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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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주석



성 경: [벧전1:1]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문안인사]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는 베드로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다. 이 호칭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사도로서의 베드로 자신의 권위와 존엄을 나타낸다(마 16:18,19; 막 3:16; 요 1:42; 21:15-19, Blum, Stibbs). 한편 '베드로'는 아람어에서 '바위'를 의미하는 '케파'(*)를 헬라어로 명명한 별명이다. 베드로의 히브리 이름은 '시므온'이었을 것이며 헬라어로는 '시몬'이었다(행 15:14; 벧후 1:1).

⭕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 본문에 언급된 다섯 지역은 모두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는 터어키 타우루스 산맥(Taurus Mountains)의 북쪽에 해당하는 로마 지역이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보다 많은 지역에 그리스도인이 거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행 16:6-8) 본서에서 다섯 지역만 언급되었으며 '본도'와 '비두니아'가 동일 지역에 대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두번 언급된 것에 대해 혹자는 이 편지를 소지한 실루아노(5:12)가 심방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Hort, Robertson). 즉 이 견해에 따르면 실루아노가 배를 타고 흑해를 지나 본도에 입성하여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를 거쳐 비두니아를 통과해 로마로 항해해 갔기 때문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지명이 각기 따로 언급되었으며 본서 수신자들이 사는 지역도 이 다섯 곳만 언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추정에 불과하며 본문에 특별히 다른 언급이 없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Michaels). 한편 '흩어진 나그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에는 관사가 없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의미하며 '파레피데모이'는 '어떤 지역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당시 네로 황제(A.D.54-68)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임을 인식하였을 것이다(Stibbs). 또한 '나그네'라는 표현은 수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니는 입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안식처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나라임을 인식하고 순례하는 자임을 암시한다(Blum).

성 경: [벧전1:2]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문안인사]

본절에서 베드로는 앞절에 '흩어진 나그네'로 지칭된 수신자들을 삼위 일체적인 신앙과 사역에 입각하여 묘사하고 있다.

⭕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택하심을 입은 자들 - '택하심을 입은 자들'(*, 에클레크토이스)은 개역성경에는 본절에 나타나나 헬라어 본문에는 1절에서 나타난다. '에클레크토이스'는 1절의 '파레피데모이스'(*, '나그네들')와 대비된다. '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묘사하는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며, '에클레크토이스'가 하나님 앞에서 특권을 소유한 그룹인 반면 '파레피데모이스'는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그룹을 나타낸다(Michaels). 이러한 '에클레크토이스'는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대상 16:13; 시 105:6; 사 65:9,15)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집합적인 칭호이다(2:9; 5:13). 한편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목적, 선택, 부르심, 섭리와 연관된 것으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 이상으로 개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다(1:20; 암 3:2; 행 2:23; 롬 8:29,30; 11:2, Cranfield, Stibbs). 이 특별한 관계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섭리를 가리킨다(Blum).

⭕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 '거룩하게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관된 것으로(살전4:7) 한편으로는 부르심그 자체와 동일한 실제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여 구별됨을 시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즉 인간의 책임을 의미한다(롬 6:19,22; 살전4:3,4; 딤전 2:15, Michaels).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의해 거룩한 삶 즉 성화의 삶을 살게 된다(Cranfield).

⭕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에이스 휘파코엔 카이 란티스몬 하이마토스 예수 크리스투). - '휘파코엔'(*, '순종함')과 '란티스몬'(*, '피뿌림')이 비록한 전치사 '에이스'(*, '위하여')와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예수 크리스투'(*, '예수 그리스도의')는 '란티스몬'에만 연결된다(Michaels). 본절에서 '휘파코엔'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인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해석하며(Blum, Cranfield, Stibbs) 혹자는 믿음의 순종(롬 1:5; 16:26)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Michaels, 22절).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복음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순종이 뒤따라야하며 그것을 통해 성장해 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은 구약 시대의 제사 의식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매개체로서(출 24:3-8; 히 9:18-21) 이 피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속함을 받았으며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10:19-22).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법으로 목회서신을 제외한 바울의 다른 서신에도 똑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 서신과 베드로 서신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1) 문법상 바울의 인사는 '소원에 따른 간구' 형식으로 표현된 반면(롬 1:7; 고전 1:3; 고후 1:2) 베드로의 인사는 '부정과거 수동태 회구'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벧후 1:2). (2) 내용상 바울은 그리스도인 전체에 대해 목자적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간구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도록 간구하고 있다(Michaels).

성 경: [벧전1:10]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 본절에서 불특징인으로 나타나는 '선지자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1) 혹자는 베드로 당시에 활동하던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한다(Selwyn). 이 견해는 본서를 읽는 수신자들이 선지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베드로가 불특정으로 썼다고 추측한다. (2) 혹자는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선지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lum, Cranfield).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견해는 본절과 12절 이하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하므로 유익함을 얻은 자들은 선지자들 자신이 아니라 수신자들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으며 신약 시대의 선지자를 포함할 경우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알았기에 그것을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메시야의 때에 대해서 간절히 알기를 원했으며 그것을 알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였다(눅 10:24).

성 경: [벧전1:11]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상고하니라 -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선재(先在)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Lenski). (2) 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ichaels, Selwy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 혹은 '성령'과 상호 교환으로 사용되고 있으며(행 1:16; 2:33; 벧후 1:21)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12절; 요 15:26, Stibbs). 성령께서 예언자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때와 그가 받으실 고난과 영광에 대해 예언하게 하였다(삼하 23:2; 눅 24:26).

성 경: [벧전1:12]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예언자들이 간절히 알기를 원하며 열심히 상고하고 예언한 것은 예언의 내용 곧 메시야의 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예언자 자신과 당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롬 4:23,24; 15:4; 고전9:9,10;10:11, Blum, Stibbs, Michaels).

⭕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 '보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탈렌티'(*)는 수동태 분사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요 14:16,26; 갈 4:6)라고 나타내기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요 15:26; 16:7; 행 2:33)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령'을 보낸 자에 대해서 특정한 자로 정하기는 어렵다(Michaels). 한편 앞서 언급된 예언자들이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여 전한 것을(11절) 본절에서는 '복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말씀을 상고하여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였던 바와 같이 신약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성령을 힘입어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 즉 복음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였다.

⭕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살펴보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이'(*)는 '자세히 주의하여 보다'라는 의미로 잘 보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하는 존재이기에 인간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알 수 있지만 구원의 계획은 너무도 오묘하여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계획이 공개되고 선포될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은 예수의 초기 지상 생활을 지켜보았으며(딤전 3:16) 구속이 완성될 때에는 찬양으로 기뻐할 것이다(계 5:11-14,Blum). 한편 베드로는 10-12절의 논의를 통해 복음의 전달 과정을 세 단계로 기술하고있다. (1) 선지자(10절). (2) 복음전파자(12절). (3) 천사들(12절). 이러한 전달 과정을 거쳐 실현된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속 계획은 신실하게 성취되어 왔다(Lenski, Cranfield).

성 경: [벧전1:13]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동이고'의 헬라어 '아나조사메노이(*)는 '급한 일을 당할 때 취하는 태도'(출 12:11)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게으른 삶을 반성하고 목표로 매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Lenski). 예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종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눅 12:35)를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동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는 가운데 긴장된 자세로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Michaels).

⭕ 근신하여...온전히 바랄지어다(*, 네폰테스 텔레이오스 엘피사테)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헬라어 문법에서 부사가 '오스'(*)로 끝나면 앞에 있는 날말을 수식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텔레이오스'가 앞에 있는 '네폰테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온전히 근신하여'로 해석한다(Michaels, Bigg). 이 경우 '온전히 근신하여'는 '인내'를 강조한다. (2) 혹자는 일반적인 헬라어 문법으로 따질 때 동사 앞에 있는 부사가 동사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번역하며 '소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Selwyn, Lenski).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가져다 줄 은혜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마음을 가다듬고 언어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며 인내 가운데 살아야 한다(Blum, Stibbs).

성 경: [벧전1:14]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테크나 휘파코에스'(*)는 전형적인 셈어적 표현이다(막 2:19; 눅 10:6). 특별히 셈족 언어에서 '자녀'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상속자'라는 뜻으로 자녀는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지닌다. (2) '부모의 인격이나 성품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일 경우 누구의 자녀이냐에 따라 자녀의 인격이 결정된다(Selwyn). 이러한 언어적 배경 속에서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향해 '불순종의 자녀'(엡 2:2)가 아니라 '순종의 자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롬 1:5; 16:26) 복음을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마음을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그 성품을 배워가기 때문이다(Michaels).

⭕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 '알지 못할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아그노이아(*)에서 '아그노이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ranfield,Selwyn). 왜냐하면 헬라어 단어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무지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이다(행 17:30; 엡 4:18).(2) 혹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Bigg).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아그노이아'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행 3:14-17).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즉, 이는 이방인이었든 유대인이었든간에 진정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나타낸다(Stibbs). 이러한 자는 사욕 즉 자연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Michaels, Stibbs) 충동대로 방종한 삶을 산다. 그러나 영적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 즉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버려야만 한다.

성 경: [벧전1:15]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거룩한 자'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칭호로서 '거룩한 자' 혹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나타난다(LXX 시 70:22; 77:41; 88:19; 사 1:4; 5:16; 12:6;17:7; 29:23; 30:12,15; 31:1; 41:20; 45:11; 55:5). 이것은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시사한다(Blum). 이러한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과거에 처했던 어둠에서 광명한 빛으로 부르셨으며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2:9;5:10). '되라'의 헬라어 '게네데테'(*)는 '기노마이'(*, '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명령형이다. 그러나 고전 헬라어에서 '기노마이'의 수동태 명령형 '되다'(become)의 의미보다 '이다'(b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의 의미보다 '거룩한 존재이니 거룩함을 나타내라'라는 의미이다(2: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한편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트로페'(*)는 본서에서 '선한 행실'(2:12), '선한 양심'(3:16), '정결한 행위'(3:2)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거룩'이 하나님께로의 분리를 의미하나 일상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것으로서 세상에서 윤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Blum, Michaels).

성 경: [벧전1:16]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 여기서 '기록하였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구약성경을 인용할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베드로가 인용한 본문은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으로(레 11:44; 19:2; 20:2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요청받은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아가도록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이 말씀을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복음 안에 산다 할지라도 율법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Lenski, Stibbs).

성 경: [벧전1:17]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 '외모로 보시지 않고'의 헬라어 '아프로소폴렘프토스'(*)는 '얼굴을 보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사파님'(*)에서 유래한 것으로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구약시대에서는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다(마 6:9; 눅11:2).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보살피시는 분'과(마 6:32)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눅 18:1-7)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여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다.

⭕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나그네로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이 세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이전에 잠시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한 것이다(Stibbs). 그러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할 것처럼 안일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하나님이 원하는 악에서 떠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한다.

성 경: [벧전1:18]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너희가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인 신앙에 대해 언급할 때나(Hort) 표준이 되는 가르침을 언급할때 사용되는(Kelly) 관용구이다. '에이도테스'가 사용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사도의 교훈을 심화시켜 설명할 때(롬 6:9; 고후 5:6). (2) 앞에서 명령한 구절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를 보충하고자 할 때이다(고전 15:58; 엡 6:8,9). 이 두 가지 중 본절의 '에이도테스'는 후자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는 권면에 이어 계속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가기 때문이다(Michaels,Blum).

⭕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 '망령된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마타이아스 아나스트로페스'(*)는 유대인의 생활 양식을 가리키기보다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을 의미한다(Blum). 더욱이 '망령된'의 헬라어 '마타이아스'(*)는 이방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렘 2:5; 8:19; 행 14:15; 엡 4:17). 한편 '구속된 것'의 헬라어 '엘뤼트로데테'(*)는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두가지를 의미한다(Blum, Selwyn). (1) 돈을 지불하고 사다. (2) 속박에서 해방시키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구속받기 위해 치른 대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과 은'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밝힘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구속사역이 완전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막 10:45; Lenski). 이러한 대가의 귀함과 완전함에 대한 베드로의 진술은 '값 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52:3)과 상치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비록 문자적인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여 (1)과 (2)의 의미를 모두 강조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태도로 (2)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Michaels).

성 경: [벧전1:19]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어린양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암누'(*)는 침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릴 때 이미 사용한 표현이다(요 1:29,36). 본문의 유래에 대해 혹자는 사53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사 52장에서는 구속의 대가를 예수의 보혈과 비교하며 사 53장에서 예수와 어린양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어린양의 피는 예수의 보혈로 비유되는 반면에 사 53장에는 어린양의 피가 없으며 심지어 침묵하는 어린양으로만 비유되고 있기때문이다. 즉 사 53장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내나 구속의 보혈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본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출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과 대비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유월절 어린양이 지닌 구원과 해방에 대비된 예수의 사역을 시사하기 때문이다(Michaels).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같이 죄와 허물이 없으신 유일한 분으로서 그의 구속은 보다 완전하고 귀한 것이다(출 12:46; 요 19:36;고전 5:7, Blum).

성 경: [벧전1:20]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그는 창세 전부터가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본절은 전형적인 비교 구문인 '멘...데'(* ... ,'한편...또다른 한편')로서 베드로는 이 구문을 통해 '창세 전'과 '말세'를 비교하여 네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창세 전'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게 진행되었다(Michaels). (2) 동사 시제에 있어서 '미리 알리신 바'의 헬라어 '프로에그노스메누'(*)는 완료 수동 분사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에 대해 '미리 알리신' 내용이 완전했음을 시사하며, '나타내신 바'의 헬라어 '파네로덴토스'(*)는 부정 과거 수동 분사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이 일회적으로 완전했음을 시사한다(Lenski). (3) 내용상 '창세 전'은 메시야의 신성과 사역을 나타내며 '말세'는 구속과 부활의 증거를 보여준다(Stibbs). (4) '프로에그노스메누'와 '파네로텐토스' 모두 수동태 분사형으로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인간의 타락이나 죄악도 하나님의 계획을 파기시킬 수 없음을 시사한다(Michaels).

