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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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주석



성 경: [행1:1]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머리말]

⭕ 데오빌로여(*, 오 데오필레) -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데오스'(*)와 `필로스'(*)의 합성어)라는 뜻이 있다. 누가는 이미 그의 첫번째 저서에서도 수신자가 데오빌로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눅 1:3).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가복음에서는 `각하'라는 존칭이 그에게 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데오빌로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說)이 있다.(1)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의미가 시사하는 바대로 그는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를 가르킨다는 추측이다(Bruce).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각하'(눅 1:3)라는 존칭을 사용한 것을 볼 때 그 신빙성이 적어진다. 왜냐하면 실재의 인물이 아닌 사람에게 그러한 존칭을 사용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2) 데오빌로가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그는 `각하'라고 불릴 만큼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적어도 총독 이상의 직위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유대 지방의 총독들인 벧릭스(23:26;24:3)나 베스도(25:1;26:25)가 바로 데오빌로였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B. H. Streeter). 그러나 `각하'라는 존칭이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전문 용어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예의를 위한 존칭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3) 또 다른 추측은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의 조카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가 신자가 된 후에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고쳐 부른 이름이 데오빌로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B. H. Streeter). (4) 어떤 사람은 37-41년 사이에 유대인 제사장 가운데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데오빌로가 그 사람일거라고 추측한다(R. Eisler). 그러나 데로빌로가 위에 언급된 사람 중에 누구라고 확실하게 꼬집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에 책을 저술하녀 누구에게 증정하는 관례가 유행되고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데오빌로'라는 수신자는 분명히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누가복음 서두의 내용(눅 1:3, 4)을 볼 때 그는 상당한 지식 수준에 있는 사람으로 이미 기독교에 대해서 이해와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 내가 먼저 쓴 글에는(*, 톤 프로톤 로곤) - 정관사 `톤'(*)은 선행(先行)된 어떤 기록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누가복음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형용사를 문자적으로 취하여(`첫째'라는 의미임) 누가가 누가복음과 본서에 이어 또 한권의 책을 쓰고자 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Zahn, Ramsay). 그러나 이 말이 두 종류만을 비교하는 데 쓰였던 예들(요 1:15;20:4)을 볼 때 오히려 `먼저'(*, 프로테로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유력하다.

성 경: [행1:2]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머리말]

⭕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 `택하신'(*, 여셀려사토)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맨 처음 택하실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동사이다(눅 6:13). `사도들'은 때로 넓은 의미에서 사도들을 도와주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의 최후의 명령을 받은 열 한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성령으로 명하시고 -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마 28:18-20; 막 16:15-18;눅 24:44-49)에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생애에서 줄곧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10:38;눅 4:1, 18). 세례를 받을 때부터(눅3:21) 부활(1:4)승천하실 때까지 그의 모든 사역이 성령의 인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하신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아울러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요 20:22) 복음 증인으로 삼으실 것을 약속하신 사실을 말하기도 한다.

⭕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 `시작하심부터'(1절)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은 예수의 모든 지상 사역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승천하다'는 원래 `어떤 것을 들어 올리다'(*, 아날람바노)는 뜻을 지닌 동사인데 본 구절에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것 즉 `승천'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 동사가 비록 `하늘로'라는 어구가 없이 사용됐다 할지라도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신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졌기 때문에(1:11, 21;막 16:19;딤전 3:16) 여기에서도 자연스럽게 `승천'(昇天)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이 70인역에서는 엘리야의 승천을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왕하 2:11).

성 경: [행1:3]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머리말]

⭕ 해 받으신 후에 - `해'(害)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하며(3:18;26:23)이 `고난'에는 그의 죽음까지 포함된다(히 2:9은 `죽음의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다).

⭕ 확실한 많은 증거 - 눅 24:13이하의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요 20:16-18;21:1).

⭕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 그 사이에 제자들에게 열 번 나타나셔서 그의 육체적 부활을 증거하셨다(마 28:1-19;막 16:9-18;눅 24:13-50;요 20:11-23,26-29;21:1-23;고전 15:5-8).

⭕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당신의 공생애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으리라 짐작된다(눅 24:45-47). 한편 `하나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신 구약 성경의 주제이기도 하다. 신.구약 성경의 내용을 살펴볼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다(사 9:1-7;11:6-8;29:17-24;35:5-10;단 2:44 등). (2)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마 12:28;눅 17:20,21 등).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아니하였다.(3)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재림때에 절정에 이르러 완성(完成)을 보게 될 것이다(마 25:34;요 18:36). (4)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다(시 103:19).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는 영역(realm)을 가리키기도 하나 일차적으로는 통치, 주권, 왕권과 관련된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으로서 주권을 행하시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막 1:14-20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참조).

성 경: [행1:4]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머리말]

⭕ 같이 모이사(*, 쉬날리조메노스) - 이 동사를 헬라어 `쉰'(*, `함께')과 `할레스'(*, `붐비는')에서 온 합성어로 추정하여 지금까지 `함께 모이사'로 번역해 왔다(Calvin, Bruce, NASB). 이에 반하여 이 동사가 `쉰'(*)과 `할스'(*, `소금')에서 온 합성어로 보고 `함께 절인 것을 나누는 동안' 혹은 `함께 식사하는 동안'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Chrysostom, Jerome, Meyer, Vulgate, RSV, NIV). 이러한 번역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사실(눅 24:42, 43;행 10:41)을 고려할 때 그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동사의 어원에 있어서 이렇다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하나의 추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견해 중 어느 것을 택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 예루살렘은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한 장소였다(대하 3:1). 그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에다 성전을 건축했는데 그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갔던 산이다(창 22:2,14). 이처럼 예루살렘은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곳이다. 이삭의 번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미리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친 그곳에다 성전을 짓도록 섭리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말씀이 나올 곳으로 예언된 것이며(사 2:3;미 4:2)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진리의 중심지로서, 신약의 터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주님께서는 바로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이다. 그곳으로부터 진리 운동이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아버지의 약속'은 요 14:16,17,26;15:26;16:7-14에 나타난 것같이 주님께서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곧 보혜사 성령에 관한 약속인 바(5절;욜 2:28-32;눅 24:49) 약속된 성령께서 하실 일은 무엇보다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또한 능력있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성 경: [행1:5]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머리말]

본절은 세례 요한이 이미 예언한 것으로(마 3:11;막 1:8;눅 3:16)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승천 후에 부어주실 성령 강림의 예표였다. 상세한 내용은 눅 3:1-20 주제 강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보라.

⭕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 분명한 시일이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은 그때부터 약 열흘 후 였다.

⭕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성취의 날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라고 하였다(욜 2:28).이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승천하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 모든 신약의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와 앞서 말한 요한의 물세례와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1:1-5 주제 강해 `성령 세례'를 참조하라.

성 경: [행1:6]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예수의 승천]

⭕ 저희가 모였을 때 - 원문에는 `멘 운'(*, `그래서')이라는 일종의 연결어(連結語)가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다. 여기에서 `저희'는 사도들을 말하고(2절) 그들이 모인 곳은 예루살렘에서 동편에 있는 감람원(the Mount of Olives, NIV)이라 하는 산이었다(12절).

⭕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 `묻자와'(*, 에로톤)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제자들이 반복하여 질문했음을 암시한다.

⭕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사도들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4절)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줄곧 그들은 이스라엘의 만족적인 독립과 회복을 통하여 실현되어질 하나님 나라를 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라가 회복되면 자신들이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막 10:35-45;눅 22:24-32).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더불어 그들의 기대는 산산이 부숴졌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를 보고서 다시금 정치적 회복에 관한 기대가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성 경: [행1:7]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예수의 승천]

⭕ 때와 기한은(*, 크로누스 에 카이루스) - 이 두 단어는 각각 보다 긴 시간과 보다 짧은 시간을 가리킨다(G. Miligan). 그러나 더 엄밀하게 말하면 전자는 시간의 지속(duration)을 가리키고 후자는 정해진 한 순간을 의미한다(살전 5:1).

⭕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 예수는 `때'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6절) 직접적으로 `아니다'라고 답하시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자들의 관심을 장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돌리셨다(8절). 이미 예수는 자신도 그의 재림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알고 계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24:36;막 13:32;살전 5:1, 2;벧후 3:10).

성 경: [행1:8]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예수의 승천]

⭕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하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셨다. 그 능력(*, 뒤나민)이란 그들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데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을 말한다.예수 자신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처럼(10:38;마 3:16;막 1:10;눅 3:21, 22) 이제 제자들도 그와 똑같이 기름부음을 받아 사역을 수행할 수 있어야 했다. 증인(證人)으로서의 사역은 본서 전체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 주요 주제이다(2:32;3:15; 5:32;10:39;13:31;22:15).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로서의 증인의 사역에 이어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완수해 나가야 될 과제로 남겨졌다. 여기에서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5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세례를 의미한다.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의 영역을 요약하고 있다. 이 지리적인 명칭들은 마치 본서의 목차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F.F. Bruce). 즉, 본서의 기록에 의하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1-7장)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8:1-11:18) 온 세계에로 확장되어 갔던 것이다(11:19-28:31). 누가복음에서는 복음 사역의 지리적 이동 상황이 갈릴리로부터 베레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이어져 가는데 본서의 경우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까지 퍼져 나간다.

⭕ 내 증인이 되리라 -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증인'(*, 마르튀스)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이는 증인은 순교적(殉敎的) 자세를 가지고(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보고 들은 것을(요일 1:1) 증거해야 함을 암시한다. `내 증인'이란 `나(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R.C.H.Lenski). 그리고 `내 증인이 되리라'는 미래 시제는 성령 강림의 약속의 실현과 더불어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성 경: [행1:9]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예수의 승천]

⭕ 보는 데서 - `보는 데서'(*, 블레폰톤)는 현재 분사로 그들이 예수를 직접 계속해여 보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 올리워 가시니 - 이는 2절과 눅 24:51에서 승천에 관해사용된 두 동사(*, 에파이로)와 같은 말이다.

⭕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을 가시적(可視的)인 형태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광야에서 구름이 장막에 충만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시적인 증표로서 이스라엘 백성 위에 임한 것이었다(출 40:34). 또한 그러한 구름은 변화산상에서도 예수와 제자들을 에워쌌었는데(마 17:5;눅 9:34, 35)그것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가시적인 표시였다. 뿐만 아니라 감람산에서 예수께서 그의 재림을 묘사할 때에도(마 24:30;막 13:26;눅 21:27)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하였다.

성 경: [행1:10]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예수의 승천]

⭕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 `자세히 보다'(*, 아테니조)는 `긴장한채 열중하여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미완료형이 사용되어 행동의 계속성을 암시한다.

성 경: [행1:11]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예수의 승천]

⭕ 갈릴리 사람들아 -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르시기 이전에는 한갖 갈릴리 사람, 즉 어부, 세리에 불과했다. 또한 그곳 갈릴리는 요 7:52에 의하면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도외시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잘것없는 곳 출신의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담대한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이다.

⭕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 이 말은 어정쩡한 태도로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책망이라 할 수 있다(I. Howard Marshall). 제자들은 과거 변화산상에서의 경험을 상기하면서(마 17:1-8) 구름이 걷히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게 되리라는 기대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예수의 승천에 관한 말씀을 들었으며(요 6:62;20:17) 또한 향후에 감당해야 할 사명을 명령받은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8절) 이 상황에서는 그것을 잊어버린채 단지 예수와 함께 있으려는 데에만 집착하였다.

⭕ 너희 가운데서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예수의 재림 사실에 대해서 그 방법까지도 강조하여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사실은 당신의 재림을 확신시키는 보증(保證)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재림의 약속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증거하는 사역에 매진할 수 있게 하는 동력과 근거의 역할을 한다.

성 경: [행1:12]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다락방 기도]

⭕ 감람원이라 하는 산 - 감람산(마 21:1;24:3;26:30)은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길게 뻗은 산이다. 이 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이 있어서 이 이름을 가진 듯하다. 이 산 서편의 감람나무 숲이 우거진 기슭에 예수께서 최후의 기도를 드린 `겟세마네' 동산이 있다.

⭕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미쉬나(Mishnaah)에 의하면 안식일의 여행거리는 최대한 2천 규빗으로 제한되었다. 이 거리는 NIV의 난외주에도 나타나듯이 약 1.1Km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한편 본문은 예수의 승천이 안식일에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강조점은 그 사건이 예루살렘 근방에서 일어났다는 데에 있다. 눅 24:50에 의하면, 예수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

성 경: [행1:13]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다락방 기도]

⭕ 들어가 -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것을 뜻한다.

⭕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원문에서 `다락'(*, 토 휘페로온)에 정관사를 사용하여 `그 다락' 혹은 `그 방'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이 다락은 이미 잘 알려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다락방은 비록 뚜렷하게 입증되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셨던 방인 것 같으며(막 14:12-16;Zahn, Bruce)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중 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던 적이 있는 바로 그 방이었을 것이다(눅 24:33-43;요 20:19-26). 다락방은 초대교회의 터전이기도 했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 베드로,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공관복음서에 제자들의 명단이 제시되었으나(마 10:2-4;막 3:16-19;눅 6:13-16) 본서에서도 그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 목록에서 누가가 의도하는 바는 사도의 무리가 그 수에 있어서 불완전하며 따라서 맛디아를 선택함으로써 그 결원(缺員)을 보충하는 기사에 대한 준비 단계를 마련하고자 함이다. 본서와 공관복음에 기록된 열 두 사도의 명단의 비교는 마 10:1-4 주제 강해 도표를 참조하고, 열 두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막 6:7-13 주제 강해의 도표를 참조하라.

성 경: [행1:14]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다락방 기도]

⭕ 여자들과 - 예수의 사역 기간 동안 그리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낼 때까지 계속 따라 다니던 여인들을 가리킨다(눅 23:49;24:10;요 19:25). 베자 본문(Codex Bezae)에는 `그리고 어린이들'이란 문장이 첨가되어 있다.

⭕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 누가는 복음서에서부터(눅 1장) 마리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는데 여기서는 여자들 중 유일하게 그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초대 교회내에서 어떤 지도적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그녀를 숭배의 대상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 예수의 아우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마 13:55;막 6:3)인데 그들은 한때 예수를 믿지 않았다(요 7:2-10).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다. 그 중에 야고보는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서(12:17;15:13 이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방문했던 사람 중 하나였고(고전 15:7) 야고보의 저자로 믿어진다.

⭕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그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위하여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에 전념하였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인도하고 강화시킬 하나님의 선물로서 성령을 약속하셨거니와, 이 약속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은 기도로 나타나야 했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가 성령을 받은 것은 기도할 때였다. 따라서 누가가 본서 시작부분에서 지속적이고 합심(合心)된 기도로써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행1:15]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유다의 종국(終局)]

⭕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 고전 15:6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의 120명 외에도 더 많은 제자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여기서 특별히 120이라는 숫자는, 자체 내에 공회(council)를 갖춘 한 공동체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최소 인원수를 120으로 규정한 유대법의 규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된다(I.H.Marshall). 곧 유대교적 견지에서도 제자들의 수는 새로운 한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 복음서에서도 베드로는 열두 제자들 중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마 16:17-19). 여기서도 그는 대표자의 자격으로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베자 사본(Codex Bezae)에는 베드로가 `그 제자들'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 지칭한 경우를 여기서 처음 보게 된다. 한슨(Hanson)에 의하면 이 말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최초의 명칭이었다고 한다(6:3;7:2;13:15,26,38;15:7,13; 22:1; 23:1,6;28:17).

성 경: [행1:16]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유다의 종국(終局)]

⭕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이 말은 성경의 영감에 있어서 `성령'은 배후의 역사자요 `다윗의 입'은 도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믿었다 하겠다(딤후 3:16). 한편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 관련된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하고 있다. 원래 가룟 유다는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그에게 할당되어진 사역 혹은 봉사의 몫을 담당했었다. 이제 그가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 공백이 메워져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20절).

⭕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 `指路(지로)한' 이란 `안내자(*, 호데구)가 된'(guide, KJV) 것을 말한다(마 26:47,48;막 14:43,44;눅 22:47,48;요 18:2, 3).

⭕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 여기서 `성경'이란 20절에 인용된 시 69:25;109:8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 마땅하도다 - `반드시 될 일'을 가리키는데 이는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는 말씀과 상통한다(요 10:35).

성 경: [행1:17]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유다의 종국(終局)]

⭕ 이 직무의 한 부분 - 가룟 유다는 예수 일행의 회계일을 맡았다(요 12:6). 이 직무는 그가 대단한 신임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듯 중요한 위치에서 큰 신임을 얻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심을 따라 결국 예수를 배신하는 중죄(重罪)를 범하고 말았다. `직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일반적으로 `섬김', `봉사'를 뜻하며(고전 12:5;엡 4:12;히 1:14) 특별히 사도의 직분을 지칭하기도 한다(롬 11:13;고후 4:1;딤전 1:12).

성 경: [행1:18]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유다의 종국(終局)]

⭕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 원문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지만 우리 성경에는 본절과 다음 절을 괄호 안에 두고 있다. 이 부분을 베드로의 계속된 설교의 일부라고 보눈 견해도 있다(Meyer). 하지만 19절에서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는 3인칭이 사용된 점으로 볼 때 베드로의 설교라고 보기는 힘들다(I.H.Marshall). 따라서 이 부분은 베드로가 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들리던 이야기를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 한편 이 괄호 부분의 내용은 마 27:5-7과 차이가 있다. (1) 마태복음에는 대제사장이 밭을 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유다가 밭을 샀다고 한다. 아마 실제로 밭을 산 사람은 대제사장이었지만 이것은 결국 유다가 산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마태는 `아겔다마' 곧 `피밭'이라는 말의 기원(起原)이 예수의 `무죄한 피'를 판 것(마 27:4)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는 반면 누가는 이 말이 유다의 피에서 유래한다고 밝힌다(Lenski).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서로 모순된다기보다는 두 의미 모두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브엘세바'라는 지명의 기원에 대해서도 창 21:31과 창 26:32,33에서 각기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 마태는 유다가 홀로 목매어 죽었다고 말한다(마 27:5).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세밀하게 말하고 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그가 나무에 목을 매고 달려 죽은 뒤에 노끈이 끊어져서 몸이 땅에 떨어져 배가 터졌다는 이야기, 힌놈의 골짜기 절벽의 나무에 목을 매었으나 그 줄이 끊어져서 바위에 부딪혀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왔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파피아스(Papias)의 글에 의하면 유다는 병에 걸려 몸이 엄청나게 부었으며 결국 수레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성 경: [행1:19]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유다의 종국(終局)]

⭕ 본방언 - `본방언'이란 아람어를 말한다. 이 아람어의 뜻을 풀어 설명한 것은 본절이 베드로의 설교의 일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람어는 당시 유대인에게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행1:20]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제자로 뽑힌 맛디아]

⭕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 헬라어 `게르라프타이'(*, `기록하였으되')는 성경을 인용할 때 관용어적으로 사용되는 완료 수동태로서 `기록된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 이 구절은 시 69:25의 인용인데 시편 기자의 원수들이 거하는 거처를 황폐케 해 달라는 간구이다. 시편에서 이 구절은 경건한 자들을 박해하는 무리의 말로(末路)를 가리켰으나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게 적용시킨다. 시 69편은 초대 교회 성도들간에 고난당하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C.H.Dodd). 따라서 본 구절이 예수를 배신한 자의 말로에 관한 예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I.Howard Marshall). 시 69:25에서의 `저희'가 여기서는 `그의'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거처'란 유다가 산 밭을 가리키는 듯아다. 마태가 전하듯이(마 27:7) 이곳은 공동묘지로 사용되어 시편의 예언대로 `거하는 자가 없게'되었다.

⭕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 이 구절은 시 109:8의 인용으로 원수가 제 명(命)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어 그 원수가 맡았던 막중한 임무를 타인이 취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베드로는 이를 유다에게 적용시켜서 유다의 계승자를 임명하는데 대한 보증으로 삼는다.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맞게 12사도를 임명하신 바 있다(마 19:28;눅 22:30 참조).

성 경: [행1:21,22]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제자로 뽑힌 맛디아]

가룟 유다 대신 사도로 선출될 자의 자격을 명시한 구절이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울 인물을 뽑고자 했던 이유는 단지 구약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사도들에세 맡겨진 직무의 성격상 증거 사역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 반드시 충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사도의 자격은 (1)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고 (2) 예수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받는 것이었다(고전 9:1,2;15:8-10;갈 1:16,17). 그런데 특별히 여기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자라고 국한시킨 것은 (1) 열 두 사도 중 한 명을 선택하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2) 열 두 사도의 사역 범위가 주로 유대인들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 요한의 세례로부터 -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마 3:13-17;막 1:1-11). 따라서 이 말은 예수의 공생애 시초부터라는 말이다.

⭕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 이는 극히 친밀하고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아니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일종의 셈어적 관용구이다(9:28;신 31:2;삼하 3:25;시 121:8).

⭕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도들의 메시지의 초점이었고 본서에서도 핵심되는 주제이다(2:24,31,32;3:15;4:2,10; 10:40,41;13:30,34;17:3,18;23:6;24:15).

성 경: [행1:23]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제자로 뽑힌 맛디아]

⭕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 바사바와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바사바는 `안식일의 아들'이란 뜻이며 요셉은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다. 또 유스도는 `정의'를 뜻하는 로마식 이름이다.

⭕ 하나는 맛디아라 - `맡다디아스'(*)의 약칭으로 `여호와의 선물' 이란 뜻이다. 유세비우스(Eusebius)의 추측에 의하면 그는 눅 10:1에 나오는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Ecclesiastical History).

성 경: [행1:24]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제자로 뽑힌 맛디아]

⭕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 그들은 먼저 사도의 자격 요건에 합당한 두 사람을 선택하였다. 히브리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러한 경우에는 제비를 뽑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였다. 똑같은 둘 중에서 하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그 투표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를 기도한 것이다(잠 16:33).

⭕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 이 기도 가운데 나오는 `주'(*, 퀴리에)라는 호격어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Meyer) 아니면 예수를 가리키는지(Bengel, Alford) 분명하지 않으나 본분의 문맥상 이 명칭은 21절의 `주 예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며(대상 28:9;시 7:9;44:21;렘 17:10;23:24;암 9:3;습 1:12;롬 8:27) 모든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롬 9:22,23) 보여준다.

⭕ 주의 택하신 바 되어 - `택하다'(*, 에클레고마이)는 말은 2절에서 사용된 동사와 같은 말이다. 이것은 지금 선택될 사도의 후계자(後繼者)가 자신들처럼 동등한 사도권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됨을 암시한다.

성 경: [행1:25]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제자로 뽑힌 맛디아]

⭕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 `제 곳'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어떤 장소를 지칭하기보다는 직무를 뜻한다고 보고, 가룟 유다가 예수를 믿고 따르던 것을 버리고 과거에 자신이 행하던 길로 돌아섰음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경해(Alexander, Meyer, Vincent). 이 중 우리는 문맥의 흐름이나 가룟 유다의 비참한 종국(18절)등을 고려하건대 후자의 견해를 취함이 더 나을 것 같다(시 9:17;마 25:41).

성 경: [행1:26]

주제1: [예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의 약속]

주제2: [제자로 뽑힌 맛디아]

⭕ 제비 뽑아 - 제비를 뽑는 방법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많이 사용되었다(레 16:7-10;수 18:10). 사도들도 당시까지 사용되던 제비뽑기 방식에 따라 결원된 한 명의 사도를 선출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경에는 이러한 방식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성 경: [행2:1]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오순절 날이 - '오순절'이란 말에는 원래 '제50'의 뜻이 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신 16:1, 10, 13)의 하나이다(레 23:15, 16). 오순절은 유월절 기간 동안 처음 익은 보리 곡식단을 제단에 드린 날로부터 시작하여 밀 추수로 끝나는 49일(7주)간의 추수 기간 다음 날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한다(출 34:22; 신 16 :10).또한 이 날은 처음 수확한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므로 '맥추절'(출23:16) 혹은 '초실절'(출 34:22)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1세기경부터 오순절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데(Jubilees 1:1 , 6:17; TB Pesachim 68b; Midrash Tanchuma 26c) 출 19:1에 암시된 연대를 추론해 볼 때 율법을 받은 날이 오순절날임이 분명하다. 이 절기는 대개 유대력 시반(Sivan)월 16일에 해당되는데 현재의 태양력으로는 5월말이나 6월 초순이 된다. 이 날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처음 익은 모맥(牟麥)으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시작으로 영적 의미를 지닌다.

⭕ 이미 이르매(*, 쉼플레루스다이)- 이 말의 원뜻은 '가득 채우다'(눅 8:23) 또는'(시간이) 거의 닥쳤다'라는 뜻으로 본절에서는 '오순절 날이 거의 가까워'라는 의미이다.

⭕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앞에서 언급뒤 3대절기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절기들을 지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보아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을 것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그 혼잡을 피할 뿐만 아니라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 곳에 모였을 것이다. 한 곳에 모인 사람은 열두 사도들과 1:13,15에 언급된 무리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로 볼 수 있다(Alfor, R. C. H. Lenski). 그러나 그들이 모인 장소에 대해 본절에서는 확실히 언급하지 않는다. 1:13에서는 '다락'으로만 언급되어 있으나 12:12에서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본절과 1:13 및 12:12의 장소가 서로 일치한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가의 다락방'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 모인 모든 무리들은 주님의 명령(1:4)을 따라 열심으로 기도하면서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이다.

성 경: [행2:2]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강림]

⭕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 2-4절에는 성령 강림이 세가지 징표(徵表)로 나타난 것으로 기록한다. 곧'바람'과 '불'(마 3:11, 12)과 '방언'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전통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다. 본 구절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성령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람'이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징표로서 나타난 것은 어원적으로 볼 때 '영'(*, 프뉴마)이라는 단어가 '바람'(*, 프노에)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음 수 있다. 이러한 연관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발견된다(요 3:8). 또한 구약 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바람'으로 표시한 곳이많이 있는 것을 볼 때(왕상 19:11; 시 104:4)이연관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람 같은'이라 했기 때문에 바람과 성령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는 성령의 능력과 그의 오심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이다(Stanley D. Toussaint). 뿐만아니라 이 말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체험하였던것보다 더 친밀하고 인격적이며 강력한 방법으로 성령께서 임재(臨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말이다(Richard N. Longenecker).

⭕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온 집'은 헬라어 본문상으로 '그온 집'을 말한다. 이것은 이미 한 번 언급된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1:13, 15 등에서 말한 집을 지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집'을 혹자가 주장하듯이 성전의 집(성전 안에는 30개의 홀이 있었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Bengel, Bruce) 세심한 관찰력과 주의력을 지닌 의사인 누가가 '성전'(*, 히에론)이란 말을 왜 언급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이 '집'은 앞서 언급한(1:13, 15) '그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Alford, Knowling, Hervey, Toussaint).

성 경: [행2:3]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 '불의 혀'는 성령의 임재를 묘사한다. 이와 괸련하며 구약에서 여러 번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출 3:2-5; 13 :21; 24:17; 40:38).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은 성령의 오심을 불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마3:11 ;눅 3 :16). 여기이서 '불의 혀'란 실제로 불이 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구약 시대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상징한다(Blaiklock, Ralph Earle). 그뿐아니라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창 19:24; 레 10:2; 민 16:35; 왕하 1:9-12; 사 47:14).

⭕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임하여 있더니 - 커다란 불덩어리 같은 것이 불의 혀같이 나타나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다. 이것은 약속된 주의 성령이(1:4; 요 14:16-21,26; 15:26, 27; 16:7-15)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사실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욜2: 28-32)과 예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의 옛 언약하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限定)되었으나(민 11:26-19; 삼상 10:6-12) 이제는 예수를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다. 이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각양 은사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성 경: [행2:4]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 세례와는 다른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여러 번 되풀이 될 수 있어서 구원의때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4:8, 31; 6:3,5; 9:17; 13:9,52).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단회적(one for all)으로 일어난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의 경우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충만에 대해 꼭 한 번만(엡5:18)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성령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른 바 성령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롬 8장에서도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특이한 현상이라 할수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인도나 지배(롬8:5, 9, 11, 14 참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뿐이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인도나 지배를 받는상태를 성령의 충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내주하신 성령(롬 8:9; 고전12: 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으로 성령이 채워지거나 다시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하나님은 바벧탑의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어버리셨다(창11:1-9).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된 이 사건은 혼잡케 되었던 언어가 다시 회복된 것으로서 새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 우주적 로 확산(擴散)될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메이어(Meyer)외에 많은 비평학자들은 오순절 체험이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본절과 같은 이적을 저자가 미화시킨 것으로 주장한다(Bauer, Schnekenburger. De Wette).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본서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누가의 의도적 편집에 의한 것으로 았던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이 견해를 따르게 되면 결국 본서가 바울이라는 인물을 부각시키고 미화시키기 위한 전기biography)에 불과하며 결코 영감받은 책이 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비평주의자들의 견해는 이런 면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한편 이 구절에서 성령의 세례를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충만을 말하지만 이미 1:5에서 성령의 세례를 예언했고 또 11:15, 16에서는 성령 세례가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오순절에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사건이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건이 교회가 세워지기 위한 처음의 특수한 상황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했다. 이것들은 성령이 그의 경륜에 찬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강림한 증거들일 뿐 일반적이며 영속적인 은사는 아니다.

성 경: [행2:5]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그 때에 - 이 시점은 (1)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을 지칭할 수 있고 (2)성령 강림의 때를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경건한 유대인이 - 누가가 '경건한'(*, 율라베스)이란 뜻 으로 사용한 이 말은 신약에서 유대인들에게만 사용되고 있다(8:2; 22:12 ;눅 2:25). 유대인들은 본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경건하게 살아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이란 표현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경건하다고 할 때(10:2) 사용되었던 말과 전혀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이표현은 오순절과 그 규례(민 28:26-31)를 지키기 위해 모인 유대인 중에서 율법을 잘 준수(遵守)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 유대인 중 다수가 바벧론에 의해 남쪽 유다가 멸망당한 후(B. C. 586)각국에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약 1:1; 벧전 1: 1)였다. 한편 '우거하다'(*, 카토이쿤테스)는 말은 보통 한곳에 머물러 사는 것을 뜻한다. 특히 헬라어 본문의 9절에서 각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이 말이 사용된것을 볼 때.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De Wette). 그러나 8-11절의 내용이 외국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를 암시하므로 오순절의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온 나그네였을 것이다(Meyer, Alfoed, Knowling, H. Marshall).

성 경: [행2:6]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이 소리가 나매 - 이 소리는 바람 소리(2절)인지,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4절)인지 주석가들 간에 견해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 소리 '를 뜻하는 헬라어 '포네'(*)가 보통 인간의 소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후자가 더 타당하다(Black, Marshall, Lake, Neil, Bruce).

⭕ 큰 무리가 모여 - 이는 4절의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큰 무리가 모여들었던 것을 뜻한다(Robertson). 이로 보아 제자들이 머물러 기도헹던 장소가 예루살렘 성 안에서 많은 사람이 붐비는 장소에 위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 '듣고'(*, 에쿠온)란 미완료시상으로서 무리들이 소리를 들은 시각이 한참 방언하고 있을 때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방언이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일어났고 주변의 골목과 안뜰에서 계속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성전 경계 지역까지 퍼져 나갔던 것을 암시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Richard N. Longenecker). 따라서 제자들의 방언은 잠시 동안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방언'(*, 디알려토스)은 '자신들의 언어'(NIV, NASB)로서 고전 14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恩賜)인 방언은 아니다. 각 사람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나라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성 경: [행2:7]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슐절 성령 강림]

⭕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 '놀라'(*, 여시스탄토)란 말의 원뜻은 '어떤 장소에서 떠난다'는 뜻인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놀라움을 의미한다. 또 '기이히 여겨'(*, 에다우마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 놀라움이 점점 커져서 어떤 사건이 뜻하는 바를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제자들이 갈릴리사람(1:11)인데다가 또 배우지 못한 자들이면서도 그와 같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심히 놀란 것이다.

⭕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이 첫째 질문은 제자들의 출신에 관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언어 구사력(驅使力)이 없는 무식한 자들로 여겨졌으므로 나다나엘도 빌립에게 갈릴리에 속한 동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요1:46).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모여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성 경: [행2:8]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것 - '각 사람의 난 곳'은 9-11절에 기록되어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 지방들을 지리적, 언어적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

| 지 리 적 구 분 | 언 어 적 구 분 |

+--------------------------------------+-----------------------------

| 동방 혹은 바빌로니아 지역 (바대, 메대| 셈어(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 |

| 엘람, 메소보다미아) | 유대, 아라비아) |

+--------------------------------------+-----------------------------

| 시리아 비역(유대, 가바도기아,본도, | 헬라어(아시아, 애굽, 구레네) |

|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 |

+--------------------------------------+-----------------------------

| 애굽 지역(애굽, 리비아, 구레네) | 라틴어 (로마) |

+--------------------------------------+-----------------------------

| 로마 지역(로마) | |

+--------------------------------------+-----------------------------

성 경: [행2:9]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 - 이사람들은 유대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과거 앗수르인들이 북쪽 이스라엘의 열 지파로부터 포로로 잡혀온 자들을 이주시켰던 지역으로(왕하 17:6) 가장 먼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생겨난 곳이었다. 그 후에도 느부갓네살 시대에 유다의 포로들로 말미암아 그 수는 더욱 증가되었다(단 1:1, 2)그들은 나중에 바사 왕국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팔레스틴으로 귀환(歸還)하지 않고 살던 곳에 머물렀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서론지도 '1세기의 근동'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우리'는 바대와 메대 그리고 엘람이란 곳에 사는 유대인들인지 아니면 그곳에 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인지 분병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곳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추정한다(Bruce, Ralph Earle, Hervey, W. Neil). 그러나 10절 하반절의 진술로 미루어 보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 또 메소보다미아 -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 사이의지대로 비옥한 초생달 지역(Crescent)으로 잘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 자리잡고있던 바벧론 제국에 의해 B. C. 589년 이후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소보다미아와 그 인접지역에 정착해 살던 유대인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언급하였다.

⭕ 유대 - 이 명칭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있다. (1)'유대'(*, 유다이라)란 단어는 형용사이기 때문에 명사로 사용되려면 앞에 관사가 있어야 하지만 본절에서는 생략되였다. (2)그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라면 사도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워했을리 없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기 위해 특별히 이처럼 언급했을리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학자들의 견해를 도표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 학 자 | 지 명 |

+--------------------+----------------------------------------------+

| Tertullian | 아르메니아 지역 |

+--------------------+----------------------------------------------+

| Olshausen | |

| Ewald | 수리아 지역 |

+--------------------+-----------------------------------------------+

| Zahn | 메소보다미아 - 구레네 지역 |

+--------------------+-----------------------------------------------+

| Olshausen | |

| Vincent | 남방 유대 |

+--------------------+-----------------------------------------------

| Hervey | 유대인들이 흩어져 사는 모든 지역 |

+--------------------+-----------------------------------------------+

| Schneckenburger | 라디아 |

+--------------------+-----------------------------------------------

| Bruce | 다윗 왕국 판도 내의 모든 지역 |

| 아사노 중이찌 | |

+--------------------+-----------------------------------------------

여기서 가장 설득력 있는 제안은 본절이 '유대'란 말이 보다 광범위한 예언

적(豫言的) 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말은 유브라데 지역으로부터 이집트 변방 지역까지 확장되었던 '유대인의 영토', 곧 다윗왕과 솔로몬에 의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통치되었던 지역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F. F. Bruce). 이렇게 생각할 때 수리아가 그 목록에서 누락(漏落)된 이유를 알수 있으며 예루살렘 출신의 원주민과는 전혀 다른 여러가지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설명이 될것이다(Richard N. Longengcker).

⭕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 이들 지역은 소아시아(지금의 터어키) 지방으로 당시에 로마의 행정 구역이었다(벧전 1:1). 소아시아의 지방들에는 규모가 꽤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13-19장; Philo, Embassy to Gaius).

성 경: [행2:10]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 아시아와 가바도기아의 중간에 위치한 로마의 행정 구역이었다.

⭕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 유대인들은 B. C. 6세기 초엽부터 계속 애굽에 거주해 왔다. 예수 당시 애굽에는 유대인이 백만 명 가량 살았는데 알렉산드리아의 다섯 구역 중에 두 구역의 전 주민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Philo, on Flaccus 6, 8). 애굽의 톨레미 1세(Ptolemy)는 그의 왕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구레네에 정착시켰는 그때에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6:9; 11:20; 13:1).

⭕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와 동격(同格)으로 봐야 할 것이다(R. C. H. Lenski). B. C.2세기 경에 로마에는 유대인 거주지역이 있을 정도로 많은 유대인이 있었다. 본문의 사람들은 B. C. 62년에 폼페이(Pompeii)에 의해 포로로 잡혀왔다가 후에 자유케 되었던 자들로 볼수 잇다. 본절에서 로마에서 왔던 사람들 중에 나면서 부터 유대인들이었던 사람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둘다'(NVI와 NASB 는 both를 사용함)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로마에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는 유대인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 이란 곧 재종자로 말하는데 유대인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그들의 의식을 준수한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 교제를 누리도록 허용된 이방인을 가리킨다.

성 경: [행2:11]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 그레데는 발칸 반도 남방의 섬이고 아라비아는 홍해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지역, 곧 시리아와 팔레스틴 동쪽 지방에 있는 나바티안 왕국(the Nabataean)을 가리킨다. 누가는 지금까지 15개국(또는 지방)에서 살던 유대인 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던 것을 일일이 열거했다. 서론의 지도를 통하여 보는 바처럼 열거된 그 나라들은 당시 지중해를 중심한 근동과 유럽지역에까지 획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복음이 이처럼 세계 각국에 각 나라의 말로 전과될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4절; 창 11:1-9 참조).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이 말은 8절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강조한 말이다. 그 강조점 소유격 '우리의' 란 말에 있다(R.H.Lenski).'우리'가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를 지칭하므로, 본절에서는 그들이 속한 지역의 방언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의'란 소유격이 첨가되었다.

⭕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 여기에서 말한 '하나님의 큰일을'(*, 타 메갈레이아 투데우)이란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특별한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셨던 구원의 전 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H.Bavinck). 사도들은 성령이 부어지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부어 주시사 이 큰 일을 깨닫고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적(異蹟)은 이미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으로(요 16:13. 14) 본절에 특별히 언급되어 약속의 성취를 보여준다.

성 경: [행2:12]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 '의혹하여'라는 말은 '완전히 당황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아포레오'(*)의 미완료형으로 신약성경에서 누가만 사용한 독특한 용어다(5:24; 10:17; 눅 9:7 ). 이 동사의 시제가 암시하듯이 그들은 계속해서 놀라고 당황했음을 알 수 있다.

⭕ 이 어찐 일이냐 하며 - 모여든 무리들은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의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 조롱하는 어떤 이들이 있었음을 볼 때 부정적인 시각을 사람들도 상당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행2:13]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오순절 성령 강림]

⭕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 '어떤 이들'이 9-11절에 언급된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또는 그외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명확지않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딘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그 곳에 많이 왔을 것이다(14절). 따라서 누가는 조롱한 자들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방언하는 소리를 들은 불특정인임을 지칭하기 위해 단순히 '어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바울이 아덴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주제로 전도하는 것을 듣고 기롱한 사람들이 있었다(17:32).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하면 '미쳤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고건 14 :23). 이처럼 '자연인은 저들의 무지와 수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사실을 자연적인 원인으로 돌리는 법이다'(Bengel). 한편 '새 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글류코스'(*)로 '감미로운'을 뜻하는 '글뤼퀴스'(*)에서 파생된 용어다. 본래 '글류코스'는 발효(醱酵)되지 않은 포도즙을 의미했다. 본절에서는 아마 발효되기 시작한 감미로운 포도즙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행2:15]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변호]

⭕ 제 삼시니...취한 것이 아니라 - 유대인들은 낮의 시간,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를 열 둘로 나누었다. 제 삼시란 아침 9시로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시간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살전 5:7).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제 4시까지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성 경: [행2:16]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변호]

⭕ 이는 곧 선지와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 이 구절은 요엘의 예언(욜2:28-32)이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요엘서의 예언 부분들을 상세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이 그 예언 성취 자체에만 모든 강조점을 두고 있다. 또한 베드로는 신약의 모든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전형적인 인용의 기본형태, 곧 '이것이...이다'(*, 투토에스틴)라는 방법을 따라 요엘서를 인용하고 있다.

성 경: [행2:17]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변호]

⭕ 하나님이 가라시대 - 베드로 자신이 인용한 구절들의 중요성과 엄숙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이말을 사용했다. 본 구절 이후에 인용된 구절들이 약 800여 년 전에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라사대' 란 동사를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은 그 예언이 불변(不變)의 진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 말세에 - 욜 2:28의 맛소라 본문(MT.; 욜 3:1)이는 '이후"(*, 아하 레이 켄)로, 70인역(LXX; 욜 3:1)에는 '이(일)후'(*, 메타 타우타)로 표기되었으나 베드로는 "말세'라는 표현으로 대체시켰다. 유대인들의 말세란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가 오시는 때를 가리킨다(사 2:2; 미 4 :1). 베드로가 이 말을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 강림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을 볼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지칭하는 종말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종말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생겨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내가 내 영으로 - 이 말은 원래'내 영으로부터'(*, 아포 투 프뉴마토스무)란 의미로 70인역(욜 3:1)의 인용구다. 이는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실 것을 가리킨다(딛 3:6).

⭕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 "모든 육체'란 '모든 사람'을 뜻한다. 모든 사람이 흩어진 유대인들만 가리킨다는 견해(Knowling)가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않다. 그 이유는 본서의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볼 때(10:45참조) 오순절 성령 강림이 복음의 우주적인 확산을 상징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준다는 말은 이후에 있게 될 성령의 보편적인 강령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육체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Meyer). 지금까지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해서 유대 지역에서 제한적(制限的)으로 활동하셨으나 오순절 이후부터는 온 세상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셨다.

⭕ 너희의 자녀들은...꿈을꾸리라 - '예언', '환상', '꿈'은 모두 구약 시대에 어떤 특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 방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오순절을 기점으로 하여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신약 시대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는 모든 사람이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부여받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야말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이며 그것은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Grosheide).

성 경: [행2:18]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변호]

⭕ 남종과 여종 - '종'에 해당하는 엘라어 '둘로스'(*)는 히브리어 '에베드'(*)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 말은 구약에서 '사환'(使喚)을 의미하는 '타아르"(*)와는 달리 주인의 재산 일부로서 간주된 '노예'(slave)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둘로스'는 주인에게 충성과 헌신을 다해야 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성도를 가리킨다. 예언할 것이요. 이 표현이 요엘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가 앞 부분과 문장구조를 맞추기 위해 삽입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베자 사본(D)과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단어를 생략했다.

성 경: [행2:19]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변호]

⭕ 기사와...징조를...피와 불과 연기론다 - 혹자는 본 구절과 다음 구절에 묘사된 자연계의 기사와 표적들이 베드로가 설교할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리들에게 더욱 호소력있게 작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를 통하여 여러가지 초자연적인 기사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잠시 해가 어두워진 사실을 예루살렘 사람들이 목격한 지 불과 7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F. F. Bruce) 따라서 이러한 기사와 징조는 '여호와의 날'의 도래에 대한 표시이며 이 날은 심판의 날 곧 "마지막 날'인 동시에 보다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초대 교회 당시를 포함한) 모든 날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성경 본문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눅21:25-28) 오히려 본절의 표현은 마지막 날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묘사로 이해됨이 무난하다. 한편 '기사'와 '징조"란 다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표시하는데 전자는 주로 하나님의 이적적 권능(wonders)을 나타내고 후자는 장래 일어날 일이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표시(sign)을 가리킨다. 이 '기사'와 '징조'는 '피와 불과 연기'라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다.

성 경: [행2:20]

주제1: [성령의 강림고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변호]

⭕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 '영화로운'(*, 에피파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사용된(살후2:8; 딤전 6:14; 딤후4:1; 딛 2:13) '나타나심'(*, 에피파네이아)과 동일한 어근을 갖는다. 따라서 본구절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표현으로서(고전 1:8; 고후 1:14; 빌 1:10; 살전 5:2) 심판과 동시에 구원이 완성되는 날을 말한다. 이 '주의 날'은 구약에서도(사 13:10; 암 8:9 등)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께서도 세상의 종말과 관련해서 언급하신(마 24:29) 것이다.

성 경: [행2:21]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변호]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여기서 '부른다'는 표현을 '기도'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본절에서 '부른다'는 표현은 '믿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롬 10:13, 14).

성 경: [행2:23]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 되심]

⭕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 '정하신'(*, 호리스메네)이란 '고정되어진, 결정되어진'의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영원 속에 두었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인간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인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의 영원 전에 세우신 계획을 바꿀수 없었던 것이다.

⭕ 내어준 바 되었거늘 - '내어준바'(*, 에크도톤)는 동사적 형용사로서 수동분사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 표현이 유다에 의하여 내어준 바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Robertson). 그러나 오히려 본절에서 베드로는 내어준 자에 단순히 유다만 포함시키지 않고 예수에 대해 거짓 증거하고 조롱했던 유대인들도 포함시키고 있는듯하다.

⭕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 이 표현은 팔레스틴의 로마 당국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유대 당국자들에 의하여 선동(煽動)되는 그대로 실행하였던 자들이다(Richard N. Longenecker). 유대교 문헌에서는 이방인들이 '악한자들'(고전9:21)로서 종종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고의로 죄를 짓는다거나 또는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이라는 이유때문이었다.

⭕ 못박아 죽였으나 - 독자들은 그곳에 모인 자들 모두가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처럼 베드로가 표현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개개인의 죄가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의 죄였기 때문이다.

성 경: [행2:24]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

⭕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 본문에서는 예수의 부활이 법 없는 자들의 어떤 행동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엡 1: 19,20)을 따라 되어진 일임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본서에서 핵심되는 주제이다(32절; 3:15; 4:10; 5:30; 10:40; 13:30-34, 37; 17:31; 26: 23) 여기에서 '사망의 고통'은 히브리어의 배경에 의하면 사냥꾼들이 포획하기 위하여 놓은 덫과 같은 '죽음의 덫', 혹은 '매는 줄'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죄가 없으시므로(히 4:15; 9:28; 벧전 2:21; 요일 3:5) 그 사망의 올무에 매여 있지는 않으셨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다(고전 15:4-6).

⭕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 이 구절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이다(요 20:9). 사망조차 예수 위에 왕노릇 할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베드로는 예수가 항나님의 아들되신 권위를 입증하고자 했다.

성 경: [행2:25-28]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 되심]

베드로는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시편(16: 8-11)을 인용한다. 이는 자신이 8절에서 예수에 대하여 말한 바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시 16: 8-11은 대표적인 메시야 예언에 대한 기록 중 하나로서 메시야의 부활(復活)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예언의 말씀을 들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메시야인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와같은 논중은 예수 자신에 의하여 세워진 해석에 기초하고(막12: 35-47 참조), 부활 이후의 기독교 전통에도 부합되며, 또한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인용되었던 미드라쉬의 제반 해석 방법과도 일치되게끔 표현된 하나의 논증이다(Richard N. Longenecker). 이 부분의 각절 주석은 본서의 시편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2:29]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

⭕ 형제들아 - 이 말은 헬라어 본문에 따라 직역하면 '사람 형제들아'라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아'(14절)라는 말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아'(22절)라는 말보다 친근감 있는 표현이다.베드로는 이제까지 인용한 구약의 맡씀에 대한 결론을 말하려고 공손히 청중들의 주의를 끌고있다.

⭕ 내가 조상 다윗에 대혀여 담대히 말할수 있노니 - 여기에서 "말할 수 있노니'란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말하게 허락하면'의 뜻이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잘 반영하여 '나로 말하게 하라'(Let me speak)고 번역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이 청중들과 형제로서, 이스라엘의 왕통의 선조로서 존경받는 다윗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공손한 태도를 나타냈다.

⭕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 다윗의 묘는 실로암 못 남쪽에 있었는데(Bruce) 현재는 예루살렘 마가의 기념교회 가까운 곳에 다윗의 무덤으로알려진 유대교의 성기가있다고 전해진다. 다윗은 이처럼 죽어서 그 무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란 구절은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음이 분명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다윗의 묘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 하나는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3,000달란트의 돈이 도난당했으며 그후 헤롯에 의해 다른 방도 도굴(盜掘)되어 더 많은 돈이 도난당했다고 전해진다.

성 경: [행2:30]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

⭕ 그는 선지자라 - 다윗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기 때문에 선지자였다(삼하23:2;마 22:43). 비록 구약에서 그가 예언하는 무리 중에 포함되어 예언한 적은 없으나 자신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예언했으므로 영감받은 선지자 중 하나로 여겨질 수 있다.

⭕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하심을 알고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처음 하신약속은 삼하 7:11-16에 기록되어 있다. 그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맹세'에 관한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 89:3,35에서는 '내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나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였은즉...', 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과 거룩함에 근거하여 영원 불변한 서약으로 맹세하신 것을 알수 있다.

성 경: [행2:31]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 되심]

⭕ 미리 보는 고로...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 이 구절은 이미 인용된(27절) 시 16:10에 대한 해석이다. '미리본다'는 것은 선지자로서 계시와 영감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의한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선지자는 예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를 단순히 예언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장래에 될 일을 미리보고 예언한 예언자이면서 영감받은 시(詩)를 많이 써서 하나님을 찬양한 선지자였다. 다만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과 관련된 다윗의 선지자의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성 경: [행2:32]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 베드로는 이미 22절에서 '예수'를 언급했으며 그 다음부터 예수에 대해 적용된 예언을 설명했으므로 본절에서 '이 사람을'(*, 투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에 의해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예수의 부활이 예언의 성취임과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했다.

⭕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다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에 관계대명사 '후'(*)가 사용되어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즉 본 구절은 이 관계대명사의 선행사(先行詞)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1)하나님:이에 따라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증인이다.' 벵겔(Bengel)같은 학자들이 이해석을 지지한다. (2)앞절 전체:'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여 개역 성경처럼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Meyer, Lenski, Bruce, Ralph Earle).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번역을 취한다. (3) 예수:'우리 모두가 예수의 증인이다' 란 의미가 된다(Alford, Knowling).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여 설교하고 있으므로 '예수'아 '하나님'을 선행사로 취하는 것보다 앞절 전체를 선행사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모든자들이 부활에 대한 증인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였고, 그들은 본절 외에 네 차례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고 강조했다(3:15; 5:32; 10:39-41; 13:30,31).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행2:33]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

⭕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 여기에서 '오른손으로"란 하나님의 전능과 그의 권능을 상징하는 말이지(엡 1:20;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 비교) 승천한 예수의 위치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다. 물론 허비(Hervey)는 '오른손으로'를 '오른편에'로 해석하여 예수가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여격이 장소로의 의미보다는 방법의 의미를 나타내므로 타당하지 않다. 한편 '높이시매'라는 말은(3 :13; 빌 2:9)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영광스러움을 내포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의 승귀(昇貴)라 칭한다.

⭕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 예수가 약속하신 성령(1:5; 요 14:16; 16:13)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내는 권능을 얻었다'(1:8; 요 14:26; 15:26; 16:7)는 표현은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와서 성자를 통해 오시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종교 회의의 결정이 비롯되었다(니케아 신조).

⭕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 무리들이 보고 들은 것은 성령이 임했을 때 일어났던 현상에 대한 것으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3절)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2절)와 백이십 명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4절)을가리킨다.

⭕ 부어주셨느니라 - (*, 여세케엔). 이 말은 '에크케오'(*, 쏟아버리다)의 부정과거형으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 말은 선지자 요엘에 의하여 사용되어진 표현으로(17절) 그의 예언이 여기에서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성 경: [행2:34]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 되심]

⭕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 그는 죽어서 장사되었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당시에 그의 무덤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육체는 무덤에서 썩었고 승천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지금 인용할 이 시는 다윗 자신에 적용시킬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었다.

⭕ 주께서 내 주에게 - 이 구절은 시 110:1의 인용으로 후기 유대교 시대에 유대교 해석자들이 난해한 문제로 삼았던 구절이다. 문제는 '내 주'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 몇몇 고대의 랍비들은 이 시편을 아브라함과 관련지어 해석했고, 또 어떤사람들은 다윗과 관련지어 해석했으며 심지어는 히스기야 왕과 관련지어 해석할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기원후 약 7년이 될 때까지 랍비 문헌에서 이 시편 110편이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 확실한 중거도 없다(D. M. Hay)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시 110: 1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適用)시킨 적이 있다(마 22:41-46; 막 12:35-37; 눅 20:41-44). 베드로는 이 시편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언급했다.

성 경: [행2:35]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

⭕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 바울이'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 :10)라고 가르친 적이 있듯이 '발등상 된다"는 것은 항복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 110: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2:36]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베드로의 설교 - 예수의 참 메시야되심]

⭕ 그런즉 이스리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 베드로는 본문에 이르러 예수를 주와 메시야로 선포하여 자기 설교의 절정이자 결론에 도달했다. '온 이스라엘'(*, 파스 오이코스 이스라엘)이란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집'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으로 이스라엘 전 민족 또는 종교적 공동체를 가리킨다.

⭕ 너희가 십자기에 못박은...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 직분을 공생애를 통하여 죽기까지 하심으로 완전히 성취하셨고 또한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므로 '주와 그리스도'란 칭호가 그에게 참으로 합당한 것이다. 또한 이 칭호가 그에게 합당한 이유는 신약의 다른 여러 곳에 나타나는 기독론적인 진술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롬 1:4; 빌 2:9-11; 히 3:14; 요일 5:6). 특별히 이 '주와 그리스도'라 는 칭호는 바로 베드로의 메시지의 제목이요 초대 교회 신앙 고백의 내용이었다(롬 10:9; 고전 12:3).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에 적용되는 주(*, 퀴리오스)는 아마 구약의 여호와와 일치되는 표현이다. 즉 34절에 인용된 '주께서'가 시 110:1에서 '여호와께서'로 언급되었으며 70인역(LXX)에서 '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또한 '여호와'란 표현을 70인역은 거의 대부분 '퀴리오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구약의 '여호와'와 '예수'를 상호 관련시키고 있는듯하다(Stanley D. Taussaint). 또한 베드로는 설교 속에서 '주'란 표현을 예수와 하나님께 동시에 적용시키고 있다(21,34,39절). 그러므로 여기에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강조적인 표현이라 할수 있겠다. 이 ' 주와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의 능력과 영광으로 유대 민족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모든 민족 위에 높여주는 정치적인 위대한 통치자로서의 주와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메시야 사상과 부합되지 않게 가르치며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성 경: [행2:37]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찔려'(*, 카테뉘게산)라는 동사는 '때리다' 혹은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실신시키다'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격심한 마음의 염려와 양심의 가책이 엉켜진 매우 심각한 고통을 의미한다. 호머(Homer)는 '발굽으로 땅을 옴푹 패게 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내면적 의미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아무튼 무리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성적인 죄책감(罪責感)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Alexander). 이처럼 제자들 속에 역사하신 성령은 예수의 예언대로(요 16:8-11)그들의 죄를 책망하는 일을 행하신 것이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하고 나서 저희의 유일한 소망이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야를 스스로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을 깨닫자 몸서리치도록 놀라며 '마음에 찔린' 것이다.

⭕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 베자사본과 몇몇 서방 본문들에는 '다른 사도들'이란 말에서 '다른'이란 형용사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를 사도들과 특별하게 구별하기 위한 의도적인 생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다른'이란 표현이 삽입되면 베드로와 같은 사도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생략될 경우 베드로가 사도들보다 우월한 어떤 권위를 지닌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강조하고있는 것은 초대 교회 안에서의 사도들의 주도권이지 베드로 자신의 주도권이 아니다(Richard N. Longenecker). 사실상 누가는 그의 복음서와 본서에서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를 사도들 가운데서 으뜸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의 대변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 우리가 어이할꼬 - 이 물음은 필사적(必死的인 부르짖음이었다(16:30). 바울도 회개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22:10).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면서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제 성령의 지시를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성 경: [행2:38]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 '회개하다'는 마음의 완전한 변화와 죄의 고백을 뜻한다. 마음의 변화란 전인격에 대한 것으로 죄와 불신에서 떠나 그리스도에게 향하는 인격 그리고 신앙과 그리스도를 통한 성결로 나아가는 인격에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회개의 메시지는 본서에 여러 번 반복되었다(3:19; 5:31; 8:22; 11:18; 13:24; 17:30:19:4; 20:21; 26:20).

⭕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 이 말은 '너희들 한 명 한 명이 각각 세례를 받으라'는뜻으로 여기에서 맡하는 세례는 유대교에서 시행해왔던 회개와 사과의 외적 상징으로서의 물세례(13:24; 18:25; 19:3 ;막 1:4)와는 판이하게 구별되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말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일 뿐 아니라 성령을 받는 일과 관련된 세례이기 때문이다. 한편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나머지 부분과 연관해서 여러 견해가 나올 수 있다. (1)회개와 세례가 사죄의 요인(要因)이 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세례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은 어디서나 죄사함 곧 구원은 오직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롬 4:1-17 ;11:6; 갈 3:8-9; 엡 2:8, 9). (2) 죄사함의 근거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 구절에서 사용되는전치사(*, 에이스)는 '근거하여'라고 번역된다. 따라서 이 구절을 번역하면 '세례를 받으라. . . 너의 죄사함의 근거로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근거하여'란 의미보다 '의도나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3)'각각... 세례를 받고'의 구절을 삽입구로 취하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으라'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진다('회개하다'는 동사가 복수이고 '너희 죄사함을 받으라'의 '너희'도 복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상의 난제를 피하기 위해 헬라어 본문을 의도적으로 변경할 필요가 없다. 본문을 직역하면 '죄사함을 위하여'란 의미를 지니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렇게 번역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본절에서 단순히 '세례 받으라'는의미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강조하여 이 이름과 세례를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세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예수의 이름에 따른 세례가 강조된다. 이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보다 더 강한 어조이므로 단순히 '세례'라는 문자에 따라 본문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막 1:4은 본 구절 요약하듯 '죄사함과 세례'를 밀접하게 연관(聯關)시켜 진술하고 있다. 비록 '세례'가 죄사함이나 구원의 근거는 될 수 없을지라도 본절과 같이 '예수만을 믿으라'는 의미를 지닐 때 그'세례'는 죄사함과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여기서 '그리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가 어떻게 번역되느냐에 따라 본절의 전체적 의미가 구분된다. (1) '그리고' 이 의미는 '카이'의 일반적인 용법이며 본절에서도 '그리고'로 번역될수있다. 이렇게 번역될 경우 본구절과 앞구절은 단순히 대등적일 뿐 인과 관계가 없다. (2)'그리하면':이 의미는 '카이'의 특별한 용법이다. 이 번역을 취하면 앞 구절과 본 구절은 인과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회개와 죄사함을 위한 세례가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조건이 된다. 그런데 앞 문장이 명령문이므로 여기서 "카이'는 두번째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한편 '성령을 선물로'란 표현을 직역하면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Holy Soirit, NIV ;성령의 은사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자체이시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며 그 유익을 위하여 각 사람 에게 나눠주시는(고전 12 :11)성령의 은사들을 말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개역성경처럼 번역되는 편이 타당하다.

성 경: [행2:39]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 이 약속 -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약속이며(1:4) 또한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약속로서(욜2:28-32) 죄사함과 성령의 은사(38절)를 포함한 것이다.

⭕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 베드로는 이 약속이 자기 설교를 듣는 청중들(너희)과 그들의 자녀들(너희 자녀) 그리고 모든 먼 지방(나라)에 있는 자들(모든 먼 데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구절에서 '모든 먼 데 사람'이라는 표현을 장차 태어날유대 자손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먼 데'(*, 마크란)라는 단어가 70인역 (LXX)에서나 신약의 어느 곳에서도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용어는 자연히 공간적(空間的)으로 핵석되어야 할 것이다(Richard N. Lingenecker).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때 '먼 데'라는 말이 절대적으로 디아스포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Meyer, Wendt)이 이방인도 포함한 것인지(Bengel, Alford, Alexander, Knowling)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이 조금의 차별도 없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을 고려할 때 베드로가 여기에서 유대인만 지칭하고 이방인을 제의시켰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너희'란 표현 속에는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및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포함되므로 '먼 데 사람'은 유대교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누가는 본문의 '먼 데'라는 말을 22:21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행2:40]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 또 여러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 '여러 말' 이란 누가가 본문에서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베드로가 하였다는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확증하며'(*, 디아마르틔로마이)란 동사와 '권하여'(*, 파라칼레오)란 동사에 접두어(prefix)로 덧붙여진 전치사들(*, '디아' *, '파라')은 본래적 의미에서 파생되었으나 강조적으로 사용된다. 곧 이 전치사들은 마르튀레오(*, '증거하다'), 칼레오(*, '부르다')라는 원형 동사에 강의적(强意的)인 의미를 부여해 준다(R. N. Lonfenecker).

⭕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 당시의 세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박았기에(눅 11:29; 17 :25)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눅 9:41)요 '악한 세대'(마 16: 4; 17: 17)였다. 패역한 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구약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창 7 :22;19:24). 그러나 그러한 불신앙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은 그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마21 :41-44; 22:7; 23:24-24:2)

성 경: [행2:41]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 이 말은 모든 사람은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는 베드로의 '말'(*, 톤로곤)에 찬동하여 수긍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 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혹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확성기(擴聲器)도 없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수 없으며 또한그 당시의 예루살렘 인구가 통틀어 25,000-30,000명에 불과했으므로 3,000명의 회개 사실을 부정했다(Haenchen). 이에 대해 롱게네커(Richard N. Longenecker)는 다음 두 가지 근거로 그 견해를 반박했다. (1) 그는 크라이슬러(B. C. Crisler)가 팔레스틴 지방에서 실험한 결과를 따른다. 즉 그는 팔레스틴에서는 설교자가 어떤 위치에 있을 때 소리의 반항음에 의해 수많은무리가 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마 예수도 이러한 지리적 입지를 고려해서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할수 있었을 것이다. (2)그는 '더하더라'는 동사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된 점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은 더해지는 수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설교의 결과로서 더해지는 과정이 계속 있었음을의미한다. 즉 3,000명의 대중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한꺼번에 반응했다는 의미가 아님을보여준다. 따라서 3,000이라는 수효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한편 본 구절에서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학자에 따라 문제시 된다. 왜냐하면 3,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수 있는 곳은 요단강뿐인데 베드로의 설교 장소는 예루살렘으로서 그 만큼의 수효가 세례 받기에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난제는 다음 두 가지로 해결될 수 있다. (1) 3,000명이 일시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라 분산되어 12제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세례받았을 것이다(H. Marshall, W. Neil). 즉 제자의 수가 점점 더해진 것처럼 세례도 점진적으로 제자들에 의해 행해졌을 것이다. (2) 여기서 세례를 침례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며 굳이 약식 세례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3,000명이 예수의 이름을 믿게 된 것을 누가는 보다 실감나는 표현인 '세례'로 언급했을 것이다.

성 경: [행2:42]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설교의 결과]

⭕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 여기에서 '사도의 가르침'은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문자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번역된다. 여기서 '사도'는 복수형이지만 '가르침"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주께서 허락하신 권위를 가지고 각기 주어진 바 임무대로 가르침에 전력했지만 그 교훈의 통일성(統一性)을 유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들(20:35)과 행하신 일들이었다.

⭕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여기에서 '교제'와 '떡을 떼며 기도하기' 사이에 '그리고'란 접속사가 생략되었으므로 이는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이 교제와 동격인 것을 보여준다. 교제(*, 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희생적인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며 물질적으로 도와 주는 것과 영혼의 교통 곧 기도하는 일은(Bruce) 필수적이라 하겠다. 또한 떡을 뗀다는 것은 성찬과 애찬을 동시에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46절; 20:7; 고전 10:16; 11:23-25). 그런데 46절에서 '떡을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이 서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에서 떡을떼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시고 제자들로 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성찬'(눅 22:19)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전혀 힘쓰니라"는 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어떤 행동 방침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지속적(持續的)으로 교제했음을 의미한다(1:14; 6:4; 8:13; 롬 12:12; 13:6; 골 4:2). 그리고 이 말은 제자들이 '교제'를 매우 중요시했음을 암시한다.

성 경: [행2:43]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도인 공동체]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 '사람마다"라는 말은 44절의 '믿는 사람'과 대비되는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수사법상 과장된 표현이다. 본 구절의 직접적인 의미는 '모든 혼에게 두려움이 되고 있더라'로 공포가 아니라 존경심과 경외심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의미한다(막 4:41; 벧전 1:17).

⭕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기사와 표적들은 그들이 사도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고후 12:12; 히 2:3-5). 이러한 증명을 위해 사도들은 성령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들을 많이 행했다(4:30; 5:12; 6:8; 8:6, 13; 14:3; 15:12). 그것들은 예수께서 지상에 있을 때 행하신 기적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었던 것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 경: [행2:44]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도인 공동체]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버리고 한 공동체 생활을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있어'란 미완료 과거형으로 신자들이 늘 함께 모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전에는 구약의 규례를 준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들을 극복하고 그들을 하나의 몸으로 결속(結束)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 백성으로 참된 교제를 했음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 '언약'(*, 브리트) 언약을 맺는 당사자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속을 의미했다. 예수를 통한 신약의 공동체도 그 언약에 기초하여 예수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과 결속될 뿐 아니라 공동체간에 또한 공동체를 구성하는각 개인간에 영적 결속이 이루어졌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을때 성령을 체험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지 성도의 수에 가입된 3,000명도 포함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람외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이 교제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유대교로개종한 이방인들은 오순절 절기 행사가 끝난 후 자기들이 거주하던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이루어진 영적인 일치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공유하는 생활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와 같은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물건을 서로 통용하려고 했고, 모든 재산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공동체는 또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캄파넬라(Campanella)가 꿈꾸던 이상향과도 다르다. 이들에게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성령이 빠져 있으며 사랑도 강조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상향은 원시 시대의 공동체 생활과 유사한 반면, 성령에 의한 공동체는 철저히 사랑이라는 원리와 언약이라는 결속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유지된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성 경: [행2:45]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도인 공동체]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 여기서 묘사된 유무 상통(有無相通)의 현상은 오직 성령의 하나되심을 따라 이루어진 특이한 현상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예루살렘 교회에 한정되었고 그외 다른 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큰 일을 하도록 하셨는가 를 보여주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다. 특히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이방인 공동체와 이 점에서 구별된다. 이방인 공동체에서는 결코 유무 상통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사유 재산이 인정되었다(고전 11:21, 22).

성 경: [행2:46]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동인 공동체]

⭕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성령을 받은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유대 전통과 관습에따라 행동함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아무 불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 바깥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다(3:11; 5: 12). 그들은 거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양을 드린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성전에 오는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제자들은 성전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계속해서 모이기를 힘썼지만 전적으로 유대인들의 방식과는 달랐다. 유대인 들은대부분 율법의 형식과 그에 따른 관습에 의해 모였으며 제사를 드렸으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自發的)이요,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모였다(5:41 ;8:8; 11:23; 12:14; 13:48,52; 14: 17; 15:3, 31; 16:34; 21:17).

⭕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여기서 누가는 성전에서의 모임과 집에서의 모임이 구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 구절의 '집에서'가 헬라어 본문에서 매우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이말의 헬라어 '카트 오이콘(*)에서 전치사 '카타'(*)를 어떤 의미로 취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의미상 차이가 생긴다. (1) 다른 집으로'로 번역될 수있다(KJV). (2) 선택의 의미; '어떤 집들 중에 한 집에서'란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3)장소의 의미; '집에서'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오이콘"은 단수이면서 관사가 없다. 이 말은 떡을 떼는 집이 특별하게 정해져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1)의 번역이 가장 타당하지만 의미상 RSV 나 NIV 처럼 '그들의 집에서'(in their homes)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이 ' 그들 각자의 집에서' 란 의미로 표현된다면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각 가정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성찬과 애찬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넓은 공간이 있는 집을 택해서 하루씩 돌아가면서 모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기쁨이 넘쳐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모임을 갖고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성 경: [행2:47]

주제1: [성령의 강림과 역사(役事)]

주제2: [그리스도인 공동체]

⭕ 하나님을 찬미하며 - 이미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최고의 축복을 발견했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찬미는 자발적인 마음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표현은 누가가 즐겨 사용한 표현으로서 신약 성경에서 9번 언급된 중에 누가가 7번 사용했다(본절; 3:8, 9; 눅2:13,20; 19:37; 24 :53; 롬 15:11).

⭕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랴안(Trajan)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있다. 즉 그는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해 본 후 '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함으로써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의 영적, 윤리적 삶이 칭송받을 만했음을 로마의 정치가로서 입증시켜주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살게 되므로 온 백성의 칭송(稱頌)을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백성에게 욕을 당한다.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이 구절에서 '주께서'란 말이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히 문법상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받는 사람을'이란 말도 반복을 나타내는 수동태 분사로서 구원의 주체가 예수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더하게 하시니라'(*, 프로세티데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더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에 대하여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누가는 지금까지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생성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누가의 이러한 강조는 단지 성령 강림의 역사에 대한 첫 전주곡에 불과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로 계속되어질 누가의 기록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장되는 승리의 찬가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성 경: [행3:1]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제 구시 기도 시간에 - 3시를 가리킨다. 단 6:11; 9: 21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제 삼 시(오전 9시), 제 육시(12시),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제 구 시 (오후3시)를 정해놓고 세번의 기도를 하였다. 물론 이것은 구속력있는 율법 규례가 아니라 나의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루 구분법에 의하면 제 구 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시간이 되어가는 오후 예배 시간을 의미한다(출 29:39).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공식적 기도시간은 (1) 이른 아침. (2)제 구 시, 즉 오후 예배 시간인 이 때공중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오늘날도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권장할 만한 방법이라 하겠다.

⭕ 베드로와 요한 - (1) 함께 어업에 종사한 동업자 였다 (마 4:18, 21; 눅 5: 10). (2) 세례요한의 때부터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요 1: 37, 42) (3) 개심 후 함께 사도직을 받은 동료 였다( 1: 13; 마 10:2). (4) 특별히 예수께 인정받고 사랑을 입은자들이었다 (마 26:37; 눅 8:51; 9:28). (5)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때에 행동을 같이하던 친밀한 친구였다(눅 22:8; 요 18:16). (6)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동역자였다(8:14). 성질이 급하고 정열적인 베드로와 조용하고 차분한 요한은 성격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이 두사람은 모든 면에서 함께 행동하였다(눅 22:8; 요 13:24,25; 18:16,17; 20:2). 따라서 이들은 12제자의 선봉장(先鋒將)으로 가장 중심 역할을 했으며 지도자 (lwader)로 부각된 인물들이었다.

⭕ 성전에 올라갈새 - ' 올라갈새'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바이논'(*)은 미 완료 시제로서 '그들이 올라가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어떤 동작 및 과정을 아주 시각적으로 인상깊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으까? 여기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 유대인의 율법 의식을 따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기 보다는 그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서 올라갔다'는 표현은 단순히 성전의 위치가 지형상 높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종교상의 경건한 측면에서 비롯되어 나온 말이다(11:2; 18:22; 눅 18:10; 요 7:14). 아울러 사도들이 예수의 승천직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욱 24:49)고 하신 예수의 명령과 또 그들의 사명이 '예루살렘에서 부터 시작되리라'(1:8)는 말씀과도 일치 되는 것이다.

성 경: [행3:2]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 '카이 티스 아네르 콜로스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투'(*)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어머니 태에서 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하나' 가 된다. 이것은 그가 중간에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고 태어날때 부터 40세(4:22)가 되는 지금까지 하체가 마비된 고통을 지닌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 사람들이 메고 오니 성전에 들어가는... 구걸하기 위하여 - 그는 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동냥하여 살아가야 했다. 더욱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매번 다른 사람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걸인(乞人)이었다. 한편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를 구태여 성전 문 앞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 ? 유대교에서는 남을 구제하는 일이 매우 큰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이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 거지들에게 동전을 던져줌으로써 하나님의 상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아는 걸인들이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 앉아 구걸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걸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성전 문앞이야말로 동냥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고 또한 유대인들은 남을 구제하여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성전 문에 걸인이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 미문(the Beautiful Gate) 이라는 이름은 외관상으로 장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이 미문이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간에 의견이분분하다.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성전 동편의 바깔 문인 슈산 문(Meyer, Alfird), 또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가노르 문(Knowling, Alexander) 의 양설이 주로 언급되나 후설이 보다 유력하다. 기원 후 5세기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 동쪽에 위치하여 있고 또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그대로남아 있던 동문 혹은 슈산문(그 문이 수산 궁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을 본문의 미문으로 동일시하여 왔었다. 그러나 유머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와 미쉬나(Mishnah)의 문서인 '미도트'(Middoth 1:3, 4:2. 3:성전규모와 그 건축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의 기록에의하면 니카노르 문(Nicannor Gate)과 동일시하고있다. 이 문은 아름답고 값진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문으로서 가치상으로 볼 때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된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 두는 자라 - '두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둔'(*)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매일매일 반복되어 앉혀지는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성 경: [행3:3]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구걸하거늘 - 그는 여전히 자기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평상시 방법대로 구걸한다. 그런데 '구걸하거늘'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로타'(*)는 미완료시제로서 구걸의 행위가 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가운데 손을 내밀고 무엇을 받으려는 그때의 정황을 잘 묘사해 주는 누가의 표현법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간절하고도 정중하게 한 푼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표현이다. 아무튼 그는 무엇을 구해야 진정한 삶을 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지 않은 가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종들을 향해서도 물질적인 적선(積善)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행3:4]

주제1: [예루살렘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 혹자는 베드로가 혼자서 말했음과 걸인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본문의 기적 행위가 베드로 한 사람에 의해서 되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으로 더불어'라는 표현은 후대에 와서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anechen). 그러나 이는 별 호소력이 없는 주장으로 본문에 있는 그대로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 기적행함에도 똑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성령의 능력따라 행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것은 행동파적인 기질이 있어 그의 적극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지난날 12제자와 함께 있을때도 베드로는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자(代辯者)역할을 서슴없이 하였었다(마 16:13 -16). 따라서 여기서는 누가 앞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활동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사실에 초점이 있을진대, 요한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이 기적의 사건에 참여한 것이다(J. Calvin, Lenski). 동시에 행동파 베드로와 사색가 요한이 함께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다.

⭕ 주목하여 가로되 - 원문상으로는 '주목(注目)하여'의 헬라어 '아테니사스'(*)란 말이 맨 처음에 나온다. 그리고 '데'(*, 그리고') 이하는 걸인이 마흔살이 되는 지금까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였어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일이 전개됨을 보여 준다. 또 '아테니사스' 란 말은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집중된 응시를 의미하며 1:10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자세히 쳐다 보다'로 번역된 말과 같은 동사다(눅 4:20). 그렇다면 왜 주목하여 보았을까 ? (1)13:9에서와 같이 사도가 집중적인 응시의 동작을 취한 것은 이제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필요한 내적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2)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이 사람을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쳐다봄으로써 걸인으로 하여금 사도를 주시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즉 인격과 인격의 접촉을 갖기 위해서이다. (3)내재하시는 성령의 지도와 그 역사하심을 따라 행동하던 사도들은 불쌍한 앉은뱅이의 구걸을 받자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에 의해서 그를 주목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Calvin). 여기서 (1)의 견해는 성경의 기적을 이적 설화로 취급하는 비판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주장으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2)와(3)의 주장은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본문의 '주목하여'라는 말은 사람 마음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본다거나, 어떤 상황의 내막을 발견하기 위하여 취하는 소위 투시 동작이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Lenski). 결국 주님이 그들을 감동시켰을 때에 그들은 이 동냥하는 걸인에게 눈을 고정시킴으로 그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게 유도한 것이다.

⭕ 우리를 보라 - 이의 헬라어 '블려손 에이스 헤마스'(*)는 병들거나 아픈 것이 없이 영원히 사는 천국 복음에 대해 전파하는 사도들에게 단지 한 푼의 돈을 동냥하는 걸인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단호하고 권위있는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이제 앉은뱅이가 돈 몇 푼을 구하는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訴願)하도록 요구한 말이다. 즉 자신에게 신기하고도 이례적(異例的)인 하늘의 축복을 소망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성 경: [행3:5]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바라보거늘 - '에페이켄'(*)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서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의를 사도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이 단어 앞에 '눈을'(*, 투스 오프달무스)이란 단어를 첨가하면 더욱 생동감있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걸인이 무슨 마음으로 또는 왜 쳐다보았을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자기에게 동냥을 주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 걸인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단순히 쳐다본 것이다(Haenchen). (2)보통 몇 푼을 던져주고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우리를 보라'고까지 말한 그들에게 이제 이 걸인은 '평상시보다도 더많은, 뭔가 대단한 것을 얻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주의를 집중하여 쳐다본 것이다(Lenski). (3) 기적을 일으킬 만한, 즉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의 눈으로 쳐다보았다(E. M. Blaiklock). 그 증거로 병고침받은 자들에게는 대개 믿음이 있었다는 점과(막 6: 34,36) 그가 고침을 받은 후 즉시 하나님을 찬미한 것을(8절) 제시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그의 믿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믿음과 관계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 병고침을 베풀어 준 사례들을 생각할 때(요 9:1-12) 이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하겠다. 따라서 걸인의 신앙 행위는 기적이 일어난 후에 생긴 것이라고 보나 렌스키의 견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할 수 있겠다.

성 경: [행3:6]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앉은뱅이에게 보기드문 기대감을 잔뜩 불러 일으켜 놓고 베드로가 한 이 말은 은과 금을 구하던 걸인으로 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곧 이어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했기 때문에 낙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제 베드로의 이 선언을 통해서 돈 몇 푼이 아닌 자신의 처지에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빛을 기대하는 희망의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있겠다. 따라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곧바로 선언되는 베드로의 선포는 앉은뱅이로 하여금 어떤 신기한 기대감(期待感)을 갖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다"베드로의 선언속에서 우리는 (1)물질의 소유에 초월해 사는 사도들의 청빈함을 엿볼 수 있으며 예수의 말씀대로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고다니지 않았다는 것과(마 10:9) (3)혹 물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믿는 사람의 필요를 따라'교회 공동체에서 공동 관리하였다(2:44, 45)는 추측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적용하며 사도들에게 물질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뜻따라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하늘의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차원에서 그렇게 선포한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이 궁핍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를 금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교회의 역할이 물질적 도움보다는 영적 구원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본문의 앉은뱅이 또한 육신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다(7절). 다만 본 사건은 사도들의 궁극적 관심사가 신체보다는 영적 치유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 사도들이 소유한 최고의 보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하여 걸인이 구하던 은과 금,즉 세상의 보화들을 배설물로 여겨버린 자들이었다(빌 3:8). 여기서 '이름으로'라고 표현한 것을 먼저 주목해 보자.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및 본질 즉 그 사람의 존재를 대표해 주는 것이었다(주제 강해 창 25:19-16 '이름 짓기'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이름이란 그 사람 인격(人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신앙심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믿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수께서 크신 능력을 베푸셔서 병자를 낫게 하신다는 것을 선언하고있다. 이 사실은 12절과 16 절에서 더 뚜렷이 증거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사렛'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사적 예수인 나사렛 예수와 부활하신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한다(Martin Keil, Bultmann). 그러나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 될 수 없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는 말이 암시해 주듯 당시 나사렛은 천한 지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롱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대망의 메시야였으며 그 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권세를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베푸심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걸으라 - '페리파테이'(*)란 말은 시작과 계속의 개념을 가진 현재 명령형으로서 '걷기 시작하라. 그리고 지금부터 계속 걸으라'는 뜻이다. 이 명령은 주님이 뜻을 선포하는 말씀이므로 놀라운 권능을 동반하는 권위있는 선언이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이 말을 믿었다는 문자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도의 말에 항변(抗辯) 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순응한 것을 보아 그가 베드로의 권위있는 명령을 듣고 믿었음알수 있다. 따라서 사도의 이 명령과 함께 성령의 크신 역사가 순간적으로 불쌍한 걸인에게 임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이 '걸으라'는 명령과 함께 성령이 얼어붙은 영혼을 혼들어 놓았던 것이다. 40년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다.

성 경: [행3:7]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신유(神癒)를 베푸는 자의 신비한 능력을 치유받는 환자에게 전달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손수 불구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걸인의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믿음을 더욱 복돋아 주기 위하여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 된다(John Joseph H. Mayfield).

⭕ 발과 발목이 - 앉은뱅이가 치유될 때의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특수한 단어들은 한결같이 의학적 성격을 띤 용어들로서 그의 전직이 의사였음을 여실히 드러낸다(Kowling). '발'의 헬라어 '바세이스'(*)는 '발바닥' 또는 '발꿈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발목'의 헬라어 '스퓌드라'(*)는 ' 복사뼈'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두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 의학적 용어이다(Henry Alford).

⭕ 곧 힘을 얻고 - 이것은 앉은뱅이가 걷지 못한 근본 이유가 발과 발목에 힘이 없었기 때문임을 말함과 동시에 이제 당장 발과 발목에 기이한 힘이 생겨 정상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그리고 일순간에 앉은뱅이가 치유받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반 법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성 경: [행3:8]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뛰어 서서 걸으며 - 본 구절에 대한 헬라어 '여살로메노스 에스테 카이 페리에파테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는 뛰어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완료 시제를 사용한것은 사도가 그에게 명령한 그대로 일어나 걷고 뛰기 시작했으며 또한 계속해서 걸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는 (1)베드로의 말이 허풍(虛風)을 떠는 빈 발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실재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의 놀라움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나아가 이 기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사35:6)라는 메시야의 시대가 실제로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적(sign)이 된 것이다. (3)40여년 동안 불구의 앉은뱅이 신세로 침상을 떠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 고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기쁨을 기운차게 표시한 것이다.

⭕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 앉은뱅이였던 그가 꿈만 같은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입어 걷게 되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맨처음 들어간 곳은 성전이었다. 이는 자신의 치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여기서 '뛰기도'(leaping up)의 헬라어 '할레스다이(*) 뛰어 오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모습으로 마치 놀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다녔다는 뜻이다. 또는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힌 새가 풀려나 창공을 날아가듯이, 혹은 개집에 매여 있던 개가 풀려나 사방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듯이 신바람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시 100:4)라는 시인의 노래는 새롭게 얻은 몸으로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하여 사도의 뒤를 따라 성전에 들어가는 이 사람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 하나님을 찬미하니 - 동전 몇 닢을 구걸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치료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으니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미함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이렇듯 찬송은 은혜를 입은 자가 마음에서부터 드리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고 입술의 제사임을 본다(히 13:15).

성 경: [행3:9]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모든 백성이... 보고 - 기적은 그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앉은뱅이였던 자가 걷고 뛰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획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 앉은뱅이 걸인은 수 년 동안의 구걸로 인해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원(身元)이나 치유 사실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성 경: [행3:10]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기이히 여기며'의 헬라어는 '담보스'(*)로 어떤 행위를 보고 감정적인 면에서 느끼게 되는 탄복이나 충격적인 놀라움 또는 거룩한 두려움등을 말한다. 그리고 '놀라니라'의 '에크스타시스'(*)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접했을 때 정상적인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진 상태를 말한다(막 1:27 ;10:24, 32; 14:33; 16:5,6; 눅 4:36). 이처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정신을 차릴 수없을 정도로 심히 놀라게 하는 것은 기적의 결과로 나타나는 첫단계의 모습으로서 기적 자체가 갖는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와같은 놀라움의 반응이 그 이적을 일으키신 분께 대한 믿음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서, 그 이적이 시사하는 바인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서도 단지 그 이적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다(출4:2-9; 요 11:40- 42 ;롬 15:18, 19)

성 경: [행3:11]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 나온 사람이... 붙잡으니 - '붙잡으니'의 헬라어 '크라툰토스'(*)는 어깨에 매달렸다는 뜻이며 이는 (1)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2)사도를 향한 애착과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고 (3)사도들이 자기를 그냥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동이다.

⭕ 솔로몬의 행각이라... 모이거늘 - 솔로몬 행각은 (1)성전 바깥 뜰 동편 끝에 있는 기다란 집채 곧 회랑(回廊)으로 교사들이 자유롭게 강론하던 곳이었다. (2)대중 집회를 할 만한 장소로서 초대 교인들이 이곳에서 자주 집회를 가졌음을 알 수있다(5:12). (3)예수께서 이곳에서 설교하신 일도 있었다(요 10:23). 아무튼 기적으로 인하여 많은 군중이 사도들 주위에 몰려들었다는 것은 기적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있지 않고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을 베풀어 주신 분에 대해 중거케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보게 한다. 왜냐하면 기적 때문에 크게 놀라서 모인 군중들은 이제 하나님 나라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생생하게 듣게 되었기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클레이(Barclay)는, '기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모이게 하기 위해서 종을 치는 것과 같은 역활을 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성 경: [행3:12]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 백성에게 말하되 - 걸인이 고침받게 된 기적은 (1)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2) 그들을 사도들 앞에 모이게 했고 (3)이제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서 '말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페크리나토'(*))는 어떤 일에 대한 답변으로 경위(經緯)를 설명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기이한 일을 보고서 그 일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본절 이하는 2:14에 나타난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에 이어 두번째 설교로서 본절은 그 서론에 해당한다.

⭕ 이스라엘사람들아 - 설교를 듣는 대상을 호칭하는 표현으로서 의미 심장하고 중대한 선포를 할 때 베드로가 자주 쓰는 표현이며(1 :16; 2: 14, 22) 그들이 율법과 약속을 받은 선민임을 상기시킨다.

⭕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기이히 여긴다'는 말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그리고 '주목하다'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4절 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사람들의 잘못된 관심을 책망하면서 설교의 서론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질문이다. 즉 (1)사도 자신들의 어떤 특별한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며 그러므로 자기들을 눈여겨 보지 말라는것이다. (2)과거에 하나님의 수많은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왜 이 일을 기이히 여기느냐는 것이다. 이는 곧 그 이적의 동인(動因)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3)결국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표현이다. 자기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인 도구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믿음이 좋고 대단한 영력(靈力)이 있어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은근히 자신을 강조하여 모든 존경과 영광을 다 받으며 기적과 그로 인해 모든 군중들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종교적 영웅주의자들, 즉 거짓 선지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인기주의로 자기를 나타내는 일에는 흥미가 없는 사도들은 오직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또한 그로 인해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하여 이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할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것이 기적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절에서 사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목도한다.

성 경: [행3:13]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이는 본래 출애굽기에서 최초로 사용된 표현이며(출 3:16, 15; 4:5) 이 표현을 사용한 의도는25, 26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이 말은 유대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는 실감을 가지게하는 표현이며 이 같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마 22:32; 막 12:36). 더 나아가 자신들이 율법과 예언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종교를 말하고 있는것 이 아니라 구약의 바탕 위에서 구약의 완성자이신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여기서 '종'을 나타내는 헬라어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휘오스'(*)가 아니라 '파이스'(*)이다. 따라서 이 종의 의미는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난의 종을 말한다(사 42:1-9; 49:1-13; 53:1-12).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구속자로 오셔서 세상로부터 배척과 수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의 항변도 없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즉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예수의 낮아지신 신분과그 직무를 말한 것이다(2:7). 예수와 종을 직접 함께 언급한 곳은4:27,30 등이며, 고난받은 종에 관한 암시적 언급은 8:32, 33; 막 10:45; 14:24; 벧전 2:22-24등에도 나온다. 그린데 이 종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이제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롭게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 두 견해로 엇갈린다. (1) 예수에 의해 일어난 기적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영화릅게 되셨다(Haencgen). (2) '에돝사센'(*) 은 부정 과거로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그가 종으로서 죽었지만 하나님이 3일 만에 부활시키고 승천케 하셔서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히기까기 그를 높이신 사실을 말한다(F. F. Bruce, Lenski).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왜냐하면 이로써 베드로는 예수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구약성경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어서 유대인들의 죄악을, 즉 그들이 이 예수를 어떻게 배척했는가를 담대하게 지적한다.

⭕ 넘겨주고 - 이의 헬라어 '파레도카테' (*)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로마인, 즉 이방 통치자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던 것을 말한다(사 53 :12).

⭕ 부인하였으니 - 이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함을 발견하고 놓아주고자 했으나 저희가 바라바를 택하고 예수를 부인하여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눅 23:13-23). 사도는 그들의 죄를 깨우치기 위해 통렬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죄의 무서움과 심각성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비 앞에 두손 들고 나올수 있기 때문이다.

성 경: [행3:14]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 거룩하고 의로운자 - 사도는 계속하여 예가 어떤 분이었던가를 증거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흉악했던가를 대조용법을 통해서 신랄하게 지적한다. 여기서 '거룩한자'(*, 호 하기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막 1:24; 눅 1 :35; 요일 2:20). 그리고 '의로운 자'(*, 호 디카이오스)란 모든 블의에서 완전히 떠나서 절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뜻이다(7:52; 22:14; 사 53:11; 렘 33:15; 요일 2: 1). 따라서 '거룩하고 의로운 자'란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야의 칭호이다.

⭕ 살인한 사람(*, 안드라 포네아). - 이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와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그들의 사악한 성격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이 사람은 바라바를 가리킨다. 그는, 유월절 사면(赦免)의 관례에 따라 총독 빌라도가 예수와 바라바 둘 중 하나를 석방해 주겠다고 유대인에게 제의했을 때 유대인들의 선택에 의해 풀려난 죄수였다(마 27 :15-16). 이 사람에 대해서(1)마27:16에는 유명한 죄수로, (2) 막15:7에는 민란(民亂) 중에 살인하여 포박된 자들 중 하나로, (3)요18:40에는 강도로 각각 언급되어 있다.

성 경: [행3:15]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 생명의 주 - 본절은 베드로 설교의 절정으로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께 집중시키고 있다. '생명의 주'의 헬라어 '호 아르케고스 테스 조에스'(*)란 '생명을 주관하는자', '생명의 근원', '구원의 원천' 등을 뜻하는 말로서 살인자 바라바와 절대적으로 대조됨과 동시에 그들이 저지른 죄의 극악성을 계속하며 강조한다(요 5:26; 10:28; 14:6).

⭕ 죽였도다 - 살인자는 놓아주고 오혀려 생명의 주는 죽였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인가 ! 특히 원문상으로는 '너희들이'라는 '휘메이스'(*)를 강조하여(14절) 그들의 죄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공격하고 있다. 즉 '너희들이 예수를 죽인 죄인들이요 살인자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오순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워 숨어 지내던 비겁한 사도들의 이 담대한 증거를 보라!

⭕ 하나님이... 살리셨으니 - 유대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으니 이는 (1)유대인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와 그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이며 (2) 예수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표었다. 따라서 구약에서 부터 예언된 메시야임을 온 천하에 선포한것이다. (요 16: 20; 롬 1:4). (3)죄의 세력과 그로 인한 모든 결과들에 대한 승리, 즉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므로 예수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신 생명의 주이심을 입증하신 것이다. (4)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표이다(빌 2:5 - 11).

⭕ 우리가 이일에 증인이로라 - 사도들의 담대한 증거와 무엇보다도 사도들 곁에 온전한 사람으로 서 있는 고침받은 그 사람이 부인할수 없는 생생한 증인이 된것이다. 따라서 그 기적 사건은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했다(부활)는 표가 될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지금 증거하는 그 내용이 참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증인'의 헬라어 '마르튀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술해야 함을 강조하는 법정적(法廷的)술어이다.

성 경: [행3:16]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 그 이름을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암아난 믿음이 - 이제까지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한 사도는 이제 결론적으로 앉은뱅이가 고침받게 된 그 능력의 근원을 대구법으로 표현된 삼중적 묘사로서 엄숙하게 되풀이해서 강조하고있다. 사도는 이 표현에서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가? (1)자신들이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밝히고 있다(12절). (2) 그 이름(*, 토 오노마)곧 저희들이 죽인 그 예수께서 지금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살아나셔서 이 사람을 낫게 했다는 선언이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자신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하늘에 앉으셔서 지금도 살아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의 계속성을 진술한 말이다. (3)예수께서 하늘에서 계속 역사하시되 성도들의 믿음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을 말한다. 즉 그의 몸된 교회와 지체된 믿는 자를 통하여 친히 능력을 베푸시는 것을 아울러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믿으므로'는 헬라어 '에피'(*)를 써서 믿음의 기초 위에서 역사함을 말했으며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에서의 믿음은 '디아'(*)를 써서 그 믿음이 예수를 통하여 얻어지는 믿음임을 말했다. 따라서 이는 믿음의 근원적 출처 또한 주님이라는 사실, 즉 믿는 자를 통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하겠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고침을 받게 했다는 것과, 예수께서 낫게 하셨다는 말은 서로 상충되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말한 믿음이 누구의 믿음을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앉은뱅이의 믿음을 말한다(Stanley D. Toussaint). (2)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이다(Meyer, Lenski, Matthew Henry) (3)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이다(Lighfoot, Cavin). 이 중 한 견해만 배타적으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치유 사건에는 먼저 두 사도의 믿음이 주도적으로 작용했으며, 이 앉은뱅이가 치유받은 후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보아 그의 믿음 또한 전혀 배제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성 경: [행3:17]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 형제들아 - 1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죄를 날카롭고도 준엄하게 꾸짖던 사도는 이제 '형제들아'라고 부드러운 어조로 따뜻하게 부르면서 간절한 권면의 성격을 띤 호소를 함으로써 그의 설교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고 있다.

⭕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죄에 대해 핑계댈 수 없도록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무섭게 지적한 사도는 이제 상처를 싸매주는 위로를 한다. 즉 청중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죄의 정상(情狀)을 참작하는 말을 하면서 격려한다. 저들이 조금도 용서받을 길이 없음을 알고 자기들의 죄에 대한 형벌의 두려움만 생각하여 짐짓 절망해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단 그들의 범죄의 원인을 무지 때문이었다고 진단해 준 것이다(눅 23:34; 딤전 1:13; 벧전 1: 14).

⭕ 너희 관원들도 - 13, 14절에서 일반 대중의 우매 무지(愚昧無知)한 죄를 낱낱이 지적한 사도는 이제 관원들,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한다. 예수께 대한 지독한 시기심으로 백성을 충돌질하고 선동한 이들의 죄는 훨씬 더 컸다(마 27:18).

성 경: [행3:18]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 그러나 하나님이...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 일반 대중과 관원들의 죄를 빠뜨리지 않고 추적한 사도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고 들추어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러나'(*, 데)라는 강조 접속사를 사용하여 이 모든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라는 측면을 증거한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예언된 바,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 친히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경론이 이루어지리라는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무지 속에서 저지른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게 했다. 그 계획이란 다름아니라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바메시야의 수난에 관한 것이다(2:23; 17:3; 26:22, 23). 구약성경에 메시야가 고난 당하리라는 사실이 직접 언급된 적은 없다. 다만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사53장)또 메시야의 고난에 관한 예표론적 예언이 선지서와 시편에 등장한다(시22, 69편; 렘 11:19; 단 9:26; 슥 13 :7).

성 경: [행3:19]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 회개하고 돌이켜 - 눅 13: 1-19 주제강해 '회개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행3:20]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수를 보내시리니 -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메시야가 되시기로 정해졌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본절은, 재림하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야로 오셔서 그 사역을 완수하신 바로 그분임음 가르친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 시대의 도래는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성 경: [행3:21]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 만유를 회복하실 때 -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의 입을 빌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고 부패하게 된 이 세상을 여인의 후손을 통해 회복하리라고 예언하셨다(창 3:15). 여기서 회복이란 '아포카타스타세오스'(*)로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땅에서 모든 죄와 불의를 제거함(고전 15: 24 - 28). (2)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그 지으신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상태에 이르게 함(엡 1:10). (3)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 복스러운 상태(계21:1)로 만듦. 이 회복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이미 시작되었으며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온건히 완성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만물도 그리스도의 두번째 나타나심을 고대하는 것이다(롬 8:19 -21).

성 경: [행3:24]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 베드로가 소개하는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등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참다운 지도자로 추앙(推仰)했던 조상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첩경은 이 믿음의 조상들과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밝히는 것임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세와 사무엘 및 그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처럼 선지자 사무엘이 정확하게 예수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예언을 한 사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고 그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을 남겼다(삼상 13:14; 15:28; 16:13; 28:17). 그리고 다윗 왕국에 관련된 그의예언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궁극적 성취를 보게 되었다. 또한 삼하7:12-16에 기록되고 있는 다윗 자손에 관한 나단 선지자의 예언은 메시야와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그 예언이 예수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3:22, 23, 34; 히 1:5)

성 경: [행3:25]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 너희는... 언약의 자손이라 - '너희"에 해당하는 '휘메이스'(*)가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제 바로 '너희'가 그 약속의 유업을 받을 자녀들로서 그 언약의 후계자, 상속자로 택함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 아브라함에게...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그 후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으며 또한 그 후손을 통해 지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2: 3; 18:18; 22:18; 26:4; 갈 3:8).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를 메시야로 위임한 것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동일시하고 있다(창 12:1-3). 따라서 여기서 '씨'의 헬라어 '스페르마'(*)는 갈 3:16에서 설명되었듯이,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즉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씨로서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주려고 왔다는 의미이다(롬10:15; 딤전 1:11).

성 경: [행3:26]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 헬라어 성경에서는 "너희에게 먼저'라는 뜻의 '휘민 프로톤'(*)이란 말이 문장 처음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순서가 첫째는 유대인이었고 그리고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롬 1:16)) 유대인들은 본문의 진술대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요, 씨를 가진 자손들이었기에 구원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는 이 큰 축복과 특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롬 1:16; 2:10; 11:1).

