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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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사무엘상 주석



성 경: [삼상1:1]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엘가나와 두 아내]

&#11093; 에브라임 산지 - '에브라임 산지' (the hill couny of Ephraim)는 팔레스틴 중안부에 위치한 구릉 지대로서, 이곳은 팔레스틴 남부에 위치한 유대 산지보다 훨씬 비옥하였으며, 특히 이곳의 서부지역은 더욱 그러하였다. 아울러 이곳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 개시된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제일 먼저 점령된 지역이었다. 또한 이 때문에 이 지역에 위치한 '실로' (Shiloh)는 가나안 최초의 성지(聖地), 즉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장소가 되어 호수와 시대와 사사 시대, 그리고 사무엘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사회의 중심지가 될수 있었다<3절>. 한편 이지역이 '에브라임 지파가 그지역을 기업으로 분배받았기 때문이다(수 17:15). 그러나 에브라임 산지에 에브라임 지파만이 거주 한 것은 아니었다. 에브라임 산지의 남쪽은 베냐민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역시 거주하고 있었다(수 18:11).

&#11093; 라마다임소빔 - '라마다임소빔' (Rama-thaim-Zophim)은 '숩 족속의 두 고지(언덕)' 또는 '숩 땅에 있는 고지들' 이라는 의미로서, 사무엘 가문의 조상이었던 '숩'(혹은 '소배', 대상 6:26)이라는 사람이 그곳에 정착함으로써 붙어진 지명이다(Kdil,Fay, Smith, Driver). 아마도 두 개의 고지(언덕)위에 세워진 듯한 이 '라마다임소빔'은 에브라임 산지 중 베냐민 지파 거주 지역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단순히 '고지'(高地)라는 이름의 의미를 갖고 있는 '라마'와 동일한 지역이다<19절>. 한편 '라마'(*, Ramah)는 사무엘이 태어난 고향이요, 그가 활동한 사역의 중심지이며, 또한 후일 사무엘이 죽어 장사된 곳으로, 사무엘 시대에 주요한 위치를 점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특별히 '라마다임소빔' 이란 원지명을 사용한 이유는 팔레스틴 지역에는 많은 '라마'(언덕 마을, hilltown)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 사무엘의 고향 '라마'와 서로 구별하기 위함이다(Keli, Smith)라는 말로 간단히 표하고있다(2:11; 7; 8:4; 15:34; 16:13; 19:18; 25:1; 28:3). 한편 이 지역은 후일 시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자 요셉의 고향과 동일한 '아리마대'로 불리워졌다(요 19:38)

&#11093;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 '에가나'(Elkanah)는 본문의 족보와 역대기의 복보(대상6:1, 27, 28)를 종합해 볼 때, 레위 지파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강해, 사무엘의 가계>. 그런데 본문에서 그를 '에브라임 사람' 이라 칭한 까닭은 그가 에브라임 지파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그 지역에 거주하여였기 때문이다. 사실 레위 지파는 타지파처럼 일정한 기업을 받지 봇하고,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의 종교 생활을 지도해야만 허었다(민 35:1-8 주석 참조). 또한 '라마'는 여호수아에 의해 정식으로 지정된 레위인의 성읍도 아니었다(수 21:17). 따라서 사무엘의 조상 '숩'(Zuph)은자신의 조상에게 원래 할당된 지역을 떠나 바로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듯하다(삿17:7, 8).

&#11093; 여로함...엘리후...도후...숩 - 이들은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 가문의 조상들이다. 그런데 이들 조상들의 이름이 역대기의 족보에서는 약간 달리 나타나고 있다. 즉 대상6:26, 27에서는 '여로함-엘리압-나핫-소배'란 이름으로, 그리고 대상 6:34, 35에서는 '여로함-엘리엘-도아-숩이란 이름으로 각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는 (1) 독법(讀法)의 다양성과(Keil Delitz-sch Commentary) (2) 의도적인 개명(改名), 그리고 (3) 시간의 흐름에 따른 철자의 변이(變移)때문일 것이다(PulpitCommentary). 여하튼 이와같은 족보의 소개는 사무엘서의 역사성을 확증해 주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 이와같이 성경은 대체로 어떤 주요 사건이나 인물을 소개할 때 그 사건이 인물의 역사성(歷使性)부터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창 5:1; 10:1 11:27 ; 36:1 출 6:14-27; 대상 1-9장; 마 1:1-17; 눅 3:23-38).

성 경: [삼상1:2]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엘가나와 두 아내]

&#11093; 두 아내가 있으니 - 어쩌면 후사를 얻기 위함일런지 모르겠지만, 당시 경건했던 엘가나까지 중혼(重婚)의 관습에 쉽게 물들었다는 사실은 사사 시대가 얼마나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암울했던 시기였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창 4:16-24 강해, 일부다처제>. 한편 신명기 21:15-17의 규레는 마치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용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신명기의 규레는 단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아내를 여럿둠으로써 부득이하게 야기될수 있는 경우를 대비케 하는 성경적 해결책일 뿐이다<강해, 축첩과 그에 대한 성경적 견해>.

&#11093;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 '브닌나'(Peninnah)는 '진주','보석','산호' 등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이처럼 히브리 여성의 이름은 보석이나 꽃, 또는 동물의 이름과 관련된 것이 많이 나타난다. 한편 여기서 '자식'(*, 옐라딤)은 '어린이' 혹은 '아들'의 복수형으로서, 이는브닌나가 최소한 2명 이상의 자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11093; 한나는 무자하더라 - 한나(*,Hannah)는 '사랑스러움' 또는 '은혜스러움'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히브리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특별히 여기서 이 이름은 그녀가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5전), 또한 후일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많이 입었다는(2:21)실제적 사실과 잘 부합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초기에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번민과 소외감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자녀의 출산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증거로 삼은 반면(신 7:13,14; 시 107:13), 무자(無子)는 하나님의 징계나 저주의 결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창 20:18).

성 경: [삼상1:3]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고통과 엘가나의 위로]

&#11093; 매년에...경배하며 - 경건한 레위인 엘가나는, 히브리 모든 남자는 매년 정한 기간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율법규정(출 34:23; 신 12:5)에 따라 이 의무를 이행하였다. 물론 성경은 매년 세 차례씩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출23:17>. 그러나 극히 타락했던 사사 시대의 정황 속에서 엘가나가 이정도나마 신앙적 열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11093; 실로 - 이곳은 당시 법궤가 보관된 곳, 곧 성소(Tabernacle)가 있는 지역이었다. 법궤(언약궤)는 처음에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 '길갈(Gilgal,수 4:19 주석 참조)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가나안 정복 후 땅 분배할 동안에 '실로'(Shiloh, 수 18:1 주석 참조)로 옮겨진 후 이때꺼자 아곳 살로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북쪽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실로'는 여호수아 시대 말기로부터 사사 시대 및 사무엘 시대 초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요, 정치적 주 무대이며, 군사적 요해지(要害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 시대 말기에 블레셋 족속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실로가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실로의 영광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5:1; 시78:60-64).

&#11093;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 - 이 명칭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jehovah God of Hosts)의 축약어로서 , 구약 중 여기서 최초로나오는 단어이다. 이 명칭은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17:45), 후에는 하늘의 천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왕상 22:19)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명칭은 하나님게서는 하늘과 지상에 만물을 아울어 통치하는 분이심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여기 이 명칭은 참된 경배와 제사의 대상이 되시는 분에게 적절히 적용된 명칭이다(F.R.fay, R. Payne Smith).

&#11093; 제사를 드렸는데(*, 리즈보아흐). - 제물과 감사의 현물, 그리고 기도가 포함된 광의적 의미의 제사를 말한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는 엘가나가 제사 완료후 그 제물을 가족들에게 나눠주었고(4절) 또 그들이 그것을 함께 먹었다는 점(9절)에서 볼때, 여기서 엘가나가 드린 제사는 제사장의 몫 이외의 나머지 부분을 자신과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가 일정한 장소, 곳 성막의 뜰이나 성막의 별채<1:18>에서 함께 나누어 먹을수 있었던 '화목제'(和睦除,Peace-offering)를 가리키는 듯 하다(레 7:14, 30-36; 민 6:20; 신 18:1).

&#11093; 엘리(*, Eli) - '엘리'는 제사장 가문중 유력한 비느하스 가문의 후손이 아니고, 이다말(민 4:28, 33)의 후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란한 사사 시대 말기에 대제사장직과 사사직을 동시에 갖고 있었음을 볼 때, 그는 유명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Klein). 그러나 그는 자녀 교육 실패의 결과, 방탕한 두 아들로 인해 결국 불운한 말년을 맞게 된다(2:27-36; 3:11-14 ; 4:18). 자세한 내용은 2:36 주석을 참조하라.

&#11093; 홉니와 비느하스가...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 70인역(LXX)은 여기에 '엘리'도 삽입시켰으나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당시 엘리는 노쇠한 관계로 제사장적 업무를 감당치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측컨데, 엘리는 제사장적 업무를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주로 일임하고, 자신은 사사의 직무만 감당한 것 같다(Keil Delitzsch, R. Payne Smith).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들로서 제사장의 소임을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들이었고(2:12, 22), 이는 결굴 엘리 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성 경: [삼상1:4]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고통과 엘가나의 위로]

&#11093; 제사를 드리는 날 - 모세 율법상 모든 히브리 남자가 일년 3차씩 중앙 성소에 올라가 준수해야 할 절기는 무교절(유월절), 맥추절(오순절, 칠칠절), 수장절(장막절, 초막절)이었다(출 23:14-17). 그런데 이중 엘가나가 택하여 제사를 드린 날은 무교절(유월절)이었던 것 같다(Smith,Fay). 그 이유는 (1)이 세 절기 가운데 유월절이 가장 큰절기였고, (2)또한 이때는 전 가족이 함께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1년 1차 유월절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던 관습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것 같다(눅 2:41).

성 경: [삼상1:5]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고통과 엘가나의 위로]

&#11093; 갑절(*, 마나 아하트 아파임) - 이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즉 (1)'아파임'을 '사람들'이란 의미로 이해하여 '사람들의 분깃'으로보는 견해(Gesenius), (2)'아파임'을 '분노' 혹은 '슬픔'의 의미로 이해하여 '엘가나는 한나에게 분깃을 줄 때 슬퍼하였다'로 보는 견해(Vulgate), (3)'아파임'을 잘못 삽입된 단어로 이해하여 단순히 '한 분깃'으로 보는 견해(LXX), (4)복수명사의 어미를 갖고 있는 '아파임'을 두 사람의 의미로 이해하여 '두 사람의 몫'으로 보는 견해(Keil, Delitzch) 등이다. 이와 같이 여러 해석이 나오는 것은 '아파임'(*)이란 단어가 '콧구멍'(창 2:7; 애 4:20), '얼굴'(창 3:19; 사 49:23) '분노','슬픔'(11:6)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J.P Lange, commentary on the oldTestamwnt). 그러나 한나가 브닌나 보다 더욱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과, 여러 갑절을 줌으로써 자신의 호의를 표현했던 중근동 지방의 일반적인 관습(창 43:34)으로 미루어보아 위의 견해 중 네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11093;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 일정기간 동안 한나가 아이를 잉태하지 못한 것은 '사라'(창 11:30), '리브가'(창 25:21),'라헬'(창 29:31),'마노아의 아내' 등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친히 모태(母胎)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잉태하지 못하던 여인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 자녀를 낳는 예가 많다(창 18:10-15; 21:1-4; 25:21; 30:22-24; 삿 13:3; 눅1:7,57). 그러한 의미에서 여기 한나의 불임(不妊)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서, 곧 꺼져가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이처럼 '육적(肉的)인 출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관과 섭리는 역시 '영적(靈的)인 출생'(중생)에 관한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롬 11:36; 엡 4:6).

성 경: [삼상1:6]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고통과 엘가나의 위로]

&#11093;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 사가르 베아드 라흐마흐'(*)를 직역하면, '그녀의 태(胎)를 닫으셨기 때문에'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태의 문'을 여닫으시는 생명의 주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말이다.

&#11093;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 여기서 '격동하다'(*,카이스)란 말은 '괴롭히다','약올리다','슬프게 하다','충동질하다','화나게 하다'등의 뜻이 있다. 그리고 '번민케 하다'(*, 라암)란 말 역시 '괴롭히다','세게 뒤흔들다','자극하여 분노케 하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브닌나가 무자(無子)한 한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여자로 보고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음을 나타내는 말이다<3절>.

성 경: [삼상1:7]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고통과 엘가나의 위로]

&#11093; 매년에...그같이 하매 - 이는 성소에 올라가 제사를 드린 후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가족에게 나눠줄 때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는 일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를 향한 엘가나의 호의가 단순한 동정이 아닌 순수한 사랑에 근거했음을 깨닫게 되나, 바로 이 일로 인하여 브닌나는 시기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한나를 더욱 격동시키게 되었을 것이다(Keil).

성 경: [삼상1:8]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고통과 엘가나의 위로]

&#11093; 어찌하여 울며...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 이말은 엘가나가 한나의 우는 이유와 먹지 아니하는 이유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 말은 무자(無子)로 인해 겪는 그녀의 고통을 깊이 헤아리고 그녀의 슬픔에 동참하면서 진정으로 달래는 애정어린 위로의 말이다. 여하튼 본절은 기쁨의 가족 잔치가 되어야 할 화목제사의 시간이 되고 말았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창조의 원리(창 2:21-25)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일부 일처(一夫一妻)의 제도가 아닌 일부 다처(一夫多妻)의 가정-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가정, 야곱의 가정 등-에서는 항상 기쁨 보다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Matthew Henry).

성 경: [삼상1:9]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기도와 서원]

&#11093; 그들이...먹고 마신 후에 - 루터 역(譯)은 엘가나의 위로를 받은 한나가 제사 음식을 먹었을 것이란 가정 하에 이 말을 '그녀(한나)가...먹고 마신 후에'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말은 단순히 한나가 음식을 먹지는 않았으나(7절), 가족들이 먹고 마시는 잔치에 함께 참여 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F.R.Fay, R. Payne Smith). 따라서 그녀는 공동 식사의 의식이 끝나자, 곧장 기도하러 가기 위해 일어섰던 것같다.

&#11093; 실로 - 3절 주석 참조

&#11093; 엘리는...앉았더라 - '앉았더라'에 해당하는 원어(*, 야솨브)의 원뜻은 말그대로 '거하다', 앉다'란 뜻이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단어는 '직분을 수행하다'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신 17:18; 왕상 1:35, 46; 2:12). 이로볼 때 당시 제사장 엘리가 문설주 옆에 앉은 것은 휴식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제사장 직분을 수행키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11093; 여호와의 전(*, 헤칼 여호와). - 당시는 아직 '성전'(聖殿,Temple)이 건축되지 않아 '성막'(聖幕, Tabrnacle)에서 제사를 드렸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왕궁'이나 궁전'을 뜻하는 '헤칼'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대단히 의미 심장하다. 이는 그곳이 '만군(萬軍)의 여호와'께서 거처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시5:7). 여기서 우리는 외형에 구애받음 없이 다만 만왕의 왕 도시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곳이 곧 왕궁이요 궁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1093; 문설주(*, 메주자). - 이는 성소(the Holy Place)의 회막 들에서 본당으로 통하는 입구에 세워진 문기둥(doorpost)이다. 아마도 성막이 실로에 오랫 동안(근 300년 이상) 머물게 되면서 성소(the Holy Place)로 통하는 휘장 입구 쪽에 이러한 문기등이 세워진 듯하다(Keil Delitz-sch, Vol. -ii. p. 23). 그리고 그 문기둥(둥설주) 옆에는 업무를 보기 위한 제사장의 고정된 자리(customary place, Living Bible)가 마련된 것같다(R.Payne Smith). 아무튼 이 '문설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예배처서가 이동이 손쉬운 회막 내지 성막의 차원에서, 보다 견고하게 지어진 성소로 대체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 경: [삼상1:10]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고통과 엘가나의 위로]

&#11093; 기도하고 통곡하며 - 공동 번역은'흐느껴 울며 애원하였다'로 번역하여 그 의미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진정 한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처 오르는 모든 인간적 슬픔과 고통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내놓고 애절한 심정으로 간구 기도를 드림으로써, 고통과 번민을 눈물의 기도로 승화시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11]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기도와 서원]

&#11093; 서원하여 가로되...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 한나의 서원은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다는 맹세가 수반됐다는 점에서 구약의 여러 곳에서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과 맥을 같이 한다(민 6장; 삿 13:15). 그런데 이 나실인(Nazirite, 민6:2 주석 참조)의 서원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기 자식이 소명되었음(렘 1:5; 갈1; 15)을 확실히 인식한 어머니에 의하여<삿 13:12 이하>, 태어날 자식의 평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신앙적 결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서원은 전쟁과 관계되어 있으나, 사무엘의 경우는 성전 봉사와 관계되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한편 나실인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이유는 (1) 머리털을 보존함으로써 자신위에 자신을 주장하는 자가 있음을 나타내며<고전 11:3-10>, (2) 또한 머리를 길름으로서 자기 생명의 근원을 인식하고, 이울러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오직 그 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민 6:5 주석 참조.

만군의 여호와 - 하늘과 땅의 만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나타내주는 하나님의 명칭이다<3절>. 한나는 바로 이같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의뢰하면서, 자신의 무자(無子)의 수치가 거두어질 것을 확실히 믿고, 소망 중에 그분께 간절히 호소하였던 것이다.

&#11093; 만일 - (*, 임 라오). 여기서 '임 랄'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의심 등을 표현한 말이 아니고, 성취를 거의 확신하는 간절한 믿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F.R. Fay).

&#11093;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 '나실인(Nazirite)으로서 자신을 구별시켜 여호와께 드리고자 할 때 서원자는 그 기간에 따라 (1) 일정 기간동안, 또는 (2) 일평생 동안 그 서원 준수의 기간을 작정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한나는 아들을 낳을 경우, 그를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성소 봉사를 위한 나실인으로서 구별해 드릴 것을 서원한 것이다<민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한편 이에 대하여 혹자는 주장하기를, 사무엘은 본래 레위 족속이기 때문에 한나의 이러한 헌신의 서원은 무의미하다고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비록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정식 성소 봉사는 30세 이상(민4:3)으로 정해진 반차를 좇아 일정기간 동안 행해졌기 때문에, 한나의 서원과 같이 아들을 어릴 적부터 성서에 거처토록 하면서 일평생 성소 봉사를 위해 구별하여 바치겠다는 서원은 분명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keil). 아무튼 한나의 이 서원은 후일 그대로 지켜지게 되는데(27, 28),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사무엘)을 선지자로 소명함으로써(3:20) 더욱 고상한 형태로 한나의 서원을 승화시켜 주셨다(Lange).

성 경: [삼상1:12-14]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기도와 서원]

일반적으로 큰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한나의 기도는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Bunsen). 그러므로 엘리 제사장은 그같은 한나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잔치에서 포도주를 많이 먹고 취한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는 음주가 다양한 종교적 행사와 관련되었고<1:24; 10:3>, 따라서 엘리는 때로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성소를 소란스럽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는 바로 이같은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슬픔이 많은 한 여인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11093;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 당시 한나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에 스스로 완전히 몰입하여 하나님 앞에 온 심령을 토로하는 깊고도 은밀한 내적 기도였다. 또한 실로 이런 기도는 간절한 소원과 깊은 시앙심 없이는 아무나 힘든 차원 높은 고상한 기도였다(Pulpit Commentary)

&#11093; 엘리는...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 물론 엘리의 판단처럼 때로 술에 취한 상태로 성소의 규율을 어지럽힌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는 이 말은 분명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으로서 엘리의 쇠퇴한 영향력과 감화력을 반영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엘리 제사장 자신이 한나의 기도와 같은 영적이고도 내적인 조용한 기도의 경험을 많이 체험했더라면, 그는 한나의 기도 모습을 '주목하는 동안' 충분히 그 진면목을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F.R. Fay). 그러나 말년의 엘리 제사장은 그 미미한 판단력으로 한나의 참된 기도의 모습을 단지 술 취한 자의 주정 쯤으로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성 경: [삼상1:15]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기도와 서원]

&#11093;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 한나의 눈언저리가 붉게 물든 것은 결코 '포도주나 독주'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자(無子)한 여인으로서 겪는 모든 인간적인 고통과 수모를 하나님 앞에 모두 아뢰면서 흘린 그 '눈물'때문이었다(Matthew Henry).

&#11093; 포도주나 독주 - '포도주'(*, 야인)는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는 상용어이다. 그리고 '독주'(*, 쉐카르)는 '취하다'라는 뜻의 어근에서 파생된 말로서, 과실이나 곡류로 만든 취하게 하는 술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는 포도를 포함한 모든 재료로 빚어진 것을 가리키지만(민 28:7), 일반적으로는 곡류로 만들어진 것만을 뜻한다. 한편 이것들은 전적으로 헌신된 나실인들에게 금지된 것인 만큼(민 6:3 주석참조), 헌신의 자세가 요구되는 한나와 같은 성막 출입자에게도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11093;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 문자적으로는 '내가 나의 심령을 쏟아 놓았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쏟아 놓았다'(*,솨파크)라는 단어는 '부르짖다'의 의미로도 쓰인다(시 102:1). 아울러 '신뢰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로서 사용되기도 했다(시 62:8). 따라서 '내가 나의 심령을 쏟아 놓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전적으로 의뢰하면서 그 문제의 해결을 부탁하는 온전한 신앙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벧전 5:7).

성 경: [삼상1:16]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기도와 서원]

&#11093; 악한 여자(*, 바트 벧리 야알). - 문자적으로 '벧리알의 딸(adaughter of Belial, KJV)이라는 뜻. 원래 '벧리알'은 '무가치람'(Worthlessness(*, `사악함'(Wickedness) 등의 뜻을 지닌 추상명사이나, 후에는 고유 명사화 되어(고후6:15) (1)혼돈이 세력(시 18:5), (2)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악행자(삿 19:22), (3)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행동을 하는 자(10:27)등에게 적용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악한 여자'란 다른 사람에게 해나 끼치는 사악하고 전혀 무익한 여자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1:17]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기도와 서원]

&#11093; 평안히 가라...원하노라 - 한나의 겸손한 해명을 듣고 난 제사장 엘리는 자신의 섣부른 꾸중(14절)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한나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 한편 여기 엘리의 이 말은 '예언'의 말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빌어줄 수 있는 '축복'의 말이다(Keil).

성 경: [삼상1:18]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한나의 기도와 서원]

&#11093; 당신의 여종이...원하나이다 - 이것을 카일(Keil)의 견해처럼, 한나가 제사장 엘리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한 말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이 말은지금 엘리가 한나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대신 복을 빌어주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듯이(17절), 앞으로도 그와 같은 혹은 그 이상의 호의를 계속적으로 베출어 주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이해햐여야 한다.

&#11093; 가서 먹고 - 심령의 모든 괴로움을 토로한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제사장의 축복을 통하여 모든 근심과 슬픔을 해소한 한나는 성소의 뜰을 떠나 성소에 딸린 여러 방 중의 하나, 곧 자신의 가족들이 제물을 나눠 먹고 있을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진정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성 경: [삼상1:19]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사무엘의 출생]

&#11093; 라마 - 1절의 '라마다임소빔'을 참조하라.

&#11093;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 자식을 낳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같은 표현이 야곱의 아내 라헬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용되었다(창 30:22). 한편 성경에서는 한나 외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여인들, 즉 이삭을 낳기까지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 15:1-21:7). 요셉과 베냐민을 낳기까지의 야곱의 아내 라헬(창 30:1-24), 삼손을 낳기까지의 마노아의 아내)삿 13:2-25), 그리고 침례 요한을 낳기까지의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가(눅 1:5-58)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1)기도의 응답으로 늦게 출생된 자식들은 모두 부모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되었다는 점, (2)또한 그 자식들은 모두 하나님 께 특별히 헌신된 신앙의 인물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는 '표시하다','기억하다'란 뜻으로서, 항상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창 8:1; 느 5:19; 시 25:7). 이처럼 가난하고 슬픈 마음을 가진 자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 기억된 바 되는 것이다.

성 경: [삼상1:20]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사무엘의 출생]

&#11093;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 보통 아이의 탄생 과정에서 겪은 경험이나 특별한 사건, 또는 바라던 소망 등을 근거로 하여 어머니다 자식의 이름을 짓는 고대 중근동의 풍속에 따라<창 4:1; 29:32-35; 35:18; 눅 1:16>, 한나는 지금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로 지었다. 그런데 '사무엘'(*,Samule)이란 이름의 의미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즉 (1)'사무엘'을 '쉠'(*,'이름'이란 뜻)과 '엘'(*, '하나님'이란 뜻)의 합성어로 보고, 곧 '하나님의 이름'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Gesenius), (2)'사무엘'을 '구하다'(ask for)란 뜻의 '쇠알'(*)과 '하나님께'란 뜻의 '메엘'(*)의 합성어로 보고, 곧 '하나님께 구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B.D.B), (3)'사무엘'을 '듣다'란 뜻의 '솨마'(*)와 '하나님'이란 뜻의 '엘'(*)이 합성되고 여기서 '아인'(*)이 탈락되어, 곧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견해(Ewald)등 이다. 이러한 견해 중 그 어원학상 세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데, 두번째의 견해는 단지 '사무엘'이란 이름을 짓게된 해석과 배경일 뿐이다(Keil Delitzsch, Vol. - ii. P. 25). 그러므로 '사무엘'이란 이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임을 확인하면서 그같은 이름을 지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성경에서는 그와 같은 뜻의 이름을 또 발견할 수 있는데, 즉 '스므엘'(민 34:20; 대상 7:2), '이스마엘'(창 16:11)등이 그러한 뜻의 이름이다.

&#11093;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 이 말은 한나가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의미의 '사무엘'이라고 지은 중여한 배경을 시사해 준다. 왜냐하면 만일 한나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들으실 일도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1:21]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구별되는 사무엘]

&#11093;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 '매년제'(the yearly sacrifice)는 이스라엘 민족이 해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지킨 희생제사의 일종으로서, 가족 전부가 참여하는 제사였다(2:19; 20:6). 그러므로 이때는 각종 화목 제물들과 한 해의 소산물 중 가장 좋은 것들, 그리고 여호와의 성소에 바칠 십일조 등을 가지고 중앙 성소로 올라가야 했다(신 12:17,18; Hengstenberg). 그리고 '서원제'(誓願祭)는 하나님 앞에 올린 서원(vow)을 효력이 있도록 확증키 위하여 그리는 제사이다. 한편 모세 율법에 따르면 비록 한나가 사무엘을 평생 하나님 전에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 할지라도(11절), 그녀의 남편 엘가나는 그 서원을 무효화 시킬 수도 있었다<민 30:6-8>. 그러나 엘가나는 그 서원을 기꺼이 인정하였고, 그런 뜻에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제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성 경: [삼상1:22]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구별되는 사무엘]

&#11093;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한나는 그 서원을 성실히 지킬 양으로,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일다 자제하였다.

&#11093; 아이를 젖 떼거든...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 아이가 하나님의 전에 평생 바쳐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양육이 된 후에야 가능했다. 대개 증근동 지역에서는 이유(離乳) 시기를 타지역 보다 훨씬 긴 약 3년 정도로 잡았다(참조, 마카비 짜서 7:27). 그러므로 이 기간이 지나면 사무엘도 어느 정도 자라서 '희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2:22>에게 맡겨져 육체적으로 양육될 수 있었고 또한 제사장에 의하여 영적으로도 훈련될 수 있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슈미트(Schmidt) 같은 학자는 3년 정도 된 아이는 엘리 제사장에게 오히려 부담만 될 뿐이라는 가정하에서 아이가 젖뗀 후 13살까지는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한다. 그러나 이는 벌로 타당성이 없는 견해이다(Keil,Fay). 왜냐하면 그처럼 서원하여 성소에 바쳐진 어린 아니는 제사장이 직접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희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에 의해 양육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Gerlach).

&#11093;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 사무엘은 레위인이므로 당연히 성소에서 봉사를 할 수 있었다<1절>. 그렇지만 일반적 원리대로 한다면, 그의 봉사 가능 기간은 30세에서 50세까지인 것이다<민 4:30>. 그러나 어머니 한나의 서원에 따라 사무엘은 '평생'(11절) 하나님 앞에서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23]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구별되는 사무엘]

&#11093; 젖 떼기까지 - 일반적으로 히브리 어머니들이 자식의 젖을 떼는 시기는 아이가 3살되는 때이다(The Second Book of the Maccabess 7:27). 그러나 유대 학자들 중 라시(Rashi)는 22개월로, 그리고 킴치(Kimshi)는 24개월로 보기도 한다(J.P. Lange,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11093; 여호와께서...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17절에서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한 말처럼, 엘가나의 이 말 또한 한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남편 엘가나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혹자(Rabbins)의 생각처럼 엘가나의 이 말을, 그가 사무엘의 출생과 봉사에 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계시를 받고 한나에게 예언한 말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이다(Keil Delitzsch).

성 경: [삼상1:24,25]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구별되는 사무엘]

&#11093; 수소 셋 - 25절에는 '수소'(*, 파르)가 단수 형태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70인역(LXX)과 일부 역본들(Syriac, Arabic Version)은 여기 '수소 셋'을 '삼년 된 수소'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옳지 못하다(Thenius). 왜냐하면 25절의 기록은 단순히 아이를 위하여 사용된 제물이 수소 한 마리 뿐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세 마리의 수소 중 한 마리는 아이를 주께 바쳐 평생 성전에서 봉사케 하는 의식과 관계된 특별 번제용이며, 또 하나는 엘가나의 가족이 매년 드리던 매년제의 제물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서원을 이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키 위한 감사의 제물임이 분명하다(Pulpit Commentary).

&#11093; 가루 한 에바 - '에바'(Ephah)는 구약 시대에 고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로서, 에바는 약 23리터 가량이다. 그런데 한마리의 수소를 번제로 바필 경우 밀가루 한 에바의 십분의 삼(3/10)이 필요하다는 민수기 15:8-10의 규정에 비추어 볼때, 여기 '가루한 에바'는 수소 세 마리를 제물로 바칠 때 소용돼는 밀가루의 분량임이 분명하다(Keil, Smith).

성 경: [삼상1:26]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구별되는 사무엘]

&#11093;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 이같은 표현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주로 발견되는 독특한 맹세의 방식이다(14:39; 삼하 14:19; 왕상 1:29; 왕하 2:2). 그런데 이러한 식의 맹세는 자신이 지금 언급하는 말의 진실성을 강력히 호소하고, 또한 그 말이 상대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소원할때 사용되었다.

&#11093; 서서...기도하던 여자라 - 선 자세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당시의 보편적 습관이었다(창 18:22; 19:27). 그러나 헌신을 깊이 다짐할 때나 진실한 기도를 드릴 경우 종종 무릎을 꿇거나 몸을 땅에 엎드려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왕상 8:54; 대하 6:13 ; 스 9:5). 그런데 여기서 한나의 이 말은 반드시 그녀가 선 자세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제사장이 보던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 그 자체를 언급하는 말일 뿐이다.

성 경: [삼상1:27]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구별되는 사무엘]

&#11093; 여호와께서...허락하신지라 - 여기서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전적으로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또한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하고 있다. 사실 오랜 기간동안 무자(無子)로 인해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여호와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서원을 변치 않고 그 아들을 여호와께 도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귀하게 보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그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다(2:21).

성 경: [삼상1:28]

주제1: [사무엘의 출생]

주제2: [구별되는 사무엘]

&#11093;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 한나의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다. 여기서 한나가 하나님께 사무엘을 드리겠다고 한 것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닌 영원히 양도하겠다는 뜻이다. 실로 그녀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왔다는 의식을 갖고 있옹고(욥 1:21),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었으므로(시 15:4) 모성애를 초월한 헌신적 결단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드리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울'(*)은 직역하면 '요구되다','구하여지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요구를 듣고 그 아이를 두셨으므로, 자신도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그 아이를 바친다'는 뜻이다(Fay,Calvin).

&#11093; 그 아이는...경배하니라 - 문자적으로는 '그가 경배했다'(*, 이쉬타후)란 뜻이고, '그 아이'란 말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그'(he)라는 3인칭 단수 대명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한글 개역 성경처럼 '그'를 '사무엘'로 볼 경우, 당시 3살짜리 사무엘이 경배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본 및 역본들(별겟역, 수리아역, 아랍역)은 이 말을 복수 형태의 '그들'(*, 이쉬타하우)로 번역하여, 곧 '엘가나와 그의 가족이 경배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처럼 히브리 사본을 고치는 것 역시 무리이다. 그러므로 가장 타당한 해석은 '그'를 '엘가나'로 보는 것이다. 즉 한나가 제사장에게 아들을 바쳤을때 남편 엘가나는 아직 성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엘가나는 경배하니라'라고 번역함이 타당할 듯하다(Keil Delitzsch, Vol -ii.p. 28). 더욱이 다음 장에서 곧이어 한나의 찬양(2:1-10)이 언급되는 것은 아직 엘가나와 한나가 모두 여호와의 성소를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성 경: [삼상2:1]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 한나의 기도는 '내 마음니...'(1절)부터 '...뿔을 높이시리로다'(10절)까지 이어진다. 진정 '마음이 슬픈 여자'(1:15)의 기도를 기억하사 아들을 허락하신 여호와께 자기 아들을 영영히 드린루(28절), 한나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적 감정을 토로한 이 기도는 단순한 감사의 찬양을 넘어 예언적이고 구속사적 성격을 지닌 찬양의 노래요 성령의 감화시였다. 따라서 이 노래는 기도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주에 대한 감사의 증거요, 주의 영광의 계시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Lange). 이러한 점에서 '한나의 기도'(여기서 '기도'(*, 테필라)는 '기도'(prayer)란 뜻외에 '찬가'(hymn),'기원'(supplication)이란 뜻도 지닌다)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1)개인적인 은혜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신적 경륜하에 진행될 신국적(神國的)인 역사에로 확대 발전된다(Keil). (2)현세적인 은혜와구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의 승리를 예언하는 미래적인 영역에로 확대 발전된다(Pulpit com-mentary). (3) '구약 교회의 송가'라고 불리워지는 '한나의 기도'는 후일 '마리아 찬가' (눅 1:46-55)의 예표가 되며, '사가랴 예언'(눅1:67-79)의 배경이 된다(E.J. Young). 그리고 구약 시대에 이와 비슷한 감사와 구속의 찬가로서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삿 5:1-18, 21)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5:1-31)가 있다.

&#11093; 내 마음...내 뿔..내 입 -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전형적 수사 기법으로 사용되는 3중 대구법적(三重 對句法的)푸현 방식이다. 한나는 이같은 표현을 통하여 자신에게 베풀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벅찬 감격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사무엘이 출생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은 괴로움(1:10)과 슬픔(1:15)에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뿔'은 먼지 가운데서 짓밟힘을 당하던 비참한 처지에서(1:6) 다시 높아지게 되었다. 더구나 그녀의 '입'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처량한 신세에서(1:13)다시 크게 열려져 자신의 원수에 대하여 여호와의 은예를 마음껏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뿔'(*, 케렌)은 이것 달린 동물이 자신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힘을 과시하며자랑스럽게 다니다는 점에서 '힘', '능력', '권위', '자부심', '긍지', 등을 상징한다(신 33:17; 시 75:5; 89:17 등). 따라서 무자시(無子時)에 대적 브닌나에 의해 무참히 이 뿔을 짓밟힌 한나는 이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뿔을 다시 높이 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혹자(Ewaid)의 생각처럼 여기서 이 뿔은 '교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11093; 이는...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 이 구절은 한나의 기쁨, 곧 앞에서 언급된 3중적 대구법으로 표현된 한나의 벅찬 감격과 희열이 궁극적으로 '주의 구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구원'(*, 예슈아)은 (1)일차적으로는 무자시에 당한 온갖 수모와 멸시로부터의 구언이겠지만, (2)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구속적 의의상, 사무엘을 통한 타락한 종교적 상황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이며, (3)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

성 경: [삼상2:2]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 본절은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거룩'(Holiness)에 대하여 찬송한다. 여기서 '거룩'(*, 코테쉬)은 단순히 도덕적.윤리적으로 온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절대 완전성과 절대 구별성를 가리킨다<레 11:29-47 강해, 성경에 나타난 거룩하신 분으로 들어서 알았겠지만, 사무엘을 낳게된 기도의 응답 사건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의 그 속성을 신앙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욥 42:5).

&#11093;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두번째 고백은 하나님의 절대 존재성, 곧 '유일성'(唯一性)이다. 그런데 이 유일성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이겠지만(시 86:10), 또한 앞에서 언급된 '거룩성'의 근거이기도 하다(R. PayneSmith). 당시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는 풍조가 만연해있던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한 상황 속에서(삿 3:6; 6:25),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고백한 한나의 신앙은 놀라운 것이었다. 신 4:35; 6:4 주석 참조.

&#11093;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마지막 고백은 하나님의 '신실성'(信實性)이다. 왜냐하면 '반석'(Rock)이라는 단어는 구약 전체를 통하여, 언제나 변함없이 성도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 명칭으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신 32:4; 시 19:14; 합 1:12). 한편 혹자는 '반석'(*, 추르)이라는 단어를 '산'으로 번역함이 더 타당하다고 말한다(Klein). 그 이유로 그는 (1) '산'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는 사실과(시 27:5; 61:2), (2) 본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이라 할 수있는 우라릿 단어가 '산'을 뜻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러나 팔레스틴이라는 지리적배경 하에서 '반석'은 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언제나 가장 쉽게 피신할 수 있는 도피처요 안식처라는 점에서 '반석'이란 번역은 적당하다. 신 32:4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3]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교만한 말...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한나의 대적 브난나가 그랬듯이(1:6),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나 섭리를 무시한채 자신의 소견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멸시하며, 또한 자신을 높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은 마음이 슬픈자의 마음을 더욱 짓밟으며,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심령에 못을 박을 뿐 아니라, 나아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말이므로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한편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동의어인데, 여기서 이처럼 두 단어가 반복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가 한결 강조되고 있다.

&#11093;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이시라 - '지식의 하나님'(*, 엘 데오트)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인간 사회의 이성적 법칙, 그리고 그 법칙들에 따라 벌어지는 원인. 과정. 결과까지도 완전히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임을 시사해 주는 말인 것이다.

&#11093;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 이말은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한 어떤 행동의 내변적 특성까지도 철저히 파악하고 계심을 가리키는 말이다(Klein). 사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는 한나의 불임(不姙)을 그녀의 사악성 내지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증거로 오판하여, 그녀를 얕잡아 보고 격동시켰다<1:6, 7>. 또한 브닌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한나가 격동됨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만한 말을 사람들에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브닌나의 그러한 사악한 속 마음과 행도의 성격을 파악하셔서, 당신의 공평하고도 의로운 기준에 따라 그녀를 판단하셨을 것이다(잠16:2; 21:2; 24:12).

성 경: [삼상2:4-8]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본문에서 한나는 인간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홀로 주관 섭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거룩성과 전지성을 생생히 증거하고 있다.

성 경: [삼상2:4]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용사의 활은 꺾이고 - 고대 사회에서 '활'은 용사가 자신의 능력을 과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자, 또한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생각하는 신뢰의 대상이다. 그리고 '꺾이다'(*, 하타트)는 '산산히 부서지다', '깨지다'란 뜻으로서, 사람이나 국가가 안팎으로 철저히 붕괴되어 도저히 소생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렘 50:2; 51:56). 따라서 본 구절은 '활을 거머쥔 용사'로 상진된 바' 하나님의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며, 또한 그러한 자신의 힘을 괴시하기를 일삼는 교만한 자들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징벌에 따라(3절), 완전히 쇠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시 34:21; 37:35, 36; 잠 14:32).

&#11093;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 '넘어진 자'는 힘이 없고 연약하여 힘센 악인들 곧 활 가진 용사들에 의해 무참히도 짓밟혔던 자들을 가리킨다(Klein). 그리고 '힘으로 띠를 띠도다'란 말은 넘어진 자가 이제 일어나 전쟁을 준비하고 출전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힘을 다시 회복한 활기차고 강건한 상태를 가리킨다(엡 6:14). 한편 자유주의 고등 비평가들(Ewald, Pfeiffer, Eissfeldt등)은 본절과 10절 등을 근거로, 한나의기도 속에 '국가적인 전쟁 및 승리'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나의 기도송'(2:1-10)은 한나보다 훨씬 후대, 곧 왕정 체제하의 시기에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문서설(文書設)의 입장에서 본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언급된 바 '용사'와 '넘어진 자'의 개념은 국가적인 강대국과 강자와 겸손한 약자의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절에서 언급된 '왕'의 개념 역시반드시 왕정 체제하의 실제적인 어떤 왕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의(義)로 통치할 이상적인 왕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왕의 개념은 한나이전 시대부터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창 17:6; 신 17:14-20; 삿 8:22; Esward J.Young, Introduchion to Oid Testa-ment).

성 경: [삼상2:5]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유족하던 자들은...품을 팔고 - 고대 사회에서 호구지책(瑚口之策)으로 품을 팔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때 먹을 것이 많음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만홀히 여기던 '유족하던 자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위와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11093;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 이것은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결코 배고픔을 모르는 유족한 상태에 이를 것임을 가리킨다(눅 16:19-31).

&#11093;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 이말은 일차적으로 한나 자신이 체험한 기쁜 감격을 노래한 것임이 분명하다. 특별히 여기서 '일곱'은 '신적 충만(완전) 수'를 상징하는 숫자이니 만큼(Kail), 이는 곧 자녀 출산과 간련해서 한나가 받아 누린 하나님의 최대 축복을 상징한다(룻 4:15). 비록 당시에 한나는 사무엘 한 명만을 자식으로 낳았지만, 그러나 그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 가운데 낳은 자식이었으므로, 그 당시 한나는 마치 '일곱' 아들을 낳기라도 한듯이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다. 결국 이말은 이전에 한나가 당했던 것처럼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슬픈 마음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하시고 큰 기쁨으로 축복해 주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11093;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 이것은 분명히 브닌나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즉 브닌나는 한나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이제 교만한 말을 더 이상 떠벌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된 것은 실로 그녀가 쇠약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브닌나와 같이 자신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모든 악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자랑하던 것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더욱 쇠약하게 될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그런데 많은 성경 주석가들(Jerome, Augustne, Patrick, Wordswo-rth등)은 본 구절 속에서 영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즉 브닌나와 한나의 관계를 사도 바울이 구속사적으로 서술한 바 하갈과 사라의 관계로 이해하여(갈 4:21-31), 곧 브린나는 많은 자녀가 있으나 약속을 받지 못한 소망없는 여인으로, 그리고 한나는 비록 처음 잉태치 못했으나 약속을 받은 소망있는 여인으로 각각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나를 장차 많은 열매를 맺을 기독 교회의 모형으로 이해하고 있다(J.P. Lange, Commentary on theHoly Scripture).

성 경: [삼상2:6]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본절은 동의적(同意的) 대구법 방식의 표현이므로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와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는 동일한 의미이다. 이같은 수사학적 표현은 동의적 내용을 반복 엄급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히브리 시(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시 1:1; 2:1). 따라서 여기 한나의 기도 속에서 '음부에서...올리기도'라는 언급이 있다고 해서, 한나가 부활 사상에 대하여 말했다고는 복 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을 대구법적 표현으로보고 그 의미를 고찰할때,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라는 표현도 그 앞부분처럼 단순히 모든 인간의 생사(生死)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절을 통하여 한나는 이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생사 문제를 언급한다. 이로써 그녀는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 섭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사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신 32:39; 시30:3). 한편 '음부'(*, 스올)는 원래 '구멍'이나 '땅 속에 파놓은 지하실'을 가리켰지만, 성경 전반에서는 보통 '죽은 자의 사후(死後)처소'라는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창 37:35; 44:31; 시 16:10). 자세한 내용은 창 37:35 주석 및 욥 26:5-14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2:7]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빈부(貧富)의 문제 및 귀천(貴賤)의 문제 역시 전적으로 주장하시는 분임을 증거해 준다.

성 경: [삼상2:8]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진토...거름더미 - 이 표현들은 극도의 수치와 천대 가운데 있는 비천한 자의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Keil). 그리고 영적인 의미에서는,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겸허한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그러한 비천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영화롭게 면류관을 쒸우신다. 그 실례로 우리는 요셉과 모세, 다윗과 다니엘 등을 들 수 있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노예 상태의 감옥으로부터 귀족 상태의 궁궐로 인도하셨고, 또한 보잘 것 없는 목자의 지팡이 대신 영광스러운 왕의 홀(笏)을 쥐어 주셨던 것이다(Matthew Henry' s Commentary, Vol. . p.286).

&#11093;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 '기둥들'(*, 메추킴)은 여기와 14:4에 나오는 단어로서 원래 '거대한 바위'나 '바위산'을 뜻한다(Klein). 즉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것을 세상(땅)의 초석(礎石)으로 본 것이다<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그런데 바로 그 초석을 놓으신 분이 여호와시요, 또 관리하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땅의 기둥들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말은 우주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나타내는 말로, 곧 여호와께서 이 세상 만물에 주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한다.

&#11093;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 이것은 이 세상이 기둥에 받쳐져서, 공간에 달려 지탱되고 있다고 보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과 잘 부합된다(욥 26:7). 결국 위와 같은 사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그 기초 위에 만물을 조성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 만물을 유지. 운행. 섭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후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성 경: [삼상2:9]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거룩한 자들 - 여기 '거룩한 자들'이란 말은 원문상 '경건한 자'(*, 하시드)란 뜻의 단수 형태로 나타내는데, 곧 신분상의 의인이 아닌(창 6:9; 롬 4:3),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윤리.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경건한 삶의 소유자를 가리킨다(창6:9; 마 1:19). 한편 이 단어는 후일 신구약 중간 시대 때에 '하시딤'이라고 불리던 일단의 '경건한 무리들'에게 적용되었다. 이 '하시딤'들은 헬라의 세속주의 내지 혼합주의를 배격하면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유대적 전통을 지키려했던 자들로서, 이후 바리새인들의 뿌리가 되었다(Bruce).

&#11093; 발을 지키실 것이요 - 성경적 표현상 '실족' (신 32:35)과 '넘어짐'(시 116:8)은 곧 패배나 차락을 상징하는 말들이다. 따라서 '발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패배나 타락으로부터의 안전한 보호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Klein).

&#11093; 악인으로 - 여기서 '악인'(*, 레솨임)은 신분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모든면에서 의인을 박해하고 억압하는 사악한 자들을 가리킨다(시 1:1; 잠 28:4).

&#11093;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 이 표현은 (1) '흑암'이 성경에서 종종 '음부'(6절)처럼 죽음 혹은 멸망을 상징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시 31:17), 이 말은 악행자들에 대한 죽음 또는 멸망의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10]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 - 여기서 '대적하는'(*, 라야브)이란 말은 법정적(法挺的)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즉 이 단어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강력히 항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 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그를 향하여 자신의 의(義)를 내세우는 교만한 자를 가리킨다.

&#11093; 산산이 께어질 것이라 - 여기서 '깨어질 것 '내리누르다'란 뜻으로서' 교만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가리키는 단어이다(단 5:20).

&#11093; 하늘 우뢰로...치시리로다 - '우뢰'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경우, (1) 당신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현현'(출 19:16-20; 시 18:7-15; 합 3:4-15)을 상징하고 (2) 당신의 원수들에 대해서는 '징벌'이나'심판'(77:10; 계 11:19)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 우뢰 그들을 치시로다'라는 말은 대적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1093;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성군(다윗)을 통한 모든 이방 세력의 정복을 암시하고(삼하 8장), 궁극적으로는 메시야(그리스도 -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를 통하여 모든 사단의 세력을 꺾은후 이룩될 하나님 나라의 의(義)의 통치(고전 15:25)를 가리킨다.

&#11093;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 이것 또한 앞의 문구와 같이 (1) 근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의로운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실 것과 (2) 원시적으로는 영원한 평강의 왕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실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다(Aalders, Goslinga). 이런한 점에서 '한나의 기도송' 은 메시야적 사상을 담고 있는 복음적인 예언의 노래요, 성령의 감화송이다(Wordswo-rth).

&#11093;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불을 높이시리로다 -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왕의 권위를 높이겠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자'(*, 마시아흐)는 왕을 가리킨다(왕상 1:30). 그런데 성경은 왕 이외도 또 다른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하여 언급하다. 즉 선지자(오아상 19:16)와 제사장(출 40:13)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실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구별되어 임명된 자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 선지자, 제사장은 장차 영원히 기름 부음을 받을 자, 곧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서 완전히 실현시키실 '메시야'(Mes-siah)-헬라어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예표하는 인물들로 볼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한나의 기도는 한나 자신의 뿔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기도<1절>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즉 왕의 강성은 곧 온 백성의 번영과 안정, 그리고 윤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로 왕이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때 백성들 개개인들도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케됨을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성도들은 그리스도(메시야)안에서 참된 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삼상2:11]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한나의 노래]

&#11093; 그 아이는...여호와를 섬기니라 - '섬기니라'(*, 솨라트)는 특별히 제사장적 직분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이다(18절; 3:1; 출 28:35, 43; 29; 30; 민1:50). 그런데 여기의 '섬김'은 결코 일순간적인 의미가 아닌, 엘리의 사망 때까지 혹은 사무엘의 전생애 기간 동안의 봉사를 가리킨다(Smith, Fay).

&#11093; 엘리 앞에서 - '엘리 앞에서'(before Eli, KJV)라는 뜻으로, 곧 '엘리의 감독 하에서'(under Eli, NLV)라는 의미이다(민 3:6). 그 이유는 당시 실로 성소의 대제사장은 엘리(Eli)로서, 그가 성소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12]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패역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 '불량자'(不良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네 벧리야야알(*)은 직역하면 '벧리알의 아들들' (sons of Belial, KJV)이란뜻으로(고후 6:15)' 곧 '사악한 자들'(wicked men, NIV), '나쁜 녀석들'(evil men,Living Bible), '쓸모없는 자들'(worthless men, RSV)이란 의미이다. 이는 엘리의 두아들 홉니와 비스하스는 사람들 보기에 사악한 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전적으로 백해 무익(百害無益)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한편 제사장 엘리는 자신의 판단력 부족으로 경건한 여인 한나를 오히려 불량한 여자로 보았고(1:16), 참으로 '불량한' 자신들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29).

&#11093;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 이 말은 (1)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아니하며 (2)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3)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대적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욥 18:21; 렘 4:22; 호 5:4).

성 경: [삼상2:13,14]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패역한 엘리의 아들들]

여기에는 '불량자'였던 엘리의 두 아들이 저질렀던 죄악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11093;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 - 여기서 '습관'(*, 미쉬파트)은 제사장들에게 보장된 법적 권한이 아니라, 그러한 권리나 권한을 뛰어넘은 월권(越權) 행위나 태도를 가리킨다(Keil).

&#11093;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 여기서 '제사'(peace-offering)에서는 제물중 기름 부분만을 번제단에 태우고 (레 3:3-5), 살코기 부분은 제사장과 제주(祭主)가나누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기의 '고기'는 제사장과 제주에게 나뉘어질 수 있는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은 삶아진 다음 제사장과 제주에게 각각 모세 율법에서 지정한 몫에 따라 분배되어야 했다<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11093; 제사장의 사환 - 여기서 '사환'(使喚)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아르'(*)는 '사환', '종'이란 뜻 이외에도 '소년'(젊은이)이란 뜻으로 봄이 좋다. 그리고 그렇게 볼 때 여기서 '제사장'(*, 하코헨, 문자적으로는 '그 제사장')이 단수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아들'의 사환이었다면, '제사장'이 복수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절의 내용은 분명 엘리의 두 아들에 관한 언급인데, 거기에는 같은 단어가 복수화되어 '소년들'로 번역되어 있다.

&#11093;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자기 것으로 취하되 - 두 아들들의 이러한 행동은 제주(祭主)에게 당연히 돌아갈 몫까지 침범하는 분명한 죄악이었다. 레위기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은 제사 후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넓적 다리를(레 7:28-36), 그리고 신명기 율법에 따르면 앞 넓적다리 즉 어깨부분, 부 볼, 그리고 위(胃)를 (신 18:3) 자신들의 몫으로 취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나머지 부분은 마땅히 제주(祭主)에게 돌려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들이 자신에게 할당된 몫만을 정확히 취하지 아니하고,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무조건 자신의 몫으로 삼은 것은 결국 제주(祭主)의 몫에 대한 침범 행위이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명하사 세우신 율법을 무시하고 범하는 망령된 짓이었다.

&#11093; 실로 - 1:3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15]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패역한 엘리의 아들들]

히브리 원문(Masoretic Text)에는 본절 초두에 그 의미를 강조하는 불변사 '감'(*, '더구나', '게다가'란 뜻)이 나와 두 아들들의 극한 죄악상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11093;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고기를 내라 - 일반 다른 제물로도 물론이거니와, 화목제의 희생 제물도 반드시 여호와의 몫인 기름(fat) 부분이 먼저 번제단 위에서 태워져 여호와께 바쳐져야만 했다(레 3:3-5; 7:23-25; 17:6). 그리고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제사장 자신들의 몫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엘리의 두 아들들의 이러한 행동은 율법의 절차와 규정을 정면 부인하고 무시하는 극악한 범죄 행위였다.

&#11093; 그가 네게...원하신다 - 이것은 엘리의 두 아들들이 자신의 아버지 엘리 대제사장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채웠음을 보여준다.

성 경: [삼상2:16]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패역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그 사람이 이르기를 - 여기서 '그 사람'은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소에 온 사람을 가리킨다(15절).

&#11093;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원하는대로 취하라 - 제사장의 횡포에 대하여 오히려 제사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먼저 제물이 바쳐져야 한다는 원칙을 설명한다. 아울러 자신의 몫에 대해서는 포기하겠다는 뜻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은 강제로 고기를 빼앗아 자신의 탐욕을 채운다. 이것은 당시 엘리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주관되던 실로 성소 제사의 타락상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 준다. 정녕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간절히 요청되던 시기였다.

성 경: [삼상2:17]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패역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이 소년들 - 여기서 '소년들'(*, 네아림)은 18절의 '어렸을' 때(*, 나아르)와 동일 어근의 단어이다. 따라서 저자가 여기서 '소년들'이란 단어로엘리의 두 아들을 표기한 까닭은 경건했던 사무엘과 사악했던 두 아들을 뚜렷이 대조하기 위함이었음이 분명하다(F.R. Fay).

&#11093; 멸시함이었더라(*, 니아추). - 이 단어는 여기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특히 하나님께 대한 적국적인 훼방 및 경멸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민 16:30; 신31:20; 삼하 12:14; 시 10:3, 13; 74:18; 사 1:4; 5:24). 따라서 엘리의 두 아들들의 죄악은 단순히 제사 제물을 탐내어 그것을 탈취한 강도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맺은 언약과 구속의 제사 제도를 파괴하고 어지럽힌 신선 모독죄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O. Von Gerlach).

성 경: [삼상2:18]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성소에서 수종드는 사무엘]

&#11093;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 앞서 언급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방자한 행동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저자는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1)엘리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과 (2) 새로운 지도자 사무엘을 통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의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에봇'(eEphod)은 일종의 앞치마로서 소매 부분이 없는 긴 조끼 모양으로 생겼는데, 제일 겉에 입는 공식 제사 복장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에봇'은 갖가지 아름다운 실로 수 놓아진 화려한 것이었으나(출 28:6-14), 일반 제사장들 및 레위인들은 단순히 흰 색의 '세마포 에봇'(a li-nenephod)을 입었다(22:18). 그리고 이러한 세마포 에봇은 주요 종교 행사 때에도 사용되어진 것 같다(삼하 6:14; 대상 15:27). 아무튼 본절은 사무엘이 이제 본격적으로 제사 직무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2:19]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성소에서 수종드는 사무엘]

&#11093; 매년제 - 1:21 주석 참조.

&#11093; 작은 겉 옷을...주었더니 - 여기의 '겉옷'(coat, KJV; robe, NTV)만은 이음새 없이 만든 옷으로서, 다만 머리와 팔 부분만 구멍을 내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만든 옷이다. 당시 이러한 '겉옷'(*,메일)은 왕과 제사장을 비롯, 일반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입었던 보편적인 옷이었는데, 그 직위와 성별에 따라 옷의 색깔 및 장식품 등이 달랐다. 물론 직위가 낮을수록 수수했다. 그리고 제사장들 및 레위인들은 이겉옷 위에 다가 '에봇' 을 걸쳤다(레 8:7). 한편, 본절을 통하여 우리는 비록 사무엘이 하나님께 영영히 바쳐졌지만(1:11), 가족들과의 인연까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상2:20]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성소에서 수종드는 사무엘]

본절에 언급된 한나에 대한 엘리의 축복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한다'(1:18)는 한나의 바램에 대한 엘리의 응답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엘리의 응답은 서원을 변치 아니하고 귀한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의 성소에 바친 엘가나와 한나 부부의 신실성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제사장적 축복 행위일 것이다. 또한 엘리의 축복속에서 언급된 것처럼,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한나에게는 사실상 자기와 함께 생활할 자녀가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다.

성 경: [삼상2:21]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성소에서 수종드는 사무엘]

&#11093; 권고하사...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 여기서 '권고(眷顧)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의 기본 개념은 '방문한다'(visit)란 뜻이다. 그런데 이 방문 행위는 어쩌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방문하는 것을 가리키지않고, 늘 방문하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적당한 때가 이르매 방문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바친 한나의 사정을 익히 알고, 방문의 시기를 고려하다가 때마침 제사장 엘리의 축복 기도에 응해 방문했던 것이다. 그결과 한나는 사무엘 외에 3남 2녀를더 잉태하게 되었는데, 이는 시로 불임(不姙)과 무자(無子)의 설움을 겪은 한나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하나님의 크신 위로요, 풍성한 축복이었다.

&#11093;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면전에서'(in thepresence of the Lord, NLV, RSV)란 의미로서, 이는 사무엘이 육체적 성장 뿐 아니라 영적 성숙도 아울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성 경: [삼상2:22]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본서의 주석과 본서 4:15은 이 당시 엘리의 나이가 98세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많은 나이는 틀림없이 자식에 대한 한 책망자로서의 부친의 영향력을 상실케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11093; 그 아들들이...행한 모든 일 - 틀림없이 13-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신성 모독과 탐욕죄에 관한 내용의 죄악일 것이다.

&#11093;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 - 여기서 '수종드는 여인'은 당시의 성소 규례를 따라 성소 내에서 일정한 직무를 부여받았던 헌신된 여인들이었음이 틀림없다(출 38:8). 그러나 성경은 이 여인들이 성소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아마도 이 여인들은 자주 반복되는 희생 제사시에 반드시 수반되는 일, 곧 식기세척 및 그밖의 음식물 장만들의 잡다한 일에 종사하였던 것 같다(R. Payne Smith,F.R. Fay). 아무튼 이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되어 성소의 일에 전념한 여인들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11093; 동침하였음을 듣고 - 여기서 '동침하다'에 해당하는 '솨카브(*)는 원래 '눕다' 혹은 '잠자다'의 뜻이지만, 성경 용례상 대개의 경우 비합법적인 성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완곡한 단어이다(창 19:33; 35:22; 레 15:33; 18:22; 20:11).그런데 여기 이 단어는 강간 행위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홉니와 비니하스의 음행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의 합의 하에 이뤄졌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일은 일면 이방 민족의 음란한 제의(祭儀) 풍습이 이스라엘 사회, 심지어 제사장 사회에까지 깊숙히 침투해 들어왔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민 25:1-5>. 그런데 이같은 악행은 이스라엘의 바벧론에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계속된 듯하다(왕하 23:7). 아무튼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하나님께 헌신된 여인들을 더럽힌 엘리의 두 아들의 이 사악한 행위는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한 것임이 분명했다(25절). 아울러 일반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쳐 그들로 실족케 한, 실로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다(24, 25절).

성 경: [삼상2:23,24]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엘리는 너무 늙어서(22절) 말로 두 아들을 책망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책망 조차도 엄하지 못하고, 우약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미 타락과 방종의 길로 치닫고 있던 두 아들의 행위를 저지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1093; 너희가...범과케 하는도다 - 신분상으로 영적 지도자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범죄 행위는(13-16, 22절) 백성들로 하여금 (1)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멸시케 하고(17절), (2) 하나님의 성소를 가볍게 여기게 하며, (3) 성적으로 타락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성 경: [삼상2:25]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 다툼이나 범죄가 발생했을 때 만물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중재자로 나서셔서 그 문제를 마무리 하실 수 있는 권리나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에 대한 인간의 범죄는 중재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회개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진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11093;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어찌할 권리나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관련된 문제에 중재자로 나서서 그 문재를 헤결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범죄 행위에는 오직 하나님의 심판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두아들에 대한 엘리의 책망 요지는 (1) 그들의 죄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되는 중대한 대신(對神) 범죄 행위라는 것이고 (2) 따라서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11093; 이는 여호와께서...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 이말은 여호와께서 엘리의 두 아들을 죽이시기 위하여 그들로부터 회개할 가능성마저 고의적으로 배제 시켰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엘리의 두 아들의 나쁜 여론, 영적 지도자로서의 신분 등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마음이 완악해져 타락과 방종에 눈멀게 되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그러한 마음을 방치해 두셨고, 따라서 이제 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만이있을 뿐임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더이상 개전(改悛)의 정을 보이지 않는 엘리의 두 아들을 죽이시기 위하여 그들을 완악케 하셨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출 9:12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26]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은총을 더욱 받더라 - 여기서 본서 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완악케 되는 징벌을 받은 엘리의 두 아들(25절)과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무엘을 예리하게 대조시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와 인정받은 자의 특징을 날카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는 하나님과 사람들로 부터 미움과 멸시를 받는다는 사실이다(눅 2:52).

성 경: [삼상2:27]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 '하나님의 사람'(*, 이쉬 엘로힘)이란 칭호는 사사기, 사무엘소, 열왕기서 등에서 약 40회 가량 나오는데, 대부분 '선지자'란 말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9:6; 삿 13:6; 왕상 12:22; 13:1-14; 왕하1:9-13; 5:8등). 한편 사악한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두 차례 대조시켰던(11,12, 25, 26절) 저자는 이제 '익명의 한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의 신진 대사를 의한 서막(序幕)을 본격적으로 연다.

&#11093; 너희 조상의 집 - 이것은 엘리 가문이 속한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특히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받은 아론의 가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1093;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 즉 엘리의 뿌리요 조상 가문인 아론의 집이 바로의 통치 하에서 노예 노릇을 하고 있었던 비참한 때를 가리킨다.

&#11093;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 익명의 선지자는 엘리 가정의 죄악을 책망하고 심판을 선언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셨던 크신 은혜를 먼저 언급한다(신 5:6).즉 그 은혜는 (1) 엘리 가문의 뿌리인 아론의 일가가 애굽의 바로 치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이며(출 4:27; 7:8), (2)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출 12:41, 42),특별히 모세와 더불어 유월절 규례를 준비케 하심으로(출 12:1-28), 장차 제사장 가문으로 삼고자 하셨다는 점이다(Keil, Fay).

성 경: [삼상2:28]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모든 지파 중에서...택하여 - 이 선택은 특별히 아론의 일가에게만 베풀어진 하나님의 주권적인 귀한 은혜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조상 가문인 아론의 가문 위에만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신 것이다(출 28, 29장).

&#11093;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으냐 - 여기의 '에봇'(ephod)은 18절에서 언급된 일반 에봇과는 다르다. 이것은 가슴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는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각종 화려한 색상의 실로 규례를 따라 엄격히 만들어진 대제사장만의 특별한 의복인 것이다. 출 28:6-14 뿐 주석을 참조하라.

&#11093; 모든 화제를...주지 아니하였느냐 - 이 말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각종 제사 제물 중에서 제사 후 제사장들에게 돌아갔던 일정량의 분깃(응식)을 가리킨다<레위기 서론,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이외에도 제사장들은 레위인들에게 돌려진 백성들의 십일조 중의 십일조를 받았다(민 18:26-29).이같은 각종 혜택에 의하여 제사장 가문은 모두 유족했고 부유했다.

성 경: [삼상2:29]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너희는 어찌하여...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 여기서 '너희'는 엘리의 두 아들 뿐만 아니라 엘리 제사장까지도 가리킨다. 그리고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는 희생 제물의기름이 태워지기도 전, 곧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지기도 전에 엘리의 두 아들이 먼저 그 제물을 가로챘던 사실을 가리킨다<2:12-17>. 실로 이같은 범죄 행위는 하나님께서 명하사 세우신 구속의 제사 제도를 업신여기고 짓밟는 사악한 범죄 행위였다. 한편 이같은 범죄는 비록 엘리의 두 아들들에 의해서 이뤄졌을지라도, 대제사장이요, 부친인 엘리는 마땅히 여호와의 전(殿)과 거기서 시행되는 제사를 거룩히 보존 유지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들의 악행을 방관했다는 점에서, 엘리 역시 하나님께 대해 아들과 같은 범죄자인 것이다.

&#11093;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 대제사장으로서 엘리(Eli)는 그 누구보다도 신본주의적 삶을 살아야 했고, 또한 성소의 규례를 유지시키는데 그 누구보다도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신성한 제사 제도를 짓밟는 두 아들의 행위에 대해 점잖게 타일렀을 뿐(24절), 별다른 제재 조치를 취하지않았다. 이는 분명 엘리가 대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유기했음을 의미하며, 또한 인본주의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1093;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 두 아들의 범죄 행위에 엘리가 결부되어있듯이, 그들이 저지른 죄악도 이중저(二重的)이다. 즉 (1) 응당 하나님의 몫인 가장 좋은 것을 자신들이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대신(對神) 범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2) 가장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린 백성들의 정성어린 마음까지 강탈함으로써 대인(對人) 범죄까지 저질렀던 것이다.

성 경: [삼상2:30]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전에 네 집과...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 이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론의 가문만으로 특별히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시면서 그들에게 맹세하셨던 내용을 가리킨다(출 27:21; 29:9). 그리고 이 맹세는 후일 아론 가문의 후손인 비느하스에게 다시 갱신되었다(민 25:12, 13). 그런데 여기의 '네 집'은 엘리의 가문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께서 엘리의 가문에게 직접 위와 감은 맹세를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엘리의 가문도 아론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아론 가문 전체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마치 그 후손들인 엘리의 가문에게 하신 맹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11093;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 이것은 (1)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의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실 것이며 (2)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의 제사장 직분의 권위를 약화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하나님의 징계는 첫째, 일차적으로는 죄악과 보응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심판적 의미가 있다. 둘째, 이차적으로는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구서속사적 의미(히 7:17)가 있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때 하나의 문제는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철회될 수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구속사적으로 진행되어가는 하나님의 신적 경륜과 섭리에는 하등의 변화가 철회가 없다.그러나 그러한 경륜이나 목적을 향해 역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개인과 국민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순종과 불순종, 그리고 조건과 상황 등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본절도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11093;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 익명의 선지자에 의해 엘리 가정에 선포된 여호와의 이 말씀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대명제이다(벧전 5:1-10). 즉 생사 화복과 빈부 귀천의 유일한 근거가 오직 하나님인 줄 바로 깨닫고 모든 일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할 때,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를 높이드사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고 그분의 말씀을 멸시할 때,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를 끌어내리사 만인의 경멸거리로 만드실 것이다. 바로이러한 원리가 조만간 엘리 가정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으니, 곧 제사 규례를 어기고 성소를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한 엘리 가정은 역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이스라엘 중에 경멸거리가 되었으나,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신실히 좇음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사무엘은 역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높이 들림받았던 것이다.

성 경: [삼상2:31-34]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본문은 엘리의 가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결국 멸절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이예언은 (1)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한날에 죽임 당한 것을 표징으로(4:11) (2) 엘리의 후손들인(14:3, 8; 22:9) 놉지역의 제사장들이 사울 왕의 사주를 받은 에돔인 도엑에 의하여 대량 학살되고(22:11-23) (3) 또한 엘리 집안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하여 제사장직에서 파면됨으로써 (왕상 2:27, 35) 성취되었다.

성 경: [삼상2:31]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팔을 끊어 - 성경의 수사학적 용례상 '팔'은 주로 '힘'또는 '권세'를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욥 22:9; 시 10:15; 37:17). 그러므로 본절은 엘리 집안의 권세를 꺾고 빼앗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엘리의 두 아들이 권세를 남용한 대가이다(MatthewHenry).

&#11093; 노인이 하나도 없게 - 고대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한 집안의 노인들은 그 집안(가문)을 떠받쳐 주는 힘이요 권세였다(Bottcher). 그러나 가문의 팔이 꺾이운 엘리 집안에는 당연히 노인이 없을 것이었다. 결국 이 말은 엘리 가문의 후손들은 조사(早死)하리라는 심판이었다.

&#11093; 날이 이를지라 - 히브리 원문(Masoretic Text)에는 '보라'란 말과 연결되어, 곧 '힌네 야밈 바임'(* - Behold ! the days come, KJV)으로 되어 있다. 즉 이 말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거나 선포할 때 선지자들에 의해 상용되는 관용구이다(왕하 20:17; 사 39:6; ;렘 7:32; 암 4:2; 8:11; 9:13 등).

성 경: [삼상2:32]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 본절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내 처소의 환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르 마온(*)은 직역하면 단순히 '처소의 환난'(distetess in hadi-tation)이란 의미로, 그 '처소' 가 엘리 집안의 처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처소(성소)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환난'으로 번역된 '차르'는 '환난'(distress)이나 '고통'(affliction)이란 뜻 이외에 '적'(enemy) 또는 '원수'(foe)란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배경 하에서 본절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이해된다. (1) 엘리 이후 이스라엘이 사무엘이 사무엘,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치로 이어지면서 날로 번영해 가는 중에서도 엘리 집안은 조사(早死), 학살, 폐위 등 비극적인 각종 재난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Pulpit Co-mmentary, RSV, Living Bible), (2) 엘리 시대로 부터 하나님의 처소,곧 성소가 블레셋을 비롯한 각종 대적들로 말미암아 피폐해질 것이라는 의미(KeilDelitzch, Lange, KJV, NLV)등이다. 아무튼 본절은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의 모든 후손, 나아가 하나님의 성소까지 각종 재난에 직면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임에는 틀림없다.

성 경: [삼상2:33]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범과(犯過)한 엘리의 아들들]

&#11093; 내 단에서...슬프게 할 것이요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의 후손들로 제사장의 직분은 계속 수행하게 하되, 그 세력이 하도 미약하고 비참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슬픈 마음이 들 정도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 구체적인 예가 36절에 언급되어 있다.

&#11093; 젊어서 죽으리라 - 한 예언 속에 조사(早死)에 관한 저주가 3중 반복되어 있다. 즉 "노인이 하나도 없게"(31절),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32절),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33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한 저주는 실제로 실로(4:11,20, 21)와 놉(22:11-19)에서 일어났다(Pulpit Commentary). 뿐만 아니라 유대 전승에 의하면, 후일 제사장 가문 중 18세 이상을 살지 못하는 조사(早死)의 집안이 있었는데, 확인 결과 엘리 가문의 후손들이었다고 전해진다(Matthew Henry,s Commentary,Vol. .p.293).

성 경: [삼상2:34]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사무엘의 아들들]

주제2: [엘리 가문의 멸망 예고]

&#11093;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 여기서 '표징'(*, 오트)은 곧 '표시'(mark), '증거(evdence), '암시'(sign), '징조' (omen)등의 뜻이다. 그런데 엘리 생전에 닥칠 두 아들의 동시적 죽음은 익명의 선지자가 선포한 심판이 하나도 어김없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보여 주는 뚜렷한 표징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예언대로 이 표징은 실제 블레셋과의 전투 중 그대로 일어나고 말았다(4:11).

성 경: [삼상2:35]

주제1: [경건한 사무엘과 타락한 엘리의 아들들]

주제2: [엘리 가문의 멸망과 예고]

&#11093; 내가...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니니 - 이것은 사무엘, 사독 그리스도에 대한 삼중적인 예언으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예언이 사무엘(Samuel)에 대한 것임이 확실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비록 그가 제사장 및 제사장 가문의 후손은 아니었디만, 제사장 및 제사의 권의를 회복했고(16:22) (2) 또한 실제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기도했으며(7:9,17) (3) 그리고 본절의 예언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이 사무엘이 등장한다는 점(3:1이하) 등이다(Theodoret, the Rad-bins). 둘째로, 이 예언이 사독(Zadok)에게 해당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정통적인 왕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고(왕상 1:45) (3) 엘리의 후예인 아비아달 대신 대제사장에 임명됐다는 점(왕상 2:27,35)등이다(Auggustine, Thenius, Gerlach). 셋째로,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는 예표로서의 희생 제사를 폐기 완성시키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점에서 궁극적으 이 예언의 성취자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히 10:1-14).

&#11093;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 하나님께 성실치 않았던 엘리의 가정이 파멸에 이른 것과는 달리, 새로이 세움을 받을 제사장 가정은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가리킨다.

&#11093;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이스라엘의 '왕'를 가리킨다(10절). 그러므로 이 말은 왕과 제사장의 과두(寡頭)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다스려질 것이라는 예언이다(렘 33:14-26). 즉 지금까지와는 달리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별도로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세워져야 하는 마당에, 제사장은 그 왕과 함께 하나님의 신정 왕국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사무엘과 사독 그리고 사독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을 도와 제사장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성 경: [삼상3:1]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11093; 아이 사무엘 - 여기서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는 넓은 의미로는 유아(infancy)의 나이로부터 청년기(adolescence)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나, 대체적으로는 '소년(boy)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를 12세로 보았다(Antiquities, V.10, p4). 한편 히브리 사회에서는 12세부터를 성전으로 간주했으므로(눅 2:42), 하나님께서는 그 통념을 인정하셔서 그때 사무엘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토록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11093;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 '엘라 앞에서'는 '엘리의 감독을 받으면서'란 뜻이다. 그리고 '섬긴다'(*, 솨라트)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성전 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출 28:35, 43; 29:;30; 민 16:9; 신 10:8; 대상 15:2; 대하 8:14).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사무엘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희생 제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11093; 여호와의 말씀 -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던 신적 계시(神的 啓示, divine revelation)을 일컫는 일반적 명칭이다(사 38:4; 렘 1:2,4; 6:10).

&#11093; 희귀하여...보이지 않았더라 - 이 표현은 그 시대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즉 계시의 희귀는 성경 전반의 가르침에서 볼 때, 백성들의 영적.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종이었다(암 8:12). 한편 여기서 '보이지'(*, 니프라츠)란 말은 '크게(널리) 퍼지다'(*, 파라츠)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곳곳에 충만히 퍼지다'의 뜻이다(Driver, 잠 3:10). 따라서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의 의미는 (1)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고(시74:9), (2)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에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마 7:6).

&#11093; 이상 - (*, 하존). 또는 '환상'(사 29:7)으로도 번역되는 이 말은 정상적인 시각(視覺)이 아닌 꿈과 황홀경 등의 특수한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는 묵시(默示, revelation)를 가리킨다(Lower). 그러나 이것은 아예 오감(五感)이 완전히 마비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자아의식은 분명한 가운데 다만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신적 계시의 전달 방법 중 하나이다.

성 경: [삼상3:2]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11093;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 이와같은 사실은 나이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고령(4:15)을 감안할 때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본절의 표현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 뿐만 아니라, 그와 비례하여 점점 약해져가는 엘리 제사장의 영적 무감각을 암시해준다. 그러므로 본절은 또한 엘리 제사장이 왜 4-9절의 내용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11093;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 대제사장 엘리의 '처소'는 분명치는 않으나 사무엘이 잠자던 곳과는 다소 떨어진 곳 곧, 성막의 입구쪽 별관 정도였을 것이다(Klein). 당시 성막은 실로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제반 부대(附帶) 시설들 - 예를 들면 당직 제사장들의 처소, 사무엘처럼 성소에 헌신한 자들및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처등 - 이 성막 주변에 세워지고 준비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R. Payne Smith).

성 경: [삼상3:3]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11093; 하나님의 등불 - 이것은 매일 저녁마다 성소(the Holy Place)의 안을 밝히기 위하여 켜지는 일곱 가지로 된 등잔의 등불이다(출 27:21). 이 등불은 저녁에 점등되어 등의 기름이 완전히 떨어지는 새벽까지 계속 켜져 있었다(출 30:8; 레 24:2). 출27:20, 21 주석 참조.

&#11093;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 그러므로 이 말은 때가 아직 완연한 새벽기 되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말이다(Keil).

&#11093; 사무엘은...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이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성막(taberna-cle)안에 머물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서는 '여호와의 전'(*, 헤칼 예호와)은 법궤 또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the Ho;y of Holies)나 분향단이 있는 성소(the Holy Place)를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시 11:4).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맛소라(Masoretic Text)는 1:9에 이어 여기서도 성막을 '궁전' 또는 '궁궐'이란 뜻의 '헤칼'(*)로 취한 듯하다(Keil Delitzsch, Vol. -ii, p. 49).

&#11093; 하나님의 궤 있는...전 안에 누웠더니 - 이것은 사무엘이 지성소(支聖所, theHolies)안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언약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된 것은 사실이지만(출 26:33), 그 언약궤는 넓게 생각하면 또한 '전'(殿, *, 헤칼)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서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씩 들어갈 수 있는 여호와의 전 뜰 주변에 제사장, 레위인, 헌신자들을 위해 지어놓은 거처에서 잠을 잔 것이다(Keli, Fay). 한편 여기서 저자가 본절에 '하나님의 궤' 라는 말은 본절에 특별히 삽입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다음 절에서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3:4]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11093;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상으로 인해 여화와의 말씀이 휘귀하던 때에, 마침내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본절은 나실인으로서 레위 지파의 헌신자에 불과했던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소명받는 순간이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는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과 은혜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삼상3:5]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11093;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 밤중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사무엘은 엘리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줄로 착각하고 즉시 일어나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 거의 보지 못했다는 2절의 언급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이는 당시 사무엘이 대제사장 엘리의 인정을 받고, 그의 개인 시종의 역할도 감당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11093;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 이때 엘리는 사무엘이 깊은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헛 것을 들은 줄로 생각해버린 듯하다.

성 경: [삼상3:6]

주제1: [사무엘 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11093; 내 아들아(*, 베니). - 본래 이 말은 나이나 신분상의 차이가 현격할 때,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다정하게 부르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에 덧붙여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난감한 심정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한편 이같은 표현은 특히 본서에 많이 나온다(16절; 2:24; 4:16; 24:16; 26:17).

성 경: [삼상3:7]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11093;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 본절은 사무엘이 세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제대로 응답치 못했던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그 이유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지 못했다'란 말의 의미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와 전인격적인 개인적 교제가 아직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다'(*,야다)란 말은 단순한 지식적 깨달음 뿐만 아니라, 남녀가 동침하듯(창 4:1)체험적으로 아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 '알지 못하고'는 사무엘이 율법을 배움으로써 여호와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은 아직 없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처럼 사무엘이 그때까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경험하지 못한 탓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3:8,9]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11093; 엘리가...깨닫고 - 당시 엘리 제사장은 영육이 노쇠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계시도 희귀(稀貴)한 상황 탓으로 처음 두 번은 사무엘의 행동을 단순히 착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세번째 사무엘의 행동을 보고,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줄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튼 사무엘을 세번씩이나 부르신 이가 여호와인줄 늦게나마 깨달은 엘리 제사장은 이제 동일한 부르심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사무엘에게 가르쳐 주었다.

&#11093; 말씀하옵소서...듣겠나이다 -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대한 존경과 겸손,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태도이다(Klein).

성 경: [삼상3:10]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엘리 가문의 멸망에 관한 계시]

&#11093;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 '임하여' (*, 야보)는 '오다'(come)란 뜻이다. 그리고 '서서'는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서서 계실 육체를 갖고 계시지 않은 영(營)이신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람과 같이 서 계신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본절이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 앞에 실제로 임재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창 28:13; 출 34:5; 욥 4:16). 그러므로 본절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무엘아 사무엘아'와 같은 반복적인 부르심의 표현이 성경 여러 곳에서 신현(神顯)의 장면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에서 또한 증명될수 있다(창 22:11; 46:2; 출 3:4).

성 경: [삼상3:11]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엘리 가문의 멸망에 관한 계시]

&#11093; 내가...한 일을 행하리니 - 여기서 '한일' (*, 다바르)은 앞에서 상세하게언급된바 엘리 가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실제로 성취시키는 일을 가리킨다(2:27-36).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들어 앞에서 예언하신 대로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11093; 두 귀가 울리리라 - 이 말은 곧 '사건의 충격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안에 내리실 심판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그 소식을 접한 자가 공포와 전율로 인해 귀가 멍멍할 정도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Smith, Fay, Keil). 구체적으로 제사장 엘리 집안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1) 법궤가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기고, 실로 성소가 파괴된 사실(4:11, 17; 5:1), (2) 엘리의 두 아들이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은 사실(4:18), (4) 엘리의 며느리가 해산하다가 죽은 사실(4:19-22) 등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런 의미에서 '두 귀가 울리리라'(*, 테칠레나 쉐테 아즈나우)는 말은 성경 다른 곳에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파괴로 인해 많은사람들이 충격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킬 때 역시 사용되었다(왕하 21:12; 렘19:3).

성 경: [삼상3:12]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엘리 가문의 멸망에 관한 계시]

본절은 엘리의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예언한대로(2:31-36) 반드시 있을 것임을 다시 확증하고 있다.

&#11093; 처음부터 끝까지 - 이는 어떠한 일을 진행함에 있어 그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세심하고도 철저히 이루어가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 경: [삼상3:14]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엘리 가문의 멸망에 관한 계시]

&#11093; 내가 ...맹세하기를 - 이하 선언되는 내용과 같은 하나님의 맹세는 구체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엘리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2:27)의 엄중한 심판적 예언(2:27-36)은 하나님의 맹세와 결코 다를 바가 없다.

&#11093; 엘리 집의 죄악은...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 이 말은 엘리의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 이유는 (1) 엘리집안의 죄악이 엄중한 경고 후에도 계속되었고, (2) 그러한 죄악을 속하는 거룩한 제사마저도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었다(2:12-17).

&#11093; 제물이나 예물로나 - 여기서 '제물(*, 제바흐)은 피흘림이 있는 희생 제사를 가리키며, '예물(*, 민하)은 소제와 같은 피흘림 없는 곡식 제사를 가리킨다(R.P. Smith). 한편 이 두 가지는 구약 시대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여호와께 속죄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성 경: [삼상3:15]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엘리 가문의 멸망에 관한 계시]

&#11093;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 여기서 '문'(門)은 히브리 본문에는 '문들'(doors)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성막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고, 그 문들을 열고 닫는 일이 사무엘의 중요한 임무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문'(*, 델레트)은 나무로 만들어진 '두짝 문'(a tow - leaved door)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다'는 말은 성막의 휘장들(출 26:36; 36:37)을 열어 젖혔다는 뜻이 아니라, 성막에 부속된 여러 별관 건물들의 문들을 열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성막이 실로(Shlioh)에 오래 머무는 동안 성막 뜰 주변에는 제사 업무상 필요한 여러 부대(附帶) 건물들이 고정적으로 지어졌던 것 같다(Keil Delitzsch, R, Payne Smith). 2절 주석 참조.

&#11093; 그 이상을...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 사무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상(異像)은 엘리 가문의 멸망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하나님께로부터 엘리 가문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고도 즉시 엘리에게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그같은 비극적인 예언으로 인하여 대스승 엘리 제사장이 심히 괴로워 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년 사무엘의 사려깊은 신중함이 엿보인다.

성 경: [삼상3:16]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엘리의 순복]

&#11093;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 지난 밤 사무엘에게 어떠한 내용의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는지 엘리가 무척 궁금해 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11093; 내 아들 사무엘아 - 이것은 평소 엘리와 사무엘의 관계가 부자(父子)관계와 같이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내 아들아' 라는 호칭은 애정과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난감한 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6절).

&#11093;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이것은 엘리에 대한 사무엘의 존경심과 겸손한 마음, 그리고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말이다(8, 9절)

성 경: [삼상3:18]

주제1: [사무엘 소명(召命)]

주제2: [엘리의 순복]

&#11093; 사무엘이...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 사무엘은 엘리의 엄숙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고, 또한 선지자적 소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엘리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이런한 사무엘의 메시지 전달은 다음 두 가지 목적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1) 메시지 전달로 부터 실제 심판이 임하기까지 약10-15년의 기간이 있었다는 것은 다시 한번 사무엘을 통해 엘리 집안을 각성시키고 회개시키기 위한 목적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2)소년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어 대제사장 엘리에게 메시지를 선언하도록 했다는 것은 향후 사무엘의 예언자적 기능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그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F.R. Fay.Smith).

&#11093; 이는 여호와시니 - 사무엘의 모든 말이 틀림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엘리가 겸손히 인정하는 말이다.

&#11093;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 이 말은 엘리가 하나님의 의지를 순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즉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집안의 멸망과 죽음에 관한 무서운 심판의 내용이었지만, 엘리는 강퍅하게 거부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 일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엘리는 이처럼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듣고도 옷을 찢고 통회하며 재를 무릅쓰고 회개한 참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으로 우리는 엘리의 신앙 면모를 얼핏 살펴볼 수 있는데, 즉 그는 개인적으로는 후덕(厚德)하고 어느 정도 신앙적이었지만, 공적으로는 죄에 대처함에 있어 유약하고 미온적인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Keil, Smith).

성 경: [삼상3:20]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화와의 선지자 사무엘]

본절의 내용은 19절 내용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즉 선지자로서의 사무엘의 예언이 말한대로 모두 성취되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사무엘을 의심할 나위없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우심을 입은 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은 민 12:7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의 경우와 관련되어 '충성됨'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그 직무상의 충성되고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께로 말미암아 세움받은 그의 선지자 직의 정통성이 입증된다는 의미이다.

&#11093;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dAN)은 이스라엘 북쪽 변경의 한 성읍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의 원래 지명은 '라이스'(삿 18:29)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단 비파의 사람들이 이주, 정착해 살면서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따라 이와 같은 지명을 붙였던 것이다. 단 지파는 원래 여호수아로부터 약속의 땅 중 남쪽 부분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분배 받았었다(수 19:40-48).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의 원주민을 몰아내지 못함으로, 그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삿 18:1). 그러던 중 정착지를 찾아다니다가 머무른 곳이 바로 이 단 지역이었던 것이다(삿 18:27).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팔레스틴 최남단 곧 헤브론 서남쪽 55km 지점에 위치하였다(창 21:14; 26:23; 삿 20:1). 따라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이스라엘 전 국토를 가리키는 관용적이 표현이다(삿 201).

&#11093; 선지자(*, 나비). - 어원적으로는 '부름을 받은 자'란 뜻이다(Klein)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어원적인 의미와 더불어 이 단어의 문맥적인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본장의 문맥은 선지자의 의미가 (1) 여호와께서 임하신 바 된자(10, 21절), (2) 여호와의 계시를 받은 자(17, 21절)임을 시사한다.

성 경: [삼상3:21]

주제1: [사무엘의 소명(召命)]

주제2: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

본절의 내용은 사무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부각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11093; 실로 - 하나님의 성막이 세워져 있던 곳으로, 사무엘이 머물던 것이다(1:3 ;2:11). 1:3 주석 참조.

&#11093; 여호와의 말씀으로 - 이 말은 혹자들의 생각 처럼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제 2위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호와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되, 당신의 말씀을 매개체로 사용하셨음을 뜻한다(사 2:1)

성 경: [삼상4:1]

주제1: [엘리 가문의 몰락]

주제2: [블레셋에 패한 이스라엘]

&#11093; 사무엘의 말이 전파되니라 - 이 말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대언자(선지자)로서 그 권위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이끌어 나갈 사무엘의 모습을 부각시켜 주는 3장 하반부(19-21절)에 연결되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실제로 벌겟역(the Vulgate)이나 수리아역(the Peshitta)에서는 이 말을 전장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혹자들(Keil, Gerlach)은 이 말을 블레셋 전투를 다루고 있는 본장(4장)과 연관시켜, 곧 사무엘이 블레셋 전투를 위해 이스라엘 군사를 소집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이스라엘이 사사요 대제사장인 엘리의 주관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타당치 않다(Pulpit Commentary). 아울러, 만일 사무엘의 소집하에 출전(出戰)했다년 이후 전쟁의 대패(大敗) 책임도 분명 사무엘에게 돌아갔을 것이고, 따라서 사무엘의 권위도 형편없이 추락되었을 터인데, 이후 전개되는 상황에서 그러한 점은 전혀 찾아볼수 없고 오히려 엘리 사후 사무엘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 모든 점은 위의 어구가 사무엘의 선지자 직의 권위를 요약 정리하는 말로서, 곧 3장의 결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11093;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 여기의 '블레셋 사람'(the Philistines)은 본래 해양 생활을 하던 민족으로서, B.C. 13세기 말에 헬라 본토인들의 압력에 의하여 자신들의 본거지 에게 해(海) 지역을 떠나 애굽으로 침입해 들어갔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애굽 왕 라암세스3세(Ramses)에게 쫓겨 다시 가나안 땅의 지중해 쪽 해안으로 건너와 거기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Burrows, What means these stones, p.277). 한편 아모스 9:7은 그들이 갑돌(그레데 섬) 지역에서 왔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B.C. 2000년 경의 아브라함 시대에 성경의 무대에 처음 등장할 때에는(창 20:1,2;26:1), 그레데 섬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그 이후 블레셋 족속은 특히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는 가나안 땅의 남서쪽을 완전히 장악하여(삿 3:3)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다(삿 13:1-16:31). 그런데 당시 이들은 높은 수준의 문명을 소유했었다. 즉 이들은 가나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제철 기술을 보유하여(13:19-22;17:7), 이 기술을 기반으로 잘 무장된 강력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다른 금속에 대한 제련 기술 및 공예 기술도 뛰어났던 것 같다(6:4,5). 그러므로 이들은 이때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스라엘을 완전히 지배하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이스라엘과 심한 마찰이 빚어진 듯하다. 한편, 엘리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B.C. 1095년 이후 40여년간 계속되는(삿 13:1) 블레셋 족속의 압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의 이 전투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으킨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때는 블레셋의 압제를 받기 시작한 지 약 20년이 경과한 B.C. 1075년 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Leon Wood).

&#11093;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 여기의 '에벤에셀'(Ebenezer)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족속과의 싸움에서 두번씩이나 패했던 곳으로(2,11절),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한 곳이며, 또한 법궤를 빼앗긴 곳이다. 오늘날 그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야파(Jaffa) 북동쪽의 '마이델 야바'(Majdel Yaba)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에벤에셀'은 후일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쳐부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돌에다 사무엘이 명명한 '미스바'와 '센' 사이의 '에벤에셀'(7:12)과는 다른 곳인 것 같다.

&#11093;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 여기서 '아벡'(Aphek)은 이스라엘이 진 쳤던 에벤에셀 서쪽 약 3.2km 지점인 아르곤 강의 근원지 근처로서, 샤론 평야의 한 지점이었다(29:1). 그런데 이곳은 원래 가나안 족속들의 아성(牙城)이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블레셋 족속들이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얼마나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블레셋 족속들이 이곳에 진(陣)을 친 이유는 자신들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취한 이스라엘에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삼상5:1]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다곤 신당에 안치된 언약궤]

&#11093; 블레셋...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 '하나님의 궤'(the Ark of God)는 블레셋 족속에게는 자신들의 역사 이래 최대의 전리품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블레셋 족속이 아벡 전투에서 하나님의 궤를 탈취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들의 처음 염려(4:6-8)와는 달리 그 궤가 어떤 능력을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그 궤로 인한 공포에서 벗어났기 때문인 듯하다.

&#11093; 아스돗에 이르니라 - '아스돗'(Ashdod)은 원래 여호수아에 의해 유다 지파에게 분배되긴 하였으나(수 15:47) 그 지파에 의해 정복되지는 못했다. 이 도시는 강대국 애굽과의 교역을 위한 근거지였고, 또한 애굽으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블레셋의 도시 중 중요하게 여겨졌다. 수 11:22;13:3 주석 참조. 한편 블레셋 사람들이 이때 여호와의 궤를 이곳으로 가져온 가장 큰 이유는, 이곳 신전(神殿)에 모셔진 자신들의 다곤(Dagon) 신에게 그 궤를 일종의 예물로서 바치기 위함이었다.

&#11093; 법궤의 이동 경로 - 여호수아시며 이래 계속 실로(Shiloh)에 있었던 법궤는 마침내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르러 옮겨졌다. 즉 엘리의 두 아들의 주관하에 법궤는 실로로부터 에벤에셀(Ebenezer)과 아벡(Aphek)사이의 전쟁터로 이동되었다(4:4, 5). 그러나 이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블레셋 족속에게 법궤를 빼앗겼다(4:11).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족속은 처음 그것을 아스돗(Ashdod)으로 가져갔다가, 곧 가드(Gath), 에그론(Ekron)으로 옮기었다(5:1-10). 그 이유는 법궤가 가는 성읍마다 독종 재앙이 발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블레셋 방백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숙의(熟議) 결과 암소 두 마리가 모는 수레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 땅의 벧세메스(Bethshemesh)로 돌려보내게 되었다(5:11-6:15). 이후 법궤는 곧 기럇여아림(Kiriath-jearin)땅의 엘리아 살의 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법궤는 이곳에서 근 20년 동안 안치되었다(7:1, 2).

성 경: [삼상5:2]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다곤 신당에 안치된 언약궤]

&#11093; 다곤(*, Dagon) - 고대로부터 이 우상은 메소보다미아, 앗수르, 베니게 지역 등지에서 널리 숭배되어 온 우상인데(The New Bible Dictionary), 블레셋 족속은 이 우상을 베니게 족속들에게서 수입하여 자신들의 민족 수호신(民族守護神)으로 삼은듯하다(H. Schmokel). 그것은 이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 '아스돗' 뿐만 아니라 '가사'(삿 16:23) 등 블레셋의 주요 성읍 여러 곳에 세워진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분명해진다(R. Payne Smith). 한편 이 다곤(*)의 어원(語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상호 이견이 있는데, 크게 다음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될 수 있다. 즉 (1) '다곤'을 '물고기'란 뜻을 지닌 '다그'(*)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보고, 곧 '다곤(Dagon) 신'은 '물'과 '물고기'를 토템(Totem)으로 한 신으로서, 자연의 활력 및 무수한 번식력을 상징하는 '풍요의 해양신'으로 보는 견해(Jerome, Kimchi, Keil, Bochart, Fay), (2)'다곤'을 '곡식', '곡물'이란 뜻을 지닌 '다간'(*)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보고,곧 '다곤(Dagon) 신'을 땅의 비옥과 땅의 열매를 상징하는 '풍요의 농경신'으로 보는견해(Albright, Ewald, Bunsen, De Groot, Gaubert) 등이 있다. 그런데 다곤 신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바, 레이야드(Layard)에 의해 콜사밧(Khorsabad)에서 출토된 양각(陽刻) 조각품의 그림에 따르면, 몸의 상반신은 수염이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왕관을 머리에 쓴 형상이고, 몸의 하반신은 물고기의 형상으로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Layard, Nineveh, ii. p. 466).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전자의 견해대로 다곤 신이 '물' 또는 '물고기와 밀접히 관련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그러나 마리(Mari), 우가릿(Ugarit) 등지에서 발견된 고대 문헌을 살펴보면 블레셋 족속은 분명 이 우상을 곡식의 풍작을 위하여 숭배한 것으로 보인다(M. J. Mulder).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블레셋 족속은 이 다곤 신에 해양 민족의 특성을 가미시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가나안의 농경신의 영향을 받아 이 우상을 '곡식의 풍작을 위해' 숭배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L. Wood). 특히 우가릿(북부 가나안) 문헌(Ugaritic Texts)에 나타난 바, 다곤 신이 가나안의 농경신인 바알 신의 아버지로 기록된 사실은 이러한 점을 보다 분명히 뒷받침해 준다. 삿 16:23 주석 참조.

&#11093; 다곤의 당 - '다곤 신당'(Dagon's Temple)은 블레셋 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았으나, 고대 우가릿(Ugarit, 북부 가나안) 지역에서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우리에게 다곤 신전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정보를 제공해 준다. 즉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그 신당(新黨)은 제단이 있어서 종묘적 의식이 집행되는 개방된 마당 가운데 위치했다. 그 마당에서 그 신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단으로 올라 가야 했다. 그런데 그 신당은 마치 성막의 경우처럼 성소와 그것의 뒤에 위치한 지성소로 구성되었다. 또한 그 지성소의 중앙부분에 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단 위에 제단과 신상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블레셋 족속이 원래 해양(海洋)민족이면서도 이처럼 중근동지방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가나안으로 이주한 후 그 지역의 여러 관습 및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11093;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 블레셋 족속이 아벡 전투에서 탈취한 여호와의 궤를 자신들의 '다곤의 신당' 에 가지고 들어가 그 곁에 놓은 것은 (1) 자신들에게 숭리를 가져다 준 다곤 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Keil), (2)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곤 신의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상징적 행위 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Smith).

성 경: [삼상5:3]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다곤 신당에 안치된 언약궤]

&#11093; 다곤이...엎드러져...땅에 닿았는지라 - 여기서 '엎드러지다'(*, 나팔)는 주인 앞에서 종이, 군왕 앞에서 봉신이, 신 앞에서 사람들이 경배할 때의 자세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20:41;25, 24;수 7:6;삿 13:20;에 7:8) 더구나 이 단어는 '항복하다'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왕하 7:4). 따라서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곧 다곤 신이 여호와 앞에 항복했음을 상징한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확증하신 것이다(갈 6:7;출 20:7).

&#11093; 다곤을...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 이것은 블레셋 족속이 본절 초반부의 사건, 곧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진 사건을 우연으로 보았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사실상 본절의 사건은 블레셋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징계였으며, 또한 블레셋의 우상 다곤에 대해 당신의 우월성을 확증하시기 위한 신적인 행위였다.

성 경: [삼상5:4]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다곤 신당에 안치된 언약궤]

&#11093; 그 이튿날...다곤이...끊어져 - 전날에 일어난 사건(3절)보다 블레셋 족속들에게는 더 심각한 양상으로 비쳐진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1) 블레셋 족속이 첫번째 싸움 때(4:2)보다 두번째 싸움 때(4:10) 더 많은 이스라엘 군인을 살륙한 것에 대향 묵시적 징계이며, (2) 블레셋 족속이 하나님의 우월성이 현시된 첫번째 사건의 의미(3절)를 깨닫지 못한 데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었다.

&#11093; 머리 - '상상', '생각', '지혜'를 상징한다(계 13:16).

&#11093; 손목 - 이 단어(*, 카포트, 문자적으로는 손바닥)는 '활동', '능력'을 의미한다(계 13: 16). 한편 우가릿 문헌(Ugaritic Texts)에는 여신 아낫이 자신의 허리에 달린 머리와 손바닥으로 적과 싸우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머리'와 '손목'이 뜻하는 바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Pritchard). 따라서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란 말의 의미는 전투에서의 완전한 패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17:51;31:9).

&#11093; 문지방에 있고 - 이 말은 고대 중근동 지역의 미신적(迷信的)풍습을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문지방(threshold) 밑에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진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 집안 사람들을 보호해 주고있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 살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곤의 목과 손을 부러뜨린 채 문지방에 걸쳐 놓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공격에 대해 잡귀 따위의 도움이나 받아야 하는 다곤 신의 비겁한 모습을, 다곤 신의 우월성을 믿는 블레셋 족속들에게 분명히 보이시려는 의도 때문이었다(삿 19:25-27). 아울러 다곤 신을 경배하기 위해 다곤 신전의 문지방을 넘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곤 신의 무능력함을 똑똑히 보여 줌으로써 경멸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삼상5:5]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다곤 신당에 안치된 언약궤]

&#11093; 그러므로...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 하더라 - 다곤의 숭배자들이 이처럼 다곤 신당의 문지방을 밟지 않고 피해 넘어간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숭배하는 다곤 신상의 머리와 손이 일시 놓여져 있었던 곳이므로 그곳을 신성시했기 때문이요,(2) 다곤 신도 보호를 요청하는 만큼, 그 문지방 밑의 귀신들을 성나지 않도록 하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같은 풍습은 그 후에도 이방인들에게서 계속되었다(습1:9).

&#11093; 오늘까지 - 이 말은 사무엘서가 기록된 때까지를 가리키며, 따라서 본절의 사건이 있은 지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 본서가 기록되었음을 암시한다. 결국 이는 본 사건과 관습의 역사적 사실성을 확증하는 표현이다.

성 경: [삼상5:6]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언약궤로 인한 재앙]

&#11093; 여호와의 손 - 이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상징하는 신인 동성적(神人同性的) 표현이다(수 4:24; 스 7: 9; 시 89:13).

&#11093;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첫번째 능력은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던 다곤 신에게 나타났었으나(3, 4절), 이제 그 능력이 블레셋 사람들에게까지 내려졌다. 한편 여기서 '더하사'(*, 솨멤)는 '황폐케 하다'란 뜻이다.

&#11093; 독종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오팔림'(*)은 일반적으로 보기 흉한 외부 질환을 통틀어 가리킨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1) 페스트의 일종으로서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의 피부염의 일종으로서 황부가 보기 흉하게 헐어서 환자 스스로 수치감을 갖게 되는 질환(Hertzberg) 등의 두 가지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6:4에서 블레셋 족속들이 속건제를 위한 제물로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취했다는 점에서 여기의 '독종'(毒種)은 쥐에 의해서 전염되는 페스트(pest)로 봄이 더 타당할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70인역(LXX)은 본절에 쥐 재앙을 덧붙이고 있다.

&#11093; 쳐서 망하게 하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야크'(*)는 '쳐부수다', '깔아뭉개다' 등의 뜻으로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삿 15:16;삼하 11:21 ;왕상 16:11; 왕하 3:19).

성 경: [삼상5:7]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언약궤로 인한 재앙]

&#11093;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 이전의 사건들(3,4절)을 모두 우연한 것으로 간주했던 블레셋 족속이 이제 그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신인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일어났을 최초로 시인하는 장면이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의 신 다곤(Dagon)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셨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애굽 위에 내린 각종 재앙으로 인해 바로의 술객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한 것과 같다(출 8: 19).

성 경: [삼상5:8]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언약궤로 인한 재앙]

&#11093;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 - 블레셋의 다섯 지방 곧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을 각각 분할 통치하던 수령들을 가리킨다(수 13:3). 여기서 우리는 당시 블레셋이 부족 연합 성격의 국가였으며, 또한 그들이 집단 지도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알 수 있다(R. Payne Smith). 한편 '방백'(*,세라님)은 성경 안에서 여기처럼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수 13:3) 비셈어 계통의 단어로서, B.C. 11세기에서 7세기까지의 블레셋 통치자들에게 적용되었다(Greenfield). 그리고 이 단어는 헬라로 넘어가 '군주'(君主)라는 의미의 (*, 튀란노스)가 되었다.