성 경: [벧전1:21]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너희는...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 '하나님을'의 헬라어 '에이스 데온'(*)은 문자적으로 '하나님 안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며(요 1:18)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켰기 때문이다(고후 5:19, Blum, Kelly).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를 이룬 하나님에 대해 두가지로 진술한다. (1)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분이시다. 곧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Stibbs,Blum). (2) 영광을 주신 -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실 뿐만 아니라 영광을 주신 것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도 미래에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롬 8:17-30; 히 2:10, Stibbs).

⭕ 너희 믿음과 소망이 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호스테 텐 피스틴 휘몬카이 엘피다 에이나이 에이스 데온) - 본문을 헬라어 구문상으로 해석할 때 두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본문을 '의도문'으로 본다(Robertson). (2) 이유는 본절이 직설법로 쓰였기 때문이다. 비록 '호스테' 다음에 부정사가 따르면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지라도 문장 전체가 명령법이 아니고 직설법일 때는 '의도'로 해석한다는 주장이다. (2) 혹자는 본문을 '결과문'으로 본다(Robertson). 그 이유는 코이네 헬라어에서 '호스테' 다음의 부정사가 따르면 일반적으로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비록 서술적 용법일 때 '의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문법적 규칙이 아니기에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문맥상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유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로 그리스도인들을 안위하기 위함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되었기 때문에(Michaels)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믿음과 소망'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1) 혹자는 '믿음'에 '소망'이 종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서 '믿음'에는 정관사가 있지만 '소망'에는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러므로 너희 믿음이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게 한다'(Kuhl)라고 해석해야 한다. (2) 혹자는 '믿음과 소망'은 병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Bigg).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실의 두 가지 의미를 반복적으로 기술하여 강조적 효과를 나타내며 믿음과 소망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서 배경적 설명을(3-9절) 해왔기 때문이다(Michaels, Selwyn).

성 경: [벧전1:22]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 '깨끗하게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그니코테스'(*)는 완료 시상으로 회개로 이루어진 상태를 나타낸다(Michaels). 그리스도인에게 성취된 이러한 정결(淨潔)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진다. '진리'는 두가지를 의미한다(Selwyn). (1) 거짓과 구별된 참됨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의 화육,대속, 부활, 승천을 뜻한다. 본절의 '진리'는 후자의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받아들며 순종함으로 깨끗하여진다. 이렇게 진리를 통해 죄로 부터 온전히 깨끗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형제애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한편 '깨끗하게 하여'와 관련된 의식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깨끗하게 하여'가 구약 시대의 정결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Bigg) (2) 혹자는 '깨끗하게 하여'가 침례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Blum).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비록 '침례'에 대한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할지라도 '깨끗하게 하여'와 다음 절의 '거듭난'이 모두 완료시상으로 과거에 단회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사랑하라'의 헬라어 '아가페사테'(*)는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부정 과거 시상은 과거의 행위와 뚜렷한 차이를 나타냄과 동시에 행위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서로 반목(反目) 상태였을지라도 회개하여 온전히 깨끗하여진 그리스도인은 과거와는 달리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새로운 품성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이면 행했어야 할 덕목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피차가 열정적으로 사랑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서로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요일 3:14-18).

성 경: [벧전1:23]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너희가 거듭난 것이...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거듭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게겐네메노이(*)는 완료 분사로 앞절의 '깨끗하게 하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회심된 상태를 시사한다. 한편 '씨'의 헬라어 '스포라스'(*)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aels, selwyn). (2) 혹자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lum,Cranfield, stibbs).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중 다른 곳에서도 '씨'는 '말씀'에 비유되고 있으며(막 4;14; 눅 8:11) 문맥상 이어지는 설명에서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진술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시 33:9; 사55:10,11; 히 4:12, Stibbs).

성 경: [벧전1:24]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본절은 포로로 끌려가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인 사 40: 6-8의 인용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구약 본문을 인용하여 당시 핍박받고 흩어져 방랑하는 수신자들에게(1절) 위로될 뿐만 아니라(Blum) 모든 육체의 영광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질지라도 말씀은 영원하며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인의 구원도 영원함을 강조하고 있다(Selwyn, Stibbs, Blum).

성 경: [벧전1:25]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성도의 성화]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본절은 사 40:8(LXX)의 인용이다. 여기서 '주의 말씀'의 헬라어는 '토 레마 퀴리우'(*)이나 70인역에는 '토 레마 투 데우'(*, '하나님의 말씀')로 되어있다. 인용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베드로 자신의 의도적인 해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Kelly). (2) 혹자는 사본상의 변화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Hort). (3) 혹자는 베드로가 신약성경의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인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ichael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토레마 퀴리우'에 나타난 속격은 이사야의 말씀처럼 '주격적인 속격'으로 예수의 말씀과 동일하기 때문이다(막 13:31; 눅 21:33, Michaels). 여하튼 베드로는 이러한 구약성경의 인용을 통해서 주께서 전한 말씀인 복음이 영원토록 변치않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됨을 진술하고있다(Selwyn).

성 경: [벧전1:3]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찬송하리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는 동사 '율로게오'(*)에서 변화된 형용사이다. 문법적으로 본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술어 동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토'(*, '하게 하다')나 '에스틴'(*, '...이다') 혹은 '에이에'(*, '...지어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대인의 송영에서는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 술어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표현하였다. 베드로는 아마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표현한 듯하다(Robertson).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에서 '퀴리우'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다. '주'는 승귀된그리스도에게 부여된 칭호로서 초대 고회의 신앙 고백이었다(롬 10:19; 고전 12:3; 고후 4:5; 빌 2:11, Cranfield). 성부 하나님은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하시는 대상이며,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Michaels). 한편 '그 많으신 긍휼대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 근원을 시사한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긍휼'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은혜'(*, 카리스)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나 '은혜'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긍휼'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동기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것은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예수 그리스도의...부활하심으로'의 헬라어 '디 아나스타세오스 예수 크리스투'(*)에서 '예수 크리스투'의 속격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주격 소유격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를 의미한다. (2)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를 의미한다. 이 두가지 의미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 전체가 하나님이 주체로 언급되기 때문이다(Michaels). '아나스타세오스'는 '산 소망'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게 하사'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한편 '거듭나게 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겐네사스'(*)는 동사 '아나겐나오'(*)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 거듭남의 사건이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구체적인 사실로 중명됨을 시사한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듭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대해 일반적으로 '팔링게네시아'(*)를 사용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팔링게네시아'가 아니라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혹자는 베드로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교의 영향을 받아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당시 신비주의나 스토아 학파에서는 '깨달아 거듭난 삶'을 아는 자를 '아나겐네사스'란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같은 이유로 '아나겐네사스'를 사용했다기보다는 본서에 강하게 비쳐지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ichaels).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거듭나다'를 '겐네데 아노덴'(*)으로 표현하셨으며(요3:3) 이것은 '아나겐나오'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겐네데 아노덴'에서 '아노덴'이 '다시'(again)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위로부터'(from above)라는 의미로 사용되든 모두 '아나겐나오'와 같은 의미가 된다. 따라서 베드로는 본서에서 예수께서 이미 사용하신 단어를 다시 사용하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고자 했던 거듭남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요 3:3-8).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소유하신 생명과 같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Stibbs).

⭕ 산 소망이 있게하시며 - '산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 결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는 새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으로 4절의 '기업'이나 5절의 '구원'을 가리킨다(Michaels). 이 '산 소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이미 마련한 것이다(Blum).

성 경: [벧전1:4]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사나니 - '기업'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미안'(*)에 대해 혹자는 구약성경에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소유물'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는 '현재에 이미 누리는 소유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rt). 그러나 '클레로노미안'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 나라(마 25:34; 엡 5:5).(2) 영생(마 19:29; 막 10:17; 눅 10:25). (3) 구원(히 1:14). (4) 약속(히 6:12).(5) 축복(3:9). 이러한 기업은 '산 소망'과 연결된 것으로(3절)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Michaels, Blum). 따라서 본절의 '기업'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서 현재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롬 8:18; 갈 4:7) 미래에 주어질 것을 가리키며 이때 성령은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롬8:11,18-23; 엡 1:14, Michaels).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기업의 온전함에 대해 부정접두어 '아'(*)로 시작하는 세 단어, 즉 '아프다르톤'(*, '썩지 않고'), '아미안톤'(*, '더럽지 않고'), '아마란톤'(*, '쇠하지 아니하는')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하게 될 '기업'이 지상의 것과는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시사한다(Lenski, Robertson).

⭕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하늘에'는 복음서에서 '하늘 나라'와 연관될 뿐만 아니라 예수의 특정한 말씀, 즉 마 5:12; 6:19,20; 눅 12:33과 연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기업이 영원할 뿐만 아니라 전혀 손상되지 않으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함을 시사한다(Lenski,Robertson). 한편 '간직하신 것이라'의 헬라어 '테테레메넨'(*)은 완료시상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업을 마련해 두셨음을 시사한다(Blum).

성 경: [벧전1:5]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 '말세에'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온전하게 성취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곧 파루시아를 가리킨다(롬8:18-25; 빌 3:20,21; 골 3:4; 요일 3:2). 파루시아 때 성취되는 '구원'은 앞서 언급된 '산 소망'(3절), '기업'(4절)과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어 향유하고 있는 구원의 실현 혹은 종말론적 차원의 완성을 의미한다(Stibbs, Blum)

⭕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보호하심을 입었나니'의 헬라어 '프루루메누스'(*)는 '프루레오'(*)의 수동태 분사 현재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프루루메누스'는 본래 군사 용어로서 순례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사단을 막아주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나타낸다(Stibbs,Leighton). 종말에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할지라도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므로 믿음 안에 거하여야 하며,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누릴 수 있게 된다(Michaels, Stibbs).

성 경: [벧전1:6]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이스'(*)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시험으로 상위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하는 시련(test)을 의미한다(약 1:2, Bigg, Michaels). 그런데 베드로가 언급한 '여러 가지 시험'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는가에 대하여 혹자는 '포이킬로이스'(*, '여러 가지')가 고전 헬라어에는 나타나지 않고 마카비 시대와 신약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마카비 시대에 일어났던 고난이나 신약시대의 예루살렘 멸망(A.D.70)을 예고한 듯하다고 주장한다(Selwyn,Hor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이 정확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Michaels).

⭕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개역성경에는 '엔 호'( , '이 가운데')가 생략되어 있다. '앤 호'는 '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5절, Michaels, Blum)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암시한다. 비록 현재에 고난을 당하여 근심에 빠진다 할지라도 그러한 고난은 '잠시 동안만' 있을 것이며 그 후 종말론적 구원이 완성되는 파루시아 때에는 현재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업이 기다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산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벧전1:7]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 본절은 약 1:3과 유사하여 혹자는 베드로가 야고보서를 참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Robertson). 그러나 야고보와 베드로의 표현에는 차이가 있기에 참조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차이점은 두 가지이다. (1) 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배우는 '수단'으로 언급되는 반면 본문에서는 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닌 '목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2)야고보서에는 믿음의 시련이 온전한 신앙에서 요구되는 한 요소에 불과하지만 본문에서 믿음의 시련은 신앙의 최고 요소로 취급되고 있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차이점과 같은 자신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히나'(*)로 인도되는 목적절로 믿음의 시련을 수식하고 있다(Michaels). 베드로가 시련을 통한 믿음과 금을 비교하여 강조하는 바는 (1) 참된 믿음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2) 금이 불로 연단받듯이 믿음도 시련을 통해 연단받는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강조점을 통해 고난당하는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Bigg, Leighton, Michaels).

⭕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금이 불에 의해 제련되어 순수해지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시련을 통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이 참된 신앙이 온진히 밝혀지는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순수하고 참된 신앙을 소유한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종말론적 보상 혹은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다리는 온전한 '구원'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롬 2:7,10; 빌 1:11; 히 2:7,9, Michaels).

성 경: [벧전1:8]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보지 못하였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이돈테스'(*)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돈테스'는 '호라오'(*, '보다')의 제2부정 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분사의 부정으로는 '메'(*)를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우크'가 쓰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양보적'인 의미보다 '사실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Robertson). 즉 본문은 '비록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가 아니라 '너희 가운데 아무도 예수를 보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사실성'을 강조한다.(2) 혹자는 베드로 자신이 예수를 친히 목격했음을 수신자들과 비교해 강조했다고 주장한다(Selwyn). (3) 혹자는 베드로를 포함해 수신자 전체가 현재 계시하시는 예수를 보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Michaels). 즉 본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는 수신자들을 칭찬하려고 했다.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수진자들이 비록 예수를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장차 종말론적 보상으로 주어질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현재 볼 수없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

성 경: [벧전1:9]

주제1: [성도의 소망과 성화]

주제2: [미래의 산 소망]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받음이라'의 헬라어 '코미조메노이'(*)는 '코미조'(*)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구원이지금도 실현 과정에 있음을 강조한다. 참된 믿음의 결과인 미래에 주어질 종말론적 보상은 영원하며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에 현재 믿음을 소유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주어질 상급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온전히 완성되는구원은 미래에 속해 있다(Stibbs, Blum).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구원에 대해 '영혼의 구원'(*, 소테리안 프쉬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이 때문에 베드로가 '영'과 '육'을 구별하는 헬라어 이분법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보기 쉬우나(Dihle)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콘'은 히브리적 이해 속에서 '자아'나 '인격' 전체를 지칭하기 때문이다(2:25; 4:19,Dautzenberg, Selwyn). 비록 베드로가 '프쉬콘'을 신체적 생명으로 생각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육체적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이다(Michaels).

