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 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 말씀이 - 원어상 '말씀(*, 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메타;*, 파라;*,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데오스) 앞에 관사 '호'(*)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에서 '말씀(로고스)이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20:28의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성 경: [요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시118편;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1:8;4:1-4;6:20;13:1)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 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 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 갈 수 없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 올려 줄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고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 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시 119:9, 105;살전 2:13).
성 경: [요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만물이 - 원문상 '만물'(*, 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 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창조(히 2:10)와 (2) 구원(10:9;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 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즉 본절의 동사는 피조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이로써 (1)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성 경: [요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영원한'(*,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 조에)이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1:9). 그리고 본절의 두개의 문장에서 '에이미'(*, '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 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한다.
성 경: [요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이신 예수]
⭕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 스코티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 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 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의 원형 '카타람바노'(*)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 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31-38; 5:10-47;6:25-65;7:14-36;8:12-59;9:39-10:18,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준다(히 11장).
성 경: [요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틴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터를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가지 단어를 실마리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전치사 '파라'(*,'...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심을 받은'(*, 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역(LXX)에서는 메시지나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에 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나타낸다(7,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에게네토)라는 부정 과거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과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 이름은 요한이라 - 앞 문자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 '세례 요한'(마 3:1;막 6:14, 25; 눅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요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 저가 증거하려 왔으니 - 본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증거'(*, 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다'라는 뜻으로서, 요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세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 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빛'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 모든 사람 -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대상들을 명시한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벨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려 믿음으로 증언한 말씀이 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다.
⭕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자기를 인하여'의 헬라어 '디 아우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 디 아우투)와 같은 단어이나 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시의 중보적 사역을 나타낸다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요한의 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15, 26, 27, 29-34절;3:28-30).
성 경: [요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증거자 요한]
⭕ 그는 이 빛이 아니요...증거하러 온 자라 -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본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 에베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성 경: [요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참빛 - 6-8절에 걸친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 본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 '그는 참빛이시다'(*,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곧 참빛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참'(*, 알레디논)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거짓에 반대되는 참'(*, 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Calvin)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true, NIV)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엡 5:8;살전 5:5)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는 원래 질서와 연관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각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 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3) 타락한 '인류'(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 판타안드로폰)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NIV)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 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성 경: [요1:1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엔 토 코스코 엔) - 1절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 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 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 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 에그노)는 '알다'(*, 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감각적인 지각(*, 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 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 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민 31: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5:26;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성 경: [요1:1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자기 땅에 - 헬라어 '타 이디아'(*)는 '자기 자신의'(*, 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 자기 백성 -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창 18:19;신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출 19:6).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 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 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계 20:6).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 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44).
성 경: [요1:1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영접하는 자 -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 '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 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 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는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17:2;마 28:18;막 2:10;3:15;눅 4:36)을 나타낸다.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고후 10:8;계 22:14).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고전 9:12, 18).
성 경: [요1:1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참빛이신 예수]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 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 혈연 관계를 의미한다. 혈연 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마3:7-9). 둘째로, 육정(*, 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 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 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가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세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요1: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성 경: [요1: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 '증거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인 '마르튀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 1:36),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근본적인 이유는 (1) 세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 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막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 공생애 직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1) 예수께서 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성 경: [요1: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는 '플레로마'(*)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함이 하나이며, 하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엡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는 원래'...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대신에'(눅 11:11)라는 뜻으로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성 경: [요1: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 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는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성 경: [요1: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출 33:11;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 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력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10:20-33).
⭕ 아버지 품속에 있는 - 이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득생자'에 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 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 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시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잎뒤스'(*)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 ,)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 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있는 기반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성 경: [요1:1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절).이는 세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6, 7,15절).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눅 3:15;행 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가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 요한의 증거 -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며(7절),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성 경: [요1:2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 본절에서 헬라어 접속사 '카이'(*)를 무려 3회에 걸쳐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 증거자인 세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던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 '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몰로게오'(*)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믿음의 호가신으로 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보여준다.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야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세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세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 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장에서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23, 26, 29, 30, 31, 33, 34절).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융합되어, 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빠졌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성 경: [요1:2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 네가 엘리야냐 - 이것은 당시 세례요한이 (1)약대 털옷을 입고, (2)금욕적인 식사를 하고, (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 나는 아니라 -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 11:14;17:12)과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절과도 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字句的)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세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이미'(*)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 우크 에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다르다. 즉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 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11:14;17:12)도 정당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말 4:5,6).
⭕ 네가 그 선지자냐 - 요한의 두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 접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 ,호 프로페테스)란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 선지자'란 개념이 곧 메시야와 직결됨을 시사한다(7:40). 성령 강림(降臨)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행3:22;7:37).
⭕ 아니라 - 이것의 헬라어 '우'(*)는 본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요1:2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 또 말하되 누구냐 -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세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 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라고 번역된 헬라어 '운'(*)이 논쟁적 어감을 띠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질문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문인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질문 형태로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상 잘 부합된다.
성 경: [요1:2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언]
⭕ 가로되 - 본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의 부정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가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마 3:3;막 1:2-4;눅3:3-6).
⭕ 주의 길을...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3:3;막 1:3;눅 3:4).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이사야가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세례 요한의 소리와 서로 일치한다. 특히 '외치는 소리'의 헬라어 '포네 보온토스'(*)의 두 단어에 서로 관사가 없는 것은 히브리어 '콜 코레'(*, 사 40:3)를 헬라어 문장 양식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 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세례 요한의 '소리'(the voice, NIV)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이와 같은 대비를 있는 용어 '카도스'(*, '...같이')가 사용됨으로써 사도 요한의 문학적 재능이 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난 점에서 볼 때,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요한의 능수 능란함을 엿보게 한다.
성 경: [요1:2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본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 아닌 것으로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 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절까지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 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때, 본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 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28절까지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일관성있게 이어주고 있다.
성 경: [요1:2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세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 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메시야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겔 36:25;37:23;슥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세례 의식이 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성 경: [요1:2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세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마 3:11;막 1:8;눅 3:16).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성령 세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세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기는 하나(눅 3:3)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6-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섶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세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 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절).
⭕ 너희가 알지 못하는 -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 메시야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내포하고 있다(8:44). 따라서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 3:7;눅 3:7).
성 경: [요1:2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나는 그이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시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자기 진술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마 3:11;막 1:7;눅 3:16).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세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야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이, 세례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아마 세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것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됨으로부터였다(눅3:21, 22).
성 경: [요1:2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세례 요한의 증거]
⭕ 이 일은...된 일이니라 -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세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 언급한 것은 단순한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11:18)이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였다. 본서에서 '베다니'라는 두 개의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된 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본서의 서론 '저자'부분 참조).
성 경: [요1:2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나아오심을 보고 -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현재 중간태 분사 '에르코메논'(*, '나아오다')을 사용함으로써, 본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전달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 보라 - 헬라어 '이데'(*)는 찬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세례 요한의 적대자들이 떠나고, 그가 증거한 예수께서 밝은 빛처럼 찬연하게 다가오셨을 때에 그가 드러낸 찬탄과 감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19-27절이 예수께 대한 요한의 간접증언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직접 증언한다.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 규정(6-8절, 15절),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접 증언을 거쳐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떨리는 직접 증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어상 본문에는 문장을 종결하거나 서술하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보라'는 감탄사에 이어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NIV) '세상 죄를 지고가는 분'이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이 대립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재를 부각시키고 어두움 속에 빛이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듯이(5절)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세상을 은혜와 진리의 세계로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17, 18절). 한편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한다. '어린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사용되었는데, 두 번은 본서의 본장에서(본절, 36절) 한 번은 행 8:32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벧전1:19에서이다. 이 중 벧전 1: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일부인 사 53:7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에서는 사 53장의 말씀을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적용시키고 있다(12:38;마 8:17;눅 22:37;행 8:32-35;벧전2:22-24). 또한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에 관해서는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도 나타난다(창 22:2-8;레 14:10-25;민 6:12).
성 경: [요1:3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내가 전에 말하기를...있는데 - 본문은 15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환기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내 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의 헬라어 '아네르'(*)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아네르'는 일반적인 의미인 '인간'을 가리키는 '안드로포스'(*)와는 달리 '남성'을 가리킨다. 특히 이 용어는 결혼 관계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시사하는 용어이다(엡 5:23). 따라서 이 용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됨을 암시한다.
⭕ 계심이라 - 이것의 헬라어 동사는 '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로서 세례 요한에게 증언을 받는 현장에서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동사 '에스티'는 '계시니라'(1절)로 번역된 '에이미'의 3인칭 부정과거형인 '엔'(*)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엔'이 영원전부터 선재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에스티'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류구속을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현장감(現場感)을 느끼게 한다.
성 경: [요1:3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예수와 세례 요한은 친족 관계였다(눅 1:36). 따라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진술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원문인 '카고우크 에데인 아우톤'(*)을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먼저 '카고'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영적인 앎'(막1:24;고전2:2)을 주로 의미한다.
⭕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의 골자(骨子)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하여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시행에 있었다(겔 36:25;슥 13:1). 당시의 세례는 기종자나 참회자를 물 속에 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침례'였다(3:23;행 8:36-38). 그러나 이와 같은 '침례형 세례'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지역별 관습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물뿌리기, 관수식, 침례)로 병행되어 왔다. 특히 세례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인 [디다케]에 보면, 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세사람이 함께 침례 의식을 받는 일과 물을 머리에 붓는 일도 허용되었다(the Didache 제7장). 이것은 기독교의 세례가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 28:19;롬 6:4;골 2:11, 12).
성 경: [요1:3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하늘'(*, 우라노스)은 일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이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창 1:6-8;행 4:24) 혹은 (2)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마 5:16;막 11:25)을 의미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하다. 즉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하늘'은 후자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의 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증(保證)하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아 1:15;마 3:17;막 1:11;눅 3:22)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례 요한이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임하였음이 분명하다(33, 34절).
성 경: [요1:3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나에게 말씀하시되 - 앞 구절과 연관되어 세례 요한의 예언자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즉 이 표현 방식은 계시를 전달할 때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양식이었다(사 1:2;25:8;렘 2:2;6:16;겔 3:24).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언한 것처럼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 성령이 내려서...머무는 것을 보거든 - 32절의 반복적 증언으로서, 32절이 요한의 목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본문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한다.
⭕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 성령 세례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을 가리킨다. 이 근본적인 변화의 체험을 통해 어두움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12절;고후 5:17), 그리스도의 지체로 된다(고전 12:13,14, 27). 한편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서로 대조적인 관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설교한 모든 것이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는 궁극적으로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까지(행 2:8) 제한성을 가졌다는 것 뿐이다. 결국 요한의 세례는 성령세례를 예표하고 준비시키는 의의를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성 경: [요1:3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하나님의 어린양]
⭕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 - 세례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반복한 것이다(막 1:1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며(마 26:63, 64;막3:11;눅 4:41),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1-4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심도있게 묘사하고 있다(3:18;5:26;17:5;19:7;20:31).
성 경: [요1:3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사들]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첫 제자들 간의 대면이 소개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주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 첫 부분에서는 세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절)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절)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2:1-11).
⭕ 자기 제자 중 두 사람 - 여기서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절). 그러면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전(全)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었을 것이다.
성 경: [요1:3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29절) 세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 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세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잘 나타낸다(3:30).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보라.
성 경: [요1:3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산'(*)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막 4:24;요일 1:1).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은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롬1:5;10:17;살전 2:13). 따라서 '에쿠산'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곧 그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뜻이다.
⭕ 예수를 좇거늘 - 말씀을 들음은 곧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의 헬라어 '에콜루데산'(*)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43;마 8:19;19:27, 28;막 6:1;8:34 등). 그리스도를 '좇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8:12;막 10:17) 뿐만 아니라 고난(12:24;막 8:34)에 까지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세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성 경: [요1:3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의 헬라어 '제테이테'(*)는 '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행 17:27;고전 1:22),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마 18:12;눅19:10).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요일 2: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살 것이다(마 13:44).
⭕ 랍비여 - '랍비'(*)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 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이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 (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이 용어는 제자들이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반해서(마 23:7),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막 9:5;11:21;14:45). 본문에서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을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이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37절 주석 참조). (2)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이 두 사람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절)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란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 번역하면 -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프메누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과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이 두 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회(마 1:23), 마가복음에 3회(막 5:41;15:22, 34), 요한복음에 4회(본절, 41, 42절;9:7), 사도행전에 3회(행 4:36;9:36;13:8), 히브리서에 1회(히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이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
성 경: [요1:3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와 보라 - 이 말은 워어상 '오다'(*, 에르코마이)의 현재 명령형과 '보다'(*, 호라오)의 미래 직설법, 그리고 접속사 '카이'(*)로 구성되어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는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와 구원의 보장(寶藏)이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표현 형식으로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초청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 '와 보라'는 표현이 명령형과 미래중간태 직설법으로 표현된 데 반해 '가서...보고'는 두 동사 모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와 보라'는 예수의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데'란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느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 관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 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어느 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저자 요한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 이 내용은 부가적 기록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각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그 만남이 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심시'란 유대 시간법을 따라 오후 네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1) 본서의 저자가 바로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이라는 점과 (2) 본서가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점, (3) '번역하면'(38절)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등을 고려한다면 로마식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Westcott).
성 경: [요1:4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은 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즉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였다(1:44;6:8;마4:18;10:2;막 1:16, 29; 눅 6:14).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12:22; 막 13:3;행 1:13).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안드레가 사도 요한과 함께예수의 첫 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사도 요한은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요1:4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이름 좀더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KJV, RSV, Living Bible)로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란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 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소 구성 인원인 2인을 상기시킨다(신 19:15). 이 두사람의 동시적 증언(testimony)은 이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본래 '크리스토스'(*)란 '기름을 발리워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이 용어가 명사형인 '토크리스톤'(*)으로 쓰일 경우에는 '의료용 연료'를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오'는 헬라적 관점에서 보다는 동양(근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편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을 붓는 것'이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명백히 하였다(출 29:7-9;삼상 10:1;16:13;왕상 19:15, 16).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메시야'임을 의미하게 되었다(사 61:1;단 9:24). 그후 바벧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로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야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행 10:38),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신앙에 기인한다. 즉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죄에 빠진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메시야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와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를 참조하라.
성 경: [요1:42]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첫번째 제자들]
⭕ 보시고 가라사대 - 원문은 '여블려사스 아우토...에이펜'(*)이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시몬'(Simon)과 '게바'(Cephas)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 쉬메온)이라고도 불리었다(행 15:14).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마 26:31-35;막 8:32, 33;14:27-31;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 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게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構築)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창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 번역하면 - 헬라어 '헤르메뉴에타이'(*)는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자세한 것은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요1:4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이튿날 -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절).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사 9:1, 2;마 4:14-16), 하나님의 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장;21장;마 28:16-20;막 16:7, 15-20;눅 24:44-53;행1:3-14).
⭕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 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8:22;9:21;19:21;막 1:18;2:14;6:1;10:21, 52;눅5:27;9:59;18:22;요 21:19).
성 경: [요1:4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빌립은...벳새다 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벳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벳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벳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벳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벳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벳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막 8:1-9), (3) 소경을 치유하심(막 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벳새다를 비롯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 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벳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 주목할 만하다(마11:20-24;눅 13:16).
성 경: [요1:4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나다나엘'(*)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46-48).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벳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불리운 것과 동일한다(마 16:17).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 모세가 율법에...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 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은 '휴리스코'(*)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빌립이 만난 메시야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마 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
성 경: [요1:4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으로 끝난 빌립의 말(45절)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미 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7:52).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호라오'(*)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目睹)하여 보라는 말이다.
성 경: [요1:4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 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 알레도스)과 '간사한'(*, 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木馬)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 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창 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시 32:2).
성 경: [요1:4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성 경: [요1:4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 랍비여 -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 당신은 하나님의...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마 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막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그리고 본서 12:13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8:22, 23;시 84:3)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代理)하실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성 경: [요1:5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셨다.
성 경: [요1:5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진실로 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마 5:18;6;5;막 3:28;8:12;눅 4:24;18:17),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3-5; 5:24, 25;6:47).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사 64장).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창 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한편 '인자'에 관해서는 8:21-59주제 강해 '인자 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요2:1]
⭕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 "사흘 되던 날" 이것은, 1:43에 기록된 날부터 계산된 날짜인 듯하다. 이렇게 자세히 날짜까지 기록한 것은, 그 저술자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실을 확증한다. "갈릴리 가나." 팔레스틴에는 이 밖에 또 다른 "가나" 란 지방이 있는 것인 만큼, 여기서 "갈릴리"란 말을 붙여서 밝힌다. 이곳은 나사렛 동북편 5마일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혼인"은 기쁨의 상징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복음이 율법과 달라서 그 주는 기쁨이 가정적(家庭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일 것을 표상(表象)한다.
성 경: [요2:2]
⭕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 예수님은 염세주의(厭世主義)를 가지신 이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이것은 그의 겸손인 동시에 그의 긍휼이다. 성결은 격리(隔離)가 아니다(Sanctity is not singularity).
성 경: [요2:3]
⭕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당시에 "포도주"는 팔레스틴에 있어서 일반 음료였고, 다른 나라에서처럼 유흥과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틴은 사막 지방과 같아서 물이 귀하므로 과즙으로 된 음료가 필요하였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더러 "포도주가 없다"고 한 것은, 포도주를 기적적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겸손히 말한 청원이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었을 터인데, 그의 모친께서 이런 청원을 어떻게 하였을까? 그것은 난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인격에 초자연적이고 비범한 일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인 만큼, 마리아로서 그에게서 이적을 기대할 만 하였다.
성 경: [요2:4]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 그가 자기 어머니더러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하대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한국 풍속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같으나, 헬라 어풍(語風)으로는 그것이 무례한 말이 아니다(Hendriksen).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하신 것에는 뜻이 있다. 메시야의 공적 역사(公的役事)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만이 주장하고 혈통적 모친 된 권세가 간섭할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모친도 하난의 "여자"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여기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실 때에, 그는 자기 어머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될 자로만 취급하신 것이다. 메시야의 공생애(公生涯)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의 하실 바 일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만 하시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는 혈통적 인연에 매이지 않아야 될 것이었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171-172).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런 표현은 구약에도 많은데(삿 11:12; 삼하 16:10; 왕상 17:18; 왕하 3:13), 반드시 냉정한 어투는 아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구속(救贖)사업에 있어서는 비록 예수님의 모친이라도 그 모친 된 권세로써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밖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도울 중보자(中保者)가 없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기 이른바 "내 때"란 말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의미한다(7:30, 8:20, 13:1, 17:1). 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그 혼인잔치에 포도주 그것을 보급시키신 자선 사업을 목적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메시야로 확실히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11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씀에 대하여 고데이 (Godet)는 해석하기를, 그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는 예루살렘에서야 될 일이고 가나에서 될 일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가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므로 메시야로서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우리 본문은 말하지 않는가? 11절 참조. 그러므로 여기 이른바, "내 때"는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실 일정한 시간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어 그의 중보 역사의 일체를 시행하신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순종은, 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대로 맞추어 움직이신 것이다. 이런 일은 일반인으로서는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절대 완전하신 순종이다.
성 경: [요2:5]
⭕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이것을 보면, 그 모친이 예수님의 의미하신 바를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순종하여 성역을 이루어 나가신 사실이, 그 모친에게 알려졌다. 예수님의 성역은 순종으로 일관하셨다. 그러므로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순종 일관주의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 모친은 하인들더러,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고 부탁한다. 순종은 무엇에서든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비결이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순종은 이적보다 낫다"고 하였다.
성 경: [요2:6]
⭕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 유대인의 가정에는, 연회할 때에 물을 많이 사용하기 위하여 돌 항아리를 비치하였다. 그것은, 주로 식사 전후에 손 씻는 예식을 행하기 위함이었다. 그 풍속은 성경이 제정한 것이므로, 진정한 종교적 의의와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런 번잡한 예식을 변하여, 맛 있는 신약의 종교(포도주는 신약의 기독교를 상징함)로 변화시켰다. 그것이 물론 포도주를 만드신 비유적 의미이다. "두 세 통 드는 항아리"의 용량(用量)은, 약 77리터, 혹은 115리터에 해당된다. 이렇게 큰 항아리가 여섯이나 놓여 있었다. 우리 본문이 이렇게 많은 분량에 대하여 관설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의 많은 분량을 말하여, 그의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지적하려는 까닭이다.
성 경: [요2:7,8]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 하인들은 즉시 순종하였다. "이제는 떠서"라는 말을, 샘물에서 "물을 길어서"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Westcott),확실치 않다. "연회장"은, 그 때 풍속에 연회의 손님들 중 주빈이었다고 한다. 이 이적에 있어서,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한 바 없고, 다만 고요히 역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런 기적이 나타났다.
성 경: [요2:9]
⭕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주님의 기이한 역사의 유래를, 사람마다 알지 못하나 오직 주님께 충성하는 종들만은 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다음과 같다. (1) 복종의 원리.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4절), 침묵하며 순종한 후 하인들더러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5절). 이것은, 무조건 순종을 말함이다. 무조건 순종은 하나님께만 하는 법인데,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 대우를 받으신 것은 당연하다. 과연 하인들은 조금 후에 그렇게 순종하였다(7-8). 루터(Luther)의 말과 같이, 참된 신앙의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을 지정해 드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복속시킨다(Wahrer Glaube schreibt Christus nicht vor-wad er tunsoll-,sondern weiss sich darin zu schicken.-Evangelien Auslegung, 4, P.93). (2) 변화의 원리(6-9).결례의 항아리 물의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권능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죄인들이 변화되어 성도가 될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악한 사람이라고 변화시킬 수 있다. 1733년부터 선교사들이 5년 동안 창세기 1장을 가르쳤어도 하나님의 인상도 받지 못하던 에스키모족 중에서도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생겼다. 루터(Luther)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또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Evangelien Auslegung, 4,P.98).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은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성 경: [요2:10]
⭕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을 이 세상보다 선미(善美)한 내세(來世)로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 이른 바 "좋은 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구원의 기쁨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1) 혹설에, 여기 "좋은 포도주"는 취할 수 있는 강한 술을 의미한다고 하나,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이적으로 만든 술 인 것인 만큼 취하게 하는 성분이 강하지 않고도 좋은 술일수 있다.(2)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발효(醱酵)하지 않은, 취하지 않는 술이었을 것이라고 하나, 그렇게 주장할 만한 본문의 증거는 없다. 설혹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취할 수 있는 성질을 가졌다 할지라도,그것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들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절제"의 덕을 가르친다(갈 5:23). 금주(禁酒)를 규칙으로 가지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이 이적이 문제될 것 없다. 한국인의 특수한 사정(술 취하기 잘 하는 한국인)으로 보아, 금주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친 "절제"를 위한 것이다.
성 경: [요2:11]
⭕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여기 "표적"(*)이란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리는 신령한 증표라는 뜻이다.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메시야의 증표로서의 권능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이다.
성 경: [요2:12]
⭕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공중 성역(公衆聖役)에 헌신하시기 때문에 가정에서 지체하시지 않게 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 경: [요2:13]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 이 귀절부터 22절까지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을 보여준다. 성전 청결 사건은 두 번 있었는데, 여기 그 첫 번 것이 기록되었고, 두 번째 것은 성역 말기에 된 일이다. 이 사건이 가르치는 교훈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속화 되었을때에 그것을 방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슐라텔(Schlatter)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곧바로 그 시대의 제사장들을 위한 복음(Das Evangelium fur die Priester)이라고 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74). 여기 "유월절"이란 말에 "유대인의"란 설명을 붙인 것은, 사도 요한의 상대한 독자들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구원을 기념하면서 지킨 것이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다가 해방될 임시에,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여호와의 형벌이 내렸다. 그 때에 이스라엘 집만을 그 재앙에 들지 않게 하려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던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한 규례였다(출 12:12-20, 13:2, 12).그런데, 이 명절은 아빕월(3,4월 사이에 있었음) 14일에 지키고, 거기 이어서 1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를 지킨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것이다(신 16:1-8).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려는 것이었다.
성 경: [요2:14]
⭕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 멀리 이방에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오는 순례자(巡禮者)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편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편리를 위하여 고요히 예배 드릴 장소에 혼잡을 가져오는 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인간은 편리를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나, 영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것을 취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돈을 바꾸는 것은, 이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로마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세겔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출 30:13). 그들이 그 때에 성전에서 이런 매매 행동을 통하여 부당한 수입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잘못이었다(사 56:7; 렘 7:11).
성 경: [요2:15]
⭕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이 말씀을 보면, 이 때에 예수님의 의분(義憤)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이 의분인 만큼, 질서 있게 움직였다. 예를 들면, 그가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을 뿐이고 그것을 뿌리지 않으셨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심이었다. 만일 그가 그 돈을 뿌리셨다면, 돈 임자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 경: [요2:16]
⭕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도 예수님의 의분이 질서(秩序)있게 나타난 것이 드러난다. 그는, 그저 말씀으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셨을 뿐이고, 그것을 날려 버리지 않으셨다. 그는 남의 소유물을 이렇게 존중히 여기셨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상업을 정죄하는 의미가 아니고, 성별된 기관을 세속(世俗)과 혼동시키지 않아야 할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공관 복음에서 취급된 둘째 번 성전 청결 기사(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에 있어서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정직하지 않은 것을 꾸짖은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에는 성전 안에서 그런 영업을 할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성 경: [요2:17]
⭕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것을 기억하더라 - 이것은, 시 69:9의 인용인데, 다윗이 그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 받은 사실을 가리킨 말씀이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날카로운 행사를 보고 그가 유대인들 앞에 핍박 받으시게 될 것을 예측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 죽으실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요2:18,19]
⭕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앙하는 태도로 이렇게 표적을 구하였다. 인간은 이렇게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내신 권위를 알아볼 줄 모르고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기이한 일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렇게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구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여기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예언을 주신 것 뿐이다.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오해한 그들이 후일에 이 말씀을 책잡아 예수님을 송사한 일도 있다(마 26:61). 그들은 여기서도 저의 무식을 폭로하였다(20절). 이런 수수께기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깨닫는 때에 믿음이 굳세어지는 법이다.
성 경: [요2:20]
⭕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 요세보 사기(史記)에 의하면, 헤롯의 성전건축은 주전 20년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말한 이때는 주후 27년경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19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영적(靈的)으로 어두운 자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다가 저렇게 오해한다.
성 경: [요2:21]
⭕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그의 육체를 비유하신 이유는, 구약 성전이 신약 교회와 같기 때문이었다. 신약에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되었다. 이 귀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다는 것이다.
성 경: [요2:22]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 여기 이른바 "성경"이란 말은, 구약에 있는 부활 예언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시 16:10 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음에 있어서 점진적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많은 경험과 체험을 경유하기 전에는 깨닫기 어려운 까닭이다.
성 경: [요2:23]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 이적(異蹟)을 제일로 알고 믿는 믿음은 변동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기적보다 하나님 자신 때문에 생긴 믿음은 전진성(前進性)과 지속성(持續性)을 가진다.
성 경: [요2:24,25]
⭕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알기 어렵다. 속담에 말하기를, "물은 건너 가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 보아야 안다"는 말도 있다. 또 혹은, "사람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도 다 모른다"(人死不知其心)라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밝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가지셨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도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안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시험해 보아야 된다(요일 4:1). 만일 그들이 무엇을 알아 마친다는 일에 조작스럽고 번잡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시고, 그것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심판자의 정당한 지식이다. 그 이유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다(렘 17:9)
성 경: [요3:1]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니고데모 -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난다(7:50;19:39).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고 하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혹시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Moutefiore, Loewe). 요한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백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다.(2)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信奉)하는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격이 아브라함을 통해 계승되는 자연적, 육적 출생에 있음을 강조한데 반해, 예수는 영적 중생을 강조하셨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다. 관원의 뜻은 `아르콘'(*)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회적 고위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친히 예수를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율법 학자가 된 사람은 종교법과 의식(儀式)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또한 랍비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다(Jeremias).
성 경: [요3:2]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밤에 예수께 와서 -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를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시간을 피해 예수와 예수와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 혹은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서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19:39에서 다시 한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사실을 언급한다. 요한의 사상(思想)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reality)로서 상징되고 있다(11:10). 그리고 13:30에서 유다는 '밤'에 예수를 떠남으로써 빛이신 예수에게로 나아온 셈이다(the Anchor Bible).
⭕ 랍비여 - 니고데모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1:38, 49) 예수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서품(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이 '랍비'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Jeremias). 한편 니고데모가 사용한 이 '랍비'라는 말이 예수에 의해서 부정되거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가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 우리 - 본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뒤따르고 있는 말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 곧 2:23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봄이 무난하다.
⭕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 니고데모는 이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첨가함으로써, 예수를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예수의 산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까지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수가 과연 대망의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니고데모의 방문의 주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니고데모가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이다(2:23).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이 '표적'이라는 헬라어 '세메이온'(*)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보여주는 이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적은 그것을 목격한 자의 주의(注意)를 그 행위 자체 보다는 그 일을 행하신 이에게로 이끄는 것이 그 특징이다.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구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증하셨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 경: [요3:3]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은 (1)'처음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2) '다시', '두번째'의 뜻 그리고 (3)'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세례로써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혜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Calvin)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이돈'(*)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블레포'(*)와는 달리,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또는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것을 뜻한다(눅 9:27).
성 경: [요3:4]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사람이...날 수 있삽나이까 - 이러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일견 매우 아둔해 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반대 주장을 제기하거나 반항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다만 그는 예수의 말씀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니고데모가 둔감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 할수 있다. 아울러 이 질문 속에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본질의 재창조라고 하는 고차적 이적 또한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하는 강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을 법하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중생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깊은 의문에 휩싸였던 것이다.
성 경: [요3:5]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물과 성령으로 -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성령'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반 어려움이 없으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엇갈린다. 즉 혹자는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 혹은 '기독교의 세례' 와 관련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 출생'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1:26, 31; 마 3:11;막 1:8;눅 3:16에서는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엣세네파(Essenes)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경우 물세례를 행하던 관습이 있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롤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세례룰 주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행 10:47, 48)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추측해 불 수 있다(행 8:26-39). 결국 '물'이 무엇을 나타내든간에 본절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와 관련시킬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증거하고자 했던 성령 세례를 통해 중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끝으로 이를 기독교의 세례와 연관시킨다면, 본문은 중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이다.
성 경: [요3:6]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육으로...영이니 - 사도 바울은 '육'에 해당하는 '사르크스'(*) 라는 헬라어를 타락한 인생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했다(롬 8:3-9). 그러나 여기서는 이 땅에 속한 존재 곧 연약하고 사라져 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 육(flesh, NIV)과 영(spirit, NIV)은 인간 본성의 보다 높은 차원(영적)과 보다 낮은 차원(신체적)을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요3:7]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지'로 번역된 헬라어 '다우마조'(*)는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의미 한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예수는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향편으로는 이 중생의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혹(疑惑)에 잠겼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요3:8]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거듭남의 교훈]
⭕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호'(*)와 이에 대한 헬라어 '프뉴마'(*)는 둘 다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만 370회 정도 사용된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의 뜻으로 사용되고 '바람'이라는 의미로는 구약성경(시 104:4)의 인용 구절인 히 1:7에서 한 번 사용되었다. 이 '프뉴마'가 본문에서는 '바람'의 뜻으로 '성령의 역사'를 적절하게 비유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1)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다.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운명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2)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 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이다.
성 경: [요3:9]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어찌...있을 수 있나이까 - 회의심(懷疑心)을 나타내는 질문인지 아니면 보다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간청인지 명확치는 않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그러한 사건이 어떻지 경험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4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교훈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는 가능성 자체를 놓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반면 본절에서는 일단 그 가능성만은 인정한 상태에서 그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여 재차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이러한 영적 거듭남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겔 36:25-28 등에 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과 중생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대교의 간과(看過)와 무시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로부터 책망을 받게 된다(10절).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 :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지극히 생소하다고 여긴 것이다.
