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홈 > 성경 > 성경주석구약 > 욥기
욥기
욥기 주석



성 경: [욥1:1]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가정 환경]

(주); 우스 - 일반적으로 욥의 고향으로 알려진 이 지역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1)하란(Haran; 창 11:31; 사 37:12), (2)에돔(Edom;창 32:3), (3)에돔에서부터 시리아까지 포함하는 지역 등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어느 것도 정설(定說)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추측컨대 이 명칭은 남으로는 에돔(창 36:28), 그리고 북으로는 아람 땅(창10:23;22:21)을 포함하는 요단 동편의 광대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 같다.

(주); 순전하고 -이에 해당하는 형용사 '탐'(*)은 '완성하다'(31:40), '끝내다'(왕상 6:22), '소진하다'(창 47:15; 렘 37:21)등을 뜻하는 동사 '타맘'(*)에서 유래하여 '온전한','정직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본서에서 특히 이 말은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의 완전성을 의미할 때 주로 쓰였다(8:20;9:20-22). 대부분의 영역 성경이 이것을 '허물이 없는'(NIV, RSV, blameless)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주); 정직하여 - '야솰'(*)은 그 어근상 '곧다', '평탄하다','곧은 길을 행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말 역시 바로 앞에 나온 원어 '탐'과 유사하게 도덕적 완전성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욥이 영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 생활에 있어서도 무흠하게 살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 하나님을 경외하며...자더라 - 본절 전반부가 견실한 도덕가로서의 욥을 묘사한 부분이라면 이 구절은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욥의 자세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지역에서, 그것도 계시가 충족히 발전되지 않은 시대(족장 시대 초기)에 욥이 생존했음을 감안해 볼 때 이러한 신앙은 실로 위대한 것으로 찬탄받을 만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의인'으로 거듭 인정하셨다(5절 ;2:3).

성 경: [욥1:2]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가정 환경]

1절에서 욥의 의로움을 소개한 후 곧 바로 본절에서 욥의 자녀 수를 기술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욥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고대 히브리인들은 많은 자녀를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 중의 하나로 여겼다(창 33:5;시127:3).

(주); 한편 일곱, 셋 - 의 숫자는 실제 욥의 자녀 수를 나타내는 1차적 목적 이외에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숫자의 비율은 욥의 양과 약대의 수(3절), 솔로몬의 아내와 처(왕상 11:3)의 수에도 적용되어 나타난 바, 곧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상징한다. 특히 일곱 자녀, 그중에서도 일곱 아들을 갖는 것은 최고의 축복을 가리킨다(룻 4:15).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후 욥이 받은 자녀의 수도 아들 '일곱'과 딸 '셋'(42:13)이었는데, 이 비율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 경: [욥1:3]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가정 환경]

(주); 동방 사람 - 성경에서 이 용어는 (1)아람인(창 29:1), (2)모압, 암몬, 에돔인(사 11:14), (3)아멜렉, 미디안인(삿 6:3;7:8)등을 가리킬 때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욥의 고향이 요단 동편에 위치한 '우스'(1절)임을 근거해 볼 때, 아마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본 동쪽 지역, 곧 요단 동쪽 지역에 거주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성 경: [욥1:4]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가정 환경]

(주); 각각 자기의 집에서 -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욥의 일곱 아들들은 결혼하여 분가(分家)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 있어서 유력한 가문의 아들은 미혼인 상태에서도 자기 가옥을 소유하기도 했으며(창 25:5,6; 삿 10:4; 삼하 13:7;14:24,31),결혼할 경우에는 더욱 그리하였다(삼하 13:8,20).

(주); 그 누이 셋도 청하여 - 아마 이들은미혼인 상태로 욥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욥1:5]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가정 환경]

(주); 그 잔치 날이 지나면...불러다가 - 욥의 아들들은 자신과 그 형제들의 연이은 생일 잔치(4절)로 말미암아 신앙적 해이 상태에 빠졌을지 모른다. 따라서 욥은 이와 같은 적절한 시기에 그들을 성결케 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제고(提高)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불미한 일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주); 번제를 드렸으니 -욥이 직접 제의를 관장하는 본문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생존 연대는 일단 모세 법령 반포 이전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모세 율법에는 제사장만이 제의를 행했던 것이다(창 15:9, 10). 한편 이방인으로서 이와 비슷한 제사 행위를 한자로는 발람을 들 수 있다(민 23:1, 14, 29).

(주); 배반하였을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크'(*)는 원래 '축복하다'(bless), '찬양하다', '경배하다'이나 완곡 어법(euphemism)으로는 정반대의 뜻인 '저주하다'로도 쓰인다. 본서 기자는 서두 부분에서 '하나님에 대한 저주'의 모티브(motif)를 여러 번 등장시킴으로써(1:1;2:5,9) 각 개인과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에서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인가? 이러한 질문은 누구에게나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J.E. Hartley).

(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 '이것이 욥의 규칙적인(일관된) 관례였더라'(NIV,RSV, continually)라고 번역될 수 있으나 원문상 '그의 모든 날(동안) '(all hisdays) 곧 '일생의'(lifelong)란 뜻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욥1:6]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

(주); 하나님의 아들들 - 천사들을 가리킨다(NIV, LB, the angels). 구약에서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창 16:11; 민 22:23: 대상 21:16-22), '신들의 아들'(단 3:25) 등 다양한 명칭으로 언급되었다.

(주); 사단도...왔는지라 - 몇몇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사단이 하나님의 아들(천사)과 동등한 수준의 권리를 지닌 것처럼 주장한다(Driver & Gray, Pope, Gordis). 즉, 사단도 소위 하나님의 천상 회의의 한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사단은 타락후 하나님으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한 불의한 천사로서(겔 28:15-19) 사실상 그러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가운데'(among)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전치사 '바'(*)는 그 용례상 불의의 '침입자'(intruder)를 언급하는 구절에 자주 쓰였다(출 14:28). 따라서 사단은 수종드는 천사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계 4:6-11;19:4) 단지 욥을 참소하기 위해 그곳에 몰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욥1:7]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

(주); 땅에 두루 돌아...왔나이다 - 일견(一見)본 구절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파송을 받아 세상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처럼 비추어질 수 있다. 그러나 본절은 안정이 없고 분요(紛擾)하며 목적없이 배회하는 사단의 상태를 문학적 기법으로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마 13:25).한편 베드로는 사단을 가리켜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고 묘사하였다.

성 경: [욥1:8]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

(주); 내 종 - '종'이란 용어는 문자적 의미로서 '노예'를 의미할 수도 있었으나 여기서는 오히려 존경과 명예의 칭호로 쓰였다(Anderson). 특히 '내 종'이라는 용어는 욥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임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출 14:31;민 14:24 ;사 20:3).

(주); 이와 같이...없느니라 - 욥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노아(창 6:9), 모세(신 34:10). 아벨(마 23:35)에 대한 것과 흡사하다. 실로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죄중에 빠졌으나(롬 5:12) 구속사의 각 단계마다 출중한 의인을 찾아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사42:1).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선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욥이 전적으로 무흠했다든가, 아니면 절대적 의를 소유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다만 당시의 조악(粗惡)한 환경하에서 그가 누구보다도 영적, 도의적으로 신실하게 살려고 진력한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기뻐하시며 '의인'으로 인정하신다(창6:9;17:1).

성 경: [욥1:9]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

(주); 어찌 까닭 없이...경외하리이까 - 이는 욥의 신앙이 반대 급부적 내지는 인과론적 원리에 근거해 있다는 사단의 참소이다. 다시 말하자면 욥이 하나님께로 받은 바 기존의 물질적, 영적 축복에 근거하여 신앙을 가졌다는 주장이다. 이를 좀더 확대 해석하자면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모종의 유익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와 상통한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욥의 시련에서 분명히 입증되듯(3장), 그의 믿음은 단순히 '주고받는'(give and take)식의 타산적 신앙이 아니라 초월자에 대한 전적인 신뢰였다(창 12:1-4; 22장).

성 경: [욥1:10]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

(주); 산울 - 비나 바람, 그리고 맹수로부터 가축(또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가시울타리(thorny hedge)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상징한다(사 5:5;호 2:6). 당시 욥의 거주 지역에서 목축업이 주로 성행하였고(3절), 따라서 맹수의 침입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기 위한 '산울'이 긴요히 필요했을 것이다. 사단은 이러한 환경적 배경을 이용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설득력 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주); 소유물 - 주로 토지나 부동산 등을 뜻하는 '아훗자'(*, 창 23:4)와는 달리 대부분 '가축'(flocks and herds)으로 옮긴 NIV번역이 보다 정확하다 하겠다.

(주);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 욥의 재산 증가에 대한 수사학적 표현이다. 여기서' 널리게 하다'에 해당하는 동사 '파라츠'(*)는 어떤 일이 돌발적으로 '발생하다'의 뜻으로서 야곱의 갑작스런 재산증가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창 30:30).

성 경: [욥1:11]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

9,10절에서 반대 급부적인 신앙 논리를 주장한 사단이 본절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궤계를 토로한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욥의 재산과 자녀를 빼앗도록 간청한다. 사단은 욥의 신앙이 다분히 현실 기복적인 토대에 근거하여 있음을 확신하고 물질적 축복이 상실되면 욥의 신앙 또한 궤멸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논리는 축복=신앙, 고난=비신앙(저주)이라는 이분법적 단순 논리에 기초해 있다. 즉, 그는 인간을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 평면화시켰으며, 조악한 현실의 정황을 초월하여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주요 특성으로 하는 신앙의 특성을 간과하고 현상적 측면만을 보았던 것이다.

(주); 치소서 - '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낙'(*)는 어떤 대상을 파괴하거나상처를 입힐 의도로 타격을 가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주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급격한 징벌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창 32:25,32;출 12:23;신28:7; 대하14:12). 본서에서는 욥의 자녀의 집을 무너뜨리는 대풍과 연관되어 사용되기도 했다(19절).

(주); 정녕 - '기필코', '반드시'라는 뜻으로 사단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이 동시에 표출되어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재앙에 대한 욥의 반응을 미리 단정짓는 영적 교만함을 보였으나, 결국 그의 예상이 빗나감으로써 우매함을 스스로 자인하는 셈이 되었다. 이렇듯 사단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의 지레 짐작으로 교만함을 보이나(겔 28:11-15)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물어 버리신다.

(주); 대면하여 -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을 향하여'(KJV, RSV, to thy face)로서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표현이다. 문학적 표현법에 비추어 볼 때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창 46:30; 잠 25:23). 특히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경에 자주 언급된다(출 10:28;민 6:25). 따라서 본절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모독적인 행위의 하나를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주); 욕하리이다 - 히브리어 '바라크'(*)는 '저주하다'(KJV,RSV,NIV, curse),'모욕하다'의 뜻이다. 사단은 욥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견과는 달리 욥은 지난(至難)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저주하는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음으로써(20-22절; 2:3, 10) 사단의 계략에 빠져들지 않았다.

성 경: [욥1:12]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

본절은 사단의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해 준다. (1)사단의 능력의 제한성 : 사단은 철저히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다(삼상 16:14; 삼하 24:1; 대상 21:1; 고전 5:5; 고후 12:7; 히 2:14). 본절에서도 사단이 독자적으로 욥을 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허락이 있은 후에 그 활동을 하는바,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독자적 능력을 가지지 못했음을 반증해 준다. (2)활동(역할)의 제한성 : 사단의 활동은 하나님의 명령의 범위 안에서만 행해진다. 욥에 대한 1차 시험에서 사단은 다만 욥의 자녀와 재산에만 관련되 재앙을 내렸을 뿐 그의 육체는 건드릴 수 없었다. 2차시험에도 그는 욥의 육체에 관련된 질병을 주었을 뿐 생명을 해하지는 못했다(2:5,6).이는 결국 사단이 성도를 미혹하여 시험에 빠뜨릴 수는 있으되(행 5:3;고전 7:5), 그를 하나님의 장중에서 분리하여 멸망시킬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고후12:7).

(주); 네 손에 붙이노라 - 이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대상을 자기 주관대로 처리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창 9:2;14:20; 신 3:3; 대하 24:24). 사단은 욥을 시험할 수 있는 허락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것이다.그러나 그의 시험은 욥의 몸(육체)에는 적용되지 않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행해져야 했다.

성 경: [욥1:13]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첫 시련]

(주); 하루 - 아마 이날은 욥의 장남(長男)의 생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4절에서 보듯, 욥의 자녀들은 각기 자기 생일이면 그 형제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장남의 특권과 중요성이 남달랐던 고대 사회의 관습을 염두에 둘 때(창27:1-4;35:17;43:33) 아마 이 날에 욥의 모든 자녀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성 경: [욥1:14]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첫 시련]

(주); 사자 - 욥의 수하에 속해 있었던 종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15절에서 보듯, 그는 스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나머지 종들과 같이 일터에 있었으며, 또한 욥을 '주인'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욥에게 2, 3, 4차 재앙의 소식을 전해준 '사자'와 동일인인지는 확실치 않다(16-18절).

(주); 소는 밭을 갈고...풀을 먹는데 - 유목 생활의 전형적인 평화로움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본서 기자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당시 욥의 생활상의 단면을 암시해주는 목적 이외에, 앞으로 전개될 재앙이 어떻게 욥이 향유한 이 같은 평화를 파괴시켜가는가를 극적으로 나타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한편, 소가 밭을 갈았다는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단순히 유목 생활만을 한 것이 아니라 농경 생활도 병행하는 반유목민이었던 같다.

성 경: [욥1:15]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첫 시련]

(주); 스바 사람 - 아마 이들은 오늘날의 이디오피아로 알려진 스바(왕상 10:1-13)로부터 이주한 남 아라비아인(south Arabians)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들의 후예들은 금, 보석, 향료 등 값비싼 물품을 교역하는 부유한 상인들로 알려졌었다(왕상 10:1-13; 시72:10, 15; 사 60:6;렘 6:20; 겔 27:22; 욜 3:8). 6:19에서도 욥은 이들을 가리켜 '행인', 곧 '무역상'(traveling merchants)으로 부르고 있다. 욥 당시 이들을 아랍 지역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1차 재앙은 3차 재앙(17절)과 비슷한 일면을 지닌다. 즉, 두 재앙 모두 인간(스바인, 갈대아인)을 통해 주어졌다. 반면, 2, 4차 재앙은 자연을 통해 주어졌다(16,19절).

성 경: [욥1:16]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첫 시련]

(주); 그가 아직 말할 때에 - 이와 동일한 표현이 17, 18절에 연이어 등장한다. 따라서 욥에게 임한 1-4차 재앙은 연속적으로 발생했음을 알 수 았다. 욥의 재앙은 그것이 (1)돌연적으로('갑자기', 15, 17절), (2)연속적으로('그가 아직 말할 때에', 16-18절), 그리고 (3)철저하게('나만 홀로 피한 고로', 15-17,19절)임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주); 하나님의 불 - 성경에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번개불'을 가리킨다(민 11:1;왕상 18:38; 왕하 1:12). 그러나 여기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쏟아졌던 것과 같은 '유황과 불을 동반한 소나기'(창 19:24)인 것 같다. 왜냐하면 7,000이나 되는 양을 일거에 소진시키려면 단순한 번개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러한 이적을 일으켜서 욥에게 파괴적 재앙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주); 양과 종을 살라버렸나이다 - 원문을 직역하면'(그녀, 곧 '하나님의 불'이) 양을 먹어 버리고 종들을 삼켜 버렸나이다'이다. 개역 성경에는 동사가 하나밖에 없으나 원문에는 '바아르'(*, '먹어 버리다', '없애다')와 '아칼(*, '먹다', '삼키다')등 동사가 두개 나타난다. 이처럼 비슷한 뜻을 지닌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한 히브리인들의 문학적 기법의 하나이다.

성 경: [욥1:17]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첫 시련]

(주); 갈대아 사람 - 이들은 B.C. 7세기경부터 티그리스 강 주변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15절에 나타난 스바인들이 트랜스 요르단 북쪽에 정착한 반면, 이들은 주로 트랜스 요르단 남쪽을 전전(轉轉)하던 부랑민들이었다.

(주); 세 떼를 지어 - 직역하면 '세 머리로 나누어 와서'이다. 이처럼 군사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서 어떤 대상을 공격하는 전술은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난다(삿 7:16,20;9:43-45; 삼상 11:11;13:17등). 아마 여기서 갈대아인들은 3,000이나 되는 약대(3절)를 한꺼번에 공격하기 곤란했을 것이므로 전략상 세 부대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공격했을 것이다.

성 경: [욥1:18]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첫 시련]

(주); 식물을 먹으며 -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원형 '아칼'(*)은 16절에서 하나님의 불이 양과 종을 사르는 것을 묘사하는 데에도 쓰인 것으로서 '먹다', '삼키다'가 원뜻이다. 그러므로 '먹고 있었다'(KJV, RSV, wrer eating)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개역 성경은 '식물'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의역하고 있다(13절).

성 경: [욥1:19]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욥의 첫 시련]

(주); 거친 들 -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황량한 사막과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욥의 거주지였던 '우스'(1절) 역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광야'(KJV,RSV, wilderness), 또는 '사막'(NIV, LB, the desert)으로 표현할 수 있다.

(주); 대풍 - 단순한 태풍(windstorm)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극렬한 회오리 바람(whirlwind) 또는 돌풍을 가리킨다. 특히 한낮의 팔레스틴 지역은 지열(地熱)이 매우 높았으므로, 이 바람은 사막의 열기를 동반한 '열풍'이라 할 만하다.

(주); 집 - 욥 당시 대부분의 거주지는 장막(tent)이었다(창 4:20;31:25). 일반적으로 벽돌을 사용하여 집을 지은 시기는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인 것으로 추측된다(삼하 12:31; 사 9:10). 그러나 여기서 욥의 자녀의 집을 '장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장막은 벽돌 집에 비해 무게와 크기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던 고로 아무리 일시에 무너진다 해도 일거에 여러 사람을 죽이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욥은 당시 우스 지역에서 가장 명망(名望)있고 부유한 자였던 관계로(3절) 벽돌 집을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 그 소년들 - 이와 같은 용어(*, 나아르)가 1-3차 재앙에서 죽은 '종'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욥의 자녀들(2절)과 그 종들을 통칭하는 것 같다. 한편 본절의 재앙으로써 욥에게 임한 1단계 시련은 끝을 맺는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1) 1단계 시련은 욥 자신과는 결정적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소와 약대, 나귀와 양을 포함한 가축의 소실이나, 종의 죽음, 심지어 그 자녀들의 급작스런 죽음조차도 욥 자신의 존재 자체와는 결정적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련은 단계적 심화 과정을 거쳐 점점 더 욥 자신에게로 접근해 간다. 즉 '가축->종->자녀'의 순으로 재앙이 임하는 바, 이는 상대적으로 그 중요도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재앙이 이행되어 감을 뜻한다. 이로 말미암아 욥의 정신적 고뇌와 압박도 점점 가중되어 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원리는 차후에 전개될 욥의 시련에도 연장되어 나타난다. 즉, 2단계 시련에서 그는 먼저 자신의 육체적 질고('악창', 2:7)를 겪고 난 다음 아내의 저주(2:9)와 친구들의 변박을 차례로 경험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욥의 시련은 '외형적 시련->육체적 시련->정신적 시련'으로 점차 심화되어 갔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성 경: [욥1:20]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여호와를 찬양하는 욥의 믿음]

지금까지 진행된 재앙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욥이 비로소 첫 번째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욥의 행위는 매우 사려깊고 고결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우리가 깊이 주목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극심한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고 참된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기품과 원칙을 자신의 행동으로써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욥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삼하12:20)과 히스기야(왕하 19:1)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이들은 공히 자신의 범죄, 곧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한 죄(삼하 11:2-5), 그리고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의지한 죄(왕하 18:13-16)를 회개한 것이었으나 욥은 직접적인 죄악을 범하지 않은상태에서 회개의 행위를 보였다. 즉, 욥은 자신에게 덮친 일련의 재앙을 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의식했으며, 자신이 모든 면에서 정직히 행하기는 했으나(27장)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의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 것임을 인식했던 것이다. 실제로 욥은 본서 전반에 걸쳐서 자신이 완전한 의를 소유했노라고 고집한 적은 결코 없으며,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였던 것이다(9:2-4). 바로 여기에 범인(凡人)으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욥의 신앙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주); 겉옷을 찢고 - 여기서 '겉옷'은 당시 귀족들이 입던 외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삼상 24:5). 이것을 찢는 것은 극심한 비탄을 표시하는 관습적 행위로서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다(창 37:34; 수 7:6;삼하 1:11;3:31;13:31;스 9:3-5 에 4:1 등).

(주); 머리털을 밀고 - 이것 역시 갑작스런 재난에 대한 애통을 표하는 관습적 행위였다. 그런데 우가릿 신화 등 고대 문헌을 보면 이러한 행위는 당시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이방 풍속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하였으나(레 19:27; 신 14:1), 구약성경에 종종 이것이 언급된 것을 볼 때(레 13:33;14:8)관례상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이방인들은 종교적 제의나 극심한 슬픔을 나타낼 때 자신의 몸을 베거나 찢는 행위도 동반했는 바(레 19:28; 신 14:1), 욥이 이러한 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이방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어느 정도 온전히 소유했다 하겠다.

(주); 경배하며 - 본서는 그 문학 형태상 긴 산문시(散文詩)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 선택에 있어서는 매우 간결하고 압축적이다. 그리고 문장 구성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것은 가급적 배제하고 있다. 특히 주어나 목적어 등이 없어도 그 뜻이 충분히 전달될 때에는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목적어)이 생략되어 문학적 간결미를 보태고 있다(LB, before God).

성 경: [욥1:21]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여호와를 찬양하는 욥의 믿음]

(주); 내가...그리로 돌아가올지라 - 본절은 곧 이어 나오는 구절과 아울러 본서의 핵심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단순히 인간의 출생과 죽음의 법칙을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닥친 급작스런 고난을 도피하기 위해 죽음에의 갈망을 토로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세속적 허무주의를 나타낸 것은 더욱 아니다. 그 반대로 욥은 자신이 출생할 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죽을 때 역시 아무런 소유물도 가져갈수 없다는 단순 명료한 사실을 들어,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본래적 무소유(無所有)와 근원적 한계성을 지적함으로써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신앙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전도서 기자는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못하리니'(전 5:15)라고 했으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6:7)라고 가르쳤다.

(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 얼핏 보기에 이것은 운명에 대한 체념, 또한 혹독한 고난에 대한 장탄식의 한 표현처럼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세상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미 결정났다는 이른바 '결정론'(determinism)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욥의 신앙을 뚜렷이 밝혀주고 있다. (1) 하나님의 주권 인정 :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련의 재앙 속에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 축복(2,3절)을 주셨던 것처럼 그분은 그것을 빼앗아 갈 권능도 갖고 계신다. 욥은 자신의 물질적 축복과 혈육이 끊어짐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기에 앞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히 인정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욥이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化福)과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토기(인간)가 토기장이(하나님)를 힐문할 수 없고 그에게 철저히 순복해야 한다는 성격의 가르침(사 29:6;45:9;렘18:6)이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고 한 바울의 신앙에 비견된다 하겠다. (2) 하나님의 섭리 인정 :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단순한 자연 현상(16,19절) 또는 우연의 결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종들의 부주의로 인한 인재(人災)로도 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스바 사람(15절)과 갈대아 사람(17절)들의 습격을 사전에 감시하지 못한 종들을 질책했을 것이다. 욥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은 모두 2차적 원인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의 궁극적 동인(動因)이 하나님임을 인식했다. 자신에게 축복을 주신자와 그것을 거두어 가는 자, 곧 불의의 재난을 주시는 자가 동일한 하나님임을 깨달았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욥의 신앙을 승화발전시키려는 계획(섭리)을 갖고 계심을 욥이 어느 정도 인식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기에 욥은 재난 중에서도 영적 평정을 잃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며(21b절), 점강(漸强)되는 재앙 속에서(2:7-9) 자신의 탄생과(3:1) 하나님을 원망은 했으되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 곧 신앙을 상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주); 여호와의 이름이...받으실지니이다 - 이로써 사단의 1차 시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는 욥이 그 소유물들을 상실하면 주를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공언(公言)했기 때문이다(11절). 결국 사단은 욥의 신앙이 현세적 물질에 토대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욥은 재앙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현세적 물질에 토대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욥은재앙 가운데서도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신실성을 입증한 것이다. 요컨대 욥은 세속적 번영이나 종교적 유익(profit)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본분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는 사실을 직시했던 것이다.

성 경: [욥1:22]

주제1: [경건한 욥의 첫 번째 시련]

주제2: [여호와를 찬양하는 욥의 믿음]

(주); 범죄하지 아니하고...원망하지 아니하니라 - 개역 성경에는 본절이 두 개의 대등한 절(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은 접속사 없이 한 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직역하면 '나쁜 행위로써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이다. 한편 여기서 '나쁜 행위'(wrongdoing)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플라'(*)는 '사악함' 또는 '어리석음'으로도 번역 가능하나 특별히 여기서는 도덕적 측면에 아람어 '타팔라'('침을 뱉다')등의 동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Marbin H. Pope). 그러므로 욥은 재앙 가운데서도 도덕적으로 책잡힐 만한 부끄럽고 파렴치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성 경: [욥2:1,2]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욥의 두 번째 고난]

이 부분은 1:6-8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6-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욥2:3]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욥의 두 번째 고난]

(주); 네가 나를 격동하여 - 이는 욥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의 본 뜻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준다. 즉, 그것은 사단의 부추김과 충동질에 의해 주도된 것이며 하나님은 다만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2-6절). 실제로 의인을 시험하시고 그에게 고난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주장(참소)의 거짓됨을 폭로하고 욥의 궁극적 신앙 증진을 위해 시험을 허락하신 것뿐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격동시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트'(*)는'자극하다'(KJV, moved), '설득하다'(LB, persuaded), '충동질하다'(NIV, incited) 등의 뜻으로서 욥에게 내린 1단계 시련이 사단의 선동에 의한 것임을 암시해 준다(신13:7; 수 15:18; 삼상 26:19; 삼하 24:1).

(주); 까닭 없이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남'(*)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뜻을 가진다. (1)'부당하게'(unjustly, 22:6), (2) 개인적 유익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gratuitously, 1:9), (3) '헛되이'(in vain), '쓸모없이'(futile, 잠 1:17)등이다. 본문에서는 (3)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주); 치게 하였어도 - 동사 '바라'(*)는 '(삼켜서) 없애 버리다'(KJV, destroy;NIV, ruin)의 뜻이다. 이 용어는 욥에게 주어진 1단계 시련의 강도와 그에 대한 욥의 정신적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준다.

성 경: [욥2:4]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욥의 두 번째 고난]

(주);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 고대 사회의 격언(proverb)으로 여겨지는(N.C. Habel)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대단히 어려움이 따르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이 표현을 당시 물물 교환을 하던 상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보아 '(짐승의) 가죽으로 또 다른 가죽을 바꾼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공동번역). 즉 고대 사회, 특히 팔레시 지방에서는 짐승의 가죽이 주요한 교역 물품으로 취급되었던바, 이를 시장에 내어 놓고 다른 짐승의 가죽으로 교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첫째, 어떤 물품을 교환할 때 동일 품목으로 교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하며 둘째, '바꾸오니'로 번역된 동사 '베아드'(*)는 '...대신에'. '...에 의해서'의 뜻으로서 단순히 물품 대(對) 물품의 매매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대개 보상적매매, 즉 보다 중요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보다 못한 것을 그 대가로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유 때문에 난점에 처한다. (2) 본문을 후반절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방법이다. 즉 인간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처럼, 외형적 가죽(예를 들면 재산, 자식등)을 버리고 내면적 가죽(생명)을 보전한다는 것이다(Hartley). 이렇게 될 때 본절의 앞에 나오는 '가죽'은 욥이 가진 소유물을 상징하고 그 뒤에 나오는 '가죽'은 생명을 상징한다 하겠다. 이는 인간의 몸이 외피(外皮, 육체)와 내피(內皮, 생명, 혼)로 구성되어 있다는 고대인들의 관념과도 잘 어울린다. 여하튼 사단은 이 표현을 통해서 욥이 지금까지 누려온 물질적 축복은 그의 겉가죽이었으며, 그것은 1단계 재앙을 통해 파괴되었으나 속가죽은 아직 건재하며 따라서 그의 신앙을 상실케 하기 위해서는 속 가죽, 곧 욥 자신의 육체에 직접적인 재앙을 내려야 한다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말 속에는 욥이 자신의 생명에 위해(危害)가 되는 재앙을 아직 겪지 않은 까닭에 신앙을 보전하고 있다는 사단의 참소가 내포되어 있다.

성 경: [욥2:5]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욥의 두 번째 고난]

사단의 2단계 시험이 전개된다. 그런데 1단계 시험이 외형적 물질적 측면에 집중된 것이라면 2단계 시험은 내면적 영적 측면에 주안점이 주어져 있다. 즉, 첫 단계시험이 가축(양,약대,소,나귀, 1:15-17), 자녀(1:19), 종(1:15-17), 재물(집, 1:19)등에 내린 반면, 둘째 단계 시험은 욥 자신의 육체(7,8절), 그로인한 가정적 파탄(9절)과 욥의 정신적 갈등에 맞추어져 감을 주목해야 한다.

(주); 뼈와 살을 치소서 - 사단은욥이 육체적 질고에 빠지면 결국 하나님을 저주하는 반신앙의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즉, 어떤 사람이 그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듯(4절) 육체적 시련을 통해 생명의 위협을 욥이 받는다면 그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며 종국에는 신앙마저 내팽개치고 목숨의 부지를 위해 전전긍긍(戰戰兢兢)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 경: [욥2:6]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욥의 두 번째 고난]

여기서 다시 한번 사단은 욥을 시험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는다. 즉, 그는 욥의 생명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욥을 시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욥2:7]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악창으로 치는 사단]

(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 온몸 전체를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표현이다.

(주); 악창 - 전통적인 해석법에 따르면 이 병은 문둥병(레 13장) 또는 상피병(象皮病,elephantiasis)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둥병자들은 대부분 격리조처를 당했지만 본서 전체를 살펴볼 때 욥이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는 말이 없으므로 문둥병은 아닌 듯하다. 추측컨대 이는 부스럼(Bagdad boil)또는 온몸 전체에 진물과 고름이나는 궤양성 피부병인 듯하다. 이 병에 대한 증상은 본서에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본장 주제 강해 '악창' 참조). 그러나 이러한 증상은 동시에 욥의 정신적 고뇌에 대한 시문학적 표현일 수도 있으므로(예를 들면 '불면')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7:14;19:17, 20;30:17 등).

성 경: [욥2:8]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악창으로 치는 사단]

(주); 재 - 이것은 (1) 마을의 쓰레기 더미(the village ruvbbish heap, The NewLayman s Bible Commebtary), (2) 성읍 밖의 쓰레기 더미(the rubbish-dump outsidethe city), (3) 똥 더미(*, 코프리아스;LXX), (4) 재(KJV, NIV, RSV,ashes)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런데 '재'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는 '에페르'(*)와 '데쉰'(*)등 2종이 있는데 전자는 대부분 회개 내지는 애통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삼하 13:19; 에 4:1, 3; 시 102:9등). 그리고 후자는 희생 재물등 어떤 대상이 타고 남은 후에 생기는 문자적인 재를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레 1:16;6:11;왕상 13:3;렘 31:40). 따라서 우리는 본문(*, 에페르)을 문자적인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추측컨대 이것은 성읍 밖, 또는 주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쓰레기 더미였던 것같다. 한편, 욥이 이러한 곳에 앉은 이유는 두가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일 수있다. 첫째,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즉 문둥병과 마찬가지로 피부병은 고대 사회에서 부정한 병으로 취급받았으며, 더욱이 이것은 이스라엘 공중 위생 규례상 불결한 병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욥이 성읍 밖으로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욥이 그의 아내와 대화한 것(9절),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대화한 것(2:1103장 등) 등의 사실 때문에 정설(定說)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만약 욥의 병이 부정한 것으로 판명되어 성읍 밖에 버리워졌다면 아내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그와 함께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고대의 문헌과 이스라엘 정결 규례(레 13, 14장)는 부정한 병에 걸린 자와의 접촉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둘째, 병에 걸려 만신 창이가 된 자신의 현상태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표시로 쓰레기 더미에 앉았을 수 있다. 즉 그는 이미 재앙을 받아 쓰레기 같은 육체를 가졌으며 사회로부터도 냉대와 거절을 받는 신세가 되었는 바, 이제 쓰레기 더미 위에 앉음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사황을 쓰레기 더미와 일체화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비참한 현상황에 대한 애통함을 암묵적으로 나타내려 했을 것이다.

(주);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 이와 흡사한 행위가 우가릿 설화(theUgaritic legend)에 나타난다. 즉, 바알(Baal) 신이 죽자 엘(El) 신이 막대기와 돌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어(베어) 애통을 표시했다. 이것에 근거하여 어떤 학자는 욥이 자기의 자녀와 종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표시로서 기와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었다고 주장한다(M.H. Pope). 그러나 이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만약 욥이 그 자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했다면 자녀의 죽음 직후(1:19)에 그렇게 했어야했다. 또한 여호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욥이 당시 이방인의 주술적 행위의 성격이 짙었던 이러한 행위를 했을리도 없기 때문이다(신 14:1). 따라서 욥은 자기 몸에 난 종기와 부스럼, 그리고 가려움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기와 조각'은 욥의 피부병의 증상을 일시나마 진정시키는 반대 자극제(counterirritant)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기와 조각'은 깨진 도자기의 파편을 가리킨다.

성 경: [욥2:9]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아내를 꾸짖는 욥]

여기에 나오는 욥의 아내의 권고는 일견(一見) 타당한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소유와 혈육을 상실하였고, 사랑하는 남편마저도 심한 악창에 걸려 생사(生死)의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깊은 절망과 좌절의 벽에 부딪혀 이와 같은 탄식조의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현세적 축복과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불의한 분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지금껏 신앙을 고수해 왔으나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결과 당신은 도리어 현재와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지 않는가?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바로 지금이라도 배반하라'는 뜻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녀의 신앙은 종교를통해서 유익(복)을 얻고자 하는 저급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신성 모독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믿음을 상실하는 단계로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그녀의 말은 사단의 책략에 결정적으로 동조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단의 궁극적 목적은 욥으로 하여금 신앙을 상실케 하여 하나님을 욕하게 하는 것(5절;1:11)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녀는 욥에 대한 단순한 비방자(slanderer)의 차원을 넘어 '악마의 보조자'(diaboliadjutrix ; Augustine), 또는 '사단의 도구'(organum satanae ; Calvin)였던 셈이다. 이러한 행위는 생명과 환난의 위협에 직면해서까지도 놀라운 신앙의 용기를 보여주었던 라합(수 2:1-7), 에스더(에 4:16-18)의 행적과 뚜렷이 대조된다. 이렇듯 이제 욥은 육체적 질고 이외에 생의 동반자로부터 버림받는 이중적 고통에 처하게 되었다.

성 경: [욥2:10]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아내를 꾸짖는 욥]

(주); 그대의 말이...말 같도다 - 본문에서 욥이 단순히 그 아내의 무분별함이나 지적 우매성을 질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네발라'(*)는 주로 도덕적 종교적 요구들을 무시하는 불경스러움, 또는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무분별함을 뜻하기 때문이다(삼하 13:12; 사 32:6 등). 따라서 욥은 아내의 말이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 죄가 될 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신성 모독적 언사임을 지적하고 있다(시 53:1).

(주); 우리가...받지 아니하겠느뇨 - 본서의 핵심 주제이자 욥의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1:21)라는 말 속에 이미 명백히 표현되었었다. 만물의 조성자이며 생사 화복의 주관자이신 자는 오직 하나님이다. 그분은 당신의 깊으신 뜻(섭리)에 따라 복을 주시기도 하시며 그것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신다(1: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의인에게 재앙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축복과 재앙의 수여와 철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토기장이의 비유'(사 29:16; 렘 18:4). '목자와 양의 비유'(암 3:12) 등을 통하여 성경 전반에 나타난다. 욥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본절에서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미 받은 재앙에 대한 체념이 아니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로운 섭리를 대망하는 적극적 신앙의 발로였다. 요컨대 욥은 자신이 당하는 재앙이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적 유익을 위해 시련과 연단을 주신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5:17; 신 8:5; 삼하 7:14; 시 94:12;잠 3:11, 12;고전 11:32;히12:5-11 등).

(주); 이 모든 일에...아니하니라 - 이로써 사단의 2단계 시험도 무위로 돌아가고 욥의 신앙의 진정성(眞正性)이 재확인되었다. 그러네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입술'이라는 용어를 예로 들어 욥이 말로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으나 마음으로는 이미 범죄하였다고 주장한다(Talmud, Baba Bathra, 17b).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부정된다. (1) 사람의 생각은 말로나 행동으로 표현되기 일반이다. 더욱이 생명의 위협에 처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 마음의 심층적 생각까지도 은연중 말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계 상황에 직면한 욥이 말로써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반증이 된다. (2)욥은 마음으로 범죄하는 것 못지않게 두려워하였다. 이는 욥이 그의 자녀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두려워하여 성결례를 행했다는 데(1:5)에서 명백히 입증된다. 이렇게 볼 때 욥은 외적 범죄 행위와 동일하게 내적 범죄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임을 인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욥이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저주했더라면 사단의 계획은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며두 차례나 욥을 의인으로 인정한 하나님의 칭찬(3절; 1:8) 역시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편 욥은 친구들과의 변론 과정에서 자기 의(self-righteosness ; 27:6)를 내세우는 등의 우를 범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견지함으로써 신약 기자에 의해 인내하는 자의 전형으로 기술 되었다(약 5:11).

성 경: [욥2:11]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친구들의 조문(弔問)]

두 단계에 걸친 사단의 시험과 그에 대한 욥의 반응으로서 본서 도입부는 종결되고 본문에서부터 본론부가 시작된다. 그 가운데서도 11-13절까지는 그 초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욥의 세 친구가 등장하여 향후 전개될 변론을 예시해 준다.

(주); 친구 세 사람 -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본서를 비롯하여 성경 다른 자료를 근거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들 모두는 욥보다 연장자였다(15:10). 둘째, 이들은 욥을 조문하러 오기 이전부터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욥을 방문하기 전에 서로 상약했다(11b절)는 말에서 분명히 암시된다. 셋째, 이들 모두는 당시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재물을 겸비한 자로 추정된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정확한 논리 전개와 풍부한 지식을 동원하여 욥과 변론을 펼치는 바(4:1;5:27) 이는 그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학식과 지혜를 소유했음을 보여준다.또한 욥을 조문하러 올 정도의 신분이라면 각기 그 지방의 유지이거나 풍부한 재물을 소유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는 대부분 같은 계층의 사람끼리 교제하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막대한 재물과 명예를 지닌 자(1:3)였던 욥과 교제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것과 비견될 만한 수준의 재물과 명예를 가졌을 것이다. 넷째, 이들 모두는 히브리 신앙을 가진 자였다. 즉, 그들은 비록 욥의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1:1, 8; 2:3) 하나님의 공의, 성품등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신앙 지식을 소유했다. 다만 계시사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때 그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성(롬 5:12),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합 2:4;롬 3:19-31)등을 인식하는 단계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주); 데만 - 이 지역은 종종 성경에서 에돔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기도 했으나(렘49:7), 역서는 모압 동쪽의 한 성읍을 가리키는 것같다(겔 25:13; 암 1:12, 13). 그런데 이 지역은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사해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주); 수아 - 본래 '수아'(Sua)는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 출생한 아들을 가리킨다(창25:2; 대상 1:32).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말(人名)이 지명(地名)으로 변천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추측컨대 수아의 후손들이 사는 중부 우프라테스 지역을 '수아'라는 지명으로 부른 것 같다.

(주); 나아마 - 이 지명이 언급되는 것은 본서 11:1;20:1 이외에 수 15:41 딱 한 군데 뿐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성 경: [욥2:12]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친구들의 조문]

(주); 그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 이는 문자 그대로 욥의 형체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변형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욥의 세 친구들은 '먼 곳에서'(12a절)도 욥을 알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욥의 질병과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과장 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물론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욥의 형체가 많이 변형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타당하다(7,8절). 사 53장에 묘사된 '수난 당하는 종'의 그것과 흡사하다 하겠다(사 52:14).

(주); 울며...뿌리고 - 본문에 나타난 일련의 행동은 1:20에 나타난 욥의 행위와 비슷한 것으로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목도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인 바 있다(애 2:10). 한편 당대의 석학(碩學)이요, 재력가(財力家)로 알려진 이들이(11절 주석 참조) 이러한 행위를 취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당시의 통례적인 관습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우정의 발로임에는 틀림없다. 즉, 그들은 주변의 이목이나 자신의 체면에 연연해하지 않고 고통당하는 욥에 대한 진실한 연민의 정과 비탄의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이렇듯 욥의 친구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욥을 방문하였으며, 욥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한다. 물론 앞으로 전개될 변론 가운데에서 친구들의 욥에 대한 비난과 정죄의 말이 종종 나오기는 하나 이것 역시 우리는 그들의 신앙 수준의 한계에서 나온것으로 보아야지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성 경: [욥2:13]

주제1: [욥의 두 번째 시련과 세 친구]

주제2: [친구들의 조문]

(주); 칠일, 칠야 - 이 기간은 죽은 자를 위한 애곡 기간과 동일하다(창 50:10; 삼상31:13; 집회서 22:12). 따라서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최상의 애통의 표시를 했다고 볼수 있다. 한편 구약에서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슬퍼하는 공식적 애도 기간은 보통 30일 내지 70일이었다(창 50:3;민 20:29; 신 34:8).

(주);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 이를 어떤 학자는 탈무드의 전승에 비추어서 해석하려고 한다. 즉, 죽은 자의 집을 방문한 조문객들은 상주가 먼저 말을 열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Talmud, Moed, Qatan 28b). 그러나 굳이 이러한 관례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말을 잃었으며,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기 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도리어 효과적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고통당하는 자와 같이 말없이 있어줌으로써 그들은 나름대로 깊은 우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욥3:1]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주); 그 후에 - 욥의 친구들이 당도한 후 7일이 지난 때를 가리킨다(2:13). 이 기간 동안 욥과 그의 친구들은 공히 침묵을 지켰다. 이때 아마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과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한 듯하다.

(주);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 '생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욤'(*)은 '날'(day). '시간', '생'(生) 등을 뜻한다. 따라서 문자적인 번역은 '(자기의) 날'(KJV, his day)이 된다. 그러나 종종 이 단어는 개역 성격의 번역처럼 '생일'을 의미하는 데에도 쓰였다(NIV, RSV, LB, his birth). 한편, 어떤 학자는 '생일'을 확대 해석하여 욥이 현재 당하는 비참한 '운명'(30:25)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M.H.Pope). 이러한 해석 역시 본장의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하다. 한편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으되,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생일(삶)에 대해 탄식을 발했다는 사실이다.

성 경: [욥3:2]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 다음에 전개될 욥의 탄식에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문학적 기교 중의 하나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도 사용되었다(Marvin H.Pope, p.27).

성 경: [욥3:3]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주); 나의 난 날이...그러하였었더라면 - 형식상 '날'(day)과 '밤'(the night)이 대구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내용상 이 두 단어는 모두 욥의 출생(일)을 가리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날'은 출생일(出生日)을 가리키고 '그 밤'은 잉태된 날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 전 후반절은 그 시제가 서로 도치되어 있다. 즉, 히브리 원문에 따르면 전반절은 '내가 태어났다'(KJV, RSV, I was born)로, 후반절은 '(남아를) 밴다'(RSV, aman-child is conceived)로 되어 있다. 요컨대 전자는 과거 완료, 후자는 현재 완료로 각각 나타난다. 이것에 근거하여 본문을 문법상의 오기(誤記)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종종 현재와 과거를 도치시키거나, 과거의 사실을 현재로 묘사하는 것 등은 시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자주 등장하는 기법(技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욥은 '낮'(날)과 '밤'을 동시에 언급하여 저주하였다. 그런데 4,5절에서는 그 둘을 분리하여 '낮'만을 저주하고 있다.

성 경: [욥3:4]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주); 캄캄하였었더라면...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 여기서 욥은 '빛=생명(출생)', '어두움=죽음(낙태)'으로 동일시하는 문학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실례는 '그늘', '구름'(5절), '어두움'(6절), '어두웠었더라면'(9절)등의 단어에서도 연장되어 나타난다.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빛을 생명과 탄생의 상장으로, 어두움을 죽음으로 보아왔다. 이러한 보편 관념에 근거하여 욥은 자신이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하는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성 경: [욥3:5]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주); 유암과 사망의 그늘 - 문자적으로 볼 때 여기서 '유암'은 '어두움'(KJV, NIV,RSV, darkness)을, '사망의 그늘'은 '깊은 어두움'(NIV, RSV, deep shadow(darkness))을 각각 가리키며 뒤에 나오는 '구름',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등과 더불어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의 세력을 상징한다.

(주);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 - 이것에 대해서는 (1) 흑사병(신 32:24), (2) 대낮에 활동하는 사단(시 91:6, Gordis, Rashi), (3) 일식(암 8:9, Pope), (4) 안개 (Dhorme) 등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펠'(*)은 '어두움'(darkness), '음울함'(gloom)등을 뜻한다(28:3). 특히 본서에서는 주로 '지하 세계의 어두움(음울함)'을 비유할 때 주로 쓰였다(10:22). 따라서 이것은 앞에 나온 '유암과 사망의 그늘'과 마찬가지로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상징한다 하겠다(시44:19;107:10,14; 사9:2;렘 2:6;13:16;암 5:8 등).

성 경: [욥3:6]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주);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 '해의 날 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메 쉬네'(*)는 직역하면 '해(年)의 날들(가운데)'이다. 이 용어는 뒤이어 나오는 '달의 수'와 더불어 세월(시간)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은 해(낮)와 달(밤)의 시간 단위가 합쳐져서 장구한 세월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탄생이 차라리 시간(세월)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 곧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 하겠다. 한편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은 히브리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포함되지 않았었더라면'(KJV, NIV, not bejoined(included))으로 옮기고 있다(RSV는 개역 성경과 동일한 번역을 하고 있다 ;not rejoice among).

성 경: [욥3:7]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주);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 이것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뉜다. (1) '그 밤이 황량하였더라면'(KJV, LB, let that night be solitary(bleak)).(2) '그 밤이 불임이었더라면'(NIV, RSV, May(let) that night be barren). '적막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무드'(*)는 '불임의'(NIV, RSV, barren), '돌처럼 단단한'(stony)등의 뜻이다. 이는 결국 여자가 임신을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1)의 번역도 무난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욥은 자신을 잉태한 날에 기쁨이 있었을 것임을 가정하고(7b절), 만일 그러한 소리가 없이 그 날이 '적막'(황량)했더라면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을 잉태한 모친의 태를 저주한 욥의 한탄 속에서 그가 현재 당하는 육체적 질고와 정신적 방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 경: [욥3:8]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주);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 -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욥처럼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고난자들(sufferers), (2) 발람처럼 신탁(信託)을 받아 저주를 행하는 전문적 주술자들(민 22-24장), (3) 단순한 일식(日食) 현상, (4) 용(Leviathan)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견해는 고대 세계, 특히 욥이 생존했던 가나안 지역의 종교나 신화를 고려해 볼 때 모두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신론(polytheism), 또는 물활론(物活論, animism)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엄격한 유일신 신앙 곧 여호와 종교를 믿고 있었던 욥이(31:26-28) 본절에서 '주술사', '용', '일식' 등을 만물의 주관자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증거는 41:1에서 욥은 하나님을 악어 등 동물계와 자연 현상의 주관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성 경: [욥3:9]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본문에서 욥은 동트는 장면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체로 시간적 추이(推移)를 따르고 있다. 즉 '새벽별'이 어두워지는 것은 동이 트기 직전에 별이 명멸(明滅)하는 것을, '광명'(NIV, daylight)은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내비취는 희끄무레한 광선을 가리키며, '동틈'은 해가 떠올라서 첫 빛을 발하는 것(NIV,the first rays;RSV, the eyelids of the morning)을 각각 가리킨다. 여기서도 욥은 밤을 자신의 잉태의 시간으로, 낮을 탄생의 시간으로 보고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3절).

성 경: [욥3:10]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일을 저주하는 욥]

지금까지 전개된(3-9절)욥의 저주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즉, 현재 당하는 고난(본절에서는 '환난'으로 표현됨)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생일과 잉태를 저주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나타나겠지만(6:1-7:21;16:1-17:16) 욥의 회의와 갈등의 최종 관심사는 하나님이었다. 한편 개역성경은 본문의 주어를 명기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원문에는 남성 단수 대명사(he)를 지칭하는 동사가 두 번 쓰였다(즉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궁의 문을 열고 닫는 것', 곧 아기의 출생을 주관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욥3:11]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출생은 하나님의 축복이요(창 33:5;48:9;시 127:3), 그 반대로 낙태(출 21:22-25;민 12:12; 시 58:8)는 하나님의 징벌로 인식(시 58:8; 호 9:11,14)되었던 고대 히브리 사상에 근거해 볼 때 현재의 고난보다는 차라리 '낙태'와 '조산사'(早産死)를 바라는 욥의 절규는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성 경: [욥3:12]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본문은 아기를 출생하고 난 다음 그 산모(産母)가 취하는 첫 번째 행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산모는 아기를 낳음과 동시에 아기를 바로 눕히고 젖을 물리는 것이다. 11절에서 아예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말 것을 희구한 욥은 여기에서 태어났으되 곧바로 죽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Anderson). 따라서 본절은 11절의 내용을 확대 심화시키고 있는 바, 점층에 대해서는 (1) 산파(LB, midwife)의 무릎, (2)아기의 아버지(창 50:23)의 무릎 등의 견해가 있으나 여기서는 산모, 곧 욥의 어머니의 무릎(NEB, my mother s knees)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사 66:12).

성 경: [욥3:13]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죽음의 상태에 대한 욥의 최초의 묘사가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근거해 볼때 욥은 현재의 모든 고난과 불평등이 종결되고 안식이 보장되는 곳으로 사후(死後)의 세계를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본문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욥이 사후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했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또한 욥이 실제로 죽음을 강력히 갈망했다고 보아서도 안된다. 다만 그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회의의 반작용으로서 죽음을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한계 상황에 처한 욥이 최종적으로 찾은 돌파구가 곧 자신의 삶에 대한 저주요, 죽음에의 희구(希求)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장을 위시하여 몇몇 부분들(10장;26:11;38:22)을 근거로 하여 욥의 내세관(來世觀)또는 음부 사상(37:18;38:29) 등을 과도하게 체계화하거나 추론해서는 안된다. 요컨대 욥은 현재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종결되고, 새로운 차원(질서)속에서 생명이 지속되는 곳으로 사후의 세계를 믿었던 것이다.

성 경: [욥3:14]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주);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 - 여기서 '거친 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라보트'(*)로서 '황폐한 곳', '불모지' 등의 의미이다. 즉, 과거 권력자들이지은 화려하고 웅대한 건물들이 세월의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무너져 폐허가 된 곳을 가리킨다. 결국 본절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영화(榮華)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짓거나 선조들의 터 위에 새로 지었음을 암시해준다(The New Laymans Bible Commentary p. 563;사 58:12;61:4).

(주); 의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아츠'(*)는 본래 '충고하다', '조언하다'의 뜻에서 파생하여 '조언자', '모사'등을 뜻한다(대상 26:14; 스 4:5). 여기서는 단순한 조언자들(KJV, NIV, RSV, counselors)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궁정의 고관(LB,prime ministers)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처럼 욥이 갑자기 이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1) 세속적 지위 고하(高下), 그리고 재물의 대소(大小)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현생(現生)의 종말을 고하고 죽을 수밖에 없으며, (2)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평등해진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욥은 세속 재물과 지위가 죽음 앞에서는 한낱 무용지물(無用之物)에 불과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신앙을 가지고 삶을 충실히 살아야한다는 것을 은연 중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19절).

성 경: [욥3:15]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주); 집 - 전통적인 주석가들은 이것을 각종 보화로 가득 찬 부자 또는 권력자의 무덤(tomb)으로 본다. 이러한 견해는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고대의 군주나 부자들은 지상의 번영을 죽음 이후에 연장시키려는 바람에서 무덤에 각종 보화를 함께 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집'(KJV,NIV, RSV, houses)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따라서 본절도 현세에서의 부귀와 영화도 '스올'(17절)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암시한다.

성 경: [욥3:16]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욥은 이미 자신의 잉태 자체를 저주한바 있다(3절). 따라서 여기서는 잉태 자체는 기정 사실로 하되,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을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들고 있다. 즉, 그것은 모친이 임신 중에 낙태하는 것이다. 이처럼 욥이 집요하게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상태보다는 차라리 죽음의 상태가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욥은 현실에서는 결코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없으나(26절) 무덤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17,18절).

성 경: [욥3:17]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주);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 '악한 자'에 해당하는 '레솨임'(*)은 '악한', '불경건한', '사특하며'등의 뜻을 가지는 형동사 '레솨'(*)의 복수형으로서,여기서는 사회적 측면에서 불의와 폭압을 일삼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는 '소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게즈'(*)가 본래 불안하게 하다', '괴롭히다', '자극하다'를 뜻하는 동사 '라가즈'(*)에서 유래되었음을 볼 때 더욱 자명해진다. 따라서 본절은 현세에서 폭압을 일삼은 악인들의 행위가 무덤(저 제상)에서는 종식될 것임을 가리킨다.

성 경: [욥3:18]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주); 갇힌 자 - 이는 전쟁 포로 (공동 번역)이든지 혹은 죄수 (KJV, RSV, prisoners)이든지 간에 과중한 부역을 강요받고 있는 노예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Hartly).왜냐하면 17절에서 악한 자 와 곤비한 자 가 대구(對句)로 쓰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갇힌 자 가 감독자 의 대칭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과도한 노역을강요하는 감독자들(NIV, slave driver: 출 5:13,14)의 소리에 쫓기는 노예들일 것이다.