&#11093; 모으고 - 이같은 블레셋 방백의 회동은 하나님의 진노가 다곤 신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여호와의 궤를 다곤 신당이 없는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결정을 하기 위함이었다(F.R. Fay).

&#11093; 가드로 옮겨 가리 - 이 곳은 구(舊) 가나안의 도시였으나,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되었다(수 10:36-39;11:21, 22). 그때 그 도시의 주민들은 아낙 자손(the Anakims)이라고 불리던 자들로서, 신체가 장대했던 자들이었다(민 13:33). 그러나 여호수아 정복후에도 그들의 일부는 여전히 살아남았는데, 성경에서는 '가드 사람'(the Gittite)불리워 졌다(삼하 6:10, 11;15:18, 19, 22). 한편 이 도시는 아스돗(Ashdod) 동쪽 약20km지점에 위치하였고, 성벽이 잘 갖춰져 있던 특별히 중요시되던 지역이었던 것 같다. 수 11:22;13:3 주석 참조.

성 경: [삼상5:9]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언약궤로 인한 재앙]

&#11093; 심히 큰 환난 - 여기서 '환난'에 해당하는 '메후마'(*)는 '큰 소요를 일으키다', '파괴하다'란 뜻의 '훔'(*)에서 파생된 말로 '혼란'(confusion), '소동'(uproar), '파괴'(destruction), '난리'(tunult) 등을 뜻한다. 그러므로 '심히큰 환난'(a very great destruction)이란 표현은 3중 강조된 말로서, 곧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얼마나 엄중했으며, 또한 그로 인한 성읍 사람들의 소동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11093; 작은 자와 큰 자 - 그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관용어이다.

&#11093; 다쳐서 - 이 단어(*, 솨타르)는 '입술이나 눈꺼풀이 깨어지다'라는 의미의 아랍어에서 온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극심한 피부 질환으로 피부가 완전히 해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아스돗 보다도 가드에 더 큰재앙을 내리셨음을 뜻한다. 결국 이것은 방백들의 모사(8절)가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삼상5:10]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언약궤에 대한 두려움]

본절에서는 방백 회의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재앙을 수반하는 법궤의 이동 문제는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었으므로, 8절에서처럼 여기서도 방백 회의는 열렸으나다만 생략된 듯하다.

&#11093;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 아스돗(Ashdod) 북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다섯 성읍 중의 하나이다(8절). 이 성읍은 여호수아에 의해 유다 지파에게 할당되었으나, 그의 생전에는 점령되지 못했었다(수 13:3; 15:11,45,46). 그 후 이 성읍이 유다 지파에 의혜 정복되긴 하였지만(삿 1:18), 얼마 안가서 블레셋의 지배 아래 떨어진 이후 유대 민족이 바벧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그같은 상황은 계속된 듯하다(렘25:20). 특히 이 도시에서는 '바알세붑'(Baalzebub)이라는 신이 모셔지고 있었다(왕하1:2, 3, 6, 16). 수 13:3 주석 참조. 이처럼 이 도시에서 '다곤'(Dagon) 신이 모셔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이 도시로 보내려고 한 중요한이유였던 것 같다.

&#11093; 우리에게로 가져다가...죽이려 한다 - 에그론(Ekron) 거민들이 이처럼 여호와의 궤를 자신들의 성읍 내로 들여놓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저항한 이유는, 이미 그들도 그 궤 때문에 아스돗과 가드에 임한 큰 환난 소식을 익히 듣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성 경: [삼상5:11]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언약궤에 대한 두려움]

&#11093; 블레셋 모든 방백 - 8절 주석 참조.

&#11093; 궤를 보내어...죽음을 면케 하자 - '궤를 보내는 일'은 블레셋 족속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취한 방책이었다. 만일 블레셋 족속들이 언약궤를 자신들의 또 다른 도시로 보낸다 해도, 옮겨진 그 도시 역시 앞의 다른 도시들처럼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약궤가 원래 보관되었던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블레셋 족속은 많은 재앙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11093; 본처(*, 마콤) - 성경의 여러 곳에서 '거룩한 한 장소'의 뜻으로 사용된단어이다(출 10:23;대상 15:1;대하 5:7). 따라서 '본처'는 넓은 의미로는 언약궤가 원래 안치되었던 이스라엘을, 그리고 좁은 의미로는 이스라엘의 성막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11093; 사망의 환난(*, 메후마트 마웨트) - 직역하면 '죽음의 파멸'(adeadly destruction, KJV), 또는 '죽음의 공포'(a deadly panic)란 뜻이다(시 55:4).곧 갑자기 몰아 닥친 사망의 징벌로 인해 도시가 폐허화되고, 성읍 거민이 공포로 떨고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11093;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 이것은 여타 도시들 보다도 더욱 에그론(Ekron)에 하나님의 큰 진노가 내려졌음을 보여 준다. 즉 블레셋 족속이 하나님의 크신 손길을 인간적인 지혜로 대처하고자 할 적마다 더욱 가중하여 진노가 임한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진노는 에그론(Ekron) 성읍에 언약궤가 들어온 직후부터 에그론 사람들이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 후, 언약궤가 그 성읍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계속 내려진 듯하다.

성 경: [삼상5:12]

주제1: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언약궤에 대한 두려움]

&#11093; 성읍의 부르짖음이 - 여기서 '성읍'(*, 하이르, 문자적으로는 '그 도시')은 단수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진노당하는 성읍이 현재 언약궤가 있는 에그론(Ekron) 한 도시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부르짖음'(*, 사와)은 극한의 상황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간절히 호소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부르짖음'은 애굽인들로부터 극심한 학대를 받았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도 있었다(출 2:23;시 30:2;욘2:2). 한편 이같은 블레셋 족속의 하늘을 향한 간절한 호소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완전한 패배를 인정하는 행위였다(욘 3:8).

&#11093; 사무쳤더라 - '사무치다'(*, 알라)란 말은 '자라다', '꼭대기까지 오르다'의 뜻으로서, 블레셋 족속들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크고 간절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이같은 부르짖는 행위를 회개 기도의 형태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블레셋 족속은 극심한 독종 재앙과 사방의 재앙으로 인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도움을 호소했을 뿐,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진정한 회개는 없었던 것이다. 곧 진정한 회개는 여화와께 대하여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와 같은 고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7:6).

성 경: [삼상6:1]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11093; 여호외의 궤 - 여호수아 3: 14-17 강해, '언약궤에 대하여' 부분을 참조하라.

&#11093; 블레셋 사람의 지방 - 여기서 '지방'(*, 사데)은 '들', '밭'을 뜻한다는 점에서(창 2: 5 ;왕하 4:39), 그 당시 언약궤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 들(field)에 보관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언약궤가 들어간 도시마다 여지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들에 보관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 한 것이다.

&#11093; 일곱 달 - 이것은 물론 문자적인 일곱 달(seven months)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의 숫자 표기상 '일곱'(7)이라는 숫자가 보통 '완전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대체없이 빈 들에서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음을 강조한 말로 볼 수도 있다.

성 경: [삼상6:2]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잘못 다룸으로써 엄청난 재앙을 만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제 정치적인 방법(5:8, 10, 11)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방식에 의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11093;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 '제사장'(*,코하님)은 구약 성경에서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제사 직분자에게 적용되지만, 여기서처럼 이교(異敎)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미 3: 11). 그런데 이 이교의 블레셋 제사장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다곤(Dagon) 우상 숭배 의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자들이었다. 한편 '복술자'(*, 코세밈)는 원래 '몫을 나누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즉 복술자(卜術者)는 작은 나무 가지들을 흔들다가 그것이 나뉘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점(占)을 치던 자들이었다(민 23:23;신 18:10).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이 극도로 타락했던 시기에는 이스라엘 안에도 존재했고, 또한 지도층 인사로 분류되기도 하였다(사 3:2). 아무튼 이들이 소집된 것은,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는 구체적인 방법 및 궤를 다루는 요령에 대해, 그리고 복술자들은 궤를 돌려보낼 날짜와 시기 등에 대해 블레셋 방백들에게 조언하기 위함이었다(Pulpit Commentary).

&#11093;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 블레셋 방백들의 이 질문은 또다른 재앙 없이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질문이었다.

&#11093; 본처로 보낼 것을 - 이 말은 법궤를 빼앗기기 이전 법궤가 안치되었던 실로(Shiloh)의 성소가 여전히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 영토로 쳐들어 갔고, 심지어 그들은 실로의 성소까지도 그때 파괴했던 것같다(렘 7:12;26:6; Albright). 따라서 여기의 '본처'(本處)는 실로(Shiloh)라는 특정 장소를 뜻하지 않고, 단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6:3]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11093; 궤를...거저 보내지 말고 - 본 구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나라 사람들로부터 '은. 금 패물과 의복'을 받아 나왔던 사건과 유사하다(출 3: 21; 11: 2;12:35, 36; 시 105:37;스 1:6). 더욱이 두 사건의 밀접한 유사성(類似性)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써 명백히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 본서 6:8과 출애굽기 12:35 모두 언약궤 및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려보낼 때 함께 보낼 예물을 언급하면서 공히 '켈리'(*, '물건')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둘째,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나 출애굽 시의 상황 모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극심한 징벌을 받은 후에야(5:3-12;출 7:10-12:30)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언약궤 및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려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한편 바로 이같은 사실들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실수로 타인의 소유물이나 사람을 취했을 경우에는 그 실수를 깨달은 직후 잘못 취한 물건이나 사람을 돌려 보내면서 실수에 따른 보상금(補償金)을 지불 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Klein). 한편 여기서 '보내지'(*, 테솰레후)는 사역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잘못으로 위한 물건이나 사람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보내는 것을 가리킨다(창20:7; 출 21:34;삼하 9:7).

&#11093;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 여기서 '그'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한다. 따라서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을 범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속건제'(*, 아솽)는 모세 율법대로 따른다면 하나님의 성물(聖物)이나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죄를 범했을 경우에 그 죄를 속함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혹은 예물이다(레 5:14-16 강해, 속건제에 대하여). 이때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피해자에게 피해물 외에 별도로 1/5을 배상금 조로 주어야 했다(레 6: 5, 6). 따라서 모세 율법에서 언급되고 있는 속건제(repayment offering)는 배상(賠償)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견지에서, 여기서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이 모세 율법에서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된 '속건제'(贖愆祭)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아솽'이라는 단어가 '배상'의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볼 때, 블레셋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해 인간적 차원의 배상을 위하여 이와 같은 예물을 생각한 듯하다. 또한 이같은 판단은 본절에서 원상 회복의 의미가 있는 '보내다'(*, 솰라흐)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확증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의 '속건제'는 차라리 '배상'이라는 말로 번역함이 더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Klein).

&#11093; 그리하면 병도 낫고 - 블레셋 술사(術士)들이 여호와께 예물을 바치려고 했던 첫번째 이유였다. 여기서 '병'은 말한 나위없이 쥐에 의해서 전염되어지는 독종(毒種), 곧 흑사병(pest)의 일종이었다(5:6 주석 참조).

&#11093; 그 손을...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 이것은 블레셋 술사들이 여호와께 예물을 바치려고 한 두번째 이유이다. 즉 그들은 예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멈춰진다면, 블레셋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같은 진노가 내려진 것으로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란 점을 언급한 것이다.

성 경: [삼상6:4]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11093; 블레셋 사람의 방백 - 당시 블레셋은 다섯 개의 주요 도시 국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 도시는 자체의 방백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5:8 주석 참조.

&#11093;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 - 여기서 '금독종'(golden tumor)은 여호와의 궤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종처'(腫處) 또는 '종양'(腫瘍)의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이고, '금쥐'(golden mice)는 쥐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이것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당했던 재앙의 종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에 의하여 '쥐'를 통해서 맹렬히 전염되는 '독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였던 것 같다(5:6). 한편 이와 같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들을 형상(形像)로 만들어 귀하게 여기는 일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당한 '불뱀 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민21: 4-9). 따라서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도 그러한 불뱀 사건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블레셋 술사들의 이러한 처방은 당시 이방 문화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즉 고대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어떤 소망을 빌거나, 혹은 감사의 표시를 할 때 그 내용을 형상화(形象化)하여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질병의 치료를 원하는 자가 그 질병든 모습을 금이나 은으로 형상화하여 신에게 바치는 경우, 난파선에서 구출된 자가 자신의 옷을 &#37116;툰(Neptune) 신전에 바치는 경우, 해방된 노예가 그 쇠고랑을 신전에 바치는 경우, 승리한 검투사가 자신의 검을 신에게 바치는 경우 등이 있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i.p. 63).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서 여기 블레셋 술사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자신들의 나라 바깥으로 보내고자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임할 재앙도 자신들의 나라에서 떠날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Payne).

&#11093;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 '금독종'과 '금쥐'를 방백의 수효대로 다섯개씩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재앙이 임했을 때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5:8)도 일반 백성들처럼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의 대표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대표의 수효에 따라 금독종과 금쥐 형상을 각파 다섯개씩 만들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6:5]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11093;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 - 여기서 '땅'은 문자적 의미로 곧 '토지'를 가리킨다고 보기 보다는, 오히려 이것은 블레셋 국가 곧 '블레셋 족속'을 가리킨다고 봄이 좋다. 즉 블레섯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의 근본 재앙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땅을 해롭게 하는 쥐'라고 말한 것이다.

&#11093;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 이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잘 알지 못하여 그분께 범죄했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크신 심판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수 7:19;렘 13:16). 그러나 블레셋 술사들의 이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이처럼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영광을 회복하신다.

&#11093; 혹 - 여기서 '혹'(*, 울라이)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대로 어떤 행동을 하실 수도 또한 안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암 5:15).

&#11093; 그 손을...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 이것은 배상(賠償) 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진정을 기대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삼상6:6]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11093; 바로가...강퍅케 한 것 같이 - 이것은 블레셋의 술사들이 출애굽 시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에 대하여 행하신 권능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8>.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당시 주변 국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역사적 대사건이라는 점을 시사한다(출 15:14-16;수 2:10). 한편 여기서 '강퍅케 한'(*,테카베두)은 '무겁다'의 뜻을 갖는 어근 '카베드'(*)에서 파생된 말로서, '마음을 스스로 완악하고 교만하게 하다'란 의미이다(출 7:3;10:20).

&#11093; 그가...기이하게 행한 후에 - '기이하게 행한'(*, 히트알렐)은 '욕보이다', '조롱하다'란 뜻의 동사 '알랄'(*)에서 파생된 말로서, 곧 상대방을 일개 장난감처럼 천하게 위급하는 것을 가리킨다(31:4;삿 19:25;렘 38:19). 즉 애굽인들과 바로는 마음을 강퍅케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바로 이와 같은 징벌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애굽인과 바로 위에 행하신 기이한 일은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10대 재앙'(출 12:29-36 강해, 도표 참조)으로 나타났다.

&#11093;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 애굽인들과 바로가 하나님의 엄청난 재앙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내보낸 사실을 가리킨다. 블레셋의 술사들은 이 역사적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더이상의 재난을 당하기 전에 속건제의 예물과 함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속히 돌려보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성 경: [삼상6:7]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11093; 새 수레를 만들고 - '새 수레'(a new cart)는 한 번도 세속적(世俗的)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적이 없는 수레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같은 수레는 존재치 않았을 것이므로 블레셋의 제사장들은 그것을 새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블레셋 제사장들이 이처럼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보내고자 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에게 경외심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Keil, Fay).

&#11093;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소 둘 - 이것 또한 세속적 목적을 위해서 전혀 사용되지 아니한 소를 가리킨다(민 19:2). 모세 율법에서도 정결 의식에 필요한 희생 제물은 이같은 조건에 부응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신 21:3).

&#11093; 젖 나는 소 둘 - 즉 새끼가 딸린 암소를 가리킨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운반할 짐승으로 이같은 암소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블레셋 제사장들에게 있어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족속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어디서 말미암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즉 그들은 그 재앙의 근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부터인지 아니면 다만 우연인지를 궁금해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9절에서 블레셋 제사장들은 재앙의 근원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놓고 있다. 즉 그들은 그 수레의 진행 방향을 보아 그 재앙의 근원을 규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새끼가 딸리지 않은 암소를 사용한다면, 그 암소가 목적지를 향해 곧장 간다고 하더라도, 그 암소는 다만 본능대로 길을 따라 간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새끼가 딸린 암소를 사용할 경우, 그 암소가 새끼를 개의치 않고 그렇게 곧장 간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가 개입됐다고 단정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블레셋 제사장들은 새끼가 있어 그것들에게 젖을 물리는 암소를 법궤 운반용으로 택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6:8]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11093; 금 보물은...궤 곁에 두고 - 블레셋 제사장들이 이같이 한 이유는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블레셋 족속에게 재앙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 예물로써 여호와의 꿰를 달래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성 경: [삼상6:9]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언약궤 반환을 위한 회의]

&#11093; 벧세메스(*, 베트 쉐메쉬) - '태양의 집'이라는 뜻.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이러한 의미는 일찍이 이곳이 가나안인들에 의하여 태양신이 숭배되던 곳임을 암시해 준다. 당시 이곳은 예루살렘 서쪽 약 22km지점에 위치하였고, 블레셋 땅으로 연결되는 동서 골짜기에 있었으며,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유다 지파의 땅이었다(수 21:13-16). 한편 블레셋인들이 언약궤를 이곳으로 보내려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언약궤가 원래 보관되어 있던 실로는 당시 블레셋 족속들에 의하여 심하게 파괴되었고(4:10 주석 참조). (2) 벧세메스는 언약궤로 인해 마지마긍로 재앙을 당한 블레셋 도시 에그론과 제일 가까운 이스라엘의 성읍이며, (3) 벧세메스는 언약궤를 관리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인 듯하다(수 21:16).

성 경: [삼상6:10]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로 향하는 언약궤]

&#11093;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 블레셋 제사장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확실히 규명하기 위하여(9절) 이처럼 어미 암소를 젖먹이 송아지들로부터 격리시켰다.

성 경: [삼상6:11]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로 향하는 언약궤]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수레에는 여호와의 궤 뿐만 아니라 그 궤로 인해 발생된 독종 재앙과 쥐 재앙을 형상화(形象化)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도 함께 보내졌다(4절). 이것들은 여호와의 궤를 진정시키기 위한 속건 예물용으로서(3절), 상자에 담겨져 여호와의 궤 옆에 놓여졌다(8절).

성 경: [삼상6:12]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로 향하는 언약궤]

&#11093; 암소가...가며...울고 -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암소들로부터 새끼를 떼어 놓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은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이, 새끼 송아지에게 모성적(母性的) 본능이 이끌리면서도 하나님의 강권 하시는 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11093;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 이같은 사실은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스스로 기준을 세운 바(9절)와 같이, 블레셋에게 임한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았음을 명확히보여 준다(7절 주석 참조).

&#11093; 대대로(*, 비메실라 아하트) - 문자적으로는 '단 하나의 큰길로'(along one highway, RSV)의 뜻이다. 결국 이것은 암소들이 가장 빨리 목적지에도착할 수 있는 지름길로 행했음을 암시해 준다.

&#11093;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 여기서 '치우치다'에 해당하는 '수르'(*)는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란 뜻이다. 따라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란 말은 종종 성경 안에서 철저한 순종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신 5:32;17:11;수1:7). 여기서는 암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목적지 벧세메스로 곧바로 갔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1)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소들이 수레를 이끌고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과, (2) 더군다나 젖 빨리는 새끼 송아지들을 둔 상태에서 좌우로 치우침 없이 곧장 갔다는 점은 분명 이 소들이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일깨워 준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천상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시다.

&#11093; 블레셋 방백들은...따라가니라 - 블레셋 방백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1) 만약의 돌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하며 (2) 재앙의 원인을 직접 확인키 위함이었다.

성 경: [삼상6:13]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로 향하는 언약궤]

&#11093; 벧세메스 사람들이...궤를 보고...기뻐 하더니 -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긴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던 만큼, 법궤의 귀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특히 제사장의 성읍(수 21:13-15)인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11093; 골짜기 - 이는 예루살렘 서남쪽 약 21km지점에서 지중해 쪽의 서북 방향으로 32km가량 이어져 있는 소렉 골짜기이며(삿 16:4), 오늘날의 '와디 에스 사랄'(Wady esSarar)과 동일 지역이다. 한편 삼손의 아내 들릴라가 살았던 딤나(Timnah)는 이 골짜기의 서남쪽 입구에 위치했었다(삿 14:1). 그리고 '벧세메스'(Bethshemesh)는 이 골짜기 남쪽 입구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11093; 밀을 베다가 - '밀'(wheat)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곡식이었다(왕상 5:11). 그리고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 '밀' 수확은 보통 5, 6월 경에 이루어진다(Robinson). 한편 언약궤가 돌아온 때가 마침 밀을 수확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 오는 장면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목격될 수 있었다.

&#11093; 눈을 들어 - 이 말은 먼 곳의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보다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취하는 자세로서 성경의 관용어이다(창 24:63;33:1;민 24:2;수 5:13;삿 19:17 등).

성 경: [삼상6:14]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로향하는 언약궤]

&#11093; 수레가...여호수아의 밭...이르러 선지라 - 수레를 끄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레가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까지 와서 딱 멈춰 선 것은 블레셋에 대한 재앙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내려졌음을 분명히 시사해 준다(9절). 그리고 여기서 '여호수아의 밭'(*, 세데)은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 세데)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분명히 옮겨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따라 언급되었다. 비록 여기의 '여호수아'가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가나안 땅 정복의 위대한 지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Joshua)와 동일한 이름의 소유자였던 그 사람의 밭에 하나님께서 수레를 멈춰 세우신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고 볼 수있다.

&#11093; 큰 돌 - 여기서 '큰 돌'은 '돌'(*, 에벤)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 추르)를 뜻하지 않는다(창 28:11; 출 31: 8; 수 4:5). 단지 땅 위로 드러난 굵직한 자연석(自然石)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이 큰 돌은 제단 대용으로서의 구실을 했다(Pulpit Commentary).

&#11093;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물(至誠物),곧 법궤를 운반했던 수레는 절대로 다른 세속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없고, 다만 번제를 위한 땔감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는 벧세메스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에 따라 행해졌을 것이다.

&#11093;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 번제물은 반드시 수컷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레 1: 3-13>, 여기서 암컷을 번제로 드린 것은 특별히 이 소들은 성물을 운반하여 다시는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던 특별한 사정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곳 벧세메스의 희생 제사는 반드시 중앙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여호와의 명령(신 12:5-7,11-14)에 심히 위반되는 제사는 아니었다(Keil). 왜냐하면 비록 이 희생 제사가 실로(Shiloh)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행해졌지만 (1) 실로가 완전한 중앙 성소로서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곳이 아닐 뿐 아니라, 당시는 블레셋 족속에 의해 심하게 파괴된 상태였고 (4:10 주석 참조). (2) 또한 무엇보다 그 때에 벧세메스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져 있었으며, (3) 그리고 그 제사가 레위인 제사장들에 의하여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집행됐고(15절), (4) 저자도 그 제사를 잘못된 일로 언급치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F.R. Fay). 한편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제사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법궤를 다시 돌려 보내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였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음을 기뻐하였다<13절>.

성 경: [삼상6:15]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로향하는 언약궤]

&#11093; 레위인은 - 여기의 이 '레위인'은 벧세메스에 거주하도록 지정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곳 벧세메스는 여호수아에 의해 아론 자손의 성읍, 곧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지역이었다(수 21:13-15). 따라서 여기 '레위인'은 아론의 후손들로서 곧 제사장일 가능성이 크다 (Mathew Henry, F.R. Fay).

&#11093; 여호와의 궤와...큰 돌 위에 두매 - 이와 같은 궤 운반 행위는 오직 고향 자손 레위인만이 할 수 있었다(민 3:25-4:28). 한편 고핫 자손 레위인(제사장)들인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큰 돌 위에 두었는데, 이는 큰 돌 곧 커다란 자연석(自然石)을 순수하고 깨끗한 것으로 여기는 구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볼 때(창 31:45; 출20:25; 신 4:13; 수 4:3 ;왕상 7:9), 그 당시의 상황에서 벧세메스의 레위인들은 언약궤를 수레에서 옮겨놓을 장소로 그곳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11093; 금 보물 담긴 상자 - 당시 레위인들은 블레셋 방백들이 함께 보낸 이것을 언약궤가 놓여 있던 '큰 돌' 위에 같이 올려 놓았다. 이와 같이 한 이유는 당시 레위인들이 그 상자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1093; 다른 제 - 이것은 성경에서 주로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를 가리키는 말이다(민 7: 17, 23; 10:10 ;수 22:23; 왕상 8:63; 대하 30:22).

성 경: [삼상6:16]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로향하는 언약궤]

블레셋 족속을 대표하는 다섯 방백들은 법궤의 귀환 과정을 빠짐없이 모두 목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범궤로 인해 파생된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분명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마음 속 깊이 깨닫고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도시 에그론과 그들의 신 다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성 경: [삼상6:17]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속건 제물을 드리는 블레셋인]

&#11093; 아스돗 - '진'(陳)이란 뜻으로 가사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교통 관문이다. 신약 시대에는 '아소도'란 명칭으로 불리웠다(행 8:40). 5: 1 주석 참조.

&#11093; 가사 - 이곳은 예루살렘 남서쪽 약 80km지점, 지중해 해안으로부터는 약 5km지점, 아스글론으로 부터는 남쪽으로 약 20km지점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남서쪽으로는 애굽으로, 북쪽으로는 수리아, 메소포타미아로 통하는 군사, 무역용 도로가 이 도시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도시는 군대 및 대상(隊商)들이 취거나 물을 공급받았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다(Mare).

&#11093; 아스글론 - 이곳은 아스돗과 가사의 중간에 위치한 지중해변의 비옥한 도시이다.

&#11093; 가드 - 아스돗 동쪽 약 20km지점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도시로, 오늘날 '텔 엘사피'(Tell el-Sahfi)로 추정된다. 5: 8; 수 11:22;13: 3 주석 참조.

&#11093; 에그론 - 지증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약 14km, 아스돗 북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블레셋의 주요 다섯 성읍 중 하나이다. 수 13: 3 주석 참조.

성 경: [삼상6:18]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속건 제물을 드리는 블레셋인]

본절은 사본(寫本) 전수 과정상 약간의 문제가 내포된 구절이라 볼 수 있다. 즉 맛소라 사본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본절 중 '웨에드'(*, '그리고~에 이르기까지')를 '웨에드'(*, '그리고 증거')로, '아벧'(*, '슬픔', '통곡')을 '에벤'(*, '돌')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Keil & Delitzsch, F.R. Fay, R. Payne Smith). 그렇게 볼 때 본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드린 바 금쥐는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리고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서 오늘까지 증거가 되니라"(And the number of the gold rats was according to the number of Philistinetowns belonging to the five rulers-the fortified towns with their countryvillages, The large rock, on which they set the ark of the Lord, is a witness tothis day in the field of Joshua of Beth Shemesh, NIV).

&#11093; 견고한 성읍 - 높은 성벽이 둘러쳐 있고 문과 빗장이 있었던 요새화된 성읍을 가리킨다(신 3:5).

&#11093; 시골 동리 - 이것은 '견고한 성읍'과는 반대 개념으로서, 저지대에 위치하였고 성곽을 갖추지 못한 작은 마을을 가리킨다(겔 38:11;슥 2:4).

&#11093; 그 돌은...오늘까지 있더라 - 성경에서 '돌'은 특별히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건들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생생히 일깨우게 할 증표로서 종종 언급되곤 한다(창 31:52; 수 4: 5;24:27). 따라서 여기의 '큰 돌' 역시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시 되찾은 기념비적 사건을 후일에 되새기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한편 '오늘까지'는 본서를 기록할 그 당시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 경: [삼상6:19]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인들이 당한 재앙]

&#11093;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민 4:5, 6, 1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것의 내부를 들여다 본 것은 사악한 세속적 호기심 때문이었으며, 그 같은 호기심은 결국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결과였다(갈 6:7).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궤를 전리품 취급한 블레셋을 정벌하셨듯이(5:1, 2), 그 궤를 단순히 세속적 구경거리로 삼은 벧세메스 사람들도 엄히 정벌하신 것이다.

&#11093; (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 여기서 '오만'이라는 숫자는 필사자의 실수에서 기인한 듯하다. 즉 숫자 표기를 종종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내는 고대의 숫자 표기 방식에 따라 '칠십명'(*, 쉬베임 이쉬)을 달리 설명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오만'이라는 말이 삽입된 것 같다. 어쩌면 '아인'(*, 70)을 '눈'(*, 50,000)으로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Kennicott). 아무튼 후일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도 7만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여기의 '오만 칠십 인'은 그냥 '칠십 인'으로 봄이 타당하다(Keil, Smith, Fay). 이런 점에서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도 '칠십 인'으로 말하고 있다(Antiquities, vi, 1,4). 그리고 히브리 여러 사본들 에서도 '오만'이란 숫자는 빠져 있다.

&#11093;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 하나님의 징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벧세메스 사람 '칠십인'은 한 가정의 가장(家長) 등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들이었을 것이므로, 그 두려운 사건은 각 지역 주민들에게 큰 충격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여호와의 거룩성'을 깊이 깨달아야만 했다.

성 경: [삼상6:20]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인들이 당한 재앙]

&#11093; 누가 능히 서리요 - 여기서 '서리요'(*, 아마드)는 원래 '서다', '머물다','시다' 등의 의미이다. 특별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존경하는 자세로 어떤 특별한 대상 앞에 서있는 것', 곧 '경배' 혹은 '숭배'의 의미로 사용된다(왕상 1:2;17:1;18:15;왕하 3:14;렘 40:10). 따라서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말은 감히 받들어 모실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과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을 시인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11093; 그를...뉘게로 가시게 할꼬 - 법궤를 경솔히 돌여다 본 범죄의 대가로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징계를 받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전과 같은 징계가 또 내려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 궤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려 했다. 따라서 이것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자신들이 징계를 당한 분명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에게 언약궤와 관련하여 미신적 신앙이 다분히 있었음을 보여준다(4:3;5:8)

성 경: [삼상6:21]

주제1: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온 언약궤]

주제2: [벧세메스인들이 당한 재앙]

&#11093;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 여기의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은 '숲의 성읍'이란 뜻으로서 오늘날의 위치는 '쿠르엣 엘 에납'(Kuryet el Enab)으로 추정된다(Robinson). 당시 이 성읍은 벧세메스 북동쪽 약 145km, 예루살렘 북서쪽 약 13km지점에 위치하였다. 그러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다른 성읍들을 제치고 하필이면 왜 기럇여아림으로 언약궤를 보내려 했을까? 그것은 그 당시 기럇여아림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를 살펴봄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당시 기럇여아림이나 벧세메스는 모두 블레셋의 정치적 영향전 아래 놓여 있었다(Blenkinsopp). 이 사실은 위의 두 성읍과 인근한 르바임 골짜기를 후에 다윗이 블레셋 족속들로부터 회복시켰다는 성경의 언급을 통해서 분명해진다(삼하 5:18-25). 즉 다윗이 르바임 골짜기를 완전히 수복시키기 전까지 위의 두 성읍은 당시 르바임 골짜기를 점령하고 있었던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블레셋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마찬가지로 블레셋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기럇여아림으로 언약궤를 보내려 했던 것이다.

&#11093; 너희는 내려와서 - 여기서 '내려와서'라는 말은 벧세메스(Beth - Shemesh)가 해발 약 305m, 그리고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이 해발 약 762m라는 점에서,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삼상7:1]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기럇여아림에 안치된 언약궤]

&#11093; 기럇여아림...여호와의 궤를 옮겨 - '블레셋에서 돌아온 법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성막이 있는 실로(Shiloh)로 옮겨가지 아니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1) 아벡 전투(4:9-11) 결과, 블레셋 족속에 의해 당시 실로까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Ewald). (2) 실로 성소가 여호와께 더럽혀진 결과 법궤를 빼앗긴 것으로 간주하고, 당시 백성들이 법궤 보관 장소로 실로 성소를 기피하였기 때문이다(Keil). (3) 되도록이면 큰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곳에 법궤를 보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Hengstenberg). 한편 '기럇여아림'에 대해서는6:21 주석을 참조하라.

&#11093;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 - 여기서 '아비나답'(Abinadab)은 레위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성읍이 레위인에게 할당된 성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봐야 할 까닭은 다옴과 같다. (1) 사사 시대에는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성읍을 이탈하여 다른 지역에서 생활한 경우가 흔했으며(삿 17:12), (2) 후일 아비나답의 후손들이 언약궤를 옮기는 일에 공식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삼하 6: 3). 한편 '산에 사는'(*, 바기아)이란 말은 직역하면 '산지에 있는'(in the hill, KJV) 또는 '산지 위에'(on the hill, NIV)란 뜻인데, 이는 곧 아비나답의 집이 기럇여아림성읍의 교외 산지에 위치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1093; 들여 놓고 - 아비나답의 집은 언약궤를 보관하기에 적당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그의 집이 기럇여아림의 교외 고지에 위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11093; 그 아들 엘리아살 - '엘리아살'(Eleazzr)은 '하나님은 도우시는 자'란 뜻으로, 이 사람은 아론의 아들로서 아론의 뒤를 이어 차기 대제사장이 된 엘르아살(Eleazzr, 출6:23;민 20:25-28)과는 동명 이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의 소유자는 위의 두 사람이외에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레위 지파의 후예임을 은연중 시사한다.

&#11093; 거룩히 구별하여 - 이 말은 제사장을 임직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출 28:3, 41).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엘리아살이 혈통상 제사장 가문의 후예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당시의 특별한 상황은 제사장적 직분을 감당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따라서 그가 비록 제사장 가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위 지파였으므로 그곳 주민들은 그를 제사장으로 세운 듯하다. 한편 성경은 엘리아살이 어떤 권위에 의해, 또한 어떤 방식에 따라 제사장으로 구별되었는지에 대혜서는 침묵한다.

&#11093;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 제사장적 신분으로 거룩히 구별된 엘리아살이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지켰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 아벡 전투로 말미암은 실로 파괴 이후 공식적인 예배나 제사는 일단 중지된 듯하다. 따라서 엘리아살의 주임무는 예배나 제사 행위 보다도 법궤를 안전하고도 정결하게 잘 보관. 건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헹스 텐베르그(Hengstenberg)의 언급은 퍽 인상적이다. "장차 법궤가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다시 드러낼 때까지(마치 충실한 묘지기인 양) 지킨 것이다".(J.P. Lange, Commentary on the Hdy Scripture).

성 경: [삼상7:2]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기럇여아림에 안치된 언약궤]

&#11093; 궤가...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 여기서 '이십 년 동안'은 다윗에 의하여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완전히 옮겨진 때까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궤를 빼앗겼던 아벡 전투(혹은 에벤에셀 전투)는 B.C. 1075년에 있었고,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간 때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시작한 직후인 적어도 B.C. 1003년 이후일 것이기 때문이다(Leon Wood). 따라서 여기의 '이십 년 동안'은 사무엘이 최초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회개를 촉구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3절). 비록 하나님의 언약궤는 일찍이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6:14), 20년이란 기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 족속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여전히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4:10), 또한 언약궤는 비록 이스라엘 땅이긴 하지만 여전히 블레셋의 깊숙한 영향권 아래 있는 기럇여아림 땅에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6:21).

&#11093; 이스아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 여기서 '사모하다'(*, 나하)란 말은 본래 '크게 울다', '부르짖다'란 뜻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 말은 흔히 신세를 몹시 한탄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깊게 뉘우쳐 크게 울면서 부르짖는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렘 9:10;31:15; 겔 32:18; 암 5:16; 미 2:4).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 활동을 이방 족속 블레셋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강제로 억제당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깃들어 있는 사무엘의 분투적인 노력과 활동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즉 일찍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명망이 높았던(3:19, 20) 사무엘이 이 오랜 시기 동안 잠자코 있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비록 성경은 이 점에 대혜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러 일의 결과를 통해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 아벡 전투의 결과로 말미암은 실로 성소 파괴 이후, 아마도 사무엘은 성막을 놉(Nob)으로 이전하는 일에 깊이 관여 했을 것이다(21:1-9). (2) 대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 사망 이후, 사무엘은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로서 사회 질서를 바로 잡고 타락된 제사 예식의 기강을 수립하는 일에 매진하였을 것이다. (3) 블레셋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곳곳을 돌며 여호와 신앙을 고취시키고 죄의 회개를 부르짖는 등 신앙각성 운동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4) 또한 사무엘은 종교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모세 율법으로 바로 세우고, 아울러 선지 학교를 창설하여 젊은 인재들을 육성했던 것 같다(Leon Wood, A Survey of Osrael's History; PulpitCommentary).

성 경: [삼상7:3]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사무엘이...일러 가로되 - 여기서 드디어 사무엘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비록 공식적이며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사무엘의 신앙 부흥 운동이 그동안 계속 되어 왔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3:19-21; 4: 1).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적절한 때를 포착한 사무엘은 본격적이고도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치.종교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때 사무엘의 나이는 32세 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사무엘은 아벡 전투(4: 5-11)가 있었던 약 12살에 소명되었고(3:1-14), 활동 당시는 그 전투 직후 궤를 빼앗긴 때로부터20년이 지난 시기이기 때문이다.

&#11093; 전심으로...돌아 오려거든 - 여기서 '돌아오다'(*, 슈브)란 말은 '회복하다', '돌아가다', '전향하다', '회개하다'란 뜻으로서 곧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죄에서 돌이켜 회개함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 된다(왕상 8:33, 48; 대하 6:24; 느 1: 9; 렘3:10). 한편 '전심으로'(*, 베콜레바브켐)는 '너의 마음 송두리채'란 뜻으로서, 이는 회개의 순수하고 진정한 성격을 강력히 암시해 주는 문구이다.

&#11093;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제하고 - 우상을 제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돌아와 여호와만을 섬기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출 20:3-6). 여기의 '이방 신'(*, 엘로헤 하네카르)은 문자적으로는 '낯선 신들'(the strange gods, KJV)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4절의 언급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구체적으로는 '바알 신'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 '바알'(Baal)은 '주'(主)라는 의미인데, 가나안 땅에서 이 바알 신은 원래 '엘(EL) 신'의 아들로 비와 풍년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신인 '못(Mot) 신'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후 7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전쟁의 여신'아낫'(Anat)이 그의 시체를 찾아 그를 다시 살렸다고 한다. 한편 '아스다롯'(Ashtaroth)은 예레미야서에서 '하늘의 여신'으로 언급되는 여신이다(렘 44:19). 이 여신은 가나안 사람들에 의하여 미(美) 와 유연성을 지닌 '성(性)의 여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바알 신과 아스다롯 신은 보통 가나안 사람들에 의하여 함께 모셔졌고,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 신들에 대한 숭배 의식에는 위의 두 우상의 성격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필연적으로 성적 음란이 뒤따르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방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멀리 하도록 했다는 중요한 이유 외에 성적 음란을 조장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키기에 충분하였다(민 25:1, 2; 왕상 14: 24;15:12; 22:46). 이에 따라 성경에서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함께 묶어 이스라엘 백성이 절대로 금해야 할 숭배의 대상으로서 언급하였다(삿 2 :11; 3:7; 왕하 23: 4).

&#11093; 너희 중에서 제하고 - '제하고'(*, 하시루)는 '제껴두다', '뽑다', '떠나다'란 뜻의 '수르'(*)에서 파생된 말로,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특히 우상을그 흔적까지도 없앤다는 뜻으로서 많이 사용된 단어이다(창 35: 2; 수 24:14; 왕상 15:14; 왕하 12:3; 대하 15:17). 한편, 후일 유다의 두 현군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우상 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찍어버리는 것'(왕하 18: 4)과 '불살라 재로 만들어 평민의 묘지에 버리는 것'(왕하 23:4-6) 등의 두 가지를 백성에게 제시하였다.

&#11093;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 사무엘의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족속에 의해 얼마나 오랫동안 심하게 유린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아울러 그러한 압제와 핍박의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도 분명히 시사해 준다.

성 경: [삼상7:4]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이에...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 본절은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백성들에 의하여 크게 신임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3: 19-21; 4 :1). 사무엘의 회개 촉구에 순히 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같은 행동은, 그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자신들을 자유케 하는 지름길임을 체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것은 그동안 힘써 노력해 온 사무엘의 신앙 각성 운동이 열매를 맺은 것이요, 또한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삿 3:8,9)

&#11093; 바알들과 아스다롯 - 3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7:5]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 이같은 대성회는 전에도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루어졌었다(삿 20:1;21: 5,8). 더구나 중앙 성소였던 실로(Shiloh)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미스바 모임의 의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스바'(*, Mizpah)는 '파수대'(watchtower)라는 뜻을 가지며, 오늘날의 '텔 엔-나스베에'와 동일 지역으로서 해발 784m의 고지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약 13km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땅이었다. 한편 이 성읍의 역사적 존재 사실은 1920년부터 1935년 사이에 실시된 탐사를 통하여 B.C. 1100-400년경의 많은 유적들이 이 지역에서 발굴됨으로써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런데 사무엘이 많은 성읍 중 이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이도록 한 이유는 아마도 미스바가 온 이스라엘이 모이기에 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지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미스바 모임의 목적은 다음 두 가지였다. (1) 대회개 운동을 통하여 국운을 회복하고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거국적 성회였다. (2) 블레셋으로부터 정치.종교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거국적 거사였다(Keil, Smith). 그리고 미스바 성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지도자 중보 기도를 하기 위해 추진한 성회였다. (2) 백성들은 금식하고 회개함으로써 동참한 성회였다. 아울러 미스바 성회가 가지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타락하고 피폐해진 이스라엘 사회를 하나님의 왕국답게 혁신하는 대개혁의 모임이었다. (2) 파괴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간계를 새롭게 회복하는 대전환의 모임이었다.

&#11093; 내가 너희를 위하여...기도하리라 - 사무엘의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중보의 기도임이 분명하다(12:19; 시 99:6; 렘 15:1). 따라서 이 일은 마땅히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할 일이었지만, (1) 당시는 대제사장이 뚜렷이 없었고 또한 제사의식마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으며 (2) 사무엘은 이스라엘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히 부름받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2:35;3:19-21) 사무엘에 의해 수행될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삼상7:6]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 이처럼 '물을...붓는' 행위는 마치 물을 부어 쏟듯이 자신의 마음 전부를 다 내어놓고 회개한다는 것을 뜻하는 상징적 행동이며(시22:14), 아울러 자신의 슬픔을 외적으로 모두 토로해 낸다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행동이다(애 2: 18,19). 따라서 반대로 '물을 길어 올리는' 행위는 기쁨과 즐거움을 뜻하는 상징적 행동이다(사 12:3).

&#11093; 금식하고 - '금식하다'에 해당하는 '춤'(*)운 본래 '입을 덮다'란 뜻이다.여기서는 여호와께 진정과 겸손으로 회개한다는 구체적인 표시로 '금식'(fast)란 방법이 채택되고 있다(사 58: 6-9). 아울러 여기 '금식'은 애통과 회개와 기도 등을 모두 함축하는 말이다(삿 20:26; 삼하 12:16-23; 왕상 21:27).

&#11093; 우리가...범죄하였나이다 - 이말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회개에 대한 묘사 중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다(출 32: 31; 신 1: 41; 삿 10:10; 삼하 24:10;왕상8:47; 왕하 18:14). 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와 같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는 그들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삿 3:9,15;4:3;6:6).

&#11093; 사무엘이 미스바에서...다스리니라 - 여기의 '다스리니라'(*, 이쉬포트)는 '재판하다'란 의미이다(출 18:16, 22;사 2:4; 렘 5:28; 단 9:12). 즉 이스라엘의종교 개혁을 주도한 사무엘은 이제 종교적인 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생활 태도 전반을 교정시키고 감독하며 재판해야 하는 사사(士師)로서의 역할도 감당해야 했다.

성 경: [삼상7:7]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듣고...치러 올라온지라 -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삿 20: 1). 블레셋 사람들은 사무엘의 영도하에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거행한 의식(儀式)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하나로 뭉쳐 성전(聖戰)을 준비키 위한 행위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러한 움직임이 더 확장되기 전에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Klein). 사실 오랫동안 블레셋의 정치적 영향권 하에 있던 이스라엘이 이방 신상을제거하고 민족 신앙을 고취시키는 거국적 집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곧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정치.종교의 자유와 독립을 선언하는 명백한 도전 행위임은 분명했다(Smith).

&#11093; 이스라엘 자손이...두려워하여 - 블레셋 족속에 의하여 숱한 세월 동안 압제를 당해왔던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블레셋의 공격 소식에 이같은 반응을 보임은 당연하였다(출 14:10,13장, 수 10:8).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은 싸울 무기나 조직 조차 변변치 못한 반면에, 블레셋 족속은 강력한 철병기로 중무장한 조직된 군대가 아니었던가?

성 경: [삼상7:8]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쉬지 말고 부르짖어 - 여기서 '부르짖다'(*,자아크)는 극한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간절한 호소를 가리킨다(삿 6: 7; 대상 5:20; 렘 11: 11). 따라서 '쉬지말고 부르짖어'라는 말은 어려운 고비를 벗어날 때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행위를 멈추지 말라는 뜻이다. 결국 이것은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의 중보자로 인정하고 있으며(왕하 3: 11-19). (2)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또한 의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말이다.

성 경: [삼상7:9]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 이 어린 양은 태어난 지 최소한 7일 이상은 된 양일 것이다(레 22:27). 한편 이처럼 사무엘이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방 신상을 제하고 회개한 이스라엘이 이 순결한 어린 양처럼 새롭게 거듭 태어났음을 상징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Keil).

&#11093;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 이것은 희생 의식 절차에 있어서의 완전성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헌신하는 마음 자세의 완전성을 뜻한다. 또한 실제적으로는 어린 양 한 마리 전체가 온전히 화제(火祭)로 불살라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할다. 한편 여기서 사무엘이 여러 가지 제사 형태 중에서 번제를 드린 이유는 '번제'가 전적 헌신의 제사이기 때문이었다<레 1:3-9 강해, 번제에 대하여>. 따라서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같은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므로써 (1) 자신들의 회개의 진실성을 강조하며(6절), (2) 자신들이 구원 받아야 할 간절한 필요성을 호소하였다(8절).

&#11093;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 이것은 진실하면서도 간절한 전적인 헌신의 기도가 얼마나 큰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말이다(약 5:16).

성 경: [삼상7:10]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블레셋 사람이...가까이 오매 - 본절의 장면은 생생하다. 즉 미스바 제단에서 어린 양은 번제로 계속 불타고 있었고, 사무엘은 전심 전력으로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었다. 때에 철무기로 무장한 블레셋 군대는 득의 앙양하여 미스바 산지의 아래에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집결해 있는 고지로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도저히 군사력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었던 몰사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오로지 하늘의 도우심만 의뢰하고 바랄 뿐이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뢰로써 기도에 응답하셨다.

&#11093;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헌신과 기도에 대하여 우뢰(雨雷)로써 응답하셨다. 즉 여기서 '우뢰'는 블레셋 군대를 쳐부수는 하나님의 무기로 사용되었던 것이다(2:10; 삼하 22: 14).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외에도 번개(삼하 22:15; 왕상 18: 38), 우박(수 10:11), 흑암(수 24: 7), 심지어 별(삿5:20)과 질병(5:6)까지도 당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징벌하시는 당신의 무기로 사용하신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연계를 당신의 의지에 따라 주장하셔서 '우뢰'라는 자연현상을 유발시키셨던 것이다. 사실 고대인들은 이 우뢰를 하나님의 목소리로 생각했었다. 여하튼 때맞춰 하늘로부터 터져나온 이 '우뢰' 소리로 인하여 블레셋 족속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고, 혼비 백산(魂飛魄散)하게 되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7:11]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우상 숭배 근절 명령]

&#11093; 이스라엘 사람들이...블레셋 사람을...쳤더라 - 득의 양양하게 진군해 와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던 순간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터져나온 큰 우뢰 소리에 놀라 혼비 백산한 블레셋 군대를 이스라엘이 사기충천하여 파죽지세로 몰아쳤다는 의미이다. 한편 타민족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 장면은 사사기 16장을 끝으로 여기서 처음 언급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승리가 항상 그렇듯, 이 승리 역시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거두어들인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블레셋 족속들은 철병기를 소유하였으며, 이러한 블레셋 군대를 이스라엘의 군사력으로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승리의 헌장에 다만 은혜로 참여하였을 뿐이다(수 10:10). 한편 우리가 아벡 전투(4: 5-11)를 B.C. 1075년 경으로 본다면(Leon Wood), 여기 미스바 전투는 그로부터 20년 후인(7: 2) B.C. 1055년 경에 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 1 주석 참조.

&#11093; 벧갈(*, Bethcar) - '어린 양의 집' 혹은 '초원의 집'이란 뜻으로, 이 '벧갈'의 위치는 확실치는 않으나 미스바 서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Klein). 한편 요세푸스는 오늘날 이 벧갈의 위치를 여리고와 벧스안 사이의 '코라이온'(Korraion)으로 보고 있다(Josephus, Antiquities, VI. 2, 2).

성 경: [삼상7:12]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에벤에셀]

&#11093; 돌을 취하여...세워 - 구약 성경에서 '돌을 취하여 세우는 일'은 특별한 사건을 후대에까지 기념 혹은 기억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창 31: 44-47; 수 4:6-7).

&#11093; 미스바와 센 사이 - '미스바'(Mizpah, '망대' 또는 '파수대'란 뜻)는 예루살렘 북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땅이다. 7: 5 주석 참조. 한편 '센'(*,Shen)은 '치아'(齒牙)란 뜻으로서, 그 지역이 불쑥 불쑥 날카롭게 튀어 나온 바위들이 많은 험준한 곳이었음을 시사해 준다(Fay, Keil). 한편 이곳은 미스바 북동쪽 약 13km지점의 '여사나'(대하 13:19)와 동일한 지역으로 주장되기도 한다(Reed). 그러나 블레셋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반격을 받아 서쪽으로 도주하였을 것이므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Klein). 사무엘과 이스라엘은 패주 하는 블레셋을 추격하여 미스바의 서쪽으로 향했고, 그리고 그들이 진격해 간 곳 근처 어디에 돌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이 세워진 곳은 '벧갈'(11절)과 가까운 곳으로 볼 수 있다.

&#11093; 여호와께서...우리를 도우셨다 -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1)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감사, (2)계속적인 은혜 공급의 간절한 요청, (3) 하나님의 은혜 안에만 계속 머물겠다는 전적인 헌신의 각오 등이다.

&#11093; 여기까지 - '여기'(*, 헨나)는 구체적으로 그때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추격해 갔던 서쪽 한계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실 근 40년간 블레셋의 압제에 시달리던(삿 13: 1) 이스라엘이 싸움에 이겼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 족속의 영역권인 가나안 서쪽까지 막강한 블레셋 군대를 공격하면서 쫓아갈 수 있었던 것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1093;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 '에벤에셀'(*, '도움의 돌'이란 뜻)은 미스바 전투의 숭리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오고오는 세대에 증거하기 위해 세운 기념석(記念石)으로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추격해간 장소에 세워졌다. 한편, 그런데 여기 '에벤에셀'(Ebenezer)은 4:1의 에벤에셀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1) 그 위치에 있어서 다르며<4:1 주석 참조> (2) 4:1의 에벤에셀은 한 지역의 명칭인 반면, 여기의 에벤에셀은 다만 '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7:13]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에벤에셀]

&#11093; 이에 - 이 말은 본절의 내용이 12절의 결과(미스바 전투의 대승리)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접속사이다.

&#11093;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 여기의 '블레셋 사람의 굴복'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완전한 항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블레셋 족속들은 이스라엘 영내 일부에 자신들의 총독부 및 수비대를 계속 두고 있을 정도로(10:5), 이스라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 16). 따라서 여기 이 말은 미스바 패전 이후 불레셋은 더이상 이전처럼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그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많은 성읍을 도로 회복할 수 었었다.

&#11093; 여호와의 손이...막으시매 - 이것은 미스바 전투(10, 11절)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블레셋의 파상적 공격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블레셋의 공격을 막아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도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라는 단서가 붙음으로써, 사무엘 사후 이스라엘에 밀어 닥칠 격랑(激浪)을 예상케 한다.

&#11093;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 이 말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통치하고 있을 동안을 가리키는 말로, 이 기간은 사울이 왕이 된 후의 약 5년을 포함하는 기간이었다. 실제로 사울은 이 5년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남길 수 있었다(14: 23).

성 경: [삼상7:14]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에벤에셀]

&#11093; 블레셋 사람이...빼앗았던 성읍 - 이 '성읍'들은 대부분 아벡 전투(4:5-11)의 패배로 말미암아 블레셋에 빼앗긴 곳들이었다.

&#11093; 에그론부터 가드까지...회복되니 - 이 말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주요 성읍인 에그론과 가드까지 정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에그론과 가드를 잇는 블레셋 경계의 동쪽 성읍을 회복 했다는 뜻이다(Keil, Fay, Smith). 사실 이 부근의 이스라엘 성읍들은 오랫동안 블레셋의 통치와 압제하에 있었으나, 사무엘 시대에 다시 되찾은 것이다.

&#11093;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 이 두 민족은 역사적으로 계속 앙숙지간의 관계에 있었다. 특별히 '아모리 사람'(the Amorites)은 가나안의 여러 족속 중 가장 강력한 족속으로서, 출애굽 이후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족속이었다. 그러나 사사 사무엘의 시대에는 이들간에 평화가 유지되었는데, 이처럼 아모리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코자 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블레셋의 강력한 군대가 이스라엘에 의하여 패퇴당하는 것을 아모리 족속이 분명 목도하고그 위세에 눌렸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7:15]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에벤에셀]

&#11093;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다스렸으되 - 여기서는 사무엘의 사사직 수행이, 사울이 왕으로 세워진 이후에도 계속 수행되었다는 사실이 애써 강조되고 있다(13절; 12:11; 13:13; 15:1). 즉 사무엘은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선지자요 사사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것은 사울의 타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당시 사울은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11:14,15), 그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지도자였다(8장; 9:16).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왕이 세워지기까지, 새로운 신정 왕국(神政王國) 건설을 준비해야 할 사무엘은 자신의 사사직을 계속 수행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었다.

성 경: [삼상7:16]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에벤에셀]

&#11093; 해마다...순회하여 - '해마다'는 '적어도 1년에 한 차례씩'의 의미이다. 그리고 '순회하다'(*, 사바브)는 '에워싸다', '돌다', '왕래하다' 등의 의미이다(수 6: 15; 시 22: 12; 전 12:5), 한편 그당시 사무엘은 이같은 일을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때까지 적어도 5년간은 계속했을 것이다(Leon Wood).

&#11093;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 '벧엘'(Bethel)은 예루살렘 북쪽 약 16km지점의 에브라임 지파에게 속한 지역으로, 이곳은 일찍이 아브라함과 야곱이 단을 쌓는 등의 역사적 사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의 성지(聖地)로 여겨 졌다(10:3; 창12:8; 28:17-19; 수 7:2; 왕상 12:29). 한편 '미스바'(Mizpah)는 예루살렘 북쪽 13km지점, 곧 예루살렘과 벧엘 사이의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다. 5절 주석 참조. 그리고 '길갈'(Gilgal)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직후 집단적으로 할례를 받은 곳으로서(수5:8), 요단 서쪽 약 6km 지점이다(수 4:19). 이처럼 사무엘이 순회했던 지역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우리는 사무엘의 사사직 수행이 온 이스라엘 지파들의 지역을 총망라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이뤄졌음을 볼 수 있다. 그같이 볼 수 있는 이유는 위에 언급된 지역들이 모두 팔레스틴의 중앙부에 위치한 곳들이기 때문이다.

&#11093;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 여기서 '그 모든 곳'과 '이스라엘'은 동격이며, 이것들은 곧 위에 언급된 여러 지역들을 가리킬 뿐이다.

성 경: [삼상7:17]

주제1: [미스바 대성회(大聖會)]

주제2: [에벤에셀]

&#11093; 라마로 돌아왔으니 - '라마'(Ramah)는 예루살렘 북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사무엘의 고향이었다(1: 1, 19). 당시 언약궤도 없고 성막도 존재치 않는 상황에서, 사무엘이 더이상 실로(Shiloh)에 계속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그때 고향 라마를 중심으로 인근 주요 성읍을 순회하면서 사사직을 수행하였던 것이다(10: 5 ;19: 18).

&#11093; 단을 쌓았더라 - 이것은 지극히 타당한 행동이었다. 그 이유는 (1) 당시는 아직 중앙 성소가 확정되지 않았으며(신 12: 11), (2) 또한 제사장의 무리들은 엘리 가문의 파멸 이후 제 기능을 발휘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3) 실로의 성막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처럼 영적 침체를 가속화시킬 수 있었던 여러 요인들이 두드러졌던 당시 상황에서 선지자요 사사인 사무엘이 또한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하여 하나님께 대한 제사 의식을 회복하는 일은 실로 시급한 문제임이 분명했다. 따라서 사무엘은 고향 라마에 여호와의 단을 쌓아 제사 의식을 수행했는데, 특히 '라마'는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위치하였으므로 모든 백성들이 그곳에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삼상8:1]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패역한 사무엘의 두 아들]

&#11093; 사무엘이 늙으매 - 이때 사무엘의 나이는 약 50살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까닭은 사무엘이 소명받은 때가 12살 때인 B.C. 1088년이라고 보고(2:26;3:1-14), 당시를 사울이 왕으로 취임한 해인 B.C. 1050년으로 본다면(Leon Wood), 그의 나이는 50살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는 미스바 전투(7:5-14)가 있은지 약 5년 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한편, 유대 탈무드(Talmud)는 이당시 사무엘의 나이를 52살로 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학자들(Abravanel, Lange)은 그들의 연대 추정법에 근거하여 당시 사무엘의 나이를 70세 정도로 보고 있다.

&#11093; 그 아들들로...사사를 삼으니 - 이것은 사사직(士師職)의 안전한 이양이나 계승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사무엘은 자신을 돕도록 하기 위하여 두 아들들을 보조 사사로서 임명한 듯하다(Keil).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사사직이 세습 계승된 일은 전혀 없었다. 물론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사사)으로 자처하기는 하였으나(삿 9:16), 그러나 그것은 사사직의 합법적 승계는 절대로 아니었다.

성 경: [삼상8:2]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패역한 사무엘의 두 아들]

&#11093; 장자의 이름은 요엘 - '요엘'(Joel)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란 뜻이다.

&#11093;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 - '아비야'(Abiah)는 '여호와는 아버지'라는 뜻이다. 결국이 두 아들의 이름은 사무엘의 믿음과 영감이 깊이 반영된 신앙적인 이름임을 알 수있다(Smith, Fay).

&#11093;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 '브엘세바'(Beersheba)는 '일곱의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란 뜻으로, 족장 시대로부터 유서 깊은 곳이었다(창 21:31). 또한 고대로부터 이곳은 근동과 애굽의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요충지로서, 이스라엘의 최남단 곧 라마로부터 약 80km나 떨어진 먼 곳이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사무엘은 두 아들보조 사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1) 사무엘 자신이 늙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2) 그리고 이곳에 사사를 둠으로써 인접국인 블레셋의 간섭을 배제 시키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사무엘의 통치 중심지인 라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 가나안 남부 지역까지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무엘 외에 별도의 보조 사사가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런데 사무엘이 한 지역에 왜 두 명의 사사를 임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따라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사무엘의 두 아들중 한 아들은 가나안 북단의 '단'에 배치되었다고 주장하나(Josephus, Antiquities,VI, 3, 2), 그 근거는 확실치 않다.

성 경: [삼상8:3]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패역한 사무엘의 두 아들]

&#11093;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 여기서도 엘리 가정에서와 같은 비극적 모습이 비쳐지고 있다(2:12). 그러나 여기의 사무엘의 경우는 엘리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 즉 성경은, 엘리가 아들들의 신앙 교육을 게을리했다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지만(2: 29), 사무엘의 경우에 대해서는 그러한 암시를 전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자식 교육을 위한 사무엘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만 아들들이 거기에 순종치 아니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인 것이다. 결국 사무엘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보여준 신앙과 삶의 본(本)은 말할 나위없이 대단히 훌륭했음이 분명하다(12: 3).

&#11093;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 이(利)의 추구(출 18:21), 뇌물수수(출 23:8; 사 1: 23;5:23; 암 5:12). 판결의 왜곡(출 23:2, 6, 8; 신16:19;24:17; 사 5:23) 등은 특별히 성경이 지도자된 사람들에게 절대로 금지시킨 조항들이다. 따라서 사무엘의 아들들의 이 같은 행위들은 그들이 사사의 본분을 망각한, 대단히 타락한 지도자들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출 23:6-8; 신 16:19 주석 참조.

성 경: [삼상8:4]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왕을 요구하는 장로들]

개역 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었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그래서'(so, NIV)의 의미인'와'(*)로 본절이 시작됨으로써, 3절의 내용이 본절의 내용을 유발시켰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11093; 이스라엘 모든 장로 - 이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대표자들이다(15:30; 삼하 5:3; 왕상 8:3). 보다 자세한 내용은 신 21 :1-9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8:5]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왕을 요구하는 장로들]

본절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 장로들은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고 있다. 곧 그 이유는 (1) 사무엘의 노쇠에 따른 불안감, (2) 사무엘의 아들들의 악행과 무능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사 사무엘의 생전에 그의 권위로써 자신들의 왕이 세움받기를 강력히 원했던 것이다.

&#11093; 열방과 같이...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 여기의 '열방'은 특히 이스라엘과 혈통적 연관성이 있었던 모압.암몬.에돔 등 주변 국가들을 가리킨다. 물론 애굽에도 왕이 있었으나, 당시 그 나라는 초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여건을 소유했으면서도 이미 왕을 갖고 강력한 왕정 제도를 실시하고 있던 모압.암몬.에돔 등을 자신들의 모범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이때 지파(tibe) 차원의 부족 동맹 체제에서 벗어나서 왕(王)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왕정 국가 체제를 형성함으로써, 주변의 이웃 나라들과 동등한 차원의 군주국(君主國)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한편, 그런데이처럼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 자체가 악하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스라엘 왕정 제도는 이미 모세에 의해 예언된 바 있었고(신 17: 14), 따라서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도 필연적으로 왕정 제도로 발전할 수 밖에 없을 운명이었다(Keil,Fay, Calvin).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진행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방법대로 행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인본주의적 욕구를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왕을 세우고자 했다. 바로 이 점이 지금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이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8:6]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하나님의 분부]

&#11093;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 '기뻐하지 아니하여'란 의미이다(삼하11:25,27).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자신의 노령과 아들들의 실정(失政)을 들먹이면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왕을 요구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같은 악감정을 품은 것은 결코 아니다(Keil,Matthew Henry, Smith). 사무엘은 그러한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근본 동기를 파악 했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은 것이다. 즉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 동기는 신정(神政) 정치를 불신하는 그릇된 왕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사무엘은 그들의 요구에 불쾌감을 표시한 것이다(E.J. Young).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주변 국가에 압제당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범죄와 불신앙과 우상 숭배 행위에 있는 줄 깨닫지 못하고, 사사(士師)제도와 같은 신정정치의 결함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태도는 이제더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행위로, 곧 선민(選民)으로서의 고유한 특권과 사명을 포기하는 이른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과 같은 방자한 행위였다. 사무엘은 이러한 점을 바로 파악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깊이 괴로워 한 것이다.

&#11093; 여호와께 기도하매 - 이것은 사무엘이 자신의 판단에 혹시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되지나 않았을까 염려하여,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물어보는 진지한 태도이다.

성 경: [삼상8:7]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하나님의 분부]

&#11093;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 즉 백성들이 요구하는대로,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 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음을 보여 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여호와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간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적인 허용일 뿐이다(호 13:11).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한 백성들의 요구에 응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인간 왕이 가져다 주는 온갖 폐해를 깊이 체험케 하여,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요 유일한 통치자임을 깨우쳐 주려고 하셨던 것이다.

&#11093;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 장로들이 공식적으로 왕을 요구했을 때, 사무엘은 일면 그들이 자신을 싫어하여 자신의 사사직(士師職)을 사임케 하려는 것으로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여호와의 말씀은 백성들의 요구가 그러한 단순한 동기 이상의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준다. 즉 백성들은 단순히 사무엘 이후 자신들을 다스릴 신정적(神政的) 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열방의 뭇 왕과 똑같은 정치적(政治的) 왕을 요구한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의해 예언된 바(신17:14-20) 신정적왕, 곧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율법을 보존. 전수하고 우상 숭배 행위를 척결하며 여호와 신앙으로 단결시켜 국력을 튼튼하게 하는 일 등을 주임무로 하는 그러한 왕을 요구했더라면, 오히려 그것은 사무엘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러한 정치적이고 무력적인 절대 군주를 원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여호와의 통치를 거부하는 일로서 곧 여호와를 버린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PulpitCommentary).

&#11093;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 성경은 도처에서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하고 있다(출 15:18; 신 33:5; 삿 8:22,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자신들을 강력하게 다스릴 또다른 왕을 요구한 것은 곧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치 않는 것과 동일한 행위였다(10:19;12:12). 나아가 이 행위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 여호와를 저버리고, 대신 절대적으로 의뢰할 또다른 그 무엇을 섬기고자 하는 우상 숭배 행위와 다름없었다(Keil).

성 경: [삼상8:8]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하나님의 분부]

이스라엘 장로들이 왕을 요구한 행위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또한 당시 성실히 사사직(士師職)을 수행하던 사무엘에 대한 반역임을 말하고 있다.

성 경: [삼상8:9]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하나님의 분부]

&#11093;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 여기의 '그러므로'(*, 웨)는 본절의 내용이 8절의 결과임을 보여 주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을 듣되'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형벌적 성격을 띠고 있음이 분명하다.

&#11093; 엄히 경계하고...알게 하라 - 여기서 '경계하고'(*, 타이드)는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란 의미이다. 또한 '알게 하다'(*, 히가데타)는 '선포하다', '고하다'의 의미이다(시 97: 6). 본절은 이같은 유사한 동사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스스로 택한 왕으로 인하여 후에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점을 못박고 있다(롬 3:25, 26).

&#11093; 왕의 제도(*, 미쉐파트 하멜렉) - 여기서 '제도'로 번역된 '미쉐파트'(*)는 '다스리다', '심판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솨파트'(*)에서 파생한 말로 곧 '심판', '특권', '권리' 등의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왕의 제도' 란 말을 직역하면 '왕의 권력', '왕의 특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따라 이 말을 풀어 해석하면, 곧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택한 왕이 취하게될 부정적인 행동(Hertzberg), (2) 그같은 왕이 행사하게 될 부정적인 권력(Caird) 등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의 이 문구는 본서 10:25에 언급된 긍정적 의미의 '나라의 제도' 와는 전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10:25에 언급된 '나라의 제도'는 왕이 지켜야 할 율법적 의무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8:10-18]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본문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정(王政) 제도가 실시될 경우 필연적으로 야기될 문제점에 대해서 사무엘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1) 젊은 남녀의 징집(1-13절), (2) 곡물과 가축의 징세 및 징용(14-17절),(3) 그외 왕의 폭정으로 인한 온갖 고초(18절) 등이다. 즉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왕은 열방과 똑같은 형태의 권력형 군주로서, 사랑과 공의의 왕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스라엘이 그 우심을 따라 스스로 택한 지상 왕의 생생한 모습이다. 한편 이상의 내용을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

성 경: [삼상8:11]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 여기의 '취하여'(*, 이카흐)는 강제적으로 물건이나 사람을 빼앗는 행위를 가리킨다(19:14; 24:11; 삼하 12:4; 대상 7: 21; 시31 :13). 그러므로 이 말은 곧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에 의하여 백성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그들의 아들들이 강제로 징집될 것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서의 징집은 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국가 방위군으로서의 징집이 아니라, 왕 개인의 사적목적과 이익을 위한 임의의 징집 행위를 가리킨다.

&#11093;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 이것은 백성들이 왕에 의하여 징발되어 왕의 병거 앞에서 왕을 호위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을 가리 킨다. 특히 여기의 '병거'(*, 메르카바) 가 단수라는 점에서 전쟁용이나 군대용이 아닌, 왕이 위엄을 과시키 위하여 타고 다니는 왕의 개인 수레임이 분명하다(왕하 9: 21). 결국 '왕의 병거를 어거케 한다'는 말은 왕에 의하여 백성들이 자유를 제약당하며, 오히려 백성 자신들이 세운 왕의 수종이나 드는 비참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이다. 따라서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란 말을 직역하면 '그(왕) 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그의 병거가운데로 (보내) 말타는 사람으로 삼으리니'(appoint then for himself among hischariots and to be his horsemen)란 의미이다. 또한 영역본 NIV는 이를 의역하여'왕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병거와 말을 돌보게 할 것이다'란 뜻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공동 번역은 "(왕이 그들을)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라고 번역했다.

&#11093;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 이 말은 곧 왕에 의해 차출된 백성들의 아들들은 왕의 어수레 앞에서 왕의 신변 보호를 위해 경호할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본절의 의도는 이제 백성들이 세우고자 하는 왕은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는 전제 군주가될 것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왕 개인을 위해 백성들이 치러야 할 희생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말이다.

성 경: [삼상8:12]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천부장과 오십부장 - '천부장'과 '오십부장'은 군대 조직상 고급 관리와 하급 관리를 통칭 일컫는 말로, 이러한 부장(父長)제도는 일찍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솔하기 위하여 장인 이드로의 조언에 따라 모세에 의해 채택된 제도였다(출 18:25, 26). 그런데 특별히 여기의 '천부장'과 '오십부장'은 그러한 정규적인 군대 조직과 관계된 관리들이라기 보다도, 왕실 경호대의 관리들을 뜻하는 말인 것 같다. 즉 이 말은 왕이 자신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경호대를 조직화 할 것이라는 말이다.

&#11093; 자기 밭을 갈게...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 여기의 '밭'은 왕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왕실의 농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왕이 자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백성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리란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같은 일은 백성들의 원성을 극심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렘 22:13). 후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됐던 큰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같은 강제적인 노동력 착취 때문이었다(왕상5:13-16; 12:10, 11). 한편, 여기서 '밭을 가는 일'과 '추수하는 일'은 곧 농사의 전과정을 가리킨다.

&#11093;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 - 여기 '병기'(instruments of war, KJV; weapons ofwar, NIV)는 주로 전투에 필요한 창. 칼. 활. 방패 등의 공격 및 방어용 무기들을 모두 가리킨다. 그리고 '병거'는 주로 왕들에 의해 자신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소유되었었다(왕상 1:5). 그런데 이것은 처음에는 애굽에서 주로 수입되었으나 (왕상 10:28), 솔로몬 시대에는 국내에서 그것을 직접 생산하였다(왕상9:19). 그리고 여기 '병거의 제구'(the equipment of chariots)는 병거의 부속품들, 즉 '여섯 개의 살이 달린 바퀴' 및 '바퀴 축' 등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8:13]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그가...딸들을 취하여 - 왕이 백성들 중 젊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젊은 여자들까지도 징집하여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할 것이라는 경고이다.

&#11093; 향료 만드는 자 - 여기의 '향료'는 몸에 뿌리는 향수 및 몸에 바르는 향기나는 연고를 모두 가리킨다. 이것들은 고대 중근동에서 주로 궁중의 호화로온 사치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물품들로 간주되었다. 한편 이것의 원료는 침향, 창포, 계피 등으로서,이 원료들에 대한 무역은 그당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창 37:25; 왕상 10:10;겔 27:22).

&#11093;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 이것은 왕의 궁전에서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식사 준비를 위하여 백성 중 특히 젊은 여자들이 징집될 것을 말한다. 그런데 후일 솔로몬 왕 당시 궁전에서 하루에 소용되었던 식량이 가는 밀가루 삼십 석, 굵은 밀가루 육십 석, 소 삼십 마리, 양 일백 마리 등이었다는 점에서 (왕상 4:22, 23), 왕의 궁전으로 징집되어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받았을 여자들의 수효는 실로 엄청났을 것이며, 또한 그들의 고초도 대단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8:14]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너희 밭...취하여 - 왕이 백성들의 토지 또는 그 토지의 좋은 소산물들을 임의로 빼앗는 것은 명백히 율법에 위배되는 것이다(민 36: 7; 왕상 21 :3). 본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은 온갖 교묘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백성들의 토지 또는 그 토지의 소산물들을 빼앗을 것임을 경고한다(왕상 21 :1-16).

&#11093;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 이와 같은 하사(下賜)는 고대 중근동의 국가들에서 널리 시행되었던 봉건 제도적 관습 중의 하나였다(Kline). 특히 이와 같은 일은 왕이 선하들에게 보다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기 위하여 시행되었다 (22:7).

성 경: [삼상8:15]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십일조를 취하여 - 여기의 '십일조'(十日條, tithe)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여호와께 바쳤던 것(레 27:30) 이외의 별도의 십분의 일(1/10) 을 말한다. 한편 우가릿 문서들은(Ugaritic Texts) 왕에게 바쳐졌던 이와 같은 십일조 제도가 고대 중근동 지역에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같은 제도는 틀림없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11093;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 왕이 자신에게 봉사한 대가로 신하들에게 봉록(俸祿)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관리'(*, 사리스)는 본래 앗수르에서 넘어온 단어로서, 문자적으로는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단어를 많은 경우 '환관'이나 '내시'의 의미로(왕상 22:9; 왕하9:32;20:18;24: 12; 사 39:7; 56:3, 4; 단 1:3, 7), 때로는 다만 '높은 지위의 관리'란 의미로(창 39:1;40:2) 사용하였다. 따라서 본 단어는 대체로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되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높은 관리'란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성 경: [삼상8:16]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너희 노비 - '너희 노비'는 원문대로 하면 '너희의 남자 노비와 너희의 여자 노비'란 의미이다. 한편 이 '노비'는 전쟁 포로로 잡혀와 이스라엘의 각 가정에 팔린 외국인 노예들을 가리킨다(출 12:44; 레 22:11;25:44; 전 2:7).

&#11093; 가장 아름다운 소년 - 여기서 '소년' (*, 바하르)은 (1) 칠십인 역(LXX)이 '황소'(*, 타 부콜리아)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2) 문맥상 '소년'보다는 '황소'가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필사자가 '황소'라는 의미의 바카르(*)를바하르(*)로 잘못 옮긴 듯하다(Keil, Fay, Smith). 이같은 추측은 본절의 '노비', '황소', '나귀' 등이 모두 토목. 건축 사업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라는 사실에서 보다 확실해진다.

성 경: [삼상8:17]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 이것 또한 종교적 목적으로 바쳐진 십일조 이외의 왕실 유지용 세금과 같은 성격의 십일조였다(15절). 한편 모세 율법에서도 여기서처럼 곡식의 십일조와 가축의 십일조을 따로 분리하여 언급 한다(레 27:30, 32).

&#11093;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 이것은 11-17절에서 길게 언급한 왕의 제도(권력)의 결론이다. 즉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와 같은 절대 군주(君主) 밑에서 사는 생활은 곧 노예의 생활과 다름없음을 말해주는 두려운 경고이다(9, 11절).

성 경: [삼상8:18]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그날에...부르짖되...응답지 아니하시리라 - 본절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즉 (1) 본래 하나님께서는 열방과 같은 왕 제도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사실(9절),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과 같은 왕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그 자체가 곧 형벌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 등이다. 한편 개역 성경에는 생략 되어 있으나, 히브리 원문에는 '택한 왕'을 수식하는 말로 '너희 자신들을 위하여'(*, 라켐)란 말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응답지 않으시는 이유를 한마디로 보여 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세속적 욕심에 따라, 자신들의 유익만을 추구키 위하여 왕을 요구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왕으로 인한 이와 같은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은 후일 왕국 시대에 빈번히 일어났고, 특히 북왕국의 여러 폭군 치하에서 많이 터져 나왔다.

성 경: [삼상8:19]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

분명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의 경고를 듣고 나름대로 숙의하고 논의했을 것이다(Smith). 그러나 이미 욕심과 아집에 귀가 막히고 눈이 먼 그들은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고 반성하기는 커녕 더욱 더 강력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우기 바빴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11093; 말 듣기를 거절하여 - 이와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던 불순종적인 일과 관련 하여 성경에 자주 나타난다(왕하 17:17;렘 11:10;13:10).

성 경: [삼상8:20]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 '열방과 같이 된다'는 말은 보다 조직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왕정(王政) 국가가 됨을 가리킨다(5절 주석 참조).

&#11093; 우리 왕이...싸움을 싸워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하게 된 결정적 이유를 암히해 준다. 즉 그들은 타민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변 열방처럼 조직력을 갖춘 군대와, 또한 그 군대를 일사 불란하게 통솔할 강력한 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이 훈련이 잘된 이방 군대의 강력한 힘과 짜임새 있는 조직, 그리고 그러한 조직을 지휘하는 위풍당당한 왕의 모습에 매료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따라서 본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금껏 싸워오셨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대신하여 싸워주실 것이라는 중요한 사실을(출 14:14; 신 20:1-4; 수 10:14, 42;23:3, 10;삿 4 :14;삼하 5:24)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죄악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

성 경: [삼상8:21]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사무엘이...듣고...고하매 -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놓고 사무엘이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제사장적 선지자로서 중보적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이로 볼 때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에 관한 문제는 이스라엘과 사무엘 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그릇된 동기를 지적하여 이르기를 "그들이...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 경: [삼상8:22]

주제1: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주제2: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11093;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 사무엘을 통한 여호와의 강력한 경고(11-18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는 백성들의 요구에 응해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정 제도(王政制度)를 허락하셨다. 이러한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은 방임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일종의 심판이 되어진다(롬1:24, 25). 이러한 사실은 후일 호세야 선지자에 의해 설파된 바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1)는 메시지에 의해 알 수 있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왕정 제도'를 통하여 당신의 구속 역사를 펼쳐나가셨다. 결국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은 늘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실패까지도 당신의 구속 섭리 가운데로 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F.R.Fay).

&#11093;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 마침내 사무엘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각 지파 각성읍으로 돌려 보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왕을 위한 백성들의 요구가 완전히 수락되었으니, 이제 이 소식을 각 성읍에 알리고 재소집의 시기를 기다리라는 의미가 있다(Keil). (2) 왕을 세우기 위한 제반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Fay).

성 경: [삼상9:1]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울의 가문과 인물]

&#11093; 베냐민 지파 -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던 12지파 중의 하나로서(민 1:37), 이 지파의 선조인 베냐민은 야곱의 막내 아들이었다(창 35:16-18). 한편 이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다(수 18:11). 그러나 이 지파는 불명예스럽게도 사사 시대 말기에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죽게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삿 19:22-30),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의 징계를 받아 그 지파의 상당수 남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삿 20:29-44). 그때 베냐민 지파의 살아 남은 장정의 수는 불과 600명 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삿 20:47). 그러므로 이후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숫적으로 가장 미약한 지파가 되었는데, 바로 이 지파 중에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나왔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즉 이스라엘 초대 왕이 수행하여야 할 선결 과제는 무엇보다도 각 지파 간의 결속과 단결을 공고히 하는 일이었는데, 바로 그 일을 이스라엘의 막내 지파가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나머지 각 지파간의 불필요한 상호 견제, 시기, 경쟁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Leon Wood). 특히 베냐민 지파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강력한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갈등과 주도권 싸움을 방지할 수 있는최선의 선택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1093; 기스라 이름 하는 유력한 사람 - 여기서 '기스'(Kish)는 베냐민 지파가 레위인의 첩을 윤간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파들로부터 징벌을 당할 때, 그 징벌을 피하여 '림몬 바위'로 도망하였던 600 명의 베냐민 사람 중의 한 사람이거나, 혹은 그의 후손이었을 것이다(삿 20:47). 한편 '유력한 사람'(*, 깁보르 하일)은 '부유한 사람'(a man of wealth, RSV)을 의미하거나 (룻 2:1; 왕하 15: 20), 혹은 '강력한 용사'(a mighty man of power, KJV)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삿 6:12;11:1). 그런데 우리는 여기 '유력한 사람'을 위의 두 가지 의미 모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1) 기스는, 약 25,000명의 베냐민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던(삿 20:46) 땅을 레위인의 첩 윤간 사건(삿 19:16-20:48) 이후 나뉘어 차지하게 되었을 600명 (삿 20:47)중의 한사람 혹은 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부유했을 것이며, (2) 뿐만 아니라 베냐민지파의 후손들 중에는 실제로 용사들이 많았고 (삿 20:16), 또한 기스의 아들 사울의 출중한 외모(2절 :10:23, 24)가 기스의 용사됨을 어느 정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11093;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 본서의 기록과는 달리 역대상 9:39은 '넬'(Ner)을 기스의 아버지로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족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성경의 족보는 '선택 기록설'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사상 특별하지 않은 인물들은 족보 기록에서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1장 강해, 사무엘의 가계>. 따라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기타 성경의 여러 참조 구절들(창 46:21;삼상 14:51;대상 7:6-8;8:29-33;9:35-39)을 비교 고찰해 보면, 우리는 역대상 9:39의 언급처럼 '넬'이 실제적인 기스의 아버지이고, 여기서 기스의 아버지로 언급된 '아비엘'(Abiel)은 실제적으로는 기스의 할아버지로 봄이 타당한 듯하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 어법상 '아들'(*, 벤)이란 개념이 반드시 1대 자손만을 뜻하지 않고, 여러 대(代) 후의 자손을 가리킬 때도 '아들'이란 말을 통칭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무리한 추측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절에 나타난 '손자', '증손', '현손'이란말도 모두 직역하면 '아들'(*, 벤)이란 말이다. 아무튼 본절 묘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부각될 사울(Saul)의 역사적 실재성을 밝히고, 나아가 이스라엘 중 그의 위치를 명확히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성 경: [삼상9:2]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울의 가문과 인물]

&#11093;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 '사울'(Saul)이라는 이름은 '구하여 얻은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의미심장하다(Klein, 1:27, 28). 즉 '사울'(*)은 이미 그 이름이 갖는 의미를 통하여 자신이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질 이스라엘의 왕임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8: 10).

&#11093; 준수한 소년이라 - 이에 해당하는 원문(M.T.)의 '바후르 와토브'(*)를 직역하면 '젊고 잘 생겼더라'(young and handsome)인데, 이는 그 의미상 사울의 미적(美的)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울의 풍채가 뛰어남을 말해주는 단어이다(창 3: 6; 6: 2; 왕상 1:6). 그리고 여기 '소년'은 한글 개역 성졍이 의미상 번역한 단어인데, 이 번역은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원문의 의미는 아직 미성숙한 남자 아이가 아닌, 오히려 전투의 능력이 있고,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으며, 또한 결혼할 정도로 성숙한 젊은 청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24Richer, 왕하 8: 12; 대하36:17; 시 148:12; 전 11:9; 사 31:8;40:30)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을 외적의 손에서 구원할 자로 지목되었고(16, 17절), (2) 사울이 이 일이 있은 직후 암몬 족속을 맞아 싸움을 했다는 사실(11: 6-11) 등에서 분명해진다(Goslinga). 때문에 칠십인역(LXX)과 갈대아역(The Chaldee)에서는 '(성인) 남자'(*, 아네르)로 번역했다.

&#11093;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 '키'는 사람의 외모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사울의 장대한 신체는 강력한 통치력을 갖고 자신들을 다스려 줄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8:20).

성 경: [삼상9:3]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심부름 길에 나선 사울]

&#11093;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찾으라 하매 - 고대 사회에서 '나귀'(*, 아톤)는 귀족들이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면서 즐겨타던 동물이었다(삿 5 :10; 10:4; 12:14;슥 9:9). 특히 그중에서도 '암나귀'는 그것의 온순성 때문에 숫나귀보다 더 귀하게 평가되었다. 그런데 '유력한 사람'인 기스(Kish)가 '암나귀' 몇 마리에 그렇게 집착한 이유는 (1) 암나귀 자체가 그것을 소유한 주인에게는 부와 존귀의 상징물이었고, (2)따라서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부와 존귀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Stoebe).

&#11093; 한 사환을 데리고...가서 - 기스가 이처럼 아들 사울에게 사환과 함께 암나귀를 찾으라 명령한 것은 '기스'가 그 나귀들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는지롤 잘 보여준다. 아무튼 사울은 사환과 함께 집을 떠남으로써 집으로부터 더 먼 곳까지, 그리고 더 샅샅이 찾아 헤맬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사울이 부친의 명을 좇아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으러 나선 이 사건은 조만간 이스라엘 왕정(王政) 출발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이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또한 그로 인해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 때문이다. 이로 볼때 우리는 주변의 사소한 모든 일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시고 섭리하신다는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 경: [삼상9:4]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심부름 길에 나선 사울]

&#11093; 에브라임 산지 - 에브라임 산지(the hill country of Ephraim)는 가나안 땅 중부의 구릉 지대로서 토양이 가나안 땅의 다른 지역보다 비옥했으며, 특히 서부 능선 지대는 농산물의 수확이 많았다.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 중 에브라임 지파와 베냐민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던 지역이었다(1:1 주석 참조). 그리고 그중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에브라임 산지의 남쪽을 차지하였다. 한편 사울의 집은 베냐민 지파가 차지한 영토의 남부에 위치한 '기브아'였다(10:26).

&#11093; 살리사 땅 -이 곳은 '제3의 땅'이라는 의미로서 세겜 남서쪽 약 32km지점에 위치하였고, '바알 살리사' (왕하 4:42)와는 동일한 지역이다. 한편 이 지역에 대한 또다른 명칭인 '바알 살리사' (Baal-Shalisha)는 그 지역에 바알을 섬기는 신당(神堂)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11093; 사알림 땅 - 이곳은 '자칼(여우의 일종)의 땅'이란 의미이며, 벧세메스(6:9)와 아얄론(수 10:12)중간에 위치하였다. 이름의 뜻이 암시하듯 이곳은 불모의 야생 들판인듯한데, 혹자는 이곳을 오브라 (13: 17) 근처의 '수알 땅'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Albright).

&#11093; 두루 다니되 - 사울과 그의 사환이 나귀를 찾기 위하여 매우 많은 거리를 분주하게 돌아다녔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즉 사울은 사환과 함께 고향 기브아를 출발하여 에브라임 산지 일대인 살리사, 사알림, 베냐민 땅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는 동안 어느덧 40km 이상의 긴 여행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 근처의 숩땅에까지 이른 것이다. 분명 이 사실은 초기 사울의 남다른 효성과 성실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성 경: [삼상9:5]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심부름 길에 나선 사울]

&#11093; 숩 땅에 이른 때에 - '숩'(Zuph)은 에브라임 산지의 남쪽, 곧 베냐민 지파의 땅 라마<1: 1, 19 주석 참조>와 가까운 지역이다. 따라서 '숩 땅에 이르렀다'라는 말은 사울과 그의 사환이 그때 이미 에브라임 산지를 거의 한 바퀴 일주한 뒤, 다시 자신들의 성읍 기브아(Gibeah)에서 가까운 곳에 도달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숩 땅'이라는 지명은 사무엘의 먼 조상 '숩'이라는 레위인(1:1)이 그곳에 정착함으로써 붙여지게 된 지명이다.

&#11093; 돌아가자 내 부친이...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 20절에 따르면 사울과 그의 사환이 부친의 명을 좇아 집을 떠난지 벌써 3일이 되었다. 따라서 사울의 이러한 걱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이것은 당시 사울이 부모를 공경하던 효성스러운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말임이 분명하다(Matthew Henry).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인간적인 좋은 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 인격에 뿌리를 두지 못하면, 영속성을 지니지 못할 뿐 아니라 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막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것은 후일의 사울의 생애가 입증하는 바이다.

성 경: [삼상9:6]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환의 조언]

&#11093;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 여기서 '이 성'은 라마다임소빔(1:1), 곧 라마(1 :19)를 가리킨다(Smith, Fay). 이곳은 사무엘의 고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사무엘이 그의 사사직과 제사장직을 수행 하던 근거지였다(7 :17).한편 '하나님의 사람' 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직무를 담당하던 '선지자'에 대한 일반적 명칭이다(2:27; 삿 13:6; 왕상 12: 22;13:1, 14; 왕하 1:9, 13;5:8).

&#11093;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 이 말은 사울의 사환이 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무엘이 그 당시 일반 백성들에 의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분명혀 보여 준다. 즉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3:20) 라는 말씀이 실제적인 사실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반영해 주는 말이다.

&#11093;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 이것은 참선지자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객관적 증거였다(신 13:1-3; 18:21, 22). 또한 이것은 3:8에서 본서 저자가 "여호와께서...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말한 바가 실제로 백성들에게 사실로서 인정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11093; 그가...가르칠까 하나이다 - 사환의 이같은 말은 그가 사무엘의 선지자됨을 온전히 믿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사환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사사 로운 점(占)이나 치는 사람으로 잘못 이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 관한 제반 문제들까지도 사무엘에게 문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F.R.Fay).

&#11093; 우리의 갈 길을 - 이것은 사울과 사환이 길을 잃어버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암나귀를 찾을 수 있는 방법과 장소를 알고 싶어한 것이다(Keil). 한편,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고찰할 사실은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를 사환이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당시 사울이 사무엘의 존재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런것 같지는 않다. 일개 사환이 알고 있었던 지식을 유력한 집안의 아들인 사울이 전혀 몰랐을 리 없다. 다만 나귀를 정신없이 찾는 중 라마성 근처에 이르자, 사울의 사환이 먼저 그 사실을 깨닫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7절에서 사울이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의 풍습까지 알고있었던 점으로 보아 확실하다.

성 경: [삼상9:7]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환의 조언]

&#11093; 우리가...무엇을 드리겠느냐 - 일반적으로 중근동 지방에서는 존경하는 어른을 방문할 때 그의 신분에 걸맞는 예물을 지참해 가는 풍습이 있었다(Pulpit Commentary). 특히 이러한 관습은 성경에서 선지자에게 무엇을 물으러 가는 경우와 관련하여 많이 나타난다(왕상 14:3; 왕하 4 :42; 암 7:12; 미 3 :5).

&#11093;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 하였으니 - 이 말은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로서 음식이 절대적이거나 또는 제일 좋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울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집에서 갖고 나온 것이 단지 음식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음식 조차도 바닥 난 상황에서 사울이 위와 같은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11093; 예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테수라'(*)는 희귀한 단어로서, 곧 선지자(선견자)에게 무엇을 문의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사례'를 뜻한다(R. Payne Smith). 이런 점에서 공동 번역은 이 말을 '복채'(卜債)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삼상9:8]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환의 조언]

&#11093; 은 한 세겔의 사분 일 - 이것은 주조(鑄造)된 은화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헬레니즘 시대까지는 은화 및 동전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Klein). 한편 은(銀)'한 세겔'은 약 11.5g에 해당되며, 따라서 사분 일(1/4) 세겔은 약2.9g이다.

&#11093;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하겠나이다 - 이것은 선지자에게 반드시 예물을 바쳐야만 그에게 물어볼 수 있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사환은 다만 그 당시의 풍습에 합당한 기본적 예의를 갖춘 후 선지자에게 물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성 경: [삼상9:9]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환의 조언]

&#11093; 옛적 이스라엘에 - 본서의 저자는 사무엘이 활동하던 당시를 이처럼 오래 전의 일로 봄으로써, 사무엘서가 사무엘이 활동했던 얼마 후에 성경으로 기록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6:18). 한편 혹자는 9절 전체를 후대의 어떤 필사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1, 18, 19절) 주해(註解)하여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R. Payne Smith).

&#11093; 하나님께...물으려 하면 - 이것은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던 계시 수납의 방식이(출 28:30) 더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Westermann). 물론 이후 시대에도 우림과 둠밈이 간혹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그 당시에는 여러 형편에 따라 우림과 둠밈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이것은 그당시 제사장의 권위가 현저히 떨어졌고, 그 역할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11093; 선견자 - '선견자'(*, 로에)는 '보다'(see)라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말로, 곧 '보는 자'(seer)라는 의미이다. 이 명칭은 '선지자'(*, 나비)라는 명칭이 아직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사용된 명칭으로서(Klein),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측면에 강조점을 둔 고대적 명칭이다. 아울러 성경에는 '로에'(Roeh)와 더불어 '선견자'(先見者)로 번역되는 단어가 또 있는데, 곧 '호제'(*)이다(삼하 24:11; 왕하 17:13; 대상 25:5; 대하 9:29; 사 29:10;암 7:12; 미 3:7). 이 '호제'(Chozeh)는 정신적(영적)인 것을 '인지하다'(perceive)라는 뜻의 동사 '하자'(*)에서 파생된 말로, 역시 '보는 자'(beholder)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명칭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신령한 환상'을 보는 측면에 강조점을 둔 시적(詩的) 명칭이다(R. Payne Smith, F.R. Fay). 한편 '선지자'(*, 나비)라는 명칭은 '말하다' (speak), '선포하다'(declare)라는 뜻의 동사 '나바'(*)에서 파생된 말로, 이 명칭은 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측면을 강조한 율법적 명칭이다. 그러므로 선견자('로에' 또는 '호제')와 선지자('나비')는 근본적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서(삼하 24:11;사 30:9, 10), 공히 '영감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키며, 따라서 선견자와 선지자는 일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실을 꿈, 환상, 계시 등을 통해 '보고'(seeing), '파악하며'(perceiving), 나아가 그 보여진 것이나 파악된 것을 일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speaking forth) 자들을 일컫는 명칭들이다.

성 경: [삼상9:10]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환의 조언]

&#11093; 네 말이 옳다 - 초기의 사울은 사환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만큼 진지하고 겸손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의 자세는 왕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9:21;10:22). 그러나 이러한 초기 사울의 겸손의 모습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행동한 망령된 제사 사건(13:8-14) 이후 점차 퇴색되고, 오히려 교만한 자로 바뀌어 갔다.

성 경: [삼상9:11]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을 찾아 나선 사울]

&#11093; 성을 향한 비탈길 - '라마'(Ramah)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고지대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그 근거는 라마의 다룬 지명인 '라마다임소빔'(1: 1)이란 명칭이 '숩 땅에있는 고지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R. Payne Smith). 아무튼 사무엘의 집은 그 고지 위에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11093;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 중근동 지역에서 물을 긷는 시간은 보통 저녁 때였다. 이것은 그 지방의 낮 기온이 너무 높기 때문에, 그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물 긷는 일은 여자들이 할 일이었다(창 8 :15-20; 29:2-12; 출 2:15-19). 따라서 사울과 사환이 사무엘의 집에 도달한 시각은 저녁 무렵이었다. 특히 이와 같은 사실은 사울이 사무엘의 집에 도착한 얼마 후 잠을 잤다는 사실로도 확인될 수 있다(25,26 절).

&#11093;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 '여기'는 라마 성(城) 전체를 가리킨다. 사울의 사환은 사무엘이 다른 지역으로 출장갔을 가능성 때문에 이같은 질문을 한 듯하다<12절>.

성 경: [삼상9:12]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을 찾아 나선 사울]

&#11093; 그가 당신보다 앞섰으니 - 이 말은 사무엘이 사울과 그의 사환보다 먼저 라마 성에 들어와 있었음을 뜻한다.

&#11093;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 '산당'(*, 바마)은 가나안어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원뜻은 '높은 곳' 혹은 '산등성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우상 숭배와 관련된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레 26:30; 민 22:41; 왕상 3:2;12: 31; 15: 8; 왕하 15:4). 그것은 이방의 우상 제단이 흔히 산 중턱이나 고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이 자선들의 우상 숭배 장소를 높은 곳에 세우는 이유는 (1) 우상 숭배자들로 하여금 그곳을 속세와 구별된 거룩한 장소로 여기게 하며 (2) 또한 그들로 하여금, 예배 대상이 거한다고 믿어졌던 하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토록 하려는 등의 심리적 효과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방의 우상제단이 세워졌던 이런 산당에서는 비단 우상 숭배 행위 뿐 아니라 종교적 매춘 행위따위의 성적 음란 행위가 수반되었기 떼문에, 성경은 산당에서의 제사 의식을 엄격히 금했던 것이다 (민 33:52; 왕하 23:8). 그러나 사무엘 시대의 '산당'(山堂)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나오는 산당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즉 사무엘 시대에는 실로에서의 성막 제사가 불가능 하였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대신 산당에서 종교 행위가 행해졌던 것이다(왕상 3:3, 4). 성경에서 이렇듯 성막이 아닌 곳에서의 제사 행위가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묵허된 시기는 (1) 성막이 설립되기 전(출 40:17), 곧 모세 이전의 족장 시대와 (2) 성막이 파괴되어 제사가 중단된 이후로부터(4:10, 11) 예루살렘 중앙 성소가 건축되기까지(왕상 6:37, 38)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사무엘은 고향 라마에제단을 쌓은 것이다(7:17). 따라서 여기의 산당은 우상 숭배 의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여호와의 제단이다.

&#11093; 그가 오늘 성에 들어오셨나이다 - 이같은 행위는 사무엘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사사직(士師職)을 수행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7:15-17). 따라서 본 구절은 여기의 이 성읍이 사무엘의 고향 '라마'(Ramah)가 아니라는 증거가 결코 되지 못한다.

성 경: [삼상9:13]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을 찾아 나선 사울]

&#11093; 당신들이 성으로 들어가면 - 이 말은 당시 여인들이 물 긷던 장소, 곧 마을의 공동우물이 성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창 9 :11; 요 4:6-8).

&#11093; 그가 먹으러 - 이것은 그때 산당에서 드려진 제사가 화목제(和睦祭)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화목제만이 제사 의식이 끝난 후 예배 참석자가 공동으로 그 제물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 3:1-5 강해, 화목제에 대하여>. 그리고 사실 제물을 함께 나눠 먹는 일은 화목제 제사 의식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었다(레7:11-18). 왜냐하면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 및 백성과 백성 간의 화목과 친교 도모를 제일의 목표로 하였으며, 그같은 화목과 친교는 여호와 앞에서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레 7:11, 19-21).

&#11093;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 여기서 '축사'(*, 예바레크)는 감사 기도와같은 성격으로 보아야 한다(Keil). 즉 '바라크'(*, '예바레크'의 원형)라는 동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찬송하다' (대하 31: 8; 느 8:6; 시 34:1;63:4), 인간에 대해서는 '복을 빌다'(창 27:34; 대하 6:3) 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처럼 어떤 물건을 대상으로 할 경우 '바라크'라는 단어는 '기도하다'란 뜻도 있으므로 곧 '감사 기도하다' 란 뜻으로 봄이 적절할 것이다(요 6:11).

&#11093;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라 - 여기서 '청함을 받은 자'는 단순히 제사 의식에 참여했던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들은 사무엘의 선견 지명에 따라 특별히 초청되었던 그 성읍의 지도자들인 듯하다(22-24절). 즉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우대하고, 또 기름 붓는 자리에 참여할 증인들이었을 것이다<22절>.

&#11093; 그러므로 - 사무엘은 제사 제물에 반드시 축사해야 하며, 그래서 '그는 반드시 산당에 올라가야 하므로'란 뜻이다. 즉 이것은 사울이 산당에 올라갈 경우 사무엘을 반드시 만나게 될 필연성을 강조하는 접속사이다.

성 경: [삼상9:14]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을 찾아 나선 사울]

&#11093;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 이것은 사울이 성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비탈길을 더 올라갔음을 보여 준다<11절>. 이러한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스미드(R. Payne Smith)박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즉 '라마'는 두개의 고지대로 형성된 마을인데, '바마'(산당)는 그 중 하나의 고지대 위에 위치했음이 분명하고, 그리고 성읍은 아마도 두고지 중간 쯤에 위치했을 것으로 본다(Pulpit Commentary).

&#11093; 마침...마주 나오더라 - 사무엘과 사울의 이 만남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 하에 이루어진 것임이 이어 나오는 15, 16절에서 밝히 설명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나귀 사건'(3절)이란 미미한 사건을 통하여, 장차 메시야 왕국을 예시케 하는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설립이란 당신의 원대한 구속사적 목적을 이루어 나가셨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확고한 진리는, 특히 성도에게 있어서 삶의 우연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성도는 영적 귀를 기울여 매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메시지를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마 10:29-31).

성 경: [삼상9:15]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에게 임한 계시]

&#11093;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 여기서 '알게 하여'(*, 갈라 에트 오젠)란 말을 직역하면 '귀를 열다' 또는 '귓속에 속삭이다'란 의미이다(룻 4:4; 삼하 7:27;욥 33:16; 36:10, 15).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특별한 내용을 은밀하게 말씀하셨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Smith, Keil).

성 경: [삼상9:16]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에게 임한 계시]

&#11093; 내가...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 이것은 결국 사울의 아비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일(3절)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3절>. 즉 하나님께서는 때를 맞춰 사울의 아비가 그에게는 귀중한 암나귀를 잃게 하였고, 그에 따라 그 아들 사울로 하여금 암나귀를 찾아 나서도록 하게 하심으로써, 결국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도록 배후에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것이다.

&#11093;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 기름부음의 의식(儀式)은 왕이나 제사장 혹은 선지자 등을 거룩히 구별하여 임직할 때 행하는 상징적 의식이다(출 29:7; 왕상 1:39;19:16). 고대 중근동의 풍습에 따르면, 기름 부음의 행위는 무엇을 거룩히 구별할 때 베푸는 상징적 행위 였다(창 28:18;31:13;35:14;출 29:36;40:10; 레 8:10; 민 7:1, 10). 즉 이같은 의식을 통하여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사람이나 물건을 세속적인 용도로부터 구별하려고 했었다. 한편, 고대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 은 B.C. 14세기에 수리아나 가나안 지역 등지에서 왕이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 의식이 그 주변 국가들의 그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음을 보여 준다(10 :1).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기름 부음 의식은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성이 반영되고, 하나님의 영이 개입되는 독톡성을 지닌다.

&#11093;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 여기서 '지도자'(*, 나기드)는 보통 '족장', '두령'이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대상 12:27; 대하 11:22; 시 76:12). 따라서 여기의 '지도자'는 왕과는 다르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왕'(*, 멜렉)이라는 단어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하여 굳이 '지도자'(Captin, KJV;leader, NIV;prince, RSV)라는 단어를 적용하신 것은 열방과 같은 왕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본심이 반영된 것이다(8: 7, 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방백 정도로 세우셨지만, 나중에 사울은 백성들의 인본주의적 요구에 부응하여 왕이 되었던 것이다(Abrecht Alt). 한편 '삼으라'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 별도로 나와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개역 성경이 그같이 번역한 이유는 앞의 '기름을 부어'라는 말 자체 속에 '삼다'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1093;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직접적 목적이다. 사실 그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사무엘의 미스바 전투 대승리 이후(7:7-11) 블레셋으로부터 잃어버린 입지(立地)를 많이 회복하기는 하였지만(7: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레셋의 계속되는 위협과 압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그로 인해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사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군사적 목적을 수행토록 하셨던 것이다.특별히 여기서 그러한 목적을 수행할 인물이 베냐민 지파 출신(9:1, 2)이라는 점은 적절하다. 첫째 그 지파의 혈통적 성격상 호전적(好戰的)이었고 (창 49:27; 삿20:12-16), 둘째 그 지파의 지리적 위치상 블레셋과의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Smith, Fay).

