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홈 > 성경 > 성경주석구약 > 이사야
이사야
이사야 주석



성 경: [사1: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주);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 이사야의 예언 활동은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 740-680년경) 계속된다.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변기이다. 웃기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구가한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전쟁을 낳았다. 아하스는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고(왕하 16:5),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만 하였다(왕하 18:13). 이 모든 것은 선지자에 의해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으로 정식화된다.

(주);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 '아모스'는 히브리어로 '아모츠'(*)라고 발음되며, 선지자 아모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델리취(Delitzsch)는 선지자의 아버지의 이름이 표기된 것은 그 역시 선지자였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라고 말한다.

(주);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 선지자의 예언은 주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마리아를 비롯한 앗수르와 바벨론 등의 주변 열국들까지도 예언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13-27장, 34장). 이런 사실로 미루어 어떤 주석가들은 본절의 표제가 기껏해야 1-12장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들 열방들은 유다와 예루살렘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Alexander), 주제에 있어서 이차적 중요성밖에 갖고 있지 않음(Calvin)을 알 수 있다.

(주); 이상(異像)이라 - '이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존'(*)은 본래 엑스터시한 상태에서의 시각적 경험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어 후에는 예언 일반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본서외에 오바댜와 나훔에서 이와 동일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옵 1:1;나 1:1, '묵시').

성 경: [사1:2,3]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막(표제)이 오르면 독자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장중하고 엄숙한 대자연의 법정으로 인도된다. 대재판관(여호와)이 있고 피고(이스라엘)가 있다. 그리고 증인들(하늘과 땅)이 있다. 이 재판은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 먼저 증인이 호출된다:'하늘이여...땅이여...'(2a절). 이어서 대재판관이 피고에 대한 기소장을 읽는다(2b, 3절). 그 죄명은 반역죄이다. 선지자는 이 광경을 사람들이 잊을 수 없도록 아름답고도 슬픈 4행시로 노래지었다.

(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 세계는 그 앞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선지자는 특별히 하늘과 땅을 지목해서 부른다. 그 까닭은 하늘과 당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걸쳐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하면서 그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과 보살핌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증인으로 참여한 바 있기 때문이다(신 4:26, 36;30: 19;31:28;시 50:4, 5).

(주); 내가 지식을 양육하였거늘 -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가 부자(父子) 관계에 비유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식이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셨다(출 4:22;호 11:1). 이러한 관계성은 약속의 씨앗이라는 형태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말씀에서 암시되었다(창 15:4). 그 씨앗은 자라서 출애굽의 감격과 더불어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탐스러운 결실로 이어진다. 여호와는 갓태어난 이스라엘을 '자기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인도했으며 온갖 향기로운 것들로 먹게 하셨다(신 32:8-14).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장성한 성년이 되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신 26:19;28:1) 이름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에 가장 잘 부합되는 시대를 찾는다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 그리고 웃시야와 요담의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식인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지극한 돌보심이 개역 성경에는 '양육하였다'는 한 단어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키우고'(*, 깃달티)와 '향상시켰다'(*, 로마므티)는 두 단어로 되어 있다. '깃델'과 '로멤'은 종종 동의어로 사용된다(23:4;겔 31:4).

(주);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거역하다'로 번역된 '파솨'(*)는 본래 '도망치다', '달아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의지에서 여호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 이스라엘은 지각이나 통찰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이스라엘이라는 주어에 종속된 '알다'(*, 야다)라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므로써 그 표현은 더욱 강력한 것이 되었다. 70인역(LXX)은 그 뒤에 여호와를 가리키는 '나를'(*, 메)이라는 목적어를 삽입하였다. 반면에 혹자는 주인을 가리키는 '그를'(him)이라는 목적어를 보충하였다(Gesenius, De Wette). 그러나 본문 그대로가 그 기소를 더욱 통렬한 것이 되게 한다(Leupold). '알다'와 '깨닫다'의 두 동사는 모두 경험에서 직접 취해진 말이다.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식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졌다. 언약 관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호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다(출 6:7). 그러나 그 지식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는 데 이스라엘의 문제가 있다.

성 경: [사1: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주); 슬프다 - 여호와의 기소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만큼 이를 반향(反響)이라고 하듯 그 뒤를 따르는 화답은 '슬프다'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슬프다'로 번역된 '호'(*)는 장례식의 애도를 표시하는 비탄의 감탄사(렘 22:18)로서 탄식이나 저주의 표현에 자주 쓰인다(G.E. Wright). 이 말은 다른 곳에서 '화로다' 혹은 '화있을진저'등으로도 번역되었다(5:8;6:5;10:5;28:1 등등).

(주);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 - 이스라엘은 정치적, 민족적 공동체로서 자신을 여호와의 나라(백성)라고 이해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약속에 근거하여 자기를 여호와의 자녀(종자)라고 이해하였다.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이해는 이스라엘의 삶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서 항상 작용하였다. 여호와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당연히 '거룩한 나라'(*, 고이 카도쉬, 출 19:6)가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범죄한 나라'(*, 고이 호테)로 전락하였다. '호테'는 '과녁을 빗나가다'(miss the mark)는 뜻을 가진 동사 '하타'(*)의 능동 분사형으로, 이스라엘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암 카도쉬, 신 7:6)이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허물 진 백성'(*, 암 케베드 아온)으로 전락하였다. '케베드 아온'은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이는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다.

(주);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 - 여호와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씨'(*, 제라 코데쉬, 6:13)가 되도록 기대되었으나,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행악의 종자'(*, 제라 메레임)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말을 속격으로 받아들여 '행악자의 자손'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동격의 의미에서 '행악자들로 구성된 자손'이라고 애해하는 것이 더 낫다(Gesenius' Hebrew Grammar, ed. E. Kautzsch). 여호와께서 양육한 '자식'(*, 바님)은 어찌되었는가 ? 그는 '행위가 부패한 자식'(*, 바님 마쉬히팀)이 되었다. '마쉬히팀'은 '타락한'(Gesenius, Henderson), '남들을 부패시키는'(Leupold), '파괴적으로 행동하는'(Lange), '변질된'(Calvin) 등으로 번역된다. 시적 평행법으로 구성된 이러한 묘사들은 이스라엘이 상습적이고도 계속적인 범죄 행위로 인하여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악해졌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파괴적인 결과만을 산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주);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물러갔도다 - 먼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다. 나아가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경멸하고 업신여겼다. 병행하는 두 구절에서 각기 '버리다'와 '경멸하다'로 번역된 '아자브'(*)와 '나아츠'(*)는 동이가어로서, 두 단어 모두 언약과 관련하여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 신들에게 전향하는 행위를 나타낸다(민 14:11;신 31:16, 20;32:19;삿 2:12 등). 랑게(Lange)는 '버렸다'를 소극적 죄악으로, '경멸하였다'를 적극적 죄악으로 분류하였다.

성 경: [사1: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주); 너희가 어찌하여...패역하느냐 -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회개케 할 목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조치들을 취할 때마다 그 결과는 더욱더 악화되었다:'더욱더 패역하느냐.' 실로 극한점에 이른 저들의 죄악 때문에 주의 징계로써도 돌이키게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패역하다'(*, 사라)는 '진실에서 이탈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여호와를 배신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불법을 더하다'로 번역하였다.

(주); 온 머리는...온 마음은 - '머리'(*, 로쉬)와 '마음'(*, 레바브)이란 명사에 관사가 수반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머리와 모든 마음'(every head and every heart)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Hitzig, Lange). 그러나 관사의 생략은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자주 허용되었으며(9:12 참조), 또한 이 말이 인간의 신체에서 취해진 비유임을 고려할 때, '온 머리와 온 마음'(the whole head and the whole heart)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Alexander). 이것들은 일부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각 다른 사회적 계층들(Hendewerk)이나 공동체의 내외적 상태(Umbreit)를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치명적인 두 부분을 의미한다.

성 경: [사1: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 머리와 마음이 병들고 지친 이스라엘의 내적인 황폐함은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좀더 인상적으로 보여주려는 선지자의 의도에 따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처절한 모습으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주);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 - 오래된 상처는 고름을 짜내야 하고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붕대를 싸매야 한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부드럽게 하고 치료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기름을 발라주어야 한다(눅 10:34 참조).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피폐함은 심각했다.

성 경: [사1: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선지자의 시선은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로 옮겨간다. 그는 고국 이스라엘의 황폐한 정경에서 율법의 저주를 본다.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한 자에 대해서 일찍이 율법은 경고하기를, '그 땅과 성읍이 황폐할 것'(레 26:33)이며, '알지 못하는 민족이 그 토지 소산을 먹을 것'(신 28:33)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에 임한 일이 과연 그러하였다. 선지자에게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율법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주);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이방인에 의해서 생기는 것과 같은 파괴'(Caspari, Lange, Knobel). 이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채택되고 있으며 이방인을 파멸시키는 자로 명시하고 있는 앞 구절에서 강력한 근거를 얻고 있다. (2)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파괴'(Delitzsch). 이것은 '파괴됨'(*, 마흐페카)이란 낱말이 옛적에 소돔 성에 임했던 무서운 파멸을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13:19;신 29:23;암 4:11). 이중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이스라엘의 황폐된 모습에서 율법의 저주를 읽으려는 선지자의 시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성 경: [사1: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주); 딸 시온 - '시온'은 성전의 고귀함 때문에 예루살렘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경에서 '딸'(*, 바트)은 관용적으로 어떤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47:1, '바벨론의 딸';시 45:12, '두로의 딸'). 시온과 이스라엘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이룬다. 선지자는 '딸 시온'이란 말로써 사랑스럽고 정결한 이미지를 야기시킨 후 바로 뒤에서 정반대의 비유들을 대조시킴으로써 충격을 가중시킨다(Oswalt). 이 같은 기법은 3:17;4:4에서도 사용되었다.

성 경: [사1:9]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7절에서 암시된 '소돔과 고모라와의 유사성'에 의해서, 그리고 8절에서 처음 싹을 틔운 '남은 자' 개념에 의해서(4장 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m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본절은 이중적으로 결합된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그 죄악의 격심함과 그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었다. 이 비교는 여호와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충격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스라엘에는 극소수의 남은 자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와는 구별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희망적인 것이었다. 부정과 긍정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사도 바울이 롬 9:29에서 본문을 인용할 때 전혀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즉 바울은 한편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유전만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여전히 유효함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혹독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소수의 참된 신자들을 남겨두신다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 야훼 체바오트) - 이는 '하늘과 땅과 별들과 모든 거민들의 주님'(Alexander)이라는 뜻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그 전능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남은 자를 보존하실 수도 있다. 만약 이스라엘이 그 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 경: [사1:1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주);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 2절과 같은 동사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다르다. 죄악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와 거의 동일하다. 그 죄는 겔 16:49에서 '불의와 탐욕과 힘없는 자에 대한 착취'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저함이 없이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적 병행어로 기술된 '관원'과 '백성'은 나라 전체가 한결같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심판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참된 해석가고 부름받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율법(*, 토라)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비난(11-15절)과 교훈(16, 17절)으로 진행되었다.

성 경: [사1:1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주); 너희의 무수한 제물 -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은 '살해된 동물의 고기,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피뿌리는 제물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으로 언급되었다(19:21;삼상 2:29;3:14). 이것은 13절에서 역시 '제물'로 번역된 '미느하트'(*)와 구별되는데, '미느하트'는 피 없는 제사 즉 식물로써 바치는 소제를 말한다. 제물의 종류와 횟수, 그리고 바쳐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7항을 참조하라.

성 경: [사1:12]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주);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 '너희에게'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너희의 손에서'이다. 에발트(Ewald)는 '너희에게'에 강조점을 두어 '그것을 누가 너 같은 사람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반면에 알렉산더(Alexander)는 '그것을'에 강조점을 두어 '그따위 헛된 출석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주);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여기서 '마당'은 솔로몬 성전 주변의 경내를 가리킨다. 에스겔은 안뜰과 바깥뜰이 있다고 말한다(겔 8:16;10:5).

성 경: [사1:13,1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주);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 이 말은 첫째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제사를 혐오하시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제사와 더불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둘째 여호아가께서 혐오하시는 대상이 무엇임을 밝히 보여준다. 그것은 제사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근본 정신에서 이탈된 외식적인 행위이다. 본래 제사와 행악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서로 배타적인 이 둘이 결합된 모양을 가리켜 성경은 '외식'이라 부른다. 가짜와 거짓을 싫어하시는 여호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진리이신 그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예배 행위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는 14절에서 세 개의 동사로 보다 구체화된다:'싫다'-'귀찮다'-'지겹다'.

성 경: [사1:1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주); 손을 펼 때에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칠 때'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의 가시적 표현이라고 믿어졌다.

(주); 많이 기도할지라도 - 혹자는 이 말을 '중언 부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큰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불쾌할 뿐이다. 참되고 진실한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불의로 얼룩진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탄원이며,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려는 거룩한 열망이다(주기도문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헛된 몸짓과 공허한 울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경멸하시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붉은 '피'(*, 다밈)는 '악을 행한다'(13절)의 시각적 표현이다. 즉, 이 '피'는 희생 제물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혹은 상징적 의미에서의 악행을 의미하는 것이다(Calvin). 사해 사본의 이사야서는 이 말 뒤에 '너희 손가락은 불법으로 물들었다'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성 경: [사1:1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주);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사랑을 기억하셔서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신다. 그것은 먼저 악에서 떠나라는 말로 제시된다. '스스로 씻으라'(*, 라하추)는 말은 원래 신체적, 의학적 의미에서 자신을 세척하라는 말이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 하자쿠)는 도덕적 의미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의 상관 관계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앞의 씻음은 단번의 회개요, 뒤의 씻음은 날마다의 점진적인 성화라고 하였다.

성 경: [사1:1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주); 선행을 배우며 - 악을 그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그 필요 충분 조건에 응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해서 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처럼 이제라도 선행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힘써 배워야 할 과목은 '공의'이며, 이 과목의 주된 학습 내용은 본절에서 세 가지 실천 사항으로 언급된다.

성 경: [사1:1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양털같이 되리라 - 평행으로 이루어진 이 두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다면, 그것이 어떻게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질 수 있겠느냐 ?'(Kaiser, Marti, Michaelis 등).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제사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조롱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것을 의문문으로 해석해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 또 전후 문맥을 고려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음 해석을 취한다. (2)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을지라도,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지리라'(Alexander, Delitzsch 등). 죄가 여기서 붉은색으로 표현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피로 물든 손과의 연관성 때문이지만(15절), 종말론적인 표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흰색의 반대는 검은색이지만 종말론에서 희색의 반대는 붉은색이다. 흰색은 세마포를 입은 성도의 색이며 성결의 색으로 간주된다(전 9:8;단 7:9;마 17:2;계 1:14;3:4;7:9;19:8). 반면에 붉은색은 바벨론의 색이며 지상 나라의 색이며 마귀의 고유한 색이다(계 12:3, 9;17:4). 본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사이에 변론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에도 불구하고'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자유이며 사랑이다. 공의대로만 보자면 이스라엘은 사형을 언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보적 상벌의 법칙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 자유로써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려고 하신다. 이러한 가능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유는 진실로 새로운 삶으로 결실한다.

성 경: [사1:19,2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회개의 촉구]

수농과 거역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주제는 율법이 선언된 이래 불변의 주제로서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레 26장 ;신 28장). 본문은 그 내용의 대조와 발음의 유사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절의 '먹다'(*, 토켈루)와 20절의 '삼키우다'(*, 테우클루)는 언어 유희의 대표적인 예다. 19절과 20절은 두운법(頭韻法)으로 이루어졌다.

(주);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 3:18)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가인이 그 아우를 죽였을 때 그는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라'(창 4:12)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땅의 소산을 먹는 것과 인간의 행사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종종 물질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는데, 이는 참것의 그림자인 현재의 복락을 맛봄으로써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이다.

성 경: [사1:2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주); 신실하던 성읍이...창기가 되었는고 - 원문대로 읽으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가, 신실하던 성읍이'이다. 2절에서 부자 관계로 표현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기서 부부 관계로 표현되었다. 부부 관계의 기초는 '신실함'(*, 네에마나)이다. '네에마나'는 '받치다', '기초하다', '기대다'는 뜻을 가진 '아만'(*)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성도들이 기도 끝에 낭송하는 '아멘'이란 말도 이 말에서 비롯된 것임). 칼빈(Calvin)은 이 말을 '순결함'으로 이해하였다. 부부 관계에서 순결이 파괴될 때 간음이 되듯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것은 영적 간음이 된다(출 34:15, 16;신 31:16;호 1:2 이하). 그리하여 한때 순결하였던 신부 이스라엘은 창녀(*, 자나)가 되었다. 어찌하여(*, 예카). 이 말은 애가(elegy)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이 말로 시작하고 이 말로 표제를 삼았다(애 1:1;2:1;4:2). 선지자의 탄식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의 확인이다.

(주);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 과거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추함이 '이제는'(*, 아타)이란 말에서 극적으로 대비된다. '살인자들'(*, 메라츠힘)은 강도나 살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가장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소유를 착취하는 자를 의미한다(엠 2:34;요일 3:15). 그 주범은 유다의 지도자라 자처하는 고관들과 방백들이다.

성 경: [사1:22]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주); 네 은은...너의 포도주에는 - 비유적으로 표현된 '은'과 '포도주'는 그 고상함과 귀중함에서 볼 때 높은 계급의 관원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나 은은 찌끼가 되고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다. 이 말은 이전 황금 시대에 고관들에 의해 나타났던 덕과 공의가 쇠퇴하고 지금은 그 찌꺼기와 그림자만 남았음을 뜻한다(Delitzsch). 비록 찌끼가 은을 대신하여 아직도 반짝이고 포도주가 불그레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수를 상실한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럴 듯한 가짜를 싫어하신다(딤후 3:5).

성 경: [사1:23]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주);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 '방백들'(*, 사림)과 '패역함'(*, 소레림)은 두운법에 맞춘 것이다. 선지자는 두운법을 사용함으로써 방백들과 그들의 패역함을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방백들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패역한 사람들이다'이다.

(주);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 '사랑하며'(*, 오헤브)와 '구하며'(*, 로데프)는 모두 분사로 쓰여 그들의 행위가 계속 지속되며 습관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구하다'는 동사는 원어상 '따라가다', '열심히 추구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들이 그처럼 열심히 추구하고 흠모해 마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뇌물'(*, 솰르모님)이었다. '뇌물'은 '평화'를 뜻하는 '솰롬'(*)과 발음이 비슷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구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뇌물'이었다.

성 경: [사1:2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주);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 -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처럼 한데 모아 놓은 곳은 이곳 외에 없다. '주'(*, 하아돈)라는 명칭은 본서에서 '만군의 여호와'와 결합되어 위협과 징벌을 가하는 경우에 쓰인다(3:1;10:16, 33;19:4). '만군의 여호와'에 대하여는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의 전능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권위있는 통치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창 49:24;시 132:2, 5 등에서는 '야곱의 전능자'라고도 표현되었다(49:26;60:16). 70인역(LXX)에서는 이것 대신 '야곱의 전능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지자는 이 세 가지 이름을 한데 묶음으로써 여호와의 무한한 엄위와 전능하심을 최고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 뒤에 이어질 말씀들이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하시되'(*, 네움)라는 동사에서 한결 분명해진다.

(주); 말씀하시되 - '네움'은 비밀스럽고 중요한 사실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창 22:16에서 처음 나오고 렘, 겔에서 자주 등장함).

성 경: [사1:2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주); 나의 손을 내게 돌려 - '손을 되돌린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개입, 간섭하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렘 6:9;겔 38:12;암 1:8). 하나님의 간섭은 찌끼를 태우고 혼잡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징벌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 그러나 '아쉬바'(*)라는 동일한 동사로 시작되는 26절과 비교해 볼 때 회복의 의미가 더 강한 듯하다.

(주);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 문자적으로는 '잿물처럼 너의 찌끼를 녹이고'이다. 하나님은 마치 잿물을 가지고 은에서 납 성분을 녹이듯이, 예루살렘의 경건치 못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성 경: [사1:2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주);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본래와 같이 - '사사들'과 '모사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관원들과 방백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정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예루살렘은 21절 상반절에 기록된 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평화의 구현기요 메시아적 통치의 예표로서 상징된다. 그러면 이러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 가까운 미래에 있어서 어쩌면 그것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틴에 귀환할 때 이들을 지도한 스룹바벨이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실현되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24:23).

성 경: [사1:2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주); 귀정(歸正)한 자 - KJV는 이것을 범죄로부터 돌아선 자라는 뜻의 '개종자들(converts)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랑게(Lange)는 '포로에서 귀환하는 자들'에게 이것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것을 이중적 전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가까운 미래에서는 '포로에서 풀려난 자들', 그리고 먼 미래에서는 '죄로부터 구속된 성도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 경: [사1:2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주); 그러나 패역한 자와...멸망할 것이라 - 25절과 관련하여 정련 과정의 반대 측면, 즉 찌끼와 혼잡물의 운명이 제시된다(Lange). 그들의 운명을 강조하는 듯이 '패망'(*, 쉐베르)이란 명사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파멸, 패역한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그리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종말에 이르리라.'

성 경: [사1:29]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주); 상수리나무...동산 - 선지자는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수법으로 '상수리나무'(*, 엘림)와 '동산'(*, 가노트)을 들어 당시에 편만해 있던 모든 유(類)의 거짓된 우상 숭배를 표현한다. 류폴드(Leupold)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이것들은 두 가지 방식의 우상 숭배, 즉 나무 숭배 의식(tree- cult)과 동산 숭배 의식(garden-cult)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무에 관하여는 57:5;왕하 16:4;렘 2:20;3:6;17:2;겔 6:13;호 4:13을, 동산에 관하여는 65:3;66:17을 참조하라.

성 경: [사1:3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주);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물 없는 동산 - 늘 푸른 나무와 물기 어린 동산처럼 그렇게 번성하기를 꿈구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달려간 그들은 허무한 우상의 결국만큼이나 자신들도 헛되이 비참함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Alexander). 그러나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택하고 그로 즐거워하는 자들의 운명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할'(시 1:3) 것이다. 선지자가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과 관련하여 동산에서 물이 넘칠 것을 노래한 구절로는 35:6, 7;41:18;44:3;48:21;66:12 등이 있다.

성 경: [사1:3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주); 강한 자는...그의 행위는 - '강한 자'(*, 헤하손)는 불법한 통치자(아마도 '우상 숭배를 조성한 지도자', Leupold)이며, '그의 행위'(*, 포알로)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우상(혹은 '안녕을 도모하는 그 수단과 고안물', Vitringa;'우상 숭배하는 행위', Lange)을 의미한다. 우상은 불티와 같아서 그것을 따라가는 자에게 재앙만을 야기시킨다.

성 경: [사2: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주); 아사야가 받은 바...말씀이라 - 문자적으로는 '이사야가 본(*, 하자) 말씀(*, 하다바르)이라'이다. 이런 표현은 매우 드물다. 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주의 말씀이 ...에게'이다(렘 14:1;겔 13:1;호 1:1;욜 1:1;욘 1:1;미 1:1;습 1:1 등). 아모스만이 이와 비슷한 표현법을 쓰고 있다(암 1:1).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 이외에도 '사건', '사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의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곧 사건이며, 사건은 곧 그의 말씀인 것이다.

성 경: [사2: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주); 말일에 - 문자적으로는 '날들의 끝에'(*, 베아하리트 하야밈)이다. 이 말은 본서에서 단 한번 나온다. 그것은 창 49:1;민 24:14;신 4:30;31:29 등에서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 히 1:2)로 번역하였다. 율법 학자들은 그날을 메시야의 날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옛 세대의 끝으로 보았으며, 오늘날 많은 주경 학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에 이르는 신약 시대로 이해한다.

(주); 여호와의 전의 산이...뛰어나리니 -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을 가리킨다(시 2:6;3:4;24:3;렘 31:23;욜 2:1;3:17 등). 고래(古來)로 산들은 그 높이와 위엄에서 사람들의 찬탄을 받아왔으며 신들이 거주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숭배되어 왔다(예컨대, 희랍의 올림푸스 산 등). 그러나 실제로 시온은 전혀 높지 않은 자그마한 언덕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바산의 산들이 이 낮고 하찮은 하나님의 산을 내려다 본다고 말하였던 것이다(시 68:16). 그러나 종말에는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날에 시온은 가장 높아질 것이요, 그 영광 앞에서 다른 모든 산들은 평지나 다름 없어질 것이다(슥 14:10).

(주);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모여든다'(*, 나하루)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흐른다'(stream)는 뜻이다. 그 옛날 범죄의 절정을 상징하였던 바벨탑에서 각처로 분산되었던 인류는(창 11:1-9)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다시 시온 산으로 물밀듯이 몰려들 것이다. 인류의 범죄와 구원의 역사는 '바벨탑에서 시온 산으로'(from the Babel to the Zion)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시온 산이 '하나님이 세운 구원의 높이'를 상징한다면, 바벨탑은 '인간이 세운 죄악의 높이'를 상징한다.

성 경: [사2:3]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주);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나올 것임이니라 - 백성들이 그처럼 시온에 오고자 한 것은 거기에만 율법, 즉 여호와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은 '참된 종교'(Alexander) 혹은 '시내 산의 토라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시온의 토라라 할 수 있는 복음'(Delitzsch)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시온에서부터'에 놓는다. 이는 구원의 길이 시온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요 4:22).

성 경: [사2:4]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판결하시리니 - 앞에서 율법의 수여자 혹은 인생의 행할 길을 가르쳐 주시는 참된 교사로 그려졌던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민족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며 판단하시는 재판관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판결과 중재가 가능한 것은 열방들이 율법의 말씀으로써 삶의 지침을 삼고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판단하다'(*, 솨파트)는 '다스리다', '왕노릇하다'(Calvin)나 '징벌하다'(Cocceius)는 뜻보다는 '중재하다'(Alexander)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주);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만들 것이며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때 전쟁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날에 사람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하였던 칼과 창을 생산적인 농기구로 바꾸게 될 것이다(슥 9:10). '보습들'(*, 이팀)은 당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도구이며, '낫들'(*, 마즈메로트)은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전지용(剪枝用) 가위이다.

성 경: [사2:5]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야곱 족속아 오라 - 문자적으로는 '야곱의 집이여, 오라'이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의 선택된 가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다(8:17; 10:20;14:1;29:22 등). 앞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는 교묘한 대조가 숨어 있다. 즉 율법에 무지한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은 오히려 뒤로만 물러간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바인을 들어 이스라엘에게 고상한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선교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롬 11:14).

(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 '여호와의 빛'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Delitzsch) 혹은 '여호와께서 계시해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Alexander)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타민족이 갖지 못한 이 빛을 특권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리 빛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으며 단지 그 가운데 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암흑 가운데서 방황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야만 되었다.

성 경: [사2:6]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 원문대로 읽으면 '가득 채워졌다(*, 말레우), 동방으로부터(*, 미케뎀)'이다. 여기서 '동방'은 지리적으로 팔레스틴 동쪽 특히 앗수르, 아람, 바벨론 등을 가리킨다. 고대 근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들 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온 이방 풍속들로 온 이스라엘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 이방인으로 더불어...언약하였음이라 - 본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이방인의 자녀들에게서 만족을 취하였다'(Luzzatto). (2) '이방인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연합되었다'(LXX, Targum). (3) '이방인들과 상업적 계약을 체결하였다'(Cheyne). 심지어 제롬(Jerom)은 여기서 남색(男色)과 같은 성적(性的)범죄를 발견하기도 한다. 문맥과 관련하여 이 말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정치적, 상업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들과의 교류가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성별된 여호와의 백성과 거룩하지 못한 태생의 이방인들 간의 구별이 폐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문은 앞절과 관련하여 대조적이다. 즉 말일에 시온으로부터 여오화의 빛이 이방으로 퍼져나갈 것임에 반해, 오히려 이방의 악한 풍습들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어온 것이다.

성 경: [사2:7]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마필(馬匹)이 가득하고 - 이방과의 자유로운 교섭의 결과, 이스라엘 땅에 경제적 부(富)를 상징하는 은금과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마필 역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일찍이 모세에 의해 강력하게 공고된 것들이었다(신 17:16, 17). 그러나 자기 의지의 수단으로서 경제적, 군사적 힘을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왕상 10:26-11:8), 웃시야 왕 때에는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었다(대하 26:6-15). 여기에도 앞 구절(4절)과 비교해 볼 때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 즉, 말일에 전쟁 무기가 평화의 도구로 바뀌어지는 것과 이와는 반대로 마필로 힘을 과시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성 경: [사2:8]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우상도 가득하므로 - '가득하다'(*, 말라)는 동사가 계속해서 문두(文頭)에 나온다. 본서에서 우상과 관련한 구절들로는 40:18-20;41:6, 7, 29;44:9-20 ;45:16-20; 46:1, 2, 5-7 등이 있다. 종말의 풍경과 이스라엘의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가 여기까지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지만 정작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에는 우상만이 가득하다.

성 경: [사2:9]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 이러한 우상 숭배는 천한 자와 귀한 자, 즉 사회 각 계층에 편만히 퍼져 있었다. '천한 자'로 번역된 '아담'(*)과 '귀한 자'로 번역된 '이쉬'(*)는 구약에서 인간에 대한 대표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전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후자는 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5:15).

성 경: [사2:10]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 이 후렴구의 변형이 19절과 21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사람들은 바위 구멍 속에 몸을 피하거나(삿 6:2;삼상 13:6) 얼굴을 땅속에 묻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 임할 재앙이 너무도 크고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동방에서 계절풍을 피하거나 사막을 통과하는 지독한 열풍을 피하는 관례적인 습관에서 착안된 표현이라고 추정한다(Leupold).

성 경: [사2:1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눈이 높은 자가...굴복되고 - '눈이 높은'(*, 에네 가브후트)은 마음의 내적 교만이 나타내는 외적 몸짓을 가리키는 것이다(시 101:5, Calvin). 본문에서 '높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 ('가브후트'와 '룸')와 '낮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솨펠'과 '솨흐')가 평행한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극명하다. 우리가 여호와를 높이면 그가 우리를 높이시려니와, 우리가 여호와를 낮추면 그도 우리를 낮추신다(57:15).

성 경: [사2:1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 - 문자적으로는 '만군의 여호와에게 있는 한 날'이다. 그날은 (1)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다. 이 칭호는 그가 전우주적인 심판을 시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Leupold). 또한 (2) 여호와의 생각 속에 영원한 비밀로 존재하다가 지정된 때가 이르렀을 때 역사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날이다(Delitzsch). (3) 반드시 하루일 필요는 없다. 주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시 90:4;벧후 3:8, Lange). 마지막으로 (4) 두려운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계속되는 전치사 '알'(*, against)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날은 이미 많은 선지자들로부터 예고된 최후의 날이다(13:6;욜 1:15;2:1, 11, 31;암 5:18, 20;습 1:7, 14;슥 14:1 등).

(주);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自高)한 자에게 - 심판의 날에 이르러 파멸의 운명에 처해질 대상들이 먼저 열거되었다. 이를 '사람'(everyone)의 의미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인 '모든 것'(everything)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Vitringa, Gesenius, Alexander). '높음'을 나타내는 세 개의 형용사 - '교만한'(*, 게에), '거만한'(*, 람), '자고한'(*, 니사)-는 동의어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뒤에 나오는 자연들과 결부시켜 '장엄하고 인상적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높이 들린 모든 것들에 대하여'로 해석하기도 하고(Leupold),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창 3:5, J. Watts).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Lange).

성 경: [사2:13-16]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여호와의 심판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넘어뜨리는, 지진을 동반한 무서운 폭풍으로 형상화된다. 그 폭풍은 북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바다로 향한다(Kaiser, Leupold). 이 방향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방향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주); 레바논의...백향목과 바산의...상수리나무 - 레바논은 '흰 산'이란 뜻인데, 그 산의 꼭대기가 1년 중 거의 절반이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팔레스틴과 시리아 접경에 위치한다. 그곳의 자랑인 백향목은 성경에서 종종 위엄과 능력의 상징으로 취해졌으며(삿 9:15;왕상 4:33;왕하 14:9;시 92:12;104:16), 세속적인 교만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시 29:5, 6;렘 22:6;슥 11:1, 2). 바산은 요르단 동쪽에 자리하고 길르앗 북쪽에 위치하며 그 남쪽으로는 야르묵 강이 흐르는 고원 지대이다. 지금은 엔-누크라(en-Nuqra)라고 불리며 가축을 키우기 좋은 목축지가 있다. 황소와 상수리나무로 유명하다(시 22:12;겔 27:5, 6;39:18;암 4:1). 주석가들은 이것들이 유다의 높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erome, Vitringa, Gesenius). 이 나무들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올 때 군사용 목적으로 벌목되어 완전히 황폐화되고 말았다(37:24).

성 경: [사2:17]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 약간 변형된 11절의 반복이다. '눈이 높은 사람'(*, 에네 가브후트 아담)이 '스스로 높은 사람'(*, 가브후트 하아담)으로 바뀌었을 뿐, 그 의미는 11절과 동일하다. 이런 반복은 이전의 상세한 시각적 묘사로부터 다시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진술로 환원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사2:18]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 선지자의 시선은 여호와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대상인 우상으로 옮긴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엘릴림)처럼, 완전한 무(naught)로 화할 것이다(슥 13:2). 랑게(Lange)는 13-16절이 7절에 관계되듯이, 본절 이하는 8절에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성 경: [사2:19]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사람들이 암혈(巖穴)과 토굴로 들어가서 - 10절의 경고가 여기서 직접적인 예언으로 바뀐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그 숭배자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상들이 무로 화하듯이, 그 숭배자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피해 암혈과 토굴에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 경: [사2:20]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주);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 70인역(LXX)은 이 구절에 착안하여 그들이 동물 숭배에 빠졌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Luzzatto, Malbim). 그러나 두더지와 박쥐는 우상 숭배자들이 몸을 피할 '암혈'과 '토굴'과 연관하여 취해진 것이다. 즉, 그들은 두더지와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던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금과 은의 형상들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행동은 '역겨움에서'(Leupold), 혹은 '심판자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Delitzsch) 취해질 것이다.

성 경: [사2:2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본문은 우상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뒤따라 나오는 후렴구이다(10, 19절).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수치와 파멸이 어느 정도로 극심할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하여 후렴구로 반복되는 것 같다.

성 경: [사2:2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후기의 삽입으로 간주되었으며(Diestel, Cheyne), 어떤 곳에서는 아예 빠져 있다(LXX).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본절은 앞에서 논의된(5절 이하) 내용의 결론이며, 동시에 3;1 이하에서 새로 이어질 내용의 도입부로 작용한다.

(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 인생의 유한함이 창 2:7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기술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이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편 기자는 그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했다:"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圖謀)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이와 관련된 구절들로는 욥 7:7;34:14, 15;시 78:39;90:36-6;104:29 등이 있다.

성 경: [사3: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주); 예루살렘과 유다 - 1:1과 2:1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聖都)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유다 전역으로 퍼져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그리고 유다로부터'로 되어 있다.

(주);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모든 물 - 유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모든 것들의 구체적 대상으로서 먼저 언급된 것은 '양식'(*, 레헴)과 '물'(*, 마임)이다. 이 둘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두 요건으로서 거론된 것이다(Alexander, Delitzsch). 양식과 물을 끊는다는 것은 기근을 뜻하며(레 26:26;겔 4:16;5:16;14:13), 이것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공 때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25:3;렘 38:9;애 4:4, 10).

성 경: [사3:2,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하나님의 심판은 앞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단순히 육체적 파멸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의 총체적 와해로까지 이어진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유다를 지탱하던, 다시 말하면 유다 사람들이 의뢰하고 의지하였던 그들의 지도자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1) 군사적 지도자들: 용사(*, 깁보르) - '힘있는 남자' 혹은 '영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높은 계급의 군대 장관을 뜻한다(Michaelis, Gesenius, Delitzsch). 전사(*, 이쉬 밀르하마) - 군인을 가리킨다. 이 말은 앞의 '용사'와 관련하여 높은 계급의 군인으로 이해되기도 하고(vITRINGA), 혹은 '용사'와는 구별된 사병으로 이해되기도 한다(cOCCEIUS, dELITZSCH). 오십부장 - 50명으로 구성된 군대의 최하급 단위 부대의 장을 말한다. 이것은 본래 행정, 사법적인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나(출 18:25, 26), 후에 군사적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2) 정치적 지도자들: 재판관(*, 쇼페트) - 여기서는 사법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당국에 의해 임명된 행정 관리들을 가리킨다. 장로(*, 자켄) - 이들은 나이든 노인으로 그들의 지혜와 경륜을 발휘하여 지도적 위치에서 공동체를 다스렸다. 귀인(*, 네수 파님) - 문자적으로는 '얼굴이 들린 (사람)'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하했던 사람을 가리킨다(9:15;왕하 5:1;욥 22:8). 모사(*, 요에츠) - 왕의 측근으로서, 나라의 중요한 정책 결정에 조언을 했던 사람을 말한다. (3) 종교적 지도자들: 선지자(*, 나비) -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계시해주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들이 복술자와 함께 열거된 것으로 보아 거짓된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같다(Michaelis, Gesenius). 복술자(*, 코셈) - 점을 쳐주는 사람을 가리킨다(겔 21:21-23). 이런 행위는 모셉법에 의해 정죄되었다(신 18:10-14). 능란한 요술자(*, 네본 라하쉬) - '라하쉬'(*)는 '속삭이다'는 뜻으로서, 마술 주문을 외우거나 중얼거리는 것을 가리킨다(삼하 12:19;시 41:7). (4) 산업 기술자: 공교한 장인(*, 하캄 하라쉼) - 기술에 능한 사람들로서 전쟁 무기의제조(Michaelis) 혹은 우상 제조(Umbreit) 혹은 연금술(Gesenius, Ewald) 혹은 산업 기술(LXX, Luther, Vitringa)에 종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왕하 24:14;렘 24:1). 앞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예언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침공해 올 때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왕하 24:14-16을 참조하라.

성 경: [사3:10,1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가 반복되어 나온다. 사람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기 마련이다. 의를 심으면 의의 열매를, 악을 심으면 악의 열매를 말이다. 비록 경험적 현실에서 이 같은 응보가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으나(시 73편;말 2:17;3:13)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날에 모든 것은 바르게 드러날 것이다. 선지자는 지혜 문학적 격언 형식으로, 혹은 일반적인 금언 형식으로 이 같은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이 말이 갖는 통시적, 공시적 보편성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 경: [사3:12]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주);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 선지자는 앞에서 논의된 내용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는 법정 진술로 이어지는 뒷부분과의 연관성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내 백성이여 !(혹은, 내 백성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들의 압제자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그들을 억압할 것이다'이다. 여기에서 '아이들'이 나이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성격적 측면에서의 방자함과 치졸함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4절). '아이들'과 더불어 거론된 '여자들' 역시 무능력하고 무자격한 통치자의 예로서 제시된 것이다. 어쩌면 선지자는 아달랴 왕비의 악한 통치(왕하 11:1-20)나 이세벧의 폭정(왕상 18:4;21:5 이하)을 상기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Leupold). 이러한 무자격한 통치자들이 나라를 주관하는 경우, 그 치명적인 결과는 자명해진다.

성 경: [사3:1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주);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 본문에 사용된 두개의 동사, 즉 '일어나시며'(*, 니차브)와 '서시도다'(*, 오메드)는 각각 분사형으로서 여호와께서 재판하시기 위하여 법정에 들어서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해주고 있다(미 6:1 이하). 재판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와는 기소하는 검사요, 심판하는 판사며 집행자로 묘사된다(Delitzsch).

성 경: [사3:1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주);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 원문대로 읽으면 '그리고 너희, 너희가 먹어 치웠다. 포도원을'이다. 강조점이 '너희'(*, 아템)에 놓인다. 여기에 묘사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5장).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가꾸고 돌보는 자들로 방백들과 장로들, 즉 지도자들을 세우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도원을 지키라는 부름을 받은 그들에 의해 포도원이 침탈되고 황폐케 된 것이다. 병행하는 다음 구절에서 그들의 죄악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주);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있도다 - '탈취한 물건'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게젤라트'(*)는 '가죽을 벗기다', '상처를 입히다'는 뜻의 동사 '가잘'(*)에서 파생된 말이다. 가난한 자를 착취, 약탈하는 것은 그의 피부를 벗기는 것과도 같은 끔찍한 악행이다.

성 경: [사3:1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주);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 백서들에 대한 지도자들의 범죄가 두 동사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짓밟다'(*, 다카)는 '박살내다', '짓이기다'는 뜻이며, '맷돌질하다'(*, 타한)는 '잘게 부수다', '억압하다'는 뜻이다. 여기 보여진 광경은 너무나 선명하고 참혹해서 결코 잊을 수 없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땅에 가슴을 대고 엎드려 있으며 그 얼굴은 피와 먼지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 얼굴을 관원의 발이 짓누르고 있다. 그가 발에 힘을 줄 때마다 가난한 자의 얼굴은 더욱더 땅에 파묻힌다. 백성들에 대한 지도자들의 횡포가 이와 같았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대개 정치적 이유로 밝혀지지도 않고 묵과되기 쉽다. 그러나 공의로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절대로 간과되지 않는다(잠 14:31;19:17;21:13;22:16, 22;28:27;29:7 참조).

성 경: [사3:1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시온의 딸들 - 1:8의 '딸 시온'이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의인화시킨 것이라면, 본문의 '시온의 딸들'(*, 베노트 치욘)은 시온에 거주하는 부녀들을 가리킨다.

(주); 교만하여 - 교만의 주제가 2:11 이하에서 계속되고 있다. 남자들의 교만이 주로 권력과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나타난다면, 여자들의 교만은 주로 허영과 음란으로 나타난다.

(주); 늘인 목 - 고개를 숙이며 걷는 것이 겸양의 표시로 간주되듯이, 목을 늘여 머리를 하늘 높게 쳐들고 걷는 것은 교만의 표중으로 간주된다.

(주); 아기죽거려 행하며 - 아이들처럼 잰 걸음으로 걷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다. 루터(Luther)는 이것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걸었다'로 번역하였다.

성 경: [사3:17]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 '정수리'는 머리 꼭대기를 말한다. 교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 하나님은 딱지(*, 시파흐)가 생기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딱지는 '옴 따위의 피부병'(KJV), '앞머리를 깎아 미는 것'(G.R. Driver),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Alexander) 혹은 '비듬투성이가 된 불결한 모습'(Lange) 등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아름다움을 생명으로 하는 여성에게 이것은 치명적인 형벌이다.

성 경: [사3:18]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구체적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선지자는 이것들을 '티프에레트'(*)라는 한단어로 요약한다. 이 말은 '장식품' 혹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번역할 수 있다.

(주); 발목 고리(* -, 아카심). 이는 금, 은, 상아 고리로서 발목에 다는 것이다.

(주); 머리의 망사(*, 슈비심). 이는 머리에 덮은 그물 아래로 금박이나 은박실을 땋은 것으로, 대개 리본 장식을 매었다. 반달 장식(*, 사하로님). 목에 둘러서 가슴까지 내려오게 한 반달 모양의 금속 목걸이를 말한다(삿 8:21).

성 경: [사3:19]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면박(*, 레알로트) - 얼굴에 걸치는 값비싼 면사포를 말한다.

성 경: [사3:20]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발목 사슬(*, 체아도트) - 이는 '걷다'(*, 차아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걸음걸이를 멋지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발목 고리에 연결하여 단 장신구이다.

(주); 호산부(*, 레하쉼) - '마술부리다'(*, 라하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부적과 같은 말이다.

성 경: [사3:2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지환(*, 타바오트) -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말한다.

(주); 코 고리(*, 니즈메 하아프) - 코를 뚫어 매다는 것으로, 동방에서 널리 사용된 장신구의 일종이다.

성 경: [사3:22]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예복(*, 마할라초트) - 특별한 때에만 입는 정장을 말한다.

(주); 겉옷(*, 마아타포트) - 옷 위에 걸쳐 입는 가운 비슷한 옷으로, 안에 입은 옷보다도 더 화려하였다.

성 경: [사3:2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세마포 옷(*, 세디님) - 인도의 직물로 만든 베일이나 옷을 말한다(삿 14:12, 13, 잠 31:24).

(주); 너울(*, 레디딤) - 머리에서부터 겉옷 위로 둘러 전신을 가리는 넒은 망토를 말한다.

성 경: [사3:2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을 때, 부유한 시온의 부녀들은 축적된 부(富)를 이용하여 온갖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식품들로 몸을 가꾸었음을 이상의 목록들에서 알 수 있다. 마땅히 가져야할 내면의 덕(벧전 3:3, 4 참조)은 가꾸지 않고 오직 외모를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된 그들에게 여호와의 진노는 다음과 같이, 즉 먼저 사치스러운 것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누추하고 비참한 것들을 들여놓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곧 없어질 좋은 것들과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나쁜 것들의 대조가 '대신에'(*, 타하트)라는 전치사에 의해 짝지워진다. '타하트'는 본절에 모두 5번 나온다. '자자한 흔적'(*, 키)이란 노예 혹은 죄인의 표시로서 불로 낙인한 것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 열거된 사항들은 모두 전쟁과 관련된다. 즉, '상처입고-포로로 잡히고-슬픔으로 머리를 뜯고-국가적 재난에 직면해 베옷을 입고-끝내는 노예가 된다.' 시온의 부녀들이 누렸던 한때의 쾌락과 허용은 전쟁과 더불어 일순간에 재난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성 경: [사3:2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너희 장정(壯丁)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戰亂)에 망할 것이며 - 앞절에서 암시되었던 상황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전쟁에서 읽은 것은 장식품들만이 아니다. 그들의 남편이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 자신은 과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불행 이외에, 나라 전체가 치욕적인 패배 속에 함몰되리라는 내용도 함축되어 있다.

성 경: [사3:2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주);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 성문은 백성들의 삶의 중심지이다. 한때 웃음소리 드높았던 그곳이 그날에는 통곡소리로 가득할 것이다. 한때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던 그곳은 그날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울부짖음만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텅 빈 공간이 될 것이다(14:31;렘 14:2;애 1:4).

성 경: [사3: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주); 아이들로...적자들로...하시리니 - '아이들'(*, 네아림)과 '적자들'(* -, 타알룰림)은 병행하는 동의어이다. 이 명사들은 비인격적인 추상 명사로서 나이의 측면에서라기보다는 그 성격적 측면에서 '어린 것들'이라고 호칭된다. 따라서 이 말은 '유치함', '치졸함'(Delitzsch) 혹은 '무책임성'(Leupold)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이 20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스를 예언한 것(왕하 16:2)이라고 하기도 하고(Ewald, Hitzig, Knobel), 혹은 이사야 선지자 이후의 일련의 사악한 왕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Lowth). 그러나 12절의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말은 특정한 인물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적자'라고 번역된 '타알룰림'이 '욕망을 만족시키다', '자기 기분을 채우다'는 뜻을 가진 '히트알렐'(*)에서 파생되었음을 보더라도, '적자의 통치'라는 것은 '법과 공의도 없이 오직 통치자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잔인성을 만끽하는 공포 정치'임이 분명하다. 5절 이하에서는 이러한 통치가 가져오는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성 경: [사3: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주);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 먼저 수평적 측면에서 극단적인 이기심과 불신으로 말미암는 인간 관계의 파탄이 초래된다. 그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특징지워진다.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사는 이웃은 각기 돌보고 서로 즐거워해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로 학대하고 잔해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주);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 수직적 측면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권위의 상실이다. 그것은 하극상으로 특정지워진다. 고대 사회에서 노인은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다(레 19:32;신 28:50). 마땅히 있어야 할 공경과 우러름이 사라진 사회는 더 이상 질서있는 사회, 틀을 갖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총체적으로 '무정부 상태'로 파악될 수 있다.

성 경: [사3: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선지자는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한 토막의 짧은 삽화를 소개한다. 그것은 남들보다 점잖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받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 이 말은 앞의 '우리 관장이 되어'에 병행하는 말이다. 그 뜻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당신의 책임하에 수습해 달라'는 것이다. '손'(*, 야데카)은 권위를 상징하는 낱말이다(창 16:9;출 18:10).

성 경: [사3:7]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 문자적인 뜻은 '나는 싸매는 자가 되지 않겠다'이다. '고치는 자'라고 번역된 '호베쉬'(*)는 '싸매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관장이 되어 달라고 초청받은 이의 이러한 거절에 대해 어떤 이들은 '나는 하지 않겠다'는 항의와 반감의 표현이라고도 하고(Lowth, Knobel, Alexander) 혹은 '나는 할 수 없다'는 무능력의 고백이라고 보기도 한다(Targum, De Wette, Leupold, Delitzsch).

성 경: [사3:8]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주);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 '멸망하였고'로 번역된 '카쉘라'(*)는 '흔들거리다', '걸려 넘어지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엎드러졌다'로 번역된 '나팔'(*)은 '떨어지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예루살렘이 비틀거리고 유다가 떨어졌다'가 된다. 선지자가 여기서 완료 시제를 쓴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확실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예언적 완료 시제).

(주); 그 영광의 눈을 촉범(觸犯)하였음이라 - '촉범하였음이라'(*, 라므로트)는 말은 '항거하다', '대들다'는 뜻을 가진 동사 '마라'(*)에서 연유하였다(시 78:17). '영광의 눈'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에서 뿜어 나오는 신령한 빛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은 종종 '눈'으로 비유된다(욥 25:5 참조).

성 경: [사3:9]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주);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소돔과 같으니 - '그들의 안색'(*, 하카라트 페네헴)은 탈굼역과 시리아 역본을 따른 몇몇 주석가들에 의해 '한 쪽편을 들어 낯을 보아주는 당파적 편애'로 해석되기도 한다(Clericus, Hitzig). 그들은 신 1:17;16:19;잠 24:23;28:21 등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에서 그 근거를 취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어떤 특수한 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기보다는 병행하는 구절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죄악이 너무 깊어서 얼굴에까지 각인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Gesenius, Calvin, Delitzsch 등). 앞절에서 묘사된 그들의 죄는 뼈 속까지 파고들어서 영혼마저 마비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며 굳이 죄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자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성 경: [사4:1]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주);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 이전에 고운 얼굴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었던 여자들이 더할 나위 없는 비참함으로 남자를 구걸하는 지경에까지 떨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은 완전수로서 허다하게 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본문의 한 남자는 전쟁에서 죽지 않고 생존한 사람이다. 그에게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애걸한다.

(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 우리를 먹여 달라, 입혀 달라 조르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본처가 아닌 첩이라 할지라도 부양받을 권리를 지녔다. 그러나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는 여인들은 그러한 당연한 권리조차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주);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 그들의 소원은 한 가지뿐이다. 제발 결혼만 해달라는 것이며 '...의 아내'라고 불리우게 해 달라는 것이다(창 12:17, '아브람의 아내 사래';창 46:19, '야곱의 아내 라헬').

(주); 우리로 수치를 면케하라 - 그들이 이처럼 결혼하기를 구걸하는 것은 수치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수치는 과부의 수치요(54:4), 또한 자식을 갖지 못한 수치이다(창 30:23). 시온의 부녀들의 교만과 허영은 끝내 수치를 면케 해달라고 비는 굴욕으로 마감된다.

성 경: [사4:2]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주); 그 날에(*, 바욤 하후) - 앞절과 동일한 '그 날에'라는 말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용은 정반대이다. 1절의 '그 날'이 심판의 날이요 수치의 날이며 서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이라면, 본문의 '그 날'은 회복의 날이요 영광의 날이며 새로운 싹이 돋는 날이라고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싹이...그 땅의 소산은 - '여호와의 싹'이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보는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일치한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미 시작하신 구원 운동을 비유하는 것이며, 그 운동의 일직선상에서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Leupold). '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체마흐'(*)는 식물의 자라남이 함축하고 있는 신선한 생명력과 활력을 나타내는 말로서, 우리말의 '싹', '가지'보다 더 포괄적이다(창 19:25;렘 23:5;겔 16:7;호 8:7;슷 3:8). 때로 망각되고 때로 은폐되었던 여호와의 싹, 즉 여호와의 구속 사역은 질긴 생명력으로 엄동(嚴冬)의 땅을 뚫고 솟아올라 그 가냘픈 듯이 보이는 싹을 틔운다. 어떤 주석가들은 병행하는 구절에서 이와 동의어로 쓰인 '땅의 소산'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이중적 기원을 읽기도 한다(Vitringa, Hendewerk). 곧 그것이 '여호와의 싹'인 한에서 신적인 기원을, 다른 한편 그것이 '땅의 소산'인 한에서 인간적인 기원을 묘사한다는 것이다(롬 1:3, 4 참조). 그러나 선지자가 그 같은 것을 말하고자 의도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계속해서 선지자는 거듭되는 4개의 명사로 여호와의 싹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주);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 개역 성경에는 '아름답다'와 '영화롭다'로만 표현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비슷한 뜻을 가진 4개의 명사, 즉 '체비'(*), '카보드'(*), '가온'(*), '티프에레트'(*)로 표현되어 있다. '체비'는 광채 혹은 영광을 뜻하며, '카보드'는 명예와 존귀 혹은 영광을 뜻하며, '가온'은 고상함과 위엄을 뜻하며, '티프에레트'는 장식 혹은 광채를 뜻한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뜻하는 4개의 명사를 병렬시킴으로써 선지자는 여호와의 싹이 나타내는 비할 데 없는 영광과 그 아름다움을 최고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아름다움이 모든 이들에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메시야의 영광이 믿음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만 밝히 보이듯이,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으로 비유된 여호와의 구원 운동이 지니는 지극한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에게만 인식되는 것이다.

(주);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 - 이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며, 2:2-4:1에 묘사된 심판에서 생존한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Leupold). 이들에 대한 묘사가 다음절에서 계속된다.

성 경: [사4:3]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주);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 '시온'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집을 가리키는 동일한 이름이다(2:3). '남아 있는 자'(*, 하니쉬아르)와 '머물러 있는 자'(*, 하노타르)는 동의어로서 둘 다 집합적인 의미를 갖는 단수로 쓰였다(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n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고 칭함을 얻으리니 - '녹명된'이란 표현은 '생명의 책'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출 32:32;시 69:28;단 12:1;말 3:16;눅 10:20;빌 4:3;계 3:5;13:8;17:8;20:12, 15;21:27). 고대의 도성(都城)들은 그 도성의 시민으로 인정된 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한 시민 인명록(人名錄)을 보존하였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고 혹은 지워지는 것은 공동체의 삶가가 관련하여 개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종말론적으로 표상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요 세말의 구원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차이는 단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느냐 안하느냐를 넘어서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문제로까지 부각되는 것이다(행 13:38 참조). 따라서 이들에게 '거룩'(*, 카도쉬)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부여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화하는 심판을 통해서 더러움의 때를 벗고 순결한 원상태로 회복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사4:4]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주);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 '루아흐'(*)는 '영' 혹은 '바람'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영은 땅 위를 휩쓰는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놀라운 힘과 권능으로써 더러운 모든 것들을 제거하신다. 그 앞에서 악인이 징벌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은 '심판의 영'이라 불리우며, 또한 불로 태움같이 악을 철저히 제거하기 때문에 그것은 '소멸의 영'이라 불리운다(Delitzsch). 이러한 씻음이 선행된 뒤에야 이스라엘은 비로소 본래의 '거룩한 나라'(출 19:6)로 회복될 것이다.

(주);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정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 '시온의 딸들'의 죄악을 선지자는 '더러움'으로 표현하고, '예루살렘'(의 남자들)의 죄악을 '피'로 표현한다. 남자들, 특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피'(*, 데메)라 불러 마땅하다. 여자들은 허영과 사치속에서 음욕을 찾아 헐떡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더러움'(*, 초아트)이라 불러 당연하다. '오물(혹은 배설물)'을 뜻하는 '초아트'는 그들의 도덕적 불결함을 드러내고, '피'는 그들의 법적인 살인 행위를 고발한다(Delitzsch).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온전히 씻겨지며, 청결케 될 날이 온다. 그날은 여호와의 구원의 날이다. '씻으시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츠'(*)는 '몸을 정결케 한다'는 신체적 의미 이외에도 법적으로 '사면되다', '깨끗케 되다'는 의미로 내포하고 있다.

성 경: [사4:5]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주);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만드시고 -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그리고 창조하실 것이다(*, 우바라), 여호와께서. 시온 산의 모든 장소(*, 메콘) 위에와 그녀의 집회(*, 미크라에하)위에...' 시온 산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여호와의 전의 산'(2:2)일 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서 축제를 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여호와는 과거 광야 유랑 때 시내 산에서 보였던 영광을 훨씬 능가하는 새로운 영광을 창조하신다. 이 영광으로 인해 '시온 산 구석구석이 찬란하게 빛날 것'(Calvin)이며, 이 영광의 빛으로 인해 시온 산은 모든 산 위에 뛰어나 굳게 서며 만방이 그리로 몰려들게 될 것이다(2:2).

(주);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 - 선지자는 독자의 시선을 멀리 광야 유랑 시대로 인도한다. 그때 여호와는 낮의 구름과 밤의 불로써 출애굽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해주셨던 것이다(출 13:21, 22). 낮의 구름과 밤의 불은 여호와의 임재와 보호의 표징이었다. 구름과 화염 사이에 놓여 있는 '연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델리취(Delitzsch)는 '구름과 연기'를 중음법(重音法)으로 파악한다. 즉, 형체는 구름이면서 실체는 연기로 되어 있어 일반적인 구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구름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이가 주석가들은 불이 없이는 연기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화염'에 연결시킨다(70인역, Vitringa, Lange, Hengstenberg). 공동 번역은 본문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솟아오르는 연기와 환한 불길.'

(주);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 '천막'(*, 후파)은 덮여 있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시온 산위에 구름 형태로, 연기와 화염의 빛의 형태로 떠 있게 된다.

성 경: [사4:6]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주); 또 천막이 있어서...되리라 - 본절에 나오는 낮의 더위와 풍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대적인 세력들에 대한 상징어이다. 이들에 맞서 그늘을 지어주고 숨을 곳을 만들어 주는 '천막'은 '구름'(Lowth)이나 '시온 산'(Delitzsch)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으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Gesenius, Gray).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의 그늘이며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시 91:1):"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6, 7).

성 경: [사5: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주);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노래하리라'로 시작한다. 그 노래는 '살아하는 자가 소유하고 있는 포도원'에 관한 것이다. 남자 친구 사이에 맺어진 깊은 우정을 가리키는 '야디드'(*)와 '도드'(*)가 본문에서는 동일하게 '사랑하는 자'로 번역되었다. 선지자가 자신의 벗이라고 부른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일컫는 친숙한 비유어이다(3:14;시 80:8).

성 경: [사5:2]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주);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 포도원에 기울인 주인의 정성과 수고가 연이어 기술된다. 그는 좋은 장소를 선택하였을 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경작하였다. '땅을 파다'(*, 아자크)는 곡괭이로 땅을 푸석푸석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구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온다. 그 다음 단계는 여기저기 박혀 있는 다돌들을 제거하는(*, 사칼) 것이다. '사칼' 동사는 '아자크'와 더불어 피엘 동사로 쓰여서 '돌을 옮기다'는 뜻을 갖는다.

(주);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 이처럼 할 수 있는 모든 수고를 다했으니 주인으로서는 좋은 포도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즉 '들포도'(*, 베우쉼)를 낸 것이다. '베우쉼'은 '악취를 풍기다'는 뜻의 '바아쉬'(*)에서 파생된 명사로, 조악하고 쓴 야생 포도를 가리킨다(라틴어:Labrusca). 70인역(LXX)은 이것을 '가시나무(혹은 엉겅퀴)'(*, 아칸다스)로 해석했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노래가 끝나고 다음절에 선지자의 친구이며 포도원 주인인 여호와의 노래가 1인칭으로 이어진다.

성 경: [사5: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 '이제'(*, 아타)는 현재 시점을 말한다기보다는 '사정이 이와 같으니'라는 뜻의 논리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Alexander). 예루살렘과 유다 주민들은 판단하는 자로서 소환된다. 그들은(칼빈(Calvin)의 주장처럼) 그들 자신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낯선 사람과 그의 포도원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소환된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이 이야기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대상이 자신들임을 알지 못한다. 구약에 있어서 이와 동일한 경우는 삼하 12:1-6에 나오며, 신약에서는 마 21:33-41에 나온다. 두 경우 모두 처음에는 이야기 속의 대상들이 자기 자신임을 모르고 판단하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판단을 구하는 내용이 다음절에서 의문형(interrogation)으로 제시된다.

성 경: [사5: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있었으랴 - 본문과 다음절('이제 내가') 사이에는 휴지(休止)가 있어서, 마치 청중들이 주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포도원을 위하여는 어떠한 변명도 주어질 수 없음을 침묵으로써 시인하는 듯하다(Gray). 그러나 주인의 단호한 말이 이 침묵을 깨뜨린다.

성 경: [사5:5]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주); 그 울타리를 걷어...그 담을 헐어 짓밝히게 할 것이요 - 주인의 진노는 먼저 포도원을 보호하고 있던 울타리와 담을 허물어뜨리는 것으로 표출된다. 포도원은 대개 '가시 울타리'(*, 메수카트) 혹은 '돌담벽'(*, 가데르)으로 둘렀으며 때로 완전성을 기하기 위하여 울타리와 돌담벽을 이중으로 두르는 경우도 있었다(G. Rawlinson). 이러한 울타리와 돌담이 제거될 때, 포도원이 사람과 짐승에 의해 '짓밟히고 먹힘을 당할 것임'은 명약 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성 경: [사5: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주);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 주인에 의해 더 이상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포도원은 자연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잠 24:30, 31). '질려와 형극'(*, 솨마르 와솨이트)은 '가시덤불과 가시'란 뜻이다. '가시덤불'은 '황무한 땅'에 어울린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받은 땅, 즉 실락원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듯이(창 3:18),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황무하게 된 포도원에 가시덤불만 무성하다. 가시나무는 종종 인간의 여러 죄악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 경: [사5: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주);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 이것은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2, 4절)에 대한 설명이다. 여호와께서 기대하신 좋은 포도는 '공평'(*, 미쉬파트)과 '의로움'(*, 체다카)이었다(1:21, 27). 그러나 정작 맺힌 것은 '포학'(*, 미스파흐)과 '울부짖음'(*, 체아카)이었다. '미쉬파트'와 '미스파흐', 그리고 '체다카'와 '체아카'는 언뜻 들어서는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음이 유사하다. 이런 유사성을 이용하여 선지자는 속내용은 변질되었음에도 겉모양만 비슷한 이스라엘의 범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1:22). '미쉬파트'와 대조 '체다카'와 대조되는 '미스파흐'는 '피흘림', '억압'을 뜻하며 '체다카'와 대조되는 '체아카'는 '억눌린 자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출 3:9)를 뜻한다. 이 억압과 부르짖음이 여섯 번의 '화 있을진저'(8, 11, 18, 20, 21, 22절) 모음 속에서 상세하게 묘사된다.

성 경: [사5: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가옥에 가옥을 연(連)하며 전토(田土)에 전토를 더하여 - '화 있을진저'(*, 호)로 시작되는 글모음 중 첫 번째는 탐욕스런 부자들에 대한 것이다. '토지'와 '가옥'은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요 생존의 근거였다(레 25:33). 하나님의 율법은 토지의 매매를 금지하며 설혹 주인이 바뀐 토지라 할지라도 7년 안식년다을 일곱 번째 맞는 그 다음 해, 즉 50년째(회년)가 되면 원주인에게 다시 귀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25장). 이처럼 율법 속에 명시된 토지 보유의 원리와 경제 정의를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가옥과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자신들의 부(富)를 축적하는 행위는 율법에 대한 반역이요 공동체의 기틀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라고 말해 지나침이 없다(왕상 21:2;욥 22:8;미 2:2).

성 경: [사5: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 '정녕히'로 번역된 '임-로'(*)는 무자적으로 '...않는다면'(if-not)이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부정적인 어휘를 써서 가장 강력한 확신을 전달하는 고대의 서약 형식에 일치하는 것이다(민 14:23;시 95:11).

성 경: [사5:1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열흘같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바트가 나겠고...한 에바가 나리라 - 여호와께서 비를 막으시면(6절) 농작물이 자랄 수 없고 그것은 기근이라는 무서운 재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제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 사는 부자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머물 수 없을 것이다. '열흘갈이'는 한 쌍의 황소가 하루 동안 밭을 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Delitzsch, Gray). '바트'(*)는 액체의 측량 단위로서, 건조한 곡식을 재는 '에바'(*, 에파)와 일치한다. 에스겔에 의하면, 10에바는 한 호멜에 해당된다(겔 45:11). '호멜'은 왕조 시대 이후에 '고르'(*, 코르)라고 불리워졌으며, 그 용량은 약 220리터 정도이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본문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징벌의 결과로 밭은 씨를 뿌린 것의 1/10에 해당하는 수확밖에 거두지 못하며 포도원에서도 포도주가 거의 산출되지 못할 것이다'(Calvin).

성 경: [사5:1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밤이 깊도록 머물러...화 있을진저 - '화 있을 진저'(*, 호)로 시작되는 글모음 중 두 번째는 탐식가들과 그들의 쾌락 추구에 관한 것이다. 8절에 묘사된 부자들의 풍요로움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는 술자리로 이어진다. 여기서 '독주'(*, 쉐카르)와 '포도주'(*, 야인)가 병행되고 있는데, 후자가 순수한 포도주라면 전자는 석류(아 8:2)와 사과, 꿀 등을 섞은 혼합 포도주로서 알콜 도수가 훨씬 더 높은 것이다. 술에 취해 세월을 허비하는 방탕함은-사도 바울에 의하면-악한 세상의 특징이다(엡 5:16, 18).

성 경: [사5:12]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생각지 아니하는도다 - '여호와의 행하심'(*, 포알 야훼)은 '그의 손으로 하신 일'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역사속에서 활동하신 일, 특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힘들여 수고하심과 일하심을 가리킨다(시 92:4). '포알'(*)에는 '노동', '일'이라는 뜻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을 삼고 육체의 향락에 도취된 자들에게 여호와의 일, 즉 영적인 역사는 한낱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주의 행하심에 관심도 아니 갖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도 않는 소행은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엡 5:17).

성 경: [사5:1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사로잡힐 것이요...주릴 것이요...목마를 것이며 - 현재의 열락(悅樂)에 대조되는 미래의 고통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눅 6:25)와 일치한다. 본절에 나오는 '귀한 자'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영광'이니, 백성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자, 즉 사회의 지도급 인사를 말하며, '무리'는 그들과 함께 죄악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킨다.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해 과거 시제로 묘사된 '사로잡힘'과 '굶주림'과 '목마름'은 그들의 '무지함'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이때 그 무지는 단순한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여호와의 일에 대한 악의적인 무관심(12절)이라고 할 것이다.

성 경: [사5:1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13절과 마찬가지로 '이러므로'(*, 라켄)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는 앞절에 묘사된 징벌의 결과, 이들이 어느 정도까지 몰락할 것인가를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함이다. 뒤따르는 동사들 역시 13절과 마찬가지로 과거 시제로 쓰여서 예언 성취의 확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음부'에 관해서는 삼상 2:1-10 주제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陰俯) 개념'을 참조하라. 선지자에 의하면, 음부는 탐욕스러운 괴물과 같아서 끝없는 욕망으로 한껏 입을 벌려 죄인들을 삼킨다(합 2:5). 삼켜질 대상들이 뒤에 열거된다.

(주); 그들의 호와로움과...그 중에서 연락(宴樂)하는 자 - '그들의 호와로움'(*, 하다라)은 직역하면 '그녀의 장식'이니, 곧 예루살렘의 허영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소란스러운 무리'(*, 하모나)와 그들이 내뿜는 '모든 소음'(*, 쉐오나), 그리고 '환락'(*, 알레즈)들이 넓게 열린 음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이는 사악한 자들의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진다고 한 고라 자손의 노래(시 49:14)를 연상시킨다(Delitzsch).

성 경: [사5:15,1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이러한 징벌의 결과로 이루어질 궁극적인 미래의 모습이 두 개의 대립 개념-인간은 낮아지고(15절) 여호와는 높임을 받는다(16절)-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주제는 2장에서부터 계속 발전된 것이다.

(주);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 '공평'과 '의'에 대하여는 1:21, 27을 보라. 만군의 여호와, 즉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평과 의 가운에서 당신을 가장 잘 드러내시며, 당신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도 바로 공평과 의 가운데서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일찍이 공평과 의 가운데서 행하였더라면 그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온 세계에 거룩하신 분으로 높임을 받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공평과 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으로 응수할 뿐이었다(7절). 이에 하나님은 비뚤어진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심판의 엄정함과 죄를 척결하시는 의로움을 통해서 교만의 극치에까지 높아진 이스라엘을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던지시며(14절), 마침내 당신 자신을 온 세계에 거룩하신 분으로 친히 증거하시려는 것이다.

성 경: [사5:1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草場)에 있는 것같이 먹을 것이요 - 본문은 주석가들에 따라 그 해석이 크게 둘로 나뉜다. (1) 약속으로 보는 경우:'어린 양들(의인)이 살진 자들(부유한 죄인)의 소유를 대신 차지하게 될 것이다'(Targum, Calvin, Vitringa). (2) 경고로 보는 경우:'거룩한 땅이 이방인들의 수중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Gill), 혹은 '부자의 소유가 가난한 자의 수중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Hendewerk), 혹은 '땅 그 자체가 파멸될 것이다'(Michaelis, Lowth).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바람직하다.

성 경: [사5:1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화 있을진저 - 세 번째 화는 여호와의 행하심을 믿지 아니하므로(12절) 오히려 대담하고 뻔뻔하게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선지자는 이들을 굵은 밧줄로 마차를 끄는 모습에 비유한다. '거짓의 끈'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교묘한 궤변이나 그릇된 노리를 가리킨다(Vitringa, Calvin). '끈다'로 번역된 '마솨크'(*)는 그 외에 '견고하게 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문의 의미는 자명하다. 즉, 거짓된 지식과 언변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불법을 합법화시킴으로써 악을 행함에 있어서 더욱 대담해진다는 것이다. 그 행위의 대담함과 그 논리의 견고함은 후반부의 '수레 줄'에서 한층 강화된 비유적 표현으로 반복된다. '수레 줄' 즉 마차의 밧줄은 그들이 무시하고 조롱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만 끊어지게 될 것이다.

성 경: [사5:1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 이들이 앞절에 묘사된 것과 같은 행위를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임하지 않는다'는 완악한 신념이 깔려 있다.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제발 하나님으로 하여금 지체치 말고 신속하게 움직이게 하여 우리 눈으로 그가 행하신다고 아득한 옛날부터 약속해 오신 그 심판을 보게 하라. 그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킬 것 아니냐 ?' 이런 조롱은 최고의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미 죄악으로 굳어져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느껴질 리가 없다. 본문과 관련하여 벧후 3:3-5, 9을 참조하라.

성 경: [사5:2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화 있을진저 - 네 번째 화는 도덕을 파괴하고 가치 전도(顚倒)에 앞장 서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자기의 잘못을 감추고 오히려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채택된 거짓 논리하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은 철폐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선과 악을 규정한 객관적, 초월적인 규범이 더 이상 존재치 않으며, 있다면 언제나 선한 그들의 행위 밖에 없다. 이러한 범죄는 지도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고질적인 질병들이다. 혹자는 본문을 23절과 관련하여 불의한 사법부에 적용시키나(Gesenius, Hitzig), 유다 지도자 일반의 범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광명'과 '단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상징하며(시 19:8, 10), '흑암'(시 112:4;잠 2:13;전 2:13;마 6:23) '쓴 것'(민 5:18;신 32:32;렘 2:19;4:18;약 3:11)은 악의 상징어로 쓰인다.

성 경: [사5:2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화 있을 진저 - 다섯 번째 화는 자기 자신을 지혜자로 자처하는 교만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자기 중심적 논리의 귀결은 언제나 교만이며, 교만은 악의 완성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위의 다른 권위를 인정치 않는다. 따라서 어떠한 훈계나 경고도 그에게는 들리지 않으며 교만은 이런 자기 폐쇄성을 그 특질로 삼는다(잠 1:7;12:1).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들은 어리석음의 전형일 뿐이다. 참된 지혜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주어진다(잠 1:7;3:5;9:10). 한편, 본문에 언급된 '지혜'와 '명철'은 위대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들로 간주되었다(11:2;창 41:39;삼상 16:18).

성 경: [사5:22,2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화는 술에 젖은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범죄한 유다 지도자들의 한 전형으로 그려졌다.

(주);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 선지자의 어조는 풍자적이다. 선지자는 그들을 용감하고 힘이 넘치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용감함은 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포도주를 마시기 위한 것이며, 그 유력함은 공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독주를 빚기 위한 것이다. '포도주'와 '독주'에 관하여는 11절을 참조하라.

성 경: [사5:2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이로 인하여'(*, 라켄)라는 접속사에 유도되는 형벌 내용은 앞의 네 가지 화(18, 20, 21, 22절)에 대한 것이다. 자기 중심적 아집에 사로잡혀 선악을 혼동하고 어떠한 훈계도 거부한 채 교묘한 논리를 내세워 스스로를 정당화하기에 바쁜 유다 지도자들은, 당장은 권세가 있고 힘있어 보일지 모르나 선지자의 눈에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풀 같고 나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벧전 1:24). 불 같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들은 마치 땅 속에서 썩어가는 뿌리와 먼지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꽃마냥 그렇게 허무하게 소멸되고 말 것이다.

(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멸시하였음이라 - 그들은 실수에 의해서 한두 가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 자체를 무시하고 적대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범죄는 총체적이다.

성 경: [사5:25]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 본문은 몇몇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대로(Alexander, Calvin, Leupold)과거에 내려진 하나님의 형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여기 쓰인 동사들은 예언적 과거 시제로서 임박한 미래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선지자는 24절에 시적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서 임할 것인지를 말하려 한다. 본문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분노가 그 백성들 안에서 불탈 것이며'이다. '분노'로 번역된 '아프'(*)는 본래는 '(숨쉬는) 콧구멍'을 의미하는데, 화가 극에 달하여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모습에서 연유하여 '분노'란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주); 산들은 진종하며 - 본문을 과거로 해석하는 이들은 이 말이 웃히야 왕 시대에 일어난 지진(암 1:1)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Leupold). 그러나 이 말은 여호와의 분노와 심판의 격력함을 나타내는 비유 언어로, 바로 앞에 나오는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는 표현과 연관된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5:2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 - 앗수르(혹은 바벨론) 군대의 침공을 가리킨다. '먼 나라'라는 표현은 신 28:49 이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들은 땅 끝에서 사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니(39:3), 당시 사람들에게 유브라데 강은 땅 끝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슥 9:10 참조).

(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 올 것이로되 - 먼 곳에서부터 점차 가까이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보라'라는 감탄사에 이어 두 개의 부사로 집약되고 있다:'빠르게'(*, 메하라)와 '날렵하게'(*, 칼).

성 경: [사5:2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 혹자는 이 구절이 밤에 휴식을 취할 때에도 허리띠와 신발 끈을 풀어 놓지 않을 만큼 전쟁에 임하는 각오가 대단하다는 식으로 해석한다(Henderson, Delitzsch). 그러나 '끊어지다'(*, 니타크)는 동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행진에 방해를 주는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기본적인 군사 장비를 철저하게 점검했음을 말하는 것이다(Leupold).

성 경: [사5:2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 상황은 점점 더 급박해진다. 질서 정연하게 대오(隊伍)를 지어 먼 곳으로부터 달려온 그들은 이제 유다를 향한 모든 전쟁 준비를 다 끝마쳤다.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무기로 꼽히는 화살과 병거들은 출전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목표물을 향해 활은 '당기어졌다'(*, 데루코트). 이는 직역하면 '활을 발로 밟았다'이다. 고대인들이 전쟁에서 사용했던 강궁(强弓)은 활이 너무 커서 발로 밟아야만 구부릴 수 있었다(대상 5:18;시 7:13;11:2).

성 경: [사5:2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 함성과 더불어 드디어 전쟁은 시작된다. 고대인의 전쟁은 함성과 함께 시작되었다(시 74:4;렘 2:15). 선지자의 귀에 그 소리는 마치 암사자와 어린 사자의 포효소리로 들린다. '어린 사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피림'(*)은 젖을 떼고 어미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먹이를 잡을 줄 아는 젊은 사자를 가리킨다. '부르짖음'과 '소리 지름'에 다같이 사용된 '솨아그'(*)는 사자가 먹이를 찾을 때의 포효소리를 뜻한다.