성 경: [요3:10]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 우선 예수는 니고데모 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시고 이어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을 책망 하신다(11절).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지도자 층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수 없지만 헬라어 본문에 `호'(*)라는 정관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쇠트겐(Schottgen)과 뤼케(Lucke)는 여기서 사용된 `관사'가 산헤드린의 의장 또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현자(賢者)등 어떤 특수한 직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요,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의회원으로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리고 공식적인 선생의 위체에 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자신이 성령의 의미와 위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구약성경의 연구를 통해 좀더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고 하는 점을 이 칭호(이스라엘의 선생)를 사용하여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Farrar). 더구나 니고데모 자신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진리와 거짓을 가리고 판별해 내는 일을 맡고 있던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요3:11]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우리 - 이들이 누구를 뜻하는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1) 메이어 (Meyer)는, 주님께서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가리켜 `권위의 복수'(pluralis majestaticus) 즉 `경어적 복수'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2) 바이스(Weiss)와 루타르트(Luthardt)는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3) 벴겔(Bengel)과 스티어(Stier)는 `삼위 일체로서의 그리스도'를, (4) 루터(Luther)는 `그리스도와 선지자들 전체'를, (5) 고데(Godet)와 웨스트콧(Westcott)과 행스텐베르그(Hengstenberg) 등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중 두번째와 다섯번째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 같다.
⭕ 아는 것...본 것 - 니고데모를 비롯한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알지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그 활동을 가리킨다.
⭕ 너희 - 니고데모를 위시해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를 믿는 참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무지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예수 당시의 유대 사람들 역시 예수의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1:5). 여기서 예수는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비밀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성 경: [요3:12]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땅의 일...하늘 일 - 이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헌터(A. M. Hunter)에 의하면 `땅의 일'이란 물, 바람, 탄생 등과 같은 지상적인 현상이나 사건들인 반면 `하늘의 일'이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초월적 사건들이라고 하였다. (2) `땅의 일'이란 니고데모가 결국 이해하지 못했던 영적 거듭남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사업이며, `하늘 일'이란 1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 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 안에 거하게 되신 것으로 그리고 후자를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장차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처소를 제공하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마지막 견해로서, `땅의 일'을 예수께서 실례로 드신 바람부는 현상으로 이해 하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 자연 현상인 땅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 다면 `하늘 일' 곧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는 말씀이다. 이중 네 번째 견해가 무난하리라 짐작된다.
성 경: [요3:13]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하늘에 올라간 자(*, 아나베베켄 에이스톤 우라논) - 직역하면 이 말은 `하늘에 계신 자'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는 현재 완료형으로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상반절의 의미를 이어 받아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者) 외에는' 그 누구도 하늘에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인자 자신 뿐이라고 하는 자기 증거가 된다. 물론 구약의 두 인물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9-11)가 승천(昇天)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그들은 땅에 살던 자로 하늘에 올라갔으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던 자로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상고해 볼 수 있다. 본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인자' 그리고 `하늘에 올가간 자'는 모두 동격이다. 다시 말해서 인자(人者)로 계신 예수는 원래 하늘에 계셨던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 인간 구원과 새창조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일체의 모든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분이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지만(고전 15:47)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신 분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신비 또한 인간의 유한한 이성(理性)으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비밀이다.
성 경: [요3:14]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모세가...인자도 들려야 - 예수는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자신의 구속 사업 즉 하늘의 일을 설명하셨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으나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날 수 있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자에서 돌아가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예표(豫標)하는 것이다. 이는 놋뱀 자체가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므로써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공부하거나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의 말씀을 외우는 열로 보내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오경에서 인용한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뱀은 마귀 또는 사단이라고 불리는 `옛 뱀'(계 20:2)을 상징하며, 이 구리 뱀은 사단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한 예수의 회생을 예표한다. 따라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회개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들려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소오'(*)는 아람어 `제캅'에 해당하는 말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이 아람어는 `들어 올리다' 혹은 `교수대에 처형되다'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말에는 (1) 십자가에 달리심(8:28;12:23) (2) 승천하실 때 영광 속에서 들어 올려지실 것(행 2:33;5:31;빌 2:9) 등의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문맥상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성 경: [요3:15]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예수의 자기 증거]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목적을 설명하는 본절은 구원론(救援論)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본절에 나오는 `영생'은 본서 전체에 걸쳐 요한이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주제이며,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예수께 대한 믿음이 지적 되고 있는 것이다. `저를 믿는 자'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를 뜻한다. 특히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신앙의 행위가 계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 영생 - 요한의 애용어(愛用語)로서 문자적으로는 `영원의 생명' 또는 `올 세대의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이 사용한 영생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요소와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물이라고 하는 두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편 요한은 `생명'과 `영생'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외 복음서에서 생명은 19번, 영생은 17번 나온다. 17:3에 의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14:6에 의하면 영생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참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이러한 앎과 교제는 현재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처소에서 이루어진다(14:3).
성 경: [요3:16]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이 구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성 경: [요3:17]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 심판하려 하심이...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식의 영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8:16)에 관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딤후 4:1, 8).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 지변(天災地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는 `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의 의미와 `정죄하다'(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의 뜻인 `소테리아'(*)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구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한다.
성 경: [요3:18]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 저를 맏는 자는...벌써 - 앞의 두 절에서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설명한다. 그는 이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後裔)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 심판을 받은 - 완료 시제 `케크리타이'(*)는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어졌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즉 정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
성 경: [요3:19]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 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톡한 표현을 반영하는 어구이다(15:12;17:3;요일 1:5;5:11, 14).
⭕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 - 여기 사용된 '빛'의 헬라어 '포스'(*)는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로,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빛'(the one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두움의 뜻인 헬라어 '스코토스'(*)는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Westcott).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 빛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표현이 믿지 않는 자들이 빛도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뤼케(Lucke)는 말하기를,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이라는 단어가 '오히려'의 뜻 보다는 '더 많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인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론'이 사용된 다른 많은 구문에서는 그 뜻이 '비교급'으로 보다는 부정 적인 의미에서의 '...보다 도리어'(rather)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43;마 10:6;딤후 3:4). 따라서 본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즉 하나님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성 경: [요3:20]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19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르'(*)가 사용되었다. 19절에서 이 전치사는 사람들이 죄악된 길을 택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주며 본절에서는 19절에서 밝혀진 원인을 보층 설명한다. 앞절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고 하는 소극적 어투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악행'을 지적한다. 특히 본절은 더욱 더 죄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 도덕적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두움을 택하며 더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수록 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 드러날까 - 헬라어 '엘렝코'(*)는 '죄를 깨닫게 하다'(convince) '밝히 드러나다', '혐의를 두다', '교정하다'(correct) 등의 뜻을 지니는 바 악을 행하는 자가 죄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그 죄에 대해서 회개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요3:21]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믿음으로 얻는 영생]
⭕ 진리를 좇는 자 -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라, 그 신앙의 열매(마 3:8, 10)를 맺는 자'(A. M. Hunter) 즉 참된 기독교적인 신앙과 삶을 실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리'의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이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 오면 회개와 전인적 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 빛으로 오나니 - '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는 '빛에게로 나아오다'란 뜻이다.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신의 기원(起源)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charlesworth).
성 경: [요3:22]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이 후에...유대 땅으로 가서 - 많은 학자들은 22-30절을 현재의 위치에서 옮겨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Barrett, Senders). 왜냐하면 '유대 땅으로'라고 하는 표현이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왔다고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야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마을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 낸다고 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 세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세례(baptizing, NIV)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고 또 4:2로 미루어 보건대 실제로 세례를 베푼 자는 예수의 제자를이었을 것이다. 이 세례를 기독교의 세례전(洗禮典)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 보다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께서는 친히 세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서 세례 요한식 세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의 첫 메시지도 세례 요한의 주된 강조 사항인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마 3:2;4:17). 한편 예수께서 몸소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 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제자들은 훗날에 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NIV)의 성령 세례를 체험하고 난 후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이었다(행 2:1-4, 37-41).
성 경: [요3:23]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살렘 가까운 애논 - 이 두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지 않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은 '샘'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 지명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는 견해.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8). (2)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즉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옛부터 알려졌던 '살림'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 '아이눈'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애논'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비록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Albright) (4) 또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이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Cheyne). 이 중에 세번째 견해는 그곳이 유대 지역이 아니라 완전히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문과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크리거(Krieger)는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즉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의 세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샘(애논)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트만(Bultmann)도 역시 살렘과 애논, 이 두 지명이 실재적인 것이지만 복음서 저자에 의해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용된 것일 수 있다고 믿었다(the Anchor Bible).
성 경: [요3:24]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옥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그 감옥에'(*, 에이스 텐 퓔라켄)이다. 이는 저자와 당시의 직접적 독자들이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의 투옥에 관해서는 눅 3:19이하를 참조하라. 저자가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및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사역에 보다 밀도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서에서 셰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공관복옴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 즉 세례 요한과 예수의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이다.
성 경: [요3:25]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논쟁(argument, NIV)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지 않다. 본문에서는 '결례'(ceremonial washing, NIV)의 뜻인 헬라어 '카다리스모스'(*)가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변론'의 뜻인 헬라어 '제테시스'(*)에 대해 바울은 '위험하고 쓸데 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9)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세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성 경: [요3:26]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1:19-28) 또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마 3:1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 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하다'의 뜻인 헬라어 '메마르튀레카스'(*)는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 세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가 붙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가더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콘타이'(*)는 연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 막 1:45;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11:48).
성 경: [요3:27]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이다. 본문에 있어서는 대화의 내 용상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하늘'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그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된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그 기욍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성 경: [요3:28]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1:20에서 산헤드린(Sanhedrin)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闡明)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바'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여러번 증거하였던 사실을 나타낸다.
⭕ 너희니라 - 이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내 설교를 귀담아 듣고 그 의미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yourselves)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시사한다. 한편 세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세례를 고지식 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행 18:24-26). 그 후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바 있다(행 19:1-7).
성 경: [요3:29]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사54:5;렘 3:20; 호 2:7;말 2:11)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엡 5:32;계 19:7).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와 그 친구인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그긔스도가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C.K. Barrett).
⭕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 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그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출 19:17)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올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2).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2:9)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그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 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페플레로타이'(*)는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치 물이 컵의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처럼 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곧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했기 때문이다(A. M. Hunter).
성 경: [요3:30]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 그는 흥하여야...나는 쇠하여야 -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히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하는 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막 1:14; 눅 3:18-20).
성 경: [요3:31]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위로부터 오시는 이...땅에서 난 이 - 본격적으로 예수와 세례 요한과의 대조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 증거되고 있는 31-36절까지의 본문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 내용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12, 13절).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근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20:31),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일간되게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저가가 강조하는 바는 세레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대해서이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눅 7:28)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서 감히 예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되는 것이다. 한편 '땅에서 난 이'란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생각 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오시나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야에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사용되곤 했다(1:30;마 11:3;눅 7:19). 그리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여기서 '땅'(the earth, 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이다(창 2:7).
⭕ 땅에 속한 것 -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등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예수가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이후의 모든 제자들의 사역도 결코 예수에 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성 경: [요3:32]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보고 들은 것 -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시제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일 1:3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한다.
⭕ 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는 '능동적으로 취하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성 경: [요3:33]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하나님을...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다(12:44-50;요일 5:10).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certification)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인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裁可)하다', '증명하다'(certify)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성 경: [요3:34]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하나님이 메시야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다고 보는 견해(R. C. H. Lenski). 렌스키에 의하면 '주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신'(*)은 '계속적인 수여'를 뜻하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으므로 예수께 적용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없다. (2)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엠 4:7)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도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보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without limit, NIV) 부어주셨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전후의 문맥으로나 사용된 어휘의 용례 등으로 볼 때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예수는 곧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을 지니셨고 성령과도 하나이셨던 것이다.
성 경: [요3:35]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 사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 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고전 15:27;계 1:18)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와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2) 인간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시는 모습이다. 전능성(全能性)은 삼위(三位)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여받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낮아지심' 과 인생의 완전한 모범을 보게 된다.
성 경: [요3:36]
주제1: [중생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교훈]
주제2: [하나님의 아들 예수]
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권고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 영생이 있고 - 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하고 만물의 지배권을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성도둘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이다.
⭕ 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단어이다. 본절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의 진노...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출 22:24;32:11;신 13:17; 스 10:14) 이 표현은 인간의 일시적인 성냄이나 분노를 의미하는 헬라어 '뒤모스'(*)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시는 일관된 '심판', '벌' 등의 뜻인 '오르게'(*)를 의미한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를 직역하면 '남아 있다'(remain)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 NIV) 아래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1:24). 예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의 세력 속에 그대로 방치(放置)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래에 끝마치게 될 것이다.
성 경: [요4:1,2]
⭕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남들과 무의미한 충돌을 피하신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종종 바리새교인들과 변론 하신 일도 있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그들과 충돌하기를 피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때에 시기심을 발하였다. 예수님께서 실상 세례를 베푸신 일은 없었으나 소문이 잘못 퍼져서 그가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처럼 선전되었다. 세상 사람은 언제나 진리와 사실대로 믿는 것보다 뜬 소문을 얼른 청취하여 쉬이 전한다.
성 경: [요4:3,4]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 유대에서 갈릴로 가는 길은, 일반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베뢰아로 돌아가는 법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피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셔야 할 필요를 느끼셔서 그곳을 직접 통과하시게 되었다.
성 경: [요4:5]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 "수가"라는 곳은 세겜을 가리킨다고 하나, 유세비우스(Eusebius)이래로 이 두 지방은 각각 다른 곳으로 생각되어 왔다. "수가"는 오늘날의 아스카(Askar)라는 지방이었을 것이다.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 수 24:32; 창 33:19 참조.
성 경: [요4:6]
⭕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 여기 이른바, "그대로"란 말은 피곤한 태도를 숨김 없이 그대로 나타내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그대로 나타내신 태도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체휼(體恤)하신 대제사장이시다(히 4:15). "제 육시"는 유대시간으로 말한 것인데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를 가리킨다.
성 경: [요4:7]
⭕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더러 물을 좀 달라고 하신 동기는, 그 자신의 갈증을 멈추시기 위함보다 그 여인의 영적 요구를 채워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청구하신다. 그러나 그의 청구는, 언제든지 우리를 유익하게 해 주시기 위한 동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 경: [요4:8]
⭕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을 청하시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면 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물을 공급하였을 것이다.
성 경: [요4:9]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이 여자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알게 된 원인이 어디 있었는가? 그의 옷을 보고 알았는지, 혹은 그의 말을 듣고 알았는지 우리는 추측하기 어렵다. 어쨌든, 예수님은 일반 유대인과는 달리 민족 차별의 기분이나 감정을 전연 가지지 않으셨으므로 그 여자로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른 민족을 형제시하심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이스라엘 민족더러 그들 중에서 거주하는 이방인들을 동포와 같이 대우하라고 하셨다(레 19:34).
성 경: [요4:10]
⭕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선물을 가리키고,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란 말은 메시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샘에서 솟아는 "생수"로써 성령을 비유하셨다.
성 경: [요4:11]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靈的)으로 알아 듣지 못하고 오해하였다. 곧, 물 길을 그릇도 없고 그 우물은 깊은데 거기서 생수를 길어낼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 어디 다른 우물에서 길어 올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실상 그 지방에는 다른 우물이 없었다. 옛날에 야곱도 그 우물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 경: [요4:12]
⭕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신다고 하니, 그 여자는, 야곱보다 위대한 자가 아니고는 그런 더 좋은 물을 내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생수"란 것을 이 세상의 음료수로 아는 착각에서 한 말이다.
성 경: [요4:13,14]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예수님은, 여기 물질적 생수와 영적 생수와의 구분을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란 말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을 다 함께 가리킨 것이니, 기독교 구원의 보편성, 곧, 무차별성을 보여준다.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란 말은 영적 기갈이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성령님을 생수로 비유한다(사 58:11). "솟아난다"는 말은 그 영적 생명이 무궁 무진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요4:15]
⭕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 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그 여자는 또 다시 주님의 말씀을 오해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에 흥미를 가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늘 갈증 없이 생(生)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또한 물 길러 다니는 수고도 면하려 한다. 이것은, 그릇된 인간의 욕심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언제나 영적 요구를 채우려 함보다 육적 요구를 채우려 하는데 급급하다.
성 경: [요4:16]
⭕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주인공 없는 환경에서 중대한 생명 문제 있는 말씀을 주시기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이 함께 있는 장소에서만 여자에게 전도할 수 있다는 사상은, 성경에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곧,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을 취하므로(불법하게라도) 이세상 만족을 찾았다. 심지어 방금 예수님의 전도를 듣는 중에 생수란 것도 이 세상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먼저 그릇된 인생관이 깨어져야한다. 그 여자의 생활은 개편되어야 한다. 그 뒤에야 진정한 생수를 받을 만한 준비가 성립된다. 생수 곧 복음이라는 보화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야 사는 법이다(마 13:45-46). 천국은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3: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6:63). 사마리아 여자의 육적사상은 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육적 심리에 대한 심판이었다.
성 경: [요4:17,18]
⭕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그 여자는 한 남편을 사귄 것이 아니라, 다섯 사람이나 사귀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그 여자의 생활상을 지적하시면서 그 가슴을 뜨끔하게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 다섯 남편이란 것을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한다. 곧, 사마리아 지방에는, 바벧론, 구다(Cuthah), 아와(Auva),하맛(Hamath), 스발와임(Sepharvaim)등 다섯 나라 사람들을 식민하였는데(왕하 17:24), 그 다섯 나라에서 들어온 이방 신(異邦神)이 역시 다섯이었다고 한다. 사마리아인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이방 신을 섬겼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남편은, 이교 사상(異敎思想)과 혼합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그들의 종합 종교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해석은 너무 상상적이다. 차라리 여기 이른 바 "남편"들은, 그 여자의 생활에 여러번 개가(改嫁)하게 된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으로 생각된다.
성 경: [요4:19]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이 여자는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에 놀라 이제 겨우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다. 그 여자는 중심에 있어서 이제부터 종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초자연(하나님)을 접촉하기 전에는 진정한 종교심과 영적 사색을 가져보지 못한다. 그 여자는 이제부터 정상적으로 예수님에게 돌아오기 시작한다.
성 경: [요4:20,21]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여야 할 것을 본래부터 주장하여왔다(신 12:5, 16:2, 26:2). 사마리아 사람들은 게르심산에서 예배하여야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바벧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을 게르심산에 세웠다(400 B.C). 그 뒤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미워하였다. 그 여자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신약적 예배를 보여 주시므로 문제 해결을 주신다. 곧, 이제부터는, 게르심산이니 예루살렘이니 할 것 없고, 오직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영적 예배를 드릴 때가 왔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예배할 때"란 말은 이 부분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약적 예배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는 예배는 어떤 장소의 제재를 받는 외부적 예배가 아니고,성령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의식(意識)하고 부르면서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성 경: [요4:22]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게서 남이니라 -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5경만 믿고 다른 선지서들을 버렸으니 만큼,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을 전부 가졌으니 만큼, 진정한 종교를 받았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보수하였고 메시야(그리스도)도 그들 중에서 나오실 것인 만큼,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말씀하시게 되었다.
성 경: [요4:23]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아버지께 예배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신(神)이 아니시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 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벧전 1:23). 사람의 거듭 난 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하기 좋아함이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가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이다. "진정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이다. 이스라엘의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이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사건(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에 근거한 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이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 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히 11:6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고 하였다.
성 경: [요4:25]
⭕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 이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야를 대망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신 18:15-18에 있는 모세의 예언에 기준하여, 사마리아인들도 메시야를 대망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 5경만을 성경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요4: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심리가 이제 진정한 종교로 바로 움직이는 것을 보시고 그 기회를 타서 자기가 메시야인신 것을 알려 주신다. 이 부분(1-26)의 의미를 좀 더 명백히 알기 위하여 앞에 있는 강해를 자세히 읽음이 좋다.
성 경: [요4:27]
⭕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 "제자들이 돌아왔다" 함은, 그들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동네에 들어갔다 온 것을 말함이다(8절). 유대 랍비들의 예법대로는, 유대 남자가 거리에서 여자로 더불어 말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사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심이 이상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에 그것을 허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았다.
성 경: [요4:28]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 그때의 물동이는 상당히 무거운 것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그것을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갔다. 그 여자는 그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열중하였다. 그는 급히 동네에 들어가서 전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성 경: [요4:29]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그 여자는, 자기의 과거 생활을 알아 맞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 때문에 그를 믿었다. 그는 이제 그 사실에 대하여 증거한다.
성 경: [요4:31-34]
⭕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만을 양식으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 양식을 참된 양식이라고 생각하셨다. 영적 양식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구속사업을 완성하심이다. 슐라텔(Schlatter)은 이 귀절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생명의 근거가 되며, 그의 능력의 원천이 된다"라고 하였다(Dieses Einssein mit dem gottlichen Willen, das ihn dem gottlichen Wirken dienstbar macht, ist der Grund seines Lebens und der Quell seiner Kraft.-Der Evangelist Johannes, P.130).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특수한 의미로 그러하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 신자도 하나님의 일을 하므로 하늘의 생명력을 받는다. 음식을 먹음으로도 육신이 생명력을 얻음과 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참되이 할 때에 영적 생명력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하는 자에게 한하여 이런 귀한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이룰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요 6:29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보내신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였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금보다 귀하다(엡 2:8; 벧전 1:7). 우리가 전쟁하듯이 힘쓰지 않으면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딤전 6:12에 말하기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으며, 히 12:4에는 말하기를,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자는 믿음으로 남들을 위하여 행해야 될 선한 일들도 책임 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상 죽은 믿음이다(약 2:17,26). 엡 2:10에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다.
성 경: [요4:35]
⭕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하나의 속담으로서, 사람들이 추수 때를 고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일에 대하여는 미리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영적 추수에 대하여는 등한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영적 추수의 때는 그때에 임박하였으니 만큼, 예수님은 화급히 일하셔야 될 것을 느끼고 일하셨다.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영적 추수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영적 추수는 무엇인가? 선지자들이 예언해 두었던 진리가 이제 예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는데, 제자들이 그 성취된 진리, 곧,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는 영적 추수이다.
성 경: [요4:36]
⭕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삯도 받고"란 말씀은 그 아래 말씀이 해설한다. 곧, "삯"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받음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여 영생에 들어가도록 인도함이다. 믿음에 순종하여 돌아오는 자들은 그 전도자에게 상급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도 복음으로 돌아온자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였고(빌 4:1),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살전 2:19).
성 경: [요4:37]
⭕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 심은자는 수고할 뿐이고 거두지는 못한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수고에 해당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둔다"함은 제자들의 수고에 해당된다.
성 경: [요4:38]
⭕ 이 귀절에 대하여는, 37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4:39]
⭕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여기 말한대로,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역사(役事)때문에 생겼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 역사를 누구에게 물어보신 일도 없이 아신 것은 (16-18),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 경: [요4:40]
⭕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 이것은, 마치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바울에게 한 말과 같다. 그 여자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하였다(행 16:14-15). 전도자를 귀하게 아는 그들 자신도 귀하다.
성 경: [요4:41]
⭕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 그들의 믿음은 점점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친히 예수님 자신을 보았고, 또 그의 말씀을 듣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구주"라고 한 것도 (42절) 퍽 자라난 믿음으로 한 말이다.
성 경: [요4:42]
⭕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 이것은, 남들의 증거에 의뢰함보다 자기들이 친히 예수님을 듣고 본 사실에 근거한 신앙을 말함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서기관의 그것과 달라서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신앙을 얻는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알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자손,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을 일찍부터 알았을 것이다(Godet).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도하실 때에 자기가 세상의 구주(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구주)이신 사실을 가르치셨다.
성 경: [요4:43]
⭕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로 가시며 - "이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신 기간을 말한다(40절).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던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역사하신 것은, 하나의 도중 행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일에 이틀을 잡으신 것을 보아, 사마리아 사람들의 회개하는 열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 경: [요4:44]
⭕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길릴리로 가시는 동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할 줄 아시면서 왜 그리로 가셨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학설이 있다. (1) 고향이란 말은 유대를 가리켰거나(Keil),예루살렘을 가리켰다고 한다(Hoskyns). 그렇다면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께서 유대나 예루살렘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할 줄 아시고 갈릴리로 가신다는 뜻이겠다. (2)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심은 고향 나사렛에 가심과 다르다. 그가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고, 나사렛 이외의 다른 갈릴리 지방에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Calvin,Lagrange). (3)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실 때는 갈릴리를 목적지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사마리아 전도에 성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고향 갈릴리에서는 환영 받지 못할 줄 아시면서도 초지(初志)대로 관철하시기 위하여 그리로 가신다는 의미라고 한다(Grosheide).
성 경: [요4:45]
⭕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예수님의 하신 일(권능 있는 일)을 본 까닭이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보다 떨어진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었다(41절). 어떤 권능을 보지 못하고 말씀만 듣고 믿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신앙이다.
성 경: [요4:46]
⭕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 "왕의 신하"는 헤롯 안디바의 신하를 말함이다. 여기 "그 아들"이란 말의 헬라 원어(*)에 관사(冠詞)가 있음을 보아 "외아들"을 의미한다(Grosheide). "가버나움"은, 수리아에서 애굽으로 갈 때에 지나게 되는 도시로서 거기 관리들과 세리들이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성 경: [요4:47]
⭕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왕의 신하로서 사환을 보내지 않고 친히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을 보니, 예수님께 대한 그의 존경이 컸다.
성 경: [요4:48]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이적 행하실 것은 믿었으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저 사람의 불신앙을 간접적으로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인격을 믿는 것이 건전한 신앙이다.
성 경: [요4:49]
⭕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 왕의 신하의 신앙은 저렇게 약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1) 거리나 시간에 제재를 받을 듯이 생각하였으며, (2) 죽은 다음에는 못 고칠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맡아 취급하신다.
성 경: [요4:50]
⭕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예수님은, 그 사람과 같이 가시지도 않고 그의 아들을 고쳐 주셨다. 그는 아무 방법도 사용하시지 않고, 먼 거리에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한 마디 말씀만 하시므로 고쳐 주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를 보여 주심이다. 여기 "살았다"란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동사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 바로 살아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 "살아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 것일까? 그것은, 여기서 질병을 고침 받음에 관하여 사용된 말이니 만큼, 물론 육신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다. 그러면, "살아난다"는 말이 요한 복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영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이 말이 예외의 의미(곧, 육신적 생명의 뜻)를 가진다는 말인가?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물론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 구원도 마침내 영생의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것이니 만큼, 그것이 도외시(度外視)될것은 아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써 영생에 관한 설교(11:25-26)의 기회를 삼으신 것이다. 스밀데(E.Smilde)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곧, 4:46-53의 말씀은, 5장에 있는 영생의 생명 주시는 (영생은 몸을 제외하지 않음)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말씀의 예비적 계단이다. 요한 복음에 있는 '생명'이란 말씀(살린다는 말씀) 귀절들을 영화(靈化)하여 버리는 해석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6).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부딪혀 믿음을 얻었으니, 그것이 과연 건전한 신앙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의 심령의 병을 고치고 믿음을 주셨으니, 그것이 그의 아들의 육신의 병을 고친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지만 심령의 병(불신앙 병)을 고치시는 것을 위주한다.
성 경: [요4:51,52]
⭕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이 말씀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상고한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그 아이가 어느 시간에 나았는지 상고해 보므로 그 낫기 시작한 시간이 예수님의 말씀하시던 그 시간과 일치한 줄 알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예수님의 능력의 신기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신앙은 한층 더 굳세어졌다. "제 칠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한 시 경이다.
성 경: [요4:53]
⭕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 아비가 예수님을 믿음에 따라 그의 온 가족이 믿음은, 계약 원리(契約原理)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실현이다.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그 집의 대표자인 만큼,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 온 집을 축복하신다. 창 17:7; 시 105:8-10 참조.
성 경: [요4:54]
⭕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표적"이란 말의 의미에 대하여는 2:11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신 표적으로써, 예수님은 자연계의 주님이신 사실을 나타내셨다. 여기 "두 번째 표적"은, 예수님께서 거리(距離)를 초월하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시고저 하시는 일을 거리 관계로 못하시는 법이 없다.
성 경: [요5:1]
⭕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 바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본다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는 추수하기 4개월 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오순절인 듯하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 50일을 말함이다(신 16:9-12). 칼빈(Calvin)은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이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해석하여, 2:13 과 6:4과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더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가 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성 경: [요5:2]
⭕ <베데스다 연못>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을 영국 왕역(A.V.)은 "양의 시장"(Sheep market)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느 3:32, 12:39에도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행각"은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킨다.
성 경: [요5:3,4]
⭕ 그 안에 많은 병자,소경,절뚝발이,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 , B, C, D)에는 3절 끝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란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劣等)한 사본들(A,C )에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논쟁건이 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이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고 하였고(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1950,PP.342-343), 고데이(Godet)는, "이것이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고 하였고, 헨드릭센(Hendriksen)은 말하기를, "이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所信)도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W.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P.191).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이, 이 부분 말씀을 사용한 실례가 있다(On Baptism V). 칼빈(Calvin)은, 이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지 않고, 이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 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곧,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ies, John's Gospel I,1847, P.189).
성 경: [요5:5]
⭕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삼십 팔 년"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38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며 고생한 사실(신 2:14)을 연상하면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40년이란 연수를 채용하지 않았으랴?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40년 동안이라고 더욱 많이 말한다.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다. 그 연수는, 그 때 예수님의 연령보다 많으니 그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암시된다(A.Marack).
성 경: [요5:6]
⭕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정지를 한 번 보시고 정확히 아신다. 그는 그 병자가 절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절망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신다. 곧, (1)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다. 믿음은, 소망과 약속에서 생긴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쳐 주시고 그 병자 자신의 심리 상태의 어떠함을 알아보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사람의 몸보다도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심령에 생기를 주시려고 힘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그 38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눅 4:25-27).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할 처지에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5:7]
⭕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하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내버림이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남 모르게 죽는다.
성 경: [요5:8,9]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이다.
⭕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곧 나아서"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준다. 주님의 병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는 저렇게 완전하여 그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병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성 경: [요5:10]
⭕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다(느 13:19; 렘 17:21-22). 그러나 그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 듯이 번쇄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오용하였다.
성 경: [요5:11]
⭕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더라 한대 -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자기는 발뺌을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권위를 승복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난치병에서 건져 주신 이의 말을, 그로서는 복종할 만하였다. 9:11; 행3:9-10 참조.
성 경: [요5:12]
⭕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 그 때 유대인들이 강퍅하였던 것이 여기 드러난다. 그들은, 그 불쌍한 병자의 고침 받은 반가운 사실을 묵살시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한 사실만을 추궁한다. (1) 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린 긍휼보다, 사람들의 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마 15:2, 9), (2)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헛되이 정죄하여 죽이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던 것이다.
성 경: [요5:13]
⭕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그에게로 모여들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는 병 고쳐 주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그는 더욱 원하신 것이다.
성 경: [요5:14]
⭕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그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Luther). 이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요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민 16:46), 우리는 이 해석을 옳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2) 여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헬라 원어(*)는,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년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를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년 동안 병 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다고한다(Maar de man leefde nu in zonde, had zich niet aan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더 심한 것"은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마 12:43-45 참조.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년 된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 (2)그가 그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를 요구하신다는 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 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히 2:2-3).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침 받은 자는 그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그 한 마디 말씀이 늘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곧,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dass man an die Genugtuung Christi glauben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성 경: [요5:15,16]
⭕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그 병 고침 받은 자가 저렇게 보고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핍박하기는 여기 이 사건에서부터이다(Bernard). "핍박하게 된지라." 이 말은 헬라원어로 미완료 시상(未完了時相)에 속하는 동사(*)인데, 핍박하기를 계속한다는 뜻이다. 이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남들을 대신하셔서 항상 고난을 받으신 분으로 드러난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그 자신은 그 일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다.
성 경: [요5:17]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 만물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창 2:2-3), 결코 하나님의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창조 역사에서 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가 계속하여 만물유지와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5:17,19-30에 나타난 변론이다. 그가 이와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되신 증표이다. 예수님의 이 변론(5:17)을 들은 유대인들 자신도 그의 변론을 가리켜,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의미의 변론이라고 하였다(18절).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신 그로서 안식일에 오히려 하실 만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안식에 속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 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 돌림이다"라고 하였다(Asleep in Jesus, P.55).