&#11093;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 '부르짖음'(*, 차아카)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극렬히 간구하는 호소를 뜻한다(창 18:21;19: 13;출3:7;느 5:1). 그리고 '상달하였으므로'(*, 바아)는 '오다', '들어오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백성들의 호소가 지극히 간절하여 그 부르짖는 절규가 하늘에 사무쳤음을 보여 주는 단어이다(5:12; 출 3:9)

&#11093;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 '돌아보다'(*, 라아)는 '자세히 응시하다'(gaze), '주의깊게 살피다'(heed)란 뜻이다(창 6:12; 22:13; 출 5:21; 왕하 7:13). 한편 성경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고통을 돌아보신 후에는 반드시 그들을 구원키 위한 구체적 행동이 뒤따랐음을 보여 준다(출 3:7, 9; 4:31; 신 26:7; 왕하 14:26-27).

성 경: [삼상9:17]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에게 임한 계시]

&#11093; 여호와께서...이르시되 - 여기서 '이르다'(*, 아나)란 말을 직역하면 '대답하다' (answer) 또는 ''응답하다'(respond)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사무엘의 내적 기도와 물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신령한 계시로써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Fay, Goslinga, Keil).

&#11093;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 '통할하다'(*,아차르)는 '닫다', '제한하다','소집하다'란 뜻으로서(시107:29), 장차 사울의 통치 방식을 부정적으로 예시해 주는 단어이다.

성 경: [삼상9:18]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

&#11093; 사울이 성문 가운데 사무엘에게 나아가 - 본절은 그 내용 전개상 14절과 이어진다. 즉,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의 안내대로 사울이 성읍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막 들어서자, 때마침 제물 축사를 위해 성읍에서 산당으로 가고자 성물을 나오는 사무엘을 만났던 것이다.

&#11093; 가로되...가르치소서 - 이 말은 사울과 사환이 사무엘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처럼 사울이 사무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사무엘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어떤 치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1093; 선견자 - 9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9:19]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

&#11093; 내 앞서...올라가라 -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 존중히 여기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Keil, Smith, Fay).

&#11093; 너희가...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온 사환까지도 한 식탁에 앉게 한 것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사무엘이 그 사환의 주인되는 사울을 가볍게 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1093;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 여기서 '네 마음에 있는 것'은 단순히 암나귀를 찾아야 하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선지자로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보다 중요한 일을 알려주겠다는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블레셋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 하는 일, 또는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에 관한 일 등을 선지자의 자격으로서 사울과 대화를 하겠다는 뜻이다(Bunsen). 그러므로 이것은 사울로 하여금 그 자신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었음을 깨닫게 해줄 말한 내용에 관한 것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9:20]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

&#11093;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 본절 초반부에서 사무엘은 사울이 묻기도 전에 먼저 암나귀에 관한 언급을 한 뒤 그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자신이 신뢰할 만한 하나님의 선견자임을 강력히 시사한다(단 2:26-46). 이같은 언급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졌음을(16절) 알려야 했던 사무엘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11093;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 이것은 히브리 원문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1) '누구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사모함이 있겠느냐', 혹은 (2) '누구에게 이스라엘 안의 사모할 만한 것들이 속하겠느냐' 등의 두 가지 중 하나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Klein). 그 중 첫째 번역은 장차 왕으로서의 사울의 높은 신분을, 둘째 번역은 장차 왕으로서의 사울에게 홀러들어가게 될 재물을 강조한다. 아무튼 이 두가지 번역 모두 사울에게 돌아갈 왕권(王權)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사모'(*, 헤므다트 이스라엘)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게 될 이스라엘의 왕권과, 또한 그 왕권으로 인해 소유하게 될 모든 값지고 귀중한 것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Keil, Smith, Fay).

&#11093;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 이것은 위의 첫번째 번역을 취하면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을 위함이 아니냐'로, 그리고 나중 번역을 취하면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에게가 아니겠느냐'로 각각 번역된다.

성 경: [삼상9:21]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

&#11093; 나는...가장 작은...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 이는 사울의 왕권(王權)을 암시하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20절)에 사울이 겸손히 대답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련의 행동(4, 5, 10절;10: 22)으로 보아 분명 초기 사울은 겸손, 성실, 효성의 덕(德)을 지닌 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인간적인 덕도 여호와를 향한 선실한 신앙에 뿌리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르고 백성들의 인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사라져 결국 교만한 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실로 사울의 경우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벧전 5:5)는 진리를 입증한 경우가 되고 말았다.

&#11093;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 한편 사울의 겸손한 발언 저의에는 실제로 이스라엘 12지파 간의 세력 분포에 관한 현실적 이해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베냐민 지파는 역사적으로 숫적 열세를 면치 못했으며(민 1:20-46; 26:511 주석 도표 참조), 더욱이 사울의 이같은 말 속에는 사사기 20장에서 발생했던 내전의 상흔이 아직까지 베냐민 지파에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1093; 베냐민 지파 - 1절 주석 참조. 특히 '지파'가 복수 형태로 된 맛소라 사본의 '쉬브테'(*)는 단수 '쉐베트'(*)로 고쳐 읽어야 한다(Keil, Fay, Smith).

성 경: [삼상9:22]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요담(要談)]

&#11093; 객실로 들어가서 - '객실'은 산당에 부속되어 있던 별실로서, 이곳은 화목제를 드린 후 그 제물을 먹던 방이었을 것이다(1:4, 8, 18). 한편 이때에 일반 백성들은 산당의 마당에서 화목 제물을 먹었음이 분명하다(Smith, Keil).

&#11093; 청한 자...삼십 명 - 여기 30명은 성읍의 유력 인사들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왕을 세을 때에 손님을 초청하는 일은 고대의 보편적 관습이었뎐 것같다. 그 증거로서 성경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모반을 하면서 손님 200명을 초대했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삼하 15:10-12). 그러므로 틀림없이 이들은 (1) 특정인이 왕으로 세워졌음을 확증하며(13절 주석), (2) 또한 그 특정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왕으로 채택되었음을 일깨우게 하는 증인들이었을 것이다.

&#11093; 수석에 앉게 하였는데 - 이것은 높은 사람을 예우하는 고대의 일반적 관습이었다(Keil). 그리고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의 사환까지 함께 대우한 것은 그를 왕의 신하로서 예우한 셈이다(Smith).

성 경: [삼상9:23,24]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요담(要談)]

&#11093; 요리인(*, 타바흐) - '동물이나 사람을 죽이다'라는 동사(*, 타바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친위대', '사형 집행인', '요리사' 등의 다양한 뜻이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남성형이므로 여자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아마도 여기의 요리인은 희생 제물을 처리 하던 레위인을 가리키는 듯하다.

&#11093;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 - 이것은 사무엘이 그의 예언자적 선견지명으로 이미 요리인에게 간직해 두라고 지시했던 희생 제물로서, 곧 사울과의 화목 잔치용 음식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넓적다리'(*, 쇼크)가 제사장 몫인 우측 넓적다리인지(레 7:32-34), 아니면 일반 경배자 몫인 좌측 넓적다리인지는 확실치 않다. 초기 주석가들은, 사무엘이 공식 위임된 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일반 평민 몫인 좌측 넓적다리라고 보았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즉 당시 산당의 실질적인 제사장 역할은 사무엘이 감당했으므로, 당연히 그에게 제사장 몫인 우편 넓적 다리가 돌아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붙은 것'(*, 헤알레하)은 넓적다리 위에 부어진 양념 국물이라든지 (Dathe & Maurer), 또는 콩팥(kidney) 같은것(Thenius)이 아니다. 그것은 제단에서 화제로 드려지지 않은, 제사장 몫의 넓적다리 고기에 붙은 기름(fat)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93).

&#11093; 네 앞에 놓고 먹으라 - 아무튼 대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을 수석(首席) 자리에 앉히고, 또한 가장 귀한 음식을 미리 준비케 하였다가, 그에게 준 것은 분명 그를 왕적 지위로 예우했음을 뜻한다.

성 경: [삼상9:25]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요담(要談)]

&#11093;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담화하고 - 이 때의 담화 내용은 전반적으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는 문제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19절 주석).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한 것은, 아마도 그당시 이스라엘의 특별한 정치.종교적 상황에 관한 것과, 그리고 사울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되었음을 스스로 인식케 하는 정도의 예비적인 수준의 내용이었을 것이다(Otto Von Gerlach). 그 이유는 사울에게 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다음 날에야 사무엘이 들려주었기 때문이다(Keil).

&#11093; 지붕에서 - 여기서 '지붕'(*, 가그)은 아래서 외부의 계단을 통하여 올라갈 수있는 평평한 지붕을 뜻한다. 이러한 지붕은 양벽을 가로지른 대들보 및 석가래 위에 잘 다져진 진흙판을 덮음으로써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사면에는 난간이 있었다(신22:8).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지붕 위에서 휴식을 취하거나(삼하 11:2) 담화를 하고 잠도 청했으며, 혹은 그곳을 창고로 쓰기도 했으며(수 2:6), 심지어는 우상숭배의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렘 19:13).

성 경: [삼상9:26]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요담(要談)]

&#11093; 일찌기 일어날새...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 이는 사울이 지붕 위에서 잠을 잤음을 시사한다. 즉 사울은 연일 계속된 긴 여행과 전날의 긴 담화등으로 인해 그대로 지붕 위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Smith). 한편 칠십인역(LXX)은 이 사실을 뒷받침이나 하려는듯 25절의 뒤에 '그들이 지붕 위에 사울을 위해서 자리를 깔아 주므로 그가 누웠다'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다.

성 경: [삼상9:27]

주제1: [왕으로 선택된 사울]

주제2: [사무엘과 사울의 요담(要談)]

&#11093; 사환으로 우리를 앞서게 하라 - 이것은 사무엘이 사적(私的)으로 비밀리에 사울에게 기름을 붓기 위함이었다.

&#11093;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 -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헹동을 취하겠다는 뜻으로서, 곧 기름 붓는 일을 가리킨다(10:1). 그러므로 여기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말로써가 아닌 행동으로써 사울에게 전한 것이다. 물론 이때 사무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그이유는 당시 사울이 왕으로 세워진 사실이 널리 알려질 경우, 그 절차상의 문제에 따른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성 경: [삼상10:1]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11093;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 여기서 '기름병'은 목이 좁은 그릇이다. 그리고 당시 기름 부음을 위하여 여기에 담겨졌던 기름은 사무엘이 이때를 위하여 특별히 준비한 거룩한 관유(출 30:23-33)였던 것 같다(Smith, Fay). 한편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병'이외에 기름부음을 위하여 '양뿔'도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16:1, 13).

&#11093; 사울의 머리에 붓고 - 기름을 붓는 일은 맡겨진 직분이 하나님께로 부터 왔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즉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그에게 신적 사명과 권위를 부여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공식적으로 수행하도록 한다는 임직(任職)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기름 부음의 의식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성별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사 61:1). 한편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과 왕, 그리고 선지자였다. 따라서 여기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기름 부음'은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왕직(王職) 역시 이미 존재하던 제사장직 및 선지자직과 더불어 동등한 하나님의 3대 신적 직분으로서 그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Keil). 또 한편 여기서 기름 붓는 일이 비밀리에 행해진 까닭은, 백성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 전에 사울이 먼저 하나님의 소명을 철저히 깨달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기의 기름 부음은 사울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께 피택되어, 이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나서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11093; 입맞추어 - 이 입맞춤은 권위에 대한 인정과 존경의 표시(Lange, 시 2:12), 또는 은혜 받는 자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표시(Keil, Schmidt)이다. 그런데 당시 이와 같은 입맞춤은 대개 상대의 입이 아닌 손, 무릎, 이마, 혹은 옷 등에 하였다.

&#11093; 그 기업의 지도자 - 여기서 '기업'(*, 나할라)은 '몫', '유산', '소유'등의 뜻으로서,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으로 친히 택하여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출 19:5; 신 4:20)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한편 '지도자'(*, 나기드)에 대해서는 9:16주석을 참조하라.

&#11093; 삼지 아니하셨느냐 - '진실로 그렇다'라는 의미로서, 곧 자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하나님의 그 뜻에 순종케 하려는 확증적 질문이다.

성 경: [삼상10:2]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11093; 베냐민 경계 셀사 - '셀사'(Zelzah)는 라마 근처, 그리고 벧엘 남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창세기 35:19에 따르면, 그곳은 베들레헴과 가까운 곳이었다. 한편 사울은 이때 사무엘과 함께 있었던 '라마'를 떠나 자신의 성읍 '기브아'로 가는 도중 이곳 '셀사'를 지나야 했을 것이다.

&#11093; 라헬의 묘실 - '라헬'은 야곱의 아내 중 가장 총애받던 여인으로서(창 29:18, 30), 요셉과 베냐민을 낳은 생모이다(창 30:22-25;35:18). 그녀는 온 가족과 함께 세겜에서 벧엘을 거쳐 당시 이삭이 살고 있던 헤브론으로 올라가는 도중 임산(臨産)하여 베냐민을 낳다가 그 산고(産苦)로 죽었다(창 35:16-19). 그러자 야곱은 그녀를 그곳 근처에 장사지내고 묘비를 세웠다(창 35:20). 오늘날 그곳은 벧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노상, 곧 베들레헴 북서쪽의 '쿠벱 라힐'(Kubbet Rahil) 근방으로 추정된다(Wilson). 한편 '묘실'은 일반적인 무덤을 뜻한다(창 35:20;47:30;겔 32:23, 24).

&#11093; 두 사람을 만나리니 - 구약 시대의 율법상 '두 사람'은 특별한 일을 증언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숫자이다(신 19:15). 그런 점에서 여기 '두 사람'은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구심을 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구심을 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증인'(證人)임이 분명하다.

&#11093;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 하리요 - 이때는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로 집을 떠난지 벌써 나흘이 지난 때였으므로, 오히려 아들 사울을 향한 아비 기스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9:5, 20, 26).

성 경: [삼상10:3]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11093; 다볼 상수리 나무 -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일부 주석가들(Ewald, Thenius)은 그곳을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매장됐던 '벧엘 아래상수리 나무'와 일치시키려 한다(창 35:8;삿 4:5). 그러나 그때 사울은 라마를 떠나 자신의 성읍 기브아로 가던 길이었으므로, 여기 '다볼 상수리 나무'는 기브아 근처 어디에 있었을 것으로 봄이 타당할 듯하다.

&#11093;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 - '벧엘'(Bethel)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제단을 쌓기 훨씬 이전부터 (창 12:8;13:3, 4) 이미 요새화된 성읍으로 발전된 듯하다(Kelso). 그곳이 그처럼 일찍부터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능선 지대인 그곳에는 많은 샘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곳은 신약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물통이 필요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단을 쌓은 것외에 야곱 또한 단을 쌓음으로써(창 28:19;35:1-7),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성역으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삿 20:18-28). 따라서 사무엘 당시까지도 벧엘은 라마에서와 같이(7:16;9:12), 별도의 제단이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드려졌음이 분명하다(Keil, Fay, Smith).

&#11093; 염소 새끼 셋 - 이것은 세 사람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칠 분량이었다.

&#11093; 떡 세 덩이 - '떡'은 소제의 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졌었다(레 2:4-6).

&#11093; 포도주 한 가죽 부대 - '포도주' 또한 희생 제물과 함께 하나님께 바쳐졌었다(1:24;민 15:6, 7).

성 경: [삼상10:4]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11093; 문안하고(*, 솨알루레솰롬) - 직역하면 '평강을 간구하였다'란 뜻이다. 여기서 '솨알루'의 기본형 '솨알'(*)은 '질문하다'는 의미 외에'원하다' 및 '간구하다'란 뜻도 있다(1:17;왕상 3:10;전 2:10). 아무튼 벧엘 순례자의이같은 행동은 결국 그들이 사울을 이미 지도자와 같은 신분으로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삼하 8:10;와하 10:13).

&#11093; 떡 두 덩이를 주겠고 - 벧엘 순례자의 이 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사울을 존경하는 의미와 함께 사울의 허기를 베워 주기 위함이며(9:7), (2) 이스라엘의 모든 값진 것이 사울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며(9:20), (3) 특히 그 떡이 하나님께 바쳐질 예물이었다는 점에서, 벧엘 순례자의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울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행위였다(1절;9:16).

성 경: [삼상10:5]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11093;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 여기서 '하나님의 산'(*, 기브아트하엘로힘)은 곧 '하나님의 기브아'(Gibeah of God, NIV)라는 뜻으로서, 이는 사울의 고향인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를 가리킨다(Keil, Fay, Smith). 그런데 '기브아'를 수식하는 '하나님의'란 말은 그곳에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산당(山堂)이 있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사울이 왕이된 이후 이곳은 '사울의 기브아'라고 불리워졌다(11:4;15:34;삼하 21:6),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며,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 고향 집의 성읍 기브아로 들어가는 길에 마침 그곳 산당에서 제사드리고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와 만난 것이었다.

&#11093;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 여기서 '영문'(*, 네치브)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즉 이 영문(營門)은 (1) 블레셋 족속이 그 권위의 표시로 세운 '기둥'(post)을 뜻한다는 견해(Wellhausen, Bottcher), (2) 블레셋 족속이 공물을 받기 위해 설치한 행정 관서 또는 사무소를 뜻한다는 견해 (Budde, Caird, Driver,Thenius), (3) 블레셋 족속이 이스라엘을 감시.통치하기 위하여 요소(要所)에 배치한 '수비대'(garrison)를 뜻한다는 견해(KJV, RSV)등이다. 그런데 이후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신의 군대로 이곳을 공격했다는 성경의 기록으로 보아(13:3, 4), 이곳은 세번째의 견해대로 블레셋 족속이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들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이스라엘땅에 구축한 진지(陣地) 또는 군사 기지(MILITARY POST)임에 틀림없다(Keil, Fay,Smith; 삼하 8:6, 14). 그리고 이러한 블레셋의 수비대는 사사시대 말기 경부터 시작된 40년 간의 블레셋 통치기간(삿 13:1) 중에 설치된 것 같다(Leon Wood, 4:10 주석 참조).

&#11093; 선지자의 무리(*, 헤벧 네비임). - 성경에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아마도 이들은 사무엘의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훈련을 받던 자들이었던 것 같다(L.Wood, F.R.Fay). 즉 이들은, 블레셋에 의해 오랫 동안 압제를 받던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적 혹은 신앙적 열심을 갖게된 자들이 당시 대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의 지도를 받기 위해 이스라엘 각처에서 모여들어 무리를 형성한 일단의 선지 훈련 생도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리 중 모두가 신적(神的)인 소명을 받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한편 어떤 주석가는 '하나님의 산' 기브아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열심을 소유한 자들이 모인 곳이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곳에 자신들의 수비대를 두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Hertzbery). 그러나 당시 그 선지자들의 본거지는 '하나님의 산' 기브아가 아니라 '라마의 나욧'(19:18-20)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11093; 산당에서부터 - 여기 기브아의 '산당'은 라마(7:17), 벧엘(3절) 등과는 별도로 여호와의 제단이 있었던 성지(聖地)였던 것 같다. 따라서 여기 '선지자의 무리'(a handof prophets)는 이때 그곳에 순례차 온 것임이 분명하다(Keil).

&#11093;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 여기서 '비파'(*, 네벧)는 현(絃)이열 개인 하프 모양의 현악기이다(시 33:2;144:9). '소고'(*, 토프)는 손으로 두드려 치는 오늘날의 탬버린과 유사한 악기인데, 이것은 홍해를 건넌 후 미리암이 사용한 악기이다(출 15:20). '저'(*, 할릴)는 갈대 또는 뿔 등으로 만들어진 플루우트(flute)와 같은 피리이다. '수금'(*,킨노르)은 '네벧'(nebel, 비파)과 같은 현악기로서, 걸어가면서 연주 가능한 오늘날의 기타(guitar)와 비슷한 악기이다(시71:22;108:2;150:3). 한편 이와 같은 여러 악기들은 히브리인들의 정서 생활과 매우 밀접한 것으로서, 그 당시 히브리인들의 문화를 잘 반영해 준다(출 15:20;삿 11:34).그리고 이때 선지자의 무리가 이같은 악기들을 사용했던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신령한 시와 찬미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중 자신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며(왕하3:15), (2) 또한 악기의 음조에 맞춰 예언적인 노래를 하기 위함이었다(대상 25:1,3).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이 악기들은 혹자(G.B. Caird)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영감을 더 받기 위한 촉진적 도구 및 광적인 입신(入神)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하다(Interpreter's Bible).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 여기 선지자 무리의 예언은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을 노래로 부른 것인 듯하다(Clericus;민 11:25).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규명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선지자의 무리가 위와 같은 예언을 할 때에 그들은 결코 무아지경(無我之境), 곧 황홀경의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황홀경의 상태에 빠졌다면 그들은 무리져 함께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며, 심지어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19:24;왕상 18:26-29).

성 경: [삼상10:6]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11093;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신' 곧 성령(창 1:2)이 임하는 일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지도자에게 때와 필요를 따라 나타났던 현상이었다(16:13;민 11:25;삿 6:34;11:29;14:6, 19;15:14).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를 택하고 인정하셨다는 확증일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일을 통하여 그 지도자에게 맡긴 일을 잘 수행토록 특별한 은사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구약 시대의 성령의 임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임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때로 떠나가기도 했기 때문에(16:14), 그 본질상 오순절 이후 임하는 성령, 곧 구원의 문제와 관계된 신약 시대 중생(重生)과는 다른 것이다(Keil;요 3:3, 5).

&#11093;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 여기서 사울이 한 '예언'도 선지자의 무리가 한 것과 동일한 것임이 분명하다. 즉 사울 역시 선지자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그 마음이 감동되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Smith, Fay). 한편 이때 사울에게 있어 이 예언은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했음을 확증해 주는 외적 증표의 하나요, 아울러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 부음 받았음을 확증해 주는 내적 증표가 되었다(Keil).

&#11093;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 이것은 신약적 의미의 중생이나 성화(聖火)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시사한다. 즉(1)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할 자로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소명되었다는 사실을 사울이 분명하게 깨닫게 되리란 뜻이요(1절;9:20, 21), (2) 그에 따라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한 열망이 사울에게 맹렬히 타오르게 되어, 이제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11:6).

성 경: [삼상10:7]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11093; 이 징조가...임하거든 - '이 징조'는 2-6절에 언급된 세 가지 징조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임하거든'은 막연한 가정을 의미치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임할 때'로 번역함이 더 타당하다.

&#11093; 기회를 따라 행하라 - 문자적으로는 '손이 발견하는 것을 너를 위하여 행하라'의 뜻이다(삿 9:33). 즉 이것은 향후 자신의 소명과 관계된 일이 발생할 경우, 소신껏 거기에 대응하라는 권면이다.

&#11093;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리라 - 이는 사울이 기회를 따라 행하는 일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을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11:11).

성 경: [삼상10:8]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에게 미칠 세 가지 징조]

&#11093;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 사무엘이 사울을 먼저 내려가도록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무엘 자신은 백성들을 소집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고 (2) 사울은 자신을 성별할 기회를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사무엘은 그때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온 백성들에게 공개적으로 소개하려는 기회를 가지고자 했던 것이다(11:14). 한편 '길갈'(Gilgal)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영도로 요단 강을 건넌 직후 진을 쳤던 곳이었다(수 4:19). 또한 이곳은 사무엘이 자신의 사사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매년 순회하던 주요 거점 중의 하나였다(7:16).

&#11093;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 '번제'는 전적 헌신을, '화목제'는 감사와 친목을 위한 제사이다. 한편 여기의 제사들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한 위임식(委任式)과 관련된 제자들이다.

&#11093; 내가...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 까지 - 이것과 관련하여 사무엘은 12장에서 사울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될 것을 가르치고 있다.

&#11093; 칠 일을 기다리라 - 여기의 '칠 일'은 사무엘이 이 말을 한 후 '칠 일'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사울이 나중에 길갈에 간 후 '칠 일'을 말한다.

성 경: [삼상10:9]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하나님의 신(神)에 접한 사울]

&#11093;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다 응하니라 - 본절은 2-6절에 언급된 사무엘의 예언이 한치의 착오없이 다 응한 사실을 전체적으로 언급한 구절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그 임무(9:16)를 감당하도록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 즉 이제 사울은 이전의 사울의 모습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막중하고도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여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이다.

성 경: [삼상10:10]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하나님의 신(神)에 접한 사울]

본절에서는 사무엘이 예언할 세 가지 징조(2-6절) 가운데서 세번째 징조(5, 6절)가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다.

&#11093; 산(*, 기브아타) - 5절의 '하나님의 산', 곧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가리킨다.

&#11093; 선지자의 무리 -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거나, 혹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미래의 일을 보고 예언하는 그러한 예언자의 무리는 아니다. 이들은 그러한 예언자들-예를 들면, 사무엘이나 엘리야- 수하에서 율법을 배우고, 경건의 훈련을 쌓으며, 일반 백성들을 가르치고, 나아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도나 묵상에 전념하는 가운데 성령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일단의 훈련 생도들을 가리킨다(MatthewHenry).

&#11093; 하나님의 신이...크게 임하므로 -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 그를 강력하게 눌러댔다'로 번역할 수 있다(NIV). 결국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을 가리킨다(Lange).

&#11093;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 이는 사울이 (1) 선지자들의 무리와 함께 (2) 선지자들의 무리가 한 것과 동일한 예언(6절)을 하였음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0:11]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하나님의 신(神)에 접한 사울]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신을 받은 사울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할 정도로 매우 낯선 것이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11093;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 - 이 사람들은 (1) 사울 가문의 대단한 위치(9:1) 때문에 사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사울의 고향 기브아의 주미들, (2) 또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산', 곧 여호와의 제단이 있는 '기브아'를 찾아온 기브아 근처의 주민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1093;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 여기서 '당한 일'은 사울이 전혀 새 사람이 되어 선지자들의 무리 중에서 예언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은 결국 이전의 사울의 모습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놀랄만큼, 변한 사울의 행동이 전혀 낯설게 느껴졌음을 암시해 준다.

&#11093;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 그 당시, 사람들은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선지자 학교에서 훈련받지 않았던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그가 그같은 훈련을 받기에 적당한 자질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인하여 그들은 지금 사울의 낯선 행동에 대하여 이같이 놀란 반응을 보일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19:24).

성 경: [삼상10:12]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하나님의 신(神)에 접한 사울]

&#11093;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 어떤 역본들(LXX, the Vulgate, the Syriac)과 학자들(Ewald, Thenius)은 여기서 3인칭 복수 '그들의'(their)를 3인칭 단수 '그의'(his)로 바꾸어, 곧 '그의 아비'란 사울의 아버지 기스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처럼 본문을 개정할 근거가 충분치 않을 뿐 아니라, 이미 사울을 가리켜 '기스의 아들'이라 칭한 11절의 말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은 타당치 않다. 따라서 여기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는 그 선지자들의 무리를 지도하는 스승을 가리킨다(Ackroyd). 또한 이같은 견해는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와 그 제자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많이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넉넉히 지지될 수 있을 것이다(왕하 2:12;6:21;13:14). 따라서 본 구절의 질문은, 선지자들의 무리가 영적 아비 사무엘에 의해 교육 받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킴으로써,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울이 선지자들의 무리와 어울려 예언을 하는 등 선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매우 놀라운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 덧붙여 혹자들(Oehler, Keil,Lange)은 이 말의 의미를 '누군들 아비로부터 선천적으로 예언의 영을 타고 나겠는가? 따라서 사울도 그러한 영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11093;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있느냐 -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란 말은 곧 사울의 모습이 눈에 드러날 정도로 급작스럽게 변화된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속담이 되었는데, 곧 어떤 사람이 이전까지의 생활 모습과는 갑자기 판이하게 달라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할 때 적용되었다(19:24).

성 경: [삼상10:13]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하나님의 신(神)에 접한 사울]

&#11093; 산당으로 가니라 - 사울은 이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경배드리기 위하여 여호와의 제단이 있는 그곳으로 올라갔을 것이다(Fay,Smith).

성 경: [삼상10:14]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의 귀로(歸路)]

본절은 사울과 사환이 산당에서 내려와 자신들의 집에 도착했던 사실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있다.

&#11093; 사울의 숙부 - 요세푸스(Josephus)와 에발트(Ewald)는 이 사람을 후에 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이 된 '아브넬'로 보고 있으나, 오히려 아브넬의 아버지 '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4:50,51;대상 8:33).

&#11093;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 사울은 집을 떠난지 오랫만에 돌아왔기 때문에, 이같은 숙부의 질문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2절;9:5).

성 경: [삼상10:15]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의 귀로(歸路)]

&#11093; 사무엘이...이른 말을 내게 고하라 - 이것은, 사울의 숙부가 암나귀 문제 이외에 사울이 혹시 사무엘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잘보여 준다. 즉 사울의 숙부는 암나귀 사건(9:3,4) 이후 확실히 변화된 모습과 행동을 보인(10절) 사울에게서 어떤 예감을 갖고, 그에게 일어난 일의 자초지종을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0:16]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사울의 귀로(歸路)]

&#11093; 나라의 일은 고하지 아니하니라 - 여기서 '나라 일'은 말할 나위도 없이 사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지는 문제와 관련된 내용들이다(1절;9:16). 그런데 사울이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숙부에게 침묵한 까닭은, 결코 숙부의 불신앙이나 시기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사울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소명받고 기름 부음 받은 것이 아직은 결코 공개될 사항이 아님을 사무엘로부터 강력히 암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9:25-27). 만일 사울이 사무엘의 이같은 암시를 무시했을 경우, 그의 숙부는 조카가 이스라엘의 왕에 오르는 문제에 직접 개입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낭패케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삿 14:4,6). 아무튼 이는 초기 사울의 겸손과 신중함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10:17]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11093;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 '미스바'(Mizpah)는 (1)이스라엘 온 백성이 모이기 좋은 지리적 이점이 있으며(7:5) (2)이스라엘을 오랜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게 했었던 기념비적 장소(7:6)라는 점들 때문에, 사무엘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집합할 곳으로다시 선택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백성'은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각 지파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11093; 여호와 앞에 모으고 -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앞에'란 표현은 종종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나 성막 또는 대제사장의 우림이나 둠밈 앞에 모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선출을 위해 제비 뽑으려고 모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마도 '우림과 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대제사장이 가지고 모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아울러 이것은, 사무엘의 백성 소집이 신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삼상10:18]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본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던 위대한 구원의 은총을 언급하고 있다. 사무엘은 이같은 언급을 통해 (1)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왕들로부터 구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2)또한 그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행동이 지극히 어리석고 경솔한 것이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삼상10:19]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11093; 하나님을...버리고...왕을 세우라 하도다 - 여기서 사무엘은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고 있다(8:7). 아울러 사무엘은 여기서 왕을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므로, 장차 그 왕으로 인해서 당할 고통도 그들 스스로가 친히 담당해야 될 것을 암시적으로 경고하고 있다(8:9-18).

&#11093; 지파대로 천명씩...나아오라 - 히브리 본문에는 '지파대로'(*, 레쉬브테켐) 다음에 '그리고 가족대로'(*, 우레알페켐)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이것은 먼저 각 지파를 구별하고, 또한 각 지파는 각 지파에 속한 가족을 그 가족대로 구분하여야 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0:20]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본문에는 어느 지파, 그리고 그 지파의 어떤 가족, 또한 그 가족의 어떤 인물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울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와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인물을 선택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제비뽑기가 성경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수 18:6,8;욘 1:7;행 1:20-26). 성경에 언급된 이같은 제비 뽑기 행위는 그 결과가 전적으로 신적인 섭리에 따라 나타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잠 16:33). 수 14:2;18:10;민 26:55 주석 참조. 한편 혹자(H.W.Hertzberg)는 여기의 제비뽑기가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방식이었을것이라고 말하나, 그것은 타당치 않다(F.R.Fay). 왜냐하면 '우림과 둠밈'은 특별한 사항에 대한 가부(可否)의 뜻만을 알 수 있는 신적인 계시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10:21]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11093; 베냐민 지파 - 9:1 주석 참조.

&#11093; 마드리의 가족 - '마드리'(Matri)는 '여호와의 비'란 뜻의 이름으로, 사울 가문의 족장이다(Davidson).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 사람의 이름은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혹자(Ewald)는 '비그리'란 이름이 잘못 발음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한다.

&#11093;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 제비는 마드리의 가족 중 다시 기드의 집으로 떨어졌고, 마침내 기스의 집안 중 사울에게 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9:16). 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비뽑기가 신적인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당시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러한 방법으로 역사하셨으므로(민26:55;수 14:2;18:10), 여기서 사울이 제비에 뽑힌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또한 사울왕국의 정통성이 확보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10:22]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11093; 여호와께 묻되 - 원래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의 의복(에봇) 가슴에 부착된(레 8:8) 우림과 둠밈으로 여호와의 뜻을 물었었다(민 27:21). 따라서 여기서도 사울의 존재 유무(有無)에 대해서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사용했을 것이다(Keil, Smith).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1)그당시 대제사장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으며(4:18), (2)우림과 둠밈은 단지 가부(可否)를 묻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울이 어디에 숨었는지를 알기 위한 수단으로써는 적절치 않으며(20절), (3)또한 여기서 우림과 둠밈의 사용을 특별히 언급치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질문되고 응답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11093;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 - 사울은 사무엘의 기름 부음(1절)과 여러가지 징조들(2-6)을 통해 이미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께 선택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1)자신이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에서 혹 일어날지도 모를 여러 가지 사건들을 두려워 했거나, (2)아니면 그의 소심하고 부끄러워하는 성격 때문이었거나, (3)아니면 그의 겸손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행구'(*, 켈림)는 '물건들'이란 뜻으로서, 여기서는 아마도 미스바에 모인 백성들의 '여행용 짐꾸러미'(baggage)를 가리키는 듯하다(Keil).

성 경: [삼상10:23,24]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11093; 어깨 위나 더 크더라 - 9:2 주석 참조.

&#11093; 여호와의 택하신 자 - 사무엘은 이미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선택 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9:15-17), 제비의 방식에 의해서 그가 뽑히자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093;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 외적 풍채만을 놓고 볼 때 사울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하였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이같은 사울의 늠름한 외적 풍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분히 매혹할만 하였다(9:2).

&#11093;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 '왕의 만세'(*, 예히 함멜렉)는 왕이 오래 살기를 비는 말로, 곧 '만세수를 누리소서!'(Long live the king!, NIV)란 뜻이다. 따라서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라는 말은 (1)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자신들의 왕으로 매우 만족하게 여겼으며 (2)열방과 같이 왕들이 자신들을 계속 다스려주기를 간절히 바랬음을 잘 보여 준다(8:5,20).

성 경: [삼상10:25]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11093; 나라의 제도 - 여기 '나라의 제도'(the duties of the kingdom)는 8:9에 언급된 '왕의 제도'와는 그 성격상 다른 것으로, 곧 신정 국가의 왕이 지켜야 될 기본적 의무 조항들을 가리킨다(신 17:14-20). 즉 이방 국가들의 왕의 제도(8:11-17)가 백성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왕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여기의 '나라의 제도'는 오히려 왕이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겸허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잘 다스리는 신정(神政) 국가하에서의 '왕권의 의무'(the regulations of the kingship, NIV)를 가리키는 말이다(Keil, Fay, Smith).

&#11093; 책에 기록하여...두고 - 이와 같은 것은 고대 중근동의 종주권(宗主權,suzerainty) 계약시에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즉 그 당시 중근동에서는 왕이 봉신(封臣)과 계약을 맺으면서, 그 봉신이 왕 자신에 대하여 이행해야 할 의무를 책에 기록하여 봉신이 섬기는 신의 신당(神堂)에 보관하였다고 한다(Klein). 이에 따라 봉신은 책에 기록된대로 왕에게 충성을 다바쳐야만 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무엘의 이같은 행위는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바로 이행케 하려는 의도에서시행되어졌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점에서 사울은, 그가 비록 열방과 같은 왕이 되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따라(8:5,20) 세워졌지만, 그러나 그는 이방의 왕들과는 그 성격에 있어 전혀 달라야 했다. 즉 사울은 절대 권력자로서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라와 백성을 통치해야만 했다(Kitto, Michaelis).

&#11093; 여호와 앞에 두고 - 이 말은 실로의 성소 안에나 혹은 법궤 앞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당시 실로의 성소는 이미 파괴되었고(4:10), 언약궤는 여전히 기럇여아림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7:1,2).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여호와의 권위 아래 엄숙히 보관된 사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ange).

성 경: [삼상10:26]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11093; 사울도...자기 집으로 갈 때에 -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울의 통치권 행사가 잠정적으로 보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울은 그때 자신의 고향 기브아를 수도로 삼아 백성들을 다스리려고 했던 것이다(11:4). 물론 당시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나름대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또한 왕을 위한 궁전이나 신하 또는 행정기구 등이 아직 미비된 상태였기 때문에(Leon Wood), 사울이 자신의 고향으로 간 후 얼마간 지도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11093;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 - 이들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택되었음을 분명히 깨달은 자들이다. 한편 '유력한'(*, 하일)은 '힘이 강한','용감한'등의 의미로서(창 47:6;삼하 17:10), 곧 당시 사울을 자신들의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호위한 용감한 자들을 가리킨다(Keil).

&#11093; 그와 함께 갔어도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어떤 용감한 사람들이, 사울을 도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민병대(民兵隊)로 사울의 주위에 몰려들었음을 뜻한다(Klein;14:52).

성 경: [삼상10:27]

주제1: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

주제2: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11093; 어떤 비류 - '비류'(*, 베네 벧리야알)는 '소모시키다', '황폐케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서, '무익한' 혹은 '아무 쓸 데 없는'이란 의미인데(1:16;2:12), 곧 '무가치한 자들'(Worthless follows, RSV)이란 뜻이다. 한편 이 단어는 구약 성경의 몇 군데에서 '왕국에 큰 손상을 입히는 자'란 의미로 언급되기도 한다(삼하 16:7;20:1;23:6). 따라서 본 단어 역시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실제에 있어 여기의 '비류'(匪類)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새로이 선택된 왕을 거역하며, 또한 나라의 평화를 깨뜨린 자들(troublemakers, NIV)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 특히 강성했던 유다 지파나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자들일지도 모른다(민 1:27,33). 즉 이들은 분명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에서 자신들의 왕이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매우 탐탁치 않게 여긴 듯하다(R.Payne Smith).

&#11093;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 비류들은 사울이 작은 지파의 출신이어서 강력한 지파의 후원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고 이같은 반문을 한 듯하다. 물론 그들은 이같은 외적 사유 외에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음을 믿지 않았던 중요한 내적 사유에 따라 사울을 반대하였음이 분명하다.

&#11093;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 고대 사회에서 '예물'(*, 민하)은 존경심 및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바치는 '공물' 및 '선물'을 가리킨다(창 32:13,19;삿 3:15;6:18;삼하 8:2,6;왕하 8:8). 따라서 비류들이 자신들의 왕으로 선택된 사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울을 왕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노골적인 표현이며,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은 곧 사울에 대한 멸시 행위이자 심각한 도전 행위임이 분명하다.

&#11093;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 문자적으로는 '귀먹은 사람처럼 되다'란 뜻이다. 한편 비류들의 노골적인 불복종과 반역 행위에 대해 사울이 이같이 처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당시 사울은 왕으로서 완전한 기반을 아직 닦지 못했고, (2)만일 대적자들의 행동에 어떤 제재를 가할 경우 그들이 속한 지파의 엄청난 반발을 두려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는 초기 사울의 신중함과 자제력을 보여 준다(F.R.Fay).

성 경: [삼상11:1]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곤경에 처한 야베스 거민]

&#11093; 암몬 사람 나하스 - '암몬 족속'(the Ammonite)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딸 사이의 부정한 관계를 통해 태어난 자식의 후예들이었다(창 19:30-38). 이 족속은 그후 요단 강 동쪽, 곧 사해 북동쪽을 차지하고, 얍복강 언덕의 랍바를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다(신 3:11). 그리고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잘 조직된 왕국의 형태를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들 암몬 족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주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롯의 후손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신 2:19).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혀 오다가(삿 10:9), 결국 다윗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삼하 12:30). 한편 '나하스'(*, Nahash)는 어원학적으로 본다면 '뱀'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아카디아어의 의미로는 '웅장'이란 뜻이다(Klein). 그런데 이 사람은 나중에 다윗에게는 호의적이었다(삼하 10:2;대상 19:2). 그 까닭은, 사울에게 그 두 사람 모두 원수 관계였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형제국인 모압 족속도 다윗을 호의적으로 대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삼하 8:2).

&#11093;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 '길르앗 야베스'(Gilead-Jabesh)는 '길르앗의 메마른 땅'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의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요단 강의 동쪽 지점으로, 가나안 땅 분배시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되었던 영토였다(수21:6-15). 그런데 사사 시대에 이곳의 주민들은, 지극히 패역한 행동을 했던 베냐민 지파의 징벌에 참여치 않은 대가로 베냐민의 남은 장정들을 위해 처녀들을 제공해야만 했다(삿 21:6-15). 한편 당시 암몬 족속들은 자신들의 수도 '랍바'(삼하 12:26;암1:14)에서 북쪽으로 약 50km 진군하여 '길르앗 야베스'의 맞은 편에 진을 친 듯하다. 이들이 이같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유는, 그 지역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이같은 욕심 때문에 암몬 족속은 사사 시대 이래 그 지역을 자신들의 합법적 영토로 계속 주장해 왔었다(삿 11:13). 이에 따라 전에도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는 했으나 사사 입다의 활약으로 완전히 패퇴당하고 말았었다(삿 11:32,33). 그런데 이제 그로부터 약 1세기 가량이 지난 후에 암몬 족속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재침공을 시도한 것이다(R.Payne Smith). 한편, 일부 역본(LXX)과 학자들(Ewald, Thenius)은 암몬 족속의 침공 시기를 '사울이 왕이 된 후 1개월이 지난 때'로 보고, 그 사실을 10:27 후반절에 부기(附記)했으나, 그 타당성은 없다.

&#11093; 우리와 언약하자 - 이 번역 보다는 '우리를 위하여 언약하자'가 원문에 보다 가까운 번역이다. 따라서 이것은 야베스 주민들이 싸움도 하기 전에 항복하려는 마음이 간절했음을 잘 보여 준다. 한편 성경에는 '언약'(言約, covenant)이라는 말이 '화평을 위한 조약'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창 21:32;신 7:2;삼하 3:21).

&#11093;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 이말은 결국 종이 되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암몬 족속의 종이 될 경우 야베스의 주민들은 때에 따라 그들에게 많은 조공을 바쳐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한 노역 봉사도 해야만 했었다. 한편, 당시 므낫세 지파의 야베스의 거민들이 암몬 족속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이같이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강력한 왕을 요구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8:20).

성 경: [삼상11:2]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곤경에 처한 야베스 거민]

&#11093;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모욕하리라 -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오른눈을 빼려고 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당시 용사들의 왼쪽 눈은 자신의 방패에 의해 시야가 가려졌기 때문에, 실제로 오른쪽 눈으로만 전방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른눈을 실명하게 되면 전투 기능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J.P. 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물론 이것도 일리는 있겠으나, 뒤에 '모욕하리라'라는 말이 있다는 점에서 야베스 주민으로 하여금 극도의 수치심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에 따른 것으로 봄이 타당한 듯하다(삿 16:21;왕하 25:7). 아무튼 암몬 왕 나하스는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의 조상이 입다에게 당한 모욕(삿 11:32,33)을 복수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Fay, Keil).

성 경: [삼상11:3]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곤경에 처한 야베스 거민]

&#11093; 야베스 장로들 -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장로의 역할에 대해서는 신 21:1-9 강해,'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11093; 우리로...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 야베스 장로들이 암몬 왕 나하스에게 간청한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당시 요단 동편 북부지역 거민인 야베스 주민들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사실(10:24)을 몰랐거나(Keil, Smith), (2)설혹 알았다고 할지라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도처에 구원을 하소연한 것 같다. 아무튼 이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왕은 있었으나, 중앙 정부는 없는 과도기적 왕정(王政) 형태를 띠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사울에게는 이 기회가 자신의 왕권(王權)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요, 시험대였다.

&#11093; 우리를 구원할 자 - '구원자'(*, 야솨)라는 말은 사사기에서 두 번 언급되며(삿 3:9,15),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 혹은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어 영웅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행위를 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Klein).

&#11093; 네게 나아가리라 - 이 말은, '나하스'(Nahash)의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다는 야베스 주민들의 자포 자기적인 심리 상태를 잘 보여 준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아가리라'(*, 야차)는 원래 '항복하다', '포기하다'란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왕하 24:12;사 36:16;렘 38:18).

성 경: [삼상11:4]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곤경에 처한 야베스 거민]

&#11093; 이에 사자가...고하매 - 3절에 언급된 야베스 장로들의 간청이 암몬 왕 '나하스'에 의해 수락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나하스'가 야베스 장로들의 요청(3절)을 수락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당시 이스라엘은 남서쪽의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길르앗 야베스를 지원할 만한 여유가 없다고 보았으며, (2)비록 이스라엘이 단결하여 대항한다고 해도, 그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3)또한 보복의 여지를 남기는 국지적인 승리보다 완전한 승리를 통해 전체 이스라엘을 영속적으로 식민화(植民化)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093; 사울의 기브아 - 즉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가리킨다(10:26). 이곳은 길르앗 야베스에서 약 74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한편 본절에서 언급된 지역이 '사울의 기브아'(Gibeah of Saul) 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자가 이곳으로만 보내졌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즉 길르앗 야베스의 여러 사자들(messengers) 중 한 사자(使者)가 이곳 기브아에 당도한 것이다(3절).

&#11093; 모든 백성이...울더니 - 기브아 주민들은 길르앗 야베스의 사자의 말을 듣고 모두 탄식하며 슬피 울었다. 그 이유는 (1)자신들의 동족을 도울 힘이 없으므로 안타까웠기 때문이며, (2)암몬 족속들은 길르앗 야베스를 유린한 후 자신들의 땅에까지 쳐들어 올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11:5]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곤경에 처한 야베스 거민]

자유주의 고등 비평 학자들은 사울이 왕으로 선출된 이후에도(10:24) 농사를 진 이 부분에 회의를 품으면서, 이것은 아마도 다른 단편 문서의 혼합일 것이라고 주장한다(Stoebe).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비록 당시 사울이 왕으로 선출되기는 했지만, 아직껏 중앙 정부를 구성할 여건을 마련치 못해 당분간 예전의 모습대로 생활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즉 사울은 사무엘의 충고를 따라(10:7)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가 오기를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11093; 소를 몰고 오다가 - 문자적으로 '소를 따라 오다가'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때 사울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성 경: [삼상11:6]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사울의 출병령(出兵令)]

&#11093;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강력하게 임하셨다'란 의미이다. 이는 곧 사울이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서, 곧 성령의 도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같은 현상은 특히 사사(士師) 시대에 성전(聖戰)이 시작되기 바로 앞서,그 전쟁을 치를 지도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났었다(삿 3:10;6:34;11:29;13:25;14:6;15:14).

&#11093; 노가 크게 일어나서 - 여기서 '노'(*, 아프)는 인간적이거나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거룩한 '의분'(義憤)을 가리킨다(출 4:14;민 11:1;신6:15;수 7:1;삼하 6:7;사 5:25). 따라서 '노가 크게 일어나서'란 말은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된 사울이 하나님의 소명을 본격적으로 인식하였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성 경: [삼상11:7]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사울의 출병령(出兵令)]

&#11093; 한 겨리 소를 취하여 - '한 겨리 소'(a yoke of oxen, KJV, RSV;a pair of oxen,NIV)는 사울이 밭 일을 마친 후 자신의 집으로 몰고 가던 소들임이 분명하다.

&#11093; 각을 뜨고...두루 보내어 - 이와 유사한 장면이 사사기 19:29,30에도 나타난다(삿19:29 주석 참조). 또한 중근동의 고대 문헌인 '마리 문서'에서도 이것과 유사한 장면이 보여지고 있다. 즉 거기서는 한 귀족이 외적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나머지 군대의 소집을 승인받을 목적으로 포로의 목을 베어 왕에게 보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결국 이같은 행동들은 군대의 소집에 응하지 않는다면, 죽임을 당한 소나 사람처럼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위협적인 경고임이 분명하다. 한편 자신의 첩을 열 두 덩이로 조각낸 레위인이나(삿 19:29), 자신의 소를 각뜬 사울 모두 '기브아'에서 이같은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각을 뜨다'란 말은 '조각내다', '절단하다'란 뜻의 동사 '나타흐'(*)에서 파생된 말로,곧 '여러 조각으로 자르다'(cut-in pieces)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짐승을 잡은 후 뼈 마디를 따라 그 고기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나누는 것을 가리킨다(레 1:6).

&#11093;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 사울이 이처럼 선지자 사무엘의 권위를 빌린 이유는 (1)자신이 여호와의 선지자에 의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합법적인 왕이라는 사실과, (2)암몬의 나하스 군대와 전투키 위한 군대의 소집이 신적 권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 (3)그리고 사무엘도 자신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다는 사실 등을 보여 주기 위함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11093; 여호와의 두려움 - 이것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두려움'이란 뜻이다. 종종 '여호와의 두려움'은 성전(聖戰)과 관련하여 적들에게 임하기도 하지만(14:15;창 35:5), 여기서는 사울로 하여금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에게서 통일된 응답을 얻도록, 여호와께서 친히 백성들의 마음을 주관하신 사실을 가리킨다(겔 11:19,20).

성 경: [삼상11:8]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사울의 출병령(出兵令)]

&#11093; 베섹에서...계수하니 - 여기서 '베섹'(Bezek)은 세겜 북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서, 길르앗 야베스로부터는 약 22.5km정도 떨어져 있었다. 또한 이곳은 잇사갈 지파에 속한 땅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유다 지파에 속한 베섹과는 분명히 구별된다(삿 1:3,4). 한편 '계수하니'(*, 파카드)란 말은 곧 '소집하다'란 의미이다(Davidson).

&#11093; 이스라엘 자손...유다 사람 - 이처럼 분열 왕국 이전 시대에도 지역적. 혈통적 구분이 있었는데, 이런 구분이 후에 분열 왕국을 이루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기 약 80년 전인 다윗 초기에도 이같은 정치적 갈등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즉 사울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대다수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왕으로 인정한 반면, 다윗은 겨우 유다 지파에 의해 왕으로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삼하 2:1-4,8-10). 그리고 그당시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키 위한 블레셋의 정책적 묵인에 의해서 겨우 가능할 정도였다.

&#11093; 삼십 만...삼 만 - 이 숫자는 광야에서 최종적으로 조사된 전투 능력을 지닌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 601,730명의 약 반에 해당되는 많은 숫자이다(민 26:51). 이처럼 사울의 징병 요구에 전 이스라엘이 거국적으로 응한 것은 (1)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들에게 임했기 때문이요(7절), (2)왕을 중심으로 구국(救國)의 열정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한편, 레온 우드(Leon Wood) 박사는 이들 33만 명을 모두 전투 능력이 있는 군인들로 보지 않고, 단지 사울의 행동과 뜻에 호응하여 모인 무리들로 본다. 따라서 실제 싸움에 임할 군인들은 이중에서 다시 선별, 군대로 조직했다고 한다(L. Wool, ASurvey of Israel's History).

성 경: [삼상11:9]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사울의 승리]

&#11093; 길르앗 야베스 - 1절 주석 참조.

&#11093; 내일 해가 더울 때에 - '해가 더울 때에'는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할 때에'란 의미이다(Klein). 따라서 아마 그 때는 정오(正午) 무렵이었을 것이다.

&#11093; 구원을 얻으리라 - 이 말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간절히 찾아 헤맸던 '구원할 자'(3절)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단어이다. 결국 이것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의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또한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반드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10:7).

성 경: [삼상11:10]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사울의 승리]

본절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족속에 대하여 계략을 꾸미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때 야베스 주민들은 암몬 왕 나하스에게 그 다음날 항복할 듯이 말함으로써 그들의 경계심을 풀게 하고, 따라서 이스라엘 군대의 공격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Smith, Fay).

성 경: [삼상11:11]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사울의 승리]

&#11093; 사울이...삼 대에 나누고 - 군대를 삼대(三隊)로 나눈 경우는 사사 시대 기드온(삿7:16,20)과 아비멜렉(삿 9:43)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으며, 또한 블레셋 족속들에게서도 매우 쉽게 관찰된다. 이같은 전법은 상대방을 여러 방향에서 일시에 협공하기 위한 병법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같은 전법(戰法)을 구사할 줄 아는 강력하고 유능한 무사적(武士的) 왕을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8:20).

&#11093;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 여기서 '새벽'은 오전 3시에서 6시까지의 사이를 가리킨다(Keil, Fay). 따라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 족속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방심과 자만심에 빠져 깊이 잠들고 있는 암몬 군대의 허(虛)를 찔러 3면 협공 기습 작전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1:12]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자비를 베푸는 사울]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자신들이 바라던 스타일의 왕(8:20)으로서 완전히 인정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암몬과의 전투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암몬과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이후, 사울의 왕권은 급속히 강화되었을 것이다.

&#11093; 사울이 어찌...다스리겠느냐 한 자 - 즉 미약한 베냐민 지파의 일개 농사꾼이 자신들의 왕으로 제비뽑힌 일에 대해 불만을 품고, 노골적으로 사울에 대해 불복종과 거역의 뜻을 나타내었던 비류들을 가리킨다(10:27).

성 경: [삼상11:13]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자비를 베푸는 사울]

본절은 사울이 그날의 승리(11절)를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했음을 보여 준다. 사울의 이같은 자세는 그의 초기 겸손과 관용의 성품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사울이 이같이 인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전투의 장소에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1093; 이 날에는...죽이지 못하리니 - 여기서처럼 기쁜날에 형 집행을 보류 또는 사면하는 경우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왕위를 회복한 날에, 자신에게 온갖 모욕을 준 시므이를 용서하였었다(삼하 19:23). 아무튼 여기 사울의 이같은 관용의 태도는 왕국 출발 초기에 사울의 도덕적.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와 같은 사울의 겸손과 관용은 이때를 정점(climax)으로, 그의 왕국이 공고화되고 그의 왕권이 강화되자 점차 퇴색되고 사라져 결국 영적.도덕적.정치적인 면에서 실패한 왕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러한 사실을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

{{

상승

}}

{{

하강

}}

{{

부모의 명령에 순종하는 효성을 나타냄(9:1-4)

사환의 충고에 귀 기울이는 포용성을 보임(9:5-10)

자신의 가문과 혈통을 낮추어 소개하는 겸손을 보임(9:21)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예언을 하는 영성을 나타냄(10:9-13)

침묵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양을 보임(10:16,22,27)

의분(義憤)을 냄(11:6)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음(11:13)

}}

{{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망령된 제사를 드림(13:8-14)

경솔한 맹세를 함(14:24,29,43-45)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15:18,19)

왕위에 집착, 다윗을 시기함으로써 하나님께 반역 의사를 드러냄(18:7-9)

다윗을 7번이나 죽이려고 시도함(18:11,25; 19:1,10,11,20,20; 20:31)

망명한 다윗을 죽이려고 네번 추격함(23:13,24; 24:1; 26:2)

하나님께서 엄금하신 무당을 찾아감으로써 영적 타락의 심연에 빠짐(28:8)

}}

{{

}}

성 경: [삼상11:14]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다져지는 사울의 왕권]

&#11093; 우리가 길갈로 가서 - 여기의 '길갈'(Gilgal)은 암몬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길르앗야베스에서 직선 거리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수 4:19 주석 참조), 사무엘이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성지(聖地) 중의 하나였다<7:16>.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일 장소로 이곳이 선택된 이유는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11093; 나라를 새롭게 하자 - 실상 이스라엘은 왕정(王政)으로의 변화가 이미 이루어졌었다. 즉 이미 사울은 (1)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10:1), (2)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 받은 일의 정당성을 신적으로 확증받는 징표로서 하나님의 신의 임재를 체험했으며(10:10), (3)백성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공개 석상에서 왕으로 인정되었으며(10:19-24), (4)사울 스스로는 백성들이 바라던 모양대로(8:20) 자신의 왕직(王職)을 이미 군사적 차원에서 행사하였기(11:6-11)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길갈에서 사무엘이 해야 할 일은 첫째, 화목제(和睦祭, 레 3:1-17;7:11-21)를 드림으로써 사울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적 관계를 형성시키며(Klein) 둘째,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음을 신적인 권위에 의해 선포하고, 이어 축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대한 대관식(戴冠式)을 치름으로써 이스라엘 초대왕의 공식 등극을 추인하고 확증하는 일이었다(Keil).

성 경: [삼상11:15]

주제1: [강화되는 사울의 왕권]

주제2: [다져지는 사울의 왕권]

&#11093; 사울로 왕을 삼고 -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사울의 왕위(王位) 등극은 그의 나이 40세 때인(13:1) B.C. 1050년의 일이었다(L.Wood). 이후 사울은 다윗이 차기 왕으로 등극할 때까지 40년간(B.C.1050-1010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행 13:21). 한편70인역(LXX)은 이때 사울이 10:1에 이어 또다시 기름 부음 받은 것으로 해석했으나, 타당성이 없다(Keil). 만일 기름 부음 받았다면, 그 일의 중요도상 다윗의 경우처럼(삼하 2:4;5:3) 또 기록했을 것이다(Lange). 한편, 자유주의 고등 비평가들은 사울의 왕위 옹립 사건과 관련하여, 그 사건이 10:1;10:24;11:15 등에서 세번 중복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세 가지 자료설(資料說)을 주장한다(Eissfeldt). 그러나 그것은 중복(du - plication)이 아니라 별개의 다른 사건이다. 즉 10:1은 사울이 사무엘에 의해 개인적으로 은밀히 기름 부음 받는 사건이고, 10:24은 사울이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 앞에서 제비뽑혀 왕으로 선출되는 사건이며, 11:15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울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앞에서 초대 왕으로 공식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면인 것이다(E.J.Young).

&#11093;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 '화목제'는 제물의 한 부분은 제단에 올려져 하나님께 바쳐지며, 그 나머지는 그 제물을 바친 백성들이 공동으로 먹을 수 있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화목과 친교의 제사였다<레 3:1-5 강해, 화목제에 대하여>. 따라서 여기 '화목제'는 승전(勝戰)과 왕의 등극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백성들 간에는 상호 기쁨을 나눈 축제의 제사였다.

&#11093; 길르앗 야베스 전투 - 암몬 왕 나하스는 이스라엘의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자 야베스 장로들은 사신을 이스라엘 전국에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기브아에 있던 사울은 베섹에서 병력을 소집한 뒤 암몬 족속을 기습 협공했다. 암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지(聖地) 길갈로 내려가 사울을 초대 왕으로 삼아 대관식을 거행했다.

성 경: [삼상12:1]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사무엘의 양심 선언]

본절은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그리고'(*, 와)로 시작한다는점에서 11장 끝부분(14,15절)의 직접적인 연속이다.

&#11093; 너희가...한 말을 내가 다 듣고 - 여기서 '너희가...한 말'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했던 사실을 가리킨다(8:5,20).

&#11093;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 사무엘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대로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일은 결코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아니었다(8:6-8). 다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청을 허락하심으로써, 오히려 그 왕을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8:11-18), 따라서 진정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계셨다(8:9,22;9:16,17).

성 경: [삼상12:2]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사무엘의 양심 선언]

&#11093; 이제(*, 웨아타) - 이 단어는 자주 장(章)의 시작을 이끌거나, 앞선 행동의 논리적 결과를 소개할 때 사용된다(7,10,13,16). 따라서 여기의 '이제'(And now)는 '왕이 세워졌으므로'란 의미로 이해하면 적당할 것이다.

&#11093; 왕이...출입하느니라 - '출입하다'(*, 할라크)는 원래 '걸어다니다'란 뜻이지만, 성경의 여러 문맥상 그 의미는 자신의 고유한 직무, 특히 백성을 여러모로 돌보고 다스리는 공적(公的)직무의 수행을 표현하는 말로서 사용되어진다(9:6;민 27:17;삼하 2:29;왕상 3:6;대하 6:16). 한편 스미드(R.Payne Smith) 박사에 의하면, 이 말은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고 감독하면서 앞서 '가는'(walking) 목자적(牧者的) 생활 풍습에서 비롯된 은유적 표현이라 한다(Pulpit Commentary).

&#11093; 나는 늙어 머리가 희었고 - 여기서 '희었고'는 '석회를 뿌리다' 라는 뜻의 '시브'(*)에서 파생된 단어로서(Keil),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사실의 비유적 표현 방식이다(창 15:15;25:8;레 19:32;왕상 2:6).

&#11093; 내 아들들도...함께 있느니라 - 사무엘의 아들들의 부패는 사무엘의 노령(老齡)과 함께 이스라엘 장로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왕을 요구하게 만든 구실이 되었었다(8:1).그러나 사실에 있어 이같은 것들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왕을 요구하게 된 진정한 원인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무엘이 자신이 늙었음과 자신의 아들들이 함께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을 특별히 언급한 까닭은, 왕을 요구한 이유를 사무엘 가문(家門)의 문제 때문으로 제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직치 못함을 암시적으로 꾸짖기 위함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의 이같은 언급은, 그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士師)로서 자신의 모든 행실이 백성들에게 낱낱이 알려져서 더이상 드러날 것이 없다는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백성들이 그토록 원했던 이스라엘의 왕들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행위가 사무엘과 비견되어 시험되어져야 할것이었다(Klein).

성 경: [삼상12:3]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사무엘의 양심 선언]

&#11093; 여호와 앞...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 - 자신의 양심 선언을 하는 자리에서 사무엘이 '여호와'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나란히 언급한 까닭은 둘 사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백성들에게 가시적(可視的)으로 실천하는 자라는 점에서,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과 특수한 관계하에 있기 때문이다(Keil). 한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왕의 명예를 특별히 높이며, 또한 왕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언약적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다(Klein, 24:6).

&#11093;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 여기서 '증거하다'(*, 아나)는 법정적(法庭的) 용어로서 증인이 재판장의 질문에 대해 증언 혹은 답변하는 것을 가리킨다(Davidson). 따라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는 말은 백성들이 기소자의 입장에서 피고인의 위치에 있는 사무엘 자신의 죄를 듣고 아는대로 말해보라는 뜻이다(출 20:16;신 31:21). 사무엘은 여기서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사사로서의 자신의 청렴 결백함을 담대히 주장하고있다. 아울러 사무엘은 연속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이스라엘 통치가 공명 정대했음을 입증시키고 있다. 한편, 사무엘의 이같은 자기 변호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의 신정(神政) 통치를 거부하고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동기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11093; 소...나귀를 취하였느냐 - 여기의 '소', '나귀', '취하다'라는 단어는 모두 열방과 같은 왕의 횡포를 경고적으로 예시했던 8:11-17에 나오는 말들이다. 이같은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사무엘은 사사로서의 자신이 새로 세워질 열방과 같은 왕과는 전혀 다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한편 모세도 다단과 아비람에게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면서, 자신이 그들에게서 나귀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했었다(민 16:15). 사실 '소'나 '나귀'는 농경(農耕) 사회에서 기본적인 재산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같은 것들을 빼앗는 행위는 율법에 의해 철저히 금지되었다(출 20:17).

&#11093; 누구를 속였느냐 - 여기서 '속이다'(*, 아솨크)는 원래 '내리누르다', '사기를 치다'란 의미로서, 곧 물건을 빼앗기 위해 타인을 현혹.협박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레 6:2;겔 18:18;호 12:7).

&#11093;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 '압제하다'(*, 라차츠)란 말은 '깨뜨리다', '낙심시키다', '학대하다'란 의미이다(전 12:6;암 4:1).

&#11093;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 - 문자적으로는 '눈을 멀게 하는 뇌물'이란 뜻이다. 결국 이것은, 뇌물(賂物, bribe)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사안이나 사물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지극히 부정적인 기능이 있음을 가리킨다(출 23:8;신 16:19). 한편 여기서 '뇌물'(*, 코페르)은 '덮다'(cover)란 뜻의 동사 '카파르'(*)에서 파생된 말로, 곧 어떤 사람이 자신이 범죄를 덮어버림으로써 그로 인한 형벌을 모면키 위하여 권력자에게 부정하게 지불하는 재물을 가리킨다(출 21:30;30:12;민 35:31,32).

&#11093; 갚으리라 - 기본 동사 '슈브'(*)는 '돌아가다', '회복하다'란 뜻으로서, 곧 타인의 재물을 부당하게 취했다가 손해 배상금과 함께 되돌려 주는 행위를 뜻한다(6:3;눅 19:8).

성 경: [삼상12:4,5]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사무엘의 양심 선언]

백성들은 기소자(起訴者)의 입장에서, 그리고 '여호와'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엄숙한 증인 앞에서 사무엘이 사사(士師)로서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전혀 책할 것이 없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로써 백성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구한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되고 말았다(Calvin).

성 경: [삼상12:6]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여호와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특별한 은총을 언급하고 있는 본절과 같은 내용(출20:2;신 5:6)은 고대 중근동 지역의 종주권(宗主權) 조약 문서에 흔히 나타난다. 즉 이와 같은 사실들을 언급함으로써, 왕은 봉신에 대하여 계속적인 충성심을 요구하였던 것이다(출 20:3-17;신 5:7-21). 여기서도 사무엘은 출애굽 구속 사건에 근거하여, 과거 미천했던 이스라엘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크신 은총을 언급함으로써, 백성들이 자신들의 참된 왕을 버리고 또다른 왕을 요구한 사실(8:5,20)이 얼마나 배은 망덕한 행위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성 경: [삼상12:7]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11093; 그런즉(*, 웨아타) - 앞서 언급된 행위의 논리적 결과를 소개할 때 사용되는 접속사이다. 사무엘은 이제 6절의 내용을 법적 근거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책망하려고 한다.

&#11093; 가만히 섰으라(*, 야차브) - 여기 이 단어는 중요하고도 특별한 토론에 임하기 앞서, 먼저 필요한 마음 자세를 갖춰야 함을 시사하는 말이다(출 8:20;9:13;신31:14;욥 33:5).

&#11093; 모든 의로운 일 - 여기서 '의로운 일'(*, 치드코트)은 문자적으로 '거룩한 일'이란 의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일이 '의로운일'인 까닭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의로운 언약에 근거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삿 5:11;미 6:5).

&#11093; 여호와 앞에서...담론하리라 - 3,5절에 이어 여기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증인'(證人)으로 언급되어진다. 한편 '담론하리라'(*, 이솨페타)는 '재판하리라','판단하리라', '국문하리라'의 의미이다(신 17:9;시 67:4;겔 11:10,11). 그러므로 사무엘은 3,5절에서는 피고(被告)의 위치에 섰었으나, 이제는 백성들을 피고의 위치에 올려놓고, 자신은 재판관의 위치에 서서 그들을 심문하려 하고 있다. 이같은 행위를 통해 사무엘은 그릇된 동기(8:7)에서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정죄하려는 것이었다.

성 경: [삼상12:8]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11093;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이었다(창25:26). 그는 말년에 애굽 땅에서 총리가 된 아들 요셉을 보기 위하여 애굽으로 들어가 거기서 정착하게 되었다(창 45:28). 그러나 사실상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간 것은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예언했던 바를 성취시키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과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창 15:13-16).

&#11093; 모세와 아론을 보내사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키 위해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그릇이었다(출 2:1-22;히 12:23-25). 그리고 '아론'은 모세 보다 세 살 많은 형으로서(출 7:7), 모세의 어눌(語訥)함을 돕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모세와 함께보내진 자였다(출 4:10,14-16).

&#11093; 애굽에서 인도하여...이곳에 거하게 - 이같은 사실, 즉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과 간섭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신 일이었다. 따라서 그때 모세와 아론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졌을 뿐이었다.

성 경: [삼상12:9]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11093; 그들이...여호와를 잊은지라 - 적어도 여호수아의 생전과,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겪었던 세대가 살아 있었던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경외하였을 것이다(수24:31). 그러나 세대가 바뀌고 가나안 땅의 물질적 풍요에 점차 빠지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과거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위해 베푸셨던 놀라운 역사를 잊어버리게 되었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은 망덕함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의 압제하에 시달려야 했다.

&#11093; 하솔 군장 시스라 - '하솔'은 납달리 지경에 속하는 북부 팔레스틴의 주요 성읍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하였다(수 11:1 주석 참조). 사사 시대초기에 그 지역을 다스렸던 가나안 왕 '야빈'은 철병거 구백승을 보유한 강력한 군대의 소유자였다(삿 4:3). 한편 '시스라'는 하솔 왕 야빈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괴롭혔던 당사자였다(삿 4:2). 이들은 결국 여사사 드보라와 사사 바락의 활약에 의해 패퇴되고 말았다(삿 4:4-24).

&#11093; 블레셋 사람 - 역사상 블레셋 족속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족속들이었다. 이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사사기 3:31에 언급되는데, 이때 이들은 사사(士師) 삼갈의 활약에 의해 격퇴되었다. 또한 이들의 두번째 공격은 사사기 13-16장에 나타난다. 이때는 사사 삼손의 활약이 있었다. 그러나 삼손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때로부터 이스라엘은 다윗 즉위 초기까지 블레셋의 지배를 완전 벗어날 수 없었다(삿13:1).

&#11093; 모압 왕 - '모압 왕'은 '에글론'을 가리킨다. 사사 시대 초기에 그는 암몬 족속 및 아말렉 족속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약 18년간 지배하였다(삿 3:12-14). 그러나 이들은 결국 '에훗'이라는 사사에 의해 격퇴되었다(삿 3:15-30).

성 경: [삼상12:10]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사무엘의 메시지 속에는 특히 이스라엘의 구약 역사에서 적나라하게 반복되어 나타는 바, 독특한 역사 철학(歷史哲學)이 깃들어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로 섬길 때에는 평안과 번영을 구가한 반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길 때에는 반드시 이방의 압제와 핍박으로 시달림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 본절도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한 까닭은 하나님을 망각한 그들의 영적.도덕적 범죄 때문이었으며, 그들이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요인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회개였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7:3-6). 결국 사무엘은 여기서 이같은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이방에 대한 자신들의 패전(敗戰) 원인을 열방과 같은 왕과 조직된 군대의 부재(不在)에서 찾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11093; 바알들과 아스다롯 - 이 우상들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대표적인 우상들이었다. 삿 2:13;10:6;삼상 7:3,4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2:11]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사무엘은 9절에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실제로 징치했던 도구 중 일부만을 언급했듯이, 본절도 이스라엘을 환난에서 구원했던 여러 사사 중 일부만을 언급하고 있다.

&#11093; 여룹바알 - 이 사사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원한 사사였다(삿 6,7장;히11:32). 이 사사의 본래 이름은 '기드온'(Gideon)이었으나, 그가 바알 신상을 훼파한 연고로 '바알에게 대항하다'라는 의미의 '여룹바알'(Jerubbaal)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삿 6:32).

&#11093; 베단(*) -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로부터 구원한 이 사사(士師)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이견이 있다. 왜냐하면 '베단'(Be-dan)이라는 이름은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1)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위해 활약하기는 했지만, 단지 그 이름이 생략된 유명한 사람일 것이라는 견해, (2)대상 7:17에 이 이름이 마길의 후손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길르앗의 '야일'(삿 10:3)을 가리킨다는 견해, (3)베단(Bedan)이란 이름을 압돈(Abdon)의 압축형으로 보고, 곧 사사 '압돈'(삿 12:13)을 가리킨다는 견해(Gesenius, Ewald), (4)'베단'을 '벤-단'(단 자파의 아들)에 대한 표기로 보고, 곧 단 지파의 '삼손'(삿 13:2,24)을 가리킨다는 견해(Kimchi), (5)'베단'(*)을 '바락'(*)에 대한 필사자의 오기(誤記)로 보고, 곧 이스라엘을 하솔의 군대 장관 시스라의 손으로부터 구원한 사사 '바락'(Barak, 삿 4:6)으로 보는 견해(LXX, the Syriac, the Arabic)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사사들의 업적이나 전체 문맥, 그리고 문법적인 상황등을 고찰해 보면, 이들 견해 중 다섯번째의 견해대로 '베단'(Bedan)은 곧 사사 '바락'(Barak)을 가리키는 것같다(히 11:32). 즉 대부분의 학자들(Keil, Fay, Smith)은 사본 전승 과정상 필사자들이 그 단어의 유사성 때문에 '바락'(*)을 '베단'(*)으로 잘못 베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p.117-118;Lange,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한편 이 사사(士師)는 여사사 드보라와 함께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였다(9절;4:4-24;히 11:32).

&#11093; 사무엘 - 사사로서 '사무엘'은 미스바 전투(7:7-11)의 승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출하였으며(7:13), 또한 아모리 족속의 외침(外侵)으로부터도 이스라엘을 보호하였다(7:14). 한편 어떤 역본들(the Syriac, the Arabic)은 사무엘이 이처럼 자신을 스스로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로부터 구원시킨 영웅들의 반열에 넣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여기 '사무엘'의 이름 대신에 '삼손'이란 이름으로 대치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바꿀만한 타당성은 전혀 없다(Keil, Fay). 따라서 대부분의 권위있는 역본들(LXX, Vulgate, the Chaldee)은 맛소라 본문(MT) 그대로 '사무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 경: [삼상12:12]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본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암몬 족속의 침략 위협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결국 이 사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하게끔 만든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었음이 분명하다.

&#11093;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 - 11:1 주석 참조.

&#11093;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 - 이 말은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의지할 경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워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준다(8:7). 사무엘은 여기서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열방과 같은 왕을 세워 외적과 싸우도록 한 것은 곧 여호와를 자신들의 왕으로 더이상 인정치 않는(8:7,8) 영적 배신 행위였음을 강조한 것이다.

성 경: [삼상12:13]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이 입은 하나님의 은혜]

본절은 자신들의 세속적 이익을 보장해 주는 열방과 같은 왕이 되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인본주의적 기대와, 율법의 말씀에 근거한 당신의 대리자적 왕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신적 기대가 엇갈린 가운데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등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11093; 너희의 구한 왕...택한 왕 - 이 말은 이스라엘의 왕이 결코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배출되거나, 사무엘 자신의 개입에 의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력한 요구(8:19,20)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Keil).

&#11093; 여호와께서...왕을 세우셨느니라 -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정(王政) 제도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기쁘신 섭리와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가리키는 말이 결코 아니다(17절).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충분한 만류와 경고(8:11-18)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백성들의 강력한 왕 요구를 결국 추인(追認)하셨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인 만큼,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충실히 좇아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좇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 왕들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었다.

성 경: [삼상12:14,15]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의 배역(背逆) 경고]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이 '열방과 같은' 왕이 되기를 바라는(8:5,20)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 동기에서 왕을 구하고 세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왕이 당신의 뜻을 구현시키고 펼치는 신적 대리자(神的代理者)가 되기를 바라고 계셨다. 이에 따라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과 왕에게 축복과 징계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준다. 그 축복과 징계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즉 (1)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헌신했는가의 여부, (2)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는가의 여부, (3)하나님의 인도대로 행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는가의 여부 등이다.

&#11093; 여호와의 명령 -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말씀'이란 뜻으로,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킨다.

&#11093; 여호와를 좇으면 - 성경에서 어느 특정인을 좇는 행위는 종종 그 특정인의 참된 백성됨을 증명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삼하 2:10;왕상 12:20;16:21). 따라서 여호와를 좇는 것은 스스로가 여호와의 백성, 즉 여호와를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는 백성임을 증명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Klein).

&#11093;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같이(*, 우바아보테켐) - 70인역은 이 말을 의역하여, 여기 '열조'를 '왕'으로 바꾸어 곧 '너희 왕을 치신 것 같이'(*, 에피-톤 바실레아 휘몬)로 번역했으나, 그 타당성은 희박하다(Keil). 왜냐하면 실로 이스라엘은 '열조 때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때는 형통과 번영을 구가했지만, 거역하고 불순종할 때는 반드시 징계와 심판을 면치못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12:16]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의 배역(背逆) 경고]

&#11093; 이제(*, 감 아타) - 이 말은 2절의 '이제'처럼, 앞선 행동의 논리적 결과를 서술하기 앞서 사용되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15절의 내용과 논리적 연관성을 지님을 보여 준다.

&#11093; 가만히 서서 - 특별한 사항을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성이 있을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출 8:20;9:13;신 31:14;욥 33:5). 7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2:17]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의 배역(背逆) 경고]

&#11093; 오늘은 밀 베는 때 - 팔레스틴의 경우 '밀 베는 때'는 대개 4월 세째 주일부터 6월 둘째 주일까지로서(6:13),이때는 비가 전연 내리지 않는 건조기이다(Graff, Robinson). 따라서 사무엘의 이같은 언급은 다음에 나오는 기상 이변이 오직 여호와의 초자연적인 형상임을 입증코자 함이었다.

&#11093; 우뢰와 비 - 이것은 분명 뇌성을 동반한 폭풍우임이 확실하다. 여기서 '우뢰'(*, 콜)는 고대인들에게 여호와의 진노의 목소리로 여겨져,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출 9:23;시 18:14;29:3). 아무튼 여기 우뢰와 비는 하나님의 이적 현상으로, 이는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청종치 아니하면(15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언제 어느 때라도 그 백성들 위에 내릴 것이란 사실을 현시하는 전조적(前兆的) 현상이었다.

성 경: [삼상12:18]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이스라엘의 배역(背逆) 경고]

&#11093; 여호와와 사무엘을...두려워하니라 - 밀 베는 때에 내린 큰 우뢰와 비의 현상은 백성들을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즉 그때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신 당사자였으며, 또한 사무엘은 여호와로 하여금 그같은 기적을 일으키시도록 간구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여호와'와 '사무엘'을 함께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경외)은 백성들이 여호와는 물론, 여호와의 선지자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였다. 사실 모든 백성들에 의해 두려움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수 4:14) 모세도 자신과 같은 선지자의 출현을 예언함으로써(신18:15), 모든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에 의해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것을 암시하였다.

성 경: [삼상12:19]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백성에 대한 권면과 위로]

&#11093;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기도하여 - 백성들을 위한 중보(中保) 기도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담당했던 중요한 사역이었다. 선지자의 모범으로 봐야 할 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심지어는 대제사장 아론이 범한 죄의 용서를 위하여서도 하나님께 종종 중보 기도를 했었다(민 11:1,2;12:13;14:19,20;신 9:20). 한편 선지자로서의 사무엘도 이미 백성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한 일이 있었다(7:5,8).

&#11093; 우리가...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 사무엘의 감화력 있는 메시지와 여호와의 초자연적인 이적 현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동기에서 집요하게 왕을 구한 (8:5,19,20;12:12)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다. 그러므로 향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왕정 체제하에서 왕을 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정 자신들의 참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했다.

성 경: [삼상12:20]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백성에 대한 권면과 위로]

그릇된 동기에서 왕을 구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사무엘은 위로와 권면, 그리고 경고의 말을 함으로써 왕을 세우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메시지를 최종 마무리 짓는다.

성 경: [삼상12:21]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백성에 대한 권면과 위로]

&#11093; 돌이켜(*, 수르) - 이는 '떠나다', '제거하다', '옮기다'란 의미로서, 의지적(意志的) 행위가 수반된 적극적.전인격적 회개를 뜻한다(왕하 10:29;대하 15:17;느9:19).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본 단어 뒤에 '왜냐하면'(*, 키)이라는 의미의 접속사에 이끌리는 내용들이 언급되어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켜'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주고 있다.

&#11093; 유익하게도...구원하지도 못하는 - '유익하다'(*, 야알)는 '경제적인 이득을가져다 주다'의 의미이며(잠 10:2;렘 12:13), '구원하다'(*, 나찰)는 '정치적.영적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의 의미를 갖는다(삼하 12:7;사 37:12).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정치적 목적에 따라 계속적으로 우상을 섬겼으나(왕상11:5;호 2:5), 그 우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오히려 망하고 말았다(대하33:11;36:11-17).

&#11093; 그들은 헛되니라 - 여기서 '헛되니라'(*, 토후)라는 단어는 '텅비다', '가치없다', '공허하다'란 의미로서 우상의 속성을 가리키는데, 이는 또한 이 세상의 창조 과정 초기에, 창조될 것이 아직 창조되지 않아 공허하며 혼돈스러웠던 지구의 상태를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창 1:2). 한편 선지자 이사야와 사도 바울도 이 단어를 '우상'에 적용시켰다(사 44:9,10;57:12;고전 8:4).

성 경: [삼상12:22]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백성에 대한 권면과 위로]

앞서 사무엘은 백성들이 축복을 받는 길은 백성들의 순종적인 행위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고 말한 반면(14절),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보다 신적(神的)인 두 가지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신적인 근거는 곧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그 크신 이름'이다. 한편 후일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과 '크신 이름'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삼하 7:23,24).

&#11093;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 이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민족들 중에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사실을 가리킨다(신 7:6;14:2;27:9;왕하 11:17). 한편, 이같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창12:1-3;15:3-6;17:4-8)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선택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유익을 위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제사장적 나라로 삼아(출 19:6), 열방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선택하셨을 뿐이다(창 12:1-3).

&#11093; 그 크신 이름 - 구약 성경에서의 '이름'(*, 쉠)은 특정한 인물이 지닌 인격의 총체를 가리킨다(히 1:4). 따라서 여기의 '그 크신 이름'은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 및 인격을 뜻함이 분명하다(민 23:19). 그런데 특별히 여기의 '이름'은 선택(election)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불변성 및 신실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수 7:9;사 48:9;렘44:26;겔 20:9,14,22;36:23).

&#11093;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결코 취소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구원될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롬 9:13,2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집단적으로 선택하셨지, 그 민족에 속한 한 개인 개인을 개별적으로 모두 선택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의 신앙과 불신앙 여부에 따라 개인은 구원 혹은 멸망을 당하되, 민족은 비록 징계는 당하나 결코 완전 멸망당함 없이 계속 남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갈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12:23]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백성에 대한 권면과 위로]

본절에서 선지자 사무엘은 지금까지도 그래 왔거니와 앞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하기로 작정한 바를 두 가지 언급하고 있다.

&#11093;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범치 아니하고 - 중보(中保)의 임무를 띤 선지자로서 사무엘은, 중보의 기도를 게을리하는 것은 분명 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사무엘은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의 범죄가 자신이 그들을 위해 좀더 열심히 중보 기도하지 않음으로 야기된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1093; 선하고 의로운 도로...가르칠 것인즉 - 여기서 '선하고'(*, 토브)와 '의로운'(*, 야솨르)은 거의 동일한 의미의 단어들로서, 하나님의 율법의 성격을 보여 주는 말이다. 특히 여기서 사무엘은 이같이 비슷한 단어를 중복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렘 40:4). 한편 '도'(*, 데레크)는 '행실', '도리'란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 가운데로 인도하겠다는 신앙 교육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수1:8;시 25:4;딤후 3:16,17).

성 경: [삼상12:24]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백성에 대한 권면과 위로]

여기서도 사무엘은 먼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덕을 말한 후, 이어 백성들이 그러한 크신 은혜에 대하여 '경외'와 '섬김'으로써 여호와께 응답해야 할 것임을 말한다.

&#11093; 여호와께서...행하신 그 큰 일 - 이것은 18절에 언급된 초자연적 기상(氣象) 이변 현상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고 카일(Keil)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주신 일을 가리키는 것 같지도 않다. 여기서는 '큰 일'이 복수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베푸신 모든 은총으로 봄이 타당한 듯하다(R.Payne Smith).

&#11093; 오직 그를 경외하며...진실히 섬기라 - '경외'와 '섬김'은 종이 주인에 대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그런데 사무엘은 여기서 이같은 자세를 오직 이스라엘을 위해 온갖 큰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가질 것을 권고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세상 왕이나 우상을 섬기는 패역한 자리에 떨어지지 않기를 훈계하고 있다.

성 경: [삼상12:25]

주제1: [사울의 왕직 갱신]

주제2: [백성에 대한 권면과 위로]

&#11093; 여전히 악을 행하면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 앞에 결정적인 범죄를 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아마도 여기서 사무엘이 염두에 두고 있는 백성들의 범죄 내용는, 그들이 열방과 같은 세상 왕을 요구함으로써(8:5,19,20) 그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통치하신 하나님의 왕권(王權)을 무시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19절). 나아가 그 악(惡)은 20-24절을 고려할 때, 왕을 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패역한 마음 자세로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고 헛된 우상들을 좇는 그러한 악을 가리킬 것이다.

&#11093;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 사무엘의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처럼 왕(王)이 그들을 이방의 모든 압제와 공격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비록 이스라엘이 왕정 제도하에서 강력한 왕과 중앙 정부를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흥망 성쇠 여부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달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왕을 중심으로 여호와를 신실히 경외하고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 깨달아야만 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왕의 운명은 진정 이스라엘의 참 왕이 되시고, 또한 만왕의 왕 되시는 여호와께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13:1]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상비군]

구약 성경 중 특히 사무엘서는 본문 전승 과정상의 문제로 인하여 숫자상의난제가 많이 발견된다. 본절도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비록 본서 저자가 일반적인 열왕기의 기술법에 따라(삼하2:10; 5:4; 왕상14:21; 22:42) 왕의 즉위 년도 및 통치 기간 등을 밝히고자 의도적으로 시도했을지라도, 여러 사본상의 차이로 인하여 그 해석에 있어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11093;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벤 솨나솨울 베말르크) - 이 말을 직역하면 '사울이 왕이 될 때에 한 살(일년)이었다'(It wasone year since Saul became king)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많은 문제점이 따르게 되므로, 여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1) 이 말을 의역하여, '사울이 왕이 될 때에 한 살 난 어린이와 같았다'라는 해석이 있다(Targum, the Chaldee). 이것은 사울이 그만큼 순진했거나 또는 유치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 지나친 의역(意譯)으로서 그 타당성은 없다. (2) 원문의 '살'(year)앞에 나이를 표시하는 알파벳 또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되었다고 보고, 추측하여 '사울이 왕이 될 때에 30세이었더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Origen의hexapla). 그러나 당시 사울에게는 병력을 통솔하고(3절) 적군을 무찌를 만큼(14:4)성숙한 아들 요나단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 해석 역시 적당치 않다. (3) 70인역(LXX)은 이것을 원문에 없는 말로 보고, 아예 여기서 이 문구를 빼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 본문을 너무 가볍게 취급한 것이다. (4) 이 말을 약간 의역하여, '사울이 일년을 다스렸다'(saul regned one year)라는 해석이 있다.(KJV). 그러나 이것은 이어 나오는 '다스린 지'(*, 말라크)라는 말과 중복된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은듯하다. (5) 이 말을 본문 그대로 충실히 번역하여 '사울이 왕이 된 지 일년이었더라'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the Vulgate, Grotius). 그런데 우리는 이 다섯번째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다섯번째의 해석은 첫재, 성경은 우선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해석 원리에 부합되며 둘째, 본절의 다음 문구인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울이 실제적으로만 일 년 간 이스라엘의 왕 노릇을 했다는 뜻이다.

&#11093;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 - 이 말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왕의 통치 기간 계산 방법을 통해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해 니산(Nisan, 혹은 아빕)월에서 다음 해 니산 월까지를 통치기간 1년으로 보지만, 실제 통치 1년 간의 중간에 니산 월이 걸리면 비록 만 1년이 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통치 긴간을 2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여기의 '이 년'은 실제적으로는 1년이되, 그 중간에 니산 월이 낌으로 인하여 이같이 계산되었던 것 같다(Grotius, Clericus).

성 경: [삼상13:2]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상비군]

&#11093;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 히브리 원문에는 '택하여' 앞에 '자신을 위하여'(*, 로)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의 이같은 행위는 암몬과의 싸움을 위하여 사울이 온 백성을 군대로 소집한 것과는 성격상전혀 다르다(11:7,8). 즉 사울이 택한 삼천 명은, 열방과 같은 왕으로서의 자신의 직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잘훈련된 정예군이었을 것이다(Fay, Smith). 따라서 이것은 성전(聖戰)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병력이라기 보다는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 중차출한 근위병적 성격이 강한 군대임이 분명하다(Klein; 14:52).

&#11093; 이천은...믹마스와 벧엘 산에 - 여기서 '믹마스'(Michmash)는 예루살렘 북쪽 약15km, 기브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7km 떨어졌으며, 해발 약 660m 정도의 고지에 위치하였다(Driver). 그러나 이같은 정도의 높이는 그 지역에서는 저지(低地)에 속한 편이었다(사10:28,29). 그런데 이곳 믹마스의 남족은 '와디수웨이닛'(Wadi Suweinit)이라는 협곡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남동쪽으로는 가파른 고개들이 있어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이곳은 보리의 산출이 많은 곳인데, 오늘날의 위치는 '묵마스'(Mukhmas)이다(Robinson). 한편 '벧엘 산'(Mt.Bethel)은 본서의 다른 곳에서는 그냥'벧엘'로 나온다. 이곳은 믹마스 북서쪽 약 7km 지점의 해발 약 960m의 고지에 위치했었다. 바로 이같은 이 지역의 표고(標高)때문에, 여기서는 '벧엘 산'으로 지칭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울의 이같은 군사 행동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오랜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Leon Wood).

&#11093;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 사울의 장자 '요나단'(Jonathan)은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셨다'이다. 한편 '베냐민 기브아'(Gibeah of Benjamin)는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가리키며,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에 대한 사울의 통치 거점이였다<10:26>.

&#11093; 남은 백성은...장막으로 보내니라 - 이것은 사울이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소집했다가 다시 돌려보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때 소집되지 않았음을 강조할 뿐이다. 사울이 이같이 한 이유는, 그는 (1) 훈련 안된 일반 백성들은 블레셋의 강한 군대를 이길 수 없다고 보았으며, (2) 또한 은밀한 가운데 블레셋 군대를 기습 공격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카일(Keil)은, 당시 사울은 길갈에서 왕의 대관식을 마친 뒤(11:15) 이스라엘 백성 중 3,000명을 뽑고 나머지는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라고 추측하나(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Vo1.2-ii, p.125), 13:1의 진술과 비교해 볼 때 시간상으로 의문이 많다.

성 경: [삼상13:3]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군사 소집령]

&#11093; 게바에 있는 블레셋...수비대 - 여기서 '게바'(Geba)는 '기브아'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곳으로, 기브아 북동쪽 약 5km 지점에 위치한 지역이다. 오늘날의 우치는 '예바'(Jeba)로 판명된다. 그리고 '수비대'는 '기지' 혹은 '요새'란 뜻으로서, 아미도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통치 기간 중(삿13:1) 이스라엘의 주요 거점에 설치한 블레셋의 '군사 초소' 또는 '파견 진지'를 가리키는 것 같다. 10:5 주석 참조.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영토 깊숙한 곳에 블레셋의 수비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의해 많은 압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9:16>.

&#11093; 치매(*, 나카) - 원래 '상하게 하다', '때리다', '죽이다'란 의미로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군사적인 공격 행위를 가리킨다(삼하13:28; 왕하10:25; 13:19; 대상18:9). 따라서 여기에 이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요나단의 군대에 의해 블레셋의 수비대가 거의 전멸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사울 휘하의 이천 군사가 포진한 믹마스와 벧엘 산은 블레셋 수비대가 있던 게바 북쪽에, 그리고 요나단이 이끈 이천 군사가 포진한 베냐민 기브아는 게바 남쪽에 가각 위치하고 있었다(2절). 따라서 그 포진 상태로 보아 사울과 요나단은 협공 기습 작전으로 게바의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하려했던 것 같다. 즉, 요나단의 군대가 정면 공격을 감행한 것 같고, 사울은 후방에서 공격을 시도한 것 같다(R.Payne Smith).

&#11093;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 여기서 '블레셋 사람'(the Philistines)은 블레셋의 본토 주민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때 요나단에 의해 패배를 당한 '수비대'의 패잔병은 약 40km 정도 떨어진 자신들의 블레셋 영토까지 패주하여 자신들이 당했던 사실은 보고했던 것이다.

&#11093;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 여기의 '나팔'(*, 쇼파르)은 '양의 뿔'(the ram's horn)을 가리킨다. 한편 성경에서 '나팔'을 부는 행위는 '위험'을 경고하며, '성전'(聖戰, the Holy War)을 선포할 때 주로 언급된다(수6:4; 삿6:34; 렘4:19;겔33:3). 따라서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블레셋 수비대를 격파한 승리의 소식을 알림과 동시에, 블레셋과의 대규모 전쟁을 준비키 위해 백성들을 소집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11093;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 '히브리 사람'(the Hebrews)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신들 상호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명칭은 타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의 저항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려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70인역(LXX)은 '종들은 항거할지어다'(*, 에쎄테카신호이 둘로이)라고 번역했으나, 그것은 너무 지나친 의역이다. 그리고 '들으라'(*, 솨마)는 명령법으로 사용될 경우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이다(신6:3,4; 삼하20:16; 대하13:4). 따라서 여기서 그 구체적인 내용은 4절을 참조할 때, 아마도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 수비대를 격파함으로 인해 격분한 블레셋이 대규모 반격을 시도하려고 한다는 내용일 것이다(F.R.Fay).

성 경: [삼상13:4]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군사 소집령]

&#11093;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 - 10:5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으로 나타나 있다. 10:5 주석 참조.

&#11093;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 이 단어(*, 니브아쉬)는 원래 '악취가 나다'란의미이지만, 여기서처럼 수동형으로 사용될겨우 '증오(혐오)의 대상이 되다'란 뜻이 된다(27:12; 출8:14; 삼하10:6). 한편, 블레셋이 이토록 격분한 이유는 물론 직접적으로는 사울과 요나단이 자신들의 수비대를 공격 격파한 사실이지만, 그 전에 먼저 이스라엘이 그들의 왕을 세우고, 그 왕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확보하여 암몬 군대를 물리치는 등 전면적으로 블레셋에 항거하는 일련의 행동을 취하였기 때문이다(R. Payne smith).

&#11093; 길갈 - '길갈'(Gilgal)은 요단 서편 약 6km 지점에 위치한 지역이다<7:16; 11:14>. 한편 사울이 이 지역을 백성들의 집결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요단강 평야에 속한 들판이어서 병력집결이 용이하였고, (2) 자신이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곳이었으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으며, (3) 당시 정치적 수도라 할 수 잇는 사울의 고향 기브아는 그 지리적 위치상 블레셋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11093; 모여...좇으니라(*, 차아크) -이 단어는 원래 '소리치다', '부르짓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수동형으로 사용될 경우 '군사적 목저의 대규모 집결 행위'를 가리킨다(삿7:23,24; 10:17; 12:1; 왕하3:21).

성 경: [삼상13:5]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 대군을 두려워하는 백성]

저자는 본절에서 블레셋 수비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습격에 대해 블레셋의 분노가 얼마나 컸고, 따라서 그 박격이 얼마나 거세었는지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11093; 병거가 삼만...마병이 육천 - 여기의 이 숫자들은 서로 잘 조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근동 지방에 있었던 고대의 전쟁에서 '병거'(chariot)의 숫자가 '마병'(horseman)의 숫자보다 많은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삼하10:18; 왕상10:26; 대하12:3). 이에 대해 혹자(Wordsworth)은 블레셋이 다른 동맥국들로부터 병거를 삯내어 빌려온 것이라고 주장하나, 당시 블레셋이 군사력이나 군사 장비에 있어 전혀 이스라엘에 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추측은 무리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병거'의 숫자 '삼만'은 필사자의 실수에 따라 과대하게 표기됐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실수가 야기된 동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원본은 1,000이었을 것이나, 필사자가 필사 중 1,000앞에 나오는 * (이스라엘)의 끝자 ('라멧'-히브리 알파벳 수치상 '30'을 나타내는 단어)을 중복 기록함으로써 30,000이란 숫자로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Thenius, De Rossi, Bunsen), (2) 원본은 3,000이었을 것이나, 필사자가 필사(筆寫)중 3,000을 나타내는 숫자 '쉘로쉐느 엘레프'(*)중 '쉰'(*, 히브리 알파벳 수치상 '300을 나타내는 단어)에 점을 두개 찍음으로써 30,000이란 숫자로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the Syriac, the arabic, Bo9chart,Houbigant, Schulz)등이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Lange). 한편, 여기의 '병거'(*, 레케브)는 보통 6개의 살이 달린 바퀴 두개가 달렸으며, 두 필의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였다. 이 수레의 대부분은 나무 및 가죽으로 이루어졌으나, 중요 부분은 청동이나 처로 장갑(裝甲)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병거의 뒷편은 열려있으나 앞면은 전사(戰士)의 보호를 위하여 어느 정도 높이까지 가리워져 있었다. 대개의 경우 이병거에는 두 사람 정도가 탔다. 그리고 '마병'(*, 파라쉼)은 B.C.1200년 경에 처음 조직된 듯하며, 그 목적은 적군에게 내달리어 좌충 우돌하며 그들의 대오를 흐트리고, 그리하여 적군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함이었다.

&#11093; 백성은...모래 같이 많더라 - 블레셋 군대의 일반 '보명'(步兵)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모래 같이'란 표현은 숫자의 많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독특한 성경적 표현이다(창13:16; 수11:4; 삿7:12; 삼하17:11).

&#11093;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 치매 - '벧아웬'(Bethaven)은 '사악한 집'이란 의미이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믹마스 동쪽 약 1.2km 지점으로 추정된다(Aharoni). 한편 호세아에서는 '하나님의 집'으로 알려진 '벧엘'(Bethel)이 우상 숭배의 장소로 타락하게 되자 경멸하는 뜻으로 '벧아웬'이라고 불려지게 됐음을 언급하고 있다(호10:5). 수7:2 주석 참조. 그리고 '믹마스'(Michmash, 2절 참조)는 후대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때,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치러가면서 많은 병참 마차를 남겨두었던 곳이었다(사10:28,29). 이같은 사실로 볼 때, 믹마스는 블레셋의 많은 군사들을 포용할 만한 넓은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여기서 '진치매'는 문자적으로 '장막을 세우다'란 뜻이다.

성 경: [삼상13:6]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 대군을 두려워하는 백성들]

&#11093;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 여기서 '위급함'(*, 차르)은 '포위공격하다', '고통당하다'에서 온 말로서, 물리적인 압박에 의하여 극도의심적(心的) 고통을 느끼고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28:15; 민 33:55; 삿11:7; 시31:9; 애1:20). 그리고 '절박하다'(*, 나가스)란 말 역시 '몰다', '내리누르다', '괴롭게 하다'란 의미로서, 곧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의 뜻에 응하여 모였으나, 블레셋의 막강한 군사력의 위용에 기가 질려 전의(戰意)를상실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11093; 굴과 수풀과 바위틈 - '굴'(cave)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흔히 발견되는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천연 동굴을 가리킨다. 후일 다윗도 사울로부터 추격을 받을 때, 이러한 굴 속에 피신한 적이 종종 있었다(24:3). 그리고 '수풀'(*, 호아흐)은 가시나무가 울창한 곳을 가리킨다(왕하14:9; 대하25:18; 아2:2). 또한 '바위틈'(crags)은 커다란 바위들 사이를 뜻한다(민24:21; 삿15:8; 사2:21).

&#11093;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 여기서 '은밀한 곳'(*, 체리아흐)은 (1)아랍어에서 온 단어로 보고,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무덤 속의 한 공간을 가리킨다는 해석(Klein), (2) 팔레스틴의 지형적 조건을 염두에 두고, 지하에 형성된 자연적인 공동(空洞)을 가리킨다는 해석(Driver), (3) 성경에 나타나는 이 단어의 다른 용례를 중시하여, 건물의 한 방을 가리킨다는 해석(삿9:46,49)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 중, 여기의 전투 장소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악(山岳)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두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웅덩이'(cistern, NIV; pit, KJV)는 말라버린 우물의 구덩이, 또는 물을 저장할 목적으로 파놓은 구덩이 등 모두를 뜻한다(R.Payne smith).

성 경: [삼상13:7]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 대군을 두려워하는 백성들]

&#11093; 어떤 히브리 사람들 - 원문은 '그리고 히브리 사람들'이란 뜻이며, '어떤(some)이란 말은 없다. 아마도 번역자가 문맥상 삽입한 것 같다. 한편 '히브리 사람'(*, 이브림-the Hebrews)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이방 민족들이 경멸조로 사용한 말인데<3절>, 여기서는 이스라엘 사람인 저자에 의해서 그 말이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저자가 여기서 일부 이스라엘 사람을 이같이 표현한 이유는 (1) 이들이 민족의 긴박한 상황을 무시한 채 요단 너머로 도피했다는 사실(Smith), (2) 또는, 추측컨데 이들이 전에 블레셋 족속의 용병으로 봉사했었다는 사실(gottwald) 중 하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문맥상 첫번째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11093; 요단 - 수4:19-24 강해, '요단강'을 참조하라.

&#11093;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 '갓'(god)은 갓 지파가 여호수아로부터 기업으로 분배받았던 땅을 가리킨다. 당시 갓 지파의 기업은 요단 동편,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지파의 기업 가운데 위치했었다(민32:1-7, 34-36; 수13:24-28). 그리고 '길르앗 땅'은 (1) 넓게는 요단 동편 지역 전체를(수22:9; 삿5:17). (2) 일반적으로는 요단 강 동쪽의 땅 중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아르논 강까지를 가리킨다. 한편 이 지역은 서쪽으로는, 해면보다 약 230m나 낮은 요단 계곡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해발 약 1,100m 이상의 산등성이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물이 많아 수목이 울창하며 목초지로도 훌륭하였다.