성 경: [사5:3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주);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어두우리라 - 위아래를 둘러보아도 도피할 데도, 도움을 청할 데도 없다(Leupold). '바라보다'로 번역된 '나바트'(*)는 '기대를 품고 바라보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땅을 바라봄'은 '하늘을 바라봄'과 대조되는 시적 표현이다(8:22). 보이는 것은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움과 고통뿐이다. 위를 쳐다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고통과 결부된 흑암은 이스라엘의 절망을 표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야말로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20절) 이들에게 참으로 적절한 심판 아닌가 !

성 경: [사6:1]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 이 말이 왕이 죽기 전을 가리키는지 혹은 죽은 후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왕이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Gray). 웃시야 왕의 치세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대하 26장) 백성들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종교적 부패의 상처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규적인 제사는 있었으나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식어갔으며 향락과 사치 풍조가 더욱 번져갔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한편,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 745-727년)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갔다.

(주); 내가 본즉 - 이 말이 선지자가 실제로 눈을 뜨고 보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4:24). 그러면 선지자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가?(Gray, Knobel).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는 계시의 진실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 즉 내적인 영혼의 눈으로 초자연적인 상(像)을 인식했음을 말할 것이다(G.Vos, Delitzsch).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느냐'이다.

(주);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진다. 선지자가 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 '높이 들린 보좌'는 아마도 여섯 계단의 꼭대기에 놓여져 있는 솔로몬의 보좌에서 연상된 듯하다(왕상 10:18).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계속된다.

(주);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왕들은 보통 흘러 내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찰 만큼 방대했으니 여기서 지상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되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Calvin). '성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칼'(*)은 웅장하게 건축된 궁전(잠 30:28;단 1:4) 혹은 여호와의 성전(왕하 24:13;시 29:9)을 뜻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사야가 본 이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요 12:41). 이 영광은 죄많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비밀한 것이어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긴 옷자락으로 감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주의 영광에 있어서는 그 감추임조차도 영광이다.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고 오직 공중나는 스랍들만 그를 찬미할 뿐이다.

성 경: [사6:2]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모셔 섰다'(*, 오메딤 밈마알 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왕상 22:19;욥 1:6;슥 6:5). '스랍들'(*, 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이다(14:29;30:6;민 21:6,8;신 8:15).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주);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그 둘로는...그 둘로는 날며 -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한 듯하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Leupold).

성 경: [사6:3]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서로'(*, 제 엘 제)라는 말은 스랍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노래 부르는 방식(교송)을 나타낸다. '창화하다'(*, 카라)는 목소리를 드높여 찬양함을 뜻한다. 천상의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로는 욥 38:7;시 29:1,2;계 4:8;7:11 등이 있다.

(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스랍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거룩'(*, 카도쉬)과 '영광'(*, 카보드)이었다. '거룩'이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아니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광'은 역사와 자연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한 신적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민 14:21;시 57:5,11;72:19). 다시 말하면, '거룩'은 인간과 구별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은폐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영광'은 인간을 위한 신적 현현(顯現)으로서 계시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 기독 교회는 세 번 반복된 '거룩'이란 말에서 삼위 일체의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같은 반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렘 7:4;겔 21:27). 칼빈(Calvin)조차도 이 구절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敎義)를 인용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하였다.

성 경: [사6:4]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 여호와가 강림하실 때 시내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출 19:18) 여호와의 거룩과 영광을 찬미하는 스랍들의 드높은 노랫소리에 선지자가 서 있는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하니, 이는 스랍들의 찬양이 얼마나 힘있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주);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 연기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4:5;왕상 8:10;겔 10:4, Gray, Knobel).

성 경: [사6:5]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직역하면 ,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기 때문이다'이다. 선지자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완전 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됨과 그 백성의 죄악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출 33:20;삿 13:22). 환상 가운데 여호와를 목도한 선지자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의식 속에서는 자기가 벌써 죽은 것처럼 느꼈다.

(주);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 선지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지목해서 말한다. 이는 첫째로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마 15:11) 부정한 입술이 모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었다(약 3:2 참조).

(주);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깊은 연대 의식(혹은 책임 의식)을 느꼈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29:13에서 발견된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주);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그 자신과 민족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 선지자가 뵈온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었다. 성전 가득 뒤덮인 긴 옷자락, 주변에서 쉼없이 찬미하는 스랍들의 모습에서(1,2절) 선지자는 이 같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의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 의식(儀式)이 뒤따른다.

성 경: [사6:6,7]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화저(火著)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내 입에 대며 - '단'은 제단이니 곧 하늘에 있는 향단을 가리킨다. 계시록에 의하면, 하늘 향단은 금으로 만들어졌다(계 8:3;9:13). '핀 숯'은 불타는 숯 혹은 뜨거운 돌을 뜻한다. 천상에서 거행된 죄사함의 성례는 스랍 중 하나가 단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정금으로 만든 화저(불집게)를 가지고 핀 숯을 취하여 선지자에게로 날아가 그가 부정하다고 탄식한 입술을 거기에 댐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적인 행동은 다만 선지자에게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핀 숯' 자체가 정화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주); 보라...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스랍들의 말로 앞절의 신비한 행동의 의미가 밝혀진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평행법은 선지자에게 사죄의 확신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받은 사죄 의식에는 피흘림의 제사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 행위로 인하여 그 같은 제사가 불필요하게 될 날이 올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 경: [사6:8]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그 영광을 뵈었던 선지자는 이제 사죄함을 받은 이후에 영적인 귀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그 음성은 직접적으로 선지자를 향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Jerome).

(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선지자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에서 그곳에 참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왕상 22:19,20 참조). 그것은 헌신의 열정에 의해 자원하여 일하러 갈 사람을 구하는 음성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관으로 인하여 '엘로힘'(*)이라고까지 불리웠다(창 6:2;시 8:5).

(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입술이 정결케 됨으로써 죄에서 자유함을 입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 가슴의 뜨거움만큼이나 불타는 정열로 이렇게 소리친다:'나를 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 히네니)란 말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다(Alexander, Michaelis). 죄씻음을 받은 감격이 헌신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우로는 시 51:12-15에 언급되어 있다.

성 경: [사6:9]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 하나님의 명령은 '가서-말하라'는 두 개의 동사로 집약된다(출 3:16;7:15;삼하 7:5;18:21;왕상 18:8;대상 17:4). '이 백성'이란 말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경멸이 내포되어 있다(6:10;8:6,11,12;9:13;28:11, 14; 29:13;미 2:11;학 2:14).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상실하고 그 행위로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할 것이요 -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지자가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감각(혹은 영적인 불감증)은 예레미야가 말한 바 '마음이 강퍅하고 목이 곧은'(렘 7:24-26) 백성들의 상태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에 의해 그의 사역의 결과를 묘사한 말로 4복음서에서 인용되었으며(마 13:13;막 4:12;눅 8:10;요 12:39), 바울에 의해서 두번 인용되었다(행 28:26,27;롬 11:8).

성 경: [사6:10]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 앞절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이라면, 본문의 명령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깨닫지 못하며 알지도 못하리라'로 단언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지 못지않게 선지자 역시 자신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삼중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1)'둔하게 하라'(*, 하쉬멘):이는 '살지게 하라', '기름으로 덮이게 하라'는 뜻이니,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대해 마음으로 전혀 지각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2)'막히게 하라'(*, 하크베드):이는 '무디게 하라'는 뜻이니, 청력이 무디어져서 어떤 깨달음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3)'감기게 하라'(*, 하솨):이는 '흐려지게 하라'는 뜻이니, 시력과 함께 모든 통찰력을 상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사역으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다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가 선포해야 할 말씀 그 자체에서 이 같은 결과가 직접적으로 초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의 등처럼, 길의 빛처럼'(시 119:105) 사람을 밝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전적으로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비밀을 이렇게 묘사한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칼빈(Calvin)이 잘 말한 것처럼,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 하여 원망할 수 없는 일이며, 귀가 막힌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여 불평할 수 없는 일이며, 지각이 둔한 사람이 자기가 이해 못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판의 제1차적인 원인은 늘 죄인에게 있다. 그위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말미암는 버려둠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롬 1:24,26,28).

성 경: [사6:11,12]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마침내는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일 수 없다는 것을 선지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주여, 이 백성들의 눈먼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되겠습니까?"(시 90:13 참조). 이 같은 물음의 배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주); 대답하시되...많을 때까지니라 - 선지자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이 너무 깊어서 완전한 파멸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위한 것이어서 그것은 온 나라가 황폐되고 백성들은 이방 민족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전국가적인 재난으로 실현되어지리라는 사실이다.

성 경: [사6:13]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주); 그 중에 십분의 일이...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 본문은 내용상 앞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혹 심판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다 할지라도 - 1/10은 극히 적은 수를 가리킨다 - 그마저 계속되는 파멸의 와류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인 마침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절망에서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베임을 당한 나무의 표상에서 이러한 사상이 암시되고 있다.

(주);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남아 있는 것같이 -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상록수에 가까우며 완전히 베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는 강인한 속성 때문에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선택된 듯하다(Delitzsch). '그루터기'라고 번역된 '마체베트'(*)는 '뿌리'(De Wette), '줄기'(Gesenius), '기둥'(Leupold)을 뜻하는 말로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담지하고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Alexander).

(주);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최후까지 보존되어질 이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 제라 코데쉬)이다. '거룩한 씨'는 '행악의 종자'(*, 제라 메레임)와 대조되는 것으로서(1:4), 거듭되는 심판을 겪고서도 끝까지 살아 남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롬 11:5). 이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어'(37:31) 거대한 나무를 이루게 될 것이다.

성 경: [사7: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주);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본절은 예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로 - 에브라임 전쟁에 대한 요약이다. 선지자는 결과를 미리 말한 다음 세부적인 사항들을 밝히는 방식으로 예언을 진행시킨다. '웃시야-요담-아하스'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역사는 유다가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서 어떻게 국제적 분쟁의 회오리와 그 참혹한 파멸 가운데로 급락하게 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시로 - 에브라임 전쟁이었다(왕하 16장;대하 28장 참조). 구체적 설명은 강해란을 보라.

성 경: [사7: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주);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 '다윗 집'은 다윗 왕조에 속한 아하스와 그의 정부를 가리킨다. 선지자가 본문에서 '다윗 집'으란 표현을 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함축되어 있다. (1)다윗의 집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르신-베가의 동맹군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다윗 왕조를 폐하고 괴뢰 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다(6절). (2)이 위기는 다윗 왕조가 여호와와 맺은 언약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데서 온 필연적 결과이며(삼하 7장), 따라서 아하스가 직면한 외부적 위협은 실은 여호와의 징계로 주어진 것임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9절에서 선지자가 다시금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주); 왕의 마음과...흔들렸더라 - 이 불길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왕과 온 백성 곧 나라 전체가 보인 반응은 심장이 얼어 붙는 듯한 두려움, 그것이었다. 선지자는 그것을 직유법으로 표현한다:'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이는 주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드려내 주고 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불신은 오직 두려움만을 증폭시킨다.

성 경: [사7: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주); 때에 여호와께서...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 이 상황에서 선지자는 '스알야숩'이란 의미 심장한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과 더불어 아하스 왕을 만나라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 온다'는 뜻이다(10:21).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위협(단지 남은 자만 돌아온다) 혹은 약속(적어도 남은 자는 꼭 돌아올 것이다)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문맥상 위로의 약속에 더 큰 비중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 왕은 스알야숩뿐만 아니라 그 곁에 서 있는 이사야를 또한 만나야 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 있는 이사야의 이름은 스알야숩이란 이름과 함하여 완전한 계시를 이룬다(Leupold).

성 경: [사7: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 이사야와 그 아들 스알야숩이 아하스 왕에게 보여진 것이 하나님의 시각적 메시지였다면, 본절부터는(9절까지) 청각적 메시지가 명료하게 전달된다. 그 메시지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4개의 명령(혹은 권유)으로 시작된다. '삼가라'(*, 히솨메르)는 두려움에 쫓겨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종용하라'(*, 하쉬케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수 1:6)는 명령이 덧붙여진다. 왜냐하면 두려움이야말로 믿음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는 마음이 녹아 내리는 낙심밖에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앞의 두 가지가 신앙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라면, 뒤의 두 가지는 불신앙에서 오는 전형적인 상태이다.

성 경: [사7: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주);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이르기를 - 개역 성경에는 '때문에'(*, 야안 키)란 말이 빠져 있다. 원문대로 읽으면 '아람이 너를 대적해서 악을 도모하여,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도, 말했기 때문에'이다. 언제나 아람이 먼저 거론된다(4절). 이는 원정군의 주도권을 쥔 나라가 아람이었음을 나타낸다.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은 동의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을 셋으로 나누어 표기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운율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본문에서 시작한 긴 문장은 7절에서 끝난다(Gesenius, Hitzig, Ewald).

성 경: [사7:6]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하였으나 - 앞절에서 말한 '악한 꾀', 즉 원정군의 전쟁 목적이 명확하게 기술된다. 그것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그것을 곤하게 하고': '곤하게 하다'로 번역된 '네키체나'(*)는 '두렵게 하다', '포위하다'는 뜻이니, 곧 유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어넣어 스스로 무너지게 하자는 것이다. 고대의 전쟁은 신경전이 그 승패를 좌우했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쪽이 으레 패배하기 마련이었다. (2)'그것을 파하고': '파하다'(*, 나브키엔나)는 '산산이 쪼개다', '박살내다'는 뜻이니, 힘으로 유다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온 나라를 유린하자는 것이다. (3)'다브엘의 아들을...왕을 삼자':최종적인 목표는 다윗 왕조를 폐하고 자기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괴뢰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다브엘의 아들'은 '르말리야의 아들'이란 이름처럼 경멸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더구나 이스라엘인인지 수리아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왕상 15:18에 나오는 수리아인 '다브림몬'과 그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수리아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사7:7]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 본문은 5절에서 시작한 긴 문장의 귀결절에 해당하며 동시에 새로운 절을 유도하는 상관적인 기능을 갖는다:유다를 공격하여 정권을 바꾸고자 하는(6절) 르신과 베가의 악한 꾀는(5절)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7절). 왜냐하면...(8,9절).

성 경: [사7:8,9]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주);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 여기서 '머리'(*, 로쉬)는 한 나라의 수도 혹은 주권(통치)을 뜻하는 비유 언어이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의역 가능하다: '아람의 수도는 (오직) 다메섹일 뿐, 예루살렘은 아니다. 르신이 다메섹의 왕이라면 그의 통치는 (오직) 다메섹에만 국한될 뿐, 예루살렘에는 미칠 수 없다.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주); 육십 오년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 본문은 앞에 나온 내용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아람에 대한 진술에 이어 에브라임이 나온다는 것이다. (2)본문의 시점(아하스 왕 2년, 곧 B.C. 734년)으로부터 보면 에브라임의 패망이 불과 십 몇 년 내의 일인데 선지자가 65년이라고 말한 것은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본문을 후대에 편집되어 삽입된 것으로 간주했다(Eichorn, Gesenius). 그러나 현대적인 논리를 앞세워 섣불리 성경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선지자의 눈은 시종 일관 유다에 향해 있다. 주변 국가에 대한 언급도 유다에 관련있을 때만으로 한정된다. 그는 아람의 한계에서 그와 동맹한 에브라임의 운명을 읽고, 또한 에브라임의 운명에서 같은 민족인 유다의 미래를 읽는다. 그 미래는 전적으로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 둘째, 연대 문제에서 그것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한 B.C. 722년의 예루살렘 점령에 국한시키기보다, B.C. 669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 맞춘다면, 65년이라는 기한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앗술 바니팔은 주변 여러 민족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에 거주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에브라임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고 혼합 민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왕하 17:24;스 4:2).

성 경: [사7:10]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주);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 앞절과 본절 사이에 짧은 휴지(休止)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는 선지자의 전언(傳言)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마음이 앗수르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된다.

성 경: [사7:1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아하스 왕에게 그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징조'는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취해졌다. 그것은 때로는 이적(38:7,8;출 4:8)으로, 때로는 미래 사건들을 지명하는 지각 가능한 상징들(8:3,4,18;겔 12:6)로 나타난다. 만일 아하스가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한다면, 그는 이적적인 증거를 구함으로써 불신앙을 확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였다.

성 경: [사7:1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주);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여호와를 시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언행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신 6:16의 금지 계명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의 불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Umbreit)나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능력(Gesenius)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내적인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스스로 고안해낸 별도의 대책이 서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성 경: [사7:1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주);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하려느냐 - 개역 성경에 단수로 나와 있는 '사람'은 원문에는 '사람들'(*, 아나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선지자 자신을 가리킨다기보다는(Bultema) 아마도 권세자들에 의해 압제받는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책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

성 경: [사7:1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주);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문자적으로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창 29:32-35;30:6-13;3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관습으로 보인다(창 16:15;삼하 12:24;눅 1:62,63등). 그러나 누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 1:23에서는 본문의 주어가 3인칭 복수형(그들)으로 인용되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그 이름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르신-베가의 멸망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또 그의 어머니인 '처녀'(*, 알마)는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예로부터 학자들 간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1)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이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E.J.Young):이것은 아이의 성장과 아하스 당대의 정치적 상황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는 15-17절로 인해 수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본절의 아이와 15,16절의 아이를 구분하거나(박윤선), 혹은 본절과 15절의 아이와 16절의 아이를 각각 다른 인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Bultema, Calvin), 이 경우에 해석의 자의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마 1:23에 의거, 본문이 메시야적 예언임에 틀림없다고 할지라도 시공간적 거리를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그 어머니는 아하스 왕의 왕비 혹은 후궁을 가리키며, 그 아이는 히스기야를 가리킨다는 주장(Lindblom, Steinmann):이는 주로 유태계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연대기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B.C.728년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였으므로,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이다(대하 29:1). (3)그 어머니는 이사야 선지자의 아내이며 그 아이는 선지자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Clements):이 경우에 선지자가 8:3에서처럼 '선지자의 아내' 혹은 '여선지자'(*, 하네비아)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굳이 '알마'(*)라는 모호한 말로 대신하였는가가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의 아내처럼 오래도록 결혼 생활을 한 여자를 '알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도 수긍하기 힘들다. (4)선지자가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당시 유다에 살고 있던 어머니들을 가리킨다는 주장(O.Kaiser). 이 경우에 정관사 '하'(*)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상의 어떤 주장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 다만 이제까지 주어진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볼 때, 우선 징조로서의 이 아이는 아하스 당대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그 아이의 성장 기한과 르신-베가 동맹군의 몰락이 결부되어 있다는 15,16절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또한 이 징조는 아하스 당대에만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이 다윗의 집에 주어졌고, 더욱이 이 임마누엘의 위로가 앗수르의 위협과 더불어 소멸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큰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된다. 선지자의 예언이 궁극적인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인격 속에 임마누엘의 약속과 구원을 구현할 메시야의 탄생에서이다. 따라서 추측컨대, 아이의 어머니는 선지자와 동(同)시대 사람으로서 다윗 가문에 속한 한 처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 임마누엘은 위기의 순간에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장차 인간의 몸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함께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사7:1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때에 미쳐 - 영아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 선악을 분별한다 함은 영아의 상태를 넘어섬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그 아이가 자라서 사물을 판단하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나이는 대략 3세 정도로 추정된다.

성 경: [사7:16]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주);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 '미워하는'은 문자적으로는 '두려워하는'이다. 유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나라 수리아와 에브라임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과(B.C. 732년) 살만에셀 5세(B.C.722년)의 침공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며(왕하 15:29;16:9;17:6), 따라서 그들로부터 가해진 위협도 소멸될 것이다.

성 경: [사7:17]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여호와께서...임하게 하시리니 - 비록 수리아와 에브라임에 의한 위협은 소멸된다 할지라도 유다의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유다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앗수르로부터 올 것이다.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심판의 위협으로의 이 돌연한 변화는 실은 아하스 왕의 불신앙이 자초한 것이다(10-13절). 불신앙에 대한 심판은 여호와로부터 온다. 앗수르는 그 손의 막대기에 불과하다(10:5).

(주);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 앞으로 당할 환난의 무서움과 그 비참함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그 분열의 역사에 비견된다. 민족의 분열은 모든 비극의 뿌리요 모태였다.

성 경: [사7:18]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 - 유다를 괴롭힐 침략군에는 앗수르 뿐만 아니라 애굽도 첨가된다. 선지자는 애굽을 파리로, 앗수르를 벌로 비유하고 있다. 나일 강을 끼고 있는 애굽에는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많은 종류의 곤충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리가 많았다. 반면에 많은 산과 숲으로 우거진 앗수르에는 벌떼가 많았다. 본문을 역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황의 전후 관계가 불분명할 수 있다. 애굽 군대가 유다 땅을 유린하게 된 것은(왕하 23:28-30) 훨씬 후대의 요시야 왕 때였다(B.C.609년).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느고가 이끄는 애굽 군대와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군대가 격돌한 저 유명한 갈그미스(Carchemish)전투에서 애굽이 패퇴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주도권은 사실상 바벨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B.C.605년). 앗수르 군대에 의한 피해는 히스기야 왕 때 가장 극심하였다(36,37장).

성 경: [사7:19]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 선지자의 비유는 계속된다. 파리와 벌로 비유된 애굽과 앗수르 군대는 여호와의 신호에 따라서 유다 땅 전역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 언급된 네 장소를 각각 파리와 벌의 서식지로 파악하여, 거친 골짜기와 가시나무 울타리는 파리에, 바위틈과 모든 초장은 벌에 연결시켰다. 또한 클레리커스(Clericus)는 이들 장소들이 군대가 주둔하기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스발트(Oswalt)는 이들이 곤충들로 비유된 외국 군대로부터 유다 백성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선택한 장소들이라고 하였다.

성 경: [사7:20]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 애굽은 유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다시 앗수르에게 향한다. 18절에서 벌로 비유된 앗수르가 여기서 다시 삭도로 비유된다. 그것은 '세내어 온 삭도'이다. 선지자는 아마도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상당한 양의 돈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듯하다(왕하 16:7,8).

(주);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수염도 깎으시리라 - 1:6에서 전신에 상처입은 패전(敗戰) 군인으로 그려진 유다 백성이 여기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깎여진, 더할 나위없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삼하 10:4,5).

성 경: [사7:2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 벌거벗은 상태 곧 황무지로 변하고 만 유다의 비참함을 선지자는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유물은 겨우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젖을 뽑아낸들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현저한 인구 감소로 인하여 그 젖이 오히려 남아돌 것이라고 한다.

성 경: [사7:2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 앗수르의 삭도를 피하여 남아 있는 자에게 제공되어질 음식은 응결된 젖과 야생꿀이 그 전부이다. 그들은 싫증이 날 정도로 계속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7:2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그 날에는 천(千) 주(株)에 은 일천 개의 가치되는 포도나무...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 본절 이하에서 질려와 형극으로 특징지워지는 황무지에 대한 묘사가 계속 반복된다. 남은 자들이 뻐터와 꿀로 연명하게 되는 것은 포도와 곡식으로 가득 채워졌던 언덕들이 모두 가시덤불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은 일천 개'는 은화 일천 세겔을 말한다. 이처럼 최상품의 포도나무들이 재배되던 곳이 그 날에는 질려와 형극으로 무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비극을 극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사7:2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 찔레와 형극으로 가득 차고 사나운 들짐승들이 서식하게 될 그곳에 살과 활을 갖지 않고 나가는 것은 크나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 땅이 쓸모가 있다면 어쩌면 사냥터로나 적합할지도 모른다.

성 경: [사7:2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주);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 이전의 유다는 포도나무로 상징되는 농업 경제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제는 소와 양으로 상징되는 유목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가 본 유다의 미래 모습이다(G.W.Grogan).

성 경: [사8:1]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 본장은 7장과 동일한 역사적 맥락 위에 놓인다. 앞서 선지자는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 먼저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몰락하고 그 다음에 유다가 황폐해질 것을 예언한 바 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1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Kissane).

(주);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 새로 주어질 이 징조는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도 뚜렷이 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큰 서판을 취하도록 명령되었다. '서판'(*, 길라욘)은 금속으로 만든 판을 가리킨다(30:8).

(주); 그 위에 통용 문자로 - '통용 문자로'(*, 베헤레트 에노쉬)라는 말은 직역하면, '(한)사람의 필체(writing style)로'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자로 기록하라는 것이다.

(주); 마헬살랄하스바스 - 본래의 음대로 읽으면 '마헤르-솰랄-하쉬-바즈'이다. 그 뜻은 '신속하게-약탈물을-급속히-노획물을', 즉 '약탈과 노획이 급속히 이르름'이다. 이는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의해 머지 않은 장래에 노략당할 것을 나타낸다(4절).

성 경: [사8: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주);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 -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왕에게 빌붙어 후에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앗수르 제단을 건립하는 데 협력한 자이며(왕하 16:10-16), 스가랴는 아마도 아하스 왕의 장인을 가리킬 것이다(왕하 18:1,2;대하 29:1). 이들이 진실한 증인이라 불리는 것은 그 지명도와 영향력이 커서 백성들에게 사실을 왜곡됨 없이 말해주리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8:3]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주);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 직역하면 '내가 여선지자를 가까이하매'이다. '여선지자'(*, 하느비아)는 그의 아내를 말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그 남편이나 부친의 품위를 따라 여자에게도 그와 비슷한 칭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출 15:20) 그녀가 반드시 어떤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했으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성 경: [사8:4]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주);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 '아빠'(*, 아비)와 '엄마'(*, 임미)는 갓난 아이가 최초로 발음하는 소리이다. 이제 예언 성취의 시간은 임마누엘의 때보다 더 앞당겨졌다. 왜냐하면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는것'(7:15,16)보다 '아빠-엄마'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앗수르에 의한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몰락은 훨씬 더 급박한 사실로 눈앞에 놓이게 된다.

성 경: [사8:5]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주); 여호와께서 다시...일러 가라사대 -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약탈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유다가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한 일로 인하여 장차 벌어질 사태를 백성들 또한 목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본절은 7:10에서 처럼, 짧은 시간의 경과를 전제할 수도 있다(Alexander).

성 경: [사8:6]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에 대조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는 곧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근하고도 비밀한 보호를 뜻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짓눌려 있어서 천천히 흐르는 이 실로아 물이야말로 참된 구원이 됨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주);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 유다 백성들이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의 파멸을 보고 자만하여 기뻐한다는 뜻이다(rejoice...,KJV, NIV). 참조로, '기뻐하다'는 뜻의 '마소스'(*)대신에 '두려워하다', '녹다'는 뜻의 '마사스'(*)를 대치시켜 해석하기도 한다(RSV, Hitzig).

성 경: [사8:7]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주);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 눈에 보이는것만으로 위로를 삼는 백성들에게 앗수르 군대의 힘과 위용이야말로 거세게 넘실대는 유브라데 강물처럼 마음 든든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범람하는 그 강물이 마침내 수리아와 사마리아를 넘어 유다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의지하는 이는 다 이와 같을 것이다.

성 경: [사8:8]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주);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목에까지 미치리라 - 앗수르에 의한 유다의 약탈은 목에까지 물이 차는 정도의 극심한 홍수 상태로 비유되었다. 선지자의 예언처럼, 디글랏 빌레셀의 대군은 몇 년 안 되어 유다의 넓은 지역을 파괴하고 예물뿐 아니라 공물까지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대하 28:20,21). 그러나 더 큰 피해는 그 후대의 왕, 특히 산헤립(B.C. 705-681) 때에 이루어졌다.

(주); 임마누엘이여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 맨 뒤에 놓여 있다. 선지자의 눈은 다시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이에게 향한다. 이는 범람하는 물결이 거의 목에 차고 새의 편 날개가 온 땅을 덮는 것처럼, 유다 전역이 물에 잠긴 듯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란 오직 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스러운 이름을 기점으로 하여 선지자의 어조와 전망은 일변한다. 비록 가까운 장래에 적들로부터 주어질 재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은 이 땅 위에 임할 것이다.

성 경: [사8:9,10]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명령법과 반복법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임마누엘이 주는 위로와 보호를 말하고 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 '민족들'(*, 아밈)은 앗수르인들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훤화하다'(*, 로우)는 '격노하다', '시끄럽게 날뛰다'(Henderson), '제멋대로 날뛰다'(Alexander)는 뜻으로 전쟁의 함성을 말한다.

(주); 필경 패망하리라 - 격동하고 허리를 동이며 모략을 짜내는 등 저들이 온갖 수고와 준비를 아끼지 않을지라도 그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뭇 세력들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운명은 패망뿐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말이 9절에서만 3번, 10절에서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로 2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 저들이 필경, 궁극적으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이 놀라운 '임마누엘'(*)의 선언 때문이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칭호로 쓰이지 않고 선언적인 진술로 사용되었다.

성 경: [사8:11]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 임마누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선지자의 마음은 자연 위축되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처음부터 예측된 것이었다(6:9,10). 따라서 하나님은 연약해진 그를 강하게 만드실 필요가 있었다. '손'(*, 하야드)은 전능자 여호와의 손을 가리키며, 그 손이 선지자에게 얹혀질 때 특별한 영감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다(겔 1:3).

성 경: [사8:1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이 백성의 맹약(盟約)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 '맹약'이라 번역된 '케쉐르'(*)는 '공모하다', '협력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그 현대적 의미는 '반역', '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신하가 군주를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왕하 11:14;14:19;15:30). 당시 르신-베가 동맹군에 맞서 친앗수르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노선을 추종치 않고 반대하는 자들은 - 이사야 선지자가 대표적이다 -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역자들로 간주되었다. 본문에서 선지자에 대한 동(同)시대인들의 시각을 확연하게 엿볼 수 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에게도 이와 동일한 비난이 가해졌다(렘 20:1,2;26:8-11;암 7:11-13).

성 경: [사8:13]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하고 -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만 주어진다. 그의 거룩하심을 인식한다 함은 그가 만군의 여호와, 곧 피조세계와 구별되어 홀로 높이 계시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알아뵙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안절부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 경: [사8:14]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 '거룩한 피할 곳'으로 번역된 '미크다쉬'(*)는 '거룩한 것'(a holy thing)이란 뜻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피난처, 은둔처로 간주되어온 거룩한 장소 곧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왕상 2:28, Gesenius, Rosenmuller, Ewald). 여호와는 그를 믿고 그에게 도피하는 이들에게 피난처요 산성이 되어 주실 것이다(시 18:2).

(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올무가 되시리니 - '이스라엘의 두 집'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직 인간의 생각만을 의지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들의 길을 가로막는 거북한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신약 성경에서 보다 명백하게 표현되었으니, '거룩한 자'(*, 토 하기온, 눅 1:35)-'미크다쉬'에 상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그가 보배가 될 것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될 것이다(롬 9:33;벧전 2:7,8). '예루살렘'은 강조적인 의미로 첨가된 것이다.

성 경: [사8:15]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 본문은 여호와가 그를 믿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될 것이라는 앞절의 위협의 연속이다. 그것은 5개의 동사로 구성되는데 앞의 세 동사들은 '돌과 바위'에 관계되며 뒤의 두 동사들은 '함정과 올무'에 관계된다.

성 경: [사8:16]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 이 명령은 여호와로부터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싸매며'로 번역된 '초르'(*)는 '기입하다', '새기다'는 뜻의 '추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Vitringa), '묶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파생된 말이다(Alexander). 선지자는 증거의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묶어 봉함하도록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계시가 무시되고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주);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 이제 그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 즉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질 것이다. 선지자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집단에 제한될 것이며 전체로서 그 나라는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주의 계시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Leupold).

성 경: [사8:17]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 그의 공적 사역이 위축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부터 얼굴을 돌리시는 이 암담한 때에 선지자가 취할 태도는 '기다림'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기다림은 '기대함'이다. 기대함은 소망으로 앞을 내다봄이다.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기다리며'(*, 하카), '바라본다'(*, 카와)는 두 동사에서 잘 나타난다. '카와'는 '기대한다'는 뜻이다.

성 경: [사8:18]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 주의 말씀이 거부되고 그의 활동이 제약되는 상황에서도 선지자의 마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였다. 이는 아마도 11절의 결과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몇몇 옛주석가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용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히 2:13)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는 메시야 자신이며, '자녀들'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라고 주장한다(Henderson). 그러나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화자(話者)이며, '자녀들'은 그의 두 아들 즉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esenius, Ewald, Delitzsch, Rosenmuller). 이 해석이 타당하니 첫째, 선지자를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이 모두 그 이름을 통한 징조와 예표로서 백성들에게 보내어졌다는 것과, 둘째, 히브리서의 인용과 관련하여,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선지자와 그 아들들의 이름이 갖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모형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Delitzsch).

(주); 징조와 예표 - 이 두 용어는 '미래 사건의 표징, 암시'(*, 튀포스)를 뜻하는 같은 의미의 낱말들로서 자주 결합되어 쓰인다(신4:34;6:22;7:19; 26:8; 28:46; 29:2; 4:11;시 135:9 등).

성 경: [사8:19]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 불신자들이 유혹하는 소리이다. '신접한 자'로 번역된 '오보트'(*)는 원래 '부풀게 하는 가죽'(욥 32:19)이란 뜻의 '오브'(*)의 복수형인데, 여기서는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지하로부터 영을 부르는 사람, 즉 마술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신 18:11;삼상 28:8;대상 10:13). '마술사'로 번역된 '야데오님'(*)은 '알다'는 뜻의 '야다'(*)에서 파생된 말로, '아는 자', '지혜로운 자', '점쟁이'를 의미한다(레 19:31;신 18:11).

성 경: [사8:20]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 불신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후에 신자의 마땅히 행할 바를 명시한다. 본문은 전쟁시에 사용되는 슬로건(표어)의 형태로 되어 있다(삿 7:18 참조):'율법과 증거(의 말씀)에게로!'

(주);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 '율법과 증거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이자 규범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앞서 말한 표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불행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 경: [사8:21,2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아침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겪게 될 비참한 상태가 두 절에 걸쳐 묘사된다.

(주);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 우선, 그들의 처지는 사막의 불볕 아래 음식도, 물도 없이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과도 같다. 선지자는 아마도 앗수르의 압제 아래 백성들이 당하게 될 곤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번조(煩燥)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 그들의 고통이 너무도 격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며 자기의 왕과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번조하여'(*, 히트카차프)는 '분노하다', '격노하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초한 불행에 대하여 그 모든 원인을 그들의 지도자에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하나님에게 돌려 저주하는 행위는 가장 비열한 짓으로 여겨졌다(출 22:28;왕상 21:10).

(주);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 문자적으로는 '어두움 속으로 내쫓기리라'이다. '아펠라'(*)는 짙은 어두움에 사용된다(출 10:22). '쫓겨 들어간다'로 번역된 '메누다'(*)는 '내몰다', '추방하다'는 뜻을 가진 '나다'(*)동사의 수동 분사형이다. 선지자의 묘사는 비유로 가득하다. 본장의 마지막 절에서 지배적인 색조는 흑암이며, 주된 정조는 절망이다. 이 모든 것이 아침을 빼앗긴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이들에게 예정된 운명이 된다.

성 경: [사9: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주);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8:23로 매겨져 있다. 비록 '흑암', '고통' 등의 어두운 단어들이 연속되고 있지만 내용은 정반대이다. 흑암이 걷히고 빛이 다시 비췬다. 이 모든 변화는 한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비롯된다(6,7절). 흠정역은 문장 첫머리에 나오는 불변사 '키'(*)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함으로써(nevertheless) 이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주);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본절에 언급된 지역들은 사사 시대 이래로 주변 열국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하여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들보다도 이방적 색채가 더 짙었다. 게다가 최근에 자행된 앗수르 군대의 침략(B.C. 733,732년)으로 이 근방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이런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들 때문에 갈릴리 지역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왔던 것이다(요 1:46;7:41,52;행 2:7). 그러나 새 날이 밝을 때, 흑암이 가장 깊은 이 땅에 빛이 가장 먼저 비췰 것이다.

성 경: [사9:2]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빛이 비취도다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앞에 언급된 갈릴리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가리키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와 평행을 이룬다. '흑암'은 슬픔 혹은 재난으로 바꿔 말할 수 있으며, 더 넓게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총체적인 불행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시 107:10,11). '큰 빛'은 세상의 빛이요(요 8:12) 참된 빛이며(요 1:9) 의의 태양이신(말 4:2)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마태에 의하면, 이 빛은 맨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마을에서 부터 비취기 시작했다(마 4:13). 그가 처음 이적을 베푸신 곳도 갈릴리였으며(요 2:11), 맨처음 가르치신 곳도 그가 자라나신 갈릴리의 나사렛 회당이었다(눅 4:14-17).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도 바로 갈릴리 해변가였다(마 4:17;막 1:14,15). 이로써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는 선지자의 예언은 신약에 이르러 완전하게 응하였다.

성 경: [사9:3]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주);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 내용은 주께 대한 찬양과 감사로 바뀐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일 가운데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나라를 창성케 해주신 것이다. '창성케 함'은 백성의 수를 많게 함이다. 둘째는, 즐거움을 더하게 해주신 것이다. 백성의 수의 증가와 즐거움의 증가는 모두 메시야 시대를 특징짓는 주도적인 현상들로 간주된다(26:15;66:8;슥 14:10,11).

성 경: [사9:4]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주); 멍에와...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음이니이다 - 본문의 '멍에'와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는 모두 노예를 다룰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이 가운데 특히 '멍에'(*, 수발로)와 '그 압제자'(*, 하노게스 보)는 애굽에서의 속박을 연상시킨다(출 2:11). 성경적 표상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을 속박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대표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해방 사건은 애굽에서의 구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미디안의 날'을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수효로 많은 대적들을 물리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이 가장 분명하게 현시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삿 7:2, Oswalt, Calvin).

성 경: [사9:5]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주);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살라지리니 - 구원은 압박받는 백성에게는 해방으로 경험되지만, 압제하는 군대에게는 패망 이외 다름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사상은 기드온의 승리(Junius)나 앗수르의 전멸(Delitzsch) 보다 더 크다. 전쟁을 위한 무장들인 '갑옷'(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군화'로 번역함)과 '군복'이 불에 태워지리라는 표현은 적들의 패망이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 더 나아가 전쟁 자체의 소멸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절에서 평강의 왕이신 메시야가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사9:6]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주);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 '정사'로 번역된 '미스라'(*)는 '지도자가 되다'는 뜻의 '사라'(*)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통치'를 의미한다. '정사를 어깨에 멘다'는 말은 권위의 상징으로 주어진 금고리나 열쇠를 어깨에 걸친 데서 연유한 듯하다(22:22 참조).

(주); 기묘자라, 모사라 - '기묘'(wonder)와 '모사'(counsellor)를 구분하여 해석할 수도 있으나(Gesenius, Rosenmuller, Delitzsch),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 라는 해석도 가능하다(28:29, Gray, Oswalt).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계획을 세우실 것이며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 신적인 계획의 수립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첫째 이름과 둘째 이름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전혀 손색이 없다. '엘 깁보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와 부를 하나님의 이름이며(10:21),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신 10:17;느 9:32;시 24:8;렘 32:18). 따라서 이 아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神性)을 소유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주);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라 - '영존함'은 신성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아버지'에 놓인다. 히브리식 사고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상관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부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후원자, 보호자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22:21;욥 29:16;시 103:13). 따라서 '아비 아드'(*)는 그의 백성들, 더 넓게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주); 평강의 왕이라 - 마지막으로 그는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자로서 '왕'이라 불리운다. 높은 곳에 앉아서 밑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왕의 개념은 히브리적이라기보다는 이교적이다. 더 나아가 그는 '평화의 왕'(*, 사르-솰롬)으로 불린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며, 그의 다스림 역시 평화로울 것이다(시 72:3,7;렘 33:6;미 5:4;슥 9:10 등).

성 경: [사9:7]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주);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와 그의 자손이 영원토록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확약하셨다(삼하 7:13,16). 사실 다윗 왕국은 구약 역사에서 백성들이 동경하던 하나님 왕국의 실체임과 동시에 장차 메시야에 의해 건설될 항구적인 평화의 왕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O.Robertson).

(주);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 그 나라의 영속성은 다윗 언약에 기초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내부 구조는 '공평'(*, 미쉬파트)과 '정의'(*,체다카)이다. '공평'과 '정의'야말로 메시야 왕국을 지상의 나라와 구별짓는 결정적인 표지인 셈이다. '보존하다'(*, 사아드)는 '떠받치다', '유지하다'는 뜻이다.

성 경: [사9:8]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 본문에서 '말씀'(*, 다바르)은 보냄을 받은 자 곧 사자와 동일시되고 있다(시 107:20;147:15,18). 이 말씀은 여호와로부터 보내졌기 때문에 일점 일획의 어김도 없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보내신 자에게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55:11). 여기에 히브리적 사고의 독특함이 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말씀과 사건이 구별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사건으로 구체화되며, 이를 통해서 그 말씀의 진실성이 입증된다(호 6:5).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과 함께 사건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38:7;42:16;창 34:14;신 17:5;삼상 3:11). 그 말씀이 야곱에게 보내어진다. 마치 음울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전령처럼 말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쓰였으며, 여기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킨다(Alexander).

성 경: [사9:9]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5:3)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기보다는 교만으로 일관한다.

성 경: [사9:10]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대신하리라 하도다 - 자만으로 가득 찬 에브라임의 말이다. 벽돌과 뽕나무는 둘 다 값싼 건축 자재들인데, 빈약한 건물이나 서민들의 집을 지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서 다듬은 돌과 백향목은 고급품들로서 권세자들의 거처나 호화로운 건물을 지을 때 주로 이용되었다(왕상 5:6;대하 1:15;2:3;스 3:7;암 5:11).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들이 외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 손상을 입을지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 강성해진다고 호언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사9:1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 에브라임은 그들의 교만의 대가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르신의 대적'(*, 차레 레친)은 언어 유희를 이용한 수법으로 앗수르인들을 가리킨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르신과 동맹을 체결했었다. 그러나 르신이 죽고 앗수르에 의해 수리아(아람)가 정복된 이후(왕하 16:9) 에브라임은 앗수르의 종속국으로 전락한 아람에 의해 침략을 당하게 된다(12절-'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성 경: [사9:12]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 '앞'(*, 케뎀)과 '뒤'(*, 아호르)는 오히려 동과 서로 이해함이 자연스럽다(11:14;창 2:8;욥 23:8 등).

(주);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 그러나 실제로 블레셋은 북이스라엘을 침략한 적이 없고 남유다만을 괴롭혔을 뿐이다(대하 28:18,19). 따라서 여기 언급된 '이스라엘'은 온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elitzsch).

성 경: [사9:13]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이 백성이...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 '돌아오다'(*, 슈브)는 완전한 전환을 뜻하며, '찾다'(*, 다라쉬)는 '문제를 풀기 위해 물어 옴, 혹은 전심으로 구함'을 뜻한다(출 18:15;신 4:29). 그러나 이들 동사 위에 부정사(不定詞) '로'(*)가 놓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백성은 반역적인 태도를 고집하였다.

성 경: [사9:14]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종려가지와 갈대 - '종려가지'(*, 키파)는 그 아름다움과 유익함으로 인해 대단히 고귀한 식물로 평가되었으며, 후일 로마 동전에 유대의 상징으로 새겨지기도 하였다(시 92:12;아 7:7,8, Alexander). 이와 대조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갈대'(*, 아그몬)는 '습지', '늪', 혹은 '시궁창'(*, 아감)에서 자라는 식물(풀)로, 대단히 천하게 여겨졌다. 이 둘은 아마도 고귀한 자와 천한 자를 암시하는 듯하다(19:15).

성 경: [사9:15]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 이사야가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을 가리켜 '꼬리'라고 부르는 까닭은 ('꼬리'(*, 자나브)에는 본래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들이 마치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권세있는 자들의 편에 빌붙어 부끄러운 말과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E.J.Young).

성 경: [사9:16]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하니 - 3:12의 탄핵과 유사하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특히 무겁게 취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잘못은 자신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성 경: [사9:17]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이 백성이 각기 설만(褻慢)하며 -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이는'(*, 키)이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토록 진노하시며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까닭을 설명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 모두가 부패했다. '설만하다'(*, 하네프)는 '모독하다', '불경건하다'는 뜻이니,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심 대신 오히려 하나님을 비웃고 모독하는 불경건만이 가득함을 나타낸다(시 14:3).

(주);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대상이었다(1:17;출 22:22;신 10:18;14:29). 그러나 그들에게까지도 주께서 평상시 베푸시던 긍휼이 거절될 것이다. 이는 주의 진노하심과 크기가 어느 정도이며 또한 백성들의 죄악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전자는 반복되는 후렴구에서, 후자는 이어지는 진술에서 명확히 표현되고 있다.

성 경: [사9:18]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대저 악행은 불태우는 것 같으니 - 죄악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선지자는 그것을 '불'에 비유한다. 이 불은 인간의 내면에서 끝없이 타오른다(창 4:7 참조). 물을 부어 꺼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도 이 불을 끄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은 끝없이 타오르는 악행의 불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라고 말한다(롬 1:28-32).

(주);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같은 것이라 - 선지자의 묘사는 거세게 타오르는 산불을 연상시킨다. 죄악의 불길은 먼저 가시나무를 삼키고 (질려와 형극은 보통 사악한 사람의 상징어로 자주 쓰인다(삼하 23:6;미 7:4)) 이어서 큰 삼림에까지 옮겨 붙어 (혹자는 이를 죄악의 집단에 참여한 온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Vitringa)) 대 초원 위에 지천으로 타올라 마침내 온 하늘을 연기로 가득 채운다. 이러한 일련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지자는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어떻게 온 나라를 파멸로 이끄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16절).

성 경: [사9:19]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 죄악의 불길 위에 또 하나의 불길 곧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이 오버랩 된다. 이 둘은 다르지 않다. 대초원을 태웠던 죄악의 불길 그 자체가 이미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임을 알게 된다. 화마(火魔)가 핥고 지나간 그 땅은 검게 그을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한다. '소화된다'(*, 네으탐)는 말은 '빨갛게 달아 오르다', '타서 검게 되다'는 뜻이다(Luther, Calvin, Virtringa, Lowth).

성 경: [사9:20]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우편으로 움킬지라도...먹을 것이며 - 무정부 상태하의 내란, 즉 동족간의 무자비한 살육은 자기 살을 뜯어먹는 굶주림에 비교되고 있다. 그들은 탐욕에 지배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런 자기 파멸적인 탐욕은 선지자의 다음 말, 곧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팔'(*, 제로아)은 비유적으로 '힘', '원조', '도움'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상부 상조해야 할 이웃을 가리킨다(Gesenius, Rosenmuller, Maurer).

성 경: [사9:2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주);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 서로 보호하고 위해 주어야 할 이웃(혹은 지체)이 오히려 서로 물고 뜯는 원수로 변할 때 거기에는 '완전한 파멸' 밖에 남지 않는다(갈 5:15).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간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북왕국 안에서 두 형제 지파,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서로를 질시하고 다툼으로 일관하더니(삼상 10:27;삼하 20:1;왕상 12:16;15:27;16:21;왕하 9:14 참조),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남유다를 공격하여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빚기에 이르른 것이다(왕하 15:13-16,25,30).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충족되지 아니하였다.

성 경: [사10: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주);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 선지자는 여기서 관료적인 이스라엘의 법집행의 부당함을 탄핵한다. 법 앞에 만민을 공평하게 대우하라는 율법 정신이 완전히 소멸된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상이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출 23:6-9;레 19:15;신 10:17;16:19;24:17). 본절을 유다에 국한된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5:23). 이런 죄악은 남북을 불문하고 온 이스라엘에 편만하였던 것이다(암 5:12). '법령을 발포하며'와 '말을 기록하며'는 두 종류의 다른 직급, 즉 재판관과 서기관을 암시하는 말(Aben Ezra, Kimchi, Grotius)이라기보다는 동일한 뜻을 지닌 평행법으로 봄이 무난하다.

성 경: [사10: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주);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화 있을진저 - 권세자들의 편에 선 재판관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편파적이며 일방적인 판결을 능사로 삼을 때, 권력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불공평한 판결이 지배하는 곳에서 피해자는 언제나 '빈핍한 자'와 '가련한 자'뿐이다. 선지자는 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과부와 고아들'이라고 언급한다.

성 경: [사10: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주); 벌하시는 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욤 페쿠다'(*)는 문자적으로 '방문의 날'이니,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하심을 특별히 나타내시는 때를 가리킨다(호 9:7, Alexander). 그날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와 동일시되는데, 이는 곧 앗수르에 의한 침공을 암시한다(5절;5:26). 선지자는 하나님의 방문의 날과 관련하여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세 가지 물음을 던지는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다음절에서 통렬하게 제시된다.

성 경: [사10: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주); 포로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 그들의 결국은 참으로 비참할 것인데,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감옥 안에 눕거나 전쟁터에서 나뒹구는 주검이 될 것이다. 이어 선지자의 시선은 범죄한 이스라엘로부터 그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받은 앗수르로 향한다.

성 경: [사10: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운명을 나타낸 '화 있을진저'(*, 호)가 앗수르에게도 적용된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잠시 사용된후, 그 교만 때문에 역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성 경: [사10: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 '한 나라'는 직역하면 '불경한(*, 하네프) 나라'이다. 그 나라는 평행을 이루는 문장에서 '나의 노한 백성'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나의 진노의 대상이 된 백성'이란 뜻이다(3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를 가장 경건한 민족이라 자부하고 앗수르 같은 이방 나라는 신(神)을 모르는 불경한 민족이라 멸시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정반대로 말한다:' 너희들이야말로 불경한 백성이며 앗수르는 너희들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받았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Oswalt).

성 경: [사10:7]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멸절하려하여 -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부름받은 바, 그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 자신의 힘의 한계를 깨달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앗수르의 마음에는 이러한 깨달음 대신 중동의 지배자가 되려는 패권주의적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근간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필연적 속성이다(왕하 18:25).

성 경: [사10: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 앗수르가 그 같은 야망을 품은 것이 결코 헛된 공상만은 아니라는 것이 반어법으로 표현된다. 실제로 앗수르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왕은 대왕(36:4)의 칭호를 가졌으며, 그 밑에 있는 방백들마저도 그 지위와 위세에 있어서 다른 나라의 왕들과 버금갈 정도였다.

성 경: [사10: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 이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앗수르가 거둔 혁혁한 전과(戰果)때문이었다. 사실 앗수르가 취하고자 했던 도성 중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의도에서 빗나간 것이 없었다. 과거의 자신감을 토대로 앗수르는 미래의 성공을 스스로 예견한다. '갈그미스'는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한 성읍으로서(대하 35:20;렘 46:2-12) B.C. 717년에 함락되었다. '갈로'는 '갈그미스'로부터 남쪽 50마일 정도에 있는 '갈레'를 가리키는 듯하며(암 6:2), B.C. 738년에 함락되었다. '하맛'은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민 34:8;왕하 14:25,28;암 6:2,14), B.C.738년과 720년에 함락되었다. '아르밧'은 '하맛'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왕하 18:34), 둘 다 수리아의 성읍들이었다. '아르밧'은 B.C. 740년에 함락 되었다.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이며(B.C. 732년 함락),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이다(B.C. 722년 함락). 언급된 6개의 성읍들은 아마도 지정학적 근접성을 기준으로 하여 배열된 듯하다(Oswalt).

성 경: [사10:1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 고대의 정복 전쟁은 신들 간의 전쟁으로 고려되었으며, 신들의 우열은 전쟁의 승패에 직결되었다. '미쳤나니'(*, 마체아)는 '도달했다', '발견했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굴복시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 경: [사10:1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내가...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 결국 앗수르의 최종 목표는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앗수르는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다른 나라의 우상들, 특히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수입된 우상들과 같이 취급하였다. 여기에 그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다. 여호와에 대한 모독에 이어 앗수르의 파멸이 곧 뒤따름을 보라.

성 경: [사10:1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 - 교만은 사람의 마음에서 발원하여 마음의 창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서 비친다. 앗수르 왕의 이 같은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다.

성 경: [사10:1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총명한 자라 - 그는 자신이 거둔 모든 성공을 자신의 힘과 지혜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라고 해석한다. 스스로 도취하는 나르시스적 경향은 '나는 총명한 자라'는 말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는 '내 솜씨가 정말 절묘했어'라는 식의 자화 자찬(自畵自讚)의 말과 같다(Calvin). 그런데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잔인한 핍박과 약탈이다.

(주); 용감한 자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 '용감한 자 같이'를 직역하면 '황소처럼'으로도 된다(시 22:12). '황소'는 앗수르의 권능의 상징이었다.

성 경: [사10:1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하는도다 - 정복 전쟁과 재물 탈취의 용이함이 비유로 묘사된다. 그 용이함은 어미새가 자리를 비운 새둥지에서 알을 줍는 것에 비견된다. 만약 어미새가 있었다면 생사(生死)를 각오하고 침입자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강조점은 아무도 앗수르를 대적하거나 저항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성 경: [사10:1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도끼가 어찌...큰 체 하겠느냐 - 교만의 어리석음을 선지자는 날카롭게 공박한다. 도끼와 톱은 유용한 물건이긴 하지만 사람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만약 도끼와 톱이 정반대로 자기들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성 경: [사10:1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살진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 앗수르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로 선포되니, 하나는 병의 형별이요 다른 하나는 불의 형벌이다. '살진 자로 파리하게 한다'는 말은 질병을 보낸다는 말이다(레 26:16;신 28:22). 이는 앗수르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져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이 죽었다는 기록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37:36). '영화'는 앗수르의 잘 무장된 군대를 가리킨다(Delitzsch). 그 영화 밑에 불을 질러 깨끗이 소멸시킨다는 말은 앗수르 군대의 급속하고도 완전한 멸망을 비유하는 말이다(Vitringa, Rosenmuller, Clericus). 선지자는 '불태우다'는 의미의 '야카드'(*) 동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타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한다.

성 경: [사10:17,1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형극과 질려가...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 거룩한 불꽃에의해 소멸될 대상은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형극과 질려는 앗수르인들의 하류 계층을 가리킨다. 둘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은 상류 계층을 의미한다. 이 같은 앗수르인들의 총체적인 파멸은 '전부'라는 말에서 강조되고 있으니, 이는 직역하자면 '영혼에서 육체까지'이다. 이 말은 전인(the whole man)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현이다(시 16:9;84:2).

성 경: [사10:1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주); 그 삼림에...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 앗수르의 황폐함은 마치 거대한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몇 그루의 나무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광경에 비유되고 있다. 불에 타고 남은 나무의 수가 얼마나 적을 것인지는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다'는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어린아이가 셀 수 있는 숫자는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성 경: [사10:2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그 날에...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 '자기를 친 자'는 앗수르를 가리킨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외에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징벌을 당하였다. 그러나 심판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뼈아픈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진실로 의지할 것이라는 말이다.

성 경: [사10:2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 이 일은 스알야숩(7:3)의 이름속에 포함된 예언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 엘 깁보르)은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에게 적용된 이름 중 하나이다(9:6).

성 경: [사10:2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돌아오리니 -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성취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삼하 17:11) 되었으나,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은 자는 소수에 국한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 9:6-8,27)는 사상과 연결시켜 인용한다.

성 경: [사10:2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온 세계 중에 -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행하기로 작정하신 훼멸은 온 땅 가운데서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이니 거기에서 살아 남은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성 경: [사10:2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 앞절에서 무서운 위협의 말이 선포된 후, 곧 이어서 위로의 말이 덧붙여진다. '시온'은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곳이며,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경건하고 신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위로는 소수의 신실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할 것이다(Calvin).

성 경: [사10:2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내가 불구(不久)에 네게는 분(憤)을 그치고...그들을 멸하리라 - 앞절의 '두려워 말라'는 위로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가 제시된다. 즉, 하나님께서 곧 그의 분노를 이스라엘에서 앗수르로 옮기실 것이다(12절). '불구에'는 '오래지 않은 시간에', '짧은 시간에'란 말이다. 앗수르의 파멸은 다음절에서 두 가지 사건으로 형상화된다.

성 경: [사10:2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같이 - 첫째, 그것은 기드온과 300 군사에 의한 미디안 군대의 패퇴에 비교된다(9:4). 오렙 반석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을 죽인 곳이다(삿 7:25).

(주);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같이 - 둘째, 그것은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가 몰살한 것과 비교된다(출 14:16-18).

성 경: [사10:27]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 '기름'으로 번역된 '솨멘'(*)은 '비만', '지방', '기름'을 뜻하는 말이다. 앗수르로부터의 이스라엘 해방은 황소의 목이 비대해짐에 따라 멍에가 찢어져 자유하게 됨과 같이(Hitzeg, Hendewerk) 그렇게 확실하게 올 것이다. 흠정역은 본문을 '기름부음 때문에'(because of the anointing)라고 번역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경: [사10:2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치중을 머무르고 - '아얏'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돌더미'를 뜻하는 '아이'를 가리키는 듯하다(수 8:1-28). '미그론'은 벧엘에서 도보로 약 8시간쯤 걸리는 곳에 위치하였으며, '믹마스'는 예루살렘 북방 약 7마일 정도에 위치한 군사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베냐민 지파의 주요 성읍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짐을 풀었다. 이는 행군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병참 기지를 건설하기 위함일 것이다. '치중'(*, 켈라)은 '그릇, 옷, 도구, 무기'등의 군수 물자를 뜻한다.

성 경: [사10:2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영(嶺)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 '영'(*, 마으바라)은 '산길'을 뜻하는 말로, 믹마스와 게바 사이에 있는 오늘날의 와디 슈바니트(Wady-es- suweinit)를 가리킨다(삼상 13:23). 깊고 거치른 좁은 골짜기 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진군하던 군대는 게바(수 18:24;21:17)에서 야영한다.

성 경: [사10:3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딸 갈림아...라이사야...너 아나돗이여 - '갈림'과 '라이사'는 기브아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성읍이다(삼상 25:44). 두 곳 모두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시간 15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오늘날의 아나타(Anata)란 곳이다(수 21:18;삼하 23:27;대상 6:60). 28,29절에 비해 본절은 선지자의 개인적인 반응이 강하게 투사된다. '갈림'과 '라이사'는 근접한 성읍이어서 큰소리로 외치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외침은 군대가 옴을 알려주는 경계의 소리라기보다는 극도의 공포에서 우러나는 비명에 가까울 것이다.

성 경: [사10:3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맛메나 사람은...게빔 거민은 도망하도다 - '맛메나'는 '기름더미'란 뜻이다. '게빔'은 '물웅덩이'란 뜻이다. 두 성읍 다 예루살렘에 근접한 것은 확실하나 분명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들 거민 또한 황급히 도망한다.

성 경: [사10:3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 '놉'은 아마도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스코푸스(Scopus) 동산을 가리키는 듯하다(Oswalt).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열(戰列)을 재정비한다.

(주);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 손을 흔드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위협적인 제스처이다. 예루살렘이 정복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 앗수르 군대가 휘두르는 손이 클로즈업되면 문득 환상은 끊긴다.

성 경: [사10:3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 삼림의 비유가 다시 등장한다. 그 삼림은 앗수르이다. 벌목하시는 이는 주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도끼찍는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진다. 위협하듯이 하늘 향해 뻗은 가지가 둘로 꺾어진다. 큰 나무, 굵은 나무 할 것없이 두 동강 난다. 이 모양으로 앗수르의 파멸은 철저할 것이다.

성 경: [사10:3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주); 레바논이...작벌을 당하리라 - 앗수르는 종종 레바논의 삼림에 비교되었다(겔 31:3). 선지자는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의 붕괴에서 작고 가녀린 한 싹을 예언적으로 내다본다(11장).

성 경: [사11:1]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메시야와 그의 왕국]

(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처럼 위용을 자랑하던 세상 제국의 급속한 몰락과 미미한 그루터기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 메시야 왕국이 극적으로 대비된다. 그 싹은 메시야이며, 그는 이새의 줄기 곧 다윗 가문에서 탄생하실 것이다(삼상 16:1). 선지자가 '다윗'대신 '이새'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로부터 나올 싹이 다윗 이전의 지위, 곧 농부였던 그 아버지 이새가 상징하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주);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땅에 묻힌 뿌리에서 연한 가지(*, 네체르)가 돋아남같이, 메시야는 무너진 다윗 가문에서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오실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비천하고 멸시받는 나사렛 사람(Nazarene)으로 불리워야 했다(마 2:23). 그러나 그 가지는 곧 자라서 열매맺는 장성한 나무로 발전할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삶 역시 그러할 것이다.

성 경: [사11:2]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메시야와 그의 왕국]

(주); 여호와의 신...강림하시리니 - 나무의 비유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대신 비유의 주인공 곧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전면에 부상한다. 그 위에 여호와의 '영'(*, 루아흐)이 강림하신다. 이는 다윗 언약과 관계된 듯이 보인다(삼하 7:14). 하나님의 영은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여호와의 영은 메시야에게 통치에 필요한 능력을 분여(分與)해 주신다. 그것들은 각각 세 쌍으로 분류된다(J.Watts). (1)지혜와 총명의 신:'지혜'와 '총명'은 왕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들이다(왕상 3:5-9). '지혜'(*, 호크마)는 외적 분별력을 의미하며, '총명'(*, 비나)은 이보다 깊은 내적 통찰력을 의미한다. (2)모략과 재능의 신:'모략'과 '재능'은 9:6에 각각 '모사'와 '전능'으로 나와 있다(잠 8:14). '모략'(*, 예차)은 정책 수립과 입안(立案), 전쟁 계획의 작성 등 포괄적인 전략을 구상할 수 있는 힘을 뜻하며(36:5;왕하 18:20), '재능'(*, 게부라)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울 수 있는 영웅적인 힘을 뜻한다(왕상 15:23;16:5,27;22:45). (3)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둘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믿음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것인데, 여호와의 영은 왕으로 하여금 신앙에 있어서도 소홀함이 없도록 힘을 복돋아 주신다. '지식'(*, 다아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말한다. '여호와 경외'(*, 이르아트)는 사유(思惟)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왕의 절대적인 두려움과 복종을 말하는 것이다.

성 경: [사11:3]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메시야와 그의 왕국]

(주);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 원문대로 읽으면 '여호와 경외를 코로 흐흡한다'이다. '코로 호흡한다'는 말은 단순히 냄새를 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좋은 향기를 만끽하는 것, 다시 말하면 즐거워한다는 것이다(Delitzsch, Gesenius, De Wette). 메시야-왕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마치 향기로운 꽃향기를 숨쉬듯이, 오로지 여호와께 대한 경외로 참된 만족과 즐거움을 삼으신다.

(주); 눈에 보이는 대로...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은 사람의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제2의 다윗, 즉 메시야 - 왕은 눈과 귀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대한 경외로 즐거움을 삼는 원칙에 의해 사물을 분별하실 것이다(Aben Ezra).

성 경: [사11:4]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메시야와 그의 왕국]

(주); 공의로...정직으로 - 메시야의 통치는 '공의'(*, 체데크)와 '정직'(*,미쇼르)에 입각한 평등 사회로 구현된다. '미쇼르'는 '평등함', '올곧음'을 뜻하는 말이다. 공의롭고 정직한 평등 사회의 구현, 그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꿈이었다. 그 나라는 빈핍하고 겸손하 자가 보살핌을 받고, 이 세상의 행악자는 엄정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그런 나라이다. 이 점에서 메시야의 통치는 유당 왕들의 악한 통치와 철저하게 대조된다(1:23;3:15;10:1,2).

(주); 빈핍한 자...겸손한 자 -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때, 가장 기뻐할 이들은 바로 세상에서 멸시받고 억압받던 '빈핍한 자'(*, 달림)와 '겸손한 자'(*, 아나윔)이다. '달림'은 '매달리다'는 뜻의 '달라'(*)에서 나온 말인데, 사회적으로 열등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아나윔'은 '굽히다'는 뜻의 '아나'(*)에서 나온 말인데, 전자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내외적으로 궁핍한 이들을 가리킨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권세자나 부자에게 매달리고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시야의 날에 그들은 의로운 왕이 바로 자기들의 편이며, 공의와 정직으로 다스려지는 하늘 나라가 바로 자기들과 가까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마 5:3;눅 6:20,21).

(주);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악인을 죽일 것이며 - 메시야의 날은 지상의 질서가 뒤바뀌는 격변의 날이될 것이다. 그날에 높은 자는 낮아지고 낮은 자는 높아진다(삼상 2:8). '세상'(*, 에레츠)은 직역하면 '땅'이다. 이 땅으로 만족을 삼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 라솨)은 공평한 재판에 의해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죽어 마땅하다면 메시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로도 그 일은 간단히 처리될 수 있다. '입술의 기운'곧 그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분은 '입의 막대기' 곧 그 말씀으로 세상을 좌우하신다(살후 2:8, Lange).

성 경: [사11:5]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메시야와 그의 왕국]

(주); 공의로...성실로 - 왕의 허리에 두른 예대(禮帶)에는 '공의'(*, 체데크)와 '성실'(*, 에무나)이라는 두 가지 장식이 아로 새겨져 있다(Calvin). 그는 모든 일을 공의대로 처리하시며 마땅히 되어져야 할 바는 성실로써 수행하시므로 그의 통치는 지극히 이상적일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평화와 지복의 낙원이 건설된다.

성 경: [사11:6,7]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메시야와 그의 왕국]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그날에 '분리됨'을 그 특징으로 하는 죄악 세상은 마감되고, 적대하던 모든 세력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평화와 공존의 새세상이 열리게 된다. 이 새세상이 오기 위해서 우선 피조물을 허무한 데 굴복케 만드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는 새창조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롬 8:19,20;고후 5:17). 그러나 그 궁극적 완성은 역사의 전변(全變), 즉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하기까지 미뤄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선지자의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주어지는 새로움을 넘어 먼 미래의 종말에까지 확대되고, 그가 노래한 메시야 왕국의 평화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계 21:5)는 요한의 묵시록에서 그 진정한 이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먼 미래에 완성될 이 새로움은 최초의 낙원 상태의 회복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복된 세계는 미움도, 갈등도, 다툼도 없는 조화의 세계였으며, 푸르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동산에서 이리와 표범, 곰, 사자 등의 맹수들이 어린 양과 염소, 송아지 등과 어울려 놀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세계는 또한 동물들이 인간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질서의 세계이기도 하였다. '(모든 짐승들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라는 구절에서 이 같은 표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선지자가 보여주는 본문의 그림에는 약육 강식, 적자 생존의 비정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성 경: [사11:8]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메시야와 그의 왕국]

(주); 젖 먹는 아이가...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이 복된 낙원 상태는 두 갓난 아이(하나는 젖을 먹고, 다른 하나는 젖을 막 뗀)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 충격적인 장면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그날에는 독사조차도 해롭지 않다. 태초의 세계에서 향유되었던 인간과 동물(자연계)의 친화가 그지없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성 경: [사11:9]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메시야와 그의 왕국]

(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 '나의 거룩한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전용어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것은 후반부의 '세상'(*, 하아레츠)과 병행하여, 하나님에 의해 구속되고 새로워진 세계를 총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65:25, J.Watts).

(주); 해(害)됨도 없고...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우주적인 평화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여호와를 아는 지식, 곧 여호와를 참으로 경외하고(잠 1:7) 온 마음으로 그를 기뻐하며(11:3) 기꺼이 그 앞에 복종하는 지식이 온 땅에 편만하게 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성 경: [사11:10]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이새의 뿌리 - '뿌리'(*, 쇼레쉬)는 1절의 '싹'(* - 호테르) 혹은 '가지'(*, 네체르)와 본질적으로 같다.

(주); 만민의 기호(旗號)로 설 것이요 - 이새의 뿌리 속에 감추어졌던 그분이 마침내 높은 곳에 우뚝 설 그날이 올 것이다. 그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볼 것이며, 그에게 관심을 갖고 그를 경배하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기호'(*, 네스)는 사람들을 소집할 목적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만든 표시 혹은 깃발을 뜻한다. 이 기호가 5:26에서는 심판의 방편으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구원의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 '그 거한 곳'(*, 메누하토) 곧 '그가 거주하시는 장소'는 말일에 세상 만민이 몰려드는 역사의 중심지요 또한 구원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구원의 중심지가 될 것이므로 당연히 영화로울 것이다. 또한 이곳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에 널리 전파된 신약 시대에 그대로 성취되었다(롬 15:12).

성 경: [사11:11]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 주께서 손을 펴심을 그의 손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심이다. 주께서 이전에 그의 전능한 손의 위력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던 것처럼(출 12:51) 이제 또 '다시'(*, 쉐니트-'다시', '두 번째'라는 뜻) 그의 백성들을 포로 상태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이다.

(주); 앗수르와 애굽과...바다 섬들에서 - 앗수르와 애굽이 먼저 거론된 것은 이들 두 나라가 이사야 시대의 주요 강대국들이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언급된 나라들을 애굽에 속한 나라(바드로스, 구스)와 앗수르에 속한 나라(엘람, 시날, 하맛), 그리고 바다 섬들의 세 부류로 구분한다. 앗수르에 대해서는 7:17-8:22;10:28-34;36,37장;왕하 15:29;17:6;18:11을 참조하라. 그리고 애굽에 대해서는 7:18;왕하 23:29-35;호 9:3,6을 참조하라. '바드로스'는 애굽 상부이며(렘 44:1, 애굽 하부는 '미스라임'), '구스'는 애굽 남쪽 아라비아 만을 포함한 에디오피아이다(18:1). '엘람'은 티그리스 강 동쪽 땅이고(21:2;22:6) '시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남쪽 평원이다(창 10:10). '하맛'은 레바논 북부에 인접한 수리아 땅이다(10:9). '바다 섬들'은 지중해의 섬들과 주변 연안 국가들을 가리킨다. 이상 언급된 나라들은 사실상 이방 세계 전부를 가리킨다(Oswalt). 선지자의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복음이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완전한 성취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롬 11:26)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Alexander).

성 경: [사11:12]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 주께서 이 일을 이루어 가시는 방식이 설명된다. 그는 '기호'(*, 네스)를 세우실 것이다. 이는 열방 중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그가 기호를 세우면 열방은 그의 백성을 석방하며 호송까지 해줄 것이다(49:22;62:10, Delitzsch).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영도하에서의 귀환은 그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주); 이스라엘의 쫓긴 자...유다의 이산한 자 - '쫓긴 자'는 남성형이고, '이산한 자'는여성형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게세니우스(Gesenius)에 의하면, 양(兩) 술부는 양 주어에 공히 종속된다. 즉, '이스라엘과 유다의 쫓긴 남자들과 이산한 여자들'을 가리킨다.

성 경: [사11:13]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 솔로몬 시대 이래 남북으로 나뉘어진 이스라엘이 장차 통일된 한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말이다. 이 일은 상호간에 적대시하던 감정이 해소될 때 성취된다. 이 적대감은 에브라임 쪽에 더 강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8:1;12:1;왕상 11:26;시 78:60-68). 이는 유다를 괴롭게 하는 자가 에브라임이라는 반복된 진술에서 드러난다. 이에 반해 에브라임에 대한 유다의 적의(敵意)는 본절 끝에서 단 한번 나온다. 포로에서의 귀환 이후, 이런 분열상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성 경: [사11:14]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그들이 서(西)으로...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 회복된 이스라엘 곧 신앙으로 일치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성공만이 따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변국들이 그들을 공격할때, 그들은 어깨를 같이하여 단합된 힘으로 방어할 것이므로 항상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은 실제 전쟁을 이야기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로 회복된 이스라엘의 우월성과 탁월함을 비유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어깨'(*, 카테프)는 바다를 향해 경사진 블레셋 해안의 별명이다. 이스라엘은 마치 굶주린 독수리가 높은 곳에서 내려와 먹이를 덮치듯이 블레셋을 공격할 것이다. 여기 언급된 나라들은 이스라엘에 인접한 주변국들인데 이스라엘을 자주 괴롭혔었다(렘 49:28,29;겔 25:4,10).

성 경: [사11:15]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애굽 해고(海股)를 말리우시고...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 과거와 미래가 시적으로 혼합되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한층 강력하고도 풍부하게 표현한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사람의 혀(해고)처럼 생긴 애굽의 홍해를 마르게 하사 그 백성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이제 여호와께서 그보다 더 놀라운 권능으로써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유프라테스 강물을 말리운 다음, 손으로 그것을 내리쳐 7개의 작은 강물로 쪼개사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신을 신은채로 건너올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할 때마다 출애굽의 테마는 주선율로서 거듭 나타난다(40-55장;렘 16:14;23:7).

성 경: [사11:16]

주제1: [메시야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관한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 '대로'(*, 메실라)는 인공적으로 건축한 큰 길 혹은 공공 도로를 말한다. 남은 자들이 대로를 통해서 돌아온다는사상은 본서에서 자주 나온다(19:23;35:8;49:11;62:10). 본문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원수의 손에서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대로를 준비하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셔서 돌아올 때도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구원 사건은 다음장에서 노래불러지는 찬양으로 일단락 된다(12장).

성 경: [사12:1]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주); 전에는...이제는...주께 감사하겠나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를 노래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한때 노하셨으나 이제는 그 노가 풀렸을 뿐 아니라 위로까지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조차도 감사의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첫째, 그의 진노는 사랑하는 자식의 잘못을 고치게 하기 위한 훈계의 방편일 뿐이요(진노의 목적, 히 12:5-11), 둘째, 그럴지라도 그 진노는 잠깐이며 그의 은총은 평생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진노의 기간, 시 30:5).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 선지자의 노래가 화답되고 있다.

성 경: [사12:2]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 이 아름다운 고백은 구원을 맛본 사람의 경험과 내적 확신에서 절로 우러난 것이다.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다. (1)'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하나님밖에는 달리 구원이 없다. (2)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하나님은 나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3)하나님은 나의 구원 '이시라':하나님은 단순히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 스스로가 구원이시다. 동일한 표현에 관하여는 시 27:1;38:22을 참조하라.

(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한 확신(믿음)에서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카톨릭 수사의 모습에서 담대한 개혁자로 탈바꿈한 루터(Luther)의 경우는 그 좋은 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구원이심이라 - 홍해를 건넌 후 모세가 불렀던 찬양의 노래가 여기 반복되고 있다(출 15:2).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여호와는 그 백성을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능력이시요, 그 백성이 매일 부를 찬송의 주제이시며, 그 백성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이시다.

성 경: [사12:3]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마름이 없이 샘솟듯 넘쳐날 것을 노래하는 것이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물이 구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즐겨 활용되었다(8:6;35:6,7;44:3;55:1;시 42:1;46:4;렘 2:13;요 4:15;7:37,38;계 7:17). 어쩌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물을 공급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절을 노래했는지도 모른다(출 17:1-7).

성 경: [사12:4]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주);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이름이 높다 하라 - 본문은 시 105:1과 거의 흡사하다.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연속되는 4개의 명령문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 첫째는,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의 최초의 언어는 감사이다. 둘째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예배드림을 가리키는 말이다(창 12:8;왕상 18:24). 셋째는,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이는 복음 전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자는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불신자에게 마땅히 전파해야 한다. 넷째는, 그의 이름을 높이라는 것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러한 모든 행위들로써 하나님을 높이며 그로 영광되게 하라는 것이다. 이는 신자의 궁극적 목표이다.

성 경: [사12:5]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주); 극히 아름다운 일 - 히브리어 원문은 '게우트'(*)이니, 그뜻은 '올라감', '탁월함',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 그처럼 고귀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은 '온 세계에 널리 알려져야만 한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령(마 28:18-20)과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선교 명령(행 1:8)을 연상시키는 말씀이다(G.W.Grogan).

성 경: [사12:6]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주);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 '시온의 거민'은 여성으로 의인화된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가리킨다(Alexander). '소리를 높여 부르라'는 원문에는 두 동사로 되어 있으니, 곧 '기뻐 소리치며(*, 차할리) 환호하라(*, 로니)'이다.

(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 노래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위대하심의 선포로 끝을 맺는다:'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그 존재와 속성에 있어서 인간과 구별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사 그 백성을 구원하심이 실로 위대하시다! 더욱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서 그 백성중에 영원토록 함께 거하심이 실로 위대하시다!