성 경: [요5:18]
⭕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이를 인하여" 란 말은, 위의 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유로 함을 가리킨다.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것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므로 자기도 일하신다는(하나님과 자기는 동등이라는 의미) 말씀을 이유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반대한 셈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아버지" 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 라고는 하지 않으셨다(Zahn). 그런데,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학설들이 있다. (1) 성령적 신자설(聖靈的神子設). 이 학설이 성립된다면, "하나님 아들" 이라는 이름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라기보다도 순 인간으로서 성령과 함께 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아들일 것이다. 곧, 뤼트겔트(Lutgert)의 이론에 의하면,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들을 문견(聞見)하신다는 어귀들에 하나님 아들이란 칭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 천적(天的) 문견은 현세에 있어서 성령을 통하여 되는 일일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의 관계 장절들을 연구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고로 하나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이다(요 1:33-34). 그 뿐 아니라, 하늘 일에 대한 문견이, 그의 현세적 경험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그의 화육(化肉) 이전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3:32의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이가 없도다"란 어귀의 그 문견에 관한 동사는 완료 시상이다. 그것은 그의 화육 이전의 경험을 말함이다. 그 이유는, 그 윗절에 있는 그의 화육 사실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는 현재 사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2) 종교 윤리적 신자설(宗敎倫理的神子設). 하르낙(Harnack)은 이 학설의 대표자이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 아니고 종교 윤리적으로 그가 하나님과 일체이신 의미에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한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의 신자 격(神子格)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한 그의 순종(종교 윤리)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10:18, 12:49, 14:31, 15:10).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이라고 하지 못한다. 요한 복음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이런 교훈을 찾을 수 없다.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은 그의 신자 격의 결과로 나타는 일종의 수반 현상이고, 결코 그것이 신자 격의 성립 원인은 아닌 것이다. (3) 역사적 신자설(歷史的神子設). 독생자란 술어를 기초로하여 역사적 신자설을 지지할 수 있을까? 독생자란 말(*)은, 예수님의 화육(化肉) 사실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원 자존의 신자격을 가리킨다. 3:16, 18; 요일 4:9 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화육 전에도 이미 독생자였음) 보내셨다고 한 까닭이다. 독생자가 독생자 되심은, 역사상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영원(永遠)에 속한 일이다.
성 경: [요5:19]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여기 이른 바 "본다"는 말은 현재사로서 부자 일체(父子一體)에서 보는 것을 말함이니, 불현계(不現界)에서 되는 일이다. 그것은 시간적 선후(先後)를 가져오는 모방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시는 아들의 종속적 의지 행위(從屬的意志行爲)를 말함이다. 그 행사는 부자(父子)의 중복(重複)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부자의 일체적(一體的) 행위를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일이 실행됨을 말함이다.
성 경: [요5:20]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 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여기 "사랑하사"란 말은, 헬라 원어로 필레오 - (*)니,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본질적 관계에 나타난 사랑을 가리킨다(Bauer). "보이시고"란 말은 계시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미래사로 된 것은 그 보이는 행위가 현재 뿐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계속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역(中保役)을 통하여 계시하시며 행하신다(마 3:17, 11:27). "그보다 더 큰 일" 이란 말을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이 일들보다 더 큰 일"이란 뜻이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큰 일을 가리킨다.
성 경: [요5:21]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이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의 "더 큰 일"이란 말을 설명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일으키심"이란 말은 영적, 또는 육체적 부활을 겸하여 가리킨다(Grosheide). "같이"란 말의 헬라 원어(*)가 여기서는 일체 동행(一體同行)의 뜻을 가졌고, 시간을 서로 달리하는 중복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가리킨다.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살릴 자를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심판 권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인데, 다음 귀절들(22,23)이 이사실을 자세히 해설한다.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단지 대종말에 나타날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죽은 자"(*)란 말, "일으켜"(*)란 말, "살리심"(*)이란 말들이 현재 영적 관계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일으켜(*)란 동사(動詞)와, "살리심" 이란 동사(*)가 모두 현재사니 만큼, 이 귀절 말씀을 대종말에 나타날 부활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 없다. 스밀데(E.Smilde)는 말하기를, "21절의 말씀은 살리는 운동의 일반적 관설이고, 24-25절은, 현재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고, 26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는 신학적 진술이고, 29절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신자들이 받을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7).
성 경: [요5:22]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이 귀절은 헬라 원어에서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것은 이 귀절이 윗귀절의 설명 문구인 사실을 보여 준다. "심판"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살리시고 어떤 사람은 그 본래 정죄된대로 두시는 그의 행위를 가리킨다.
성 경: [요5:23]
⭕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은 그 아들을 공경하는 데서 실현된다는 뜻이다. 이 뜻은 하반절에 밝히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신 처지를 가리킨다. 24-29.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께서 현세에 그 복음에 의하여 사람들을 영적(靈的)으로 중생하게 하심과(24-25), (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원리와(26-27), (3) 내세(來世)에 신자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주실 것을 가리킨다(28-29).
성 경: [요5: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내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내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는 어귀는, 말씀이 생명력(生命力)을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셋트(Boussett)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작용을 마술적인 것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헬라의 비지적 오묘(秘智的奧妙)란 것 (Geheimnisvolles mysterien wort)과 동일하게 보았으니(Kyrios Christos, 1926, S.170) 잘못이다. 여기 "듣는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 범신론 사상(汎神論思想)이 가르친 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그 들음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눅 17:21; 고후 5:17; 골 3:3; 벧전 1:23). 스밀데(E.Smilde)는,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稱義論)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44).
성 경: [요5:25]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 이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곧 이 때라"고 하신 말씀(25절 하반)은 현재 신약 시대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사상이 노시스 신화인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194).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오데벌키(Odeberg)가 수집한 만데안(Mandean) 문집에서 몇 개의 문구들을 실제로 보여 준다. (1) "생명의 음성이 부르짖는다. 깨어 있는 귀는 듣는다. 어떤 자들은 듣고 살아나고 어떤 자들은 계속하여 잔다"(Ginza Left 596,9)라고 한 말, (2) "생명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의 교훈을 받아 죽음을 미워하고 생명을 얻는다"(Ginza Righe 12)라고 한 말, (3) "혈육으로 된 자들의 영들이 생명의 소리를 듣고 믿으면 생명의 집에서 존전에 거하게 되리라"(Ginza Right 12)고 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 소개된 바 만데안(Mandean)문헌의 내용은, 사도 요한의 사상과 아주 다르다. (1)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는, 사람의 영혼에게 외치는 자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인 우주적 실존이라고 한 반면에,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역사적 인물이다(1:14, 2:1,12, 4:6, 5:27, 7:1, 8:59). (2) 만데안(Mandean)문헌에서는 성령을 가리켜 흑암의 신(神)이라 하였고, 예수님을 가리켜 거짓 메시야라고 하였으니(C.H. Dodd,The Fourth Gospel 1953, P.119). 어떻게 사도 요한이 이런 괴이한 문헌 중에 어떤 부분이 그리스도 이전 것으로 생각되나, 거기 포함된 사상은 파사의 이원론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을 위반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런 사상을 섭취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4) 만데안(Mandean) 문헌이 말하는 구원론은 영혼이 세상을 떠남이라고 하나, 사도 요한의 구원론은 신자들의 부활을 구원의 완성으로 본다. 이렇게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성 경: [요5:26]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 여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란 말은 아들에게는 없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 "주어"란 것은 시간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영원한 시간을 말함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 주는 역사(役事)를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바,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하신 "생명"은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생명 운동의 근원이다(요 1:4).
성 경: [요5:27]
⭕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인자(곧, 사람)의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는 것(빌 2:7-10). (2) 칼빈(Calvin)은 이 말씀을 윗절에 연락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인자(곧, 인성)되신 방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시어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라고 한다.(3) 구속 사업 전체를 인성(人性) 소유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것인 만큼, 구속의 일부분되는 심판도 그가 하신다는것(Meyer). (4)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는 의미의 행위인 것인 만큼, 사람들 측에서 할 일이며 그것을 실행할 이는 이상적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해야 된다는 것(Godet). (5)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자정죄(自定罪)하는 것 뿐이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넘어진다. 곧, 그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사실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 한 것이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실상 그것에게서 심판을 받음과 같다. 곧, 그것은 그들의 자정죄이다. (Beyschlag, Neutest, Theol. 1,P.290). (6) 헨드릭센(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이 귀절의 '인자'(*)란 말이 관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만 인간 성품을 의미하고 메시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지나치게 일정한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 어떤 때에는 직명(職名)이 관사를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자'란 말이 보통으로는 메시야의 직명인데, 하필 여기 와서 인간 성품만을 의미하였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인자'란 말은 인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세우시고(26절), 또 다시 그의 인간성을 내세우신다(27절). 이렇게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어 심판의 권세를 받을 자격을 가지셨다. 그가 인간성을 가지신 자격으로써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성에게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더욱 윗절(26절)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수 있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375-376). (8) 슐라텔(Schlatter)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이 부분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생명의 창조자이시고(25절), 인자(곧, 인간성)이신 그는 심판자이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인자는, 속죄자(곧, 인간성으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시니 만큼, 죄악을 심판하실 권리도 받으심이 당연하다. 그 이유는, 죄는, 이와 같이 속죄하여 주신 그를 믿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은 주로 사단에게 대한 것이다(12:31, 16:11). 이 심판은 예수님이 그 인간성으로 죽으심에 의하여 성립시키셨다고 하였다(Das Hauptstuck des Gerichts ist das Gericht am Satan, 12:31, 16:11, und dieses bewirkt Jesus durch seinen Tod.- Der Evangelist Johannes, P.151). 위의 여덟가지 해석 중 우리는 첫째 해석을 택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섯째 해석을 취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성 경: [요5:28]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이것은 별세하였던 신자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요5:29]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포이에-산테스(*)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의 헬라어 원형은 프라쏘(*)이니, 상습적으로 행한것,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을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트만(Bultmann)은, 이 부분 말씀을 본래의 원본으로 생각지 않고 후대인의 삽입구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p. 196-197). 그러나 불트만(Bultmann)의 이같은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1) 이 귀절들에 대하여 사본상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전연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다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고 하며, 이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슐라델(Schlatter)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롸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의 권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2)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 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水平線的)인 종말관(終末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날"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그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도 그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성 경: [요5:30]
⭕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이 말씀은 19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재설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행사, 곧,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하신 말씀이다. 그의 행사가 정당한 이유는, 그가 자행자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듣는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심판한다"는 말(*)이 여기서는 그의 재림시의 종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복음을 통하여 살릴 자를 살리시는 주권행위를 가리킨다(3:18).
성 경: [요5:31]
⭕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표준하여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신다면, 그들은 멋모르고 그것을 잘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실상 예수님의 자증(自證)은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생각되는 것이다. 8:14에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누구든지 자율적(自律的)으로는 그에게 대하여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들도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증거도 저렇게 그리스도께서 성립시킨 것이니만큼, 그리스도의 자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스키페르스(R. Schippers)는, 성경에 있는 "증거"란 말은 법정 술어의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여 요한 복음의 특색을 나타내어 보여준다. 곧, "요한 복음은 하늘과 세상,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대립의 기세를 보여준다. 이 대립의 기세는 소송의 광경으로 결정적으로 나타낸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미망(迷妄)에 빠져 스스로 재판장인 체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재판정에 있어서는 피고(被告)였던 사실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p. 159-160)
성 경: [요5:32]
⭕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고 한 말씀은,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나 대다수의 헬라 주석가들의 의견과 반대로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과 라틴 주석가들에 의하면,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학자 뷕셀(F. Buchsel)은, 이것이 세례 요한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스키페르스(Schippers)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키지 않고 세례 요한의 증거를 의미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곧, "예수님께서 자기의 증거와 남의 증거를 관설하는 이 문맥에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 162).
성 경: [요5:33]
⭕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심문자들을 보낸 것은, 1:19-28에 기록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표준이었다. 그는 진리 (眞理)대로 말한 증인이었다. 그러므로 10:41-42에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하였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 완료 동사로서, 과거에 행한 일의 결과가 아직 남아 있음을 표시하는 시형(時形)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세례 요한의 증거한 바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에도 아직 효과적이고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Grosheide).
성 경: [요5:34]
⭕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곧,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한 것 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자증적(自證的)으로 진리이시며 빛이시다. 그의 참되심의 성립은 어두운 인간에게 의존하시지 않는다. 빛은 그 자체의 증거로 알려질 뿐이고 어두움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밝히 비추고 있는 태양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촛불을 켤 필요는 없다. 태양은 그 자체를 자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신 목적은, 세례 요한의 증거 목적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만큼, 그것을 그들에게 기억시켜 그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성 경: [요5:35]
⭕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 "비취는 등불"은 일시적으로 좁은 범위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적당한 비유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빛 자체이시고, 온 세상을 비추신다.
성 경: [요5:36]
⭕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 "나의 하는 그 역사"는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 역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밝히 보여 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란 말은 그가 메시야로 오셨다는 뜻이다.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그 역사"란 말이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21-29절이 가르친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나, "그 역사"란 말이 그런 특수한 일들만 가리킨다고 할 수 없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5:37,38]
⭕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 증거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처럼 강퍅했다. 그들은 그 증거의 형태("형용")를 전연 모르는 자와 일반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그들이, 구약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자처하며 그의 형용을 보았다고도 자처하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자처하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 경: [요5:39,40]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성 경: [요5:41-44]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신다(41,43). 그러나 유대인들은 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큼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성 경: [요5:45-47]
이 귀절들은, 다시 39-40절 말씀에 연속하여 구약 성경(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무식, 혹은 불신의 태도를 책망한다. 그들이 구약 성경을 믿었더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구약을 배척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죄할 자는 구약 성경이다.
성 경: [요6:1]
⭕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여기 "디베랴 바다"란 이름은, 주님 당시의 이름이 아니고 좀 후대의 것이었으나, 저자가 이방 교회의 식별을 위하여 "갈릴리 바다"란 말에 첨부한 것이다. 디베랴 바다라고 해야 당시 이방 사람들이 잘 알았다.
성 경: [요6:2]
⭕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 표적"이란 말(* 은, 예수님의 이적으로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는 표란 뜻이다. 이 표적들에 대하여는, 마 14:14; 막 1:34,40-42,2:11-12.3:1-5,6:5; 눅 9:11; 요 2:11을 참조하여라. 그러나 대중은 예수님의 이적의 표적 성격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호기심과 육적요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다. 26절 참조, 그들은 아직 그의 말씀이 이적보다 귀한 줄 몰랐던 것이다.
성 경: [요6:3]
⭕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여기 말한 "산"(*)은 언덕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갈릴리 바다의 해변 언덕을 가리킨다. 유대의 랍비들은 보통으로 높은 데 앉아서 그 제자들을 가르쳐 주었다. "제자들"은 열 두 제자를 가리킨다.
성 경: [요6:4]
⭕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유월절"에 대하여는 2:13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여기 "유월절"이란 말(*)이 모든 사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부들의 증거는, 이것이 없는 편을 지지한다. 홀트(Hort)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있는 것이 연대적으로도 자연스럽고 저자의 신학적 견지에서도 자연스럽다(Schlatter, Barrett).
성 경: [요6:5]
⭕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 예수님께서 눈을 드시고 큰 무리를 보신 것은, 그들을 위하여 무슨 좋은 일을 하시려고 그리 하신 것이다. "빌립"에 대하여는 1:44, 12:21, 14:8 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신 문제는 그의 신앙을 시험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빌립은 신앙적으로 이 문제를 취급하지 못하였다. 그의 당한 것은 모세가 주린 백성을 앞에 두고 당한 난제와 같으며(민 11:13,22), 엘리사의 종이 당한 것과도 같았다(왕하 4:42-43).
성 경: [요6:6]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 예수님께서는, 이 때에 자기의 권능으로 군중을 먹이실 대책을 벌써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육신을 먹이는 문제보다 영적 문제, 곧, 제자들의 신앙 교육을 더욱 중히 하셨다. 그는 빌립의 신앙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에게 문제를 주셨다. 그것은, 빌립이 그 군중의 가련한 정형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는 여부를 아시려는 시험이 아니다. 그것은, 비범한 방법으로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신앙 여부를 알아 보시려는 시험이었다(Grosheide). 이와 같은 시험은 신앙을 배양하는데 유익하다.
성 경: [요6:7]
⭕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므로 200 데나리온이면 상당한 금액이다. 빌립의 이 계산은 다만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것이다. 그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Godet).그는 일찌기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때에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의 권능에 대해서는 건망증이 많다.
성 경: [요6:8]
⭕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빌립과 안드레는 종종 함께 나타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고향 사람인 사실과 그들이 제자 중 가장 먼저 선발된 까닭인 듯하다. 12:20-22, 1:41-44 참조. 안드레의 말(9절)은, 이 부분 기사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곧, 그 때에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음식물이라고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으므로 이적으로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이 부분 기사가 이적이 아니고 단지 각 사람에게 있었던 음식물을 먹도록 하였다는 합리주의 해석은 안드레의 말을 위반하는 것이니,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성 경: [요6:9]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다. "물고기"라고 한 것(*)은 멸치와 같이 작은 고기라고 한다. 안드레도 여기서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현실주의 견지에서 낙심하고 만 것이다.
성 경: [요6:10]
⭕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 무리를 앉힌 것은 그리스도의 긍휼의 표현이며, 그들이 앉은 것은 그들의 순종이다. 그들은,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권위 있는 지도를 받으려고 감심으로 순종하였다. 언제나 신앙의 태도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권위(權威)를 믿고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 여기 5,000명이란 것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들만을 계수한 것이다(마 14:21). 이때에 남자들만 계수한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의 대표적 지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성 경: [요6:11]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란 말씀은, 그 제공한 다섯 개의 보리떡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전연 없는 데서 창조하심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가지시고 많게 하셨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감사하는 자리에 더 많은 축복이 임한다.
성 경: [요6:12,13]
⭕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 예수님은 선물을 관대하게 주시지만 낭비하는 것을 금하신다. 물질이 헛되이 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 유대풍속에, 식사에 봉사하고 남은 음식은 그 봉사자들의 분깃이 되었다고 한다(Lightfoot, Hor., 3,30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한 12사도들은 저렇게 필경 받은 상급이 컸다.
성 경: [요6:14]
⭕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 "그 선지자"에 대하여는 신18:15에 예언되었으니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기 때문에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15절 참조).
성 경: [요6:15]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았으나, 진리대로 바로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저희의 물질 문제나 해결하여 주실 메시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니, 그가 거기 응하시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그 떡 먹이신 이적이 얼마나 위대하였던 것을 증명해 준다. 그들이 그 권능을 본 뒤에는, 로마 정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막바로 예수님을 유대의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응하시지 않은 것은, 그가 군중의 메시아 관념이 육적인 것을 합당치 않게 보셨기 때문이었다.
성 경: [요6:16]
⭕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 -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하였다(마14:22). 그가 그렇게 그들을 지도하신 목적은, 그 자신이 홀로 떨어져 기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마14:23). 그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때를 도리어 위기(危機)로 보시고 기도에 열중하셨다. 이것이 그의 특이하신 점이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심이다. 사람들은 인기가 올라갈 때에 그것을 성공으로 알고 안심한다.
성 경: [요6:17]
⭕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 그가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않은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때에 제자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때에 예수님 없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구원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더 믿었어야 될 것이었다. 신32:11 참조.
성 경: [요6:18]
⭕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 지중해보다도 682피드나 낮은 갈릴리 바다에는 사방 높은 언덕사이의 골짜기로부터 강한 바람이 뜻밖에 불어오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풍랑 중에 있는 것은, 마치 교회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음과 같다. 예수님은 얼마동안 그 배로 찾아 오시지 않았으나, 마침내 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와같이, 환란중에 있는 교회도 마침내 주님의 권고로 말미암아 평안해진다.
성 경: [요6:19]
⭕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어떤 학자들은, "바다 위"란 말(* )이 해안을 의미한다고 하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러 오신 것이 아니고 바닷가의 언덕으로 걸어 오셨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는 이적을 기록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1) 제자들이 두려워한 까닭이며, (2) 공관 복음의 동일한 기사가 이적을 기록하는 심리를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막6:29; 마14:26).
성 경: [요6:20]
⭕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 "내니"란 말(*)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자신의 현림(現臨)하심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啓示)하심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안전과 평안이 있다.
성 경: [요6:21]
⭕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여기 "배는 곧"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므로 말미암아 또 다시 배는 초자연적으로 순조롭게 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연계를 통솔하실 수 있는 권능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마14:33 참조).
성 경: [요6:22]
⭕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 곧, 떡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아직 바다 이 편(저희 있는 곳)에 계신 줄 알고 안심한 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각에는, 제자들만이 거기 한 척 밖에 없었던 배를 타고 건너갔고, 바다 이 편에 남아 계셨던 예수님은 아직 머물러 계시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뜻 밖에도 예수님도 거기 계시지 않은 사실을 그들은 발견하게 되었다(24절).
성 경: [요6:23]
⭕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 이 귀절 말씀은, 그 무리가 어떻게 바를 건너 가게 된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본래는 배 한 척 밖에 없었으나, 그 뒤에 여럿이 왔으므로 그들이 그 배 편들을 이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기 알려진다. 이런 자세한 기록을 보아서도 이 사실에 대한 목격자였던 사도 요한이 이책을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요6:24]
⭕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 이 말씀을 보니,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지는 못하였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동기가 불순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찾는 동기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전해지는 여부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다(Grosheide).
성 경: [요6:26]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 부른 까닭이로다 - "진실로 진실로"란 말은, 그 장차 말씀하시려는 사실의 중대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무리가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그를 영적 메시야로 바로 안 까닭이 아니다. 그들은 떡을 위하여 따라 다녔던 것이다. 곧, 그들은,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떡 먹이신 그 이적에서 그리스도의 증표를 깨달음보다 물질적인 떡에 흥미를 가졌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적 만족을 위하는 때가 많다. 그것은 인간의 부패성의 결과이다.
성 경: [요6:27]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력(靈力)을 가리킨다. "인자"는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바 그가 살과 피를 희생하셔서 속죄하여 주시므로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게 된다. "인 치셨다"는 뜻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시고 인정하시고 신임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구주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다는 참람한 죄악이요,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이로 여기는 죄악이다.
성 경: [요6:28]
⭕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 여기 이른 바, "하나님의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일들"이란 뜻이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였다. 신앙은 일 아닌 일, 곧,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이다. 유대인들은 저렇게 인간의 힘으로 어떤 고등 노동들(하나님의 일들)을 하므로 영생을 얻고자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복수 명사를 사용하였으니, 일의 수량에 의하여 문제 해결을 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어떤 고등 노동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어리석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다(29절).
성 경: [요6:29]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인간에게 믿음을 가르친다. 특별히 우리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일들이 아님)하심은, 의미심장하다. 여기 단수 명사로 된 "일"(*)은 "그 일"이란 말인데, 모든 다른 일들 곧, 율법적인 일들과 엄격히 구분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무슨 내용을 가진 신앙인가? 그것은, (1)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신(神)이심을 믿음.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성육신(成肉身)하여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리신 무의 무정(無意無情)하신 이로 오해하는 자이다. (3)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눈과 귀로 친히 보며 듣는 것과 같이 믿음.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진자이니, 그로서는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남들의 권면을 받지 않고도 믿었고 (창 18:9-15; 롬 4:19-21), 수로보니게 여자는 하나님의 권면 없이도 믿었고(마 15:22-28), 노아는 경험한 바 없이도 홍수에 의하여 세상이 망할 것을 믿었다(히 11:7).
성 경: [요6:30]
⭕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일찌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곧, 신학적 문제에 접촉하였고, 이제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문제 곧, 구원론에 접촉하여 각각 불신앙을 나타냈다(Godet).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통하여 표적다운 내용을 보지 못하였다.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에 그의 거절하신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낙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메시야 아닌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표적을 찾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격이 이 세상의 정치적 임금이 아닌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의 무리에게 먹이신 표적(메시야 표적)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으니, 유감스럽다(26절).
성 경: [요6:31]
⭕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출 16:15; 시 78:24 참조. 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을 보니, 그들은 지도자들이었든지, 혹은 서기관인 듯하다(Belser). 그들은, 메시야가 온다면 또 다시 만나를 내려 먹게 해 줄 것으로 잘못 알았다(Midrash Koheleth, P.73).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간접적으로 청원한 것이다.
성 경: [요6:32]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을 쓰실 때에 만나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신령한 떡,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로써 옛날의 물질적인 떡 곧, 만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저 유대인들은, 만나보다 더욱 위대하신 떡("참 떡" 곧,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음에 대하여 불신앙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 경: [요6:33]
⭕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여기 "하나님의"(*)란 어귀가 강세(强勢)를 띤 말이라고 한다(Goebel). 그렇다면, 이 어귀가 그 "떡"을 가리켜 그 영성(靈性)과 그 영원성과 생명성과 및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고조한다. "하늘에서 내려"란 말씀이, 이 부분 예수님의 교훈에 일곱 번 나온다(33, 38, 41, 42, 50, 51, 58).그 만큼 이 말씀은 역설체(力說體)로서 그 떡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곧, (1)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 만큼 광범위한 세계에 분배된다. (2)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만나는 영양을 줄 수 있었으나 하늘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3) 만나는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생명의 떡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다(Calvin). (4)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내려오는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양식은 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내려온다.
성 경: [요6:34]
⭕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이것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불신앙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 떡"이 육신의 양식인 듯이 오해하고 욕심을 부린다. 여기서 그들은 그것을 "항상" 주시기를 청원한다.
성 경: [요6:35]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 (1)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먹는 행위와 같이 실제적이어야 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먹음으로 우리의 주린 것을 멈추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 기갈이 멎어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 것처럼 믿어 그를 내 분깃으로 섭취해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이론만 알고 그를 내게 섭취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큰 곡창(穀倉) 문 앞에서 굶어 죽는 것과 같은 가석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해야된다. 작년 이 때 먹은 것이 오늘의 주림을 멈추어 주지 못한다. 신앙 생활을 먹고 마시는 행동에 비유한 것은, 성경에 많이 있다. 사 55:1에도 말하기를, "너희 목 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다. 계 3:20, 22:17 참조.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란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신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란 뜻이다. 그는 주시는 자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Zahn). 그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도 되신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제의 효과를 받아 누리며 따라서 그와 일체(一體)되도록 밀접히 연합하게 된다. 그가 자기를 떡에 비유하신 이유는, 음식물은 그 먹는 자와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란 말과 "나를 믿는 자"란 말은, 서로 병행하여 동일한 뜻을 가리킨다.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한 영적 동태(靈的動態)를 말함이고, 믿는다 함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합해 있음을 가리킨다(Grosheide,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439).
성 경: [요6:36]
⭕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26절의 내용에 암시된 뜻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 것을 본다고 반드시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이 믿는 데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다(요 20:29). 벧전 1:8-9 참조.
성 경: [요6:37-40]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이유가,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권위가 부족한 탓이 아니고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 (2) 믿는 자들은 그들의 의지력(意志力)으로 믿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니 만큼, 그 구원이 확고 불변하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그러므로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것을 소유한 것이 벌써 확실한 구원 소유인 줄 알고 위로를 받는다. 딤후 1:12에 말하기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하였고, 빌 1:6에도 말하기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위대한 신앙가요 과학자인 미카엘 파라디(Sir Michael Faraday)는, 임종시에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영혼이 장차 어떻게 되겠다고 추측합니까?"하고 물을 때에 그는 대답하기를,"추측? 나는 추측에서 살지 않는다. 나는 확신에서 살고 있노라"고 하였다. 어떤 성도는 늘 기쁘게 노래하기를, "나는 가련한 죄인이고 그 밖에 아무 것도 아니로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령한 체험이나, 혹은 도덕 생활에는 굴곡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죄인인 사실은 변치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사실도 변치 않는다. 혹시 우리의 도덕 수준이 올라갔다 해도 죄인임을 면치는 못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다. 히 13:8에 말하기를,"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다. 진실한 성도들은, 끝까지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건다. 해버갈(Havergal)이란 성도는, 임종시에 자기 친구더러 사 42장을 읽어 달라고 하였다. 그 친구가 읽을 때 그는 6절 말씀에서 주의를 시켰다. 곧,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한 말씀이다. 그는 이 말씀에서 "불렀다"는 말씀, "손을 잡았다"는 말씀, "보호한다"는 말씀을 맏고 세상을 떠난다고 고백하였다.
성 경: [요6:41,4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가 자기를 가리켜, "하늘로서 내려 온 떡"이라고 말씀하심을 듣고 원망하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위대(偉大)를 그의 인간성 때문에 의심한다. 그러나 그가 인성을 취하신 것은, 인간들에게 나타낸신 그의 지극한 사랑이다.
성 경: [요6:44]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지못한 이유는, 그 실상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서 오신 증표가 없는 까닭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으신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동시에, 그의 백성도 이끌어 그에게(그리스도에게)로 모으신다(호 11:4). 이끈다 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를 가리킨다(롬 8:9; 고전 3:16, 6:19, 12:3; 요일 3:24). 그 때는 아직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이었음으로 여기서는 성령의 인도에 관한 말이 사용된지 않았다.
성 경: [요6:45]
⭕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선지자의 글"은 사 54:13을 가리킨 것이다. 우리와 신학처지가 다른 버나드(Bernard)도 이 귀절에 대하여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려면 진리를 배워야 되고, 한번 듣기만 해서는 신자가 되기 어렵다. 예정의 도리가 요한 복음에 있으나 이렇게 인간편의 책임있는 노력을 무시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말하였다.
성 경: [요6:46]
⭕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 윗절에,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로 한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직접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 사자들로 말미암은 전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에게로 오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자 곧, 예수님 뿐이시다. "하나님에게서"란 문구의 "에게서"란 말(*)은 본래의 근원으로 부터 관계된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만 사용될 말이다. "보았느니라."이 말의 헬라 원어(*)는, 보았고 또 그 본 결과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보셨고, 또 그 보신 사실이 그에게 계속해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자가 없다(1:18, 14:9; 마 11:27).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셨고, 또 그의 말씀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성 경: [요6:47,48]
⭕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믿는 자"란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란 뜻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문구의 짧은 것을 가리켜 사상의 표현을 강력하게 하려는 문체라고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간단 명료한 진리 표현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이 문구에 대하여는 35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6:49]
⭕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예수님도 인간 편으로는 유대인이고,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의 조상도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할 때에, 그들과 그들의 조상은 불신앙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물질적인 만나와 달라서 영적인 하늘떡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자들은 영생한다.
성 경: [요6:50,51]
이 귀절들은, 33, 35절에 있는 말씀을 거듭한 셈이다. 중언체(重言體)는 역설체(力說體)이다. "내 살"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임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성 경: [요6:52]
⭕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원인은, 그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데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속죄 교훈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살이 세상 사람의 생명이 된다는 말씀(51절 끝)에 걸렸다. 그들은, 메시야가 죽어서 속죄하시는 진리를 왜 믿지 못했던가? 그 진리는 이사야서 53장에 명백히 예언되지 않았는가?
성 경: [요6:53]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세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여기서는, "인자의 살"이란 말에 "인자의 피"란 말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었인가? (1) 그것은, 살과 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전체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으니, 그것은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신 것이다. (2) 피를 첨부하여 말씀하신 또 한가지 이유는, 피는 특별히 생명을 의미하는데 (창 9:4; 레 17:11,14), 그것을 흘리셔서 속죄 제물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출 12:7,8; 레1:5; 히9:12,20).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적 의미보다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은, 곧,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마시는 행위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나 자신의 분깃으로 만드는 실제적 행위이다. 신앙은 이론 뿐이 아니다. 이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 성찬 교리에 대하여, 불트만(Bultmann)은, 그것이 헬라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Theology of the New Testamant I, p.148). 그러나 헬라 신비 종교에서 그 의식에 참여한 자들이 신(神)을 먹는다고 한것(그들의 신으로 표상된 소위 고기 같은 것을 먹는 것)은, 범신론 사상과 마술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 먹음에 참여하는 자가 신(神)이 된다는 그릇된 주장도 거기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찬은 그와 정반대로서 유신론적인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찬은, 구약에 있는 유월절 잔치의 후신(後身)이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바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것을 성찬으로 변전시키신 것 뿐이다(눅 22:7-23). 요 6장에서 신자들이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실 필요성에 대하여, 그가 강조하신 때도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다(4절). 그 뿐 아니라, 유월절 잔치의 영적 의미가 성찬의 그것과 같다. (1) 유월절 잔치를 먹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구속을 준 것처럼(출 12:13), 성찬을 먹는 것이 기독 신자에게 그런 의미를 가지며, (2) 유월절의 만찬이 애굽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양식이 된 것처럼, 성찬은 기독자에게 영적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면, 성찬과 헬라의 신비 종교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헬라의 신비 종교들 중 다요니시스(Dionysys)란 신을 예배하는 제사에서는, 거기 참여하는 자들이 그들의 신을 상징하는 소의 고기를 생으로 먹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므로 그들 자신이 신화(神化)한다고 믿었던 것이다(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pp. 281-282). 이런 사상은 범신론(汎神論)으로서, 유신론(有神論)인 기독교와 반대된다.