성 경: [욥3:19]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죽음을 사모하는 욥]

(주); 작은 자나 큰 자나 -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여러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1)연령면에서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을 가리킨다. (2) 재산 면에서 빈자(貧者)와 부자를 가리킨다. 1:3에서도 '큰 자'라는 용어가 '부자'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3) 신분의 측면에서 '작은 자'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큰 자'는 상류층 계급의 사람들을 각각 가리킨다(NEB, high and low;공동 번역, '낮은 자와 높은 자'; 창 17:20; 출15:16; 왕하 18:24; 대상 12:14; 렘 16:6).

(주); 일반으로 있고 - 이는 현세에 상종하는 신분, 재산, 연령상의 구별(차별)이 무덤에서는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한편 14절에서부터 본절까지 전개된 욥의 독백에서 우리는 일종의 문학적 틀(form)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 사회적 특권 계층('세상임금', '의사'-14절;'목백들'-15절)과 (2) 사회적 소외 계층('곤비한 자'-17절;'갇힌 자'-18절)이 서로 대구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19절에서는 상반된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동시에 언급되어((1)'작은 자','종'; (2)'큰 자', '상전')지금까지 전개된 사상을 종합하고 있다.

성 경: [욥3:20]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명을 탄식하는 욥]

욥은 3-10절에서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였다. 그리고 11-19절에서는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서 '죽음'을 갈망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부터는 (1)왜 고난이 자신에게 임하는가(25,26절), (2)왜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20-23절).

(주); 곤고한 자...마음이 번뇌한 자 - 공히 재앙 속에 허덕이는 욥을 지칭한다. 한편 '마음'은 영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사실적이다.

(주); 빛 - 이는 욥의 '생명'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욥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욥은 앞에서 '죽음'(무덤)을 어두움으로 여러 번 묘사한 바 있다(4-9절).

성 경: [욥3:21]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명을 탄식하는 욥]

(주);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 인간은 종종 현실의 한계 상황에 부딪히거나 절망의 벽에 다다를 때 죽음 을 최후의 해결책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염세주의자나 일단의 실존 철학자들은 죽음 이야말로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 방책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아마 욥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즉, 그는 모세(민 11:15)와, 엘리야(왕상 19:4)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중압감에 압도되어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죽음을 의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욥이 자살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자살은 생명의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정면적 배반이기 때문이다. 욥 역시 자살을 생각했을리 만무하다. 실제로 그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첫 단계 시련(1:13-19) 또는 적어도 둘째 단계 시련(2:8,8)을 받았을 때 이를 결행했을 것이다. 요컨대 욥은 현실의 상황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성 경: [욥3:22]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명을 탄식하는 욥]

(주);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 욥이 죽음을 고난으로부터 해방되는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했음을 시사해 준다.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길'(*)은 감정의 흥분 상태에서 주위를 빙빙 돌며 춤을 추는 행위가 동반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말은 '즐거워하다'라는 말과 더불어 욥이 얼마나 죽음을 갈구했는가 하는 것과 또 역설적으로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 경: [욥3:23]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명을 탄식하는 욥]

(주);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 1:10에서 사단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산울로 두르심'으로 표현한 바 있다. 여기서 욥은 일단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보호(섭리)를 인정하고 들어 간다. 그러나 그 보호가 이제는 욥에게 있어서 도리어 방해와 올무(Anderson)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는 한 욥은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단계에 이르러서 욥은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데에까지 이름으로써 사단의 계략에(1:11;2:5)일면 동조하게 된다.

(주); 길이 아득한 사람 - 여기서 '길'은 '생명'(고난에서의 해방)을 상징하기도 하며 그반대로 '죽음'을 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욥은 현실의 고난의 해결책으로서 '죽음'을 갈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고난에서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구원을 바라며 생명을 연장시키기에는 그 고난이 너무 감당하기 힘든 욥의 상황, 곧 진퇴 양난(進退兩難)에 처한 그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성 경: [욥3:24]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명을 탄식하는 욥]

(주);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 전에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리프나이 (*)로서 시간보다는 장소를 지칭하는 전치사로 많이 쓰였다. 즉, ...의 면전(面前)에서 (tothe presence of), '...정면에서 (to the front of) 등의 뜻이다(4:19). 따라서 개역성경의 번역 처럼 이것을 굳이 시간의 전치사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대신 (NIV, insteead of), ...로(RSV,as)'로 번역하는 것이 더 사실적이다. 이렇게 될 때 본문은 음식 대신 한숨이 나오고 , 또는 탄식이 밥이되며 (RSV, sighing coms as mybresd) 로 해석된다. 이는 욥의 고난의 심각성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이다.

(주);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 시청각적 직유법을 사용하여 병고(病苦)와 싸우는 욥의 상황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런데 여기서 앓는 소리 는 대부분의 영역성경이 끙끙거리는 소리 , 신음 소리 (NIV, LB, RSV, groans)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원어상 이 말은 포효하는 사자의 우름 소리 같은 것을 가리키므로 KJV의 번역과같이 으르렁거리는 (roaring) 으로 옮기는 것이 더 좋다. 이 표현이 욥의 상채를 보다 적나라하게 묘사해 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앤더슨(F.I.Anderson)같은 학자는 본 구절을 나의 큰 울음이 바닷물처럼 떨어지는 구나 ((my bellowingw cascadelike the sea)라고 옮기고 있다.

성 경: [욥3:25]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명을 탄식하는 욥]

(주); 두려워하는 그것. 무서워하는 그것 - 이는 (1) 물질적 축복(1:2,3)을 상실하는 것, (2) 육체적 질병(2:7,8)을 당하는 것, (3)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욥은 자신의 번영(1:2,3)중에서도 그 자손이 행여 범죄할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성결케 하는 의식을 일장한 시기에 행하기도 하였다(1:5). 이에 근거해 볼때 욥은 언제 닥칠지도 모를 하나님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항상 경성(警醒)하는 삶(히 13:17)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늘 두려워하던 것, 곧 하나님의 축복(소유물의 번성, 건강, 하나님과의 교제)을 상실하는 것이 지금 욥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재앙)은 구체적인 욥의 범죄가 없는 가운데 임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회의(갈등)에 빠졌던 것이다.

성 경: [욥3:26]

주제1: [욥의 탄식]

주제2: [생명을 탄식하는 욥]

본절은 본장의 후반부(11-26절)를 종결짓는 결론부라 할 수 있다. 즉 11절부터는 고난에 대한 욥의 한탄을 서술하고 있는 바, 본절에서는 그의 한탄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욥의 정신적 육체적 평안을 깨뜨리는 고난이었다. 그런데 이 고난은 특별한 이유없이 주어진 것이었기에 더욱더 욥의 심경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한편 본장에 나타난 욥의 '저주'(3-10절)와 '한탄'(11-26절)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1) 인간의 한계성:욥은 그 행위와 성품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인정을 받은 의인 중의 의인이었다(1:1, 8;2:3). 뿐만 아니라 그는 자녀들의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를 정기적으로 행하는 견실한 가정(1:5)의 가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같이 위대한 신앙을 가진 그도 두 단계로 주어진 시련을 결국 인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일과 잉태를 저주하며(3-9절), 무덤을 갈망하는(11-19절)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선지자중의 선지자였던(신 34:10) 모세가 죽기를 간구한 것이나(민 11:10-15), 엘리야, 요나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고통의 심각성으로 인해 죽기를 간구한 것(왕상19장; 욘4:3)과 흡사하다. 이렇듯 인간은 그 능력과 인내에 있어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피조물인 것이다. 이 같은 인간을 엘리바스는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4:19)로 묘사하고 있다. (2) 정직한 토로:하나님은 지.정.의를 갖춘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 2:7; 요 4:24). 이는 인간이 자신에게 닥치는 환경적 요소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즐거운 일에는 웃고, 고통에는 슬픔과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욥의 경우에 있어도 그는 무한정 인내 하거나, 외부의 환경적 요소에 대해 전혀 무반응을 보이는 목석(木石)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 중에 신음과 저주의 목소리를 발했다. 생일을 저주한 것이나(3-9절), 죽음을 갈망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볼때 그가 이미 신앙을 상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욥은 감내할 수 없는 현실의고통으로 인해서 자연스런 장탄식을 발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섭리)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데에 궁극적 의도가 있었다. 요컨대 욥은 솔직한 자기 감정을 내보임으로써 하나님의 감추어진 진리로 접근해 갔던 것이다. 이는 속으로 불신앙과 회의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행세를 하는 외식주의자들(마 6:5; 딤전 4:2)의 행태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자기 고민과 고통을 토로하며 당신의 섭리를 물은 욥에게 결국 진리를 계시하시고 구원의 축복을 주셨다(42:5,12-17).

성 경: [욥4:1]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질책으로 시작하는 엘리바스의 충고]

전장(3장)에서 전개된 욥의 저주와 한탄은 특정한 대상(object)을 두고 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그것은 하나님, 또는 욥의 친구를 직접적 대화 수신자(受信者)로 설정하지 않은, 소위 자기 독백적 언설(言說)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는 자신의 현상태에 대한 절망적인 한탄이 내포되어 있었으므로, 욥의 친구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것에 대해 응답하고자 했다. 욥의 세 친구들 중에 엘리바스가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최연장자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Pope, 박윤선). 한편 엘리바스의 변론은 방법상에 있어서 매우 세련되어 있으며 내용상에 있어서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또한 그는 5:27에까지 진행되는 긴변론 중에서 욥을 정면으로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편 타당한 진리(악=징벌, 선=보응)를 너무 도식적으로 고집한 나머지 욥의 특수한 상황(의인=징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이미 욥의 주장을 정중히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한편 이하 전개되는 엘리바스의 변론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서언(2절)->(2) 훈계(exhotation;3-6절)->(3)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7-11절)->(4) 하나님의 계시(진리의 계시, 12-21절)->(3) 인간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5:1-16)->(2) 훈계(exhortation;5:17-26)->(1) 결어(5:27). 이렇게 볼때 (4)를 축으로 하여 4장과 5장은 동일 주제를 반복하는 대칭 구조를 보여준다.

성 경: [욥4:2]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질책으로 시작하는 엘리바스의 충고]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에 조건을 나타내는 'if'(만일 ...한다면)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if'를 첨가하여 본절을 '조건절'로 해석한다. 즉, '만일 ...한다면 ...하지 않겠느냐'(KJV, NIV, RSV). 개역 성경 역시 이러한 번역을 따르고 있는데 전후 문맥상 이 표현이 자연스럽다 하겠다. 한편 본문 전체를 알기 쉽게 번역하면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면 자네는 귀찮게 여기겠지.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일세'(공동 번역)로 된다. 즉, 친구의 불행을 보고 권면, 위로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토로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1)욥이 자신의 말을 불쾌히 여기지 말 것과, (2) 욥에 대한 자신의 우정을 확인하여 이하 전개될 내용을 부드럽게 해준다.

성 경: [욥4:3]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질책으로 시작하는 엘리바스의 충고]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과거에 욥이 행한 선행과 업적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의 변론의 서두를 시작한다. 특히 이 인정 속에는 욥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 빠진 사람들을 보살피고 가르친 것에 대한 칭찬이 주조를 이룬다. 이처럼 엘리바스가 욥의 긍정적 측면을 먼저 부각시킨 것은 현재 고난에 빠진 욥을 위로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이기도 하겠지만 현재 욥에게 닥친 재난이 범죄의 결과임을 은근히 암시하려는 의도에서이기도 하다. 한편 3절 전반절과 4절 전반절 그리고 3절 후반절과 4절 후반절은 각각 대칭을 이룬다(Hartley).

(주); 교훈하였고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사르타'(*)는 완료형으로서 욥이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육(訓育)하여 왔음을 가리킨다. 특히 이 단어의 원형 '아사르'(*)는 회초리를 들거나 벌을 주어 올바른 길로 인도한 행위를 묘사할 때 쓰였는 바(신 4:36;시 2:10;16:7;94:12). 이는 욥이 죄인된 이웃을 경책하여 선한 길로 강하게 이끌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욥은 이웃에 대해 무관심과 자기 위주의 독단적 신앙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 성경에서 '손'은 종종 '능력'(수 4:24), '보호'(시 89:13), '도움'(수 7:9;8:18)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손이 늘어진 자'는 용기를 잃고 낙담한 자를 비유한다. 영역 성경은 이를 '연약한 손'(KJV, NIV, RSV,weak(feeble) hands)으로 번역했다. 이는 또 정신적 육체적으로 허약한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히 12:12). 이렇듯 신체의 일부분의 특징을 예로 들어 그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으로는 '간담이 녹았다'(두려워하다', '절망하다'의 뜻, 수 2:9,24;14:8), '얼굴을 돌리다'('싫어하다'의 뜻. 신 31:17;대하 30:9;시10:11;13:1;88:14), '목이 곧다'('거만하다'의 뜻, 대하 36:13;렘 17:23;19:15;잠29:1)등이 있는데 이는 히브리 시문학의 특징적인 기교중의 하나이다.

성 경: [욥4:4]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질책으로 시작하는 엘리바스의 충고]

(주); 넘어져 가는 자 - '넘어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가솰'(*)은 '비틀거리다', '빼앗기다', '쇠하다', '파멸되다' 등의 뜻을 가진다. 그런데 성경상에서 이용어는 주로 (1)하나님의 징계로 멸망해 가는 사람(레 26:37; 시 9:3;잠 16:18; 단11:14), (2) 발을 잘못 디뎌 엎어지는 사람(사 28:13)등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1)의 뜻으로 쓰였다. 이는 결국 욥이 죄를 짓고 멸망해 가는 사람들을 권고하여 생명의 길로 돌이켰다는 뜻이다.

(주); 무릎이 약한 자 - '무릎'은 신체 구조상 몸의 중심을 지탱하는 주요 부분이다. 따라서 '무릎이 약한 자'는 자기 스스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자, 즉 신체 허약한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정신적 허약자, 곧 힘이나 담력을 상실한 자를 스스로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극빈자와 소외계층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시 109:24('약한 무릎'), 사 35:3('떨리는 무릎'), 겔 7:17('물과 같은 무릎')에도 나타난다. 결국 3절을 포함하여 본절은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대(對)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의로운 자였음을 입증해 준다. 참고로 욥의 대(對) 사회적 선행에 대한 자증(自證)적 변론은 29장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성 경: [욥4:5]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질책으로 시작하는 엘리바스의 충고]

본절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1) 욥의 나약함에 대한 비난 :즉, 욥이 자신의 현재 처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타인들에게는 격려와 용기를 주었으나(4,5절)이제 자신에게 재앙이 임하자 낙담과 불신앙에 빠졌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욥이 타인의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자신의 문제에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되 처지에 빠졌다고 은근히 비난하는 것이다. (2) 욥에 대한 격려와 권면:즉, 엘리바스가 욥의 지난날의 의로운 행적(3,4절)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로 하여금 현재의 불행에서 일어나도록 권면, 위로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에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격려하고 교훈했듯이 너 자신도 현재의 고난에서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의미이다.

성 경: [욥4:6]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질책으로 시작하는 엘리바스의 충고]

욥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뢰)과 소망이 그의 행위의 선함에 기초해 있다는 엘리바스의 주장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선행을 강조하는 히브리인들의 초기 신앙 관념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엘리바스가 본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는 축복을 주시되 악인에게는 징벌을 주신다는 것(권선 징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욥의 나머지 친구들 역시 이와 동일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욥 자신도 이런 생각을 지녔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에 대해 너무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성 경: [욥4:7]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악인에게만 임하는 심판]

본문은 이하 전개될 엘리바스의 변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서 '권선 징악'의 원리를 표출하고 있다. 엘리바스의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죄의 삯은 사망'(롬6:23),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26)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그 행위에 상응하는 보응 원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창3:8). 그러나 엘리바스의 변론은 선악의 보응에 대한 보편적 원리를 욥의 고난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적용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그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다. 즉, 악이 징계받고 선이 보응받는 것이 일반적 원리이나 아벨의 예에서 보듯(창 4:8; 마 23:35) 종종 악이 득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민의 회개와(롬 2:4), 의인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시 119:71) 악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고 유보하시기도 하신다. 엘리바스는 바로 이런 측면을 고려함 없이 욥의 고난을 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고로 그의 신앙은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분히 현상적 차원에서 단순하게 이해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5:17-26에서 보듯 선악에 대한 엘리바스의 도식적 사고는 다소 유연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성 경: [욥4:8]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악인에게만 임하는 심판]

본절 역시 7절과 동일한 논지(論旨)로 일관하고 있다. 즉, 심은대로 거둔다고 하는(갈 6:7) 자연의 보편 원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 원리에 대해서 반박할 자는 아무도 없겠지만, 문제는 욥에게 닥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이었다.

성 경: [욥4:9]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악인에게만 임하는 심판]

(주); 입 기운 - 직역하면 '숨'(NIV, RSV, breath)이다. KJV는 '돌풍'(blast)으로 보다 생생히 번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말씀'을 가리킨다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박윤선).

(주); 콧김 - 성경에서 '콧김'은 종종 극심한 진노를 가리킨다. 이는 어떤 사람이 노했을 때 코를 벌름거리며 그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코를 통해 나오는 것에 연유한 비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많은 영역 성경들은 이를 의역하여 '분노의 돌풍'(NIV,RSV, theblast of his anger)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신인 동형 동성론적(anthropomorphic) 표현을 사용하여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 경: [욥4:10]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악인에게만 임하는 심판]

히브리 시가 문학(詩歌文學)에서 사자는 그 위용과 용맹성으로 인해 담대한 의인(잠 28:1), 권위(잠 30:29, 30)를 상징하기도 했으나 그 파괴적 성향으로 인해 '악인'(시 91:13), '죄인'(시 7:2;17:12;22:13;35:17;58:6) 등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사냥감을 입에 물고 목을 빳빳이 세운 사자의 모습은 회개할 줄 모르는 악인을 상징한다(시 17:12). 본절에 나타나는 사자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한편 본절의 '젊은 사자'와 11절에 나오는 '늙은 사자', '새끼 사자'는 모든 악인을 통칭한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본절에서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을 불문하고 악인은 그 누구도 공히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욥4:11]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악인에게만 임하는 심판]

(주); 움킨 것이 없어 - 사자가 그 먹이를 얻지 못한 상태(KJV,RSV,NIV,for lack ofprey)를 가리킨다. 본절에서 엘리바스는 악인이 결국 그 소득(열매)이 없으므로 인해 멸망할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성 경: [욥4:12]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가는 소리 - '세미한 음성' 또는 '속삭임'(NIV,RSV,whisper)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처럼 신탁이 주어지는 전초 단계에 사람의 청각이 감지할 듯 말 듯한 세미한 음성이 주어지는 것은 '엘리야'(왕상 19:11,12), '사무엘'(삼상 3:3-9)등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성 경: [욥4:13]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깊이 잠들 때 - 여기서 '깊은 잠'(KJV,NIV,RSV,deep sleep)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르데마'(*)는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창 2:21), 어떤 것에 압도되어 정신(얼)이 빠진 상태(사 29:10), 아브라함의 잠(창 15:12), 사울 일행의 잠(삼상26:12)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같은 무의식 상태가 인간의 의도적 능력이나 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간섭)에 의해 무의식 상태에 빠짐으로써 계시를 받을 준비를 위했던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대부분의 구약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중에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 있었다는 실례(호 1:2; 욜 1:1; 말 1:1 등)를 들어 엘리바스의 계시받는 행위가 이방 선지자 발람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 선지자 중 엘리바스와 흡사한 상태에서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이 여럿 있으며(단 7:1 등), 이러한 실례가 신약에서도 발견된다(사도 바울:행 16:9, 사도 요한:계 1:17)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이 주장은 별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다.

(주);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 단순히 '생각 중에'(KJV, Inthoughts)로 번역하는 것보다 '동요하는 중에', 또는 '불안해 하는 중에'(NIV, Amid disquieting)로 번역하는 것이 14,15절과 조화를 이룬다. 이 말은 본서에서도 이곳과 20:2등 단 두번 나타나는데 그곳에서는 '초급함이니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초월적 존재(하나님 또는 그의 사자)의 임재로 인해 인간의 심령이 크게 동요(당혹)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다니엘(단8:27;10:15-17), 느부갓네살(단 2:1) 등에게도 이와 흡사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 경: [욥4:14]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 '골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쳄'(*)은'뼈'(bone), '생명', '몸'을 의미한다. 이 용어가 잠 3:8에서는 '골수'로 번역되었다. 성경, 특히 시가 문학에서 보면 '뼈'는 심령의 처소 또는 그 사람의 인격과 동일시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죄로 인하여 내 뼈로 평안함이 없나이다'(시 38:3), '저주가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시 109:18),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하느니라'(잠 17:22) 등이다. 이렇듯 히브리인들이 뼈를 인격의 실체(實體)와 동일시한것은 그것이 인간 신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뿐 아니라 '마음'과 마찬가지로 지.정.의의 깊은 처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에 접한 엘리바스가 그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인해 온몸(전존재)에 전율을 느꼈음을 가리킨다(렘 23:9; 합 3:16).

성 경: [욥4:15]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영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41:16; 창 8:1; 사7:2;41:16), '광풍'(1:19;30:15; 사 27:8;32:2), '생명'(전 3:21;8:8;12:7),'의지'(대상 5:26;대하 21:16;36:22;학 1:14), '기질'(전10:4)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으나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주로 그분의 '영'(26:13;33:4;민 11:7,25;느 9:20; 시104:30;사 48:16;겔 11:19;36:26,27),사물을 소생시키거나 진멸하는 그분의 '능력'(4:9;시 18:15;33:6;겔 10:17;슥 5:9등)을 뜻한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영'에 대해서는 단순한 '바람'(wind), '천사'(angel), '초자연적인 숨결'(uncanny breath) 등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본절 하반절에 근거하여 이것은 인간의 몸을 오싹떨게 만드는 '찬 바람'(a cold breath of air)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Rowley).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Anderson, 삼하 5:24).

성 경: [욥4:16]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무나'(*)는 하나님의 얼굴, 영광(민 12:8; 시 17:15)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독특한 용어이다. 따라서 본절은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얼굴(형상)을 보기는 보았으나 그것을 분변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느냐 하는 질문에는 많은 난점이 따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신 까닭에 결코 물질적 형상을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물론 모세(민 12:8), 다윗(시 17:14,15)등이 직접 대면(對面)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위엄스럽고 영광에 찬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와 동일하게 칼빈도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은 인간에게 결코 보여지지 않는다'(Bavink, Gereformeerde Dogmatier, p.179)고 하였다. 따라서 본절에 뒤이어 나오는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으니라'는 말은 엘리바스가 직접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주); 종용한 중에 목소리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조용함 그리고 한 목소리'(astill,small voice; 개역 성경. '세미한 소리')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NIV 번역처럼 '한 조용한 목소리'(a hushed voice)로 옮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처럼 명사와 그것을 형용하는 형용사 대신에 두 명사를 접속사 and로 연결하여 표현하는 것. 예를 들면 '아름다운 소녀'(beautiful girl)를 '아름다움 그리고 소녀'(beauty and girl)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문학 기법상 이사 일의(二詞一意)라고 한다. 한편 엘리바스가 본환상은 목소리(음성)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을 맺는다(21절), 이는 엘리야가 받은 환상과 흡사하다(왕상 19:9-14).

성 경: [욥4:17]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 '하나님보다'에 쓰인 전치사 '민'(*)은 비교급인 '...보다', '...더'의 뜻으로 보기보다 '...로부터', '...앞에서'(before)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Driver, Gray, Delitzsch). 한편 '인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노쉬'(*)는 '깨어지기 쉽다', '약하다', '병들다' 등을 뜻하는 동사 '아나쉬'(*)에서 유래하여 연약한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지닌 인간(KJV, NIV, RSV, mortal man)을 가리킨다(창 6:4; 삿 9:28;16:27; 삼하 2:29; 대하 24:24; 스 2:2 등). 따라서 본절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분(시90:2;102:26)이신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로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주);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 그 창조하신 이 앞에 성결하겠는가'로 옮겨질 수 있다. 앞에 나온 절이 시간의 카테고리(즉, 인간=유일;하나님=무한(영원))에 견주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설파한 것이라면, 본절은 존재성(存在性)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의가 하나님 수준에 이를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의 주체요 동력인(動力因)인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성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로 본문 전체는 인간의 유한성과 부패성(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이 죄성은 단순히 윤리가 도덕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파악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요컨대 인간은 특정한 죄악을 범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 있어 초월성을 지닌 하나님과 비견될 수 없고,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의(義)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엡 4:13; 벧후 1:4). 한편 욥은 본문에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의(義)의 수준에 이를 수 없다든지, 아니면 인간이 전적으로 죄성을 지닌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회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그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차후에 욥이 스스로 인정한 진리이기도 하다(9:2). 고로 본문의 계시는 명확한 진리이기는 하나 그 당시 욥에게 있어서는 해결책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욥의 머리속에는 왜 하필 자신에게 그토록 엄청난 환난이 닥쳤는지에 관한 의문과 탄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욥4:18]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그 종 - 하늘에서 하난님을 수종드는 (his heavenly attendants)를 가리킨다.

(주); 그 사자 - 이것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의 무리를 가리킨다(KJV, NIV, angels) 천사들은 인간보다 성결하여 하나님 가까이에서 수종드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믿지 않고 미련하다고 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나타내 준다. 한편 어떤 학자는 본문의 천사를 타락한 천사로 보기도 하나 그 타당성 여부는 아직도 논란 중에 있다.

성 경: [욥4:19]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흙 집에 살며 - 이는 흙으로 만든 집에 사는 인간의 거주 상태(KJV, RSV,dwell(live)in (the) house of clay)를 묘사한 것이라기 보다는 흙처럼 연약하여 부숴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다(LB, men made of dust).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는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10:9),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33:6) 등이 있다. 인간은 원래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사후(死後)에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적 사상에 비추어 볼 때(창 2:7;3:19; 고전 15:47) 이는 인간의 기원과 그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탁월한 표현이다.

(주); 티끌로 터를 삼고 - 인간은 흙에서 왔으며(창 2:7) 그 흙(땅)에 삶의 기반을 두고 살아간다. 이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 3:19)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잘 입증된다. 본문은 이처럼 인간의 생존 터전인 땅을 '티끌'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의지하는 대상(물질, 명예 등)의 허무성과 유한함을 피력하고 있다. 나아가이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없다면 불안과 허무의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해 준다(22:16; 잠 10:25).

(주);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 '하루살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좀)와 '켄'(*,각다귀)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자가 쓰였다. KJV는 본 구절을 이끄는 관계 대명사로 which를 사용함으로써 선행사 houses(집)를 수식하게 했다. 원래 좀은 의복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캄(Hakam) 같은 학자는, 여기서'이쉬'가 좀벌레와 유사하게 생긴 벌레로서 블록의 짚을 갉아 먹어 진흙 집을 무너지게만드는 것이라고 본다(Hartley). 하지만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이쉬'를 '하루살이'로 옮겨도 무방하겠다. 성경에서 하루살이는 그 생명의 짧음과 연약성(하루살이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죽는다)으로 알려졌다(사 51:6). 이것에 근거하여 본문은(하루살이처럼 쉽게 멸망할 수 있는) 인간의 나약함을 설파하고 있다.

성 경: [욥4:20]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19절에서 인간의 연약성을 논증한 엘리바스는 여기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논증하고 있다. 특히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라는 표현은 마치 '아침에 태어났다 저녁에 죽는' 것같은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짧음을 과장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일생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 순간만을 사는 찰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짧은 인생이 어떻게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하는 반문이 본문 속에 내포되어 있다.

(주);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 이는 인간의 존재가 너무나 하찮은 고로 아무도 그의 운명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 죽을 정도로 짧은 인생을 사는 까닭에 자신의 장래 운명이가 처지를 인식할 겨를도 없이 죽음을 맛본다(KJV, RSV, they perish for ever without any regarding it)는 뜻도 된다.

성 경: [욥4:21]

주제1: [엘리바스의 첫 변론(1)]

주제2: [환상으로 깨달은 진리]

(주); 장막줄 - 여기서 '장막'은 인간의 육체를 상징하며(고후 5:1,4; 벧후 1:13), 줄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장막을 지탱하고 있는 줄을 뽑을 때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6:9;사38:12).

(주); 지혜가 없느니라 - 17-19절에서 엘리바스는 인간 육체의 유한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한 바 있으며 여기서는 인간의 지적 도덕적 불완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욥5:1]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미련한 자가 당하는 멸망]

(주); 거룩한 자 - 본서 서두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아들'(1:6;2:1), 곧 '천사'(angel)를 가리킨다(15:15;시 89:5,7 ;단 4:13,17,23:8:13;슥 14:5). 그러나 KJV는 '성인들'(thesaints), LB는 '그들의 신들'(their gods)로 각각 옮기고 있다. 여기서 LB의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번역을 따를 경우 욥 또는 엘리바스가 이방의 다신교적 관념(the conception of poly theism)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경우 욥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줄 대상으로 이방 신을 찾고 있다고 은연 중 엘리바스가 힐책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한 히브리적 유일신론을 소지한 욥이 실제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엘리바스 또한 욥과 동일한 믿음을 소유했던 고로 욥에게 그 같은 일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욥5:2]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미련한 자가 당하는 멸망]

본절에서 엘리바스는 구체적으로 욥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하 전개되는(3-7절) 내용에 근거해 볼 때 본문은 욥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 전체는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해 분노와 시기를 터뜨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결국 여느 악인과 마찬가지로 멸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다. 지금껏 엘리바스는 욥을 직접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으나 이 시점에 이르러 욥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욥이 고난 중에 다소 불신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저주와 한탄(3장)을 토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믿음을 아예 상시하지는 아니했으므로 그를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로 매도한 엘리바스의 처사는 분명 지나친 감이 있다.

성 경: [욥5:3]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악인의 비참한 운명]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언급함으로써 2절의 논증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실례는 4:8에도 나타나는 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논증이 직접적 체험에 토대한 무오(無誤)한 진리임을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주); 뿌리 박는 것 - 앞에 나오는 '미련한 자'를 '나무'(tree)로 보면 본절이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즉, 나무가 튼튼히 뿌리를 박고 무성해 가는 것처럼 종종 악인이 현세에서 번성한다는 뜻이다(LB, Those who turn from God may be successful). 이처럼 사람을 특정 사물, 특히 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히브리시가 문학에서 흔히 발견된다(8:16-22;14:7-9;15:32; 18:16;19:10; 24:20; 29:19; 시 1:3;52:8;92:12, 13;잠 12:3, 12등).

(주);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러나 내가 당장에 저주하였다'(KJV, but suddenly I cursed his habitation)이다. 이 번역을 따를 경우 본절전체는 (1) '내가 미련한 자(악인)의 번성을 보아왔다. 그러나 내가 그 집을 저주하였다(그래서 그 집이 멸망당하였다)'. (2) '내가 미련한 자의 번성을 보아왔다. 그러나내가 그집을 저주하였다(그래서 그 집이 멸망당하였다)'. (2)'내가 미련한 자의 번성을 보아왔다(그러나 그 집이 멸망하였다). 그래서 내가 당장 그 멸망한 집을 보고 저주를 하였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전자는 악인이 멸망을 미리 예견하고 엘리바스가 저주한 것이며, 후자는 악인이 멸망하자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인 줄 알고 엘리바스도 저주했다는 것이다. 로린슨(G. Rawlinson), 에발트(Ewald), 쉴로트만(Schlottmann)등은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델리취(Delitzsch), 랑게(Lange), 드라이버(Driver), 그레이(Gray) 등은 후자의 견해를 취한다. 양쪽 다 일리가 있으나 전후 문맥상 후자 쪽이 보다 자연스럽다 하겠다(NIV, but suddenly his house was cursed). 한편 본절에서 시작하여 7절에서 끝나는 미련한 자의 받을 재앙과 17-2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받을 복이 서로 대조되어 나타난다.

성 경: [욥5:4]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악인의 비참한 운명]전절(3절)

이 미련한 자(악인)에 대한 저주를 선포한 것이라면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그가 받을 재난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본절은 가족에게 임할 재앙을 첫 번째로 묘사하고 있다.

(주);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 우리는 이를 죄가 그 자식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엘리바스는 이러한 의도를 가졌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후에 욥이 본인의 죄는 본인 스스로에게 갚아져야 한다고 반박하기 때문이다(21:19,29). 성경은 '아비의 죄가 삼사대까지' 간다(출 20:5; 신 5:9 등)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표현은 죄에 대한 강한 경계심과 경종을 주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처럼 아비의 범죄가 그 자손에게 악 영향을 미쳐 그 역시 아비와 동일한 범죄를 자행하여 심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실제로 성경은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20;13절)고 말함으로써 죄와 의에 대한 보응이 각 개인 주체에 한정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 성문에서 눌리나 - '성문'은 '법정'(court)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히브리인들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적(公的) 장소의 하나인 성문에서 재판을 한 실례에 비추어 볼 때(신 25:7; 시 127:5; 사 29:21; 암 5:10) 매우 설득력이 있다. 만일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본절은 미련한 자(3절)의 자녀가 재판에서 불의한 판결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욥 당시는 족장 시대였던 고로 성문에서 재판이 실시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실제 족장 시대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에는 재판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성문'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KJV, RSV, gate). 따라서 본문은 악인의 자녀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문(城門) 또는 대로(大路)에서 부당한 처사(공동 번역, '몰매를 맞아도')를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구하는 자가 없다'는 말은 악인은 그 쌓은 죄로 인해 위경(危境)시에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앤더슨(F.I.Anderson)은, 본절의 '성문'이 이례적으로 '광풍', '대풍'(1:19)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문'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광풍'과 철자가 똑같기 때문이다(두 단어 모두 '사아르'(*)임). 만일 이 주장을 취하게 될 경우에 본절의 '성문'은 1:19에 나오는 '대풍'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고 본절은 대풍에 의해 그 자녀를 잃은(1:19) 욥의 재앙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절에서 욥을 은근히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로 간주하려 한 엘리바스의 의도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하겠다.

성 경: [욥5:5]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악인의 비참한 운명]

4절에서 악인의 가족이 받는 재앙을 묘사한 엘리바스가 본절에서는 그가 받을 재산상의 손해를 언급하고 있다. 즉, 악인은 그 재물을 불의한 방법으로 획득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또한 그것을 방비하기 위해 아무리 공교(工巧)한 계책을 마련한다 할지라도 잃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주);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빼앗으며 - 족장 시대의 근동인들은 추수한 뒤 곡식단을 가시나무로 가려 보관하거나그 낱알을 왕겨로 덮어 보관하였었다. 이는 짐승이 물고 가거나 먹는 것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종종 출몰하여 식량을 약탈하는 침입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따라서 본절은 악인이 그 곡식(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나 결국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임을 나타내 준다.

(주); 올무 - 매우 난해한 단어로서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 침탈자:이러한 번역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는 KJV, LB, ICC, 랑게 주석, 풀핏 주석이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뒤에 나오는 '입을 벌리느니라'는 '마셔버리다'(swallowethup)로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본절 상반부에 나오는 '주린 자'(the thirsty)='먹다'(eat up)와 본절의 '목마른 자'(the hungry)='마시다'(swalloweth up)가 자연스런 대구가 되기 때문이다. (3)'올무' 또는 올무를 만드는 사람:이러한 번역은 시리아 벌게이트(Aqulla Symmacus Syr Ug), 카알 델리취 주석(Keil & Delitzsch Commentary)등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견해는 모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올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밈'(*)이 단순히 '올가미'(18:9)를 의미할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도둑', '약탈자', '음모자'도 뜻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올무'는 악인의 재산을 빼앗는 침입자(약탈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결론 짓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한편 본문의 사건은 욥이 불의의 약탈자, 즉 스바 사람(1:15)과 갈대아인(1:17)에 의해 그 재산과 자녀를 잃은 사건을 연상시킨다. 아마 엘리바스는 이러한 암시적인 사건을 예로 제시하며 욥의 은밀한 죄를 추궁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성 경: [욥5:6,7]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고난 그 자체인 인생]

여기에서 주장하는 엘리바스의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난의 원인(thecause of sufferings): 엘리바스는 인간의 고난이 외부적인 원인이 아닌 인간 내부의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그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나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죄성, 부패성)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창 3:17, 19에서 분명히 보듯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적대적인 자연 환경과 부단히 투쟁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2)고난의 범위(the extension of sufferings) :엘리바스는 7절 상반부에서 '인생은 곧 고난이다'라는 논리를 통해 고난이 모든 인간들에게 임함을 역설하고 있다. 즉, 인간 모두는 이 고난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7절 하반절의 표현 역시 인생의 고난이 변개될 수 없는 자명한 이치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바스의 논리는 다분히 일반론적 측면에 기울어진 감이 농후하다. 즉, 4:17-21에서 인간의 보편적 유한성과 부패성을 주장한 그는 본문에서도 인생의 고난을 보편적 원리에 의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이론은 원칙론적 측면에서 지극히 타당하다. 따라서 욥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도식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에서만 현실 상황(욥의 고난도 포함)을 파악하여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즉, 그는 욥(의인, 1:1;2:3)이라는 특수한 한 개인을 인생 일반(죄인)의 범주에 포함기켜 그의 고난을 정당화시키고 따라서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에 아무런 불평없이 무조건 순응하기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주); 불티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르쉬프의 아들들'(sons of Resheph)이다. 고대 가나안 신화에 의하면 르쉬프는 역병과 파괴의 신이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이것(또는 '르쉬프의 아들들')이 '불', '역병'(신 32:24; 합 3:5), '번갯불'(시 78:48)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르쉬프의 아들들'로 직역하는 것보다는 '불티'(LB,flames)로 옮기는 것이 좋다(Hahn, Barnes, Delitzsch, Dillmann등), 본절은 불이 탈 때 그 재가 항상 위로 치솟는 것처럼 인생의 고난이 피할 수 없는 자명한 것임을 나타내 주는 비유이다.

성 경: [욥5:8]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본절 앞에 강한 반대 접속사인 '그러나'를 첨가시켜 '그러나 만일 내가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NIV, But if it were I...)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그러나'는 1,2절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강한 질책의 태도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즉, 여기에서 에리바스는 지금껏 전개된 교조적(敎條的;dogmatic)태도에서 다소 물러나서 욥에게 권면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7-27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본절의 권면 속에는 욥에 대한 은근한 질책이 내포되어 있다. 즉, '자네는 쓸모없는 불평을 터뜨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네. 만일 나 같으면 그러한 일을 집어 치우고 하나님께 기도하겠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에서 보듯 엘리바스는 욥의 한탄과 변론(3장)을 무익한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도에 지나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성 경: [욥5:9]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이와 비슷한 표현으로는 9:10;37:5;시 145:3등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바스가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소위 '신적 섭리의 불가해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굳이 볼 필요는 없다(시 40:5;72:18;77:14;136:4;롬 11:33). 다만 그는 10-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공의)를 문학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한편 본문의 동사('행하시며', '행하시나니')가 현재형으로 표현된 것(KJV, doeth; NIV,performs)은 엘리바스가 목도한 하나님의 섭리가(10-16절) 시종여일(始終如一)함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욥5:10]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대부분 건조한 사막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비는 식수(食水)로(창 24:11; 대하 26:10), 농부의 식물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으로(창 2:5; 레 26:4),그리고 초장의 풀을 자라게 하여 육축을 기르게 하는 것(삼하 23:4)으로서 매우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기후는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며, 건기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으며,우기라고 해서 다량의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었다(창 27:28; 신 33:28). 따라서 팔레스틴인들에게 있어서 비는 간절한 희구의 대상이었다. 성경이 비를 하나님의 축복(신 28:12; 시 68:9; 겔 34:26), 또는 은총(욜 2:23;마 5:45)으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여기서도 엘리바스는 '비'('물')를 하나님의 축복(섭리)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메마른 땅과 밭이 비를 받아 소성하듯. 인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살아간다는뜻이다(시 104:11;147:8).

성 경: [욥5:11]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주); 슬퍼하는 자 - '슬퍼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다르'(*)는 단순히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말은 '재투성이가 되다', '(상심으로 얼굴 표정이) 어두운 색깔이 되다','(삼베 옷, 또는 더러운 옷을 입고) 극심히 애도하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극심한 슬픔을 나타내는 자를 가리킨다(삼하 13:19;에 4:1 등).

성 경: [욥5:12]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주); 궤휼한 자 - 정직한 자를 억압함으로써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악인을 가리킨다(사32:7; 미 3:1-5).

성 경: [욥5:13]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주);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과 비슷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악인은 자신의 지혜로 어떤 일을 공교(工巧)히 도모하나 결국그 동기의 사악함으로 인해 패망하게 된다는 교훈이다(시 57:6,7; 잠 26:27;28:10).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시 9:16), '저(악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시 7:15,16),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신다'(고전 3:19) 등이 있다.

성 경: [욥5:14]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본절은 12, 13절에 대한 결론부라 할 수 있다. 즉, 12,13절이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한 것이라면 본절은 그 심판의 결과(형국)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엘리바스는 빛의 대조(낮:밝음, 밤:어두움)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악인이 당하게 될 당혹감과 좌절감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12:24,25; 신 28:29; 사19:13-25;59:10). 이렇듯 악인은 늘 불안한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잠 28:1; 사48:22;57:20) 종국에는 주의 진노로 그 존재의 근거 마저 상실되고 만다(창 11:8; 사37:27;40:23;40:23;41:11;44:25;45:16; 렘 20:11).

성 경: [욥5:15]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주); 곤비한 자 - 영역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된다. (1) '고아'(LB,RSV,the fatherless), (2) '가난한 자'(KJV,the poor; NIV,the needy), (3) '곤궁한 자'(NEB,the destitute)등이다. 그러나 맛소라 사본(MT)에는 이말이 나타나 있지 않다.

(주); 그들의 입의 칼에서 - 이것 역시 매우 난해한 구절로서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1)'칼에서 곧 저들의 입에서부터'(KJV,from the sword, from their mouth). 즉, '칼'과 '입'을 동격으로 보는 것이다. (2) '그들의 입 안에 있는 칼에서부터'(NIV, from thesword in their mouth).즉, 본절의 후반구(句)를 전반구(句)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다(Zockler). 어떤 견해를 취하든 간에 본절 상반절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칼, 곧 그들로부터 악한 훼방(시 55:21;57:4; 59:7;64:3)과 핍박을 당하는 연약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뜻만은 확실하다(삼상 2:6-8;고전 1:27-29).

(주); 강한 자의 손 - '그들의 입의 칼'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면 '압제자의 손'(LB,the grasp of these oppressors)또는 12절의 '궤휼한 자의 계교'나 13절의 '간교한 자의 궤휼','사특한 자의 계교'로 해석된다. 공동 번역도 이러한 해석을 취한다. 그러나 '강한'(powerful)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자크'(*)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주로 쓰였다는 사실에 근거해 볼 때(출 32:11;렘32:21). 본문의 '강한 자'를 '사악한 자' 또는 '압제자'로 해석하기 보다는 하나님으로 해석함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Anderson). 그렇다면 본절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때 약한 자(의인)를 그 심판에서 제외시켜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가 된다.

성 경: [욥5:16]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주); 가난한 자 - 히브리어 '달'(*)은 '늘어지다', '헐겁게 되다', '허약하게 되다', '흔들리다'를 뜻하는 동사 '달랄'(*)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는 15절에 나타난 '곤비한 자'와 동일한 의미이다(KJV, NIV, RSV, LB, the poor).

(주);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 -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11-15절)으로 악인의 횡포와 압제가 종식되는 것을 의인법적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침탈당하는 약한 자를 구원하신다(11, 15절). 그리고 압제자와 강포자를 징계하신다(12-14절). 이는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증표이다. 바로 이 같은 신적 통치 질서에 근거하여 의인은 새로운 존재의 소망을 가지게 되며, 악인은 더 이상 활개치지 못하게 된다. 한편 본절은 '하나님의 길을 의심하는 자들은 그분의 공의가 행사되는 것을 보고 넘어지게 된다'로 해석하기도 한다(Rawlinson). 만일 이 해석을 따른다면 본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한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간접적 비난이라하겠다.

성 경: [욥5:17]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본절은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보는 엘리바스의 견해가 피력된 구절이다. 즉, 그는 욥의 고난을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연단(시험)'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단을 영구적인 것이 아닌 일시적인(temporary) 것으로 생각했다. 즉 질병(18절), 환난(19절), 기근과 전쟁(20절), 비방과 조롱(21절), 멸망과 기근(22절)모두가 하나님의 연단으로서 일시적인 것이니 욥이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인내하여야 한다는 권고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본문의 내용과 형식은 잠 3:11,12과 거의 일치한다(히 12:5, 6).

성 경: [욥5:18]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에 대한 권면]

본문은 욥의 질병('피부병',2:7,8)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즉, 욥의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의 일환이나 욥이 그것을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고쳐 주신다는 것이다(신 32:39; 삼상 2:6). 한편 본문은 앞절과 뒷절이 동의(同意)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즉, '아프게 하시다가'- '상하게 하시다가', '싸매시며'-'고치시나니'는 각각 동일한 의미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치료자로 그 백성을 병자(病者)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사 30:26; 호 6:1), 예수께서 죄인을 '병든 자', 당신을 '의원'으로 비유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막 2:17; 눅 4:23).

성 경: [욥5:19]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주); 여섯 가지...일곱 가지 - 일종의 관용적 표현으로 여기서는 '모든'(all), '어떠한'(whatever)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처럼 숫자를 반복하여 그 뜻을 강조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우가릿 신화')과 히브리 문학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로 꼽힌다(창 4:24; 잠 6:16;30:15,18,29; 전 11:2;암 1:3-13; 미 5:5; 집회서25:7; 마 18:22). 한편 본절은 욥이 징계를 달게 받는다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을 것임을 나타낸다.

성 경: [욥5:20]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주); 기근 - 수렵과 목축과 거의 의존하던 고대 족장 시대에서 기근은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성경은 족장 시대의 기근의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창41:29-36).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가혹한 형벌의 하나로 간주한다(레 26:19,20; 신 28:22-24;왕하 8:1; 시 105:16; 사 14:30; 렘 24:10).

(주); 전쟁 - 이것 역시 고대 근동 지역에 있어서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대부분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종종 무리를 지어 다른 부락을 약탈함으로 그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욥의 재산과 육축을 빼앗은 '스바인'(1:15)과 '갈대아인'(1:17)의 침입도 작은 전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고대인들이 겪었던 가장 곤혹스러운 위협에서부터 욥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권고이다.

성 경: [욥5:21]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주); 혀의 채찍 - '불의 혀'(tongue of fire,Gordis), '쏟아지는 저주'(공동 번역), '채찍의 혀'(Hebrew Sermon on the O.T. p. 147)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어떤 것을 취하든 간에 '중상'(LB, slander), '비방'을 의미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결국 이러한 표현은 채찍이 공중에서 휘도는 것처럼 사람의 입 안에서 날름거려 파괴적 위력을 동반하는 혀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라 하겠다(시 31:18; 렘 18:18). 이처럼 인체(人體)의 일부분을 사물로 형상화(形象化)하거나, 또는 사물의 일부분을 의인화하는 것을 히브리문학의 수사학적 기교이다(예를 들면 15절의 '입의 칼', 20절의 '칼 권세'(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칼의 손'이 됨)).

성 경: [욥5:22]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주); 들짐승 - (*, 하야트 하아레츠).직역하면 땅의 짐승'(KJV,NIV,RSV,the beasts of the earth)이며 육축을 해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 맹수(LB,wildanimals)를 가리킨다.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 있어서 맹수를 매우 위험스런 존재였으며, 특히 성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민가(民家)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왕하 17:25). 한편, 20-23절에 나타나는 재앙(20절-기근, 전쟁'21절-중상;22절-참화,들짐승)을 에스겔 14:21에 나타나는 재앙과 동일시 하려는 견해도 있다(Rawlinson).

성 경: [욥5:23]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주);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 본절은 '밭에 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진다. (1) '들판의 요정'(M.H. Poge), '들판의 주들'(K. Kohler), '들판의 아들들'(G.Beer) 등으로 볼 경우;즉, 본절은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않는 어둠의 영적 세력들로부터 음해(陰害)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대인들, 특히 팔레스틴인들은 땅 속에 영(地神)들이 거하며, 인간이 이들을 노하게 할 경우 흉년과 기타 재앙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2) '들판의 돌'로 볼 경우(KJV,RSV,NIV,the stones of thefield); 즉, 밭 농사가 잘되어 풍족한 수확을 거둘 것이라는 표현이다(Hartley,Habel). 다시 말하자면 대부분 돌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밭 곡식이 잘 성장하여 풍년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팔레스틴지역에서는 돌 때문에 밭 곡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견해 중 후자를 따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주);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 본절은 앞절과 동의(同意) 대구를 이루고 있다. 특히 앞절의 '밭의 돌'이 인간의 생존에 적대적인 무생물(無生物)을 상징한다면 여기서의 '짐승'은 공히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생물(生物)을 총제적으로 상징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의인)이 맹수(생물)의 위협없이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영위함을 의미한다. 엘리바스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당시 팔레스틴에 육축과 인명에 대한 맹수의 위협이 흔했던 사례에 연유한 것 같다(22절). 한편 본문은 인간의 타락으로 와해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될 것임을 나타내는 바, 이는 메시야의 도래로 완성될 새로운 창조 질서(사 11:6-8; 호 2:18)를 시사해 준다.

성 경: [욥5:24]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23절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장막', '우리' 등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상이 분명히 지적된 점이 다를 뿐이다.

(주); 장막 - 오늘날의 '텐트'(RSV,tent)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욥이 성읍(town)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목민(당시 유목민들은 대부분 성읍에서 떨어져 유랑하면서 육축을 했다)이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29장에서 보듯 욥은 성읍에서 유력한 현자(賢者)중의 하나였으며, 또한 농부요, 목축업자였다(1:3, 15, 17). 그러므로 '장막'은 오히려 '집'(LB, home)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성 경: [욥5:25]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본문 역시 23절과 마찬가지로 동의(同意)대구법이 사용되어 의인의 후예가 번성할 것을 강조해 준다.

(주);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 - 과장법과 직유법이 쓰인 문학적 표현이다. 시 72:16을 고려해 볼 때 이 '풀'은 성읍 밖에 도처에 널려 있는 야생화(野生花) 또는 잡초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라니'(창 22:17)라고 약속하셨던 것을 들 수 있다.

성 경: [욥5:26]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본절에 나타난 장수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상기시킨다(레 26:3-13; 신 28:1-14). 실제 고대 히브리인들은 '장수'를 '자손의 번성'(25절)과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다(왕상 3:14; 시 91:6; 잠3:2;9:11;10:27; 사 65:22;슥 8:4 등). 한편,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된 엘리바스의 변론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을 거쳐야만 6장부터 전개될 욥의 반론(反論)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고난의 일반화(一般化):거듭 확인하거니와 욥의 고난은 그의 특별한 죄악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단의 궤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으로 주어진 것이었다(1:9-12;2:4-6). 하나님은 1차적으로 사단의 참소(1:9-11;2:4,5)의 허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욥에게 시련을 내릴 것을 허용하셨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욥에게 신앙의 연단(演壇)과 보다 새로운 차원의 계시 신앙을 주기 위해서였다. 즉, 자기 의(self-righteousness)와 선행(善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만족감을 느낀 욥에게 초월자 앞에서 그것은 절대적 구원의 근거가 아닌 단지 상대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런 측면에서 욥의 고난은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기 보다는 의인의 신앙 건덕(建德)을 위한 일종의 '시련'이었다(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신 8:2,16; 잠 17:3; 약 1:12; 벧전 1:6;4:19 등). 그러나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의 고난의 특수성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일반적 고난의 범주에 넣어 해석했다. 그 결과 그는 욥이 범죄로 인해 고난받고 있음을 심증적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3,4).(2) 경험 철학: 엘리바스는 자신의 논증을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이 목도한 몇가지 사례를 들었다(4:8-11;5:3). 그런데 이 같은 것들은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진리이나 현실의 개별적 부분에 있어서는 그대로 적용되기 힘든 측면을 내포하였다. 결국 그는 부분적 경험에 근거하여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그것을 모든 부분에 적용시키는 잘못을 범했다.(3) 위로자로서의 자격 결여: 그의 논증은 거의가 딱딱한 교리 체계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으며 실로 냉정하기조차 하다. 그는 '위로자'(comforter)라기 보다는 '훈계자' 내지는 '교사'로는 욥 앞에 섰던 것이다. 물론 엘리바스의 고압적이고 냉정한 자세가 5:17-27에서 약간 완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27절에서 보듯 그는 자신을'지혜자'(wiser)요, 욥을 그 지혜에 복종해야 하는 '학생' 정도로 취급함으로써 욥의 심경을 격발시켰다(6:24-29). 요컨대 엘리바스는 친구에 대한 참된 우정에서 자신의 변론을 시작했으나(4:1,2)욥의 특수한 상황을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투적인 논리만을 나열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욥을 정죄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성 경: [욥5:27]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주의 징계를 인정하는 자의 복]

(주); 우리의 연구한 바 - 이는 엘리바스의 지금까지의 언설(言說)이 자신의 경험 체계에 근거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물론 그의 변론이 하나님의 계시(4:12-21)에 의존한 면도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 계시 역시 그의 경험의 일부였다. 특히 그는 4:8과 5:3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의 사고 체계가 경험에서 실증된 진실임을 강조하였다. 한편 기독교 신앙이 경험, 곧 역사적 산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경험을 초월한 세계를 믿음으로 신뢰하는 데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히 11:1).