⭕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께서 종을 먼저 보내신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즉 19절의 반복으로 각인이 회개하여 악함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사도의 간절한 설교는 끝을 맺는다(겔 3:19; 18:27; 33:14; 욘3:10).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했기 때문이다. 본장의 주석을 마감하면서 한 가지 분명히 밝힐 것은 본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앉은뱅이가 고침받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앉은뱅이의 치유 기적 자체만 강조하여 논한다면 우리는 나무는 보고 정녕 숲은 못보는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진 자가 되고 말것이다. 왜나하면 기적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표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그 기적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의 전(全)구속 경륜(求續經綸)을 설명하면서 증거한 베드로의 훌륭한 설교에 초점이 모아짐이 마땅하다.

성 경: [행4:1]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

⭕ 사도들이... 말할 때에 - '말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랄룬톤'(*)은 부사적 분사 용법의 형태로서 '그들이 아직도 말하고 있는데'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동안에 성전 가운데서 사태가 급변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 누가는 뵨음 전파에 대한 최초의 반대 셰력이 누구였던가를 밝히고 있다.

⭕ 제사장들 - '호이 히에레이스'(*)라고 표현된 그들은 산헤드린에 속한 권력자들로서 성전에서 모든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 예배를 맡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시 종교 체제로부터 아무런 합법적 권위도 받지 않은 자들이 성전에서 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며, 복음에 대하여 언제나 적대자 노릇을 하였다(마 26:3, 4). 이때도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자 나타난 것이다. 당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 정부와의 협력하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고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것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거침없이 대적하였다.

⭕ 성전 맡은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스트라테고스 투 히에루'(*)는 문자적으로 '성전의 장'(Captain of the temple)이란 뜻이며 성전 수비대(守備隊)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어떤 학자는 성전 맡은 자는 안토니아 성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의 장교였다고 한다(Lightfoot). 그러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제사장 가운데서 임명된 사두개파 출신이 맡고 있었다(5:24, 26)고 하며 어떤 학자는 성전수비대가 레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Lenski). 렌스키의 견해를 따르면, 그 우두머리인 '성전 맡은 자'도 레위인이었을 것이고, 이는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사두개파 출신인 래위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로마 정부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성전 맡은 자'(수비대장)는 대제사장 다음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Schuerer Bruce), 누가복음에서는 복수인 '스트라테고이(*)가 사용되었다(눅 22:4, 52).

⭕ 사두개인들 - 하스몬 왕가의 후예들이었다. 하스몬 왕가의 사람들은 맛다디아와 유다와 요나단및 시므온(B.C. 168-134)을 메시야 시대의 개척자들로 보아왔으며, 그 열조들이 시작했던 바를 자신들이 이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레위 지파 출신의 제사장들을 포함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서 고대의 정통성을 주장하였고,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는 종교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세속적이고 현세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에 대한 발전적인 견해나 천사나 마귀에 대한 사색적(思索的)인 고찰 또는 부활 교회에 대한 것들은 반대했다(23:8;막 12:18-27). 그리고 그들은 나라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간섭을 바라는 것과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대하는것은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를 배척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시대가 이미 마카비 시대의 영웅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 시대는 자기들의 감독하에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란 하나의 이상(idea)이었을 뿐이며 어떤인격적 존재 자체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지배적인 지주들로서 마카비 통치 시대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이양받았던 자들이었고, 또한 실세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와의 협력과 현상 유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사두개인적인 관념을 갖고있었다. 따라서 성전을 지키는 경비력은 완전히 레위 지파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의 강세로 인해 대제사장이나 성전 수비대장은 언제나 고위 직급의 사두개인이 맡고 있었다.

⭕ 이르러 - '에페스테산'(*)로 표현된 이 말은 어떤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여 적의에 찬 마음을 가지고 급작스럽게 몰려왔다는 것을 뜻한다. 외견상으로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매우 종교적인 것이었고 악하였다(눅 20:1;24:4).

성 경: [행4:2]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

⭕ 백성을 가르침과...싫어하여 - '싫어하여'에 해당하는 혤라어 '디아포누메노이'(*)는 '심히 격노하고 크게 불안해 하였다'는 뜻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1) 사도들이 자기들의 교리와는 반대되는 혁신적인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적이었다. (1) 부활 교리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했다고 했는데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예수'(*)는 '예수 안에서', '예수에 의해서', '예수를 기초로 하여'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그의 잔에서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증거는 부활을 믿지않는 사두개인들과 예수를 계획적으로 죽인 제사장들에게 도전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성 경: [행4:3]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

⭕ 저희를 잡으매 -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범죄한 사람에 대해서는 형을 집행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성전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등의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형까지 언도할 수 있었다.

⭕ 날이 이미 저문 고로 - 당시 랍비의 법에는 해가 지면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을 못하게 되어있었다. 그런고로 의회가 모일 수 없었고 어떤 송사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回附)하지 않고 감금시켜 놓은 것이다.

성 경: [행4:4]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

⭕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는 '남자'의 헬라어 '안드론'(*, '남자들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엄격히 말해서 여자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때 개심한 사람 가운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남자의 수만을 가리킨다(Mayer, Lenski, Robertson, Bruce, McGarvey). (2) 여자를 포함하여 개종한 모든 사람의 수로 생각한다(Spence, Hekiett). 이 가운데 (1)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남자'(*, 아네르)라는 표현은 '사람'(*, 안드로포스)과는 달리 여자를 제외한 남자의 경우에만 한정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마 14:21). 둘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천명이 되었더라'는 숫자에 대한 것인데, 그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바로 그때 믿게 된 수효를 가리킨다(Jerome). (2) 지금까지 믿게 된 예루살렘 신자들의 총수라 본다(Lenski, Joseph H. Mayfield). 여기서 (2)의 견해를 택하는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것은 '되었더라'의 원어 '에게네데'(*)가 부정 과거로서 단지 역사적인 사실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2:41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날 믿은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했는데 거기서 '더하더라'를 가리키는 헬라어 '프로세테데산'(*)은 미완료 동사로서 베드로의 설교 결과로서 일어나는 어떤 과정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삼천 명의 군중이 반드시 한꺼번에 믿었다고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본절의 오천 명이란 숫자도 2:41에 나타난 삼천 명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예루살렘 신자의 총수라고 보는 견해가 더 자연스럽다(6:7;16:5). 아무튼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박해 속에서도 게속 확장(擴張)되어가는 복음의 능력이다.

성 경: [행4:5]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베드로의 지혜로운 변증]

⭕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모였는데 -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킨다(23:14;막 14:53;눅 22:2). 산헤드린 공회는 그 당시 나라의 원로원이자 최고 법원으로서 극형을 제외한 모든 사건에 대하여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 관원(*, 아르콘타스) - 이 말은 종종 대제사장이란 용어와 동의어로 쓰인다(23:5).

⭕ 장로들(*, 프레스뷔테루스) - 장로들은 모세가 백성의 재판 처리를 위해 '덕과 경험을 지닌 자'를 세운데서 시작된 족속의 우두머리들로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여 의사 결정을 하던 집단이었다(출 3:16;4:29;민 11:16, 17).

⭕ 서기관들(*, 그람마테이스) -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율법 교사들로서 율법과 구약성경을 해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산헤드린 공회에 대한 자세한 것은 4:5-22 주제 강해 '산헤드린 공회'를 참조하라.

성 경: [행4:6]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베드로의 지혜로운 변증]

⭕ 대제사장 안나스 - 예수를 정죄하기 위한 재판 회부에 개입하였던 퇴임 원로이다. A.D. 7-15년까지 9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나 그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배후(背後)에서 실제적인 세력을 행사했던 인물로 나타난다(요 18:13-24).

⭕ 가야바 - 안나스의 사위로서 A.D. 18-36년까지 18년 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이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실제적인 직무는 가야바에 의해 수행되었다.

⭕ 요한과 알렉산더 -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으나 서방 본문이 제시해 주는 바에 의하면, 요한은 기원후 36년에 가야바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직에 오른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이라고 추측된다.

⭕ 대제사장의 문중 - 사두개인의 가문으로 초기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주동하였다. 대제사장의 가문이 여기에 언급된 것은 산헤드린공회에서 그들이 의사 결정권을 어느 정도 행사할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4:7]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베드로의 지혜로운 변증]

⭕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재판 모습을 보여준다. 긴 옷을 입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높은 단상 위에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앉았고, 피고는 낮은 마루 바닥위에 서서 심문을 받는 형태이다. 이것은 법정의 외적인 분위기로도 피고를 압도(壓倒)하려는 것임을 보여준다.

⭕ 너희가(*, 휘메이스) - 이말은 헬라어 문장에서는 맨 끝에 나온다. 그뜻은 '너희 같은 백성'(people like you)으로서 무지하고 멸시받는 계층을 가리키는 경멸조의 표현이다.

⭕ 무슨 권세 - '어떤 종류의 능력이냐'는 뜻으로서 사도들이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통한 악령의 힘을 사용하여 이적을 행한 것(신 13:1-4)이라는 저의를 그들이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질문은 종교적으로 위법인 것을 암시하는 유도성을 가지고 있다.

⭕ 뉘 이름으로 - 어떤 사람의 권위를 배경으로 위법을 행하고 있는지 심문하고 있다. 산헤드린에 있어서 예수의 이름은 지독히 불경스러운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이것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사도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계략이었다. 만일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단 사실을 퍼뜨리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하려는 악한 속셈을 가지고 간교한 질문을 한 것이다. 이들이 문제삼은 것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낫게된 사실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 일을 행했던 방법과 수단이 무엇이었느냐는 점이었다. 그 일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일을 행한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시비하며 파헤치는 것은 시기심이 가득한 교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일찍이 예수께서도 대제사장들로부터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았으나 그들의 간계를 미리 아시고 지혜릅게 대처한 바 있었다(마 21:23-27). 본절에서도 대적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도들을 처치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애매한 질문 공세를 폈다. 그러나 사도들은 심문당하는 자로서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터무니없는 속셈을 은근히 책망함과 아울러(9절) 이를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다(10-12 절).

성 경: [행4:8]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베드로의 지혜로운 변증]

⭕ 성령이 충만하여 -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특별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다(마 10:9-20). '충만하여'를 가리키는 '플레스데이스'(*)는 특별한 순간의 영감을 가리키는 부정과거 수동태의 용법이다.

⭕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 이것은 당시의 권세자들을 인정하며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 충만은 이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예의를 깨뜨리지 않고 위협적인 재판정에서라도 담대한 증거를 시작하게 하였다. 이 양자를 다 갖추기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행4:9]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베드로의 지혜로운 변증]

⭕ 착한 일에 대하여...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 그들의 지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분명하고 단호하게 질문의 주지(主旨)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되묻는 베드로의 담대함을 본다. 여기서 '착한 일'로 번역된 혤라어 '유에르게시아'(*)는 '친절하고 선한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 표현 속에 사도가 행했던일에 대한 변호가 포함되어 있고, '착한 일에 대하여' 심문하는 자들이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행4:10]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베드로의 지혜로운 변증]

⭕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너희 앞에 섰느니라 - 사도는 여기서 거부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 다섯 가지를 증거한다. (1) 너희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중대한 사실을 선포할 때마다 자주 쓰는 권위있는 명령형이다. 그 대상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증거하는 내용의 중대성과 사실성을 암시한다. (2)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 사도는 여기서 '너희가' 그런 일을 행한 죄인들이라고 지적하고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그들이 바로 죄인이라는것이다. 산헤드린은 모든 흉한 책략으로 저질렀던 만행을 은닉하려고 하지만, 사도는 그들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폭로하며 힐책하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너회'가 죄인 취급하여 죽였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이 증거야말로 부활을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의 큰 반발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의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담대히 확신에 차서 중거하였다.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케 된 것을 증거했다. 이것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7절)는 산헤드린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그예수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이 능력을 베푸셨다는 것이니 저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드는 선포가 아닐 수 없다. (5) 건강하게 되어 너희앞에 섰느니라. 이상의 변론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 '섰느니라'의 헬라어 '파레스테켄'(*)은 현재 완료 능동태로서 '계속 서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도들 옆에 서 있는 고침받은 자의 생생한 모습 때문에 저들은 힐책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상의 증언을 통해 사도의 증언에는 위대한 복음 진리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본다(2:14-36;3:15,16).

성 경: [행4:11]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베드로의 지혜로운 변증]

⭕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이것은 시 118:22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전에 예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21:42;막 12:10;눅 20:17). 즉 건축자들에게는 쓸데없다고 버림받은 돌과 같이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사 자기 우편에 두시고, 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셈이다.

성 경: [행4:12]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베드로의 지혜로운 변증]

⭕ 다른 이로서는...주신일이 없음이니라 - 사도는 이제 예수 외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 역시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구원 얻을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니 사도의 증거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이 구절은 불변의 진리로서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제시향다. (1)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 무이한 구세주이시다는 사실이다. 예수 외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의롭고 거룩한 신인(神人)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셔서 살아계시는,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야이심을 사도는 친히 목격하고 확신했던것이다. (2) 여기서 '구원'의 헬라어 '헤 소테리아'(*)는 단순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친 것과 같은 육적 구원 뿐만 아니라 죄와그 세력 그리고 죄의 형벌인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즉 메시야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

성 경: [행4:13]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기탄없이 말함 - 헬라어로 이 말은 '모든'을 의미하는 '판'(*)과 '연설'을 뜻하는 '레시아'(*)의 합성어인 '파르레시안'(*)으로서 '모두 남김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하였다'는 뜻이다. 사도는 그태도와 말에 있어서 확신에 차서 이처럼 기탄없이 예수를 증거하였다. 공회원들은, 죄인으로 서 있으면서도 자신있게 변론하는 사도의 태도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 학문 없는 범인 - 이는 랍비들의 학교에서 전문적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을 의미한다.

성 경: [행4:14]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 이 말은 그들이 사도의 증거에 대하여 반박할 만한 아무런 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13절과 본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던 사도들이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2) 예수와 함께 있던 예수의 제자들임을 알았기 매문이다. (3) 무엇보다도 이전에 앉은뱅이였던 자가 사도가 말한 것들에 대한 산 증거로서 그들의 목전에 당당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그들이 궁지에 몰려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예수께서 하신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면박할 수 없는 구제와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는 약속이 성취된 것이며 주께서 살아 계셔서 복음을 전하는 그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준다(마 28:18-20).

성 경: [행4:15]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 '공회'(*, 쉬네드리온)는 그 재판과 심문이 진행되었던 법정을 말한다. 공회원들은 사도의 변증에 대해 답변할 마땅한 고소거리를 찾지 못하여 그들끼리 의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밖으로 나가도록 명하였다.

⭕ 서로 의논하여 - 공회가 심문하려 했던 피고들이 대담하고 확신에 차서 자신들의 무죄를 변론하고 증거를 내세우자, 이제 피고를 회의실에서 내보낸 후 심의(審議)에 들어간 모습이다. '의논하여'에 해당하는 혤라어 '쉬네발론'(*)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이다. 따라서 공회원들이 주도적으로 회의를 따로 소집하여 계속해서 의논을 거듭했음을 보여준다. 즉 배심원들의 논리와 결정을 거쳐 판결을 내리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성 경: [행4:16]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유명한 표적...우리도 부인해 수 없는지라 - 그들이 곤경에 처하게 된 이유를 말해준다. '유명한 표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스톤 세메이온'(*)은 '알려진 표적'이란 뜻으로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고침받은 사건을 말한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 경: [행4:17]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이것이 민간에...저희를 위협하여...말하지 말게 하지 - 사도들의 변론은 이미 잘 알려진 증거가 있었으므로, 결국 법적으로 심문할 근거를 찾지 못한 그들이 택한 결정은 사도들을 위협하여 더이상 아무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못한 것은 백성의 여른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민심의 동향에 민감하다. 예수께서 유일한 구주라는 것과 친히 살아 계심을 부인할 수 없도록 증거가 보여졌고,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의해서 그런 예수를 죽인 죄가 그들에게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정은 자기들의 교세만을 고수하고자 하는 부당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그 양심이 마비되었는가를 시사해 준다.

성 경: [행4:18]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가르치지도 말라 -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오직 자기들의 교권(敎權)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을 볼 수 있다.

성 경: [행4:19]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하나님 앞에서...옳은가 판단하라 -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공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도들의 단호한 태도는 실로 대담한 도전이다.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용기가 생긴 근거를 살펴보면, (1)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가 일으킴을 받는 표적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확인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이처럼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믿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다(히 11:38). (2) '하나님 앞에서'(*, 에노피온 투 데우)라는 사도들의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항상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다는 신전 의식에서 나온것이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확신하며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이 사도들에게 용기를 준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재해 계시는 앞에서 과연 너희 말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보라고 한 것이다. '판단하다'의 헬라어 '크리노'(*)는 '분석하고 분별해 보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양심에 호소하며, 그들이 '의'(*, 디카이온)를 떠나 불의하게 판결을 내리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성 경: [행4:20]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우리는...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 타협할 수 없는 사도들의 확고 부동한 입장을 공회앞에 재천명하는 이 구절은 원어상으로 보면 두가지 강조 어법이 돋보인다. (1) 이중 부정으로 강력한 긍정을 표현하는 어법을 사용함으로 반드시 말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시했다. (2) 동사와 주어를 뒤바꾸어 쓰면서, 지시대명사인 '우리는'(*, 헤메이스)을 사용하여 '우리'에 강조점을 두었다. 즉 목격자로서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이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도들은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할 때 자신들이 보고 듣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편을 택했다. 이것은 생명을 건 각오를 한 것이다.

성 경: [행4:21]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다시 위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 공회원들은 의회의 결정이 피고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거부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들은 속수 무책이되자 고작 우격다짐식으로 협박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들이 '벌할 도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사도들을 징벌할 방도가 도무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그래서 저들이 택한 것은 다시 위협하는 일뿐이었다. '다시 위협하였다'(*, 프로사페일레오)는 것은 '더욱더 위협하였다'는 의미인데, 공회의 일차경고가 무시되었기 때문에 재차 가중한 위협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공회가 이런 방법을 택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누가가 밝힌대로 '백성을 인하여'이다. 이는 기적이 가져온 효과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이 행한 표적을 목격한 군중들의 열기는 대단했으니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공회는 사도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과 백성의 반응 사이에서 전전긍긍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고 환심(歡心)을 사기 위해 늘 애쓰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회는 어쩔수 없이 사도들을 다시 위협하여 석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회원들은 하나님과 진리보다는 자기들의 교권 유지를위해 대중을 더 무서워하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성 경: [행4:22]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석방된 베드로와 요한]

⭕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 누가는 고침받은 앉은뱅이의 연령을 '사십 세이상'(*, 플레이오온 텟세라콘타)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고침받은 자가 날 때부터 만성적인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3:1)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앉은뱅이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도 못하다가 전혀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적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모든백성은 놀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성 경: [행4:23]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그 동류에게 가서 - 여기서 동류란 다른 사도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 전파를 통해 더하여진 그 이외의 제자들을 포함하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 무리가 오천 명이나 되는 믿는 자(4:4) 전체라기 보다는 좀더 작은 무리였으리라는 것이다(Marshall). 또 '프로스 투스 이디우스'(*)라는 말이 '그 자신의 사람들'(요 13:1), '자기 백성'(요 1:11)등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무리'(말 3:16)등과 연관됨을 생각할 때 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신앙의 공동체요 동질적인 유대(紐帶) 아래 맺어진 교회로 볼 수 있겠다.

성 경: [행4:24]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 여기서는 기도의 방법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1) 무리가 영감을 받아 모두 한 목소리로 기도했는가? (2) 인도자의 기도를 따라서 반복했는가?(Alfold) (3) 이미 작성된 기도를 사용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확실치 않으니 '소리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넨'(*)이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점과 일반적으로 공중 기도나 대표 기도가 전 회중을 대표하는 것을 볼때 이부분은 한 사람이 대표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나머지 무리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 한 마음으로 연합되어 그기도에 동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저자 누가도 그런 의미에서 핍박으로 인한 교회의 일치된 기도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의 증거라고 강조한듯하다(Marshall, 1:14;15:25;롬 15:6).

⭕ 대주재여 - 이의 헬라어 '데스포타'(*)는 '주'(Master)라는 뜻으로 70인역에는 25회 가량 사용되었으나 신약성경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는 아마도 이 말이 갖고있는 독단적이고 무력적인 의미 때문인 듯하나, 고대 헬라인들은 '통치자'나 '왕' 또는 주종 관계에서 '주인'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강조하는 '절대 통치자'의 의미가 강하다(눅 2:29;계 6:10).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칭호는 박해의 위기에 서 있는 교회가 첫째, 하나님을 천지를 지으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통치가로 믿는 믿음을 가졌고 둘째, 그분의 통치 아래에있는 교회를 세상이 해치지 못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앙으로 그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성 경: [행4:25]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 본문은 사본상으로는 해석이 난해한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의탁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을 통하여', '-에 의해서')가 어떤 사본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필사자에 의한 실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obertson). 또한 특별히 이 말은 '입'(*, 스토마토스)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 축자 영감적인 의미를 띠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이 구절은 선지자 다윗을 통해 장차 일어날 큰 일을 예언케 하신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제자들의 확신을 보여준다.

⭕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 시 2:1의 인용으로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 말씀이다. 여기서 '열방'의 헬라어 '에드네'(*)는 복수로서 유대인들을 뺀 그 이외의 이방 나라를 의미하며, '족속'(*, 라오이)은 복수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한다. '분노하다'라는 동사의 헬라어 '에프뤼앝산'(*)은 부정과거 능동 직설법으로 '말'(horse)이 콧김을 내쉬듯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 관련된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소멸시키려는 이방인들의 꿈이 거만하고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경영하다'란 둥사의 헬라어 '에멜레테산'(*)은 '멜레테'(*, '신경쓰다')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됐으며 '실행에 옮기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성 경: [행4:26]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 군왕은 헤롯왕을, 관원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지칭하는 듯하다. 여기서 '나서며'라고 하는 '파레스테산'(*)은 '정렬하여 선'이란 뜻으로 진을 치고 대열을 지어 싸움일으킬 태세를 갖춘 상태를 말한다. 이는 '함께모여'라는 표현과 병행(竝行)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 나라를 파괴하려는 큰 흑암의 세력이 연합하여 반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 경: [행4:27]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합동하여 - 신약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 왕이 등장한다. 예수 탄생시 통치자인 헤롯 대왕(마 2:1;눅 1:5). (2)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왕위를 게승해 유대 사마리아 등의 분봉왕이었던 아켈라오(마 2:22). (3) 아켈라오뒤에 왕이 되어서 교회를 박해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던 헤롯 아그립바1세 등이다. 본문의 헤롯은 B.C. 4-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를 통치하던 분봉왕으로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헤롯 안티파스이다(마 14:3). 한편 눅 23:12에는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예수를 죽이는 데에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본절에서도 원수들간의 연합이 실제로 발생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연합은 이미 다윗의 입을 통해 예언된 바였다.

⭕ 거룩한 종 예수를 - '종'의 헬라어 '파이스'(*)는 때때로 '아들', '어린 아이'(마 2:6;눅 2:43)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주로 부자(父子) 관계에 중점을 둔 용어이다. 특히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종'을 수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종'이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눅 1:35) 종으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표현한다(사 42:1;52:13).

성 경: [행4:28]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하나님의 권능 - '권능'에 사용된 헬라어 '케이르'(*, 손)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1) 19:26에서처럼 '손으로 만들어진 신(神)'이라고 할 때의 '손'(hand)을 뜻하거나(마 12:10) (2) 주로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권능'등을 의미한다(7:50;눅 1:66). 또한 (2)에 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그들의 계획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고 하는 그의 '역사하시는 손'으로의 의미와(Hammond) 둘째는 욥 13:26에서처럼 그의 뜻과 계획을 미리 기록해 놓았다는 '기록하시는 손'으로서의 의미이다(Matthew Henry). 앞뒤의 연관된 부분들을 블 때 두번째 해석 즉, '기록하시는 손'으로서의 해석이 지지되는데 이는 누가가 이 사건을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 예정하신 - '미리 결정하다'란 뜻의 '프로오리센'(*)은 초월자로서 인생의 운명과 만물의 법칙을 제정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보여준다. 이 단어는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사용되기는 하지만, 베드로 역시 같은 사상을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2:23;벧전 1:2, 20). 이는 성경의 전체 사상이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누가는 주와 교회에대한 핍박이 오히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어 간다는것을 증언하고 있다. 본문의 제자들 역시 대적들의 악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에 대적들은 패배하고 말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Marshall).

성 경: [행4:29]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주여 이제도 - '이제도'의 헬라어 '카이 타 뉜'(*)은 '그리고 현재 발생하는 상황예 관하여'라는 의미이다. 앞에서(24-28)는 그들이 처한 악한 형편과 상황들을 하나님께 고하고 나서, 본절예서는 그들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이처럼 상황을 고하고 나서 구체적인 간구를 하는 형태의 기도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으며, 깊은 신앙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 하감하옵시고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피데'(*)는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본다'는 뜻이다. 특히 이 단어는 방해하거나 응분의 처벌을 내릴 목적으로 지켜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제자들이 당하는 위협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탁(依託)하는 것은 결국 (1)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섭리자요 감찰자이시며 (2) 교회는 그의 통치하심아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주옵시며 - 이들은 처해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그 대적들이 망하게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핍박의 상황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할편 '주옵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스'(*)는 제2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으로 '지금 즉시 주옵소서'라는 의미이며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요구할때 사용되는 표현 형태이다. 이는 결국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을 어떤 일보다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4:30]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손을 내밀어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텐 케이라 에크테이네인'(*)은 누가의 관용적 표현으로 '그 손을 펴사' 또는 '그 손을 펴심으로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내밀어'라는 동사의 주어가 인격적이어야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적당한 해석은 '당신이 당신의 손을 내밀어'가 된다. 즉이 말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과 권능으로 당신의 손을 내밀 때에 이적이 행해짐을 나타낸다.

⭕ 표적과 기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는 '하나님의 능력(손)에 의해 되어지는 모든 이적'을 뜻하는 것으로서 앞절의 '손을 내밀다'에 연결되는 종속 목적의 의미로 보는게 타당하다(Knowling, Page, Wendt). 병고침이나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모든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일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특히 '표적과 기사'라는 말에서 생각해야 할 중요점은 (1) 예수의 병고침이나 이적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메시야되심과(요 10:25)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드러났다는 점과, (2) 사도들에게 주어진 '표적과 기사'를 그들의 사도권에 대해 인정하시는 표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14:3).

성 경: [행4:31]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감사와 찬양의 기도]

⭕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 기도가 끝나자마자 즉각 일이 발생하고 있다. '진동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살류데'(*)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1)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상태(마 11:7). (2) 지진에 동반된 진동 상태(16:26). 본문은 두번째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 모인 곳이 지진이 일어날 때와같이 흔들린 것은 주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대한 표징(사 6:4)일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 성령이 충만하여 - 신약에서는 주로 세가지 의미의 '성령 충만'을 언급한다. (1) 한 사람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한 일시적인 충만(8절;13:9). (2) 스데반이나 일곱 집사처럼 그 사람의 생애를 특정짓는 영구적인 의미(6:3). (3) 엡 5:18에서와 같은 계속적인 성령 충만. 여기서 '충만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에플레스데산'(*)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1)과 같은 의미로 특별 사역을 위한 일시적 충만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해서도 담대히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행4:32]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나눔 공동체]

⭕ 믿는 무리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플레두스 톤 피스튜산톤'(*)은 문자적으로 '믿는 자들의 그 무리'라는 뜻이다. 누가는 '무리'라는 용어를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 (1) '무리' 또는 '거주민 전체'(2:6;14:1, 4). (2) 종교적 공동체(6:2). 여기서는 두번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여기서 '믿는'(*, 피스튜산톤)이라는 과거 분사를 사용해서 이 무리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뒤이어 나타나는 무리의 일치는 외적인 것에 의함이 아니요, 바로 같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공동의 신앙에 의한 것이었다.

⭕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카르디아 카이 푸쉬케 미아'(*)에서 '엔'(*)은 미완료 3인칭 단수로 나타난다. 이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각각 이기보다는 막 12:30에서처럼 전인격적인 일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하여 한 몸을 이룬 교회가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 통용하고 - '코이나'(*)는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주로 '친교', '교류', '분배'등으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특별히 재물을 소유하는 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면에서 통용(通用)했음을 시사한다. 각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공동체의 필요를 느꼈을 때 언제라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었고 동시에 하나님 은혜의 결과였다. 누가는 여기서 교회가 갖는 교제의 독특성을 가르쳐 준다. 즉 먼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그분과 거룩한 고통을 하게 되면 자연히 성도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행4:33]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나눔 공동체]

⭕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 '증거하다'의 헬라어 '아페디둔'(*)은 '돌려주다, 빚을 갚다'라는 의미이며 법적인 채무를 이행한다는 뜻이 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것은 빚진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무를 수행한 것이다(1:22). 한편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었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가 바로 '오실 메시야'였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사두개인들과 산헤드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증거했다.

성 경: [행4:34]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나눔 공동체]

⭕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태에 이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중에는 빈곤한 자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구약의 약속(신 15:4)이 초대 교회 내에서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룬테스'(*)는 현재 능동태 분사형으로 계속되는 진행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자신의 소유를 파는 행위가 교회의 궁핍한 자들이 생길 때마다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각 사람의 소유는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그것을 팔아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만 자신에게 위임되어 있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즉 자신의 소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요 따라서 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이 초대 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성 경: [행4:35]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나눔 공동체]

⭕ 사도들의 발 앞에 - '발 앞에'의 헬라어 '파라 투스 포다스'(*)의 표현법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1) 사도들이 강단 위에 앉아 있다는 표현이다(Lenski, Weststein). (2) 세상 재물에 대한 경멸의 표현이다(Henry). (3) 이는 소유물에 발을 올려 놓으므로 그 소유나 처분권(處分權)을 획득한다는 법률적 용어이다(E. Haenchen, Marshall). 여기서는 세번째 해석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또다른 직무 중 하나는 그런 재물들을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분배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행4:36]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나눔 공동체]

⭕ 바나바 - 본명은 요셉이었고 사도들로부터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는 레위인으로서 구브로에 거주했는데 당시 구브로에는 유대인들이 소수로 모여 살았다(11:29). 본절에서 누가는 '바나바'란 이름의 뜻을 '권위자'즉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로 말하고 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문자적으로 '예언자' 또는 '선지자의 아들'이란 뜻이다(고전 14:3). 바나바는 '선지자'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11:23;13:1). (2) '위로 혹은 권면의 아들'이란 뜻이다(Robertson, Mayfield). 이중 후자의 입장이 더욱 지지된다. 왜냐하면 '권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의 주된 개념은 '용기를 북돋움'(encouragemant)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9:31;13:15). 여기서 누가가 특별히 바나바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이유를 살펴보면, (1) 그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내어 놓음에 있어서 아주 뛰어난 믿음의 행위를 보였기 때문이었고 (2) 계속된 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그가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11:24)) (3)믿음을 갖게 된 첫 레위인으로서 복음에 대해 유대인이 가진 편견(偏見)의 큰 벽을 허물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 경: [행4:37]

주제1: [교회에 대한 핍박과 성장]

주제2: [나눔 공동체]

⭕ 팔아 값을 가지고 - 여기서 '값'의 헬라어 '토 크레마'(*)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복수 형태로 되어 있지 않고 단수로 되어있는 이유는 이것이 그 돈의 총액을 의미하기 때문인 듯하다.

성 경: [행6:1]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일곱 집사 임명]

⭕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 '제자'의 헬라어 '마데테스'(*)는 본서에서처음 언급되고 있다. 이 단어는 공관복음서에서 160회, 요한복음서에서 78회, 본서에서 28회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의 12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들이된 사람들까지 지칭한다.(14:21; 요 8:31). 전장에서 유다인들의 탄압에 대한 가말리엘의 변호(5:34-39)와, 채찍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증거한 사도들의 담대한 전도는 제자들의 수를 급증시켰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이 때의 신자의 수는 약20,000-25,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불과 1,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 정도로 증가되었다는 것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 헬라파 유대인...히브리파 사람 - '히브리파 사람'이란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 성장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며, '헬라파 유대인'이란 각처에서 흩어져 살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Diaspora) 출신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전자는 약간의 헬라어(Greek)를 알고 있으면서 셈어(Semitic language)를 주로 사용했다. 당시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적어도 약간의 헬라어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헬라어는 지중해 동쪽 지방의 국제 통용어(lingua franca)였기 때문이다. 이 히브리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람어(Aramaic)였다고 봄이 더 정확하다. 반면 후자는 아람어를 전혀 모르거나 약간 알고 있으면서 주로 헬라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상용어(常用語)인 헬라어로 예배드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러한 습관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도지속되었다. 이들은 히브리파 사람들보다는 혼합주의적 영향력에 더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히브리파 사람들은 헬라파 사람들보다 선민적(選民的) 배타 의식이 더 강했다.

⭕ 구제에 빠지므로...원망한대 - 당시 유대교내의 빈민 구제 사업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일정한 지역 내의 거주민들 중 극빈한 사람들에게 매주 금요일마다 열 네끼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방랑하는 낯선 빈민들에게 사발에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기독교 공동체의 구제 방식은 위의 두 가지와는 또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구제 대상이 공동체 내의 지역민들인 동시에 구제 시기는 또 매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구제를 받은 사실은 이미 유대교 사회로부터 소외당했음을 시사한다(Haenchen). 한편 헬라파 유대인들이 원망하게된 구체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다. 그들은 매일 매일의식량 배급이나 생필품 지급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보다 푸대접을 받거나 더러는 누락이 되어 불만을 표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들의 원성이 교회 안에서 높아감에 따라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에 나서게 되었다(2절). 더욱이 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상용어가 서로간에 달랐으므로 자연히 따로 모이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며 이런 와중에서 서로는 편견과 불평들을 토로했을 것이다.

성 경: [행6:2]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일곱 집사 명령]

⭕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 당시 사도들은 교회의 중심 인물로서 기독교 공동체를 지도하고 감독했었다. 이들은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임으대로 처리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회의를 소집(召集)하였고 그 회의에서 논의된 결과에 따라 그 문제를 처리하였다. 이 회의가 굳이 예수의 수석 제자인 베드로에 의해서 주재되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반드시 남자들로만 구성되거나 연령 제한이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회의는 사도들 독단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사도들은 단지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했을 뿐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 예수께서 열 두 사도에게 분부한 우선적인 사명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것이었다(마 28:19, 20). 그런데 교회 내에 구제 사업을 비롯한 행정적 일들이 날로 늘어감에 따라 사도들은 정작 주력해야 할 복음 증거 사역에 자연히 소홀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사도들은 그들이 맡은 사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교회 안의 행정 처리와 말씀 전하는 일을 이원화 시킬 것을 제안한다.

⭕ 공궤를 일삼는 것 - '일삼는'의 헬라어 '디아코네인'(*)은 전치사 '디아'(*)와 '먼지'를 뜻하는 '코니스'(*)의 합성어로서 '먼지가 일어날 만큼 분주히 움직이다', '열심히 일하다', '봉사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식사나 기타의 일 등에서 섬기는 것'(요 12:26)을 나타낼 때와 '집사로서 봉사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딤전 3:10, 13). 영어의 집사에 해당하는 단어deacon은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1절의 '구제'(*, 디아코니아)라는 말도 본 단어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되어 집사들이 교회 안에서 주로 맡은 일들이 무엇인가를 시사한다(6:1-7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 참조). 또 '공궤'의 헬라어 '트라페자이스'(*)는 '식탁'이나 '환전상의 탁자'를 의미하는데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는 함께 결합하여 특별히 교회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식량과 생활용품 등을 나누어 주는 등의 구제 사업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도들이'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하였다고 해서 '공궤'가 기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보다 저급(低級)한 일이라고 단정해 버려서는 안된다. 이는 다만 열 두 사도에게있어 '공궤' 하는 일은 그들이 주께로부터 부름받은 일(마 28:19, 20)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교회 안의 각 구성원은 저마다 주께로부터 특별히 부름받은 사명이 있는 것이다.

성 경: [행6:3]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일곱 집사 명령]

⭕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 집사 일을 맡아 볼 사람들의 자격으로서 제일 먼저 거론된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복음 전파와 교회 확장의 주요 동인(動因)이었기 때문이다(5:32; 8:39;10:19, 38, 44;11:12, 24;16:6). 따라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께서 부여하신 은사와 함께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바쳐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지혜의 충만함'은 성령 충만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혜의 충만함은 곧 성령 충만의 증거도 되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행정 및 사무 처리에 필요한 지혜를 뜻할 수도 있겠으나 보다 포괄적으로는 생활에 필요한 실천적인 지혜들까지 포함한다. 여기서 '칭찬듣는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평판이 좋은 사람', '증명된 사람'이다. 즉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을 사람은 성령 충만한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 인격 또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다. 한편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선택하는 본문의 과정은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서 여호수아를 택하여 세우는 과정과 평행이 된다(민 27:16-20).

⭕ 입곱을 택하라 - 집사의 수효를 굳이 일곱으로 정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나 다음 세 가지가 비교적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 유대인들에게 있어 7이라는 수는 성수(聖數) 또는 완전수로 여겨졌으므로 그들이 임의로 특정한 수를 택해야 할 경우에는 대개 7을 택하였다. 그래서 본문의 경우에도 그들의 생활 관례에 따라 7명의 집사를 선택했을 것이다(Lenski, Pulpit Commentary). (2) 유대의 관습상 특별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7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관습을 좇은 것같다(Marshall). (3) 유대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지역 책임자들이 7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때 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유대의 제도를 따른 것같다(Haenchen). 어떠한 견해를 따르든 본 구절을 해석하는 데는 별무리가 없으며 그 문제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7명 정도면 구제 사업을 담당하며 교회 내의 사무 및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사례를 본받아 어떤 교회에서는 항상 일곱 집사만을 선택하여 세우려 하지만 이는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적용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 집사 수를 일곱으로 고정시켜 제도화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몸된 교회를 위한 일꾼으로 또 사도들의 동역자(同役者)로 선출된 사람들이지 사도들의 보조자나 종 또는 심부름꾼으로 선출된 사람들이 아니다.

성 경: [행6:4]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일곱 집사 임명]

⭕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 여기서 평신도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의 기본적인 사역의 방향이 제시된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 안의 사무 행정 등의 문제를 담당한다면 목회자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전하는 사명을 특별히 부여하심(막 16:15)과 함께 늘 기도할것을 말씀하셨고 기도의 모형을 제시하시며 기도를 가르치셨다(마 6:9). 여기서 '기도'의 헬라어 '프로슈케'(*)는 때때로 기도라는 의미 외에 '기도회' 같은 기독교 공동체의 '공동 예배'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이 같은 의미로 사용됐는지는 모르지만, 사도들이 기도에 열심을 다하는 모습이 성도들에게 비쳤다면 당연히 성도들도 기도에 열심을 내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기도회(祈禱會)같은 모임이 자주 형성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6:5]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일곱 집사 임명]

⭕ 스데반...니골라 - 본 절에서 제시된 일곱 사람의 이름은 모두 헬라명이다. 이 사실만 가지고 이들이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 팔레스틴내에도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 누가가 여기서 헬라식 이름만을 기재한 사실과 이들을 뽑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이었다는 점 등을 본다면 이들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스데반과 빌립'이 첫번째 언급된 것은 뒤이어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즉 스데반과 빌립은 사도들처럼 훌륭한 사역을 감당한 전도자들이다. 한편 본 구절의 '빌립'은 예수의 제자 빌립과는 다른 인물이다(8:5;21:8).

⭕ 안디옥 사람 니골라 -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은 본 구절의 '니골라'가 계 2:6-15의 '니골라당'을 세운 사람과 이름이 같다 하여 양자를 동일 인물로 보아 본 구절의 니골라를 배교자로서 간주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일곱 사람들 중 유독 니골라에게만 특별히 상세한 소개를 첨부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본다(Gieseler, de Wette,Ewald). 그러나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나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성 경: [행6:6]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일곱 집사 임명]

⭕ 안수하니라 - 여기서 사도들이 일곱 집사에게 안수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부여한 것은 민 27:15-23에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함으로써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서 지명한 이야기와 평행하는 것 같다 (출 29:1-37 주제 강해 '안수에 대하여'참조).

성 경: [행6:7]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일곱 집사 임명]

⭕ 왕성하여...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 '왕성하여'의 헬라어 '으사넨'(*)은 '자라게 하다', '증가하게 하다'는 뜻인 '아워사노'(*)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교회를 질적으로 계속 자라게 하시며 또양적으로도 믿는 자의 수를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의 한 예로 많은 제사장의 무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실이 언급되는데 이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의 한 예로 많은 제사장의 무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실이 언급되는데 이는 예루살렘 성 내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으며 유대교 내에서는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따르면 예수 당시의 유대인 일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모두 18,000명가량이었고 이중 8,000명 정도가 제사장들이었다고 한다. 이 제사장들 이 제의(祭儀) 기능을 수행했던 기간은 3대 명절의 순례 축제 기간과 연 2주간 정도였으며 나머지 연 10-11개월 동안은 고정된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과 대제사장들 사이의 사회적인 신분격차는 대단히 컸으며 대제사장들은 항상 제사장들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곤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별다른 소득이 없는 제사장들은 굶어죽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제사장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따라서 당신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생활과 또한 유대교 자체의 부패상으로 인해서 많은 회의(懷疑)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명력있는 기독교 신앙이 많은 호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성 경: [행6:8]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체포된 스데반 집사]

⭕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 스데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요'(3절)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5절)로 묘사된바 있다. 이 두 표현과 본문의 표현은 스데반의 영적 자질을 묘사함에 있어 상호 보충적이다. 그리고 지혜, 믿음, 은혜, 권능이 모두는 성령충만에 따른 은사들이다.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소 애매하다. 4:33과 눅 4:22에서 이는 영적인 매력이나 사람을 끄는 매력(winsomeness)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도 여전히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권능'(*, 뒤나미스)은 2:22와 4:33에서 각각 '기사와 이적' 및 '은혜'라는 말들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신적인 능력을 뜻한다.

⭕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여기서 스데반이 행한 기사와 표적이 어떤 것들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의도로 보아 예수와 사도들이 행한 것과 같은 것들로 짐작된다(2:22, 43;5:12). 한편 어떤 학자들은 스데반이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은 후에야 그 같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지나친 추측이다. 스데반과 다른 여섯 사람들에 대한 안수가 집사로서의 임명(任命)에 준한 것이었다면 스데반의 그 같은 은사는 이미 그전에 주어진 것으로 보여진다(Marshall). 왜냐하면 그가 안수받기 이전에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5절)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행6:9]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체포된 스데반 집사]

⭕ 리버디노 - 이들은 본래 유대인이었으나 B.C. 53년 폼페이(Pompeii)의 유대 토벌후 로마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자유인이 된 사람들의 후손이다(the Libertines, KJV;theFreedmen, NIV). 대벧리우스나 아르메니아 번역본에 따르면 이들을 '리비아인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그 정확성 여부가 의심스럽다.

⭕ 구레네 - 북 아프리카의 구레나이가(Cyrenaica)국의 수도였으며 학술과 문화가 번창한 도시였다. B.C. 321년 프톨레미의 통치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후에는 이들이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 알렉산드리아 - 세계 최대의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헬라어를 공통어(共通語)로 사용하였다. 이 도시에서 유명한 학자 필로(Philo)가 태어났으며 70인역(LXX)이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이 도시에는 약 1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 길리기아 - 소아시아의 동남부 연안 지대에 위치한 성읍으로 B.C. 57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수도는 '다소'인데 이 도시에서 바울이 출생하였다(22:3).

⭕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 예루살렘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전용 회당이 있었는데(Chrysostom)이 회당의 수효에 관해서는 학자 간에 의견이 다소 엇갈린다. (1) 여기언급된 다섯 부류 사람들을 위한 다섯 개의 회당이 있었다(Weiss, Lietzmann,Schurer). (2)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들의 회당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 곧 2개의 회당이 있었다(Wendt, Zahn). (3) 'ghlekd'(*, 테스 쉬나고게스)이라는 말이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고 '리버디노' 다음의네 명칭이 모두 성격상 설명적인 보충어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회당은 단 한개가 있었다(Jeremias, Bruce, Haenchen). NIV의 경우는 이 마지막 견해와 분명한 일치점을 보인다. 어떠한 견해를 취한다 하더라고 해석상에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지만 마지막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 이는 스데반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뛰어들어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다소 논쟁이 있다. (1) 스데반은 말씀 전파의 사도적(使徒的) 기능을 위해서 임명된 것이 아니고 구제를 행하며 그같은 일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말씀 전파는 저자 누가의 기록 착오이다(Brandon). (2) 스데반이 실제로 말씀을 전파한 것이 아니고 다만 자신의 신적인 이적 행위에 대한 복음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Zahn). (3)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이 성령의 이끌리심으로복음을 전한 것을(8:26-40) 감안한다면 스데반의 복음 전파는 사실 그대로였으며 당연한 것이다(Haenchen). 대부분의 학자들이 마지막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성 경: [행6:10]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체포된 스데반 집사]

⭕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 스데반의 적대자들은 여럿임에도 불구하고 스데반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눅 12:12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눅 21:15에서는 지가혜의 도움을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초대 교회는 이 약속의 진실성을 입증했다.

성 경: [행6:11]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체포된 스데반 집사]

⭕ 사람들을 가르쳐...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 적대자들은 스데반의 지혜를 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는 예수께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과 유사하다(마 26:61;막14:58;요 2:19-22). 아마 스데반이 형식주의로 치달은 성전예배의 부패상과 전통 준수에만 급급한 율법주의의 폐단(弊端)을 지적한 데 대해 적대자들이 그릇된 편견을 나타냈을 것이다. 한편 후기의 랍비 율법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공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한 신성 모독의 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신성 모독을 정의할 때,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는 민 15:30의 말씀에 따라 광범위한 적용이 가해졌다. 그리고 증인들이 피고가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여 증거하는 것은 신성 모독죄를 심문할때 일반적으로 행해진 순서였다. 하지만 스데반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거는 거짓이요모함에 불과했다. 이렇듯 무고한 자를 사형에 처하게 하려고 법정에서 거짓 증거하는것은 극악한 범죄였다(잠 6:17, 19).

성 경: [행6:12]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체포된 스데반 집사]

⭕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 스데반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스데반을 당할 수 없자 유대교 내의 공권력을 동원하려고 했다. 장로와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산헤드린에서 스데반을 재판할 것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셈이다.

성 경: [행6:13,14]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체포된 스데반 집사]

⭕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 적대자들은 매우 치밀하게 스데반을 공격했다. 산헤드린 앞에 세워진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더욱이 예수를 반율법적 이단세력의 원흉으로 몰아붙였다. 이는 곧 기독교 교회 전체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다. 예수의 복음을 소극적 측면에서 보면 성전 예배의 실제적 병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해된다. 반면 적극적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진정하고도 새로운 관계 회복을 나타낸다. 적대자들은 이 두측면 중 소극적 측면에만 집착할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고 피상적인 의미로만 이해하였던 것이다. 사실 유대교 신자들이나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성전에 관한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많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성전 덕택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 유지와 드려지는 예배를 위해서 세계 각처의 흩어진 유대인들로부터 막대한 헌금이 제공되고 있었으며 또 매 절기 때마다 성전 순례자들이 많은 헌금을 바치며 많은 돈을 이 도시에서 소비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은 그 도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입원(收入源)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공격은 곧 가장 직접적인 저들의 생활권의 침해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스데반을 소환한 것이다.

성 경: [행6:15]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조직과 부흥]

주제2: [체포된 스데반 집사]

⭕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스데반의 얼굴에 천사와 같은 영광이 나타났다는 이 표현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단지 시적, 상징적 표현일뿐이라고 생각한다(Kuinoel, de Wette). 그러나 이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도 영광스러운 광채가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으로써 그리고 그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광이 외적으로 반영된 것이다(출 34:29-35).

성 경: [행7:1]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아브라함의 교훈]

⭕ 이것이 사실이냐 -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거스렸다는 죄목으로 고소되었다(6:14). 당시의 재판 관례에 따르면 피고에게는 고소한 내용에 대해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재판장인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고소 내용에 대한 사실성 여부를 공식적으로 물었다.

성 경: [행7:2]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아브라함의 교훈]

⭕ 여러분 부형들이여 - 어떤 학자들(Alford, Hervey)에 따르면 스데반이 이 설교를 70인역(LXX)을 바탕으로 하여 헬라어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지방에서도 헬라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식자층(識者層)에서는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스데반 자신도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이며 종교지도자들이었고 또 스데반 자신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설교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는 히브리어로 설교했을 가능성이 높다(Meyer). 이 설교가 어떤 언어로 행해졌던 간에 본문에 드러나 이 설교의 내용의 독창성과 특이성 또는 그 의미의 심오함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한편 여기서 '여러분 부형들이여'라는 말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을 겸손하고 공손하게 부른 호칭이다. 특히 '부'(父)의 헬라어 '파테레서'(*)는 공회의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하며 '형'(兄)에 해당하는 '아델포이'(*)는 모든 참관자들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Lenski). 공회원들이나 고소자들은 스데반을 배교자로 몰아붙였으나 스데반은 분을 내거나 욕설로 맞서지 않고 정중히 예의를 갖추고 있다.

⭕ 아브라함이...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본구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이는 갈대아 우르를 말함, 창 11:31)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했는데 창 12:1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다. 이 같은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번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베푸신 약속을 거듭 되풀이 하신것으로 이해된다(Lenski).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필로(Philo)나 요세푸스(Josephus)도 동의하고 있다. 여기서 '영광'은 히브리어로 '쉐키나'(*)로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말이다(출 16:7, 10;24:16, 17;33:18, 22;40:34, 35;레 9:6, 23). 이 표현은 시 29:3에서 인용된 것으로 스데반은 이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말하는 하나님과 구약성경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서로 동일한 분이심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제약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성 경: [행7:3]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아브라함의 교훈]

⭕ 네 고향과 친척과 친척을 떠나...땅으로 가라 - 여기서 '내가 네게 보일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말한다. 스데반의 논지(論旨)는 이 땅 자체는 '영원한 도성'의 예표로서 의의를 지닐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라는 것이다. 즉 스데반은 보다 핵심적인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서는 둔감하면서 외형적 성지 숭배 의식에 젖어 있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경책하고 있는 셈이다.

성 경: [행7:4]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아브라함의 규훈]

⭕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 창 12:4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에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고 하란을 떠났다. 유대 신학자 필로(Philo)도 동일한 진술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 연대기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70세때 출생했으며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을 때의 나이는 205세였으며 구약 성경에 따르면 이 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 그러나 실제로 데라가 죽을때 아브라함은 145세가 되어야 하므로 결국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기 전에 하란을 떠난 것으로 진술되어야 한다. 그래서 P문서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브라함이 데라가 죽기 60년 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고 가정한다. 그렇지만 성경 내.외적 증거 자료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난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데라의 나이에 따른 연대기적 차이는 여전히 남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라가 아브라함을 낳은 나이를 130세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데라가 70세에 첫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아브라함을 낳은 나이를 130세에 낳았다고 가정하면 연대기적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행7:5]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아브라함의 교훈]

⭕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이 땅을...약속하셨으며 - 혹자에 따르면 스데반이 여기서 아브라함이 매입한 막벨라의 밭과 굴을(창23:16,17)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Haenchen). 그래서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遺業)을 주지 않았다'는 말은 모순된다고 한다. 그러나 막벨라의 밭과 굴은 매장지로서의 목적을 가진 것이지 유업의 목적으로서 소유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 아브라함에게는 모든 것이 약속으로 주어졌고 그에게 실제로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의 자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땅을 유업으로 주고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창 12:2,3)는 말씀은 75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는 믿기 어려운 약속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으로 믿기 어려운 약속을 믿었다는 이 사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롬 4:16-22).

성 경: [행7:6]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아브라함의 교훈]

⭕ 그 씨가...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 스데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기간을 400년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출 12:40은 430년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400년이라는 기간을 스데반은 창 15:13에 근거하여 말했을 것이다. 이 400년과 430년의 차이는 유대인들의 수자 개념에서 찾아야 되는데, 그들은 정확한 수자를 말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 주로 개략적으로 말한다(삿 11:26). 즉 430년은 400년보다 정확히 표현한 것이며 400년은 개략적인 연대를 나타낸 것이다.

성 경: [행7:7]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아브라함의 교훈]

⭕ 저희가...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당신의 계획과 섭리가 나타난다. 이 구절은 출 3:12에서 인용된 것으로 출애굽기에서는 '이곳'이 '시내산'이나 '호렙산'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약속의 땅'이나 혹은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성 경: [행7:8]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요셉의 교훈]

⭕ 할례의 언약을...행하고 - '할례의 언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히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약속의 증표(證標)다. 스데반이 이 언약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1)이스라엘은 할례를 통해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과 (2) 이 언약은 단순히 의식 거행의 차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51절).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것은 출 4:18-26의 주제 강해 '할례와 신앙'을 참조하라.

성 경: [행7:9]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요셉의 교훈]

⭕ 여러 조상이 요셉을...팔았더니 - 스데반의 설교는 창 37:11,28에 나타난 야곱의 12아들, 즉 12족장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기서 요셉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메시야의 모형이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버렸지만 그는 자기 형제들의 구세주로 다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죽음에 팔아 넘기워졌지만 이들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스데반이 이 12족장들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애굽'(9-16절 사이에 6번 반복)에 있던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다는 것이다.

성 경: [행7:10]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요셉의 교훈]

⭕ 환난에서 건져내사...치리자로 세웠느니라 - 창 39:21;41:41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며 시 105:21의 말씀과도 연결된다. 요셉이 애굽의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恩寵)때문이었으며 그에게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몽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본절에서는 바로가 요셉을 치리자로 세운 것으로 언급되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치리자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이렇게 예비하시고 섭리하셨다.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는 방향으로 일을 몰아간 결과를 낳았지만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요셉을 통하여 계속 이루어 나가셨다.

성 경: [행7:11]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요셉의 교훈]

⭕ 온 땅에 흉년들어...양식이 없는지라 - 이 구절은 창 41:54, 56;42:5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 흉년이란 당시 팔레스틴 뿐 아니라 애굽 전 지역을 휩쓴 기근을 말한다. 여기서 '양식'의 뜻으로 사용된 '코르타스마타'(*)는 '건초'를 뜻하는 '코르토스'(*)에서 파생된 단어로 70인역(LXX)의 창 24:25, 32에서는 '사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그리고 이 단어는 창 24:25, 32의 개역 성경 번역과 같이 '보리'의 의미보다 '사료'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먹는 것'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사람에게 적용될때는 '양식'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흉년'이라는 말은 곧 '양식이 없다'는 말과 연결이 됨으로 본절에서는 '양식'으로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보다 확장된 의미로는 흉년으로 인해 가축의 사료 역시 바닥이 났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본절의 '코르타스마타'는 사람의 '양식'과 가축의 '사료'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성 경: [행7:12]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요셉의 교훈]

⭕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 이는 창 42:1,2와 병행 구절로서 계속되는 기근 가운데 있던 팔레스틴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본래 애굽은 홍수 때 나일 강이 범람하여 주변이 옥토로 변해 곡창 지대가 많았다. 특히 풍부한 나일 강의 물은 애굽의 젖줄 역할을 하여 로마의 통치를 받을때 로마 양식의 공급자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사실 당시 애굽에도 기근이 찾아왔으나 요셉의 해몽을 믿은 애굽 왕에 의해 7년의 심각한 기근 가운데서도 애굽 지역은 양식 걱정을 별로 하지 않았다.

성 경: [행7:14]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요셉의 교훈]

⭕ 요셉이...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 개역 성경이 따르고 있는 맛소라 본문(MT)의 창 46:27에는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의 가족이 모두 70명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70인역(LXX)은 75명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로 보아 스데반은 70인역을 인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수자상의 차이에 대해 비평주의 학자들은 두 가지 구전을 전제하기도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 차이는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즉 맛소라 본문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만 포함시켰으나 70인역은 그의 다섯 손자까지 포함시켰다(민 26:28-37; 대상 7:14-21). 70인역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은 애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수에 들어갔으나 손자들이 생략된 것을 고려해서 75명으로 수정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차이는 표현상에 의한 것일 뿐 내용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 경: [행7:15]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요셉의 교훈]

⭕ 야곱이...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 이는 신 10:22과 출 1:6의 내용을 합한 것으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스데반이, 조상들이 애굽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은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이 받았으나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성 경: [행7:16]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요셉의 교훈]

⭕ 세겜으로 옮기워...무덤에 장사되니라 -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값 주고 산 무덤의 위치에 관하여 해석상 약간의 문제가 발생된다. 창 23:3-20; 49:29-35;50:13에 따르면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산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에 묻혔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본구절에서 스데반은 야곱과 12족장들이 모두 아브라함이 최초로 정착했던 세겜(창 12:6,7)에 장사되었다고 한다. 이는 수 24:32의 진술 곧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서 값주고 산 무덤이 있어서 그 곳에 요셉과 그 자손들이 묻혔다는 것과 혼동된 진술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 각기 조금씩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1)스데반이 그 당시 긴장된 상황 속에서 잠시 착오를 일으켰다(Calvin, Meyer). (2) 모든 조상들이 사마리아의 세겜에 묻혔다는 사마리아 전설을 따른 것이다(Jerome,Knowling). (3) 스데반이 그때 죽음 직전의 급박한 압력을 은연 중에 받았으므로 아마야곱이 세겜 땅을 산 것과 요셉이 그 땅에 장사되어진 비슷한 두 사건을 요약 단축해서 말한 것이다(Bengel). 그런데 본 구절은 본서 저자인 누가의 실수일 가능성도 있다. 즉 스데반의 설교 내용이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을 누가가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창세기의 기록과 여호수아서의 기록을 혼동하여 잘못 기술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어떤 견해를 취하더라도 본문의 불일치는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임에 틀림없다.

성 경: [행7:17]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약속하신 때...애굽에서 번성하여 - 야곱의 자손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그의 자손 수는 모두 70명에 불과했다(창46:27). 그러나 그 자손은 그곳에서 '생육이 중다(衆多)하고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어'(출 1:7) 출애굽 당시 보행(步行)하는 장정의 수가 60만에 달했다(출 12:37,38). 이는 분명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창 12:1, 2)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7:18]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 여기언급된 '새 임금'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두가지 견해가 있다. (1) 힉소스 왕조의 첫왕 : 이 왕조가 애굽에 진출하여 애굽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는 B.C. 1700년이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간 시기는 B.C.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므로 요셉을 아는 왕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약 150년 이상 평안히 애굽에 거했다. 그런데이 150여년 동안 불어난 야곱의 후손이 출애굽 당시 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므로 출1:9, 10에 비추어 볼 때 이 견해는 그렇게 타당하지 않다. (2) 애굽 18왕조의 첫 왕 :이 시기는 B.C. 1584년으로, 아모스(Ahmose)가 애굽을 다스렸다. 이 때는 야곱의 자손들이 번창했을 당시이므로 새 왕조의 첫 왕이 그 사람들을 당연히 견제했을 것이다.그리고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난당하기 시작한 시점을 힉소스 왕조 때로보면 출애굽 시점까지 너무나 긴 시간적 격차가 있으므로 (2)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무난하다.

성 경: [행7:19]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궤계를 써서...어린아이들을 내어버려 - 이는 출 1:10-22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애굽 왕 바로의 박해는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것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박해의 상황은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자 헤롯이 이스라엘의 유아를 살해하라고 하였던 것과 유사하다(마 2:16). 또한 이러한 박해와 고난은 6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기도 하다.

성 경: [행7:20]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아름다운지라 - '아름다운지라'로 번역된 '아스테이오스'(*)는 출 2:2의 히브리어'토브'(*)에 대한 70인역(LXX)의 번역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 '토브'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아름답다' 또는 '좋다'라는 한 면만 지닌 용어가 아니라 피조물의 완벽한 모습을 나타낸다. 본절에서 '아스테이오스'도 그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모세의 아름다운 외모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거의 완벽한 모습을 지녔음을 암시한다.

성 경: [행7:21]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바로의 딸이...아들로 기르매 - 출 2:5-10에 기록된 내용이다. 여기서 '자기 아들로 기르매'라는 뜻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 아이를 아들로 양육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그녀가 모세를 단순히 호기심이나 연민에 의해 키운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양육시켰음을 암시한다. 그녀가 애굽의 모든 학술을 모세로 하여금 익히도록 했던 것도 이 사실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승(傳承)에 따르면 공주의 아버지 바로가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공주는 바로의 뒤를 이어 모세를 왕위에 앉히려고 계획했었다고 한다.

성 경: [행7:22]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모세가...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 출 4:10-16에 따르면 모세는 '말에 능치 못한 자'(*, 이스크노포노스 ; LXX)였으므로 그의 대변자로서 아론이 지명되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를말에 능한 사람으로 묘사했으며 애굽의 제사장들이 과학, 수학, 천문학, 의학 등에 정통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모세가 애굽 왕실 가족으로서 이러한 모든 학문을 습득했음을 알 수 있다. 1세기 유대인 사상가요 저술가인 필로(Philo)는 모세가 음악, 기하학, 수학, 과학, 예술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모세가 자신을 '말에 능치 못한 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辯明)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세는 애굽 왕궁에 기거하면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아 광야의 오랜 세월을 통해 연단받았던 것이다.

성 경: [행7:23]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나이 사십이 되매...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 여기서 '돌아보다'는 뜻의 헬라어는 '에피스켜토마이'(*)로서 ' 방문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가시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눅 7:16) 방문하는 자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확인하여 돕고자 하는 뜻에서 찾아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 모세도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사실을 미리 알고 그들을 도울 방도를 찾고자 동족들이 고통당하는 현장을 방문했을 것이다.

성 경: [행7:24]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 압제받고 고통당하는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그의 마음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인간적인 면에서 모세의 행동은 의와 사랑의 행위로 인정될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지시도 없이 행동함으로써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는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은 모두 그 정한 시기가 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야 비로소 그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성 경: [행7:25]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깨닫지 못하였더라 - 스데반의 이러한 진술에 따르면 모세는 스스로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로서 자각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출애굽기에 이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당시 애굽의 노예 감독관은 매우 잔인하고 포악했었다. 그래서 필로(Philo)는 당시의 애굽 노예 감독관들을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이라고 묘사했다. 모세의 살인은 압제 세력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려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의협심있는 행동으로 변호될 수가 있을 것이다. 본절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실제로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봄이 무난하다.

성 경: [행7:26]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 모세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스스로 인식했으므로 히브리 민족 사이에 화해자 또는 중재자로 나섰으나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모세의 중재는 설득력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바로 궁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동안 자신들은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모세를 지도자나 중재자로 결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너희는 형제'라는 모세의 말은 고난 당하고 있는 히브리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응집시키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 경: [행7:27,28]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나를 죽이려느냐 - 싸우고 있는 이 두 사람을 집단적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싸움은 곧 애굽 내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과 분열을 나타내는 것이다. 애굽 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노예 생활을 통하여 민족성 자체가 이기적으로 변해 서로에 대한 불만과 갈등이 심화되어 극단적 분열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애굽 당국이 정책적으로 조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모세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답은 노예 생활로 인해 관원을 꺼리게 된 그들의 민감한 반응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에 대해 강하게 배척함을 시사한다.

성 경: [행7:29]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모세가...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 출 2:15에 따르면 모세는 바로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형식상 본절의 진술과 어긋난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그렇게 문제시될 것이 없다. 즉 모세는 자기의 살인에 대해 동족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쁜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그 사실이 바로에게 알려지기 전에 도망했을 것이며 이 사실이 바로에게 알려지기 전에 도망했을 것이며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바로가 그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미디안 광야로의 도망은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에 대해 로이지(Loisy)는 모세의 이 미디안 광야로의 도망을 매우 풍류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의 도망은 이방 세계로의 복음 전파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아들 둘을 낳은 것은 이방 세계에서 복음전파 후 얻은 결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설교하고 있는 스데반이나 본서의 저자 누가는 이 이야기를 그같은 의도에서 전개시키고 있지 않다. 출애굽기나 본문에서는 모세의 광야 생활이 하나님의 섭리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이방 선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나 그 앞 구절들이 모세의 선교에 대해 암시했어야 옳다.

성 경: [행7:30]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사십 년이 차매 -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출 2:23-25) 본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본 구절의 표현은 모세의 미디안 생활이 하나님의 섭리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 천사가...그에게 보이거늘 -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생활은 모세를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로서 성숙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여러 모양으로 단련하신 후 비로소 부르셨다. 출 3:1에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이 '호렙 산'이라고 언급되고 있으나 본 구절에서는 '시내 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별개의 장소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호렙'은 그 산맥의 이름이고 '시내'는 그 산맥 중 어느 특정한 산꼭대기의 명칭이었을 것이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그 반대로 '호렙'과 '시내'를 바꾸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두 산이 별개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한편 '가시 나무떨기 불꽃'으로 약간 달리 번역되어 있으나 70인역과 본절의 표현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상 차이는 없다. 이 나무는 땔감으로나 목재로서 별로 소용이 없는 나무로 당시 학대받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성 경: [행7:31]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모세가...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 출 3:2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로 묘사되었고 30절에서는 단순히 '천사'로만 언급되었으나 본절에서는 '주'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 모세에게 나타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만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단순히 '사자' 즉 '천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창 18:1-21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성 경: [행7:32]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 출 3:6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본 구절의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1) 하나님 자신은 과거와 같이 현재에도 변함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즉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 신실하게 지켜오셨고 지금도 그 약속을 시행하고 계신다는뜻이다(시 102:27;말 3:6). (2) 하나님은 영원토록 불변하시리라는 뜻이다.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며 모세가 죽더라도 그 하나님의 신실성은 변함없으리라는 뜻이다(히 1:12;13:8;약 1:17).

성 경: [행7:33]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거룩한 땅 - 출 3:5을 인용한 구절이다. 본 구절은 시내 산 자체가 거룩한 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시내 산 광야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이면 어디든 그 장소는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중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로 구분한 성막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성 경: [행7:34]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저희를 구원하려고...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한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했다. 이 부르심은 40년 전 모세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생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 부르심에 의해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구원하려'의 헬라어 '여셀레스다이'(*)는 '직접 끌어내기 위하여'라는 뜻으로 애굽에서 고통받고 압박받는 백성들을 해방시키겠다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출애굽 사건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실 것임을 가리킨다.

성 경: [행7:35]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관원과 재판장으로...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 여기서부터는 문체가 전환되고 있다. 평온하게 사실적인 설명처럼 이어지던 설교는이제 그의 청중들을 향한 논박(論駁)으로 바뀌었다. 이 설교의 요지는 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가 동일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구속자인 모세를 거부했듯이 구세주이시며 생명주로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 예수도 거부했다.

성 경: [행7:36]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모세의 교훈]

⭕ 백성을 인도하여...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 스데반은 출 7:3의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는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에서 성취되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애굽의 바로 앞에서 많은 표적과 이적을 행하셨으며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 때에도 그 백성 가운데 임하셔서 수많은 능력을 행하셨다.

성 경: [행7:37]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 이는 신 18:15에 언급된 말씀이다. A.D. 1세기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메시야를 기대하면서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를 기다렸다. 그들은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모습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같은 구속자'라고 말하였는데 그들은 쿰란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같은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 18:15, 18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후기 랍비 자료들에서는 신 18:15-18을 '사무엘'에게 적용시키는가 하면 혹은 '예레미야'에게 또는 예언자들의 전체에 적용시키기도 하여 기독교적 해석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무드의 많은 구절들에서는 이스라엘의 첫번째 구속자 모세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 메시야를 평행적으로 언급하며 신 18:15, 18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신 18:15, 18의 예언에 근거를 둔 스데반의 주장은 당시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종말론적 소망과 일치한다.

성 경: [행7:38]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 광야 교회에 있었고...이 사람이라 - 여기서 스데반이 모세의 율법을 경시한다거나 뜯어 고치려고 했다는 고소 내용이 근거없는 사실임이 입증된다. 이 구절은 모세를 지극히 칭송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광야 교호'라 함은 문자적으로 '광야에 모인 회중' 즉 '율법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교회'란 표현을 사용한 스데반의 의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의해 다시 생기게 된 '교회'와 대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마을 단위의 집회(19:32, 39, 41). (2)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성도들 즉 보편적인 교회(골 1:18). (3)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지역적 집단, 지역 교회. 본구절의 '교회'는 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킴과 동시에 신약 시대의 교회를 예표(豫表)한다. 한편 '생명의 도'는 율법을 가리키는데 혹자는 누가가 '생명'이라는 표현을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Haenchen).그러나 신 32:47에서 율법이 생명을 주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스데반은 율법을 과소 평가하지 않기 위해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스데반은 자신이 전하는 도가 그 '생명의 도'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성 경: [행7:39]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 조상들이...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 이 구절은 민 14:3에서 인용한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철저한 노예 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몸은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었지만 마음과생각은 애굽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출애굽시킨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애굽에서 당했던 노예 생활이 잠시 당하는 광야의 생활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스데반은 여기서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하고 과거에 집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생명의 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리고 하나님께 배은 망덕의 죄를 범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성 경: [행7:40]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만들라 - 이는 출 32:1의 인용 구절이다. 백성들의 완악함은 극에 달해 그들을 애굽의 압제의 그늘에서 기적과 능력으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을 인도할 우상들을 요구하였다. 특히 '우리를 인도할'이라는 말은 곧 자신들을 이 거칠고 고된 광야길에서 애굽의 길로 인도할'이라는 말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조그마한 시험도 견디지 못하고 예수를 믿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스데반 당시의 사람들도 '생명의 주'이신 예수를 죽일 만큼 완악했음을 지적해주고 있다.

성 경: [행7:41]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 송아지를 만들어...기뻐하더니 - 탈무드(Talmud)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지은 최초이자 마지막의 가장 가증한 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랍비들이나 회당 예배에서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할 뿐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떤 랍비는 금송아지 사건에서 모세에 대한 백성들의 반역은 언급하지 않고 그 사건으로 인해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렸음을 강조하여 모세란 인물 자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스데반은 탈무드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구속자들을 반역한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지적함으로써 스데반은 당시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행위와 예수에 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 사이에 공통점을 끌어내 그들의 패역함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성 경: [행7:42]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자신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민족을 외면하셨다. 사도 바울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계속 범죄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 죄악의 길에 들어설지라도 하나님께서 버려두신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스데반도 바울과 같은 맥락에서 본절의 표현을 사용했다(롬 1:24, 26, 28). 그런데 여기서 '하늘의 군대'란 '일월 성신'(日月星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우상 숭배를 대표한다. 일월 성신 숭배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 가운데서 계속 존속되어 왔기 때문에 (신 4:19;17:3;왕하 21:3, 5;렘 8:2;19:13;습 1:5) 스데반은 이 우상 숭배를 지적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다시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하늘의 군대'란 표현이 41절에 언급된 송아지 우상과 동일시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스데반은 송아지 우상이라는 특수한 진술에서 하늘의 군대라는 일반 진술로 단순히 논리를 비약했을 뿐 동일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송아지 우상은 애굽의 우상이었으며 일월 성신은 주로 고대 근동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일월 성신 자체에 대한 내용은 다음 도표를 참조하라.

천체 - 태양 : 태양 숭배는 애굽에서 널리 행해졌으나 앗수르와 바벧론에서도 많이 행해졌으며 가나안 지역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달 : 주로 가부장제 사회의 영향권에 속해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숭배되었으나 가나안 지역에서도 일찍이 숭배되었다.

금성 :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아스도렛(Ashtoreth)으로 섬겼던 것 같다.

토성 : 암 5:26에서 언급된 앗수르의 별신 '식굿'과 '기윤'이 토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천사 : '하늘의 군대'란 표현이 대부분 일월 성신 곧 천체와 관련된 표현이지만 왕상 22:19;대하 18:18;눅 2:13에서는 '천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나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성 경: [행7:43]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 여기서 '몰록'이란 말에 대해 혹자는 '너희들의 왕'이란 뜻의 히브리어 '말렉크켐'(*)을 70인역(LXX)이 잘못 번역한 것을 누가가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 주장한다(Haenchen). 그러나 본 구절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이방신의 이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아람의 주(主)신인 '몰록'으로 번역되는 것이 무난하다. 이 우상은 놋쇠로 만들어져 있으며 황소 머리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형태를 지녔다. 사람들은 우상의 팔 가운데 제물로 바칠 어린아이를 산 제물로 바친 후 밑에서 불을 놓아 어린아이를 태워 죽였다(왕하 23:10). 한편 여기서 '레판'이란 말은 70인역(LXX) 암 5:26에서 인용된 것이며 맛소라 사본(MT)에서는 '키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42절의 도표중 '토성'을 참조하라. 그런데 '레판'에 대한 명칭이 70인역 본문과 히브리 원문에 어떻게 해서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에서 토성이 '렘판'(Remphan)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키윤' 대신에 '레판'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데반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여 '생명의 도'(38절)를 받은 백성이 우상 숭배를 통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했는지를 설명했다. 이는 예수를 통한 '생명의 도'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당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성 경: [행7:44]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증거의 장막 - 벤트(Wendt)는 이 '증거의 장막'이란 원래 하늘에 있는 장막의 실제 모형이며 성전은 그것을 본뜬 모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히 8:5은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이 '증거의 장막'이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돌판을 그 장막 안에 보관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민 9:15). 그 장막(帳幕)의 실체가 하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장막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투영(投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셔서 택한 백성과 교제를 나누셨기 때문에 '회막'(會幕)으로도 불리었다.

성 경: [행7:45]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때까지 이르니라 -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 역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그 장막을 가지고 다녔다. 이 장막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앙에 위치해 항상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여기서 '받아'라는 뜻의 헬라어 '이아뎌사메노이'(*)는 '물려받다', '상속으로 계승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는 그 장막의 계승이 여호수아 세대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초기부터 다윗 시대까지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나타내 준다.

성 경: [행7:46]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다윗이...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 혹자는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려고 한 것은 '장막'의 처소이지 어떤 견고한 건물을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Haenchen). 그리고 그 근거로 '처소'란 뜻의 헬라어 '스케노마(*)가 '천막', '초막', '오두막 집' 등의 의미임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분명 너무 지나친 자구적(字句的) 해석이다. 오히려 여기서의 처소란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집으로 볼 수 있다(삼하 7:5-16). 렌스키(Lenski)는 이 '스케노마'가 여기서 '시적 표현'으로 사용 되었다고 하여 다윗이 건물성전을 구상했음을 암시한다. 특히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함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여러가지를 준비해 두었다. 이는 그가 건물 성전을 염두에 두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처소'란 곧 '집'이나 '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행7:47]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솔로몬이 집을 지었느니라 - 이제 여기서는 앞서 언급된 '증거의 장막'과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 비교되고 있다. 헨헨(Haenchen)은 스데반이 여기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여호와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면서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며 수많은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견고한 성전 안에서 번제나 희생제를 받으시는 정적인 하나님으로 가두어 놓았다는 사실은 여호와 신앙의 정체(停滯) 내지는 후퇴로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서만 예배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건물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로 바뀌었음을 진술하기 위해 그 성전에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성전이나 스룹바벧의 성전은 구약 시대에서는 그 자체로서 그림자적 의의를 지니면서 존속해야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행7:48]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 실제로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거하시면서 제한을 받으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성호'(聖號)나 그의 '임재하심'은 성전 안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스데반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전하는 요지는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를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운명하실 때 성소가 찢어진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마 27:51;막 15:38). 본 구절의 진술을 통해 비록 자세하지는 않으나 스데반은 무소 부재(omni-present)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보이면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제한되어 성도를 만나지 않으심을 역설한다.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이'를 나타내는 헬라어 '휴시스토스'(*)는 히브리어 '엘레욘'(*)에 상응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호칭중 하나이다. 벤트(Wendt)나 바우에른파인트(Bauernfeint)는 이 표현을 초월적인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이 용어는 인간이 범접(犯接)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표현이므로 단순히 초월성만 나타내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성 경: [행7:49,50]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하늘은 나의 보좌요...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 이 구절은 사 66:1, 2을 인용한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창조물 안에 거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 역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으로서 그분이 거하실 처소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수많은 이방 세계의 신전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들의 신을 위한 거처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그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통박(痛駁) 내지는 후퇴로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서만 예배 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건물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로 바뀌었음을 진술하기 위해 그 성전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성전이나 스룹바벧의 성전은 구약 시대에서는 그 자체로서 그림자적 의의를 지니면서 존속해야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행7:51]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 지금까지 스데반은 청중들의 마음을 자극시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본절에서 자극시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극적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그는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 대해 즐겨 사용된 구약적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출 33:5;레26:41;신 9:13;10:16;렘 4:4;9:26)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도 그들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켰다. 즉 이 말씀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배교했던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성령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내려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행7:52]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를 거스리는 이스라엘]

⭕ 의인이 오시리라 - 여기서 '의인'이란 표현은 '무죄한 자'라는 의미에 가깝다(I. H. Marshall). 이는 예수가 무죄한 자로서 십자가를 진 사실과 연관짓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의인'을 메시야이신 예수로 보는데에는 학자들 간에 별 이견이 없다. 왜냐하면 '오시리라'는 표현이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것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 블라쓰(Blab)는 스데반이 50절 다음에 설교를 잠시 중단했다가 51절의 말씀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Haenchen). 그러나 설교의 내용이나 어투가 달라졌다고 설교가 중단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특히 성령이 충만하여 거침없이 설교하던 스데반이 뚜렷한 이유없이 설교를 중단했을 리없다. 그리고 특히 스데반의 설교가 중단되었다면 누가는 그 사실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그의 설교를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Haenchen). 한편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비일 비재하다(대하 36:15, 16;느 9:26;렘 2:30). 그리고 이렇게 선지자들이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주제는 유대 문학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유대 사회에서 높은 학식을 갖추고 있는 공회원들은 구약성경과 유대 문학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러한 내용들을 수없이 접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 메시야까지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그래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던 것 같이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를 살해한 무리임을 폭로하였던 것이다.

성 경: [행7:53]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천사의 전한 율법을...지키지 아니하였도다 - '천사의 전한 율법'이란 천사의 중보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율법(갈 3:19)을말한다. 신 33:2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율법 전수 과정에서 천사들이 중보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보편화된 것으로 짐작된다(히 2:2). 아마 바울이나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이 복음보다 계시의 차원에서 열등하다는 의미로 율법 수여에 있어서 천사의 중보개념을 수용했을 것이다(W. Neil).

성 경: [행7:54]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이를 갈거늘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극심한 분노를 나타낼 때 머리에 재를 뿌리거나 옷을 찢는 행위와 유사한 의미에서 사용되었다(욥 16:9;시 35:16;112:10). 이는 그들이 스데반의 질타를 듣고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성 경: [행7:55]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성령이 충만하여 -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6:3, 5, 8, 15) 이 표현은 분노한 청중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스데반의 모습을 부각시켜 준다. 즉 스데반의 권고적 설교에도 불구하고 완악함을 버리지 않은 청중들과는 반대로 성령의 성품조차 변화된 스데반의 모습을 누가는 간략하게 보여주었다.

⭕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이 말에 대하여 주석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예수는 죽는 순간 천국에 들어올 자신의 순교 제자인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하여 일어서셨다(Bengel). (2) 그는 지상에서 자신의 메시야적인 직무를 이행하시기 위해 서 계셨다(Bauernfeind). (4) 법정에서 증인이재판장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예수는 하나님 앞에 서서 스데반을 시인하고 계신다(F.F.Bruce). 그런데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언급된 것은 앞에서 진술된 예수의 죽으심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즉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서 계신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간접적 표현임과 동시에 스데반 자신의 증거가 신적(神的) 권위를 지녔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예수가 서 계신 모습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성 경: [행7:56]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인자가...보노라 - 예수를 '인자'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경우는 복음서들 외에는 본 구절과 계1:13;14:14 뿐이다. 예수께서는 이 명칭을 '나'라는 대명사에 대한 하나의 관용어법으로 사용하셨고 또 단 7:13-28의 용례를 반영하는 명칭의 하나로 사용하셨다. 인자에 대해서는 요 8:21-59의 주제 강해 '인자의 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행7:57]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큰 소리를 지르며...달려들어 - 공회의 스데반에 대한 사형 집행은 불법이었다. 이들은 당시 로마법에 따른 법적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여기서 그들이 큰소리를 지른 것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고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성 경: [행7:58]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성밖에 내치고...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 유대인의 죄인 처형 방법은 먼저 죄인을 3.5m 정도 사형 집행 장소에서 아래로 떨어뜨린 후 그가 죽지 않았을 경우에는 크고 무거운 돌들을 그 죄인에게 던져 죽게 하였다고 전한다(Mishna). 그리고 죄인에게 돌을 던질 때 증인들이 먼저 던진 후 주위의사람들이 던졌다. 그런데 스데반의 청중들은 자신들이 모두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다는 의미에서는 증인들이었으나 공식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은 불법이었다. 특히 그들은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발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와 유사하게 그들의 종교적 편견과 독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편 증인들이 옷을 벗었다는 사실은 피고가 옷을 벗었다고 기록한 미수나(Mishna)와 다르다. 어떤 이유로 증인들이 사울 앞에 옷을 벗어놓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 주도적으로 동참했음을 보여주고자 그 표현을 사용한 것 같다. 이는 22:20에서 기록된 바울 자신의 회고(回顧)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성 경: [행7:59]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돌로 스데반을 치니...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여기서 영혼을 부탁하는 스데반의 기도는 눅 23:34, 46의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혹자는, 저자 누가가 스데반의 처형 사건을 두고 예수의 위대한 최초의 순교 행위의 재현인 것처럼 나타내려고 의도했다고 주장한다(C.H.tabent). 그러나 이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스데반의 순교를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누가는 여기서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특징지웠던 용서와 책임의 정신이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났었음을 보여주고자 했으리라고는 짐작될 수 있다.

성 경: [행7:60]

주제1: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주제2: [성령을 거스리는 이스라엘]

⭕ 무릎을 꿇고...자니라 - 렌스키(Lenski)는 스데반이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공회원들에게 너무 심하게 돌을 맞았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무릎을 끓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59절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1차적으로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절에서 그가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끓었다고 보기 힘드나 돌에 맞는 과정에서 그가 쓰러져 있던 중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해 그리고 곧 대면하게 될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고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편 이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박해의 시발점이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교회는 팔레스틴 각지와 아시아 지역까지 흩어지게 되었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해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여 선교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결국 스데반의 순교의 피는 초기 기독교 확산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성 경: [행8:1]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

⭕ 사울이...마땅히 여기더라 -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사울의 책임성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울은 스데반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교의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하고 마땅히 여김으로써 죄악에 동참했다. '마땅히 여기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유도콘'(*)은 동의하다', '합의하다', '승인하다'의 뜻을 지닌 '쉰유도케오'(*)의 미완료 과거 완곡 어법으로서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에 찬동하고 있음을 나타낸다(22:20).

⭕ 그 날에 -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던 날을 가리킨다. 스데반의 순교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서곡임과 아울러 기독교 확장의 제1보(步)이기도 했다.

⭕ 큰 핍박이 나서 - 3절의 언급으로 보아 로마의 박해라기보다는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로부터의 박해를 의미하는 듯하다. 로마 당국이 직접 기독교 탄압을 시작한 것은, 사울의 회심 이후 기독교가 확장되어 로마에 전파되고 황제 숭배에 대해 배타적일수밖에 없는 기독교의 특성이 로마 당국자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된 때문이다.

⭕ 사도 외에는 다...흩어지니라 - 박해의 결과 사도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도처로 흩어지게 되었다. 성도들이 각처로 흩어진 것은 핍박을 피해 도망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복음의 세계적 확산을 도모하고자 한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였다. 당시 초대 교회 사도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1:8)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자, 하나님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이라는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세계 선교에의 전기(轉機)를 마련코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중심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이방 지역에의 선교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속적이고 확장된 선교 활동임을 암시한다.

성 경: [행8:2]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

⭕ 경건한 사람들 - '경건한'(*, 율라베이스)이라는 형용사는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붙여졌으며(2:5)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도 붙여졌다(22:12). 여기서는 아마도 복음의 진리에 대해 깊은 호의를 보였던 신실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며, 예수를 장사지낸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인물을 연상케 한다(눅23:50).

⭕ 위하여 크게 울더라 - 유대의 장례식에서는 큰소리로 애곡하는 것이 관습이었다(막5:38 주석 참조). 그러나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고 돌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참수형을 당하거나 혹은 교살당한 사람을 위해 공개적으로 통곡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중하게 스데반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당시 영향력있는 유대 지도자 계층에 속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사실 스데반의 거룩한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만큼 감격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행8:3]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

⭕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데반의 처형 장면을 관망하던 사울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에 주동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잔멸할' 해당하는 헬라어 '엘퓌마이네토'(*)는 '모욕을 주다', '더럽히다', '파괴하다'의 뜻을지닌 '뤼마이노'(*)의 미완료 중간태인데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된 단어이다. 시 80:13에서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아 황폐화시킨 것을 나타낸 70인역의 표현 중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사울의 이러한 잔인한 행위는 자신의 입을 통해서 여러 차례 확인한 바이다(22:4;26:10;고전 15:9;갈 1:13;빌 3:6;딤전 1:13). 한편 여기서 '교회'(*, 에클레시아)는 건물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뜻한다.

성 경: [행8:4]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의 복음 전파]

⭕ 두루 다니며...전할새 - 원문에서 '멘운'(*, '그러나')으로 시작되는 본문은 13절에서 언급된 교회에 대한 박해와는 대조적인 새로운 사건의 전개를 지시한다. 박해로 인해 흩어진 자들은 사마리아는 물론이고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을 증거했다(11:19). 교회사를 통해서 볼때 박해와 순교는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성 경: [행8:5]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의 복음 전파]

⭕ 빌립 - 흩어진 기독교인의 활동에 대한 첫번째 언급으로서 빌립이 소개되는데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인 빌립(막 3:18)과 같은 이름이다. 그래서 혹자는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Welhausen). 그러나 여기서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보인다(6:5). 왜냐하면 그가 12사도 중 한 사람이었다면 사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된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이 굳이 그곳을 방문해 성령 받기를 간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사마리아 성 - 이는 사본에 따라 두 가지고 해석될 수 있다. (1) 사마리아의 한 성: 대부분의 후기 사본은 이렇게 읽고 있다. 이는 사마리아의 어떤 특정한 성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막연한 어떤 성을 이야기할 뿐이다. (2) 사마리아의 그 성 : 이는 '사마리아라 불리는 그 성' 이란 의미로 구약 시대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를 가리킨다.이 해석을 지지하는 것으로는 *,A, B사본 및 영역 성경중 KJV가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반대하는 학자는 '사마리아'가 신약에서 도시의 이름으로보다 오히려 지역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G.A.Buttrick). 그래서 (1)의 사본의 독법을 지지하면서 어떤 학자들은 그 장소를 시몬 마구스(9절)의 고향인 깃타(Gitta)로 추정한다(LakeCadbury, Neil). 혹은 세겜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Zahn, Welhausen,Olshausen). 그런데 만약 이 성이 세겜이었다면 이 유명한 도시를 누가가 언급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사마리아 성'으로는 읽혀질 수 없는 이유는 당시 그 성은 헤롯에 의해 개축되어 '세바스테'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9절에서 시몬 마구스가 갑자기 등장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성은 '깃타'일 가능성이 크다.

성 경: [행8:6]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의 복음 전파]

⭕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 이 표현은 빌립의 말에 권위가 있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초대 교회의 복음 전파에 예수 당시와 같이 표적(sign)이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6:8). 빌립을 통해서 나타나는 표적은 그가 전파하는 말에 권위를 부여하여 사마리아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나타냈다.

성 경: [행8:7]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의 복음 전파]

⭕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 이 구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가르'(*)로 시작하지만 개역성경은 구체적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이는 본절을 6절의 '좇더라'라는 말에 대한 이유가 아니라 8절의 이유로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개역성경은 본문에서의 주어를 사람들에게 붙어있는 귀신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헬라어 사본들은 주어를 '많은 사람들'(*, 폴로이)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크게 소리지르며 나간 것은 귀신이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귀신 축출 기적과 관련해서 사용되지 않으므로 벧하우젠(Welhausen)은 막 1:34를 근거하여 귀신이 쫓겨나 병자가 치유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서 더러운 귀신들이 울부짖으며 나갔다'고 번역하기도 한다(Meyer, Bengel).

⭕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 - 빌립에 의해 치유받은 사람들이 영적인 불구자 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불구자까지 포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중풍병자'로 번역된 '파랄렐뤼메노스'(*)는 중풍(中風)으로 인해 부분적인 기능이마비된 '파랄뤼티코스'(*)와는 달리 전신의 기능이 거의 마비된 병자를 가리킨다. 의사였던 누가의 예리한 관찰에 의해 병자의 병명이 정확하게 묘사된 듯하다.

성 경: [행8:8]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의 복음 전파]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 이 말은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을 시사해 주며 또한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가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앞절에서 언급된 소외된 불구자들의 쾌유와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온 성의 기쁨은 복음이 수용된 곳에서 일어나는 마땅한 결과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짤막한 본문은 빌립의 선교활동의 결과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 후에 있을 기독교 선교 활동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행8:9]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세례받은 시몬]

⭕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 5-8절에서 언급되었던 빌립의 활동 내용과 그 결과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위해 '시몬'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화제를 바꾸었다. 여기서 언급된 시몬은 본장 외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초대 교회의 몇몇 자료에만 그의 신분과 활동이 언급돼 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에 따르면 시몬은 사마리아의 깃타(Gitta) 출신으로서 애굽에 건너가 철학과 마술을 배웠던 사람이다. 그래서 시몬에게 '마술사'를 의미하는 '마구스'(Magus)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이레니우스'(Irenaeus)의 주장에 따르면 시몬은 '영지주의'(Gnosticism)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또 외경 '베드로행전'에서는 시몬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타락시킨 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적으로 고증될 수 없지만 시몬이 초대 교회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 자칭 큰 자 - 시몬이 자신을 가리켜 '큰 자'라고 언급한 것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인 '하나님의 능력'(10절)이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술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미혹시킨 것 같다. 그런데 그가 행한 마술이 어떤 형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그는 마술을 통해 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내어 쫓기도 했으며 점성술을 통해 예언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Lenski).

성 경: [행8:10]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세례받은 시몬]

⭕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 마술사 시몬은 모든 계층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빌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시몬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여 시몬과 그의 추종자들을 압도함으로써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12, 13절).

⭕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 - 사마리아인들이 시몬에게 붙여준 별명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몬은 마술을 행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속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예수를 믿었을지라도 자신의 마술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면 그를 통해서 영지주의가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후에 진행된 이야기로 보아 그는 사도들의 능력을 자신의 마술을 능가하는 마술 정도로 생각했으며, 뿐만 아니라 전수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즉 그는 사도들을 굉장한 마술의 전수자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영지'(靈智)가 전수될 수 있다는 영지주의자의 일반적인 생각을 시몬 역시 비치고 있다.

성 경: [행8:11]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세례받은 시몬]

⭕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 청중들이 시몬을 따르게 된 큰 동기가 시몬이 행한 마술 때문이었음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술의 영향은 하루 이틀 정도의 영향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빌립의 선교 현장이 시몬의 마술 행위로 모든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열악한 환경이었음을 말해줌으로써 시몬까지 예수를 믿게 한 빌립의 전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8:12]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세례받은 시몬]

⭕ 하나님 나라 - 본서에서는 이 주제가 부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전파되었는지 자세하게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혹자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와 동일시된다고 주장한다(Lake, Cadbury).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인 누가가 예수에 의해 전파된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서 가운데 하나님 나라란 용어가 몇번 언급된 점으로 보아 사도들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던 내용을 전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막 1:14-20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라.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이는 본서의 핵심 주제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예수의 이름은 마술사인 시몬의 가르침과 구별된 의미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 빌립의 선교는 시몬의 막강한 영향력을 누름으로써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결과 청중들은 빌립의 설교를 듣고 세레를 받음으로써 시몬의 영향에서 벗어나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단했다.

성 경: [행8:13]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세례받은 시몬]

⭕ 시몬도 믿고 - 사마리아 성의 변화가 파격적임을 묘사하는 이 한 마디는 빌립의 선교 활동이 성공적인 것이었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시몬의 추종자들이 기독교인으로 변화되고 최종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장 많이 행사하던 시몬이 기독교인으로 변화된 것은 그곳이 거의 기독교화도었다는 암시라고도 이해될 수 있다.

⭕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 빌립에 대한 시몬의 반응을 묘사하는 본문은 11절에서 묘사된 시몬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과 대비되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시몬의 마술에 놀라는 장면과 시몬이 빌립의 능력을 보고 놀라는 모습은 서로 대조되어 빌립의 능력과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시몬이 빌립을 추종하여 따라다닌 주된 목적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의 소유자임을 인정하여 그 능력을 마술처럼 배워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표적과 능력 행사의 내용은 7절에 언급된 내용과 동일한 것이며 당시 선교 활동의 중심 내용이 설교였지만 사실 많은사람들을 기독교화시킨 큰 요인은 역시 기적을 행한 신비한 능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8:14]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 1절에서 언급된 바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도들은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 활동의 성공적 보고를 듣고 두 사도를 파송하기에 이른다. 사도들 중에서 기둥같이 쓰임받던두 사도가 빌립의 전도지를 방문한 것은 두 가지의 큰 의미가 내포되고 있다. (1) 빌립의 선교 활동에 대한 확인이다. 즉 빌립의 선교 활동이 정당한 것이고 사마리아인들이 기독교인으로 인정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2) 복음은 어떠한 벽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준 것이다. 즉 사도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유대인들에 의해 경멸받는 이방인과 특히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의 벽을 허물고 모든 사람의 기쁨을 위해(8절) 사마리아를 찾아감으로 전정한 복음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성 경: [행8:15]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 이로 보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지방으로 내려간 목적은 빌립의 선교 활동으로 나타난 성과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이들에게는 유대와 사마리아간의 벽이(마 10:5;눅 9:51-53) 없어졌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한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성 경: [행8:16]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 빌립의 선교 활동에 의해 그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성령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유대인에 대해 나쁜 감정을 지닌 사마리아인들에게 두 사도가 와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인들을 한데 묶어주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2) 사도들에 의해 성령이 임함으로써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3) 빌립이 능력을 행하면서 전도하기에 바빴으므로 안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어떤 것이 정확한 추정인지는 알 수 없다.

성 경: [행8:17]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고 참된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이구절은 성령을 받기위한 안수의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안수를 통해 성령을 체험하기도 하였지만(9:17)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는 경우도 있고 (10:44) 여럿이 모인 곳에 임하기도 한다(2:1-4). 그러므로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안수를 통해서만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한 사도에게만 성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에 의해 성령이 강림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의의를 지닌다. 첫째는, 지방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인정을 받아야 됨을 암시한다. 둘째는, 사도권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이 기독교인임이 최종적으로 확인되고 선포됨을 강조한다.

성 경: [행8:18]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 본절에는 시몬이 어떻게 성령받는 것을 보았는지에 대해서 언급되지 않았다. 아마방언이나(Wendt) 예언을 통해 성령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성령 강림으로 인해 외적 현상이 나타났음이 분명하며 이 현상을 시몬이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현장에 있었던 시몬이 그 체험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확실한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어느 정도 시사해 준다. 이러한 암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성령받는 것을 목격한 시몬은 두 사도에게 돈을 건네주고 그 권능을 팔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마도 성령받은 사람에게서 어떤 신비한 현상을 시몬이 발견하고 마술을 전수(傳授)하듯이 성령도 전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13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시몬이 빌립을 추종한 것이 표적과 권능을 보게된 때문이라는 점과 시몬이 마술사였다는 점에서 아마도 성령을 주는 능력을 갖는다면 무엇이나 자신의 마술 능력을 능가하는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마도 성령을 모든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원천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Bauernfeind). 즉 그는 자신이 돈을 주고 마술을 전수받은 것처럼 성령을 강림케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고자 했을 것이다.

성 경: [행8:19]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이 표현도 18절에서와 같이 사마리아인들이 두 사도의 안수를 받으면서 성령 체험을 하는 그 장소에 시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 체험을 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권능'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수시아'(*)로 1:8에서 '권능'으로 번역된 '뒤나미스'(*)와 의미상 차이가 있다. 즉 '뒤나미스'는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외적 현상을 강조하는 반면 '여수시아'는 내적 현상을 강조하는 용어다. 여기서 시몬이 외적 현상을 의미하는 '뒤나미스'를 나타낼 수 있는 '권세'를 요구했음을 암시한다.

성 경: [행8:20]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 베드로가 말한 성령은 하나님이 주는 선물이다. 따라서 선물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에게 무상(無償)으로 주어지듯이 성령 역시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은 돈주고 거래할 수 있는 성격이 전혀 아니다. 또한 받은 선물에대해 돈을 지불하는 것도 선물을 준 자에 대한 모독 행위가 된다. 따라서 성령을 돈으로 거래하려는 발상 자체는 곧 신성 모독이다.

⭕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 성령을 돈으로 얻겠다는 신성 모독적인 발상에 대해 베드로는 가차없는 저주 선언으로 대용하고 있다. '망할지어다'에서 전치사 '에이스'(*, '안으로')가 목적격의 명사를 동반해서 서술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용법은 70인역의 일반적인 예라는 점에서 본문이 70인역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베드로의 저주에는 재물이 지닌 위험성을 지적하여 종교 타락의 원인이 되는 재물을 멀리 할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종교는 돈이 개입된 흥정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내린 멸망의 저주를 연상하게 한다(5:1-10). 따라서 본문은 성령 은혜가 돈이나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성 경: [행8:21]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 이 말을 혹자는 시몬에게 베드로가 출교(黜敎)를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Haenchen, Neil). 그러나 이는 시몬이 기독교인이 된 사실(13절)을 부정하고 내어쫓으려는 것이 아니라 첫째, 시몬을 책망하여 올바른 기독교인이 되게 하려는 의도와(22절) 둘째, 시몬과 같이 불순한 의도와 잘못된 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용납될 수 없음을 선언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두 사도의 행위는 17절에서와 같이 온전한 기독교인을 인정하고 보증하며 거짓된 기독교인을 구별함으로써 예루살렘교회와 사도의 권위를 강화하고 있다.