&#11093;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 당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위하여 백성들을 소집하면서 틀림업이 사무엘의 후원을 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제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 소집된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사무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사무엘을 기다리기 위하여 백성들이 소집될 장소로 지정된 길갈(Gilgal)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분명 사울은 그때 블레셋을 격파한 미스바 전투(7:7-11)를 생각하면서, 이번 전쟁에서도 사무엘의 도움이 자신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3:8]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범죄]

&#11093; 사무엘의 정한 기한...이레 -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10:8과 연관시켜 생각한다(Keil, Fay, Smith). 즉 사울은 10:8의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길갈에서 사무엘을 '이레'동안 기다렸어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10:8과 본절 사이에 전개된 많은 사건들, 즉 사울이 왕으로 공식 소개된 사건(10:27-24), 암몬 군대를 결파한 사건(11:1-11), 사무엘의 길갈 메시지(12:1-25), 사울과요나단의 블레셋 수비대 공격(13:1-4) 등의 사건들을 매우 신속히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로 이해하여 시간상의 난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10:8에서의 사무엘의 명령은 오히려 11:14-12:25의기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서 11:14-12:25에는, 사무엘이 10:8에서 언급한 주요 사항인 화목제와 사무엘의 훈계등이 확실히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1:15에는 10:8에서 언급된 제사 중 번제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직 화목제만이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번제는 화목제가 드려질 때 필연적으로 함께 드려진다는 점에서(1:24), 11:15에서 언급이 생략된 듯하다. 더구나 2년이나 지나서<1절> 시행될 일을 10:8에서 미리 지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타당치 못하다. 따라서 여기의 '사무엘의 정한 기간'은 본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사울이 군사 행동을 개시하기 전이나 혹은 군사 행동을 개시한 후 백성들을 소집하면서 사무엘과 사울 간에 약속된 또다른 기간으로 봄이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서무엘은 그대 일주일 후 길갈로 내려갈 것을 사울에게 약속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여기서 '정한'이라는 말은 히브리 본문에는 없고, 다만 칠십인역(LXX)과 갈대아역(The Chaldee)의 영항을 받은 번역자의 삽입일 뿐이다. 아무튼 여기서의 핵심은 이러한 연대순의 문제가 아니라, 사울이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아니했다는 것과, 따라서 사무엘의 제사장적 권위가 무시되어 결국 사울이 하나님께 망령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11093;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 혹자(Edelkoort)는 여기서 사울이 사무엘과 약속한 이레(7일)는 기다렸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한 잘못은 없고 다만 사무엘의 제사장적 기능을 침범한 잘못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사무엘이 약속된 이레의 마지막 날이 완전히 지나도록 길갈에 오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울이 사무엘과의 약속을 어긴 채 자신의 손으로 제사를 드린 그 시점을 기준으로 할때 사무엘이 오지 않았음을 가리킨다(10절).

&#11093; 백성이...흩어지는지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 전투(7:7-11)에서 사무엘의 집전으로 번제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블레셋 족속들에게 나타나 크게 승리할 수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7:10,11>. 이러한 그들에게, 사무엘이 약속한 날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한 블레셋(5절)으로 인한 두려움을 가증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됐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3:9]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범죄]

&#11093; 사울이...번제를 드렸더니 - 이것은 사울이 자신이 직접 제사장의 역할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smith). 그때 이 제사는 엘리의 증손자 아히멜렉에 의해서 시행되었을 것이다(21:1' 22:9,16). 따라서 사울이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다만 그때의 제사 성격상 반드시 사무엘에 의해 드려져야만 했었을 제사를(7:9) 사무엘 외에 다른 사람이 대충 드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여호와의 선지자의 권위를 경솔히 취급했다는 뜻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망령된 일(13절)과 다름 없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번제'(*, 올라)와 '화목제'(*, 쉘라밈) 앞에 각각 정관사 '하'(*, the)가 붙어있는데, 이것은 사무엘이 드리도록 되어 있는 '그'제사를 가리킨다(R.Payne Smith).

성 경: [삼상13:10]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범죄]

&#11093; 필하자...온지라 - 이 말은 그때 사울의 제사드린 행동이 지극히 성급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즉 이 말은 사울이 제사를 드린 때가 사무엘이 오기로 약정된 그 날이 저물기 훨씬 전이었음을 강력히 사시한다(Goslinga). 그러므로 그때 사울은 사무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 날이 저물 때까지 온전히 사무엘을 기다렸어야만 옳았다.

&#11093; 사울이...문안하매 - 여기서 '문안하다'(*, 바라크)란 말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찬송하다'(시34:1; 106:48), 그리고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축복하다'(2:20;시129:8)의 뜻으로 사용되는, 엄숙한 의식적(儀式的) 단어이다. 따라서 사울의 이같은 인사는 당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을 두렵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성 경: [삼상13:11,12]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범죄]

본문은 사무엘의 도착 전에 제사를 드렸던 사울이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라는 사무엘의 질책 섞인 질문에 국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부분이다. 그 변명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즉 (1) 이스라엘 군사들의 흩어짐, (2) 사무엘의 도착 지연,(3) 블레셋 군대의 공격 가능성 등이다. 결국 사울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부득이 자신이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울의 변명은 결국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과 사무엘과 하나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못한 불순종의 결과에 다름아니었다. 진정 사울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누구 보다도 큰 전쟁에 임하기 전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려야만 했고, 그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해야만 옳았다.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순종과 믿음의 시험에 실패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입증시키고 말았다.

&#11093;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 이것은 '여호와의 얼굴을 뵙지 못하였다'라는 문자적 의미를 의역한 것이다(출32:11; 렘26:19). 결국 사울은 그때 자신의 주도 하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블레셋과의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려 하였던 것이다. 사실 희생 제사는 성전(聖戰)에 앞서 항상 드려졌으며(7:9), 이 같이 한 증용한 이유중의 하나는 그 성전의 신적 합법성을 하나님께로부터 승인받기 위함이었다(7:9;14:8-10,37; 23:2,9-12; 28:6; 30:7,8; 삿20:23,27; 삼하5:19,23).

성 경: [삼상13:13]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범죄]

&#11093;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 여기서 '망령되다'(*, 사칼)란 말은 '어리석다', '악하다'란 의미로서, 곧 매우 어리석고도 사악한 범죄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성경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침범한 범죄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11093; 왕이...여호와...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 여기서 '명령'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어떤 율법 규저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왕 사울 자신이 지켜야 했던 직무의 한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때 사울은 성전(聖戰)의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의 절대적 지도를 받아야 했다. 이것이 성전(Holy Wor)의 원리였다. 그러나 사울은 급박한 상황을 이유로 들어(11,12절) 이같은 원리를 지키지 않았고, 바로 그것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무시한 사울의 망령된 범죄 행위였던 것이다.

&#11093;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 이것은 사울 왕조가 조건적이었던 사실을보여 주고 있다(12:25). 즉 사울은 여호와를 향한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자신의 왕권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3:14]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범죄]

&#11093;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 여기의 이 말은 사울의 왕권이 그의 생전에 취소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Keil). 이것은다만 사울의 왕권이 그의 당대에서 끝날 것이라는 뜻이다(13절). 한편 사울의 왕권이 그가 죽기 전에 취소될 것이라는 선언은 그의 결정적인 두번째 실수(15:9,15) 뒤에 나타난다(15:17-23). 혹자는 여기서 사울의 첫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생생한 경고(8:10-18)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 제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깨닫고 실천해야만 했다. 즉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열방과 같은 왕(8:5,20)이 되어서는 결코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요구대로 그 뜻을 구현하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블레셋과의 대전투라는 중요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권'을 성결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울의 거역 행위를 엄히 문책하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결코 불변적이고 결정정인 것이 아니었다. 즉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에라도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진정 뉘우치고 회개했더라면, 그는 자신의 왕권을 훨씬 오래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왕하20:1,6). 그러나 징벌을 받은 후 사울은 더욱 강퍅케 되어, 결국 스스로 자신의 왕권을 단축시키고 만 셈이 되었던 것이다(15:26). 그러기에 미리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대신할, 마음에 맞는 한 인물을 준비하셨는데, 이같은 모든 신적 섭리의 배후에는 다만 역사를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예정(豫定), 그리고 전지성(全知性)이 깃들어 있을 뿐이다.

&#11093; 그 마음에 맞는 사람 - 이것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열방과 같은 왕'(8:5)과는 날카롭게 대조되는 말이다. 또한 이것은 사울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왕권이 신적(神的) 기원을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여기의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다윗을 가리킨다(16:12,13' 행13:22).

&#11093; 구하여(*, 바카쉬) - 이 단어는 '살피다', '찾다'의 뜻으로서, 자신에게 꼭필요란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 헤매는 것을 가리킨다(대하15:15; 시54:3; 전12:10; 렘5:1; 호2:7,9).

&#11093;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으니라 - 여기의 '지도자'(*, 나기드)는 '족장', '두령'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직접적으로 왕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그를 대신하는 다윗에게도 이 단어가 역시 적용되었을 것이다. 한편, '삼으셨느니라'(*, 차와)는 '임명하다','명령하다', '위탁하다'란 의미이다(Davidson).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의중에는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로 작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다윗은 사울이 죽을 때 23세였으므로, 그는 이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혹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였을 것이다.

성 경: [삼상13:15]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과의 교전(交戰) 준비]

&#11093; 사무엘이...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 '베냐민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 '기브아'로서(10:26), '사울의 기브아'(11:4)라고도 하는데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였다. 사무엘은 그때 (1) 백성들을 격려하고, (2)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한 조언을 하며, (3) 자신의 신변에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특히 위의 세번째 목적은, 블레셋의 군대 중 벧호론 길로 향한 한 대(隊)가 그 지경에 있는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위협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다(18절).

&#11093; 함께 한 백성...육백 명 - 여기의 '육백 명'은 원래 사울과 함께 했던 '이천 명'(2절)에 비하여 훨씬 적은 숫자이다. 이것은 결국 인본주의적 생각에 근거한 사울의 성급한 제사가 전혀 실효를 나타내지 못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8,9절).

성 경: [삼상13:16]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과의 교전(交戰) 준비]

&#11093; 사울...요나단...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 여기서 '베냐민 게바'는 원래 블레셋의 수비대가 주둔하던 곳이었으나, 요나단의 군대에 의해 정복되었다(3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언급된 것을 볼 때, 사울은 자신의 부대를 '길갈'(Gilgal)로부터 이동시켜 '게바'(Geba)에 주둔하고 있던 요나단의 부대와 합쳤음이 분명하다<2절>. 한편, 이곳 게바는 블레셋의 진(陳)이 있는 믹마스와는 그곳으로 통해 있는 협곡(峽谷) 길로 약 2km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바로 이같은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사울과 요나단의 소부대는 블레셋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3:17]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과의 교전(交戰) 준비]

&#11093; 노략군들(*, 마쉐히트) - 이 단어는 '망쳐놓다', '파괴하다'란 뜻을 갖는 동사(*, 솨하트)에서 왔으며, 원래 상대 국가의 농작물. 과수(果樹)등을 파헤쳐 버리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선봉대를 가리킨다(신20:19; 삿6:4). 그러나 여기서는 상대의 진(陳)을 돌파. 파괴하여 상대의 사기를 꺽는 역할을 담당하는 막강한 기병(騎兵) 편대로 이해함이 타당한 듯하다(Lange).

&#11093; 삼 대로...진에서 나와서 - 블레셋 사람들의 이같은 전법(戰法)은 자신들의 막강한 군사력(5절)으로 이스라엘 전국토를 단시일 내에 유린하여 정복하고 말겠다는 그들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한다.

&#11093; 오브라 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 '오브라'(Ophrah)는 벧엘 북동쪽 약 7km 지점에 위치했으며, 그 지명의 의미는 '엶은 황갈색'이란 뜻이다(수18:23). 그리고 그곳은 원추 모양의 산지(山地)로 형성되었다. 한편 '수알 땅'의 '수알'(Shual)은 '여우'라는 뜻이며, 그 땅은 오브리 약간 못미쳐에 있는 넒은 지경을 가리키는 듯하다(Aharoni). 그런데 보통 그곳은 사울이 부친의 암나귀를 찾기 위해 헤매던 지역 중의 하나인 '사알림'과 동일 지역으로 여겨진다(9:4). 결국 그때 블레셋의 제 1부대는 자신들의 진영이 있는 믹마스에서 북쪽으로 향해 진격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3:18]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과의 교전(交戰) 준비]

&#11093;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 '벧호론'(Bethhoron)은 '동굴의 집'이란 뜻이다(수10:10 주석 참조). 이곳은 믹마스 서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했으며, 성경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윗 벧호론'과 동일 지역이다(수16:5). 그리고 이곳은 해발 약 600m의고지이다(수10:11). 한편 이때 이 길로 향한 블레셋의 제 2부대에 의하여 사무엘의 고향 '라마'는 많은 피해를 입엇을 것으로 추측된다.

&#11093; 한 대는 광야를 향한 - 블레셋의 제3부대는 믹마스에서 남쪽으로 향했는데, 이때 이들이 향한 여기는 '광야'는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유대 광야의 북부인 듯하다.

&#11093;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지경길 - '스보임 골짜기'(the Valley of Zeboim)는 베냐민 땅으로서, 예루살렘 북동쪽을 가리킨다(느11:34).

성 경: [삼상13:19]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과의 교전(交戰) 준비]

&#11093; 때에...철공이 없어졌으니 -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애굽에 거주할 때부터 쇠를 다루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신4:20). 또한 이스라엘 땅에는 많은 철광석이 묻혀 있었다(신8:9). 따라서 그들에게는 발달된 수준은 아니었겠지만, 어느 정도의 철기(鐵器)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레셋의 압제하에 있던 기간 동안(13:1).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철독점 정책에 의하여 농기구 이외에는 철 제품을 소유할 수 없었고, 아울러 무기를 만들 만한 철공(鐵工)도 없었다.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철공'은 블레셋인들이 침공했을 때 그들에 의해 납치되어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이같은 일들은 고대 국가에서 승전국이 패전국에 대하여 취하는 일련의 정략적 조치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흔했었다(왕하24:14-16).

&#11093; 히브리 사람 - 여기서도 '히브리 사람'(the Hebrews)이란 이 명칭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경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3:20,21]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브레셋과의 교전(交戰) 준비]

본문은 당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신들에게 예속시키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한편 연장을 벼리려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는 것도 그들과 평화할 때나 가능하였지, 전시에는 그나마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11093; 보습(*, 마하레쉐트) - 날이 있는 절단용 도구를 가리킨다.

&#11093; 벼리려면 - '날카롭게 하다'란 의미이다(창4:22; 욥16:9; 시7:12; 52:2). 한편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그당시 농기구 하나를 날카롭게 벼리는 삯이 약 2/3세겔(Shekel)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Lane). 한편, 한 세겔은 약 은 11.4g이다(Vo.1.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p.39).

성 경: [삼상13:23]

주제1: [사울의 첫번째 실패]

주제2: [블레셋과의 교전(交戰) 준비]

&#11093; 블레셋 사람의 부대 - 이 부대는 이미 세 방향으로 진격해 간 병력들이 아니라 본대(本隊)의 병력이었다. 이처럼 블레셋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병력을 3대로 나누어 보내고도(17.18절) 나머지 병력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쳐부술 자신을 가질 만큼, 다시 그들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숫적으로나, 무기면으로나, 조직면으로 얕보고 우습게 여겼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방심이 요나단에게 허(虛)를 찔리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14:6-15).

&#11093; 믹마스 어귀에 이르렀더라 - '어귀(*, 마이바르)는 특정한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을 뜻한다. 당시 블레셋 군대는 자기들의 본진이 있던 믹마스에서 요단 계곡으로 통하는 현재의 와디 에스 수웨이니트(wadi es Suweinit)의 골짜기를 따라 약 1km정도 내려와 보세스 강 근처에서 멈춘 후, 그들이 따라 내려온 골짜기의 왼편에 있는 '보세스'(Bozez)라는 산등성이로 올라간 듯하다(14:4). 블레셋 군대는 그같이 함으로써 사울의 군대와 접전할 경우 유리한 전략적 위치를 선점(先占)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성 경: [삼상14:1]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출범]

&#11093; 하루는 - 여기서 '하루(*, 하욤)는 문자적으로는 '그 날'(the day)이라는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믹마스 어귀에 자신들의 파수대를 세운 바로그 날을 뜻하지 않는다(13:23). 다만 블레섯 군대가 게바로 통하는 믹마스 어귀 절벽에 파수대를 세운 뒤 불과 얼마나 지난 어떤 하루를 가리킨다.

&#11093; 병기를 든 소년 - 본장의 전체 내용을 볼 때 여기서 '병기든 소년'은 단순히 비서직 그 이상의 역할을 담당한 신분이었던 것 같다(Klein). 한편 '병기를 든 자'(the youngman that bare one's armour)는 아비멜렉(삿9:54), 기드온(삿7:10), 심지어는 요압(삼하18:15; 23:37)에서도 있었다. 그리고 소년 시절 다윗도 사울의 '병기를 든 자'로 선택되었었다(16:21). 이처럼 다윗 같은 유능한 인물이 그와 같은 신분에 뽑혔다는 사실을 볼 때, '병기를 든 자'는 왕이나 군대 장관의 수하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11093;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 - 이때 사울과 요나단의 부대는 믹마스에서부터 뻗어내려오는 협곡에서 약 1.5km 떨어진 게바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여기의 '건너편'은 블레셋의 수비대가 자리잡고 있는 믹마스 어귀의 보세스 고지를 뜻한다(4절; 13:23).

&#11093; 건너가자 - 이는 협곡(峽谷-현재의 Wady es Suweinit)의 게바쪽 고지 즉 '세네'에서, 협곡을 가운데 둔 반대쪽 고지 즉 '보세스'로 넘어가는 것을 뜻한다<4절>. 그러므로 이같은 행동을 하기 앞서 요나단과 그의 병기를 든 자는 게바에서 세네까지 약 1.5km를 걸어 왔어야 했다.

&#11093;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 요나단이 이같이 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1)사울의 소심한 성격상 블레셋에 대한 요나단의 공격을 용인치 않을것이 분명하였으며(F.R.Fay), (2) 기습 작전의 성공을 위한 비밀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R. Payne Smith).

성 경: [삼상14: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출병(出兵)]

&#11093; 사울이...머물렀고 - 여기서 '머물렀고'(*, 야솨브)라는 단어는 '거하다', `앉다'의 뜻으로서, 성경에서는 주로 직분의 수행을 위해서 앉아있는 행동을 가리킬 때사용된다(1:9; 신17:18; 왕상1:35,46; 2:12; 왕하2:15).

&#11093; 기브아 변경 미그론 - 여기 '변경'(*, 비크체)은 특정 지역의 끝부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욥28:24; 시19:6; 사40:28). 또한 '미그론'(*)은 '절벽'이란 뜻으로(Thenius). 산악 지대의 지형상 흔히 발견되는 이름이다(smith). 그런데 여기서의 '미그론'(Migron)은 기아브 북쪽 변경, 믹마스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믹마스 북쪽에 위치한 '미그론'과는 구별된다(사10:28).

&#11093; 석류나무 - 히브리어로 '림몬'(*)이다. 따라서 혹자들은 이 말을 믹마스북동쪽에 있는 '림몬 바위'(the rock Rimmon)를 기리키는 고유 명사로 해석한다(삿20:45,47). 그러나 그 위치상 이곳은 기브아 최북단, 믹마스의 남쪽 미그론에 있는 유명한 '석류나무'(the pomegranate tree)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봄이 타당하다(Keil).

&#11093;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 이것은 사울의 군사적 형편이 블레셋의 대군에 비해(13:5) 어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저자의 의도에 따른 언급인 듯하다<13:15>. 또한 저자가 여기서 이같은 언급을 한 중요한 이유는, 뒤이어 나올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승리(31절)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따른 것임을 보여 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14: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출병(出兵)]

&#11093; 아히야 - 여기서 '아히야'(*, Ahijah)는 '여호와의 형제'라는 뜻이다. 이사람은 보통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ahimelech, 22:9)과 동일시 된다(Keil). 즉 이같이 보는 사람들은, 아히야의 본명은 아히멜렉(*, '왕의 형제')이었으나, 이 이름이 가나안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므로 바꿨다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아히야와 아히멜렉을 형제 관계로 보기도 한다(klein).

&#11093; 에봇을 입고 - '에봇'(*, Ephod)은 대제사장들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레16:4)와 하나님께 특별한 뜻을 물을 때 착용했던 특수한 제의적(祭儀的) 의복이었다(출28:6-14). 따라서 '에봇을 입고 있었으니'라는 말은 아히야가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고 왕의 옆에 함께 있는 것은 사울이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출28:30>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레8:8). 이같이 왕들이 신의 뜻을 묻기 위해 제사장을 옆에 두는 일은 성경 외적 문헌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자신의 왕권(王權) 과시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Klein).

&#11093; 거기 있었으니 - 이 말은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변역자가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삽입한 것임이 분명하다.

&#11093;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 - 여기서 '이가봇'(Ichabod)은 대제사장 엘리(Eli, 1:3)의 아들 비느하스의 소생이었다(4:19-22). 그런데 성경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으면서 죽었다고 했으므로, 여기의 '형제'는 형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한편 '아히둡'(*)은 '형제는 선하다'란 의미이다.

성 경: [삼상14: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출병(出兵)]

&#11093; 어귀 사이 - '어귀 사이'는 블레셋 군대의 주둔지인 믹마스로 통하는 협곡의 양편을 가리킨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의 '사이'(*, 벤)는 '-과 -의 사이'를 뜻하지만, 때때로 '-의 양편'이란 의미를 갖기도 하기 때문이다(Davidson).

&#11093; 보세스 - '빛나다', 또는 '미끄럽다'란 의미이다.

&#11093; 세네 - '아카시아', 또는 '가시'란 뜻이다. 이러한 이름의 뜻은 다시 블레셋의 주둔지인 믹마스로 뻗어있는 주변 지형이 가파르고 뾰족한 바위와 절벽으로 형성된 험준한 산악 지대임을 보여 준다(Conder, Robinson).

성 경: [삼상14: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출병(出兵)]

&#11093; 북에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 이것은 '보세스'(Bozez)에 대한 지형적 설명이다(4절).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그 의미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북에서부터 뻗어서 믹마스 맞은 편에 있다'로 번역함이 좋을 것이다.

&#11093; 남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 이것은 '남에서부터 뻗어서 게바 맞은 편에 있다'로 번역함이 좋다. 결국 위의 두 큰 바위 절벽은 협곡을 가운데 두고 마주 서있었다.

성 경: [삼상14: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11093; 할례 없는 자들 - 이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선민 신앙(選民信仰)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할례'(割禮), circumcision)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징표였기 때문에(창17:10), 할례가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결국 요나단의 이같은 말은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는 말인 것이다(17:26,36). 그리고 이같은 사상에 근거하여 삼손과 사울은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게 됨을 매우 불명예스럽게 여겼던 것이다(삿15:18; 삼상31:4). 한편,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포경(包莖) 수술을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성서 고고학자들이 므깃도에게 발견한 바 블레셋 족속의 전사(戰士)들이 그려진 그림에는, 그들에게 표피가 없었다(Strobel). 또한 고대 블레셋 땅 게셀에서 발견된 실물 크기의 남근상(男根像)도 포경 수술을 받은 모양이었다(Derver). 따라서 '할례 없는 자들' 이라는 요나단의 말은 외형적 수술 여부와 별 상관없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은 이방 민족임을 강조하려는 것었이다. 창17:1-14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를 참조하라.

&#11093; 여호와께서...일하실까 하노라 - 원문에는 '혹시'(*, 울라이)라는 단어가있어서 요나단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은 양 보인다(창32:20).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정녕', '필시'라는 뜻의 소망과 확신의 의미도 있는 말로서, 역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수14:12). 진정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는 용사되심을 믿었던 것이다.

&#11093; 여호와의 구원은...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승리의 관건은 수효의 다소(多少)나 군사력의 우열(優劣)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여하에 있음을 믿는 요나단의 신앙 고백이다. 이러한 신앙은 기드온(삿7:4,15), 다윗(17:47), 솔로몬(전9:11), 이사(대하14:11), 히스기야(대하32:7,8)의 신앙과도 상통한다.

성 경: [삼상14: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11093; 병기 든 자 - 1절 주석 참조.

&#11093; 앞서 가소서 -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살리고 있다. 한편, 원어 '네테 라크'(*)에 대한 문자적인 번역은 '기우는대로 행하소서'이다.

성 경: [삼상14: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여기서는 요나단이 블레셋의 진영으로 가려는 일차적 목적이 언급되고 있다.

&#11093; 보이리니 - 이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노출시킴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요나단이 블레셋에 대하여 기습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삼상14:9,10]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11093; 만일...하면...표징이 되리라 - 본문에는 두 가지 경우에 따른 블레셋 사람의 반응으로 표징(表徵, sign)을 삼고자 한 요나단의 작전이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요나단이, 이같은 생각을 한 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키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다만 요나단은 이와 같이 함으로써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했던 것이다. 즉 그때 요나단은 첫째,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에게로 내려오겠다고 하는 경우(9절) 둘째,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으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올라오도록 하는 경우(10절)의 두 가지 중 둘째 경우를 하나님께서 그 전투를 기뻐하신다는 징조로 삼으려고 하였다. 여기서 요나단이 둘째 경우를 긍정적인 표징으로 본 까닭은,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을 자신들에게 올라오도록 용인한다는 것은 곧 블레셋 사람들이 전투에서 승리하려는 적극적인 의욕의 결여를 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Keil, Fay). 그러므로 요나단은 블레셋 족속들이 자신을 보고 둘째의 경우와 같은 반응을 보일 때,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큰 전과를 올릴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전에 사사 기드온도 이와 비슷한 표징을 통하여 승리의 확신을 얻은 바가 있다(삿7:9-15).

&#11093; 여호와께서...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성전(聖戰, the Holy War)의 특색을 잘 나타내 주는 전형적 술어이다.(VonRad, 수6:2; 8:1,7; 10:8,12,19; 삿11:30,32; 12:3). 한편 여기서 '붙이다'(*,나탄)는 '주다', '두다'의 뜻으로서, 어떤 사물을 특정인에게 완전히 위임하는 것을 가리킨다(창39:4,8; 삼하14:7; 20:21).

성 경: [삼상14:11]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11093; 둘이 다...보이매 - 그때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는 세네 바위를 넘고 협곡을 건너 이미 보세스 바위 아래에 도착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보세스 바위 밑어느 곳에 자신들을 은폐시키고 있다가 표징을 구하고자(10절) 자신들을 노출시킴으로써, 보세스 바위 위의 블레셋 사람들에게 목격된 듯하다.

&#11093; 히브리 사람 - 13:3 주석 참조.

&#11093;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 원문에는 여기의 '구멍'(*, 호르)에 정관사'하'(*)가 붙어있다는 점에서, 이 '구멍'은 요나단 일행이 잠시 은신하기 위해 작전상 파놓은 구멍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요나단 일행은 이 은신처에서 과감히 나옴으로써, 자신들의 일차적 목적대로(8절) 적에게 목격될 수 있었다.

성 경: [삼상14:1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11093;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일행의 용기를 모욕하고 그들을 지극히 우습게 보았음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이같은 블레셋 군인들의 반응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나태해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따라서 요나단은 이 응답을 접하면서 블레셋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였을 것이다(9,10절).

&#11093; 한 일을 보이리라 - 문자적으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주겠다'란 뜻이다. 한편, 여기서 '한 일'(*, 다바르)은 블레셋 군대의 무력적인 힘을 뜻한다.

성 경: [삼상14:1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11093;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 보세스의 고지는 거의 절벽에 가깝다고 한다(Lange). 따라서 요나단은 이같은 방식으로 가파른 그곳을 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1093; 블레셋 사람들이...엎드러지매 -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요나단의 민첩한 공격에 따른 것이었다(LXX).

&#11093; 병기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 여기서 '죽였으니'(*, 메모테트)는 다시 살지 못하도록 완전히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Lange, 창7:22; 신22:24; 왕하8:10). 따라서 병기 든 자는 요나단에 의해 부상당한 자를 뒤따르면서 즉이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성 경: [삼상14:1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11093; 반일경 지단 안에서 - 고대 중근동에서는 황소 두 마리가 하루에 보통 밭을 갈 수있는 분량인 약 1에이커(1에이커=약 4km )를 밭의 면적을 계산하는 단위로 삼았었다(Driver). 따라서 '반일경 지단'은 대략 1/2에이커의 땅(an half acre of land, KJV)을 뜻한다. 여기서 '지단'(地段)은 단지 '땅'이란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위의 언급이 블레셋에 대한 요나단의 공격이 반나절 걸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때 요나단은 단시간 내에 블레셋 수비대에 대한 공격을 완료했을 것이다.

&#11093; 처음으로 도륙한 자 - 여기서 '처음으로'는 본서 저자가 20절 이하에 언급된 블레셋의 수비대는 요나단 일행이 그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가와 졸지에 습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마냥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요나단 일행의 공격에 당황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바빴던 것이다(Keil, Smith).

성 경: [삼상14:1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11093; 들에 있는 진 - 여기서 '들'(*, 사데)은 넓은 벌판을 가리킨다. 따라서 '들에 있는 진'은 블레셋 본국의 사령부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실 '사데'라는 단어는 블레셋 지역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였다(6:1).

&#11093; 모든 백성 - 군인과 대조되는 일반 블레셋 백성들을 가리킨다.

&#11093; 떨림이 일어났고 - 여기서 '떨림'(*, 하드라)은 심리적인 현사으로서 극도의 공포심(panic)을 뜻한다(NIV, RSV).

&#11093; 부대와 노략군들 - '부대'(*, 하마차브)는 당시 믹마스에 주둔하고 있던블레셋의 본대를 가리킨다<13:16>. 한편, '노략군들'은 삼 대(三隊)로 나뉘어 이스레엘의 여러곳을 유린키 위해 떠났던 블레셋의 부대들이다<13:17,18>.

&#11093; 땅도 진동하였으니 - 이것은 '지진'(earthquake, Living Bible)을 가리킨다. 비록 '진동하였으니'(*, 티르가즈)란 말이 때로 심리적인 격동을 뜻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지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삼하22:8; 시18:7; 77:18; 사5:25). 또한 지진은 공포와 함께 성전(聖戰)이 있을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11093;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 원문에는 '하나님의 큰 떨림이었더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블레셋에 임한 공포와 지진의 재앙이 하나님에 의해 니려진 것임을 강조한다.

성 경: [삼상14:1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11093; 베냐민 기브아 - 즉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란 뜻으로, 이곳은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가리키며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사울의 통치 거점이었다(10:26; 13:2).

&#11093; 파숫군이 바라본즉 - 이때 '파숫군'은 약 1.5km 떨어져 있는 믹마스의 블레셋 본진(本陳)을 관찰한 듯하다. 물론 이때 파숫군은 블레셋 진(陳)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아우성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11093;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 여기서 '무너져(*, 나모그)는 문자적으로는'녹아내리다'란 뜻이다. 곧 이는 극도의 공포로 인해 용기를 잃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상태를 나타낸다.

&#11093;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일행의 예상치 못한 공격과 수비대의 패주 소식을 듣고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이다.

성 경: [삼상14:1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이때 사울은 블레셋 진(陳)의 혼란이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의 이스라엘 병사들에 의해 일어나게 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블레셋의 진을 공격한 병사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점호(點呼)를 실시하게 하였다.

&#11093; 점고하여 보라 - 여기에서 '점고(點考)하다'(*, 파카드)란 말은 '계수하다(number, KJV; 11:8; 13:15; 민1:20,22; 대상23:24), '점호하다'(공동번역), '소집하다'(muster, NIV)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14:1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11093; 하나님의 궤를...가져오라 -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은 이처럼 '하나님의 궤'(*, the ark of God)로 되어 있으나, 칠십인역(LXX)은 '에봇(*, ephod)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칠십인역의 표기를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Keil, Smith).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가져오라'(*, 하기솨)라는 말은 성경 용례상 언약궤와 관련하여 사용된 적이 전혀 없으나, '에봇'과 관련해서는 몇 회 사용된 단어이다(23:9; 30:7). (2) 사울은 그때 자신의 아들 요나단의 안전 여부를 대제사장의 에봇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께 물으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22:10). (3) 그 당시 언약궤를 전장(戰場)에 가져갔다가 패배했던 아벡 전투(4:5-11)에 대해서 능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1093; 하나님의 궤가...함께 있음이라 - 이것은 '하나님의 궤를...가져오라'는 앞의 문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필사자의 가필(加筆)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R.Payne Smith). 따라서 물론 칠십인역에는 본 문구가 없다.

성 경: [삼상14:19]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11093;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 사울은 블레셋 진에서 벌어진 이같은 상황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물론 사울은 이때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 대한 염려를 모두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11093; 네 손을 거두라 - 이것은 사울이, 요나단의 안전 여부 및 블레셋의 진으로 공격해 들어가야 할 당위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묻기를 포기했음을 시사해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의 변덕스런 신앙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즉 사울은 전쟁의 작전 수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으려 하다가(18절), 전세(戰勢)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돌연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취소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삼상14:20]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11093; 사울과...모든 백성이 모여 - 여기서 '모여'(*, 자아크)는 원래 '고함을 치다', '소리를 지르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수동형으로 사용될 때는 '소집하다'란 뜻으로 봄이 타당하다(수8:16; 삿6:34,35). 한편 '함께한...백성'은 사울과 길갈에서부터 동행했던 육백 명(13:15)과 요나단의 수하에 있던 병력 일천 명(13:2)을 합한 숫자를 가리킨다.

&#11093; 블레셋 사람이...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 이같은 기묘한 상황은 기드온의 소수 병력이 미디안을 대항해 싸울 때에도 벌어졌었다(삿7:22).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심으로써, 자기들끼리 피차 싸우다 자멸(自滅)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결국 이같은 상황은, 모든 전쟁을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신 결과였으며, 요나단의 신앙적 용기와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였다.

&#11093; 크게 혼란하였더라 - 이같은 적군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의 모습은 대적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가 결정적임을 보여줄 때 종종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5:9,11; 7:10;출14:24; 신7:23; 겔38:21).

성 경: [삼상14:21]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11093; 블레셋 사람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 - 이들은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 편성되어 블레셋을 위하여 싸우던 용병(傭兵) 내지는 징용군(徵用軍)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한때 분명히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의 군대로 편성된 데에는, 이스라엘 영토의 많은 부분이 블레셋의 지배를 오래도록 받았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여기의 '히브리 사람'(*, 이브림)은 타민족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여지던 모멸적 의미의 명칭이었다<13:3>. 따라서 그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출신의 군민들을 바로 이 '히브리 사람'(the Hebrews)이라는 명칭으로 불렀을 것이다(Keil).

&#11093; 사방에서...진에 들어왔더니 - 이것은 이스라엘 출신의 용병(혹은 징용군)들이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자신들의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도록 강제로 동원되었음을 강력히시사해 준다.

&#11093; 그들이 돌이켜...합하였고 -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돌이켜'라는 말이 없다. 다만 이는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이다(the Chaldee, LXX,the Vulgate, the Syriac).

&#11093; 이스라엘 사람 - 이는 본절 앞부분의 '히브리 사람'과 대조된다. 즉 여기서 저자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 백성의 거룩성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이 사실로 볼 때 위의 '히브리 사람'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을 위해 봉사했다는 전력(前歷) 때문에 본서 저자에 의해서도 경멸적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R.Payne Smith).

성 경: [삼상14:2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11093;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사람 - '에브라임 산지'(hill country of Ephraim)는 팔레스틴 중부의 구릉 지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곳에는 베냐민 지파 사람도 거주했으나(수18:11), 여기서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지역만을 가리킨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에브라임 산지의 베냐민 지파 거주 지역은 사울의 군대로 인하여 그리 불리한 전황(戰況)만은 아니었고, 따라서 베냐민 사람들의 대부분은 숨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13:6).

성 경: [삼상14:2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본절은 그날 블레셋과의 믹마스 전투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인하였으며, 또한 완전하였음을 강조한다.

&#11093;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 '벧아웬'(bethaven)은 믹마스 서쪽 약 1.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13:5 주석 참조). 본서 저자가 여기서 '벧아웬'을 언급한 이유는, 13:5에서 블레셋 족속의 군대가 주둔했던 믹마스를 '벧아웬 동편'이라고 소개했던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여기서는 '벧아웬을 지나니라'라고 언급함으로써 믹마스에 주둔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제 자신들의 본국 방향인 서쪽으로 패주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Bunsen; 31절). 한편, 여기서 '지나니라'(*, 오브라)라는 말은 '넘어가다'(passed over, KJV), '계속되다'(continued out, Living Bible)란 뜻으로서, 곧 전쟁이 벧아웬 너머까지 계속 진행된 상태를 보여 주는 말이다(the battle moved onbeyond Beth Aven, NIV).

성 경: [삼상14:2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11093; 이 날에...백성이 피곤하였으니 - 여기서 '피곤하였으니'(*, 니가스)는 원래 '독촉하다', '압제하다'란 뜻이다. 여기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곤욕을 당하다', '괴로움을 받다'란 의미이다(13:6; 사53:7).

&#11093; 이는 사울이...맹세시켜 경계하여 - '이는'은 본절 첫 부분의 내용, 즉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구절을 이끄는 상관 접속사이다. 한편, '맹세시켜 경계하여'(*, 요엘)는 (1) '-라고 맹세하기를 강요하여', (2)'어리석게 행동하여'등 두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잇다. 그리고 본 문구 이하는 사울이 백성들에게 맹세하기를 강요한 내용이다.

&#11093;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 사울의 이같은 말은, 태양이 질 때까지 원수를 무찌르겠다고 했던 여호수아의 결심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수10:13). 따라서 이 말은 블레셋을 완전 섬멸시키겠다는 사울의 결심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 맹세는 여호수아의 경우와는 달리 여호와를 위한 진정한 충정과 신앙에서 비롯된 열성은 아니였다. 다만 사울이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드높이기 위해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그대로 밀어부친 독선적 횡포에 불과했다(Kiel, Fay). 따라서, 결국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여러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으며, 전쟁에 이기고도 백성들의 신임을 잃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울의 이러한 맹세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열정이 가져다 주는 폐단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11093;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 구약 성경에서 성행위를 절제하는 것(21:5), 잠을 줄이는 것(시132:3,4), 그리고 희생 제사를 드리기로 서원하는 것(삿11:30,31) 등은 용사들이 전쟁에서 필승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취했던 행동으로 언급되고 있다(Klein). 따라서 그때 사울은 이겻들과 유사한 형식으로, 자신의 헌신적 자세를 표명키 위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군(全軍)에게 금식령을 내린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군사들로 하여금 금식하도록 한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 전투를 속전 속결로 끝내기 위함이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격전을 치뤘으며, 블레셋을 쫓아 먼 거리를 행군했기 때문에 매우 허기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사울은 이러한 군사들의 상황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공명심을 채우기위해 경솔한 맹세를 발했던 것이다.

&#11093;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 이것은 사울의 명령이 어리석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령에 충실히 복종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삼상14:2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11093;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 여기서 '그들이'(*, 콜 하아레츠)는 문자적으로는 '온 땅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온 땅의 백성이'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하다(렘22:29). 한편 '수풀'(*, 야아르)은 레바논의 백향목숲 보다는 그 규모나 나무의 크기 등에 있어 훨씬 볼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양의 이 수풀 지대 역시 어느 정도 우거졌었다. 그리고 이것은 농지나 목초지로 개간 가능한 숲을 말한다(Keil).

&#11093; 땅에 꿀이있더라 - 파레스틴 지방에서는 벌들이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 집을 짓고 거기에 꿀을 만들어 놓느다고 한다(Schultz). 심지어는 꿀이 벌집에서 넘쳐 땅으로 흘러내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신32:13; 삿14:8; 시81:16; 마3:4).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서 꿀을 취해 먹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11:9 주석 참조)으로 묘사하기도 했던 것이다(출3:8; 민13:27; 신8:8).

성 경: [삼상14:2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11093; 맹세를 두려워하여 - 이스라엘 군사들의 이 두려움은 결국 자신들이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할 경우 사울에 의해 시행될 엄중한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성 경: [삼상14:2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11093;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 이처럼 요나단이 손이 아닌 지파이로 꿀을 찍어 먹은 이유는 시간의 낭비없이 신속히 적을 추적하기위해서였다(Stoebe).

&#11093; 눈이 밝아졌더라 - 기록된 본문(케티브)을 따라 직역하면 '그의 눈이 보였더라','시력을 회복했더라'란 뜻이다. 그러나 맛소라 학자들은 29절에 근거해 이말을 '케리'로 처리하여 곧 '그의 눈이 밝아졌더라'란 의미로 해석하였다. 여하튼 이 말은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던 중, 피로하고 허기에 지친 요나단이 수풀 나뭇가지에 뭉쳐있는 꿀을 취해 먹고 기력을 다시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스9:8; 시13:3).

성 경: [삼상14:2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11093; 맹세로...엄히 명하여 - 이는 금식(禁食)이백성들 스스로 자원해서가 아니라, 사울의 강제적인 명령에 의해 되어진 일임을 시사한다. 즉 사울은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하에서 금식령을 내려 백성들로 맹세케 했고, 이에 백성들은 그 위세에 눌려 할 수 없이 금식 맹세를 했던 것이다.

&#11093;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 여기서 '피곤하였나이다'(*, 야아프)는 '탈진하다', '지치다'란 뜻의 '우프'(*)에서 파생된 말로, 곧 사울의 금식령으로 인해 백성들이 심히 곤비하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삿4:21에는 같은 단어가 '기절하다'란 말로 나타나 있다.

성 경: [삼상14:29]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11093;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 여기서 '이 땅으로'(*, 에트 하아레츠)는 '이 땅을'이란 뜻인데, 곧 25절의 경우처럼 '이 땅의 백성들'이란 의미이다(Keil). 그리고 '곤란케 하다'(*, 아카르)는 '해롭게 하다', '고통을 주다'란의미이다(창34:30; 수6:18). 또한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성전(聖戰)을 망치다'란 의미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Keil). 왜냐하면 사울의 잘못된 금식령으로 인해 이스라엘 군사들이 탈진 상태에 놓였고, 결국 그로 인해 블레셋을 철저히 추격 섬멸하지 못함으로써, 믹마스 전투의 승리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편 여호수아는, 전리품의 일부를 사취(詐取)함으로써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패배케한 아간에 대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었다(수7:25). 그리고 사사 입다는, 자신의 맹세로 인해 결국 자신을 괴롭게 했던 자신의 딸에게 이 단어를 적용하였다(삿11:35).

성 경: [삼상14:30]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본절에 나타난 요나단의 말은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가 왜 믹마스 전투를 망치는 행위였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삼상14:31]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11093; 아얄론에 이르기까지...쳤으므로 - '아얄론'(Aijalon)은 '사슴의 자리'란 뜻으로, 이곳은 믹마스로부터 서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했으며 블레셋과의 국경에 인접한 성읍이다. 또한 이곳은 역사상 여호수아가아모리 족속을 패배시켰던 전적지이기도 하였다(수10:12). 결국 이스라엘이 금식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얄론까지 블레셋을 추격했다는 사실은 (1) 요나단의 말처럼(29,30절), 만일 금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승리가 얼마나 더 컸을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반면 (2) 또한 그당시 이스라엘 군사들이 얼마나 허기지고 피곤했을 것인가를 가히 짐작케 해준다.

성 경: [삼상14:3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본절은 사울의 어리석은 금식 명령이 야기시킬 수 밖에 없었던 부정적 결과에 대한 언급이다. 즉 맹세의 유효 만료 기간인 저녁이 되자마자(24절), 이스라엘 군사들은 너무나 허기에 지친 나머지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느라 율법의 주요한 두 가지 계명을 범하고 말았다. 곧 이때 이스라엘 군사들이 범한 죄는 (1) 소와 송아지를 같은 날에 잡아먹은 것(레22:28), (2) 고기를 피채 먹은 것(창9:4; 레17:10-14; 신12:23)등이다(Pulpit Commentary). 이 중 특히 '고기를 피채 먹은 것'은, 거듭 반복 금지된 율법의 핵심 명령을 어겼다는 점에서 더욱 큰 잘못이었다. 레19:26 주석 참조.

&#11093; 땅에서 잡아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고팠던 나머지 허기(虛飢)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돌 위에서 가축을 잡아야만 고기로부터 피를 뺄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4:3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11093; 무신하게 행하였도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바가드'(*)는 '은밀히 행하다', '속여 다루다', '배은 망덕하게 행하다','신실치 못하다'란 뜻이다. 결국 이 말은 고기를 피채 먹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레19:26)을 지키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사울의 엄중한 책망이다. 그러나 사실 백성들의 이러한 범죄는 결국 사울의 경망스런 금식령(24절)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 따라서 사울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먼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이어 범죄한 백성 전체의 회개를 주도했어야만 옳았다. 그러나 사울은 당장 범죄한 눈 앞의 백성들만 책망하였고, 더 나아가 꿀을 먹은 요나단(27절)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44절).

성 경: [삼상14:3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11093; 거기서 잡으니라 - 즉 사울의 명령으로(33절) 마련된 큰 바위 위에서 짐승을 잡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군사들은 짐승으로부터 피를 뺀 후 살코기만 구별하여 먹을 수 있었다(Keil, smith, Fay).

성 경: [삼상14:3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11093;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 여기서 '단'(壇)은, 그곳을 희생 제사가 계속적으로 드려지는장소로 삼으려는 목적에 따라 세워지지는 않았다. 다만 사울은 그때 본(本) 믹마스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7:12) 단회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그 단을 쌓은 듯하다(Keil).

&#11093;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 문자적으로는 '단을 쌓기 시작하였다'란 의미이다. 즉 이것은 특별한 목적에 따라 왕이 단을 쌓는 일에 있어서, 사울이 선구자가 되었음을 뜻한다(R.Payne Smith). 한편 후일 다윗도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다(삼하24:25).

성 경: [삼상14:3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11093; 사울이 가뢰되...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 블레셋을 섬멸시키고자 했던 사울의 열심을 엿볼 수 있다. 그때 사울은 자신의 어리석은 명령(24절) 때문에 블레셋 군대를 섬멸할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함으로써, 그것을 만회키 위해 이와 같은 제안을 한 듯하다.

&#11093; 제사장이 가로되...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 여기의 '제사장'은 말할 나위없이 대제사장 아히야(Ahijah)임이 분명하다(3,18절).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사이다'란 말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기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그때 제사장 아히야는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블레셋 군대를 계속 추격하자는 사울의 결정이, 전투중인데도 백성들을 금식시켰던 전번의 결정만큼이나 경솔하지나 않은 것인지를 염려했던 것이다.

&#11093; 이리로 - 방금 전 사울이 쌓았던 제단을 가리킨다(Keil).

성 경: [삼상14:3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11093;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 사울은 이때 대제사장의 에봇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출28:30 주석 참조)을 통하여 블레셋을 추격해야 할지의 여부를 질문하였을 것이다(Fay).

&#11093;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문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전혀 응답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분명 이스라엘 중에 어떤 하자(瑕疵)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Fay, Keil).

성 경: [삼상14:3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11093; 사울이 가로되...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 - 사울은 자신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응답지 않으신 것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 중에 숨은 죄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 사실을 규명코자 적극 나섰다.

&#11093; 백성의 어른들 - 여기서 '어른들'(*, 핀노트)은 '모퉁이의 돌', '우두머리', '망대'란 뜻이다(출27:2; 삿20:2; 습1:16). 따라서 '백성의 어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자 격인 각 지파 장로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8:4; 민11:30).

성 경: [삼상14:39]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11093; 반드시 죽으리라 - 전투 중에 군사들을 금식케 한 사건(24절) 이후, 사울의 경솔한 맹세가 여기서 또다시 나타난다(수9:15-21).

&#11093;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 요나단이 사울의 명령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군사들까지도 이같이 한 것은, 이처럼 침묵함으로써 사울의 경솔함을 책망키 위함이었을 것이다(Pulit Commentary).

성 경: [삼상14:40-4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우림과 둠밈을 통한 문의에 하나님께서 대답이 없자(37절), 사울은 여기에서 제비를 뽑는 방식에 의하여 범인을 가려내고 있다. 즉 그때 사울은 제비 뽑기를 통하여(1) 백성과 자기 가족 두편 중에서 먼저 범인이 속한 한 편을 가려내고 (2) 이어 범인이 속한 한 편으로 밝혀진 자신의 가족 중 최종적으로 범인 요나단을 가려냈던 것이다.

&#11093; 실상을 보이소서(*, 하바 타밈) - 직역하면 '완전을 주소서'(Give a perfect)인데, 곧 '완벽한 제비(lot)를 보여 주소서'란 의미이다(KJV). 그런데 70인역(LXX)과 일부 학자들(Ewald, Thenius)은 여기서 '타밈'을 '툼밈'(thummim)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부분을 길게 의역(意譯)하기를, "만일 나 또는 요나단에게 죄가 있으면 '우림'(Urim)으로 응답하시고,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가 있으면 '둠밈'(Thummim)으로 응답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동사 '뽑히고'(*, 일라케드)와 '뽑으라'(*, 히필)는 제비 뽑기의 추첨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동사이며, 우림과 둠밈과 관련해서는 성경 용레상 한번도 사용된 적이없다. 그러므로 본문을 확대 의역한 70인역의 번역은 그 타당성이 없다(Keil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T., vo1.2-ii. pp. 145-146). 한편 '제비뽑기'(lot)에 대해서는 수14:2; 18:1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14:4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들의 변호(辯護)]

본절에서는 요나단은 자신의 행위(27절)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겸손히 부친 사울의 뜻을 좇기로 작정한다.

성 경: [삼상14:4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들의 변호(辯護)]

사울은 여기서 자신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했던 바(39절)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지켜저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민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물론 그때 사울은 자신의 맹세가 경솔한 것이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내심 후회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요나단이 금식령 기간 중 꿀을 먹은 사실은 결코 사울의 맹세에 대한 거역이나 불복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 요나단은 그러한 사울의 명령을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27절). 즉 요나단은 전혀 고의성(故意性) 없이 '부지중에' 잘못을 범한 것이다. 이런 경우 율법에 의하면(레4:3,13,14,22-24,27,28),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대속을 위한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죄 용서함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요나단에게 속죄제를 드릴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맹세를 따라 요나단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권위에 스스로 빠져버린 어리석은 행위였다(R.Payne Smith).

성 경: [삼상14:4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들의 변호(辯護)]

&#11093;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 백성들은 제비를 뽑기 전에는 소극적으로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제비에 의해 요나단이 맹세를 범한 장본인으로 판명되고, 이에 따라 그가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이제 적극적으로 요나단의 구명(救命)을 위해 사울에게 항의한다.

&#11093;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 이것은 백성들이 사울에게 제시한 바 요나단이 죽임을 당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도구로하여 블레셋과 전투를 치르셨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금번 믹마스 전투를 이스라엘이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므로, 승리를 위해서 발한 사울의 맹세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하고, 따라서 요나단에 대한 처형 역시 마땅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당시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을 해(害)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11093; 구원하여 - 기본 동사 '파다'(*)란 단어는 원래 돈, 짐승, 심지어 사람 등을 대신 주고 특정인을 되찾거나 목숨을 구하는 경우에 사용된다(출13:13,15; 21:30;34:20; 민3:46-51). 결국 본서 저자는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요나단을 구출하려는 백성들의 의지가 실로 대단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백성들의 강력한 의지는, 결국 애초에 사울이 발한 맹세(24절)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 경: [삼상14:4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11093; 블레셋...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 이것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완전히 중지한 채,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정치적 통치 중심지인 기브아(10:26)로 돌아갔음을 뜻한다. 한편 이것은 사울이라는 인물이 경박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보여 준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지 아니하신 것은(37절), 블레셋을 추격치말라는 의미에서 그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까닭은, 대답지 아니하셧다는 것은 이스라엘 중에 어떤 하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는 바(37절), 이제 그 하자가 발견되어 완전히 해소되었기 때문에 다시금 일치 단결하여 추격의 고삐를 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그 하자(瑕疵)가 결국 자신의 경솔한 맹세(24절)로 귀착되자 그만 블레셋에 대한 추격까지 포기하고 만 것이다.

&#11093; 블레셋 사람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 즉 믹마스 땅에 진쳤던(13:16)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에 패하여, 결국 자기 본토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따라서 결국 이번 믹마스 전투에서 살아남은 블레셋 군대는 이후 다시 세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재차 침공하였고(29:1),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기까지 하는 비극을 당하고 만다(31:1-6).

성 경: [삼상14:4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11093; 사울이...왕위에 나아간 후에 - 사울이 처음 길르앗 야베스 전투(11:11)를 통해 암몬 족속을 꺾음으로써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추대되었듯이(11:15), 이제 사울이 믹마스 전투(14:23,31)를 통해 난적 블레셋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완전히 확립했음을 보여 준다(Keil). 한편 여기서 '나아간'(*, 라카드)은 '획득하다', '점령하다'란 의미로서(신2:35; 수8:21; 삿1:12), 이는 곧 사울이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확고히 굳혔다는 의미이다(Jerusalem Bible, 공동번역).

&#11093;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 이 표현 그대로, 당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모압과 암몬은 동편에, 에돔은 남방에, 소바는 북방에, 그리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서편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11093; 모압 - 여기서 모압 족속은 요단의 동쪽, 갓과 르우벤 지파의 영토 남쪽에 거주했던 민족으로서, 사사 시대 이래 이스러엘 백성들을 괴롭혀왔다(삿3:12-14). 한편 이곳이외에는 사울 시대에 이 모압 족속이 이스라엘을 침입해왔다는 언급도, 또한 사울이 이들을 물리쳤다는 언급도 없다.

&#11093; 암몬 자손 - 암몬 족속 또한 사사 새디 이래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족속이다(삿10:7-17). 이들은 사울의 즉위 직후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폈으나, 사울에 의해 격파당했었다(11:1-11).

&#11093; 에돔 - 에돔 족속은 사해의 남부에 자리잡고 잇던 족속으로서,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들의 침입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는 모압 족속의 공격이 없었을지라도, 사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들의 공격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11093; 소바의 왕들 - '소바'(Zobah)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서 야르묵 강 사이에 자리 잡았던 아람족의 일파이며(삼하8:3),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 연합 성격의 국가였다(Beitzel). 한편 '왕들'은 이들이 부족 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던 도시 국가였음을잘 보여 준다.

성 경: [삼상14:4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11093; 아말렉 사람을 치고 - 사울이 '아말렉'(Amalek)을 친 사실은 15:1-9에 언급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별도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하다. 그같이 보아야 할 까닭은, 15:1-9의 언급은 출애굽시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여정(旅程)을 방해했던 역사적 사실에 따라 그 족속에 대하여 행해진 징벌과 관계되지만, 본절의 언급은 아말렉족속의 이스라엘 영토 침입에 따른 징벌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11093;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 이러한 문구는 사사의 활약상을 묘사한 전형적 문구이다(삿2:16). 그러므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결국 본서의 저자가 사울을 사사(士師)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4:49]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11093; 리스위 - 이 사람은 '아비나답'과 동일한 인물임이 분명하다(31:2; 대상8:33;9:39).

&#11093; 말기수아 - 이 이름은 '나의 왕은 구원이다'란 의미이다. 한편, 사울과 그의 세 아들 요나단과 리스위(아비나답)와 말기수아는 후일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함께 전사(戰死)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사울에게는 '에스바알'이라고도 불리우는(대상8:33) 그의 네째 아들 '이스보셋'이 있었다(삼하2:8).

&#11093; 메랍 - '증가하다'란 의미의 이름인 메랍은 원래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이 되었었다(17:25).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골리앗을 죽인 다윗 대신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시집보내졌다(18:19).

&#11093; 미갈 - '누가 하나님 같으냐?'란 뜻이다. 사울의 차녀인 미갈은 다윗과 결혼했으나, 언약궤로 인하여 기뻐서 춤추던 다윗을 비웃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아이를 낳지 못했다(삼하6:23). 한편 사울의 두 딸 메랍과 미갈은 18:17-21의 사건에 대한 배경으로 여기 기록되었다.

성 경: [삼상14:50,51]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11093; 아하노암 - '나의 형제는 유쾌하다'란 의미이다. 부친은 '아히마아스'인데, 그 이름에 '아히'(*, '형제'란 뜻)란 접두어가 붙은 것으로 보아(3절) 제사장 가문일 가능성이 있다(Smith, Fay).

&#11093; 아브넬 - '나의 아버지는 넬'이란 뜻이다. 사울과는 사촌 관계로서(Keil, Fay), 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을 맡았던 아브넬은 요압이 다윗을 군사적으로 도왔듯이 사울과 그의 아들 이스보셋을 군사적으로 보좌했던 인물이다(삼하2:8,9).

&#11093; 사울의 숙부 넬 - '넬'은 '등불'이란 뜻이다. 이 사람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던 인물이다(10:15,16).

&#11093; 기스 - 9:1 주석 참조.

&#11093; 아비엘의 아들 - 카일(Keil)과 스미드(Smith) 박사는 여기서 '아들'(*, 벤)을 '자손들' 혹은 '아들들'(*, 베네)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 경: [삼상14:5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본절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왕국을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 있었던 가장 특징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즉 (1) 숙적(宿敵) 블레셋과 간단없는 전쟁을 치루었다는 사실이며(17:1-3; 23:27; 29:1; 31:1,2), (2) 따라서 그러한 블레셋과의 전쟁에 대비키 위하여 정예 상비군을 조직함으로써, 국방력을 키워나갔다는 사실이다(Pulpit Commentary). 이처럼 사울은 이스라엘의 사사(士師)시대를 마감하고, 왕정(王政) 시대를 문을 열고 그 기반을 닦은 무사적(武士的) 왕으로서, 실로 백성들의 요구대로 '열방과 같은'(8:5,20) 왕처럼 활약한 인물이었다.

&#11093; 사울이...불러 모았더라 - 이 말은 사울이 열방과 같은 왕처럼 조직적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힘있고 용맹한 백성들을 병사로 징집함으로써 상비군(常備軍)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13:2).

성 경: [삼상15: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1109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선지자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사울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에게 다시 온 때는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13:15)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듯하다. 대략 당시의 시점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때인 B.C. 1010년 경에 왕위에 올랐는데, 만일 다윗이 최초 기름 부음 받은 때를 대략 15세 때로 본다면(16:11, 12) 그때는 아말렉 전투 직후였으므로(16:1), 아말렉 전투는 B.C. 1025년 경에 벌어졌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시 온 이때는 믹마스 전투 때(B.C. 1048년)이므로 사울과 헤어진 지(13:15) 약 23년 후라는 계산이 나온다(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11093;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기름을 부어 -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열방의 왕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왕임을 보여 준다. 즉 선민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열방의 왕과는 달리 신적(神的)인 기원을 가지며, 따라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왕이었다. 한편, 여기서 '기름을 부었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은 10:1의 사건과 연관되는 말이다(Keil, Fay).

&#11093; 이제 왕은...말씀을 들으소서 - 이말은 사울이 전에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의 직무를 침범했던 제사 사건(13:8-14)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사울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일차 시험을 통과치 못했었다. 그러므로 여기 사무엘의 이 언급은 사울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새로운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질 것을 예시한다. 이로 볼 때 믹마스 전투 개시 직전,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심판적 경고(13:13, 14)를 내린 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그 선언 이후 사무엘이 다시금 사울을 찾아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당부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직 사울을 버리지 아니하사, 그로 하여금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13:14 주석 참조). 이것은 마치 니느웨 성에 대한 요나의 심판 선언도 최종적인 선언인 것 같았으나,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욘 3:4-1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사 죄인이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겔 18:23; 33:11; 롬 2:4). 그러나 사울은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거역과 반역의 죄를 범함으로써(9절), 마침내 하나님께 버림받고 만다(26절; 16:14).

성 경: [삼상15: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11093; 만군의 여호와 - 이 표현은 특별히 성전(聖戰)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1:3, 11; 4:4; 17:45; 삼하 5:10). 따라서 사무엘은 여기서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아말렉과의 전투 명령의 엄숙성을 더욱 강조한다.

&#11093;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 아말렉 족속(the Amalekites)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손들로서(창 36:12, 16; 대상 1:36), 유다 남부 광야 지역을 거점으로 유목과 약탈로 살아간 호전적인 족속이다. 이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직후 르비딤 광야에 이르렀을 때, 교활하게 이스라엘 후미(後尾)를 기습 공격했었다(출 7:8-13).그런데 그때는 이스라엘이 오랜 노예 생활 끝에 해방된 직후였으므로 아무런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신 25:17-19). 따라서 그때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입은 타격은 실로 막대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은 바로 이러한 아말렉의 기습 공격 사건을 뜻한다. 아말렉의 이 공격 사건이 특히 용서받지 못할 사건이 된 것은 이것이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베푸신 크신 출애굽의 은총을 무시한 채 가나안 여정을 방해했던 사건이고, (2)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의 후미를 공격하는 비겁한 전술을 구사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을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제 1의 대적국으로 간주하시고, 그 족속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진멸할 것을 선언하시고 명령하셨는 바(출 17:14; 신 25:19), 이러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는 이방의 술사(術士) 발람의 예언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민 24:20).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 하에 놓여진 아말렉 족속은 비단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요단을 통하지않고 네게브(Negeb, 유다 남부 사막 지대) 지역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것도 방해하였다(민 14:43-45). 그리고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잔인하고 난폭한 침입은 결코 중지되지 않았었다(삿 3:13; 5:14; 6:3, 33; 7:12; 10:12; 12:15). 이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울을 통해 아말렉 족속을 진멸코자 하셨던 것이다. 출 17:14; 민 24:20; 신 25:19 주석 참조.

&#11093; 내가 추억하노니 - '추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 '생각하다'란 뜻으로서, 곧 어떤 일에 대해 잊지 않고 내내 기억하고 있다가 때가 되어 찾아가는 행위를 뜻한다. 물론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행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아말렉의 적대 행위 자체만을 기억하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1)아말렉 족속에게 복수하라고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던 사실(출 17:14; 신25:19), (2) 그리고 아말렉에 대한 복수를 위한 성전(聖戰)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사실(출 17:16) 등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성 경: [삼상15: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11093; 지금 - 출애굽 직후 가나안 행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복수해야 할 때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러 측면에서 안정을 이룩했을 시기로 지정하셨었다(신 25:19).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 치하에서 정치적인 안정을 이미 구축하고 있었다(14:47, 48). 즉 아말렉을 칠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11093; 가서(*, 얄라크) - '진군하다', '쫓아가다'란 뜻이다(출 13:21; 24:5,8). 곧 총공격을 하라는 의미이다.

&#11093; 아말렉을 쳐서 - 여기서 '치다'(*, 나카)란 말은 '때리다', '쳐죽이다'란 의미로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해(傷害)를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13:4; 14:14 ;17:35; 수 10:20).

&#11093; 그들의 모든 소유를...진멸하되 - '그들의 모든 소유'는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란 뜻으로, 곧이어 언급되는 '남녀...나귀' 등 모두를 가리킨다. 한편 '진멸하되'(*, 하람)는 원래 '금지하다' 혹은 '바치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경우 '분리시키다', '금지시키다'란 의미가 된다. 특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부정한 것을 제거하거나 저주받은 물건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행동을 나타낸다(Lange).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헤렘'(바쳐진 것, 금지된 것)으로 지정된 것은 결코 다른 용도로는 쓰여질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헤렘의 법칙'대로 시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만일 이 '헤렘'이 산 것이면 죽여야 했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로 다 태워버려야 했으며, 불로 태워지지 않는 금.은 등은 성소에 귀속시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만 했다(레 27:28; 신 13:16 ;수 6:17). 한편, 이와 비슷한 법칙은 성경 외적 문헌들에도 나타난다. 곧 어떤 고대 문헌에는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의 장년, 소년과 소녀, 하인 등을 잡아간 후 그들을 모두 죽여서 자신의 신 그모스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Pritchard). 따라서 여기의 '진멸하되'는 단순히 정치.군사적 행동이 아닌 영적.종교적 행위라는 점에서, 사울로서는 반드시 그대로 이행해야 될 사항이었다. 레 27:28; 신 13:17; 수 6:17 주석 참조.

&#11093; 남기지 말고 - 여기서 '남기다'(*, 하말)는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 '아까워하다'란 뜻이다(23:21; 삼하 12:6; 대하 36:15, 17). 그러므로 이 말은'일말의 동정도 하지 말고' 또는 '조금도 아까워 말고'란 뜻이다. 곧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대로 철저히 시행하라는 엄숙한 명령이다.

성 경: [삼상15: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11093;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 여기서 '소집하다'(*, 솨마)는 원래 '듣다'란의미이나, 여기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불러 모으다', '듣게 하다'란 뜻이 된다(시 66:8; 렘 51:27). 결국 이것은 전투의 필요성을 알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전투하기 위하여 모여 들도록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11093;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 '들라임'(Telaim)은 유다의 한 성읍으로서 '델렘'(수15:24)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Kimchi, Keil). 그런데 '델렘'(Telem)은 여호수아서에서 유다의 또 다른 성읍 '십'과 같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그곳에 인근한 지역일 것이다. 한편 '십'(Ziph)은 헤브론 남쪽 약 51km지점에 위치해 있다. 결국 '들라임'은 유다 남방의 국경 지대에 있는 장소로서, 곧 아말렉과의 경계 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아말렉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여건상, 아말렉 전투를 수행키 위한 군사들의 집결 장소로 이곳이 채택된 것 같다(Fay). 한편 '계수하니'는 오히려 '소집하다'란 의미로 봄이 좋다(11:8).

&#11093; 보병이 이십만...유다 사람이 일만 - 여기서 '유다 사람'만 유독 구별되어 있는 것은, 여기에는 본서 기록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의도적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11:8). 즉 이 아말렉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와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Klein). 한편 '이십만...일만'은 야베스 길르앗 전투때 소집된 병력 '삼십만...삼만' 보다는 적은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유다 지파는 병력 소집 장소인 '들라임'에 가까이 거주했으면서도 참여율이 다른 지파에 비하여 훨씬 적었다는 사실이다(11:8). 이것은 결국 유다 지파가 사울의 왕국에 대하여 특별히 도전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 유다 사람들은 그때 자신의 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창49:10).

성 경: [삼상15: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11093; 아말렉 성에 이르러 - '아말렉 성'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곳으로서, 지금도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때 사울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아말렉의 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11093;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 여기서 '골짜기'는 건기(乾期)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Wady)를 가리킨다. 그리고 '복병'(伏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정복전을 치룰 때 이미 전술의 한 형태로서 사용되었다(수 8:2; 삿 20:29). 그러나 여기의 '복병'은 아말렉을 기습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말렉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겐 사람들(the Kenites)을 대피시킬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5: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사울이 후대의 다윗처럼(27:10; 30:26-30),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11093; 겐 사람 - '겐'(*, 케니)은 '금속 세공업자' 혹은 '대장장이'란 의미이다. 이와 같은 명칭은 그들이 살던 아라비아 지역에 질이 좋은 동광석(銅鑛石)이 풍부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당시 유목민으로서 가나안 땅에 거주한(창 15:19) 겐 족속의 일파는, 모세 당시에는 미디안 지역에 거주했었으며(출 2:16-21; 18:1; 민 10:29),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때에는 그 족속의 한 사람이었던 모세의 처남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길 안내자가 되면서(민 10:29-32) 이스라엘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그 민족은 이스라엘의 남부 브엘세바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삿 1:16). 그리고 이때로부터 점점 남부로 내려가, 사울 시대에는 아말렉 족속들의 지역에 함께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겐 사람들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언급된 '겐 사람' 이외의 또 다른 '겐 사람'의 일파는 아라비아의 페트레아(Petrea) 지역에 살면서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등,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의를 갖고 있었다(Lange).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은 이후 다윗 시대까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30:29).

&#11093; 선대하였느니라 - '선대'(*, 헤세드)는 '인자', '긍휼' 등의 의미로서,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킬때 사용되었다(창 19:19; 시23:6; 106:45).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들의 '선대'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행 길 안내자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이다(민 10:29-32). 출애굽 당시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敵對) 행위를 한것에 비하면, 겐사람들의 이같은 태도는 '선대'(善待)라고 하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삿4:11-22; 5:24-27). 한편 혹자(Hengstenberg)는 이처럼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겐 족속이 구별되어 보호 받을 것이란 사실은 이방의 술사 발람의 예언(민 24:20, 21) 속에서 이미 나타난다고 한다. 민 24:21 주석 참조.

&#11093; 떠나니라 - 이것은 겐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영원히 떠났음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투를 피해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 대피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후 사울 왕 말기에도 겐 사람들이 네게브(Negeb) 지역에 계속 살고 있었다는 사실로써 확증될 수 있다(27:10; 30:26-30).

성 경: [삼상15: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11093;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 - '하윌라에서부터 ~술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은 당시 아말렉 족속들이 흩어져 살던 거의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창 25:18). 한편 '하윌라'(Havilah)는 '광황한 모래 사장'이란 의미로서,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 쯤에 위치한 한지역 정도로만 추측된다(S.Cohen). 카일(Keil)과 스트라보(Strabo)는 현재 이곳을 아라비아의 페트레아 경계 지점에 위치한 '하우로테안'(Chaulotoeans) 지역으로 본다. 그리고 '술'(Shur)은 딤사 호수 동쪽에 위치한 시나이 광야를 뜻하는 일반적 명칭인듯 하다(창 16:7). 즉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최초로 도달한 지역으로(출 15:22), 애굽과 팔레스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이다(Keil).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이팔'(Jifar) 광야이다(Fay). 한편, 위의 언급을 통해 우리는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유다 국경 지대로부터 애굽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족속의 거의 전지역을 초토화(焦土化) 시켰음을 알 수 있다(Smith).

성 경: [삼상15:8,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진멸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이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일반 백성들과 짐승의 열등한 것들은 명령대로 모두 진멸했지만, 자신에게 실리적으로 유용한 짐승 또는 우수하고 질 좋은 것들은 진멸치 아니했다.

&#11093; 아각을 사로잡고 - 사울이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처럼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Agag)을 살려둔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아각'을 통하여 큰 실리(實利)를 얻기 위한 목적(왕상 20:31-42), (2) 혹은 '아각'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목적(12절)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아각'(*)은 애굽 왕을 '바로'라고 하듯이, 아말렉 왕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불려지던 명칭이다(민 24:7 주석 참조). 그리고 '아각'의 의미는 '맹화'(猛火)란 뜻이다(Lange).

&#11093;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 이 말은 아각을 제외한 모든 아말렉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진멸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거의 모든 아말렉 족속을 쳐죽였다는 뜻이다(Fay). 사실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던 유다 남부 광야 지대는 광활했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 족속은 유랑 생활을 하던 족속이었으므로 이들을 완전 진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Smith). 따라서 당시 일부는 피해 달아났거나 또는 발각되지 않았던 관계로 살아 존속했을 터인데(27:8; 30:1; 삼하 8:12). 결국 이들은 히스기야 시대에 시므온 사람들에 의해 전멸되었다(Keil, 대상 4:43). 한편, 여기서 진멸하였으되(*, 헤헤림)란 말의 개념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11093; 기름진 것(*, 미쉐님) - 직역하면 '두번째로 태어난 것'이란 뜻이다(D. Kimchi, R. Tanchum). 그러나 이는 다른 것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것보다 좋다는 의미이다(Keil, Fay). 사실 고대인들은 동물의 태(胎)에 있어, 첫번째 태보다 두번째 태를 더 좋은 것으로 간주하였다(Smith).

성 경: [삼상15:10,1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여호와의 탄식]

사무엘의 제사권 침해 사건(13:9)에 이어 여기서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된 두번째 시험, 곧 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1절; 13:8-14).

&#11093;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 여기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와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후회는 당신의 어떤 특별한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여, 거기서 돌이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29절). 이것은 다만 죄인의 거역에 대한 신적(神的)인 슬픔을 의인법적(擬人法的)으로 묘사한 표현일 뿐이다(창 6:6, 7).

&#11093; 돌이켜서(*, 슈브) - 성경 용례상 이 말은 종종 여호와께 대한 반역 및배교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민 14:43; 32:15; 수 22:16, 18; 렘 3:19).

&#11093; 사무엘이 근심하여 - 여기서 '근심하다'(*, 하라)란 말은 '(분노로) 타오르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이 말은 오히려 '진노하여'로 번역함이 타당하다(창4:6; 민 11:33; 신 7:4; 삼하 24:1). 아마도 이때 사무엘은 자신의 간곡한 권면(1절)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자신의 이기적 충동을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왕을 세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손상되고 파괴되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거룩한 의분(義憤)을 느꼈을 것이다(Keil, Fay).

&#11093;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사무엘의 이같은 태도는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각오(12:23)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자신의 각오처럼 이때 사무엘은 (1) 하나님께로부터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2) 그리고 무엇보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습은 이전에도 수차 나타나는데(7:8, 9; 12:18), 이로 보아 진정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으니, 곧 당사자인 그 죄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한편, 유대 학자 아바르바넬(Abarbanel)은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그처럼 간절히 중보 기도한 것은, 사무엘이 개인적으로 사울을 그 용모와 용감성 때문에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성 경: [삼상15:1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11093; 사울이...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사울의 이기적 행동 원리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한편 '기념비'(*, 야드)는 원래 '손'(hand)이란 뜻이나,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다는 효과 때문에 '기념비'란 의미로 전의(轉義)된 듯하다(삼하 18:18; 사 56:5). 한편 여기서는 아말렉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勝戰碑)를 가리킨다.

&#11093; 갈멜에 이르러 - 여기의 '갈멜'(Carmel)은 헤브론 남동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서, 원래 갈렙에게 주어졌었다(수 15:55). 이곳은 또한 나발과 아비가일의 고향이기도 하였다(25:2-40). 현재의 '쿨물'(Kurmul) 지역으로 추정된다(Fay, Keil).

&#11093; 돌이켜...길갈로 내려갔다 - 사울이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인 기브아(10:26)로 가지 아니하고 '길갈'로 간 까닭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이 있는 여러 곳(7:16) 중 가장 가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1절). 한편 '내려갔다'(*, 야라드)라는 말은 길갈(Gilgal)이 요단 골짜기 저지대에 위치했었다는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해 준다(10:8; 창 43:20; 수 16:7; 18:16). 즉 사울은 갈멜에서 승전비를 세운 뒤 유다 산맥을 가로질러 요단 계곡의 길갈로 향했던것 같다(13:4). 한편 '길갈'(Gilgal)에 대해서는 수 4:19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15:1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11093;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 '여호와의 명령'은 분명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여호와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치 않았으면서(8, 9절), 명령을 온전히 이행한 듯 묻기도 전에 말한 것은 죄의식(罪意識)의 소산이요, 외식(外飾)의 결과였다.

성 경: [삼상15:1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여기서 사무엘은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를 증거로 사울의 말(13절)이 위선이요 거짓임을 예리하게 폭로한다. 이에 대해 스미드(R. Payne Smith) 박사의 다음과 같은 표현 역시 날카롭다. '사울의 양심은 침묵하나 오히려 짐승은 사울의 위선과 불복종을 외치고 있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15:1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11093; 그것은 무리가...끌어 온 것인데 - 여기서 '무리가'란 말은 13절의 '내가'란 말과 너무나도 대조된다. 즉 13절에서는 자신을 내세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다가, 이제 상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무리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 및 죄의 고백으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가는 사울의 위선이 애처롭다. 이는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죄를 하와에게 떠넘기려는 책임 전가와 다를 바 없다(창 3:12).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사울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는 결코 짐승들을 끌고 올 수 없었다(14:24-26).

&#11093;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남김이요 - 사울의 이 말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범죄와 이기심을 합리화 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비록 사울이나 백성들이 짐승들을 실제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진멸치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바로 이같은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제사'를 빙자하여 짐승들을 진멸치 아니한 것이었다(Keil).

성 경: [삼상15:1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11093; 가만히 계시옵소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레프'(*)는 문자적으로'중지하라!'(Stop!)란 뜻이다. 결국 이 말은 핑계와 변명, 책임 전가 등을 이제 그만두라는 의미로서, 사울의 구차한 변명을 더이상 듣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하는 말이다.

&#11093; 간밤에...이르신 것 - 이 계시는 사무엘이 철야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신 사울에 대한 말씀인 듯하다(11절).

성 경: [삼상15:1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11093;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사를 보였을 때에 사울이 취했던 겸손한 행동을 가리킨다(9:21).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권력이 생기자 사울은 점차 교만한 자가 되어, 결국은 비천한 자신을 들어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의 명령까지 무시하는 패역한 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11093; 여호와께서...기름을 부어...왕을 삼으시고 -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2) 따라서 사울의 왕권은 이방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실행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5:18,1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여기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달된 여호와의 신성한 명령을 사울이 전적으로 이행치 아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사울의 주장(13, 15절)이 자기 변명과 외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11093; 길로 보내시며 - 여기서 '길'(*, 데레크)은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족속을 진멸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주어 내보낸 원정의 길을 뜻한다(Fay).

&#11093; 죄인 아말렉 -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아말렉' 족속들이 마땅히 진멸됐어야 할 합당한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 아말렉 족속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멸절시키려 했던 죄이다(2절; 출 17:8-13).

&#11093;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탈취물에게로 날아갔다'(flew on thespoil, KJV)란 뜻이다. 이 말은 아말렉과의 전투시 사울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보고 그 마음에 탐심이 생겨, 그것을 간절하고도 열정적으로 원했다는 뜻이다. 결국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남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성 경: [삼상15:20]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11093; 아각을 끌어왔고 - 사울은 여기서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거역하고 '아각'을 살린 자신의 사악한 행위(8, 9절)를 전혀 죄로 인정치 않고 있다. 오히려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아말렉과 전투를 수행했다는 그 실제적인 증거로서 아각을 사로잡아 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성 경: [삼상15:2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사울은 15절에 이어 여기서도 아말렉의 짐승을 진멸치 않은 자신의 범죄를, (1) 하나님의 제사를 빙자하고 (2) 또한 백성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정당화시키려 한다(15절).

성 경: [삼상15:2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11093; 번제와 다른 제사 - '번제'는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다(레 1:3-17). 그리고 '다른 제사'(*, 제바힘)는 문자적으로 '희생'(sacrifices)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수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번제 이외의 다른 희생 제사 모두를 가리킴이 분명하다<레위기 서론, 7.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11093;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와의 진멸 명령(3절)을 무시한 채, '여호와께 제사드릴 목적으로'(15, 21절) 그 족속의 가장 좋고 기름진 짐승들을 끌고 왔노라고 극구 주장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명쾌히 선포한 이 말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외적 의식(儀式) 행위 보다는 내적 마음의 순종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금언적(金言的)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무엘 이후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께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거듭 강조되었다. 즉 시편 기자(시 50:8-15; 51:16, 17), 이사야(사 1:11-17), 예레미야(렘 6:20), 호세아(호 6:6), 미가(6:6-8), 그리고 마침내 참 선지자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금 확증되고 강조되었다(마 9:13 ;12:7).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1) 예배의 형식 보다는 예배자의 마음 자세가 더욱 중요하며(전 5:1; 미 6:6-8), (2) 영(靈)이신 하나님께서는 수양의 피나 기름보다 인간의 전인격적 마음을 원하시며(시 51:17; 요 4:24), (3)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모든 신앙 생활의 척도가 된다(딤후 3:16, 17)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사 행위는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인간이 그 행위 속에 담긴 참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즉 '제사'는 그림자요, '순종'은 실체인 것이다. 벧렌베르겔성경(Berlenberger Bible)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제사(sacrifices)로는 인간이 단지 비이성적인 짐승의 고기만을 드릴 뿐이지만, 순종(obedience)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뜻을 바친다. 그러므로 순종이야말로 이성적이고 영적인 제사인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56). 한편, 그러나 사무엘의 이 말은 '제사'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사무엘이 여기서 강조한 근본 사상은 제사 행위 속에는 반드시 순종의 자세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요, 제사로 말미암아 순종이 거부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말은, 후대의 예언자들이 합당한 예배에 앞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를 언급하면서 많이 사용하였다(사 1:10, 11,13; 렘 7:21-26; 호 6:6; 암 5:21-24; 미 6:6-8; 막 12:28-34).

&#11093; 수양의 기름 - 여기서 '기름'(*, 헬레브; fat)은 희생 제사에서 하나님께 태워지던 부분으로서, 주로 가축의 내장 및 꼬리 주위의 '기름진 부분'을 가리킨다(레 3:16, 17; 7:23-25).

성 경: [삼상15:2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11093; 사술의 죄 - 여기서 '사술'(*, 케셈)은 점(占)을 치는 행위를 뜻하며, 이같은 행위는 당시 이방 세계에서 보편화 되었었다(6:2; 민 22:7; 신 18:14; 수13:22). 그리고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행해졌었다(렘 14:14 ;27:9; 29:8; 겔 13:6, 23; 미 3:7).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우상 숭배죄로 규정되어 성경에서 절대 금지되었다(신 18:10; 왕하 17:17).

&#11093; 사신(邪神) 우상 - '사신'(*, 아웬)은 '악함', '무가치함', '허탄한 것'등의 의미로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우상'으로 번역되었다(사 66:3). 그리고 '우상'(*, 테라핌)은 중근동 사람들이 가신(家神)으로 섬기던 우상의 한 종류인데(창 31:34, 35; 삿 17:5; 18:14),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점(占)을 치는 수단으로써 언급되기도 한다(겔 21:21; 호 3:4). 창 31:19 주석 참조.

&#11093;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 여기서 '버려'(*, 이므아스카)는 미완료형이므로 미래형의 의미로 번역해야 된다는 점에서, 사울의 왕권이 머지않아 끊어질것을 시사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나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 말씀을 제대로 좇았다면, 그의 왕권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세습될 수 있었을 것이다(13:13). 한편 여기의 '버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했던 그 행위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단어이다<8:7>.

성 경: [삼상15:2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후회]

사울은 사무엘의 날카로은 심문과 경고에 의하여, 변명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꿔 이제 자신의 죄를 시인했지만, 그 시인한 죄조차도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11093;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 사울의 이 고백은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범죄하였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는 참된 회개라고 볼 수 없다(Keil, Fay, Smith). 그 이유는 (1) 계속 자신의 죄를 시인치 않고 변명과 책임 전가로만 일관하다가, 사무엘의 무서운 심판적 선언(22, 23절)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시인했기 때문이며,(2) 또한 죄의 고백 후에, 다시금 백성들의 탓으로 그 죄의 원인을 책임 전가하는 말(24b)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3) 나아가 고백 후에도 계속 왕위 보존과 왕권의 명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30절). 결국 라피데(C.V. Lapide)가 정의한 것처럼, "사울의 이 고백은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통회의 회개가 아니라, 단지 왕국의상실과 명예의 실추를 두려워한데서 비롯된 '입술의 회개'(repentance of the lips)였다"(Keil & Delitzsch, op. cit. p. 157).

&#11093;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 사울의 이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당시 사울의 왕권은 웬만큼 백성들로부터 인정은 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실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0절). 바로 이 사실이 사울 왕권(王權)의 한계요,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고, 당신께로부터 비롯된 마음에 합당한 한 인물(다윗)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13:14; 행 13:22).

성 경: [삼상15:2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후회]

&#11093; 지금 내 죄를 사하고 - 사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기서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 용서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사울이 아직까지도 그가 지은 죄의 근본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인간에 대한 범죄 정도로 가볍게 인식했던 것이다.

&#11093; 나와 함께 돌아가서 - 이때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길갈 제단이었을 것이다(21절).

&#11093;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 사울의 이 '경배' 허락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갖고자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울은 그때 사무엘이 집전하는 제사의 현장에 사무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이 왕으로서 건재함을 만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사무엘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요청했던 것이다<30절>.

성 경: [삼상15:2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사울의 심중(心中)을 간파한 사무엘은 여기서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단호히 선포한다. 여기에 왕권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참 선지자로서의 절개가 돋보인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왕직 박탈은 단순히 사무엘의 제사직 침해 사건(13:9)과 아말렉 왕과 짐승을 살려둔 사건(15:9)의 두 가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 불복종 사건은 사울이 저지른 유일한 불복종 사건이 아니라, 많은 반역적이고 불순종적인 사건들 중 대표적인 경우라는 점이다(Leon Wood).

성 경: [삼상15:2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11093;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 사무엘의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사울에게 그의 폐위가 확정적임을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다.(2) 사울의 반복되는 간청 때문에 인정에 얽매여 혹시 범할지 모르는 인간적 실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11093;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 여기의 '겉옷'(*, 메일)은 몸에 꽉 붙는 옷을 가리킨다(R. Payne Smith). 따라서 사울이 붙잡았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게 극렬히 매달렸음을 뜻한다. 한편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임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사울의 왕권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sign)로 삼으셨던 것이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찢어진지라'는 말이 28절의 '떼어서'(*, 카라)란 말과 동일한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 경: [삼상15:28]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11093;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 여기서 '이웃'(*, 레아)은 비한정적인 용법으로사용된 말로, 곧 '누구든 간에 어떤 다른 사람'(an other)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여기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곧 다윗을 가리킨다(13:14; 행 13:22).

&#11093; 주셨나이다(*, 네타나흐) - 여기서 이 단어는 13:14에서처럼,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다(16:3, 6-13).

성 경: [삼상15:2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可變的) 속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변적(不變的) 속성을 소개함으로써,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기 불가능함을 명확히 선언하고있다.

&#11093; 지존자(*, 네차흐) - 하나님의 신적(神的) 속성을 시사하는 명칭 중의 하나로서, '영광스러우신 분', '영원히 계시는 분', '승리하시는 분', 그리고 '변함이 없으신 분'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Klein).

&#11093;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 여기서 '변개(變改)하다'(*, 나함)란 말은 11, 35절의 '후회하다'란 말과 같은 어근(語根)의 말이다. 그렇지만 본절의 '변개함이 없다'란 말과 11, 35절의 '후회하셨다'라는 말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1, 35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후회(변개)는 사람의 후회나 변개처럼 그 마음의 변덕이나 어떤 계획의 차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타락에 대해 가지는 신적 긍휼과 슬픔을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 안드로포파도스)으로 묘사한 것 뿐이고(창 6:6, 7), 본절에 묘사된 바 '변개(후회)함이 없다'란 표현은 신적 섭리와 경륜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순수하게 신성론적(神性論的, *, 데오프레포스)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Keil, Fay). 실로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과거.헌재. 미래가 동일하신 분이시다(출 3:14).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물려 역사가 진행될 때,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이고, 또한 11, 35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했을 뿐이다(R. Payne Smith). 민 23:19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5:30]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11093; 범죄하였을지라도...나를 높이사...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작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줄것을 사무엘에게 다시금 요청한다<25절>. 이로써 사울은 죄의 고백(24절)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끌 왕의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던 것이다.

&#11093; 내 백성의 장로들 - 여기서 '내 백성'이라는 말은 사울이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앞에서 갖는 언약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삼상15:3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하나님의 최종적인 폐위(廢位) 선언으로 말미암아(23, 26절), 사울은 이후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무엘은 함께 제단으로 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리자는 사울의 간절한 요청(25, 30절)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을 허락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1)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차기 이스라엘 왕이 등극할때까지 그래도 사울을 통하여 외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O.V. Gerlach). (2)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C.F. Keil).

성 경: [삼상15:3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각의 처형]

&#11093; 아각이 즐거이 오며 - 여기서 '즐거이'(*, 마아단노트)는 '부드럽다', '느슨하다'의 의미를 갖는 아랍어 어근 '아단'(*)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기쁘게', '기꺼이' 등의 뜻이다. 아마도 아각은 자신이 왕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을 알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 부지될 줄로 확신했던 것 같다(Clericus). 한편 '아단'이라는 동사에서 '복락', '기쁨', '환히' 등의 의미가 있는 '에덴'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창 2:8; 시 36:8).

&#11093;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 벌겟역(the Vulgate)과 수리아역(the Syriac)은 아각의 이 말을, 그가 자신의 죽을 운명을 예견하고 불안과 체념으로 한 말이라고 보고 "실로 죽음은 괴롭도다"란 의미로 번역했다(R. Payne Smith). 그리고 혹자는 아각의 이 말을, 죽음을 앞둔 전사로서의 영웅적 용기로 치켜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 아각의 이같은 언급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넘겨짐을 알고,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노년의 선지자는 적어도 왕이나 군대 보다는 긍휼이 풍성할 것이라는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공동번역)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Lange).

성 경: [삼상15:3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각의 처형]

&#11093;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무자하리라 -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Lex Talionis, 출 21:24, 25; 신 19:21)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편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아말렉 왕 아각(Agag)이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란 말은 아각이 여인들을 얘기 못낳는 불임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인들의 자식을 죽여 없앴다는 뜻이다.

&#11093;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쪼개니라 -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제단 앞을 가리킨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특별히 이같은 언급을 한 까닭은, 사무엘의 아각 처형이 단순히 정치 보복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3절)에 근거하여 영적.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한편 선지자의 이같은 직접적인 형 집행은, 왕이 합당한 형 집행을 게을리하는 경우에 대신 이뤄졌었다(왕상 18:40).

&#11093; 찍어 쪼개니라 - 기본 동사 '솨사프'(*)는 '여러 조각내다'(cut inpieces) 또는 '토막토막 끊다'(hew in pieces)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아각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켜 주는데, 우리는 이를 단순히 잔인하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악한 아말렉 족속의 아각 왕에 의해 더욱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수많은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그 백성을 파멸시키고자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말렉 족속의 극한 죄악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 왕국의 우두머리에 대한 신적(神的) 공의의 정당한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 경: [삼상15:3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과 헤어지는 사무엘]

&#11093; 사무엘은 라마로...사울은 기브아 본집으로 - 길갈에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아각의 처형을 마친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자의 거처로 각각 돌아갔다. 이 사실은 단순히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외에, 이후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사무엘의 고향 '라마'(Ramah)에 대해서는 1:1주석을, 그리고 사울의 고향 '기브아'(Gibeah)에 대해서는 10:26 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성 경: [삼상15:3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과 헤어지는 사무엘]

&#11093; 사무엘이...사울을 다시...보지 아니하였으니 - 이 말은 사무엘과 사울이 죽기까지 서로 상면조차 아니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19:24),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선지자로서의 권고를 더이상 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결국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신정(神政)왕국의 왕으로 더이상 인정치 아니했음을 뜻한다. 즉 신정 왕국의 특성은 왕에 대한 선지자의 신의(神意)의 전달 및 권고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지자가 왕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왕의 폐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11093;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었을 때는 그를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사울의 왕직(王職) 수행을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하자,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왕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23,26절). 따라서 이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폐위시켜버린 왕을 위해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사울을 위해 슬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무엘이 사울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는 계속 기도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1093;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11절 및 29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6: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11093;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위를 배척하셨다는 언급은, (1) 사울이 선지자 사무엘의 제사 행위를 침해했을 때(13:8, 9, 13, 14), (2) 그리고 사울이 이기적 욕심에 따라 아말렉에 속한 것을 잔멸치 아니했을 때(15:23, 28) 나타났었다. 그러나 첫번째의 경우때에만 해도, 사울은 자신의 이후 행위 여하에 따라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의 거역 행위로 인하여 사울에게 선언되었던 '폐위(廢位) 선고'는 완전히 확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11093;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 사무엘의 이같은 깊고 오랜 슬픔은 단순히 개인 사울의 비극에 대한 사적(私的) 심정 때문만이 아니라, 사울의 폐위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나타날 부작용을 염려한 때문이었다(Keil, Smith). 사실 그때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울의 군사적 능력만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후일 사울의 전사(戰死)를 슬퍼한 다윗의 애가(삼하 1:19-27)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한편 여기의 '슬퍼하겠느냐'(*, 미트아벧)는 특별한 원인에 따라 심히 애통하는 행동을 가리킨다(사 3:26; 암 1:2; 8:8). 그런데 여기서는 특히 강조적 재귀형으로 사용되어, 그 슬픔을 밖으로 강력하게 표출시킴을 가리킨다(15:35;삼하 14:2; 대하 35:24; 스 10:6).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책망과 더불어 사무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심으로써 그의 슬픔을 소망으로 승화시켜 주셨다.

&#11093;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 여기서 '뿔'(*, 케렌)은 양의 뿔을 가리킨다.그런데 왕의 기름 부음을 위해서는 '병'(*, 파크)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10:1). 그러나 '뿔'이 사용되는 경우와 '병'이 사용되는 경우는 분명 어떤 대조점이 암시되고 있는 듯하다. 즉 '뿔'이 사용될 경우에는 주로 그 왕의 정통성 및 긍정적 성격이 암시되며(왕상 1:39). 반면 '병'이 사용될 경우에는 그 왕의 비정통성 및 부정적 성격이 암시되는 듯하다(10:1; 왕하 9:1-13). 성경이 이처럼 의도적으로 '뿔'의 사용을 보다 긍정적 차원에서 보는 것은, 성경의 여러 문맥상 '뿔'이 왕권(王權)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2:10; 겔 29:21; 단 8:3, 21).

&#11093; 내가 너를...보내리니 - 여기서 '보내다'(*, 솰라흐)란 말은 '가기를 강요하거나 허락하다'라는 의미 보다는, 오히려 '사명을 주다'란 의미로 봄이 더 타당하다(민 14:36; 신 19:12; 삿 6:14).

&#11093; 베들레헴 사람 이새 - '베들레헴'(Bethlehem)은 '떡집'이란 뜻으로, 이곳은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 남서쪽 약 16km, 그리고 예루살렘 남서쪽 약 10km지점의 해발 690m에 위치한 유다의 작은 성읍이다(룻 1:1). 한편 '이새'(Jesse)는 부호(富豪)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 사이에서 태어났던 오벳의 아들로서(룻 4:17, 22; 대상 2:12; 마 1:5,6; 눅 3:32).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사람'이다(Klein). 이새는 그의 할아버지가 부자였으므로, 그 당시 그 역시 부유했었음이 분명하다(룻 2:1). 그러므로 사무엘은 인근 마을의 유력한 가문인 이새의 집에 대해 개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Fay,Smith). 그러나 그가 당시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에 대해서는 몰랐음이 분명하다.

&#11093; 그 아들 중에서 - 당시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다(6-11절).

&#11093;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 여기서 '예선하였다'(*, 라아)는 문자적으로'보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성경 전반에서 이 단어는 '선택하다'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17절; 창 22:8; 41:33; 왕하 10:3). 그리고 여기의 '왕'(*, 멜렉)은 사울에게 적용되었던 단어 '지도자'(*, 나기드)와는 그 의미에 있어 다르다<9:16>. 즉 '방백'(方伯)의 의미인 '지도자'와는 달리, '왕'은 명실공히 한 나라의 군주(君主)를 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 여호와에 의해 왕으로 예선된 자는, 이미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13:14), '사울보다 나은 사울의 이웃'(15:28) 등의 표현으로 암시되어 왔던 다윗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인간적인 기준에서 백성들에 의해 선발된 왕이었으나(8:5, 20; 11:15), 다윗은 오래전부터 신적인 기준에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예비된 왕이었다(7절; 행 13:22). 이런 점에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신정적(神政的) 왕정 체제는 사울의 때가 아니라, 다윗의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룩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신 17:15).

성 경: [삼상16: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11093; 사울이 들으며 나를 죽이리이다 - 비록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최종 폐위 선언을 당함으로써(15:23, 26) 영적 왕권은 이미 상실된 처지였지만, 그래도 당시 사울은 정치.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사무엘이 다른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을 경우, 그 일은 당연히 역모(逆謀) 행위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일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면 자신의 죽음이나 추방이 문제가 아니라, 이새 가문까지 화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솔직히 하나님께 아뢰었던것이다(Smith, Fay). 따라서 사무엘의 이같은 반응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우려되는 불행한 상황을 방지하고, 보다 나은 방법을 하나님께 아뢴 선지자의 사려깊은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그러한 반응을 전혀 책망하지 않으시고, 즉시 지혜로운 방법을 그에게 알려 주셨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입증된다(Keil).

&#11093;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 사무엘에게 지시한 여호와의 이 명령은, 여호와께서 당신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사를 사울을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이 결코 아니다. 실로(Shiloh)의 중앙 성소가 훼파된 당시 상황에서, 백성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자격과 책임이 있는 선지자 사무엘이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백성들과 함께 드리는 일은 지극히 정당하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때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실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아울러 그곳에서 기름 붓는 일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Calvin, Keil, Fay). 다만 사무엘은 자신이 기름 부으러 간다는 사실을 공개할 필요나 책임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제사'(*, 자바흐)는 (1) 화목제를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된단어라는 점(1:3) (2) 제물이 암컷이라는 점(레 3:1-5)등으로 미루어 볼 때 화목제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6: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1109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 여기에 언급된 '제사'는 제사 후 함께 나누어 먹는 잔치가 동반되는 화목제였기 때문에, 사무엘이 제사에 그 지방의 사람을 칭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9:22). 그러므로 사무엘에게 있어서 사실상 이새를 청하는 것은 그의 아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그러나 그 소식을 듣게 될 사울에게는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11093;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붓는 것은 사울에게 기름 부은 것과는 그 성격.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름을 암시하고 있다. 즉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던 목적은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8:5, 20) 다만 이스라엘의 군사.정치적 독립을 위한 것이었지만(9:16, 17),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일은 '하나님의 일'로서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삼상16:4]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11093; 성읍 장로들이 떨며...영접하여 -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의 이같은 태도는 (1) 당시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가장 권위있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2) 또한 사무엘은 사사로서 그 직무상 종종 죄 범한 성읍을 방문하여 책망하고 징벌하는 일을 하는 자였기 때문에, 성읍 장로들은 갑자기 방문한 사무엘을 불안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Klein, Keil, Fay, Smith).

&#11093;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 "언짢은 일로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공동번역),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혹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what is wrong? why haveyou come? - Living Bible). 베들레헴 장로들의 이같은 질문은 사무엘이 자신들의 잘못을 징치하기 위하여 오지는 않았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Mauchline; 왕상 2:13; 왕하 9:17, 19)

성 경: [삼상16:5]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11093; 스스로 성결케 하고 -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몸과 의복을 깨끗케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출 19:10; 수 3:5; 7:13; 욥1:5; 요일 1:7-10).

성 경: [삼상16:6]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11093;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 여기서 '보고'(*, 야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사울을 선택할 때 그의 탁월한 신체를 중시했던 것처럼(9:2; 10:23, 24), 여기서 지금 사무엘도 그같이 외모를 중시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엘리압'(Eliab)은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란 뜻이며, 그는 블레셋의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사울을 따라 종군하였다(17:13, 28).

성 경: [삼상16:7]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처음 외모를 중시하여 왕을 선택했던 일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사실을 사무엘로 하여금 회고케 함으로써 그같은 실수의 재발을 방지하려고 한신다.

&#11093;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여기서 '용모'(*, 마르에)는 '보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곧 얼굴 생김새나 풍채 등내면은 관계없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appearance) 자체를 가리킨다(창 2:9; 12:11; 민8:4).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머리에 기름부을 자를 택할 때 결코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용모나 신장은 무조건 배격하고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11093; 사람은 외모를...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여기서 '외모'(*, 아인)는 직역하면 '눈'(eye)이란 뜻으로서, 곧 '육신의 눈'(肉眼)을 가리킨다. 그리고 '중심'(*, 레브)은 직역하면 '마음'(heart)이란 뜻으로서, 곧 '마음의 눈'(靈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원문의 뜻에 맞추어 본절을 해석하면,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보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의 눈)으로 보느니라"란 뜻이 된다(Klein). 즉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서 인간의 척도와 하나님의 척도가 전혀 다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는 비록 인간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사람의 외적 용모, 신장, 배경등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사람의 내적 겸손, 신앙, 인격, 진실성 등을 감찰하신다는 의미이다(대상 28:9; 시 7:9; 눅 16:15).

성 경: [삼상16:8,9,10]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사무엘은 이새의 여러 아들들 중 누가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선택됐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이새의 아들들을 차례로 자기 앞으로 지나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나, 그러나 이새의 일곱 아들들 중에는 왕으로 선택된 자가 끼어있지 않았다. 아마도 사무엘은 그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주신 내적 음성 또는 내적 확신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Fay).

&#11093; 아비나답...삼마 - 이 두 사람은 모두 형 엘리압과 함께 블레셋의 골리앗이 침범했을 때 사울을 따라 종군했었다(17:13, 28). 한편 여기서 '아비나답'(Abinadab)은 '아버지는 훌륭하시다'란 뜻으로서, 이새의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사울 왕의 둘째 아들이름도 '아비나답'이었다(31:2). 그리고 '삼마'(Shammah)는 '황무지'란 뜻으로서, 삼하 13:3; 대상 2:13에서는 '시므이'로 표기되어 있다.

&#11093;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지나게 하나 - 대상 2:13-15에 기록된 다윗의 가계에 따르면, 이새의 아들은 다윗까지 포함하여 도합 7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윗까지 포함하면 이새의 아들은 도합 8명이 된다. 이러한 차이는 분명 이새의 8아들들 중 한 사람이 어려서 일찍 죽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Smith, Fay).

성 경: [삼상16:1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11093; 말째가 남았는데 - 여기서 '말째'(*, 하카탄)는 '가장 어린'이란 의미외에 '가장 작은'이란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 당시 다윗의 모습은 사울의 '큰 키'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9:2; 10:23).

&#11093;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 이것은 그당시 이새의 가족들이 다윗을 아직 어른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당시의 풍속으로 볼 때, 어른만이 제사의 초청에 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왕은 고대 중근동에서 종종 '목자'로 인식된다는 점에서(De Vaux), 여기서 다윗이 양무리 가운데 있는 것으로 언급된 것은 다윗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예시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Klein).

&#11093; 앉지 아니하겠노라 - 이 말은 그때까지 사무엘이 앉아 있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의 '앉지'(*, 사바브)는 '둘러싸다', '에워싸다'란 의미로서(삼하 22:6; 대하 33:14; 시 17:11; 전 9:14), 곧 식사하기 위하여 식탁에 둘러앉는 것을 가리킨다(Keil, Smith, Fay). 따라서 그때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 식사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성 경: [삼상16:1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11093; 그의 빛이 붉고 - '빛이 붉고'는 머리털 색깔이 붉음을 뜻한다(Klein, Keil, Lange).대부분 검은 머리털 색깔을 지닌 중근동에서 이 붉은 색 머리칼은 귀한 것으로서, 그 지역에서는 아름다움의 한 조건이었다(Keil).

&#11093; 눈이 빼어나고 - 여기서 '빼어나고'에 해당하는 원어 '야페'(*)는 '아름답고', 또는 '반짝이고'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총기어린 아름다운 눈을 가리킨다. 이것도 뛰어난 얼굴 모습의 소유자가 갖추어야 했던 한 조건이었다(창 29:17).

&#11093; 얼굴이 아름답더라 - 이것은 단지 외적 아름다움만을 의미치 않고, 내면에서 풍겨나오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25:3; 창 41:5; 신 1:25; 9:6; 삼하 18:27; 행 7:20). 그러나 여기 '얼굴'(*, 로이)은 분명 '겉모양' 혹은 '외모'란 의미도 있는바, 이는 또한 그 외적 얼굴도 아름답게 잘 생겼다는 사실을 시사한다.(Klein).