성 경: [욥6: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본문에서부터 7장까지는 엘리바스의 변론(4,5장)에 대한 욥의 첫번째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성 경: [욥6: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5:2에서 엘리바스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인다'고 함으로써 욥을 은근히 질책한바 있는데, 본문은 그것에 대한 욥의 반박이다. 즉 고통에 처한 자가 그 고통을 토로한다고 무조건 질책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참작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인과 응보적인 변론만을 전개한 엘리바스의 태도에 대한 욥의 반박이라 하겠다. 나아가 이 말속에는 욥의 자기 변호의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즉, 그가 당하는 고통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며, 다라서 죽음을 갈망하는 자신의 행위와 말(3장)이 자연스럽게 나올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성 경: [욥6: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주);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 `바다 모래'는 성경에서 대부분 셀 수 없는 많은 수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2:1; 32:12; 41:49; 수 11:4; 삿 7:12; 삼상 13:5). 그런데 여기서는 잠 27:3과 마찬가지로 `무거움'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H-artley). 고대 히브리인들은 `돌'(잠 27:3)과 마찬가지로 허다한 모래 또한 무거움의 대명사 격으로 표현하였다.

(주);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죄의 시인: 욥은 3장에서 자신의 잉태와 탄생을 저주(3:1, 3-11)하며 죽음을 갈망하였다. 따라서 본절에서 욥은 그것이 비신앙적 행위였음을 시인하고 그 죄를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별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본장에서도 욥은 3장에서와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갈구하고 있다(9-11절). 만일 욥이 3장에서 나타난 자신의 행위를 부당한 것으로 여기고 회개했다면 여기서 동일한 행위를 반복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자기 변호:욥의 고난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2절). 그것은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우며(본절 상반절), 따라서 그의 현재의 말과 행동이 정당하다는 뜻이다. 즉, 3장에 나타난 그의 말이 그의 고난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하다는 의미이다. 도리어 그를 은연중 `미련한 자'(5:2)로 매도하려 한 엘리바스가 경솔한 자였다고 본다. 이 해석은 전후 구절들을 참고해 볼 때 타당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2절에서 자기 고통의 심각성을 토로한 욥이 4-6절에서는 그 고통으로 인한 자신의 토로가 정당한 행위임을 거듭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욥6: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주);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 여기서는 하나님의 징계, 보다 직접적으로는 욥에게 주어진 일련의 재앙을 가리킨다(1:13-19; 2:7,8). 이처럼 하나님을 `용사'(勇士) 또는 `궁수'(弓手)로, 그의 진노(징계)를 그분이 쏘는 화살로 각각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하게 발견된다(신 32:23, 42; 시 7:13; 21:12; 45:5; 애 3:13, 14 등). 여기에서 보듯 일단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왜'(why) 그것을 주셨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고로 그의 갈등은 지속된다.(7:20; 16:12, 13 등).

(주);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 이 말은 `그 독이 내 영혼을 삼켰다'(KJV, thepoi-son whereof drinketh up my spirit)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여기서 `그 독'이라 함은 앞절에 나온 `화살의 독'(NIV, RSV, their poison)을 가리킨다(pope,Dahood). 고대인들은 사냥을 할 때 화살의 끝에 독을 묻혀 쏘곤 했는데, 욥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독화살을 맞은 짐승이 그 독성이 온몸에 퍼짐으로 인해 차츰 죽어가듯, 하나님의 진노(화살)를 받은 자신이 점점 더 깊은 절망과 회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본절 상 반절에서는 `화살'이 `몸'에 박혔다고 했으나 하반절에서는 그 `화살의 독'이 `그의 영'을 삼킨다고 표현함으로써 `신체'에서 `영혼'으로까지 이행(移行)되어 가는 그의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주);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 욥이 당하는 고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구절이다. 욥은 자기에게 연속적으로 주어진 일련의 재앙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4a절). 그런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대상(형벌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재산, 자손, 건강을 상실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참을 수 없는 형벌이었다. 점점 가중되는 하나님의 재앙 속에서 그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전조(前兆)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성 경: [욥6: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본절에서 욥은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일상적 소재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수사 의문문'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귀'(KJV, RSV, wild ass)와 소는 먹을 풀이 풍족히 있으면 결코 울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욥 자신도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결코 비탄과 불평(3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욥이 불평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자기 변호의 말인 것이다. 특히 `나귀'와 `소'의 울음에 자신의 비탄(불평)을 비유한 것은 마치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들이 우는 것이 자연적이며 본능적이듯, 그의 현재의 불평도 그와 같은 성질의 것임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욥의 불평을 미련한 것이요 시기하는 것(5:2)이라고 은근히 꼬집은 엘리바스에 대한 책망도 숨어 있다.

성 경: [욥6: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1) 엘리바스에 책망 : 엘리바스의 변론(4, 5장)은 욥의 고난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욥이 `왜' 고난받는가 하는 질문에도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도리어 엘리바스는 자기 변증적인 일반론으로 변론을 일관함으로써 욥의 심중에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의 변론은 마치 소금을 치지 않아 간이 맞지 않은 음식, 그래서 사람의 입맛에 구역질을 일으키게 하는 음식처럼 욥에게 무미 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달걀의 흰자위처럼 핵심에서 이탈해 있었다(Anderson, Habel).(2) 욥의 자기 변호 : 일반적으로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것을 먹는 것은 고역스런 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달걀의 흰자위를 그 노른자 위에 비해 맛없는(영양가 없는)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싱거운 음식, 달걀의 흰자위)을 싫어한다. 욥에게 있어서 그의 고난이 바로 이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즉, 그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음식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 즉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인내해야만 하는 데에 그의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겠으나 전자의 해석이 좀더 타당하므로 여기서는 그것을 취하기로 한다.

(주); 닭의 알 흰자위 - 이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한데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멀건 흰죽(공동 번역) : 일반적으로 죽에는 소금을 넣지 않아 그 맛이 없다. 마찬가지로 엘리바스의 변론도 그것처럼 아무런 맛과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이 해석은 `닭의 알 흰자위'를 앞절에 나온 `싱거운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2) 쇠비름의 즙액(Anderson, Harthey, Keil and Delitzsch) : 쇠비름(purslane)은 팔레스틴의 길가나 밭 같은 데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1년생 풀로서 그 즙액에서 아무 맛도 없다. 엘리바스의 변론도 이와 대동 소이(大同小異)했다. 따라서 이 해석 역시 (1) 과 마찬가지로 상반절의 내용을 반복,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셈이다. (3) 꿈결에 흘린 침(Tur Sinai) : 이는 `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무드 (*)를 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헬렘'(*)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아, `꿈'으로 번역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달걀의 `흰자위'를 `침'으로 보는 이유는 삶지 않은 달걀의 흰자위가 끈적끈적한 것처럼 잠결에 흘린 침 역시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해석법을 따를 경우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욥의 반응은 더욱 신랄한 것으로 된다. 즉, 꿈결에 흘리는 침이 그 끈적거림과 악취로 인해 구역질 나게 하듯, 엘리바스의 변론 역시 욥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4) 닭 알의 흰자위(개역 성경 탈굼역). 이중 어떤 해석법을 취하든 본문이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질책, 또는 욥의 현재 고난에 대한 자기 변호를 담고 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성 경: [욥6: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결백을 주장하는 욥]

욥은 엘리바스의 변론을 먹기 싫어하는 음식에 비유한 데 이어(6절), 여기서는 그것을 만지기 조차 싫어하는 음식에 비유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 이는 욥이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 못된 식물 - `나를 아프게 하는 음식'(NIV, food makes me ill), `나를 짜증나게 하는 음식'(RSV, food that is loathsome to me)' `몸이 아플 때에나 먹는 것'(공동번역), `나의 슬픈 음식'(KJV, my sorrowful meat)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들이 가능한 것은 개역 성경에서 `못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데와이'(*)가`(병이 들어)쇠약해지는', `혐오하는', `슬퍼하는'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욥6:8,9]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죽음을 원하는 욥]

본문은 3장에 이미 나타난 욥의 간구를 재확인하고 있다. 즉 3장에서 욥은 자신의 죽음을 갈구하였던 바, 여기서 그것을 다시 반복하여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죽음에 대한 욥의 갈구 : 3장에서 욥은 자신의 죽음을 강하게 나타낸 바 있다. 즉, 그는 (가) 차라리 잉태되지 말았으면(3:3-10), (나) 탄생하지 말았으면(3:3-10), (다) 탄생하였으되 일찍 죽었음다(3:11-19)하고 소망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러한 소망의 연장선상에서 (라) 지금이라도 죽었으면 하고 갈구한다. 이처럼 욥은 죽음의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설정하고 그 가능성들이 한 가지씩 실패로 돌아가자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렇듯 집요하게 죽음에 집착하는 1차적 이유는 욥이 당한 고난의 심각성에 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풀길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욥이 신앙적 혼란에 빠졌으며, 더 이상 현생(現生)에대한 소망을 둘 여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2)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정면 거부 :엘리바스는 그의 변론에서 죽음은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최종적 형벌이요 심판임을 강하게 설파하였었다(4:9). 그리고 욥에게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권면하였다(5:1,8). 그러나 여기서 욥은 도리어 죽음을 강하게 염원함으로써 이 같은 엘리바스의 권면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향후 전개될 욥과 그의 친구들간의 변론에서 긴장과반목이 야기되는바, 이 같은 욥의 태도도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3) 욥의 신앙 :욥은 여전히 죽음을 갈망하는 가운데에서 그 죽음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고백하고 있다. 즉, 인간의 생사(生死)를 좌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그는 철저히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인내의 한계에 봉착하여 자살을 도모했을런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도 그 고난의 조성자가 하나님이시며(4절), 자신은 그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 죽음을 갈구할 수는있을지언정 그것을 도모할 수는 없다는 것이 욥의 믿음이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욥은 세속적 염세주의자(pessimisti), 또는 현실의 한계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정당시한 후기 스토아주의자(Later Stoic)들과 명백히 대조된다.

성 경: [욥6:10]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죽음을 원하는 욥]

(주);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본문은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앙 절개를 지켜 왔노라고 하는 욥의 신앙 고백이기도 할. 그러나 이고백 속에는 자신의 허물을 책망하려 들었던 엘리바스에 대한 반발과 변호의 심리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인정을 받은(1:1, 8; 2:3) 거룩한 자였다. 그러나 엘리바스로부터 직접적이진 않지만 간접적으로 그 자신의 의를 의심받고, 죄를 추궁당했다(4:6-11; 5:2-7). 아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욥은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듯하며 29절에 가서는 그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성 경: [욥6:1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죽음을 원하는 욥]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누릴 축복에 대해 약속한 바 있다(5:17-27). 그러나 욥의 현재 상황은 그 같은 약속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즉, 엘리바스는 소유(5:24)와 자손(5:25)의 축복을 약속했으나 욥에게 있어서 그것은 한낱 공허한 언설(言說)에 불과했다. 더욱이 잃어버린 건강(2:8, 9)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5:18, 19)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욥의 현 상황은 절망의 연속이며, 어떤 측면에서 절망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는 참고 인내하여 회복될 미래를 소망하기 보다는 차라리 현재에서 죽음을 요청했다.

성 경: [욥6:1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죽음을 원하는 욥]

본문은 신앙의 위인인 욥 자신도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능력을 지닌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토로되어 있다. 즉, 상반절은 정신력(기력)의 한계를 후반절은 육체(살)의 한계를 나타낸다 하겠다. 여기서 정신력이라함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상실하지 않는 신앙 의지를, 그리고 육체라 함은 고난, 특히 전신에 퍼진 피부병(2:8, 9)을 인내하는 육체적 능력을 각각 가리킨다. 요컨대 욥은 그 정신력과 육체에 있어서 한계 상황에 다다랐던 것이다.

성 경: [욥6:1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죽음을 원하는 욥]

(주);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 나지 아니하였느냐 - 불의의 재난을 당한 욥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경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재난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따라서 본절은 욥이 삶의 위기를 해소할 능력(RSV, any resource)이 전혀 없음을 토로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지혜'는 `생명의실제'(Lange), `구원'(Noyes), `회복'(Conat)등으로도 해석된다. 만약 이 해석법을 따를 경우 본절은 구원과 회복(건강 회복, 자손과 소유의 번성 등)의 가능성이 전무(全無)한 욥의 절망감을 토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 경: [욥6:1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를 질책하는 욥]

본문 전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야 그 뜻이 통한다. `절망한 자는 그의 친구들의 헌신(동정)을 받아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포기한 자라 할지라도 그리하여야 한다'(NIV, A despairing man should have the devotion of his friends,even thougth he forsakes the fear of the Almighty). 여기서 욥은 엘리바스의 태도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을 나타내고 있다. 즉 자신에게 진정으로 요구되었던 것은 온후한 동정과 사랑의 말이었으되, 엘리바스의 변론에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더욱이 엘리바스가 이미 은연중 지적한 것처럼 욥이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4:7, 8) 엘리바스는 욥을 권고하고 동정하는 참다운 우정을 보여주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17:5; 19:21, 22). 실로 엘리바스를 비롯하여 욥의 친구들에게서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진정한 사랑에서 출발한 이해였다. 우리는 여기서 타인에 대한 권고의 말을 할때는 그 말이 지니는 논리성이나 말의 유창함이 아닌, 그 사람의 정황에 대한 전적인 이해와 사랑으로 하여야 함을 교훈 받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타인, 심지어 범죄한 자를 권고할 때라도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로(갈 6:1)고 했다.

성 경: [욥6:1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를 질책하는 욥]

(주); 나의 형제 - 원문상으로는 복수형(KJV, RSV, My brethren)이다. 4,5장의 변론이 엘리바스 단독으로 선포되었음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복수형은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 비록 엘리바스가 4,5장의 변론을 독자적으로 설파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실제적으로 엘리바스, 빌닷, 소발 등 세 친구의 공동 변론과 다름 없었다. 왜냐하면 5:27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변론을 `우리의 연구한 바'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욥과 그의 친구들과의 변론은 매우 자유스러운 대화(discussion or dialogue)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이 긴주제를 변론(또는 강연)하는 식이라기 보다는 짤막한 대화로써 구성되었을 것이다.그런것을 본서 저자가 극시(劇詩) 형태에 맞게 각 사람의 대화를 일목요연하게 재조정내지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엘리바스와 함께 그의 다른 친구들이 욥에게 말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욥은 그들을 염두에 두고 `나의형제들'이라고 지칭했을 듯 싶다.

(주);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 팔레스틴 지역의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와디(wadi)의 특성을 들어 욥은 친구의 변덕스러움과 불성실을 비난하고 있다.여기서 `시냇물'과 `개울'은 공히 `와디'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비가 오면 금방 물이 불어나다가도 비가 그치고 조금만 지나면 그 강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메말라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팔레스틴 지방의 지층(地層)이 물을 오래 가두어 둘 수 없는 모래와 자갈 들로 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와디는 농부와 행인(行人)에게있어서 전혀 쓸모없는 무용지물(無用之物)과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물이 절실히 필요한 건기(乾期, 5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에는 메말라 있으며, 그 반대로 물이 필요없는 우기(雨期, 11월부터 다음해 5월 초순까지)에는 비로 인해 와디가 넘쳐 흘러 버리기 때문이다. 욥에게 있어서 그의 친구들도 이와 같았다. 즉, 그들은 욥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따뜻한 동정과 위로는 주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변론과 주장으로 욥의 심화(心化)를 자극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욥은 그들에게 일종의 배신감(RSV, My bre-thren are treacherous)과 속았다는 느낌(KJV, my brethren have dealt deceitfully)을 갖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을 신뢰할 수 없는 존재(NIV, my brothers are asundependable)로 여기게 되었다.

성 경: [욥6:16,1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를 질책하는 욥]

본절에서는 15절에서 토로된 친구에 대한 욥의 책망이 더 신랄해진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틴 고지대, 특히 길르앗(Gilead)이나 바산(Bashan)지역에는 겨우내 눈이 내린다. 기온이 더 하강하면 산의 협곡의 물들이 얼게 되며, 종종 그 얼음 위에 또다시 눈이 내려 겹겹으로 얼게 되기도 한다(16b절). 그런데 봄이 되어 기온이 올라가면 이들의 녹아 흘러내리게 되는데 대개 이때에는 주변의 흙과 먼지, 얼음 조각, 자갈, 암석, 잡초덩이 등이 함께 휩쓸려 내려온다. 따라서 자연히 그 물빛은 검은 색을 띠게 된다(1 6a절). 여러 지류(支流)가 합쳐진 본류(本流)에서 그 물은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 양은 급격히 줄어들며 정작 물이 절실히 필요한 여름철에는 아예 강바닥이 마른다(17절). 욥의 친구들도 그가 절실히 필요했던 때에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존재들이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을 기초로 볼 때 욥의 고향은 레바논 인근 지역이었을 것이다.

성 경: [욥6:18]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를 질책하는 욥]

본문은 그 주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 (1) 와디(wadi)의 수로(水路)로 볼 경우 : 와디의 수로는 그 발원지(發源地)에서는 넓고 크며, 또 거의 한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하류로 내려올수록 그것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支流)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흐르게 된다. 따라서 자연히 그 물의 양이 격감하게 되며 어떤 것은 사막으로 흘러들어 수로의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게 된다. 본문은 이것을 `광야로가서 죽고'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법은 델리취(Delitzsch), 데이빗슨(A. B.Davidson), 부드(K. Budde), 히찌히(F. Hitzig)등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떼를 지은 객'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아르호트'(*)가 19절에서도 `떼'(대상)를 분명히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무리가 따른다. (2) 떼를 지은 객(NIV, Caravans)을 주어로 볼 경우 : 일반적으로 여행객, 특히 장거리 여행자들은 수통(水桶)을 준비하여 그곳에 물을 채운다. 사막으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더욱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장거리 여행을 하는 도중 그 수통에 물이 떨어지면 그들은 시냇가를 찾는다. 이때 만약 시냇가가 말라 있으면(17절) 그들은 물을 찾아 상류로 이동하게 될 것이며, 나중에는 수원지(水源池)인 협곡이나 산지까지 다다르게 된다(Driver & Gray). 그래도 찾지 못하면 그들은 광야로 나와 방황하다가 결국 갈증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된다. 이 같은 해석은 쉴로트만(Schlottman), 히르첼(Hirzel), 에발트(Ewald), 랑게(Lange)등에 의해 주장되며 본장의 전후 문맥상 타당하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해결책을 찾아 방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비애감만을 맛본 자신의 심경을 물을 찾는 여행자에 비유하고 있다.

성 경: [욥6:19]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를 질책하는 욥]

(주); 데마 - 이스마엘의 후손으로서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창 25:15). 그리고 이들의 거주지는 에돔 근방의 아라비아 지역으로 알려진다(사 21:4; 렘 25:23) 따라서 본문의 `떼'라는 말은 `대상' (隊商, RSV, NIV, caravans)을 가리키는 것으로보아야 한다.

성 경: [욥6:20]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를 질책하는 욥]

본문은 장거리 여행을 하는 자들이 시냇물을 찾았으나 그것이 메말라 있음을 발견한 직후의 허망한 심정을 묘사함으로써 현재 욥의 심경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즉, 그들은 사막의 폭염(暴炎)아래서 갈증에 허덕이다 먼 발치에서 시내가 있음을 발견한다. 기뻐 뛰어가지만 그물이 메말라 있음을 발견하고 그들은 깊은 절망감과 당혹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으나 다가가 보자 그것이 신기루였음을 알아챈 직후의 심경에 비견된다 하겠다. 따라서 본문은 고난에 빠진 욥이 친구들로부터 인말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냉담한 질책만 당한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 하겠다(시 6:1).

성 경: [욥6:2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를 질책하는 욥]

(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 여기서 욥은 자신을 위로하려 온 친구들의 이기적인 성향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다. 즉, 그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동정하려는 진정 어린 충정심(衷情心)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욥의 고난에 동참하는 행위를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2:12, 13). 그러나 욥에게 내려진 재앙의 참혹함과 그것이 조만간 회복되어질 가능성이 희박함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두려워하며 넌지시 발뺌하고자 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욥의 재앙을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했을 것이다. 즉 욥은죄인이요, 그 죄값으로 지금의 재앙을 겪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본래의 태도에서(2:12, 13) 후퇴하여 욥에게 온후한 사랑과 동정의 행동( 말)을 나타내 주기를 주저하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죄인(욥)과 연합했다는 이유로 그들 자신들도 형벌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의 신앙은 구약 초기의 `동태(同態)보복법'(talion)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출21:23-25; 레 24:17-21; 신 19:21). 그러나 14절에서 욥이 밝힌 것처럼 그 친구들이보여야 할 의당한 행위는 고난에 처한 자, 심지어 욥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었다는 할지라도 그에게 온정과 위로를 보내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의인뿐 아니라 창가와 세리 등을 사랑하시고(마 9:10; 21:31), 눌린 자에게 위로를 주심으로(눅 4:18 ; 행10:38) 이러한 모범을 몸소 보이셨다.

성 경: [욥6:22,2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를 질책하는 욥]

본문에 나타난 4가지 질문을 통해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기대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예물이나 용맹스런 행위(23절)가 아니라 14절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듯, 진퇴양난의 고통 중에 처한 욥에 대한 사랑(*, 헤세드)이었다. 한편 23절에 나타난 `대적', `포악한 자'는 욥의 소유물을 약탈하고 종들을 죽인 스바인(1:15)과 갈대아인(1:17)으로 볼 수도 있다.

성 경: [욥6:2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헛점을 지적하는 욥]

지금까지 욥은 직유법과 반어법을 사용하여 그의 친구들의 무정(無情)한 행위를 비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같은 문학적 기교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질책을 가한다. 따라서 본문의 전체적 분위기는 다분히 공격적이며 격앙(激昻)되어 있다. 즉, 욥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지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이 말 속에는 (1) 은연중 자신을 죄인의 동류(同流)로 취급한 엘리바스에 대한 강한 불쾌감과, (2) 자신은 그러한 비난을 받을 만한 범죄를 결코 자행하지 않았다는, 소위 자기 의에 대한 항변(10절, 29절), 그리고 (3) 만일 엘리바스가 욥의 범죄를 확신하고 있다면 암시적으로 언급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 경: [욥6:2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헛점을 지적하는 욥]

(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정직한 말은 어찌 그리 힘이있는지'(KJV, RSV, How forcible are right words)이다. 그런데 NIV 와 포우프(M.H. Pope)는 `정직한 말은 어찌 그리 고역(비탄)스러운지'(NIV, How painful are honest words)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 원어상 이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에서 `유력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라츠'(*)가 `힘있는', `효과적인', `설득력있는', `기분좋은'등의 뜻을 가질 뿐 아니라(시 119;103), `비탄에 젖은', `고역스러운'등의 뜻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왕상 2:8; 렘 14:17 등).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문의 뜻은 변함이 없다. 즉 욥은 엘리바스의 변론이 부정직하며, 따라서 그 자신은 그 변론에 순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성 경: [욥6:2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헛점을 지적하는 욥]

(주);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욥의 자기 변호 : 일반적으로 격심한 고난에 처한 자는 이성과 논리를 떠나 자기 감정을 무자비하게 토해낸다. 마치 그것은 바람처럼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일 수 있다. 3장에 나타난 욥의 변론 역시 이러한 성향이 없지 않다. 즉, 그는 가중되는 고난의 압박감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혹에 못이겨 가히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일들을 소원하는 말을 토해내었던 바, 이러한 것은 그의 고난의 와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결코 이성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고난으로 모든 소망이 상실된 상태에서 발설된 욥의 말을 책망하거나 비난하는 것은아무 필요도, 소용도 없다는 의미이다. (2) 친구들에 대한 비난 : 욥은 고난 중에 발설된 자신의 말이 그 친구들에 의해 정당히 받아들여 평가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것을 마치 지나가는 바람처럼 별 가치없이 받아들였다. 아마 욥은 자신의 정황과 내적 고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주어진 자기 변증적인 엘리바스의 변론 속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자신의 말을 사려깊고 분별력있게 받아주지 못한 그의 친구들에 대한 욥의 실망과 질책의 뜻이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너는 절망한 자의 말을 바람처럼 취급하려는가?'(NIV, KJV, RS V,Do you treat the words of a despairing man as wind?)로 번역함으로써 이 같은 해석을 지지한다.

성 경: [욥6:2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헛점을 지적하는 욥]

(주); 고아를 제비뽑으며 - 앞에서 친구들의 부정직과 이기심을 비난(21, 25절)한 욥은 여기서 그들의 무자비함을 책망하고 있다. 고대 히브리 관습에 비추어 볼 때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최하류 계층으로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다(출 22:22; 신 14:29; 16:14; 27:19; 사 1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악한 자들은 채무 능력이 없는 과부의 자녀(개역 성경은 이것을 `고아'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어상 `아버지가 없는 자'가정확함)를 놓고 제비뽑기를 하였다. 즉, 돈을 지불받지 못한 데 대한 대가로 과부의자녀들을 제비뽑아 노예로 삼거나 노예 시장에 팔았다(왕하 4:1; 느 5:5; 욜 3:3; 욥1절; 나 3:10). 이러한 무자비한 행위를 예로 들어서 욥은 친구들의 동정없음을 질책한다.

(주);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번역된다. (1) KJV의번역 : `너희 벗을 위해 구덩이를 팔 자로구나'(ye dig a pit for your friend). 이들은 개역 성경에서 `매매하다'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 `카라'(*)를 `파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 원문에 나타나지 않는 `솨하트'(*, 구덩이)를 보충하고 있다. 전후 문맥상 충분히 이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요셉의 예에서 보듯(창 37:24, 28) 고대인들은 자신의 대적자를 처치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그를버렸기 때문이다. (2) NIV, LB, ICC(Driver & Gray), 공동 번역, 랑게(Lange)번역 :이들은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너희의 친구들을 팔아넘길 자들이로다'(barteraway your friend)로 옮긴다. 절친한 친구를 상품으로 팔아넘긴다는 이러한 표현속에서 이미 욥과 그의 친구들간의 불신과 갈등의 벽이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감지할 수있다.

성 경: [욥6:28]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헛점을 지적하는 욥]

(주); 이제 너희가...원하노라 - 이 구절 앞에 반대 접속사인 `그러나'(NIV, RSV, But)를 첨가하면 뜻이 더욱 잘 살아난다. 지금까지의 경직된 질책의 어투가 변하여 온화한 간청조로 전환됨을 알 수 있다.

성 경: [욥6:29]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헛점을 지적하는 욥]

(주); 너희는 돌이키라 - 이 말 속에는 두가지 요청이 함축되어 있다. (1) 나를 죄인으로 가정하는 일을 즉시 중단하라. (2) 나의 입장에서 보라. 욥의 현재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채 주어진 친구들의 변론은 욥의 감정만 자극시켰다. 따라서 욥은 여기서 그들에게 기존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욥 자신의 위치에 서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고하고 있다.

성 경: [욥6:30]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권면의 헛점을 지적하는 욥]

(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 여기서 다시 한번 욥은 지금까지 한 말 속에 잘못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주);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궤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본절은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해석된다. (1) `재난'(RSV, calamity)으로 볼 경우 : 이는 욥이 자신에게 임한 재난이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욥의 재난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욥의 친구들은 은연중 그것을 욥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욥은 그 재난이 자신의 범죄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만은 확신하고 있다. 요컨대 욥은 자신이 재난을 받을 만한 인물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과 이해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궤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와'(*)가 2절; 30:13에서 `재앙'으로 번역되어있음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한 시도이다(Schlottmann, Dillmann). (2) `악'(KJV,perverse things ; NIV, malice)으로 볼 경우 : 이는 욥이 선악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즉 자신은 아직까지 도덕적. 지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문제가 논란이 될 때 그것을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는뜻이다(12:2, 3). 위의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을 취하든간에 본문은 공히 욥의 도덕적 판단 능력(또는 이해력)에 대한 자기 변호의 뜻을 내포한다.

성 경: [욥7: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 `전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바'(*)는 `군대',`전쟁', `부역'(사 40:2)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은 군대에 지용된 자가 무거운 고역을 강제적으로 해야하듯 인간 역시 고역스러운 삶을 영위해 나가야 되지 않느냐는 의미이다. 한편 여기에서 욥은 인생 일반을 취급함으로써 자신의 현재 고통스런 삶의 정황을직접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생 일반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현재 자신의 고통의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현 상황은 군인이 강제적(의무적)으로 힘든 고역을 수행해야 하듯, 자신에게 주어진 재난(1:13-1 9)을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현재 상황은 주인(하나님)에게고용되어 하루의 노동량(욥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를 `재난'으로 볼 수 있겠다)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품군'(본절 하반부)이나 다름 없었다.

성 경: [욥7:2]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 고대 히브리 사회에 있어서 품꾼의 노동 시간은 엄격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날이 밝거나 해가 뜰 때 일을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 그것을 끝냈다. 따라서 품꾼에게 있어서 해가 저무는 것은 단순히 일의 종결 시간을 뜻하는 것 이외에 고역스러운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과 평화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욥은 고난의 때가 속히 끝나기를 소망하는 자신의 심경을 노동시간이 속히 끝나기를 염원하는 품꾼의 심경에 비유하고 있다.

성 경: [욥7:3]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공허한(무익한) 달들을 부여받았다'(NIV, 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이다. 여기서 욥이 자신의 지난 날들을 `무익한'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고난을 타개하려는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재난이 자신에게 닥친 이후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산과 소유는 여전히 상실된 채로 있었으며 자손 또한 다시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육체의 질병은 더욱 가중되고(5절),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갈등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욥은 이제 절망의 벽에 부딪혀 지나간 날들이 마치 열매없는 무용지물과 다름없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성 경: [욥7:4]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전신에 퍼진 피부병(2:7,8)으로 인해 전전반측(轉轉反側)하는 욥의 참담한 심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밤은 휴식과 평안의 시간이요, 잠은 하루 동안의 피로와 고통을 풀어주는 묘약(妙藥)이다.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들이 여느 사람보다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부분의 낮 시간 동안에 친구들과 변론함으로써 심신이 지쳐 있었을 것이며, 또한 추한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밤은 더 큰 형극의 시간이었다. 여느 병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의 질병은 밤에 더욱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13-15절). 이러한 육체적 고통 이외에도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지 않나하는 영적 회의와 갈등 때문에도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성 경: [욥7:5]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 여기서 `구더기'(*, 라마)는 흰 색의 길고 미끄러운 형태의 벌레로서(Quain's, Dictionar of Medicine, vol. 1,p.512), 욥의 피부가 곪은 데에서 기생한 것으로 추측된다(17;14). 그리고 `흙 조각'은 (1) `때'(공동번역), (2) `피부로부터 나오는 흙덩이'(Keil & Delitzsch), (3)`먼지'(KJV, dust ; RSV, dirt), (4) `상처의 딱지'(NIV, scabs ; Lange, `굳어진 꺼풀')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여기서는 기와 조각으로 긁고(2:8), 종기가 나서 지저분하게된 욥의 몸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본문의 묘사에 근거해 볼때 욥의 질병의 상태가 상당히 악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 구나 - 이는 욥의 피부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가(RSV, hardens) 다시 터지는 것을 가리킨다. 욥은 자신의 몸에 피부병이 발병한 이래로 여러 달이 흐르는 동안(3절) 이러한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문을 원문에 따라 정확히 번역하면 `나의 살갗이 깨어진다. 그리고 곪는다' 인데,이것 역시 종기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곪아 터지고 그 위에 새 살이 돋아나는 피부병의 일반적 증상을 가리킨다.

성 경: [욥7:6]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베틀의 북 - 원문을 직역하면 `베틀짜는 사람의 북'(KJV, NIV, RSV, a weaver's s-huttle)이다. 이것은 베를 직조할 때 실을 엮는 틀로서 대단히 빠르게 좌우로 움직인다. 이는 찰나(刹那)같은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고백은 4절의 말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4절에서 욥은 자신의 날이 더디 간다고 토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병중에 있는 자들은 그 기간을 매우 길게 느끼기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은 세월의 빠름에 그 초점이 있기 보다는 그 덧없음(허무)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여야 한다. 즉, 본절에서 욥은 아무런 성과(회복)없이 보낸지난 몇달(3절)이 자신에게는 전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절망과 무가치의 시간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본절 하반부).

성 경: [욥7:7]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 `호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KJV, wind) `공기', `영'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짧은 기간을 상징함과 아울러 허무와 덧없음을 의미한다(시 78:39; 전 1:14; 사 41:29; 렘 5:13). 아마 욥은 자기 병이 치유 불가능하다고 예견했을 것이며, 따라서 죽음만이 그것을 모면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욥의 변론의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6:1-7:6까지의 욥의 변론은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나 본절에서 부터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가 대화(dialogue)형식이었다면 후자는 독백(soliloquy) 형식을 띠고 있다.

(주); 복된 것 - 좁게는 (1) 그의 질병이 완치되는 것(2:8, 9)을, 넓게는 (2) 그의 건강, 소유(1:3), 자손(1:2) 등이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5장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약속한 축복(5:17-27)과 동일하다. 그러나 욥의 현재 상황은그 같은 축복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무(全無)하였다. 이로써 욥은 끝없는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되었다.

성 경: [욥7:8]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나를 본 자 - 원문을 정확하게 옮기면 `지금 나를 보는 자'(NIV, (the eye) that now see me)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를 보아왔던 자'(KJV, him that hath seen me)로 번역하는 것이 전후 문맥에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전자의 견해를 취할 경우 본문은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을 가리키며,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는 지금까지 욥을 알고 지내왔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주);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 전절(前節)에서 욥은 친구들과의 사별(死別)을 토로한데 이어, 여기에서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토로하고 있다. 즉, 욥은 죽음이 현세에 있어서 인간관계의 단절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도 종결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죽음을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한편 우리는 본문을 `죽음의 종결성'이란 측면에서만 살필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욥의 갈망'이란 차원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이 닥친 이후로 줄곧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해 왔다. 이러한 그의 염원은 "내가 친히 그(하나님)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19:27)라는 고백 속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현재 욥의 상황은 이러한 그의심적 염원 상태와 정반대로 전개되어 구원의 여하한 가능성 조차 상실되어 가고 있다. 육체적 질고가 악화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도 희박해져 간다. 즉, 현재 욥은 영적.육적 생명의 위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7:9]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올'(*)은 `비었다', `깊다'를 의미하는 동사 `솨알'(*)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음부'를 죽은 자의 영혼이 내려가는 어두운 지하 세계로 인식했던 것 같다(창 37:35; 민 16:30, 33; 시 55:15; 사 5:14). 그런데 본절에 기초해 볼 때 욥이 음부 세계에 관해 어떤 관념을 가졌는지 정확히 추측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본서는 그 분류상 시가 문학(詩歌文學)에 속하며, 따라서 죽음과음부 세계에 대한 욥의 묘사 역시 교리적 성격보다는 시적.비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은 음부에서 지속, 고정되며 현세로 되돌아오거나 다른 세계로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음과 음부 세계에 대한 욥의 이러한 관념은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지속된다고 믿은 고대 팔레스틴, 특히 애굽인들의 내세관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이 현세를 왕래한다고 믿은 반면, 욥은 이 양자(兩者)사이의 단절성을 믿었다는 측면에서 그의 내세관은 이방의 그것과 구별되며, 신약의 내세관의 한 토대를 형성했다 하겠다(마18:9; 눅 16:19-31; 계 20:10).

성 경: [욥7:10]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주);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 음부 세계와 현세와의 단절성을 의인법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8절 주석 참조). 고대 팔레스틴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생전에 그가 살던 집이나 아끼던 물건에 도로 돌아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애굽인들은 영혼이 육체에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들이 미이라를 만들어 무덤속에 보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욥은 이방 세계에 살았으나 그들의 이 같은 종말관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관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욥7:1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말하며...원망하리이다 - 본문은 앞으로 전개될 욥의 변론(불평)에 대한 서론격으로서, 욥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의 심각성으로 인해 심중(心中)에 있는 불만을 기탄없이 하나님께 털어놓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욥의 연설(演說)은 얼핏 보기에 매우 경거 망동(輕擧妄動)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본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욥의 하나님께 대한 질문에는 이러한 인상이 더욱 짙게 풍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욥의 이러한 언사(言辭)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유일성, 그리고 인격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것을 거두어 줄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인식했으며(하나님의 주권), 또한 그분을 고난에 처한 인간(욥)의 소리를 들어 주시는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하나님의 인격성). 만일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욥은 고난 중에 차라리 영원히 침묵해 버렸거나 아니면 자살 등의 방법으로 고난을 종결시켜 버렸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말들을 고통에 대한 불평과 비난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한 인간의 신앙적 갈등의 토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욥7:12]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 내가 바다니이까 - 어떤 학자는(Delitzsch, Hirzel) 본문의 `바다'(*, 얌)를 나일강으로 보기도 한다. 그 증거는 사 19:5에 쓰인 히브리어 `얌'이 나일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정지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큰 강(예를 들면,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관개 시설이 발전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이들 강들은 우기(雨期)때에 삽시간에 흘러 넘쳐 주변 지역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특히, 상류 지역에 홍수가 날때에는 강바닥이 패이고 강둑이 유실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천시에 특별한 신경을 써서 강 수의(首位)를 관찰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다. 이처럼 흉용하고 격랑하는 바다를 지켜보는 것같이 욥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하나님으로부터 감찰 받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감찰(보호)이 도리어 현재의 욥에게 있어서는 부당한 처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바다'와 같이 취급될 만한 하등의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강물이 흘러 넘쳐 인명과 재산에 손실을 주는 것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과(1:1, 8) 사람 앞에서(4:3, 4) 공의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둘째, 그는 바다와 같이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성향(性向)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1:1)이었으며, 더구나 바다와는 구별되는 이성적 피조물이었다. 이상의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절에서 욥은 (1)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만한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자기의 주장), (2) 따라서 현재 자기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행위는 부당하며(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 (3) 자신은 그 같은 행위(재난)를 흔쾌히 수납(受納)하거나 끝까지 인내할 수 없다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주); 용이니이까 - 여기서 용은 (1) `고래'(KJV, a whale), (2) `심연의 괴물'(NIV, themonster of the deep), (3) `악어'(Delitzsch), (4) `용'(Lange), (5) `큰 짐승'(박윤선)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중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닌'(*)이 `뱀'(출 7:9, 10, 12; 신 32:33; 시91:13), `큰 물고기'(창 1:21), `악어'(겔 29:3; 32:2), `용'(사 27:1; 51:9; 렘 51:34) 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용은 전절에 나타난 `바다'와 마찬가지로 그 성질이 난폭하고 거세어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바다의 큰 생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욥은 어부(漁夫)가 큰 바다 괴물을 잡을때 그 시선을 집중하며, 때로는 매로 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또는 부당하게)다루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 속에서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시며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다.

성 경: [욥7:13]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 - 극난(極難)한 고통 중에 잠시나마 평안과 위로를 받고자 염원하는 욥의 심경이 의인법적 표현을 통해 드러나 있다. 그의 병은 발병(發病)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다(3절). 이 기간 동안 욥은 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러나 병이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세인(世人)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밤 역시 그가 갈구하던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도리어 전신에 퍼진 피부병이 밤중에 발작(發作)을 더 심하게 일으켜 그는 속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할 형편이 되었다(4절). 어느 한 순간에도 영육의 평안을 갖지 못했다는 욥의 고백속에서 그가 겪은 고통의 실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욥7:14]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심신의 질곡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수면과 평안이다. 욥 역시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13절).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단잠과 휴식이 아닌 불쾌하고 무서운 꿈이었다.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꿈'과 `이상'을 사단의 역사(役事)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Adam Clarke). 사단이 욥을 칠 수 있는 전권(全權)을 하나님께로 부여받았다(1:12; 2:6)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욥의 병고(病苦)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후유증)으로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특히 정신적 갈등을 동반하는 병자에게는 악몽(惡夢)과 환영(幻影)이 자주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욥은 병중에서 안식과 평안을 취하기 위해 잠을 청했으나 도리어 악몽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성 경: [욥7:15]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 성경에서 `뼈'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가리킬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 실례로 아담이 하와를 `뼈 중의 뼈'(창 2:23)로, 라반이 야곱을 `나의 골육'(창 29:14)으로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다(삼하 5:1; 사 38:13 등). 그런데 본절에서는 욥이 오랜 질병으로 말미암아 몹시 수척해진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성 경: [욥7:16]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 여기서 `생명'은 문자적으로 `목숨', `삶'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현재 처한 욥의 상황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욥이 자신의 생명(삶)을 혐오한 것은 (1) 질병의 악화(5절), (2) 정신적(신앙적) 고통의 심화(13-15절), (3) 회복의 가능성 전무(全無)(7,8절) 등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욥이 강력하게 삶을 저주하고 죽음을 희구한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간구하는 욥의 고투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주); 나를 놓으소서 - 절망의 한계 상황에 빠져 있으면서도 원초적 신앙을 견고히 고수하고 있는 욥의 자세를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즉, 욥은 자신의 현재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따라서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신했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삶(축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에게 죽음을 허락할 수 있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심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는 욥이 생사(生死)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했음을 드러내 준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일찍이 그가 사단의 시련을 받았을 때부터 피력되었으며(1:21), 그의 질병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서도 보여졌었다(6:4). 이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의 참신앙이라 하겠다.

성 경: [욥7:17,18]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본문은 시 8:4; 히 2:6-8과 내용상 유사하다. 그러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시편 기자 및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과 다르다. (1) 동기(상황) : 욥의 고백은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와중에서 나온 것으로서 절망과 한탄조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기쁨과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2) 의도 : 욥의 고백은 실로 비천한 존재인 인간을 지속적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19절)에 대한 원망의 토로이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가지의 고백은 실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마치 하늘의 천사보다도 더 특별히 여기사 권고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관심과 눈길이 도리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불화살과도 같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욥은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으며(6:4), 그분의 눈길(관심)이 존속하는 한 그가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한 죽음(3장)마저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 크게 여기사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가텔레누'(*)는 `창대케하다'(창 12:2), `더 크게 하다'(왕상 1:37), `(명성, 지위 등을)존귀하게 하다'(대상29:25), `(키를)자라게 하다'(사 44:14)등 다양하게 쓰였다. 여기서는 `존귀하게 하다'(magnify)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벌레와 같이 작은 존재(25:6; 시 84), 하나님과 비교할 때 메뚜기 같이 미천한 존재(시 90:10; 전 8:8)인 인간이 이렇듯 존귀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무한한 축복일진대 욥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도리어 불평과 원망의 요소가 되어버렸다는 고백속에서 우리는 그가 당한 고난의 심각도를 추측해 볼수 있다.

(주); 마음을 두시고 - 히브리 관용법에 따르면 이 표현은 `관심을 기울이다'(pay heed to), `배려하다'등의 뜻이다(출 7:23; 삼상 4:20; 시 48:13, 14).

성 경: [욥7:19]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 나의 침 삼킬 동안 - 18절에 나타난 `아침마다', `분초마다'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본문은 18절의 그것보다 더 세분된 시간을 가리킨다. 즉, `침 삼킬동안'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짧은 시간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18절에서 시작된 과장법적 표현이 본절에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서 매순간마다 고통을 당해야 하는 욥의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성 경: [욥7:20]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하 아담 노첼)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부성애적(父性愛的) 관심과 그의 백성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나타낼 때 주로사용되었다(사 27:3). 이 표현이 성경에서는 `지키는 자'(시 25:10), `보호자'(시31:23), `포도원지기'(사 27:3), `파숫군'(렘 31:6), `상직군'(27:18)등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는 공히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를 지배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도리어 부담과 불평의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감찰하시는 주가 계시는 한 그는 자기의 뜻대로 죽음을 택할수도, 그리고 현재의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감찰은 도리어 그이 불안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주);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극히 미천한 존재인 인간(욥)의 범죄가 초월적이고 광대하신 하나님(시 145:3)께 아무런 영향이 끼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까닭에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22:2-4; 35:5-8)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욥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며, 조그마한 범죄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죄의 심각한 본성을 알고 있었다. (2)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다고 탄식하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 철저히 경건 생활에 전력했던 욥이 그토록 큰 환난을 당한 데대해 깊은 의구심을 타나낸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맥상 비교적 타당하게 여겨진다.

성 경: [욥7:2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 내 허물...내 죄악 - 이 말은 지금까지 전개된 욥의 고백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엘리바스가 욥의 범죄를 의심했을 때에도 자신은 결코 그같은 의심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거듭 주장한 바 있다(6:24).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욥의 변론의 범죄 : 욥은 고통을 토로하는 중에 심한 독설(毒舌)을 여러 차례 토로하였다(3장). 이러한 언설(言說)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비신앙적인 것으로 지적받았을 것이며, 그로 인해 욥은 자신의 말이 신앙의 길에서 일면 이탈되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2) 인간의 원초적 죄성 : 욥이 무흠한 이물로서 `자신의 의'(자기 의)를 주장하기는 하였으나(6:24)원론적 측면에서 볼 때 그를 포함한 모든 인생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직시하였다(9:2). 물론 이러한 그의 인식이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과 죄성을 인식하는 차원, 그리고 행위가 아닌 전적으로 신앙을 통해서 의로울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이신 득의(以信得意)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 이제 흙에 누우리니 - 이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날로 악화되어 가는 병고로 인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있는 것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흙에 눕다'는 표현은 `자다', `흙으로 돌아가다'(창 3:19)는 표현과 더불어 인간의 죽음을 나타내는 히브리 관용 어법 중의 하나이다.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아직껏 욥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원의 시기가너무 늦을 것이라는 예감, 그래서 자신은 그 구원을 입지 못하고 음부로 내려갈 것(6-10절)이라는 생각이 욥을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한 반면,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욥에게 주어진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은 고로 그 구원을 베푸실 시기가 돌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주어진 사단의 시험(2:4-6)이 온전히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 계획을 갖고 계셨다(42:8). 바로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욥의 신앙은 긴장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욥은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고난받고 있는 바로 그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침묵속에 그를 섭리하고 계시며, 구원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했어야 마땅하다.

성 경: [욥8:1]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공의]

(주); 수아 사람 빌닷 - 2:11 주석 참조

성 경: [욥8:2]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공의]

본절에서부터 시작되는 빌닷의 변론과 그의 태도에서 나타난 특징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분법적 사고 : 일찍이 엘리바스는 악인은 징계를 받고, 의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역설한 바 있다(4:7-11; 5:12-16). 빌닷 역시 그 같은사고 체계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고 체계는 엘리바스의 그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엘리바스는 `의인=축복, 악인=징계(멸망)'라는 근본 원리를 고수하기는 하였으나, 종종 의인도 징계를 받는다는(5:17-27)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반면, 빌닷은 현실의 제반사가 `순전한 사람' (의인;20절)과 `사곡한 자'(악인;13절) 등 두 부류로 분류되며, 전자는 흥함(축복)을 받고 후자는 재난(멸망)을 받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그는 극히 경직된 권선 징악, 또는 인과 응보적 차원에서만 하나님의 공의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조언자(위로자)의 자격 결여 :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병중에 빠진 욥에게 있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은 그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해 주는 동정심과 따뜻한 위로의 말이었다. 실제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무조건적인 동정과 이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6:14, 28). 그러나 본절에서 빌닷은 다짜고짜로 비난하는 투로 자신의 변론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체계(신앙관)에 근거하여 욥을 죄인으로 취급한다(2 -4절). 이러한 그의 태도는 엘리바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매정하다. 그러므로 그는 참된의미의 `상담자' , `위로자'이기 보다는 가혹한 `정죄자'(accuser)였다 하겠다. 이러한 빌닷의 태도 때문에 욥과 그의 친구들과의 반목은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대립되어 갔던 것이다.

(주);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 여기서 `광풍'이라는 것은 욥의 언설(言說)의 허탄함과 거셈을 비유한 것이다(15:2; 16:3; 왕상 19:11). 욥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는 중에 죽음을 의구(3장)하고 친구들의 무정함을 신랄하게 질책(6:14-25)한 바 있는데 아마 빌닷은 이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러나 빌닷의 이 말은 위로를 바라는 욥의 심경과 까닭 모를 재난에 처한 그의 상황에는 적합지 않은 것이었다. 빌닷은 욥이 심경의 교란과 신앙의 갈등 상태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그의 말이 때론 비이성적(비신앙적)이고 정도에 지나칠 정도로 과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참작했어야 했다. 실제 욥은 자신의 말이 `바람'(6:26)과 같이 두서없으며, 따라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말을 꼬투리 잡아 책망하지 말 것을 간청한 바 있다(6:28).

성 경: [욥8:3]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공의]

본절에 나타난 빌닷의 말은 변개(變改)할 수 없는 진리이기는 했다. 왜냐하면 공의로운 하나님은 그 심판과 해위에 있어서 왜곡되거나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다(창18:25). 그러나 그의 말이 욥의 현재 상황에 적합하지는 못했다. 즉, 빌닷은 `순전한 자가 왜 고난에 처해야 하는가?'하는 욥의 신앙적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빌닷은 지극히 전통적, 율법적인 자신의 신관(神觀)에 집착하여 욥을 반박하였던 것이다. 사실 욥 자신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그 심판을 의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그의 신앙(신관)이 현재의 자신의 상황과 모순을 일으키는데에 그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욥8:4]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공의]

엘리바스는 욥의 자녀들이 범죄하여 재앙을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언급하였다(5:4). 그러나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정확한 상황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욥은 그의 자녀들이 마음으로라도 범죄하지 않도록 정례적으로 성결 의식을 시행하였기 때문이다(1:5).

성 경: [욥8:5]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공의]

(주); 부지런히 구하며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솨헤르'(*)는 자신의 소원을 겸손하고 간절하게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 전능하신 이 - 3절 주석 참조

성 경: [욥8:6]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공의]

(주); 네 의로운 집 -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웨'(*)는 좁게는 `양 우리'를뜻하고, 넓게는 목자들의 거주지를 지칭하기도 하며, 여기서 `양 우리'란 특별히 하나님의 보호하에 있는 안락한 거주지를(잠 3:33) 상징한다(Hartley). 한편 본문을 `너의 의로운 재물(소유)'로 보는 해석도 가능하다(your rightful estate; 5:3). 이는 욥이 소유했던 육축(1:3)을 가리킨다.

성 경: [욥8:7]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공의]

본문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구를 이루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시작'과 `나중', 그리고 `미약'과 `창대'가 각각 대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전반부를 과거, 즉 욥이 재앙을 받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때 욥은 막대한 부(副)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2, 3). 따라서 이는 욥의 현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후반부에 나타난 빌닷의 예언은 엘리바스의 그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5:18-26), 그의 이러한 예언은 정확하게 적중되었다(42:12).

성 경: [욥8:8-10]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여기서 빌닷은 자신의 논증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고대의 지혜(the wisdom of ancient)를 들고 있다. 즉 자신의 말이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인간의 지혜와 보편적 원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따라서 욥에게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것을 은연 중 강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빌닷의 사상 또는 신앙은 다분히 경험주의적인 요소가 농후하다 하겠다.

성 경: [욥8:9]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주);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 본절에서 `우리'는 욥과 그의 친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다 넓게는 `현세대'(現世代)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제'는 과장법적 표현으로 짧은 시절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현세대가 그 경험과 지혜에 있어서 `옛시대', 또는 `열조'(8절)와 비교될 수 없다는 말이다.

(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 이는 (1) 인생의 유한성과 짧음(14:2; 시 102:11; 사 40:6), 그리고 (2) 덧 없음을 나타낸 말이다. 욥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였다(7:7, 16). 그러나 양자는 서로 다른 의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즉, 빌닷은 인생은 그 짧음으로 인해서 스스로 어떤 중요한 지식이나 지혜를 얻을 수 없기에 과거에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자체는 무의미하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하였던 것이다.

성 경: [욥8:10]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주); 그들 - 8절에 나타난 `옛 시대 사람'과 `열조'를 가리킨다.

성 경: [욥8:11]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주); 왕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메'(*)는 `마시다', `흡수하다', `빨아들이다'를 뜻하는 동사 `가마'(*)에서 유래하였으며 파피루스를 뜻한다(출 2:3;사 18:2; 35:7). 이 식물은 고대 애굽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강변이나, 물이 고여있는 늪 지대에 분포해 있었다. 여기서는 `악한 자', `사곡한 자'를 상징한다.

(주); 갈대가 물없이 자라겠느냐 - 여기서 `갈대'(*, 아후)는 전절에 언급된 파피루스의 일종으로서 `갈대', `갈대 풀'(창 41:2, 18)을 가리킨다. 이것 역시 앝은 강물 속에나 물이 고여 있는 늪 지대에 서식한다. 여기서는 `왕골'과 마찬가지로 `악인'을 상징한다. 한편 `물'은 앞절에 나타난 `진펄'과 내용상 동의어로서 `세속의 헛된 소망' 또는 `헛된 의뢰처', `악행'(惡行)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악인이 세속의 헛된 것 내지는 자신의 악행에 근거해 살아가므로 조만간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성 경: [욥8:12]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본절은 왕골과 갈대가 수분이 있을 동안에는 무성하고 신속하게 성장하나 수분이 말라버리면 곧바로 메말라 죽어버리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는 악인이 세상의 의지와 소망이 끊어질 때 그 존재 근거를 상실하고 멸망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 이는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버리는 나무(시 1:3), 길가에 떨어진 씨(막 4:4), 돌밭 에떨어진 씨(막 4:5),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막 4:7)의 종국과 다름없다 하겠다.

성 경: [욥8:13]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 본문은 11, 12절에 대한 결론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는 `왕골', `갈대'(11절)와 더불어 `악인'또는 `사곡한 자'(13b절)를 가리킨다. 악인은 마치 갈대와 왕골이 신속하고 무성하게 자라듯이, 그 행사가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그 형국이 파탄을 맞게된다(시 1:6; 잠 1:19). 한편 본문에 나타난 `길'(*, 아르호트)은 `운명'(destiny, fate)으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Dhorme).

