 그리고
그것은 가나안 원주민과 관련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사항이기도 하다(신 20:16, 17).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 총회에서 본절과
같은 맹세를 하였다는 것은 곧 그들이 베냐민 지파를 가나안 이방인들과 동등히 취급함으로써(신 7:3) 이스라엘 사회에서 축출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성 경: [삿21:2]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로 인한 애곡]
(주); 벧엘에 이르러...대성 통곡하여 -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마친 후(20:48)
다시금 하나님의 언약궤와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있는 벧엘(20:26-28)로 되돌아온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의 열기가 가시면서 미스바에서 한 그들의 처음 맹세에 따르면 그들은 위대한 성전(聖戰)을 훌륭히 수행한
셈이다(20:8-11).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열 두 지파 중에 한 지파가 거의 멸종 위기에 닥치게 되므로서 언약 백성으로서의 구성 요건이
상실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 문제를 긴급히 해결하여야 했는데 이미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맹세로 인해 해결책이 없자 대성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서 장탄식을 늘어놓고 만다(3절).
성 경: [삿21:3]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로 인한 애곡]
(주);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 이스라엘 백성들이 12지파로 존속할 수 없게된 것이 마치 하나님의 탓인 양 하나님께 원망하는
장면이다(Goslinga). 아무튼 이스라엘 12지파의 존속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입장에서 필수적인 전제였다(출24:4;신 27:11-13). 즉 언약
공동체 중 한 지파가 빠진다는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성립 요건을 결여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멸절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지파의 몰락이 아니라 그 공동체 전체의 사활(死活)에 관계된 심각한 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에 대하여
이렇게 거국적으로 노심 초사(勞心焦思)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성 경: [삿21:4]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로 인한 애곡]
(주); 거기 한 단을 쌓고 - 당시 벧엘에는 이미 제단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20:26) 본절에서 그들이 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통상적인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이에 대한 설명도 가능해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함부로 아무 곳에서나 제단을 쌓지는 않으며 반드시 신의 현현이 있는 곳에서만 단을 쌓는 것을 관습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민족적인 위기를 직면했거나 축제 등을 치룰 때에도 단을 쌓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특히 전쟁 전(前)이나 후(後)에 단을 쌓는 경우가 많았다(삼상 7:9;13:9;14:35). 따라서 본절에서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쟁을 마친 후 재기된 민족적 과제를 놓고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새롭게 단을 쌓았을 것이다(Keil & Delitzsch).
(주); 번제와 화목제 - 20:26 주석 참조.
성 경: [삿21:5]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로 인한 애곡]
(주);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 본절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모색하던 중 일전에 그들이 미스바 총회에서 맹세하였던 중 일전에 그들이 미스바 총회에서 맹세하였던 사항을 기억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곧 기브아 거민을 응징하기 위해 모인 미스바 총회(20:1, 2)에 참석치 아니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1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여 불참자들의 성읍을 친 후 그곳 처녀들을 사로잡아 베냐민 자손에게 줄 계획(12절)을 수립하였을 것이다.
(주); 크게 맹세하기를...하였음이라 - 여기서 '크게 맹세하였다'는 것은 불이행의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뜻한다(Keil & Delitzsch).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맹세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1) 긍정적인 면 : 언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온전케 하는 일에 발뺌한 자들을 응징하는 것은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발뺌자들은 소극적이나마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19:22-26)을 묵인한 셈이니 어떤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범행에 동조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2) 부정적인 면 :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응징하지 않고 베냐민 지파의 멸절 위기를 타개하는 타개책으로 그들을 응징하였다는
점이다.
성 경: [삿21:6]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로 인한 애곡]
(주);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 여기서 '뉘우쳐'에 해당하는 '나함'(*)은 '한숨 쉬다', 호의적으로 '동정심을 갖다', 소극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는 적극적인 의미의 회개와는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가 멸절하게 된 그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안타까와하였을 뿐 그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도 있다는 연대 의식(solidarty)을 느끼고 회개하는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삿21:7]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로 인한 애곡]
(주); 그 남은 자들 -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패퇴(敗退)하여 림몬 바위로 도망, 간신히 목숨을 보존한 베냐민 자손 600명을 가리킨다(20:47).