성 경: [요6:54]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헬라 원어에 의하면, 여기 "먹고"란 말(*)이 이때까지 사용된 먹는다는 말(*)과 다르다. 여기 사용된 말은 맛있게 먹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 누림에 대한 적합한 술어이다. 이 귀절 말씀은, 기독 신자가 이 세상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내세에는 몸의 부활까지 받는, 구원의 복락 전부를 가리킨다.
성 경: [요6:55]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여기 "참된"이란 말이 사용된 목적은 이렇다. 곧, 만나와 같은 물질적 양식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속죄의 은혜)는 참되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곧, 물질적 양식은 그림자와 같고 물완전하나,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는 실물이요 영원히 살리는 효과를 가진 것이다.
성 경: [요6:56]
⭕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자가 주님과 연합하게 됨을 가리킨다. 요한의 신학 사상대로 보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1) 주님의 계명을 지킴(요일 3:24), (2)주님을 본받음(요일 2:6), (3) 열매를 맺음(요 15:2), (4) 죄를 범치 아니함(요일 3:6), (5) 기도 응답을 받음(요 15:7), (6) 생명을 가졌음(요 6:57), (7)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담력을 가진다(요일 2:28).(Bernard,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of St. Jhon, p. 212)
성 경: [요6:57]
⭕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는 영원 자존의 생명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다만 중보자(中保者)로서의 그의 처지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위치에 계신 것 만큼,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는 아버지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영원 자존하신 것 만큼, 그도 그러하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과 같이 실제적으로 믿어야 그의 생명을 받아 누린다.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자연계의 생명의 열매가 떡덩이로 나타날 때에 사람에게 섭취됨과 같이, 신적 생명(神的生命)도 그리스도로 화육(化肉)되어 나타났으므로 우리에게 접촉되어 받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떡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떡도 먹어야 우리의 생명 영양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였다.
성 경: [요6:58]
이 귀절은, 32-33 절 말씀 내용이 거듭 나온 셈이다. 같은 말씀을 거듭 하는 것은, 그 말씀을 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리한다.
성 경: [요6:60]
⭕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가 있느냐 한대 - 그들이 듣기 어렵다는 부분은 어느 말씀이가? 그것은 58절 말씀이 대표한 사상, 곧,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한다는 말씀이다.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시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것이 어려운 문제란 뜻이다. 그 말씀 뜻이 어렵다고 하므로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라고 하셨다(62절). 곧, 그가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므로 사람들로 거듭 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게 하여 살리신다는 뜻이다.
성 경: [요6:61]
⭕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시는 것만큼, 그 때 그들의 불평을 아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영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않고 육적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말씀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벧전 2:7-8).
성 경: [요6:62]
⭕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 있다. (1) 여기 이른 바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가리키는데(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시 살아 승천하심에 이르는 한 계단임), 그 때에는 그들이 더욱 예수님을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2) 예수님의 속죄에 대한 말씀이 피와 살로써 설명될 때에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승천하셔서 그의 속죄를 영적으로 이루시며 나타내실 때에는 더욱 깨닫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Westcott), (3)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때에 저희는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시는 내막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과 같은 속죄 신앙의 효과가 그의 승천하시는 때에 확실히 성립되고야 만다는 것이다. 여기 "볼 것 같으면"(*)이란 말은, 하필 육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심령의 눈으로 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신앙을 육안(肉眼)으로 본 것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들음에 근거하도록 한 것이다(Er band den Glauben nicht an das Sehen, sondern an das Horen des Worts.-Schlatter, Der Evangelist Johannes, P.181).
성 경: [요6:63]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새로운 선언이다(Schlatter). 이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를 시정하는 것이다. 살을 먹는다 함은, 육체적 식음으로 오해할 것이 아니고 영적 식음(靈的食飮)으로 간주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것으로서 살리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다.
성 경: [요6:64]
⭕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제자들 중에 불신앙 사실이 있음을 지적하시어 그들을 경성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알게 될 때에 경성하게 된다.
성 경: [요6:65]
⭕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그의 주장이 저렇게 탁월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모순을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다. 곧, 예수님을 안믿는 원인은,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불충분하여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작정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성 경: [요6:66]
⭕ 제자 중에 많이 물러 가고 - 이 귀절에 대하여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그들이 생명체와 교제를 끊었으니 만큼 그들의 생명은 떠났다"고 하였다. 고데이(Godet)는 이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의 메시야 역사(役事)의 비결이 나타난 것을 지적하였다. 곧, 이렇게 오합 군중(烏合群衆)은 일단 헤어질대로 헤어지고 소수(少數)만 남게 된다. 기드온의 300명 군대는 많은 군대보다 오히려 유력하였다.
성 경: [요6:67]
⭕ 너희도 가려느냐 - 열 두 제자는, 외부적 관계로 볼 때에 언제든지 모두 다 예수님을 따를 듯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외부적 관계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염두에 두시고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 곧, 그들도 늘 경성하여 있을지언정 방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여기 암시하신다.
성 경: [요6:68]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 "영생의 말씀"이란 것은 6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베드로는 언제나 모든 제자들 중에서 대표자 격으로 솔선하여 나서곤 하였다(13:6,24,36,18:10,20:3,21:3,7; 마 14:28).
성 경: [요6:69]
⭕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란 말은, 메시야의 성역을 위하여 성별하여 보내심이 된자란 뜻이다. 막 1:24; 눅 4:34; 사 43:14 참조.
성 경: [요6:70,71]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주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이 말씀은, 제자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너무 자신 있게 지나지 말아야 할 것을 암시하신다. 그가 택하신 열 두 사도 중에도 넘어질 자가 있다고, 그는 경고하신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신 것은, 그가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리라는 의미이다.
성 경: [요7:1]
⭕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 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 다니신다는 말은, 제자들과 성역(聖役)하시고 계심을 가리킨다. 그는 때가 되기 전에 일부러 위험 중에 들어가시지 않은 것이다. 박해를 당할 때 구차스러이 면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일부러 박해를 청하여 받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
성 경: [요7:2]
⭕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초막절"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에 거주한 사실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명절이다(레 23:34).
성 경: [요7:3]
⭕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 일설에, 여기 기록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보다 연로한 자들이었다고 하나(Bernard), 성경적이 아니다(눅 2:7). "제자들"이란 말은 12제자 밖에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저런 말을 한 것은, 예수님에게 또 한 번 고통을 드린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명예주의자로 오해하고 저렇게 권면했다. 그들이 예수님과 형제 관계이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그의 형제들의 권면은, 마치 저 떡 먹은 무리가 그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던 것과 같고(6:15),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 만국을 주겠다고 한 마귀의 시험과도 같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엄밀하게도 하나님 중심이었지만, 그 형제들은 이 세상주의로 행하였다.
성 경: [요7:4]
⭕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 이 말은 이 세상 처세술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인본주의에서 취할 원리이다. 신본주의에서 행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그대로 움직인다.
성 경: [요7:5]
⭕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 행 1:14을 보면, 그들이 후에 믿는 자들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현재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 이른바 "믿지 아니함"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아니함을 말함이다. 신앙은 혈통 관계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엡 2:8).
성 경: [요7: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 여기 "내 때"란 말의 "때"(*)는, 여기서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시간을 가리킨다(Grosheide). 이것은 주로 예수님의 수난 시기(受難時期)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의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시기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시키시는대로 하신 것이다(5:19,30). 그 이유는, 그는 아버지와 일체(一體)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인 만큼, 언제든지 그들의 원대로 행하는 그 때가 그들의 때이다. 그들은 굴레 벗은 송아지와 같아서 자율주의로 덤빈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겨와 같이 가벼운 것이다.
성 경: [요7:7]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 이 세상은 타락하여 본질적으로 악해졌으므로 완전히 선하신 예수님과 정반대이다. 거기서 예수님은 미움을 당하신다(창 3:15). 그가 미움을 당하시는 사실이 도리어 그가 세상의 구주 되신 증표이다. 우리는, 그의 미움 받으신 사실을 보고 도리어 그를 진심으로 믿어야 된다.
성 경: [요7:8]
⭕ 이 귀절에 대하여는 6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7:9]
⭕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그의 머무심은, 그 어떤 다른 힘이 변동시킬 수 없는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 밖에 다른 것이 없다.
성 경: [요7:10]
⭕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교훈하실 때에는 비밀히 하시지 않고 공개적으로 하셨다(26,28,18:20).그런데, 그가 올라가실 때에 비밀히 하신 것은, 도중에 원수들의 위험이 있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는 때가 이르기 전에 그의 생명을 함부로 내버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성 경: [요7:11-13]
⭕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 명절에 모인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조심하였다. 그 이유는, 종교 지도자들의 의견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대하여 옳은 의견도 공적으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진리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한 잘못이다.
성 경: [요7:14]
⭕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 이 명절 기간은 한 주간이었다(레 23:36). 이제 그 중간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였을 것이다. 이 때에 그는 가르치기를 시작하셨다.
성 경: [요7:15]
⭕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 여기서 "글"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문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갈 6:11), 성경을 의미하기도 하나(딤후 3:15), 여기서는 학문을 가리킨다(W.Hendriksen).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의문은, 그의 교훈이 권위(權威)있기 때문이었다(마 7:28-29).
성 경: [요7:16]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 예수님께서 만일 자기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라고 하셨더라면, 서기관들은 그를 가리켜 속이는 자라고 하였을지 모른다(Bernard). 그러므로 그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교훈을 그대로 말한다고 하신다. 그는 나면서부터 아는 이라고 하기보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말씀하시는 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하여, 또는 아버지의 뜻을 대언하시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7:17]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방법에 관하여 말한다. 그 방법은, 사람의 지능(知能)을 첫째로 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 윤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말씀을 행하려고 하는 자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것인 줄 알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의 교훈을 알 수 있는 자는 지능의 인물이거나 혹은 통찰력의 소유자가 아니고, 그 말씀을 행하려는 자라고 하셨다. 영적 지식을 얻는 방법에는 이렇게 종교 윤리적인 것이 먼저 관계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론이 첫째가 아니고 순종이 첫째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좋은 학교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7:18]
⭕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 즈안(Zahn)은, 여기 "스스로 말하는 자"란 것은 그 때의 불신 유대인을 가리키고,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란 것은 예수님을 가리켰다고 하였다. 불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생각하며 말하였다. 그들이 구약 성경을 존중히 하는 듯하며 그것에 기준하여 말하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그것을 자기들의 사욕을 위하여 그릇되이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율주의 자들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는 처지(보내심을 받은 처지)였으니 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시는 처지(보내심을 받은 처지) 였으니 만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만 대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참되고 그의 행동 원리에 불의가 없다. 그는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명대로 순종하시니, 그 사실(보내심을 받은 사실) 앞에서 참되시고 또 불의함이 없다. 일반인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생활을 하는 자라면 비교적 참되고 불의함이 없다. 그 이유는, 그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히 행하기 때문이다. 8:29,49-50,54,16:32 참조. 참되고 불의가 없는 생활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경건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및 그를 믿는 사람의 생활이다. 그러나 참되지 못하고 불의한 생활(불의로 진리를 막는 생활)은 모든 경건치 못한 자들의 것이다(롬 1:18).
성 경: [요7:19]
⭕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 이 귀절부터 24절까지는, 윗절 끝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는 불의가 없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변증하신다. 곧, (1) 자기의 반대편인 유대인들 측에 불의가 있다는 것.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겨 가면서, 율법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를 죽이려고 하니, 그것이 불의하다. (2) 예수님께서 안식에 병자를 고치신 것(5장)은 율법을 어김이 아님. 만일 그것이 율법의 안식법을 어긴 것이라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그것이, 종교 의식으로서 혹은 사람을 위생적으로 돕는 자비의 일로서 허용된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자비의 일로서 허용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저것이 정죄되지 않는 한, 이것도 정죄되지 않는다(21-24).
성 경: [요7:20]
⭕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독한 미움을 품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저희 마음 속에 숨은 악독을 몰랐다. 그들은, 도리어 그들의 악을 바로 지적하신 예수님을 미쳤다고 지적하며,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하였다. 불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모든 불신앙의 사람들은 무언 중에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욕하는 자들인 셈이다.
성 경: [요7:21]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 여기 "한 가지 일"이란 것은,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을 가리킨다(5:10). "괴이히 여긴다"함은, 그들이 불신앙으로 인하여 도리어 놀람을 가리킨다.
성 경: [요7:22]
⭕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 할례가 모세의 법(구약 율법)에 제정되어 있다. 그 만큼 그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실상 모세 이전 부조 시대(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대)부터 내려온 법이다(창 17:10,21:4; 행 7:8). 유대인은 부득이 하여 안식일에도 이 법을 지키는 일이 있었다. 곧, 그들은 난지 8일 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는데, 제 8일이 안식일에 해당하면 그것을 그 날에도 행한 것이었다(Rabbic Akiba).
성 경: [요7:23]
⭕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 여기 나타난 대조를 해석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있다. (1)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도 하나의 의식적 제도인 할례를 행한다면, 행치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으랴? (2) 할례는, 의식적(意識的) 의미로 그것을 받는 자의 한 지체에 축복이 된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은, 그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3) 그리고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할례는, 그것을 받는 자의 한 지체를 위생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정도이지만,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그 사람의 온 몸을 건강하게 하셨다고 한다. (4)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할례를 위생적 유익에 관계된 일로 생각하지 않고 영적 유익에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하기를, "할례는 다만 그것을 받는 자에게만 영적 유익을 주지만, 그리스도께서 38년 된 병자의 온 몸을 고치신 일은 모든 시대를 통한 교회에 유익을 주는 계시이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p.516).
성 경: [요7:24]
⭕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외모로만 본다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죄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안식일에 할례 받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저것이 죄라면 이것도 죄이다. 이 문제는 공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성 경: [요7:25,26]
⭕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 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실은, 여기 예루살렘 사람의 증거로도 알려진다. 그러므로 20절의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한 군중의 변명은 무식한 말이다. 예수님께서 드러나게 말씀하셔도 당국자들(유대의 지도자들)이 그를 잡지 못한 원인은, 때가 이르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은 까닭이었다(30절).
성 경: [요7:27]
⭕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이것은, 예수님 나시기 전 중간 시대에 나온 계시 문학에 있는 사상인 듯하다. 계시 문학에는,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구름에서 나타난다", 혹은 "해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제 4 에스라 7:28,13:32).
성 경: [요7:28,29]
⭕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내력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인성(人性)편의 역사와 환경을 아는데 불과하였다. 그것은 예수님도 인정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관계된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그(그리스도)를 배척하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그 앎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심이다. 하나님(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을 참으로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가 진정한(*)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실도 참되다는 뜻을 가진다(Grosheide). 그가 참으로 메시야이신 것 만큼, 사람들은 그를 절대로 믿어야 된다. "내가 그에게서 났고,"이 문구의 헬라 원어(*)는, "내가 그에게서 왔고"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에 "났고"라는 개념은 도무지 들어 있지 않다(Calvin). 이 문구의 강조점은, 그가 하나님을 아시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참되시다는 것이다.
성 경: [요7:30]
⭕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그는 많은 위험으로 포위되었으나 잡히우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아직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위험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보호하신 것이, 여기에도 나타났다. 그는, 일반 신자들에게 대해서도 꼭 마찬가지로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을 가장 위험한 줄 알고 경계해야 된다.
성 경: [요7:31]
⭕ 무리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 그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가 있었던 반면에(30절), 그를 믿는 큰 무리도 일어났다(31절). 진리가 박해를 당할 때에 택한 백성들은 자던 잠을 깨어 진리편으로 오는 법이다. 어두운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와 오는 것처럼(롬 13:12), 죄악이 혹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정의감이 일어나게 되면서 진리 편에 가담하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 받을 믿음을 가지게 될 근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예택을 받은 사실에 달렸다. 6:37, 44 참조.
성 경: [요7:32]
⭕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 "수군거리는 것"은 윗절 하반에 기록된 내용과 같은 것이겠다. 그렇게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제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를 잡으려고 한다. 종교가들도 부패하면 저렇게 남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악독을 발한다. 좋은 것이 썩으면 더욱 괴악하여지는 법이다.
성 경: [요7:33,3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 이것은,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역사하시는 기간이 길지 못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는 하늘에 가실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 그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가시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그는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예수님을 해하려는 자들의 종국(終局)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여 찾는 신자들은 벌써 어느 정도 그 (예수)를 소유하고서, 더욱 풍부히 그를 소유하기 위하여 찾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찾음은 헛되지 않다. 이 세상의 우물에 물을 길러 가는 자는 물을 못 길어 올때가 있어도, 구원의 생수(예수)를 얻으려고 찾아 가는 자들은 언제나 기쁨으로 찾아 만난다.
성 경: [요7:35,36]
⭕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 유대인들은,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서 잘못 생각하기를,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란 말은, 헬라와 기타 외국에 분산하여 사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외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천하게 보았으며, 특히 이방인(헬라인)들을 멸시하였다(Bernard). 그러므로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란 말은, 예수님의 권위를 업신여긴 말이다. 그들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하신 무서운 말씀 앞에서도 두려워 회개할 줄 모르고, 오만한 태도로 그저 한 번 의문하고 지나간 것이다. 불신앙은, 이렇게 내세(來世)에 당할 일에 대하여 둔감(鈍感)하다.
성 경: [요7:37]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초막절은 한 주간이지만, 거기 하루를 더하여 8일 동안 지켰다(레 23:36; 민 29:35). 유대인들은, 이 초막절 기간에 매일 실로암못에서 물을 길어 가지고 행렬을 가지고 행렬을 지어 성전 문에 돌아와서 물을 붓는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광야에 있을 때 바위에서 이적으로 솟아나온 물을 기념하는 뜻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초막절 행사와 관련하여 영적 생수에 관한 설교를 하셨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말씀이다. 이것은, 메시야로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권위는 마 11:28 말씀과 같다. 사 55:1 참조.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만이 인류의 갈증을 멈추어 주실 수 있음이 확실하다. 인간은 작은 자이지만, 그의 소망과 요구는 무한한 것으로야 채울 수 있다(전 3:11). 이 무한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인류의 갈증을 참으로 만족시키신다는 사실은, 약 2,000년 동안의 진실한 기독 신자들의 경험이 증거한다.
성 경: [요7:38]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어떤 학자들은, 이 귀절 초두에 있는 "나를 믿는 자"란 말을, 앞절 끝의 "마시라"는 말의 주격으로 올려 붙인다. 그것이 문법상으로 가능한데,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그 뜻은, "나를 믿는 자로 마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 "그 배에서"란 말을 "그리스도의 배에서"란 뜻으로 간주한다(Lagrange, Bultmann, Wikenhauser). 옛날 교회에서는 히폴리트(Hippoliyt)가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나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함이 옳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강수처럼 풍성히 전달해 준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말씀은 다음 성귀들을 기억하게 한다. 곧, 사 43:20, 44:3, 55:1,58:11; 겔 47:1-12; 욜 3:18; 슥 13:1, 14:8등이다. 여기 이른 바 "그 배에서"란 말은 성령님께서 신자의 가장 깊은 심령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생수"는 성령님을 비유하는데, 이런 비유가 성령님의 인격성을 제외함이 아니다. 요한 복음은 성령님의 인격성(人格性)을 밝히 말하고 있다(1:33, 3:34, 6:63).
성 경: [요7:39]
⭕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영광을 받음"에 관한 말씀은, 여기서는 특히 그의 승천을 가리킨 것이다. 14:26,16:7을 보면, 성령님의 강림은 그의 승천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뷕셀(Buchsel)은, 여기 "영광"이란 말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까지 포함한다고 하였다(Theo., S.74). 슐라테르(Schlatter)는, 이 귀절들(37-39)에 있는 성령 관설은 그리스도의 말씀 운동, 곧, 신약 시대의 전도 운동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Theo., d. Apost., S. 152). 그러나 여기 이 말씀은 신자에게 대한 성령님의 내적 역사, 곧, 거듭 나게 하는 역사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역사하셨으나, 신약 시대의 역사는 그 성격이 특이하다. 이 시대(오순절 때)에 임하신 성령은 강수와 같이 풍성하고, 교회 안에 유하시며 교회를 근거점으로 하고 일하신다(Grosheide, Hij in de gemeente woonte en uit de gemeente werkt.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535).
성 경: [요7:40-43]
⭕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 인간들은 죄로 인하여 어두어졌기 때문에,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해서도 저렇게 견해가 달라졌다. "그 선지자"란 말은 모세가 예언한 바(신 18:15) 메시야 명칭이다. "다윗의 씨." 삼하 7:12 참조.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미 5:2 참조.
성 경: [요7:44]
⭕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 그들은 진리를 신앙하므로 구원 받기를 원치 않고 도리어 그를 잡아 치우려고 한다. 그것은, 어두움이 빛을 물리쳐 보려는 어리석은 일이다.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진리의 존재가 괴로운 것이 되어진다(계 11:10).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눌러 보려고도 하며, 잡아 치우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멸망을 자취함이다. 그들이 그 때에 그를 잡지 못한 원인은 아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성 경: [요7:45]
⭕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 오지 아니하였느냐 - 여기 나타난 그들의 질문을 보아서,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해하려는 마음으로 불 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요7:46]
⭕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 하속들(성전 경비원들)의 느낌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그 말씀은 권세 있는 자의 말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마 7:29). 그러므로 저 하속들도 압도되어 그를 잡지 못하였다.
성 경: [요7:47]
⭕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 예수님을 잡으려던 하속들은, 그래도 그의 말씀 앞에 압도를 당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미혹된 자들이라고 한다. 그 만큼 바리새인들은 더욱 강퍅하였던 사실이 드러난다.
성 경: [요7:48]
⭕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 이 점에 있어서 어거스틴(Augustine)은 해석하기를, "그 때에 율법을 모르는 무리는 도리어 율법의 제정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율법을 가르치노라고 하는 자들은 그를 정죄하였다. 그것은, 그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시리라는 말씀(9:39)의 성취이다"라고 하였다(Catena Aura IV,P.279).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진리의 표준인 듯이 여기서 호언 장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그들의 시기로 인하여 발표된 역설(逆說)이다.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의 죄악에 미혹되었다. 그들의 이 말은 그 자리에서 모순된 것으로 탄로된다. 곧, 그들의 이 말 끝에, 그들중 하나인 니고데모가 그리스도 신앙의 방향으로 돌아온 표를 나타내었다(50-51). 여기에 따라서 그들의 호언 장담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 경: [요7:49]
⭕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켜 율법을 모르는 자라고 망단(妄斷)한다.
성 경: [요7:50,51]
⭕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 니고데모의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호언 장담한 내용, 곧,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 믿는 자가 없다는 주장(48절)을 수포화시켰다. 그 이유는, 니고데모는 관원이요 바리새인(3:1)이면서도 이 때에 예수님을 변호할 정도의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이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또 한 가지 호언 장담, 곧, 자기들딴은 율법을 안다고 하면서 율법을 모르는 무리를 저주한 것도, 니고데모의 이 말 한 마디로 인하여 헛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남들을 율법 모르는 자들인 사실이, 니고데모의 이 말로 확증되었다. 그들은, 남들을 정죄하려다가 도리어 자기들 자신을 정죄한 셈이다. 신 1:16; 출 23:1-3 참조.
성 경: [요7:52]
⭕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 그들이 니고데모를 업신 여기는 태도로 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모순된 말이니, 율법과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식을 자증한 것 뿐이다. "상고하여 보라"는 것은 율법책(혹은 성경)을 상고하여 보란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도전적으로 자기들딴은 율법이나 성경의 권위자인 듯이 자처하며 남들을 무시한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그들 자신의 무식이 여기 이 말로 나타났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못하느니라"고 한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 9:1 참조.
성 경: [요7:53]
⭕ 이 귀절은, 8장 초두에 취급된 사본 문제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 경: [요8:1]
⭕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이 중요한 사본들(* , B, L, T, W)에는 없고, 중요하지 않는 사본들(D, E)에만 있을 뿐이다. 알포도(Alford)와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이 부분이 진정한 역사성을 띠었지만 요한의 친필은 아니고, 구전적(口傳的)으로 돌아가던 것이 여기에 삽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7:53-8:11)의 순정성(純正性)을 변호한 학자들도 있다(I.W. Burgon, C.H. Van Herwerden, J.J. Van Oesterzee etc). 헨드릭센(Hendriksen)에 의하면, 이 부분을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의 이유는, (1) 여기 있는 어떤 낱말들이 요한의 기록한 다른 책들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2)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이 중요한 사본과 번역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롸벌트손(A.T. Robertson)은, 이것이 본래는 변주(變註)에만 있던 것인데 후에 서사자(書寫者)의 잘못으로 본문에 삽입되었다고 한다(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25, p.154). 그러나 이 부분이 요한 복음의 순정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들 수 있는 이유는, (1) 여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시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8장에 가르치신 바 진리가 죄인을 놓아준다는 사상(32절)과 부합한다. (2)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Papias)도 이 부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하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말하기를, "파피아스가 히브리 복음에 있는대로 주님 앞에 고소 당한 많은 죄 있는 여자에게 관한 이야기도 해석하였다"고 하였다(Ecclesiastical History, III. 39:17). (3)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사본에서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뽑았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자들이 그 이야기를 근거하고 정조 없는 행동의 구실을 삼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라고 하였다(De Adulternis Conjugiis II. 7). 이 점에 있어서 헨드릭센(Hendriksen)은 결론하기를, "여기 기록된 것이 확실히 역사적으로 있는 사건이었겠고, 거기 포함된 사상이 사도적 사상과 충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의 복음에서 제외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마땅히 보수해야 된다. 전도자들이 이 부분 말씀에 근거하고 설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II. pp. 33-35).
성 경: [요8:2]
⭕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 그가 감람산으로 가신 것(1절)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겠고, 일찌기 성전으로 들어오신 것은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하심과 가르치심은 그의 주요한 일이었다.
성 경: [요8:3,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흠을 잡아 보려고 애쓴 자들이었다. 그들은, 범죄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잔인한 월권행위를 감행하였다. 죄인은 법정에서 취급되어야 하는데, 법관이 아닌 그들로서 죄인을 끌고 다닐 권리는 어디 있었는가?
성 경: [요8:5]
⭕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레 20:10; 신 22:22 참조. 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진실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 것이면, 로마의 정권을 거스리게 되었을 뻔하였다. 그 이유는, 그때에 로마의 정권이 유대 민간에게 사형 집행권을 허락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일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린 자라는 죄인 취급을 받으실 뻔하였다. 유대인들은 저렇게 교묘하게 예수님을 딜레마(Dilemma=窮地)에 빠뜨리려고 시험하였다.
성 경: [요8:6]
⭕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로마 법에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으니 만큼,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하라고 명하신다면 로마 법에 걸리게 되고, 모세의 법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에 걸리게 될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예수님께서 글을 쓰신 일은, 이 사건에 관련하여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 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성 경: [요8:7]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함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실언하시는 허물을 찾아 보려는 간교한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것은, 그 여자보다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하라는 말씀과 같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범죄자를 취급하는 새 계명(사랑)의 원리이다(갈 6:1). 이 말씀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한 말씀과 같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저희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다.
성 경: [요8:8]
⭕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혹설에, 그 때 그 쓴 글은 거기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름이었겠다고 한다. 그들의 이름을 땅에 쓰신 목적은, 그 이름의 소유자들이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라고 한다(렘 17:13). 그러나 이런 해석은 추측에 불과하다.
성 경: [요8:9]
⭕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그들의 나가게 된 원인이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그의 기록하신 글에도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곧, "그들은, 예수님의 땅에 기록하신 말씀을 읽었으나 항복하지는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니 만큼, 거기서 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P.7). 그들이 "하나씩" 나간 것은, 그들이 감심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지 못하여 행동한 증표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양심적으로 옳은 줄 알면서 그래도 대항해 보려는 억지를 부릴 듯이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어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저렇게 진리를 눌러 보려는 강퍅한 심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을 찌르신 주님의 옳은 말씀의 권위 앞에서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모두 다 물러갔다.
성 경: [요8:10]
⭕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시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제멋대로 재판장이 되어 남을 정죄하는 인간들의 월권 행동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 뿐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신약 시대를 당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때에 영적(靈的)으로 사죄함이 될 수 있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요8:11]
⭕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 가지셨다. 그러니 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 회개를 권고하실 뿐이고 정죄하지 않으셨다.
성 경: [요8:12]
⭕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여기 이른 바 "나는 세상의 빛"이란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만물 창조의 근본을 이룬 첫째 날의 빛을 연상케 한다고 하며, 그 빛이 없을 때에는 피조물이 하나의 혼돈체였으나, 그 빛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질서 있는 우주가 되었다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P.10). "빛"은 영적으로 세 가지 작용을 의미하는데, 곧, 밝혀 주어 알게함 (계시를 의미함)과 구원하여 줌과 깨끗하게 함(성결을 의미함)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빛"이라고 하신 동기는, 메시야를 빛과 같다고 한 구약을 생각하신데 있었을 것이다(사 9:2, 42:6, 49:6; 말 4:2). 눅 2:32 참조. "따르는 자"란 말은, 어두움 가운데서 빛만을 따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생각케 한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 밖에 다른 데는 어두움만 가득한 줄 확신하고 전적으로 그 분만을 의지하고 따라 간다. 그러므로 여기 "따른다"는 말은, 신앙의 동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어두움"은 무지와 죄와 불행을 모두 가리키는 비유이다. "생명의 빛"이란 것은, 생명에서 나는 빛, 곧, 하나님과 사귄 생명에서 나는 빛으로서 우리의 지능을 밝게 하여 주는 것이라고, 고데이(F,Godet)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6:35의 "생명의 떡"이란 말, 6:68의 "영생의 말씀"이란 말, 계 21:6의 "생명수"란 말이, 모두 다 같은 성격 있는 문구로서 생명을 주는 떡, 말씀, 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이스(B.Weiss)는,이것을 "생명 중개(仲介)의 빛" 이라고 해석하였다(das zum Leben gehorige Licht, welches dieses vermittelt). 그러면, 생명을 얻음이, 그리스도의 선물인 빛을 소유함에 달렸다. 폰 슈렝크(Von Schrenk)와 푸리브노우(Prinbnow)등도 이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빛은 진리를 아는데 인도하고, 진리는 생명으로 인도한다"라고 하였다(Das Licht fuhrt zum Erkennen der Wahrheit und dieses zum Leben. a. w. S. 72).
성 경: [요8:13,14]
⭕ 여기 바리새인들의 힐난한 말은 모순된 것이다. 그들은 빛의 자중성을 모른 것이다. 빛은 다른 것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직접 자체의 밝음을 나타냄으로, 그 빛된 사실을 성립시킨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높은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는 자기가 친히 자기를 증거하심으로만 자기를 나타내신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는 빛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228 페이지에 있는 설교를 참조하여라.
성 경: [요8:15]
⭕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이 귀절과 다음 귀절은, 사람에게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식 방법과 예수님의 것을 대조한다. 바리새인들은 남들을 외모(육체)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판단(심판) 하시지 않는다. 그는 누구든지 그 때에 판단하실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은 일반인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처지에서 그는 판단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성 경: [요8:16]
⭕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심을 가리킨다.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판단하시며 증거하실지라도 그 증거는 참되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증거는, 그와 및 그를 보내신 이(하나님 아버지)가 합하여 나타내시는 유력한 두 증인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요8:17,18]
⭕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 "두 증인"에 관하여는, 민 35:30; 신 17:6, 19:15을 참조하여라. 예수님은, 두 증인의 증거가 유력한 사실을 여기 지적하시고, 자기에게 대한 이런 이중의 증거자들이 계심을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의 증거는 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5:37-39). 여기 이 귀절을 보아서도 신약에 사용된 "증거", 혹은 "증인"이란 말이 법정의 증거 원칙에 의한 것임이 알려진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관한 증인이 두 분인 사실을 유대인의 율법에 근거하여 논하신 것이다. 스키페르스(R.Schippers)는, 예수님에게 대한 신약 증인들의 증거가, 법정 증거의 엄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인들은, 법정 증거의 성격을 가지고 사실 그대로에 대하여 증거한 자들이다. 법정 재판도 그들을 정당성 있다고 간주해야 된다. 더욱 이 요한의 저술에 있어서는, '증거'란 말이 구약에서 처럼 법정 술어의 성격을 띤 것이다. 거기서(요한 복음)는, 증인이란 것은 친히 보고 들은 사실을 증거하는 자였다. 거기 기록된대로, 증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성부와 성령처럼 그의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성품에 기준하여 사실을 밝히 아시고 말씀하신 증거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있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들의 불신앙과 비진리를 걸어서 법정 증거의 성격으로 고소한 것이다. 법적 정당성과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법정에서는 사실이라면 정당성 있는 판결을 내리는 법이다. 이 둘의 관련성은 엄중한 것이다. 이런 성격을 띠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요한 복음의 증거이다. 따라서 그 증거된 사실을 신앙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만큼 그 증거는 엄중하고 참된 법정 증거의 사실주의에 입각한 것이다"(意譯)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1938, PP.198-199).