성 경: [사13:1]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 - 아하스 시대의 예언이 마감되고 이어서 바벨론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에 대한 심판 선고가 뒤따른다(13-23장). 글의 구성은 다소 의도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7-12장에 예언된 메시야의 통치 곧 전우주적인 평화의 왕국이 건설되기 위해서는 적대적인 지상 왕국들이 평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40:3-5;마 3:3). 열국에 대한 심판 예언 중에 바벨론이 제일 먼저 거론된다. 이는 그 당시 미미한 세력에 불과했던 바벨론이 머잖은 장래에 앗수르를 대신하는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을 선지자가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이다(39장).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본장에서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바벨론의 역사적 측면보다는 스미드(G.Smith)가 명기한바,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적이요 암흑의 요새'(창 11:9;계 14:8;17,18장)로 취급되어온 바벨론의 영적인 특성에 주로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벨론은 인간의 영광과 교만의 대변자이다. 바벨론이 망한다면 바로 그 내적인 교만 때문이다(12-17절). 유다와의 관계는 여기서 고려되고 있지 않다. '경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맛사'(*)는 문자적으로는 '무거운 짐'인데, 이는 환난의 말씀이나 파멸 선고같이 전달하기 부담스러운 메시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언서에 자주 나온다(14:28;15:1;17:1; 19:1;21:1,11,13;22:1;23:1;30:6;나 1:1;슥 9:1;12:1;말 1:1).

성 경: [사13:2]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자산 위에 기호를 세우고...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 군대가 소집된다. 이 장면은 연속되는 세 개의 컷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나무없는 민둥산에 멀리서도 볼 수 있는 깃발이 세워진다. 그 다음 큰소리로 사람들을 부른다.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 서둘러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군대를 소집하는 이가 누구인지, 또 소집된 이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는다(그것들은 나중에 점차적으로 드러남).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바벨론을 대적하기 위해서 모였으며, 그 운명의 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자산'의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슈페'(*)는 '긁다, 벗기다'는 뜻의 동사 '솨파'(*)의 나팔 분사형으로, '벌거벗은', '벗겨진'을 의미한다. '기호'(*, 네스)에 대하여는 11:12 주석을 참조하라.

(주);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 군대를 소집한 목적은 그들로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도성을 정복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존귀한 자'(*, 네디빔)는 아마도 바벨론의 군주들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시 107:40;113:8).

성 경: [사13:3]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내가 나의 거룩히 구별한 자에게 명하고 - 강조형으로 쓰인 '내가'(*, 아니)란 말에서 군대를 소집한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드러난다. 그는 바벨론과의 전쟁이라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 용사들을 선발하고 또 준비하신다. 즉 '성별하신다'(렘 22:7;51:27;욜 3:9;습 1:7).

(주); 나의 노를 풀게 하였느니라 - 용사들을 성별한 목적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하는 막대기로 부름받았다.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치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동일한 방법으로 용사들을 불러 바벨론을 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로 삼으시는 것이다(10:5).

성 경: [사13:4]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산에서 무리의 소리가 남이여 - 산에서 들리는 이 소리는 많은 사람의 소리, 곧 '열국 민족들이 함께 모여 떠드는 소리'이다. 침략군들은 잡다한 산악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다(렘 51:27).

성 경: [사13:5]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온 땅을 멸하려 함이로다 - '온 땅'(*, 콜-하아레츠)은 바벨론 제국을 가리키는 수사학적 표현이다(Gray). NIV는 이를 '온 나라'(the whole country)라고 번역했다.

성 경: [사13:6]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 욜 1:15 참조. 원문대로 읽으면 '전능자에게서(*, 미솨다) 멸망같이(*, 케쇼드)임할 것이다'이다. '멸망'(*, 쇼드)과 '전능자'(*, 솨다)는 모두 '강하다', '황폐시키다'는 뜻의 '솨다드'(*) 동사에서 파생된 말들이다. 언어 유희의 일종이다.

성 경: [사13:7,8]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심판날에 바벨론 주민들이 겪을 공포가 생생하게 묘사된다. (1)'모든 손이 피곤하며':저항 불능의 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2)'마음이 녹을 것이라':싸울 용기마저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말이다. (3)'놀라며':직역하면 '전율하며'(*, 니브할루)이다. (4)'괴로움과 슬픔에 잡혀서 임산(臨産)한 여자같이 고통하며':'해산의 고통'은 선지자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다. '괴로움'(*, 치림)과 '슬픔'(*, 하발림)은 모두 임산한 여자의 고통과 관련된 말들이다. (5)'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 같으리로다':'불꽃 같은 얼굴'은 얼굴에 피가 솟구침을 비유한 말이다. 공포와 경악의 극한을 보여준다.

성 경: [사13:9]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땅을 황무케 하며...죄인을 멸하리니 - '땅'(*, 하아레츠)은 전세계를 가리킨다(Ewald, Umbreit, Delitzsch). 전세계적 심판을 통한 죄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노아 홍수와 유사하다(창 6:13).

성 경: [사13:10]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 여호와의 날은 어두움의 날이다(겔 32:7;욜 2:10;3:15;암 5:18;슥 14:6,7). 그날에 하늘의 별들도 빛을 잃고 해와 달도 더 이상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의 빛남이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증거한다면(창 1:14-19;마 5:45), 역으로 어두움의 지배는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어두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갈보리 언덕에서 1번 있었고(마 27:45), 최후의 심판 때에 다시 있을 것이다(마 24:29).

성 경: [사13:11]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교만한 자의 오만...강포한 자의 거만 - 본문은 '그중에서 죄인을 멸한다'는 9절 말씀의 확대, 부연이다. 세상은 그 죄로 인해 멸망당한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다. 그 모든 죄 가운데 선지자는 교만의 죄를 으뜸으로 꼽는다. '교만한 자', '강포한 자'는 사악한 세상의 군주들을 가리킨다. 특히 '강포한 자'로 번역된 '아리침'(*)은 단순히 군주를 뜻하는 '네디빔'(* -2절)과는 달리 무섭고 잔인한 폭군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바벨론의 주요한 특성을 나타내는 전용어로 에스겔서에 자주 등장한다(겔 30:10,11;31:12;32:12).

성 경: [사13:12]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사람을...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 - 직역하면 '내가 사람(*, 에노쉬)을 정금보다 희귀하게 하며, 사람(*, 아담)을 오빌의 금보다'이다. 여기서 '에노쉬'와 '아담'은 보통 사람과 고귀한 사람을 구별하는 의미로 쓰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람을 지칭하는 동의어로 쓰였다(Alexander).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인구가 급속히 감소될 것을 말한다. 선지자는 이 희귀함을 금에 비교한다. 금은 값비싼 만큼 그 수가 많지 않다. 더욱이 불순물이 혼합되지 않은 정금일수록 그 수효는 훨씬 더 줄어든다. '오빌'의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오는 금은 특별히 좋은 것으로 인정된 듯하다(왕상 9:28;10:11;22:48;대상 29:4;대하 8:18;9:10;욥 22:24;28:16;시 45:9).

성 경: [사13:13]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떠나게 하리니 - 하늘이 떨리며 땅이 흔들림은 전세계적 격변이 일어날 최후 심판의 날을 연상시킨다(24:18;욜 2:10;3:16;학 2:6,7;21,22등). 선지자에게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는 날은 여호와의 날의 한 모형이요 시작에 불과하다. 그 완성은 세상이 낡은 허물을 벗고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새로움을 덧입게 될(엡 4:24) 세상 끝날에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성 경: [사13:14]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그들이...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 제국의 전성기에 바벨론은 각처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로 인간 시장을 형성했다. 그러나 제국의 멸망에 직면해서 거대한 군중들이 썰물처럼 도시를 빠져 나갈 것이다. 선지자는 이들의 모습을 위험에 처해서 혼비 백산하여 사방으로 날뛰는 겁많은 노루와 한번 흩어지면 다시는 모일줄 모르는 양들에 비유한다.

성 경: [사13:15]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만나는 자는...잡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겠고 - 그들이 이처럼 사력을 다해서 도망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읍에 남아 있다가 붙잡히는 날에는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게세니우스(Gesenius)는 여기서 길에서 발견당한 사람과 집에 숨어 있다가 붙잡힌 사람이 대조되고 있다고 한다. 반면에 로우스(Lowth)는 혼자 있다가 붙잡힌 사람과 무리와 함께 있다가 붙잡힌 사람이 대조되고 있다고 본다. 전자가 더 합당하다.

성 경: [사13:16]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어린아이들은...그 집은...그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 - 침략군의 만행에서 제외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지자의 묘사는 소름끼친다. 심지어 방어 능력도 없는 어린아이들마저 내던져져 유리 구슬처럼 부수어 뜨림을 당한다. 그것도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호 13:16;나 3:10). '메어침을 입는다'로 번역된 '라타쉬'(*)는 '박살낸다', '깨뜨린다', '산산조각낸다'는 뜻이다(18절). 집이 약탈당하고 아내가 욕을 보는 재앙에 대하여는 신 28:30;렘 3:2;애 5:11;슥 14:2 참조하라.

성 경: [사13:17]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메대로 인한 바벨론의 멸망]

(주); 보라...메대 사람을 내가 격동시켜 그들을 치게 하리니 - 여기 처음으로 약탈자들의 정체가 제시된다. 그들은 메대 사람들이다. 메대인들은 아리안족의 후손으로서 소금 사막(the Salt Desert)과 페르시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저지대 사이에 있는 이란 북서부의 고원 지방에 거주하였으며, 성경 기록으로는 창 10:2에 처음 나온다. 이들은 오랫동안 앗수르의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특히 사르곤 왕 때에는 부족의 일부가 점령당하여 일단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메대의 여러 마을에 강제로 이주되기도 하였다(왕하 17:6).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만 해도 메대는 앗수르의 지배를 받는 미약한 세력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본래 호전적인 그들은 B.C. 714년경에 독립된 나라를 형성하였으며 그로부터 1세기 뒤에 바벨론과 함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략하기도 하였다(B.C.612년). B.C. 539년, 메대-바사 연합군이 바벨론을 점령한 사실에 기초하여 일군의 학자들은 본문이 그 후에 기록되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맞다면 후대의 작가가 본문을 작성할 때, 바벨론 점령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바사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선지자가 본문에서 바사 대신 메대만을 언급한것은 아마도 그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광포하기 그지없는 사나운 민족들로 알려졌었기 때문일 것이다(Oswalt, G.W.Grogan).

(주); 은을...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 이 말은 그들이 금과 은의 가치를 모르는 미개한 야만인들임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그들의 목적이 바벨론 정복에 있음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 경: [사13:18]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메대로 인한 바벨론의 멸망]

(주); 활로 - 메대 사람들은 활을 잘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22:6;렘 49:35).

(주); 청년을...태의 열매를...아이를 가석(可惜)히 보지 아니하리라 - 이는 모두 메대인들의 잔인성을 구체적으로 나열한 표현이다.

성 경: [사13:19]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메대로 인한 바벨론의 멸망]

(주);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 - 직역하면 '갈대아 사람들의 자랑의 영광'이다. '노리개'로 번역된 '티프에레트'(*)는 '꾸미다', '장식하다'는 뜻의 '파아르'(*)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 '장식', '광채', '영광'을 의미한다. '갈대아 사람'(*, 카스딤)은 바벨론 성읍 최남단의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로 초기 바벨론을 구성한 주요한 부족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B.C.722년경에 히브리어로 므로닥 - 발라단이라 이름하는 그들의 지도자 마르둑 - 아플라 - 일디나(Marduk - Apla - iddina)를 앞세워 바벨론을 정복했으며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약 1세기 후에 느부갓네살의 통치 아래 신바벨론 제국이 건설되어 그 지배력을 온 세계에 떨치게 되었다(J.Watts). 부족민, 즉 갈대아 사람들에게 세계 제일의 도시 바벨론은 진실로 그들의 자랑이며 영광으로 비쳤을 것이다.

(주);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형벌로 인한 완전한 파멸의 보기(모범)로 쓰이고 있다(1:9).

성 경: [사13:20]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메대로 인한 바벨론의 멸망]

(주); 아라비아 사람도...양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 아라비아 사람들(아라비, * )은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떠도는 유랑민족으로 목축과 수렵에 능하였다. 그들은 아무데서나 천막을 치고 거주하였기 때문에 헬라인들로부터 '천막 생활자들'(*, 스케네타이)이라는 말을 들었다(Calvin). 그런데 이들마저도 그곳에 장막 치기를 거부한다는 말은 바벨론 땅이 사람의 주거지로서만이 아니라 잠시 유숙하는 곳으로도 사용되지 못할 만큼 철저히 황폐해질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Lange).

성 경: [사13:21]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메대로 인한 바벨론의 멸망]

(주);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들양이 거기서 뛸 것이요 -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곧 저주받아 쓸모없게 된 땅을 '들짐승들'(*, 치임)과 '부르짖는 짐승'(*, 오힘), 그리고 '타조'(*, 베노트 야아나)와 '들양'(*, 세이림)이 차지한다. '치임'과 '오힘'이 구체적으로 어떤 짐승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하이에나, 족제비등과 같이 광야에서 서식하는 야생 동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타조'는 문자적으로는 '타조의 딸들'인데, 이는 고대 근동에서 타조에 대해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세이림'은 본래 '털이 많은 숫염소'를 뜻하는데(레 17:7;대하 11:15에서 숫염소의 형상을 한 우상의 의미로 사용됨), 유대인들 가운데 널리 보급된 민간 신앙에서 이는 염소의 모양을 하고 사막에 자주 출몰하는 귀신(34:14)으로 여겨졌다고 한다(Alexander).

성 경: [사13:22]

주제1: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메대로 인한 바벨론의 멸망]

(주); 그 궁성에는 시랑이...들 개가 울 것이라 - '시랑'(*, 이임)은 그 어원적 의미에서 볼 때 '울부짖는 짐승'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리', 혹은 '재칼'등으로 번역된다. '들개'(*, 타님)는 '하이에나'(RSV) 또는 '도마뱀'(KJV)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런 동물들이 '궁성'에 거주한다. '궁성'(*, 알므노트)은 '과부살이'를 뜻하는 '알마노트'(*)와 모음 하나만 다르다. 이는 한때 호사스러웠던 궁성이 이제는 외로운 과부살이처럼 버려진 곳이 될 것을 빗대어 암시한 것이다.

성 경: [사14:1]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

(주); 여호와께서...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 바벨론의 파멸은 그의 백성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본문 모두(冒頭)에 나와 있는 '왜냐하면'(*, 키)이라는 접속사에서 앞말과의 논리적 연관성이 분명히 드러난다:'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심은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이 책의 후반부(40-66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렘 50:4,8, 28;51:6,36 참조). '야곱'과 '이스라엘'은 온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다시 택하여'(*, 바하르 오드)는 그 옛날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심같이 이제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그 백성을 다시 선택하실 것을 말하니(신 4:37;7:6,7;시 135:4), 결국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버리지 않고 계속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그 사랑은 세 가지로 표현된다. (1)자기 땅에 돌아옴. (2)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 연합함. (3)이방인들을 다스림.

성 경: [사14:2]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

(주);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를...주관하리라 - 땅과 안식의 회복, 이방인들의 개종은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의 운명이 뒤바뀌어질 것을 암시하는 서곡에 불과하다. 이 반전(反轉)은 전에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자유자가 되고 전에 압제자였던 이방인들이 노예가 된다는 말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이 말을 전형적인 유대주의의 표현(Procksch)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본문의 참된 성취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백성된 권리와 특권 및 언약을 계승한 교회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2:2,3;슥 8:20-22, Alexander).

성 경: [사14:3]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여호와께서...안식을 주시는 날에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귀환함으로써 시 137편에서 노래불렀던 포로 생활의 슬픔과 고달픔은 이제 지난날의 추억으로 화할 것이며, 대신 영원한 안식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안식을 주시는 날'은 신 25:19에서 대적에게서 벗어나는 날로 묘사된다. '슬픔'(*, 오체브)은 무거운 노역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을 가리키며, '곤고'(*, 로게즈)는 분노와 초조와 괴로워하는 마음의 고통을 가리킨다(Aben Ezra).

성 경: [사14:4]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부를 노래는 파멸당한 바벨론 왕을 조롱하는 노래이다. 노래는 23절에서 종결된다.'노래'로 번역된 '마솰'(*)은 '비교하다', '비슷하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일반적으로 간결하게 표현된 비유, 격언, 수수께끼, 풍자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여기서는 특히 풍자적인 말의 의미로 쓰였다.

(주); 학대하던 자가...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 '학대하던 자'(*, 노게스)와 '강포한 성'(*, 마드헤바)은 동의어이다. '노게스'는 세금을 걷는 관리이며, '마드헤바'는 황금성을 뜻하니, 바벨론 사람들의 황금에 대한 탐욕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그처럼 기세 등등하고 고압적이던 압제자들이 졸지에 몰락하게 된 사실이 보는 이들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안겨준다. 이러한 감정이 '어찌'(*, 예크)라는 경악에 찬 물음 속에 함축되어 있다.

성 경: [사14:5]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여호와께서...꺾으셨도다 - 앞절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즉, 황금 성이 몰락하게 된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멸시키셨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파멸은 우연적,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에 의한 것이다.

성 경: [사14:6]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그들이 분내어 여러 민족을 치되 - 바벨론의 몽둥이와 홀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들은 쉴새없이 정복 전쟁을 감행했으며, 정복한 나라에 대하여는 무자비한 압제와 핍박으로 시종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사14:7]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靜穩)하니...노래하는도다 - 독재자의 급속한 몰락으로 온 땅에 평안과 고요함이 감돌고 기쁨의 노래가 꽃핀다. 구원의 감격이 노래로 표출된다는 사상은 본서에 친숙하다(44:23;49:13;52:9;54:1;55:12). 이 기쁨의 노래에 말 못하는 대자연도 동참한다.

성 경: [사14:8]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향나무와 레바논 백향목도 너로 인하여 기뻐하여 - 향나무와 레바논 백향목이 기뻐하는 까닭은 바벨론의 넘어짐으로 이제 더 이상 군사적 목적으로 자신들이 벌목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향나무와 백향목은 건축물의 최상의 목재로 평가되어 왔다. 따라서 예로부터 열방들은 함대나 공격 무기 등을 제조하기 위하여 이들 나무들을 함부로 벌목하였다. 이 같은 일은 전쟁에 길들여진 갈대아인들에게 더욱 현저하였을 것이다.

성 경: [사14:9]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아래의 음부 - '음부'(히, *, 쉐올;헬, *, 하데스)는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고대인들은 그것이 땅 아래 실재한다고 믿었다(5:14).

(주);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 땅 위의 평안(8절)과 땅 밑의 소동이 대조된다. 바벨론 왕이 음부에 내려온다는 소식은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세상의 영웅들(*, 레파임)과 열방의 뭇 왕들을 경악 속에 빠뜨린다. '레파임'은 음부에 거주하는 망령들을 가리키는데 산 자에 비해서 훨씬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들(그림자처럼 외형만 소유한)로 간주되었다. 게세니우스(Gesenius)는 이 말이 '약해지다'는 뜻의 '라파'(*) 동사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26:14,19;욥 26:5;시 88:11;잠 2:18;9:18;21:16).

성 경: [사14:10]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너도 우리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 망령들이 바벨론 왕을 보고 외치는 소리이다. 생전에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아삽이 노래한 바 같이, 스스로 신(神)이라 자처하고 지존자의 아들이라 자부하는 이들도 결국 죽을 때는 범인들과 똑같이 엎어지기 마련인 것이다(시 82:6,7).

성 경: [사14:11]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구더기가...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 선지자의 풍자는 점입 가경(漸入佳境)이다. 음부에 떨어진 바벨론 왕이 누울 이부자리가 소개되니, 그 요는 우글거리는 구더기요 그 이불은 꿈틀거리는 지렁이다. 생전의 영화와 사후의 비참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성 경: [사14:12]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땅에 찍혔는고 - 바벨론 왕의 급락을 선지자는 두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는 별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둘째는 거대한 나무가 찍혀 쓰러지는 모습으로, '계명성'(*, 헬렐)은 새벽별(혹은 금성)을 뜻하는 말이다. 그것은 태양보다 먼저 떠서 동트기 전에 비췬다는 의미에서 적절하게 '아침의 아들'(*, 벤-솨하르)이라 불리운다(*, 헤오스포로스, LXX;Lucifer, 루시퍼, Vulgate). 초대 교부 터툴리안과 그레고리 대제는 눅 10:18을 근거로 하여 이 말을 사단의 떨어짐에 적용하였는데, 그 이후로 '루시퍼'가 마귀의 왕을 가리킨다는 대중적 오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본문에서 선지자가 사단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하늘 끝까지 높아지려한 교만한 바벨론 왕을 염두에 두고 '계명성'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열국을 엎은 자'는 거대한 그늘로 주변을 뒤덮는 나무에서 따온 표상인데, 그 힘으로 열국을 압도했던 바벨론을 일컫는 말이다(Hitzig, Hendewerk).

성 경: [사14:13]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북극 집회의 산 - 신들이 특정한 산에 모여 집회를 갖는다는 신화적인 관념은 고대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예, 그리스의 올림푸스 산). 그 경우 산들은 언제나 북쪽 극단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 언급된 '집회의 산'은 제신(諸神)들의 집회의 장소로 알려진 시리아 북쪽의 자폰(Zaphon) 산 혹은 카시우스(Cassius)산을 가리키는 듯하다.

성 경: [사14:14]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 '지극히 높은 자'는 히브리어로 '엘리욘'(*)인데, '위로 오르다', '높다'는 뜻의 '알라'(*)동사에서 유래하였다. 델리취(Delitzsch)에 의하면, 바사 왕들은 그들의 비문에 자신들을 '신의 후손' 심지어는 '신들'(*, 데오이)이라고까지 명명하였다고 한다.

성 경: [사14:15]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그러나 이제 네가...빠치우리로다 - 선지자가 재구성한 바벨론 왕의 독백(13,14절)은 끝나고 이에 대한 엄중한 판단이 뒤따른다:'너는 하늘 끝까지 높아지고자 하나 (정반대로) 무덤으로 던지워질 것이다.'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죽음을 선고받은 첫사람 아담과,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늘에 닿는 탑을 쌓다가 붕괴된 바벨탑 사건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창 3,11장).

성 경: [사14:16,17]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무대는 지하의 음부에서 지상의 전쟁터로 바뀐다. 바벨론 왕은 더 이상 유령이 아니라 여기서부터는 칼에 찔려 횡사한 주검으로 나온다.

(주);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 그 시체는 매장되지도 아니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쉬이 뜨인다. 바벨론 왕의 비참한 운명에 대한 놀라움은 지하에서나 지상에서 다르지 않다. 놀람의 원인도 동일하다(10절).

성 경: [사14:18,19]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열방의 왕들은...밟힌 시체와 같도다 - 열방의 왕들과 바벨론 왕이 대조된다. 생전의 영광에 있어서 열방의 왕들은 바벨론 왕에 비길 바가 못되었다. 그러나 사후의 영광에 있어서는 사정이 정반대가 되었다. 열방의 왕들은 미리 준비한 자기들의 집(무덤)에 편안하게 안장될 수 있었지만(왕하 21:18;대하 33:20), 바벨론 왕은 무덤에 눕지도 못하고(*, 미키브레카, '무덤에서 멀리') 마치 나무로부터 잘려져 썩어져가는 나뭇가지처럼 또한 밟힌 시체처럼 길바닥에 버려질 것이다. 주석가들은 느부갓네살의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어졌다고도 하고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벧사살에게 이 모든 일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고도 한다(단 5:30). 그러나 이런 예증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군주의 운명이 아니라 세계 제국으로서의 바벨론의 비참한 최후이기 때문이다(Alexander).

성 경: [사14:20]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악을 행하는 자의 후손은...못하리로다 - 악인의 통치가 초래하는 재난은 그 당대에만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까지 미친다. 이는 주께서 약속하신 바, 의인은 영원히 기념되나(시 112:6) 악인의 자취는 땅에서 끊어지고(시 34:16;109:13) 그 이름은 썩으리라(잠 10:7)는 말씀과 일치한다(Calvin).

성 경: [사14:21]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너희는 - 바벨론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부름받은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Alexander, Calvin).

(주); 그들로 일어나...충만케 하지 못하게 하라 - 그들이 번성하여 다시는 그들의 조상들처럼 정복 전쟁에 나서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바벨론의 전제 군주들은 세계 정복의 야욕에 불타 영토 확장에만 전념하고 넓혀진 경계선마다 그들의 승전(勝戰)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고 도시들을 건설하였다(Leupold).

성 경: [사14:22,23]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

바벨론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판결로 바벨론에 대한 경고는 종결된다(13,14장). 본문의 주요한 의미는 바벨론의 멸절을 결론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을 두번에 걸쳐 반복되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주);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 하나님의 심판은 그가 원수를 대적하여 일어나심으로 표현된다. 결국 바벨론의 참된 대적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주); 고슴도치의 굴혈(窟穴)과 물웅덩이가 되게 하고 -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곳을 들짐승이 차지하며, 화려했던 궁성이 들어섰던 자리를 물웅덩이가 대신한다. '고슴도치'로 번역된 '키포드'(*)는 습지에 서식하는 동물을 가리키며(34:11;습 2:14), '물웅덩이'(*, 아그메-마임)는 '늪지', '습한 곳'을 뜻한다(35:7;41:18;42:15).

성 경: [사14:24]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앗수르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이루리라 - 직역하면 '만일 내가(*, 임-로)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더라면...'이다. 단축형의 맹세에 대하여는 5:9을 참조하라. 이 같은 맹세 형식에서 여호와의 신실하심이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 신자들의 믿음의 확실성이 근거한다.

성 경: [사14:25]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앗수르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내가 앗수르 사람을...밟으리니 - 하나님의 계획은 앗수르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 파괴는 '나의 땅'(*, 나의 산), 즉 유다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을 포위한 산헤립의 군대가 갑작스레 전복된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37:36;왕하 19:35).

(주); 그 때에 그의 멍에가...벗어질 것이라 - 앗수르의 파멸은 곧 이스라엘의 해방으로 귀결된다. 본문에 언급된 사상은 10:27과 비슷하다.

성 경: [사14:26]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앗수르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온 세계를 향하여...열방을 향하여 - 바벨론의 몰락과 앗수르의 멸망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세계 경영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온 땅과 열방에 대하여 계획하신 일은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니, 왜냐하면 그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감히 하나님과 겨룰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시 33:11).

성 경: [사14:27]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앗수르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경영하셨은즉...그 손을 펴셨은즉 - '경영'(*, 에차)과 '손'(*, 야드)은 여기서 '지혜와 능력'(Vitringa) 혹은 '계획과 실행'(Gill)을 뜻한다.

성 경: [사14:28]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아하스 왕의 죽던 해에 받은 경고라 - '경고'에 대하여는 13: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사14:29]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블레셋 온 땅이여 - '블레셋'(*, 펠레쉐트)은 한때 소아시아 남서 지방에 거주하다가 지중해 연안으로 이주하여 가나안 남부 해안 지역에 정착한 해상 백성들로, 그 이름의 뜻은 '유랑자들', '이주자들'이다.

(주); 이들은 다섯 도시국가 -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사, 가드 - 를 형성하여 각각 군주들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가나안 문화와 종교에 쉽게 적응했으며 헷 족속으로부터는 철 제련 기술을 전수받았다. 유능한 군사 조직가들이나 용맹스러운 전투 행위로 이름난 이들은 사사 시대 이래 통일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하였다.

(주); 너를 치던 막대기 - 아하스 왕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은 디글랏 빌레셀 3세를 가리킨다(B.C.727년 사망). 블레셋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던 그의 죽음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막대기가 아하스 왕을 가리킨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블레셋을 때린 막대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얻어맞은 북이었기 때문이다(대하 28:18).

(주); 뱀의 뿌리에서는...나는 불뱀이 되리라 - 블레셋이 기뻐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주석가들은 이것을 미래로 갈수록 위험이 증폭되고 연속되는 세 단계로 파악한다. 그러나 가장 좋은 해석은 본문의 '뱀의 뿌리'와 '그 열매', 그리고 '독사'와 '나는 불뱀'을 시적 평행법에 따른 동의어로 보는 것이다(Gray, Oswalt). 그렇다면 그 의미는 블레셋이 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 말대로, 디글랏 빌레셀의 사후(死後) 사르곤 왕은 아스돗을 치고(20:1) 가사의 왕 카눈을 포로로 잡았으며, 산헤립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정복하고 가사와 아스돗의 왕을 사로잡았던 것이다(G.Rawlinson).

성 경: [사14:30]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가난한 자의 장자는...누우려니와 - 선지자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허덕이는 유다 백성을 '가난한 자의 장자'라 부른다. '장자'(*, 베코레)는 여기서 최상급의 의미로 쓰였다(욥 18:13). '빈핍한 자'(*, 에베요님)는 유리 방황하는 양에 비유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비록 현재의 고난이 이와 같을지라도 미래의 모습은 이와 전혀 다를 것이다. 즉, 그들은 목자되신 하나님의 품에서 편히 누울 것이며,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도 영구히 해방될 것이다. 여기 두 겹의 대조가 있다. 즉, 유다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유다의 미래와 블레셋의 미래이다.

성 경: [사14:31]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없느니라 - 선지자는 블레셋에 임박한 재난을 북방에서 다가오는 연기로 표현한다. '연기'는 블레셋을 침공하는 군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행진하는 군데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먼지에서 착안된 것인지(Lowth, Gesenius, Rosenmuller), 아니면 침략군에 의해서 파괴당한 도성들에서 솟아오르는 화재와 연관된 말인지(Knobel, Maurer) 분명하지 않다. 하여튼 이 군대는 전열(戰列)에서 낙오되는 이가 하나도 없을 만큼 훈련이 잘되어 있다(5:26-29). 아마도 앗수르 군대를 가리킬 것이다(Oswalt).

성 경: [사14:32]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 '사신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에 와서 반 앗수르 동맹에 가입해 주기를 요청하는 블레셋 사신들을 가리킬 것이다(Gray, Leupold). 그 대답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호해주신다'는 것이다. 즉 시온을 세우신 그가 시온을 지켜주실 것이니, 다른 나라와의 군사적 동맹 따위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성 경: [사15:1]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I)]

주제2: [모압에 임할 심판]

(주); 모압에 관한 경고 - 선지자의 경고는 서쪽에 있는 블레셋을 지나 동쪽의 모압으로 향한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로(창 11:31;19:37) 요르단 동편 사해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모압과 이스라엘이 혈연적으로 가까운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두 나라 사이의 상호 관계는 우호적이 아니었다. 사사 시대에 모압 왕 에글론은 이스라엘을 18년간이나 정복하였다(삿 3:12-14). 사울은 모압과 싸웠으며(삼상 14:47), 다윗은 모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삼하 8:2;대상 18:2). 솔로몬은 그의 아내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모압의 신(神) 그모스를 섬기는 산당을 지었다(왕상 11:7,8). 남북으로 나라가 나뉜 후 모압 왕 메사는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조공을 바쳤다(왕하 3:4). 아합이 죽은 후 메사는 이스라엘을 배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 유다 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어야 했다(왕하 3:6-27). 그러나 예후 시대에 이스라엘이 트랜스 - 요르단 지배권을 상실한 이후(왕하 10:32) 모압은 빈번히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괴롭혔다. 앗수르에 관한 한, 이웃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모압도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B.C. 712년 모압이 반앗수르 동맹인 아스돗 동맹에 가입한일로 앗수르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선지자의 기록은 아마도 이때를 전후해서 작성된 듯하다. 모압에 관한 그 밖의 기록으로는 렘 9:26;40:11, 특히 렘 48장을 참조하라.

(주); 하루 밤에 - 이는 모압의 멸망이 문자적으로 야간에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돌연히 임한다는 말이다(17:14 참조).

(주); 모압 알...모압 길 - '모압 알'(혹은 '알 모압')은 아르논 남단에 위치한 모압의 수도 이름이며(민 22:36) 오늘날의 랍바(Rabba)에 해당한다. '모압 길'(혹은 '길 모압')은 거대한 바위 위의 요새화된 도시로 '모압 알'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오늘날의 케레크(Kerek)에 해당된다. 가장 중요한 모압의 두 도성이 황폐된다 함은 나라 전체가 붕괴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하에서 계속 나오는 모압 지명에 대하여는 본장 강해 지도를 참조하라.

성 경: [사15:2,3]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I)]

주제2: [모압에 임할 심판]

(주);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 '바잇'(*, 바이트)의 뜻은 '집', '성전'이다(출 23:19;34:26;신 23:18;수 9:23, Calvin, Alexander, Oswalt, Kimchi). '디본'은 아르논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며 모압 왕 메사의 고향으로 알려지고 있다(민 33:45). 이곳에 그모스 신의 산당이 있었다. 모압 사람들은 국가적 재난에 직면할 때 그들의 우상인 그모스 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울며 호소하였다. '바잇'이 '벧 바알 므온'(수 13:17-그곳에 바알 신당이 있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주);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도다 - '느보'는 헤스본 남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던 곳이다(신 34:1). '메드바'는 느보와 디본의 중간 지점에 있는 성읍이다. '느보'에 대하여는 민 32:3,38;33:47;대상 5:8;렘 48:1,22 등을, '메드바'에 대하여는 민 21:30;수 13:9,16;대상 19:7등을 참조하라. 모압 사람들이 통곡하는 모습이 길게 서술된다.

(주); 그들이 각각 머리 털을 없이 하였고...각기 애통하여 - 각기 자기의 머리털을 베고 수염을 깎으며 맨몸에 굵은 베를 두르고 지붕 위에서 오열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애도 방식으로서(3:24;22:12;창 37:34;삼하 3:31;15:30;왕상 21:27;스 9:3;렘 41:5;애 2:10;미 1:16) 앗수르(욘 3:5), 아람(왕상 20:31), 바사(에 4:1,2), 이스라엘(느 9:1)등에도 이런 관습이 널리 유포되었다(Rawlinson).

성 경: [사15:4]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I)]

주제2: [모압에 임할 심판]

(주);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야하스까지 들리니 -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인접한 성읍들로, 모압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선지자가 가장 북쪽에 있는 이들 도성들까지 언급한 것은 비탄이 모압 전역에 가득 차서 어느 한 군데고 예외적인 곳이 없음을 보여주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곳에서 부르짖는 통곡 소리가 어찌나 큰지 아르논 근처에 있는 야하스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소리의 크기로써 슬픔의 깊이를 표현하는 시적 기교이다.

(주); 모압의 전사가...떨도다 - 모압의 비통함이 한층 강조되고 있다. 가장 용맹스러운 전사들마저도 이처럼 두려움에 겨워 통곡할 지경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본절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그 의미상 대구를 이룬다.

성 경: [사15:5]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I)]

주제2: [모압에 임할 심판]

(주); 내 마음이...부르짖는도다 - 모압에게 심판을 선고한 선지자마저도 모압의 통곡에 동참한다는 말에서 모압의 비참이 최고로 강조되고 있다. 본문은 '그들의 재난이 얼마나 심각하면 내 마음이 그들을 위해 이렇게 아파하며 더불어 통곡하겠느냐'로 풀어 설명할 수 있다.

(주); 그 귀인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로 도망하여...부르짖으니 -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귀인들'(*, 베리헤하)을 '도망하는 사람들'(*, 바리헤하)로 읽는다(43:14, Saadias, Kimchi, Alexander). 모압의 피난민들은 사해 남단으로 도피한다. 이는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하여 소알로 피신한 것과 흡사하다(창 19:23).

성 경: [사15:6]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I)]

주제2: [모압에 임할 심판]

(주); 니므림 물이 마르고 - '니므림'이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다. 오늘날 사해 남단(Wady en-Numere)과 사해 북단(Wady Nimrin)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문맥상 본문이 피난민들의 행로와 관련된다고 볼 때, 그것은 아마도 남쪽을 가리킬 것이다. 한편, 니므림 물이 마른 것은 모압을 침공한 군사들이 전략적 목적으로 수원(水源)을 차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자연의 피폐함(시각적 표현)은 피난민들의 통곡소리(청각적 표현, 5절)와 적절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성 경: [사15:7]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I)]

주제2: [모압에 임할 심판]

(주); 그러므로...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 '얻은 재물'(*, 이트라)은 '남겨진 것'이며, '쌓았던 것'(*, 페쿠다)은 '값진 소유'이니, 모압 사람들이 난리통에 그나마 건질 수 있었던 재물들을 가리킨다(Leupold). 그들은 이것만이라도 무사히 운반하고자 한다. 그들이 건너야만 하는 '버드나무 시내'는 아마도 모압과 에돔을 가로질러 흐르는 세렛 강(Wady el-Hesa)일 것이다(Oswalt).

성 경: [사15:8]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I)]

주제2: [모압에 임할 심판]

(주); 곡성이...브엘엘림에 미치며 - 이처럼 서둘러 피신해야 하는 이유를 선지자가 요약적인 진술로 제시하니, 즉 '곡성이 사방에 둘렸기' 때문이다. '에글라임'은 사해 남단에 있으며 '브엘엘림'은(위치상 에글라임의 정반대인) 모압의 북동쪽에 있다고 추정된다(Gray). 그렇다면 그 의미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압 땅 방방 곡곡에서 통곡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 경: [사15:9]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I)]

주제2: [모압에 임할 심판]

(주);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 '디몬'(*)은 '디본'(2절)의 의도적 변형인듯하다. '디몬'은 발음상 '피'(*, 담)와 매우 유사하다. 백성들의 부르짖음과 디몬 물을 붉게 물들인 피, 이것이 귀와 눈을 빌어 표현된 모압의 비극인 것이다.

(주); 그럴지라도...더 내리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앙은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9:12,17,21;10:4).

(주); 사자를 보내리라 - 앞 구절의 부연 설명이다. 비록 소수의 모압 사람들이 재난에서 모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들마저 사자의 밥이 되게 하실 것이다. '사자'(*, 아르예)는 대적의 손을 빌려 모압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말이다(Alexander).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도 완전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24:18;암 5:19).

성 경: [사16:1]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II)]

주제2: [모압에 대한 권고]

(주); 이 땅 치리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 현재의 비참한 상황으로부터 모압이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유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서 선지자는 유다 왕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권유한다. 조공은 복종을 표시하며, 동시에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의 수단이다. 모압은 양들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도 새끼양 십 만의 털과 수양 십 만의 털을 보낸 전력이 있었던 만큼, 그 물품으로는 어린 양들이 적격이었을 것이다(왕하 3:4).

(주); 셀라에서부터...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 - '셀라'는 모압 사람들이 도피하였던 에돔의 수도이다(왕하 14:7). 그러나 이 말이 고유 명사로서보다는 '바위'(*, 셀라)로 뒤덮인 모압의 주요 도시들을 지칭하는 집합 명사로 쓰였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Oswalt, G.Rawlinson). 이 공물은 셀라에서부터 출발하여 사해 남부를 돌아 유대 광야를 거쳐 딸 시온 즉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지시되었다.

성 경: [사16:2]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모압의 여자들은...새 새끼 같을 것이라 - '모압의 여자들'(*, 베노트 모압)은 모압 마을들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가리킨다(애 1:15;겔 16:55-57 참조). 고향을 떠나 이곳 저곳을 근심스레 방황하는 그들은 이미 '떠다니는 새'요,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나 다름없다. 이러한 그들의 정서가 아르논 강에 속한 나루터에서 가장 진하게 투영된다. 본절은 모압의 처지가 어느 정도로 위태로운가를 여실히 묘사해주고 있다.

성 경: [사16:3]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본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선지자가 유다의 입장에서 모압에게 말하고 있다고 본다. 즉, 유다의 피난민들을 모압인들이 친절히 대해 주도록 부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모압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을 유다에 대한 모압 사절들의 간청으로 해석한다(Gesenius, Delitzsch, Gary, Oswalt).

(주); 모략을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 직역하면 '모략을 자져오며 공의를 실행하며'이다. 그 뜻은 어려운 지경에 빠진 모압 사람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말고 은혜롭게 대우해 달라는 것, 다시 말해서 피난민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다.

(주); 정오 때에 밤같이 그늘을 짓고 - 성경에서 종종 '한낮의 뜨거움'은 억압과 고난을 표상하는 말로 쓰인다(4:6;25:4). 그럴진대 '그늘'이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함의함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그 의미는 뒤따라 나오는 구절에서 명확히 해석되고 있다:'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성 경: [사16:4]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나의 쫓겨난 자들로...그 피할 곳이 되라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쫓겨난 모압인들로 너와 함께 머무르게 하라. 너는 약탈자의 얼굴로부터 그들을 숨기는 피난처가 되라'(NIV).

(주); 대저 토색하는 자가...멸절하였으며 - 그러나 이러한 피난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착취자'(*, 하메츠)가 끝장나고 '폭압'(*, 쇼드)이 그쳤으며 '발로 짓밟는 자'(*, 로메스)가 그 땅에서 멸절되었기 때문이다. 동사의 과거 시제는 미래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이 압제의 종언(終焉)은 다윗 장막에서 출현할 미래의 완전한 통치자(왕)의 출현과 밀접히 관련된다.

성 경: [사16:5]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신속히 행하리라 - 폭력과 착취로 능사를 삼는 지상 제국이 멸절한 자리에 그와 대조적인 한 왕국이 돋아남을 본다. 이 왕국은 다윗 장막에서 나온 한 왕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왕은 '인자함'(*, 헤세드)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충실함'(*, 에메트)으로 옳고 그름을 판결할 것이며(시 89:24,33 참조), 또한 '공평'(*, 미쉬파트)과 '의'(*, 체데크)를 추구하고 실행할 것이다(9:7;11:4). 이 모든 것들에서 메시야적 시대를 구별짓는 친숙한 특징들을 발견한다. 이 메시야적 소망에 모압도 열방의 하나로서 참여한다. 이는 모압이 시온의 그늘 아래서 피난처를 삼았다는 사실로 말미암는 것이다. 2:1-4에 기록된 예언을 연상시킨다.

성 경: [사16:6]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이 피난민들을 숨겨달라는 모압의 간청에 대한 시온의 부정적인 답변, 즉 거절을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을 엄밀히 살펴볼진대, 명백한 거부 의사를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3,4절에서 2인칭 복수로 되어 있는 점이 위의 주장을 수용하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그레이(Gray)의 제안을 따라 본문을 모압의 교만에 대한 독립된 서술로 간주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주);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 선지자는 모압을 교만한 민족이라 단정짓는다. 짧은 본문에서 동일한 어근으로부터 파생된 '교만'이란 낱말이 4번이나 중언(重言)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모압의 교만에 대하여는 25:11;렘 48:42을 참조하라. 이러한 교만은 다른 사람을 쉽게 경멸하며 사소한 것도 참지 못하는 '격분'(*, 에브라)과 자신을 치켜세우기 좋아하는 '자랑'(*, 바딤)으로 연결된다. '바딤'은 '재잘거리다', '쓸데없이 말하다'는 뜻의 '바다드'(*) 동사에서 파생한 말이다. 흠정역은 이 말을 '거짓말'로 번역하였다. 허영과 교만으로 가득 찬 그들의 자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거짓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교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들 중 으뜸가는 것이며(잠 6:16,17;8:13), 그 최후는 필경 멸망과 넘어짐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잠 16:18). 따라서 다음절에서 모압의 교만은 통곡으로 바뀌어진다.

성 경: [사16:7]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라는 말은 모압 사람들이 서로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며 운다는 뜻이다(Calvin). 이 울부짖음에서 제외되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이 비탄의 크기가 클 것임을 뒤이어 나오는 '모두 다(*, 쿨로) 통곡한다'는 말이 보여준다. 이하에서 선지자는 양털과 더불어 모압의 대표적 작물의 하나이며 모압의 교만의 한 요인이기도 한 포도나무에 초점을 맞추어 모압의 황폐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해 나간다.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 '길하레셋'은 '길 모압'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15:1;왕하 3:25). '건포도 떡'(*, 아쉬쉐)은 건포도를 떡의 모양으로 눌러 만든 것을 말하는데(삼하 6:19;아 2:5;호 3:1), 아마도 길하레셋의 주요 교역 물품인 듯하다. 칼빈(Calvin), 미켈리스(Michaelis) 등은 이 말을 '토대', '주춧돌'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흠정역도 그렇게 해석함). 그러나 모압 덩쿨의 황폐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건포도 떡'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Alexander, Delitzsch). 본문과 병행하는 렘 48:31에서 '길하레셋 건포도 떡'은 '길헤레스 사람'(*, 안쉐)으로 변형되어 나온다.

성 경: [사16:8]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 - 헤스본과 십마는 모압의 유명한 포도 산지들이다. 특히 십마의 포도는 그 맛이 달고 강렬하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헤스본에 대하여는 15:4 주석을 참조하라. 십마는 르우벤 지파에 속했던 촌락으로(민 32:38;수 13:19), 제롬(Jerome)의 수사학적 표현에 의하면, '헤스본에서 걸어서 500보 되는 거리'쯤에 위치해 있다.

(주); 전에는 그 가지가...바다를 건넜더니 - 한창 때 모압의 포도 농사는 북쪽으로 야셀에 미치고 동쪽으로는 시리아 사막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사해 근방까지 펼쳐졌었다. 이는 물론 선지자의 과장된 표현이다. '야셀'은 헤스본 북쪽 15마일 되는 거리에 위치한다(민 32:35;수 13:25).

(주); 열국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 본문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십마의 포도주의 우수성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그처럼 방대한 지역에서 번성하던 포도나무가 급작스레 황폐하게 된 원인을 상술하고 있는 것이다(Alexander, Oswalt). 전자의 해석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본문을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에 도취되어 쓰러졌도다'로 번역한다(Cocceius, Vitringa, Lowth, De Wette, Delitzsch, Gray). 이들은 본문의 동사 '할람'(*)이 28:1에도 사용되었다는 점을 강력한 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본문과 28:1 사이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상이점이 있으니, 즉 그곳에는 적에 의한 포도나무의 황폐를 암시하는 말이 없고 더욱이 사람들을 넘어뜨린 것도 포도나무가 아니라 포도주였던 것이다(Gesenius, Kissane). 언급된 '열국의 주권자들'은 아마도 여러 민족 단위의 사령관들로 구성된 앗수르 군대를 가리킬 것이다(Leupold).

성 경: [사16:9]

주제1: [이스라엘의 구원과 주변 국가들의 멸망]

주제2: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내가...나의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 본문의 주제는 선지자의 눈물이다. 선지자는 십마의 포도나무가 황폐케 된 것을 슬퍼하는 야셀의 울음에 자신의 눈물을 섞는다. 그의 눈물은 쉬임없이 흘러 헤스본과 엘르알레를 적신다. 이 눈물은 물론 모압의 참상에 대한 선지자의 인간적 동정심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범죄한 백성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Alexander). '엘르알레'에 대하여는 15:4 주석을 참조하라.

(주); 너의 농작물에 떠드는 소리가 일어남이니라 - '떠드는 소리'(*, 헤다드)는 원래 포도짜는 농부들이 포도즙을 밟을 때 내지르는 즐겁고 유쾌한 소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비옥한 들판이 침략군의 장화에 의해 짓밟히는 소리이다. 마땅히 흘러야 할 포도즙 대신에 선지자의 '눈물'(*, 데마)이, 마땅히 들려야 할 수확의 환호소리 대신에 포도원이 유린되는 소리가 들린다.

성 경: [사16:10]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II)]

주제2: [모압에 대한 권고]

(주);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 롤린슨(G.Rawlinson)에 의하면, '틀'은 포도원 가까이에 있다. 이는 바위를 파서 만드는데, 상하(上下) 둘로 나누어 위에서 흐르는 것을 아래에서 받도록 하였다. 포도를 따면 먼저 윗틀에 부어 발로 밟고 그것을 아랫틀로 내려오게 한다. 이때 밟는 사람은 대략 7명이며 맨발로 밟는다고 한다. 이들은 포도를 밟을 때 '포도의 노래'를 불렀다(렘 25:30;48:33).

(주); 내가 그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 포도를 수확할 때 부르는 기쁨의 노래를 그치게 하는 이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에 불과한 것이다.

성 경: [사16:11]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II)]

주제2: [모압에 대한 권고]

(주); 나의 마음이...그러하도다 - '마음'(*, 메에)과 '창자'(*, 케레브)는 몸의 내장, 심장, 창자를 가리킨다. 이로 보건대, 선지자의 눈물은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것이 분명하다. '소리를 발하며'(*, 예헤무)는 직역하면, '격렬하게 떨리며', '요동하며'이다. 모압에서 이루어질 가공할 심판을 생각할 때 선지자의 창자는 마치 하프 줄이 떨림같이 고통으로 뒤틀린다는 것이다. '길하레셋'은 '길헤레스'(렘 48:31)와 같은 곳이다.

성 경: [사16:12]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II)]

주제2: [모압에 대한 권고]

(주); 그 산당에서...기도할지라도 무효하리로다 - 재난의 순간에 모압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모스 신이 있는 산당에 나아가 몸이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기도하는 것뿐이다.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키-니르아 키-닐르아)는 직역하면 '모습을 드러낼 때, 기진 맥진할 때'이다. 이는 그들이 섬기는 신으로부터 응답을 얻어내기 위하여 제몸을 학대하는 이방 종교의 예배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왕상 18:28 참조). '니르아 닐르아'(*)는 유음 현상이다. 그럴지라도 그들의 모든 노력은 결국 헛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무효하리로다'(*, 로 유칼)는 '할 수 없을 것이다'이니, 즉 그들이 성전에서 큰소리로 부르짖을지라도 그 응답을 전혀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성 경: [사16:13]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II)]

주제2: [모압에 대한 권고]

(주); 전에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어니와 - 선지자가 제시했던 모압에 대한 경고는 이미 오래 전에 그에게 주어졌던 말씀이다. 여기에 새로운 예언이 첨가되어 계시의 결론 부분을 형성한다.

성 경: [사16:14]

주제1: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II)]

주제2: [모압에 대한 권고]

(주); 품군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 3년이라는 시기는 예언의 확실성을 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이 시간은 결코 늦춰지거나 연기될 수 없으니, 왜냐하면 그것이 '품군의 정한 해' 곧 고용 기간이 끝나 품꾼들이 정한 삯을 받기로 되어 있는 그날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품꾼들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21:16). 이처럼 모압의 파멸을 확정한 하나님의 시간표는 한치의 착오나 어김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이 '삼년'이라는 기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듯하며, 다만 본절의 사건은 B.C.734년의 디글랏 빌레셀의 침공 사건 혹은 B.C.718년경의 사르곤 2세의 아라비아 북서쪽 부족민들에 대한 정벌 원정과 연관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주); 모압의 영화와...소용이 없이 되리라 하시도다 - 3년이 지나기 전에 모압의 영화는 '능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니클라). 즉, 그때에 모압의 많은 무리가 끊어져 무시할 만한 극소수만 남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압의 운명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교만(*, 게온)으로 시작해서 수치(*, 칼론)로 마감되다.'

성 경: [사17:1]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다메섹에 임할 심판 예언]

(주);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 유다의 남서쪽에 있는 블레셋과 동쪽의 모압을 살핀 뒤에 선지자의 눈은 북쪽에 있는 다메섹 곧 수리아와 북이스라엘 왕국인 사마리아로 향한다. 이들 두 나라는 전에도 언급된 바 있으나(7-9장), 여기 열방에 대한 경고 가운데 다시 삽입되었다. 본문은 다메섹이 앗수르에 의해 파멸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 같다(B.C. 732년 이전). 더욱이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함께 거론된 것으로 보아 그들이 군사 동맹을 맺은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B.C. 735년 이후). 따라서 B.C.735-732년 사이에 (아마도 734년) 기록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B.C. 1,000년경 다메섹은 수리아 연맹의 맹주로서 앗수르와 더불어 고대 근동의 주도권을 다툴 만큼 그 힘이 강력하였다. 그러나 B.C. 732년,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함락된 이후 이전과 같은 힘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다. 다메섹은 메스포타미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로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의 헬몬산과 남의 현무암 평원에 둘러싸인 비옥한 지대였다. 부채살 모양의 일곱 지류로 흐르는 아마나강과 헬몬 산 기슭에서 흘러 내리는 바르발(아와이) 강이 중심을 관류하고 있다(왕하 5:12). '경고'에 대하여는 13:1 주석을 참조하라.

(주); 성읍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 수도 다메섹의 몰락은 곧 수리아의 멸망을 함의하는 것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이런 수법(제유법)은 선지자의 즐겨 쓰는 표현 기교 중의 하나이다. 선지자는 다메섹이 도시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파멸의 무더기로 변모할 것이라고 한다. '도시의 모습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제국으로서의 위용을 상실한다는 말이다. B.C. 732년, 다메섹을 함락시킨 디글랏 빌레셀은 그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르신의 아버지(벤하닷)의 왕국을...내가 500 성읍들을 파멸시켜 쓰레기더미처럼 만들었다'(Lange). 다메섹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몇 안 되는 고대 도시 중의 하나이다.

성 경: [사17:2]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다메섹에 임할 심판 예언]

(주);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 '아로엘'(*)이란 지명은 성경에 세 번 나온다. (1)유다에 있는 성읍(삼상 30:28):본문과는 관계가 없다. (2)'아르논 골짜기 가에 있는 아로엘'(신 2:36;수 12:2;13:9,16):르우벤 지파가 차지했으며, 요단 강 동쪽, 이스라엘 남쪽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3)그 북쪽, 옛 암몬 족속이 차지한 '랍바 앞의 아로엘'(민 32:34;수 13:25):갓 지파가 차지했다. 여기에 언급된 '아로엘의 성읍들'은 요단 강 동편 성읍들을 가리킨다. 수리아의 파멸 경고 뒤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요단 강 동쪽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로엘'이란 이름이 그곳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 말은 어원적 의미에서 '버림을 당하다'(*, 이르에르), '벗은'(*, 아르아르), '불쌍한'(*, 아리리)등과 유사하다. 버림받은 성읍 '아로엘'은, 사람은 살지 않고 양들만 거하는 목초지가 될 것이다. 각각 따로 거론되었던 다메섹(1절)과 이스라엘(2절)이 다음절에서 함께 다루어진다.

성 경: [사17:3]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다메섹에 임할 심판 예언]

(주);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 - 에브라임은 유다와 한 핏줄을 나눈 형제국이었음에도 유다를 대적하는 일에 이방 민족인 수리아와 결탁했으므로, 그 운명 역시 수리아와 함께 분유(分有)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운명은 다음과 같다:'에브라임에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요새화된 성읍들이 제거된다. 다메섹은 한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주권(통치)을 잃는다.' 이어지는 말에서 두 나라의 공동 운명은 더 한층 확실하게 표현된다.

(주); 아람의 남은 백성이...이스라엘 자손의 영광같이 되리라 - 선지자의 조롱의 말이다. 전쟁에서 살아 남은 아람의 백성들은 소멸되어져가는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같이 될 것이다(4절).

성 경: [사17:4]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예언]

(주);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파리하리니 - 앞절에서 비교된 야곱의 영광, 즉 북이스라엘의 영광이 서술된다. 선지자는 이것을 사람의 신체에 빗대어 말하니 곧 병들어 뼈만 남은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그 날에'란 말이 암시하듯이, 한때 찬란했던 이스라엘의 영화는 과거지사가 될 것이다(Leupold).

성 경: [사17:5]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예언]

(주); 마치 추수하는 자가...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 미구에 닥쳐올 이스라엘의 비참이 얼마나 심각할 것인지를 선지자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것은 마치 추수꾼이 그 곡식을 베어 팔에 안음과 같고 추수꾼이 남은 이삭을 주움과 같으니,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이 이같이 원수의 칼에 의해 남김없이 베임을 당할 것이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펼쳐진 넓은 평지를 말하는데(수 15:8;18:16;삼하 5:17-25;23:13 참조), 그 땅의 비옥함이 이스라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거명된 듯하다(Calvin).

성 경: [사17:6]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예언]

(주); 오히려 주울 것이 남으리니...남음 같으리라 - 그 비참함은 두 번째로 감람나무 열매를 딸 때에 거의 다 떨어지고 그 꼭대기에 '사오개 남은 과실'의 모습으로 비유된다(신 24:20).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이스라엘의 완전한 절멸(絶滅)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남은 열매에서 암시된다('오히려 주울 것이 남으리니'). 여기에 심판으로부터 위로에로 향하는 은밀한 전환이 있다. 아무리 극심한 진노 중에라도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며 자기를 위하여 신실한 자들을 남겨 두신다. 이들 소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신앙함에 있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성 경: [사17:7,8]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예언]

두 신, 즉 '사람을 지으신 신'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 대조되고 있다. 모든 일이 형통할 때 흔히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잊고 헛된 것들에 정신을 빼앗긴다(호 4:7). 그러다가 환난을 당해서야 겨우 각성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는다. 이스라엘이 그러하니, 수많은 우상들 - 그중에서 '아세라'와 '태양상'은 대표적인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 을 숭배하던 그들이 이제 큰 재난을 당한 뒤에는 돌아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1:4)를 쳐다보게 될 것이다. '...을 쳐다보다'(*, 솨아알)는 '도움을 간구하다', '앙망하다'는 뜻이다. 즉, 신앙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우상에 대하여는 2:8;44:9-20을 참조하라.

(주); 아세라나 태양상 - '아세라'(*, 하아쉐림)는 엘(el) 신의 배우자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이쉬타르(Ishtar), 애굽의 이시스(Isis)에 해당하는 가나안의 월신(月神)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왕하 17:10)에서 아세라상을 예배하였다(출 34:13;신 16:21;삿 6:25;왕하 23:4). '태양상'(*, 하하마님)은 페니키아인들이 숭배하던 태양신 '바알 하몬'(*)이다(레 26:30;대하 34:4,7;겔 6:4,6,Oswalt, Delitzsch). 흠정역은 이것을 '작은 숲과 형상'으로 번역하였다.

성 경: [사17:9]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예언]

(주); 그 날에...황폐하리니 - 의미상 본절은 3절에 연결된다. 선지자는 멸절되리라고 선고된 에브라임 요새의 운명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진입했을 때 그 땅의 거민들이 수풀이나 작은 산 꼭대기에 버려두고 도망간 황폐한 성읍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이 다음절에서 상술된다.

성 경: [사17:10]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예언]

(주); 이는 네가...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이라 -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같은 형벌을 받는 것은, 첫째 그들이 과거에 자신들을 구원하시며 보호해주셨던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구원의 하나님'(*, 엘로헤 이쉬에크)는 '자기 백성을 어려움에서 구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며(시 18:46;25:5; 27:9;62:7;미 7:7;합 3:18), '능력의 반석'(*, 추르 마우제크)은 '택한 백성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란 말이다(26:4;30:29;신 32:4,18;시 18:2,31,46;19:14; 28:1;31:3;62:8). 이 이름들은 이스라엘의 체험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주); 기뻐하는 식물을...이방의 가지도 이종(移種)하고 - 심판의 둘째 원인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종교들을 수입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이식시켰기 때문이다. '기뻐하는 식물'은 곧 '이방의 가지'를 가리키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무인 이스라엘(5:7)이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자기들의 육신의 기쁨을 좇아 이방인의 사악한 풍습을 모방했다는 말이다(2:6-8). 델리취(Delitzsch)는 '이방의 가지'가 이스라엘과 연합한 다메섹을 가리킨다고 본다.

성 경: [사17:11]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 예언]

(주); 네가 심는 날에...없어지리라 - 계속되는 묘사는 '아도니스 정원'에 연관된 듯하다. '아도니스'는 담무스(겔 8:14)의 헬라식 명칭으로서, 신화에 의하면 죽었다가 지하의 신으로 부활한다고 한다. 프레이저(Frazer)에 의하면, 주로 여자로 구성된 이 의식의 숭배자들은 흙으로 채워진 바구니나 항아리에 밀과 보리, 상추 등과 그외 여러 꽃을 심고 8일 동안 재배한다. 태양의 빛을 받은 식물은 빨리 자란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므로 또한 빨리 시든다. 이 아도니스의 정원은 아도니스의 표상물 혹은 그 힘의 표현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되는데, 이것은 본래 식물의 성장, 특히 농작물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한 주술이었다. 그럼에도 그 결과는 극히 비참할 것이다. 선지자는 저들이 바라는 것 대신 회피하고자 하였던 근심과 심한 슬픔이 오히려 맺힐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의 요지는 명확하다:'네가 기뻐하는 이방의 가지가 재난의 날에 너를 도와주지 못할 것이며, 또한 네가 수고하고 힘들여 심은 식물이 너에게 아무런 수확도 안겨주지 못할 것이다'(Gray).

성 경: [사17:12]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패배에 대한 예언]

(주); 슬프다 - 루터(Luther)는 이 말을 저주를 뜻하는 '화 있을진저'로, 칼빈(Calvin)은 이를 이스라엘에 임할 미래의 재난을 괴로워하는 '슬프다'로 번역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뒤이어지는 큰소리와 관련하여 '들으라'로 해석함이 자연스럽다(Henderson, Alexander).

(주);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소동하였고 - 선지자가 '들으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그 소리는 많은 민족이 모여 소동하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에 비유된다. 여기 언급된 '많은 민족'은 많은 민족들로 구성된 앗수르 군대를 가리킬 것이다.

성 경: [사17:13]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패배에 대한 예언]

(주); 열방이 충돌하기를...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 직역하면 '열방들이 많은 물의 함성처럼 함성지른다'이다. 그러나 파도치듯 물밀려오는 이 거대한 함성소리도 주의 꾸짖음 한마디에 무력하기 그지없이 흩어지고 만다. 선지자는 이들이 흩어지는 모양을 두 가지로 묘사한다.

(주); 산에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 그것은 언덕 위에서 농부가 곡식을 타작할 때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겨와 같다(29:5;호 13:3). 또한 그것은 회오리바람 앞에서 뿌리뽑혀 떠도는 검불과 같다. 이 모든 비유는 아무리 당당한 지상 세력이라도 말씀 한마디로 바다를 평정하시는 전능자 앞에서는 힘을 잃고 만다는 것을 보여준다(막 4:39 참조).

성 경: [사17:14]

주제1: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패배에 대한 예언]

(주);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 '저녁'과 '아침'은 여기서 각각 대적의 공포와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대조적인 시간으로 나타난다. 적으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은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어두움의 공포처럼 무섭고 견딜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침이 되기 전에 자취도 없이 사라질 악몽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본문이 산헤립의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몰락한 사건과 관계있다고 생각한다(37:36;왕하 19:35).

(주); 이는...우리를 강탈한 자의 보응이니라 - 침략자들이 거둘 몫은 영구한 파멸밖에 없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그들의 운명이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신자들의 마음에서 두려움은 능히 극복될 것이다:"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성 경: [사18:1]

주제1: [여호와께 대한 구스의 굴복]

주제2: [구스에 대한 예언]

(주); 슬프다 - 구스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되고 있는 본장은 다른 곳과는 달리 '경고'(*, 맛사)라는 말로 시작되지 않고 '호'(*)라는 감탄사로 시작한다(13:1;14:28;15:1;17:1과 비교하라).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첫째, 본장이 17:12에 연속되는 예언의 한 부분이며, 둘째, 본장을 구스에 대한 심판예언(경고)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선지자의 논의의 초점은 오히려 앗수르에 향해 있다. 본장은 어떤 의미에서 애굽에 대한 경고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혹은 서론)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은 19, 20장과는 확연히 구별된다(Oswalt).

(주); 구스의 강 건너편 - '구스'(*, 쿠쉬) 곧 에디오피아는 애굽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영토는 오늘날의 에디오피아와 수단, 소말리아를 포함할 만큼 광활하였다(겔 29:10;30:6). 바사 시대에 구스는 인도와 더불어 땅의 맞은편 끝에 있는 나라로 인식되었다(에 1:1). 따라서 탈굼역(Targum)이 본문을 '인도의 강 건너편'으로 해석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Oswalt). B.C. 715년, 샤바코(Shabako)가 애굽의 왕위에 오름으로써 시작된 애굽 제25왕조(Nubian 왕조) 시대에 이 나라는 북쪽의 앗수르와 함께 서아시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나파타(Napata, 오늘날의 Gebel Berkal)틔 그 당시 정치의 중심지였다. 누비안(Nubian) 왕조의 세 번째 왕인 디르하가(Tirhakah)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핍박하여 라기스를 포위했을 때 그와 접전하였다(37:8, 9; 왕하 19:8, 9, Leon Wood). 한동안 계속되었던 에디오피아인의 애굽 퉁치는, B.C. 633년, 애굽의 삼메티쿠스(Psammeticus)가 그 자리를 다시 찾음으로써 종인을 고하게 된다. 여기에 언급된 '구스의 강'은 나일 강과 그 지류를 가리키며, '그 건너편 땅'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에디오피아인들이 지배하던 남쪽 땅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Alexander, Delitzsch).

(주);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 그 땅은 선지자의 묘사에 의하면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 에레츠 칠찰 케나파임)이다. '칠찰'(*)을 '첼'(*, 그늘)의 반복형(혹은 강조형)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말을 '날개로 그늘 드리운 땅'으로 해석한다(KJV, Calvin, Grotius, Vitringa, Eichorn, Knobel). 그러나 '칠찰'의 이중 형태가 성경에서 거의 소리와 연관되어 쓰이기 때문에(신 28:42; 삼하 6:5; 시 150:5). 이 말을 본래대로 번역함이 낫겠다. 이소리는 '강물의 철썩거림'(Umbreit)이나 '군인들의 무기가 부딪혀 '쨍그렁거림'(Gesenius, Rosenmuller)이라기보다는 '곤층들의 윙윙거림'(Michaelis, Delitzsch)이 더 어울린다. 무덥고 습기찬 에디오피아 땅에는 곤충들의 날개치는 소리가 흔했다(7:18). 아울러 본문은 앗수르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소집된 군사들의 거대한 함성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성 경: [사18:2]

주제1: [여호와께 대한 구스의 굴복]

주제2: [구스에 대한 예언]

(주); 갈대배를 물에 띄우고 - '갈대배'는 파피루스 갈대로 만든 배로서, 극히 가볍고 빨라서 나일 강에 적합하였다(35:7;출 2:3).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직역하면 '사자들을 바다(*, 얌)로 보내며'이다. 여기서 '바다'는 나일강일 것이다(19:5;나 3:8).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의 '사자'를 유다 땅에 파견된 에디오피아 사자들로 이해한다.이들은 아마도 앗수르를 견제하기 위한 공동 전선의 필요성을 유다에게 역설하기 위하여 파견되었을 것이다(Ewald, Knobel, Meier). 이들에게 선지자의 음성이 떨어진다.

(주); 너희 경첩한 사자들아...가되 - 에디오피아 사자들에 대한 선지자의 회답은 한마디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는 에디오피아의 제안에 대한 거절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경첩하다'(*, 칼림)는 말은 '가볍고 날래다'는 뜻이다. 이하에서 에디오피아인과 그 나라에 대한 선지자의 섬세한 인상 묘사가 나열된다. (1)'장대하고 준수한 백성':그들은 '메무솨크'(*), 즉 키가 크고 당당하며(45:14), 또한 '모라트'(*), 즉 윤기나며 부드러운 살갗을 가졌다. 그리스의 사가(史家)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에디오피아인들을 '가장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들'이라고 하였다.(2)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 :선지자는 그들이 애굽을 압도하고 그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시초부터'(* - , 민-후와할르아)는 공간적인 의미, 즉 '왼거리에서부터'로 해석함이 더 적절하다. '강성하여'(* - , 카우-카우)는 '측량줄', '명령'. 혹은 '힘'을 뜻하는 '카우'(*)를 이중으로 결합시킨 말이니, 이는 온 땅을 명령하며 탁난 용맹성으로 끝없이 영토를 확장시켜 정복해 나가는 그들의 호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3)'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 : 에디오피아인에 대한 신체묘사가 마지막으로 덧붙여진다. '강들이 흘러 나누인다'는 말은 그 땅이 지극히 비옥함을 암시하는 것이다(Alexander, Delitzsch).

성 경: [사18:3]

주제1: [여호와께 대한 구스의 굴복]

주제2: [구스에 대한 예언]

(주); 세상의 모든 거민...너희는 들을지니라 - 앞절의 거절에 대한 이유가 설명된다. 선지자의 말은 지상에 거하는 모든 거민들을 향해 선포된다. 이제 곧 여호와께서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 것이다. 그날에 온 세상은 산 위의 기호를 바라봄같이, 그리고 나팔소리를 들음같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호'와 '나팔'에 대하여는 5:26;13:2;렘 4:5;51:27을 참조하라.

성 경: [사18:4]

주제1: [여호와께 대한 구스의 굴복]

주제2: [구스에 대한 예언]

(주); 내가 나의 처소에서 종용히 감찰함이 - 여호와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놀라운 역사는 먼저 고요한 감찰(침묵) 가운데서 비롯된다. 이 침묵은 때로 고난받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버리심으로, 그리고 악을 밥먹듯이 행하는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부재(죽음)의 증표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할진대, 이것은 목적있는 한정적 침묵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성숙하기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리시지만, 그 때가 되면(갈 4:4 참조) 지체함없이 신속하게 행동하신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대하여 기다리시는 이 기간은 그들이 하나남의 진노의 막대로서 이스라엘을 때리는 때까지요(10:12), 일단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면 그가 역사하셔서 앗수르를 징벌하실 것이다(10:25, John A. Martin). 본문의 전체적인 표상은 시 33:13, 14에 일치한다.

(주); 쬐이는 일광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雲霧)같도다 - 하나님의 정관(靜觀)은 한낮의 햇볕과 저녁의 이슬에 비유된다. 이것들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데 매우 필요하고 적절한 것이다. '일광'(*, 홈 차흐)은 밝은 빛을 가리키며, '운무'(*, 아브 탈)는 밤에 이슬이 되는 가벼운 구름을 뜻한다. 온 세상을 포괄하는 고요한 응시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영글어간다.

성 경: [사18:5]

주제1: [여호와께 대한 구스의 굴복]

주제2: [구스에 대한 예언]

(주); 추수하기 전에... 찍어 버려서 - 하나님의 개입은 추수기가 가까워져서 포도들이 거의 익어갈 무렵 일어난다. 선지자는 그것을 거의 성숙한, 그러나 아직은 신맛이 남아 있는 포도가 달려 있는 연한 가지(*, 하잘잘림)와 길게 뻗은 덩굴손(*, 하느티쇼트)을 베어내는 농부의 작업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서 비유되고 있는 '익어가는 포도'(*, 보세르)는 아마도 앗수르일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과 그들의 급작스런 몰락에 대하여는 14:24-27;17:12-14 등을 참조하라.

성 경: [사18:6]

주제1: [여호와께 대한 구스의 굴복]

주제2: [구스에 대한 예언]

(주); 산의 독수리들에게와...과동(過冬)하리라 - 앞절에서 농부에 의해 베어지고 찍혀진 포도 가지가 여기서 산과 땅에 무참히 내버려진 시체들로 구체화된다. '독수리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트'(*)는 썩은 고기를 뜯어먹는 새를 뜻하는 말이다(46:11;창 15:11). 선지자의 과장된 표현에 의하면,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한 시체들의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새들이 여름 내내 먹고, 맹수들(*, 베헤마트)이 겨울 내내 먹을 것이다. 즉. 배불리 먹을 것이라고 한다(겔 39:17-20). '과하(過夏)하며'(*, 카츠)는 '여름을 보낸다'는 뜻이며, '과동하리라'(*, 테헤라프)는 '겨울을 보낸다'는 뜻이다. 산헤립의 군대가 하룻밤에 몰살당하였을 때, 그 죽은 수가 무려 185,000명에 이르렀다고 성경은 전한다(37:36).

성 경: [사18:7]

주제1: [여호와께 대한 구스의 굴복]

주제2: [구스에 대한 예언]

(주); 그 때에 - 앗수르의 패망이 에디오피아에 미칠 영향이 기술되고 있다. '그 때'가 가까운 미래를 말하는지. 아니면 먼 미래를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선지자는 앞절의 사건이 있은 직후 에디오피아가 시온 산에 이르러 하나님께 예물드릴 것을 미리 바라보는 한편, 동시에 이것을 통하여 먼 미래에 세계 모든 민족들이 나아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미할 종말론적인 구원의 날을 내다보는 이중적인 전망을 보았을 것이다(2:2-4;습 3:10;행 8:26-39).

(주);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백성에게서 - 2절에 묘사된 에디오피아를 가리킨다. 선지자는 수미 쌍관의 구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동일한 나라로부터 두 번의 사절이 파견된다. 첫 번째는 앗수르를 대적하기 위해 함께 연합할 것을 제안하려는 목적으로 온 것이었다(2절). 그러나 두번째는 앗수르를 물리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예물을 들고 올 것이다. 이는 시편 기자가 노래한 바,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시 68:31)는 내용과 같다(Delitzsch).

(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 - 여호와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곳이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경배하고 그 이름을 부르도륵 명하신 곳, 즉 시온 산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대체되었다(Calvin).

성 경: [사19:1]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애굽에 관한 경고라 - `애굽'의 히브리어 음역 `미츠라임'(*)은 본래 그들의 조상에서 따온 이름이다(창 10:6). 이 말은 하애굽의 명칭이었으나, 여기서는 애굽 전체를 대표하는 뜻으로 쓰였다. `경고'에 대하여는 13:1을 참조하라.

(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 여호와께서 임하심은 애굽을 재판하시기 위함이다(시 96:13). 그가 구름을 타고 임하심은 그의 재판이 신속히 이루어질 것을 가리키는 것이요, 동시에 그의 주권이 온 자연에 미침을 나타내는 것이다(시 18:10;68:33;104:3). 성경에서 하나님은 종종 하늘 구름과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는 것으로 묘사된다(신 33:26; 삼하 22:11).

(주);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녹으리로다 - 하나님의 신속하고 거룩한 임재 앞에서 애굽의 우상들(*, 얼릴레)은 두려움으로 떨 수밖에 없으니, 출애굽사건에서 그들은 이미 결정적으로 심판을 받았으며(출 12:12; 렘 46:25), 그때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아무것도 아님'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2:18 참조). 따라서 한번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맛본 저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서 떠는 것은 우상들만이 아니다. 용감 무쌍하던 애굽인들의 마음(*, 레바브)조차 절로 녹아내린다고 선지자는 말한다(7:2 참조). 고대의 전쟁에서는 적에게 두려움을 주는 그 자체가 곧 승리의 선취라고 여겨졌다.

성 경: [사19:2]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그가 애굽인을 격동하사 애굽인을 치게 하시리니 - 히브리어 원문에는 주어가 3인칭(그가)이 아니라 1인칭(내가)으로 되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은 4절까지 이어진다. 애굽에 내려진 심판의 형태는 내란이다(3:5; 삿 7:22; 삼상 14:20; 왕하 3:23; 겔 38:21; 슥 14:13). `격동하다'(*, 시크사크)는 말은 `무장하다', `공격하다'는 뜻이다.

(주); 그들이 각기 형제를...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 동족 상간(同族相姦)의 비극은 `형제'에서 `이읏'으로, `성읍'에서 `나라' 로 그 범위와 강도를 더해간다. 여기서 `나라'는 수십 개로 나뉘어진 고대애굽의 지방들(nomes, 노메스)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애굽의 역사는 끝없는 자기 소모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처음 여섯 왕조(B.C. 3,000 - 2,200년경)가 변하는 동안 강력한 연합을 유지하였던 애굽은 그 뒤 약 42개의 노메스(지방정부)로 갈리어 난립하는 혼란기를 맞게 된다. 이 같은 혼란은 제12왕조하(B.C. 1990-1785년경)에서 잠시 주춤거렸을 뿐, 이후 애굽은 거듭되는 분열과 내란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특히 에디오피아 왕조(제25왕조, B.C. 715-664년)가 들어서기 직전과 직후(B.C. 715년경). 그리고 삼메티쿠스에 의한 애굽 왕조의 회복(B.C. 664년경)을 전후하여 혼란은 극에 달한 둣하다.

성 경: [사19:3]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 극심한 혼란 가운데서 애굽인의 `정신(*, 루아흐)이 쇠약해질 것이다. 여기서 `정신'은 병행하는 뒷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처리해나가는 `지혜' 혹은 `분별력'을 의미한다. '쇠약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베카'(*)는 `바카크'(*)동사의 나팔형으로서, `공허하게 되다', `쏟아버림을 당하다'는 뜻이다. 애굽인들의 절망 상태는 어쩌다 그들이 입안한 계획들조차 하나님에 의해 못쓰게 된다는 말에서 더욱 심화된다.