(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하였도다 - 본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1) 남아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딸들을 주어 한 지파의 사멸을 방지하는 것이다. (2) 딸을그들의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한
맹세(1절)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맹세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딸을 베냐민인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둘러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일전의 미스바
총회에도, 그 같은맹세에도 참여치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의도는 감추고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치기로 결의한다(8-11절). 5절 주석 참조.
성 경: [삿21:8]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진멸당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
(주); 야베스 길르앗 -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는 갓 지파의 성읍이다. 이 성읍은 요단강의 지류 중 갈릴리 바다 남쪽 32km 지점의
동쪽으로부터 요단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엘 야비스(Wadi el-Yabis) 근처에 위치하였다. 이 성읍을 진멸하기 위해 1만 2천 명의 군사만을 보낸
것(10절)으로 볼 때에 그리 큰 성읍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견해는 그 성읍에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4백 명 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로도 뒷받침
되어진다(12절). 이러한 야베스 길르앗은 훗날 사울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성읍이다(삼상 11장). 야베스 거민이 아모리 사람 나하스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울이 성읍을 도와 구출해 주었다.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은 훗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벧산 성벽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야베스에 묻어 주었다(삼상 31:11-13). 때문에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용감하고 경건한 이들 야베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삼하2:5).
성 경: [삿21:9]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진멸당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
(주); 백성을 계수할 때에...없음을 보았음이라 - 앞서 이스라엘이 미디안 총회로 모여 베냐민과의 싸움을 결의했을 때(20:1-11) 그들은 분명
군사들의 수를 점호(點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총회에 참석치 않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을 일컫는 듯하다. 20:17 주석 참조.
성 경: [삿21:10]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진멸당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
(주);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 - 이는 곧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 대하여 철저한 심판을 가하라는 뜻이다. 한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비록 그곳의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의 책임이 아닐 터인데도 이처럼 그들까지 모두 함께
진멸시키도록 한 이유는 공동체적 책임 때문이다. 즉 당시 공동체 의식을 중요시 하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한 성읍의 일개인이 범죄하였을
경우에도 그 성읍에 대하여 전체 책임을 묻곤 하였다(신 21:1-9). 그것은 곧 이웃이 범죄할 경우 그를 개도(開導)할 책임이 각자에게 있음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본절에서 야베스 길르앗 성읍을 철저히 진멸토록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인데 그러나 당시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 400명만은 멸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2절).
성 경: [삿21:11]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진멸당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
(주);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 여기서 '남자와 잔 여자'란 곧 '기혼녀'(married women, Living Bible)를 가리킨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개 전쟁이나 변란(變亂)이 일어났을 때 기혼녀를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민 31:17). 아마 이는 그들을 살려둘 경우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획책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진멸하다'에 해당하는 '하람'(*)은 '구분하다', '봉헌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듯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을 멸절시킨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삿21:12]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진멸당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
(주); 젊은 처녀 사백인을 얻었으니 - 남은 베냐민 자손들(20:47)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야베스 길르앗을 치게 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교묘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즉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서원한 것(1절)을 어김이 없이도 베냐민 자손들에게 아내를 구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7절 주석 참조.
(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 오니라 - 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 번제를 드린 곳은 분명히 벧엘이었다. 그런데 본절에서 야베스 길르앗 처녀 400명을 이끌고 간 곳은 벧엘이 아니라 실로였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혹자는 이제 베냐민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벧엘로 옮겼던 언약궤를 다시 실로로 복귀시켰다고 한다(Hervey). 그리하여 백성들은 다시금 벧엘이 아닌 성소 실로로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19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가 가까웠기 때문에 언약궤를 실로로 옮겼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Goslinga). 그리하여 백성들은 다시금 성소로 모인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실로는 엘리 제사장 당시까지(삼상 4:3, 4) 희막이 있던 성소로 여호수아 시대에도 이곳에서 자주 총회가 열렸었다(수 18:1;21:2;22:9).
(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 -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성읍인 반면 실로는 요단 서편, 즉 가나안의 성읍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로를 야베스
길르앗과 대비시키기 위하여 '가나안 땅'이란 말을 사용한 듯하다(Hervey, Keil).