성 경: [요8:19]
⭕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그들은, 예수님의 아버지, 곧, 참 하나님을 모르는 처지에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원인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드리지 않음(믿지 않음)에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는 중보자(中保者)시다(5:38, 14:7, 9; 마 11:27).
성 경: [요8:20]
⭕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연보궤"는 성전 안에 여자들이 서는 뜰 밖에 있다. 그곳은 산헤드린 의회가 모이는 방에서 멀지 않다. 예수께서 거기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잡지 못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하락하시지 않기 때문이었다.
성 경: [요8:21]
⭕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이것은, 그 때에 저렇게 강퍅하여 회개치 않던 유대인들을 경성시키려고 하신 말씀이다. 곧,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들에게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별세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날이 온다. 기회가 다 지난 다음에는 그들이 그것을 회상하고 사모하여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신 기회는 천지 창조 이후 처음이요, 후에도 없을 희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귀한 줄 몰랐다. 그들은 빛이 있을 때에 빛을 믿어야 된다(12:35-36).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저희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할 것 밖에 없다.
성 경: [요8:22]
⭕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 그들은, 이 말로써 그들의 지독한 강퍅과 불회개의 철면피를 그대로 드러냈다. 앞절에 있는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많지 못함을 알려주신 무서운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꼼짝하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만 토한다. 자살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지옥 가는 길이다(Josep,. Bell. Jud., 3, 8, 5).
성 경: [요8:23]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 때 강퍅한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영적 융통성이 도무지 없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땅에 속하여 죄악에 젖었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예수님의 가시는 곳(하나님 아버지의 계신 곳)에 갈 수 없다.
성 경: [요8:24]
⭕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여기 "내가 그 이"란 말은, 그가 영원 자존자, 곧, 하나님 자신이시란 뜻이다(출 3:14; 신 32:39; 시 90:2).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생명의 관계를 가장 힘있게 고조한 것이다. 곧, 믿음 없는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은 "죄 가운데서 영멸하리라"는 뜻이니, 곧, 그 죄인이 죄 안에 있고 또한 죄로 인한 형벌 아래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절대적 분리(絶對的分離)를 가리킨다(Grosheide). 엡 2:1 참조.
성 경: [요8:25]
⭕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곧,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되신 내용이란 뜻이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다.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처음"(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씀이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본질적으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 그 아래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8:26]
⭕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 곧, 그가 그들을 책망("판단")하실 말씀이 많아도, 그는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복음)을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이는 메시야 밖에 없다. 이 말씀의 내용은,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하심과 같다.
성 경: [요8:27]
⭕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이것은, 얼마나 그들이 불신앙으로 어두워진 사실을 통탄하는 저자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윗절에 말씀하신바 "나를 보내신 자"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아직 몰랐다.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은, 결국 자신을 메시야라고 증거하신 예수님의 주장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 경: [요8:28]
⭕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부자 관계를 모르는(27절) 유대인들을 깨우치려 하심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런 관계를 가지신 예수님을, 그의 죽음 당하신 후에야 알게 된다고 여기 밝힌다. 벴겔(Bengel)의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지금 그의 말씀을 근거해서는 믿지 않던 그 이를, 장차 그에게 일어날 사실(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사실)로 인해서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너희"란 말은 그 때의 유대인들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후에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게 될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들리우신 뒤에야 그를 알게 된 자들은, 예컨대 백부장(마 27:54)과, 가슴을 친 백성들과(눅 23:27), 회개한 3,000명이다(행 2:41). "그 인줄안다"는 말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고 메시야이신 사실을 유대인들이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메시야란 뜻이다. 5:17,19,30 참조. 유대인들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다음에야 그의 메시야이신 사실을 깨닫게 된 자들이 많이 생겼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를 알지 못하게 하는 인간들의 죄악의 장벽을 없애는 능력이다.
성 경: [요8:29]
⭕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이 때에 유대인들은,예수님을 반대함에 있어서 매우 강퍅하였다(22,25).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역사(役事)에 있어서 고독을 느끼지 않으시고 외축하지도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온 세계보다 강하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행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 뿐이시다. 우리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그 안에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함께 하여 주시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성 경: [요8:30]
⭕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이 귀절이 말하는대로 "많은 사람이 믿더라"는 문구가, 일시적 신자를 가리키지 않고 참 신자들을 의미했다면 문제가 생긴다. 곧, 그들이 왜 잠시 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항하였을까 하는 문제이다. 31-59절 참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결된다. 곧, 33절 이하에 나타난대로 예수님을 항거한 사람들은, 30절의 "많은 사람" 가운데 포함되었던 일부 불순 분자들일 것이다.
성 경: [요8:31]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성 경: [요8:32]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란 말 (*)은 "그 진리"란 뜻이니, 그 유일하신 진리를 가리킨다(14:6). 이것은, 철학적인 추상적 진리, 곧, 개념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啓示)된 그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으로 구체화 된 계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6절 에서 밝혀 준것과 같이, 하나님 아들(예수님 자신)이 그 속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신자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귀절에 있어서 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결과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와 예수님을 동일체라고도 할 만하다(14:6).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진리이며, 그의 보내신 성령의 하시는 모든 기적적인 역사도 진리이다. 참된 기적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진리 없는 기적이나 역사(役事)는 성령의 것이 아니다.
성 경: [요8:33]
⭕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여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말은, 어떻게 해석될 말씀인가? 이것이 영적 의미일 것인가, 육적 의미일 것인가? 고데이(F.Godet)는, 이것을 육적 의미로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민 자유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학설은 부당하다. 유대 나라는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방(屬邦)으로서 이미 종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전에도 저희 조상들이 여러번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종으로 끌려 간 일이 있었다(Grosheide).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것으로 택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그 계약 대상의 머리로 정하셨으니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곧, 언제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겨 왔고, 어떤 다른 나라의 신(神)을 섬긴 적이 없다고 한다(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汚點은 잊어버렸음).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행한 것은 틀렸지만 계약 신관만은 가지노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체계 없이 변동하시는 이가 아니시고, 옛 사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며, 이루어 가시며, 그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이런 역사적 신관을 가지고, 또 저런 든든한 구원사관(救援史觀)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그는, 저렇게 계약 사상에 기준하여 교회를 생각해야 된다. 교회는, 계약 사상을 배경하고 이 세상 기관으로서의 한 방면을 가짐에 있어서 낙관한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있어서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고, 그 기관 성격 때문에 세상과 접촉을 가진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결성이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 접촉하여 세상을 이긴다. 이렇게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성립된다. 그러나 땅위에는 계약 성격을 무시하고 취미 본위로 사람끼리의 연락만을 치중하여 나타나는 단체들이 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기보다는 종파(sect)라고 함이 적합하다. 이런 종파들이 있어서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경향이 많고, 객관적인 계약(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필요하게 여기지 않는다(H. Dooyewee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III, p. 529). 그러면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계약 신관(契約神觀)을 주장하였더라면 진리에 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기계적이고 모방적인 점이 잘못된 것이다.
성 경: [요8:34]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죄의 종"이란 말은, (1) 범죄하는 자마다 결국 그 죄의 지배를 받게 되어진다는 뜻과, (2) 그가 거기서 놓이는 길은 오직 속량함이 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을 가진다. 과연 죄는 무섭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힘있게 주관하여 망하게 만든다. 전에 아일랜드 해역(海域)에서 배가 파선된 일이 있었다. 그 배를 운전하는 선장도 퍽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침반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지남침을 점검하는데, 칼 끝이 조금 떨어져 상자에 떨어졌다. 그것 때문에 지남침의 작용이 잘못되어 결국 딴 방향으로 가다가 파선 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죄는 작은 것이라도 사람을 주장하여 망하게 한다. 롬 7:23에 말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죄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가장 악독한 원수이다. 사람이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사람을 주장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든다. 롬 7:15-20 참조. 이렇게 죄는 사람을 사로잡아 망하게 한다. 사람을 잡는 무서운 뱀을 하나 잡아 훈련시켰는데, 그의 팔에 챙챙 감겨 머리를 들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받아 먹곤 하였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그 구경을 시켰다. 한 번은, 그 뱀이 그렇게 그 사람의 팔을 챙챙감은 다음 그의 팔을 물었으므로 당장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죄로 더불어 즐기는 자는 결국 이렇게 된다. 어떤 써커스(Circus)단에서, 사람이 호랑이의 입에 머리를 넣고 구경을 시키는 순서가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머리를 호랑이 입에 넣었을 때에 그 호랑이가 그의 머리를 깨물었다고 한다. 죄를 즐기는 자도 이와 같이 위험한 짓을 하다가 망하는 자와 같다. 종이 속량되어 놓이는 것처럼, 죄인도 속량되어 놓이는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들의 해석에서 참조하여라.
성 경: [요8:35-36]
⭕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 종은, 아브라함의 집의 축복 언약을 누릴자가 못되고 일시 그 집에 거하는 것처럼, 구속을 받지 못한 사람, 곧, 죄의 종 된자는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 그는 마침내 택한 백성과 나누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기업을 영원히 누리실 자니, 그가 구속자(救贖者)의 자격을 가지셨다. 눅 4:18; 갈 4:1-7, 4:28, 31, 5:1 참조. 롬 8:1에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실 뿐아니라, 모든 죄악을 도말하여 없애 주시는 구주님 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을 놓아 주시는 자격을 지닌 이유는, 위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까닭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만큼, 하나님의 집을 지으신 자시며 또는 그 집을 맡으신 이로서(히 3:3-6), 영원히 살아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 집에 속하여 영원히 죄의 노예된 자리에서 벗어 나서 참된 자유를 누릴수 있다. 세상 나라에 충성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의 희생에 의하여 민족을 위한 육적인 생활에 유익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영원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할 수는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며 우리가 자유를 얻는다. 만일 사람들이 물질로서 죄중에서 건짐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지구보다 큰 금덩이라도 그들을 위하여 내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로는 죄에서 건짐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보다 귀하신 아들을 희생시키셨다. 사람이 죄의 조이 된 것을 그의 힘으로는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 된 불행을 없애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찾아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며, 그의 고침 받을 소원있는 여부를 알아 보셨다(요 5:6).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해방하신 혜택 아래서는 우리가 확실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므로 히 3:6 하반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애국자의 담대함과 자랑을 잘 안다. 그들은 국가의 소망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영적 소망으로(믿음으로) 담대해야 될까? 딤전 4:8에 말하기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귀한 축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축복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구속을 믿지 않는 자는, 곡식이 가득한 창고에서 굶어 죽는 자와 같다. 미국 남북 전쟁때에,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데 한 군인이 찾아 와서 말하기를, "나를 살리시오, 나를 살리시오!"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묻기를, "왜 그러는가?"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도망치는 병정인데 먹을 양식이 없어 그럽니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말탄 사람이 말 하기를, "저 동네에 들어 가시오"라고 하니, 그 병정은 말하기를, "내가 거기 가면 군인들이 총살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탄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은 정전이 되었소"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병정은 기뻐하며 마을로 들어 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는 이 귀한 소식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성 경: [요8:37]
⭕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일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예수님은, 그 때의 유대인들이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그의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을 곳이 없음은, 그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가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납 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영적으로 한 계통이 아닌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아브라함이 바라보며 기뻐하던 메시야(56절)를 죽이려고 하였다.
성 경: [요8:38]
⭕ 나는 내 아버징게서 본 것을 마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것을 행하느니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은, 역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더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셨던 예수님과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언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성 경: [요8:39,40]
⭕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여기서도 그 때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하면서도, 실상 아브라함과 같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 모순을 지적하신다.
성 경: [요8:41,42]
⭕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저희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다시 지적하신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자녀였더라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을 뻔하였다(요일 5:1-2).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
성 경: [요8:43]
⭕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는 말씀이다. 곧,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는 무서운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해야 되며, 자신을 걱정해야 될 처지였다.
성 경: [요8:45]
⭕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하는도다 - 이 말씀은, 그 때 유대인들의 마귀적인 성격을 지적하심이다. 그는, 이렇게 날카롭게 말씀하셔서 그들의 심령 상태의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성 경: [요8:46]
⭕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는 도언(挑言)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것은 큰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신 일이 없는(죄가 없으시니 만큼) 사실도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이지만, 여기 이 말씀도 그러하다. 무죄자가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듣는 자들은 그것을 믿을 것 밖에 없다. 아무리 진리를 말하여도 그 말하는 자 자신에게 허물이 있으면, 듣는 자들이 잘 믿어주지 않는다.
성 경: [요8:47,48]
⭕ 하나님께 속한 자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유대인들은, 타락한 자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욕한다. 이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의 부패를 지적하신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하며 욕하였다.
성 경: [요8:49-51]
⭕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자아주장의 말씀이 중대한 것임을 지적한다. (1) 그 말씀은,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가 아니고 도리어 그와 정반대로 극치(極致)의 진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심에서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시는 것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은, 경건을 모욕하는 극단이요,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그런 미친 일로 여기는 것도 그러하다(49절). (2) 예수님의 주장은, 저렇게 자기 자신 공경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찾아 드리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주장이 무시를 당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세워 주시는 것이다(50절). (3) 예수님의 주장을 믿는 자는 영생하게 된다(51절). 위의 세 가지로 나타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중대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의 주장이 귀신 들린 자의 미친 소리라는 뜻으로 모욕하였으니, 그들이 극도로 강퍅해진 것이 드러났다.
성 경: [요8:52,53]
⭕ 이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변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곧, 예수님께서 어떻게 신자들을 죽지 않게 하여 주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영생하고야 비로소 남들도 영생케 할 터인데,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선지자들과 아브라함도 다 죽지 않았는가?"한다.
성 경: [요8:54-57]
⭕ 예수님은, 그들의 난제들을 다음과 같이 해결하여 주셨다. 곧, (1) 그의 말씀은 절대로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 그의 주장은, 순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그대로 순종하여 전하시는 것 뿐이니 만큼, 그것은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의 변론이다. 그의 주장, 곧, 그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이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 만큼, 절대적 진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불신앙한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그들의 지식이 형식 뿐이고 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신앙의 원인을 지적하시는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라고 하셨다(54-55상반). (2) 그가 유대인들의 그릇된 사상(예수님을 선지자들이나 아브라함보다 낮게 보는 사상((52-53)을 시정시키심,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보다도 높다고 생각된 아브라함의 지위에 대하여, 그는 말씀하셨다(56-58).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절) - 랍비들의 사상에도,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메시야 시대가 계시되었다는 신념이 있었다(C.K. Barrett,P.291). 그러나 그보다도 이 귀절 상반절의 내용,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받고 기뻐한 사실이다(창 17:17). 이삭의 출생 약속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란 약속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메시야께서 그의 후손으로 나시게 될 것을 내다보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내다보고 즐거워하였다.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과연 약속되었던대로 1년 후에 이삭이 출생하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 성취를 보고 기뻐했다는 뜻인 듯하다(Hendriksen, PP. 64-65).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여기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땅에 있을 동안에 기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에 가서 체험한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 P.60).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관설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으니 만큼, 그가 아브라함보다 자기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시려는데 있다. 58절 참조.
⭕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 여기 "오십도 못 되었는데"란 말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님의 그 때 연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곧, 그 때에 그의 연세가 30대라면,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라고 한 유대인들의 말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여기 "오십"이란 말 대신에 "사십(*)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는 말하기를, 그 때에 예수님의 연세가 50세에 가까왔을 것이라고 하나(Adv. Haer. 2, 22:6),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추측에 불과한 말이다. 여기 "오십"이란 것은, 예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시간 거리(2000년동안)에 대조하여 생각된 짧은 연수이다.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씀에 대한 사본상 독구(獨句)들이 서로 다른것이 있다.(1) 우리의 한역이 채택한 헬라 원문(*)은, * ,A,C,D,N의 것이고, (2)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는가"(*)란 독구도 있는데, 그것은, 수리아역(Syr. sin)과 애굽역의 지지를 받는 시내산 사본(*)의 독구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58절) - "네가 오십도 못 되었는데"(57절) 라고 한 유대인들의 힐문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이 세상 연령에 의하여 위대해지신 분이 아니다. 그의 생애는 33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의 하신 일의 위대는 그의 초자연적 인격에 달렸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초역사적(超歷史的)인 인격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여기 이른바,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 원어(*)는 현재사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늘 현재란 뜻이다. 비켄하우젤(Alfred Wikenhauser)은, 여기 "내가 있느니라"고 한 말씀에서 그의 존재가 어느 역사적 시간에든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Durch bin ich "bringt er zum Ausdruck, dass seine Existenz unabhangig ist von jeder Zeit.-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5). 다시 말하면, 그는,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하나님이란 뜻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히 13:8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초시간적 인격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 세계에서 33년 동안 행하신 그의 행적도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이렇게 위대하신 구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어떤 파선 당한 선객이 바다 가운데서 수면에솟아 오른 바위 때문에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 그 바위의 꼭대기 면적은 비록 좁았으나 그 바위 밑은 매우 크며, 또 깊이 뿌리 박고 있었으므로 안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역사의 생애는 짧게 가지셨지만, 그 인격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게 된다. 우리의 이 세상 생애가 짧아도 걱정될 것은 없다. 우리의 중요성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데 있다.
성 경: [요8:59]
⭕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10:31-33, 11:53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그 생명을 원수들에게 내어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위험을 피하여 숨기도 하셨다. 희생이 귀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낭비된 희생으로서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성 경: [요9:1,2]
⭕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 나면서 소경 된 자를 고치신 것은, 창조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제자들의 물어본 말, 곧,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라고 한 것은, 한 번 생각할 만하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무슨 죄를 지었겠기에 "자기오니이까"(자기 죄 때문입니까)라고 하였을까? 이것은, 유대인 랍비들의 그릇된 교훈대로, 사람이 나기 전에 그 영혼이 벌써 있었다는 사상에 근거한 말이다. 어쨌든 이런 말은 진리에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납득되실 수 없는 그릇된 말을 한 것이다. 인간의 질병이나 불행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성경상으로 보아 확실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인의 죄악으로 말미암지 않는 불행이나 고통도 있으니, 그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답변에서 그런 의미를 밝히신다.
성 경: [요9:3,4]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3절 말씀은, 마치 나면서 소경 된 것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인 듯이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까지는 아니다. 그것은 그 불행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이론을 붙이는 것보다, 불행을 상대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행한 일들만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도 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가지셨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을 보고 피하며 저주하기에 급급하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대하셔서도 자비를 베푸신다. 여기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복수명사(*)로서 "일들"이란 뜻이다. 이 "일들"은, (1) 이제 예수님의 고쳐주시는 은혜(그것도 하나님의 일)로 나타났고, (2) 그 고침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일로도 나타났다. 말쿠스 다즈(Marcus Dods)는 말하기를, "불행(고통)은 하나님의 일을 증진시킨다. 곧, 그것을 극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낮"이란 말은 예수님이 땅에 계신 기간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서 영원토록 선을 행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국한하여 하셔야 될 일들이 별도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의미의 사명 실행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그는, 사명 실행의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밤과 같은 일할 수 없는 때가 온 줄 아셨다.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시기는, 낮과 같이 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보다 귀한 시간인 것이다. 기회는 귀하다. "기회는 오직 한 번만 문을 두드린다"(Opportunity knocks the door only once).
성 경: [요9:5-7]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예수님께서 이제 빛을 소유하지 못한 소경에게 눈을 밝히는 권능을 행하시기 위하여, 먼저 자기가 누구심을 알려 주신다. 여기 그의 알리는 말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하신 것은, 영적 의미를 가진 넓은 범위에 속한다. 그는 소경을 고치시는 빛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소경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영생의 빛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가 누구이신 것을 먼저 알려 주신다. 실상 이 소경은, 자기의 눈이 밝아지기를 원함보다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그에게도 예수님을 바로 아는 참된 지식이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명백히 알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 다시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눈 뜨는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것은, 혹설에 의학적 치료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이라고 한다. 실상 침은 안질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행동은, 그런 자연적 치료에 의하여 그 소경의 눈을 밝히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셔서 그로 하여금 보게 하신 것은, (1) 그가 어떤 피조물을 가지시고라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함. (2) 진흙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비유하고, 침은 그의 말씀의 신성을 비유한다고 함. (3) 하나님 아버지께서 맨처음에 사람을 지으실때에 흙으로 하신 것 같이, 예수님도 그와 같은 원리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의미라고 함. 그러나 (4) 이것은, 그 소경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곧, 소경은 본래 보지 못하여 매우 갑갑함을 느끼는데,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 갑갑함을 느끼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명령을 따라 실로암 못에 가서 그것을 씻었다. 이는 마치,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게 하여, 그의 문둥병이 고침 받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왕하 5:10-14). 비켄하우젤(Wikenhauser)도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Nicht weil das Wasser des Teiches besonders heilkraftig ware, sondern um seinen Glauben auf die Probe zu stellen.-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7).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실로암"이란 것은, 히브리 원어 쉴로아크(*)란 말과 같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해명한 것과 같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실로암 못에 보내신 목적은, 그 소경의 눈을 예수님 자신이 고쳐 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을 관설하신 것은, 실상 그 때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를 반영시킴이다. 하나님의 참된 종교는 요란스러운 폭력이나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에 의하여 고요히 진리로 역사한다(왕상 19:12). 그러나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사야도 말하기를,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고 하였다(사 8:5-8).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실로암 물로 상징된 여호와의 종교를 반대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불신앙으로 놀란하였으니, 그것이 14-34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참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었으며, 실로암 물로 상징되었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성 안에 있다. 그것은 히스기야왕이 전쟁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팠던 것이다.
성 경: [요9:8,9]
⭕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이 소경이 그 이웃 사람에게만 잘 알려졌던 것이 아니라 그 지방 모든 거민들에게도 걸인(乞人)으로 알려졌던것이 확실하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던 소경이 이제 눈을 떴으니, 그 이적은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도 변론하면서 그 이적을 유쾌하게 믿지 아니하려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명백하게 나타나도 인간성은 거기에 대하여 희박하게(혹은 적게) 믿는 악한 근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사건에 있어서 그들의 의심은, 그 이적을 사실로 드러내는데 도움이 된 것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눈 뜬 소경에게 힐문할수록 그의 증언은 더욱 확실히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진리는 모든 반대와 시험을 겪을수록 더욱 빛난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John's Gospel, P.372).
⭕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 이것은, 저 눈 뜬 소경이 그 받은 은혜에 대하여 증거한 제 일보(第一步)이다. 그는, 소경으로서 눈을 뜨게 된 큰 은혜를 받고, 그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자기(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고자 하심이다. (1)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자가 그 사실을 증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에게 계속될 수 없다. (2)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은혜 받은 사실을 증거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는 폐단도 있다. 이것이 역시 그 증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근심되게 하는 행동이 되어진다. 그러나 이 눈 뜬 소경은 최후까지 주님을 나타냈다. "내가 그로라"고 한 말도 그 자신을 자랑하는 의미가 아니고, 소경 되었던 자기 처지를 밝혀 예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 경: [요9:10-12]
⭕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 고침 받은 소경은, 여기서 (1) 자기의 신념 그대로를 발표한다. 곧, 그는 자기의 개인적 체험을 사실 그대로 말한다. 이것은,그의 순수한 확신을 남들에게 알게 하여 주는 고백이다. (2) 그 뿐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에게 대한 순종의 열매가 얼마나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틀림 없이 효과를 가져왔다는 고백이다.
성 경: [요9:13-16]
⭕ 이 부분의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랐으므로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 고침받은 소경더러 "어떻게 보게 되었는가?"라고 물은 것은,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발랐다는 말을 듣고자 함이었다. 저렇게 바리새인들은, 계명을 존중히 한다고 하면서 계명의 정신(사랑)은 알지 못하고, 외모를 따라 머리털을 쪼개는 듯한 기계적 해석에 흘러 번쇄주의에 빠졌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은, 하나님께 드릴 예배에 방해될 영업을 중지하라는 뜻이고, 무슨 동작이든지 금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취할 수 있는 동작은 안식일에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주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선행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계명의 정신을 모르고, 안식일에는 사소한 동작이나 일까지 일체 할 수 없는 듯이 가르쳤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 고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의 의견 충돌을 각오하시고 진리를 행동으로 드러내신 처사이다. 진리는, 비진리로 더불어 충돌되는 기회에 도리어 그 빛을 나타내고 더욱 힘있게 전파된다.
성 경: [요9:17]
⭕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 바리새인은, 고침 받은 소경이 저희들의 마음에 맞는 대답을 할까 하여 또 다시 물어 보았다. 그들은, 사실이나 진리 그대로를 알고자 함보다, 자기들의 편벽된 고집을 그 어디서든지 통과시키려는 완강한 마음을 가졌다. 그들은, 사실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부패한 고집을 끝까지 애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간교한 계획은, 진리나 사실 앞에서 실패를 당하였다. 그 고침 받은 소경은 사실 그대로에 입각하여 대답하였는데, 그것이 그들의 간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 고침 받은 소경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거하였다. 물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거한 것은 만족하지 못한 고백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기대하였던 것과는 반대 방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여러가지로 곤고(困苦)한 처지에 설 때마다 도리어 빛을 나타낸다.
성 경: [요9:18-21]
⭕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 바리새인들은, 고침 받은 소경의 사건에 있어서 믿으려는 마음으로 질문하지않고, 어쨌든지 믿지 않으려는 악한 마음으로 거듭거듭 질문한다. 신자들은 믿으려는 목적으로 사실과 진리를 찾으나, 악도들은 어쨌든지 믿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끝까지 진리와 사실을 피하며 또 힐난한다. 바리새인들은, 고침 받은 소경의 부모에게서 저희의 불신앙을 지지하는 좋은 재료가 나타날까 하여 저렇게 질문하였던 것이다. 그 부모는 정직하게 그를 저희 아들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대답을 회피하였다. 이것은, 받은 바 은혜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의 어두운 태도인 동시에, 진리 증거를 회피하는 겁약인 것이다. 그들이 저렇게 겁약하여진 이유는,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던 까닭이다. 그들은 저런 불의한 법을 무서워하였다. 진리와 경건을 떠나서 인간의 고집을 세우기 위한 법은 실상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저렇게 두려워하였으니, 그들의 심령의 어두움과 생활의 부패가 이로써 추측된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출교권을 주신것은 교권자들로 하여금 영혼들의 목을 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함이다. 집권자는 하나님 뿐이시고 사람들은 그의 사역자가 되는 것 뿐이다. 소위 감독이라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원대로 교권을 가지고 우뢰와 같이 덤빌려면 덤비라고 하여라. 그들의 공허한 소리는, 진리를 배우지 못하여 의심 가운데 방황하는 자들 외에 아무도 두렵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 John's Gospel, Eerdmans Publishing Co. 1949, Vol. I,P.381).
성 경: [요9:24,25]
⭕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 여기 "이에"란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그러므로"란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불신앙을 고집하기 위하여 이 때까지 이론하여 왔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 번째 그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한 말은 진리를 말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판정한다. 이것은 그들이 저희의 구원 받지 못한 사실을 자증(自證)하는 말이다. 실상은 저희들이 죄인이고 예수님은 절대의 의인(義人)이시건만, 그들은 이 사실을 거꾸로 인식하였다 사 5:20 참조. 이 원통한 사실에 대하여, 소경 되었던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가득한 확신을 발표하려고 일정 풍자식(諷刺式)으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곧,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닌 사실을 그가 참으로 모른다는 말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판단을 풍자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말한 바,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한 것은, 이론보다도 실제적 사실에 호소하여 바리새인들의 이론을 사정 없이 꺾어 버림이다. 우리는 이론을 존중히 하여야 한다. 원칙상으로는 진정한 이론이라면, 거기에 기준하여 사실이 결론되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사람들이 참되지 않은 이론으로 사실을 매장하려는 일도 없지 않다. 그런 때에는, 이론보다도 사실이 계속적으로 주장되어야 한다. 소경 되었던 사람은 여기서 그런 방법을 취하였다. 그는 사실을 그대로 주장하였다. 크로솨이데(F.W.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의 심리를 바로 파악하고 말하였다. 곧, "그가 '한 가지'를 안다고 했는데, 그것은 실상 그에게 있어서 한 가지이면서 모든 것을 의미하는 중대한 것이다. 곧, 그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I,1950, P.82).
성 경: [요9:26-29]
⭕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 바리새인들은 그 불신앙의 고집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기를,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이것은, 듣기 싫으리 만큼 역스러운 질문의 중복인 것이다. 그들은 담벽을 문이라고 할 만큼 어두워지고 강퍅해진 것이다. 그들의 이론은, 소경의 눈 뜬 놀라운 사실 앞에서 여지없이 막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쓸데 없는 질문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처럼 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자의 신앙의 뱃심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그들의 불신앙의 철면피를 산산히 깨뜨릴 만큼, 날카롭게 사정 없는 풍자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그들을 꾸지람하는 방식으로 나오면서,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라고 한 말이다. 신앙자는 어떤 때에 그 대적을 향하여 조롱하는 태도를 취한다. 물론 그것이 상대방의 영혼을 증오하는 악독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불신앙 사상 그것에 대하여 사정 보지 않는 심판의 철퇴(鐵槌)인 것이다. 저런 사정 없는 철퇴를 효과적으로 사용 할 수 있는 자는, 실상 상대방의 영혼을 위하여 울 수 있는 자이다. 신앙자의 속에는 악독이 없다.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수 없이 악독과 욕으로 저 소경 되었던 자를 대적한다. 불신앙자의 무기는 저렇게 불법과 악독인 것이다. 사람이 악독해지면 사상과 이론도 어두워진다. 그들은, 이론에 있어서 모순성을 띠었다. 곧, 그들 자신이 자칭 모세의 제자라고 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모세의 제자가 못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제자였더라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 5:46에 말하기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하였다.
성 경: [요9:30-33]
⭕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 - 소경 되었던 자는 이 점에 있어서도 자기의 굳센 신앙을 나타낸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이상하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불신앙자에게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심리는, 천국과 맥(脈)을 통하고 있는 굳센 신념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론에 기준하여 그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겼다. (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한 자를 들으신다는 확신(31절). 이 사상에 대하여 버나드(Bernard)는 성경에서 여러 귀절들을 참조하였으니, 참고할 만하다. 욥 27:9; 시 66:18; 잠 1:28, 15:29, 28:9; 사 1:15, 59:2; 렘 11:11,14:12;겔 8:18; 미 3:4;슥 7:13;행 10:35. (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은 전연 없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위대한 일을 행하셨으니, 어찌 그를 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확신(32-33).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의한 힘있는 논증이다.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자 한 사람의 신앙적 증거 앞에서 산산히 실패를 당하고, 이제는 더 할 말이 없어서 그를 출교하였다. 소경 되었던 자는 초신자(初信者)였다. 그러나 그의 올바른 신앙이 확신 있게 증거를 나타낼때에, 많은 바리새인들도 여지없이 패배하였다.