(주);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 - 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움에 녹고(1절) 지역마다 분열되어 골육 상쟁(骨肉相爭)하며(2절) 판단력마저 고갈된(3a절), 이런 상황에서 애굽 사람들이 의지할 데라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명된 우상들과 죽은 자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의 비참함은 점강법으로 서술된 `우상-마술사-신접한 자-요술객'의 어순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그들이 가장 신뢰하던 우상에게 도음을 구하나 불만족한 고로 그보다 낮은 마술사에게 도움을 구하고, 그래도 안 되자 신접한자, 요술객들에게까지 미래를 의탁한다는 것이다(Calvin).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추론할 수 있다. (1) 사회가 불안할수록 허탄한 미신이 판치고 광신적인 종교 집단이 활개친다. (2)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그 어느것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수 없다.

성 경: [사19:4]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그가 애굽인을 잔인한 군주의 손에 붙이시리니 - 본문을 직역하면 `내가 애굽인들을 잔인한 군주의 손에 가둘 것이니...'이다. 새로운 군주에 의한 이 압제의 과중함이 두 개의 형용사, 즉 `카쉐'(*, 단단하고 무겁다)와 `아즈'(*, 강하고 견고하다)로 강조되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잔인한 군주'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학자들간에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그가 애굽의 삼페티쿠스라 하기도 하고(Grotius, Gesenius, Delitzsch), 혹은 앗수르의 사르곤(Hitzig, Hendelwerk) 혹은 에살핫돈(G.W. Rawlinson), 혹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Clericus), 페르시아의 캄비세스(Vitringa)라고도 한다. 그러나 본문에는 잔인한 군주가 애굽 본토인인지 아니면 외국인인지 조차도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역사상의 특정한 인물과 결부시키기보다는 `군주들'(*, 아도님)이란 복수 명사에서 알 수 있듯이, 애굽의 여러 군주들에게 지속적으로 압제를 당할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게 여겨진다(Calvin, Alexander).

성 경: [사19:5]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을 `바다'(*,얌)라고 불렀다(18:2). 차고 넘치고 범람하여서 주변 땅들을 적셔주는 나일 강은 예로부터 애굽의 자랑이며 풍요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바다처럼 풍부한 이 강물도 필경은 말라 없어질 날이 이를 것이다. 선지자는 여기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 세가지 동사를 연속적으로 사용하여 나일 강에 임할 기근의 심각성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 `니솨트'(*, 타다, 마르다), `하레브'(*, 메마르다, 말라지다), `야베쉬' (*, 말라지다). 본문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애굽의 무질서와 재난이 예기되고 있다고 단언한다(Vitringa, Knobel). 반면에 칼빈(Kalvin)은 나일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스스로 무적이라고 자부하던 애굽의 군사력이 붕괴됨올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구절들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선지자는 나일 강의 기근을 통해서 애굽의 기대와 자랑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애굽의 전사업이 일시에 몰락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Gesenius, Delitzsch, Alexander). 본문의 전체적인 묘사는 욥 14:11과 거의 흡사하다.

성 경: [사19:6]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마르므로 - 전절에 이어 나일 강의 기근이 상세 하게 묘사된다. 바닷물이 없어지고 강이 잦아서 마르게되면 그곳에서 악취가 풍길 것이며 작은 시냇물들도 모두 말라붙게 될 것이다. `애굽 시냇물'은 히브리어로 `예오레 마초르'(*,* )인데, `예오르'(*)는 강을 뜻하는 애굽어이며, `마초르'(*)는 `미츠라임'(*, 1절)의 단수형으로서 '바드로스'(상애굽, 11:11)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삼각주를 중심한 하애굽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37:25; 왕하 19:24; 미 7:12, Oswalt, Delitzsch).

(주); 달과 같이 시들겠으며 - 직역하면, `갈대'(*, 카네)와 골풀(*, 수프)이 시들겠으며(*, 카멜루)'이다. `갈대'와 '골풀'은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들로서 나일 강 역류 지역에 넓게 분포되어있다. 이하에서 나일 강이 마름으로 해서 애굽의 전체 산업에 파급될 여러 국면이 서술된다.

성 경: [사19:7]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나일 언덕의 초장과...곡식 밭이 다 말라서 날아 없어질 것이며 - `나일언덕'은 문자적으로는 `강의 입'이니, 즉 강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지점(Knobel) 혹은 (Gesenius,Michaelis)를 뜻한다(출 2:3; 잠 8:29). 일반적으로 애굽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일는 대신 나일 강을 통하여 중앙 아프리카의 평원에 내리는 동기(冬期) 강우와 에디오피아 고지대에 내리는 하기(夏期) 강우가 유입되어 언제나 풍족한 수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일 강의 마름은 곧 애굽 전역의 사막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목축업과 농업의 피폐함뿐만 아니라 어업계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성 경: [사19:8]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어부들은 탄식하여...피곤할 것이며 - 한때 고대 애굽의 경제를 지탱했던 어업 또한 붕괴된다(민 11:5; 겔 29:4 참조). 어부들이 생계를 위하여 낚시줄을 던지거나 그물을 쳐도 고기가 거의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피곤해하며 끝내 슬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변화는 전적으로 나일 강의 마름에서 기인된 것이다.

성 경: [사19:9]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세마포를 만드는 자와 백목(白木)을 짜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며 - 이 파괴적인 재난에서 의류 산업이라 해서 제외되지 않는다. `세마포'(*, 세리코트)는 애굽 승려들의 제사복과 미이라를 싸맬 때 쓰는 천으로 가늘고 질긴 고가의 린넨 직물이며, `백목(*, 호라)은 보다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된 흰 모직물을 가리킨다. (Delitzsch)

성 경: [사19:10]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애굽의 기둥이 부서지고...근심하리라 - `기둥'(*, 솨토트)과`품군들'(*) , 오세 세케르)은 사회의 두 구성 집단, 즉 고위 관리자들과 하층 노동자들을 의미한다(Gesenius, Delitzsch).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사회의 모든 계층이 한결같이 고통받게 된다는 말로, 5절이하의 내용은 일단락된다.

성 경: [사19:11]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소안의 방백들은...우준하여졌으니 - `소안'은 애굽 북부 삼각주 동편에 자리한 도시로(민 13:22) 하애굽의 왕궁이 있다. 특히 힉소스 왕조 때에는 정권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방백들'(*, 사림), 곧 지도자들은 애굽의최고 귀족 계급인 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의 지혜와 학식은 이미 고대에 유명하였다.(왕상 4:30; 행 7:22).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서 애굽 전체가 재난에 빠진이 상황에서 그들의 지혜조차 전혀 도움이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무기력함은 심지어바로의 곁에 서서 온갖 조언과 모략을 짜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모사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즉 그들은 우준하여졌다.

성 경: [사19:12]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 선지자의 조소는 바로를 향해 주어진다. 본문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말씀에 대하여는 47:12, 13; 신 32:37, 38; 렘 2:28 을 참조하라.

성 경: [사19:13]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소안의 방백들은...미혹되었도다 - `놉'(*)은 멤피스(Memphis)이며 (렘 2:16; 44:1; 46:14,19; 겔 30:13; 호 9:6), 고대 애굽의 주요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서, 삼메티쿠스에 의해 왕도(王都)로 부상되었다. 소안과 놉은 델타 지역의 북단과 남단이라는 대극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선지자는 델타(애굽)을 종횡하여 지혜로운 자는 한 사람도 없음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Leupold).

성 경: [사19:14]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여호와께서...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 애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설명한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애굽의 지혜로운 자들에게 `사특한 영'(*, 루아흐 이웨임), 곧 혼돈의 영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한다. 그 결과, 그들은 마치치 술취한 자가 제 몸을 이기지 못하고 토하며 비틀거림과 같이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끝없는 혼란과 비극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28:7,8; 욥 12:25; 렘 48:26 참조).

성 경: [사19:15]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애굽에서...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 - 여호와의 징계로 인해 주어진 이 불가해한 현기증에서 깨어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머리나 꼬리나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는 지위 고하를 막론한 애굽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포괄하는 말이다(9:14 참조).

성 경: [사19:16]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만군의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 - `손의 흔들림'(*, 테누파트 야드)에서 애굽인들은 전투를 지휘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모습을 본다(30:32). 과거에 자신들이 겪었던 하나님의 손의 능력 즉, 열 재앙이나 갈대 바다의 갈라짐 등을 결코 잊을수 없는 애굽인들로서는 이 전투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볼 수 있을 것이며(11:15; 출 1 4:25), 따라서 두려음과 떨림은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사19:17]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애굽에 대한 심판 선언]

(주); 유다의 땅은...듣는 자마다 떨리라 - 유다의 하나님에 대한 에굽인들의 공포가 너무나 지대하므로 그들은 심지어 유다의 땅에 대한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를 생각할 때 그들은 필경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가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모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날에 애굽 사람들이 두려워 떨 것이다'로 요약되는 16절과 본절은 1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의 에필로그를 구성하는 한편, 18절에서 시작되는 애굽인들의 변화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축복의 이유를 설명하는 프를로그로서 작용한다.

성 경: [사19:18]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세계 평화에 대한 예언]

(주); 그 날에...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 선지자는 두려움의 정점에서 애굽이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말한다. `다섯 성읍'은 이 사실을 보증해주는 전조로서 주어진다. 이 `다섯'이라는 숫자는 많은 것 가운데서 지극히 적은 것을 뜻한다(30:17; 레 26:8; 고전 14:19). 그러나 분문이 후대의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현대의 학자들은 언급된 `다섯 성읍'이 포로 귀한 이후 애굽 땅에 건설될 유대인 거류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렘 44:1 참조). 더 나아가 어떤 이는 그 거류지들의 구체적 지명까지 제시한다(Hitzig). 본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향한 애굽인들의 회심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할진대,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주); 그 중 하나를 장망성(將亡城)이라 칭하리라 - 장망성, 곧 `장차 망하리라고 예정된 성'은 히브리어로 `이르 하헤레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무오한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의심하고 있다. 왜냐하면 애굽의 회심과 그로 말미암는 복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본문에서 `장망성'이란 단어는 문맥에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난점을 피하기 위하여 칼빈(Calvin)은 `장망성'이라 지명된 한 성이 구원받을 다섯 성읍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여섯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가운데 하나가 그러한 이름을 가질 것을 분명히 말한다. 델리취(Delitzsch)는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려한다. 즉 장망성이 다섯 성읍 가운데 포함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장차 망하리라고 예정된 성읍'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장차'(우상 제단들을) 파괴시킬 `성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본문에 우상 파괴에 대한 어떤 암시도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하헤레스'(*)가 `하헤레스'(*)의 오기(誤記)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약 15개의 히브리어 사본들과 심마쿠스역(Symmachus), 탈굼역(Targum), 벌게이트역(Vulgate) 등에 이 단어는 `태양의 성읍'(*, 이르 하헤레스)로 표기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본문의의미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인, 태양신을 섬기던 바로 그 우상의 성읍조차 하나님께 돌아와 가나안 방언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될 것이다'(O-swalt). 현재로서는 이 해석이 가장 타당하게 여겨진다.

성 경: [사19:19]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세계 평화에 대한 예언]

(주); 애굽 땅 중앙에는...기둥이 있을 것이요 - 어떤 이들은 본문을 B.C. 2세기의 상황과 결부시킨다.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당시 유다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Onias) 4세가 고국에서 도망하여 애굽으로 망명하였을 때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위하여 애굽 왕 필로메토르(Philometor)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똑같은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간청하여 허락받았는데, 이때 그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시한 성경 구절이 바로 본문이었다고 한다. 그 신전은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애굽에서의 유대인의 행위를 말하지 않고 다만 애굽인들 스스로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오니아스의 왜곡된 해석과 본문의 참된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제단'과 '기둥'은 족장 종교의 흔적을 보여준다(Young).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며'(창 12:8), 야곱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응답으로서 돌을 쌓아 `기둥을 세웠다'(창 28:22). `제단'은 하나님께 대한 구약 시대의 예배 행위를 대표하는 말이며, `기둥'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처럼 애굽도 장차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헌신을 표시하기 위하여 제단과 기둥을 세울 것이다(Oswalt).

성 경: [사19:20]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세계 평화에 대한 예언]

(주);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 애굽의 중앙과 변경에 세워지는 제단과 기둥은 그 자체로애굽 땅에 여호와를 경배하는 이들이 있다는 한 `표적'(*,오트)이 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애굽에 드러내시는 한 `증거'(*,에드)가 될 것이다(Delitzsc- h).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애굽인들은 한때 그들을 징계하셨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도움을 간구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마치 사사 시대에 구원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심같이 그들을 구원하실것이다(삿 3:9, 15을 보라). 요컨대, 본문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이스라엘과 똑같이 대우 해주신다는 것이다. 오스발트(Oswal-t)가 잘 관찰한 바와 같이, 19절이 창세기의 분위기를 연상 시킨다면, 본문은 사사기에 매우 흡사하다.

성 경: [사19:21]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세계 평화에 대한 예언]

(주);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애굽에 편만해질 것을 말한다. 이 지식은 전절의 구원의 경험으로부터 주어지는 체험적 지식을 가리키는데 (*, 야다), 이 점에서 그것은 그들이 열 재앙의 쓰라린 과거 속에서 간직하였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것이다(출 7:5; 9:29; 14:4). 왜냐하면 과거의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사도 야고보가 말한바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심을 귀신들도 믿고 떠는 정도에 불과한 반면에(약 2:19), 미래의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기초하고 그와 친밀하게 교제하고 동거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 17:3 참조).

성 경: [사19:22]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세계 평화에 대한 예언]

(주);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고쳐 주시리라 - 끈끈한 유대와 애정으로 결속된 하나님과 애굽의 관계는 부자지간으로 표상된다. 이스라엘과 더불어 새로이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애굽은 이제 징계의 형태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게 된다. 때로 그들이 죄악의 길에 빠질때, 하나님은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이나 그럴때라도 그들에 대한 치유룔 잊지 아니하실 것이다(호 6:1; 히 11장). 하늘에 계신 한 분 하나님아버지 앞에서 애굽과 이스라엘의 차별은 사실상 완전히 소멸된다. 따라서 이 둘은 동일한 구원의 계획에 포함되게 된다.

성 경: [사19:23]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세계 평화에 대한 예언]

(주);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 애굽과 관련하여 보다 확대된 전세계적인 전망이 펼쳐진다. 선지자의 시대에 고대 근동을 지배하던 두나라, 즉 유다를 중심하여 각각 남과 북에 위치하고 있던 애굽과 앗수르가 이전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마치 친구처럼 서로 왕래하게 될 것이다. 그날에 유다는 이 두 나라를 잇는 통로가 될 것이다. 여기에 선지자의 세계주의적, 평화주의적 비전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1) 그날에 유다는 세계의 중심이 되어 끊어진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 (2) 유다를 교량으로 하여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가로놓인 전쟁의 통로가 그날에 복음의 통로, 평화의 대로로 바뀔 것이다.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시키시고 이 둘을 화목하게 하심같이, 신자들은 오늘의 한국상황에서 분열되고 갈라진 인간 관계를 회복시키는 자로서 역할해야 한다(마5: 9; 엡 2:14-18). 둘째, - 애굽의 입장에서 볼 때 - 모든 관계의 우선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그럴 때에 적대적인 관계들도 해소된다는 것이다(엡 2:13).

성 경: [사19:24]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세계 평화에 대한 예언]

(주); 그날에 이스라엘이...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 온 세상을 대표하는 두 개의 초강대국,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이스라엘이 셋 중의 하나로서 참가하게 될 것인데, 이를 통해서 이전에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림을 받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중재해 주는 나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결국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약속의 말씀의 실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사19:25]

주제1: [애굽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세계 평황에 대한 예언]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복이 있을지어다 - 영적으로 연합된 세 나라에 대한 축복 선언으로 본장은 마감된다. 이 축복은 이스라엘에게만 배타적으로 허락되었던 권리와 영예로운 이름이 애굽과 앗수르에게까지 확대 적용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먼저, 애굽은 `나의 백성'(*, 아미)이라 불리운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10:24; 렘 11:4; 호 1:10; 2:23). 그리고 앗수르는 `나의 손으로 지은 작품'(*,미아세 야다)이라 불리운다. 이는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어 만든 수고로운 작품이란 말이다(60:21; 64:8;시 11 9:73; 138:8).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쓰임 받았던 앗수르가(10:5)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탈바꿈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나의 산업'(*, 나할라티)이란 이름이 그대로 주어진다(신 4:20; 32:9; 시 28:9; 47: 4; 94:5; 미 7:14). 이 놀라운 예언은 16-25절에서 무려 6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그날'(* ' 바욤하후), 곧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질 신약 시대에나 성취되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 당대의 모습과는 전혀 조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데, 이런 시간적 괴리감 때문에 선지자의 사고는 다시 현재로 되돌아가게 된다. 다음장에서 그는 애굽의 내적 변화의 시발점이 된 사건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앗수르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다.

성 경: [사20:2]

주제1: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멸망]

(주);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향하니라 - 이 말은 본서에 모두 다섯 번 나온다(1:1;2:13:1;37:21). 선지자가 자신의 신분을 암시하는 이 말은 본문에 덧붙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선지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활보함은 세인들의 눈에 놀라움을 넘어서 의미 심장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Lange).

(주);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 '베(* 사크)는 애통하거나 회계하는 표시로 몸에 걸치는 의복의 일종(창 37:34;삼하 3:31;왕상 20:31;21:27;왕하 6:30;19:1)인데,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의 예복으로 여겨졌다(왕하 1:8;슥 13:4;마 3;4히 11:37). 이 옷을 바로 갖춰 입기 위해서는 허리에 띠를 둘러야 했다. 의복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던 동방에서는 이 옷(겉옷)을 벗는 자체만으로도 벌거벗은 것으로 간주되었다(삼하 6:20, Delitzsch). 속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더구나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것이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복하였다.

성 경: [사20:3]

주제1: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멸망]

(주); 삼 년 동안 - 이 말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에 걸리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를 따르면, 그 의미는 선지자가 3년 동안 계속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했다는 뜻이 된다(Calvin, Lange, Delitzsch). 반면에 후자를 따르면, 선지자의 단한번의 기이한 행위가 3년 동안 예표와 기적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Jerome, Hitzig, Knobel, Alexander). 히브리어의 구문상 어느 하나를 확장하기는 어렵다. 다만 더위나 추위 등의 다양한 기상 여건 속에서도 선지자가 3년 내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닐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전달되어져야 할 표적과 기적이 그처럼 중대한 것이라면 단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미에서 전자를 지지한다. '삼 년'이라는 숫자는 아마도 앗수르 군대에 의해 아스돗이 포위된 기간 혹은 애굽이 멸망하기 직전의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주);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 이는 전쟁 포로의 비참한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4절).

(주);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었느니라 - '예표와 기적'(*,오트 우모페트)은 직역하면 '표적과 기사(혹은 징조)'이다(8:18;신 13:1, 2;28:46; 29:3;34:11;시 135:9;렘32:20,21).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선지자의 행위를 예표와 징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미래에 있을 애굽과 구스의 불행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음절에서 그 의미가 제시된다.

성 경: [사20:4]

주제1: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멸망]

(주); 이와 같이...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 이사야가 온몸으로 실연(實演)한 예언적 행위는 아스돗이 점령된 지 약 30년 후에 사실로 이루어졌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은 애굽을 공격하여 디르하가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멤치스를 점령했으며(B.C. 681년), 그의 아들 앗술바니팔에 의해 애굽은 재차 유린되었다(B.C. 669년). 나이의 노소를 불문하고 붙잡혀간 수많은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원문대로는 '애굽의 포로들과 구스의 추방된 자들')는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끌려가야 했으며, 심지어 엉덩이가 드러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포로들의 복장에 대하여는 대하 28:15, 그리고 하부를 드러내는 치욕과 수치에 대하여는 3:17;겔 16:37;23:10,29을 참조하라.

성 경: [사20:5]

주제1: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멸망]

(주); 그들이...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 여기서 '그들'은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던 유대인 및 팔레스틴 거민들을 가리킨다. 애굽과 구스의 포로됨의 소식은, 그들에게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안겨다 준다. 놀라움은 그토록 강대하게 보이던 애굽과 구스가 몰락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요, 부끄러움은 그런한 나라를 그들이 바라고(*, 마바트) 자랑했다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것이다. '마바트'(*)는 도움을 얻기 위하여 바라봄을 의미한다.

성 경: [사20:6]

주제1: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에 의한 애굽과 구스의 멸망]

(주);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 전절의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그들 자신의 입으로 토로되어진다. '해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는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물'에 대조되는 의미에서 '물', '내륙'에 대조되는 의미에서 '해변', 그리고 '본토'에 대조되는 의미에서 '섬'이다. 여기서는 두 번째 뜻으로 쓰여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나라들을 가리킨다(23:2,6;습 2:5). 여기에 유다가 포함됨을 물론이다.

(주);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 하나님 대신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이 끊어질 때 느껴지는 암울한 절망의 표현으로 본장은 마감된다(왕하 10:4 참조). 그러나 행간 속에 숨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던지는 선지자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왜 하나님으로 피난처를 삼지 않느냐?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느냐?'

성 경: [사21:1]

주제1: [바벨론,에돔,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주);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 '해변광야'는 바벨론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이다(9절) 아라비아 사막의 남단 대평원에 위치한 초기의 바벨론은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댐을 쌓기 전까지는 , 아비데누스(Abydenus)가 '마치 바다 처럼 보인다'고 말했을 정도로, 범람하는 유브라데 강물에 자주 침수되었다(Alexander). 그러나 '해변 광야'란 상징적인 이름에는 물에 잠겨 있는 바벨론의 지형 조건만이 아니라, 그 모습을 통하여 선지자가 미리 내다본 바, 바벨론의 궁극적인 운명의 불길한 전조까지 내포되어 있다(14:23;렘 51:13, Delitzsch). 그것이 선지자의 환상 속에서 점점 구체화된다. 적병이...남방 회리바람같이 몰려 왔도다. 바벨론에 임할 재난은 광대한 아바리아 사막에서 급속도로 불어오는 태풍에 비유된다. 이 태풍의 무서움에 대하여는 욥 1:19;37:9;렘 4:11;13:24;호 13:15;슥 9:14 등을 참조하라. 광야 곧 두려운 땅에서 오리라고 예언된 적병은 다음절에 나오는 엘람과 메대인들을 가리킨다.

성 경: [사21:2]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주); 혹독한 묵시 - 이는 '묵시'(*,하주트)의 내용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무겁다(*, 카솨)는 뜻이다.

(주);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 옛 주석가들은 본문을 포악한 바벨론 군주들에 대한 묘사로 본다. 이에 따르면, 바벨론이 왜 멸망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선지자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을 바벨론의 침략자들에게 적용시킨다. 두 가지가 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나 후자를 취한다(Alexander).

(주);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 '올라가고 에워싸라'는 말은 바벨론에 대한 공격 명령이다. 이 명령은 엘람과 메대에게 주어졌다. '엘람'은 현재의 이란 남부에 해당하며 바사 제국을 가리킨다. '엘람'은 히브리인들에게 잘 알려진 반면(창 14:1), '바사'는 그때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바사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엘람은 후에 바사에게 합병되었다. 바사와 메대는 B.C. 539년 고레스 왕의 주도하에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메대'에 대하여는 13;17 주석을 참조하라. 이사야 선지자 당대에 엘람과 메대가 바벨론의 연합국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묵시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이러한 혜안(蕙眼)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영감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성 경: [사21:3,4]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전절의 '혹독한 묵시'는 선지자에게 두 가지 신체적인 반응, 즉 극심한 요통(3절)과 마음의 진동(4절)을 야기시켰다. 포로기의 선지자들이 바벨론의 몰락을 환호한 데 비하면, 본문에 묘사된 선지자의 반응은 다소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 카이저(Kaiser)는, 이 같은 표현은 선지자들이 자기 계시의 엄중함을 부가시키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수사학적인 기교라교 설명한다(15:5;16:9, 11;겔 21:6, 7;단 10:2, 3, Oswalt). 반면에 칼빈(Calvin)은 자기가 본 것을 백성들에게 생동감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자신을 바벨론과 동일시하여 마치 배우처럼 자신을 입을 통해 바벨론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을 취하든지, 묵시의 혹독함이 간접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주);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 본문의 히브리어 '할할라'(*)는 '춤추다', '꼬이다'는 뜻의 '훌'(*)에서 파생된 명사로, 몸부림치는 고통을 의미한다(겔 30:4,9). 선지자는 이 고통을 '임산한 여인의 고통'(*,치림)으로 비견한다(13:8).

(주);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 '희망의 서광'(네쉐프 히쉐키,* )은 직역하면 '나의 기쁨의 저녁'이니, 한 날의 근심을 벗고 안식하리라고 기대되었던 저녁 시간조차 두려움의 때로 변한다는 말이다.

성 경: [사21:5]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주);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먹고 마시도다 - 포위 공격을 당하리라고 선언된(2절) 바벨론의 자세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 묘사된 상황은 바벨론의 대연회 장면이다. (적군의 내침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들은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신다. 루짜토(Luzzatto)는 본절을 대립적으로 이해한다 : '그들은 식탁을 베푼다, 파수꾼을 세워야 함에도;그들은 먹고 마신다,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발라야 함에도,' '파숫꾼을 세우고'(*, 차포하차피트)는 언뜻 봐서는 바벨론인들의 허랑 방탕한 연회 모습을 기록하는 있는 본문에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인다. 이 때문에 몇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융단을 깔고'(sperad the carpets)로 번역한다(Hitzig, Knobel, Leupold, Gray, Alexander). 그러나 '차파'(*)란 '감시하다'는 뜻이며, 더욱이 이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파수꾼을 배치하는 최소한의 예방 조치도 없이 연회를 베푼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본래대로 해석함이 옳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 '그들은 파수꾼을 세우는 한 가지 예방 조치만으로도 모든 준비를 다했다는 듯이 안심하고서 아무 걱정없이 연회에 빠져든다.'

(주); 너희 방백들아 일아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 전쟁 준비를 서두르라는 말이다. 방패에 기름을 바름은 적군이 내리치는 칼날이 미끄러져 빗겨가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에 앞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몇 가지 선행 조처들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이 시간까지도 방패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의 태만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본문의 전체적인 상황은 바벨론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는 단5장과 흡사하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벧사살은 귀인 일천 명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며 놀다가 고레스의 군대에 의해 몰살당하였다.

성 경: [사21:6]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주);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 다가오는 메대-바사 군대와 바벨론의 멸망이 선지자 자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파숫군'이라는 제 삼자의 시가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할진데, 이 파수꾼은 선지자에 의해서 객관화된 또 다른 그의 모습이다. 파수꾼의 표상은 메시지를 보다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다.

성 경: [사21:7]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주);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약대 떼 - 파수꾼이 주목해서 봐야 할 내용이 소개된다. 기병대는 고레스가 자랑하는 바사의 주력 부대였다. 그 외 나귀 떼와 약대 떼는 군수품과 식량 운반 등에 활용된 듯하다. 그러나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고레스가 리다아인들(Lydians)을 물리칠 때는 나귀 떼를 이용했다고 한다(Gray). 이로 보건대, 나귀떼와 약대 떼는 운송 수단으로 뿐만 아니라 전쟁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크세노폰(Xenophon)은 바사의 군대가 둘씩 짝을 지어 행군했음을 알려준다(Alexander).

성 경: [사21:8]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주); 파숫군이 사자같이 부르짖기를 -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외친다-사자-파수대 위에서'이다. 대분분의 주석가들은 '사자'(*, 아르예)가 파수꾼의 보고 내용이 아니라 보고하는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좋는 병행구는 계 10:3의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에서 발견된다. 파수꾼의 보고는 먼저 자신이 성실과 끈기를 다하여 임무에 임했다는 것(8b절)과 바벨론에서 벌어진 전쟁의 결과(9절)에 대한 것이다.

성 경: [사21:9]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주);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 6절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사태의 추이가 마침내 '바벨론이 함락되었다'는 파수꾼의 환호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것은 고레스 왕이 주도하는 메대-바사 군대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선언하는 말인데, 영적인 의미에서 그 참된 성취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8:2)라고 외치는 하늘 천사들의 합창에서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바벨론과 함께 그 우상들의 몰락이 언급된 것은 비록 이일이 직접적으로는 고레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이다.

성 경: [사21:10]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예언]

(주);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 바벨론에 대한 경고의 마지막에서 예언의 목적이 제시된다. 그것은 바벨론에 의해 예속되어 고달픔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전하는 큰 기쁨의 소식은 바벨론이 몰락했다는 것이다. '나의 마당의 곡식'(벤-가르니, * - )은 문자적으로는 '나의 마당의 아들'인데, '아들'은 어떤 물건에 소속됨(관련성)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Alexander). 이 말은 '나의 타작한 것'과 동의어다. 마치 농부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곡식을 타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바벨론이라는 징계 수단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타작하였으나 그 괴로움의 시간은 이제 곧 끝날 것이다(렘 51:33;미 4:12).

성 경: [사21:11]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아돔에 대한 예언]

(주); 두마에 관한 경고라 - '침묵', '정적', '쓸쓸함'을 뜻하는 '두마'(*)는 에돔의 변형으로서, 에돔의 미래 운명을 상징하는 이름이다(시 94:17;115:17, Vitringa, Rosenmuller, Delitzch, Knobel). 어떤 이들은 '두마'가 이스마엘을 조상으로 하는 아랍 족속의 명칭(창 25:14;대상 1:30) 혹은 오늘날 '두마엘얀딜'(Dumah Eljandil)이라 불리우는 아라비아 북부의 한 지역이라고도 한다(Geseniuss, Hitzig, Michaelis, Umbreit, Ewald). 그러나 뒤에 나오는 '세일'(Seir) 자체가 에서의 자손 혹은 에돔인들의 거주 지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Alexander).

(주);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 파수꾼(선지자)을 부르는 소리는 사해의 남쪽에서 엘란 만(Elantic gullf)에 미치는 높은 산악 지대인 세일(창 14:6;32:3;36:8, 9)에서 들린다.

(주); 파숫군이여 - 본무의 '파숫군'(*, 쇼메르)은 6절의 '파숫군'(*,메차페)과 같지 않다. 후자가 주로 적의 침략으로부터 성(城)을 방비하는 일을 한다면, 전자는 밤에 깨어 성을 지키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62:6;시 127:1;130:6;아 5:7). 참다운 의미에서 선지자는 세계의 밤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는 온 세상이 잠에 취해 있을 때, 홀로 깨어 어둠을 응시한다. 깨어 있는 자로서, 감시하는 자로서, 어둠의 무게를 두 어깨에 짊어진 자로서, 그는 세계의 운명에 대해 말할 것을 강요받는다.

(주);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 '밤'은 재난의 시간이다. 이 밤의 지겨움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어린 물음이 새어 나온다. 그 물음은 이렇게 풀어 말할 수 있다:'우리는 지금 밤의 어느 지점에 있는가? 밤이 얼마나 남았는가? 이 고난의 밤은 언제나 끝나는가?' 반복된 물음은 그들의 답답함의 정도를 암시해준다.

성 경: [사21:12]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아돔에 대한 예언]

(주);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 파수꾼의 대답은 간결하고 모호하다. 탈굼역(Targum)은 이 말을 '의로운 자에게는 보상의 아침이 밝을 것이나 불의한 자에게는 형벌의 밤이 임할 것이다'로 해석한다. 노벧(Knobel)은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아침이 돋을 것이나, 에돔인들에게는 고난의 밤이 계속되라라'로 해석한다. 반면에 그로티우스(Grotius)는 '비록 아침의 시간이 올지라도 영적인 흑암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좋은 해석은 아침과 밤의 순환이 여기서 말해지고 있다고 보는 해석이다(Gesenius). 밤이 재난의 사건이라면, 아침은 구원의 시간이다. 비록 구원의 때가 바벨론의 멸망과 더불어 도래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어둠에 삼킴을 당할 것이니, 즉 바사제국에 의해 그들은 지배될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21:13]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아라비아에 대한 예언]

(주);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 바벨론의 파멸은 에돔뿐만 아니라 인접한 아리비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라비아'(*,아라브)라는 이름에는, '해변광야', '두마'와 같이 그 나라의 운명을 암시하는 '저녁'이라는 상징적 뜻이 담겨 있다. 그의 구성은 대단히 기교적이다. 세일 산지를 뒤덮은 어둠(12절)은 아라비아에도 어어져 뜨거운 태양 아래 대상들이 자유로이 왕래하던 나라 아라비아는 이름 그대로 저녁의 땅이 될 것이다.

(주); 드단 대상이여 너희가...유숙하리라 - 선지자의 경고는 먼저 사막을 횡단하는 드단의 대상들에게 향한다. 이들은 에돔과 이웃한 족속들(창 10:7;25:3;렘 49:8;겔 25:13;27:20)로 낙타를 이끌고 두로를 오가는 원거리 상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이 평상시에 통행하던 길에서 쫓겨나 수풀에서 은신처를 찾을 것이라는 말은 심각한 전쟁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요 아라비아 땅이 적에게 유린될 것을 시사한다.

성 경: [사21:14]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아라비아에 대한 예언]

(주); 데마 땅의 거민들아...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 선지자의 다음말은 드단 대상들이 숲속으로 도망한 곳 근처에 있는 데마(아라비아 북부에 있음) 주민들에게 주어진다. 도피자들에게 물과 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동정심을 표시하는 행위이다(신 23:4). 이 말은 데마 주민들의 동정심이나 또는 아라비아 땅의 나머지에는 그래도 몸을 쉴 곳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피자들의 비참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성 경: [사21:15]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아라비아에 대한 예언]

(주);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도망하였음이니라 - 드단 대상들이 왜 그토록 서둘러 몸을 피해야 했는지 그 이유가 설명된다. 한편, 본문은 '앞에서'(*, 미프네)라는 말을 4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칼날 앞에서...,뺀 칼 앞에서, 당긴 활 앞에서, 전쟁의 무거움 앞에서'(원문)-, 이는 13절에 암시된 전쟁의 참사을 묘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성 경: [사21:16]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아라비아에 대한 예언]

(주);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다 쇠멸하리니 - '게달'(*,카다르)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데(창 25:13), 여기서는 아라비아 유목 민족을 대표하는 뜻으로 쓰였다(42:11;60:7;시 120:5;렘 2:10;49:28;겔 27:21). 지금도 유대 랍비들은 아라비아어를 '게달의 언어'라고 부른다(Alexander). 두로와의 상거래를 통하여 축적된 많은 부(富)와 풍부한 가축들, 그리고 활달한 용사들로 넘치는 게달의 '영광'(*, 케보드)은 가까운 장래에 전쟁의 '무거움'(*, 코베드)에 눌려 붕괴되고 말 것이다(Oswalt). '일 년 내에'란 말은 '품군의 정한 기한같이' 예정된 파멸의 시간이 결코 늦춰지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성 경: [사21:17]

주제1: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아라비아에 대한 예언]

(주);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 그 조상 이스마엘 이래(창 21:20) 게달 자손들은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시 120:4 참조).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겪은 뒤에 저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 극소수만 남게 될 것이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경고는 아라비아를 징벌하시는 분이 결국 하나님이시며 그는 무한한 능력으로써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예언된 이 모든 일을 기필코 이루실 것임을 확인, 공표하는 말로 끝맺는다.

성 경: [사22:1]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이상(異像)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 '이상 골짜기'(*,게 히자욘)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이다(5절). '골짜기'는 다윗 성이 서 있는 언덕(산) 기슭에서 마주치는 힌놈, 기드론 등의 골짜기에서 연유된 듯하고, '이상'은 그곳에 선지자의 거주지가 있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시온 산'이라 불렸음을 생각할 때, '이상 골짜기'라는 이름에는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산' 과 '골짜기'의 대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산의 높은 곳에서는 먼 데까지도 전망이 가능하나, 어두운 골짜기에서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못한다. '이상'에 관한 한, 예루살렘은 골짜기와 같다. 선지자가 그 이름을 통해서 풍자하고 있는 바, 미래를 예측하는 시력을 상실한 예루살렘은 임박한 재난 앞에서도 회개하기는 커녕, 기쁨으로 소동하며 분요하는 모습만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2절).

(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 '어찜인고'(* - , 마-라크)는 직역하면 '네게 무슨 일이냐?'(What to you)이다. 이 물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조롱의 뜻이 담겨 있다(삿 18:23). 예루살렘 주민들이 떼를 지어 지붕에 올라감(삿 16:27)은 아마도 (퇴각하는) 적군(산헤립의 군대)의 모습을 지켜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36:22, Gray, Leupold). 본문과 관련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사실 여기서 제시되는 주장들은 기껏해야 개연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본문의 상황이 B.C. 701년에 있었던 앗수르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당시 산헤립은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양의 공물을 받고 그의 군대를 철수시켰다(왕하 18:14-16).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자세한 사항에 대하여는 36,37장;왕하 18장을 참조하라.

성 경: [사22:2]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 예루살렘 성읍을 떠들석하게 만든 이 소동은 기쁨과 안도감에서 촉발된 것이다. 백성들은 퇴각하는 적군을 바라보면서 모든 위협이 사라진 양, 자만하며 허랑 방탕한 환락에 도취되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전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즐거워하다'(*, 알리자)는 말은 헛된 자만에서 분출되는 득의 양양한 기쁨을 나타낸다(습 2:15, Delitzch).

성 경: [사22:3]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너희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결박을 당하였도다 - 백성들을 지켜야 할 관원들이 오히려 제 몸을 보전히기 위하여 활도 팽개치고 도망하다가 포로가 되어 결박을 당한다. 명예와 용기가 자취를 감추고 수치와 비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것이 이상을 상실한 백성들의 결국이다. '활을 버리고'(*, 미케쉐트)는 직역하면 '활로부터'이니, 그 의미는 '활을 쏴보지도 못하고' 혹은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이다. 유다의 지도자들에 관한 선지자의 부정적인 시선은 1:23;3:2, 3;5:13;7:2;28:7, 14;29:15 등에도 나와있다.

성 경: [사22:4]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 예루살렘의 미래가 이러하므로 선지자는 기쁨으로 환호하는 성읍의 한 가운데서 홀로 눈물을 흘린다. 그는 어떠한 위로도 거부한채 실컷 울기만을 소원한다. 이상을 결여한 시대에 선지자는 얼마나 특이하고 외로운 존재인지! 그는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깨어 어둠을 응시하며(21:11, 12), 모두가 기쁨에 들떠 분요할 때 홀로 슬픔에 잠긴다. 그는 백성을 향하여 선포하는 자이며, 동시에 백성과 그 운명을 함께 나누자는 자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눈물은 백성의 고난에 참예하려는 그의 애끊는 가슴에서 흘러 내리는 것이다.

성 경: [사22:5]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로다 - 직역하면 '성벽을 무너뜨림과 산악에 대하여 부르짖음(*, 쇼아)이로다'이다. 두 소리가 들린다. 먼저 들리는 소리는 적군의 공격을 받아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요, 그와 때를 같이해서 살려달라는 백성들의 비명소리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서 메아리쳐 울린다. '쇼아'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이다(Alexander).

성 경: [사22:6]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엘람 사람...기르 사람 - 예루살렘 성을 포위 공격하는 앗수르 군대 중에 주도적인 두 나라가 진술된다. '엘람'과 '기르'는 산헤립 당시에 이미 거대한 앗수르 제국의 한 주(속국)로 편입되었다. '엘람'은 바벨론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21:2),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기르'는 코카서스에서 발원하여 카스피해로 유입되는 큐로스 강에 근접한 지방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경에서 그곳은 '아람 사람의 기원지'(암 9:7)로, '아람 사람이 포로로 사로잡혀온 곳'(엄 1:5)으로, 또는 디글랏 빌레셀이 다메섹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킨 장소(왕하 16:9)로 언급되고 있다. '엘람'과 '기르'는 여기서 각각 바사와 메대 대신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Alexander). 이 두 나라로 대표되는 앗수르 군대의 위용은 곧 궁사들과 전차 부대와 기병대와 보병대로 구성된다.

성 경: [사22:7]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병거는...정렬되었도다 -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마다 적들의 병거가 가득하고, 성문 앞에는 마병이 정렬해 있는 일촉 즉발(一觸卽發)의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다고 아니할 수 없다.

성 경: [사22:8]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 직역하면 '그가 유다의 베일(*, 마사크)을 벗기매'이다. '마사크'는 사람의 눈을 가려 보지 못하도록 하는 무엇을 뜻하는데(출 26:36;민 4:5;삼하 17:19;시 105:39;고후 3:15, 16), 여기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베일로 해석함이 가장 무난하다(Alexander, Leupold).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우쳐 주심으로 백성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이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회개하도록 하는 데까지는 이르게 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병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성 경: [사22:9]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아래 못의 물도 모으며 - 포위당했을 때를 대비하여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사전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아래 못'은 시온 산 서쪽 맞은편 힌놈 골짜기에 아직도 남아 있는 저수지를 가리키는 듯하다.

성 경: [사22:10]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 - 성읍 내의 가옥을 계수함은 그것을 헐어내기 위함이요, 그것을 헐어냄은 성벽을 견고케 하는 데 필요한 건축 재료를 얻기 위함이다(9절;렘 33:4).

성 경: [사22:11]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존경하지 아니 하였느리라 - 선지자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백성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행위의 이면에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없음을 질책하는 것이다. '앙망하다'와 '존경하다'는 히브리어로 '바라보다'(의지하다)는 뜻이다. '이 일을 하신 자'(*,오세야)와 '이 일을 경영하신 자'(*,요체라)는 문자적으로는 각각 '그것을 만드신 자'와 '그것을 빚으신 자'인데, 이는 유다 앞에 놓인 위기를 조성하신 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께 돌아옴이 없이는 그들이 어떤 자구책을 강구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성 경: [사22:12]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 예루살렘 성읍 앞에서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위기 상황들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경고요, 부르심이었다. 이것은 백성들이 특별히 깨닫기 어려운 것도 아니며, 올바른 지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능히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통고하며 애호함'은 가슴을 치고 우는 것이니, 하나님을 거스려 범죄하였음을 뉘우치는 행위이다.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띰'은 회개의 외적 증거로서 동방에서 널리 시행되어 온 관습이었다(15:2,3 참조). '굵은 베'(*, 사크)는 슬픔의 날에 입는 굵은 삼베옷을 가리킨다(3:24;창 37:34;에 4:1;욘 3:6).

성 경: [사22:13]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 그러나 회개에의 기대는 깨어졌다. 백성들은 미래의 재난 앞에서 찰나적인 쾌락으로 일관하였다. 니느웨가 보인 반응과 비교해 보라(욘 3:6-9). 그들의 행위는 미래를 상실한 데서 오는 자기 파멸적 경향성일 수도 있고, 또는 '선지자가 내일 죽는다고 하니 그 말을 존중해주는 의미에서라도 오늘만큼은 실컷 즐기며 놀자'는 조롱의 표현일 수도 있다. 내일은 없으며 따라서 인생에는 영원한 것도, 가치있는 것도 없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은 먹고 마시는 쾌락의 한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의 눈에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며 자기 부정과 희생의 길을 걸어 가는 신앙인의 삶은 얼마나 기이하고 또 어리석게 보일 것인가(고전 15:19,32)!

성 경: [사22:14]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주);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 회개하기를 거부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절대로 맛볼 수 없음을 엄숙히 선고하는 말이다. '속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파르'(*)는 본디 '덮다', '가리다'는 뜻이다. 구약 시대에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뿌려진 황소와 염소의 피는 백성들의 죄를 없이 하지 못하고 다만 일시적으로 가리울 뿐이었으므로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있었다(히 10:3,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이 같은 필요가 소멸되게 된 것이다.

성 경: [사22:15]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그 국고(國庫)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 - 직역하면 ' 이 국고 맡은 자(*, 하소켄 하제), 그 집 위에(* - ,알-하바이트) 있는 셉나'이다. 셉나의 직위가 소개된다. 그는 '집 위에 있는 사람', 즉 왕궁을 다스리는 궁내 대신이다(창 39:4;44:1, 4;왕상 4:6;18:3;왕하 15:5 참조).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왕을 가까이 하는 사람(*, 소켄)이라 불렀다(Lange). '소켄'은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며 그 여성형인 '소케네트'(*)가 다윗 왕을 수종든 젊은 여자 아비삭에게 적용되었다(왕상 1:2, 4). 그 앞에 붙은 지시 대명사 '이'(this)라는 말 속에 경멸적인 어감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셉나'란 이름 앞에 '...의 아들'이라는 소개가 생략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성 경: [사22:16]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높은 곳에...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 2인칭에서 3인칭으로 전환된다. 셉나의 헛된 야망의 높이를 상징하는 '높은 곳'은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대하 32:33)이란 말에서 보여진 것처럼 열왕들의 묘실을 기리킨다. 이들 무덤들은 예루살렘 주변 산들의 경사진 곳에 바위를 뚫어 만들었는데 이는 침해를 방지하고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Gray).

성 경: [사22:17,18]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속박하고...던질 것이라. 그러나 예루살렘 높은 곳에 왕들처럼 묻히고자 하는 셉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는 단단히 속박된 채로 공처럼 말려져 광막한 지경에 던져질 것이다.

(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거기 있으리라 - 원문상 '그 곳'(*, 솨마)이 2번 쓰여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의미상으로 16절의 '여기'와 대조된다. 후자가 고귀한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면, 전자는 수치스러운 이국 땅을 뜻한다. 이국 땅에서 최후를 맞이함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불행으로 간주되었다(암 7:17, Leupold). 셉나의 영광은 곧 왕궁의 부끄러움이다. 그 같은 인물을 등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왕궁은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영달을 좇아가면 욕과 멸시가 그 뒤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이치이다(23:9).

성 경: [사22:19]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고 - 본문은 다음절에서 엘리아김의 등장을 말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셉나는 서기관으로 강등되었으며(36:3), 그 자리를 엘리아김이 차지했다.

성 경: [사22:20]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 엘리야김은 36:3에서 셉나와 함께 다시 언급된다. 그 이름 앞에 '내 종'이란 수식어를 첨가한 것은 그가 여호와의 충실한 종복으로서(20:3;삼하 3:18;암 3:7) 셉나와 대조적인 인물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Alexander).

성 경: [사22:21]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힘있게 하고 - '옷'은 사람의 신분과 권세를 나타낸다. '예복'(*, 케토네트)과 그 위에 두른 '띠'(*, 아브네트)는 취임식 때 입는 관복을 가리킬 것이다(출 28:4, 39;레 8:7, 13).

성 경: [사22:22]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 '다윗 집'은 유다 왕궁이다.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둔다'는 말은 위정자의 책임의 무거움을 강조하는 비유적 표현인데 무겁고 긴 열쇠를 어깨에 둘러 메었던 고대의 풍습이 반영되고있다(9:6). 열쇠를 가진 자는 집 안의 출입을 비롯해서 모든 살림 살이를 관장해야 했다. 이 열쇠는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자에게 주어졌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했을 때도 이와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다(마 16:19).

성 경: [사22:23]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 새로이 공직에 취임한 엘리아김의 위치가 확고 부동할 것을 선지자는 두가지로 표현한다. 첫째, 국가에 관한 한, 그는 단단한 곳에 박힌 목처럼 흔들림이 없이 견고할 것이다(슥 10:4 참조). 둘째, 가문에 관한 한, 그는 그 아비 집에서 온 가족이 의지하는 보좌 같이 될 것이다. 즉, 영광이 될 것이다.

성 경: [사22:24]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주);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항아리 까지리라 - 그 가문에 속한 모든 이들이 견고한 못 같은 엘리아김에게 의지함을 말한다. '후손과 족속'(*, 하체에차임웨하츠피오트)은 대립적 의미-'아들과 딸'(성의 구분), '아들과 손자'(세대 구분), '고귀한 자와 천한 자'(계급 부분)-로 이해된다(Alexander).

성 경: [사22:25]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유다의 관리들에 대한 심판]

본절은 해석자들에게 큰 어려움을 야기시킨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엘리아김이 친족을 등용하여 족벌 정치를 행사하다가(24절), 그로 인하여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25절)는 해석을 취한다. 그러나 앞에서 엘리아김의 좋은 면을 이야기하다가 돌연 그에 대한 비난과 비극적 최후를 말한다는 것은 매우 납득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몇몇 주석가들은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24절을 엘리아김에게, 본절을 셉나에게 적용하는 것이다(Calvin, Umbereit). 그러나 이 경우에 23, 24절에서 엘리아김을 가리킨 못이 어째서 돌연 셉나로 바뀌어야 하는지 그 까닭이 분명치 않다. 따라서 문맥에 비추어 부자연스러운 감은 있지만 앞의 해석을 받아들인다.

성 경: [사23:1]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두로에 관한 경고라 - 열방들에 관한 경고(*, 마사)는 바벨론에서 시작하여(13장) 두로에서 끝난다. 바벨론과 두로는 각각 세계의 대극점(동과 서)에 위치하면서, 세계의 두 힘 곧 권력과 재물을 대표한다. 계 18장에서 이들 두 나라는 영적으로 함께 결합된다. '두로'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 페니키아(베니게)의 주요한 네 성읍-아라두스, 비블로스, 시돈, 두로-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항구 도시였다. 그 자매 항구인 '시돈'은 약 40km 북쪽에 있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두로는 일찍이 바다를 개척하여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에 활발히 종사하였다. 두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때로부터 B.C.322년에 이르기까지 약 5번의 공격을 받았는데, 2번은 앗루르에 의해(느부갓네살), 또 1번은 바사에 의해(아타르크세르크스 3세), 그리고 마지막은 마게노냐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였다(Oswalt). 본문의 예언이 이중 어느 것과 관련되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에 의한 점령이 가장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3절). 두로에 대한 예언으로는 겔 26-28장을 보라.

(주);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 '다시스의 선척들아'란 말에는 이중의 수사법이 들어 있으니, 그것이 지중해를 오가는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을 대표하는 한에서 환유법이요, 또한 그것이 인격화되어 부름을 받는 한에서 돈호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타르테수스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두로의 해상 식민지였다(2:16;60:9;왕상 10:22;22:48;시 48:7;겔 27:25;욘 1:3). 다시스를 돌아 고향으로 귀항 중인 선원들에게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그것은 두로가 파멸되어 들어갈 항구도, 쉴 집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들려온 곳은 최종 정박지인 '깃딤' 곧 구브로 섬(Cyprus)이다(창 10:4;렘 2:10;단11:30).

성 경: [사23:2]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고(商賈)로 말미암아 부유하게 된 - '시돈 상고'는 페니키아의 상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시돈'은 페니키아를 대표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도시이며(삿 3:3;왕상 16:31), '상고'(*, 소헤르)는 상인, 장사꾼을 뜻한다. 이들은 지중해를 오가며 인접한 나라들의 물건을 중개 무역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덕을 본 나라들이 많았다.

성 경: [사23:3]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시흘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열국의 시장이었도다 - 시돈 상고로 대표되는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이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이들은 고대 세계의 곡창 지대였던 애굽으로부터 곡식을 사서 이것을 '큰 물' 곧 지중해(시 107:23;겔 27:26)로 운반한 뒤에 곡식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되팔아서 큰 이윤을 남겼다. '시흘'(*)은 나일 강을 뜻하는 애굽어 '예오르'(*, 19:6)의 히브리어 발음이다(수 13:3;렘 2:18).

성 경: [사23:4]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시돈이여...생육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니라 - '바다', 엄밀히 말해서 '바다의 요새'(*, 마오즈 하얌)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의 요새'는 내륙에서 보건대, 섬과 같은 두로를 가리킨다. 두로에게 임한 재난은 시돈으로 대표되는 페니키아 땅에 부끄러움을 강요한다. 왜냐하면 한때 지중해를 석권하며 많은 식민지들을 건설할 두로가 이제 재난을 당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23:5]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통도(痛悼)하리로다. 두로의 패망 소식은 애굽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곡물 수출업자들인 그들의 몰락으로 애굽의 경제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겠기 때문이요, 둘째는 동방 국가의 서진(西進)을 저지시켜 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두로의 몰락으로 애굽 역시 동일한 군사적 위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23:6]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슬피 부르짖을지어다. 적의 포위 공격을 받는 두로 거민들에게 가능한 한 멀리 다시스로 도피하라는 동정어린 명령이 주어진다.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를 포위했을 때 이와 유사한 광경이 벌어졌는데, 늙은이, 부녀자, 어린아이 할 것없이 모두 페니키아의 식민지 중의 하나인 카르타고 (Carthage)로 도피하였다고 한다(Diodorus, Curtius, Justin). 그들의 경제력을 두로와의 해상 교역에 거의 의존하다시피 해온 해변 거민들 역시 두로의 몰락으로 자기들에게 미칠 손실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에 부르짖는다.

성 경: [사23:7]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유하던 성이냐 - 두로의 어제와 오늘이 대비된다(14:16, 17;애 2:15 참조). 선지자는 이것을 놀람이 함의된 의문문의 형태로 표현한다. 두로와 관련된 세 가지 요인이 이 놀람을 더욱 증폭시킨다. 첫째, 두로의 유구한 역사이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는 두로의 도성이 약 2,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두로의 활력성이다. 이 활력성은 모험성과 진취성이 충만한 상업적 활동에서 기인된 것이며, 두로의 사치와 교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셋째, 두로의 끝없는 개척 정신이다. 그들은 넘쳐나는 활력으로 먼 데까지 나아가 시장을 개척하는 한편, 카르타고, 다시스 등과 같은 식민지들을 건설하기에 바빴다(Oswalt).

성 경: [사23:8]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뇨 - 히브리어 원문에 이 물음이 문두에 나온다. 실상 이 물음이 8-14절의 주조를 이룬다. 두로처럼 역사성이 깊고, 활력이 충만하며, 개척 정신이 강한 나라가 몰락한 데는 역사의 우연 이상의 더 큰 무엇이 개입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답변하기 전에, 선지자는 두로의 몰락이 주는 충격을 더하기 위해 과거 두로가 국제 사회에서 점했던 위치를 상기시킨다.

성 경: [사23:9]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하려 하심이니라 - 직역하면 '땅의 모든 존귀한 자들(*, 콜-니크바데-아레츠)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 레하켈)'이다. 어원적인 면에서 '니크바딤'(*)과 '하켈'(*)은 '무겁다'와 '가볍다'는 대조적인 의미를 갖는다.

성 경: [사23:10]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딸 다시스여...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 두로의 패망은 곧 그 밑에서 속박당해 온 속국들의 해방과 독립의 계기가 된다. 다시스는 그 한 예로서 본문에 언급된다. 구속된 상태에서의 두로와 그 식민지 다시스와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비유된다. 그러나 해방의 그날, 다시스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어떤 간섭도 받음이 없이 마치 나일 강이 넘쳐서 제멋대로 흐름과 같이 그렇게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23:11]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 두로의 파멸이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의한 것임을 선지자는 다시 강조하고 있다. 손을 펴시는 여호와의 모습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친숙한 이미지이다(5:25;9:12, 17, 21;10:4;14:26;31:3). 그가 바다에 손을 펼치심으로 바다에 의존하던 열방들 곧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왕을 섬기고 있던 페니키아의 여러 나라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Gray).

성 경: [사23:12]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는 6절과 유사하다. 한때 순결한 처녀와도 같이 그 부(富)와 명예를 자랑하던 시돈 곧 페니키아가 능욕당하여 모든 즐거움울 상실한 여인의 모습으로 비유된다. 그에게 깃딤으로 도피하라는 권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바라는 안식은 찾지 못할 것이다.

성 경: [사23:13]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황무케 하였느니라 - 두로를 멸망시킬 도구가 제시된다. 그러나 이 도구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두로의 파멸이 앗수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가나안 땅(페니키아)을 보라. 이 나라는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앗수르가 그것을 광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페니키아인들)은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건설했으나 그(앗수르)가 그것을 황무케 하였다'(Ewald). 그러나 이것은 과도한 본문 수정을 요구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갈대아 사람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다는 견해를 취한다. 이때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갈대아 사람(바벨론)의 땅을 보라. 이 백성(지금 거주하고 있는 바벨론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즉, 원주민이 아니었다). 앗수르가 그것을 광야의 거주자들(전에 유목 생활을 하던 갈대아인들)을 위해 건설하였다. 이 백성(갈대아인)이 망대를 세우고 그녀(두로)의 궁전을 헐었으며 그것을 황무케 하였다'(Alexander, Delitzsch). 언급된 '망대'는 고대 사회에서 포위 공격할 때 사용된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이토발 왕 치하의 두로를 13년간이나 포위했으며(요세푸스, [고대사]) 부왕(父王)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국 바벨론으로 귀환할 때 수 많은 페니키아의 포로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Berosus).

성 경: [사23:14]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

(주);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 1절의 반복이다. 슬피 부르짖는 이유도 앞과 유사하다. 즉, '너희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4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두로가 견고하 요새(*, 마우즈)로 묘사된다. 수미 쌍관의 형식으로 두로에 대한 비극적인 예언은 종결된다. 이하에서 선지자는 두로의 회복을 노래한다.

성 경: [사23:15]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재건에 대한 예언]

(주); 그 날부터 두로가...기생 노래의 뜻 같이 될 것이라 - 본문에서 선지자는 두로를 기생에 비유하니, 이는 물건을 사고 파는 상업 도시의 면모가 노래와 몸을 파는 기생과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17절). 이 기생은 일정한 기간 동안 손님으로부터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70년이 지난 뒤, 다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언급된 70이란 숫자는, '7(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키는 수) 10(완전을 가리키는 수)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대로 일을 성취시켜 나가는 충만한 때를 상징하는 말로 봄이 무난하다(단 9:24). 실제로 70년이란 기간은 바벨론 유수의 시한과 일치한다(대하 36:21;렘 25:12;29:10;단 9:2;슥 1:12).

성 경: [사23:16]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재건에 대한 예언]

(주); 잊어버린 바 되었던 기생 너여...다시 기억케 하라 - '기생 노래'의 가사가 일부 소개 된다. 이는 선지자의 예언을 보다 생생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노래의 내용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한 기생이 다시금 옛 명성을 되찾고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 기묘한 곡조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이는 항간에 유행하던 소곡에서 따온 표현인 듯하다(Dillmann).

성 경: [사23:17]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재건에 대한 예언]

(주); 여호와께서 두로를 권고하시리니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두로를 방문하실 것이니'이다. 두로의 멸망이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 회복 또한 여호와의 은총으로부터 기인됨을 말하는 것이다.

성 경: [사23:18]

주제1: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두로의 재건에 대한 예언]

(주);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 직역하면 '(그녀의) 소득과 (그녀의) 보수가 여호와께 거룩히 여김이 될 것이며'이다. '하나님께 거룩히 여김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뜻이다. 이때 '열방과 음란한 행위를 해서 번 돈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져오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신 23:18)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두로에게 적용된 '기생'이라는 말이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두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Oswalt). 상행위 자체는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 다만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딤전 6:10)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사24:1]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그 거민을 흩으시리니 -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보라(*, 힌네) 여호와께서 땅을 쏟아버리시며(* 보케크), 공허하게 하시며, 그 얼굴을 뒤집으시며, 그 거민을 흩어버리실 것이다'이다. '보케크'는 '바카크'(*)동사의 분사형인데, 이처럼 '히네'와 분사가 결함됨으로써 사건의 급박함을 나타낸다(3:;17:1;19:1;30:27). 한편, 여기서 '땅'(*, 하아레츠)은 13-23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사으로 지정된 열국들을 포함한 온 세상을 가리킨다. 이 땅이 여기서 더러운 그릇으로 비유된다. 그 속에든 내용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릇을 뒤집어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도 미래의 어느날 하나님에 의해 깨끗하게 될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다.

성 경: [사24:2]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백성과 제사장이...일반일 것이라 - 우주적 심판에서 제외될 자가 아무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짝을 이루는 두 부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불평등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불평등은 정치-종교적(백성과 제사장), 신분적(종과 상전, 비자와 가모), 혹은 경제적(사는 자와 파는 자, 채급하는 자와 채용하는 자,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이유 등으로 해서 더욱 심화된다. 그러나 이런한 차별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완전한 평등 가운데서 마주 설 날이 온다. 그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다. '비자'(*, 쉬프하)와 '가모'(*, 게비라)는 각각 계집종과 여주인을 뜻한다.

성 경: [사24:3]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 원문대로 읽으면 "왜냐하면(*, 키) 여호와께서 '이 말씀'(*, 하다바르 하제)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디베르)"이다. 이는 동족 목적어를 취한 강조 구문의 한 예이다. 예언의 확실성의 근거를 여호와의 말씀에서 구하는 선지자의 신앙적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즉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 경: [사24:4]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땅이...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 '땅'(*, 하아레츠)과 '세계'(*, 테벧)는 동의어이다(13:11;18:3). 1절에서 '더러운 그릇'으로 비유된 '땅'이 여기서 '가뭄으로 인해 시들고 쇠약해진 식물'로 비유된다. 발음의 유사성를 이용한 언어 유희는 계속된다-'(땅이)슬피 울며 시들며(*, 아벧라 나벧라) (세계가) 쇠약하고 시들며(*, 우믈렐라 나벧라).'

성 경: [사24:5]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 땅과 인간의 관계가 고려된다:땅이 심판받은 이유는 그것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1-4절). 그런데 그 땅을 더럽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인간들-하나님에 의해서 땅의 관리자로서 부름받는(창 2:5-7, 15)-이다. 땅은 그들에 의해 '오염되고 부패하고 더럽게 되었다'(*, 하네파). 땅을 오염시키는 가장 주된 요인은 살인과 피다. 이에 대하여는 26:21;민 35:33;시 106:38 등을 참조하라. 그 밖의 요인들로는 음행(렘 3:1, 2, 9), 우상 숭배(렘 16:18;겔 36:17, 18) 등이 있다(Kissane). '심판'은 인간의 죄로 인해 더렵혀진 땅를 본래대로 정결하게 회복시키는 기능을 한다.

성 경: [사24:6]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 '저주'(*, 알라)는 언약을 파기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응이다. 고대 근동의 언약 문서에는 의무 조항과 더불어 그에 따른 축복과 저주가 명기되었다(신 27, 28장 참조, Mendenhall, Covenant Forms in Israelite Tradition).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고 피조물이 고통중에 함께 탄식한다는 사상에 관해서는 창 3:17;롬 8:22 등을 보라.

성 경: [사24:7]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며 - 심판이 갖는 또 다른 국면이 제시된다. 그것은 인간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들의 제거로 특징지워진다(7-13절). '새 포도즙'은 새로 압착한 포도에서 나온 아직 발효되지 않은 즙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포도나무'와 동의어로 쓰였다. 이것들은 슬퍼하고 쇠잔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뿌리가 말라서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Oswalt). 본문의 전체적인 표현은 욜 1:10-12과 거의 유사하다.

성 경: [사24:8]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 흥겨운 음악과 즐거운 아우성으로 대표되는 축제의 기쁨이 멎고, 대신 무거운 침묵이 자리한다. '소고'(*, 토프)는 작은 북을 가리키며95:12;30:32), '수금'(*, 키노르)은 비파 혹은 하프를 가리킨다(5:12;16;11;23:16;30:32).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는 환락에 겨워 흥청대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을 나타내는 말이다(22:2;습 2:15).

성 경: [사24:9]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노래하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쓰게 될 것이며 - 그나마 술이 남아 있더라도 내면의 고통이 극심하여 술맛을 잃어버린다. 기쁨으로 마시는 술은 달콤하나 슬픔으로 마시는 술은 그지없이 쓴 법이다(시 104:15)- '노래도 없이 퍼마시는 술, 그 독한 술맛은 입에 쓰기만 하다'(공동 번역).

성 경: [사24:10]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집마다 닫히었고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 본문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적의 침탈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빗장를 가로지르고 집을 폐쇠시킨다. (2) 집들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파멸되었다. 문맥상 후자를 취한다. 비슷한 표현이 23:1에 있다.

성 경: [사24:11]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 파멸된 도성의 암울함이 시적으로 묘사된다. 먼저, 거리에서 술을 구하는 부르짖음이 들린다. 이 부르짖음은 이전 시대에 성행했던 향연에 대한 그리움에서(O. Kaiser)혹은 현대의 비참함으로부터 망각의 세계로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에서(Rawlinson) 촉발된 것이다. 그러나 그 풍부하던 포도주를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주); 모든 즐거움이 암흑하여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으며 - 청각적인 부르짖음에 이어 시각적인 색채 묘사가 대비된다. 밝은 태양 같은 기쁨과 즐거움이 스러진 자리에 대신 음울하고 어두운 땅거미가 짙게 깔린다.

성 경: [사24:12]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성문이 파괴되었느리라 - 사람들이 가장 붐비던 자리, 옛날 도성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던 곳, 그러나 지금은 파괴되어 사람의 발걸음이 끊긴 성문에서 황무한 도성이 남긴 폐허의 잔영을 확인한다.

성 경: [사24:13]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같을 것이니라 - 전술한 예언의 범위가 확정적으로 진술된다. 그것은 '열방 가운데'와 '땅의 한 가운데'는 대등구이다. '이러한 일' 곧 심판 때에 일어날 일이 두 가지로 비교된다. 감람나무 열매를 흔들어 떨어뜨릴 때 그 꼭대기에 몇 개가 붙어 있음같이, 그리고 포도를 수확하고 난 뒤 이삭 줍는 자의 몫으로 얼마가 남겨짐같이, 심판의 날에 세계 민족의 운명이 그러할 것이다(17:5, 6을 보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무수히 많던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적은 수만 남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온 인류가 물 속에 잠기고 오직 노아와 그 가족만이 겨우 건짐을 입은 첫 번째 심판은 이 점에서 이후에 올 하나님의 심판의 원형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사24:14]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 직역하면 '그들(*, 헤마)이 소리를 높이며, (그들이) 노래 부를 것이며'이다. '그들'이 강조된다. 여기서 '그들'은 아마도 앞절에 묘사된 심판에서 생존한 극소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Young, Scott, Alexamder).

(주); 여호와의 위엄을 인하여 - 찬양의 이유는 '여호와의 위엄'(*, 게온 야훼)때문이다. 전세계적인 심판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위엄이 지상에 밝히 드러나는 그때에 사람들은 '진실로 높은 자가 누구인지'(2:10-19;5:15, 16;13: 11;14:12-17;16:6;23:9)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성 경: [사24:15]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 찬양의 목적이 언급된다. '이름'(*, 쉠)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며, 섭리하시며, 구원하시며, 통치하시는 사역에서 드러나는 그의 신적인 본성를 가리키는 것이다(30:27).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말일에 온 인류가 유일 무이(唯一無二)한 참종교인 여호와 종교 앞에 부복한다는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2:2-4).

성 경: [사24:16]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궤휼자가...심히 궤휼을 행하도다 - 본문은 모두 '바가드'(*)라는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5개의 낱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가드'는 '불성실하다', '속이다', '악탈하다'는 뜻인데, 속임수를 통해 남을 강탈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최후의 때가 이르기까지 이 땅에는 폭압과 강탈과 살인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미리 본 광경이었다.

성 경: [사24:17,18]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 전에 온 땅에 미칠 최후 심판에 대한 묘사가 다시 전개된다.

(주);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임하였나니 -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할 길이 전혀 없음이 연속되는 세 단어에는 강조된다. '두려움'(*, 파하드)과 '함정'(*, 파하트)과 '올무'(*, 파흐)는 야생 동물에 대한 사냥에서 빌어 온 말들이다(Bultema). 사냥꾼은 먼저 동물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한다. 두려움에 질린 동물은 허겁지겁 달아나다가 사냥꾼이 길목에 설치해 놓은 함정에 빠진다. 운좋게 그것을 피했다 할지라도 이번에는 올무(덫)에 걸린다. 이처럼 땅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야기된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지라도 그 앞에 함정이 숨어 있으며, 설혹 그것을 피한다 해도 덫에 걸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땅의 거민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다. 암 5:19에서 이와 유사한 표상을 볼 수 있다.

(주);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는 까닭이 명시된다.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라는 표현은 노아의 홍수를 연상시킨다(창 7:11). 그때 온 땅을 절멸시킬 엄청난 양의 물을 방류하기 위해 하늘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여기서 물의 심판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창 9:11, 15 참조).

성 경: [사24:19]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땅이 깨어지고...흔들리며 - 지진의 과정이 인상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먼저 땅이 깨어지고 깨어진다(*, 로아). 그 다음에(깨어진) 땅이 갈라지고 갈라진다(*, 포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라진) 땅이 흔들리고 흔들린다(*, 모트). 단어의 중복은 강조적 의미로 해석된다(3절 참조).

성 경: [사24:20]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땅이 취한 자같이 비틀비틀 침망같이 흔들리며 - 지진으로 인해 요동하는 땅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선지자는 그것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28:7;29:9;시 107:27)과 '거센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침망'(1:8)에 비교한다. '침망'(*, 멜루나)은 나무 사이에 달아맨 그물 침대를 말하는데, 그 어원적 의미에서 그것은 본래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원두막)를 뜻하였다(1:8).

성 경: [사24:21]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 본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 '높은 군대'와 '땅의 왕들'이 동의어를 이룬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전자를 후자에 대한 비유로서 이해한다(Targum, Luther, Calvin). 그러나 더 많은 학자들은 '높은 군대'와 '땅의 왕들'이 여기서 대조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고 주장한다(Gray, Delitzsch, Oswalt). '높은 군대'는 문자적으로 '높은 곳의 군대'(*, 차바 하마롬)로서, 곧 하늘에 있는 별들(대하 33:4, 느 9:6)과 악한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성 경: [사24:22]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그들이...형벌을 받을 것이라 - 최후 심판 이전의 어떤 과정이 언급된 듯하다. 그것은 3단계로 묘사된다. 이와 유사한 광경에 대하여 벧후 2:4;유 1:6;계 9:2, 11;11:7;17:8;20:1-3 등을 보라.

성 경: [사24:23]

주제1: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

주제2: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주);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 최종적으로 세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이 묘사된다. 그 나라의 중심은 새 예루살렘일 것이며(2:2-40 구속받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영광 중에 주를 보필할 것이다(출 24:9-11;계 4:4, 9-11). 그 나라의 영광은 너무나 눈부신 것이어서 심지어 하늘의 해와 달마저도 그 앞에서 빛을 잃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굴 것이다(60:19;욜 3:15;슥 14:7;계 21:23;22:5).

성 경: [사25:1]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주는 기사를...행하셨음이라 - 찬양의 이유가 제시된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기이한 일(*, 펠레)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출 15:11;시 40:5;77:11, 14;78:12;88:10, 12;89:5). 이 기이한 일의 시간적 깊이는 영원까지 닿는다. 인간의 사고력이 미치지 못하는 오래 전부터(*, 메라호크) 이 일을 계획 하시고 정하신(22:11;37:26)하나님은 이것을 또한 '성실함과 진실함'(*, 에무나 오멘)으로 이루신다. '에무나'와 '오멘'은 모두 '받들다', '견고하다'는 뜻의 '아만'(*) 동사에서 파생된 말들이다. 이처럼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들을 병렬시킴으로써 최대한의 강조적 의미를 얻고 있다(3:1;16:6 참조). '성실함과 진실함'은 '완전한 성실'로 번역 가능하다. '기이한 일'의 내용이 다음절에 소개된다.

성 경: [사25:2]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주께서 성읍으로 무더기를 이루시며 - 여기서 '성읍'은 하나님의 도성에 대립하는 지상의 도성을 가리킨다(Oswalt, Delitzsch). 이것들은 모두 멸망당할 운명에 놓여 있다. 외인(*, 자림)은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를 뜻하는 말이다(1:7;29:5;61:5). 심판의 끝에서 열방들은 하나님께 돌아온다.

성 경: [사25:3]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강한 민족이...주를 경외하리이다 - '하니님을 대적하고 그 백성을 억압하던 세상 나라가 심판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위엄을 목도한 후에(24:14) 비로서 하나님께 돌아와 그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경외하게 될 것이다'는 의미이다. '(그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자연 특히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는다는 뜻이며(24:23;26:15), '(그를) 경외한다', '두려워한다'(*, 이르아)는 말은 하나님께 에배드린다는 뜻이다(시 34:11, Gray).

성 경: [사25:4]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빈궁한 자의 보장(保障)이시며...그늘이 되셨사오니 - 하나님은 포악한 나라들에 대한 심판자로서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로부터 압제를 당해온 가련한 민중들을 해방시키는 구원자로서 영광을 받으신다. 본문의 초점은 세말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맞춰진다. 선지자는 우선 그 백성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세 가지(보장, 피나처, 그늘)로 형상화 한다. '보장'(*, 마오즈)은 문자적으로는 '힘', '강함'인데, 여기서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강력한 요새의 뜻으로 쓰였다(시 27:1;28:8;29:11;31:2;43:2;46:1;렘 16:19).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친숙하게 발견되는 표현 중의 하나이다. 특히 찬양 문학에서 현저하다(신 33:27;삼하 22:3;시 9:9;14:6;27:1; 28:8;31:4;37:39;46:1, 7, 11;48:3;62:7, 8;71:7;91:2, 9;94:22;142:5;렘 16:19). 더위를 피하는 '그늘'에 대하여는 4:6;16:3;32:2;시 57:1;91:1 등을 보라. 이어서 구원의 대상이 두 가지로 묘사된다. '빈궁한 자'(*, 달)와 '빈핍한 자'(*, 에브욘)는 가난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후자의 경우 물질적, 경제적 측면이 더 강조되는 반면,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적, 계층적 열등성이 더 부각된다(10:2;11:4;14:30;26:6;29:19;41:17;시 72:12-14). 그러나 강조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개념 다 열악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만 의뢰하고자 하는 경건한 자들에 대한 묘사로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사25:5]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주께서...포악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 - 마른 땅에 작열하는 폭양 같은 포학자의 압제도 두꺼운 구름으로 그늘을 지어 그 백성을 돌보시는 여호와의 능력 앞에서는 그 위력을 잃는다. 그 결과, 한때의 승리에 도취되어 노래 부르던 적들의 환호가 가라앉을 것이다. 여기서 '노래'(*, 제미르)는 승전(勝戰)의 외침 소리를 뜻하며, '훤화'와 동의어로 쓰였다.

성 경: [사25:6]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 - 콜레스테롤을 걱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지방질이 풍부한 살진 고기는 가장 인기가 있었다(창 45:18;시 36:8;63:5). 특히 화목제의 주요한 제물로 기름이 드려졌다는 것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출 29:13-22;레 3:3;4:8, 9;8:16;9:19). 이전에 그 백성들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졌던 그것이 이제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 백성들에게 되돌려진다(Oswalt, Lange). 여기서 아름다운 반전(反戰)이 있다. 골수에는 영양분이 아주 많았으므로 사람들을 먹고 남은 뼈다귀를 으깨어 골수를 먹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오래 저장되어 완전히 발효한 포도주도 고급 연회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음식의 하나였다. '기름진 것'(*, 쉐마님)과 '포도주'(*, 쉐마림)는 발음이 유사하다.

성 경: [사25:7]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그 가리워진 면박과... 그 덮인 휘장을 제시하며 - 그날에 하나님과 그 백성을 가로막던 벽이 허물어지고 참된 교제가 실현된다. '면박'(*, 로트)은 얼굴에 덮는 수건이니(고후 3:15). 참된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영적인 무지를 비유한 것이다(출 34:30 참조). '덮인 휘장'(*, 마세카)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22:8). 그러나 주님이 그 가리운 것을 제시하면 그때 하나님과 사람을 가로막던 모든 장애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마치 얼굴로 대면하여 보는 것처럼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고전 13:12;요일 3:2). 그날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Delitzsch, Bultema).

성 경: [사25:8]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 인생을 지배하던 최후의 적인 죽음(고전 15:26)의 정복에 대한 놀라운 기사가 덧붙여진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가 사망을 꿀꺽 삼켜버릴 것이다(*, 빌라), 영원히'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노래하면서 이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이와 유사한 사상에 대하여는 65:20;단 12:2;호 13:14 등을 보라.

눈물을 씻기시며...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 죽음이 제거되면 그로부터 연유하는 눈물도, 슬픔도 없게 될 것이다. 여호와는 죽음이라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실 뿐 아니라 친히 그 손으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신다(계 7:17;21:4). '그 백성의 수치'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련된 말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한 가운데서 홀로 여호와 종교를 갖는다는 것만으로 조소거리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그날에 모든 수치는 녹는 눈처럼 사라질 것이다(롬 11:11, 12, Oswalt).

성 경: [사25:9]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그 날에 말하기를 - 주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문맥에 비추어 보건대 하나님을 오래 전부터 기다리다가 이제야 그 구원을 맛본 백성들의 노래라고 추론할 수 있다(Gray).