성 경: [벧전2:1]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영적 성숙]

⭕ 그러므로...버리고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혤라어 '운'(*)은 결과를 유도하는 접속사로 본절이 1:23-25의 결론임을 시사한다. 본절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자가 취하여야 할 행동들을 나타낸다. 한편 '버리고'는 2절의 '사모하라'와 대조되어 믿음으로 갓 태어난 자들이 성숙한 삶을 위해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생활 태도를 제시한다(슥 3:3,4; 엡 4:22,23; 골 3:8,10; 약 1:21).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버려야 할 악덕들을 '모든'을 사용하여 세 범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있다.

⭕ 모든 악독(*, 파산 카키안) - 이것은 단순한 '악의'와는 다른 것으로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모든 악들을 의미한다(행 8:22; 롬 1:18; 엡4:31; 골 3:8, Michaels, Lightfoot, Selwyn, Stibbs, Lenski).

⭕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 판타 돌론 카이 휘포크리세이스 카이 프도누스) - '궤휼'의 헬라어 '돌론'(*)은 '미끼로 끌어들이다'라는 의미의 '델로'(*)에서 유래한 단어로 3절의 '순전'과 반대되는 '속임'을 의미하며, '외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크리세이스'(*)는 '아래'를 의미하는 전치사 '휘포'(*)와 '심판'을 나타내는 '크리시스'(*)의 합성어로 겉과 속이 다르게 판단하는 죄를 가리킨다. 또한 '시기'는 자기 우월감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타인이 잘 되는 것을 방해(妨害)하는 죄악을 의미한다.

⭕ 모든 비방하는 말(*, 파사스카탈랄리아스) - 본문은 복수로 표현되어 남을 향해 무고히 '중상 모략'하거나, 악담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죄악은 악의에 찬 마음에서 비롯된다(12절; 롬 1:30; 고후 12:20).

성 경: [벧전2:2]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영적 성숙]

본절은 부정적인 금지 명령을 한 앞절과는 달리 긍정적인 명령문으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것을 제시한다.

⭕ 갓난 아이들같이 - '갓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겐네타'(*)는 '아르티'(*, '방금')와 '겐나오'(*, '되다', '나다')의 합성어로 방금 태어난 상태를 묘사해 준다(Lenski, Robertson). 그리고 '아이들'(*, 브레페)은 문자적로 '아직 출생하지 않은 아이'를 의미하지만(눅 1:41,44) 본문에서는 '네피오이'(*, '유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눅 2:12). 이 '갓난 아이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에 대한 비유로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다(마 18:3; 막 10:14,15).

⭕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 '순전하고'의 헬라어 '아돌론'(*)은 부정접두어 '아'(*)와 '유인하다'라는 의미의 '돌로스'(*)의합성어로 '궤휼'(1절)과 반대되는 거짓이 없는 순수함을 의미한다. 한편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콘'(*)은 '말씀', '이성', '교리' 등으로 해석되는 '로고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말씀의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V, Calvin,Bigg, Caffin, Bengel, Keil, Lenski). (2) 혹자는 '사리에 맞는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SV, Vincent, Hort). 두가지 해석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로 앞장에서도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1:23-35) 본절 후반부에서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하고 신령한 젖'은 가감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한편 '사모하라'의 헬라어 '에피포데사테'(*)는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상태를 나타낸다(빌 2:26). 베드로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이 성장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말씀을 갈망해야 함을 강조한다(시 119:20, Michaels, Blum,Calvin).

⭕ 이는 이로 맡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말씀의 젓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성장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다.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가능해진다(히 5:11-14). 본문의 '구원'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화의 완성(完成)을 시사한다. 이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계속적인 성장으로 나타내 보여야 할 미래의 목표이기도 하다(1:5,9; 고전 3:1-4, Stibbs, Caffin).

성 경: [벧전2:3]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영적 성숙]

⭕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리라 - 본절은 시 34:8의 인용으로 '에이'(*, '만약')로 시작되는 조건문이다. '인자하심을 맛본다'라는 것은 마치 갓난 아이가 젖의 맛을 알게 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기 위해 말씀을 더욱 사모하여 그 능력 안에서 성숙해 가야 한다.

성 경: [벧전2:4]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산 돌이신 예수]

⭕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 저자는 본문에서 '버린'과 '택하심을 입은'을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배척당한 진정한 메시야임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는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여야 할자칭 건축자들인 유대인들이 오히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가리킨다(막 8:31; 눅 9:22; 행 4:11). 예수께서는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을지라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았다. '택하심을 입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크톤'(*)은 '인정받다'라는 의미를 가진 '도키몬'(*)에서 파생된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존귀함을 받았음을 시사한다(행 2:22-24).

⭕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 '보배로운'의 헬라어 '엔티몬'(*)은 문자적으로 '존경을 받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영광을 가리킨다(1:19; 눅 7:2; 14:8; 빌 2:29).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순종으로 인해 배척 당하셨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게 하셨다. '산돌'은 실제로 유대인들 사이에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의 머릿돌'(마 21:42), '생명수의 반석'(고전 10:4), '기초석'(고전 3:11), '심판의 돌'(단 2:34)로 비유되었다(Blum, Stibbs, Leighton, Selwyn). 이러한 비유와 마찬가지로 메시야이신 예수를 비유하는 '산 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한 사실이며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교회의 초석이 되심을 시사한다. 한편 '나아와'의 헬라어 '프로스 혼 프로세르코메노이'(*)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인이 예수께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 한 번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끈임없이 나아와야 함을 강조한다(Robertson, Lenski, Caffin).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반석에서 물을 마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는 언제든지 그로 말미암아 신령한 물을 마실 수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전 10:4,Hort, Bigg, Reicke). 본절은 예수께서 비록 사람에게는 버림받았을지라도 메시야로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의 구원의 반석이 되심을 시사한다.

성 경: [벧전2:5]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산 돌이신 예수]

⭕ 너희도 산 돌같이 - 베드로는 앞절에서 그리스도를 산 돌에 비유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산돌을 그리스도인들에 비유하고 있다. '산 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리도이 존테스'(*)는 복수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산돌이 되며 생명의 근원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 할 존재임을 시사한다(Lenski, Leighton, Robertson).

⭕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신령한 집'은 저자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을 제사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아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한다(시 69:9;사 56:7; 막 11:17, Blum). 한편 '세워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스데'(*)는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실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아올 때 그리스도인이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돌이 되며 거듭난 자들과의 연합을 통해 교회를 이루게 됨을 강조한다(롬 12:1;15:16; 고전 3:16: 엡 2:21-22; 3:6, Alford, Vincent, Stibbs, Leighton, Selwyn,Mi-chaels).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에 비유하고 있다. '제사장'의 헬라어 '히에라튜마'(*)는 '제사장의 직분'이나 '제사장의 단체'를 의미한다(눅 1:8, Hort, Meyer).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가진 산 돌이라는 사실에서 진일보하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이 되었음(만인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제사장적 역할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Blum, caffin, Alford, Selwyn, Reicke).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이어야 했던 것을(출 19:6) 이루지 못했으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교회가 그이상(理想)을 실현했으며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그 직무를 감당하게 되었다(롬 12:1;빌2:17; 히 13:15; 계 1:6; 5:10; 20:6, Lightfoot, Calvin, Stibbs).

성 경: [벧전2:6]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산 돌이신 예수]

⭕ 경에 기록하였으되 - 베드로는 앞서 진술한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증명한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티 페리에케이 엔 그라페'(*)는 문자적으로 '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라는 뜻으로 이제까지 논증한 진술 곧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신 것과 그에게 나아가는 자도 누구든지 산 돌인 것이 성경 안에 이미 확증(確證)된 사실임을 시사한다(사 28:16; 롬9:33).

⭕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 본절은 사 28:16의 인용이다. 모퉁이 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온'(*)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현관의 돌이라고 주장한다(Jeremias). (2)혹자는 건축물의 현관이나 기초를 닦는데 필요한 돌이라고 주장한다(Grant). (3) 혹자는 건축물의 벽과 벽 사이를 잇는 건물의 기초요 중심되는 돌이라고 주장한다(Lloyd,Calvin, Stibbs). '아크로고니아이온'이 '가장 높은'이란 의미를 가진 '아크로스'(*)와 유대인의 건축 양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요 중심인 '모퉁이 돌'을 의미하는 '고니아이오스'(*)의 합성어인 것으로 보아 세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이것은 '모퉁이 돌'이 벽과 벽을 연결하여 건축물을 지탱하는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퉁이 돌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셔서 교회를 이루심을 시사한다(엡 2:20, Blum,Stibbs, Michaels). 한편 '시온에 두노니'는 요긴한 모퉁이 돌로서의 그리스도의 독특한 위치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확정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두노니'의 헬라어'티데미'(*)가 본절에서는 현재 능동태로 사용되고 8절에서는 부정과거수동태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의 역할이 이미 확정되었으며 지금도 수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지위가 생명을 주는 역할을하며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된다(8절; 마 21:42,44; 롬 9:33).

⭕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피스튜온에프 아우토 우 메 카타이스퀸데'(*)는 문자적으로 '저를 믿는자는 다급한 일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의미로 두려움과 공포로 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서게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는 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현재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engel). (2) 혹자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Mey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성 경: [벧전2:7,8]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산 돌이신 예수]

베드로는 본문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비교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어떤 가치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Wiesinger, Caffin).

⭕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 '보배이나'의 헬라어 '헤 티메'(*)에서 관사 '헤'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는 자신과 연합한 그리스도인에게 크나큰 영광이요 보배가 되심을 시사한다(Blum). 한편 베드로는 믿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지니는 가치에 대해 두 가지 인용문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1)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 본문은 시 118:22의 인용이다. '버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도키마산'(*)은 문자적으로 '거절당한'이란 의미로(고전 9:27,RV)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거부당하신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시 118:22) 예수께서도 친히 그 예언을 확인하셨다(마 21:42;눅 20:17,18).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버렸으나 하나님은 배척당한 예수를 영광의 자리로 높이셨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는 사 28:16을 반영하는 것으로(6절 주석참조; 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하나님님에 의해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시사한다(Blum). (2)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 본문은 사 8:14의 인용이다. '부딪히는 돌'은 길가에 있는 불필요한 돌들처럼 보행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방해물을 암시하며 '거치는 반석'은 덫이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나 덫이 되며 심판의 돌이 된다(Origen, Caffin, Delitzch, Selwyn, Stibbs). 그러나 그리스도 자체가 장애물이나 덫이 되는 것은 아니다.단지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불신앙함으로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덫이나 장애물'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이다(Beare, Blum).

⭕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본문 역시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진술이다.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의 헬라어 '프로스코프투신 토 로고 아페이둔테스'(*)는 문자적으로 '순종치 않아 말씀에 넘어진'이라는 의미로 믿지 않는 자들이 넘어지는 원인이 순종치 않는 불신앙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에서 '이렇게'는 '넘어지나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문은 믿지 않는 자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예정되었음을 시사한다(Blum, Hort, Bigg, Caffin,Beare).

성 경: [벧전2:9]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거룩한 백성]

베드로는 본절에서 7, 8절과는 달리 믿는 자들의 신분적인 특권에 대해 네 가지로 언급한다((Caffin, Calvin).

⭕ 택하신 족속이요 - 본문은 사 43:20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을 시사한다. '족속'의 헬라어 '게노스'(*)는 '혈통' 혹은 '출생'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혈통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고 자랑하나 진정한 택함을 받은 족속은 혈통이나 민족의 차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의 연합을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영적 이스라엘'을 나타낸다(1:23; 신7:6-7; 사 44:1-2, Robertson, Blum, Selwyn).

⭕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본문은 출19:6의 인용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혹자는'왕정의 제사장' 곧 왕에게 속하여 왕을 섬기는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Stibbs). (2) 혹자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롬 5:17,Clement, Bigg, Stibbs, Blim).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그리스도인은 왕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만국 통치하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이다.

⭕ 거룩한 나라요 - 본문 또한 출 19:6이 인용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현재 직책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거룩한'은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린것을 나타내는 말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선별하신 존재들임을 시사한다(blum, Stibbs).

⭕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 본문 출 19:5; 사 43:21; 말 3:17의 인용이다. '소유된'의 헬라어 '페리포이에신'(*)은 특별한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된 것을 나타낸다(행 20:28; 엡 1:7; 살전 5:10, Robertson, Stibbs).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사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신 언약의 백성이다.

⭕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위의 네 가지 신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신 이유이다.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과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이전에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신' 사실을(롬 8:29,30; 엡 1:4) 시사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구원하여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신분을 부여하신 목적은 덕을 전하게 하는 것이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스 아레타스'(*)는 '찬미', 혹은 '탁월함'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만이 갖는 온갖 종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실제적 행동들을 시사한다(stibbs, Calvin).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과 역사를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성 경: [벧전2:10]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거룩한 백성]

본문에서 베드로는 호 1:6,9,10; 2:23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상태와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상태를 비교한다.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후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롬 9:25,26, Bengel).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삼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부르셨음을 암시한다(Caffin).