성 경: [삿21:13]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에 대한 화친 선포]
(주);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때까지 약 넉달 동안(20:47) 림몬 바위에 숨어 지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평화를
공포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14, 23절). 아무튼 이스라엘 회중이 이처럼 남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평화를 공포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성도는 비록 이웃과 다투었다 할지라도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이 옳다(마 5:21-26). 뿐만 아니라 원수와 죄인조차도 회개할 때에는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후 2:7).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다(요 13:34, 35).
성 경: [삿21:14]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에 대한 화친 선포]
(주); 오히려 부족하므로 -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서 데려온 처녀들은 400명이고(12절) 베냐민 사람들은 600명이었기 때문에(20:47) 약 200명의
처녀가 부족한 셈이다. 이를 위해 부득불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계책을 짜내었는데 곧 실로 여인 납치극이다(19-23절).
성 경: [삿21:15]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지파에 대한 화친 선포]
(주); 여호와께서...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 -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궐이 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이 단지 지파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내전이었던 것만은 아니며 거기에는 죄악 중에 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궐'에 해당하는 '페레츠'(*)는 '분열, '갈라진 틈' 등의 뜻으로서 3절의
'이지러지다', '빠지다'라는 뜻의 '파케드'(*)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한 틈이 나게 하셨다'는
말이 된다(KJV, RSV, 공동번역).
성 경: [삿21:16]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주); 회중 장로들이 가로되...얻게 할꼬 - 모자라는 200명의 처녀 때문에 다시 장로들의 회의가 열렸다. 한편 여기서의 문제 제기(16-18절)는 6,
7절에서의 문제 제기와 거의 유사하지만 다음과 같은 새로운 내용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1) 6, 7절에서와는 달리 베냐민 지파의 실상(14절)을
분명히 목격한 뒤였다. (2) 여호와께서 한 지파를 궐이 나게 하셨기 때문에(15절) 그들이 길르앗 야베스를 쳐서 처녀를 데려온 것으로(12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라고 한 장로들의 탄식 및 의견 제시는
6, 7절에서 제기했던 것보다 더욱 강한 어조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삿21:17]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주);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 여기서 '기업'에 해당하는 '예레솨'(*)의일반적 의미는 '산업', 또는 '소유'를 뜻한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미 자신들의 영토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이다(14절).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아내를 얻어 이룬 '가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내가 없으면 베냐민 지파의 후사(後嗣)를 얻을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베냐민 지파의 이즈러짐은 여전히 방지할 수 없다.
추측컨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자라는 처녀 때문에 베냐민 지파간에 일어날 불화를 염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삿21:18]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주); 맹세하여 이르기를...저주를 받으리라 -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선 하나님과의 맹세이든, 사람과의 맹세이든 모두를 막론하고 '맹세'는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불변의 약속이었다. 따라서 대개 히브리인들은 무엇을 맹세할 때, 그것을 이행치 못할 경우 죽음이나 어떠한 저주라도
감수하겠다는 약속을 곧잘 첨언(添言)한다(수 6:26;삼상14:28;왕상 2:42). 본절 역시 바로 그러한 한 예인데 '맹세의 엄정성'을 잘 드러내 준다. 민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참조.
성 경: [삿21:19]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주); 벧엘 북편...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편 실로 -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실로'는 12절에 나오는 '실로'와 다른 곳이 아니다. 성경에 언급된 '실로'(Shiloh)란 지명은 언제나 한 곳을 가리키는데 본절의 설명에 의하면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약 32km지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호수아 때(수 18:1)부터 엘리 제사장 때(삼상 4:3, 4)까지 그곳에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성막이 있었는바 종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성읍이었다. 현재 실로는 '길벳 세일룬'(Khirbet Seilun)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 르보나 - 실로와 세겜 사이에 있는 큰 길가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실로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루반'(Lubban)인 것으로 추정된다.
(주); 세겜 -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49.6km 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성읍이다. 8:31 주석 참조.