(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이는 여호와시라 - 원문에는 '보라'(힌네, * )가 삽입되어 있다. 이는 구원받은 백성의 입으로부터 자랑스럽게 발출되는 탄성이다:'보라! 이 분이 우리가 말했던 그분, 곧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으며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시 48:14).

(주); 우리가 그들 기다렸으니...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도래 할 때 그 약속을 의지하고 기다린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기다림'은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성도가 뿌리는 눈물의 씨앗이다(시 123편). 그리고 '구원'은 그의 기다림이 보상받는 수확의 날에 성도가 거두는 기쁨의 단이다(시 126:5,6).

성 경: [사25:10]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 '손'(*, 야드)은 권능을 상징한다. 시온산에 나타나신 여호와의 손은 구속함을 입은 백성들에게는 은혜와 축복의 손이요, 반면에 그 백성들을 조롱하고 멸시한 모압에게는 심판과 복수의 손으로 역사하신다(Delitzsch, Oswalt).

(주); 모압이...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 교만한 모압의 몰락이 '지푸라기가 똥더미에 묻히는 모양'으로 비유된다(왕하 9:37;시 83:10;렘 8:2;9:22; 16:4;25:33 참조). '거름물'에 해당하는 '마드메나'(*)는 '거름을 주다'는 뜻의 '다만'(*) 동사에서 파생한 말로, '거름더미', '똥더미'를 뜻한다. 이는 모압 성읍인 '마드멘'(*)에 대한 언어 유희로 의도적으로 채택된 것이다(렘 48:2). 여기서 모압이 왜 구속받은 백성들의 대표적인 원수로 등장하였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는지 않다. 모압이 과거에 이스라엘에 행했던 일들을 보려면 왕하 24:2;겔 25:8-11;습 2:8-10등을 보라.

성 경: [사25:11]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그가...누르실 것이라 - 앞절의 표상이 계속된다. 본문의 요점은 명료하다. 모압이 무슨 일을 하건 그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의 교만은 낮추어질 것이다(Gray). 여기서 헤엄치는 이는 모압 자신이며(Gesenius, Hitzing), '그 속'은 모압이 빠진 퇴비더미를 뜻한다(Knobel, Alexander).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모압의 죄악이 두 가지로 언급된다. 그 첫째는 '교만'이며, 그 둘 째는 '그 손의 교활'이다(16:6;렘 48:29).'손의 교활'은 손의 간교한 동작으로 상징되는 속임수, 거짓, 책략 등을 뜻한다(Lange). 참조로 델리취(Delitzsch)는 이 말을 물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팔을 휘젓는 모양으로 해석한다.

성 경: [사25:12]

주제1: [여호와의 능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주제2: [새 왕국을 위한 이스라엘의 찬양]

(주); 너의 성벽의 높은 보장을 헐어...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 - 여호와께서 모압을 낮추심을 선지자는 다르게 표현한다. 강하고 높은 성벽으로 묘사된 모압의 위세도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시는 날에 '헐리고 땅이 내려지며 심지어 먼지 바닥에 던져진다'(26:5). 즉, 완전하게 파괴될 것이다.

성 경: [사26:1]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 모압으로 전형화된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몰락하는 날에 새로운 도성이 창건될 것인데, 여기서는 그 도성의 강함의 원천이 제시된다. 그것은 그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돌과 흙으로 빚은 성벽과 바깥벽만으로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이 함께할 때라야 그 도성은 난공 불락(難攻不落)이 된다.

성 경: [사26:2]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너희는 문들을 열고...들어오게 할지어다 -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 있는 백성들의 자질이 두 가지로 언급된다. 그것은 의로움(*, 차디크)과 신실함(*, 에무님)이다(1:26). '신을 지킨다'(*, 쇼메르 에무님)는 말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확고하게 유지함을 뜻하는 말이며, '의로운 나라'(*, 고-차디크)는 그로부터 파생되는 고귀한 영적 특성을 가리킨다(신 6:25).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의로움은 자기 안에 선함이 없음을 깊이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만을 갈망하는 내적 의존의 태도를 말하니(롬 7:18), 이러한 믿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도성의 문은 열리는 것이다(32:16, 17;33:15, 16;시 15편;24:3-10;118:19, 20;호 2:18-20;암 5:21-24). 이것은 다음절에서 보다 명확하게 표현된다.

성 경: [사26:3]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심지가 견고한 자(*, 예체르 사무크) - 문자적으로는 '견고한 마음'이니, 하나님만을 굳게 붙잡고 의지하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마음'(*, 예체르)은 사람의 내적 구조, 즉 사상과 의지의 그물로 짜여져 있는 전 태도와 습관을 가리킨다(Delitzsch). '사무크'(*)는 '머물다, 받치다'는 뜻의 '사마크'(*) 동사의 분사형으로서, 어떤 것을 확고하게 떠받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시 112:8). 그 맞은편 대극에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태도'(약 1:8)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마음'(마 6:24)이 위치한다.

성 경: [사26:4]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완전한 평화가 여호와를 의지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확실할진대,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선지자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지하라고 권면한다. '의뢰하라'(*, 비트후)는 말은 '믿다', '확신하다'는 뜻의 '바타'(*) 동사의 명령형이며, 그 분사형(*, 바투아흐)이 앞절에서도 사용되었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지자 이사야에게 있어서 믿음과 구원의 문제는 긴밀하게 연관된다(12:2).

(주); 영원한 반석 - 하나님은 '반석'(*, 추르)으로 즐겨 비유된다(8:14;17:10; 30:29;44:8;신 32:4;삼상 2:2;삼하 22:2, 32;시 19:14;61:2;고전 10:4). '반석'에는 위급할 때 사람들이 도피하는 피난처라는 의미와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요새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더나아가 그는 영원한 반석 곧 만세 반석이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영원성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성 경: [사26:5]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높은 데...솟은 성 - '높은 데'(*, 마롬)와 병행하는 '솟은 성'(*, 키르야 니스가바)은 사람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난공 불락에 가까운 도성을 뜻한다. 이 도성은 1절의 '하나님의 도성'에 대립하는 지상의 도성인데, 이 둘은 각각 의의 원리와 악의 원리 또는 영원성과 찰라성을 대표한다. 전자의 모델이 예루살렘이라면, 후자의 모델은 아마도 바벨론(혹은 니느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대항해서 스스로 높아진 이 교만한 도성은 심판의 그날에 극적인 반전(反轉)을 경험하게 된다(25:12).

성 경: [사26:6]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걸음이리로다 - 파멸의 무더기를 밟는 '빈궁한 자'(*, 아니)와 '곤핍한 자'(*, 달림)의 발걸음에서 한때 교만했던 높은 성의 몰락이 확인된다(말 4:3). 이전에 불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그성은 먼지로 화하였으나, 그로부터 억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으로 반석을 삼고 그를 의지한 백성들은 살아 남았다.

성 경: [사26:7]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 앞절에 언급된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에서 저들이 밟고 다니는 '길'에 대한 표상으로 자연스레 전환된다. 본문을 직역하면 '의인을 위한 길은 곧다'이다. '길'(*, 오라흐)은 성경에서 인생의 행로를 비유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곧고 평탄한 길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의로운 길이다(욥 8:13;시 1:6;5:8;27:11;119:105;잠 1:19;3:6;4:26;5:6, 21;11:5;15:19). '오라흐'는 본서에서만 여덟 번 나오며(8절;2:3;3:12;26:7, 8;30:11;33:8;40:14;41:3), 다른 예언 자료들에는 나오지 않는다(J.Jensen). 본서의 단일 저작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성 경: [사26:8]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관으로서 속히 임하시기를 고대한다는, 다시 말해서 의로운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히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이다. '기다림'은 그것이 기다리는 대상에 대한 지극한 열망의 표출이며 동시에 기다리는 자신의 철저한 겸비심(謙卑心)의 고백인 한에서,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25:9;33:2;40:31;49:23;51:5;59:19;60:9;시 25:3;37:9;호 12:6;미 7:7).

성 경: [사26:9]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밤에 내 영혼이...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 1인칭 복수에서 1인칭 단수로의 전환은 시편에서 종종 발견된다(시 44:5, 6). '밤'(*, 라옐라)은 여기서 고난의 때, 묵상하기 좋은 때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나(Delitzsch, Leupold), '아침'과 대조되는 시간의 의미로 쓰였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즉, 본문은 '밤이나 아침이나 어느 때에나 하나님을 사모합니다'이다(Alexander). 이는 비록 '아침'(*, 보케르)이란 단어가 명시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간절히 구한다'는 뜻의 '솨하르'(*)동사에 '(아침에) 찾는다', '(일찍 일어나) 구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데서 확인된다(Young).

(주);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의를 배움이니이다 - 선지자가 그처럼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구한 데에는 그 백성들이 압제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악한 자들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적극적인 이유도 담겨 있다(시 78:34).

성 경: [사26:10]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 여기서 '악인'은 '세계의 거민'(9절)과 동의어이다(시 9:17 참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다루실 때 왜 심판의 과정을 취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의 설명은 그가 딛고 선 경험적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좋게 해서는 도무지 의를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 경: [사26:11]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사르리이다 - '쳐진 손'이 무력함을 상징한다면(삼하 4:1;렘 50:43), '높이 들린 손'은 활동 중인 힘을 상징한다(삼하 24:16). 악인들은 주의 높이 들린 손, 즉 임박한 심판이 그들의 머리 위에 준비되어 있음에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선지자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었다.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은 하나님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며(9:7;37:32, Delitzsch), '불'은 그의 대적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복수와 진노를 비유한 낱말로서(신 32:22;욥 20:26;22:20) 그의 백성에 대한 '열성'과 병행구를 이룬다(9:7;37:32).

성 경: [사26:12]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이루심이니이다 -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의로운 자들에게 초래될 궁극적인 결과는 포괄적인 안녕과 행복을 함의하는 '평강'(*, 솰롬)이다. 이 평강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행동에 전적으로 근거한다(Delitzsch).

성 경: [사26:13]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 이방 나라들의 압제에서 그 백성을 해방시켜 주신 일이 하나님의 일로서 첫 번째로 거론된다. 세상의 주권자들이 이스라엘을 치리하는 동안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신 여호와는 소외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주권을 회복하시는 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들의 찬송소리는 다시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른 주들'에 관해 사사 시대(Kissane)와 제국 시대(Delitzsch)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억누른 이방 군주들을 가리킨다는 주장(Gray)과, 포로가 되기 전에 저들이 섬긴 우상신들을 가리킨다는 주장(Alexander)이 대립되고 있다. 전자의 견해가 우세하다.

성 경: [사26:14]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그들은 죽었은즉...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 하나님의 일로서 두 번째로 거론된 것은 한때 강력한 나라를 일구었던 세상 군왕들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사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죽음의 심연으로 던지신다는 것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죽은 자들(*, 메팀), 그들은 살지 못하겠고, 망령들(*, 레파임), 그들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이다. '레파임'에 대해서는 14:9 주석을 참조하라. 14:9-11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죽음이 인간의 헛된 교만을 비웃는 최후의 조롱꾼으로 등장한다.

성 경: [사26:15]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주께서 이 나라를...더 크게 하셨나이다 - 하나님의 일로서 세 번째로 거론된 것은 그가 이 나라를 더 크게 확장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나라를 더 크게 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로 인구가 번성하고 그에 따라 국토의 경계가 더욱 확장됨을 뜻한다(9:3;54:2, 3;미 7:11). 한편,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넓은 세력을 형성하였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회고하는 듯하다(Dillmann, Kissane).

성 경: [사26:16]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백성이 환난 중에...주께 기도하였나이다 - 선지자의 사고(思考)는 다시 현재로 되돌아온다.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신앙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일상에서 겪는 경험적 현실 - '환난'과 '징벌'로 표현된 - 앞에서 신자들은 거듭거듭 심각한 무력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밖에 없는 것이다(Oswalt).

성 경: [사26:17]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잉태한 여인이...부르짖음같이 - 이스라엘을 가위누르는 현재의 어려움이, 부르짖음으로 극대화된 임산의 고통으로 비유되고 있다(13:8;21:3;42:14;호 13:13;미 4:10).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임산부가 견뎌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 고통의 때가 지나면 소망했던 결과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성 경: [사26:18]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 그러나 그 지난(至難)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거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허망함을 선지자는 '바람을 낳음과 같다'고 표현한다(41:29;전 1:14).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여인의 산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배반적(背反的)현실이었다.

(주);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 본문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새로 태어나는 생명들을 떨어뜨리지 못하였다(즉, 생산하지 못하였다, Delitzsch). 이는 해산의 고통을 강조한 문맥에 더 적합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 '떨어진다'는 뜻의 '나팔'(*)이 결코 해산의 뜻으로 쓰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따라서 다음 해석을 취한다. (2)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세력들을 떨어뜨리지 못하였다(즉, 패배시키지 못하였다. Gray). 이 경우, 본문은 앞의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와 평행을 이룬다.

성 경: [사26:19]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주의 죽은 자들은...일어나리이다 -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일 수 없으며, 그들의 헛됨이 하나님의 헛됨이 될 수 없다. 인생의 최대 비극인 죽음마저도 정복하시는 생명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다. 이 믿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침울한 절망의 애가가 부활의 환호로 돌변한다. 거듭되는 환난과 징벌에 눌려 사망의 그늘 가운데 누워 있던 신실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부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실한 성도들이 마지막날 부활의 영광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참예할 것이다. 본문은 부활 교리를 가르쳐주는 구약의 몇 안 되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25:8;겔 37:1-14;호 6:2).

(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내어 놓으리로다 -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이슬'로 비유된다(시 133:3;잠 19:12;호 14:5).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乾期)에 밤에 흡족히 내려 땅을 적시는 이슬은 팔레스틴 땅의 농작을 위하여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창 27:28;삼하 1:21;왕상 17:1;슥 8:12). '빛난 이슬'(탈 오로트, * )은 문자적으로는 '빛의 이슬'(Targum, Vulgate, Ewald, Grotius, Gesenius)이다. '빛'과 '이슬'은 공히 팔레스틴에서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성 경: [사26:20]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내 백성아 갈지어다...잠간 숨을지어다 - 세상을 뒤엎은 대홍수로부터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 속에 몸을 숨겼던 것처럼, 또한 애굽 땅을 뒤엎은 죽음의 천사로부터 히브리 백성들이 집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 것처럼, 온 땅을 뒤엎게 될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성도들에게 '밀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잠간 숨으라'는 권면이 주어진다. 밀실에 들어가서 그것도 부족해서 문을 닫고 숨으라는 말은 대환난 날에 성도가 취해야될 몸가짐을 언급하는 듯하다. 즉, 그날에 성도들은 세상과의 분주한 거래를 단절하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 시간을 가져야만 된다. 그러나 그 혹심한 심판의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성 경: [사26:21]

주제1: [의인들의 찬송]

주제2: [새 왕국에서의 노래]

(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 그날에 땅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즉, 그동안 말없이 들이삼켰던 무죄한 자들의 피를 땅이 일순간에 토해낸다. 땅을 붉게 물들였던 피가 복수를 호소하며 일제히 부르짖는다(창 4:10;37:26;레 17:13;욥 16:18;시9:12;겔 24:7, 8;계 6:10). 뒤따르는 구절은 순교자들의 호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절의 평행으로 이해된다(Gray).

성 경: [사27:1]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날랜 뱀 리워야단 ... 용을 죽이시리라 - 본문에 언급된 대적의 수가 셋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각기 의견들이 다르다. 델리취(Delitzsch)는 '날랜 뱀리워야단'은 물살이 급하고 빠른 티그리스 강에 위치한 앗수르를 가리키고,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은 구부러진 곳이 많은 유브라데 강에 위치한 바벨론을 가리키며, '바다에 있는 용'은 애굽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박스(Box)와 체인(Cheyne)은 이들이 각각 바벨론과 바사, 그리고 애굽을 가리킨다고 하고, 라쉬(Rashi)는 앗수르, 애굽, 두로, 그리고 듐(Duhm)은 파르티아, 시리아, 애굽이 지칭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것은 단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삼중 표현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오스발트(Oswalt)는 우가릿 문헌을 근거로 말하기를, 이 같은 수법은 당시 가나안 지방에서 관례화된 시적 묘사일 뿐이라고 하고, 게세니우스(Gesenius)는 언급된 나라가 바벨론이라고 주장한다. 단일 대상설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여기서는 세 가지 대상설을 취한다. 그러나 이세 가지 대상들을 특정한 세 나라와 연계시키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세 동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 철저하게 멸망하리라는 것이다. 심판의 그날에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는 혼돈의 세력들은 칼에 삼키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주권만이 온 우주에 높이 세워질 것이다. 대적하는 동물 '리워야단'(*, 리우야탄)은 어원학적으로 '뒤틀어진 것, 둘둘 말린 것'을 의미하는데, 대체로 큰 뱀이나 악어(욥 41:1;시 74:14) 또는 바다에 사는 큰 괴물(욥 3:8;시 104:26)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Alexander). 그리고 '바다에 있는 용' 혹은 '괴물'(*, 탄닌)은 애굽에 대한 지배적인 상징어이다(51:9;시 74:13;겔 29:3;32:2). 본문의 지배적인 사상은 24:21-23과 매우 흡사하다.

성 경: [사27:2]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너희는 ... 노래를 부를지어다 - 직역하면 '아름다운 포도원, 그것을 너희는 노래할지어다'로서 노래의 주제(혹은 제목)를 밝히고 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비유한 말이다.

성 경: [사27:3]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 - '나 여호와'(*, 아니 야훼)가 강조되고 있다 : '포도원지기는 다름 아닌 나, 여호와이다...' 포도원을 가꾸며 돌보는 데는 많은 손질과 세심한 관심이 요청된다. 본문에서 포도원지기가 해야만 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일이 거론된다. 그것은 정기적으로 물을 주는 일(재배)과 밤낮으로 잘 간수하여 상해를 입지 않도록 지키는 일(보호)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정성과 애정에 대하여 시 121:4,5을 보라.

성 경: [사27:4]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 '나의 백성에 대하여 더 이상 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Alexander). 이전에 열매맺지 않는 쓸데 없는 포도원에 대하여 퍼부어졌던 하나님의 진노가 이제는 그 적들로부터 포두언을 보호하는 애정으로 바뀔 것이다.

(주); 질려와 형극이 ... 불사르리라 - '질려와 형극'은 교회의 적들에 대한 묘사이다(10:17;삼하 23:6, 7, Delitzsc).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대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여 불에 던져 버리신다는 말이다.

성 경: [사27:5]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 앞절의 연속이다. 질려와 형극 곧 교회의 대적에게는 양자 택일-하나님께 대적하여 멸절하든가, 아니면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와 화평을 누리든가-만이 있을 뿐이다. '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오즈'(*)는 '강하고 견고한 장소', '요새'를 의미하는데(17:9) 여기서는 '피난처'의 의미로 쓰였다. 본문과 바로 앞절에는 복음의 정신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새롭게 회복된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더 이상 분노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분노를 만족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마련해주셨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는 자는 누구라도(심지어 원수라도) 용서하시며 화평을 누리게 하신다(롬 3:21-26;5:8-11).

성 경: [사27:6]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후일에는 ... 지면에 채우리로다 -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된 소망스런 장래의 전망이 제시된다. 그것은 한 그루 나무로 표상된 야곱의 왕성한 성장이 다섯 단계로 묘사된다 : '뿌리가 박힘-움이 돋음-꽃이 핌-결실함-지면에 가득히 채움'(37:31;호 14:5-7 참조). '야곱'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초괄하는 명칭이며(Leupold, Fischer), '지면에 채운다'는 말은 복음에 의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2:3;19:24, Calvin).

성 경: [사27:7]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은들 ... 같았겠느냐 -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징계 가운데서라도 확증된다.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을 가혹하게 다루셨을지라도 백성들을 위하여는 예외적인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렘 10:24, 25;30:11;46:28). '그 백성을 친자들'(백성을 도륙한 자들)은 앗수르나 바벨론처럼 이스라엘을 침략한 제국 세력을 가리킨다.

성 경: [사27:8]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적당하게 견책하사 -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벌주시되 그들이 견뎌낼 수 있는 한도내에서 알맞게 주신다. 즉, 구각적 존립이 완전히 와해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이스라엘을 먼 나라로 유배시키셨다는 말이다. 주께서 그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심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동풍에 실려 옮겨가는 모양으로 묘사한다. 한편,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영적 교훈에 대하여는 고전 10:13을 참조하라.

(주); 동풍 부는 날에 ... 옮기셨느니라 - '동풍'은 근동 지방에서 부는 파괴적인 바람으로, 봄.가을 무렵에 곡식밭을 휩쓸고, 나무를 부러뜨리며, 밭에 있는 모든 작물과 나무의 과실들을 남김없이 짓밟아서 막대한 재난을 안겨주는 무서운 폭풍이다(창 41:6;욥 27:21;렘 18:17;겔 27:26;호 13:15, Calvin). 여기서 추론 가능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벌하심이 비록 그 대적에 대한 징벌과 비교할 바 못되고 더욱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적당하게 사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백성의 입장에서 볼때 그것은 극히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2) 그러나 그 형벌이 그처럼 고통스러운 것이라도 그것이 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것처럼 일시적인 것을 뿐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인내하는 데 큰 유익이 된다.

성 경: [사27:9]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 이로 인하나니 - 직역하면 '그러므로 이것에 의해서 야곱의 불의가 속죄함을 얻으며 그의 죄악을 없애버린 모든 열매는 이것이니'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서 그 백성들의 죄악이 속함을 얻는데, 그 결과는 우상 숭배의 제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사27:10]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견고한 성읍 - 이것이 어느 곳을 가리키느냐에 대해 해석자들의 견해는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1) 예루살렘 도성를 가리킨다는 주장(Calvin, Delitzsch, Fohrer, Duhm, Fischer, Rudolph, Skinner, Young). (2) 사마리아 성을 가리킨다는 주장(Marti, Clements, Wildberger, Vermeylen, Ploger, Leupold). (3)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세상 제국을 가리킨다는 주장(Dillmann, Procksch, Alexander, Feldmann, Gray, Kissane, Kaiser). 이중 마지막 견해를 취한다. 본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이스라엘은 적당하게 견책받고 나아가 행복한 미래를 보장받는 반면, 그 대적들은 완전한 파멸에 처해질 것이다.' 특히 본절은 바벨론과 연관되는 듯하다.

성 경: [사27:11]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이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 파멸의 보다 깊은 원인이 제시된다. 그것은 열방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 곧 지각이 없기 때문이다(시 9:17). '지각'(*, 비노트)은 '이해', '깨달음'을 뜻하는 '비나'(*)의 복수형으로서, 일종의 강조적 의미를 갖는다(Leupold).

성 경: [사27:12,13]

주제1: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세상 제국의 붕괴는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본문은 12절과 13절을 분리시켜 보느냐 아니면 함께 묶어 보느냐에 따라 두가지로 해석된다. (1) 전자의 경우 : 2번 쓰인 '그날에'가 각각 다른 때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즉 12절의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의 영역(유브라데 강에서 애굽 시내)내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별하여 모으시며, 13절의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앞에 말한 그 경계선을 넘어 그 북쪽인 앗수르 땅과 그 남쪽인 애굽 땅에 유폐되고 추방된 백성들을 나팔소리로 소환해 들이신다는 것이다(Delitzsch, Leupold). (2) 후자의 경우 : 2번 쓰인 '그 날에'가 같은 때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12절의 경계(유브라데 강에서 애굽 시내)의 의미가 13절에서 설명되고 있다고 본다. 즉, 앗수르 땅과 애굽 땅에서 백성들이 몰려올 것이다(Alexander, Young). 여기서는 후자를 취한다. 전체적인 사상은 11:10-16과 매우 흡사하다.

(주);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 '창일하는 하수'는 유브라데 강을 가리킨다(창 31:21;신 1:7;11:24;수 1:4). '애굽 시내'는 오늘날의 '와디 엘 아리쉬'(Wady el-Arish, 민 34:5;왕상 8:65)를 가리킨다. 유브라데 강에서 애굽 시내에 이르는 지역은 약속의 땅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경계이다(창 15:18;출 23:31;왕상 8:65). 그러나 여기서 그 의미는 다음 절에서 설명되는 바, 곧 귀환하는 백성들이 모여드는 방향을 의미한다 : 그들은 유브라데 강을 건너 포로로 잡혀간 땅 앗수르로부터 그리고 애굽 시내를 건너 쫓겨간 땅 애굽으로부터 모여들 것이다(Young).

(주);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 깃발을 들어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팔을 부는 것도 사람들을 회집케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시 81:3). 신약에서 이는 특히 종말론적인 표상과 결부되어 자주 쓰인다(마 24:31;고전 15:52;살전 4:16, Gray).

(주); 파멸케 된 자 - 문자적으로는 '잃어버린 자'(*, 하오베딤)이니, 곧 낯선 땅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을 뜻한다(신 26:5). 동사 '아바드'(*)는 주인의 품을 떠나서 제멋대로 유리 방황하는 양들을 묘사할 때 주로 쓰인다(시 119:176;렘 23:1;50:6).

(주); 쫓겨난 자 - 문자적으로는 '추방된 자'(*, 하니다힘)이니, 애굽 땅으로 비겁하게 도망친 자들을 가리킨다.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앗수르 땅과 애굽땅에서 서러운 세월을 보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세말 구원의 날에 약속의 땅으로 불러들이실 것이다. 그날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구심점이 될 것이며, 백성들은 거룩한 산 시온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것이다(2:2-4;11:10-16;24:23;25:6 참조).

성 경: [사28:1]

(주);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 화 있을진저 -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지파를 가리키며, '에브라임의 취한 자'는 그 방탕한 백성들을, 그리고 '교만한 면류관'은 사마리아 도성을 가리킨다. 사마리아 도성을 '교만한 면류관'이라 부름이 그 위치한 지리적 환경에서 연유한 듯하다(Alexander). 아합 왕의 부친 오므리가 세운 사마리아 도성은 비옥한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머리 부분에 자리 하였다(4절;왕상16:24;암 4:1;6:1). 몇몇 학자들은 잔치 때에 술 취한 자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는 고대의 풍습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Lowth, Gesenius, Ewald). 하여튼 이들은 풍부한 물질적 여건을 믿고 지나치게 교만하여, 선지자가 '포도주에 절었다'과 할 만큼, 술과 방탕에 깊이 탐닉하였다.

성 경: [사28:2,3]

(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 - '주께 있다'(*, 라아도나)는 말은 '주께서 보유(예비)하고 계시다'는 뜻이다(Hendwerk, Ewald, Knibel). 여기서 '강하고 힘있는 자'는 앗수르를 가리킨다(왕하 17:3-6 참조).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진노의 도구요 형벌의 매개체이다(10:4 참조).

(주); 손으로 그 면류관을 따에 던지리니 ... 밭에 밟힐 것이라 - 일반적으로 '야드'는 능력이나 힘을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발'에 대응하는 의미로 쓰였다. 즉, '손으로 던지고(그것을) 발로 밟는다'(Alexander).

성 경: [사28:4]

(주);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 먹으리로다 - '시들은 꽃'으로 비유된 사마리아의 운명이 다시 '처음 익음 무화과'에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에서 사마리라에 대한 적들의 탐욕스러움과 그로 말미암은 파멸의 완전함이 암시되고 있다. 팔레스틴 땅에서 무화과나무가 대개 8-10월 사이에 추수됨을 고려할 때, 본문에 언급된 무화과 열매는 여름이 되기 전인 6월쯤에 숙성되어 나온 것인 듯하다. 이것은 대단히 희귀하고 맛이 있어서 나오자마자 소비되었다(렘 24:2;호 9:10;미 7:1;나 3:12). 본문의 의미는 사마리아 도성이 적들에 의해 게걸스럽고도 신속하게 삼켜질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선지자의 예언처럼, 사마리아의 비옥함과 아름다움은 앗수르의 식욕을 돋구는 자극제가 되어서 포위 3년 만에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왕하 18:9, 10).

성 경: [사28:5]

(주);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 화관이 되실 것이라 - 두 면류관이 대조된다. 에브라임이 적에게 삼킴을 당하는 그날에, 교만한 면류관(사마리아 도성)은 스러지고, 대신 영화로운 면류관(하나님 자신)이 햇빛처럼 솟아난다. 그러나 모두가 그 따스함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남은 백성'에게 제한시킨다. '남은 자' 개념은 본서에 현저한 주요 사상들 중의 하나이다(4:2;10:20-22;11:11, 16;14:22;15:9;16:14;17:3;21:17;37:31, 32;46:3). 이 '남은 자들'에 대해 학자들간에 이견이 분분하다. '도성의 파멸에서 살아 남은 열 지파의 생존자'(Jarchi), '멸망에서 구별된 유다와 생존한 에브라임의 일부'(Delitzsch), 멸망한 열 지파와 비교할 때 '남은 자로서의 두 지파, 왕국 즉 유다'(Kimchi, Alexander). 여기서는 맨 나중의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

성 경: [사28:6]

(주);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 재판으로 대표되는 내치(內治)에는 '모략'이 필요하며, 대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방비하는 외치(外治)에는 '힘'이 필요하다. 이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심으로써 참된 왕으로서 평화를 누리게 하시며 왕국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시는 것이다(사 11:1-9).

성 경: [사28:7]

(주); 이 유다 사람들도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들 또한'( - 감-엘레)으로 되어 있다. '이들'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에브라임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주장(Oswalt, J. Watts). (2) 초점이 에브라임에서 유다로 넘어가고 있다는 주장(Alexander, Delitzsch, Lange).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2)를 채택한다. 이 경우, 해석은 '에브라임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자비에 의해서 열 지파와 구별된 유다에도 그와 똑같은 술취함과 방탕의 죄가 만연되어 있다'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 선지자는 특별히 지도적인 두 계층, 제사장과 선지자를 거론한다.

(주); 옆걸음 치며 ... 비틀거리며 ... 옆걸음 치며 ... 실수하나니 - 술에 취해 제 몸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 비슷한 음의 반복과 함께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 '...솨구(*) ... 타우(*) ... 솨구 ... 타우 ... 솨구 ... 파쿠(*).

성 경: [사28:8]

(주); 모든 상에는 ... 깨끗한 곳이 없도다 - 술취한 광경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술에 절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옆으로 게걸음질할 뿐 아니라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입으로 토하기까지 한다.

성 경: [사28:9]

(주); 그들이 이르기를 ...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 선지자의 꾸지람에 대한 술취한 자들의 반응이 기술된다. 그들은 선지자를 조롱하며 비웃는다 : '당신이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드는가? 우리가 누구인지나 아는가? 당신이 우리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를 가르칠 생각일랑 품지 말고 차라리 갓난 아이한테나 가서 떠벌려 보아라'(Jerome, Lowth).

성 경: [사28:10]

(주);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 본문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간에 제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조롱할 때 쓰는 무의미한 말들(Cheyne, Duhm). (2) 갓난 아이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칠때 쓰는 유치한 말들(Marti, Lindblom). (3) 술에 취해 주정 부리는 소리(Driver). (4) '키'(*, 토하다)와 '추아(*, 배설물)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말(Skinner, Michaelis). (5) 알파벳을 가르칠 때 쓰는 항목의 일부분(히브리어에서 '차데'(*) 다음에 '코프'(*)가 온다. Houbigant, Procksch, Forher, W.Hallo). 이들 제 견해는 모두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뜻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성 경: [사28:11]

(주);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 - 이는 압제자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이다(신 28:49;렘 5:15). 앗수르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셈조 계통의 언어이지만, 그 어휘와 문법 체계가 크게 달라서 유대인에게는 그것이 다른 지방의 방언처럼 들린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이 여호와의 교훈을 더듬거리는 말투로 조롱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더듬거리는 듯한 이방인들(앗수르인들)의 언어로 그들을 조롱하실 것이다.

성 경: [사28:12]

(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 참된 안식의 길이 이미 그들에게 지시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고 그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다(신 28:1-14). 만약 저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약속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듣지 아니하였다(Alexander).

성 경: [사28:13]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 잡히게 하시리라 -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부드러운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오히려 조소했으므로, 저들은 경험이라는 한층 더 무서운 교사로부터 그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아니된다(Oswalt). '경계에 경계를 ... 저기서도 조금'은 10절의 반복이며, 그 의미는 동일하다. 다만 이전에 저들이 역겨운 소리라고 비난했던 그 소리를 이제는 앗수르인의 생소한 입술을 통해서 듣게 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G.Rawlinson).

성 경: [사28:14]

(주); 너희 경만(輕慢)한 자여 - 이는 문자적으로 '비웃음의 사람들'(*, 안쉐 라촌)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없는 것으로 조롱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9,10절). 이들은 스스로 진리의 길에서 이탈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도 이탈시키기를 즐겨 한다. 이런 사람들이 권위있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로 말미암은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성 경: [사28:15]

(주); 우리는 ... 숨겼음이라 - 사망과 언약하였으므로 어떤 재난으로부터도 안저하다는 저들의 자기 확신은 어디에 기초하는 것인가? 그것은 애굽과의 동맹이다. 애굽으로 피난처를 삼고 그곳에 숨는 한, 앗수라의 위협도 무서워할 게 없다고 저들은 자만하였다. 그러나 선지자가 보기에 그것은 착각이었고 오산이었다. 애굽은 결코 그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사 30:1-7;36:6-9).

성 경: [사28:16]

(주);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 경만한 유다 지도자들의 말(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대조되어 나온다. 여기에 두 그림이 있다. 하나는 거짓과 허위로 기초를 삼은 건물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다 시온의 돌로 기초를 삼은 건물 그림이다. 전자는 홍수와 채찍이 어우러진 혹독한 재앙이 닥쳐올 때 흔적 조차 없이 소멸되어 버린다. 그러나 후자는 전혀 요동하지 않으며 견고함을 잃지 않는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다(마 7:24-27 참조). 이 견고성은 그 건물을 뒷받침하고 있는 시온의 모퉁잇돌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돌은 '시험한 돌' 곧 모든 시험을 다 거친 돌,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돌이다. 이 돌로써 건물의 기초를 삼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돌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에 대해 다양한 대답들이 제시되었다 : 율법(Eichhorn, Umbreit), 상전(Ewald), 하나님의 말씀(Schegg),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Feldmann),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Duhm, Sknner), 다윗 왕국(Delitzsch), 히스기야(Gesenius, Maurer), 참된 신자들(Eichrodt), 시온(Chids, Hktzig, Knobel), 남은 자(Donner), 하나님의 약속(Konig), 신앙 그 자체(Kaiser, Marti, Forher), 하나님 자신(Cheyne), 예루살렘은 불가침이라는 하나님의 확신(G. Smith), 메시야의 구원(von Orelli) 등등. 이중 어느 하나를 확정하는 것은 힘들다. 다만 신약의 빛에 비추어 판단하건대, 이것이 메시야를 미리 가리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마 21:42;행 4:11;롬 9:33:엡 2:20;벧전 2:6).

성 경: [사28:17]

(주); 나는 공평으로 ... 넘칠 것인즉 - 시온의 모퉁잇돌로 기초를 삼고 '공평'과 '의'로 측량되어진 건물만이 영구한 견고성을 부여받는 반면, '거짓'과 '허위'에 기초한 다른 모든 건물들은 철저하게 붕괴되고 말 것이다. '우박'과 '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한 말이다(2절). '피난처'와 '숨는 곳'은 예루살렘의 경만한 자들이 자랑하던 것을 가리킨다(15절, Alexander).

성 경: [사28:18]

(주);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 즉 앗수르 군대가 나라를 유린할 때, 그들이 그토록 의지하였던 사망(=음부)과의 언약도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15절). 애굽은 유다를 구하지 못할 것이며, 그날에 유다 백성들은 속수 무책으로 밟힘을 당할 것이다(10:6).

성 경: [사28:19]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대립된다. (1) 새로운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만으로도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Lowth, Leupold). (2) 오직 두려움만이 그들로 하여금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게 할 것이다(Calvin, Alexander). 여기서는 후자를 취한다. 왜냐하면 '전해진 것'이라고 번역된 '쉐무아'(*)가 여기에서와 같이 9절에서도 동일한 명사와 결합되어 쓰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사28:1]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 화 있을진저 -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지파를 가리키며, '에브라임의 취한 자'는 그 방탕한 백성들을, 그리고 '교만한 면류관'은 사마리아 도성을 가리킨다. 사마리아 도성을 '교만한 면류관'이라 부름이 그 위치한 지리적 환경에서 연유한 듯하다(Alexander). 아합 왕의 부친 오므리가 세운 사마리아 도성은 비옥한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머리 부분에 자리 하였다(4절;왕상16:24;암 4:1;6:1). 몇몇 학자들은 잔치 때에 술 취한 자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는 고대의 풍습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Lowth, Gesenius, Ewald). 하여튼 이들은 풍부한 물질적 여건을 믿고 지나치게 교만하여, 선지자가 '포도주에 절었다'과 할 만큼, 술과 방탕에 깊이 탐닉하였다.

성 경: [사28:2,3]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 - '주께 있다'(*, 라아도나)는 말은 '주께서 보유(예비)하고 계시다'는 뜻이다(Hendwerk, Ewald, Knibel). 여기서 '강하고 힘있는 자'는 앗수르를 가리킨다(왕하 17:3-6 참조).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진노의 도구요 형벌의 매개체이다(10:4 참조).

(주);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 밭에 밟힐 것이라 - 일반적으로 '야드'는 능력이나 힘을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발'에 대응하는 의미로 쓰였다. 즉, '손으로 던지고(그것을) 발로 밟는다'(Alexander).

성 경: [사28:4]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 먹으리로다 - '시들은 꽃'으로 비유된 사마리아의 운명이 다시 '처음 익음 무화과'에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에서 사마리아에 대한 적들의 탐욕스러움과 그로 말미암은 파멸의 완전함이 암시되고 있다. 팔레스틴 땅에서 무화과나무가 대개 8-10월 사이에 추수됨을 고려할 때, 본문에 언급된 무화과 열매는 여름이 되기 전인 6월쯤에 숙성되어 나온 것인 듯하다. 이것은 대단히 희귀하고 맛이 있어서 나오자마자 소비되었다(렘 24:2;호 9:10;미 7:1;나 3:12). 본문의 의미는 사마리아 도성이 적들에 의해 게걸스럽고도 신속하게 삼켜질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선지자의 예언처럼, 사마리아의 비옥함과 아름다움은 앗수르의 식욕을 돋구는 자극제가 되어서 포위 3년 만에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왕하 18:9, 10).

성 경: [사28:5]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 화관이 되실 것이라 - 두 면류관이 대조된다. 에브라임이 적에게 삼킴을 당하는 그날에, 교만한 면류관(사마리아 도성)은 스러지고, 대신 영화로운 면류관(하나님 자신)이 햇빛처럼 솟아난다. 그러나 모두가 그 따스함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남은 백성'에게 제한시킨다. '남은 자' 개념은 본서에 현저한 주요 사상들 중의 하나이다(4:2;10:20-22;11:11, 16;14:22;15:9;16:14;17:3;21:17;37:31, 32;46:3). 이 '남은 자들'에 대해 학자들간에 이견이 분분하다-'도성의 파멸에서 살아 남은 열 지파의 생존자'(Jarchi), '멸망에서 구별된 유다와 생존한 에브라임의 일부'(Delitzsch), 멸망한 열 지파와 비교할 때 '남은 자로서의 두 지파, 왕국 즉 유다'(Kimchi, Alexander). 여기서는 맨 나중의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

성 경: [사28:6]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 재판으로 대표되는 내치(內治)에는 '모략'이 필요하며, 대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방비하는 외치(外治)에는 '힘'이 필요하다. 이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심으로써 참된 왕으로서 평화를 누리게 하시며 왕국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시는 것이다(사 11:1-9).

성 경: [사28:7]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이 유다 사람들도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들 또한'(*, - 감-엘레)으로 되어 있다. '이들'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에브라임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주장(Oswalt, J. Watts). (2) 초점이 에브라임에서 유다로 넘어가고 있다는 주장(Alexander, Delitzsch, Lange).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2)를 채택한다. 이 경우, 해석은 '에브라임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자비에 의해서 열 지파와 구별된 유다에도 그와 똑같은 술취함과 방탕의 죄가 만연되어 있다'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 선지자는 특별히 지도적인 두 계층, 제사장과 선지자를 거론한다.

(주); 옆걸음 치며 ... 비틀거리며 ... 옆걸음 치며 ... 실수하나니 - 술에 취해 제 몸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 비슷한 음의 반복과 함께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 '...솨구(*) ... 타우(*) ... 솨구 ... 타우 ... 솨구 ... 파쿠(*).

성 경: [사28:8]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모든 상에는 ... 깨끗한 곳이 없도다 - 술취한 광경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술에 절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옆으로 게걸음질할 뿐 아니라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입으로 토하기까지 한다.

성 경: [사28:9]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그들이 이르기를 ...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 선지자의 꾸지람에 대한 술취한 자들의 반응이 기술된다. 그들은 선지자를 조롱하며 비웃는다 : '당신이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드는가? 우리가 누구인지나 아는가? 당신이 우리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를 가르칠 생각일랑 품지 말고 차라리 갓난 아이한테나 가서 떠벌려 보아라'(Jerome, Lowth).

성 경: [사28:10]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 본문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간에 제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조롱할 때 쓰는 무의미한 말들(Cheyne, Duhm). (2) 갓난 아이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칠때 쓰는 유치한 말들(Marti, Lindblom). (3) 술에 취해 주정 부리는 소리(Driver). (4) '키'(*, 토하다)와 '추아(*, 배설물)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말(Skinner, Michaelis). (5) 알파벱을 가르칠 때 쓰는 항목의 일부분(히브리어에서 '차데'(*) 다음에 '코프'(*)가 온다. Houbigant, Procksch, Forher, W.Hallo). 이들 제 견해는 모두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뜻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성 경: [사28:11]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 - 이는 압제자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이다(신 28:49;렘 5:15). 앗수르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셈조 계통의 언어이지만, 그 어휘와 문법 체계가 크게 달라서 유대인에게는 그것이 다른 지방의 방언처럼 들린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이 여호와의 교훈을 더듬거리는 말투로 조롱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더듬거리는 듯한 이방인들(앗수르인들)의 언어로 그들을 조롱하실 것이다.

성 경: [사28:12]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 참된 안식의 길이 이미 그들에게 지시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고 그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다(신 28:1-14). 만약 저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약속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듣지 아니하였다(Alexander).

성 경: [사28:13]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에브라임에 대한 경고]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 잡히게 하시리라 -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부드러운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오히려 조소했으므로, 저들은 경험이라는 한층 더 무서운 교사로부터 그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아니된다(Oswalt). '경계에 경계를 ... 저기서도 조금'은 10절의 반복이며, 그 의미는 동일하다. 다만 이전에 저들이 역겨운 소리라고 비난했던 그 소리를 이제는 앗수르인의 생소한 입술을 통해서 듣게 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G.Rawlinson).

성 경: [사28:14]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너희 경만(輕慢)한 자여 - 이는 문자적으로 '비웃음의 사람들'(*,안쉐 라촌)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없는 것으로 조롱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9,10절). 이들은 스스로 진리의 길에서 이탈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도 이탈시키기를 즐겨한다. 이런 사람들이 권위있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로 말미암은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성 경: [사28:15]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우리는 ... 숨겼음이라 - 사망과 언약하였으므로 어떤 재난으로부터도 안저하다는 저들의 자기 확신은 어디에 기초하는 것인가? 그것은 애굽과의 동맹이다. 애굽으로 피난처를 삼고 그곳에 숨는 한, 앗수라의 위협도 무서워할 게 없다고 저들은 자만하였다. 그러나 선지자가 보기에 그것은 착각이었고 오산이었다. 애굽은 결코 그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사 30:1-7; 36:6-9).

성 경: [사28:16]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 경만한 유다 지도자들의 말(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대조되어 나온다. 여기에 두 그림이 있다. 하나는 거짓과 허위로 기초를 삼은 건물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시온의 돌로 기초를 삼은 건물 그림이다. 전자는 홍수와 채찍이 어우러진 혹독한 재앙이 닥쳐올 때 흔적 조차 없이 소멸되어 버린다. 그러나 후자는 전혀 요동하지 않으며 견고함을 잃지 않는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다(마 7:24-27 참조). 이 견고성은 그 건물을 뒷받침하고 있는 시온의 모퉁잇돌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돌은 '시험한 돌' 곧 모든 시험을 다 거친 돌,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돌이다. 이 돌로써 건물의 기초를 삼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돌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에 대해 다양한 대답들이 제시되었다 : 율법(Eichhorn, Umbreit), 상전(Ewald), 하나님의 말씀(Schegg),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Feldmann),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Duhm, Sknner), 다윗 왕국(Delitzsch), 히스기야(Gesenius, Maurer), 참된 신자들(Eichrodt), 시온(Chids, Hktzig, Knobel), 남은 자(Donner), 하나님의 약속(Konig), 신앙 그 자체(Kaiser, Marti, Forher), 하나님 자신(Cheyne), 예루살렘은 불가침이라는 하나님의 확신(G. Smith), 메시야의 구원(von Orelli) 등등. 이중 어느 하나를 확정하는 것은 힘들다. 다만 신약의 빛에 비추어 판단하건대, 이것이 메시야를 미리 가리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마 21:42;행 4:11;롬 9:33:엡 2:20;벧전 2:6).

성 경: [사28:17]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나는 공평으로 ... 넘칠 것인즉 - 시온의 모퉁잇돌로 기초를 삼고 '공평'과 '의'로 측량되어진 건물만이 영구한 견고성을 부여받는 반면, '거짓'과 '허위'에 기초한 다른 모든 건물들은 철저하게 붕괴되고 말 것이다. '우박'과 '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한 말이다(2절). '피난처'와 '숨는 곳'은 예루살렘의 경만한 자들이 자랑하던 것을 가리킨다(15절, Alexander).

성 경: [사28:18]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 즉 앗수르 군대가 나라를 유린할 때, 그들이 그토록 의지하였던 사망(=음부)과의 언약도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15절). 애굽은 유다를 구하지 못할 것이며, 그날에 유다 백성들은 속수 무책으로 밟힘을 당할 것이다(10:6).

성 경: [사28:20]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침상이 짧아서 ...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 유다 백성들이 처한 곤고한 상황이 속담투의 말로 기술된다. 그들은 눕기 위해서 침상을 조달했으나 너무 짧아서 적당치 못하며, 또 덮기 위해서 이불을 재단했으나 너무 좁아서 불충분하다. 이 비유의 초점은 그들의 측정이 그릇되어서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애굽과의 동맹으로 앗수르의 공격을 막아보려는 그들의 인식과 계산이 잘못되었음을 꼬집은 말이다.

성 경: [사28:21]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여호와께서 브라심산에서와 같이 ...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의 행사임을 환기시킨다. 즉 하나님께서 전쟁을 지휘하시는 한, 그들의 도모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그 옛날, 다윗 왕때 있었던 브라심 산 전투(삼하 5:18-20;대상 14:9-11)와, 여호수아 때 있었던 기브온 골짜기 전투(수 10:10,11)에 비견된다. 다만 그때와 지금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의 원수가 바뀌었다는 것이다(시 139:19-24). 그때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오히려 이스라엘을 대적해서 싸우실 것이다.

성 경: [사28:22]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에 대한 경고]

(주);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 우심(尤甚)할까 하노라 - 결론적으로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비웃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을 압박하고 있는 결박 상태가 가중될 것이다. 마치 덫에 걸린 동물이 빠져 나오려고 온몸을 뒤틀면 뒤틀수록 더욱더 단단히 조여드는 것처럼, 그들이 이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나가려고 한다면 그럴수록 더욱 큰 재난을 맞게 될 것이다(Calvin).

성 경: [사28:23]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주); 너희는 ...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로서, 지혜 문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전형적인 연설 형태이다(시 49:1;78:1).

성 경: [사28:24]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주);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 고르게만 하겠느냐 - 대답은 자명하다. 즉, 농부는 밭을 기경할 때 무한정 땅을 갈아 엎고 써레질만 하지는 않는다. 밭가는 모습에 대하여는 왕상 19:19을 참조하라.

성 경: [사28:25]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주);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 심지않겠느냐 - 일단 땅을 갈아 고르게 한 뒤에 농부는 파종을 한다. 이때에도 농부는 아무렇게나 하지 않으며 종자의 크기와 특성, 종류에 따라 사려 깊게 행동한다(레 19:19). '소회향'(*, 가 검고 꽃이 푸르며 향기가 나는 미나리과 제비속의 식물의 일종)과 '대회향'(*, 향로로 사용되면 회향풀과 비슷한 미나리과 식물) 같은 종자가 작은 것들은 지면에 뿌리면 되었다. 반면에 이보다 종자가 큰 소맥과 대맥은 줄을 지어 심거나 혹은 구획을 나눠 심었다. 마지막으로 밀의 일종인 '귀리'는 가장자리에 심었는데, 이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사28:26]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주);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 직역하면 '올바른 원리를 따라'(*, 라미쉬파트)이다. 이에서 보다시피, '미쉬파트'(*, 공평)는 단순한 법적 정의를 넘어 물질적,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속함을 알 수 있다(Oswalit).

성 경: [사28:27,28]

주제1: [전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비유]

(주);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 타작할 때 보다 가벼운 농작물은 알갱이가 깨어지지 않도록 막대기로 두들겨 탈곡한다. 반면에 보다 단단한 곡식은 수레바퀴와 말발굽을 이용해 타작한다(41:15;신 25:4;미 4:12). 즉, 농사를 지어본 자라면 각 곡식에 따른 적절한 타작법 정도는 이미 지각하고 있다는 말이다(Leupold).

성 경: [사29:1]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유다의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

(주); 슬프다 아리엘이여 - 첫 번째 '화 있을진저'가 '교만한 면류관'(28:1)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본장의 예언도 그 형식상의 유비(類比)에 의해 '아리엘'이라는 다소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름으로 시작한다. 이 '아리엘'이 '다윗의 진친 성읍' 혹은 '절기가 돌아오려니와'란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다의 성도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학자들간에 의견의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를 가리킨다(Gesenius, Delitzsch, Ewald). 이는 유다를 '사자'라 호칭한 것(창 49:9)과 왕의 보좌에 사자의 형상이 새겨진 것(왕상 10:19,20), 그리고 동물의 왕 사자처럼 예루살렘이 결코 정복되지 않는 강력함을 지닌 성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취한다. 그러나 이는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 (2) 그것은 '하나님의 번제단'을 가리킨다(겔 43:15,16, Alexander). 이는 '절기'(1절)란 낱말과 2절 후반부의 의미와 잘 어울리므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주); 연부년(年復年)절기가 돌아오려니와 - 더 나아가 다윗이 신성한 법궤를 이곳으로 옮긴 날로부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예배 처소가 되었다(삼하 6:12-19). '연부년'은 '해마다'라는 뜻인데, 이곳에서 신성한 절기들이 자연의 순환 사이클처럼 아무 뜻도 없이 형식적이며 주기적으로 반복됨을 꼬집은 말이다.

성 경: [사29:2]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유다의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

(주); 네가 ...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 '희생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자랑을 삼는 네가 바로 아리엘과 같이 될 것이다.' 즉, 희생 제사의 피로 둘려있고 그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불로 태우는 그러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이 장차 변할 것이다(Oswalt). 임박한 재앙이 예루살렘에 몰고 올 고통은 '슬픔과 애통'(*, 타아니야 와아니야)이다. 이 두 낱말은 모두 '신음하다', '괴로워하다'는 뜻의 '아나'동사에서 파생한 방계 명사들이다(애 2:5).

성 경: [사29:3]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유다의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

(주); 내가 ... 너를 치리니 - 한때 다윗이 진을 쳤던 그 도성(1절)을 이제 여호와께서 공격하기 위해 진을 치신다. 이 공격은 앗수르인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속하는 것이다. 고대의 전쟁에 대하여는 신 20:20;왕하 25:1-4;겔 4:2;21:22 등을 참조하라.

성 경: [사29:4]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유다의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

(주);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 - 앞에서 언급된 장기간의 포위의 결과로 그들이 극도로 쇠약해질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이것을 '땅에서 말하는 소리'와 '티끌에서 나는 소리'로 표현한다. 언급된 '땅'(*, 에레츠)과 '티끌'(*, 아파르)은 더 이상 낮아질 데가 없는 수치의 극한 혹은 주검의 세계(N.J.Tromp, J.Watts)를 가리킨다.

성 경: [사29:5]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유다의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

(주); 네 무적의 무리 ... 강포한 자의 무리 - 문자적으로는 '너의 이방인들의 무리(*, '하몬 자라이크) ... 잔혹한 자들의 무리(*, 하몬아리침)'타이다. '이방인'에 대하여는 1:725:5, '잔혹한 자'에 대하여는 13:11을 참조하라. '티끌'과 '겨'는 '나약한 것'혹은 '무력한 존재'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4절;5:24;17:13;41:15;단 2:35;호 13:3;습 2:2).

성 경: [사29:6]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유다의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

(주); 벽력과 .. 맹렬한 불꽃으로 - 나열된 여러 현상들은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고전적인 표현에 속한다(출 19:16-19;왕상 19:11-13;겔 20:47, 48). 여기서 '큰 소리'(*, 콜 가돌)는 천등과 지진이 일어날 때 수반되는 굉음을 가리킨다. '맹렬한 불꽃'은 문자적으로는 '삼켜버리는 불의 광휘'(*, 라하브 에쉬 오켈라)인데, 이는 회오리 바람과 폭풍이 불 때 동반되는 벼락불을 가리킨다.

성 경: [사29:7,8]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유다의 위기와 하나님의 구원]

앗수르 군대에 대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과 관련하여 그 결과가 꿈의 언어로 제시된다. 대적의 모습이 7절에서는 '꿈'에 비견되고, 8절에서는 '꿈꾸는 자'에 비교된다.

(주);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 갈증이 있는 것같이 - '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인간 자신'을 나타내는 완곡 어법(Grotius)으로도 쓰이나, 여기서는 '육체적 삶의 근원으로서 주림과 목마름을 느끼는 영혼'(Delitzsch)의 의미로 쓰였다기보다는 '욕구'라는 또 다른 의미로 쓰였다고 봄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린다(Alexander). 즉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품고 있던 그 욕구는 '전혀 채워지지 않았으며'(*, 레카), 따라서 '더욱 짙은 갈증만을 남길 뿐이다'(*, 쇼케카).

성 경: [사29:9]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주);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 5-8절에 약속된 구원을 경험하기 전에 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제시된다(9-16절). 본문을 직역하면 '너희는 머뭇거려라(*, 히트마흐메후). 너희는 놀라라(*, 테마후). 너희는 즐겨라(*, 히쉬타아쉬우). 너희는 소경이 되어라(*, 쇼우)'이다(원문 -Gesenius의 해석). 각각의 경우 두 번째 나오는 명령문은 앞에 나온 말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다. 즉 '믿지 말고 머뭇거려 보아라. (그 결과로)너는 더욱 놀라워하게 될 것이다. 연락 속에 빠져 즐겨 보아라. (그 결과로) 그것이 너호 하여금 더욱 눈이 멀게 할 것이다'(Alexander).

성 경: [사29:10]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주); 대저 여호와께서 ... 부어 주사 - 백성들의 술 취함(소경됨)의 원인이 하나님께로 소급된다 : '깊은 잠의 영을 부어주신 분은 바로 여호와시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6:9,10 주석을 참조하라.

(주); 눈은 선지자요 ... 머리는 선견자라 - 눈을 가리고 머리를 덮음은 전혀 볼 수 없게끔 하려는 것이다. 선지자 혹은 선견자는 백성들의 '눈'과 '머리', 즉 지도자로서 올바로 보고, 바르게 생각하여 백성들을 진리로 인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들 스스로가 눈이 멀고, 소경이 되었으니, 누가 누구를 인도할 수 있겠는가(마 15:14)!

성 경: [사29:11,12]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주); 모든 묵시가 ... 봉한 책의 말이라 - '모든 묵시'(*, 하주트 하콜)는 하나님께서 참된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해주신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말하나(Delitzsch). 이 말씀들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책'(*, 하세페르)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이 백성들에게는 굳게 닫혀서 도무지 열수 없는 봉함된 책과 같을 것이다. '책'이라 번역된 '세페르'(*)는 '긁다', '새기다'는 뜻의 '사파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기록하는 것', '기록된 것', '문서', '편지'를 뜻한다. 기록된 문서는 비밀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로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봉인되었다(8:16 참조).

(주); 유식한 자 ... 무식한 자 - '유식한 자'는 문자적으로는 '쓰는 것을 아는 사람'(*, 요데아 하세페르)이니, 곧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지도층 인사)을 가리킨다. 이들은 외적인 지식은 갖추었으나 영적인 통찰력은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계시의 말씀을 깨달은 수가 없었다(6:9 참조). 이와 반대로 '무식한 자'(*, - 로-야다 세페르)는 '쓰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니, 곧 일반 백성을 가리킨다(요 7:15).

성 경: [사29:13,14]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주);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 존경하나 - 병행하는 두 말, '가까이하다'(*,나가쉬)와 '존경하다'(*, 카바드)는 공적인 예배 행위를 함의하는 낱말들이다. 당시 히스기야 왕주도하에 남왕국 유다에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종교 정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교도의 관행들과 우상들은 여지없이 척결되었고 모세 떠의 고유한 예배 의식이 부활되었다(와하 18:4).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어디까지나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되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내면까지 바꾸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를테면 참종교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참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 레바브)과 '경외심'(*, 이르아)은 갖추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입술의 종교를 혐오하신다. 신약에서 이 말은 입술과 혀로 그들의 경건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적용되었다(마 15:7,8).

성 경: [사29:14]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주); 지혜자의 지혜가 ... 가리워지리라 - 백성들이 그토록 의지하는 지도자들으니 지혜와 총명을 제거해버린다는 말이다. 그 결과, 그들은 다가올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5:21).

성 경: [사29:15]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주); 자기의 도모를 ...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 이 백성이 징벌받을 수밖에 없는 세 번째 이유가 제시된다. 그것은 애굽과 동맹을 체결하려는 자들의 음모 때문이다. 선지자는 오래 전부터 이 일을 탄핵해왔다(20:5-6). 따라서 그들은 선지자 몰래 은밀하게 이 일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악인은 비칭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그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어둠 속으로 도피하고 싶어한다(시 64:2-6;94:7;139-12;요 3:!9, 20).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래 인류가 계속적으로 시도해온 일이 이것이었으며(창 3:8-10), 특히 하나님을 안다고 스스로 공언하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영적 무지를 증명해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성 경: [사29:16]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주);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저들의 생각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부정하는 불신앙이 전제되어 있다. 그들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만물을 다 관찰하시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그 만드신 피조물과 동일한 수준에 병렬시키는 태도이다. 선지자는 저들의 이 같은 태도를 한마디로 '패리함'(*, 하페카)이라 규정한다. 이 말은 '상하가 뒤바뀌어 전도되다', '가치가 전도되다'는 뜻이다.

(주);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 여호와를 토기장이로 비유한 다른 예에 대하여는 45:9;64:8;욥 10:9;렘 18:4-6 등을 보라.

성 경: [사29:17]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심판 후 받을 축복]

(주); 레바논이 ...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 부정 의문문은 긍정의 가장 강력한 형식 중의 하나이다. 본서의 여러 곳에서 '레바본의 삼림'은 권세자들의 표상으로(2:13;10:34;33:9;35:2;60:30), 또 그 삼림을 자르는 것은 비천하게 됨의 상징으로(10:34;37:24)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삼림은 경작된 평원이 될 것이며, 반면에 경작된 평원은 삼림이 될 것이다.' 즉, 권세자들은 낮아질 것이요 반대로 억압받던 백성들은 높아질 것이다. 한편, 본절 이하로부터 24절까지는 메시야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도 이해된다.

성 경: [사29:18]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심판 후 받을 축복]

(주); 귀머거리가 ... 소경이 눈이 볼 것이며 - 이는 분명 귀가 뚫리고 눈이 열리는 치유의 역사가 있을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신체적 치유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들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책의 말'(*, 디브레-세페르), 곧 선지자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11,12절). 이제 그토록 단단하게 굳었던 백성들의 마음이 부드럽게 변화될 날이 오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다.

성 경: [사29:19]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심판 후 받을 축복]

(주); 겸손한 자가 ... 즐거워하리니 - 이처럼 변화된 새로운 미래의 상속자들은 '겸손한 자'(*, 아나윔)와 '빈핍한 자'(*, 에브요님)이다(11:4;14:30,32;암 2:6-8). 이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지만, 영적으로 경건하다.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힘이 없으므로 오직 여호와의 손에 자신들의 송사를 맡긴다(21절).

성 경: [사29:20]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심판 후 받을 축복]

(주); 강포한 자가 ... 다 끊어졌음이라 - 반면에 지금 웃는 자들, 곧 '강포한 자'(*, 아리츠)와 '경만한 자'(*, 레츠)에게는 정반대의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 즉 그들은 '끝장나며'(*, 아페스), '소멸된다'(*, 칼라). 그들은 힘없는 백성을 착취하며(13:11;25:3-5;29:5;49:25) 진리를 조롱하고 가치를 전도시키며 공동체의 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다(28:14;잠 1:22;13:1).

성 경: [사29:21]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심판 후 받을 축복]

(주); 그들은 ... 억울케 하느니라 - 첫째, 그들은 거짓 증거로써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조작한다. 둘째, 그들은 시시 비비를 가리는 재판관을 올가미를 씌워 넘어뜨린다(암 5:10). 셋째, 그들은 의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를 박탈한다(10:2;출 23:6;암 5:12).

성 경: [사29:22]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심판 후 받을 축복]

(주);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 말씀하시되 - 본문을 직역하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곱의 집에게, 아브라함을 구속하신'이다. 이때 문법적으로만 해석하자면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자가 야곱이 되어버린다. 이를 피하기 위해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서 읽는다 : '...야곱의 집의 하나님, 아브라함을 구속하신'(Lowenthal, Lowth, Lluzzatto). '야곱 족속', 즉 '야곱의 집'은 그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원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가리킨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에 빠졌던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되었듯이, 이제 여호와를 저버린 많은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남은 자들도 새로운 공동체의 바탕이 된다(Delitzsch).

성 경: [사29:23]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심판 후 받을 축복]

(주);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 경외할 것이며 -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될 때, 그들이 보일 반응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다 하는 것'(*, 히크디슈)과 그를 '경외하는 것'(*, 야아리추)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은 그의 본성을 참되게 인식하는 것이며 피조 세계와 구별된 유일무이한 절대자로서 그의 주권을 온 세상에 널리 선포,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경외)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바르게 인식함에서 비롯된다(8:13;마 6:9).

성 경: [사29:24]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소망]

주제2: [심판 후 받을 축복]

(주);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 교훈을 받으리라 - 새로운 이스라엘을 특징짓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과 깨달음이다. 선지자는 미래에 약속된 변화상을 좀더 충격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극적인 반전 기법을 사용한다 : '영이 방황하던 자, 곧 이전에 소경 같고 귀머거리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알지 못하던 자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불평하던 자, 곧 이전에 완악하고 패역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거부하던 자들이 지식을 배우게 될 것이다'(원문). 14절과의 대조에 유의하라.

성 경: [사30:1,2]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애굽과의 동맹에 대한 경고]

(주); 패역한 자식들이여 - 이는 '마음이 완악하고 불순종하는 자식들'(바님 소레림)이란 뜻이다. '소레림'은 '다루기 힘들다'는 뜻의 '사라르'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이 말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동물에 대해(호 4:16),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패륜아에 대해(신 21:18;시 78:8) 주로 사용되었는데, 선지자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특별히 적용하였다(1:5,23).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굽과의 어떠한 종류의 동맹이나 결속도 체결하지 말 것을 엄중히 명하셨다(출 13:17;신 17:16 참조). 그 이유에 대하여는 문화적, 종교적인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으니, 첫째,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와 교섭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물들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요, 둘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소속된 나라인 한, 오직 그만을 섬기고 의지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주); 죄에 죄를 더하도다 - 본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이전에 유다가 앗수르와 연합해서 이 땅에 그를 불러들였는데 이제 다시 애굽과 결탁하여 그를 몰아내려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Calvin). (2) 하나님을 버린 죄에 더하여 인간에게 도움을 구걸한 행위를 가리킨다(Hitzig). (3) 애굽과 동맹한 죄에 더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숨긴 행위를 가리킨다(Skinner). 그러나 이보다는 더 포괄적인 의미로서 '계속적으로 죄가 누적되고 있음'을 뜻하는 말로 보는 것이 더 무난하다(Alexander).

성 경: [사30:3]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애굽과의 동맹에 대한 경고]

(주); 바로의 세력이 ...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 애굽으로부터 그들이 기대하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애굽은 그들에게 '힘'(세력)과 '그늘'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수치'와 '수욕'이 될 것이다. 당시의 애굽은, 랍사게가 '상한 갈대 지팡이'(36:6)라고 비웃을 정도로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성 경: [사30:4]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애굽과의 동맹에 대한 경고]

(주); 그 방백들이 ... 이르렀으나 - 본문만 가지고서는 언급된 '그 방백들'과 '사신들'이 애굽 사람을 가리키는지, 유다 사람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다. '에발트'(Ewald), '히찌히'(Hitzig), 노벧(Knobel) 등은 전자를 지지한다. 그러나 문맥을 고려할 때-2절에 유다 사신들이 이미 애굽으로 내려간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후자가 더 적절한 듯하다(Delitzsch). '소안'(타니스)은 애굽 북부 델타 지역의 동쪽에 자리한 도시(19:11;민 13:22)이며, '하네스'는 중앙 애굽의 나일 강 상류에 있는 도시로, 후에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opolis)라 불렸다. 유다 사신들은 '소안'을 거쳐 심지어 '하네스'까지 이르는 먼 길을 힘들여 여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성 경: [사30:5]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애굽과의 동맹에 대한 경고]

(주); 수치를 당하리니 ...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 - '수치를 당하리니'로 번역된 '호비쉬'는 '악취를 풍기다'는 뜻의 동사 '바아쉬'에서 파생한 말로서(Maurer, Knobel), 여기서는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Delitzsch). '수욕'으로 번역된 '헤레파'는 역시 같은 말로 번역된 '켈리마'(3절)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멸시', '조롱'을 뜻한다.

성 경: [사30:6]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애굽과의 동맹에 대한 경고]

(주); 남방 짐승에 관한 경고라 - 본문의 요가지는 애굽으로 파송된 사절들이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키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수고했다는 것이다. 언급된 '남방 짐승'(바하모트)은 '사자와 독사'(Hitzig), 혹은 '애굽을 상징하는 하마와 같은 짐승'(Delitzsch)이 아니라 '남쪽 방향으로 짐을 싣고 가는 짐스, 곧 나귀와 약대'를 가리킨다 : '오! 남방으로 향하는 짐승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이여'(Alexander). '나귀'와 '약대'는 광야를 지날 때 짐 운반용으로 흔히 사용되는 짐승들이다(창 37:25;42:26).

성 경: [사30:7]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애굽과의 동맹에 대한 경고]

(주); 가만히 앉은 라합 - '라합'(*)은 찬조 질서에 대적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인데,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애굽 군대를 바다에서 물리치신 사건과관련하여 애굽에 대한 시적 동의어로 사용되었다(51:9;욥 9:13;26:12;시 87:4;89:10). 이 괴물은 지금-태만함에서건 무력함에서건-바다에서 꼼짝도 않고 부동 자세롤 앉아 있다(G.E. Wright, Martin). 그러니 어찌 유다를 도울 수 있겠는가?

성 경: [사30:8]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 책에 써서 -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글로 남겨서 그들의 불순종과 패역함에 대한 증거를 삼으로 하신다. 한편, 서판 혹은 책에 기록하고자 한 그 내용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대립된다. (1) 돌 위에 끌로 새긴 형태로 '라합'(7절)이라는 애굽 별명을 기입했다(Delitzsch, O, Kaiser). (2) 두루마리에 적은 형태로 애굽에 대한 비난의 주요한 대목들을 기록했다(Skinner, Scott). 후자가 더 적절한 듯하다.

성 경: [사30:9]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패역한 백성이요 ... 자식이라 - 선지자가 지적한 바, 백성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즉 그들의 마음 자체가 이미 패역해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듣기 싫어할뿐 아니라 거짓말을 능사로 하고 있는 것이다. '패역한 백성'(*, 암 메리)은 문자적으로는 '반역의 백성'인데, 모세의 인도하에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괄할 때 저들이 상습적으로 나타내었던 그 불순종과 완악함을 상기시키는 말이다(민 17:10).

성 경: [사30:10]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 거짓된 것을 보이라 - '선견자'(*, 로에)와 '선자자'(*, 호제)는 평행하는 두 문장에서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선지자'를 뜻하는 구약의 대표적인 명칭은 '나비'(*)와 다른 점은, 후자가 주로 메시지의 전달이라고 하는 능동적인 기능를 강조한 반면, 전자는 메시지를얻게 된 수동적 경험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G. Vos, Bilical Theology). 하나님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백성들은 바른말 하는 선지자의 입을 막고 오히려 자기들의 뜻에 맞는 '부드러운 말'(*, 할라코트)과 '거짓된 말'(*, 마하탈로크)만을 전해 달라고 한다. '할라코투'는 '뺀들뺀들한 아침'을 뜻하며, '마 하탈로트'는 '미혹', '기만', '사기'를 뜻한다 할 수 있다.

성 경: [사30:11]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 떠나시게 하라 -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1:4),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여지는 교훈과 훈계를 제발 그만 듣게 해달라는 말이다. 악으로 치닫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오하며,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협박하고 방해한다. 이러한 예에 대하여는 왕상 22:8-13;렘 11:21;암 2:12;7:13;미 2:6 등을 참조하라.

성 경: [사30:12]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로하니 - '압박'(*, 오쉐크)은 '억압', '상해'를 뜻하니, 애굽에 보낼 재화(財貨)를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취한 강제적인 수탈을 가리킨다(왕하 15:20, Delitzsch, Skinner, Rawlinson). '허망'(*, 날로즈)은 '왜곡됨', '뒤틀어짐', '사악함'을 뜻하니, 애굽에 의존하는 외교정책을 가리킨다(Leupold).

성 경: [사30:13]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이 죄악이 ... 무너짐 같게 하리라 - '이 죄악'은 122가의 '이 말'과 대조되는데(Oswalt), 구체적으로는 애굽과의 동맹을 지칭한다. 애굽과의 동맹은 유다를 구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멸망의 전조로 작용하게 된다.

성 경: [사30:14]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파쇄하시리니 - '무너지는 벽'의 비유에서 '파쇄되는 토기 그릇'의 비유로 바뀐다. 벽의 비유에서 그 초점이 멸망의 급속함에 놓였다면, 여기서 그 초점은 멸망의 철절함에 맞추어진다. '훼파하다'(*, 솨바르)는 '깨뜨리다', '박살내다', '갈기갈기 찢다'는 뜻으로서 '파쇄하다'(*, 카타트)는 말과 동의어이다. '아낌이 없이'(*, 로 야흐몰)는 문자적으로는 '동정심도 없이'이다. 그릇을 깨뜨리는 토기장이 곧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움이 여기에 암시되고 있다.

성 경: [사30:15]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 유다 백성들이 마땅히 취했어야 할 올바른 신앙 자세는 '돌이킴'(*, 슈브)과 '쉼'(*, 나하트)이다. '돌이킴'은 보통 회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유다가 애굽에 대하여 취하고 있는 정책을 철회하는 것을 의미한다. '쉼'은 인간의 조바심에서 비롯되는 헛된 수고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맛보게 되는 휴식(안식)과 평화를 의미한다. 동일한 메시기가 아하스 왕에게도 주어졌었다(7:4).

성 경: [사30:16]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 그들은 하나님은 구원과 힘 대신에 (애굽의)말과 기병을 선택하였다(31:1). 선자자는 말을 되받아 치는 기법(언어 유희)을 이용하여 악인들이 의지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올무에 빠짐을 재치있게 묘사한다.

성 경: [사30:17]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

(주);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 이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충시했을 때, 그들은 '한 사람으로 천을 쫓으며 두 사람으로 만을 쫓을 수 있었다'(레 26:8;신 32:30:수 23:10). 그러나 이제 하나님으로 힘을 삼기를 거부하고 애굽을 의지하는 유댜 백성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경험을 겪게 된다.

(주); 너희 남은 자는 ... 영(嶺)위의 기호 같으리라 - 전재의 참화에서 겨우 살아 남게 될 패잔병들의 모습을 선지자는 산꼭대기의 '깃대'(*, 토렌)와 영 위의 '기호'(*, 네스)에 비유한다. '토렌'은 '전나무'(Augusti), '소나무'(Rosenmuller) 혹은 '신도를 보내는 깃대'(Gesenius, Ewald), '등대'(Gataker) 등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높이 솟은 깃대의 기둥'이라는 의미로 취함이 무난하다(Alexander).

성 경: [사30:18]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선지자는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하며 기다리지 못하는 유다 백성들의 조급함(15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대조시킨다.

(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 본문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해석이 대립된다. (1)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공의는 충족되어야 하며 그때까지 그의 은혜는 보류되지 않으면 안 된다(Young). (2)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여호와는 징께를 베푸시는 동안에도 절제하시며 자비를 베푸셔서 그 백성을 진멸치 아니하신다(렘 10:24;30:11;합 3:2, Calvin). 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 본문은 앞절의 연속 심판으로 이해되나, 후자의 경우는 사랑의 근거로서의 공의 혹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완벽한 조화를 표현한 말로 이해된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자비의 근거로 말해지고 있다. 더욱이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음을 권면하는 다음 구절과의 상관 관계를 생각할 때, 후자의 해석이 더 낫겠다.

성 경: [사30:19]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 본문은 '울다'는 뜻의 '바카'(*) 동사의 부정사와 미완료형이 결합되어 강조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관용적 중복어'(an idiomatic pleonasm, De Wette)이다. '너는 울되 울지 않을 것이다'(원문직역).영어성경 KJV는 이 말을 적절하게 '너는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하였다.

성 경: [사30:20]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리니 - 한 때 핍박을 당하여 몸을 숨겨야 했던 선지자들이 다시 세상에 나와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게 된다는 말이다. '네 스승'으로 번역된 '모레카'(*)는 단수(하나님)로도 번역 가능하나(Valgate, G.E Wright,Ewald),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것을 복수(선지자들)로 번역한다(Alexander, Delitzsch, Lange).선지자들에게 가해진 갖가지 비난과 위협들에 대하여는 8:12;왕상18:17;렘38:4;암7:10;마23:37 등을 참조하라.

성 경: [사30:21]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너희가 ...이리로 행하라 - 여기서 뒤에서 말하는 이는 선지자이며, 앞에서 듣는이는 백성들이다. 가르치는 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것과 관련하여, 선지자들는 양무리의 뒤를 따라가며 갈 길을 이노하는 목자의 모습에서 이 표상을 취했을 수도 있고(Delitzsch), 짐승을 모는 사람이 뒤에 앉아서 짐승에게 방향을 지시하는 모습에서 빌려왔을 수도 있다(Leupold). 여기서 '우편'과 '좌편'은 인간 생활의 모든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며(신 5:32;17:20), 이로써 선지자는 우리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참된 인도자로 삼고 그의 말씀에 따라 우리의 행위를 조정해 나가야 할 것을 교훈하고있는 것이다(Calvin)

성 경: [사30:22]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또 너희가 ...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상의 파기로 이어질 것이라. 말씀이 고갈되고 불신앙이 팽배한 시대에 우상숭배는 큰 유행이 된다. 그러나 선지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힘있게 선포되고 백성들의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리게 될 때, 우상은 그 즉시로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그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임재로 말미암아 우상이라는 인공적인 상징 자체가 불필요하게 된다(31:7;호14:3;미5:13,14,J. Watts).

성 경: [사30:23]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 풍성케 하길 것이며 - 농부의 수고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하늘에서는 때를 따라 비가 내리고 그 결과 땅에서는 곡식이 영글어 넘친다. 팔레스틴의 농업은 거의 전적으로 비에 의존하였으며 이런 자연 환경 아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비를 내리게 하실 수도, 막으실 수도 있는 분'으로 신앙하였다(5:6:신11:14;28:12;왕하8:1;암4:7).

성 경: [사30:24]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 먹을 것이며 - 비옥한 땅에서 풍성한 소산을 내는 한편, 가축들은 광활한 목초지 위에서 마음껏 먹이를 뜯는다. '맛있게 한 먹이'(*, 베릴 하미츠)는 문자적으로는 '발효된 혼합물'이니,'(귀리,보리,살갈퀴등의 여러 곡식들을 섞은) 혼합물'(*)에다 '(소금 혹은 향료를) 조미한'(*)것을 말한다.