성 경: [행8:22]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 회개를 촉구하는 베드로의 이 말은 20절의 저주와 21절의 냉혹한 책망이 단순한 공격적 발언이 아니라 시몬으로 하여금 참된 기독교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말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몬의 불경건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마음을 '악하다'고 다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카키아'(*)는 부패된 심적 상태뿐 아니라 도덕적인 악행도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몬의 부패된 심적 상태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의해 입증되었다.

⭕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 이는 시몬이 행동으로보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음을 보여주면서 마음에 지닌 사악함을 회개해야 함을 강조한다. 시몬은 빌립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불순한 동기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듯하다. 한편 '혹'으로 번역된 '에이 아라'(*)는 조건절을 강조적으로 이끄는 표현으로 회개하고 기도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역성경은 그 강조적 의미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오히려 그 의미를 불명확하게 번역했다.

성 경: [행8:23]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악독이 가득하며 - 이 말은 헬라어로 '에이스 콜렌 피크리아스'(*)인데 직역하면 '쓰디쓴 쓸개를 향하여'란 의미를 지닌다. 이에 혹자는 시몬이 미신과 마술의 쓴 뿌리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거나 불의에 대한 벌을 받게 될 쓴 쓸개즙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F.F. Bruce). 이와 유사하게 마샬(I.H. Marshall)은 시몬이 쓰디쓴 심판을 재촉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한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시몬이 예수를 받아들였으나 옛날의 사악한 습성을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 불의에 매인 바 - 불의에 속하여 있는 시몬의 실존(實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이 구절은 사 58:6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회개는 악으로부터의 확실한 해방이며 또한 악으로부터의 분리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간 실존 상태는 시몬에게만 국한되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행8:24]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 베드로의 신랄한 비판에 대한 시몬의 반응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베자 사본은 '울음을 멈추지 않고 통곡하였다'라는 구절을 삽입시켜 시몬이 베드로의 책망을 듣고 깊이 회개했음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베자 사본의 첨가를 따라 시몬의 회개를 기정 사실화했다(Blass, Wendt). 그러나 시몬은 베드로의 저주가 자신에게 내려질 것을 두려워했을뿐 진실한 회개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Meyer, Bengel, Alford, Knowling, Lenski). 22절에서 베드로가 그에게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권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회개하지 않고 베드로에게 기도를 요청한 것은 여전히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불신앙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본 구절을 시몬의 회개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 경: [행8:25]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두 사도의 사마리아 방문]

⭕ 두 사도가...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 이 표현은 선교의 중심이 예루살렘 교회라는 점을 암시하는 말이다. 즉 모든 지방교회는 교회의 중심인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확인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교회의 정통성과 관계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바울에 의해 이방 지역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퇴색해졌다.

성 경: [행8:26]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주의 사자 - 사마리아 선교 이야기는 일단락되고 새로운 선교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초자연적 능력이 가시적으로 개입되었다. 여기서 언급된 '주의 사자'란 표현은 '하나님의 사자' 또는 간략히 '천사'와 동일한 의미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직접적인 개입을 강조할때 사용되는 용어로서 누가가 즐겨 사용했다(7:30, 35, 38;10:7,22;11:13;12:7, 11, 23;27:23;눅 1:11;2:9).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이 표현을 통해 누가는 이방지역에 대한 선교 활동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 남으로 향하여 - 이 말은 빌립이 당시 사마리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를 볼 때 빌립은 사마리아 선교를 시작했던 장본인임을 알 수 있다.

⭕ 가사로 -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명령했지만 정확한 지점을 지칭하지 않고 다만 가사를 향해 가라고 방향만 지시했다. 가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70여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창 10:19에 따르면 가나안의 도시였던 것으로 보이며, 유다 지파가 그곳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여 그이후 계속 블레셋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다. 또 이곳은 삼손이 성문짝을 메었던 곳이었다.(삿 16:1-5). 이 도시는 B.C. 96년경 마카비 가(家) 출신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에 의해 멸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그 후 B.C. 약57년경 폼페이의 칙령으로 '가비니우스'(Gabinius)에 의해 재건되었으나 A.D. 66년경에 멸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Josephus). 그런데 가사로 가는 길은 아스칼론(Ascalon)을 통해 가는 길과 서쪽 헤브론을 통해 갈수 있는 두 길이 있는데 여기서는 어느 쪽인지 분명하지 않다.

성 경: [행8:27]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에디오피아 사람...내시 - 빌립의 선교대상으로 언급된 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출신지와 직책이다. '검은 피부'라는 의미를 지닌 '에디오피아'는 애굽의 남쪽 지역으로서,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스 족속(사 11:11)의 후예로 구성되어 있다. 에디오피아에서는 당시 모계(母系) 왕통을 갖고 있었으며 '간다게'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왕조를 나타내는 명칭으로서 로마의 '가이사' 또는 애굽의 '바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국고'(*, 가자)라는 말은 본래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말로서 왕실의 보물 또는 국가의 재산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내시는 왕실 또는 국가의 재무 관리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 성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는 고자(鼓子, 신 23:1)이면서 이방인인 그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될 수 없다. 아마 그는 유대인의 총회에 들 수는 없었으나 유대교를 독실하게 믿었으므로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한 절기 기간을 택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예루살렘 방문이 총회는 상관없이 단지 성지 순례만이 주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고자됨을 감추고 절기 중 거행되는 성회에 참석하려는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한편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먼길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가 유대교를 신실하게 믿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성 경: [행8:28]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 32, 33절에 인용된 구절이 70인역(LXX)의 사 53:7, 8과 같다. 그래서 혹자는 그 사람이 70인역을 읽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F.F. Bruce).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그 구절을 인용할 때 70인역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행8:29]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 빌립에게 지시하는 자가 '주의 사자'에서(26절) '성령'으로 바뀌어 언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26절은 빌립에게 가시적으로 천사가 나타났으나 본절은 음성이나 영감을 통해 명령이 주어졌기에 누가가 '성령'이란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2)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주의 사자'가 나타난 것으로 표현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는 유대인들의 사상에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빌립에게 '내려가라' 지시한 사자나 본문의 성령은 동일한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7:30-33 주석을 참조하라.

⭕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 빌립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언급되어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묘사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당위성 및 필연성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성 경: [행8:30]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달려가서...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 빌립은 내시의 읽는 소리를 통해 성경의 내용이 자신이 전하려 하는 복음의 내용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이 내시도 유대인들의 습관을 따라 마차 속에서 큰 소리로 성경을 읽었을 것이며 이를 빌립은 들었을 것이다.

성 경: [행8:31]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 '지도하는' 이란 표현이 미래형으로 사용되었다. 직역하면 '지도해 주게 될' 이란의미를 나타내므로 내시의 소망을 담고 있다. 즉 지금까지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자신을 지도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나타내기 위해 미래형 동사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그 내시가 성경을 깨닫는 것에 매우 관심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빌립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다.

⭕ 빌립을 청하여 - 갑자기 나타난 빌립으로부터 도전적인 질문을 받은 내시는 의외로 빌립에게 자신의 마차에 오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처럼 내시가 배타적인 태도가 아니라 호의적으로 빌립을 맞아들였다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1) 내시가 자신의 체면에 관계없이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겸손과 주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자 하는 열망이 높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 선교자를 맞아들이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사하고 있는데 영접하는 자의 구원을 암시하고 있다(막 6:11 주석참조).

성 경: [행8:32]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양...어린 양 - 사 53:7의 인용구로 그곳에서 표현은 메시야의 수난과 관련된 예언이다. 메시야의 수난에서 비유적으로 '양'을 언급한 것은 메시야가 순종의 제물임과 동시에 희생 제물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자세한 것은 사 53:7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8:33]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 이 말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 사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자기 백성들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의미일 수 있으며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재판 과정에서 공의로운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것도 의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사53: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8:34]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 예언서에 예언된 고난의 종이 누군지를 묻는 내시의 질문에는 매우 진지하고 정중한 문장이 사용되고 있다. 즉 '청컨대'(*, 데오마이 수)라는 말을 부탁을 하기 전 붙이는 '죄송하지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Haenchen). 한편 내시는 예언된 고난의 종이 이사야 선지자일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었다는 전설 때문에 그러한 추측이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또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고난의 종으로 상징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대해 내시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시에 두 세 가지의 해석들이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행8:35]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켜 - 아마도 빌립은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의 고난과 결부시켜 가르쳤던 것 같다. 다시말해 빌립은 사 53:7, 8이 메시야의 고난임을 설명하고 그 메시야가 예수임도 밝혔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치심과 수난 및 부활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그 내시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성 경: [행8:36]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물 있는 곳...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 많은 학자들은 '물 있는 곳'이라는 말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즉 그 장소가 예루살렘 남쪽 헤브론에서 3km정도의 거리에 이쓴 '벧술'이라는 샘(수 15:58;느 3:16)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고(Jerome, Eusebius, Alford), 가사로 가는 길에 위치한 '텔엘 하시'(Tell-el-Hasy)라 이름하는 샘을 말한다는 주장(Robinson, Hervey)도 있으며, 가사 부근에 있는 어떤 샘으로 추정하기도 한다(Smith).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설득력있는 주장이라고 볼 수 없다. 즉 저자는 그곳이 어느 지역인가 하는 장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다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이 두 갈래였으므로 어느 길을 택했느냐에 따라서 견해가 다를 수 있으며 빌립이 내시를 어느 지점에서 만났느냐에 따라서도세례 장소가 달라질 수 있다. 한편 내시가 '무슨 거리낌이라도 있는가?'라고 반문한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세례에 관해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빌립이 예수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 세례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아마 빌립은 내시로 하여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내시는 자신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대신 세례받는데 거리낌이 전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반문 형식의 의문문을 사용했다.

성 경: [행8:38]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둘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 이는 두 사람 모두 물에 들어가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浸禮)를 베풀었음을 암시한다. 당시에는 오늘날 행하는 약식 세례와는 달리 침례를 행했으므로 물이 넉넉히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이로 보아서 내시가 세례를 받은 장소는 단순히 오아시스의 샘이 아니라 흐르는 시내였을 것이다.

성 경: [행8:39]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 빌립을 이끌어 주는 자가 '주의 사자'에 이어(26절) '성령'으로 언급된 후(29절) 여기서는 또 다른 표현인 '주의 영'으로 언급되고 있다. 누가는 서로 같은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이끌어 간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르파센'(*)은 재빨리 어떤 것을 채어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빌립을 내시의 눈 앞에서 금방 사라지도록 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 기적이 실제로 시공간(視空間)에서 발생했음을강조한다. 그리고 누가는 이 기적에 대해 묘사함으로써 빌립의 전도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해 주며 또한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을 부각시켜준다.

⭕ 내시는 흔연(欣然)히 길을 가므로 - 혹자는 기쁨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이 누가의 독특한 표현법이라고 주장한다(Harmack, Haenchen). 그러나 이 기쁨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지 누가의 독특한 표현법이 아니다. 내시에 관한 언급은 여기서 끝나고 있지만 내시가 기뻐하며 걷는 모습은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으리라는 추측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성 경: [행8:40]

주제1: [이방 선교의 전조(前兆)]

주제2: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

⭕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 빌립이 세번째로 찾아간 선교지 아소도는 가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40km, 지중해 연안 4.8km 대륙 지방으로서, 삼상 6:17에서는 블레셋 성읍인 '아스돗'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도시는 처음에는 번창한 항구 도시였으나 암 1:8에 예언된 바대로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빌립의 선교 활동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두루 포함한다는 본절의 진술은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빌립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를 방문하였을 때(9:32, 36) 그곳에 이미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성 경: [행9:1]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주의 제자들을 - 사울이 핍박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명칭으로 언급된 '주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이다. 누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현을 '그 도를 쫓는 사람들'(2절), '제자'(10절), '성도들'(13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14절), '형제'(17절) 또는 '형제들'(30절)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 기독교인에 대한 사울의 잔혹한 행위를 심리적으로 묘사이다. '위협'으로 번역된 '아페일레'(*)는 '경고'라는 말로도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당장이라도 '살해'를 할 것 같은 위협적인 모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같은 바울의 심리 상태를 '등등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적(動的)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말은 본래 '숨을 쉰다'(breathe)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사울의 호흡이 살기와 위협의 숨소리로 들릴만큼 박해가 잔인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울의 행위가 얼마나 능동적인 행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사울 자신은 박해 행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 같다.

⭕ 대제사장에게 가서 -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간 것은 기독교인에 대한 체포권을 부여받기 위함이다(2절).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 속한 사울이(26:5) 예수를 죽이기로 음모하고 이를 실행했던 대제사장, 바리새인들(눅19:47;20:19;22:52;23:10)과 같은 노선에 있었음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당시 대제사장은 칠십 인으로 구성된 의회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로마로부터 인정받은 권한 곧사법권과 행정권을 팔레스틴 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당시 대제사장이 '가야바'(A.D. 18-37)였는지 그 후임자 '데오빌로'(A.D. 37-38)였는지 알 수 없으나 사울의 회심(回心)을 A.D 35년경으로 본다면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Lenski).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자는 '데오빌로'로 추정한다(alford, Levin). 그러나 사울의 회심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성 경: [행9:2]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다메섹 여러 회당 - 사울의 행선지로 언급된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30km정도 거리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서 삼 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 671m의 고원 지대이다. 이곳은 아브라함때부터(창 14:15;15:2) 다윗 시대(삼하 8:6)와 솔로몬 시대에(왕상 11:24) 걸쳐 계속 언급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B.C.73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B.C. 64년부터 로마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초대 교회 당시 다메섹에 거주했던 유대인의 수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A.D. 66년 네로 박해 때 약 10,500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요세푸스(Josephus)의 보고가 이를 뒷바침한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있어서 중심 기구라고 할 수 있는 회당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박해 때(8:1-3)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해 간 유대 기독교인들과 그들에 의해 개종된 유대인들로 추정된다.

⭕ 그 도를 좇는 사람 - 여기서 언급된 '그 도'란 기독교를 묘사하는 다양한 표현중의 하나다. 누가는 단순하게 '도'(道)로만 언급하기도 하며(19:9, 23;22:4;24:14,22) '주의 도'(18:25)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용어로 '도'란 말을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예수를 '생명의 길'로 교회가 인식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 같다.

⭕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 사울이 이방 지역에서 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묘사하고 있는 본 구절은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의 유대인들에 대해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교회 탄압의 중심이며 유대인들에 대한 행정의 중심지도 됨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 지역의 유대인에게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마카비1서 15:15-21에 따르면 루기오(Lucius)총독은 유대에서 도망한 자들을 대제사장이 유대법에 따라 처벌할 수있도록 프톨레미에게 요청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 글라우디오 황제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분봉왕(分封王)으로 유대를 다스렸으므로 대제사장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을 것이다.

성 경: [행9:3]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 본 구절은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초자연적 개입이 일어난 것에 대한 묘사이지만 그 지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한편 '빛'이 22:6에서는 '큰 빛'이라고 언급되고 26:13에서는 '해보다 더 밝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하늘로부터 온 빛에 대해 강조하기 위한 의도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나타나는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한 저자의 배려로 이해한다(Haenchen). 그러나 오히려 바울이, 둘러 비친 그 빛에 대해 묘사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간증할 때 조금씩 달리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에게 둘러 비친 '빛'의 성격은 그빛에 대해 언급된 세 곳의 묘사를 종합해 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 26:13에서는 같은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서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모색할수 있다. 즉 본절에서는 오직 사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26:13에서는 사울 자신의 회심 사건에 있어 현장 목격자들도 있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행들에게도 동일한 빛이 비추었다는 진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22:9의 기록은 본절과 26:13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무튼 사울과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일행들도 사울이 경험한 그 빛을 목격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성 경: [행9:4]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땅에 엎드러져 - 본 구절은 갑자기 내려 비취는 빛에 의해 나타난 사울의 반사적 행동에 대한 묘사다. 여기서 '엎드러져'라는 단어 '페손'(*)은 '떨어진다', '넘어진다'의 뜻으로 쓰러지듯 엎드린 사울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반사적이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즉각적 반응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이 말을 타고 갔다면 말에서 떨어지다시피하여 땅 위에 엎드렸을 것이다.

⭕ 사울아 사울아 - 혹자는 구약 시대에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격식을 갖추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Longenecker). 그러나 사울에게 들려진 예수의 음성은 분명히 애정어린 음성으로 이해된다. 본절 외에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씩 불렀던 경우는 아브라함(창 22:11), 모세(출 3:4), 사무엘(삼상 3:10), 시몬(눅 22:31)을 들수 있다. 이는 부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다.

성 경: [행9:5]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주여 뉘시오니이까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알지 못하는 음성에 대하여 사울은 '주여'(*, 퀴리에)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호칭은 자기를 부르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했음이 아니다. 이는 사울이 곧이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을 부른 자의 정체를 묻고있다는 점에서 알수 있다. 아마도 초자연적 어떤 힘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나온 호칭으로서 짐작된다.

⭕ 나는...예수라 - 본절의 헬라어 본문에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자기 선언의 한 양태인 '에고 에이미'(*)가 언급되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언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를 70인역(LXX)이 '에고 에이미'의 문장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심으로써 구약에서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선포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힌 반면 예수는 스스로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다. 본절에서도 역시 예수는 사울에게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선언하심으로써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동일한 언어습관을 나타내셨다.

성 경: [행9:6]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자신의 정체를 밝힌 예수께서 곧이어 사울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셨던 것은 다음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사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예수께서 그를자신의 제자로 지명하여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사울이 예수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활한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암시한다. 이 두가지 의미를 종합해 보면 사울의 소명 의식이 부활한 예수의 강권적인 능력의 부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가 사울을 아시기 위해 이미 예정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26:16과 본절은 내용 전개상 약간의 모순이 있다. 즉 26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사울에 만남에 대해서 생략되어 있으며 사울의 소명이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주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본절은 사울의 소명이 그가 다메섹성에 들어간 후에 주어질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같은 불일치는 26장이 사울 자신의 체험을 간략하게 전달하는 것이므로 그 체험에 담긴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받았던 소명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것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접속사 '알라'(*, '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서 혹자는 앞절과 연관지어 '나는 네가 행한 일에 대해서 더 이상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는 지금 어떤 일을 해야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알라'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혹자는 '알라'를 감탄사 정도로 생각하여 '자'로 번역했다(Haenchen). 여기서 어느 해석을 취해도 앞절과 본절의 연결은 자연스럽지못하다. 그래서 어떤 영역 성경 중에는 '그는 떨면서 놀라움에 사로잡혀 주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말했다'는 구절을 첨가시켰다(KJV, MLB). 이는 22:10과 조화시키기 위한 첨가로 짐작된다. 아마 바울은 자신이 핍박하는 자들이 섬기던 예수를 만나자 놀라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성 경: [행9:7]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 사울과 함께 동행하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시각적으로 아무것도 감지하고 있지 못함을 언급하고 있으나 22:9과 26:14에서는 각각 조금씩 달리 설명했다. 22:9에서는 일행이 소리는 못들었어도 빛은 보았다고 진술하여 본절과 정반대의 상황을 나타내었다. 반면 26:14에서는 사울과 그 일행 모두가 엎드려졌다고 한점으로보아 모두가 초자연적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울의 세 가지 진술이 모두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소리'는 음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울에게 명령한 음성이 예수의 음성인지 아니면 사울의 음성(5절)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또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하늘로부터 온 빛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러한 의문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1) 일행들은 '주여 누시오니이까?'라는 사울의 외침만 들었을 것이다(Chrysostom, Bruce). (2) 그들이 무슨 소리를 듣기는 들었으나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Bengel). 여기서 강조된 분명한 사실은 사울이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경험을 하였고 그 사건을 목격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사울이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없는 피상적이거나 부분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2:9과 26:14의 기록과 본절의 기록이 지닌 차이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사울뿐임을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다.

⭕ 말을 못하고 섰더라 - 본 구절은 사울의 일행들이 무엇인가를 경험하면서도 아무 말을 못하고 있음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말을 못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오이'(*)에 대해 혹자는 '공포로 인하여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A.C. Hervey).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다만 70인역(LXX)의 사 56:10에서 짖지 못하는 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56:10에서는 이 단어가 공포와는 관계없이 어떤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아마 누가는, 사울의 일행이 자신들과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성 경: [행9:8]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일어나 눈은 떳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 사울이 예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모습은 땅에 엎드러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보지 못했다'라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사울이 보고자 했으나 볼 수 없었던 상태, 즉 빛을 경험한 순간부터 일어서는 시점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사태를 암시한다. 따라서 사울이 경험한 소명 사건은 가시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었다기 보다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음성을 들었던 사실은 내면적인 사건으로 돌릴 수 없다. 사울이 빛으로 인해 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음성은 그에게 실제로 들려왔다. 한편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상태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사울이 회심하기 전까지의 영적 무지에 대한 상징으로 생각한다(Calvin, De Wette).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그러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그 생각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Meyer). 오히려 이 사건은 사울에게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였다.

성 경: [행9:9]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 도상의 사울]

⭕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하고 심음을 전폐하니라 - 여기서는 강조점은 보지 못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 식음(食飮)을 전폐한 사실이다. 즉 사흘 동안에 걸쳐 사울에게 내면적인 어떤 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사울 자신이 지금까지 배웠고 자랑스럽게 고수했던 사상 체계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예수의 음성을 연관지어 깊은 고뇌나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특히 '사흘'(*, 엔 헤메라스 트레이스)이라는 숫자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요나의 이야기(마 12:40)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예수의 부활처럼 사건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이와 같이 사울의 회심은 자기 자신의 엄청난 내면적 고통을 통한 결단이었다. 이 사흘 동안 사울은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구약적 차원에서 재해석해야 했으므로 그의 신학적 체계가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에 신중을 가했다.

성 경: [행9:10]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그 때에 - 헬라어 본문에는 특정한 시간을 지시하는 접속사가 없고 이야기의 진행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접속사 '데'(*, '그러나')만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데'를 생략하든지 아니면 '한편'이란 접속사로 연결시키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 - '제자'로 언급되는 '아나니아'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1;23:2). 이 이름의 히브리적 본래 의미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 이름의 뜻에 걸맞게 아나니아는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경건한 자였다(22:12). 그런데 그가 어데게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한편 '제자'는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다(1절주석 참조). 22:12을 볼때 아나니아가 다메섹에 오랫동안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루살렘 박해 때 피신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오순절 때 기독교인이 되었거나(2:5-11) 아니면 그 이전 예수의 활동 당시 예수를 따랐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짐작된다.

⭕ 환상(幻像) 중에 불러 - 본 구절은 아나니아의 구약적인 계시 경험(삼상 3:1-9)에 대한 진술이다. 이 언급은 사실적 묘사라기 보다 신적 계시에 대한 문학적 묘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서 계시 전달자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난다. 본절에서 아나니아가 본 환상은 (1) 사울을 택하기 위한 주의 치밀한 섭리를 강조하며, (2) 아직도 의구심에 사로 잡혀 있을 사울에게 증거가 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예수의 부름에 대한 아나니아의 대답은 구약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창 22:1;삼상 3:4). 따라서 본절에서 사울의 소명 사건을 구약 시대의소명 사건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9:11]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직가라...가서 - 예수가 가라고 지시한 거리 '직가'(直街)는 동서로 곧게 뻗은 거리로서(Vincent)현재는 '다르발 무스타킴'(Darbal Mustaqim)이라고 불리어진다.

⭕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9절에서 언급된 사울의 금식 행위를 예수는 기도하는 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울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절박한 기도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9절 주석 참조)

성 경: [행9:12]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보았느니라 -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와서 안수를 통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여 줄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환상으로 이미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사울에게 아나니아의 일을 보여주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사울은 두번째 환상을 본 셈이된다. 이같이 치밀한 과정을 통해 사울의 회심시키는 사실을 볼 때 사울에 대한 예수의 깊은 애착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철저한 유대교적 사상과 기독교를 탄압하였던 광신적 열정만큼이나 사울의 회심은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겪고있는 깊은 고뇌와 예수의 집요한 노력이 사울의 회심을 가능케 하였다.

성 경: [행9:13]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사울을 직접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또한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많은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이미 이전에부터 있어 왔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은 사울의 악명이 이방 지역에까지알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잔악하고 반(反) 기독교적인 사울의 행위에 대한 강조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악명 높은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예수의 지시는 충격적인 사실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사울의 회심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지닌다.

⭕ 주의 성도 - 이말은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 하나로 '구별된 거룩한 자'를 의미한다. 32절과 41절에서는 단순히 '성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본문에서 '주'라고 번역된 '당신'(*, 수)이라는 표현은 성도와 예수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는 성도에 대한 박해가 예수에 대한 핍박이며(5절) 따라서 사울이 예수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예수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 경: [행9:14]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 기독교인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명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누가는 기독교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이야기의 지루함을 피할 뿐 더러 기독교인에 대한 당시의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고 있다.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의미한다(몸 10:13).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성도를 의미한다.

성 경: [행9:15]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 13, 14절에서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사울의 반 기독교적 행위가 언급된 후 예수로부터 사울의 소명(召命)이 극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사울의 선교 대상이 크게 세 가지로 언급되었다. (1) 이방인. 여기서 예수는 유대 이외의 모든 나라에 대한 선교를 첫번째 관심사로 언급하고 있다. 사울이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이며 광신적인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소명은 사울의 회심에 걸맞는 매우 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임금. 이는 세속적인 권력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그립바 왕(26장), 가이사(딤후 4:16, 17)등 집권자들 앞에서 증언하였던 사울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 이 소명이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이스라엘 자손들. 사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으며 회심 후에도 그 애정을 잃지 않았다(롬 9:1, 2).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사울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 다만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유대인을 상대로 전도 활동을 했으므로 사울 자신은 이방인을 상대로 그 사역을 감당했다(갈2:8).

⭕ 택한 나의 그릇 - 선택된 그릇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법으로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렘 22:28;51:34). 사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께 선택된 자임을 의미한다(롬 1:1;갈 1:15).

성 경: [행9:16]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그가...받아야 할 것 - 본 구절은 복음전파를 위한 소명과 함께 사울이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서그 고난이 필연적인 것으로서 언급된다. 이 같은 예고는 13절에서 언급된 아나니아의 말과 사응하는 표현으로 사울이 기독교인들에게 해를 입혔던 것처럼 자신도 해를 받게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해'(害)는 고난의 의미로서 보복의 차원이 아니다. 즉 기독교인이 당하게 될 의로운 고난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따라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예수의 명령을(마 16:24;막 8:34;눅 9:23;14:26, 27) 실천해야 했다.

⭕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보이리라'로 번역된 '휘포데잎소'(*)는 '지시하다', '증거하다'의 의미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사울에게 보이시겠다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겪어나갈 실제적인 고난을 말한다. 즉 사울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를 위해 어떠한 고난을 얼마나 당하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기보다는 실제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성 경: [행9:17]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형제 사울아 - 아나니아는 예수의 지시에 따라 사울을 방문하여 안수하고는 '형제'라는 호칭으로 사울을 부르고 있다. 특히 '형제'(*, 아델포스)라는 칭호가 암시하는바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이미 아나니아는 사울의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인해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13, 14절). 따라서 여기서 '형제'라는 호칭은 사울의 모든 악한 과거가 용서되고 사울을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 아나니아의 이 말은 사울의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과 사울에게도 사도적 능력이 부여됨 그리고 그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성령이 임하는 방편으로 이해된다(8:17). 본절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을 했으나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사울의 눈이 치료되어 세례받은 사실과 이 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 경: [행9:18]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 사울이 다시 보게 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가 보지 못하게 된 원인이 제거됨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의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Lumby, Haenchen, Hervey). 혹자는 이 기적을 사울이 경험한 주관적 느낌이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한다(Weiss, Barnes).그러나 이 사건은 물리적으로 나타난 사실적 현상이다(alford, Bengel, Knowling). 왜냐하면 상징적 의미만을 전달하려 했다면 단순히 '눈을 뜨게 되었다'는 표현만을 사용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울의 눈이 치유된 기적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며 그 사건을 사울의 부름받음에 대한 증거로 기록했던 것이다

⭕ 세례를 받고 - 기독교인 됨에 대한 의식으로서 사울은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 세례가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베풀었던 것과(8:36-38)같은 형식을 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다메섹에 침례할만한 강이 없었다는 점에서 볼 때 침례가 행해질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현대에 행해지는 형식의 간단한 예식을 치렀을 것이라(Lenski)고 말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다메섹에 있는 유다의 목욕탕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Earn). 그러나 이러한 추정들은 확실한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요점은 사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믿음의 공동체에 가입했다는 사실이다.

성 경: [행9:19]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나니아의 안수]

⭕ 강건하여지니라 - 사울이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다는 본문은 9절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사울의 금식이 끝났다는 단순한 의미 외에 사울의 내적 갈등과 고뇌의 종결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본 구절은 사울의 변화된 새로운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강건하여지니라'라는 단어는 사울의 변화가 매우 긍정적으로 나타난 것임을 암시한다.

⭕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 사울이 다메섹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은 그가 기독교인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며 또한 그가 다메섹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회심과 선교시작 사이에 나타난 며칠간의 공백 기간에 대한 갈 1:16, 17과의 차이점이다. 즉 본절과 20절에는 사울이 회심한 후 곧바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으며 여러 날 후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묘사된 반면 갈 1:16, 17에서는 그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다메섹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다르다. 혹자는 회심 직후 아라비아를 다녀와서 다메섹에서 머물렀다고 주장한다(Pearson).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학자들은 사울이 23절에 언급된 '여러 날' 이후에 아라비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Neander, Meyer). 그 외에 올스하우젠(Olshausen) 같은 학자는 25절 사건 이후에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과 바울 자신의 진술을 문자적으로 일치시킬 필요가 없다. 누가는 사울이 회심 후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기록한 반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함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햇수를 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 이후부터 26절 사이에는 3년이란 기간이 걸렸으며 사울은 이 동안에도 복음 전파를 했을 것이다.

성 경: [행9:20]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에서 전도하는 사울]

⭕ 즉시로 각 회당(會堂)에서 - 사울의 첫 복음 전파의 장소가 회당으로 소개되어 2절에 언급된 회당과 대조되고있다. 즉 사울이 기독교인을 핍박하기 위해 방문하기로 되어있는 장소였던 회당이 복음을 전파하는 장소로 뒤바뀜으로써 그의 회심이 극적으로 강조되었다. 한편 '각 회당'이란 표현은 사울의 설교가 여러 회당에 걸쳐 계속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사울이 큰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이가 예수이심을 확신했기에 그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을 서로 연관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를 따라 다녔던 자가 아니었기에 자기가 만난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을 연관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을 신학적으로 깊게 연결한 혼적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행9:21]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에서 전도하는 사울]

⭕ 듣는 사람이 다 놀라 - 여기서 누가는 사울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을 언급하면서 사울의 과거를 언급함으로 사울의 회심을 강조하고 있다. 본 구절에 언급된 청중은 회당에 모인 비기독교적 유대인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을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칭하여 그들이 제 삼자적 입장에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청중들의 놀람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반응, 즉 사울에 대한 반감이라고 볼 수 있다(Haenchen). 특히 23절의 언급은 유대인들이 사울을 배교자, 배신자로 여겼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성 경: [행9:22]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에서 전도하는 사울]

⭕ 사울은 힘을 더 얻어 - 본 구절은 청중들의 반감에 상응(相應)하여 표현된 반응으로서 청중들의 반감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 기세를 높여 증거하는 사울을 부각시킨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영적인 힘이 증가되고 점점 담대해지는 사울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證明)하여 - 본절에서의 설교는 20절에서의 설교와 표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같다. 이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것이 사울의 일관된 메시지의 중심이기 때문이다(고전 1:23). 한편 여기서 언급된 '증명하다'로 번역된 '쉼비바조(*)는 본래 '연결시키다'는 뜻과 함께 '논증하다', '가르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울의 설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여러가지의 자료들을 모아 논증적으로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가르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케오'(*)는 '혼란케하다', '섞다'의 뜻을 지니므로 사울의 설교 내용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혼란에 빠져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갑작스런 사울의 회심과 그의 설교 내용은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공동 번역은 이러한 의미로 번역했으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 의미로 번역했다(KJV, RSV, MB).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다음절에 언급되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개역성경의 번역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성 경: [행9:23]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에서 전도하는 바울]

⭕ 여러 날이 지나매 - 이 표현은 사울의 선교가 시작된 후 유대인들의 살인 공모가 있게 된 시점까지 상당한 시간의 경과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러 날' 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히카나이'(*)는 19절의 '며칠'(*, 헤메라스 티나스)과는 달리 상당히 긴 시간의 간격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간적 간격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간 기간이 삼 년으로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간 기간을 삼년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갈 1:18의 삼 년은 바울의 회심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은 자신이 아라비아에서 얼마동안 머물렀는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날'에 대한 시간적 규명은 어렵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사울이 회심 이후 약 삼 년여에 걸쳐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고 다메섹에서 사울의 선교 활동이 상당한 기간 동안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울에 의한 파문은 유대인 공동체에 있어서 충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울의 지속적으로 예수를 전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사울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성 경: [행9:24]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에서 전도하는 사울]

⭕ 저희가...선문까지 지키거늘 - 고후 11:32에 의하면 '아레다 왕의 방백'이 성을 지킨 것으로 사울은 언급했다. 여기서 역사적 고증(考證)에 따른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다메섹은 나발인들이 소유하여 그들이 성을 지켰다는 설(H. Schlier)이 있는가 하면 나바티안족들이 다스렸다는 설도 있다(Loisy, Lake). 당시에는 유브라데스 강에서 홍해까지 뻗쳐있는 나바티안 아랍 왕국이 있었으며 이곳의 통치자는 아레다 4세(B.C. 9-A.D. 40)였다. 유대인들이 나바티안 족의 방백을 매수해서 사울을 잡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이처럼 사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과격한 것이었다.

성 경: [행9:25]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메섹에서 전도하는 사울]

⭕ 그의 제자들이 - 누가는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사울을 탈출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여기서는 문맥상 '사울의 제자들'이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칭 대명사 '그의'(*, 아우투)는 앞절에서 언급된 사울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에 대해서 다음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이들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예루살렘에서부터 따라간 동행인이었을 것이다. (2) 다메섹에서 행한 사울의 설교에 감동되어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일 것이다. (3) 이전부터 있었던 기독교인들로 사울을 따르며 그를 도왔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2)의 견해가 가장 적절하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상당 기간 전도 활동을 했으므로 그곳에 상당한 추종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 광주리 - 이 말의 헬라어 '스퓌리스'(*)는 예수가 4,000명을 먹이신 기적때 언급되었던(마 15:37;막 8:8) 것과 동일한 단어이다. 그러나 사울이 고후11:33에서 직접 언급할 때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갈대 광주리와 구별되는 끈으로 만든 바구니 '사르가네'(*)가 언급되었다. 사람을 달아내리는 데는 사울이 직접 언급한 '사르가네'가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만 '스퓌리스'와 '사르가네'가 본절과 고후 11:33에서 구별없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광주리에 담겨져 탈출한 것은 그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회심으로 인해 겪게 되는 사울의 첫번째 수난이라는 점에서 16절에서 예수가 아나니아에게 예언한 그의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행9:26]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는 사울]

⭕ 예루살렘에 가서 - 갈 1:18에 의하면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삼 년만에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15일 동안 체류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오게 된 동기는 베드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 제자들을 사귀고자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이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를 가리킬수도 있고 일반 기독교인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갈 1:19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 외에 다른 한 사도도 만나지 못했음을 진술했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성도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 다 두려워 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 본문은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으로 교회가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고 경계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사울의 제자됨은 본인이 직접 말한 것인지 아니면 소문으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는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아마 소문으로도 이미 알려져 있었을 것이고 자신 또한 직접 제자됨을 언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문은 다메섹과 예루살렘이 거리상 많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정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사울에 대한 신회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도들은 사울에게서 직접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것도 역시 사울의 회심이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없을 만큼 예기치 못한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제자됨'이 사도성(使徒性)을 뜻하는 말인지 단순히 '기독교인이 됨'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만약 사도됨을 진술하려고 의도했다면 누가는 일반 성도의 의미인 '제자'란 용어 대신 '사도'란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성 경: [행9:27]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는 사울]

⭕ 바나바 -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냉대를 당할 때 사울을 사도들 앞에서 보증해 준 바나바는 구브로(Cyprus)섬 출신으로서 레위인이며 본명은 요셉이었다. 그에게 설교하는 능력과 위로하는 능력이 인정되어 바나바라는 이름이 사도들에 의해 주어졌다(4:36).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으며(4:37) 안디옥 교회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울과 동역자가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11:24-30;13:2-4). 이러한 그의 경력으로 보아 사울이 예루살렘에 갔을 당시 바나바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사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지는 본문 가운데 전혀 언급이 없다. 아마도 그는 사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전적으로 신뢰하였을 것이다. 결국 사울은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을 만나게 되는데 갈 1:19에 따르면 야고보만 만났다고 사울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가 언급한 '사도들에게'란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서 가운데서 '사도'란 표현은 열두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14:4, 5,14). 따라서 본절의 '사도들'은 당시 그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사역을 하던 자들로 짐작된다.

성 경: [행9:28]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는 사울]

⭕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말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다'라는 뜻이 된다. 즉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말이며 기독교인들로부터 경계받거나 배척받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행9:29]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는 사울]

⭕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울의 설교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사울이 선교 활동에 어떻게 임했는지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특히 '담대히 말하고'라고 해석된 헬라어 '파르레시아조마이'(*)는 '숨김없이 자유롭게 말하는'의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사울의 설교 내용보다 사울이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인정되었으며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누가가 바울의 사도성을 나타내기 위한 구체적인 첫 진술로도 이해될 수 있다.

⭕ 헬라파 유대인들과...변론하니 - 여기서 언급된 변론자들은 유대에 거주하는 유대인이면서 헬라적 문화와 철학의 영향을 받아 논쟁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로 보인다. 이들이 기독교도였는지 아니면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유대인들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모의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에 배타적인 감정을 지닌 유대인들로 짐작된다. 당시 유대 사상가 필로(Philo)가 헬라 철학을 이용해 성경을해석할 정도였으므로 유대인들에게 헬라 철학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헬라 철학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헬라 철학은 교부들에 의해 신앙을 변증(辨證)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처럼 헬라 사상은 초대 교회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울도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다소 출신이므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성 경: [행9:30]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는 사울]

⭕ 형제들 - 이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 가이사랴...다소 - '다소'가 사울의 고향이었다는 점에서(11:25;21:39;22:3) 안전한 곳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울이 다소로 가기 위해 거쳐 갔던 곳이 '가이사랴'이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랴를 의미한다(Alford, Alexander, Bruce). 다메섹에서 당한 살해 위협(23절)에 이어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또다시 살해당할 위협을 받고 탈출하게 되는데 이 같은 그의 수난은 선교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16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예언처럼 사울이 당해야 하는 고난이며 이방인 선교를 위해 져야하는 십자가였다.

성 경: [행9:31]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는 사울]

⭕ 그리하여 - 이 접속사는 다음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사울이 다소로 피신한 것과 본절이 깊이 연관되었음을 보여 준다. (2) 주제를 전환시키기 위해 단순히 별 의미 없이사용되었다. 여기서는 (1)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누가는 바울이 다소로 피신함으로써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마찰이 해소되었음을 전해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 이방 지역에도 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가 팔레스틴 지역만을 언급한 것은 이 지역 교회가 이방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가는 사울에 의해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틴 지역이 신학적인 문제로 소동이 벌어졌으나 그 문제가 잠잠해졌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지역에서의 교회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 교회가 평안하여 - 이 말은 교회에 대한 외부의 박해가 없었다는 의미와 함께 교회가 성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울에 의해 예루살렘의 소동 외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박해도 잠잠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 : A.D.37-41)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려 하여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41년 1월 24일에 칼리굴라가 피살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상대적으로 감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 든든히 서 가고 - 이 말은 당시 건축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는 교회 성장에 대한 묘사다. 바울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각 성도가 연결되어 지어져 가는 것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엡 2:21).

⭕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 누가는 초기 교회의 성장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위로'라는 단어 '파라클레시스'(*)는 '격려', '권면'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성령의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성 경: [행9:32]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아니아의 의무]

⭕ 때에 - 특정한 시간을 지시하는 언급은 원문에 없고 다만 '그러나' 또는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데'(*)만 언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에서는 '때에'라는 표현을 통해 베드로의 룻다 방문이 교회가 평화롭게 성장하고 있는 시기(31절)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어느 시점을 지칭하기보다 주제의 전환을 위해 '데'가 사용되었으므로 '한편'으로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 룻다에 오기 전 이미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거쳐 왔음을 밝히고 있는데 선교를 위한 여행이었는지 이방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방문하는 시찰(視察) 여행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8:14에서 처럼 이방 기독교인들을 시찰하면서 동시에 전도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룻다 - 오늘날 이름은 '룻'(Ludd)이며 예루살렘 북서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서 해안도시 욥바로부터 동쪽으로 약 17-18km에 위치한 비옥한 땅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성 경: [행9:33]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애니아의 의무]

⭕ 애니아 - '칭찬받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이름으로서 그가 기독교인이었는지 아니면 기독교와 상관없는 유대인이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32절에 언급된 '성도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팔 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온 환자인데 본절에는 그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팔 년 동안을 직역하면 8살부터 중풍병을 앓아온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번역 성경들은 애니아가 8년 동안 그 병을 앓아온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릴 때에 중풍병에 걸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는 병의 햇수를 밝힘으로써(3:2;4:22;14:8;눅 13:11) 환자의 병이 이웃으로부터 확인되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환자가 상(床)에 누워서 팔 년을 지냈다는 표현은 거동을 할 수 없는 중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같이 병의 깊이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치유 능력에 대한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성 경: [행9:34]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애니아의 의무]

⭕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 '낫게 하시니'란 표현은 누가의 상투어라고 볼수 있다(10:38;28:8;눅5:17;6:19;9:2,11,42;14:4;22:51). 이는 예수가 그 불치병을 고쳐주신다는 베드로의 확신을 전달해 주는 용어다. 나아가서 베드로의 치유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를 결부시키는 것은 예수의 치유 기적을 상기시키고 부활한 예수께서 지금도 치료자로서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 자리를 정돈하라 - 환자에 대한 베드로의 지시는 중풍환자를 고치며 명령했던 예수의 지시와 비슷한 어투다(마 9:6;막 2:19). 이는 치유의 즉각성을 강조하고 예수의 능력이 현존함을 암시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자신이 예수의 보낸 자임도 시사한다.

성 경: [행9:35]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애니아의 의무]

⭕ 사론에 사는 사람들 - 일반적으로 '사론'은 '평야'를 의미하며 남쪽 욥바와 북쪽 갈멜산 사이에 위치한 평야 지역을 가리킨다. 이 평야는 길이가 약 80km, 폭이 약 9-19km로 북부는 수목이 많은 편이며(사 35:2) 남부는 비옥한 농토가 펼쳐지고 있다(사 65:10). 신약 성경에서는 이 지명이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본절과 38절을 종합해 볼 때 여기서의 '사론'은 길게 뻗쳐 있는 평야 전체를 의미하지 않고 룻다와 욥바 근처의 한 성읍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아 2:1;대상 27:29;사 33:9).

⭕ 주께로 돌아가니라 - 이 말은 룻다와 사론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다는 의미다(Bengel, Knowling). 그런데 그 지역 사람 모두가 개종하였다는 표현은 과장된 것으로 짐작되며(Haenchen) 치유 기적이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치유 기적은 예수의 사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의 확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8:5-7).

성 경: [행9:36]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시 살게 된 다비다]

⭕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 -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55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서 현재는 '야파'(Jaffa)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이 욥바와 애니아를 만났던 '룻다'와의 거리는 약 18km 정도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는 수리아의 통치 아래 있었다. 어떤 까닭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여기서 언급된 다비다가 이미 기독교인임을 '제자'라는 말로서 알 수 있다. '제자'의 여성형은 여기서 처음 사용되고 있다(신약성경에서). '다비다'라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아 그녀는 유대인임에 틀림없으며 그 이름은 헬라식으로 '도르가'(*, 도르카스)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본절의 내용으로 보아 다비다는 그 도시에서 잘 알려진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앞장 선 것으로 보아 그녀는 부자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39절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그녀가 과부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성 경: [행9:37]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시 살게 된 다비다]

⭕ 시체를 씻어 다랍에 뉘우니라 -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따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Bruce). 헬라인들에게도 이러한 절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Knowling). 저자의 의도는 장례 절차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비다가 완전히 죽어서 이미 장례 절차의 일부를 밟은 후였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40절에서 언급되는 다비다의 소생을 자연스럽게 강조하는데 있다. 한편 시체를 다락에 뉘었다는 사실은 왕상 17:17-24과 왕하 4:32-37의 영향을 받아 다비다를 다시 소생(蘇生)시키고자 하는 기대에서 나온 발상으로 판단할수 있으며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Haenchen). 38절에서 언급되듯이 즉시 베드로를 부르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은 그들이 다비다를 다시 살려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다비다가 선행을 많이 하여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에서 주위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살려보려고 애썼을 것이다.

성 경: [행9:38]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시 살게 된 다비다]

⭕ 제자들이...두 사람을 보내어 - '제자 들'은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누가의 상투적 용어이며(1절 주석참조) 그들이보낸 두 사람도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높다. 36절의 '여제자'란 말로 볼 때 욥바에 이미 기두교인이 있었음을 알수 있는데 어떤 경로로 욥바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8:40에 언급된 빌립의 전도 여행의 영향이거나 2:1-11에서 언급된바처럼 오순절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일 가능성도 있다.

⭕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 그들의 간청이 다비다를 살아나게 해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죽었으니 와서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해달라는 것인지 또 무조건 와 달라고 간청한 것인지 전혀 언급이 없다. 살려달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혹자는 이야기를 더욱 섬세하게 이끌어간다는 인상을 준다고 설명한다(Haenchen). 그러나 앞에서 다비다가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므로 누가는 간청의 말에 그 표현을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성 경: [행9:39]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시 살게 된 다비다]

⭕ 모든 과부 - 이들은 다비다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베드로 곁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로서 평소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로서 평소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다비다도 과부였다는 가정과 함께 평소에 함께 지냈던 친구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다만 문맥상 구제한 일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36절) 그리고당시 과부들이 구제의 대상에 속했다는 점에서(6:1) 여기에 언급된 과부들은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로 이해된다.

⭕ 저회와 함께 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 - 렌스키(Lenski)는 다비다가 구제 활동을 위해 봉제 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며 프로이쉔(Preuschen)은 다비다의 부유함을 말하기 위해 과부들의 그의 옷을 보여준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는 다비다가 생전에 입던 옷을 보며 그를 추모(追慕)하고 울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과부들이 다비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믿는다면 평소에 다비다가 그 과부들을 위해 만들어 주었던 옷을 베드로에게 보여주며 그 은혜를 기억하고 울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적절하다.

성 경: [행9:40]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시 살게 된 다비다]

⭕ 베드로가...다비다야 일어나라 - 본절에서 베드로의 치유 방법은 예수의 행위를 모방했다고 할 정도로 서로 비슷하다. 사람을 다 내보내는 행위는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막 5:40). 아마도 베드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릴 당시 예수에게서 배운 대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비다야 일어나라'라는 말을 아람어로 번역할 경우 야이로의 딸에게 예수가 했던 말인 '달리다굼'과 거의 일치한다(Haenchen). 또한 여기서는 34절에서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칠 때 언급한 '예수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예수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였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한편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사실은 예수의 행위와 닮지 않았고 오히려 왕하 4:33에서 언급된 엘리사의 행위와 비슷하다. 따라서 누가의 서술은 예수를 모방하여 행동했던 베드로의 모습과 엘리사의 사건이(왕하 4장) 결부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성 경: [행9:41]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시 살게 된 다비다]

⭕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 베드로가 깨어난 다비다를 일으키는 모습 역시 막 5:41에서 보여준 예수의 행위와 흡사하다.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과 권위로 병을 고치면서 자신의 행위속에서 예수의 능력이 함께 함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베드로의 행위에 부활한 예수가 사도들을 통해 세상에 계실 때와 같이 일을 하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다.

⭕ 그의 산 것을 보이니 - 본 구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행위는 막 5:43에서 묘사된 예수의 행위와 정반대이다. 아마도 42절의 내용으로 보아 전도하기 위한 베드로의 의도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성 경: [행9:42]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시 살게 된 다비다]

⭕ 주를 많이 믿더라 - 다비다의 회생(回生)의 결과는 룻다에서 애니아를 치료했던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이 치병(治病)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의 확장이 치유 기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 선교 때에 의료 선교가 공헌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행9:43]

주제1: [이방 선교를 위한 획기적 전기(轉機)]

주제2: [다시 살게 된 다비다]

⭕ 시몬이라 하는 피장(皮匠)의 집 - 누가는 '시몬'이란 사람의 직업을 명시함으로써 베드로와 구별하고 있다. '피장'이라는 직업은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는 직업으로서 오늘날의 피혁 제조업자로 이해될 수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피혁 제조업자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기피했다(Edersheim, Bruce, H.Marshall, Hervey).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람과 교제를 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눌 19:5-10). 이 사실은 또한 초기 기독교에서 신분과 직업에 대한 계급적 의식을 무시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베드로가 천한 신분인 시몬의 집에 머물렀음은 다음에 나오는 이방인 고넬료의 개종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즉 이 사건은 당시 선민 의식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을 깨뜨리고 천민과 이방인에게도 평등하게 주의 은총을 선포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 경: [행10:1]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의 환상]

⭕ 가이사랴에 고넬료 - 베드로의 세번째 방문지로 언급되는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04km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8:40에 의하면 빌립이 선교 활동을 벌였던 지역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곳이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12:19 주석을 참조하라. 당시 가이사랴에는 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고넬료는 주둔군의 하급 지휘관이었던 것 같다. B.C. 82년 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던고넬료 슐라(Cornelius Sulla)의 이름을 본따 당시 고넬료라는 이름이 흔했었다(Longenecker). 아마 고넬료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

⭕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 - 이는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총독 보호를 위해 배치된 지원 부대로 보인다. 한편 '대'(*, 스페이라)는 본래300-6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되는 부대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부대는 오늘날의 대대 병력 정도를 의미하며 그중에 백부장은 100명의 지휘관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중대장급에 속하는 지휘관으로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자주 언급되지만(마 8:13;27:54;막 15:39;눅 7:2;23:47) 부대 이름을 밝한 것은 본문 외에 27:1에서 '아구사도대'뿐이다. 따라서 팔레스틴에 주둔해 있었던 황제 직할 부대는 2개 이상이었을 것이다.

성 경: [행10:2]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의 환상]

⭕ 그가 경건하여 -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세베스'(*)에 대하여 혹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지닌 독특한 경건이라고 생각한다(T. Whitelaw). 이에 대해 혹자는 그가 완전히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proselyte)이라고 주장한다(Olshausen, Neander,Fecht, Ritshl). 그러나 몇몇 학자는 11:3을 근거로 그가 회당 집회에는 참석했으나 할례 받은 개종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H. Marshall, Neil, Haenchen, Bruce, Hervey). 내용 전개상으로 보아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 하나님을 경외하며 - 이말은 할례받은 유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면서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 유대교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Haenchen). 특히 이 말은 이방 유대교인을 뜻하는 누가의 일반적인 표현이다. 혹자는 당시 이방 유대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2절을 볼 때 이 견해가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고넬료가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알리기 위해 누가는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특히 백성을 구제(救濟)했다는 말은 곧 궁핍한 자들을 경제적으로 많이 도왔다는 말로서 초대 교회 당시 궁핍한자에 대한 구제가 깊은 관심거리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유대인들에게 많은 구제를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본문에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구제와 기도에 열심을 내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성 경: [행10:3]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의 환상]

⭕ 하루는 제 구시쯤 - 9시경은 오후 3시경이다. 고넬료는 아마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오전 9시와 오후3시경에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누가가 고넬료가 기도한 시간을 언급한 것은(1) 환상에 대한 사실성 강조를 위한 의도와 (2)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고넬료의 습관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넬료의 경건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도 지닌다.

⭕ 환상 중에 밝히 보매 - 고넬료가 경험한 이 환상은 9:10에서 언급된 아나니아의 경험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환상에 대해 혹자는 '인간의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거나 천사를 만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정의를 내린다(Haenchen). 고넬료는 기도 중이었으므로 환상 가운데서 실제를 보듯 천사와 대면했던 것이다.

⭕ 사자(使者)가 들어와 - 구약 시대에 '사자'는 왕의 전령,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 또는 제사장, 그리고 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신약 시대에는 주로 '천사'에만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자가 '들어온다'고 표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넬료가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개인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행10:4]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의 환상]

⭕ 주여 -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바라본 고넬료의 반응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찬 것이었다. 고넬료는 주의 사자를 '주여'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또는 예수에 대한 호칭이 아니다. 다만 자신 앞에 갑자기 나타난 초자연적 사건 앞에 당황하며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을 것이다(9:5).

⭕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 주의 사자가 언급한 말은 고넬료의 신앙과 행실을 용납하였다는 의미를 지닌 '상달하여'(*, 아나바이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있는 이는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즉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 보좌에까지 올라갔음을 의미한다. 즉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었다는 말이며 고넬료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 기억하신 바 - 이 말은 구약적인 표현으로(출 2:23;17:14) 위로와 격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Haenchen). 본 구절에서 누가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위로와 격려 외에(1) 고넬료가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 (2) 이방인인 고넬료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기독교인으로 개종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 정당성은 그만큼 강화된다.

성 경: [행10:5]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의 환상]

⭕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 이 지명은 9:43에서 언급된 것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본문의 지명과 이야기를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본문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임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욥바 체류는 고넬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나타내 보이려고 의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성 경: [행10:6]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의 환상]

⭕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 사자는 계속해서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피장(皮匠) 시몬의 집을 지시하면서 그 집이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고 있다. 따라서 언급된 지명이 더욱 정밀해짐으로써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더욱 섬세하게 느껴지게 한다. 피장 시몬의 집이 해변가에 위치한 것은 그의 직업적인 이유로 이해된다. 아마 피혁 가공 작업상 바다를 낀 곳이 유리하기 때문일 수 있으며(Lenski) 무역을 위해 바닷가에 위치해 있을 수 있다.

성 경: [행10:7]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의 환상]

⭕ 하인 둘과 종졸...하나. - 사자의 지시에 대해 고넬료는 즉각적이고 정중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고넬료의 행위를 매우 진지하고 정중하게 묘사하려 했다. 그 근거는 (1)단순히 사람을 보냈다고 언급하지 않고 보냄을 받은 사람을 구체적으로 명시했으며, (2) 특히 '종졸'이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종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티오테스'(*)는 '군사'를 의미한다. 이 군사는 고넬료 자신의 수하(手下)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을 것이다.

성 경: [행10:8]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의 환상]

⭕ 욥바로 보내니라 -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약 50여km 정도로 사람이 걸어서 약 10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9절에서 이튿날 제 육시경에 도착했다는 언급과 무리없이 연결하자면 이들이 출발한 시각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각인 제 9시 직후이며 도중에서 잠을 잔 후 계속 길을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행10:9]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환상]

⭕ 이튿날...제 육시더라 - 고넬료가 보낸 심부름꾼들은 최소한 전날 오후 3시 이후부터 그 다음날 정오 12시경까지 약 20여 시간을 소요하여 욥바에 당도했다(10:1-6 주제 강해 '유대인의 시간구분'의 도표 참조). 이에 대해 혹자는 밤을 세워 50km의 거리를 걸어서 가기에는 곤란하다는 점에서 말을 타고 갔을 것으로 가정한다(Bruce).

⭕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 베드로가 기도하러간 지붕은 헨헨(Heanchen)의 말처럼 통풍이 잘되고 햇빛이 잘드는 옥상을 가리킨다(신 22:8;왕하 23:12;렘 19:13;습1:5;눅 5:19). 아마 피장 시몬은 베드로가 머무는 동안 그곳을 기도처로 예비한 것 같다.

⭕ 제 육시 - 시각은 낮 열 두 시로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과 상관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습관과는 상관없이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시간적 언급은 베드로의 환상에서도 언급되는 바처럼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을 타파하려는 선교적 동기를 암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성 경: [행10:10]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환상]

⭕ 시작하여 먹고자 하매 -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으려 하는 베드로의 심리 상태를 그린 본문은, 곧이어 언급되는 환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보통 유대인들은 오전 기도시간(9시)을 지나서 아침 식사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기도를 시작한 즉시(12시경)에 배고픔을 느낀 것이 아니라 아마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서 상당한 시간에 걸쳐 기도하던 중 배고픔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누가는 환상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 나오는 환상을 먹고 싶은 베드로의 욕구 때문에 나타난 환각과 천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누가는 환상이 사람의 일상적인 삶을 매개로 하여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 비몽 사몽간에(*, 에게네토 에크스타시스) - 이말은 환상을 경험하는 베드로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서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심리 경험을 묘사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환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서 3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10:11]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환상]

⭕ 하늘이 열리며 - 이 말은 매우 문학적이며 심정적 표현으로 베드로의 경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환상에 대한 신약적인 표현 방식으로(7:56;마 3:16;계 19:11)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나타낸다.

⭕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 개역성경은 여러 소문자 사본에 따라 번역했으나, 권위 있는 시내산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및 바티간 사본(B)은 '매어'란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생략된 대로 직역하면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머물렀다'란 표현이 되어 그 뜻이 매우 애매 모호하게 된다. 이는 보자기 같은 그릇의 네 귀가 땅에 드리워진 모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 않고 개역 성경처럼 번역되면 그 그릇의 네 귀가 매여 땅으로 내려 오는 모습이 강조된다. 그런데 여기서 보자기 같은 것이란 표현으로 보아 네 귀가 매여 땅 위로 드리워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 않고여러 학자들이 지지하는(Holtzmann, Westcott, Hort) 권위있는 사본을 따라 번역하면 보자기 같은 그릇이 어떠한 모습으로 드리워졌는지 모호하다. 한편 그것의 네 귀퉁이가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으며 하늘로 부터 땅 위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땅 위의 모든 영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Lange, Bengel, Neander). 즉 환상에서 보여주듯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을 파기한 것처럼 유대의 배타적선민 의식(選民意識)도 파기되고, 하늘이 온 세상을 덮듯이 온 세계가 유대인과 이방인 곧 민족적 구별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행10:12]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환상]

⭕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 - 짐승들에 대한 이 목록은 창 1:24, 25을 연상하게 하는 데 아마도 여기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피조물임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짐승 목록은 14절로 보아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부정한 짐승이라고 규정하여(레 11장;신 14:3-20)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짐승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창조물의 목록 중 물고기가 빠져 있다. 아마도 물이 없는 공중의 그릇이라는 이유로 물고기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Weiss, Knowling).

성 경: [행10:13]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환상]

⭕ 잡아 먹으라 - 누구의 음성인지 전혀 언급없이 베드로에게 보여준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명령문이 언급되고 있다. 이 명령은 10절에서 베드로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준비했다는 진술과 상응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먹고자 하는 식욕 앞에, 제공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명령은 매우 반가운 제안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명령에 베드로를 시험하는 의도가 내포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명령은 베드로의 대답을 예견한 명령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에 대한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성 경: [행10:14]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환상]

⭕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 베드로의 대답은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대표적 생각을 나타낸 것 뿐이다. 즉 그의 대답은 생활과 종교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에까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는 '결코...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어를 사용하여 전면적으로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이 같은 부정적 대답은 주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이 얼마맡큼 철저한 율법적 생활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같은 베드로의 대답은 모든 유대인들의 대답으로 상징될 수 있다(겔 4:14).

⭕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 - 본 구절은 베드로가 그 짐승들을 잡아 먹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 제공된 짐승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짐승으로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먹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는 속(俗)된 것이기 때문이다. (2) 자신이 어려서부터 이 짐승들을 멀리하고 정한것과 부정한 것을 철저하게 구별하며 살아온 바처럼 지금도 지켜야 될 규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이 같은 베드로의 대답은 유대인들의 일반적 견해다. 베드로는 아직 환상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성 경: [행10:15]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환상]

⭕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니 말라 - 이 말은 곧 유대인들이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규범시해 왔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를 뒤엎는 타격적 선언이다. 이 같은 메시지는 이미 12절에서 짐승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연상케 하고 1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짐승들을 담은 그릇이 땅에 늘어져 닿았다는 표현 속에 암시되어 있다. 본절에서 하나님의 선언은 베드로에게 보인 짐승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고 있다. 본 구절은 당시 속되다고 인식되던 것을 깨끗하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면 속되지 않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상상들을 인간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파기(破棄)하고 일치와 화해, 용서와 사랑의 시대를 선언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같은 메시지는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행10:16]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환상]

⭕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일'이 이제까지 묘사된 환상을 말하는 것인지 15절에서 언급된 음성, 곧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선언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베드로가 계속 명령을 거부하기 때문에 세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공동번역은 '이런 말이 세 번 오고 갔다'고 말함으로써 베드로가 완강하게 거부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RSV는 이런 일이 단순히 세 번 일어났음을 언급하고있다. 어쨌든 저자 누가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베드로의 거부가 세 번 반복되었다는 데 있다. 즉 전통적으로 세 번 반복하는 형태가 지극히 강조적 묘사라는 점에서(요 21:15-17), 본절의 세 번 반복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이 (1) 매우 명백했다는 사실과 (2)베드로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실과 관련이 있음 및 (3) 베드로가 유대적인 전통을 하나님 앞에서 고집했음을 의미한다.

⭕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베드로가 체험한 환상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이 구절은 11절의 '땅에 드리웠더라'는 표현과 대응되는 구절이다. 즉 하늘로부터 내려왔던 그릇과 짐승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 묘사는 이야기 전체가 나타내고 있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거룩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하늘에서 그들이 속되고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짐승들이 내려오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사고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며, 그들이 속되고 부정하다고 판단한 것들이 깨끗하고 거룩된 것이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세상에 오심 이후부터 깨끗하고 부정한 것의 구별이 없고 이방인과 선민이라는 구별도 파기되었다(고전 10:26).

성 경: [행10:17]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 '의심하더니'로 번역된 '디아포레오'(*)는 본래 출구가 없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태를 의미하며 공동번역은 이 단어를 '어리둥절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함이 분명하다.

⭕ 마침 - 이 말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시각을 알 수 있는 단서로 베드로가 환상을 본 직후 도착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각이 베드로의 기도 시작 시간인 정오였는지(92절) 아니면 정오가 지난 어느 시간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성 경: [행10:18]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우거하느냐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제타이'(*)는 '거주하다'는 의미와는 달리 손님으로서 잠시 유숙(留宿)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베드로는 피장 시몬의 집에 오랫동안 머문 것이 아니라 손님의 자격으로 잠시 머무른 것 같다.

성 경: [행10:19]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 - 이 말은 17절의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베드로는 자신이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깨닫고자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 비록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 있지도 않았으며 기도하고 있지 않았으나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무런 제한없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누가는 그 음성이 설명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면서 조금 전의 환상과 구분시키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초기 사도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 베드로를 찾는 이들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라면(17절) 두 명이 아니라 두 명의 하인과 한 명의 종졸을 포함해서 모두 세 명이어야 하는데(7절) 여기서는 두 명이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베자 사본(D)에서는 숫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사본 (*, A, C, E)에서는 '세 사람'이라고 언급하는데 본문은 바티칸 사본(B)을 따라 두 명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두 명이란 표현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된 두 명은 고넬료의 직접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두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을 호위한 종졸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 경: [행10:20]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 내려가라는 성령의 지시는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간 후 아직 내려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령은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유없이 무조건 두말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암시한다.

⭕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 고넬료로 하여금 하인을 베드로에게 보내도록 지시한 이가 4절에서는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들로 묘사된 반면 여기서는 성령으로 언급되었다. 따라서 천사와 성령이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4절의 천사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로서 묘사되지만 본절의 성령은 환상 중이 아니라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결코 동일한 표현으로 볼 수 없다. 특히 본절에서 '내가'(*, 에고)가 강조됨으로써 그 음성의 주제가 하나님이심을 부각시키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성령'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성 경: [행10:21]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무슨 일로 왔느냐 -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에 담긴 의미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 다른 말보다도 제일 먼저 그들이 온 목적에 대해서 물었다. 이로 보아 아직도 베드로는 환상과 두사람의 방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행10:22]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의인이요 -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인은 율법 준수의 기준에 따라 구분되었다(Lenski). 그런데 고넬료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도 아니고 더욱이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의 군인이기에, 그에게 붙여진 의인이라는 말은 매우 파격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인이라는 표현을 유대인들이 고넬료에게 직접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두 하인이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비록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회당 예배에 참석했다는 전제하에서(2절 주석 참조) 유대인들에 의해 고넬료의 경건한 삶이 인정되었을것이며, 그에 따라 그는 의인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 베드로와 대면한 고넬료의 하인들은 먼저 자신들을 보낸 주인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 소개의 내용 중 유대 온 족속들이 고넬료에게 하고 있는 칭찬을 언급한 것은 베드로가 유대인이므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고넬료의 인물됨에 대해서 2절에 언급되었으나 본절과 같은 칭찬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인들이 베드로를 설득시키기 위해 특별히 언급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강조되는 점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4절에서 언급되었던 '천사'(*, 앙겔로스) 앞에 '거룩한' 명령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지시하다'라는 말에 헬라어 '크레마티조'(*)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 '에크레마티스데'(*)가 사용되어 고넬료가 받은 지시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명령이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베드로로 하여금 깨우쳐 주고 있다.

⭕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타'(*)는 생동감 있는 말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은 베드로의 설교뿐 아니라 간증이나 예수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증언 등을 포괄하고 있다.

성 경: [행10:23]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베드로가 불러들여 - 방문객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후 그들을 집 안으로 영접한 베드로의 행위는 그 방문객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즉 베드로가 그들의 말을 신뢰하였다는 뜻과 함께 이방인을 한형제로서 용납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시몬의 집으로 영접한 것은 아직 이방인과의 접촉이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 비추어 보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으므로 그렇게 행동한것 같다.

⭕ 유숙하게 하니라 -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함께 잠을 자게 한다는 사실은 당시에 매우 반 유대교적 행위로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1:1-3). 그럼에도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되어 이제 무할례자인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가 그들을 유숙하게 한 것은 그들이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므로 다시 가이사랴까지 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본절의 핵심은 이방인을 전적으로 용납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다.

⭕ 욥바 두어 형제 - '두어'로 번역된 부정대명사 '티네스'(*)는 확정되지 않고 또한 많지도 않은 수효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런데 11:12에서 여섯 명이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서 언급된 형제는 세명이 분명하다. 이 표현상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누가는 본절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11:12은 베드로의 고백의 입장에서 기록되었으므로 베드로의 고백 부분에서는 정확한 숫자가 언급되어 그 고백의 사실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누가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므로 정확한 숫자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 욥바에서 세 사람이 베드로를 동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본문에서 명백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1)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그 세사람이 목격하고 증인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 (2) 아직도 고넬료가 보낸 사람의 신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드로가 그들과 동행하게 되어 혹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성 경: [행10:24]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 본 구절에서 구체적 도착 시간은 언급되지 않고 욥바로부터 출발한지 이특째 되어 가이사랴에 도착했다고 언급되었다. 그런데 30절에 따르면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했던 그때와 어느 정도 일치함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후 3시를 전후해서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것이다.

⭕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 이는 고넬료가 환상을 굳게 믿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동시에 형제 사랑과 신앙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여준다. 만약 그에게 그 사랑과 열정이 없었다면 자기 가족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친족과 친구들까지 초청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했으며 함께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고자 원했다.

성 경: [행10:25]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베드로가 들어올 때 -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이한 장소가 고넬료의 집인지 가이사랴로 들어가는 어귀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어떤 사본(D)에서는 베드로가 도시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24절의 정황으로 보아 집으로 들어올 때라고 보는 것이 정황으로 보아 집으로 들어올 때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Haenchen).

⭕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고넬료가 베드로를 마중할 때 보여준 자세는 마치 신적인 존재나 로마 황제를 대하는 듯하였다. 이는 당시에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보여주며 또한 고넬료의 겸손하고 순수한 성품을 나타낸다. 특히 고넬료가 베드로를 대할 때 신적인 권위 앞에서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베드로를 환상 중에 경험한 천사의 말과 관계된 사람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절 참조).

성 경: [행10:26]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나도 사람이라 - 고넬료의 행위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신적 권위를 사양하며 동등한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겸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있으나 한편으로는 사도와 일반 성도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고넬료가 로마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배 행위가 로마인들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성 경: [행10:27]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 누가는 이표현을 통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음을 강조하려 했을것이다. 즉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 지니고 있던 배타적 우월감을 버리고 15절에서 지시한 주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을 한 형제로 용납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17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한 환상의 의미에 대해 고심했지만 지금은 그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10:28]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위법인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 고넬료 집 안에 모여 있는 고넬료의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24절)을 향해 베드로는 자신의 방문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언급하고 있다. 즉 신 7:3, 4규정을 확대 해석하여 모든 이방인과의 교제를 죄악시하고 이방인들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식품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대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베드로 자신의 고넬료집 방문은 유대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넬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가 일종의 모험임을 강조했다.

성 경: [행10:29]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 여기서 언급된 '사양치 아니하고'라는 단어 '아난티르레토스'(*)는 직역하면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없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해 준다.

성 경: [행10:30]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나흘 전 이맘때까지 -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한 날로부터(3절)나흘이 지났음을 밝히고 있는데, 고넬료의 하인들이 이틀만에 욥바에 도착하였고(9절) 욥바서 하루를 묵고(23절)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 걸려 도착하였으므로 3박 4일이 지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흘'이란 표현은 타당하다.

⭕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 본 구절은 3, 4절에 언급된 천사에 대한 묘사로 70인역 자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희고 빛난 옷은 거룩한 천사의 옷으로 자주 묘사된다(1:10;마 28:3;막 16:5;눅 24:4).

성 경: [행10:31]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들으시고...기억하셨으니 - 4절과 내용상 같다. 다만 4절보다 간략하게 진술되고 있을 뿐이다. 용어상의 차이로 4절에서는 '상달하여'가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들으시고'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미상 아무런 차이는 없다.

성 경: [행10:32]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베드로...우거하느니라 - 이 부분의 헬라어 본문은 세 가지로 읽혀지고 있다. (1) '바닷가'란 말이 생략되었다. (2) '바닷가' 다음에 '와서 너에게 말할 자'(*, 호스파라게노메노스 랄레세이 소이)가 첨가되어 있다. (3) 개역성경과 같은 독법을 취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본들은 (2)의 독법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청하라'는 말속에 (2)의 첨가된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는 앞의 사건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2)의 독법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3)의 독법이 가장 무난하다.

성 경: [행10:33]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고넬료와 베드로의 상면]

⭕ 하나님 앞에 - 본 구절이 사본에 따라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 있다. (1) '하나님 앞에, 대부분의 사본이 이 독법을 취한다. (2) '주님 앞에', 몇몇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3) '당신 앞에', 서방 사본과 역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3)의 독법에 따르면 베드로의 권위가 강조되지만 (1)과 (2)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지닌 고넬료의 모습이 강조된다. 특히 '하나님 앞에'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여호와 앞에서'와 함께 자주 사용되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순종과 경건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구절에서는 '하나님 앞에'가 가장 무난하다.

성 경: [행10:34]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베드로가 입을 열어 - 빌립이 이방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할 때(8:35), 또는 산상 설교에서 예수가 설교를 시작할 때(마 5:2)처럼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곧이어 언급될 이야기의 권위와 잔중함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선언하는 중대한 선언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신 10:17의 인용구로 짐작된다. 여기서 언급된 '외모'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과 종교적 제의와 관습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형식적인 경건주의를 상징한다.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외형적 구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성 경: [행10:35]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 - 이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선민의식과 같은 배타적 우월감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받을 대상의 범위가 온세상 사람으로 확대된다. 한편 본절의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인데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영접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 깨달았도다 - 헬라어 본문에서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보여진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여 이제 분명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10:36]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 베드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사용하던 칭호를 예수에게 사용하면서 이제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 예수를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만유'(萬有)는 헬라어로 중성과 남성 모두에 해당되어 '세계 만물' 또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만유'를 '모든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만유'를 '모든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Haenchen, Bruce). 이는 롬 10:12의 '모든 사람의 주'란 표현과도 일치한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만민'(萬民)으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만유'를 '만민'으로 해석해야 할 정당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만유'로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이 '만유'란 표현은 모든 피조물을 지칭하므로 '만민'이란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 베드로는 평화를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으로 본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뜻한다(Haenchen). 과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심판하는 자와 죄인의 관계였으므로 화해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롬 5:10, 11). 또한 이 평화는 사람간의 평화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엡 2:14, 2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있으서, 그동안 그 둘을 가로 막았던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민족적 편견과 편애가 없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성 경: [행10:37]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 예수가 선포했던 평화의 복음은 요한의 세례에서 부터 출반된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언급된 '그 세례'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예비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앞서 세례요한을 언급했던 것이다.

⭕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 본 구절이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지역에 대한 설명인지 아니면 예수의 출생에 대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36절에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란 표현이 사용된 점으로 비추어 보아 본 구절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 두루 전파된 그것 - '전파된 그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게노메논 레마'(*)는 '되어진 말씀'으로 직역될 수 있다. 이는 이미 예수를 통해 온 지역에 전파된 말씀으로 앞에서 언급된 '화평의 복음'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여기서는 비록 '말씀'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이 말씀 속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말씀 외에 행하신 표적도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통해 나타난 계시는 말씀에 의한 것과 행위에 의한 것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행10:38]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 누가는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함께 예수를 언급하여 그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실을 강조했다. 한편 누가는 역사적 예수가 수행하신 모든 언행에 대한 권위를 언급하려는 의도로 본문을 서술했다. 즉 앞절에서 언급한 '그것'은 나사렛 예수의 언행과 일치하는 것이고 나사렛 예수의 언행은 하나님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가 행했던 모든 언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받게 됨을 보여준다.그래서 누가는 본절 마지막에 '이는 하나님의 함께 하셨음이라'고 덧붙여 놓았다.

⭕ 착한 일을 행하시고 - 이에 대해 혹자는 헬라적인 의미에서 백성들에게 은인으로 인정받는 군주에 대한 암시를 주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Haenchen). 즉 군주가 백성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애정으로 도움을 베풀어 줄 때 헬라인들은 그 군주를 향해 선한 일을 행한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군주를 자신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의 통치자적인 모습을 연상하면서 착한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선하신 본질을 지니신 예수가 행하신 일에 대해서 유대적인 윤리 개념으로 진술했을 뿐이다.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예수의 기적 행위를 치유의 행위로 연결시켜 모든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것 즉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이 모든 능력을 하나님이 함께하는 증거로 말하여 예수의 모든 언행을 하나님의 권위로 정당화하여 설명하려고 한 것 같다(2:22).

성 경: [행10:39]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우리는...모든 일에 증인이라 - '우리'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 동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아마도 열 두사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 즉 역사적 목격자이며 동시에 그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선언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예수는 온 인류를 우해 죄에 대한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리고 이 저주는 신 21:22에 따라 나무에 달린 것 곧 십자가 지심과 깊은 연관이 있다. 5:30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고 묘사하였다. 따라서 본문은 초기 기독교의 상투적 증언 내용으로 예수의 죽음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보면서 또한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는 이중적 효과를 나타낸다.

성 경: [행10:40]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 베드로는 예수의 죽으심에 이어 부활 사건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당시 사도들의 증거 내용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본 구절에서는 부활 사건의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가 이미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교한 점을 미루어 보아(2:32;3:15;4:10;5:30) 부활이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선포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10:41]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 본 구절은 베드로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권위를 보증하려는 의도로 언급되었다. 즉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이 모든 백성에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선택한 몇몇 증인에게만 나타난 것이다. 이 표현을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사도권에 대한 배타적(排他的) 강조이다. 특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증언자로서 선택되었다는 특권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초대 기독교의 교권 중심을 사도 중심으로 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8:14 주석참조). 둘째는 부활 사건에 대한 증인이 소수였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解明)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불특정한 다수를 통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불러 세운 소수의 증인을 통해서 일하심을 밝힘으로써 소수에게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 - 부활의 증인으로 세움을 받은 사도들의 새로운 소명(召命) 체험의 시기와 사건에 대한 진술로서 아마도 눅 24:36-49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베드로는 부활 후 함께 식사를 나눌 때 주어진 예수의 명령을 부활에 대한 증언자로서 선택된 사도들의 소명의식으로 이해했다. 초대 기독교에서 사도의 권위에 대해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은 본서에서 사도권에 대한 계속된 강조 속에 암시되어 있다(1:2;2:42; 4:35-37;5:12, 41;6:6). 본절 역시 사도권에 대한 정당성과 그 권위를 강조하려는 변증적 입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 경: [행10:42]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 지금까지 베드로는 세상에 오신 메시야의 사역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세상 마지막 날 수행하실 그의 사역에 대해 진술한다. 이는 초대 기독교 인들의 고백으로서 부활하신 예수가 장차 종말적 심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다.

⭕ 증거하게 하셨고 - 베드로는 앞에서 언급된 내용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증언 내용을 정당화하며 증언의 권위를 부각시키고 있다.

성 경: [행10:43]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베드로의 말씀 증거]

⭕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 이 내용은 이미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3:18,19;사 33:24;53:5;렘 31:31-34;49:6;눅 24:46, 47).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설교의 내용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사함이 선포됨으로써 베드로의 설교가 종결되면서 복음이 사람에게 끼치는 결과가 핵심적으로 진술되었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짐으로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죄 문제가 해결됨을 선포했다.

성 경: [행10:44]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성령 세례]

⭕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 본절로 미루어 보아 성령 강림(降臨)의 시점이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뒤라기보다는 성령 강림으로 인해 베드로의 설교가 중단된 듯한 인상을 더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표현이다. 당시 성령의 임재가 곧 기독교인됨에 대한 징표로 여겨졌지만(8:14-20), 무엇보다 본문의 사건은 안수나 세례 없이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점이 처음 성령 강림의 때와 유사하다. 이는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성령의 임재가 어떤 의식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이들이 이방인들이었다고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려고 기독교인의 어떤 집회에 참여했다는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성령은 인간이 같춘 어떤 조건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활동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이로써 이방인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이 확실하게 제시되었다. 한편 여기서는 2:2-4과 같이 성령이 강림함을 객관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어떤 묘사가 없지만 46절에서는 방언을 말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점이 유일한 성령 강림의 외적 증거로 묘사되어있다. 이는 고넬료의 가정에도 2:2-4와 같은 현상이 있었느나 누가가 자세한 묘사를 생략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행10:45]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성령 세례]

⭕ 할례받은 신자들이...놀라니 - 본절은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유대인들의 절대적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을 묘사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할례받은 신자들이란 여기서 정통 유대인을 말하며 욥바에서 베드로를 따라 동행했던 자들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놀람은 구약 시대에서부터 시행된 할례 의식을 통하지 않고 이방인도 구원의 경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 같은 장면 묘사는 첫째로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도 아직까지 이방인 구원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있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고 둘째로 유대인을 이방인에게 직접 임재하는 성령의 활동을 목격한 증언자로 언급하여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유대인들에게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숨어 있음을 볼수 있다. 여기서 이방인 선교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한다는 바울의 구원관이 암시되어 있다.

성 경: [행10:46]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성령 세례]

⭕ 방언을 말하며 - 오순절 사건(2:4)과 같은 현상으로 묘사되었으나 그 당시와 같은 각국 방언 현상은 아닐 것이다.

⭕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들음이러라'의 헬라어가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해서 들었다'의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이방인들에게서 계속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찬양 행위가 노래였는지 말로 표현되었는지 아니면 방언으로 찬양한 것인지는 정확히 규명할 수 없으나 베드로의 일행이 그 찬양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가능성이 높다.

성 경: [행10:47]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성령 세례]

⭕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 이방인들의 성령 받음을 베드로는 자기들의 성령받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정당화했다. 이는 이방인 전도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里程標)가 될 수 있다.

⭕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 반문 형식으로 된 본문은 강한 긍정의 대답을 전제한 어투이다. 첫째는 이미 성령을 받은 사울에게 기독교인됨의 형식인 세례 행위(8:12)는 마땅히 수행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둘째는 성령 받음은 기독교인됨의 가장 확실한 징표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어투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행위가 당시 할례자들에게 매우 문제시 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따라서 본절에서 베드로의 증언은,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재하였다는 사실이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기독교인으로 입교시키는 데 아무 하자가 없음을 보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성 경: [행10:48]

주제1: [고넬료 가(家)의 성령 강림]

주제2: [성령 세례]

⭕ 세례를 주라 하니라 - 베드로가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고 누구인지는 언급이 없지만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주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빌립이 세례를 주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8:12) 당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사도들의 고유 권한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베드로를 대신해서 세례를 베푼 자들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놀란 할례자들, 곧 욥바에서 베드로를 수행한 자들이었을 것이다(23절).

⭕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것 만큼 중요한 사실이기에 언급되었다. 왜냐하면 누가는 이방인과 사도가 함께 자고 먹었다는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으며 유대인의 의식 절차를 밟지 않고 서로 교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편 비록 본 구절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더 머물렀는지에 대해서 누가가 언급하지 않았으나, 11:1-3로 미루어 보아 그가 그곳에 머문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특히 누가는 어떤 사건이 다음에 문제시되거나 그 내용이 반복된다면 그 진술들이 상호 보충되도록 서술하는 방법을 취했다.

성 경: [행11:1]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사도들과 형제들이 - 이방인 선교에 대한 초대 교회의 논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면서 사도들과 형제들이 언급되는 것은 당시 교회 내에서 이방인 선교에 관한 논쟁이 매우 심각하게 논의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사도들'은 12사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형제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을 뜻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법 중 하나이다. 누가는 이 형제들을 `도를 좇는 사람'(9:2), `주의 성도'(9:13) `성도'(9:32,41)라고 다양하게 묘사했다.

⭕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 `말씀을 받았다'란 말은 로넬료의 성령 체험 사건(10:44-46)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당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며칠 머물렀다는 점에서(10:48)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고넬료에 관한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절은 이방인 선교에 관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시작되는 이야기의 발단이 된다.

성 경: [행11:2]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할례자들이 - 이방인 선교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로서 `할례자'들이 언급되는데 이는 `할례받은 사람들'(*, 호이 에크 페리토메스)로서 유대인을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들은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할례에 대하여 상당한 우월 의식을 갖고 있음은 무할례자에 대한 그들의 노골적 편견에서 잘 입증된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으로서 모두 할례자였다는 점에서 볼 때 여기서는 막연하게 유대 기독교인을 지칭했다기 보다는 특별히 할례를 강조하거나 유대적 전통을 자랑하는 자들로서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자들(15:5)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우월감이 잔존하여 공동체 안에서 갈등적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 힐난하여 -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방인들과 함께 하였던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 할례자들은 단순히 문제점을 제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단죄(斷罪)하여 비난하는 차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힐난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크리노'(*)가 단순히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집요하게 따지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성 경: [행11:3]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 할례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이방인으로 언급되는 무할례자와의 식사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머무는 동안의 행적이 10장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베드로가 실제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할례자들의 힐란에 대해 직접 베드로가 변명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넬료의 집에 며칠 머물면서 함께 식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할례자들이 무할례자들과 함께 식사한 것만을 이유로 베드로를 힐난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본절 이후 계속된 베드로의 변론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사실에 대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성 경: [행11:4]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 비난하여 문제를 제기해 오는 할례자들을 대하는 베드로의 자세는 매우 장중(莊重)하고 권위있는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Haenchen). 특히 본 구절에서 사용된 `설명하여'라는 단어 `여세티데토'(*)는 `선포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크티데미'(*)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어떤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분명하게 밝혀 선언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의지가 암시되어 있다(A.T.Robertson).

성 경: [행11:5]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내 앞까지 드리우거늘 - 10:11에서는 `땅에 드리웠더라'로 묘사되어 있다. 두 표현 다 내용물을 베드로가 볼 수 있게 광주리가 드리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 가지 표현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성 경: [행11:6]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들짐승 - `네 발 가진 것'에 대한 더 구체적인 묘사인 것 같다.

성 경: [행11:7]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내게 이르되 - 10:13에서 이 구절은 생략되었다. 그 이유는 본 구절이 베드로의 직접적인 진술인 반면 10:13은 누가의 간접적인 묘사이기 때문이다.

성 경: [행11:8]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 10:14에서는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니다'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성 경: [행11:9]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하늘로부터 내게 대답하되 - 10:15에서 이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 자신에게 주어진 응답을 보다 구체적으로 성명해 주며 동시에 그 응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11:11]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세 사람이 - 10:19에서 고넬료가 욥 바로 보낸 사람이 두명으로 진술되어 있으므로 본절과 숫자상의 모순이 발생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계수(計數)할 때 여자나 어린아이, 시종(노예 포함)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두 구절을 종합해 볼 때 두 사람을 수행하기 위해 시종도 함께 왔음을 알 수 있다(10:7).

성 경: [행11:12]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이 여섯 형제 - 10:23에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형제는 두어 명이었다.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과,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두어 형제를 합치면 모두 여섯 명 정도 된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1절) 자기와 동행했던 사람 모두 데리고 갔던 것이 분명하다.

성 경: [행11:14]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그가 너와 온 집의 네게 이르리라 - 10장에서 이 표현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본 구절은 천사에 의해 고넬료에게 주어진 내용을 요약하여 보다 강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0장 가운데서는 생략되었으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고넬료로부터 들은 보다 자세한 이야기 중에 본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 경: [행11:15]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내가 말을 시작할 때 - 베드로의 증언에 의하면 고넬료의 일가와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재한 때가 베드로 자신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된다. 그러나 10:34-44에 따르면 베드로의 설교가 한참 진행된 뒤거나 아니면 설교가 끝났을 때쯤이라고 언급된다(10:44 주석 참조). 여기서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시점에 차이가 생긴다. 이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의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1) 혹자는 본문의 강조점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나타난 성령 강림 현상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주장한다(Haenchen). 따라서 본문에서는 성령이 임한 시점이 언제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2)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할 때 이미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해서 설교가 끝날쯤에 오순절에 임했던 것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고넬료의 집에 있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는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성령이 주장하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듣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도 시종일관 주장하셨음을 가리킨다.

⭕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했던 말이 다시 반복되지만 여기서는 베드로가 `처음'(*, 엔 아르케)이라는 단어를 첨가시키고 있다. 즉 베드로와 사도들이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을 체험했을 때를 가리키고 있다.

성 경: [행11:16]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주의 말씀에 세례 받으리라 - 이 말은 10:47,48에서 베드로가 자신있게 이방인에 대한 세례 선언을 하게 된 숨겨진 배경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가 기억해낸 주의 말씀은 1:5에 나오는 부활한 예수의 말씀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베드로는 자기 및 다른 형제들과 이방인의 성령 체험을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예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로써 베드로 자신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사실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바 있듯이 성령 세례가 기독교인 됨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권위있는 보증임을 말해주고 있다.

성 경: [행11:17]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하나님이 주신 것과 같은 선물 -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로 이해하면서 이방인들도 사도된 자신들이 받았던 것과 동등한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체포되시기 전 하셨던 기도의 성취로도 이해된다(요 17:22).

⭕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 본문은 10:47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말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이방인을 기독교인으로 용납하고 세례를 베풀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 형제됨을 인정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못박고 있다. 그리고 또한 베드로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따름을 암시한다(5:29). 이러한 베드로의 선교 자세는 바울과 일치한다(갈 1:10).

성 경: [행11:18]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 이 표현은 베드로에게 비난섞인 공격을 하였던 자들이 베드로의 설명에 아무런 이의(異意)를 제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베드로의 설명이 그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간접 묘사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베드로에게 도전해 왔던 할례자들이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표현은 베드로가 계속하여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에 대한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행위이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돝사조'(*)는 일반적으로 `영광을 돌리다'로 번역되지만 `찬양하다'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감격으로 다가왔기에 기쁨으로 그 뜻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 베드로가 언급했을 법한 결론적 이야기를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먼저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의미에 대해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즉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 있음이 반대자들이었던 할례자들에 의해 선언됨으로써 초대 교회 안에 있어온 이견들이 통합되어 이방인 선교가 확실한 권위와 보증을 받게 되었다.

성 경: [행11:19]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 때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멘 운'(*)을 `때에'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때'로 번역될 경우 어떤 사건의 시점을 의미하므로 18절에서 언급된 사건과 시간적 연관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장을 접속하거나 이야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멘'(*)은 반의적(反意的) 의미를 연결하는 상관 접속사로서 `그러나' 또는 `한편'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운'(*)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의미나 사건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그래서' 또는 `결국'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 때에 따라서 `그러나'와 같은 반의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본절의 접속사는 앞의 사건과 시간적 연결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접속사로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한편'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 - 본 구절은 독자로 하여금 과거의 일을 회상하도록 촉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배경을 설정하고 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 후(7:54, 60) 교회에 닥친 박해(8:1-4)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9장에서는 박해의 손길이 유대땅이 아닌 다메섹까지 미쳤음이 나타나 있다. 박해의 범위가 타 지역(이방 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가리킨다. 아마 이 같은 일련의 박해로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성도들은 이방나라로까지 이주했을 것이며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박해의 손길이 그곳까지 미치게 되자 또 다시 점점 더 멀리 흩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의 박해가 복음을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한다.

⭕ 베니게 -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갈멜산과 레바논산 사이에 위치했으며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도시가 속해 있는데 이미 예수는 갈릴리 선교 당시 이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바 있다(막 7:24-30). 따라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생소한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구브로 -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하여 안디옥과 다소, 그리고 길리기아 지역과 마주하고 있는 섬으로 구약 시대에는 `깃딤'(민 24:24)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오늘에는 `키프러스'(Cyprus)로 알려져 있다. 바나바는 이 섬 출신이며(4:36)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도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13:4-12).

⭕ 안디옥- 행정 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본절의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다(13:14). 수리아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에 셀류쿠스 니카토르 1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디옥은 A.D.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 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A.D.37-41년에는 갈리굴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신약성경에서 안디옥은 외국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13:1-3)처음으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곳이며(11:26)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처음있었던 곳이다(15:1,2;갈 2:11-21). 이와 같이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지도되었고 2세기에는 이그나타우스와 데오빌로, 3,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 본산(本産)이 되었다.

⭕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본문의 의도는 1-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유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지금까지 이방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 경: [행11:20]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 구브로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 도시로서 B.C.7세기경 설립되었으며 헬라 문화권에 속한 지역이다. 또한 이곳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출신지이기도 하다(눅 23:26). 여기서 언급된 구레네 몇 사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선교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의 배타적(排他的) 우월 의식을 버렸기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 헬라인에게도 - 이 말은 19절에서 언급된 `유대인에게만'이라는 단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헬라인'을 뜻하는 헬라어 `헬레나스' 대신 `헬라파'라는 의미의 `헬레니스타스'(*)로 표현된 사본들이 있어(B, E, H, L, P)논란이 되고 있다. 즉 `헬레니스타스'라고 할 경우에는 `헬라화된 유대인' 또는 `헬라 지역에 사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 때문에(6:1)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어느 사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헬레나스'(*)를 본문으로 인정한다(Alford, Chrysostom, Knowling, Bruce, Vincent).왜냐하면 헬라파 유대인은 19절의 `유대인'이라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을 굳이 `헬라인'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헬라파로 구분할 때에는 `히브리파'와 대립하여 사용되는데(6:1) 여기서는 `유대인'과 (19절) 대립되어 사용된 점으로 보아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에 `헬라인'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헬레니스타스'라고 언급한 사본들은 19절과의 대립적 묘사를 피하고,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가 바울의 활동 이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이방 선교에 대한 바울의 공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Haenchen).

⭕ 주 예수를 전파하니 - 그들의 선교활동의 중심 내용은 예수가 `주님'임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다는 의미다.

성 경: [행11:21]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 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구약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삼하 3:12). 누가는 이같은 구약적 표현을 통하여 그들의 이방 선교 활동이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여 이방 전도의 정당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본서의 일관된 내용이기도 하다.

⭕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음을 표현하는 이 어투는 누가의 독특한 수사법이다(Haenchen). 이방인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돌아왔다'는 표현은 곧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지만 세례를 베풀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아직 교회가 조직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세례는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행11:22]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 8:14과 비슷한 이야기로 지방 교회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대표를 파견하게 된다. 사마리아에 파견되었던 대표는 요한과 베드로였으나 여기서는 바나바가 파견된다.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설교를 잘하여 바나바라는 이름이 주어졌다(4:36). 그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으며(4:37)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장본인으로 안디옥 교회의 교사이기도 하다(13:1). 또한 아디옥 교회가 확장되자 바울을 다소에서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와 가르치게 하였으며(11:26) 바울의 선교 여행의 동역자로서 바울을 돕기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여 바울을 능가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흔적이 있다(13:2;15:12)에서는 바울 이름보다 바나바 이름이 먼저 언급됨). 그는 마가를 선교 여행에 동행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바울이 반대하므로 바울과 결별을 하게 된다(15:36-39). 이처럼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했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안디옥에 바나바가 파송된 것에 대해 혹자는 당시 모든 사도들이 베드로처럼 선교 활동에 여념이 없어 예루살렘에 부재(不在)중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Lenski). 그러나 헨헨(Hasnchen)은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아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합법화할 수 있는 전권을 행사했다고 본다.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했다면 그를 파송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부재중이었을 거라는 전자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 사람이고, 고향 사람들이 안디옥에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을 할 때 그곳에 파송받는 데는 적격자였을 것이다. 아무튼 예루살렘 교회는 지방 교회를 공인하고 합법화하는 권한을 지닌 교회임을 여기서는 암시해 주고 있다(8:14 주석 참조).

성 경: [행11:23]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21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의 개종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21절에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들어오는 것이 `주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묘사했듯이 바나바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가 `기뻐했다'는 말은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공인(公認)한다는 표현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독교 공동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 굳은 마음으로 - 이 마음은 한 목적을 향해 흔들림이 없음을 뜻한다. `굳은'으로 번역된 `프로데세이'(*)는 본래 여러 사람 앞에 차려놓고 진열하는 것을 뜻하며(마 12:4;막 2:26;눅 6:4;히 9:2) 또한 `계획, 결의,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하듯 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라는 말이다.

⭕ 주께 붙어 있으라 - 이 말은 초기 기독교의 메시지로 예수를 삶의 중심이 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가 모든 삶의 원리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모든 종교적 율법과 유대교적 전통들로부터 자유하여 예수에게로 돌아오고 오직 예수만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성 경: [행11:24]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 바나바에 대한 누가의 평가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은 바나바가 선언한 23절의 내용을 정당화하고 보증(保證)하기 위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이방 기독교인을 인정한 것이 정당한 것임을 보증하고 나아가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한 것임을 암시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이다.

⭕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 바나바의 안디옥 방문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교회의 확장을 가속화시켰는데, 그 이유가 바나바의 착함과 성령이 충만한 믿음 때문임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이에'라는 말은 헬라어 접속사 `호티'(*)를 번역한 말인데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원문에서 이 접속사는 본래 본절의 처음에 나와서 큰 무리가 주께 더 나오는 까닭을 말해주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따라서 본절 전체를 직역하면,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가 된다.

성 경: [행11:25]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 9:30에서 사울이 다소로 보내진 사실이 언급된 후 처음으로 사울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가게 된 것은 환상 중에 받은 명령에 따른 것으로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17-21). 사울이 다소로 가서 머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보인다(Haenchen, Ramsay). 왜냐하면 예루살렘 2차 방문이 14년만에 이루어졌다고 사울 스스로 밝히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갈 2:1) 안디옥에서의 1년을 빼면(26절), 약 13년 정도의 시간이 남기 때문이다. 바나바가 찾아간 다소는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2.9Km의 거리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무역이 성행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계(中繼) 무역을 했으므로 헬라 철학을 비롯한 헬라 문화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은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뚜렷한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끌 수 없었고,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을 위해 부름받은(갈 1:16) 사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바나바의 모습은 9:27의 내용과 함께 사울을 초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로 등장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성 경: [행11:26]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 일 년간 모여 있어 - 바나바와 사울이 협력하여 안디옥 교회에 사역하는 기간이 일 년으로 언급되는데 그 시기가 A.D. 43-44년경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Lenski),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일 년간' 이란 표현은 아마 바울과 바나바가 부근의 일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 제자들이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이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이며 이방 기독교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이해된다. 혹자는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과 그 성격은 비유대적인 것으로서 유대적 기독교와는 구별되는 이방적 기독교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Bickermann).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안디옥에서 처음 붙여졌다는 점에서 유대 기도교와는 구준되는 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안디옥의 50만 인구 중 약 1/7 정도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 중에 유대인들이 포함되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 그리스도인 - 이 단어는 기독교인들에게 붙여진 고유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수치스럽고 간교한 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에릭 피터슨(Erik Peterson)은 로마 당국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서 유대교 안의 반정부적인 정치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가 당시 친로마적이고 로마 정부에 호의적인 방식으로 본서를 기록했다는 개론적(槪論的) 이해와 모순되기 때문에 피터슨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Haenchen). 신약에서 세 번 언급되는(26:28;벧전 4:16) 이 말은 비기독교인에 의해 붙여졌다는 의미에서 경멸적인 별명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에서 누가가 소개하는 어투를 보면 그렇기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쟁쟁한 사람이 이끄는 기독교인에 대해 수치스러운 단어를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상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로서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집단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안디옥 교회는 타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임을 인정받게 되고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교회의 설립에 대한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보존받게 될 수 있었다. 당시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헤롯당', 막 3:6)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여진 지극히 당연한 칭호였다(11:19-26 주제 강해 `그리스도인'참조). 따라서 이제 기독교는 안디옥에서 유대교와 전혀 구별되는 새롭고 독특한 종파로서 부각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구분된 종파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문제는 다음 두 가지로 고려된다.(1) 로마 제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유대교와 같은 합법적 종교가 아니라 신흥 종교(新興宗敎)로 구분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다.(2) 구약성경과의 관계성에 관한 문제다. 즉 구약 시대의 구원사를 이해하는 데 유대교와 무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실 바울은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였고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를 조화있게 연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Haenchen). 이런 점에서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sect)로 이해했다.