⭕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얻지 못하였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엘래에메노이'(*)에서 '엘레에메노이'는 '엘레에오'(*, '불쌍히 여기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방인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못했음을 암시한다(Stibbs, Robertson, Caffin). 이와는 반대로 '얻은'의 헬라어 '엘레에덴테스'(*)는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로 하나님의 긍휼을 오랫동안 얻지 못하던 이전의 상태에서 단회적인 회개 사건으로 구원을 받았음을시사한다(Hort, Michaels, Stibbs).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했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 복종하던 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빛 가운데 있어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다.

성 경: [벧전2:11]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행실]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베드로가 본서와 베드로후서에서 모두 7회나 언급한 애정어린 호칭이다(4:12; 벧후 3:1,8,14,15,17). 이 호칭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사용된 호칭이며(롬 12:19; 살전 2:8, Blum, Caffin) 본서와 베드로후서에서는 간곡한 권면이나 무엇을 환기시킬 때 사용되었다.

⭕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 '나그네'의 헬라어 '파로이쿠스'(*)는 일시적으로 거주하여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키며 '행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무스'(*)는 거쳐가는 길손으로 정착자가 아닌 자를 나타낸다. 베드로는 이 용어들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 시민으로 신령한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빌 3:20)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나그네나 행인처럼 잠시 머물렀다 가는 유한(有限)한 것임을 시사한다(시39:12; 히 11:13, Stibbs, Lenski).

⭕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육체'의 헬라어 '사르키콘'(*)은 단순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육체에서 비롯된 정욕은 영혼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셔서 그리스도인이 소유하고 있는 영적인 삶을 어렵게 한다. 본문에서 언급된 '육체'와 '영혼'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신분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합당한 영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락된 악한 본능과 대적하여 싸워야만 한다(롬 6:6; 7:23; 고전 9:27; 갈 5:16,17; 골 3:5, Stibbs, Caffin, Blum, Leighton).

성 경: [벧전2:12]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성도의 행실]

⭕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 '이방인'은 본래 육체적 혈통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은 비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간과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욕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물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잡히지 않는 선한 행동을 해야한다. '선하게'의 헬라어 '칼렌'(*)은 나타나는 행위 뿐만 아니라(마 13:8) 그 본성까지 옳은 것을 의미한다(히 13:18).

⭕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가운데서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프튜온테스'(*)는 '감시자'를 의미하는 '에포스테스'(*)에서 유래한현재 능동태 분사로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심하게 관찰함을 시사한다(3:2, Meyer). 한편 '권고하시는 날'은 눅 19:44을 반영한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위로와 해방을 주시는 날'(출 3:16; 삼상 2:21), '심판과 형벌의 날'(출32:34; 시 58:6)을 의미했다. 이러한 '권고하시는 날'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Kuhl, Calvin, Hunter). (2) 혹자는 마지막 심판날이라고 주장한다(Hart). (3)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는 날이라고 주장한다(Moffatt).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이방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방편(方便)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첫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Lenski, Stibbs, Blum).

성 경: [벧전2:13]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대한 순복]

⭕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 '제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세이'(*)는 본래 '토대'나 '창조물'을 의미한다(막 13:19; 롬 1:25;고후 5:17; 골 1: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제정한 법과 질서에 대해 '크티세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제도들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암시하며(롬 6:1),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 윤리 생활을 사회 제도내에서 충실하게 이행해야 함을 시사한다(Meyer, Calvin). 그러나 인간이 세운 제도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는 '주를 위하여'라는 분명한 기준이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Bigg, Clark, Hoffmann). 본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에 징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인간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동해서는 안 됨을 시사한다.

⭕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 '위에 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휘페레콘티'(*)는 '위에 서다'(*, 휘페레코)의 능동태분사로 '보다 높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위에 있는 왕'은 신적 왕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통치자' 곧 당시의 로마 황제를 나타낸다(롬 3:1,Stibbs, caffin). 베드로는 당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나 왕이 잔악한 폭군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복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요 19:11).

성 경: [벧전2:14]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대한 순복]

⭕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 본문은 롬 13:3,4을 반영한 것으로 위정자들의 임무를 나타낸다. 위정자나 혹은 통치자의 역할은 악행하는 자를 징계하고 처벌하며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포상하는 것이다. '그의 보낸'의 헬라어 '디 아우투 펨포메노이스'(*)는 문자적으로 '그를 통하여 보내어진'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명사 '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lvin, Hort, Robertson). (2) 혹자는 로마 황제가 속주들을 다스리기 위해 총독들을 파송한 것을 근거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ffin, Bigg, Clark).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방백들은 범법자를 처벌하고 선행자를 포장(褒奬)하라는 황제의 뜻을 수행할 책임을 갖고 있는 지방총독이나 식민지 총독들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들은 황제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방백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 통치자라고도 할 수 있다(롬 13:1-7).

성 경: [벧전2:15]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데한 순복]

⭕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 '어리석은 사람들'의 헬라어 '텐 톤 아프로논'(*)는 이성이 없을 정도로 몰지각한 사람을 의미하는데(고전 15:36) 본절에서는 위정자나 혹은 비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또한 '무식한'에 해당하는 '아그노시안'(*)은 단순히 지식이 결핍된 것만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거나 수용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나타낸다(고전 15:34).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서 선행을 행하고 위정자들이나 법에 순복함으로 이방인 곧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잡히지 않아야 한다(12절, Stibbs, Caffin,Leighton).

성 경: [벧전2:16]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대한 순복]

⭕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 '자유하나'의 헬라어 '호스 엘류데로이'(*)는 문장 구조상 독립 주격구문으로 앞절의 '선행으로'에 연결된다(Alford).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자유를 방종이 아닌 합법적인 권위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으로 나타내야 한다. 한편 '악'은 온갖 종류의 '악덕'을 의미한다(12,14절).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소유했다고 해서 그 자유를 오용하여 악덕을 행하는 구실을 삼거나 혹은 방종하는 구실을 삼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 자유를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와 사단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에서 해방된 진정한 자유이다(요 8:32,36; 롬 6:15; 갈 5:13). 그러한 자유를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 자유를 사용하는 죄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롬 6:16-23).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앞서 언급한 방백이나 법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외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로 순복해야 한다(Stibbs).

성 경: [벧전2:17]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제도에 관한 순복]

⭕ 뭇 사람을 공경하며 - '공경하며'의 헬라어 '티메사테'(*)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강조성을 띤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Caffin, Blum,Stibbs).

⭕ 형제를 사랑하며 - '사랑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파테'(*)는 '아가파오'(*, '사랑하다')의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을 계속적으로 사랑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독특한 특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자들의 지속적인 우애를 가리킨다(1:22; 3:8; 4:8; 5:14, Stibbs, Caffin, Selwyn).

⭕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 '두려워하며'(*, 포베이스데)와 '공경하라'(*, 티마테)는 모두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행동의 지속성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중해야 하나 하나님과 왕을 섬기는 자세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왕을 존중하고 순복한다 할지라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멸할 수 없는 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마 10:28). 따라서 하나님과 왕에 대한 태도는 상충(相衝)될 수 없으며 왕을 공경하는 것은 형제 사랑이니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어긋나지 않게해야 한다(Alford, Blum).

성 경: [벧전2:18]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주인에 대한 종의 순종]

⭕ 사환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케타이'(*)는 문자적으로 '집의 것'이라는 의미로 '가정에 소속된 하인'을 나타낸다(눅 16:13; 행 10:17; 롬14:4, Robertson, Caffin).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신분이 천한 '종'(*, 둘로스)과는 다른 의미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종속된 자들을 가리킨다(엡6:5-7; 골 3:22-25; 딤전 6:1; 딛 2:9).

⭕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 '두려워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는 존경심을 가지고 경외하는 마음을 의미한다(17절).이는 형벌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환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들의 권위를 중시해야 함을 시사한다(엡 6:5, Lenski, Stibbs, Robertson). 한편 '순복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탓소메노이'(*)는 '휘포탓소'(*, '순종하다')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주인에 대해 순종해야 함을 시사한다(3:1; 롬 12:16, Robertson, Michaels).

⭕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러하라 - 사환들의 순종은 주인의 인격의 좋고 나쁨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과 '까다로운 자들'에는 관사 '토이스'(*)가 연결되어 주인들의 인격을 암시한다. 여기서 '관용하고'의 헬라어 '에피에이케신'(*)은 '양보한다'는 의미를 가진 '에이코'(*)에서 파생된 말로 법같이 엄하지 않고 쉽게 용서하는 마음을 의미하며 '까다로운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스콜리오이스'(*)는 '마음이 뒤틀린 자'란 의미로 성품이 온당치 못해 하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자들을 가리킨다(Alford, Robertson. Leighton). 사환들은 주인의 인격을 불순종의 변명거리로 삼지 말고 주인의 인격이 어떠하든지간에 순복해야 한다.

성 경: [벧전2:19]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면]

주제2: [주인에 대한 종의 순종]

⭕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 본절은 사환들이 까다로운 주인을 만나 부당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경우를 나타낸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는 인간의 행동이 의무감에서 마지 못해 하는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Caffin, Bigg). 사환들은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하게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주인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인내해야 한다. 한편 '이는 아름다우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토 가르카리스'(*)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감사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AV) 혹은 '이러한 것은 인정받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 5:10-12에 대한 반영으로 종이 주인의 부당한 처사를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으면 그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은혜받을 증서가 됨을 시사한다(Caffin, Stibbs, Selwyn, Blum).

성 경: [벧전2:20]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주인에 대한 종의 순종]

⭕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 '죄가 있어'의 헬라어 '하마르타논테스'(*)와 '매를 맞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콜라피조메노이(*)는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그 죄의 결과로 반복되는 응당한 벌을 받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생활 곧 사환들 자신에게 과오가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고 참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 본문은 19절에 대한 확대 해석이다. 고난을 받음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죄의 결과라면 수치스러운 것이나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은혜로 받을 가치가 있다(Caffin, Moffatt).

성 경: [벧전2:21]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개역성경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호티'는 본절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아야 하는 이유임을 시사한다.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 '부르심'은 본래 구원에 초대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암시한다(롬 8:28-30, Blum, Hort).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엡 4:1; 빌 3:12-14).

⭕ 그리스도도...하셨느니라 -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 너희를 위하여 - '위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대신 당하신 것으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순수하게 타인을 향한 목적에서 행동하셨음을 암시한다(요 10:11. Stibbs, Michaels).

⭕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속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난의 참된 본보기를 제시하시고 따라오도록 하셨다(마 20:28; 26:28; 눅 24:25-27,44-47, Bengel, stibbs, Blum,Leighton).

성 경: [벧전2:22]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 베드로는 사 53:9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누죄하심에도 불구하고 고난당하심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께서 애매히 고난받는 자의 참된 모범이 되심을 확증하고 있다(마 26:60; 요 18:38; 19:4,6). '궤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는 '거짓'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종들이 많이 저지른 죄악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고난받는 종들과는 달리 거짓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죄가 없으신 무흠하신 존재이셨다(Caffin, Stibbs, Leighton).

성 경: [벧전2:23]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본절은 사 53:7을 암시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친히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마 26:64).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법정에서 아무런 죄 없이 우리를 대신하여 심문과 고난을 당하시는 가운데서도 위협하거나 욕하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셨다.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의 헬라어 '우크 안텔로이도레이'(*)와 '위협하지 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에페일레이(*)는 모두 미완료 시제로 그리스도께서 시종일관 죄를 타인에게 돌리지 않는 습관적 태도를 나타내 보이셨음을 시사한다(Robertson, Michaels).

⭕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자에게 부탁하시며 - 본문에는 목적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목적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한다(Bigg, Caffin, Robertson). (2) 혹자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눅 23:34, Alford). (3) 혹자는 주님에 관해 열리고 있는 재판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Vincent, Hart, Bengel). 세가지 견해 중 첫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부탁하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디두'(*)가 미완료 시제로 계속적인 위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눅 23:46에서도 주님의 죽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Stibbs).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대신하여 수많은 고통을 당하시는 가운데 침묵하시고 도리어 모든 일을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기 자신과 모든 결과를 맡기셨다(Bengel, Selwyn, Blum).

성 경: [벧전2:24]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친히...그 몸으로'의 헬라어 '호스 아우토스...엔 토 소마티'(* ... )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와 강조적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가 연결되어 자발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한편 '담당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넹켄'(*)은 '제단에 희생 제물을 두다'는 의미를 가진 '아나페로'(*)의 부정과거로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에 대하여는 제물을 대신하였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공의를 만족시켰다(사 53:12; 골 2:14;히 9:28, Kuhl, Bigg).

⭕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십자가상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이유이다. '죄'의 헬라어 '타이스 하마르티아이스'(*)는 복수로,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디카이오쉬네'(*)는 단수로 표현되어 죄인이 갖는 죄의 속성과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법정적인 측면을 나타낸다(롬 6:1-23; 갈 2:20).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동참하여 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본문은 사 53:5의 인용이다. '채찍'의 헬라어 '몰로피'(*)는 본래 매질로 말미암은 자국이나 흔적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사 53:5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드러냄으로(Lumby)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범을 바라보면서 순종하고 인내해야 함을 강조한다(Caffin, Leighton, Calvin).

성 경: [벧전2:25]

주제1: [성도의 의무에 관한 권고]

주제2: [고난의 모범]

⭕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 본문은 사 53:6의 인용으로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 구원받기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인식치 못하고 습관적인 방황에 빠져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Blum, Leighton).