성 경: [욥8:14]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주); 그 믿는 것 - `믿는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슬로'(*)는 그 어원이 `허리'를 뜻한다. 이는 인체 구성상 허리가 힘의 근원인 것으로 여긴 고대인들의 관념에서 유래된 듯하다. 따라서 이 말은 `희망', `신뢰', `신망' 등을 상징한다(레 3: 4;잠 3:26). 결국 본절은, 몸의 중심을 지탱하는 허리가 끊어지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듯, 사곡한 자 역시 세속적 의지(처)가 끊어지면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주); 거미줄 - 원문을 직역하면 `거미의 집'이다. 거미는 매우 힘을 들여, 그리고 많은 시간을 소요하여 정교하게 자기 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줄은 매우 약하기 때문에 외부의 조그마한 충격에 의해서도 쉽게 허물어져 버린다. 이는 악한 자들의 결국에도 적용된다. 즉, 그들은 세속적 책략과 공력(功力)에 의해 자기 행사를 도모하나 조만간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 전소되고 말 것이다. 이는 그들의 의지 대상 자체가 악하고 무의미학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성과는 외견상 화려하게 보이나 내실(內實)이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악인은 거미가 허공에 거미줄을 쳐서 지은 집처럼 오래 보존되지 못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한편 본문의 표현을 통해서 빌닷은 욥이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세상적인 것에 의지함으로써 현재의 고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은근히 지적하고 있다.

성 경: [욥8:15]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주); 집 - 여기서는 가족, 육축, 재산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악인들이 의지하는 세속적인 요소들을 총칭한다(14b절 주석 참조).

성 경: [욥8:16]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본문은 악인의 번성을 나타낸 말이다. 종종 악인은 번성하되, 급작스럽게 그리고 크게 번성한다. 그것은 마치 급작스럽게 자라나는 풀, 또는 여름철에 온 뜰을 뒤덮는 무성한 잡초처럼 왕성하게 성장한다(창 49:22; 욘 4:6). 그래서 외견상 생명과 기운이 넘쳐 흐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성은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 악인의 헛된 영화는 소진(燒盡)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욥8:17]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생명력이 강한 식물은 그 뿌리를 단단한 지층에 둔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돌 무더기 사이를 헤치고 뿌리를 박기도 한다. 대부분 암석과 자갈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방에 있어서 식물이 암석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본문은 악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리킨다. 동시에 이것은 세속적 의지(처)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악인의 심성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성 경: [욥8:18]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주);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하리니 - 전체적으로 의인법이 쓰인 구절이다(신33:29). 돌 무더기(17절), 진펄, 그리고 물(11절)등은 식물의 존재 기반이었다. 그러나 이제 식물이 그곳에서 뽑히게 되자 그들이 모른체 한다는 뜻이다. 이는 악인이 멸망당할때에 자신의 존재 근거로 부터도 따돌림을 당하며 모멸을 당할 것임을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악인은 종국의 때에 자신이 믿었던 것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비참함을 맛보아야 한다. 한편 빌닷은 악인의 급속한 번창과 비참한 최후를 식물의 빠른 성장과 순식간의 쇠퇴에 도시적으로 비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기존의 논리를 강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은연중 욥을 죄인의 부류로 취급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성 경: [욥8:19]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사곡(邪曲)한 자에 대한 교훈]

(주);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 본문은 다양하게 번역된다. (1) `태양 가운데 그가 바짝 마른다'(Kaisein). (2) `확실히 그것의 생명은 소멸되어 버린다'(NIV, Surely itslife with hers away). (3) `보라 그가 자기 길을 새롭게 하리라'(Tur Sinai). 그러나 개역 성경의 번역을 그대로 취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다. 즉, 악인은 그의 번성으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부러움과 존귀를 받기도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의 인생 항로가 공고하며, 기쁨에 넘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물을 빼앗긴 갈대가 창졸간에 시들어 버리듯(11절), 돌 무더기에 뿌리를 박은 식물이 뽑힘을 당하여 완전한 멸망을 당하듯, 그의 최종 형국은 비참한 것으로 막을 내린다는 의미이다.

(주);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 이는 식물이 자랐다가 죽은 자리에 또 다른 식물이 성장한다는 의미로서 악인이 흥망한 자리에는 또 다른 악인이 그 전철을 밟아 일어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빌닷의 이러한 논리는 결국 (1) 현세상에는 악인이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2) 그 악인은 성장했다가 시드는 풀처럼 예정된 파국을 맞는다는 의미가 된다. 이 주장을 좀더 극단화시키면 악인은 반드시 징벌을 당하고 그 반대로 의인은 반드시 보응을 받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물론 이러한 그의 논조는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이러한 원리가 엄밀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인에 대한 심판이 연기되기도 할 뿐더러, 종종 악인의 흥왕이 목도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인은 축복을 받는 대신 악인의 압박을 받거나, 이유없는 고난의 굴레를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욥8:20]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무죄한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주);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 본문 역시 지금까지 전개된 빌닷의 사고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지금가지 악인에게 임할 심판을 설파한 데이어(11-18절), 여기서는 의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보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절의 빌닷의 논리를 극단화시킬 경우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마저도 죄의 결과로 보는 오류에 봉착하게 된다(마 27:43).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볼때 빌닷의 주장은 분명히 진리이다. 왜냐하면 현상계에서는 종종 의인의 수난과 핍박이 발생하난 궁극적 차원에서는 의인이 반드시 그 의로움에 대한 보응을 받기 때문이다.

(주);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악인의 손을 붙들어 주지 않으리라'가 된다. 여기서 `손을 붙잡다'라는 표현은 어떤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보호와 인도하심을 상징한다(사 43:6; 51:18). 하나님께서는 잠시 동안은 악인의 손을 붙들어 주실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시지는 않으신다.

성 경: [욥8:21]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무죄한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본절에 나타난 히브리 원문의 접속사 `아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본문의 내용이 달라진다. (1) `그리고'(and)로 볼 경우(Pope) : 이렇게 될 때 본절의 내용이 20절 하반부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해석은 적당치 않다. (2) `그러므로'(Pulpit Commentary)로 볼 경우 : 본문이 20절의 사상을 요약하는 결구(結句)가 된다. 그러나 전체의 결구는 22절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므로 이 해석 역시 타당성이 별로 없다. (3) `게다가'(Umbreit)로 볼 경우 : 이것 역시 (1)의 해석과 흡사한 것으로서 무리가 따른다. (4) `그러나'로 볼 경우 : 에발트(Ewald), 딜만(Dilmann), 슈티겔(Stickel), 뵈쳐(Bottcher)등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 해석은 시 42:6 을근거로 하여 본 구절을 앞 절의 내용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5) `동안에'(during)로 볼 경우 : 델리취(Delitzsch), 랑게(Lange)등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 주장을 따를 경우 본문은 `(그가)네 입에 웃음으로 채우실 동안에 네 입술은 즐거움으로 채우시리라'(Lange Commentary)로 해석된다. 전후 문맥상 (4)와 (5)의 견해가 가장 무난한 것 같다.

성 경: [욥8:22]

주제1: [빌닷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무죄한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21절을 20절 상반부의 사상을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본다면 본문은 20절 하반부의 사상을 확대 요약한 것임과 동시에 본장 전체의 내용을 결말짓는 부분이라 하겠다. 한편 본문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욥의 대적자에 대한 저주라 할 수 있겠지만, 욥을 포함시켜 악인 일반의 멸망을 토로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욥이라는 구체적 인물을 경시하지는 않으나 이 표현을 통해서 빌닷은 욥을 죄인의 동류(同類)로 취급하려 한 것 같다. 어쨌든 본장 전체를 통해 볼 때 빌닷의 논리는 이분법적 사고 체계에 철저히 근거해 있으며, 욥을 죄인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게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교조적, 전통적 입장에만 매달려 그의 신앙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성 경: [욥9:1]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인간]

본절에서부터 10:22까지는 빌닷의 변론(8장)에 대한 욥의 첫 번째 응답이다.

성 경: [욥9:2]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인간]

(주);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 이는 욥이 지금까지 말한 빌닷의 논지 자체를 타당한 것으로 용인한다는 뜻이다. 빌닷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8:20)를 역설한 바 있는데, 이것은 욥 자신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주);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 본문은 4:17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의(義)의 수준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본질상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의 이러한 신(神)이해, 내지는 인간 이해는 계시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는 분명 탁월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미천한 인간과 교체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갖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그 자신의 행실로는 결코 의에 도달할 수는 없으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웠으되(1:1) 복음의 경륜이 개화(開花)하지 못한 율법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겠다.

성 경: [욥9:3]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인간]

(주); 쟁변하려 할지라도 - `경쟁하려 할지라도'(Pulpit Commentary), `다툴지라도'(Lange)등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용어가 법률적인 용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원고와 피고가 각각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해서 원문상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것을 취하든간에 하나님은 사람과 쟁변(다툼, 경쟁)의 대상자가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은 사람과 더불어 쟁변하시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사람과 쟁변하시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때문이다. 즉, 인간은 유한하고 죄성을 가진 존재이나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한 분으로가 완전한 의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렇듯 욥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를 철저히 인식한 것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단절감과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판단 기준과 인간의 그것이 상이(相異)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처럼 인간에게도 온전한 성결과 의를 요구하신다. 만약 이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희생을 요구하신다. 구약 시대의 희생제가 바로 그것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이러한 기준은 변개(變改)되지 않았다.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리니'(엡 4:13)라는 말이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1:16),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는 말 들이 모두 이런 측면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기준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며, 결코 다다를 수도 없다. 즉, 인간은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와 성결에 부합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 기준에 다다를 수 있다. 이러한 복음의 비밀에 접해 보지 못한 욥으로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차이를 더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욥9:4]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 욥의 신(神) 이해, 곧 여호와께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다. 지금껏 욥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모진 시련을 겪어왔고, 또 현재 겪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본절과 같은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의 근저가 아직도 든든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요컨대 그는 뼈아픈 고난 중에 격한 감정을 토로하며, 때로 하나님께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 놓았으나, 하나님 존재 자체를 거부하거나 그분의 품성을 왜곡하는 등의 비신앙적 형태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비범한 신앙 인격자로서의 욥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성 경: [욥9:5]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주);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 본문은 다음과 같은 자연 현상을 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1) 지진에 의해 산이 갈라지거나 암석 등이 아래로 굴로 떨어지는 모습, (2) 폭풍우에 의해 산이 깎여 내리는 모습, (3) 급류에 의해 산이 깎이고 주변의 암반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등이다. 상기(上記)의 현상들은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인 바, 본문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를 가리킨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본문을 통해서 욥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을 드러내고 그러한 하나님에 비견해 볼 때 미천하기 그지 없는 자신, 특히 현재 극심한 고난 중에 처해 있는 자신의 나약한 심경을 대비하여 드러내고자 한다.

(주); 산이 깨닫지 못하며 - 본문은 산이 지진, 폭풍우, 급류 등에 의해 옮겨질 때(민16: 32; 왕상19;11; 시 104:32; 암 1:1; 슥 14:4, 5; 마 24:7), 그 과정이 매우 급속히 전개된다는 뜻이다. 의인법이 사용된 구절이다(시 35:8; 렘 50:24).

성 경: [욥9:6]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본문은 지진 현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고대 근동 지역,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인접한 나라에 있어서 지진은 그렇게 드문 현싱이 아니었다(시 104:32). 성경에도 지진에 관한 언급이 여러 번 나타나는데(민 16:32; 왕상 19:11; 암 1:1; 슥 14:4, 5) 대부분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 그 기둥 - 이 용어는 고대인들의 우주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들은 지구(땅)가 커다란 기둥들(pillars)에 의해 떠받쳐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38:6; 삼상2:8; 시 104:5). 또한 그들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산이라고 보았다(26:11). 즉, 땅에서 우뚝 솟아난 거대한 산이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 경: [욥9:7]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주);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 이것은 다음과 같은 자연 현상을 염두에 두고한 표현인 듯하다. (1) 일식(日蝕) :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식은 천지를 순식간에 어둡게 한다. (2) 자연현상에 의한 해 가림 : 갑자기 찾아오는 먹구름, 모래를 동반한 폭풍 등은 하늘을 짙게 가려 해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 모래 사막과 건조한 기후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 할 수 있는 것이었다. (3)지진 : 지진이 일어나면 건물이 무너지며, 산과 계곡의 암석과 나무들이 쏟아짐으로 인해 먼지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사람의 시야가 가려 햇빛을 보지 못한다. (4) 화산폭발 : 화산 폭발로 인한 화산 재와 연기는 햇빛을 가려 시야를 어둡게 한다.

성 경: [욥9:8]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주);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에 대량의 물이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 물을 지탱하기 위해서 하늘은 단단한 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즉, 궁창은 단단하고 고정되어 있는 땅의 천장 혹은 지붕(잠 8;27)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이러한 하늘을 펼쳐 편다는 것은 창조자의 능력을 가장 강력하게 증거해 주는 증거로 인식되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일을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내주는 독특한 증거로 보고 있다(사 42:5; 45:12; 51:13; 렘 10:12). 한편 본문에서 `홀로'(*, 레바도)라는 말은 욥의 신(神) 인식, 곧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 하나님으로 인식했음을 잘 드러내 준다. 많은 학자들은 욥기에 신화적인 요소가 농후하며 따라서 욥 역시 이러한 요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다신론적(多神論的) 견지에서이해했다고 주장한다(Pope, p, 70). 그러나 본문은 그가 창조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한 분이시며, 그만이 참된 능력을 지닌 하나님임을 확신했음을 잘 증거해 준다.

(주);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 격랑에 의해 마치 산더미처럼 높이 솟아오른 파도를 하나님께서 밝고 계신다는 표현은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철저한 주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계를 지배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한편,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땅의 높은 데(즉, 산)를 밝는 자'로 묘사한 아모스(암 4:13), 미가(미 1:3)의 표현과 매우 유사한 일면을 지닌다(신 33;29; 시 18:33; 사 58:14; 합 3:19 등).

성 경: [욥9:9]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주); 북두성 - 히브리어 `아쉬'(*, 38:32)로서 오늘날의 `큰 곰자리로'로 이해된다.

(주); 삼성 - 히브리 원어로는 `키실'(*)로서 `오만한'의 뜻이며 오리온(Orion)별자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삼성'이란 별자리 명칭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주); 묘성 - 히브리어로 `키마'(*)로서 `더미', `떼'라는 뜻이며 `시리우스'를포함한 일군(一群)의 별자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주); 남방의 밀실 - 갈대아인들은 12궁의 별자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욥은 남쪽 지평선 위에 떠있는 무수한 별자리를 두고 이러한 표현을 한 것 같다.

성 경: [욥9:10]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5:9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5:9 주석 참조).

성 경: [욥9:11]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본문은 4:15, 16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경험과 유사한 일면을 지닌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체득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을 체험하지 못했다. 바로 여기에 욥의 고난의 심각성에 있었던 것이다. 즉, 욥은 가중되어가는 고난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앙적 회의에 대한 질문을 쏟아놓으면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간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계속 주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욥의 문제의 핵심은 친구들과의 갈등도, 육체적 질병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 관심이 있었는 바,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었다. 그러나 42:5에서 보듯 결국 욥은 하나님과 만나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앙적 회의를 청산하게 된다.

성 경: [욥9:12]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 아마도 욥은 자신의 자녀와 소유를 잃은 것(1:13-19)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본문은 1:21에 나타난 욥의 신앙 고백, 즉,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고백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은 직후에 여호와의 주권(sovereignty)을 고백했는 바, 그 사건 이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같은 신앙을 재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사 45:9; 렘 18:6). 그러므로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회의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왜'(why) 자신이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하는 데에 그의 고뇌가 있었던 것이다.

(주);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 앞 부분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인간(또는 넓게는 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성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만물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실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 통제하실 권리도 갖고 계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역사(works)에 대해 철저히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본문은 암시하고있다. 이러한 표현은 토기장이 비유에 나타나는 토기장이(하나님)와 토기(인간)의 그것과 내용상 동일하다(사 45:9).

성 경: [욥9:13]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주);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 여기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하'(*)는 욥기에서만 42회 쓰인 말로서 욥이 참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한 것이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한번 작정하신 일은 결코 변개시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은 유동적이지 않고 결정적이다. 특히 악인에게 임하는 심판과 징계는 더욱 그러하다.

(주); 라합을 돕는 자 - `라합'은 원어상 `교만', `강팍함', `완악'등을 뜻한다(사 3:5;14:4).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바다의 괴물'(7:12; 사 51:9)로 여겼다. 성경에 따르면 이것은 야훼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어 쫓겨난 것으로 나타난다(26:12; 시 89:10;사 51:9).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계 12: 3-12). 그러므로 `라합을 돕는 자'는 사단에 동조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무리 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인간만이 아니라 사단을 추종하는 모든 악의 세력도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성 경: [욥9:14]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설명]

여기서 `대답하다', `변론하다'에 해당하는 용어는 공히 법적 용어이다(3절 주석참조). 그러므로 욥은 여기서 하나님을 재판관, 자신을 재판을 받는 자로 보고 있다하겠다. 이러한 비유를 간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욥을 시험하고 심판하는 권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욥 자신은 그것에 대해 하등 항변할 권리를 가지지 못함을 나타내준다. 또한 지금껏 하나님께 탄원과 질문을 쏟아 부었으나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한 욥이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토로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성 경: [욥9:15]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본절에서 욥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를 통절히 고백한다. 즉 인간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공의로우신 전능자임을 토로한다. 이러한 욥의 자세는 지금껏 보여준 욥의 태도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친구와의 변론 과정에서 욥은 여러차례 자기 의(self - righteousness)를 피력하였기 때문이다(6:24, 30). 그러나 욥의 자기 의에 대한 주장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측면에서 그 자신이 범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본절의 내용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을 피력한 것으로서 욥자신도 그러한 죄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재판장 앞에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다만 그분의 은혜만을 간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욥9:16]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주); 부르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라'(*)는 단순한 부름이 아니라 법적인 소환(a legal summon)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사 59:4). 전절(15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은 욥이 하나님을 심판자로, 그 자신은 그분의 공평한 판결을 촉구하는 재판받는 자로 보고 있다.

(주);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 아마 욥은 자신의 고통스런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구원)이 속히 주어지지 않자 이러한 표현을 한 듯하다. 따라서 본문은 구원을 속히, 그리고 간절히 촉구하는 욥의 애절한 심경의 토로로 해석되어야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비신앙적 행태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성 경: [욥9:17]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욥은 아직까지 자신이 까닭없이 하나님께로부터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욥이 재난을 처음 당했을 때부터 줄곧 그의 신앙 의식을 괴롭혀온 난제였다.

성 경: [욥9:18]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주);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 연속되는 수난에 대한 과장법적 표현이다. 가중되는 재난으로 말미암아 욥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계속되는 불행의 연속(7:3-6; 13-19)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 경: [욥9:19]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주);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 2, 14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에도 법정적 분위기가 강하게 배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전권(全權)을 소유하고 계시는 심판자이시며, 인간은 그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 내지는 원고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재판을 번복할 권능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를 법정에 불러낼 권한, 곧 소환권 조차도 없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아마 욥은 지극한 고난을 체험하는 기간 동안에, 자신은 단지 미천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재난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느꼈던 것 같다.

성 경: [욥9:20]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태도]

욥은 절대적,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자신도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은 죄인임을 고백했었다(2절). 그러나 그는 사실적.구체적 측면에서는 특정한 범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고백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자기 확신도 고통의 나날이 지속되면서부터는 흐려져간 것 같다. 즉, 욥은 재난을 받기 이전까지는 늘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 또한 경건한 의인으로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고난의 강도가 심해지고 그것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질책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욥은 고통의 나날(1:21; 2:10)속에서 때로는 구원을 갈망하고, 또 때로는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는, 이른바 신앙적 `씨름'(창32:24)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신앙을 확인시켜 갔다.

성 경: [욥9:21]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욥이 말하는 자신의 처지]

(주);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자신의 병세에 회의를 느끼고 체념적으로 한 말이다.

(주);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 구나 - 7:16 주석 참조.

성 경: [욥9:22]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욥이 말하는 자신의 처지]

(주); 일이 다 일반이라(*, 아-하트 히이) - 문자적인 의미는 `그게 모두 동일하다'(It is all the same)이다. 이는 선악이 공히 똑같이 대우받는다는 의미이다. 나름대로 경건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욥 자신이 재난을 받자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성 경: [욥9:23]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욥이 말하는 자신의 처지]

(주);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 - 이는 욥이 그의 가축과 자녀를 창졸간에 잃어버린 사건(1:13-19)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주); 무죄한 자의 고난 - 여기서 욥은 자신의 고난이 그의 범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곧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하시는(22절) 하나님의 주권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무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변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욥의 이해는 다분히 현상적, 다면적인 경향이 짙다. 왜냐하면 제반 현실사에서 악인의 흥왕과 의인의 고난이 자주 목도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그것이 의인과 악인을 동일한 수준에서 위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악인의 흥왕을 묵과, 허용하실 뿐이다. 이는 사단의 활동을 하나님께서 일시적, 제한적으로 허용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12; 2:6).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 역시,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에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숨겨진 공의를 온전하게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 경: [욥9:24]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욥이 말하는 자신의 처지]

(주);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 22절에서 욥은 이 세상의 공의와 질서가 왜곡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의인의 고난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곧 냉소적이며 무자비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보았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욥은 본문에서 더욱더 신랄하게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털어놓고 있다.

성 경: [욥9:25]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생명이 짧음에 대한 탄식]

(주); 체부 - `시종'(侍從)으로도 번역된다(Pope). 이는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조정에서 고용한 발이 빠른 자를 가리킨다(대하 30:6; 에 3:13; 8:10, 14). 고대 팔레스틴, 특히 애굽 지역에서는 이러한 전령자들을 많이 사용하여 군사적, 행정적 사무를 원활히 처리하였다.

성 경: [욥9:26]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생명이 짧음에 대한 탄식]

(주); 빠른 배 - 원문의 문자적 의미는 `갈대의 배'이다. 고대인들은 큰 갈대를 이용하여 배를 만들었다. 이 배들은 넓이는 좁고 길이가 긴 유선형이었기 때문에 매우 빠른 속도로 항해할 수 있었다.

(주);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 일반적으로 독수리는 창공을 배회하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전속력으로 하강하여 그것을 채어간다. 이러한 독수리의 하강 모습을 통하여 아무런 소망없이 허무하게 흘러가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있다. 한편 욥은 육지(`체부', 25절). 바다(`빠른 배'), 공중(`독수리')등에서 빠르다고 생각되는 것을 일일이 열거함으로써 보잘것 없고 짧은 자신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욥은 단순히 세월의 빠름을 나타내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고통이 멈출 날을 기대하면서 병고 가운데 보내는 참혹한 시일들이 빨리 흘러가기를 소망하고 있다(34절).

성 경: [욥9:27]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인간 수고의 헛됨에 대한 고백]

본절에는 극심한 고통 중에 종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던 심령을 바로잡으려는 욥의 굳은 결심이 엿보인다(Hartley).

(주); 내 원통함을 잊고 - 이는 특히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정죄하는 태도를 보였던 친구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욥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였던 것도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 탓이 컸다.

성 경: [욥9:28]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인간 수고의 헛됨에 대한 고백]

전절(27절)에서 보여주었던 욥의 굳은 결의도 극도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성 경: [욥9:29]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인간 수고의 헛됨에 대한 고백]

(주);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 이 말은 다음 두 가지 뜻을 모두 내포한다. (1) `하나님이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고통을 피하려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Hartley) 이는 곧, 고통의 엄연한 현존 앞에서 깊이 절망해 하는 탄식이다. (2) `하나님이 유죄로 판결하신 마당에 어찌 자신의 결백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Pope). 한편 `수고하리이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가'(*)는 본래 `기진맥진하다'라는 뜻으로서 고된 노역으로 말미암은 쇠약함에 강조점을 두고 말이다.

성 경: [욥9:30]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인간 수고의 헛됨에 대한 고백]

(주); 내가 눈 녹은 물로...깨끗이 할지라도 - 여기서 욥은 자신을 정화(淨化)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시 26:6에서 시인은 성소 제단에서 손을 씻음으로써 자신의 무죄성을 입증하려 했다. 신 21;1-9에는 피살된 시체를 발견할 경우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음으로써 그 살해 사건과 무관함을 나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렘 2:22에서 하나님은 `잿물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유대 백성의 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본문에서 욥은 한편으로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결국 흠많은 존재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을 말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욥9:31]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인간 수고의 헛됨에 대한 고백]

(주);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 구약 성경에서 종종 의복은 어떤 사람의 도덕적, 영적 특질과 결부되어 언급된다(8:22; 사 52;1; 61:10). 죄악에 대한 징계로 말미암아 황폐화된 예루살렘도 더러워진 치마를 입은 여인에 비유한 바 있다.

성 경: [욥9:32]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인정]

앞의 두 구절에서 욥은 자신의 무죄성을 보이기 위한 최선의 방도를 강구하였거니와, 이제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다.

성 경: [욥9:33]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인정]

(주); 판결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키아흐'(*)는 `야카흐'(*)에서 유래된 말이다(Norman C. Habel). 이 단어는 여러 문맥에서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지혜 문학에서는 `바로잡다', `경책하다'는 뜻으로 쓰였고(5:17; 잠 9:8) 법정적인 문맥이나 제삼자의 역할을 언급하는 문맥에서는 `판단하다' 혹은 `변론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창 31:37; 사 2:4). 여기서는 양자(兩者) 사이에 가로 놓인 벽이나 문제 등을 해소하는 중재자들을 의미한다. 욥은 지식, 능력, 거룩성 등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격을 통절히 인식하고서 그 간격을 연결시켜줄 대상을 마지막 희망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렴풋하게나마 중보 사상을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딤전 2:5). 한편 욥기서 중 신약 성경에 그대로 인용된 부분은 단 한 곳뿐이지만(5:13; 고전 3:19) 그 내용상 신약 성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절들이 더러 있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 내 용 | 욥 기 | 신 약 |

+-------------------------+--------------+----------------------

| 사단의활동 | 1 : 7 | 벧전 5 : 8; 계 12 : 9, 10 |

| 공수래 공수거의 인생 | 1 : 21 | 딤전 6 : 7 |

| 인간 지혜의 한계 | 5 : 12, 13 | 고전 3 : 19 |

| 경책에 대한 자세 | 5 : 17 | 히 12 : 5 |

| 중재자 | 9 : 33 | 딤전 2 : 5 |

| 부활에 관하여 | 14 : 14 | 요 11 : 25 |

| 하늘에 계시는 증인 | 16 : 19 | 히 9 : 24 |

| 살아계신 구속자 | 19 : 25 | 히 7 : 25 |

| 부활의 몸 | 19 : 26, 27 | 빌 3 : 20, 21; 요일 3 : 2 |

| 이기주의 | 22 : 6, 7 | 마 25 : 42-45 |

| 헛된 이득 | 27 : 8 | 마 16 : 26 |

+-------------------------+--------------+----------------------

성 경: [욥9:34,35]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항변]

주제2: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인정]

욥은 현재 자신의 판단력과 삶의 의지마저 흐리게 만드는 지독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러한 고통 속에 있는 한 객관적 입장에서 스스로를 볼수도 없었을 것이다.

(주); 막대기(*, 쉬베토) - 이는 양떼를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해 목자들이 들고다녔던 지팡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주는 안위감에 대해 노래하고 있으나(시 23:4), 이 지팡이가 징벌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21:9;사 10:5; 애 3:1).

성 경: [욥10:1]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식]

빌닷의 변론에 대한 욥의 응답이 계속되고 있다. 욥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하나님께로 전환하기에 앞서 욥 자신이 갖고 있는 암울한 심경을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욥이 세번에 걸쳐 이러한 반복 형식을 취한 것을 보면, 세 친구의 반응을 짐작할수 있다. 즉, 친구들은 욥의 변증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 같다.

(주); 발설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에즈바 알라이'(*)를 직역하면 `나로 하여금 나에 대하여 말하게 하라'는 뜻이 된다(M. H. Pope). 따라서 욥은 자기 자신의 결백함을 떳떳하게 말하고자 한 것이다.

성 경: [욥10:2]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식]

(주);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 욥이 대화의 상대자를 하나님께로 전환하면서 발설하는 첫마디이다. 이것은 욥 자신이 갖고 있는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이 절대적이라는 사상은 본장 전체에 걸쳐 면면히 흐르고 있다(9, 12, 16절).

성 경: [욥10:3]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식]

(주);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 전후 문맥상 본절은 욥 자신이 받는 고난을 염두에 둔 것이므로 이는 일반적인 창조물을 가리키기에 앞서 욥 자신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기아 카페카'(*)인데 직역하면 `당신 손바닥의 역작'이라고 할 수있다. 일반적으로는 `마아세야데카'(*), 즉 `당신 손의 작품'(the work of your hands)이라는 표현이 쓰인다(14:15; 34:19; 시138:8). 혹자는 `예기아'(*)가 하나님께서 수고로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고 제안한다(Hartley). 따라서 욥은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서 이처럼 독특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성 경: [욥10:4]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식]

(주);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 `육신'에 해당하는 `바사르'(*)는 문맥에따라 `살'(2:5; 6:12; 7:5), `몸'(4:15), `인생'(12:10)등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말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육신, 즉 제한성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사람'을 주로 지칭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상대적인 분이 아니시고, 절대자이신 것을 강조하며 상기 시키려는 의도가 이 말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한다'(요 8:15)는 말씀에 비추어 볼때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독특한 속성 가운데 하나는 육체의 방법을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주관하시며(사 31:3),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삼상 16:7)는 사상과도 연결된다.

성 경: [욥10:5]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식]

본 구절은 세 번째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원문상 동의어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시적 기교를 사용한다. 즉, (1) `인생'에 해당하는 단어를 앞에서는 `에노쉬'(*)를, 다음에는 `가베르'(*)를 사용하며(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동일하게 `인생'이라고 번역함), (2) `주(원문 : `당신')의 날'(*, 야메이카)은 `주의 해'(*, 쉐노테카)로 대치하여사용한다. 본 구절은 앞절(3, 4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질문과 연결되어 욥이 인식하고 있던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을 표현한다(Lange). 즉, 앞의 두 질문에서는 하나님의 자존성(自存性)(3절)과 전지성(全知性)(4절)을 타나내었으며 본절에서는 시간적으로 초월해 계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연대는 무궁하셔서(시 102:24) 시간적으로 한계지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성과 유약성을 초월해 계신 분임을 의미한다(Rawlinson).

성 경: [욥10:6]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식]

(주);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 본문을 내 죄를 꼬치꼬치 밝혀내시려고 하십니까?'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새번역). 2-5절에서 이미 제기했던 하나님의 속성들에 비추어 볼때, 이 질문은 욥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타당성이 있고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자다. 인간을 이미 알고 계시며(3절), 본래부터 근본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5절). 이러한 본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 지배자들과 같이 어떤 죄를 들추어 내려고 극심한 고문을 하거나(Keil & Delitzsch), 유도 신문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욥의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욥10:7]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식]

하나님의 심문 방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6절에 이어 본절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살았다는 것을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 욥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도 최선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에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Keil & Delitzsch). 한편 비평 학자들은 본절의 두 행에서 각기 다른 두 가지 심상을 표현하고 형식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 약간의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왜냐하면 내가 내 자신을 구원할수도 없고, 아무도 당신의 손에서 구출해 낼 자도 없다는 것을 당신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Driver, Gray). 그러나 이러한 제안대로 고친다면 나름대로 일관된 문맥이 제시될 수는 있지만 오해려 욥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는 축소된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욥은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본절 상반절) 근거를 자신이 `주의 손'에 있다는 사실(본절 하반절)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구라도 주의 손에서 욥을 벗어나게 할 자가 없다는 진술(본절 하반절)은 바로 욥이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며, 또한 누구라도 하나님을 벗어나면, 벗어나는 순간 범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욥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도록 하지 못한다는 확신에 근거하여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10:8]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창조주에 대한 욥의 고백]

본절로부터 12절까지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보여준다. 그중 본절은 마치 새로운 장면이 도입되면서 제시되는 막간과도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 제기되었던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3절)을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로 상기시키고, 아울러 9절부터 전개될 내용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반되는 두개념, 즉 지으심과 멸하심을 대치시켜 앞 구절의 부정적인 세 질문들(3-6절)을 단정적으로 요약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진퇴양난에 빠지게 하는 논법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주); 백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하드 사비브'(*)는 문자적으로`주의 모든 곳'이란 뜻이다. 그러나 70인역(LXX)에 의하면 `메타 타우타 메타발론(*)으로 되어 있어서, `돌이킨 후에'(after you have turned)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KJV, NASV, 한글 개역 성경 등이 맛소라 본문을 따라 번역하였고, NIV, RSV, NEB, Vulgate(라틴역), 새번역, 공동 번역(`이제 마음을 바꾸시어')등이 70인역의 본문을 따라 번역하였다.

성 경: [욥10:9]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창조주에 대한 욥의 고백]

(주); 흙을 뭉치듯 - 이 말은 첫째로 진흙과 같이 본성상 깨어지기 쉬운 인생을 하나님이 고려해 주실 것을 의미함과 아울러, 둘째로 욥 자신이 거의 진흙 그릇이 깨어질 것과 같은 다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호소하는 것이다(Hartley). 한편 이 구절은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는 말씀과도 연결된다. 이 구절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시사하며 피조물의 존재가치는 오직 주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나타낸다(사 45:9).

(주); 티끌로 돌려 보내려 - `티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파르'(*)인데, 이는 아담을 만든 재료로 사용된 `흙'이며(창 2:7),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저주로 선언하신 결과 사람이 돌아갈 `흙'(창 3:19)을 가리키기도 한다.

성 경: [욥10:10]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창조주에 대한 욥의 고백]

수태의 과정을 묘사하는 히브리식 표현으로서

(주); 젖과 같이 - 쏟은 것은 정액을,

(주); 엉긴 젖(치이즈;새번역) -은 태(胎)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Hartley,Dr-iver, Gray, Pope). 이스라엘 지혜자들은 태아가 자라는 것을 가장 위대한 신비로 보았는데(전 11:1; 마카비후 7:22ff), 욥 또한 신비로운 수태의 과정을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의도적으로 묘사했다.

성 경: [욥10:11]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창조주에 대한 욥의 고백]

수태된 태아가 모태에서 형체를 이루어 가는 것을 묘사한다. 그런데 10절에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9절에서는 단순히 `흙을 뭉쳤다'라고 표현했는데, 본절에서는 더욱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가죽', `살', `뼈', `힘줄'로 입히고 뭉쳤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3, 8, 9절에서 반복적으로 반복적으로 언급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욥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재차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10:12]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창조주에 대한 욥의 고백]

(주); 생명과 은혜를 - 중언법(重言法 : hendiadys)을 사용한 표현으로(Anderson), 처음 목적어인 `생명'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다(Lange). 따라서, `은혜로운 생명을', 혹은 `은혜로 생명을'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는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고, `생명'을 언급한 것은 욥이 죽음의 위협을 직면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본장의 마지막 부분(21, 22절)에서 이러한 죽음의 사상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며 후반부로 가면서(14, 19장 등) 사후(死後)의 부활에 관한사상이 희미하게 나타나게 된다(Anderson).

(주);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 욥은 전생애를 인도해 오신 주의 계속적인 배려를 시사하는 구절이다(Rawlinson). 욥은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권고를 통해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욥이 가진 자기 판단과 결정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욥이 현재의 상태에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기원에 있어서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자신의 현재 상태 역시 그 자초 지종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을 상기 시키는 것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는 `성도의 견인(堅忍)'을 유추할 수 있는 일말의 근거가 제시되어 있다.

성 경: [욥10:14]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엄정한 다스림에 대한 탄원]

(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 `인정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는12b절과 13:27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각각 그 어의(語義)가 다르다 12b절에서는 `지키다', `보호하다'(guard)라는 의미로 사용된 반면에 13:27과 본절에서는 조그마한 죄라도 `지켜 보신다'(watch)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Hartley). 특히 본문에서 처럼사람을 목적격으로 취했을 경우에는 `아무개를 기억하다', `아무개를 죄인으로 표하다'로 이해된다(Keil & Delitzsch).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죄악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뿐만 아니라, 죄의 동기에 대해서도 지적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매우 세부적이고 사소한 죄까지도 묵과되지 않고 정죄된다는 점을 단언하고 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러한 언급을 통해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10:15]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엄정한 다스림에 대한 탄원]

(주); 내가 악하면 -14절에서 사용된 `범죄하다'(sin)보다 강한 용어인 `악하다'(wicked)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Lange). 또한 `만약'(if)에 해당하는 `임'(*)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와같이 논리의 시작과 문장 형식은 14절과 동일 하지만 의미는 보다 강화되었다. 따라서 욥의 고난이 증가하는 것을 표현하기에(17절) 앞서 욥의 감정이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앞 구절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에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주); 화가 있을 것이오며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리'(*)는 결과를 나타내는 절에 위치하는 감탄사로 공포와 고통을 매우 강하게 표현한 말이다(미7:1). 한편 본 구절이 `악하다면'으로 시작하는 것은 다음 구절 `의로울지라도'(의롭다면)와 대조를 이루면서, 후에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강조시켜 준다.

(주);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 앞 문장에서는 `악하면'으로 시작하고 있는 반면, 본 문장에서는 `의로울지라도'(개역)라고 시작하는데, `악'의 결과가 `화가 있으리라'는 것이므로 `의로움'의 결과는 어떤 상급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결과로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욥이 현재 처해 있는 암담한 상황이 자신의 논리로서는 이해할 길 없는 것임을 표출하고 있다.

(주);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 - `목도함이니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라아'(*, 보다)대신에 `라와'(*, 흠뻑 젖다, 배어 들다, drowned)로 읽을 수있다(NIV, Smick, Pope). 결국 욥은 환난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어서 이로 인해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과 굴욕을 느꼈다는 것이다.

성 경: [욥10:16]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엄정한 다스림에 대한 탄원]

(주); 사자처럼 - 혹자는 사자가 욥을 은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하나님께서 사자를 사냥하듯이 욥을 사냥하신다는 해석을 한다(Gordis, Schaltens). 그러나 오히려 사자는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무섭게 욥을 사냥하신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사 31:4; 38:13; 렘 25:38; 애 3:10; 호 5:14; 13:7).

(주); 기이한 능력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팔라'(*)는 형용사, 동사 그리고 명사로도 쓰이는 말로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지시할 때 사용된다(사 28:29; 29:14). 본절에서는 욥에게 닥친 환난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크고 두려우신 능력을 가리킨다(Driver, Gray).

성 경: [욥10:17]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엄정한 다스림에 대한 탄원]

(주);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 - `증거하는 자'는 고통이 의인화된 것이다(16:8). 고통을 `증거하는 자'로 표현한 것은 욥이 마치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질병과 그 외의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마치 죄를 추궁하는 증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Hartley, Rawlinson).

(주); 군대가 갈마들어 - 앞 문장의 내용을 반복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욥이 받고 있는 고난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음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대'에 해당하는 `차바'(*)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군대', `교전'(交戰)등을 뜻하며(Anchor), 상징적으로 `역경', `곤경'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차바'(*)를 정규 부대로 `갈마들어'(번갈아, 현대인의 성경)에 해당하는 `할리포트'(*)를 증강 부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NEB, Driver, Grary), 구조 부대로 보기도 한다(Rowlery). 이 해석에 따르면 전자는 지금까지 욥이 받아왔던 고난을 말하고, 후자는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앞으로 닥치게 될 예측할수 없는 역경을 말한다.

성 경: [욥10:18]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엄정한 다스림에 대한 탄원]

(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 욥은 전형적인 애가 문체를 사용하여 질문하고 있다(Hartley). 욥의 이러한 불평 섞인 질문은 욥이 처음으로 한탄을 털어놓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3:11;Pope, Rawlinson, Robinson, Zuck). 끝없는 고난의 연속에 직면한 욥은 살 소망을 잃고야 말았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기의 태어난 것 때문이라고 비관한다. 한편 여기서도 욥은 자신의 출생은 물론이고 현재 당하고 있는 참담한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주); 기운이 끊어져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그와'(*)는 `죽다'라는 뜻이다(창 6:17;민 20:3; 시 88:15). 욥은 자신의 출생, 혹은 수태가 곧 죽음으로 직결되었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욥은 태어나지 않았기를 기대하지만, 자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존하고 있다.

성 경: [욥10:19]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엄정한 다스림에 대한 탄원]

(주); 있어도 없던 것같이 - 본절 역시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비관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20-22절에 묘사된 사후(死後)의 세계가 3:17-19에서와는 달리 매우 암울한 곳으로 나타난 것은, 욥의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애착심이 역설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성 경: [욥10:20]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죽기 전에 안식을 간구하는 욥]

자기 존재에 대한 혐오감을 계속 설파하고 있는 문맥임에도,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는 기대감으로 진전하고 있다. 이는 뒷절(21,22)에서 언급하는 암울한 음부의 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해서 욥은 하나님께서 고통 주시는 일을 멈추시고 음부에 떨어지기 전에 잠시나마 기력을 회복하여 숨 쉬게 해달라는 것이다(시39:13). 심각하게 급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렇듯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으며(Wycliffe), 뒤이어 나오는 소발의 답변에서도 드러나듯이(11:4), 욥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굳게 믿고 있다.

성 경: [욥10:21,22]

주제1: [하나님을 향한 욥의 기도]

주제2: [죽기 전에 안식을 간구하는 욥]

20 절에서는 지금 살고 있는 날이 적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본문은 `가게 될땅', 즉 미래의 거처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이 있던 것이 확실하다. 또한, 22절에서는 어두움, 죽음의 그늘이라는 개념을 반복하면서, 마치 `클로즈 업'(close-up)하는 듯한 효과를 내고 있다. 즉,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집중하고 확대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21a절

+-----------------+

| 돌아오지 못할 땅|

+-+---------------+

| 21b절 22a절

| +--------+ +----------+

| +-> | 어둡고 | ----+----->| 어두워서 | 22c절

| | +--------+ | +----------+ +-----------------------+

| | +----->| 흑암같고 |-->| 광명도 흑암같으니이다 |

+-+ +----------+ +-----------------------+

| 22b절

| +---------------+ +--------------------+

+-> | 죽음의 그늘진 |--+->| 죽음의 그늘이 져서 |

+---------------+ | +------------------+-+

+->| 아무 구별이 없고 |

+------------------+

한편 여기에서 죽음의 어두움을 묘사하기 위해 5개의 히브리어를 7회에 걸쳐 사용한다. 즉, `어두움'(*, 호쉐크), `그늘진'(*, 찰마웨트; 2회), `어두워서'(*, 에파타), `흑암'(*, 오펠; 2회), `구별이 없고'(*, 로 스다림)등이다(3:21, 22 비교).

(주);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매우 강렬하게 표현하는데, 밀턴(Milton)식의 생각과 연결지어 이 구절의 의미가 `아무런 빛도 없고 다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두움 뿐이라'는 심상을 갖는다(Lange, Pope, Milton 의 `Paradise Lost' 1권 p.63에서 인용). 또한 하틀리(Hartley)는 가장 밝다고 하는 어떠한 빛이라도 이 땅위에 있는 죽음 같은 어두움 보다도 더 깜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제안하다. 극도의 고난 속에서 죽음을 구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사후(死後)의 세계에 더 큰 두려움을 표하는 이 역설적인 모습은, 욥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인색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을 염두에 두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욥11:1]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욥의 결백에 대한 소발의 질책]

(주);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 나아마 사람 소발의 욥에 대한 첫 번째 변론이다. 여기에서 `나아마'는 수 15:41에 나오는 곳과 또다른 곳으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북 아라비아의 헤자즈(Hejaz)와 동일한 장소로 간주된다. 한편 `소발'이란 `수다떠는 자', `지저귀는 작은 새'라는 뜻으로서 욥의 세 친구 가운데 제일 나중에 변론하며 그것도 다른 두 친구들과는 달리 두 번만 변론한 것으로 보아 세 친구 중 제일 연소자인 것 같다. 그는 일반적으로 볼 때 성격이 가장 성급하며 열렬한 것으로 보이나(Delitzsch). 그의 변론은 논리적이며 이성적이고 그 논리의 근거를 정통성(正統性)에 두고 있다.

성 경: [욥11:2]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욥의 결백에 대한 소발의 질책]

(주);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얻겠느냐 - 본문에서 소발은 죄 때문에 고난 당한다고 주장하는 앞의 두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욥을 책망하여 조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지혜서에서는 말이 많은 것을 어리석은 것, 또는 허물을 면키 어려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바(잠 10:19; 전 5;2, 3), 본문에서도 소발이 욥을 말이많은 자로 규정한 것은 그를 우둔한 자로 취급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하겠다. 한편 본문의 `입이 부푼 사람'이란 문자적으로는 `이쉬 세파타임'(*)으로서 `입술의 사람'(man of lips)을 뜻한다(M. H. Pope, J.E. Hartley). 그리고 본문에서 소발이 말한 바 `의롭다함을 얻겠느냐'란 욥의 말한 바 6:29; 10:2 등에 빗대어 한 말이다.

성 경: [욥11:3]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욥의 결백에 대한 소발의 질책]

(주); 자랑하는 말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드'(*)는 `허풍', `잡담', `거짓말'(사 16:6; 렘 48:30) 등의 뜻을 지닌다(KJV, lies; NIV, idle talk, ; RSV, babble).이로써 소발이 자신의 무죄를 고집하는 욥의 말(6:24-30; 10:2-11)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소발이 잠잠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고대에서 흔히 논쟁에서 잠잠하는 것은 상대방의 뜻에 동조하는 것으로 여겨졌는 바, 소발이 결코 욥의 뜻에 수긍하지 않으며 오히려 욥의 말을 반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J.E. Hartley).

성 경: [욥11:4]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욥의 결백에 대한 소발의 질책]

(주);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깨끗하다 하는구나 - 본절의 `내 도'를 70인역(LXX)에서는 `토이스 에르고이스'(*, 나의 행동)으로 번역하고 있으며,드라이버(Driver)나 그레이(Gray)등도 이 의미를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그 원형이 `레카흐'(*)로서 본래 `받아들여진 것'(what is recieved), 더 나아가 `지식', `학식', `교훈', `가르침'등을 뜻한다(사 29:24, J.E. Hartley). 본문에서는 욥이 앞에서 증거한 말, 특히 그 자신은 의롭고 하나님이 그런 자신을 징계하고 계신다고 말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 H. Pope). 한편 `주의 목전에'라는 말이 맛로라 사본에 의하면 `너의(당신의) 목전에'(in your eyes)로 번역된다. 그러나 `내 도는...깨끗하다'를 직접 화법으로 바꾸어 보면 `너의'(당신의)란 곧 하나님을 지칭한것이 된다. 70인역에는 `그의 앞에'(*)로 되어 있으며, 영역본RSV는 이를 `하나님의 목전에'(in God's eyes)로 번역하였다.

성 경: [욥11:5]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욥의 결백에 대한 소발의 질책]

(주);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입을 여시고 - 이는 욥이 현재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 소발의 확신을 보여준다.

성 경: [욥11:6]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욥의 결백에 대한 소발의 질책]

(주);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광대하심이라 - 여기에서 `오묘'란 문자적으로는 `타알루마'(*)로서 `비밀', `숨겨진 것'등을 뜻한다. 한편 본문 전반절은욥이 현재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15:2). 그리고 본문 후반절의 `광대하심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플라임'(*)은 `이중의', `두배의'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지식은 양면(兩面), 즉 보여지는 면과 보여지지 않는 면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현재 욥이 하나님의 지식의 보이지 않는 깊은 면을 알고있지 못함을 은근히 나무라는 말이다.

(주); 하나님의 벌하심이...경하니라 -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이(너를 위해) 너의 불의(의 일부분)를 잊어버리신다'(NIV, God has even forgotten some of your sin ;NASB,God forgets a part of your iniquity)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욥의 불의를 모두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중 일부분에 대해서만 징벌하고 계신다는 점을 의미한다.

성 경: [욥11:7]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주);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온전히 알겠느냐 - `오묘'란 원어상으로 `심사 숙고', `깊은 것'(RSV, the deep thing)등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오묘'란 하나님의 깊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깊은 뜻을 가리킨다. 그리고 `측량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차'(*)는 `발견하다'(RSV, find out; NASB, discover)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 전반절은 욥과 같이 말이 많고(2절) 어리석은 자가 결코 하나님의 깊은 뜻과 비밀들을 발견할 수도 깨달아 알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한편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네가 전능자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RSV, Can youfind out the limit of the Almighty)의 뜻이다. 즉, 본문 후반절의 `온전히 알겠느냐'의 히브리 원어는 전반절의 `측량하며'(*, 팀차)란 말과 같은 잘못된 것으로 보고 후자의 `팀차'(*)를 `네가 도달하다'(you reach)로 수정 번역한다(Driver & Gray). 그러나 본문은 동일 어휘의 반복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봄이 무난하다.

성 경: [욥11:8]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주); 하늘보다 높으시니...음부보다 깊으시니 - 본절과 다음 절에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있었던,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 영역(하늘, 음부, 땅, 바다)을 비교대상으로 삼아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Anderson). 특히 본문의 `어찌하겠으며'란 문자적으로는 `마 티팔'(*)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NASB, RSV, NIV, What can you do)를 뜻한다. 이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욥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으리라는 말이다. 한편 흔히 피조 세계의 광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네 개의 서로 다른 측량 단위가 사용되는데, 그것은 `높이', `깊이', `길이', `넓이'등이다. 이중 `높이'와 `깊이'는 `하늘'과 `음부'와 관련되어 사용되며(시 139:8; 롬 10:6, 7), `길이'와 `넓이'란 `땅'과 `바다'와 관련되어 쓰인다(11:9; 37:10; 애 2:13).

성 경: [욥11:9]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주);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 `도량'이란 그 원형이 `마드'(*)로서 `규모'(measure)를 뜻한다. 그리고 영역본들 중 대부분은 이 단어의 주어를 비인칭(NASB, RSV, Its)을 사용하여 옮기고 있다. 이럴 경우 그 주어는 하나님의 지혜, 또는 깊으신 뜻 등을 가리키는 셈이다. 결국 본절 역시 앞절(8절)처럼 하나님 지혜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성 경: [욥11:10]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주);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능히 막을소냐 - 이는 8,9절에 암시된 초월적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시공(時空)에 제한 받지 않으시고 땅 끝 이곳 저곳을 다니시사(욥과 같이)어리석고 범죄한 자들을 잡아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그 어느누구도 막거나 제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개정하시면'의 히브리어 `카할'(*)은 죄인들을 정죄 또는 심판 할 목적으로 `회중을 모으다', `소집하다'(NASB,calls an assembley; NIV, convene a court)는 뜻이다(잠 5:14; 겔 16:40).이와같이 욥의 고난이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뜻이 본절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성 경: [욥11:11]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주);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키'(* ; For, RSV, NASB, KJV, For ; NIV, Surely)라는 연결사가 있다. 이것은 소발이 본문을 근거로 그의 주장을 강하게 변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허망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으'(*)는 `헛된'(NJV, vain), `아무것도 아닌'(of nothingness)의 뜻이다. 이는 본서에서 욥의 친구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악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인다. 즉 그 속에 지혜, 진리가 없고 거짓으로 가득찬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다.

성 경: [욥11:12]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새끼 같으니라 - 여기에서 `허망한'이란 원문상으로 `나바브'(*)로서 11절의 `허망한'이란 말과 어휘가 다르나 그 의미 면에서는 유사하다. 그리고 본문 전반절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허망한 사람의 지각있게 될 것이다'(KJV, Vain man would be Wise ; RSV, a stupid man will get understanding ;NASB, an idiot will become interllingent)의 뜻이다. 이와 같은 의미는 후반절과 연결될 때 그 뜻이 더욱 확연해진다.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분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영역 본 RSV 나 NASB 등은 각각 이것을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때'(When a wild ass's colt is born an man ; When the wild ass is born tame)란 뜻으로, 그리고 하틀리(J. E. Hartley)는 `들나귀가 나귀로 태어날 수 있음 같이'(as awild ass can be born a donkey)란 의미로 이해한다. 아무튼 이런 다양한 본문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의미는 결국 본문 후반절의 내용이 불가능한 것처럼 전반절의 내용, 즉 허망한 자가 지각이 있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욥과 같이 어리석고 속이 빈 허망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오묘하신 깊은 뜻, 지혜를 깨달아 알게 될 수가 없으리라는 소발의 단정을 보여준다.

성 경: [욥11:13]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회개를 촉구하는 소발]

(주); 마음을 바로 정하고...손을 들 때에 - `마음을 바로 정하고'란 마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확고히 하고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삼상 7:3). 그리고 이는 과거의 죄악된 곁길에서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따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본문 후반절의 `손을 들때에'란 지난 과거의 죄악된 길에서 떠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것을 나타낸다 하겠다(시 28:2; 63:4; 134:2; 141:2; 사 1:15; 애2:19; 3:41). 한편 본문의 `손'(*, 카프)이란 문자적으로는 `손바닥'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는 쫙 펴고 높이 든 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J. E. Hartley).

성 경: [욥11:14]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회개를 촉구하는 소발]

욥으로 하여금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새롭게 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죄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웬'(*)은 일반적으로 여러 죄악들을 포괄하며 특히 사회적 강자가 약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문 후반절은 욥의 가정에 불의가 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로서, 이는 욥의 재산이 빼앗기고 그 아들들이 죽임당한 사실과 연관시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욥11:15]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회개를 촉구하는 소발]

(주); 흠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 이는 소발이 욥의 말한 바 10:15 내용을 빗대어 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언급은 욥이 죄 때문에 고난과 징벌을 받는다는 가정하에 주어진 것이다. 한편 얼굴을 들게 된다는 것은 욥이 이전에 가졌던 사회적 지위와 권위, 명성 등을(29:4-25) 회복하는 것을 암시한다.

(주); 두려움이 없으리니 - 이는 욥이 현재 고난받고 질병으로 시달리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9:28).

성 경: [욥11:16]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회개를 촉구하는 소발]

(주); 환난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말'(*)은 3:10에서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시련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소발은 욥이 회개할 경우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흘러가버린 물처럼 그것(환난)을 기억할 뿐일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그의 당하는 바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서 그 모든 고난을 아득한 옛일처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성 경: [욥11:17]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회개를 촉구하는 소발]

(주); 네 생명의 날이...될 것이요 - `생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레드'(*)는장수(長壽)의 측면에 강조점을 둔 단어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생애에 빛이 비췬다는 것은 그 생애에 따뜻함과 생기 발랄함 혹은 풍요로움이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본문은 욥이 그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 불의한 길에서 돌이킬 경우 그의 생애가 더욱 왕성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어두움이...아침과 같이될 것이요'란 욥의 현재 처지가 암울하고 환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들이 사라지고 밝고 활기찬 삶이 도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윗이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6)라고 노래한 싯귀를 연상시킨다(사 58:10). 결국 소발은 여기서, 욥이 이전에 자신의 생애에 대해 암울한 상태로 부정적으로 말한 것을 염두에 두고 빗대어 말하고 있는 셈이다(10:21,22).