성 경: [사30:25]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크게 살륙하는 날 ...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 '물의 공급'과 '망대의 붕괴'라는 두 주제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망대'는 유다 백성들의 자기 교만을 상징하는 요새를 의미한다. 이 망대가 무너질 때, 즉 교만에 찬 무리들이 제거된 후에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풍성한 축복의 날은 허여된다:2:15;미5:9,10).'메마름'과 '비옥함'은 하나님을 의뢰함과 관계가 깊다(1:30; 3:1; 12:3; 15:6; 19:5; 32:2,20; 33:16; 35:6,7; 41:17,18; 43:19,20; 44:3,4; 48:21; 49:10; 55:1,10; 58:11; 65:10; 66:14, Delitzsch, Oswalt)

성 경: [사30:26]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 '달'은 '흰 것'(*, 할레바나)으로, '해'는 '뜨거움'(*, 하하마)으로 각각 형상화되었다. '일곱날의 빛'은 '일주일의 빛이 하루에 집중됨'(DRECHSLER)을 의미하니,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밝기로 빛나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 강조점은 눈을 멀게 할 정도의 빛의 강렬함에 있지 않고 상처입은 당신의 백성들을 치유하는 빛의 영화로움과 그들이 누리게 될 축복의 영속성에 놓인다. 여호와의 치유하심에 대하여는 1:6;욥5:18;겔34:16;호6:1;말4:2등을 참조하라.

성 경: [사30:27,28]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 앗수르에 대한 심판 에언이 이어진다(27-33절).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대적인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행위를 통하여 그 백성에 대한 사랑을 거듭 확인시켜 보여주신다.'여호와의 이름'(*, 쉠-야훼)은 그 말씀과 사역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영광'(겔1:28)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J.Watts).

(주); 그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 하수같은 즉 - 천둥, 번개를 통한 폭풍의 표상에 무섭게 분노하는 사람의 표상이 뒤섞여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맹렬한 불(*,에쉬 오칼레트)은 혀에 닿는 모든 것을 삽시간에 먹어치우는 탐욕스런 불의 성질을 나탄낸 말이다(30절;29:6;3:14;출24:17;신4:24;9:3;욜2:5). '창일하는 하수'는 평상시에는 큰 물로 돌변하는 사막의 '와디'를 가리킨다(Oswalt).

(주); 멸하는 키 ... 미혹되게 하는 자갈 - '키'와 '자갈'의 비유가 첨가된다. 하나님께서는 '열방들' 곧 이민족들로 구성된 앗수르군대를 키로 흔들어 멸망시키실 것이며(마3:12), 또 마부가 자갈을 눌려 야생마를 제어하듯이, 그들을 인도하여 파멸의 심연속으로 몰아 넣을실 것이다.

성 경: [사30:29]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 - 앗수르 구대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기쁨과 환호를 가져다 줄 것인데, 선지자는 이 기쁨을 절기를 맞이하여 저(피리)를 불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는 자들의 가슴 벅찬 희열에 빗대고 있다. 여기서 '절기'는 아마도 유월절을 가리킬 것이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두가지이니, 첫째 그것이 밤에 시작되었고(출 12:42), 둘째 대적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Delitzsch).'이스라엘의 반석'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서(삼하23:3) 자신을 의뢰하는 모든 이들에게 여호와께서 진실로 안전한 피난처요 견고한 요새가 되심을 함의하고 있다(Alexander, Leupold).

성 경: [사30:30]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여호와께서 ... 우박을 하시리니 - 앗수르에 대한 심판 묘사가 계속된다. '그 목소리의 장엄함', 곧 하나님의 음성과 같고(시18:13;29:3-9;77:18), '그 팔의 치심', 곧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폭풍과 같다.

성 경: [사30:31]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 '낙담하다'로 번역된 '예하트'(*)는 '깨뜨리다','무섭게 하다'는 뜻의 '하타트'(*)동사의 니팔(수동), 미완료형이니, 공포로 인해 혼비백산함을 의미한다.

성 경: [사30:32]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 그들을 치시리라 - 하나님이 몽둥이를 들어 앗수르를 치실 때마다 그것에 맞추어 음악이 연주된다. 29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다 백성은 즐거운 방관자이다, 원수와의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으로 돌려지는데, 이 사실이 '전쟁 떠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는 말에서 명시되고 있다. 하나님은 칼과 창같은 무기들을 쓰지 않으신다. 단지 팔을 들어 흔드시는 것만으로도 그는 능히 대적들을 제압하신다(19:16 참조, Delitzsch).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전쟁을 수행하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즐거이 찬미하고 노래부른다.

성 경: [사30:33]

주제1: [애굽과의 계약에 대한 경고와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자비]

(주); 대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 이를 사르시리라 - '도벳'(*, 토프테)은 '(혐오의 표시로) 침을 뱉다'는 뜻의 '투프'(*)동사에서 파생한 명사로, 예루살렘의 남서쪽 힌놈 골짜기에서 불타고 있는 화장터를 가리킨다. 이곳은 이전에 어린아이를 불태워 몰록신에게 제사를 드린 곳으로 유명하였는데(왕하 23:10;렘 7:31;19:6,11), 여기에서 자행되었던 끔찍한 살륙으로 인하여 '지옥'을 뜻하는 '게헨나'(마 5:22;10:28)란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이 '도베'은 이제 '몰록신' 대신 '멜렉'(*), 곧 앗수르 왕을 위해 '이미'(옛적부터) 마련되었다. 악인들이 불바다에서 쓰레기더미처럼 태워질 것이라는 끔찍한 예언과 더불어 본장은 마감되었다.

성 경: [사31:1]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주);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 선지자는 애굽이 제공할 수 있는 도움 가운데 특히 말을 지목해서 거론한다. '말'이 고대 근동에 처음 유입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전쟁 양상은 급속도로 변모되어 갔다. 전차 부대와 기병대 등 , 말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지구력과 기동력은 싸움의 질을 변화시켰으며 파괴력 또한 엄청나게 증강시켰다. 따라서 병거와 마병은 보유력은 곧 그 나라의 군사력을 측정하는 기준으로까지 인식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앗수르는 당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수효에 관한 한, 애굽도 이에 못지 않았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는 600대의 특별 병거를 위시한 많은 병거들을 대동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했으며(출 14:7), 시삭은 60, 000의 마병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다(대하 12:3). 또한 애굽은 인접한 국가들에게 병거를 수출하기도 하였다(왕상 10:29). 이로 보건대, 유다가 앗수르의 위협을 당하여 애굽 특히 그들의 '말'에 마음이 끌렸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성 경: [사31:2]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주);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 선지자는 대단히 완곡하게 풍자적으로 (irony), 그리고 대단히 완곡하게 하나님의 지혜와 애굽의 지혜, 그리고 애굽에 자신을 의뢰한 유다 지도자들의 지혜를 비교한다(5:21;19:11-15;28:14, 25;30:1.2)-'애굽이 지혜롭다면, 하나님은 더욱 지혜로우시지 아니하냐?(그러므로 마땅히 그에게 조언을 구했어야 했다.) 유다 지도자들아, 너희들만 지혜롭고 하나님은 지혜롭지 아니하시느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들로 하여금 큰코를 다치게 하실 것이다)'(Alexander).

(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 자신을 불신한 백성들에 대해 선포하신 경고를 결코 철회치 아니하신다는 말이다. 오직 중심에 우러나는 회개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것으로도 하나님의 징계를 변경시킬 수 없다.

(주); 악행하는 자의 집...행악을 돕는 자를 치리시니 - '악행하는 자의 집'은 유다를 가리키고(1:4), '행악을 돕는자'는 애굽을 가리킨다-'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불행을 가져오기로 마음 먹으시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Oswalt).

성 경: [사31:4]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대립 된다. (1)부정적으로 보는 경우 : 목자들(애굽)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사자(하나님)는 일단 잡은 먹이 (유다)를 놓지 않고 끝까지 잡아먹는다(징벌한다, Delizsch, Young, Lange). (2)긍정적으로 보는 경우 : 목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끝까지 보호하실 것이다(Calvin, Oswalt, J.Watts). 여기서는 후자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성 경: [사31:5]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주);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 앞절에서 사자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본문에서는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새로 비유된다. 어미새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제 몸도 아끼지 않고 싸울 만큼 모성애가 강하다(신 32:11). 이는 하나님과 유다의 관계에 있어서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즉,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자처럼'강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이 '어미새처럼' 끈끈하고 뜨거움을 묘사하는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선지자는 연속되는 4개의 동사들을 사용하여 다양하게 표현한다.

(주);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 '호위하며'(*, 가난)는 '덮다', '가리다'는 뜻으로 , '넘어가다'로 번역된 '파사흐'(*)와 평행을 이룬다. '파사흐'는 출애굽기에서 유월절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된 동사인데 그때 하나님의 보복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은 남김없이 죽이는 한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넘어갔던' 것이다(출 12:13, 23, 27). 이는 미래에 있을 구원이 출애굽과 비슷할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11:15; 30:29). '건지며'(*, 나찰)와 '구원하리라'(*, 말라트)는 평행하는 말로서 다같이 '구해낸다'는 뜻이 있다.

성 경: [사31:6,7]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그 백성을 위로하시는 여호와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선지자는 동(同)시대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주); 너희는 심히 거역하는 자에게로 돌아오라 - '심히 거역하겠다'는 말은 직역하면 '반역을 심화하였다'(*, 헤에미쿠 사라)이니,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것을 더욱 심화시켰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아직 회개의 문이 닫힌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죄악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긍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 은우상, 금우상을...던져 버릴 것이며 - 우상 숭배가 만연되었던 때에 참회개의 증거는 이전에 섬기던 우상들을 무가치하게 내던져 버린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30:22). 회개는 내면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시작하지만 항상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열매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또 그럴 때에만 그 진실성을 인정 받게 되는 것이다(눅 3:8-14참조).

성 경: [사31:8]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주); 앗수르는 칼에 엎어질 것이니 -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서 주어진다(8, 9절). 그러나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백성들의 회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본문 초두에 나오는 접속사 '와우'(*)에서 이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그때에 앗수르가 떨어질 것이며...'(원문).

(주);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 앗수르 군대가 군사적 열세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비한 힘에 의해 괴멸된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신비가 반복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홍해를 건넌 사건 ,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전투, 기드온의 승리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 될 것인데 , 여기에 선지자는 앗수르의 몰락을 첨가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덧붙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굳건한 신앙 관계에 있을 때에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음을 또한 교훈하고 있다.

(주); 그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 한 나라의 꽃이라고 할 수있는 청년들, 곧 전쟁을 위하여 선발된 용사들이 외국으로 끌려가 노예로 복역하게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완전한 붕괴를 뜻한다.

성 경: [사31:9]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주); 그의 반석은...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반석'이 '그의 방백들'과 평행하는 말로서, 앗수르의 왕을 가리킨다는 데에 일치한다(Delitzsch, Cheyne, Lange). 군대를 지휘하던 그, 그래서 백성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왕도 두려움 때문에 싸움 한번 변변히 못하고 그만 물러나고 말 것이다. '기호를 인하여'(*, 미네스)는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 '기호때문에', 즉 적군의 군기를 보고 크게 두려워 한다.(Oswalt, J.Watts). (2) '기호로부터', 즉 너무나 무서워서 자신들의 군기마저 뒤에 팽개친 채 도망친다(Calvin, Delitzsch). '두려움을 인하여'라는 말과의 평행을 고려할 때 전자가 더 나을 것이다.

(주); 여호와의 불은...예루살렘에 있느니라 - 예루사렘은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는 풀무이며 그곳에서 타는 불은 죄악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능력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풀무인 한, 그래서 함부로 손대는 자마다 소멸하는 불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다면 (레 10:1-7 참조),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보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Oswalt).

성 경: [사32:1]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주); 보라 장차 한 왕이...정사할 것이며 -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 도성을 공격하려던 대적들(앗수르)은 몰살되는 반면 그 도성은 영속성을 보장받게 되는데(31:4-9), 선지자는 계속해서 장차 그 도성에서 시행될 참되고 의로운 통치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 통치는 새로운 왕과 방백들, 즉 새로운 정부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제 동참할 '한 왕과 방백들'은 눌려 도망가는 '앗수르의 왕(반석)과 그 방백들'과 대비된다(31:9).저들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에들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 언급된 '왕'은 아마도 종교 개혁을 통해서 여호와 신앙을 부흥시킨 히스기야 왕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다. 선지자의 시선은 당대를 넘어 먼 미래에 미치며 그의 예언은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성취되어진다.

(주); 의로...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 '의'(*, 체데크)와 '공평'(*, 미쉬파트)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통치 규범이다(1:21, 27). '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제된 올바른 행동의 원리라면, '공평'은 그 원리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선지자는 전자를 왕의 덕목에, 후자를 방백들의 덕목에 각각 적용시킨다.

성 경: [사32:2]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주); 광풍을 피하는 곳...같으니 - 악한 정부의 통치가 백성을 괴롭히는 '광풍'과 '폭우' 그리고 '마른 땅'과 '곤비한 땅'과 같다면, 선한 정부의 통치는 그것들로부터의 백성을 보호해주는 '가리는 것'(*, 마하베), '덮는 것'(*, 세테르), '시냇물'(*, 펠레그), '무거운 바위의 그늘'(*, 첼 셀라-카베그)과 같을 것이다. '광풍-폭우'와 '마른 땅-곤비한 땅'은 팔레스틴 땅의 여행객들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자연 재해들로서, 전자는 큰 비를 동반한 폭풍을, 후자는 뜨거운 햇볕으로 사람의 목을 타게 만드는 무서움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4:6;25:4을 보라.

성 경: [사32:3]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주); 보는 자의 눈이...기울어질 것이니 - 공의로운 통치가 가져오는 유익은 비단 외적인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내면적인 변화까지도 유발된다. 선지자는 이것을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소경 같고 귀머거리 같았던 자들이 다시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게 된다(29:18, 19). 이 약속은 전에 선지자가 들었던 것(6:9, 10)이고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경고(29:10)와 대조된 것이다. '듣는자의 귀가 기울어진다'는 말은 '주의 깊게 경청한다'(*, 카솨브)는 뜻이다.

성 경: [사32:4]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주); 조급한 자의 마음이... 말을 분명히 할것이라 - 급하게 서두르며 초조하고 분주하여 헛된 일에 집착하던 '조급한 자'(*, 님하람)의 마음이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참된 지식과 통찰력을 갖게 된다. 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는 '어눌한 자'(*, 일김)가 되어 혀를 잘 놀릴지 못하던 자들이 이제는 세련되고 적절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일김'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를 경멸하는 자'를 빗된 말(28:11 참조, Knobel, Drechsler)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을 가리킨다.(Delitzsch, Alexander).

성 경: [사32:5]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주); 어리석은 자를...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 이와 같은 영적인 명징(明澄)함의 결과로, 가치가 전도되어 참과 거짓이 뒤바뀌고 악덕과 미덕이 혼동되던 시대에 상습적으로 자행되어졌던 잘못된 일들이 바로잡아질 것이며 모든 일이 올바른 질서 위에서 시행되어짐을 의미한다. '어리석은 자'(*, 나발)는 '사악한 자'로도 번역 가능하다. '궤휼한 자'라 번역된 '킬라'(*)는 '간교하다'는 뜻을 가진 '네킬라'(*)의 단축형 (Gesenius) 혹은 '낭비하다'는 뜻을 가진 '칼라'(*)에서 파생된 말(Hitzig)로 설명되기도 하니 확실하지는 않다.

성 경: [사32:6,7]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본문은 '왜냐하면'(*, 키)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선지자는 '어리석은 자'와 '궤휼한 자'가 전에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명예로운 칭호(관직)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주); 어리석은 자는...없어지게 함이며 - 성경에서 '어리석음'은 머리의 둔함에 관련된 말이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에 관계되는 말이다(신 32:6; 시 14:1 ; 74:22). 어리석은 자는 먼저 하나님을 거스려 죄악을 범하고 다음에는 동료 인간들에 대하여 악행을 저지른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관계에서 옳지 못한 인간 관계가 배태(胚胎)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린 자의 '심령(*, 네페쉬)을 비게 한다"는 말은, 굶주린 자를 먹이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그의 양식을 빼앗아 생존할 수조차 없게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죄악을 밥먹듯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주); 궤휼한 자는...그리함이어니와 - '궤휼한 자'는 재물과 이권을 획득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 하여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된 먹이는 스스로를 보호할 줄 모르는 '가련한 자'(*, 아니윔)와 '빈핍한 자'(*, 에브욘)이다.

성 경: [사32:8]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야의 통치]

(주); 고명(高明)한 자는...서리라 - '고명한 자'(*, 나디브)는 외부적인 요인에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동기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힘쓰는, 천성적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이다. 그는 궤휼한 자가 끊임없이 악한 계책을 도모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고귀하고 덕스러운 일을 생각하고, 또한 생각한 그것을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려고 애쓴다. 이러한 그의 덕행은 시간이 지난다 하여도 변하지 않으며 어떤 장애가 가로막을지라도 중단되지 않는다. '서리라'(*, 쿰)는 말은 '자라나다', '견고히 서다'는 뜻이다(40:8).

성 경: [사32:9]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너희 안일한 부녀들이...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 본문은 추수 절기에 춤을 추는 유다의 여자들에 대해서 말한다.(삿 21:20 이하, G.E.Wright). 선지자는 그들을 '안일한 부녀', '염려 없는 딸들'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풍족한 수확의 기대와 즐거움에 도취되어 다가올 재난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재난의 때는 어김없이 임할 것이다. 예루살렘 부녀들의 허영과 교만을 그린 3:16-4:1과 본문을 비교하라.

성 경: [사32:10]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 직역하면 '너희 자신 만만하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여자들아 너희가 몸을 떨것이다(즉, 두려움에 전율할 것이다)'이다. 극히 대조되는 앞말과 뒷말의 결합을 통하여 선지자는 충격을 가중시킨다.

성 경: [사32:11,12]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옷을 벗어...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 이제 선지자는 재난의 때에 그들이 취해야 될 마땅한 태도를 설명한다. 평상복을 벗고 가슴을 치는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큰 재난을 당했을 때 슬픔을 나타내는 관습화 된 것이다.( 3: 24 ; 15:3 ; 22:12 ;욜 1:13; 나2:7).

(주); 좋은 밭...포도나무를 위하여 - 이전에 풍성한 곡식을 산출했던 좋은 밭과 열매 많던 포도나무가 재난으로 황폐하게 변해버리는 것, 곧 삶의 터전을 상실하는 것이 그들이 애통한 이유인 것이다(16:7-11).

성 경: [사32:13]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형극과 질려가 내 백성의 땅에 나며 - '내 백성의 땅'과 '형극과 질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출 3:8, 17;13:5;33:3)에서 어떻게 '형극과 찔레'가 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7;5:6;7:23).

(주); 희락의 성읍...나리니 - 본문은 불변사 '키'(*)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것은 앞의 사상을 확대, 설명하는 '...까지도'로 해석함이 무난하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야기되는 황폐함이 땅에 만이 아니라 심지어 희락의 성읍, 기쁨이 넘치는 집들까지도 미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이것은 다음절에서 확인된다.

성 경: [사32:15]

주제1: [여호와의 외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聖神)을...부어 주시리니 - 본문을 직역하면 '영이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부어질 때까지'이다. 성령을 부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까지 재난은 지속 된다. 그때가 언제일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반드시 도래한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변화 될 것이다. 영을 부어 주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왕권 확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만 일어난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될 때 거기에는 무력함과 불의만이 판을 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어 인생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이 땅은 풍요함을 되찾고 집집마다 희락이 찾아 들며 나라 전체에 평안이 깃들게 될 것이다.

(주); 광야가 아름다운 발이 되며...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야기되는 복스러운 변화는 먼저 땅에서부터 나타난다. '광야' 곧 곡식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이 '아름다운 밭' 곧 경작된 땅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둔 소출도 나중에 산출될 그 풍성함에 비추어 보면 야생숲으로 여겨질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 경: [사32:16]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공평이...있으리니 - 물질의 풍요로움은 축복의 서장에 지나지 않는다. 선지자는 변화된 땅에 거할 변화될 백성들의 영적 특성에 주목한다. '곡식을 산출하는 비옥한 밭이나 경작되지 않는 목초지에도 의와 공평이 거한다'는 말은, '의와 공평이라는 새 시대의 규범들이 온 땅 위에 편만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 체다카)와 '공평'(*, 미쉬파트)은 '하나님을 높임'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함'이라는 율법의 두 기본적인 의무 조항들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말들이다(Calvin, Kissane).

성 경: [사32:17]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의의 공효는...평안과 안전이라 -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짐을 역설한 말이다. 이를 신약의 언어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성 경: [사32:18]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본문은 그 의미상 13절과 대조된다. 한때 희락과 기쁨이 감돌던 곳이었으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형극과 질려가 자라던 '내 백성'의 집에 하나님의 의로부터 발출되는 참된 평화가 깊이 스며들 것이다.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 그리고 '종용히 쉬는곳'은 모든 이들이 꿈꾸는 곳이겠거니와 이러한 곳에서 거할 수 있는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경건한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요 14:27 참조).

성 경: [사32:19]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심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 본문은 세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그리고 삼림은 철저히 가라앉고 성읍은 전적으로 황폐해지리라'(RSV). (2)'그때에는 삼람 비탈이 서늘하겠고 성읍은 평화롭게 될 것이다'(NEB). (3)'비록 우박이 삼림에 쏟아져 내리고 성읍은 평지처럼 될지라도'(NIV). 문맥상 세번째가 가장 무난하겠다(G. W. Grogan).

성 경: [사32:20]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주);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너희는 복이 있으니라 - 하나님의 백성이 편안하게 농사 짓는 행복한 전원시적인 분위기로 본장은 마감된다. 물기 마를 염려가 없는 땅, 곧 '물가'에서는 농부가 뿌린 씨앗마다 풍성한 수확으로 결실한다. 소와 나귀 등의 가축들을 씨뿌린 밭에서 몰아내는 것이 상례임에도 여기에 나오는 농부는 오히려 가축을 이끌어 일찍 나온 잎들을 뜯어먹게 한다. 왜냐하면 땅이 너무나 비옥하여 곡식이 속히 자라기 때문이다. 이 같은 풍성한 생산력은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복주심의 결과로서 묘사된다. 30:23-25을 참조하라.

성 경: [사33:1]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주); 화 있을진저...사람이 속이리라 - 앞에서 유다에게 내려진 '화'(*, 호)가 본장에서는 '유다를 학대하며 속이는 자', 곧 앗수르에게 선고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애굽)의 도움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파멸이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구원이다'는 선지자의 일관된 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Oswalt). 이것을 구체적인 역사의 배경 속에서 고찰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였다. 히스기야 왕은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받쳐 그 침입을 저지하려 하였다, 산헤립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언약을 깨고 재차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왕하 18:13-17). 이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 왕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했으며 하나님은 그 종 이사야를 보내어 응답하셨다. 스미스(G. A. Smith)는 그것이 본장에 기록된 것이라 한다. 선지자는 언약을 파기한 앗수르에 대해 재앙을 선포하는데, 그 내용은 '악인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성 경: [사33:2]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주); 여호와여...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에 대한 깨달음은 기도를 통해서 주어질수 있으므로 선지자는 문득 예언을 중단하고 기도를 삽입시킨다. 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성도의 기도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1)스스로에게 아무런 공적도 없음을 겸손히 시인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참으로 무력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은혜를 베푸소서'). (2)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주를 앙망하오니').

성 경: [사33: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주); 진동시키시는 소리로 인하여...열방이 흩어졌나이다 - '진동시키는 소리'와 '주의 일어나심'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현재의 위기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 원수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묘사한 말이다. '진동시키는 소리'에 대하여는 30:30;삼상 2:10;7:10;욥 37:4, 5;40:9;시 18:13;29:3-9;77:18;104:7;단 10:6;계 1:10을 '주의 일어나심'에 대하여는 민 10:35;시 68:1을 참조하라. 본문은 아마도 산헤립의 군대가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서 하룻밤에 궤멸된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37:36)

성 경: [사33:4]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주); 황충의 모임같이...뛰어 오르리라 - '황충'이라고 번역된 '하실'(*)은 '잘라 먹다', '탐식하다'는 뜻의 '하살'(*)에서 파생된 명사로, 메뚜기의 일종을 의미한다(신 28:38;왕상 8:37;시 78:46;욜 1:4).이들은 떼로 몰려 다니면서 곡식을 남김없이 갉아먹었다. 비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 메뚜기떼가 들판을 휩쓸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앗수르군의 노략을 또한 그처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유다 백성들에 의해 노획될 것이다.

성 경: [사33:5]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주);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 승리의 결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아지실 것을 묘사한 말로 본장의 서론부(1-6절)는 일단락된다(Delitzsch, Oswalt). '지존하시다'로 번역된 '니스가브'(*)는 '사가브'(*) 동사의 수동 분사형으로, 높아지신 상태만이 아니라 높임을 받으시게 된 변화를 또한 암시한다(Alexander). 지극히 '높은 데'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스스로 높은 자로 자처하실 뿐 아니라, 한편 그 백성에 대하여는 당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셔서 시온 곧 예루살렘에 의와 공평을 충만하게 하신다(Calvin).

성 경: [사33:6]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주);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 선지자는 계속해서 히스기야 왕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안정감'(*, 에무나)을 잃지 않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향유하게 되리라고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경외함이 너의 보배'라는 결론적인 말속에 담겨 있다. '여호와 경외'(*, 이르아트 야훼)는 하나님을 무서워한다기보다는 그의 본성을 바르게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기꺼이 복종하고 공경하려는 마음으로 그를 예배하고자 하는 내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다른 곳에서 이것은 '지혜의 근본(실체)'이라 불리기도 한다(시 111:10;잠 1:7;9:10). 이같이 영적으로 개화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이지 않을 뿐더러 금과 은 같은 보물 대신 하나님 경외함을 그 즐거운으로 삼게 된다. 메시야 시대의 영적 속성들을 기록한 11:2과 비교하라.

성 경: [사33:7]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보라 그들의 용사가...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 선지자는 앞에서 간략한 형태로 본장의 주체를 소개한 뒤에 다시 그것을 세부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술한다. 그는 먼저 아무데서도 도움받을 길 없는 현재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용사의 애가로 시작한다(7-9절). 언급된 '용사'(*, 에르엘람)는 평행하는 '평화의 사신들'과 동의어로서, 평화 협상을 위해서 산헤립이 평화의 조건으로서 내세운 금과 은을 가지고 갔으나(왕하 18:14), 산헤립은 평화의 조건으로서 다시 예루살렘의 완전 항복을 요구하면서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성 경: [사33:8]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유다의 형편을 묘사한다. 대로가 황폐하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자 끊기고 여행객도 보이지 않으며 장사하는 이들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삿 5:6)은 전쟁 상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주);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 어떤이는 '성읍들'(*, 아림)을 '중인들'(*, 아딤)로 수정해서 읽을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약을 파기했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uhm, Oswalt, J. Watts). 그러나'성읍들'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터에 굳이 맛소라 본문을 바꿀 필요는 없는 듯이 보인다.

성 경: [사33:9]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땅이 슬퍼하고...목엽(木葉)을 떨어치는도다 - 유다의 참상이 땅에 반영된다. 가장 비옥한 땅으로 일컬어지던 대표적인 네 곳들-레바논, 사론, 바산, 갈멜-이 하나같이 황폐해진다. 백향목과 전나무로 꽉차 있어서 언제나 울창한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은 바짝 말라 볼품 없는 모양이 될 것이며(2:13), 감멜 산 남쪽 기슭에서 욥바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넓은 평원으로서 아름다운 들풀과 목초지를 자랑하던 사론(대상 27:29)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사막과 같이 될 것이며, 동과 서에 위치한 비옥하고 기름진 땅들로서 과일 나무와 삼람으로 유명한 바산 (2:13;렘 50:19;미 7:14;슥 11:2)과 갈멜은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성 경: [사33:1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너희 먼데 있는 자들이...가까이 있는 자들아 - '먼데 있는 자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은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Alexander). 앗수르를 파멸시킨 하나님의 권능에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것이어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족하다는 말이다.

성 경: [사33:14]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함께하리요 하도다 - '시온의 죄인들' 곧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거하면서도 그 행위와 습성이 앗수르와 별로 다를바 없는 불법하고 불의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앗수르를 삼킨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그들 또한 삼킬 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성 경: [사33:15]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앞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선지자는 그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 시 15편; 24:3-6과 유사한 내용이다.

(주); 토색한 재물을 가중히 여기는 자 - '토색한 재물'(*, 베차 마아솨코트)은 다른 사람을 착취함으로 해서 얻어지는 부당한 소득을 가리키며, '가중히 여기다'(*, 마아스)는 말은 '거절하다', '멸시하다'는 뜻이다. 의로운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연약한 자를 이용하거나 억누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므로 그의 손은 언제나 깨끗하다.

성 경: [사33:16]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그 물은 끊이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경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로부터 풍족한 사랑을 호흡하며 복된 삶을 영위해 나간다. 선지자는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1)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몸소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높은 곳'(*, 메로밈)은 적의 위협이나 어떠한 자연의 재해도 접근 불가능한 난공 불락의 요새 곧 가장 안전한 장소를 가리킨다(25:12). (2)하나님께서 일상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양식'(*, 레헴)과 '물'(*, 밈)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필수품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으로 주인을 삼고 그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럴진대, 성도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성 경: [사33:17]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너의 눈은...목도하겠고 - 선지잔는 계속해서 앞에서 말한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누릴 풍요한 미래의 모습을 말한다(17-24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기 언급된 '왕'(*, 멜렉)이 히스기야 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의 위기 상황에서 찢긴 의복과 삼베옷을 입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나(37:1) 위기가 끝나고 적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존귀의 위엄을 회복한 영광스런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Delitzsch, Alexander). 그러나 이것을 배타적으로 히스기야 왕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1)동일한 문맥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분명히 묘사하고 있으며(22절), (2) '왕'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사살은 선지자가 역사상의 특정한 왕뿐 아니라 이상적인 왕을 염두해 두고 있음을 시사하며, (3)히스기야 왕이 다스렸던 협소한 영토와 본문에 언급된 '광활한 땅'과는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잘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히스기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서 거론되었다는 견해를 취한다(Calvin).

성 경: [사33:18,19]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 구원 받은 백성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겪었던 두려웠던 순간들을 회고하게 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감격 속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터트리게 될 것이다 :'지난날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자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어디있느냐?'(고전 1:20;15:55 참조). 한때 공물과 전리품들을 계산하고 장부에 기입하던 서기들(*, 소페르)과 그 공물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던 관리들(*, 쇼켈)과 탑 (망대)을 세워 도성을 습격하려던 계획을 세우던 앗수르 관리들(*, 소페르 에트-하미그달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더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며 길길이 날뛰던 '강포한 백성'(*, 암 노아즈) 곧 앗수르인들 또한 꿈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성 경: [사33:20]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그 줄이 하나도 끊이지 아니할 것이며 - 결코 정복되지 않는 도성 예루살렘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축제(절기)의 성읍'(*, 키르아트 모아테누)이라 불린다.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성소가 고정되기 전, 즉 광야를 떠들며 대적과 싸우던 불안정한 시절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장막'(성막)이라는 협소하고 유동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장막은 본래 하나님의 거주하심을 상징하는 처소로 세워졌다(출 25:8; 29:44, 45).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거주하심'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거주한다'는 말은 성경적 의미에서 '친밀하게 연합함을 뜻한다(창 30:20; 시 5:4).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자력으로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과 백성의 참교제는 그런 연 후에라야 허락되었다. 이 경우 성막은 동물의 피를 뿌려 백성의 만남이 실현되는 '친교의 공간'(*, 오헬 모예드)으로 기능하였다(출 40:2). 성막은 언제나 12지파의 한 가운데 위치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진퇴(進退)를 같이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의 원리), 와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심(신정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막은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의 모형론적인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것이 옛것을 대신하고 실재가 그림자를 대신하는 그때에는 응당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히 11:9, 10).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시는 미래의 그날에는 '임마누엘의 원리'(21절)와 '신정의 이상'(22절)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구현될 것이다(G. Vos, Biblical Theology).

성 경: [사33:21]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여호와께서는...넓은 하수(河水)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니라 - 참으로 '권능 있는 자'는 예루살렌을 위협하는 앗수르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도성을 지키시는 여호와이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면 그 도성은 큰 강이 빙 둘러서 아무라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천혜의 요새들처럼 그 영구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시 46:4-5;겔 47:1-12;슥 14:8). 선지자는 아마도 유브라데 강에 둘러싸인 바벨론이나 나일 강에 둘러있는 애굽의 테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성 경: [사33:22]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대저 여호와께서는 우리 재판장이시요...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권능으로써 도성을 방비하시는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거의 동일한 뜻을 가진 세 가지 칭호로 불려진다. (1)그는 우리의 재판장이시다(*, 쇼푸테누). 그는 공의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준열하게 판단하신다(11:3, 4). (2)그는 우리의 율법 수여자이시다(*, 메호케케누). 그는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따라야만 되는 삶의 규범을 제정해 주신다(신 33:21). (3)그는 우리의 왕이시다(*, 말루케누). 그는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삼상 12:12). 그에게 현대적 의미의 입법권, 사법권, 행전권이 모두 속해 있다. 이는 그분만이 인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유일 무이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성 경: [사33:2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주);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 옛주석가들은 물론 현대의 많은 주석들까지도 21절의 '배'(앗수르를 가리킴)의 표상이 본문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데는 큰 난점이 따르니, 다른 데서 앗수르가 항상 남성형으로 취급되는 반면, 본문의 '하발라이크'(*, 너의 돛대줄)의 어미는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앗수르가 아니라 유다가 언급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겠다(Delitzsch, Oswalt). 앞에서 승리자로 묘사되었던 유다가, 여기서는 정비조차 제대로 안 된 낙후한 배로 묘사된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아즈) 모든 것이 뒤바뀐다. 유다의 결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앗수르에게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간명하다 : 승리는 외적인 조건에 달려 있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다.

성 경: [사34: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열국이여...귀를 기울일지어다 - 1:2에서 땅과 하늘을 소환했던 것처럼 여기서 선지자는 지상에 거하는 모든 이민족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이 소환은 그들을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예비된 심판의 무서운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다. '열국'(*, 고임)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스리는 이방 민족을 일컥는 말로서, '민족들'(*, 우밈)과 동의어이다.

(주);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 노벧(Knobel)은 '땅에 충만한 것'을 짐승들로, '셰계에서 나는 모든 것'을 식물들로 규정하고 선지자가 그 대상을 부르고 있는 순서에서 '열국들, 백성들-짐승들-식물들'의 점강법적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임의적인 해석의 한 예일 뿐이다 '땅에 충만한 것'과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은 시적 동의어로서 '온 땅에 편만한 인구'를 가리키는 말이다(Oswalt).

성 경: [사34:2]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케하셨은즉 - 열국과 거기 속한 여호와의 격렬한 진노의 내용은 마치 옛 가나안 족속들처럼 '진멸'(*, 헤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수 6:17, 21;삼상 15:3). '헤렘'의 사상은 '여호와만이 홀로 전쟁의 유일한 승리자이시며 따라서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해야 하고 이것이 인간에게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완전히 파멸시킨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럴진데, 이 말과 관련하여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열국의 범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홀로 그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삼키게 될 것이다'(Oswalt).

성 경: [사34:3]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그 살륙당한 자는...산들이 녹을 것이다 - 여호와의 극심한 진노와 그에 뒤따르는 가공할 장면이 묘사된다. 살륙당한 자의 수효가 너무 많기 때문에 땅에 묻지도 못하고 다만 내어 던지게 된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풍기는 악취가 천지를 진동시키고(겔 39:11 이하), 시체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산들마져 녹는다(즉, 피가 강물처럼 흘러 산들을 씻기운다).

성 경: [사34:5]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 '에돔' (*)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에서의 후손(창 36장)으로서 끊임없이 이들을 훼방하고 대적하였다(창 25:23;민 20:14-21;대하 21:8-10; 25:11; 28:17;암 1:11, 12;옵 1:1-14). 특히 이들은 B.C. 586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협조했으며 이로 인해 에돔은 이스라엘의 제 1의 증오 대상이 되었다(겔 35장 참조). 하여튼 에돔은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로서 '멸망으로 정한 뱃성'으로 규정되고 있다(25:9-12에서 '모압'이 하나님 백성의 전형적인 원수로 취급된 것과 유사하다).

성 경: [사34:6,7]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선지자는 에돔으로 대표되는 열국의 진멸을 '희생 제사에 비교한다(렘 46:10; 51:40; 겔 39:17; 습 1:7-9). 이는 동물들이 하나님의 예배와 영광을 위해 살육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돔의 멸망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이바지하기 때믄이다(Calvin). 몸집이 작은 '어린 양'과 '염소'와 '수양'은 에돔의 평민들을 사용하며, 몸집이 큰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는 에돔의 영주들을 상징한다(Delitzsch). '들소'(*, 레에밈)는 다른 곳에서 희생 동물로서 거론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마에 뿔이 달려 있으며 '힘'의 상징으로 자주 나온다(민 23:22;신 33:17;욥 39:9;시 22:21;92:10). 아마도 이는 다른 곳에서 드려진 것보다도 더 큰 대규모의 희생 제사가 '보스라'와 '에돔 땅'에서 드려질 것과 또 이 살육에서 제외될 자가 아무도 없게 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보스라'는 사해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약 32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에돔의 성읍(혹은 수도)으로, 오늘날의 '부세이라'(Buseirah)로 추정되고 있다(63:1;창 36:33; 대상 1:44;렘 49:13-22;암 1:12 참조).

성 경: [사34:8]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신원하실 해라 - 본문은 '왜냐하면'(*, 키)이라는 불변사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에돔을 이토록 잔혹하게 진멸하시는 이유가 제시된다. 선지자는 그것을 '여호와의 복수'라고 말한다. 그 복수는 에돔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고 핍박을 받아온 시온을 위한 것이다. 에돔은 시온에 대한 그들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복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감정적인 응징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복수'(*, 나캄)는 어느 한 쪽의 폭압적인 범죄로 인해 어그러지고 뒤틀린 상태를 바로 잡고 균등케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평행하는 단어 '신원함'(*, 쉴루밈)이라는 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보상', '보수'라는 뜻을 갖는 이 단어는 '안전케 하다', '회복시키다', '갚다'는 뜻을 가진 '솰람'(*)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다(J.Watts).

성 경: [사34:9,10]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에돔 땅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를 생생하게 묘사된다. 이 묘사는 파괴된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킨다(창 19:24-28;신 29:23;렘 49:18). '소돔과 고모라'는 성경에서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표상으로 주어지고 있다(유 1:7). '역청'과 '유황'은 모두 불에 잘 타는 가연성 물질이어서 한번 점화되면 꺼지지 않고 오래도록 타오른다(Sanetius, Leupold). 본문의 표현은 특히 에돔이 사해에 근접해 있고 그곳에 화산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한편, 꺼지지 않는 불과 끊임없이 떠오르는 연기는 세상의 종말을 암시한다(계 19:3, Delitzsch).

성 경: [사34:1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당아와 고슴도치...부엉이와 까마귀 - 열거된 짐승과 새들 가운데 까마귀(*, 오레브)만이 분명하게 확인될 뿐, 그 나머지 이름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당아'(혹은 펠리칸)라고 번역된 '카아트'(*)는 '토하다'란 뜻의 '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아마도 그 새의 울음소리를 본따서 만든 말인 듯하다(레 11:18;시 102:6;습 2:14, Delitzsch). '고슴도치'라고 번역된 '키포트'(*)는 '움츠리다', '둥글게 굽다'는 뜻의 '카파드'(*) 동사에서 파생된 명칭이며, '부엉이'라고 번역된 '얀소프'(*)는 탈무드에서 종종 나쁜 징조를 나타내는 새로 언급되는데 아마도 으스스한 소리를 내는 그 새의 울음소리에서 따온 말인 듯하다(Oswalt).

(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 '줄'과 '추'는 건축하는 일에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에돔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파괴하는 일에 이것들을 사용하신다. 그 작업의 결과, 여호와께서는 '혼란'(*, 토후)과 '공허'(*, 보후)라는 말에서 암시된 것처럼, 창조 때의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상태속으로 에돔을 던져버릴 것이다(말 1:4, 5 참조).

성 경: [사34:12]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없게 될 것이요 - 이는 세습 귀족들이 모여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군주국이었던 에돔에 이러한 일이 끊어질 것을 말하니 곧 왕국으로서의 에돔의 운명이 끝장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사34:13]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 '시랑'(*, 타님)은 사막에 사는 야수의 일종을 가리키는데(13:22;렘 9:11), '재칼'(Gesenius, Ewald) 혹은 '이리'(Henderson)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욥 30:29에도 '시랑'과 '타조'가 함께 나온다.

성 경: [사34:14]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 '들짐승'(*, 치임)은 광야에서 거주하는 동물들을 가리키며, '이리'(*, 이임)는 '울부짖는 동물'을 가리킨다. '치임'과 '이임'은 형태와 소리가 비슷한 두 개의 다른 낱말이 어우러져서 언어 유희(paronomasia)의 효과를 가져온다.

(주); 수염소가...쉬는 처소를 삼으며 - '수염소'와 '올빼미'는 마성적(魔性的)인 괴물들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거주할 안락한 장소를 구해 오랫동안 헤매던 이들이 이전에 왕과 방백들이 잠자던 궁궐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발견한다.

성 경: [사34:15]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주); 부엉이가 거기 깃들이고 - '부엉이'로 번역된 '키포즈'(*)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화살 뱀', '뛰어오르는 뱀'으로 이해된다. '악마'와 '뱀'의 이미지는 서로 유사점이 있다.

(주); 솔개들도...거기 모이리라 - '솔개'(*, 다야)는 시체들을 먹고 사는 '검은 독수리'를 가리킨다. 본문의 의미는 분명하다 :'사람이 살던 곳에 광야의 야수들이 깃들어 살 뿐 아니라 그곳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계속적으로 번식하니, 이는 에돔의 파멸이 영구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사34:17]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예언의 확실성]

(주);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나눠 주셨으니 - 그 옛날 여호와께서 제비를 뽑고 줄로 재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셨던 것처럼(민 26:55, 수 18:4-10). 그와 동일한 방법과 그 세심함으로 에돔 땅을 나누어 혐오스러운 동물들에게 분배해주신다는 뜻이다(Alexander, Oswalt).

성 경: [사35:1]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주); 광야의 메마른 땅이...피어 즐거워하며 - 프록쉬(Procksch)가 단테의 '신곡'에서 차용하여 '지옥 대 낙원'(Inferno v. Paradiso)이라 이름지은 것처럼(Leupold) 34장과 본장은 첨예란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특히 땅의 변화에서 현저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대표하는 에돔은 황무한 땅으로 변하는 반면에, '광야와 메마른 땅'(사막)은 백합화 꽃피는 소망스럽고 기쁜 낙원으로 화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사막'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유다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경유하게 되는 시리아 사막을 가르킨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으나(Delitzsch, Lange),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열망하는 본장의 문맥상 이는 성도들이 통과해야 할 죄많은 이 세상을 암시하는 듯하다. '백합화'로 번역되 '하바찰레트'(*)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그것은 풍부한 강우(降雨) 뒤에 즉시 만개하여 온 땅을 융단처럼 수놓은 작은 꽃들을 가리킬 것이다 (Oswalt).

성 경: [사35:10]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주);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 (*, 페두예)은 전절의 '구속함을 얻은 자'(*, 게울림)에 평행하는 말로서 동의어이다. '되사다', '구속하다', '친족의 권리를 행사하다'는 뜻을 가진 '가알'(*) 동사는 법정 용어로서 친족에 대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과 연관된 말이다(레 25:25, 32, 48;민 35:19;룻 4:4, 6). 이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학정 밑에서 구속하신 행위와 관련하여 자신을 '고엘'(*) 로서 소개하신 이래, 깊은 종교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43:1;48:20;출 6:6;15:13;시 74:2;106:10 참조). '구속하다'(*, 가알)는 낱말은 바벨론에서의 귀환이란느 소망스러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본서의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41:14;43:14;60:16;63:16). '속량하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주다'는 뜻을 가진 '파다'(*) 동사 역시 초태생의 구별과 연관된 법정 용어였으나(출 13:13, 15 참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하는 말로 전용(轉用)되었다(특히 신 7:8;9:26 등). '구속하다'와 '속량하다', 이 두 말은 렘 31:11에서도 같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시온의 주제가 '속량받고 구속함을 얻는 자들'과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렘 31:12, J.Watts).

(주); 시온에 이르러 - 하나님의 성이 있는 시온은 이 대로의 최종 도착지일 뿐 아니라 모든 성도의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곳에만 하나님의 백성이 갈망하는 참된 안식이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 있다. 길(Gill)은 말한다 : "묘사된 '대로'는 '밑에 있는 시온' 즉 교회로 향할 뿐 아니라 '위에 있는 시온' 즉 천국으로도 향한다. 이 길을 걷는 모든 구속된 성도는 그곳에 도달할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그들의 영혼은 그 주인인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리고 부활의 순간에 그들의 육체는 흙무덤에서 돌아와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마주서게 될 것이다."

(주);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 이는 그 얼굴이 항상 희락이 넘칠 것을 가리키니 , 즉 시온에 이르는 성도의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을 일컫는 말이다.

(주);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 현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을 따라잡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이다'(원문, 신 28:2;시 23:6 참조). 그럴진데 시온의 백성들 , 곧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속량받고 구속한을 입은 성도들의 삶은 얼마나 복될 것인가!

성 경: [사35:2]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주);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 전절에서 묘사된 완전하고 즐거운 변화의 상을 더욱 인상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선지자는 독자들에게 친숙한 세 개의 비교를 덧붙인다 : '레바논의 영광이 그것(사막)에 주어졌고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원문). 이들 세 지역은 비옥함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데, 특히 '레바논'은 향기로운 백향목으로, '갈멜'은 웅장한 상수리나무로, 그리고 '사론'은 꽃들과 비옥한 목초지로 이름이 나 있다(33:9 참조, Leupold).

(주); 그것들이...보리로다 - 문장 초두에 나와 있는 '헤마'(*)를 개역 성경은 '그것들'이라고 번역하여 마치 광야와 메마른 땅(Vitringa) 혹은 바로 앞에 거론된 세 지역(Delitzsch, Lange)이 지칭된 것처럼 하였다.그러나 이것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70인역(LXX)에서 주어진 듯하다 :'내 백성.'

성 경: [사35:3,4]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주);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두려워 말라 - 이러한 영광스러운 변화에의 전망과 더불어 현실에서 좌절하고 절망한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주어진다 : '강하게 하라. 축 처진 손들을, 그리고 흔들리는 무릎들을 굳게 하라'(원문). '밑으로 처진 손'과 '요동하는 무릎'은 각각 연약함과 버티지 못함을 상징한다(Alexander). 이들은 삶의 목적을 상실할 뿐더러 더 이상 삶을 영위해 갈 만한 힘을 잃어버린 자들이다(히 12:12). 이러한 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과 의미, 그리고 능력이 허여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주); 너희 하나님이 오사...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그에게 아무리 가까이 가고자 하여도 닿지 못한다고 탄식하는 자들에게 들려지는 대답이다. 이 말 속에서 '여호와의 오심'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의 오심은 그가 이루고자 하시는 두 가지 목적과 결부되어 있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했던 원수들에 대한 공의로운 보응과 복수, 그리고 그의 백성에 대한 구원이다(살후 1:6, 7 참조).

성 경: [사35:5]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주); 그 때에 -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성취되어질 미래의 그 시간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이다.

(주); 소경의 눈이... 귀가 열릴 것이며 - 인간의여러 신체 기능 중에서 특히 '눈'과 '귀'는 육체적인 상태와 아울러 영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6:10;29:9, 10;30:20, 21;32:3). 델리취(Delizsch)는 여기 언급된 육체적 치유가 영적 치유를 비유할 뿐더러 장차 여호와의 오심으로 인해 실현되어질 전인격적이고도 총체적인 구원의 외적인 측면을 나타낸다고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지적은 적절하다.

성 경: [사35:5]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주); 저는 자는...노래 하리니 - 절름발이와 벙어리의 경우에 그 치유의 완전함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즉 절름발이는 완전히 치유되어 마치 사슴처럼 뛸 수 있을 정도가 될 것이며, 벙어리는 혀를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까지 될 것이다(Leupold). 절름발이의 치유와 관련하여 행 3:8을 참고하라.

(주);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이제 선지자는 구원에 관한 두 번째 표상으로 독자를 이끈다. '사막에서 시내가 흐른다'는 주제는 본서의 후반부(특히 40-55장)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41:17, 18; 43:19, 20;44:3, 4;48:21;49:10;51:3 등), 건조한 땅으로 뒤덮인 이스라엘에서 '물'이 생명과 구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58:11;시 1:3;143:6;렘 2:13;17:8, Oswalt).

성 경: [사35:7]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원천이 될 것이며 - 사막에서 '물이 솟고-시내가 흐르고-못이 되고-마침내 원천이 되는' 일련의 계속적인 발전을 통해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구원의 완전성이 강조된다. '뜨거운 사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솨라브'(*)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낮은 대기층에서 불균등한 빛의 굴절 현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Alexander). 그렇다면 불볕 내리쬐는 사막에서 목이 갈한 이들을 헛된 환영으로 유도하는 이 가짜 오아시스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진짜 '못'(*, 아감)으로 변화게 될 것이다.

(주);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의 브들이 날 것이며 - 여호와께서 시온의 송사를 위해 에돔에게 보수하시는 행위(34:8)를 통해 에돔 궁궐이 '시랑의 굴'이 풀과 갈대와 부들이 자라나는 윤택한 초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43:19, 20 참조, Oswalt)

성 경: [사35:8]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주); 거기 대로가 있어 - 8-10절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는'(10절)대로에 대해서 말한다. 본디 길을 찾을 수 있는 '공공도로'(*, 마슬룰)가 놓여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적적인 일인데, 이 일은 사막이 낙원으로 변함과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은 '통행 가능과 불가능'이란 측면에서 34:10과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대로'에 대하여는 11:16을 참조하라).

(주); 그 길을...있게 된 것이라 - '그 길'이 '거룩한 길'인 것은 그것이 여호와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룩함을 덧입는 성도들이라는 데 기인한 것이다. 그 길은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해서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럴진데 '깨끗하지 못한 자'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또 이스라엘 자녀 중에서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그 길을 지나지 못한다.

(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 본문은 전혀 다른 두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 (1)그 길이 너무도 정확하기 때문에 심지어 '바보'(*, 에윌림)라도 실수함 없이 갈 수 있다(KJV, E. Young, Alexander, Delizsch, Leupold). (2)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바보)은 그 길을 결코 가지 못한다. 이 경우, 그 의미는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한다'는 말과 같게 될 것이다(Oswalt).

성 경: [사36:1]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히스기야 왕 십 사 년에...취하니라 -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은 앗수르의 왕이 된 산헤림 (B.C. 705-681)은 그의 비문에서 '유다의 성읍 46개를 취하고 히스기야를 조롱 속의 한 마리 새처럼' 예루살렘을 봉쇄했다고 의기 양양하게 기록하고 있다(Pritchard). 이 사건은 히스기야 왕 14년( B.C. 701년)에 일어났다.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왕하 18:13-16에 따르면, 산헤립은 평화를 조건으로 하여 그 대가로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라는 막대한 양의 공물을 요구하였다. 이에 히스기야는 성전과 왕궁의 곳간을 털고 심지어 성전 문과 기둥에 입혀진 금까지 벗겨 앗수르에게 바쳤다. 그러나 산헤립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33:1 이하 참조). 그는 퇴각하는 척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도성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성 경: [사36:2]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서매 - '라기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25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대하 11:5-9)으로 당시 앗수르군의 주력 부대가 위치한 곳이다(대하 32:9). 이곳에서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항복을 독촉하기 위하여 대군과 더불어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였다. '랍사게'(*, 랍-솨케)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왕의 술잔을 시중드는 사람'을 뜻하는 직책명인데, 아마도 왕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고위 관료를 가리키는 듯하다(느 1:11 참조), 왕하 18:17에 의하면, 그 외에 '다르단'(군대 장관, 20:1)과 '랍사리스'(고위 관리)등도 같이 파견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되었다.

성 경: [사36:3]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궁내 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리라 - 앗수르의 사신들에 맞서 히스기야 진영에서도 역시 3명의 사절들이 파견되었다. '궁내 대신'은 문자적으로는 '집 위에 있는 사람'으로, 왕 다음 가는 권력의 서열에 위치한, 오늘날의 '총리'에 해당되는 직책이다(22:15). '서기관'은 국내외의 정치적 협약이나 사건들을 기록하고 또한 대외적인 공문서 처리와 서신 연락 사무를 기록하고 또한 대외적인 공문서 처리와 서신 연락 사무를 총괄하는 고급 관료를 가리키는 말인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전문적인 율법 교사를 일컫는 말로 변했다(와하 12:10;22:3, 8;렘 36:12, 20;37:15, 20). '사관'은 나라 안의 고위 관리를 가리킨다(삼하 8:16;20:24;왕상 4:3;대상 18:15). 흥미로운 것은, 22:15과 연관하여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셉나와 엘리아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22:19-21, Oswalt).

성 경: [사36:4]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 앗수르의 왕의 사신인 랍사게의 도전적인 연설이 소개된다(4-20절). 그의 연설은 외교 언어인 아람어 대신 유다 방억으로 진행되는데(11절) 이는 명백히 유다 백성들을 분열,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 기록된 것들은 그가 말한 그대로를 정확히 옮긴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유능한 역사가에 의해 효과적으로 요약, 정리된 듯하다(Leupold).

(주); 네가 의뢰하니 무엇을 의뢰하느냐 - 앗수르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도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유다의 완강함에 대하여 놀라움과 경멸을 드러내면서 묻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는 '의뢰하다'(*, 바타흐)는 말인데, 이단어는 5-7, 9절에서도 연속적으로 나온다. 선지자 이사야가 거듭 경고했던 바와 같이 유다는 앗수르의 위협에 직면하여 애굽을 크게 의뢰하였다(30, 31장 참조). 랍사게는 애굽을 의뢰하는 유다의 이러한 자신감을 꿰뚫어 보고 있으며 그것이 근거 없는 헛된 자만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말한다.

성 경: [사36:5]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내가 말하노니...입술에 붙은 말 뿐이니라 - '모략'(*, 예차)과 '용맹'(*, 게부라)은 왕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자질들로서 이들은 항상 거론된다(11:2). '모략'은 '전쟁을 계획하고 전략을 입안하는 힘'을 가리키며, '용맹'은 '계획되고 입안된 이 모든 것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능력' 혹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울 수 있는 영웅적인 힘'을 가리킨다. 그런데 랍사게는 히스기야 왕이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 두 가지를 '입술에 붙은 말', 곧 전쟁할 때 아무 쓸모도 없는 말재주로 치부해버린다. 그가 이렇게까지 호언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경고를 통해서 유다의 실정을 인지하고 있으며 유다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 것까지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36:6]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 한때 애굽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서 앗수르 제국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은 이전에 아하스 왕이 수리아 - 에브라임 연합군의 공격을 맞아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처럼, 이제 앗수르의 침략을 당하여 애굽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애굽은 유다가 바라는 든든한 지팡이가 되지 못하였다.

(주); 그것은 상한 지파이와 일반이라 - '애굽 - 갈대 지팡이'의 비유는 겔 29:6, 7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파피루스 갈대와 골풀이 풍부한 애굽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적절하다(Delitzsch). '상한 갈대'는 사람이 그것에 의존하여 몸을 기댈 때 지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히 부러져서 도리어 그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성 경: [사36:7]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그는...그 신이 아니냐 - 랍사게의 물음은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과 연관된 것이다(왕하 18:4). 잘 알려진 대로, 히스기야는 유다에 있는 모든 산당들을 다 헐어버리고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만 예배할 수 있도록 개혁 조처를 단행하였다. 우상 숭배와 다신론적 사고에 물든 이교도 랍사게의 눈에 이것은 신들의 수효를 제한하는 일대 실수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앗수르인들은 신들을 숭배하는 제단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에 부속되는 권력의 힘도 더해지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예배 장소를 한 곳으로 감소시킨 히스기야의 행위는 결정적으로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들을 격노하게 만들 뿐이라고 그들은 확신하였다(Oswalt).

성 경: [사36:8]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그러므로...못하리라 - 랍사게는 앞에서 유다가 군사적, 종교적으로 의지하는 두 대상-애굽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조롱하고 부인한 뒤에 여기서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군사력의 문제를 거론한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환기시키려고 애쓰는 것처럼 앗수르의 군사력과 유다의 군사력은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아니하였다(5:28 참조). 이처럼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한 랍사게로서 유다 사절들에게 협상과 굴복을 권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본문의 '내기하라'(*, 히트아레브)는 말은 '결합하다', '서약하다'는 뜻을 가진 '아라브'(*) 동사의 히트파엘형(강의 재귀형)이니, 곧 전쟁하겠다는 헛된 생각을 버리고 앗수르 왕에게 서약하라는 항복 요청인 것이다(Alexander, Calvin, J. Watts).

성 경: [사36:9]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그런즉 네가 어찌...얻으려 하느냐 - 이같은 경멸적인 비교에 근거하여 랍사게는 두 가지를 주장한다. (1)히스기야는 앗수르 왕과는 상대가 안될 뿐더러 심지어 그 밑에 있는 장군들 가운데 가장 못난 자도 물리치지 못한다. (2)히스기야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진데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도는 다른 나라, 곧 애굽에 의존하는 길뿐이나 그럴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성 경: [사36:10]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여호와께서...멸하라 하셨느니라 - 한술 더 떠서 랍사게는 자신들이 유다를 치러 온 것은 하나님의 재가(裁可)를 받아서 된 일이라고 강변한다. 이 말은 분명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5:26 이하;7:18 이하;8:7, 8;10:5, 6 등). 이 점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앗수르인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고대의 전쟁 기록에서 정복자는 자신의 승리를 동일시하며 정복된 나라의 신들이 자신의 편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승리가 가능한 것으로 전공(戰功)을 자랑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말은 수호신의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유대인들을 더욱더 공포에 떨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Alexander, Oswalt).

성 경: [사36:11]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 랍사게의 주장은 히스기야의 사신들을 크게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격동하여 유다를 침공하도록 하였다는 앗수르측의 선전이 백성들에게 미칠 심리적 충격과 그 파급 효과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랍사게에게 모든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외교 언어인 아람 방언으로 말해줄 것을 비굴한 태도로 요청한 것이다. '아람어'는 수리아어를 가리키지만 본문에서는 당시 식자층과 궁중에서 널리 사용되는 고급 언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성 경: [사36:12]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랍사게가 가로되...보내신 것이 아니냐 - 랍사게는 유다 사절들의 요청을 일축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한층 공공연하게 드러내 보인다. '대변을 먹으며...소변을 마신다'는 말은 포위 기간 중에 극심한 기근에 시달릴 것을 위협하는 말이다.

성 경: [사36:13]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크게 외쳐 가로되 - 어떤 이들은 '일어서서 크게 외쳤다'는 말을 '자신의 말을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Delitzsch, Leupold), 혹은 '백성들의 눈에 보다 더 잘 보이는 높은 위치에 섰다'(Calvin)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성 경: [사36:14]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 히스기야와 산헤립의 대조는 랍사게가 이들에게 붙이고 있는 칭호에서 우선 극명하게 드러난다. 산헤립에 대하여는 '대왕'(13절)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히스기야에게는 아무런 호칭도 붙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히스기야를 '잘못된 길로 백성을 유혹하고 속이는 자', '그 백성을 능히 구원하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자'로 규정한다.

성 경: [사36:15]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히스기야가...받지 말라 - 랍사게가 히스기야를 이처럼 '백성을 미혹하는 자', '백성을 구원 못하는 무능한 자'로 비난하는 까닭은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도자 히스기야에 대해 등을 돌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어떠한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도록 회유한다.

성 경: [사36:16]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 '나와 축복(*, 베라카)을 만들자'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베라카'는 '선물'을 뜻하는 말로도 나온다(삼상 25:27;왕하 5:15 등). 따라서 본문은 '화평하자는 표증으로서 예물을 가져오라'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만일 본문을 각자 상대방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마음의 상태가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Delitzsch), 랍사게의 입을 통해 들려진 앗수르의 왕의 말은 일견 지극히 자애로운 초청처럼 들리지만 실은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항복을 권유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주); 그리하면 너희가...먹을 것이며...마실 것이요 - 본문은 12절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신의 소변을 마실 것'이란 말과 대조된다. 이런 대조를 통해서 앗수르 왕의 사신은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여 무기를 던지고 손을 들고 나온다면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 것인지를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는' 축복은 성경에서 이상적인 번영을 나타내는 말로 즐겨 사용되고 있다(왕상 4:25;미 4:4 슥 3:10 참조 , Leupold).

성 경: [사36:17]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내가 와서 너희를...옮기기까지 하리라 - 현란하고 교묘한 언어로 채색되어 있지만 본문의 의미는 명료한 것이다. 즉 앗수르 왕이 애굽 원정을 마차고 고국으로 귀환할 때, 유다 백성들은 본토에서 추방되어 낯선 땅으로 강제로 옮겨질 것이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피정복민들을 멀리 있는 다른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은 앗수르 제국의 주요한 식민 정책 중의 하나였다.

성 경: [사36:18]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열국의 신들 중에... 있느냐 - 이제까지 앗수르와 싸워 무릎 꿇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는 말이다. 고대인들은 한 나라의 존립 여부가 그 나라의 수호신의 능력 여하에 좌우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곧 그 나라의 신이 상대 나라의 신보다 약함을 시인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성 경: [사36:19]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건졌느냐 - 산헤립은 이전에 앗수르가 거두었던 혁혁한 전공을 상기시킨다. '하맛'과 '아르밧', 그리고 '사마리아'에 대해서는 10:9 주석을 참조하라. '스발와임'은 메소포티미아 남단에 위치한 도시 시파라 (Sipphara)로 추정된다(Alexander, Delitzsch).

성 경: [사36:20]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여호와가 능히...건지겠느냐 - 본문에서 앗수르 왕의 사신의 연설은 정점에 이른다. 그 요점은 정복 전쟁의 역사가 보여즈는 것처럼, 유다보다 지리적으로 더 넓고 신들의 숫자도 더 많은 강력한 국가들도 다 앗수르에게 백기를 들었거든 하물며 하나의 신밖에 갖지 못한 약소국 유다가 어찌 앗수르를 막아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가 알지 못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그것은 주 여호와는 다른 신들과는 전혀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인간의 탐심에 의해 나무나 돌로 지음받은 신이 아니라 당신의 형상에 따라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며, 말씀 한마디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오직 그분만이 참되며 유일하고 영존하는 하나님이신 것이다.(2:8-11 ;17:7, 8 ;40:18-26 ;41:4 ;42:8;43:11-13;44:6-8;신 32:1-47;대상16:26;시86:8;96:5;97:9;습 2:11, Oswalt).

성 경: [사36:21]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그들이 잠잠하여...하였음이었더라 - 여기서 '그들'은 아마도 유다의 사신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대답지 말라'는 히스기야 왕의 명령을 따라 침묵을 지켰다. 이전에 그들의 불필요한 말 한마디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된 것과 비교해볼 때 이는 분명히 지혜로운 일이다(11절).

성 경: [사36:22]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주); 때에...그 옷을 찢고 - 세 명의 사신들은 비록 와의 명령에 따라 침묵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이교도의 비난에 대해 제대로 대꾸하지 못한 그들의 내면의 상처와 끓는 분노를 자신들의 옷을 찢는 행위로서 표시하였다. 유대인들은 지극히 혐오스러운 일을 당할 때, 흔히 자기 옷을 찢음으로써 그 감정을 나타내었다(특히, 참람한 일과 관련해서는 마 26:65을 참조하라).

성 경: [사37:1,2]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주); 히스기야 왕이 듣고...보내매 - 본장은 그 내용상 앞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신들의 비통한 보고에 접한 히스기야 왕의 반응은 4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사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옷을 찢었다. 이는 극심한 슬픔과 분노를 표시하는 관습적인 행위이다(삼하 3:31;스 9:3;욥 1:20;렘 36:24). 둘째, 더 나아가 그는 '굵은 베' 곧 '삼베옷'(*, 사크)을 입었다. '삼베옷'은 재난 때에 입는 옷이며 참회의 때에 입는 옷이기도 하다(왕상 20:31, 32; 21:27;느 9:1;단 9:3;욜 1:13;욘 3:6;마 11:21). 셋째, 그는 기도하러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이후, 그곳은 공적인 중보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는 장소로 인정되었다(왕상 8:29, 33, 34). 마지막으로, 그는 엘리아김과 셉나, 그리고 제사장 중 어른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냈다. 이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위로하심을 듣기 위한 것이다. 당시에 이미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해설, 전달하는 자로 높임 받고 있었으며 왕으로부터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22:14;렘 37:3을 참조하라. 그러나 왕상 22:9의 경우는 정반대되는 사례이다, Alexander). 재난의 때를 당하여 히스기야 왕이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원통한 일을 당할 때 본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신앙의 본으로 남아 있다.

성 경: [사37:3]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주);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 사신들이 전한 히스기야의 말을 통해서 그가 현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환난'(*, 차라)은 '누르다', '억압하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파생되 말로서 외부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복합적인 영적인 짓눌림까지도 함의하는 말이다(Vitringa). 이 단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참회의 시편에 나온다(시 20:1;50:15;77:2;86:7). '책벌'(*, 토케하)은 호 5:9의 '견책하는 날'과 동일하게 쓰였다. '환난'과 '책벌'은 앗수르를 통해 유다에게 주어진 것이긴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인 것이다. '능욕'(*, 네아차)은 '조롱하다', '멸시하다'는 뜻의 '나아츠'(*)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앗수르인들이 '훼방한다'(신성 모독)는 의미이다(4절, J. Watts).

성 경: [사37:4]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본문은 '혹시', '아마도'(*, 울라)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듣지 못하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는 히스기야 자신의 겸허한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경건함은 그가 나라의 새존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받지 않으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주어지기만을 우선적으로 간구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Oswalt).

(주);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모독은 그들이 하나님을 이방 신들과 혼동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대하 32:19). 따라서 히스기야는 생명없고 무기력한 우상들과 대조, 구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적절하게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신 5:26;수 3:10;시 42:2;84:2;렘 5:2;10:10;23:36;단 6:26;마 16:16;26:63 참조 , Alexander).

성 경: [사37:5]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주); 이와 같이...나아가매 - 본문은 히스기야 왕의 전갈이 끝나고 이사야 선지자의 답신이 곧 시작됨을 알려주는 구실을 한다.

성 경: [사37:6]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주); 앗수르 왕의 종들이...두려워 말라 - 이사야의 메세지는 '두려워 말라'는 강한 권고로부터 시작된다. 전에 아하스 왕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떨릴 때도 선지자는 이와 비슷한 권고를 해준 바 있다(7:4). 여기서 '(앗수르의) 종들'로 번역된 단어는 앞절의 '(히스기야) 신하들'과 같은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어린 것들', '풋내기들'(*, 나아레)을 뜻하며, 경멸적인 어감을 나타내기 위해 선지자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말이다.

성 경: [사37:7]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 앞으로 전개될 사태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니, 그는 앗수르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불려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철수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신'(*, 루아흐)은 '악인들을 멀리 날려버리는 강한 바람'(Calvin)이나 '악인들을 파괴하는 천사'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는 경향성, 태도, 혹은 기질'(19:14;민 5:14;호 4:12;슥 13:2;딤후 1:7 참조)을 가리킨다(Alexander, Oswalt, Leupold).

그가 풍성(風聲)을 듣고 - 앗수르 군대의 퇴각은 그들이 듣게 될 '풍성' 곧 '소문'과 깊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에디오피아 왕 디르하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 나아온다는 소문을 가리킨다(9절 이하, Delitzsch, Lange).

성 경: [사37:8]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앗수르 왕의 위협]

(주); 랍사게가...돌아가다가...만나리라 - 랍사게가 돌아간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추측컨대, 아마도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나 응답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왕으로부터 후속 조처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 그리했을 것이다(Lange, Leupold).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라기스'는 르호보암 왕이 세운 15개 요새중의 하나로서(대하 11:5-10) 훗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침략해 왔을 때, 끝까지 맞서 싸운 '견고한 성읍'으로 유명한 곳이다(렘 34:7). '립나'는 레위인이 거하던 성읍으로 도피성 가운데 하나(수 21:13)인데, 라기스보다 북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나 이동하였는가도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산헤립으로서는 에디오피아 군대가 자신을 치러올 경우를 대비해서 립나를 먼저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군사 전략상 보다 좋은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구스 왕 디하르가'가 앗수르 군대를 치러 올라온다는 소식이 산헤립의 귀에 들린 것은 이때였다(Oswalt, Leupold).

성 경: [사37:9]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앗수르 왕의 위협]

(주);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 산헤립이 랍사게에 이어 다시 사자들을 보낸 까닭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히스기야를 위협, 굴복시킴으로써 앞뒤로부터 적을 맞는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사37:11]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앗수르 왕의 위협]

(주); 앗수르 왕들이...얻겠느냐 - 본절은 '보라'(*, 힌네)라는 말로 시작된다.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이 말 속에 앗수르인의 자랑과 오만이 함축되어 있다.

성 경: [사37:12,13]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앗수르 왕의 위협]

(주); 나의 열조가 멸하신...어디 있느냐 - 랍사게가 산헤립의 업적으로 돌려 말한 모든 일들(36:18-20)을 산헤립은 그의 선조들의 업적으로 돌려 말한다. 그는 히스기야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지명들을 골라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는 예증을 전개한다. '고산'은 티그리스 강의 왼쪽 지류인 하불 강 동쪽에 있는 '수산'(Zuzan)인데,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뒤 그 포로들이 이주한 곳이기도 하다(왕하 17:6). '하란'은 아브라함이 그의 부친과 더불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다가 머물러 살던 곳(창 11:31;행 7:2, 4)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다. '레셉' 역시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성읍인데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고, '들라살'은 갈그미스 너머 북쪽에 있으며, '에덴 자손'은 스바와 거래하던 상인들이다(겔 27:23). '하맛'과 '아르밧', 그리고 '스발와임'에 대하여는 10:9주석을 참조하라. '헤나'와 '이와'의 위치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성 경: [사37:14,15]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기도하여 가로되 - 히스기야의 반응은 같은 지경에 처했던 아하스와 크게 대비된다. 아하스는 그를 도와주겠다는 하나님의 요청과 징조를 구하라는 권고마저 거부한 반면(7:11, 12), 히스기야는 하나님께만 도움이 있음을 믿고 그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왕은 산헤립이 보내온 편지들을 읽은 뒤, 성전에 올라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펼쳐 놓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모르는 그 무엇을 알려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비통함과 충격을 당하여 하나님께 그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 위함이었다(Alexander, Oswalt).

성 경: [사37:16]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 히스기야의 기도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룹 사이에 계신...'(원문)으로 시작된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처럼 길고도 장엄하게 부르는 까닭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이름이 앗수르인들의 입을 통해서 더럽혀졌기 때문이다(겔 36:20-32 참조).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전체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분, 곧 '만군의 여호와'임을 고백한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기시도 하다. 그럴진데, 왕의 통치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앗수르의 힘이 지상에서 강력하다 하나 그들 또한 만군의 여호와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신 언약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과 독특한 유대를 맺고 계심을 지시해준다.

성 경: [사37:17]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여호와여...보시옵소서...들으시옵소서 -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우상들(43:8 참조)과 대조하여, 히스기야는 천지 만물을 감찰하시고 들으시는 '사시는 하나님'께 호소한다(Oswalt).

성 경: [사37:18,19]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앗수르 왕들이 과연...불에 던졌사오나 - 히브리어 원문에는 서두에 '진실로', '과연'(*, 암남)이란 말이 나온다. 주변 열국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신(우상)들을 불에 던져 파멸시켰던 앗수르의 군사적 업적에 관해서 히스기야는 '과연'이란 말로써 시인한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는 산헤립이 모르고 있는 한 가지 사실, 즉 산헤립이 멸망시킨 다른 나라들과 이스라엘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차이점을 말한다.

(주); 이들은 참신이 아니라...멸망을 당하였나이다 - 우상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역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성 경: [사37:20]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이제 우리를 그의 송에서 구원하사...알게 하옵소서 - 히스기야의 기도는 본문에서 그 핵심에 이른다. 그는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그와 그의 나라를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할 때조차 그의 관심은 하나님과 그 영광에 향해 있다. 이 점에서 히스기야의 기도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성 경: [사37:21]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이사야가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그에게 '보냈다'. 즉, 그의 제자들 중 한명(혹은 종)을 보내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성 경: [사37:22]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처녀 딸 시온이...머리를 흔들었느니라 - 현재와 같이 위축된 상황(3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유다가 앗수르를 조롱하며 멸시할 날이 미구에 이를 것이라는 예언이 시적으로 주어진다. '머리를 흔드는 것'은 경멸하는 몸짓(시 22:7;44:14;109:25;렘 18:16;애 2:15;마 27:39)이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퇴각하는 날,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등을 향하여'(*, 아하레카) 머리를 흔들어 댈 것이다. '처녀'란 말은 예루살렘 성이 위협을 당했을지언정 아직 정복되지 아니하였음을 상징하는 말이다(Michaelis, Hitzig).

성 경: [사37:23]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네가 훼방하며...누구에게냐 -예루살렘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은 그 오만함과 방자함으로 인하여 단순한 군사적 의미를 넘어 감히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훼방하며 능욕하는 신성 모독의 차원에까지 미쳤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성 경: [사37:24]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이를 것이며 - 이하에서 산헤립이 말한 되풀이로 이해되는 본절은 고대의 왕들이 남겨놓은 기념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어투와 매우 흡사하다. 산헤립이 교만하게 '감히 우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으며 우리가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지 못 갈 데가 없다'고 호언하는데, 그의 교만은 전적으로 '병거'(*, 레케브)로 대표되는 앗수르의 무력에 근거한 것이다.

성 경: [사37:25]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밟아 말리리라 - 앞절에서처럼 본문은 과거형으로 시작해서 미래형으로 끝난다. 이는 지금까지 그의 원정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던 만큼 앞으로의 원정도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다(Alexander). 앞서 레바논의 우거진 삼림들이 앗수르 군대의 나아감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머나먼 원정길에서 피할수 없이 따라오는 목마름조차도 역시 문제가 못 될 것이다. 그는 물이 없는 곳에서는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다고 노래한다. 그의 허풍은 앗수르 군대의 수효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애굽의 모든 강들이 다 말라버릴 것이라는 말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산헤립(B.C. 705-681)은 애굽 델타에까지 결코 원정하지 못하였다. 실제 애굽 공격은 그의 후계자 에살핫돈(B.C. 670년)과 앗술바니팔(B.C. 668년) 때에 이르러서야 수행되었던 것이다(Leupold).

성 경: [사37:26]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느냐...되게 하였노라 - 앗수르 왕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1인칭으로 기술된다(26-29절). 하나님은 앗수르 왕이 내세운 공적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지도 않는다. 본문에서 그 초점은 '(네 말이 다 사실일진대) 땅에서 되어진 그 모든 일의 참된 주체가 과연 누구냐?'에 모아진다. 하나님은 앗수르가 거두었던 놀라운 군사적 성공도 당신께서 태초부터 이미 작정하셨던 신적인 계획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시켜 나가는 신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10:5).

성 경: [사37:27]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그러므로 그 거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같았었느니라 - 앗수르 군대 앞에서 평평한 지붕 위에 돋아나서 햇볕이 들면 쉬어 시들어버리는 약한 풀이나 아직 영글지도 않아서 낫을 댈 필요조차 없는 곡식과도 같았다(시 129:6). 그들은 이 모든 현상이 자기들의 위압적인 힘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며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 중에 포함됨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성 경: [사37:28]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앉고 일어섬'에 대하여는 시 139:2, '나가고 들어옴'에 대하여는 신 28:6;시 121:8 등을 보라(Alexander).