⭕ 이제는 너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베드로는 상반절의 '전에'와 본문의 '이제'(*, 뉜)를 대비시켜 구원받기 이전의 죄의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던 영적 죽음의 상태와 생명을 얻은 현재의 상태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목자'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었으며(시 23:1; 사40:11; 겔 34:23)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마 25:32; 요 10:14; ; 13:20). 또한 '감독'은 '목자'와 거의 같은 의미로 목자의 기능적인 면, 곧 돌보고 감찰하는 면을 나타낸다(행 20:28).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죄인으로서 죄의 종노릇을 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목자와 감독되신 그리스도에게 그 영혼을 보호받는다(4:19; 겔34:23, Bengel, Bigg, Leighton).

성 경: [벧전3:1]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부부에 대한 권면]

⭕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 '이와 같이'(*, 호모이오스)는 2:13을 가리킨다(Blum). 그러므로 아내 된 자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지위에 있어서 열등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른 가정 생활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노예와 같은 지위에서 남편들에게 맹종을 할 수는 없으나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 가장인 남편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고 아내는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Stibbs). 따라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자의 관계이다.

⭕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 본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 하는 목적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고 믿지 않는 남편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도를 순종치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믿지 않는 남자들과 결혼한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 여자들을 비방하 는자들을 가리킨다(9절; 2:12,15,Balch, Michaels).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비그리스도인 남편들과 결혼했을 경우 그 여자는 남편의 사회적인 배경에 따른 여러 가지 습관과 종교적인 의식들을 이해해야 한다. 만약 순종치 아니한다면 그 사회는 그리스도인의 자질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게 된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비그리스도인 남편을 자신들의 말로써 회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해야 한다. '말로 말미암지 않고'는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나친 말싸움이나 유창한 말을 가지고 입씨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구원을얻게 하려 함이니'에서 '얻게 하려 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르데데손타이'(*)는 '이익'을 의미하는 '케르도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이익이 되게 하다'라는 뜻이다.

성 경: [벧전3:2]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부부에 대한 권면]

⭕ 너희의...봄이라 - '봄이라'의 헬라어 '에포프튜산테스'(*)는 '주의 깊게 관찰하다'의 뜻으로 비그리스도인 남편이 그리스도인 아내의 삶을 자세히 관찰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됨을 암시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 아내의 행위는 두 가지로 묘사된다.

⭕ 두려워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앤 포보'(*)는 남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의 모습이다(Blum, Robertson). 비그리스도인 남편은 그리스도인 아내가 하나님을 늘 인식하고 경외하는 가운데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 정결한 행위 - 이것은 흠이 없고 깨끗한 '순결한 삶'을 의미한다. 비록 이교도처럼 이교신을 숭배하는 예배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 아내는 당시 사회의 정숙한 아내상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 비그리스도인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를 인정케 하고 그 아내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Michaels).

성 경: [벧전3:3]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부부에 대한 권면]

⭕ 너희 단장은...외모로 하지 말고 - 본문은 외모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보다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할 것을 시사한다. 여자들의 단장은 마땅한 것이나 인위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려고 단장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은 의모를 보고 판단할지라도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삼상 16:7). '단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질서를 가진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쓰인 장식을 나타낸다(Robertson). 당시 전반적으로 사치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일부 계층에서 머리를 땋고, 금장식을 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벧전3:4]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부부에 대한 권면]

⭕ 오직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은 앞절과 본절이 대조되고 있음을나타낸다. '외모', '단장'과 '숨은 사람', '머리, 금, 옷'과 '심령'을 대조시켜서 그리스도인 여인이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해서 강조한다(Selwyn).

⭕ 마음에 숨은 사람을 - '숨은 사람'은 앞절의 '외모'와 대조 개념으로 '속 사람'을 의미한다(롬 7:22; 고후 4:16; 골 3:9, Michaels). 속 사람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생명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마음으로서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두며, 그와 연합하여 깨끗하고 신실하며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15절;1:22).

⭕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썩지 아니할 것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앤 토 아프다르토'(*)는 본서의 독특한 용어로 구속함 받은 그리스도인 여인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표현이다(1:4,18,23, Michaels). 이것은 두 가지 마음으로 정의된다. (1) 온유하고. - 이것은 마음의 동요를 일키지 않는 것으로(Bengel) 남편의 태도나 요구를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기질을 나타낸다(Stibbs) (2) 안정한 - 이것은 타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동요에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으로(Bengel) 틀림없이 남편을 보필하는 것을 나타낸다(Stibbs) 이런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인정할 만하며 가치있는 덕목이다. 한편 '심령'의 헬라어 '프뉴마토스'(*)는 '성령'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인 여인이 지니는 어떤 '기질'을 나타낸다(Lenski, Michaels). 이러한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성 경: [벧전3:5]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부부에 대한 권면]

⭕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 - 여기서는 구체적인 구약 시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거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이'(*)는 '거룩한 선지자'를 칭할 때 사용되었으며(눅 1:70; 행 3:21) '사도'(엡 3:5)와 '천사'를 호칭할 때(막 8:38)도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여인들에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사용된 것으로(1:15; 2:5,9)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것처럼 구약 시대의 '부녀들'도 이미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로서 '거룩한 자들'이었다(Michaels). 하나님에게 둔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한편 '부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귀나이케스'(*)는 다음 절에서 예로 '사라' 혼자만이 언급된 반면에 복수로 나타나고 있다. 유대 전승에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아내인 사라, 리브가, 라헬과 레아가 족장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부녀들'은 이들을 가리키는 듯하다(Michaels). 이들은 그들의 뜻이 하나님 앞에 고정된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갈망했던 그들은(5절; 1:3,13; 히 11:13) 내면의 아름다움을 단장했던 자들이었다(Bengel, Blum).

⭕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 저자는 '거룩한 부녀들'이 갖춘 내면의 아름다움을 '순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단장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스문'(*)은 습관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로서 '단장하곤 했다'라는 의미이다.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내적인 단장이며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되는 장식이었다.

성 경: [벧전3:6]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부부에 대한 권면]

⭕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순종을 통해서 내면적인 아름다움으로 단장한 '거룩한 부녀들' 중 '사라'를 실례로 들고 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름으로 그에게 복종했다(창 18:12). 비록 자기 남편을 주라 칭했던 것이 당시의 풍습이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주'라는 호칭이 아브라함에 대한 사라의 순종의 표시임을 강조한다. 이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고 복종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Stibbs). 한편'딸'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는 문자적으로 '자녀'를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믿음의 아버지인 것처럼(롬 4:11; 갈 3:7) 아브라함에게 순종한 아내 사라 역시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가 되며(갈 4:22-31) 아브라함과 사라는 모든 믿는 자의 부모가 된다. 실제로 사 51:2에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동일하게 유다의 부모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심할 것 없이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부모로 간주할수 있다(Goppelt).

⭕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 이 부분은 본절에 대한 삽입구로 볼 필요가 없다. 하나의 독립된 구절로 보아서 '너희가 선을 행하면','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의 분사구로 해석함이 탸당하다. 그러나 이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딸이 될 수 있다'라는 조건적 분사로서가 아니라 이 현재 분사를 부정과거로 연결시켜 이미 '사라의 딸이 되었으므로 선을 행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해석되어야 타당하다(Lenski). 한편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는 잠 3:25의 인용이다. 이 말은 너희가 딸이 되었으므로 이교도 남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고 난폭하게 취급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두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침착하고 용기를 가지라는 권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딸이 되었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벧전3:7]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부부에 대한 권면]

⭕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한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들에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와같이'는 1절과 동일한 분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결혼의 관계를 세상의 제도적인 것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로 인식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남편 된 자들이 마땅히 아내들에게 결혼 생활 속에서 감당해야 할 의무는 연약한 아내를 보살펴 주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부부 관계에 있어서는 마땅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 '지식'에 대한 헬라어 '그노신'(*)는 하나님께서 의도하고 있는 결혼 관계에 대한 인식 즉 결혼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는 통찰력을 의미한다(Vincent). 한편 '동거하다'의 헬라어 '쉬노이쿤테스(*)는 '함께 살다'의 '쉬노이케오'(*)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특히 성교와 관련된 말이나(Kelly) 본문에서는 단순히 남편이 아내와 갖는 성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여자의 육체적인 연약함을 돌보는 전체적인 관계를 나타낸다(Reicke).

⭕ 저는...귀히여기라 - 베드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하게 대할 것을 권면한다.

⭕ 더 연약한 그릇이요 - 이것은 지적이나 도덕적인 연약성이 아닌 육체적인 연약성을 가리킨다(Blum).

⭕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 아내가 남편에게 귀히 여김을 받을 또 다른 이유는 영적인 면에서 남편과 동등하게 영생의 은총을 공유한 자이며 그것을 상속받을 동등한 동반자이기 때문이다(Stibbs, blum, Michaels).

⭕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남편과 아내가 꾸미는 가정은 교회의 축소판이다(Clement).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협력하며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였을 경우 두 세사람과 함께 계신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 이다(마 18:20;고전 7:5). 그러나 서로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기도 생활에서(4:7-11; 마5:23-24; 6:12,14; 18:15-20; 막 11:25) 남편이 악하게 아내를 대하거나 서로가 불화하는 경우에는 기도의 효력이 발생하기 어렵다.

성 경: [벧전3:8]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2:18-3:7에 있는 명령을 마무리하면서 5개의 형용사를 사용함으로 완곡한 권면을 하고 있다. 본절에 사용된 5개의 형용사는 동일하게 분사적인 용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특별한 계층으로 부터 신자의 특성으로관심을 옮긴 것으로(Goppelt, Selwyn) 신자의 상호 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 마음을 같이하여(*, 호모프로네스) - 이것은 '같은'을 뜻하는 '호모스'(*)와 '마음'을 의미하는 '프렌'(*)의 합성어로서 '한가지 일에 뜻을 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일한 의견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가 서로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가지며 영적인 끈으로 연합되어야 함을 시사한다(행 4:32, Michaels).

⭕ 체휼하며(*, 쉼파데이스) - 이것은 '함께'를 뜻하는 '쉰'(*)과 '고통을 받다'에 해당하는 '파스코'(*)의 합성어이다. '쉼파데이스'의 직접적인 의미는 '동정심을 갖다'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참여하여 고난 받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동정하는 것을 나타낸다(히 10:34).

⭕ 형제를 사랑하며(*, 필라델포이) -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필라델포이'는 '사랑'에 해당하는 '필로스'(*)와 '형제'에 해당하는 '아델포스'(*)의 합성어이다. 이는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결속시키는 형제애로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윤리적 덕목이다(롬 12:10; 살전 4:9,10; 히 13:1; 벧후 1:7).

⭕ 불쌍히 여기며(*, 유스플랑크노이) - 이것은 '좋은'의뜻을 가진 '유'(*)와 '마음'을 뜻하는 '스플랑크논'(*)의 합성어이다. '유스플랑크노이'는 히포크라테스 당대에 '내장이 강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의미가 변화되어 '용기 있는'이나 '인정 많은'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Selwyn).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나 동정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고후7:15; 몬 1:7, Bigg).

⭕ '겸손하며'(*, 타페이노프로네스) - 이것은 '겸손한'의 의미를 가진 '타페이노스'(*)와 '마음','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렌'(*)의 합성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가지셨던 마음으로(잠 29:23;빌 2:6-9) 낮은 마음을 나타낸다.

성 경: [벧전3:9]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 베드로는 본절에서 일반적인 불신자와의 관계를 말함으로써 결론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해치고 욕하는 자에게도 보복하는 일이 없이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교훈이다(눅 6:27-29; 23:34). '갚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디돈테스'(*)는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아포디도미'(*,'지불하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복을 빌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군테스'(*)는 저주의 반대말로 '좋게 말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악이나 욕으로 갚아도 될 만한 상황 속에서라도 저주나 앙갚음을 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고 중보 기도해야 함을 시사한다(Blum).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히나'(*, '...을 위해서')로서 목적절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히나'는 목적절로 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목적절로 해석하면 복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려고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복을 빌어야 한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복을 빌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Lenski,Bengel, Blum).

성 경: [벧전3:10]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 본절은 시 34:12-16을 인용한 것이다. 본래 시편에서는 '생명'과 '좋은 날'이 이 세상과 관련된 표현이나 베드로는 본절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그 의미를 종말론적 차원까지 확대하고 있다(Blum). 즉 베드로는 '생명'이 단순히 '이 세상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망인 영생을 지칭하는 것으로(Michaels), '생명을 사랑하고'는 7절의 '알아'와 연결되어 단순히 생명을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깨달아서 그 목적에 맞게 소망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다(Lenski). 한편 '좋은 날'은 시편 기자가 '이 세상의 아름답고 즐거운 날'로 묘사했으나 본문은 장차 올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Beare, Kelly)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날'을 가리킨다(1:8). 이렇게 영생을 소망하고 사랑하며 다가올 세계를 기다리는 자는 곧 그리스도인이다.

⭕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맡하지 말고 - 영생을 사랑하고 다가올 세계를 간절히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약 3:6). '궤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론'(*)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것을 삼가하며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화평은 세상에 목표를 두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 이루어진다.

성 경: [벧전3:11]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 '떠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클리나토'(*)는 문자적으로 '돌아서라'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악에서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가운데 선을 행해야한다(Tasker).

⭕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리 - 본문은 시 34편에서 인용한 듯하다(Goppelt,Michaels). '화평을 구하는 것'은 서로를 세워 주는 것이며(딤후 2:22), 현실적인 삶에 순응하여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삶이다.이런 '화평'은 상대가 불신자든(롬 12:18) 특별히 그리스도인이든 간에(고후 13:11; 살전 5:13)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윤리적 덕목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붙잡아야 할 것이다.