성 경: [욥11:18]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회개를 촉구하는 소발]

(주);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안전히 쉬리니 - 17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욥이 회개하면 장차 현재 당하는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될 뿐만 아니라 왕성하고 풍요로운 장래를 누리게 되리라는 소발의 주장이 점철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 28:1)라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욥은 계속 이어지는 고난과 질병으로 인하여 소망이 끊겨졌다고 탄식할 정도로 심각한 고통에 처하게 된다(13:15; 14:17; 17:13,15,16; 19:10)

성 경: [욥11:19]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회개를 촉구하는 소발]

(주); 누워도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바츠'(*)는 주로 네 발 가진 짐승에게 적용된다(창 49:9; 사 11:6; 17:2, M. H. Pope, J. E. Hartley). 그러나 상징적으로 사람이 편안히 누워 쉬는 것에도 적용되는데(시 23:2) 본문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주); 그리고 첨을 드리리라 - 는 `얼굴을 기쁘게 할 것이다'(Would make sweet your face, M.H. Pope), 또는 `쓰다듬어 얼굴을 부드럽게 하다'(to make the face smooth through stroking)는 의미를 지닌다(J. E. Hartley). 다시 말하면 이는 `잘 대해 주다', `호의를 베풀다', `달래다' 등의 뜻을 시사한다. `이 말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께 대해 적용되었으나(출 32:11; 왕상 13:6; 대하 33:12; 렘 26:9; 슥 8:21; 말 1:9) 종종 사람에 대해서 언급되어지기도 한다(시 45:12; 잠 19:6). 소발의 이와 같은 언급은, 만약 욥이 그의 죄악을 회개하고 불의한 길에서 돌이킬 경우 예전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 권위를 회복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를 따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15절; 29:2-25).

성 경: [욥11:20]

주제1: [소발의 첫 번째 충고]

주제2: [회개를 촉구하는 소발]

(주); 그러나 악한 자는...끊침이리라 - 소발은 본문에서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묘사함으로 욥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앞절들(15-19절)에 묘사된 회개한 자의 형통과 대조를 이룬다.

성 경: [욥12:1]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친구들의 지적 교만에 대한 비난]

(주);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 욥과 친구들간의 변론의 1차 주기가 끝나고, 본장에서부터 제2차 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성 경: [욥12:2]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친구들의 지적 교만에 대한 비난]

(주);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 친구들의 몰지각함과 매정함에 마음이 상한 욥은 풍자적 표현으로써 가차없는 책망을 시작한다. 아울러 `너희'라는 복수형은 친구들 모두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너희와 함께 지혜가 죽을 것이다'이다. 개역 성경은 마치 지혜를 독점한 것이 양 거만하게 이야기한 친구들에 대해 비난하는 의미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의역하였다. 하나님만이 참지혜를 소유하시면 모든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극히 부분적으로 나누어 가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친구들이 지혜를 독점했다는 욥의 주장은 친구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처럼 군다는 것을 의미한다(F. I. Anderson).

성 경: [욥12:3]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친구들의 지적 교만에 대한 비난]

(주); 총명(*, 레바브) - 직역하면 `마음', `심장'이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사고(思考), 애정, 의지력의 중심으로 이해된다.

(주);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 히브리 원문에는 `나'라고 하는 인칭 대명사 `아노키'(*)가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욥 자신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본 문장에서 `나'라는 인칭 대명사를 한 번만 사용함으로써 강조 용법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주);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 칠십인역(LXX)에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누구에도 이 같은 것들이 없겠느냐?'이다. 아마도 욥은 여기서 소발이 11:7-10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러나 만일 이 말이 보응의 의(義)에 대한 소발의 주장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는 그것을 비꼬기 위한 의도이다.

성 경: [욥12:4]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비난당하는 처지에 대한 설명]

(주); 내가...되었으니 - `하야'(*, ....이되다) 동사의 미완료 형태인 `예흐예'(*)를 사용한 이유는 욥의 지위에 있어서 일어난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마저 그를 조롱한다. 비웃음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특히 고대 시대에 대중적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매우 큰치욕이었다(J. E. Hartley).

성 경: [욥12:5]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비난당하는 처지에 대한 설명]

(주); 평안한 자의 마음은...기다리는구나 - 번역하기가 난해한 절이다. 적어도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둘 다 명확한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첫 번째 번역은 `평안한 자의 생각에는 경멸하는 횃불이 있다'이고 두번째 번역은 `평안한 자의 생각은 재난에 대해 경멸한다'이다. 벌게이트(Vulgate)는 전자의 의미를 취하는 반면 ,에즈라(Ibn Ezra) 같은 학자는 후자의 의미를 취하는데 이는 `횃불'대신에 `재난에 대하여'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와 같은 번역의 문제는 `랏피드'(*)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이다. 전자의 번역은 이를 하나의 단어로 보아서 `횃불'로 변하였고, 후자의 경우는 `전치사 + 정관사 + (재앙)'의 결합 형태로 본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형태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본절은 하나의 격언이다. 욥은 이 격언으로 자신의 불행에 대한 친구들의 경멸적인 태도를 꾸짖고 있다.

성 경: [욥12:6]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비난당하는 처지에 대한 설명]

(주);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 해석하기가 어려운 구절이다. 개역 성경은 KJV를 그대로 받아 들였지만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직역하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하나님(신)이 그의 손에 돌아가도록 한 자에게'이고, 둘째는 `하나님(신)을 그의 손에 돌아가도록 한 자에게'이다. 고대 근동의 상황을 고려할 때 후자의 번역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견해도 여러 개로 나누어진다. (1) 고대 여행자들은 여행할 때 호주머니 크기의 신상(神像)을 지니고 다녔으므로 이 말은 우상에 대한 언급이라는 견해이다(J. E. Hartley). (2) `우상' 대신에 `칼'로 보는 견해이다(Delitzsch). (3) 강도들은 흉기나 무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필요한 존재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견해이다.

성 경: [욥12:7]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주); 모든 짐승...네게 고하리라 - 본절에서 욥은 11:6에 나타난 소발의 말을 정면으로반박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모든 것의 창조자로서 높이며 또한 지혜가 하나님의 피조물에게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려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롬 1:20). 아울러 본문에는 친구들의 지식이 땅의 짐승들의 지식보다 낫지 않다고 하는 풍자가 내포되어 있다(J. E. Hartley).

성 경: [욥12:8]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주); 땅에게 말하라 - 난해한 구절이다. 개역 성경은 `시아흐'(*)를 동사로 취급하여 `말하라'로 번역하였지만, 본서의 다른 곳에서 `시아흐'(*)는 오히려 `불평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7:11). 두 번째 문제는 `시아흐'(*)가 명사로서 `관목'의 의미로도 쓰인다는 것이다(7:13; 9:27). 세 번째 문제는 7절에서 짐승과 하늘의 새가 평행을 이룬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도 바다의 물고기들에 상응하는 땅과 관련된 동물들이 기대된다는 것이다(E. Dhorme). 결국 `시아흐'(*)를 동사로 볼 때 본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불평하다'라는 의미가 본절의 문맥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개역 성경에서 처럼 동사로 취급하기에는 어색하며 그렇다고 해서 `관목'으로도 보기 힘들다. 따라서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제안을 하고 있다. 즉, 철자를 조금씩 변형시켜서 내용에 적합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1) `그 땅의 짐승'(*, 하야트 하아레츠) - Ewald, Fohrer, Horst, Hesse, KB, BHS 편집자. (2) `그땅의 짐승'(*, 쉐레츠 하아레츠) - Hitzig, Peake. (3)`땅의 기는 것들'(*, 조할레 에레츠) - Duhm, Dhorme, NEB, JB(신32:24; 미 7:17). (4) 다후드(Dahood)는 `에레츠'(*)를 `지하 세계'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본문에서 우주를 네 가지로 구분하는 암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땅, 하늘, 지하세계, 바다). 문법적으로는 세 번째 제안이 가장 타당하다.

성 경: [욥12:9]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주); 이것들 중에...알지 못하랴 - 물론 동물의 지각은 인간보다 훨씬 못하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로부터 배우기도 한다(민 22:21-35). 이것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의 실체에 대한 무언(無言)의 자기 증언이자,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성 경: [욥12:10]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주);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 히브리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모든 살아있는 것의 혼과 모든 인간의 영'이다. 여기서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동물까지도 포함되며 특별히 인간과 관련된 말이다(J. E. Hartley, Clines). 한편 본절이 시사하는 바는 인간이 살아있는 피조물(*, 네페쉬 하이, 창 2:7)이며 육체(*, 바사르)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동물과 비슷하지만 인간만이 `영'(*, 루아흐)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는 구분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오직 한 곳에서만 영이 짐승과 관련되어 나타난다(전 3:21). 이런 견해와는 달리 `혼'(*, 네페쉬)과 `영'(*, 루아흐)을 거의 동의어적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두 단어는 둘 다 삶의 기본적인 원리와 의식(意識)의 자리를 나타낸다고 말한다(E.D-horme). 그런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모든 살아있는 것의 혼'이 동물까지도 포괄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인간을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려는 의도가 없으며 7:11에 `나의 영'과 `나의 혼'이 평행법으로나타난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그러나 전자의 견해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주); 그의 손에 있느니라 - 살아있는 피조물의 모든 영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 하나님이 그 영을 취할 때,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34:14, 15). 어떤 자의 손에 있다는 것은 그의 소유라는 것 혹은 그의 판단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욥12:11]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주); 입이 식물의 맛을...분변하지 아니하느냐 - 아카드어, 히브리어, 아람어와 같은 몇몇의 셈어에서 `맛을 보다'(*, 타암)라는 동사는 `정신 작용'에 대해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한편 성경에서 이 단어가 명사형으로 쓰이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결정, 판결 - 스 4:21; 5:3; 6:1, 3, 12; 단 3:10, 29; 욘 3:7. (2) 마음 -6:14. (3) 행동 - 삼상 21:13, 14에서 다윗이 미친 체했을 때 `그 행동을 변하여'라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거기서 `행동'이라는 단어가 바로 `타암'(*)이다(M. H.Pope). 한편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귀'가 지성(知性)의 중심으로 믿어졌다(H. Frankfort). 입의 기능이 먹는 것 뿐만 아니라 먹을 가치가 있는 것을 결정하는 것임과 마찬가지로 귀의 기능은 메시지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들을 분별한다는 것이다(Clines).

성 경: [욥12:12]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

(주); 늙은 자, 장수하는 자 - 여기서 `늙은 자'와 `장수하는 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하다(W. Quinterns, J. E. Hartley). 시 91:16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시적(詩的) 표현을 살려서 번역하면 `야훼여, 오! 장수하는 분'이다(M. H. Pope). 일반적으로 인생의 연륜이 쌓아 갈수록 지혜도 늘어간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우시다고 자연스런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J. E. Hartley).

성 경: [욥12:13]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지혜와 권능이...그에게 속하였나니 - 본절에서는 지혜의 여러 측면들이 다양한 어휘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 모든 측면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밝힌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최선의 행동 방향을 계획하게 하는 지혜 뿐만 아니라 그 계획을 실행하게 하는힘도 아울러 지니고 계신다는 것이다.

성 경: [욥12:14]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그가 헐으신즉...놓지 못하느니라 - 본절은 구조상 9;11, 12과, 특별히 11:10 내용을 상기시킨다. 11:10에서 소발은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가두시는 것을 그의 지혜에 대한 예로서 사용했다. 또한 본절은 형태상 격언적이며, 굳이 노아 시대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혹은 여리고 성의 파멸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과 결부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Clines). 세상의 전사(戰士)가 파괴시킨 것은 다시 지어질 수 있고 그가 감금한 자는 풀려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파괴적인 행위는 더욱 무시무시하고 그의 응징은 완전 무결하기 때문에 그가 파괴한 것은 다시 지을 수 없고 그가 가두신 자는 헤어날 수 없다(J. E. Hartley).

성 경: [욥12:15]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그가 물을 그치게...땅을 뒤집나니 - 성경에서 가뭄이나 홍수는 하나님의 징벌의 도구로서 자주 등장한다(왕상 17:1; 사 28:2). 비단 이러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극심한 가뭄과 홍수는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다(M. H. Pope).

성 경: [욥12:16]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지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투쉬야'(*)의 사전적인 의미는 `능력',`도략', `지혜', `도움', `효과적인 상담'등이다. 그리고 번역본들을 살펴보면 칠십인역(LXX)은 `이스퀴스'(*, 능력), 데오도시우스역은 `쏘테리아'(*,지혜), 시리아역(페쉬타)과 아람어역(탈굼)은 `호크마타'(*, 지혜), 그리고 라틴어역(벌게이트)은 `sapientia'(지혜)로 번역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투쉬야'를 단순히 번역하기에는 난점이 있다. 포우프(M. H. Pope)는 본절이 `지혜'와는 문맥상 걸맞지 않는다 하여 우가릿 문헌의 평행 자료에 근거하여 `승리'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사전적인 의미에 가깝고 칠십인역과도 부합된다. 그러나 13절에 나타난바와 같이 지혜가 능력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도한 `지혜' 로번역한 번역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사전적으로 정확하게 `지혜'라는 뜻을 밝혀주지 못하며, 본래 히브리어에는 `호크마'(*) 라고 하는 `지혜'의 의미를 가진 단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투쉬야'(*)를 번역함에 있어서 달리 적절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지혜'로 번역함이 옳지만 이상에서 논의한 사항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주); 속은 자와...속하였으므로 - 속은 자, 즉 잘못된 길로 인도된 자와 속이는 자, 둘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므로, 결국은 하나님의 공의대로 보응받게 마련이라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 말 속에는, 17절 이하에 언급되듯이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죄악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고 인간의 유한성과 연약성에 대한 지적도 내포된 것이다.

성 경: [욥12:17]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모사(*, 요아침) - `상담자들'이란 뜻이다. 그들은 삼하 16:23의 아히도벨과 같은 전문적인 상담자들, 즉 궁중 관리들이다(Clines). 그러므로 그들은 영향력 있는 계층을 형성하고(스 4:5), 왕과 자리를 함께 했다(3;14).

(주); 벌거벗겨(*, 숄랄) - 본래 `맨발의'라는 뜻이다(B.D.B). 본절과 삼하15:30 의 맥락에서 맨발로 가는 것은 거의 정신 착란에 까지 이르게 된 극단적인 고통(슬픔)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E. Dhorme).

성 경: [욥12:18]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열왕의 맨 것을 풀어 - BHS(Biblian Hebraica Stuttgartensia)편집자에 의하면 `맨것'(*, 무사르)이란 법복(法服)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르디스(Gordis)는 권위의 상징으로서의 허리띠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고대 레슬링에서 근거하여, 본 구절의 의미를 `하나님이 마치 레슬링 챔피언처럼 열왕들의 허리띠를 푸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다(C. H. Gordon).

(주);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 축약된 개역 성경의 번역을 좀 더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그들의 허리를 허리 두르게(*, 에조르)로 동이셨다'가 된다. 그런데 BHS 편집자에 의하면 `에조르'(*)는 `비천한 옷'이라고 하는 라틴어 `vestis humilis'와 같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 어구는 포로로 끌려가는 왕에 대한 묘사로 볼 수 있다(Clines).

성 경: [욥12:19]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제사장들을...끌어 가시고 - 제사장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된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차지한 위치나 행사하는 영향력 때문에 직면하고 있는 재앙에서 제외되지 않는다(J. E. Hartley).

(주); 권력이 있는 자(*, 에타님) - 본래의 뜻은 `영구적인'이다. `권력이 있는 자'로 번역한 것은 문맥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학자마다 견해를 조금씩 달리한다. 즉, (1) 성전 관리인들 중의 특별한 계층(N. Sarna), (2) 권력가(E. Dhorme), (3) 확고한 자리를 잡은 자들(Driver, Gray, M. H. Pope)등이다. 이러한 견해들 모두가 상반절에 나타난 `제사장'과의 평행 관계에서 파악한 것이므로 결코 서로 상층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 지위가 영구적이며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성전 관리인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성 경: [욥12:20]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충성된 자(*, 네에마님) - 일차적인 의미는 `신임을 받는 자들'이다. 이들은 군주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고문들로서 정부에서 특별한 지위가 주어진 자들이다(J. E. Hartley, M. H. Pope). 반면에 17-19절에서 언급된 자들보다는 공적인 신분이 낮았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Clines).

(주);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 개역 성경에서 `지식'으로 번역한 `타암'(*)은 직역하면 `미각', `맛'이란 뜻이다. 은유적으로 `통찰', `판단력'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본문은 상반절과의 연속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재난을 당했을 때 결정적인 상담을 위해 장로들을 찾아갔을 때, 충고자들의 생각이 혼란에 빠뜨려진다는 의미로서, 사회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상황을 시사한다(J. E. Hartley).

성 경: [욥12:21]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 원어상으로 볼때, `강한 자'는 `전사'(戰士)를 가리킨다. 만일 그들의 띠가 풀리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을 위해 허리에 칼을 찰 수 없게 되는 셈이다(삿 3:21; 삼하 20:8).

성 경: [욥12:22]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어두운 가운데서...나오게 하시며 -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주석(gloss)으로 판단하여 생략하였으며(Duhm, Fohrer, Pope), 또 혹자는 신학적 확대로 보아 본절을 빠뜨리고 있다(Horst). 또한 NEB 는 본절을 25절 다음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본절을 지금의 위치에 놓아도 문맥상 큰 무리가 없다. 오히려 가장 깊은 어두움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숨기워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찬가적 후렴구가 본 위치에 오는 것이 적절하다(J. E. Hartley). 세상적인 권력이나 모략에 의지하는 자들이 은밀한 장소에서 영악한 계획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의표를 찌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빛으로 드러내심으로 그들의 악한 계획을 꺾으신다.

성 경: [욥12:23]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만국...열국 - 다섯 개의 히브리어 중 세 사본에는 `백성들'(*, 레움밈)로 되어 있다. 그래서 듐(Duhm)은 본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 대신에 `암밈'(*, 백성들)으로 수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집합적 의미로서 `고임'(*)과 별 차이가 없다. 한편 개역 성경에서 `만국'과 `열국'이란 표현으로 달리 하고 있으나 사실 원어상으로는 같은 단어로서 수사학적 의도일 뿐이다.한편 세속 사가(史家)들은 국가의 흥망(興亡)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원인이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한다(Clines, Hartley).

성 경: [욥12:24]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만민(*, 암 - 하아레츠 ) -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 땅의 백성'이다. 또한 이는 전문 용어로서 `영향력 있는 지주들'이란 뜻으로도 쓰인다(20절 주석 참조). 그러나 후대(포로기 이후)에 와서는 의미가 역전되어 본토에 남아 있던 비천한 자들을 지칭하게 되었다(김정준). 본절에서는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 거친 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후'(*)는 창 1:2에서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를 타나내는 두 개의 단어 중 하나이다(렘 4:23). 그러나 여기서는 사회 질서의 파괴를 암시하는 것이지 `창조 주제'와는 관계가 없다. 신 32:10에서는 `토후'(*)가 사막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Clines).

성 경: [욥12:25]

주제1: [소발의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

(주);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 술취한 사람에 관한 이미저리(imagery)는 불법과 배도의 길을 걷는 자의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된다는 비유를 상기시킨다(사 51;17, 18).

성 경: [욥13:1]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나의 눈이...통달하였느니라 - 욥은 진부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친구들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계속 그들을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눈이...보았고'는 개인적인 관찰을 통하여 아는 것이고(전 8:9, 16, 17), `귀가...듣고'는 현자(賢者)들이 말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12:11). 그러므로 욥이 주장하는 바는 그가 이미 조상들의 전승을 들었고 이해했다는 것이다(Hartley). 또한 이는 욥의 친구들이 현재와 과거 세대 현자들의 지혜를 피력한 반면에 욥은 그 자신의 관찰과 현자들의 지혜에 대한 자신의 평가 위에서 자신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도 암시한다(Clines).

성 경: [욥13:2]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너희 아는 것을...내가 아니니라 - 히브리어는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은 인칭 대명사 `나'(*, 아니; *, 아노키)를 굳이 첨가시켜욥 자신을 강조하고 있다.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지혜가 친구들의 그것과 질적으로 동등함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통찰이 훨씬 우월하다는 뜻을 표한다(Clines). 친구들의 지식은 전통적인 것이거나 원칙론에 입각해 있었지만 욥은 자신에게 직접 부딪친 실제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으며, 단순한 원칙이나 논리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에 대한 물음으로 번민하고 있었다.

성 경: [욥13:3]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참으로 나는...말씀하려 하며 - 친구들은 진정한 대화의 상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욥은 이제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고자 한다.

(주); 변론하려 하노라(*, 호케아흐 에흐파츠) - 히브리 언어를 직역하면 `나는 변론하기를 열망하고 있다'이다. 이와같이 욥의 소원을 `하파츠'(*)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변론하다'(*, 야카흐)라는 단어는 `논쟁하다', `논하다', `꾸짖다'의 뜻을 지닌 사법적인 용어이다(Pope). 그러나 이 동사가 꾸짖음이나 논쟁에서의 승리 외에 오해를 풂으로써 화해에 이르게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며(사 1:18) 본문도 이러한 용례에 해당한다(Anderson). 그리고 욥은 그의 고통의 이유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며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소망한다(Hartley).

성 경: [욥13:4]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 - 히브리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거짓을 회칠하는 자들'이다. 욥이 친구들에 대해서 이렇게 부른 의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시 119:69의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와의 유비 관계를 고려하여 단순히 `친구들이 거짓으로 그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Clines). (2) 겔 13:10-12 내용과의 연관성을 고려해 볼 때, 그 이미지는 잘못 지어진 벽을 회칠함으로써 강하고 안전하게 보이도록 하듯이, 친구들은 진실을 거짓으로 회칠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이는 진부한 신학적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스스로 현자인 체하며 욥을 책망한 친구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인 셈이다.

(주); 다 쓸데 없는 의원이니라 -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그 어려움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에, 관념적인 설명으로 그것을 덮어두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치 속으로 곪은 상처를 보지 못하고 표피의 상처만 문제시하는 무능력한 의사와 같았다.

성 경: [욥13:5]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너희가 잠잠하고...지혜일 것이니라 - `잠잠하다'라는 뜻의 본 동사 `타하리슐'(*) 이외에 부정사 절대형 `하하레쉬'(*)를 첨가하여 히브리어 특유의 강조 용법을 구사하고 있다. 욥의 잘못된 신학을 바로 잡아 주는 해결책으로 생각했던 친구들의 말이 욥의 눈에는 매우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욥은 차라리 그들이 침묵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여긴 것이다(Clines). 한편 본문은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라는 잠언 17:28의 말씀을 연상시킨다(Pope, Cline's).

성 경: [욥13:6]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들으며 - 히브리어 원문에는 간청을 나타내는 기본 불변사 `나'(*)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너희는) 제발 들으라'이다.

(주); 변명 - 히브리어 `립'(*)은 생활속에서 일어난 싸움(출 21:18), 분쟁 당사자간에 교환하는 논쟁(창 31:36) 혹은 피고와 원고가 재판장 앞에서 논쟁하는 소송 그 자체(Clines)등을 가리킨다.

성 경: [욥13:7]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너희가 하나님을...말하려느냐 - 본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욥은 논재의 전형적 특색을 보여주는 일련의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본절에서 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Hartley).

성 경: [욥13:8]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쫓으려느냐 - 문자적으로 `너희가 그의 얼굴을 들려고 하느냐?'이다(Anderson). 다시 말하면, `왜 편파적으로 하나님 편만 드느냐'라는 뜻이다. 이 말속에는, 욥 자신에게 닥친 재난의 부당성으로 인해 하나님께 원망하는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자칭 하나님 편에 선다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욥을 공박하는 친구들의 매정함을 나무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Hartley).

성 경: [욥13:9]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 `감찰하시면'의 히브리어 `하카르'(*)는 `꿰뚫다', `자세히 조사하다'(NIV, examin), `찾아내다'(KJV, RSV, search out)등의 뜻으로서, 단순히 바라보거나 살피는 것의 의미를 넘어 자세히 헤아려 감추어진 것을 찾아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지금 욥을 정죄하고 있는 친구들을 주시하시어 그들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찾아내시게 되면 어떻게 하려느냐는 뜻이다. 친구들은 욥을 고발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르나 도리어 하나님 앞에 심문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 욥의 생각이었다.

성 경: [욥13:10]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책망하시리니 - `낯을 좇을진대'란 문자적으로는 `얼굴을 올리다', `얼굴을 높이다'의 뜻으로서, 어떤 사람이 어느 쪽에 편파적으로 편드는 것을 암시하는 히브리적 관용 어구이다(8절). 여기서 욥은 친구들이 자신들의 인위적인 뜻과 주장에 따라 비진리와 불의 가운데서 무조건 하나님의 편을 든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책망하시리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불의를 배척하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레 11:44, 45; 요 14 :6).

성 경: [욥13:11]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 `존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에트'(*)는 `높음', `위엄', `존영' 등의 뜻이며, 31:23 에서는 `위엄'으로, 창 49:3에서는 `위광'으로 번역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탁월하심, 즉 불의나 비진리등과는 전혀 상관 없으신 하나님의 의와 거룩, 영광 등의 높으심과 탁월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존영 앞에서 친구들의 거짓과 불의를 드러나게 마련이며 이때 그들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으리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두렵고 크신 위엄과 권능이 패역한 성읍이나 국가에 징벌로서 임했을 때, 사람들이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지했던 사례가 많다(출 15:16; 시 105:38; 사2:10, 19, 21). 한편

(주); 위엄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하드'(*)는 `놀람', `두려움'(KJV, dread)등의 뜻이다.

성 경: [욥13:12]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격언(*, 지크론) - 은 `기념물', `(누구나가 쉽게 기억할 수 있고 간결한) 민간에 떠도는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 속담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솰'(*)은 잠 1:1 처럼 비유나 유사한 사실들을 들어 교훈해 주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욥의 친구들의 `격언'(말)이 `재 같은' 속담이라는 것은 그들의 말이 `생명력이 없는', `전혀 무가치한'(30:19; 창18:27; 사 44:20) 교훈임을 암시한다.

(주);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 `토성'(*, 호메르)이란 문자적으로 `진흙'(30:19; 38:14; 창 11:3)을 의미한다. 이는 쉽게 무너지고 부숴지기 쉬운 것을 비유적으로 지칭한다. 따라서 본문은, 욥의 친구들의 변론 특히 욥의 주장에 대한 반증이 허술하고 빈약하며 사실에 맞지 않아서 쉽게 반박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성 경: [욥13:13]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친구들의 독선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너희는 잠잠하고 - 문자적으로 `나에게서 잠잠하라'란 뜻이다. 이는 욥이 말할 수있도록 그의 친구들이 잠잠하기를 요청하는 말이다.

(주); 그리고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 는 말은 욥이 그의 뜻과 생각을 말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어떠한 일이든지 기꺼이 당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나타낸다(Hartley). 이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또한 모든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안에서 처신되어지기를 바라는 욥의 신앙의 일단을 보여준다.

성 경: [욥13:14]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는 욥]

(주);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 이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구절이나, 대략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고통을 참기 위해 혹은 끝내 침묵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살을 깨무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Rashi). 그렇다면 본 구절은 13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어떠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해보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시사한다. (2) `살'을 짐승의 `먹이'로 보고서, 본문을 먹이를 물고 가는 짐승이 그것을 빼앗으려는 짐승을 만난다면 계속 먹이를 물고 있겠느냐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경우 역시,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위급하므로 하나님께 그 고통을 아뢰지 않을 수 없음을 가리킨다하겠다.

(주);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 자신의 생명을 보물처럼 애지중지 주의하며 보존하겠느냐란 뜻으로서 생명을 돌보지 않고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겠다는 뜻을 암시한다(D-elitzsch).

성 경: [욥13:15]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는 욥]

(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 본문의 단어를 어떤 의미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본문의 서두에 있는 `헨'(*)을 `보라'(behold)는 뜻으로 이해하고 `없노라'의 `라'(*)를 `아니다'(not), `없음'(no)의 의미로 보는 경우 : 본문의 의미는 `보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RSV, Behold, he will slay me, I have no hope; 한글 개역 성경)가 된다. (2)`헨'(*)을 양보를 나타내는 `...일지라도(though)'라는 뜻으로 보고 `라'(*)를 `그에게'란 뜻의 `로'(*)로 보는 경우 : 이때 본문의 의미는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할(소망할)것이다'(KJV, AV, Though he slay me, yet will Itrust in him; NIV, Though he slay me, yet will I hope in him)이다. 이에 대해 로울리(Rowley) 같은 주석가는, 본문에서 욥이 하나님께 신뢰하는 마음보다는 궁금한 내막을 알고자 하는 도전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2)를 도외시한다.그러나 고대 역본들 중 시리아 역본, 탈굼역 등은 (2)를 지지한다. 그리고 라쉬(Ras-hi)등 여러 학자들도 (2)를 따른다.

(주);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 이 말은 욥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특정한 죄악을 범치 않았는데 그분의 징계를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성 경: [욥13:16]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는 욥]

(주);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 `사곡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네프'(*)는 `더러운 자', `불경건한 자'(NIV, RSV, godless man)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상대적으로 욥 자신이 의롭고, 하나님 앞에서 불경건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한편 사곡한 자가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함은 근복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의나 죄와는 상관없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레 11:44, 45).

(주);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 원문에 의하면 본절이 16절 서두에 나타나며 전문(前文)은 그 뒤에 조건절(*, 키)로 뒤따른다. 여기에서 `이것'은 원어상으로 중성이 사용되었다. 이는 앞절 내용,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변백하는 그의 행위의 무죄성 증명을 뜻하는 것 같다.

성 경: [욥13:17]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는 욥]

(주); 너희는 들으라...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 이는 욥이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는 세 친구들의 말을 막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피력한 것을 들으라고 권면하는 것처럼 보인다(6절). 그러나 혹자는 본문에서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라'(*)가 신앙 고백적 `선언', `선포'를 뜻하며 `설명'도 원어상 위의 `말'과 거의 동의어로 쓰인 점(Lange)을 들어, 본문의 `말'이 20절 이하의 하나님께 대한 욥의 탄원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M. H. Pope).

성 경: [욥13:18]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는 욥]

(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 `사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법적인 `판결', `선언'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욥이 자신의 무죄성을 법적, 논리적으로 증거하고 변명한 사실을 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진술하였거니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크'(*)는 제단에 나무를 쌓거나(창 22:9), 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시 23:5)등과 같이 어떤 사물을 잘 정돈하는 것, 특히 군대를 정돈하는 것 등을 뜻하는 말이다(32:14). 본절에서는 욥이 그의 사정(변명)을 잘 정리하여 말한 것을 암시한다.

(주); 내가...의로운 줄 아노라 -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그로 인한 세 친구들의 정죄와 책망 속에서도 계속 자신의 무죄성을 주장하고 있다(10:2; 12:4; 16:11; 27:2,6).

성 경: [욥13:19]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는 욥]

(주); 나와 변론할자가 누구이랴 - 이는 공개적인 성격의 질문으로서, 자신의 무죄성과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과 변론하여, 그의 논리를 반박하고 그의 죄악성을 드러낼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는 확신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주);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 무죄한 욥 자신의 논리를 반박하고 그의 죄악상을 누가 드러낼 수 있다면 자신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서, 이는 어느 누구도 결코 자신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으리라는 강한 역설적 표현이다.

성 경: [욥13:20]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두 가지 일을 간구하는 욥]

(주); 오직 내게...행하지 마옵소서 - 욥이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는 친구들을 반박하며 그의 무죄성을 강력히 내세우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이와같은 욥의 태도는 이 세상 어디에나 의뢰할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바라볼 뿐이며 그의 어려운 문제와 처지를 해결할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절실히 깨달았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기도는 본서에 여러번 나타난다(7:11-21;10;2-22; 13:20-28; 17:3, 4). 한편 `이 두가지' 란 21절에 나타나는 바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떠나시게 하는 것과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시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9:34에 이미 언급되었다.

성 경: [욥13:21]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두 가지 일을 간구하는 욥]

(주);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소며 - 문자적으로는 `당신의 손을 내게서 거두어 주옵소서'(NIV, Withdraw your hand far from me)를 뜻한다. 이는 하나님께 징계의 손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6:4; 7:12, 19; 10:9). 한편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론적인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도움을 나타내기도 하나 때때로 하나님 당신이 징계하시는 수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시 32:4; 38:2; 사 1:25).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과 환난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징계로 보았다(6:4; 7:12,19; 10:9).

성 경: [욥13:22]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두 가지 일을 간구하는 욥]

(주); 주는 나를 부르소서...내게 대답하옵소서 - 이는 욥이 자신의 무죄성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고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욥이 하나님께 먼저 그를 부르시도록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욥의 경건한 신앙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란 그의 무죄성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간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먼저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등장하신다(38:3).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욥13:23]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고통을 호소하는 욥]

(주); 나의 불법과 죄...내게 알게 하옵소서 - 그토록 심한 고난을 당해야 할 정도로 악한 죄를 저질렀는가를 알려 주시라는 탄식이다. 혹자는 이를 욥이 하나님께 그를 고난당하게 한 기소장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M. H. Pope). 한편 본문의 `불법'에 해당하는 `아온'(*)은 `구부리다', `굽게 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바른 길에서 떠난 `불의'(33:9; 레 16:20, 22), `불법'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빗나가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반적인 `죄', `범법'(犯法)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 `페솨'(*)는 `이탈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반역적인 죄', 배도' 등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 가지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성 경: [욥13:24]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고통을 호소하는 욥]

(주); 얼굴을 가리우시고 - `얼굴'이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시 34:16; 벧전 3:12),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 도우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시 27:9; 42:5; 105:4). 따라서 본 구절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비우호적인' 혹은 `적대적인' 뜻을 나타내는 관용구적 표현이다(신 31:7; 시 27:9; 30:7;사 54:8, M. H. Pope).

성 경: [욥13:25]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고통을 호소하는 욥]

(주); 주께서 어찌하여...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 이는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과 같이 연약하고 `마른 검불'과 같이 가볍고 하찮은 자신을 그토록 징계하시느냐고 질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날리는 낙엽'이나 `마른 검불'은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 앞에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함과 연약함을 암시한다(시 1:4; 83:14; 사 64:6). 그리고 `따르시나이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다프'(*)는 `뒤를 쫓다'의 의미를 갖는데, 욥은 마치 사냥개가 사냥물을 쫓듯이 하나님이 연약한 자신을 너무도 집요하게 추궁하며 징게하신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성 경: [욥13:26]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고통을 호소하는 욥]

(주);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 `기록하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토브'(*)는 법적인 언도나 선포, 판결 등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갖는 바(31:35; 시 149:9; 사10:1, Lange), 이는 욥이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인식하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욥에게 있어 가장 궁금한 것은 구체적인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가 미진했던 당시 상황에서, 자신의 살아온 경건한 삶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무신론적 사고에 빠지지 않은 것만 해도 욥의 진실한 신앙을 넉넉히 엿보게 해준다 하겠다.

(주);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 이는 욥 또한 인간의 온전한 무죄성이나 완전성을 주장하지 않고 연약하여 실수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릴 적 죄를 기억하사 낱낱이 징계하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다.

성 경: [욥13:27]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고통을 호소하는 욥]

(주);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한정하시나이다 - 이는 욥이 자유를 완전히 상실했으며 모든 길에 있어서 하나님의 간섭과 제한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란 하나님이 욥을 죄인처럼 대하사 자유롭게 행하지 못하게 묶으시는 것, 즉 징계하심을 암시한다(시 105:18; 렘 20;2; 행 16:24). 그리고 `나의 모든 길 한정하시나이다'도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길을 면밀히 주시하시며 그의 발바닥에 표시를 두었다는 뜻으로서 이것 역시 하나님의 징계를 시사하는 말이다(7:19; 10:6).

성 경: [욥13:28]

주제1: [하나님을 굳게 확신하는 욥]

주제2: [고통을 호소하는 욥]

원문에 의하면 본문의 `나는'이란 `에후아'(*)로서 `그래서 사람은'(KJV,so man), `그리고 그는'(KJV, And he)등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M. H. Pope 등은 본문이 14:2 이후 위치하는 절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욥이 앞절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고해도 하나님께로 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자 이제는 자신의 처지를 3인칭으로 바꾸어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Delitzsch). 아무튼 본문은 그가 `썩은 물가의 후패함'처럼 철저히 소모되어 쓸모없는 자가 되었으며 `좀 먹은 의복'처럼 무가치한 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성 경: [욥14:1]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원]

(주);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괴로움이 가득하며 - 욥이 계속 일반적인 사람, 즉 1인칭(자신)이 아닌 3인칭을 들어 말하는 것은 13:28 주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욥이 자신의 고난에 관한 질문을 해도 응답이 없자 그 내용을 3인칭으로 바꾸어 간접적인 방식으로 계속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이 죄의 결과, 곧 죽게 되고 이 세상 가운데서 사는 동안에도 죄로 인해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암시한다(시 90:4-6; 애 3: 39). 사람이 고생하며 근심하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애 3:33) 인간의 타락으로 자초된 바이다(창 3:18, 19).

성 경: [욥14:2]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원]

(주);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 '발생함'에 해당하는 '야차'(*)는 '나가다', '나오다'(KJV, cometh forth; NIV, springs up)의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출생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이는 인간이 꽃과 같이 피었다가 쉽게 지고 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흔히 성경에서 죄인된 인간의 생애를 쉽게 피고 지는 꽃으로 비유했는데,이는 인생의 무상함, 헛되이 쉬 지나감 등을 나타낸다(시 90:5, 6;103:15 ;사 40:6;약 1:10).

(주);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 본문 역시 전반절처럼 인생이 밤의 장막 속에 쉬 묻혀 버려지는 허무하고 무상한 것임을 암시해 주는 은유적 표현이다(8:9;시 102:11;144: 4).

성 경: [욥14:3]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원]

(주);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 13:15, 16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욥에게서 죄악과 허물을 찾으시어 징계 하신다는 뜻을 내포한다(16절;10:16). 그리고 이는 욥 자신과 같이 헛되고 무상한 존재(1, 2절)를 그토록 심각한 눈으로 주시하시며 살피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하소연 또한 내포한다(M.H.Pope).

(주);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 '심문하시나이까'의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법적인) 판결', '선고' 등을 의미하며 본문에서의 문자적 의미는 '당신이 나를 법적인 판결(선고)을 위해서 당신 앞으로 이끄나이까'(NIV, Will youbring me before you for judgement)이다. 한편 본문의 '나를'을 NIV, RSV 역본은 '그를'(Him)로 번역하나, 수리아역, 벌게이트역, 70인역(LXX) 등은 그대로 '나를'로 번역하였다.

성 경: [욥14:4]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원]

(주); 누가 깨끗한 것을...하나도 없나이다 - 이는 인간의 원죄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 즉, 모든 인간은 부정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난 자 또한 깨끗할 수가 없다는 암시이다. 이것은 다윗이 말한 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는 말씀을 연상케 한다. 신약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라는 말씀과 같이 자연 상태의 인간의 한계성과 죄성을 분명히 규명하고 있다. 욥은 여기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보편적인 인간의 죄악성과 연약성을 들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고 있다.

성 경: [욥14:5]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원]

(주); 그 날을 정하셨고.하셨사온즉 - 여기에서 '정하셨고'의 히브리어 '하라츠'(*)는 문자적으로 '자르다'란 뜻으로서 한계선을 분명히 긋는 것을 암시한다(Lange). 그리고 본문의 '제한'도 원어상으로는 '잘라진 어떤 것'(Something cut in), 또는 '새겨진 어떤 것'(Something incised)을 뜻한다고 본다(Driver & Gray). 따라서 이것 또한 엄밀히 규제한 '제한', '한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KJV, RSV, bounds; NIV,limits).

성 경: [욥14:6]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탄원]

(주); 품군같이 그 날을 미치게 하옵소서 - 혹자는 본문이 '품꾼같이 그의 날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RSV, that he may enjoy, kike a hireling, his day)을 뜻한다고 본다. 그리고 포우프(M.H. Pope)도 '마치게 하옵소서'를 '즐기다'(enjoy)로 해석한다. 이것은 일꾼으로 고용된 품꾼이 하루 해가 지나고 일을 마친 후 그 일한 삯을 받고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한다(7:1, 2). 만약 이럴 경우 본문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를 감시하시거나 죄악으로 인해 징계치 마시고 연약한 그를 놓아 자유케 하사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짧은 인생을(5절)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다.

성 경: [욥14:7]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짧은 인생에 대한 고백]

(주); 찍힐지라도...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 나무를 자를지라도 그 그루터기 밑줄기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난다는 뜻이다. 상수리 나무나 특히 스페인 밤나무 등은 나무를 자를지라도 그 후 그 그루터기에서 곧바로 새로운 싹이 돋아난다고 한다. 한편 고대 근동 지방에서 오래된 나뭇가지를 자르고 새 가지 싹이 나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주로 포도나무나,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호도나무 등에 적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Driver & Gray).

성 경: [욥14:8]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짧은 인생에 대한 고백]

(주);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죽을지라도 - 이것은 나무가 오래도록 자라 고목(古木)이 된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요단 동부 지역, 특히 다메섹 지역 등에서는 다 죽어가는 나무라 할지라도 그 줄기의 밑둥지를 자르면 그 다음 해에는 그 그루터기에서 많은 새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한다(Wetzstein).

성 경: [욥14:9]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짧은 인생에 대한 고백]

(주); 물 기운에 움이 돋고...같거니와 - 혹자는 나무의 움이 물기운에 돋은 점에 착안하여, 욥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나무는 물가에서 자라는 종려나무(대추야자나무)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Lange, Delitzsch).

성 경: [욥14:10]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짧은 인생에 대한 고백]

(주);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그가 어디 있느뇨 - 원문에 의하면 본문의 서두에는 접속사 '와우'(*)가 있다(KJV, NIV, RSV, but). 이것은 본문의 내용이 앞절, 즉 7-9절의 나무를 비유로 한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사람'의 히브리어 '게베르'(*)는 '용사', '용감한 사람'을 뜻한다. 이것은 '죽으면 소멸되나니'와 대조를 이루어 본문이 의도하는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켜 준다. 즉, 일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용감하고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죽으면 소멸되어 버리는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라는 암시이다. 한편, 전도서 기자는 인생의 죽음에 대해서 인간의 몸은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 루아흐)은 위로 올라가고'(전 3:20, 21)라고 말하였다.

성 경: [욥14:11]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짧은 인생에 대한 고백]

(주);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마름같이 - 이는 하나의 비유문(比喩文)으로서 이 내용이 암시하는 결구는 12절이다. 한편 '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얌'(*)은 내륙에 있는 바다나 물이 모여 있는 큰 강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민 34:11; 사 27:1,Driver & Gray). 욥은 본문에서 실지로 큰 강(예를 들어 유프라테스 강이나 티그리스강)의 지면이 상류에서 흘러 내려오는 침전물에 의해 점점 얕아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바닥이 말라 보이는 것 또는 큰 기근에 의해 마르는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그리고 '하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하르'(*)는 티그리스 강이나 유프라테스강과 같은 '(큰) 강'을 의미한다(창 2:14; 신 1:7). 또 '잦아서'의 히브리어 '하라브'(*)는 '타다', '마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하수(강)가 가뭄으로 인해마르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

성 경: [욥14:12]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짧은 인생에 대한 고백]

(주); 사람이 누우면...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 물이 바다에서 줄고 하수가 잦아서 말라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사람이 한번 죽으면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누우면'이란 죽음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다(시 13:3; 렘51:39). 그리고 혹자는 '하늘이 없어지기까지'를 하늘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속한다는 가정에 근거한 역설적 표현으로 본다(시 89:29;102: 27; 148:6; 렘 31:36). 즉, 하늘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이 한번 죽으면 결코 깨지 못함을 강조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J.E. Hartley, Wycliffe), 한편 본문에서 욥은 하늘이 없어지지 않을 때까지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일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하늘을 없어지게 하시는 때에는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죽은 성도들은 다시 소생할 것이라는 암시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나 호소력이 약하다.

성 경: [욥14:13]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내세(來世)에 대한 욥의 신앙]

(주);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올'(*)은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가는 사후(死後) 중간기 처소로 나타난다(창37:35; 시 31:17; 사 38:10).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우주가 하늘과 땅 그리고 땅밑 이렇게 세 부분으로 되었다고 보고, 이 음부는 땅 및 지하에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민16:30, 33;겔 31:14-17). 히브리인들의 이 음부의 장소 구분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으나 후기에는 그 장소가 구분되어 나타난다(에녹서 22:1-4). 그리고 이 음부는 히브리인들에게는 흑암의 장소, 잊음의 땅(시 88:12), 적막의 장소(시 115:17), 일이나 계획, 지식, 지혜가 없는 장소(전 9:5, 10) 등으로 이해되었다(26: 6;시 139:8). 욥 자신도 본서에서 이 음부를 빛이 없는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 묘사하였다(10:21,22).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데스'('* )를 '지옥'('*, 게엔나)과는 달리 악한 죄인들이 죽은 후 최후 백보좌 심판을 받기 전까지 거하는 사후 중간기 처소로 보는데(눅 16:19-31). 이 음부도 최후 하나님의 대심판 때에는 멸망받는 것으로 묘사된다(계 20:14). 한편 본문의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욥이 단지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소원을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 : 즉, 욥은 사람이 죽어 음부에 내려가면 다시 소생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 세상에서는 피할 곳이 없음으로 음부에라도 가서피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면서 자비를 구한다는 것이다(J.E. Hartley). (2) 욥의 내세(來世)에 대한 생각을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 : 욥은 현재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지하 세계(음부)에서나마 피할 수 있고, 후에 자신에게 새로운 긍휼이 주어진다면 현재의 불행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M.H.Pope), 믿음 안에서 기꺼이 죽음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욥의 마음이 3:1-26;7:6-10;10:20-22 등에서 나타나는 바, 음부에 대한 그의 새로운 사상을 간파하게 한다. 즉, 그는 음부를 하나의 일시적인 피난처로 보게 된 것이다(Anderson). 비록 당시 욥이 오늘날과 같은 음부 개념을 갖지는 못했다고 하더라고 나름대로 내세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더 타장하게 여겨진다.

(주);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 '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브'(*)는 '돌아가다', '물러가다', '지나가다'의 뜻이다. 이는 욥이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 곧 지나갈 것으로 믿었음을 보여준다(사 57:16).

(주);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 욥은 음부에서 훗날에 다시 소생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믿고 단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라고 말했든지 간에(위의 (2)), 본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복되기를 피력한 것만은 분명하다.

성 경: [욥14:14]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내세(來世)에 대한 욥의 신앙]

(주);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부전적인 대답 즉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역설적 질문으로 생각한다.(Lange, Delitzsch, J.E. Hartley).즉, 여기서 욥은 사람이 죽을 경우 다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앞절(13절)의 경우처럼 현재의 고통에서 해방받기 원하는 염원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70인역(LXX)은 '사람이 죽으면 그가다시 살리리이다'라고 번역하여 본문을 욥의 개인적 부활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크뢰제(J.H. Kroeze)같은 학자도 본문을 욥 자신의 개인적 부활 소망을 피력한 것으로 본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다시'(again)란 말을 문장 속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 함축적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M.H. Pope).

(주);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기다렸겠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나는 다가오는 나의 해방(소생)의 때까지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기다리겠나이다'(RSV, All he daysof my service I would wait till my release should come)이다. 그리고 '놓이기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리파티'(*)는 문자적으로 '바꿈', '변함'(change,alteration)의 의미이나 본문에서는 '구원', '해방'(relief, release)의 뜻을 나타낸다. 이는 욥 자신이 병사나 노예 등이 전쟁이나 고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처럼 그의 시련들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말이다(M.H. Pope).

성 경: [욥14:15]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내세(來世)에 대한 욥의 신앙]

(주);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대답하였겠나이다 - 혹자는 본문을 하나님께서 욥의 진위(眞僞)의 판결을 위해서 부르시고 욥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무죄를 변호할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E. Hartley). 반면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이 부활의 때에 욥을 음부에서 부활케 하시기 위해 부르실 것이고 욥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소생할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Matthew Henry, J.H. Kroeze). 14절과의 문맥적 관계를 고려해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주); 주께서는...아껴 보셨겠나이다 - 본문은 전반절 곧 하나님께서 욥을 부르시는데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만드신 바 피조물을 갈망하시고 아끼시므로 그것을 버려 방치해 두시지 않고 부르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아껴 보셨겠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사프'(*)는 '은'(*, 케세프)을 의미하는 말과 같은 어근에서 유래되었으며 은의 색깔처럼 '창백하게 되다'(be pale, to turn pale)의 뜻을 갖는다. 여기서는 얼굴이 창백한 색으로 변할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거나 관심을 갖는다는 뜻,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아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을 내포한다.

성 경: [욥14:16]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하나님의 간섭에 대한 욥의 호소]

본절은 '그러하온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1) '그러하온데'의 히브리어 '키 아타'(*)를 '그러나 지금'(but now)으로 해석하여 현재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견해(Lange, Delitzsch) : 이럴 경우 본문은 앞절들의 내용과 욥의 현재 그렇지 못한 상황을 대조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즉, 욥의 앞절들에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음부에 숨게 하시고 훗날 부활 소망 가운데서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 바랐지만, 현재에는 하나님이 계속 그의 죄를 살피시며 징계하시고 소망을 잃게 하신다는 뜻이다. (2) '키 아타'(*)를 '왜냐하면 그때에는'(for then), '확실히 그때에는'(surely then)으로 해석하여 미래의 결론적인 상황을 나타내 준다고 보는 견해 : 영역본 NIV 와 RSV 등은 이 견해를 따른다. 이럴 경우 본문은 하나님께서 훗날 욥을 되돌아 보실 때, 즉 그를 새롭게 소생시키실 때 그의 죄를 되돌아보시지 않고 감추어 두신다는 것이다(Anderson). 이중 (1)의 견해가 더무난하게 보인다.

성 경: [욥14:17]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하나님의 간섭에 대한 욥의 호소]

(주);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싸매 시나이다 - 앞절과 본절 내용을 미래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볼 경우, 본문은 하나님께서 욥의 허물과 죄악을 싸매시고 감추시는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절과 본절 내용이 욥의 현재 상황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욥의 허물과 죄악을 없애거나 잊어버리시지 않고 주머니에 봉하시고 싸매셨다가 심판 때에 그것들을 판결하시려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J.E. Hartley, 13:12; 신 32:34, 35; 롬 2:5). 특히 본문에서 허물을 봉하는 '주머니'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감추거나 잊게 하기 위해 사용되기 보다는 잘보존하기 위해 사용되어진다(창 42:35;잠 7:20).

성 경: [욥14:18]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자신의 죽음에 대한 욥의 예견]

(주);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옮겨 가고 -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산'과 '바위'는 '영원함'(창 46:26; 시 125:2)과 '견고함'(시 18:2; 마 7:24, 25) 등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산이 흩어지고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간다는 것은 그토록 견고한 것들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티끌같이 흩어지는 만큼, 욥 자신의 소망이 하나님의 징계하심으로 견디지 못하고 온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암시한다(19절).

성 경: [욥14:19]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자신의 죽음에 대한 욥의 예견]

(주); 물은 돌을 닳게 하고...끊으시나이다 - 본문도 앞절의 의미처럼 하나님의 징계하심으로 욥의 소망이 사라짐을 시사한다(M.H. Pope, J.E. Hartley).

성 경: [욥14:20]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자신의 죽음에 대한 욥의 예견]

(주); 주께서 사람을...쫓아 보내시오니 - '이기셔서'의 히브리어 '타카프'(*)는'압도하다'(KJV, RSV, prevailest; NIV, overpower)의 뜻으로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로 말미암아 멸망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암시한다. 그리고 '얼굴 빛을 변하게하시고'는 사람이 죽을 때 그의 얼굴에 생명의 빛이 없어지고 창백해지는 것을 가리키며 '쫓아 보내시오니'란 사람이 죽음으로 이 세상과의 모든 연관을 끊게 됨을 뜻한다.

성 경: [욥14:21]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자신의 죽음에 대한 욥의 예견]

'그 아들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나위'(*)는 문자적으로 '그의 아들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사람이 죽으면 그 후손들이 잘되든지 비천하게 되든지 알지 못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성 경: [욥14:22]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주제2: [자신의 죽음에 대한 욥의 예견]

(주);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슬플 뿐이니이다 -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사람이 죽기 직전에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말한다는 견해 : 욥은 자신이 현재 느끼는 고난과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음부로 가게 해달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 바(13절), 차라리 음부에서는 이와 같은 육체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J.E. Hartley). (2) 죽어 음부에 내려간 자의 고통과 슬픔을 말한 것이라는 견해(M.H. Pope) : 그러나 앞 문맥과의 연결된 관점에서 볼 때 두번째 견해가 더 무난하다. 즉, 본문은 사람이 죽은 후의 상태, 다시 말하면 육체가 썩으며 그 영혼이 광명이 없고 음울한 음부에서 거하는 슬픔을 나타낸 것 같다.

