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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팀 켈러의 14일 묵상
갑상선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은 후 여름을 맞아 저는 개인 말씀묵상 시간에 네 가지 실제적인 변화를 주었습니다. 우선 몇 달간 시편을 한 편씩 차례로 살펴보면서 요약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정하게 시편으로 기도하며 일년에 여러 번 시편을 통독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한 일은 성경을 읽은 후 기도하기 전에 늘 묵상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아침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기도에 힘썼습니다. 네 번째로는 더 큰 은혜를 기대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가 결실을 맺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2년 정도 이러한 노력을 거듭하다 보니 진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기복은 존재했지만 생명력 있는 기도의 새로운 빛 가운데 제 마음을 좀더 분명히 살펴볼 수 있게 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기쁨과 함께 새로운 고통도 맛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제 마음과 세상에서 하나님이 악을 이기시는 것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투와 안식을 주는 사랑의 체험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이 두 가지 기도 체험은 쌍둥이 나무처럼 함께 자랐습니다. 그래야 했던 이유를 이제는 납득합니다. 이 두 체험은 서로를 촉진합니다. 그 결과 이전 나의 모든 설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영적인 생기와 힘이 생겼습니다.

기도는 참된 자기 이해로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입구입니다. 기도는 비가역적이고 급진적인 변화인 '사랑의 재정렬'을 경험하는 주된 방법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방법입니다. 실제로 기도는 우리가 구하는 것들을 하나님이 공급하실 때 우리에게 무해하도록 해줍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며, 마침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방법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삶에서 해야 하는 모든 것과 필요한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기도의 궁극적인 형태란 고요한 찬미일까요, 아니면 적극적인 강청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둘 중 하나로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기도서 시편을 참고하여 답을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시편에는 두 가지 형태의 기도가 경험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27편, 63편, 84편, 131편, 그리고 시편 146편에서150편까지의 '할렐루야 시편'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묘사하는 시편이 있습니다. 시편 27편 4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이 기도할 때 주님께 구하는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다른 것들도 구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편 63:1~3



주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다윗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시 63:5). 이는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입니다.



하지만 시편에는 불평하거나 도움을 호소하거나 세상에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경험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시편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편의 기도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느껴집니다. 시편 10편, 13편, 39편, 42~43편, 88편이 이러한 기도의 몇몇 예입니다. 시편 10편은 하나님께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라고 물으면서 시작됩니다. 갑자기 저자는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시편 10:12). 저자는 주님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말하는 듯합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시편 10:14



시편 10편의 기도는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의 때와 지혜를 인정하면서도 이 땅에서의 정의를 부르짖으며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중심의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하는 기도와 하나님 나라를 강청하는 기도 모두가 나와 있습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기도로 나아가는 길은 저 자신의 영적·신학적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버지니아에서의 첫 목회 기간과 그 후 뉴욕에서의 목회 기간 동안 저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중간에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5~16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선 성령님은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부르짖을 수 있게 해주십니다. 또한 우리 영과 함께 계시면서 더 직접적으로 주님을 증거해 주십니다. 20세기 중반의 영국인 설교자이자 작가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읽고 나서 저는 이 구절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바울이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심오한 경험에 대해 쓰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결국 하나님의 굳건한 사랑에 대한 확신은 “가장 좋은 의미에서 신비”이기에 이 구절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종교적 경험"이라고 묘사한 한 신약학자의 말에 현대 성경 주석가 대부분이 동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토머스 슈라이너는 경험의 “감정적 근거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 주관성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회피하지만 일부 집단의 주관적인 남용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나오는 '신비'와 정서적 중요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에베소서 1:15~19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쓴 서신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에서 이들이 처한 상황을 바꾸어 달라는 간구가 없었다는 점은 참으로 주목할 만합니다. 성도들이 수많은 위험과 고난 가운데 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박해와 압제와 질병으로 인한 죽음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겪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존의 위협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기도에서는 황제의 호의를 얻게 해 달라는 간구나 약탈하는 군대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간구나 심지어 다음 끼니를 때울 음식을 구하는 간구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보통 구하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통 구하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바울도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할 것과 악에서 구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라고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평안과 선한 정부와 세상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과 같은 보편적인 기도의 모델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을 위해 가장 많이 구했던 기도제목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바울이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주님을 더 잘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1:18-19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에베소서 1:18). 성경적으로 마음은 자아를 통제하는 센터입니다. 마음은 감정과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핵심적인 의무와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근본적인 소망의 보고입니다. 특정한 진리로 마음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그 진리가 우리 마음속 깊이 들어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지만 이 진리에 대해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되면 인지적으로도 이 진리를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놀랍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주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태도나 행동을 자발적으로 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8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받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성령님이 이들에게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은혜에 대해 알고 있지만 기도는 그 이상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의 실재를 더욱 생생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17세기 영국의 신학자 존 오웬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고 성공한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목회자는 강단에 서서 성례를 집행하고 설교할 수 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특히 생각해야 할 것이 없을 때 무슨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생각하시나요? 자신을 겸손하고 주제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솔선하여 자기 죄를 고백하시나요? 자신을 긍정적이고 명랑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소유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시나요?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큰 복인지 그리고 자신이 주님을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하는지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말이 정말 진실일까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고 신실하지 않다면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과 실제 자신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서 6:5~6