성 경: [벧전3:12]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성도들간의 사랑]

⭕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 '주'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Michaels) 시 34:15,16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lum, Stibbs). 한편 '눈'은 항상 자신의 섭리에 따라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감찰하심을 의미하며(출 2:25) '귀'는 자신이 백성의 필요한 간구를 들으심을 의미한다(출 3:7).

⭕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 '주의 낯'은 하나님께서 악행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진노의 모습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표현이다(Blum). 한편 '향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는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1) '넘어서'(over). (2) '대항하여'(against). 두 가지 의미 중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들이나 동일하게 향하시나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넘어 가시며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악한 자를 대적하여 진노하시기 때문이다(시 34:16).

성 경: [벧전3:13]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 '열심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타이'(*)는 '뜨겁게 하다' 혹은 '타는 듯하다'의 뜻을 가진 '젤로오'(*)에서 유래된 말이며, '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코손'(*)은 '나쁜'이라는 뜻의 '카코스'(*)에서 나온 말로서실제로 '상처를 내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또한 그의 귀가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므로 열정을 갖고 선을 행하는 자들이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전혀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절은 유대주의적인 표현으로(시 56:4; 118:6; 마10:28; 롬 8:31, kelly)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절은 육체적인 것은 해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영혼까지는 해칠 수 없으며(마 10:28), 그들이 믿음의 사람에게 육신적으로 해를 가한다고 할지라도 묵묵히 참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승리가 보장됨을 시사한다.

성 경: [벧전3:14]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 헬라어 본문에서 '고난을 받으면'은 실제로 일어날 확실한 박해를 암시한다(Robertson).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마 5:10)이 베드로가 인용한 것이다(Michaels). 한편 '복있는 자'(*, 마카리오이)는 베드로가 자신의 서신에서 잘 쓰는 단어 형태로(4:14) 이러한 복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 속할 기대를 가지고 견뎌내는 자가 갖는 것으로 미래적인 것이다(Blum). 따라서 본문은 수신자들이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순간을 견디어이기면 축복의 영광을 소유할 것임을 시사한다.

⭕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 본절은 사 8:12의 인용이다. 70인역은 '저희에 대한 두려움'로 잘못 이해하여 '앗수르 왕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하였으나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톤 포본 아우톤'(*, '그들의 두려움을')으로 '그들의 두려움을 두려워 말라'로 해석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어떠한 상황하에서든지 주께 헌신한 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서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Calvin).

성 경: [벧전3:15]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 본절은 사 8:13의 인용이다. 사 8:13에서 '주'는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이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온 톤 크리스톤'(*)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퀴리온' 앞에 관사가 없으므로 서술격으로 해석되어 '그리스도를 주로서'라는 의미이다(Christ as Lord,NIV,RSV). (2) '퀴리온'과 '톤 크리스톤'을 동격으로 '주, 즉 그리스도를'이라는 의미이다(Bigg, Micha6els, Selwyn). 한편 '거룩하게 하고'의 헬라어 '하기아사테'(*)는 그리스도를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나타낸다(Michaels). 그리스도인은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불러주신 거룩하신 분, 그리스도를 알려야 한다(1:15,16; 2:9b).

⭕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소망이라 함은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소유하는 기대이다(1:3,21;롬 4:18; 엡 2:12).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두고 소망을 가진 자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될 수 밖에 없으며 비그리스도인들은 그 점에 대해 의아해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수호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답'에 해당하는 '아폴로기안'(*)은 본래 재판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변호할 때 사용되어진 용어이다(행 22:1; 25:16). 본문에서 법정 용어가 사용된 것은 공식적인 대답의 요건을 갖추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대답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헬라어 본문에는 '알라'(*, '그러나')가 본문앞에 삽입되어 있다. 베드로는 '알라'를 사용하여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온유'의 헬라어 '프라위테토스'(*)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이며(딤후 2:24,25)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2절; 1: 17;2:17, Blum).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변론하는 과정에서자기 주장이나 감정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합당한 진리만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Stibbs).

성 경: [벧전3:16]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선한 양심을 가지라 - '선한 양심'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아가는데에서 생기는 자유와 담대함과 관련된다(행 24:16; 딤전 1:19, Michaels, Blum). 이러한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들이 변론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근거이다. 아무리 논리에 맞는 대답과 설득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만약 양심이 선하지 않다면 복음에 대해서 올바로 증거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만다.

⭕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함이라 - '욕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레아존테스'(*)는 '모욕하다'를 뜻하는 '에페레아조'(*)에서 유래된 말로서 '정신적으로 학대하다'라는 의미이다(Robertson).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과 깨끗한 행동을 보일 때 그를 모욕하고 핍박하던 자들의 거짓이 드러나 오히려 그들이 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벧전3:17]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 이 구절은 2:20과 같은 구조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특별히 '선을 행함'(*, 아가도포이운테스)과 '악을 행함'(*, 카코포이운타스)이 병행 구절로 되어 비교되고 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행한 악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부끄러움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고난받는 자들을 축복하신다(2:15,19,20; 4:13,14; 골 1:24, Stibbs, Blum).그러므로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성 경: [벧전3:18]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 '죽으사'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에파덴'(*, '고난당하였다')로 되어 있으며(B.K.P) 어떤사본에서는 '아페다넨'(*, '죽었다')으로 나온다(*,A.C). 여기서 어떤 것을 취한다 할지라도 의미에는 변화가 없으나(Blum) 2:21과 4:1의 연관성으로 보아 '에파덴'으로 보는 것이 탸당한 듯하다(Caffin, Lenski). 한편 '죄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하마르티온'(*)은 '죄에 관하여','죄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속죄제의 희생을 나타낼 때 쓰인 어구이다(레 5:7; 6:20;겔 43: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로서, 그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번에 드린 대속적인 죽음이었다(Bigg)

⭕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의인이시지만 죄를 지은 불의한 인간을 위하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사 53:5,6, 11,12)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셨다(Blum). '대신하셨으니'의 헬라어 '휘페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되는 목적절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목적을 나타낸다. '인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사가게'(*)는 본래 법관 앞으로 데려오거나궁전 앞으로 데려올 때 사용된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깊이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로사가게'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나(히 6:20) 희생 제물과 관계가 없으며(Selwyn, Kelly, Goppelt). 어두움에서 빛으로, 우상에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개종의 경험과 연관된다(Michaels, Stibbs).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하였다.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 본절은 '죽으심'과 '부활', '육신'과 '영'이 대조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헬라에서는 물질과 영을 나누어서 해석하는 방법이 유행하였으나 본절의 '육체로는'의 헬라어 '사르키'(*)와 '영으로는'의 헬라어 '프뉴마티'(*)는 도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아니라 영역을 나타내는 여격이다. 따라서 '육'과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육'은 인간적인 생명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를 '영'은 부활하신 생명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selwyn, blum, Dalton, Michaels).

성 경: [벧전3:19]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 본절은 해석상에 있어서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 있는 영은 누구인가? 만약 영을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전파하셨는지, 아니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파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다면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전파하셨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1) 혹자는 '에녹의 영'이 음부에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파했다고 주장한다(Nestle, Harris, Moffatt, Goodspeed). (2) 혹자는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부활하기까지의 동안에 노아의 홍수 때 멸망하여 음부에 갇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파했다고 주장한다(Bigg, Hunter).(3) 혹자는 그리스도가 성육신 전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당시의 패역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도했다고 주장한다(Jerome,Augustine, Aquinas).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의 '옥'은 이 세상은 의미한다. (4)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도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Blum, Dalton,Kelly). 이러한 견해들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20절; 1:10,20; 벧후 2:5).

성 경: [벧전3:20]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 1세기 때에 묵시 문학에서 노아의 홍수는 종말에 오는 심판의예표로 종종 이용되곤 하였다(마 24:37-39; 벧후 3:3-10). 또한 신약 시대에 와서 노아 시대의 홍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로 비유된다(21절). 그래서 홍수 가운데 방주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보존된 '의의 상징'이었다(히 11:7). 반면에 홍수에 멸망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그리되었다. 하나님은 '방주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창 6:3; 롬2:4; 벧후3:9)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방주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여기서 '방주'는 '교회'에 대한 상징으로(Justin, Tertullian) 노아 시대에 120년을 기다리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벧후 3:9).

⭕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겨우 여덞 명이라 - '물로 말미암아'(*, 디 휘다토스)는 '물을 통하여'라는 의미이며 '방주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에이스 헨'(*)은 '방주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방주 안에 들어간자들이 물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음을 시사한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았지만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이 안전하게 방주를 밀어올림으로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를 통한 구원을 상기시켜준다. 한편 '여덟 명'이란 숫자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불과 소수만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특히 고난을 받은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Kelly).

성 경: [벧전3:21]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맘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 노아의 가족을 구원한 물은 침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침례의 형태에 참여한 것을 곧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참여하여 연합되어야 얻을 수 있다.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는 표시이다. 실제로 노아 홍수때의 물은 침례시의 물의 '실체'(*, 안티튀폰)이고 침례 때의 물은 '표상'(*, 튀포스)이다(TDNT).

⭕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 본문은 침례의 중요성을 배제시키려고 함이 아니다. 단지 침례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로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혹자는 '육체의 더러운 것'에 나타난 소유격을 주격으로 보아서 '육체가 더러움을 제거함으로'라는 의미로 보나(Bengel) 침례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까닭에 심령의 죄를 씻어내는 것이다(히 10:22).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

성 경: [벧전3:22]

주제1: [고난에 대한 권면]

주제2: [의를 위한 고난]

⭕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 그리스도께서 고난 후에 승귀하여 영광의 자리에 계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오르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류데이스'(*)는 19절에서 사용되었던 분사로서 계속적인 승리의 전진을 나타낸다(Stibbs).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권세와 모든 피조물로부터 존귀를 받으시는 영광 중에 거하신다(시 110:1; 롬 8:34).

⭕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존재들 즉 '천사'와 '권세', 그리고 '능력'은 강력한 힘을 지닌, 선한 천사나 악한 천사의 구별없이 영적 세력을 의미한다(롬 8:38; 고전 15:24; 엡 1:21) 이들은 영적 존재로서 일시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결국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온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성 경: [벧전4:1]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 베드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본(本)을 강조하고 있다. '육체의 고난'은 문자적으로 '육체 안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의미로(KJV, RSV, NASB) 그리스도께서 '육의 생활영역'에서 죽기까지 고난받으셨음을 시사한다(3:18, Michaels,Stibbs, Blum).

⭕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 '갑옷'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플리사스데'(*)는 '무기'를 뜻하는 '호플론'(*)에서 유래된 단어로 여기서는 전장(戰場)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현세의 삶 속에서 사상이나 이념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을 의미한다(Lenski).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갑옷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온유했던 대속적인 마음을 의미한다(빌 2:5, Cranfield).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속에서 고난당하시는 가운데 가지셨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Kelly)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다(Calvin, Bigg, Selwyn, Michaels, Blum).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의 유혹과 권세가 이기지 못하여 죄가 끊어지게 되며(롬 6:8, 11) 깨끗한 삶을 영위하는 성화의 한과정을 경험하게 된다(Selwyn, Cranfield, Stibbs).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의 동참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함으로 죄의 권세가 지배할 수 없는 성화의 삶을 영위하도록 권면한다.

성 경: [벧전4:2]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그후로는...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을 제시한다. '육체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사르키'(*)는 '육체 안에서'라는 의미로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지상 생활을 나타낸다. 한편 '남은 때'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생명이 남아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 사람의 정욕을 좇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 '사람의 정욕'과 '하나님의 뜻'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사람의 정욕'의 헬라어 '안드로폰 에피뒤미아이스'(*)에서 '안드로폰'은 본서에서 한번을 제외하고는(3:4)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6절;2:4, 15), '에피뒤미아이스'는 단순히 성적인 욕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모든 죄악된 욕망을 의미한다(요일 2:16, Selwyn, Michaels).한편 '하나님의 뜻'은 문맥상 죄를 그치고(1절) 부끄러운 죄악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2, 3절). 비록 베드로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정의하지 않았지만, 본서 내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왕을 공경하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19절; 2:15,17;3:17).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타락된 본성에서 비롯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

성 경: [벧전4:3]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너희가...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 - 본절은 수신자들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삶에 대한 묘사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삶은 과거 그리스도인이 되기전으로 족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방인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본절의 '뜻'의 헬라어는 '불레마(*)로 2절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뜻'(*, 델레마)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불레마'는 확고한 목적성이 없어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처럼 변하기 쉬운 것을 가리키며 '델레마'는 목적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뜻을 가리킨다(Caffin). 한편 '행한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이르가스다이'(*)는 완료 분사로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전부 이방인 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수신자들은 더이상 과거 이방인의 삶과 동일한 죄악된 삶을 영위할 이유가 없다. 죄악된 삶은 과거 이방인 시절로 족한 것이다. 베드로는 경고하기 위해서 과거 수신자들이 저지른 세 가지 부류의 죄악을 열거한다. (1) 음란과 정욕 - 본문은 성(性)과 관계된 죄악이다. '음란'은 절제되지 않은 지나친 정욕으로 인한 부도덕한 성행위를 가리키며.'정욕'은 사악한 욕망들이 내적으로 감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 '정욕'은 '음란'으로 향하게 된다(2절;2:11). (2)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 - 본문은 '술'과 관계된 죄악이다. '술취함'의 헬라어 '오이노플뤼기아이스'(*)는 '포도주'라는 뜻의 '오이노스'(*)와 '솟아 오르다'라는 뜻의 '플뤼오'(*)의 합성어로서술에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방탕'은 술취한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것을 의미하며 '연락'은 '큰 술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 술이 만취 되었을때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쉽게 범죄하게 된다. (3) 무법한 우상 숭배 - '무법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데미토이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허락하다'라는 뜻의 '데미토스'(*)가 합성된 말로서 자연과 양심의 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음주와 음란이 섞인 가증스러운 것이었다(왕상 21:26; 겔 7:20; 롬 2:22). 그 결과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기억지 못하게 되고 그분을 떠나 허탄한 우상에 빠져버리게 된다.