성 경: [행11:27]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 그 때에 - 앞에서 언급한 바나바와 사울의 활동 기간을(일 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황제는 글라우지오로 그는 A.D.41-54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에 대한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 내에 심한 기근이 여러 번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여행시에도 글라우디오가 아직 황제로 있었으며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한 것은 A.D.50-5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18:1,2). 그리고 12장에 언급된 헤롯이 죽은 시기는 A.D.44년 경이다. 만약 본서가 연대적인 순서를 철저히 따른 기록이라면 본 구절의 `그 때'는 A.D.44년을 넘지 않는다. 특히 12:25에서 언급된 대로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扶助)의 일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시점과 헤롯의 사망 시기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절은 A.D.44년경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흉년 이전의 어느 때를 가리킨다.

⭕ 선지자들(*, 프로페타이) - 본서와 바울 서신에만 언급되고 있는(13:1;15:32;21:9,10;롬 12:6;고전 12:10;13:2,8;14:6;살전 5:20) 이들은 초대 기독교에서 영감있는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성경에 관해 가르치고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예언을 하기도 하며(롬 12:6;고전 12:10) 사도 다음으로 중요한 직분으로 인정받았다(고전 12:28;엡 2:20;4:11).

⭕ 예루살렘 이르니 -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오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28절에서 예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흉년에 대한 예언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흉년을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요청하기 위해 그들이 안디옥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당시에 있었던 헤롯의 박해(12:1)를 피해 이 곳을 찾았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성 경: [행11:28]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 아가보 -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아가보는 유대 출신 기독교인으로 보인다. 그는 두 가지를 예언한 것으로 본서에서 언급되는데 본문 외에 21:10, 11에서 사울의 투옥에 관하여 예언하였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성취되었다.

⭕ 성령으로 말하되 - `말하되'로 번역된 `세마이노'(*)는 `표시하다',`지시하다', `알리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신탁(信託)을 전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Haenchen). 특히 이 동사의 명사형 `세메이온'(*)은 요한복음에서 `표적'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세마이노'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을 나타냄을 암시한다.

⭕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 이 말은 과장된 표현이다. 그 당시 개별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 전승은 있으나 세계 전역은 아니었다. 특히 46-48년 사이에는 팔레스틴에 큰 기근이 있었지만 역시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Haenchen). 누가는 당시 로마 제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지역을 `천하'라고 했다. 특히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 헌금한 점으로 비추어 보아 아가보가 예언한 흉년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극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본절의 흉년은 A.D.46-48년 사이에 있었던 팔레스틴 지역의 큰 흉년을 지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흉년은 A.D.46년 이전과 관련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 글라우디오(Claudius) - 그는 헤롯 아그립바 1세(12:1)의 정치적 세력을 배경으로 등극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폈으나 말년에 가서는 유대인들의 종교 집회를 금지아였을뿐 아니라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기도 했다(18:2). 그리고 그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고소를 기각(棄却)시켰다(18:12). 또한 그는 황제 예배를 강요한 대표적인 로마 황제로 알려졌다. 그는 조모를 여신으로, 조부를 신으로 모시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두게 하여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성 경: [행11:29]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 유대에 사는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기근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 부조(扶助)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본래 `봉사'의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구제 헌금'의 의미로 예루살렘에서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헌금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갈 2:10), 고린도 교회(고전 16:1),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롬 15:26)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 즉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했다는 사실을 이방 교회와 유대 교회와의 우호적 관계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F.F.Bruce). 이방 교회 역시 독립된 교회로서의 위치가 확인될 뿐만 아니라 유대 교회와 동일한 기독교 공동체로서 인정된 것이다. 이제는 유대와 이방인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와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짓는 배타적 분리주의도 없어졌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유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행11:30]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 안디옥 교회가 헌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대표로 사울과 바나바가 언급된다. `손으로'라는 말은 `통해'라는 단순한 의미로 70인역에 자주 사용되었다(Haenchen). 그러나 여기서 누가는 단순히 전달된 사실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전달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강조하여 안디옥 교회의 대표성을 바나바와 사울에 두었다. 이는 이방 교회의 대표로서 바나바와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가 받아들인다면 곧 이방 쇼회가 실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로 공인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안디옥 교회에서 보내는 헌금의 수령자(受領者)가 장로로 언급됨으로써 처음으로 신약적인 의미의 장로라는 직분이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로란 생소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장로와 신약 시대의 장로는 차이점이 있다. 구약 시대의 `장로'는 성읍의 정신적, 행정적 지도자로서 백성들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 노릇을 하여 공의를 확립하였다. 이 외에도 장로는 사회 기강을 확립하는 제반 업무 및 중요한 정치, 종교, 사법적인 일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간혹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수 8:10;삼상 4:3).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신 21:1-6 주제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신약 시대에는 `장로'가 목회 임무를 수행하며(벧전 5:1-4;약 5:14) 가르치며 권면하는 일도 행했다. 일반적으로 사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후 그 교회의 대표자로 `장로'를 세웠다. 그런데 `장로'란 말이 간혹 사도들에게도 적용되기도 했다(벧전 5:1;요이 1절; 요삼 1절). 그리고 이 직분은 초대 교회 당시 `감독'의 직분과 별 구분이 없었으나 후에 이그나티우스(Ignatius)에 의해 장로직과 감독직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장로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6:1-6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아무튼 본절에 언급된 `장로'가 사도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6장에서 언급된 일곱 집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누가는 본서에서 사도들을 장로로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장로와 사도가 동일시 될 수 없다. 누가는 구제를 위해 선출된 집사에게 장로라는 직함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성 경: [행12:1]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야고보의 순교 및 베드로의 투옥]

⭕ 그 때에 - 이야기의 무대가 다시 유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그 시점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때는 헤롯왕이 통치하던 시기이며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扶助)를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이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은 헤롯왕이 죽은 후에 방문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12:23-25). 연대기적으로는 A.D.44년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헤롯이 44년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헤롯이 44년에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Thomas Whitelaw).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이야기의 시점은 헤롯이 죽던 해 즉 A.D.44년 유월절 전후로 볼 수 있다(3절).

⭕ 헤롯 왕이 - 여기서 언급된 헤롯 왕은 헤롯 대왕(B.C.37-B.C.4)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Agrippa I, A.D.37-44)를 가르킨다. 그는 로마 황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성장했으면서도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가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권을 받게 된 것은 A.D.41년 갈리굴라(Caligula)가 암살당한 후 글라우디오(Claudio)가 황제로 즉위할 수 있도록 공헌한 데 대한 대가였다. 그는 친유대교적인 정책을 펴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본장에서 역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인을 탄압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Lenski).

⭕ 손을 들어 - 이 말은 헤롯에 의하여 기독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으로서 박해에 대한 헤롯의 직접적인 개입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박해의 손을 뻗쳐'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4:3과 5:18에도 이와 유사한 문장이 언급되는데(*, 에페발론 타스 케이라스) 체포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하반절과 2절에서 박해에 대한 구체적 진술이 나오므로 `체포하다'란 의미보다 `박해의 손을 뻗치다'로 이해되어야 한다.

⭕ 교회 중 몇 사람 - 교회, 즉 기독교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몇 사람이 박해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몇 사람이라는 말이 교회 전체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2,3절에서 언급된 대로 야고보나 베드로와 같은 몇몇 지도자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두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보면 교회에 대한 헤롯의 박해가 전체 기독교인들에게 미쳤을 것이고 또한 그는 그중 몇 사람을 체포하여 죽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박해의 대상을 몇 사람으로 언급하여 헤롯이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시범적으로 몇 사람을 체포하여 죽이거나 투옥했던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같다. 따라서 헤롯에 의해 기독 교회 전체가 핍박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 해하려 하여 - `악을 행하다' 또는 `상처를 입히고 고통당하게 하다'이 뜻의 `카코오'(*)는 70인역에서 60회 이상 사용된 단어이다(Haenchen). 본절에서 이 단어는 고통을 주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과 같이 핍박과 관련된 악행 행위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행12:2]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야고보의 순교 및 베드로의 투옥]

⭕ 요한의 형제 야고보 -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로 언급되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다(마 4:@1;10:2). 그의 아버지 세베대는 어부이면서 선주(船主)였던 것으로 보인다(막 1:20;눅 5:11). 야고보는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세 명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급하고(눅 9:53, 54) 이기적인 성격이었으므로(막 10:37) 예수는 그에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막 3:17). 그런데 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1:13)나 예수의 동생 야고보(15:13;21:18;갈 1:19)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성 경: [행12:3]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야고보의 순교 및 베드로의 투옥]

⭕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 사도 야고보를 처형한 헤롯의 행동에 대해 유대인들이 매우 흡족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묘사된다. `기뻐하다'로 번역된 `아레스토스'(*)는 `기분이 좋은' 또는 `만족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적 형용사인데 헤롯의 행위가 유대인들을 크게 만족시켰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헤롯의 이같은 행위에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고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까지 옥에 가둔 헤롯의 행위는 백성들의 반응에 자심감을 얻어 광분한 독재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 잡으려 할새 - 야고보의 참수형을 보고 기뻐하는 유대인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헤롯은 베드로까지 손을 뻗쳤다. 베드로가 제자들 중 우두머리 역할을 했으므로 헤롯은 그를 잡게 되면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를 더욱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 두개의 동사형이 함께 나온다. 즉 개역 성경에는 정확하게 그 두 동사의 의미가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 따라 본 구절을 직역하면 `추가하여 체포하다'란 의미로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는데 그치지 않고 또 다시 베드로를 체포하려 했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두 단어는 70인역에 나오는 히브리적 구문인데(창 4:2;8:12;18:29) 누가는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유대인들과 헤롯이 기독교를 박해한 공범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누가는 복음서에서와 같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유대 민족으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복음서에서 누가는 유대의 지도자 계급, 즉 사두개파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것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대 대중들도 기독교의 박해에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 때는 무교절이라 - 베드로가 체포되었던 시기가 무교절(無較節)기간임을 말하고 있는데(무교절에 관해서는 눅 22:1 주석 참조) 4절에서 언급된 유월절을 니산월 14일 저녁 유월절 식사로 제한 한다면 군사들이 베드로를 유월절이 지난 후에 백성들에게 내어 놓자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체포 시점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시점을 전후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점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니산월 14일 저녁 해지면서 15일이 시작되고 무교절의 첫날이 되며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월절을 무교절과 같은 기간으로 볼 때(눅 22:1 주석 참조)에는 정확한 시점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다만 무교절 기간 중에 있었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4절 주석 참조).

성 경: [행12:4]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야고보의 순교 및 베드로의 투옥]

⭕ 잡으매 옥에 가두어 - 이로써 베드로는 세번째로 투옥되는 셈이다(4:3;5:18). 이러한 사도들의 모습은 예수가 걸어가셨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용기있게 따라가는 모습으로 보여지기에 충분하다.

⭕ 군사(軍士) 넷씩인 네 패(牌) - 옥에 갇힌 베드로를 경비하는 군사들의 근무 편성을 소개하고 있는 본문은 (1) 베드로의 체포가 공권력에 의한 것임과 (2) 베드로가 중죄인으로 취급받았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베드로를 경비하기 위해 편성된 군인이 한 조에 네명씩으로 구성되어 모두 네 개의 조로 짜여져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루 24시간을 한 조가 6시간씩 지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Lenski). 이에 반해서 혹자는 밤에만 베드로를 지켰던 것으로 생각하여 세 시간씩 4교대로 보초를 섰을 것으로 단정한다(A.C.Hervey, 아사노중이찌). 이 외에 네일(Wiliam Neil)은 낮과 밤에 네 조가 각기 돌아가면서 3시간씩 4교대로 보초를 선 것으로 추측한다. 혹자는 이러한 주장 중 당시 로마에서 투옥된 죄수를 지키던 관습이 두번째 주장과 같기 때문에 이 견해를 지지한다(I.H.Marshall).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풀려난 사건이 밤중에 일어 났으므로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아무튼 두 명은 묶인 죄수 옆에서, 두 사람은 옥문 밖에서 지켰을 것으로 추측된다(6절). 한편 이같은 근무 편성은 평소의 옥문지기보다 많은 수라고 주장하면서 이미 베드로가 탈옥한 전과가 있었으므로(5:19) 병력을 증가시켰을 것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Jacquier). 그러나 로마군에서는 4명이 한 조가 되어서 세 시간씩 근무를 했다는 점에서 볼 때(Haenchen) 헤롯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도 그에 준했을 것으로 보는 편이 가장 무난하다.

⭕ 유월절 후에 - 베드로를 백성 앞에서 공개 재판하기로 작정한 날로 언급된 유월절 축제는 눅 22:1에서 언급된 바처럼 무교절과 동일시 되어 무교병을 먹는 일주일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Alford, Haenchen, Hervey). 따라서 유월절 후라면 적어도 니산월 21일 후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유월절이 유월절 식사를 하는 니산월 14일 저녁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Lenski, Zahn, Ephraem Syrus). 본문을 통해서는 이 두가지 견해의 타당성 여부를 구분할 근거를 찾아낼 수 없으나 누가가 유월절이라는 단어를 3절의 무교절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여기의 `유월절 후'는 무교절이 끝나는 니산월 21일 후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 백성들 앞에 베드로를 끌어내고자 하는 헤롯의 의도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백성들이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도 없었기 때문에 재판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Haenchen). 아마도 예수의 수난 설화(受難設話)에 맞추기 위한 저자의 의도적 편집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Loisy).그렇지 않으면 사형 집행을 공개적으로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유대인들을 만족시켰고 또한 자신도 유대인들의 기쁨에 매우 고무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2, 3절) 헤롯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베드로의 체포를 선전하고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성 경: [행12:5]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야고보의 순교 및 베드로의 투옥]

⭕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 베드로의 체포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본 구절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1) 성도들이 베드로의 체포를 교회의 위기로 판단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이미 영향력있는 사도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베드로 역시 처형될 것이라는 결론은 자명했다. 따라서 핵심적 지도자의 상실은 곧 교회의 위기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2) 교회의 단결을 볼 수 있다.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되어 뭉쳤다는 뜻이다. 즉 교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 흩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단결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는 고난 중에 있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고난 중에 해야 될 교회의 본분 중에 기도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따라서 당시 기독교인들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초능력만을 기대하는 현실도피적 신앙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불법적 힘에 맞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그것을 따른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은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의 구성상 7-11절에서 나타난 기적적 사실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즉 교회의 기도는 기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단결과 기도하는 힘은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됨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이와 같은 교훈적 의미를 초대 교회에 시사해 주기 위해 본문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것이다.

성 경: [행12:6]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베드로의 기적적 탈옥]

⭕ 그 전날 밤에 -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되면서 또다시 이야기의 시점이 언급되고 있다.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기로 작정했던 그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4절에서 유월절 후라고만 언급하였기 때문에 유월절이 끝나는 바로 그 다음 날인지 아니면 막연하게 유월절이 지난 어느 날을 가리키는지 정확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헤롯이 잡아내려 했다는 말을 볼 때 특정한 날이 지정되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 후라는 말은 유월절이 끝난 니산월 22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유대인의 대명절로서 그 기간 중에는 죄인에게 형을 집행하지 않는 관례(慣例)가 있었기 (마 26:5)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시점은 니산월 21일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의 날짜 계산이 저녁 해질 무렵에 하루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유월절 기간이 끝나고 22일이 시작된 날 밤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자세한 것은 4절 주석을 참조하라.

⭕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 옥에 갇힌 베드로의 모습에서 두 가지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상황이 탈출이나 구출을 엄두도 못낼만큼 삼엄하고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베드로의 양 옆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병사 두 명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장면 묘사는 도저히 베드로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는 이 다음에 진술되는 베드로의 구출에 극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2) 베드로 자신도 탈출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그가 잠자고 있었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다(Bauernfeind). 이같은 장면에 대해서 베드로가 자신의 처형 날짜가 다가왔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고 전제하면서 베드로의 침착성과 경건성이 강조될 수도 있다.그러나 누가는 문맥상 강조점을 베드로가 탈출에 대한 의사도 없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함으로써 베드로를 탈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두고 있다. 한편 베드로가 두 군사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진술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 베드로가 양 옆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고 그 옆에서 두 군사가 지키고 있다. (2) 베드로를 묶고 있는 두 쇠사슬은 각각 양편의 군사와 함께 묶여 있다. 베드로에 대해 철저히 감시하려 한 헤롯의 의도로 보아 두번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 감방 안에서도 두 사람의 경비병이 있고 문 밖에서도 두 사람 이상의 파수꾼이 지키고 있다는 것은 역시 베드로의 상황이 탈출이나 구출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임을 강조한다. 이로써 누가는 베드로를 구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극적으로 고조시켜 준다.

성 경: [행12:7]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베드로의 기적적 탈옥]

⭕ 주의 사자 -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늘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누가는 `하나님의 사자'(10:3) 또는 단순히 `천사'(10:4,22;12:8)로도 묘사하고 있다. 주의 사자가 나타난 것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5절) 하나님의 응답을 암시하며 한편으로는 베드로의 구출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을 의미한다.

⭕ 광채가 조요(照耀)하며 - 환한 빛이 감방을 비추었는데(공동번역) 이같은 묘사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그 영광이 임함을 표현하는 전통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마 28:8;눅 2:9;24:4).

⭕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 천사는 베드로를 깨우기 위한 수단으로 베드로의 옆구리를 쳤는데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파타쏘'(*)는 `친다', `때린다' 외에 `때려 눕힌다'(strike down) 또는 `죽인다'(slay) 등으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천사가 베드로에게 세찬 충격을 준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깊은 잠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주는 듯하다(A.T.Robertson).

성 경: [행12:8]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베드로의 기적적 탈옥]

⭕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 이 명령은 계속 강조되고 있는 사실 즉 베드로 자신에게는 탈출하려 하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베드로가 허리띠를 풀고 신까지 벗어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증명된다. 당시의 복장은 반드시 허리띠를 띠어야만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 산달리아)는 나무나 가죽으로 밑바닥을 만들어 가죽끈을 이용해서 발목에 메는 것이었으므로 벗었다가 신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편안한 상태에서 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천사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베드로의 모습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베드로의 구출이 계획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성 경: [행12:9]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베드로의 기적적 탈옥]

⭕ 참인줄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 여기서 언급된 `환상'은 바로 앞의 `참'과 대조되는 단어로서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이 아닌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Haenchen).이같은 묘사 역시 베드로에게는 스스로 탈출하려는 계획이나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도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의 구출 사건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행12:10]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베드로의 기적적 탈옥]

⭕ 성으로 통한 쇠문 절로 열리는지라 - 성으로 통하는 쇠문은 `거리로 통하는 철문'을 의미하는데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도시 또는 시내로 향한 것을 뜻한다. 또한 쇠로 된 문이란 매우 육중하고 함부로 열 수 없는 견고한 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절로 열리는지라'는 말과 대조되어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헤롯이 베드로를 성 중에서 가장 견고한 감옥에 구금(拘禁)했음을 의미한다.

성 경: [행12:11]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베드로의 기적적 탈옥]

⭕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알겠노라 -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정신을 차렸다는 말은 곧이어 언급된 ` 알겠노라'와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구출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2) 9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이 구출되고 있는 사실을 환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환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본문의 전체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두번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베드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아해 하면서 천사를 따라 나온 후 천사가 떠나버리자 자기가 감옥 바깥에 확실히 나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환상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사건의 전모에 대한 의미를 깨닫기 전에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심리 상태를 묘사해 준다. 베드로는 자신이 당한 일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먼저 놀라운 사건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인식해야 했다. 그 다음에 그는 자기가 왜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어야 했는지 알게 되는 인식의 과정을 거쳤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오이다'(*)는 경험적인 지식에 주로 사용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적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베드로가 정신이 들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성 경: [행12:12]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베드로의 기적적 탈옥]

⭕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 베드로가 감옥으로부터 구출되어 처음으로 찾아간 집을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마리아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라는 요한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요한의 이름이 당시 독자들에게 지명도(知名度)가 높은 이름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이며(골 4:10) 바울과 바나바의 보조자이며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다. 이는 바울이 로마식 이름이고 사울이 유대식 이름인 것과 동일하다. 그는 바울의 제1차 여행때 바나바와 바울과 동행하였는데(12:25;13:5) 2차 여행 때 그의 동행에 관한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기도 한다(15:37,38). 또한 1:13이하에 언급되는 다락방이 본문과 동일한 장소라고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제자들이 수시로 모였던 것 같다.

⭕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 5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성도들은 베드로가 체포된 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베드로가 구출되어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본절에는 미완료 동사와 분사형이 함께 사용되어 끊임없이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강조되었다.

성 경: [행12:13]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놀라는 무리들]

⭕ 대문 - 혹자는 베드로가 찾은 이 집이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본체로 들어가는 큰 집이라고 주장한다(hAENCHEN). 그 근거는 `대문'에 해당하는 `퓔론'(*)이 주로 `행랑의 대문' 또는 `궁전의 큰 대문'을 의미한다는데에 있다. 마가의 다락방이 1:13에 언급된 것과 동일하다면 그 집은 상당히 큰 규모였을 것이며 정원도 지닌 집이었을 것이다. 한편 대문이 잠겨 있는 것은 일상적일 수도 있으나 헤롯의 박해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 계집 아이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스케'는 `계집아이' 또는 `처녀' 외에 `하녀'도 의미한다. 이는 요 18:17에서 대제사장의 여종 곧 문 지키는 여종에게 동일하게 적용된 용어다. 따라서 본절에서 `파이디스케'는 단순히 계집아이가 아니라 큰 집의 문간방에 거하면서 손님이 왔을 때 문을 열어 주는 `하녀'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 영접하러 - 이 말의 헬라어 `휘파쿠오'는 주로 `칭송하다' 또는 `따르다'의 의미로 사용되며(롬 6:16;엡 6:5;골 3:22;살후 1:8) 간혹 `열다'로도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 경: [행12:14]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놀라는 무리들]

⭕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 로데가 얼굴을 보지 않고서 음성만 듣고 베드로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에 자주 왔음과 그 가족들과 친밀한 관계였음을 시사해 준다.

⭕ 기뻐하며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 너무 기뻐서 문여는 것조차 잊고 안으로 달려가는 로데의 모습은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기적의 의외성(意外性)을 보여준다. 즉 그녀의 행동은 베드로가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15절에서 로데의 증언을 듣고서 `미쳤다'고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당시 그 집에 모인 성도들은 사도 야고보가 순교당하고 베드로조차 투옥되어 핍박자의 손길이 자기들에게도 미치리라 생각하여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함께 기도했었다. 그러던 차에 베드로가 나타났으니 기쁘기도 하며 놀랍기도 했을 것이다.

성 경: [행12:15]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놀라는 무리들]

⭕ 네가 미쳤다 - 그들의 반응은 로데의 진술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즉 그들은 베드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무시했다. 베드로가 투옥된 후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던 그들의 모습과 본절에서의 반응이 매우 상반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이 불신앙에 근거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너무도 뜻밖의 소식을 접했기에 그들은 로데가 잘못 본것으로 여겨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 힘써 말하되 - 이 표현은 성도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로데가 자신의 진술이 진실됨을 강하게 강조하는 만큼 성도들의 부정적인 반응도 그만큼 컸던 것이다.

⭕ 그의 천사 - 이 말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수호 천사를 말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당시 각 개인을 지켜주는 수호 천사가 있다고 믿었다(창 48:15,16;단 3:28;6:22;마 18:10;히 1:14).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천사가 찾아와 베드로의 죽음을 전해주는 것으로 오해하였을 가능성도 있다(Lenski). 그들이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베드로 체포 직전에 야고보가 참수형(斬首形)을 당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인 있을 것이다.

성 경: [행12:16]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놀라는 무리들]

⭕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 현재분사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장면묘사는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17절에 베드로가 급히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점(17절)과 병사들의 소동(18절)이 베드로에게 닥친 상황의 긴박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성 경: [행12:17]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놀라는 무리들]

⭕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 베드로의 출현으로 사람들이 기쁨과 놀라움으로 흥분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손을 흔들어' 조용히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자신의 구출이 헤롯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구출될 당시는 한밤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6절) 아직 아무도 베드로의 구출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출현이 알려져 또다시 체포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이같은 조치를 취했을 수 있다. 그는 오래 머물수 없는 위급한 상황임을 직시하고 곧 떠나야 할 마음 때문에 같이 기뻐할 겨를도 없이 먼저 자신의 구출 경위를 증언하기 위해 조용히 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가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12사도 중의 하나인 알패오 야고보라는 설도 있으나(Calvin,Bengel) 대체적으로 모든 주석가들은 예수의 동생 야고보로 보고 있다(Alford, Meyer, Lumby, Knowling, Lenski, Hervey). 여기서 언급된 인물은 당시 지명도가 높은 유명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을 맡게 될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적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15:13:21:18;고전 15:7;갈 1:19;2:9,12). 그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때로는 비난했던 적이 있으나(요 7:2-5) 그의 변화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1:14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초대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15:12-21). 이와는 달리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 베드로는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행선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즉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과 클레멘트(Clement)의 설교에 근거하여 베드로의 행선지가 로마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의 기록 자체가 별로 신빙성이 없고 오히려 로마 교회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주장이 대두된 듯하다. 특히 이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했으며(A.D.44)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도 그곳에 있었다(갈 2:9). 따라서 베드로가 이후에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교회를 일으켰다는 카톨릭 신학자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본다.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지지되는 지명은 안디옥으로 꼽히고 있다(Haenchen). 그러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베드로는 헤롯이 죽은 후(12:23) 예루살렘 회의 때 돌아오게 된다(15:7).

성 경: [행12:18]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놀라는 무리들]

⭕ 날이 새매 -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마가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감으로써 일단락되고 여기서는 이야기의 뒷마무리가 묘사되고 있다. 날이 밝아오는 아침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베드로의 구출 사건은 간밤에 감쪽같이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점은 구출 사건이 한밤중이었다면 왜 아침까지 군사들이 몰랐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 군사들이 천사에 의해 깊은 잠에 빠졌거나 날이 샐 동안 베드로가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시점은 4-6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 날 즉 헤롯이 베드로를 유대인들 앞에 끌어내려고 작정해 둔 날이었다.

⭕ 적지 않게 소동하니 -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적지 않게'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이는 본서에서만 나타나는 누가의 독특한 용법이다(15:2;17:4,12;19:23,24). 이는 소동하는 정도가 매우 심했음을 강조해 준다. 한편 `소동하니'란 말은 어떤 문제가 야기되어 그 문제로 인해 야단법석이 난 상황에 적용된다. 아마 군사들은 근무 교대 시간에 이르러 베드로가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여 서로 놀라고 당황하였을 것이며 곧 그 사실을 헤롯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에 헤롯 궁전 안에는 큰 혼란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12:19]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놀라는 무리들]

⭕ 심문하고 - 여기서 언급된 법정 용어 `아나크리노'(*)는 `심문하다', `질문하다' 또는 `조사하다'는 뜻 외에 `심판하다'와 `책임을 묻다'의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문책(問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죽이라 명하니라 - 베드로가 없어진 것에 대한 결과로 파수꾼들이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1) 베드로의 구출이 헤롯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11절에서 베드로를 구출하는 주님의 뜻이 헤롯을 실망케 하려는데 있음을 베드로가 깨닫는 장면을 통해 이미 암시되었다. (2) 베드로가 옥에 그대로 있었다면 야고보의 경우처럼 처형당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즉 헤롯이 파수꾼들을 처형시킬 정도였다면 그가 베드로를 체포한 것이 어떤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였음을 시사한다.

⭕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4Km 지점에 있는 지중해 연안 항구 도시로서 고넬료가 있었던 곳이며(10:1) 로마 총독의 관저(官邸)가 있는 곳으로 팔레스틴의 로마 행정 중심 도시이다. 헤롯이 갑자기 가이사랴로 내려간 이유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헤롯이 가이사랴로 내려갔다는 것은 헤롯의 박해가 사실상 실패했음을 시사한다. 가이사랴가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곳이기는 하나 헤롯 안티파터(Antipater)에 의해 건축되었으므로, 헤롯 왕가는 그곳에 거할 장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본문에 언급된 헤롯 아그립바(1세)는 기습된 베드로의 탈출을 경험하고 박해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는 유월절 절기가 끝난 상황이므로 그느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쉬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가이사랴가 예루살렘보다 북서쪽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가다'로 표현된 것은 위치의 표현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기인한다. 즉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가면 `올라간다'고 표현하는 반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방향이 어디든지 상관없이 `내려간다'고 표현한다.

성 경: [행12:20]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헤롯의 죽음]

⭕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 헤롯은 보복 조처로 시돈과 두로 지방에 대해 아마 식량 공급을 중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로와 시돈은 솔로몬 시대 이후(왕상 5:9;스 3:7) 식량을 유대지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성 경: [행12:21]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헤롯의 죽음]

⭕ 헤롯이 날을 택하여 - 앞절과 연관하여 볼 때 아마도 이 `날'은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절단과 `평화 조약 체결'을 발표하는 날이었던 듯하다(Haenchen). 이와 달리 여러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글을 인용하여 이 날이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영국에서 돌아온 승리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경기일 둘째날이었다고 말한다(Lenski, Whitelaw, H. Marshall, Bruce). 요세푸스가 묘사한 당시의 장면은 21-23절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므로 이보다 더 정확한 근거가 없는 한 부정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주가가 다음절과 아무 연관이 없는 한절을 삽입시켰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헤롯은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정하였던 것이고, 이와같은 축제일을 기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사절단이 헤롯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헤롯은 은으로 만든 빛나는 옷을 입었으며 그 옷이 햇빛에 빛나자 아첨꾼들이 그를 신으로 추대하여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 백성을 효유(曉諭)한대 - `효유하다'란 말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한다는 의미다. 이는 어떤 공식적인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백성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아우투스'(*)는 직역하면 `그들에게'라고 해야 한다(새번역, 현대인의 성경,KJV, NASB, RSV,JB, LB). 그런데 지시대명사의 성격상 앞에서(20절) 언급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Haenchen). 하지만 22절에서 헤롯의 연설에 반응을 보인 것은 `군중'을 뜻하는 `데모스'(*)이다. 이는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축제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헤롯은 경기일 둘째날 모여든 모든 군중들을 향해 승전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을 것이다.

성 경: [행12:22]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헤롯의 죽음]

⭕ 이것은 신의 소리요 -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대개의 경우 모든 자연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신들의 질서는 인간 세계와 밀접하며, 범상하지 않은 사람은 신으로, 기이하거나 거대한 자연 현상은 신적인 것으로 이해했다(14:11;28:6). 이와같은 범신론적인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신의 소리'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헤롯을 향해 `신의 소리'라고 외친 사람들을 대해 요세푸스는 막연히 `아첨꾼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아첨꾼들을 유대인들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비록 헬라나 로마 세계에서 범신론이 퍼져 있기는 해도 유일신 신앙을 가진 유대교는 그것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함성은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12:23]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헤롯의 죽음]

⭕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 이 말은 헤롯이 군중들이 자신을 추켜 세우는 함성을 듣고 매우 만족해 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루스드라에서 그 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대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挽留)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했던 것(14:8-18)과 매우 대조적이다.

⭕ 주의 사자가 곧 치니 - 헤롯의 불경건을 벌하기 위해 나타난 것은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 나타난 것과 같은 `주의 사자'였다. 그가 행한 것은 헤롯을 `쳤다'는 것으로 7절에서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쳤을 때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적인 힘을 가한 것이 아니라 그 사자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어떤 조치를 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요세푸스는 헤롯의 죽음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기를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5일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한다.

⭕ 충이 먹어 - 헤롯이 죽어간 과정은 벌레에 먹히어 가는 과정이었다. 어떻게 먹히게 된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의 비참한 최후를 강조하는 것이다.누가는 이같은 묘사를 통해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맞게 되는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줌으로써 독재자들이 기타 교권주의자들이 박해를 못하도록 경고하려 했던 것같다. 헤롯을 죽게 한 것이 주의 사자였다는 것은 박해자를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성 경: [행12:24]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헤롯의 죽음]

⭕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 헤롯의 비참한 최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본문은 기독교의 확장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이같은 형식의 문장은 6:7과 19:20에서도 나오는데 기독교의 거침없는 성장을 요약해 주고 있다.

성 경: [행12:25]

주제1: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

주제2: [헤롯의 죽음]

⭕ 부조(扶助)의 일을 마치고 - 본문은 문맥상 매우 이질적이다. 11:30과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사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 베드로 구출 사건과 헤롯의 죽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베드로 사건과 헤롯의 죽음 이후에 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헌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기근을 디베료 율리우스 알렉산더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발생한 것으로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점은 A.D.46년경으로 추정된다(F.F.Bruce). 그렇지만 헤롯 아그립바가 A.D.44년 죽었으므로 그들의 예루살렘 방문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과 2년 이상의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을 것이다.

성 경: [행13: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

⭕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 - 11:19-30예서 언급되었던 안디옥 교회가 새로운 이야기의 장소적 배경으로 언급되고있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 명의 교사와 선지자들이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안디옥 교회는 11:19에 언급될 당시보다 많은 성장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언급된 선지자들과 교사듸은 설립된 지 얼마되지 않은 안디옥 교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직분자들로 보인다. 한편 11:27에서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음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 언급된 선지자들에 예루살렘에서온 선지자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여기서 언급된 선지자들은 아가보와 같이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기능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목회적 직분을 지녔으므로 예루살렘예서 왔던 선지자듸을 제외한 본래 안디옥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선지자들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을 취할 경우 선지자들이 함께 언급되는 '교사들'(*, 디다스칼로이)과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허비(A.C. Hervey)는, 선지자들을 당시 교회의 정규 전도요원으로 생각하여 가르치는, 기능이 강조된 교사들과 구분시키고있다. 그리고 아사노 중이찌는 선지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은사를 구비한 사람으로 이해하여 지적인 입장에서 신앙을 변증하며 성도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구분하기도 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고전 12:28, 29와 엡 4:11에서 함께 언급되어 별 구분없이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교회 사역을 담당한 자들로 생각될수 있으나 선지자란 표현 자체가 예언과 대언(代言)의 은사를 받은 자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한편 누가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그룹 즉 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단을 언급하면서 바나바를 맨 처음에 언급하고 사울을 맨 나중에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안디옥 교회에 있어서 중심 서열 내지 신앙의 연륜에 따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바나바를 비롯하여 시므온, 루기오는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 오기 이전부터 직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11:20). 그러나 누가 선지자인지 누가교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따라서 혹자의 주장처럼 바나바와 시므온 그리고 루기오는 선지자로, 마나엔과 사울은 교사로 보는 것은(Meyer, Longenecker, Hervey) 분명하지 않다.

⭕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 니게르라는 말이 검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때 시므온은 아프리카 출신으로 볼 수 있다(Alford, Longenecker, 아사노 중이찌). 그렇다면 이 사람은 예수의 십자기를 졌던 구레네 시몬(눅 23:26)과 동일인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동일인이었다면 루기오를 구레네 사람으로 언급하면서 구레네 사람으로 더 잘 알려진 시몬을 굳이 니케레네 사람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동일인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 '젓동생'이란 같은 젖을 먹고 자란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친한 친구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표현이 헤롯과 마나엔이 서로 매우 친밀한 사이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행13: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

⭕ 주를 섬겨 금식해때 - 27:9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금식(禁食)절기를 정해 놓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를 섬겨'라는 단서를 달아 유대교적인 금식과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섬기다'는 봉사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본절예서는 예배행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라고 번역했다.

⭕ 성령이 가라사대 - 성령의 지시가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임하였는데 성령의 음성을들은 사람들은 앞절에서 언급한 바나바 외에 4명이다. 성령의 지시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선교를 위한 사역자들로 구별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지가 되며 성령의 지시로 인해 사울은 사도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 따로 세우라 - 름 1:1; 갈 1:15에서는 이 표현이 바울의 소명(召命)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특별히 사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임명받은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

성 경: [행13:3]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

⭕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 여기서 언급되는 금식 기도가 2절에서 시작되었던 금식기도와 동일한 것인지(Lenski) 아니면 2절의 금식기도가 끌난 다음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기 위하여 일종의 임명 예배를 다시 했다는 것인지(Alford, Haenchen, Hervey) 분명하지 않다. 두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특별히 정해진 예배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 따라서 2절과 3절의 진술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 안수하여 보내니라 -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按手)를 베풀고 선교사로 파송한 주체가 누구인지 본절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 1절에 언급된 시므온과 루기오 그리고 마나엔 이 세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것이다. 그 세 사람이 그들에게 안수했다고 해서 안수받은 두사람보다 직책상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는 말할수 없다. 다만 그들은 성령의 지시로 두 사람을 안디옥 교회의 대표자로 혹은 사도로 인정하는 의식을 집행했을 따름일 것이다.

성 경: [행13:4]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

⭕ 실루기아에 내려가 -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이 실루기아(Seleucia)로 내려간 것은 배를 타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안디옥은 내륙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실루기아를 외항(外港)으로 삼아야 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 서쪽 약 26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B.C. 300년경 셀류시드(Seleucid) 왕조의 첫 왕 셀류쿠스(Seleucus) 1세 니카토르(Nicator)에 의해 개항되었다.

⭕ 구브로에 가서 - 이곳은 사울과 동행한 바나바의 고향이고(4:36) 안디옥 교회구성원의 일부가 이곳 출신의 사람들이었다(11:20). 따라서 첫 선교지로 구브로(Cyprus)가 선택된 것은 바나바와 구브로 출신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 경: [행13:5]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

⭕ 살라미 - 구브로섬 동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이다. B.C. 58년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인해 상업 도시로 커갔다. 그러나 A.D. 116년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 살라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회당도 여러 곳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비록 그들은 이방인들의 사도로 전도 여행을 떠났지만 실제적으로 전도는 주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유대인들도 그들의 전도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 요한을 수종자로 - 요한은 12:25에서 언급된 마가 요한을 가리킨다. 그는 아마 두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베푸는 일을 도왔을 가눙성이 있다(Alford). 왜냐하면 바울은 전도 여행시 몇 사람에게만 직접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고전 1:14-17). 또한 요한은 두사람의 여행 경비를 관리하는 등 전도 여행 중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왔을 것이다.

성 경: [행13:6]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제1차 전도 여행 시작-구브로 전도]

⭕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 바나바와 사울의 일행은 살라미의 반대편 즉 구브로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인 바보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살라미로부터 약 180여km의 거리에 있다. 본래 바보(Paphos)는 두 군데가 있었다. 즉 한 군데는 옛 베니게의 도시이고 여기서 언급된 바보는 이곳으로부터 서북쪽 약 11km의 거리에 있는 로마령의 도시를 가리킨다.

⭕ 바예수(*, 바르예수스) - '예수의 아들' 혹은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유대식 이름이다. 바예수는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유대인으로 그의 신분은 '거짓 선지자 박수'였다. 박수(*, 마고스)는 당시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릍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여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덧불여진 점으로 보아 자칭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인 그가 그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를 보호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레 20:6) 처벌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성 경: [행13:7]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제1차 전도 여행 시작-구브로 전도]

⭕ 총독 서기오 바울 - 서기오 바울(*, 세르기오스 파울로스)에 대해서 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 더이상 알 수 없다. 그가 글라우디오 황제 때 티베르강 관리자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F.F. Bruce)도 있지만 정확한 인물 고증(考證)이 어렵다. 다만 누가의 묘사로 보아 지혜있고 유력한 통치자로 추측할 수 있다.

⭕ 지혜있는 사람 - '지혜있다'(*, 쉬네토스)는 맡은 본래 신중하고 지성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이 말은 총독의 통치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아마 누가는 총독으로서 서기오 바울이 공명 정대하면서 분별력이 있는 정치를 한 것을 이 한 단어로 묘사한 것 같다.

성 경: [행13:8]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제1차 전도 여행 시작-구브로 전도]

⭕ 엘루마 - 아람어 또는 아랍어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6절에서 언급된 박수와 동의어다. 본래의 뜻은 요술장이 또는 마법사로 통한다. 그는 총독과 바나바 일행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반(反)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따라 총독 서기오 바울의 지혜는 더욱 돋보이게 된다. 즉 측근의 불경건한 술수를 물리치고 바나바와 사울 일행을 만남으로써 지혜있다는 누가의 묘사가 증명되는 셈이다.

성 경: [행13:9]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제1차 전도 여행 시작-구브로 전도]

⭕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 처음으로 바울(Paul)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후로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된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울이 회계한 이후부터 새사람된 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Bengel, Olshausen, Meyer) 이는 주관적 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저자가 사울을 로마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Zahn, Lightfoot, Ramsay, Knowling, Vincent).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식 이름 외에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1:23;12:25;13:1) 특히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22:28)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울의 로마식 이름을 이제야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 비로소 사울이 이방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이고 설교에도 도음이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 성령이 충만하여 - 여기서 누가가 의도하는 바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1) 모든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끄는 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말한다. (2) 거짓 선지자와 대결하는, 성령이 충만한 바울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제까지 앞세웠던 바나바로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로 옮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13:10]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제1차 전도 여행 시작-구브로 전도]

⭕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 - 바울은 엘루마에 대한 일차적인 공격으로서 엘루마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궤계'에 해당하는 혤라어 '돌로스'(*)는 '미끼로 잡다'의 '델로'(*)에서 유래된 단어로 '교활', '간교', 또는 '올무', '미끼' 등의뜻으로 사용된다. 한마디로 사기꾼이라는 말이될 수 있다. 6절에서 '거짓 선지자'라고 언급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악행'이라는 말은 본래 경솔하거나 무절제한 행위를 의미한다(Robertson). 여기서는 부주의하고 반(反)신앙적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케하는 것을 의미한다.

⭕ 마귀의 지식 - 이와 같은 저주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의 저주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요 8:44). 이 말은 엘루마에 대한 저주이면서 그의 악한 행실에 대한 폭로이다.

⭕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 엘루마의 행위가 '주님의 길을 훼방'(공동 번역)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총독 서기오 바울과 바나바와 바울 일행의 만남이 주님의 뜻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성 경: [행13:1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제1차 전도 여행 시작-구브로 전도]

⭕ 주의 손...소경이 되어 - 저주 또는 축복에 대한 묘사로 주의 손이 본서에서 언급되는데(11:21) 여기서는 성령의 일을 거스른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을 의미한다. 진노가 임한 결과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징벌은 구약성경에서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되었다(신 28:28, 29).

⭕ 안개와 어두움 - 눈이 멀어진 상태를 점층적 표현으로 묘사한 듯 하다. 즉 엘루마의 눈은 안개처럼 희미하다가 어두움처럼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 엘루마가 완전히 실명(失明)하여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갈길을 지시해 주는 일을 했지만 지금은 혼자서 걸을 수도 없어 인도자를 찾는 엘루마의 모습은 거짓 선지자의 상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행13:1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제1차 전도 여행 시작-구브로 전도]

⭕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 본 구절은 총독 바울이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에 대한 설명이다.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이 총독 바울의 회심(回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회심을 유발시킨 전체 동기는 아니다. 즉 기적적인 사건이 총독 바울의 회심에 영향을 크게 준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여기에만 강조점을 둘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엘루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만나고자 했다는 점은 바울의 가르침이나 그에 관한 이야기에 이미 호의적인 입장에서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엘루마가 소경된 사건은 그가 회심하는 데 외형적 동기 부여의 기능을 갖고 있다.

⭕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여기서 '주의 가르치심'은 총독 바울이 엘루마의 저주를 목격하면서 받은 교훈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의 일을 훼방하고 사기와 악행을 일삼아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의 비참한 말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함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13:13]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 박수 엘루마의 사건 이후 누가는 여기서부터 바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이 엘루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기독교인으로 회심시킴으로써 선교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격으로 부상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 - 구브로 섬을 떠나 바울 일행이 두번째로 찾은 밤빌리아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소아시아의 남쯤 해안에 접한 지역이다. 해안의 길이가 120km이며 내륙쪽으로 폭이 48km 정도의 이 지역은 동편에는 길리기아, 서쪽에는 루기아, 북쪽에는 비시디아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버가는 밤빌리아의 중심 도시로 해안에서 내륙쪽으로 13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이곳을 들르게 된다(14:25). 이곳에서의 바울 일행의 선교 행적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마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것이다.

⭕ 요한은...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 예루살렘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를 동행하여(12:25) 그들을 도우며 따라왔던(5절) 마가 요한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누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다음과 같이 추측이 다양하다. (1) 사전에 구브로까지만 동행하기로 함. (2) 사촌 바나바를 따라왔다가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바나바가 소외된 데 대한 불만(Alexander), (3) 향수병, (4) 용기 부족으로 여행을 포기함(Lenski), (5) 바울이 풍토병에 걸려(고후12:7;갈 4:13, 14) 겁을 먹었음(Ramsay). 그러나 모두 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쨌든 나중에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되는 점으로 보아 바울은 요한의 귀향으로 크게 실망하고 상심한 듯하다(15:37-39).

성 경: [행13:14]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 이곳은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곳으로(11:27)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얄바크(Yalvach) 근처의 폐허 지역을 말하며 당시에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은3차전도 여행때에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18:23).

⭕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 셀류쿠스 왕조 때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므로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이 있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구브로나 이곳에서도 바울 일행이 회당올 먼저 찾은것은 이방땅에서 동족에 대한 친밀감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방 선교 이전에 유대인에 대한 방문이 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13:15]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 - 회당의 예배 순서 중 한 부분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율법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키며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말한다. 1세기경의 회당 예배는 쉐마(신 6:4-9) 기도,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설교나 권면의 말씀과 축복의 순서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성경이 회당에서 낭독되었던 전통은 바벧론 포로기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B.C. 163년부터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율법서 낭독을 금지하여 예언서만 낭독되었으나 마카비 혁명 때에 다시 율법서가 낭독되었다. 회당에서 성경은 히브리어로 낭독된 다음 다시 아람어나 코이네 헬라어로 통역되었다(Robertson).

⭕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 예배순서상 권면의 말씀을 할 차례가 되었는데 회당장은 바울에게 사람을 보내어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당시 예배 중에 설교 또는 권면의 말씀을 담당할 대상을 회당장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랍비나 방문자에게 설교를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배 전에 설교자를 선정해야지 예배 도중에는 할 수 없었다(Haenchen, Robertson).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로 회당장이 예배 도중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게 되는데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예배 시작과 더불어 회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리 설교를 부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회당장에 바울 일행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듣고, 그들에 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는 본문의 어투는 '만일'(*, 에이)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조건적 제안으로서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요청하는 말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최대한 살려 "두 분께서 혹 격려할 말씀이 있거든 이 회중에 한 말씀 해주셨으며 좋겠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성 경: [행13:16]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 회당장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곧바로 일어나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본래 회당 안에서의 설교는 관습적으로 앉아서 하는데(눅 4:20) 바울은 일어서서 손짓까지 하면서 설교를 한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열정적인 웅변가로 보여지게 된다. 아마 누가는 바울을 헬라적인 연설가로 묘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Haenchen).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유대 회당의 전통과는 다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 여기서부터 바울의 설교가 시작된다. 서두에서 누가는 설교를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해 학자에 따라 다음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이스라엘로 언급된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란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다(Lenski, Robertson). (2)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생에 의한 유대인 및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10:2의 '경건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을 가리킨다(Haenchen, Bruce, Neil).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스라엘 사람에 포함된다. 따라서 (2)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성 경: [행13:17]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 여기서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요약으로 신앙 고백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7장에서 소개된 스데반의 설교와 그형식이 비슷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스데반보다는 간략하다. 바울이 이스라엘을 구원시킨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방인 청중을 의식하여 언급한 듯하다(Lenski). 즉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출애굽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호칭은 당시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며 70인역(LXX)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투였다(Laenchen).

⭕ 우리 조상들을...백성을 높여 - 본절에서 '조상들'과 '그 백성'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시문학에서는 병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해서 그 구절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명확하게 하곤 했다. 만일 본절이 그러한 형식을 취했다면 두 용어는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두 용어가 다른 의미로 쓰여 역사적인 흐름을 차례로 설명하고 있다면 '조상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을 칭하는 의미이며 '족장들'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과 본절의 바울 설교를 비교해 볼 때 '족장들'로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 큰 권능으로 - 에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현인 '큰 권능'은 70인역(LXX)역에서 영향받은 어투로(Robertson) 출 6:1, 6;신 5:15;시 136:12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성 경: [행13:18]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 본 구절은 광야 40년간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참으시고'로 번역된 혤라어 본문은 사본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에트로포포레센'(*):공동번역 및 많은 영역 성경이 이 용어를 따라 '참으시고'로 번역했다. 이 용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많은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참으신 사실을 부각시켜 준다. (2) '에트로포포레센'(*):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이 번역을 취하며 몇몇 대문자 사본 및 소문자 사본, 그리고 번역본들이 이 용어를 선택한다. 이는 '돌보다'는 의미로 신 1:31의 70인역(LXX)에 따른 것이다. 몇몇 학자들이 (해석을 지지하지만(Holtzmann, Zahn, Bruce)어떤 학자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Haenchen, Marshall, 아사노 중이찌). 사본상으로 '참으시고'가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돌보시고'가 더 어울리기에 어느 하나를 강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 1:31의 히브리어 본문은 70인역의 '돌보시다'란 의미보다 '참으시다'의 의미에 더 가깝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는7'에트로포포래센'(*)이 더 적합하다.

성 경: [행13:19]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정착하게 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약한 본문은 신 7:1과 연관이 있다. 신 7:1에서 그 일곱 족속이 헷,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로 언급되어 있다.

⭕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 '기업으로 주다'에 사용된 동사 '카타클레로노메오'(*)는 70인역(LXX)에서는 종종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언급된다. 그 뜻은 '몫을 따라 분배하다'란 의미로 유산 상속과도 관계가 있다. 본절에서 이 동사는 각 지파가 받을 분깃에 따라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것에 대해 적용되었다.

⭕ 약 사백 오십 년간 - 여기서 450년이라는 기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계산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특히 사본에 따라 본 구절의 위치가 다르다. (1) 개역성경처럼 20절에 언급되는 '그후'란 표현 앞에 본구절을둔다(*,A,B,C). 이 경우 450년은 사사 시대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2) 20절의 '그후' 다음에 450년을 둘 때 애굽에서 탈출한 후 광야생활부터 사사 시대까지 포함하여 450년이 된다. 첫번째 견해를 취할 경우 애굽에서400년, 광야에서 40년, 가나안 정복 기간 10년을합친 450년을 뜻한다(Bauernfeind, Lenski, Bruce, Knowling, Weiss, 아사노 중이찌). 그러나 실제로 광야 40년과 사사 시대는 사무엘 이전까지 약 37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사로 앉으면서 활동한 기간이 다윗왕까지 이어지는 70여 년간으로 계산할 경우 450여년이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450여 년은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정착하여 왕을 세우기까지의 기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2)를 따르는 편이 무난하다.

성 경: [행13:20]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그 후에 - 앞절이 가나안 정복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므로 '그 후'란 가나안 정복 이후 사사 시대를 뜻한다.

⭕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후 이스라엘을 이끌어 갔던 지도자들을 요약하여 언급하고있다. 가나안 정복 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 기간은 가나안 정복 전쟁(B.C. 1405)에서부터 사무엘이 그의 사역을 마치기까지(B.C. 1017) 약 400여 년이다.

성 경: [행13:2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 사사 시대가 끌나고 왕정 국가 시대가 언급되고 있다. 왕정 국가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사무엘이 너무 늙었다는 이유와 함께 다른 열방들의 왕권 통치에 대한 부러움예서 시작되었다(삼상 8:5). 사실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며 신정 시대(神政時代)를 폐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은 들어주셨으나 호 13:11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분노하여 왕권을 허락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즉 왕권에 대한 요구는 부당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사울의 통치는 40년간(B.C. 1050-1010) 계속 되었는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함과 동시에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음으로써 그의 통치는 끝나게 된다(삼상 31:1-6). 본 구절에서 언급되는 사울의 통치 기간 40년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으므로 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추측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Lenski).

성 경: [행13:2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폐(廢)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 바울은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등극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사울왕을 '폐하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호 13:11)임을 보여준다. 이는 왕정국가가 성립되었어도 하나님 개입이 계속 되었음을 말해 준다. 아마도 바울은 18절의 표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참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려는 듯하다.

⭕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 삼상 13:14과 시 89:20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정(王政)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왕가(王家) 의 정통성을 신적인 권위로 세우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구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인물임을 부각시킨다.

⭕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 다윗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는 23절에서 언급되는 메시야 탄생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다윗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속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속사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망하던 메시야에게로 초점을 맞추어 진행시키고 있다.

성 경: [행13:23]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삼하 7:12에서 볼 수 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언약을 맺는 형식을(창 15:1-21) 취하지 않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주어졌다. 그렇지만 언약 맺음에 있어서 수반되는 축복과 저주, 충성과 복종의 조항이 언급되므로 삼하 7장을 '다윗 언약의 장'이라 부른다. 아무튼 바울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면서 다윗 언약을 상기시켜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통을 이어받았음을 증명하였다.

⭕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이 말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안에서 성취되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약간의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즉 본절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온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예수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소명자로서의 바울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는 다윗 왕국을 강건하게 복원시키는 정치적 인물임을 믿었다(삼하 7:12-16).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에 대해 다앙한 예언이 있다. 즉 수난의 '종'(사 42:1-7;49:1-7;50:4-9;52:13-53)또는 '인자'(단 7:13), '왕'으로서의 메시야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슥 4:11-14) 등이 나타난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한 메시야에게 다양한 상(像)이 복합적으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으나 유대인들은 굳이 일부분만을 취하여 메시야를 정치적인 즉 이스라엘에 국한된 메시야로 한정시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말한 것은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메시야 사상을 말하기보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예언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구주임을 권위있게 증언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국한시키는 말로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 경: [행13:24]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 바울은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한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세례 요한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세례 요한을 예수의 권위를 보증하는 데 이용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었으며 이러한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18:25;눅 3:7-15). 따라서 바울은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청중들에게 이러한 세례 요한의 활동을 회상시켜 그의 말에서 예수의 권위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그는 이 사실이 예수의 권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성 경: [행13:25]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 이 말은 딤후 4:7에서도 나오는데 헬라적 어투로서 바울의 독특한 어법이다(Haenchen). 본 구절은 요한이 예수에 대한 증거 사역을 다하였을 때를 의미한다.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바울이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언급한 의도는 이 표현 속에 함축되어 있다. 즉 요한 자신이 메시야임을 직접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본문은 눅 3:15, 16과 요 1:19-27의 내용으로 당시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믿었던 유대인들이 많았음을 반증함과 동시에 요한이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신뢰와 인기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신뢰하는 요한이 직접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 예수가 참 메시야이며 따라서 세례 요한 자신은 그 증언을 위한 사명자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혔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를 메시야로 확증하고자 한다.

성 경: [행13:26]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형제들 - 청중들을 부르는 이 말은 회당 안에 모인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들 및 회당 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청중을 다시 부름으로써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설교를 본론으로 이끌었다.

⭕ 아브라함의 후예 - 이 말은 혈통적인 유대인들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도 의미한다. 이 용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 본 구절은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들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서도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 본 구절을 헬라어 본문에 따라 직역하면 '이 구원의 말쏨이 우리에개 보내졌거늘'이란 의미가 된다. 개역성경은 주어를 하나님으로 전제해서 보내신 주체(主體)인 하나님을 강조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구원의 말씀'이 강조되었다. 본절부터가 바울의 설교에 있어서' 본론 부분에 해당하므로 당연히 '구원의 말씀이 강조되어야 한다. 한편 '우리에게'란 표현은 어떤 사본에서는 '너희에게'로 언급되어 있다. 본절의 구원의 말쏨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어졌음을 볼 때 '우리에게'가 무난하다.

성 경: [행13:27]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 - 바울은 예수를 처형했던 주범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가의 견해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를 처형한 장본인들이 이스라엘 종교.정치 지도자들임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23:1-25).

⭕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 15절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그들은 예배때마다 예언서를 읽지만 예언서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구셰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같은 바울의 지적은 유대 지도자들의 무지함을 강조하며 또한 예수의 처형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 응하게 하였도다 - 결국 예수의 불법적인 처형도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이미 제시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밝히는 바울의 설교는 3:18에서 언급되는 베드로의 설교와 일치되고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와 바울은 신학적으로 동일성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만 이 두 설교가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누가 자신의 신학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Haenchen).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나 바울의 설교에서 같은 내용을 언급하여 초대 교회 시대에 있어서 케리그마가 어느 지역에서나 동일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13:28]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죽일 죄를 하나도 채지 못하였으나 - 본 구절은 예수의 무죄함을 강조한다. 이는 눅 23:14, 15에서 언급된 빌라도의 무죄 선언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무죄 선언과 눅 23:14, 15에서의 무죄 선언의 주체를 구분하고있다(Haenchen). 즉 그는 눅 23:14, 15에서는 빌라도가 무죄를 선언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무죄함을 입증한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에 대한 무죄 선언은 재판 과정에서나 신학적으로나 정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성 경: [행13:29]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 바울은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의 성취로 이해하며 예수 사건을 전체 구속사의 핵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재확인하면서 부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즉 장사지내고 무덤에 돌어갔다는 점이 예수의 죽음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바울은 믿는 듯하다. 여기서 '십자가'라는 말 대신 '나무'라고 언급한 것은 신 21:23에서 언급된 예언과 일치시키려는 바울의 의도로 보여진다. 한편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복음서처럼 자세하게 설명하지않았다. 이는 바울의 관심이 예수의 완전한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구속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행13:30]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하나님이...저를 살리신지라 - 부활신앙에 대한 고백은 초대 교회에서 이미 공통된 교리로 고정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15;4:10). 그리고 예수를 부활하게 한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정죄와 처형을 하나님께서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으로 보증하셨음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에게 정당한 것으로 용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 경: [행13:3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 - 본 구절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동행했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복음서에서도 증언하는 부활 목격자는 매우 다양하다. 즉 마태는 예수의 부활 현현(顯現)의 장소를 갈릴리로 제한시켜 언급하고 있으며(마 28:7, 10, 16) 마가 역시 마태와 동일하다. 요한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각각 부활 현현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요 20장;21:2, 14). 또한 누가는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가 예수의 부활 현현을 목격했으며(눅 24:18) 예루살렘에 있던 열 한사도와 그 외의 추종자들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눅 24:33). 이와 같이 각 복음서마다 부활 현현의 장소와 대상이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고전 15:6에서는 열 두사도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 전반에 걸친 부활 현현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할 때 본문의 의미는 불특정한 같릴리 출신인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10:39-41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처럼 사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Haenchen, Bruce).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다메섹 경험을(9:1-8)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고전 15:6에서 언급한 500명의 목격에 관한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본문의 내용은 저자인 누가의 관점에서 묘사된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언급된 바처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 추종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여러 날 - 여기서 언급한 부활 현현의 기간은 1:3에서 언급된 400일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Haenchen, Robertson, Beyer).

⭕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이 부활의 산증인임을 언급하는데 바울 자신이 그 증언자에 포함되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32절에서 본절의 증인들과 구분하여 '우리도'라고 바울 자신과 바나바를 언급한 점으로 보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목격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0:39-41).

성 경: [행13:3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 - 이 약속은 23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 바울은 롬 4:13과 갈 3:16에서도 같은 형태의 진술을 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오셔서 사역했음을 밝혔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성취된 소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무지를 벗겨주고자 노력했다.

성 경: [행13:33]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우리 자녀들에게 - 몇몇 사본들에는(*,A,B,C,D 등) 약속이 성취된 세대가 '우리의 자녀들'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본에서는(C,E,P 등)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게'로 언급되었다. 본절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세대에 대한 것이므로 '우리 자녀들에게'란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바울은 지금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대의 세대를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대부분의 영역처럼 '그들의 자녀된 우리에게'로 해석되는 것이 무난하다.

⭕ 너는 내 아들이라 - 시 2:7을 인용한 본문은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대관식(戴冠式)때 사용되던 시로서 이스라엘 왕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 하나님과 부자(父子)의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이 시편의말씀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은 바울의 독특한 인용이 아니다. 사실 복음서에서도(막 1:11; 눅 3:22) 예수가 메시야로서 성령의 능력을 받을때 본문과 갈은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Bruce).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시 2:7을 예수에 대해 적용시켜 인용하였다(히 1:5). 이는 시 2:7이 비록 왕의 대관식에서 많이 사용된 구절일지라도 유대인의 전통에서 그 구절을 메시야와 연관시켰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다윗의 가문에서 나온 왕권적인 권리를 가진 메시야로서 하나님께 세움을 받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성 경: [행13:34]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 - 바울은 예수가 죽어서 썩지 않고 부활할 것이라는 구약적 근거를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다윗의 가문에서 부활할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구약적 증거로 칠십인(LXX)역의 이사야 55:3을 들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의도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2:27).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교 전통과 분리된 이단이 아니라 유대교가 필연적으로 가야 할 길임을 강변하고있다. 즉 본절은 당시 전통적인 유대교 앞에 소수종교로서 기독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바울의 끈질긴 설득이다.

성 경: [행13:35]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또 다른 편에 - 이 말은 33절에서 언급한 들째 편(시 2:7)과 구분되는 시편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은 시 16:10 근거로 구약적인 부활 사상을 다시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더욱 심도있게 진술하고 있다.

성 경: [행13:36]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 바울은 22절에서 언급했던 다윗을 다시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과 다윗의 죽음을 대조시켜 예수의 부활 사건을 강조했다. 먼저 바울은 육대인들이 갖고 있는 다윗에 대한 인상을 재확인하고있다. 즉 22절에서는 다윗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세움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에게 용납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낼 사람으로 언급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인물임을 말하여 다윗을 높이고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곧이어 다윗의 죽움과 썩어짐을 예수의 부활과 대조시켜 썩지 않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유효했음을 강조한다. 한편 '섬기다'란 동사의 목적어로 사용된 '하나님의 뜻을 좇아'란 구절은 전치사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라고 번역될 수 있다(Robertson, Alford, Haenchen). 이 해석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윗이 그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던 사람'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다윗의 업적과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22절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비록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썩음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하나님에 의해 맡겨진 사명을 잘 수행했을지라도 죽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성취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예수와 연관지어 35절에 이어 다시 한번 더 언급함으로써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대로 부활하셨음을 강조했다.

성 경: [행13:37]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하나님의 살리신 이 - 부활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본 구절은 죽음으로부터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다윗의 유한한 생명과 예수의 영원한 생명을 대조시켜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됨을 주장한다.

⭕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나 - 이 말은 36절의 '썩음을 당하였으되'라는 말과 반대되는 표현으로 다윗과 예수를 극명하게 구분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 전통에 붙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다윗보다 예수가 위대함을 논증해 보임으로써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선입관이나 잘못된 의식을 바꾸고자 했던 것같다.

성 경: [행13:38]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이 사람을 힘 입어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를 의미하여 어떤 결과의 유래(由來)를 나타낸다. 그것은 '죄사함의 선언'을 한 이가 예수임을 의미한다.

⭕ 죄사함 -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죄사함'과 곧바로 연결시킨 것은 약간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부활이 어떻게 해서 죄사함의 근거가 되는 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것 같다. 한편 바울이 '죄사함'을 복음의 핵심으로 선포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죄'의 문제가 신앙의 억압적 요소로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했으며 그 중 하나라도 범하게 되면 죄인으로 판명되므로 죄문제로 인해 항상 억압당하는 신앙 생활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예수에 의한 죄사함의 선포는 바리새인이었던 자신이 예수를 만남으로써 체험했던 사실에 대한 것임과 동시에 초대교회의 교리의 핵심이었다.

성 경: [행13:39]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모세의 율법으로...의롭다 하심을 - 본 구절은 바울 서신과 일치된 사상을 전달하고 있으므로 본장에 언급된 바울의 설교를 본서의 저자인 누가의 작품으로 평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본 설교가 누가의 필치에 의해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부활'과 '의의 선포'같은 내용은 바울의 독특한 신학을 형성하는 골격이 되므로 전체적인 내용은 분명히 설교자 바울의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의롭게 되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던 유대인들의 삶을 지적하면서 의롭게 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있다. 이러한 바울의 설교에는 (1) 사람이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과 (2) 예수를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성 경: [행13:40]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마무리 지으면서 마지막 경고를 주기위해 41절에서 합 1:5를 인용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삼가라'는 말은 41절의 인용 구절 중 '멸시하는'과 연관되어 '멸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놀라고 망하라'는 표현과 연관되어 '놀라고 망할까 조심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지 확정할 수 없다.

성 경: [행13:4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일렀으되 -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했듯이 '선지자들'이 한 말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으로 예언서에서 발췌된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인용되는 구절은 합 1:5로서 70인역을 약간 변형시켜 사용되었다. 히브리 본문에서 이 구절은 갈대아 사람의 등장에 대한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Haenchen). 그러나 바울은 이 문구를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배타적으로 우월감에 빠진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인해 버림받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성 경: [행13:4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저희가 나갈새 - 본 구절은 바울이 설교를 마치고 회당에서 퇴장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문맥상 바울과 바나바가 설교 후 곧바로 퇴장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예배 도중에 바울과 바나바가 퇴장했을 가능성은 희밖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교 전통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예배를 마치기 전, 즉 자신의 설교만 마치고 퇴장한 것(Meyer, Knowling)이 아니라 예배를 마친 다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퇴장했으나 누가가 그 과정을 생략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Haenchen).

⭕ 사람들이 청하되 -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 47절부터 시작되는 다음 안식일의 설교가 있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2) 바울의 설교가 유대인들로부터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얻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유대교인들 중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성 경: [행13:43]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폐회한 후에 - 예배의 종료(終了)를 알리는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폐회의 암시와 부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즉 앞절에서 이미 예배의 종료가 함축적으로 언급되었다면 또다시 언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퇴장할 때가 예배 도중이었을 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도중에 퇴장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42절 주석) 본절은 예배 종료를 알리는 말이라기보다는 본절에서 언급되는 사건이 예배가 폐회된 이후에 있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 16절주석 참조.

⭕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 본 구절은 42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기로 간청한 것과 맞물려 이방 지역의 유대인 공둥체에서 기독교의 새로은 공동체가 발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행13:44]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온 성이 거의 다...모이니 - 이 같은 묘사는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극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당시 온 성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일 수 있을 정도의 회당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Bauernfeind). 누가가 이처럼 과장법을 사용한 것은 바울을 성공적인 설교가로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Haenchen). 하여튼 본절에서 누가가 진술하고자 하는 요지는 바울의 설교가 성공적이어서 비시디아 안디옥 온 성이 떠들썩했으며 더욱 많은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몰려왔다는 사실이다.

성 경: [행13:45]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유대인들이 - 이들은 회당의 구성원들로 바리새파의 유전을 철저히 추종하는 유대인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회당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가 자기 공동체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에 대해 무조건 비방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시기와 비방은 새로이 형성되는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있다.

성 경: [행13:46]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 유대인들의 비방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가 응답함에 있어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진술을 권위있게 묘사하기 위해 '담대히 말하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 말의 헬라어 '파르레시아사메노이(*)는 '자유롭게 말하다' 또는 '숨김없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대답이 매우 확신에 찬 것으로 청중을 설득하는 호소력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 이 말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이는 유대인들 자신이 자처(自處)한 것이므로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하는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언급은 바울 자신도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비방하는 자들이 자신을 반(反) 유대적인 교리를 전파하는 자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성 경: [행13:47]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주께서...명하시되 - 바울은 다시 자신의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여 그 사역의 신적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도 인간의 지혜나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섬기던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자신을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 내가...구원하게 하리라 - 이 인용구는 사 42:6;49:6에서 발췌된 것이다. 이 이사야서의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예게 하신 말씀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예언하신 내용과 연관지어 볼 때(9:15) 이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에게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하겠다. 즉 바울은 사 42:6;49:6에 예언된 내용을 전파하는 자로 자신들이 선택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성 경: [행13:48]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 여기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들의 기쁨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45절에서 언급된 유대인들의 반응과는 매우 대조되고 있다. 본절은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작정된 자 - '작정(作定)된'으로 번역된 '테탁메노이'(*)는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작정'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과거 완료는 과거를 시점으로 어떤 사건이 그 과거 이전에 완료되어 그 시점까지 영향을 미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작정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버리지 않고 모든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 경: [행13:49]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주의 말씀이 퍼지니라 - '퍼지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페레토'(*)는 미완료 과거로 '게속 퍼지고 있었다'를 의미한다. 이는 주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져가는 것을 묘사한다. 그런데 누가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믿게 된 자들의 부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않고 있다. 아마 이 부류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13:50]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경건한 귀부인들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 일행의 설교가 육대교 회당 중심의 공동체에 위협을 주고 았다고 판단되자 그들을 추방하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영향력있는 인물들을 이용했다. 여기서 언급된 귀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 여인들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짐작된다.

⭕ 그 성내 유력자들 - 이들은 앞에 언급된 '경건한 귀부인들'의 남편(William Neil) 일 수 있으며 아니면 단순히 그 성읍에서 지도적인 인물로서 육대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성 경: [행13:5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 추방당하는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에게 명령했던 예수의 말씀(마 10:14)을 그대로 실천했다. 이러한 풍속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로서 이방인들의 지역으로부터 나올 때 행한다.

⭕ 이고니온 -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부터 추방당하여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20km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이고니온(Iconium)으로 떠나게 된다. 이 곳 역시 B.C. 25년경 갈라디아가 로마의 한 도(道)로 복속될 때 로마에 합병되었다(F.F. Bruce).

성 경: [행13:5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1)]

주제2: [이방인 전도 및 유대인들의 핍박]

⭕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비시디아 안디옥의 거주자들을 가리킨다. 누가는 그들에게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로서 그 지역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과 동일한 성령을 받았음을 보여줌과 동시에(2:4;4:31;10:44) 기독교 공동체가 융성해 갔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성 경: [행14: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이고니온 전도]

⭕ 이고니온 - 이고니온(Iconium)은 헬라인에 의하여 도시국가로 변형되었는데 비옥한 고원지대(高原地帶)에 형성된 도시이다. 이곳은 당시 루가오니아(Lycaonia)의 수도였으며 로마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였으나 하드리안(Hadrian) 황제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현재의 터키의 중요한 상업도시로 '코냐'(Konya)라 불리어진다. 이곳에도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하여 신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회당에 들어갔을 것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아마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배려라고 볼 수 있다.

⭕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 이 문장 역시 안디옥에서와 같이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없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 경: [행14: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이고니온 전도]

⭕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 - 이 말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즉 불신앙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바의 반대자로 언급된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동일하다(13:45 주석 참조).

⭕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집단적인 공격 형태의 움직임까지 나타내고 있다.

⭕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 여기서 언급된 '형제들'(*, 아델폰)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바울의 설교에서는 '형제들'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여기서의 '형제들'은 1절에서 언급한 '허다한 무리'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를 가리키며 누가가 본서에서 즐겨 사용하는 '제자'(6:1,2,7;9:1,10,19,25,26,38; 11:26,29;13:52;15:10;16:1)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성 경: [행14:3]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이고니온 전도]

⭕ 두 사도가 오래 있어 - 개역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이 문장은 접속사 '멘 운'(*, '뜻')과 함께 시작되어 앞에 진술된 내용과 본절 이후의 진술이 서로 인과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그래서'로 번역하여 인과 관계를 분명히 해주는 편이 좋다. 그런데 이 인과 관계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학자나 번역본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1)'개종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반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두 사도는 오래 남아 있었다'(Knowling). (2)'주께서 그들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총에 관하여 그들이 전하는 말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그래서 두 사도는 계속 남아 대담하게 말씀을 전했다'(공동번역). 그런데 접속사 '멘 운'이 본절 초두에 나와서 2절과 본절을 인과절로 접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 오래 머문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인들의 선동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이와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NIV, MB).

⭕ 표적과 기사 - 복음서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언급된 곳은 마24:24와 요4:48 두 곳뿐이나 본서에서는 본절 외에도 2:22,43;4:30;5:12;6:8;8:13 등 수 차례 언급되었다. 이는 누가가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그 두 단어를 함께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성 경: [행14:4]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이고니온 전도]

⭕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 이고니온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두 부류 즉 바울과 바나바를 추종하는 무리와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바울 일행에 악감을 품은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것은 곧 논쟁의 출발이며 바울 일행이 겪는 박해의 시작이다. 당시 헬라계 성읍에서 이와같은 파벌적 대립과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은 흔히 있었던 일이었으므로(Alford)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 두 사도 - 이는 바울과 바나바를 지칭하는 말로서 본서에 12명의 제자가 아닌 예수 추종자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처음 붙여지게 된다. 물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속하여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한 적이 있다(롬1:1;고전1:1;9:1;15:9;고후1:1;갈1:1;딤전1:1;딤후1:1). 그런데 본서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의 칭호를 적용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바울과 바나바의 지위가 사도로서 인정받았을 수 있었다는 점과 사도라는 말이 예수를 직접 수행한 12명의 제자 이외의 사람에게도 폭넓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갈1:19).

성 경: [행14:5]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이고니온 전도]

⭕ 그 관원들이 -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는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로 그 지역을 통치하는 지도자들(공동번역)이다. 다시 말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가 단순히 회당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박해만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까지 가담하여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공격적 박해임을 말해주고 있다.

⭕ 능욕하며 - 무례하고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나타내는 '휘브리사이'(*)는 앙심을 갖고 조롱하고 학대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공동번역). 이것은 육체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폭력행위라기보다는 경멸하는 어투와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괴롭히는 것을 나타낸다.

⭕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 그들의 능욕 행위는 투석을 통한 폭력행위로 발전하였다. 본래 돌로 사람을 쳐죽이는 처형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형 집행 방법이었다. 이는 처형당하는 죄인에 대한 저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이와 같은 투석 행위는 스데반에게도 있었던 일이다(7:58). 스데반을 향해 유대인들이 돌을 던질 때 그 일에 가담했던 바울이 스데반과 똑같은 폭력을 당하게 될 위기에 직면한 것은 9:16의 예언이 그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묘사는 당시의 전도자가 필연적으로 져야 할 공통적인 십자가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돌을 던지려는 행위가 실제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이 상황 묘사는 박해자들이 돌을 던질 만큼 험악한 분위기에 다달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돌로 쳐 죽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라고 번역하여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성 경: [행14:6]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이고니온 전도]

⭕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 여기서 '도망하여'는 헬라어로 '카타퓨고'(*) 이며 뜻은 '도망하다' 외에 '피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같은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단순히 폭력을 두려워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박해자들과 무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갔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표현보다는 피하였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 루가오니아 - 루아오니아(Lycaonia)는 소아시아의 중남부 지방으로 북쪽으로는 갈라디아가 있고, 동쪽에는 가바도기아, 서쪽에는 브루기아 비시디아가 인접하여 있다. 이 지역은 마게도냐에 정복된 적이 있으므로 코이네 헬라어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루스드라 - 루스드라(Lystra0는 루가오니아의 중남부 지방에 위치한 성으로서 이고니온 성에서 약 38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소수의 로마군이 지배하고 있는 전원 도시였다. 이곳은 해상을 통한 무역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곳 주민은 주로 농사와 목축에 의존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회당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이곳에서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가 살았고(16:2,3;딤후1:5) 바울 일행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 더베 - 이곳은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길리기아와 인접한 곳으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 글라우디우스 티베라 불리기도 한다. 바울은 이곳에서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 후 제2차 전도 여행 때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16:1). 특히 이곳은 아시아까지 바울과 동행한 가이오의 출신지로 알려져 있다(20:4).

성 경: [행14:7]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이고니온 전도]

⭕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이 말은 6절에서 도망했다는 진술이 반대자들을 두려워해서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과의 충돌을 피해 활동 무대를 옮겨간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 전력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로버트슨(Robertson)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 언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렌스키(Lenski)는 어디서나 헬라어가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은 팔레스틴 지역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었으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는 이 지역에서 코이네(Koine) 헬라어가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큼을 암시한다. 따라서 렌스키의 의견이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다(11절 주석 참조).

성 경: [행14:8]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나면서 앉은뱅이 - 이 환자는 발이 있으나 무기력하여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태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다고 보충 설명을 하여 그의 질병이 치유 불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성전 미문(美門) 앞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 이야기와 비슷하다(3:2). 아마도 누가는 앉은뱅이를 고친 두 사건에 중요한 의미를 둔 것 같다. (1)베드로처럼 바울도 앉은뱅이를 고침으로써 동등한 사도권이 바울에게도 인정됨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2)베드로는 유대인을, 바울은 이방인을 치료한 사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바울을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성 경: [행14:9]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구원받을 만한 믿음 - 이 표현은 앉은뱅이 환자가 바울의 설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를 눈여겨 보았기에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병고침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으로 '믿음'이 언급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병고침의 전제는 주로 환자의 믿음과 관계된 것으로 묘사되었다(3:16;막9:21-29;눅5:20;7:50;8:48;18:42). 여기서 언급된 '구원받을'(*, 소조)이라는 말은 '구원하다'란 의미 외에 '온전하게 하다' 또는 '건강하게 하다'의 뜻도 지닌다.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앉은뱅이의 무기력한 발이 완전하게 되어 건강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을 앉은뱅이의 영적 구원과 반드시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믿음'이란 말도 바울 신학의 핵심 주제로서의 '믿음'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롬1:8-17 주제 강해 '이신 득의의 이해'). 한편 본 치유사건은 3:2-6에서 언급되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와 내용상 다르게 언급된다. 즉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을까 하는 구결인으로 묘사된 반면 본문에서는 앉은뱅이의 마음 속에 치료받을만한 믿음이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저자인 누가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즉 그는 이방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치병 기적을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에게도 구원받을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며 또한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선포하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성 경: [행14:10]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 여기서 바울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한 것은 아마 환자에게 믿음을 북돋우고 확신을 주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앉은뱅이에게 한 말과 차이점이 있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하였으나 바울은 예수처럼(막3:5) 자신이 직접 명령했다. 이에 대해 C와 D사본은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 말을 첨가시켰지만 대부분의 사본은 그 구절을 첨가하지 않았다.

⭕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 이 묘사는 3장에서 언급된 미문의 앉은뱅이가 구원받은 묘사와 비슷하다. 즉 걸을 뿐만 아니라 뛰기도 했다는 이 표현은 구원 곧 치유가 바울의 소리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앉은뱅이가 차츰차츰 걷게 되었다든가 다소 불편한 걸음이 아니라 완전히 회복된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강조적 표현이다.

성 경: [행14:1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 본구절은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현장을 목격한 루가오니아 사람들이 놀라와하며 흥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흥분하여 격앙된 목소리로 기적의 현장을 떠들석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였다는 표현은 이제까지 루가오니아 말로 하지 않고 다른말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네일(W.Neil)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다른 성읍들과 마찬가지로 루스드라는 평상시 3개의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한다. (1)라틴어:루스드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라틴어가 공식적인 언어였다. (2)헬라어:로마의 상용어(Lingue franca)로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3)모국어:이는 성읍 사람들끼리의 통상적인 의사 소통 수단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Haenchen, Bruce).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헬라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나 그들이 흥분한 나머지 자기들의 언어인 루가오니아말로 소리쳐 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는 헬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사고방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교리는 헬라 문화권에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성 경: [행14:1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쓰스...허메 - '쓰스'는 헬라어로 '제우스'(*)인데 본 구절에서는 여격(*, 디아)이 언급되어 있다. '제우스'는 헬라 신화에서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로 묘사되어 있으며 '허메'는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Jamblichus). 아마 바나바는 당당한 체구와 존경받을 만한 위용(威容)을 지닌 사람(Chrysostom, Zahn)이었기에 '제우스'로 불리었을 것이며,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말을 하였다는 점에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인 허메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한편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이 헬라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이해한 것은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암시해준다.

성 경: [행14:13]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 - 일반적으로 헬라 지역 내의 도시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루스드라의 쓰스 신당과 같이 헬라 지역 이외의 신전들은 성 밖에 세워졌던 것 같다. 그리고 뷔켄하우저(Wikenhauser)에 따르면 신전이 성 밖에 있었던 것은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신당과 제사장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종교적인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 지역은 본래 헬라 문화권 밖에 있었으나 알렉산더에 의해 소아시아 지방이 헬라화될 때 헬라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때 헬라의 다신교가 이곳에 전해져 정착된 것 같다.

⭕ 소와 화관 - 이는 제사장이 예배하기 위해 가져온 제물이다. '소'로 번역된 헬라어 '타우로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황소를 뜻한다. 그리고 화관은 꽃다발(harland, RSV)을 뜻한다. 당시 제우스와 머큐리 신에게는 황소를 제물로 바쳐 제사하며 화환을 함께 올려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obertson).

⭕ 대문 앞 - 바울의 설교가 행해졌고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신당의 제사장이 달려온 이 장소는 대문 앞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으므로 정확한 위치와 장소를 알 수 없다. 성 밖에 있는 신당의 대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Ramsay, Bruce) 문맥상 바울의 설교가 성 안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성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성 안의 자신들이 머물렸던 집 대문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큰 집 대문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Alford, Lumby). 그러나 대중 설교를 할 수 있는 대문이라면 가정 집이라기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성문 앞으로 생각할 수 있다(Hervey, Blass). 당시 이곳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구걸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과 새 번역도 '성문 앞'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대문 앞은 성문 앞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성 경: [행14:14]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 옷을 찢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비통한 심정이나 절망과 증오를 위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습관이었다(창37:29,34;수7:6;삼하13:19;왕하18:37;19:1;마26:65). 그리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묘사는 옷을 찢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 바울과 바나바의 단호한 의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루스드라 주민들의 그같은 행위를 절대 용납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보여준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다가(11절 주석 참조) 제사를 준비하게 되자 그 내용을 알아차리고 당황하여 다급한 심정으로 이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14:15]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 -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정(性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파데이스'(*)로 동일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의 몸을 취했으나 인간과 본성이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한다.

⭕ 이 헛된 일 - 헛된 일은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는 행위 또는 사람을 신으로 알고 경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곧 루스드라인들에게 신관(神觀)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성 경: [행14:16]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종교적 진리, 세계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각 이방 나라의 관습과 종교생활 등에 대해 책망하시거나 벌하시지 않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성 경: [행14:17]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그러나 - 이말의 헬라어 '카이토이게'(*)는 '그렇다해도', '그러면서도'(공동번역)를 의미하는 복합 접속사이다. 이 접속사는 앞 문장과 뒷 문장을 반대적 의미로 연결한다기보다는 앞의 진술과 관련이 있으면서 또 다른 내용의 진술로 전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 각 민족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종교, 가치관, 세계관을 갖고 살아왔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고 자연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각 민족들에게 계시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15절에서 언급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께서 자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자연을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연 계시에 대한 진술이다. 바울은 17:24-29과 로마서 1:19,20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설교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열려 있었다는 말이 된다.

⭕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 이 말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게 주어졌으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모든 민족을 하나님은 공평히 사랑해 왔음을 말하는 일반 은총에 대한 진술이다.

성 경: [행14:18]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루스드라 전도]

⭕ 겨우 무리를 말려 -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을 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음을 '겨우'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성 경: [행14:19]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디옥 유대인들(13:14 주석참조)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로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이고니온에 사는 유대인들(2,5절)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박해를 가하였음을 진술한다.

⭕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 '초인하여'의 헬라어 '페이산테스'(*)는 '설득하다'(공동번역)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선동하다'란 의미를 더 강하게 나타낸다. 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동했는지 본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짐작컨대 그 두 사람이 마술과 같은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를 파괴하려 한다고 선동했을 것이다. 실제로 본서 19장에서 은장색(銀匠色) 데메드리오가 에베소 지방의 사람들을 선동할 때도 바울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를 무시하고 그 종교를 폐하려 한다고 소리쳤다(19:26,27).

⭕ 돌로 바울을 쳐서 - 본절에서 돌에 맞은 사람이 바울 한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왜 바울만 폭력을 당하고 바나바는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바울이 말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12절)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돌로 친 주체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맥상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이고니온에서 음모가(5절) 루스드라에서 성공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면서 누가는 그들의 핍박이 매우 집요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건을 바울은 고후 11:25에서 회상하며 언급하고 있다.

⭕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이 표현으로 보아 바울을 돌로 친 현장이 성 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절에서 언급된 장소, 즉 앉은뱅이를 고치고 설교하던 곳에서(13절 주석 참조) 폭행을 당한 듯하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는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어낸 다음 돌로 쳤으나(7:58) 바울은 성 안에서 돌에 맞은 후 밖으로 끌어내졌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서로 대조된다. 이는 바울을 쳐죽이려 하는 무리들이 절차를 무시할 정도로 격분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그들의 박해가 스데반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부각시켜 스데반의 박해자가 스데반과 똑같은 방식으로, 더 나아가 훨씬 더 잔인하게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행14:20]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 19절에서 바울이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어 성 밖으로 내다 버려졌던 사실이 언급되었듯이 바울은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었을 자리에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는 그 일의 증인들로서 제자들을 언급했다. 이 제자들이 쓰러진 바울을 중심으로 둘러섰던 것은 바울의 상태를 알아보고 죽었으면 장례 절차를 집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Robertson, Bengel).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쓰러진 바울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건강하게 일어선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둘러서서 어떤 행위를 취하기 전에 바울이 일어났음을 암시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 더베 - 루스드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더베(Derbe)로 오게 된다. 이곳에 대해서는 6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14:2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 이곳 더베에서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처럼 박해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으며 설교의 내용이나 기적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고 간략하게 이 곳에서의 활동만이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 없었거나 순조롭게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돌로 쳤던 유대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으므로(19절)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유대인이 거주하던 더베에서는 박해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면서 저자는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성공적인 성과를 언급함으로써 바울의 선교 전체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결한 어투와 함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는 짤막한 언급은 그곳에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바울의 믿음을 암시한 듯하다. 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성 경: [행14:22]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마음을 굳게 하여 -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에피스테리조'(*)는 '힘있게 해준다', '튼튼하게 만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바울이 방문한 곳에서 개종자들을 격려하며(공동번역)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하였다는 말이다.

⭕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 이같은 바울 일행의 권면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잘 반영해 준다. 즉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고통과 박해를 겪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실존(實存)에 해당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이 말은 당시 바울 및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당했던 박해와 수난들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받는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성 경: [행14:23]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각 교회에서 -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에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음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계속 배출했으며(4,20,21절)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방 지역에서 견고한 조직체를 만들어 갔다.

⭕ 장로들을 택하여 - 집단적인 공동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활동적으로 이끌기 위한 지도자로 장로를 택하게 되었는데 이미 11:30에서 장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를 택하여 세웠다는 언급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장로(elder, NIV)는 감독자라는 직분으로 언급되기도 하며(20:28) 다스리며(롬12:8;살전5:12) 수고하는 자(고전16:16)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만으로 당시 장로들의 정확한 직분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단순한 교회의 봉사직으로서 설교할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는 주장(Zahn)도 있으나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기능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자로서 언급된 점으로 보아(딛1:5;약5:14) 사실상 목회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6:1-7의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장로를 어떠한 방법으로 택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예루살렘이나 기존 교회들로부터 파송된 사람이 장로의 직분을 맡았는지 아니면 각 지역 자치 내에서 믿음이 충만한 자를 택하여 그 일을 맡겼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등과 같이 기존의 교회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장로를 세운 점으로 보아 각 지역 자체 내에서 장로들을 선출하여 임명한 것 같다.

⭕ 금식 기도하며...주께 부탁하고 -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한 것은 선출된 자들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직분의 거룩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이 사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누가는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를 중재(仲載)하는 바울의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암시적으로 내세웠다.

성 경: [행14:24]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비시디아...밤빌리아 -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13:13,1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14:25]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앗달리아 - 바울 일행은 버가(13:13)를 거쳐 앗달리아(Attalia)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게 된다. 왜 방향을 바꾸어 앗달리아로 갔는지 그 이유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버가에서도 복음을 전한 점으로 보아 귀환 길에도 쉬임없이 전도활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전도의 목적을 갖고 앗달리아로 갔을 것이다. 앗달리아는 항구도시(port city)로서 버가의 서남쪽 약 26km에 위치해 있는데 이 항구도시는 B.C.159-138에 버가몬의 왕으로 지냈던 아탈루스(Attalus II) 왕이 건설한 것이다(Jacquier). 지금은 아달라(Adala)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소아시아의 남단에서 이 도시가 가장 큰 항구도시로 인구가 많아 전도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성 경: [행14:26]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 앗달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또한 전도 여행시 처음 찾은 곳인 구브로(Cyprus)섬(13:4-12)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안디옥으로 직행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앗달리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과 비교해 볼 때 뚜렷한 성과나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 - 여기서 누가는 바울 일행이 구브로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등에서 성공적 결과를 거둔 전도 활동이 안디옥 교회에서 출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부탁하다'라는 말은 23절에서 언급된 '파라티데미'(*)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파라디도미'(*) 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임명하여 파송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다(13:1-3 주석 참조).

성 경: [행14:27]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교회를 모아 - 그들이 돌아와 교회를 모았다는 것은 교회 신도들을(공동번역) 불러 모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모임이라는 주장은(Fern-ux)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은 안디옥 교회의 큰 경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온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교 보고회를 열었던 것이다.

⭕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 - 본절에서 누가는 이방인의 개종 사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밝힘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시작된 이방인에 대한 선교(宣敎) 활동이 하나님에 의한 일임을 밝혀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물론 베드로나(9:32;11:18) 빌립보에 의해서도(8:4-13)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것처럼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 교회가 직접 나서서 이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성 경: [행14:28]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오래 있으니라 -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미 누가는 9:43과 10:48에서도 베드로가 한 곳에 오래 유(留)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선교 활동이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 바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에 대해 안디옥 교회가 열렬히 찬사를 보내고 환영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오래 머물렀다는 말은 긴 휴식을 취했다는 의미로 선교 활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제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당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약 1년 안팎으로 본다(Levin, Alford, Lenski).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은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 교회로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된다.

성 경: [행15:1]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할례]

⭕ 어떤 사람들이 -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기독교인들로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갈2:12에서 바울이 말한 바 있는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과 같은 부류의 인물로 추정된다. 이들은 기독교 안에서 유대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한 분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구원을 얻는데 할례를 필수적 조건으로 전제하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소아시아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지자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 자기파에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로 안디옥까지 내려온 듯하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초대 기독교 안에서 이방인 선교와 함께 분파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6:1에서는 헬라파와 히브리파가 대립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전 1:10-17에서도 나타나는 바처럼 지도자별로 각 분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4절의 진술에 비추어 볼 때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결정된 바도 없이 이들이 독단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점에서 계파간에 배타적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열성적 유대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람도 있었는데(5절)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논쟁의 대상이 이 부류의 사람들인 것 같다.

⭕ 형제들을 가르치되...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 바울과 바나바가 중심이 되어 가르치는 안디옥 교회(13:1)에 할례없이 구원이 불가능함을 가르친 이들의 사상은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으며 안디옥 교회에 대한 충격적 도전이었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 안에서는 적잖은 동요가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본 구절에서 율법의 계명중 할례만 언급되었는데 이는 할례가 모든 율법조항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 취급되었던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할례 문제를 다루던 예루살렘 총회가 결국 할례와 전혀 관계없는 몇몇 의식법의 조항들을 금기시킨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 경: [행15:2]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할례]

⭕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 -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파 기독교인들 사이의 논쟁은 매우 격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생겨난 이방 기독교회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바울의 사도권(使徒權)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 방침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이미 11:2에서도 베드로의 이방인 선교에 대해 할례주의자들이 비난하고 도전해 왔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이 문제는 기독교의 이방 선교와 함께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교리적 문제이기에 모든 교회가 함께 의논하여 해결해야만 했다.

⭕ 형제들이...작정하니라 -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에 속한 몇 사람의 성도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 중에 디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갈2:1,3;Alford, Robertson).

성 경: [행15:3]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할례]

⭕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 이 진술에는 다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바울 일행이 안디옥 교회의 공식 대표임을 보여준다. (2)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에 동요되지 않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전송은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할례없는 기독교인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고 유대주의 기독교인에 대해 승리하기를 바라는 안디옥 교회의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 바울 일행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들이 지나가는 성읍에서 복음을 전하는 열성(熱誠)을 보였다. 이 지역들이 비록 팔레스틴에 속해 있으나 유대인들에게 소외된 지역이면서 큰 성읍에 해당되므로 그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또한 기존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했다. 베니게는 이방 지역으로서, 11:19에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서 피신해 간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빌립에 의해서(8:5)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지역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싫어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이방인에 대한 바울 일행의 전도성과를 듣고 기뻐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누가는 이 지역들이 바울의 사상에 동조함을 잠시 언급함으로써 바울의 권위를 더욱 세우고 있다.

성 경: [행15:4]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할례]

⭕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 예루살렘의 온 교회와 지도자들로부터 환영받게 된 바울의 모습은 9:26-30과 매우 대조된다. 즉 회심 후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는 의심과 냉대를 받았지만 1차 선교 여행 후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행 결과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헬라어 본문에서는 '사도'가 복수형으로 나와 있다. 이로보아 갈1:18,19에 언급된 예루살렘 방문이 아니라 2:9에 언급된 방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1:19에서는 야고보만 만난 것으로 진술했으나 2:9에서는 세 명의 사도를 만난 것으로 진술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선교여행의 결과에 대하여 보고를 하게 되었는데 안디옥 교회에서의 보고와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업적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14:26,27). 누가는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介入)을 거듭 강조하여 이방인의 선교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초대 교회에 인식시킴으로써 반대론자의 도전을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성 경: [행15:5]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할례]

⭕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 -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 바리새파 출신 개종자들도 있었다는 점은 기독교의 세력이 상당히 확장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급의 철저한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음을 보여줌으로써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 바리새파 출신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 선교에 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유대교적 기독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며 1절에서 언급된 '어떤 사람들'도 이들이 파송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는 할례에 대한 주장이 1절에서 언급된 주장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성 경: [행15:6]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구원]

⭕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 그 의안(議案)은 앞서 언급된 대로 바리새파 출신들이 제기한 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이 회의는 기독교가 발생된 후 최초로 시작된 교회 총회라는데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즉 기독교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자 유대인들이 그동안 매우 자랑스럽게 지켜왔던 선민 의식에 큰 상처를 받게 되면서 나타난 민족적 감정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대응했다는 점과 종교적으로 중요한 구원에 관한 교리를 취급했다는 점에서 종교 회의의 모태가 된 것이다.

성 경: [행15:7]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구원]

⭕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회의 진행을 압축적으로 전해주는 본 구절을 통해 회의가 상당히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장시간 계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변론(*, 제테시스)은 논쟁이나 토론을 뜻하는 말인데 일방적인 변론이 아니라 상호간의 주장을 내놓고 토의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회의에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바울과 바나바를 지지하는 주장들이 맞서 열렬한 토론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변론'이라는 단어 앞에 형용사 '폴뤼스'(*)를 두어 강조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에서는 '많은'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공동번역에서는 '오랜'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폴뤼스'의 의미로 어느 것이 정확한지 분간할 수 없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지만(KJV, RSV, NIV, MB) 공동번역의 해석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폴뤼스'란 용어 자체가 수나 양, 공간 및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토론의 열기 또한 뜨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 베드로가 일어나 - 매우 긴 시간의 토론 속에서 언급된 발언자는 베드로와 야고보(13절) 두 사람 뿐이다. 이를 미루어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역할을(갈2:9)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베드로의 발언 결정적(決定的)인 것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향력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너희도 알거니와 - 이 말은 10:1-48에서 언급된 내용, 즉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베드로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된 사실과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10:10-16)을 뜻한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못박아 두고자 한다.

성 경: [행15:8]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구원]

⭕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 베드로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하게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재함을 진술하고 있다. 이 사실은 고넬료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10:44-47의 내용과 관계가 있다. 이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방문한 사건을 두고 할례자들이 공격해 왔을 때에도(11:2)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이 성령받은 사건을 언급함으로 그들을 잠잠케 한 바가 있다(11:18). 여기서도 역시 아무도 베드로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12절).

성 경: [행15:9]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구원]

⭕ 믿음으로...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이유가 믿음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전통이나 민족에 의한 차별을 통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배타적인 선민 의식이나 우월감(優越感)은 지양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것이다. 지금까지 베드로의 변론은 공의회가 소집하게 된 내용인 할례 문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단지 이방선교의 정당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회의 진행 도중 이방 선교 자체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케 한다.

성 경: [행15:10]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구원]

⭕ 어찌하여 - 이 말의 헬라어 '티'(*)는 의문 대명사(who)로 쓰이기도 하고 이유를 묻는 부사(why)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맥상 단순히 이유를 묻는다기보다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말하면서 책망하는 형식의 어투로 보는 것이 좋다.

