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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세상을 움직인다

비전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이라면, 소원은 그 비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따라서 꿈은 소원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소원이란, 마음을 다해 바라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라고 하는 마음가짐이다. 사도 바울이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고백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가자 주님은 평소 때와는 달리 굉장히 냉정하게 대하셨다. 심지어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 달리 해석하면, “너는 개만큼도 못한 존재다”라고 하는 뜻이었다. 이스라엘과 같은 동양권 문화에서는 인간을 비하할 때 개와 연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녀의 마음 가운데 강력한 소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소원은 다름 아닌 흉악히 귀신들린 사랑하는 딸이 자유를 얻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시면서 칭찬하셨다. 그러나 그 다음을 주목해 보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자 그녀의 소원대로 기적이 나타났다. 성경은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고 증거하고 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소원에는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강력한 소원을 품었으면 이제부터는 소원을 마음에 품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아브라함을 보라.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하나님은 과정이 아닌 목표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길을 보기보다는 끝을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목표를 주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When), 그리고 어떻게(How) 이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준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요셉의 삶에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역사하셨다. 즉, 그에게 꿈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말씀은 눈 씻고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집트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또는 몇 년의 세월이 흘러야 이 꿈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다윗에게는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솔로몬에게는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선지자들에게는 그 시대에 심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신약시대의 사도들에게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즉,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 꿈은 이루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뜻을 이룰 것인가를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목표를 통해 역사하신다. 그 때문에 우리는 과정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는 “믿고, 믿음으로 첫 발을 내딛어라. 첫 번째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보려고 하지 말라. 서두르지 말고, 그저 한 계단씩 올라가라”고 충고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10년이 걸린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말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소원을 주셨다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도 믿으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오늘의 세대를 빗대어 꿈포 세대라고 한다. 꿈을 포기했다는 신조어인데,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다시 말해, 꿈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역사를 가리키며, 이를 위해 우리 마음에 소원을 품게 하심으로써 이를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실의에 빠져 있을 수도 있는 당신을 위해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나는 전문 작가로서 책을 굉장히 사랑하는 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책 한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영화 제목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만 18세 때의 난생 처음으로 책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데 성공했다. 


몇 년 후 대학시절에 처음으로 책을 번역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너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잖아.” “글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도 써본 적이 없잖아.” “책을 아무리 번역해도 원고를 출간할 출판사를 모르잖아.” “너는 절대로 이룰 수 없을 거야.” “더군다나 너는 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너의 한국어 실력은 수준 이하라고!” 이런 속삭임은 여러 날 지속됐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소원이 있었기에 인내를 가지고 책을 친구로 삼아 가까이 했다. 


결국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데 성공했고,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 말씀하셨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몇 권의 책을 출간하기를 원하느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책장이 하나 보였다. 그러자 몇 권의 책이 들어있는지를 세어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순식간에 숫자를 잊어버렸다. 또 다시 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왕이면 천문학적인 숫자를 말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주님, 100권을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놀라운 것은 20년 만에 40권의 역서, 그리고 25권의 저서가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소원은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품는 소원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작이 미약하게 보이고,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생각되더라도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소원을 이루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의지는 마음을 움직이는 네 번째 요소이다. 의지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 믿음의 거인들은 하나같이 “끝까지 싸워 이기리라”고 하는 의지의 사람들이었다. 아인슈타인(Einstein)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전기도 원자 에너지도 아닌 바로 인간의 의지이다”라고 말했고, 빅토르 프랭클(Viktor Frankl)은 “인간이 마음의 의지를 포기하면 인생을 포기한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 옛말에도 “마음먹기 나름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받았다면, 계속 전진하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아무리 애써 노력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을 때이다. 노아를 보라. 그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류가 부패하고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 것을 보시고 난 후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창 6:13-14)라고 말씀하셨다. 


환경은 홍수가 내릴 것이라고 하는 조짐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의 일기예보는 ‘맑음’이라는 뉴스를 보도했고, 구름 한 점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바로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방주를 완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노아의 방주가 현대 축구 경기장만큼 컸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노아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노아가 그 거대한 방주를 만들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이보시오.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소?” “예, 하나님께서 큰 홍수를 보내시어 온 땅을 휩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방주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말도 안 돼! 당신 방금 홍수라고 말했소? 비가 오지 않은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홍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참!” 


조롱이 지속되자 노아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의 말이 옳을까? 아무런 변화가 없기는 없네.’ 그러나 그는 홍수가 반드시 언젠가 온 땅을 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전진했다. 풍선은 더 이상 공기를 담아낼 공간이 없을 때까지는 터지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외형적으로 볼 때 크기가 조금 커질 뿐, 아무런 화학적 변화가 없다. 물도 마찬가지이다. 섭씨 100도가 되기까지 물은 증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99도에 이르러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변화하고 있다. 

모든 성공 이면에는 실패가 있다. 