성 경: [욥15:1]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발언에 대한 엘리바스의 비난]

(주);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 4:1에 이어 엘리바스가 두 번째로 변론하는 장면이다. 첫 번째 변론과 비교해 볼 때 엘리바스는 한 차례 변론이 진행되는 동안 욥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음을 본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첫번째 변론 때에는 엘리바스가 욥의 특정한 범죄를 염두에 두고는 있었으나 위로와 동정 어린 어투로 권면하였다(4:7; 5:17). 그러나 본장에서는 욥의 재난에 대해 단순한 인과 응보적 시각만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성 경: [욥15:2]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발언에 대한 엘리바스의 비난]

(주);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 이는 욥이 자신을 그의 친구들보다 지혜로운 자라고 말한 사실을 염두에 둔 질책이다(12:3; 13:2). '헛된 지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아트 루아흐'(*)는 문자적으로 '바람의 지식'을 뜻한다. 이것은 욥의 지식이 바람처럼 헛되이 날아가는, 가볍고 공허한 것임을 가리킨다.

(주);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 여기서 '동풍'이란 시리아나 북아라비아 지방에서 팔레스틴 지역으로 불어오는 열풍으로서 특히 봄철에 많이 불며 농작물에 커다란 피해를 준다(27:21; 창 41:6, 23; 렘 18:17; 겔 17: 10; 호 13:15; 욘 4:8). 따라서 본문은 헛되고 오히려 해로운 것을 그 품에 채워 간직하겠느냐란 뜻이다. 이는 욥이 내세우는 논리가 헛되고 무익한 것임을 지적하는 엘리바스의 경멸섞인 표현이다. 한편 '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텐'(*)은 '배' 특히 '아랫배'를 가리킨다(J.E.Hartley, 민 5:21, 22, 27). 히브리인들은 이곳을 생각과 감정의 가장 깊은 좌소(坐所)로 생각한 듯하다(잠 18:8; 20:27, 30; 22:18).

성 경: [욥15:3]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발언에 대한 엘리바스의 비난]

본절은 2절 내용을 부연하여 강조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유조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칸'(*)은 '유익하다'의 뜻으로서(22:2;35:3), '우조치 아니한'이란 앞에서 주장한 욥의 말이 전혀 무익하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성 경: [욥15:4]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발언에 대한 엘리바스의 비난]

(주); 참으로 네가...그치게 하는구나 - 개역 성경의 번역은 욥의 악하고 어리석은 말이 다른 사람의 신앙에 타격을 준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영역 성경 TEV(Today's EnglishVersion)도 이러한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본절의 초점은 오히려 욥 자신이 신앙적 마모에 놓여져 있다고 봄이 더 자연스럽다(Anderson,Hartley).

성 경: [욥15:5]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발언에 대한 엘리바스의 비난]

(주);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 여기에서 욥이 친구들의 권면을 한사코 거부하고 도리어 자기를 변호하기에 급급한 것은 근본적으로 욥이 죄악 가운데서 바른 판단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욥의 재난을 철저히 범죄와 연결시켜 온 다른 친구들의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성 경: [욥15:6]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발언에 대한 엘리바스의 비난]

(주);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증거 하느니라 - 이는 욥의 변론, 특히 그 자신은 의롭고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신을 고난당하게 한다 하는 하나님께 대한 항변(12:4;13:3, 18, 20-14:22)이 그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 죄악되며, 욥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M.H. Pope, J.E. Hartley).

성 경: [욥15:7]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짧은 지식과 경함을 탓하는 엘리바스]

(주);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출생하였느냐 - 이는 해석하기 어려운 문구 중의 하나이다. 혹자는 여기서 '제일 처음 난 사람'을 '창조 이전의 사람'(pre-creationman, Rowley), 혹은 지상의 아담의 원형으로서의 천상의 아담(Hartley)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른 명백한 성경 구절을 들어 증거하기가 어렵다. 반면 이를 '아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아담은 '산들'이 존재한 후 창조 6일째에 창조되어졌다(창 1:24-31). 이 산들이 있기 전 존재했던 분은 하나님(시90:2; 잠 8:22-31)과 천사들(38:4-7) 뿐이다. 아무튼 여기서 엘리바스는 과장적인 표현으로써 욥의 자기 주장의 무모성을 힐책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특히 욥이 그의친구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한 것에 대한 반문으로 보인다(12:2, 3;13:1, 2).

성 경: [욥15:8]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짧은 지식과 경험을 탓하는 엘리바스]

(주);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홀로 가졌느냐 - 이는 앞절(7절)과 연관되는 구절로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시원적(始原的)인 존재 혹은 나아가 초월적인 존재이냐고 힐책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노인들은 지혜를 많이 지닌 것으로 여겨져 존경의 대상이었다(12: 12; 레 19:32). 그러므로 7절이나 본절에서 언급하는 바, 욥에 대한 반어적 질문 역시 이러한 전통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성 경: [욥15:9]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짧은 지식과 경험을 탓하는 엘리바스]

(주); 너의 아는 것이...우리에게는 없겠느냐 - 이는 12:2, 3;13: 1, 2의 욥의 말에 대한 반박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실제로 욥은 앞에서 친구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무지한 자로 단정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자신이 친구들 못지않게 지혜롭다고 역설하였을 뿐이다. 한편 본문의 이와 같은 언급은 친구들이 의뢰해 온 그들 자신의 경험이나 전통,정통성 또는 연배와 인생 경륜 등에 대한 자부심에서 한 말이나 실지로 그들의 지식은 원칙론적이며 피상적인 측면이 강했다.

성 경: [욥15:10]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짧은 지식과 경험을 탓하는 엘리바스]

(주);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있느니라 - 이는 앞에서 언급되어진 것처럼(8절주석 참조) 연로한 자가 더 지혜롭다는 당시의 보편적 인식에 근거를 두고 한 말로서, 엘리바스 등 욥의 친구들이 지혜로운 자들임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12:12;레19:32).

성 경: [욥15:11]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의로움에 대한 엘리바스의 책망]

(주); 하나님의 위로와...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욥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권고해 주신다고 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욥은 그를 충고하고 교훈하려 하는 친구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13: 7)라고 말함으로 그 친구들의 교훈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13:7-12). 따라서 엘리바스는 이러한 욥의 태도를 마치 하나님의 위로를 거부하는 것인 양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15:12]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의로움에 대한 엘리바스의 책망]

(주);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 문자적으로는 '왜 너의 마음이 너를 끌게 하느냐'(KJV, Why doth thine heart carry thee away ? ; NIV, Why has your heart carriedyou away)이다. 이것은 욥의 교만되고 자만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그릇된 길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전에 욥은 자신은 의로우며(12:4; 1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굳이 죄를 찾아 징계하시고 계신다고 말한 적이 있다(7:12, 19,21;10:2-22). 그리고 이러한 말에 대해서 엘리바스는 욥이 헛된 지식을 갖고 있고, 동풍(헛되고 해로운 것)을 그 품에 품고 있다고 힐책한 바 있다(15:2). 따라서 본문 또한 그러한 맥락의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네 눈을 번쩍여 역시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되고 반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지적한 책망조의 말로 보인다. 혹자는 이것이, 욥이 자신을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하는 표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J.E. Hartley).

성 경: [욥15:13]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의로움에 대한 엘리바스의 책망]

(주);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말들을 내느냐 - 엘리바스는 욥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는 커녕 끝내 자기(自己) 의(義)를 고집하는 것이(6:29; 12:4; 13:18) 그의 심령에서부터 하나님을 반대하는 불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성 경: [욥15:14]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의로움에 대한 엘리바스의 책망]

(주); 사람이 무엇이관대...의롭겠느냐 - 이는 엘리바스를 위시한 친구들이 욥에 대하여 범죄로 말미암아 환난과 고난을 당한다고 주장한 것과 일맥 상통한 말로서(4:7-11;8:3-7, 22; 11:6), 특히 욥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 말(6:29; 12:4; 13:18)에 대한 반박이다. 어떤 면에서 본절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한 사실(롬 5:16-21), 즉 인간의 원죄의 사실을 나름대로 묘파한 말로서 교리적으로는 옳게 보이는 듯하나 욥의 현재적 딜레마를 해결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따라서 훗날 이들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욥의 중보 기도로 죄사함을 받게 된다(42:7, 8).

성 경: [욥15:15]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의로움에 대한 엘리바스의 책망]

(주);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 '거룩한 자들'이란 일반적으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5:1). 그리고 '하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임'(*)은 복수로서 물질계의 하늘(Rowlinson) 혹은 천사들이 거하는 곳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자연스러울 듯하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4:18)라는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정함과 불의함을 상대적으로 더 부각시키는 말이다. 혹자는 여기에서 '하늘들'이 단순히 한 장소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하늘에 거하는 존재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본다(J.E. Hartley). 그러나 이 주장의 근거는 명백하지 않다.

성 경: [욥15:16]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의로움에 대한 엘리바스의 책망]

(주); 하물며...사람이겠느냐 - 이는 앞절(15절)의 결론적인 내용으로서 인간의 불의와 부정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또한 이는 14절의 내용처럼 이전에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 것에 대한 변론과 반박의 연장선상에서 말해진 것이다.

성 경: [욥15:17]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내가 네게 보이리니...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 본장의 앞절들에서 자신의 의를 고집하여 친구들의 말을 반박했던 욥을 비판했던 엘리바스는, 본절에서부터는 이전에 주장했던 그의 논리처럼(4: 7-11) 또다시 악인은 고통과 환난을 당한다는 원칙론적 교훈을 피력하고 있다. 이중에서 17-19절은 그의 본 논지를 교훈하기에 앞서 이끄는 서언(序言)이라 할 수 있겠다.

성 경: [욥15:18]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전하여 온 것이라 - 본절은 엘리바스의 교훈이 그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17절)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 지혜에 입각해서 말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주의에 입각한 교훈은 자칫 현실의 상황이나 보다 개혁된 또는 진보된 진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폐쇄성에 빠질 우려와 단순히 그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고 전하려는 무사고(無事故)주의 형식성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 본문에서 지혜로운 자들이 그 조상들에게서 교훈을 어떤 형식으로 받았는지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아마도 구전(口傳)에 의해 전승되어진 것 같다. 그리고 렘49:7에도 데만 사람의 지혜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19절 주석 참조).

성 경: [욥15:19]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못하였었느니라 - 여기에서 '땅'은 엘리바스 자신이 사는 데만 사람의 땅을 뜻하는 것 같다(M.H. Pope). 그리고 본문은 데만 사람의 땅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다른 외인들은 그곳에 무력으로 침입하거나 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는 데만 땅의 지혜로운 자들에게 전승되어진 교훈 역시 다른 외부인의 영향에 의해 오염되거나 왜곡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순수하고 진실되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 같다(J.E. Hartley).

성 경: [욥15:20]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작정되었으므로 - 원문에는 '그 말에 이르기를'이란 문장이 없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17-19절의 도입부 서언에 이어 본절에서부터 엘리바스의 주 논지가 언급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문구를 첨가하였다. 한편 '고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힐'(*)은 해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악인은 필경 극렬한 고통을 당하리라는 뜻이다. 엘리바스의 이 말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12:6)라는 욥의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본문의 '강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리츠'(*)는 '압제자', '독재자'를 의미한다(Lange, J.E. Hartley).

성 경: [욥15:21]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리고 - 여기에서 '놀라운 소리'란 1:13-19에서 들렸던 것과 같은 '공포 또는 재난의 소식'을 의미한다(Anderson). 즉, 악한 자에게는 항상 악재(惡材)의 소식이 뒤따라와 그를 괴롭힌다는 뜻이다.

(주);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 악인의 형통은 잠깐이고 뜻하지 않는 재난이 갑자기 들이닥침으로써 결국 파멸한다는 뜻이다. 본문의 '멸망시키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다드'(*)는 본문 그대로 '멸망시키는 자'(KJV, thedestroyer), 또는 '약탈자'(NIV, marauders)를 의미한다. 결국 본절 전반절과 함께 본문 또한 욥의 현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1:13-19).

성 경: [욥15:22]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 '어두운 데'에 관해서 혹자는 '불행'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고 하며(23, 30절 ; 19:8, Lange, M.H. Pope), '음부'(10:21,22) 또는 '죽음의 징조'등을 암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J.E. Hartley). 본문에서는 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즉, 악인들은 한번 재앙이 임하여 불행한 비극 가운데 빠지면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리는 바람에 그 속에서 다시 빠져 나오기를 바라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 경: [욥15:23]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 - 문자적으로는 '그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한다'(KJV,He wandereth abroad for bread ; RSV, He wanders abroad for bread)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악인이 먹을 식물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헤메이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악인은 앞절에서처럼 갑작스런 재앙을 만나 먹을 것이 없어서 헤매는 비참한 처지에 빠짐을 암시한다.

(주);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 극도로 심각한 재난을 만나 삶의 의욕마저 상실하고 오직 파멸의 시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절망적 처지에 몰리게 됨을 시사한다.

성 경: [욥15:24]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이기리니 - 악인에게 임할 비극적 결말을 의인법을 사용하여 실감나게 표현한 문구이다. 여기서도 엘리바스는 21절의 내용처럼 욥이 처한 불행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본문의 '환난'(*, 차르)이란 문자적으로 '좁음', '협소함' 등을 뜻한다. 이는 재난을 당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갑갑한 마음상태를 암시하는 듯하다(J.E. Hartley).

성 경: [욥15:25]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이는 그 손을 들어...배반함이니라 - 원문에 의하면 본문의 서두에는 '키'(*, 왜냐하면)가 있다. 이는 본문이 앞절들의 이유, 즉 악인들이 비참한 불행에 처하고 멸망당하는 이유를 나타내고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욥은 극도의 재난 속에서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원망 섞인 탄식을 늘어놓은 적도 있지만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거나 모독한 적은 없다. 그러므로 본문은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편견을 엿보게 한다. 한편'그 손을 들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 또는 어떤 사람을 대적하는 것을 나타낼 때 주로 쓰이는 표현이다(삼상 26:9, 23; 왕상 11:26, 27; 사 5:25).

성 경: [욥15:26]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목을 굳게 하고...달려가나니 - '목을 굳게 하고'란 일반적으로 '교만함', '완고함', '강퍅함'등을 뜻한다(신 31:27; 대하 36:13; 느 9:16, 17; 렘 17:23; 행 7:51). 따라서 본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심지어 하나님마저 대적하려 드는 악인의 참람한 행태를 가리킨다. 이것 또한 엘리바스가 욥의 자기 무죄성에 대한 변론을 염두에 두고(10:2-22; 12:4; 13:13, 20-14:22) 말한 것 같다.

성 경: [욥15:27]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죄악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또 온갖 탐욕과 쾌락을 충족시키는 악인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신 32:15; 시 73:7; 119:70;렘 5:28).

성 경: [욥15:28]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는 황무한 성읍...거하였음이니라 - 본문의 해석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1) 악인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황폐한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J.E. Hartley).(2) 악인은 폐허가 된 성읍을 재건축하여 그곳에 살기 위해 황폐한 곳으로 간다(Rashi). (3) 악인들의 화려하고 좋은 성읍과 집들은 이내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변해 버린다(Anderson). 그리고 영역본도 '거하였음이니라'를 서로 약간 다르게 번역하였는데, NIV는 '거할 것이다'(will inhabit)는 미래형으로, KJV는 '거한다'(dwelleth)는 현재형으로, RSV는 현재 완료형 곧 '산다'(has lived)로 번역했다. 그러나 본문은 전반적인 문맥의 흐름상 악인이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를 받아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못할 집에 거할 것이라는 의미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본문에서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 무더기가 될 곳' 등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신 13:13-17; 왕상 9:8; 렘 19:8).

성 경: [욥15:29]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증식하지 못 할 것이며 - 악인은 경제적으로도 그 부(富)와 재산을 계속 보존하지 못하고 이내 상실하게 될 것이며 다시 번창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또한 21, 24절에서처럼 욥이 당한 재산상의 피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1:13-19).

성 경: [욥15:30]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떠나리라 - '흑암'이란 악인이 당하는 '재앙'

또는 '불행'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22절 주석 참조). 그리고 '불꽃'은 하나님의 진노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꽃을 상징하는 것 같다(사 30:33; 히 12:29). 또한 일반적으로 번성한 나뭇 가지가 형통함, 번성함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바(시 1:3; 80:11;92:12) 본절의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도 악인의 번성, 번영 등을 의미하는 것 같다. 결국 악인은 한번 재앙에 빠질 경우 그 불행한 처지에서 다시는 빠져 나오지를 못하며 그의 번성하는 사업도, 재산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온전히 사그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성 경: [욥15:31]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 문자적으로 '그로 하여금 헛된 것을 신뢰함으로 스스로 속임받지 않도록 하라'(KJV, Let not him that is decieved trustin vanity ; NIV, Let him not decieve himself by trusting what is worthless)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본문이 앞절들(29, 30절) 또는 뒷절들(32, 33절)의 나무 비유들과는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M.H. Pope), 오히려 서로 연관된다고 봄이 더자연스럽다. 즉, 찍힌 나무가 다시 때가 되면 소생하고 열매를 맺는 것(14:7-9)과는 달리 악인은 다시 새롭게 될 소망을 가져봐야 헛될 뿐이라는 것이다. 악인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공허하며 쓸모없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을 기만하는 것일 뿐이다(Rawlinson).

성 경: [욥15:32]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푸르지 못하리니 - 앞절 후반부의 '그의 보응'을 '그의 종려나무'로 보는 자들은 본문의 '이룰 것인즉'을 '시들다'(wither)로 번역한다. 이 경우에 본문은 그의 날, 즉 종려나무의 추수 때가 이르기 전 그 나무가 시들고 가지가 죽는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J.E. Hartley).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본문은 악인이 허망한 것을 믿어 기대하다가 도리어 때가 되기도 전에 실망케 되고 멸망케 된다는 뜻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성 경: [욥15:33]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 때 아닌 한파로 말미암아 포도 열매가 익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움을 당하듯이, 악인에게도 창졸간의 재난이 들이닥쳐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떨어짐'의 히브리어 '하마스'(*)는 '해치다', '난폭하게 빼앗다'는 뜻을 지니는 바, 악인의 파멸이 거역할 수 없는 강압적 힘에 의해 초래됨을 시사한다(J.E. Hartley).

성 경: [욥15:34]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사곡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불 탈 것이라 - '사곡한'의 히브리어 '하네프'(*)는 '더럽히다', '타락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더러운', '불경건한'의 뜻을 갖는다. 이는 곧 엘리바스가 욥을 빗대어 한 말 같다(21, 24, 29절). 그리고 본절 후반절은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12:6)라고 한 욥의 말을 정면으로 논박함과 아울러, 욥에게 임했던 불 재앙을(1:16) 곧바로 연상시키는 말이다. 결국 본절은 엘리바스가 욥의 위선과 부패상을 간접적 어투로 꾸짖는 내용이라 하겠다.

성 경: [욥15:35]

주제1: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의 종말에 대한 엘리바스의 설명]

(주);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하였느니라 - 여기서 엘리바스는 출산과 관련된 잠언투의 경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최종 정리하고 있는데, 본절의 '마음'과 엘리바스의 변론 서두의 '품'(2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공히 '자궁'으로도 번역되는 '베텐'(*)인 점에서 수미 쌍관적(首尾雙關的) 기교를 엿보게 한다. 여기에서 '악한 생각'(*, 아말)이란 문자적으로 '수고', '노고'를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해악'(KJV, RSV, mischief), '폐'(NIV, trouble)를 암시한다. 그리고 '궤휼'의 히브리어 '마르마'(*)는 '속임', '사기' 등을 의미한다. 한편 혹자는 본문에서 '불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웬'(*)을 '자기 기만' 또는 '헛됨'(KJV, vanity)의 의미로 보기도 한다(Bernhart). 아무튼 본문은 '사곡한(불경건한) 무리'는 해악을 품고서 남을 해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자신도 기만하여 멸망에 빠지게 되는 자들임을 예시한다 하겠다.

성 경: [욥16: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들에 대한 욥의 질책]

(주);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 욥이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하여 두 번째로 변론하는 장면이다(6:1).

성 경: [욥16: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들에 대한 욥의 질책]

(주);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 이는 악인이 하나님의 징계를 면할 수 없다고 하는 식의 교조적인 교훈에 대해서는 욥 또한 익히 들어 아는 바라는 뜻이다. 기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악하다 단정하고 비판 및 책망하는 변론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4, 5, 8, 11절; 15장).

(주);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번뇌케 하는'의 히브리어 '아마르'(*)는 15:35에서 사용된 '악한 생각'이라는 말과 같다. 친구들이 욥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을 가지고 오히려 욥 자신이 그의 친구들에게 역으로 말함으로써, 욥은 그의 친구들이야말로 욥의 어려운 처지를 고려해 주기는 커녕 도리어 해를 끼치는 악인들이라고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16: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들에 대한 욥의 질책]

(주);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 '허망한'의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을 뜻한다. 이는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 대해 '헛된(바람) 지식'을 갖고,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운 자로 비판한 것에 대하여(15:2) 욥이 오히려 역으로 엘리바스를 비판하는 말이다.

(주);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 욥의 친구들이 처음에 찾아왔을 때에는 욥을 조문(弔問)하고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다(2:11). 그러나 이들이 정작 입을 열었을때에는 위로와 종정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경험, 전통, 정통 주의를 근거로 욥을 책망하거나 정죄하기에 급급하였다. 따라서 욥은, 그들이 돌이키고 잠잠하기를 원하였는데(6:29; 13:5, 13), 본문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성 경: [욥16: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들에 대한 욥의 질책]

(주);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흔들수 있느니라 - 앞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이 욥의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한 바 있다(5:8). 그러나 그것은 욥의 고난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 하였다. 반면에 여기서는 역으로 욥이 친구들과 뒤바뀐 입장을 가정하고 있다. 즉, 그럴경우 욥 자신도 그들 못지않게 적당한 미사 여구(美辭麗句)나 정연한 논리를 동원시켜 그들을 공박해줄 수 있지만, 적어도 자신은 위로와 동정을 잃지 않겠다는 것이다(5절). 한편 머리를 흔든다 는 것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정죄하며 조롱, 조소하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외적 표현으로본다(왕하19:21;시22:7;사37:22;렘18:16;애2:15:마27:39).

성 경: [욥16: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친구들에 대한 욥의 질책]

(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근심을 풀었으리라 - 이것은 현재 고난당하는 욥 자신에게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매정하게 굴었는가를 역설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한편 본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

성 경: [욥16: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내가 말하여도...어찌 평안하랴 - 여기서 욥은 말을 하든지 안 하든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곧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절망 섞인 탄식조라는 사실과 조화를 이룬다. 즉, 당시 욥으로서는 친구들과 변론을 주고받기보다는 차라리 독백조의 탄식을 하는 편이 한결 낫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성 경: [욥16: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 이제 욥은 친구들에 대한 반박을 멈추고 그의 내밀(內密)한 고통을 독백 형식으로 토로한다. 이는 곧 욥이 그나마 호소할 데라고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음을 시사한다.

(주); 나의 무리를 패괴케 하셨나이다 - '무리'(*, 에다)란 문자 그대로 '군중','회중' 등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욥의 가까운 친족 특히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J.E. Hartley, Lange, Anderson). 그리고 '패괴케 하셨나이다'란 문자적으로 '황폐케하다'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욥의 가족들을 치사 멸망케 하셨다는 뜻을 암시한다 하겠다. 그러나 혹자는 '무리'를 '재앙', '화'(calamity)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M.H. Pope) 그 근거가 불명확하다.

성 경: [욥16:8]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 '시들게 하셨으니'(*, 카마트)는 '뜯다', '주름 살지다', '일그러지다' 등의 뜻이 있다. 영역본 KJV나 드라이버(Driver), 그레이(Gray) 같은 학자들도 '주름살지다'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욥이 질병과 고난을 당함으로 온몸이 일그러진 것을 뜻한다.

(주); 이는 나를 향하여...증거하나이다 - 이것은 욥이, 병들고 고난당하는 것이 그의 범죄에 대한 공정한 징벌임을 시인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무죄한 자신의 입장을 안타깝게 호소하는 뜻을 드러내는 말이다. 즉 욥 자신은 이런 징계를 받아야 할 만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임한 극한적인 재난은 자신의 죄악을 증거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욥은 이제 자신이 친구들에게 결백을 호소해 봐야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다. 한편 '대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나이다'에서 '나의 죄를'이란 원문에는 없고 단지 '대면하여 증거하나이다'로 되었음을 유의하자(KJV, beareth witness to my face; NIV, testifiesagainst me; RSV, testifies to my face).

성 경: [욥16:9]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나를 보시고 - 하나님께 대한 욥의 묘사는 8절의 2인칭에서 이제는 3인칭으로 바뀌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욥이 하나님을 무시무시한 대적자로 묘사한 것은 다시 말해서 욥의 고통이 그만큼 극심하였음을 반증한다 하겠다. 여기서 '군박하시며'의 히브리어 '솨탐'(*)은 '미워하다', '박해하다'의 뜻을 갖는다(30:21; 창 27:41; 49:23). 그리고 '이를 갈고'란 아주 극단적인 원수 관계에 처해있는 자를 향한 미움, 분노의 표시를 나타낸다(시 35:16; 37:12; 애 2:16). 한편 혹자는 본문의 후반부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를 10절 초반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여기에서 '대적'이란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욥의 불행을 기뻐했던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M.H. Pope).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영역본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KJV, mine enemy sharpeneth his eyes upon me; NIV,my opponent fastens on me his piercing eyes; RSV, my adversary sharpens hiseyes against me).

성 경: [욥16:10]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무리들은...대적하는구나 - 이는 욥이 육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여기다 모든 친지들로부터 버림과 모욕을 당하는 사면 초가(四面楚歌)와도 같은 처지를 한탄하는 말이다. 여기서 '무리들'이란 고난당하는 욥을 멸시했던 일반 대중 이나 친지를 가리키며 더 직접적으로는 본서에 나오는 세 친구들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입을 벌리며'란 일종의 모욕 또는 조롱의 행위를 암시하며(시 22:13). '뺨을 치며'란 모독하며 적대적인 행위를 취하는 것을 뜻한다(애 3:30; 미 5:1; 요 18:22; 19:3). 한편 본문의 이와 같은 상황은 시 22:12-18의 다윗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성 경: [욥16:1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하나님이 나를...던지셨구나 - 본문의 '경건치 않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윌'(*)은 그 해석상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1) '울'(*, 젖을 먹이다', '젖먹이')에서 유래된 말로 '어린이', '소년'을 뜻한다는 견해. (2) '아왈'(*, '왜곡하다', '불의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불의한 자'를 뜻한다는 견해. 이중, 본절 후반절에서 '악인'이 언급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1)의 견해가 더 무난하리라 본다. 즉, 욥은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철없고 무지한 자들에게 조차 경멸거리가 되고 말았다고 말하는 것이다(Delitzsch, Driver & Gray). 또한 본문에서 유의할 사항은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즉, 욥은 비록 그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해 고뇌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만사(萬事)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6:4;10:2-11; 13:23-28).

성 경: [욥16:1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내가 평안하더니...과녁을 삼으시고 - 마치 철천지 원수가 자신을 공격하여 철저히 때려부수는 듯한 신랄한 표현을 통해, 욥은 참기 어려운 고난에 직면한 자의 참담한 심경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10:2-11; 13:23-28). 특히 여기서 욥은 한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평안하게 되었음을 토로함으로써, 행복했던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1:13-2:10). 한편 '꺾으시며'(*, 파라르)란 '분쇄하다','산산이 부수다'는 뜻이다.

성 경: [욥16:1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그 살로 나를 사방을 쏘아...흘러 나오게 하시는구나 - 12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욥은 섬뜩할 정도의 표현을 통해 자신의 곤경을 적나라하게 토로한다. 한편 하나님의 징벌을 화살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엘리바스의 첫 번째 변론에 대한 반론에도 나온다(6:4). 성경에서 '살'을 쏘는 것은 대개 하나님의 징계의 표현으로서 진노하시고 징벌을 내리심을 암시한다(신 32:23; 시 18:14). 한편 '허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킬야'(*)는 '신장'(NIV, RSV, kidneys)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사람의 사고와 감정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번역한 곳도 있다(잠 7:23).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욥의 중심을 화살로 꿰뚫었다는 뜻으로서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셨음을 의미한다.

성 경: [욥16:1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그가 나를 꺾고...달려드시니 - 여기에서 '꺾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12절의 '꺽으시며'(*, 파라르)와는 달리 '파라츠'(*)로서 큰 돌로 성벽을 파괴하여 커다란 구멍을 뚫거나 허물어 뜨린다는 의미인 '부숴뜨리다', '파괴하다'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용사같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13절과 연관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바, 성벽을 파괴하고 그 안으로 달려드는 용사같이 하나님이 욥을 징계하시고 패망케 하신다는 말이다(Lange).

성 경: [욥16:1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내가 굵은 베를...내 피부에 덮고 - 일반적으로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은 비참하고 낮아진 처지를 애도하며 나타내는 외형적인 표현이다(왕하 6:30; 시 35:13; 사3:24; 단 9:3; 마 11:21).

(주);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 '뿔'이 일반적으로 '힘', '권능', '능력'등을 상징하는 바(시 75:5, 10; 89:17; 92:10; 148:14; 렘 48:25), 본문의 의미는 욥이 극도의 재난에 직면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회적인 힘, 명성, 권능 등이 온전히 실족되고 상실되고 말았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Rawlinson). 혹자는 이 표현을 마치 상처받은 황소가 그 뿔을 흙 속에 파묻으려 하는 것에 빗댄 것으로 보기도 한다(J.E. Hartley, M.H.Pope).

성 경: [욥16:1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고난에 대한 욥의 고백]

(주);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 이 울음은 너무도 큰 고통 때문에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통탄한 것을 연상케도 하며(3:2-26), 또한 극심한 환난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왕하 20:1-7; 시 56:8; 사 22:12).

(주);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 혹자는 '죽음의 그늘'이 단지 병든 환자의 눈 주위에 어린 음울한 기색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M.H. Pope). 영역본들도 이를 '깊은 그늘'(NIV, deep shadows), '깊은 어두움'(RSV, deep darkness)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죽음의 전조로서 눈 주위에 드리우는 '어두운 그늘'로 보는 것이 더 무난하다(J.E. Hartley, Norman C. Habel, KJV).

성 경: [욥16:1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무죄를 위한 욥의 변증]

(주);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정결하니라 - 이는 욥이 현재 고난과 징계를 받고 있지마는 여전히 무죄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욥 자신이 고난받는 것은 그의 친구들의 비난처럼 자신의 특정한 범죄 때문이 아니라 영문 모를 하나님의 징계 의지로 말미암은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본문은 무죄한 자신이 징계를 받고 있는 이유를 하나님께 진지하고도 열렬하게 아뢰는 말이기도 하다(7:11-21;10:2-22; 13:20-28; 14장).

성 경: [욥16:18]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무죄를 위한 욥의 변증]

(주);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 욥은 그의 피가 자신의 무죄성을 증명하고 보증할 수있도록 땅으로 하여금 덮지 말도록 호소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하소연은 창 4장에서 불의한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죽였을 때 그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함으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피에 대한 보복으로서 가인을 심판 하신 사실과 관련된다(사 26:21; 겔 24:8).

(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 고난당하는 욥의 흘린 피가 그의 무죄성을 증명하고 나타낼 수 있도록 멈추지 않고 계속 부르짖게 해달라는 호소이다(RSV, let my cry find no resting place).

성 경: [욥16:19]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무죄를 위한 욥의 변증]

(주); 지금 나의 증인이...높은 데 계시니라 - 본문의 '보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헤드'(*)는 '증거하다'는 뜻의 어근에서 유래 된 말로 '증인', '기록' 등을 의미한다. 영역본 KJV는 이를 '기록'(record)으로 번역했으나, NIV는 '옹호자'(advocate)로, RSV는 '증인이 되는 보증하는 자'(he that vouches)로 번역하고 있다. 결국 이 말은 본절의 '증인'과 동의어로 사용되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것은 19:25에서 언급되는 '구속자'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욥은 앞에서 자신의 무죄성을 하나님께 계속 하소연해 왔으며(10:2, 6; 13:20-23), 그의 피로 하여금 무죄한 중에 고난 받는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증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한 바있다. 따라서 본절 또한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 앞에 판단받기를 원하는 내용이다. 특히 이는 욥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공정하심 등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성 경: [욥16:20]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무죄를 위한 욥의 변증]

(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 '조롱하나'(*,루츠)는 '조롱하다', '조롱자'라는 뜻 외에 '해석하다', '해석자'라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혹자는 본문을 '그의 해석자는 그의 친구이다'(his interpreter is his friend)로 번역하기도 한다(J.E.Hartley). 반면에 랑게(Lange)나 델리취(Delitzsch) 등 많은 학자들은 본문을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해석하며 KJV, RSV 등의 영역 성경들도 이를 지지한다. 그리고 성경내에서도 이 말이 시 119:51에서는 '조롱하다'의 의미로, 33:23; 창 42:23 등에서는 '해석자'의 의미로 쓰여졌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따르든 지간에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기본 의미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이를 '해석자'로 번역할 경우 본문의 뜻은 욥의 친구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욥의 참되신 해석자(변호사)로서 욥의 무죄성을 드러내고 욥의 사정을 밝혀주시리라는 기대를 암시한다 하겠다(본절 후반절 참조).

성 경: [욥16:2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무죄를 위한 욥의 변증]

(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 본문의 '사이에와'의 '와'에 대해서 수리아역, 벌게이트(Vulgate), 탈굼역, 히브리 본문 등에서는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리고'(and)로 번역하나 KJV, NIV, RSV등의 일반 영역본들은 '...처럼','...과 같이'로 번역한다. 이들 영역본대로 해석할 경우에는(NIV, onbehalf of a manhe p;eads with God as a man pleads for his friend) 욥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열망하고 있다는 측면이 강조되고, 개역 성경에서처럼 번역할 경우에는 친구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깨어져 버린 듯한 욥의 절박한 위기 의식이 강조되어진다. 어쨌든 본문은 19, 20절과 계속 연관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욥의 증인, 증거자로서 그의 무죄성과 온전함을 증명해 달라고 하는 또는 증명해 줄 것이라는 염원과 확신이깃든 말이라 하겠다. 본문의 '변백하시기를'(*, 야카흐)이란 '올바르게 잡아주다', '논증하다', '변론하다'의 뜻이다.

성 경: [욥16:2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1)]

주제2: [무죄를 위한 욥의 변증]

(주); 수년이 지나면 나는...갈 것임이니라 - 원문에 의하면 본문의 서두에는 '키'(*, '왜냐하면'; RSV, For)가 있다. 즉 여기서 욥은,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음부의 길로 가므로 (7:9) 그 전에, 즉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무죄성과 깨끗함을 변론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J.E. Hartley). 한편, 역설적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욥이 이 세상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기를 포기하고 내세에 가서야 비로소 모든 문제를 해결받게 되리라고 기대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Anderson).

성 경: [욥17: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욥의 생각]

(주);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 '기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영'(NIV, RSV, spirit), '숨', '호흡'(KJV, breath)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이를 '호흡'으로 옮길 경우에 본문은 심한 병약 증세로 인한 호흡 장애를 뜻하며, '영'으로 볼 경우에는 극도의 고난 가운데 심령이 지치고 핍절된 상태를 가리킨다. 결국 욥은 더 이상 삶을 영위하기 조차 어려운 위기에 직면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욥은 이전부터 자신이 고난당함으로 곧 죽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10:20-22). 그리고 그는 차라리 현재와 같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음부에 숨겨달라고, 즉 죽음에 이르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었다(14:12, 13).

성 경: [욥17: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욥의 생각]

(주);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보는구나 - 욥의 주위 사람들, 특히 세 친구들의 비난과 책망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계속되었음을 뜻한다. 특히 '격동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라'(*)는 '쓰디씀', '괴로움' 등의 뜻으로서(출 15:23) 욥의 괴롭고 씁쓸한 심경을 잘 나타내 준다.

성 경: [욥17: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의 중보에 대한 욥의 호소]

(주);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보주가 되옵소서 - 여기에서 '보증물'이란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상호 거래를 위한 물질적인 계약 증표를 가리킨다(창 38:17-20; 출 22:25,26; 느 5:3). 따라서 본문은 욥이 하나님께 그의 무죄성을 입증하고 보증할 수 있는 표를 주십사 하는 의미이다(RSV, Lay down a pledge for me with thyself). 한편 '손을 치다'란 어떤 사람이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으로 보인다(잠 6:1; 17:18).

성 경: [욥17: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의 중보에 대한 욥의 호소]

(주);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 욥의 친구들이 스스로의 경험, 전통, 정통주의에 입각하여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혹자는(J.E.Hartley) 본절 하반절을 '당신이 높임을 받지 못하시리이다'로 해석함으로써, 마치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끝까지 신뢰하고자 하는 욥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

(주); 그들을 높이지 아니하시리이다 - 본문처럼, 무죄한 자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종국적 패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는 시편에 자주 나타난다(시 13:3-5; 30:1,2; 38:19-22; 41:1).

성 경: [욥17: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의 중보에 대한 욥의 호소]

(주);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멀지니라 - 잠언적인 성격을 띤 문구로서 독설로 욥을 정죄하고 비방하는 친구들에게 징벌이 임하기를 바라는 말이다. 이는 친구들에 대한 욥의 적개심이 매우 컸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지적하여 해를 받게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헤레크 야기드'(*)는 '분깃'(또는 '분배물')을 위해 대적하여 말하다(고발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역본 RSV는 본절 전반절을 '그들의 재산을 나누기 위해 그의 친구들을 고발하는 자는'(He who informsagainst his freinds to get a share of their property)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NIV는 이를 '어떤 사람이 보수를 위해 친구들을 공격(비난)한다면'(If a mandenounces his friends fot reword)으로, KJV는 '그의 친구에게 아첨하는 자는'(Hethat speaketh flattery to his freinds)으로 번역한다.

성 경: [욥17: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욥의 처지와 의인들의 형편]

(주);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기거리가 ...뱉는구나 - 여기서 '백성들'이란 욥의 질병과 고난 소식을 듣고 그를 비웃으며 멸시하는 욥 주위의 사람들을 뜻하는 것 같다(16:10; 19:13-22). 그리고 본문에는 주위 사람들의 모욕과 경멸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주권 사상이 암시되어 있으며, 아울러 자신의 결백함에 대한 안타까운 호소도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10:2-13; 13:23-28).

성 경: [욥17: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욥의 처지와 의인들의 형편]

(주);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 이는 극심한 고통과 슬픔으로 인해 소위 '눈앞이 캄캄하게'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는 16:16에서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라고 고백한 것과도 일맥 상통한다(시 6:7).

(주);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 여기에서 '온 지체'의 히브리어 '야추르'(*)는 '구조물', '사지', '뼈대'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의 온 뼈대가 약하고 야위어서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음을 뜻한다 하겠다(시 31:9, 10). 한편 성경에서 그림자는 종종 인생의 허무함 또는 연약함, 비련함 등을 나타내는 데 비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8:9; 시 39:6; 102:11; 109:23; 144:4; 전 6:12).

성 경: [욥17:8]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욥의 처지와 의인들의 형편]

(주); 정직자는 이를 인하여 놀라고 - 욥과 같이 의롭고 흠이 없는 자가 창졸간에 그토록 엄청난 재난과 시련에 내던져짐을 인하여 정직한 자들이 놀란다는 뜻이다. 여기서 '놀라고'의 히브리어 '솨멤'(*)은 '아찔하다', '마비되다', '소스라치게 놀라다'라는 뜻으로서 의외적인 사실로 인해 크게 놀람을 가리킨다.

(주); 무죄자는 사곡한 자를 인하여 분을 내나니 - 본문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사곡한 자'를 일반적 의미에서의 악인들로 보고, 무죄자라면 당연히 사곡한 자에게 분을 발해야 할 터이나 욥의 친구들은 도리어 정직한 자인 욥 자신에게 노를품고 있다고 비판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2) '사곡한 자'를 곧바로 욥의 친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소위 무죄자들은 욥을 정죄하는 친구들에게 당연히 화를 낼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문맥상 이 두 가지 해석 모두가 가능하다.

성 경: [욥17:9]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욥의 처지와 의인들의 형편]

(주);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 본문 서두의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는 경우에 따라서 약간 달리 번역된다. 영역본 KJV는 '또한'(also)으로, NIV는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로, RSV는 '그러나'(Yet)로 각각 옮기고있다. 그러나 앞의 내용이 의로운 자인 욥이 큰 시련과 고난에 봉착하였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의미로 번역됨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즉 욥에게 닥친 상황은 심한 회의와 좌절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탈선의 길로 가지 않고 끝내 정도(正道)를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Rawlinson).

(주);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 즉, 의로운 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그의 올바름이 드러나고 그에 따라 더욱더 강해진다는 뜻이다(잠 4:18).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 또한 하나님이 의인에게 축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소망을 지닐 수 없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회복을 기대하는 투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초점은 욥의 회복에 대한 기도보다는 자신의 결백에 대한 호소에 더욱 집중되어 있다. 한편 본문의 '손이 깨끗한 자'란 죄악과 손을 잡지 않는 의롭고 정결한 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인다(시 18:24; 24:4; 약 4:8).

성 경: [욥17:10]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소망없는 삶에 대한 욥의 탄식]

(주);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찾을 수 없느니라 - 앞에서 엘리바스는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한 바 있으나(15:9, 10) 본문에서 욥은 그들의 지혜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편견에 불과하다고 공박한다. 혹자는 욥의 이 말을 친구들로 하여금 돌이켜 욥에게 위로하고 동정하는 태도를 갖도록 요청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할테면 해보라'는 식의 빈정됨으로 봄이 나을 것 같다(Hartley, Rawlinson).

성 경: [욥17:1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소망없는 삶에 대한 욥의 탄식]

엘리바스에 대한 두 번째 변론을 마무리하면서(11-16절) 욥은 절망에 사로잡힌 채 음울한 죽음만 기다리는 심정을 토로한다. 한편 본절의 내 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지모티'(*)는 문자적으로 '나의 계획들'(my plans)이라는 뜻으로서, 뒷문구인 '내...사모하는 바'와 함께 욥이 품었던 소원, 목표, 욕망 등을 통칭한다(Rawlinson).

성 경: [욥17:1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소망없는 삶에 대한 욥의 탄식]

(주);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가깝다 하는구나 - 본문에서 '밤'이란 하나의 은유적 표현으로서 욥이 당하는 바 고난과 질병의 고통을 뜻하며 '낮'도 역시 같은 문장 기법으로서 고통과 질병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문 후반부의 '빛이 어두운 데 가깝다'는 말은 칠흑의 어두움이 지나면 곧 동이 터온다는 사실에서 착안된 것으로서, 여기의 '빛'과 '어두운 데' 역시 앞의 '밤'과 '낮'과 종일한 의미를 내포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본절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경우 욥이 죽기 전에 곧 좋은 상태로 회복되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친구들의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5:17-26; 8:20-22; 11:13-19, J.E. Hartley).

성 경: [욥17:1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소망없는 삶에 대한 욥의 탄식]

(주);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누가 보겠느냐 - 본문은 앞의 두 구절들(13, 14절)의 귀결절로 보인다. 본절의 '소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13절에서와는 달리 '티크아'(*)로서 문자적으로는 '묶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끈', '기대', '소망' 등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소망'이란 현재의 재난과 고통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아울러 그의 결백함을 입증받는 것을 뜻한다(J.E. Hartley).

성 경: [욥17:1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2)]

주제2: [소망없는 삶에 대한 욥의 탄식]

(주);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내려갈 뿐이니라 - 이는 15절을 강조하는 부연 설명으로서, 욥이 죽어 구덩이에 묻히고 음부에 내려갈 때에는 그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뜻을 암시한다 하겠다.

성 경: [욥18:1]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경박성을 공격하는 빌닷]

(주);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 이는 빌닷이 8:1에 이어 두 번째로 변론하는 장면이다.

성 경: [욥18:2]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경박성을 공격하는 빌닷]

(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 빌닷의 변론은 직선적이며 과격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는 8:2이하의 첫 번째 변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엘리바스의 두번째 변론에 대해 반론했던 욥을 심하게 책망하며 꾸짖는 듯한 말투로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너희가'란 복수로서 욥을 포함한 모든 불경건한 자를 포괄적으로 가리켜 말한 것으로 보인다(M.H. Pope). 그리고 본문의 '말을 찾겠느냐'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너희가 언제 말을 그만 둘 것인가?'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KJV, NIV, J.E. Hartley). (2) 본문을 '말에 올무를 놓다', '말을 사냥하다', 즉 말을 계속 교묘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RSV, Delitzsch, Lange,Castell, Ewald). 이 둘 중 어느 견해를 취하든지 전달하는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즉, 이는 그의 친구들을 책망하는 욥에 대해 그의 말을 그만 둘 것을 강하게 비난조로 책망한 말이다(6:9; 10:2; 12:4; 13:18; 16:2; 17:10).

(주); 깨달으라 - 이에 대해서 70인역(LXX)은 '그만두다'(*, 에피스케스, leave off)의 뜻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원형 '빈'(*)은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깨닫다', '분별하다'의 뜻이다.

성 경: [욥18:3]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경박성을 공격하는 빌닷]

(주);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보느냐 - 빌닷의 눈에 비친 욥은 끝까지 회개치 않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도리어 선의의 조언을 하는 친구들을 경멸하는 자일뿐이었다. 물론 욥이 친구들에게 경멸적인 조롱을 퍼부은 예가 있긴 하지만(12:2;17:10), 그것은 마치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발길로 차는 것과 같은 친구들의 매정한 태도에 기인한 바가 컸다(6:14, 15; 12:4; 13:4; 16:2). 결국 빌닷은 욥의 현실적 필요를 세심하게 배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명성이 실추될까봐 더 노심 초사하고 있다(Anderson). 한편 '부정하게'를 '어리석게', '우둔하게'의 뜻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NIV, RSV, Driver & Gray, J.E. Hartley, M.H. Pope).

성 경: [욥18:4]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욥의 경박성을 공격하는 빌닷]

(주);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 욥이 의롭고 무죄한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고뇌하며 변론하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 같다(10:2-11; 12:4; 13:18, 19).한편 성경에는 괴롭거나 슬플 때 자신의 옷을 찢는 것으로 고통을 표현한 곳이 많다(창 37:29, 34; 44:13; 수 7:6; 삼하 13:19).

(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옮기겠느냐 - 땅을 견고히 세우시고 바위를 땅에 고정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 법칙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수 있다(렘 31:35-37). 따라서 본문은 자연 법칙이 함부로 변개(變改)될 수 없듯이 죄의 결과 징계를 받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덕적 법칙이므로 어느 누구도 이에서 벗어나거나 이를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J.E. Hartley). 혹은 본문을 '네게 맞추기 위해 전 우주가 재구성되어야 겠느냐?'는 식의 빈정거림으로 볼 수도 있다(Anderson).

성 경: [욥18:5]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 여기서 '빛'이나 '불꽃' 등은 악인이 누리는 건장한 생명 또는 삶의 번영 등을 상징하는 표현이라 하겠다(3:20;22:28). 따라서 본문은 악인이 풍요를 누리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이내 멸망당하고 만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잠언 13:9의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리라'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한다(잠 20:20; 24:20). 또한이 표현은 욥이 현재 심하게 고난을 받으므로 그 자신과 집이 파산 지경에 이른 상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1:13-2:10).

성 경: [욥18:6]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꺼질 것이요 - '빛'이나 '등불'은 5절에서처럼 '생명', '번영', '행복'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막'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는 생활 터전으로서의 거주지인 바, '장막 안의 빛'이란 특히 그 사람의 경제적인 번영, 부귀 등을 상징적으로 뜻한다 할 수 있다. 빌닷은 그의 첫 변론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8:22)고 하였으나 본문에서 또 반복한 것은 욥이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12:6)라고 한 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성 경: [욥18:7]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스스로 빠질 것이니 - 빌닷은 본문에서 악인의 멸망, 연약함, 쇠약해짐 등을 사람이 걷는 걸음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반명에 성경은'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라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빠질 것이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솰라크'(*)는 '내던지다', '세게 던지다'의 뜻을 가지고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본문 하반절을 '그 자신의 꾀가 그를 내어 던지다(던질 것이다)'(KJV, his own counsel shall cast him down ; NIV, RSV, his ownschemes throw him down)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는 말씀을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이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사악한 꾀를 품는 자가 도리어 그 악한 일의 도모로 말미암아 파멸에 직면하게끔 만드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잠 1:18, 19).

성 경: [욥18:8]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이는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가고...밟음이며 - 본절로부터 10절까지에서는 짐승을 잡는 데 사용되는 각종 사냥 기구들을 비유적으로 동원시켜 악인의 종국이 멸망 곧 사망으로 끝나고 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Norman C. Habel). 특히 여기에서'그물'이란 작게는 새나 조그마한 짐승들을(호 7:12), 크게는 사자 같은 짐승들(겔19:8)을 잡는 데 사용하는 도구를 의미하며 '얽는 줄'(*, 쉐바카)은 여자 머리털이나 기타 가는 줄로 짜서 만든 것(M.H. Pope), 구덩이 위에 얹혀 놓은 격자(格子) 모양의 나뭇가지 그물(John E. Hartley), 혹은 구덩이 위에 펴놓은 그물로 보기도한다(Bernard).

성 경: [욥18:9]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창애(*, 파흐)란 '덫', 특히 나무로 만든 '덫'을 뜻하는 것 같다(시 124:7).그리고 '치이고'의 히브리어 '아하즈'(*)는 '잡다'(창 25:26; 아 2:15; 3:8; 렘49:24)라는 뜻이다. 따라서 영역본들은 본절 전반절의 의미를 '덫이 그 발뒤꿈치를 잡는다(잡을 것이다)'(KJV, The gin shall take him by the heel ; NIV, RSV, A trapseizes him by the heel)로 번역하고 있다. 즉, 이는 악인이 창졸간에 멸망받음을 암시한다.

성 경: [욥18:10]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동일 줄'의 히브리어 '헤벧'(*)은 '올가미'(NIV, noose ; RSV, rope)를 의미하며, '함정'(*, 말코데트)은 '올무', '덫'(KJV, NIV, RSV, trap)등을 의미한다(시 35:8), 따라서 본절은 악인이 가는 길 도처에는 멸망케 하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어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 경: [욥18:11]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 '무서운 것'(*, 빌라하)은 '깜짝 놀라게 하는 것', '공포'등을 뜻한다. 실제로 악행을 도모하는 자는 항시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 때문에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늘 쫓기는 심경에 직면하게 된다(잠 28:1). 본절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친 자의 내면 심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성 경: [욥18:12]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 힘은 기근을 인하여 쇠하고 - 본문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영역본KJV, RSV나 하틀리(J.E. Hartley)는 이를 '그의 힘이 고갈케 되다'의 뜻으로 본다. 반면에 랑게(Lange), 델리취(Delitzsch) 등은 본문의 '힘'이 '재난'을 가리킨다고 보아 본문을 '그의 재난이(그를 삼킬 만큼) 굶주림을 보이고'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리고포우프(M.H. Pope)의 경우에는 본문을 '굶주린 그를 대면하고 있다'(The ravenous oneconfronts him)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특히 이 경우 죽음은 산 것들을 먹어치우는 데 혈안이 된 게걸스러운 자로 비유되며, 이러한 모티브는 이어지는 13절에서는 물론이고2:4, 5; 7:5등에도 나타난다(Habel). 이러한 제(諸) 해석들 중 어떤 것을 택하든지 간에, 악인의 파멸이 필연적임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성 경: [욥18:13]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먹을 것이며 - '백제'(*, 올 바다이)는 문자적으로 '그의 피부의 부분들'(NIV, parts of his skin)을 뜻한다. 그러나 혹자는 '부분들'을 '병에 의해'(시 41:3, 4)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Dhorme,J.E. Hartley). 따라서 본문의 전반절을 '그의 피부가 병에 의해 먹혀진다'(RSV, Bydesease his skin is consumed)로 해석하기도 한다. 결국 본문은 욥의 온몸을 뒤덮은 독한 악창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후반절의 '사망의 장자'란 일반적으로 아라비아나 바벨론 및 앗수르 지역에서 흔히 '무서운 질병'을 가리킬 때 스인 환유법적 표현으로 본다(Delitzsch, Lange, J.E. Hartley).

성 경: [욥18:14]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잡혀가고 - '무서운 것'(11절), '사망의 장자'(13절) 등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Delitzsch, Lange). 악인은 자기 나름대로 갖가지 안전책을 구해 보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성 경: [욥18:15]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뿌려질 것이며 - 혹자는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본문을 '불이 그의 장막에 붙다'(NIV, Fire resides inhis tent)는 뜻으로 해석한다(M.H. Pope).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은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여 악인의 멸망받은 장막 안에 그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 즉 들짐승이나 애생 식물 등만이 거하게 됨을 가리킨다고 본다(Delitzsch, Lange). 그리고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란 멸망받은 악인의 처소가 다시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황폐화 되게끔 심판받음을 암시한다 하겠다(15:34; 창 19:24, 25; 신 29:22, 23; 시 11:6).

성 경: [욥18:16]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찍힐 것이며 - 악을 행한 자의 멸망에 대해서 식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서(8:16-18; 15:30, 33) 곧 욥의 전가족의 멸망을 암시한다. 다시 말하면 가족의 생존의 근원이 되는 뿌리로서의 욥 자신뿐만 아니라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인 그 자손들가지 온전히 멸망당하고 만다는 의미이다.

성 경: [욥18:17]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의 기념이 땅에서 없어지고...없을 것이며 - 고대 근동에서 인생의 최대의 비극은 후손이 없는 것과(시 9:6) 그 이름이 후손들에게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져 버리는 것, 이 두 가지였다(시 109:15; Norman C. Habel). 반면에 자신의 삶이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또 기념되는 것은 큰 축복 가운데 하나였다. 여러 사람들을 이롭게 한 의인은 길이 기억되나 악인의 이름은 철저히 망각됨이 당연한 이치이다(잠 10:7).

성 경: [욥18:18]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는 광명 중에서 흑암으로...쫓겨 날 것이며 - 이는 악인이 이 세상 밝은 곳(창1:3, 4)에서 죽임을 당하여 음부의 어두운 곳으로 쫓겨가게 됨을 암시한다(5절;3:16; 10:21, 22; 12:25; 14:13). 특히 본절 후반절은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내려졌던 형벌을 연상시킨다(창 4:12-14). 고대의 상황에서 땅에서 쫓겨 나는 저주는 치명적인 심판이라 할 만했다(J.E. Hartley).