주님은 영적 정직에 대한 확실한 테스트가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생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도의 실천을 전체적으로 편만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우리 삶에서 기도를 통해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진리에 대한 긴 증거입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께 친밀한 기도를 직접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하나님의 자비를 끈질기게 구하는 아브라함의 기도는 굉장히 주목할 만합니다(창세기 18:23). 출애굽기에서 기도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기도라는 선물이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명기 4:7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단지 종교적 규례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며 주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사무엘상 12:23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기도서 시편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사람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갈망하던 다윗 왕이었습니다(시편 65:2).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한 후 장엄한 기도로 성전을 봉헌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성전에서 하나님 백성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솔로몬의 최고의 기도는 기도라는 선물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솔로몬은 이방인들도 주님의 명성을 듣고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기를 바랐습니다.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열왕기상 8:42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기도로 사람들을 치유하셨으며,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된 것을 규탄하셨고, 특정한 귀신은 기도가 아니면 쫓아낼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일정하게 자주 기도하셨고(히브리서 5:7), 때로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성령님이 임하셔서 기름을 부으셨고(누가복음 3:21-22),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신성한 영광으로 그 모습이 변하셨습니다(누가복음 9:29). 가장 큰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도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고뇌하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제자들은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에 힘쓰며 앞날을 대비했습니다(사도행전 1:14). 온 교회 지체들이 기도에 힘썼습니다(사도행전 2:42, 11:5, 12:5, 12).

강력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의 능력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임했으며, 지도자들은 오직 기도로만 선택되고 임명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일정하게 신실하며 변함없고 간절한 기도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기도는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사람의 심령에 임하셨다는 주요 표징 중 하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확신과 열망을 주시며,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생토록 늘 기도에 힘써야 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7).



기도는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성경 어디를 보든 나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엔 어디에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무한히 광대한 분이시기에 우리는 기도로 삶을 편만하게 채워 나가야 합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인가요? 기도란 하나님이 말씀과 은혜를 통해 먼저 시작하신 대화를 이어가는 것으로, 결국 우리를 하나님과의 온전한 만남으로 이끌어 줍니다.

구약성경 욥기 전체에 걸쳐 욥은 고뇌에 찬 기도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욥은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을 떠나거나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욥은 기도를 통해 그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처리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욥기 38:1). 주님은 우주와 자연계의 창조와 유지에 대해 생생하고도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며 겸손히 자신을 낮춥니다(욥기 40:3~5).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욥은 마침내 주님께 철저히 회개하며 경배하는 기도를 드립니다(욥기 42:1~6).

