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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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2서
요한이서주석



성 경: [요이1:1]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인사말]

⭕ 장로는. - '장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프레스뷔테로스'(*)에 관사 '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본서의 저자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아니하고 '장로'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이 나이가 많은 연장자로서 존경을 받을 만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감독과 같이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단의 거짓 교리에 대항하여 사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임을 시사한다(Stott, Barker, Smalley, Westcott).

⭕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 본서의 수신자를 나타내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의 헬라어 '에클려테 퀴리아 카이 토이스 테크노이스 아우테스'(*)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1)혹자는 '에클려테'나 '퀴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라고 주장한다(Clement, Harris). (2)혹자는 지방 교회와 같은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Westcott, Brooke, Bruce, Dodd).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한 개인에게 해당하지만 사실상 공동체에 대한 교훈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따라서 수신자들은 요한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방 교회와 교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 '참으로'의 헬라어 '엔 알레데이아'(*)에 대해서 혹자는 관사가 없음을 근거로 '진실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그러나 문맥상 본서에서 이단자들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진리 안에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tott). 한편 본절에 나타난 '사랑'과 '진리'는 본서 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이단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하는 방패이다. 요한은 '사랑'과 '진리'의 상관 관계를 통해서 자신과 진리 안에 거한 자들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교회와 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4-6절).

성 경: [요이1:2]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인사말]

⭕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 본절은 요한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수신자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메드 헤몬 에스타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는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는 진리는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주어지며 이 진리를 통해서 상호에 대한 사랑이 지속되게 된다(Stott, Smalley). 한편 '우리 안에 거하여...진리를 인함이라'는 진리가 앞서 언급된 사랑의 원인임을 시사한다.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본이며 동기이다. 진리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내포하며(요일2:7,8; 3:11)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내적인 동기 부여와 충동을 통해서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성 경: [요이1:3]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인사말]

본절은 당시 서신의 관행을 따른 수신자들에 대한 축원(祝願)이다.

⭕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를 호의와 선물이며(약1:17) '긍휼'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딛3:5). 이러한 은혜와 긍휼을 근본으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결과가 바로 '평강'이다.

⭕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파라 데우 파트로스, 카이 파라 예수 크리스투 투 휘우 투 파트로스). - '아버지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칭호 가운데 독특한 것으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요한의 신학을 반영한 것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계시하고 계셔서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과 같음을 시사한다(뇨20:31; 요일2:23, Smalley, Brooke, Bengel). 한편 본문에서 '...로부터'의 헬라어 '파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각각 적용되어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이는 아버지와 동등하게 아들도 축복의 근원이 되심을 시사한다(Stott).

⭕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 요한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인사한 것과는 달리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를 삽입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이신 예수의 생을 통해서 계시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 그의 사랑 안에서 현시되었음을 시사한다(요일4:9,10, Smalley, Barker). 또한 이러한 '진리와 사랑'을 통해서 수신자들이 이단자의 거짓 교리에 대처해 나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진리와 사랑은 불가 분리의 관계를 형성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사랑할 수 있게 하며 사랑을 통해서 진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Stott).

성 경: [요이1:4]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진리 가운데 행함]

⭕ 너의 자녀 중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톤 테크논 수'(*)는 부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몇몇'의 헬라어 '티나스'(*)를 필요로 한다. 이 '몇몇'이 가리키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교회 구성원들 중 순회하다가 요한에게 와서 만나게 된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rshall, Stott, Bruce). (2)혹자는 교회가 이단의 거짓 교리에 의해서 어려워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교리는 따르게 되었을 때 진리와 사랑 가운데 있었던 몇몇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malley, Houlden, Schnackenburg).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계명은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예수 안에서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요일3:23, Smalley). 이는 요한이 본서에서 강조하는 '진리와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삶의 특징이다. 한편 요한은 예수께로부터 받은 계명이라고 표현하지 않고(요13:34; 15:12,17) '아버지께' 받은 계명이라고 진술한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모든 진리와 메시지의 궁극적인 근원임을 시사한다(Marshall, Westcott).

⭕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 '진리에'로 번역된 헬라어 '엔 알레데이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관사가 없는 것을 이유로 '진실하게'와 같이 부사적으로 해석한다(Barker). (2)혹자는 앞절에서 관사를 사용하지 않고 '진리와 사랑'을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관사와 관계없이 '진리 안에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행하는'의 헬라어 '페리파툰타스'(*)는 현재 분사로서 복음과 그 도덕적 기준을 따라 일정하게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시사한다(요일1:7).

성 경: [요이1:5]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진리 가운데 행함]

본절은 요일4:21을 반영한다.

⭕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 '내가...구하노니'의 헬라어 '에로토'(*)는 서간체이다. 요한은 자신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와 권한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청하는 표현을 씀으로 자신이 수신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어했던 중심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한편 '서로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 알렐루스'(*)는 요 13:34; 15:12,17)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현재 시상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인 상호간의 사랑이 지속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요일4:7) 아들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셨던 것이며(요일3:16)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취되어 가는 것으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비이기적인 행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자발적(自發的)인 순종이다(요일4:13-15, Barker, Smalley).

⭕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 본문은 요일2:7에 대한 설명이다(요일2:3-5,10; 3:11-18,23; 4:7,11,21).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주어진 의무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해야 할 계명이다(Stott).

성 경: [요이1:6]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진리 가운데 행함]

⭕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 본절은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두 종류의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Westcott, Smalley). 두 종류의 사랑은 상관 관계를 맺고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사랑으로 나타난다(요일4:7-1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요14:15,21; 15:10; 요일5:2,3). 즉 사랑의 시금석은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다.