⭕ 하나님을 시험하여 -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행위를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한 시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시험'이라는 단어 '페이라조'(*)는 '시도하다', '시험하다'(make trial of;RSV)외에 '유혹하다'(tempt)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의 의미는 문맥상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도록 장애물을 설치하거나(Alford)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간섭하는(공동번역) 불경건한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본 구절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행위의 의로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네일(W.Neil)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 베드로의 논점은 유대인 자신들조차 메지 못하는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징적으로 언급된 '멍에'라는 단어 '쥐코스'(*)는 무거운 짐을 끌거나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끌도록 소의 목에 걸었던 도구로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에 대한 강제적인 압제(사9:4) 또는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상징하며(신28:48) 신약성경에서는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종교적 의무나 율례를 뜻한다. 여기서도 역시 5절에서 언급된 바 있듯이 유대교의 종교적 의무나 계율을 뜻하며 '조상'과 우리가 모두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유대교의 전통적 율례를 뜻한다. 특히 초기 기독교 당시(1세기 중엽) 베드로가 활동하던 때에는 샴마이(Shammai)학파의 극단적인 해석으로 율법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F.F.Bruce). 바울도 역시 율법을 종의 멍에로 묘사하며(갈5:1) 그것을 비인간적인 억압 구조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율법을 조상때부터 지금까지 완전하게 지켜내지 못했음을 베드로는 전제하고 율법의 멍에는 사람이 질 수 없는 것이므로 강요해서는 안 됨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울 서신에서와 같이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 관계에 대해서 당시에 분명한 신학적 입장이 없었거나 베드로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아직 명확한 인식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행15:11]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이방인의 구원]

⭕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하는 설교의 핵심이 언급되고 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바울의 사상과도 일맥 상통한다(롬1:16;3:30;5:15;갈2:14-16;엡2:14). 바울이 베드로를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듯이(갈2:11-14), 베드로는 바울만큼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본 구절처럼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正當性)에 있어서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아마 베드로 자신이 고넬료 사건을 직접 체험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15:12]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 베드로의 변론을 듣는 청중들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본문은 7절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논쟁으로 시끄럽던 회의장이 베드로의 변론으로 침묵하게 되었다는 말로 베드로의 주장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졌음을 암시해 준다. 이로써 공의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공인하고 바리새파 출신을 중심한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배격하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 이미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접을 받고 이방 선교에 관한 보고를 한 바 있다. 여기서는 공식적 회의장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여 이방인들이 구원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즉 바나바와 바울은 여기서도 4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자신들의 이방선교를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임을 증언하고 있다.

⭕ 표적과 기사 -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언급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기적적인 사건이었는데 아마 14:3,8-10에서 나타난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방 선교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 경: [행15:13]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야고보가 대답하여 -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는 주의 형제(마13:55)를 말하며 예루살렘 교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것 같다(12:17;21:18;갈2:9).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의회에서는 의장의 직분을 담당하여 회의를 이끌고 마무리 짓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13-21). 따라서 야고보가 베드로의 연설에 곧이어 응답한 것은 의장으로서 베드로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회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성 경: [행15:14]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하나님이 처음으로...처희를 권고하신 것 -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내용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을 선택하여 부르신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8절 주석 참조)을 예로 들고 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베드로의 히브리식 옛 이름으로서 베드로가 야고보와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며 회의장에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베드로의 옛 이름을 알 정도로 서로를 잘 아는 유대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방선교 문제를 거론하면서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의장인 야고보가 아랍어로 말하고 있음을 암시하거나(Haenchen) 아니면 그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유대인들뿐이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행15:15]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선지자들의 말씀이 - 야고보는 구약성경 중 선지서를 인용하여 그 예언이 베드로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여 줌으로써 베드로의 주장을 회의 결론(結論)으로 확정지으려 한다.

성 경: [행15:16]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 마소라 히브리 본문(Masoretic Text)에서는 '그 날에 내가 다시 돌아와'로 읽혀진다. 그리고 70인역도 마소라 본문과 동일하게 읽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인용할 때는 한글 개역성경과 같이 변형되어 있다. 이처럼 야고보의 인용이 정확히 70인역(LXX)의 암9:11,12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야고보는 70인역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읽혀지던 히브로 본문이나 아람어 본문을 인용했을 것이다.

⭕ 다윗의...일으키리니 - 본문은 아모스의 예언을 베드로의 연설과 접목시키면서 아모스가 예언한 '그 날'이 바로 지금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야고보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메시야에 의해 재건된 세계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했다.

성 경: [행15:17]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그 남은 사람들 - 마소라 본문(MT)에서는 '에돔의 남은 자'로 되어 있는데 70인역에서는 단순히 '남은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살아남은 자가 마소라 본문에 따르면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으나(Robertson) 70인역의 번역은 유대인들 중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야고보는 마소라 본문 보다는 70인역과 유사한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본문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본문을 인용하여 유대인을 언급하고자 했던 것 같다.

⭕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 - 이는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이방인들을 한정짓는 관계절인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공동번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구약 시대에서부터 열려있었음을 확언하는 말이 된다.

⭕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게 되는 목적이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여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기독교인됨이 구약의 예언 성취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이방 선교의 정당성이 구약의 예언(豫言)을 통해 확증된 셈이다.

성 경: [행15:18]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예로부터...주의 말씀이라 - 본문은 야고보의 자유로운 변형이거나 인용일 수 있다. '예로부터'라는 말이 아모스의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으나 야고보의 말에서는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야고보는 사45:21의 어투를 따왔거나 아니면 야고보가 인용한 사본에 이 말이 첨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 구절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구약 시대에도 계시되어 왔음을 밝혀준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사업을 계속적으로 펴왔음을 뜻한다.

성 경: [행15:19]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그러므로 - 여기서 사용된 접속사 '디오'(*)는 결론이 자명한 것을 연결해 준다. 즉 야고보가 인용한 아모스의 예언대로라면 자신이 제안하는 다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 내 의견 - 이 말의 헬라어 '에고 크리노'(*)는 '내가 판단하다' 또는 '내가 심판하다'의 의미로 야고보 자신이 단순히 의안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토론의 결론을 내리는 재판장으로서 최종 판결을 내리는 듯한 어감을 주고 있다. 이는 '내가'(*, 에고)란 표현이 강족적으로 사용된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본절에서 야고보의 의견을 채택하는 형식 절차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야고보의 의견을 최종적 결정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이로 보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의 권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 괴롭게 말고 - 여기서 괴롭히고 있는 주체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며(1,5절) 그 내용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요구인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의 상징이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우월감을 유대인들이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제시된 네가지 권면 조항은 세 개의 의식적 부분과 하나의 도덕적 구분으로 구분된다. 이로보아 예루살렘 총회에서 논의된 내용이 단순히 할례 문제만이 아니라 율법 전반(全般)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15:20]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다만...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 - 이 어투는 강제적 명령이라기보다는 권면의 성격을 띠고 있다.

⭕ 우상의 더러운 것 - 29절에서는 '우상의 제물'로 다시 언급된다. 이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의미한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논쟁은 이방 선교 과장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 중의 하나였다. 예루살렘 총회는 우상의 음식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고전8:1-13;10:27,28;갈2:11-14에서 바울은 각자의 양심에 맡김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이 부분의 권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음식 섭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빗나가는 신앙을 경계하는데 있다.

⭕ 음행 - 십계명에 언급되어 있는 이 규정이 예루살렘 총회의 권면 조항에도 나타나게 되었으므로 학자들에게 여러 가지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그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우상에 바친 음식을 먹음으로써 범하는 영적 음행(Beza, Selden). (2)우상의 신전에서 행하는 육체적 음행(Stolz, Heinrichs). (3)음행을 조장하고 매개하는 포주(抱主)의 죄(Salmasius). (4)축첩행위(J.Calvin). (5)근친혼(Lightfoot). (6)이도교와의 결혼(Teller, Bruce, J.W.Packer). (7)재혼(Schwegler). (8)돼지고기(Bentl- ey). (9)금지된 혈존간의 결혼(Haenchen).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음행(*, 포르네이아)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향한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네일 (W.Neil)이나 마샬(H.Marshall)의 견해처럼 율법의 음행 조항들로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범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음행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Alford,Meyer).

⭕ 목매어 죽인 것과 피 - 이는 이미 구약에서 금지된 것이다(창9:4;레17:14;신12:16,23). 여기서 목매어 죽인 짐승은 피가 체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피채 먹지 말라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구약에서 피를 먹지 못하게 규정한 것은 피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레17:11).

성 경: [행15:21]

주제1: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2)]

주제2: [안디옥으로 귀환]

⭕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읽음이니라 - 이는 이방인 지역마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는 회당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쳤다. 그렇게 때문에 유대인들의 율법이 이방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므로 이방인 개종자들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된 네 가지 조항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 권면 조항들이 지닌 의미에 대해 이방인 개종자들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회당 교사들에게 배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 경: [행15:22]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야고보의 연설]

⭕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 이는 예루살렘 총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온 교회는 모든 지역 교회의 대표를 의미하므로 사도 및 장로와 함께 언급됨으로써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사항이 모든 교회의 찬성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해 주며 바울 일행과 동행(同行)하게 된 자들의 권위도 암시한다.

⭕ 사람을 택하여...보내기를 가결하니 - 21절과 22절은 매우 압축적으로 문장이 연결된다. 즉 이방 선교 문제에 대한 어떤 결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그 대신 사람을 뽑아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을 공인했음을 간접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그리과 바울의 선교 활동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도 공식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정당성이 확인되었다. 이 파송으로 인해 바울은 실라를 만나게 되어 이후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가결하니'로 번역된 헬라어 '도케오'(*)는 '생각한다', '작정한다', '결정한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 총회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 반드시 찬반(贊反)을 묻는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즉 이 용어를 만장일치 또는 이의없이 그 두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 형제 중에 인도자 -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직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바사바라 하는 유다 - 유다에 대해서는 그가 선지자라는 것과(32절) 요셉 바사바의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1:23)는 사실 외에 이렇다할 자료가 없다.

⭕ 실라 - 본서에서는 그의 히브리식 이름인 '실라'로 언급되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로마식 이름인 '실루아노'로 언급된다(살전1:1). 따라서 실라도 바울과 같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16:21). 그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에 동행하게 되는데(40절;16:19-29;17:4,10,14;18:5)베뢰아에 혼자 남은 적도 있고(17:14) 디모데와 함께 전도한 사실도 있다(18:5;고후1:19).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베드로전서를 소아시아의 교회에 전해준 사실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와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벧전5:12).

성 경: [행15:23]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 - 이 표현은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1)'형제들'에 관사가 붙은 경우 : 이 때는 개역성경과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2)'형제들'에 관사가 생략된 경우 : 공동번역과 같이 '형제된 사도와 장로들'로 번역되어야 자연스럽다. (3)'형제들'앞에 접속사 '카이'(*)와 관사가 함께 붙은 경우 : '사도와 장로와 형제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본상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3)의 경우다. 그 이유는 그와 유사한 표현이 본장에서(4,22절) 사용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3)의 것이 사본상 많은 지지를 받으나 그 중 많은 사본들이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카이'와 관사를 의도적으로 첨가하였을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주고 있다는 데 있다. 사본 비평상 가장 간단한 구절이 원문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경우 (2)의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이방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주체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인 '사도와 장로'가 언급된 사실은 편지의 권위를 확정지어 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구절은 (2)의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이방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주체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인 '사도와 장로'가 언급된 사실은 편지의 권위를 확정지어 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구절은 (2)의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좋다.

⭕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 - 이는 편지를 받게 될 지역에 대한 진술이다. 수리아 지역을 언급하면서 그 지역의 수도인 안디옥을 특별하게 언급한 것은 논쟁의 발단이 안디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수리아 지역에 대해 언급한 것은 바울이 처음 개종하여 다메섹 등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9:19-22). 그리고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를 중심한 수리아 북서 지방을 말한다. 길리기아 지역 교회는 바울이 다소에 머물렸었으므로(9:30;11:25) 바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성 경: [행15:24]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 사도와 장로들은 이 문구를 사용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파손한 바가 없음을 재확인하며 강조하고 있다.

⭕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 이방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것이 폭력적 박해가 아니라 유대 기독교인이 저지르는 말, 곧 그들이 전파하는 잘못된 가르침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의 율법적 규정들을 강요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1절) 종교적 갈등과 혼동을 촉발시키는 거짓 진리를 뜻한다.

⭕ 마음을 혹하게 한다 - 이는 헬라어 본문에서 '아나스큐아존테스 타스 프쉬카스 휘몬'(*)으로 진술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너희의 혼을 파괴하면서'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 교회의 성도들을 단순히 미혹하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붕괴(崩壞)시키려는 의도로 그들의 가르침을 전파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 '혼을 파괴한다'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에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일으키게 하여 결국 믿음의 도에서 떠나 사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의미다.

성 경: [행15:25]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사람을 택하여 - 22절에서 사용된 형태(*, 에클렉사 메노이스 안드라스)와 같은 관용구다. 이는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 대표임을 보증함과 동시에 바울과 바나바 역시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선교사임을 뜻한다. 이로 미루어 아직까지 바나바와 바울의 권위보다는 예루살렘에서 직접 보냄을 받는 특사로서의 권위가 더 신뢰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권위는 파송되는 유다와 실라의 권위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뜻한다. 그 이유는 아직 예루살렘에 대부분의 사도들이 머물고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최초로 교회가 설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는 사도들의 권위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성 경: [행15:26]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 - 이 표현은 잘못된 가르침과 투쟁한 바나바와 바울을 격려하고 이방 기독교인들 앞에 찬사하며 그들의 노력과 공적을 치하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공적인 보증을 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논쟁은 바울과 바나바의 승리로 끝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보내는 이 같은 애정어린 찬사는 이방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격려이며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공격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고 공격자들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거부를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바울의 공식화된 권위를 뜻한다. 이 편지에서 바울보다 바나바가 먼저 언급된 점으로 보아 예루살렘 교회안에서는 바울보다 바나바가 더 친숙함을 엿볼 수 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 확장될 때 헌신했던 자였다(4:36,37).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은 바나바를 바울보다 먼저 언급했을 것이다.

⭕ 일치 가결 - 한 마음이 되어 뜻을 모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집된 총의(總意)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파송되는 유다와 실라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의 권위를 보증하기 위한 표현이다.

성 경: [행15:27]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 '이 일'은 25,26절의 내용 곧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공식적인 보증 및 유다와 실라의 파송에 대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유다와 실라가 파송된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을 이방 교회에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또한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사항을 전달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은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 사항을 가리킨다.

성 경: [행15:28]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성령과 우리는 -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보내게 된 결정권자 즉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의 주체가 곧 성령과 자신들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결정, 곧 예루살렘 교회의 결의가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성령의 활동은 본서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이 같은 언급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신적인 명령으로서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요긴한 것들 - 이 말의 헬라어 '에파낭케스'(*)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용어로 본래 부사이지만 본절에서는 명사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의미는 '필요 불가결 한 것',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등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을 이용할 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보는 것이 좋으며 그 구체적인 예는 20절에서 야고보가 제의한 4가지 금지(禁止) 조항으로 이해해야 된다.

⭕ 아무 짐도 - 앞에서 제안했던 4가지 금지 조항외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더이상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무분별하게 요구하는 할례 등의 요구는(1절) 공식적으로 무시되는 것이다.

성 경: [행15:29]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 개역성경에는 분명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실천하다'(*, 프랖세테)란 말이 강조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는 교회에서 덕을 세우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성도들이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본에 따라 시제상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그런데 개역성경처럼 미래형이 사본상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해석상으로도 가장 자연스럽다.

성 경: [행15:30]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 여기서 사용된 '무리'의 헬라어는 '플레도스' (*)로 일반적으로 공적, 정치적, 종교적 모임을 나타내는 단어다(Lenski). 그렇다면 이 모임은 예배를 위해 모인 단순한 집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이 모임은 안디옥 집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이 모임은 안디옥 교회의 전체적인 모임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모교회로부터 전달된 공식 문서를 다시 자기들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온 회중에게 선포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성 경: [행15:31]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 편지는 회중 앞에서 대표자에 의해 낭독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회중들은 그 내용을 다 들은 후 크게 만족하면서 편지의 내용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따라서 '기뻐하더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가 예수살렘 교회의 제안을 전폭적(全幅的)으로 수용했다는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 준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가 예루사렘 교회에서 제안한 4가지 금지 조항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성도된 의무로 받아들였으며 할례와 같은 율법적 짐을 벗게 한 복음으로 받아들인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편지의 내용을 '위로한 말'이라고 표현한다. 위로한다는 단어 '파라클레시스'(*)는 '격려' 또는 '권면', '간청' 등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공동번역은 '격려'로 해석하는데 문맥상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 권면(勸勉)의 뜻도 배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이 용어가 동사형으로 다시 언급되어 권면의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안디옥 교회가 그동안 유대적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 사이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었으나 끝까지 견뎠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을 경우 흔들리지 말라는 격려의 의미도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편지를 읽은 후 그에 따른 권면의 말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누가는 이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기 위해 '파라클레시스'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안디옥 교회에서는 유대적 전통에 종속됨 없이 독립된 교회로 공인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고조된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공격에 대한 승리로 여기고 당당한 기독교인으로 새로 태어남을 경험했을 것이다.

성 경: [행15:32]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격려하게 된 것에 대한 권위와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는 그들의 신분이 '선지자'임을 언급하고 있다(선지자에 대해서는 11:27,28주석을 참조하라). 그들은 편지에서 언급된 바처럼(27절) 편지의 내용에 대한 설명과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구두로 전달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주역인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을 간략하게 전달하여 안디옥 교인들에게 견고한 믿음을 북돋우도록 격려했을 것이다.

⭕ 굳게 하고 - 14:22에서도 같은 단어가 언급된다. 유다와 실라의 활동이 갈등과 불안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던(24절) 안디옥 교인들의 신앙을 진정시키고 견고(堅固)하게 하는데 공헌하였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루살렘 교회가 그 회의 결정 사항을 담은 편지와 두 선지자를 파송한 결과가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성 경: [행15:33]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평안히 가라는 전송 - 유다와 실라가 얼마동안 지내다가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누가는 유다와 실라의 활동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이방 교회로 대표되는 안디옥 교회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의 긴밀하고 두터운 형제애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에 새로운 용기를 갖고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며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이 준비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성 경: [행15:34]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주요 사본에서는 34절이 생략되고 35절이 시작된다(A,B,E,). 따라서 개역성경과 공동번역 그리고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RSV,NASB,NIV,LB)도 34절을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난외주를 통해 어떤 사본에 언급된 본문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사본에 '실라는 거기에 머무르기로 작정하였다'(*, 에돝세 데 토 실라 에피메이나이 아우투스, 모노스 데 유다스 에포류데)란 구절이 첨가되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유다만 떠났다'란 표현만 불필요한 첨가로 판단하여 배제했다(Zahn). 그런데 이러한 사본들에서 실라가 안디옥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첨가시킨 것은 40절에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실라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33절은 유다와 실라 두사람 모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 확실하므로 굳이 실라가 안디옥에 머물렀다고 첨가시킬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7-40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15:35]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 바울과 바나바는...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 바울과 바나바는 계속하여 안디옥에 머물면서 전도 활동에 열심을 다했는데,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는 바나바와 바울의 변함없는 활동을 보여준다. 즉 안디옥 교회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1,2절에서와 같은 혼란 이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언급된 '다른 여러 사람들'이란 13:1에서 언급된 바처럼 안디옥 교회에 있는 여러 교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성 경: [행15:36]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제2차 전도 여행 -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 수일 후 - 여기서 언급된 며칠 후는 유다와 실라가 떠난 이후의 날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Lenski) 그리 오랜 시간이 경과된 날은 아닐 것으로 짐작된다.

⭕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 제2차 선교여행에 대해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1차 여행 당시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안디옥 교사들이 안수하여 파송한 것이지만(13:1-3)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직접 계획하고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과 안디옥 교회의 빠른 성장에 고무되어 새로운 전도 여행의 사명을 느끼게 된 듯하다.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가 겪었던 혼란을 미연(未然)에 방지하기 위해 이전에 전도했던 지역을 찾아가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사항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성 경: [행15:37]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제2차 전도 여행 -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 마가라 하는 요한 - 바울의 제안을 받은 바나바는 전적으로 찬성한 듯하다. 그런데 바나바는 요한을 동행시키자고 바울에게 제안하고 있다. 요한은 12:12에서 언급된 인물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12:12 주석 참조). 또한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로 알려져 있다(골4:10). 또한 1차 여행 때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까지 동행하였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실이 있다(13:13). 그러나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왔는지 아니면 바나바가 그를 데리러 예루살렘으로 간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실라와 마가가 동일하게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

성 경: [행15:38]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제2차 전도 여행 -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 바울은...옳지 않다 하여 - 바나바의 제안을 거부하는 바울의 이유는 1차 여행 당시 요한이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점(13:13)이다. 아마도 바울은 요한에게 선교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음을 13:13의 사건을 통해 인식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이 별 도움이 못되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성 경: [행15:39]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제2차 전도 여행 -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 바울을 위해 헌신적으로 애썼던 바나바(9:27;11:25)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동행자 문제로 언쟁 끝에 헤어지게 된다. 이 다툼은 감정적(感情的) 요소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예루살렘 회의 이후 바울의 입지가 강화되고 독자적 권위가 인정됨으로써 바나바의 도움이 바울에게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바울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바울에게서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다툼은 대등한 입장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양보를 거부하게 된 지극히 감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바울 서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바나바와의 다툼과 요한에 대한 냉대가 지나친 바울의 고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가 요한은 훗날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줌으로써 바울로 하여금 감사하게 한다(골4:10;딤후4:11;몬24절).

⭕ 바나바는...구브로로 가고 - 바나바의 행적은 구브로를 떠남으로써 막을 내리고 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다(4:36). 그가 구브로로 가게 된 것은 1차 여행의 첫 선교지였고 바울이 제안한대로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 경: [행15:40]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제2차 전도 여행 -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 - 바나바가 떠나자 바울은 실라를 택하지만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갔다가(33절) 바울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왔는지 아니면 바울이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실라에게 전도여행을 제안했는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바울은 바나바와 헤어져서 실라를 동역자로 맞아드리고 선교여행을 준비한다.

⭕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 바울이 안디옥을 떠나는 장면 묘사는 바나바와 매우 대조된다. 즉 바나바는 매우 화난 사람이 훌쩍 떠나버린 듯한 묘사(39절)를 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바울의 떠남이 교회 성도들의 환송과 축복을 받으며 떠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 누가의 초점은 바울에게로 모아지고 바울의 비중(比重)을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15:41]

주제1: [예루살렘 공의회]

주제2: [제2차 전도 여행 -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 수리아와 길리기아 - 바울의 행선지는 육로를 통해 북상하여 자신의 고향인 다소를 향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1차적으로 향했다는 점에서 바나바와 흡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 여행을 제안했을 때 첫 방문지를 재방문하자고 하였던(36절) 계획이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바울의 2차 여행에서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가 빠져있다는 것은 바나바와의 감정적 대립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갖게 한다. 그러나 바나바가 구브로로 떠났기 때문에 바울이 다시 그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2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편지의 수신처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서도 바울의 행선지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 지역에 편지를 전하기 위해 그 길을 택했다든가 아니면 직접 편지를 전해준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쨌든 본절에 비춰볼 때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단순히 바나바에게 처음 제안했던 것과 같이(36절) 1차 여행지의 재방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시작하는 대장정(大長程)의 출발이었다.

성 경: [행16:1]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디모데를 합류시킴]

⭕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 이 지명들은 14:6에도 등장하는데, 그때와는 다르게 지명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이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때와는 달리 동쪽으로부터 전도를 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 바울의 1차 전도여행시 개종한 것으로 알려지는 디모데가 채 1년도 안돼 시행된 2차 전도여행때에 벌써 '제자'라고 불리었다는 것은 디모데의 어릴 적 성장배경과(딤후3:15) 그 신앙의 열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고전 4:17에서 디모데는 바울에 의해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불리운다. 바울이 그와 의기 투합한 다른 이들 모두에게 '내 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걸로 보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호칭은 단순히 '뜻이 맞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Lenski).

⭕ 그 모친은...헬라인이라 -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 곧 이방인이었다. 이를 볼 때 디모데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유대 신앙에 돈독(敦篤)하지 않았거나(Lenski) 혹은 소아시아 지역이 예루살렘보다 허약한 유대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Neil). 이렇듯 유대적 전통에 철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유대인의 법에서는 아이가 어머니의 종교를 따르도록 되어 있는데 디모데가 그때까지 할례조차 받지 않은 것은 유대 전통에 대한 그 어머니의 태도를 명백히 보여준다. 또한 3절의 미완료동사 '휘페르켄'(*, '그는...였다')을 볼 때 이방인(헬라인)이었던 디모데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 경: [행16:2]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디모데를 합류시킴]

⭕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이라는 지명이 함께 거론된 것은, 루스드라와 더베, 이고니온 등이 서로 인접해 있어서(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거리는 31km) 상업 등 정기적인 교류가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 부모의 이방 결혼이라는 외면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1:22;6:3;딤전3:7). 실제로 교회의 지도자를 세울 때에 성도들의 평판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0:22;22:12).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잘 대접하지 못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찌 잘 할 수 있겠느냐는 예수의 질타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마15:4).

성 경: [행16:3]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디모데를 합류시킴]

⭕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 바울은 디모데를 그의 복음 사역에 있어 동료이자 조력자(助力者)로 삼고 싶어하였다. 즉, 바울은 1차 전도여행때 요한 마가가 담당했던 역할을 이제 디모데에게 담당시키고자 하는 것이다(13:5). 디모데는 이때부터 바울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었다. 디모데라는 이름은 바울이라는 이름과 함께 고린두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 디모데전.후서 등의 서두에서 등장한다. 이때 디모데의 나이를 15세 혹은 18세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바울의 1,2차 전도여행의 간격이 채 1년도 안되었던 걸로 보아 이보다 많은 21세쯤으로 추청된다(Lenski).

⭕ 유대인을 인하여...할례를 행하니 - 예루살렘에서 디도에게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한 것과(갈2:3) 달리, 바울이 여기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다 하여 문제삼는 자들이 있다. 고전 7:17-20을 쓴 바울이 이러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고(Haenchen) 그래서 이 부분이 나중에 편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썼던 것뿐이지, 무조건적으로 유대인의 전통을 모욕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라는 말씀은 바울의 이러한 선교적(宣敎的) 전략을 잘 대변한다. 바울은 그 자신이나 실라처럼 디모데도,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이라고 비난받지 않고 순조롭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양친이 모두 이방인이었던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은, 부친만이 이방인이었던 디모데의 경우와 다르다.

⭕ 이는...다 앎이러라 - 그 근처에 사는 유대인들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 양친의 혼합 결혼은 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을 것이며 또한 여전히 그들의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성 경: [행16:4]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디모데를 합류시킴]

⭕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 1차 전도여행시 복음을 증거했던 곳 즉,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디옥 등을 가리킨다.

⭕ 예루살렘에...지키게 하니 - 규례(the decisions)는 예루살렘 1차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15장)을 가리킨다. 할례 문제를 발단으로 하여 개최된 이 총회는 율법 엄수를 주장하는 자들의 폐쇄적인 태도를 멀리하고,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영접한다는 내용을 결정하여 안디옥과 수리아, 길리기아 등에(15:23) 전했다. 그러므로 남북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은 아직 그 '결의안'내용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작정한'의 헬라어 '타케크리메나'(*)는 야고보가 15:19에서 결의안을 표결에 부칠 때 사용한 '크리노'(*, '판단하다')의 완료수동태형에 관사가 붙은 분사이다(reached, NIV, RSV;decided, LB;ordained, KJV). 개역성경의 '작정한 규례'는 이러한 원문의 의미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다소 불분명한 번역이다. 한편 '규례'(*, 도그마타)는 토의를 위해 모인 모임에서 결정된 것을 말할 때 사용되며, 이 단어의 동사와 여격은 항상 '결정되었다'의 뜻으로 사용되지 '명령한다'의 뜻이 아니다(Lenski).

성 경: [행16:5]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디모데를 합류시킴]

⭕ 이에 여러 교회가...날마다 더하니라 - 본절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멘 운' (*)은 누가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4절에 대한 '결과'를 나타낸다. 즉, 여기서는 바울의 적극적인 증거, 교육사역과 예루살렘 결정 사항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의 결과로, 교회가 굳건하게 자라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 사이에 고대 율법의 문제가 효과적으로 해결되자 새로운 이방인들이 교회에 더 많이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본절은 그때 그때마다 전후 문맥의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는 6:7;9:22; 12:24;19:20;28:31과 비교된다. 그리고 브루스(Bruce)는 본절을 누가의 이야기 중에 가장 중대한 결론(結論)이라고 말한다.

성 경: [행16:6]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이 본 환상]

⭕ 성령이...못하게 하거늘 - 성령이 어떠한 방법으로 누구에게 뜻을 전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누가의 관심은 그 사실 '자체'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환상을 보거나 꿈을 꾸었을 수도 있고(9절;23:11) 주변 환경(環境)의 영향때문에(예를들면 유대인의 반대) 계획을 변경했을 수도 있다(Neil).

⭕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 - 이 지역에 대한 해석은 나중에 바울이 보낸 '갈라디아서'가 북갈라디아에 보내진 것인지의(남갈라디아설) 문제를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에 아주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1)이 구절은 헬라 문법상으로 살펴볼 때 '한 지역'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 즉 본문 '텐 프뤼기안 카이 갈라티겐 코란' (*)중에서 '프뤼기안'과 '갈라티켄'을 형용사로 취급, 이들이 모두 '코란'에 걸린다는 것이다. 프뤼기안과 갈라티켄이 '카이'('그리고')로 연결되어 있고 관사가 처음 낱말 앞에만 있는 걸로 보아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E.D.Burton). 남갈라디아설의 측면이 강한 이러한 주장은 행정구역상 갈라디아 주 전체가 아니라 갈라디아의 브루기아 지방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든지 일반적으로 브루기아 방언과 켈트 방언을 모두 들을 수 있는 로마의 갈라디아주 남쪽 내륙의 브루기아 지방에 인접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켈트족이 거주하였던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갔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2)이 구절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두 지역을 나타낸다는 주장도 있다(Lake, Haenchen). 바울 일행이 페시누스, 앙키라, 다비움에 이르는 북갈라디아 전역을 휩쓸면서 교회를 세웠으리라고 보며 그래서 나중에 그곳에 '갈라디아서'를 써 보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리학상으로 치명적인 결점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만일 그렇다면 누가가 그 광범위한 사역을 '디엘돈'(*, '그들이 다녀가다')이라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누가의 서술만으로는 바울의 행적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 일행이 아시아의 본래 선교 목적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갔다는 것이며 또한 그 여행이 아시아의 동쪽 경계선으로부터 소아시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무시아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Marshall). 한편 본문에 이어 계속 언급되는 바, 소아시아로부터 드로아에 이르는 전도 여행 경로를 지도로 표시해 보면 아래와 같다.

성 경: [행16:7]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이 본 환상]

⭕ 무시아 앞에 이르러 - 무시아는 소아시아 서북부 지방으로 프로폰트(Propontis)해와 헬레스폰트(Hellespont) 해협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경을 통해 보면 바울이 이곳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보로(Onesiphorus)에 의해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 비두니아 - 소아시아의 북서부 지방. 흑해와 마르마라(Marmara)해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 6-10절을 통해 '성령'으로부터 '예수의 영'을 거쳐 '하나님'으로 용어가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은 단순한 표현방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원초적인 삼위일체(三位一體) 신앙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을 통해 어떻게 복음의 진로를 안내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성 경: [행16:8]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이 본 환상]

⭕ 무시아를 지나 - 무시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드로아를 갈 수 없는데도 누가가 '디엘돈테스'(*, '통과했다') 대신 '파렐돈테스'(*, '지나쳐 갔다')라는 분사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용어 선택을 통해 무시아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분사를 through(통하여)로 번역한 LB는 누가의 의도를 다소 무시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 드로아 - 에게해 연안에 있는 항구(港口)로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를 잇는 배가 출입하던 곳이다.

성 경: [행16:9]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이 본 환상]

⭕ 밤에 환상이...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 꿈과 환상은 고대에 있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9:10,12;10:3,17;18:9;22:17). 이는 밤이든 낮이든(10:11) 상관없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는 밤중의 '어느 때'를 뜻하는 '디아 뉴토스'(*)가 사용된 걸로 보아 아마도 바울이 잠들었을 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나치게 '말씀' 계시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환상의 '시각적'요소를 배제하려는 자들도 있었다(Michaelis). 그러나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호라마'(*, '환상')나, '오프데나이'(*, '나타나다'), '이데인'(*, '보다')등의 단어는 이 환상의 시각적 명료함을 잘 보여준다(Haenchen). 결국 환상은 단순한 상상이나 추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시각적인 것을 동반한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어떤 이들은 드로아에서 바울에게 도움을 구했던 마게도냐인이 바로 누가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누가가 마게도냐인 즉, 빌립보 출신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대화하는 가운데 이미 누가가 바울에게 마게도냐에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였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 만남이 환상 가운데 이용하셔서 바울 일행을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혹자는 드로아에서 바울이 실제로 마게도냐인들의 방문을 받은 바 있고, 이것이 심층 심리 속에서 작용하여 꿈으로 나타났으리라 추측하기도 한다(H.Marshall). 어쨌든 이 환상이 하나님이 보내신 초자연적인 환상임에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각양의 짐승들을 보이신 것처럼 바울에게도 환상 가운데서 마게도냐 사람을 보이신 것이다(Lenski).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 담지자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성 경: [행16:10]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이 본 환상]

⭕ 우리가 - 본서에서 '우리'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드로아에서이다(10-17절). 이 '우리'라는 형식과 관련하여, 바울 일행이 빌립보로 갈 때에 동행한 빌립보 주민이 있었다는 점과 그 사람이 누가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이 '우리'라는 표현이 빌립보에서의 사역에 관한 기사(11-40절) 이후에는 멈추어져 있다. (2)두번째 '우리'라는 부분(20:5-15)이 전도자들의 3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를 재방문할 때 시작되어 있다. (3)본장에서 빌립보에서의 사역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본문과 관련하여, 바울이 드로아에서 의사 누가와 상면하게 되었다고 추론하는 학자들이 많다(Ramsay, schlatter, Wei ). 그러나 이 주장은 근거없는 억측일 따름이다.

⭕ 곧 - 여기서는 다음날 아침을 뜻한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의 순종하는 모습이 돋보이는 단어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으뜸가는 태도는 '순종'이다(삼상15:22;히5:9;11:8;13:17).

⭕ 인정함이러라 - 이의 헬라어 '쉼비바조'(*)는 원래 '결합시키다'는 뜻으로 9:22에서는 '증명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는 '결론내리다'(assuredly gathering, KJV;conclude, NIV, RSV)는 정도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성 경: [행16:11]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루디아의 개종]

⭕ 사모드라게 - 드로아와 빌립보 사이, 에게해 북동쪽에 있는 섬이다. '물과 지진과 말(馬)'의 신인 포세이돈이 산으로 형성된 이 섬에서 고대 트로이 평야를 측량했다고 해서 포세이돈 섬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섬은 북에게해를 항해하는 선박들의 기항지(寄港地)가 되었는데, 추측컨대 바울 일행도 여기서 닻을 내렸을 것이다(Neil).

⭕ 직행하여 - 의사였던 누가는 의학 용어에 익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항해 술어도 정확하게 기록했다. '유뒤드로메오'(*)는 순풍을 받아 우와좌왕하지 않고 곧장 항해하였다는 것을 잘 드러내 주는 용어이다(Lenski). 당시의 화물선이나 여객선의 경우 바람을 잘 만나 순조롭게 항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육지나 바다의 바람과 해류를 잘 이용해야 했으며, 때로는 우회하는 항해도 감수해야 했다(18:21,22).

⭕ 네압볼리 - 사모드라게로부터 16km 내륙에 위치한 상업 중심지 빌립보의 외항으로, 아드리아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로마의 도로 '이그나티우스 대로'(the great Egnat- ian way)의 동부 지역 종착 지점이었다. 한편 여기서는 저자가 함께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거쳐간 항구이름과 소요(所要) 기간 등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우리' 문장으로 기록된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이다(20:5,13-15;21:1-8;27:1-28).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에서 돌아올 때 닷새가 소요되었던 것(20:6)과 비교해 볼 때, 네압볼리까지 250km를 항해하는데 이틀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그 순풍의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성 경: [행16:12]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루디아의 개종]

⭕ 빌립보에 이르니 - B.C.360년경 마게도냐의 필립 2세에 의해 이름이 크레니데스('샘'이라는 뜻)에서 빌립보로 바뀌었다. 이곳은 줄리어스 시이저를 살해했던 부루투스와 캐시우스가 B.C.42년 안토니아 옥타비안(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에 의해 패퇴(敗退)당한 장소로 유명하다. 이 지역은 바로 그때 이후 승리의 기념으로 로마의 식민지로 지정되어 황제에게 직접 배속됨으로써 주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를 누렸으며 공물과 세금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또 이탈리아 도시의 시민들이 누렸던 것과 동일한 권리를 누렸다. 이곳은 바다와 육지 양쪽 통로상의 전략적인 위치에 있어서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특히 금광과 비옥한 평야로 유명하였다. 이밖에도 이곳에는 유명한 의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다. 마게도냐 지경 첫성 - 누가가 빌립보를 이렇게 표현한 사실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곤 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본들 역시 차이를 보여 정확한 해석을 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 nus),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등 대다수의 본문에 따르면 '프로테 메리도스 테스 마케도니아스 폴리스'(*, '마케도냐 지경의 첫성')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 첫째가는 도시라 할만한 곳은 빌립보가 아니라 오히려 B.C.167-146년 사이에는 암비볼리였고 그 후에는 그 주의 수도 데살로니가였다. 그런하면 어떤 사본들에 '프로테'(*, '첫째')대신 '프로테스'(*, '제1의')로 되어 있어 빌립보가 '마게도냐 제1지구의 도시'였음을 가리켜 주고 있다. 즉, B.C.146년 전지역이 마게도냐주(州)로 개편되기 전 B.C.167년에 마게도냐가 로마인들에 의해 4개 행정규역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서 제1지역의 도시였다는 말이다. 그런가하면 베자 사본(D)은 ' '(프로테)를 '케팔레'( '우두머리', '수도')로 이해하여 주(州) 수도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이때의 수도가 실제로는 암비볼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쟈안(Zahn)은 여러나라들이 하나 이상의 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이 사본을 옹호한다. 그러나 '프로테'가 도시의 경칭(敬稱)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빌립보와 같은 로마 식민지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았다(Haenchen)이러한 해석상의 여러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마게도냐 지구의 첫째가는 도시'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the chief city of that part of Macedonia, KJV;the leading city of that district of Macedonia, NIV, RSV). 왜냐하면 행정상의 고려 외에 누가가 이 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 경: [행16:13]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루디아의 개종]

⭕ 안식일에 - 새로운 도시를 방문할 때 도착한 후 첫 안식일에 지역 회당을 방문하여 가급적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울의 일반적 관례(慣例)였다(13:5;14:1, F.F.Bruce).

⭕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프로슈케'(*, '기도처')는 거의 항상 '쉬나고게'(*, '회당')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기의 '기도처'가 실제 회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Schurer). 그러나 본절, 16절의 '기도처'는 회당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여자들만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고 또 본서의 다른 곳에서 '회당'이라는 구체적 명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17:1,10,17). 유대인의 법에 따르면 하나의 회당에는 최소한 10명의 남자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자들만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이곳의 '기도처'는 여자들이 관습적으로 모여 기도하던 곳으로 추측된다(MaRSHALL). 한편 이러한 기도처의 장소로는 주로 강변, 바다 근처 등이 선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유대의 정화 의식에 필요한 물을 구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견해도 있다(Marshall).

⭕ 문 밖 강가에 나가 - 여기서 '강가'는 갱가이트강(the Gangites) 아니면 크레니트(the Crenides) 강변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 여자들에게 - 남자가 한 사람도 참석하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글라우디오(Cla- udius)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할 때 그 식민지 도시인 빌립보도 그러한 전범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Lenski).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작은 모임도 무시하지 않았다.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단순히 청중들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마18:20).

성 경: [행16:14]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루디아의 개종]

⭕ 두아디라 성의...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 - '루디아'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렌스키(Lenski)는 누가가 여격을 사용해 개인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의 루디아는 개인의 이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Bruce 등) '루디아'가 이름이 아니라 단지 고대 루디아 왕국의 영토였던 지방에 살던 사람 즉 '루디아(출신의) 여인'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한다. 당시 루아디라는 직조와 자색 염료 사용 기술로 유명했는데 루디아가 빌립보에 온 것은 계속 그 사업을 확장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편 그녀는 두아디라에 있을 때 이미 회당에서 유대교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 들었는데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엔'(*, '듣고 있었다', '듣곤 했다')은 미완료형으로서 반복되는 모임을 암시한다. 이 동사는 루디아가 바로 첫 안식일에 회심(回心)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Lenski).

⭕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 바울의 말을 들을 때에 그녀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는 바울의 고백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학자들 중에는 이 '루디아 여자'의 본명이 유오디아 또는 순두게(빌4:2)였으며 또한 회심한 간수 글레멘드(빌4:3)의 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Zahn). 또한 바울이 언급한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빌4:3)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으며 혹자는 바울이 루디아와 결혼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Renan). 그러나 이러한 추측들은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성 경: [행16:15]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루디아의 개종]

⭕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 8:36에 등장하는 에디오피아인의 경우처럼, 루디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곧바로 세례가 베풀어졌다. 루디아의 집 또한 고넬료의 집처럼 세례를 받았다(10:47,48;11:14). 한편 유아 세례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포함, 이와 유사한 구절들을 통해(11:14;16:33;18:8;고전1:16) 이 집의 세례가 어린아이들도 포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자들은 어린아이 특히 유아에 대한 언급이 여기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본장 주제 강해 '유아세례' 참조). 어쨌든 이 '집' 속에 장사를 돕는 하인이나 노예들이 포함된다면 어린아이라고 해서 꼭 배제(排除)될 이유도 없다(Lenski).

성 경: [행16:16]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함]

⭕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 누가는 거듭하여 우리에게, 기독교 복음이 싸워 나가야 했던 그리이스-로마의 미신적 배경을 상기시키고 있다(8:9;13:6). '귀신'(*, 프뉴마 휘도나)의 '퓌돈'(*)은 고린도만 북부 파르나소스산 남쪽 언덕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지키는 신화 속의 뱀 또는 용을 가리키는데 퓌돈은 결국 아폴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퓌돈은 나중에 복화술사(腹話術師)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퓌돈의 영이 들어있는 것으로 여겨졌다(Plutarch).

⭕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 여종은 점을 쳐 사람들의 앞날을 알아 맞히고 많은 돈을 벌었으나, 수입금의 대부분은 주인들에 의해 착취되었다. 이러한 주인들의 태도는 약자들의 병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약함을 이용하여 이윤만을 챙기려는 불의한 정치인들과 악덕 기업주 그리고 적게는 이기주의에 젖어있는 우리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성 경: [행16:17]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함]

⭕ 바울과 우리를 쫓아와서 - '바울'과 '우리'를 구분하여 표현함으로써, 누가는 스스로를 특별히 바울을 중심으로 한 선교팀의 일원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우리' 문장은 여기에서 끝나고, 빌립보성을 그리고 있는 20:5,6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그곳에 교회을 세우기 위해 홀로 남았으며, 몇 년 뒤 바울 일행의 마지막 전도여행시 합류(合流)했다는 사실을 추측케 해준다(Neil).

⭕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너희에게 전하는 자 - 예수의 사역중 귀신들이 소리지른 일을 상기시켜 준다(막1:24;3:11;5:7;눅4:34,41;8:28). 이 소녀의 외치는 내용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모두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헬라어 '호 데오스 호 휴시스토스'(*, '지극히 높은 하나님')는 본래 뵈니게 사람들의 신(엘 헬루온)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히브리인들은 이 말로 야웨를 가리키고(민24:16;시78:35;사14:14;단3:26;4:32;5:18,21;에스드라상2:3) 헬라인들은 제우스를 가리키는데에 사용하였다(Roberts, Skeat, Nock). 한편 '소테리아'(*, '구원')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죄로부터 구원을 의미했으나 이방인들에게는 사람과 물질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권세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귀신들린 여종의 이 외침은 바울과 실라의 사역을 명쾌하게 드러내주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복음의 사명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사43:10;딛2:15).

성 경: [행16:18]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함]

⭕ 여러 날을 하는지라 - 바울이 여러 날 동안 귀신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이 여종의 외치는 소리가 처음에는 그다지 위험스럽게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복음을 널리 알리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여러 날이 경과하는 동안 바울은 이 여인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침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축출(逐出)한 것이다(H.Marshall).

⭕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즉시 나오니라 - 바울이 왜 '심히 괴로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분명치 않다. 벤트(Wendt)는 거룩한 복음이 부정한 영에 의해 증거되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아울러 그 소녀의 딱한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Lenski). 소녀의 외침으로 인해 전도자들은 외관상으로는 뜻하지 않았던 유명세를 받았을 것이고, 나중에는 복음의 선포보다 귀신의 말에 더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한편 귀신을 쫓아내는 이러한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도자들에게 주신 능력들 가운데 하나로, 그리스도께서 귀신들의 정복자임을 나타내는 표적이었다(마4:24;8:16;눅4:41). 구원받은 소녀의 회심에 대해 본문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소녀는 루디아와 그녀의 집안 사람들, 의사 누가, 직업 군인 간수 등과 함께 빌립보 초기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 경: [행16:19]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과 실라의 투옥]

⭕ 종의 주인들 - 이들은 사업적인 연합체였거나 혹은 단순히 개인 주인이었을 수도 있다.

⭕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 나중에 에베소에서도 그랬던 것처럼(19:23-27), 복음은 미신이나 악을 이용하여 이윤을 챙기는 자들의 사업을 파멸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누가는 18절과 19절에서 동일한 동사 '엑셀덴'(*, '나오니라'-18절;'끊어진'-19절)을 사용함으로써 흥미로운 언어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 바울과 실라를 잡아 - 이때 디모데와 누가는 왜 핍박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물론 디모데와 누가가 바울과 실라보다는 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었기 때문일 수 있으며, 또한 그 시각에 디모데와 누가가 다른 곳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디모데가 반헬라인이고(half-Greek) 누가가 완전히 헬라인이었던 반면,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이, 주요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보인다(Bruce, Neil). 20절과 21절에서 죄목(罪目)을 이야기하며 민족적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로마 사람인 우리가')을 사용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 저자 - 이곳에는 법정이나 감옥도 있었다.

성 경: [행16:20]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과 실라의 투옥]

⭕ 상관들 앞에...심히 요란케 하여 - 그들은 바울이 소녀로부터 귀신을 쫓아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고,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인종적 편견을 부추겼으며 또한 로마 제국내에 공공 평화를 해치고 폭동의 씨앗을 뿌리는 자들로 몰아붙였다(왕상18:17;19:40;24:5). 바로 1년 전에 황제 글라우디오가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을 축출하라는 칙령을 내렸었다(18:2). 이에따라 유대인들은 제국 전역, 그중에서도 특히 식민지역에서 좋지 않은 평판을 받았을 것이다(Neil). 또 '요란케 한다'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로도 해석된다. 당시 유대교는 로마법에 따라 허용되었으나, 로마인이 유대인에 의해 개종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성 경: [행16:21]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과 실라의 투옥]

⭕ 로마 사람인...전한다 하거늘 - 여기서 언급된 풍속에 대하여 혹자는 만찬때의 '거룩한 입맞춤'(*, 필레마 하기온)의 관습이 부도덕한 동양 제의(祭儀)의 모습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Haenchen). 그러나 송사자들의 관심은 풍속보다는 그들이 더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됐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래서 복수의 출구를 찾고 있던 송사자들은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알고, 무조건 그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풍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고 사실상 악한 동기를 숨겨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똑같이 로마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는 점 등을 살펴볼 때, 산헤드린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송사한 일과 유사하다(요19:6).

성 경: [행16:22]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과 실라의 투옥]

⭕ 상관들이 - 로마의 식민지였던 빌립보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주 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치 정부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로마 식민지에는 '두움비리'(duu- mviri)라 하여 집정관이 두 사람씩 있었다. 그런데 일부 식민지에는 이들에게 '프래토레스'(praetores ; , 스트라테고이)라는 존칭이 적용되었는데(20,22,35, 36,38절), 이곳 빌립보에서도 그러하였다. 한편 이 집정관들 밑에는 두 사람의 '릭토르'(*, 랍두코이)가 있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집정관의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 매로 치라 하여 - 바울은 이 태장(笞杖)에 대한 고후 11:25에서, 다른데에 기록이 없는 두 번의 태장과 함께 언급한다. 또한 그는 살전2:2에서 이곳 빌립보에서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대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성 경: [행16:23]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과 실라의 투옥]

⭕ 많이 친 후에 - 22절의 미완료 동사 '에켈류온'(*, '매로 치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유대인들은 태형의 경우에 40대 이내의 매를 맞았다(신22:18;25:3). 그러나 릭토르들은 언제 매를 멈춰야 할지를 몰라서 상관의 신호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 상관들은 반복해서 매를 치도록 신호를 보냈다. 바로 이것이 미완료 동사가 의미하는 바이다(Lenski). 그러므로 '많이 쳤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선한 일을 하고도 정식 재판조차 받지 않은채 심한 고난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감수해야 할 고통인지도 모른다.

⭕ 든든히 지키라 - 이 말 속에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2:19에서 베드로를 지키던 간수는 베드로가 탈출하자 그 책임을 지고 목숨을 잃었다.

성 경: [행16:24]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바울과 실라의 투옥]

⭕ 깊은 옥에 가두고 - 로마의 감옥은 보통 3종류로 분류된다. 즉, 죄수들이 햇빛을 쬐고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보통 감옥(communiora)과 견고한 빗장을 치고 잠그는 내옥(interiora) 그리고 사형수들을 수감하는 지하옥(tullianum)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내옥에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양발에 착고를 채워 벽에 고정시키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면 발이 벌려져서 고통스런 자세가 된다(Lenski). 사실 상관은 그들이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했었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한 감시의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Marshall). 한편 이러한 완벽한 수감(收監) 상태는, 나중 그들의 탈출 내용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극적인 감동을 더해준다.

성 경: [행16:25]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밤중쯤 되어...찬미하매 - 고난 중에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롬5:3;약1:2;벧전5:6,7). 이 내용은 기적적인 구출을 바라는 간구보다는 고난에 대한 신앙의 승리를 보여주는 전형으로서 기록된 것이다(Neil).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적적인 방법으로 풀려나게 됨으로써, 간수들은 바울 일행의 찬송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 경: [행16:26]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이에 홀연히...다 벗어진지라 - 양식 비평은 옥문이 저절로 열려 기적적으로 옥에서 탈출하는 이야기가 고대 세계에서는 흔했다면서(5:19-24; 12:7-10;도마행전154) 35절의 이야기가 24절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즉, 양식 비평가들은 25-34절이 누가의 이야기가 아닌 삽입된 '전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그와 비숫한 다른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역사적 확실성을 훼손받아야 할 근거는 없다. 그리고 어떠한 이야기가 가운데를 뚝 떼어내고 보아도 의미가 잘 통한다고 해서, 그 중간 자료를 삽입된 '전설'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섬세(纖細)하게 미쳤는가 하는 것은 '벗어졌다'는 의미의 '아네데'(*)가 제1단순과거 '수동형'이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 경: [행16:27]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간수가 자다가...자결하려 하거늘 - 로마의 법에서 죄수를 도망하게 한 간수는 그 죄수가 받은 형량만큼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죄수들이 도망간 걸로 생각하는 간수가 검(로마의 정규 무기)을 빼어든 것은, 별다른 죄도 없이 바울과 실라가 얼마나 심한 형벌을 받았는지 짐작케 해준다. 고난과 죽음의 위험 가운데서도 찬미할 줄 아는 사도들과 재난 중에 자살하려고 하는 이교 로마인 간수는 얼마나 서로 대조적인가! 한편 '그 간수는 자결하려 하기 전에 왜 좀더 감옥안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가?' 혹은 '설사 죄인들이 도망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초자연적 힘에 의한 것이었을 때 간수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지 않는가?'(Clemen) 등의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미 바울의 초능력 소문을 들었던 간수는 직접 눈앞의 기적에 직면하여,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막9:6;16:8, Marshall).

성 경: [행16:28]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바울이...다 여기 있노라 하니 - 본문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어두운데도 간수가 죽으려 했는지를 알았는가?' 또한 '다른 죄수들이 하나도 도망치지 않았는가?' 하는 등의 질문이 제기되곤 한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감옥안에 희미한 빛조차도 없었겠느냐고 주장하면서, 다른 죄수들이 도망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도 '초능력을 목격한 죄수들의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H.Marshall, Lenski). 그러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때때로 그러한 것처럼, 압축된 이야기에는 저자의 목적을 뒷받침하는 중요내용들만 부각(浮刻)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저자가 세목 하나하나를 논리적으로 꿰맞추지 않는 때도 있는 것이다(Marshall).

성 경: [행16:29]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 감옥을 이 간수 혼자서만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며, 이 간수는 조수에게 등불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 바울과...부복하고 - 간수는 자신이 착고에 채우며 고문했던 자들 앞에 이제 엎드렸다. 이제야 비로소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의 능력있는 사자임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려 존경의 뜻을 표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10:25). '부복하고'의 헬라어 '프로세페센'(*)은 '앞으로 떨어졌다', '맹렬히...에 돌진했다'는 뜻을 내포하는 바, 이 간수의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성 경: [행16:30]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저희를 데리고...하거늘 -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복음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가 '구원'에 관해 물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 간수는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17절)라고 외친 소녀의 말을 상기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구원'의 의미가 간수의 근무 소홀로 인한 지위 상실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쟈안(Zahn)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죄수들은 한 명도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생들아'라고 번역된 헬라어 '퀴리오이'(*, '주들이여')는 존경의 어조를 내포하고 있다. 간수는 지진(地震)을 통해 자존심 따위는 모두 털어버렸다.

성 경: [행16:31]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가로되...얻으리라 하고 - 본절은 초대 교회 복음 증거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대주제였다(2:38,39;3:19-26;4:12;8:12;10:43;13:38,39). 동시에 이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다. '피스튜손'(*, '믿다')은 당연히 단순과거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그 순간, 구원은 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항상 주 예수께 신뢰와 의탁을 두는 것을 뜻한다. '너와 네 집'(*, 수 카이 호 오이코스 수)에서 '너'라는 개념이 이미 동사 어미로 표현됐는데도 '쉬'(*, '너')가 첨가된 것은 대명사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간수의 믿음이 자동적으로 아내나 아이들을 구원할 수는 없다. 그가 자기의 인격으로 믿어야 했던 것처럼 그 식구들도 각자의 인격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행16:32]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그 집에...전하더라 - 10:2;11:14;18:8;고전16:15 등에도 가장(家長)과 가족들의 개종에 대한 예증들이 보인다.

성 경: [행16:33]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밤 그 시에...세례를 받은 후 - 여기서부터는 문법적으로 간수가 주체가 된다. 믿음의 첫 증거로서 간수는, 전날 매질한 것을 사죄하는 의미의 일을 했다(마25:36;히10:34). 그리고는 그와 그 가족들이 지체없이 세례를 받았다. 복음의 힘이 어떠한 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성 경: [행16:34]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이적적 출옥 및 간수의 회심]

⭕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 바울과 실라가 얼마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허기진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마샬(Marshall)은 이 식사와 함께 성만찬이 베풀어졌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자기집에 올라가서'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간수의 집이 꼭 윗층에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마당에서 방으로, 그리고 식당으로 모시고 들어갔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Lenski).

⭕ 크게 기뻐하니라 - 간수와 식구들의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절망적인 자살의 순간에 구원의 길로 들어선 간수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 이는 바로 복음의 역사가 아닌가! 한편 누가는 불필요한 세목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추측컨대 바울과 실라는 이 일을 마치고 다시 감옥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성 경: [행16:35]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명예로운 석방]

⭕ 날이 새매...놓으라 하니 - 상관은 아전(lictor, 22절 주석을 보라)을 시켜 두 사람의 유대인을 풀어주도록 하였다. 갑작스런 상관들의 태도변화에 객관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인지 어떤 서방 사본은 이 부분을, 날이 새매 상관들은 시장의 광장으로 갔고, 지난 밤의 지진을 상기하면서 두려워하며 아전을 보냈다고 해석하고 있다. 닐(Neil)도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누가는 직접적인 지식이 없을 때에는 가급적 사실 자체만을 기록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정확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상관들은 공적인 태형과 하룻밤의 투옥으로 그들의 의도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던 듯하다(Lenski, Haenchen, Marsall). 혹은 그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에 대한 송사가 거짓된 것임을 발견하고 그들을 석방하도록 명령했다고 해석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Lenski)

성 경: [행16:36]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명예로운 석방]

⭕ 평안히 가라 - 누가는 이 인사말을 통해 간수의 회심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이 인사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주 사용하였던 유대식 인사인 것이다(눅8:48).

성 경: [행16:37]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명예로운 석방]

⭕ 바울이 이르되...나가야 하리라 한대 - 당시 아구스도 칙령(Edicts of Augustus)에 의해 확정되고 발전된 발레리안과 포르시안법(Valerian and Porcian laws)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로마의 보호 아래 로마 행정지역의 어느곳이나 여행하며, 본인의 동의하에서만 지방법률에 따라 재판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뿐만아니라 곤란한 문제일 경우에는 지방 당국이 아닌 황제 자신에게 재판을 받기위해 호소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로마 시민의 항소권에 대해서는 22:25-29;25:9-12;26:32;28:16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때리고'의 헬라어 '데로'(*)는 '가죽을 벗는다'는 뜻으로서 태장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아카타크리투스'(*,'죄도 정치 아니하고')는 이곳과 22:25에만 등장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재판에 붙여지지 않았다'이다. 상관들은 재판도 열지 않은 채 태장을 가하고 그들을 투옥함으로써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혹자는 바울 등이 왜 좀더 일찍 로마 시민권을 주장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아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측컨대, 그러한 주장은 군중의 소동과 함성(喊聲)의 분위기 속에서 묻혀버렸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행16:38]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명예로운 석방]

⭕ 로마 사람이라...두려워하여 - 어쨌든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취한 행위는 심각한 위법 행위였고, 이것이 상부 기관에 보고되면 충분한 문책 사유가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내세운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새로 탄생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복음에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도구로 사용할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빌1:18). 둘째는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물론 애매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참으면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겠지만(벧전2:19), 그 고난 자체가 즐거운 일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성 경: [행16:39]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명예로운 석방]

⭕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 헬라어 '에로톤'(*, '청하다')의 미완료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관들이 계속하여 떠나기를 청하였으나, 이에 대해 바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Lenski). 상관들이 바울일행에게 빌립보를 떠나도록 요구한 이유는 머무를 경우 상관들의 범법 행위가 로마 식민지 도시 전체에 알려지게 돼,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둘째는 귀신들린 소녀의 주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몰려와 계속적으로 바울과 실라의 처벌을 요구할 경우, 그들 자신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성 경: [행16:40]

주제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주제2: [명예로운 석방]

⭕ 두 사람이...위로하고 가니라 - '호이아델포이'(*, '형제들')라는 용어를 보아 추측컨대, 이때 이미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 귀신들렸던 소녀 들을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가 구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교회는 누가의 지도하에(17절 주석 참조), 새로 탄생한 교회들 중 가장 훌륭한 교회로 성장하였다. 바울은 로마에서 구금생활을 하고 있을 때인 A.D.62년경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빌1:1) 상담과 권면의 내용을 적고 있다(빌2:25-30;4:10-19). 한편 상관들이 전도자들을 추방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바울 일행이 빌립보를 떠난 것은 꼭 상관들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사역을 완수하여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또한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사역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Lenski). 그러나 누가는 빌립보에 남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10절에서 시작되었던 '우리' 문장은 17절에서 끝났다가 20:5 빌립보에서 다시금 등장한다.

성 경: [행17:1]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저희 - 바울과 실라를 말한다. 디모데와 누가는 빌립보에 체류중이었다(16:12,40)

⭕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 '암비볼리'(Amphipolis)는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는 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 데살로니가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R.N.Longenecker).

⭕ 유대인의 회당 -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로 오기 전 다른 두 도시, 곧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 머물지 않은 부분적인 이유는 그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 공동체와 회당이 있었으므로 바울과 실라는 효과적으로 또 곧바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는 그곳을 선교지로 택했을 것이다.

성 경: [행17:2]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자기의 규례대로(*, 카타 토 에이오도스) - '규례'의 헬라어 '에이오도스'는 '에도'(*)의 완료 부사로서 '습관', '익숙한 일' 등의 뜻이다. 이는 이미 바울이 새로운 도시에서 회당을 찾아 복음 전하는 일을 습관처럼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살라미(13:5), 비시디아 안디옥(13:14), 이고니온(14:1) 등에서 바울은 이미 그의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이 회당을 다른 곳보다 먼저 찾은 이유는 회당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서 거부당한 후에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식의 기계적인 수준을 밟아 증거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다만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항상 우선적(優先的)인 일로 유념하고 있었던 것이다(롬1:16;2:9,10).

⭕ 세 안식일에 - 이 구절만 가지고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단지 3주 동안만 머물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3주 이상 그곳에서 체류하며 회당에서 가르쳤고, 회당에서 가르치지 않을 때는 거리나 그밖의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다(Furneaux).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적어도 한번 이상 빌립보 교회로부터 '쓸 것'을 공급받았고(빌4:16) 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친히 노동했다는 점(살전2:9) 등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 성경을 가지고 - 구약성경을 토대로 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단 한번도 성경을 떠나서 가르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복음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 강론하며(*, 디엘려사토) - 원형 '디알레고마이'(*)의 제1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담론하다', '문답하다', '연설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성 경: [행17:3]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뜻을 풀어...증명하고 - 여기서 바울의 설교 형태가 잘 드러난다. 바울 설교의 중심은 대개가 '증거와 선포'의 형태였다. 그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과 부활을 해석하여 선포하였으며 그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하였다. 이러한 증거와 선포는 13:16이하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구약성경 구절은 신21:23;시2,16,110편;사53장 등이었을 것이다.

성 경: [행17:4]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 바울의 설교 끝에는 늘 권고가 뒤따른다. 여기서 바울의 권고로 많은 회심자들이 생긴다. '경건한 헬라인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20:4에 언급된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귀부인들'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부인들로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들로 짐작된다.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에서보다도 여성들이 많은 자유를 누렸다. 한편 호르트(Hort)는 이 '귀부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들의 유대인 아내들'이라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편 여기서 헨헨(Haenchen)은 사회 지도급 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그들이 바울 일행에 대한 박해를 막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 핍박의 주동세력은 시당국자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문은 쉽게 해소될 수 있다(I.H. Marshall).

성 경: [행17:5]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처럼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켰다. 살전 3:3-10에 의하면 이 유대인들의 시기는 단순한 시기가 아니라 갖가지 중상모략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 -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쫓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를 와해할 목적으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시장이나 광장 등의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매도(罵倒)하는 것이었다.

⭕ 야손 - 이는 '여호수아' 또는 '예수'에 대한 헬라어 번역 이름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사람이 유대인(Lenski, Longenecker)이 아니면 이방인 출신(Robertson)이라고 각기 다르게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바울과 그의 전도단 일행이 빌립보에서 루디아의 집에서 머물렀던 것처럼(16:14) 여기서는 '야손'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본 구절의 '야손'이 롬16:21에 언급된 바울 친척인 '야손'과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성 경: [행17:6]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발견치 못하매 - 불량배들의 소동을 접한 집 주인 야손은 바울과 전도단 일행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을 것이다.

⭕ 야손과 및 형제를 - '형제'(*, 아델포이)란 야손의 형제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여기서는 예수 안에서 함께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Howard Marshall). 불량배들은 바울을 찾지 못하자 그들의 눈에 띄는 야손과 다른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끌고가 가당치 않은 누명을 씌워 행정당국에 넘겼다.

⭕ 읍장들 - '폴리타르카스'(*)라는 칭호는 B.C.2세기부터 A.D.3세기에 걸친 시대의 비문에서 발견되었고 마게도냐의 도시들에만 적용되었다고 한다. 이 칭호는 로마 영토 내의 자치 도시를 책임지는 행정 장관을 가리킨다.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식민지가 아닌 자유 도시로서 인정하여, A.D.1세기에는 다섯 명의 읍장들이 이 도시를 다스리게 했고 그후 2세기에는 읍장이 6명이 되도록 늘렸다.

⭕ 천하를 어지럽게 - 당시 '천하'라고 하는 말은 곧 로마 제국 전체를 가리켰다(눅2:1). 따라서 본문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야손이나 바울은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셈이다.

성 경: [행17:7]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들였도다 - 헬라어 '휘포데데크타이'는 원형 '휘포데코마이'(*)의 현재 완료형으로서 '손님으로 영접하다'는 뜻이다. 이는 야손이 로마제국을 어지럽게 하는 범죄자들과 하나가 되어 죄를 지었으며, 또 야손의 음모로 그의 집에서 작당(作黨)하여 범죄했다는 암시를 내포한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 여기서 가이사의 명은 가이사 율리우스(Julius Caesar)의 '황제의 법령'을 뜻한다. 여기에는 황제에 대한 반역과 로마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고 제국 내 모든곳에 적용되었다.

⭕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반역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의 끝에 가장 큰 죄인 반역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 중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로마에 반역하여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임금을 세웠다고 모함했을지도 모른다(14:22;19:8;20:25;28:23,31). 그리고 이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서신들에서 사람들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왕국'이라든가 '임금'이란 말을 가능한 회피했을 수도 있다(R.N.Longenecker). 그렇지만 예수께서 로마제국을 초월하여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심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 경: [행17:8]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무리와 읍장들이...소동하여 -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에게 반역했다는 소리가 다른 무리에게 전해지고 읍장들에게 고해지자 이 소란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억울한 누명에 대해서 야손과 그 일행은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으며 그들을 위해 증언해 줄 바울과 실라도 그곳에 없어서 읍장들의 처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읍장들은 이러한 고소에 대해 성의없는 반응을 보이면 그들 역시 반역 공모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만 했다.

성 경: [행17:9]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데살로니가 전도]

⭕ 보(保)를 받고 놓으니라 - 법정 용어로서 판결이 명한 보석금을 받고 석방했다는 말이다. 야손과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이의를 제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 다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에서 바울 일행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야손 일행은 이후로 바울의 일행을 도시내에 다시 들이지 않겠으며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보석금을 지불하는 정도로 충분히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어려움이지 야손과 그의 일행의 보석금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D.E.Haenchen). 한편 살전 2:18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나 '사단이 막음'으로 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며 특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야손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염려한 사랑의 배려 때문이다(J.W.Packer).

성 경: [행17:10]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베뢰아 전도]

⭕ 밤에 형제들이 - 읍장들이 보석금을 받고 조건부적으로 야손의 일행을 석방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울일행의 데살로니가 체류는 양측 모두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야손이 읍장들에게 끌려갔을 때 아마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의 어느 비밀장소에 숨어 있었을 것이고 낮보다는 다소 안전한 밤이 되서야 소수의 새로운 개심자들의 길 안내로 데살로니가를 떠날수 있었을 것이다.

⭕ 베뢰아 -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성 경: [행17:11]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베뢰아 전도]

⭕ 더 신사적이어서 - '더 신사적'의 헬라어 '유게네스'(*)는 비교급의 형태로서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귀한'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베뢰아 사람들이 모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 자세를 나타내 보였고 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 간절한 마음으로(*, 파세스 프로뒤미아스) - '프로뒤미아스'는 '열심히', '자신해서', '준비된' 등의 뜻이며 '파세스'는 '모든'이란 뜻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모든 준비된 마음과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여 말씀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말씀은 준비된 마음 밭에 떨어졌을 때 좋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마13:3-8).

⭕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상고하다'의 헬라어 '아나크리노'(*)는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는 등의 뜻을 내포한다. 이는 종종 사법적 심문(審問)과 관계되어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심을 다해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고 살펴 그 본의를 다시금 잘 새겼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헬라의 철학사상, 그리고 그들의 생활체험 등을 바탕으로 바울의 설교를 깊이 비고 검토하여 복음을 진리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성 경: [행17:12]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베뢰아 전도]

⭕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 - 상류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미쳤던 헬라인들을 가리킨다. 그 중에는 유대교로 개종했던 이방인들과 이교도를 믿던 사람들도 다소 있었을 것이다. 복음은 헬라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롬1:16). 한편 바울의 아시아 여행에 동반했던 부로의 아들 '소바더'도(20:4) 이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성 경: [행17:13]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베뢰아 전도]

⭕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소동케 하거늘 - 베뢰아에서 선교활동의 소식이 데살로니가의 사악한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베뢰아까지 달려왔다. 이들은 똑같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켰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소동의 무리에 베뢰아 사람들이 가담하였다는 언급이 없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는 바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적어도 바울 일행에 대해 적의(適意)를 나타내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성 경: [행17:14]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베뢰아 전도]

⭕ 바울을...바다까지 가게 하되...거기 유하더라 -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하여 베뢰아 도시 안에 안전하게 거할 곳이 없어진 바울은 그곳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베뢰아를 떠난다. 바울이 바다로 나가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메돈(Methone)이나 디움(Dium)이나 피드나(Pydna)로 갔을 것이다(Longenecker, Lenski).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보다는 다소 위험이 적다고 판단되었던지 베뢰아에 계속 체류하여 아직은 성장이 미약한 그곳 교회를 보살폈던 것 같다.

성 경: [행17:15]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베뢰아 전도]

⭕ 바울을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 바울이 다른 곳을 두고 하필 아덴으로 갔던 이유는 이곳에 언급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아덴이 베뢰아에서 가장 가까운 선교 장소여서인지(Haenchen), 아니면 마게도냐가 안전해지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선교활동을 계속하려고 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마게도냐의 대부분을 여행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교장소를 택해야 했고 그래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아덴을 선택해 그곳을 찾아갔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가장 좋을 듯하다(Lenski).

⭕ 실라와 디모데를...속히 오게 하라 - 바울이 아덴으로 갔을 때 디모데가 베뢰아에 남아 어떤 일들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의 행적을 서신서와 비교해 보면 다소 윤곽이 잡힌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살전3:1). 그러나 바울은 다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파송하고(살전3:2), 실라는 마게도냐(추측컨대 빌립보일 것이다)로 파송한다. 이 사이에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갔으며(18:1),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18:5;살전3:6).

성 경: [행17:16]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아덴 - 아덴(Athens)은 에게해의 지류 샤론만에 위치하였으며 피라에우스(Piraeus)항구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이다. 북쪽으로는 파르네스 산, 동쪽으로는 펜텔리쿠스 산, 남동쪽으로는 히멧투 산이 둘러싸고 있는 좁은 평지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테네(Athene)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아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페리클레스(B.C.495-239)에 의해 이 도시는 전성기를 맞아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이 건축되었다. 아울러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을 피웠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수스 전쟁(B.C.431-404)으로 인하여 아덴은 빛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 문학적,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명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성 경: [행17:17]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헬라어 원문에 나오는 '멘 운'(*)이란 말은 '따라서'라는 뜻으로 새로운 장면을 이끌어 내며 본 단락의 도입부분(16절)과 본론부분을 연결시켜 준다(17절 이하).

⭕ 회당에서는 - 바울은 그의 규례대로 먼저 회당을 찾았다. 어떤 학자는 바울은 먼저 회당을 방문했다는 본문의 기록은 누가의 독특한 서술 양식에 따라 일부러 첨가된 것이라고 본다(Conzelmann). 그러나 바울의 습관을 고려하면 이는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봄이 나을 것이다.

⭕ 저자에서 - 아덴에는 다른 그리이스 도시들처럼 오직 하나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장은 상업과 웅변과 철학적 담론의 중심지였음은 물론 한가한 사람들이 소일(消日)을 위해 북적대는 곳이기도 하였다(Meyer). 한편 헨헨(Haenchen)은 이 시장이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옹기시장(*, 케라메이코스)으로서 아덴의 생활중심지였다고 설명한다.

⭕ 변론하니(*, 디엘레게토) - 2절의 '강론하며'와 같은 뜻으로 바울이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세히 증거하고 시장과 길거리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설파한 것을 나타낸다.

성 경: [행17:18]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 - '에비구레오'는 '에피큐로스 학파'를 뜻하며, '스도이고'는 '스토아 학파'를 뜻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도표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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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피큐로스 학파 | 스토아 학파 |

+-----+-----------------------------------+-------------------------+

| 주 | 에피큐로스(Epicurus, B.C.341-270) | 제논(Zenon, B.C.340-265) |

| 창 | | |

| 자 | | |

+-----+-----------------------------------+-------------------------+

| 이 | 주창자인 에피큐로스의 이름 땀. | 제논이 아덴의 아고라 관장에서 늘 |

| 름 | | 가르치던 장소가 장식 회랑(Painted |

| 의 | | stoa)이었던 데서 유래. |

| 유 | | |

| 래 | | |

+-----+-----------------------------------+-------------------------+

| | 쾌락이 인생의 주된 목표라고 주장. | 우주 속에 내재하며 인간 삶의 지침이|

| 주 | 이 쾌락은 육욕적인 것이 아니라 | 되는 원칙으로서의 이성의 중요성을 |

| | 고통, 육정, 공포, 죽음 등에 대한 | 강조함. 엄격한 금욕주의와 만물을 |

| | 염려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정, 즉 | 통할한다는 로고스론, 최선을 다하는 |

| | 아타락시아(ataraxia)를 뜻함. | 자는 지위계급을 막론하고 칭송을 |

| 장 | | 받을 것이라는 만민 동증주의, 만인 |

| | | 형제 사상을 주장함. |

+-----+-----------------------------------+-------------------------

| |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으나 |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하나님을|

| 종 | 그 신들이 인간의 삶과는 전혀 | 세계정신이라고 생각함. |

| 교 | 관련성을 맺지 않고 있다고 하는 | |

| 관 | 자연신교의 입장을 취함. | |

+-----+-----------------------------------+-------------------------

⭕ 쟁론할새 - 바울이 직업적인 철학자들과 함께 논쟁에 참여한 것을 나타낸다. 당시 아덴에는 직업적인 철학자들이 준비를 갖추고 논쟁에 참여할 목적으로 광장이나 거리에 나타나곤 하였다.

⭕ 말장이(*, 스페르몰로고스) - 원래 곡식을 쪼아먹는 새를 뜻하였으나 후에 쓰레기를 주워모으는 사람을 가리켰으며, 점차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얻어 듣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것인 양 도용(盜用)하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 말이 결국 변변치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여기서 이 말은 극단적인 조롱과 멸시의 의미로서 그 철학자들이 바울을 사기꾼이나 떠벌이 같은 인물로 보았다는 뜻이다.

⭕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 - 철학자들은 바울을 새로운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같다. 당시 아덴에는 수많은 이방신들이 숭배되었고 또 그 신들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한 이방신으로 생각했으며 '부활'(*, 아나타시스)이란 말을 예수란 신의 배우자인 여신으로 잘못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Longenecker, Haenchen). 참고로 그리이스의 열 두 신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

|차례| 헬 라 이 름 | 로 마 이 름 | 맡은 일 | 관련 성구 |

+----+--------------------+--------------------+----------------+---+

| 1 | 제 우 스 | 쥬 피 터 | 천지창조, | 행 14:12 |

| | | | 통치 | |

+----+--------------------+--------------------+----------------+---+

| 2 | 헤 라 | 쥬 노 | 생산, 결혼 | |

+----+--------------------+--------------------+----------------+---

| 3 | 포 세 이 돈 | 넵 츈 | 바 다 | |

+----+--------------------+--------------------+----------------+---

| 4 | 하 데 스 | 플 루 토 | 음 부 | |

+----+--------------------+--------------------+----------------+---

| 5 | 아 레 스 | 마 즈 | 전 쟁 | |

+----+--------------------+--------------------+----------------+---

| 6 | 헤 르 메 즈 | 머 큐 리 | 상 업 | 행 14:12 |

+----+--------------------+--------------------+----------------+---

| 7 | 헤 파 이 스 | 볼 칸 | 대장간 | |

| | 투 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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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아 프 로 | 비 너 스 | 연 애 | |

| | 대 테 | | | |

+----+--------------------+--------------------+----------------+---

| 9 | 아 폴 로 | 졸 | 음악, 문예 | |

+----+--------------------+--------------------+----------------+---

| 10 | 아 데 미 스 | 피 아 나 | 사 냥 | 행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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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세 레 스 | | 농 업 | |

+----+--------------------+--------------------+----------------+---

| 12 | 미 네 르 바 | | 지 식 | |

+----+--------------------+--------------------+----------------+---

성 경: [행17:19]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아레오바고 - 이는 문자적으로 '법정' 또는 '아레스의 평의회'라는 뜻으로 주로 종교와 교육,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던 일종의 권력 기구였다. 바울 당시 시의 모든 행정관들은 이 평의회의 구성원이었으며 면책(勉責) 특권을 누렸다. 한편 바울이 끌려간 아레오바고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아덴인들의 비공식적 집회를 가리킨다고 본다(Barnes). 이 견해는 바울의 연설투가 법정상의 변호와 거리가 멀고 또 재판 진행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다는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반면에 이를, 바울의 가르침 내용을 심문하기 위해 열린 공식 법정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Hemer). 이 견해는 디오누시오라는 아레오바고 관원에 대한 언급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34절). 걸론적으로 이것이 반드시 법적 재판의 형식을 띤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공적 집회의 성격임에는 분명하다고 봄이 무난할 듯하다.

성 경: [행17:20]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무슨 이상한 것을...알고자 하노라 - 표면적으로는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말로 보이지만 조롱 섞인 태도도 배제되지 않았다. 아울러 그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헬라의 종교적 배경과 철학적 사고 체계에서는 바울의 가르침이 새롭고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더욱 자세한 내용과 그 배경 등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철학적 사고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려고 한 철학자들의 노력 자체가 무모했다.

성 경: [행17:21]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 이는 아덴 사람들의 호기심 많고도 경박한 생활 태도를 말해준다. 아덴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고, 새로운 것이라고 찾았을 때는 또 이내 식상(食傷)해 버렸다. 이에 대해 B.C.5세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클레온은 아덴 사람들을 소위 새로운 것이라고만 하면 가장 잘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었다(Thucydides, History). 이러한 피상적인 기질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새로운 면을 보고서 복음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내 낡은 것으로 여겨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성 경: [행17:22]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 바울이 이 곳에 선 것은 죄인으로서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나 혹은 철학자들 앞에서 철학을 강의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다만 바울은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포자로서 그곳에 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순간도 복음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증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영역 성경 KJV는 이 부분을 '너무 미신적이다'(too sup-erstitious)라고 번역하고, NIV는 '매우 종교적이다'(very religious)라고 옮긴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한 것은 그들의 도시에 신전과 신상들이 많았던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바울의 이 말은 그들의 경건함이나 종교적인 성향에 대한 칭찬(Chrysostom)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그들의 무분별한 미신적인 태도에 대한 비난으로 이해됨이 더 합당하다(Calvin, Luther).

성 경: [행17:23]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알지 못하는 신에게(*, 아그노스토 데오) - 이러한 유형의 비문을 증거하는 것들이 있는데, 2세기의 지리학자였던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팔레룸에서 아덴으로 가는 길에 '이름은 있고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제단'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버가모에 있는 한 비문에도 '알지 못하는 신'이 새겨져 있다(Bruce, Longenecker, Blaiklock, Marshall, Meyer). 그러나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이나 비문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Longenecker, Haenchen). 이는 아덴 사람이 가진 신관의 한 유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긴 단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그 도시를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종교심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Blaiklock). 바울은 이러한 헬라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즉 여느 때와 같이 유대의 역사를 언급하거나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시작하지 않고 아덴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기초로 하여 그와 아덴사람들과의 접촉점을 마련하였다.

⭕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알게 하리라 -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으로서, '알지 못하는 신'을 언급하는데, 아덴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절대자를 표현하기 위한 것 같다. 바울은 이러한 '막연한 신관'을 가진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을 계시하고 있는 창조(24절), 구속(25-30절), 부활(31절)의 신관을 도입하여 제시하고 있다.

성 경: [행17:24]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우주와...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 하나님은 헬라의 많은 신들 중에 주신인 제우스처럼 여러 신 가운데 있는 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분이시다. 아덴에는 약 30,000이 넘는 신들이 있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러한 신들 중에 하나로 포함하지 않도록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명백히 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느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겨난 것도 없고 그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분은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관여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신다.

⭕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 '손으로 지은 전'은 바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비교하여 본다면 쉽게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떠올릴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지은 것이 틀림없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봉헌할 때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한 바 있다(왕상8:27).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국한될 수가 없으시다. 그분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다. 아덴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국가와 또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많은 신전과 사원 안에 수많은 신들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소유될 수 있는 분도 아니며 그러한 신들과 같은 부류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성 경: [행17:25]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 아덴 사람들은 신들의 항구한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들의 희생 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상에 음식을 갖다놓고 옷을 입히고 또 좋은 장소에 그 신상들을 안치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심으로 인간의 희생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헌금과 헌물을 드린다 하여 더 많이 응답하거나 기뻐하시지도 않는다. 그분은 무엇이 필요하다 생각될 때 우리의 도움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하고 충만하사 자신 안에서 모든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만큼 충족하신, 이른바 유복적 속성(有福的 屬性)을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딤전1:11;6:15).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호흡을 한치도 연장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명과 호흡'의 주인이시다.

성 경: [행17:26]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 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반대하여 인류는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한 혈통과 한 조상을 가진 후손임을 언급하고 있다(Bruce, Longenecker). '한 혈통으로'(한글개역, KJV)라는 번역은 '여스 헤노스 하이마토스'(*)라고 되어 있는 후대의 사본들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사본들(*, A, B등)에서는 '하이마토스'(*)가 생략되어 있고 단지 '여스 헤노스'(*, 피)라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번역본들이 이를 따르는데(현대인의 성경, NASB, RSV, NIV 등), '한 사람으로부터'(from on 또는 from one man)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한데,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인류의 하나됨이라는 사상은 바울 신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롬5:12-21;갈3:28). 이러한 하나됨은 죄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구속으로 인해 회복되었다(Bruce).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인간관을 피력하고 있다.

⭕ 연대를 정하시며...경계를 한하셨으니 - '연대를 정하셨다'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정해주셨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또한 14:17에 근거하여 볼 때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D.E.Haenchen). 본절은 24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알지 못하는 신'은 곧 하나님으로 창조주이시며, 그는 시간을 만드사, 사람을 시간의 흐름속에서 살게 하셨고 나아가 모든 민족들이 살 수 있는 공간적인 경계까지 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시편 기자와 모세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셨으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노래했다(시74:17). 또한 모세도 모든 민족들의 경계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음을 교훈하고 있다(신32:8).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는 사상에 근거하여 아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행17:27]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 '더듬어 찾다'는 뜻의 헬라어 '프셀라파오'(*)는 '만지다', '느끼다'는 뜻으로 '소경이 무엇인가 열심히 더듬어 찾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영적으로 어두움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방황하는 것을 묘사한다.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쫓아 다녔지만 그들로부터 영혼의 갈급함이나 구원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했다. 이들이 믿고 따르던 신들은 오히려 그들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범신론적 사상, 불가지론 또는 회의론 등은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성 경: [행17:28]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그를 힘입어...기동하며 - 이 구절은 크레타(Creta)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 des, B.C.6세기)의 4행시 '크레티카'(Cretica)에도 나온다.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 (Minos)가 그의 부친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당시 아덴인들에게 익숙했던 이야기를 통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한 것이다.

⭕ 그의 소생 - 이런 표현은 길리기아 시인 아라투스(Aratus, B.C.315-240)의 시 '패노메나'(Phaenomena)에 나온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클레안데스(Cleanthes, B.C.331- 233)의 시 '제우스에게 드리는 찬송'(Hymn to Zeus)에도 나타난다. 바울이 이곳 외에도 희랍의 시를 정확하게 몇 차례 인용한 사실로 미루어(고전15:33;딛1:12) 그는 희랍의 학문이나 문학에도 능숙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렇듯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與件)을 이미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희랍적인 지식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희랍 세계의 시를 인용하여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며 성경적이었다. 한편 24-28절의 바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희랍의 철학적 사고와 비교된다.

+----+---------------------------+----------------------------------+

| | 바울의 설교 | 헬라의 철학적 사고 |

+----+---------------------------+----------------------------------

| | (1)하나님은 한 분이다. | (1)스토아 철학 : 범신론 |

| +---------------------------+------------------------------------

| | (2)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 (2)에피큐로스 철학 : 세상 만물은 영원전부터 |

| | | 존재해 온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 |

| +---------------------------+-----------------------------------

| | (3)인류는 한 하나님에서 | (3)아덴 사람들은 아티카(Attica) 본토의 |

| | 창조되었고 같은 조상을 | 흙에서 생겨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

| | 가진 후손이다. | 자부함. |

| +---------------------------+------------------------------------

| | (4)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 (4)에피큐로스 자연신론(deism) : 신은 인간의 |

| | 삶을 섭리하신다. |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음. |

| +---------------------------+-----------------------------------

| | (5)천지의 주재시다. | (5)인간이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하여 신들은 |

| | |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또 한사람의|

| | | 손으로 신들을 새겨 만질 수 있다고 여김. |

+----+---------------------------+----------------------------------

성 경: [행17:29]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여길 것이 아니니라 - 바울의 이 말은 스토아 철학(Stoicism)의 범신론적인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 그대로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현자(賢者)이고, 현자는 또한 신과 같은 자라고 한다. 이는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보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관, 인간관과는 배치된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용어인 '신의 소생'이라는 싯구를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셩경적인 인간론의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창1:26,27). 따라서 자연물(금, 은, 돌 따위)로 만들어 놓은 신들은 인간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인간보다 뛰어난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증의 독특함을 알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참 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성 경: [행17:30]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 바울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점진적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절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선포와 절단에의 촉구로 옮겨가고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란 바울이 이미 루스드라에서 '지나간 세데'(14:16)라고 표현한 말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이전에 가리킨다.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의 헬라어 '휘페리돈'(*)은 '보지않다', '간과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또 심판보다는 가급적 회개의 때를 기다리는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우상 숭배 행위마저 참고 견디시며 자신을 자연을 통해 계속적으로 계시하셨다(14:16;롬3:25).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신'은 그 정체가 드러났고 아울러 '알지 못하던 시대'도 끝이 났다.

⭕ 회개하라( ,메타노에인) - 이는 '메타노에오'(*)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서 계속적인 명령의 뜻을 내포한다. 이 회개는 삶의 태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데 여기서는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용서와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가르치는 바울 사상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회개에 대한 강조점이 여전히 나타난다(살전1:9,10).

성 경: [행17:31]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 전도]

⭕ 정하신 사람 -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서 언급하신 것 같이(막14:41;눅17:24)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아울러 온전한 인성(人性)을 지니고 세상에 오셨고 인류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 본절에서 심판주를 '사람'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이 다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심판주란 의례히 초월적 위엄과 권세를 지닌 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계18:8). 그러나 이 표현은 후반절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이란 구절과 연결되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즉 본절은 인자의(죽으심과) 부활이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곧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바울의 설교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설교를 두고 한낱 철학적 강변 또는 자신의 지식과 언변에 대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리거나 그의 아덴 사역이 실패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사실 바울이 아덴에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거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 분명한 성과를 보았다(34절). 바울은 자신의 화려한 사역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빌3:8)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 바울의 아덴 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의 이 설교는 결코 철학적 강변이 아니다. 이 설교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샛별같이 빛나고 있다.

성 경: [행17:32]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을 떠남]

⭕ 저희가...기롱도 하고...다시 듣겠다 하니 - 부활이란 주제는 역시 아덴 사람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었으나, 몸의 부활에 관한 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육체를 속되고 악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만 아니라 부활 또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고전1:18). 시인 에스킬루스(Aeschy- lus, B.C.525-456)가 '사람이 일단 죽으면 티끌이 인간의 피를 빨아들이며 결코 부활은 없으리라'고 노래한 바 있듯이 본문의 아덴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조롱과 비웃음으로 일축(一蹴)해 버리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단의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더욱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듣기를 요청했고 그들 중 몇몇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성 경: [행17:33]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을 떠남]

⭕ 바울이...떠나매 - 바울의 설교는 대부분의 청중들에게는 거부되었지만, 몇몇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더이상 아레오바고 광장에 머무르기를 거절하였던 것 같다. 아마 바울은 공공장소에서 연설할 수 있는 자유나 권한이 있지 않았던 듯하며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랬더라도 다행히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Haenchen).

성 경: [행17:34]

주제1: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주제2: [아덴을 떠남]

⭕ 몇 사람이...믿으니 - 여기서는 세례를 주었다거나 예배를 드렸다거나, 또는 장로를 세원다는 등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소수의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고 하는 이 간략한 언급에는 이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결코 신자의 수가 많고 적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는가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아덴 선교의 복음의 씨를 심은 것이다.

⭕ 디오누시오 - 이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후기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덴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첫 개종자가 대개 그 지역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사실과(고전16:15,16) 조화를 이룬다.

성 경: [행18:1]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바울이...고린도에 이르러 - 고린도는 북쪽으로 중부 그리이스와 남쪽으로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를 연결시키는 고원 위에 위치했다. 이 도시의 동서쪽에는 각각 항구가 있어 전략상 요충지였다. 한편 이 도시는 B.C. 8세기에 크게 번성하여 B.C. 6, 7세기경에는 영화와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B.C. 146년 고린도는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Mummius)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B.C. 46년 로마 황제 시이저(Caesar)는 이 도시를 재건하여 B.C. 44년 로마의 식민지로 삼았고 B.C. 27년에는 로마의 아가야 행정 구역의 수도가 되게 하였다. 주민들은 대개 헬라인, 이탈리아 출신의 자유민, 로마군의 퇴역 장군, 상인, 정부 관리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도시는 특히 육상 및 해상 무역로가 집중되어 상업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해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며 이러한 윤택(潤澤)한 생활은 결국 주민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B.C. 5세기 초 고린도 사람들의 문란한 생활 때문에 '고린도 사람이 되다'는 뜻의 헬라어 '고린디아제스다이'(*)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이곳은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다.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른 바울은 이 같은 사실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 아덴에서의 경험을(17:16-34) 잘 분석하여 타락의 중심지 고린도에서 새로운 선교 전략을 세웠을 것이다.

성 경: [행18:2]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아굴라...브리스길라 - 아굴라의 출생지인 '본도'(Pontus)는 소아시아 북부 지역에 있었다. 아굴라는 로마식 이름인데 로마의 기사나 호민관들 중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굴라는 유대인 노예였다가 후에 로마에서 자유민이 되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브리스가 가문(gens Prisca)과 관계있는 유대인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라고 한다. 브리스길라는 브리스가의 애칭이다. 롱게네커(Longenecker)에 따르면, 아굴라에게는 기술이 있었고 브리스길라에게는 돈과 연줄이 있었으며, 이들은 공동으로 천막 제조와 가죽 수공 상사(商社)를 소유했고 또 이 상사의 지점이 로마와 고린도, 에베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가장 헌신적인 바울의 동역자들이었다(3, 18, 19, 26절; 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이들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온 것은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글라우디오 칙령(49년)의 원인인 유대인 폭동의 주동자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만일 브리스길라가 로마 시민권이 있는 가문의 출신이라면 그녀는 글라우디오의 추방령에서 제외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남편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을 것이다. 본서나 기타 바울 서신서에서도 이들이 바울에 의해 개종된 자들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이로 보아 이들은 이미 고린도에 오기전에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던 것 같다(Zahn). 누가는 바울을 중심으로 본서를 기록하고 있기때문에 대체로 바울과 관계있을 경우에만 다른 인물들을 기록한다. 따라서 누가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 글라우디오 - 로마 제국의 4대 황제로서 그의 재위 9년(49년 경)에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追放令)을 내렸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이 추방령이 내려지게 된 동기는 로마의 유대인 사회 내에서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자는 수에토니우스가 언급한 크레스투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고, 그 소동이란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문제를 두고 충돌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 년 후 로마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 회심하기도 했다는 본서 28:17 - 29의 기록 등을 고려해 볼 때 그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R.C.H.Lenski).

성 경: [행18:3]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업(業)이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 크고 번창한 도시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없이 새로이 전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했다. 바울은 전도 여행중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20:34;고전 9:1-8;고후 11:7- 2;살전 2:9;살후 3:7-10). 당시 천막은 바울의 출신지인 길리기아의 다소 근방에서 산출되었던 염소의 피륙이나 기타 가죽으로 제조되었다고 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그들의 후손에게 전통이나 유산을 물려줄 뿐 아니라 기술을 한 가지씩 가르쳐 주어 차후에 생계 유지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이 그런 기술을 어떻게 익히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는 낯선 곳에 당도(當到)하자 그의 기술을 사용하여 여비를 충당하기 위해 천막만드는 사람이나 가죽 기술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을 물었을 것이고 그런 계기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을 것이다. 이들은 함께 일을 하고 함께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행18:4]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안식일마다 - 바울은 평일에는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하였고 안식일이 되면 으례히 그의 습관대로 회당에서 말씀을 전파했다. 쟈안(Zahn)의 견해에 따르면 당시 고린도에는 회당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 강론하고...권면하니라 -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한 사람들은 대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아시아 지역에는 '흩어진 유대인들'(diaspora)에 의하여 곳곳에 유대교 회당이 설립되었고 또 그들에 의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구약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흩어진 유대인들에게서 구약성경을 배우게 된 이방인들은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알게 되었고, 이로인해 율법의 조항을 부분적으로 준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회당 예배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이방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며 회당 예배도 참석하였지만 유대교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거나 완전한 개종자들이 되지는 못하였다.그것은 유대교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에 의해 이방 민족을 무시한 데서 연유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율법을 배우고 회당 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은 유대교에서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대부분의 유대인들로부터 부정한 자들로 여겨져 배척당하곤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한편 이때까지의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그다지 적극적인 형태를취하고 있지 않다. 즉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속히 와서 자신의 사역에 참여할 때까기는 이곳에서의 사역을 어느 정도 크게 확대하는 것을 자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사역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의 언급이 없다.

성 경: [행18:5]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실라와 디모데가...내려오매 - 마침내 바울이 고대하던 두 명의 사역자가 당도했다. 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거나 아니면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먼저 도착하고 그 후에 실라가 빌립보에서 도착했을 것이다(Lenski).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신앙 생활에 열중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살전 3:6),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는 섭섭한 소식도 전하였다(살전 4:13; 5: 11).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나서 이에 대한 답장을 썼는데 이 서신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혼란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두번째 서신인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였다. 한편 실라는 빌립보 교회의 소식과 그들이보낸 연보를 가지고 왔다(고후 11:9; 빌 4:]4, 15). 빌립보교회에서 보내준 헌금은 이 때의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시기 적절하고 유용한 것이었다. 빌립보교회의 헌금으로 바울은 더 이상 생계 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오로지 말씀 전파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 말씀에 붙잡혀 - 실라와 디모데가 온 후 바울의 회당에서의 말씀 증거는 안식일에만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있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현금덕분으로 장막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 말씀 준비에만 몰두했고 또 준비한 말씀을 전하는데만 전력 투구(全力投球)했다. 특히 '붙잡혀'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쉬네나케토'(*)는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이러한 사역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성 경: [행18:6]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 '훼방하거늘'이란 뜻의 헬라어 '블라스페문톤'(*)은 '신성 모독'이라는 뜻으로 바울의 선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과 대적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한 신성 모독이었다. 특히 '대적하여'를 나타내는 '안티타쏘'(*)는 '반대편'이라는 뜻의 '안티'(*)와 '정돈하다', '배열하다'는 뜻의 '타쏘'(*)의 합성어로서 유대인들이 바울의 반대 입장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게획적으로 대적하며 방해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대적과 훼방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같은 것이었다(13:46 -52).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사악하고 완악한 행동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에서 방향을 바꿔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 옷을 떨어... 너희 피가...돌아갈 것이요 - 성경에서 '옷을 떤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엄숙한 맹세'나 또는 '저주의 행동' 등으로 받아들여졌다(느 5:13). 바울이 옷에서 먼지를 떠는 모습은 이미 비시디아 안디 옥에서 그의 발에서 먼지를 떠는 모습을 통하여서도 비춰졌다(13:51). 바울이 이렇게 옷에서 먼지를 떠는 행동은 예수께서 12제자와 70인의 전도대를 파송하면서 그들을 영접지 않는 자들을 향해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명령하신 것과 유사하다(눅 9:5; 10:11). 이렇게 발이나 옷에서 먼지를 떠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마을에 들어갔다 나오면 으례히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는 모습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발의 먼지를 떠는 것은 부정한 모든 것을 거룩한 곳인 자신들의 땅에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행동이다. 즉 종교적으로 종죄되었던 이방인들의 영향력을 제하여 버림과 동시에 자신들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행동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역이용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 복음과 무관(無關)하다는 사실을 그들의 방법대로 보여준 것이다. 한편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라는 바울의 말은 겔 3:18; 33:4, 8 ;삼하 1:16에 나타난 말씀이다. 아울러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기 위해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장담하면서 사용했던 말이기도 하다(마 27:25). 이는 결코 단순한 저주나 악담이 아니다. 이것은 살인자는 죽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또 그 책임에 따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 말씀은 바울이 최선을 다해 생명의 말씀을 전파했으나 유대인들이 이것을 끝내 거부했으므로 그들의 영적 생명에 대한 책임은 그들 스스로에게 있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자멸을 초래한 것이다.

성 경: [행18:7]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디도 유스도 -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찾은 곳은 '디도 유스도'(Titus justus)의 집이다. 디도는 로마식 이름으로 이 사람이 로마 시민임을 나타내 준다. 추측건대 그는 B.C. 44년 로마 황제 가이사(Julius caesar)가 고린도를 재건할 때 이곳에 정착했던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한편 람세이(Ramsay)는, 디도는 그의 둘째 이름이고 유스도는 셋째 이름이며 그의 첫째 이름은 다름 아닌'가이오'(Gaois)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이 디도가 롬 16:23의 가이오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고전 1:14에서 바울은 그의 고린도 전도 초기에 개인적으로 세례를 준 '가이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회당 옆에 있던 유스도의 집은 고린도 전도 사역의 주사령부가 되었으며 고린도 교회의 최초 집회장소가 되었다.