성 경: [삼상16:1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1109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부었더니 - 다윗은 모두 3차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았다. 즉 여기 첫번 기름 부음은 비공식적으로 이새의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은밀히 부어졌고, 두번째의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올랐을 때(삼하 2:3, 4) 기름 부음 받았다. 그리고 세번째는 마침내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을 때(삼하 5:3)받았다.

&#11093; 그 형제 중에서 - 이것은 형제들이 목격하는 가운데서 다윗이 기름 부음 받았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때 이새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은 그 장소에 아무도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의 형제들은 사무엘의 엄중한 부탁과, 그리고 사울의 보복등을 우려해 그 사실을 비밀로 유지한 듯하다(Leon Wood).

&#11093; 이 날 이후로 -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다윗에게 즉각적으로 임했고, 또한 영속적으로 임재하고 계셨음을 시사하는 문구이다(Fay).

&#11093;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적.도덕적.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역량과 은사를 허락하셨음을 뜻한다. 그 결과 다윗의 행동과 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18절). 한편, 이처럼 기름을 붓는 객관적 의식(儀式)의 결과로 여호와의 신이 주관적으로 임했다는 이 사실은 사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었다(10:1, 10). 그러나 사울의 경우와는 달리, 다윗의 경우는 이같은 일이 (1) 기름 부음의 의식 직후에 있었으며 (2) 임재하신 여호와의 신이 끝까지 떠나지 않으셨으며 (3) 여호와의 신이 임할 때 발작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10:9-12; 11:6, 7) 사울의 경우와는 구별된다(Klein). 따라서 본서 저자는 위의 두 경우를 암시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사울에 대한 다윗의 우월성을 강조하려고 한 듯하다. 한편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의 신(神)을 부어주신 까닭은 (1) 다윗이 왕의 신분에 합당한 도덕성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며, (2) 왕의 고유한 직무를 감당할 능력을 소유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삼하 5:4에 이하며,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된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받을 때, 그의 나이를 레온 우드(Leon Wood)는 15세 가량으로, 그리고 카일(Keil)은 20세 가량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당시 다윗이 제사 의식에 공식 참여치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만 20세 이상의 성년 남자가 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므로(11절), 따라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마침내 등극될 때까지 약 10-15년 가량을 예비 왕으로서 연단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혹자는 사무엘의 생전에 다윗이 라마의 선지 학교에서 일정 기간 동안 훈련받았다고 추정하기도 한다(R. Payne Smith, f.r. Fay).

성 경: [삼상16:14]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11093;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 사울에게 임했던 '여호와의 신'은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직을 제대로 수행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11:6>. 따라서 이제 사울의 왕위가 폐위된 이상,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1109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 원문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신'(an evil spirit from Jehovah)이란 뜻이다. 여기서 이 '악신'(*, 루아흐 라아)은 인간의 도덕적.영적 생활을 고양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는 본질상 뚜렷이 대조되는 사단의 영으로서, 곧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억누르고 파괴하는 사단의 사악한 영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사단의 영은 하나님과 허락과 지배하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욥 1:12). 따라서 이것은 선악(善惡) 간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주재권 아래 있다는 구약의 전반적 사상과 잘 조화된다(신 13:2-4; 삿 9:23; 삼하24:1; 왕상 22:19-22; 대상 21:1; 욥 1:6-12).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이같은 악신이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그것은 (1) 사울의 왕위가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가시화(可視化)하여, (2) 새로이 영호와의 신을 받은 다윗과 대조시키며, (3) 또한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로 인해 다윗이 수금 연주자로 성경이 무대에 공식 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한편 여기서 '번뇌케 한지라(* 바아트)는 '두렵게 하다', '놀라게 하다'란 의미이다(삼하 22:5; 욥 18:11;사 21:4). 즉 이것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 혹은 정신병적 우울증이나 착란증 현상을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16:15]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은 사울 주변의 신하들에게도 사울의 폐위가 가시화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 경: [삼상16:16]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11093; 수금(*, 킨노르) - 이 악기는 음량을 크게 하기 위한 소리통 곧 본체에서 뻗은 두 개의 가지가 달린 현악기로서<10:5>, 이 두개의 가지 사이를 가로지른 막대기와 본체의 끝에 동일한 길이의 현(絃)들이 여러개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약 B.C. 14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이와 같은 모양의 악기가, 최근에 일단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므깃도에서 발굴되었다(Klein).

&#11093;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 이것은 사울에 대한 악령의 활동이 간헐적(間歇的)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1093; 그가...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 당시 사울이 당하던 고통은 원인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정신 심리적 현상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고대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던 음악을 통한 심리적 치료 요법이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10:5; 왕하3:15>. 그러나 사울에게 나타난 현상은 근본적으로 영적(靈的)인 원인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에서, 음악을 통한 심리적(心理的) 요법은 임시 방편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삼상16:17,18]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여기서는 장차 왕위에 오를 자로서, 다윗의 여러 뛰어난 자질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미 어느 정도 널리 인정되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11093; 소년 중 한 사람 - 이 소년(*, 네아림)도 사울의 신하 중에 있었다는 점에서, 사울의 신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의 연소함은, 또한 연소했던 다윗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었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11093;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 다윗에 대한 이같은 호칭은 하나님께서 1절에서 직접 사용하셨던 것으로서, 다윗을 소개하려고 한 그 소년 신하가 다윗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11093;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 - 다윗에 대한 저자의 이같은 언급은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탁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서 '호기'(豪氣)는 문자적으로 '능력있는 용사'(a mighty valiant man, KJV)란 뜻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다윗이 자신의 가축을 해치려던 사자나 곰 등을 쳐죽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17:33-37). 그리고 '무용'(武勇)은 '전사'(戰士, a man of war; KJV, RSV)란 뜻이다. 이것도 위의 '호기'와 같은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또한 '구변'(口辯)은 '매사에 분별력 있는'(prudent in matters, KJV), '말을 신중하고 현명하게 하는'(prudent in speech, RSV)이란 뜻이다. 특히 이러한 자질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귀중히 평가되던 덕목(잠 23:9; 25:9, 11, 15; 29:20)인데, 이것은 시편 기자로서의 다윗의 작시(作詩) 능력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준수한'(*,토아르)은 '잘 생긴 미남자'(a finelooking man, NIV; a man of good presence, RSV)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히 이 점에 대한 묘사는 이미 12절에 언급되었었다(25:3; 창29:17; 39:6; 신 21:11; 에 2:7).

&#11093; 여호와께서...함께 계시더이다 - 기름부음 받은 결과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된(13절) 다윗은, 이후 그의 행적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즉 내적으로는 겸손, 성실, 진실함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사자나 곰을 맨손으로 물리치는 호기와 무용으로 그 증거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아무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게신다는 이 사실은 이후 모든 면에서 다윗에게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어구이다(3:19; 10:7; 18:12, 14).

성 경: [삼상16:19]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11093; 사울이...다윗을...보내라 하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던 바대로(8:11-18), 사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백성들을 징집하는 일을 거침없이 시행하고 있었다.

성 경: [삼상16:20]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11093; 이새가...보내니 - 당시 이새는 왕의 권위를 존중하였으며 - 또한 자신의 아들이 왕실의 일에 종사케 되었음을 명예롭게 여겼기 때문에(Klein), 자신의 아들을 기꺼이 사울에게 보냈을 것이다. 특히 이때 이새는 자신의 아들이 미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실(13절)을 상기하고, 자신의 아들이 왕실에서 일하게 됐다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11093;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 - 이와같은 예물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1)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표명하거나(9:7, 8), (2) 또한 상대방에게 감사를 나타낼 때(창 14:18). (3) 그리고 상대방을 진정시킬 목적(25:18) 등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왕에 대한 예의라는 점에서 첫번째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성 경: [삼상16:2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11093; 그 앞에 모셔 서매 - 이것은 (1) 분부를 받기 위하여 가까이서 기다린다(왕상3:16), (2) 또는 본격적으로 신하의 한 사람이 되어 일을 하다(창 41:46)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분명 다윗은 사울이 악신으로 고통당할때 수금을 타 그의 마음을 위로함으로써 봉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사울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하였고, 또한 사울에게 크게 사랑받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23절).

&#11093;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 처음 수금 연주자로 사울에게 봉사한 다윗은 얼마 후 사울의 병기 든자(armor - bearer, RSV)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즉 (1) 다윗에 대한 사울의 사랑과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2) 또한 사울이 다윗의 무예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병기 든 자'는 주인의 창칼이나 방패 등을 가지고 다니는 일종의 부관으로서(Smith, Keil), 주인으로부터 가장 신임받는 정예군 중에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14:1; 17:41; 31:4-6; 삼하18:15). 이처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말미암아, 마치 모세처럼 다윗도 사울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상황 가운데서 왕실의 보다 고상한 직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왕궁의 여러 법도와 국사를 익히게 하셨는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착실히 준비시켜 나가셨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72).

성 경: [삼상16:2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계속적으로 자신의 곁에 두겠다고 이새에게 고지(告知)함으로써, 다윗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신임을 강력히 표명하고 있다.

&#11093;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그가 나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느니라'란 뜻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이 사울 자신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21절). 이처럼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이 생기기 전에는 그를 진정 사랑했다. 그러나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이 자신을 앞지르자(18:7), 이후로 사울은 이전에 다윗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그를 적대하게 되었다.

성 경: [삼상16:2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은 다윗이 사울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21, 22절)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11093;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 - 이는 하나님의 허락과 지배하에서 주로 악인들에게 활동하는 사단의 영을 가리킨다. 14절 주석 참조.

&#11093; 다윗이 수금을...탄즉 사울이...낫고 - 굳이 현대 의학적으로 사울의 병명을 분류하자면, '심한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 착란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상 좋은 음악을 통한 치료법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울을 번뇌케 한 원인은 사단의 활동이므로 일반 음악 요법으로는 결코 그를 치료할 수 없었다. 다만 여기서 다윗의 수금연주가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13절) 다윗이 수금을 통한 음악으로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에, '악신'(惡神) 곧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사단의 영이 사울에게서 일시적으로 떠나간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6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7: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11093; 블레셋 사람들이...싸우고자 하여 - 블레셋 사람들의 이같은 전의(戰意)는 당시 악신으로 고통받던(16:14) 사울의 통치력 약화를 기화로, 믹마스 전투에세의 패전(14:31)을 설욕키 위한 것이었다.

&#11093; 유다에 속한 소고 - '소고'(Shochoh)는 '가시가 많은 곳'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원, 곧 세펠라 지역에 위치한 요새 도시 중 하나로서(수 15:35), 오늘날 와디숨트(Wady Sumt)지역에 위치한 '슈웨이케'(Shuweikeh)로 추정된다(Keil,Smith). 베들레헴 서쪽 약 22.5km, 아세가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블레셋 군이 유다에 속한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스라엘에 대해 기선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1093; 아세가 - '파헤친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아얄론 골짜기(수 10:12) 남부의 견고한 도시로서, 해발 약 120m 가량이다. 수 10:10 주석 참조.

&#11093; 에베스담밈에 진치매 - '에베스담밈'(Ephes-dammim)은 '피의 경계선'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지명은 그곳에서의 잦은 전투로 많은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이곳은 소고(슈웨이케) 북동쪽 약 2.5km 지점으로 현재의 '다뭄'(Damum)으로 추정된다(Keil, Fay). 한편 대상 11:13에는 '바스담밈'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 경: [삼상17: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11093;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 '엘라 골짜기'(the vally of Elah)는 '상수리 나무의 골짜기'란 의미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서남쪽 약 22.5km에 위치한 오늘날의 '와디 에스상트'(Wadies Sant)로 추정된다. 당시 그 지역 내에는 나무가 무성하였고, 그 골짜기 밑바닥에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용했을 듯 싶은 조그만 돌들이 지금도 깔려있다고 한다. 또한 이 골짜기는 '소고'의 북쪽에서 동서로 가로질러 있다. 한편 이곳은 여름철만 빼고는 항상 골짜기에 물이 흘렀으므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이 전투는 물이 말랐을 여름철에 벌어졌음이 분명하다(Hertzberg).

&#11093; 항오를 벌였으니 - '항오(行伍를 벌이다'(*, 아라크)는 '상대를 엄습하다', '일렬로 정렬하다'란 의미이다(4:2;욥 6:4). 여기서는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방어적 자세를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본절은 블레셋 족속이 자신들의 본진이 있는 '에베스담밈'<2절>을 떠나 이스라엘이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로 진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때 양군은 골짜기를 경계로 낮에는 양편 언덕에 대열을 이뤄 길게 늘어서서 전투 내세를 취하다가, 밤에는 자신들의 장막으로 돌아가기를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Hertzberg).

&#11093;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 여기의 '골짜기'(*, 가이)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골짜기(*, 에멕)와는 전혀 다른, 좁고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협곡(峽谷)을 뜻한다(Conder). 바로 이같은 지형적 요인 때문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마주보면서도 쉽사리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PulpitCommentary).

성 경: [삼상17: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11093; 싸움을 돋우는 자(*, 아쉬 하베나임) - 문자적으로는 '둘 사이에 있는 사람'(a man between the two)이란 뜻이다. 이것은 결국 단신으로 싸워 단번에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하기 위해 두 군대 사이에 개입하는 중간사람(middle-man)이란뜻으로, 곧 선봉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같이 전군(全軍)을 대표하여 선봉장이 상대방의 선봉장과 전투를 하는 방식은 성경 다른 곳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같은 전투 방식은 헬라 민족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 블레셋 족속들이 헬라권에서 이민 온 민족이라는 사실은 골리앗의 이같은 전투 형태를 넉넉히 이해케 해준다.

&#11093; 그 이름은 골리앗 - '골리앗'(Goliath)이란 이름이 갖는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사람이 비셈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11093; 가드 사람 - '가드'(Gath)는 아세가 서쪽 약 8.9km 지점으로, 블레셋 5대 도시 중 하나이다(5;80. 그런데 이 지역에는 거인족인 아낙 족속(Anakim)이 섞여 살고 있었다(수 11:22). 그러므로 분명 골리앗도 이 거인족의 후예일 것이다.

&#11093;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 고대의 측략법에 근거하여 한 규빗(Cubit)을 약45cm 정도로, 한뼘(Span)을 약 13cm 정도로 본다면, 골리앗의 키는 약 283cm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한편 NEB는 274cm로 환산하였고, NIV와 Living bible은 '9피트 남짓'(over nine feet, 약 270cm 남짓)으로 보았다. 아무튼 골리앗은 270cm 이상으로,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장대한 거구였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7: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11093; 머리에는 놋투구 - 여기서 '놋투구'(*, 코바)는 이 단어의 첫 철자가 본절에서는 '카프'(*)로, 반면 38절에서는 '코프'(*)로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헷 족속이나 아랍 민족으로부터 수입한 것이 듯하다(Krinetzki).

&#11093;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 '어린갑'(*, 카스케세트)은 천 위에 비늘모양의 놋이나, 철판 조각을 다닥 다닥 붙여서 만든 갑옷(coat of mail, KJV; coat ofscale armor of bronze, NIV)으로(Aquila), 고대의 전투 때에 왕이나 군장에 의해 주로 착용되곤 하였다(Layard).

&#11093;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 - 한 세겔(Shekel)은 약 11.5g이므로, '오천 세겔'은 약 57.5kg이다.

성 경: [삼상17: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11093;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 어린갑에 의해서는 허리나 허벅다리 부분까지도 보호되었다. 그러므로 이 놋경갑은 다리 부분을 보호하는 장비임이 분명하다.

&#11093;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 '놋단창'(*, 키돈)은 어깨의 뒷 부분에 차는 창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것을 방패라고 주장하나(LXX, Vulgate, theSyriac) (1) 고대에 방패는 대개 병기 드는 자가 별도로 갖고 다녔으며(7절) (2) 견고한 갑옷에 의해서 등 부분도 충분히 보호될 수 있다는 점(Josephus) 등에서, 여기 '놋단창'은 방어용 무기인 방패라기 보다는 오히려 창과 같은 공격용 무기로 봄이 타당할것이다. 그리고 본 단어가 단수라는 점에서, 이것은 손으로 던져 적을 살상케 하는 단검류는 아닌 듯하다.

성 경: [삼상17: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11093;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 이것은 멀리 던지기 위해 창자루에 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감아 놓은 창의 모양에 대한 표현이다(Yadin). 즉 창자루에 긴 끈이 달려있었기 때문에 '베틀채'(weaver's beam, KJV; weaver's rod, NIV) 같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자루'(staff, KJV; shaft, NIV)에 해당하는 '헤츠'(*)는 케리(Keri)에 따라 '에츠'(*)로 고쳐 읽어야 한다(삼하 21:19;대상 20:5).

&#11093; 창 날은 철 육백 세겔 - 600 세겔은 약 7kg이다. 따라서 이것은 골리앗의 창이 엄청나게 컸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4-7절에 묘사된 바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 골리앗(Goliath)은 그 거대한 신장이나 육중한 무기등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만큼 크고 강했다. 마치 우뚝 솟은 난공 불락의 요새와 전혀 다를 바 없었던것이다.

성 경: [삼상17: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본절에는 골리앗이 자신을 블레셋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자신과 싸울 대표를 뽑아 보내라고 호통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골리앗이 이처럼 일대일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협곡을 경계로 서로 대치했던 지형 형편상 전면 선제 공격이 곤란했으며 (2) 골리앗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이스라엘의 그 누구라도 쉽사리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이같은 일대일 결투는 고대 이방의 전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 선봉장의 승리는 곧 전체의 승리로 간주되어, 패배한 측은 상대국에게 패전국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해야 했다(Klein, 9절).

&#11093; 그가 서서 - 골리앗은 그때 언덕위에 있던 자신의 진을 나와 골짜기의 중간쯤에 우뚝 버티고 서있었을 것이다.

&#11093; 어찌하여...항오를 벌였느냐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와 진을 치고, 골짜기 언덕에 대열을 이루고 있는 사실을 가리킨다.

&#11093; 나는 블레셋 사람...너희는 사울의 신복 - 여기서 '나는 블레셋 사람'이란 말은 골리앗 자신이 블레셋 군대의 힘을 대표하는 자란 뜻이다(Keil). 그리고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중앙 집권적 군주 사울에 의해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 이것은 여기의 '신복'(*, 아바림)이란 단어가 '종들' 혹은 '노예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골리앗은 이같은 언급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흥분케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것이다.

성 경: [삼상17: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11093; 종이 되어...섬길 것이니라 - 본절에 언급된 골리앗의 이 제안은, 결국 그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52-54절), 다만 이스라엘을 공포 분위기 속으로 빠뜨리기 위한 공갈 협박용이었음이 확실하다(10, 11절).

성 경: [삼상17:1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11093; 내가...모욕하였으니 - 이것은 골리앗이 (1)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울의 노예 혹은 종이라고 깔보았고(8절), (2) 또한 이스라엘은 겁장이들이므로 블레셋의 종노릇이나 해야 할 무력한 민족이라고 조롱했던 사실(9절)을 가리킨다.

&#11093;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용사를 요구만 하고 이스라엘 진으로 접근해 갈 수 없었던 이유는 (1)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진이 가파른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2) 또한 그는 중무장을 하여 몸이 무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17:1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11093;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 여기서 '놀라'(*, 하타트)는 원래 '파괴되다', '부서지다'란 의미로서, 극단의 공포심을 표현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왕하 19:26;사30:31;렘 8:9). 그리고 '두려워하니라'(*, 야레)는 '경외하다', '엄위하다'란 의미로서, 어떠한 유.무형의 강력한 힘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8:15;19:30;신 5:5;수 4:4;시 119:120). 이처럼 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부터 전체 병사에 이르기까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기가 질려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총지휘자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 버린 필연적 결과였다(F. W. Krummacher).

성 경: [삼상17:1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11093;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 '에브랏'(Ephrath)은 베들레헴의 고대 명칭으로서(창48:7), 족장 야곱의 아내 라헬이 산고로 죽은 곳이며(창 35:16-19), 무엇보다도 후일 선지자 미가의 입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이다(미 5:2). 한편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과 구별했고(수 19:15;삿 12:8), 또한 '에브랏 사람'(Ephrathite)이라고 밝혀줌으로써 이새의 집안이 베들레헴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결국 유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고향으로서, 그리고 장차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으로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11093; 이새는...나이 많아 늙은 자 - '늙은 자'(*, 자켄)는 성경에서 보통 '장로','노인'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한편 '나이 많아'는 '나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섰다'란 의미이다. 결국 이같은 언급은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참전하고 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새가 참전치 아니했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Fay). 한편 스미드(R.Payne Smith) 박사는 당시 이새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고, 도합 8명의 자녀가 있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새의 나이를 최소한 60세 이상으로 보았다.

&#11093; 여덟 아들이 있는 중 - 16:10, 11에서도 이새의 아들은 여기서처럼 여덟 명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역대상 2:13-15에서는 일곱 명으로 나와 있다. 이같은 차이를 규명해보려는 시도로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즉 (1) 이새의 아들은 원래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죽었다고 보는 견해(Keil, Smith), (2) 이새의 아들은 원래 일곱 명이었으나 16:10에서 다윗을 제외하고도 일곱 명이라고 한 까닭은 많은 다른 아들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Klein) 등이다.

성 경: [삼상17:1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11093; 장성한 세 아들은...싸움에 나갔으니 -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군대에 나갈 자격과 의무가 있는 자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였다(민 1:3).

&#11093; 엘리압...아비나답...삼마 - 16:6-9 주석부분 참조.

성 경: [삼상17:1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11093; 다윗은 말째라 -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형들과는 달리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이는 당시 다윗의 나이가 20세 미만이었음을 시사해준다.

성 경: [삼상17:1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11093;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 여기서 '왕래하며'(*, 훌레크 와사브)는 다윗이 사울의 궁전과 베들레헴 집을 반복적으로 계속 오갔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히브리 원문은 다만 '갔다가~그리고 (사울에게로부터) 왔다'라고 말하고 있기때문이다. 즉 다윗은 수금을 타기 위해사울에게 갔다가(16:19, 22), 그의 병이 호전되자 양을 치는 자신의 일을 위하여 다시 베들레헴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11093; 베들레헴에서...양을 칠 때에 - 이것은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기 위하여'(to feed...sheep at Bethlehem, 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즉 이것은 다윗이 수금을 타던 일을 그만 두고, 사울의 곁을 떠났던 한 가지 목적을 언급하는 어구인 것이다.

성 경: [삼상17:1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11093; 그 블레셋 사람 - 이것은 단수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블레셋 군대가 아닌 '골리앗'(Goliath) 개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11093; 사십일을... 몸을 나타내었더라 - 이것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계속적으로 소강(小康)상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같은 상태가 계속된 까닭은 (1) 이스라엘측에서 골리앗을 상대할 용사를 아직껏 내보내지 못했으며(11절) (2)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진(陳)이 자리잡고 있던 지형적 조건상 전면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절 주석). 그러나 블레셋의 선봉장 골리앗의 계속 되는 위협으로 말미암아 전황(戰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사십 일'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예시해주는 어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창 8:6;삿 13:1; Krinetzki). 즉 본서 저자는 여기서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이같이 시련과 위기의 수인 '사십 일'이라는 말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매우 필요 적절한 시기에 이새에 의해 블레셋과의 전투 장소에 보내졌음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 듯하다.

성 경: [삼상17:17,1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이새가 여기서 이같은 조치를 위한 이유는, 블레셋과의 사십 일 이상의 대치로 인하여(16절) 이스라엘 군대의 식량이 고갈되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가정은 싸움에 징집된 자식들에게 일종의 병참 지원을 했던 것같다.

&#11093; 볶은 곡식...떡...치스 - 성경에서 이것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곤고한 자들에게 적절한 음식으로 주로 언급되고 있다(25:18;삼하 17:28;룻 2:14). 특히 '볶은 곡식'과 '떡'은 서민들에 의해 애호되던 음식이었다(Krinetzki). 그리고'치스'(*, 할라브)는 문자적으로는 '우유'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건조한 우유덩어리'를 가리킨다. 한편 '한 에바'는 약 23리터에 해당하는 구약 시대 고체량의 부피 단위이다(출 16:36).

&#11093; 안부를 살피고 - 이것은 건강 및 생존의 여부에 관한 '솰룸'(*, '평안')의상태를 알아보라는 당부이다.

&#11093; 증표를 가져오라 - 이것은 (1) 다윗이 제대로 형들을 만나 형들의 안부를 살폈는지의 여부, (2) 예물이 전달됐는지의 여부, (3) 다윗에 의해 이새에게 전달될 형들에 관한 소식의 진위(眞僞) 여부를 증명할 어떤 '증거물'(token, RSV)을 뜻한다. 틀림없이 이것은 서신(書信)의 형태였을 것이다(F. R. Fay).

성 경: [삼상17:1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본절도 18절에 이어, 이새에 의해 다윗에게 전달됐던 내용이다.

&#11093; 엘라 골짜기 - 2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7:20,2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11093; 일찌기 일어나서 양을...맡기고 - 다윗의 순종과 부지런함, 그리고 책임감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아마도 저자는 여기서 사울의 왕권을 계승할 자로서의 다윗의 인품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 같다.

&#11093; 진영 - (*, 마갈라). 이것은 '둥글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 '아갈'(*)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고대 수비 진지의 일반적 형태인 둥근 모양을 한 바리케이드를 가리킨다(Lange). 한편 칼빈(Calvin)은 이 바리케이드가 병거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병거의 장소'로 이해하였다(26:5, 7).

&#11093; 항오를 벌이고 - '항오(行伍)를 벌이다(*, 아라크)란 말은 '정렬하다', '배열하다'란 의미로서, 곧 전투 대형으로 군사를 적절히 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2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11093; 짐을...맡기고 -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형들이 있는 전투 대열로 신속히 가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서 '짐'은 형들에게 주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가져온 음식 보따리를 가리킨다(17절).

짐 지키는 자 - NEB(the New English Bible, 새 영어 성경)는 이 말을 '병참 장교'(quartermaster)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을 따른다면, 다윗은 그때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전하지 않고, 여기의 이 병참 장교의 손을 통해 형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성 경: [삼상17:2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11093; 골리앗...항오에서 나와서 - 여기서 '항오'(*, 마아로트)는 골짜기를 경계로 양쪽 언덕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군사 대열을 가리킨다<3절>. 그리고 '나와서'(*, 올레)는 '올라가다'란 의미인데, 이것은 골리앗이 자신의 진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진쪽의 언덕으로 어느 정도 올라왔음을 가리킨다(F. R. Fay).

&#11093; 전과 같은 말 - 곧 8-10절의 내용과 같은 모욕과 조롱의 말.

성 경: [삼상17:2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11093; 심히 두려워하여...도망하며 - 즉 골리앗이 더이상 따라 올라올 수 없는 안전 지대로 피신했다는 말이다. 이로 볼 때 당시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한 사람으로 인하여 얼마나 사기가 저하되고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혔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삼상17:2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여기서는 사울 왕에 의해 약속된 바(27절)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주어질 세 가지 상급이 언급되고 있다.

&#11093;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 이와 같이 큰 재물을 약속함으로써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 경우는 성경에 많이 언급된다(수 15:16;삿 1:12;삼하 18:11;대상 11:6). 한편 당시의 왕정(王政)이 실시된 지 20여년<15:1> 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으므로, 아마도 사울 왕가(王家)는 어느 정도의 행정 조직을 갖추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많은 재정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8:15, 17). 사실 고대 군주국에서는 군주(君主)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하의 충성에 대한 보상이 뒤따랐고, 따라서 그러한 관습이 군주가 많은 재정을 보유하려 했던 목적 중의 하나였다(8:14, 15).

&#11093; 그 딸을 그에게 주고 - 성경에는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딸만이 사울의 딸로서 언급되고 있다(14:49). 그러나 사울에게는 이들 외에도 또다른 딸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에 이 두명 만이 언급된 까닭은, 이 둘만이 다윗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맏딸 '멜랍'(Merab)은 결국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지만 처음에는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됐던 처지였고(18:17-19), 또한 둘째딸 '미갈'(Michal)은 결국 다윗에게 주어졌던 것이다(18:20-27). 어쨌든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며, 의미 심장한 일이었다. 특히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아 차기의 왕으로 확정된(16:13) 다윗에게는 그 일이 왕좌로 나아가는 자신의 길을 보다 평탄게 할수 있을 것이었다.

&#11093; 그 아비의 집을...자유하게 하시리라 - 사울의 이 약속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즉 (1) 왕과 백성 사이의 중간 계급 혹은 귀족 계급으로 올려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Lemche, Ewald), (2) 세금 납부를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Fay), (3)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Smith) 등이다. 그러나 첫번째 견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중간 계급이 형성되어 있지않았다는 점에서 (Mccarter), 그리고 두번째의 견해는 '자유하게 하시리라'(*, 하파쉬)는 단어가 성경 용례상 세금의 면제를 전혀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출 21:2;신 15:12;렘 34:10) 타당치 않다. 반면에 세번째의 견해는 '자유케 하시리라'라는 단어가 대체적으로 육체적 억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한 우가릿 문서에 용감한 행동을 한 사람이 왕에 의하여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평행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Klein) 타당성이 있다. 한편 여기 '아비의 집'은 가문(家門) 전체를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2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11093;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 이 말은 다윗의 의분(義憤)이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또는 골리앗을 죽이려한 다윗의 의도가 자신의 영달이나공명심 때문이 아니라, 오직 골리앗으로부터 당한 민족적 치욕 및 신성 모독을 제거하려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치욕'(*, 헤르파)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준 '모욕'(10절)과 동일한 어근의 말이다.

&#11093;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 이것은 다윗이 이미 약속된 것(25절)보다 더 큰 상급을 사울에게 약속받으려 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다윗은 그때 이 말을 함으로써 골리앗을 죽이는 일의 당위성.시급성을 시사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본절의 후반부 '이 할례 없는...모욕 하겠느냐'라는 말과 (2) 이후 딸을 주겠다는 사울의 제안을 다윗이 사양했다는 언급(18:18) 등을 통해 분명해진다.

&#11093;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대체로 포경 수술을 안했다는 사실 자체 보다는, 그들이 이스라엘과는 달리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 관계하에 있지 않은 이방 민족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다<14:6 주석 참조>. 그러므로 다윗의 이 말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하나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라는(16:18) 확신이 담겨 있었다.

&#11093;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 - 이같은 문구는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동에 관한 언급이 다뤄지는 문맥중에 종종 나타난다(Klein, 수 3:10;왕하 19:4).그리고 여기 '사시는 하나님'(*, 엘로힘 하임)은 말할 나위없이 블레셋이 섬기던 다곤(Dagon, 5:2 주석 참조) 우상의 무기력함과 무가치함을 경멸하는 말투임이 분명하다(렘 10:6-10). 이같은 다곤 우상의 무기력성은 다곤의 이름을 빙자한 골리앗의 다윗에 대한 저주가 아무런 효험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결과적 사실로써 증명되고 말았다<43절>. 뿐만 아니라 다곤 우상의 무기력함은 과거에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완전한 항복을 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지 않았던가(5:3, 4)! 한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으로 훨훨 타올랐던 소년 다윗의 이 말은 당시 사울 통치하의 무기력하고 침체된 이스라엘 군대의 무감각성을 일깨워 주는 각성제가 되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7:2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본절은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는 세 가지 상급(25절)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결코 근거없는 유언 비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삼상17:2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11093; 엘리압이...노를 발하여 - 다윗의 맏형 엘레압의 이 분노는 다윗의 거룩한 분노와는 뚜렷히 대조되는 것으로, 곧 자신의 편협한 소견에서 비롯된 세속적 분노이다. 어쩌면 엘리압의 이같은 분노는 자신을 제쳐놓고 동생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한 질투 및 시기심이 근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11093; 네가 어찌하여...내려왔느냐 - 이것은 베들레헴이 해발 690m 높이의 고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15:12;16:2).

&#11093;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 엘리압의 이 말은 (1) 양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에 태만했다는 것, (2) 쓸데 없는 일에 공연히 참견했다는 것 등을 지적한, 다윗에 대한 부당한(20절) 책망이다(Lange).

&#11093; 나는 네 교만과...완악함을 아노니 - 여기서 '교만'은 목동의 주제를 벗어난 이기적 욕심(25절)을 지적한 말이고, '완악'은 피흘리는 전쟁을 보고 즐기고자 하는 사악한 심성을 지적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과 '완악'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지적코자 할때 성경에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들이다(신 17:12;18:22;렘 7:24). 그러므로 결국 형 엘리압은 이같은 단어를 다윗에게 적용함으로써, 다윗의 거룩한 열정과 의분을 한낱 이기적인 교만과 사악함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실로 교만하고 완악한 심성은 엘리압 자신의 부당한 비난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17:2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11093;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 이 말은 자신이 책망받을 일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말이다(Fay).

&#11093;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그것은 한 마디의 말에 불과하지 않은가?'란 뜻이다. 곧 이것은 다윗 자신이 골리앗과 싸울 의사를 밝히는 말 이외에는 기타 아무런 교만하고 완악한 말도 하지 않았음을 기라킨다. 이처럼 여기서 다윗은 자긴이 그곳에 간 일차적 목적(17, 18절)을 제쳐두고, 골리앗을 쳐죽이는 일을 자신이 그곳에 간 목적으로 형에게 제시한다. 그때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골리앗으로 인해 빚어진 이스라엘의 위급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신적(神的) 소명을 느꼈고, 바로 이같은 신적인 소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그곳으로 가게끔 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17:3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11093; 전과 같이 말하매 - 이것은 문자적으로 '이 말(*, 다바르)을 따라 말하매'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다다르)은 골리앗에 대한 자신의 도전 의사를 가리킨다(26, 29절).

&#11093;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 이것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자에게 세 가지 상급이 약속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25, 27절).

성 경: [삼상17:3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11093;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 문자적으로는 '사울의 면전(面前)에 고하였으므로'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 면전'이라는 말은 특정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특수한 표현이다(Thenius). 따라서 여기서 이같은 표현법을 사용한 까닭은, 다윗이 사울앞에 나아간 것은 그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우며 또한 의미 심장한 일이었음을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인 듯하다.

&#11093;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 여기서 '부른지라'(*, 라카흐)는 '취하다', '맞다들이다'란 의미이다. 결국 이 단어는 골리앗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사울에게 있어 다윗이라는 인물의 출현이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는지를 잘 시사해준다.

성 경: [삼상17:3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11093; 그를 인하여 - 여기서 '그'는 '저 블레셋 사람'(골리앗)을 가리킨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기피한 까닭은, 그때 다윗이 이스라엘의 군대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모욕하고 있던 골리앗을 증오.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Klein).

&#11093;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 여기서 '사람'(*, 아담)은 정관사가 없으므로 '한 사람'으로 번역해야 타당하다. 따라서 본 어구는 '한 사람도 낙담하지 말 것이라'로 번역해야 좋다. 그런데 70인역은 '사람' 대신에 '나의 주'(*, 아도니)로 번역하여 읽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원문을 고쳐 읽을 근거는 전혀 없다(Fay). 아무튼 일개 시골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한 나라의 통치자용 군대 총지휘관인 사울에게 오히려 이같은 위로의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11093; 주의 종이 가서...싸우리이다 - 다윗의 이 말은 엘리압이 비난했던 것처럼(28절) 결코 쓸데없는 만용이나 교만이 아니었다. 오직 소년 다윗은 할례받지 못한 이방 족속 블레셋 사람의 그 모멸스런 치용과 경멸로부터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의 명예를 되찾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거룩한 열정에 불타 믿음과 확신으로 결연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성 경: [삼상17:3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11093; 너는 소년이요 - 사울의 이 말은 다윗이 나이가 어린 관계로 실제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실을 가리킨다(12-14절).

&#11093;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 - 여기서 '어려서'(*, 나아르)는 앞의 '소년'과 동일한 단어이다. 결국 이 말은 골리앗이 다윗의 나이만큼 밖에 안되었을 때부터 이미 전투 경험을 쌓아온 백전의 노장임을 뜻한다. 한편 '용사'는 문자적으로 '전쟁의 남자'(a man of war)란 뜻이다.

성 경: [삼상17:34,3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여기서 다윗은 자신에게 '전투 경험'은 없지만 '전투 능력'은 충분히 있음을 사울에게 강력히 호소한다<16:18>.

&#11093; 사자나 곰 - '사자'(*, 아리)는 오늘날과는 달리 다윗 당시만 해도 소아시아 전역을 포함하여 헬라와 인도까지에도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는 대개 풀이 많은 초원 지대나 삼림 지대에서 주로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대에서 양떼를 방목하는 목자들에게는 항상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의 곰'(*, 도브)은 연한 갈색을 띤 '시리아 곰'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잡식성으로서 보통 때는 사람이나 가축을 안건드리지만, 동면이 끝날 시기인 늦겨울이나 이른 봄에는 먹을 것이 없으므로, 자신들의 서식지인 고산 지대를 내려와서 새풀을 뜯고 있는 어린 양들을 거침없이 잡아먹는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 언급된 '사자와 곰'은 양떼를 돌보고 지킬 책임이있는 목동에게는 가장 경계해야 할 맹수의 대표격인데, 본문의 언급은 이러한 맹수들이 동시에 내려와 양떼를 해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때는 사자가, 그리고 어떤 때는 곰이 내려와 양떼를 해하려고 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묶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11093;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 아마도 곰과의 사투(死鬪)를 묘사하는 말인것 같다. 왜냐하면 실제 곰은 적을 일거에 강타하여 쓰러뜨리기 위하여 뒷다리로 의지하고 일어서서 앞 다리를 치켜 내리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의 취약 부분은 머리 부분으로서 그곳을 정확히 지팡이로 강타하면 제압할 수 있다고 한다(Pliny). 아마 다윗도 목자의 지팡이로써 곰과 싸워 이긴 듯하다(R. Payne Smith). 사실 고대 문헌을 살펴보면, 이처럼 지팡이로 곰이나 사자와 싸워 이긴 기록이 나타난다(Rosenmuller,Thevenot). 한편, 고대 히브리인들은 그 덩치와 외모의 험상굼음 때문에 사자 보다도 곰을 더 무서워하고 공포스러워 했다고 한다(Fay). 따라서 다윗도 여기서 곰과의 싸움을 일례로 이야기한 것 같다.

&#11093; 수염을 잡고 - 사자나 곰은 '수염'이 없다는 점에서, 여기의 '수염'은 '턱'(chin)을 가리킴이 분명하다(R. Payne Smith). 이같이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수염'에 해당되는 '자칸'(*)dms '수염'이란 의미 이외에도 '턱'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Bochart). 한편 이러한 관점에서 갈대아역(the Chaldee)은 '아래 턱'으로, 그리고 70인역(LXX)은 '목구멍'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삼상17:3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11093; 사자와 곰도 쳤은즉...모욕한...블레셋 사람이리이까 - 여기서 다윗은 가축을 해하려하여 자신이 쳐죽였던 맹수와, 그때 이스라엘을 해하여 하고 있는 골리앗을 암시적으로 동일시한다(Klein). 이같은 동일 묘사를 통해서 다윗은 골리앗에 대한 자신의 승리가 확실함을 사울에게 강력히 시사하였던 것이다.

&#11093;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 - 26절 주석 참조.

&#11093;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 26절 주석 참조. 한편, 특별히 여기서 이 호칭을 골리앗의 명수와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삼상17:3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11093; 여호와께서...건져내셨은즉...건져 내시리이다 -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도전 의사는 결코 일시적 흥분이나, 충동으로 인한 만용이 아니었다. 즉 그때 다윗은 (1) 과거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양떼를 해하려고 한 사자와 곰을 물리친 경험에 근거하고(2)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여호와를 능멸하고 있는 사자와 곰 같은 골리앗을 직시하면서 (3)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신과 함께하사 그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을 거꾸러드릴 것이라는 미래적 확신에 불타올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생사가 걸린 이 골리앗과의 결투에 결연히 자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09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 이번 골리앗과의 일대일 결투는 전체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 짓는 중요한 대결투였고(9절), 나아가 이 전쟁의 승패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와 위협으로부터 자유하느냐 아니면 또다시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소국으로 전락하고 마느냐 하는 역사적 기로의 한판 승부였다. 따라서 사울은 40일 동안이나 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감수하면서도 선뜻 도전자를 내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 다윗의 자원(32절)은 일면 반가운 일이었으나, 일면 무시할 수 밖에 없는 에피소드적 사건이었다(33절). 그러나 거룩한 열정과 확고한 신앙에 근거한 다윗의 논리적인 설득에 결국 사울은 크게 감동을 받고, 마침내 골리앗과의 결투를 허락한 것이다.

&#11093;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흐예)란 말은 미래형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계실 것이다'로 번역함이더 좋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사울이 다윗의 승리를 강력히 염원했을 뿐만 아니라 더나아가 확신까지도 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다윗의 말(34-37절)이 그만큼 믿음과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삼상17:3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11093; 이에 사울이...입히매 - 이러한 시도는 사울의 신앙과 경험(34-37절)을 완전히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Klein).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골리앗과 싸우려는 다윗에게 인간적인 전투 장비 등은 전혀 무가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골리앗의 중무장을 의식하고(4-7절) 다윗에게도 그와 같은 무장을 시키려 했던 것이다.

&#11093; 군복을...입히고 - 여기서 '군복'(*, 마드)은 찢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4:12), 갑옷을 입기 전에 입은 겉옷 종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Smith, Keil).

성 경: [삼상17:3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11093; 익숙치 못하므로 - 여기의 '익숙하다'(*, 나사)는 '시험하다', '시도하다'.'입증하다'라 의미이다(창 22:1;출 15:25;신 6:16;삿 3:1). 결국 위 문구는 다윗이 사울의 군장을 자신의 몸에 착용한 채 전투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봤으나, 불가능 했었음을 가리킨다.

&#11093; 시험적으로 - 여기의 이 말은, 그 의미가 본절의 내용 중에 스며들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11093; 걸어보다가 - 이 말은 오히려 앞에 나왔던 '익숙치 못한지라'의 앞에 두고 '걸어 보기를 시험하다가'로 번역함이 좋다.

&#11093; 익숙치 못하니...가지 못하겠나이다 - 결국 이같은 현상은 당시 사울과 다윗이 체격에 있어 그 차이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나타났을 것이다(9:2;10:23).

성 경: [삼상17:4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出戰)]

&#11093; 막대기(*, 마켈) - 보통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만든 것으로, 한쪽 끝을 굽어지게 하여 손잡이가 되도록 한 지팡이(staff)를 가리킨다. 이 지팡이는 목자가 산을 오르거나, 걸으면서 나뭇가지와 잎을 칠 때, 그리고 웅덩이에 빠진 양을 구출할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창 32:10;출 2:11;민 22:27). 한편,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막대기(rod) '맛테'(*)는 구부러지지 않고 곧게 뻗은 모양의 지팡이를 가리킨다(출 4:2;7:9).

&#11093; 시내에서 - 여기의 '시내'(*, 나할)는 '골짜기'. '하수', '강' 등의 의미로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를 가리킨다(2절). 이곳은 우기(雨期)인 가을부터 봄까지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乾期)인 여름에는 강 바닥이 말라붙어 버린다.

&#11093; 매끄러운 돌 - 이 돌은 물이 말라붙은 골짜기의 시내(Wadi) 바닥에서 주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차돌을 가리킨다.

&#11093; 물매(*, 켈라) - 이것은 주로 양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던질 돌을 넣을 수있도록 가운데 부분이 넓게 엮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물매의 한쪽 끝에는 끈이 달려져 있어 엄지에 연결하여 물매를 돌려 던질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이러한 물매는 막대기와 더불어 목자들의 필수 도구였는데, 곧 목자들은 물매로써 (1) 옆길로 새는 양떼를 멀리서도 통제하고 (2) 양을 노략하려는 야수들을 쫓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물매는 조직된 군대에 의해서도 사용된 듯하다. 즉 우선 베냐민 사람들은 성경에서 물매사용의 명수들로 언급되며(25:29;삿 20:16;대상 12:2;대하 26:4), 심지어 최근에 발견된 앗수르왕 산헤립의 궁궐 벽에는 구리로 된 투구를 쓰고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물매꾼이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11093; 다윗과 골리앗 - 이스라엘군과 블레셋군은 엘라 골짜기를 경계로 서로 대치한다. 아비의 심부름으로 베들레헴으로부터 전장(戰場)에 도착한 다윗은 선봉장 거인 골리앗의 신성 모독에 의분을 느끼고, 그와 결투할 것을 결심한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되고, 이에 사기가 충천한 이스라엘군은 블레셋군을 에그론과 가드까지 추격하여 물리친다.

성 경: [삼상17:4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블레셋 사람...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 본절은 무장을 안하다시피한 다윗과는 대조적으로, 그러한 다윗과 싸울 골리앗의 완벽한 무장 상태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7절>.

성 경: [삼상17:42,4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여기서는 골리앗이 다윗의 연소 혹은 왜소함, 그리고 허술한 무장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고 그에게 독설(毒舌)을 퍼붓는 장면이 언급된다.

&#11093; 다윗을 보고 - 여기서 '보다'(*, 라아)란 말은 '자세히 들여다보다', '관찰하다'란 의미이다(레 13:3;왕하 7:13;대하 12:17;욥 28:24).

&#11093; 젊고(*, 나아르) - 흔히 '소년'이란 말로 번역되는 단어로(16:18), 곧 나이의 연소함을 가리킨다<33절>.

&#11093;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 이 말은 외형적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12절), 한편으로는 나이 어린 사람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한 말이기도 한다.

&#11093; 개로 여기고 - 문자적으로는 '내가 개냐?'(Am I a dog?)란 뜻이다. 한편 '개'는 중근동에서 가장 싫어하고 금기로 여기는 대표적 동물이다(왕상 21:23;왕하 9:36).

&#11093; 신들의 이름으로...저주하고 - 여기서 '신들'은 히브리 본문에는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다만 '신'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골리앗은 분명히 다신주의자(多神主義者)였을 것이라는 추정적 사실과 충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이 모순을 해결할 두가지 방법이 제안되어 왔다. 즉 그 방법은 (1) 단수 '신'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복수인 '신들'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 (LXX, KJV), (2) 단수'신'을 정확한 것으로 보고, 다만 '신'을 다윗의 신 곧 여호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Keil) 등이다. 그러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믿는 수호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상대방을 경멸하는 일이 고대 용사들에게는 보편적이었다는 사실(Lange)에 근거하여볼 때, 위의 두 가지 견해 중 첫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R. Payne Smith). 또한 이같은 추축은 45, 46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상대방 골리앗을 경멸했다는 점에서, 보다 신빙성을 띠게 된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의 '이름으로'는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서, 번역자의 의역으로 삽입한 것이다.

성 경: [삼상17:4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네 고기를...들짐승들에게 주리라 - 고대의 전사(戰士)들이 결투를 벌이기 전 이처럼 저주와 위협의 독설(毒舌)을 상대방에게 퍼붓는 것은 스스로 사기를 앙양시키고, 기선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흔히 사용되었다. 고대 서사시인 호머(Homer)의 작품속에도 이러한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이러한 위협은 실제 고대 중근동에서(1) 패배당한 상대 장수의 옷을 벗기는 등 신체에 모욕적 행동을 가하며, (2) 또한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둠으로써 새나 들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는 등, 보편적인 관습으로 행해지고 있었다(Klein, 31:8-13).

성 경: [삼상17:4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여기서 다윗은 군대의 무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성전(聖戰)을 수행하는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있다.

&#11093; 칼과 창과 단창 -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인 거인 골리앗이 소유하고 있던 막강한 무기들로서(4-7절), 곧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무력(武力)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다.

&#11093; 만군의 여호와(*,.예호와 체바오트) - 이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징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당신의 군대로 삼고, 친히 그 지휘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밀이다<1:3>.

&#11093;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 이 말은 앞에 언급된 '만군의 여호와'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나타난 다윗의 말을 통해 볼 때, 다윗은 자신과 골리앗과의 싸움을 단순히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간의 사움만으로 보지 않고, 골리앗이 숭배하는 블레셋 족속의 신들과 자신이 믿고 의뢰하는 이스라엘의 신, 곧 여호와 하나님 간의 싸움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방의 헛된 목석(木石)의 신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 앞에 여지없이 거꾸러지리라는 신앙과 확신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이다.

성 경: [삼상17:4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내 손에 붙이시리니 - 이 말은 주로 성전(the Holy War)을 수행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완전한 승리를 주시고자 할 때(수 6:2;8:1, 7) 사용되는 말이다<14:10 주석>.

&#11093; 온 땅으로...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 다윗의 이 말은 성전(聖戰)의 일차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보여 준다(수 2:9-11). 즉 성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살아계셔셔 역사를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섭리.운행해 나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널리 증거하는 데 있음을 다윗은 올바로 인식한 것이다(고전 10:31).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 만천하에 널리 드러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성 경: [삼상17:4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알게 하리라 - 만일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맞싸울 장수로 이스라엘에서도 최대한 비슷한 조건의 용사를 고르고 골라 내보내어 혹시 이겼다면, 그 싸움의 모든 영광은 그 승리한 용사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조건과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현격한 대조를 보이는 다윗이 '창 칼 없이' 막대기와 물매만으로 승리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요, 오직 그 이름만이 영광받을 것이었다. 따라서 소년 다윗은 이러한 점까지 내다보면서, 진정 골리앗의 창칼이 썩은 지푸라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이스라엘의 거인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던 것이다.

&#11093;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 이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전쟁의 하나님'으로서, 곧 (1)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좌우되며(대하 20:15;시 127:1;144:1) (2) 또한 그러한 모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이다.

성 경: [삼상17:4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 여기의 '일어나'(*, 쿰)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 보다는 차라리 어떤 결정적 행동에 선행되는 의지적 결단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1093; 블레셋 사람에게로...빨리 달리며 - 이러한 다윗의 적극적인 전투 자세는 오직 여호와의 능력만을 힘입어 싸우려 했던 다윗의 신앙과 용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이는 다윗이 골리앗과는 달리 극히 가벼운 무장, 즉 막대기와 물매 만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0:, 43절).

&#11093; 항오를 향하여 - 본 문구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블레셋의 진영과 가까운 지점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도 골리앗은 중무장(4-7절)으로 인해 행보가 둔했던 반면, 다윗은 평상시 목동의 복장과 소도구 그대로였기 때문에 블레셋 군대의 대열쪽으로 많이 전진해갔던 것 같다. 한편 '항오'는 '군대의 대열(隘列)'을 의미한다<23절>.

성 경: [삼상17:4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돌을...물매로 던져 - 여기서 '물매'는 블레셋 사람들이 예기치 못할 정도의 비밀 병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 이유는 (1) 물매는 이미 고대 중근동에 널리 알려져 있던 병기였으며<40절>, (2) 또한 골리앗은 다윗이 물매를 휴대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골리앗은 자신의 거대한 몸집이나 거의 빈큼없는 무장 상태로 보아 그까짓 물매로 인해 어떤 타격을 입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무력을 과신했던 것이다.

&#11093;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 이같은 결과는 일차적으로 (1) 그당시에는 중세기의 기사(騎士)들이 착용했던 것과 같은 안면 보호대(面甲)가 개발되지 않았으며, (2) 골리앗 앞에 있던 방패드는 자가 골리앗의 큰 키로 인하여 그의 안면을 방어하지 못했으며, (3) 그리고 다윗의 뛰어난 물매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전과(戰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거두어질 수 있었음<45-47절>이 분명하다(Galling). 그러므로 실로 이것은 "40일 동안이나 그 교만한 블레셋 사람(골리앗)의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다윗의 물맷돌 속에 응축되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것이다". 한편 '이마에 박히니'라는 말은 (1) 골리앗에대한 다윗의 승리가 결코 다윗 자신의 물매 솜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2) 골리앗이 단 하나의 물맷돌로 인하여 죽기까지 했던 이유를 시사해 준다.

&#11093; 땅에 엎드러지니라 - 외형적 자세로만 볼 때 이것은 상대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표할 때에 취하는 자세이다. 일찍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블레셋의 다곤(Dagon) 신상이 이처럼 엎드러졌었다<5:3>.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멸하던 자를 강제로라도 굴복시켜 그로부터 합당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1093; 다윗의 물맷돌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종종 주위의 흔하고 평범한 물체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물체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사용에 합당하도록 하나님께 헌신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우리 주변에, 또는 우리 자신 속에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실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 그리고 그 무엇이라도 당신의 목적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들어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성 경: [삼상17:5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 여호와께서는 창.칼 등 무기의 도움없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다윗의 확신과 신앙(47절)이 실제적으로 입증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이처럼 다윗의 물맷돌이 대적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쳐서 거구러뜨린 것은 다니엘서 2:34, 35에 나타난바 '뜨인 돌이 큰 신상(神像)을 부숴뜨리고, 이어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물맷돌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단의 세력을 징치하고 전멸시킬 것이라는 심판 사건의 전조(前兆)에 다름 아니었다.

성 경: [삼상17:5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다윗이...블레셋 사람을 밟고 - 밟는 행위는 완전한 승리.정복의 의미를 갖는다(수10:24;롬 16:20). 따라서 블레셋 사람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1) 다윗을 통한 블레셋 민족 정복(삼하 8:1), (2) 그리스도를 통한 사단 세력 멸절(룸 16:20;계 20:10) 등의 의미를 이중적으로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11093; 그의 칼을...빼어 내어...그를 죽이고 - 전쟁 관례상 자신의 무기를 사용치 않고 상대국 장수로부터 칼을 빼앗아 그 장수를 죽이는 일을 강대국과 그 장수에 대해 수치심을 안겨 주려는 것이었다(Klein, 삼하 23:20, 21). 한편 여기의 '칼'은 골리앗이 소지했던 창과는 달리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추정은 (1) 소년 다윗이 능히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2)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 칼을 다윗에게 적당한 것으로 생각했었다는 사실(21:9) 등으로 충분히 뒷받침 된다. 아무튼 자신의 칼과 창만을 믿고 큰소리쳤던(43, 44절) 골리앗이, 결국 자신의 그 칼로 자신의 목을 베임 당한 이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악인은 결국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그 자신이 빠지고 만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시 7:15;9:15).

&#11093; 그 머리를 베니 - 고대의 전투에서 적국의 적장을 죽이고, 그 승리의 증거로서 그 머리를 베어 왕에게 바치는 일(57절)은 하나의 관례였다.

&#11093;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 블레셋 군대는 골리앗의 승리를 확신하고 이스라엘 군에 대한 총공격 태세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골리앗의 패배라는 어이없는 결과에 그만 전의(戰意)를 완전 상실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골리앗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초에 약속했던 것, 곧 양쪽의 대표 중 진쪽의 군대는 이긴 쪽의 군대에게 완전한 항복의 예(禮)를 갖추어야 한다는 선언(9절)을 스스로 파기한 행동이기도 했다.

성 경: [삼상17:5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쫓아 - 여기서 본서 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같이 분리 언급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본 전투가 있었던 당시와 본서가 기록된 당시의 유다 지파와 타지파가 상호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11:8;15:4), (2) 본 전투에서의 승리가 유다 지파 사람 다윗의 결정적 역할에 따른 결과였다는 사실, (3) 본 전투가 유다 지파의 땅에서 벌어졌었다는 사실(1절) 등의 정치.군사적 배경을 암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이 함께 블레셋 군대를 추격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방 원수를 격퇴함에 있어서는 온 이스라엘 민족이 한 마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Klein).

&#11093;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 이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7:14>. 그런데 한편 여기서 '가이'(*)에 대한 해석으로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즉 이를 (1)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 '골짜기'(3절)로 보고, '성문'처럼 '에그론'에 속한 한 지점일 것이라는 해석(Targum,Vulgate), (2) 필사자의 실수에 따른 오기(誤記)로 보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를 가리킬 것이라는 해석(Keil, Klein, LXX) 등이다. 그런데 첫째, 블레셋이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다는 언급과(52b절) 둘째,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시사하는 구절 속에 '가드'와 '에그론'이 나란히 언급됐다는 점(7:14)등에서 (2)의 견해가 더욱 타당성이 있다.

&#11093; 사아라임 가는 길 - 이것은 '엘라 계곡'을 가리킨다<3절>. 한편 '사아라임'(Saaraim)은 여호수아 15:36의 언급을 통해서 볼때, 소고 및 아세가<1절>와 인접한 한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의 '텔 케플 자카리야'(Tell Kefr Zakariya)지역으로 추정된다(Keil).

&#11093; 가드와 에그론 - 블레셋의 주요 도시 국가들. 수 13:3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7:5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진을 노략하였고 - 고대 중근동에서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전리품을 획득하는 일은 극히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행위는 본서 저자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쳐졌음이 분명하다. 그 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저자가 여기서 합법적인 탈취를 뜻하는 '솰랄'(*)이라는 단어를 사용치 아니하고(민31:31;신 2:35;수 8:2;11:14;삼하 3:22;대상 20:2), 부정적 의미의 탈취를 뜻하는 '솨사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삿 2:14;시 89:41;사 13:16;렘 30:16). 그렇다면 저자가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략 행위를 부정적으로 본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1) 그 물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했던 블레셋 족속의 소유물이었으므로, 필연 하나님께 바쳐진 저주받은 것들이었음이 분명하며(15:3 주석 참조;수 6:18-21),(2) 따라서 그 물건들은 반드시 영적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처분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임의로 취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Klein, 민 31:21-24;수6:18).

성 경: [삼상17:5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11093;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가고 - 이같은 언급은 여기의 '예루살렘'이 그 당시 여전히 여부스 족속(the Jebusites)의 수중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삼하 5:6-9). 바로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그것은 (1) 당시 예루살렘이 여부스 족속에 의해 부분적으로 장악되긴 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에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에(수 15:63;삿 1:21), 다윗은 그때 블레셋과의 싸움 직후 골리앗의 머리를 가까운 그곳으로 가져갔다는 해석(Keil, Lange), (2)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여부스 족속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싸움 직후에는 골리앗의 머리를 다른 곳에 임시 보관하였다가, 마치 임시장사 되었던 사울의 시체가 후일 그 아비의 매장지에 완전히 안장되었듯이(삼하21:12-14),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그곳으로 옮겼다고 보는 해석(Willis) 등이다. 그런데 다윗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일부 거주 하기는 하였으나, 그 도시는 여부스 족속의 강력한 지배 아래 있었고 또한 다윗과 같은 특별한 인물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는 점에서 두번째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다는 여기의 언급은 후대에 본서를 기록한 저자의 결과론적 진술임이 부명하다(R. Payne Smith). 본서 저자는 이같이 의도적으로, 후일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예루살렘'으로 적장의 머리를 가져갔다고 함으로써, 적국 블레셋에 대한 다윗 혹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11093;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 여기서 '갑주'(*, 켈리)는 문자적으로는 '기계' 혹은 '물건'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다른 문맥에서처럼 여기서도 '무기'(weapons,NIV)란 의미로 보아야 할 듯하다(14:1, 12;20:4;21:8). 그리고 여기서 '자기 장막'은 혹자들(Hertzberg, Abravanl)의 주장처럼 '여호와의 장막'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다윗의 베들레헴 집을 가리키는데(Keil, Smith), 그 근거는 여기서 '장막'(tent)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헬'(*)은 '거주지'를 가리키는 고대 어휘로서(Fay), 그 용례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4:10;13:2:삼하18:17;19:8;20:1). 한편 이러한 사실은 후일 골리앗의 칼이 높(Nob)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보관되었다는 본서 21:8, 9의 언급과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후일 다윗이 블레셋 거인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내 승리케 하신 여호와의 영광과 명예를 기리기 위해 놉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그 칼을 기념물로 바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기 때문이다(J. P. 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Kil &Delitzsh, Commentry on the O. T. Vol. - . pp. 184-185).

성 경: [삼상17:5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을 접견하는 사울]

&#11093; 군장 아브넬 -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로서 사울과는 사촌 형제지간이다(삼상14:50, 51). 사울의 군장(軍長)이자 사울 가의 능력있는 무사로서, 사울을 보필하다가 사울 사후 다윗 가에 대항하기 위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사울 왕의 첩 이스바와의 통간 사건으로 이스보셋으로부터 질책을 당하자 격노하여 다윗 가로 귀순하려고 한다. 그러나 귀순의 과정에서 다윗의 군장 요압의 계교에 걸려 살해당하고만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격분했으며 슬퍼했다. 다윗은 후일 아들 솔로몬에게 아브넬의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하였다(삼하3:6-39;왕상 2:5, 6). 한편 아브넬은 적어도 아들 하나 이상은 가졌던 것 같다(대상27:21).

&#11093;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 이같은 사울의 질문은, 이미 다윗은 사울을 위해 궁중 악사로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16:21-25) 우리에게 큰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따라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제시해 왔다. 즉 (1)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사울이, 당시 자신과 잠시 함께 있다가 헤어진지 오래되어 많이 변해있었을 다윗을 실제로 알아보지 못하여 이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Klein, Lange, Smith), (2) 사울은 그때 개인적으로는 다윗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골리앗과의 결투를 계기로 그처럼 용감 무쌍한 다윗의 가문(家門)이 어떠한 혈통과 신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이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Keil)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은 첫째, 골리앗과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이미 다윗과 대면을 했었고(31-40절) 둘째, 불과 몇 년 전에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고통을 덜어 주었던 은인(恩人)을 완전히 잊어 버렸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때 두번째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서론, 7. 사무엘서에 대한 고등 비평 비판>.

성 경: [삼상17:5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을 접견하는 사울]

&#11093; 청년(*, 엘렘) - 그 당시 다윗에게 적용되었던 '소년'(*, 나아르)이라는 단어(35, 58절) 대신 사용된 이 단어는 다윗의 연소함을 특별히 강조한다(Klein,20:21, 22).

성 경: [삼상17:5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을 접견하는 사울]

&#11093;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채 - 고대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장(敵將)의 머리는 승리의 기념물로서, 또는 전사(戰士)의 업적으로서 흔히 베어졌고, 그리고 그것은 존경과 충성에 대한 표시로서 왕에게 바쳐지는 관례가 있었다.

성 경: [삼상17:5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을 접견하는 사울]

&#11093;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 대해서는 16: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그러나 이같은 다윗의 대답만으로는 다윗 가문의 사회적 지위가 분명히 밝혀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구 뒤에 다윗 가문의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 등에 관한 사울과 다윗의 긴 대화가 분명 있었는데, 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해야만 할 것이다(Keil). 그리고 18:1의 첫 문구는 그러한 추측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사울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자 그의 사위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Smith).

&#11093;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 폐백금으로 사울이 다윗에게 양피 일백을 요구한 기한이 이르기 전에 다윗이 일어나 그 일을 수행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27절의 내용과 연결된다.

성 경: [삼상18:1]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11093;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 이는 본장이 17장의 마지막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아울러 다윗의 가문.혈통.신분 등에 대해 오랫동안 다윗과 사울간에 많은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11093; 요나단...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 사울과 다윗이 대화를 나눌때 요나단도 거기에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의 '마음'(*, 네페쉬)은 하나님이나 왕을 향한 순수하고 전인격적인 사랑과 충성의 정신을 가리킨다(Achnoyd). 그리고 이같은 정신은 요나단이나 다윗에게 공통적으로 있었다(14:6;17:32-36, 45-47). 바로 이같은 정신적 공통점 때문데 다윗과 요나단은 특별한 우정을 맺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우정을 변치 않고 오래도록 나눌 수 있었다. 한편 '연락하다'(*, 카솨르)란 말은 '매다'(tie), '묶다'(bind), '짜다'(knit) 등의 의미로서, 곧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의 띠로 단단히 동여 매는 것, 또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정신적 쇠사슬로 굳게 묶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창 38:28;신 6:8;잠 3:3).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이같은 일이 극히 자연스럽게 이뤄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11093; 요나단이...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여기서 '생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영혼'(soul)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로서, 곧 이것은 다윗에 대해 요나단이 품었던 정신적이고도 고상한 우정의 성격을 나타내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20:17).

성 경: [삼상18:2]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11093; 그 날에...머무르게 하고 - 이 말은 골리앗과의 전투를 다윗이 승리로 이끈후, 사울은 자신의 등용 정책에 따라(14:52) 다윗을 자신의 궁중에 영속토록 거주하게끔 하였다는 말이다. 아울러 이는 다윗이 전처럼 일개 궁중 악사로서가 아니라(16:23), 정치적 비중을 소유한 한 신하로서 왕 사울과 가까이 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11093; 아비의 집으로...허락지 아니하였고 - 이는 사울이 다윗으로 하여금 고향 아비의 집으로 문안 인사차 방문하는 것조차 금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는 다윗이 전처럼(17:15) 아비의 집에서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은 집안 일을 하기 위하여 돌아가는 것은 사울이 허락치 아니했다는 말이다.

성 경: [삼상18:3]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11093; 요나단은...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 이것은 상호간의 우정.신뢰.사랑을 계속 유지하자는 엄숙한 약속으로서, 아마도 이러한 신뢰.우정이 자신들의 당대 뿐 아니라 후손들의 대(代)에 이르기까지 영속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20:14-16;23:18). 결국 다윗과 요나단은 혈연 관계 보다도 더 진한 의형제를 맺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이렇게까지 자신들의 우정을 높이 승화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보다도 상호 변치않는 여호와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20:42). 그리고 결국 이러한 언약은 요나단 편에서나(19:4, 5;20:17-29), 다윗 편에서나(삼하1:17-27;9:1-7;21:7)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이행되었다.

성 경: [삼상18:4]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11093; 겉옷을...다윗에게 주었고 - 요나단의 이같은 행위는 언약을 확증하고 그 표징을 남기기 위한 행위였다. 한편 여기서 '겉옷'(*, 메일)은 상류층 인사들이 입었던 외투(robe)로서, 이는 곧 요나단 자신이 사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능히 과시할 수 있는 외적 표시였다. 따라서 당시 합법적으로 인정받던 사울 왕의 후계자 요나단으로부터 다윗이 그같은 의복을 언약의 징표로 인계받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11093; 그 군복...칼...활...띠도 그리하였더라 - 이처럼 자신의 의복을 벗어 준다던지, 또는 자신의 무기를 상대방에게 선물로 주는 것 등의 행위는 고대에 있어서 용사들간에 상호 우정이나 혈맹 관계를 다지고 돈독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흔히 행해졌던 풍습이었다(Keil, Philippson). 한편, 여기서 다윗이 요나단으로부터 의복과 함께 이같은 무기를 넘겨받은 것은 (1) 당대의 정치적 실력자 사울에게서 무기를 일시 넘겨받은 것(17:38), (2) 당대의 군사적 영웅 골리앗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한 사건(17:54) 등과 함게 다윗이 미구(未久)에 근동 지역을 장악할 정치.군사적 영웅으로 부상하게 될 것을 능히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일들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8:5]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11093; 다윗이...가서 - 여기의 '가서'(*, 야차)는 보통 군사적 출동을 뜻한다. 따라서 이것은 다윗이 국경 너머까지 원정(遠征)갔었음을 가리킨다(8:20;삼하 2:13;왕상20:39).

&#11093; 지혜롭게 행하매(*, 사칼) - 이것은 '깨닫다', '형통하다', '신중하다' 등의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겨져 있는 단어이다(신 32:29;수 1:8;왕하 18:7). 따라서 본 문맥상 이 단어는,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행함으로써 만사가 형통하는 결과를 얻었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1093;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 문자적으로는 '전쟁의 사람들 위에 세웠다'(set him overthe men of war)란 뜻으로, 곧 '여러 군사들의 지휘관으로 삼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의 '군대의 장'은 아브넬의 계급인 '군장'(軍長)과는 전혀 다르다(17:55).즉 13절에서야 다윗은 사울에 의해 천부장으로 세워진다는 점에서, 여기의 '군대의 장'은 백부장(白夫長)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본절은 다윗의 빠른 승진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

&#11093;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 문자적으로 '모든 백성들의 눈에 선했다'(창 1:12,31). 이같은 언급은 결국 다윗이 미래의 왕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차츰 닦여져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11093;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 이것은 백성들의 경우와 더불어 다윗의 명성이 궁궐 안팎에서 점차 높아져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아울러 이것은 다윗이 정치적 경쟁심. 질투 등을 초월하여 칭송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윗의 인격.처신이 대단히 훌륭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8:6]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11093;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정관사와 더불어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골리앗'(Goliath)을 가리킨다(17:10, 16, 23,26, 37, 41-43, 48, 51, 57). 따라서 본 전투는 엘라 골짜기의 전투를 가리키는데, 그 전쟁은 골리앗을 죽인 후에도 나머지 블레셋 군대를 쳐부수는데 상당한 기일이 소요된 대전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전투의 특징은 역시 다윗과 골리앗과의 일대일 결투 장면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묘사된 것같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바로 그러한 긴 엘라 골짜기의 전투가 최종 마무리 되고, 마침내 이스라엘 군대가 사울과 다윗을 앞세우고 왕성(王城)으로 개선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1093; 여인들이...노래하며 춤추며 - 고대 근동 사회에서 여인들의 이러한 가무(歌舞) 행위는 절기나 승전(勝戰) 등의 사유로 매우 기쁠 때 축제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행해졌었다(출 15:20;삿 11:34).

&#11093;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 '소고'(*, 토프)는 영어 성경들에서는 보통 '탬버린'(tambourine)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성경에서는 항상 즐거움 및 기쁨과 관련하여 언급된다(출 15:20;삼하 6:5;사 5:12). 그리고 '경쇠'(*, 솰로쉬)는 '삼중' 또는'세개'란 뜻으로서, 보통 '트라이앵글'(triangle) 또는 삼현(三鉉) 악기(three-stringed instrument)로 이해된다. 아무튼 소고와 경쇠는 춤이 수반되는 야외 행사에 알맞는 축제용 악기들이다(R. Payne Smith).

&#11093; 환영하는데 -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환영하는데'라는 의미의 말은 없다. 따라서 틀림없이 여기의 '환영하는데'란 말은 원문에 원래 나와있는 '만나기 위하여'(*, 리크라트)라는 단어와, 그리고 '소고'와 '경쇠' 사이에 나타나 있으나 번역 중 생략된 '기쁨으로'(*, 메시므하)라는 단어가 합성 의역(意譯)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분명한 이해를 위하여 위의 두 단어를 분리시켜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소고'와 '경쇠'처럼 마치 악기의 하나같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관점에서 혹자는 그 단어를 '기쁜 소리로'라고 주석하기도 한다(Stoebe).

성 경: [삼상18:7]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11093; 뛰놀며 창화하여 - 원문상으로는 이 두 단어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한편 여기의 '뛰놀다'(*, 사하크)는 (1)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다(삿 16:25), (2) 악기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다(삼하 6:5, 21), (3) 어린이들이 집단으로 장난을 치며 놀다(슷 8:5) 등의 의미로 성경에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기쁨에 겨워 음악에 맞춰 천진난만하게 춤추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창화하다'(*, 아나)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단순히 '대답하다'란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처럼 음악적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서로 주고 받는 형식, 즉 교차적으로 노래하는 교창(交唱)을 가리킨다(21:11;29:5).

&#11093;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 여기서 '천천'이나 '만만'은 원문상으로는 다만 '천'(*, 엘레프)과 '만'(*, 레바바)이지만, 우리말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 이같이 번역되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울은 그의 천을, 그리고 다윗은 그의 만을 죽였도다!"(Saul has slain his thousands, and Davidhis ten thousands). 물론 고대 우가릿 문서나 중근동의 문서들을 통해 볼 때 '천'이나 '만'은 모두 '많음'을 상징하는 보편적 숫자라는 점에서 여기 여인들의 노래가 담고있는 기본 의미는 '우리의 두 영웅 사울과 다윗은 많고 많은 원수들을 죽이셨도다'란 뜻으로 볼 수 있다(Klein). 그러나 또한편 여인들이 '사울'과 '다윗'을, 그리고 '천'과 '만'을 분명히 상호 대구(對句)하여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 여인들의 노래 속에는 분명 당시의 인기도 또는 민심(民心)이 반영된 생생한 백성들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이 노래는 민심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결국 이러한 백성들의 노래 속에는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그의 왕위(王位)를 후임자인 다윗에게 평화적으로 이양하게끔 촉구하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한편, 이 여인들의 노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널리 애송(愛誦)되었기 때문에, 이웃 블레셋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21:11;29:5).

성 경: [삼상18:8]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11093;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 본래 사울은 열방과 같은 무사적(武士的) 왕을 요구한 백성들의 세속적 동기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8:5, 20). 따라서 사울이 왕으로 옹립되었다(8:5, 20). 따라서 사울이 왕으로서의 권위와 명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그 용맹성에 있어 누구보다도 뛰어나야만 했었다. 그런데 골리앗의 출현 이후 그러한용 맹성에 있어 자신보다 다윗이 더 인정받게 되자, 사울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저하되었다는 사실에 그의 가슴은 그만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이다.

&#11093;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 결국에는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가겠구나"(공동 번역)란 뜻이다. 이렇나 사울의 우려와 불안 기저(基底)에는, 아마도 일찍이 사무엘에 의행 선언되었던 바(13:14;15:28) 자신의 폐위와 후임자의 등장이라는 현실적 문제 인식이 깔려있은 듯하다(R. Payne Smith). 실로 이방의 침입자(골리앗)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위기적 상황 가운데서, 왕으로서 사울은 속수 무책인데, 한 목동이 나와서 그 침입자를 제거해 버렸다면, 그것은 곧 왕직(王職)의 이동을 의마하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O.V. Gerlach).

성 경: [삼상18:9]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11093; 사울이...주목하였더라 - 여기서 '주묵하다'(*, 아완)란 말은 '눈'(eye)이란 뜻의 '아인'(*)에서 파생된 말로, 곧 '의심에' 찬 눈으로 관찰하다';란 의미이다(Klein). 즉 이것은 사울이 왕권(王權) 수호 차원에서 다윗을 정치. 군사적으로 경계하고 배타하였다는 뜻이다.

성 경: [삼상18:10]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11093; 그 이튿날 - 블레셋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공개적이 환영 행사가 벌어진 다음 날을 가리킨다. 그 환영 행사에서 사울은 여인들의 노래(7절)를 통해자신보다 다윗이 더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질투와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고(8절), 결국 그 일로 인해 밤새 잠못 이루고 설치는 통에 그 마음은 악신(惡神)이 임하기에 좋은 터전이 되고 말았다.

&#11093;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힘 있게 내리매 - 이 강신(降神) 현상은 차기의 왕으로 예정되어 있던 다윗에 대해 사울이 가지고 있던(9절) 극심한 피해 의식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점에서, 사울의 왕위 폐위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선언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때 이같은 현상을 통해 사울로 하여금 왕권에 대한 미련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하시려 한 듯하다. 그리고 여기서 '힘있게 내리다'(*, 찰라흐)란 말은 '앞으로 세게 밀다', '터져나오다', '강력하게 다가오다'란 의미로서, 곧 돌진해오듯 힘있게 닥쳐오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악신의 적극적인 활동 상태를 시사하는데, 이는 사울에게 최초로 악신이 임했을 때의 상황보다 더 악화된 상태이다. 결국 악신의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은 하나님의 묵인하에서 이루어지는 일로서, 이는 사울의 종말이 가까왔음을 강력히 암시 하는 징조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에 대해서는 16:14 주석을 참조하라.

&#11093;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 여기의 '집'(*, 바이트)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 자신의 궁전을 가리킨다(삼하16:21;20:3). 한편 '야료하는 고로'(*,이트나베)는 문자적으로는 '예언하다'(prophesy ; KJV, NIV)란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말이 재귀적 사역형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이교적(異敎的) 성격의 헛소리로 이해함이 타당하다(19:20, 21, 23, 24;왕상 18:29;렘 23:13). 즉 재귀적 사역형의 동사로 표현된 사울의 이같은 야료(惹鬧) 행위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탈인격적(脫人格的) 행위로서,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마치 미친 자처럼 마구 말을 내뱉는 '헛소리' 또는 '지껄임'(rave, RSV)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8:11]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11093; 그 창을 던졌으나 - 여기의 '던졌으나'(*, 야텔)란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즉 (1) 여기 이 단어를 그 원래 의미인 '던지다'로 보고, '창을 던졌으니'라고 해야 한다는 견해. (2) 이 단어의 본래 의미를 '뻗다'로 보고, '창을 던졌으니'라고 해양 한다는 견해 등잉 있다. 그런데 이 견해 중에서 첫째, 다윗이 그 창끝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 둘째, 사울이 계속 연거푸 두번 다윗을 향해 창을 사용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19:10의 경우와는 달리 (2)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Fay,Keil).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향해 1차 던진 창을 또 집어 재차 던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그 때 다윗은 그 용맹과 기지에도 불구하고, 전혀 대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다만 사울의 창을 두번 피했다.

성 경: [삼상18:12]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11093; 여호와께서...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신이 다윗에게 임했다는 사실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권을 빼앗아 다윗에게 이미 넘겨주셨다는 사실까지를 의미한다.

&#11093;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일개 경쟁 상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음을 가리킨다. 이같은 단정은 여기의 '두려워한지라'(*, 야레)는 말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신적인 경외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실시 될 수 있을 것이다(창 22:12;출 9:20;왕상 18:3). 아무튼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즉 버림받고 거절당한바 된(13:13, 14;15:26) 사울은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만사 형통하는 다윗을 볼 때마다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8:13]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11093;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백성앞에 출입하며 - 여기서 '천부장'(*, 사르 알레프, '천 명의 우두머리')은 (1) 내정(內政)을 관장하는 중앙행정 관리(Lange, Smith) (2) 국경을 지키는 국방 관리(Keil, Klein) 등으로 이해되고있다. 그런데 첫째, 당시 사울은 다윗을 전쟁터로 보내어 그곳에서 죽게 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그를 천부장에 임명했으며 둘째, 여기서 '출입하며'라는 말은 성경에서 '전투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다'란 의미로 흔히 사용되며(Klein;8:20;민 27:17;삼하 5:24) 셋째, 다음 절(14절)에 '지혜롭게 행하다'라는 단어가 다윗의 군사적 활동을 다루는 문맥에서 사용됐다는 점<5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후자의 견해가 훨씬 더 타당성이 있다. 즉 그때 사울은 틀림없이 다윗을 변방의 일선 지휘관으로 보내버림으로써, 잦은 전투로 인해 거의 목숨이 위태하게 되기를 바랐으며, 아울러 다윗의 정치적 역량이 중앙의 상류 계층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8:14,15]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11093; 지혜롭게 행하니라 - 5절 주석 참조.

&#11093; 사울이...두려워하였으나 - 여기의 '두려워하였으나'(*, 구르)는 12절의 '두려워 한지라'보다 더 강한 의미의 공포심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Driver). 이는 다윗의 형통과 사울의 두려움이 상호 반비례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다윗과 함께 한다는 인식에서부터 비롯된 사울의 두려움은 악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점차 다윗을 향한 광기적(狂氣的) 증오로 발전된다.

성 경: [삼상18:16]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다윗을 대적하는 사울]

&#11093;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초월하여 거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한편, 이전의 몇몇 경우처럼(11:8;15:4) 여기서도 '이스라엘'과 '유다'가 구별되어 기록된 것은, 본서가 반드시 왕국 분열 이후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다. 다만 사울과 다윗의 당대에도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간에 주도권에 관한 알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표현으로 이해 가능하다.

&#11093; 그가...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 '출입하다'(*, 요체 와바)란 말은 직역하면 '나가고 들어오다'(go out and come in, KJV)란 뜻인데, 이는 곧 자신이 맡은 고유한 직무의 수행을 위하여 공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성경의 관용어이다(12:2;29:6;민 27:17;신 31:2;수 14:11;삼하 5:2;왕상 3:7;대하 1:10;렘37:4;행 1:21). 이런 견지에서 여기의 이 말은 천부장으로서 다윗의 성공적인 군사 역할 수행을 의미한다(5, 14, 15절).

성 경: [삼상18:17]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11093; 맏딸 메랍을...주리니 - 일찍이 사울은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 딸을 주리라고 약속했었다(17:25). 그런데 그 약속은 즉시 지켜지지 않고 상당히 지연된 것 같은데, 그이유는 (1) 사울의 변덕스런 성격과 (2) 다윗의 연소한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의 신뢰와 사랑을 점차 크게 받게되고, 그의 나이도 점차 성숙해지자 이제 그 약속을 더이상 지연시킬 명분이 없었다. 때마침 사울은 자신의 약속도 지킬겸 다윗을 제거시킬 음흉한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약속 이행을 수행코자 한 것이다.

&#11093; 너는 나를 위하여 - 이 말은 딸과 결혼하려는 자는 그 딸의 아버지에게 그에 합당한 예물을 제공해야 했던 고대 중근동의 결혼 풍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창29:15-20, 25-27). 따라서 사울 왕은 그러한 결혼 예물 대신 전쟁터에서 이스라엘의 적들과 용맹히 싸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울 왕의 이러한 요구는 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이미 결혼 예물대신 골리앗을 이기는 것 자체로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17:25). 그러므로 사울은 아무런 또다른 조건이나 요구없이 자신의 약속을 이행해야만 할 의무가 있었고, 반면 다윗은 당연히 사울 왕의 사위가 되는 명예를 누릴 권리가 있었다(F.R. Fay).

&#11093; 용맹을 내어...싸우라 - 여기의 '용맹을 내어'는 문자적으로 '용사가 되어'란 뜻이다. 사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이같은 주문은 그로 말미암아 큰 전과(戰果)를 올리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윗으로 하여금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도록 함으로써 전장(戰場)에서 죽게끔 하려는 음모에 따른것이었다(13절;삼하 11:14, 23-25).

&#11093; 여호와의 싸움 -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적 도우심을 의뢰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 거룩한 전쟁을 가리킨다(25:28;삼하 5:19-23). 그러나 사울이 다윗에게 주문한 여기서의 전쟁은 다윗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사악하고 간교한 음모에 빙자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결코 '여호와의 전쟁'이 아니었다.

&#11093; 생각하기를 - '마음에 이르기를', '스스로 이르기를' 등과 같은 표현으로, 곧 독백(獨白)이나 심중(心中) 의지를 나타내는 성경의 관용 어법이다.

&#11093;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대게 하리라 - 지난번 사울은 악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다윗을 죽이려 시도하기도 했지만(10, 11절), 이제 이성(理性)을 되찾자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이 간교한 음모로 발전되어 여호와의 싸움을 빙자,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려 다윗을 살해코자 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사울의 마음 속에는 온갖 죄된 생각만이 넘치고 있었다.

성 경: [삼상18:18]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11093; 내가 누구며...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 다윗의 순수하고 겸손한 이 고백은 사울왕의 간교하고 음흉한 제안과는 날카롭게 대조된다. 즉 사울이 자기 딸을 이용하여 교활한 방법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획책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자신과 아비의 집 신분이 사회.정치적으로 비천하고 무명함을 겸손하고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결국 자신이 골리앗과 싸운 이유가 형들이 오해했듯(17:28) 사울 왕이 내건 명예와 부의 보상에 조금도 유혹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실로 다윗은 이전 자신의 목동의 신분을 사랑했을 뿐, 부마(駙馬)의 신분을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를 들어 왕의 자리에까지 올리우신다.

성 경: [삼상18:19]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11093;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 이것은 기한적인 의미보다는 여건의 성숙을 뜻하는 표현이다. 즉 당시 다윗은 사울의 표면적 주문대로(17절) 블레셋 족속과 용감히 싸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을 것이다.

&#11093;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준 바 되었더라 - 이같은 사울의 처사는 메랍이 다윗을 사랑하지 아니했기 때문(Keil;20절)이라기 보다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증오심과 그자신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기인한 것임이 분명하다(Lange). 어쩌면 사울이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로부터 많은 패물을 제공받았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결혼의 불합리성은 결국 이 결혼이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로써 확증되고 말았다(삼하 21:8). 한편 '므홀랏'(Meholath)은 갈릴리 호수 남방 약 37km 지점의 요단 서쪽 강뚝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다(Stoebe). 그리고 '아드리엘'(Adriel)은 아람어로는 '아스리엘'(대상5:24;27:19;렘 36:26)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란 뜻이다.

성 경: [삼상18:20]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11093;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 이때는 다윗과 메랍의 결혼이 깨어진 후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난 다음인 듯하다. 메랍과 다윗의 결혼이 약속됐을 때만해도 사울의 작은 딸 '미갈'은 아직 결혼 적령기에 도달치 못했을 것이다.

&#11093;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궁지에 몰아 넣을 수 있는 또한번의 기회를 포착했음으로 인하여 기뻐했다는 뜻이다(17, 21절)

성 경: [삼상18:21]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11093; 딸을...주어서...올무가 되게 하고 - 여기서 '올무'(*, 모케쉬)는 '함정에빠뜨리다', '덫을 놓다'란 뜻의 '야코쉬'(*)에서 파생한 단어로, 곧 짐승을 잡는 '올가미'(noose)또는 코를 꿰는 '갈고리'(hook)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딸을 이용하면서 까지 다윗을 올가미로 덧씌우려는 사울의 간악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성 경: [삼상18:22]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본절은 작은 딸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는 사울 왕의 제안(21절)에 대하여 다윗이 크게 신뢰하지 않았으며, 사울 자신도 다윗이 그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음을 보여 준다. 바로 이같은 사정으로 인하여 사울은, 다윗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맏딸 메랍의 경우(19절)와는 달리 반드시 이해될 것임을 다윗에게 확신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자신의 설득(21절)과 병행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을 설득케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다윗이 사울의 제안을 신뢰하지 않고 탐탁치 않게 여긴 까닭은 분명 (1) 맏딸 메랍의 경우처럼 미갈과의 결혼도 사울의 변덕스런 마음 때문에 성취될 가능성이 적다고 보았으며(19절) (2) 왕의 딸을 데려올 때 왕에게 지불해야 할 막대한 '폐백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23, 25절).

성 경: [삼상18:23]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11093; 왕의 사위 되는 것을...경한 일로 보느냐 - 이것은 왕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제적 부담이 뒤따름을 가리키는 말이다(25절). 그러므로 결국 다윗의 이 말은, 메랍과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 주요한 이유를 사울 왕의 변덕, 사회적 신분의 차이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왕의 사위가 되기에 합당한 막대한 폐백금 지불 능력의 부재(不在)로 인식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8:25]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사울의 악한 계략]

&#11093; 폐백...양피 일백 - 여기서 '폐백'(*, 모하르)은 '그 아비에게 돈을 주고 아내를 사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마하르)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고대 중근동에서의 '폐백'은 대개 장인의 요구액 만큼을 사위될 자가 현금.재물로 지불하는 것이 통례였다(De Vaux;창 34:12;출 22:16, 17).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장인될 자의 요구에따라 그외 다른 것으로도 대치할 수 있었다. 다라서 '양피 일백'은 금전.재물이 아닌 노력 봉사로써 '폐백'을 대신할 수도 있었던 고대의 풍습과 잘 부합된다(창 29:15-30;수 15:16;삿 1:12). 그런데 여기 '양피'(陽皮, foreskin)는 남자 생식기의 포피(包皮)를 말하는 것으로서(창 17:11-14), 이는 반드시 사람을 죽여야만 얻을 수 있었다(27절).

&#11093;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 사울의 요구대로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양피를 벨 경우, 그 행위는 곧 블레셋 족속을 할례받지 못한 족속이라고 모욕하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다윗이 그 일을 행하게 되면 그는 블레셋 족속의 민족적 분노를 사게 될 것임며, 끝내는 군사적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더욱이 양피를 베는 행위는 대외적인 명분이 서는 공식 전쟁이 아니라 사적(私的)인 목적을 위해서 수행되는 전투이므로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생명을 건 모험을 감행해야만 했다. 결국 사울의 이 같은 제안을 자신의 정적(政敵)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을 빌려 죽이기 위한 주도 면밀한 계책이었다.

성 경: [삼상18:26]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

&#11093;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 다윗이 사울의 음흉한 계책을 전혀 의심치 않은 채, 단지 사울의 제안을 성실히 수행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다윗은 사울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자 그의 사위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모른다(Smith).

&#11093;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 폐백금으로 사울이 다윗에게 양피 일백을 요구한 기한이 이르기 전에 다윗이 일어나 그 일을 수행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27절의 내용과 연결된다.

성 경: [삼상18:27]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

&#11093; 그 종자(*, 아나솨우) - 이 단어는 여기서 복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시 천부장의 지위에 올라있던(13절) 다윗의 휘하 병력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Klein, Lange).

&#11093; 딸 미갈을 다윗에게...주었더라 - 이같은 사울의 행위는, 후에 그가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또 다시 주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25:44), 마지 못해 취해졌던 것임이 분명하다. 즉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이 죽기를 바란 자신의 계책과는 달리, 오히려 다윗이 자신의 요구에 갑절이나 부응하는 용맹을 떨침으로써, 공개적인 왕의 약속상 어쩔수 없이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8:28,29]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

&#11093;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 - 이것은 다윗이 차기의 왕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객관적 표시였다(12절).

&#11093; 딸 미갈도...사랑하므로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 칠십인역(LXX)은 '딸 미갈'을 '온이스라엘'로 읽는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근거없이 히브리 원문을 변화시킨 것에 불과하다(Bunsen). 한편 여기서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 일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더욱 두려워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는 까닭에 사울의 계략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것이 분명하며(Smith) (2) 다윗이 자신의 딸로부터도 사랑을 받을만큼 흡인력있는 인물임이 명명백백히 밝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의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란 말은 12절의 '두려워한지라' 또는 15절의 '두려워하였으니'보다 한층 심각한 공포심을 가리킨다.

&#11093; 평생에...대적이 되나라 - 이같은 언급은 사울이 죽을 때까지 계속 다윗을 죽이려했었던 이후의 역사적 사실로써 능히 증명된다.

성 경: [삼상18:30]

주제1: [다윗의 부상(浮上)과 사울의 질투]

주제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

&#11093; 블레셋...방백들이 나오면 - 여기서 '블레셋...방백'은 이들이 지위했던 블레셋 군사들을 포함한다. 한편 여기의 '방백'(*, 사르)은 '귀족'이란 의미가 있기도 하나(출 2:14;사 23:8), 여기서는 천부장 등의 군대 지휘관으로 봄이 타당하다(창 21:22;욥 39:25). 그리고 '나오면'(*, 야차)은 군사적 행동의 개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5절;삼하 2:13;왕상 20:39).

&#11093; 더 지혜롭게 행하매 - 이것은 형통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게끔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다윗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게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사 그를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5절 주석 참조.

&#11093;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 '이름'은 고대인들에게 한 사람의 인격 전체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귀중히 되니라'(*, 야카르)란 말은 '영광을 받다', '존경을 받다'란 뜻이다. 결국 본절은 사울의 책략으로 다윗을 위험한 전장에 내보낼 때마다 오히려 다윗이 그 전쟁을 통해 혁혁한 무훈을 세움으로써, 용장(勇將)과 지장(智將)으로서 다윗의 명성이 이스라엘 뿐 아니라 주변의 적대국들에게조차 알려지고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어떠한 역경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전화위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한편, 그러나 이처럼 다윗이 전공(戰功)을 통해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신앙을 한몸에 받으면 받을수록 사울은 더욱 더 두려움, 질투, 증오심에 사로잡혀 자윗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로써 다윗에 대한 사울의 계속되는 살해 음모와 다윗의 정처없는 도피 생활의 역사가 이후 전개된다.

성 경: [삼상19:1]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11093;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 원문상 차라리 '다윗을 죽이는 것에 관해서 말하였더니'로 번역해야 한다(Klein, Smith, Lange, Keil). 결국 이것은 (1) 다윗에 대하여 살의(殺意)를 품는 단계(18:8, 9), (2) 살해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는 단계(18:17, 25)를 지난 마지막 단계로서, 곧 이제는 공개적인 궁중 회의를 통해 다윗 살해 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사울이 다윗을 끝까지 죽이려 했던 까닭은 자신의 왕권 수호 뿐 아니라, 자신의 후손에게 그 왕권을 세습시키려 한 세속적 아집과 욕심 때문이었다.

&#11093;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 여기서 '기뻐하다'(*, 하페츠)란 말의 기본 개념은 '마음이 기울다'란 의미로서, 요나단의 마음은 이미 다윗에게로 향했음을 의미한다. 실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18:1). 특히 다윗의 영광은 자신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그러한 이기적인 욕심을 떠나 변함없이 다윗을 사항했다. 이러한 요나단의 자기 부인(自己否認)과 자기 희생의 정신은 후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한 침례 요한의 예수께 대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과 유사하다.

성 경: [삼상19:2]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11093; 아침에...숨어 있으라 -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꾀한 이상 그 모든 일은 신속히 진행될 것이 확실하였으므로, 요나단은 급히 다윗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되도록 아침 일찍부터 몸을 피신하여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라고 요청했다.

&#11093; 은밀한 곳 - 문자적으로는 '그 은밀한 곳'. 결국 여기의 '그'라는 정관사는 다윗도 이 장소를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9:3]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11093; 너 있는 들 - 이곳은 2절의 '은밀한 곳'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아마 이곳은 사울이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산책을 즐기던 궁정(宮廷) 근처의 들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을 이곳에 숨어있게 한 까닭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 부자(父子)간의 대화를 엿듣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단지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부친의 살해 음모에관해 어떤 정보를 입수했을 경우, 신속히 그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다윗이 거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토록 하려는 목적에 다른 것이었다(Keil).

&#11093; 무엇을 보거든 - 차라리 '무엇을 알거든'으로 번역함이 좋다(7절). 즉 이때 요나단은 자신의 간곡한 중재(仲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다윗을 반드시 죽일 작정인지, 또는 그렇게 할 경우 사울이 언제 어떻게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할 것인지 등에 대하여 알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9:4,5]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여기서 요나단은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에 앞서 다윗을 죽이는 일의 부당성을 부친 사울 왕에게 간곡히 설파한다.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변호는 다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1) 지금까지 다윗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스라엘과 사울 왕을 위해 충성.헌신한 사실 (2) 그러므로 만일 다윗을 죽일 경우 그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경우가 되고, 또한 그것은 여호와께 큰 범죄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요나단의 변호는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11093; 포장하여(*, 토브) - 문자적으로는 '선하게(좋게, 기쁘게) 말하다'(speakwell of~ ; NIV, RSV)란 뜻이다.

&#11093; 왕께 행한 일은...선함이니이다 - 여기의 '왕께 행한 일'은 원문상 복수라는 점에서, 다윗이 왕을 위해 지금까지 충성되이 실행했던 모든 선한 일들을 가리킨다.

&#11093; 그가...블레셋 사람을 죽였고...왕이...기뻐하셨거늘 -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단수로 사용되어 '그 블레셋 사람'이란 뜻인데 곧 '골리앗'을 가리킨다(17:10, 42). 그러므로 여기서 요나단은 이스라엘이 그 블레셋 거인의 위협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이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과 왕의 명예 회복을 위해 단신으로 싸웠고, 결국 승리했을때 사울 왕이 사심없이 기뻐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때만해도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해 어떤 시기나 질투심 없이 그를 사랑했었다. 요나단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함으로써 사울 왕의 양심의 심금을 울리고자 한 것이다. 한편 사울 왕이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한 때는 여인들의 노래(18:7) 사건 이후부터였다.

&#11093; 무고히...무죄한 피를 흘려 - '무조지한 피'를 흘리는 일은 모세 율법에서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다(신 19:10;21:8;27:25). 그러나 후일 바로 이같은 범죄를 저질렀던 므낫세 왕은 하나님의 특별한 진노의 대상이 되었었다(왕하 21:16;24:4).

성 경: [삼상19:6]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본절은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간곡한 설득이 실효를 거뒀음을 말하고 있다.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 정직하게 진실을 호소한 요나단의 간곡한 변호는 사울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11093; 맹세하되...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 혹자의 주장처러 여기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요나단을 일시 속이기 위한 거짓 맹세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악신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는(9절) 사울 왕이 다윗을 곁에 두고도 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단의 간곡한 변호에 사울 왕이 감동을 받아, 일시동안 사울과 다윗간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오래지 않아 또 변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맹세를 하는 등 변덕과 광기의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11093;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는 것처럼'(As the Lordlives, RSV)이란 뜻으로(Klein), 곧 '여호와의 삶을 두고서(결고서)' 맹세한다는 뜻이다.

성 경: [삼상19:7]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비호하는 요나단]

&#11093;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 이 말은 다윗이 예전처럼 천부장으로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는 궁중 악사로서 계속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음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9:8]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크게 도륙하매 - 엘라 골짜기 전투(17:1-54)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는 국지전(局地戰)이 빈번히 발생했다(18:30). 다윗은 그때마다 숙적 블레셋을 당당히 격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천부장으로서의(18:3) 본분을 충실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성공과 형통은 또다시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사울 왕은 자신의 맹세(6절)를 스스로 깨뜨리고 다시금 다윗을 죽이기 위해 광분하였다.

성 경: [삼상19:9]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여인들의 창화(唱和) 사건(18:7) 이후 시도된 사울의 다윗 살해 기도는 18:11,17,21;19:1 등에 이어 또다시 재현되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첫번의 경우(18:10, 11)와 비슷한 상황 가운데서 발생하였는데, 즉 악신(惡神)의 영향으로 사울 자신이 직접 창으로 다윗을 살해하고자 시도한 경우이다. 이처럼 사울이 또다시 악신의 영향을 받은 주된 이유는 다윗의 형통과 성공이었다(8절). 즉 자신은 하나님께 버림당했다는 심한 콤플렉스, 다윗이 자신의 왕좌를 노리고 있다는 강박 관념, 백성들의 마음이 온통 다윗에게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피해의식 등등이 시기와 질투심으로 불타 올라 걷잡을 수 없는 광기적 형태로 분출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악신이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사울은 악신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109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 - 16:14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9:10]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 여기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18:11에서와는 달리 실제 창을 던지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18:11에서의 사울의 행동은 창을 쥐고 두어번 휘두른 경우이지만, 여기서는 다윗을 겨냥하고 창을 날린 것이다.

&#11093; 그는...피하고 - 무예가 뛰어난 사울의 투창이 이처럼 빗나가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사울이 악신의 영향으로 정신이 혼미해 있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는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1093; 창은 벽에 박힌지라 - 이것은 사울이 실제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성 경: [삼상19:11]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아침에...죽이게 하려 한지라 - 사울이 다윗을 그 밤에 죽이지 아니하고 다음 날 아침에 죽이려 한 까닭은, 아마도 섣부른 야간 행동은 오히려 다윗의 야음(夜陰) 도주를 도와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1093;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죽임을 당하리라 - 다윗에 대하여 사울이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미갈은 (1) 사울의 사자들이 집 주위에 매복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든지 (2) 오빠 요나단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입수했든지 (3) 궁전에 들어갔다가 사울과 다윗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거나 혹은 어떤 정보를 입수했다든지 함으로써 사울의 음모를 알아챘을 것이다(R. Payne Smith). 특히 두번째의 추측은 이전의 경우(19:2, 3)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 추측이다.

성 경: [삼상19:12]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 사울의 사자들이 문을 지키고 있어기 때문에, 미갈은 창문으로 다윗을 도피시키고 있다. 이처럼 생명을 노리는 자들의 손을 피해 창문으로 도피한 유사한 경우가 여호수아 당시의 여리고 정탐군(수 2:15), 초대 교회 당시의 사도 바울(행 9:25;고후 11:33) 등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이때 다윗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토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원을 간구한 내용이 시편 59편이다. 즉 시 59편에서 다윗을 '환난날에 피난처'(시 59:16)되신 하나님께 자신의 애매한 고난을 가탄원하며(시 59:3, 4) 구원을 호소하였던 것이다(시 59:1, 2, 4-13).

다윗의 도피 생활-1 - 다윗은 처음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음모를 듣고, 창문을 통해 도망쳐, '라마'(Ramah)의 사무엘에게로 피신했다. 이어 다시 '기브아'(Gibeah)로 돌아와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 뜨거운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놉'(Nob)으로 도피했다. 놉에서 다윗은 그곳 제사장으로부터 음식과 무기를 제공받고 계속 도망쳐 다니다가 결국 블레셋 땅의 '가드'(Gath)로 도망쳤다. 그런데 다윗이 블레셋 족속드로부터 의심을 당하자, 그는 급히 그곳을 빠져나와 '아둘람'(Adullam) 근처의 동굴로 피신했다. 그리고 다윗은 그곳에서 많은 동지들을 규합했다(19:12-22:1).

성 경: [삼상19:13]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우상을...침상에 뉘고 - 여기서 '우상'은 곧 '드라빔'(*, 테라핌)을 가리키는데, 단어 형태는 복수지만 단수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드라빔'(teraphim)은 '편안히 살다'란 뜻의 '타라프'(*)에서 파생된 말로, 구복(求福)과 점술(占術), 그리고 신탁(神託) 행위와 관련된(겔 21:21;슥 10:2) 가정 수호신(守護神)이다(삿18:17, 24). 즉 아람과 갈대 족속들로부터 도입된 이 우상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가정에 행운을 가져다 주는 가정의 수호신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 우상은 인간의 형상을 닮은 반신상(半身像)으로서 보통 나무나 은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크기는 약대 인장 밑에 숨길 정도의 작은 크기로부터(창 31:34) 사람의 키와 맞먹을 정도의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근 발견된 누지(Nuzi) 서판에 의하면, 어떤 가정내에서 이것을 소유한 자는 그 가정 전체에 대한 지배권 및 그 가정의 재산을 가장 많이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한 것으로 인정되었다(창 31:19, 30-35). 바로 이같은 점에서, 라헬이 그랬듯이(창 31:19) 미갈도 이 우상을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Klein). 한편 이것은 한 가정을 단위로 해서 모셔졌던 우상이라는 점에서 그 크기는 전반적으로 다른 우상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았다. 그러나 여기서 '침상에 뉘고'라는 말은 미갈이 소유하고 있던 이 '드라빔'이 사울의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이 누워있는 줄로 믿게할만큼 큰 규모의 드라빔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아무튼 이 드라빔은 많은 종교 지도자 및 선지자들의 우상 척결 정책에도 불구하고 족장 시대로부터 포로 시대전까지 이스라엘 사회내에 면면히 존재하고 있었다(창 31:19;삿17:5;18:14;삼상 19:13;겔 21:21;호 3:4;슥 10:2).

&#11093; 염소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 여기서 '염소털로 엮은 것'은 보통 (1) 두터운 누비 이불(Stoebe, 왕하 8:15), (2) 베개(Hertzberg), (3) 가발(Mccarter)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엮은 것'(*, 케비르)이라는 단어의 용례상 (1)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따라서 여기의 '그 머리에 씌우고'는 '그 머리 부분에 놓고'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씌우고'로 번역된 '사마'(*)라는 단어는 원래 '위치 시키다', '놓다'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70인역(LXX)은 이를 '염소의 간'(*, 헤파르 톤 아이곤)으로 번역했는데, 그이유는 마치 사람이 숨쉬듯이 위장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갈의 의도는 멀리서 보았을 때 마치 사람의 머리털 처럼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70인역의 번역은 설득력이 없다.