성 경: [요9:35-38]
⭕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 주님은, 불법하게 출교 당한 신자를 가까이 하신다. 주님은 그를 만나서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신다. 곧,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시어, 그의 신앙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신다. 이 때까지 소경 되었던 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또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알 뿐이었다. 물론 그만한 신앙 지식에 강력한 신념이 함께 하였던 것만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은 좀 더 명백한 진리 지식이 필요하였다. 곧, 예수님을 인자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였다. "인자"란 말 뜻은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런 친절한 주님의 계시 앞에서 그는 신앙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신앙은 무한히 장성할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부요(富饒)를 상대하고 있다. 확신의 소유자도 또 다시 더 깊은 신앙에 들어가기를 원해야 된다. 고침 받은 소경은 그것을 원하였고, 또한 그 소원을 구체화하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9:39-41]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있어서 인류를 소경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된다. 사람의 육안은 표준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된다. 사람의 육안은 표준이 아니다. 우리의 육안은 어떤 짐승의 눈만도 못하다. 예를 들면, 매는 여러 십리 밖에 있는 작은 것도 밝히 본다고 한다. 사람의 눈의 표준은 심령의 눈이다. 심령의 눈은 하나님 보기를 목적한다. 심령이 하나님을 보기 전에는 소경임을 면치 못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잠 28:26). 인간은 이렇게 소경인데도 자기가 본다고 하며, 불행 가운데 아주 떨어진다. 요 9:41에,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자기들이 소경인 줄 알았더라면 주님을 믿었을 것이고, 따라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무죄한 자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소경이 아니라고 자처한다면, 죄를 더욱 범함이다. 그것은, 곧, 요일 1:8에 말한대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고, 요일 1:10에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안니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소경이면서 소경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죄와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이로 여기는 죄를 범함이다.
성 경: [요10:1,2]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이 말씀은, 사람이 합법적으로 양에게 관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도 하나님의 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 본문의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은,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양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교회의 인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의 인도자가 되는 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양을 먹일 만한 진리와 능력을 받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된 일군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진정한 의미에서 돕지 못하고 도리어 양 떼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무의식 중에, 혹은 의식 중에 저렇게 불행한 생활을 보내기 쉽다.
성 경: [요10:3-5]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여기 이른바 "문지기"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어떤 학자는 이것이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를 생각할 때에, 그를 가리켜 문지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낮은 칭호라고 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문지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맥상으로 보아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므로 "문지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맺어 주시는 점으로 보아서 이 해석이 적당하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는 문구는 10장에 많이 나온다. 4,5,27절을 참조하여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 듣는 사실을 비유한다. 택한 백성은 그 목자 되시는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알아 듣고 모이는 법이다. 교회의 사역자(使役者)는 하나님의 양을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다. 온 천하의 모든 세력과 능력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의 양 하나를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의 양(택한 백성)은, 오직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백성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들을 모울 수 있고 또한 완성시킬 수 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정미롭게 전파할 뿐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양 된 자들은 모여서 한 무리가 된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이 점에 있어서 행스텐벌키(Hengstenberg)는, 시 147편; 사 40:26, 43:1; 출 33:12,17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지식이 얼마나 친근하고 개별적인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름을 각각 불러 낸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피지도자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뜨거운 사랑과 정성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영혼을 먹이는 자는, 대중 본위로 사업의 동기를 가지지 말고,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영혼 하나에게라도 모든 사랑과 성의의 정력을 기울여 일해야 된다. 그런 역사(役事)가 진정한 복음의 열매를 맺힌다. 그것은 마침내 광범위에 미치는 구령 운동(救靈運動)도 성립시킨다. 설혹 그의 역사로 광범위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는 소수의 열매로써도 만족한다. 비루마에 처음 선교사로 갔던 저드슨(Judson) 목사는 7년만에 세례 교인 한 사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써도 천하를 얻은 듯이 기쁨을 느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이란 말은, 그가 우리에 있는 양들을 인도하여 푸른 초장으로 갈 때에 양 한 마리라도 빼놓지 않기 위하여 노력한 표를 보인다. 곧, "다 내어 놓은 후에"란 것이 이 뜻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는 양 한 마리라도 등한히 여기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는 인도자는 소자 한 사람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된다.
성 경: [요10:6]
⭕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는 구약에도 많이 있다. 시 23편, 79:13, 80:1, 95:7; 사 40:11; 렘 23:1; 겔 34:1-2; 슥 11:17, 13:7 참조. 그때 유대인들이 구약을 알았더면 이 비유를 깨달았을 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에 무식하였으므로 주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성 경: [요10: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여기서는, 윗부분(1-5)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뿐이다. 1-6절 해석에 대한 머리말을 참조하여라. 버나드(Bernard)에 의하면, 여기 "문"이란 말이 사히딕(Sahidic) 사본에는 "목자"(*)란 말로 읽게되어 있는데, 모판트(Moffat)는 그것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버나드(Bernard) 자신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양의 문"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하는 통로를 의미한다(14:6).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시 118:19-20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문은 의(義)의 문, 곧, 그리스도라 하였고, 익나디오(Ignatius)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문, 곧, 그리스도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들, 사도들, 또는 교회가 들어간다고 하였다. 슐라텔(Schlatter)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 118:20의 예언("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대로 오신 분이다. 그는 말하기를, "시 118:20에 있는 '이는'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나님의 문이시다. 거기 '의인들'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양들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dieser, namlich der Christus, ist das Tor Gottes. Die Gerechten des Psalms sind bei Joh. die dem Christus gehorenden Schafe.-Der Evangelist Johannes, p. 235)
성 경: [요10:8]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나보다 먼저"(*)란 말에 대하여는 사본상 차이가 있다. 곧, 몇몇 사본(* ,A,B,D,L,W)이 우리 본문과 같이 이 문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본(*)은 이것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원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본들의 증거가 강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란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내 권위를 횡령하여"(above me)란 뜻이라고 함. 이 해석이 옳다면, 이 귀절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절도나 강도로 간주한 것이다. (2) 이것은, 시간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을 가리킨다는 것. "먼저"라는 헬라 원어가 그런 뜻으로 요한 복음에 많이 나와 있다(11:55, 12:1, 13:1, 19, 17:5, 24).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해석을 합당하게 여기는 이유로서 그 아래 나온 에이신(* ),곧, "이요"로 번역된 동사가 현재사라는 것을 들어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염두에 있었던 인물이 예수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와서 교권을 잡았는데, 아직도 그 현재에(예수님 당시에)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인 것이 분명하다.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한다.
성 경: [요10:9]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누구든지"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이나 국가의 차별 없이 관계한다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란 말씀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의 중보 역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에게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렇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생명의 부요를 얻기 위하여 영의 양식을 자유롭게 받는다. 이 사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알려진다. "들어가며 나오며"란 것은 자유로운 활동을 의미한다(신28:6; 시121:8; 렘37:4). 그리스도 신자는, 그의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신령한 양식을 섭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주시는 양식은 영원한 만족을 준다. 땅에 속한 모든 것은 인간이 가져 볼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다. 그것들로써는 인간의 갈증을 멈출 수 없다.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자는 소금 물을 마셔서 갈증을 없애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하여질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꼴은, 먹는자마다 영원한 만족을 얻어서 모든 다른 것들을 진토와 같이 여기게 된다. 이 아래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성 경: [요10:10]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이 말씀은, 기독교회에 거짓 스승들이 종종 들어올 것을 미리 경고한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회에 나타나는 도적은 거짓 교훈을 가진 자들이다(골2:8; 렘23:2; 겔34:2). 이런 자들은 양을 귀히 여기지 않고 저희의 사리 사복을 위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목자로서 양들의 진정한 유익을 구하신다. 곧, 그는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며, 또한 그 생명을 장성케 하신다(시23편; 히13:20-21).
성 경: [요10:11-13]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 "선한 목자"에 대하여는, 구약에도 많이 예언하였으니, 대상11:2; 시23편; 사40:11; 겔34:23; 슥11장 등이다. 이 귀절들을 보면, 여호와 자신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선한 목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때 그 예언들은 성취되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그말이 그 양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실 것을 가리켰다고 한다(막10:45; 마20:28).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사53:10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고데이(F.Godet)도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란 말씀이, 다른 이의 요구에 응하여 생명을 내어 놓음, 혹은 바침, 또 혹은 희생함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성 경: [요10:14,15]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여기 목자와 양이 서로 안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말함인가? 예수님이 그의 백성(양)을 아신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되어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아신다는 뜻이다(민16:5; 딤후2:19). 그것은 그의 전지(全知) 성품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이 그를 안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성립된다. 이것은, 성부자(聖父子)의 서로 아심과 같이 신령하고 정확하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인간의 자율적인 지식이 아니다. 마11:27 하반에 말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양이 목자를 안다는 지식이 노시스(Gnosis)의 실존 각성(Seinsverstandnis, Existenzverstandnis)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이와 같은 지식은 노시스 신미 문건에서 왔을 터인데, 그 지식은, 아는 자와 알리운 자가 서로 일체로 관련된 사실을 결정함이다. 그런 지식은 이론적 지식이 아니고(nicht ein rationales, theoretisches Erkennen),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실존적으로 결정함이다"라고 하였다(ein Innerwerden, in seiner ganzen Existenz bestimmt ist.-Johannes Evangelium, p.290). 그는, 요한 복음의 이 부분 사상이 분명히 노시스를 배경하고 있다고 한다(Der gnostische Hintergrund dieser Gedankenbildung ist unverkennbar - Johannes Evangelium, p. 285). 그러나 신약이 말하는 양과 목자 사이의 지식은 그런 빌려온 것(Lehnsatz)이 아니다. 요한 복음의 구속자(목자)는 노시스 문헌의 그것과 다르다. (1) 사도들이 전파한 그리스도는 명백한 역사적 인물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고, 노시스(만데안 문학)에서 말한 구속자는 전사 시대(前史時代)의 신화적 인물에 불과하다. (2) 사도들이 전파한 구속자(救贖者)는 유신론적(有神論的)이고 구원사적(救援史的)인 구속자요, 노시스에서 말한 구속자는 이원론적인 우주 세력들과 싸운 상상적인 전쟁 영웅이다.
성 경: [요10:16]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 이것은 이방 선교에 대한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킨다. 이방 선교에 대하여는 벌써 구약에 많이 예언되었다. 사 49:1-13, 52:13-15, 53:10-12;미 4:2; 슥 8:23; 마 8:11 참조.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만 이런 놀라운 선교가 시작되겠으므로, 그의 목숨 버리신다는 말씀이 이 귀절 앞뒤에 배치되어 있다. 뱅겔(Bengel)은, 하나님 백성의 통일성을 위하여 아름다운 목자도 한 분(예수님)이심을, 이 귀절이 지적한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성 경: [요10:17,18]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는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이유가 그의 목숨 버리심과 다시 사심에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자(聖者)이시니 존재론적으로 영원토록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다(5:20). 그러나 그가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는 때에 구속 사업의 사명을 받으셨으므로, 그의 사명에 순종하신(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 그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방면도 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곧, 그가 목숨을 버리시는 것과 다시 사시는 것이 순연히 독자적(獨自的)인 의지(意志)로 순종하심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그 위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씀이, 그 사실을 역설(力說)한다. 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의 생명 버리심을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도 성자(聖子)의 생명을 빼앗을 처지에 계시지 않다는 말이다. 그는 순연히 자유 의지로써 단 마음으로 순종하신 것 뿐이다. "계명"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사명을 의미한다.
성 경: [요10:19-21]
⭕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갈렸다. 언제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환영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창 3:15).
성 경: [요10:22,23]
⭕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 "수전절"은, 유다의 매코비가 성전을 중수(重修)한 뒤에 그것을 기념하는 절일을 정했는데, 그것을 말함이다( .매코비 4:51, .메코비 10:5-8). 이날은 12월 25일이다. "솔로몬 행각"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시설한 현관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팔레스틴에는 12월이 우기(雨期)이므로 예수님께서 그 때에 솔로몬 행각에 다니신 듯하다.
성 경: [요10:24]
⭕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 주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직설(直說)하심보다, 흔히 비유적으로 하시고 밝히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때 민중의 메시야 관념이 그릇되어서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더러 그의 메시야이신 여부를 "밝히 말하시오"라고 한다.
성 경: [요10:25]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메시야격에 대한 두 가지 증거가 나타났다. (1) 그의 말씀의 증거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음.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들이 등한히 해도 언제나 살아 역사(役事)한다. 그의 말씀을 오해하고 선전하는 자들이 많아도 그의 말씀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아도 그의 말씀은 계속 살아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마 24:35에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고, 요 8:51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권위 있고 진실하다. (2) 예수님의 행하는 일들이 그를 증거함. 예수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현대인은, 기독교에서 그 이적 요소를 제외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기독교는 이적으로 된 종교인데 거기서 이적을 제외하고 믿으려고 하는 것은, 돌 집에서 돌을 모두 다 뽑아 버리고 남은 데서 살아 보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이적은 구원사적(救援史的)인 진실과 구속적인 사랑을 그 성립 요소로 한다는 것이다. 메시야께서 이런 권능을 행하시리라는 것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데(사 29:18, 35:5-6), 그것이, 과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것을 가리켜 구원사적 이적이고 한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음은 메시야를 보고도 믿지 않는 죄악이다.
성 경: [요10:26]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다(벧젠 1:2). 곧, 그가 우리를 택한 백성으로 삼으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믿게 된 것이다. "양"이란 말은 택한 백성을 비유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할 증거들은 많이 나타났다. 그 증거들은 하나님의 진실성에 의하여 완전하게 나타났다. 기독교는 이렇게 가장 믿을만하게 된 유일하고도 진정한 종교이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쌀이 가득한 창고 안에서 굶어 죽는 자들과 같고, 샘 앞에서 목 말라 죽는 자들과 같다. 결국 그들은 영생의 복을 받도록 택함이 되지 못한 자들이다.
성 경: [요10:27]
이 귀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양(택한 백성)의 성질이 어떠함을 밝혀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하나님 말씀)을 알아 듣고 따른다(닮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편애(偏愛)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먼저 택하신 사실에서 일어난 반응이다. 그것은, "나는 저희를 알며"란 말씀이 밝혀 준다.
성 경: [요10:28,29]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테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이 귀절들은, 그리스도의 양 된 자의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그 행복은 그들이 영생을 받음이다. 아무도 그들의 받은 영생을 빼앗지 못한다. 그 이유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의 양 된 자들, 곧,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 받는 구원의 불변성을 알고 안전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양 된 자들은 힘있는 원수들에게 둘러 싸였고, 그들 자체는 심히 연약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뢰한 자가 그들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그들은 확신한다(딤후 1:21). 하나님의 양 떼인 교회는, 악한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 놓여 있어도 근심할 것 없다. 악한 것들도 하나님의 주권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다. 28절 상반 말씀은, 7-10절의 사상과 연락하고 나온다. 곧, 이 귀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사상을 재음미한다. "주노니"라는 말(* )은 현재 동사로서, 현대시 곧, 신약 시대에 세계적으로 신자들에게 영생 주시는 운동이 시작됨을 염두에 둔 말이다.(E.Smilde, 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111). 그리고 28절 하반(29절도 참조)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한 말씀은, 11-18절의 사상을 재음미한다. 그리스독게서 그 양들을 위하여 원수들(도적, 갇도 같은 자들)과 싸워 이기시므로, 양들은 영원토록 안전하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란 문구(*)에 대하여,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된 것을 찬성하는 학자들도 있다. (Godet, B. Weiss, Bernard). 그런 경우에는, 이 문구의 의미가 양들(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신 하나님이 만유보다 위대하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스밀데(Smilde)는 이 문구를 우리 한역의 각주(脚註)와 같이 번역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만물보다 크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신 것"이란 말이 신자들을 총칭한 것이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신자들은 시간 세계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대상이고 그리스도의 소유니만큼, 만물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원칙에 있어서는 벌써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그들 중 하나라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oschriften, p. 112).
성 경: [요10:30]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28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29-30절 말씀이 나왔다.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심은, 본질적으로 그가 아버지로 더불어 일체로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계시자(啓示者)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시는 것 만큼, 그의 모든 행동은 곧바로 아버지의 행동과 완전히 일체(一體)였다.
성 경: [요10:31,32]
⭕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 그 때 유대인들은 자칭 경건하다고 하며, 거짓 선지자를 돌로 치라는 성경 말씀(신 13:5)을 실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악행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히 답변하신다. 그 답변은, 유대인들의 완강한 불신앙을 지적하신 것이니, 곧, 그들이 너무도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몰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완전하고 철저함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보여준다. 곧,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 "너희에게 보였거늘"이란 말씀들이다. (1) "아버지께로 말미암아"란 말은, 그의 하신 선(善)이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아 보지 못했으니 그들의 불신앙은 현저하다. (2) 그 뿐 아니라, 그 선한 일이 한 가지만 아니고 여러가지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신앙 하였다. (3) 또 그 뿐 아니라, 그런 선한 일들을 그들에게 밝히 보였으되 그들은 불신앙 하였다. "보였거늘"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중 앞에서 행한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밝히 보여주었으되, 그들은 강팍하여 아직도 믿지 않았다.
성 경: [요10:33]
⭕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철면피는 저렇게 두텁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듯이 자처한다. 곧, 그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충성하는 듯이, 예수님의 발표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 말씀을 책잡아 그것이 "참람"한 말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진리와 시실에 근거한 여부는 알아 보지 않고 먼저 정죄한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과 편견과 시기에서 나온 행동이다.
성 경: [요10:34-3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 여기 "율법"이란 말은 시 82:6을 가리킨다. 시편을 왜 율법이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모세의 율법이 구약의 처음부분에 있는 것만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구약 전체의 책 이름을 "율법"이라고 하는 풍속이 있었다. 요 12:34, 15:25; 롬 3:19; 고전 14:21 참조 시 82:6에는 재판장들을 가리켜 "신들"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재판장들이 신(神)의 시키심을 받아 재판을 대행(代行)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고, 그들 자신이 영원한 신들이라고 함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신격(神格)이나 신자격(神子格) 주장의 정당성을 이 시구에 두셨다. 그것은 얼른 보아 예수님도 순 인간으로서 신의 시키시는 일을 맡은 의미의 하나님 아들이고,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Ontological Sonship)이 아님을 증거하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구에 근거한 예수님의 논증의 귀결은, 추론의 등위적 이론(等位的理論=Analogical argument)이 아니고 강이유 결론(a fortiori)이니, 곧, 보통 인간들도 신의 시키심을 받은 자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신(神)이 아니로되 그들을 "신들"이라, 또는 "자존자의 아들들"(시 82:6)이라고 하였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야 말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결론이다.
성 경: [요10:37,38]
⭕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 여기 "내 아버지의 일"이란 말은 그가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는, 그의 이적 행하신 사실을 저 불신앙자들 앞에 도전적으로 내세우신다. 그것은, 그 이적들의 역사성과 진실성에 대하여 천하가 공인한 사실을 지적함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어떤 한 구석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대중이 주목하는 공석에서 되었으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강퍅한 교권자들이 끈질기게 책잡으려는 무서운 눈초리 앞에서 성립된 일들이다. "그 일은 믿으라."이것은, 그의 행하신 이적들이 초자연적이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 표적인 사실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 함은,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그의 기관(organ)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성(예수님)에게 하늘의 모든 부요(富嶢)를 충만히 전달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하나님) 안에" 계신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 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부요에서 모든 것을 가져오심을 가리킨다(Godet). 예수님의 이적은, 저렇게 땅에 계시면서 하늘에 계시는 (3:13) 오묘를 보여준다. 그것은 내세(來世)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예표하는 것이다. 바빙크(Bavinck)는 말하기를, "내세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거기 의(義)가 거한다. 그 때에는 이적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그 때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하나가 된다"라고 하였다(Geref. Dog. Uitgave van J.H Kok Te Kampen 1928, Vol I, p.311).
성 경: [요10:39]
⭕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 아직도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원수들이 그를 해하지 못하였다.
성 경: [요10:40,41]
⭕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 예수님은, 불신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떠나 요단강 저편으로 가셨다. 그곳은 물론 적막한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도 대중으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하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는, 세례 요한의 이적(세례 요한은 이적을 행치 않았음)을 본 까닭이 아니고 그의 증거한 말(그의 메시야 증거)이 참된 까닭이었다. 말의 진실성은 이렇게 귀하다.
성 경: [요11:1]
⭕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 "병든 자"란 말이 이 기사(記事)의 초두에 나오게 됨은, 나사로란 사람보다 그의 질병이 여기서 화제거리이기 때문이다(Godet). "나사로"란 이름은 "엘르아살"이란 이름의 단축형이라고 한다.
성 경: [요11:2]
⭕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 12:1-8 참조. 이 마리아는 눅 7:37-50에 관설된 여자와 동일시될 사람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경건한 행위와 사랑이 어떻게 큰 사실을 기억한다.
성 경: [요11:3]
⭕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병들었나이다"라고만 말하고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청원에 있어서 고상한 성격을 드러낸다(Bengel). 이것은 짧은 기도이다. 우리는 길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짧게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근심거리를 주님에게 고하면 주님은 그것을 들어 주신다. 특별히 그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 기뻐하신다.
성 경: [요11:4]
⭕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을 보여 주고, (2)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이신 사실을 보여 주고, (3) 또한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지않으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 있다.
성 경: [요11:5]
⭕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저 하심이었다(4 절).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동기가 여기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은 나사로와 그 형제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특수한 이적을 행하시게 되었다.
성 경: [요11:6]
⭕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의 위급한 사태를 아시고도 천천히 그들을 방문코저 하신 이유는, (1) 그 사태의 수습이 오직 자기에게 달린 까닭, (2) 천천히 시간을 잡는 것이 오히려 그 당사자들에게 유익한 까닭. 그가 지체하시는 동안 그 당사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도록 준비된다. 그것은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천히 오심을 사랑을 베푸시기 위한 지체이다.
성 경: [요11:7,8]
⭕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 예수님께서 천천히 제자들의 신앙 수준을 올리셨으므로, 인제는 그들이 거정 없이 위험 지대인 유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Bengel).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겁을 낸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한 사건은 유대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8:59, 10:31 참조
성 경: [요11:9]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고쳐 주시기 위하여 유대 땅으로 가시려 할 때에 제자들은 만류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주님의 신변을 위험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신 기회가 남아 있으므로 그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런 기회를 식별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님은 그것을 식별하셨다. 그는 헤롯의 죽이려는 음모를 아시고도 말씀하시기를, "가서 저 여유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하셨다(눅 13:32-33)
성 경: [요11:10]
⭕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 칼빈(Calvin)은, 윗절(9 절)의 "낮에 다닌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혹은 그의 명령)대로 다님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말씀에 관게 없는 환경과 사정을 가리킨 것이겠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없이 인간 자신의 심사(心思)에 따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인간은 실족할 수 밖에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 안에는 참다운 빛(진리)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밖에서(하나님에게서) 빛을 받아야만 된다(Grosheide). 예수님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명과 말씀 가운데서 행하시는 것인 만큼, 밤에 행하는 것과 같은 일은 전연 없으셨다.
성 경: [요11:11]
⭕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잠들었다"는 것은 성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잠들었다가 깨는 것처럼, 성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때가 온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경건한 자의 죽음은 하늘 나라의 방언으로는 잠듬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11:12,13]
⭕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이다. 제자들의 오해는, 결국 모든 죄인들의 습성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준다(Grosheide).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아서도, 잠들었다는 말이 보통 수면을 의미하지 않는 사실을, 그들은 왜 몰랐던가? 보통 수면이면 다른 사람들도 깨울 수 있지 않았으랴? 하필 예수님이 그것을 깨워야 될까?(Greijdanus).
성 경: [요11:14]
⭕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나사로의 죽은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은 잠들었다는 말로 비유하셨다(11 절). 그러나 이제는, 그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고로 밝히 해석하여 주신다. 처음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신령한 지혜를 사용하여 보도록 하셔서 그들을 연단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그들에게 명확히 그 말씀의 뜻을 알려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아무런 노력 없이 수확이 있도록 하시지 않는다. 마침내 주시기는 하되, 인간으로 하여금 먼저 노력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 경: [요11:15]
⭕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 가자 하신대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그 질병에거 건지시지 않았으므로 그가 죽었으니, 이제 나사로의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해결하는 광경이 미구(未久)에 나타난다. 그것을 보는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굳세어질 것이다. 제자들의 신앙은 부절히 자라나야 할 것이었다. 새로운 난관은, 신앙이 새로이 장성할 기회이다. 신앙은 되어가는 것이고 된것이 아니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 되어있는 기독자는 기독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He who is Christian is not a Christian).
성 경: [요11:16]
⭕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방금 신앙 연단(鍊鍛)을 위하여 난관과 시련의 필요를 역설(力說)하셨는데(15절 해석 참조), 그는 그 말씀 끝에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다. 곧,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한 유대 땅(7-8절 참조)으로 같이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불신앙은 디두모(쌍동이라는 뜻)라고 하는 도마의 근성이다. 이때에 도마가 죽기로 작정하는 영웅주의는 가졌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의 박해를 당할 줄 알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가려는 모험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이 방금 말씀하신대로(9 절)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비록, 그의 태도는 용감스러웠으나 신앙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9,15)을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저렇게 현실의 얕은 곳에서 잘못 움직였다. 우리는 생각하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잊을까! 아버지가 먼 곳에 갔을 때 그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아이와 같이, 주님을 잊지 말아야 된다. 하나님 아버지를 못보는 대신 우리는 그의 말씀을 보는데, 어찌 그 말씀을 잊으랴?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를 예사로이 한다. 분주하여 잊어버리고, 평안하여 잊어버리고, 곤난하여도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어려움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과 관계하려고 한다. 그것은 악한 일이다.
성 경: [요11:17]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 "나흘"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얼마나 큰 권능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여기 지적한 것이다. 볼토만(Bultmann)은, 여기 "나흘"이란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여기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고 기록한 의도는, 유대인의 관념에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지 사흘 동안까지는 무덤에 가까이 있지만, 나흘이 되면 그렇지 못하니 생명으로 돌아올 소망이 없다고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Das Evangelium des Johannes, p. 305). 볼트만(Bultmann)의 이 학설은,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은, 요한 복음 저자가 유대인의 미신 사상과 타협했다는 것이니 옳지 않다.
성 경: [요11:18]
⭕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많이 오게 된 원인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성 경: [요11:19]
⭕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그들은 위문차로 많이 왔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로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Calvin).
성 경: [요11:20]
⭕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 이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활동적이며 또 사업적이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집에 앉아 있었음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니다.
성 경: [요11:21,22]
⭕ 이 두 귀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듯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이 있었다. 그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절),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절).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또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이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의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척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도가 일어도 그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또 깊이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알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때 어름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그 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는 네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건너 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간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성 경: [요11:23,24]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 끝날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고, 그 때 방금 행하시려는 이적에 따라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가리켰다(43-44). 그러나 마르다는 그 말씀을 세상 끝날에 있을 부활 관계의 것으로 알았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 끝날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단 12:2에 근거한 사상일 것이다. 마르다가 저렇게 유대인들의 믿는 교리는 기억하였다. 그러나 부활이 주인공이신 메시야께서 그 때에 현림하셨으니 만큼, 그 현재에도 사람의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가 교리는 알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충분히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바로 "부활"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이란 것이 전연 없다. 예수님과 관계 없는 독자적인 부활은 없다. 세상 끝날의 부활도 예수님 때문에 성립될 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다.
성 경: [요11:25,2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성 경: [요11:27]
⭕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마르다의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의 완전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하고서 조금 후에는 약하여져서,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시지 못할 듯이 말한다(39 절).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대하여는, 고후 8:9; 빌 2:7을 참조하여라.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한 합당한 신앙 고백이 있다면 무엇이나 다 고백하려는 열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실력은 실제에 있어서 아직 그와 같은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 기독 신자들 가운데 종종 있다. (1)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그가 진리를 깊이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본래 체계 정연한 것이다. 그것은, 그 부분 부분에도 전체가 들어 있고 그 전체에도 부분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극히 정밀한 연구를 하는자들에게 알려진다. 성경 말씀은, 신령한 감동으로 알 수 있는 방면도 있고, 또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방면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깊이 배워야 된다. 사람이 진정한 학문을 무시하면 안된다. 그 이유는, 진정한 학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혜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잠언을 보면, 미련한 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되었다. (2) 마르다의 신앙이 그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한 원인은, 신앙 연단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신앙 생활에는 연단이 필요하다. 벧전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보석도 잘 갈아야만 귀한 보석이 된다. 암스텔담(Amsterdam)에 금강석을 정제(精製)하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금강석 한 점을 정제하는데 여러 달 걸린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배로 여기시는고로 여러가지로 연단시키시기를 좋아하신다(신 32:10-12).
성 경: [요11:28-30]
⭕ 마르다가 "가만히...마리아를 불러" - 낸 것은, 유대인 군중의 소동이 있을까 두려워한 까닭이다. 그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연루자(連累者)들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외(敬畏)한 증표이다(Calvin).
성 경: [요11:31]
⭕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 가더니 - 유대인들이 이렇게 많이 따라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을 보지 못할 뻔 하였다.
성 경: [요11:32]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이 말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권능은 믿었으나, 부활시키시는 권능은 믿지 못했던 것이 드러난다.
성 경: [요11:33]
⭕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어떤 학자들은, "통분히 여긴다"는 말의 헬라 원어(*)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였으니, 곧, "슬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뜻을 취하면, 그가 슬퍼하신 것은, 그 우는 자들을 동정하시는 체휼(體恤)의 슬픔이었을 것이다(Calvin). 이 말을 우리 한역대로 "통분히 여기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노하신다는 뜻으로 보아야 된다. 그러면, 그가 누구에게 대하여 노하셨단 말인가? 이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1)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곧,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인성의 약점에 대하여 그의 신성이 노하셨다는 것. (2) 유대인의 불신앙, 혹은 의식적 울음에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3) 사망의 세력, 혹은 마귀에게 대하여 노하셨다는 것. 이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다.
성 경: [요11:34-38]
⭕ 이 귀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애의 정서(情緖)를 많이 나타내셨다.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둘러 싸고 왜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내다보시고 계셨는데 왜 슬퍼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곧, (1) 그에게 대한 이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이들도 신앙이 부족하였고, 유대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 앞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신다. 그는 불신앙의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적도 있다(눅 19:41). (2) 예수님은 진리이시니, 진리 그것을 그대로 느끼심. 죽음이 비애라는 것은 천정의 진리이다. 그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죽음이 슬픈 것은 사실이다.
성 경: [요11:39]
⭕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에 있어서, 거기 모인 사람들더러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라고 하신다(44절 참조). 그것은, (1)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일에도,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가르치고, (2)거기 모여 있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적 역사(異蹟役事)에 수종들므로, 그들은 그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좀 더 인상 깊이, 또는 밀접하게 체험하게 되어 확신에 이르게 된다.
⭕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이것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표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인간의 냄새 맡는 표준으로 측량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마르다의 이 말은, 그 이적의 위대를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게 했으니, 곧, 냄새 날 정도로 부패한 시체를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이, 만대(萬代)에 전파될 수 밖에 없다.
성 경: [요11:40]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 예수님께서 여기 관설하신 말씀은, 25-26절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의미하신 바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조건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마르다가 불신앙하면, 그 나타날 부활의 이적을 영적 눈으로 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느낄 수 있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으로만 보며 느낀다(Grosheide).
성 경: [요11:41,42]
⭕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 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예수님은, 자기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사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언제나 계속한다고 하여, 여기 "항상"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그는, 이 말씀으로써 자기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통은 끊임 없는 것임을 지적하신다. 그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 끊임 없는 교통이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둘러 선 사람들이 다 듣도록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기도로 발표하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기를 원하셔서 그 어느 기회에라도 가르치셨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바로 알아야만 그들이 구원을 받겠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남들의 구원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셨다.
성 경: [요11:43]
⭕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그는, 진리이시며 공명 정대하시다. 그는, 마술사들의 어물어물 하거나 중얼거리는 것과는 반대로 큰 소리로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를 산 자 처럼 불러내신 것이다. 롬 4:17; 요 5:28 참조. 어떤 재미 있는 말이 있다. 곧, 만일 예수님께서 그 묘지에서 "나사로"란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그저 "나오라"고 하셨더라면, 묘지에 묻혔던 모든 시체들이 다 일어나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성 경: [요11:44]
⭕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 이것은, 그 살아 나오는 자가 나사로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그에게 베로 동인 것이 없었다면, 무슨 유령이 아닌가 생각될지도 모를 것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그 부활 이적의 역사에 무리들이 수종들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 사실의 진실성을 살깊이 체험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친히 이루시고도 그 일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일을 주신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지만, 그 기적 때문에 사람들이 태만하여지거나 무책임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존귀한 덕이다.
성 경: [요11:45,46]
⭕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의 결과 두가지를 말한다. 곧, 예수님을 신앙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그를 해하려고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한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성 경: [요11:47,48]
⭕ 이 부분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승인하고 걱정하는 내막이 나타났다. 불신앙도 가만히 있지 않고, 악한 방면으로 활동하는 법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중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로마정부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염려였다.