성 경: [행18:8]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회당장 그리스보 - 회당장 그리스보(Crispus)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고린도의 유대인 사회에 파문(波紋)을 일으켰음직하다. 여기서 그리스보가 고린도 선교 사역의 최초의 열매처럼 보이지만 고전 16:15에 의하면 고린도 최초의 신자는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이었다. 그렇지만 고린도에서 바울이 세례를 베푼 사람이 몇 안되는데 그 중 한 명이 그리스보였다(고전 1:14). 바울이 직접 그리스보에게 세례를 베푼 것은 그가 회당장으로서 유대 사회에서 매우 비중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일반 개심자들에게 바울이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은 이유는 그 사역을 이미 실라와 디모가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고전 1:14 - 17). 아무튼 그리스보의 개심은 고린도 선교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 수다한 고린도 사람 - 이들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받아들인 이방인 개종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헬라인들과 로마인들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교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을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 누가는 유대인들이 이방지역에 거주한다고 해서 그들을 '고린도 사람들'이라는 형태로 부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방인 개종자들도 슷자상으로 많지 않으므로 '수다한'이란 의미 속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많은 로마인들이 고린도에 거주했고 많은 헬라인들도 경제적인 것을 비롯하여 기타 이유들로 인해 고린도에 많이 드나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또 그들로부터 많은 결실을 거두었을 것이다. 이때의 개심자들로는 유스도와 그리스보를 제외하고도 에배네도와 스데바나(롬 16:5; 고전16:15) 그리고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고전 16:17) 등 다수의 이방인들이 있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고린도 서신에 따르면 고린도 교회는 대개가 이방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있다. 렌스키(Lenski)는 고린도 교회에 있던 게바의 추종 세력들(고전 1:12)은 이 소수의 유대인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 원문상 이 부분은 현재 분사와 미완료 과거형으로 구성된 구절로서 반복적인 행위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바울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으로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났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고린도에서의 지속적인 부후 운동은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에게 온 이후에 일어난 결과이다. 이것은 공동사역(Team Work)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아덴에서 바울이 홀로 선교하던 것과 고린도에서의 공동사역을 비교해 본다면 공동 사역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행18:9]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주께서 환상 가운데 - 바울은 이미 여러차레에 걸쳐 환상 가운데 예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다메섹(9:4)에서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된 때를 위시하여, 드로아(16:9), 예루살렘(22:17) 등지에서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환상 가운데 예수를 만나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다. 그는 차후에도 환상 가운이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23:11;27: 23). 이렇게 때때로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는 바울이 그의 사역을 흔들림없이 굳건하게 수행하는데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 고린도의 유대인들 회당장 그리스도와 같은 지도자급 인사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보고 바울에 대해 보복(報復)을 계획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바울은 그로 인해 큰 동요가 생기기 전에, 그리고 유대인들이 핍박이 적극적으로 가시화되기 전에 조용히 고린도를 떠나고 싶었을 수도 있다(16:19-19;17:13, 14). 바울은 고전 2:3에서, 자신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두러워하며 떨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심령이 위축되어 영적 위로와 격려가 꼭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말씀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주신 것과 유사하다(출 3:12; 신 31:6; 수 1:5, 9: 사 41:10;43:5; 렘 1: 8).

성 경: [행18:10]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네가 너와 함께 있으매. - 이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숭천하실 때 이 땅에 있는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말씀이다(마28:20).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의한 약속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바울이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오랜 선교 여행과 지속적인 말씀 전파 그리고 지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위협으로 지치고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약속을 바울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심으로 그에게 위로를 주시고 있는 것이다.

⭕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리가 없을 것이니 - 이는 앞으로 바울이 전혀 박해를 받지 않거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앞으로도 어려움에 처할 것이며 고난도 당할 것이지만 그때마다 그와 함께 예수께서 계시사 그 어려운 상황을 넉넋히 극복하게 할 것이며 아무런 허도 받지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12-17절). 내백성이 많음이라 - 여기서 이르는 백성은 곧 바울의 복음 증거로 구원허야 할 많은 고린도의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시기로 택정한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 성내에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그의 권속(券屬)으로 삼으셔서 그의 아들이 되게 할 것을 예정하셨다(롬 8:29; 엡 1:5).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택과 사랑과 기쁘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엡 1:4 - 11;2:8, 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예정을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예정하셔서 구원하신 자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개개인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개인 스스로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하는 결단과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바로 이 고린도 성내에는 아직까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피택된 백성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성 경: [행18:11]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고린도 전도]

⭕ 일 년 육개월을 유하며 - 1년 6개월의 기간에 대해서나 학자 간에 다소 의견에 차이가 있다. 즉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도착해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의 전체 기간을 말한다는 의견(Zahn, Haenchen, Longenecker)과 바울이 환상을 경험한 후 고린도에 머문 기간만을 의미한다는 의견이 있다(Robertson, Whitelaw). 여기에서 어느 것이 정확한 의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적어도 1년 6개월 고린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린도에 머물며 참으로 많은 사역을 수행했다. 한편 롬 16:1과 고후 1:1을 살펴보면 고린도와 인접한 아가야와 겐그레아 항구까지 복음이 전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바울이 그러한 지방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추측할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바울은 주로 고린도 내에서 활동하였고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인접한 지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는 추측이 훨씬 더 타당하다(Lenski). 특히 '유하며'의 헬라어 '에카디세'(*) '머물다', '거주하다'는 뜻으로 바울이 고린도를 벗어나지 않고 전도 사역을 지속했음을 시사한다.

⭕ 하나님의 가르치니라 - 바울이 고린도 성 내에서 가르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 설교의 핵심은 항상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관한 것이었다(17:31). 이 사실에 근거해 볼 때 화목을 이루신 예수를 전파했고 또 그를 믿는 믿음에 관해 가르쳤을 것이다.

성 경: [행18:12]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유대인들의 핍박]

⭕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되었을 때 - 갈리오는 본명이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로서 코르도바 츨신이고 스페인의 뛰어난 수사학자이며 갑부인 마르쿠스 안네우스 세네카(M.A. Seneca:B.C.50 - A.D. 40)의 아들이며, 스토아 철학자, 정치가, 희곡작가인 루키우스 안네우세네카(B.C. 4-A.D. 65)의 동생이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통치 기간(A.D.41-54) 중에 그는 로마로 가서 로마의 수사학자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의 양자가 되었으며 A.D.51년 7월 1일 아가야의 총독이 되었다. A.D. 65년 네로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그는 네로로부터 자살할 것을 강요받고 그로 인해 죽게 된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독창적이며 청렴결백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평을 들었다. 한편 갈리오가 부임한 아가야는 B.C.27 15년까지 원로원의 관할 지역이 있고 그후 황제령이 되었다가 다시 A.D. 44년부터 원로원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 아가야는 지방 총독의 통치를 받았다.

⭕ 유대인이...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 바울은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 약 8, 9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선교사역을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A.D.50 년 가을부터 A.D. 51년 7월 초순까지). 이 기간동안의 바울의 사역에 대해 유대인들은 많은 불만이 있었던 듯하다. 그 즈음에 총독이 새로 부임하자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교를 봉쇄하고 새로운 총독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게략을 꾸몄던 것같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을 총독에게 데려가 고소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미 빌립보에서 바울을 관원들에게 데려가 고소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이었다(16:19 ). 그리고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는 것은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며 바울을 잡고자 했던 일을 상기시키기도 한다(17:51). 한편 유대인들이 총독이 바뀌는 상황을 틈타 바울을 고소한 것은 때우 교묘하다. 아마도 이들은 임지(任地)로 처음 부임하는 고관이면 으례히 그 지방 주민들로부터 환심을 얻고자 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새로운 총독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 경: [행18:13]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유대인들의 핍박]

⭕ 율법을 어기어...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1) 바울이 불법 종교(religio illicita)를 전한다는 것이다. 로마법상 로마 정부로부터 공인되지 않은 종교를 전하는 것은 불법 행위였다. 그런데 유대교는 당국으로부터 승인된 공인 종교(religio illicita)였다. 따라서 유대교는 자유로운 예배행위를 허유받았고 나아가 로마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도 허용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신들과는 달리 공인되지 않은 불법 종교를 로마의 법을 어기면서 전하고 있다고 고소한 것이다. (2) 바울이 로마법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형태의 종교를 전파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3) 바울이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의 칙령을 위반한다는 것이다. 가이우스 갈리굴라(Caius Caligula)의 경우는 자신을 살아있는 상(像)을 예루살렘 성전안에 둠으로써 유대인들이 깊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글라우디오가 횡제로 즉위하면서 그는 칙령을 발표하며 유대인들에게 로마 제국 내의 어느 곳에서든지 그들의 관습과 율법을 자유릅고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자유로운 관습을 간섭하고 훼방하므로 결국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있다고 고소한 것이다. 이들 견해증 14, 15절에 언급된 갈리오의 말을 염두에 둘 때 첫번째 견해가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성 경: [행18:14]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유대인들의 핍박]

⭕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 로마법상 재판은 원고(原告)의 고소와 피고(被告)의 변호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원고와 피고는 마주 서서 재판장을 향해 각자가 자기 주장을 하게된다. 바울도 역시 원고의 고소 내용에 따라 자신을 변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갈리오의 변호 승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바울은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갈리오가 이 사건 자체를 기각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 부정한 말이나 괴악한 행동 - 이는 갈리오가 재판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나타낸다.

⭕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 갈리오가 갖고 있는 법적인 권한이 제시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의 고소가 법정에서의 판결이 필요한 믿.형사상의 문제라면, 갈리오는 성심껏 판결을 내려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성 경: [행18:15]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유대인들의 핍박]

⭕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 갈리오는 이 고소 사건이 민.형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들 자체 내의 '언어와 명칭과 그들의 법'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언어'는 곧 '말씀'(*, 로고스)을 나타내는 것이고 '명칭'은 메시야와 관련된 '이름'(*, 오노마타)을 뜻하는 것이며 '법'은 곧 '율법'(*, 노모스)을 나타낸다. 따라서 갈리오는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볼때 이 사건은 자신이 재판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다. 왜냐하면 총독이 해야 할 일은 로마의 안정과 질서 유지에 관계 있는 민.형사상의 문제를 재판하는 것이지 유대의 종교 문제를 중재(仲裁)해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리오는 개인적으로 민.형사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으로도 매우 번거롭고 성가셨을 것이므로 그는 그의 책임 영역 밖의 종교 문제까지 중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갈리오는 바울에게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이 문제를 유대인들 스스로 처리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종결지어 버린다. 한편 이는 A.D. 49년 경에 있었던 로마의 유대인 사회 내의 폭동을 갈리오가 염두에 두어 그러한 폭동이 고린도에서 재발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갈리오는 그의 재임 기간 초기부터 이러한 단호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다시는 이와 같은 일로 고통을 당하지 않고자 했던 것 같다.

성 경: [행18:16]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유대인들의 핍박]

⭕ 저희를...쫓아내니 - 갈리오의 이러한 결정이 기독교를 옹호하는 입장해서 내려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 결정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마게도냐 선교 당시 바울은 가는 곳마다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었다(14:5, 19;16:19;17:5;고후 11:24-27). 따라서 만일 갈리오가 유대인들의 억지 고소 내용대로 바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면 이 전례를 따라 각 지역의 행정관들은 동일하게 유죄 판결을 내렸을 것이고 바울은 무수한 어려움 속에서 선교 사역을 수행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그 터무니없는 고소를 물리쳤다. 갈리오의 명망과 지위를 고려할 때, 이 결정은 훗날 이와 유사한 사건에 대한 판결에 중요한 판단 근거로 작용하였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기독교 선교를 순탄케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Richard N.Longenecker). 한편 유대인들은 갈리오의 기각(棄却) 선고를 듣고서도 물러서지 않고 어떻게해서든 총독을 설득시키려고 계속 남아 같은 이 야기를 반복했을 것이나 총독의 결정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갈리오가 부하들을 시켜 그들을 쫓아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Lenski,Zahn).

성 경: [행18:17]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유대인들의 핍박]

⭕ 회당장 소스데네를...때리되 - 당시 그리이스-로마 세계에서는 반(反)유대주의 감정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갈리오도 이러한 반유대주의 감정에서 예외가 아니었고 이 재판정에서 그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갈리오의 행동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갈리오 앞으로 끌고가 때리게 되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하여 쟈안(Zahn)과 헨헨(Haenchen)은 그 재판에 실망한 유대인들이 아님은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롱게네커(Longenecker)는 이 사람들이 헬라 군중들이라고 본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가 기각되고 총독이 유대인들을 냉대하는 것을 보자 반유대적 감정을 품고 있던 헬라인들이 책임자격인 회당장을 무고죄(誣告罪)로 구타한 것 같다. 한편 앞서 고린도에는 하나의 회당이 있고 그 회당장이 그리스보(8절)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회당장이 소스데네로 나와 있다. 그러나 다소 규모가 큰 회당에는 때때로 한 사람 이상의 회당 지도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니면 소스데네는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되자 그의 후임으로 회당장 직분을 맡았을 수도 있다.

성 경: [행18:18]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안디옥으로의 귀환]

⭕ 더 여러 날 유하다가 - 바울의 전도여행을 살펴보면 바울은 항상 자신에게 닥친 여러 위험한 상황들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머물던 곳을 떠나곤 하였다(14:6, 20;16:40;17:10;18:;19:8;20:1). 고린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울이 여기서 '여러 날' 더 머문 것이 앞서 11절에서 언급된 1년 6개월의 기간에 포함되는 것인지 아니면 추가되는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그런데 바울이 갈리오의 뜻하지 않은 옹호를 받게 된 상황을 감안한다면 바울은 고린도를 그렇게 서둘러 떠날 이유가 없었을 것이므로 후자의 견해가 더 적절한 듯하다(I.H. Marshall).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인 아굴라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여기외에도 몇 군데 더 있다(26절;롬 16:3;딤후4:19). 이는 브리스길라가 아굴라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브리스길라의 신앙이 아굴라의 신앙보다 더 신실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들 부부는 바울의 선교에 매우 헌신적으로 협조한 사람들이었다(롬 16:4).

⭕ 바울이...게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의 선교 사역과 관련하여 어떤 목적을 두고 하나님께 일정 기간의 나실인의 서원(Nazurute viw, 21:17-26 주제 강해 '나실인 제도' 참조)을 하였으며 이제 그 기간이 다 지나갔음을 보여준다(민 6:2-21). 원래 이러한 서원(誓願)은 예루살렘에서 온전히 마감되는데 그곳에서 머리카락을 하나님께 바치고 희생 제사를 드렸다(민 6:13-21). 여기서 바울이 유대의 옛 관습을 좇아 서원을 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바울은 스스로 자기자신을 유대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했고(고후 11:22) 또 제3차 전도 여행을 끝맺음할 때에도 그는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23:6). 한편 혹자(Grotius, Meyer, ieseler)는 머리를 깎은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아굴라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는 거의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또 저자 누가가 아굴라 같은 인물에 관해서까지 그렇게 세세한 언급을 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한편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가까운 곳으로 고린도의 외항(外港)이며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 도시에는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하며 전도하여 거둔 열매인 여집사 뵈뵈가 봉사하는 교회가 있었다(롬 16:1, 2).

성 경: [행18:19]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안디옥으로의 귀환]

⭕ 에베소에 와서 - 이 도시는 로마의 아시아 관할 지역의 수도이며 상업 중심지였다. 아울러 이 도시는 원로원과 시의회를 갖춘 자유헬라 도시였다. 이곳에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은 고대의 칠대 불가사의(七代不可思議)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A.D. 262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이곳에 계속 머물게 하였다는 의미인 듯하며 이들의 체류 기간은 4, 5년 정도로 짐작된다. 이들은 이곳에서 믿음의 형제들을 대접하며 바울의 서신을 통해(고전 16:19) 고린도의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데메드리오의 공격시에(19:23-41) 이곳에 있었고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았으며(롬 16:4) A.D. 54년(혹 56년) 글라우디오 횡제가 죽은 후 로마로 돌아갔다(롬 16:3). 한편 이 때의 실라와 디고테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기가 어렵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 계속 머물며 그 곳의 사역을 감당했거나 아니면 바울과 계속 동행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수리아 안디옥을 거쳐 에베소에 돌아왔을 것이다(Longenecker).

⭕ 회당에 들어가서...변론하니 - 바울이 낯선 땅에 들어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회당을 찾는 것은 전형적인 그의 선교 방법이었다(4절;13:5, 14;17:1, 10, 17:19:8). 그런데 바울이 회당을 찾은 이 날은 안식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회당을 찾으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꼭 안식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또는 토론과 담소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회당에 모이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바울이 회당을 찾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유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반응을 알아보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행18:20]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안디옥으로의 귀환]

⭕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매우 전망이 좋았고 사람들도 호의적이었다. 바울의 설교에 깊은 인상을 받은 많은 에베소사람들이 바울의 체류를 간청하였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여행 길을 재촉한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여행 길을 재촉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가 왜 이렇게 여행을 서둘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략 21절에서 제시되는 바와 같이 몇가지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행18:21]

주제1: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안디옥으로의 귀환]

⭕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 바울 자신도 어느 정도 에베소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에베소에서의 아쉬움을 남긴 채 에베소의 선교 전망과 이곳에 뿌린 씨앗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에베소를 떠나게 된다.

⭕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 바울이 서둘러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던(22절)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서방 사본(Western Text)과 비잔틴 사본(Byzantine Text)에는 본 구절에 '내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절기를 지키야 하리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사본들의 구절을 참고해 보면 바울은 아마도 유월절 내지는 오순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서둘러 가려고했을 것이다. 2.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의 성과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함으로써 예루살렘교회와 이방 교회간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자 했을 것이다. 3.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 성전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번제로 드리고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을 것이다(18절;21:26).

성 경: [행18:22]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안디옥으로의 귀환]

⭕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탄 배가 수리아 안디옥의 항구 실루기아(Seieucia)에 정박하고자 했으나 강한 북동풍이 봄철 풍향 사정 때문에 쉬운 항로를 택하여 그곳보다 약 400KM 남쪽에 있는 가이사랴항에 상륙하였다고 주장한다(Haenchen).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풍향 사정이 아니었다면 바울이 얼마 후면 곧바로 다시 돌아갈 안디옥에서 무려 400KM나 떨어진 가이사랴에 굳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전제를 미리둔 것이고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 목적(21절 주석 참조)을 간과한 것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한편 가이사랴는 헤룻 대왕 이후 예루살렘의 항구 역할을 해왔다.

⭕ 올라가...내려가서 - 어떤 학자들(Knopf, baurnfeind)은 본 구절에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없기 때문에 바울이 가이사랴에 있는 성도들의 안부를 물어보려고 항구에서 가이사랴 성내로 '올라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가이사랴 항구까지 온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l.H.Marshall).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약 104KM 떨어겨 있었으며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사실 팔레스틴의 지형상 헤브론쪽의 방향을 제외하고난 예루살렘은 어느 쪽에서든지 윗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헬라어 원문에서 올라가다'를 뜻하는 '아나바이노'(*)는 뜻의 '카타바이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이 사실에 덧붙여서 '교회라는 뜻의 헬라어 '여클레시아(*)라는 말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욱 더 확증해 주고 있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후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으며 이번이 그중 4번째였다(9:26;11:30;15:4 ;21:17). 그리고 세차례에 걸친 바울의 선교 여행은 모두 예루살렘 방문으로 마감되었다고 본다(본절:15:4;21:15).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해서 그의 두번째 선교 여행의 결과를 보고하고 이교회와 이방 교회간의 결속(結速)올 다졌을 것이다. 아울러 축제에 참석하여 30일간의 결례기간을 가진 후 성전때 올라가 그의 서원대로 머리카락을 번제로 드리고 희생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방문 목적이 끌나자 그의 이방 선교의 전도 기지인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안디옥은 예루살렘 북쪽 약 480KM 지점에 있었다.

성 경: [행18:23]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제3차 전도 여행-아볼로의 사역]

⭕ 얼마 있다가 -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에 얼마 동안 체류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롱게네커(Longenecker)는 이 기간 52년 여름부터 53년 봄까지로 추정한다. 이 기간동안 그는 두 차례의 선교 여행을 돌아보며 드러난 여러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숙의(孰議)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간 여독을 풀면서 3차전도 여행에 대한 게획을 세우며 준비하였을 것이다.

⭕ 떠나 - 누가는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제1차나 2차 전도 여행과는 달리 바나바나 실라는 데리고 갔다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바울이 이번 여행을 홀로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 갈리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굳게 하니라 - 이 지역은 아마도 브루기아 방언과 겔틱 방언이 사용되는 지역인 갈라디아시 브루기아 지역이나 남부 갈라디아의 어떤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2차 전도 여행 때 방문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주변 지역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16:1-6). 바울은 이러한 지역을 다니면서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제자'들이 된 성도들이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방의 거짓 교훈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 굳건히 서도록 격려하며 위로했다.

성 경: [행18:24]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제3차 전도 여행 - 아볼로의 사역]

⭕ 알렉산드리아 - B.C - 332년 알렉산더대왕이 세운 중요한 해양 도시이다. 상업의 중심지요,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B.C. 280년경에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서인 70인역(LXX)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는데, 유대인들이 크게 번성하뗘 당시 인구의 1/3이나 되었다 한다. 따라서 유대적 헬라 설학이 발달하였는데 그 철학자들 중 필로(Philo)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때까지 필로가 생존해 있었으로 아마 아볼로는 그 필로 학파의 일원이었던것 같다.

⭕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성경에 능한자라 - '학문이 많고'의 헬라어 '로기오스'(*)는 '유식한', '말 잘하는'이란 뜻이 다나이는 아볼로가 천부적인 언변(言辯)과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또한 아볼로는 이 외에 '성경에 능하기'까지 했다. 즉 그는 그의 언변과 학식을 성경 연구와 그 연구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건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복음의 핵심을 몰랐다. 한편 아볼로가 에베소를 방문한 시기는 바울이 에베소에 잠시 머물다 떠난 후(19:1)부터 그가 제3차 건도 여행 때 다시 에베소를 방문하기(19:1) 전의 기간이었다. 이 때에 아볼로가 에베소를 방문하여 영적 지도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성 경: [행18:25]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제3차 전도 여행-아볼로의 사역]

⭕ 주의 도를 배워...요한의 세례만 알따름이라 - 아볼로가 어디서 어떻게 주의 도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가 않다. 추측건대 그는 세례 요한의 몇몇 제자들을 통해 기독교의 교훈을 배웠을 것이다. 누가의 저서에 있어서 '주의 도'나 '하나님의 도'는 항상 '기독교의 가르침' 즉 복음을 의미했다(Haenchen). 그러나 아볼로가 주의 도를 아무리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다고 해도 세례 요한이 죽기까지 예수에 관해 이야기한 것만 부분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지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흘츠만(Holzmann)은 아볼로가 세례 요한히 뒤를 잇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한, 또한디벧리우스(Dibelius)는 아볼로를 통해서 혼합적인 반(半)기독교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캐제만(Kasemann)은, 아볼로는 사도 중심적 기독교에 대해 독립적으로 활동했던 기독교 교사였는데 이러한 연유로 누가는 그를 불완전한 교사로 묘사했다고 한다.

성 경: [행18:26]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제3차 전도 여행-아볼로의 사역]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 본 구절에서도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 아굴라보다 먼저 언급되었다. 이는 아볼로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에 있어 브리스길라가 아굴라보다 더 적극적이고 열심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Haenchen). 이들 부부는 아볼로가 회당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가 복음의 진수(眞髓)에 대해 무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가르쳤다. 여기서 특별히 아볼로가 세례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는데 이씨 대해 혹자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아볼로가 이전에 받은 '회개의 세례'를 기독교적 세례로 간주했던 것으로 판단된다(Longennecker)고 주장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많은 학자들은 아볼로가 성령 세례를 받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학자 간에는 이 구절에서 기독교의 성령 세례에 관해서 논하기도 한다.

성 경: [행18:27]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제3차 전도 여행-아볼로의 사역]

⭕ 아볼로가 아가야로...많은 유익을 주니 - 베자 사본(Codex Bezae)에 따르면 에베소에 몇몇 고린도 교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아볼로의 이야기를 듣고 아볼로에게 자신들과 함께 고린도에 갈 것을 부탁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에베소에는 이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사역하고 있었으므로, 또한 그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은바 은혜를 전하고 싶어 고린도로 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볼로의 고린도 사역을 위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추천장을 써주기도 하였다. 결국 고린도에서의 아볼로의 사역은 후에 큰 결실을 거두었고 바울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고전1-4장).

성 경: [행18:28]

주제1: [제2차 전도 여행을 마감한 바울]

주제2: [제3차 전도 여행-아볼로의 사역]

⭕ 성경으로써...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 아볼로 역시 바을과 마찬가지로 메시지의 핵심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집중시켰다. '성경에 능한 자'(24절)였던 그는 복음의 핵심을 깨닫자 공증 앞에서 그가 알고 있던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더욱더 설득력있고 확신있게 전하였다. 그의 능슥한 언변과 철학적 학식, 성경시 능통함 등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데 뒷받침이 되었고 특별히 유대인을 설복시키는데 귀하게 사용되었다. 이런 아볼로의 사역을 근거로 마르틴 루터(M,luther)는 히브리가 아볼로의 성경적 논증의 실례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유대교를 능가한다는 점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건들을 뒷받침할 만한 분명한 자료들이 없다.

성 경: [행19:1]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복음에 대해 정확히 가르침을 받은 후 아가야 지방의 수도 고린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18:26, 27).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에 당도할 즈음에는 아볼로는 그곳에 있지 않으므로 두 사람이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동일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에 활발히 전파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어느 정도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전 1:12).

⭕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 18:23에서 끊겼던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여기서 '윗지방'이란 일반적으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Zahn, Bauernfeind). 그래서 람세이(Ramsay)는 바울이 브루기아의 '구릉지대'를 통해서 에베소에 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브루기아의 내륙 지방을 통해서 에베소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Wendt, Lake, Holtzmann). 그런데 본절에서 누가는 바울이 어떤 경로를 통해 에베소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 에베소 -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도시로서 코레소스(Koressos) 산맥과 에게해 사이의 카이스터(Cayster) 강 어귀에 위치하였다. 이는 항구도시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아시아의 보고'로 불리울 만큼 번창하였다. 그러나 각종 미신들과 이방 종교들과 사회적 병폐들이 만연해 있었다. 당시 에베소인들은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점점 잃어가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전부터 섬겨오던 아데미 여신을 더욱 더 열심히 섬겼는데 이 여신의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중 하나였다.

⭕ 제자들 - 누가에 있어서 제자란 대개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6:1;9:10, 26).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다는 것(3절)은 이상한 일이다. 이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도(18:26) 무관한 사람들인 것같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 부부와 관련이 있다면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볼로 역시 이미 고린도에 가고 없는 터여서 이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문제시된다. 추측건대 이들은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 전 성경을 가르칠 때 그에게 영향을 받아 믿게 된 사람들일 것이다.

성 경: [행19:2]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바울이 어떻게 해서 이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진술되지는 않았으나 아마 바울이 그들의 신앙 상태를 통찰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 이들의 대답에 바울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를 진정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하였다는 것은 '요한의 세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반증한다. 즉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께서 오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이다(눅 3:16).

성 경: [행19:3]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요한의 세례 - 본장 1-7절의 주제 강해 '물세례 연구'를 참조하라.

성 경: [행19:4]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예수라 하거늘 - 바울은 요한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요한의 세례에 관한 정확한 의미와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을 올바로 가르쳐 주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마음의 변화와 근본적 전환을 위해 베푼 회개의 세례였다는 것이다. 결국 이 회개의 세례는 요한 뒤에 오실 이, 곧 예수를 믿게 하기위한 것이다. 때때로 세례 요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계시의 절정으로 보며 심지어는 메시야와 동일시 하기도 했다(눅 3:15). 그러나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 따름이었다(마 3:3). 따라서 요한은 예수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 세례'를 위해 먼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왜냐하면 회개 없이는 성령을 받을 수 없으며 또 근본적으로 회개케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기(Lenski) 때문이다.

성 경: [행19:5]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저희가...세례를 받으니 - 바울의 가르침으로 자신들이 모두 잘못 알고 있음을 깨달은 제자들은 자진(自進)해서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제자들이 세례를 다시 받은 것은 아볼로의 경우(18:26)와 차이가 있다. 즉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는데 그는 다시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아볼로와 마찬가지로 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달리 다시 세례를 받았다. 이 두 경우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이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다시 받고자 하는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본다(Meyer). 물세례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세례를 받은 표라는 사실에 궁극적 의미가 있다는 점, 그리고 세례 요한의 물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서 세례받은 자들이 이들 외에도 있었으나 일일이다 물세레를 재차 받지는 않았으리라는 점 등에 비추어 보건대 이 견해는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한편 여기서 이들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아굴라였다는 주장도 있지만(Zahn)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정확한 자료가 없다.

성 경: [행19:6]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안수하매 성령이...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 여기서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것은 안수 행위이다. 즉 안수가 능력을 임하게 하거나 성령이 임하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8:5-25 주제 강해 '안수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한편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표적들은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와(2:4, 6, 8), 고넬료의 집에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10:44-46)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나타났던 표적들과 동일한 것이었다. 특별히 이곳에서 나타난 방언은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막 16:17)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고전 12:4-10). 여기서 성령 세례를 받은 열 두사람들은 후에 에베소 교회의 핵심 인물들이 되어 이방 선교에 전심 전력했을 것이다. 혹자는 이 사건을 두고 '에베소의 오순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성 경: [행19:7]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 여기서 12라는 숫자를 두고 학자들(Weizacker, Wendt)은 비유적 해석을 시도한다. 즉 숫자를 예수의 열 두 제자나 이스라엘 민족의 열 두 지파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려고 하나 저자 누가에게 그같은 의도가 있었다는 근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만약 그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의도와 연관된 부연 설명을 했을 것이다.

성 경: [행19:8]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회당에 들어가...강론하며 권면하되 - 이미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이 회당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18:19, 21)고 약속했었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는 회당 사람들의 호의적인 태도로 석 달 동안이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석달이란 기간은 이제까지 바울이 회당에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중 가장 긴 기간이었다. 여기서 '담대히...강론하며'의 헬라어 '에파르레시아제토'(*)는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바울이 회당에서 석 달 동안 계속해서 쉬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권면했다'는 뜻의 '페이도' (*)란 말은 원어적으로 바울이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설득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동원했다는 뜻을 나타낸다. '에파르레시아제토'와 '페이도'란 두 단어를 통해서 누가는 바울이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심 전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행19:9]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마음이 굳어(*, 에스클레뤼논토) - 미완료 과거 중간태로서 바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마음을 굳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 문을 열려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 문을 굳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두고 이 갖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굳어질대로 굳어 진 마음들은 부서지거나 깨지기 쉽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때 그 굳어진 마음들이 부서져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의 적대감(敵對感)이 매우 심했던 까닭에 바울은 더이상 회당을 복음 증거 장소로 이용할 수 없다고 느끼고, 두란노 서원으로 옮겼다.

⭕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 이 제자들은 바울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곳에서 얻은 제자들이었다. 바울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로부터 떠나면서 그곳에서 얻은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여기서 '따로 세우고'의 헬라어 '아포리조' (*)는 '한계를 분명히하다', '구별하다', '떼어놓다'는 뜻으로서 바울이 복음을 거부하는 완악한 자들로부터 새로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따로 구분하여 새로운 교회를 형성케 했다는 의미이다.

⭕ 두란노 서원에서...강론하여 - '두란노'가 이곳에서 가르쳤던 선생의 이름인지(Zahn) 아니면 이 서원의 소유주의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 서원 자체의 이름인지는 정확지가 않다. 한편 서방 본문(Western Text) 몇몇 사본에 따르면 5시부터 10시까지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이 사건은 보통 당시의 오후 휴식 시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사본들에 따르면 바울은 사람들이 일하는 노동 시간을 피하여 이 휴식 시간에 말씀을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일하는 시간에 말씀을 가르쳤다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서원에서 집회를 가진 후에 청중들과 함께다시 일과를 시작하여 오전에 하던 일을 끝마쳤을 것이다(Haenchen, Longenecker). 이곳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2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에베소에서 큰 결실을 이루어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했다.

성 경: [행19:10]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에베소 사역]

⭕ 아시아에 사는 자는...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 2년 동안 바울 열심있는 사역은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많은 교회를 탄생시켰다. 루커스 계곡(the Lycus Valley)에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세워졌고, 소아시아 지역에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등 여러 교회들이 속속 세워지게 되었다.

성 경: [행19:11]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시기 시작하셨는데 그 기적들은 제자들에게조차도 익숙지 않은 특별한 것들이었다. 홀츠만(Holtzmann)은 바울의 이러한 기적들이 베드로가 그의 그림자를 통해서 일으킨 기적들과(5:15, 16) 유사하기 때문에 역사적 신뢰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기적이나 바울의 기적이 그들 스스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적뿐만 아니라 더 큰 기적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미신과 주술이 범람(氾濫)하는 도시에서 바울의 선교 사역은 이러한 특별한 기적 행사가 필요했을 것이다(Whitelaw).

성 경: [행19:12]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 학자들 간에는 이러한 일들이 정말로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또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본절에 언급된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바울은 마술과 미신의 본거지에서 사역했으며 무당들 가운데서 말씀을 전파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손수건이나 앞치마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인 믿음을 통해서 기적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 기적을 일으키는데 사용된 '수건'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땀을 닦기 위해 머리에 두루고 있던 헝겊 조각이며 '앞치마'는 장막 짓는 작업을 위해 허리에 둘렀던 것이다(F.F. Bruce).

성 경: [행19:13]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예수를 빙자하여 - 고대 세계에서 악령을 내쫓기 위해 주문을 외울 때 주술적(呪術的)인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경향이었고, 특히 이러한 관습은 에베소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그런데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 또는 성도들 외에 비기독교인들도 귀신 축출을 위해 예수 이름을 마술적으로 사용했다(14-16절 ; 막 9:38, 39). 그리고 실제로 파리의 마술 문서인 574번 파피루스 3018행에서는 무당들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 실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내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엄히 명하노니." 본문에서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을 목격한 유대인 주술사들도 바울의 행동을 모방해 예수의 이름을 그들의 주술에 이용하려고 했다.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라고 굳이 바울의 이름까지 언급한 것은 바울이 행하는 능력이 압도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주술사들이 악령을 쫓아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마술적 주문과 정확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Haenchen, Longenecker).

성 경: [행19:14]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행하더니 - 헬라어 본문에는 스게와가 대제사장이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KJV, RSV, NASB, MB, NIV). 대제사장이 이방인의 땅에 살고 있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업 수단으로 고객 유치를 위해 자신들이 대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을 빙자하였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이들이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라면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이방 도시에서 귀신 쫓는 일이나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몰락한 가정형편을 보여 주는 것이고 아울러 에베소의 유대교는 그곳의 미신과 혼합, 변질되어 그곳 사람들로부터 형편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학설은 몇몇 학자들이 지지하지만(Mastin, Marshall) 별로 타당성이 없다. 만약 이들이 대제사장의 가문을 빙자하고 있다면 그들은 대제사장의 권위와 명성을 빌어 자신들의 야심을 채우고자 하는 간교한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문헌에는 스게와라는 대제사장의 이름은 나타나 있지 않다. 누가는 그 사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여기서 그들이 충분히 대제사장의 가문을 빙자할 수 있는 인물들임을 암시하려고 했는 듯하다. 이전 맥락에서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 앞에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는다고까지 증언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이런 교활한 행동은 마치 사마리아인 시몬의 태도와도 유사하다(8:9-24). 이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행동들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들이 지금까지 행하던 사악한 일들을 계속해서 하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행19:15]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 유대의 주술사들은 영적인 세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귀신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믿음과 능력들을 먼저 파악한다. 그들 자신들이 하는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를 이미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며(막 1:24, 34;5:7;눅 4:41;히 2:14;요일 3:8) 나아가 바울이 그 예수의 사도이며 믿음과 능력의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귀신들이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누구냐'라고 한 것은 곧 이 귀신들이 스게와의 아들들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함을 먼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도 전혀 없이 또 사악한 동기에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사단의 세력이 징벌(懲罰)의 도구가 될 것이다.

성 경: [행19:16]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악귀 들린 사람이...도망하는 지라 - 사기성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과 또한 귀신들을 동시에 시험해 보려고 한 사악한 유대인 주술사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력 앞에서 봉변을 당하고 쫓겨가야만 했다. 그들이 마귀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감으로써 이들의 신의와 위엄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며 반면에 바울의 권위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다. 한편 개역 성경에서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을 '그 두 사람에게'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암포테론'(*)으로 '양쪽'(both)이라는 의미 외에 '모두'(all)를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파피루스에서는 이 단어를 둘이상의 경우에 많이 사용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암포테론'은 스게와의 '일곱 아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Haenchen, Lenski, Robertson, Longenecker, G.A. Buttrick).

성 경: [행19:17]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유대인과 헬라인들이...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 미신과 주술이 난무하는 에베소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일곱 주술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난 파문을 던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그 주술사들처럼 미신과 주술이라는 악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귀신의 봉변이 자신들에게 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곤경을 치르게 될까 염려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바울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귀신이 쫓겨나고 주술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주술사들이 오히려 귀신에게 쫓기는 그 원인을 몰랐다. 단지 그들은 예수의 이름이 모든 귀신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19:18]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믿은 사람들이...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 이 일은 에베소 주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보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예수의 이름이 지닌 신비한 능력 앞에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은밀하게 범하던 잘못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에베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생활 습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은밀한 가운데 미신과 주술을 쫓거나 그 같은 일들을 직접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의 능력을 확실히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자 자신들의 은밀한 범죄를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기독교가 비기독교 지역에 전파되면 문화적 혼합(混合) 현상이 나타나 자칫 잘못된 악습으로 인해 교회가 부패될 위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19:19]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 '마술'을 뜻하는 헬라어 '페리에르가'(*) 는 문자적으로 '주변 일' 이라는 의미로서 주된 일을 제외한 '쓸데없는 일'을 가리키거나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누가가 '마술'을 '쓸데없는 일'로 표현한 것은 공허한 것을 섬기는 우상 숭배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에베소에 많았다고 하는 것은 그 도시 자체가 영적인 기갈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며 또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에베소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 그 책을...불사르니 -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행동을 회개하고,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공개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마술에 관계된 모든 서적들을 불살랐다. 이 책들은 주문이나 부적 등 미신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파피루스나 양피지(parchment)에 기록된 것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책들은 '에베소의 책들'(Ephesia Grammata)로 추정된다(Zahn). 한편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을 불태우는 것은 그 내용을 공식적으로 배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렘 36:23). 따라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공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과거 자신들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 은 오만 - 에베소에는 대부분 헬라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은 오만'에 대한 화폐 단위는 아마도 '드라크마'(Drachma)이었거나 아니면 로마의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Denarius)이었을 것이다. 이 두 화폐의 가치는 거의 같은 것으로서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이를 오늘날 액수로 환산(換算)한다면 약 800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 본다 하더라도 당시 에베소에 미신이나 마술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성 경: [행19:20]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주의 말씀이...세력을 얻으니라 - 헬라어 본문에서 본 구절의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주의 말씀이 에베소에서 지속적으로 흥왕하여 모든 거짓되고 미신적인 마술들을 물리치며 많은 사람을 회개시켰음을 나타낸다.

성 경: [행19:21]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이 일이 다 된 후 - 바울이 에베소에서 행한 총체적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Haenchen) 또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이 10절에서 언급한 2년의 기간에 있었던 사역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endt, Loisy, Lenski, Bruce, Neil). 이 견해대로라면 본 구절 '에베소에서 머물기로 작정된 날이 다 된 후'라는 의미를 지닌다. 문맥상 이 해석이 더 무난하리라 본다.

⭕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 본문에서 전혀 언급이 없지만 당시 팔레스틴은 기근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1:27-30).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러 연보를 모아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했을 것이다(롬 15:31;갈 2:8-10). 여기서 '경영하여'라는 뜻의 헬라어 '에데토 엔 토 프뉴마티'(*)는 직역하면 '성령 안에서 결정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바울이 그러한 지방으로 가고자 한 것은 성령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된 것임을 시사한다.

⭕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결심한 것은 로마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자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유럽을 복음화하기 위해 로마를 전초 기지로 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할 만큼 번성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기에 선교 효과가 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도나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한 곳에는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롬 15:20). 그래서 그는 이미 다른 전도자들이 교회를 세우지 않은 유럽으로 시선을 돌려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얼마 후 아가야와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에게 전달한 후(롬 15:26) 죄수의 몸으로서 로마를 방문해 그가 계획했던 바를 이루게 된다(28:16).

성 경: [행19:22]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능력을 행하는 바울]

⭕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마게도냐로 보내고 - 저자 누가는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돌아와 고린도에서 합류한 이후(18:5) 디모데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라는 언급을 보면 그는 분명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안 디모데를 고린도로 파송하여 봉사하게 하였다(고전 4:17;16:10, 11). 한편 '에라스도'라는 이름은 본서에서는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딤후 4:20에서 그는 고린도 교회에 특별한 관심을 둔 바울의 친숙한 동료로서 소개된다. 아마도 그는 롬 16 :23에 언급된 고린도의 재무 담당자인 에라스도와 동일인일 것이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했던 디모데와 함께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 벤트(Wendt)는 여기서 바울이 에베소가 아닌 아시아의 다른 곳에서 얼마간 더 머물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쟈안(Zahn)은 26절을 근거로 바울이 그의 조력자들을 마게도냐에 보낸 후 에베소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23절을 근거로 바울이 에베소에 계속 체류했다고 반박했다(Haenchen). 그러나 본절에서 누가는 바울이 어떤 지역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낸 후 좀더 아시아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어느 견해가 옳은지 결정하기 힘들다. 다만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할 때 '에베소'란 말을 게속 강조적으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이 에베소에 계속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행19:23]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그 때쯤 되어 이 도로...소동이 있었으니 - 여기서 '그 때쯤'이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에 대해 다음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1절의 '이 일이 다 된 후'와 거의 비슷한 시점. 이는 바울이 유럽으로 떠날 계획을 실행에 옮길 시점을 의미한다.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낼 시점.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내게 된 것은 데메드리오의 선동이 있었던 때문인 듯하다. 즉 바울은 디모데와 에라스도와 함께 유럽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려고 작정했다가 데메드리오의 소동으로 인해 두 사람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그 소동을 잠재운 후 떠나게 된 것이다(20:1). 따라서 의 추측이 더 타당하다. 한편 '이 도'란 뜻의 헬라어 '테스 호두'(*)에 대해 로이지(Loisy)는 '호두' 대신에 원래는 이 곳에 '데우'(*) 즉 아데미를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소동'은 '이 도로 인하여'라는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일어난 소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행19:24]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데메드리오...아데미 - 에베소의 아데미(Artemis) 여신은 근동 지역에서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모신(母神)이었다. 사람들은 이 아데미의 신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이 신상은 여러개의 유방을 지닌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신상은 원래 운석(隕石)이었는데 그 모습이 유방을 많이 가진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경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데미의 신전은 에베소 북동쪽 약 2.4km지점에 있었는데 가로와 세로가 각각 120m, 60m나 되어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당시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신전을 방문하려고 원근 각처에서 몰려들었다. 신전 주변에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음식을 팔거나 숙소를 제공하며 아울러 제물과 기념품을 파는 장사꾼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 중 가장 수입이 좋은 장사는 데메드리오 같은 자들이 취급했던 아데미의 은감실 즉 모조 은신상을 제조해서 여행자들에게 파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조 은신상을 기념품이나 서원의 헌물 또는 호신품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로 많은 사람들, 심지어 마술사들까지 개종함으로 자연히 우상 숭배의 악습이 점차 폐지되어 은장색(은세공사)들의 수입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은장색 조합의 우두머리는 기독교를 대항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소동을 통해 그들은 사람을 선동하여 바울의 기독교 선교를 저지함과 동시에 아데미 여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더불러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행19:25]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 데메드리오는 단순히 은장색들만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아데미 여신상과 관련을 맺고 생계를 유지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들은 은장색들 외에 적갈색 진흙으로 작은 신상을 만드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은장색들과 함께 여행자들을 상대로 대단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행19:26]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신이 아니라 하니 -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라는 말은 바울이 아시아 전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에베소를 중심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시아 전역에 소문으로 번져갔거나 바울을 통하여 믿는 신자들이 아시아 각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로 추측된다. 그리고 바울이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미 아레오바고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가르친 내용이다(17:29). 대체로 에베소에서는 5월 무렵에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대축제가 벌어졌는데 이 축제는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큰 축제로서 이 축제에 인근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본문에서는 은장색들이 이 축제가 곧 임박했는데 바울의 선교 활동은 갈수록 확장되어만 가니 매상이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염려한 것같다(Lenski).

성 경: [행19:27]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영업만...떨어질까 하노라 - 데메드리오는 사람들을 부추기고 선동하기 위하여 몇 가지 합리적 이유들을 제시한다. 데메드리오의 주장과 관심은 아데미의 위엄과 권위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신의 이익에 있었다. 한편 아데미 숭배가 세계적이라는 데메드리오의 말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같다. 왜냐하면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모두 32개소에서 아데미 숭배의 흔적이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Wernicke).

성 경: [행19:28]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 이는 우상 숭배자들이 의식을 거행할 때 신을 찬양하기 위해 쓰이는 상투적(常套的)인 말이다. 서방 사본(Western Text)과 함께 몇몇 사본에서는 본구절 바로 앞에 '거리로 뛰어나가'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다. 만일 이러한 사본을 따른다면 이길은 에베소의 중심부를 지나고 있는 아카디안대로(Arcadian Way)일 것이다. 이 대로는 에베소의 항구로부터 피온(Pion) 산의 기슭에 있는 대극장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외치며 종교적 열정을 구실로 삼아 에베소 성읍을 소동 가운데 몰아넣으려고 했을 것이다.

성 경: [행19:29]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연극장으로 - 가이오는 더베 출신이고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바울과 함께 여행한 동료들이었다. 소동을 일으킨 무리들이 어떻게 해서 이 두 사람을 붙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두 명을 붙잡아 노천 극장으로 끌고 갔는데 이 노천 극장은 에베소 동편에 있는 것으로서 약 2만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건축물이었다.

성 경: [행19:30]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바울이...들어가고자 하나 - 바울이 살벌한 기운이 넘치는 현장 속으로 달려들어가고자 한데 대해 혹자는 바울의 신앙적 의리와 용기에 초점을 맞춘다. 즉 바울이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속수 무책으로 가만히 있는 것을 비겁한 도피라 여기고 폭도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 동료들에게 자신이 신뢰할 만한 형제임을 입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Bauernfeind). 이러한 측면 외에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일찍이 여러 로마 관리들에게서 호의를 받았기 때문에 폭도들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R.N. Longenecker, Zahn).

성 경: [행19:31]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 - 아시아의 관원들은 대체적으로 고귀하고 부요한 가문 출신이었다.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와 로마의 여신(女神)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는 것이 이들의 주임무였다. 해마다 아시아 관원이 그 관할 지역을 위하여 선임되었고 그 인원이 추가되기도 했다. 이 아시아 관원들의 동맹은 정치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관원들 중에 몇몇이 바울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바울을 염려하여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이는 당시 로마의 정책이 기독교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F.F. Bruce).

성 경: [행19:32]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태반이나...알지 못하더라 - 이 집회는 불법 집회(40절)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는 채 모여있었다. 소요를 선동한 데메드리오는 결정적인 순간에 슬그머니 뒤로 빠져버렸고 그와 함께 행동하던 동료들도 특별히 나서지 않는다. 군중들은 분노 가운데 하나로 뭉쳤으며 아데미에 대해 불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켰지만 일의 자초 지종을 알지 못해 혼선을 빚고 있었다. 분노에 찬 사람들 대부분이 영문을 몰라한다는 본 구절의 표현은 저자 누가가 지니고 있는 헬라의 풍자적인 유우머 감각을 잘 반영해 준다(Bruce).

성 경: [행19:33]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알렉산더를 권하여...발명하려 하나 - 알렉산더라는 이름은 유대인 사회나 헬라인 사회에서 흔했다. 본 구절의 알렉산더가 딤전 1:19, 20이나 딤후 4:14의 알렉산더와 동일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군중들은 유대인의 신분인 알렉산더를 앞으로 밀어냈다. 그는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해서 변명하려고 온 사람이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배척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 양자는 모두 우상 숭배를 배격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대가 자신들에게까지 파급될 것을 두려워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알렉산더를 보냈던 것이다(Bruce, Longenecker).

성 경: [행19:34]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데메드리오의 소동]

⭕ 유대인인줄 알고...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 군중들은 알렉산더가 자신들 앞에서 변명을 시작하려 하자 큰 소리로 외쳐됨로써 그를 저지하였다. 군중들은 그가 유대인로서 자신들을 변명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군중들의 외침 때문에 유대교의 입장을 변론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에베소 사회 내에서 유대교가 얼마나 무력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Haenchen). 한편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군중들의 외침은 한번 시작되면 거침없이 휩쓸려 버리는 전형적인 군중 심리를 보여줌과(Lenski) 아울러 이러한 광신성은 아데미 신전의 제사장 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아데미 신전의 대제사장이나 그 밑의 제사장들은 모두 환관(宦官)이어야 했다.

성 경: [행19:35]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서기장의 중재]

⭕ 서기장 - 로마의 임명을 받은 관리는 아니었지만 자유 도시 의회롤 통해 선출된 의회의 최고 서기이며 최고 행정 관리였다. 이 서기장은 본토 출신의 관리이기 때문에 담당 지역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요 사태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래서 본문의 서기장은 이번 소요 사태가 앞으로 에베소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여 일단 진정시킬 방안을 모색하였다.

⭕ 에베소 사람들아...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 '전각지기'란 뜻의 헬라어 '네오코로스'(*)는 '신전 청소부'라는 뜻을 지니나 '신전과 신을 섬기는 의식을 담당하는 수호자'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는 당시 에베소 사람들에게 매우 명예와 자부심을 반영하는 말이었다. 서기장은 무리를 안정시키고자 군중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그들의 자부심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서기장의 이 말 가운데는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아데미 여신상으로 섬기는 에베소 사람들의 몽매한 신관(神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성 경: [행19:36]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서기장의 중재]

⭕ 너희가...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 에베소인들이 그 도시가 아데미와 쓰스의 전각지기라는 사실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서기장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에베소는 이미 아시아 전역에 아데미의 도시로 정평이 나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에서 아데미를 숭배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군중들의 행동은 근거없는 경솔한 행동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서기관이 기독교에 대한 변호자로 나선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단지 로마범과 질서의 수호를 위해 개입하였다고 이해된다. 그는 에베소가 무질서하고 불법 행동이 난무하는 곳이라는 소문이 행여나 생겨날까봐 우려하였다(Howard Marshall).

성 경: [행19:37]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서기장의 중재]

⭕ 도적질하지도...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 - 이 사람들은 곧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가리킨다(29절). 서기장은 이들이 잡혀온 데 대한 구체적 혐의가 없음을 지적함으로써 논지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성전에서의 도적질이나 신성 모독은 당시 이방 사회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제일 많은 고발 사유였다고 한다. 한편 롬 2:22에서 바울은 이방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성 경: [행19:38]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서기장의 중재]

⭕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 당시 재판은 회기(session)에 따라 열리든지 기타 정규적인 개시일에 열렸다. 그리고 아시아는 당시에 총독의 주재 하에 있었으며 간혹 총독이 주재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때때로 로마 총독이 출장하여 재판을 주재하거나 기타 사무 일체를 보고받곤 하였다. 따라서 서기장의 주장은, 사적인 문제로 소송건이 생길 때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한편 '총독들' (*, 안뒤파토이)이라는 복수형은 예외적이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관할 지역의 총독은 1인이기 때문이다. 이를 혹자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총독 유니우스 실라우스(Junius Silaus)를 암살한 두 사람(Helius, Celer)이 아시아에서 권력을 행사한 사실과 연결시킨다(G.S. Duncan). 하지만 이 복수형의 표현은 단지 '총독들같은 사람'이라는 정도의 일반화된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Howard Marshall).

성 경: [행19:39]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서기장의 중재]

⭕ 그 외에 무엇을...민회에서 결단할지라 - 당시 이 민회는 시의원들과 평의원들로 구성되었으며 시민들에게는 합법적으로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 민회는 정기적으로 한 달에 세 번 열렸으며 모일 때마다 도시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며 그 도시의 행정 사무 일체를 논하였다.

성 경: [행19:40]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서기장의 중재]

⭕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받을 위험이 있고 - 서기장은 본토 출신의 관리였기 때문에 그 지역의 소요에 대한 책임을 누구보다 엄하게 져야했다. 따라서 그는 이런 식의 이유없는 불법 집회로 인하여 집회에 참석치 않은 사람들과 로마 당국의 미움을 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사실 이 소요와 집회는 개인적인 이기심과 음모에 의해서 비롯된 것으로서 구체적 이유나 근거도 없는 충동적인 소요 사태였으며 군중 심리에 의해서 모이게 된 불법 집회였다. 결론적으로 데메드리오의 음모와 요구는 거부되었으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성 경: [행19:41]

주제1: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주제2: [서기장의 중재]

⭕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 서기장의 논리적이고 합당한 연설은 군중들을 자진 해산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위기적인 상황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무사히 끝났다. 바울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았으면서도 다급한 상황은 진정되었다. 한편 저자 누가는 이방 세계 가운데서 기독교의 호교적(護敎的)인 요소를 매우 비중있게 다루는데 여기서도 그는 서기장의 연설을 심도있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누가의 집필 태도는 다섯 차례에 걸친 바울의 호교적 변론에 대한 기록에서도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성 경: [행20:1]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사역]

⭕ 소요가 그치매 - 여기서 소요란 데메드리오 사건(19:23 이하)으로 에베소 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을 말한다. 이 소요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나이다. 이제 소동이 진정되자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것이 그자신의 안전과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두려움 속에서 소요가 그치는 틈을 타서 서둘러 도망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소요가 그치매'라는 문구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이유나 동기를 진술하고 있다기 보다는 떠나가게 된 시간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R.C.H. Lenski).

⭕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 이것은 바울이 놀라움에 가득차서 갑작스럽게 야간 도주하듯이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작별의 의식을 다 갖추고 그들과 진지하게 헤어졌음을 뜻한다. '권한 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사스'(*)는 격려하고 위로하며 권면한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전도 계획에 의해서 떠나려는 바울은 그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또한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의 권한다는 말 속에는 기독교 설교의 포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작별하고'(*, 아스파사메노스)는 권함이 끝난 후 서로 포옹하고 사랑의 입맞춤을 나눈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교회의 작별에 대한 일반적인 관습은 서로 안고 입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7절).

⭕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 19장의 폭동이 있은 직후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19:21) 마게도냐로 향했다. 람세이(Ramsay)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드로아로 항해하는 연안 무역선을 탔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고린도 교회의 심상치 않은 사태에 대한 소식을 알고자 파견했던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 보고를 들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도를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드로아에서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고후 2:12, 13)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여러 생각들 때문에 곧장 마게도냐로 향하였다.

성 경: [행20:2]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사역]

⭕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 '지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로스'(*)란 말은 특정한 지리적인 위치를 지적하는 낱말로서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긴 육로 여행도를 다 망라(網羅)하고 있다. 즉 바울은 처음 전도의 옛 중심지인 빌립보(16:12),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재방문했을 것이며 이 기간 중에 바울이 로마서 15:19에서 말한 바와같이 일루리곤(Illyricum)까지도 갔을 것이다. 또한 이때 그가 이그나티우스 대로(the Egnatian Road)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하여 그 길의 끝인 아르리아 해의 두로하키움(Dyrrhachium)에까지 여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F.F. Bruce). 고린도 후서도 이때 기록한 것으로 본다(고후 7:6). 바울의 여행의 주 목적은 그곳 교회들을 계속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곤궁(困窮)한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데 있었다(Tyndale). 바울은 이 연보를 위해 갈라디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이다(롬 15:25-32;고전 16:1-4).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는 단순히 사랑을 나타내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성 경: [행20:3]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사역]

⭕ 석달을 있다가 - 그곳은 헬라, 즉 아가야 지방이었지만 실제로 바울이 체류하였던 곳은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였다. 체류 기간은 삼개월로 A.D. 56-57년에 걸친 겨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Bruce). 바울은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따뜻한 대접을 받으면서(롬 16:23) 이 기간에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이 서신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방문에 대한 준비도 시키고 또한 체계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었다. 바을이 이처럼 로마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장차 로마를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롬 15:17-23).

⭕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돌아가기를 작정하니 -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제 어느 정도 자기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알고 헬라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은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원하는 자들이 타고 가는 순례선(Pilgerschiff)을 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18:18). 그런데 바울을 박해해 오던 유대인들이 그가 배에 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또는 배 밖으로 밀쳐 버림으로써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득불 노정을 변경하여 해상보다 훨씬 늦은 육로를 통하여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공모'의 헬라어 '에피불레스'(*)는 그의 생명을 노리는 필사적인 음모를 뜻한다. 그리고 '작정하니'의 헬라어 '에게네토 그노메스' (*)는 '결단을 내렸다'(He decided)라는 뜻으로서 그의 생각이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나타낸다(Bruce).

성 경: [행20:4]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사역]

⭕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두기고와 드로비모라 - '함께 가는'의 헬라어 '쉬네이페토아우토'(*)는 '그와 동행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바울을 수행(隨行)하는 것을 말한다(E. Haenchen). 이 일곱 사람은 지난 2년 동 안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보롤 냈던 것을 맡아 가지고 가는 사명을 받은 각 교회의 대표자들이다. 바울은 결코 자신의 손으로 이 연보를 관할하지 않고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도적 결정을 따른 행위로서 매우 지혜로운 일이었다(행 6:1-6). 그러면 이제 바울과 함께 동행한 각 교회의 대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 소바더 -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로서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다. 롬 16:21에 나타난 바울의 친척 소시바더와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 아리스다고 - 19:29의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로마까지 바울을 따라 갔으며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하는 데살로니가 출신이다(27:2;골 4:10;몬 24절).

⭕ 세군도 -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단지 여기만 나오는 인물이다.

⭕ 가이오 - 더베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한다(19:29).

⭕ 디모데 - 루스드라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16:1-3).

⭕ 두기고 - 아시아 사람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며 언제나 바울과 동행한 인물로서 골로새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달한다(엡 6:21;골 4:7;딤후 4:12;딛 3:12).

⭕ 드로비모 - 에베소 출신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한다(딤후 4:20).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대표해서 예루살렘에 간 것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디모데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아가야 지방과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졌던 사람이기(고후 1:1) 때문이다(R.C.H. Lenski). 하지만 고후 8:6 이하로 미루어보건대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바울이 그 교회에 보낸 디도와 다른 형제에게 맡겨져 보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디도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디도가 누가의 형제였다는 주장(Ramsay)에서 신빙성 있는 답변을 찾는다. 따라서 누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수령하기 위하여 디도와 함께 파견된 두 형제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F.F. Bruce). 아무튼 바울 사도는 그의 활동의 절정기에서 여러 수행인들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한다.

성 경: [행20:5]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사역]

⭕ 그들은 먼저 가서 - 여기서 그들이란 앞절에 언급된 일곱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나 네압볼리를 경유 드로아로 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먼저 갔는지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으나 바울은 빌립보에서 누가와 합류(合流)해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일곱 사람보다 후에 드로아로 가기로 여정을 짰던 것으로 추측된다(Lenski, Pulpit).

⭕ 우리를 기다리더라 - '우리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다만 우리 가운데 누가가 들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16:10). 따라서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을 말한다.

성 경: [행20:7]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 사역-유두고를 살림]

⭕ 안식 후 첫날에 - '엔 데 테 미아 톤삽바톤'(*) 은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15:21;18:4)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진다(E. Haenchen, 요 20:19, 26;고전 16:2;계 1:10).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날은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의 날이 되었다. 믿는 자가, 새 생명을 주사 영원한 안식의 소명을 갖게 하신 주님을 주일날에 모여서 경배함은 마땅하다(히 10:25). 이 날을 지킴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것이 확실하게 세상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 떡을 떼려 - '클라사이'(*)는 '클라오'(*)의 제 1부정과거 능동 부정사이며 목적을 나타낸다.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인 목적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떡을 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애찬(*, 아르토스, 2:42;고전 10:16)을 가리킨다는 견해. '떡'의 헬라어 '아르톤'(*)에 정관사 '톤'(*)이 없는 것은 일반적인 식사를 말한다(R.C.H. Lenski). 초기 기독교의 풍습대로 성도들이 성례전(聖禮典)의 필수적인 순서로서 가졌던 애찬겸 성찬이었다고 보는 견해(F.F. Bruce, Pulpit, Alford). 그런데 이것은 교회 내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켜(고전 11:20-22) 후에 애찬은 없어지고 성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본문의 '아르톤'(*)에는 정관사 '톤' (*)이 없는 반면에 11절의 '아르톤'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떡을 뗀다는 것이 애찬겸 성찬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11절의 '톤 아르톤'은 단지 7절의 '아르톤'을 가리킨다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고전 10:16, 18과 11:17-34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주의 거룩한 만찬(the Lord's Supper)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 의해 뒷받침된다.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개인집에 모여서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만찬을 나누기란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다. 저녁 시간이 아니고 한밤중에 떡을 뗀 것을 생각해 보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모였다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밤중에 떡을 뗀 것은 단지 그것을 맛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Jonh Calvin). 와 의 주장이 보다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한편 떡을 떼는 횟수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기에 각 교회는 임의로 그 횟수를 정했으나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주일 회집(會集)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매주일 성찬을 행하는 것이 사도들에 의해 정해진 관습임을 알 수 있다(McGarvey). 그리고 떡을 떼는 일은 반드시 말씀을 강론한 후에 실시되었음이 성경(20:7-11)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유스틴 마터의 둘째 해명서(Apology)에 나타나 있다(pulpit).

⭕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 바울은 의식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를 것을 계획했다. 이는 바울이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된 날로서 중요시한 데 그 이유가 있다(R.C.H. Lenski).

성 경: [행20:8]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 사역-유두고를 살림]

⭕ 윗다락에 - '휘페로오'(*)는 9절과 1:13에도 나타났듯이 초대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개인집의 다락방을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 집을 신앙 공동체의 목적을 위하여 제공한 것은 초대 교회의 두드러진 모습이었다(Tyndale). 그들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성전도 회당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장소일 망정 모이기를 힘썼다(Matthew Henry).

⭕ 등불을 많이 켰는데 -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모임에 어두움 속에서의 제의적 매음 행위가 있다고 의심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으로 등불을 많이 켜서 장소 전체를 환하게 했다(Ernst Haenchen). 모임의 분위기를 엄숙하고 화려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다(Kuinoel). 사람이 많이 모인 밤중의 집회에 잡담을 방지하기 위해서다(Bengle). 단순한 장식적인 효과라고 본다(Olshausen). 누군가가 떨어지는 것을 즉시 알아보기 위해서다(Meyer). 한 젊은이가 졸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다(Alford). 모인 수가 많았기 때문에 밤중 집회에 알맞게 많은 등불을 설치하였다는 견해(John Calvin). 혹자는 다락방 자체가 많은 회중이 모일 수가 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칼빈은 만일 그 다락방에 많은 무리가 모여 비좁지 않았다면 유두고(Eutychus)가 구태여 창에 걸터 앉지는 않았으리라는 논리로 반박을 한다. 사치스럽게 허식적으로 꾸며서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내려 했다기 보다는 밤중 집회의 필요성(必要性) 때문에 모임 전체를 환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하겠다.

성 경: [행20:9]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 사역-유두고를 살림]

⭕ 창에 걸터 앉았다가 - 건방지기 때문에 창에 걸터 앉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견해도 있지만(Matthew Henry), 그보다는 방이 회중으로 꽉 차서 유두고는 청년이기에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다는 것과(McGarvey) 등불들로 인해 혼탁해진 공기보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걸터 앉았다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Bruce).

⭕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집회(meeting)의 핵심 내용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Tyndale).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모일 때마다 강론을 들었고 또한 그 가르침에 부착해서 세상과 다른 독특한 삶의 원칙들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의 백성임을 능력있게 증시(證示)하였다. 강론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오늘의 교회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인상깊은 귀절이다.

⭕ 깊이 졸더니...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 '깊이 졸더니'의 헬라어 '카타페로메노스' (*)는 '카타페로'(*)의 현재분사로서 점차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의 헬라어 '카테네크데이스'(*)는 부정 과거분사로서 계속되는 졸음의 결과로 완전히 잠에 곯아 떨어진 객관적인 상태를 진술한다(Robertson). 그렇다면 거룩한 모임에,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는 신성한 시간에 왜 이런 현상이 생겼으며 누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노동으로 피곤하였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그것에 압도되어서 졸다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Bruce, McGarvey). 또한 많은 등불들로 인해 방안이 더워졌을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기름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 공기를 흐리게 하여 산소부족 현상을 일으키므로 졸음이 가중되었다고 본다(Alford, Bruce). 따라서 앞의 8절에서 등불을 많이 켰다고 기술한 것은 유두고가 떨어진 사건에 대한 복선(伏線)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Meyer). 그리고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혹자는 말씀을 들을 때에 졸음을 주의하라고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한다(Metthew Henry). 그러나 칼빈(J. Calvin)의 경우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더구나 온종일 고된 일을 한 사람이 졸음과 싸우다가 잠에 빠진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졸음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고 유두고의 졸음을 질타하는데 초점을 둔 주석가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이 견해에 대한 증거로 본문에서 누가는 유두고가 졸다가 잠에 빠져든 시간이 한밤중인 것을 말함로써 이미 유두고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더욱이 바울이 유두고를 책망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John Calvin, Brece, McGarvey). 그렇다면 이 사건의 기록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분으로 계시하고 있는가에 해석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개인의 행위에 역점을 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성경의 메시지를 놓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 3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꼭 죽었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I.B.C.) 의사인 누가가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 진단을 내리기를 '죽은 것 같이'라는 뜻의 '호세이 네크로스'(* ;막 9:26)가 아니라 '네크로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Thomas Whitelaw).

성 경: [행20:10]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 사역-유두고를 살림]

⭕ 내려가서 - '에페페센'(*)은 '뛰어 내려가' 혹은 '달려들어'라는 뜻이다.

⭕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 여기서 '안고'를 가리키는 '쉼페릴라본'(*)은 '완전히 껴안다', '함께 둥그렇게 붙잡다'라는 뜻으로서 엘리야(왕상 17:21)와 엘리사(왕하 4:34, 35)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행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흉내냈다기 보다는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의 즉각적인 표현이며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자세이다(J. Calvin).

⭕ 떠들지 말라 - '메 도뤼베이스데'(*)란 말은 갑작스런 사고로 온통 동요되어 울고 불고하는 회중들을 진정(鎭靜)시키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Thomas Whitelaw). 일찍이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흐느끼고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막 5:38ff.) '티 도뤼베이스데'(*, '어찌하여 환화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이다.

⭕ 생명이 저에게 있다 - 혹자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청년이 죽은 것이 아니라 까무라쳐 기절한 것을 바울이 현대의 인공 호흡법을 써서 살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Ramsay, Wendt, Zoeckler). 그러나 이는 바울이 그를 끌어 안았을 때 그의 생명이 되돌아왔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서(Bruce)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소생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성 경: [행20:11]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 사역-유두고를 살림]

⭕ 오래 동안...이야기하고 - 갑자기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모두들 크게 놀랐으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한 극적인 이적을 보고 회중은 두려움과 흥분, 놀라움 속에서 이 잊을수 없는 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의 헬라어 '호밀레사스'(*)는 바울이 혼자서 더 이상 강론하지 않고 성도들과 자유스럽게 담화했음을 뜻한다. 주님의 권능과 그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생생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은 피곤을 잊은 채 철야를 한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통이다.

성 경: [행20:12]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 사역-유두고를 살림]

⭕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드로아의 신도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큰 기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 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證票)를 보면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대로(마 28:18-20)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말씀과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된 임마누엘 신앙 이것보다 더 큰 성도의 위로가 무엇이겠는가 !

성 경: [행20:13]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를 떠남]

⭕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정하여 준것이라 -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나 되는 거리인데 밤새 철야 강론을 한 바울이 일행을 먼저 보내고 왜 혼자서 육로로 가는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육로를 도보로 간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예상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그 길을 택했을까? 바울이 쇠약하여 배 멀미를 하기에 밤에 배 타는 것이 싫어서 육로를 택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바울이 철야 강론을 한 것이나 본서 27장을 보면 바울이 바다를 기피할 정도로 쇠약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그때는 4월의 아름다운 화창한 봄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불쑥 돌출한 렉툼 갑(Cape Lectum)을 돌아서 긴 항해를 하는 것보다 직선거리인 육로를 통해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기 위해서 그 길을 택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 발자국씩 예루살렘으로 다가서는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E.M. Blaikclock).

성 경: [행20:14]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를 떠남]

⭕ 바울이...우리를 만나니 - 바울은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 승선하였다. 그리고 그 배는 앗소로부터 70km 정도 떨어진 레스보스섬의 수도 미둘레네로 향했다. 여기서 '만나니'에 부정과거가 사용되지 않고 미완료 시제 '쉬네발렌'(*)이 사용된 것은 바울과 그 일행이 서로 만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효과를 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Thomas Whitelaw) 여행 보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기도 하다(E. Haenchen).

성 경: [행20:15]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를 떠남]

⭕ 거기서 떠나...밀레도에 이르니라 - 바울을 태운 배는 첫 날 밤에는 미둘레네에서 보냈다. 둘째날 밤에는 가능한 서둘러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 때문에 항구에 배를 정박(碇泊)시키지 않은 채 이른 아침의 바람을 기다리기 위해 기오 앞에 있었다. 그리고 셋째날에는 사모에 들렀다. 여기서 베자 사본(Codex Bezae)은 그들이 밤에 사모에 인접한 항구인 트로길리움(Trogyllium)에 체류한 것을 첨가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 날 에베소 곁에 있는 밀레도에 도착했다.

성 경: [행20:16]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드로아를 떠남]

⭕ 바울이...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 바울이 에베소를 그냥 지나가기로 한 이유를 밝힌다. 혹자는 바울이 에베소를 통과한 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난날 에베소에서 겨우 살아난 경험이 있기에(19:23-41)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고 주장을 하지만(E. Haenchen) 그것보다는 본문에 밝히 언급된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로 곧장 향할 계획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능하다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한 연보를 전해 주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 연보는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이방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가르칠 숭고한 메시지를 내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순절을 지키려고 도처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동안 이방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 교회가 서게 되었는가에 관한 선교(宣敎) 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성 경: [행20:17]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에베소로 보내어...장로들을 청하니 - 배가 밀레도 항구에 닿자마자 바울은 그곳에서 직선 거리로 약 50km 떨어진 에베소에 사자를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presbyters) 청하였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평상시 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편 '장로들'(*, 프레스뷔테루스)란 각 교회의 지도자들(leaders)을 가리킨다(14:23). 본 설교에서 '감독자들'(*, 에피스코푸스)이라고도 지칭된 그들은(28절) 교회 내의 행정적 일은 물론이고 목회적 임무까지 수행했으리라 짐작된다(약 5:14;밸전 5:1-4). 기타 장로에 관한 사항은 신 21:1-9 주제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성 경: [행20:18]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오매 - 추측컨대 에베소 장로들이 밀레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삼일이 걸렸을 것이다(Ramsay). 그리고 그들이 바울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찾아온 것은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다.

⭕ 첫날부터 지금까지 - 약 3년에 걸친(31절) 에베소 사역 기간을 가리킨다.

⭕ 너희도 아는바니 - 원문에는 이 문구가 본절의 처음에 나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에베소 장로들의 지식과 판단에 호소하면서 연설을 시작한다. 이처럼 바울은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한 자신의 실생활을 증거삼아 복음으로 살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고전 11:1; 살전 2:1-12).

성 경: [행20:19]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겸손과 - '타페이노프로쉬네스'(*)에 대해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이 단어가 굽실굽실하는 굴종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께 예속된 자의 자발적인 봉사와 섬김의 자세를 의미한다고 한다.

⭕ 눈물이며 - 31절에서도 눈물이 다시 언급되며 또한 고후 2:4과 빌 3:18에서도 그의 눈물이 언급되는데 이는 그가 고도의 지성인이었지만 뜨거운 감정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을 보여준다. 이 눈물은 주님을 섬겨나가는 과정에서 주님을 거부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그 아픔에 못이겨 나온 것이며 또한 자기 동족의 회심을 위한 그의 애타는 심정의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판자들이 말하는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스러운 확장을 위한 눈물이라 하겠다.

⭕ 유대인의 간계 -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괴롭혔으며(13:45;14:2;17:5) 또한 19:9,13,33,34을 보면 유대인들의 적개심(敵愾心)이 얼마나 혹독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11장은 에베소에서의 유대인의 핍박이 어떠했는지를 능히 짐작케 한다.

⭕ 주를 섬긴 것과 - 여기서 섬긴다는 표현을 '둘류온'(*)으로 나타낸 것은 바울 자신이 주님의 '종'(*, 둘로스)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현재 시제의 사용은 지금도 변함없이 주를 섬긴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겸손과 눈물 그리고 시험을 참고 오직 '둘로스'로서 주님만을 섬긴 것! 이것이 사도가 간증한 에베소에서의 생활 방식과 신앙 태도였다.

성 경: [행20:20]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부지런히 목회한 것을 본다. 여기서 '공중 앞에서'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회당(18:19;19:8)이나 두란노 서원을 뜻하며 '각 집에서'란 그들의 필요를 따라 바울이 심방한 에베소 교인의 집이나 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을 의미한다(18:26). 따라서 강단에서 왜 선포적인 설교와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살피고 권면(勸勉)하고 가르치는 심방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공적인 설교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사적인 방문을 태만히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자신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이 양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매맺는가를 살피지 않은 게으른 종이 될 것이다.

⭕ 꺼림이 없이 - '휘페스테일라멘'(*)이란 말은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릴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추러들거나, 또는 교묘한 가장을 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없이 즉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삭감이나 은폐함이 없이 담대히 다 증거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증거의 책임을 다한 자신의 떳떳한 사역을 변호한 말이다.

성 경: [행20:21]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 회개와 믿음 ! 이것은 바울이 증거한 핵심 내용이며 기독교의 중심 진리이다. 혹자는 회개는 주로 이방인들에게 해당된 것이고, 믿음은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구별하지만(Kuinoel)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했다(2:38;3:19). 사람이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오는 회개(*, 메타노이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는 각성과 함께 그 죄에 대한 형벌과 멸망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 나오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면 이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또한 자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의롭다 하시며 새생명을 주시는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이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음과 결부되지 않은 회개 그자체는 개과천선(改過遷善)에 머무는 세속 윤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회개와 믿음은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며 구원은 먼저 회개가 있고 이것에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 결부될 때에만 얻을 수 있다.

성 경: [행20:22]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심령에 매임을 받아 - '심령에'를 가리키는 '토 프뉴마티'(*)가 '심령에'(in the spirit)냐 아니면 '성령에'(by the spirit)냐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지만, 문맥과 전체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이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표현으로 '심령에'라는 해석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심령에 매임을 받아'란 말은 바울의 앞에 일을 고난을 확실하게 예견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성령의 지시로 가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 속에서 느끼는 하나의 내적인 압박감(壓迫感) 같은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순종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성 경: [행20:23]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 바울이 친히 성령의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바울이 통과해 지나가는 도시에서마다 성령이 예언자들을 시켜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운명을 말해준 것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자연스럽다(21:10-14).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앞에는 지금까지 당했던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더 심한 상황들 곧 문자 그대로 실제적인 투옥(쇠고랑)과 견딜 수 없는 극심한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무거운 말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위해 사는 사도 앞에 놓여진 현실이었다.

성 경: [행20:24]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끊임없이 그리고 오로지 주를 위해 충성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현실 앞에서 바울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결론적으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이 참으로 귀한 것이로되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자기 생명 때문에 자기 생명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관심밖에 둠으로써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그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바우어(Bauer)는 이 구절을 "...을 다하기만 하면(...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내 생명을 내놓겠습니다(또는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바울이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만 그의 생명을 내놓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다 마치는 데 있었다(롬 14:8;빌 1:20, 21).

성 경: [행20:25]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막 1:4). 왜냐하면 븍음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이기 때문이다(하나님 나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막 1:14-20 주제 강해 참조). 따라서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해서 구별되게 생각하는 세대주의의 가르침은 그릇된 신학의 결과이다.

성 경: [행20:26]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오늘 - '엔 테 세메론 헤메라'(*)는 '오늘이라고 하는 이날' 즉 '너희와 작별하는 마지막 이 날'을 강조한 것이다.

⭕ 증거하노니 - '마르튀로마이'(*)는 일반적으로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는 뜻이며 본절에서처럼 중간태로 사용되면 주로 '엄숙하게 호소하다'란 뜻을 나타낸다. 특히 이 말은 신약에서 바울만이 자주 쓴 표현으로 중대한 선언을 할 때 사용했다(갈 5:3).

⭕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 피는 생명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바울은 여기서 겔 33:1 이하의 말씀을 자신에게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경비를 소홀히 하여 백성에게 화가 임하면 그 피가 파수꾼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겔 33:1-7). 그러나 파수꾼의 간절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행을 거듭하면 그는 죄악 중에서 죽고 파수꾼의 생명은 보존되었다(겔 33:8, 9). 따라서 바울의 이 선언은 20절의 진술을 더욱 뒷받침해 주는 엄숙한 고백으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자기의 책무(責務)를 남김없이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성 경: [행20:27]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전하였음이라 - 20절의 반복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온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말한다.

성 경: [행20:28]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너희는 - '너희'는 17절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그들 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도 같은 수고를 당부한다.

⭕ 삼가라 - '프로세코'(*)는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라', '전력하라', '관심을 가져라', '조심하라'는 뜻인데, 계속의 의미를 내포한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근면하고 깨어 었어야 함을 강조한다.

⭕ 자기를 위하여 온 양떼를 위하여 - 삼가라고 당부한 구체적인 첫번째 이유이다.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결코 도움을 줄 수 없다.

⭕ 성령이 저들 가운데 - 삼가라고 당부한 두번째 이유로 성령에 의하여 그 임무가 위탁(委託)되었다는 신성성을 상기시킨다. 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삼가라고 촉구한 것이다.

⭕ 감독자를 - 여기서 감독(*, 에피스코포스)은 17절의 장로 (*, 프레스뷔테로스)와 같은 직무를 설명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사도시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오늘날처럼 구별이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 즉 장로, 목사, 감독등의 직무가 제도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이후였다.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감독들에게 엄숙한 책임이 지워졌으니 이것이 삼갈 것을 당부한 세번째 이유이다. 여기서의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만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한 단어가 빠져버린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면서 '자기 아들의 피로'라는 말을 넣어야 맞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하나인 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자기의 것으로 만드신 교회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예수의 대속 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희생적 사랑에 대한 확증임을 강조한 것이다(G. Campbell Morgan). 그런데 본 구절이 몇몇 사본과 역본들에는 '데우' (*, '하나님의') 대신에 '퀴리우'(*, '주의')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에 근거해서 '주님의 교회'(*, 여클레시아 투 퀴리우)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ange, Meyer). 그러나 '여클레시아 투 퀴리우'라는 표현이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여클레시아 투 데우'(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이 11번 나타날 뿐 아니라(고전 1:2;고후 1:1;딤전 3:5) 또한 많은 학자들이 시내 사본(* ;Codex Sinaiticus), 바티칸 사본(B ; Codex Vaticanus) 등에서 후자로 표기되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본문을 그대로 취하는 쪽을 지지한다(Alford, Bengel, Tertullian). 하지만 이 부분이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난해한 구절임은 사실이다.

⭕ 치게 하셨느니라 - '포이마이네인'(*)은 사역자의 포괄적인 목회 활동을 의미하는 말로서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하고 돌보는(tending) 것을 뜻한다. 결국 본절은 교회의 비할 데 없는 고귀함과 그 교회의 양 무리를 맡은 자의 책임의 중차대함을 나타내고 있다.

성 경: [행20:29]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흉악한 이리가...들어와서 - 에베소 교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견(豫見)으로서 흉악한 이리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이것이 유대주의자들인지 아니면 영지주의자들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거짓된 교의를 가지고 기독교를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믿는 자들을 넘어 뜨리는 거짓 교사들을 지칭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찍이 양의 탈을 쓰고 침투하는 이리들에 대해 경계하신 예수의 가르침(마 7:15)과 연관된 것으로 배교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될 시대의 성격을 상기시켜 준다.

성 경: [행20:30]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너희 중에서도 - 흉악한 이리가 외부로부터 침입해서 양떼를 해칠 것이라는 29절과 대조적으로 에베소 교회 자체에서도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 어그러진 말 - '디에스트람메나'(*)는 '왜곡하다', '구부러지다'는 뜻이며 복음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써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생겨 분열을 획책(劃策)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들이 목회 서신(딤후 1:15;2:17)과 계시록(2:1-7)에 나타나 있다.

성 경: [행20:31]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너희가 일깨어 - '그레고레이테'(*)는 '깨우다'를 뜻하는 '그레고레오'(*)의 현재 명령법으로 '방심하지 말고 계속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재림을 준비하고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도 이 말을 사용했다(막 13:35). 따라서 이는 배교의 시대의 성격을 예견한 사도가 파수를 보는 데 정신을 차려서 최선의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는 목회적 용어이다(Bengel).

⭕ 기억하라 - 모세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계할 때 자주 사용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능력을 펴서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한 이 광야에서 지금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고(신 8:2, 18) 그리하여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라(신 8:1-6)고 촉구한 것과 같이 바울 자신이 삼년 동안의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기고 각 사람을 가르친 것을 기억하여 그 본을 받으라는 권면이다. 언행 일치한 지도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감화력 있는 교육 방법이다.

성 경: [행20:32]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지만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러움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 도구일 뿐 근본적(根本的)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단 말인가?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이때 그 방법은 오직 말씀으로이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부탁한다는 '파라티데마이'(*)는 '넘겨주다', '위탁한다', '맡긴다', '의뢰한다'(딤후 2:2;벧전 4:19 등)는 뜻이다.

성 경: [행20:33]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내가 아무의 은이나...탐하지 아니하였고 - 자신의 자랑으로서가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 탐욕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은, 금, 의복은 고대의 중요한 재산이었다(왕하 5:22).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탐하지 않았고(고전 9:4-18; 고후 11:7-12;12:14-18;살전 3:8, 9) 오직 자족(自足)한 삶을 살았다. 이것은 사무엘이 사사로서의 그의 직무롤 마칠 때 온 이스라엘 앞에 고백한 말과 같다(삼상 12:3, 5).

성 경: [행20:34]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 바울은 데살로니가(살후 3:7-12)와 고린도(고전 9:11-15;고후 11:7-12)에서처럼 에베소에서도 친히 노동을 하여 자신의 생계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행들의 필요까지 채워주었다(18:3;고전 4:12; 살전 2:9). 그러나 모든 복음 전파자들이 자급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고전 9:14). 여기 바울의 경우는 당시 반대자로부터 탐욕을 위해 일한다는 어떤 빌미도 잡히지 않기 위한 특별한 예이다. 따라서 바울 역시 생계비를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고 손수 일했다는 것을 밝힌 것뿐이다. 여기서 바울이 한 일은 천막 깁는 일이며, 동행들이란 디모데, 에라스도, 누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당하여'란 표현은 '휘페레테산'(*)으로 낮은 자리에서 함께한 자들을 섬겼다는 뜻으로 본서에만 나오는 단어다(13:36).

성 경: [행20:35]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바울의 고별 설교]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옴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상과 행동에 그 정신이 이미 나타났으며 또한 눅 6:38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이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가장 타당한 견해는 구전을 통해서 알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말씀이 초기에는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전부 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향한 권면의 결론을 삼는다. 그리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 한다. 여기서 '약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영적인 면에서 믿음이 약한자를 가리킨다(Meyer, Bengel, Calvin). 2)경제적인 면에서 빈궁한 자를 가리킨다(Lenski 등). 3)병들고 신체상의 약점을 가진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Matthew Henry, Pulpit). 2)와 3)의 견해가 본문의 문맥상 더 자연스럽고 또한 엡 4:28의 바울의 권고와도 일치한다.

성 경: [행20:36]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전송]

⭕ 무릎을 꿇고...함께 기도하니 - 지금까지 경고하고 권고한 것의 최종적인 결론으로서 기도로 마감하는 모습이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으로써만 신령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주님을 향하여 겸손히 무릎을 꿇은 바울의 태도는 하나님께 향한 간절함과 동시에 이별의 슬픈 감정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기도 자세로는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이었다(눅 18:10, 13). 그리고 다음과 같은 본문에서 바울이 기도한 내용의 본질적인 것을 짐작할수 있겠다(엡 1:15-23;빌 1:3-11;골 1:3-12;살전 1:2, 3).

성 경: [행20:37]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전송]

⭕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 이것은 작별에 대한 유대인의 관례적인 인사를 소개했다기 보다는 작별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견디지 못한 즉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목을 안았다는 것은 요셉이 그 아우 베냐민과(창 45:14) 아버지 야곱에게(창 46:29) 했던 것과 같다. 또한 '입을 맞추다'의 헬라어 '카테필룬'(*)은 미완료 시제로서 점잖게 한번 나누는 거룩한 관례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격정에 차서 몇번이고 연거푸 입을 맞추는 것을 뜻한다(눅 15:20).

성 경: [행20:38]

주제1: [이방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

주제2: [전송]

⭕ 근심하고 - '오뒤노메노이'(*)는 '오뒤나오'(*)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말로 인해 '깊이 슬퍼했다', '몹시 괴로워 마음이 아팠다', '매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 배에까지...전송하니라 - 정박 기간이 끝나서 이제 밀레도를 출항하려는 배에까지 전송하는 장로들의 모습을 기술함으로써 누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바올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무튼 본장에서 만남과 작별에 대한 내용과 그 광경이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기술된 것은 본서가 당시 바울과 함께 동행하면서 모든 현장을 목격했던 누가의 기록이라는 것을 더욱 뒷받침한다.

성 경: [행21:1]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두로 사역]

⭕ 우리가 - 본서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곳은 모두 네 곳인데(16:10-17;20:5-15;21:1-18;27:1-28:16) 본 단락은 그 중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의 차이가 있다. 혹자는 '우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바울, 누가, 드로비모, 아리스다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바울과 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20:4에서 부로의 아들 소바더,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아리스다고에 대해 언급한 이후 지금까지 그들 중 누구와도 헤어졌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과 헌금 전달자의 명단위에 열거된 이름 외에 다른 이름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들 외에도 다른 동행자들이 함께 했으리라 짐작된다(Haenchen).

⭕ 저희를 - '저희'는 밀레도의 회중들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가리킨다(20:17, 18).

⭕ 작별하고 - 헬라어 '아포스파스덴타스'(*)는 동사 '아포스파오'(*)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인데, 이 말은 어떤 사람 또는 물건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아포'(*)와 '끌다', '당기다'의 뜻인 '스파오'(*)의 합성어로 '찢어놓는다'는 의미로서 매우 어렵고도 아쉬운 이별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교역자로서의 바울과 그로부터 양육을 받는 성도들 사이가 매우 친밀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고스 - 밀레도 남쪽 68km 지점에 있는 작고 비옥한 섬으로 명주, 솜, 고약의 산지로 유명하며 또한 전설적인 의학자인 히포크라테스의 고장으로 규모가 큰 의학교가 있었다.

⭕ 로도 - 이 지명은 '도데케네스'(Dodecanese)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을 가리키며 더 구체적으로는 이 섬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를 가리킨다. 이곳은 소아시아 대륙에서 19.2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장미의 섬으로 불리울 만큼, 피부한 일조량으로 하여 장미가 만발하는 섬이다. 또한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태양의 상징 아폴로 신상이 크게 서 있는데 당시에는 넘어져 있었다.

⭕ 바다라 - 이곳은 소아시아의 남서 해안에 위치한 루시아의 도시였다. 당시 '바다라'는 수리아, 팔레스틴 및 애굽 동쪽 연안의 지중해 항구들과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의 항구들을 왕복하던 큰 배들의 정박지로서,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자 거대한 상업 도시였다. 한편 한때 이곳에는 델피(Delphi)에 견줄만한 아폴로 신의 신탁소가 있었다.

성 경: [행21:2]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두로 사역]

⭕ 베니게로 건너가는 - 베니게는 팔레스틴 북쪽 두로나 시돈이 위치한 지역을 포괄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제는 에게해를 완전히 빠져나와 지중해를 가로질러 두로에 이르는 항로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들은 바다라에서 두로로 직항(直航)하는 큰 배로 갈아탔을 것이다.

성 경: [행21:3]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두로 사역]

⭕ 구브로를 바라보고...왼편에 두고 - 구브로는 바다라와 두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중 해상의 섬으로 과거에 바울과 바나바가 바보에서 바예수의 훼방을 물리친 바 있다(13:4-12). 바다라에서 두로 방향으로 항해를 하자면 이 구브로섬의 남단을 지나가게 되는데,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라는 표현은 이 항로를 따라 배가 움직여갔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 배가 순항하였음을 암시한다.

⭕ 수리아 - 이 지역은 팔레스틴 서북방의 지중해에 접한 지역으로 이 지역의 남쪽에 두로가 위치해 있다.

⭕ 행선하여 - 헬라어 '에플레오멘'(*)은 '항해하다'의 뜻인 '플레오'(*)의 미완료과거형으로서 구브로에 머무르지 않고 수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항해하였음을 시사한다.

⭕ 두로 - 이 도시는 바로 위에 위치한 시돈과 함께 베니게의 오랜 항구 도시이다. 대표적 이교 도시로 번영과 부패(腐敗)의 표본이었으며 늘 책망의 대상이었다(눅 10:13). 이 두로는 바다라에서 닷새의 항해 거리에 있었다고 하는데(Chrysostom, Bruce), 이곳에 배가 정박한 것은 배의 짐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아마 이 짐은 과일이나 곡물이었을 것이다(Robertson).

성 경: [행21:4]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두로 사역]

⭕ 제자들을 찾아 - 이 진술은 두로에도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언제, 어떤 경로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11:19에 의거하여 스데반의 순교 후 각지로 흩어진 교인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본다(Bruce, Lenski). 또한 이들 중에는 바울과 실라의 2차 전도 여행시 전한 말씀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한편 본문의 '찾아'(*, 아뉴론테스)는 '수색하여 발견하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이는 두로에 있던 교인들과 바울의 만남이 사전에 약속된 것이 아니라 수소문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으며 그곳에 있던 교인들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5절 주석 참조).

⭕ 이레를 머물더니 - 바울 일행이 두로에 머문 것은 일주일 간이었다. 바울이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두른 것에 비하면(20:16) 상당히 여유있는 행동으로 보이는데, 이는 바다라에서 출발한 배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배가 아니라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는 배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많이 단축(短縮)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두로에 일주일간 머물러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일정에는 별로 차질이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배편을 찾지 않고 그냥 머물러 있었던 데서도 드러난다. 한편 바울 일행이 일주일간 머물러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는데, 헨헨(Haenchen)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타고온 배는 두로가 종착지였기 때문에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배를 기다려야 했다고 보며, 이에 반해 벤트(Bent)나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다른 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배의 짐을 풀고 다시 싣는데 이레가 걸렸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3절의 문맥상 배를 갈아탄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짐을 내리고 싣는 동안 기다려야 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 성령의 감동으로 -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였고(19:21), 그의 의도와 행동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었다(20:22-24). 그런데 여기서는 두로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일견 성령의 역사가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면 그러한 오해는 해소될 수 있다. 즉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생겨난 결과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내용이지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행을 중단토록 만류하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한 것은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들로서는 당연히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고 베드로가 예수의 수난 길을 만류(挽留)했던 일과도 일맥 상통한다(마 16:22). 오히려 성령께서는 바울의 예루살렘행이 고난의 길임을 재차 확인시켜준 것이며 바울은 그것에 대해 조금의 동요도 없이 성령의 지시하심을(20:22) 충실히 따를 뿐이었다.

성 경: [행21:5]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두로 사역]

⭕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 바울 일행이 이레를 머물고 떠나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밀레도 해변에서 그곳의 성도들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이별할 때에 비해서는 덜 애절하지만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다. 비록 일주일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나님과 성령안에서의 그들의 교제는 매우 강한 사랑과 신앙의 유대를 만들어 냈다. 아내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동행하여 바울을 전송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인데 이것은 두로의 신앙 공동체가 상당히 소규모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구절이다. 또한 이 구절은 사도 시대에 교회와 관련하여 어린이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시된다(Vincent). 한편 '성문 밖'은 구체적으로 배가 정박하고 있는 부두를 가리키는 것같다.

⭕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 이 모습은 밀레도에서의 이별 장면과 동일하다(20:36). 서서 기도해도 무방할 터인데 사람들의 이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진지한 신앙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러한 기도는 그들의 교제가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잘 견디어 낼 수 있도록 그리고 두로의 성도들이 타락한 이방의 도시에서 신앙의 순결을 잘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한 목소리로 간구했을 것이다.

성 경: [행21:6]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두로 사역]

⭕ 우리는 배에...저희는 집으로 - 누가는 이별의 장면을 세세한 부분까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배에'라는 문구의 헬라어 표현에는 정관사 '토'(*)가 첨가되어 있어 이 배가 처음 타고 온 배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배임을 말해준다.

성 경: [행21:7]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돌레마이 - 이 지역은 두로에서 가이사랴 방향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소항구로 구약 시대에는 악고(Acco, 삿 1:31)라는 지명으로 불리어졌었다. '돌레마이'라는 이름은 아마 톨레미 2세(Ptolemy II, B.C. 285-246)를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Bruce). 이 도시는 오늘날 아크레(Acre)로 불리어진다.

⭕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하루를 있다가 - 바울 일행은 돌레마이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성도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4절에서는 '제자들'이라고 표현한데 비하여 여기서는 '형제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친근감(親近感)을 더해준다. 이곳 돌레마이에 복음이 전해진 것 역시 두로와 같은 시기였으리라고 본다(Bruce).

성 경: [행21:8]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가이사랴 - 이 도시는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50-6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로마 치하에서는 유대 지방의 행정 장관이 거주하는 정치적 수도였다. 이 도시는 헤롯에 의해 건설되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를 높이기 위하여 '가이사랴'로 명명되었다(Robertson). 또한 이곳은 거대한 항구 도시로도 유명한데, 바울은 그의 선교 여행 중 이 도시를 세번째로 방문하는 셈이다. 한번은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여행하는 중에 방문했고(9:30) 두번째는 2차전도 여행 말기에 안디옥에서 돌아오는 길에 방문했으며(18:22) 지금이 그 세번째이다. 한편 여기에는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까지 이르는 교통편(交通便)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학자들 간에는 육상과 해상에 대한 견해가 갈리고 있다. 로버트슨(Robertson)같은 학자는 7절의 '수로를 다 행하여'라는 문구를 근거로 하여 해상을 통한 여행은 돌레마이에서 끝났으며 거기서부터 가이사랴까지는 육로로 여행했으리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에 반해 브루스(Bruce), 렌스키(Lenski), 헨헨(Haenchen) 같은 학자들은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까지의 거리가 50-60km에 이르므로 결코 걷기에 가깝지 않으며 더구나 가이사랴까지 가자면 갈멜산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육로로 갔을 가능성이 없고 해상으로 이동했리라는 주장을 편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후자의 주장이 타당한 듯하다.

⭕ 빌립 -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일곱 집사 중 하나', '전도자'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그가 일곱 집사 중의 하나임은 6:1-5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를 또한 '전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재정을 담당하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에게 '전도자'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그와 '사도 빌립'을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Bruce). 이 빌립이 본서에 등장하기로는 스데반 사후 사마리아에서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였다는 기록(8:5-40) 이후 여기가 처음이다. 브루스(Bruce)는 이 기간을 20년으로 잡기도 하는데, 하여튼 빌립은 8:40 이후 이곳 가이사랴에 정착하여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아마 이 곳에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였을 것이다(Haenchen).

성 경: [행21:9]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그에게 딸 넷이...처녀로 예언하는 자 - 빌립은 그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는 은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네 딸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는 축복까지 누렸다. 여기서 '처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교회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은 대개 과부들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딤전 5:9-15) 이례적(異例的)이라 하겠다. 아무튼 예언하는 은사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고전 12:4-27, 주제 강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비교 연구' 참조) 이를 방언의 은사보다 높이 평가했다(고전 14:1-33). 따라서 본문은 빌립의 딸들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중요한 은사를 가지고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녀들의 예언 활동이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편 아시아에 있는 히에폴라리스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Papias)의 말에 의하면, 빌립과 그의 딸들은 몇 년 후에 소아시아의 히에라블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 딸들 가운데 몇은 상당히 늙도록 생존하여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들에 관한 자료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Eusebius).

성 경: [행21:10]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여러 날 있더니...선지자 아가보 - 바울은 빌립의 집에서 상당 기간을 머물고 있는데 이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에서 여행을 급히 서두른 결과 심신이 피로했으며 오순절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육신의 휴식과 아울러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고 고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각오를 새로이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지자 아가보는 과거에 몇몇 선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와 유대에 기근이 들 것을 예언하였었는데 그 예언이 A.D. 46년 글라우디오 때에 성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1:27, 28). 이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아가보와 동일 인물이라는 데에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Robertson, Bruce, Lenski).

⭕ 유대로부터 내려와 - 이 표현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에 있는 당시 상황의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니라 옛날 유다의 관점이서 서술한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당시에는 가이사랴가 행정 구분상 유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내려왔다는 식의 문장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유대로부터'라는 표현의 실제 의미는 '예루살렘으로부터'로 보아야 한다(Haenchen).

성 경: [행21:11]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띠를...수족을 잡아매고 - 여기서 '띠'는 폭이 약간 넓고 길이가 길어 허리에 여러번 둘러감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들고 은실이나 금실로 수놓는 경우도 있었다(삼상 15:27;왕상 11:30). 아가보는 이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는 행위로써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말로써가 아니라 행위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 행위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상으로, 자기의 새 옷을 찢어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예언했던 아히야(왕상 11:29, 30), 벗은 몸과 발로 행하여 애굽인들이 앗수르인들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한 이사야(사 20:2)와 같은 인물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렘 13:1-11;27:2;겔 4:1-3 참조). 아가보의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울의 결박과 투옥을 가리킨다(30, 33절).