성 경: [욥18:19]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재앙에 대한 빌닷의 견해]

(주);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 이는 16절의 말씀과 유사한 것으로서 악인의 후손이 끊겨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후손이 없거나 도중에 끊기는 것을 불행한 것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로 묘사된 곳이 많다(창 30:1, 2; 삼상 2:31-34;시21:10). 한편 전반절의 '아들'의 히브리어 '닌'(*)은 단순히 '아들'(son, ckd4:25)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싹이 트이다'에서 유래된 말로 '자손'(NIV, RSV,pffspring)을 의미한다 하겠다. 그리고 '손자'(*, 네케드)도 단순한 '손자'(창29:5; 31:28)보다는 역시 '후손'(NIV, RSV, descendant)을 의미한다 하겠다.

성 경: [욥18:20]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패망 원인과 그 영향]

(주); 그의 날을 인하여 뒤에 오는 자가...놀라리라 - 여기에서 '그의 날'은 악인이 심판받는 멸망의 날을 뜻한다(삼상 26:10; 시 37:13; 1137:7; 옵 12). 그리고 '뒤에 오는 자'와 '앞선 자'에 대해서는 (1) 각각 후대의 악인들과 동(同) 시대의 악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Bernard, Hirzel, Renan, Scholttamann, Wordsworth)와, (2) 각각 서편의 사람들과 동편의 사람들 곧 당대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Barnes, Delitzsch, Hartley, Pope)로 나뉜다.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는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성 경: [욥18:21]

주제1: [빌닷의 두 번째 변론]

주제2: [악인들의 패망 원인과 그 영향]

(주);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그러하니라 -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아크'(*, KJV, NIV, RSV, Surely)라는 부사가 첨가되어 있다. 이는 본문이 빌닷의 변론중 결론적인 내용으로서 그의 주장하는 바를 요약 강조함을 암시한다. 즉, 빌닷은 욥이 바로 멸망에 처할 수 밖에 없는 불의한 자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19:1-6]

(주);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 욥은 그 친구들의 부당한 말을 신랄하게 공격한다. (1)그들이 욥을 학대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것(3절). (2)욥에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자신의 사적(私的)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간섭한다는 것(4절).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란 말씀의 뜻은 그 자신(욥 자신)이 관계할 일이라는 뜻이다. (3)그에게 임한 환난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니만큼 그들은 그를 위로해주어야 된다는 것(6절). 그런데 그들이 욥을 위로하지는 않고 도리어 자긍하며 욥의 죄를 찾아내려고만 힘쓴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욥의 친구라고 하면서도 고난 중에 있는 욥을 극도로 괴롭히는 것 뿐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6절). 이 말씀은 욥이 자기의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지 않다는 확신의 발표이다. 설혹 그에게 죄가 있다 할지라도(5절) 그것은 그의 고난과는 별도라는 것이다. 이렇게 욥은 자기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확신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불신앙이 아니며 원망도 아니다. 그의 이 말은 사실대로 표현된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줄 알아야 된다. 그렇게 알 때에 구원 받을 소망이 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쳐 주신다(욥 5:18). 그러나 만일 고난의 원인이 우연이라고 한다면 고난을 받는 자가 어떻게 소망을 가지랴?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성 경: [욥19:7-12]

(주);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히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쳤구나. - 여기서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역경과 고난을 묘사한다. 그것은 곧,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다"는 말(7절), "길을 막았다"는 말(8절 상반), 그의 길에 "흑암을 두셨다"는 말(8절 하반), "영광을 벗기셨다"는 말(9절), "사면으로 나를 헐으신다"는 말(10절 상반), "소망을 뽑으셨다"는 말(10절 하반), "하나님이 원수 같이 보신다"는 말(11절), 하나님이 군대를 보내어 치시는 것 같이 하신다는 말(12절) 등이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다 고난 받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진실한 신자들은 고난 중에서 이와 같은 느낌을 가진다. 예를 들면 애가의 저작자 예레미야의 느낌도 그와 같았다.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라고 하였으며(애 3:1), 그는 계속하여 위의 욥의 탄식과 같은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였다(애 3:2-18).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하였다(애 3:20-22). 애 3:32-33 참조.

성 경: [욥19:13,14]

(주);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 여기 이른바 "형제들"이란 말은 혈연에 의한 형제들을 의미하지 않고 가까운 친구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전날 욥의 행복한 시대에는 이들이 모두 가까운 친구들이었으나 지금 그의 곤고한 시절에는 모두 다 그를 저버린 것이다. 이런 친구들은 신의(信義)가 없는 자들이니 손우(해로운 친구)들이다. 그러므로 잠 18:24에 이런 친구를 많이 두는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라고 하였다. 욥은 이렇게 친구들이 그를 멀리하는 괴로움의 원인까지도 하나님께 돌린다. 그것은 "떠나게 하시니"란 말(13절)이 알려준다. 이것이 그의 신앙사상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1)그는 그 배신하는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다윗이 시므이로부터 저주를 받았을 때에 그 저주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고 시므이를 원망하지 않았다(삼하 16:9-10). (2)욥의 그런 사상은 하나님을 원망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어드림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성 경: [욥19:15,16]

(주);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 전에 욥이 행복하던 시절에는 그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그의 후대(厚待)를 받았었고(31:32), 그의 종들도 사랑을 받았었다(31:13), 그런데 이제 그의 곤궁한 시절에는 그들이 배은망덕한다.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란 말은 그가 이제는 그 종들에게도 애원하다시피 무엇을 요구해야 겨우 받게 되는 형편이 되었다는 뜻이다.

성 경: [욥19:17]

(주);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 욥은 자기 아내의 내조(內助)를 받지 못함은 물론이고(2:9), 도리어 배척을 받는 처지였다. 부부도 신앙 사상이 서로 다르면 일체가 되지 못하고 서로 대립된다. 또한 사상이 다른 동포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

성 경: [욥19:18]

(주);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 여기 이른바 "어린 아이들"이란 말(* )은 소년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존장(尊長)을 존경해야 되는데 도리어 업신여기고 조롱하였다. 그런 행동은 상대방에게 큰 고통을 주는 무서운 죄악이다. 욥은 그것도 참아 견디었다.

성 경: [욥19:19]

(주);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 이 말씀은 위에 진술된 모든 말씀에 대한 결론일 것이다. 욥은 가장 가까운 자들이 자기에게 원수가 된 것이 큰 괴로움인 것을 여기서 발표한다. 가까운 자들이 그렇게 된 것은 본래 원수였던 자들의 핍박보다 더욱 괴로운 것이다. 그 이유는, (1)사람은 자기에게 가깝던 자가 멀어질 때에 그 받던 사랑과 협조의 결손을 아프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몸에서 어떤 요긴한 지체가 끊어져 없어짐과 마찬가지이다. (2)사람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서는 사랑의 보답을 기대하는데 그 기대와 정반대되는 보답을 받게 될 때에는 절망의 심리마저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욥은 이와 같은 고난을 받은 점에서 예수 그르스도의 예표가 될만하다. 우리는 욥기를 읽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받으신 고난의 한 부분을 조금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으로 일찌기 욥의 생애를 통하여 고난 문제를 인류에게 계시하셨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받으신 고난은 사랑하는 자에게서 발꿈치를 들리운 것 같은 것이기도 하다(요 13:18 하반).

성 경: [욥19:20]

(주);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 뿐이로구나. - 이것은 욥이 그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과 사람들의 배신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그의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비참한 꼴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정 표준역(R.S.V)에는 "나는 이빨 붙은 뼈로만 남았구나"(I am left with only the bone in which my teeth are set.)라고 번역되어 있다.

성 경: [욥19:21,22]

(주);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 이것은 풍자적인 언사가 아니고 겸손한 욥의 진지한 요청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에게 대하여 원망함도 아니다. 이 말은 자기의 심각한 고난에 대하여 표현한 그의 자연스러운 애가(哀歌)이다. 시문학(詩文學)이란 것은 때로는 자연 현상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묘사하는 것을 족하게 여긴다.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한 것은 그저 그 때 사태의 외모를 그대로 묘사한 것 뿐이다. 그 때에 욥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저런 고난을 받는 것을 알고 있었다(7 -12). 그러나 그가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슬피 호소한 것 뿐이다. 기도와 호소는 원망이 아니고 신앙이다. 여기 "핍박"이란 말(* )이 은근히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함축하는가? 하나님께서 욥을 핍박하셨다는 말이 순조로운 말일까? 여기 "핍박"이란 말은 불의하게 압제한다는 뜻을 반드시 내포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저 괴롭게 하려고 쫓아다님(pursue after)을 말함이다. 욥이 이렇게 말함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자세한 간섭을 염두에 둔 것이고 원망함은 아니다. 욥이 하나님을 거스려 원망하였다는 말은 본장에 한 마디도 없다(C. Van Gelderen, Geen enkel woord van aanklacht tegen God. - Das Hoofdp- unten Der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pp.43-44). 욥이 여기서 표현한 것은 이렇다. 곧,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욥을 "핍박"(불의한 처사란 의미는 아님)하실 수 있겠으나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여기 "살을 먹는다"는 말은 아람어에 보통 나오는 표현으로서 맹수가 물듯이 사람이 남을 거짓말로 비방함을 가리킨다(J.H.Kroeze, G.Fohrer, Konig).

성 경: [욥19:23,24]

(주);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 욥은 여기서 자기의 고난의 원인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자기의 어떤 죄가 아니라고 주장해 온 자기의 이때까지의 변호가 영구히 후세에 전달되기를 원한다. 그는 그만큼 이 문제에 있어서 자기의 청백을 확신하고 또 주장한다. 그는 교만이 아니고 진리와 사실을 굽히지 않으려는 신앙 양심의 고백이다. 그러면 욥이 후세에 전살하고자 하는 기록의 내용은 25-27절의 내용도 아니고, 벌써 앞에 나온 변론의 집합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이때까지 그가 말한 변론의 핵심(혹은 실질)이다. 포렐(G. Fohrer)도 이 점에 있어서는 동의한다(Mit dem Wunsch: "Wurden doch meine Worte aufgeschrieben!" sind naturlich die folgenden Verse 25-27 gemeint, die keine Inschrift bilden und nicht mit beginnen durften, noch die gesamten vorhergehenden Reden, die sich dadur nicht eignen. Vielmehr kann es sich nur um den Kern und die Substanz der Reden Hiobs handeln.-Kommentar zum Alten Testment, Das Buch Hiob, 1963, s.316-317).

성 경: [욥19:25]

(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 욥은 자기의 고난의 원인이 될 만한 죄가 없는 사실을 기록하여 전하기 원하였다(23- 24). 이제 그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 그것은 후일에 구속자가 그를 신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이란 말(* )은 역설체(力說體)로서 확신을 강조한다. "구속자"란 말(* )은 종을 사서 그를 자유하게 하는 자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 피로 그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욥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와 옴을 생각하면서 살아 계신 구속자(救贖者)가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내다본다. 이것은 요셉이 임종시에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라고 말한(창 50:24) 그의 신앙과 흡사하다.우리 본문의 "살아 계시니"(* )란 말은 여기서 요긴한 뜻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죽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완전한 구주님이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한 말에 포함된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중요한 뜻을 가지는 것으로, 욥이 그의 생전 어느 때에 한 번 하나님이 변증해 주신다는 해석(ante-mortem-view)이 있으나 개혁주의 학자들은 욥의 죽은 후(세상 끝날)에 부활하신 주님이 오신다는 뜻이라고 한다(Kuyper, Loc de Consumm. bl. 31-44; Bavinck, Geref. Dogmatiek IV, bl.771; Honig, Handbuch.bl.782). 이 말씀은 단지 욥의 주장을 옳다고 할 증인이나 변호자가 온다는 의미가 아니고, 구원론적 또는 종말관적인 신원(神怨)을 말해준다(C. Van Gelderen, Beide, soteriologisch en eschatologisch heeft hij vooreerst zijn hoogtepunt bereikt. -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bl.44).

성 경: [욥19:26]

(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내가 육체 밖에서"란 말(* )은 "내 육체를 떠나서" 혹은 "내 육체 없이"란 뜻이다. "육체 밖에서"란 말은 물론 "죽은 후에"란 뜻과 같다. 반 겔데렌(C.Van Gelderen)이 역시 그렇게 해석하였고(Denkt Job wel aan een leven der ziel na den dood, een leven in gemeenschap met God, maar niet aan eene opstanding des vleesches. -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bl. 45). 흴쉘(Gustav Holscher)도 위의 해석과 같이 "내 육체 없이"라고 해석하였다(Mithin ist (* ) 19:26 nicht zu ubersetzen: "von meinen Fleische aus", sondern "ohne mein Fleisch". - Handbuch zum Alten Testmnt, Das Buch Hiob, 1952, s.49). 어떤 다른 학자들처럼 이것을 "육체로부터"(육체를 입은 그대로 곧, 아직 살아 있어서)라고 번역한다면, 그것은 그 윗문귀(26절 상반)에 있는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란 말과 통하지 않는다. 그의 "가죽이 썩은 후"란 말은 그의 죽은 후를 의미하므로 그가 아직 살아 있는 육체 그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성 경: [욥19:27]

(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니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 이 귀절은 앞절의 말씀을 좀 더 밝혀준다. 곧, 그가 육체를 떠나서 하나님을 볼 터인데 간접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고 직접적으로 친히 보게 된다고 한다.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곧,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외인"이란 말의 의미가 대적을 의미할 수도 있음)처럼 나타나지 않으시고 구원자로 나타나신다는 뜻이다.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란 말(* )은 "내 속에 있는 것들이(나의 내장이) 모두 소멸될지라도"(곧, 질병으로 인하여 그의 내장은 모두 녹아버려 그가 죽은 뒤에라도)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한역의 의미도 상당한 근거를 지녔다. 곧, 그의 마음 속으로 주님을 보기 원하고 사모하여 쇠약해진다는 것(시 84:2, 119:82)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는 헹스텐벧크(E.W.Hengstenberg)가 지지한다(* sich verzehren, bezeichnet eine lebhafte Sehnsucht.-Das Buch Hiob, 1875, s.68). 크루제(J.H.Kroeze)는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한다. 곧, "욥이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을 사모하다가 마침내 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에게 이루어진 계시사(Openb-aringsgeschiedenis)이다."라고 하였다(Het Boek Job, 1961, bl.226).

성 경: [욥19:28,29]

(주);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 여기서는 욥이 자기에게 대한 그 친구들의 취급이 위태하다고 그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이 고난 받는 욥을 동정하지는 않고 계속해서 그에게는 해당되지도 않는 이론으로 그를 정죄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징벌이 그들에게 내릴 것이라고 한다.

성 경: [욥20:1-3]

(주);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내게 대답하는구나. - 소발은 욥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그의 마음 속에 답변이 솟아 오른다고 한다.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란 말이 그 뜻이다. 이렇게 소발은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무익한 변론만 열심으로 한다. 그런데 그가 4절 이하에 사용한 여러 가지 말이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그 말이 진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성 경: [욥20:4,5]

(주);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라. - 여기 "이기는 자랑"이란말(* )은 승리의 기쁨으로 떠드는 소리를 가리킨다. 악인들이 스스로 된줄 알고 승리의 함성을 지르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이 악인은 "사곡한 자"(* ) 곧 외식자인데 그의 즐거웁다고 하는 것도 잠간이다. 계 3:17에 말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런 외식자의 거짓말은 오래 가지 못한다(잠 12:19). 하나님의 법 앞에서는 외식하는 자의 받는 벌이 가장 엄하다(마 24:51). 마 23:13, 15, 16,23, 25, 27, 29 참조.

성 경: [욥20:6,7]

(주); 그 높기가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 외식자는 일시 동안 높아진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높아지기를 원한다. 그것이 진실을 특성으로 가지는 성도와 다르다. 그러나 외식자의 높아짐을 도리어 떨어질 계기가 되는 법이다. 여기 이른바 "자기의 똥"이란 말(* )은, 돌메(E. Dhorme)에 의하면 앗수리아 말 깔루(gallu)곧 악귀(惡鬼)란 말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악귀(evil spirit)라고 번역하였다(E. Dhorme, A Commentary on the Book of Job, 1967, pp. 292-293). 그러나 구약에는 이말이 종종 똥 혹은 거름이란 말로 사용되는데(왕상 14:10; 겔 4:12,15), 구태어 그것을 달리 번역할 필요는 없다. 똥이 아주 내버림이 되는 것처럼 인간 중심한 명예나 영예는 더러운 것이다. 악인은 그것을 귀히 여겨도 성도는 그것은 배설물 같이 여긴다(빌 3:8). 하나님께서도 마침내 그것을 심판하여 소탕해 버리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를,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고 하셨다(눅 16:15).

성 경: [욥20:8,9]

(주);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던 환상처럼 쫓겨 가리니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 이 말씀은, 극악한 죄인의 번영은 (1) 꿈과 같이 헛되다는 것과 (2) 잠간 후에는 놀랄 정도로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에 의하여 깨끗이 망해 버린다는 것이다. 사 29:7-8에 말하기를, "아리엘(하나님의 제단이란 뜻인데 이스라엘을 비유함)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곶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 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고 한다. 시 37:35-36 참조.

성 경: [욥20:10,11]

(주); 그의 자녀들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그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다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 이 귀절들은 극악한 자의 받을 두 가지 벌을 지적하였으니 곧, (1) 불의로 모은 그의 재물은 마침내 다 상실케 됨에 따라서 그의 자녀들이 극히 빈곤해 진다는 것. 렘 17:11에 말하기를,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하였다. 잠 10:2, 23:5; 전 5:13-17참조. (2) 청년의 원기를 아직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히 사망케 된다는 것이다. 욥 8:11-13; 시 129:6 참조.

성 경: [욥20:12-15]

(주); 그는 비록 알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찬 자 속에서 변하며 뱃 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 여기서는 죄악에 깊이 빠진 자의 범죄 현상과 그 결과를 진술한다. 그것은 (1)그가 범죄할 때에는 단 맛 있는 음식 먹듯이 꺼리지 않고 거기서 재미를 본다는 것(12-13). 그의 즐기는 죄악은 불의하게 재물을 취하는 것이다(15절 참조). (2)그가 그렇게 범죄한 결과는 독사의 쓸개와 같다는 것이다. 학자들 중엔 독사의 "쓸개"(* )란 말이 독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간주하고 하나의 난제를 만든다. 곧, 독사의 독은 그 두부(頭部)에 있는데 왜 여기서는 그것이 쓸개에 있다고 하는가 한다. 그들의 이렇게 자신들이 난제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애쓰기도 한다. 횔쉘(G. H lscher)은 말하기를, "고대인들은 독사의 독이 쓸개 속에 들어 있는 줄 알았다."라고 하였다(Das Schlangen gift dachten sich die Alten in der Gallenblase der Schlange.-Handbuch zum Alten Testament, Das Buch Hiob, 1952, s. 53). 또한 포렐(G Forrer)과 라울리(H.H. Rowly)도 이점에서 동조한다. 이에 대하여 제미슨, 파우세트, 부라운은 이 성구의 권위를 변증하는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성경의 저자는 그 가르치려는 신령한 진리와 도덕의 교훈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限) 그 기록 당시의 일반적 용어를 사용하였다."라고 하였다(Jamieson, Fausset, and Brown, One Volume Comentary, AP & A, p .325). 그러나 위의 횔쉘이나 포렐의 노력은 헛된 것이다. 우리는 "독사의 쓸개"란 말을 독사의 독으로 풀이할 필요가 없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쓴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쓸개로 음식물을 삼는다는 것은 못 먹을 것을 먹는 다는 의미이다(시 69:21). 그런 것은 먹은 결과는 만족이 없고 도리어 토하게 될 것이다(15절). 독사의 독에 대하여는 16절에 별도로 나오는데 14절의 "독사의 쓸개"란 말을 그것과 동일시 할 필요가 없다.

성 경: [욥20:16]

(주); 그가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다. - 여기 이른바 "독사의 독을 빤다"는 것은 반드시 입으로 빨아 위장에 들어가도록 삼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독사의 독과 같이 해로운 것을 취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섭취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뱀의 혀"는 여기서 그 독을 상징한다(E. Dhorme). 뱀은 실상 무엇을 물려고 할 때에 독을 뿜으며 혀를 발사(發射)한다(이빨로 물지만). 이 귀절은 시문학적(時文學的) 표현이고 또 비유적 진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교훈을 앎으로 만족한 것이고 이 말씀의 과학적인 여부를 논할 필요는 없다. 성경의 시문학은 어떤 때에는 과학적 진술은 아니면서도 역시 무오(無吳)의 셩격을 지닌다. 불의한 행동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시문학적으로 말한 것은 사 59:3-8에도 있다. 그리고 잠 21:6에는 말하기를,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고 하였다.

성 경: [욥20:17]

(주);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 "꿀과...젖이흐르는 강"은 꿀과 젖을 강수처럼 풍성히 산출하는 비옥한 땅을 말하는 것이다. 팔레스틴의 주요 산물은 꿀과 젖과 기름, 이 세 가지인데 이것들은 생활 필수품을 상징하는 것이다(G. Fohrer, Drei fur das palastin Kulturland wichtige Landesprodukte werden symbolisch fur die Lebensguter genannt.-Kommentar zum Alten Testament, 1963, s.331).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이 선민에게 약속하신 복된 땅인데(출 3:8, 13:5), 특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었다(E.W. Hengstenberg, Das Buch Hiob, 1875, s.331). 그런데 저 극악한 자들은 저런 풍성한 물질을 얻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굳어지고 말았으니만큼 그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며 그들에게 풍부한 물질을 주시는 때도 없지 않다(시 17:14, 73:3-12). 그러나 그것도 그들이 회개를 기다리시는 동안만 허락된 것이다(롬 2:4). 시 73:18-19참조. "꿀과...젖이 흐르는 강"은 역시 복된 내세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 55:1-5참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극악한 자들은 거기에 참여할 수 없다. 그곳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복되게 받는 기업의 후사들이 산다(롬 4:13-16, 8:17). 만물을 은사로 복되게 누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뿐이다(롬 8:32).

성 경: [욥20:18,19]

(주);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삼키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워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 수고하여 얻은 것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에 한하여 그러하다. 시 128:1-2에 말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악한 죄인은 수고하여 얻은 것을 먹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것은 18-19절에 밝힌 것과 같이 (1)그가 수고스럽게 남의 것을 빼앗았던 것이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에 의하여 도로 내어주도록 되기 때문임. 섭리적 심판이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억지로 빼앗았지만 그와 그가족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왕상 21:1-29). (2)그가 얻은 재물은 불의로 얻었으니 만큼 기쁘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임. 혹시 질병의 원인으로나 기타 원인으로 그가 자기의 소득을 행복하게 누리지 못할 경우도 있다(18절). 그가 이렇게 불행하게 되는 화근(禍根)은 그가 빈민을 학대한 사실에 있다(19절). 잠 14:31에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하였다. 약 5:1-6참조. 여기 진술된 악인과는 달리 욥은 의인이었음에도(욥 31:16-20,39) 불구하고 소발이 욥을 악인으로 판정하였다. 소발의 말은 모두 진리이지만 그 진리를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맹목적이다. 그는 영적 체험을 외면 하고 정통주의를 말로만 늘어놓는 바리새인과 같다.

성 경: [욥20:20,21]

(주);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 남긴 것이 없이 몰수히 먹으니 그런즉 그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라. - 소발은 이 귀절들에서 악인의 불안에 대해여 말한다. 악인은 그의 탐심 때문에 마음에 만족이 없고 또한 그의 좋아하는 것을 탕진해 버린다.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자에게는 늘 불만과 원망이 있다. 이 세상 것은 사람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인만큼 그것을 쓰는 자는 쓰면 쓸수록 불만이 계속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정한 만족을 얻으려면 이 세상 것을 따르지 않고 주님을 따라야 된다. 다윗은 여호와 한 분으로 만족을 얻고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다(시 23:1). 시 27:4참조.

성 경: [욥20:22,23]

(주); 풍족한 때에도 곤액이 이르리니 모든 고통하는 자의 손이 그에게 닿으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밥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 곧, 그가 부요해져서 평안히 살 만한 그무렵에 재앙이 임한다는 뜻이다. 일이 이렇게 교묘하게 전개됨은 하나님의 간섭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고통하는 자의 손"이란 말(* )은 "모든 불행의 손"이란 뜻이다(LXX, Vulgate). dl이것 은 그 사람을 아주 몰락시키는 강력한 세력을 가리킨다(G. Fohrer, Mit voller Macht greift die Hand des Unheils nach him.-DasBuch hiob, 1963, s.332). "밥 먹을 때에" 불행한 일이 발생함도 교묘한 일이다. 이것도 그 죄인의 먹음으로 만족하려는 계획을 실패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이다.

성 경: [욥20:24-27]

(주); 그가 철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 낸즉 번쩍번쩍 하는 촉이 그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사람이 피우지 않는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 가산이 패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흐러 가리니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산업이니라. - 이 부분은 위의 말씀의 연속으로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진술한다. 곧, (1)철병기 같은 벌(24절 상반), (2)놋화살 같은 벌(25절), (3)깊이 뚫고 들어간 화살 같은 벌(25절), (4)캄캄한 어둠 같은 환난(26절 상반), (5)불과 같은 환난(26절 하반), (6)가산이 없어짐(28절) 등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1)죄인을 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다양성(多樣性)을 지녔다는 것과 (2)그가 그 받는 한가지 벌을 피하면 또 다른 것이 뒤에서 쫓아온다는 것이다(24절).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기 전에 자기들의 죄를 발견하여 회개함이 지혜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긴다(잠 14:9).

성 경: [욥21:1-3]

(주);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것이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또 조롱할지니라. - 여기서 욥은 자기의 말을 들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는 진리의 확신을 가졌으니 만큼 겸손하고 또 담대하게 발언한다.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고 한 말은 그의 겸손을 보여 주고, "내가 말한 후에 또 조롱할지니라"고 한 말은 그의 담대함을 보여준다.

성 경: [욥21:4]

(주);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가 어찌 초급하지 아니하겠느냐. - 여기 "원망"이라는 말(* )은 사실상 "수심" 혹은 "근심"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욥은 자기의 당한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다만 그 난제를 풀지 못하여 근심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미궁(迷宮)에 빠져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그것이 만고(萬古)에 모본이 도리 만한 신앙이다.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에도 믿음을 지키는 자는 참으로 지혜롭다. 그런데 욥의 근심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자기를 죄인 벌하시듯 무서운 환난으로 괴롭히시는가 하면서 자기 마음 속에는 근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근심 때문에 그는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내가 초급하지 아니 하겠느냐"란 말이 그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불신앙을 내포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가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답답해 하는 것 뿐이다. 그가 이렇게 답답한 중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계속 기도한 사실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성 경: [욥21:5,6]

(주); 너희는 나를 보아라, 놀라라,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 내가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 여기서는 욥이 자기의 당한 고난의 처지를 실제로 보여주면서 그 친구들의 이론이 틀린 것을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확실히 자기의 고난에 해당될 범죄 사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모든 고난은 반드시 특별한 범죄 결과라고 하는 그 친구들의 주장은 실제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욥은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친구들더러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고 하였으니 곧, 침묵하라는 뜻이다. "내가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몸을 잡는구나." 곧, 그가 과거에 당한 비참한 일들을 돌아볼 때에 가슴이 막힐 지경이고, 또한 소름이 끼칠 지경이라는 뜻이다.

성 경: [욥21:7]

(주);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 욥이 이 말은 원망이 아니고 다만 난제를 제시하는 것 뿐이다. 이런 난제 속에서도 그는 여유 있게 하나님을 바라본다. 악인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며 세력을 잡는 일이 있음에 대하여 반스(Albert Barnes)는 여섯 가지를 들어 그 이유를 제시한다. 곧, (1)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덕을 보여주기 위함, (2)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악함을 보여주기 위함, (3)악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어 심판 때에 불평하지 못하게 하려 함, (4)하나님의 자비의 풍성함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여주기 위함, (5)그의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 그들을 쓰시려 함, (6)이 세상 사회가 악인들의 재능에 의하여 진보하기 위함 등이라고 한다(Notes on the Old Testament, Job I,1971, p.349). 그러나 우리는 위의 여섯 가지로 이 난제를 다 해결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응이 이 세상 중심이 아니고 내세 중심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이 주요한 축복은 아닌 것이다. 시 17:14-15에 말하기를,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 나를 중의 손으로 구원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악인이 이 세상에서 불의한 행동으로 번영을 누림은 결국 그 인격에 손해를 받는 것이 된다는 의미에서 이 난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곧 모든 행동은 그 자체에 있어서 벌써 성격상 보응을 받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남의 것을 도적하는 그것은 벌써 자기 자신을 도전하는 것임을 면치 못한다고 한다(Minos Devine, The Story of Job,1921, p.152).

성 경: [욥21:8]

(주); 씨가 그들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 여기 이른 바 "그들의 앞에서"란 말(* )과 "그들의 목전에서"란 말 "(* )은 중요하다. 이 문구들은 그들이 자손의 잘되는 것을 보며 행복하게 지낸다는 뜻을 표현한다. 곧, (1)욥은 여기서 그 친구들의 변론(15:33, 18:19)곧, 악인은 언제나 무자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의미로 말한다. 즉 악인도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많은 자녀들을 거느리게 됨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도 악인이 벌을 받아 무자하게 되는 일도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삼하 18:18참조. (2)여기 욥의 말은 사람에게 반드시 자손이 있어야만 행복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자기의 자녀들이 다 죽은 뒤에도 (욥 1:18)고백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라고 말하였다(1:21 하반). 그는 이렇게 하나님 중심으로만 행복을 생각하였다.

성 경: [욥21:9]

(주);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 회개하지 않는 악인이 끝까지 평안히 잘 살다가 평안히 죽는다는 욥의 주장은 모든 악인들에게 공통된 사실이라는 것이 아니다.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도 최후에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악한 왕 느부갓네살이 평안히 잘 살다가 벌 받은 일이 있고(단 4:28-33), 벧사살왕도 그렇게 되었고(단 5:1-9, 30-31), 나발도 그렇게 되었고(삼상 25:36-38), 헤롯도 그렇게 되었다(행 12:23). 욥이 이같은 경우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욥 27:8-23), 다만 그가 그 친구들의 치우친 주장(악인은 모두 다 이 세상에서 징벌을 받는다는 주장)을 반대하기 위하여 악인이 세상에서 끝까지 형통한다고 변론한다.

성 경: [욥21:11,12]

(주);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 보냄이 양 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 그 아이들이 "양 떼 같다"고 함은 그 자녀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악인들은 그 자녀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며 즐기도록 장려한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성도들과 대조된다. 성도들은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힘쓴다(창 17:8-9, 18:19). 신 6:4-9참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맡은 책임을 잘 실행할 힘을 얻기 위하여 하던 일을 쉴 수도 있다. 그러나 쾌락을 위한 쾌락주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죄악에 빠지도록 만든다(딤후 3:4).

성 경: [욥21:14-16]

(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 이 부분 말씀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1)악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이때까지 이 세상에서 육적으로 형통하면서도 그 형통함이 자기의 손에 달린 줄 오해하였다(16절 상반). (2)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악한 말을 한다(14절 상반). 그는 하나님을 섬길 필요도 없고 그에게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애굽의 바로와 같다(출 5:2). (3)이런 악인은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이다(H.H. Rowley). 그가 공리주의(功利主義)의 동기로(15절 하반) 하나님을 평가하는 것이 우선 잘못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또한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악인의 잘못은 자기의 번영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는데 있다. 그것은 짐승과 같은 그의 어두움이다. 그것은 돼지가 도토리나무 아래서 그 떨어진 도토리를 많이 주어 먹고도 그 나무를 알아 보지는 못하고 가버림과 같다. 그러므로 욥은 자기가 이런 악인과 다름을 명백히 말한다(16절 하반). 여기 "계획"이란 말(* )은 여기서는 인생관을 가리킨다(J.H. Kroeze, Hot Boek Job, 1961, bl.241).

성 경: [욥21:17,18]

(주);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불려가는 겨 같이 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느냐. - 이 말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몇 번이나 있었느냐"(* )란 말이다. 회개치 않은 악인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벌을 받는 일에 대하여 욥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다만 그의 의미한 바는 악인마다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 국가의 법률 시행 방법은 같은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대체로 같은 형(刑)을 내린다. 그것은 인간의 육신만 상대할 수 있는 제한된 제도 아래서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간 통치 원리는 (1)인간의 육신만 아니라 그의 영혼, 그리고 현세만 아니라 내세와도 관련을 가진다. 그 뿐 아니라, (2)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다스림심에 있어서 공의로우시면서도 일정한 전형(典刑)에 예속되시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처사는 다양성(多樣性)을 지녔고 또한 자유로우시다. 그러므로 회개치 않는 죄인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다 이 세상에서 꼭 같은 모양으로 곤고케 되거나 멸망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어떤 자는 현세에서 육신도 망하고(행 12:23), 어떤 자는 현세에서는 호화롭게 살다가 내세에 가서 비참해 진다(눅 16:23). "등불이 꺼짐"은 멸망을 비유하고, "바람 앞에 검불"이나 "폭풍에 불려가는 겨"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 자의 비참한 육신 생활을 비유한다(시 1:4, 35:5, 83:13; 사 17:13, 29:5; 렘 13:24). 그는 이제 불가항(不可抗)의 힘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이 패망한다. 악인이 이렇게 이 세상에서 패망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악인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욥의 변론이다.

성 경: [욥21:19-21]

(주);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 그몸에 갚으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시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셔야 할 것이니라 그의 달수가 진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 욥은 여기서 그 친구들의 주장, 곧, 악인의 죄값은 이 세상에서 그 자신이 친히 받지 않은 경우에 그의 자손이 그것을 받는다는 주장(5:4, 20:10, 21:19)에 대하여 반대한다. 그 이유는, 만일 그 악인의 죄값이 악인 자신에게 미치지 않고 그의 자손에게 미치게 된다면 그 악인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만다는 것이다(19절 하반-20). 왜 그런가 하면 그 악인은 그의 사후(死後)에 자기 후손("자기 집")에 대하여 무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21절). 욥이 이렇게 말함은 아비의 죄값이 그 자손에게 미치게 된다는 성경적 진리(출 20:5; 신 5:9)를 아주 반대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난제를 제시하는 것 뿐이다. 그가 그 난제 때문에 의문을 가지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그의 불신앙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오(深奧)하신 처사에 대하여 알아 보려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것이 본서에 제시된 욥의 특이한 신앙과 또는 그의 인내의 덕이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난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었고 또 참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렌케마(W.B. Renkema)는 이점에 있어서, 욥이 아비의 죄값이 그 자손에게 미친다는 진리(출 20:5)를 몰랐다는 뜻으로 말하였다(Dit wordt hier door Job uit het oog verloren.-Het Boek Job, 1899, bl.172). "그의 달수가 진하면."이 말은 그 악인의 생애가 끝난다는 뜻이다.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와 그의 가족과의 혈연 관계는 끊어진다. 휄쉘(G. Holscher)도 동일한 의미로 말한다(Denn den Toten kummert "sein Haus",d.h. sein Familie, nicht mehr.-Handbuch zum Alten Testament, Dan Buch Hiob,1952, s.55).

성 경: [욥21:22]

(주);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 여기 "높은 자들" 이란 말(* )은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의미하거나(Gottinger Hand-Kommentar zum Alten Tostament, Das Buch Hiob,1913, s.123), 혹은 하늘에 있는 피조물들을 가리킨다(J.H. Kroeze, commentaar Op Het Oude Testament,1961, bl.243). 그러면 이들은 천사들이다. 천사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지식은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실수가 없으시다. 이 말씀을 보면 욥이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면서도(18-21) 하나님의 무소부지하신 지식을 믿음으로 해결을 받는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사람이 모를 것도 많으나 그것은 사람의 무지 때문이고 하나님의 잘못은 아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모를 오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을 만하다. 그가 인간의 지식으로 다 측량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면 그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실 수 없다. 과연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고 또 오묘막측하다. 롬 11:33-36에 말하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먼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한다.

성 경: [욥21:23-26]

(주);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며 안일하고 그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 골수는 윤택하였고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였어도 이 둘이 일반으로 흙 속에 눕고 그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 욥은 여기서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사가 오묘막측하심을 진술한다. 욥의 이 말은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의 무지(無知)를 고백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심령 깊은 데서는 하나님을 애모(愛慕)하며 찾는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파스칼(Pascal)의 좋은 말을 인용할만하다. 그는 말하기를, "합리적이라고 불리울 만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는 자요, 다른 한 종류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를 진심으로 찾는 자이다."라고 하였다(Thoughts 194). (1)왜 꼭 같은 사람으로서 한 사람은 평생토록 평안히 살고 다른 한 사람은 평생 고난을 당하는가? (2)또 그 두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육체들은 왜 아무 차별없이 꼭 같은 모양으로 썩는가? 이것이 욥의 의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느끼는 것 뿐이고 하나님을 원망함은 아니다.

성 경: [욥21:27]

(주);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도 아노라. - 여기 이른바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이란 문구(* )는 "내게 대하여 너희가 상상하는 방침"이라고 개역해야 된다(Dhorme). 곧, 그의 친구들은 "고난을 받는 자가 악인이라" 하는 변론에 의하여 고난의 사람인 욥을 죄인으로 몰아 붙이려는 방침을 가졌다는 것이다. 고난 중에 빠진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치는 것은 잔인한 행동이다. (1)기독자는 그 고난의 이유를 알아볼 필요도 없이 그런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야 된다. 요 9:1-7참조. 그 뿐 아니라 (2)고난 중에 빠진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일 수도 있으니 만큼(히 12:7-11), 기독자는 도리어 그런 사람을 귀히 여기며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성 경: [욥21:28]

(주); 너희의 말이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뇨 하는구나. - 여기 이른바 "왕후"란 말(* )은 통치자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폭군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욥은 여기서 그 친구들의 말을 인용하였으니 곧, 악한 폭군이구나 또는 기타 악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멸망하기 때문에 그 종적도 찾을 수 없이 된다는 것이다.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뇨"란 말씀이 그 뜻이다. 물론 악인이 이 세상에서도 그 죄값으로 멸절되는 일이 있으나 모든 악인이 일률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이런 의미로 욥은 다음 귀절부터 그 친구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경우(30-34)를 진술한다.

성 경: [욥21:29]

(주); 너희가 길 가는 사람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 곧, 세상에서 악인들이 모두 일률적으로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개중에는 그 사는 날 동안에 평안히 지나다가 평안히 죽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길가는 사람들" 곧 여행자들도 명백히 증거할 수 있다고 욥은 말한다. 여행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되는 일들을 잘 아는 만큼 이 사실에 대하여 환하에 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지식은 세계적 지식이다. 욥의 이 말은 그 사실에 대한 자기의 확신을 표현한다. 곧, 누구든지 욥 자신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편견 없이 친히 목격하고 말할 행인들의 증거를 보라는 것이다(G. fohrer, Will man Hiob selbst nicht glauben, so mag man diese Fremden als unparteiliche Augenzeugen berragen.-K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as Buch Hiob, 1963, s.347).

성 경: [욥21:30]

(주); 악인은 남기워서 멸망의 날을 기다리움이 되고 진노의 날을 맞으러 끌려 나감이 된다 하느니라. - 곧, 회개치 않는 악인이 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고 또 평안히 죽는 것은 그가 사후에 그 심판을 받도록 되기 때문이라고 행인들이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욥이 그대로 받아들인 내세(來世) 신앙이다(A.Barnes). 사람이 이 세상에서 선악간에 보응을 받지 못하면 그의 죽은 후에 내세에 가서라도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눅 6:22-26, 14:12-14, 16:25 참조.

성 경: [욥21:31-33]

(주); 누가 능히 그의 행위를 면박하며 누가 그의 소위를 보응하랴마는 그를 무덤으로 메어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고 그 앞선자가 무수함 같이 모든 사람이 뒤를 좇으리라. - 여기서는 세력있는 악인의 생전에 되어진 일과 또 죽은 후에 그의 육신이 당할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그 겉 모양만 보아서는 매우 행복하다는 것이다. (1)생전에는 그의 세력 때문에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충고도 못하고 책망은 물론 못한다. 그는 자행자지한다. (2)그가 죽은 후에는 사람들이 그의 육체를 안장하고 그 무덤을 지키는 수위들을 세운다. (3)그렇게 호화롭게 매장된 당면은 마치 그가 무덤 속에서 흙덩이를 달게 여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장례식에는 그의 앞 뒤에 사람들이 무수히 호위하고 행진한다는 것이다(33절 하반). 어떤 학자는 "그 앞선 자가 무수함 같이 모든 사람이 그 뒤를 좇으리라"고 한 말씀(33절 하반)을 달리 해석한다. 곧, 무수한 사람들이 이 죽은 악인보다 먼저 죽었고 또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라 많이 죽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어나 앞의 해석이 여기 문맥에 부합한다. 그러면 이 부분 말씀(31-33)은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 끝까지 영광을 받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받을 심판은 내세에 남아 있다(30절).

성 경: [욥21:34]

(주); 이러한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 뿐이니라. - 곧 욥은 그 친구들의 변론(악인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는다는 변론)이 성립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그것으로 자기가 설득될 수 없고 따라서 자기에게 문제 해결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성 경: [욥22:1-3]

(주);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 이 부분에서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말한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2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자충족성(自充足性)에 대하여 잘 표현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혜택을 받으실 일이 전연 없으시다. 그 이유는 그가 절대로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와 반면에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 시 116:12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롬 11:35에 말하기를,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하였다. 사 40:12-17참조.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선을 행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유익을 베푼다" 하지 말고, "내가 이렇게 함으로 결국은 내게 유익이 있게 된다"라고 고백해야 된다. "네가 의도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3절). 이 말씀은 인간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의 기쁨을 증가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완전하시므로 인간에게 보조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가 물론 인간의 참된 의(義)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있으시다. 그러나 참된 의는 사실상 그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 그의 기쁨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기뻐하시는 기쁨이다.

성 경: [욥22:4,5]

(주);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 엘리바스는 아무 증거도 없이 욥을 큰 죄인으로 몰아 넣는다. 이것은 그의 추측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욥이 저런 극한 환난에 빠진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극한 범죄 때문이지 결코 그의 경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인과론(因果論)의 결론에서 가정(假定)된 것이다. 포렐(G. Fohrer)도 이와 같이 풀이한다(Sie sind eden Postulat der Doktrin, welche verlangt, dass Hiob so und so gehandelt haben muss. Dem entspricht, dass in den Beschuldigungen ein typisches Bild des Sunders begegnet.-Kommentar zum Alten Testament, Das Buch Hiob,1963, s.556). 엘리바스의 이같은 논법은 고난 문제에 있어서 너무도 상선벌악 보응론의 일변도의 논법이다. 그가 고난 문제를 이렇게만 취급함은 너무 편협하다. 하나님의 고난 섭리는 이밖에 오묘막측한 방면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늘 쉽게 깨닫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받는 자를 만났을 때에 판단보다는 먼저 동정과 구조를 앞세워야 한다(요 9:1-7).

성 경: [욥22:6]

(주); 까닭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 이 귀절은 가난한 동포에게 돈을 빌려준 일도 없이 잔인하게 물건이나 의복을 전당잡는 악한 행위를 말함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법(출 22:26)을 범함이다. 하나님은 이런 무자비한 행동에 대하여 벌을 내리신다(출 22:22-24; 신 27:19).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무자비하게 행함을 큰 죄로 보신다. 잠 14:31에 말하기를,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하였고, 잠 22:22-23에는 말하기를,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라"고 하였다. 엘리바스의 말은 진리이지만 그것이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욥 21:16-20). 하나님의 진리를 잘못 적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이며(렘 23:30), 그는 병자에게 약을 잘못 처방해주는 거짓 의사와 같다(렘 23:30). 교역자가 하나님의 교회의 회중에서 설교할 때에 성경 말씀을 사용하기는 하면서 그 회중에 적합한 말씀을 바로 찾아서 전하지 못하면 효과를 내지 못하거나 혹은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교역자는 (1)하나님의 양 떼의 요구를 깊이 또는 바로 알아야 되며, (2)성경을 깊이 또는 바로 알아야 참 목자로서의 사역을 할 수 있다.

성 경: [욥22:7]

(주);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 이렇게 행하는 자는 (1)무자비한 자임. 사람이 기갈을 당한 자를 눈 앞에 놓고 어떻게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있으랴? 만일 못본 체 한다면 그런 사람은 그 기갈에 처한 자를 죽이는 자와 다름이 없다. 따라서 그 자신도 사망에 거하는 자이다(요일 3:14,17). (2)불의한 청지기임. 사람이 가진 풍부한 재물은 사실상 하나님에게서 받았으며(고전 4:7), 따라서 그는 그것을 하나님 뜻대로 남들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할 하나님의 청지기이다(눅 12:42-44, 16: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의 맡은 물질로써 자기만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눅 12:45-48). (3)극단적인 개인주의자임. 그는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도 주지 않으니 남에게 유익한 것은 사소한 것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 옛날에 중국의 철학자 양주(楊朱)는 "머리털 한 개를 뽑아서 온 천하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해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교훈(마 22:39)과 정반대되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개인주의는 죄악이다. 엘리바스의 말은 진리이지만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성 경: [욥22:8,9]

(주);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 이것도 욥을 오해하여 정죄하는 말이다.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곧, 욥이 권세 있는 자를 도와주어 그로 하여금 토지를 탈취하게 하여 거기서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욥이 불공평하게 재판하여 강자의 편에 들어서 약자를 억울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시 욥에게 공연한 누명을 씌우는 거짓말이다. 욥은 사실상 그런 불의한 사람이 아니다. 욥 31:21-23에 말하기를,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송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 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권세 있는 자" 또는 "존귀한 자"는 욥 자신을 가리킨다고 한다. 엘리바스의 말 자체는 진리이다. 그것은 약한 빈민을 착취하는 집권자의 죄를 책망하는 말이다. 이런 책망은 흔히 옛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입에서 나왔다. 횔쉘(G. holscher)도 이 해석과 유사한 말을 하였다(Die Kennzeichnung des Sunders ist typisch: es sind die Sunden, die das Gesetz von fruh auf verboten und die Propheten jederzeit gerugt haben, die Sunden, der herrschenden klasse, welche die Armen und Notleiden gewalttatig bedruckt.-Das Buch Hiob, 1952, s.57).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권세를 주시는 목적은 약자들을 돕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것을 받아가지고 도리어 그들을 압제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와 정반대 되는 마귀의 사자이다. 왕상 21:1-16; 잠 22:22-23참조. "과부...고아." 과부나 고아를 압제함은 큰 죄악이다(출 22:22; 신 27:19; 렘 7:6;22:3; 슥 7:10).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신 10:18, 14:29, 16:11, 14, 24:19, 26:11-12; 사 1:17). 약 1:27참조.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으나(마 5:7), 남에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약 2:13).

성 경: [욥22:10,11]

(주);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 - 여기 진술된 벌은 모두 돌연한 것이고 무자비한 것이다. 이것이 욥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5-9절에 진술된 범죄자는 마땅히 이런 벌을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의 무자비한 죄악은 무자비한 벌을 받음이 하나님의 공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벌의 성격은 종종 그것을 받는 자의 죄상에 비례되는 일이 있다(시 18:24-26). 이 징벌이 그 범죄자에게 임하는 방식이 돌연한 듯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벌을 예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성 경: [욥22:12-15]

(주);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 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 -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다" 함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모든 것들을 다 아신다는 의미와 같다. 높은 곳에 계시는 이가 땅에 있는 것들을 완전히 다스리신다는 의미는 성경 다른 데도 있다. 사 11:4; 전 5:2; 엡 4:10 참조. 여기서도 엘리바스는 욥을 오해하고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로 흠을 잡는다. 곧, 욥이 하나님을 가리켜 인간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시는 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극히 악한 죄인들의 사상이다(21:15). 사 29:15; 렘 23:24; 겔 8:12 참조.

성 경: [욥22:17,18]

(주);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할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 여기서는 엘리바스가 욥의 말(21:14-16)을 풍자하는 뜻으로 말한 것 뿐이다. 그 이유는 이 말씀에 포함된 사상을 욥의 말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21:14-16의 해석 참조.

성 경: [욥22:19,20]

(주); 의인을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대적이 끊어졌고 그 남은 것이 불사른 바 되었다 하느니라. - 극도로 악한 자들이 끊어질 때에 의인들은 기뻐한다. 잠 11:10에 말하기를,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고 하였다.

성 경: [욥22:21-24]

(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원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라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며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에 길에 빛이 비추리라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 여기서는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부탁한다. 이 부분(21-30) 말씀에 대한 해석은 이 아래 설교로 대신한다. 사람은 다 평안을 원한다. 그러나 평안도 거짓된 것이 있고 참된 것이 있다. 이 세상 평안은 모두 다 거짓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만이 참된 것이다. 사람이 진정한 평안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다음과 같이 살아야 된다. 1. 하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둘것(22절). "마음에 둔다" 함은, 피와 생명이 움직이는 심장, 곧 애정 속에 둔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에 애정을 붙이지 않는가? 그 원인은 나의 좋아하는 대로 하려하고 하나님의 교훈대로 할 마음이 없는 까닭이다. 왜 사람들이 자가의 좋아하는 대로 행하는 습성으로 기울어지는가? 우리가 이 문제를 깊이 알아야 된다. 순종치 않는 자식의 경우를 들어 생각해 보자. 그는 부친의 말을 순종치 않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부친의 말을 듣는 것조차도 싫어한다. 그는 왜 순종치 않을까? 그것은 그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가사(家事)에 협력하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욕심의 충동을 따라서 나쁜 동무들과 노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은 언제나 그 부모의 생각과 엇갈린다. 그는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부모보다 나쁜 동무들을 더 좋아한다. 그와 같이 신자가 그 생활 목표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기의 소원대로 할 마음이 간절한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 그는 이름으로만 신자이고 심령으로는 자기를 중심하는 자이다. 사람이 자기 중심주의로 살 때에는 그의 행한다는 소위 선(善)도 참된 선이 아니다. 그의 모든 행위는 선악간에 모두 다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 2. 전능자에게로 돌아갈 것(23절). 하나님께로 돌아감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말 뿐이 아니고 진실되이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실행되는가?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에게로 돌아갈까? 그것은 우리가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하므로 실행된다. "장막에서 불의"는 가정의 죄악을 말함이다. 밖에 나가서는 점잖은 듯한 사람이 가정에 들어가서는 마귀 노릇을 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가정에서는 허물이 가리워지는 줄 알고 조심 없이 행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속은 생각에서 연출한 행동이다. 사람은 그 가정에서 옳게 행해야 그 자신도 잘되고 발전한다. 가정은 사람의 생활의 근거점이다. 자녀된 자들도 그 가정에서 바로 행해야 그 앞길이 형통한다. 잠 30:17에 말하기를,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자들의 불행을 가리킨다. 사랑하는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자녀는 결국 집을 망케 하니 집 없는 사람처럼 된다. 그런 사람은 어느 사회에서도 생활 근거를 얻지 못하고 방랑 생활을 하다가 패망하게 된다. 욥 22:23의 "불의를 멀리 버리라"는 말씀은 귀하다. 사람이 죄를 가까이 하면 범죄하게 된다. 그 이유는 죄는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 1:1에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3.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을 버릴 것(24절). 위의 본문에 말하기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고 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보배롭게 여기는 고질된 사상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되면 안된다. 우리는 그런 사상을 버려야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들이라도 진토나 돌 같이 버리고 그것들에게 애착을 두지 말아야 된다. 우리가 보배롭게 여기던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도 그것을 아까와 하는 심리로 바치면 안된며, 그것을 바친후에 진토처럼 잊어버려야 된다. 물론 이렇게 실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하게 된다. 곧, 우리가 보배로운 것들을 진토와 같이 던질 이유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보배로운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바칠 때에 그것들보다 더 좋은 하나님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25절에는 말하기를, "그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라고 한다(25절).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기 위한 일이라면 우리가 무엇인들 희생하지 못할 것이 있으랴? 마 6:19-24; 합 3:17-18 참조. 그러면 이와 같이 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면 어떤 축복을 받는가? (1) 그가 하나님을 기뻐하게 됨(26절). (2) 그의 기도가 열리고 또 기도 응답을 받음(27절 상반). (3)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결실한 것을 실행하게 됨(27절 하반). (4) 그의 경영하는 일이 형통함(28절). (5) 그가 남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를 높여주심(29 절). (6) 그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구원을 받음(30절)등이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면 축복을 받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과 돈의 경중(輕重)을 다루는 처지에 서게 되는 수가 있다. 어떤 때에 우리는 직장 문제와 주일 지키는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직장을 지키려면 주일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경중을 바로 알아야 한다. 직장보다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은가? 우리는 직장을 지키지 못할 지라도 주일을 지키기로 용단을 내려야 된다. 그리고 우리는 생활 문제와 십일조 문제를 다루어 볼 때도 있다.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설혹 생활에 타격이 올지라도 하나님에게 바치는 문제에 있어서는 타격을 받지 않아야 된다. 심일조의 의의를 바로 알 때에 그것을 참되이 바치게 될 줄로 안다. 1. 십일조는 처음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사건에서부터 인류에게 알려졌다. (1) 아브라함의 자손된 기독 신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니 만큼 역시 십일조를 멜기세덱 곧그리스도에게 바쳐야 된다(롬 4:12). 신약 시대의 교역자들은 구약 시대의 레위 자손에게 해당되는 것인 만큼 그들도 십일조를 바쳐야 된다(민 18:26). (2) 멜기세덱은 율법에 의한 아론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고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으셨으니 만큼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모든 기독자들에게서 십일조를 받으실 처지에 계신다(히 7:9). 십일조 제도는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모세의 율법 제도만이 아니고 세계적인 제사장 멜기세덱의 법에 의한것이다. 예수도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23:23). (3) 십일조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방법 중하나이다. 히 7:6-7에 말하기를,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말 3:10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시겠다고 한다. 거기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고 하였다. 세계적으로 큰 부자가 된 죤 록펠러(John d. Rockefller)는 첫 봉급을 150불 받았는데 그가 그 돈을 자기 모친에게 가져왔을 때에 그 모친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는 후에 백만불 수입되었을 때에도 십일조를 바쳤다고 한다. 2. 우리는 우리 생명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돈을 바치지 않을 것인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헌금을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하였다(고후 8:5). 그는 또 말하기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하였다고 한다(고후 8:2-3). 우리는 장차 죽음의 환난이 올 것을 내다보며 헌금해야 된다.