성 경: [벧전4:4]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이러므로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이러므로'의 헬라어 '엔 호'(*)는 본서에서 다섯 번 나타나며(1:6; 2:12; 3:16,19) '이러한 생활 안에 있으므로'를 의미한다.이것은 한때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삶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상히 여겨'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존타이'(*)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크세노스'(*)에서유래된 말로 '낯선 사람처럼 보이다'라는 의미이다(행 10:6, 18;17:20). 이방인들은과거에 자신들과 같은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낯선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Bigg). 이러한 모욕과 비방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아니하는 것을 - 본문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비방하는 이유이다. '극한'(*, 아소티아스)은 자기 자신을 무모하게 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눅 15:13). 그러므로 '극한 방탕'은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며 방종한 생활에 버려둠으로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생활을 말한다(엡 5:18; 딛 1:6). 이방인들은 과거에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아 전혀 다른 새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들처럼 살지 않는다고 비방한다.

성 경: [벧전4:5]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 본래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던 심판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주셨다(요 5:22,27; 행 17:31; 롬 2:16).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해서 마땅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자들을 말한다(살전 4:15). 여기서 '죽은 자'는 복음을 듣지 못한 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는 '마땅히 심판하시는 자'를 표현한 것으로 심판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 경: [벧전4:6]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본절에 '이를 위하여'(*)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심을 가리킨다(Selwyn).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자'의 '심판주'가 되시기 위해서 '죽은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죽은 자'에 대해서 혹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Augustine, Frasmus, Luther)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성이 없다. 왜냐 하면 앞절에서 육체적으로 죽은 자에 대해 이미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Stibbs). 따라서 본절의 '죽은 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하기 전에 죽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Dalton, Kelly, Moffat, Selwyn,Cranfield).

⭕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는 '육체로'와 '영으로'를, '심판을 받으나'와 '살게 하려 함이니라' 대조시켜서 본절이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 목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심판을 받으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도시(*)는 부정 과거로 육체로는 세상에서 이미 심판을 당하였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살게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조시'(*)는 현재형으로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아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으로는 영원히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복음은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하는 능력으로(요일 3:14)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할수 있으나 영적으로는 복음이 제공하는 생명력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수 있다.

성 경: [벧전4:7]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 '만물의 마지막'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3:10, Stibbs). '가까왔으니'의 헬라어 '엥기켄'(*)은 '가까이잡아 당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엥귀스'(*)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임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베드로는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낙심치 말고 소망을 가질 것을 권고하고 있다.

⭕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네사테'(*)는 '소리'라는 뜻의 '소스'(*)와 '마음'이라는뜻의 '프렌'(*)의 합성어로서 '올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을 의미하며 '근신하여'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조심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생활을 버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성 경: [벧전4:8]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 에크테네)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벧전4:9]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대접하기를'의 헬라어 '필록세노이'(*)는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와 '나그네'를 의미하는 '크세노스'(*)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풀다'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여관'이 없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다(딤전 3:2; 5:10; 딛 1:8).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쫓겨다니면서 전도 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자들이 많았기때문이다(Lenski, Cranfield). 따라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여서 사도들은 자주 이 덕에 대해서 언급하였다(롬 12:13;히 13:2; 요삼 1:5-8). 한편 베드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조건으로 '원망없이'할 것을 권면한다. 당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에 겨울 수도 있었으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불평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25:35, 38, 40).

성 경: [벧전4:10]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 -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다양하다(롬 12:6;고전 12:4).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할지라도 그 은사는 서로 비교되거나 자기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고전 4:7) 교회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Cranfield).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해야 한다. 이 '봉사' 는 '상대를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 본절은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통해 서로 섬겨야하는 자세를 나타낸다. '각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킬레스'(*)는 여러 가지 특색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은 한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주시지 않고 각 사람마다 다양한 종류의 은사를 허락하셔서 각 사람이 서로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여 필요한 부분을 채우도록 하신다. 한편 '청지기'는 본래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양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청지기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통해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멋을 추구해야 한다(Robertson, Blum).

성 경: [벧전4:11]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베드로는 본절에서 은사의 사용 범주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 첫번째 범주는 '말의 사용'이다. 여기에서 '말하려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랄레이'(*)는 모든 종류의 말을 의미하며 '말씀'의 헬라어 '로기아'(*)는 하나님의 입에서나오는 말씀으로 계시를 의미한다(Blum ). 그리스도인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처럼 즉 성경 말씀처럼 해야한다(고후 5:20; 살전 2:13).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표본 삼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함을 시사한다(Lenski).

⭕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 둘째범주는 '봉사'이다. 베드로는 봉사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다 열거하지 않고 한 단어로 묶고 있다.'공급하다'의 헬라어 '코레게이'(*)는 본래 '합창하다'라는 의미였으나 후에 '하나님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공급해주시는 것을 염두에 두고 힘껏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해야 한다(Calvin).

⭕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함이니 -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앞서 언급한 두가지 범주 즉 말과 봉사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베풀어 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은사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전영역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행해야만 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 인해서 가능한 것임을 암시한다(Beare).

⭕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본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영이다(롬 11:33-36; 엡 3:20, 21). '그에게'의 헬라어 '호 에스틴'(*)은 선행사가 예수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인지 분명치 않으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Stibbs, Michaels, Kelly, Goppelt, Selwy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광'이란 의미가 되어 논리에 어긋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논리상 타당하므로 본절에 해당하는 선행사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Blum, Clement).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고 영광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 연결되기 때문에(롬 16:27; 유 1:25; 계 1:6, Lenski, Robertson) 찬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의미에는 특별한 차이가 없으며 아마도 베드로도 대상을 구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송영이 이곳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원래 본절이 독립된 것이었는데 삽입된 것으로 주장하나(Clement)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위엄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

성 경: [벧전4:12]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사랑하는 자들아 - 베드로는 본절부터 다시 핍박 받는 자들에 대한 권면을 한다. 본문은 수신자를 향한 베드로의 애정어린 마음을 나타내며(2:11) 동시에 새로운 권면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

⭕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불시험'으로 묘사된다. '시련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페이라스몬'(*)은 진위(眞僞)를 가리는 것으로 유혹이 아니라시험(test)을 의미한다. 이 '시련'은 본절에서 '불 시험'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 시험'의 헬라어 '테 엔 휘민 퓌로세이'(*)는 문자적으로 '너희 중에 타고 있는 불'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고통스럽게 타는 불'로서 소돔성을 파괴시킬 때의 불로 묘사되며(Josephus) 또한 종말에 '바벨론 성'을 멸망시킬 불로 나타나기도 한다(계 18:9, 18). '퓌로세이'는 순수한 금속을 얻기 위해 제련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불같이 뜨거울 것을 상징한다(시 66:10; 잠27:21; 계 3:18, Stibbs, Blum). 이러한 시련을 끝까지 믿음으로써 견디는 자는 저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한편 '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메 네'(*)는 현재분사로 베드로나 수신자가 이미 경험했고 또한 현재에도 고난을 당하고 있으며 장차 계속 다가올 시험임을 시사한다.

⭕ 이상한 일 당하는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 '이상히 여기지'의 헬라어 '크세니제스데'(*)는 실제적인 박해에 의해서 '사람을 마비시킬 정도의충격'을 의미한다(Beare).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앞에 다가오는 시련을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그 시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그 고난의 동참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쁨과 영광에 참예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Stibbs, Blum).

성 경: [벧전4:13]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 고난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여러 가지 핍박과 치욕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겪을 때와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즐거워하라'의 헬라어 '카이레테'(*)는 현재분사로 그 즐거움이 일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받을 때 후에 주어질 영광의 승리를 바라보며 항상 어떤 조건하에서도 즐거워해야 한다.

⭕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너희로 줄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 본절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는 절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즐거워하는 목적이며 마지막 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게한다. 현재에 당한 고난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할정도로 어려운 것이지만 그날의 영광을 생각하면 능히 이기고도 남을 만한 것이다.'기뻐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갈리오메노이'(*)는 너무 기뻐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극도의 기쁨을 나타내는 단어로(Lenski)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극명한 대조를 통해 고난보다 즐거움과 기쁨이 훨씬 큰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벧전4:14]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엔 오노마티 크리스투)는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표현은 주님이 하셨던 표현이며(마 5:11) 초대 교회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박해가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거의 전문적인 표현 방식으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마 10:22; 요 15:21; 행 9:16; 15:26; 21:13; 계 2:3; 3:8, Kelly). 한편 '욕을 받으면'은 믿지않는 사람들로부터 비방이나 능욕을 받는 것으로 본서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다(4절; 2:12, 15; 3:16). 이것은 70인역에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비방했던 것에 대해 많이 사용했으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받은 모욕을 나타낼때 많이 사용되었다(마 27:40 - 44; 롬 15:3; 히 13:13).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에서 당하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후대 영광에 참여할 복된 것이다.

⭕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당하는 자들이 복 있는 이유이다. 본절에서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되어 '성령'을 나타낸다. '영광의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테스 독세스'(*)는 문자적으로 '그 영광의 그'이다. 이 표현은 쉐키나(S-hekinah)를 묘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영광을 가리킨다(출 16:7; 24:16; 29:43; 40:34; 민 14:10; 왕상 8:10, 11; 사 6:1 ; 겔 1:28,Cranfield, selwyn). '하나님의 영' 곧 '영광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들에게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게 되며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소유됨을 시사한다(Stibbs). '계심이라'의 헬라어 '아나파우에타이'(*)는 '쉬게 하다', '자리잡다'라는 의미로 성령의 임재를 시사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임재해 계셨으며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행 7:55, Bigg).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시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이 동참할 때 하나님의 두드러진 속성인 영광을 보게 된다(행 7:55).

성 경: [벧전4:15]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이름'때문에 받는 것이어야 하며 세상에서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악행으로 받는 고난은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며 그 악행 자체는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로'(*, 호스)는 앞의 세 가지 범죄와 다음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 사이를 분리하여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는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이나(Deismann), '금지된 일하는 자'(Bigg) 혹은 '밀고자'(NIV)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들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로 인해 고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 경: [벧전4:16]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은즉 - '그리스도인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 즉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다(13절).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행 11:26; 26:28) 그 말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제자','형제', '성도'라는 호칭이 사용되다가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당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아그립바는 그리스도인을 경멸할 때 사용하여(행 26:28) 초기에는 주로 신자들을 박해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Goppelt). 따라서 신약성경 기록 당시에는 보편적인 단어가 아니었으나 그후 A.D. 64 년 경까지 로마에서 신자사이에 이 말의 적합성을 깨닫고 그들 스스로가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Tacitus, 행 11:19 - 26 주제 강해 '그리스도인' 참조).

⭕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본절은 베드로 자신의 수치인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건을 암시한다(막 14:66 - 72, Blum). 베드로는 처음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나(막 14:68)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있다. '그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엔 토 오노마티투토'(*)는 후기 사본에서 '이런 이유 때문에'(*, 엔 토 메레이 투토)로 기록 되어 있다(K,L,P). 그래서 흑자는 이 구문을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라는 의미로서 신분 의식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Selwyn, kelly). 그러나 '그 이름으로'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라는 의미이다(Blum, Stibbs). 왜냐하면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붙어도 고난과 핍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14절).

성 경: [벧전4:17]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성도들의 새 생활]

⭕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 '하나님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고전 3:16; 딤전 3:15; 벧전 2:5). 왜냐하면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에 하나님의 심판이 성소에서 시작된다고 했기 때문이다(렘 25:29; 겔 9:6; 말 3:1-6 ).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으로 인하여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있으나(마 24:8, 9) 이 심판은 멸망당할 심판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본절은 종말의 모습이 먼저 그리스도인에게 임해서 성결케 하고 다음에 확대될 것이라는 사상을 표현하고있다(1:7; 슥 13:7-9; 말 3:1-5, Stibbs,Blum).

⭕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게 되는데 하물며 악인들은 어떠하겠는가? 이 심판 앞에서는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베드로는 앞서 언급한 '하나님 집'과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대조시켜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는 하나님 집도 심판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더 크고 분명한 심판을 받을 것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세상에 선포된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로(막 1:15; 롬 1:1; 살전 2:2, 8, 9, Michaels), 이런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살후 1: 5-10).

성 경: [벧전4:18]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 본절은 잠11:31(LXX)의 인용이다. '의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니며 어려운 불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한다(12절).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이 얻는 구원도 '겨우' 얻는 것이다. 혹자는 '겨우'(*,몰리스)를 '고통'이라고 하나(Scott) 여기서는 '간신히', '겨우'라는 말이 합당하다. 의인인 그리스도인도 심판을 통해서 겨우 구원을 얻는다. 의인들도 그러할진대 경건치 않은 자들은 당연히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고 멸망당할 것이다. 베드로가 본절에서 의인의, 구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방탕한 길에 빠지지 않고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Calvin).

성 경: [벧전4:19]

주제1: [고난과 성도의 각성]

주제2: [그리스도인의 고난]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찾아오는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그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1:6; 5:6).