성 경: [사37:29]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돌아가게 하리라 - '코에 갈고리를 꿰고 자갈을 먹이는 것'은 말 안 듣는 짐승을 다룰 때 사용하는 수법이다(욥 41:2;겔 19:4;29:4;38:4). 하나님은 분노와 교만으로 길길이 날뛰는 앗수르를 강제적으로 유다로부터 철수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드신다는 말이다.

성 경: [사37:30]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먹을 것이니이다 -오만한 정복자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응징의 말씀에 이어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말한다. 발언의 핵심은 한 '징조'는 사건에 앞서 믿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어떤 기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 '하나님께서 진실로 역사하셨구나!'하는 것을 확인하게끔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출 3:12, 18 참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쟁의 참상과 흔적이 남아있는 금년과 제2년에는 정상적인 파종과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때까지 백성들은 땅에서 절로 자라나는 것만을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제3년이 되면 백성들의 생활은 정상으로 회복되고 자신이 뿌린 씨에서 수확을 거두고 그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포위 상태로 인해 유다의 농업 경제의 기초가 다 훼파되었다 할지라도 그 상처가 아물어 흔적초차 볼 수 없는 날이 곧 이르리라는 것이다.

성 경: [사37:31,32]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남는 자는...나을 것임이라...이를 이루시리이다 - 앞절의 농사 비유를 확대하여 선지자는 그것을 유다가 예루살렘의 구원에 적용한다. 즉,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이 온전히 회복되듯이 포위된 성읍으로부터 '남은 자'가 나와 다시 번성하게 될 것이다. '남은 자'의 주체가 다시 등장한다(4:3;6:13;10:21, 22;11:11, 16 참조). '남은 자'와 동의어로 쓰이는 '피하는 자'(*, 펠레타)의 문자적인 뜻은 '피난', '구출'인데, 여기서는 '피신한 사람들'이라는 집합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Alexander, Calvin). '여호와의 열심'은 이 모든 일의 절대적 확실성을 보증하는 근거로서 덧붙여진다(9:7).

성 경: [사37:33,34]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이 성에 이르지 못하니라 - 앞에서 대체적으로 말해졌던 앗수르 왕의 장래가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보다 명확하게 예언된다. 그 요지는 '그 왕이 이 성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본문에서 2번 반복되고 있다. '방패'(*, 마겐)는 화살과 창을 막을 뿐 아니라 성벽에 접근했을 때, 위에서 떨어지는 돌이나 역청을 막는데도 사용되었다. '흉벽'으로 번역된 '솔렐라'(*)는 돌을 들어 던지는 전쟁 무기(Calvin)가 아니라 언덕 위에 있는 도성을 공략하거나 포위할 목적으로 쌓아 올린 작은 토성을 가리킨다(렘 32:24, Delitzsch, Oswalt).

성 경: [사37:35]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구원하리라 -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받은 것은, 첫째로, 산헤립에 의해서 모욕되고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23절)을 보존하고 그 영광을 천하 만국에 증거(20절)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 종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한 것이다. 다윗 언약의 핵심은 '다윗의 나라와 그 위가 그의 자손들로 더불어 견고케 되며 영원히 보존된다'는 것이다(삼하 7:12, 13, 16). 이 약속은 후에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영적으로 참되고 온전하게 성취되었다(9:7;11:1;55:3;렘 30:9;겔 37:24;호 3:5 참조, Oswalt, Calvin).

성 경: [사37:36]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 선지자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의 대군을 잃고 비참한 모습으로 고국으로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을 보도한다. 이러한 패배는 그가 하나님과 더불어 대적하고 싸운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것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첫째로, 앗수르 군대의 몰살은 단 하룻밤 사이에 기적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근거해서,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용한 치명적인 살육의 도구는 쥐가 옮기는 페스트 전염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없다. 설혹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전염병으로 인해 엄청난 숫자의 대군이 몰살당한것 역시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이 기적의 주체는 '여호와의 사자'였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유월절의 밤에 애굽의 장자들을 단번에 살육하였던 '죽은의 천사'를 연상시킨다(출 12:12).

성 경: [사37:37]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떠나 돌아가서 - 직역하면 '(야영지를) 해체하고(*, 이사), 떠나서(* .옐레크) 돌아왔다(*, 야솨브)'이다. 연속적으로 배치된 이들 세 동사는 그들이 혼란 중에 서둘러 퇴각하였음을 보여준다.

성 경: [사37:38]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주);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그를 칼로 죽이고 - 산헤립의 최후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되었다(7절). 그는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암살은 그가 신전에서 '니스록'신에게 경배할 때에 일어났다. '니스록'(*)은 '결합자'라는 뜻인데 아마도 산헤립의 개인 수호신인 듯하다. 앗수르의 대표적인 신들 이름에는 '니스록'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의 개인 이름에는 '니스록'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이 그의 신에게 기도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이 아니라 아들들의 손에 의한 비참한 죽음이었다.

성 경: [사38:1]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주); 그 즈음에 - 히스기야 왕은 29년을 통치하였다(왕하 18:2). 그중 15년은 질병이 나은 후에 여호와의 은혜로 생명이 연장된 기간이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그의 재위 14년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의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36:1). 히스기야 왕이 치명적인 병을 얻어 죽음을 선고받은 후에 여호와 앞에서 그토록 슬퍼하며 통곡한 것도 이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그가 슬퍼한 것은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보다도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민족이 당할 비극적인 처지를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Calvin, Vitringa)은 히스기야의 질병이 앗수르 군대 퇴각 이후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 들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치유 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구원까지 약속되고 있기 때문이다(6절). 따라서 본장과 39장의 사건은 36, 37장보다 시간적으로 앞에 위치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Lange, Leupold, Oswalt, Delizsch).

(주);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 히스기야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21절의 '종처'(腫處)라는 말을 근거로 할때, 그의 병이 염증을 동반하는 치명적인 병-가령, 종기나 등창 같은-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레 13:18;욥 2:7 참조).

(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 '살지 못하리라'는 말은,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히스기야에게 이 말은 결코 변경될 수 없는 냉혹한 사형 선고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철회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새의 운명과 관련된 하나님의 선고에도 집행 유예(執行猶豫)는 있다(출 32:6-12 참조). 언제나 인생에게 복주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의 종들이 기도를 기꺼이 들으시며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나, 성도의 기도는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을 변경시킬 수 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다(Oswalt).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히스기야의 겸손과 기도의 열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다.

성 경: [사38:2]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주);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기도하며 - 이러한 행동은 아합 왕이 취했던 것과 일견 비슷하게 보이나(왕상 21:4), 그 기본 정신에서는 크게 차이가 난다. 아합이 그의 얼굴을 벽으로 향한 것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한 노여움에서였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자세를 갖기 위해서이다.

성 경: [사38:3]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주); 여호와여 구하오니...추억하옵소서 - 히스기야의 기도는 '의인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구약의 확신에 부합되는 것이다(시 4:3;6:8;17편;26편;34:15, 17, 18;잠 15:29).그러나 그 초점은 행동의 완전함이 아니라 동기의 순전함에 모아진다. 히스기야도 인간인 한 비록 그의 행사가 다 완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순전한 양심에 따라 최대한 바르게 행하고자 하였다. 왕하 18:1-7에 나오는 역사적인 기록과 평가를 참조하라.

(주); 진실과 전심으로 - 문자적으로는 '진리(*, 에메트) 안에서 그리고 완전한 마음(*, 레브 솰렘) 안에서'이다. '에메트'는 흔들림없이 일관되게 일을 추진해 나가는 성실성을 가리키며, '레브 솰렘'은 나뉘지 않은 마음의 온전함, 즉 정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 경: [사38:4]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주); 이에...가라사대 -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선지자에게 전달된다. 첫 번째 말씀과 두 번째 말씀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그렇게 오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하 20:4의 평행구에서 볼 수 있듯이, 선지자는 그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38:5]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말씀하시기를 -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할 때는 여호와의 이름만 간단히 언급되었다(1절). 그러나 위로를 제시할 때, 선지자는 여호와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명칭으로 부른다. 이는 히스기야에게 베풀어진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가 그 조상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기인한 것이며,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Calvin). '다윗'은 단순한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왕국의 연속성을 약속받은 인물로서 언급되고 있다(삼하 7:12-16). 물론 이 영속성이 다윗 자신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 관련된 것임을 말할 나위도 없다.

(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 '듣고-보았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참되고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셨다는 말이다. 여호와는 의인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들으시며, 특히 의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귀하게 보신다.

성 경: [사38:6]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주); 너와 이 성을...보호하리라 -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약속은 유다에 이미 진주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의 위협으로부터의 일시적인 보호뿐만 아니라(Hitzig, Hendewerk, Knobel). 동시에 일단 퇴각한 후에도 계속해서 있을 수 있는 추가적인 모든 위협으로부터의 완전한 보호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Gesenius, Rosenmtiller). 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으니 앗수르는 결코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사38:7]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주); 나 여호와가...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 개역 성경은 1인칭 문장으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3인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 '그리고 이것이 여호와께로부터 너에게 (주어질) 징조니, 그가 말씀하신 이 말씀을 여호와께서 이루실 것이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일의 순서상 이사야의 말이 주어지기 전에 징조를 구하는 히스기야의 적극적인 요청이 선행되었을 것이다(22절; 왕하 20:8 참조). 이 점에서 히스기야의 행동은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의 불신 행위와 대조를 이룬다(7:12, Skinner, Oswalt).

성 경: [사38:8]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주); 아하스의 일영표에...물러가게 하리라 - '아하스의 일영표'는 히스기야의 선왕(先王) 아하스가 세운 해시계를 말한다.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의하면, 일영표는 바벨론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herod. .109). 이것이 앗수르에 의해 전달되었을 것이고, 아하스가 다메섹에 있는 디글랏 빌레셀을 방문했을 때 이에 대한 지식을 도입한 듯하다(왕하 16:10 참조). '일영표'는 문자적으로 '계단들'(*, 마알로트)이니, 해가 떠오를 때와 질 때를 기준으로 해서 계단에 드리워진 그늘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왕하 20:9, 10의 병행구에 따르면,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그림자가 앞으로 10도 나아가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제안했으며, 왕은 좀더 어렵게 보이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주); 이에...물러가니라 - 히찌히(Hitizig)는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간 현상을 히스기야의 죽음이 뒤로 연기된 것과 평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10'이라는 숫자 대신에 '15'라는 숫자가 사용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칼빈(Calvin)은 '당시 해시계는 12눈금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하였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숫자상의 차이 때문에 꺼림칙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시계의 눈금의 정확한 수치는 차치하고라도, 해시계 자체에 대해서 학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더구나 이 징조는 히스기야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이적적'인 것이다(대하 32:31 참조). 그럴진대, 이러한 현상이 히스기야의 눈앞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혹자는 이것을 부분적인 일식 현상으로 해석한다(Bosanquet). 그러나 이로써는 그림자가 뒤로 물러감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장 적절한 해석은 이것을 시각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서 빛의 굴절 현상으로 인해 오후에 바닥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이적적으로' 위로 옮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Delitzsch, Lange, Oswalt). 본문에서도 '뒤로 물러간 것'은 태양이 아니라 그 그림자였다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태양의 진행이 한시적으로 거꾸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물리학적인 견지에서 이 지구상에 엄청난 문제점들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통상적으로 자신이 설정해 두신 이 세상의 법칙들과 조화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듯하다. 마침 신기루가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상한 현상을 나타내듯이, 그 징조는 빛의 굴절 작용으로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Leupold). 그러나 본문 자체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문제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추론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성 경: [사38:9]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유다 왕 히스기야가...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 히스기야 왕의 시편(9-20절)은 오직 본서에서만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편을 죽음의 병에서 회복된 후에 지었다.본절은 이 시편의 표제인데,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유다 왕 히스기야의 글(*, 믹탑), 그가 병들었다가 그 병에서 살아난 때'(원문). '믹탑'은 보통 '기록된 글' 혹은 '쓰여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이 다른 시편의 표제에는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게세니우스(Gesenius)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믹탐'(*)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믹탐'은 시편의 전문 용어로서, 시 16편, 56-60편에서 표제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문학에 탁월하였던 히스기야는 성전 예배시에 관악과 성악을 복구시켰으며(대하 29:25-30), 특히 위원회를 결성하여 잠언을 수집하고 고대 문서들을 수집, 보관하는 등의 일을 추진케 한 바 있다(잠 25:1). 따라서 이러한 그가 본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은, 몇몇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 경: [사38:10]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 직역하면 '내 날들의 고요함 가운데서 음부의 문으로 내가 달려간다'이다. '고요함'(*, 데미)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건강한 생활의 평탄한 과정'(Delitzsch), '격정의 때가 지나고 사람의 성격이 한층 고요해지는 때'(Umbreit), '정오의 휴지(休止)'(Cheyne)의 긍적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진다(Gesenius, Maurer, Knobel). 그럴진대, '내 날들의 고요함'을 '내 생애의 정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NSB). '음부의 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이다(5:14;14, 9, 11, 15;28:15, 18, 삼하 12:15-25하 주제 강해, '구약의 사후(死後) 개념-(陰府)' 참조).

성 경: [사38:11]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내가 또 말하기를...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 계속하여 히스기야는 돌연한 죽음으로 인하여 그가 상실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를 노래하니, 그 첫째는 '여호와를 뵈옵는 것'이며, 그 둘째는 '사람들(동료)과 교제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뵈옵는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본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에서 공중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그와 살아있는 접촉과 교제를 나눈다는 말이다(시 11:7;17:15;27:4;42:2;63:2;84:2 참조).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는 필경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히스기야가 생존세계, 곧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들이었는데 이제 죽음의 자리에서 이것들을 안타깝게 추상하는 것이다.

(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뵈옵지 못하겠고 - 히브리어 원문에는 '여호와'의 단축형인 '야'(*)가 연속해서 두 번 나온다. 직역하면 '내가 보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 여호와. 산 자들의 땅에서'이다. '야 야'(*)는 '야훼'(*)의 오류가 아니라 강의적인 반복을 나타내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사38:12]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나의 거처는...하였도다 - 자기 생명의 덧없음을 상기하면서 시인은 그것을 두 가지로 비유한다. (1)목자가 장막을 걷음 : 목자는 목초지가 싱싱한 곳에 '장막'(*, 오헬)을 세우고 짐시 기거한다. 그러나 그 기간은 풀이 남아 있을 때뿐이다. 풀이 마르면 목자는 곧 장막을 걷고 새로운 곳을 찾아 이동한다. (2)직공이 베를 틀에서 끊음 : 피륙이 베틀에서 완성되어진 다음에는 순식간에 직공의 손에 의해서 잘려진다. 인생의 덧없음에 대하여는 40:6-8;마 6:30;벧전 1:23을 참조하라.

성 경: [사38:13]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 탈굼역(Targum)은 본문의 동사(*, 쉬위티)를 변형시켜 '(괴로움으로 인해 나는 사자처럼) 포효하였다(*, 쉬와티)'라고 읽는다(Houbigant).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사자'에 비교된 이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데 난점이 있다. 또 혹자는 '솨와'(*) 동사에 '...과 같이 되다', '...에 필적하다'는 뜻이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나는 아침까지 (사자)와 같이 되었다(즉, 포효하였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뒤에 나오는 '뼈를 꺾는다'는 표상을 '사자'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시 7:2), 동일한 표상을 양자 모두에게 적용해야 하는 보순에 빠지게 된다(Alexander). 그러므로 문맥상 본절은 히스기야가 극한 고통 속에서도 인내로서 밤을 세웠으나, 아침이 되어도 병세는 그대로였으며 오히려 '사자가 그의 뼈를 물어 뜯는 것'과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거의 죽게 된 사람처럼 혼미한 소리를 내뱉는 뜻으로 이해함이 무난하겠다.

성 경: [사38:14]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여호와여...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 구원을 호소하는 왕의 탄원은 '주여'(*, 아도나이) 라는 외침으로부터 시작된다 : '주여! 나에게 억압, 나의 보증이 되소서'(원문). '억압'(*, 아쉐카)은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느끼는 짓눌림을 나타내는 전문적인 법정 용어이다(마 18 : 28-30 참조). '나의 보증이 되소서'(*, 아르베니)라는 단어 역시 법정 용어이니, 채무자의 압박을 경감시켜 주기 위해 그 빛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시 119:122;잠 20:16;27:13 참조). 히스기야는 채무자의 입장에서 채권자이신 여호와께 자신을 위해 보증이 되어 달라고, 즉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욥 17:3, Wildberger, Cheyne, J. Watts).

성 경: [사38:15]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각근히 행하리이다 - 본절을 기점으로 시편의 정조가 '비탄'에서 '찬양'으로 급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고-행하셨다'는, 즉 '주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셨고-죽음의 질병으로부터 구원해주셨다'는 두가지 사실로부터 유도된다.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 앞에서 시인은 할 말을 잊는다 :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삼하 7:20 참조, Alexander, Delitzsch, Leupold, Lange, J. Watts). 이제 그는 은혜로 부여받은 15년이라는 여생을 지난날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엄숙하고도 경건하게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각근히 행하리이다'의 히브리어 '에다데'(*)는 시온산을 향해 나아가는 백성들의 엄숙한 행진을 묘사하는 말이다(시 42:4).

성 경: [사38:16]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주옵소서 - 본문은 개역 성경처럼 간구 형태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여기 사용된 두 동사는 모두 히필형(사역형 능동)으로서 명령형뿐만 아니라 미완료형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미완료형으로 번역할 경우에는, '당신이 나를 치유하시며(*, 타할리메니). 나를 살게 하시리이다'(*, 하하예니)가 되어 두 동사 모두 기도자의 확신을 나타낸다.

성 경: [사38:17]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보옵소서...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 죽음에서 벗어난 후 히스기야는 자신의 이전 고통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가져다준 영적인 유익을 노래한다. 히스기야는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건강의 축복을 '평안'(혹은 '온전함', *, 솰롬)이란 한 단어로 요약하여 말한다. 진실로 깨닫는 자에게는 고통조차도 그를 연단, 완성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롬 8:28 참조).

(주); 주께서...사랑하사...건지셨고...던지셨나이다 - '사랑하사'에 해당하는 '하솨크'(*)는 내적으로 확고하게 결합된 사랑을 의미한다. 또 '멸망'의 히브리어 '벧리'(*)는 '허무', '부정'을 뜻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는 의미로 취한다. 그리고 '등 뒤에 던지다'라는 말은 '주께서 사라지게 하다', '망각하다',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느 9:26 참조). 반대로 주께서 무언가를 기억하실 때는 그 대상을 그의 얼굴 앞에, 눈앞에 놓으신다고 표현된다(시 90:8; 109:15;렘 16:17;호 7:2). 결국 하반절은 히스기야가 자신에게 선고된 죽음의 재난을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시 103:3, 4 참조, Alexander).

성 경: [사38:18]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 본절과 19절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하여, '죽음'과 '생명'을 대조시킨다. '죽은 자는 하나님을 찬미하지 못한다'는 구약적 인식에 관하여는 욥 10:21, 22;시 6:5;30:9;88:10-12;115:17 등을 참조하라. 특히 본절과 관련하여,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은 히스기야가 죽음을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결과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Calvin).

성 경: [사38:19]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 '산 자 곧 산 자'(*, 하하)는 강의적 반복이다(11절 참조). 죽음을 선고받은 자의 슬픔의 '어제'와, 죽음에서 벗어난 자 곧 산 자의 찬미의 '오늘'이 대조되고 있다(Lange). '주의 신실을 아비가 자녀에게 알게 한다'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된다(출 12:24-27;신 6:7 참조). 왜냐하면 이 당시 히스기야는 아직 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Alexander).

성 경: [사38:20]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노래하리로다 - 히스기야의 시편은 그가 자신의 동료 예배자들에게 자기와 더불어 찬미할 것을 권유하는 말로 끝난다. 찬미의 주제는 '여호와의 구원'이며, 그 방법은 '악기를 사용하여 노래하는 것'이며, 그 장소는 '여호와의 전'이다. 아마도 히스기야는 성전에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염두에 둔 듯하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는 '여호와'라는 고유 명사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라는 부정사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문장이다. 가장 무난한 독법은, 부정사에 임박한 미래적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생각하고 본문을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로 읽는 것이다(Oswalt).

성 경: [사38:21]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이사야는 이르기를...왕이 나으리라 하였었고 - 앞에서 언급하지 못했던 사항들을 이사야 선지자는 부연하니, 그중 첫째가 치료약에 관한 것이다. 선지자는 왕에게 무화과 열매를 찧어 만든 찜질약을 종처 부위에 바르도록 처방하였다. 무화과나무는, 델리취(Delitzsch)에 의하면, 종기를 빨리 곪게 하여 고름을 터뜨리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무화과나무는 오히려 종기에 해로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Grotius). 이들의 말에 따르면, 무화과나무가 상처에 해로운데도 붙이게 한 것은, 히스기야의 질병이 오직 여호와의 권능에 의해서만 기적적으로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치료를 매개 물질 없이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역사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모든 치유 행위는 여호와께 속한다. 그는 때때로 병을 직접 치유하시나, 또다른 경우에는 매개 물질을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치유하기도 한다(Oswalt).

성 경: [사38:22]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주); 히스기야도 말하기를...하였었더라 - 선지자의 처방 다음에 징조를 구하는 히스기야의 요청이 이어진다(왕하 20:7, 8). '여호와의 전에 올라간다'는 말은, 예배드리기 위하여 혹은 여호와를 찬미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간다는 말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왕하 20:5). 이에 히스기야는 그 약속을 확증할 수 있는 징조를 요구했으며, 여호와께서는 해의 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가는 이적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다(8절).

성 경: [사39:1]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주); 그 때에 - 바벨론의 사절들이 히스기야 왕을 찾아온 것은, 왕의 병이 회복된 직후였다. 본장의 사건은 38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주); 므로닥발라단이...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앗수르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두 번에 걸쳐 바벨론을 통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맨 처음에 그는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반대하여 B.C. 721-710년까지 12년간 바벨론을 통치했다. B.C. 710년에 사르곤 2세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 뒤 재기하여 산헤립에 대항하여 다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여기 언급된 사건은 이중 후자의 연대(B.C. 701년 직후)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병에서 회복한 왕에게 사절을 통해 선물과 축하의 서한을 보내는 것은 고대의 관례에 속한 일이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사절들을 파송하면서 외교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그 사실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지만(대하 32:31 참조). 진정한 속셈은 유다의 도움을 입어 앗수르에 대항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

성 경: [사39:2]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주);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며 - 히스기야의 기쁨은 사절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정중한 방식으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한 바벨론 왕의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지만(Alexander), 더 크게는 유다와 같은 약소 국가가 감히 바벨론의 군사 동맹 상대로 인정받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이다(Leupold).

(주); 그에게 궁중 보물...다 보였으니 -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의 사절들에게 궁중의 보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여준 것은 이러한 자부심의 외적 표현이며, 유다의 국력을 널리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왕은 바벨론이 지리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왕은 자기를 드러내고 세상의 보물을 자랑하는 데 급급하였다. 역대하 기자는 이 장면을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신' 것으로 본다(대하 32:31). 왕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취함으로써 이 시험에 실패하였으며, 결국 이로 인해 유다의 바벨론 포로가 예고되기에 이른다.

성 경: [사39:3]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주);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나아와 -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온 것은 바벨론 사절들이 떠난 직후였을 것이다. 이사야라는 이름 앞에 '선지자'라는 직함이 언급된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사람으로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 묻되...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세 가지 물음을 던진다. (1)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나이까?' : 이에 대해 왕은 대답하지 않는다. 외국과의 동맹에 대한 선지자의 부정적인 입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왕으로서 이 문제를 가급적이면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Gesenius, Oswalt). (2)'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 이에 대해 히스기야는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까닭을 학자들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왕의 개인적인 명성과 정치적인 중요성이 먼 거리에 있는 바벨론에까지 퍼졌음을 은근히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Calvin). 둘째, 친선과 우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먼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환대한다는 것은 마땅한 도리라는 점을 내세워 자신의 잘못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다 (Vitringa). 셋째, 선지자의 의심과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Knobel). 둘째 의견이 가장 자연스럽게 보인다.

성 경: [사39:4]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주); 이사야가 가로되...하나도 없나이다 - 선지자의 세 번째 물음이 주어진다. 즉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 왕의 대답은 매우 솔직하다. 그러나 왕의 대답 속에 담긴 솔직함이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성 경: [사39:5]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주); 왕은...들으소서 - 엄숙하고도 권위있는 신적(神的)인 판결이 주어질 때, 전형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병행구인 왕하 20:16에는 '만군의'(*, 체바오트)라는 말이 빠져 있다.

성 경: [사39:6]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주); 보라 날이 이르리니...남을 것이 없으리라 -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형벌은 히스기야가 지은 죄-역대하의 기록에 따르면, 그것은 교만의 죄이다(대하 32:25)-에 상응해서 주어진다. 히스기야가 왕가의 모든 보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 사절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였듯이, 그와 그의 조상들이 축적한 바로 그 보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기우게 될 것이다(Jarchi, J. Watts, Leupold).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된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미래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옮겨지게 되니, 본서의 제 1부가 앗수르와 관계했던 방식으로, 이제 본서의 제 2부는 바벨론에 관계하게 될 것이다.

성 경: [사39:7]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주);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하셨나이다 - 바벨론으로 옮기우는 것은 히스기야의 보물만이 아니다. 장차 그에게서 날 자손 중 몇 명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왕궁의 환관(*, 사리심)이 될 것이다. 참조로 '사리스'(*)에는 '고자', '환관'이라는 뜻도 있다(창 37:36; 39:1; 왕하 8:6 등 참조, Targum, Gesenius, Lange). 본절 첫구절에 표현된 미래형을 통해서 히스기야가 아직 자손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Delitzsch, Alexander). 본 예언의 성취 여부에 대하여는 왕하 24:12-16;단 1:1-7을 보라.

성 경: [사39:8]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당신의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긍적적인 의미로, 혹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이 말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히스기야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파멸 선고가 그 당대에는 임하지 아니하고 그 후손들에게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기뻐한다는 것이다(Gesenius, Hitzig, Oswalt). 그러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는 말은 그러한 이기심의 절정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파멸의 선고 중에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때를 늦쳐 주신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대하 32:26 참조). 이와 유사한 경우에 대하여는 왕하 22:18-20을 보라. 따라서 히스기야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많은 주석가들과 더불어 '좋소이다'라는 말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가 '타당하다'(just)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인식과 그리고 형벌의 때를 늦쳐준 것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크나큰 '자비로움'에 대한 감사가 복합적으로 함축된 개념으로 파악한다(Alexander, Calvin, Delitzsch, Leupold, J.Watts, Lange).

성 경: [사40: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위로]

(주); 위로하라...위로하라 - 앞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 본절의 내용은 다소 돌연적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표현 방식이 본서의 특징임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무대는 바벨론 포로시대로서 이제 그 시대의 종결의 임박성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이 두 번 반복됨으로써 그 성취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피력한다.

(주); 내 백성 - 본절 앞부분의 '너희 하나님'과 본 용어는 상호 연관성을 지닌다(렘 31:33;호 1:9, 10). 이 둘은 언약적 용어인데, 여기서 이 용어가 사용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슴 아픈 사건(특히, 바벨론 포로 사건)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맺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파기되지 않았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Fausset, Whybray).

성 경: [사40: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위로]

(주);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 히브리어 원문은 '키 나르차 아오나'(*)이다. 여기서 '니르차'(*)의 원형은 '라차'(*)로서 '죄값을 지불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위로의 메시지의 핵심은 죄값이 지불되었다는 것,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망했고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하는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죄사함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심판도 궁극적 의미의 심판은 아니었다. 궁극적 심판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이스라엘은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 신실성으로 말미암아 본문과 같은 약속을 받게 되었을 따름이다.

성 경: [사40: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주); 외치는 자의 소리여 - 히브리어 원문 '콜 코레'(*)는 서술적 용법('한 음성이 외친다'), 형용적 용법('외치는 음성'), 명사적 용법('외치는 자의 음성')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본 구절을 인용한 마 3:3과 본서에서의 용례를 고려할 때 명사적 용법의 번역이 좋다. 그렇다면 '외치는 자'가 누구이냐라는 문제가 생기는데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6:4에 근거할 때 천상적 존재, 곧 천사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여기 '사막'을 단지 바벨론과 팔레스틴 사이에 있는 지리상의 광야로만 생각함으로써 본 구절을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한 언급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본서가 지향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너무 축소시킨 견해이다. 가깝게는 2절에서 분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암시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본문은 우주적 구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막'은 죽음의 땅, 심판의 땅이며 그 같은 땅에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9:1-7).

성 경: [사40: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본절은 동방의 군주들이 여행에 앞서 선발대를 보내어 골짜기에 길을 만들고 언덕을 평평하게 함으로써 여행에 장애를 주는 요소들을 제거하던 관행을 연산케 한다. 한편 본절은 침례 요한에게 적용될 수 있는데 침례 요한의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에서 떠난 것, 자기 확신, 민족적 특권에 대한 자만심, 위선 그리고 비종교성을 제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꺼이 준비케 하는 일이었다(말 4:6;눅 1:17).

성 경: [사40: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여기 '모든 육체'란 인간의 본성 혹은 일반적인 의미의 인류를 가리키는데(창 6:12;시 145:21). 본절에서는 후자가 옳다. 한편 '보리라'에 해당하는 '라우'(*)는 '몸소 체험하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출애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익숙했던 여호와의 현현보다는(6:3;출 33:18-23) 성육신하신 하나님 곧 예수의 오심을 암시한다. 신약은 이 사실을 이렇게 묘사한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 경: [사40: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주);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 여기 '아름다움'은 '하스도'(*)인데 그 원형은 '헤세드'(*)이다. 이 말이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 견해가 있는데 그 하나는 인간 관계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예의이며(Gleek), 또 다른 하나는 친절 긍휼이 여김이다. 야보고와 베드로는 둘 다 이것을 '돝사'(*) 곧 '영광'으로 번역하였는데(약 1:10, 11;벧전 1:24, 25) 이 영광이란 어떤 사람을 아름답게, 힘있어 보이게 하는 건강, 기력, 미, 재능, 지혜 등을 뜻한다(Barnes). 인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예법, 그것을 지나서 상대방에게 친절, 선을 베푸는 것 그리고 건강미, 지혜 따위가 들의 꽃과 같이 마르고 시들 것이라고 본문은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모든 자랑거리와 아름다움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함을 뜻한다.

성 경: [사40: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본절의 이미지는 사막의 열풍(sirocco)이 불어올 때 봄에 피어난 꽃들이 갑작스럽게 시들어버리는 현상에서 취해졌다(Whybray).

성 경: [사40: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주);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 본문의 의미는 말씀의 영원성과 불변성뿐만 아니라 유효성, 곧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서리라'로 번역된 '야쿰'(*)이 바로 '유효성'의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용어이다.

성 경: [사40: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주); 높은 산에 오르라 - 이는 적군의 침입을 알리기 위하여 파수대 따위와 같은 높은 곳에 머물렀던 파수꾼이나(52:8) 자기 부대의 도착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앞서 파송되어 높은 지대로 오르곤 하였던 전령(삼상 31:9;삼하 18:19-21)의 모습에서 착안한 표현이다. 한편, 높은 산에 올라 전할 '아름다운 소식'이란 1차적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 소식이며, 더 나아가서는 성육신하여 오실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성 경: [사40:1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주); 상급...보응 - 전자는 '쉐카로'(*), 후자는 '페울라토'(*)인데 이 용어들은 전투의 승리자가 본국으로 귀환할 때 가져갔던 노획물 혹은 공물 따위를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강한 능력을 동반하고 오실텐데 그때에는 여호와를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흑암의 세력들이 패퇴당할 것이다.

성 경: [사40:1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본절은 그 내용상 앞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하나님이 강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얻은 대가는 새끼 밴 암양과 양떼 곧 새롭게 회복된 백성이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는 성도의 목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게 한다(요 10:11-15).

성 경: [사40:1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손바닥...뼘...되...명칭...간칭 - 이들은 모두 당시의 측량 도구를 가리키는데, 본절에서 이것들을 가지고 달고 재어보는 대상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다. 당시보다 오늘날은 측량 도구가 발달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것이든 오늘날의 것이든 간에 그것들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이 위대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성 경: [사40:1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 '모사'란 '이쉬 아차토'(*)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그의 조언의 사람'이다. 본문은 당시 군왕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정치 전문가들에 의존하였던 사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절은 하나님을 조언할 책략가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自己充足性)과 초월성을 가르친다.

성 경: [사40:1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하나님의 피조 세계조차 헤아릴 자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에 통달하고 하나님을 유일 무이성, 초월성 및 무한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세상 존재와 구별되는 거룩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다.

성 경: [사40:1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저울의 적은 티끌 - 원문 직역은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이다. 본절은 물동이의 물 한 방울,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 등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눈에 보이는 가시적 물리 집단인 당시의 국가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사40:1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표면상으로 본절은, 하나님이 비교할 상대가 없는 위대한 분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핵심적인 의미는, 그 유명한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이나 짐승들로도 그분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기에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땔감용 나무와 희생 제사용 짐승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틴이 가장 울창한 삼림과 가장 풍성한 동물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성 경: [사40:1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아무것도 아니라...없는 것...빈 것 - 이에 해당하는 세 히브리어 '아인'(*) '메에페스'(*), '토후'(*)는 우상과 관련한 묘사에서 자주 언급된다(41:24, 29;44:9-11;46:1, 2). 물론 여기서는 제 힘만 믿고 제국주의적 야심에 불탔던 열방들에 대한 풍자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주권 앞에서 그들의 존재란 무기력하고 미미하기 짝이 없다는 점에서 허탄하고 허무한 우상(18절 이하 참조)에 비교될 수 있겠다(Watts).

성 경: [사40:1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인간이 가진 특징 중에 하나는 경험한 세계를 토대로 경험치 못한 세계를 상상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유용하다. 그러나 그 같은 기능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피조 세계에 보이는 어떤 사물이나 인간을 연관시키는 목적에 사용할 때는 우상 숭배라고 하는 극악한 죄에 빠지게 되는데 바로 이점을 본절은 지적하고 있다.

성 경: [사40:1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본절은, 우상이 인간의 고안물임을 밝히고 있다. 앞부분에서(17절) 열국을 말하고 나란히 우상을 말하는 까닭은 고대 세계에서 한 나라와 우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을 단지 전쟁 당사국간의 싸움이 아니라 나라마다 섬기던 신들 간의 싸움으로 믿었다. 따라서 싸움 후 진 편의 신은 없어지든지 이긴 편의 신에게 종속적 존재가 되곤 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당시 이방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바벨론의 말둑(Marduk) 신에 의한 하나님의 패배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18절에서부터 저자는 우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물건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사40:2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 우상을 세운 사람이 그 마음대로 옮기거나 고정시킬 수 있음을 암시함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분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 경: [사40:2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본절은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기 위해 질문하는 교사를 연상케 한다. 이스라엘은 어려서부터 만물의 기원을 배웠다. 저자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와 초월해 계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의문법을 사용하고 있다.

성 경: [사40:2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메뚜기 같으니라 - 땅과 하늘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람이 지극히 자그마하게 보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문맥상 하나님과 비교조차 되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과 미미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성 경: [사40:2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귀인들을...헛되게 하시나니 - 인간의 눈에 방백이나 재판관들은 힘있는 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무력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권세를 주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제든지 그 권세를 폐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사40:2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37:31과 뚜렷이 대조되는 구절이다. 견고하게 뿌리내려 과실을 맺는 의인과는 반대로, 악인은 열매는 커녕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는 식물에 비유되고 있다.

성 경: [사40:2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 이에 해당하는 '에쉬에'(*)는 문자적으로 '내가 같아지겠느냐'는 뜻이다. 하나님의 유일 무이성이 이번엔 하나님 자신의 말로써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하에서는 이러한 강조의 근거가 이어지고 있다.

성 경: [사40:2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눈을 높이 들어...보라 - 하늘 영역을 보라고 말한다. 25절까지에서는 땅의 영역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하늘 영역에까지 확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 완전성, 절대성을 증명하고 있다.

성 경: [사40:2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본절에서는 야곱, 곧 이스라엘이 자신은 정당한데 그 정당한 사정이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다고 원망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우리는 26절에까지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절대성, 초월성, 무한성, 무비성(無比性)이 강조된 것을 보아왔는데 본절부터 31절까지에서 그 강조한 바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성 경: [사40:2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정이 외면당했다고 생각하여 절망, 좌절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영원하신 분,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 그리고 한번 시작한 일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일관성 있는 분, 신실한 분, 아무도 깨달을 수 없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신다.

성 경: [사40:2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계속해서 본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긍휼에 풍성하신 분임을 첨가하고 계신데, 영원, 무한, 신실, 전지하신 분이 힘없고 능력없는 자에게 힘주신다는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든다.

성 경: [사40:3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 '장정'에 해당하는 '바후림'(*)의 문자적인 뜻은 '선발된 자'인데 이들은 긴박한 사업, 위험한 일 등을 수행하기 위하여 피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들이 특별히 뽑힌 장정들이라고 할지라도 질병이나 피로, 사고 등에 의하여 그 힘이 쇠약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성 경: [사40:3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의존적 존재이므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강한 권고의 말씀이다. 본서 1장은 이스라엘의 당면된 현실을 바라보면 소망이 없음을 강변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과 가능성을 조금씩 비치기 시작하는데 그 절정은 53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성 경: [사41:1]

(주); 섬들 민족들 - 전자는 '이임'(*)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를 가리키는데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블레셋, 페니키아 등이 그런 나라들이겠다. 그러나 '이임'이 후자 곧 '민족들'로 번역된 '레우밈'(*)과 나란히 사용할 경우, 이것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들을 포함한 세계 모든 민족들을 가리킬 수 있다. 서로 변론하자 - 문자적인 뜻은 '함께 재판하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논쟁하다', '조목조목 따져 보다'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논쟁을 통하여 가려볼 사실은 각 열방들이 각각의 신들을 신뢰하고 있는 이유 및 참신은 과연 누구냐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혹자는 이렇게 본 구절을 번역하고 있다 : '자함께 엄숙한 토론의 장으로 들어가 보자'(Lowth).

성 경: [사41:2]

본절 상반절의 맛소라 원문 직역은 이와 같다 : '누가 동방에서 일으켰느냐. 그 의가 그 발 뒤를 따르리라.' 본절에는 두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전자는 완료형인 '일으켰느냐'로 번역된 '헤이르'(*)이고 후자는 '이르게 하였느뇨'로 번역된 '이크라에후'(*)로서 미래형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40-66장을 제2이사야서로 보고 그 저작 시기는 포로기 말엽 혹은 포로 귀한 후로 추측하는데, 더욱이 '혜이르' 곧, 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그 당시 이미 활약 중이던 고레스를 지칭하는 것이라 단정한다. 그러나 또 다른 동사가 분명한 미래형이며 그 내용도 미래적임을 고려할 때, 이 완료형 동사는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하나님이 사용하기 위하여 세운 동방의 사람은, 고레스가 그 그림자인 미래에 임하실 메시야를 예언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사41:3]

(주); 안전히 지났나니 - 여기 '안전히'의 원문 직역은 '평화롭게'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으킨 인물이 정복 사역을 감당하되 그 사역은 피를 흘리게 하는 폭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하게 암시한다.

성 경: [사41:4]

(주);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命定)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 문자 그대로는 '시초부터 시대들을 불러서 존재케 하신 분이 누구냐?'는 뜻인데 여기 역사적 의미의 시간을 의미하는 '도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 구절이 강조하는 바는 역사의 주제 곧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인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유일 독특성과 이스라엘의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음이 언급된 후에 비록 열국과의 변론 형식을 취하긴 하지만 동방에서 사람을 불러내어 세계를 정복케 하리라는 언급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본문에서 특히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이란 그 인물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성 경: [사41:5]

섬들, 땅 끝, 곧 세계 만민을 놀라 떨게 할 대상이 생략되어 있지만 문맥상 동방에서 일으킬 한 인물이 바로 그 대상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사41:6]

(주); 담대하라 - 원문 직역은 '강하라'이다. 이것은 한 인물의 출현으로 온 세계가 떨면서도 내놓는 자구책의 일종인데, 그것은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성 경: [사41:7]

본절은 두려워하는 역국이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도모하는 자구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우상 손질이며 그 묘사는 회화적이다. 즉, 본절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한 상황이 닥칠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서도 인간의 지혜, 능력을 대변하는 우상을 손질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분주함을 그림을 보여주듯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사41:8]

(주); 나의 종 야곱 아브라함의 자손 - 먼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그의 도구로 택함받은 존재를, 두 번째는 족장사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선택된 존재를, 세 번째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상속자 곧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각각 함축하는 호칭들이다. 본 예언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역하다가 심판당하여 노예로 잡혀감으로 온 나라가 없어진 상황인데,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그의 뜻을 이루는 당신의 도구로 부르신다. 그렇다면 족장사를 통해서 택한 이스라엘의 선택은 아직도 유효하며,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속에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씨로서 하나님이 세우기로 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사41:9]

(주);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 이는 하나님이 땅 끝과 같이 먼 곳에까지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과 여전히 관계를 맺고 계심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유효성은 불변한다는 사실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

성 경: [사41:10]

(주); 놀라지 말라(* , 알 티쉬타) - 여기 '티쉬타'(*)는 '보다', '주시하다'의 뜻인 '솨아'(*)에서 온 말로서 다급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눈을 크게 뜨고 그 대상을 주시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이 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한 사실의 유효성은 아직 불변함 곧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사41:11]

(주);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 수치와 욕을 당한다는 것은 정복당하고 멸망한 개인이나 단체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한편 40장이 주는 바벧론으로부터의 유다를 구한다는 수동적 측면을 다룬다면, 본장은 여기 보듯이 역으로 적국들을 완전히 정복한다는 구원의 적극적 측면을 다룬다. 물론 이 예언은 메시아의 초림에 따른 복음의 영적 승리와 재림에 따른 메시아의 종말론적 승리를 복합적으로 예언한 내용이라고 보아도 무난하겠다.

성 경: [사41:12]

(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 이 표현은 그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될 정도로 말끔히 치워버린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36:37 참조). 대적의 멸망으로 입증될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사41:13]

(주); 나 내가 - 둘다 원어로는 1인칭 강조사인 '아니'(*)로서 다른 성경 특히 다른 선지서들에 비해 월등히 많이 본서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14-46, 48, 49, 52장 등에서 지배적으로 나오고 있다. 중재자를 가운데 두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 이 강조사는 본절에서 하나님이 힘을 주고 도우실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J. Watts).

성 경: [사41:14]

(주);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 '지렁이'에 해당하는 '톨라아트'(*)는 부패한 물질에서 생겨나는 벌레(14:11;출 16:20) 혹은 식물을 파괴하는 해충(신28:39;욘4:7)등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흔히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성 경: [사41:15]

(주);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같게 할 것이라 - 본서에서 산, 언덕은 정치적 권세를 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을 이스라엘이 부숴뜨린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스라엘의 대적임에 틀림없다. 한편 앞 문맥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노하던 자가 멸망한 것이라고만 말했는데, 본절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무가치한 이스라엘이 힘이 있는 세계 열강들을 무너뜨릴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복자로서의 이스라엘을 제시하고 있는데 본장 초두와 이 사실을 연결시킬 때, 동일하게 정복자로 묘사된 초두의 한 인물과 이스라엘은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특별한 의미가 파악되어진다.

성 경: [사41:16]

(주); 그들을 까부른즉 - 문자 그대로 키질을 의미한다. 타작한 곡식을 바람이 부는 가운데 키질을 하면 알곡은 채 안에 남고 껍데기는 날아가버리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은 본 문맥에서 이스라엘을 통한 대적의 완전한 멸망,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주);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 고대 사람들은 폭풍 혹은 회오리 바람이 사람을 휩쓸어 버린다고 믿었는데, 아마도 대적의 완전한 멸망을 생생하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익숙해 있던 믿음에 호소하는 것 같다.

성 경: [사41:17]

(주);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 물은 생명을 보존케하는 중요한 수단인데, 그것이 없어서 구한다는 것은 생명 유지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는 의미이다. 40:3에서 나온 바있는 '광야'란 심판, 죽음의 땅을 의미했는데, 본 구절과 관련시켜 볼 때 그 광야는 징계 아래있는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을 찾을 수 없어 그것을 구하는 상태란, 하나님의 극심한 징계 아래에 있는 상태를 암시한다 하겠다.

성 경: [사41:18]

(주); 자산 - 문자적인 뜻은 '메마른 고지(高地)'로, 토질이 척박하여 나무 한 그루 없는 벌거숭이 산들을 가리킨다(욥33:21;렘3:2;7:29등).

(주); 강 - '네하로트'(*)로서 문자적인 뜻은 '강들'이며 생수의 풍성함을 암시한다.

(주); 못 -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나 항상 생수가 비축되어 있는 오아시스 비슷한 곳이다. 이상 몇 단어들의 의미를 주해해 본 결과가, 본절은 생수공급이 불가능한 땅을 근원으로 만들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다.

성 경: [사41:19]

본절에서 하나님은 식물의 생장(生長)이 불가능한 광야에 온갖 수목이 자라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 약속은 단순히 바벧론 포로로부터의 귀환 정도만을 암시한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특히 광야에 생수를 공급하는 이미지는 그리스도를 연결시키지 않고는 그 온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고전 10:1-5).

성 경: [사41:20]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었으나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 을 위하여', 곧 목적을 의미하는 전치사 '레마안'(*)이 붙어 있다. 즉, 본절은 하나님께서 '가련하고 빈핍한 자'(17절)에게 초현실적 긍휼을 베푸시는 목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목적은 보고, 알고, 체험하여, 곧 깊이 숙고하고 그 뜻을 상고하여 오직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베푸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성 경: [사41:21]

(주); 소송을 일으키라 - 문자적 뜻은 '너희 건을 내놓으라'인데, 이것은 너희 입장이 옳다는 것을 제시해보라는, 즉 시비를 따져 보자는 의미이다. 또한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는 그 문자적인 뜻이 '너희 강한 것들을 제시해 보라'로서 소송 사건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킬 논거(論據)를 펴보이라는 의미이다. 그 논거의 핵심은 참신의 증거이다. 바로 앞 문맥에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는 목적은 그 백성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열국의 신들을 헛되고 하나님만이 참신으로서 유일하게 영광과 찬송을 받을실 만한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성 경: [사41:22]

(주); 장차 당할 일 이전 일 - 전자는 미래사를, 후자는 과거사를 각각 의미한다. 과거사와 미래사를 구별하여 양쪽 다 말해보라는 것은 한마디로 누가 역사의 주관인가에 의해서 참신의 여부를 가려보자는 의미이다. 진정한 역사의 주관자는 과거 역사가 어떤 경륜, 계획에 의해 일어났는가를 알고 또 미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경륜의 의미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 경: [사41:23]

(주);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 원문 직역은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라'이다. 우상이 추종자를 옹호하고 그 대적들을 좌절케 하기 위하여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만한 무언가를 행해보라는 뜻이다. 이 표현들은 이방 우상들이 무능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동일한 강조를 위하여 그들을 벙어리, 귀머거리, 움직이지 않는 것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시115편등).

성 경: [사41:24]

이와같이 이사야가 우상들의 무력함을 만방에 공포하는 까닭은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과 가증함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정치 권력, 경제적인 부(富), 군사력, 과학 기술 등을 숭배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성 경: [사41:25]

앞에서는 우상들과의 비교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사까지 결정하시는 참신임을 논증하고자 했다. 이제 본절로부터는 그러한 논증의 실례를 증거로서 제시한다.

(주); 내 이름을 부르는 자 -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를 고레스에 대한 지칭으로 보는 데에 동의한다(G. W. Grogan, Whybray). 한편 본문과 같은 호칭은 반드시 고레스가 개종자가 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무관하겠다.

성 경: [사41:26]

(주); 누가 처음부터 알게 하였느뇨 - 본문은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 25절에서 언급된 인물의 출생, 성품 등에 관하여 예언한 자가 하나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이 같은 의미에 이르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를 출생에 따른 성품 등으로 해석한 결과이다(Barnes). 그러나 문맥적으로 볼 때 역사의 미래사나 과거사를 주관하는 존재가 하나님 외에 있었느냐는 질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 경: [사41:27]

(주); 기쁜 소식 전할 자 - 본절이 포로 귀환과 관련된 예언임을 고려할 때, 본문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재건 운동을 일으켰던 스룹바벧, 느헤미야, 에스라 등과 같은 인물에 적용될 수 있겠다(J. Watts).

성 경: [사41:28]

본절은 이방세계의 선지자를 가장한 자들 가운데 미래사를 정확히 예언할 존재는 하나도 없음을 강조한다.

성 경: [사41:29]

본절은 이방 선지자들이 미래지사를 예언할 수 없는 까닭을 말함으로써 1절에서 제시한 논쟁을 결론짓고 있는데, 그 까닭이란 그들이 미래지사를 알려주기는 커녕 그 존재 자체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사42:1]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나의 종...나의 택한 사람 - 이 두 용어는 동격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전자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나 모세 혹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걸출한 활약을 보였던 인물들에게 자주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이 인물은 하나님의 신을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본문의 문맥상 이상적인 통치자 곧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11:2에서는 다윗 계통의 왕에게 동일한 신이 임할 것을 예언한 바 있다.

성 경: [사42:2]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 '외치지 아니하며'와 마찬가지로 본 구절 역시 격렬한 분쟁 중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크고 분에 찬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하고 있는 왕은 칼과 창으로 신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고레스와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다. 즉, 이분의 통치 방식은 세속적인 정복자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성 경: [사42:3]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 여기 '갈대'는 늪이나 습기가 많은 지대에서 서식하는 연약한 줄기 따위를 의미하는데, '상한 갈대'란 바람 때문에 그 연약한 줄기가 상처를 입지만 꺾이거나 뽑히지는 않는 갈대를 말한다. 본문은 마치 상한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결점투성이인 인생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은혜로써 강하게 세워주시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말한다.

성 경: [사42:4]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 문자적인 뜻은 '섬들이 그의 법을 고대한다'인데, 이것은 1, 2절이 묘사한 분의 의로운 통치를, 열방을 포함한 온 세계가 바란다는 뜻이다.

성 경: [사42:5]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호흡을 주시며...신(神)을 주시는 -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온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 인간을 취하여 중개자로 삼으신다는 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6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종의 사역에 대해 다룬다. 결국, 본절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 종의 사역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사42:6]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백성의 언약 - 종의 사역 중 하나가 소개된다. 그 내용은, 종의 사역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즉, 메시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회복,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의미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이 새 언약은 혈통적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 곧 영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주); 이방의 빛 - 본 사역은 종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 곧 열방에 생명의 축복을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그를 찾아온 헬라인(이방인)과 나눈 대화 속에서 밝혀졌다:"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의 이러한 취지를 가장 활발하게 받든 인물은 바로 바울 사도였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리라"(갈 2:8).

성 경: [사42:7]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소경의 눈...갇힌 자...흑암에 처한 자 - 종의 사역을 설명하는 본절에서 등장하는 이 용어들은 종의 사역의 내용을 깨닫게 한다. 얼핏보면, 이 용어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된 상태에 대한 암시로 생각된다. 특히 '갇힌 자', '흑암에 처한 자'는 바벨론에 포로된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생각될 수 있겠다. 그러나 '소경의 눈'은 포로 상태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 표현은 본서에서 영적 무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43장). 본문의 종의 사역도 영적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메시야의 놀라운 계시로 말미암아 흑암과도 같이 캄캄한 무지 상태로부터 찬란한 구원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눅 4:18).

성 경: [사42:8]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 '여호와'라는 칭호의 뜻은,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스스로 있는 자'로서(출 3:14),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주권자이심과 함께(창 21:33;시 90:2;139:7-12) 언약의 주체이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출 3:7-15 주제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스스로 나타내시는 까닭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성 경: [사42:9]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메시야의 사역]

(주); 전에 예언한 일...새 일 - 계속해서 과거사와 미래사가 제시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참신이심을 보이는 증거이다. 한편 '전에 예언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때까지 전달되어졌던 모든 예언을 가리키며, 그중에서도 특히 39:5-7의 예언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새 일'이란 1차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 시대의 위대한 영적 해방을 시사한다.

성 경: [사42:10]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여호와 찬양의 권고]

(주); 섬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임'(*)은 먼 곳, 땅 끝까지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나, 여기서는 전세계 민족을 가리키고 있다.

(주); 새 노래로...찬송하라 - 문맥상 여기 '새 노래'는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구원 역사에 감격하여 땅 끝까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이다. 이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감사, 찬양하는 것이다.

성 경: [사42:11]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여호와 찬양의 권고]

(주);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 -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의 이름(창 25:13)이나, 후에 아라비아 사막을 '게달'이라 불렀다.

(주); 셀라의 거민들 - '셀라'(*)의 문자적인 뜻은 '바위'이며, 후에 '페트라'(Petra)로 알려진 에돔의 성읍을 가리키는 듯하다(Whybray).

성 경: [사42:12]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여호와 찬양의 권고]

(주);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 - 다시 온 세계를 가리키는 용어인 '섬들'이 등장하고 있다. 저자는 온 세계에 구원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사42:13]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여호와 찬양의 권고]

(주); 용사...전사 - 하나님께서 강력한 권능으로 그 대적을 쳐서 멸하실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2, 3절에 나타난 메시야의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모습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원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이 두 모습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외견상 무력하기 짝이 없어 보였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강력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도리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되었다(고전 1:22-24).

성 경: [사42:14]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나님]

(주);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 '숨이 차서'에 해당하는 '에숌'(*)은 원래 산고 중에 있는 여인이 내뿜는 거친 호흡을 뜻하지만, 문맥상 매우 강도가 높은 분노를 암시하는 말로 이해된다. 또한 '심히 헐떡일 것이라'의 히브리어 '에쉬아프'(*) 역시 거친 호흡을 뜻하는데, 특히 급박하게 대적을 쫓을 때 내뿜는 분노의 콧김을 가리킨다. 이 두 용어는 문맥상 용사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앞절과 연결되어 있다. 오랫동안 그 백성의 고통을 지켜 보시던 하나님은 이제 일어서시어 활동하실 것인데 그 활동 내용은 후속절에 이어지고 있다.

성 경: [사42:15]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나님]

본절의 '큰 산', '작은 산' 등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을 가리키며, '강들'은 그들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동인(動因)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성 경: [사42:16]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나님]

바로 앞 구절들에서 그의 대적에 관해 말쓰마신 하나님은 이제 그 대상을 바꿔 당신의 백성에 관하여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소경된 그들을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끄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이끄실 이 길은, 단순히 포로 귀환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이 길은 이스라엘이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새 길을 말한다. 특히 본장의 주된 문맥이 메시야의 구원에 관해 말하고 있음을 볼 때, 이 길은 이스라엘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방법의 구원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소경들의 참 목자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다.

성 경: [사42:17]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나님]

본절은 구약 성경에서 자주 취급되는 우상 숭배자들의 불행한 종말을 다루고 있다(시 35:4;70:3;97:7;겔 16:52 등). 그러나 16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본절의 핵심은 우상 신뢰자들의 불행한 종말보다는 이스라엘을 소경으로 만들어버린 요소로서의 우상, 헛된 신에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로 깨닫고 회개한 자들도 예전에는 그러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절 이하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소경, 귀머거리가 언급된다.

성 경: [사42:18]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

(주); 귀머거리들...소경들 - 16절에서 언급되었던 소경이 재언급되고 있고, 또 다른 부류인 귀머거리가 첨가되고 있다. 여기 '귀머거리'란 듣는 능력을 상실한 자를 뜻하지만, 문맥상 영적 분별력, 참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결여한 자를 뜻한다(20절).

성 경: [사42:19]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

(주); 소경이...내 종이 아니냐 -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수행해야 할 종이 영적 소경이었다.

(주);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 여기 '사자'는 '메슐람'(*)인데, '보내심을 받은 자'로 고쳐 읽는 자도 있으나 원문상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자'로 해석하는 편이 낫다. 본절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특별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택하신 대상인 이스라엘이 귀머거리요 소경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큰 아이러니이다.

성 경: [사42:20]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

(주); 많은 것 - 재앙이나 환난으로부터의 기적적인 구원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다양한 구원 행위들을 뜻한다.

(주); 귀는 밝을지라도 - 문자적인 뜻은 '귀는 열렸으나'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선조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가르침, 곧 율법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던 것을 가리킨다(Barnes). 그들은 목격하고 들었으나 그 보고 들은 내용들의 참의미는 깨닫지 못하였다.

성 경: [사42:21]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

(주);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 원문 직역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위하여'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엄과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므로 그 백성도 마땅히 의로워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편, 여기 '의'(*, 체데크)는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수 없다(Murray). 이 같은 사랑과 의의 밀접성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죄인을 죄없다 할 수 없는 공의를 동시에 총족시키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성 경: [사42:22]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의 계시를 받는 등 선민으로서의 온갖 특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존귀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 곧 약탈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모습을 자초한 이스라엘의 비극상이 제시된다.

성 경: [사42:23]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

(주); 이 일(*, 조트) - 이스라엘이 당한 비참한 포로의 현실 혹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계시를 가리킨다.

성 경: [사42:24]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

본절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심판당하고서도 심판당한 이유를 깨닫지 못한 사실을 반문하는 형식을 통하여 들춰내고 있다.

성 경: [사42:25]

주제1: ['여호와의 종'의 성품과 사역]

주제2: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

(주);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닫지 못하며 -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영적 소경됨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 소경됨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무지, 듣지 않으려는 완악함 그리고 당하고 있는 현실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그런 의미에서 소경이요 귀머거리였다. 이쯤되면 본장 앞부분에 언급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인 종의 중요한 사역의 의미를 읽을 수 있겠다(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 중 가장 주요한 것이 바로 백성의 영적 무지와 맹목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성 경: [사43:1]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너를 조성하신 자 - 여기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대표 단수로 쓰였다. 이스라엘이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 초두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났다. 한편, 하나님이 교회를 친히 세우시고 붙드시고 다스리신다는 확신이 무너질 때 우리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인간적 노력과 재주를 부리는 인본주의나 이적만을 구하는 신비주의로 빠져 버릴 수 있다.

(주); 두려워 말라 - 이 말씀은 앞장의 마지막 내용과 관계가 있다. 앞에서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이 아닌 소망의 하나님으로 알고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주); 구속하였고 - 히브리어 '가알'(*)은 대가를 지불하고 무엇을 살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지금 이 용어는 그 죄로 멸망당한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죄 때문에 포로라는 징벌을 받고 있는데, 이 징벌 자체가 그들의 죄악을 깨끗이 씻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 대가란 새로운 차원의 무엇을 기대케 한다. 그 자세한 의미는 53장에서 밝혀질 것이다.

성 경: [사43:2]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 이는 극심한 위험이나 재앙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 은유로서(시 66:12 참조),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익숙한 표현이었다. 특히 물 가운데로 지난다는 것은 출애굽의 모티브와 연관된다(Whybray).

성 경: [사43:3]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애굽을...속략물로, 구스와 스바를...대신(代身)으로 - 심지어 다른 열방을 희생시켜가면서 까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택한 자를 위한 특별하신 사랑과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보여준다. 한편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바사 왕 고레스의 애굽, 구스 및 스바 정복 계획과 연관되는 것 같다.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이 열방들을 공략하도록 허락하는 대신 유대인의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돕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실제로 고레스가 애굽을 침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와 다리오 1세는 애굽 정복을 위한 발판으로 팔레스틴을 이용했다(J. Watts).

성 경: [사43:4]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내가...사랑하였은즉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월등하게 선하거나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당신의 주권적인 사랑에 기인하여 그들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하신 것이다(벧전 1:7, 19 참조). 본절 전체 또한 출애굽 기사와 B.C. 6세기와 5세기의 근동의 정치 상황에 동시에 연관된다(J. Watts).

성 경: [사43:5]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유대인 포로 귀환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본절의 예언은 B.C. 538년 고레스 칙령으로 성취되었다.

성 경: [사43:6]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놓으라...구류하지 말라...이끌며...오게 하라 -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온 세상의 통치권을 갖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시온으로 향할 수 있도록 놓으라고 명하시는 것을 당연히 하실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이제 땅은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성 경: [사43:7]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 하나님의 창조 목적, 특히 땅 위에 그의 택한 백성을 두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이는 에베소서의 한 구절을 상기케 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 6).

성 경: [사43:8]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소경이요...귀머거리인 백성 - 이 백성을 이방인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는데(Lowth), 옳지 못하다. 42:18, 19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성 경: [사43:9]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본절은 법정적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으며, 열방이 다 모였다고 할지라도 장차 하나님이 세계 각처에서 이스라엘을 시온으로 모으실 것과 과거 이스라엘이 열방들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증인이란 없다고 단언한다.

성 경: [사43:10]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 이스라엘은 오래도록 영적 소경과 귀머거리 상태였으나, 새롭게 회복된 다음에는 하나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증인으로서의 사명은 구속함 받은 성도의 제1차적 사명이기도 하다(행 1:8).

성 경: [사43:11]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 문맥상 본문은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첫째, 10절의 '내가 그'라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유일성과 절대 주권을 나타내며, 둘째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나타낸다.

성 경: [사43:12]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에인 바켐 자르) - 여기 '자르'(*)는 '이방인', '낯선 자'를 뜻한다. '자르'의 이러한 문자적 의미를 중시할 경우, 본 구절의 번역은 이와 같다:'나는 너희 가운데 낯선 자(외인)가 아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 행사를 통하여 밝히 알려진 분이시지 결코 낯선 외인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구원을 예언하시고 실행하심으로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충분히 계시하셨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증거할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

성 경: [사43:13]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

(주);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 이는 하나님의 영원성 혹은 유일 절대자되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유일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일을 방해할 존재란 없다.

성 경: [사43:14]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

(주);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내려가게 하리라 - 보냄을 받는 자가 생략되어 잇으나, 문맥상 고레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는 바사와 메대를 통하여 바벨론을 치셨고 그때 재난의 위경 속에서 탈출을 꾀하던 도망자들을 멸하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때 바벨론의 귀족들은 서로 먼저 도망치기 위하여 배에 오르기를 경쟁하며 아우성쳤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경된 이스라엘을 증인으로 세울 것임을 말씀하신 후 본절에서 그들을 얽매는 바벨론 세력을 멸망시킬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 멸망 사건은 과거 애굽을 멸하신 일을 능가하는 놀라운 일이다.

성 경: [사43:15]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

(주);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까닭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창조자'란 특히 이스라엘을 택하사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셨음을 나타낸다(고후 5:17;갈 6:15;엡 2:10, 15;4:24). 그리고 '너희 왕'이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사 영원히 통치하시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출 15:18;삿 8:23;대하 20:6;시 10:16;계 19:6).

성 경: [사43:16,17]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의 전형적인 예증인 홍해로부터의 이스라엘 구원 및 바로 군대의 멸망 사건이 언급된다.

성 경: [사43:18]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

(주); 이전 일...옛적 일 -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16, 17절에 기록된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및 그 대적의 멸망을 가리킨다.

성 경: [사43:19]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

(주);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옛적 일과는 비교가 안 되는 새 일에 대한 묘사인데 이 묘사가 그려내는 내용은 메말라 죽어 있는 상태에 생명의 물이 쏟아짐으로 다시 생명이 회생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때에 광야와 사막을 완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특별한 보호와 배려를 베풀어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자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 경: [사43:20]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

(주); 들짐승...나를 존경할 것은 -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실 은혜의 생수는 심지어 들짐승들까지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울러 이는 구속의 은총이 택함받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피조계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암시한다(롬 8:21).

성 경: [사43:21]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구원]

(주);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 하나님이 놀라운 새 일을 행하셔서 그의 백성으로 구원을 체험케 하시는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을 찬양케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증인의 사명과 그 맥을 같이한다(12절).

성 경: [사43:22]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주); 너는 나를 괴로와하였으며(*, 야가에타 비)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올 수 있다. 그 하나는 긍정적 해석으로 '너는 나를 위하여 수고하였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부정적 해석으로 '너는 나에 대해서 피곤해 하였다'이다. 문맥을 볼 때, 둘 중 후자의 해석이 합당하다.

성 경: [사43:23]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기본적인 제사 예물조차 드리기를 아까워하고 귀찮아 하는 불신 상태에 대한 책망이다. 이는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인 형식에 치우친 제사와 함께(1:11-14) 이스라엘의 타락한 종교상을 꼬집은 말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가 하나님께 흠향되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마찬가지이다(요 4:23).

성 경: [사43:24]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주);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 하나님이 제사 제도를 주신 까닭은, 하나님이 인생의 죄악을 사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제사는 짐을 지우는 수단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그 의미를 망각한 채 제물을 바치는 의식 자체에 몰두하거나 제물을 마련하는 비용에 연연함으로써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고, 이러한 죄의 짐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다.

성 경: [사43:25]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주);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 22-28절까지의 문맥은 지난날에 이스라엘이 행했던 죄악을 지적하고 징벌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용서와 사죄를 언급하는 본절은 다소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죄악이 그토록 심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 곧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백성들을 회개시키시며 또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사죄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시켜 주기 위해 삽입된 구절이다.

성 경: [사43:26]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주); 서로 변론하자 - 지금까지 진술된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지 그른지 따져 보자는 뜻이다.

성 경: [사43:27]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주); 시조(始祖) - 문자적인 뜻은 '첫 아비' 혹은 '이전 아비'이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아담으로 보나 문맥이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으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운을 이룬 열두 아들을 낳은 야곱을 가리키는 듯하다(J. Watts).

(주); 교사들 - 문자적인 뜻은 '중재자', '해설가', '통역관' 등이며 여기서는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특히 선지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다(Whybray).

성 경: [사43:28]

주제1: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주제2: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주);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 '욕을 보게 하며'의 문자적인 뜻인 '더럽게 하다'이지만 '찌르다', '살해하다'는 뜻도 갖고 있다. '성소의 어른들'에 대해서는 (1) 예루살렘 제사장들 중 지도급 인사들, 혹은 (2) 이스라엘의 왕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중 (2)의 견해가 비교적 우세하다.

성 경: [사44:1]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주); 이제 들으라 - 이는 바로 앞장 뒷부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영적 무지와 맹목성으로 말미암아 심판받았지만 이제 구원을 통하여 새 이스라엘을 재건하겠다는 약속을 함축하고 있다.

성 경: [사44:2]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주);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결정적 이유인 '선택'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예레미야, 바울 등도 자신들의 선지자됨 혹은 사도됨이 바로 이 선택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렘 1:5;갈 1:15).

성 경: [사44:3]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상반절은 심판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내용의 일부로 메마른 당, 갈한 자들에게 생수를 부으실 것을 언급한다. 또한 하반절은 성령을 붓고 축복을 내리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데, 이 둘은 유사적 평행구로 결국 성령 부어 주심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반절은 상반절의 비유적 표현의 실체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사44:4]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주); 솟아나기를 - 원래 이 표현은 물이 잘 공급되는 곳에서 쑥쑥 자라나는 나무나 풀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Barnes), 여기서는 성령 부음을 통하여 새 생명들이 영적으로 자라고 번성할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한편, 이는 많은 후손들이 번성할 것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케 한다(창 15장).

성 경: [사44:5]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주);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일컬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주체는 생략되어 있다. 그 주체를 단순히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이라고만 볼 수도 있으나(J. Watts), 문맥이 새 생명으로의 소생, 성령 임재 등을 말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성령 부음을 통하여 영적 야곱의 후손에 합류될, 이방인까지도 포함하는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로 보는 것이 좋겠다(Westermann).

성 경: [사44:6]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본절은 하나님이 전역사의 과정을 주관하시는 분인 것을 밝히고 있는데, 본절 후에 이어지는 내용을 고려할 때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라는 사실도 더불어 함축하고 있다:"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성 경: [사44:7]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주); 될 일과 장차 올 일 - 미래사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미래사를 알고 계시는 이유는 그가 역사의 주관자로서 역사의 진행 과정 전체를 계획하고 진전시키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이 입증되고 있다.

성 경: [사44:8]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주);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관한 계시가 전달되었던 사실과 그 계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던 사실을 회상시키는 말이다. 그 회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유일한 참신이심을 확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은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특권이었다:"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1, 2).

성 경: [사44:9]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본절로 20절까지는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열거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은 참신이심을 강조하는 앞 문맥(6-8절)의 의미를 한층 강화시킨다.

성 경: [사44:10]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주);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 - 이것은 우상을 만든 자에 대한 책망이기 이전에 우상 제작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임을 비꼬는 의미를 지닌다. 우상은 외형적으로는 인간이 섬기는 대상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그 조작물에게 인간의 생사 화복(生死禍福)을 맡긴다는 자체가 아이러니이다.

성 경: [사44:11]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 곧 장인, 장색을 비롯하여 보석 세공인, 금속 세공인, 철공, 목공 등 우상 제조에 관여했던 모든 자들이 큰 수치와 두려움 가운데 심판당할 것을 나타낸다. 그들이 만든 신이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것은 그 신 자체가 연약한 인간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사44:12]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연약함에 매여 사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은 결코 초자연적인 힘을 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기 위하여 쇠로 만드는 우상의 제작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Whybray).

성 경: [사44:13]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그 재질이 나무인 우상의 제작 공정이 묘사된다. 나무는 피조된 생물 가운데 가장 하층부에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자는 그런 것을 가지고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신전에 안치하여 신으로 섬긴다. 새겨진 우상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그 피조물 중 하나님의 형사에 가장 가까운 형상인 인간 형상에 대한 숭배는 나름대로 가장 세련된 형태라 하겠다.

성 경: [사44:14]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주); 디르사나무(*, 티르자) - 이 용어는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온다. 아마도 이 용어는 '단단하다', '굳다' 등을 뜻하는 '타라즈'(*)에서 온 것 같다. 한편, 본절에서는 이 나무를 포함한 팔레스틴의 대표적 나무들을 인간이 마음대로 베거나 심고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같은 운명의 나무로 만든 우상의 무가치성을 간접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사44:15]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본절과 다음절은 인간에게 있어서 나무란 근본적으로 화목(火木), 곧 땔감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강조한다. 그런 나무로 인간은 자신의 생사 화복을 좌우할 것으로 믿는 우상을 만든다.

성 경: [사44:16]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주); 내가 불을 보았구나 - 불기운의 위력을 느꼈다는 말로서, 쉽게 풀면 '야, 불기운이 대단한데'이다.

성 경: [사44:17]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나무가 땔감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의 행위로 증거했다. 그리고도 동일한 것으로 신을 만드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이 그려진다.

성 경: [사44:18]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자들이 동일한 재목을 가지고 이율 배반적인 두 가지 용도에 동시에 사용하는 아이러니를 범하는 것은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는 영적 무지 때문이라고 본절은 말한다.

성 경: [사44:19]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아이러니에 대하여 숙고해보는 자가 없다는 것을 본절은 재차 강조한다.

성 경: [사44:20]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주); 재를 먹고 - 본 표현은 헛되고 무익한 것을 얻기 위하여 애쓰는 자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삼하 13:19;욥 30:19;겔 28:18 참조), 에브라임의 경우, '재' 대신 '바람'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호 12:1).

(주);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 레브 후탈 히타후) - 문자적인 뜻은 '미혹된 마음이 그를 오도하였다'이다. 이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는 근본적으로 그 마음이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한 때문임을 보여준다. 롬 1장은 이 부분의 주해라고 할 만큼 예리한 설명을 담고 있다.

(주); 나의 오른손에 거짓것이 있지 아니하냐 - 여기 '오른손'은 인간이 힘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48:13;왕상 2:19;욥 40:14;마 27:38 참조).

성 경: [사44:21]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택함 받은 백성의 구속]

(주);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로 티나쉐니) - 여기 '티나쉐니'(*)를 단순 능동형(칼형) 명령형으로 보고 '너는 나를 잊지 말라'로 번역하는 견해도 있으나, 문맥상 수동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 수동태인데도 이 같은 혼란을 준 것은 대개 단순 재귀형(니팔형)에서는 동작자가 '라멕'(*)을 통해 표시되기 마련인데, 본절에서는 '라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수동태인 본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개역 성경과 동일하다. 하나님께서는 열국이 섬기는 우상의 실상을 말한 후 본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위치를 재확인하심으로써 그들의 패역함을 끝내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을 보여주신다.

성 경: [사44:22]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택함 받은 백성의 구속]

(주);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 구속이 회개 촉구에 선행하고 있다. 회개 촉구는 현재형으로, 구속 사실은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원문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강력히 변증한 후(1-5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영적 회생으로 연결시킨 반면), 여기서는 죄사함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로 보아 이스라엘의 영적 회생과 그들의 죄사함은 불가분적 관련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바벨론 포로라는 역사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죄사함, 영적 회생이라는 차원을 견지하며 53장까지 나아가고 있다 하겠다. 본서가 말하고 있는 구속은 고레스의 구원을 통하여 완전히 그리고 확연히 성취된다. 53장의 고난의 종과 그의 구속 사역이 본서 저자의 진정한 관심사요 본질적 내용이다.

성 경: [사44:23]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택함 받은 백성의 구속]

본절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찬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찬양이란 구속을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의 감격의 표현이다. 따라서 참구속의 의미를 깨달은 자만이 바른 찬양을 할 수 있다.

성 경: [사44:24]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택함 받은 백성의 구속]

(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 여기서는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속주가 될 뿐 아니라 본절 이하에 나오는 놀라운 사역을 능히 이루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적 권능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Fausset). '땅을 베풀었다'는 것은 땅을 평평하게 펼쳤다는 뜻이다. 이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번영하는 표현이다.

성 경: [사44:25]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택함 받은 백성의 구속]

(주); 거짓말하는 자의 징조를 폐하며 - 여기 '거짓말하는 자'란 원문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거짓 선지자를 비롯하여 점쟁이, 신접한 자등이 포함된다. 또한 '징조'는 '오토트'(*)로서 표적, 이적 등을 뜻한다. 당시 점쟁이나 신접한 자들은 그 배후에 있는 악령의 힘을 빌어 가시적인 이적들을 행하곤 했다.

성 경: [사44:26]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택함 받은 백성의 구속]

(주);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 여기 '종'(*, 아보두)은 단수형이지만 일존의 집합적인 의미, 곧 복수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는 동의어격으로 나온 '사자'(*, 말르아카)가 복수형인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참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케 하신 말씀을 이제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주); 황폐한 곳 - 문자적인 뜻은 '쓸모없는 곳'이다. 바벨론의 침입을 받은 유다의 도시들은 부서지고 망가져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지 못할 것처럼 쓸모없는 곳이 되어버렸었다.

성 경: [사44:27]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택함 받은 백성의 구속]

많은 학자들이 본절을 바벨론 정복을 위해 고레스가 유프라테스 강 지류들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사실에 대한 암시로 본다(Lowth, Grotius, Rosenmuller). 그리고 또 다른 학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당시 홍해가 갈라졌던 사건에 대한 암시로 본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Gesenius). 이중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하나님의 전능성, 유일한 능력의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본 문맥과 합치한다.

성 경: [사44:28]

주제1: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주제2: [택함 받은 백성의 구속]

(주); 나의 목자 - 이스라엘을 인도한 모세에게도 이 호칭이 붙여진 바 있다(시 77:20). 본절에서 이 호칭이 고레스에게 부여된 것은 그가 포로 귀환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았기 때문이다. 고레스에게 맡겨진 임무는 포로 귀환까지만일 뿐이며, 그 후의 온전한 구속은 앞으로 임할 종의 사역 곧 메시야의 사역에 의해 완수될 것이다.

성 경: [사45:1]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주); 나 여호와는...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 '잡고'의 히브리어 '하자크'(*)는 '강하게 하다'는 뜻도 내포한다. 이 표현은 힘없는 자에게 힘을 줄 때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능력의 제공자이시고 고레스는 단지 그 능력을 따라 수행하는 도구에 불과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주); 열왕의 허리를 풀며 - 히브리 개념에 있어서 허리를 묶는다는 것은 여행, 노동, 혹은 전쟁에 임할 채비를 갖추는 것을 가리킨다. 반대로 허리를 푼다는 것은 쉼, 연약한 상태 혹은 무장 해제를 가리킨다. 두말할 나위 없이 여기서는 '무장 해제'를 의미한다.

성 경: [사45:2]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주); 내가 네 앞서 가서 - 고레스가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하나님이 강력히 역사하셨음을 암시하는 본문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진을 앞서가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케한다:"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출 13:21, 22).