성 경: [욥23: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갈망]

엘리바스의 비난과 충고에 대하여 욥은 직접적인 변호 대신에 자신의 고통받는 현실을 불평하며(2절), 심판자 앞에서 자신의 변론이 정당하게 인정받게 되기를 소망한다(3-7)절. 그러나 동시에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탄식하면서(8,9절) 자신의 무죄함을 강조하고 (10-12)절 자기도 모르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행하시기 때문에(13,14절) 그를 두려워한다고 토로한다(15-17절).

성 경: [욥23: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갈망]

(주); 오늘도 - (*, 감 하이욥). 일반적으로 '지금도' 또는 '항상'을 뜻하는 표현이다. 혹자는 이 표현이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하나, 그보다는 '심지어 지금까지도'(even now)의 뜻으로 보는 것이 더자연스럽다(Delitzsch).

(주); 혹독히 원망하니 - '혹독히'(*, 메리)는 원래 '고집하는', '반역하든', '맛이 쓴', '독한'등의 뜻이다. 혹자는 히브리어 '메리'를 '반역하는'(rebellious)의 뜻으로 보고 , 여기서 욥이 하나님께 반항하며 원망을 토로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Delitzsch). 그러나 이어지는 문맥을 보건대, 이 히브리어를 단지 '독한', '쓴''(bitter)이란 뜻으로 보고 욥이 친구들에게 반박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Anderson).

(주);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 '받는 재앙'의 히브리어 '야디'(*)는'나의 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70인역(LXX), 수리아역, NIV, RSV 등에서는 '그의 손'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야디(*)의 접미어를 '요드'(*,my)로 읽지 않고 '와우'(*, his)로 읽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을 '위에'가 아닌 비교급 전치사(...보다도)로 보거나 혹은 양보의 접속사로 보아 '...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고려할때 본문의 의미는 '나의 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RSV), 혹은 '나의 형벌은 나의 결함보다 훨씬 무겁다'(LB) 등의 두가지 뜻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뜻으로 압축될 수 잇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뜻 중에서도, 본장에서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후자의 뜻이 더 타당하다 하겠다.

성 경: [욥23: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갈망]

(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 욥은 자신의 극심한 고난에 대해 잠시 언급한 후, 본절에서부터는 곧장 자신의 주된 관심사로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 그 주된 관심사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받아 보려는것이다.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확신하였고 더욱이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을(시 89:14) 믿었기에 기필코 하나님께 호소하고자 한 것이다(J.E. Hartley).

(주); 그 보좌 앞에 - '보좌'(*, 테쿠나토)는 '이미 준비되거나, 배열된 거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특히 하나님의 법정이나 심판대를 가리킨다(E.B. Smick).

성 경: [욥23:4,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갈망]

욥은 하나님 앞에서 궁금했던 모든 의문들을 마음껏 털어놓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어떤 판결이 나든지간에 거기에 순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변하지 않으며 욥 자신의 결백함 또한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훗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욥에게 말씀하실 때, 욥은 두려움 가운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40:2-5). 따라서 본문은 어떤 의미에서 40장 사건을 염두에 둔 극적 암시라 하겠다.

성 경: [욥23: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용서를 확신하는 욥]

(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물에 다투실까 - 다분히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이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 권세와 능력을 남용하여 멋대로 판결을 내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와 진리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혹자는 '큰 권능'을 '대리인'으로 해석하여, 본문을 '하나님은 (너희와 같은) 대리인을 통해 논쟁케 하시지 않고 이제 직접 말씀하실 것이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Tur-Sinai).

성 경: [욥23: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용서를 확신하는 욥]

(주); 거기서는 - (*, 솽). 이를 공간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또는 '보좌 앞'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35:12;시14:5;66:6;습 1:14) '그때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dewilde, Gordis). 즉 '하나님과 변론하는 그 때에'라는 뜻이다.

(주);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 즉 - 욥은 하나님께서 '정직자'(*,야솨르)의 변론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신한다. 물론 여기서 '정직자'란 곧 욥 자신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란 거룩한 존재 앞에 직면했을 때 욥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40:5). 욥은 극도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 고난의 원인을 밝혀보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변론의 상대자가 아니라 오직 순종의 대상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주);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 '벗어나리라'(*, 팔라트)는 '해방될 것이다', '피하게 될 것이다'하는 뜻으로 심판자의 형벌(또는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리라는 의미이다. 즉,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죄함과 순전함이 입증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성 경: [욥23:8,9]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을 못만난 욥의 탄식]

여기서 욥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해 잠잠하시는 소위 '숨어계신 하나님'(thehidden God)을 의식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그 어디로 도망가도 좇아오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니님을 증거한 바 있다(시 139:7-10). 반면에 욥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헤어려 주사 믿음의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였으나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엄연히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욥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계셨다. 다만 문제 해결의 과정이나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주); 앞...뒤 - 원어 '케뎀'(*)은 동쭁을, '아호르'(*)는 서쪽을 가리킨다. 히브리인과 아랍인들은 동쪽을 바라보고 전후 좌우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Habel, Hartley). 따라서 동쪽은 '앞', 서쪽은 '뒤', 남쪽은 '오른편', 그리고 북쪽은 '왼편'을 각각 가리킨다.

성 경: [욥23:10]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신앙 고백]

(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 '나의 가는 길'을 직역하면 '나와 함께 있는 길'이다. 바로 앞에서 욥은 그 어디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탄식한 바 있다.(8,9절). 그러나 욥 자신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고난 뒤에 정금같이 단련된 영광이 오리라고 소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J.E.Hartley).

(주);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즉,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 때에 용광로에서 연단받은 금처럼 내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자기 무죄성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고, 고난 뒤에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욥의 확신과 기대는 절정에 다다른다. 욥이자신의 시련을 금 제련에 비유한 것은 그의 염원이 재물의 회복이 아니라 바로 인격과 영예의 회복이었음을 암시한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더러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금과 은처럼 여기라고 충고하였으나(22:24, 25), 욥은 자신이야말로 신앙인격과 신앙안에서의 명예를 그 무엇보다 종요시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23:11]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신앙 고백]

본절과 12절에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정에서 승소할 수 있다고 믿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었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교훈과 법도를 무시하는 자라고 공박한 적이 있다(15:4;22:22). 그러나 욥은 일거수일투족을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음을 담대히 고백한다. 이는 시편 119편 기자의 고백을 상기시킨다(시 119:105, 131, 147).

(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 이것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렘9:20), 곧 그의 명령과 교훈에 순종하였다는 뜻이다(J.E. Hartley).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시 1:6).

성 경: [욥23:12]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신앙 고백]

(주);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 '일정한 음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후키'(*)는 보통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일정한 음식'(LB,NIV) 또는 '필요한 양식'(KJV, 창 47:22;잠 30:8). (2)'나의 가슴속에'(70인역, 벌게이트역,RSV). 이 경우는 '메후키'(*)를 '베헤키'(*)로 읽기 때문이다. (3)맛소라 사본(MT)에는 '나의 규칙, 법칙'으로 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을 단정적으로 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전달하고자 하는 기본 의미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1)의 견해는 말씀을 사모하는 열성이 특출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2)는 말 그대로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명심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3)의 견해는 특별히 욥이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나의 규칙, 법칙'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있는 본성의 법, 곧 '지체의 법'(룸 7:23)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욥은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거부하고 주의말씀에 순종했다는 뜻이다.

성 경: [욥23:13]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신앙 고백]

(주);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 본문의 원어적 의미는 보통 다음 세 가지로 해석된다. (1)'그는 한 분이시며, 홀로 계신다'(Gordon, J.E. Hartley) : 즉, 하나님의 절대적 위엄과 유일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서 표현되고 있지만(신 6:4), 본 문맥에서는 연관성이 다소 희박하다. (2)'그는 통치자이시다' : 다후드(Dahood)는 우가릿 문서(UT, 51, Ⅶ, 49-50)에 나오는 '나만이 신들을 통치할 것이다'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본문의 '에하드'(*)를 '통치자만이'로 해석한다. (3)'그가 선택하신다'(Pope):이것은' 베에하드'(*)를 '베에하르'(*, '선택하다')로 취하여 시 132:13의 상반절(...택하시고)과 하반절(...삼고자 하여), 그리고 본절이 서로 대구를 이르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적 제(諸)해석들로서는 본문의 의미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여기서 욥이 하나님의 불변하신 뜻, 변개되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을 고백하고 있다고 본다(KJV, he is in one mind ;RSV, he is unchangeable). 즉, 이유야 어쨌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과 그 목적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욥은 어느 누구도 그 뜻을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23:14]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의 신앙 고백]

(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 여기서 '이런 일'이란, 욥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이유 없는 고통을 내리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욥 자신에게 내려지는 재앙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욥 자신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그의 절대적인 섭리하에 행하여진다.

성 경: [욥23:15]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이 설명하는 자신의 모습]

욥은 자신의 변론을 전형적인 비탄조의 탄식으로 끝맺고 있다(15-17절). 그러나 이러한 탄식이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소망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31:35-37). 또한 이러한 탄식이 10-14절에 나타난 고귀한 신앙의 상실을 의미한다고도 보기 힘들다. 다만 욥은 견디기 힘든 현실로 인해 저절로 고통스런 절규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Anderson, Habel).

성 경: [욥23:16]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이 설명하는 자신의 모습]

(주);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 직역하면 '나의 마음을 연약하게 (또는 앓게) 만드셨다', 즉 용기를 빼앗아 가시고 두려움에 떨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다. 동사'헬라크'(*)는 '부드럽게 (또는 약하게) 만들다'라는 뜻이 있다(신 20:3). 욥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의 압박뿐만 아니라 미래에 당할지도 모르는 모든 위협을 생각하고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다. (15절 주석 참조).

성 경: [욥23:17]

주제1: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욥이 설명하는 자신의 모습]

본문은 매우 난해한 구절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왜냐하면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의 히브리어 '로 니츠마티'(*)에 대한 해석의 어려움 때문이다. 맛소라 사본에는 한글개역 성경과 같이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했다'로 되어 있고,KJV는 '(어두움 앞에서) 멸절되지 아니했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NIV는 '니츠마트'(*)의 어근을 따라 '(어두움 앞에서) 침묵하지 아니했다'로 해석하며, RSV는 부정어 '로'(*)를 생략하여 이해한다. 혹자는 감탄문으로 번역하여 '내가 멸망당하지 아니하였도다!'로 보기도 한다. 한편, 칠십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내가 어두움이 오기 전에 끊어짐을 당하지 않았고'라고 해석한다. 즉, 멸망당하지 않음으로써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메튜 헨리(Matthew Henry)도 욥이 환난이 이르기 전에 죽지 못하고서 여러 가지 고통에 직면해야 하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중 어떤 견해를 따르더라도, 욥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타나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성 경: [욥24:1]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하나님의 때에 관한 욥의 관심]

(주);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 여기서 '시기'(*, 이팀)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이다(15:32;18:20). 그날은 악인을 위해 준비해 둔 형벌이 쏟아진다(21:19). 본문에서 욥은 악인에게 곧장 심판이 임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욥에게 두 가지 의문을 갖게 했을 것이다. 첫째는 악인들이 더욱 기세 등등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신실하게 생활허던 자들이 낙심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 편파적이고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욥이 현재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는 그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 혹은 보응의 원칙은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적용된다는 것이다(E. B.Smick).

성 경: [욥24:2]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어떤 사람은 지계표(地界標)를 옮기며 - 이제 욥은 악인이 오히려 번영하고 있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지계표'는 '경계를 짓다', '한계를 정하다'의 히브리어 '가발'(*)에서 온 명사로 땅의 경계를 구분하는 도구이다. 고대 동방에서는 이웃하는 땅의 경계를 담이나 울타리를 쌓지 않고, 돌이나 바위 등을 경계선 자리에 놓아 표시하였다. 이러한 지계표를 옮김으로써 이웃의 토지를 부당하게 빼앗아 소유하려는 죄악은 모세의 율법에서도 저주받는 이로 금지된 사항이다(신19:14;27:17). 또한 이것은 지혜서(잠 22:28;23:10)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호 5:10)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일로 죄악시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작 행위는 개인의 소유를 약탈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칠십인역(LXX)은 '어떤 사람'에 해당되는 주어를 본문의 주제에 맞도록 '사악한 자'라고 표기하였다.

(주);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 '빼앗다'의 히브리어 '가잘'(*)은 '벗기다', '잡아뜯다', '강탈하다'의 뜻이며, '기르며'는 '방목하다', '풀을 먹이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은 양떼를 강제로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뻔뻔스럽게도 탈취한 양떼를 공개적으로 방목하기까지 했다는 의미이다.

성 경: [욥23:3]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 '몰아가다'의 히브리어 '나하그'(*)는 '몰다','끌어내다'란 뜻이다. 부모를 잃은 고아에게는 나귀가 그의 유일한 재산이자 유일한 노동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귀를 약탈하는 행위는 고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주); 과부의 소를 볼모잡으며 - 원문에는 '소' 앞에 '멍에 메인'(*, 알람)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여기서 '소'(*,쇼르)는 농경에 필요한 황소를 가리킨다. 그리고 '볼모잡다'의 '하발'(*)은 '담보물로 속박하다'는 뜻으로 과부의 생활 밑천인 황소를 저당물로 빼앗음을 의미한다. 즉, 아주 적은 부채를 이유로 과부의 전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그 재산이 의지할 곳 없는 과부의 소유였다는 점에서 죄악의 무게를 더해 준다. 사회적 약자 내지는 소외층인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율법은 그들의 송사(訟事)를 억울하게 하지말고(신 27:19;사 1:23), 또한 그들의 재산을 전집(典執)하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24:17). 한편, 함무라비 법전(Hammurabi Code)에 따르면 이러한 약한 자들을 탈취하는 행위에는 벌금이 부과되었는데, 특히 과부와 고아의 물건을 빼앗는 경우엔 두 배의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다.

성 경: [욥24:4]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길에서 몰아내나니 - 빈궁한 자들을 자기들이 다니던 길로부터 밀어내어 방황하도록 만들거나(Delitzsch), 약탈 행위로 인하여 그 길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J. E. Hartley). 가난한 자들은 압제자들에 의해 길에서마저 쫓겨 다녀야했다. 혹자는 본문을, 가난한 자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나(Anderson) 그 근거가 희박하다.

(주); 다 스스로 숨는구나 - 그들은 압제를 피하여 '땅'(*, 에레츠)에서 숨을 곳을 찾았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배자의 억압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깨닫게 한다. 그들은 그 억압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삿 5:5;암5:11-13).

성 경: [욥24:5]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그들 - 에 대해서 혹자는 2-4절의 '사악한 자들' 곧 '약탈자'로 생각하지만(Matthew Henry, G. Rawlinson), 이보다는 오히려 압제자들로부터 억압받는 가난한 자 (4절)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Delitzsch, Driver, Gray,Lange, Tyndale, Pope, Hartley). 본절에서 욥은 피압제자들의 상황을, 험난하고 메마른 스텝 지역에서 소량의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니는 들나귀의 모습에다 비겨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39:5; 호 8:9).

(주); 광야가...식물을 내는구나 - 여기서 '광야'(*, 아라바)는 '건조한 땅', 또는 '사막'을 가리킨다. 혹자는 '아라바'를 '에레브'(*)로 보고 '밤'이라고 옮긴다(Dohrme), 이럴 경우 본문은 '그들이 밤늦도록 수고해도 아이들을 먹일 음식을 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해석하지 않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하다. 즉, 가난한 자들은 배고파서 칭얼대는 자식들의 음식을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설 곳이라고는 광야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LB, They are sent into the desert tosearch for food for their children).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사회의 공동체에서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生存)에 필요한 음식조차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에 허덕이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분명 욥의 눈에는 이런 비참한 상황이 사악한 자들의 압제로 인한 결과로 보였을 것이며,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욥은 그러한 불의(不義)를 가만히 두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24:12,22,23).

성 경: [욥24:6]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밭에서 나의 곡식을 베며 - '남의 곡식'의 히브리어 '벧릴로'(*)는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1) 고르디스(Gordis)같은 학자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유사하게 '자기 것이 아닌' 곧 '남의 곡식'으로 옮긴다. 이 경우에는 가난한 자들이 허기를 견디지 못해 도둑질을 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름을 암시한다. (2) 이 말을 '섞다', '혼합하다'란 뜻의 '발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혼합된 가축 사로'(mixed fodder)라는 의미로 이해한다(Lange). 이 해석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가축 사료로나마 배를 채워야 했다는 뜻이다. (3) 본절 하반절의 '악인'과 대구를 이루게 하기 위해, '벧릴로'를 '악한' 이란 뜻의 '벧리알'로 읽는다(Pope). (4) 이 말을 '밤에'(in the night)란 뜻의 '발라엘라'로 읽는다(Dhorme). 이중 (1)과 (2) 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주);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 직역하면 '그들이 사악한 자의 포도원에서 남겨진 것을 따다'이다. 이는가난한 자들이 심지어 악인의 밭에 남겨진 것을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한 꼴이 되었다는 뜻인 듯하다(LB, glean in the vineyards of the wicked). 가난한 자들을 위해 수확을 얼마 남겨두는 규정은 율법에도 있다(레 19:10; 신 24:21). 그러나 악인이 가난한 자를 위해 열매를 남겨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렇게 곡식을 모아봤자 가족의 굶주림을 해결할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악인'이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괴롭힌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괴로움이 더욱 가중되었을 법하다.

성 경: [욥24:7]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6절에 이어 본절과 8절에서는, 인간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衣食住)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주); 의복이 없어...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 가난한 자들은 먹을 음식뿐만 아니라 의복이 없어서 추위에 몸을 떨면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입을 옷이 없는 것은 워낙 가난해서이기도 했지만, 악인들에게 볼모잡힌 것을 돌려받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다(9절).

성 경: [욥24:8]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 그들은 마땅한 은신처가 없어서 산으로 피하지만 거기에서도 소나기에 흠뻑 젖어 어찌할 바 모른다. 여기서 '소나기'(*, 미제렘)는 '쏟다', '흐르다'의 '자람'(*)에서 유래한 것으로 맹렬하고 거센 폭풍우를 가리킨다.

(주);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 '안고'의 히브리어 '하바크'(*)는 '포옹하다', '손으로 꼭 껴안다'라는 뜻으로 편안히 쉴 곳이 없어서바위라도 의지하여 추위와 소나기를 피하려는 열악한 생활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혹자는 '하바크'를 '바위 틈 속으로 몸을 밀어 넣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찬 바람과 산중 소나기로부터 보호해 줄 구석을 찾는 것이라고 본다(Wetzstein). 이처럼 바위밑에 몸을 숨기는 것은 아마 그들이 바위 밑에 천막을 치고 살거나 아니면 바위밑 동굴에 거주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성 경: [욥24:9]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 여기서 '어미 품'에 해당되는 '쇼드'(*)는 원문에서 단지 '가슴' 곧 '젖'을 가리킨다(사 60:16 ; 66:11). 즉, 어미의 젖가슴이다(70인역, KJV, NIV, RSV). 그리고 '빼앗다'의 '가잘'(*)은 '벗기다', '잡아채다', '강탈하다'란 뜻이며 '고아'에 해당하는 '야톰'(*)은 '홀로 있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특히 '아버지 없는 아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아직도 어려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강제로 빼앗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무자비한 채권자들이 아비 없는 아이를 그 어미가 빚을 갚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담보물로 빼앗아 간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치있는 재산으로 인식되었는데, 채권자들은 아직 젖도 떼지 아니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고(느 5:5) 돈을 버는 경우가 많았다(왕하 4:1). 이것은 괴로운 처지에 있는 자들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포악한 행위로서 그들에게 고통을 더 가중시켰다. 한편, 본절은 사악한 자들의 행동을 다시금 언급하는 것으로 문맥상 3절과 4절 사이에 오면 더 자연스러울 듯 싶다(Hartley, Pope).

(주);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잡으므로 - '옷'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맛소라 원본상으로는 '알'(*), 곧'...위에'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역본 성경은본절 상반절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가난한 자의 옷'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아이'로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등). 즉, 가난한 자가 돈이나 곡물로 부채를 갚기도 전에 채주들은 그들의 유아들을 담보물로서 압류한다는 의미가 적당하다(LB). 여기서 '볼모잡다'의 '하발'(*)은 담보물로 속박하기 위하여 '압류 또는 탈취하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파괴하다', '멸망시키다'란 뜻도 있으므로(34;31) 본문을 사악한 자들이 자기들 의 이익만을 위하여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의 삶을 파괴시킨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난할 것 같다.

성 경: [욥24:10]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 이미 7절에서 비천한 자의 헐벗는 모습을 묘사한 바 있는데, 7절이 추위를 막을 따뜻한 옷의 결핍을 말한다면, 여기서는 노동자들이 안전 사고에 대비한 작업복마저 입지 못하는 형편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J. E. Hartley). 이것은 압제자의 비정한 착취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압제자들은 그들의 일을 억압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시켰지만 그에 필요한 어떠한 대가나 보호해줄 의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주);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 굶주림을 당하면서도 곡식단을 날라야만 하는 고통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압제자들은 짐승들에게도 금지해서는 안 될 일을 가난한 자들에게 행하고 있다(신 25:4). 그것은 노동의 삯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여 정죄하고 있다(신 24:14, 15; 딤전 5:18).

성 경: [욥24:11]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담 안에서...술 틀을 밟느니라 - 여기서 '담'(*, 슈로탐)은 원어의 뜻이 불명확하여 해석상의 논란이 많지만. 대체적으로 '담'또는 '축대'(시 18:29;렘 5:10)의 의미에 동의한다(KJV, NIV). RSV는 이를 '나무의 줄(row) 사이'로 번역하며, 혹자는 '담'과 관련된 '맷돌'(millstone)로, 또는 '노래'나 '암소'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타당하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본문은 압제자들의 담 안에서(KJV, within their walls) 올리브 기름을 짜며, 포도주 틀을 밟는 장면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낫다. 즉, 압제자들의 매우 철저하고 혹독한 감독이 시행되고 있는 그들의 정원 안에서 비천한 자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포도주의 틀을 밟고 잇지만 가장 가깝게 있는 포도즙으로 갈증을 해소시킬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욥은 이러한 성읍 내에서의 불의와 압제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성 경: [욥24:12]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을 벌하지 않음에 대한 항의]

(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 이제 욥은 도시 가운데서 행해지는 강포와 불의에 대해 언급한다. '사람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팀'(*)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1) 뒤에 나오는 '상한 자'와 대등구로 보고서 압제자의 횡포로 인해 거의 죽게 된 사람으로 해석하는 경우(70인역, NIV, LB, RSV, Lange, Dlitzsch 등). (2) 조금 약한 의미에서 '심한 곤경에 처한 자'로 해석하는 경우(수리아 역, KJV, Jerome, Symmacus 등). 이 둘 중에 전자의 해석이 본문의 문맥에 더 자연스럽다. 즉, 압제와 심지어는 살륙으로 인하여 상하며 죽어가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음하며'의 '나아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가 외치는 부르짖음을 뜻한다(Dlitzsch, 렘 51:52 ; 겔 30:24).

(주);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부상당한 자의 영혼이 부르짖다'이다 여기서 '상한 자'(*, 할라림)는 단순한 부상이 아닌 치명적인 상처로 거의 죽게된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억울하게 습격당하여 거의죽게 된 자들이 매우 처절하게 도움을 호소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볼 수 있다.

(주);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 '불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플라'(*)는 원래 '어리석은 짓'(1:22)을 뜻하는데(KJV), 여기서는 사악한 범죄 행위, 또는 도덕 질서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행위를 뜻한다(Dlitzsch) 즉 사악한 자들이 도덕 질서, 또는 신적 법칙을 조롱하고 비웃는데도 징벌을 당하지 않은채 이 땅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Lange). 한편, 두 개의 히브리어 사본과 수리아 역은 '티플라'(*)를 '테필라'로 읽어서 본문을 '그러나 하나님은그들의 기도를 들은 체도 않으신다'로 해석한다(RSV). 이런 해석도 본절의 주어가 억압당하여 상한 자이기 때문에 가능하기는 하다. 결국 욥은 이 땅에 폭력과 억압이 계속되고 정의가 짓밟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것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24:13]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한 자들의 여러 악행들]

이제 욥은 앞서 언급한 사악한 자들외에 또 다른 부류의 악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빛을 반역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십계명의 제 6, 7, 8,계명을 어기는 살인자들(14절), 간음자들(15절), 밤도둑들(16절)이다. 이런 부류의 악인들이 가지는 공통된 특성은 본절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광명을 미워하고 어두움으로 덮여진 은밀한 죄악을 남몰래 행하는 것이다(Anderson). 그런데 밤과 어두움이 그들의 악한 행위를 감춰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이 분명하다(34:22).

(주);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 '광명'의 '오르'(*)는 '빛'을 뜻하지만 그해석은 다양하다. (1)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자연의 빛, 율법의 빛, 양심의 빛이라고 보는 견해(Habel). (2)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빛이 있는 '낮'으로 보는 견해(Pope). (3)세상의 빛으로서 하나님을 언급한다고 보는 견해(Ezra). 여기서는 이 세가지 해석 모두가 가능하다. 한편 '배반하다'의 '마라드'(*)는 '반역','배도'를 뜻하며, 다른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빛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빛의 원수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ange, Delitzsch).

(주);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 '알다'의 '히키르'(*)는 '인식하다', '익히알다', '관심을 갖다'란 뜻이다. 즉, 악한 자들이 빛의 길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그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하거나 그 유익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 악인들은 자기들의 사악한 범죄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어두움 가운데서 계락과 음모를 꾸밀 뿐, 그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밝은 곳은 어디든지 가까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의 길에서 평안함을 느끼지 못하며(Dlitzsch), 삶과 진리의 근본이 빛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빛의 고상함과 의로움을 발견한다할지라도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한다. 한편 '머물다'를 '돌이키다'로 해석하는 경우(70인역, 수리아역, 벌게이트역)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거주하다', '살다'는 의미가 더 적당하다.

성 경: [욥24:14]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한 자들의 여러 악행들]

(주); 새벽에 일어나서 - '새벽'(*, 라오르)은 동이 트기 전의 캄캄한 어둠의 때를 가리킨다. 즉 악인은 인적이 드물고 주위가 캄캄한 때를 골라,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기동하는 궁핍한 자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성 경: [욥24:15]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한 자들의 여러 악행들]

(주);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 직역하면 '어두움을 살피는 간음자의 눈'이다. 여기서 '바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는 '주의 깊게 지켜보다', '관찰하다'란 뜻으로 은밀하게 행하기를 원하는 음탕한 마음을 타나낸다(잠 7:9). 그리고 '저물다'의 '네쉐프'(*)는 해질 무렵, 곧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한 황혼 무렵을 가리킨다. 결국 본문은 음행의 수치와 그 죄를 감추기 좋은 어두움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간음자의 특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주); 얼굴을 변장하며 - 직역하면 '그가 베일을 얼굴에 얹다', 곧 얼굴을 가면으로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베일'의 '세테르'(*)는 '숨기다', '감추다'의 '사타르'에서 유래된 명사로 가면이나 마스크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를 생략하고 위장한다는 의미로만 번역한다(KJV, NIV, RSV).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마스크 같은 것이 알려진 바 없다는 사실을 들어 '세테르'가 기혼 여성들이 얼굴에 착용했던 '베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Delitzsch). 즉, 간음자가 여자의 옷으로 변장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Pope). 이러한 위장은 밤에 더욱 용이했을것이다.

성 경: [욥24:16]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한 자들의 여러 악행들]

(주); 낮에는 문을 닫고 - 탈무드와 고대 랍비들은 도적들이 밤에 뚫고 들어가기 위하여 낮에 미리 대문에 표시해 두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닫다'(*, 하탐)는 '봉(封)하다', '밀폐하다'란 뜻으로 자물쇠로 문을 잠가두는 것을 의미한다(9:7; 14:17). 즉, 도적들이 낮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집의 문을 잠그고 몰래 숨어 있다는 뜻이다.

(주);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 '알다'(*, 야다)는 단순히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경험적인 이해 이상으로 감정적 동화(同化)까지 포함한 전인격적인 교통과 사랑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빛과의 사귐 또는 교제가 전혀 없었음을 의미한다(13절과 비교하라). 그들은 빛의 길에 익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빛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어두운 일을 행하며 어두움과 밀접한 교제를 나눈다(요 1:5,11). 한편,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신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하셨으며(요 8:12), 나아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도록 빛의 아들이 될 것을 교훈하셨다(요 12:35. 36).

성 경: [욥24:17]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한 자들의 여러 악행들]

(주);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 원문을 직역하면 '왜나하면 흑암이 그들에게는 아침이 되기 때문이니'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은 그들에게 발각될 위협을 가져오지만, 다른 사람들이 잠드는 깊은 밤은 그들에게는 아침처럼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는 의미이다. 도적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숨겨주는 어둠이 올수록 기뻐하면서 비로소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흑암'을 '죽음의 그림자'(shadow of death)로 번역하여 간접적으로 도적들의 파멸적인 결과를 묘사하기도 한다(KJV).

(주);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 즉, 깊은 밤이 도적에게는 아침과 같기 때문에 그들은 밤의 위협적인 두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밤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밤의 두려움에 놀라지 않고 도리어 그런 위험을 미리 예견하고 피하는 것에 능하다(Dlitzsch). 그들은 어두움의 특성을 노련하게 이용하여 사람들의 집을 뚫고 재산을 훔치는 데 교묘하고 능란하다. 이와같이 어두움에 깊이 빠졌기 때문에 그들은 빛과의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고후 6:14). 한편, 본절의 '흑암의 두려움'에 대해서 혹자는 그들이 공개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M. Henry). 즉, 사망 또는 수치의 공포가 심판의 일부분으로서 그들에게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어두움과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Lange).

성 경: [욥24:18]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들이 당할 결과]

(주);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 즉, 악인들의 존재는 물 위에 떠서 빨리 흘러가 보이지 않는 물체처럼 쉽게 잊혀지고 만다는 것이다(9:26 ; 호 10:7). 혹자는 본절의 악인을 약탈하는 바다의 해적들로서 빠른 배를 타고 다니며 악행을 일삼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Carey, Henry) 다소 어색한 해석이다.

성 경: [욥24:19]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들이 당할 결과]

뜨거운 태양이 눈을 녹이고 물을 증발시키듯이 음부(陰府)가 악인을 재빨리 채간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본절을, 평생 죄를 짓고 불의하게 살았던 자들의 죽음이 고통이나 괴로움없이 찾아와 그들을 편안하게 잠들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처절한 고통이 임하기를 바라는 욥의 불평 섞인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악인의 허망한 파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봄이 더 자연스럽다.

성 경: [욥24:20]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들이 당할 결과]

(주); 태가...먹을 것이라 - 본문의 두 문구가 서로 대조를 이루어 악인의 비참한 결말을 강조한다. 즉 악인은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강렬한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조차 버림을 받으며 그를 가까이하고 달려들 자는 구더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태'의 히브리어 '레헴'(*)을 '땅'으로 번역하기도 하나 '그를 잉태한 모친'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성 경: [욥24:21]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들이 당할 결과]

사악한 자의 생전에 저지른 죄악의 실상이 밝히 증거되고 있다. 이것은 욥이 불의한 현실을 명백하게 고발하기 위한 구절이다. 즉, 욥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쌍한 여인들을 학대하거나 약탈하고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악한 자의 불의한 죄악이야말로 반드시 형벌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눈에 목격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악인들은 흥하고 있었다. 이는 또한 욥 자신의 처절한 체험이기도 했다. 이것이 욥의 딜레마이다.

성 경: [욥24:22]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의 편함에 대한 욥의 의문]

(주);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 '강한 자'에 해당하는 '아비림'(*)은 '능한', '용감한'의 뜻을 가진 '아비르'(*)에서 파생된 말로서, 자기 자신의 힘만 의지하는 교만하고 대담스러운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의 뜻을 완고하게 거역하는 자들이기도 하다(Delitzsch, 사 46:12). 그리고 '보존시키다'(*, 마솨크)는 '끌다', '연장하다'는 뜻으로 생명을 길게 연장시켜 계속 살아가게 함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는 이 동사를 자동사로 보고 그 주어가 '강한 자들'이라고 이해한다(Gordis). 그러나 악인의 번성을 허용하시는 하나님께 항변하는 내용이 본문의 문맥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동사의 주어는 오히려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해준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이 오히려 스스로 거만하게 행동하는 강한 자들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뜻이다. 욥은 이처럼 모순된 현실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욥24:23]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의 편함에 대한 욥의 의문]

(주); 하나님이...평안케 하시나 - '호위하다'의 '바타흐'(*)는 '신뢰하다', '담대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악인들의 피난처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악한 일에) 담대하게 하시며 또한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그들을 평안하게 휴식하도록 만든다는 욥의 불평이다.

(주);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 한편 원문상으로 본절 상반절과 하반절을 이어주는 접속사 '와우'(*)는 순접 관계(and) 혹은 역접 관계(but) 등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순접 관계로 볼 경우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불법 행위와 계략들 위에 오히려 빛을 비추어서(10:3) 안전하게 성공하도록 악행을 도우신다는 의미가 된다.(LB, and helps them in mamy ways). 반면에 역접 관계로 보면 본문은, 24절 내용과 연결되어 악인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를 나타내는 셈이 된다(KJV, yet his eyes are upon their ways).

성 경: [욥24:24]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의 편함에 대한 욥의 의문]

(주);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 '높아지다'의 '라맘'(*)은 '스스로 일어서다', '높이 세우다'란 뜻으로 악인의 교만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변론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즉, 이 변론(23, 24장)이 진행되는 동안 욥은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깊은 회의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끝내 불신할 수 없었던 욥으로서는 본절에서처럼 악인의 멸망을 기대하는 강한 기대감으로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 경: [욥24:25]

주제1: [세상의 악에 대한 욥의 항의]

주제2: [악인의 편함에 대한 욥의 의문]

욥은 지금까지 표명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신감을 누구든지 공박할테면 해보라는 투로 확언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욥은 그 친구들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또한 자기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항변하며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무죄를 변호해주실 분은 하나님이며, 또 이 고통의 신비를 깨닫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1:22). 따라서 욥의 현재의 소망은 극심한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자기의 무죄함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시리라는 생각에 있었다.

성 경: [욥25:1]

주제1: [빌닷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

(주); 빌닷이...가로되 - 빌닷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발언인 본장은 앞서 엘리바스의 사상(4:17; 15:14 이하)과 욥이 인정한 내용(9:2; 14:4)을 상투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M. Kline). 그것은 곧 '위엄과 권능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인간의 의로움이나 순전함을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빌닷의 이세 번째 요지는 경건한 발언 같으나 이제까지 욥이 항변해 온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엉뚱한 것이며, 그 내용도 빈약하다.

성 경: [욥25:2]

주제1: [빌닷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

(주);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 여기서 '권능'(*, 마솰)은 '지배하다', '다스리다'란 뜻으로 하나님의 통치권과 주권을 의미하며, '위엄'(*, 파하드)은 문자적으로 '놀람', '두려움'이란 뜻이다. 따라서 본절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에 모든 피조물이 두려워하며 복종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 '높은 곳'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장소로서의 하늘을 가리키며(16:19; 31:2), 동시에 천상의 존재들이 거주하는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화평'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1) 창조의 시초에 세워진 질서(Schlott), (2) 천체의 질서(Habel), 혹은 (3) 하나님께 대항하여 일어난 천상 세력들이 진압된 사실(Habel, Hartley, 9:13; 26:12, 13; 시 82:1; 사 14;12-14 ;24:21, 22) 등과 관련된 언급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이중 (3)의 견해가 보다 무난한 것 같으며, 이는 당시 고대 근동에 흔했던 주제를 상기시킨다(Hartley). 그러므로 여기서 빌닷은 천상의 존재들 마저 맥없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이 땅의 존재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어지럽힐 수 있겠느냐 하고 간접적으로 강변하는 셈이다. 이는 특히 이 땅에서 불의가 창궐하는 것에 대한 욥의 탄식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24:1-17).

성 경: [욥25:3]

주제1: [빌닷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

(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 여기서 그의 군대는 하나님의 만군(단 7:10), 곧 하늘의 수많은 영들과 천군 천사들을 가리킨다. 더 넓게는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포함한다(사 40:26). 그러한 하나님의 모든 군대는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의 평화적 통치에 봉사한다(Hartley). 그런데 그들의 수효를 인간이 계수하기란 불가능하다(시 68:17; 계 9:16). 여기서 빌닷은, 이 천군 천사들이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의 표현임을 알진대 하찮은 인간이야 하나님과 변론도 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욥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 '입지'에 해당하는 '쿰'(*)은'일어나다'라는 기본적인 뜻을 가지고 있어서 본절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야기시킨다. 곧 (1) '광명'을 태양 빛으로 이해하여 '태양 빛이 비추이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Henry, Schlott, Hahn). (2) '하나님의 빛이 누구를 능가하지 못하는가?' 또는 '그의 빛이 누구 위에 일어나 그보다 밝지 아니한가?'(Ewald, Delitzsch), (3)이 빛을 절대적 초자연적인 은혜의 빛으로 이해하여(시 104:2; 게 1:27) '그 빛을 받지 않는 자가 있느냐?'(Lange)등이다. 여기서 우리는 (2)와 (3)의 해석을 종합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빛은 어떠한 빛의 존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며 모든 만물에게 은택을 베푸신다. 따라서 본문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는가?'라는 점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내용이라고도 볼수 있다. 한편, 칠십인역(LXX)은 '그의 빛'(*, 오레후)을 '오레보'(그의 복병)로 읽어서 '그의 복병에 대항해 누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잘못 해석하였다.

성 경: [욥25:4]

주제1: [빌닷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저급한 존재인 인간]

(주); 하나님 앞에서 -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서', 또는 '만물 위에 뛰어나 모든 것을 다 비추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이다. 빌닷은 욥의 변론 일체를 하나님 앞에서 아예 무가치한 것으로 무시하고있다.

(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여 - '의롭다'의 '차다크'(*)는 도덕적 또는 법정적인 의미에서 의로움을 가리킨다(9:15, 20; 10:15; 13:18; 33:12). 빌닷은 의롭다 칭할 수 있는 권리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과 변론하겠다는 욥을 교만하다고 정면으로 논박하고 있다. 그러나 빌닷이 여기서 간과하는 것은 칭의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주장하면서도 그 역시 욥의 불의를 선언함으로 욥과 똑같은 범주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주);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 '부녀에게서 난 자'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14:1; 15:14을 참조하라. 한편 본문은 5,6절에서 나타나는 사상과 계속 이어진다. 즉, 다른 피조물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흠이 있거든 하물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무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성 경: [욥25:5]

주제1: [빌닷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저급한 존재인 인간]

(주);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 '명랑하다'에 해당하는 '아할'(*)은 '할랄'(*)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서(31:26) '빛나다'라는 뜻이다. 고대근동의 여행자들에게 있어, 맑은 날 밤의 달빛은 스텝 지역을 건너가는 발길을 비춰주기에 충분히 밝았다. 달이나 별등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사람들 보기에는 참으로 밝고 신기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영광과 거룩성에 비추어보면 한갓 초라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 경: [욥25:6]

주제1: [빌닷의 세 번째 변론]

주제2: [저급한 존재인 인간]

빌닷은 인간을

(주); 벌레 - (*, 림마)와

(주); 구더기 - (*, 톨레아) 같은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피조물 가운데 가장 보잘것 없고 멸시받을만한 것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빌닷의 뼈아픈 체험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는 욥 자신도 인정한(7:5; 17:14) 일반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빌닷이 이처럼 인생을 벌레에 비유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욥의 무죄 주장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다. 빌닷은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고통받는 이유를 묻고 있는 욥에게 한마디의 도움도 주지 않고 있다. 그것은 욥의 친구들도 알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다만 욥이 자기의 무죄함을 입증하기 위해 심판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만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23:6, 7). 그러나, 욥은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일 필요는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욥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더라도 죄인으로서의 겸손을 위배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Delitzsch).

성 경: [욥26:1]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빌닷에게 반문하는 욥]

(주);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 이제 욥은 엘리후의 발언이 있기 전까지 매우 긴 연설을 행한다(26장-31장). 욥은 빌닷이 제기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오히려 승화시켜서 설명한다(5-14절). 그러나 그에 앞서 빌닷의 발언이 적절치 못하다는 사실을 풍자적으로 비꼬고 있다(2-4절). 왜냐하면 빌닷의 발언이 욥의 변론의 요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내용도 앞서 엘리바스가 언급한 것으로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성 경: [욥26:2]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빌닷에게 반문하는 욥]

(주);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 도왔구나 - '힘'에 해당하는 '코아흐'(*)는 '생기', '능력'이란 뜻으로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는 힘을 의미한다. '힘없는 자', 곧 욥은 빌닷의 유창한 연설이 무력한 상황에 있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잇다. 특히 히브리어 '메'(*)는 '어떻게 그렇게 잘'이란 뜻을 지닌 조롱 섞인 말투로 사용되고 있다.

(주); 기력 없는 팔 - '기력'(*, 오즈)은 강한 힘이나 위엄을 가리킨다. 즉 더이상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기운이 욥에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에게는 오직 외부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빌닷의 충고는 오히려 더 맥빠지게 한다는 의미이다.

성 경: [욥26:3]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빌닷에게 반문하는 욥]

(주); 지혜 없는 자 - '지혜'의 '호크마'(*)는 단순히 기교적 지식이나 사변적인 학식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바로 유지시켜 주는데 긴요한 이론적인 명철함, 실천적인 유능함, 도덕적인 성실함 그리고 영적인 온전함 등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욥은 자신의 지혜 없음을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6:13) 빌닷이 그의 지혜를 충족시켜 주기는 커녕 오히려 무지를 폭로하고 있음을 꼬집고 있다.

(주); 큰 지식을 참 잘 타나내었구나 - 여기서 '지식'(*, 투쉬야)은 도움이나 능력을 더해 주는 참된 지혜를 가리킨다(11:6; 12:16). 즉, 욥이 고민하고 있는 '악인의 흥함과 의인의 고통'이라는 인간사의 난제와 자기의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아무런 유익이나 해답도 빌닷의 지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참된 지혜는 진실과 유익, 그리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욥의 항변인 것이다.

성 경: [욥26:4]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빌닷에게 반문하는 욥]

(주); 네가...말을 내었느냐 - '누굴 위하여 너의 정교한 말을 만들어 냈느냐?'(Lange), 혹은 '도대체 너의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이냐?'라는 뜻이다. 아무런 감동도 유익도 주지 않는 빌닷의 연설은 텅빈 강정에 불과할 뿐 욥 자신과는 털끝 만큼의 관계도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주); 뉘 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 '신'에 해당하는 '네솨마'(*)는 '호흡'이나 '영감'이란 뜻으로 '너에게 그렇게 말하도록 영감을 준 것은 누구이냐?', 혹은 '그것은 신령하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빌닷의 말이 매우 빈약할 뿐만 아니라 그 말 속에 담겨진 사상도 이미 엘리바스가 말한 것을(4:17-19) 반복하였음에 불과함을 상기시킨다. 신적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이처럼 무익할 수도 없으며 허공에 뜨는 말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32:8). 따라서 빌닷의 충고는 욥에게 있어서 전혀 무가치함을 알 수 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전능자 하나님의 변호와 위로였음에 분명하다.

성 경: [욥26:5]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빌닷이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에 대해서 하늘과 관련된 사실만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25:2, 3) 욥은 하늘과 땅(7-13절), 그리고 땅밑과 음부에까지 확대시키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주권을 찬양한다(5, 6절).

(주); 음령들이 - 히브리어 '레파임'(*)에 대해서 주로 두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1) '헐거운', '풀려지다'의 '라파'(*)에서 유래된 것으로 '죽은 다음에몸이 없는 유혼들'이라는 해석(Lange), (2) '높다', '원기 왕성하다'란 뜻의 '신장이 거대한 거인들'이란 해석 등이다.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은 '레파임'이 홍수시대에 익사한 네피림 곧 장대한 자들(창 6:4)로 보거나(M. Henry), 아니면 동부 요르단 지역에 거주하였던(신 2:10, 11; 수 12:4, 5) 멸종된 거대한 원주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Pope).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레파임'이 죽어서 저승에 거주하는 자들이라는 점은 일치한다(시 88:10; 잠 2:18; 9:18; 사 14:9; 26:14, 19).

(주); 큰 물과 수족 밑에서 - '큰 물'(*, 마임)은 땅 아래 있는 물들을 가리키며(출 20:4), '수족'(*, 샤켄)은 '큰 물'에 거주하는 물고기나 바다 괴물, 또는바다의 동식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밑에서'(*, 미타하트)는 '음부'를 가리킨다. 한편 성경에서 '음부'는 줄곧 물로 인한 두려움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삼하 22:5; 시 42:7), 물은 땅 아래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신 4:18; 5:8) 음부와 물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주); 떠나니 - 이에 해당하는 '훌'(*)은 '진통하다', '두려워하다', '흔들리다','고통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음부 세계에 거주하는 영혼들이 바다의 파도처럼, 땅의 지진처럼, 해산하는 여인처럼,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몸부림치며(Delitzsch), 공포 속에서 떨면서 두려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Lange,Rawlinson). 이것은 하나님의 무소 부재하심과 그의 위엄스러운 통치가 음부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 경: [욥26:6]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음부도 드러나며 - 즉 인간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음부의 세계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발가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아롬)는 것이다( 시 139:8; 잠 15:11; 암 9:2).

(주);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 '멸망의 웅덩이'(*, 아바돈)는 '쉐올'(*)과 동의어로서 '파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파멸과 공포의 상징인 '무저갱'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생명이 파멸되는 무저갱과 그곳에 거주하는 존재들까지 하나님의 지식과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묘사하고 있다(히 4: 13).

성 경: [욥26:7]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 '북편 하늘'에 해당하는 '차폰'(*)은 원래'복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높은 산들과 바위들이 솟아 있는 북쪽 곧 가장 험준한 북편의 땅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어 왔다(Ewald, Scholottmann). 그러나 '펴다'의 '나타'(*)가 땅에 대해서 보다는 하늘에 대해서 곧 휘장같이 하늘을 펴셨다는 내용에 언급되기 때문에(시 104:2; 사 40:22; 44:24; 51:16; 렘 10:12) 오히려 북편 하늘로 이해되어야 한다(Delitzsch, Kline). 즉, 이것은 북반구의 하늘, 또는 하늘의 북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 중요한 별자리가 있는 북쪽 하늘인 것이다. 따라서 '허공'의 '토후'(*)는 '황폐하다'란 뜻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사 40:17).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텅빈 우주 공간에 하늘을 휘장같이 드리우셨다는 의미이다(서론,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주); 땅을 공간에 다시며 - '공간'에 해당하는 '벧리마'(*)는 '토후'(*)와 동의어로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을 뜻한다. 이처럼 우주 공간에 땅 곧 지구를 매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창조와 그 능력의 위대성을 암시해 준다. 한편, 지구가 아무런 도움도 없이 그 무게를 지탱하며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은 '땅에 기둥이 있다'는 11절; 9:6의 표현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문은 '무에서 유'의 창조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욥26:8]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 '싸다'의 '차라르'(*)는 '묶다', '메다'란 뜻으로 두꺼운 구름 속에 물을 저장하여 보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홍수가 나지 않도록 물을 구름 속에 붙잡아 두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땅 위의 기상학적 조건이나 법칙까지도 하니님께서 정하시고 관리하신다는 시실을 보여준다.

(주);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 아무리 많은 양의 비를 가진 구름이라도 하나님의 명령없이는 쏟아지지 않는다. 여기서 '찢어지다'의 '바카'(*)는 '터지다'란 뜻으로 아라비아인들이 여행할 때 휴대한 가죽 물주머니를 연상시킨다(G. Rawlinson).

성 경: [욥26:9]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우시고 - '가리우다'의 '아하즈'(*)는 '붙잡다', '닫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구름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차단하여 보이지 않게 한다는 의미이다. 혹 '보좌'에 해당하는 '키쎄'(* 또는 * )를 '케쎄'로 읽어서 '만월'(full moon)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나(NIV, RSV, 시 81:3; 잠 7:20),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왕상 10:19; 사66:1).

(주); 자기 구름으로 그 위에 펴시며 - 즉, 하나님은 자신의 보좌와 영광스러운 광채를 구름을 펼치심으로써 땅에 사는 인간들의 눈으로부터 감추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하시는 뜻을 가리우는 계시의 감추심을 암시하기도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과 궁극적인 신비를 쉽게 알 수 없으며 접근하지 못한다(왕상 8:12; 시 18:11). 하나님의 이러한 감추심은 인간의 지식과 판단으로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으며, 오직 그분의 계시를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미약함을 상대적으로 드러낸다.

성 경: [욥26:10]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으니라 - 이것은 '낮과 밤의 끝이 오기까지'(KJV)라는 시간적 한계보다는 '빛과 어두움이 접촉되는' 공간적 한계를 뜻하는 것이다(M. Kline). 다시 말해서 이 수평선을 경계로 윗 부분은 빛이 비취는 세계요, 아랫 부분은 흑암의 세계라는 것이다(Delitzsch). 고대인들은 땅이 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반대편(빛이 끝나는)에는 어두움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성 경: [욥26:11]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하늘 기둥이 떨며 놀라느니라 -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하늘 기둥이 높이 솟아오른 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산들이 하늘과 맞닿아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떨다'(*, 루프)는 격동에 의하여 심하게 흔들린다는 뜻이며, '놀라다'(*, 타마)는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깜짝 놀라거나 감각이 마비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진동하는 모습을 나타내는데(시 18:7; 사 5:25) 지진이나 우뢰같은 현상을 묘사하는 듯하다.

성 경: [욥26:12]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그는...흉용케 하시며 - '흉용케 하다'의 '라가'(*)는 '격동시키다', '휘젓다'라는 뜻이 있으나(NIV), 그와는 정반대로 '잠잠케 하다'라는 뜻도 있다(70인역,RSV). 여기서는 바다를 요동시켜 놀라게 하는 것이란 의미가 더 타당하다(사 51:15 ;렘 31:35). 아무튼 본절에서는 바다를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강조되고 있다.

(주); 지혜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 '라합'(*, 라하브)은 원래 '뽐내다', '거만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모든 악의 세력들을 표상하고 있다(J. E. Hartley,사 51:9).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9:1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욥26:13]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 그의 '신'(*, 루아흐)은 하나님의 '영' 또는 '바람'이나 '호흡'을 가리킨다(사 40:7). 그리고 '단장하다'의 '쉬프라'(*)는 '맑다', '빛나다', '아름답다'란 뜻으로 비구름과 폭풍우로 인해 흐렸던 하늘을 청명하게 빛나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Driver & Gray). 한편 혹자는 '그의 호흡으로 하늘을 깨끗하게 소제하다'란 의미로 해석하며(Dhorme), 또는 '쉬프라'를 '솨프루르'(*)로 읽고, '하늘을 펴다'(BDB)로 해석하기도 한다(Gordis). 그러나 '하늘의 기둥들이 그를 두려워했다'라는 70인역(LXX)의 해석은 무리하게 보인다.

(주);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 '날랜 뱀'(*, 나하쉬 베리아흐)이란 도망가는 뱀을 뜻하며, '찌르다'의 '홀랄라'(*)는 '파괴하다', '쳐부수다'의 뜻인 '할랄'(*)에서 유래한 동사이다. 즉, 주의 위엄 앞에서 도망치는 뱀을 그의 권능의 손으로 찔러 죽이신다는 의미이다(사 27:1; 51:9). 혹자는 욥이 당시 근동에 익히 알려졌던 우가릿(Ugaritic) 신화의 영향을 본절에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욥은 자기 몸으로 태양을 감아 일식 현상을 타나내려는 뱀에게 하나님이 상처를 입혀서 태양의 광명을 회복시킨다는 사실을 신화론적인 사상의 옷을 입혀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Delitzsch). 아무튼 본절은 바다를 지배하는 용을 찌르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인 뱀의 세력들을 단번에 제거시킨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 경: [욥26:14]

주제1: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주제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욥의 설명]

(주);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 '행사'에 해당하는 '데레크'(*)는 본래'길'을 뜻하나, 여기서는 '권능'이나 '주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행사'(NIV, hisworks)를 가리킨다. 그리고 '시작점'의 '카차'(*)는 '가장자리의 끝' 또는 '모서리의 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과 능력을 서술한 앞의 내용들은 단지 하나님의 행사의 테두리 또는 처음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주); 누가 능히 측정하랴 - '측정하다'(*, 빈)는 '이해하다', '인식하다'란 뜻이다. 즉, '만일 하나님의 권능이 천둥 소리처럼 크게 모두 울린다면 누가 그것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 능력의 본질을 다 알 수가 없다. 다만 세미한 속삭임으로 듣고 아주 적은 부분만을 이해할 뿐이다. 만약 욥의 친구들이 그들의 지식의 한계를 인식했다면 욥에 대한 오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욥은 이처럼 신이 아닌 보잘것 없는 인간으로서의 친구들을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의 완전함에 대조하면서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욥27:1]

주제1: [세 친구에 대한 욥의 결론적 항변]

주제2: [순결에 대한 주장]

(주);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 직역하면 '욥이 비사를 다시 들어올려 계속하여 말했다'이다. 여기서 '비사'로 번역된 '마솰'(*)은 본래 격언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