⭕ 성령이 말씀하시되 - 바울의 고난을 예언하는 아가보의 예언이 온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말해주는 이 장엄한 표현은, 구약성경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표현에 상응한다(민 14:28;왕하 9:26). 바울에게 닥칠 고난은 유대인들에 의해 도발(挑發)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점에서 예수의 수난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었다(막 10:33;15:1).

성 경: [행21:12]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우리가...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 두로에서와는 달리 이곳 가이사랴에서는 현지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수행했던 누가 일행도 합세하여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었다. 그러나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뜻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의 뜻이었다(4절 주석 참조). 여하튼 여기서는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정도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공동번역에서는 '간곡히 전하였다'로 옮겨 그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바울 주변에 있던 성도들이 그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듣고 그 행로를 만류하려 했던 점에 대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바울의 사역을 방해(妨害)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베드로 또한 예수의 수난에 대해 이와 유사한 행동을 보여준 경우가 있거니와(마 16:22), 지금의 경우도 바울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성 경: [행21:13]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상하게 하느냐 - 헬라어 '쉰드뤼프톤테스'(*)는 '두들겨 깨뜨린다'의 뜻을 갖는데, 이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에 가득찬 눈물의 만류가 마치 바울의 마음을 부수어버릴 정도로 간곡했음을 나타낸다. 이 표현 속에는 성령의 일을 거역하게 하는 것에 대한 책망보다는 그들의 충정어린 애정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

⭕ 결박받을 뿐 아니라...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성도들의 애정어린 만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결의를 더욱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했던 바로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겠다고 한다. 바울이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추측된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Bruce). 그는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교회의 단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였음에 분명하다(롬 15:25-32). 예루살렘에는 유대계 신자들과 이방 신자들 사이에 소원(疏遠)한 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원만한 연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연합의 당위성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며(갈 3:28), 이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바울은 바로 이 연합을 위해 죽음까지도 무릅쓰려고 한 것이다.

성 경: [행21:14]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 헬라어 구문 '메 페이도메누 아우투'(*)는 '설득하다'는 의미를 갖는 '페이도'(*)의 현재 수동태 분사의 문장으로 직역하면 '저가 설득되지 아니하므로'(when he would not be persuaded, KJV)가 된다. 아마 그들은 바울의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많다는 식의 그럴듯한 명분(名分)으로 바울을 설득하여 그의 예루살렘행을 포기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때가 아니라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설득을 뿌리칠 수 있었다.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은 그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에게 닥쳐올 불행을 넘어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본문은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잘못된 충정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신앙의 자세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주는데, 허비(Hervey) 같은 학자는 이 문구가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응용한 것으로 보며, 브루스(Bruce)의 경우는 본문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를 상기시켜 준다고 보기도 한다.

성 경: [행21:15]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행장을 준비하여...올라갈새 - 드디어 바울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큐아사메이노'(*)는 신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희귀한 단어로 '짐을 꾸리다'(Robertson),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성금을 챙기다'(Bengel), '말의 안장을 꾸리다'(Ramsay) 등으로 해석된다. 이 해석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상호 보충적으로 취해질 수 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km이고 그 길을 도보로 가기에는 너무 피곤하다는 것, 그렇게 지친 상태로는 예루살렘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물론이고 특히 의사인 누가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교통 수단은 말을 이용하였을 것이다(Ramsay).

성 경: [행21:16]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가이사랴 사역]

⭕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 '오랜 제자'라는 표현은 나손이 기독교의 초기 공동체 즉 오순절의 120명의 제자 가운데(1:15)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Robertson, Haenchen, Bruce). 이럴 경우 바울은 그와 사전에 친분(親分)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가이사랴의 신도들이 소개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한편 본절에서 '나손을 데리고 가니'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나손의 집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로 번역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공동번역, Bengel, Bruce, Meyer). 전자의 개역 성경 같은 번역을 주장하는 학자는 칼빈(Calvin), 베자(Beza), 빈센트(Vincent), 로버트슨(Robertson) 등으로 이 중 로버트슨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나손의 집에서 묵어가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갔다고 본다. 이럴 경우 나손의 집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중간에 묵어가기 위해 사람을 일부러 데리고 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간에 쉬어가야 할 경우 여인숙 같은 곳에서 묵어가면 되지 구태여 사람을 데려갈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후자의 견해는 나손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꺼이 영접해 줄 것같지 않은 상황에서 거처(居處)를 제공해 줄 사람으로 나손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한다(Bruce). 후자의 견해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성 경: [행21:17]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형제들이...기꺼이 영접하거늘 - 가이사랴에서 함께 한 성도들을 포함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들을 기꺼이 환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본문의 '형제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형제들'을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시켜서 바울이 예루살렘 공동체 전체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견해는(Overbeck)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18, 22절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까지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예루살렘 교회의 비공식적인 접대였다(Lake). 2)바울의 동료들과 친구들로 이루어진 사적인 모임을 말하고 있다(Jacquire). 3)예루살렘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의 성도들이 베푼 환대였다(Beyer). 4)이들은 헬라적 기독교인들이었다(Knopf). 2)와 3)의 견해가 비교적 무난하다.

성 경: [행21:18]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바울이 우리와 함께 - 여기서는 '우리'와 바울이 구분되어 표현된다. 이는 아마 바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인 듯하다.

⭕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하고 할 수 있는 야고보를 방문하였다(12:17).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나 요한, 그밖의 다른 사도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그들이 전도나 다른 일을 위해서 출타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ruce, Lenski, Zahn).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혜롭게 잘 지도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일반 유대인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Bruce).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일반 유대인들은 그에게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 장로들 - 이 표현에 대해서도 학자들 간에 해석이 다양하다. 1)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장로들이 다 모인 것이라고 본다(Lenski).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단에 대해, 브루스(Bruce)는 야고보가 그의 행정적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단의 동료 장로들과 함께 일했는데, 20절에서 나타나는 바 교인의 수가 수만 명(공동 번역에서는 '대단히 많습니다'로 표현되어 있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예루살렘에는 야고보를 의장으로 하고 70인의 장로로 구성된 일종의 나사렛 산헤드린(Nazarene Sanhedrin)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2)야고보는 수석 장로이며 다른 장로들은 바울을 환영하는 자리에 초청된 야고보의 손님들이라고 본다(Robertson). 3)야고보를 제외한 사람들은 단지 입회인에 불과하다고 본다(Beg, Zahn). 자료들이 불충분하여 정확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어려우며 단지 잠정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아직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상당히 있었다는 점을(22절) 감안할 때 1)의 견해보다는 2)나 3)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행21:19]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봉사로 말미암아...고하니 - '봉사'(*, 디아코니아)는 '종', '일꾼'을 뜻하는 '디아코노스'(*)에서 파생된 말로 '사명'(20:24), 또는 '직분'(롬 11:13)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람들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그의 역할 가운데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 전달도 포함되었을 것인데, 본문에서 그 사항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성금 전달은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언급할 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Bauernfeind). 성금을 전달한 것에 대한 효과가 생각한 것보다 미미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후에 바울을 위하여 유대인들에게나 로마 당국에 대해 한마디의 변호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오랫동안 투옥되었을 때 그에게 동정을 표시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제시한다(Furneaux).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한편 바울은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사역한 일들을 세세히 증언하고 있는데, 그는 그 모든 일들의 주체(主體)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겸손한 신앙의 자세를 나타낸다.

성 경: [행21:20]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이 문구는 야고보 및 장로들이 바울의 증언을 매우 호의적으로 들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자기의 봉사 배후에는 하나님이 주체로 있었다고 증언했으므로(19절) 이들이 이야기를 경청한 후 바울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 누가는 야고보의 무리들이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기쁨에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길들이 많음을 주지시키고 있다(22절). 그런데 '수만 명'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많은'의 뜻을 가진 '포사이'(*)와 '일만', 또는 '허다한 것', '무수한 것'을 뜻하는 '뮈리아데스'(*)가 합하여진 것으로 학자들 간에는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해하기도 하고(Lenski), 불특정한 다수를 과장적으로 서술하는 표현 양식이라고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Haenchen, Robertson). 아무튼 야고보의 이야기는 교인들의 수가 많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이들은 소위 유대적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을 비롯한 각종 규례들을 소중히 여겨 지킨다는 것이다. 이들은 바울이 깨달은 바,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다음 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율법에 매이지 않는 바울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했다.

성 경: [행21:21]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모세를 배반하고...지키지 말라 - 바울을 비방(誹謗)하는 소문이 어떻게 떠돌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이러한 소문의 진원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유대교적 전통에 철저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모세를 배반한다는 것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무시한다는 말이고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배반을 뜻한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을 배반했다는 것은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이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한 바 없으며 오히려 그는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보았고(롬 7:12)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도 인정하였다(갈 3:24). 다만 바울은 사람들이 율법 자체에 얽매여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들을 배격(排擊)하였던 것이다(롬 10:3).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형식주의 또는 완고한 유대주의에 매여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엡 2:15). 또한 바울이 할례를 금하였다는 것도 전혀 터무니 없는 허위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할례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나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했으며(고전 7:18, 19;갈 5:6), 디모데에는 할례를 받도록 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들은 바대로 오해를 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며 이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성 경: [행21:22]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어찌할꼬 - 야고보 및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신변에 대한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실은 이제 곧 다른 교인들에게 알려질 것이며 바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자들이 거센 공격조로 나올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

성 경: [행21:23]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서원한 네 사람 - 서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케'(*)는 '기도하다', '원하다'의 의미를 갖는 '유코마이'(*)에서 온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하기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소원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서약이기 때문에 매우 엄숙한 것이다. 서원에 관한 자료는 구약성경에 많이 있으나, 그 기원은 알 수 없다. 서원은 주로 나실인의 서원과 관계되는데, 부모에 의한 서원이나(삼상 1:11), 본인의 자유의사에 의한 서원이 있으며 서원의 기간은 영구적인 것이 있고(삿 13:7;삼상 1:11),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것이 있다(민 6:8, 12). 서원자는 서원한 것에 대해 반드시 신속하게 행해야 하며(신 23:23;시 15:4;전 5:4, 5), 남용하거나 경솔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잠 20:25;마 15:4-6). 또한 서원한 기간 동안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으로는 독주를 마시지 말고 머리를 깎지 말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네 명의 서원은 본인의 자유 의사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서원이라 여겨진다(Robertson). 서원에 관한 보다 자세한내용은 민 30:1-8 주제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행21:24]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결례를 행하고...머리를 깎게 하라 - 결례를 행하라는 것은 서원한 자들처럼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서원 기간동안 지켜야 할 규범(23절 주석 참조)을 지키라는 의미이며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은, 결례 기간이 끝나는 날에 머리를 깎고 희생 예물을 드리는 때에 드는 경비(經費)를 부담하라는 말로 이해된다. 여기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로는,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일년 된 어린 암양 하나, 화목제로 수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 과자 등이었으므로(민 6:1-21) 그 비용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고 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서원자를 위하여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것은 매우 경건한 행위로 여겨졌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아그립바 I세가 가난한 나실인을 위해 이런 비용을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Jos, Ant., XIX, 6:1). 바울에게 이런 일을 하라는 것은 그의 재력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환심을 사라는 말이 아니라 그가 율법을 부정하지 않고 지키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어 그들의 오해와 노여움을 풀기 위함이었다.

성 경: [행21:25]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우상의 제물과...음행을 피할 것을 - 이 내용은 일찍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지침으로 결의되었던 것인데(15:20),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하여 상기(想起)시키고 있다. 본문의 내용이 결의될 때 바울도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5:1-20) 그 내용이 여기서 문자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다소 어색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문의 내용이 주로 바울의 동료들에게 전달되기 위한 것으로 보거나 혹은 단지 독자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삽입된 표현이라 간주하기도 한다(H. Marshall).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정이 이방인 선교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바울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라고 볼 때 이번에는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 신자들을 위하여 바울이 양보해 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성 경: [행21:26]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대로 행하였다. 본문의 상황은 바울 일행이 서원의 절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친 후 머리를 깎아 제단 불에 던져 태운 다음(민 6:13-18) 제사장에게 서원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제기되었다. 1)바울의 행동은 율법주의자들과의 타협이며 그 결과는 실패였다고 본다(Furneaux, Calvin). 2)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에 순종한 것 뿐이라고 본다(Bengel, Wesley). 3)바울은 그의 설교 전략 즉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에게는, 자신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지만,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같이 된다는 원칙을 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본다(고전 9:20, Meyer, Weiss, Knowling). 바울은 일찍이 예루살렘에 올때 고난이 있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4, 10-14절;20:23),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13절). 그런 바울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율법과 타협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圖謀)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3)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성 경: [행21:27]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그 이레가 거의 차매 - 바울과 네 명의 서원자가 7일 간의 결례를 거의 마감할 무렵을 가리킨다.

⭕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 - 이들은 에베소에서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왔던 것같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몰랐을 터인데 이들은 보자마자 바울을 즉시 알아보았고(바울은 3년간 에베소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더구나 이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9절).

⭕ 무리를 충동하여 - '충동하다'의 헬라어 '슁케오'(*)는 일찍이 에베소에서 이방 종교인들이 일으킨 소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말로(19:23-41), 바울을 해하려는 이 무리들의 포악함을 시사한다.

⭕ 성전 - 이곳은 성전 영내의 '이스라엘의 뜰'(the Court of Israel)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유대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성 경: [행21:27]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그 이레가 거의 차매 - 바울과 네 명의 서원자가 7일 간의 결례를 거의 마감할 무렵을 가리킨다.

⭕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 - 이들은 에베소에서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왔던 것같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몰랐을 터인데 이들은 보자마자 바울을 즉시 알아보았고(바울은 3년간 에베소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더구나 이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9절).

⭕ 무리를 충도하여 - '충동하다'의 헬라어 '슁케오'(*)는 일찍이 에베소에서 이방 종교인들이 일으킨 소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말로(19:23-41), 바울을 해하려는 이 무리들의 포악함을 시사한다.

⭕ 성전 - 이곳은 성전 영내의 '이스라엘의 뜰'(the Court of Israel)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유대인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성 경: [행21:28]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 - 에베소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르며 바울을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그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신성한 율법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인 성전을 거스리는 내용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3요소에 대한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분노를 촉발시키려 하였다.

⭕ 거룩한 곳을 더럽게 - '거룩한 곳'은 성전을 가리키고, '더럽게 하였다'(*, 케코이노켄)는 '평범하게 만들다'의 뜻을 갖고 있는 '코이노'(*)의 현재완료형으로서 이방인을 성전의 '이스라엘의 뜰'에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거룩한 성전을 평범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더럽혀진 효과가 이미 시작되어 지속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성전에는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바깥 뜰'(이방인의 뜰)이 구분되어 있어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뜰'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것은 로마 당국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종교적 금기(禁忌)였다. 만약 이방인이 이 금기를 어기고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갈 경우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양쪽 뜰을 가르는 울타리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는데, 울타리를 넘어 침입해 들어가는 자는 사형에 처하게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Bruce). 이런 절대 금기의 규율을 바울이 어기게 하였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분노를 분출시키기에 충분했다.

성 경: [행21:29]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전에 - 이 표현이 지시하는 시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1)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 즉 에베소에 있을 때를 가리킨다(Lenski). 2)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Bruce).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 드로비모...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 바울의 적대자들이 선동하기 위해 외친 소리가 사실의 목격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 설명되고 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바울과 드로비모가 예루살렘 시내에서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지레 짐작하기를 드로비모가 그를 따라 성전에 들어갔다고 본 것이다. 바울에 대한 적대감(敵對感) 더 나아가 바울을 해치려는 음모가 없이 이러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것은 순간적이고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그를 죽임으로써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명을 중지시켜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감과 선민 의식을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계획된 행동으로 짐작된다. 사도로서 바울의 고난은 터무니없는 거짓 증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수난을 뒤따르는 것이었다(막 14:55-59).

성 경: [행21:30]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온 성이 소동하여 - 드디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고 적대자들의 의도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소동하여'(*, 에키네데)는 폭력적인 행동과 격앙된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는 동사 '키네오'(*)의 제 1부정과거형으로서 24:5에서는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곧 닫히더라 - 사태는 매우 과격하고도 비이성적인 방향으로 돌변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 단 한마디의 자기 변호도 허용하지 않고 성전 밖으로 끌어내었다. 여기서 '끌고'(*, 헤일콘)는 '헬코'(*)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바울을 사정없이 끌고 나가는 행위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문을 닫은 것은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문을 닫은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완료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분노한 군중들이 성전으로 밀려 들어와 그곳에서 바울을 살해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살해 사건이 있게 되면 이는 곧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들로서는 그런 일을 피하려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이 제단 뿔을 잡아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제단 뿔은 제단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뿔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살륙(殺戮)이 행해질 수 없다고 믿어져 왔다(왕상 1:50).

성 경: [행21:31]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죽이려 할 때에 - 바울을 끌어낸 무리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몰고가고 있는 장면이다. 최소한의 형식적 재판 절차도 없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 것은 그 무리들이 종교적 자존심의 손상에 대한 반발과 군중 심리적 흥분으로 극도로 포악해져 있음을 말해준다. 군대의 천부장 - 바울이 연루되어 성전에서 발생한 소요는 민첩한 정보망을 통해 그 지역의 치안 책임자인 천부장에게 즉각 전달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오순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폭동이나 소요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주시하던 터라 그 소식은 매우 신속하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천부장은 보통 1000여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로마군의 장교를 가리키며 이 부대의 구성은 보병 760명과 마병 240명으로 되어 있었다. 23:26에 의하면 이 천부장은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였다.

성 경: [행21:32]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군사들과 백부장들 - 이 군대의 군영(軍營)은 성전 북서쪽의 언덕 위에 세워진 안토니아 성에 있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즉시 사건 현장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백부장이 대략 100명의 군대를 지휘하였고, '백부장들'로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최소한 200명 이상의 군대가 출동한 것이 된다(본서 서론 '로마의 행정 및 군대 제도' 참조).

⭕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 바울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던 위기의 상황은 천부장과 그의 부하들의 출동으로 일단 모면되었다. 유대인들이 로마 군대가 출동했을때 바울을 죽이려던 행위를 중단하였던 것은 그들의 행위가 불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의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산헤드린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후에도 빌라도에게 다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던 예수의 경우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마 26:66;27:1, 2).

성 경: [행21:33]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 이것은 마치 한 피의자의 양팔에다 두 형사가 자기의 팔목과 피의자의 팔목에 수갑을 채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당시에 군인들은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 체포용 쇠사슬을 가지고 다녔고 죄수의 도주를 막기 위하여 자기와 함께 묶었다. 천부장이 폭력을 당하고 있던 바울을 묶으라고 명한 것은 일단 그가 죄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12:6), 군중들로부터 바울을 분리시킨 것은 그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법의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11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성 경: [행21:34]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무리 가운데서...부르짖거늘 -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하게 한 후 무리들에게 바울의 신상과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33절). 그런데 무리들이 매우 소란스러운 가운데 여러가지 말을 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그 사건의 실상을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부르짖거늘'(*, 에페포눈)이라는 단어는 예수를 재판할 때에 흥분한 군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큰 고함소리로 미친듯이 부르짖는 것'을 뜻한다(눅 23:21).

⭕ 영문 안으로 - 광적으로 흥분하여 외쳐대는 무리들의 소란은 사실을 알고자 하는 천부장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그리하여 천부장은 무리들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에 심리(審理)를 하기 위하여 바울을 일단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가도록 조치를 취했다. 여기서 영문은 군대의 주둔지인 안토니아 영문을 가리킨다.

성 경: [행21:35]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층대...들려가니 - 이 층대는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에서 안토니아 영안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가리킨다. 이 계단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무리들의 난폭함이 극에 달하여 로마군인들이 바울을 손으로 높이 들어올리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 어떤 학자는 바울이 '들려갔던' 이유를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쇠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보지만(E. Haenchen) 근거없는 추측일 따름이다.

성 경: [행21:36]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 무리들의 포행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들은 연행되어 가는 바울을 향하여 '그 놈을 죽여라'(공동 번역)고 외치며 따라갔다. 한편 '따라감'의 헬라어 '에콜루데이'(*)는 '아콜루데오' (*)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되어 있어 무리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바울을 죽이라고 외쳐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여기선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고(22:22;28:19),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의 수난 때에도 그러했다(눅 23:18;요 19:15).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조상들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였었다(눅 11:47, 48). 실로 이 백성은 역사를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거역(拒逆)하여 '그를 죽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행21:37]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 로마 병사가 바울을 연행하여 영문(34절)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때 바울은 헬라어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며,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 할 줄 아는 것을 의외의 일로 생각하여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당시에 헬라어는 '코이네'(*)로 로마 제국권 내에서는 공통 언어였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문화인에 국한되었다.

성 경: [행21:38]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난을 일으켜...애굽인 - 바울이 헬라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천부장은 한편 놀라면서 다른 한편, 그렇다면 바울이 과거에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였다. 천부장이 말하는 이 난(亂)은 역사가 요세푸스가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데, 그의 기록에 의하면 A.D. 54년경 한 애굽인 거짓 선지자에 의해 예루살렘에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위대한 선지자로 자처한 이 애굽인은 추종자 3만여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와 광야와 감람산 등에 웅거하면서 예루살렘 성벽 파괴 및 로마군의 멸망을 예언하며 때가 되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자였다. 본문에 나오는 사천 명은 그 가운데 자객으로 선별된 무리들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음모는, 로마 총독 벧릭스(Felix, A.D. 52-58)의 군대에 의해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고 이 애굽인 거짓 선지자는 감쪽같이 도망감으로 해서 좌절되었다. 그러니까 천부장의 질문은 바울이 바로 이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 경: [행21:39]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길리기아 다소 성 - 바울은 자신이 천부장이 말한 애굽인이 아니라 혈통은 유대인이며 출생지는 길리기아의 다소 성이라는 사실을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拂拭)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출신지인 길리기아 다소 성이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다소는 헬레니즘의 중심지로 훌륭한 대학이 있는 문화적 수준이 높은 도시였다. 바울이 다소 출신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는 제롬(Zerome)의 기록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바울의 부모들은 본래 갈릴리의 기스칼라(Gischala) 출신이었다. 그런데 주전 1세기 경에 로마군에 의해 북부 팔레스틴이 침탈을 당한 후에 바울의 부모들이 길리기아 다소로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 된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여 천부장의 의혹을 해소한 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고 있다. 그는 사실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것이다(13절).

성 경: [행21:40]

주제1: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주제2: [체포된 바울]

⭕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히브리 방언으로 - 백성들에게 말할수 있게 해달라는 바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바울은 자신과 복음에 대해 변증(辨證)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영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계단 맨 윗부분에 쇠사슬로 그의 양팔을 결박한 채 함께 서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흥분한 무리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수백명의 로마 병사들이 서 있고 그 뒤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흥분된 감정을 큰소리로 표출하고 있다. 이때 바울은 그의 양손을 들어올려 백성들을 조용히 시킨 다음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히브리 방언'은 구약성경 시대의 히브리어와는 다른 것로 포로기 이후 아람어화한 언어를 가리킨다. 당시에는 이 아람어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상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에 바울이 이 언어로 말한 것은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함이었다.

성 경: [행22:1]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론]

⭕ 부형들아 - '형제들과 선배 여러분'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며(공동 번역),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연설할 때 사용한 호칭과 동일하다(7:2). 또한 이 호칭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저 의인'(14절) 등과 함께 유대적 풍취를 강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자신과 유대인 무리들과의 동질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무작정 이스라엘의 전통을 훼방하는 자가 아님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

⭕ 변명 - 헬라어 '아폴로기아스'(*)는 '...로서', '...을 가지고'의 의미인 전치사 '아포'(*)와 '말'(word)을 뜻하는 '로기아'(*) 의 합성어이며 현대 영어의 '변명'(apoiogy)은 이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성 경: [행22:2]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론]

⭕ 히브리 방언...종용(從容)한지라 - 바울은 무리들과의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시킬 수 있는 아람어로 말하였는데 그것은 의외로 효과를 거두어 무리들로 하여금 조용히 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마 무리들은 바울이 배교자(背敎者)이자 민족을 버린 자로 여겨 분노했을 터인데, 바울이 아람어로 말하자 너무도 뜻밖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누그러져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사실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 대다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잘 몰랐다. 심지어 1세기의 가장 뛰어난 유대인 학자인 필로(Philo of Alexandria) 조차도 , 모세 오경에 대해 방대한 주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오경을 해독하지 못했다한다(I. H. Marshall).

성 경: [행22:3]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론]

⭕ 가말리엘의 문하에서...열심하는 자라 - 가말리엘은 당시의 유명한 교법사 즉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유대인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5:34). 로버트슨(Robertson)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유대인들로부터 '우리의 랍비'(*, 랍반)라는 최고의 칭호로 불리어지는 일곱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바울이 이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웠다는 것은 그 누구에 못지않게 율법에 정통한 식견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바울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 자기를 소개함에 있어서 '태생'(길리기아다소, 21:39), '성장'(이 성에서) 그리고 '교육'(가말리엘 문하)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고대 세계의 전통적인 자기 소개법에 해당한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고 율법에 정통하며, 하나님께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심을 가진 자라는 것을 강조했다(고후 11:22;갈 1:14;빌 3:5).

성 경: [행22:4]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론]

⭕ 이 도를 핍박 - '이 도'의 헬라어 '헤호도스'(*)는 문자적으로 '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 도'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이 도를 핍박하는 자'로 소개하는 것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26:10;고전 15:9;갈 1:13, 23;빌 3:6;딤전 1:13). 바울은, 무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이었음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처넣은 사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것(7:54-60;8:1-3) 외에도 바울이 교회에 대해 핍박한 사례(事例)들이 더 많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올이 후에 자신을 가리켜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딤전 1:13), 또는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말한 데에는 이러한 사실이 적잖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성 경: [행22:5]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론]

⭕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 - 바울은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에 최고의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당시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인정받았던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던 바(9:2), 바울은 산헤드린의 대표인 대제사장이 서명한 위임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자 했었다. 한편 9:2에서는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는 대제사장 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들까지도 언급된다. 이것은 9:2에서 공문을 받은 것이 대제사장 개인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전체 산헤드린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가리킨다. 다만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의장 즉 대표로서 서명을 했을 것이다. 한편 본문 당시의 대제사장은 아나니아였지만(23:2)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당시에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의 자리에 있었다.

⭕ 다메섹 행제들 - 다메섹은 동쪽으로 안티레바논 산맥과 남서쪽으로 헤르몬 산, 남쪽으로 아스왓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대 수리아의 수도를 가리킨다. 이 도시는 바르발 강을 끌어들여 관개 용수(灌漑用水)로 사용한 과수원과 정원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형제들'은 다메섹에 있는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 거기 있는 자들 - 이들은 본래 다메섹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스데반의 순교 이후 각지로 흩어진 예루살렘의 성도들 가운데 그곳으로 피난했던 사람들로 짐작된다.

성 경: [행22:6]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오정쯤 되어...큰 빛이 -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묘사된다. 9:3과 거의 비슷한 묘사가 전개되고 있는데, 그 때의 시각이 오정쯤 되었다는 것과 홀연히 바울을 둘러 비추인 하늘의 빛이 매우 강렬했다는 사실은 여기에만 나타나는 상세한 묘사이다. 이 빛은 정오의 태양 광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바울은 사흘 동안 눈이 먼 상태로 지내야 했다(9:9). 그런데 이 빛은 바울에게만 집중적으로 비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함께 있던 사람들은 별 이상이 없었으나 바울만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11절).

성 경: [행22:7]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땅에 엎드러져 - 본절은 9:4와 거의 동일한 표현이다. 공동 번역에서는 '땅에 거꾸러져'로 옮겨졌는데, 이것은 바울에게 비추인 하늘의 빛이 단순히 밝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어 그를 무력화시켰음을 시사한다.

⭕ 사울아 사울아 -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사울의 헬라식 이름이다. 본문에 대한 주해는 9: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22:8]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 - 본문 역시 9:5와 동일한 표현이다. 다만 여기서는 예수라는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첨가되어 있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바로 그 나사렛 출신의 예수임을 말한다. 여기서는 사울이 핍박했던 그리스도인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동일시(同一視)되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일찍이 주님께서 성도들과 항상 함께 있었다고 약속하셨던 바의 성취이다(마 28:20).

성 경: [행22:9]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빛은 보면서도...듣지 못하더라 - 9:17에서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진술 사이에는 표현상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사실 일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는 경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주위 사람들은 빛을 보기는 하였으되 그것을 영광스러운 예수의계시로 보지 못했으며, 또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직 바울만이 그 순간에 있었던 사건의 경험자이자 완전한 참여자였다. 바울은 그 순간 하늘에서 들려오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고 그리하여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하려고 했던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다. 결국 바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10절).

성 경: [행22:10]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바울]

⭕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 9:6에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만이 주어지고 있는데여기에서는 바울의 질문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회심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이 질문에는 바울이 자신의 행한 일들과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오순절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마음에 가책을 받은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뉘우친 사실과 유사하다(2:37).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데 이는 진정한 회개 또는 회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 다메섹으로...누가 이르리라 - 이는 바울의 회심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삶을 감찰(鑑察)하고 있었으며 이제 그 결정적인 때가 되자 그를 부르신 것이다. 바울에게는 해야 할일이 정해져 있었고 그 일을 그에게 이를 자도 마련되어 있었다.

성 경: [행22:11]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사람들의 손에 끌려 - 바울에게 집중적으로 내려쪼인 강렬한 빛은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쬐인 팔레스틴의 강한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한 햇빛을 쳐다보았다 해도 몇 초 또는 몇 분 안에 곧 정상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그마치 사흘동안이나 장님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그것도 아나니아의 안수 때문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다(9:8). 이러한 바울의 회심 체험은 아무런 근거 없는 단순한 환상이나 심리적 착각이 아니었다. 본문에서 실제로 그가 눈이 멀게 된 사실이 여러 증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한편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 '우크 에네블레폰'(*)은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어 바울의 눈먼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행22:12]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경건한...아나니아 - 9:10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 소개되고 환상 중에 바울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는 것으로 되어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잘 지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어서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경건한 자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유대인이 그를 칭찬했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바울이 이처럼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흠없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하여 관련시키는 것은 자신의 회심이 경건한 유대인조차 인정하였던 것이니 만큼 결코 유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변증하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성 경: [행22:13]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형제 사울아...쳐다보았노라 - 바울이 다시 눈을 떠 보게 된 과정이 9:17, 18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본문의 상황은 시간과 분위기가 매우 촉박하였으므로 중요한 부분만 자세히 설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보라'(*, 아나블려손')는 명령은 '아나블레포'(*)의 부정과거 명령형인데 더 분명하게는 '다시 시력을 회복하라'이다. '즉시'라는 말은 아나니아의 명령과 바울의 시력 회복 사이의 동시성(同時性)을 강조해 준다. "그를 쳐다보았노라"는 말은 '나는 시력을 회복하여 그를 쳐다보았다'(I received my sight and saw him, RSV)는 의미이다. 바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그의 거듭남을 의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됨을 뜻한다.

성 경: [행22:14]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청중들에게 설명함에 있어서 가능하면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용어 선정을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하고 있다. 처음 그는 의도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고(2절;21:40), 자신이 온전한 유대인이자 율법을 잘 아는 자임을 말했으며(3절), 아나니아를 설명할 때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역시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지금 바울 앞에 선 유대인들이 열심을 다해 섬기노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 택하여...알게 하시고...보게 하시고...듣게 하셨으니 - '택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케이리사토'(*)는 '미리 손으로 잡다'란 뜻으로 바울의 소명이 전적인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세 가지를 행하셨다. 첫째는 '당신 뜻'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신앙을 갖게 될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였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를 수정해야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받들어야 했다. 둘째는 '의인' 즉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하셨다. '저 의인'은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의인이고 메시야이셨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것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실한 신앙을 갖게 만든 체험인 동시에 그의 사도직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고전 9:1;15:8)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셨다(7, 8절). 이 세 가지는 사도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히 기억되어야 할 사항이다.

성 경: [행22:15]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모든 사람 앞에서...증인이 되리라 -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지니는 증거의 포괄성과 이방인에 대한 그의 선교사명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Lenski), 9: 15와 26:17에 비추어 볼 때 이 견해는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바울이 증거해야했던 내용은 '보고 들은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본 바를 충실히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잘 알고 있었고 충실히 이행했다(4:20).

성 경: [행22:16]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왜 주저하느뇨 - 이 말씀은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 망설이는 바울을 책망하는 뜻이라기 보다는 어서 속히 은혜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말씀으로 이해됨이 더 적절하다.

⭕ 주의 이름을 불러...죄를 씻으라 - 2:38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주의 이름과 세례와 죄 씻음이 연결되어 언급된다. 이것은 세례 의식이 죄 씻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세례 그 자체가 죄 씻음이라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비로소 죄 씻음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예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며, 죄사함을 상징한다(19장 주제 강해, '물 세례 연구' 참조).

성 경: [행22:17]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 이 때를 바울이 회심한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때, 즉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후 3년간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다음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9:2;갈 1:17-19)라고 보는 견해와(Bruce) 두번째 방문(11:30)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Ramsay) 전자가 유력하다.

⭕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 여기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바울이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 계시의 진정성(眞正性)에 대해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행22:18]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 바울에게 내려진 계시는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9:29에 의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과의 견해 차이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증거를 듣지 않은 극단적인 한 예일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행22:19]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때리고 - 회심을 체험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일이 하나님을 훼방한 자들을 징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일들(8:3)을 숨기려 하지 않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에서 그의 진정한 거듭남을 볼 수 있다.

성 경: [행22:20]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 바울이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일이었을 것이다(7:57-60). 바울은 자신이 직접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였고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의 옷을 지켰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직접 죽이는 일 이상의 책임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바울은 스데반을 재평가(再評價)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 '주의 증인'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증인'(*, 마르튀로스)은 계 2:13;17:6에서 처럼 '순교자'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데(Robertson, Haenchen), 실제로 흠정역에서는 '순교자'(martyr)로 번역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일을 다시 회상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어떤 학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ruce, Lenski). 그러나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할 때 감히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과분한 일임을 고백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성 경: [행22:21]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 바울의 이야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19, 20절), 주님은 재차 그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사역을 맡기기 위한 것임이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는 본 명령이,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가 그의 소명임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다.

성 경: [행22:22]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이 말하는 것까지...살려 둘 자가 아니라 - 바울의 조심스러운 연설을 잠잠히 듣던 무리들은 바울의 이방 선교 소명(召命)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이 다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다시금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21:36). 오히려 '살려둘 자가 아니라'는 첨가어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배타적이며 완고한 선민 의식과 이방인에 대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전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성 경: [행22:23]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떠들며...던지고...날리니 - 연속되는 세개의 현재 분사형(*, 크라우가존톤, *, 립툰톤, *, 발론톤)은 격렬한 분노와 흥분으로 인하여 종잡을 수 없이 설치고 날뛰는 난폭한 군중들의 모습을 매우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위에 언급된 세 가지의 표현은 극한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으며 대개 비통, 울분, 애통함을 표현하는 행위로 묘사된다(욥 2:12;삼하 16:13;계 18:19). 혹자는 본문에 묘사된 군중들의 상태가 바울을 돌로 쳐죽일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Preuschen), 지금의 상황은 로마 병사들이 지켜 서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고 덤벼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다만 즉각적인 본노의 표현이라고 할 수있다.

성 경: [행22:24]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 바울이 유대인 청중들에게 말할 때 아람어로 말했으므로(21:40), 천부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군중들의 흥분으로 보아 바울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채찍은 가죽 끈에다 쇠조각과 뼈를 매단 것이며 이것으로 심하게 맞을 경우 불구자가 되거나 죽기까지도 하였다. 이 채찍질은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나 노예를 심문할 때 사용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자유인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채찍질을 가하여 심문하였다고 한다.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전도 활동 중에 매를 맞는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태장(笞杖)을 세 번 당했고 한 번은 돌로 맞았다고 한다(고후 11:24, 25).

성 경: [행22:25]

주제1: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 당시에는 혐의자에게 채찍질을 가하기 위해 기둥이나 말뚝에 채짹질하기 좋은 위치와 자세로 묶었다. 이때 채찍질의 표적은 대개 등이었다.

⭕ 로마 사람 된 자 -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시민의 권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 로마 사람들은 발레리안 법(Lex Valeria)과 포르시안 법(Lex Porcia)에 의해 보호를 받았는데,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채찍질은 금지되어 있었다. 만일 이 법을 어기고 함부로 채찍질을 가할 때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뿐만아니라 쥴리안 법(Lex Julia)은 로마 시민들이 로마 법정에 호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아무런 혐의도 없고 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부당한 채찍질을 가하려 한 데 대해 항의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성 경: [행22:26]

주제1: [유대인들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백부장이...천부장에게 전하여 -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들은 백부장은 매우 당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고한 로마 시민을 결박하여 채찍질을 가한 것은 명백한 범법(犯法) 행위였고 그것에 대한 처벌이 어떤 것인지는 백부장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행22:27]

주제1: [유대인들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네가 로마 사람이냐...그러하다 - 백부장의 보고를 들은 천부장은 상당히 당황한 듯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우라면 피의자인 바울을 자기에게 불러 사실 여부를 묻는 것이 상례일텐데 지금은 그가 직접 바울에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네가 로마 사람이냐"(*, 쉬 로마이오스 에이)에서 '네가'(*, 쉬)의 위치가 강조적인 자리에 있는데 이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 천부장의 당황한 모습을 반영한다. 이에 비해 바울의 대답은 담담하고도 단호하다. 그는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애써 증명하려 하거나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단지 간단하게 그러하다고만 대답한다. 천부장은 바울의 단호한 대답에 대해 더이상 의심을 갖지도 못하였다. 그것은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데서 드러난다. 한편 당사의 로마 시민들은 '토가'(toga)라는 긴 겉옷을 걸침으로써 로마 시민임을 나타냈다. 그러나 토가는 착용이 불편했기 때문에 국가적 행사등이 있을 때 외에는 잘 착용하지 않았다. 만약 바울이 이 토가를 입고 있었다면 로마 군대에 의해 연행되지도 않았겠으나 그는 앞의 이유외에도 민족적 배타성이 강한 예루살렘이었으므로 더더욱 그 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행22:28]

주제1: [유대인들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돈을 많이 들여...시민권을 얻었노라 - 당시에 로마 시민권은 로마인이 아니고서는 몇몇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매우 중요한 자격이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은 정부의 고위층이나 로마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했던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졌다. 그런 만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상당한 명예와 권리를 누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민권이 뇌물에 의해 주어지기도 했고 로마 황제들이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시민권을 공개적으로 팔기도 했다. 특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때에는 그의 아내까지도 이 시민권을 팔아 치부(致富) 하였다고 한다(Dio Cassius, History LX). 이 천부장의 씨족명이 글라우디오(Claudius)인 것을 감안할 때(23:26) 황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시민권을 산 것으로 보인다(Bruce, Longenecker). 이렇게 말하는 천부장의 생각에는 자기는 많은 돈을 들여 시민권을 샀는데 전혀 돈이 많아 보이지 않는 초라한 바울의 외양을 볼 때 어떻게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 의아하다는 뜻이 있는 듯하다.

⭕ 나면서부터로라 - 이 말은 바울의 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문이 언제, 어떻게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대체로 그 가능한 방법은 다음 세 가지로 추측된다. (1) B.C.171년경 다소가 헬라의 시(市)로 편입될 때 그 도시의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으로 인정되었는데 바울의 선조도 그 엘리트들 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2) 바울의 선조 중 누군가가 로마의 행정관이나 장군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여 그 대가로 시민권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3) 바울의 선조가 돈을 지불하고 취득하였을 것이다.

성 경: [행22:29]

주제1: [유대인들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천부장도...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를 심문하려던 자들은 물론 심문을 명령했던 최고 책임자 천부장도 두려움에 빠졌다. 왜냐하면 그는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로마 시민을 결박하거나 매질을 가하지 못한다는 로마 법을(25절 주석 참조) 어겼기 때문이다. 천부장은 뒤에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허위 보고서를 총독에게 보냈다(23:26,27)

성 경: [행22:30]

주제1: [유대인들에게 변증하는 바울]

주제2: [로마 시민권]

⭕ 결박을 풀고...온 공회를 모으고 - 바울은 로마인이었고 로마법에 의하면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심문할 수 있었으므로 고소자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함부로 바울을 심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원인 규명을 해야 했고 또 그 문제가 종교적인 것이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한 것이다. 이것은 천부장이 바울 사건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흥분된 군중에 의한 여론 재판을 피하여 그래도 유대 민족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사실을 규명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상 산헤드린은 바울을 적대하고 그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무리들이 가득한 반(反) 기독교 집단이었고 거기에서의 심리(審理) 결과가 바울에게 불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지만 천부장이 그것까지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바울이 산헤드린에 서게됨으로써 사건은 또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23 장).

성 경: [행23:1]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공회를 주목하여 - 공회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바울에게 변론의 기회를 준 것인지 아니면 먼저 공의회회원들로부터 바울에 대한 비난과 고소가 있은 다음 바울에게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본절에서의 바울의 변론 직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는 것과 그것에 대하여 바울이 즉각 강경(强勁)하게 맞서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변론에 앞서 그에 대한 여러가지고소가(21:28)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마 바울에게로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누가가 유대인들의 고소장면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Howard Marshall). 바울에 대한 고소는 그가 율법과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21:28). 여하튼 바울은 공의회의 증언대에 섰고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 앞에조금도 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변론에 임하고 있다. 이 사실은 '주목하여'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테니사스'(*)는 '노려보며'의 의미를 지니며 담대하게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바울의 이런 담대하고 강한 태도는 3절에서도 잘 나타난다.

⭕ 형제들아 - 22:1의 '부형들'과는 또다른 표현인 '형제들'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공의회와 같은 공식석상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반적인 인사말이었다(Lenski). 공의회에서는 회원들을 존중해 주는 정중한 인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4:8).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바울이 이런 호칭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두가지의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이 모임이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라 비공식 모임이었으리라는 추측이나 설득력이 약하다. 둘째는 이 모임이 공식적인 모임이기는 하였으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양심을 가졌으므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부당하게 굴복할 수없음을 도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추측이다. 그럼으로써 바울이 어설픈 권위나 무력에 의해 굴복되지 않는다는 결의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 양심을 따라...섬겼노라 - 이 '양심'은 '선한 양심'(good conscience, RSV)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바울의 이 선언적인 진술은 전날 자신에게 덮어 씌워진 고발에 대해(21:28) 무죄함을 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적어도 율법의 기준으로 볼때 바울 자신은 흠 없음을 의미하고 (빌 3:6)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분명한 자의식(自意識)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복음의 빛에서 볼 때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이나 자신의 의가 율법의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에서난 것임을 고백한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빌 3:9). '섬겼노라'(*, 페폴리튜마이)는 '시민으로서 행하다', '어떤 원리나 규책대로 살다'는 의미의 동사 '폴리튜오'(*)의 완료형으로서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음과 또 복음의 원리에 따라 생활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 경: [행23:2]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아나니아 - 이 사람은 네데배우스(Nedebaeus)의 아들 아나니아(Ananiah)로 48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군림했으며 잔인함과 탐욕으로 유명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그는 분반 제사장들로부터 십분의 일 세(稅)를 몰수하여 재산을 축적했고 로마 고관들에게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렇듯 아나니아는 탐욕적이고 술수에 능한자였으며 그의 친로마 정책으로 인하여 유대인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66년에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나니아의 집은 국수주의자들에 의해방화되었으며 아나니아는 헤롯 대왕의 궁전으로 피신하여 궁전 뜰에 있는 도수관 속에 숨어있다가 그의 형 히스기아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Jos. Wars II, 426).

⭕ 곁에 섰는 사람들...입을 치라 -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 아나니아는 바울의 당당한 태도에 즉각적으로 흥분했다. '곁에 섰는 사람들'(*, 토이스 파레스토신 아우토)이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산헤드린 의원들이라고 보는견해와(Lenski) 그곳에 있던 시중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Haenchen), 눅 19:24와요 18:22의 예를 볼때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도 뺨을 맞은 일이 있었지만(요 18:22).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뺨이나 입을 때리는 행위는 사람의 인격을 극도로 모독하는 표현인 것을 생각할 때 바울의 한 마디 말에 대해 사리를 따져보지도 않고 즉각적으로 입을 치라 명하는 아나니아의 행위는 그의 폭력적(暴力的) 성격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여실히 드러난다.

성 경: [행23:3]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회칠한 담이여...치시리로다 - 바울은 아나니아의 불법적이고도 인격 모독적인 행위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력하게 맞서고 있다. '회칠한 담이여'라는 표현은, 일찍이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회칠한 무덤이여'(마 23:27)라고 맹렬히 질책한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 둘은모두 위선자에 대한 질책의 의미를 갖는다. 구체적으로 '회칠한 무덤'이 겉은 깨끗한것 같으나 속은 썩어빠진 상태를 뜻한다면, '회칠한 담'은 기반이 안정되어 있지 못해 흔들거리면서도 겉에 흰 회를 칠해서 튼튼한 것처럼 꾸미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단지 아나니아의 위선을 질책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그에게 저주를 선언하기까지에 이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는 형식이 율법에 기록된 저주 방식이기 때문이다(신 28:22). 혹자는 바울의 이말을 단순히 관용적인 저주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한다(Jacquier). 아나니아가 66년에 살해당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 견해도 일리가 있다.

⭕ 율법대로...율법을 어기고 - 바울은 아나니아의 위선을 풍자적 대조법을 사용하여 지적하고 있다. 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는 자가 법을 어기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재판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하며(레 19:15),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형벌이 집행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도 정치 않는 상태에서 바울의 인격을 모독하는 처벌을 명하였으니 그것은 명백히 율법을 어긴 행위였다.

성 경: [행23:4]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하나님의 대제사장을...욕하느냐 - 유대 사회에서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자로서 대단한 권위와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감히 대제사장의 권위에 맞설 수 없었다(신 17:12). 이런 종교적 풍토 속에서 살고 있던 그들로서는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맞서는 것이, 그 내용에 관계없이 제사장을 욕되게 하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일찍이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당당하게 대답한 것이 불손한 행위로 간주되어 매를 맞으신 사실을 생각한다면(요18:22), 바울의 저주 선언은 매우 불리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성 경: [행23:5]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형제들아...알지 못하였노라 - 본절에서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한 자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는가 하는 점이다. 혹자는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고 있으면서도 빈정되는 말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자를 대제사장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말했다고 본다(Zahn). 그러나 '형제들아'라는 정중한 어투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출 22:28), 그리고 그의 신앙적 인격으로 보아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참이라고 봄이 무난하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의 눈에는 질환(疾患)이 있었는데(갈 4:13, 14), 이 눈질환으로 인해 시력이 약했기 때문에 누가 대제사장 직책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본다(Chrysostom). (3) 바울이 자신의 변증에 너무나열중했기 대문에 자기의 입을 치라고 명한 사람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본다(Bengel).(4) 지금 모인 공의회는 정기적인 산헤드린의 모임이 아니라 로마 관리에 의해 긴급히소집된 회의이므로 대제사장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옷을 입지 않았고 공식 좌석에도 앉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본다(Bruce). 이가운데(3), (4)의 견해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무난하다.

⭕ 관원을 비방치 말라 - 이 말은 출 22:28을 인용한 것으로 바울이 저주를 선언한 인물이 대제사장인 것을 정말로 몰랐으며 또한 그가 율법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율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이다.

성 경: [행23:6]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사두개인 - 이들은 당시 상당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그 기원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때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에까지 거술러 올라간다. 사두개인들이 구체적인 집단으로두각을 나타낸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 때(B.C. 166-63) 부터이다. 이들은 순수 유대적전통만을 고수하고 이방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는데,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문서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가영적 세계, 천사와 마귀 등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라 하여 배격하였다.이들은 철저히 현세 지향적이고 친로마적이고 체제 유지적인 귀족 집단이었으므로 민중들의 생활과는 유리(遊離)되어 있었다.

⭕ 바리새인 - 이들 역시 사두개파와 쌍벽을 이루던 종교적 귀족 집단이었다.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유대주의에 충성하는 한 부류가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났는데, 이들은 '하시딤', '하시디안'으로 불리어진 경건 집단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사두개파와 달리모세 오경 외에도 각종 구전, 전승을 동일하게 권위있는 정경으로 취급하였고, 죽은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였다. 이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권만을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에 배치된다고 보아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 사과의 뜻이 담겨 있는 바울의 변론(5절)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바울에 대한 적대 행위가 더욱 노골화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던것 같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아무 대책없이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헤드린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양자 사이에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알았던 바울은 이를 이용하여 논쟁(論爭)을 불러 일으켰다. 바울이 이렇게 한 행동에 대해 혹자는 노련한 수를 쓴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Preuschen), 마 10:16에 언급된 소위 뱀 같이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보기도 하는 반면(Nestle), 상대방을 분열시키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었다고 보기도 한다(Farrar)너무 근시안적 해석이라 할수 있다. 적어도 바울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고, 또한 그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11절). 자기가 감당해야 할 막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희생을 대책없이 감내하려 드는 것은 도리어 책임성이 결여된 행동일 뿐이다. 지금 바울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그가 장차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넓은 안목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더욱이 지금 일어난 사건이 그의 로마행의 한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옮길 수 있으며(공동 번역), 이는예수의 부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부활 소망이다(고전 15:16-58).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부활을 믿는 것이지만 바울의 부활 신앙이 예수의 부활에 근거한 반면 바리새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와 관계없이 전승되어온 신앙에 근거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차이점을 갖는다.

성 경: [행23:7]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다툼이 생겨 - 바울의 발언은 즉시 효과를 나타내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다툼'(*, 스타시스)은 '놓다', 또는 '두다'의 뜻을 갖는 '히스테미'(*)에서 온 단어로 '세움'을 뜻한다. 즉 서로 다른 입장을 옳다고 주장하면서 맞세우는 것이다. 이 두 종파는 기독교에 대해 그토록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들 간에 대립되는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는 첨예한 분열상(分裂相)을 드러내었다. 이는 비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기회만 있으면 논쟁을 일삼는 소위 비신앙적신학자들의 전형을 보여준다.

성 경: [행23:8]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부활도...천사도...영도 없다. - 사두개인들은 합리적이고 현세지향적이며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았다. 특히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복음서에서도 예수와 부딪히는 주제로 등장한다(마 22:23).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천사, 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주제들은 두 집단이 가장 첨예한 대립을보인 부분이었다. 이 두 집단 사이에는 신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감정적대립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에 논쟁은 필요 이상으로 격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견해 차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의 지배 원리 - 바리새인 : 역사는 신적 목적을 가지며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었다. 사두개인 : 바리새인의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할개인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역사 자체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천사론 - 바리새인 : 천사와 마귀의 계층이 있다고 믿었다. 사두개인 : 천사도 없고 마귀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 - 바리새인 : 자유 의지나 또는 하나님의 주권만으로는 다른일(사람)의 운명을 취소할 수 없다는 중간적인 입장을 취한다. 사두개인 : 자유 의지란 궁급적으로 역사 과정의 한 결정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다. 사회적 활동 - 바리새인 : 인간 평등을 주장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순수한 민족적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두개인 : 자신들의 이해 득실(利害得失)에 민감하여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였다.

성 경: [행23:9]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훤화 - 헬라어 '크라우게'(*)는 '비명을 지르다', '울부짖다'란 뜻의 '크라조'(*)에서 유래한 말로 큰 외침이나 고함 소리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것은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의 논쟁이 매우 격렬해졌음을 시사한다.

⭕ 서기관이...가로되...혹 영이나 혹 천사 -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 가운데 누가는 몇 사람의 바리새인이 말한 바울에 대한 변론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의 서기관은 율법 전문가를 가리키는데 바리새인이 대부분이었다. 바리새인들의 말인즉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했다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했다고 할 때 그것이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말하는 것인지(22:6-10), 아니면 그후 성전에서 기도할 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22:17-21)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한편 바울을 옹호하는 쪽으로 돌아선 몇몇 바리새인은 본문에 등장하는 자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들의 변호성 발언도 바울에 대한 지속적 지지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다만 이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적어도 관대한 입장을 지닌 자들이 있었으리라는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 그리스도인중 다수는 그생활 양식에 있어 다른 유대인들과 별로 상충(相沖)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경: [행23:10]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큰 분쟁이 생기니...빼앗아 가지고 - 급기야는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험악해지고 말았다. '찢겨질까'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서가파스데'(*)는 '깨뜨려 버리다', '산산조각을 내다'는 뜻의 '디아스파오'(*)의 제1부정 과거형으로서 천부장이 특별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바울의 신상에 큰 위험이 있었을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빼앗아'라는 표현도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붙잡고 폭력을 가하려 했기 때문에 강제로 떼내어 데려가야만 했던 상황을 현장감 있게 묘사한다.

성 경: [행23:11]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예수]

⭕ 주께서...담대하라...증거하여야 하리라 - 주님께서는 일찍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같은 말로 위로했었다(1:18;요 16:33 참조).이제껏 바울은 그의 생을 통해 많은 환상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지만(16:9;18:9;22:17;27:23, 24) 그 상황이 지금처럼("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가깝게 느껴지도록 묘사된 경우는 없었다. 이는 현재 시점의 긴박성을 시사한다.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운 바 있고(19:21)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이미 각오한 바 있었지만(20:23;21:10-13),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적잖이 당혹감에 사로 잡혔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고 로마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vision)을 제공해주셨다. 22:21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말씀이 여기서는 '로마'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제 로마로 가는 것은 단순한 바울의 바램이 아니라 주님이 부여해 준 사명(使命)임이 분명하게 제시되며 지금 그에게 매우 가깝게 감지되는 격려의 말씀은 이후 2년간에 걸친 로마 전도 여행에서 많은 위험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큰 힘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성 경: [행23:12]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당을 지어 맹세하되...마시지도 아니하겠다 - 합법적인 재판을 통하여 바울을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일단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살해할 암살단을 구성하였다. 아마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한 이 집단 안에는 앞에서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몄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21:27-29).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는 단식 서약은 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삼상 14:24). 이 맹세의 본래적 형식은 '만일...하면 내가(우리가) 저주를 받을 것이다'였으리라 본다(Haenchen). 그런데 만일 이들이 실제로 바울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맹세를 위하여 굶주려 죽어야 했을까? 당시에는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네 가지 경우가 랍비에 의해 허용되었다고 하는데, '선동에 의한 맹세', '과장된 맹세', '잘못된 맹세', '억업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맹세'가 그것이다. 아마 이들 중에는 이 사실을 잘 아는 사두개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만약의 경우 빠져나갈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의 맹세는 바울을 꼭 죽이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성 경: [행23:13]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이같이 동맹한 자가 - 무려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울을 죽이겠다고 동맹하였다. 여기서 '동맹'(*, 쉬노모시안)은 '함께 맹세하다'는 뜻의 '쉬놈뉘미'(*)에서 온 말로 이집단의 강한 결집력(結集力)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살벌한 맹세가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바울의 굳은 결심을 돌려좋을 수는 없었다(11절).

성 경: [행23:14]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한 무리들에게 일단 문제가 되는 것은 안토니오 성 안에서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바울에게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협조를 얻으면 가능하리라는 계획이었다. 본문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산헤드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바울에 대한 적개심이 남달리 강한 사두개인들이었을 것이다. 본문에 서기관 즉 율법학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바울을 옹호했던 바리새인들을(9절) 염두에 둔 암살단이 그들의 계획에 대해 보다 확실한 지지를 보내리라 판단한 자들에게로 갔음을 시사한다.

성 경: [행23:15]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바울을...데리고 내려오게 -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세운 계획은 상당한 실현 가능성을 지녔다. 천부장도 자초지종을 알고자 하였고(22:30) 전날의 공의회에서는 소란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조사할수 없었으므로 공회가 천부장에게 재심을 요구한다면 천부장이 이를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로마 군대가 바울을 공의회에 출석시키기 위해 성에서 데리고 내려올 때 길가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법이나 절차에 상관없이 오직 바울을 죽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바울을 죽이고 난 후에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되든 개의치 않겠다는 식의 맹목적이고 저돌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한편 이들이 바울을 산헤드린에서가 아니라 길거리에서 죽이려 한것은 기습(奇襲)하기에 용이함도 있었겠지만 산헤드린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하기 위함이라고 보기도 한다(Haenchen).

성 경: [행23:16]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바울의 생질이...고한지라 - 바울에 대한 친척관계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이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우리는여기서 최소한 바울에 게는 출가한 누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바울과 누이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된 생질 사이에 관계에 대해 두 가지로 추측한다. (1) 바울집단이 바리새인이었으므로(6절), 바울의 누이는 바리새인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크고 남편이 예루살렘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며,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할 때 그 누이의 집에서 머물렀을 것이라고 본다(Lenski). 그렇다면 본문의 생질은 예루살렘에서 나고 예루살렘에서 자랐을 것이다.(2) 바울의 누이는 다소에서 살았고 다만 그의 아들을 삼촌 바울이 공부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 율법 공부를 시키기 위해 유학 보냈을 것이라고 본다(Bruce). 두 가지 모두 추측일 뿐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생질이 다행스럽게도 바울을 해치려는 자들의 암살 계획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음모자들이 자만과 자신감에 가득찬 나머지 계획의 비밀을 철저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또는 어떤 바리새인이 바울의 생질에게 알려 주었다고도 본다(Vincent). 바울의 생질은 정보를 입수하자 곧바로 영문 안으로 찾아가 바울을 면회한다. 바울에게는 아직 아무런 구체적 혐의가 없고 로마 시민권을 가졌으므로 면회가 자유롭게 허용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23:17]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백부장을 청하여 가로되 이 청년을...인도하라 - 백부장은 백명 가량의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인데, 바울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듯 백부장에게 말하지 않고 직접 최고 책임자인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한편 어떤 학자는 바울이 백부장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는 누가의 기록에 대해 의구심을 표한다(Haenchen). 그러나 이는 바울의 위치을 격상시켜 보이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상황의 심각성과 긴박성(緊迫性)에 따른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Howard Marshall).

성 경: [행23:18]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죄수 바울이 - 백부장은 바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여 그대로 따라 주었다. 그런데 그는 바울을 '죄수'(*, 데스미오스)라고 부른다. 아직 유죄 판결도 받지 않은 상태인 바울을 '죄수'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렌스키(Lenski)의 말대로 이 용어가 감금되어 있는 자를 가리킨다면 그리 문제시할 필요는 없다. 당시 로마의 감옥은 세 종류로 되어 있었다. (1) 공중 감옥(custodia publica)은 보통 사람들을 가두는 곳으로 대개 어두운 지하실이었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을 때 갇혔던 옥이이에 해당하는 듯하다(16:24). (2) 자유 감옥(Custodia libera)은 상류층 죄수를 가두는 곳으로 어느 정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3) 군영 감옥(custodia Militaris)에서는 군사 한 사람이 자신의 한 손과 죄수의 한 손을 함께 묶어 감시하게 한다. 지금 바울이 갇힌 곳이 바로 이 군영 옥이다.

성 경: [행23:19]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손을 잡고 물러가서 - 천부장은 백부장을 통해 바울의 말을 전해듣는 순간 무엇인가 중대한 일이라고 직감했는지 바울의 생질의 손을 잡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물었다. 여기서 천부장의 친절한 행동은 바울을 죽이기 위해 광분해 있는 유대인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께서 수난을 당할 때에도 이방인 빌라도의 우호적인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유대인들의 피의 요구는 가히 광적이었다(눅 23:13-23).

성 경: [행23:20]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 바울의 생질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용상 15절의 것과 일치한다. 여기서 '유대인들'이란 직접적으로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 행위로 인해 바울이 이방 선교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조함으로써그 정당성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은연중에 이스라엘 전체를 지시하는 셈이다.

성 경: [행23:21]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좇지 마옵소서 - 여기서 '좇다'의 헬라어 '페이스데스'(*)는 '설복하다', '감언으로 속이다'는 뜻인 '페이도'(*)의 제 1부정 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무리들이 무슨 이유를 들어 바울의 재심을 요청한다 하더리도 설득당하거나 속임을 당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 숨어서...허락만 기다리나이다 - '숨어서'(*, 에네드류우신)는 16절의 '매복'과 같은 어원에서 왔으며 '안'(in)을 뜻하는 '엔'(*)과 '자리'를 뜻하는 '헤드라'(*)의 합성어로 '잠복' 또는 '복병'을 가리킨다. 바울의 생질은 음모자들이 천부장의 승락만을 기다린다고 첨가함으로써 천부장의 권위를 높여주는 동시에 그의 책임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성 경: [행23:22]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 살해 음모]

⭕ 경계하되...이르지 말라 - 천부장은 바울의 생질의 이야기를 순수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전날의 소동으로 미루어 보건대(9, 10절), 유대인들이 능히 그럴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천부장은 친절하게도 둘 사이의 일을 비밀로 하라고 경계시킨다. 이렇게 한 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바울의 생질이 음모자들의 계획을 천부장에게 보고한 사실이 드러나면 그의 신변(身邊)에 위험이 닥칠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음모자들이 자기들의 계획이 드러난 것을 알게 되면 다른 방법을 새로이 계획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날밤에 바울을 호송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이 따를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울은 또 한번의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주님에 그에게 두신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11절).

성 경: [행23:23]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밤 제 삼시에 - 현대적 시간 개념으로 바꾸어 말하면 저녁 9시를 가리킨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의 집요함과 폭력성을 익히 잘 알던 터라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장 그날 밤 음모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바울을 빼돌리려 했다. 바울 한 사람을 호송하는 데 호위 병력을 무려 사백 칠십명이나 동원하는 것은 천부장이이 일을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했던가를 말해준다. 물론 천부장의 이러한 조치가 바울에 대한 애정이나 존경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로마 시민이 자기의 관할 구역에서무고한 희생을 당하도록 방치했을 때 그 자신도 책임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아무튼 바울로서는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성 경: [행23:24]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총독 벨릭스 - 바울을 가이사랴에 보내려 한 것은(23절), 총독이 주재하고 있는 그곳에서 바울을 정식으로 재판받을 수 있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총독 벨릭스는 본래 노예였으나 글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모친 안토니아(Antonia)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안토니우스 벨릭스(Antonius Felix)라고 불렀다. 그의 형제 팔라스(Pallas) 역시 같은 노예였으나 그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고그의 총애를 받는 총신(寵臣)이 되기까지 하였다. 벨릭스는 그의 형제 팔라스의 도움으로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A.D. 52년에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A.D. 58년 까지 자리를 지켰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벨릭스는 잔인하고 음탕하며 노예의 정신으로 왕의 권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Tacitus, History, V.P). 그의 음탕함은 결혼을 세 여자와 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한 여인은 안토니아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고, 또 한 여인은 헤롯 아그립바 I세의 딸 드루실라(Drusilla)였으며, 나머지 한 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 짐승을 준비하라 -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90km 정도 되는 거리였으므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탈 것을 이용해야 했다. 여기서 '짐승'(*, 크테네)은 전쟁용 말이 아닌 일반 운송용 나귀나 말을 가리킨다.

성 경: [행23:25]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 이 표현은 대략적인 내용을 적는다는 뜻으로, 누가가 루시아의 편지를 입수하여 그 전체를 축자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하여 대략의 중심 내용만을 기록하였음을 말해준다. 루시아가 이 편지를 벨릭스에게 쓰는 것은 로마법에 의한 절차를 보여준다. 로마법에 의하면 하급 관리가 상급자에게 어떤 사건에 대하여 보고할 때에는 서면(書面)에 기록된 진술서를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성 경: [행23:26]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글라우디오 루시아 - 천부장의 이름이 여기서 밝혀진다. 이름의 전반부는 로마식이고 후반부는 헬라식인데, 이는 루시아가 헬라인으로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였음을 암시한다(22:28 주석참조).

⭕ 각하 - 헬라어 '크라티스토스'(*)는 '강한', '고귀한'을 뜻하는 '크라튀스'(*)의 최상급으로, '가장 숭고한', '지존하신'의 의미이나 이말은 본래 로마의 원로원 의원 다음 서열에 속하는 기사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 문안하노이다 - 벨릭스에게 보내는 루시아의 사건 진술서는 당시의 전형적인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1) 발신인의 이름을 먼저 밝히고, (2) 다음에 수신인의 이름을 적고, (3) 이어서 문안을 하는 말로 내용을 써나가는 형식이 그것인데, 성서 가운데 히브리서와 요한 일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신들이 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성 경: [행23:27]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이 사람이...구원하여다가 - 루시아는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 경우를 우려한 나머지 보고 내용을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지닌 것을 안 것은 이미 바울을 체포하고 채찍질을 명한 이후였지만 보고 내용에는 이 사실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21:33;22:24).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로마 당국이 바울의 로마 시민권을 처음부터 존중해 주었다는 것이다(Haenchen).

성 경: [행23:28]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알고자 하여 -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든 것은 단순히 사형(私刑)을 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공적(公的) 차원에서 제재를 가하기 위함이었다(21:27-32). 따라서 그들은 로마 당국의 허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천부장 루시아가 바울을 결박한 것은 군중들의 소요 사태를일단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21:32, 33). 만일의 사태로 인해 자신에게 불이익이 초래될지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사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성 경: [행23:29]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 - 이런 일은 이미 예전에 갈리오 총독 때에도 있었던 일로 총독 갈리오는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소송이 로마 법정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유대인들의 종교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재판을 거부하였었다(18:15). 여기서도 천부장 루시아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판별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은 율법에 관한 문제일 뿐 형사 처벌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루시아가 바울에 대하여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을 의미한다.

성 경: [행23:30]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해하려는 간계 - 40여명의 단식 맹세자들의 음모를 가리킨다(12, 13, 20, 21절).

⭕ 송사하는 사람들도...하였나이다 - 천부장이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준 때는 바울을 호송하는 군인들이 안전한 지대로 빠져나간 후였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기 위해 누가가 본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넣었다고 이해하지만(Haeanchen) 근거가 회박한 견해이다.

성 경: [행23:31]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보병이...안디바드리에 이르러 - 안디바드리(Antipatris)는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사이에 있는 도시로 본래의 이름은 카바르 - 사바(Kaphar-Saba)였는데, 헤롯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 후 그의 부친 아티바터(Antipater)의 이름을 따서 이처럼 명명했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않는데, 학자들은 예루살렘 북서쪽 유대 구릉의 끝에 있는 현재의 라스엘-아인(Rasel-Ain)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루살렘에서 안디바드리까지가 56km 이상이라고볼 때 밤새 이 먼 거리를 로마의 보병들이 바울을 호위하여 걸었다면, 비록 밤의 기온이 선선하여 걷기에는 힘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당한 강행군(强行軍)을 한 셈이다.

성 경: [행23:32]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마병으로...돌아가니라 - 바울은 안디바드리까지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추격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더이상 중무장한 군대의 호위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홀가분하게 빠른 속도로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으므로 마병을 제외한 나머지 군대는 철수하게 했다.

성 경: [행23:33]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가이사랴에 들어가서...그 앞에 세우니 - 안디바드리에서 가이사랴까지의 39km를 기병들에 의해 바울은 무사히 호송되어 루시아가 보낸 편지와 함께(26-30절) 벨릭스에게 직접 인도되었다. '세우니'의 헬라어 '파레스테산'(*)은 재판정 앞에 출두시킨다는 뜻으로 사용된 용어이다(롬 14:10).

성 경: [행23:34]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어느 영지 사람이냐 - 벨릭스는 일종의 예비 심문(preliminary interrogation)을 행하고 있다. '영지'에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르케이아'(*)는 '지배한다', '통치한다'는 뜻의'아르코'(*)에 '위에'(upon)를 뜻하는 전치사 '에피'(*)가 붙은 말로 통치권이 미치는 곳이란 뜻이다. '어느'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아스'(*)가 '어떤 종류의' 영지, 즉 황제의 영지인지, 원로원의 영지인지를 묻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Wendt, Robertson) 황제의 직할지인가 아니면 지방 총독의 속주인가를 묻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Haenchen, Bruce), 후자가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출신지를 묻는 이유는 바울의 출신지에 따라 재판 관할권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바울의 출신지가 지방 총독의 관할권이라면 그를 그 지역의 총독에게 보내 재판을 받게 할 수도 있었다(본서 서론, '로마의 행정 및 군대 제도' 참조).

성 경: [행23:35]

주제1: [공회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로 이송된 바울]

⭕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대답하자, 그곳은 로마의 직접 통치 지역이었으므로 벨릭스는 자기가 재판을 담당하기로 결정하고서 바울을 송사하는 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한다. '헤롯 궁'은 본래 헤롯 대왕(B.C. 37~A.D. 4)이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크게 지은 궁전이었는데 후에는 로마 총독의 관저 및 본영으로 사용되었다. 총독의 관저로 사용될 때의 명칭은 '브라이도리온'이다(막 15:16). 대개의 고대 궁전이 그러하듯이 헤롯 궁도 요새의 역할을 하고 재판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지하에는 감옥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울을 이 지하의 감옥에 가두어 두었는지 아니면 따로 방을 하나 주어 그곳에 머무르게 하면서 감시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고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이고 루시아의 편지 내용이 바울의 무죄를 암시하였으므로(29절) 벨릭스는 바울을 죄수 취급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 바울은 가벼운 구금(拘禁)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성 경: [행24:1]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닷새 후에 - 이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출발 때부터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Meyer), 그보다는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부터 닷새 후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Haenchen, Bruce,Holtzmann).

⭕ 아나니아가...변사 더둘로와 함께 -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잔인한 성격에 대해서는이미 23:2에서 밝힌 바 있는데, 여기서도 그의 집요한 악함이 드러난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떠났다는 종교적 이유 외에도 바울에게 저주를 당한 것에 대한(23:3) 개인적 증오심 때문에 가이사랴까지 찾아와 바울을 끝까지 해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로마 법정에서 바울에게 불리한 판결을 확실히 하기 위해한 변사(辯士)까지 동원하였다.

⭕ '변사'(*, 레토로스) - 유대교의 법과 로마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고서 뛰어난 언변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변사를 데리고 온 것은, (1) 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받게 하려면 로마법의 절차를 잘 알아야 했기 때문이며, (2) 변사의 뛰어난 언변으로 재판을 받게 하려면 로마법의 절차를 잘 알아야 했기 때문이며, (2) 변사의 뛰어난 언변으로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변사의 이름 더둘로(Tertullus)는 당시 로마 세계에서 널리 쓰이던 이름이다. 아마 그는 헬라계 유대인이었을 것이다(Bruce). 한편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몇 명의 장로들이 산헤드린 전체를 대표해서 온 것인지 아니면 바울에 대해 특별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특히 사두개인들, 23:6-9)이 사적(私的)으로 온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격렬한 논쟁 후에 쉽사리 화해할 수 없으리라고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

성 경: [행24:2]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바울을 부르매...송사하여 -아나니아 일행의 고소가 접수되었고, 바울이 법정에 불려나옴으로써 원고와 피고가 한자리에 모였고 재판장 벨릭스가 자리에 앉음으로써 재판은 시작되었다. 먼저 더둘로의 바울에 대한 고발 논고가 시작된다.

성 경: [행24:3]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벨릭스 각하여...감사 무지하옵나이다 - 더둘로의 논고는 의례적으로 재판장을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낯간지러운 아첨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의 아첨의 요지는 벨릭스의 뛰어난 통치력으로 민족이 개혁되었고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내용이며 이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나 환영하며 감사하여 마지않는다(공동번역)는 것이다. 더둘로의 이 말은 아첨 이상의 어떤 진실성도 갖고 있지않았으며 이 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총독 벨릭스의 상습적 잔혹 행위는 그 당시에 널리 알려졌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벨릭스는 총독으로서의 특권을 이용하여 뇌물과 여색을 탐하는 등 온갖 악행을 도모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비위를 거스리는 자들은 암살자를 동원하여 살해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또한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당시에 많이 일어났던 소요를 진압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강도떼들을 부추겨 약탈하도록 하여 그 약탈물을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나중에 벨릭스가 총독에서 물러나 로마로 소환되었을때,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앞의 일들에 대해 유대인들이 탄원하였기 때문이었다(Tacitus Ann, XII, 54).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찬사를 늘어놓는 더들로의 의도는 (1) 당시에 벨릭스가 가지고 있던 반유대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며, (2) 벨릭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거짓 찬사를 통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내려는 것임이 명백하다.

성 경: [행24:4]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 이는 실질적으로 할 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총독 벨릭스를 불편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간단하게 중심 내용만 말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당시 관례적으로 법정에서 재판장에 대한 예의로서 한 언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더둘로의 변사로서의 노련한 언변을 엿보게 한다. '괴롭히다'를 뜻하는 '엥콰토'(*)는 '방해하다'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당신의 통치 업무를 방해하지 않기위해'로 번역될 수 있다(Preuschen).

⭕ 대강 - '쉰토모스'(*) '간단히'(공동번역)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짧게 베다'의 뜻인 동사 '쉰템노'(*)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필요한 부분만을 베어내는 것, 또는 필요한 부분 외의 것을 베어내 짧게 한다는 뜻이다.

성 경: [행24:5]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염병 - '염병'(*, 로이모스)은 흑사병과 같이 전염성이 강하고 일단 감염이 되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전염병을 가리키며, 형편없는 사람에 대한 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더둘로는 바울이 전한 도(道)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며 그것이 마치 흑사병과 같이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고 잘라말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흑색선전이었을 뿐이다. 여하튼 바울을 염병(染病)이라고까지 부른 것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나갔음을 말해준다.

⭕ 소요케 하는 자 - 아나니아 일행이 상당히 치밀한 준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떤 문제가 벨릭스의 분노를 유발시킬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고소 내용의 제일 첫번째 항목으로 그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이 정치적 혁명 세력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벨릭스는 유대를 통치하는 동안 여러 가지 소요 사건들에 직면하여 그 주동자들은 물론 추종자들까지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방식으로 강경하게 진압했다(Jos, Wars II). 그리고 그는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어떤 소요에 대해서도 즉시 잔인하게 진압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나사렛 이단의 괴수 - 이단(*, 하에레시스)은 '선택하다', '더 좋아하다'를 뜻하는 '하이레오'(*)에서 파생되어 어떤 '파'나 '당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며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것을 택한 자'혹은 '파당'을 가리킨다. 더둘로가 이 표현을 썼을 때 종교적 견해 차이에 중점을 두는 의미에서 '이단'(개역 성경)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로마에 저항하는 집단으로서의 '도당'(공동번역)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종교적 교리에 대한 차이를 가지고는 로마 법정에서 시비를 걸수 없음을 더둘로 일행이 잘 알고 있었을 터인즉, 벨릭스가 그 말을 받아들일 때 후자의 의미로 생각하기 바라는 뜻에서 사용했을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한편 예수를 따른 자들을 가리켜 '나사렛당'(Nazarenes)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이는 본래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에 예수 이름 앞에 '나사렛'을 덧붙여 부른데서 시작되었다. '괴수'(*, 프로토스타테스)는 '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와 '서다'를 뜻하는 '히스테미'(*)의 합성어로 '무리 중에 첫번째 서 있는 자' 즉 '지도자'나 '주모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더둘로가 바울을 정치범으로 몰고 가려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는 예수께서 당하신 모함(謀陷)과 상당히 유사하다(눅 23:2). 아마 누가는 주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자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인식하기 바랬을 것이다.

성 경: [행24:6]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성전을 더럽게 - 성전 즉 종교에 관한 것은 로마 법정에서 죄의 유무를 판결하는 자료가 되지 못함을 저들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간략하게만 끝으로 언급하고 있다. 만약 여기가 유대교 법정이었다면 가장 먼저 중요하게 고발해야 할 제목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고 반로마적인 행위에 관한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만든 것이 성전 정화 사건이었고(막11:15-19) 바울이 결정적으로 음모에 걸려든 것도 성전에서였다는 점은(21:27-30) 주님과 제자의 고난에 있어서 또 다른 공통점을 보여준다. 한편 어떤 사본에는 '유대인들이 바울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려고 했으나 천부장이 바울을 빼앗아갔다'고 더둘로가 말한 내용이 들어 있지만 별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성 경: [행24:7]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 만약 앞절에서 언급한 사본의 내용을 인정한다면 여기서의 '그'는 '루시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으로 보아 그렇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벨릭스가 더둘로의 말대로 심문한 사람은 바울이었고 루시아를 부르도록 조치하거나 재판을 연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성 경: [행24:8]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우리가 송사하는...아실 수 있나이다 - 총독 벧리스가 직접 심문하면 고발한 모든 내용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You will be able to learn from him about everything of shich we accuse him,RSV). 더둘로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한데 대해서는 의구심이 생긴다. 바울이 그의 고발내용을 시인하리라고 보았는가? 만일 그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이는 판단 착오일 뿐이다. 아니면 동료들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할 셈이었는가?(눅 23:13-25) 어쨌든 분명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궤변적, 허위적 자신감이 나타나 있다는 사실이다.

성 경: [행24:9]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더둘로의 송사]

⭕ 유대인들도 - 본문은 아나니아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올 때 장로들 외에 다른 유대인들도 데리고 왔음을 시사한다. 아마 자기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많은 증인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자기들의 의도대로 판결을 끌고가려는 속셈이 있었을 것이다.

성 경: [행24:10]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머리로 표시하여 - '누오'(*)는 '고개를 끄떡이다', '고갯짓으로 암호하다'는 뜻이다. 벨릭스는 재판장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듯 말로 하지 아니하고 고갯짓으로 바울에게 변호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 이 민족의 재판장 - '이 백성의 재판장'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이 민족'이라고 표현한 것은 로마 총독 벨릭스와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다름을 시사하는 듯하다. 바울은 벨릭스가 '재판장'됨을 말하는데 이는 더둘로가 벨릭스의 '통치자' 됨을 집중적으로 말한 것과(3절) 대조를 이룬다. 현재의 상황은 재판정에서, 벨릭스를 총독으로보다는 재판장으로서 대하고 있는 자리이므로 바울의 인사말이 상황에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바울 역시 벨릭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재판장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표시하고 있으나 더둘로의 비굴한 아첨에 비해 절제되고 점잖은 인사이다.

성 경: [행24:11]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8절에서 더둘로가 자신에게 했던 말고 동일하다. 두 사람 모두 벨릭스의 증언이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증언이 서로 다르므로 한 사람은 진실을 말한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거짓을 말한 것이며 이는 구체적인 증거로써 밝혀질 것이었다.

⭕ 예배하러 올라간 지 -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임을 먼저 밝히고 있다. 이것은 더둘로가 바울을 정치범으로 고발한 것에대한 반대 논증인 셈이다(5절). 한편 1절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에 온 것을 '내려와서'라고 표현했으며 본절에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올라간'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예루살렘을 종교적 중심지로 보는 유대적 배경에 따른 관용적 표현이다.

⭕ 열 이틀밖에 -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이 정치적 소요(騷擾)를 일으키기에는 상당히 짧은 기간이었음을 밝힘으로써 더둘로의 고발이 근거없는 억지임을 증거하고 있다. 더구나 열 이틀 가운데서도 나흘 동안 붙들려 있었다는 점과 칠일간은 성결례(聖潔禮)를 행하였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혹자는 본문의 '열이틀'이 7일 간의 결례 기간(21:27)과 가이사랴에서의 닷새(1절)를 합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나(*) 이렇게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본문의 의미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날부터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을 계산한 것이므로 위의 견해대로 볼 경우 예루살렘에 머문 며칠의 기간이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21:17, 18;22:30;23:12, 32). 쉴라터(Schlatter)의 견해대로 다음과 같이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제1일 : 예루살렘에 도착(21:17), 제2일 :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과의 회합(21:18), 제3일-제9일 : 7일간의 정결례(21:27) 및 성전에서의 누명(21:28), 제10일 : 공회에서의 증언(22:30), 제11일 : 바울을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23:12), 제12일 : 가이사랴로의 이송(23:32).

성 경: [행24:12]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변론하는 것이나...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 바울의 자기 변호는 매우 논리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더둘로의 웅변가적이고 선동적인 주장과 뚜렷이 대조된다. 앞절에서는 자신의 예루살렘 체류 기간이 짧았다는것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는 더 나아가 대중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갖지 않았음을 말함으로써 정치적 반란자로 고발된 것이 터무니 없음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성전에서 사람들로 더불어 토론을 벌인 적도 없고 회당과 성 안에서 사람들을 선동한 일도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천부장 루시아가 그의 보고서에 기록하지 않았을리가 없을 것이다. 한때 소란 사태가 있긴 있었지만 그것은 바울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에 의한 선동의 결과였고(21:27, 28), 그나마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기에 바울에게는 아무런 흠잡을 일이 없었다.

성 경: [행24:13]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 바울의 변론은 논리적이고 치밀하였다. 그는 더둘로의 고발이 터무니없는 것임을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증명한 후 이제는 결정적으로 더둘로의 고발이 거짓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소요 죄에 대하여 무죄함을 증명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절에 의하면 바울은 구금(拘禁) 상태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1) 바울에게 밝혀지지 않은 죄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2) 바울이 공적(公的)으로 위험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라도 반란의 가능성이 보이면 그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로마 행정관의 임무였던 것이다(HowardMarshall).

성 경: [행24:14]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하나님을 섬기고 - 바울은 앞의 정치적인 문제에 이어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변론하기 시작한다. 먼저바울은 더둘로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을 '도'(*, 호도스)라고 정정하고 있으며 유대교와 이 '도'(道)가 동일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이 '도'가 유대교와 동일하게 로마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은근히 시사한다. 그리고 더둘로가 '나사렛 이단'이라고 표현할 때 정치적 집단이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이도록 사용한 것에 대해(5절 주석 참조), 결코 반로마적인 정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 경: [행24:15]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하나님께 향한 소망...의인과 악인의 부활 - 여기서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과 부활이 동일시되고 있고 그것은 곧 유대인들의 신앙과 동일시 된다. 물론 이 자리에는 사두개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부활을 부정했지만 전통적 유대교 신앙과 기독교의 관계성을 논의하는 이 자리에서 사두개인의 신앙을 표준으로 놓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성경적 근거를 가진 것이다.(마22:23-33 주제 강해, '부활에 대한 구약 성경의 증거' 참조). 한편 바울이 부활을 언급함에 있어서 의인과 악인의 동시적 부활을 언급함에 있어서 의인과 악인의 동시적부활을 말한 것이 여기가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가 있다. 즉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구원을 이야기하는 바울의 부활 사상을 누가가 잘못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Gardner). 그러나 예수께서도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말씀하신 바 있고(요 5:28, 29), 바울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활과 다른 부활을 이야기했다고 볼 수 없으며, 바울이 주로 의인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 것이(고전 15:12-58);살전 4:13-5:11)곧 영원한 심판으로 이어지는 악인의 부활을 배제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서신들은 기존의 그리스도교인들을 향한 목회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자연히 악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의인의 부활에 대한 관심이 집중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행24:16]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이것을 인하여...힘쓰노라 - '이것'이란 앞절의 부활, 즉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되는 것을 뜻한다. '거리낌이 없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로스코폰'(*)은 부정 접두어 '아'(*)와 '치다', '실족하다'를 뜻하는 '프로스콰토'(*)의 합성어로 '범(犯)함이 없는'(Page) 또는 '...에 넘어지지 않는'의 의미이다. '힘쓰노라'(*, 아스코)는 '부단히 연습하고 노력한다'는 뜻으로 바울은 늘 이렇게 살려고 애썼다(고전 9:27;15:31). 본문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기본적인 의무를 반영하고 있으며 (잠 3:4;눅 18:2, 4),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율법을 요약하신 예수의 말씀과 결부된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가 강조되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인들은 사람 앞에서의 의를 위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상실하거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위하여 사람 앞에서의 의를 무시해 버리는 형태를 보였었다(눅 20:46, 47).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동시적(同時的)으로 의롭게 행하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바울의 겸손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말할 뿐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단언하지 않았다. 이는 허위적 자신감에 가득 찬 더둘로의 태도와는 전혀 대조적이다.

성 경: [행24:17]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여러 해 만에...제물을 - '여러 해 만에'는 그의 제2차 전도 여행 끝에 예루살렘을 잠시 방문한 것(18:22)을기점으로 계산하면 4-5년의 기간이 된다. 바울이 민족의 구제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언급은 누가의 기록에는 여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들에는 구제헌금에 대한 기록이 여러 군데 있다(롬 15:25, 26;고전 16:1-4;갈 2:10). 그런데 바울이 구제금에 대한 언급을 할 때 그것이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한 것은 역사적 사실성을 넘어서는 누가의 확대 해석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Haenchen). 왜냐하면 본래 바울의 구제금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함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염려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대 민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자기 민족이 복음을 받아 구원을 받을 수있기를 원했다(롬 11:13, 14).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가 구제금의 힘을 입어더욱 열심으로 유대인들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국은 유대 민족을 위해 유익하다고볼 때 바울의 구제금이 직접적으로는 유대 기독교 공동체의 가난한 자들을 돕고 그들과의 사랑의 연대성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제물'에 대한 언급은 네 명의 서원자(誓願者)를 위하여 바친 제물을 바울의 방문 목적에 소급하여 적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21:23, 24, 26).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 제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고 또 예루살렘에서 서원자들을 위해 제물을 바칠 것을 예견했다고 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Holtzmann). 그러나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목적 중에는 오순절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고(20:16), 또 그는 늘 율법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므로(14절) 전례대로 당연히 제물을 드리려 했을 수도 있다.

성 경: [행24:18]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결례를 행하였고 - 21:26-28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압축한 내용이다. 바울은 네 사람의 서원자와 함께 있었을 뿐 그밖의 사람들과의 모임은 물론 소동은 더더욱 없었다. 이를 목격한 증인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시아에서 올라온 몇몇의 유대인들에 의해 발생했다. 사실 바울이 성전에서 결례를 행했던 사실은 성전 관계자들로부터 쉽게 확인될 수 있었으며, 이와같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겠다.

성 경: [행24:19]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 성전에서 바울을 해치려 했던 유대인들(21:27, 28)이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들은 지금 이 재판정에 나와 증언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자리에 나와 있지 않다. 이는 그들이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해주며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시사한다. 아시아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은 허위의 사실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여론 재판식으로 바울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것이 실패하자 슬그머지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성 경: [행24:20]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공회 앞에 섰을 때에...말하라 하소서 - 바울은 더둘로의 고발에 대해 조목조목 반격을 가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 자기의 결백을 객관적으로 증거한다. 공회에 섰을 때(22:30) 바울이 취한 행동 가운데 조금이라도 죄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아나니아 일행이 증언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아나니아 일행이 바울에 대하여 고발한 모든 것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으며 바울에 대한 고소는 무효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성 경: [행24:21]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항변]

⭕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 바울은 자신의 공회에서 했언 유일한 발언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23:6). 죽은자의 부활에 관한 바울의 주장은 로마 법정에서도 산헤드린 법정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마 법정에서는 그것이 종교적인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소송의 건(件)이 될 수 없었으며 산헤드린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유대교의 정통적 신앙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 경: [행24:22]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 감옥에 갇힌 바울]

⭕ 벨릭스가...더 자세히 아는 고로 - 벨릭스가 바울의 도에 대해서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가이사랴에 살았던 전도자 빌립의 영향과(8:40;21:8), 그의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에 의해 견문을 갖게 되었으니라고 추측할 뿐이다(Bruce, Robertson, 24절 주석 참조). 아니면 유대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으로서 유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 그런 정도의 정보는입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여기서 벨릭스가 '더 자세히' 안다고 했을 때 그의미는 산헤드린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벨릭스가 바울의 도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 연기하여 - 헬라어 '아나발로'(*)는 법정 전문 용어로 '휴회하다', '휴정하다'는 의미이다. 이 시점에서 재판장 벨릭스가 판결을 연기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진행된 더둘로의 고소와 그에 대한 바울의 반대 변호속에서 사실을 충분히 규명할 수 있음 만큼 증언의 진위(眞僞)가 드러났기 때문이다.그리고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판결을 내리겠다는 것도 판결 연기의 정당한 사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천부장 루시아가 그의 편지를 통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보고했고 거기에서도 바울을 형사 처벌할 아무런 혐의점이 없었기 때문이다(23:26-30). 벨릭스가 바울을 계속 구금시켰던 이유에 대해서는 13절 주석에 밝힌 바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러한 이유 외에도 아마 벨릭스는 바울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유대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의 분노를 고려함과 동시에 바울에게 뇌물을 받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26절).

성 경: [행24:23]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 감옥에 갇힌 바울]

⭕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 판결을 연기하고 난 후의 바울에 대한 벨릭스의 처우는 그가 바울의 무죄됨을 상당 부분 인정하였음을 말해준다. 형식적으로 아직 판결이 내려진 상태가 아니므로 바울은 여전히 구금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훨씬 많은 자유와 후한 대우가 주어졌다. 여기서 '자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시스'(*)는 '풀어놓다', '쉬게 하다'는 뜻의 '아니에미'(*)에서 파생된 말로 느슨한 구금 상태에서 쉬거나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했음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들어와 면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수종도 들 수 있었다. 가이사랴에 있던 전도자 빌립(21:8),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20:4;21:17), 바울의 조카(23:16)등이 바울을 방문하여 위로도 하고 수종도 들었으리라 추측된다.

성 경: [행24:24]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 감옥에 갇힌 바울]

⭕ 드루실라 - 판결이 연기된 후 루시아를 가이사랴로 불러내렸는지, 혹은 그 동안에 아나니아 일행이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었는지 등에 대한 언급이 없이 벨릭스가 바울에게 와서 예수 믿는 도를 듣는 이야기가 연결되고 있다. 드루실라는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아그립바 2세의 누이이고 버니게의 자매였다. 그녀는 A.D. 37년경에 태어났고 처음에는 코마겐(Commagene)의 왕자 에피파네스(Epiphanes)와 약혼하였으나 그가 할례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파혼하게 되었고 후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수락했던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결혼하였다. 그때가 불과 15세였다. 그후 절세의 미녀인 드루실라에게 매혹된 벨릭스가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 마술사 아토모스(Atomos)를동원하여 자신과 결혼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그의 세번째 아내로 삼았다. 드루실라와 벨릭스 사이에는 아그립바(Agrippa)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A.D.70년 베스비오(Vesvius)화산 폭발 때 죽었다고 한다. 드루실라는 유대인으로서 당시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도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서방 사본들에 의하면 드루실라가 더욱 바울을 만나고자 했다고 한다(Bruce, Haenchen). 이렇게 볼 때 벨릭스가 바울의 도를 잘 알았던 것도 아내인 드루실라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성 경: [행24:25]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 감옥에 갇힌 바울]

⭕ 의와 절제와 장치 오는 심판 - 본문은 놀라울 만큼 강직한 바울의 모습과 대상에 따라 복음을 적절하게 적용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먼저 바울은 자기가 하는 이야기들이 벨릭스 부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음과 자기의 안전한 석방을 위하여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벨릭스 부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의 말을 서슴지 않고 말하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벨릭스는 잔인함과 탐욕으로 유명할 만큼 불의한 사람이었고(3절 주석참조), 이들 부부는 불륜의 관계로 맺어진 만큼(24절 주석 참조) 절제와는 거리가 먼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이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장차 올 심판에서 분명한 응보를 받을 것이었다. 한편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도를 듣고자 하는 벨릭스 부부의 관심사와는 다소 관계가 회박한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지만 사실상 바울은 복음을 훌륭하게 전달하고 있다. 바울은 단순히 복음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청취자가 복음을 들음으로 해서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불의와 방종한 삶을 사는 이들 부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장차 올 심판을 확인시킴으로써 회개로 나아가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의(義)를 믿음으로써 받아들이게끔 인내하였던 것이다(롬 1:17).

⭕ 두려워하여 - 벨릭스는 바울의 강론을 들은 후 마음의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 이상더 진전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마치 세례 요한의 의로운 선포를 인정하여 두려워하였으나 그 이상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결단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결국에는 요한의목을 베는 죄악을 저질렀던 헤롯왕의 경우와 유사하다. 헤롯도 불륜의 결혼 관계를 맺었었다(마 6:17-29). 아마 벨릭스 부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리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의 도를 들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성 경: [행24:26]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 감옥에 갇힌 바울]

⭕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 벨릭스의 두려움은 잠깐뿐이었고 그의 재물에 대한 탐욕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한 바울에게까지 돈을 기대하는 촌극을 연출하고 있다. 그는 아마 바울이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에게 상당한 기금이 있으리라 추측했던 것같다. 그리하여 벨릭스는 바울을 자주 불러 돈을 요구하는 말을 간접적으로 전했거나 협박과 회유를 하면서 돈을 주면 석방해 줄 수도 있음을 직접 암시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율리아(Julia)법에 의하면 돈을 받고 죄수를 풀어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위반하는 경우 관직에서 쫓겨나 추방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도록 되어 있었다(Robertson). 그러나 타락한 관리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불의한 재산을 축적했다.

성 경: [행24:27]

주제1: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주제2: [가이사랴 감옥에 갇힌 바울]

⭕ 이태를 지내서 - 바울의 판결을 연기하겠다고 결정한 후 2년이 경과하였음을 뜻한다.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판결을 하겠다고 해놓고 2년이 지나도록 재판을 속개(續開)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벨릭스는 바울을 석방하면 유대인들의 비난과 반감을 야기시킬 것이라고 판단하고서 계속 바울을 억류시켜 두었으리라 짐작된다. 대중들에게 별 인기도 없는 한 개인에게 부당한 처사를 행하더라도 자신의 기반만은 안전하게 유지하고자 했던 밸릭스에게서 권력가의 비열한 일면을 볼 수 있다.

⭕ 보르기오 베스도가...소임을 대신하니 - 보르기오 베스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전임자나 후임자에 비해 성실하고 유능했으며 비교적 선량한 총독으로서 공정한 통치를 하려고 애썼다는 것과 벨릭스에 비해 자기 구역의 강도들을 제거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정도가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Josephus, Antiq, XX 8:9). 한편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직무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벨릭스가 소환(召還)되었음을 뜻하는데 그의 소환 이유에 대해서는 가이사랴에 있었던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내전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는 가이사랴에 있었던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는 가이사랴에 주도권 장악을 놓고 분쟁이 있었는데 이 분쟁에 벨릭스가 개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고 투옥당하였으며 재산을 약탈당했다. 여기에는 벨릭스의 사리 사욕과 잔인성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표를 파견하여 강력한 항의를 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끝내는 소환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는 소환되어 엄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나 그의 형 팔라스(Pallas)의 중재로 형벌을 면하였다(Josephus, Wars II;Antiq.XX).

⭕ 벨릭스가...구류하여 두니라 - 벨릭스가 물러나면서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구금된 채로 두도록 조치한 것은 조금이라도 유대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에서였다. 아무튼 바울로서는 전후 사정을 모르는 보르기오 베스도에 의해 다시 재판을 받는 것이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성 경: [행25:1]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도임한 지 삼일 후에 - '도임한 지'(*, 에피바스 테에파르케이아)는 직역하면 '도(province)에 발을 올려 놓은 지'가 된다. '에피바스'(*)는'발을 올려 놓다'는 뜻의 '에피바이노'(*)의 제2부정 과거형이고 '에파르케이아'(*)는 '도'(都)를 뜻하는 후기 헬라어 단어이다. 결국 통치할 땅에 발을 올려 놓는 것으로 취임을 표현한 것이다. 베스도는 58-60년경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62년경 사망하기 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삼일 후에'라는 표현은 제3일째를 가리키는 유대적 어법이다. 그러니까 베스도 신임 총독은 부임한 다음 날 하루를 쉬고 사흘째 되는 날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새로운 곳에 처음 부임한 베스도로서는 자기 관할 구역의 실태를 하루라도 빨리 파악하는 것과 지역의 유지들과 친밀한 관계를 여는 것이 급선무였고 예루살렘이 유대의 수도이자 종교적 중심지였으므로 그곳부터 방문한 것이다.

성 경: [행25:2]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대제사장들과...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대제사장은 파비(Phabi)의 아들 이스마엘이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가 벨릭스 통치 말기에 이스마엘로 하여금 아나니아의 대 제사장직을 계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Jos, Angiq., XX, 179<iii, 8>,194<viii, 11>, 196<viii, 11>).그의 임기에 대해서는 탈무드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록이 각각 다른데 전자에 의하면 10년으로 되어 있고, 후자에 의하면 베스도 통치 기간에 아그립바 2세가 대제사장직을 다시 이스마엘에서 요셉으로 교체시켰다 한다. 요세푸스에 따른다면 이스마엘의 재임 기간은 2년이 채 못되는 셈이다. 한편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형은 전임자(前任者)들까지도 포함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명이고 종신제이며 자손에게 계승되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는 권력자들에 의해 자주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전직 대제사장들도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었고 그 위치가 존중되었으므로 통상 이들을 같이 부를 때는 대제사장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높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바에 대해서는 산헤드린의 영향력있는 회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15절). 한편 신임 총독이 관할 지방의 유력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십분 이용하여 다시금 바울을 공격하고 나섰다. 산헤드린이 바울을 잡아죽이려는 의지가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는, 그들이 무려 2년이 지나도록 바울을 죽이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성 경: [행25:3]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베스도의 호의로...죽이고자 - 대제사장들 이하 산헤드린은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바울을 죽일 수 없음을 확인한바 있으므로 불법적으로 살해하려 한다. 그들은 새로 부임한 베스도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악용하여 다시 바울에 대한 재판을 청구하되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경우 자객을 매복(埋伏)시켰다가 중간에서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성 경: [행25:4]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베스도가...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 베스도는 결코 호락호락한 관리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 우호와 행정적인 일의 처리를 구분할 줄 알았다. 어쩌면 전임자인 벨릭스가 베스도에게 바울 사건에 대한 개요를 일러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그들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첫째,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는 만큼 그가 도주할 염려는 없다. 둘째, 베스도 자신이 '미구(未久)에' 가이사랴로 떠나갈 것이므로 굳이 바울을 불러올릴 필요가 없다. 여기서 '미구'(*, 타케이)는 '빠른'의 의미인 '타코스'(*)의 여격 단수형으로, 일정한 방향을 향해 빨리 나아감을 뜻한다.