&#11093; 의복으로...덮었더니 - 여기서 '의복'은 헐겁게 입는 통상복을 가리킨다(Smith). 이 통상복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흔히 이불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성 경: [삼상19:14]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그가 병들었느니라 - 우상으로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만든 미갈은 아침이 되어 사울의 군사들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치자 이처럼 둘러댐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멀리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게해 준다.

성 경: [삼상19:15]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사울이...다윗을 보라 하며 - 이것은 사울이 보낸 최초의 군사들이 미갈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간 채, 사울에게 돌아가서 다윗이 병들어 누웠다고 보고했었음을 암시해준다. 한편 여기의 '보라'는 다윗이 병들어 있는지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이다.

&#11093; 침상 채...가져 오라...죽이리라 -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반드시 다윗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폭군 사울의 잔인성이 드러나고 있는 구절이다.

성 경: [삼상19:16,17]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미갈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병들었느니라'(14절)고 첫번째의 거짓말을 한 이후, 사울의 확인 명령으로(15절) 그 사실이 거짓으로 발각되자(16절) 이제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에게는 다만 방조죄(放調罪) 밖에 없다고 두번째로 거짓말을 한다.

&#11093; 어찌하여...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 이 말은 곧 다윗의 협박에 의해 마지 못해 그의 도피를 방조하고, 또한 거짓말(14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미갈의 자기 변호이다.

성 경: [삼상19:18]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다윗이...라마로 가서 - 여기서 '라마'(Ramah)는 다윗의 출발지인 '기브아'(10:26)에서 북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였다(1:1;7:17).

&#11093;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 다윗이 이처럼 사무엘에게로 도망간 이유는 (1) 우선 사울의 살해 음모로부터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며 (2) 앞으로 자신이 취해야 될 처신에 대해 선지자의 자문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Keil). 그때 다윗은 사울이 적어도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존중하여, 거기가지 자신을 죽이러 사람을 보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한편 이처럼 다윗이 자신의 도피처로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쉽사리 택한 것은 이전부터 사무엘과 다윗 사이에 개인적인 교제가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한다(F. R. Fay).

&#11093; 사울이...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 아마도 이것은 (1) 이스라엘 왕인 사울이 정신적으로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으며 (2) 그 결과 다윗 자신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무엘은 사울에 관한 다윗의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바 된 상태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13, 14;15:26, 35).

&#11093;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 사무엘보다 다윗을 앞서 언급하는 본 어구는 다윗이 이미 역사의 주역이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나욧'(*)은 '거처', '거주지', '초원지대' 등의 의미를 가지는 아카디아어 '나움'에서 온 단어로서, 마치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숙소 시설을 가리킨다(Smith, Keil, Fay). 이같은 추정은 이 단어가 항상 특정 지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로써 보다 분명해 진다. 즉 '나욧'은 사무엘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드는 제자들을 수용키 위해 세운 기숙 시설을 가리키는 특수한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나욧'은 단순한 기숙 시설 이상의 '교육의 집' 또는 '선지 학교'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리고 '나욧'이 '초원 지대'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사실은 이 교육을 위한 기숙사가 목자들이 거주하는 초원 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Klein,삼하 7:9;렘 33:12). 아울러 '나욧'이 복수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여러 동(棟)으로 구성된 교육용 숙소 시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Keil).

성 경: [삼상19:19]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혹이...고하여 가로되 - 다윗이 처 미갈의 도움으로 기부아 집을 도망쳐 나온 이후, 아마도 사울은 군사들에게 그의 도피처를 탐색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며, 어쩌면 많은 현상금까지 내걸었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윗의 도피처는 발견되었고, 그 사실은 즉각 사울에게 보고되었다.

성 경: [삼상19:20]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 - 여기서 '선지자 무리'는 당대의 대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영적 지도를 받기 위하여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훈련을 받던 젊은 생도들이었다(10:5). 그리고 '예언하는 것'(*, 니브임)은 '예언하다'(*, 나바)의 단순 수동형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의 신령한 상태 즉 성령에 감화 감동되어 (1)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10:5) (2)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 담아주신 신령한 계시를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Wilson). 따라서 이들 선지자 무리는 이때 자의식을 상실한 채 무아지경 곧 황홀경(ecstasy)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이때 이들은 분명한 자의식(自意識)을 소유한 채 경건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R. P Smith).

&#11093;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 - 이것은 사무엘이 그때 그 선지자 무리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왕상 4;7;왕하 2:5). 그리고 '나욧'에서 그 선지자들의 무리를 직접 지도.감독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상황은 확실히 본서 10장의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즉 그때는 사무엘이 그 선지자 무리를 일일이 지도하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사무엘이 그들을 직접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의 변화는 당시 사무엘이 선지자직을 제외한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그들을 지도하는데 전념할 수 있게 된 때문일 것이다.

&#11093; 볼 때에...사자들에게 임하매 - 이같은 현상은 '볼 때에'라는 말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때 사울의 사자들은 선지자 무리가 엮어낸 독특한 분위기를 '본' 후, 즉 접한 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볼 때에'(* 야르, 원형은 '라아')가 3인칭 단수로 표기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 본 저자가 사울의 사자들 전체를 하나로 취급했기 때문일 것이다(Keil). 즉 본 저자는 이같이 표기함으로써 사울의 사자들 모두가 마치 한사람처럼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독특한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갔음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11093; 하나님의 신이...임하매...예언을 한지라 - 다윗을 잡으러 간 사울의 사자들은 사무엘과 선지자 무리의 신련한 예언의 노래에 휩쓸려 들어가고, 또한 그때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강권적으로 임하므로, 그들 역시 자제할 수 없는 예언의 상태에 사로잡힌 것이다. 특히 여기서 '예언'(*, 나비)이란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받아 미래의 일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선지자적 예언이 아니라, 영감받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울의 사자들은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묵시적(默示的) 황홀경 상태에 들어가 자신들도 모르는 중에 영감 깊은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고볼 수 있다(Fay, Smith). 결국 라마 나욧의 다윗은 더이상 피할 곳도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19:21]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 본절은 사울이 보낸 세 그룹의 사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신'에 의해 사로잡히는 바람에 다윗을 체포하려 했던 사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말해준다. 그러자 마침내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22절).

성 경: [삼상19:22]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예언하는 사울]

&#11093; 세구에 있는 큰 우물 - 여기서 '세구'(Sechu)는 '전망대'란 의미이다. 이곳은 기브아와 라마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라마 북쪽 4.8km 지점의 오늘날 '슈웨이케'(Suweikeh)로 추정된다(Conder). 한편 '큰 우물'은 문자적으로 '그 큰 우물'이란 뜻인데, 여기에 정관사로 '그'가 붙어 있다는 사실은 이 우물이 그 근처에서는 매우 유명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혹자는 이것을 '저수지'나 '물탱크'로 이해하기도 한다(Smith). 한편 칠십인역(LXX)에는 '세구에 있는 큰 우물' 대신 '산 위에 있는 타작 마당'으로 되어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히브리 본문(Masoretic Text)에그 독법(讀法)의 우선권을 두어야 할 것이다.

&#11093; 라마 나욧 - '라마의 선지 학교'란 뜻이다. 18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9:23]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하나님의 신이...임하시니...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예언을 하였으며 - 사울의 체험은 그가 보낸 세 그룹의 사자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20, 21절). 즉 여기의 '이르기까지'는 사울이 자신이 보낸 사자들과는 달리 선지자 무리의 신령한 분위기를 접하기도 전에 이미 '세구'(Sechu)로부터 예언을 시작하여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계속 예언 행위를 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결국 사울은 자신의 사자들과는 달리 보다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보다 지속적으로 황홀경의 상태 속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당시 성령의 역사는 보다 강퍅한 사울의 심령 상태를 완전히 주장하시어, 그로 하여금 다윗을 체포하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포기 하게끔 만든 것이다. 즉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사울 왕의 강퍅한 심령을 녹이고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F. R. Fay)

성 경: [삼상19:24]

주제1: [사울의 살해 음모와 다윗의 도피]

주제2: [다윗을 죽이려 드는 사울]

&#11093; 그가 또 - '그는 심지어'란 뜻으로, 이는 사울에게 임한 기이한 현상으로 말미암은 저자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말이다(Klein).

&#11093; 그 옷을 벗고 - 옷을 벗는다는 것은 성경 용례상 수치스러운 행동 중의 대표적 경우로 취급된다(창 3:7, 10, 11;삼하 10:4, 5;미 1:11). 그러므로 사울이 이같은 행동을 한 까닭은 (1) 근본적으로는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정도로 성령의 역사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며 (2) 또한 실제적으로는 사울이 황홀경의 영적 심리 상태로 발생하는 체열(體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Abarbanel, Fay). 그러나 여기서 사울이 벗은 것은 겉옷(*, 베게드) 뿐이었지 속옷은 아니었다(사20:2-4;미 1:8).

&#11093;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 칠십인역은, 사무엘이 사울과 길갈에서 헤어진 후 죽을 때까지 사울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본서의 언급(15:35)과 조화시키기 위해 여기 '사무엘 앞에서'를 '그들 앞에서'로 고쳤다. 그러나 여기의 '사무엘 앞에서'는 15:35의 언급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여기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은 사울이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무엘을 거저 보았을 뿐, 15:35절의 언급처럼 상호 교제를 나눈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1093;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 여기서 '종일 종야'는 그때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벌거벗은 채'란 의미인데, 이것은 사울이 속옷까지 완전 벗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겉옷을 벗어 사울이 왕으로서 체통을 잃을 만한 부끄러운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고 '누웠더라'(*, 나팔)는 '엎드러지다'란 의미로서, 결국 이것은 대단히 오래도록 지속된 예언 상태로 인해 그때 사울이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빠진 상태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한편,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영적 상태에 계속적으로 빠져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아마 한동안 하나님의 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황홀경의 상태에서 손짓 발짓을 섞어 노래를 하는 등의 행위를 한 후, 그로 인한 피곤감으로 깊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R. Payne Smith).

&#11093;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 이 말은 본래 어떤 사람이 본래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할 때 적용되는 말이다. 10:11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0: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11093;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 당시 다윗은 자신을 잡으러 라마 나욧까지 온 사울의 사자들 및 사울이 하나님의 신의 불가항력적 임재로 말미암아 황홀경의 심리 상태에 빠져 있을 때(19:20-24), 그 때를 호기(好機)로 삼아 그곳에서 도망할 수 있었다(Smith, Keil).

&#11093; 와서 - 이것은 다윗이 당시 사무엘의 선지학교가 있던 라마 나욧(19:18)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궁성(宮城)이 있던 기브아로 돌아온 것을 가리킨다. 다윗이 그때 사울로부터의 위협이 상존해 있는데도 기브아로 돌아온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1) 친구 요나단에게 사울이 자신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2) 그럼으로써 요나단의 도움을 요청하고, 향후의 신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4절).

&#11093; 죄악...죄가 무엇이관대 - 다윗의 이 질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역설적 질문으로서, 곧 자신은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만한 아무런 죄악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의 '죄악'(*, 아온)과 '죄'(*, 핫타트)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인데, 다윗은 이같은 동의어의 반복을 통하여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강력히 호소한다.

&#11093; 내 생명을 찾느뇨 - '내 목숨을 노리는가'란 뜻이다(공동 번역). 특별히 여기서 '찾다'(*, 바카쉬)란 불을 켜고 샅샅이 수색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출 4:19).

성 경: [삼상20: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11093; 부친이...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 이 말은 (1) 왕과 왕세자로서 사울과 요나단이 특별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2) 아울러 당시 요나단은 사울의 모든 정책 결정에 깊이 참여할 만큼 중요한 직위에 올라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그런데 요나단의 이같은 말은, 그가 이때 사울이 다윗을 몇 차례 죽이려 했던 것을 다만 일시적 광기(狂氣)의 결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Keil). 따라서 요나단은 자신의 힘으로 다윗을 그러한 부친의 광기적 살인 시도로부터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다윗을 안심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0:3]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11093; 내가 네게 은혜받은 줄을 - 문자적으로는 '내가 너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한 줄을'이란 뜻이다. 결국 이것은 왕자 요나단이 목동 다윗을 깊이 사랑하고,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18:1; 19:1).

&#11093;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경우 반드시 자신에게 알릴 것이라는 요나단의 호언 장담(2절)에 대한 다윗의 반론이다. 즉 사울은, 만일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요나단이 알면 다윗과 두터운 우정 관계에 있는 요나단이 (1) 다윗이 살해되는 것을 매우 슬퍼할 것이며, (2) 따라서 틀림없이 다윗에게 그 음모를 누설할 것을 예측하고, 그러한 사실만은 요나단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1093;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 즉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자신의 음모를 아들 요나단에게 알릴 경우 그에 관한 비밀이 누설될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것이므로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해도 결코 그에 관해서는 요나단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11093;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 - 이 말은 요나단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사울의 음모에 의해, 다윗 자신의 생명이 마치 사망의 문턱에 도달한 듯한 매우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비유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즉 생명의 위협을 시시각각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 경: [삼상20:4]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11093; 네 마음의 소원...이루리라 - 본절은 요나단(2절)이 다윗의 논리(3절)에 설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처해있는 긴박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이처럼 친구 요나단으로부터 헌신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성 경: [삼상20:5]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11093; 월삭(*, 호데쉬) - 매월 첫날을 가리킨다. 이때는 상번제 외에 속죄제를드려 지난 한달 동안 지은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고 새 마음을 다지는 등의 종교적 행사와 아울러 민간 축제가 거행되었다(민 10:10; 28:11-1; 스 3:5; 느 10:33; 느10:33; 사 1:13). 레위기 서론의 '히브리 절기와 축제'를 참조하라.

&#11093; 내가 마당히 왕을 모시고...식사를 하여야 - 월삭(月朔) 때의 식사는 아마도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함께 모여 공동 식사를 했던 것 같다(Smith, Fay). 따라서 다윗도 사울의 사위였으므로(18:27). 마땅히 사울의 식탁에 참석하여야 할 자격과 의무가 있었다.

&#11093; 제 삼 일 저녁까지...숨게 하고 -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같이 요청한 까닭은 관례상 월삭 잔치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으므로(27, 34절). 이에 따라 '제 삼일'에야 요나단이 자신에게 사울의 반응(30, 31, 33절)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1093; 들에 - 문자적으로는 '그 들에'이다. 이처럼 여기에 정관사 '그'가 붙었다는 사실은 여기의 '들'이 다윗이 이미 먼저 번에 숨었던 궁전 근처의 '들'이었음을 시사해 준다(19:2, 3).

성 경: [삼상20:6,7]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여기서 다윗은, 왕의 식탁에 불참한 후 요나단을 통해 사울에게 전달될 변명에 대해 나타날 사울의 반응을 통하여, 사울이 자신을 향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

&#11093; 온 가족을 위하여 - 여기의 '가족'(*, 미쉬파하)은 (1) 이새가 속한 유다 지파(Smith), (2) 이새의 가족(Klein) 등으로 주장된다. 그러나 첫째, 왕정(王政) 하에서 한 지파 전체가 왕의 허락없이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둘째,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 전체가 모이기에는 너무 협소하며 셋째, '매년제'(每年祭)는 소가족단위로 드려진 제사(1:3)였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11093; 거기서 - 이는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지역적으로 드려진 가닭은 실로의 중앙 성소가 파괴된 후(4:10) 새로운 중앙 성소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제단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소가족 단위로 각종 제사가 드려질 수 있었다(Keil, Gerlach).

&#11093;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 '매년제'(a yearly sacrifice)는 가족 단위로 매년 1차씩 드려지던 제사를 가리킨다(1:3 주석 참조). 그러나 모세 율법에서는 매년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수장절)를 맞이하여 세 차례씩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한다(출 23:14-17; 34:24). 따라서 매년 1차씩만 드리는 여기의 '매년제'는 일종의 편의주의적 편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의 '드릴 때'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출 23:14-16). 즉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세 절기 중 자신들에게 편한대로 한 절기를 택하여 '매년제'를 드렸던 것같다. 아무튼 이처럼 이 제사는 율법에서 엄중히 명령되는 만큼, 다윗에게는 사울 왕이 베푼 월삭 잔치에 불참할만한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때 베들레헴에서 이 매년 제사가 그의 가족에 의해 드려진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11093; 좋다 하면...노하면 - 요나단을 통해 전달될 다윗의 처사(6절)에 대하여 만일 사울의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그가 다윗을 기뻐한다는 증거요, 만일 부정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울이 다윗을 여전히 증오한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사울의 마음을 알기를 원했는데, 이는 사울이 하나님의 신을 접한 이후(19:23, 24)처음 그의 의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다윗은 향후 자신에 대한 사울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성 경: [삼상20:8]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11093; 그런즉 - 7절의 내용과 연결시켜 주는 상관 접속사이다. 따라서 본 접속사에 뒤따르는 내용은 7절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11093;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 이 말은, 다윗이 베들레헴에 매년제를 드리러 갔다는 요나단의 보고에 대하여 사울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를 가상해서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다. 사실 사울이 죽이려 할 경우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의 '인자히'(*, 헤세드)는 원래 명사로서 언약적 관계에 따라 베풀어지는 특별한 사랑 및 은총을 가리킨다.

&#11093; 네가...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 다윗이 요나단에게 담대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근거는 요나단의 주관하에 맺어진 신실한 언약 때문이었다(18:3, 4). 다윗이 이처럼 단순한 우정이 아닌 언약 관계를 근거로 해서 도움을 호소한 까닭은 (1) 단순한 우정 관계는 부자(父子)관계보다 우선될 수 없으며 (2) 여호와 앞에서 그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통념이었기 때문이다.

&#11093; 내게 죄악이 있거든...친히 나를 죽이라 - 이 말은 다윗이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요나단이 부친 사울의 뜻과는 달리 자신을 돕는 일이 하등에 거리낌 없는 옳은 행위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성 경: [삼상20:9]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11093;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 이 말은 문자적으로 '그것이 네게로부터 멀리 있다'란 의미를 갖는 감탄문이다. 즉 이것은 (1) 다윗에게 결코 죄가 없다는 의미(Lange, Klein), (2) 다윗에게 결코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Smith)등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원문상 본 문구 다음에 나오는 문구가 '왜냐하면'의 의미를 갖는 '키'(*)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즉 요나단은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죽인다든지, 또는 다윗을 사울에게로 데리고 간다든지 하는 불행한 일이 결코 다윗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Keil).

성 경: [삼상20:10]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11093; 네 부친이 혹 엄하게...대답하면 - 여기의 '대답하면'은 요나단이 다윗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또한 다윗에 관한 사울의 음모를 알아내려고 사울에게 질문했을 경우 사울이 요나단에게 보일 전반적인 반응을 가리킨다. 따라서 '엄하게...대답하면'은 다윗의 행동(6절)에 대해 사울이 격노하고, 아울러 사울이 자신의 음모가 다윗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협박을 하거나, 방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11093;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 이것은 사울로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관한 정보를 요나단이 입수했다고 해도, 사울의 방해.협박 때문에 요나단이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삼상20:1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의 소원]

본절에서 요나단과 다윗은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신호를 만들기 위해 들로 나갔다.

&#11093; 들 - 문자적으로는 '그 들'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 궁전 근처의 들판을 가리킨다(5절; 19:3).

성 경: [삼상20:1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1109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이러한 신(神) 명칭은 서원이나 맹세를 할 때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칭호로서, 여기서 요나단은 자신의 맹세의 신실성을 확증키 위해 바로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한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명칭은, 하나님께서는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 언급된다(2:30; 25:32, 34; 삼하 7:27; 왕상 1:30, 48).

&#11093; 증거하시거니와 - 이것은 원문에는 없는 말이나, 의미를 강화키 위한 번역자의 적절한 삽입구이다.

&#11093; 내일이나 모레 - 월삭(月朔) 잔치가 벌어지는 이틀 동안을 가리킨다 <5절>.

&#11093; 내 부친을 살펴서 - 이것은 다윗이 매년제에 참석하러 베들레헴에 갔다는 얘기를 사울에게 하고, 또 그 얘기를 들은 사울의 반응을 살피는 것을 가리킨다(6, 7절).

&#11093; 보내어 - 이것은 요나단이 직접 전달하지 아니하고, 사자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다윗에 대한 부친 사울의 의향이 선하게 나타날 경우 요나단이 사자를 보내겠다고 한 까닭은, 그러한 경우에는 분명 사울의 마음이 누그러진 상태일 것이므로 사자를 보내도 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0:13]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11093;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 이것은 사울의 동향에 관한 적절한 정보를 다윗에게 제공하여 사울로부터 무사히 피신토록 협조함을 뜻한다.

&#11093; 여호와께서...벌을...내리시기를 원하노라 - 이같은 맹세적 표현은 원래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동물을 죽이는 상징적 행위와 함께 이루어졌었다 <3:17>. 즉 맹세를 파기할 경우 그 동물의 죽음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만큼 맹세에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의식이었다. 한편 맹세를 지키지 않을 경우 여호와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요나단의 이 맹세적 표현은 '여호와'를 증인으로 세웠던 12절의 맹세와 잘 부합된다.

&#11093;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 같이 - 여기서 '하신'(*, 하야)이 완료형이라는 점에서,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과거에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계셨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6:14>.

&#11093;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 여기서 '하시기를 원하노니'(*, 예히)가미완료 시제 즉 미래형이라는 점에서, 여기 이 문구는 지금부터 앞으로 계속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실 것을 소원.확신하는 말이다 <1:13; 17:37; 18:12>. 이것은 결국 요나단이, 이스라엘의 왕권(王權)이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넘어갔다는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음을 뜻한다(14, 15절; 23:17).

성 경: [삼상20:14]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본절에서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간청은, 고대 중근동에는 축출된 왕조의 가족들이 새로운 왕에 의해 몰살되는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Fay, Smith; 삼하19:28; 왕상 15:29; 16:11).

&#11093; 나는 사는 날 동안에...나로 죽지 않게 - 이 말은 요나단이 다윗의 등극이 자신의 생전에 있을 것으로 예측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실상 요나단은 길보아 전투에서 자신의 부친 사울과 함께 전사함으로써, 생전에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31:2-6).

&#11093;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 '여호와의 인자'(*, 헤세드 예호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약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계약적 사랑을가리킨다 (8절). 여기서 요나단은 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과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를 다윗으로 하여금 깊이 상기시키려 한다. 한편, 이처럼 요나단이 현재 다윗을 돕는 자이면서도 오히려 겸손히 다윗에게 '인자'를 요청하면서 그를 축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왕자로서 명예욕과 권세욕에 초연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전적 협조와, 그리고 장차 인자 베풀 것을 요청한 것은 사울 대신 다윗을 들어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요나단이 전적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바, 실로 요나단은 탁월한 신앙 인격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상20:15]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11093; 다윗의 대적들 - 이것은 (1) 사울의 가문(Lange), (2) 사울의 가문을 포함한 모든 대적(Klein)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첫째, 요나단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 집만을 멸망받을 자로 직접 지명할 리가 없다는 사실, 둘째, '대적'(*, 오예브)이라는 단어가 복수라는 사실, 셋째, '대적'이라는 단어가 사울이외의 대상에게도 다윗에 의해 적용된다는 사실(25:26, 29, 39; 삼하 3:18)등으로 미루어 볼 때 (2)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요나단이 다윗의 여러 대적들 중 자신의 아버지 사울의 멸망에 대하여 주된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은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사울의 멸망은 그의 아들인 자신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11093; 너는 네 인자를 내집에서...끊어 버리지 말라 - 이것은 장차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사울의 가문은 멸망될 때에, 요나단 자신의 직계 후손만은 멸망되지 않도록 특별한 배려를 원한다는 뜻이다. 사실 요나단의 이같은 간청은 후일 다윗에 의해 받아들여져, 후에 요나단의 후손으로 다윗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삼하 9:6, 7).

성 경: [삼상20:16]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11093;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에 대하여 충성 서약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자기 아비의 집과 다윗의 집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할 당시 상황에서, 요나단은 (1) 다윗을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차기의 왕으로 확신했으며(13, 14절; 23:17). (2) 그 사실을 아는 이상 자신의 후손들을 헛되이 죽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같이 언약했음이 분명하다. 한편 여러 학자들은 이부분을 15절의 하반부와 연결된 것으로 보고, '요나단의 이름이 다윗의 집으로부터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let not the name of Jonathan be cut off from the house ofDavid, RSV)로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Hertzberg, Klein). 그들이 이같이 번역하는 까닭은 (1) 여기서 '언약 하기를'로 번역된 '카라트'(*)라는 단어는 뒤에 '베리트'(*, '언약')라는 단어가 뒤따르지 않을 경우 '언약을 하다'란 의미로 번역하기 곤란하므로(Davidson, Keil) 이에 따라 15절에서의 용례처럼 '끊어버리다'로 번역해야 되기 때문이며, (2) 그리고 칠십인역(LXX)은 '요나단'이 아닌 '요나단의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이유로 여기서 그들은 맛소라 사본에 의존한 전통적 번역 방식보다 칠십인역을 좇는 번역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11093;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 앞 절의 해석 방법에 근거할 때 이 문구 역시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적들의 손으로부터 그것을 요구하실 것이다'(Let theLord even require it at the hand of David's enemies, 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결국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 자신과의 언약을 이행치 않을 경우, 다윗은 여호와께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창 31:39; 삼하 4:11). 요나단은 그 신적인 저주가 다윗의 대적들을 통해서 내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즉 대적들을 토벌하려다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성 경: [삼상20:17]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본절은 요나단이 자기 자손들에 대한 약속 이행을 다윗으로 하여금 맹세토록 강요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두 사람간의 기본적인 언약 관계(18:3)를 보다 견고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11093; 요나단이...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 이는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도와줄 것을 맹세한 뒤, 이어 다윗이 후일 요나단의 후손들을 배려해 줄 것을 맹세하였음을 뜻한다. 그 맹세의 내용은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만일 ...을 지키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란 말로 구성되었을 것이다(13절). 아무튼 이러한 맹세는 맹세한 쌍방 중 어느 한편이라도 그 맹약을 어긴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친히 심판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11093; 자기 생명...같이...사랑함이었더라 - 18:1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0:18,19]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11093; 월삭 - 5절 주석 참조. 한편, 19절의 내용은 사본상의 문제 때문에 몇 군데가 수정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11093; 사흘을 있다가 - 이것은 원문대로 '제 3일에'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이틀 동안 계속되는 월삭 잔치가 끝나는 다음 날을 가리킨다.

&#11093; 빨리 내려가서 - 여기의 '내려가서'(*, 테레드)는 본 문맥의 흐름상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여기의 언급처럼 만일 다윗이 빨리 내려가야 '숨었던 곳'에 도달한다면, 다윗이 사흘 동안 숨을 곳은 자신이 원래 숨어있겠다고 요나단에게 약속한 지점(5절)과 다르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내려가서'는 사본상의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혹자는 칠십인역(LXX)을 좇아서 '테레드'를 '파카드'(*, '찾다', '묻다'란 뜻)의 단순 수동형인 '티파케드'(*)로 고쳐야 된다고 주장한다(6절). 만일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말 번역의 '내려가서'는 '찾아지리니'란 의미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빨리'(*, 메오드)는 '무척', '대단히'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11093;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 - 여기서 '그 일'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음모 때문에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숨었던 사건을 가리킨다(19:1-3). 따라서 여기 '숨었던 곳'은 사울 궁전 근처의 은밀한 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11093; 이르러 -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과의 담화가 끝나는 즉시 '은밀한 들판'으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말 개역 성경의 번역은 마치 사흘째의 그리고 가라는 말처럼 오인케 한다.

&#11093; 에셀 바위 곁 - '에셀'(*, Ezel)은 '가다', '출발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아잘'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여기의 '에셀 바위'는 방향 표시를 위하여 세워진 바위를 가리키는 듯하다(Smith).

성 경: [삼상20:20]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11093; 내가...살 셋을 그 곁에 쏘고 - 여기서 요나단이 활 쏘는 것으로 신호(sign)를 삼으려 한 것은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이 직접 다윗에게 결과를 알려 줄 수 없게 될 경우를 대비키 위함인 듯하다. 한편 여기서 요나단이 화살을 셋씩이나 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을 향해 쏘는 사람이 요나단임을 알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성 경: [삼상20:2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11093; 아이(*, 나아르) - 여기 '아이'는 그 용례로 볼 때 '요나단의 병기 든 자'를 가라킴이 분명하다(14:1).

&#11093; 살을 찾으라 - 이같은 일은 전쟁 물자가 매우 부족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병기 든 자에게 매우 당연한 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병기 든 자가 이 일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다윗에게 정보를 제공할 기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11093;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 직역하면 '네게 평안이 있을 것이요'(peace shall beto you)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살의(殺意)를 품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 경: [삼상20:2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11093; 네 길을 가라 - 곧 지체말고 도주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살의를 품었을 경우를 대비해 예상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성 경: [삼상20:23]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과 요나단의 밀약(密約)]

본절에서 요나단은 자신과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불변성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재천명한다.

&#11093; 너와 내가 말한 일 - 이는 단지 둘 사이에 묵계(默契)된 암호(20-22절) 뿐만 아니라, 요나단과 다윗이 새롭게 다지고 맺은 우정의 맹약(12-17절)도 포함한다. 즉 그맹약에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증인과 판결자로서 영원히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삼상20:25]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11093; 왕은...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 사울이 이같이 벽 곁 자리에 좌정한 것은 (1) 그 위치가 자신의 몸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자리이며(Hertzberg),(2) 고대 중근동에서 출입구 반대편의 그곳은 가장 상좌(上座)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Fay, Smith, Keil).

&#11093; 요나단은 섰고 - 여기의 '섰고'(*, 야캄; 원형은 '쿰', * )는 요나단이 그때 식탁을 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매우 부자연스러운 자세이다. 따라서 이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1) 여기의 '야캄'을 사본상의 오류로 보고 '코프'(*)와 '멤'(*)사이에 '달렛'(*)을 삽입시켜 '에카뎀'(*)으로 수정하여 '맞은 편에 위치하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LXX, Klein, Ewald, Bunsen, Thenius), (2) 여기 '쿰'의 의미를 '오다'란 말로 이해하여 '요나단이 왔다'란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De Wette, Maurer), (3) 사본을 정확한 것으로 보되, 다만 '(요나단이) 자신의 위치를 잡다'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견해(Mastin)등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 여기의 '섰고'(쿰)라는 동사가 단순히 서있는 동작만을 의미하지 않으며(16:12; 창 43:13) 둘째, 히브리 본문을 최우선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일반 해석론에서 볼 때 (3)의 견해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곧 처음 요나단이 사울의 곁에 자리 잡았다가, 아브넬이 들어옴으로써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보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요 숙부인(14:51) 아브넬이 들어오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단순히 잠깐 일어나는 자세를 취했다가 다시 앉은 행위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the Vulgate, Keil, Fay).

&#11093; 아브넬...다윗 - 결국 월삭 어전 잔치의 참석자는 왕 사울, 왕자 요나단, 군장 아브넬, 천부장 다윗 등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울 왕을 중심으로 부자(父子) 관계, 사촌 형제 관계, 사위 관계 등 혈연으로 얽혀있었다는 점에서 가족 잔치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아무튼 이들 4인은 당시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핵심 수뇌부인데, 고대 초창기 왕정의 성격상 이러한 혈연 중심의 통치는 당시 보편적이었다(Leon Wood).

성 경: [삼상20:26]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11093; 부정한가보다 - 모세 율법의 정결 의식법상 시체를 만지거나(레 7:20, 21;15:16-18), 혹은 잠을 자다가 몽설(夢泄)을 하는(신 23:10) 등의 사유로 인하여 의식적(儀式的) 부정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모세 율법은 이같은 상태에 이른 자가 제사, 축제 등의 성별된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성 경: [삼상20:27]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11093; 이새의 아들 - 성경 용례상 이 말은 다윗의 대적들에 의해서 주로 부벙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30, 31; 22:7, 8; 25:10; 삼하 20:1). 당시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심경을 보여 주는 말이다(Klein).

&#11093; 어찌하여...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 사울의 이 말은 여러 사유 등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자는, 그 당일에는 부정하지만 그 다음 날에는 깨끗케 된다는 율법규정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레 15:1-27). 바로 이같은 율법 규정을 아는 사울은, 다윗의 첫날 식사 불참은 그가 부정하게 됐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고 용납할 수 있었으나(26절). 그 다음 날에도 불참한 것은 첫날의 불참과는 달리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20:28,29]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다윗의 행방을 묻는 사울의 질문에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이틀 전 다윗과 이미 약조한대로(6절) 다윗의 불참 사유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당시 다윗은 베들레헴으로 내려갔던 것이 아니라, 에셀 바위가 있는 들에 숨어 있었다(19, 24절).

&#11093; 나의 형(*, 아히) - 70인역(LXX)은 '형제들'로 이해하나, 히브리 원문은단수이다. 아마도 다윗의 맏형으로서 가족의 제사를 주관하는 형을 가리키는 듯하다(Keil, Fay).

성 경: [삼상20:30]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11093;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으로 하여금 베들레헴으로 가도록 허락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가리킨다. 이같은 반응은 결국 사울이 월삭 잔치를 기회로 다윗을 사로잡고자 한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보여 주는 증표였다.

&#11093;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 여기서 '패역'(*, 나아와트)은 '구부러지다'(*, 아와)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극도로 사악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잠 12:8). 그리고 '부도'(*, 마르두트)는 '반역하다', '거역하다'(*, 마라드)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반항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창 14:4; 수 22:16; 왕하 18:20). 또한 여기의 '계집'은 사울 자신의 아내 곧 요나단의 생모(生母) '아히노암'(14:50)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 아히노암에 대한 사울의 이같은 언급은 그녀가 그같은 행위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사울은 요나단의 어머니를 나쁜 여자로 몰아버림으로써, 즉 요나단을 처음 출생부터 잘못된 인물로 선언함으로써 그 아들 요나단의 '패역 부도'(悖逆不道)함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따라 직역하면 "너 사악하고 반역적인(계집의) 아들아!"(you son of a perverse and rebellious woman!; NIV, RSV)란 뜻인데, 이처럼 어머니까지 들먹여 욕하는 이런 행위는 특히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는 극도의 증오와 분노를 나타내는 가장 격렬한 감정의 표시였다. 결국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다윗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신의 아들마저 아들로 인정치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이 지니는 악한 감정은 결국 자신의 인격마저 파탄시키고 만다.

&#11093;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 - 여기서 '택하다'(*, 바하르)란 말은 사랑과 신의(信義)로써 사랑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곧 요나단이 다윗과 친구가 되어 그 편을 들어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여기 '이새의 아들'에 대한 해석은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11093; 네 수치 -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갈 경우 마땅히 사울의 왕권을 이양받을 권한이 있던 왕자 요나단이 당할 여러가지 부끄러움을 가리킨다.

&#11093;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 이 말은 다윗에게 사울의 왕권이 넘어감으로써 심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요나단으로 인하여 요나단의 어미가 그를 낳은 일 자체를 부끄러워 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말은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독선이고 아집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윗을 성실히 도와준 요나단은 오히려 그의 그러한 선행 때문에 가문의 수치를 벗고 다윗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되었다(31:9-13; 삼하 4:12; 9:1-13).

성 경: [삼상20:3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11093; 너와 네 나라가...서지 못하리라 - 사울 자신의 왕권이 다윗으로 인하여 요나단에게 양위(讓位)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말이다. 일찍이 사울은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그 왕위(王位)가 단절될 것이라는 선언을 들은바 있었고(13:13, 14), 이제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차기의 왕으로 세워진 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18:12; 23:17) 이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신을 소유치 않은 비합법적인 왕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16:14).

&#11093;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 문자적으로는 '그는 사망의 자식이니라'이다. 반드시 다윗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이는 곧 다윗을 차기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에 정면 도전하는 선전 포고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사울의 악한 감정은 이제 그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대항하는 자로까지 발전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결국은 멸망 뿐이다(31:4, 5; 나1:2).

성 경: [삼상20:3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11093; 요나단이...가로되...무엇을 행하였나이까 - 부친 사울 왕의 격심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변치않는 신의(信義)로써 친구 다윗을 위해 변호함으로써 부친의 마음을 바로 잡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19:4-7). 그러나 당시 사울은 이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성 경: [삼상20:33]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11093;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 - 여기의 '던져'는 '창을 뻗다'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하다(18:11). 그리고 '치려'(*, 나카)는 죽이거나 혹은 치명상을 입힐 목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37:21; 출 2:12; 신13:15; 삼하 1:15). 그런데 이같은 행동은 사울이 악신에 사로잡을 때 나타났다는 점에서 볼 때(18:11; 19:10). 이때도 사울은 극력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인하여 마치 악신에 사로잡힌 바 된 상태와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성 경: [삼상20:34]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다윗에 대한 사울의 미움]

&#11093; 심히 노하여 - 이같은 요나단의 분노는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한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님에 의하여 차기의 왕으로 특별히 선택된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기 요나단의 노(怒)는 불의를 참지 못하여 일어난 의분(義憤)으로서 사울의 불의한 분노(30절)와는 뚜렷이 대조된다. 즉 요나단의 분노는 사랑과 신의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사울의 분노는 증오와 시기로부터 나온 것이다.

&#11093; 달의 제 이 일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 이것은 월삭 잔치 둘째날의 음식(27절)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11093;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 이는 매년제를 드리러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다윗을 부친 사울이 정당한 이유없이 반역자로 몰아, 반드시 '죽일 자'(31, 33절)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0:35]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11093; 아침에 - 다윗과 요나단이 만나기로 약속한 제 3일(5, 19절) 곧 이틀 동안의 월삭잔치가 끝난 그 다음날 아침을 가리킨다.

&#11093; 작은 아이(*, 나아르) - 차라리 '소년'으로 번역함이 자연스럽다(22절;14:1).

성 경: [삼상20:36]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11093;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 요나단은 아이가 달려간 거리보다 더 멀리 활을 쏘았다. 이것은 요나단이 병기 든 소년에게 '살이 네 앞편에 있다'(22절)라고 말할 구실을 마련키 위한 의도적 행동이다. 즉 요나단은 다윗과 사전에 약속하기를, 만일 자신이 소년에게 '살이 네 앞에 있다'라고 말할 경우 사울이 그에 대하여 살의(殺意)를 품고 있다는 뜻으로 알고 도망쳐야 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22절).

성 경: [삼상20:37]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11093;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 아마도 요나단은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을 다윗도 족히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이 말을 외쳤을 것인데, 이것은 다윗에게 도망쳐야 될 필요성을 고지(告知)하는 암호(sign)였다.

성 경: [삼상20:38,39]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11093;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 요나단이 이처럼 소년을 독촉한 이유는 소년으로 하여금 숲 속에 숨어 있는 다윗을 발견할 여지나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Keil, Fay). 그리고 이 의도대로 소년은 살을 주워오기에 바빠 다른 눈치는 전혀 채지 못했다(39절).

&#11093; 살을 주워 가지고 - 히브리 본문에는 여기 '살'(*, 헤치)이 단수로 표기되었지만, 난외주(keri)에는 복수 '살들'(*, 힛침)로 표기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미 요나단이 다윗과 약속할 때 '살 셋'을 쏘기로 했기 때문이다(20절). 아마도 요나단은 화살 셋을 연이어 쏜 것 같다(Bunsen).

성 경: [삼상20:40]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11093; 병기를...가지고 성으로 가라 - 여기서 '병기'는 활과 화살, 그리고 화살통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은 베냐민 기브아의 사울의 궁성(宮城)을 가리킨다. 한편 요나단의 이 명령은 말할 나위없이 소년을 돌려보낸 후 다윗과 은밀한 작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사실 주인의 마음에 따라 이같은 종류의 명령을 받아 하인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당시 매우 보편적이었다는 점에서(Pritchard, Hertzberg), 그 소년은 별다른 생각 없이 홀로 성으로 돌아갔을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0:41]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11093;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 문자적으로는 '남편쪽으로부터'이다. 따라서 히브리 원문에는 '바위'라는 말이 없지만, 요나단이 '에셀 바위 곁에' 숨어 있으라고 지시한 19절의 말을 고려하여 '바위'라는 말을 첨가한 것 같다. 아무튼 여기의 '바위 남편'은 궁전쪽, 즉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있던 곳의 반대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 '일어나서'는 몸을 웅크려 숨어있던 자세에서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11093;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이 행동은 요나단이 다윗 자신에게 크나큰 호의를 베풀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것이다(Hertzberg). 즉 땅에 엎드려 얼굴을 숙이는 자세는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경의와 예우를 갖추어하는 절을 의미한다(삼하 9:6; 14:33). 그러나 여기 다윗의 절은 그러한 형식적인 경의나 예우의 표시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런 의미에서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언급에 대하여 '다윗은 요나단을 존경하여 그를 자신의 생명의 주라고 불렀다'라고 의역하였다.

&#11093; 피차 입맞추고 - '입맞춤'은 보통 '만남의 기쁨'이나 '이별의 슬픔'을 표하기 위해 포옹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이마나 볼이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슬픈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여 생명같이 사랑하는 친구의 앞날을 서로 걱정해주면서 우정과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이다(창 29:11; 33:4; 45:15; 출 4:27;18:7; 룻 1:9, 14; 왕상 19:20; 행 20:37).

&#11093;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 이것은 (1) 깊은 사랑과 우정의 교제를 나누던 친구가 비극적 현실 앞에서 기약없이 서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2) 그 중 한 친구는 목숨의 보존을 위해 향후 정처없이 방랑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전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반역자로 몰려 왕과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갖기는 커녕 친구와 가정과 별리하고, 왕과 원수가 되어 정처없이 도피의 길을 떠나야 된다는 그 어이없는 현실에 그동안 참았던 설움이 복받쳐 올라와 길고깊은 울음으로 터져나왔으리라!

성 경: [삼상20:42]

주제1: [다윗과 요나단의 약정(約定)]

주제2: [요나단과 작별하는 다윗]

본절에서는 (1)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평안(샬롬)의 기원, (2) 이미 맺어졌던 두사람 간의 언약의 재확인에 대해 언급된다.

&#11093; 평안히 가라(*, 레크 레솰롬) -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이 함축된 마지막 작별 인사이다. 다윗과 요나단은 마음놓고 길게 작별을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과 그 측근들의 눈초리가 사방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나단은 순간의 격정이 지난 뒤 '평안히 가라'(Go in peace!)란 말로 다윗을 기약없이 떠나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진정 요나단의 작별 인사처럼 깊은 사랑과 우정이 깃든 평안(솰롬)에의 기원이야말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11093; 다윗은...떠나고 요나단은...들어오니라 - 마침내 다윗은 친구와 가족을 등지고 사울의 추적을 피해 사울의 죽는 날까지(31:6) 온갖 고난이 뒤따르는 정처없는 도피 생활에 접어들게 되었다(21-31장). 한편 다윗과 요나단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부친 사울과 함께 전사하기 전, 십 황무지 수풀 속에서 잠시 상면한 일(23:16-18)을 제외하고는 다시 서로 만나지 못했다. 후일 다윗의 궁가(弓歌) 속에는 요나단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다윗의 애도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삼하 1:26).

성 경: [삼상21:1]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진설병(陳設餠)을 위하는 다윗]

&#11093; 다윗이 놉에 가서 - '놉'(Nob)은 '작은 산', '언덕', '산당'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약 4km, 그리고 그 당시의 수도 기브아의 동남쪽 약 4km 지점으로 추정된다(느 11:32; 사 10:32). 일찍이 블레셋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실로(Shiloh)의 성막이 파괴된 이후(4:10, 11) 여호와의 성막은 제사장의 성읍인(22:19) 이곳 '놉'으로 옮겨졌던 것 같다. 한편 다윗이 그때 '놉'으로 간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으로 자신의 피신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22:10), (2) 당장도피 생활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며(3-6절), (3) 자신의 몸을 보호키 위한 무기를 구하기 위한(8, 9절) 목적 때문이었던 것이다(F.R. Fay).

&#11093; 제사장 아히멜렉 - '아히멜렉'(Ahimelech)은 '아히야'(Ahijah)와 동일시 되는 사울 시대의 대제사장으로서(14:3), 아히둡의 아들이며 비느하스의 손자요, 엘리 대제사장의 증손이다(22:9). 그러므로 '아히멜렉'(아히야)은 이전 블레셋과의 믹마스 전투에서 사울 왕을 도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에 참가하기도 했다(14:3, 36-42).

&#11093;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 아히멜렉의 이같은 반응은, 사울의 포악한 성품을 익히 알고 있는 바 혹시 다윗이 사울의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어떤 위해(危害)를 가하러 오지는 않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Lange). 이와 유사한 형태의 두려움은 사무엘을 급작스레 맞이했던 베들레헴의 장로들에게도 있었다(16:4).

&#11093; 어찌하여...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없느냐 -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이 질문은 왕의 사위이자 국가의 중요 지위(18:30; 20:5)에 있는 자가 호위병도 대동치 아니하고 기별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것에 대하여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때 다윗은 자신을 따라 나선 소년 몇 명을 대동하고 있었으나(2절; 막 2:26), 당시 사울에게 쫓기고 있던 자신의 처지를 은폐하기 위해 그들을 부근 어디엔가 남겨두고 단신으로 아히멜렉을 방문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때 다윗은 자신과 아히멜렉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이루려 했던 것같다(Keil, Smith).

성 경: [삼상21:2]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진설병(陳設餠)을 위하는 다윗]

&#11093; 왕이...일을 명하고...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 다윗이 이처럼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한 까닭은, 만일 자신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왔다는 사실을 아히멜렉이 알 경우 사울로부터의 보복이 두려워 아히멜렉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사울로부터 쫓긴다는 사실을 감춘 채, 마치 자신이 사울의 특명을 받아온 것인 양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사실 이 거짓말은 은연 중 아히멜렉을 위협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이같은 속임수로 아히멜렉의 도움을 유도해 냈으나(6, 9절), 후일 그 일로 인해 놉의 제사장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야기시킴으로써(22:9, 10, 18, 19), 그들에 대하여 다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말았다(22:22).

&#11093;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 여기서 '약정하다'(*, 야다)란 말은 '알다', '지정하다', '약속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소년들과 어떤 장소에서 만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NIV, RSV). 즉 "제 부하들과 어느 지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읍니다"(공동 번역)란 말이다. 또한 추측컨대 다윗의 이 말은 근거가 있는 말이다(Keil, Smith, Clericus). 왜냐하면 후일 이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의 언급을 살펴볼 때(마 12:3, 4; 막 2:25, 26; 눅 6:3,4), 다윗에게는 당시 일행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의 성격상 다윗은 그들을 인근 어느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후 헤어지고 아히멜렉을 혼자서 찾아갔던 것 같다. 즉 다윗은, 자신이 아히멜렉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비밀에 붙이려 했던 것 같다.

성 경: [삼상21:3]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진설병(陳設餠)을 위하는 다윗]

&#11093;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 여기의 '떡 다섯 덩이'(five loaves of bread)는 다윗 일행이 당분간의 배고품을 면할 수 있는 양이었을 것이다(Keil, Thenius). 그리고 '무엇이든지'는 떡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음료 즉 포도주를 가리킴이 분명하다(수9:12, 13).

&#11093; 있는 대로...주소서 - 사울의 추격을 피해 정처없이 도피 생활을 해야만 하는 다윗의 절박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사실 먹을 것을 구하기가 힘든 광야의 도피 생활에서 무엇보다 굶주림을 면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성 경: [삼상21:4]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진설병(陳設餠)을 위하는 다윗]

&#11093; 항용 떡 - 식용(食用)으로 먹는 일반적인 떡을 가리킨다.

&#11093; 거룩한 떡 - 이 떡은 이전(以前) 안식일에서부터 돌아오는 안식일까지 일주일 동안 여호와 앞 즉 성소의 떡상에 베풀어 놓았던 '진설병'(陳設餠)을 가리킨다. 이 떡은 일 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새 것으로 교체되어야 했고, 물려낸 떡은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의 거룩한 장소에서 먹을 수 있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다(출 25:30; 35:13;39:36; 40:23; 레 24:8, 9).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떡에 대하여 이같은 율법 규정을 두신 근본 정신은 이 떡을 아론의 후손들 곧 제사장들에게만 특혜적으로 먹게 하려는데 있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 앞에 놓여졌던 거룩한 떡이 부정(不淨)하게 소용되는것을 막으려는 데 그 근본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왕의 임무를 띠고 먹을 것을 급히 요구하는 굶주린 다윗 일행에게 성결(聖潔) 여부를 확인한 뒤 진설병을 내어준 일은 후일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율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라고 인정되었다(마 12:3, 4; 막 2:25, 26; 눅 6:3, 4). 한편 여기서 성소의 떡상 위에 진열되던 '거룩한 떡' 즉 '진설병'에 대한 언급은 블레셋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실로'(Shiloh)의 성소가 여기의 '놉'(Nob)에 재건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시사해 준다. 4:11 주석 참조.

&#11093;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적(性的) 정결'은 (1) 성전(聖戰)에 참여중인 자(신 23:9-14; 수 3:5; 삼하 11:11, 12), (2) 특별한 종교 의식에 참여할 자 혹은 참여중인 자(출 19:15; 레 15:18) 등에게 반드시 요구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히멜렉이 진설병을 주는 문제와 관련하여 다윗 일행에게 이같은 성적 정결을 요구한 까닭은, 진설병과 관계된 율법 규정의 근본 정신에 따라 최소한 그 '거룩한 떡'(진설병)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본절을 통해, 시대 상황의 변천에 따라 다윗 시대에는 이미 제사장만이 진설병을 먹는 철칙이 무너졌고, 아울러 그와 관련된 여러 의식(儀式) 율법들은 그 근본정신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어느 정도 융통성이 발휘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Klein)

성 경: [삼상21:5]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진설병(陳設餠)을 위하는 다윗]

&#11093; 삼 일 동안이나 - 레위기의 정결법상 성관계를 가진 자는 그 당일에만 부정(不淨)하다는 점에서 볼 때(레 15:18), 여기의 '삼 일'은 아히멜렉에 의해 제시된 조건(4절)을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여기의 '삼 일'은 다윗이 숲 속에 숨어있었던 월삭 잔치의 첫 날(20:24)을 기점으로 요나단과 헤어진 후(20:42) 놉에 도착한 그 당일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기간 동안 다윗 일행이 절제 생활을 했을 것은 당연하다. 한편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어제처럼 제 삼일에도'란 뜻이다.

&#11093;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 이것은 2절의 내용에 따라 다윗 자신이 왕의 명령을 받아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러 길을 떠났음을 강변키 위한 언급이다.

&#11093;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 여기서 '그릇'(*, 켈리)은 (1) 소년들이 지참했던 무기, 옷, 기타 필수품 등을 가리킨다는 견해(Keil, Klein), (2) 소년들의 떡그릇을 가리킨다는 견해(Smith, Lange, Hertzberg), (3) 소년들의 몸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라는 견해(Schmid)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여기서 단순히 이 단어의 용례만을 따진다면 (1) (2)의 견해가 타당하나, 본 문맥이 떡을 먹을 주체(主體)의 성결 여부를 논(論)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3)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11093; 오늘날 - 즉 사울의 특명을 받고 거룩한 임무를 수행키 위하여 떠난 날을 말한다.

성 경: [삼상21:6]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진설병(陳設餠)을 위하는 다윗]

&#11093; 거룩한 떡...진설병 - '진설병'(陳設餠, Showbread)은 특별히 여호와께 바치기 위해 고운 밀가루로 만든 떡을 가리킨다. 이 떡은 모두 12개로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데, 6개씩 두 줄로 배열되어 성소의 떡상 위에 진설되었다. 그리고 이 떡은 매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었으며, 이미 진설되었다가 물려진 떡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졌다(레 24:5-9).

&#11093; 물려낸 떡 - 다윗이 온 후 물려낸 것이 아니라, 이미 물려낸 것으로서 제사장이 아직 먹지 않고 보관했던 떡을 말한다. 이러한 떡은 대개 건조되어서 딱딱한 상태였을것이다.

&#11093; 더운 떡 - 물려 낸 떡 대신에 새로이 성소의 떡상에 진설한 떡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1:7]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골리앗의 검을 취한 다윗]

&#11093; 사울의 신하 한 사람 - 곧 사울의 목자장 '도엑'(Doeg)을 가리키는데, 이 자가 특별히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이유는 22:9, 10에 기록된 바 도엑이 사울에게 다윗과 아히멜렉 사이에 되어진 일(1-9절)을 고해 바친 경로를 말하기 위함이다. 즉 당시 도엑은 다윗과 아히멜렉 간에 되어진 일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발함으로써 무고한 제사장 85인과 놉 땅의 거민과 가축을 몰살케 만들었다(22:9-22). 이처럼 도엑은 간악하고 아부 근성이 농후한 인물로서, 후일 다윗은 그의 시편 52편을 통해 도엑의 잔인성을 질타하였다.

&#11093;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 여기서 '머물러 있었는데'의 기본형 '아차르'(*)는 원래 '닫다', '제지하다'의 의미이지만 수동형으로 사용될 경우 '물러나 있다', '갇혀 있다'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라는 말은 (1) '성소'라는 말 대신에 특별히 '여호와'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점(2:18),(2) 그리고 여기의 '머물러 있었는데'가 수동형으로서 의무에 따른 필요 행위를 나타낸다는 점 등에서 볼 때, 어떤 종교적 의식 절차의 이행을 위하여 성막에 일정 기간동안 체류한 사실을 뜻한다. 즉 '도엑'은 (1) 에돔 사람인 까닭에 개종을 위한 할례를 받거나(창 17:23, 27), (2) 이미 개종을 했었다면 하나님께 특별한 서원을 하거나(Stoebe, 1:11), (3) 혹은 어떤 병에 걸려서 제사장의 지시를 받기 위함이거나(레13:4), (4) 아니면 범죄를 속함받고자 정한 제사를 바칠 목적 등으로 당시 대제사장과 여호와의 성막이 있던 놉으로 갔을 것이다.

&#11093; 도엑...에돔 사람 - '도엑'(Doeg)은 '불안'이란 뜻이다. 그리고 '에돔 사람'은 야곱의 쌍동이 형 에서의 후손들로서 팔레스틴 지방과 인접한 남부에 살고 있었다(창 36장). 바로 이같은 혈연적.지역적 사정으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에돔 사람들 중에는 개종(改宗)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사울 왕의 목자장(牧者長)이란 요직을 맡을 정도가 된 '도엑'은 이미 개종하여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본서 저자가 여기서 '에돔'이라는 도엑의 과거 국적을 굳이 밝힌 까닭은, 그로 인하여 머지 않아서 결코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려고 의도한 때문인 듯하다(Klein, 창 25:25, 30; 민20:14-21; 삼하 8:13, 14; 왕상 11:14-22).

&#11093; 사울의 목자장 - 당시 가축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는 점에서, '도엑'이 사울 왕의 목자장이라는 요직(要職)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울 왕으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한다(Smith). 한편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과는 달리 70인역(LXX)은 이 말을 '사울의 노새를 관리하는 자'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근거는 희박하다(Keil, Fay). 또한 최근 들어서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여기 '목자'(*, 로임)를 '로임'이 아닌 '라침'(*), 즉 '달리는 자'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Driver, Graetz, Klein).즉 여기의 '달리는 자'는 왕의 병거보다 앞서 나가는 왕의 시위대를 가리키는데(8:11), 다라서 도엑을 '달리는 자의 우두머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견해는 도엑이라는 인물이 (1) 왕의 시위대 가운데 끼어 있었으며(22:17, 18),(2) 많은 사람들과 가축을 쳐죽일 만한 무예 및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 된다고 한다.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성 경: [삼상21:8]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골리앗의 검을 취한 다윗]

&#11093;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사(武士) 다윗은 무엇보다도 무기가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정처없는 도피생활을 하는 중 어떤 위험에 직면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소한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방어할 무기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 왕의 급한 용무를 핑계로 아히멜렉으로부터 무기를 제공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후일 도엑의 입을 통해 사울의 귀에 들어가자, 놉의 제사장들이 다윗과 공모하여 모반한 줄로 알고 사울은 그들을 모두 몰살시켰던것이다.

성 경: [삼상21:9]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골리앗의 검을 취한 다윗]

&#11093; 엘라 골짜기 - 17:2 주석 참조

&#11093;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 - 17:50-54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다윗은 이 칼로 골리앗의 머리를 벤 후, 이 칼을 자기 장막(베들레헴)으로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칼이 이때 놉의 성막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이후 다윗이 그 칼을 승리의 기념물로 하나님의 성소에 봉헌했기 때문일 것이다(17:54 주석 참조). 한편, 그런데이 칼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의 징표였으므로, 제사장은 그 칼로부터 진흙과 습기와 녹을 제하고 방지하기 위해 보자기에 조심스럽게 싸서 제사장의 '에봇'(Ephod, 출 28:6-14)을 두는 거룩한 곳에 보관하였던 것같다.

&#11093;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 다윗은 (1) 그 칼이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승리의 결과 얻은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2) 그같은 칼을 자기 손에 넣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자신의 미래가 매우 소망적이라는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다윗은 그 칼을 이세상에 다시 없는 귀중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11093; 내게 주소서 - 골리앗으로부터 탈취한 후 하나님께 봉헌한 칼을 다윗이 다시 되돌려 받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그 칼은 도우심과 은혜의 표시였다. 따라서 다윗은 그 칼을 뽑을 때마다 그로 하여금 거인 골리앗을 능히 이기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기억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2) 그 같은 봉헌과 헌신의 표시였다. 즉 다윗은 골리앗에 대한 승리의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기 위해 그 칼을 성소에 봉헌하였는데, 이제 그것이 꼭 필요한 때 다윗에게 다시 되돌아왔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헌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시간, 재물 등) 필요 적절한 시기에 여러가지 방법과 모양으로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려지는 것이다.

성 경: [삼상21:10]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거짓 광기(狂氣)를 부리는 다윗]

&#11093; 두려워하여...도망하여 - 여기의 '두려워하여'란 말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다만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일 뿐이다. 한편 '도망하여'(*, 바라흐)라는 동사는 본서의 19:18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본서 저자는 다윗이 자신의 집을 떠나는 장면을 기술하면서도 계속 반복적으로 이 동사만을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사울의 위협이라는 동일한 원인에 의해 계속적으로 도망을 다녀야만 하는 그 비참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9:18; 20:1). 그런데 여기 놉(Nob)으로부터의 '도망'은 사울의 신하 도엑으로 말미암은 황급한 도주였을 것이 분명하다(22:22).

&#11093; 가드 왕 아기스 - '가드'(Gath)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5:8)이다. 그 위치는 놉의 남서쪽 약 37km지점이다. 수 11:22 주석 참조, 한편 '왕'(*, 멜렉)이라는 호칭은, 블레셋 족속들에게는 중앙 집권적 왕이 없으며 다만 각 도시 국가를 다스리는 방백만 있었다는 분명한 사실(5:8; 17:8)에서 볼 때, 여기의 '왕'은 가드 지역만을 통할하는 '방백'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기스'(Achish)라는 이름은B.C.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애굽의 문헌에도 나오는데, 이는 그당시 애굽에 침입했던 '크레 타 인'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아기스'라는 이름이 칠십인역(Septuagint)에서는 '앙쿠스'(*)로 번역되었는데, 이와 거의 비슷한 '앙키세스'(*)라는 이름이 호머(Homer)의 서사시에도 나온다는 사실들은, '아기스'라는 이름이 비셈어계 즉 헬라 계통의 이름임을 잘 증명해 준다(4:1). 한편, 후일 본 사건을 읊은 다윗의 시편 34편의 제목에는 여기 블레셋 왕이'아비멜렉'(Abimelech)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것은 애굽 왕의 공식 명칭이 '바로'로 통용되듯, '아비멜렉'은 가드 왕의 공식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 '아기스'는 실제 다윗 당시의 가드 왕 곧 아비멜렉의 이름이다(Keil, Smith). 그리고 또한편 다윗이 굳이 '가드'로 도망간 이유는 (1) '가드'는 엘라 골짜기 입구에 위치한 블레셋 국경의 첫번째 도시로서, 이방 국가로서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고, (2) 다윗은 자신이 가드 출신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인 후(17:49-51)벌써 수 년(약 3-4년,Smith)이 경과하였으므로, 그들이 당시와는 많이 변모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으며, (3) 오히려 블레셋 족속의 가장 큰 적인 이스라엘의 사울로부터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처신할 때, 어쩌면 가드의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R. Payne Smith, Keil & Delitzsch, Vol. II-ii. p. 220).

성 경: [삼상21:11]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거짓 광기(狂氣)를 부리는 다윗]

&#11093;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 당시 다윗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왕으로 인식한 까닭은 다윗이 사울과 대등한 위치로서 백성들에 의하여 칭송되었기 때문이다(18:7).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볼 때, 블레셋의 신하들은 다윗을 마치 자신들의 방백처럼 여러 명의 왕중의 한 사람, 즉 지역적 군주(local prince)로 봤음이 분명하다(McCarter; 수 12:1, 7). 결국 이것은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와 그 전승가(18:7)로 말미암아 사울은 다윗의 그늘에 묻히고, 다윗은 이방의 적들에 의해 그 땅의 영웅으로 부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Thenius).

&#11093; 사울...천천이요 다윗...만만이로다 - 이 노래는 다윗의 전공(戰功)으로 말미암아 블레셋에 대해 대승을 거두었던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전승가(戰勝歌)이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널리 유행했던 이 노래는 이방 국가에까지 퍼져, 그들도 잘알고 있을 정도였다. 18:7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1:12]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거짓 광기(狂氣)를 부리는 다윗]

&#11093;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 '이말'은 아기스의 신하가, 다윗이 자신들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줬던 영웅적 인물임을 알고, 이 사실을 자신의 왕에게 상기시켰던 것을 가리킨다(11절).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기스'가 자신을 몰라 볼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피신해온 다윗에게는 심히 두려운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1:13]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거짓 광기(狂氣)를 부리는 다윗]

&#11093; 그 행동을 변하여 - 여기의 '행동'은 '판단력' 혹은 '미각'(味覺)이란 의미이다(25:33). 따라서 이것은 상대를 제대로 분간도 못하는 사람처럼 태도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Smith, Thenius).

&#11093; 미친 체하고 - 히브리 본문에는 이 말 뒤에 '그들의 손 안에서'(*, 베야담)라는 말이 있다. 즉 이것은 다윗의 거짓 미친 짓을 아기스의 신하들이 강력하게 제지시키려 애썼음을 뜻한다. 한편 여기의 '미친 체하고'는 문자적으로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헤매다'란 의미이다(Lange, Smith).

&#11093;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 여기서 '그적거리다'(*, 타와)는 '휘갈겨쓰다'(scribble)란 의미로서, 곧 뜻도 없는 글자를 되는대로 마구 낙서하는 것을 가리킨다(시 78:41; 겔 9:4). 그런데 혹자는 본 단어의 원래 의미가 '타우(*,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 자(字)를 쓰다'임을 의식하여, 다윗이 대문에 실제로 '타우' 자(字)를 썼을 것이라고 본다(Smith). 그러나 그것은 미친 사람에게는 부합되지 않는 행동임으로 타당한 해석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한편 여기의 '대문'(*, 텔레트)은 성경에서 '성문'(삿 16:3; 느 6:1). '방문'(왕하 4:4, 5; 대하 29:7)등 모든 문(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과연 어떤 문을 말하는지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급된 상황을 통해서 볼 때 왕과 신하가 함께 정사(政事)를 의논하던 방의 문으로 추정함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한편 70인역(the Septuagint)은 이 말을 '대문짝을 쿵쿵 때리다'로 번역했는데, 벌겟역(the Vulgate)도 이를 따랐다. 아무튼 이 말은 다윗이 자신을 최대한 미친 자로 가장하여, 손가락으로 낙서를 휘갈기며 주먹으로 대문짝을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한 것을 말한다(Keil). 또한 다윗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미친 자 행세는 아마도 악신(惡神)들린 사울의 행동에서 보고 배웠을 것이다(Lange, Smith, Klein). 이로 볼 때 성도에게 임하는 선악간의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합력하여 마침내 선(善)이 됨을 알 수있다(롬 8:28).

&#11093; 침을 수염에 흘리매 - '침'은 끈적끈적하여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일으키는 분비물인데(Klein), 이러한 침을 수염에 질질 흘리는 행위는 미친 자의 행위로는 가장 적합한 행동이었다(Keil). 한편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한다 고할지라도,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요동치 않는 피난처가 되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기스왕을 두려워하여(12절) 이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기를 모면케 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훗날 다윗은 시34, 52, 56편 등에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삼상21:14]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거짓 광기(狂氣)를 부리는 다윗]

본절은 아기스 왕에게 자신을 전혀 두려워할 가치가 없는 미친 인물로 인식시키려했던 다윗의 의도가 일차 성공했음을 보여 준다.

&#11093;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 고대 중근동에서는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감으로써 미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Smith, Fay), 사람들은 미친 사람과의 상종(相從)을 적극적으로 기피하였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다윗은 그 위태한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1:15]

주제1: [다윗의 유랑 생활]

주제2: [거짓 광기(狂氣)를 부리는 다윗]

&#11093;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 아마도 아기스는 가드의 백성들 중 미친 자들을 이전에도 종종 보았던 것 같다(Fay). 한편 유대 전승은 이 말에 근거하여 당시 아기스의 집안 중에 미친 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Philippson).

&#11093; 내 앞에서(*, 알라이) - 문자적으로는 '나를 대적하여', '내 위에서'란의미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의 미친 사람 행세가 주로 아기스 왕을 겨냥하여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아기스 왕은 매우 당황했었을 것이 분명하다.

&#11093;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 여기의 이 단어(*, 솨가)는 때때로 황홀경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선지자의 괴기한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왕하 9:11; 렘 29:26;호 9:7). 따라서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기스 왕이 자신의 민족 중에서 황홀경에 빠져들어가 이교적(異敎的) 예언을 하곤 하는 예언자들을 많이 보아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더욱이 이같은 추측은 본절 초반부의 '내게 마치광이가 부족하여서'라는 아기스 왕의 언급에 의해서도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이다.

&#11093;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 "그래 감히 이런 자를 나의 궁에 들일 작정이냐?"(공동번역)란 뜻으로, 곧 당장 이 궁에서 그를 쫓아내라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다윗의 미친 자 행세가 성공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다윗은 이때 아기스의 궁을 도망쳐 나와 그 길로 아둘람 굴로 피신했다.

성 경: [삼상22:1]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아둘람 굴에 피신한 다윗]

&#11093; 다윗이...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 '아둘람'(Adullam)은 '피난처', '보호처'란 뜻이다. 이곳은 성경 다른 곳에서 가나안 족속의 왕도(王都)중 하나로 언급된다(창 38:1,2; 수 15:35). 그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곧 가드 남동쪽 약 14km 지점으로, 본래는 유다의 영토였으나 그 당시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Hertzberg,Stoebe). 한편 최근의 성서 고고학자들은 그곳을 탐사하던 중 아둘람성(城)의 한 산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살기에 적합할 듯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Conder,Robinson). 이러한 '아둘람'은 현재 '텔 에쉬 - 세이크 마드쿨'(Tell esh - SheikhMadhkur)로 추정된다(L. Wood). 그리고 여기의 '도망하매'란 말은 앞장의 사건(21:10-15), 곧 '아기스 왕 앞의 거짓 광인(狂人) 사건'의 결과로, 본장이 앞장과 밀접히 연결되어있음을 잘 보여 준다.

&#11093;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그에게 이르렀고 - 역모(逆謀)에 관한한 한 사람의 범죄때문에 온 가족이 처벌당하는 일은 고대의 흔한 관습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사울의 보복을 피하여 다윗의 가족이 이같이 도피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Keil, Smith,Clericus). 한편 '아둘람 굴'은 다윗의 가족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졌다는 점에서, 다윗의 가족들은 적어도 약 네 시간 정도 걸려 그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11093; 내려가서(*, 야라드) - 이 단어는 베들레헴에 비하여 아둘람 지역이 상대적으로 저지대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삼상22:2]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아둘람 굴에 피신한 다윗]

&#11093; 환난당한 모든 자 - 여기서 '환난당한'(*, 마초크)은 '억지로 시키다','강요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추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단어의 어근이 갖는 의미를 통하여 추론해 볼 때, '환난을 당한 자'는 그 당시 사울의 학정(虐政)으로 인하여 주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사 51:13).

&#11093; 빚진 자 - 이들은 사울 왕국의 부당한 세정(稅政) 또는 채주의 강압적인 고리(高利) 등으로 인하여 주로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Fay, Smith).

&#11093; 마음이 원통한 자 - 이와 같은 성구가 무자(無子)로 인해 브닌나로부터 애매히 고통 당했던 한나의 경우에도 적용되었다(1:10). 따라서 아마도 이들은 사울 왕국의 비도덕성 또는 비종교성 등으로 인해 심적.영적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끼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11093; 모였고(*, 이트카베추) - 이말은 '모이다'(*, 카바츠)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자신들 스스로 모여들었다'란 의미로 이해해야한다(수 9:2; 삿 9:47; 삼하 2:25). 한편, 이처럼 스스로 뜻을 세우고 다윗에게로 모여든 여러 사람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 그리고 지사(志士)들이 있었다(5절;대상 12:1-18).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점점 타락하고 쇠퇴해가던 사울 왕국에서 침묵하고 안주하기 보다는 장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할 자로 부름받은 다윗과 더불어 고난당하기를 기뻐하여 이처럼 모여든 것이다.

&#11093;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 -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으로는 여자와 어린 아이는 항상 계수(計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기의 이 '사백 명' 역시 전투에 참여할 만한 용사들만을 의미함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 숫자는 얼마 안가서 결국 육백 명으로 불어난다(23:13; 25:13; 27:2; 30:9, 10).

성 경: [삼상22:3]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모압 미스베로 피신한 다윗]

&#11093; 다윗이...모압 미스베로 가서 - 다윗이 '아둘람 굴'<1절>로 간 것은 일시적으로 피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추종자가 많아짐에 따라 블레셋 사람들과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다윗은 보다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모압'으로 간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과 자신의 부모들의 피신처로 모압을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증조모 룻이 모압 여인이었으므로(룻 1:22), 다윗은 모압 민족과 어느 정도 혈연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으며(룻 4:13-22; 마 1:5, 6),(2) 당시 사울 왕국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모압 민족이 사울 왕의 경쟁자인 다윗 자신을 후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며(14:47). (3) 일단 피신하였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기에 적당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미스베'(Mizpeh)는 '망대'(watch-tower)란 뜻으로, 현재까지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지명이 갖는 의미로 볼 때, 사해(死海, Dead Sea) 동쪽에 있는 모압 평지 가운데의 비스가 산(신 3:27; 34:1) 근방 혹은 그 인근의 고지대로 추정할 수 있다(Fay, Smith,Keil).

&#11093; 하나님이 나를...어떻게 하실 것을...알기까지 -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길을 밝히 보여주사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고히 믿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다윗은 자신의 고난이 결코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와 능력으로써만 해결된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시 27:10).

&#11093; 나의 부모로...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 다윗은 노쇠한 부모와 함께 자신의 험난하고 고달픈 도피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같은 요청을 한 것이다.

성 경: [삼상22:4]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모압 미스베로 피신한 다윗]

&#11093;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 '다윗의 요새'에 대해서는 (1) 모압이나 이스라엘 땅을 막론하고 다윗이 돌아다녔던 여러 요새라는 견해(Smith), (2) 자신의 앞날을 관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던 모압 땅의 한 요새라는 견해(Keil, Lange)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여기의 '요새'(*, 메추다)가 단수라는 사실 둘째, '갓' 선지자가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했다는 사실<5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2)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성 경: [삼상22:5]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모압 미스베로 피신한 다윗]

&#11093; 선지자 갓 - 성경 주석가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이 선지자의 출현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들을 제시한다. 즉 (1) 갓은 그때 다윗에게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하나님의 뜻만 전했다는 해석(Lange), (2) 갓은 사무엘이 지도하는 선지 학교 출신으로서, 사무엘의 명을 받아 다윗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는 해석(Smith, Keil),(3)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때 모여든 사백 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모압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다윗에게 전했다는 해석(Wood) 등이다. 그런데 본서가 사무엘을 통한 다윗의 왕국 건설을 대주제로 하는 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하지는 않지만 (2)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한편 '갓'(*)은 '행운'이란 뜻인데, 이와 동일한 명칭의 지파 즉 갓 지파가 있다는 점에서, 이 선지자는 그 지파 소속의 사람인 듯하다. 향후 이 선지자는 다윗의 도피 생활 중 그의 조언자 역할을 한 것 같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궁전 선지자로 봉사하면서(대상 21:9)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기도 하고(삼하 24:11-19), 다윗의 행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대상 29:29).

&#11093;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 이같은 명령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애굽 땅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다시 불러내셨던 사건과 신학적 동일선상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창 12:1, 10).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언약의 땅 가나안을 지켜야 했듯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도 어떠한 위험과 역경이 기다린다고 하지라도 언약의 땅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다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사실 다윗은 유다로 돌아가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등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백성들로부터 지속적인 인정을 받을수 있었으며(18:7, 28-30), 바로 이같은 일이 왕좌(王座)로 나아가기 위하여 다윗 자신이 준비해야 할 일이었다.

&#11093;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 '헤렛'(Hereth)은 오늘날 '카라스'(Kharas)와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Smith, Fay). 그 위치는 '십'(23:15) 남쪽 약 3.2km, 헤브론 남서쪽약 8-9km지점으로 '그일라'(Keilah, 23:1)와 인접 지역이다(Hertzberg).

성 경: [삼상22:6]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신하들을 책망하는 사울]

&#11093; 사울이 다윗...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 본서 저자는 놉의 제사장들이 대량 학살을 당하는 사건의 초두에서 이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유다에 나타난 이 사실이 대학살 사건이 벌어지게 된 한 요인이었음을 암시하려고 했다. 한편 여기의 '나타났다'는 '야다'(*)의 수동형으로서, '알려졌다'로 번역함이 타당할 듯하다(시76:1; 잠 31:23; 전 6:10).

&#11093;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 여기의 '높은 곳'은 산당(山堂)을 의미치 않는다. 다만 자신의 왕적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사울에 의하여 선택된 높은 곳의 자리를 가리킬 뿐이다(Keil, Fay).

&#11093; 손에 단창을 들고 - '단창'은 사울이 항상 소지하던 것으로서(18:10; 19:9, 10;26:7, 8, 11, 12, 16; 삼하 1:6), 왕들이 흔히 지참하는 홀처럼 왕의 위엄을 상징(히1:8)하는 것이다(Fay). 그런데 사울이 홀 대신에 '단창'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수행하던 왕직(王職)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9:16, 17).

&#11093; 에셀 나무 아래 앉았고 - '에셀나무'(tamarisk tree)는 보통 사막 지역의 와디(Wadi, 건천)에서 자생하는 연질(軟質)의 나무이다. 이 나무는 수많은 가느다란 가지에 비늘과 같은 잎이 달려있으며, 꽃의 색깔은 하얗다. 그런데 이것은 고지대에서 특히 귀하다는 사실 때문에, 대부분 산지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히 여겨졌다.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이 에셀 나무 아래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Klein). 더구나 여호와 숭배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이 나무를 브엘세바에 심었다는 사실 또한 이 나무를 소중히 여기도록 한 한 가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창 21:33). 또한 후일 사울이 이 나무 아래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은(31:13), 그가 이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다는 증거도 된다.

&#11093;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 이것은 '어전 회의'(御前會議)에 대한 묘사로서, 사울은 중대한 국사(國史)는 이러한 어전 회의를 통해 이견을 듣고, 또한 명령을 시달한 것 같다.

성 경: [삼상22:7]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신하들을 책망하는 사울]

&#11093;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 사울의 신하들이 이처럼 사울의 지파와 동일한(9:1, 2)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즉 (1) 사울의 민족 단합 정책이 거의 실패로 돌아갔으며(Smith), (2) 사울이 자신의 병적인 피해 의식에 따라 편증된 인사(人事) 정책을 실시했음을 깨닫게 해준다(Fay, Keil).

&#11093; 이새의 아들 -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호칭이다<20:30>.

&#11093; 너희에게...밭과 포도원을 주며 - 여기의 '밭과 포도원'은 왕에 대한 봉사.충성의 대가로 하사받는 토지를 가리킨다(8:14). 그런데 사실 여기의 '밭과 포도원'은 왕권(王權)을 이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의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경고했던 바(8:11-18), 곧 왕이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라는 예언이 사울에 의해 그대로 성취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8:14>.

&#11093;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 사울의 이 말도 역시 사무엘이 예언했던 왕의 직권 남용이 사울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8:12>

성 경: [삼상22:8]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신하들을 책망하는 사울]

&#11093;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 이것은 실제로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을 모해(謀害)하기로 음모를 꾸몄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신하들이 다윗을 체포하고 처치하는 데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나아가 이 말은 자신의 신하들이 다윗과 공모하여 고의적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의심의 말이기도 하다(Lange).

&#11093; 맹약하였으되 - 당시 다윗과 요나단 간의 우정과 사랑의 맹약은 너무도 진솔하고 탄탄한 것이었으므로, 사울 뿐만 아니라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다윗의 도피 생활에 분명 요나단이 개입되었을 터인데, 그러한 정보를 신하들 중 한 명도 자신에게 고발하지 않고 있다고 사울이 격노하고 있는 것이다.

&#11093; 내 아들이...나를 치려 하는 것 - 이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피해 의식이 점차 심화되어, 신하들은 물론 자신의 아들까지도 자신을 죽이려 하는 모해자(謀害者)로 의심하는 사울의 병적 증세를 보여 준다.

성 경: [삼상22:9,10]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신하들을 책망하는 사울]

&#11093; 도엑이...신하 중에 섰더니 - 여기서 '신하'(*, 에베드)는 '종이 되다','종노릇 하다', '섬기다'란 의미를 갖는 '아바드'에서 온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의이 '신하'는 고관 대작만을 의미치 않는다. 즉 상당히 넓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한데, 아마도 여기의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 또는 사울의 근위대장 정도의 지위였던 것같다(21:7 주석 참조).

&#11093;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 - 21:1 주석 참조.

&#11093;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 이것은 실제로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을 언급하고 있는 21:1-9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엑의 이말은 사실이다(15절).즉 도엑이 사울에게 고발한 바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하여 여호와의 뜻을 묻고, 식물도 주고, 칼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왕명(王命) 수행을 핑계로 그러한 요구를 했다는 사실(21:2)은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러한 사실까지 말했다면, 정황을 모른 아히멜렉은 무고히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18절)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엑은 혀가 지닌 간사성과 위험성을 가장 잘 보여 준 대표적인 악인이었다(시 52:3-5; 약 3:2-6).

&#11093; 식물 - 성소의 떡상에서 물려냈던 진설병(21:5, 6)을 말한다.

성 경: [삼상22:11]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수난당한 제사장 성읍]

&#11093; 아히둡 - 대제사장 엘리의 손자이며, 사악한 제사장 비느하스의 아들이다(14:3).

&#11093; 놉에 있는 제사장들 - 원래 '놉'은 제사장의 성읍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이 성읍에서 집단 거주하게 된 까닭은, 실로가 블레셋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에서 엘리 제사장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던 바로 이 성읍으로 거주지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때 엘리의 후손들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성막을 다시 재건했을 것이다(21:1).

성 경: [삼상22:12,13]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수난당한 제사장 성읍]

&#11093;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이 말은 아히멜렉이 불길한 예감을 갖고 두려운 마음으로 사울의 호출에 응했음을 잘 보여 주는 표현이다.

&#11093; 네가 어찌하여...공모하여 - 간신 도엑의 말(9, 10절)에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사울왕은 정황을 자세히 살피기에 앞서 먼저 제사장 아히멜렉을 반역 공모죄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런데 사실 모세 율법에 따르면(신 19:15; 민 35:30) 판결에는 반드시 두사람 이상의 증인(證人)이 요구되었는데, 사울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자기 심복이었던 도엑의 증언만을 듣고 재판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11093; 오늘이라도...나를 치게 하려 - 다윗에 대한 사울 왕의 피해의식과 강박 관념이 잘 드러난 말이다. 사실 사무엘로부터 폐위 선언(13:13, 14; 15:23, 26)을 듣고 곧이어 다윗이 출현하게 되자, 사울은 다윗으로부터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성 경: [삼상22:14]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수난당한 제사장 성읍]

&#11093; 충실한 자 - 여기서 '충실한'(*, 네에만)은 '신뢰하다'(*, 아만)의 수동형 분사이다. 따라서 '신임을 받는'이란 뜻이다(사 33:16; 렘 42:5).

&#11093; 왕의 모신 - 여기의 '모신'(*, 미쉐마아트)은 어원학상으로 볼 때 '순종해야 되는 자', '듣는 자', '청중'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시종' 즉 '옆에서 모셔서는 자'란 말로서, 왕의 개인 보좌관 내지는 조언자를 가리킨다(Klein,Keil, Smith; 삼하 23:22, 23; 대상 11:24, 25).

성 경: [삼상22:15]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수난당한 제사장 성읍]

&#11093;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처음이니이까 - 성경은 다윗이 사울의 중신(重臣)이 된 이래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경우를 언급치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있을 때마다 대제사장이 전장(戰場)으로 나아가서 전투 최고 지휘자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관례였다는 점에서 볼 때(14:3). 다윗이 지휘했던 전투에 아히멜렉도 함께 가서 다윗의 요구에 따라 '우림과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성 경: [삼상22:16]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수난당한 제사장 성읍]

본절의 내용은 사울이 그릇된 재판을 행하는 등 하나님의 공의를 파기한 불의한 폭군임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신 16:18). 즉 사울의 재판은 (1) 모세 율법에 명시된 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세우지 않았으며(신 19:15), (2) 간결 명료한 진술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던 아히멜렉의 증언을 오히려 자신의 독단으로써 일언지하에 무시하였으며(14, 15절; 신 19:16-19), (3) 분명한 이유도 없이 온 가문(家門)을 몰살시켰다는 점(신 24:16)에서 볼때 분명 폭군(暴君)의 불의한 횡포일 뿐이었다.

성 경: [삼상22:17]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수난당한 제사장 성읍]

&#11093; 좌우의 시위자 - 여기의 '시위자'(*, 루츠)은 '달리는 자'란 의미이다. 즉 이것은 왕의 병거를 호위하는 근위병을 가리킨다.

&#11093; 왕의 신하들이...죽이기를 싫어한지라 - 사울의 신하들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죽여야 하는 대상이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신분에 있는사람들이며, (2) 이들 제사장들에 대한 사울의 재판이 완전한 독단과 조작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093; 여호와의 제사장 - 본서 '저자는' '제사장'앞에 계약적 의미를 강조하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을 첨부함으로써, 사울의 신하들이 왜 제사장들을 도륙하라는 사울의 명령을 이행치 아니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한다. 즉 사울의 신하들은, (1)자신들이 여호와의 계약 백성임을 믿고 있었으며, (2)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자신들 간의 계약적 관계를 제사 의식을 통하여 연결.유지해 주는 중요한 직분자들이었음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제사장들을 죽이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 경: [삼상22:18]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수난당한 제사장 성읍]

&#11093; 왕이 도엑에게...죽이라 하매 - 사울은 자신의 다른 신하들이 제사장을 죽일 수 없는 필연적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 '이방인' 도엑(21:7)을 시켜 제사장을 죽이려고 했다.

&#11093; 에돔 사람 도엑 - 여기서도 '도엑'이라는 인물이 '에돔 사람'(the Edomite)임이 강조되고 있다. 21:7 주석 참조.

&#11093; 그날에 - 무고한 제사장들을 죽이는 일이 지체없이 시행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11093;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 인을 죽였고 - '놉 제사장 학살 사건'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즉 (1)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 직무를 맡고 있는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무고한 혐으로 가혹하게 처단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한 처사요, 따라서 그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8:7)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였다.(2) 일찍이 대제사장 엘리의 가문에 내려졌던 심판적 예언의 성취였다(2:31-36;3:11-14). 즉 제사장 아히멜렉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심판적 경고를 받았던 엘리의 증손자로서(14:3). 조상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의 불의한 재판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대소사(大小事) 및 길흉(吉凶)의 사건들이 모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하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한편 여기의 '세마포 에봇'은 일반 제사장들이나 성막 봉사자들이 입던 옷으로서, 대제사장들이 입는 에봇과는 분명히 구분된다(2:18).

성 경: [삼상22:19]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수난당한 제사장 성읍]

&#11093; 제사장들의 성읍 - '놉'(Nob)은 분명히 모세나 여호수아에 의하여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되지 아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놉'은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그당시 놉이 제사장들의 거주지였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다.

&#11093; 남녀...젖 먹는 자들과 소...양을 칼로 쳤더라 - 제사장을 죽이라는(17, 18절) 사울의 명령보다 더 심하게 이처럼 행한 것은 분명 '도엑' 자신의 독단적 판단에 따른 행위로는 볼 수 없다. 틀림없이 이것은 '놉'이라는 성읍 전체를 '진멸'해야 하겠다고 판단한 사울의 또다른 명령에 따른 행위였을 것이다. 일찍이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15:3)을 제대로 이행치 않음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15:18, 19, 23). 그러나 이제 사울은 그때 휘둘렀어야 했을 '진멸의 칼날'을 오히려 선량한 놉의 제사장들에게 사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2:20]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아비아달의 피신]

&#11093; 아히멜렉의 아들 중...아비아달 - 여기의 '아들 중'이라는 말은 당히 '아히멜렉'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또한 여기서 '아비아달'(Abiathar)은 '아버지는 뛰어나시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아비아달은 제사장들이 모두 사울에게 호출됐을 때에 성막에 혼자 남아 있다가, 사울에 의한 비극적 학살 사실을 전해 듣고 급히 도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Smith). 특히 이처럼 아비아달이 성막에 있다가 도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가 '에봇'(21:9)을 갖고 다윗에게로 도망갔다는 사실에 의하여(23:6) 그 정확성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11093;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 '아비아달'이 이같이 다윗에게로 도망간 까닭은, 다윗이 사울에 의해 쫓기는 등 사울과는 적대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역시 사울에게 쫓기는자신을 기꺼이 받아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22:21]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아비아달의 피신]

&#11093;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는 다윗의 시편으로는 17, 35, 64, 109, 140편 등이 있다. 즉 후일 다윗은 이러한 시편들을 통해 악인의 잔인성과 그 말로(末路), 자신의 범죄및 여호와의 긍휼 등을 진솔히 읊었다.

성 경: [삼상22:22]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아비아달의 피신]

&#11093; 반드시...고할 줄...알았노라 - 다윗은 바로 이같은 판단에 따라, 황급히 '놉'을떠나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갔었다(21:10). 그러나 그때 다윗은 자신으로 인하여 제사장들이 엉뚱하게 다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11093; 네 아비 집...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같이 유

감을 표명한 까닭은, 아비아달의 아비 아히멜렉의 가문이 사울로부터 화를 당하게 된 것은 자신이 그에게 거짓말을 해서 그로부터 도움을 받게된 사실이 주요한 원인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1:2>. 따라서 다윗은 이처럼 아히멜렉을 위시한 제사장들의 죽음의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었음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시 32:5). 더욱이 그는 자신의 거짓말 범죄(21:2)에 대한 인정과 회개의 표시로 긴급 구조를 요청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을 자신의 무리 안에 받아들이기까지 하였다. 이같이 비록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기는 했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참된 회개를 통하여 신앙을 회복하는 행위야말로 다윗을 다윗답게 한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삼하 12:13).

성 경: [삼상22:23]

주제1: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

주제2: [아비아달의 피신]

&#11093;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 아비아달을 확신시키는 다윗의 이 말 속에는 (1)하나님께서 자신과 늘 함께 계실 것이라는 신앙과 (2) 이스라엘의 왕권은 결국 자신에게로 넘어올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다.

성 경: [삼상23:1]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는 다윗]

&#11093;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 '그일라'(Keilah)는 헤브론 북서쪽 약 13km, 아둘람 남쪽 약 5km 지점으로서, 가나안 정복 후 여호수아에 의하여 유다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었다(수 15:44). 이곳은 당시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헤렛 수풀'(forest ofHereth)에서는 북쪽으로 약 9km의 거리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둘람' 지역이 그당시 블레셋의 영토였다는 점에서 볼 때(22:1), 그곳과 인근했던 '그일라'는 블레셋과의 국경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였을 것이다(Keil, Smith, Tobler).

&#11093;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침공한 목적 및 이유를 보여 준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1) 추수된 양곡을 탈취할 목적으로, (2) 전투 상대가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들이라는 이유에 따라 그곳에 침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틴의 밀을 베는 시기가 대략 5, 6월 정도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블레셋 사람의 침공 시기는 아마도 밀 베는 시기가 좀 지난 6, 7월 경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높은 곳에 위치한 평평한 마당 또는 바위 위에서 타작이 행해진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람이 많이 부는 고지대가 (1) 알곡을 건조시키기에 좋으며, (2) 또한 쭉정이를 제거하기에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작하여 쭉정이를 제거한 알곡은 집의 창고로 옮겨갈 때까지 타작 마당에 쌓여지게 되는데, 절도 또는 약탈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파수꾼을 둔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Conder). 아무튼 이러한 시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 성읍의 타작 마당을 습격한 것이다.

성 경: [삼상23:2]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는 다윗]

&#11093;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 당시 이러한 문의는 대제사장의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출 28:30)을 통한 질문 방식이었을 것이다(Keil, Smith).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아비아달'이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 온 것은(6절; 22:20) 다윗에게 대단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다윗에게는 '갓'(God)이라는 선지자가 있었으나(22:5), 당시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받을 만한 단계에 있지는 못한 듯하다.

&#11093;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 여기의 '이'는 14:6에서 '할례 없는 자들'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 인칭 대명사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이 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그가 블레셋 족속의 약탈 행위에 의분(義憤)을 느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Klein). 아무튼 다윗은 그때 블레셋을 두려운 존재로 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11093; 그일라를 구원하라 - 여기서 '구원하라'(*, 야솨)는 말은 이스라엘을 침략자들의 손에서 구출했던 사사들에게 많이 적용되었던 단어였다(삿 2:16; 3:9; 6:15;7:7). 결국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사사가 수행했던 직능을 행하게 하는 등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강력히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다(Klein, Keil, Fay). 한편 하나님의 이같은 뜻은, 당신께서 요단 건너 모압땅에 있던 다윗을 유다 땅으로 불러내신 의도와 완전히 부합된다(22:5).

성 경: [삼상23:3]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는 다윗]

&#11093; 다윗의 사람들 -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모여들은 인물들<22:2> 을 가리킨다.

&#11093;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 다윗 추종자들의 이 말은 그 당시 그들은 사울을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사울의 추격이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치 못한 상황에서 사울보다 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요 굉장한 부담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11093; 블레셋 사람의 군대 - 여기서 '군대'(*, 마아르코트)는 잘 정렬된 군사의 '대열'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의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훈련이 매우 잘된 강력한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문구이다. 한편 여기의 이같은 '군대'라는 단어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17장에서는 무려 10회나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삼상23:4]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는 다윗]

&#11093;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 이처럼 다윗의 재차 문의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믿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2절)에 따라 행하기를 두려워하며 주저하는 부하들을 격려하며 확신시키려는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1093; 네 손에 붙이리라 - 이같은 표현은 여호와의 전쟁 곧 성전(聖戰)과 관련된 문맥에서,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가 신적(神的)으로 보장될 때 종종 사용되었다(14:10;17:47; 수 6:2; 8:7; 10:8; 11:8 등). 따라서 다윗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이같은 응답은 다윗의 부하들을 안심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3:5]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는 다윗]

&#11093; 크게 도륙하고 - 이 문구는 다윗이 사울의 휘하에 있으면서 블레셋에 대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19:8>.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문구를 여기서도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열심이 결코 식지 않았으며, 또한 왕이 될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군사적 능력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계속 함께 하심에 따라 결코 쇠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11093;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 이것은 그일라(Keilah)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것들을 다시 찾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타작 마당에서 건조시키던 중 빼앗겼던 곡식들(1절)도 틀림없이 되찾아 왔을 것이다(Smith).

&#11093; 다윗이 이와 같이...구원하니라 - 여기서 '구원하니라'(*, 야솨)란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2절)을 성실히 이행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삼상23:6]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시간적으로 볼 때 22장의 후반부(20-23절)에 언급되어야 할 본절이 여기에 놓여진 까닭은 다윗이 그일라에 침범한 블레셋과의 싸움에 앞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11093;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 본 문구는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헤렛 수풀'(22:5)에 있던 다윗에게로 도망했을 것으로 언급하는 22:20과는 분명히 모순된다. 이같은 모순의 해결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된다. 즉 (1) 아비아달은 최초에 다윗이 피신했던 아둘람 굴로 도망갔으나(22:1), 다윗이 모압으로 가는 바람에 그와 헤어져 있다가 다윗이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와 블레셋을 치기 위하여 그일라로 갈 때에 그리로 함께 갔다고 보는 견해(Smith), (2) 아비아달은 다윗이 헤렛 수풀에 있을 때 그에게 도망했고(22:5), 다윗이 그일라로 향할 때 그와 함께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Klein, Keil, Lange, Hertzberg, LXX)등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1)의 견해를 취할 경우 다윗이 모압으로 간 것은(22:3, 4) 사울이 제사장을 몰살시킨 직후로 봐야 하는등, 22, 23장의 순서를 극도로 혼란케 한다. 따라서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2)의 견해를 택함이 타당할 것이다.

&#11093; 에봇 - 소매 부분이 없는 긴 조끼 모양의 옷으로, 금색, 청색, 자색, 홍색, 흰색 등 다섯 가지 색상의 실로 만들어진 대제사장의 의복이다(21:9). 출 28:6-14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3:7]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1093; 내 손에 붙이셨도다 - 이것은 성전(聖戰)에 임함에 있어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완벽한 승리를 예상할 때 사용되는 술어 '나탄'(*, ; 4절; 14:10, 37)과는 다르다. 여기의 '붙이셨도다'(*, 나카르)는 원래 '거부하다', '따돌리다','소원하게 하다'란 의미이다(Davidson). 결국 이 단어는 여기서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다윗이 지극히 위태한 상황에 떨어졌음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70인역(LXX)은 이 말을 '파셨다'(*, 페프라켄)란 말로 의역하였다.

&#11093;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갇혔도다 - 사울이 다윗을 체포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自信)하게 된 이유를 말해 준다. 한편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은 그일라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임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유다 광야와는 달리, 다윗이 그 성(城)안에 들어가 있는 이상 사울의 추격망을 벗어나기 힘들 것은 당연하였다. 더구나 사울에 의하여 그 성이 장기간 포위 공격될 경우(8절), 그 성의 주민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버릴 것이 뻔한 이치였다(12절).

성 경: [삼상23:8]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1093; 사울이...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 이러한 징병 행위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적(모압, 아말렉, 블레셋 등)을 치려고 할 때마다 취했던 행동이다(11:7; 15:4). 따라서 여기서도 사울은 아마 외적을 치려한 것처럼 징병의 명분을 거짓으로 세웠을 것이다(Fay).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군대를 악용하여,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다윗을 대적하는 사악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23:9]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1093; 다윗이 사울의...계교를 알고 - 사울이 거하던 궁성(宮城) '기브아'로부터 당시 다윗이 임시 머물고 있었던 '그일라'까지는 약 35km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사울의 군대가 그일라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사울의 군대가 그일라로 향한다는 소문이 먼저 다윗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11093; 에봇을...가져오라 - 이는 대제사장의 '에봇'(출 28:6-14) 안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Urim & Thummim, 출 28:30 주석 참조)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한 명령이다(2, 4절).

성 경: [삼상23:10]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1093; 여호와여...주의 종이...들었나이다 -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경건과 의뢰심이 잘나타나 있다(Klein). 실로 다윗은 모든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경건한 신앙적 기도를 잊지 않았다. 한편, 이처럼 에봇의 '우림과 둠밈'을 통한 문의(問議)는 진솔하고도 경건한 기도와 함께 드려졌던 것 같다(Keil, Fay).

성 경: [삼상23:11]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1093; 그일라 사람들 - 여기서 '사람들'(*, 바알)은 '주인', '지도자'란 의미이다(사 16:8). 따라서 이는 곧 그일라의 장로들을 의미함이 분명하다(16:4).

&#11093;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 여기의 '붙이겠나이까'(*, 하야세기루니)는 '닫다', '가두다'란 의미를 갖는 '사가르'(*)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붙이겠나이까'는 강제로 감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레 13:4; 시 31:8). 결국 이같은 행동은 다윗으로 인하여 결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계산에 근거하여, 의로운 다윗을 사악한 사울에게 넘겨주기를 서숨치 않았던 그일라 사람들의 이기주의적인 인간성을 잘 보여 준다.

&#1109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의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실 것을 강조.소원하는 의미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2:30; 20:12; 25:32; 삼하 7:27; 왕상 1:30, 48). 즉 다윗은 이같은 신(神)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신실한 답변을 주셔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11093; 그가 내려오리라 - 본절에서 다윗은 (1) 그일라 주민들이 자신의 일행을 해롭게 할지의 여부, (2) 그리고 사울이 그일라로 쳐들어올 지의 여부 등 두 가지 질문을 하나님께 했지만, 이처럼 다윗은 한 가지의 대답만을 듣는다. 이와 같이 다윗이 한가지 대답 밖에 듣지 못한 것은 다윗은 한꺼번에 두 가지의 질문을 하나님께 한 반면, '우림과 둠밈'은 한 사안(事案)에 대하여 '예'(yes)와 '아니오'(no)로 한 가지만 대답하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Keil).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질문 중 논리적 우선 순위를 갖는 사울의 침공 여부에 대해서 먼저 답을 주셨다.

성 경: [삼상23:12]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1093;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 11절에서 이미 언급된 이 질문은 하나님께로부터 이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으므로 본절에서 다시 되풀이 되고 있다.

성 경: [삼상23:13]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109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 여기의 '육백 명'은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신했을 때 그의 주변에 모여들은 숫자 '사백 명'(22:2)보다 약 '이백 명'이 늘은 숫자였다. 그러나 이 숫자의 병력은 사울의 대군에 비하면 지극히 보잘것 없었다. 한편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육백명'이라는 숫자를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1) 다윗이 그때 이리저리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암시하고 (2) 아울러 그러한 도피 생활 가운데서도 다윗의 세력이 점차 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11093;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 14절의 언급을 통해 볼 때, 이것은 특별한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을 뜻한다. 즉 당시 사울에게 쫓기고 있던 다윗이 일정한 노정(路程) 없이 그때 그때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여호와께서 이끄시는대로 일행과 함께 이곳 저곳으로 방랑하는 생활을 하였음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3:14]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1093; 황무지 요새 - 여기서 '황무지'는 유다 광야를 뜻한다(Keil, Fay). 즉 유다 지역 중앙의 산지와 사해 사이에 있는 광야를 가리킨다(수 15:61, 62). 그리고 '요새'는 산과 수풀 등 자연적 지형 지물(地形地物) 등으로 형성된 안전한 은신처를 가리킨다(Smith).

&#11093; 십 황무지 산골 - '십'(Ziph)은 오늘날의 '텔 짚'(Tell Zif)과 동일시 되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 성읍이다(수 15:55). 그 위치는 그일라 남동쪽 약 21km, 헤브론 동남쪽 약 8km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산악 지대에 있는 산 중의 하나가 19절에서 언급되는 '하길라(Hachilah) 산'이다.

&#11093; 사울이 매일 찾되 -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실(15, 25, 26절; 24:2; 26:2)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울이 평생에 다윗의 대적(對敵)이 되니라'라는 19:29의 기록과 일맥 상통한다. 실로 다윗에 대한 시기와 증오심을 버릴 수 없었던 사울은 그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평안과 휴식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11093; 하나님...붙이지 아니하시니라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경건한 성도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시 31:20; 46:1; 145:20). 즉 그들을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시 17:8). 진정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허락없이 인간은 참새 한마리의 생명 조차도 어찌할 수 없다(마 10:29-31).

성 경: [삼상23:15]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광야로 피신하는 다윗]

&#11093; 십 황무지 수풀 - 여기서 '수풀'(*, 호레솨)은 '숲' 혹은 '숲으로 덮인 높은 곳'이란 뜻의 '호레쉬(Horesh)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이 '수풀'(호레쉬)은'십' 남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키르벱 코레이사'와 동일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 곧 지명(地名)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lein, Smith, Lange).

성 경: [삼상23:16]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광야로 피신하는 다윗]

&#11093; 요나단이...다윗에게 이르러 - 요나단의 이같은 행동은, (1) 사울에게 쫓겨 심한 곤경에 빠져있을 다윗을 위로하며, (2) 다윗과 자신간에 맺어진 언약(20:12-16)을 재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1093; 수풀 - 말할 나위없이 '호레쉬'를 가리킬 것이다(15절).

&#11093; 그로 하나님을...의지하게 하였는데 - 요나단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한 위로와 격려의 말은 구체적으로 17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그말의 핵심은 다윗의 왕권(王權)에 대한 인정과 보장(保障)이었다.

성 경: [삼상23:17]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광야로 피신하는 다윗]

&#11093; 두려워 말라 - 이 문구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적극적으로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사용된다(수 1:9; 사 41:10). 마찬가지로 오늘날 온갖 세속과 사단의 위협, 그리고 불의한 세력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성도를 향해서 주께서는 동일한 평안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다(마 10:31; 14:27; 17:7; 행 18:9; 27:24).

&#11093;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 결국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사울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다(15:26; 18:15). 그러나 여기 요나단의 이 표현은 위와 같은 부친 사울의 생각이 점차 굳어져서 확신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11093; 나는 네 다음이 될 것 - 요나단의 이 말은 다윗이 등극한 후 자신에게 제 2인자의 지위를 보장해 달라는 소망이나 부탁이 결코 아니다. 요나단의 이 말은 단순히, 자신에게 부친 사울의 왕권이 승계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이같이 보아야 할 까닭은, 왕조가 바뀔 경우 전(前) 왕조의 후예들은 추방 내지는 죽임을 당하는 풍습이 보편화 되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20:14), 사울은 자신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갔을 때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의 은총을 입어 제 2인자로서 존립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3:18]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광야로 피신하는 다윗]

&#11093; 두 사람이...언약하고 - 다윗과 요나단 간에 이미 맺었던 언약(20:12-17)을 새롭게 갱신한 사실을 가리킨다.

&#11093; 여호와 앞에서 - 저자는 계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 '여호와'를 사용함으로써 다윗과 요나단 간의 언약의 공고성을 부각시키려 한다(20:13, 14, 16). 한편둘 사이에 맺은 이와 같은 언약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전사한 요나단(31:2)에게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요나단의 후손들에게는 다윗에 의하여 그대로 성취되었다(삼하9:11).