실패가 없으면 성공도 있을 수 없다. 엄밀히 말해, 성공은 실패 한 가운데 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우리의 삶을 연단하신다. 그래서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했던 것이다. 소원이 크면 클수록 실패도 그만큼 크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리더십의 전문가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꿈을 이루기 원한다면, 역경을 받아들이라. 실패가 당신의 삶의 일부가 되게 하라. 실패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불의한 재판장 비유가 나타난다. 어느 한 작은 마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다. 그 도시에 어느 한 무명의 과부가 매일같이 찾아가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호소했으나 아는 채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언젠가는 지쳐서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떠나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부는 계속해서 호소했다.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어느 날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재판장은 “이제는 그만!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 18:4-5)고 말했다.


힘없는 과부는 재판장이 불의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했다. 다시 말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도전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8:1).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지고 계속 전진하라는 것이다. 


실패는 포기하지 않는 한 실패로 남아 있지 않는다. 도중 탈락하지 않는 이상 실패는 운명이 되지 않고, 성공으로 향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과정의 실패를 보지 말고, 운명의 성공의 바라보라. 

의지란 무엇인가? 의지는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될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년 동안 연구한 결과 인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내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인내는 의지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한다. 즉, 기적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을 결코 무시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 노력에 따른 상급을 주시는 분이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여기서 침노한다는 말이 다른 번역본에는 ‘노력’이라고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노력형 인간이 되라. 폴란드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잔 파데레스키(Ignaz Jan Paderewski)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피아노를 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그 다음날 손이 굳어 있다는 것을 내가 느끼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내 가정이 눈치 채고, 사흘 동안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이를 알아차린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말하기를 “천재는 2%의 천부적인 재능과 98%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루는 어느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당신은 틀림없는 천재입니다.”라는 말을 건네자, 이 위대한 음악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아닙니다. 당신도 나와 같이 매일 8시간만 투자하여 40년 동안 연습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피아노를 잘 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루기까지 노력하라. 레위기 6장 11절에서 12절 말씀에 보면,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신은 제사장들이 나무를 어디에서 구했다고 생각하는가? 버튼을 누름으로써? 아니다. 누군가 매일같이 나무를 가지고 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노력은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습관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한계를 느끼기 마련일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한계를 느끼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계를 허락하신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당신의 노력의 끝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이루신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될 때까지 노력하라. 그리고 그 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확신은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여기서 증거라고 하는 말이 어떤 번역본에는 “확신”(confidence)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확신이란, 할 수 있다고 믿으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면의 확신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시 말해, 당신의 자화상이 어떠한가? 긍정적인가, 아니면 부정적인가? 창세기 12장 2절에 보면, 우리가 ‘복’(Blessing)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신은 특별한 날짜에 결혼식을 하거나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해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당신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3, 6). 


복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다! 요셉을 보라.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셨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 


추측컨대, 당신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손에 시달려 더러워진 100달러 지폐와 같은 느낌일지도 모른다. 외부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면 나는 항상 은행에서 막 나온 반듯한 100달러 지폐 한 장을 가지고 강단에 서곤 한다. 그 지폐를 지갑에서 꺼낼 때면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집중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나는 그 지폐를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고, 구기고 난 나음 바닥에 던져 무자비하게 밟는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는다. “바로 저와 여러분은 이 지폐와도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의 꿈은 짓밟히고, 우리의 삶은 무너졌으며, 어디를 봐도 희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이런 나를 받아주실까 하며 의아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추한 나를 받아주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곧이어 강단에서 내려가 어느 한 사람을 무작위로 찍어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형제님, 이 지폐는 상태가 매우 안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혀 형편없어 보입니다. 부끄럽지만, 당신께 이 지폐를 선물로 드리고 싶은데, 받으시겠습니까?” 나는 이 질문을 수없이 해봤지만, 신기한 것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100달러 지폐는 아무리 상태가 안 좋다 손치더라도 가치가 떨어지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라. 과거의 실패에 얽매이거나 아픈 기억이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지 말게 하라. 당신의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아직 하실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당신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터득한다. 의사소통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입술의 말이라고 하는 통로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매개체이다. 즉, 먼저 생각한 것을 나중에 말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남성은 하루에 평균 2만 단어를 말하는가 하면, 여성들은 하루에 3만 단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계산을 해보면, 대략 어느 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내뱉는 말은 무려 6억 개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한 권의 책은 2만 개 이상의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한 권의 책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인생의 책에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우리의 입술의 말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확신은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언젠가는 나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분은 확신 넘치게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셨다. 또는 “네가 구원받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눅 10:9)고 축복하셨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충동을 감추지 못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확신 없는 어투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상상해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될 가능성을 한번 생각해 보겠다. 추측컨대, 내가 너를 굳세게 할 수도 있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지 않을까 싶다.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당신은 어떠한가? 다행히도 하나님은 확신 없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음과 같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확신 있는 말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엘리야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고 확신 있게 말함으로써 세상을 움직였다. 여호수아도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 10:12)고 확신 있게 말함으로써 세상을 움직였다. 예수님께서는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고 믿음으로 명령하심으로써 환경을 변화시키셨다. 