성 경: [요11:49]
⭕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 그 시대에 대제사장인 로마 정부의 계획에 의하여 해마다 변동되는 일이 있었으니 만큼, 가야바도 그 다음 해에는 그 직분을 내놓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그 해"라고 밝힌 것이다(Jos. Antiq. 18, 2, 2).
성 경: [요11:50]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 가야바의 이 말 뜻은 악한 것이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 운동 때문에 로마 군대가 유대를 멸할 위험이 있으니, 예수 한 사람만 희생시키면 유대국은 안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야바의 이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용되어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속죄 고난에 대하여 공직자(公職者)의 처지에서 예언한 것은 중대하다(49-52).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가야바)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은, 참으로 그 속죄의 고난의 중대함과 믿을 만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것이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고(민 24:17), 다윗의 원수 사울이 다윗의 일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다(삼상 26:25)
성 경: [요11:51,52]
⭕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그런 큰 예언을 하였다. 그의 본의는 예수님을 해하려는 악심으로 말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언으로 이용된다는 뜻이다.
성 경: [요11:53,54]
⭕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구주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행동은 괴이하다. 그 행동은, 착한 일일수록 반대하는 마귀의 것이다. 예수님은 이기미를 아시고 깊은 광야의 한동네로 피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심은, 때가 이르기 전에 잡히는 것을 면하시려는데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순종하셨다.
성 경: [요11:55]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오라갔더니 - 이것은 유월절 전의 결례(潔禮)를 가리킨다. 그것은, 머리를 깎거나 옷을 빠는 정도의 것이었다. 창 35:2; 출 19:10,11; 수 3:5; 대하 30:17; 행 21:24,26 참조.
성 경: [요11:56,57]
⭕ 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만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 예수님에게 대한 민중의 논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힐 위기에 처한 줄 알고 냉정한 태도로 논단한 것 뿐이다.
성 경: [요12:1]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여기서 그 사실을 다시 관설한다.
성 경: [요12:2]
⭕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마태와 마가는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마 26:7; 막 14:3), 그 연회 장소를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다. 어떤 학자는 상상하기를, 시몬은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몬은 알려진 문둥이었으니 만큼,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Grosheide). 그러므로 시몬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과는 가족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등도 아마 청함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 곧, 그가 연회 배설(排設)과 음식물 준비에 봉사한 것을 가리킨다. 눅10:40 을 보면, 그는 이 방면 봉사에 능하였다. 이런 인물도 귀하지만, 그보다도 주님의 진리와 영적 생활에 열중하는 인물이 더욱 귀하다(눅 10:39, 42)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는, 그 부활한 몸으로 그 자리에 와서 앉은 것만으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를 보는 자마다 주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었다.
성 경: [요12:3]
⭕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특별히 술을 향기 있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흑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수 없다. 막 14:8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절).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곧,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 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성 경: [요12:4]
⭕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마 26:8에 의하면, 마리아의 향유 부은 일에 비평한 이들이 "제자들"이라고 하였다(막 14:4에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음).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가룟 유다만 거론한다. 유다가 그 다른 제자들보다 지도적 처지에서 저런 비평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이 여기서 그의 이름만 말하고 그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요12:5]
⭕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300날 동안의 노동 품 값이라고 한다. 유다는, 가난한 자를 예수님보다 귀히 여긴다고 여기 말한 셈이다(Grosheide). 이것은 세상 생각으로만 타산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어난 불평이다. 이 불평은, 한 영혼이 예수님에게 사랑을 붓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어두움이다. 마리아와 유다 두 사람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는 희생자임. 그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아낄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니, 주님의 말씀과 같이 행한 자이다. 곧, 마 22:37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악한 일에 최선을 다 할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께 그리할 줄은 모른다. 인도의 어떤 선교사가 한 번은 이상한 일을 보았다. 곧, 간지스강 가에 한 여자가 섰는데, 앓는 갓난 아이는 팔에 안고 건강한 아들은 옆에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오랫 동안 거기 서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선교사가 다시 와서 보니 그 옆에 섰던 건강한 아이가 없어졌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그를 강에 넣어 악어들로 먹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 대답은, "나의 신(악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져서 이렇게 악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2) 유다는 옳은 것을 비평하였음. 유다는 마리아의 봉사를 비평하였으니, 그것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뜨거운 관계를 맺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태도이다. 예수님은 천하의 몇 만배보다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귀한 예수님을 위하여 천하를 바친들 아까우랴? 그러나 유다는 물질만 귀한 줄 알았으며, 빈민 구제를 구실로 삼아 트집을 잡았다.
성 경: [요12:6]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마 26:8; 막 14:4)은, 부주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귀절에 나타난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악행이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악까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 마음 속에 자라나던 죄악(탐심)이 결국 그로 하여금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성 경: [요12:7]
⭕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그 여자로 하여금 지금 향유 붓고 남은것을 보관시켜 후일에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 때에 사용하게 하라"는 뜻이라 함. (2) "그 여자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 그 행동이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이 옳다. "이를 두게 하라"란 말(*)은, "향유를 보관한 일이 되게 하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보관해 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 한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향유를 그때까지 보관하였던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귀중한 뜻을 지적한다. 곧, "마리아는 그런 값 비싼 의식(儀式)을 흔히 실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렇게 희귀한 행위를 취한 것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흔히 외부적으로 찬란한 의식에 치중함을 금하신다. 어떤 해석가들이 마리아의 이 일에 기준하여 추론하기를, 의식을 성대히 갖춘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리아의 한 일은 그 한 때에 필요하였으나 신약 계시가 완성 된 후에는 그런 방식의 의식(儀式) 행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 John's Gospel, Vol. , 가가. 13-14).
성 경: [요12:8]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서부 사본(西部寫本)의 대표격인 베사 사본(D)에는 이 말씀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보다 유력한 사본들에 있으니, 이 말씀은 원본대로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Godet).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란 것은 신 15:11 의 말씀과 같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돌아볼 책임이 있음을 지시하신다(13:29). 다만 시간적 순서로 볼 때, 그 때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중요성을 예언적으로 표시하는 의미에서 그 값 비싼 향유를 사용함이 합당하다는 것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 행위는, 복음 전파의 행위이다. 그것은 지극히 귀한 일이며, 따라서 그 일을 위하여 값 비싼 향우라도 소비할만하다. 스킬더(K. Schilder)는 말하기를,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말씀하시면서 "먼저 나요 다음에 너희들이라"고 하신 셈이라고 하였다(Christus in Zijn Lijden, Kampen, p. 45).
성 경: [요12:9-11]
⭕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 예수님의 계신 곳으로 찾아 온 무리 중에는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온 자들도 있었다(11:46). 이렇게 피상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때에 베다니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도 많았다(11:45).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이적의 절정이다. 편견 없이 그 사건을 본 자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이적의 목격자들이 많도록 하기 위하여 대중을 동원시키신 것이다. 믿고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이적을 어떤 캄캄한 모퉁이에 감추시지 않으셨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대중이 친히 목격한 사실이며, 또 그들이 믿은 진리이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행동은 참으로 악독하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실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고 하여, 그를 다시 죽여 버리자고 모의하였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적인 반면에, 그를 다시 죽이려고 한 것은 마귀의 행동이다. 이 들은 서로 정반대이다. 대제사장들의 이 행동은 시기심의 극단이요, 잔인성의 절정이며, 하나님과 싸우는 강팍한 행동이며, 대중 인기를 탐하여 날뛰는 괴악한 명예주의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극악한 원수들이 대적한 이 진리(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극치(極致)이시다.
성 경: [요12:12]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함을 듣고 - 이 부분에 기록된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자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여 온 나그네들이었다. 칼빈(Calvin)은 이 사실에서 영적 교훈을 찾아 본다. 곧,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에 관습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진정한 종교적 열심은 식어졌고 외식(外飾)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온 나그네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불타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님에게 대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하게 되었다.
성 경: [요12:13]
⭕ 종려 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호산나"란 것은 히브리 말(*)의 음역(音譯)이니, 그 뜻은, "도와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란 것은 시 118편에서 나온 말씀이나, 메시야를 가리킨 것이다.
성 경: [요12:14,15]
⭕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그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메시야의 영광 얻으실 것을 예표하는 행동 설교이다. 그가 장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만민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었다. 이 사실은 바리새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예언하였다. 곧, 19절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고 하였다. 요한은 이런 무의식적 예언을 흥미 있게 취급하였다. 그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뒤에 있었던 대제사장의 무의식적 예언에도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한다. 요한 복음의 특색 중 하나는, 표적의 책(book of signs) 곧, 신령한 뜻을 나타내는 이적들과 상징적 행동들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은, 바리새인들의 말(19절)을 인용한 뒤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사실을 말하였다(20-22). 그것은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신 뒤에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세계적 복음 전파)을 표적으로 말함이다. 예수님은 사실상 그것을 그렇게 해설하셨다(23-3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전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카일(Keil)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그의 낮아지심을 상징한 것이로 하였으나, 그 의견도 평화의 뜻을 제외함이 아니다(Grosheide). 우리 본문에 인용된 예언은 슥 9:9의 말씀이다. "시온 딸"이란 말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메시야께서 평화를 가지고 오실 터인즉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것 없다. 스가랴 시대의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도 그 소망(메시야가 장차 오실 소망)중에서 평안을 가지라고 부탁 받았으니, 그가 오신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욱 평안을 가져야 할 것인가?
성 경: [요12:16]
⭕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그의 주(主)되신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는, 예수님의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그 일이 슥 9:9의 성취하였음을,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교훈을 받는다. 곧, 현재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잘모르지만, 세월이 지난 뒤에 알게 되기 위하여 그 동안에 파란 곡절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였는데, 후에 그들이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때까지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는 과정이 단순치 않은 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고개를 넘은 뒤에 비로소 일찍부터 움직인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알게 되어 기뻐하게 된다. 시 119:71에 말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12:17,18]
⭕ 여기서는, 그 무리가 예수님을 성대히 영접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곧, 그들은,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신 예수님의 권능에 대하여 들은 까닭이었다. 그 사실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한 자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본 자들이었다(17 절).
성 경: [요12:19]
⭕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그 때의 군중의 동태를 바로 보고 지적하였다. 그들의 말에,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한 것은, 무의식 중에 나온 예언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세계적 선교의 확실성을 예언한 셈이다. 그들의 말에 뒤이어 예수님께서 자기의 세계적 선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20-32).
성 경: [요12:20]
⭕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 여기 이른바 "헬라인"은 순연한 헬라인으로서, 개종(改宗)하고 그 때의 구약 종교에 들어왔던 자들을 의미한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장체 이방인들이 무수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실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요12:21]
⭕ 저희가 갈릴리 벱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 그들은, 직접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빌립의 소개를 받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경외(敬畏)하는 증표였다(Calvin). 그런데,그들은 하필 다른 제자들보다도 빌립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립"이란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사실을 보아서 그가 누구보다도 헬라어를 잘 한 관계였든지, 혹은 그들이 빌립의 고향 벱새다(헬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온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성 경: [요12: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이 말씀은, 그의 개인적인 영화를 말함이 아니고 메시야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내포한 것이다. 구원의 갈증을 느낀 헬라인들이 찾아 온 마당에 있어서, 이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 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만 된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P. 215-216). 12장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를 영화롭게 함(1-8)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영화롭게 함(12-19) 헬라인 몇이 그를 베옵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다(20-33). 그러나 이 일들이 모두 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사건을 보여 줌과 관련되었다.
성 경: [요12: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및느니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많은 이방인들이 천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가리킨 비유인데, 사 53:10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거기 말하기를,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의 속죄적 희생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인 만큼, 그를 따르는 자들(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
성 경: [요12:25]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여기 기록된 희생의 원리는, 일반 사회에도 적용되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의 지켜야 할 원리를 보여주신다. 곧,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만 따라가야 하는 신령한 희생의 도리를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으니 만큼(24 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따르지 말고(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그만 따라가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위한 자기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신 뒤에는, 이어서 그를 믿기(따르기) 위한 우리의 희생을 권고하시곤 하셨다(마 16:21-26; 눅 9:20-26).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란 말은,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제 예수님의 속죄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므로(24 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구원을 그에게 맡기고 그만 믿고 따라야 된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은 생명을 잃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듯이 주님만 사랑하며 바라보아야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이렇게 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용이하게 그렇게 되는 길이 있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미워함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푹 적시움이 있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12:26]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이것은, 위의 말씀에 이어서 참된 신자 되는 원리를 더 자세히 가르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곧,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25절 하반), 여기서 주님을 따른다(믿는다)는 말로 바뀌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을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주님과 함께 받게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장차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하반절). 딤후 2:11-12 참조.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신자의 구원을 내세의 장소와 관련시키는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에 많다(14:2, 17:24). 8:21, 33 참조. 그러나 이와 같은 내세 사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하고 있다. 곧, 그 장소가 그리스도의 계신 곳이라는 것이다. "나 있는 곳",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들이 그 뜻이다. 공관 복음도 내세의 장소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마 19:28; 눅 23:43), 주로 "천국"이란 말에 내세(來世)를 포함시킨다. 천국이란 말이 내세의 장소성(場所性)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운동의 경역(곧, 하나님의 통치 경역)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말하는 내세적 구원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혹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사실을 그 중심 요소로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과 및 그를 섬기는 자들이 동일한 곳에 들어감에 대하여, 볼트만(R.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잘못 말하였다. 곧, "여기에 나타난 교훈은 노시스(露智派) 신비의 구속 교리와 부합한다. 노시스는 우주적 관련에서 그런 구속자의 구원 받는 자들의 연합을 가리키고, 여기 요한 복음은 역사적 관련에서 그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26). 그는, 특별히 32절의 모든 사람을 이끄는 "들리움"이란 말 해석에서도 이와같은 견해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다시 여기서 신비(노시스 신비)의 술어로써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30). 그러나 예수님의 돌리우심은, 노시스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우주 전쟁을 통과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구원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들리우심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사 부활 승천케 하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요12:27]
⭕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가 왔나이다 -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란 것은, 주님께서 그의 인성(人性)에서 그의 당하실 속죄의 죽음을 느끼시고 하신 탄식이다. 그는 무죄하신 이로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의 진상(眞相)을 맛 보신 유일한 사람이시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죄로 물들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져서 죄의 결과인 사망의 비참한 진상을 참으로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
성 경: [요12:28]
⭕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 곧,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성 경: [요12:29]
⭕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 그 때에 대중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계시(啓示)의 말씀(28 절)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계의 뇌성으로 오해하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임하였던 하늘의 소리가 역시 그 동행자들에게 오해되었다. 그 동행자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있었다고 하였다(행9:7). 그 때의 군중은 저렇게 심령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졌으므로 천지를 진동할 능력 있는 복음을 들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고 딴 것으로 오해한다(Calvin). 어떤 이들은, 그것을 천사의 말로 오해하였으니, 그것을 뜻 있는 말로는 안 셈이다. 그것을 보니, 그 때에 들린 소리가 무의미한 소리 뿐만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소리는 예수님 밖에 다른 사람들도 들었으니 만큼, 그것이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인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요12:30]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 위의 28절의 계시, 곧,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그리스도 죽으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일설에 의하면, 여기 "너희를 위한 것"이란 말씀은, 그 뜻 모를 이상한 소리가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이르도록 함에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경이감(驚異感)으로 인하여 신앙에 이르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이 귀절 말씀이 그런 뜻을 가진다고 하기는 어렵다.
성 경: [요12:31]
⭕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고난 받아 죽으신 뒤에 나타날 결과를 표시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는 처분되고(1:29), 마귀의 계획은 파괴된다.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영적 질서는 오기 시작하여 마침내 만물이 새롭게 되는 우주적 구원이 임한다(계 21:5). 곧, 예수님은 자기의 죽었다가 부활하심이 가져올 구원 운동의 전폭(현재와 미래를 포함함)을 여기 진술 하셨다. "이 세상 임금"이란 말은 사단을 의미한다. 눅 10:18 참조.
성 경: [요12:32,33]
⭕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리킨다(3:14). 이렇게 그가 속죄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만국에서 그의 모든 백성을 모으신다. 곧, 만국에서 그를 믿을 자들이 생긴다. 희생은 사람들을 끈다. 특별히 흠과 티가 없으시며 전연 허물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아들의 속죄하시는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실 뿐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그 안에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의하여 사람들을 거듭 나게 하시어 자기에게로 오게 하신다. 6:44 참조.
성 경: [요12:34]
⭕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나 -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이것은, 그들이 시 110:4; 사 9:6; 단 7:14등에 근거하여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은 몰랐던 것이다.
성 경: [요12:35]
⭕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여기 "잠시 동안"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가리킨다. 기회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두근거리며 긴장을 느낄 줄 알아야 된다. 그 이유는, 기회는 언제나 잠간 동안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기회라는 것은 사람이 당면한 그 현재 밖에 없다. 그는 미래를 자기의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미래는 그에게 감취어 있다. 혹 그것이 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것이 되지 못할 수도 잇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받은 기회는 현재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회를 잠간 동안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다. 청년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지금 준비하는 시기이고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부나 다 해 가지고 이 다음이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뒤에 신앙 생활을 바로 해 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은 생각이다. 청년들은, 그 준비하는 중에도 그 준비가 역시 정규적 살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준비가 바로 살림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도 하나님 없이 살지 말아야 된다. 이 다음에 잘 믿겠다고 하는 것은, 이 다음에도 잘못 믿을 것을 약속함과 같다. 노인들은 낙오자의 심리를 가지고 기회를 허송하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시대는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노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을 좋은 환경에 처햐여 있다. 그들은, 한 평생 모든 것을 다 지내보고 헛된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야 말로 그 당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만하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70세 때에 선교사로 출발하였고, 크랜멀(Cranmer)은, 60세 때에 비로소 복음 진리를 크게 깨닫고 그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이 귀절과 다음 귀절에 "빛"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여기서 "빛"은 그리스도를 비유한다. 36절에 말하기를,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유하였을 때는 그 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 중에 빛을 가장 먼저 지으셨으니, 그것을 보아도 빛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이 없는 세계에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슐라텔(Schlatter)은 말하기를, "생명은 존재보다 높고, 빛은 그 중에도 가장 높다. 그 이유는, 그것이 생명에게 깨닫는 내적 성정(內的性質)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Hoher als das Dasein ist die Lebendigkeit, und das Hochste ist das Licht, womit dem Leben die bewusste, enkennende Innerlichkeit verliehen ist. - Der Evangelist Johannes, p.6).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보여주시는 빛이신가?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실 때에 어떤 이론에 의하여 보여주시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보여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 속에 모실 때에는 하나님이 환하게 우리에게 알려진다. 슐라텔(Schlatter)은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교훈에서 교훈을, 또는 신학에서 신학을 해설하시는 이가 아니다. 그는 빛으로 역사하신다"라고 하였다. (Er hat nicht Lehre durch Lehre, Theologie durch Theologie ersetzt. Er wirkt als Licht. - Der Evangelist Johannes, p. 273).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참으로 접촉하는 자마다 참되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보다 귀한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을 수 있는 기회처럼 중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 보다 그 분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전파할 때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행 20:24에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생각한 원인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니 만큼,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제일 주의로 살아야 된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죽으셨던 분으로 내 영혼을 구원하게 하여라"고 하였다.
성 경: [요12:36]
⭕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서 숨으시니라 - 여기서 "빛"은 윗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신 만큼, 그도 빛이시다(요일 1:5; 요 8:12).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심은 그 때 팔레스틴에만 한 번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는 중에 있었다. 그것은 천재 일우의 귀한 기회를 놓치는 불행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 뒤에는, 그가 육신으로 세상이 계실 수는 영원히 없을 터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아 그를 믿어야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별세 후에는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기회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던 주님을 오랫 동안 보면서도 그렇게 완강하게 끝까지 배척하던 자들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두 번이나 역설(力說)하신 것이다(35절 참조).
성 경: [요12:37]
⭕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나 - 요한 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탄식함이다. 1:5, 10-11 참조.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메시야심을 보여주시는 표적(곧, 증표)인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았으니, 그들 자신에게 죄책이 돌아갈 것 밖에 없다.
성 경: [요12:38]
⭕ 이는 선지자 아시아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니이까 하였더라 - 이 말씀은, 사 53:1의 인용이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수효가 많지 못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주의 팔"이란 것은 주님의 능력(곧, 사람의 마음 눈을 열어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예언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 때에 별로 많지 못하였다.
성 경: [요12:39]
⭕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 은혜가 많을술록 불신앙을 고집하는(37 절) 원인은,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한 사실에 있다. 우리가 이 원리를, 현재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할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 중에 믿을 자도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요12:40]
⭕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은, 이사야서에 있는대로 이사야가 주님의 영광을 본 뒤에 받은 말씀이다(사 6:10).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선한 인간들을 강팍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는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화되는대로 버려 두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의 이렇게 하심이 그의 거룩하신 계획에 들어 있었다는 뜻도 여기 포함되어 있다. 물론 유대인들이 저렇게 되는(40절의 내용과 같이 되는) 죄책은 저희 자신들에게 있었다.
성 경: [요12:41]
⭕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이사야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들었다.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 말씀이 앞질러 인용된 내용이었다(사 6:9-10).
성 경: [요12:42,43]
⭕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여기 "관원"들은, 산헤드린공의회의 지도층 인물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세상 영광에 사로잡혀 있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이신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본문 "그러나"란 말과 "에도"란 말이 이 사실을 역설(力說)하며 지적한다. 그들이 그 믿은 바를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던 원인이, 진리 지식의 부족이 아니고 도덕력의 부족이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그들이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더욱 약해질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신자가 마땅히 강해야 할 자리에서 어떤 육적 이유로 강하지 못하면, 그는 강해질 방향을 등지고 약해 가는 방향으로 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계속하여 약해진다. 그것은, 사람이 경사진 어름판에서 미끄러져 내림과 같다. 그러면 그 때에 믿는 관원들이 왜 저렇게 약하여졌던가? 그것은 우리 본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1)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욱 사랑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니, 곧 존재자란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인즉, 본래 없던 자요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없앨려면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인간의 칭찬이나 영광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을 찾아야 된다(Hengstenberg).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판단보다도 사람의 박수를 택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기보다, 차라리 짐승 같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명예를 탐하면 명예의 종이 됨. 이런 사람은 혹시 의(義)를 행하다가도 명예를 위하여 얼른 중단한다. 명예주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 중에서 명예주의에 속한 자를 사용하시지 않고 버리신다. 무디(Mody)가 하나님께 사용된 이유도 그가 언제나 자기를 감추었으며, 명예를 좋아하지 않은데 있었다고 한다. 그의 후계자인 트레이(Torray)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남의 말을 많이 인용하기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단에도 될 수 있는대로 남들을 내세웠다고 한다.
성 경: [요12:44-46]
⭕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권고하신 말씀이다. 이 권고의 내용은 그가 바라 신인 간(神人間)의 중보자란 것이다. 곧,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중보자)라는 것이, 요한 복음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영적으로 보게)하시니,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 경: [요12:47-50]
⭕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가 어떻게 큰 것을 가리킨다. (1) 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데 세상 끝날에 그 말씀이 심판한다고 하시며(47-48), (2) 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며(49절), (3) 그 말씀이 영생을 주는 것이니 만큼, 그 말씀을 "영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신다(50 절). 요 6:63 참조
성 경: [요13:1-3]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 이 귀절들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세가지 동기로써 제자들에게 사랑의 일, 곧, 발 씻는 일을 행하셨다. (1)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그의 인성(人性)편의 무거운 느낌에서 행하신 것. (2) "마귀가...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은 줄 아시고(2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가장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팔리운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장면이고, 낙심될 일이다. 그런데, 그가 계속하여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는, 가장 검은 미움의 활동이 일어난 곳에 가장 부드러운 사랑으로 대하셨다. (3)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그가 자기의 영광 받으실 사실을 아셨다는 뜻이다(마 28:18). 그는 저렇게 영광 받으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사람이 천국에서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비결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나타난 그의 겸손이다. "저녁 먹는 중." 이것이 유월절 만찬을 가리킨 것일까? 혹은 다른 때의 저녁 식사를 의미한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유월절 하루 전(니산월 13 일 저녁)의 식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21-30절의 내용을 보니,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줄 자로 지적된 저녁인 것이 드러난다. 그 저녁은 유월절 만찬 저녁이다. 공관 복음은 그렇게 말한다(마 26:17-25; 막 14:17-21).
성 경: [요13:4,5]
⭕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유대인의 풍속에는 보통 식사 전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법인데, 이 때에는 식사 도중에 그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 때에 이 일을 할 종이 없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겉옷"은 저고리를 말함이 아니고 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일할 준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겸손의 극치(極致)이다. 그가 최종의 행동 교훈으로 식사 도중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의 별세 후에 제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겸덕을 고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저렇게 계급을 초월하시고 영광의 주님을 사랑의 발 씻는 종으로 삼으셨다. 고데이(F. Godet)는 추측하기를, 이 발 씻는 일이 아마도 제자들의 서로 다툰 사건(눅 22:24-27)을 동기로 하고 있은 듯하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이것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설교하신 셈이다(12-16). 실행으로 본을 보이는 설교자는 그 설교로써 사람들의 심령을 아주 점령해 버린다. (2)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속죄하시는 중보(中保)의 역사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지극히 크신 사랑의 행동이시다. 그가 피를 흘려서 그의 백성의 죄를 씻으신 일도 지극한 사랑이면서 역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낸다. 유명한 변증 학자 스킬더(Schilder)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하여 물을 휘저으신 주님의 손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그의 못 박히신 손에서 흐르는 피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되지 못함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뜻은, 그의 몇 제자들에게만 그의 친절과 겸손의 모본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위로써 온 세계를 찾으시는 그의 속죄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요13:6]
⭕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이것은 베드로가 너무 황송한 중에 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은, 그가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은 때에도 하였으니, 그 때에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였다(눅 5:8). 베드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취급하면서 그것을 황송하게 여겨 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수난하실 일에 대하여 들었을 때에도 역시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였다(마 16:22). 저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업 관계의 행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해석으로 잘못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겸손과 희생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황송(惶悚)하게 생각함은 좋으나 그 행하심이 구원의 행위인 것인 만큼, 그것을 감격하여 받아야 된다. 그것을 받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것은, 병자가 의사의 진료를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성 경: [요13:7]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 이것은, 그 현재에 베드로가 죄로 인하여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나,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은, 그의 속죄의 고난으로 신자들의 죄 씻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1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본 뒤에야 그의 발 씻기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성 경: [요13:8]
⭕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베드로가 발 씻기시는 예수님의 봉사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 의미로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의 구원 은총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받으실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성 경: [요13:9]
⭕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베드로는 여기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또 실수함을 면치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심이, 구속의 사랑에 대하여는 상징하는 정도 뿐인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의 실제인 줄 오해하고 욕심을 부렸다.
성 경: [요13:10]
⭕ 이미 목욕하는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예수님의 제자들은, 속죄를 받은 자들이라고 간주된 때 벌써 온 몸이 깨끗해진 셈이다(15:3). 그러나 그들도 매일 세상과 접촉하여 허물과 죄로 더러워진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하여 사죄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발 씻는 일로 비유된 것이다.
성 경: [요13:11]
⭕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히 겸손의 덕을 나타내신 것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을 속죄하여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파는 자는 천하에 가장 더러운 죄를 범하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만민을 구속하여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시지만, 그를 파는 유다는 깨끗지 못한 자들 중 하나이다.
성 경: [요13:12-15]
⭕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겸손한 봉사의 표본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일로써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위 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겸손히 봉사하신 고상한 정신이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대하여 겸손하기는 쉬우나, 윗 사람으로 아랫 사람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에 기준하여, 톨레도(Toledo)회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웠다(694 A.D.).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이 그것을 폐지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부탁하신 것은, 다만 제자들더러 서로 겸손하게 봉사하라는 것 뿐이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진하여 형제를 겸손히 봉사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크게 간주될 것을 가리킨다(마 18:4).
성 경: [요13:18]
⭕ 이 귀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의 상징적 의미, 곧, 구속에 관하여 말한다. 예수님께서 구속 사업을 이루시지만, 그 은혜에 참여할 자들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곧, 그의 제자들이 모두 다 "복이 있을"것(17절)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18절).
⭕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이것은, 매우 친근하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큰 손해를 본 다윗의 경험을 들어 말씀하심이다(시 41:9).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다윗의 당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일의 예표였던 것이다.
성 경: [요13:19]
⭕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를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 예언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그것이 성취될 때에, (1) 그 예언을 주신 이의 진실성과 권위를 믿게 되며, (2) 그 성취된 사건 자체를 믿게 되며, (3) 그 예언 성취가 지향한 장래 행복의 활실성도 믿어진다. "내가 그 인줄"(*)이란 말은, "나 곧 나만 중재자요 보내심을 받은 자요 메시야라"는 뜻이다(Grosheide).
성 경: [요13:20]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이 말씀의 목적한 바는 이렇다. 곧, 비록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보낸자". 곧,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그 만큼 사도들의 권위는 높은 것이다.
성 경: [요13:21]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그의 심령에 민망하시게 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생각되는 것은, (1) 그의 제자가 그를 팔아 먹는 일이 너무도 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과, (2) 그런 일에 대하여 이제 공적으로 지적하여 말하기가 역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일을 지적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될 단계였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엄격한 법정 선언과 같이 "증거하여" 말씀하셨다. 여기 "증거"란 말이 법정 용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 경: [요13:22]
⭕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 이것은, 제자들이(유다를 제외하고는)강퍅하지 않은 증표이다.
성 경: [요13:23]
⭕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일 것이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식사할 때 취하는 자세를 말함이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그 때 풍속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지 않고 왼 팔에 의지하여 옆으로 누워서 먹었다고 한다(Westcott).
성 경: [요13:24,25]
⭕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윗절에 말한바,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을 가리킨 것인데, 이제 베드로가 그더러 주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알려 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는 측근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이것은, 유대인들이 음식 먹을 때에 원형으로 팔꿈치를 의지해서 서로끼리 가슴에 기대다시피 연접하여 누워서 먹는 풍속이 있었음을 말한다.
성 경: [요13:26,27]
⭕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유다를 주시니 - 그 당시에 연회 주인이 떡 조각을 찍어서 손님에게 주는 것은 친절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이 행동은 가룟 유다의 회개를 독촉하신 사랑이다.
⭕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이유는,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눅 22:3-6; 요 13:2 참조
성 경: [요13:28,29]
이 부분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유다의 행할 악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성 경: [요13:30]
⭕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유다는 주님을 팔 자로 지적된 때에, 회기하지 않고 그냥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하려고 그 좌석에서 떠나 나갔다. "때가 밤이러라"고 한 것은, 영적 의미도 가진다. 곧, 회개하지 않는 그의 마음도 밤과 같이 캄캄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의 앞길도 영원히 캄캄할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요13:31]
⭕ 지금 인자가 영광을얻었고 여기서 "인자"란 말(* )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그의 부활 승천을 의미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가(유다가)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서,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게 한 사건이다. 그 뿐 아니라, 다음 절에, "영광을 주시리니"(* )라고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을 보아서도, 이 귀절의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보셨다.
⭕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인자를 인하여"란 말은 "인자 안에서"란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
성 경: [요13:32]
⭕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 여기 "자기로 인하여"란 말(* )은, 하나님 계신 곳을 가리킨다. 17:5에서는, 이 뜻이 "아버지와 함께"(* )란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 층천케 하셔서 자기의 계신 곳에 함께 계시도록 하심을 가리킨다(6:62, 17:5, 20:17; 빌 2:9-11).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곳에 가시게 되므로 그 제자들과는 당분간 나누이게 된다. 다음의 33절 말씀이 그 뜻이다.
성 경: [요13:33]
⭕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이 말씀이 윗절(32 절)과 무슨 연락을 가지는가? 그 연락은 이렇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신 결과(32절 하반)로 그는 아버지의 계신 곳으로 가시게 된다. 그의 제자들은 당분간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6절 참조.