욥기의 질문은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만을 사랑하여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근본적인 만족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 가능한가(욥기 1:9)? 예, 가능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서만 그럴 수 있습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기도의 능력은 사람의 노력과 수고, 또는 특별한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응수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욥이 들을 수 있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너무나도 명확히 표현해 주고 있는 더 나은 증거가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요 1:1~14). 우리에게 주님 외에 더 이상 포괄적이며 개인적이고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태양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태양의 광채가 우리의 시력을 압도하여 손상시킬 것입니다. 태양을 보려면 필터를 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태양의 거대한 불꽃과 색깔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인간 본성의 필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가 존 녹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진지하고 친숙한 대화'가 되고, 요한 칼빈이 말한 것처럼 성도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가 되며, 양방향으로 상호작용하며 소통하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감’이 되었습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8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그의 저서에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건 기도의 기술이 아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경험과 감정에 따라 기도하는 법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모든 노력을 다하다 보면 기도는 자연스레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파악할수록 기도는 제대로 틀이 잡히며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깊이 침잠하지 않으면 기도는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뿐만 아니라 본질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진짜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바라는 신과 삶에 반응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신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양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닌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서구 젊은이의 영적 삶에 대한 다수의 연구가 이들의 기도에 회개와 용서받는 기쁨 모두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건 그저 혼잣말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본성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마태복음 28장 19절은 이러한 본성이 가장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이름들로”가 아닌 하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름이라는 용어는 임의로 폐기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상표나 브랜드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 시대에는 한 인격의 본성과 존재 자체를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모두가 하나의 신성한 본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닌 한 분이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하면서(골로새서 2:9)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린도전서 8:4)"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에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서로를 사랑하시며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며 서로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차원의 사랑과 기쁨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평온함이 아닌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격렬한 만족감인 온전한 기쁨으로 충만하여 무한하고 심오한 희락을 누리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감정이나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디모데전서2:5, 히브리서 8:6 및 12:24). 고대 모든 지역과 문화에는 신전이 존재했습니다. 사람은 신과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나면서부터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지만 사람은 보잘것없고 결함 많은 존재입니다. 신전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진 곳이었습니다. 멀어져 버린 신을 인간에게로 이끌기 위해 '중보자'(성직자)가 희생과 제물을 바치며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람과 신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었습니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신을 숭배하고 달랠 수는 있어도 신과 실제적이고 친밀한 우정을 맺을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철학자는 양 당사자가 서로 친밀한 우정을 맺으려면 동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양 당사자는 서로 비슷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크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사람과 우정을 맺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던 제사장의 임무를 종식시키신 가장 높으신 중보자이자 대제사장이 계십니다(히브리서 4:14~15). 이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 간극을 메우십니다(출애굽기 33:11 참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고자 온전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2:17).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이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4:15~16).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하는 세상의 다른 모든 철학자나 종교 교사는 이러한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이 온전히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이나 공로 없이도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유일한 순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을 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자신은 잊혀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영원한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괴로워하며 부르짖은 기도의 대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수 있도록 예수님이 그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학대받았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경험이 기도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행한 가정사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 부모가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못 해 주었는지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해 주는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시편 27편 10절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불행한 가정사를 지닌 분에게는 하나님과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실패자라고 느끼는 분, 세상에 나 혼자라고 느끼는 분, 절망 속에서 헤매는 분에게도 하나님과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형제 되신 예수님이 치르신 대가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배울 수 있으며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관념적인 신앙을 체험적인 신앙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이 주시는 기쁨과 사랑과 평안과 확신을 누리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의 태도와 행동과 성품이 변화됩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이 한없이 넓고 끝없는 이유는 그 사랑이 한없이 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얼마나 깊은가요?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사랑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비현실적 관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 절절히 담긴 책 60 권을 주실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 역시 삶을 변화시키는 실재가 아닌 추상적인 개념일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고자 감당하신 고통의 깊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고통까지 감당하셨나요?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태복음 27:46

지옥의 고통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제껏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깊은 고통의 심연으로 자진하여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은 고통의 심연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복음으로 나타난 한없이 깊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이 사랑이 한없이 넓고 끝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미국 펭귄 그룹 LLC, 펭귄 랜덤 하우스 컴퍼니 회원사 듀턴과의 협의로 재인쇄된 팀 켈러의 저서 '기도'에서 발췌. 저작권 © 티머시 켈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