성 경: [행25:5]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유력한 자들은...송사하라 - '유력한 자들'은 15절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보며(Overbeck), 그 의미는 '책임있는 대표자' 정도로 이해된다. 베스도는 그들의 재판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긴박하게 처리되어야 할 일이라면 그들 중 책임있는 대표자들이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소송을 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보내서 바울을 호송해오자면 여러 면에서 번잡스러우며 또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법정에 구류되어있는 자를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 데려와 재판한다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결국 베스도의 신중한 판단으로 바울은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게 된 셈이다.

성 경: [행25:6]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팔일 혹 십일을 지낸 후 -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머무른 기간에 대해 헬라어 성경(사본)들 가운데 약간씩 차이가 있다. 예컨대 트리니티 성서 공회(The Trinitarian Bible Society)에서 발행한 헬라어 성경에는 '10일 이상'으로 되어 있고(more than ten days, RSV), 화란의 네슬알란드 성경(Nestle-Aland)에는 '8일 혹은 10일 이상을 지내지 않고'라 되어 있다(notmore than eight or ten days, RSV). 전통적으로는 한글개역성경 본문처럼 '8일 혹은 10일'을 지지한다.

⭕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 베스도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공식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바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재판만 세 번(22:30;24:1-22) 받는 셈이 되었고 또한 증거도 없는 억지 주장에 대해 자신의 무죄함을 또다시 증명해 보여야 했다.

성 경: [행25:7]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유대인이 둘러서서...증명하지 못한지라 -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변사를 동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위압감을 주며 그러한 분위기로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고소 내용은 더둘로의 것에 비해(24:5, 6) 더 새로운 것이 없었던 듯하며 여러 가지 중한 죄목으로 송사(訟事)하였으나 단 한 가지도 능히 증명하지 못하였다. 특히 이 소송사건이 무려 이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설사 기소된 내용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증인을 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전혀 터무니없는 사실로써 모함하려 하니 증인이 없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성 경: [행25:8]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아니하였노라 -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제기된 모든 고발을 집약적으로 종합하여 반박하고 있다. 율법이나(21:21), 성전(21:28)은 유대인들과 관계된 것이고, '가이사에게'라 함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가리켜 반란자, 또는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고 말한 것(24:5)에 대한 요약적 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는 단언은 유대인의 입을 봉해버렸다. 그들은 더이상 바울의 변론을 반박하지 못하였다. 한편 '가이사'는 원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2-44)의 속명(俗名)이었으나,그의 양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Octavianus)가 B.C. 27년에 로마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 가이사는 황제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참조로 역대 가이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1)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2) 디베료(14-37) (3) 칼리굴라(37-41), (4) 글라우디오 (41-54)(5) 네로(54-68) (6) 갈바(68-69) (7) 오토(69) (8) 비텔리우스(69) (9) 베시파시아누스(69-79) (10) 티투스(79-81) (11) 도미티아누스(81-96) (12) 네르바(96-98) (13)트라야누스(98-117) (14) 하드리아누스(117-138).

성 경: [행25:9]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심문을 받으려느냐 - 원고측과 피고의 진술을 다 들은 베스도는 즉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소송을 제기했던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었고(7, 8절), 따라서 바울에게 무죄 선언을 한 후 즉시 석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는다. 베스도가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은, 만약 그가 바울을 석방할 경우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임(赴任) 초부터 유대의 지도자들과 부딪쳐 그들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그의 통치는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총독 관할 지역의 주민들이 총독에 대한 불평을 황제에게 고할 수 있었고, 그럴 경우 고발을 당한 총독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스도는 이런 경우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행25:10]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가이사의 재판 자리...행한 일이 없나이다 - 바울은 베스도의 제의가 로마법의 절차에 어긋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재판대 앞에선 이상 끝까지 가이사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로마 시민에 대한 재판권이 없는 유대의 산헤드린에 서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베스도의 제의를 거절하는 의미에서 이 사실을 확인시킨뒤 자신의 무고함을 다시 한번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무고함을 총독 베스도 역시 잘 알고 있음을 비교급 '칼리온'(*, '더 잘')을 써가며 진술한다.

성 경: [행25:11]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만일 내가...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 이는 바울이 지금 목숨에 연연하여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를 문제삼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에 해당한다. 요세푸스가 피고의 입장에서 자신을 변호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을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려 하는 의도를 보이자 즉시 가이사에게 항소(抗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루살렘에는 심각한 음모가 기다리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3절;23:14-16). 로마 시민은지방 행정장관의 판결에 불복하여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 받았다. 특히 지방 행정관의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대한 재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지방 관청은 그 호소자를 로마에까지 호송하여 황제의 재판을 직접 받도록 해야 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고 그는 54-68년에 걸쳐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나 통치 초기에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와 집정관 아프라니우스 부루스(Afranius Burus)등의 영향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한 때는 네로가 선정(善政)을 베풀던 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가이사(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그는 단지 공정한 재판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로마에 가고자 했언 자신의 희망과(19:21).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할 소명923:11)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Robertson).

성 경: [행25:12]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베스도 앞에서의 변호]

⭕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 '배석자'(*, 쉼불리온)란 배심원 회의의 위원들을 가리키며 의회의 판사들, 법 전문가들, 그리고 총독의 고문들로 이루어졌다(Haenchen). 최종적인 결정은 총독이 내리지만 배석자(陪席者)들과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었다. 지금 이들이 상의한 것은 바울의 항소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과연 바울에 대한 고소가 중대한 것인가의 여부가 논의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대한 소송건일 경우에 그 항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바울을 반란 죄로 고소하였고(24:5), 반란죄는 그 무엇보다 중대한 제목이었으므로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한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바울의 항소를 받아들인 것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문제가 그에게 많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9절 주석 참조), 이 불편한 재판에 대한 판결을 황제에게 넘김으로써 자신이 정치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성 경: [행25:13]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아그립바 왕 - 아그립바 세의 아들이자 헤롯 대왕의 증손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 2세'(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그는 어려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Claudius)황실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부친처럼 친로마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A.D.44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7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토를 이어받아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팔레스틴은 로마 행정관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다가 A.D. 50년경에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아그립바 2세는 갈기스(Chalcis)의 왕으로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팔레스틴의 통치자로 부상되었다. 그후 글라우디우스는 그에게 더 많은 영톡를 맡겼는데, 빌립의 관할 지역, 아빌라(Abila), 트라코니티스(Trachonitis), 아크라(Acra)등이 그것이다. 아그립바의 통치지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에 의해 갈릴리, 다리게아(Tarichea), 디베랴(Tiberias)등에 까지 확장되었다(Jos., Wars II). 아그립바는 매우 친로마적이어서 유대인들이 반로마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공작을 하였고, 66-70년에 걸쳐 있었던 전쟁기간에는 더욱 철저히 로마에 충성했던 관계로 전쟁 후 더 많은 영토를 부여받았다. 이처럼 아그립바 왕은 로마와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예방(禮訪)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버니게 - 이 여인은 아그립바 2세의 한 살 아래 누이이자 벨릭스 전(前) 총독의 처인 드루실라(24:24)의 언니이다. 그녀는 일찍이 철학자 필로(Philo)의 조카인 마르쿠스와 약혼한 적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 후에 그녀는 삼촌인 헤롯과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48년에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다. 그후 그녀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Polemon)과 두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다시 오빠에게 돌아왔다. 이때 이들 사이에는 근친상간(近親相姦)의 불륜이 저질러졌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었다. 70년 이후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의 아들인 티투스(Titus)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으나 여론의 악화로 끝내는 헤어지고 말았다. 오빠와 함께 베스도의 취임을 축하하러 온 지금은 아마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오빠 집에서 함께 거할 때였을 것이다.

성 경: [행25:14]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여러 날을 있더니...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의 베스도 문안이 다소 길어진 듯하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의명성과 권위로 보아 바울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판단하고서 바울이야기를 화제로 꺼냈던 것 같다. 아그립바 왕이 직접 유대를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글라우디우스 황제가 '성전의 후견인'의 자격과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권, 그리고 성전 창고와 제사장의 예복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성 경: [행25:15]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 베스도는 자기가 겪은 사건의 줄거리를 아그립바에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새로운 사실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단지 바울을 고소만 한 것이 아니라(2절),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유죄 판결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성 경: [행25:16]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 본문에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억지 주장과 총독 베스도의 법적 공정성이 대조된다. 로마의 사법 관행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며, 피고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베스도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3절) 법을 준수함으로써 로마법의 정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베스도의 진술은 자신이 법에의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소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가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요구를 거절할 때 제시한 이유는 지금과 달랐으며(4절), 재판 과정에서도 유대인들을 의식함으로써(9절) 완전한 불편 부당(不偏不黨)함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 경: [행25:17]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지체하지 아니하고 - 사실상 베스도는 재판을 신속하게 열었었다(6절). 그는 재판을 지연시키면서 직무를 유기(遺棄)하거나 뇌물을 기대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하였다는 것을 넌지시 강조한다. 이는 전임자인 벨릭스의 우유부단한 처사와 대조된다(24:22).

성 경: [행25:18]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원고들이...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 -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력한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바울을 고소했을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명망으로 보아 문제거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소송을 제기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베스도는 필시 바울이라는 자가 상당히 중대한 악행을 법했으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재판이 열리자 베스도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로마법에 의해 유죄에 처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다(7절).

성 경: [행25:19]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자기들의 종교와...죽은 것을 살았다고 - 여기서 성전 모독에 관한 사항은(24:6) 제외되고 그 대신 부활에 관한 주제가 등장한 것이(24:21) 흥미롭다. 베스도 자신이 말하듯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범죄자로 정죄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부활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예수의 부활만큼은 그들을 포함한 유대교 지도자들 전체가 기를 쓰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는 로마 법정에서 다룰 성질이 아님은 자명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우에도 종교적 문제로써 정치적 올가미를 씌우고자 안간힘을 썼을 뿐이다(눅 23:4, 14). 한편 '종교'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시다이모니아스'(*)는 '미신'(superstition)으로도 번역될 수있는 말이다(17:22). 대체로 로마 관리들은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베스도 역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를 듣은 사람이 유대의 종교를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는 아그립바였으므로 그런 의미로 사용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성 경: [행25:20]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 베스도는 9절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의 재판을 제의(提議)한 것이 자신의 종교 문제에 관한 무지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두 진술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머뭇거린 것은 무지탓도 있었겠지만 그 배후에는 고소자들 앞에서 바울을 무죄로 선언하기를 원치 않은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Howard Marshall).

성 경: [행25:21]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황제 - 헬라어 '세바스토스'(*)는 라틴어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해당하는 형용사로서 '존엄한', '존경스러운'이란 뜻이다. 또한 이 말은 원래 '숭배하다', '경외하다'는 뜻의 동사 '세바조마이'(*)에서 유래했다. B.C. 27년로마 최초의 황제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헬라어로는 '세바스토스')라는 칭호를 받은 이후로 이는 '가이사'와 더불어 로마 역대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성 경: [행25:22]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문을 구하는 베스도]

⭕ 나도...듣고자 하노라 - 본절은 아그립바가 바울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호기심을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것은 '나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 '카이아우토스'(*, also myself)가 강조형으로 되어 있는 데서 드러난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다시 한번 증언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로마의 총독(본디오 빌라도) 앞과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 안티파스 앞에 섰던 예수의 경우(눅 23:8)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했던 반면(눅 23:11),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성 경: [행25:23]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아그립바와 버니게]

⭕ 크게 위의를 베풀고...바울을 데려오니 - '위의'(偉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시아'(*)는 '보이게 하다'는 의미의 '판타조'(*)에서 파생된 말로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위엄있고 호화 찬란하게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버니게의 사치와 화려함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유대 전쟁의 긴장이 감돌던 시기에 그의 오빠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피하도록 권유하는 순간에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오빠 옆에 앉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그립바 남매를 필두로 하여 천부장을 비롯하여 성중의 유력 인사들이 뒤따라 들어오는 화려한 행렬은 이 날의 청문회가 얼마나 비중있는 것인가를 말해준다. 한편 '신문소'(*, 아크로아테리온)는 '청취자가 되다'는 의미의 '아크로아오마이'(*)에서 파생된 말로 공개적으로 청취를 하는 공청실(公聽室)을 뜻한다. 재판은 이미 끝났고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졌으므로 다시 재판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마 청문회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가이사랴 최고의 권력자들과 실력자들의 위세와 화려함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이 외소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스승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다(9:15).

성 경: [행25:24]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아그립바와 버니게]

⭕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 엄밀하게 말해서 바울을 송사한 사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William Neil). 다만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직후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바울을 해하려 했던 군중들을 감안한다면(21:27-36)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무리들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행25:25]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아그립바와 버니게]

⭕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 본문은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를 분명히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천부장 푸시아도 그러했고(23:29), 벧릭스도 마찬가지였으며(24:22, 23), 지금은 베스도까지도 바울의 무죄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석방되지 않고 있다. 매번 바울이 석방되지 않은 사유가 있었지만(9-12절;23:20-24;24:22), 사실상 그런 것들은 바울을 풀어줄 수 없는 정당한 사유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판결의 지연이 바울을 로마로 향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23:11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은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주님의 섭리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성 경: [행25:26]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아그립바와 버니게]

⭕ 황제 - 본문의 '황제'(*, 퀴리오스)는 21절의 '세바스토스'(*)와 다른 칭호이다(21절 주석 참조). '퀴리오스'는 '주'(Lord or His Majesty)라는 뜻의 칭호인데, 옥타비아누스나 디베료(Tiberius)는 이 칭호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연상케하는 권위주의적인 것이라 하여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이 칭호가 공식적으로 용납된 것은 칼리굴라(Caligula) 때부터이고 도미티안(Domitian)에 이르러서는 공인된 칭호가 되었으며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는 자신의 동전에 이 칭호를 새겨넣기까지 하였다. 본래 이 칭호는 통치자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이었으나 점차 신성과 관련되면서 황제 숭배로까지 발전하였다. 이것은 '퀴리오스'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문제를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그리스도에게 적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문제를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고 그것을 우상 숭배로 여겼기 때문이다. 폴리갑(Polycarp)은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아 순교당한 인물의 예이기도 하다.

⭕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 본문에는 베스도의 난처한 입장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9절) 엉뚱한 제의를 하였다가 바울의 항소를 받았고(11절).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을 최고 법정인 로마에 보낼 때 함께 보내야 할 혐의 사실이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황제가 보아서 재판의 필요성을 인정할 만한 상소(上訴) 재료도 없이 바울을 올려 보낸다면 그에게는 무능력가라는 낙인과 문책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상소(上訴) 재료를 찾기 위하여 이 청문회를 열기로 한 것이며 아그립바의 심문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행25:27]

주제1: [베스도 앞에 선 바울]

주제2: [아그립바와 버니게]

⭕ 죄목을 베풀지 - 베스도는 천부장 루시아가 벧릭스에게 써보낸 것과 같은(23:26-29) 애매 모호한 조서(調書)를 올려보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베풀지'(*, 세마나이)는 '표시한다'는 뜻의 '세마이노'(*)의 제1과거 능동태 부정사로 구체적인 죄목을 명시하는 것을 뜻한다.

⭕ 무리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로곤'(*)은 부정 접두어 아(*)와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의 합성어로 '이성이 없는', '이성에 위배된'의 뜻이다. 분명한 죄목도 없이 사람을 보내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이성이 없는, 즉 정신나간 일이 아닐 수 없다.

성 경: [행26:1]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아그립바가...허락하노라 - 지금은 청문회가 아그립바를 위하여 열린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25:22) 바울에대한 청문의 주도권은 아그립바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진행된다. 사실상 베스도가 자신은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므로 바울에 대한 심문을 아그립바에게 일임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겠다.

⭕ 바울이 손을 들어 - 바울의 항소가 받아들여진 이상 재판은 끝난 것이며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건 아니면 청중들의 호기심을 위해서건 다시 변증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기회를 자신의 무죄됨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보다는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손을 들어'라는 표현은 21:40처럼 청중들을 조용하게 하거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 아니라 연설을 시작하면서 예의(禮意)를 표시한 것이라고 본다. 가이사랴의 최고 권력자들과 학식있는 자들이 위엄있게 앉아있는 자리 앞에 사슬에 묶인 채(29절) 손을 들어 연설을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은 차라리 비장하다고 할 수 있겠다.

성 경: [행26:2]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 바울은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24:10).그러나 여기서 아그립바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고 한 것은 의례적인 인사 치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성 경: [행26:3]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유대인의 모든 풍속...아심이니이다 - 2절에서 다행스럽다고 말한 이유이다. 아그리바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종교적인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바울의 설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베스도가 선뜻 판결을 내리지 못한 데에는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무지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볼 때 당시 바울의 심정은 상당히 답답하였으리라 본다. 바울은, 베스도가 이미 그에게 정치적인 죄를 정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에(25:25), 더이상 그것에 대해서 변명할 필요는 없었고 여기서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변명하면 되었다(R.N. Longenecker).

성 경: [행26:4]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 - '생활한 상태'로 번역된 '비오시스'(*)는 '생활 방식'(manner ofLife, KJV)을 뜻한다. 바울의 고향은 '다소'였으나 실질적인 그의 정신적 배경은 예루살렘이었다(22:3). 바울이 구체적인 그의 성장 배경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유대 사회에 두루 알려져 있는 바임을 힘주어 말한 것은 그의 바리새적 배경과 유대교적 열정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먼저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행26:5]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우리 종교 - '종교'로 번역된 '드레스케이아'(*)는 '경건하다'는 뜻인 '드레스코스'(*)에서 유래한 말로 단순한 외적 의식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내적 경건성까지 내포하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유대 종교를 '우리 종교'로 표현한 것은 아그립바와 자신의 동족성(同族性)을 은연중 확인시킴으로써 공감대를 넓혀 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지며(4절의 '다 아는 바라'는 말과 연결됨) 또한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청취자들이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 의도도 엿보인다.

⭕ 가장 엄한 파...바리새인 - 이는 바울이 한때 유대교적인 정통성에 누구 못지않게 철저했음을 말하기 위한 진술이다. 바울은 이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갈 1:13, 14;빌 3:5, 6). 실제로 바울은 힐렐(Hillel) 학파의 가말리엘로부터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라 하면 가장 엄격하고 완벽에 가까운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성 경: [행26:6]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 바울은 과거에 대한 언급을 간단하게 끝내고 심문을 받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주목하게 한다.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란다 함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느날 갑자기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뿌리를둔 것임을 의미한다. 그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명료(明瞭)하게 언급되지는 않고 있으나 메시야와 부활에 관한 것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8, 23절). 다시 말해서 바울은, 구약의 언약들과 예언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또 온전히 성취되어 갈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초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성취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맞춰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행26:7]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열 두 지파...이 소망을 인하여 -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송사한 유대인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즉 바울이 말하는 이 소망은 전체 이스라엘이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것인 바, 이 소망을 인하여 다른 민족이 아닌 바로 유대인에게 송사를 받았다는 것을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바울은 자기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25:25) 종교적으로 허물이 없음을 먼저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소망'이라는 말은 바울의 변호 연설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핵심적인 용어이다(23:6;24:15;28:20).

성 경: [행26:8]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당신들은...여기나이까 - 여기서 '당신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가 분명치 않다. 바울이 유대교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을 이교도들에게 이러한 주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는 아그립바와 버니게 외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참여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이 질문은 그 특유의 치밀하고 예리한 논증을 보여준다. 즉 만일 그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부활을 배척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질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이라고 하는 일반론적 차원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긍정의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의 진정한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맞춰져 있음은 물론이다(H. Marshall)

성 경: [행26:9]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나도 나사렛...행하여야 될 줄 - 여기서 '나도'(*)는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적대했던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증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다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 자신도 극적인 변화를 받았듯이 반대자들의 태도가 궁극적으로는 바뀌어야 함을 역설하려는 준비 작업일 뿐이다. 바울은 복음의 탄압자에서 선포자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反轉)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강렬한 인상과 설득력을 유발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잘활용하고 있다(22:3, 4;딤전 1:13). 그러나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을가져오는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원만하고 점진적인 신앙을 키워가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바울의 경우에는 극적인 전환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 강한 설득력을 주는 힘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하여야 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인'(*)은 어떤 필요성이나 의무를 뜻하는 비인칭 동사 '데이'(*)의 부정사로서, 바울이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했던 데에는 나름대로의 투철한 종교적 의무감이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성 경: [행26:10]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가편 투표를 하였고 - 바울은 자기가 기독교를 어떻게 박해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가편 투표를 하였고'(*, 카테넹카 프세폰)를 직역하면 '자갈(검은색)을 아래로 던졌고'가 된다. 이 표현은 고대에 재판할 때 배심원들이 피고가 무죄라고 판단될 때는 흰 자갈을, 유죄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검은 자갈을 던졌던 판결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할 때 사형에 처하는 판결에 투표를 하였다는 진술은 이곳이 처음이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바울이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Robertson, Meyer, Holtzmann). 그러나 산헤드린의 회원이되려면 일단 기혼자로서 30살이 넘어야 했는데 바울이 결혼을 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과, 자기의 바리새인됨을 여러 차례 강조했던 그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음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그러한 추측에 회의를 갖게 한다. 그리하여 혹자는 본문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보아 '찬동하다'의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Jackuier). 이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성 경: [행26:11]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바울의 변명]

⭕ 모든 회당에서...형벌하여 - '모든 회당'은 예루살렘 내에 있는 회당들을 가리키는 듯하며(Bruce, Haenchen), `형벌'은 당시에 회당 형벌로 관례화 되어 있던 채찍질을 가리킬 것이다.

⭕ 강제로 모독하는 말 - 이것은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여 성도들을 배교자(背敎者)가 되게 유도하려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강제로...하게 하고'의 '에낭카존'(*)이 미완료로 되어 있는 것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바울의 시도가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그리하여 더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Bruce, Robertson). 어떤 특정한 집단을 탄압함에 있어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조나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대 수리아의 폭군 안티오커스는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한 일이 있었다. 또한 트라얀(Trajan)에게 보내는 젊은 플리니(Pliny)의 보고서에는, 만약 기독교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독하면 그를 놓아 주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Epistle X. 96).

⭕ 외국 성까지도 -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할 때 유대지역 밖으로 나간 것으로 언급된 곳은 다베섹 뿐이었다(9:2;22:5). 그렇다면 '외국성'은 다메섹으로서 출장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Haenchen)

⭕ 핍박하였고 - 헬라어 '에디오콘'(*)은 '사냥감을 쫓다', '적을 쫓다'의 뜻을 가진 '디오코'(*)의 미완료형으로, 반복되는 핍박 시도를 뜻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참으로 지독한 정도였으며 마치 사냥감을 쫓는 자나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뒤쫓는 자와 같았다. 열심으로 말하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했던 유대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 경: [행26:12]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신의 개종을 설명하는 바울]

⭕ 그 일로...권세와 위임을 받고 - '그일'이란 '그 용건', '그 목적' 즉 그리스도인들을 발본 색원(拔本塞源)하는 일을 뜻한다. 본절에서부터 바울은 자기 생애에 있어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던 결정적 순간을 다시 언급한다. 이 진술은 9:1-19와 22:6-21에 이어 세번째에 해당하며 주된 이야기의 흐름은 동일하나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1-23절 주제 강해'바울의 회심 기사 비교 연구' 참조). 이러한 차이점은 이야기하는 당시의 상자황이나 청취자에 따라 강조점을 다소 변화시켜 서술하는 누가의 문학적인 역량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H. Marshall). 한편 본절에서 드러난 차이점을 보면 9:2;22:5에는 사울이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대제사장들'로부터 '권세와 위임'을 받은 것으로 표현된다. 본절의 표현이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성 경: [행26:13]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신의 개종을 설명하는 바울]

⭕ 정오 - 22:6의 오정 쯤(*, 메셈브리안)이 대략적인 시간(about noon)을 나타내는데 비해 본문의 '헤메라스 메세스'(*)는 정확한 시점, 곧 '한 날의 중간'(in the middle of the day)을 나타낸다.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대개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었으니 그의 열성이 어떠했는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때가 한 낮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체험이 온전한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있었던 일임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 이하에는 강렬한 빛에 의해 바울의 눈이 멀게 되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으며, 모든 관심은 주님이 하는 말씀에로 집중되어 있다.

성 경: [행26:14]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신의 개종을 설명하는 바울]

⭕ 히브리 방언으로 예수께서 - 아람어로 말씀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본다(21:40). 바울의 회심을 기록한 다른 곳에는 '히브리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주님께서 바울의 이름을 '사울'(*)이라는 아람어로 불렀다는 사실이 암시되기는 하였다(9:4;22:7). 반면 9:1에는 '사울로스(*)라는 헬라어 이름이 사용된 것과 비교하라.

⭕ 가시채를...고생이니라 - 이 말은 헬라와 라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속담과 같은 것으로 본래적 의미는 '신을 대적하는 행동이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농경 문화에 배경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가시채'는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킨다. 이 가시채는 밭을 갈 때 소나 말을 잘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이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한편 이 속담은 유대교 내에서도 알려져 있었으며(솔로몬의 시가 16:4) 필로(Philo)는 양심이 어떻게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가를 언급한 바도 있다. 혹자는 본문의 말씀이 바울 스스로 양심과 싸우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생각한다(Bruce). 즉 바울은 유대교적 열정으로써 기독교 핍박에 앞장섰지만 날이 갈수록, 특히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스스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느끼며 점차 혼란과 번민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감히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그 정해진 섭리를 거역했던 바울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꾸짖으신 말씀으로 이해함이 더 무난하겠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 역사에 의한것임을 이 속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성 경: [행26:15]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신의 개종을 설명하는 바울]

⭕ 네가 핍박하는 예수 - 본절의 문구는 9:5와 문자적으로 일치하나 22:8에는 '나사렛'이란 말이 첨가되어있다. 본문에 대한 보다 자세한 주해는 9:5;2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행26:16]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신의 개종을 설명하는 바울]

⭕ 일어나 네 발로 서라 - 본문에서는 '아나니아'에 대한 이야기가 생략되고 대신 아나니아를 통해 받은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바울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 누가에게 있어서 바울이 소명의 인식을 아나니아를 통해 전해 받았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건 그것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상황에 맞추어 요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부수적인 것들은 언급하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전달하고자 했다. 가령 아나니아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을 상대로 말할 때는 자신의 유대교적 경건성과 정통성을 증거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과 같이 헬라적 청중들까지 포함된 상황에서 변증할 때는 유대교적 경건과 정통성을 그렇게 중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부르심에 바울이 어떻게 이끌림을 당했는가를 증언하는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네 발로 서라'는 말씀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소명을 상기시킨다(겔 2:1, 3;렘 1:7, 8). 뿐만 아니라 바울의 소명 내용도(18절) 사 42:5-7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의 소명과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

⭕ 나를 본 일...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 - 주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일꾼으로 삼아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게 하려함이었다. 여기서 '나를 본 일'은 지금 다메섹에서 경험한 것을 가리키며, '장차...나타날 일'은, 앞으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보여질 것(16:9, 10;18:9;22:17, 18;23:11;27:23;고후 12:1-4, 7)을 가리킨다. 이는 바울이 두려움과 외경심에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주께 받은 사명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도록 명령받았음을 시사한다.

성 경: [행26:17]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신의 개종을 설명하는 바울]

⭕ 구원하여 - 헬라어 '여사이루메노스'(*)는 '여사이레오'(*)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선택하여'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이다. 가령 고대 헬라어와 70인역 사 48:10에서는 '선택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파피루스 문서들에서는 두가지 의미 모두로 다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학자들 간에는 '선택하여'(Overback,Randall)로 보는 견해와 '구원하여'(Bruce, Haenchen, Meyer)로 보는 견해로 갈린다.그런데 본서의 다른 곳에서(7:10, 34;23:27)이 단어가 '구원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다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본다. 사실상 바울은 과거 여러 차례의 위기 상황에서 구원함을 받았었다(9:23-25;21:30-32;23:12-24;25:3).

성 경: [행26:18]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자신의 개종을 설명하는 바울]

⭕ 눈을 뜨게 하여...빛으로 - 이 본문은 사 42:6, 7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빛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사42:6) 어두움에서 헤매이고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빛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듯이 바울도 사람들의 소경된 영안을 뜨게 하여 죄악과 방탕한 어두움의 생활에서(롬 1:24;엡 5:18) 벗어나 빛을 발견케 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요 8:12;요일 1:5).

⭕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 어두움이 사단의 권세를 뜻한다면 빛은 하나님의 지배를 뜻한다. 이것을 골 1:13에서는 흑암의 권세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대비시킨다. 흑암의 세계에서는 죄의 지배를 받으나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는 죄사함을 받고 그의 자녀로서 기업을 얻게 된다. 한편 본절에서 사용된 신학적 언어는 개종의 특성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전통적인 이해를 반영하며 아그립바가 유대교적 테두리에서 제대로 이해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H. Marshall).

성 경: [행26:19]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바울]

⭕ 하늘에서 보이신 것...거스르지 아니하고 -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자의적인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사명임을 강조하고 있다(렘 20:9). 그가 그리스도인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처럼(13-18절),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거역할 수 없는소명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셈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거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셈이었다. 바울은 이런 논리로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납득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청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논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의 삶을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은 그의 삶의 일관된 내용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예정(豫定)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롬 9:19-24;엡 3:9-11),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고전 15:43), 자신의 죄악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딤전1:15)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성 경: [행26:20]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바울]

⭕ 다메섹...예루살렘...유대 온 땅과 이방인 -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전파된 것과 같은 형태로 서술한 듯하다. 실제로 바울은 다메섹의 회심 이후 먼저는 다메섹에 있는 사람들에게(9:19), 다음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9:28, 29) 복음을 전파했다. 그런데 '유대 온 땅'이라는 표현은 갈1:22 등으로 미루어 다소 과장된 듯하다(Bruce, Marshall, Haenchen).

⭕ 회개하고...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회개의 촉구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세례 요한도 그랬고(마 3:2), 예수님도 그랬으며(마 4:17),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회개를 선포했다(행 3:19).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행실을 중지하고 나아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켜 어두움에서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18절) 옮겨가는 것으로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는 표현은 마 3:8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를 상기시키는데, 바울은 이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표현한 바 있다(갈 5:22, 23).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와 구원은 그 열매로써 증거된다 하겠다.

성 경: [행26:21]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바울]

⭕ 성전에서 나를...죽이고자 - 바울을 지금 심문받는 자리에 서게 한 직접적인 죄목은 소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21:26-28). 그런데 바울은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다. 대신에 그는 자기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일과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던 일을 연관시켜 설명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적 핵심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추측에 의한 정죄는(21:29 주석참조) 하나의 계기일 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보다 궁극적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천한 까닭이다(22:21, 22).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 의식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는 바울의 소명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Bruce).

성 경: [행26:22]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바울]

⭕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21:31, 32;23:12-15).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으며 17절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다.

⭕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 앞에서는 복음이 민족의 차별을 뛰어넘어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함을 말했으며(17, 20절), 여기서는 복음이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전파되는 것임을 밝힌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준다(요 3:16).

⭕ 선지자들과 모세 - '율법과 선지자'(13:15)와 같은 뜻의 표현으로 구약 전체를 요약한 말이다.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전파한 복음이 모세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일치하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롬 1:2;16:26).

성 경: [행26:23]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바울]

⭕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 - 사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기독교는 예수께 적용하여 예수의 수난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메시야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다시말해서 유대인들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영웅적 존재로서 옛 유다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여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할 지상적.정치적 인물이었다(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 참조).

⭕ 먼저 다시 살아나사...빛을 선전하시리라 - 메시야가 이방 세계를 포함한 만방의 빛이 되시리라는 예언은 사 42:1-7;49:6;60:3 등에 나온다.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었으나, 메시야가 고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들로서는 메시야가 죽었다가 첫번째로 부활하리라는 생각 역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메시야로서 고난을 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뿐만 아니라 그 메시야는 유대 민족은 물론이고 모든 민족에게 빛을 선전하신다. 한편 '선전하시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탕겔로'(*)는 '공포하다', '선언하다', '전도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빛을 선포한다 함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요(약 1:17;요일 1:5), 어두움이 아니라 밝음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포한다는 말이다(18절).

성 경: [행26:24]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미쳤도다 -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바울의 말을 베스도가 가로막았다. 그러나 바울의 변증은 이 부문에서 사실상 끝나고 있다(H. Marshall). 가이사랴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 문외한인 베스도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바울을 볼 때 순간적으로 그가 미친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베스도의 생각에는 바울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토록 몰두함으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적 차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게끔 자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Bruce). 이렇듯 현세적이고 실제적인 분야에만 주된 관심이 있는 베스도의 모습은 복음의 신령한 메시지에 초미(焦眉)의 관심을 보였던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과 대조를 이룬다(13:7, 12).

⭕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 베스도는 바울이 너무나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베스도가 바울의 폭넓은 지식과 논리적이고 막힘이 없는 달변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사실상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그밖에는 희랍의 철학이나 당시의 최고 학문에 대해 폭넓은 지식이 바울을 미치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베스도가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렸을 뿐이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헌신은 바울로 하여금 미친 자라는 소리까지 듣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에 개의치 않았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자되었음을 고백하였다(고후 5:13). 주님께서도 살아 생전에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셨다(요 10:20).

성 경: [행26:25]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 참되고 정신차린 말 - '정신차린'에 해당하느 헬라어 '스프로쉬네스'(*)는 '건전한', '올바른'을 뜻하는 '소스'(*)와 '생각', '마음'을 뜻하는 '프렌'(*)의 합성어로 '건전하고 정상적인 마음'을 뜻한다.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바울은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하고 있다. 이는 아나니아에게 심한 말로 맞섰던 것과는 대조가 되는 장면이다.

성 경: [행26:26]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담대히 말하노니 -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더이상 그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했다. 바울은 결코 비굴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담대히'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담대히말하노니'의 헬라어 '파르레시아조메노스'(*)는 '파르레시아'(*)에서 온 말인데, 이는 '모든'(all)을 뜻하는 '판'(*)과 '말'(word)을 뜻하는 '레시스'(*)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함'을 의미한다. 사실상 바울은 숨기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진실대로 말했고, 아그립바왕은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을 가진 성전의 보호자였고(Lenski), 유대교와 구약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으므로 바울의 증언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 한편 구석에서...아니 로소이다 - 바울은 자기의 증언이 어떤 은밀한 종교 집단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생생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공공연하게 선포된 것임을 강조한다. 예수의 삶이 공개적인 것이었고(눅 22:53). 그분의 죽음 또한 여러 증인들에 의해 목도 되었고(눅 23:26, 35-37). 예수의 부활 역시 '빈 무덤'이라는 객관적 증거와 현현 체험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던 것처럼(마 28:9-11;막 16:12, 14),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공개적으로 행해졌다(20절;1:8;2:14;막 16:20).

성 경: [행26:27]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 이 말 속에는 '선지자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부활 또한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이 담겨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가면 누구나 선지자를 믿는다. 아그립바는 성전의 보호자로서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은 피상적 지식차원에 불과하였으므로 예언된 바 메시야에 관련된 구절들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못한 듯하다(Meyer). 따라서 이어지는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는 말은 그에게 마치 아부 내지는 조롱의 어감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성 경: [행26:28]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 적은 말로...그리스도인이 - 본문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형용사 '올리고스'(*)에 대한 해석 문제이다. '올리고스'는 양적으로 '적은'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그런데 이 말이 전치사'엔'(*)과 함께 쓰일 때는 시간의 연속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엔 올리고'(*)는 개역 성경과 같이 '적은 말로'도, RSV처럼 '짧은 시간 안에'(in a short time)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29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생각한다면 전자의 번역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는 '적은 노고'(Vincent)로 해석하는 견해와 '거의'(Luther)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다소 거리가 멀다. 아그립바왕의 대답은 상당히 애매하여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판별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혹자는 그의 대답에는 냉소적(冷笑的)인 부정의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하며(Bauernfeind), 혹자는 간접적인 긍정의 뜻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Overbeck, Haenchen). 당시 상황을 고려할때, 만일 아그립바가 긍정의 뜻을 확실히 표현했다면 바울을 미친 자로 생각한 베스도의 말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전격적으로 부정했다면 유대인들의 눈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바울의 말에 크게 동조도 않고 반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를 택했으리라 본다.

성 경: [행26:29]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 말이 적으나 많으나...모든 사람도...나와 같이 되기를 - 여기서 '말이 적으나 많으나'는 '길거나 짧거나'(whether long or short)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결정적인 의미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대답이 부정이건 긍정이건 간에, 그리스도인이자 복음 증거자로서의 자산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과 아울러 애정 어린 소망을 기원법의 동사((*, 워사이멘)를 사용하여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 자신과 같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뜻하며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게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18절). 바울의 마지막 말과 행동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는 가이사랴 최고의 군세가들 앞에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다. 더구나 그의 손에는 사슬이 매여 있다. 그런 모습의 바울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권세가들에게 자신에 찬 목소리로 진정한 영적 자유에로의 초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슬 묶인 손을 들어 보이며 마지막 말을 맺을 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아마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성 경: [행26:30]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다 일어나서 - 바울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총독과 버니게 그리고 함께 배석했던 사람들이 일어섬으로써 그날의 청문회는 조용히 마감을 하게 되었다. 더이상 바울을 비난하거나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 경: [행26:31]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심문소를 빠져나간 참속자들은 다른 장소로 옮겨가 바울의 증언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결박하여 둘 만한 혐의점(嫌疑點)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울의 무죄는 천부장 루시아(23:29), 베스도(25:25)에 이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성 경: [행26:32]

주제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주제2: [무죄 판결]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을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바울의 무죄가 최종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석방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그립바의 결론이다. 아그립바는 그밖에도 베스도가 항소 이유서를 작성할 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바울의 무죄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바울이 석방되지 못하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가야되는 현재 상황의 배후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23:11). 바울의 석방되지 못함은 도리어 그에게 가장 안전한 로마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 경: [행27:1]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로마 여행]

⭕ 우리 - 본서에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본문이 네 군데 있는데(16 :10-17;20:5-15;21:1-18), 이곳이 마지막 네번째이다(27:1;28:16). 그러니까 본문의 '우리'는 21:1-18 이후 2년 만에 처음 나오는 셈이다. 이는 가이사랴에서의 2년간(24:27)은 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상태였고 또한 기록의 초점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집중되었으므로 '우리' 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엇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누가가 바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Bruce). 그런데 이제 바울이 기이샤라를 떠나 로마로 이송되는 시점에서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다시 합류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누가는 다시 '우리'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물론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총독의 허락이있어야 했을 것이다.

⭕ 다른 죄수 - 본문에는 죄수들의 죄질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들이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로 로마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의 싸움 대상으로 보내어지는 것이었다고 본다(Lenski, Ramsay, Robertson),

⭕ 아구사도대 - 아구사도대(Augustan Cohort)는 당시 로마의 한 군대 조직인 듯하다(서론 '로마의 행정 및 군사제도' 참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아그립바 왕의 친위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공동번역, 표준성경, NIV, Holtzmann)이다. (2) 사마리아의 군대이다. 이는 아구사도대의 헬라어 '스페이레스 세바스테스'(*)의 '세바스테스'가 사마리아의 수도 '세바스토스'와 유사한 점에 착안한 것이다(Alford). (3) 로마의 황제와 지방의 주둔군 사이의 연락 업무를 맡은 부대로서, '프르멘타리'(frummentarii)라 불리기도 했다(Ramsay,Mommsen). 바울 시대에는 이러한 업무를 수행한 군인들을 '스페쿨라토레스'(speculatores)라고 일컬었던 것 같다(Longenecker, Lenski, Bruce). 대부분의 학자들은 (1)과 (3)의 견해에 동의한다. 따라서 '아구사도대'는 로마 황제의 직할 부대로서 전방 부대를 지도, 통제, 연락하는 '친위대'라고 할 수 있다.

⭕ 백부장 율리오 - 이 사람은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이송하는 아구사도대의 인솔자로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여기서 '율리오' (*' ,율리오스)는 가문명(家問名)일 뿐이다.

성 경: [행27:2]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로마 여행]

⭕ 아드라뭇데노 배 -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아드라뭇데노라는 항구 도시에서 온 배인데, 아시아 지방에서 서방을 오가는 무역선인 것같다(Blaiklock) . 아드라뭇테노는 소아시아 북서해안에 위치한 무시아의 항구 도시이며 레스보스(Lesbos) 섬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의 이름은 '아드라미티'(Adramiti) 혹은 '에드라미트'(Edramit)이다(Whitelaw). 본장 강해에 있는 지도를 참조하라. 이들이 탄 배는 소아시아 해안올 따라 운항하는 비교적 적은 규모의 배였므로 그것을 타고 지중해를 건널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간 어디에선가 지중해를 횡단하는 큰 배로 바뀌탈계획이었을 것이다. 가장좋은 방법은 가이사랴를 출발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바로로마로 향하는 큰 배를 타는 것이었으나 때 맞추어 그런 배틀 만나지 못한 듯하다.

⭕ 아리스다고 - 바울이 로마로 이송될 때 그와 동행한 자는 누가 말고도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이 더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누가는 의사로,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시중드는 자로 함께 승선(乘船)하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이 두 사람이 바울의 노예로 자처하여 동행함으로써 백부장 율리오의 눈에 바울올 중요한 인물로 보이게끔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amsay). 아무튼 아리스다고는 몬 24 절과 골 4: 10에서 바울의 동역자요 함께 갇힌 자로 재등장하는데, 이 두 서신이 로마 감옥에서 씌어진 것이라고 볼 때 아리스다고가 바울의 로마 여행에 계속 동행했음은 분명하다.

성 경: [행27:3]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로마 여행]

⭕ 시돈에 대니 - 시리아 해안의 조류(潮流)는 북쪽으로 흐르는데,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이 조류를 따라 약 23시간 가량 걸려 시돈에 도착한 것이다(Breusing).

⭕ 친구들에게다...허락하더니 - 본절과 43절은 백부장 율리오의 특별한 친절을 보여 준다. 아마 베스도는 바울을 율리오에게 넘겨주면서 다른 죄수들처럼 다루지 말고 관대하게 대우하도륵 특별히 지시을 하였을 것이고, 율리오도 바울의 언행과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누가와 아리스다고)의 극진한 시중을 보고, 결코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을것이다. 아마 배는 짐을 내리거나 싣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따라서 율리오는 이 시간 동안에 바울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여기서 친구들은 스데반의 순교 후에 각지로 흩어진(8:1) 성도들 가운데 시돈에 자리잡고 복음을 전파하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하르낙(Harnack)에의하면 본문의 '친구'라는 명칭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던 칭호였다고 한다(요삼 15절). 황제앞에서의 재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고,또한 항해를 하는 중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불안한 여정(旅程) 가운데서도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바울에게 커다란 위안과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성 경: [행27:4]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로마 여행]

⭕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출항하여 구브로의 남서 해안을 지나 아드라뭇데노로 직항하고자 하였으나 동쪽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서풍을 만나 더 이상 직진할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서풍을 막아줄 수 있는 구브로 섬 동쪽 해협을 따라 우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 경: [행27:5]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로마 여행]

⭕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러 - 배는 구브로를 서쪽에 두고 북상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해안을 지나 항해를 계속하였는데 이 항해는 그 해안을 따라 흐르는 해류와 밤에 대륙에서 바다를 향해 부는 대륙성 기류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을 이 항해는 그럭저럭 소아시아의 가장 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루기아의 항구 무라에 도착하였다. 이때 소요된 항해 기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서방 사본에 의하면 14일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무라 항은 애굽에서 오는 곡물을 로마로 보내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무라 성읍은 항구로부터 내륙쪽으로 약 3.2 Km거리에 있었다. 바울 일행을 태운 아드라뭇데노 배는 가이사랴에서 무라까지 항해하였고, 무라에서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내려주고 계속해서 아드라뭇데노로 향했을 것이다(지도 참조).

성 경: [행27:6]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로마 여행]

⭕ 이달리야로...알렉산드리아 배 - '이달리야' (*, 이탈리아)는 로마를 수도로 하는 이탈리아 반도를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알렉산드리아 배는곡물 운반선이었을 것이다. 당시 애굽은 로마 제국의 주요 곡창지(穀創地)였고, 거기서 생산되는 곡물들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곡물선을 통해 로마로 운송되었다. 곡물선들은 알렉산드리아 항을 떠나, 그레데 남방을 거쳐 로마로 직접 항해하는 것이 빨랐지만, 대부분의 선박들은 풍향 사정 때문에 무라 항을거쳐가는 것이 상례였다. 바울 일행이 올라탄 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전형적인 곡물 운반선이었지만(38절), 여객선 역할도 하며 무려 276명이나 되는 사람을 태울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배들이 많았는데, 개인기업의 소유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로마 정부와 특별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로마정부에 대해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바울 일행을 배에 태우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성 경: [행27:7]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로마 여행]

⭕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 무라를 출발한 배는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다가 강한 북서풍을 만나 매우 어려운 항해 끝에 겨우 니도에 이르렀다. '간신히'의 헬라어 '몰리스'(*)는 '수고', '고생'을 뜻하는 '몰로스'(*)에서 온 말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어렵게 항해하여 니도에 다다랐음을 말해준다. 니도는 소아시아 서남단의 도리스 반도 서남쪽 끝에 있는 도시로 무라에서 약 223Km정도 떨어져 있어서 순풍을 등지고 항해할 경우 이틀 정도면 족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정도의 거리를 여러 날 걸려 힘겹게 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항해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니도는 아시아 지역의 자유 도시였고 이탈리아 반도를 향하여 에게해를 가로질러 가려는 배들이 서쪽으로 항해하던 중 마지막으로 기항(寄港)하는 항구였다. 그런만큼 니도항의 규모는 제법 컸고 정박하는 배들을 위한 편의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 그레데 - 무라를 출발한 배는 니도를 경유하여 서쪽 으로 항해를 계속하려 했다. 그래서, 그레데 섬을 남쪽으로 바라보며 에게해를 통과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역풍을 받지 않고 순풍만을 의지할수 있을 때 가능한 항로였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니도에 이르렀을 때는 북서풍이 너무 강하여 더 이상 서쪽으로의 항해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제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양자 택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니도에 머물면서 순풍이 불기틀 기다리던지 아니면 본문에서처럼 니도에서 남하하여 살모네를 지나 그레데 섬을 바람막이로 하여 서쪽으로 항해를 하는 것이다. 그레데 섬은 그리이스 본토에서 남쪽으로 100Km정도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큰 섬들 가운데 대표적인 섬으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 섬의 동서 거리는 약 255Km 정도이고 남북의 거리는 10Km에서 50Km에 이르는 좁고 길쭉한 섬이다. 좁고 길쭉한 섬이다. 좁고 길다란 이 섬을 방파제 삼아 서쪽으로 항해할 경우 북서풍이 상당히 많이 차단되므로 항해는 계속될 수 있었다. 딛 1:5에 의하면 그레데 섬에도 교회가 있었고 디도가 그곳에 파송되어 사역을 한 적도 있다. 한편 본문의 살모네는 그레데 섬의 동쪽 끝의 돌출부에 위치해 있었다.

성 경: [행27:8]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로마 여행]

⭕ 미항...라새아 성 - '미항'(*, 칼루스 리메나스)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항구'라는 뜻인데 이곳은 지금도 동일한 뜻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리메오나스 칼로우스, Limeonas Kalous). 그런데, '아름다운'(fair) 이라는 말은 이 항구의 좋지 않은 특성 때문에(12절) 비꼬는 식으로 불리어진 것 같다(Whitelaw). 이 미항은 그레테 섬의 중간쯤에 위치한 남해안의 자그마한 만(灣)만으로 오래도록 머물 만한 곳은 못되나 잠시 바람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레데섬이 바람막이 역활을 해주었지만 완벽하게 바람을 막아 준 것은 아니어서 항해는 결코 쉽지가 않았고 따라서 미항에서 쉬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본절에서도 항해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간신히'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7절). '라새아 성'은 이곳 '미항'에서 동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성 경: [행27:9]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금식하는 절기 - 이는 디스리 (Tishri)월 (태양력으로 9-10월경) 10일에 지켜졌던 속죄일을 의미한다(민 29: 7-11). 브루스(Bruce)에 의하면 로마 여행 당시인 A.D.59년의 속죄일은 태양력으로 10월 5일경이었다고 한다.

성 경: [행27:10]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내가 보니...손해가 있으리라 - 바울은 지금이 항해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차례의 여행 경험이 있었고 또한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하여 위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고후 11:25). 따라서 바울은 항해를 중단하고 겨울을 지낸 후에 다시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할 수 있었다. 혹자는 본절에 언급된 이 바울의 말이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점을 고려하여(18, 19, 38, 41절),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하나(Haenchen), 이것이 그의 경험적 지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예언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통하여서도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성 경: [행27:11]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백부장이...더 믿더라 - 바울과 선주측 (선장은 포함) 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겨울을 이곳 미항에서 나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서 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전자를 주장했고(10절), 선장과 선주는 후자를 주장했다(12절). 여기서 최종적인 결정권은 백부장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그 백부장이 이 배에서 가장 높은 로마의 장교였고, 그 배는 로마 정부와의 계약 관계로 로마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백부장의 입장으로는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고 있는 바울의 말보다는 항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믿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21, 22절) 바울의 권면을 듣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제안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이 배의 운명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될 것이다(10절).

성 경: [행27:12]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 공동 번역에는 '그 항구는 겨울을 날 만한 곳이 못되어'로 되어 있다. 여기서 '과동'(過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케이마조'(*)는 '통과하다'를 뜻하는 '파라'(*)와 '겨울'을 뜻하는 '케이몬'(*)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겨울을 통과하는 것' 즉 ' 겨울을나는 '것을 뜻한다. 미항이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로 숙소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만이 적고 추워서 겨울철의 거센 폭풍을 견디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Bruce, Lenski).

⭕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 '뵈닉스' (Phoenix)는 감람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레데 섬의 서남쪽 끝에 있으며 미항으로 부터는 약 65Km 정도 거리에 있는 항구이다. 오늘날에는 '루트로'(Lutro)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미항에 비해 겨울을 나기에는 적합하다고 하는데 이는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Smith). 본절에 의하면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나자고 하는 의견과 미항에 머물면서 겨울을 나자는 의견으로 갈린 듯하며 뵈닉스를 지지하는 자가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카타 리바카이 카타코론'(*)은 문자적으로 '남서를 향하여 '그리고 북서를 향하여'라는 의미이다(Bruce, Meyer). 따라서 개역성경의 '동북, 동남을 향하여'란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뵈닉스 항구의 양쪽 입구가 각각 북서쪽과 남서쪽에 있고 서쪽면에는 큰 만이 있어서 마치 이 항구가 서쪽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성 경: [행27:13]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남풍이 순하게 불매 - 때마침 불어준 남풍은 뵈닉스로 옮기기로 한 결정이 현명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심하여 닻을 감아 올리고 그레데 해변에 바짝 붙어 서쪽으로의 항해를 계속했다.

성 경: [행27:14]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유라굴로라는 광풍 - 순풍에 의지하여 순항을 하던 배가 마다라곶을 돌아서 멧세라만에 들어서자 갑작스런 태풍에 휘말리게 되었다. 여기서 '광풍'(*, 아네모스 뒤포니코스)은 '태풍'을 가리킨다. '유라굴로'(*, 유라퀼론)는 '동풍'을 뜻하는 헬라어 '유로스'(*)와 '북풍'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낄로'(aquilo)의 합성어로 '동북풍 '을 가리킨다. 이 바람은 지형의 영향으로 생기는 바람인데 남풍이 그레데섬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2100 Km 높이의 이다(Ida)산맥으로부터 생기는 두 반대 기류의 충돌로 생긴 태풍에 휩싸이면서 강력한 북동풍이 되는 것이다. 일단 이 바람을 만나면 배는 방향을 조절할 수없는 상태가 되어 속수 무책으로 아프리카 방면으로 밀리다가 모래톱이나 암초에 부딪히면 파선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행27:15]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배가 밀려 - 유라굴로에 걸려든 배는 바람이 불어가는 대로 밀려갈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선장 이하 선원들이 배를 조종 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채 바람과 파도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배는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곳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행27:16]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가우다라는 작은 섬 - 본문의 표현 대로 작은 섬이며, 뵈닉스에서 남서쪽으로 35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그러니까 배는 상당한 거리를 떠밀려 온 것이다. 그러나 이 배가 가우다섬 아래로 밀려온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이 섬이 조금은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선원들은 배고물에 매달려 위태했던 거룻배를 갑판 위로 끌어 올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거룻배는 배고물에 매달아 끌고 다니지만 거친 폭풍을 만나면 배에 부덫혀 파선될 위험이 있으므로 갑판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상례였다. 이 거룻배는 큰 배가 암초에 걸려 파선하게 될 경우 타 항구 시설이 없는 곳에 비상 상륙을 해야 될 경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행27:17]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끌어 올리고... 선체를 둘러 감고 - 거룻배 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고 폭풍은 여전히 몰아쳤으므로 그것을 끌어 올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누가는 7절에서와 같이 '간신히'라는 표현을 쓰고있다(16절). 줄을 가지고 선체(船體)를 둘러 감은 것은 배를 조금이라도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에는 배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했므로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라도 배의 견고성을 강화시켜야 했던 것이다.

⭕ 스르디스 - 이는 바다에 있는 모래톱, 모래 수렁, 또는 유사 (流砂)를 가리킨다. 그레데 서남방으로는 이 스르디스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큰 것으로(Syrtis Major) 구레네 서쪽의 아프리카 해안에 있고, 다른 하나는 작은 것으로(Syrtis Minor) 카르다스(Carthase) 부근에 있다. 본문의 스르디스는 큰것(Syrtis Major)을 가리킨다고 본다(2Bruce, Lenski).

⭕ 연장을 내리고 - 스르디스에 걸리면 배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하여 선장은 아직 스르디스와는 먼 거리에 있지만 미리 연장을 내려 대비시키고 있다. 이처럼 미리 대비해야 하는 이유는 태풍이 불어오면 며칠이고 계속 불어대므로 (20절), 언제 그곳까지 밀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장'(*, 스큐오스)이 무엇을 가르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배에서 사용되는 것들, 그러니까 돛, 돛대, 닻, 밧줄, 등을 가르키는 것으로 본다(Zahn, Robertson,Bruce). 결국 배의 선원들은 배가 서남쪽으로 떠밀려 가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하여 돛을 내리고 닻을 내리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행27:18]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 본문은 폭풍이 조금도 약화 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음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을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항해하던 배가 폭풍을 만나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짐을 버리는 장면은 욘 1:5에서도 볼 수 있다. 혹자는 점점 차는 바닷물로 인해 무거워진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비교적 무거운 곡물을 버렸다고 보기도 하나(Breusing), 38절에서 곡물을 최종적으로 버리는 점을 고려할 때 본문에서는 갑판 위에 있던 수하물(手荷物)을 버린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Renie)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행27:19]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배의 기구를...버리니라 - 많은 짐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 지지 않았다. 다음날은 배의 기구를 버려야 했다. 여기서 '기구'(*, 텐스큐엔)가 뜻하는 것에 대해서는, 배의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 등을 가리킨다고보는 견해와(Breusing, Preuschen, Jacquier) 침구, 테이블, 의자 등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Lenski, Meyer, Vincent).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배의 무게를 많이 줄여야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전자를 버리는 것이 후자를 버리는 것보다 배를 가볍게 하는데는 효과적이므로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한편 본절의 '저희 손으로'라는 표현은 뱃사람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기구들을 버려야만하는 비참한 상황을 강조적으로 묘사하는 효과를 가지는데, 그것은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강행한 불신의 결과였다(10절).

성 경: [행27:20]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다에서 만난 광풍]

⭕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 바다의 풍랑은 잠잠 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늘에 끼인 짙은 구름은 낮의 해와 밤의 별빛을 완전히 차단 하였으므로 배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채 절망적인 표류를 하고 있었다. 항로를 이탈한 배에게 있어서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해와 별마저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 어디서 암초를 만나거나 모래톱에 걸려파선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기는 무방비 상태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살아 돌아갈 희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선장과 선주이하 선원들은 전문가로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으나(18, 19절) 어떻게 할 수 없는 악천후(惡天候) 속에서는 절망뿐이었다.

성 경: [행27:21]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 배에 탄 사람들은 갑작 스럽게 불어 닥친 태풍 때문에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파도와 바람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배 속에서 지독한 멀미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음식을 먹지 못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바울이 가운데 서서 - 절망과 허기 속에 있던 무리들 가운데 바울은 지난날 자기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나서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한 구원의 길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바울이 절망과 낙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 내는 까닭은 결코 그들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판단과 자신의 옳은 판단을 다시한번 확인시키기 위함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부터 자기가 하나님을 힘입어 판단하고 지시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믿고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성 경: [행27:22]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안심하라...배 뿐이리라 - 드디어 바울은 희망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풍랑이나 허기짐보다 오히려 삶의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먼저 그들의 불안을 제거시키기 위해 배는 잃게 되더라도 생명은 잃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계시해 주었기 때문이다(23, 24절).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들은 그 즉시는 안심하지 못했고 구체적인 징후들이 보인 뒤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27- 36).절

성 경: [행27:23]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하나님의 사자 - 바울은 자기의 이야기가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가 계시해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사자'의 헬라어 '앙겔로스' (*) 는 '천사' 로 번역할 수도 있다(공동번역). 배에 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교도들이었을 것이므로 이들도 알아들을 수있는 '천사'의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바울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해주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18:9, 10;22:17-21; 23:11). 그러나 바울은 자기에게 나타난 천사가 이방인들도 알고 있는 동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천사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은연중 사람들에게 선교을 하고 있다.

성 경: [행27:24]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 본래부터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23:11). 본절은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끝까지 관철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가 바울에게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하지 않고 '가이사 앞에서 서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의 삶이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즉 바울의 삶은 오직 복음 선포로 인하여 의미가 있는 것이다.

⭕ 너와 함께... 주셨다 - 이는 바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와 함께 한 이백 칠십 오 명의 생명도 살려 주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주셨다'(*,케카리스타이)는 '선물',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에서 온 동사 '카리조마이'(*)의 완료 중간태이다. 말하자면 바울과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을 바울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뜻이 된다. 아마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성 경: [행27:25]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안심하라...하나님을 믿노라 - 바울은 하나님 께서 주신 계시에 거해서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바울의 말을 믿고 안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바울의 믿음은 매우 확고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바울의 이런 확실한 신앙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절망적인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 신앙의 독특함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재판을 받으러 끌려가는 죄인 이상의 어떤 고상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을 것이다.

성 경: [행27:26]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한 섬에 걸리리라 -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장래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 '배가 어느 한 섬에 걸릴 것이고 그러면 배는 잃게 될 것이나 사람들의 생명은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일어날 결과는 바울의 믿음과 하나님의 신실성을 사실로 드러낼 것이다.

성 경: [행27:27]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열 나흘째 되는 날 -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미항에서 멜리데 섬까지 약 800Km 이르는 거리를 14일간 유라굴로라는 태풍에 떠밀려 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지역에서는 수일간 계속되는 태풍 때문에 11-3월 사이에는 항해가 중단된다.

⭕ 아드리아 바다 - 오늘날 에는 이탈리아와 유고 슬라비아 사이의 바다를 이렇게 부르는데 당시에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그레비 섬, 헬라사이의 바다를 가리켰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이 탄 배가 팔레스틴에서 로마로 항해하다가 아드리아해 한 가운데서 난파당했던 일을 기록에 남겨놓았다(Jos., Vita 15).

⭕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 배가 육지에 가까와 지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배 밑에 있는 방류묘가 밑바닥에 부딪히는 것으로 알았다(Breusing). (2) 배가 동쪽에서 성(聖) 바울(St. Paul)만으로 들어갈 경우 반드시 쿠라 곶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지날때 쿠라 곶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듣고 알았을 것이다(Smith, Beg, Lenski). 두 견해가 다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전자의 견해는 방류묘의 길이가 36M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므로(28절 주석 참조, Haenchen), 후자의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만약 쿠라 곶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배에 탄 사람들이 들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삶에의 희망을 보여주는 기쁨의 소리로 들었을 것이고 그를 통해 바울의 예언이 사실로 다가옴을 서서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2절).

성 경: [행27:28]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이십 길...열 다섯 길 - 여기서의 '길' (*, 오르귀이아)은 '뻗치다' 를 뜻하는 '오레고'(*)에서 온 말로 양 팔을 벌려서 쭉 폈을 때 한손의 중지 끝에서부터 다른 손의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나타낸다. 이 길이는 대략 1.8m로 본다. 그러니까 본문의 '이십 길'은 수심이 36m였다는 뜻이고 다음에 잰 '열다섯 길'은 수심이 27m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수심이 빠른 속도로 얕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암초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짐을 나타낸다.

성 경: [행27:29]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고물로 닻 넷을 주고 - 닻은 배를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밧줄이나 쇠줄에 매어 물에 던지는, 쇠나 나무 따위로 만든 무거운 물건이다. 고물은 배의 뒷꼬리 부분을 가리킨다. 닻을 배의 뒷부분 즉 고물에서 내리는 것은 보통의 일상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본래 닻은 이물 즉 배의 앞머리 부분에서 내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 닻을 고물에서 내린 것은, 배가 해변 가까이 접근해 있고 폭풍이 몹시 불어대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이물에서 닻을 내려 배의 앞부분이 고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바람과 파도가 배를 해변쪽으로 밀어 붙이면 배의 뒷부분이 180도 앞으로 돌아갈 수가 있고 그 과정에서 배가 암초에 부딪히는 일이 발생할 수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 닻을 고물에서 내린 것은 현명한 조처였다고 할 수있다. 닻을 네 개나 내린 것은 가능한 한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행27:30]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 닻을 내려 배의 전진을 억제시킨 지금의 상황에서 밤만 무사히 지낸다면 날이 샌 후에 육지에 상륙 할 수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었었다(22-15절). 그러나 선원들이 밤사이에 있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염려와 바울의 말을 믿지 못하여 자기들끼리 도망가려고 했다. 이들은 이물에서 닻을 내리려는 체하며 거룻배를 내려 타고가려고 했다.

성 경: [행27:31]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바울이 백부장과...얻지 못하리라 - 이물에서 닻을 내리지 않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닻을 내리려는 선원들의 행동은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었으며 바울은 그들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그들의 도망을 저지시키도록 충고했다. 지금과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선원들이 없어져 버린다면 배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 다음날 상륙할 때에도 경험이 많고 노련한 선원들은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성 경: [행27:32]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 바울은 사공들의 도주를 저지 시키라고만 했을 뿐 거룻배를 버리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군사들이 거룻배의 줄을 끊어버림으로써 거룻배는 바다에 버려졌다. 이것이 백부장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면,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못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룻배는 다음날 육지에 상륙할때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그들은 다음날 배를 해안에 갖다대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고 그것은 실패로 돌아간다(39 -41절).

성 경: [행27:33]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음식 먹으라 권하여 - 날이 새려고 할 무렵 바울은 우선 배에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것은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겠지만 곧 날이 새면 상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비상 사태에(43, 44절)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열나흘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고 주렸음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먹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열 나흘을 주렸다는 것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기간을 지내왔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14일을 폭풍에 시달려 왔다면 상당수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겨우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만큼의 음식만 섭취하였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Bruce, Haenchen,Robertson, Lenski).

성 경: [행27:34]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 - 이제 먹는 것은 단지 주림을 해소하거나 기운을 차리게 하는 차원을 넘어 생명의 보존과 관계된다. 여기서 '구원'(*, 소테리아)은 육체적인 구원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는데 히 11:7에도 같은 용법이 발견된다. 바울이 날이 밝은 후 상륙을 시도할 때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견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결과론적으로 지금 음식을 먹는 것은 다음날 육신의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43, 44절).

⭕ 머리터럭 하나라도 - 이 문구는 구약 시대 부터 전해져 왔던 격언 형식의 문구로(삼상 14:45;왕상 1: 52),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에 의해 인용되기도 했는데(눅 12:7), 본서에서 바울이 다시 인용하고 있다. 이와같은 바울의 자신있는 안전 보장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불안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성 경: [행27:35]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떡을 가져다가... 축사하고 - 바울이 떡을 가져다가 축사 하고 떼어 먹은 이 식사 행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다. (1) 기독교인의 성만찬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Belser, Olshausen, Ewald). (2) 유대인의 가정에서 식사할 때 가장이 축사하는 것에 따른 것이다(Meyer, Hackett). (3)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없이 누구나 알고 있었던 식사 때의 감사기도였다(Haenchen, Wendt1). 이상의 세 견해 가운데 첫번째 견해는, 본문의 표현이 예수께서 하셨던 축사와 유사한 점은 있으나(눅 24 :30) 그것이 성만찬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점과 지금 바울과 함께 있는 절대 다수가 이교도들이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둘째 견해는 지금 바울이 유대교인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유대교 뿐만 아니라, 모든 헬라 세계에 일반적으로 식사에 대한 기도가 있었다. 다만, 여기서 바울이 축사를 하였을 때는, 명백하게 바울의 방식대로 축사의 내용이 말하여졌을 것이다.

성 경: [행27:36]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저희도 다...먹으니 - 바울의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도 담대하고 평안해 보였으므로 다른 모든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식사를 시작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신뢰하기 시작 하였고 절망에서 벗어나 안심하기 시작한 것이다(22, 25절).

성 경: [행27:37]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이백 칠십 육 인 - 음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음식을 먹은 후에 상륙할 것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인원 점검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어본 것인지 분명치 않다. B사본에는 76명이 배에 타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고 당시 선박의 취약성으로 인해 숫자가 적다는 점에서 이 B사본을 지지하는 학자도 있으나(Weiss) 숫자가 적은 것이 타당성을 갖는다고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요세푸스가타고 가다가 난파 당했던 배에는 600명 가량이 타고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Jos.,Vita 15) 276명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 경: [행27:38]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바울의 위로]

⭕ 배부르게 먹고...버려 - 모두가 배부르게 먹어 기운을 차린 뒤에는 밀을바다에 던져버려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였다. 이때 버린 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1) 전에 짐을 버릴 때 (18절) 일반 화물과 함께 곡물 대부분을 버리고 식량으로 조금 남겨놓은 것 중 지금 먹고 남은 것을 버렸다(Bruce, Meyer, Weiss).(2) 이전에 버린 것은 곡물을 제외한 일반 화물이었다고 보아 지금 버린 것이 바로 운송하던 곡물 전부였다(Holtzmann, Haenchen, Knowing). 처음에 버린 것이 곡물이었다고 보기 어렵고(18절 주석 참조), 먹다 남은 식량을 버리는것이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데 사실상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볼 때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소중한 곡물까지도 버려야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해변가까이에 접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는 거룻배도 버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헤엄을 치거나 물에 뜨는 물체에 의지해서 상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바울의 예언이 점점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22절).

성 경: [행27:39]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광풍으로부터의 구출]

⭕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 28:11에 의하면 이 섬은 결코 선원들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여기서 혹자는 선원들이 멜리데 섬을 분간하지 못했을 리 없다고 보아 이곳이 멀리데섬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한다(Haenchen). 그러나 이 배가 상륙한 곳이 멜리데 섬의 주항(主港)인 발레타(Valetta)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Smith, Bruce). 후에 이 배가 들어간 이곳을 '성 바울 만'(St. Paul's Bay)이라고 불렀다.

⭕ 해안 - 이의 헬라어 '아이기알로스' (*)는 '평평한 모래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ruce, Haenchen). 그러니까 바울이 탄 배는 정식으로 된 항구에 배를 댄 것이 아니라 평평한 모래밭에 비상 상륙을 시도한 것이다.

성 경: [행27:40]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광풍으로부터의 구출]

⭕ 닻을 끊어 - 평평한 모래밭에 배를 들이대고 상륙을 시도 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이제 거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일만 남았다. 일단 배를 고정시켰던 닻을 끊어 버렸다. 닻을 들어올릴 수도 있었을 텐데 끊어버린 것은 아마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여 해안 가까이에 상륙시키려는 목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닻을 버린 것은 더이상의 항해를 포기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미 앞에서는 수하물(18절), 배의 기구들(19절), 곡물(38절)을 버렸고 마침내 여기에서는 닻을 버림으로써 사람을 제외한 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22절).

⭕ 킷줄을...해안을 향하여 - 닻을 끊어 버린 후에는 고정시켜 두었던 키의 밧줄을 풀어 느슨하게 했는데 이는 배가 진행할 때 방향을 조절하기 위한 조처였다. 다음에는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하여 해안으로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이미 앞에서 큰 돛을 버렸으므로(19절 주석 참조). 여기서 사용한 돛은 작은 앞 돛이었을 것이다(Bauer).

성 경: [행27:41]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광풍으로부터의 구출]

⭕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 - 이는 육지로부터 흘러 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곳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모래나 진흙과 같은 점토가 마치 사주(砂洲)와 같은 형태로 형성되어 있다.

⭕ 이물은...깨어져가니 - 본문의 묘사는 배의 앞 부분이 바로 이 점토층에 처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뒷부분은 부딪힐 때의 충격과 뒤에서 때려대는 파도에 의해 깨어져가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성 경: [행27:42]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광풍으로부터의 구출]

⭕ 군사들은...죽이는 것이 좋다. - 보통 죄수들은 쇠사슬로 묶어두는 것이 상례였고 그럴 경우 헤엄쳐 도망갈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본문에 의하면 죄수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갈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아마 곡물을 나를 때 쇠사슬을 풀어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군인들은 죄수들을 안전하게 이송해야할 책임이 있었고(Bruce, Haenchen). 만일 죄수를 놓치거나 잃을 경우 죄수가 받을 형벌을 대신받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12:18,19; 16:25-18), 죄수들이 도망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성 경: [행27:43]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광풍으로부터의 구출]

⭕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 만약 백부장이 부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죄수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바울 역시 죄인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던(3절)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 부하들의 뜻을 막았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나머지 죄수들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상황이었으므로, 바울로 인해 다른 죄수들도 죽음을 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실상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바울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게 된 것이다(24절).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려 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뛰어난 용기와 그가 믿고 있는 신앙의 능력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 헤엄칠 줄...뛰어내려 - 배가 좌초(坐礁)한 곳은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므로 백부장은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을 먼저 뛰어내리게 하여 육지에 헤엄쳐가도록 했다.

성 경: [행27:44]

주제1: [로마로 향하는 바울]

주제2: [광풍으로부터의 구출]

⭕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 나머지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물에 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뭍으로 올라오게 하였다. 그결과 바울의 말대로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구원을 받았고 그밖의 모든 것은 바다에 버려졌다(22절).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다시 한번 증명된 것이다.

성 경: [행28:1]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안즉...멜리데라 하더라 -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육지에 상륙하고 난 후에야 그곳이 멜리데라는 섬인 것을 알았다. 멜리데(*)는 오늘날의 말타(Malta)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섬은 시실리 남쪽 약 98Km, 아프리카 북동쪽 약320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전체 길이가 약 29Km 되고 너비가 15Km 정도 되는 작은 섬이다.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은 이섬에 이주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나 B.C. 218년 로마가 제 2차 카르타고 전쟁 초기에 이곳을 점령하여 다스려 왔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섬을 관할(管轄)하는 행정관을 세웠는데, 그 명칭은 '멜리데의 자치에 있어서 모든 일을 관할하는 우두머리'라는 뜻의 '멜리테시움 프리무스 옴니움'(Melitesium Primus Omnium)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섬에 많은 수의 퇴역 군인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이 섬은 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한편 '멜리데'의 위치에 대해서 현재의 말타(Malta)라고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멜리데'가 달마티아(Dalmatia) 해안 앞에 있는 '멜레다'(Meleda)라고 이해한다(Bryent, Papulus). 그러나 '멜레다'(Meleda)가 멜리데(Malta)의 북동쪽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Adriatic Sea)의 북동쪽 달마티아 해안에 있다는 것은 다음 기항지가 '수라구사'라는 것(12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수라구사는 멜리데(Malta)바로 위에 있는 시실리 섬의 항구 도시이기 때문이다. 결국 후자의 견해는 '아드리아의 바다'(the sea of Adria, 27:27)fmf '아드리아 해'(theAdriatic sea)로 오해한 데 기인한 것일 뿐 정당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바울의 예언은 성취되었음이 확인되었다(27:26, F.F. Bruce).

성 경: [행28:2]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토인들이...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 '토인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바르바로이'(*)는 의성어로 멜리데 섬의 토착민들이사용하는 페니키아어가 '바르'(Bar) - '바르'(Bar)로 들렸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야만인'(Barbarian)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문명화되지 못한 미개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용법상 야만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헬라인들이 그 말을 쓸 때 의미하는 바는 헬라 민족이 아닌 '타민족'을 가리킨다(롬 1:14).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NIV에서는 '섬 사람들'(islanders)로, RSV에서는 '원주민들'(natives)로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배에서 내린 바울 일행에게 적대 행위를 하지 않고 동정을 베풀어 불을 피워준 뒤 추위에 지친 몸을 녹이도록 배려(配慮)해 주었다. 더구나 그들이 베풀어준 친절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친절이었다. 본문이 보여주는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27:24, 25). 여기서 '우리'가 뜻하는 것이 276명 전체를 가리키는지(27 :37) 아니면 바울과 함께한 기독교인의 소그룹을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276명 전체가 하나의 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Haenchen).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에게 모아져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적당한 규모로 무리를 지어 불을 지폈을 것이다(Richard N.Longenecker).

성 경: [행28:3]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독사가...손을 물고 있는지라 - 계속해서 불을 피우려면 많은 나무가 필요했으므로 사람들은 불을 쬐는 틈틈이 마른 나무를 주워 모아야 했을 것이다. 바울은 죄수 신분이기 매문에도 그렇지만 그의 성실한 생활 태도 때문에도 열심히 마른 나무들을 주워다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마른 나믓가지를 한아름 주워다 불에 넣고 옆에 앉아 불을 쬐려니까 그 나무 속에있던 독사 한 마리가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바울의 손가락을 무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서 '독사'(*, 에키드나)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사용한 단어이며(마 3: 7; 눅 3:7), 예수께서도 사용한 바 있는 말이다(마 12:34; 23:33). 그런데 혹자는 오늘날 멜리데 섬에 독사가 없다는 조사 결과와(Preuschen), 바울이 물렸으나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5, 6절), 바울의 손에 달린 뱀이 독이 없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Loisy). 그러나 원주민들이 독사와 독이 없는 뱀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 없고 의사인 누가가 그런 정도의 구별을 못했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 섬에 독사가 없다고 해서 오랜 과거에도 없었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독사가 아닐 것이라는 견해는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태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 상당수의 생물이 멸종하거나 도태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고 보면, 이곳 멜리테 섬의 독사도 이렇게 도태되어 없어진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Ramsay).

성 경: [행28:4]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 원주민들은 틀림없이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것을 확인했고 따라서 그가 죽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왔으나 끝내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되는 것은 필경 그가 살인자이기 때문이라고 여긴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의' (*, 헤 디케)가 끝까지 응보한 것이라고 여겼다. '디케'(*)라는 표현은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인과 응보적 정의의 신개념을 나타내는 것인데 누가가 헬라적 배경에서 정의의 신을 일컫는 이름인 디케(Dike)를 사용하여 표현한 듯하다(Lenski).그러나 정확하게 무엇을 가르키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아마도 멜리데 섬의 토속 신앙의 대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濟藤篤美).

성 경: [행28:5]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바울이...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 바울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손을 흔들어 뱀을 불속에 떨어버렸다. 바울은 독사에게 물렸고, 원주민들은 바울이 죽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바울에게는 이상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막 16:18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절에서 '짐승'으로 표현된 '데리온'(*)은 위험한 짐승 특히 뱀을 가리킬때 사용된 말로 입증되었다(Bauer,Worterb).

성 경: [행28:6]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그가 붓든지...신이라 하더라 - 바울이 뱀에 물렸으므로 당연히 그의 손이 부어오르고 조금 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들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그 원주민들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원주민들은 달리 해명할 길이 없게 되자 바울더러 신(神)이라고 칭하였다. 신의 심판을 받은 자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했던 그들이 이제는 정반대로 바울을 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멜리데섬의 원주민들은 루스드라에서(14:11-18)와는 달리 바울을 신으로 경배하려 하거나 당연히 신에게 취해야 할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들의 말은 바울이 '신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뱀에 물렸으나 기적적으로 생명을 잃지 않은 클레오메네스(Cleomenes)에 대해 '신이 사랑하는 자'(*, 데오필레스) 라고 묘사한 풀루타크의 기록이 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그들의 생각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고 그분의 은총을 입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원주민들로서는 그 이상 달리 생각할수는 없었을 것이다(Haenchen).

성 경: [행28:7]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 - '제일 높은 사람' 이 이 섬의 토착민 추장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이 섬의 최고 행정 책임자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영수' (領袖)를 뜻하는 '프로토스'(*)가 로마에서 파견한 최고 행정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용례가 있음을 감안할 때(Corpus Inscripionum Latinarum10.7465),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름 '보블리오' (*, 포플리오스)는 라틴계 이름으로 보이며 '푸블리우스'(Publius)나 '포필리우스'(Popilius)를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Ramsay, Haenchen, Bruce). 혹자는 누가가 이 사람의 이름만을 기술한 것에서, 석달 동안 바울 일행이 그곳에 머물면서 바울, 누가 그리고 보블리오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 되었음을 추측하기도 한다(Zahn). 아무튼 이 사람은 바울 일행을 자기집에 영접하여 사흘간 친절한 대답을 하였다. 아마 이 사람은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소작인들을 거느닐 만큼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성 경: [행28:8]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열병과 이질 - 여기서 복수형 '푸레토이스'(*) 로 묘사된 열병은 멜리데와 지브랄타의 지중해 해역에 오랫동안 널리 퍼져있던 말라리아와 같은 것이다. 이 열병에 걸리면 그 고통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보통 4개월이상 고통을 당하였고 긴 경우에는 2-4년간 지속되기도 했으며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 병이 멜리데의 염소 젖을 먹고 발병한다는 것과 그 병원체가 미생물 '마이크로코쿠스 멜리텐시스' (Micrococcus melitensis)라는 것이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1887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뒤센테리오'(*)으로 표현된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또다른 질병 '이질'은 곱똥이 나오고 뒤가 잦은 질병을 가리킨다. 의사인 누가는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였으나 병을 고치는 것은 오직 바울의 기도와 안수의 결과였다. 바울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기도를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를 알리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침으로써 자신이 증거하는 복음과 하나님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R. N. Longenecker).

성 경: [행28:9]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병든 사람들이...고침을 받고 -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친 소문은 멜리데 섬 전체에 금방퍼져 나갔고 그리하여 다른 병자들도 바울에게 몰려들어 병고침받기를 원했다. 본문의 '고침을 받고'의 헬라어 표현 '데라퓨오'(*)는 의학적 술어이다. 이에 대해서 람세이(Ramsay)는 누가가 의사로서 치료를 했을 경우 '데라퓨오'가 사용되고 바울이 안수하여 치유한 경우에는 '이아오마이'(*)가 사용된다고 구분하며 더 나아가 하르낙(Harnack)은 본문의 병자들이 누가의 치료를 받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의학적인 치료와 기적적인 치유가 단어의 사용에 의해 드러난다고 하는 람세이(Ramsay)의 분석은 일리는 있지만 보편성을 갖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치유 행위에 대해서는 위의 두가지 동사가 모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눅6 :18 참조). 물론 본문에 나오는 치유에 대해서 의사인 누가가 전혀 참여하지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구태여 바울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누가가 가볍게 치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치유의 주체가 바울이라는 것이며 '치유를 받았다' (*, 에데라퓨온토)는 의학적 표현은 바울의 이적적인 치유가 의학적으로 완치(完治) 판정을 받은 것임을 밝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행28:10]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 섬에 도착]

⭕ 후한 예로...대접하고 - 바울 일행과 섬 사람들 사이에 매우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본문의 '후한 예'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메'(*)는 의사의 치료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서 사례금을 지급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Bauer, Worterb), 그렇게 보는 것보다는 고마운 행동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Haenchen).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머물때 뿐만 아니라 떠날 때에도 항해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해 주었다. 아마 식량과 의복 같은 필수품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 한 사람에 의해 그와 함께 있던 275명의 사람들도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해 주는 것이었다(27:24).

성 경: [행28:11]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에서 로마로]

⭕ 석 달 후에 - 당시에는 선박들이 겨울 철 3개월 동안 항해를 중단하는게 일반적인 통례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를 출발하여 가이사랴로 가는 사절들이 겨울철 항해 중지 기간으로 인해 3개월간 중간에 머물러야했다(Josephus). 항해가 재개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2월 8일에 서풍이 불면서 시작되었다는 기록(Pliny theElder, Natural History)과 3월 10일까지는 항해가 불가능했다는 기록이(Vegetius, onMilitary Affairs iv. 39) 있다. 그런데 후자의 기록은 근해 항해가 아니라 먼 바다의 항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Bruce), 따라서 전자의 기록에 의거해 볼 때 바울 일행이 탄 배가 태풍을 만나 파선당한 것은 11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

⭕ 알랙산드리아 배...디오스구로. - 바울 일행은 마침 그곳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지낸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날 수 있었다. 아마 그 배는 멜리데 섬의 '발레타'(Valletta) 항구에서 겨울을 지냈을 것이다. 여기서의 '우리'가 276명 전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백부장과 그의 부하 군인들과 죄수들 그리고 바울과 누가, 아리스다고를 포함하는 그룹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배도 곡물 수송선이었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 누가는 이배의 이름을 '디오스구로'(*) 라고 밝히고 있다. '디오스구로'는 제우스(Zeus)와 레다(Leda)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를 가리킨다. 이들 쌍동이 별자리'제미니'(Gemini)는 폭풍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해주는 항해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아마 이 배의 앞 머리 양편에는 이 쌍동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 '디오스구로'라는 명칭이 씌어 있었을 것이다(Longenecker).

성 경: [행28:12]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에서 로마로]

⭕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 이 도시는 시실과 섬의 수도로 섬의 동해안 남쪽에 있는 중요한 항구이다. 멜리데로부터 약 150K 떨어져 있고 성의 둘레가 35Km 되는 번창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테스(Archimedes)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B.C. 734년 고린도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하였고, B. C. 212년 이후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이 배가 왜 이곳 수라구사에서 사흘간 머물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1) 멜리데에서 불어오던 남풍이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와(Bruce) (2) 심한 역풍(逆風)을 만났거나 짐을 내리고 새 짐을 싣고 가기위해서였다(Haenchen)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성 경: [행28:13]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에서 로마로]

⭕ 레기온 - 이는 오늘날의 '레기오 디카라브리아' (Reggio di Calabria)를 가리는데 메시나(Messina) 해협의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있는 항구이다. 지리적 위치상 중요한 항구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폐항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남풍이 불기를 기다리며 하루를 묵었다.

⭕ 남풍이 일어나므로...보디울에 이르러 - 바로 다음날 남풍이 불어 주었기 때문에 더이상 지체하지 않아도 되었다. 레기온에서 340Km 떨어진 보디올까지 이틀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보디울'(Puteoil)은 '작은 샘'이라는 뜻을 가지며 오늘날은 포주올리(Pozzuoli)라고 부른다. 보디올은 나폴리 만에 위치한 네압볼리(Neapolis)의 외항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송해온 곡물들은 이곳에서 내려져 내륙으로 운반되었다. 보디올에 도착함으로써 바울은 긴 해상 여행을 끝내고 로마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이제 로마까지는 불과 220Km 밖에 안 남았고 그 정도의 거리는 건강한 장정이 아피오도로를 통해 걸어서 오 일이면 갈 수 있었다(Zahn).

성 경: [행28:14]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 믿는 사람...믿지 아니하는 사람 -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한 바울의 증언은 노력에 비해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의 믿는 사람을 얻었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때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본다(26, 27장). 유대인 동족(同族)에게 복음 증거하여 믿음을 갖게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극히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던 경우는 본서에 여러 차례 기록된 바이며(14:4; 17:4; 19 :9) 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고 동족을 포기하지도 않았다(롬9-11장).

성 경: [행28:15]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멜리데에서 로마로]

⭕ 압비오 저자 - 이는 압비우스 광장(Forum of Appius)을 가리키며 로마로 부터 6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압비아 대로상에 있다. 이 대로는 B.C. 312년 로마의 감찰관 압비우스 글라우디오(Appius Claudius)가 이 도로의 건설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도로는 로마로 향하는 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도로의 하나로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의 입성을 할 때, 군중들이 열열한 환영을 하며 맞이하던 길이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그 길을 걷고 있지만 사실상 그 길은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기 위한 영광의 길이었다.

⭕ 삼관 - 이 지명은 '트리온타베르논'(*)을 의역한 것으로 삼관(三館) 즉 '세 개의 숙소'(Tres Tabernae)라는 뜻이다. 이곳은 로마로부터 50Km정도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두 곳에서 바울을 맞기 위해 기다려고 있었던 것이다.

⭕ 맞으러 오니...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 바울과 로마 교인들과의 만남은 매우 감격적인 것이었다. 바울로서도 일찍이 와보려고 했었고(19: 21), 또한 주님께서도 그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과 약속을 주신 일이 있던(23:11;27:24) 로마에 오게 되었으니 그 기쁨과 감사가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이곳 로마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그를 환영해주었으니 마음이 든든했을 것이다. 본문의 '맞으러'는 '아판테신'(*)으로 어떤 도시의 대표단이나,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 쓰는 단어임을 생각할때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서 얼마나 뜨겁게 환영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성도들을 만나기 전에는 절망을 하거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음으로 해서 낯선 곳에 대한 어색함이 없어지고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Bruce).

성 경: [행28:16]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 로마에 들어가니 - 드디어 바울이 로마애 당도했다. 오래된 서방 사본에는 "백부장이 죄수들을 시위 대장에게 넘겨주었"다는 문구가 첨가되어 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였으므로(25:11) 황제 휘하의 부대 책임자에게 넘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 바울은...한 군사와 함께 따로 - 누가는 중간 과정에 대한 자세한 언급 없이 바울이 한 군사에 의해 따로 감시를 받게 되었다는 결과 만을 언급하고 있다. 몸센(Mommsen)에 의하면 군인에 의해 따로 감시받게 한 것은 감옥에 감금시키는 것보다 가벼운 형벌이었다. 아마 거기에는 베스도의 긍정적인 조서(25: 25; 26: 32), 그리고 호송 책임자였던 율리오가 바울에 대해 경험한 대로 작성한 긍정적인 보고서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로마법에 의해 군인의 한 손과 바울의 한 손이 사슬에 묶인 상태였는지 아니면 자유롭게 활동수 있도록 허락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화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자유가 허용된 것은 사실이다(17-23절).

성 경: [행28:17]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 바울이 로마에 도착 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지도자급 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하나의 통합(統合)된 공동체 기구를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보며, 따라서 바울이 초청한 이들은 개별적 공동체들의 장로, 지도자, 회당장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본다(Wendt). 유대인들이 로마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마카비 시대(B.C. 166-63)부터 였고, B.C.63년 에는 폼페이가 유대의 독립운동을 진압한 후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오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에는 제법 많은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실례로 B.C. 6년 유대인들이 헤롯 아켈라오의 폭정을 로마에 고소하기 위하여 50명의 대표를 파견 하였을 때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이 무려 8,000명이나 동조하였다는 기록이있다(Josephus. Anitp. xii. 1). 바울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자기의 숙소에 초청한 것은, 그가 죄수의 신분으로서 활동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고, 그들을 초청한 목적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자신을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는 자기에 대해 어떤 소식을 전해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거기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바울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판단하여 황실(皇室)에 뇌물을 주면서 부정적인 내용의 고소를 한다면 바울로서는 여간 괴로운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23절). 바울 자신로서는 개인의 일신상의 안전을 염려하는 것보다는 무엇보다도 복음을 중거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 형제들아...배척한 일이 없는데 - 바울은 정중한 태도로 자신이 로마에 재판을 받기 위해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그는 자기가 동족인 유대인을 거스리거나 유대의 관습을 반대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없게 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허위의 누명을 씌워 사형(死刑)을 가하려 했으나 로마 군사들이 구해준 일(21: 32, 33)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다만 무죄하게 로마인의 손에 넘겨졌다고만 진술함으로써 가능한 한 반유대 감정을 배제하고 있다.

성 경: [행28:18]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 로마인은...놓으려 하였으나 - 로마인이라 함은 천부장 루시아의 총독 벧릭스 및 베스도를 가리키며 그들은 모두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23:29; 24: 22-26). 그러나 이들이 바울을 석방하고자 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적극적으로 바울을 놓아주고자 한 일이 없고 베스도 같은 경우에는 도리어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25:9).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진술이 결코 허위는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려 했던 것은, 자기가 지금 재판을 받기위해 로마에 이송되어 온 것이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적대감 내지는 오해 때문이었다는 것 즉 유대인들이 원인 제공자라는 것과 거기에 비해 로마인들은 부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것이었다. 한편 로마인들은 바울을 놓아주려 했으나 유대인들이 방해했기 때문에 석방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예수의 모형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바울의 유사성을 보여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성을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신학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3:13 참조).

성 경: [행28:19]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 마지못하여...아니로다 - 본절에서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유대인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있다.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적대 의식 때문에 불가피하게 가이사에게 상소(上訴)하기는 했지만, 조금도 동족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준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반대하여 그로 하여금 가이사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지만 바울이 자신을 살해하려한 동족을(23:2-15 ;25:3) 송사할 의사가 없다고 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한 동족을 용서하신 사실을 연상시킨다(눅 23:34)

성 경: [행28:20]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 이것은 공의회에서도(23:6), 벨릭스 앞에서도(24:15),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26:6) 증언 했던 내용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소망' 이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다. 바울은 이 소망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성되었다고 하였으나 정치적이며 현세적 메시야를 기다렸던 일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차이 때문에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던 것이다.

성 경: [행28:21]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 편지에 해당하는 혤라어 '그람마' (*)의 본래적 의미는 '그려지거나 씌어진 어떤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에서발송한 바울에 대한 공식 고소장을 가리킨다고 본다.

⭕ 누가 와서...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 앞에서는 문서를 통한 연락이 없었음을 말했고 여기서는 사람을 통한 정보의 전달도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 '고하든지 '의 '아펭게일렌' (*)은 공식적인 알림을 뜻하고 '이야기한'의 '엘랄레센' (*)은 사적인 알림을 나타낸다. 결국 유대인 지도자들의 말은, 공식적인 문서를 통해서나 혹은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온 사람을 통해서나 도무지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는 것이고, 또한 여행객을 통해 사적으로도 들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대로 하자면 바울은 그들에게 베일에 싸인 인물인 셈이다. 만약 이들이 실제로 바울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면 그것은 아마 다음의 이유때문일 것이다. (1) 예루살렘의 반(反)바울적 유대 주의자들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로마에 미리 연락하지 못했다(Meyer). (2) 연락을 하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바울의 이송이 거의 마지막 항해 시기였기 때문에(11절 주석 참조) 교통원의 어려움이 있었다(Alford, Lumby). (3)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이후 다시 로마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멀리 본국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가까운 지역에 흩어져 있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바울 사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Olshausen, Hervey). 이 가운데 첫번째 견해는 타당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하더라도 반(反)바울적 유대 주의자들은 바울이 항소할 때 현장에 있었으므로(25:11), 그 때에라도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공문을 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번째와 세번째의 견해가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로마의 유대 공동체 지도자들이 바울에 대해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다고 한 것은 단지 외교적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로마의 유대인들이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징도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견해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와 동방 간에는 정규적인 왕래가 있었고, 바울이 연루된 문제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초미의 관심사인 종교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그런 소문은 당연히 로마까지 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른다고 한 것은, 아무런 유죄 증거가 없는 바울의 상소건에 대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자기들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Bruce). 종교적인 문제로 분란을 일으켜 로마로부터의 추방령을 받았던 쓰라린 경험(18 :2)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성 경: [행28:22]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고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단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일음을 말해준다. 본문에서 '파'(*, 하이레시스)는 '이단'으로도 번역되며(24:4), 이에 의거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유대인들에 의해 이단시 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도 있으나(Bronhauser), 본문에서 보여진 유대인들의 태도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바울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듣고자' 했다. 만약 그들이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여겼다면 바울에게서 무엇을 듣고자 했을리가 없다. 또한 '하이레시스'의 보편적 의미는 '이단'이 아니라 '종파'라는 점에서 이 단어를 반드시 '이단'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아마 로마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다만 유대교의 많은 종파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성 경: [행28:23]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 일자를 정하고...많이 오니 - 본문의 상황은 22 절에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왔던 사람들이(17절) 바울에게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더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는지 아니면 처음 만났을때는 상견례(相見禮)만 하고 날짜를 따로 정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한것인지 분명치 않다. 하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숙소에 모여왔고, 이렇게 하여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에게 처음으로 복음올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혹자는 바울의 숙소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많았거니와 점차 더욱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상당히 넓은 집을 얻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Zahn).

⭕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하나님 나라와 예수로 요약하며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핵심적이고 정확 한 증거라고 할수 있다.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며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현되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으며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울이 먼저 증거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지상 사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막 1:15) 당연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기대해 왔던 유대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진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이었다(요 18 :36; 고후3:17; 계 21:1). 다음으로 바울이 증거한 것은 예수에 관한 것이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과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기독교적 메시야관은 유대인들에게 낮선 것이었고 이해하기도 힘든 것이었으므로 그는 단지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해시켜 설득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전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돈'(*)이 '설복하다'는 뜻을 갖는 단어라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 경: [행28:24]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 믿는 사람...믿지 아니하는 사람 -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한 바울의 증언은 노력에 비해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의 믿는 사람을 얻었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때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본다(26, 27장). 유대인 동족(同族)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믿음을 갖게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극히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던 경우는 본서에 여러 차례 기록된 바이며(14:4; 17:4; 19:9) 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고 동족을 포기하지도 않았다(롬9-11 장).

성 경: [행28:25]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 -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고 마침내는 집회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흩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23:10에 있었던 유대인들 사이의 분쟁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 사 6; 9, 10의 인용으로, 이곳 외에도 신약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인용된 말씀이다(마 13:14, 15; 막 4:12; 눅 8:10; 요 12:40 ;롬 11:8). 본래 사 6:9, 10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본래적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행28:26,27]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 이 백성에게...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 70인 역의 사 6:9,10과 내용이 일치하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본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실 때 그가 어떠한 말을 하여도 백성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었다. 결국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하여 이사야의 말을 청종(聽從)치 아니함으로써 마침내는 바벧론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이제 바울은 그 말씀을 이사야 시대 백성의 후손들에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과 그에 따른 심판을 말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구원의 복음을(24절)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28절).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 있듯이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유대인들도 구원에 참여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롬 11:1-12).

성 경: [행28:28]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 구원을 이방인에게로...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 되었으나 그들이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졌다. 이것은 바울이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는 논리이며(13: 48; 18:6), 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22:18, 21). 유대인들은 '듣지 않을 것이나'(22: 18), 이방인들은 '들을 것이다'. 그 결과 유대인에게 주어져야 할 구원이 이방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본서에서는 복음이 이방인들 사이에퍼져 나가는 과정과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역하는 것이 평행을 이루면서 기록되고 있는데, 26-28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결정적으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결론부를 이루고 있다.

성 경: [행28:29]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몇몇 유력한 사본에는 본절이 빠져있으나 (*, A, B, E 등), 어떤 서방 사본에는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논쟁을 하며 물러가더라" 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후대의 삽입으로 추측된다.

성 경: [행28:30]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 온 이태 - 누가는 구원이 이방인에게 확산됨을 선언하는 것으로 본서를 종결짓고 있다. 그래서 로마에서의 바울의 생황을 간단하고도 대략적인 말로 묘사하고 있다(25-31절). 본절에 의하면 바울은 만 2년 동안 로마에 머물렀는데, 본문의 2년은 석방되기 이전 연금된 상태로 있었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6절) 이것은 바울에 대한 재판이 2년 동안이나 열리지않고 연기되었거나, 판결이 지연(遲延)되었음을 뜻한다. 유대인 고소자들은 재판의 승산이 없고 더구나 재판 과정에서 구체적인 증거없이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고소로 여겨질 때는 그에 대향 응징을 받아야 했던 로마법정의 절차가 두려워 법정 고소 만료일인 18개월이 지나도록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결석(缺席) 재판으로 진행되어 바울이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Ramsay, Bruce). 이 때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61년 중순부터 63년 까지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 셋집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마티'(*)는 '삯'을 의미하는 '미스도스'(*)에서 온 말로 바울이 머문 집은 무료 교도소가 아니라, '세'(hire)를 내는 집이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집세를 어떻게 부담할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1)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돈으로 지불했다(Ramsay), (2) 장을 만드는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지불했다(Bruce), (3) 빌립보교회에서 현금을 보내주어 지불할 수 있었다(빌4:18, Knowling) 등의 견해가 있으며 이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을 갖는다.

⭕ 영접하고.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아페데케토(*)는 '아포데코마이(*)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바울을 찾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때 찾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리라고 추측된다(Wendt).

성 경: [행28:31]

주제1: [로마에 도착한 바울]

주제2: [바울의 강론]

⭕ 담대히...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 바울은 자기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여 복음 즉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23절 주석참조). 그리고 로마 당국은 바울의 그러한 선교 행위를 방해 하지 않았다. 누가는 복음이 로마 당국의 방해을 받지않고 계속 전파 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Haenchen).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방해했던 반면(21 ;27-36; 23:1-15), 로마에서는 복음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전파되었다. 이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소명과 주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22:21 ;23:11).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복음이 성공적으로전파되기 시작했으며, 누가는 본서를 매우 간략하게 끝을 맺고 있지만, 마침내 복음은 로마와 전세계에 퍼져나가게 될 것을 내다보는 원대한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