성 경: [요13:34]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여기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의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종말관적 동기.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수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누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유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임. 요 15: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임. 자식을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 시작해야 된다.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임.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주어야 된다.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닭.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3).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으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집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계된 벌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새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그 날자가 변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제 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13:35]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이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를 실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다. 이것은, (1) 예수님의 제자된 표가 사랑이라는 말과 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성 경: [요13:36-38]
⭕ 이 부분의 말씀은, 베드로의 결심과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신다"는 것(33 절), 그가 죽어서 하나님 계신 하늘 나라에 가실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오해하고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였다(36 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것은, 진리대로 움직인 신앙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의 유적인 용기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적인 용기를 꺾어 겸손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으니,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38 절). 그가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육적 용기는 도리어 주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요14:1]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예수님의 별세에 대한 말씀(13:33)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그들더러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의 이와 같은 권면은, 이 아래 여러가지 이유를 가진다.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또 예수님 자신을 그 만큼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고 믿으라는 뜻이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보며 일체로 본다(5:24, 10:30, 14:9, 12:44).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심은, 그가 일찌기 그들에 주신 내세훈(來世訓)(12:26, 13:36)을 믿으라는 뜻이다. 다음 절 하반에, 일찌기 주셨던 그의 내세훈이 다시 관설된다. 거기 있는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요14:2]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여기 "거할 곳"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모나이(*)인데, 이것은 영구한 저택(邸宅)을 의미하는 바, 하반절의 "처소"(* )라는 말과 다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나이 곧, "거할 곳"은 구약 시대에도 늘 있어오는 것이니,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비하실 "처소"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거할 곳"에 신자들을 수용할 자리이다.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 곧, 구속 사업의 완성인 것이다. 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번역은, 원문의 문구를 괄호구로 취급하고 번역한 것이다. 그 뜻은, 만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사실을 그들에게 벌써 말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문구를 그 아래 호티(*)로 시작되는 문구와 연속시켜서 의문(疑問)의 말씀으로 읽음이 더욱 문법적이다. 그렇게하면 그 문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라고 일찌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12:26, 32에 포함되었다. 어쨔든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천당 신앙을 강조함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준비된 천국을 믿고 바라보는 신자는, 벌써 천국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생활을 한다"라고 하였다(Those who look for a heaven made ready will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in heaven-Notes from my Bible, p. 141).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에 조급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 사람들이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관설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 기독교의 색체를 가지지 않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노시스주의(靈智派)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 465). 곧, 요한 복음의 내세관(來世觀)이 노시스 사상에서 말한 것(영혼이 하늘 세계에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 복음의 말씀이 물론 신자의 별세 후 그 영혼이 하늘 세계에 감을 말하지만, 노시스 사상에 있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노시스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유출설에 속한다. 한스 조나스(Hans Jonas)는, 노시스 사상이 말하는 영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내려온 부분이라"고 하였다(Gnostic Religion p. 44) 헬미티즘(Hermetism) 문헌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분산된 것이니 이는 마치, 광선이 태양에서 분산된 것과 같다고 한다(Libelius, p. 12 ). 따라서 노시스 사상에서 말하는 영혼의 승천은, 그것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연합을 의미하는데, 점차 성화되어 올라간다는 것이다(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pp. 45, 166). 이같은 사상이 헬메티즘(Hermetism)문헌에 있다(Libelius 1:25-26). 거기 있는 말을 보면, 별세한 영혼이 7 층 세계를 통과하여 결국 하늘에 이르러 성화 되어 신화(神化)된다고 한다. 그 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곧, "승천에 대하여 내게 말하시요"하니 포이만드레스(Poimandres)가 대답하기를 "내 몸이 용해되면 나는 하늘들을 통과한다. 첫째 하늘은 일이 증가되기도 하고 감손되기도 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모든 악한 계획들이 있는 곳이요. 세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이요, 네째 하늘은 교만이 다스리는 곳이요, 다섯째 하늘은 거룩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곳이요,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는 곳이요,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이다. 영혼이 이 모든 하늘들을 지나서 여덟째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완성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노시스 사상은 인간의 자력 구원을 말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러나 요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단독 역사(役事)로 말미암는 구원론이다. 요 14:2 이하는, 실상 구약 사상(시 49:15, 73:24)에 근거한 것이다. 볼트만(Bultmann)의 신환 제거(Demythologizierung)주의는, 실존주의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쓰는 말은 대부분 신화(神話)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사람의 언사로 표현될 수 있다.
성 경: [요14:4]
⭕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예수님께서 일찌기 자기를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많이 말씀하셨다(8:19; 10:1, 7,9,37,38, 12:26, 44,45,49,50; 마 11:27, 28). 다음 귀절(6 절)은 그 곳을 명백히 가리켜 말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이라고 하였다.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인고로 그들은 편하게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길 되시는 주님 자신은, 그 길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큰 고생을 당하셨다.
성 경: [요14:5]
⭕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 요한 복음에는, 특별히 도마가 충성스러우면서도 둔한 제자로 나타났다. 도마는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이 천당을 가리키신 줄 몰랐던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지각이 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 때문에 진리를 밝혀지곤 하였다(Barrett).
성 경: [요14: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여기 "길", "진리", "생명"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모두다 "그"라는 관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길", "그 진리", "그 생명"을 의미한다. "그 길"은 유일한 길이요(행 4:12), "그 진리"도 유일한 진리요, "그 생명"도 유일한 생명 근원을 가리킨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다른 종교 사상과 타협하시지 않은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간다는 영지파(노시스)의 사상과 기타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타협하는 혼합주의(Syncretis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 독일 무이(獨逸無二)하신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그는 메시야적인 자아 주장을 세우신다. 선지자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요, 더욱이 그 길의 목적인 "그 진리", "그 생명"자체이시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시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이 사실은 그가 절대적인 구주이심을 성립시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당 가는 길을 알려는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천당 가는 길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당이 하나님 중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별도로 천당을 생각하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으로 흐른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善)이나 진리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성 경: [요14:7]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은 그 때까지 그런 영적 지식에 부족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들이 그런 지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란 말은, 이제 멀지 않아 곧 실현될 일, 곧, 그의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부터 시작될 완전한 계시(啓示)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은 완전한 지시기, 곧,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됨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그것을 가장 확신 있는 지식으로 여겼다. 그것이 그렇게 확실하다는 의미에서 우리 본문에, "보았느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사도 요한의 글에는 이 방면 기록이 적지 않다. 19:35에도 말하기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고 하였고, 요일 1:1-3에도 말하기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에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성 경: [요14:8]
⭕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은 여기서도 현실적이고 타산적이다. 그는, 영(靈)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감각적으로 보기 원하였다.
성 경: [요14:9]
⭕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벴겔(Bengel)은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영혼 자체를 볼 수 없으나, 그것이 몸을 도구로 하여 행하는 바를 보아서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관한 일체의 생각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거울로 삼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골1:15)"라고 하였다(Gnomon 2, Edinburgh, p. 433).
성 경: [요14:10]
⭕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여기 이른 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 두 분의 도덕적 연합(행위로써 연합)도 의미하였으니, 고데이(Godet)의 말한 바와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여기 '나는 아버지 안에'란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자기를 겸허(謙虛) 시킴이고, '아버지는 내 안에'란 말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겸허에 모든 능력과 지혜를 전달하심이다"라고 하였다(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Zondervan, p. 274).
성 경: [요14:11]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여기 "믿으라"는 부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저 그의 말씀에 의하여 그런 줄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그의 말씀대로 믿으라는 명령이다. 이렇게 함이 최고의 신앙이다(Hendriksen).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렇게 믿는 것이 둘째로 가는 신앙이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첫째인데, 그것은 상반절에 보여 주었다. "그 일"이란 것은 그의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10:25, 37-38 참조.
성 경: [요14:12]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이 말씀은 사도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일반 신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1) 이 부분(14-17장) 말씀이 사도들의 사명에 대한 주님의 임종유언(臨終遺言)과 같은 까닭이며(26,17:18), (2) 이 부분 교훈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는 17장의 기도에, 주님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후대의 신자들을 사도들에게서 구분하신 까닭이다(17,20).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곧,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에 의하여 이적을 행하며, 기타 위대한 일들을 하되,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것과 같은 정도의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보다 큰 것."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성령이 오서서 이루실 만국 전도와 구령(救靈) 사업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땅 위에서 행하신 일들은 미래의 이 큰 일들을 위한 준비였다. 신바가들은 이 귀절에 근거하여, 신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땅 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일과 승천하신 뒤에 그의 하시는 일과으이 구분을 모르는 가운데서 일어난 오해이다. "이보다 큰 일"은 외부적인 육신 상대의 이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시므로 완성된 구원을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시함이다. 외부적 이적은 "비유로 말씀하신" 계시(啓示)라고 할 수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 실시는 "밝히 말씀하시는" 계시라고 할 수 있다(16:25-28).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만국에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저렇게 큰 일이다(시 27:8; 사 42:6; 슥 9:10).
성 경: [요14:13]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신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위의 12절에서 독립된 것인가? 혹은 그것의 연속인가? 이것은 하나의 난제이다. (1)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부분 말씀이 12절 내용을 더 설명해 주는 부속 문구라고 한다. 고데이(Godet)와 즈안(Zaln)도 역시 같은 해석을 취한다. (2) 그러나 크로솨이데(Grosheide)와 버나드(Bernard)와 렌스키(Lenski)등은, 이 부분 말씀을 또 하나의 독립적인 약속으로 간주한다. 특히 버나드(Bernard)는, 13절 초두에 있는 "또한"(*)이란 헬라원어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세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1) 예수님의 권위(權威), 혹은 공로(功勞)에 의지하여 기도함이고, (2)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의 뜻대로 기도함이다. "내가 시행하리니"란 말씀은,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기도응답은 언제나 인간의 사욕을 채우려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그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 함이다. 이런 기도 응답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사로 인하여 실시되는고로, 여기서 "아들을 인하여"란 말이 쓰여 있다.
성 경: [요14:14]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이것은, 윗절에 말씀하신 약속을 거듭 말씀하여 고조하는 것 뿐이다.
성 경: [요14:15]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여기서 예수님은, 사도들더러 그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신자가 그의 계명을 지킴이 곧, 그를 사랑함이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이 말씀이 앞절과 관계를 가지는가 혹은 독립적인 말씀인가? 또 혹은 이것이, 16절 이하에 나오는 보혜사 약속과 관련된 말씀인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몇몇 학자들의 의견을 생각해 보고저 한다. (1)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귀절의 말씀이 독립적인 언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2) 렌스키(Lenski)와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귀절 말씀이 위에 있는 많은 말씀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곧, 그들은, 여기 "사랑"이란 것을 믿음(11절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계명"이란 것을 기도하라는 부탁과 같이 생각하여 윗말과 연락시타다다. (3) 버나드(Bernnard)는, 이 말씀을 16절 이하의 보혜사 약속과 관련시킨다. 곧, 그는 생각하기를, 신자가 계명을 지켜야 되는데, 그것은, 16절 이하에 약속된 성령의 은혜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4) 다른 학자들은 역시 이 귀절을 16절 이하와 연락시키면서도 위의 버나드(Bernnard)와 달리 취급한다. 이들은, 이 귀절(15 절)과 아랫 말씀을 연락시켜서 다음과 같은 뜻을 찾는다. 곧, 신자들의 계명을 지켜야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계명이란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과(34 절), 또한 합심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신약 교회를 창립하는 오순절 성령 운동은 물론 구원사(救援史)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이다. 이 약속 성취는 인간의 주관적 조건에 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약속 성취를 내다 보시면서 사도들과 그 때 신자들의 주관적 준비를 명하시기는 하셨다. 예컨대, 그들더러 예루살렘에 유하며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행 1:4). 그들의 기다리는 일은 바로 기도에 전력함이었다(행 1:14). (5)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계명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14절에 나온 기도하라는 부탁과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5: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귀절의 말씀이 그 아래 나오는 말씀, 곧, 성령이 오시리라는 약속과 관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기도하는 결과로 성령님이 오시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행 1:12-14, 2:1-4). "계명을 지키리라." "지킨다"는 말은, 보배를 지키며 보관함에 대해 쓰는 말이다. 이것은 계명을 중심에서부터 사랑하여 지킴이다. 계명 지킴과 기도 응답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마술적 의미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윤리적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그 기도자가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실이 있어야 그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다.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계명과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에 있다. 예를 들면, 재세례파에 속하는 란텔파(rANTERS)는, 자기들이 모든 계명을 초월한다(계명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뜻)고 하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자기 자신을 신격화(神格化) 하는 참람한 행동이다.
성 경: [요14: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여기 이른바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 원어(*)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혜사"란 말(*)은 "대언자"를 의미한다. 요일 2:1에 예수님을 "대언자"라고 하였으니, 성령을 가리켜 "다른 대언자"라고 함이 적당하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란 말을 위로자란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과 마찬가지의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 약속된 보혜사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성 경: [요14:17]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말씀은, 진리(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 사업에 대한 설명 계시)가 성령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그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은 육안에 보이는데로만 무엇을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를 받는 이유는, 그가 그들 속에 거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까닭이다. 그것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하신 말씀이 의미한 바이다.
성 경: [요14:18,19]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여기서 갑자기 "내가"란 말씀으로 시작된 것은, 위(16-17)의 논제(성령)와 달라진 느낌이 있다. 즈안(Zahn)은 이것을 논거로 하여, 이 귀절 말씀은 재림을 취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란 말을 사용하신 이유는, 위(16-17)에 관설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 자신의 속죄 사업의 연장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과 일체이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내가"란 말을 기탄 없이 사용하셨다. 위의 16-17절은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 뿐이고, 이 귀절(18 절)부터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란 말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 "내가...너희에게로 오리라"하신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는가?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가? 혹은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가? (1) 재림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조금 있으면"이란 말(19절 초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온다는 것은 미구에 오심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오심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재림설에 맞지 않는다.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리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계 1:7). (2)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켰다는 학설도 여기 맞지 않는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땅에 계신 기간은 길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것이 18절의,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킬 수 있겠는가 함이 문제 된다(Smide). (3)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을 성령 강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령 강림 사건에 주님의 부활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인(Fein)은 말하기를, "부활절과 오순절은 일체(一體)로 합류한다"라고 하였다(Ostern und Pfingsten fliessen zu einer Einheit zusammen. - Theol., S. 383).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사는고로 너희도 살게 되리라"고 번역하신 것이 헬라 원문과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 한역의 "이는"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위의 말씀에 직속하는 이유 문구가 아니고 하나의 독립 문구이다. "내가 사는고로"란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Lange, Barrett).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고유하신 생명 근원을 의미한다고 한다(Grosheide). 어쨌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려 주시는 근원이 되심을 보여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상반절의 "나를 보리니"란 말씀이, 살게 하여 주는 원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산다는 것(영생의 생명)은 실상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봄으로(앎으로) 생기는 것이다. 요 17:3 참조. 18절부터 27절 까지는 보혜사의 하실 일에 대하여 말한다. 곧, (1) 신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살리심(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심(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를 깨닫도록 하심(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심이다(27 절).
성 경: [요14:20]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이 말씀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한 관계를 가리킨다. 신자와 그리스도와 연합에는 여러가지 방면이 있으니, (1) 신자가 선택 관계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1:3-4). (2) 신자가 구원사상(救援史上)의 그리스도 행적에서 그와 연합함. 곧, 그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의 승천의 복된 사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롬 6:3-11; 엡 2:4-6; 골3:3-4). (3) 신자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2:10). (4) 신자가 그의 행위와 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롬 6:4; 고전 1:4-5). (5) 신자가 죽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살전 4:14,16). (6) 신자가 부활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고전 15:22; 롬 8:17). 이렇게 이 연합은 영원하며, 죽음도 그것을 파괴 시키지 못한다.
성 경: [요14:21]
⭕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나의 계명."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13:34) "새 계명"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다. 13:34 해석, 요일 2:7-11 참조. 형제를 사랑한다 함은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포한 신약 윤리(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이 모든 윤리는 사랑을 목적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신약 윤리가 모세의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완성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사고 방식으로 관설하였다(롬 13:8-10). 그런데, 기독자가 계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구약 시대 성도보다 더욱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관철하게 된다. 그 이유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 성취 형태에서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그 큰 사랑을 받은 것이, 언제나 그의 윤리 생활의 동기를 이룬다. 요일 4:19에 말하기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무슨 일을 행할 때든지 사랑의 동기로 행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의 동기를 가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명확하고 철저하고 일관성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마 22:37-40).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을 가리킨다. 그 나타나심은, 우리의 육신에 나타나심보다 더욱 근거 깊이 우리의 심령에 나타나심이다.
성 경: [요14:22]
⭕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니까 - 여기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눅 6:16). 그의 물어본 말은 세상 영광을 생각한 것이다. 곧, 예수님이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시리라(21 절)고 하신 말씀을, 유다는 이름낸다(명성을 떨친다)는 뜻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묻기를, "왜 널리 세상에는 이름을 나타내시지 않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성 경: [요14: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의 말씀을 지킴보다 앞선다. 사랑없이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지킨다 해도 생명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성부(聖父)와 예수님이 함께 신자에게 오셔서 거하신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내주(內住)를 가리킨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신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다(고전 6:19; 고후 6:16; 엡 3:17; 살전 4:8). 이와 같은 연합은 내세에 이르러서 더욱 완전히 이룬다(계 3:20, 21:3). 현세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거하시며, 내세에는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거한다(Godet).
성 경: [요14:24]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이 귀절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악이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요14:25]
⭕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이것은, 그가 이때까지 가르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목적이, 다음 절(26절)에 나와 있다. 곧, 그의 별세 후에 보내실 성령님을 통하여 하실 말씀은 더욱 자세하고 많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성 경: [요14:26]
⭕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여기"너희"란 말은 사도들만 가리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들은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여 주시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은 사도들이다. 성령의 일은, 예수님의 교훈을 되살려 해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님의 전날 교훈을 사도들의 기억에 되살려 깨닫게 하시는 운동이다.
성 경: [요14:27]
⭕ 이 말씀이 윗절까지 계속되던 성령론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이 귀절이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26절에 말한대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사건("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였고, 그 뒤에 이 귀절은 평안의 선물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을 깨닫고 믿을 때에 비로소 참다운 평안을 누린다. 어떤 학설에, 평안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작별 인사라고 하나, 이 말씀을 그렇게 보는 것은 잘 못이다. 그 이유는, 이 귀절에 말한대로 그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하였고, 또한 그것이 세상의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신자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28 절), 또한 그 평안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된다. 예수님의 평안은, 그가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시는 관계를 말함이다. 그는 구속 사업의 완성으로 신자들에게도 그런 평안을 주신다. 그의 주시는 평안이 세상의 그것과 다른 특성은, 그 가장 위험한 때에도 심령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Barrett)
성 경: [요14:28]
⭕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엿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것과 오신다고 하신 것은 그가 이미 말씀하신 바이다. 13:33-36, 14:2, 3, 12, 18-19, 21, 23 참조. 그런데 그를 사랑하신 자라면 그의 가심을 기뻐할 이유가 무엇인가? (1)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그가 영화를 얻으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며(히 12:2), (2) 그가 가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까닭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이것은, (1) 예수님께서 땅에 계신 동안 영광을 취하시지 않은 고로 아버지보다 낮음을 가리키고, (2) 그가 중보자(中保者)의 지위에 계신 것 만큼, 그 역사에 있어서는 아버지에게 종속(從屬)하심을 말함이다.
성 경: [요14:29-31]
⭕ 이 부분 말씀은 14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결론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곧, (1) 그가 이 부분에 미리 말씀하신것은, 그 일이 성취될 때에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29절)과 (2) 사단의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고난의 자리로 잡아 간다는 것이다(30-31).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곧, 사단은 예수님을 정죄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속하셨으며, 또한 그에게는 전연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 예수님께서 사단으로 말미암아 해를 받으시게 되는 목적이 이러하니, 곧,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시며 순종하시는 마음으로 고난 받으신다는 것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수난은, 사단의 뜻을 이루어 주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죽으라는 것과 부활하는 것-10:17-18)을 가심으로 이루시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성 경: [요15:1-2]
⭕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고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많이 받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수록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주님과 자기와의 구분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안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세우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를 영원 전에 세우시고(벧전 1:2), 그를 마침내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가 중보자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듬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마 3:17).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말슴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도 하셨다(마 17:5). 하나님께서 신임하시고 세우신 중보자를 인간이 불신임할 것인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성 경: [요15:3]
⭕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슴"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슴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이 일하지 않을때에도 일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말씀에 능력이 마술적으로 붙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말씀과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바빙크(Bavinck)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한 능력이 아니며, 늘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
성 경: [요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은 "머물라"는 뜻이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박까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6:44).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 할 뿐이다. 순종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성 경: [요15:7]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느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슴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성 경: [요15:8]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실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실과 나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셧다(마 16:26). 예수님게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여호와으 빛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0:27에 말하기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등불이 되게 하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눅 15:17).
성 경: [요15:9]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이 귀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성 경: [요15:10]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Jezus vraagt niet een mystick zwelgen in liefdegenot, Maar activiteit, liefd toonen.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 346).
성 경: [요15:11]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우너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성 경: [요15:12]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여기서는, 10절에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계명을 지키는 동기는 남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남들에게 종교가로 나타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명을 오해한 것이다. 계명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만 이루묘가 그것은 완성된다. 롬 13:8-10 참조.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면서도 실상은 옛 계명이다(13:34; 요일 2:7-8). 사랑은 이렇게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이다(고전 13:13). 고데이(F.Godet)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15:1-11 까지는, 계명의 첫 부분(하나님과 연합해야 될 것)을 가르치시고, 12-17절까지는, 그 둘째 부분(사람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였다. 성경은, 신앙 사상이 같은 형제들끼리의 분리(分離)를 정당하게 여기지 않고 연합을 고조한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밖에, "몸과 지체"의 비유(엡 1:22-23, 3:6, 4:15-16). "성전과 돌들"의 비유(벧전 2:5)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반응을 부족하게 받으시더라도 사랑을 계속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상대방에게서 반응(서로 사랑함)이 있으므로 계속된다. 사랑을 받는 자도 같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인격이니 사랑을 행해야 된다. 여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행은, 신자가 그 속 사람의 영적 충동으로만 취할 행동인가? 그에게도 외부적 성질이 있는 계율들의 제재가 필요한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만큼,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으므로, 무엇에게 얽매인 바 없어도 자발적으로 선을 힘쓸 자요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부터 감심으로 하나가의 종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주님의 뜻을 자세히 알아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적 표준으로 있는 율법을 상세히 알야야 되며, 지켜야 된다. 그는, 이 율법을 폭군의 엄한 명령과 같이 생각하지 않늘다. 그 율법은 실상 은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사랑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그것은 은혜의 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기독자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사실은, 은혜의 원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부요를 가져오는 거룩한 생활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계명의 목적과 정신이 사랑하는 의미에서 "계명"이란 말을 단수(單數)로 썼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인 복수적 율례들이 이제부터 신자와 관게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그의 시선에서 계명이란 말을 복수로도 사용하였다(요일 3:22, 5:2). 신비가들은, 내적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외부적인 율법 조문들을 무시한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는 반율법주의 경향이 많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 p. 499). 그들은 외부적인 신앙 규율, 곧, 성경도 사실상 무시한다. 16세기의 자유 형제파(Brethren of free Spirit)나 17세기의 란텔과(Ranters)는 그렇게 잘못 움직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이렇게 신비가들은, 외부적 계율들보다 자기 마음에 온다는 영적 감동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상 오착이 많다. 그들은 옳지 않은 일을 해 놓고라도 그것을 계시 받아서 하였다고 하면서 통과하려 하였다.
성 경: [요15:13]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큰 사랑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킨 말슴이다. 그는,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큰 사실을 설명하여, 윗절(12절)의 내용과 같이 신자들로 하여금 남들을 사랑하게 하려 하신다. 그리스도의 무한히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 어찌 남들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랴? 요일 4:11 참조. 예수님게서 신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그 앞에 죄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들을 속죄의 사망으로 사랑해 주신다는 뜻이다. 롬 5:6-10 참조. 우리를 사랑하심은, 다만 우리의 보통 유익을 위한 일반적인 적선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하셨으니, 다시 사신 뒤에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또 얼마나 클 것이가? 이렇게 신자들은 예수님의 친구 되는 큰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친구였다(사 41:8).
성 경: [요15:14]
⭕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여기 이른바 "나의 명하는대로 행함"은, 그가 그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순종함이다.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증표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믿는 형제를 참으로 사랑할 수 없다(요일 4:7-21). 이 귀절 뜻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자가 그리스도의 친구 된 자격, 곧, 그 속죄의 사랑을 받은 자격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성 경: [요15:15]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그리스도께서, 이때까지 구속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 제자들에게 전하여 주셨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 깊이 감취었던 오묘한 진리였다(벧전 1:10-11).
성 경: [요15:16]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들이 사도로 세움 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인 만큼, 그들의 일은 유력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과실을 맺고, 그들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는다(마 3:7-8, 5:23-24, 6:14-15). 이 말씀(16 절)은, 주님과 신자가 연합하게 되는 것(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 전연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성립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성 경: [요15:17]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위에 있는 15-16절 말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내막을 보여 준다. 그가 이 내막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끼리 사랑하게 하른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을 근거하여서만 남을 사랑할 수 있다. 18-27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핍박 받을 사도들(신자들)들에 대하여,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1) 그 핍박은 결국 예수님을 미워하는 일이니(18 절). 그들로서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미움에 동참함이 영광이다(행 5:41). (2) 그들이 핍박 받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증표이니(19절), 핍박 받음은 그들이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증표이다(빌 1:28), (3) 주인이 핍박을 받으셨으니 종 된 자로서 그것을 면할 수 없다(20절). (4) 핍박자들의 악행은 하나님에게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행동이며 따라서 무서운 죄악이니, 불쌍히 여길 대상이다(21-22). 눅 23:24 참조. (5) 신자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운 일이다(23-2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윤리적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부패한 인간성을 원인으로 한 것이다. (6)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대로 되는 일이니,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고 안심할 따름이다(25 절). (7)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령님의 증거가 사도들과 함께 하실 것이므로, 그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다. 벧전 4:14에 말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다.
성 경: [요15:18]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예수님은, 이때까지 그 사도들의 받을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그들의 받을 미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이(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에게서는 사랑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는다. 그들이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은 그 사건에 있어서 그들보다 먼저 영적으로 박해를 받으시는 셈이 된다. 그 만큼 그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성 경: [요15:19]
⭕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세상이 그들을 사랑할 경우는 한 가지 조건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근원이 그냥 세상에 속하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세상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 반대되는 조건이 있는 까닭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세상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세상 죄악은 이처럼 서로 반대된다(7:7).
성 경: [요15:20]
⭕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13:16 참조. 이 귀절 말씀은, (1) 기독 신자가 핍박 받을 것이 필연적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2) 도덕적 처지에서도 그것을 받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여기 "지킨다"는 말은 트집 잡는다는 뜻이다.
성 경: [요15:21,22]
⭕ 하나님에게 대한 핍박자들의 무지가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지는 무죄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증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신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좋을 번 하였다.(Bengel).
성 경: [요15:23,24]
⭕ 참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함이고(18 절), 그리스도를 미워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큰 죄라는 의미에서 이 귀절들은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 속은 자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시다(10:30). 이 점에 있어서 벴겔(Bengel)은, 미움과 불신앙과의 관련성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은 신앙과 동반하나 증오는 불신앙과 동반한다"라고 하였다.
⭕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 여기 이른바, "아무도 못한 일"이란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들을 가리킨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적들)은 너무도 위대하며, 그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한다(5:17,36, 14:9,11).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다만 지식적 과오가 아니고 도덕적 반역이다.
성 경: [요15:25]
⭕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시 35:149의 인용이거나, 혹은 시 69:4의 인용이다. 시편을 "율법"이란 이름 아래 넣어 말하는 것은 그 때의 풍속이었다(10:34). 그 때에는 사람들이 구약 초두의 부분 곧, 율법으로써 구약 전체의 명칭을 삼았던 것이다.
성 경: [요15:26,27]
⭕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Wikenhauser, Schlatter).
⭕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성 경: [요16:1]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핍박에 대한 경고]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혹자는 '이것'이 예수가 지상 사역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교훈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H.R. Reynols).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15:20-25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eyer, Godet, Barrett, Lindars). 그리고 버나드(Bernard)는 핍박 외에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 '이것'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것'은 '핍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하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5:26, 27의 보혜사 성령에 관한 내용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요한은 '이것'을 의미하는 헬라어로 '타우타'(*)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는 복수로서 두 가지 이상을 지칭한다. 따라서 버나드(Bernard)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이 15:11에도 나오지만 본 구절에서는 부정문이 뒤이어 진술된다. 15:11에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이 강조되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진술된 반면 본 구절은 '핍박'이 강조된 뒤에 언급되고 있으므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 '실족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넘어뜨리다'를 의미하는데 본서에서는 본절과 6:21에만 언급되어 '기독교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 즉 '배교'(背敎)를 의미한다(C.K. Barrett). 그렇지만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마태복음에서는 '배교'(마 11:6;26:31)뿐 아니라 '죄를 범하는 것'(마 5:29)을 뜻한다. 여기서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큰 징계인 '출회'(혹은 출교)와 사형을 염두에 두고 계신(2절)것 같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체포될 때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들 혼자의 힘으로 앞으로 닥쳐올 박해를 견딜 수 없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그와 같은 박해를 만날 때 그의 말씀을 기억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성 경: [요16:2]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핍박에 대한 경고]
⭕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 우리는 제자들이 유대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회'는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 나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유대 랍비들은 '출회'를 몇 가지로 세분 하였으나 구약적 의미에서 '출회'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유대인들과 교제의 떡을 뗄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9:22 주석 참조). 따라서 예수를 믿는 신앙과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교의 긴장 관계는 제자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였다. 즉 '출회'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당시대의 문화, 교육, 경제 외에 사소한 마을의 공고문이나 사장 정보등으로부터도 분리되는 현실적인 고난이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급속히 성장하는 기독교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대 기독교인들을 회당으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시키는 일들을 강행했으며 주후 90년경에는 람비 가말리엘 2세(Rabbi Gamalie II)가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도교인들은 '출회'라는 고난의 역사을 통하여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여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출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9:22 주석을 참조하라. 때가
⭕ 이르면 - '때'로 번역된 '호라'(*)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 '호라'는 본서에서 관사와 함께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 (1)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2:4;7:6, 8, 30;8:20) (2) 이미 성취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2:23, 27;13:1;16:32;17:1). 두 가지 때의 관계를 오스카 쿨만(O. Cullmann)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본절의 '때'는 예수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다. 이 '때'는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신 후 있게 될 제자들 및 성도들의 순교의 '때', 박해의 '때'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요한이 관사를 생략한 것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때와 구분함과 동시에 박해가 어느 시대이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행하는 일들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으로 (1) 출회시키는 일과 (2) 죽이는 일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는 열광적인 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에서의 개심(改心) 전에는 하나님 섬기는 열심으로 성도들을 죽이고, 외국에 있는 성읍 다메섹까지 찾아가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했다(행 26:9-12). 그리고 영국에서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그외에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로마 교회로부터 숱한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맹신이 빚은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도 이 같은 유대 지도자들의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힌 맹신의 결과로 십자가를 지셨기에 이런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핍박에 대해 미리 가르치신 이유도 그들이 그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성 경: [요16:3]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핍박에 대한 경고]
⭕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본 구절은 5:21의 반복으로 예수는 2절에 기록된 광신적인 핍박자들의 열심이 영적 무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지나친 열심이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에게 계시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고백했다(갈 1:13, 14). 이 무지는 이성적인 지식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데서 기인함으로써 종교적 독선과 아집 및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행 3:17;고전 2:8). 어느 시대에서든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성경 지식만을 소유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종교적 독선과 편견으로 인해 형제를 핍박하는 무지에 빠질 수 있다.
성 경: [요16:4]
주제1: [고별 강화를 마감하시는 하나님 아들]
주제2: [핍박에 대한 경고]
⭕ 이 말을 이른 것은...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 예수께서는 종종 미래에 되어질 일들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이 말을 이른 것'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2:22;13:19;16:1 ). 특히 13:19에서는 이 표현이 제자들의 믿음과 관련이 있지만 본절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있을 제자들의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제자들은 앞날에 닥칠 자신들의 일들을 미리 예수로부터 직접 들은 후 실제로 그 일을 당하게 되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큰 위로와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14:26) 그들은 핍박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 '처음부터'(*, 여스 아르케스)란 표현은 '아프 아르케스'(*)와 같은 의미로 예수의 공생애 시작 또는 예수가 제자들을 만난 시점을 의미한다(H. R. Reynolds). 그런데 그때부터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있을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