⭕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 '그 가운데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테'(*)에서 '아우테'는 여성 명사를 받는 지시 대명사로서 여성 명사인 '계명'(*, 헤 엔톨레)과 '사랑'(*, 헤 아가페) 중 하나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중 '엔 아우테'는 '사랑'을 가리킨다(Smalley).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한 순간부터 기독교 복음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들어 온 것이다(요일1:1-5). 한편 '행하라'의 헬라어 '페리파테테'(*)는 문자적으로 '걷는다'라는 의미로 생활을 통해서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계명을 행하는 삶은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고 빛 가운데 거하는 삶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성 경: [요이1:7]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개역성경에는 '호티'(*,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사랑과 진리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4-6절까지의 내용과 7-11절에서 언급될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가 상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 '진리와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로서 이를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은 곧 미혹하는 자이며 적그리스도들이다. 본절은 요일2:23,27과 4:1-3을 반영한다.

⭕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 '많이'로 번역된 헬라어 '폴로이'(*)는 4절에 나타난 '너의 자녀 중에'에서 암시된 '몇몇'(*, 티나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는 수신자들이 속한 교회에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나 미혹하는 자를 따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은 매우 많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나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셀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미혹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무리를 형성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나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요일2:19). (2)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나와 세상에 들어오셨고(요17:18; 20:21; 요삼1:7) 같은 단어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미혹하는 자들이 잘못된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하여 나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 본절은 요일4:2을 반영한 것으로 미혹하는 자의 정체를 나타낸다. 본절과 병행을 이루는 요일4:2에서는 완료 분사인 '엘렐위도타'(*, '오신 것을')가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육체로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내나 본절에서는 현재 분사인 '에르코메논'(*, '임하심을')이 사용되어 미래 시제의 의미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절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이유가 없다. 요한이 요일4:2에서와 같이 완료 시상을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상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초시간적인 사건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Barker, Marshall, Stott, Brooke, Alford). 미혹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후토스 에스틴 호 플라노스 카이 호 안티크리스토스). - 본문에는 관사 '호'가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에 대해 수신자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Smalley). 이러한 이단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로서(요일2:18,22, 26)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을 파괴(破壞)시킨다(9절).

성 경: [요이1:8]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 '우리의 일한 것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너희가 일한 것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hat you have worked for, NIV, RSV, Stott, Bultmann, Schnackenburg). (2)혹자는 '우리가 일한 것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hich we have wrought, KJV, NEB, RV, JB, Brooke, Marshall, Westco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만약 수신자들이 미혹하는 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면 요한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수고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갈4:11,19, Barker). 한편 '온전한 상'의 헬라어 '미스돈 플레레'(*)는 유대적인 표현으로(LXX 룻2:12)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봉사에 대한 보상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온전한 상'은 그리스도인이 신실하게 행한 진리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영생의 보상을 의미한다(벧전1:9; 요일4:14-16, Smalley).

성 경: [요이1:9]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를 따라 행할 때 온전한 상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함을 강조한 앞 절에 이어 본절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조차도 상실하게 됨을 나타낸다. '지내쳐'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아곤'(*)은 진리를 넘어서 지나치게 나아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스스로 믿음의 초보 상태를 벗어나 진보되고 성숙된 믿음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모습을 나타낸다(Stott, Smalley). 한편 '그리스도의 교훈'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디다케 투 크리스투'(*)에서 나타난 소유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ith, Bultmann, Marshall, 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두 가지 견해가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과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전자는 믿음의 근본을 이루는 진리를 나타내며 후자는 진리에서 비롯된 믿음의 표현을 나타낸다(Barker).

성 경: [요이1:10]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 '이 교훈'은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요한이 본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진리와 사랑'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의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는 명령은 요한의 교훈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요한은 다른 사도와는 달리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특히 강조하며 나그네 된 자들을 환대해야 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요삼1:5-8). 그러나 본문의 '들이지도 말고'는 사적(私的)인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집'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만났던 장소로서(롬16:5; 고전16:19; 골4:15; 몬1:2) 미혹하는 자들을 '집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미혹하는 자들을 공식적으로 환대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Stott, Smalley). 그러기에 요한은 교묘하게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고 거짓된 진리를 자랑하며 선전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거절할 것을 권면한다.

성 경: [요이1:11]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 본절은 미혹하는 자를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하지도 말라는 명령에 대한 이유이다. 미혹하는 자들과의 인사는 그들과의 만남의 시작이나 혹은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혹하는 자들과의 교제를 의미한다(Smalley). 그들과의 교제는 그들이 저지르는 악한 일 즉, 교리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죄와 윤리적으로 타인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죄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에 참여하다가는 온전한 상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잃어버리고 영원한 파멸을 향하게 된다(마6:24; 고전 10:20).

성 경: [요이1:12]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끝인사]

⭕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 '원치 아니하고'의 헬라어 '우크 에불레덴'(*)은 서간체 단순 과거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서신을 받아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하여 요한이 본 서신을 기록하였음을 나타낸다. 한편 '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스토마 프로스 스토마'(*)는 문자적으로 '입과 입으로'라는 의미로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다. 요한은 본절에서 수신자들에게 전해야 할 말이 많으나 더 이상 서신으로 교제를 나누지 아니하고 직접 만나기를 원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 본문은 요한이 서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수신자들을 만나기를 원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 인간의 교제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요일1:3,4).

성 경: [요이1:13]

주제1: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주제2: [끝인사]

⭕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 본절의 마지막 인사는 본서 처음에 나타난 인사인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와 병행(竝行)을 이룬다(1절). '수'(*, '네')와 '세'(*, '네게')는 집합적인 의미를 지닌 단수로서 수신자들이 속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를 가리킨다(Marshall, Smalley, B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