성 경: [삼상23:19]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사람의 밀고]

&#11093; 십 사람들이...사울에게...가로되 - 십 사람들의 이같은 밀고(密告) 행위의 동기는(1)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1-19)에 겁을 집어먹은 그들이, 사울로부터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누명을 쓰지 않고 오히려 사울로부터 칭찬을 받을 목적과(21절), (2) 다윗이 사울의 손에 결코 붙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14절>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靈的無知) 때문이었다.

&#11093; 다윗이 우리와 함께...숨지 아니하였나이까 - 이 말은 다만 다윗 일행이 십 사람들의 고장에 머물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11093; 광야 남편 - 이는 유다 광야의 남쪽, 즉 사해(死海)의 서쪽 황무지를 가리킨다(Keil). 한편 흠정역(AV)은 여기의 '광야'(*, 예쉬몬)를 유다 광야의 한 부분에 위치한 특정 지역으로 본다(민 21:20; 23:28). 아무튼 이곳은 후일 침례요한이 머물던 곳으로서(마 3:1), 그 동쪽으로는 사해로 내려갈 수 있는 석회암 절벽이 있어 가히 천연적 요새지라 할 만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오늘날에도 각종 피난처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Smith).

&#11093; 하길라 산 수풀 요새 - '하길라'(Hachilah)는 '건조한 언덕'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 산골'(14절)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하길라 산'은 15절에 언급된 '십 황무지 수풀'의 구체적인 또다른 명칭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산은 약 30km 정도의 높이로 서있는 관계로, 이 산에서 기거하던 다윗의 일행은 이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평지에서 생활하던 십 사람들에 의하여 쉽사리 발견될 수 있었다(Keil & Delitzsch, op. cit. p. 231).

성 경: [삼상23:20]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사람의 밀고]

&#11093; 내려오소서 - 이 말은 당시 사울의 궁성이 있던 기브아는 고지대에 위치한 반면 십 황무지는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다.

&#11093;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 - 여기서 '붙일 것'(*, 하스기로)은 '닫다', '가두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사가르'(*)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는 상대방을 강제로 감금함으로써 궁지에 빠뜨리는 것을 가리킨다(레 13:4; 시 31:8). 또한 이 단어는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에 대해서 취하려 했던 행동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11절). 본서 저자는 본장 안에서 이 단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성읍 거민의 무지한 밀고와 배반등으로 위기 상황에 계속 봉착되는 안타까움을 암시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성 경: [삼상23:21]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사람의 밀고]

&#11093;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 사울은 그때 자신이 다윗의 음모와 계교에 의해 왕권을 상실하게 될 동정받을 만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따라서 여기의 '긍휼히 여겼으니'는 십(Ziph) 사람들이 자신의 그러한 불쌍한 처지를 동정했다는 뜻이다.

&#11093;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 그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떠나셨고<16:14>, 그리고 사울도 그의 행위로써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십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성경은 이같은 자를 가리켜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도다'(사 29:13; 마15:8)라고 기록하였다.

성 경: [삼상23:22]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사람의 밀고]

&#11093;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 여기의 '공교히 행동한다'(*, 아람)는 '경계를 하다', '경성하다', '간계를 꾀하다'란 의미이다(시 83:3; 잠 15:5; 19:25). 구체적으로 이것은 행동의 민첩성,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준비성 등을 가리킨다.

&#11093; 더 자세히 살펴서 - 이것은 '라아'(*), 즉 '보다'라는 의미의 동사를 확대 번역한 것이다. 이는 문맥상 상당히 잘 된 번역이다(창 31:42; 레 13:3; 시31:7).

&#11093; 그가 어디 은적하였으며 - 문자적으로는 '그의 발이 있는 장소'이다. 즉 다윗의 발자취를 철저히 살펴 추적.확인하라는 말이다.

&#11093; 알아보고(*, 야다) - 다윗에 관한 첩보 수준이 아닌 정보를 입수하라는 뜻이다. 즉 이것은 다윗이 십 사람들에 의해 목격된 곳 이외의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성 경: [삼상23:23]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십 사람의 밀고]

&#11093; 탐지하고 - 22절의 '더 자세히 살펴서'와 동일한 단어이다.

&#11093; 그가 이 땅에 있으면 - '이 땅에'(*, 바아레츠)는 '그 땅에'로 번역해야 정확하다. 그런데 여기의 '땅'(아레츠)은 (1) '지구'(창 1:1), '세상'(수 23:14) , '나라'(삼하 24:8)등 상당히 넓은 범위의 지역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며 (2) 이단어 뒤에 '유다 천천 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라는 말이 있다는 점에서, 십 황무지 지역만이 아닌 유다 땅 전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093; 유다 천천 인 중에서...찾아내리라 - 이 말은 다윗이 유다 땅에 있는 한 체포하고야 말겠다는 사울의 단단한 각오이다. 그런데 여기의 '천천'은 많은 수효의 백성을 상징한다(민 1:16). 즉 유다 지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찾아내리라'(*, 히파스티)는 '보물을 찾듯이 구석 구석 살피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잠 2:4> '하파스'(*)의 강조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반드시 다윗을 잡고야 말겠다는 사울의 강력한 결의를 엿보게 해준다.

성 경: [삼상23:24]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거듭되는 다윗의 피신]

&#11093; 일어나 - 특별한 일을 행하기에 앞서 그 일을 해하는 데에 대한 각오를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

&#11093;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 - 이것은 '광야 남편으로 아라바의 근처에 있는 마온 황무지'로 번역함이 좋다. 그런데 여기의 '광야 남편'은 19절에서 언급된 '광야 남편'과 동일하다. 그리고 '마온'(Maon)은 '거주', '거처'란 뜻으로서, 이곳은 오늘날의 '키르벧 마인'(Khirbet Main)과 동일 지역으로 추정되며(Keil, Smith, Fay), 헤브론 동남쪽 약 13km, 십 남쪽 약 7km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지형적 특성을 갖고 있다(Lange). 한편 '아라바'(Arabah)는 '황무지' 또는 '사막의 들'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로부터 사해에 이르기까지 요단 게곡을 따라 좌우로 펼쳐져 있는 저지(低地)의 광야 지대를 통칭하는 말이다(Smith). 그런데 보통이 말은 넓게는 유다 광야 전체를, 좁게는 유다 광야 중 사해(死海) 인근의 지역 혹은 요단 계곡 중 사해와 가까운 곳 등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유다 광야 중 사해 인근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삼상23:25]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거듭되는 다윗의 피신]

&#11093; 다윗이 바위로 내려 - 여기서 '바위'(*, 셀라)는 '마온'(Maon)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 또는 '절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6절). 즉 다윗은 그 산에서 평지 곧 '마온 황무지'(wilderness of Maon)로 내려온 것이다. 다윗은 그때 산 바로 아래의 동굴 또는 수풀 등으로 피신하려고 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3:26]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거듭되는 다윗의 피신]

&#11093;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 여기서 '산 이편'은 마온에 있는 거대한 바위 협곡의 한편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협곡은 매우 깊어서 먼 거리를 돌지 않고서는 반대편으로 갈 수 없다고 한다(Conder). 그러므로 사울은 그때 '산 이편'에서 '산 저편'으로 도망치고 있는 다윗의 일행을 빤히 바라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1093; 다윗...산 저편으로...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 그때 다윗과 그의 일행은 급한 나머지 쉽사리 건널 수 없는 협곡을 애써 건너 도망치려 했던 것 같다.

&#11093; 두려워하여 급히(*, 네흐파즈) - 이 말은 '서두르다', '떨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하파즈'(*)의 수동형인데, 그 의미는 '겁에 질린 나머지 매우 서두르다'란 뜻이다.(시 48:5; 104:7).

성 경: [삼상23:27]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거듭되는 다윗의 피신]

&#11093;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 본절은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 갇힌 다윗이 하나님의 섭리로 극적인 보호를 받는 장면이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다(행 9:1-9) : 사실상 블레셋 군대가 침입한 것은 결코 다윗을 도와주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일어나는 시기와 장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사건으로 하여금 거의 생포될 위기에 놓여 있었던 다윗을 구출케 하는 역할을 하게 했던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미 7:7, 8) : 다윗은 극한 상황에 처해서도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를 신뢰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다(시 63편). 이것은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신앙인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인간적인 잔꾀보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참된 신앙이 요구되어진다(시 146:5; 마 24:13).

&#11093; 침노하나이다(*, 파솨트) - 원래 '벗기다', '강탈하다'란 의미로서, 약탈을 목적으로 한 침략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31:8; 삿 9:33; 대상14:13).

성 경: [삼상23:28]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거듭되는 다윗의 피신]

&#11093;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 당시 사울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맺어져야 했을 합당한 관계는 무시했으나, 이방의 왕들처럼 왕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의무인 외적으로부터의 국가 방어에 관해서는 충실했다. 이같은 점에서 사울은 신정(神政)왕국의 왕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열방의 왕과 같은 세속적 군주일 뿐이었다(8:5,20).

&#11093; 셀라하마느곳(*, Sela - Hammahlekoth) - 사울에게 쫓겨 더이상 피할 곳이 없었던 다윗은, 그 절대 위기의 순간에서 구원받은 그 장소를 기념하여 '셀라하마느곳'이라 명명했다. 어원상 그 이름의 뜻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즉 (1) '미끄러운 바위'를 가리킨다는 견해(Gesenius, De Wette, Keil), (2) '분리의 바위'를 가리킨다는 견해(Clericus, Smith, Fay)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셀라'(*)가 '바위', '절벽'등을 가리키는 확실한 단어인데 반해 '하마느곳'(*)의 기본형 '할라크'(*)는 (1) '미끄러움', '순탄함' (2)'분리', '구획'등 두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6-28절의 문맥으로 미루어볼 때, 이 말은 '분리의 바위'(The Rock of Division)란 뜻으로 봄이 타당할 것 같다. 즉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분리시켜 다윗의 도피를 성공하게 해준 바위란 뜻이다(Koeheler, Baumgarten). 이런 의미에서 RSV, Living Bible 등의 영역본은 '도피의 바위'(the Rock of Escape)라고 번역했다.

성 경: [삼상23:29]

주제1: [계속되는 다윗의 방랑]

주제2: [거듭되는 다윗의 피신]

본절은 엄밀히 말한다면 다음 장으로 분류됨이 타당할 것이다.

&#11093;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 여기의 '거기서'는 다윗이 사울에 의해 쫓겨 도망간 최종 지점으로서 마온 황무지의 바위 산을 가리킬 것이다. 비록 사울의 추격은 중지됐지만, 다윗은 십 사람들이 자신을 계속 탐지하고 밀고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났다. 즉 다윗과 그의 일행은 마온 협곡을 완전히 건너 올라갔던 것이다.

&#11093;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 '엔게디'(Engedi)는 '염소의 샘'이란 뜻인데, 이곳은 다윗이 앞서 은신해 있었던 '마온 황무지'의 동북방 약 17km정도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엔게디 요새'(the strongholds of Engedi)는 한 지점만이 아닌 약 20여km의 거리에 걸쳐 있는 산맥 전체를 가리킨다(Aharoni). 그리고 여기의 '요새'(*, 메차도트)가 복수라는 점에서 볼 때, 당시 다윗은 그 지역의 어느한 곳에서만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면서 은신했던 듯하다. 특히 이같은 요새 지대는 동쪽으로는 사해로 내려가는 석회석 협곡 및 벼랑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협곡과 벼랑은, 흙은 석회질이지만 바위는 백악(白堊)의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많은 자연적인 굴들이 있어, 현재에도 도망자들의 도피처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Robinson). 또한 이 협곡의 벼랑으로 내려가다 보면 이 지역의 명칭을 낳게 한 수온 약 30도의 '샘'이 있다고 한다(Conder). 그리고 이 엔게디는 유다의 여러 지역중 국방상 가장 취약한 곳이었기 때문에, 암몬.모압.에돔족들에 의하여 유다를 침범키위한 통로로 이용되었었다(대하 20:1 이하). 한편 엔게디 요새지는 사해 수면에서 약670m이며, 엔게디의 샘은 약 200m에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 지명에서 암시되어 있듯이 지금도 들염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Thompson).

성 경: [삼상24:1]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을 선대한 다윗]

&#11093; 사울이...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돌아오자마자 사울에게는 다윗에 관한 정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본서 저자는 이때의 밀고자를 구체적으로 언급치 않지만, (1)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는 데 필요한 병력 규모를 결정함에 있어 주저치 않았으며 (2) 사울이 다윗의 은신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2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밀고자는 아마도 그곳 지리에 밝은 '십'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3:19; 26:1).

&#11093; 엔게디(Engedi) - '염소의 샘'(Spring of the goat)이란 뜻으로, 사해(死海)의 서부 중앙에 위치해 있는 요새지요, 석회석 고원 지대이며, 또 온천수가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후일 솔로몬은 사랑하는 자를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에 비유하기도 했다(아 1:14). 한편 오늘날의 이곳 지명은 '아인 이디'(Ain-jidy)인데, 현재도 숨을 수 있는 많은 동굴들이 도처에 있다고 한다. 23:29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4:2]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을 선대한 다윗]

&#11093;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 여기의 '택한 사람'(*, 이쉬 바후르)은 문자적으로는 '남자 청년'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들은 특별히 이스라엘 전국에서 선발된 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최고 정예병들이라고 할 수 있다(9:2;13:2; 신 32:25; 사 9:17; 겔 30:17).

&#11093; 삼천을 거느리고 - '삼천'은 사울이 일찍이 수많은 블레셋 족속들을 무찌를 때 동원했던 수효와 동일한 병력 규모이다(13:2). 사울은 이 규모의 병력으로 다윗과 그의 추종자 육백 명(23:13)을 일거에 제거시키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사울이 다윗의 군대에 비해 5배나 많은 정예 병력을 동원하여 엔게디 황무지까지 다윗을 추적한 것은 다윗의 무리를 섬멸하려고 단단히 각오했던 사울의 의지(意志)를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보호 아래 있었던 다윗에게는 그와 같이 많고 강한 사울의 군대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시 3:6).

&#11093; 들염소 바위 - 이곳은 사해(死海)로 내려가는 벼랑의 한 지점으로, 그 가파름 때문에 들염소나 산양만이 생존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으므로, 이러한 명칭이 부여된 것 같다(Robinson). 뿐만 아니라 당시 이 지역에는 충분한 풀과, 샘에서 넘쳐 흐르는 신선한 물로 인하여 들염소가 많이 야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Danin). 오늘날에도 여행자들은 이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많은 산양과 산염소를 발견한다고 한다(Thompson). 또한 이곳에는 은신하기 좋은 동굴이 많다고 한다(Fay).

성 경: [삼상24:3]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을 선대한 다윗]

&#11093; 길가 양의 우리 - 이것은 그 지역의 좋은 자연 조건을 이용한 양(羊)의 사육처를 가리킨다. 오늘날에도 많이 존재하는 이 '양의 우리'는 대부분 동굴 앞에 돌로 나즈막히 둥글게 쌓아서 만들어졌으며, 그 지붕은 야생 짐승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나무로 되어 있다고 한다(Thompson).

&#11093; 굴이 있는지라 - 그 당시 '굴'은 일반적으로 양을 돌보는 동안 목자들의 주거 장소로 이용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굴'은 날씨가 추울 때는 동물들의 거처로도 이용되었다.

&#11093;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 여기서 '가리우다'(*, 사카크)는'덮다', '둘러싸다'란 뜻이다. 그런데 '발을 가리운다'는 말은 '용변을 보다'란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Keil, Thenius). 히브리인들이 대변 보는 것을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대변을 보려고 쪼그리고 앉을 때 옷자락에 의해 자신의 발이 덮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혹자들(Michaelis, Ewald, the Peshitta)의 주장처럼, '잠을 자다'란 뜻으로 볼 수 없다. 한편 사울이 바로 이같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간 그 굴 안쪽에는 다윗의 일행들이 숨어 있었다.

&#11093; 다윗과...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 엔게디 요새(23:29) 지역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었다. 다윗과 그의 일행은 그 중 은신하기에 좋고 큰 어느 동굴 속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그 굴 속으로 찾아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가 들어간 바로 그 굴에 숨어있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발견치 못했다. 그 까닭은 (1) 동굴의 내부는 지척을 분간 못할 만큼 매우 캄캄했으며, (2) 다윗과 그 일행은 캄캄한 그 굴의 깊숙한 곳에 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동굴 입구는 볕이 드는 관계로 식별 가능하지만, 동굴 내부는 볕이 차단되기때문에 캄캄했다. 따라서 동굴 내부의 다윗 일행은 사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전혀 동굴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4:4]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을 선대한 다윗]

&#11093; 여호와께서...이르시기를 - 사울에 대한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예언하는 본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은 갓과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다윗에게 주어졌던 말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때 다윗의 추종자들은 다윗에게 주어졌던 그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사울이 호위병도 없이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일행이 숨어있던 그 동굴로 들어온 것은, 사울의 인생을 거기서 비극적으로 끝나버리도록 조성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것으로 인식하고 다윗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사실 그때 다윗이 사울만 제거해 버리면, 당시의 정황상(18:7) 민심(民心)은 다윗에게로 급속도로 기울어질 것이었고, 따라서 다윗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왕권(王權)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다윗에게는 남다른 신앙과 인품 및 우정이 있었다.

&#11093; 다윗이...사울의 겉옷자락을...베니라 - 다윗은 동굴에 들어온 지 오래여서 동굴의 어두움에 이미 적응이 되었으나, 사울은 그렇지 못하여 자신에게 가까이 근접해 온 다윗의 위와 같은 행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이 행동을 도왔을 것이 틀림없다(26:12). 한편 다윗이 이때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을 벤 까닭은 다음과 같다. 즉 (1) 원수에 대한 복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만 하실 일임을 확신했으며(12절), (2)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를 남김으로써, 자신이 사울을 해하려고 한다는 사울의 의심과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11절). 그러나 혹자는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벤 이 행동을 (1) 사울로부터 왕권을 빼앗으려는 강력한 욕심의 표현(Klein, Payne;15:27, 28; 왕상 11:29-31), (2) 또는 찢어진 옷자락으로 인하여 사울이 조롱의 대상이 되도록 하려는 의도(Payne)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들은 본 문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바 다윗의 신앙과 성품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편, 여기서 '겉옷'(*, 메일)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도포식 통옷으로서(2:19), 사울은 아마 용변을 보기 위하여 이 겉옷을 벗어 옆에 두었을 것이다. 혹 입고 있었더라도 그 옷은 땅에 길게 축 늘어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의 그 겉옷자락을 베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Fay). 더군다나 사울은 그때 긴장을 푼, 전혀 무방비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4:5]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을 선대한 다윗]

&#11093; 후에...다윗의 마음이 찔려 - 다윗은 사울을 죽이자는 부하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단지 사울의 겉옷자락만 살짝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 자체가 혹시라도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는 자의 인격을 조롱한 행위로 비쳐지지는 않았는지 괴로워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튼 그 일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결례(缺禮)인 것만은 틀림없기 때문에, 다윗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도피시절 당신의 다윗의 민감한 신앙 양심을 느끼게 해준다.

성 경: [삼상24:6]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을 선대한 다윗]

본절에는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아니한 결정적 이유가 시사되고 있다.

&#11093;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 - 다윗의 이 말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하여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서 임명된 자, 즉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사울을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엄연히 여호와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10:1), 선민 통치의 대권을 위임받은 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사울을 해치지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을 결코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충성을 다해섬겨야 할 주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처럼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않은 것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신앙적 열심 곧 여호와 경외 사상에 금거한다는 점에서(C.J. Goslinga),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일과 관련하여 다윗을 정치 술수에 능한 인물 혹은 관대한 무사도(武士道) 정신을 가진 인물(Hertzberg)이라는 등 인간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4:7]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을 선대한 다윗]

&#11093; 다윗이...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 여기서 '금하다'(*, 솨사)란 말은 '째다', '찢다', '끊다', '자르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강조형으로 사용되어, 엄히 책망하면서(Davidson) 상대방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차단시키는 행위를가 리킨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과 부하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근거하여 행동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같은 자의 앞날을 보장하신다.

성 경: [삼상24:8]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자신의 뜻을 펴보이는 다윗]

&#11093; 다윗...외쳐 가로되 - 사울을 향한 다윗의 이 외침은 실로 진리와 신앙에 입각한 절규로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양심 선언이다(F.R. Fay).

&#11093; 내 주 왕이여 - 사울을 향한 다윗의 이 호칭은 깊은 존경과 전적 복종의 뜻이 담겨있는 호칭으로서, 다윗은 자신이 여전히 사울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강조하고 있다.

&#11093; 땅에 엎드려 절하고 - 당시 다윗은 그 용맹과 지략등으로 인해 주변 이방 국가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온유했고, 충실한 종처럼 겸손했다. 실로 이러한 겸손과 예의는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하는 외적 증거가 된다. 진정 겸손한 자세로 진실을 말할 때 성도는 가장 성도답다.

성 경: [삼상24:9]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자신의 뜻을 펴보이는 다윗]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 - 본서의 내용을 볼 때,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증오심을 갖게 된 것은 다윗의 명망에 대해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 자신의 잘못된 성격 때문이었지, 특별히 어떤 사람의 충돌질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마치 사울이 다른 사람의 이간질에 의하여 자신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된 양 말하고 있는 것은, (1) 실제로 사울의 증오심을 부추긴 구시라는 베냐민 사람이 없지 않아 있었으며(시 7편), (2) 완곡한 표현으로 사울의 완악한 마음을 유화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4:10,11]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자신의 뜻을 펴보이는 다윗]

여기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주어졌었으며, 또한 사울을 죽이라는 적극적인 권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사울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강력히 주장한다. 즉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벨 때(4절) 이미 생각했던 대로, 사울을 향하여 (1) 자신의 결백한 행위와 (2) 전혀 사울왕을 해칠 의사가 없는 자신의 마음을 간절히 호소했다. 이러한 다윗의 호소는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 7편에도 잘 나타나 있다(F.R. Fay).

&#11093; 나의 아버지여 - 다윗은 비단 사울이 이스라엘의 국부(國父)이자 자기의 장인(丈人)이요, 나이상 연장자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부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기름 부음받은 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 및 사랑의 표시로서 사울을 이처럼 부른 것이다(Keil,Fay).

&#11093; 보소서...옷자락을 보소서 - 다윗은 이때 자신의 말을 입증하는 증거물로서, 사울의 베어진 겉옷자락(4절)을 제시한다. 실로 다윗의 손에 들려있는 사울의 겉옷자락은 사울의 의심이나 주위의 모든 중상 모략을 일소(一掃)하는 증거물로서, 곧 다윗이 사울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생생한 시각적 증거물이다(F.R.Fay).

성 경: [삼상24:12]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자신의 뜻을 펴보이는 다윗]

&#11093; 여호와께서는...보복하시려니와 내손으로는...않겠나이다 - '원수 갚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롬 12:21; 히 10:30; 신 32:35)는 사상은 다윗의 철학이요, 신앙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을 '보수하시는 하나님'(시 94:1)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에게 극악한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그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위임한다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심히 원하시는 일이다.

&#11093; 판단하사(*, 솨파트) - 공의적(公義的) 심판을 전제로 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적 재판 행위를 가리킨다(시 7:8; 96:13; 겔 18:30).

성 경: [삼상24:13]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자신의 뜻을 펴보이는 다윗]

&#11093; 옛 속담 - 여기서 '속담'(*, 마솰)은 '잠언', '격언'이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의 '옛 속담'은 모세 오경 및 히브리인의 세계관에 근거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당시까지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던 금언(金言)이었을 것이다.

&#11093;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 이 속담은 악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잠 13:16; 마 7:16-20; 12:35; 눅 6:43; 약 3:11, 12). 바꾸어 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자인지는 그의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는 뜻인데, 따라서 이 속담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수 있다'(마 7: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말이다. 아무튼 다윗은 이 속담을 언급함으로써, 만일 자신에게 왕이 되고픈 야욕이나 사울을 해할 악의가 있었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 때 사울을 죽였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다만 겉옷자락만 벤 것은 자신에게는 그러한 야욕이나 악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Stoebe).

&#11093; 내 손이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 앞에서의 속담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악인(惡人)이 아님을 증명한 다윗은, 이제 반대로 자신은 선인(善人)이기 때문에 그 선한 성품에 따라 자신은 절대로 사울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 경: [삼상24:14]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자신의 뜻을 펴보이는 다윗]

&#11093; 이스라엘 왕이...개나 벼룩을 - 여기서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영광스럽고 위엄있는 호칭이다. 반면 '죽은 개나 벼룩'은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 아울러 전혀 해(害)를 끼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Fay,Smith, Keil).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라는 칭호는 사울에게, 그리고 '죽은 개나 벼룩'은 자신에게 대조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사울에 대한 자신의 현저한 상대적 열등성을 강조한다.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사울로 하여금 다윗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적의(適意)나 질투, 그리고 경계심 따위 등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때문이었다(삼하 9:8; 16:9; 왕하 8:13).

성 경: [삼상24:15]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자신의 뜻을 펴보이는 다윗]

&#11093; 재판장이 되어...판결하사 - 여기서 '재판장'에 해당하는 '다얀'(*)의 기본 동사 '둔'(*)은 '재판하다', '심판하다'란 의미로서(욥 19:29), 뒤에 나오는 '판결하사'란 말과 거의 비슷한 뜻이다. 그런데 이 '판결하사'는 12절의 '판단하사'와 동일한 단어이다. 결국 이 모든 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 재판장으로 인정하고 전적 의뢰하는 다윗의 신앙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11093; 살펴 신원하시고 - '살펴'(*, 라아)는 세심히 관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23:22). 그리고 '신원하시고'(*, 리브)는 원래 '잔소리하다', '변론하다'란 뜻이나, 이 문맥에서는 특정한 일의 깊은 내막까지를 꼼꼼이 헤아리는 행위를 가리킨다(사 1:17; 호 2:2).

&#11093; 건지시기를(*, 솨파트) - 이말은 앞에 나오는 '판결하사'와 동일한 단어인데, 특별히 이 문맥에서는 '공정히 판결하사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여 매임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란 의미이다(시 35:1; 43:1; 119:154).

성 경: [삼상24:16]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의 일시적 회개]

&#11093; 내 아들 다윗아...소리를 높여 울며 - 진실에 근거한 다윗의 간절한 호소(8-15절)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즉 다윗은 '내 주 왕'(8절).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10절), '나의 아버지'(11절) 등의 표현으로써, 최대의 충성과 존경과 사랑을 나타내면서 사울의 양심에 호소한 결과, 사울의 무디고 강퍅한 마음의 심금까지도 울릴 수 있었다. 따라서 결국 사울은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르면서 대성 통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같은 반응은 그가 진실하게 회개했음을 의미치 않는다(26:1, 2). 단지 사울은 감정에 강하게 좌우되는 자신의 균형 잡히지 못한 성격에 따라 다윗의 설득력 있는 호소에 감동되고 말았을 뿐이다. 한편 '내 아들 다윗아'는, 11절에서 다윗이 사울을 '나의 아버지여'라고 한 것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라 볼수 있다. 아무튼 사울의 이같은 표현은, 사울이 이전에 다윗을 '죽어야 할 자'(원문대로 한다면 '죽음의 아들')라고 한 것에 비하면 실로 놀라운 호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0:31).

성 경: [삼상24:17]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의 일시적 회개]

&#11093; 학대하되 - 문자적인 의미는 '악으로 보답하되'(have rewarded - evil, KJV)란 뜻이다.

&#11093;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 하나님께 기대되던 (15절) 판결이 사울에 의하여 먼저 이같이 행해지고 있다. 실로 증오심과 질투로 불타오르던 사울의 마음이 다윗의 진실하고도 겸손한 호소와 변호로 말미암아 녹아 내렸을 때, 사울은 사태를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마음은 일시적인 감동에 근거한 사과(謝過)에 불과할 뿐 진정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회개(悔改)는 아니었다. 이것은 얼마 후 사울이 또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추적한 사실로 보아 명백하다(26장). 이처럼 한 순간의 감정이나 감동으로 행해지는 사과는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없고, 따라서 진실성이 결여된 것일 수 밖에 없다. 한편 '의롭도다'(*, 차디크)는 법정적 용어로서, 법적 판단에 따른 무죄(無罪)의 선언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이다(창 7:1; 신4:8; 잠 18:5; 렘 12:1).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 곧 윤리.도덕적으로 선한 자에 대해서 주로 많이 사용된다(창 18:23; 삼하 4:11; 시 1:1; 겔18:26).

성 경: [삼상24:18]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의 일시적 회개]

본절은 다윗이 사울을 선대(善待)한 내용으로서(17절), 곧 사울이 다윗을 자신보다 더 의롭다고 말한 근거이다.

&#11093;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 여기서 '붙이셨으나'(*, 시그라니)는 '닫다', '가두다'란 의미가 있는 '사가르'(*)의 강조형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에 의하여 당신의 원수를 택한 백성(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뜻하는 동사 '나탄'(*)과는 전혀 다르다(23:4). 따라서 우리가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가졌던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나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4절), 사울 자신은 '사가르'라는 단어를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과 다윗의 갈등과 다툼을 성전(聖戰)의 차원에서 보는 반면, 사울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지 않고 개인적 차원의 정적(政敵) 관계로 국한 시키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그러나 아무튼 사울의 이러한 깨달음과 고백은 이전에 사울이 호언한 바(23:7),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신의 손에 붙이셨다고 하던 때와는 뚜렷이 대조된다(F.R. Fay).

성 경: [삼상24:19]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의 일시적 회개]

&#11093; 원수를...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 이말은 사울 자신에 대한 다윗의 '선대'(17절)를 높이 칭찬하는 반문(反問)이다. 즉 통례상, 사람이 평소 극히 미워하던 원수를 해할 절호의 순간을 만나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하는 것이 상례인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아니했으니 그것이 곧 자신을 선대(善待)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란 뜻이다.

성 경: [삼상24:20]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의 일시적 회개]

&#11093; 나는...알고...아노니 - 본절에서 언급된 사울의 이같은 확신은 이미 요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정확하게 알려졌었다<23:17>.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신이 자신에게서 떠났던 사실(16:14), (2) 하나님께서 전쟁터에서 다윗을 형통케 하신다는 사실(18:5), (3) 다윗이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고 있다는 사실(18:6, 7), (4) 심지어 다윗이 자신의 가족들로부터도 호감을 사고 있다는 사실(18:1, 20) 등으로 인하여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에 오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11093; 아노니(*, 야다) - 이는 일말의 의심없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사울의 뇌를 온통 뒤덮고 있던 시기와 증오, 의심과 적개심의 먹구름이 다윗의 진실한 호소로 인해 다 거두어진 이 순간 만큼은 사울도 모든 사실을 바로 인식할 수 있었고, 또 그 마음의 진실을 거짓없이 다 말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깨달음과 진실이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했고, 또 오래 지속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성 경: [삼상24:21]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의 일시적 회개]

&#11093;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 이것은 왕조(王朝)가 바뀔 경우 후환(後患)을 없애기 위해 구(舊)왕조의 후손들을 멸절시켰던 고대의 풍습과 연관시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20:14, 15 주석 참조).

&#11093;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 - 이것은 앞에 나오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에 연이어진 동의적(同意的) 대구법(對句法)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은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고대 중근동에서는 (1) '이름'을 곧 그 사람의 '인격'으로 간주했으며, (2) 또한 후손들은 조상에게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됐다는 점(히 7:5)등에서 볼 때, 사울의 '후손'이 멸절되는 것은 곧 사울이 멸절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성 경: [삼상24:22]

주제1: [사울을 선대(善待)한 다윗]

주제2: [사울의 일시적 회개]

&#11093; 다윗...요새로 올라가니라 -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1) 자신에 대한 사울의 일시적 호의(好意)를 근본적 변화로 볼 수 없었으며, (2) 다윗을 경쟁 관계로 생각하는 사울이 내심 그의 입경(入京)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요새'(*, 함메추다)는 '그 요새'(the stronghold)란 뜻으로서, 말할 나위없이 유다 광야에 속한 '엔게디 황무지'(엔게디 요새, 23:29; 24:1)를 가리킨다.

성 경: [삼상25:1]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 가일]

주제2: [사무엘의 죽음]

&#11093; 사무엘이 죽으매 - 사울의 추격과 다윗의 도피가 계속되는 상황 가운데서, `라마나욧 사건'(19:18-24) 이후 중단되었던 사무엘의 기사가 나타나는데, 곧 그의 사망 소식이다. 한편 사무엘의 사망 연도는 그의 향년(享年) 83세 때인 대략 B.C. 1017년 경으로 추정된다(Leon Wood). 우리가 이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때는 `미스바 전투'(7:5-11, B.C. 1055년)가 있은지 5년 후 즉 사무엘이 약50세 때인 B.C. 1050년 경이며, 따라서 사무엘의 출생 연도는 대략 B.C. 1100년 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최후의 사사요 최초의 선지자인 사무엘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소명된 목적, 곧 신정(神政) 왕국의 건설을 준비하는 직무의 수행을 완료하고(16:13)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에 따라 세상을 하직하고 열조에게로 돌아간 것이다(창 25:8; 35:29; 49:33; 민 20:26).

&#11093; 온 이스라엘 무리가...애곡하며 - 사무엘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슬픔은 마치 아비의 죽음에 대한 자식의 슬픔과도 같았다. 즉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같이 애곡과 애통의 날을 보냈던 것이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슬픔은 (1) 선지자로서 영적.정치적으로 완전히 쇠퇴했던 이스라엘을 회복시켰던 사무엘의 업적(7:3-16), (2)사사로서 청렴 결백했던 사무엘의 인품(12:1-5) 때문이었을 것이다(1:1; 7:16). 그리고 `집'은 문자적 의미의 `가옥' 그 자체라기 보다는 집(가옥)에 딸린 공지(空地)나 정원 또는 뜰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Keil & Fay, Smith). 따라서 혹자(Klein)의 생각처럼 이를 `고향'이란 의미로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 유대 전승은 사무엘의 장지(葬地)가 미스바의 고지(高地)라고 주장하나, 지리적 여건상 타당성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무엘의 장지를 그가 살던 집에 딸린 정원의 공지나 뜰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장사법(葬事法)은 당시 고대 중근동 지역에 흔히 있었던 관례로서, 오늘날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11093; 다윗이...바란광야로 내려가니라 - 여기서 `바란 광야'는 시나이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서(창 21:21; 민 10;12; 12:16; 13:3, 26), 아라비아 반도의 최남단부에 있는 오늘날의 `엘-티'(El-Tih)광야이다. 그런데 최근의 학자들(Klein, Hertzberg)은(1) `바란 광야'는 팔레스틴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윗의 행동 반경으로 보기 힘들며 (2) 또한 바로 뒤의 2절 이하에서 `마온 광야'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란 광야'를 `마온 광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70인역(LXX)의 독구(讀句)를 따른 주장이다. 그러나 Keil, Smith, Lange 등은 고전적 견해를 취하여 그냥 `바란 광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바란 광야'는 팔레스틴의 최남 도시`브엘세바'와 뚜렷한 경계선 없이 인접한 광야로서, 역시 유다 광야와 경계선 없이 이어지는 광야이므로, 당시의 여건상 다윗이 이곳까지 도피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Pulpit Commentary). 사실, 당시 사울 왕을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사무엘이 죽자, 그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바 있는(16:12, 13) 다윗은 사울에게서 더욱 멀리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과 그 일행이 `엔게디 황무지'를 떠나서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가, 자신들이 이전에 머물렀던(23:24, 25) `마온광야'로 다시 올라 온 것은 식량 문제의 해결을 위함이었음이 분명하다(8, 11절).

성 경: [삼상25:2]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윗]

&#11093; 마온 - `거처', `장소', `뜰'이란 뜻의 `마온'(Maon)은 `십'과 `갈멜' 부근에 있는 유다의 구릉지 성읍이다(수 15:55). 그리고 현재의 이름은 `마인'(Main)이다.

&#11093; 그 업이 갈멜에 있고 - 여기서 `업'(*, 마아세)은 `일하다', `만들다'의의미가 있는 동사 `아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여기 이 단어는 `일하는 곳', 혹은 `돈을 벌게하는 출처'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창 46:33; 전 2:4). 한편 `갈멜'(Camel)은 `마온'(Maon)의 북쪽 약 1.6km 지점으로, 이전에 사울이 아말렉 전투 후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다(15:12). 따라서 이 마을에서는 사울이 영웅시되며, 사울의 영향력 역시 컸을 것임이 분명하다(Klein).

&#11093;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 - 소유주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이같이 재산 명세를 먼저 언급함으로써, 본서의 저자는 `나발'(3절)이라는 인물보다 그의 부유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한편 여기의 이 가축들은 비록 욥이 소유한 재산, 곧 `양 칠천, 약대 삼천, 황소 오백, 나귀 오백'(욥 1:3)보다는 적은 숫자이나, 당시 팔레스틴의 여러 형편을 기준으로 한다면 엄청난 숫자였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나발'(Nabal)은 이 많은 가축들을 마온 광야에 고지대에 방목(放牧)하고 있었을 것이다.

&#11093;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 4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5:3]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윗]

&#1109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 여기서 `나발'(*)은 `시들다', `바보처럼 행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나벧'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리석은', `우매한', `괴악한'등으로 번역되었다(삼하 13:12; 시 14;1; 39:8). 그런데이 이름은 본명(本名)이 아니라, 아마도 그의 특성으로부터 붙여진 별명(別名)일 가능성이 높다(Keil).

&#11093;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 `아비가일'(*)은 `기쁘게 하는 자'또는 `기쁨을 주는 자'란 뜻이다. 이 여인은 후에 자신의 남편 `나발'이 죽자, 다윗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둘째 아들 길르압을 낳았다(삼하 3:3; 대상 3:1).

&#11093;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 `총명하고'(*, 토바트 세켈)는 `지혜가 뛰어난', `명철한'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뜻을잘 분별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다(대상 22:12; 대하 30:22; 느 8:8; 시 111:10). 그리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예파트 토에르)는 남녀를 막론하고 내면적.외면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16:18; 아 4:10; 7:1,6)

&#11093;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 `완고하고'(*, 카쉐)는 `거칠은', `굳은', `난폭한'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으며,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목이 곧은' 사람에게 적용되었다(출 33:3, 5; 34:9;신 9:6; 삿 2:19). 그리고 `악하며'(*, 라 마알랄림)는 성질(性質)을 가리키는 `완고하고'와는 달리, 능동적으로 악한 행위를 일삼는 것을 가리킨다.

&#11093;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 여기서 `갈멜 족속'(*, 켈리보)은 히브리 본문의 독법(讀法, 케티브)을 따라 해석하면, `그는(그 마음의 소욕을 따라)자기 마음대로하는 자였다'란 뜻이다(Maurer). 그리고 70인역(LXX, the Septuagint), 아랍역(the Arabic), 수리아역(the Syriac)및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말을 `개'란 뜻의 `켈레브'(*)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곧 `개 같이 야비한 자', `개처럼 성급하고 심술궂은 자'란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본 문맥상의 흐름으로 본다면, 이 말은 난외 독법(케리)을 따라 `갈렙 족속'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켈리비'(*)로 봄이 타당한 듯하다(Klein, Keil, Lange, Simth, Targum, Vulgate). 왜냐하면 여기서 `그는'(*, 웨후 -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이란 뜻)이란 말은 `나발'이란 인물의 성격 묘사를 계속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고, 그의 혈통, 조상 등 새로운 사실의 소개를 나타내고자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F. R. Fay). 따라서 여기의 `갈멜 족속'은 마땅히 `갈렙 족속'으로 번역되어야 함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나발'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찰을 신실하게 수행했던(민 13;30) `갈렙의 후손'이었다. 한편 갈렙은 그 신실성으로 말미암아 모세로부터 헤브론을 중심한 유다 땅의 일부를 약속 받았었고, 그는 그 자신이 약속받은 그 땅을 정복했었다(민 13, 14장; 신 1:22-36; 수 14:6-15;15:13, 14). 한편 `마온'(Maon)이라는 지명은 갈렙의 자손인 삼매의 아들 `마온'에게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볼 때(대상 2:45), 바로 이 `마온'에 살던 `나발'은 `마온'이라는 인물의 후예인 듯하다.

성 경: [삼상25:4]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윗]

&#11093; 나발이...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 본절은 왜 다윗이 자신의 수하 소년을 나발에게 보내게 되었는지를 말해 준다. 즉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양털을 깎을 때 음식을 장만하는 등, 잔치를 벌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창 38:13,Keil). 즉 유목민(遊牧民)들에게 있어 양털을 깎는 날은 농민들의 추수의 날에 해당된다. 아무튼 이같은 관례에 따라 다윗은 자신과 부하들의 먹을 식량을 얻기 위하여 나발의 집으로 수하 소년들을 보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5:5]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윗]

&#11093; 열 소년을 보내며 - 이것은 다윗이 자신과 육백명의 부하들이 먹을 많은 음식을 나발로부터 기대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열명'이라는 숫자는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예의와 존경심을 상징한다(Lange, Klein).

성 경: [삼상25:6]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윗]

&#11093;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 이 구절 중 `사는 자'(*, 레하이)에 대한 해석은 난제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하여 상호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즉 (1) 맛소라 사본의 `레하이'를 맞는 것으로 보고, `생명' 혹은 `살아있는' 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Luther, Driver, Keil, Lange), (2) `레하이'를 `아하이'(*)의 오기(誤記)로 보고 `나의 형제여'로 해석하는 견해(Wellhausen, Vulgate, Klein, Hertzbe-rg)등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1)의 견해를 택하는 학자들은 `레하이'에 대해 해석하기를, 사람에게, 현재 건강한 모습으로 보여지듯이 그 다음에 볼 때도 그러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인사의 형태라고 하였다. 그리고 (2)의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나발도 유다 지파이고 다윗도 유다 지파이므로, 다윗은 같은 지파의 나발에 대하여 `나의 형제여'라고 인사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정확한 근거가 없는 한 히브리 본문에 충실할 필요가 있으므로, (1)의 견해를 따라 `레하이'를 독특한 인사 형태의 `행운', `번영', `장수'등의 의미로 보고, 곧 `그리고 이같이 이르기를, 행운을!'이란 뜻으로 봄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여기 `부하게'는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원문에 없는 말을 번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11093; 너...네 집...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 `평강하라'(*, 솰롬)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인사를 할 경우 인사를 받는 상대에게 그 인사말과 같은 `평강'이 실제로 임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여기 `평강하라'는 말은 단순한 염원 그 이상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인사, 곧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축에게까지 `평강'을 기원하는 예절을 갖춘다. 이것은 나발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으려 했던 다윗의 간절함과 결코 무관치 아니할 것이다(대상 12:18).

&#11093; 평강하라 -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법으로서, 본절에서 특별히 3번이나 강조된 것은 그 평화가 나발의 집안에 완전히 정착되기를 비는 다윗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대상 12;18). 다윗은 비록 현상황이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이었지만, 그의 생명을 지탱시켜 주시며 원수의 잔학한 손아귀에서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러한 평강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었다(눅 10;5). 이처럼 신앙인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환경을 초월하여 이웃에게 `평강'과 `복'과 `기쁨'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창 12:1-3; 벧전 2:9).

성 경: [삼상25:7]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윗]

&#11093;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 여기의 `양털 깎는 자들'은 양털 깎는 일을 위하여 나발에 의하여 특별히 고용된 자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자들이 고용됐다는 사실은 곧 양털 깎는 특별한 축제와 잔치가 배설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4절).

&#11093;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 이것은 그때 다윗의 일행과 나발의 양을 치던 목자들이 모두 마온 황무지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2절).

&#11093;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 여기서 `상치'(*, 헤클라메눔)는 `부끄럽게 하다', `수치를 주다', `괴롭게 하다'란 의미를 갖는 `칼람'(*)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여기의 `상치 아니하였고'는 무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괴롭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삿 18:7). 나아가 이 말 속에는 나발의 양치기들이 평안히 그들의 가축을 먹일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다는 의미도 암시되어 있다(Smith,Fay).

&#11093;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 나발의 양들은 마온 광야에서 방목되었지만, 그 본거지는 `갈멜'이었다(2절).

&#11093;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 이것은 다윗이, 마온 광야 남쪽에 사는 베드윈 족속등과 같은 아랍 족속들의 약탈과 노략 행위로부터 나발의 목자와 양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을 가리킨다(Keil). 다윗은 비록 사울에 의하여 쫓기는 몸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적의 손에서 보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결코 망각하고 있지 않았다(23:1-5).

성 경: [삼상25:8]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윗]

&#11093; 좋은 날 - 양털을 깎는 특별한 축제의 날을 가리킨다. 이때는 손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눠 주기도 하였었다(Lange).

&#11093;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 - 이것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상대방에게는 존경과 헌신을 표시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즉 고대 중근동의 풍습상 연장자 또는 상급자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장자 또는 상급자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자신을 `아들'로 낮추어 부르는 일은 보편적이었다. 특히 이 말은 윗사람에게 아버지가 베푸는 것과 같은 자애로운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한편 이와같은 표현법은 91) 아람 왕 벤하닷에 의하여 엘리사 선지자에게(왕하 8:9), (2) 아하스 왕에 의하여 앗수르 왕 디글랏 발레셀에게(왕하 16:7) 사용되었다.

&#11093; 주기를 원하노라 - 다윗이 나발의 양털 깎는 날을 택하여 이같은 요청을 한 까닭은, 이 날은 특별히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나발이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지 않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 다윗은 중근동의 풍습에 따라 자신이 나발의 양들을 지켜주었던 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고, 양털 깎는 날을 기다렸다가 최대의 예의를 갖춰 겸손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5:9]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모욕과 다윗의 분노]

&#11093; 고하기를 마치매 - 여기의 `고하기를'은 그냥 `고하였다'로 번역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 예다베루)는 위와 같이 번역할 수 있는 부정사나 분사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마치매'(*, 와야누후)는 `쉬다', `기다리다'란 뜻의 `누아흐'(*)에서 파생된 말인데, 직역하면 `그리고 쉬었다'라는 뜻이다(창 8:4; 사 47:2). 아마 다윗의 소년들이 다윗의 전갈을 나발에게 전한 뒤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앉아 쉬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 같다(Smith).

성 경: [삼상25:10]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모욕과 다윗의 분노]

&#11093;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 `이새의 알르'이란 말이 다윗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반영해 주는 술어라는 점에서(20:27, 30), 나발의 이같은 반문은 다윗의 간절한 요청에 대한 거절 및 경멸의 의사를 분명히 해준다고 할 수 있다.

&#11093;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 나발의 이 말은 다윗이 사울과 원수의 관계가 된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즉 이같은 비유를 통하여, 나발은 다윗을 주인(사울)을 배반한 불충한 건달로 몰아가고 있다. 나발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나발이 살고 있던 갈멜이 사울의 전적비가 세워지는 등 사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는 마을이라는 사실과 전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나 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차기의 왕으로 보는 이 마당에(23:17; 24:20), 일개 졸부에 불과한 나발이 다윗에 대하여 이같은 오만 불손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대단히 둔감한 어리석고 미련한 자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억지로 떠나는'(*, 하미트파르침)이란 말은 `깨어지다',`부서지다'란 의미를 갖는 `파라츠'(*)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자신을 위하여(어떤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깨뜨리고) 튀쳐나가는'이란 의미로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나발이 다윗을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울을 배반한 자로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삼상25:11]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모욕과 다윗의 분노]

&#11093; 내 떡...물...고기 - 이것들은 잔치때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음식물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술'이 아닌 `물'이 언급된 것은 아마 `갈멜'이 물이 매우 귀한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나발이 `떡...물...고기' 앞에 `내'(my)라는 1인칭 소유격을 붙여 사용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나발의 몰지각성을 잘 보여준다(눅 12;13-21).

&#11093;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 - 이말은 다윗 일행이 사울을 피하여 정처없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 따라서 나발은 다윗 일행을 주인에게 좇겨 떠돌아 다니는 부랑아 내지는 건달로 몰아부친 것이다(Keil, Fay).

성 경: [삼상25:12,13]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모욕과 다윗의 분노]

&#11093;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 다윗의 소년들은 나발의 문전 박대로 말미암아 공수(空手)로 돌아와 다윗에게 모든 일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이에 격분한 다윗은 부하들에게 출전 무장을 갖출 것을 명령했다. 이처럼 다윗이 공격적 결의를 하게 된 것은 (1) 다윗은 나발의 양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며(7절), (2) 그리고 다윗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최고의 예의를 갖추었으나(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발은 최악의 모욕적 언사로 응답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원수를 친히 갚은 것은 율법에서 분명히 금지하고 있는 바였다(신 32:35; 롬 12:19,20).

성 경: [삼상25:14]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본절의 언급은 나발의 하인들도 분명히 다윗에 대해서 호의(好意)를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상전 나발이 다윗에 대해 취한 태도를 못마땅히 여겼음을 시사해 준다(17절).

&#11093; 수욕하였나이다 - 기본형 `이트'(*)는 `매우 화나게 하다', `격동시키다'란 의미인데(Davidson). 그 어원은 매나 독수리 등 맹금류(猛禽類)를 쫓아내는 행위에서 연유된다.

성 경: [삼상25:15,16]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여기서 나발의 하인은 나발이 다윗에 대해 취한 태도가 극히 부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윗이 그동안 자신들에게 선(善)을 베풀었던 일을 아비가일에게 세세히 아뢴다.

&#11093; 상종할(*, 하트할라케누) - 이 단어는 `다니다', `왕래하다'란 의미를 갖는 `할라크'(*)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자신들을 위하여 왕래하다'란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결국 이것은 나발의 하인들이 다윗의 보호를 요청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암시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093; 밤낮...담이 되었음이라 - 여기서 `담'(*, 호마)은 `성' 또는 `성벽'이란 의미이다(레 25:29; 삼하 11:20; 왕상 3:1; 왕하 14:13). 그런데 성경 용례상 이 `성'(城)은 `확실한 보호'를 뜻하는 은유적 표현으로는 `산성'(시 9:9; 28:8), `요새'(시18:2; 144:2), `반석'(시 31:3; 62:2)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다윗 일행은 나발의 가축과 양치기들을 사나운 광야의 맹수와 사막의 약탈자인 아랍계 베드윈 족속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었을 것이다(Fay, Keil).

성 경: [삼상25:17]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 여기서 `불량한 사람'(*, 벤 벧리야알)은 문자적으로는 `사악한 자의 아들' 혹은 `무익한 자의 아들'이란 뜻인데, 곧 그 악한 성품과 못된 성질 등으로 인해 `아무런 쓸모없는 인간' 즉 `백해 무익한 인간'이란 뜻이다. 한편 이와 같은 호칭은 지극히 타락했던 엘리의 두 아들들에게도 적용되었었다(2:12).

성 경: [삼상25:18]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아비가일의 급히...취하여 - 아비가일의 기지(機智)가 엿보인다. 특히 여섯 종류의 음식을 준비한 데서 그녀의 세심한 정성과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정성스런 예물은 맹렬한 분노마저도 그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잠 18:16; 21:14).

&#11093; 떡 이백 덩이 -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한 가족에게 필요한 떡의 양(量)을 `떡세 덩이'로 보았다(눅 11:5-8). 따라서 육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던 다윗에게 이같은 양(量)은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다.

&#11093; 볶은 곡식 다섯 세아 - 한 `세아'는 약 13.5리터이다. 따라서 `다섯 세아'는 약 70리터정도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그런데 이처럼 그 양이 너무 적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학자는 `오백 세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Ewald). 또한 같은 맥락에서 70인역은 `다섯 에바'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앞에 언급된 떡의 양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음식물은 다윗의 출격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이 그 노(怒)를 일단 진정시킬 목적으로 급히 준비하여 간단히 요리된 관계로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다라서 본문 그대로를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의 `볶은 곡식'은 야전(野戰)에 나가 있는 군인들에게 적절한 음식으로 인정되었다(17:17).

&#11093; 건포도...무화과 - 이 같은 식품들은 지극히 곤비한 자들의 원기 회복을 위하여 매우 적절한 음식으로 사용되었다(30:11, 12).

성 경: [삼상25:19]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내 앞서 가라...뒤에 가리라 - 이것은 `아비가일'이 음식을 실은 나귀보다 훨씬 뒤쳐져서 따라가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는 `면전(面前)에서'란 의미이기 때문이다(수 4:12). 즉 `아비가일'은 그때 짐을 실은 나귀의 뒤를 바로 좇은 것이다. 이처럼 예물을 앞서 진행시키는 것은 상대방의 호의와 은혜 입기를 소원한다는 뜻이 담긴 관례였다(창 2:13-23).

&#11093;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 - 이것은 아비가일이 음식을 갖고 다윗에게 가는 것을 나발이 알게 될 경우 틀림없이 적극 막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명한 자는 때에 따라 침묵하고, 때에 따라 말한다. 말하기에 적당한 때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큰 지혜라고 할 수 있다(잠 15:23; 약 3:2).

성 경: [삼상25:20]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산 유벽한 곳 - 이는 마치 산에 의하여 덮여진듯 은밀한 곳을 가리킨다

(27:5; 31:20). 한편 카일(Keil)은 `산의 두 정산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이라 했다. 그리고 NIV는 `협곡'(ravine)으로 번역했다.

&#11093; 좇아 내려가더니 - 이 말은 고지에서 저지로 내려가는 행위를 뜻하는 `야라드'(*)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좇아'는 문맥상의 의미 강화를 위한 번역자의 삽입이다.

&#11093; 다윗...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 그 당시 다윗은 나발이 살고 있었던 `갈멜'의 맞은편쪽 `요새'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즉 `마온 황무지'는 여러 개의 고지(高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갈멜'이며, 또 다른 하나가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요새'였을 것이다.

성 경: [삼상25:22]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남자(*, 마쉐틴 베키르) - 문자대로 직역한다면 `벽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자'(that pisseth aginst the wall, KJV)란 의미인데, 이 말은 남자를 경멸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다(왕상 16;11; 21:21; 왕하 9:8). 결국 다윗의 이 말은 나발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다 죽이겠다는 단호하고도 분노에 찬 결의이다.

&#11093;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 맛소라 사본(M.T.)과 칠십인역(LXX)은 `다윗의 원수들에게'로 되어 있다. 바로 이같은 사본상의 차이로 인하여 이 어구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1) 마소라 사본이나 칠십인역의 기록을 옳은 것으로 보고,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들에게 벌을 내리시고'로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Lange, Keil, Smith). 즉 랑게(Lange)와 카일(Keil)은, 당시 다윗이 나발에 대한 공격을 하나님의나라와 그의 의(義)를 위한 싸움으로 생각함으로써, 이같은 형식의 저주를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스미드(Smith)는, 다윗이 `나발'이라는 명칭 대신에 `원수'라는 보다 특수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같은 용어의 사용에 따라 나발에 대한 자신의 저주가 훨씬 더 효험을 잘 나타낼 것이라는 미신적 판단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2) 마소라 사본이나 칠십인역이 다위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저주를 선언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판단에 따라 그같은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원수들'이란 말을 공연히 삽입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Hertzberg, Klein, NIV, 공동번역). 이같은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구약 성경의 용례상 상대에 대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직접적으로 선포하는 경우는 없으며, 그리고 본문과 동일한 저주의 형태가 때때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제시한다. 우리는 위의 두가지 견해 중 첫째, 나발에 대한 자신의 공격 행위를 다윗 자신이 성전(聖戰)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둘째, 다윗은 자신의 한(恨) 풀이를 위해서 하나님을 저주의 도구로 이용하려 할 만큼 미신적 사상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점등으로 미루어 볼 때 (2)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성 경: [삼상25:23]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아비가일...다윗의 앞에 엎드려 - 이러한 태도와 자세는 자신을 낮추는 반면 상대는 높이는 최상의 예우이다. 아비가일이 이처럼 겸손한 태도를 취한 까닭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분노를 완하시키기 위함이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Smith, Fay). 즉 당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은 백성들에 의하여 이미 보편적으로 예측되고 있었다(18:7, 30). 따라서, 특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을 소유했던 `총명한'(3절) 여인 아비가일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성 경: [삼상25:24]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내 주여...여종으로 - 아비가일은 행동 뿐만 아니라, 언사(言辭)에 있었서도 이처럼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11093; 이 죄악을...내게로 돌리시고 - 아비가일의 희생 정신이 돋보이는 말이다. 즉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과 자기 집의 모든 남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을 불사하고 다윗에게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11093;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 여기서 `귀에 말하다'라는 표현은 반드시 필요한 내용을 상대에게 은밀하면서도 진지하게 전달.호소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22:8; 신 31:11; 룻 4:4).

성 경: [삼상25:25]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호소]

본절에서 아비가일은 나발이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그를 상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11093; 불량한 사람(*, 아쉬 하벧리야알) - 문자적으로는 `무익한 남자', `쓸모없는 남자', `무가치한 남자'란 뜻이다. 17절 주석 참조.

&#11093;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 `어리석은', `미련한'이란 의미를 갖는 `나발'(*, Nabal)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나발이라는 인물이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을 했음을 가리킨다. 즉, 나발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바로 보지 못한 채 (1) 오히려 사울을 배반한 불충한 떠돌이 종으로 몰아세웠으며(10절), (2) 다윗에게 주어져야 할 마땅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기 거절한 것(11절)등은 분명히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었다.

&#11093; 그는 미련한 자 -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어리석음이 있다'이다. 따라서 여기의 `미련한'(*, 네발라)은 `어리석은'(나발)의 명사형이다.

&#11093; 여종은...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 이것은 나발의 허물을 아비가일 자신이 담당해야 할 이유이다. 즉 아비가일은 어리석은 나발을 제대로 감독치 못하였기 때문에, 나발이 다윗을 진토케 하는 큰 잘못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만일 아비가일이 자신의 남편 나발을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남편의 행동을 주의깊게 지켜봐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는,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나발이 어리석은 짓을 하였는데, 그 모든 일에 대하여 다윗이 어리석은 나발을 상대로 복수할 일이 못되니 제발 마음을 도리시고 용서해 달라는 뜻이다.

성 경: [삼상25:26]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 이 표현은 맹세 또는 어떤 말의 신실성을 확증.강조하려고 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14:45; 17:55; 19:6; 20:21; 26:10;삼하 2;27). 즉 이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것이 확실하듯이 ~도 확실하다'란 뜻이다.

&#11093;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 아비가일의 이 말은, 그녀가 자신을 다윗의 유혈 보복을 중지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내진 사자(使者)로 자임(自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당시 다윗은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으므로, 어리석은 나발로 인해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피흘리는 복수의 범죄를 저지를 뻔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통해 장차 왕위에 오르게 될 다윗을 영적으로 온전하게 보존하셨던 것이다(Klein, Fay).

&#11093; 나발과 같이 되기를 - 즉 나발과 같이 어리석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 성경은 `어리석음'을 필연적으로 벌을 받게 되는 `불경건'과 항상 연결시키고 있음에 주목해야할 것이다(26:21; 시 14:1; 잠 14:17; 사 32:6; 렘 10:8). 따라서 `나발과 같이'(어리석게)된다는 것은, 곧 그 어리석은 행위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Keil & Delitzsch, Vol.II-ii. p. 243;Schmidt).

성 경: [삼상25:27]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예물(*, 베라카) -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복',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비가일은 여기서 바로 이같은 단어를 자신이 가져온 음식에 적용시킴으로써, 자신의 남편 나발의 모욕적인 언사(10,11절)와 상쇄시키려고 한다. 즉 나발은 심부름왔던 다윗의 사환들에게 저주스러운 말을 퍼부었지만,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여기서 그 사환들에게 축복된 `예물'을 갖고 온 것인 양 표현함으로써, 남편의 악한 행위를 보상하려고 했던 것이다.

&#11093;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 나발의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은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에, 아비가일은 `예물'을 다윗이 아닌 `소년'들에게 주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나 물론 그 음식은 다윗의 요청에 따라, 그리고 다윗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가져온 것이다.

성 경: [삼상25:28]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 여기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의 불미스런 행동이 자신 때문임을 재차 언급한다(24, 25절).

&#11093; 여호와께서 반드시...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권(王權)을 굳건하게 하실 것을 가리킨다(삼하 7:11, 26, 27; 왕상 2;24; 11:38). 그런데 여기의 `집'(*, 바이트)은 `가문', `일족'이란 의미이다(창 12:1; 삼하 3;6;7:16). 그리고 `든든한'(*, 네에만)은 `신뢰하다', `믿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만'(*)의 수동형 분사이다. 특히 이 단어는 신적(神的) 언약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된다(시 89:28, 29; 사 55:3). 따라서 여기의 `든든한 집을 세우리니'라는 말은 (1)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며 (2) 다윗의 후손 중 메시야(`기름 부음을 받은 자', 2:10)를 통하여(마 1:1)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실 것(고전 15:25; 빌 2:11)이라는 `다윗 언약'을 예시하는 말임이 분명하다(삼하 7:11).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은 예언적 영안(霙眼)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한편 이같은 예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 의하여 이미 언급된 바 있었다(2:10).

&#11093; 이는(*, 키) - 이 단어는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1093;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 `여호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도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는 성전(聖戰)을 가리킨다(18:17; 삼하 5:19-23). 아비가일은 이처럼 다윗이 `성전(聖戰)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자임을 강력히 시사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나발을 죽여 손에 피를 흘리는 사사로운 보복을 중지토록 하려고 한다. 아무튼 아비가일이 여기서 `성전 수행(修行)'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한조건처럼 언급한 까닭은, `성전수행'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그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다윗도 왕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비가일은 `성전'(聖戰)과 `왕권'(王權)을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11093;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즉 그 두 가지 해석은 (1)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른 다윗의 형통(Smith, Lagne,Keil), (2) 다윗의 윤리.도덕적 무흠(Hertzberg, Klein)등이다. 그런데 본 문맥은 첫째, 다윗의 왕권이 굳건하게 확립될 것을 말하고 있으며 둘째, 본절을 이은 29절의 내용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를 다룬다는 점에서, (1)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아무튼 이와 같은 축복스런 예언을 언급함으로써, 아비가일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소한 일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강변한다.

성 경: [삼상25:29]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본절은 28절의 끝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볼 수 있다.

&#11093; 사람이 일어나서 - 여기서 `사람'(*, 아담)은 단수라는 점에서, 다윗을 계속적으로 죽이려 했던 한 인물 `사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Smith). 아비가일은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 말은 더넓은 의미에서 사울처럼 다윗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 및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Fay).

&#11093; 내 주의 생명은...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 이 은유적 표현은 값진 보화나 귀중한 물건의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그것을 `싸개'에 잘 싸서 묶어 두었던 고대 중근동의 풍습에서 유래했다(Abarbanel, Targum, Talmud). 한편 여기서 `싸개'(*, 체로르)는 `주머니' 또는 `보자기'(bundle, KJV)를 가리킨다(욥 14:17; 잠7:20). 아무튼 본 문구는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하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여호와의 불꽃같은 눈이 다윗의 생명을 항상 지켜 보호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11093; 물매로 던지듯...던지시리이다 - 오랫동안 물매를 사용했으며 심지어는 그것으로 블레셋의 용장 골리앗을 죽이기까지 했던(17:49) 다윗은, 한 번 던져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물맷돌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감지한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다윗의 원수의 생명을 물맷돌에 비유함으로써, 원수의 회복 불가능한 완전한 멸망을 설명하고 있다. 즉 여기서 아비가일은 `생명싸개'(*, 체로르 하하임;the bundle of life) 속에 곱게 싸여 여호와의 품속에 간직되어 있는 다윗의 생명과, `물매 속의 물매돌'처럼 획획 돌려져 멀리 날려 버려질 원수의 생명을 대조시킴으로써, 다윗의 궁극적 승리를 기원하고 또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25:30]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11093; 여호와께서...하신 말씀 - 이것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16:13)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약속받은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별도의 게시 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에도 별도의 계시 수단에 의하여 다윗에게 선포된 말씀이 이썽아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튼 총명하고 신앙적인 여인 아비가일은 다윗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말씀을 아마도 선지 생도들과의 교제 등을 통하여 알고, 오늘날 이처럼 성숙한 예언적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Keil, Fay).

&#11093; 모든 선을...행하사 - 구체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왕위에 올리는 일일 것이다.

&#11093; 지도자(*, 나기드) - 엄밀히 말하여 이 말은 `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9:16; 10:1).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왕'을 의미하는 `멜렉'(*)대신에 이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그 당시 사울이라는 `왕'(멜렉)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이 `나기드'는 왕에 대한 조심스러운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5:31]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아비가일의 호소]

본절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나발을 죽이지 않을 경우, 다윗은 후일 왕이 되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1093; 슬퍼하실 것도 없고 - 여기서 `슬퍼하실 것'(*, 레푸카)은 `거침돌이 될 것'이란 뜻이다. 순간의 격분과 분노로 사람을 죽인 후 자신의 잘못을 나중에 개달았을 때, 그 사람이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은 실로 대단할 것이다. 즉 두고 두고 양심의 거침돌이 되어 괴롭힐 것이다. 바로 그같은 예 중의 하나가 바로 밧세바 여인과의 간통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 남편 우리아를 죽였다가 다윗이 겪어야 했던 마음의 고통이 아니었겠는가(삼하 11:14-21; 시편 51편)!.

&#11093; 마음에 걸리는 것 - 여기서 `걸리는 것'(*, 레미크숄)도 앞의 `슬프게 하는 것'처럼 `걸림이 되다'란 의미이다(렘 50:32).

&#11093; 후대하신 때 -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올리실 때'를 가리킨다.

&#11093;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 아비가일의 이 청원은 나발을 죽이지 말아달라는 자신의 청원을 들음으로써, 다윗이 후일 왕이 된 후에 마음의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공로임을 은연 중에 내세우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비가일의 이 말은 자신의 공치사(功致辭) 자체에 핵심이 있지는 않다. 다만 이같은 말을 함으로써 아비가일은 어떻게 하든지 다윗이 자신의 간청을 듣게끔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성 경: [삼상25:32]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노를 푸는 다윗]

본 절에서 다윗은 아비가일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을, 그녀의 남편 나발의 구명(救命)이라는 사사로운 차원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인식한다(Klein, Fay).

&#1109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 당신의 계약적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11093; 찬송할지로다 - 이같은 언급은 하나님의 오묘한 주권적 섭리에 따라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신 놀랍고 위대한 일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종종 나타난다(왕상 1:48; 5:7;8:15, 56; 10:9; 눅 1:68; 엡 1:3).

성 경: [삼상25:33]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노를 푸는 다윗]

&#11093;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 여기서 `칭찬할지며'(*, 바라크)는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동일한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항상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여기의 이 `칭찬'은 말할 나위 없이 아비가일에게 그같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의 `지혜'(*, 타암)는 신중한 행동을 동반하는 분별력 혹은 판단력을 가리킨다(욥 12;20; 시 119:66; 잠26:16).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바는, 위와같은 `지혜'를 소유한 여자만이 진정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3절; 잠 11:22).

&#11093;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 바라크)도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앞의 `칭찬할지며'와 그 기본형이 동일한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의 이 단어는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복이 있기를 하나님께 비는 일종의 기도로 이해해야 할것이다(삼하 14:22; 19:39). 바로 이같은 점에서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와 같은 성경적 축복 행위는, 복을 주는 주체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없이 의례적으로 하는 우리나라 전래의 `복 받으세요'라는 축복적 인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 경: [삼상25:34]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노를 푸는 다윗]

&#11093;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 맹세의 불변성과 신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관용적 술어이다.

&#11093; 남자(*, 마쉐틴 베키르) - 문자적으로 `벽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자'(one who urinates against the wall)란 뜻으로서, `남자'(man)를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인 `이쉬'(*)의 속어(俗語)이다. 22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5:35]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노를 푸는 다윗]

&#11093; 네 청을 허락하노나 - 여기서 `허락 하노라'(*, 나사 파님)는 문자적으로 `얼굴을 들게 해주다'란 의미이다(창 19:21; 32:20, 21).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청원을 허락하다'란 의미를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청원의 당사자는 겸손한 자세를 취한 나머지 항상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25:36]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죽음]

&#11093;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배설하고 - 나발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에게 유익을 주었던(7, 15, 16절) 다윗의 자그마한 요구(8절)를 모욕적으로 거절했던 사실(10, 11절)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즉 나발은 자신이 욕심껏 먹고 마시는 데는 아낄 줄 몰랐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몫을 조금 나눠주는 데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실로 `미련한 자'였다(25절).

&#11093; 대취하여 - 양털을 깎는 잔치 때에 술에 취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삼하 13:23-28). 그러므로 나발이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이같이 취했다고 할지라도, 아무튼 술에 취하는 일 재는 경건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죄되어 마땅하다(롬 13;13; 고전 5:11; 6:10). 따라서 성경은 `술취하는 일'을 어리석은 자의 한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잠 20:1; 23:21; 26:9; 눅 21:34).

&#11093; 마음에 기뻐하므로 - 만취로 인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방종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가리킨다.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 다말을 겁탈했던 자신의 이복 형제 암논을 양털 깎는 잔치에 초대한 후, 그가 바로 위와 같은 상태에 빠지면 그를 살해하려고 했었다(삼하 13:28).

&#11093;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 여기서 `다소간의 말'이란 다윗이 나발의 모욕적인 응답(10, 11절)에 격분한 나머지, 그를 죽이러 병사들을 데리고 쫓아왔던 사실을 가리킨다(13절).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이같이 행동한 까닭은 (1) 나발이 술에 취한 그때는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며 (2) 술에 취한 나발에게 다윗이 그를 죽이려했다는 말을 할 경우, 그는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 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성 경: [삼상25:37]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죽음]

&#11093; 이 일 - 이것은 91) 다윗이 나발을 죽이러 갈멜로 향했었다는 사실(13절). (2) 아비가일이 다윗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많은 음식을 다윗에게 가져다 주었으며, 또한 다윗에 대한 나발의 냉대(10, 11절)를 그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렸다는 사실(Kle-in, Keil, Lange; 25절) 등으로 이해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의 `이일'(*, 하데바림 하엘레)이 복수(複數)라는 점에서, 위의 (1)(2) 모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발에게 더 큰 충격을 준 `일'은 (1)의 사실일 것이다.

&#11093; 낙담하여 - 문자적으로는 `그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서 죽었다'(his heart diedwithin him, KJV)란 뜻이다. 즉 나발의 `기뻐하던 마음'(36절)이 이제 `죽어버린 마음'이 되어버린 것을 뜻한다(Klein).

&#11093;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 `돌과 같이 되었더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돌이 되었더니'란 뜻으로, 즉 강한 충력(shock)에 의하여 어떤 심인성(心因性)질환에 걸린 것을 말한다.

성 경: [삼상25:38]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나발의 죽음]

&#11093; 한 열흘 후 - 여기서 `열흘'은 나발이 병고로 고생하던 기간이다. 아마도 나발은 어떤 충격 내지는 고혈압 등으로 인한 전신 마비의 중풍(中風)에 걸렸던 듯하다.

&#11093;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 여기의 `치시매'(*, 나가프)는 `상처내다', `쳐부수다'란 의미로서, 신적(神的) 징벌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12;15; 슥14:18). 결국 나발의 죽음은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이 분명하다(29절).

&#11093; 그가 죽으니라 - 나발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다윗에게 자기 소유물 중 일부를 공급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1) 공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이 속한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17:41-51; 18:5, 30; 19:8; 23:1-5). (2) 개인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의 양떼와 소유를 보호해 준 은인(恩人)이었다(7절). (3) 이 외에도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율법(신 10:18, 19)을 생각한다면, 나발이 다윗 일행을 접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발은 예의를 갖춘 다윗의 정당한 요구(4-9절)를 교만한 말로써 일축하였다(10, 11절). 나발의 이 악한 행동은 스스로가 자기 무덤을 판 격이되고 말았다. 즉 나발은 그의 행동에 격분한 다윗(12, 13절)에게 복수당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공의의 하나님에 의해 병으로 죽게됨으로써 보응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은 재물과 돈을 생의 최고 목표로 추구하는 자의 말로(末路)는 파멸이라(딤전 6:9, 10)는 엄숙한 경고와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성 경: [삼상25:39]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

&#11093; 나발에게 당한...욕 - 여기서 `욕'은 문자적으로는 `욕의 원인'이란 의미인데, 그 구체적 내용은 10, 11절을 참조하라.

&#11093; 신설하사(*, 라브) -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다'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억울한 형편(2절)을 살피셔서, 그의 원수를 갚아 주신 것을 가리킨다(38절).

&#11093;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 자신이 행한 악한 행위만큼 결국 자신이 그 악행의 대가를 받는 일을 가리킨다(왕상 2;44).

&#11093; 다윗이 아비가일로...아내를 삼으려고 - 이와같은 구혼(求婚)은 미망인의 법적 애곡(哀哭) 의무 기간인 칠 일이 지난 다음에 제안되었을 것이다(Smith). 그런데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구혼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그녀는 지혜와 신앙에 있어서 자신의 내조자가 되기에 매우 적격자였으며93, 33절) (2) 다윗의 처 미갈이 다른 남자와 재혼하였기(44절)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25:40]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

&#11093; 사환(*, 에베드) - 아비가일에 대한 구혼(求婚)은 사적(私的)인 문제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공적(公的)인 문제와 관계되어 사용되는 단어인 `소년'(*, 나아르)이라는 단어 대신에 `에베드'가 사용되고 있다(8절; 14:1).

성 경: [삼상25:41]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

&#11093; 그가...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 이와 같은 겸손한 행위는 그녀가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취해졌었다(23절). 따라서 여기 아비가일의 이 행동은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겸허한 태도이다.

&#11093;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 - 이미 다윗의 수하에 있던 `사환'들처럼 아비가일도 다윗에게 `내 주'라는 말을 적용시킴으로써, 자신도 그들처럼 다윗의 사람이 될 것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11093; 발 씻길 종이니이다 - 발 씻기는 행위는 종들이나 하는 지극히 미천한 행위이다. 따라서 다윗의 구혼을 받은 아비강리은 그러한 다윗의 구혼은 자신의 분에 넘치는 과분한 것으로서 감사하게 받아 들임은 물론, 요구하신다면 다윗의 수하에 딸린 사환들의 발이라도 씻기는 지극히 미천한 일도 기꺼이 감당할 것이라고 겸손히 말하고 있는것이다.

성 경: [삼상25:42]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

&#11093; 급히 일어나서 - `급히 일어나서'는 아비가일이 이같은 문자적인 의미의 행동을 취했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일어나서'는 특별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의 단호한 결심을 시사해 주는 관용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11093;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 여기의 `처녀 다섯'은 아비가일을 수종드는 시종(侍從)들을 가리킨다(창 30:4, 9). 아비가일의 집은 대단한 부호였으므로, 이러한 개인 몸종이 있었던 것이다.

&#11093; 사자(*, 말아크) -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천사' 및 그 밖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기 위해 다윗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할자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단어가 사용된 듯하다.

&#11093;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이 사건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이었다. 즉 순수한 애정이나 신앙적인 목적 이외에도, 후일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기 위하여 헤브론으로 입성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한, 그것도 갈렙의 후예인 아비가일(3절 주석 참조)을 대동함으로써, 유다 지파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Klein). 아무튼 이같은 결혼에 따라 다윗과 아비가일 사이에는 `길르압'(삼하 3:3)과 `다니엘'(대상 3:1)등, 최소한 두명의 아들이 출생하였다.

성 경: [삼상25:43]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의 아내들]

&#11093; 이스르엘 아히노암 - 여기서 `이스르엘'은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14:50)과 구별하기 위하여 덧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이 `이스르엘'(Jezreel)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심'이란 뜻이다. 추측컨대 이곳은 마온과 갈멜과 십 근처인 헤브론 남서쪽 약 10km 지점의 고지대일 것이다(Beek ; 수 15:56). 따라서 잇사갈 지파에 소속된 동일한 이름의 성읍과는 구별된다(수 19:18). 한편 `아히노암'은 `나의 오빠는 유쾌하다'란 뜻이다. 다윗은 아히노암과 결혼함으로써 아비가일과의 결혼에서처럼(42절 주석), 그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됐을 때에 유다 지파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이끄는데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Klein). 아무튼 다윗은 아히노암과의 사이에 `암논'이라는 아들을 두었다(삼하 3:2).

성 경: [삼상25:44]

주제1: [다윗과 나발 그리고 아비가일]

주제2: [다윗의 아내들]

&#11093; 사울이...미갈을...발디에게 주었더라 - 일찍이 사울은 골리앗을 죽인 대가로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맏딸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는 변덕스러운 짓을 하기도 했었다(18:19). 여기서의 이같은 사울의 행동 역시 메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윗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을 것이다(18:8, 10, 11). 한편 `발디'(Phalti)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란 뜻으로, 삼하 3:15에서는 `발디엘'(Phaltiel)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발디'란 이름과 동일한 이름의 소유자가 가나안 정탐을 했던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 중에서 발견된다(민 13:9). 그는 곧 베냐민 지파의 대표로서 가나안 정탐에 참여한 `라부'의 아들 `발디'였다. 그렇다면 여기의 `발디'는 자신의 조상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음이 분명하다(22:5).

&#11093; 갈림에 사는 - 문자적으로는 `갈림 출신인'이란 뜻이다. `갈림'(Gallim)은 `무더기'란 뜻으로, 이곳은 이사야 10:30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사울의 기브아 사이의 베냐민 지파의 땅에 위치한 성읍이다.

성 경: [삼상26:1]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11093; 십 사람이...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 본절 이하에서는, `십 사람'의 밀고 행위가 23:19이하에 이어 두번째 언급된다. 혹자들은 본문과 23:19이하 사건의 여러 유사성을 근거로하여 동일한 사건이 반복 기술되었다고 주장한다(Ewald, De Wette, Thenius).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유사성과 아울러 더 많은 상이점(相異點)이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절 하단에 나와 있는 24:1-22 사건과 본장 사건의 비교 도표를 참조하라.

&#11093; 십 - `십'(Ziph)은 헤브론 남동쪽 약 8km, 마온 북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23:14 주석 참조.

&#11093; 기브아 - 사울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이다. 10:26 주석 참조.

&#11093;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 `십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의 장소는 `광야 남편'이었다(23:19).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광야 앞'은 문자적으로는 `광야의 얼굴'이란 의미로서, `광야의 남편'과는 전혀 다른 `광야의 인접 지역'을 가리킨다(Drinkard, D-river, Klein). 따라서 아비가일과 결혼한 다윗은(25:42) 갈멜을 떠나서 십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에 거주했던 곳보다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듯하다.

&#11093; 하길라 산 - `십 사람'들의 1차 밀고 당시에 다윗은 여기처럼 `하길라 산'(the hill of Hachilah)이 아닌 `하길라 산 수풀 요새'(Horesh, on the hill of Hachilah)에 있었다(23:19). 그런데 `하길라 산 수풀 요새'는 `십 황무지'의 또 다른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 같이 보아야할 이유는 여기의 `수풀'(*, Horesh)은 고유명사로서, 별도의 특정한 지점을 가리키는 지명이기 때문이다(23:15).

성 경: [삼상26:2]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11093; 사울이...다윗을 찾으려고 - `십 사람'들의 1차 밀고 때에 자신에 대한 다윗의 선대(24:4, 10, 11)에 따라 다윗을 축복까지 했던 사울이(24:16-22), 여기서 다시 다윗을 죽이러 찾아나서고 있다.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악신의 영향하에 있는(16:14; 18:10) 그의 지극히 불안정하고 변덕스런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의 그같은 성격이 결국 잠정적으로 억제됐던 다윗에 대한 증오심을 다시 폭발시키게 한 것이다.

&#11093; 십 황무지 - 23;14 주석 참조.

&#11093;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 이들은 `십 사람'의 1차 밀고 때에도 동원했던 사울의 정예병을 가리킨다. 24:2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6:3]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11093; 광야 앞 하길라 산 - 1절 주석 참조.

&#11093; 길가에 - 여기에 `길' 은 예루살렘(Jerusalem) 방향에서 네게브(Negeb) 지방의 `아랏'(민 21:1)으로 통하는 대로(大路)를 가리킨다(Smith, Fay). 이같은 사실에서 볼때, 본절의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의 동쪽임이 분명하다. 아하로니(Aharoni)도 그의 `성경지도'(Bible Atlas)에서 이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11093;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 당시 다윗은 사울의 진 서쪽 지점 고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다. 이는 6절의 `진에 내려가서'란 말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의 동태를 잘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6:4]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11093; 탐정을 보내어...알고 - 여기서 `알다'(*, 야다)란 말은 체험적이리만큼 확실히 깨달아 아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2:12; 22:22; 창 4:1; 48:19). 즉 척후병의 보고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쫓겨 도망하기에만 급급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오히려 이제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비록 전력에 있어서는 약자의 처지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연고로 강자인 사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실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성 경: [삼상26:5]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계속된 사울의 추격]

&#11093; 넬의 아들...아브넬 - `넬'은 사울의 숙부이다(10:14; 14:50, 51). 따라서 `아브넬'과 `사울'은 사촌 관계이다. `아브넬'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갔었다(17:55-58). 그후 아브넬은 사울의 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 쫓아 다니는 위치가 되었다. 그러다가 사울이 죽은 후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앉힌 다음, 자신은 실세(實勢)로서 위치하였다(삼하 2:8-11). 그러나 아브넬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한 사건으로 이스보셋과 관계가 악화되자(삼하 3:7-11), 이스보셋의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버리고 말았다(삼하 3:17-21). 그렇지만 아브넬은 전쟁의 와중에서 요압의 동생을 죽였던 연고로 인하여 결국 요압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삼하 3;27).

&#11093;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 여기의 `진'(*, 마갈)은 `방책'(barricade)을 의미한다(17:20). 그런데 당시 이 `방책'은 병거 및 마차 등으로 이뤄졌을 것이다(Calvin, Smith, Keil). 한편 사울이 이같은 위치에서 잠을 잔 가닭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신의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11093;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 이같은 언급은 앞의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란 언급과 함께 다윗의 용맹성을 강조.시사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 준다. 즉 저자는 여기서 당시 사울이 소지하던 창과 물병을 바로 위와 같은 삼엄한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서 가져갔던 다윗의 확신에 찬 영웅적 행동을(11, 12절) 부각시키려는 것이다(Klein). 한편 여기서 `백성'은 사울의 3천 병사를 의미한다(2절; 14:2; 수 8:1).

성 경: [삼상26:6]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11093; 헷 사람 아히멜렉 - `헷 사람'(the Hittite)은 가나안 일곱 족속 중의 하나였다(수3:10).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 때도 이미 팔레스틴 땅에 거주했었으며(창 15:23), 이스라엘의 출 애굽 후 이스라엘에 의하여 정복되었다(삿 1:6; 왕상 9:20). 바로 이같은 헷 조속으로서 다윗을 좇았던 또 다른 유력한 인물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였다(23:39; 삼하 11장). 한편 `아히멜렉'(Ahimelech)은 `왕의 형제'란 의미를 갖는 가나안식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름을 소유했던 제사장 `아히멜렉'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21:1). 그런데 헷 사람 `아히멜렉'이 다윗의 휘하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당시 이스라엘 임족과 함께 섞여 살던 `헷 족속'에 대하여 사울이 어떤 압박을 가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e; 22:2).

&#11093; 스루야의 아들...아비새 - `스루야'(Zeruiah)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시집오기 전 `나하스'라는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다(삼하 17:25). 따라서 다윗의 이부(異父) 누이이다. 한편 `아비새'(Abishai)는 `아버지가 계신다'란 의미이다.그런데 이 사람은 후에 비록 다윗의 용사 중 최상급인 `세 용사' 그룹에는 끼지 못했지만, 그 다음인 `삼십 용사' 그룹의 두령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삼하 23:18, 19;대상 11:20, 21).

&#11093; 요압 -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어 명실 공히 다윗의 제 1 무사(武士)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삼하 5:6 이하; 8:16; 20:23; 대상 11:4 이하; 18:15; 27:34).

&#11093; 누가...내려가서 - 다윗의 일행이 사울의 일행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때 사울은 `길 가'(3절)에 있은 반면 다윗은 `산'(1절)에 있었다.

&#11093;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 이것은 `아히멜렉'과 `아비새' 중 `아비새'가 더 용기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무튼 본서와 사무엘하의 저자는 `아비새'에 대해서는 다윗을 도왔던 훌륭한 인물로서 계속 말하지만, 본절에서처럼 다윗의 요청에 묵묵부답(默默不答)했던 `아히멜렉'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히멜렉이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그의 위와 같은 침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Klein). 여기서 우리는 `아히멜렉'이 `아비새'보다 먼저 먼저 언급되는 등 더 우위에 있었으나, 그 자신의 지나친 소심성 때문에 그 위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성 경: [삼상26:7]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11093;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 여기서 `창'은 `홀'(笏)과 같이, 사울의 왕권(王權)을 상징한다(Keil, Fay, Smith). 이같이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창'을 자신의 머리맡에 꽂아 놓은 것은 (1) 왕으로서의 자신의 위엄을 높이며, (2) 또한 왕으로서의 자신이 잠자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삼상26:8]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11093; 하나님이...원수를...붙이셨나이다 - 아비새의 이같은 판단은 다윗의 각오 여하에 따라서는 사울이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결과였다(24:4). 즉 그는 이같은 상황 전개를,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본 것이다.

&#11093; 단 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자고 있는 사울에 대해서 이같이 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울의 부하들을 깨우지 않고 달아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단 번'에 죽여야 했을 것이다.

&#11093;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 아비새의 이 말은 당시 사울이 완전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아마 사울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이 긴 출정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했던 관계로 모두 곯아 떨어진 것 같다.

성 경: [삼상26:9,10]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여기서 다윗은 사울을 친히 죽여 복수해서는 안될 이유를 제시한다.

&#11093;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그 첫째 이유이다. 즉 여호와께서 택하사 기름 부은 자는 여하한 경우일지라도 그 생명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그런고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침해하면, 곧 그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침해하고 모독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원칙에 철저히 입각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것은 단순히 다윗의 관대한 성품이다. 혹은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11093;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두번째 이유이다(24:12). 즉 이 두번째 이유 역시 첫번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기름 부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곧 사람을 택하사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분이 하나님이시듯, 또한 왕을 폐하고 죽이는 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하에 속한 것이라는 사상이다. 다윗은 시종 일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사울을 대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사울을 전쟁터에서 블레셋 족속의 손에 붙이심으로써(31:3, 4), 다윗과 사울간에 당신의 주권적인 심판을 행사하셨다.

성 경: [삼상26:11]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11093; 손을 들어...치는 것을...금하시나니 - 사람이 그 원수에 대하여 친히 복수하는 일을 금하고, 그 모든 선악간의 판결을 공의의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성경의 복수관(復讐觀)이다(신 32:35; 롬 12:19; 히 10:30). 그러므로 여기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단번에 처치하자는 아비새(8절)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임을 들어 그것을 만류하는 다윗(9-11절) 사이에서 우리는 신앙의 차원을 느낀다. 즉 전자는 이성에 근거한 인간적 사고의 발로요, 후자는 신앙에 근거한 신본주의적 사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만일 다윗이 아비새의 말대로 했다면, 나중에 그가 경험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참된 승리'(21, 25절; 롬 12:21)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조그마한 일로부터 원수 갚은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도와 선한 판결을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참된 지혜와 판단력을 허락하신다(롬 12:19, 20).

&#11093; 그의...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증할 증거를 삼기 위함이었다(24:4).

&#11093; 머리 곁에 있는 - 이것은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이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었던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기 위한 언급이다. 왜냐하면 `머리'는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 부분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곧 사울을 단번에 죽일 수 있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8절).

성 경: [삼상26:12]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

본절은 사울을 죽이지는 아니하고, 다만 그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만을 남기려고 한 다윗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돕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11093; 여호와께서...깊이 잠들에 하셨으므로 - 여기서 `깊은 잠'에 해당하는 `타르데마'(*)란 단어는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들기 위한 갈비뼈를 빼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뜨리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창 2:21).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동물을 쪼개게 하신 후, 그와의 언약이 비준되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를 깊이 잠들도록 하시는 장면을 다루고 있는 문맥에서도 나타난다(창 15:32).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사울과 그의 일행이 다윗의 접근을 전혀 인식치 못할 정도로 깊이 잠이 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11093;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 사실 이때 다윗은 아비새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사울을 자신의 손에 붙이신 것으로 해석하여 사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생명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을 더욱 존중함으로써, 끝까지 모든 일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주건을 인정하는 다윗을 기뻐하셨고, 결국 당신의 선하신 계획을 다윗을 위해 베푸셨다. 즉 다윗은`선으로 악을'이긴 것이다(롬 12:1).

성 경: [삼상26:13]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아브넬을 책망하는 다윗]

&#11093; 건너편...산꼭대기에 서니 - 다윗과 아비새는 이때 계곡 하나를 건너 맞은편 언덕, 즉 하길라 산 정상으로 올라간 듯하다. 그리고 여기의 이 `산 꼭대기'는 사울의 동정을 살필 목적으로 `탐정'(4절)이 정탐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11093; 상거가 멀더라 - 다윗이 이처럼 사울로부터 먼 거리에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깨우고, 또한 사울과 대화를 하려고(14-25절) 한 까닭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사울에게서 도망갈 안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다윗이 사울의 변덕스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6:14,15,16]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아브넬을 책망하는 다윗]

여기서 다윗은 사울의 경호 책임을 맡고 있던 군대 장관 아브넬(14;50)의 직무유기를 비난함으로써 (1) 사울로 하여금 그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절감케 하며, (2) 그리고 다윗 자기 자신은 사울을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고 또한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11093; 아브넬아 - `아브넬'(Abner)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가는 등 이미 다윗과 친교가 있었다(17:55-58; 20:25). 더구나 `아브넬'은 사울과 사촌간이며(14:50, 51)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다는(18:27; 25:44) 점에서 본다면, 다윗과 아브넬이 상호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11093;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 이 말은 여자적(如字的) 의미로 이해되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이 아닌 아브넬을 불렀기 때문이다(14절). 따라서 우리는 이 말을, 다윗이 아브넬을 큰 소리로 불러 소란케 함으로써 잠자던 사울을 깨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eil & Lange).

&#11093; 네가 용사가 아니냐 - 이것은 아브넬이 왕을 경호하는 그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 한편 여기의 `용사'(*, 이쉬)는 `여자'(*, 잇솨)와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창 2:23).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남자다운 남자'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Klein).

&#11093; 네 주...네 주 - 여기서 `네 주'라는 말이 반복 기술된 것은 아브넬이 자신의 상전인 사울에 대한 경호 책임을 게을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아브넬은 자신의 `주' 사울을 보호해야 했어야만 했다.

&#11093;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25:26 주석 참조.

&#11093;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 이것은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려 했던(8절) 가로막았던 다윗의 행동과 잘 대조된다. 즉 다윗은 이같은 언급을 통하여 아브넬의 직무 유기와 자신의 선행(24:17, 18)을 대조적으로 강조한다. 나아가 다윗의 이 말은 진정 사울을 지키고 보호해 줄 자로서 아브넬보다 자신이 더욱 적격자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따라서 자신은 사울을 해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으며, 오해려 사울을 주(主)로 모시고 충성된 신하로서 지키고 보호해 줄 자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11093;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 문자적으로는 `너희는 죽음의 아들이니라'(20:31)란 뜻이다. 다윗이 여기서 아브넬과 병사들에 대하여 `죽음의 아들'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은 것은 곧 그를 죽인 것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9절).

성 경: [삼상26:17]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다윗의 호소]

&#11093;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 이때는 캄캄한 밤 또는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을 것이므로, 사울은 음성을 통해서만 다윗이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1093; 내 아들 다윗아 - 사울의 이같은 반응은, 다윗이 자신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던 사실을 인식한 결과였다(24:16). 아마도 이때 변덕스런 사울은 다윗을 아브넬보다 더 나은 호위병으로(16:21) 생각했을 것이다.성

경: [삼상26:18]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다윗의 호소]

&#11093; 어찌하여...쫓으시나이까 - 사울은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24:2-7)으로 다윗과 화해를 했었다(24;16-22).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또다시 추격하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성 경: [삼상26:19]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다윗의 호소]

&#11093;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 이같은 표현은 주로 악행을 선행으로 전환할 도 한번의 기회를 줄 때 사용되었다(15:1). 즉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았던 사울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면서 이와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다윗의 이 말은 최후 통첩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종 다윗의 이 최후 통첩을 무시하고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27:1-4) 하나님께서 결국 엄중한 심판을 내리셨다는 사실이다(10절; 31:4-6).

&#11093;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만유(萬有)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상(대상 29:11; 시 103:19)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선(善) 뿐만 아니라 악(惡)도 주관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사울을 격동시킬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다윗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됐다고 하더라도, 사울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악이 나왔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그 악을 교사(敎唆)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악인이 그 소욕대로 저지르는 악을 묵허(默許)했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방편이며, 따라서 악한 행동 자체에 대한 책임은 항상 본인이 져야하는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까지도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상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압살롬의 난(亂)을 피하여 도망을 가는 자신을 향하여 온갖 모욕적 언사를 아끼지 않았던 시므이(Shimei)도,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고 그를 해하지 아니하였다(삼하 16;10, 11).

&#11093;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 다윗의 이 말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1)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달게 죽겠다는 뜻(Hertzberg, Klein), (2)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주기를 원한다는 뜻(Keil)등이 있다. 그런데 첫째, 여기의 `제물'(*, 민하)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창 8:21) 그분 앞에서 태워지는 소제 제물의 향기를 가리키며 둘째, 사울이 격동된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만일 `인자(人子)들'에 의한 것이라면 다윗이 아닌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본절의 언급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다윗 자신이 달게 죽겠다는 뜻의 (1)의 해석이 타당성이있다.

&#11093;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저주를 받으리니 - 다윗은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에도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간신(奸臣)들의 중상 모략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었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악신(惡神)의 영향하에 있는 사울의 증오심과 적개심 때문이지만, 이와 더불어 사울 주변에는 베냐민 사람 구시(시 7편)와 같은 중상 모리배(中傷謀利輩)들이 있어 그러한 사울의 증오심을 더욱 부축긴 것 같다. 24:9 주석 참조.

&#11093; 이는(*, 키) - 앞 부분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절(節)을 이끄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접속사 이하는 사우을 격동시킨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를 말해준다.

&#11093;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는 땅,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인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물론 사울을 격동시킨 자들이 이같은 말을 직접, 구체적으로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을 격동시켜 그로 하여금 다윗을 추격케 함은 곧 다윗에게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살라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Calvin). 그런데 다윗의 이같은 염려는 실제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즉 다윗은 사울로부터 다가오는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결국 이스라엘 땅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27:1, 2).

&#11093;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 여기서 `여호와의 기업'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출 19;5). 그리고 `붙지'(*, 하스타페아흐)는 `연합하다', `모이다'라는 의미의 동사 `사파흐'(*)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의 유기체적 구성원이 됨을 가리킨다. 따라서 `붙지 못하게 한다'라는 말은 그 언약 공동체에서 강제로 추방시킴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6:20]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다윗의 호소]

본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 도망가 결국 이방 땅에서 객사하게 되는 그러한 비극이 없게 해달라고 사울에게 간청한다. 그러면서 다윗은 만일 자신이 타국땅으로 도망간다면 그것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고자 쫓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11093; 여호와 앞 -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으며, 따라서 그분께 제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 곧 `이스라엘 땅'을 뜻한다(Hertzberg). 물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만을 특별한 약속의 땅으로 지정하셨음도 사실이었다(신 12;5). 그래서 모압 출신의 룻은 자신의 고향 모압 땅을 떠나 유다의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면서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들어간다고 말하였다(룻 2:12).

&#11093; 먼 이곳에서(*, 아르차 미네게드) - 직역하면 `~(앞)으로부터 떨어진 (그) 땅에서'(to the earth away from ~, RSV; to the ground far from~, NIV)란의미이다.

&#11093; 나의 피로...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 다윗은 이 말을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가게될 경우 나타날 결과로서 말한다. 따라서 다윗은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울로 하여금 자신을 추격하는 일을 중지해 줄 것을 호소한다. 아울러 다윗은 여기의 이 언급을 통하여 만일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이방 땅에서 죽게 될 경우 사울은 다윗 자신의 그 피에 대하여 결코 무관치 않으며,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만일 다윗 자신이 이방 땅으로 도망가 그곳 우상의 땅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울의 추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사울은 다윗 자신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되며, 그럴 경우 아벧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했던 가인처럼(창 4:10) 사울 역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1093;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 이것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의 행동이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메추라기'는 `산'이 아닌 광야에 많기 때문이다(출 16:13, 14; 민 11:31). 따라서 메추라기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메추라기가 떼지어 다니는 광야의 들로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사울은 어쩌다 산에 한 마리있는 메추라기를 잡으려고 설치는 사냥꾼 같이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Winer). 아무튼 우리는 이 비유의 초점이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의 행위가 매우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지적하는 데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1093;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려 -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과 `벼룩'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으며, 또한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지를 역설한다. 24;14주석 참조.

성 경: [삼상26:21]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의 사죄]

본절에서 사울은 다윗의 호소(18-20절)에 전적 수긍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한다. 즉 다윗을 죽이기 위해 추격한 자신의 행위를 (1) `범죄'로 (2) `어리석은 일'로 (3) `대단히 잘못된 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다윗을 자신보다 의롭다고 여긴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 직후 때(24:17) 보다 훨씬 고무적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사울의 이같은 태도 역시 진정한 회개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사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27:1). 실로 참된 회개란 단순한 후회 또는 반성의 차원을 넘어 마음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지한 죄의 고백과 더불어 더이상 과거의 범죄나 실수를 범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전인격적 변화요 결단이어야 한다.

&#11093; 내 아들 다윗아 - 이것은 다윗에 대하여 하등의 적의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24;16).

&#11093; 돌아오라 - 옛 직책으로의 복귀를 가리킨다(18:13, 30). 또한 이것은 이방 땅으로 도망갈 필요도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19, 20절).

성 경: [삼상26:22]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의 사죄]

&#11093; 왕은 창을 보소서...가져 가게 하소서 - 본절에서 다윗은 사울로부터 자신이 가져온 `창'과 `물병'중(12절) 다만 `창'만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왕권을 상징하는 창에 비하면 `물병'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Klein). 한편 여기서 `물병'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때 다윗이 창과 아울러 물병까지 사울에게 넘겨주었을 것은 당연하다.

성 경: [삼상26:23,24]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의 사죄]

&#11093; 여호와께서...갚으시리니 -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 모든 일에 대해 여호와께서 심판해 주실 것을 다윗이 간구한 것처럼(24:15), 여기서도 다윗은 사울에 대하여 공의로운 처신을 한 자신에게는 상급이 있고, 다윗 자신에게 불의를 행한 사울에게는상급이 있고, 다윗 자신에게 불의를 행한 사울에게는 징벌이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의 이 말은 혹자들(Thenius, Stahelin)의 주장처럼 결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말은 아니다. 다윗의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수하고 선한 양심의 선언이요, 또한 공의와 진리의 하나님을 전적 의뢰하는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Keil).

&#11093;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 이 말은 사울의 반성과 태도 전환에도 불구하고(21절), 다윗이 사울로 인하여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여기의 `환난'은 말할 나위없이 사울의 살의(殺意)에 따른 다윗 자신의 정처없는 위험한 방랑 생활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6:25]

주제1: [재개된 사울의 추격]

주제2: [사울의 사죄]

&#11093;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 사울의 이말은 구체적으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가리킨다(24:20). 물론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훌륭한 업적을 남길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11093;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 사울의 이 말 역시 엔게디 동굴 사건(24장) 직후의 말(24:20)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다윗이 사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대적들을 꺾고 이스라엘의 왕위를 오를 것을 가리킨다(20;15, 16).

&#11093; 다윗은...사울은...돌아가니라 -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별의 장면을 묘사할 대 사용되는 전형적 방식이다(24:23; 민 24:25). 그러나 특별히 여기서의 이 표현은 사울과 다윗이 아직껏 화해하지 못한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사울과 다윗의 마음은 하나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각기 자기 길을 따라 따로 가야만 했다"(Berleb Bible)

&#11093; 자기 곳 - 여기의 `곳'(*, 마콤)은 24:23의 `집'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2;20; 29:4; 왕상 8:21). 따라서 여기의 `곳'을 `집'이 아니라고 보고, 사울이 기브아의 자기 궁성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다윗을 계속 쫓았다는 주장(Keil, Lange)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R. Payne Smith).

성 경: [삼상27:1]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가드로 피신한 다윗]

&#11093;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망하리니 - 본절과 같은 다윗의 생각과 판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굳게 맹세하고서도(24:16-22) 그 약속을 스스로 뒤엎는 등, 다윗으로서는 도저히 사울을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었다. 따라서 다시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던 십(Ziph) 진(陳) 사건(26:6-12) 직후의 사울의 약속(26;21, 25) 또한 다윗으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울의 주변에는 사우로 하여금 다윗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인물들이 있었으며(24:9; 26:19),

특히 다윗의 은신처 주변에는 다윗의 행동을 밀고하는 `십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23:19; 24:1; 26:1). 따라서 600명의 군사와 그에 딸린 남녀 가족들을 거느린 다윗으로서는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도피 생활을 할수가 없었기에, 당시 사울의 추격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11093;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 당시 다윗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모압(22;3, 4) 보다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상책(上策)으로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자신과 600명의 군사 및 그에 딸린 가족들의 보다 안전한 도피 생활을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보다 약소국인 모압 보다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이 더좋다고 판단되었으며, (2) 또한 블레셋이 모압보다 이스라엘과 더 인접한 곳에 블레셋이 모압보다 이스라엘과 더 인접한 곳에 있는 관계로, 유사시의 사건에 대비하는데 더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J.P. Lagn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아무튼 이방의 땅인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들어 가는 것'은 다윗이 최악의 경우 취하려고 했던 선택이었다(26:19, 20).

&#11093; 사울이...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려고 했다. 따라서 그때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오래 머물 생각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7:2]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가드로 피신한 다윗]

&#11093; 일어나(*, 야캄) - 성경 용례상 이 표현은 종종 결정적인 그리고 중대한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지는 문맥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11093; 함께 있는 육백 인 - 다윗의 휘하 추종 병력으로, 여기의 이 숫자는 앞에서와 동일할(23;13; 25:13). 한편, 600명이란 숫자는 분명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출전할 만한 성인 남자들만을 계수한 수효일 것이다(민 1:3). 따라서 600명의 병력에 딸린 가족들의 수효까지 모두 계산하면, 다윗이 거느린 일행의 총수효는 대략 2,500~3,000명 가량 되었을 것이다.