확신은 말 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다시 말해, 내면의 확신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자아정체성, 말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담대한 행동을 통해 겉으로 보여진다. 서양에는 “너의 행동이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너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명언이 있다. 


다윗은 17세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형들에게 도시락을 가지고 갈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블레셋 거인 골리앗의 말을 들은 다윗은 즉시로 반응했다.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 다윗의 확신 있는 말은 왕의 종들을 감동시켰고, 급기야 사울 왕은 그를 불러들였다. 성경을 유심히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먼저 말을 건네지 않고, 오히려 다윗이 왕에게 말하는 점을 주목해보라.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어느 한 나라의 왕과 평범한 청년의 일반적인 대화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너의 부친의 이름이 무엇이냐? 왜 나를 보자고 했느냐?”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반대로 다윗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왜? 다윗은 이 싸움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34-37). 


사실상 다윗이 이 같은 내면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대 블레셋의 혈전이 아니라, 더군다나 다윗 대 블레셋의 싸움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대 골리앗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힘이 더 강한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그 때문에 다윗은 확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으며, 결국에는 그의 말대로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사람은 믿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확신 있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확신 있게 믿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졌다고 한다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 시선을 목표에 고정시키라. 원하는 것을 놓치지 말라. 우아하게 걸으라. 자신감 있게 움직이라. 확신 있게 말하라. 그리고 당신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라. 

생각의 원천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의 생각은 절대 바꾸어지지 않는다. 


생각에도 차원이 있다. 나무를 보라. 나무는 3차원이지만, 그림자는 2차원이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고차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볼 때 그렇다. 사실상 스크린은 한 장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2차원적 평면이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그것을 3차원으로 인식한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의 차원을 높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세상을 바라본 것이다. 베드로는 저차원적으로 생각하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라고 말했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고차원적으로 생각하여 성전의 환상 속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말했다. 골리앗은 저차원적으로 생각하여 “칼과 창과 단창”(삼상 17:45)으로 나갔지만, 다윗은 고차원적으로 생각하여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삼상 17:45) 나갔다. 


그러므로 당신도 성경을 매일 같이 깊이 묵상함으로써 생각의 차원을 높이라.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생각하는대로 된다. 그러므로 타락한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I am what the Bible says I am! I have what the Bible says I have! I can do what the Bible says I can do!” 멋진 말이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을 깨어버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연습하라. 평범한 생각은 당신의 인생을 평범하게 만들지만, 위대한 생각은 당신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문제 해결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있다. 히브리 격언에 “사람은 마음에 생각한대로 된다”는 말이 있다. 성경은 생각의 중요성에 대해 300구절이나 할애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르게 생각하라.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중풍병자와 4명의 친구들에 대한 말씀이 나타난다. 아무리 애써 예수님이 거하고 계신 집에 들어가려고 해도 허사였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었다. 고정관념은 그들에게 “다음에 오면 되겠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다르게 생각했다. “지붕을 뚫어버리자!” 이것이 바로 아이디어 발상법이다. 믿음에 의거하여 생각을 달리 하니까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고,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무제한적으로 생각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당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라. 그 속에 무한한 자원이 있다. 

‘아무리 생각을 달리 해도 나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소 때처럼 어느날 기독교 서점에 들렀다. 거기서 우연히 친구인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투덜대며 “도대체 남미에서는 책을 못 사겠단 말이야. 미국보다 50%나 더 비싸니, 원!”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말이 계기가 되어 1986년 어느 날 부에노스아이레스 부근에 서점을 개업하였다. 현지 소비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목적이었는데,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 닥쳐왔다. 아르헨티나의 기독교 인구는 극소수였고, 더군다나 비싼 가격에 외국도서를 손쉽게 그것도 정기적으로 구입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당시 “주님, 한 달 만 더 서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폐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어느 날 어느 유명 목사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것이 기회다’ 생각하고 조그마한 스탠드를 구입하여 책을 조금이나마 더 팔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의 귓가에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말았다. “꿈과 비전은 성령의 언어다.” “성령 하나님은 당신의 동반자다.” “기도하면 문이 열린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붙들고 나가라.” 그때까지만 해도 ‘여기서는 안 돼’라며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주의 종을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사업에 큰 복을 안겨주었다. 


그때부터 남미에 큰 부흥이 일어나 기독교 인구가 급수기하적으로 늘어났고,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구입하고 싶어도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운영하는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작은 초라하였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케 되어 미국을 포함한 남미의 기독교 서점 시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출판사의 사장이 되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을 담고 있으므로 성경대로 생각하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 일어난다. 믿음대로 된다. 인생은 결국 생각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