⭕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박해하는 핍박자들에게 악으로 갚을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도리어 선을 행하므로 갚아야 하며, 확신을 가지고 고난 가운데에도 자신의 영혼을 보호해 주실 것을 부탁해야 한다(Stibbs). '부탁할지어다'의 헬라어 '파라티데스도산'(*)은 '예금하다', '맡기다'의 '파라티데미'(*)에서 유래된 말로서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의탁하는 것'을 뜻한다. '파라티데스도산'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것과(눅 23:46) 스데반의 의탁이다(행 7:59). 한편 '조물주'(*, 크티스테)는 외경에는 많이 등장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이곳에만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능히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사한다(Bigg).

성 경: [벧전5: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장로에게 주는 교훈]

⭕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 지금까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 즉 사환(2:18), 아내들(3:1), 남편들(3:7), 모든 사람들(3:8)에 대한 권면이었으나 본절은 장로들에 대한 권면이다. '장로'(*, 프레스뷔테루스)는 구약 시대부터 시작된 호칭이다(출 3:16,18; 24:9; 민 11:16; 수 20:4). 구약 시대에는 주로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적으로 직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장로 제도를 사용하였으며(행11:30; 21:18)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다(행14:23). 따라서 이 제도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여러 지역으로 번져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장로'는 '감독'(*, 에피스코포스) 과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딤전 3:1; 딛 1:7). 그러나 감독은 직분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하며, 장로는 신분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와 같은 장로는 교회에서 전반적인 것을 관리하는 영적 지도자로서 교인들을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일을 감당하였다(히 13:7;약 5:14, Blum, Stibbs, Selwyn). 한편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자신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함께 장로 된 자요 -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서로가 같은 동역자임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이는 결코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훈계하고자 하는것이 아니며 자신도 '장로'로 같은 '장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함을 시사한다(Brown). (2)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직접 그리스도의 고난을 목격한 증인이요(행 5:32; 10:39), 그것을 증거할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임을 의미한다(요 21:15 - 18; 행 1:8). (3)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 '나타날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보여 주실 영광이며(4:13) 동시에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누릴 영광이다(롬 8:17, 18). 혹자는 본절의 영광이 변화산상에서 베드로가 목격한 영광을 지칭한다고 하나(Stibbs) 그것보다는 장차 임할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 경: [벧전5: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장로에게 주는 교훈]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베드로는 요 21:15 - 17에서 예수께서 자신에게 부탁했던 말을 다른 목자들 즉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본래 '양'은 그리스도의 것이며(요 10:14; 21:15), 하나님의 것이다(행 20:28). 그런데 목자장이 되시는그리스도께서 양 무리를 돌보는 직임(職任)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양 무리'를 돌보고 양육하는 직임을 다하라고 장로들에게 권면한다. 장로들은 이 때 두 가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1)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 '부득이함으로'의 헬라어 '아낭카스토스'(*)는 '자원함으로'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억지로'를 의미한다. 일부 영역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 빠져 있는데(KJV) 그러면 뒤에 나오는 '자원함'을 설명할 수 없다. 장로들은 주어진 직임을 행할때 인간적인 열심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신 마음으로 즉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심으로 행해야 한다(행 20:28). (2)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 본절은 당시의 장로직에 일정한 보수가 있었음을 암시한다(딤전 5:17, 18). '더러운 이'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공동체의 재정을 이용하는 행위이며(Kelly), '즐거운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뒤모스'(*)는 헌신적으로 열심을 내는것을 가리킨다. 장로들은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의 재정을 이용하거나 돈을 목적으로 직임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헌신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성 경: [벧전5: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장로에게 주는 교훈]

⭕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 본절 역시 앞절과 마찬가지로 장로가 직임을 감당할 때 취해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한 언급이다. '맡기운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론'(*)은 본래 '제비 뽑기'란 의미의 '클레로스'(*)에서 나온 단어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들어갔을 때 제비 뽑기를 하여 땅을 할당 받았던 것에서 유래한다(수 18:10). 그래서 '클레론'은 '분배', '몫', '할당'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막 15:24; 행 1:26), 본문에서는 레위인에게 할당한 기업처럼 신성한 은혜에 의한 '몫'이다(민 3:12). 한편 '주장하는 자세'는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 무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장로 직임은 하나님의 은혜로 맡겨진 것이기 때문에 장로들은 지배를 하거나 다스리는 자세로 양 무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겸손한 마음과 신성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여서 양을 양육하고 돌봐야 한다.

성 경: [벧전5: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장로에게 주는 교훈]

⭕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 신약성경에서 단한번 나오는 '목자장'(*, 아르키포이메노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는 '목자'로 불리어졌으나(2:25) 본절에서는 장로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목자장'으로 사용되었다(Deissmann). 모든 양들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는 '큰 목자'요(히 13:20) '선한 목자'(요 10:11, 14)이시며 베드로를 포함한 장로들은 목자장이신 예수의 '대리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대리 목자들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서 적합한 보상을 해주실 권리가 있다. 그것의 상급은 '시들지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다. '시들지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마란티논'(*)은 '아마란티노스'라는 절대로 시들지 않는 꽃 이름에서 나온 단어로 '쇠하지 않음'을 상징하며(Robertson) '면류관'은 운동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을 가리킨다. 직임을 잘 감당하는 장로들은 그리스도로부터 합당한 상급으로 영원히 쇠하지 않는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롬 8:17, 18; 요일 3:2).

성 경: [벧전5:5]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장로에게 주는 교훈]

⭕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 본절에서는 '장로'를 1절에서 처럼 굳이 '직분자'로 해석하거나, '젊은 자'(*, 네오테로이)를 '성직자'나 '집사'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네오테로이'가 성경에서 직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장로'는 단순히 '연장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Kelly, stibbs, Blum).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에게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땅한 질서이다. 한편 '허리를 동이라'의 헬라어 '엥콤보사스데'(*)는 '옷 입다'라는 의미로 노예들이 주인을 시중들기 위하여 앞치마를 두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께서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상기시키는 권면으로(요 13:14 - 17)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본절은 잠 3:34(LXX) 의 인용으로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젊은 자들이 장로들에게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대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탓세타이'(*)는 군대를 배치시킬 때 사용하는 군사 용어였다(Caffin).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교만하여 자기의 능력만을 믿는 자들을 대적하셔서 파멸시키신다. 반면에 겸손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성 경: [벧전5:6]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회중에 대한 권면]

⭕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구약 시대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에 종종 사용되었던 표현이다(출 3:19; 6:1; 13:3; 신 9:26; 렘 21:5). 베드로는 '겸손'과 '높임'을 대조시켜서 현재에 받는 어려운 고난을 통해 겸손할 때 장차 그리스도의 때 곧 재림의 때가 되면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으로 바뀌게 될 것을 권면한다.

성 경: [벧전5:7]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회중에 대한 권면]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본절은 시55:23(LXX)의 인용이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난'(*)은'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림나'(*) 에서 유래한 단어로 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을 의미한다(마6:25 - 34).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염려를 다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맡겨 버리라'의 헬라어 '에피립산테스'(*)는 '던져버리다'라는 의미로 부정 과거 분사형이나 본절에서는 새로운 명령형 형태를 취하지 않고 6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Kelly). 이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항상 보호하시는 손에 염려를 맡겨야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권고하심이니라'의 헬라어 '멜레이'(*)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로 '염려가 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걱정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을 맡겨야 하며 그때만이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

성 경: [벧전5:8]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회중에 대한 권면]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깨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레고레사테'(*)는 '깨어 있다'라는 의미인 '에게이로'(*) 에서 유래된 단어로 잠에서 깨어있는 상태뿐만 아니라 영적인 경각심을 갖도록 할 때 또는 권고나 주목을 요청할 때 사용되었다(마 26:40, 41; 막 13:35 - 37, Lenski).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 다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귀'(*, 디아블로스)는 '비난하는 자' 곧 '사단'을 가리킨다(대상 21:1; 욥1:6- 12; 슥 3:1). 베드로는 '마귀'를 배고픈 사자로 비유하여 사단의 유혹이 강력함을 시사한다.

성 경: [벧전5:9]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회중에 대한 권면]

⭕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 '굳게 하여'(*, 스테레오이)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단단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원래 마귀를 대적하는표현으로 많이 사용되었다(Selwyn). 본문에서도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믿음을 반석처럼 견고하게 세울 것을 권면하는데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터로 하였을 때 굳건히 설 수 있으며 굳건한 믿음의 소유를 통해서 마귀를 강력히 대적 할 수 있다(약 4:7). 이는 죽음의 위협에서도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Kelly).

⭕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 '세상'은 성경에서 사용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사람이 사는 보편적인 우주'를 지칭한다(Kelly). 또한 '형제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표현이다(1:22; 2:17; 3:8).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동일한 몫의 고난을 당한다(Kelly). '당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텔레이스다이'(*)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에피텔레오'(*)에서 나온현재 진행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세상에서 계속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시사한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수 많은 고난 가운데 처하게 되지만 그 고난을 통해 보다 완전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성 경: [벧전5:10]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회중에 대한 권면]

⭕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 - 베드로는 본절에서 모든 권면을 마치고 위로의 힘을 얻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행하시는 일에 대해 언급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소망의 위로가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도우심으로 은혜를 베푸심을 암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는 사역에서 시작된다. 그 부르심의 목적은 영원한 영광 즉 궁극적인 구원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 안에서'의 헬라어 '엔 크리스토'(*)는 바울이 잘 쓰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는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

⭕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 '잠깐 고난'은 장차 온전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영원한 영광'과 대조를 이룬다.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겪는 고난은 그것을 참고 견디어 소유하게 되는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4개의 동사를 나열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확실한 개입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다(Selwyn, RV).

⭕ 온전케 하시며 - 이것은 '완전케하다'를 뜻하는 것으로 본문에서는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시사한다(고전 1:10; 고후 13:11).

⭕ 굳게 하시며(*, 스테릭세이) - 이는 '어떤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하게 하는것'(살후 2:17)을 나타낸다.

⭕ 강하게 하시며(*, 스데노세이) - 이는 자율적으로 봉사하도록 무장시킨다는 의미로서(Masterman) '굳게 하다'의 동사와 뚜렷한 구별을 할 수 없는동사이다.

⭕ 견고케 하시리라(*, 데멜리오세이) - 이는 확고한 신앙의 터전 위에서 요동치 않도록 하는 것을 나타낸다(Bengel).

성 경: [벧전5:1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회중에 대한 권면]

⭕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 이런 송영은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형태이며(4:11) 그리스도의 교훈(마 5:16), 바울서신(롬 11:36; 16:27;갈 1:5; 딤후 4:18), 공동서신(2:12; 히 13:21; 벧후 3:18), 묵시서신(계 1:6; 5:13)등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권력'의 헬라어 '크라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된 단어로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의미한다(Stibbs).

성 경: [벧전5:1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문안과 축복]

⭕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 '실루아노'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12절에서 14절까지는 사도 베드로의 친필인 것을 말해준다. '실루아노로 말미암아'의 표현은 실루아노가 본 서신의 대필자임을 분명히 해준다. 그는 '실라'라고도 하며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때 동행했던 자이다(행 15:22- 33; 15:40; 18:5). 그리고 바울의 서신에서도 '실루아노'라고 불리었다(Selwyn). 실루아노가 베드로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베드로 전 후서 를 기록하는데 큰 공헌자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실루아노'를 '신실한 형제'라고부른다. '신실한 형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피스투 아델푸'(*)는 정관사로 연결되어서 수신자들이 실루아노에 대해 잘알고 있음을 시사한다(Stibbs).

⭕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 본서의 주요한 특징은 권면이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권면한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이제까지 권면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 안에서 뿌리를 내려야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설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벧전5:1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문안과 축복]

⭕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헬라어 '헤 엔 바뷜로니 쉬네클레크테'(*)는 문자적으로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그 여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그 여자'란 누구인가? 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베드로의 아내라고 주장한다(Stibbs). 왜냐하면 베드로는 전도여행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었기 때문이다(고전 9:5, Clement). (2) 혹자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enski, Kelly, Blum). 이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헬라어로 교회는 여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베드로의 부인이었다면 구체적으로 이름을 열거하였을 것이고 또한 고대의 사본에는 교회라고 직접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바벨론'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 이다. (1) 혹자는 베드로가 가서 전도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는 실제 '바벨론'이라고 주장한다(Calvin). 그러나 베드로가 그곳에서 전도를 했다는 정확한 근거가 없고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타당성이 없다. (2) 혹자는 '애굽의 한도시'라고 주장한다(Strabo, Josephus). 그러나 베드로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희박하고 기독교가 초기에 이곳에서 발전했다는 자료도 없다. (3) 혹자는 '로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enski, Stibbs, Kelly, Blum). 바벨론은 세상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로마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 베드로는 마가를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 초대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후에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마가를 내 아들 이라고 한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딤전 1:2;딤후 1:2) 친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베드로의 영적 아들인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골 4:10) 본명은 마가 요한이다(행 12:12,25). 그는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 때 동행했으나 제 2차 전도 여행때는 동행하지 않았다(행 13:5;15:37-39). 그러나 후에 바울이 투옥되자 시중을 들었었다(골 4:10; 몬1:24).

성 경: [벧전5:1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인사]

주제2: [문안과 축복]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도가 주로 사용한 표현이다(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 살전 5:26). '입맞춤'은 초대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인사법으로(눅 7:45, Justin, Tertullian, Chrysostom) 2세기 경까지 지속되었다. 3세기 이후에는 남녀가 구분되어 행해졌으나(TDNT)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기를 기도함으로 서신을 끝맺는다. '평강'(*, 에이레네)은 히브리인의 인사말로서 '샬롬'(*)과 같은 것으로 본 서신은'평강'으로 시작해서(1:2), '평강'으로 끝을 맺는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과 관련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할때 소유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