&#11093; 가드 왕...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 비록 블레셋은 이스라엘과는 적대국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했던 사울 왕에 대해서 특별히 강한 증오심을 가졌던 관계로, 당시 사울의 강력한 경쟁 상대이자 증오의 대상인 다윗에 대해서는 오히려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기대하고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도피해 들어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드'(Gath)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서(5:8; 수 11:22; 13:3 주석 참조), 그 위치는 당시 다윗과 그의 일행이 피신하고 있던 `십 황무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7km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드 왕'은 블레셋의 5대 방백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5:8 주석 참조). 또한 `아기스'(Achish)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21:10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때 다윗이, 전에 `아기스'로 부터 도망나온 일이 있었으면서도(21:10-22:1) 다시 그에게로 도피한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갔으며, (2) 다윗이 아기스의 대적인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핍박을 받고 있었음이 그에게까지 틀림없이 알려졌을 것이며, (3) 또한 아기스는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군사적 세력을 확충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11093; 마옥의 아들 - 여기서 `마옥'(Maoch)은 왕상 2:39에 나타나는 `마아가'(Maachah)와 동일한 인물인 듯하다(Keil, Smith, Fay). 그렇다면 아기스가 솔로몬이 즉위한 직후까지 블레셋의 가드왕으로서 계속 살아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기스가 다윗의 즉위(B.C. 1010년) 직전부터 솔로몬의 즉위(B.C. 970년)직후까지 약 50여년간 왕위에 있었다면 이 문제는 넉넉히 해결될 수 있다(Keil & Delitzsch,Vol. II-ii. p. 255).

성 경: [삼상27:3]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가드로 피신한 다윗]

&#1109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 이것은 단지 몇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블레셋 땅에 들어갔던 21장의 경우와는 완전히 상이하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처럼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블레셋으로 간 것은 가족들의 안전과 정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11093; 아히노암...아비가일 - 다윗의 최초 아내는 사울의 딸 `미갈'이었으나, 그녀는 사울에 의해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보내졌기 때문에 다윗 아내의 명단 중에서 빠져있다(25:44).

성 경: [삼상27:4]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가드로 피신한 다윗]

&#11093; 사울이...수색하지 아니하니라 - 본절의 내용은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가기 직전에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11절).

다윗의 도피 생활 3 - `엔겐디' 동굴 사건 후 사울과 일시 화해한 다윗은 사무엘 사후 또다시 위험을 느끼고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 이후 다윗은 다시 `십 황무지'로 돌아왔으나, 십 사람들의 밀고 행위로 다시금 사울의 추격을 당한다. 그러나 십 진(陳) 사건으로 또다시 사울의 목숨을 해할 기회가 있었으나 다윗은 사울을 히하지 않았다. 이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으나, 다윗은 더이상 사울의 변덕스런 마음을 신뢰할 수 없어, 결국 블레셋 땅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기스 왕으로부터 식읍(食邑) `시글락'을 얻어 그곳에서 1년 4개월 동안 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다윗의 목숨을 채던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다윗은 오랜 도피 생활을 마감하고 조국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24:1-27:12).

성 경: [삼상27:5]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시글락을 얻은 다윗]

&#11093;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 문자적으로는 `내가 당신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했거든'(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NIV, RSV)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다윗이 `아기스'와 용병(傭兵) 관계를 형성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다윗은 아기스와 용병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그에게 적절한 요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기스는 다윗과 바로 이같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군사적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을 것이다.

&#11093; 당신의 종이 어찌...왕도에 거하리이까 - 당시 다윗의 군사가 약 육백 명이었다면(2절). 그의 가족까지의 숫자를 모두 합칠 경우 거의 삼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많은 숫자는 `왕도'(王都) 가드의 시민들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항상 있었다. 바로 이같은 점을 내세워서 다윗은 왕도 `가드'를 떠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가드를 떠나려고 했던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였다. 즉 다윗이 지방 성읍의 독립된 거주지를 요구한 진정한 이유는 (1)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가드에서 가주할 경우 자신의 백성들이 이교적(異敎的) 혼합주의에 빠져들 우려가 충분히 있었고(5:8, 9; 26:19), (2) 다윗이 아기스의 궁전에 자주 출입할 경우 아기스의 신하들에게시기의 대상이 될 우려가 또한 있었으며(21:11; 29:4, 5), (3) 그리고 다윗이 가드를 떠날 경우 아기스의 정치적 영향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이점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경: [삼상27:6]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시글락을 얻은 다윗]

&#11093;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주었으므로 - 아기스 왕에 대한 다윗의 간청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아기스가 다윗과 자신을 호혜적(互惠的) 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드 왕 아기스가 망명객 다윗을 영접하고 그에게 식읍(食邑)으로서 `시글락'을 수여하는 등 다윗을 환대한 것은, 사울과 분명한 적대 관계에 있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을 자신의 신복(臣僕) 내지는 용병(傭兵)으로 포섭하여 자신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2절). 한편 여기 `시글락'(Ziklaq)은 가나안 정복 후 원래 유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가(수 15:31), 그후 다시 시므온 지파에게로 넘어간 성읍이었다(수 19:5; 대상 4:30).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사사시대에 그 땅을 블레셋에게 다시 빼앗겼던 것 같고, 그 이후 그 성읍에는 사람이 거주치 않은 것 같다(Keil, Fay). 그 위치는 가사(Gaza) 동남쪽 약 24km 지점으로, 그때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가드(Gath) 남서쪽 약 40km 지점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같은 가드로부터의 먼 거리는 가드를 떠나려고 했던 다윗의 진정한 목적(5절 주석 참조)을 넉넉히 충족시켜 줄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같은 다윗의 목적과는 달리 아기스는 아기스대로 다윗을 그곳에 주둔시킴으로써, 자신의 영토의 남쪽 변경을 다른 민족들이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Klein).

&#11093; 시글락이...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 여기의 `왕'(*, 말키)은 복수(plural)이다. 따라서 `유다 왕'은, 정확히 하자면 `유다 왕들'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유다 왕들'이란 표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본서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할된 후(B.C. 930년)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아울러 본서 전체를 면밀히 고찰할 때 본서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에 대한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 보수주의 학자들은 본서(사무엘서)의 저작 시기를 분열 왕국 직후(B.C. 930년)로 부터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사이의 어간으로 본다(Steinmueller, Moeller, Young, Fay)

&#11093; 오늘까지 - 즉 본서가 기록된 때까지를 가리킨다(서론, 3 `기록 연대' 참조).

성 경: [삼상27:7]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시글락을 얻은 다윗]

&#11093; 블레셋 사람의 지방 - 여기서 `지방'(*, 사데)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빈들'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6:1; 창 2;5; 왕상 11:29). 따라서 이것은 다윗의 독립된 거주지 시글락이 변방에 위치했음을 시사해 준다.

&#11093; 거한 날 수는 일 년 넉달 - 여기서 `일 년'(*, 야밈)은 문자적으로는 `날들'(days)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요세푸스와 칠십인역은 다만 `넉 달'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여기의 `야밈'은 (1) 성경에서 `매년'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1:3; 2:19), (2) 또한 `일 년'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라는 점에서(Klein; 삿 17:10; 삼하 14:26),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일 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바로 이 기간이 지난 후 헤브론으로 돌아가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삼하 2:1-4).

성 경: [삼상27:8]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1109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 여기서 `올라가서'(*, 알라)는 보통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오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당시 다윗이 침노한 족속들이 시글락보다 고지대인 바란 광야의 북동쪽 산악 지대에 거주했음을 시사한다(Keil, Smith, Fay). 또한 이 표현은 성전(聖戰)에 있어서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수 4:19; 6:5; 8:11). 따라서 본서 저자는 여기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비록 타국 땅에 도망나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온갖 애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11093; 그술 사람 - `그술'(*, Geshur)은 정확치는 않으나, `교랑'이란 의미인듯하다. 그런데 이 종족은 아말렉 족속처럼 유랑 생황을 하던 족속으로서, 그 당시 어떤 한 지역에 모여서 살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즉 그들 중 일부는 요단 동쪽 지방에(신 3:14; 수 12;5; 13:11, 13; 삼하 13:37). 또 다른 일부는 `가사'와 인접한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같다(신 2:23).

&#11093; 기르스 사람 - 여기의 `기르스'(*, Girz)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었다. 즉 (1) 팔레스틴 중앙부의 그리심 산 근처에 살던 한 종족으로 보는 견해(Smith), (2) 블레셋 땅과 이스라엘 땅의 남부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보는 견해(IDB) 등이있다. 그러나 첫째, (1) (2)의 견해와 관계되는 민족들은 팔레스틴 남부에 위치하고 있던 다윗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없었으며 둘째, 그때 다윗의 또다른 공격 목표였던 `그술 사람 및 아말렉 사람'등이 모두 팔레스틴 남쪽에 거주하던 민족들이며 셋째, 본절은 다윗의 공격 목표가 되었던 세 민족을 `술과 애굽땅으로 지나가는 지방' 곧 팔레스틴의 남쪽에 사는 거민들로 말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위의 세 견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11093; 아말렉 사람 - 이 종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5:2 주석을 참조하라. 이 `아말렉 족속(the Amalekites)은 일찍이 사울의 군대에 의하여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15:7,8), 오랜 세월의 지난 그 당시 아말렉 족속은 다시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한 듯하다(Fay). 그래서 이들은 다시 이스라엘과 블레셋 모두에게 심각한 골치거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11093; 그들은 옛적부터...지방의 거민이라 - 원문에는 본 구절의 앞 부분에 `왜냐하면'이란 의미를 갖는 접속사 `키'(*)가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다윗이 앞에 언급된 세 민족을 침한 까닭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이같은 측면에서 본 구절을 해석해야 하는데, 우선 본 구절을 히브리 원문에 따라 `왜냐하면 그들은 옛날로부터 그 땅의 거민이었기 때문이다'로 바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곧 그 땅의 거민들이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혀왔다는 사실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다윗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혀왔고 또한 괴롭히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Keil).

&#11093; 술과 애굽땅으로 지나가는 - 이것은 다윗이 공격했던 그 땅이 과연 어떤 땅인가를 설명해 주는 구절로 볼 수 있다. 우선 본 구절은 히브리 본문에 보다 가깝게 `너희가 애굽과 술로 들어갔을 때의'로 번역할 수 있다. 즉 본서의 저자는, 15:7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족속을 쳤던 영역에 대하여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라고 언급한것을 염두에 두고 본 구절을 쓴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본 저자는 `그 땅'을 하나님의 군대로부터 엄중한 징벌을 받아야 하는 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15:1-3) 결국 본 구절은 앞에 언급된 세 민족에 대한 다윗의 침공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정당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언급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삼상27:9]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11093; 다윗이...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 다윗의 이같은 행위는 결코 종교적 목적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이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1)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들을 `진멸하라'(*, 아헤라메템)는 명령을 내리지 아니하셨다는 사실, (2)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혹시 `진멸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그 거민들에게 속했던 모든 가축 등의 재산도 동시에 진멸해야 했으나 다윗은 그것들을 진멸치 않았다는 사실, (3) 본서의 저자는 다윗의 이같은 행위를 비밀 유지의 목적상 그렇게 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11절) 등이다.

&#11093; 양...소...나귀...약대...의복을 취하고 - 사실 이처럼 노획물을 획득하는 것이, 다윗이 이스라엘 남방의 세 민족을 공격했던 주된 목적이었다. 즉 다윗은 이러한 노획물로써 (1) 자신에게 딸린 많은 식솔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했으며, (2) 또한 생활이 어려운 유대 사람들도 도와야 했던 것이다(30:26-30).

&#11093;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 다윗이 자신의 본거지 시글락(6절)이 아닌 왕도(王都) 가드로 향한 것을 가리킨다.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아기스에게 약탈물의 일부를 바침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인 듯하다(Smith).

성 경: [삼상27:10]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11093;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 아기스는 자신에게 바쳐진 전리품(戰利品)을 보고 이같은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오늘'은 그 당일에 이스라엘이 남방에 거주하는 민족들에 대한 침공이 행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이번에'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침노하였느냐'(*, 파솨트)는 `벗기다', `강탈하다'란 의미로서, 주로 전리품의 탈취를 목적으로 한 노략과 공격 행위를 가리킨다(8절; 30:1; 31:8; 겔 16:39).

&#11093; 유다 남방...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겐 사람의 남방 - 이같은 다윗의 대답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지극히 애매한 답변을 함으로써, 자신이 아말렉 등을 약탈한 사실을 감추려고 한다. 한편 여기서 `유다 남방'은 브엘세바의 인근 지역을 가리킨다(8:2; 삼하 24:7). 그리고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은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가리킨다(30:29). 여기서 `여라므엘'(Jerahmeel)은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란 의미인데, 이 사람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이다(대상 2:3, 5, 9). 다라서 `여라므엘 사람'(Jerahmeel)은 이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또한 `겐 사람의 남방'은 `아말렉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지역과 인접한 곳을 가리킨다. 이전에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치려고 하면서 겐 사람들도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겐 사람'(Kenites)들을 대피시켰던 일이 있었다(15:6주석 참조). 아무튼 여기서 다윗이 아기스의 질문에 실제로 그가 침노한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8절) 대신 유다, 여라무엘, 겐 족속이라고 답변한 이유는 다윗이 유다와 그 동맹.종속.우호 성읍들을 공격한 것처럼 아기스에게 믿도록 함으로써 아기스의 신임을 더욱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다윗이 유다를 약탈하던 이방 종족들을 공격한 것은 잘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쉽사리 은폐.거짓말을한 것은 당시 이방 땅에 머물러 있었던 다윗의 신앙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즉 다윗의 답변은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인간적 기지(機智)에서 나온 말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선(善)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시글락 정착 시절에는 다윗의 신앙 상태가 연약해졌는데, 이는 블레셋의 시글락 정착 1년 4개월 동안(7절) 다윗이 지은 시편이 하나도 없다는 데에서도 입증된다. 즉 당시는 다윗에게 기도와 찬양이 메마른 때였다(F. B. Meyer).

성 경: [삼상27:11]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본절은 다윗이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 등을 공격하면서 그곳 거민들을 남녀 불문하고 몰살시킨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11093;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 이것은 패전국의 주민을 노예로 붙잡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일은 고대 전쟁에 있어서는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이같은 관습을 따르지 아니하고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11093;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 당시 다윗은 그술, 기르스, 아말렉 등의 남방 족속들에게 자신이 행한 침노 행위가 가드 왕 아기스에게 보고될 것을 두려워 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족속들은 주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들로서 블레셋으로서는 하등 공격할 이유가 없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의 행위는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이적(利敵)행위가 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시기하던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에 의하여 끌려왔을 노예들로부터 전해들은 다윗의 행적을 과장하고 악평하여 보고할 가능성이 많았으며, 또한 끌려왔을 노예들도 다윗에 대하여 앙심을 품은 나머지 다윗의 행적을 과장해서 떠들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다윗의 행적이 사실 그대로 아기스에게 알려지면 그 사실이 과장됐든지 안됐든지 간에, 아기스는 다윗의 그같은 이적적(利敵的)인 공격 행위로 인하여 다윗을 의심하고 또한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다윗은 바로 이 점을 사전에 방지코자 한 것이다.

성 경: [삼상27:12]

주제1: [블레셋 땅에서의 다윗]

주제2: [아기스의 신용을 얻는 다윗]

&#11093;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 이것은 유다 남방 족속들을 공격했다는 다윗의 답변에 `아기스'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음을 뜻한다(10절). 따라서 아기스는 이제 다윗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의구심과 경계심까지 풀기 시작한 것이다.

&#11093; 다윗이...이스라엘에게...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 다윗이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및 그 동맹.우호.종속 성읍들을 침공 몰살시킴으로써, 스스로 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되었다는 뜻이다. 이같은 아기스의 착각은 그가 다윗의 답변(10절)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반영해 준다.

&#11093;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 아기스는 동족을 무자비하게 친 다윗의 행위는 반드시 동족 유대의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다윗은 더이상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이제 평생토록 자신의 심복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여기서 `사역자'(*, 에베드)는 `종', `신하'란 의미인데, 전에 `아기스'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한 `왕'으로(21:11, 12) 본 것과는 많이 대조된다. 즉 이같은 다윗에 대한 아기스의 인식의 전환은, 아기스가 다윗에 대해 품었던 경계심을 이제 더이상 갖고 있지 않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이때 `아기스'는 다윗이 그 자신의 동족을 침노하여 몰살시킨 일로, 다시는 조국 유대 땅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11093; 블레셋...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 여기서 `블레셋'은 가드 왕 아기스를 포함한 그들 모든 족속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전투는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의 연합군에 의해 발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5:8; 29:2, 3).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벤에셀 전투)(4:1-11)이후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전한 데 대하여 일대 복수를 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14;52; 17:50-53; 18:6,30)

&#11093;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 이같은 아기스의 요구는 그로서는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같은 일을 위하여 아기스는 위험 부담을 안채 다윗을 자신의 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27:6, 12). 더구나 아기스는 이미 다윗이 자신의 동족을 침략함으로써 그들과 원수지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27:10, 12)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를 통하여 아기스는 다윗을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11093;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 이 말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다윗의 애매한 답변이다. 다윗이 이같이 애매한 답변을 한 까닭은, 그는 아기스의 요구대로 자신의 동족을 공격할 수도 없고, 또한 그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들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히 피할 수 있는 훌륭한 은신처를 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 저자는 이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기술함으로써, 다윗이 극도의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11093; 그러면 내가...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의 애매 모호한 답변을 (1) 그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2) 그리고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어떤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머리지키는 자'는 `경호 대장' 또는 `시위 대장'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 나라 왕국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위대한 전사(戰士) 다윗이 한낱 이방 왕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비극적 결과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의 손길을 전적 의뢰하여 조국 이스라엘 땅을 끝까지 떠나지 말았어야 옳았다. 따라서 당장 목전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다윗이 우상의 나라 블레셋 땅으로 스스로 찾아든 것은, 기근을 피해 언약의 땅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창 12:10-20).

성 경: [삼상28: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1109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장사하였고 - 이 사실은 이미 25:1에서 언급되었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이같은 사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울이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魂)을 불러내려는 노력을 한 사실과 연결시킨다(8절).

&#11093;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쫓아내었었더라 - 이같은 종교적 숙정(肅正) 행위는 분명히 사울의 집권 초기에 이뤄졌을 것이다(Smith). 이 같이 볼수 있는 까닭은 (1)사울은 왕위에 오르는 예식이 행해질 때에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좇을 것을 명령받았으며(12:14), (2)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에게 강력히 요구되던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18:10-14)인 바, 처음 사울은 율법 준수에 대한 열심으로 이러한 일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의 `신접한 자'(*, 오보트)에 대해서는 어원학상의 여러 이론(異論)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즉 (1) `오브'(`오보트'의 단수)를 비히브리어계의 단어 `아브'에서 온 것으로 보고, 어떤 `제의적(祭儀的) 구멍'에서 유출되는 영혼 혹은 유령이라는 해석(Hoffner), (2) `오브'를 어원학적으로 `조상' 및 `아버지'의 의미가 있는 `아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형상' 및 `도구'라는 해석(Lust), (3) `오브'를 `가죽 부대'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오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귀신이 들어가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복화술사의 배'를 가리킨다는 해석(Smith), (4) `오브'를 `어리석은',`공허한'이란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우브'(*)에서 온 말로 보고, `공허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해석(Lange)등이 있다. 그런데 이같은 여러 견해 중 첫째, 본절의 `쫓아내었더라'(*, 헤시르)란 말은 우상과 같은 유형적 형상의 제거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며(왕하 18;4; 23:19; 대하 17:6; 30:14; 사 3:23) 둘째7절의 `신접한 여인'은 문자적으로 `오브를 다스리는 여자'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등에서 볼 때, '오브'는 (2)의 견해처럼 죽은 사람의 혼(魂)을 불러내는 데 사용되는 어떤 '형상'이나 '도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미신적 도구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 사후(死後) 세계와 교통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레 19;31).

&#11093; 박수(*, 이드오님) - 이것은 `알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점(占) 또는 마술 등의 방법을 통하여 미래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자, 곧 점장이나 마술사를 가리킨다(Lust, Fay).

성 경: [삼상28: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11093; 블레셋 사람이...수넴에 이르러 - 여기서 `수넴'(Shunem)은 `두 개의 휴식처'란 의미이다(Gesenius). 그 위치는 침공해 오던 블레셋 군을 및이하여 사울이 진을 쳤던 `이스르엘'(29:1; 수 19:17, 18)의 북쪽 약 5.6km 지점으로, 바로 이 지점은 `모래 언덕(창 12;6)의 남서쪽 기슭이었다. 즉 이스르엘 계곡에 의해 분리되는 길보아 산 맞은편의 소(小) 헬몬산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Conder, Robinson). 아마도이때 블레셋 군대는 `아벡'(4:1; 29:1)에서 소집되어 `수넴'은 가나안 정복 후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며(수 19:18), 동녀(童女) 아비삭의 고향이고(왕상 1:3), 또한 엘리사를 영접한 귀한 여인의 고향이기도 하다(왕하 4:8-10).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술렘'(Sulem)이다(Eusebius).

&#11093; 사울이...길보아에 진 쳤더니 - '길보아'(Gilboa)는 사마리와와 갈릴리 사이의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에 있는 길이 약 12.8km, 그리고 폭 약 8km 정도의 산악 지대이다. 그곳 중 가장 높은 지대는 해발 약 565m 정도이다. 이 길보아 산악지대의 특징은,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해발 약 10m의 에스들렐론 평지에 다다르며, 반면 북쪽과 동쪽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어 요단강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때 사울은 바로 이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스르엘'(Jezreel)에 진을 쳤다(29:1).

성 경: [삼상28: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사울은 불과 수 마일 거리에서 진치고 있는 블레셋의 엄청 많은 군대로 인하여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11093; 보고(*, 라아) - 미세한 것을 들여다 보듯이 세심하게 탐색하는 행동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16:6; 23:23; 25:15; 왕하 7:13).

&#11093; 두려워서(*, 야라) - 이 말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점층적으로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8:29).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보고 사울이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를 강력히 시사한다.

&#11093; 떨린지라(*, 하라드) - 이 단어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의 기습 공격으로 인하여,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나타냈던 당혹스럽고 어쩔줄 모르는 심리적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4:15). 바로 이같은 단어는 사울의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13:7; 사 32:11). 아무튼 사울은 과거 대(對) 블레셋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14:21-23, 31, 47; 17:53), 금번 길보아 전투를 맞이하여 `두려워 크게 떨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엘라 골짜기 전투(17:1-3) 이후 가장 대규모의 전투인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힘의 원천이요 전쟁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더이상 자신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Keil, Clericus).

성 경: [삼상28: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11093; 사울이...묻자오되 - 여기서 '묻자오되'(*, 솨알)는 '요구하다' 혹은 '문의(問議)하다'란 의미로서, 사울은 이때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15:26; 16:14)을 잘 알면서도, 이처럼 사울이 허둥지둥 여호와를 찾는 모습은 블레셋 군대로 인한 사울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준다.

&#11093; 여호와께서...대답지 아니하시므로 -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희귀는 어느 인물 또는 어느 시대의 사악성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3:1).

&#11093; 꿈으로도 - '꿈'(*, 할롬)은 사람이 자의식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을 잘때, 외부의 변화없이 인간 내면(內面)의 사고 작용 및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구약 시대의 계시(啓示) 방편이다(창 20:6; 민 12:6; 단 2:4).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꿈, 우림, 선지자 등 3가지 계시 방편은 저급한 단계에서 보다 고급한 단계의 순서인 것 같은데(Fay), 꿈은 그 전달 방법이 간접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비점진된 최하급의 계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Erdman).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라도 계시적(啓示的)성격의 현몽(現夢)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을 것이다.

&#11093; 우림으로도 - 여기의 '우림'(Urim & Thummin)의 약칭이다(출 28:30 주석 참조; 민27:21). 그런데 사울이 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철저히 사울의 자업 자득(自業自得)이었다. 즉 사울은 우매한 판단으로 놉(Nob)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킴으로써,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비아달'로 하여금 `우림과 둠밈'이 들어있는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로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22:18-20; 23:6). 그러나 당시 사울에게 '우림과 둠밈'이 없었고, 또한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대제사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추측컨대, 사울은 놉(Nob)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8,19) 이후 성막을 기브온 자기 궁성(宮城)으로 옮긴 다음 엘르아살 계열의 아히둡의 아들 '사독'(Zadok)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던 것 같다(대상 16:39). 그리고 이에 덧붙여 본래의 것을 본뜬 모조(模造) '우림과 둠밈'도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 사후 다윗 시대의 두 명의 대제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써도 입증된다(삼하 8;17; 15:24, 29, 35; 대상 15:11; 18:16). 한편 사울의 이러한 시도는 (1) 놉 제사장 학살 사건 이후 민심(民心)을 수습하고, (2) 자신의 측근들로 제사직을 독점하고자 한 정치적 계산 또는 왜곡된 종교적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울의 '우림을 통한 문의'에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리 만무한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0-261; Smith, Fay).

&#11093; 선지자로도 - 하나님의 대선지자 '사무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3절; 25:1). 또한 그밖의 선지자들도 이미 하나님께서 버린(13:13, 14; 15:26; 16:14) 사울의 왕국을 떠나 망명객 다윗에게로 도망을 쳤다(22:5).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선지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튼 꿈과 우림과 선지자는 모든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저냐 받는 방편이었다(15:10, 11; 23:9-12). 하지만 사울은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15:1-23).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만날 만한 때에', 즉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기회가 지나가지 전에 하나님을 찾아야한다는 교훈을 절실히 암시해 준다(사 55:6; 고후 6:1, 2).

성 경: [삼상28: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11093;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 - , 바알라트 오브)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11093; 물으리라(*, 다라쉬) - '자세히 묻다'란 의미이다(신 13:14; 시 9:12; 111:2).

&#11093; 엔돌에...있나이다 -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성 경: [삼상28: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11093; 사울이...변장하고 -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같다(Fay).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울이 위와 같이 철저히 변장을 한 까닭은 신접한 여인이 살던 엔돌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은, '엔돌'이 블레셋의 진영과 인접한 곳이었으므로, 혹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한 것이다. 즉 만일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경우 그 의복에 의하여 그가 이스라엘 왕 사울임이 밝혀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맹렬한 공격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왕상 22:30).

&#11093; 밤에...이르러 - 사울은 변장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일부러 밤 시간을 택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이렇듯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11093; 신접한 술법으로 -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 카삼)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레 19:31; 20:27).

&#11093; 사람을 불러 올리라 - 즉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8: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11093; 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11093; 어찌하여...올무를 놓아...죽게 하려느냐 - 이 말은 신접한 그 무녀(巫女)가 변장한 사울을 몰라봤음을 말해 준다. 즉 이때 그녀는 사울 일행을 자신과 같은 점치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죽이기 위하여(출 22:18; 레 20:27; 신 18:11) 왕의 명을 받고 그곳으로 온 왕의 사신들로 알았던 것이다. 이같은 그녀의 판단은 (1) 이전에 사울이 복술 행위를 엄히 금지시켰으며(3절), (2) 사울 일행은 무녀의 눈에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한편, 비록 밤늦게 방문한 낯설은 사울 일행에 대해서는 그 무녀(巫女)가 이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라도, 그당시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통한 복술을 베풀어 유명한 무녀로 통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본절에서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사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11093;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여호와께서 사시는 것처럼, 또는 여호와께서 살아 존재하시는 한 맹세한 사항이 확실이 이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짐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 맹세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이다(25:26).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삼상28:1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11093;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 참조).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11093;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 사울이 많은 사람 중 하필 사무엘의 혼을 요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사무엘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람으로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조언자 역할을 담당했었으며(10:1; 15:1), (2) 또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7:10-12),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울은 그때 이같이 사무엘을 부름으로써, 그로부터 블레셋과의 싸움과 관련해서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하여 조언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사울은 다윗과 관련된 자신의 미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8:1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11093;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즉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Henry, Grotius, Patrick), (3) 본문의 '사무엘'(*, 쉐무엘) 앞에 '이름'(*,쉠)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등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네가지의 견해 중 (1)의 견해는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3)의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또한 (4)의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그 무녀가 본 것은, (2)의 견해대로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11093; 큰 소리로 외치며...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 이같은 무녀(巫女)의 언급은, 그녀가 그때까지는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한 인물이 사울인 줄 몰랐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비록 사울은 거구의 소유자여서(10:23) 타인의 눈에 쉽게 띄일 여지가 많았으나, 그래도 당시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8절), 무녀의 눈에 의해서 간단히 분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기서 어떻게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사울인 줄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추측컨대, 그때 그 무녀(巫女)는 사울이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울인줄 몰랐으나, 사무엘의 형상을 보는 순간 그가 사울인 줄 깨달았을 것이다. 즉 그 무녀는, 블레셋의 침공이 격렬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사무엘의 혼을 부를 사람은 그 전쟁으로 인하여 최악의 곤궁에 빠져있을 사울 밖에는 달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Keil, Lange, Klein). 더구나 그녀는 사울의 큰 키를 이미 본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3, 9절) 두려움과 공포에 차서 즉각 큰 소리를 내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1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11093; 왕이...이르되 두려워 말라 -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무당과 박수를 축출시켰던 장본인이다(3절). 따라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현장을 그 사울에게 목격당한 그 무당 여인으로서는 큰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9절).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은 그 무녀(巫女)에게 '두려워 말라'라는 말로 안심 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卜術) 행위 조차도 서슴없이 독려하는 자아 모순적인 작태를 드러내고 있다.

&#11093;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 이 질문은, 그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Smith).

&#11093;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 여기의 '신'(*, 엘로힘)은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Hertzberg, Klein),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Keil, Smith).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삼상28:1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11093; 그 모양이 어떠하냐 -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11093;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 사무엘이 83세에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25:1 주석참조), 사단적 유령이 이같이 '노인'의 모습으로 무당에게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1093;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 여기서 '겉옷'(*, 메일)은 발목까지 내려오는긴 망토식 가운으로서,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구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입었던 옷이다(출 28:4; 레 8:7; 삼하 13:18; 대상 15:27), 사무엘도 생전에 선지자의 외투로서 이같은 겉옷을 입었었다(15:27). 결국 그 무당은 자기가 본 형상의 주인공이 '노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이같은 '겉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가 사무엘임을 넉넉히 느꼈을 것이다(Hertzberg).

&#11093;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절하니라 - 이것은, 그때 사울이 사무엘의 형상을 직접 봤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울은, 그 접신녀가 '노인'과 '겉옷'을 언급한 사실로 인하여,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본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사울은 무녀가 사무엘이 올라온 곳이라고 암시하는 곳을 바라보며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넙죽 절을 한 것이다.

성 경: [삼상28:1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1109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11093; 나로 분요케 하느냐 - '분요케 하느냐'(*, 히르가즈타니)는 '격분하다', '진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라가즈'(*)의 사역형으로서 '안식을 방해하다'(disquit, KJV; disturb, NIV)란 뜻이다(렘 50:34). 특히 이 단어는 시돈의 왕 타브닛의 비문에서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Klein). 따라서 이 단어는 무덤을 평온하게 안식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고대 중근동의 내세관과 잘 부합된다(Klein; 욥 3:13-19; 사 14:9). 아울러 이 말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지하 세계인 음부(스올)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히브리인들의 고대 사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11093; 심히 군급하니이다 - 여기서 '군급하다'(*, 차르)는 대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하여 당하는 커다란 고통을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24:13; 욥 6:23; 7:11). 따라서 영역본들(RSV, NIV)은 '커다란 재난에 처해있다'(be in great distress)란 말로 번역했다.

&#11093;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 사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23:17).

&#11093;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시기로 -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 다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6절에는 언급되어 있는 계시 수단인 '우림과 둠밈'을 생략한 것은 '우림과 둠밈'(Urim & Thummin, 출 28:30 주석 참조)이라는 계시 수단은 다른 것과는 달리 자신의 극심한 잘못 때문에 상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Talmud, Berach, Xii. 2). 즉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6절 참조.

&#11093; 행할 일을 배우려고 - '행할 일'은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는 방책(方策)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8:1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11093; 네 대적이 되셨거늘 - 이 말은 칠십역(LXX)의 번역대로 '네 이웃의 편이 되셨거늘'이란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15절).

&#11093;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만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등을 돌리셨다면,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묻는 행위는 가당치 않다는 뜻의 반문(反問)이다.

성 경: [삼상28:1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본절의 언급에 대해서는 15:27, 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28:1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11093;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 이는 사울이 왕이 된 후 하나님께 불순종한 여러 사건 중 '아말렉 진멸 명령'(15:3)을 어긴 사실이 가장 치명적인 사울의 범죄 행위임을 시사해 준다. 아마도 출애굽 후 가나안으로 향하는 선민 이스라엘의 여정을 최초로 그리고 비겁하게 방해하고 적대한(신 25:17-19) 아말렉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회심(會心)의 복수전을 사울이 그의 사악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망쳤기 때문일 것이다.

&#11093;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행하셨고 - 본절은 이때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5:3)을 이행치 않음으로써(15:9) 나타난 결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15장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울에게 왕위(王位) 박탈 선언을 했다는 점(15:26)과 연결하여, 여기서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은 사울을 왕의 자리에 더이상 앉아 있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작업중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11093;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붙이시리니 - 여기서 '붙이시리니'(*, 나탄)란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의지로 어떤 당사자나 나라에게 확실한 승리를 부여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11093;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사무엘처럼 '죽은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는 뜻으로, 곧 '죽을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네 아들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죽을 사울의 세 아들, 곧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가리킨다(31:2; 대상 10:2).

성 경: [삼상28:2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11093; 사울이...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 무릎을 꿇고 있던 상태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쓰러져버린 것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11093; 종일 종야에...먹지 못하였음이라 - 사울은 전투에 앞서 금식을 하곤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14:24). 이와 유사하게 당시에도 (1) 사울은 엔돌의 이 접신녀에게 자신이 행할 바를 묻기 위하여 (2) 그리고 엔돌로 향하는 과정에서 블레셋의 수비망을 뚫고 가야한다는 어려움을 예상하여(Klein) 일부러 금식을 하였던것 같다. 그러나 그러나 이 견해와는 달리, 먼거리를 오느라고 식사를 하지 못했으리라는 가정은(1) 당시 이스라엘의 진지인 이스르엘(29:1)에서 무당이 거주하던 엔돌까지의 거리는불과 8km 정도(Aharoni), 즉 두 시간 거리밖에 안되며 (2) 23절에서는 사울이 주위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먹기를 거부한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결코 성립되지 아니한다.

성 경: [삼상28:2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11093;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 이같은 언급은, 그 접신녀가 사울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사울은 접신녀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을(15절) 마치 사무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말로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접신녀는 자신과 사울 사이의 시계(視界)를 흐리게 할 목적으로 향을 피웠을 가능성도 있다(Smith).

&#11093;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 여기서 '고통함'(*, 바할)은 '두려워 떨다'란 뜻이다(창 45:3; 출 15:15; 삼하 4:1; 시 6:2). 그리고 '보고'(*, 라아)는 자세하게 관찰하는 행동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같은 행동 뒤에 취한 접신녀의 태도는 국도의 공포로 떨고 고통스러워 하며, 또한 육체적 탈진으로 기력이 쇠잔해 있는 사울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Hertzberg, Smith).

&#11093;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 '왕의 말씀'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 달라는 사울의 명령을 가리킨다(11절).

&#11093;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 사무엘을 불러내라는 사울의 명령(11절)은 초혼(招魂)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 그당시 상황으로 인하여(3절), 무녀에게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으로 들렸을 것이다(9절). 그러므로 그 무녀가 그같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1) 사울로부터 목숨 보장에 대한 맹세를 이미 받았고(10절) (2) 또한 당시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물을 통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울이 자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음을 알고 있는 마당에서, 그 무녀(巫女)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결코 생명을 건 모험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라는 무녀의 말은 자신의 공을 자찬(自讚)하는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8:2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본절에 언급된 무녀의 행동은 사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접신녀의 이같은 동정도 사울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는 정신적이며 근본적인 원인을 결코 제거할 수는 없었다.

성 경: [삼상28:2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11093;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 이것은 당시 만사가 귀찮은, 그리고 거의 자포 자기의 상태에 있는 사울의 탈진한 심리 상태를 잘 반영해 준다.

&#11093;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낙담한 정신 상태를 어느 정도 수습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따라서 사울은 지금까지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침상에 앉았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침상'(*, 밋타)은 방의 벽을 따라 길게 배열된 푹신한 긴 의자를 가리킨다(Keil, Thenius, Smith).

성 경: [삼상28:2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11093; 살진 송아지...잡고 - 이것은 사울에 대한 무녀의 정성이 극진했음을 잘 시사해 준다(창 18:7; 눅 15:23).

&#11093; 무교병 - 이것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으로, 급히 장만할 수 있는 음식이다(출12:8, 15-20). 이때 그 무녀는 보다 먹기 좋은 유교병은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준비하지 못한 듯하다.

성 경: [삼상28:2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11093; 그 밤에 가니라 - 날이 밝을 경우 (1) 블레셋 군대에게 발각될 위험과, (2) 그리고 블레셋의 공세가 본격화될 것이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이같 이급히 서두렀을 것이다(Klein). "실로 사울은 자신과 아들들과 백성들의 죽음과 패배를 괴로워하고 슬퍼하기에는 그 양심이 죄로써 너무 둔감해져 있었다. 따라서 사울은 그의 강퍅한 심령을 이끌고 자신의 운명을 맞으러 갔다. 즉 한때 여호와의 신이 임했으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되는 축복을 누린 자 - 사울은 이처럼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맞으로 간 것이다"(O.V. Gerlach; 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9-270).

성 경: [삼상29:1]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본 절의 내용은 28:1, 4에 대한 또 다른 각도에서의 언급이다.

&#11093; 블레셋 사람들은...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 블레셋 사람들의 1차 군사 집결지는 '아벡'(Aphek)이었다. 블레셋 족속은 특별히 다섯 방백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부족 연합 성격의 정치 체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5:8), 이처럼 집결지를 정해 그곳으로 각 부족의 군사들이 총집결했던 것이다. 한편 '아벡'은 '요새'란 뜻으로, 이와 동일한 지명이 팔레스틴 여러 곳에 있다. 혹자들(Keil, Fay, Conder)은 여기 '아벡'을 잇사갈 지파에 속하는 오늘날의 '엘 아풀레'(el-Afuleh)로 추정하여, '수넴'과 멀지 않은 곳이라고 보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어쩌면 엘리 제사장 시절,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블레셋 족속에 의하여 이미 병력 집결지로 사용되었던 '에벤에셀' 근처의 '아벡'일 가능서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4:1).

&#11093;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 '이스르엘'(Jezreel)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림'이란 뜻인데, 헬라식 이름으로는 '에스드라엘론'(Esdraelon)이다. 이곳은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28:4), 기손 강의 영향으로 토지는 비옥하고, 길게 평원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여기의 '샘'(*, 아인)은 '이스르엘'동남쪽 약 2.8km 지점에 있고, 길보아 산지 북쪽에 수원(水源)을 갖고 있는 우물로서, 오늘날의 '아인 잘루드'(Ain Jalud, '골리앗의 샘'이란 뜻)와 동일 지역으로 인정되고있다(Robinson). 그런데 이 우물은 화강암 절벽에서 흘러 내려온 물에 의하여 형성된 큰 웅덩이의 모양으로 되어있다고 한다(Conder). 한편, 70인역(LXX)은 여기 '샘'을'엔돌'(*)로 번역하고 있는데 타당성이 없다(Keil, Smith, Fay).

성 경: [삼상29:10]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11093; 네 주의 신하들 -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다윗의 휘하 병력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을 이와 같이 표현한 까닭은, 다윗의 추종 병력들이 원래는 사울의 휘하에 있었으나 이후 다윗에게로 넘어온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22:2;23:13;대상12:19-21).

&#11093; 새벽에 일어나라 - 이는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의 참전(參戰)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한 때가 거의 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11093; 밝거든 곧 떠나라 - 이같은 아기스의 명령은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의 눈에 더이상 띄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즉 날이 밝은 그 다음날 아침에도 다윗이 블레셋 방백들에 의하여 발견된다면, 다윗은 또다시 그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고, 급기야는 블레셋 땅에서 완전히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도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7절).

성 경: [삼상29:11]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11093; 다윗이...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가고 -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시글락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블레셋 방백들로 하여금 다윗의 참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심으로써, (1)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데 있어 장애가 없도록 하셨으며, (2) 또한 때마침 아말렉의 침공에 의하여 납치되었던 자신의 가족등을 구출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11093; 일찌기 아침에 일어나서 떠나 - 다윗은 진퇴 양난의 위기에서 결국 동족 이스라엘에게도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하고, 또한 아기스 왕에게도 전혀 의심받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거처인 시글락으로 떠났다. 한편, 본절은 B.C. 1010년에 발발한 길보아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전투를 계획했던 블레셋 왕 아기스는 그당시 다윗을 상당히 신임하고 있었던 터라 다윗을 그 전투에 참가시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어떠한 행동을 취하든 결과는 반역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당신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인의 신하가 되어 있던 다윗이었지만,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용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표시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던 다윗에게 그 전투에 참전할 수 없도록 섭리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같은 사실들을 통해 (1) 인간의 실수와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마 26:14-29)과 (2) 당신이 택하신 자를 결코(그가 범죄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버리지 않으실 뿐 아니라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신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다(고전 10:13).

&#11093; 이스르엘 - 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9:2]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11093;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 - 여기서 '장관들'(*, 세렌)은 본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방백'으로 번역된 단어이다(5:8, 11;6:4, 12, 18;7:7). 즉 이들은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을 그들의 수도 곧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수 13:3)을 중심으로 다스리는 최고 지도자들을 가리킨다(5:1-12).

&#11093;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 이것은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 밑에는 천부장과 백부장이 있어서, 병력이 그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이같은 언급은, 블레셋의 군대가 병력도 많을 뿐만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잡혀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의 '영솔하여 나아가고'(*, 오브림)는 '건너가다','목적지를 향해 어느 곳을 통과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바르'(*)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블레셋 군대의 행진이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Davidson). 그런데 여기의 '영솔하여'는 원문에는 없는 말로서 문맥상의 의미를 보강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이다. 그렇다면 이때 블레셋의 군대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 이때 블레셋 군대는 자신들의 1차 집결지인 '아벡'<1절>을 떠나 자신들의 진(陳)칠 곳인 '수넴'<28:4>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같이 보아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나아가고'(아바르)라는 동사는 먼 거리를 진행하는 행동을 나타낼때 주로 사용되며(창 33:3;민 13:32;신 29:16), (2) 다윗이 '아기스'를 제외한 다른 블레셋 방백들의 거부에 의하여 회군(回軍)하였을 때, 그 당시 그 자신이 위치했던 지점에서 '시글락'(27:6)까지 삼일만에 도착했다는 사실(30:1) 때문이다. 만일 다윗이 그 당시 '수넴'(Shunem, 28:4)에 있었다면, 자신의 거주지인 시글락까지 결코 삼일만에 도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Smith). 그러나 '아벡'에서 '시글락'까지는 약 75km 정도이므로, '아벡'에서 '수넴' 쪽으로 조금 진행한 지점에서 다윗의 군사가 다시 시글락까지 회군(回軍)하는 데 삼일 걸렸다는 사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11093; 다윗...아기스와 함께...나아가더니 -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다윗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던 아기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28:1). 가드 왕 아기스는 그때 다윗을 자신의 영원한 사역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27:12).

&#11093; 그 뒤에서 - 다윗과 그의 일행은 아기스의 후군(後軍)이 되어 본전투에 참여하였음을 암시한다.

성 경: [삼상29:3]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11093; 이 히브리 사람들 - 다윗과 그의 휘하 병력을 가리킨다. 여기서 블레셋 방백들이 이들을 이같이 '히브리 사람'(*, 이브림)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방백들이 이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7).

&#11093;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 - 아기스의 이 말은 다윗이 전에는 사울의 신하였으나 지금은 그와 원수가 되어 아기스 자신의 신하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블레셋 사람들까지도 다윗이 사울과 원수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아기스는 자신의 말이 다른 방백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11093;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 - 여기서 '여러 날 여러 해'란 표현은 다윗이 충실한 신하로서 아기스 자신과 함께 오래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독특한 표현이다. 실제로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한 기간은 '일 년 넉 달'이었다(27:7).

&#11093;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 이는 아기스가 그때까지, 다윗이 자신 몰래 그술, 기르스, 아말렉 등 이스라엘 적대 세력들을 침노했던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27:8, 12). 그리고 사실 다윗은 이러한 남방 민족들을 아기스 몰래 침노한 사실 이외에는 아기스에게 충성을 다하여 큰 신임을 얻었던 것 같다(Smith).

성 경: [삼상29:4]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1109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 이는 다윗을 두둔하는 가드 왕 아기스에 대한 블레셋 방백들의 반발이다. 즉 블레셋의 다른 네 방백들은, 아기스가 자신들의 말보다 다윗을 더 신뢰하는 데 대하여 이같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한편 여기의 '방백'(*, 사르)은 '군주', '우두머리', '지휘관' 등의 의미로서, 왕보다는 낮은 계급의 소유자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창 12:15;출 1:11;삼하 2:8). 아무튼 본절은 블레셋 방백 회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당시 블레셋에는 5인의 방백이 있었으며, 그 방백들 중에서 한 명이 블레셋 연방 체제(聯邦體制)를 대표하는 왕이 되었다(6:4,16;수 13:3;삿 3:3). 하지만 이 왕은 절대적 왕권을 갖지 못하고 방백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따라야 했으며, 방백들의 제의를 무시하고 자의(自意)로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6:1-16). 여기서 아기스는 가드의 방백이면서 위와 같은 제한적 왕권을 지닌 블레셋의 왕이었다. 따라서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의 참전 문제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아기스 왕의 뜻을 꺾고 다윗을 되돌려 보내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블레셋의 독특한 통치 체제에 기인한다. 그러나 다윗이 길보아 전투에 참전할 수 없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때문이었다.

&#11093; 왕이...정하신 그 처소 - 즉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식읍(食邑)으로 부여한 '시글락'(Ziklaq)을 가리킨다(27:6).

&#11093;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 이 말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군대가 진치고 있는 곳의 맞으편 언덕에 위치할 자신들의 진지에서, 전투를 위하여 이스라엘 군대와 자신들의 군대 사이의 계곡 혹은 들판으로 내려가는 행위를 가리킨다(Keil,Smith, Fay).

&#11093;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 이 말은 다윗이 막상 싸움에 임하여서는 블레셋을 배반하고 사울의 편에 서서 오히려 블레셋을 역공격하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블레셋 방백들은 이전에 믹마스에서 이스라엘과 전투할 때(13:5)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투항하였지만, 그들이 다시 블레셋에 대항했던(14:21) 뼈아픈 경험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대적'(*, 사탄)은 정관사(*, 하)와 더불어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악령의 두목 '사단'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대상 21:1;욥1:6;시 109:6;슥 3:1). 그러나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평강을 방해하는 자', 혹은 '은밀하게 대적하는 자'란 뜻이다(Hertzberg).

&#11093;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 이는 다윗이 사울의 편에 다시 서기 위하여 어떤 예물을 그에게 가져갈 것이라는 확신적 질문이다. 여기서 '화합하리이까'(*, 이트라체)는 '기쁘게 하다', '화해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라차'(*)의 재귀적(再歸的) 사역형이다. 따라서 여기의 '화합하리이까'는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울을 즐겁게 하는 것, 즉 블레셋을 배반한 후 도리어 사울을 도와서 블레셋에 역공(逆功)을 펼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또한 여기서 '그 주'는 사울 왕을 가리키는데, 이는 블레셋 방백들이 사울 왕에 대한 다윗의 신실함에 대해 의혹을 끝까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아기스가 다윗을 자신의 '영원한 사역자'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과는(27:12) 크게 대조된다.

&#11093;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아니하겠나이까 - 이것은 다윗이 사울과 화해하기 위하여, 즉 사울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많은 블레셋 병사들의 머리를 그에게 예물로 바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전에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되기 위하여, 즉 사울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 이백을 그에게 바친 일이 있었다(18:27). 아무튼 블레셋 방백들의 이같은 언급은 그들이, 만일 다윗을 전쟁터로 데려가면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손실을 입힐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삼상29:5]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방백들]

본절은, 다윗이 전에 골리앗을 꺾은 엘라 골짜기 전투(17장)에서 사울과 함께 블레셋에게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혔던 장본인이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언급이다(21:11). 이전에도 가드 왕 아기스는 바로 이같은 언급을 부하들로부터 전해 들음으로써, 자신에게 망명왔던 다윗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었다(21:12). 아무튼 다윗의 무공을 칭송하는 이스라엘 여인들의 이 노래는 당시의 민심(民心)이 반영된 채 이스라엘 인근 지역의 국가들 사이에도 익히 알려졌던 것 같다.

&#11093;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 18:7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9:6]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11093;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자신의 말의 신실성(信實性)을 강조적으로 표현하는 히브리적 맹세의 한 방식이다(26:10). 그러나 여기에 언급되는 아기스의 이 맹세는, 그가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기스는 신실한 맹세를 하고자 할 때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같이 맹세한다는 것을 다윗으로부터 배운 후, 이제 오히려 그는 자신의 심경을 진지하게 표출하는 이 마당에서 도로 다윗에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11093; 네가 정직하여 - '정직하여'(*, 야솨르)는 어떠한 악의(惡意)나 사심(私心)없이 곧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형용사이다(출 15:26;신 12:28;수 9:25).

&#11093;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 '네가 정직하여'와 동일한 의미이다. 아기스는 이같은 동의어를 반복 언급함으로써 다윗의 의로움을 강조적으로 칭찬하고 있다. 한편 아기스의 이러한 말을 통해 우리는 당시 이방 사회에 거주하던 다윗이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비록 이방 땅으로 피신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신중하게 생활했다. 이 사실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경적 삶의 원리를 일깨워 준다. (1) 성도의 어느 곳에 처하든지 정직하고 진실한 삶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마 5:13-16). (2)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한 까다롭게 대하는 상전들에게도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듯 진실하게 봉사해야 한다(벧전 2:18). 이처럼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실천적 삶으로써 하나님을바로 섬기는 자가 산 믿음을 소유한 자요(약 2:26),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이다(롬 14:18).

&#11093; 군중(*, 마하네) - 군대의 진영 혹은 진지(陣地)를 가리킨다(4:3; 13:17; 17:1).

성 경: [삼상29:7]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11093;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 사실 이 같은 아기스의 명령은, 다윗에게는 매우 기다려지던 바였다. 사실 다윗은 그때 블레셋 군대와 합세하여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과 절대로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전투에 참여치 않으려 노력했었다(28:2). 그러므로 그때 다윗을 시글락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하여 이같은 말을 하는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에 대하여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겠지만, 그 당사자인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였을 것이고,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11093;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 - 문자적으로는 '장관들의 눈에 악함이 보이지 않도록'이란 뜻이다. 이러한 당부는 아기스가 다윗을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사역자'로 삼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즉 만일 다윗이 다른 블레셋 방백들에 의하여 더이상 눈 밖에 나게 된다면, 아기스도 다윗을 계속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더라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삼상29:8]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본절에 나타난 바 다윗의 이 항변은 분명히 그의 양심에 반(反)하는 것이었다. 사실 다윗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할 수도 없었고, 또한 전투를 하고 싶은 마음도 결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같은 거짓된 말을 한 까닭은, (1) 블레셋 방백들의 의심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고, (2) 또한 아기스가 한 말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Keil). 만일 그때 다윗이 잠잠히 있었다면, 아기스는 다윗을 고소한 다른 방백들의 말(4, 5절)을 참말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1093; 내 주 왕의 원수 - 여기서 '내 주'는 다윗의 의도를 따른다면, 사울을 가리킬 것이 분명하다(McCarter). 이처럼 다윗은 '내 주 왕'을 내심 사울에게 적용시켰지만, 아기스는 다윗의 교묘한 말투에 의하여 '내 주 왕'을 자신에 대한 명칭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같은 말투를 사용함으로써, 아기스가 자신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도 품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도 가책이 없도록 하려고 하였다. 한편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내 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이 사울을 다윗의 '주'로 말했던 것<4절>에 항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다윗의 이같은 말투는 상대를 속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명예스럽지 못한 테크닉'(word-play)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9:9]

주제1: [위기를 모면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철수]

&#11093;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천사'를 의미하는데, 아기스의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는 항상 인간들을 위하여 좋은 일만 한다는 일반적 관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다윗의 정직함과 의로움을 강조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11093; 내가 아나 - 여기의 '아나'(*, 야다)는 체험적으로 깨달아 자세히 아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11093; 그가...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 이것은 블레셋의 집결지 '아벡'으로부터 그들이 진을 칠 곳인 '수넴'까지 진군하는 것을 가리킨다(28:4). 한편 '올라간다'는 말은 북상(北上)한다는 뜻과 아울러 블레셋의 진지인 '수넴'이 '모레 언덕'이라는 고지대(高地帶)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삼상30:1]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11093; 다윗...시글락에 이를 때. - 이것은 다윗과 그의 일행이 블레셋 방백들의 거부로 인하여 (29:3-5)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참여치 않고, 블레셋 군대를 떠나 다시 자신들의 본거지인 '시글락'에 돌아온 사실을 가리킨다(27:6).

&#11093; 제 삼일에 - 여기 '삼일'은 다윗 일행이 블레셋 군대로부터 떠난(29:11) 제 3일을 가리킨다(Keil). 이 기간 동안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아벡'으로부터 '시글락'까지 약75km를 행군 했음이 분명하다(29:1).

&#11093;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 아말렉 족속들의 이같은 행위는 (1) 이전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행한 침노 행위(27:8, 9)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지니며(Fay, Keil), (2) 또한 생존을 위한 약탈물 확보(Smith) 등이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범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곳을지키던 다윗이 북쪽 '아벡'으로 이동함으로써, 그곳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기서 '남방'은 유다의 남부 지역을 통칭하는 '네게브'(Negeb)를 가리킨다(27:10). 그런데 원래부터 이곳은 항상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받던 지역이었다(14:48). 그리고 '침노하였는데'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파솨트'(*)는 '홑뜨리다', '벗기다'란 의미로서, 이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침략 행위라기 보다는 갑자가 급습하여 필요한 노획물을 약탈해 가는 노략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27:8).

성 경: [삼상30:2]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11093;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 - 다윗 일행의 가족들인(27:3) 이들은 여자들인 관계로 다윗과 함께 전투에 참여치 않고 시글락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한편, 3절은 이 여자들 외에도 자녀들까지 아말렉 사람에게 모두 잡혀갔음을 말하고 있다.

&#11093;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끌고...갔더라 - 아말렉 사람들이 이같이 사로잡아 간 까닭은 그들이 결코 인정이 많아서가 아니었다(15:2). 다만 (1) 무장하지 않은 연약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공격에 대항치 않았으며 (2) 애굽에 노예로 팔 경우(창37:25-28)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이방 아말렉 족속의 관행을 오히려 선하게 이용하심으로써, (1)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셨으며 (2) 다윗 가문(家門)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계획을 차질없이 계속 진행시켜 나가셨다. 실로 세밀한 구석까지 친히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성 경: [삼상30:3]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11093; 아내와 자녀들 - 이들은 그때 시글락에 남아 있던 자들로서, 다윗과 그의 군사들에게 딸린(27:3) 모든 식구를 가리킬 것이다(Klein).

성 경: [삼상30:4]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11093; 다윗...울었더라 - 다윗의 이같은 비탄은 비단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겼다는 사실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즉 다윗은 시글락을 무방비 상태로 비워 놓고 경솔히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간 자신의 실책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부하들의 아내와 자녀가 포로로 잡혀간 그 엄청난 사실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긴 것이다. 한편, 다윗에게 닥친 이러한 큰 재난의 궁극적 원인은 목전의 안전과 정착을 도모코자 언약의 땅 이스라엘을 떠나 우상의 나라인 불레셋 땅으로 이주한 데 있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고생과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언약의 땅에서, 언약의 백성과 더불어, 언약의 주를 바라고 믿으면서 울고 웃어야 한다.

성 경: [삼상30:5]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본절은 다윗도 자신의 부하들처럼 동일한 환난을 당했음을 말해 준다. 저자는 이같은 언급을 통하여 (1) 다윗도 다른 부하들처럼 동일하게 슬퍼할 수 밖에 없었으며,(2) 그리고 동일한 피해자인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한 백성들의 태도는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려는 듯하다(6절).

&#11093; 아히노암...아비가일 - 25:3, 42, 43 주석 참조.

성 경: [삼상30:6]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

&#11093; 백성이...슬퍼서 - 여기서 '슬퍼서'(*, 마라르)는 '쓰리다' 혹은 '괴로워하다'란 의미이다(왕하 4:27;사 24:9). 이 말은 어떤 괴로운 사실로 인하여 마음이 극도로 낙망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11093;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 백성들이 이처럼 말한 이유는 재난의 책임이 전적으로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1) 다윗이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아말렉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려 놨으며(27:8, 9), (2) 또한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의 말을 좇아 시글락을 비워 둔 채 군사들을 모두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등, 백성들의 보호자 혹은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치 못했다고 본 것이다(Klein).

&#11093;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 여기서 '군급하였다'(*, 야차르)는 '답답하다', '곤란하다'란 의미로서, 어떤 원인에 의하여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답답한 감정 상태를 가리킨다(창 32:7;삿 2:15;10:9;삼하 13:2).

&#11093; 그 하나님 여호와 - 여기서 '그'는 '그의' 혹은 '그 자신의'란 뜻이다. 그리고 '여호와'란 신 명칭(神名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의 계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15). 결국 저자는 여기서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때 다윗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으며, 또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신뢰했는지 분명히 보여 준다.

&#11093; 힘 입고 - 엄밀히 말하여 '...안에서'란 의미이다.

&#11093; 용기를 얻었더라(*, 이트하제크) - '힘을 내다', '견고히 하다'란 의미를갖는 '하자크'(*)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여호와 안에서)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힘을 내다'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삿 20:22;대하 12:13;17:1;겔7:13). 즉 이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하여 적극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새로이 먹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다윗의 신앙을 엿볼수 있다. 즉 이때 다윗은 휘하 군사들을 회유하는 설득이나 구구한 변명 대신 하나님께 그 어려운 문제를 맡기고 그분의 도우심을 전적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실로 신앙인이 불신자보다 월등한 점은 고난에 처했을 때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그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다. 그리고 당신만을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위로를 제공하신다(시 50:15;사 40:31).

성 경: [삼상30:7]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11093; 아히멜렉의 아들...아비아달 - 아비아달(Abiathar)은 자신의 아버지 '아히멜렉'을 포함한 놉(Nob) 제사장들이 사울에 의하여 집단 학살됐을 때(22:18-20), 단신으로 다윗에게 피신해 온 제사장이다. 그런데 그는 당시 다윗에게 도피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계시 수단인 '우림과 둠밈'이 부착되어 있는 에봇을 갖고 갔었다(23:6)

&#11093;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 이는 '우림과 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이었다<14:18;23:9>. 이는 당시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이 어디서부터인지를 잘 보여 준다. 즉 다윗의 신앙적 행동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에 있었다. 즉 그는 대제사장의 에봇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령한 교신(交信)을 했으며, 결국 이것이 올바른 행동과 승리의 관건이 되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항상 복되고 의로운 길을 걸을 수 있는 방책은 매사에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다(롬 12:1, 2;엡 5:17). 한편, 대제사장의 의복인 '에봇'(Ephod)에 대해서는 출 28:6-14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30:8]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11093; 다윗이...묻자와 가로되...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 이때 다윗이 하나님께 질문한 것은 구체적으로 포로된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였을 것이다. 한편 '미치겠나이까'(*, 나사그)는 원래 '잡다', '치다'란 의미로서, 상대를 공격하여 그들의 소유물까지 자신의 것으로 삼는 행동을 가리킨다(출 15:9).

&#11093;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 '우림과 둠밈'(출 28:30)은 항상 어떤 질문에 대한 '가부'(可否)의 응답만을 했다. 따라서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전달될 뿐이었다(Fay, Hengstenberg).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중단되었으나(28:6), 다윗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계속적으로 계시되고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본서 저자는, 이제 사울의 왕권은 완전히 쇠퇴하고 반면 다윗의 왕권은 일취 월장(日就月將) 흥왕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11093; 쫓아가라...미치고...찾으리라 - 여기의 이 대답은 다윗이 질문할 때 사용한 말인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보다 '찾으리라'는 말이 덧붙여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고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삼상30:9,10]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이 부분은 다윗의 지도자적 역량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즉 다윗은 자신을 돌로 치려 하는 큰 소요가 바로 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를 일순간에 반전시켜 그들 모두로 하여금 자신을 좇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성들 모두가 다윗을 좇은 것은 '우림과 둠밈'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긍정적인 답변(8절)으로 인하여, 아내와 자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1093; 함께 한 육백 명 - 이것은 한 명의 항명자(抗命者)도 없이 다윗의 부하 전원이 다윗을 좇았음을 시사해 준다(27:2).

&#11093; 브솔 시내 - '시글락' 남쪽 약 24km 지점으로, 유다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가사' 남서방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내이다(Raumer). 헤르츠베르그(Hertaberg)는 나름대로의 어원학적 분석을 근거로 하여, '브솔 시내'(Besor Brook)의 뜻을 '좋은 소식의 시내'로 본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 '와디 에스 쉐리아'(Wady es -Sheriah)로 추정되어진다(Keil, Fay, Smith).

&#11093; 뒤떨어진 자를...머물렀으되 - 이같은 결과가 나타나게 된 까닭은 (1) 다윗과 그의 휘하 군사들은 '아벡'으로부터 '시글락'까지 약 삼 일 길을 이미 행군하였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상태였으며(1절), (2) 거기다가 쉬지도 못한 채로 온 힘을 다하여서 아말렉 족속을 밤낮 추적한 관계로 몹시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힘들어하는 200명을 브솔 시내에서 쉬게 하였던 것이다. 물론 추격의 시급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지친 자들에게 무리한 강행군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는 신앙에 기초를 둔 다윗의 인도적 조처였다. 더욱이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남은 400명과 함께 하신다면 600명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대하 14:11, 12). 이와 같은 다윗의 신념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숫자에 있지 않음(14:6)을 입증하듯 다윗에게 큰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16-20절).

성 경: [삼상30:10]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11093; 곧 피곤하여...머물렀고 - 이것은 다윗이 육백 명 중 사백 명만을 데리고 아말렉 족속을 쫓아갔던 이유를 제시해 주는 구절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라는 말 다음에 놓고, 본 구절의 초두에 나오는 '곧'(*, 웨)을 '왜냐하면'이란 뜻으로 봄이 좋다(이러한 해석이 히브리 원문에 충실한 해석이다).

&#11093;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 여기의 이 '브솔 시내'(Besor Brook)는 유다 남방의 산악 지역에서부터 흘러 가사(Gaza) 지역을 통과한 후 지중해로 빠지는 하천이다. 그러나 이 시내는 '와디'(Wady) 즉 '건천'(乾川)이기 때문에 우기(雨期)를 제외하고는 항상 강바닥이 말라있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이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강물을 건너는 수고는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 '브솔 시내'는 험한 골짜기를 따라 흘렀기 때문에, 비록 강바닥이 말라붙는 건기(乾期)라 할지라도 그 골짜기를 건너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친 군사들은 그 골짜기를 건너지 못하고 낙오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이들은 이때 뒤에서 짐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24절:25:13).

성 경: [삼상30:11,12]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11093; 애굽 사람 - 이 사람은 아말렉 사람들이 애굽의 어느 변방 지역을 노략하면서 노예로 붙들어 온 자였을 것이다<13절>.

&#11093; 무화과 뭉치 - 이것은 무화과를 재료로 하여 만든 과자를 가리킨다(25:18).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틴 지방의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랄 정도로 매우 강인한 생존력을 지닌식물이다(민 13:23). 그러므로 바위와 돌이 많은 곳에서도 약 9m의 높이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열매는 그 속에 꽃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르지 않고서는 꽃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화과'(無花果)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성 경: [삼상30:13]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11093; 애굽 소년이요 - 이것은 다윗의 '어디로서냐'(어디 출신이냐 ?)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한편 '소년'(*, 나아르)은 완전한 성인(成人)은 아니지만, 전투를 감당할 만큼 나이 든 젊은 남아(男兒)를 가리킨다(14:6).

&#11093; 아말렉 사람의 종 - 이것은 다윗의 '뉘게 속하였으며'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11093; 사흘 전에 병이 들매 - 여기서 '사흘 전'은 다윗이 아벡 근처에서 시글락을 향하여 출발할 즈음이다(29:10, 11;30:1). 이때 아말렉 족속들은 시글락에 대한 노략질을 마치고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말렉 사람들의 시글락 노략은 다윗이 아벡의 집결지에 도착했을 무렵에 이루어진 듯하다(29:1, 2). 한편 '병이 들매'(*, 할라)는 '약해지다', '쇠약하다' 등의 의미로서, 병으로 인하여 움직일 기력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삿 16:7;사 57:10).

&#11093;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언급이다. 즉 주인은 병들어서 노동력을 상실한 이 종에게 치료를 해주고 먹을 것을 주는 등 보살필 경제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마치 물건 버리듯 들에 내팽개쳐 버린 것이다.

성 경: [삼상30:14]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11093; 그렛 사람의 남방 - '그렛 사람'(the Cherethite)은 그레데(Crete) 섬 출신의 가나안 이주 민족이다. 이와 같이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그렛'과 '그레데'라는 단어는 상호 매우 유사하며, (2) 호머(Homer) 시대에는 그레데에서 '그렛'이라는말이 사용되었으며, (3) 그리고 또 다른 그레데 출신의 민족들인 블레셋(4:1)과 매우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겔 25:16;습 2:5). 그러므로 우리는 '그렛 사람'들이 블레셋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하여, 이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용병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Klein). 그런데 이들의 일부는 후일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그의 친위대가 되어서, 다윗에 대한 여러 번의 모반이 있을 때마다 항상 다윗의 편에 서서 온갖 충성을 다하기도 하였다(삼하 15:18;20:7;왕상 1:38). 한편 이 민족의 거주지는 가나안 땅의 남서쪽 해안(海岸)지대였다(습 2:5). 그렇다면 '그렛 사람의 남방'은 어디를 가리킬까 ? 이곳은 대체적으로 블레셋 사람의 영토 중 남부 즉 시글락 주변 지역으로 추측된다.

&#11093; 유다에 속한 지방 - 이곳은 유다 땅의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1절).

&#11093; 갈멜 남방 - 개역 성경의 '갈멜'은 '갈렙'(*, M.T;*, LXX;Caleb,KJV)으로 번역해야 한다<25:3>. 이 '갈렙'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기에 그나스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분배되었던, 헤브론을 중심으로 한 유다 남부 지역에 해당된다(수 21:12). 결국 아말렉 족속이 침범했던 지역으로서 애굽 소년에 의하여 언급된 세 지역 즉,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멜 남방'은 팔레스틴의 모든 남쪽 지역을 망라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11093; 침노하고 - 1절;27:10 주석 참조.

성 경: [삼상30:15]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다윗의 추격]

&#11093; 네가...그 군대에게로 인도하겠느냐 - 이같은 다윗의 요구는 아말렉 족속이 일정한 거처를 갖지 않는 유랑(流浪) 민족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그들도 목적상 일정기간 동안 잠정적인 거처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를 형성하고 살지 않는 유랑 민족으로서, 언제든지 이동할 가능성이 있는 부족이었기 때문에, 어떤 정보 없이 그들의 발자취를 추정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따라서 병든 애굽 소년의 정보는 다윗에게 매우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가 여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만일 이 부족이 다른 부족처럼 도시를 형성해 살아갔다면, 다윗은 안내자 없이도 그들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093;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 애굽 소년의 이 말은, 적군의 패잔병을 안내자로 이용한 후 그 효용 가치가 없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미련없이 죽여버렸던 고대의 전쟁 풍습에 기인한다(Thenius, Smith). 즉 그 애굽 소년은, 다윗도 자신을 안내자로 이용한 후 목적이 달성되면 자신을 죽일 것으로 염려한 것이다.

&#11093; 주인의 수중에 붙이지도 아니하겠다고...맹세하소서 - 만일 다윗이 종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준다면, 그 종은 이적(利敵) 행위를 한 혐의로 인하여 분명히 무참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그 애굽 소년은 다윗에게 맹세를 요구하였다.

&#11093; 하나님으로 - 여기 '하나님'(*, 엘로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는 창조주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지만, 이방인들에 의해서는 자신들의 이방 신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왕하 17:31, 33;대하 33:15). 따라서 여기 애굽 소년에 의해 언급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다만 자기가 섬기던 신(神)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30:16]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11093; 그가 인도하여 내려가니 - 비록 애굽 소년은 병들어 버림당했지만 삼일 전까지만 해도 아말렉 족속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행 방향에 대해 알고 있었다. 더욱이 다윗 일행은 맹추격을 한 반면, 아말렉 족속에게는 여자, 어린이, 가축 등 많은 약탈물이 딸려 있었기 때문에 진행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윗 일행은 애굽 소년의 안내로 쉽사리 아말렉 족속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편 애굽 소년의 이같은 인도 장면은, 이스라엘의 미래 왕 다윗에게는 장차 국내외적으로 많은 협력자들이 있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Klein). 그러나 사울에게로부터는 국내의 협력자들까지 떠나가지 않았던가(22:2) !

&#11093; 그들이...편만하여 - 여기의 '편만하여'(*, 나타쉬)는 무질서하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편만하여'란 말은 당시 아말렉 족속들이 방심한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11093;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 - 14절에서 애굽 소년에 의하여 언급된 여러 지역들을 말한다.

&#11093;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유랑 민족(베드윈)에게서 흔히 볼수 있듯이, 성공적인 약탈 행위 이후 방탕하게 베푸는 주연(酒宴)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경계심을 푼 상태에서 모두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취하기 때문에, 기습 공격은 그대로 주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는 소수의 병력을 지닌 다윗의 공격 작전이 주효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었음이 분명하다(삿 8:11).

성 경: [삼상30:17]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11093;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치매 - 여기서 '새벽'(*, 네쉐프)은성경의 어떤 문맥에서는 '황혼' 혹은 '밤'을 의미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분명히 '새벽'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욥 7:4;시 119:147). 만일 이것을 성경의 다른 문맥에서 처럼(사 5:11;렘 13:16) '밤'으로 이해하게 되면, (1) 본절의 '저물 때까지'라는 말과 잘 조화되지 아니하며, (2) 간밤의 만취로 인해 완전히 저항 불능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새벽 무렵에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매우 적절치 않다. 한편 '이튿날 저물 때'(*, 하에렙 레마하라탐)는 문자적으로는 '다음 날 저녁'이란 뜻이다. 그런데 만일 이 말을 문자적으로 취한다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이틀간 아말렉과 싸웠다는 곤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는, 저녁 시간부터 하루를 계산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날짜 계산 방식을 이해한다면 능히 해소될 수 있다. 따라서 다윗과 아말렉 간의 접전은 새벽 무렵부터 그날저녁 무렵까지 하루동안 진행된 것이다(F.R. Fay). 아무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저녁까지...치매'라는 말은 다윗이 저항하는 아말렉 족속을 얼마나 철저하게 진멸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언급이라 할 수 있다.

&#11093;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 '약대'는 팔레스틴 남방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많이 사용한 동물이었다(삿 6:5). 한편 여기 소년들은 가축 관리의 임무를 맡은 자들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약탈한 가축들에게 먹이와 물을 주기 위하여 연회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 다윗의 기습 공격을 당하여 자신들의 약대를 타고 도망침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30:18]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11093; 도로 찾고(*, 나찰) - '건지다', '구원하다'란 의미로서, (1) 처음처럼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삿 11:26), (2) 위급한 상황에서 구출하는 것(출 2:19;민35:25;삼하 12:7)을 가리킨다.

&#11093; 구원하였고(*, 나찰) - 앞의 '도로 찾고'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는 다윗의'완전한 회복'과 '더욱 풍성한 회복'을 강조한다. 즉 다윗의 아말렉 공격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과 교훈이 깃들어 있다. (1) 이전에 탈취당했던 모든 것을 되찾았다(18, 19절). 이와 같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는 과거에 죄악으로 상실했던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된다(요 8:32;14:27;15:11). (2) 전리품을 노획했다(20절). 말하자면 다윗 군대는 시글락 사건 이전보다 더욱 풍성한 소유를 누리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신앙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전화 위복(轉禍爲福)의 은총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께 나아오는 자를 위하여 풍성한 은총을 예비해놓고 계신다(요 10:10;엡 3:20).

성 경: [삼상30:19]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11093; 도로 찾아왔고(*, 하쉬브) - '돌아오다', '보답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슈브'(*)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엄밀히 말해 '돌아오게 하였고'란 뜻이다.

성 경: [삼상30:20]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가솔(家率)을 되찾은 다윗]

&#11093;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 이 가축떼들은 전에 다윗이 빼앗겼던 가축들이 아니다. 그 원래의 소유자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아말렉이 다른 부족들에게서 빼앗아 자신들의 소유로 삼은 가축떼가 분명하다. 만일 다윗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았다면 18,19절에서 나오는 '나찰'(*)이나 '슈브'(*)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이같은 사실은, 다윗이 이 가축들을 전리품으로서 유다 사람에게 나눠주었다는 사실(26-30절)로써도 분명해진다.

&#11093;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 이것은 '그 가축을 앞에서 몰고 가며'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을 잘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연스럽다(AV).

&#11093;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 이는 다윗의 업적과 무공(武功)을 환호하는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도 다윗을 쳐죽이려 했던 그들의 행동과는 매우 대조적이다(6절). 그러므로 후일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 이처럼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보다는, 바위나 산처럼 늘 변치 않는 하나님만을 전적 의뢰하였다.

성 경: [삼상30:21]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이왕에...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 - 이들은 먼 거리를 급히 행군한 까닭에(9, 10절) 낙오된 자들이었다. 대신 이들은 짐을 지키고 있었다(24절).

&#11093; 다윗이...문안하매 - 여기서 '문안하매'(*, 솨알 솰롬)는 '평강의 여부를 물어보다'란 뜻이다(삿 18:15). 이것은 다윗이 전투에 참여했던 자들에게처럼, 낙오한 자들에 대해서도 매우 호의적 입장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25:5).

성 경: [삼상30:22]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악한 자와 비류들 - 직역하면 '악하고 무익한 남자들'이란 뜻이다. 여기의 '비류'(*, 벧리야알)는 본서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2:12), 사울의 왕권을 부정하려 들었던 자들(10:27). 그리고 다윗의 요구를 모욕적으로 거절했던 나발(25:17,25) 등에게 적용됐던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마땅히 행할 바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전에(6절) '다윗을 돌로 치자'라고 선동했던 자들도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11093;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주지 말고 - 이같은 비류들의 제안은 (1) 전투에 참여치 아니한 사람들에게도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던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례와 상충되며(민31:27) (2)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에 따른 것이었으며(8, 23절) (3) 후방에서 소유물을 지키는 일도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25:13) 등으로 볼 때, 뒤에서 소유물을 지키던 자들에게 돌려져야 할 그들의 분깃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 곧 그것을 자신들만 나누어 갖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다.

성 경: [삼상30:23]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나의 형제들아 - 이처럼 부름으로써 다윗은, 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이나 뒤에 남아있던 자들이나 다 한 아버지로부터 나온 같은 형제들이라는 공동체(共同體) 사상을 불러 일으켰다(F.R. Fay).

&#11093; 여호와께서...보호하시고...그 군대를...붙이셨은즉 - 이것은, 다윗이 비류들의 제안(22절)을 부당하다고 판단했던 논리적 근거이다. 즉 탈취물을 얻을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탈취물의 처분에 대해서 왈가 왈부(曰可曰否)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다윗의 생각과 행위는 (1) 전쟁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2) 전리품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23절) (3) 따라서 전쟁에 불참했던 용사들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형제라는 연대 의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아래 모인 공동체는 '나눔'과'사랑'의 실천장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행 2:44-47). 한편, 여기서 '보호하시고...붙이셨은즉'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군대에게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통틀어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30:24]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이 일에...너희를 듣겠느냐 - 이것은 비류들의 제안(22절)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시사해 주는, 다윗의 거부적 반문(反問)이다.

성 경: [삼상30:25]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다윗이...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 전리품 분배의 규례는 이미 광야 시절 모세 때로부터 있었다. 즉 당시 모세는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여호와의 명을 좇아 노획한 전리품 중 절반은 싸움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그리고 절반은 진(陳)에 머물러 있던 '백성들'에게 분배하도록 하는 규례를 세운 바 있었다(민 31:27). 그런데 본절에서와 같은 다윗의 규례 제정은 그러한 광야 생활의 규례에 근거하여, 그 규례의폭을 군인들 중 전투자와 비전투자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등, 확대 제정한 것이다. 한편 이같은 규례 제정은 앞으로도 이같은 경우가 매번 발생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구속력을 지닌 구체적인 규범의 필요성을 느낀 결과였다.

&#11093; 율례와 규례 - 성경 다른 곳에서는 '규례와 법도'라는 말로도 번역된 단어로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신적(神的) 명령이나 규범 등을 강조하여 지칭하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다. 신 4:1 주석 참조.

&#11093; 오늘까지 이르니라 - '오늘'(*, 하욤 하제)은 본서의 기록 시기<서론, 3. 기록 연대>까지를 가리키는 관용어구이다. 한편 '이르니라'는 다윗의 규례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속 지켜졌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성 경: [삼상30:26]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1) '친구'와 '유다 장로'를 동격(同格)으로 보고, 그때 다윗은 유다의 많은 장로들 중에서 오직 친구들에게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Keil, Lange, Smith), (2)'친구'와 '유다 장로' 사이에 접속사 '그리고'(*, 웨)가 생략된 것으로 보고, 그때다윗은 모든 유다 장로들 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LXX, Klein), (3) '친구'(*, 레레에후, 문자적으로는 '친구에게')를 '성(城)에 따라'(*, 레에레우)의 오기(誤記)로 보고, 그때 다윗이 유다 모든 성의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Hertzberg, McCarter),(4) '유다 장로'는 모두 다윗의 '친구'였던 것으로 보고, 그때 다윗은 모든 유다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NIV)등이 있다. 그러나 26-30절을 보면 첫째, 특별한 성읍들을 언급함으로써 그때 다윗은 모든 유다 성읍의 장로들에게 탈취물을 준것은 아니며 둘째, 또한 다윗과 그의 일행이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의 사람들을 특별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30절)에서, 위의 네 견해 중 (2)의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아무튼 다윗이 이같이 선심(善心)을 베푼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자신이 비록 블레셋 땅에 망명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며, (2)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물심 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준 성읍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며(30절), (3)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앞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닦아 놓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독일의 주석가 크룸마허(F. W. Krummacher)는 이러한 다윗의 행위를 미구(未久)에 이루어질 '왕적 하사(下賜) 행위의 전조'로 보았다.

&#11093;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 - '여호와의 원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1)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계약의 신실한 이행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며 (2)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점에서, 곧 '여호와의 원수'는 이스라엘의 원수였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선물을 바로 이같은 자들로부터 '탈취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1) 적지(適地)에서 망명 생활을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2)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늘 함께 하셔서 자신을 승리로 이끌고 계심을 암시하고 있다.

&#11093; 선사하노라(*, 베라카) - 원문대로 직역한다면, 다만 '선물이다'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의 이 '베라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리키는 명사로서, 특별히 '하나님의 축복(은총)의 선물'(a gift of blessing)이란 의미이다(F.R. Fay).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선물이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임을 분명히 시사하려고 한것이다.

성 경: [삼상30:27]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벧엘에 있는 자 - 여기의 '자'(者)는 복수이다. 즉 이것은 한 성읍에 여러 명의 장로가 있었던 사실과 잘 부합된다(16:4). 한편 '벧엘'(Bethel)은 그 이름은 같으나, 오늘날 '베이틴'(Beitin)이라 불리우는 유명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10:3)은 아니다(Keil). 이같이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1) 27-30절에 나오는 모든 성읍들이 유다 땅 남부에 위치하는 것들이며, (2) 당시 유다 지파의 선무(宣撫)가 시급한 다윗이 베냐민지파에게까지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벧엘'은 '호라마'와 '시글락' 근처의 '브둘'(수 19:4,5)일 것으로 추정된다(Smith).

&#11093; 남방 라못 - 브엘세바(8:2) 남동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의 성읍으로 추정된다(수 19:8).

&#11093; 얏딜 - 에스드모(28절;수 15:50)의 남서쪽 약 8km 지점으로, 유다 지파에 속한(수15:48) 제사장의 성읍이다(수 21:14).

성 경: [삼상30:28]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아로엘 - 브엘세바 남동쪽 약 10km, 헤브론 남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대상11:44), 오늘날의 '와디 아라라'(Wady Arara)란 폐허지로 추정된다(Robinson).

&#11093; 십못 - 유다 남방(네게브)에 위치한 한 성읍 정도로만 알려질 뿐이다. 다른 사본들에는 '시브못'으로도 표기 되었다(Keil).

&#11093; 에스드모아 - 오늘날 '세무아'(Semuah)라고 하는 폐허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다의 산악 성읍으로(Schubert, Robinson), 헤브론 남서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다(수15:50;21:14;대상 6:57).

성 경: [삼상30:29]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라갈 - 이 성읍은 헤브론 남동쪽 약 11km, 에스드모아 북동쪽 약 6.5km 지점에 위치한 '갈멜'(25:2)로 추정되기도 하나(Thenius), 확실치는 않다(Keil, Smith, Fay).

&#11093;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 - '여라므엘 사람'(the Jerahmeelites)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대상 2:4,5, 9). 이들은 브엘세바의 남쪽 지역(네게브)에서 살았다<27:10>.

&#11093; 겐 사람의 성읍 - '겐 사람'(the Kenites)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들로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안내자들이 되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그곳에 정착하였다(15:6;민 10:29-32;삿 1:16). 이들은 유다 남방, 아말렉 사람들의 거주지 북쪽에서 거주했었던 것 같다<15:6;27:10>.

성 경: [삼상30:30]

주제1: [약탈당한 시글락과 다윗의 구조(救助)]

주제2: [공평한 전리품 분배]

&#11093; 홀마 - 브엘세바 동쪽 약 11km 지점이다(수 15:30). 이곳의 원래 지명은 '스밧'이었으나, 유다 사람들이 이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시킨 후 '진멸을 위하여 헌신된'이라는 의미(Davidson)의 이름인 '홀마'(Hormah)로 바꾸었다(삿 1:17). 오늘날 '라크마'(Rakhma) 고원(高原)의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한 '세바다'(Zepata)로 추정된다(Robinson, Ritter).

&#11093; 고라 산 - 네게브 지방의 변두리에 위치한 세펠라 지역의 한 부분인 '아산'과 동일한 곳이다(수 15:42). 처음 시므온 지파에게 소속된 성읍이었으나(수 19:7), 후일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곳이다(대상 6:59).

&#11093; 아닥 - 이 성읍은 헤브론 북서쪽 약 24km 지점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의 '에델'(수15:42;19:7)과 동일 성읍으로 추정되기도 한다(tHERIUS).

&#11093; 헤브론 - 예루살렘 남쪽 약 22km 지점에 위치한 주요 성읍으로(수 10:3), 일찍이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곳이다(창 13:18;23:1). 오늘날의 지명은 '엘 칼릴'(el- Khalil)인데, 그 뜻은 '벗' 또는 '친구'이다. 다윗은 나중에 이곳을 자신의 잠정적인 왕도(王都)로 삼았다(삼하 2:1-4;5:3). 삼하 2:1 주석 참조.

&#11093; 왕래하던 모든 곳 -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피 생활을 하던 여러 지역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억울한 도피자 다윗에게 먹을 것과 숨을 곳을 은밀하게 제공하여 주는 등 분명 다윗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을 것이다(Fay).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본서의 기자는 이들을 다윗의 '친구'라고 기록하였다(26절).

성 경: [삼상31:2]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11093;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 미쳐서 - 여기서 '쫓아 미쳐서'(*, 다바크)는'연합하다', '붙다'란 의미로서(창 2:24;신 28:60), 곧 '바짝 달라붙다' 혹은 '바짝추격하다'란 의미이다(삿 20:42;삼하 1:6). 따라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완전히 분산되고,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은 그들의 아무런 경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Klein). 또한 이때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도 각기 흩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11093;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의 세 아들의 이름은 역대상 10:2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여기의'아비나답'은 14:49의 '리스위'와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상 8:33;9:39에 언급된 사울의 네 아들 중 네번째의 '에스바알'은 사울 사후(死後) 아브넬에 의해 잠정적으로 사울의 후계자로서 옹립되었던 '이스보셋'이다<삼하 2:8>. 한편,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한(18:1)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요나단은 (1) 사울의 아들이었으나 질투와 시기의 화신이었던 사울과는(18:29) 대조적으로 참 사랑과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자였으며(18:1-4:20:17), (2) 매우 지혜롭고 용감한 군인이었고(14:6-14),(3)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춘 의인이었으며(19:1;20:30-42), (4) 왕위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의 인물이었다(18:4;23:17). 그러한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패역한 사울과 운명을 같이한 사실은 다음의 교훈들을 준다. (1)부친의 사악한 죄 때문에 그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된다(겔 18:2). (2) 의인의 소망과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고 오는 세상의 참되고 영원한 삶에 있다(잠 14:32). (3) 사악한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한 효성이 아름답다.

성 경: [삼상31:3]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11093; 사울이 패전하매 -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 전쟁이 사울에게 무겁게 되었다'란 뜻이다(왕상 12:10;대하 10:14;애 3:7). 이것은 결국 (1) 전황(戰況)이 지극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2) 불리한 전화으로 인하여 극도로 낙심하게 되는 것 등을 말한다(Klein, Lange).

&#11093; 활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 여기서 '따라 미치다'(*, 마차)는 '발견하다','만나다'란 의미이다(창 36:24;신 22:23). 즉 블레셋 군대의 궁수(弓手)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을 찾아 발견하고는 맹렬히 추격했다는 뜻이다. 한편 '활쏘는 자'는 문자적으로 '활을 가진 자'란 뜻이다.

&#11093; 중상한지라(*, 야헬 메오드) -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1) '야헬'을 '고통하다' 혹은 '근심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훌'(*)에서 온 것으로 보고, '매우 떨었다'로 해석하는 견해(Keil, Smith, Klein, Lange, Wigram),(2) '야헬'을 '다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할랄'(*)에서 온 것으로 보고,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매우 많이 다쳤다'로 해석하는 견해(Hertzberg, Davidson) 등이다. 그런데 본 단어 '야헬'은 신명기 2:25에서는 '근심하니라'로 번역되었으며, 또 그렇게 번역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 중 (1)의 견해가 타당하다. 그러나위의 견해 중 (2)의 것이 맞다고 보는 학자들은, 사울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린 아말렉 소년의 증언 때문에 그같은 판단을 하는 듯하다. 즉 그 아말렉 소년은, 사울이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알고' 사울을 죽였다고 말했던 것이다(삼하 1:10). 그러나 그 아말렉 소년의 증언은 본장의 언급 및 대상10:1-6의 언급과는 전반적으로 상층되는 위증(僞證)임이 분명하다(삼하 1:1-10). 한편 여기와 병행 구절인 대상 10:3에서는 그 단어가 위의 (1)의 견해와 유사하게 '군급하여'로 번역되어 있다.

성 경: [삼상31:4]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11093; 할례 없는 자들 - 이 말은 할례의 징표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창 17:9-14)이라는 선민(選民) 사상에 근거한 말로, 곧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하에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14:6;17:26,36).

&#11093;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 여기서 '모욕할까'(*,히트알렐루)는 '더럽게 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알랄'(*)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더럽게 할까'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말은 사울을 죽인 후에 그 시체를 욕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은 남에게 가혹한 잔악 행위를 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곧 블레셋이 이전에 삼손을 사로잡아 그를 욕보였던 것처럼(삿 16:21-27), 블레셋 군대가 사울을 사로잡아 학대하고 욕보이는 행위를 가리킨다(삿 19:25). 그러므로 사울은 그들이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을 기피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11093; 병기 든 자가 두려워하여 행치 아니하는지라 - 병기 든 자의 이같은 처신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1) 자신은 왕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자로서, 기회를 봐서 어떻게 해서는지 그 긴박한 상황(3절)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2)사울에 대하여 다윗이 가졌던 생각처럼(24:6) 기름 부은 바된 왕에게 감히 칼을 댈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11093;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 칼 끝을 위로 하여 칼을 세운 후 그 위에 자신의 몸을 덮친 행위를 말한다. 한편 생명에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자살은 결코 흔치 않았으나, 여기 사울의 자살 행위는 그의 비극적인 종말을 더욱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성 경: [삼상31:5]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11093; 병기 든 자...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함께 죽으니라 - 병기든 자의 이같은 행동은 (1) 자신이 모시던 상전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소박한 충성심, (2) 자신의 주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자살토록 방치한 혐의로 인하여 비록 자신이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처형을 변치 못할 것이라는 염려(삼하 1:14, 15), (3) 사울의 생각처럼 '할례 없는 자'에 의해서는 죽음을 당하지 않겠다는 히브리적 종교심등의 이유로 이뤄졌을 것이다. 후일 유대 전승은, 여기서 사울의 병기 든 자는 에돔사람 도엑이며, 그가 자살한 칼은 놉 제사장들은 쳐죽인 바로 그 칼이라고 하나(22:18), 그러한 전승의 신빙성은 없다(Smith)

성 경: [삼상31:6]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 일가의 몰락]

&#11093; 그의 모든 사람 - 역대상 10:6에서는 '그 온 집'으로 말한다. 그러나 여기의 '그의 모든 사람'은 이 어구 앞에 '역시' 혹은 '또한'이란 의미를 갖는 '감'(*)이라는 접속사가 있다는 점에서, 본 어구 앞에 언급된 사울의 병기 든 자와는 다른 무리들 즉 사울의 모든 근위(近衛) 병사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여기의 '모든'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전투에서 사울의 군대가 완전 섬멸됐다고 볼 수는 없다. 아울러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가문이 완전 멸절된 것 또한 아니다. 사울의 사촌이다 군대 장관인 '아브넬'(14:50)이 살아 남았고, 아마도 전투에 참여치 않았을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에스바알, 삼하 2:8;대상 8:33;9:39)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 사후에도 왕가(王家)의 명맥을 잠시 유지해 갔다.

성 경: [삼상31:7]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모독당하는 사울의 시신]

&#11093;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 - 여기서 '골짜기'는 사울이 전사한 길보아 산의 북동쪽 기슭으로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이스르엘(Jezreel) 골짜기'(29:1)를 가리킨다. 그리고 '저편'(*, 에베르)은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지파 등의 주민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을 가리킨다. 당시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분명히 비전투 요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울의 군대와 합류치 못한 까닭은, 바로 이같은 연합을 방지하기 위하여 블레셋의 군대가 이곳 사람들과 사울의 군대 사이인 '수넴'(28:4)에 진을 쳤기 때문이었다(Aharoni).

&#11093;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 - 요단 서편에서 볼 때 '요단 건너편'은 '요단 동부 지역'(Transjordan) 전체를 가리킨다(Smith). 그러나 여기서는 전투 장소인 길보아 산의 맞은편 지역인 므낫세 반 지파의 거주 지역만을 가리킨다. 한편 길보아 산의 패배 소식은 이곳까지 급속히 퍼져나간 것 같고, 따라서 이들은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남하(南下)했던 것 같다.

&#11093; 이스라엘 사람들 -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의 군사들로서, 이들은 주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등에 속한 백성들일 것이다.

&#11093;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 이는 길보아 전투의 패배와 사울의 죽음이 이스라엘 온 땅에 큰 공포의 분위기를 몰고왔음을 말해 준다.

&#11093;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 거하니라 - 여기서 '거기'는 갈릴리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이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는 '마하나임'(Mahanaim)에서 왕위에 올랐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삼하 2:8,9). 또한 다윗이 사울의 사망 직후 유다 지역에서 왕위에 오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유다 지역도 당시 블레셋의 공략으로부터 점령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삼하 2:1-4).

성 경: [삼상31:8]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모독당하는 사울의 시신]

&#11093; 그 이튿날 -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한 그 다음날을 말한다.

&#11093;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 여기서 '벗기러'(*, 파솨트)는 일반적의미의 약탈 행위를 가리킨다(27:10;30:1;삿 9:33;대하 28:18). 그런데 이 단어는 주로 의복을 벗기는 행위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된다(욥 22:6;미 2:8). 아마도 이것은 그 당시 옷이 모든 약탈물 중 가장 귀한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수 7:24).

&#11093; 사울과 그 세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 의복, 무기, 식량 등 전리품을 획득하러왔다가, 시체들 중에서 발견된 이스라엘 왕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의 주검은 블레셋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노획물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31:9]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모독당하는 사울의 시신]

&#11093; 사울의 머리를 베고 -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큰 승리를 증명키 위한 증거물로 삼기 위한 행동이었다(17:57). 이같은 행위는 고대의 전쟁에서는 일종의 관습이었다(Smith).

&#11093;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 이는 사울의 머리를 벤 중요한 목적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에게 너무도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점에서(14:47;17:52;18:6), 엄청난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은 그들에게 대단한 기쁨을 안겨줄만한 큰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당 에게 전파한다'는 것은, 사울의 '머리'와 '갑옷'을 자신들의 신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10절;대상 10:10). 이같이 적으로부터 빼앗은 대단히 중요한 전리품을 자신의 신에게 봉헌하는 행위는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언약궤를 다곤(Dagon) 신당에 바친 경우<5:2>, (2)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여호와의 성소에 보관한 경우(17:54;21:8,9)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신당'(*, 베트 아차베헴)은 문자적으로 '우상들의 집'이란 뜻이다. 그리고 '아차베헴'은 '새기다', '조각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아차브'(*)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서 '베트'(*)는 형태는 단수이지만, 복수(複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Lange, 출 6:14). 결국 이것은, 블레셋 땅에는 많은 신당(神堂)들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삼상31:10]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모독당하는 사울의 시신]

&#11093;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 이같은 블레셋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신(神)에 대한 숭배와 봉헌의 성격을 띤다(9절;5:2). 즉 블레셋 족속은 자신의 신들이 자신들에게 금번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함으로써, 바로 이같은 봉헌 행위를 한 것이다. 한편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 신 7:5), '아낫'(Anath) 등과 더불어 가나안 3개 여신 중 하나로서, 전쟁과 풍요의 여신(女神)이다(삿 2:13주석 참조). 그리고 '아스다롯'이란 복수(plural)형태인데, 성경 용례상 이 '아스다롯'이 복수로 사용되는 것은 이것이 항상 '바알'과 함께 여호와의 신적 저주의 대상으로 선포되어지는 문맥에서이다(7:3, 4;12:10;삿2:13;10:6). 반면에 '아스다롯'의 단수형은 '아스타르테'(Ashtarte)로서, 시돈의 여신인 '아스토레트'(개역 성경에는 '아스다롯'으로 표기되어 있다)와 동일시된다(Klein,왕상 11:5,33;왕하 23:13). 이 사실은 곧 블레셋 족속들이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에 깊이 동화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리고 여기 '아스다롯의 집'은 '아스글론'에 있었던 고대의 유명한 신전(神殿)으로 추정된다(Herodotus).

&#11093;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 여기서 사울의 '시체'는 '그 머리를 다곤의 묘(廟)에 단지라'라는 역대상 10:10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머리가 없는 몸뚱이 뿐의 시체였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12절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이때 사울의 세 아들들의 시체들도 함께 성벽에 못박혔음도 분명하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여기서 본 저자가 오직 사울의 시체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은, 오직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으로 인해 죽어서까지 수치를 당하는 처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Hertzberg, Keil). 한편 '벧산'은 요단 골짜기 근처 즉 이스르엘 골짜기의 동쪽 끝부분으로, 요단 강으로부터 서쪽으로약 6.5km 지점, 그리고 갈릴리(긴네렛, 디베랴)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당시 블레셋에 의해 점령된 성읍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은 행위와, 이전에 골리앗이 다윗의 시체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줄 것이라고 그를 위협했던 일(17:44)과는 어떤 상통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블레셋 정복 후 블레셋의 에그론 관리들의 시체를 그 성읍 주위의 기둥 위에 매달아 놓기도 했었다고 한다(Pritchard). 바로 이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자신들에 의하여 패배된 적장(敵將)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는 등 모욕하고 또한 공개적으로 노출시키는 행위는 (1) 상대국 백성들에게 엄청난 수치심을 안겨주며 (2) 자신들의 승리를 공개적으로 확증하려는 당시의 전쟁 관습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러한 비참한 사건은 개인 사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행한 그의 끈질긴 반역 행위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왕을 원했던 그 반역 행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수모요 치욕이라 할 수 있다(8:4-8,19,20).

성 경: [삼상31:11]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을 장사지내는 야베스 거민들]

&#11093; 길르앗 야베스 거민 - '길르앗 야베스'(Gilead-Jabesh)는 갈릴리 바다 남쪽 약30km 지점에 위치한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의 성읍이다(수 17:5,6). 이곳은 사울의 즉위 초기에 '암몬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받았었다(11:1). 그때 사울이 '베섹'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암몬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구원했었다(11:8-11). 그러므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과거 사울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이 은혜를 기억한 것이다.

&#11093;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 -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에서 목을 벤 후, 목은 다곤의 신당에 매달고(대상 10:10), 나머지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박아 사울의 시체를 심히 욕되게 한 일을 말한다.

성 경: [삼상31:12]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을 장사지내는 야베스 거민들]

&#11093; 모든 장사 - 여기서 '장사'(*, 이쉬 하일)는 '남자'와 '유력'(有力)이 합성된 말로서, '기드온'(삿 6:12)과 '입다'(삿 11:1)등에게 적용되었다.

&#11093; 일어나(*, 쿰) - 이는 문자적 의미의 일어남을 의미치 않는다. 보다 함축적인 의미로서, 특별한 행위를 실천하기에 앞서 거기에 대한 강한 결단의 태도를 보여주는 관용적인 단어이다. 한편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이같은 결단은, 과거에 자신들이 암몬 족속들로부터 침공당하여 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11:1-3), 사울의 군사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암몬 족속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받았던 사실을 기억한 연고이다(11:11). 즉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에게 신의(信義)를 지키고 보은(報恩)하기 위하여 블레셋 족속들에게 능욕당하고 있는 사울의 시체를 취하여 오기로 결단을 한 것이었다.

&#11093; 밤새도록 가서 -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시체가 못박혀있던 '벧산'까지는 약21km 정도의 거리이다. 그러나 요단 강 계곡 등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벧산까지의 험한 지형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그때 그 거리를 최소한 약 5시간 정도 이상 행군했을 것이다. 특별히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밤을 택하여 그같은 일을 결행한 까닭은, 말할 나위없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망을 뚫기 위함이었다(28:8).

&#11093; 불사르고(*, 사라프) - 왜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장사 방식을 택하였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즉 (1) 목이 잘리는 등 매우 손상된 시체였기 때문에, 매장(埋葬)과 같은 일반 장사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이같이 화장했다느 견해(Lange, Keil), (2) 매장과 같은 일반적인 장사법을 사용할 경우, 블레셋 사람들이 재침공하여 그 시체를 파내고 다시 모욕할까 염려하여 이같이 했다는 견해(Thenius, Smith, Philippson), (3) 죽은 지가 오래되어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어서 이같이 했다는 견해(Hertzberg), (4) 모압 암몬 등의 이방 국가와 인접하여 살던 까닭에, 그들의 영향을 받은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훌륭한 용사들을 화장하는 이교적 장사법에 따라 이같이 했다는 견해(Rainey), (5)'불사르고'(사라프)라는 단어를 '송진을 바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여부스 사람들의 장사 방식에 따라 사울의 시체를 방부 처리했다고 보는 견해(Driver)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 중 (2)의 견해는, 사울의 매장지가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밖인 요단 동쪽이라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그리고 (4)의 견해는, 모압 암몬 등의 민족들은 화장(火葬)하는 방식의 장례에 별로 익숙치 않다는 점에서 또한 타당치 않다(Klein). 오히려 그 민족들은 적의 시체를 불살라서 뼈를 가루로 만드는 등의 형벌적 성격으로 시체를 불살랐다(암 2:1). 따라서 존경심의 발로로 화장(火葬)을 했던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5)의 견해는 시체를 불사름으로써 뼈가 남았다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적다. 그렇다면 (1)이나 (3)의 견해를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사건을 병행적(竝行的)으로 다루고 있는 역대상 10장은 사울의 시체를 불사르는 내용은 언급치 않는다. 다만 뼈를 묻은 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대상 10:12). 이는 산 사람 혹은 시체를 불사르는 행위를 악행에 대한 형벌의 관점에서 보는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따라서(레 20:14;21:9),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행위를 바르지 못한 것으로이해하여 화장(火葬)은 생략하였기 때문인 듯하다(Klein). 혹은 화장(火葬)과 매장(埋葬) 사이의 조화에 어려움을 느껴 시체 처리에 대한 결과만을 언급했기 때문일 것이다(Keil).

성 경: [삼상31:13]

주제1: [사울의 최후]

주제2: [사울을 장사지내는 야베스 거민들]

&#11093;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 여기서 '에셀 나무'(the tamarisk tree, NIV) (대상10:12에는 '상수리 나무'(the oak tree, Living Bible)로 표기되어 있다. 히브리 원문은 위성류(渭城柳) 나무를 가리킨다)는 길르앗 야베스에 많았던 유명한 나무였다(Smith).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뼈를 그 나무 아래 장사한 까닭은, 그들은 사울이 그 나무 아래 앉기를 즐기는 등 생전에 그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6). 한편 그곳에 묻혔던 사울의 유골은 후에 다윗에 의하여 발굴되어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자신의 아비 기스의 묘에 안장되었다(삼하 21:11-14).

&#11093;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 아론이나 모세가 죽었을 때,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씩 애곡을 했었다(민 20:29;신 34:8). 이같은 애곡은 고인(故人)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키 위함이었다. 여기의 '금식'도 애곡의 일종으로서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삼하 1:12). 이처럼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으로부터 걷어다가 장사를 지내고 7일을 금식하였다. 즉 이들은 과거에 사울이 베풀어준 은혜를 기억하고(11:1-11) 그 보답으로 이러한 선행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는 일도 필요하지만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은혜레 대한 감사 행위는 더욱 큰 은혜를 가져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만을 맹목적으로 간구하지 말고, 이미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본서를 마무리짓는 사울의 비극적 죽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한(8:5,20)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구속 역사의 섭리 속에 승화시키사, 당신의 뜻에 합당한 한 인물을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삼으셨으니(13:14;15:28;16:13), 그가 곧 다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