(주);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가 - 실로에서 매년 절기가 있었다는 언급은 삼상 1:3,7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무슨 절기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절기'에 해당되는 '하그'(*)는 주로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등 3대 절기에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주석가들은
유월절이었다고 생각한다(Keil & Delitzsch,Hengstenberg, Lange). 왜냐하면 그들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었다는 것은(21절) 과거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渡河)후 미리암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의 딸들이 춤을 춘 것(출 15:20)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Lange).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그것은 실로 고유의 축제로서 신 12:10-12에 언급된 축제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Hervey,Rosenmuller). 하지만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이 세 절기
가운데 올리브(olive)와 포도등의 수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장막절이다(신 16:13). 레위기 서론, '히브리절기와 축제' 참조. 따라서 본절의
축제도 포도원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20, 21절) 장막절임이 분명한 것 같다(Patrick, Cundall). 장막절의 주요 행사는 주로 밤에
거행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베냐민 자손들이 춤추는 여자들을 쉽게 납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대낮에 여인을
납치했다면 실로에서 베냐민 땅까지 데려가기도 전에 발각되었을 것이며, 발각되었다면 율법에 따라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출 21:16;신 24:7).
성 경: [삿21:20,21]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본절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처럼 철저한 계획 속에서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아내를 취하여 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장로들이 이와 같은 납치극을 꾸민 이유는 22절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베냐민 사람들 중에 아내가 없는 200명 뿐만 아니라 아내가 있는 나머지 400명의 베냐민 사람들도 분명히 이 일을 돕기 위해 나섰을 것이다.
(주);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려 나오거든 - 패트릭(Patrick) 주교에 따르면 장막절에는 이스라엘 처녀들이 춤을 추도록 허용되었는데 이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허용된 절기는 오직 장막절 뿐이라고 한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251).
(주); 붙들어 가지고...돌아가라 - 여기서 '붙들다'에 해당하는 '하타프'(*)는 마치 죄수를 체포하듯 '꽉 붙들어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냐민인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성 경: [삿21:22]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주); 만일...쟁론하면 - 앞서 미스바 총회에서 자신들이 베냐민 자손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이스라엘 자손들(1절)은 아무도 그 같은 서원을 범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냐민 자손들이 자기들의 딸을 납치해 가려는 일이 탄로나면 싸움이 일어날 것임이 분명하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태를 가리키는데 만일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이스라엘 장로들은 자신들이 친히 베냐민인들을 위해 변호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주); 너희에게 죄가 없을 없을 것임이니라 - 이처럼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실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무죄성을 납득시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논거(論據)가 있었을 것이다. (1) 길르앗 야베스와의 전쟁에서 베냐민 사람들의 아내를 다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한
이스라엘의 공동 책임이 있기 때문에(10-14절) 실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것은 실로인들의 책임만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2)
실로인들이 고의로 자신들의 딸을 내준 것이 아니라 베냐민 사람들이 강제로 납치해 간 것이기 때문에 실로인들은 그들이 한 맹세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전쟁 때에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이방인들에게도 딸을 빼앗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성 경: [삿21:23]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베냐민 사람들은 장로들의 계획대로 실로에서 춤을 추던 여인 200명을 데리고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갔다.
(주); 성읍들을 중건하고 - 이처럼 베냐민 사람들이 아내를 얻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 가장 시급했던 일은 거의 잿더미로 변한 성읍들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베냐민들에게 속한 성읍은 앞서 이스라엘 연맹군과의 싸움에서 대부분 완파(完破)되었기때문이다(20:48).
성 경: [삿21:24]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주);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 본절은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는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이제서야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주); 그곳을 떠나 - 여기서 '그곳'이란 일차적으로 실로라고 생각할 수 있다(12절). 그러나 혹자는 16-23절의 상황에 의거해 대부분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종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Goslinga).
성 경: [삿21:25]
주제1: [베냐민 지파의 회복]
주제2: [베냐민 생존자들을 위한 배필(配匹)]
(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 마지막으로 본서 기자는 사사기의 역사를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그러한 불법적인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21장에 걸쳐 기록된 불법적인 일들에 대한 본서 기자의 이러한 결말은 사사기 시대의 예비적인
성격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6 주석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