(주);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 문자적인 뜻은 '구부러진 곳을 반듯하게 하며'이다. 계속 전투 개념이 이어지는 문맥을 중시할 때 이 표현은 고레스의 모든 대적, 방해적 요소들을 하나님이 제거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Lowth).

성 경: [사45:3]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본절은, 하나님이 고레스를 열왕의 정복자로 세우시는 이유를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고레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고 회개했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숭배하는 말둑(Marduk)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귀환을 명령하였고 포로 귀환 명령 자체도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책의 일환이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앗수르의 정책은 그 식민지 백성들을 다 흩어버려서 다시는 국가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강압 정책을 썼던 반면, 페르시아 제국은 식민 국가로 하여금 자기 본토로 돌아가서 자기 종교를 갖게 하는 등 유화 정책을 썼던 것이다.

성 경: [사45:4]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주);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이방인 고레스를 일으키셨던 것은 그의 백성 때문이라는 말이다. 열왕들과 그 민족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목적 특히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들을 통제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다(10:5;42:6).

성 경: [사45:5]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주); 네 띠를 동일 것이요 - 1절의 '열왕의 허리를 풀며'와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열방의 정복자를 만들기 위하여 철저히 준비시키시겠다는 뜻이다.

성 경: [사45:6]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주); 나밖에 다른 이가...알게 하리라 - 앞 문맥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의 한 인물을 들어 쓰실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 경우, 우리에게 생기는 의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중에서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인물을 들어 쓰실까라는 점이다. 이는 구원뿐 아니라 심판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재기될 수 있는 의문이다. 즉 하나님은 이방 나라, 곧 바벨론과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징벌하셨기 때문이다. 이 의혹을 풀어주는 것이 바로 본 구절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의도는 당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곧 세계 모든 민족과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심을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만이 참하나님이심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재건, 회복뿐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 참여에 대한 암시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사45:7]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주); 빛...어두움...평안...환난 - 당시 바사인들은 빛, 어두움 그리고 평안, 환난을 대치적 관계에서 이해했다. 그들은 철저히 이원론적 구도를 견지하였다(J. Watts). 바로 그들에게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 각각을 모두 창조하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의 이원론을 뛰어넘어 그 모두를 통치하는 절대적 존재임을 강변하고 있다. 이 강변은 하나님이 유일한 참하나님이신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되기도 한다.

성 경: [사45:8]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본절은 7절과 마찬가지로 천지 창조에 관한 기사인 창세기 1장 내용을 상기케 한다. 본서 서두에서 하나님은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증인으로서 하늘과 땅을 호출하신 바 있거니와(1:2), 여기서는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명령하신다. 이는 창조의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이 동일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언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의와 구원이 긴밀하게 연관지어 언급되는 것은 여기 외에도 46:12, 13;51:5, 6, 8;56:1,2;59:17;61:10;62:1;63:1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G.W. Grogan).

성 경: [사45:9]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본절은 유대인을 통하여 제기될 수 있는 변론, 곧 왜 하나님은 그들로 포로가 되게 하셨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이방 왕을 통해 포로 귀환케 하셨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왜 하나님은 구원자를 내시어 이방인도 구원하시는가 등에 대한 변증을 담고 있다. 바울은 본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롬 9:11-21).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한마디로 그의 절대적 주권에 기인한다.

성 경: [사45:10]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문자적으로 볼 때 본절은 열악한 환경에 처한 아이가 그 부모에게 항의하는 모습에서 그 이미지를 따온 것 같다(Barnes). 그리고 그 항의하는 내용은 9절 주석에서 밝혀진 바 유대인에게서 제기될 수 있는 항의 사항일 것이다.

성 경: [사45:11]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앞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아무도 시비를 따를 수 없음,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언급이 있었거니와, 본절은 이러한 언급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개역 성경처럼 명령문으로 번역할 경우는 하나님더러 이러라 저러라 할 권리가 그 누구에게도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되며, 의문문으로 번역할 경우 역시 부정적 답변을 강조해준다(NIV, RSV).

성 경: [사45:12]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본절은 땅 위의 그 누구도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시비를 걸 수 없는 이유를 마지막으로 첨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요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창조주라는 사실이다. 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분이 자신의 계획을 따라 실행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성 경: [사45:13]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하나님의 도구 고레스]

(주);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 본절은 1차적으로,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귀환을 허락할 때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놓아주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약탈당했던 보물과 성구(聖具)들까지 돌려줌으로써 성취되었다(스 1:8-11;5:14;6:5). 그러나 보다 궁극적 의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될 사실에 대한 예언이기도 한다. 특히 후자의 측명과 관련하여, 본 구절의 의미를 올바로 상고하기 위해서는 본절이 앞부분 어디와 연결이 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의미를 더듬어 볼때 이는 하늘에서 의의 생수를 내려 땅으로 하여금 의와 구원의 열매를 맺겠다고 하는 8절과 연결됨을 알 수 있다. 9-12절은 의와 구원의 열매를 맺는 일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렸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첨가된 일종의 삽입구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본절의 '의'는 8절이 진술하는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 '의'(*, 체데크)는 그 의미를 쉽게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문맥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진다. 그러나 구원과 연관성을 가질 때 우리는 전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죄있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없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연상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대상은 누구인가 ? 그 대상은 말할 나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의를 논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의로 일으킨 인물은 다름 아닌 고레스로 예표되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본절의 성읍(*, 이리)은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을,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하나님의 복된 통치가 이루어질 영역을 뜻한다.

성 경: [사45:14]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애굽의...네게로 돌아와서 - 애굽, 구스, 스바 등이 바사 제국에게 무릎을 꿇을 것과 그들로부터 약탈한 재물이 유다 성전 건축에 기증될 것을 나타내며, 더 나아가서는 장차 이방인들까지도 회개하여 여호와께 돌아올 것까지를 암시하는 예언이라 하겠다.

성 경: [사45:15]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은 스스로를 숨기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이다. 본문의 화자(話者)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진다. (1) 고레스로 볼 경우:이는 고레스가 이제껏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에 대해 무지하였다가 이제 비로소 그것을 깨닫고 탄복하는 고백이 된다. 이 경우에 고레스의 탄복은 '왜 이제까지 스스로를 숨겨 오셨습니까 ?'라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 (2) 이사야로 볼 경우:이 경우의 해석도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방인까지 구원에 포함시키시고 또 이방 세력을 통해 귀환을 가능케 하시는 등의 일들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뜻. 둘째는, 하나님이 초월자로서 유한한 인생에게는 마치 숨어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당신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사 그 백성을 구해주심을 확신하는 역설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맨 마지막 해석이 가장 무난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 경: [사45:16]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전절과 관련지어 보면, 하나님을 스스로를 숨기시는 분이라고 단정하고 더 이상 신앙과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로 빠져드는 경우를 암시하는 구절이다.

성 경: [사45:17]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여호와께...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 일순간적인 도움도 줄 수 없는 우상(16절)과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26:4).

성 경: [사45:18]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 하나님은 특히 땅을 만드심에 있어서 기후, 토양, 그리고 각종 소산물등을 배려하사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드셨다는 말이다. 이 구절을,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감으로 황량해졌던 팔레스틴 땅이 포로 귀환으로 인하여 다시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변화될 것을 암시하는 구절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Fausset, Barnes), 문맥상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으며 온 우주의 구원자되신 참신으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해함이 무난하다.

성 경: [사45:19]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 어두운 동굴과 같은 곳으로부터 그 의미도 분명하지 않은 채 들려오던 이방 신의 신탁 따위와는 다른, 분명하고도 명확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가리킨다(48:16). 한편, 본 구절은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표현과도 유사하다(요 18:20).

성 경: [사45:20]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어떤 학자는 열방 중에 뛰어난 자, 곧 우두머리, 왕들로 본다(Kimchi). 그런가 하면 바벨론 백성들(Aben Ezra), 이방의 우상 숭배를 버리고 참신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온 개종자들(Vitringa), 혹은 고레스의 학정에서 살아 남은 자들(Grotius)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여기 '피난한 자들'로 번역된 '펠리테'(*)는 원래 전쟁, 위험, 혹은 학살로부터 도망쳐 피한 자들을 가리킨다(창 14:13;수 8:32). 이 용례를 참고하면, 마지막 견해가 유력해 보인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은 '펠리테'가 우상 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하반절의 암시를 중시할 때 우리는 '펠레테'를 이방 민족 가운데서 우상 숭배의 무지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자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하겠다.

성 경: [사45:21]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본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만유를 통치하시며, 의로우시며, 동시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특히 여기서의 '의'는 엄한 공의의 법을 시행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그 속성이 항상 옳은 일만 하시는 분, 그 말씀이 항상 진리인 분, 그 약속을 항상 성취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로 보는 것이 낫겠다.

성 경: [사45:22]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나를 앙망하라...구원을 얻으리라 - 여기 '앙망하다'로 번역된 '페누'(*)는 '향하다', '돌아가다'는 뜻으로서 믿음의 눈으로,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곧 의롭고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21절)께 그 마음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시 22:27).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권한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상 모든 백성에게 주어지고 있다.

성 경: [사45:23]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 온 우주에 하나님의 맹세를 받을 만큼 큰 자는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맹세하시는데, 성경에서 이 같은 표현은 반드시 그 성취를 보게 될 약속에 대한 확증이 필요한 때 사용된다(히 6:13, 16). 동일한 비중의 표현으로는 '내가 살았노니'(룸 14:11)가 있다.

성 경: [사45:24]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의와 힘(*, 체다코트 와오즈) - 문자적인 뜻은 '의와 능력'이다. '의와 능력'은 하나님의 구원과 관계있는 것으로 분리하지 않고 '능력있는 의' 혹은 '의로운 능력'이라 부를 수 있겠다.

성 경: [사45:25]

주제1: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

주제2: [만방의 구원자 하나님]

(주);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 문자적인 뜻인 '여호와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이다. 24절과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여호와 안에서 죄를 용서 받고 구원 얻으며'로 의역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이 일으키실 구원자(53장 참조)가 강력히 요청되고 있다.

성 경: [사46:1]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바벨론 우상의 파멸]

(주); 벨 - 바벨론의 수호신들 중의 우두머리이며, 그 수도의 신인 말둑(Marduk)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는 아람 방언이며, 히브리어로는 '주'라는 뜻의 '바알'이다(엠 50:2;51:44).

(주); 느보 - '나부'라 불리기도 한 이 우상은 바벨론 당시 벧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말둑의 아들이며 운명의 서판들을 보관하는 문학과 지혜의 신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나보니두스와 같은 왕들의 이름이 이 신의 이름과 유사한 것을 볼 때 바벨론 왕조가 섬겼던 신, 곧 왕가의 수호신이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Whybray). 그런데 본절은 이들을 포함한 다른 우상들이 그들을 숭배하는 자들의 짐이 되었다고 말한다. 아이러니컬한 이 표현을 통해 그 대조를 이룰 참신이신 하나님의 특성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3절).

성 경: [사46:2]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바벨론 우상의 파멸]

(주);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 여기 '짐'이란 금속, 목재 혹은 돌 등으로 구성되었던 바벨론의 신상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바벨론 사람들이 숭배했었던 이 신들은 그들 자신을 상징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형상조차도 지킬 힘이 없었기에, 더군다나 그들을 신뢰하는 자들을 구하고 보호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성 경: [사46:3]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바벨론 우상의 파멸]

(주);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 - 문자적인 뜻은 '태중에서부터 운반된 자'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짐이었음을 의미한다. 여기 '짐'이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심판과 비참의 근원이 된 '죄의 짐'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죄의 짐을 지고 죄를 사하는 분으로 계시된 하나님은 그 섬기는 자에게 도리어 짐이 된 이방의 신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은 짐을 지우는 분이 아니라 짐을 지는 분이셨다. 바리새인들이 구약 성경을 제대로 깨달았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그와같이 사시고 그와같이 죽으셨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사46:4]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바벨론 우상의 파멸]

(주);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 하나님은 동일한 자상함, 애정, 보살핌을 계속 유지하실 분이라는 뜻이다. 곧 하나님의 분별성이 그 핵심이다. 이 예언은 혈통적 유대인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에 포함될 성도 모두들에게까지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Fausset).

성 경: [사46:5]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바벨론 우상의 파멸]

(주);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 본절의 의도는 하나님과 대조가 되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우상 신뢰의 헛됨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본서 저자가 흔히 강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같은 주장의 근거는, 바벨론의 우상들은 그 도성을 보호하지 못할 뿐더러 그 자신도 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고 있다(1, 2절). 그렇다면 그것들을 의존하는 일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 그리고 그 무력하고 허망한 우상들과 살아계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비교하는 일은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Barnes) !

성 경: [사46:6]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바벨론 우상의 파멸]

(주); 금을 쏟아 내며 - 여기 사용된 동사 '줄'(*)의 문자적인 뜻은 '흔들다', '풍부하게 붓다' 등이지만 '탕진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신 21:20;잠 23:21;28:7). 말하자면, 우상 숭배자들은 천하고 무치한 신상을 만들기 위하여 아낌없이 금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Fausset).

(주); 은을 저울에 달아 - 저울에 무게를 다는 행위는 대체로 신중하고 사려깊은 정서를 반영한다. 그러나 낭비하듯 값비싼 금을 사용하는 우상 숭배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 바로 앞 구절을 중시할 때, 본문은 '그들은 정확히 그 눈금을 보지도 않고 값싼 금속을 취급하듯 되는 대로 양을 달았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주); 장색(匠色)에게 주고 - 정확한 원문 지역은 '대장장이를 고용하고'이다.

성 경: [사46:7]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바벨론 우상의 파멸]

(주);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 우상 숭배자들은 고용한 대장장이가 제작한 우상을 그들의 어깨에 메어 신전 혹은 그것을 고정시켜 둘 자리로 옮겨간다. 이 같은 묘사의 목적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의 어깨에 메여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신에게 복종을 표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주); 그의 처소에 두면 - 본절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와 대조시키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피조물이 아니므로 영원하시며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신 반면,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 그 처소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우상은 누가 옮겨가기 전까지는 전혀 움직일 수도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며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구하거나 그들의 소원을 들을 능력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다.

성 경: [사46:8]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패역자에 대한 경고]

(주); 패역한 자들 - 문자적인 뜻은 '범죄한 자들'인데, 문맥상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던 자들'을 지칭한다.

(주); 장부가 되라(* -, 히트오솨슈) -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로서 어렵지만 '이쉬'(*)로부터 파생된 '남자처럼 행동하라'의 의미를 지닌 용어로 보면 무난하다(Gesenius). 유사 용어인 헬라어 '안드리제스데'(*)가 고전 16:13에서 사용되었다:'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남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문맥상 어리석고 무가치한 우상 숭배 행위를 과감하게 청산하는 것을 뜻한다.

성 경: [사46:9]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패역자에 대한 경고]

(주); 옛적 일을 기억하라 - 여기 '옛적 일'은 '리쇼노트'(*)로서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시고 또 그 예언된 바를 성취하셨던 일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고서 하나님이 그 행하신 일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깨달아야만 한다. 이 같이 과거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상기케 하기 위함이다.

성 경: [사46:10]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패역자에 대한 경고]

(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 역사를 깊이 상고함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역사의 시종(始終)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의 그것이다. 이 이슈(issue)와 관련하여 최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유'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하나님은 미래에 무엇을 하시겠다는 계획을 말씀하시나 그 중간에 인간과의 대화, 곧 인간이라는 파트너의 반응에 따라 그 역사 계획을 수정하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대로 행하실 자유와 수정하실 자유를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Zimmerli). 어떻게 보면 이 같은 주장은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자유성을 변호하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그 중심을 살펴보면 위험성이 가득하다. 하나님의 자유를 말하는 것 같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유를 말하기 위하여 그같이 주장한 것이다. 인간의 역할, 반응의 중요성을 확대시킨 이 주장은 결국 하나님을 인간의 하수인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물론 성경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반응을 적고 있다. 죽을 것을 선언받았지만 기도를 통하여 그의 생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그 대표적 모범이다. 그러나 이 사건 역사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하에서 되어진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응에 따라 그의 계획을 변경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불변적으로 일관되게 시행하신다. 하나님의 가장 큰 특징, 곧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은 그의 계획과 그 실행의 신실성에 있다.

(주); 모략이 설 것이니...이루리라 - 여기 '모략'은 하나님의 계획, 뜻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반절이 하나님의 역사 계획의 일관성을 강조한다면, 본하반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은 역사 계획을 일관성있게 진행하실 뿐 아니라 주권적으로 세부적인 사항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성 경: [사46:11]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패역자에 대한 경고]

(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 여기서 1차적으로 의도된 인물은 고레스임이 분명하다. '동방'은 바사를 의미한다. '독수리'로 번역된 '아이트'(*)는 '솔개'(욥 28:7), '매'(렘 12:9), '독수리'(18:6)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호전적인 왕, 움직임의 신속성, 황폐를 낳는 강한 세력 등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개역 성경을 비롯한 영역본들은 본 용어를 '독수리' 혹은 맹금(猛禽)으로 번역한 것이다. 성경에서 전쟁을 좋아하는 왕을 독수리에 비교하고 있는 예는 많으며(렘 49:22;겔 17:3), 아마도 본 문맥에서는 고레스가 큰 힘과 용맹성으로 열방들에게 나타날 것과 마치 맹금과 같이 갑자기 그들을 덮칠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본 용어가 사용된 듯하다. 실제로 고레스의 군대는 긴 창에 황금빛 찬란한 독수리 형상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Xenophon).

(주);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 - 여기 '모략'은 10절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본절에서는 고레스가 단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불리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목적을 지니고 있다. 고레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내가 말하였은즉'이라는 강조사가 동원되고 있다(Whybray).

성 경: [사46:12]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패역자에 대한 경고]

(주); 마음이 완악하여 - 본래 이 표현은 대담하고 용기있는 자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데 대담한 자,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에 저항하고 대적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자, 곧 본서의 표현대로 하면 영적으로 우매한 자를 가리킨다.

(주); 나를 들으라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매한 결과, 죄를 짓고 포로로 잡혀 갔지만 포로의 징벌 속에서도 징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관심 집중을 요구하는 명령이다.

성 경: [사46:13]

주제1: [우상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능력]

주제2: [패역자에 대한 경고]

하나님께서는 한 인물을 들어서 그의 계획을 실천하실 터인데 그 인물이 행할 일의 내용을 본절은 '나의 의', '나의 구원', '나의 영광' 등의 용어들로 정의하고 있다. 개역 성경을 볼 경우 '나의 의'와 '나의 구원'만이 평행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나, 원문 성경을 보면 '나의 영광'과 '나의 구원'도 평행구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나의 구원'과 '나의 의'가 갖는 관계이다.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의에 대하여 가장 잘 언급하고 있는 곳은 롬 3:21이하이다. 로마서는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적 의를 동시에 설명한다. 이같이 로마서와의 연관성 속에서 살필 때, 본절의 의는 인간에게 전가되는 구원의 의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 자신의 의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죄인을 의롭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손상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 동방에서 일으킬 한 인물과 지금까지 논한 하나님의 구원(및 영광)을 낳을 하나님의 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11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방의 인물은 역사적 인물인 고레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레스를 그 궁극적 인물의 예표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무지 몽매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레스를 통해 포로 귀환의 장도(長途)에 오르게 하실 뿐 아니라 보다 궁극적으로는 고레스로 예표된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본절은 멀리서 조망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사47: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처녀 딸 바벨론 - '처녀 딸'이란 남자와 관계를 갖지 않은 순결한 여인을 가리키는데, 바벨론과 동격으로 사용된 데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이 용어는 바벨론이 그전에는 외국 군대에 의하여 한번도 정복을 당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이다(Kimchi, Whybray). 두 번째로, 이 용어는 바벨론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갈대아와 그 땅 전체를 의인화한 표현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Gesenius). 섯째로, 이 용어는 바벨론 성 자체의 아름다움, 찬란함, 그리고 그 성 여인들의 우아함, 장식품의 풍부 등을 암시한다는 견해가 있다(Barnes). 각각의 견해들이 일리는 있으나 문맥이 난공 불락의 바벨론 성이 외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멸망을 당할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첫 번째 견해를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다(Herodotus).

(주); 티끌에 앉으라 - 이는 땅 위에 앉아 재를 머리에 뒤집어 쓰는 것을 가리키는데, 성경에서 이 이미지는 극도의 수치나 슬픔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욥 2:12;10:9;애 3:29). 디도(Titus)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조한 기념 메달에 보면 종려나무 아래 땅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Barnes). 여기서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은 가장 열악한 상황으로 떨어져 버릴, 가장 심한 슬픔을 맛볼 바벨론을 묘사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성 경: [사47: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라 - 아우구스투스 시이저 시대에 물레방아가 발명되기 전까지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맷돌은 아래짝과 위짝 두 둥근 돌로 만들어졌으며 아래짝은 볼록한 모양으로 위짝은 오목한 모양으로 서로 맞물려 있었고 위짝 맷돌 가운데에 난 구멍으로 곡식 따위를 넣어 돌리므로 곡식을 빻았다. 대체로 여인 둘이 마주 않아 돌렸던 이 맷돌은 특히 여자 노예의 전유물이기도 하였다(마 24:41). 미래 바벨론의 노예 생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주); 면박을 벗으며 - '면박'에 해당하는 '차마테카'(*)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오며, 의미는 '꼬고 땋아 내린 머리' 혹은 문자 그대로 '얼굴을 가리는 얇은 천' 등으로 볼 수 있따(고전 11:15). 땋은 머리든지 면박이든지 그것을 들어올리거나 벗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큰 수치를 뜻하였다.

(주);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 다리를 드러낸다는 표현은 당시 바벨론의 지도층 부녀자들이 자락이 길고 펄럭이는 옷을 입었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강을 건넌다는 표현은 바벨론 주위에 있었던 많은 강들과 수로들을 건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울러 이는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성 경: [사47:3]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 본 구절 중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는 매우 어려운 부분으로 그 해석이 다양하다. 해석에는 '사람이 나를 저항하지 못하리라'(Jerome), '나는 그 어느 누구도 중재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Grotius), '나는 누구와도 평화하지 않을 것이다'(Noyes)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해석의 관건은 '아끼다'로 번역된 '에프가'(*)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인데, 이 용어는 '누구를 치다', '공격하다', '적대감을 갖고 덮친다', '죽이다', '살육하다' 등의 뜻과 함께 '누구를 치다', '공격하다', '적대감을 갖고 덮치다', '죽이다', '살육하다' 등의 뜻과 함께 '누구를 대신하여 만나다'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 후자의 뜻을 중시하고 전술한 해석 중 그로티우스(Grotius)의 견해를 존중할 때 우리는 문제의 구절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다:'바벨론을 대신하여 나선 그 어느 중재자도 만나지 아니하리라'(참조, I will not meet thee as a man, KJV). 이 같은 번역은, '내가 보수하되'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히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바벨론에 대한 징벌의 단호한 결심과도 조화를 이룬다.

성 경: [사47: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본절은 앞뒤 문맥과 잘 조화되지 않는 듯한 독특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찬양 혹은 큰 놀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저자는 환상 중에 바벨론의 수치스러운 멸망의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큰 놀람과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던 것 같다. 그 감격의 내용을 좀더 풀어보면 이와 같다:'오 우리의 구속자이시여 ! 당신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시니이다 ! 당신의 능력은 얼마나 크신지요 ! 당신은 얼마나 신실하신지요 !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도 분명히 드러났나이다. 바벨론이 멸망하나이다. 그들의 우상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나이다. 그들의 멸망은 우리 백성의 구속자이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당신에 의하여 성취되었나이다.' 예기치 못했던 바벨론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저자는 인간적인 통쾌감을 느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 및 그분에 대한 감격을 느꼈던 것이다.

성 경: [사47:5]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흑암으로 들어가라 - 동일한 이미지가 이스라엘의 포로 사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사용된 바 있는데(42:7), 이제 그 동일한 운명으로 고통당하는 바벨론을 묘사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본 묘사가 바벨론의 포로 사실을 필연적으로 암시하는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포로와 같은 슬픈 운명을 강조할 뿐이다.

(주); 열국의 주모(主母) - 분자적인 뜻은 '왕국들의 여주인'이다. 이 호칭은 로마에게 붙여졌던 '세계의 여왕'이란 호칭을 연상케 한다. 바벨론은 이 같은 호칭에 걸맞는 권세와 명성을 유지하였고 그 주위의 열국들은 종속자, 종들로 여겨졌었다.

성 경: [사47:6]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 여기 '기업'이란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땅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모든 유다의 도시들이 파괴되도록 허락하셨고, 그 결과 그 온 땅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비록 갈대아의 손을 빌어 그 일을 하셨지만 분명히 그 결과는 하나님의 계획 아래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 이스라엘 포로를 대함에 있어 바벨론이 온정을 베푼적도 있었다. 다니엘의 경우 바벨론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았고 큰 특혜를 누렸던 것을 우리는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러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경우 예루살렘 성과 도시를 참혹하게 부쉈을 뿐 아니라 인권을 말살하는 잔혹성으로 이스라엘 포로들을 대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시편 기자는 그 사실을 애절한 시구로 묘사한 바 있다(시 137:1-3). 더욱이 바벨론의 압제자들은 노인을 학대하고 그들에게 중한 노역을 시켰다. 성경은 도처에서 노인에 대한 예우, 공격을 중요한 의무로 가르치고 있다(레 19:32;욥 32:4-6). 그리고 노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행동을 가장 악한 범죄의 하나로 경고하고 있다(왕하 2:23-25;잠 30:17). 바벨론의 압제자들이 노인을 학대한 사실을 예레미야의 시들 속에서 반영되고 있다(애 5:12).

성 경: [사47:7]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 이 구절은 바벨론의 교만과 자기 확신을 묘사한다. 바벨론은 부(富), 그 성벽과 성문의 견고함, 대적에 대항할 수 있는 풍부한 군비 등을 믿었다. 더군다나 바벨론에게는 내우 외환(內憂外患)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듯이 보였다(Barnes). 따라서 그들은 바벨론의 태평 성대가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같은 확신이 바벨론 멸망의 동기는 되지 않는다. 문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사실 곧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다.

(주); 이 일 -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알지 못한 채 포로 생활로 압제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들의 방법대로 가혹하게 대했던 것을 가리킨다. 물론 그 같은 처세는 자신들이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때문이었다.

(주); 그 종말 - 바벨론은 자신들처럼 교만하고 잔혹하였던 다른 열방들의 종말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치 않았으니 불행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성 경: [사47:8]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 유흥에의 탐닉과 사치스런 생활이 조장한 유약하고 의미없는 삶을 가리킨다. 일설에 의하면 이 시대는 부패와 유흥과 방탕이 극에 달했던 시대라고 한다(Strabo). 또 다른 학자는 그 당시 바벨론만큼 방탕과 범죄적 쾌락에 몰두했던 나라는 없었다고 주장한다(Curtius).

(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 이것을 바벨론의 비교 우위적 자만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바벨론 백성들은 그들의 도시만 도시요 다른 나라의 도시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당대 필적할 나라가 없었던 로마 역시 동일한 자만을 나타냈다고 한다(Martial). 그러나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위치에 자신들을 비교했던 신성 모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Whybray). 이 두 견해는 상호 보완적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에 대한 극도의 자만은 결국 자신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놓게 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자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나타내었던 자들로 니느웨 성 거민들을 들 수 있다(습 2:13-15).

성 경: [사47:9]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 원문 직역은 '많은 사술과 많은 주문 속에서'이다. 여기 '속에서'는 '베'(*)를 번역한 것인데 이 '베'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하나는 '...에도 불구하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때문에'이다. 전자의 뜻을 취할 경우는 개역 성경 번역의 뉘앙스처럼 많은 사술과 마법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 재앙이 임한다는 뜻이 되겠고, 후자의 뜻을 취할 경우는 바벨론에 재앙이 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많은 사술과 마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무리없는 문맥의 소통을 위해서는 전자를 취하는 것이 좋다.

성 경: [사47:10]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지혜...지식 - 이것은 당시 주변 국가에 비해 월등하게 발전하였던 산수, 천문학, 점성학, 마법 등을 일차적으로 가리킨다. 특히 당시 점성학이나 마법 따위는 단순한 학문의 성격을 넘어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성 경: [사47:1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 여기 '근본'으로 번역된 '솨헤라'(*)는 '새벽의 빛', '새벽의 여명', '아침'을 뜻한다. 이 같은 의미를 존중할 때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새벽의 빛이 캄캄한 어둠을 갑자기 몰아내듯이 바벨론 위에 임하는 멸망도 갑자기 시작되리라는 것이다.

(주);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 여기 '물리칠'은 '속죄하다', '보상하다'가 그 원문적인 뜻이다. 말하자면 바벨론은 그 어떤 속죄의 희생물이나 기도, 제물 따위로도 임하는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는 신정(神政) 시대였다. 따라서 어떤 나라든 간에 위기가 닥치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 의존함으로써 위기를 해결하기 일쑤였다.

성 경: [사47:1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악신의 음성을 듣고 그 위기를 해결했던 영매자, 마법사들에게 이번에도 악신을 불러 위기를 한번 막아보라고 권하는 일종의 조롱조의 도전이다.

성 경: [사47:13]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하늘을 살피는 자 - 문자적인 뜻은 '하늘을 나누는 자'이다, 여기서 '나누는'에 해당하는 '호베레'(*)는 구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이며 '자르다', '나누다'를 뜻하는 아랍어의 동족어이다. 바벨론 사람들은 천체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땅의 일을 예언하기 위하여 하늘을 몇 구역으로 나누었다. 아마도 오늘날의 황도대(黃道帶), 12궁도 따위도 바로 여기에서 기원한 것 같다(Whybray).

(주); 별을 보는 자 - 문자적인 뜻은 '별을 응시하는 자'이다. 이는 단순히 천문학을 연구하는 차원보다는 별을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격체로 숭배했던 사실과 관련되는 표현인 듯하다.

(주);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 - 문자적인 뜻은 '달들에 관하여 지식을 주는 자'로서 달의 모양이 변해가는 동안 벌어질 땅 위의 사건을 예언하는 일종의 점쟁이들을 가리킨다. 하늘, 별, 달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들을 관찰하며 미래지사를 예언하는 자들을 비웃듯 열거하고 계신다.

성 경: [사47:1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이 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 문자적인 뜻은 '따뜻하게 하는 숯 하나 없으리라'이다. 이것은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암시한다. 초개나 나무의 등걸이 완전히 타버릴 경우 심지어 숯 하나 남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와 같은 장면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어떤 학자는 '그것으로 빵 하나 구울 수 있는 숯 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으리라'로 번역하기도 한다(Rosenmuller, Cocceius).

성 경: [사47:15]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교만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주); 너의 근로하던 것들 - 앞에 언급된 '하늘을 살피는 자', '별을 보는 자', '월삭에 예고하는 자' 등을 가리킨다.

(주); 너와 함께 무역하던 자들 - 바벨론은 지형학적으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많은 외국 배들이 그들의 항구를 빈번히 찾곤 하였다.

성 경: [사48:1,2]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주);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 문자적인 뜻은 '유다의 물들에서 나왔으며'이다. 여기 물줄기의 근원, 수원지를 연상케 하는 '물들'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비슷한 용어가 유다의 혈통을 암시하는 도 다른 대목에서 사용된 바 있다:"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민 24:7). 여기서 '유다'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은,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출생할 것에 대한 암시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창 49:10). 즉, 그토록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백성들이 타락하였음을 강하게 책망하는 것이다.

(주);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 '거룩한 성'이란 곧 예루살렘을 가리킨다(52:1;마 4:5). 이곳이 그렇게 불리운 까닭은 성전과 특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인 법궤가 있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룩한 성'이라는 명칭 속에서 그곳에 사는 백성들의 행실과 성품도 거룩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Keil & Delitzsch).

성 경: [사48:3]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본절에서 하나님은 과거에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장래의 일을 예언하시고 결국엔 그 일들을 성취했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그 성취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홀연히 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심으로써, 미래에 있을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의 성격도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신다(42:9;44:7, 8;45:21;46:10).

성 경: [사48:4]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주); 완악하며(*, 카솨) - 문자적인 뜻은 '굳은'인데 이것은 멍에 메기를 거절하는 수소에서 그 의미를 따온 것이다. '굳은 목', '뺏뻣한 목', '얼굴의 굳음'(겔 2:4), '마음의 굳음'(겔 3:7) 등으로도 묘사되고 있는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율법을 거절하는 상태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적 무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주); 목의 힘줄은 무쇠요 - 문자적인 뜻은 '목은 쇠 근육이요'이다. 이 비유 역시 멍에를 거절하기 위해서 그 목을 뻣뻣하게 하는 황소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다.

(주); 이마는 놋이라 - 이 표현은 흔히 수치를 모르는 매춘부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렘 3:3). 그러나 여기서는 무감각하고 완전한 상태를 나타낸다(렘 6:28).

성 경: [사48:5]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본절의 핵심은 하나님이 세상 만물과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치 않으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부패와 불신의 심성에 놓여져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을 입증하고도 남을 풍성한 역사적 경험과 말씀을 통한 계시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에게 향하는 전철을 되풀이하였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성 경: [사48:6]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주);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隱秘)한 일 - 3-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 때문에 먼저 어떤 일을 예언하고 그 후에 그 일을 성취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데 그 일은 이스라엘이 들어보지도 못한,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이 일은 1차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일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은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구원 사역의 완성일 것이다(Fausset).

성 경: [사48:7]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주);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 - 43:16-21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그곳에서 저자는 출애굽 사건을 '옛적 일'로 말하면서 '새 일'을 언급한 바 있으며 그 '새 일'을 그토록 놀라웠던 출애굽 사건마저 압도할 만한 어떤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사건이라면 바벨론 포로 귀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래로 말미암는 구원 사역까지 포함시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성 경: [사48:8]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주);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었나니(*, 로 피트하 아제네카) - 분명히 동사 '피트하'(*)가 능동태이므로 본 구절의 정확한 원문 직역은 '네가 너의 귀를 열지 않았다'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바로 앞 구절들과는 달리 귀 기울일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본절은 이스라엘과 특정한 어떤 사건과의 관계를 밝히는 내용이 아니라 그들의 어떤 특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 어떤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번번이 영적 귀를 닫아온 민족이었다.

(주);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 문자 그대로 부면 인간 개인의 출생 당시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사실 성경에 원래부터 부패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는 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 그러나 본서가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한 단위로 보고 진술하고 있으므로,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생, 곧 국가 역사의 시초로부터 하나님을 거역한 사실을 지적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사48:9]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주); 내 이름을 위하여 - 이 표현은 고레스에게 주신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45:4)라는 표현과 배치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곳의 '위하여'가 사용된 배경은 다르다. 45:4에서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고자 하셨음을 밝히는 반면, 여기서는 이스라엘 구원 자체의 궁극적인 이유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만유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른 것이다(J. Watts).

성 경: [사48:10]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주); 은처럼...택하였노라 - 여기 '택하였노라'는 '시험하였노라'가 그 원문적인 뜻이다. 당시 제련 과정에서는 광물들을 용광로에 넣음으로써 그 찌꺼가 가라앉고 순수한 원물질만 남았다. 이와같이 용광로에 광물을 넣는 목적은 순수한 물질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용광로에 광물을 넣는 것과 같은 시련이 많았지만 광물의 경우와는 달리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이다(Whybray).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고 죄를 고백케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저 아무런 효과없이 시련이라는 용광로 속에 넣다 뺐다 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건국 이래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입증한다.

성 경: [사48:11]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와 사랑]

(주);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 무지 때문에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이해하지 못했고 현재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다. 그런데 그러한 실상 때문에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신다면 이방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를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神)의 승리로 착각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및 이방이 전혀 알지 못한 '새 일'(6절)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것이다.

성 경: [사48:12]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바벨론의 멸망]

(주);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 41:4과 외관상으로 유사하지만 그곳에서는 '역사성'을 강조하는 '도르'(*)가 사용되었고(41:4에서 '만대'로 번역됨) 이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역사성' 보다는 온 우주의 흥망 성쇠(興亡盛衰)를 쥐고 계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

성 경: [사48:13]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바벨론의 멸망]

(주);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 문자적인 뜻은 '내 오른손이 하늘을 재었다'이다. 40:12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 그리고 그 능력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특히 만물을 창조, 보존하시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을 모르실 리 없다. 자신이 만물의 흥망 성쇠를 쥐고 있음을 강조하여 이스라엘의 관심을 집중시키신 후 하나님께서는 시야를 좁혀 이스라엘 영역 속에서 되어질 일을 소개하고자 하신다.

성 경: [사48:14]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바벨론의 멸망]

(주); 나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벨론 위에 시행할 고레스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랑하는'이란 표현이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도덕적 품성을 기뻐했다거나 그가 경건한 자였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도구로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고레스에게만 적용하기에는 너무 강한 표현이다. 이 표현을 온전히 적용할 대상은 메시야이신 예수 뿐이시다(눅 3:22). 그렇다면 이 표현은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로서의 고레스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성 경: [사48:15]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바벨론의 멸망]

본절의 특징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 '나'가 세 번씩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특징은 이방 왕 고레스를 선택하고 그로 흥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임받게 만드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하에 되어지는 일임을 드러낸다. 원문에 보면 '그 길이 형통하리라'가 '그가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하리라'라고 되어 주어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뀐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같은 인칭의 변화는 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자 고유의 기법이다(Barnes).

성 경: [사48:16]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 본 구절을 기점으로 화자(話者)가 하나님에서 본서 저자인 선지자로 바뀌고 있다. 먼저 '신'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데 이 용어가 먼저 '신'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데 이 용어가 나온 것은 저자의 사역이 자신이 아닌 성령에 의해 되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화자가 바뀜으로써 이어질 예언의 내용, 곧 17-22절이 몹시 중요한 내용임을 기대케 한다.

성 경: [사48:17]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여호와라 - 본절은 저자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수식어들을 사용한 데다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직접 연이어 놓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본문의 수식어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인 이스라엘간의 언약 관계가 여전히 존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주); 가르치고...인도하는 - 이 용어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일을 압축시켜 놓은 것인데, 원문에 보면 이 용어들은 분사형으로 되어 있다. 이 사실은 괄목할 만한데 히브리어에서 분사형은 계속되는 상황을 강조할 때 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부각된다.

성 경: [사48:18]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얼핏 보면 본절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것 같지만, 사실은 백성에게 의도한 하나님의 축복의 풍성함을 역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은, 본절이 지닌 시적 성격을 드러내 보면 잘 알 수 있다. 본절에 드러난 하나님의 축복 부분만 시적 구조에 충실하게 정리해보면 이렇다:'강과 같았(겠)다. 너의 평강이 그리고 너의 의가. 바다 물결 같았(겠)다.' 본절의 주안점은 무한한 평강과 의에 있는 바,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축복이다. 즉, 평강과 의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분의 백성이 되는 언약 관계에서 나타나는 축복이다.

성 경: [사48:19]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18절과 본절 상반절에는 축복이 기록되고 있는데, 전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내적 축복인 반면 후자는 외적 축복이라 봐도 무방하다. 특히 후자의 내용은 낯익은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축복을 반영하고 있다(창 22:17;32:12).

(주); 그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 이름이 끊어진다는 것은 그 백성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반역으로 일관된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아울러 여기에는 혈통적, 민족적 개념의 이스라엘을 영적 이스라엘로 대치시키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어렴풋이나마 시사되고 있는 듯하다. 즉, 언약 백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쥐고 있던 그 영광스러운 신정 체제는 이제 망각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그림자와 모형의 시대가 지나가고 왕되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이 넌지시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사48:20]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주); 피하고 - 압제하는 민족으로부터 온갖 수단을 다해 탈출해 나오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 놓았으니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이제 나온 자들은 그냥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쁨으로 찬양하고 땅 끝까지 그 사역을 선포할 것이다.

성 경: [사48:21]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본절에는 과거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가 그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20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보증물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본서 저자는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이미 발생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서 있는 시점은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인 1차 독자들에게 바벨론 포로 기간 이후 귀환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확실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준하는 실제적인 보증물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이 제시하는 사건은 광야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모든 사건을 망라해서 대표적으로 제시된 사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이 본절은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근거로 하여 20절에 나타난 앞으로 있을 구원 사역을 튼튼하게 제시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반복하지만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여호와의 위대한 구원 사역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본서가 암시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사역이란 옛날 출애굽으로 대표되는 구원 사역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랍고 새로운 구원 사역인 것이다. 이 새로운 구원 사역은 천지를 처음 창조한 하나님의 사역에 필적한 것이며, 그 창조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 주며, 그 목적을 완성시켜 주는 새 창조의 사역임을 이미 40장 이후부터 저자가 계속 시사해 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49-53장에 서술되고 있는 메시야의 사역에 관한 내용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성 경: [사48:22]

주제1: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심으로 벌어질 일 중의 하나는 두 부류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두 부류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받느냐 안 받느냐로 갈라질 것이다.

성 경: [사49:1]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종의 노래]

(주); 여호와께서...말씀하셨으며 - 본문의 화자(話者)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누인다. 먼저 이스라엘 혹은 고레스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 근거는 본절에 나오는 '부르셨고', '이름' 따위의 표현이 분명히 이스라엘이나 고레스를 가리키는 43:1;45:3과 연관성을 나타낸다는 점이다(Whybray). 반면에 메시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 근거로는 43:1;45:3과는 달리 본 문맥이 종으로 오신 메시야를 요청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들고 있다(Barnes, Fausset, Clark). 우리는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신약은 예수께서 그의 출생 전부터 메시야의 사역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출생 전 하나님으로부터 그 이름을 부여받았던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마 1:21;눅 1:31). 42장 이후 일반적인 용어들로 그 특성과 사역이 암시되었던 메시야는 본장에서부터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가 감당할 사역을 선포하고 있는데, 그 선포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 나라에도 구원 사역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성 경: [사49:2]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종의 노래]

(주);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 성경에서는 하나님 말씀의 설득력과 능력을 나타낼 때 '찌르는 것', '검' 따위에 비유한다(전 12:11;히 4:12). 한편, 계 1:16;19:15 등에서 요한은 본문을 인용하여 구세주를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 바로 앞 구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때 '나'는 칼과 같은 능력있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은 망토에 칼을 숨기듯 메시야의 칼과 같은 말씀을 숨기셨다가 적절한 때 그 말씀을 내실 것이다(Hengstenberg).

성 경: [사49:3]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종의 노래]

(주);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 여기 '종'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1)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유대인'으로 보는 견해인데(41:8)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는 선포에 근거를 둔다(44:23, Rosenmuller). 이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이 종에 대한 언급으로 나오는 후속절의 내용이 결코 유대인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본서 저자인 이사야로 보는 견해이다(Grotius, Dathe). 이 견해는 '이스라엘'이란 호칭을 이사야에게 붙여줄 근거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쉽게 반박된다. (3) 메시야로 보는 견해이다. 사실 후속절들에 나오는 이 인물에 대한 묘사와 신약에 나오는 설명(마 13:57;눅 2:32)은 메시야와 일치하고 있는 특히 7절에 열방의 왕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언급은 메시야 외의 다른 인물을 적용시키기 힘들다는 점을 확정짓는다. 문제는 '메시야'에게 '이스라엘'이란 호칭이 붙여진 점인데 한 개인인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호칭이 부여되었듯이, 사탄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의 머리가 되신 메시야에게 영적 의미의 이스라엘이란 호칭을 부여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될 만하다 하겠다.

성 경: [사49:4]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종의 노래]

(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 메시야 당시 팔레스틴 땅의 인구 수에 비해 결국 그의 사역을 통해 믿게 된 자의 수가 너무 적을 사실을 내다보는 언급으로 이해된다. 성경은 메시야의 부활을 믿는 수준에 이르렀던 자의 수가 대략 500여 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측케 한다(고전 15:6).

(주); 나의 신원이...하나님께 있느니라 - '나의 심판이 여호와와 함께 있고 나의 상급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원문 직역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메시야의 사역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상급을 내리신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메시야의 수고와 고통이 결국에는 목적할 만큼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결코 낙심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42:4;50:7-9). 메시야의 고난과 십자가 사역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의 사역을 통하여 얻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었다(53:10-12;벧전 2:23).

성 경: [사49:5]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종의 노래]

(주);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모이게 하시려고 - 양치기가 그의 흩어진 양들을 혹은 암탉이 그의 병아리들을 다시 모으는 장면에서 따온 비유이다:"예루살렘아 예루사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깨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 23:37). 메시야 예수께서 땅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함이었다.

성 경: [사49:6]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종의 노래]

(주);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이르게 하리라 - 혈통적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는 일은 메시야가 궁극적으로 이루실 과업에 비해서는 너무 작은 일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거듭된 반역으로 한 혈통적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구원은 막을 내렸고 이제 그 사역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세계를 대상으로 하되 메시야를 구세주로 믿는 개개인들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구원 사역은 이어질 것이다.

성 경: [사49:7]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종의 노래]

(주);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 종으로 오실 메시야의 특징을 한마디로 잘 요약하고 있는 구절인데, 좀더 자세한 묘사는 53장에 나온다.

(주);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보고 모든 이방 권세자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가리킨다.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 표현이다.

성 경: [사49:8]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 갑자기 시제가 완료형이 되었다. 메시야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장면이 선행되어 있음을 짐작케 하는 표현이다. 은혜를 구하는 장면이란 다름 아닌 메시야의 대속적 죽음을 가리킨다. 메시야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가리킨다. 메시야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근거를 마련하셨다. 이와 같은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은혜를 베푸실 것을 확신하는 의미에서 저자는 완료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 경: [사49:9]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잡혀 있는 자 - 영적 우매에 사로잡혀 있는 자를 가리킨다. 메시야께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고 인간의 죄를 속하신 1차적 이유는 영적 우매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을 해방하시기 위함이었다(42:7).

(주); 길에서...것인즉 - 여기 '길'이란 광야를, '자산'이란 나무,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을 각각 가리키는데, 그곳에 푸른 초장이 있다는 묘사는 후속절에 나오는 그 양떼를 먹이시는 목자되신 메시야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룬다. 비록 메마른 광야를 다닐지라도 참목자되신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 양떼들은 목마르거나 굶주리지 않는다는 영적 의미가 숨어 있다.

성 경: [사49:10]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 이것은 사막을 여행하던 대상(隊商)이 쉴만한 그늘이나 수풀을 만나게 되는 것을 연상케 한다(4:6;14:3;25:4;32:2). 목자되신 메시야를 통해 부여되는 보호, 쉼, 기쁨 등을 가리키는데, 신약에서도 동일한 이미지가 나온다:"...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계 7:16).

성 경: [사49:11]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모든 산을 길로 삼고 - 여기 '산'은 장애물을 상징하는 바, 본문은 그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여기 '산'을 복음 전파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로마라는 한 나라에 복속되었던 애굽, 시리아와 같은 큰 나라들로 보기도 한다(Vitringa).

성 경: [사49:12]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시님(*) - 성경에 한 번만 등장하는 용어이므로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를 규명하기란 불가능하다. 70인역(LXX)은 '페르시아'로, 갈대아역은 '남부'로, 또 다른 학자는 '팔레스틴의 남부'로 각각 보고 있다. 특이할 만한 견해는 오늘날의 '중국'으로 보는 견해인데 이 견해는 당시 아라비아나 시리아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의 중국은 '시님'과 그 음역이 비슷한 '신', '친', '치니' 등으로 불리웠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Gesenius). 이렇게 견해가 엇갈리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이 팔레스틴으로부터 먼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 혹은 이방인이 메시야의 복음을 듣고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의 구성원으로 소속될 것이다.

성 경: [사49:13]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하늘이여 노래하라...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생물인 자연을 그의 성가대로 부르신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 '위로'란 문자 그대로 억울하거나 힘든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베푸는 정도의 선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다. 본서의 특징은 동일한 사상을 계속 반복 심화시킨다는 점인데, 이곳과 유사한 사상을 피력하고 있는 44:21-23에 의하면 '위로'란 죄사함이다. 또 본서는 '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본서에서 '의'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본서는 동시에 그 '의'가 메시야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만족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여기 '위로'란 메시야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죄인들의 죄사함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놀라운 사실 때문에 자연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그 백성을 메시야를 통하여 구속하시는 근거는 그의 언약이다. '그 백성'이 언약적 용어라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성 경: [사49:14]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시온 -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포로지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그곳에 영원히 버려두시고자 한 것처럼 불평할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본서의 집필 시점은 포로로 잡혀가기 100여 년 전인데, 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완료형이 사용되었다.

성 경: [사49:15]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훨씬 승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표현은, 없는 사실을 일부러 가정한 것이 아니다.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오늘날의 세태에서도 가끔 볼 수 있거니와, 당시 이방 부모들 가운데는 형편상 그의 어린 자녀를 버려서 죽어가게 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롬 1:31, Barnes).

성 경: [사49:16]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손바닥에 새겼고 - 손바닥은 자주 들여다볼 수 있게끔 가까이에 있는 것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주);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 이 표현도 계속 시선을 떼지 않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결국 본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로부터 멀리 계시거나 무관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힌다.

성 경: [사49:17]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 원문 직역은 '네 자녀들은 서두를 것이다'이다. 무엇을 하기 위해 서두르느냐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 '자녀들'로 번역된 '바나이크'(*)는 '너의 아들들'로 또는 '너의 건축자들'(70인역)로 번역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서두르며 하는 일이란 건축에 관한 것이라는 암시를 추측케 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포로 이스라엘이 그 무너진 성벽과 성전을 수축하기 위하여 서둘러 귀환할 사실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

성 경: [사49:18]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 원문 직역은 '살아 있는 내가 말하노니'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맹세의 중요한 한 형태인데, 이것은 이 맹세에 따르는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에 대한 엄중한 확신을 내포한다(렘 22:24;겔 5:11;14:16, 18, 20;16:48).

(주); 네가 반드시...신부처럼 할 것이라 - 성경에서 시온은 흔히 신부에, 개심자들은 신부의 장식품에 각각 비유되고 있다(62:3;말 3:17). 여기서 시온의 자녀들이란 1차적으로 포로 귀환할 이스라엘 백성을, 2차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로 개심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이 후자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완전한 회심을 이루는 수단이 될 것이다(미 5:7, 8;롬 11:12-15).

성 경: [사49:19]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거민이 많으므로 좁게 될 것이며 - 1차적으로는 귀환할 백성으로 인해 그 땅이 붐비게 될 것을 가리키나,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될 진정한 개심자들이 무수히 많을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본 암시는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주셨다(창 12:1-3;13:14-17 등).

성 경: [사49:20]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고난 중에 낳은 자녀 - 원문 직역은 '너희의 사별(死別)의 아들들'이다. 이는 남편과 사별한 사실보다는 자녀와 사별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1차적으로 전쟁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많은 자녀들을 잃어버린 예루살렘이 이제는 각처에서 돌아온 백성들로 크게 붐비게 될 것을 예언하는 말이다(Whybray). 그리고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덕분에 믿음을 지니게 될 성도들에 대한 암시로도 이해된다.

성 경: [사49:21]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누가...생겼는고 - 이것은 1차적으로는 예기치 못한 회복을 목도한 시온의 즐거운 비명이며, 2차적으로는 영적 이스라엘의 행렬이 이방 각처에서 교회로 이어질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 이러한 사실에 따른 탄성, 비명은 행 10:45에서 가장 먼저 성취되었다:"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Fausset).

성 경: [사49:22]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주);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 손을 쳐든다는 것은 환영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이방인이 메시야를 받아들이는 복된 대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부르고 환영하신다는 것이다(11:11).

(주); 그들이 네 아들들을...올 것이며 - 어느 정도 자란 아이는 어깨에 올려 놓고 아주 갓난 아이는 가슴에 안은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은, 이방인들이 혈통적 이스라엘과 함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 구성원으로 가입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사49:23]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시온의 재건]

본절의 이미지들은 보호, 복종 등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땅 위의 권세잡은 자들에 의해 보호받고 또 그들을 복속시킬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일례로, 이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國敎)로 공인된 사실이나 기독교의 영향력이 로마 전체에 미쳤던 사실은 생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성 경: [사49:24]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바벨론의 함락에 대한 예언]

(주); 용사의...있으랴마는 - 바로 뒤에 강한 긍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부정의 문구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포로된 백성을 해방시킬 뿐 아니라 나아가 신약 교회 시대에 핍박 받는 그의 성도들을 핍박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에 대한 강한 암시이다(Fausset, Clark).

성 경: [사49:25]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바벨론의 함락에 대한 예언]

(주); 대적하고...구원할 것임이라 - 문자적인 뜻은 '싸워서...구원할 것이다'이다(54:17). 전쟁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세상 군왕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무기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다. 그 무력해 보이는, 그러나 진정 강한 그 무기를 가지고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성 경: [사49:26]

주제1: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위로]

주제2: [바벨론의 함락에 대한 예언]

(주);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 적의 자중지난(自中之亂)을 암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대적은 서로 치고 받아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계 16:6).

성 경: [사50:1]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

(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 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 여기서 시온은 아내, 유대인은 자녀들, 그리고 하나님은 남편과 아버지로 비유되고 있다(54:5;62:5;렘 3:14). 율법에 따르면, 한 가정의 가장은 아내에게서 결격 사유를 발견하면 합법적으로 그 아내를 내보낼 수 있었는데 그때 이혼장을 주었다(신 24:1). 그런데 악한 가장들은 아내를 내보내는 행위를 정당화 시킬 때 이 율법대로 이혼장을 써주었다(마 19:7 참조). 뿐만 아니라 악의가 없는 가장들도 채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할 때 자녀들을 종으로 팔기도 하였다(출 21:7;왕하 4:1;느 5:5). 그런데 본절에서 하나님은 아내된 이스라엘과 자녀된 그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이 팔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혼 증서를 써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에 대한 징벌 때문인 것을 밝히기 위해 이스라엘이 익히 알고 있는 한 율법 조항을 사용하여 설명하신 것이다. 이 설명 속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인연은 잠시 중단된 것이며 한 남편이 그 아내와 자녀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 징벌의 의미를 깨닫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합법적으로 그 관계를 회복하실 수 있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Horsley).

성 경: [사50:2]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

(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 마치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강림하신 적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 표현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던 사실을 암시한다(렘 7:25, 26).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지 않자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리스도의 선지자되심은 베드로의 설교 속에 잘 드러난다(행 3:22-26).

(주); 내 손이 어찌 짧아...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 길게 뻗은 손은 '능력'을, 그 짧은 손은 '연약함'을 상징한다(59:1, Fausset).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고 그 수치스러운 생활이 지속되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에 대한 징벌의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우매한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계속 묘사된다.

(주); 거기 물이...되느니라 - 어떤 학자는 근종 사막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렬한 태양 광선으로 강줄기가 말라 그곳에 있던 물고기가 죽은 현상에 대한 묘사로 보지만(Barnes), 그것보다는 출애굽 전, 애굽의 하수가 피로 변하여 그곳의 물고기가 죽고 악취를 풍겼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더 문맥적이다(출 7:18-21).

성 경: [사50:3]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

(주);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출애굽 전 하나님이 애굽 땅에 내리셨던 흑암 재앙을 가리킨다(출 10:21, 22).

(주); 굵은 베로 덮느니라 - '베'는 그 피륙의 조직 상태가 조잡하고 어두운 색으로 되어 있는 천으로, 애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삼하 3:31). 그러나 본절에서는 애도의 상징보다는 그 색이 검다는 사실 때문에 언급되었으므로 본절의 상반절과 동의적 개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2절에서는 땅 위, 본절에서는 하늘에 일어난 초자연적 현상을 대비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온 우주를 향해 그 능력을 발휘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성 경: [사50:4]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메시야의 순종과 승리]

본절부터는 화자(話者)가 바뀌고 있다. 이 화자가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본서 저자인 이사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경우, 8절은 이사야가 바벨론 정부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사실에 대한 묘사라고 한다. 물론 이사야가 심문을 받는 이유는 바벨론이 바사에게 곧 멸망할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Whybray, J. Watts).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사야가 바벨론 정부에 체포되어 심문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구절은 없다. 다른 하나는 메시야로 보는 견해이다. 초대 교회 시대 이후 지지를 받아왔던 이 견해는 결정적인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6절을 인용하여 그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던 사실을 들고 있다(눅 18:31, 32). 이 결정적인 단서를 빼고서 객관적으로 볼 때도 철저하게 능욕당함(6절), 여호와로 인한 궁극적 승리(8절) 등은 이사야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메시야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증거들이라 하겠다.

(주); 곤핍한 자 - 문자적인 뜻은 '지친 자'이다. 죄 의식으로 눌려 있는 자 혹은 무거운 짐을 지고 견딜 수 없어 하는 자 등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성 경: [사50:5]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메시야의 순종과 승리]

(주); 귀를 열으셨으므로 - 이 표현은 가르침의 전달이나 임무 수여를 뜻할 때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룻 4:4;삼상 9:15). 메시야는 인류 구속의 성취라는 막중한 임무를 하나님께 받으셨다. 비록 그 임무 수행에는 온갖 고통이 따르지만 그분은 그것을 기꺼이 수행하셨다.

성 경: [사50:6]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메시야의 순종과 승리]

(주); 나를 때리는...등을 맡기며 - 물론 이사야 자신도 이 같은 유(類)의 시련을 전혀 당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 표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취되었다(마 27:26;눅 18:33).

(주); 수염을...맡기며 - 수염은 당시 사회에서 일종의 영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 수염을 자르거나 뽑는다는 것은 최고의 모욕 중 하나였다. 특히 이 같은 행위를 하는 자들은 사악한 자들로 간주되었다. 로마의 악한 소년들 중에는 족집게로 학자들의 긴 수염을 뽑는 못된 습관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Hengstenberg). 이 무례하고 사악한 부류에게 메시야되신 그리스도께서는 빰을 맞으셨다(마 26:67;눅 18:32).

(주); 침 뱉음 - 누구의 면전에서 다른 곳을 향해 침을 뱉는 것은 모욕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더구나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바로 이 모욕을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다(눅 18:32;막 14:65;15:19).

성 경: [사50:7]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메시야의 순종과 승리]

고통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을 아시고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모든 오욕을 인내로 이겨내실 것임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주);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 성경에서 마음, 이마, 얼굴 따위를 굳게 한다는 표현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모두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부여된 임무를 고통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완수할 것이라는 각오가 담겨져 있다:"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미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도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겔 3:8, 9).

성 경: [사50:8]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메시야의 순종과 승리]

(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 여기 '의롭다 하심'이란 죄인을 의롭다 하는 칭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메시야의 의롭고 무죄하신 품성을 인정하고 드러내심을 가리킨다.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의 사역 과정에서 이 사실은 잘 드러난다. 먼저 그가 침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를 통하여(마 3:17), 그가 행하신 기적을 통하여, 빌라도 아내의 입을 통하여(마 27:19), 심지어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로마 백부장에 의해서(눅 23:47) 그의 의로움이 증거되었다. 결국, 이는 그의 공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인정 속에 되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며 그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사 하늘로 오르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의 의로우심은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주); 나의 대적이 누구뇨(*, 미 바알 미쉬파티) - 문자적인 뜻은 '누가 나의 재판의 주인이냐'이다. 얼핏 보면 재판장이 누구냐는 질문으로 보이나, 문맥상 '나의 의로움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불의함을 선고하기 위하여 재판을 걸어오는 자가 누구냐'라는 의미의 질문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 누가 재판을 걸어봐도 결국 메시야 자신의 의로움은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다(Barnes, Fausset).

성 경: [사50:9]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메시야의 순종과 승리]

(주); 주 여호와께서...누구뇨 - 사도 바울 역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성 경: [사50:10]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권고]

(주); 너희 중에...누구뇨(*, 미 바켐) - 이 표현을 이해하는 견해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본절이 묘사하는 대상, 곧 경건한 자의 숫자가 매우 적을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며(Hengstenberg), 다른 하나는 단순히 '누구든지'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부사로 보는 견해이다(Fausset). 문맥상 후자가 타당하다고 본다. 본절에서 메시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혹독한 재앙에 처해 있을 때에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 하지 말고 메시야 자신을 본받아 자신들을 신실한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의탁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성 경: [사50:11]

주제1: [이스라엘의 죄와 종의 순종]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권고]

(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 - 원문 직역은 '섬광(불꽃)으로 너 자신을 둘러쌀 불을 지피는 자'이다. 여기 '섬광(불꽃)'이란 지속적으로 타는 것이 아니라 잠시 큰 광채를 내지만 곧 스러지고 마는 문자 그대로의 불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본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인생 여정에서 역경을 만날 때 자신의 보잘것 없는 능력으로 그것을 헤쳐보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영매, 마법 등에 의존하는 영적 무지에 빠졌던 백성들 혹은 인간 철학의 교묘한 올무, 거짓 종교, 무신론, 자기의 등에 빠져 있는 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결국 그 의존하는 것으로 인하여 멸망하고 만다. 이것은 마치 빛과 열기를 기대했던 불에게 삼키움을 당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무튼 10절과 본절은 인생 여정, 특히 역경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와 자신이나 우상을 의지하는 자를 비교하고 그 결과를 뚜렷이 대조시킨다.

성 경: [사51:1]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 - 이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본국으로 귀환할 때를 고대했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를릉 다포로 생활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던 자들이었다. 본문에서 이들은 '의를 좇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칫하면 형식적 율법 준수에 집착하는 것으로써 선민(選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바로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려고 하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주); 반석 ... 구덩이 - 이 둘은 석수장이가 돌을 떠내서 움푹 패인 자리를 가리킨다. 무엇인가 암시하는 이미지인데, 그 내용은 2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 곧 하나님이 그 주권적 의지에 따라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언약 백성이 출현하게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용어가 포함된 문장과 2절 상반절은 공히 '생각하여 보라'로 끝맺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사51:2]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너희 조상 ... 생각하여 보라 -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의'(5절 참조) 설명함에 있어서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되어 많은 수의 민족으로까지 불어난 이스라엘 민족을 예로 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약속을 부여하시되 인간의 안목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 곧 노인 사라를 통한 자손 출생을 통하여 그 약속을 이루어 나가셨고,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큰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이 위로를 받은 남은 자들은 구원에 관한 절대 주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의로워질 수 있는 근거를 이 소망 위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 경: [사51:3]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그 광야로 에덴 같고 - 여기 '에덴'은 하나님이 인간의 거주지로 정하셨던 최초의 장소인 에덴 동산을 가리키는데(창 2:8,9), 구약에서 이 호칭은 이상적인 목초지 혹은 농경지의 상징이 되고 있다(창 13:10;겔 31:8,9). 그러나 겔 36:35과 마찬가지로 본 호칭은 미래에 다시 회복될 처소를 상징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본절은 종말론적 관점에서도 이해 가능하다. 1차적으로 본절은 혼자였던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만드셨던 하나님이 포로지의 남은 자들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재건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그리고 그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완료형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는 '에덴'이란 호칭으로 미루어 볼 때, 본절은 메시야를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 그리고 더 나아가 메시야의 재림 때에 있을 완전한 구속 사역의 성취에 따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까지 그 시야를 확산시키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사51:4]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내 백성 ... 내 나라 - 각각 '암미'(*), '레움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용어를 각각 '민족들'이란 뜻의 '아밈'(*)과 '나라들'을 뜻하는 '레우밈'(*)으로 바꿈으로써 본 구절의 청중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한 만민들인 것으로 보려 하나 '만민'에 관한 언급이 따로 나오므로 원문 수정까지 해가면서 굳이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주);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 원문에 입각한 직역은 '나의 심판은 만민의 빛이 되리라'이다. 문맥상 본절의 '율법'과 본문의 '심판'은 동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본절과 5절 내용은 여호와의 날에 되어질 상황을 그린 2:3,4과, 이방에 공의를 베푸실 '종'의 노래에 해당하는 42:1 내용과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의 예언 역시 바벨론 포로 귀환뿐 아니라 메시야 시대에 되어질 일들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이라 하겠다.

성 경: [사51:5]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 계속해서 복합 성취를 겨냥한 예언이 나오며, 특히 종말론적 색채가 짙은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와 이스라엘의 죄의 해결을 동시에 만족시킬 대속주이신 메이야의 대속 사역을 암시한다. 한편 메시야의 대속 사역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2차적으로는 이방의 택한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주); 팔 -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26)을 가리킨다.

성 경: [사51:6]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하늘이 연기같이 ... 죽으려니와 - 만물의 일시성,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묘사이지만 종말에 되어질 어떤 징조에 대한 암시가 정확히 담겨 있지 않다고 볼 수도 없는 구절이다. 이 같은 묘사가 갑자기 나오는 것은 앞서 언급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통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의 선택받은 자의 구원은 결국 성취되고 말 분명한 사실이다 :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시 102:26;히 1:11,12).

성 경: [사51:7]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의를 아는 자들 ...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 - 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여호와의 구원을 사모하여 율법대로 살아가고자 힘쓰는 이들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특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뜻한다. 이제 바벨론 포로 사건을 놓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어떻게 구원받겠느냐'라고 조롱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위기 때 여호와의 언약적 신실성을 확신하는 이들은 결코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마 10:28).

성 경: [사51:8]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 좀이 의복을 갉아먹어버리듯이 무기력하게 멸망당하고 말 악인들의 허망함과 유약함을 나타낸다(Fausset). 이처럼 유약한 인간이라면 그가 내뱉는 조롱조의 말은 생명력도 없고 영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하나님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해(害)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며 따라서 그분에게서 나온 말씀, 구원의 계시는 생명력이 있다.

성 경: [사51:9]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사야의 간구]

(주); 깨소서 깨소서 - 하나님의 과거의 전능 사역을 회고하며 아뢰는 이 호소는 '공동체적 애가'(corporate lamentation)의 특성을 보여준다(시 44:1-3, 23;80:2). 하나님의 구원을 재촉하는 듯한 이 호소는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 긴박한 현실 상황으로부터 한시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 말이다.

(주); 라합 - '애굽'의 시적인 이름이다. 이미 본서 저자가 사용한 바 있다 :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30:7).

(주); 용(*, 탄닌) - 문자적인 뜻은 '악어'인데 악어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애굽 정복 뒤에 애굽의 동전에 새겨진 그림을 통해 확인하였듯이 애굽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특히 그 왕 바로를 가리킨다(27:1;시 74:13,14;겔 32:2). 선지자는 여기서 기적적인 출애굽 사건 중 바로의 항복기사를 회상하고 있다.

성 경: [사51:10]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사야의 간구]

(주); 바다를 ... 주가 아니시니이까 - 여기서 '바다'는 홍해를 가리킨다(43:6;출 14:21). '당신은 홍해 기적 사건을 일으키신 바로 그 전능자가 아니십니까?'라고 묻고 있지만 이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의 질문이다.

성 경: [사51:11]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사야의 간구]

(주);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 1차적으로는 넓게 펼쳐진 광야를 지나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귀환민들에게 찬양과 감격이 가득할 것을 서술한 것이다. 한편 본절이 9,10절의 애가적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하여 본절의 화자(話者)를 하나님으로 보려는 시도도 있으나, 원문상 9-11절과 12-16절은 서술 시점 및 사용된 인칭에 있어 분명한 구별성을 보이고 있다.

성 경: [사51:12]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거듭되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나여늘 나여늘(*, 아노키 아노키) - 보기 드물게, '아노키'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참위로자, 구원자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반복되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그의 백성에 대한 답답한 심정의 표출이기도 하다.

성 경: [사51:13]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거듭되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 원문 직역은 '너를 멸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이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은 표적을 정하고 활시위를 뒤로 잡아당긴 상태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시 7:13;11:2;21:12, Maurer). 사실 이와 같은 상태 속에 있다면 두려워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본절은 그와 같은 상태 속에 있더라도, 우주 안에 되어지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람과 하나님 중에 누구를 더 의지할 것인가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며 날마다 부딪혀야 하는 심각한 질문이다.

성 경: [사51:14]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거듭되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 여기 '결박된 포로'(*, 초에)의 문자적인 뜻은 '한 쪽으로 치우친 것' 혹은 '기운 것'으로 담은 액체를 쏟기 위해 기울인 그릇 따위를 연상케 한다(헴 48:12). 그렇다면 이것은 포로로서 그 헐리를 구부린 모습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회화적 표현이라 보면 적절하다. 이제 그 포로 상태에서 속히 놓인다면 본절의 시점은 포로 시대 말기 쯤이 될 것이다. 이 표현을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승리할 신약 교회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Fausset).

성 경: [사51:15]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거듭되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고 흉용케 하는 자 - 원문 직역은 '그 물결이 뛰는 바다를 나눈 자'이다. '꾸짖어 뛰는 파도를 잠잠케 한 자'로 번역하는 역본도 있다. 이 같은 번역들을 종합할때 본 구절은 파도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흉용한 바다를 명령하셔서 잔잔케 하시고 둘로 나누어 그 사이에 길을 내심으로 이스라엘로 무사히 건너게 하셨던 홍해 도보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사51:16]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거듭되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

(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 이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본문이 세 번째 종의 노래를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할 때(49:2), 이는 본서에서 줄곧 암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을 통한 신기원적인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고 추측할 수 있다(49:2;50:4,5;59:21;신 18:18;요 3:34, G.W. Grogan).

성 경: [사51:17]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스라엘의 각성 촉구]

(주);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 - 당시 바벨론의 포로로 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상태를 분노의 잔을 마신 자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담긴 잔을 마신 자는 전적으로 파멸당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비유는 그리스도에 대속적 죽음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바 있다(막 10:38). 한편 9절에서 사용된 '히트오레리'(*) 곧 '깰지어다'가 여기서도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1차적으로 진정 깨어나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인 것 같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회복될 것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사51:18]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스라엘의 각성 촉구]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을 회복할 존재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은 바사 왕 고레스의 개입에 의해 실현되었다. 아울러 본문은 영적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적 존재 곧 메시야를 통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사51:19]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스라엘의 각성 촉구]

(주); 이 두가지 일 - 정확히는 '이 두 가지 일들'이다. 말하자면 두 쌍, 곧 네 가지 일들을 가리키는데, 먼저 한 쌍은 땅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황폐와 멸망이며 또 다른 한 쌍은 사람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기근과 칼, 곧 전쟁이다. 한편, 이를 내적 사건과 외적 사건으로 구분하는 견해(Aben Ezra, Kimchi), 혹은 기근으로 인한 황폐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멸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Clark).

성 경: [사51:20]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스라엘의 각성 촉구]

(주);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 여기 '모퉁이'(*, 로쉬)란 그 문자적인 뜻이 '머리', '꼭대기'인데 거리의 '머리'(꼭대기)란 당시 한 도시의 모든 거리와 도로의 출발점이자 중심지였던 성문을 가리킨다. 당시 성문은 밤이 되면 폐쇄되었는데 문 안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자로서 밤이 되어 그 문이 폐쇄되면 그 문 앞에 모여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모습 곧 여럿이 성문 앞에 모여있는 모습을 저자는 그물에 걸린 영양떼에 비유하고 있다. 어쩔 도리없이 그 발이 묶인 나그네와 같이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다.

성 경: [사51:21]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스라엘의 각성 촉구]

(주);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 - '포도주 없이 취한 자'이다. 포도주 때문이 아니라 외적의 침입으로 비틀거리고 쓰러진 이스라엘의 형편을 지적으로 표현이다(29:9;애 3:15).

성 경: [사51:22]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스라엘의 각성 촉구]

(주);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 문자 그대로는, 다시는 바벨론 포로와 같은 시련과 재난을 허락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 후에도 로마의 침공으로 동일한 시련과 재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제 경건한 참이스라엘 백성, 곧 남은자들은 세상에서는 시련과 재난을 겪으나 결국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결코 동일한 고통을 겪지 않고 살게 될 것이다.

성 경: [사51:23]

주제1: [의로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이스라엘의 각성 촉구]

(주); 그들의 앞에 ... 하였느니라 -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잔혹하게 대하였던 사실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 정복자들이 문자 그대로 그 피정복 국가 왕의 목을 밟았던 관습은 성경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수 10:24;66:11,12).

성 경: [사52:1]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네 힘을 입을지어다 - 문자적인 의미를 중시하면 좌절, 낙담에서 벗어나서 여호와의 능력에 의지함으로써 강하고 담대하라는 뜻이다(40:28-31;51:9;삿 6:12-16;시 84:5,7).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의 평행구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Fausset). 예루살렘은 여기에서처럼 흔히 여성에 비유된다.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것은 문맥상 포로 및 고통과 대조를 이루는 돌립 및 기쁨, 번영의 미래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주); 이제부터 ... 것임이니라 - 여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란 문맥상 이스라엘을 침입하는 이방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귀환이후에도 두 차례 정도 큰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따라서 본 예언은 그 완전한 성취 시점을 먼 미래로 잡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Leupold). 먼 훗날 곧 메시야의 완전한 통치를 받게 되는 날, 이스라엘 곧 교회는 부정하고 불의한 세력의 통치없이 완전한 성결을 이루며 살게 될 것이다.

성 경: [사52:2]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보좌에 앉을지어다(*, 쉐비) - 문자적인 뜻은 '앉으라'이다. 문맥적으로 볼 때 이것은 마치 일어섰던 곳, 곧 티끌에 다시 앉으라는 뜻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용어는 영예로운 진리, 왕의 자리 등에 앉기를 권할 때 주로 사용된다. 여기서 우리는 포로 귀환할 이스라엘이 포로 해방이라는 차원을 넘어 무너진 왕조를 다시 회복할 것까지 내다보게 된다. 물론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되어질 것이다(9:1-7).

성 경: [사52:3]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값 없이 ... 속량되리라 - 이스라엘이 값을 받지도 못한 채 포로가 되고 죄수가 되었으니 이제 값을 치르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되겠다는 말씀이다. 값을 치렀든 안 치렀든지 간에 일단 포로나 노예의 소유주가 된 자는 일정한 값을 받지 않고는 절대 그들을 놓아주지 않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의 소유주인 바벨론은 이스라엘 포로에 대한 그 같은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자유의 몸으로 만드실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시대 교회 역시 '죄 아래 팔린 자'이다(롬 7:14). 그러나 이들 역시 값없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55:1). 말하자면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행위에 관계없이 죄인이지만 값없이 베푸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 경: [사52:4]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본절은 앞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포로 이스라엘이 값없이 자유의 몸이 될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그 유사한 예들을 증거로 제시하는 내용으로 보면 되겠다. 먼저 과거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애굽 땅에 내려갔었는데 그 후손들은 값을 받지도 못한 채 애굽의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한 바 있다. 또한 이스라엘은 디글랏 빌레셀, 살만에셀, 산헤립 드응로 대변되는 앗수르의 군대에게 수차례 공격받고 포로로 잡혀간 바 있었는데,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마치 이스라엘의 소유주인 양 행사하다가 파멸당하고 말았다. 이 같은 과거의 예들을 근거로 할 때 이스라엘이 비록 값없이 바벨론에 팔려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성 경: [사52:5]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 문자적인 뜻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로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내놓는 탄식 같지만, 문맥상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을 압시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과거처럼 이스라엘이 값없이 포로로 잡혀갔으니 이스라엘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강력 개입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 여기서 '떠들며'는 자랑한다는 뜻인데, '슬픔의 비명을 지른다'는 뜻도 있기 때문에 바벨론의 포악한 통치 및 압제자들의 폭정으로 인한 이스라엘 포로들의 '비명소리'를 의미한다 할 수 있겠다(70인역). 두 경우의 어느 것이 옳든 간에 이것은 하나님이 강력히 개입하시는 이유가 된다.

(주);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는 뜻인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비웃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속하시는 근본적 이유는 그들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당신의 주권적인 계획과 그의 거룩하신 이름의 영예 때문이다(겔 20:9,14).

성 경: [사52:6]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 1-5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계획의 중요한 이유가 밝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앞문맥에서 밝힌 예언을 그대로 성취시킴으로써 당신의 영화로운 권능과 주권을 밝히 드러내고자 하신다.

성 경: [사52:7]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온 성(城)안 백성이 고대하고 원하였던 소식을 소지하고 달려오는 전령을 발견하였을때 그들의 눈에 비친 전령의 발이야말로 아름답게 보였음에 틀림없다. 물론 그 소식이란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회복의 소식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암시라고도 볼 수 있겠다(롬 10:15).

성 경: [사52:8]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이는 여호와께서 이온으로 돌아오실때에 - 파수꾼들이 한 목소리로 기쁨의 노래를 부를 첫 번째 이유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돌아오심이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포로 구환민들과 함께 다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일순간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묘사는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에 대한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주); 눈이 마주 봄이로다 - '눈이 눈을 보기 때문이다'란 뜻이다. 민 14:14에서도 등장하는데, 그곳에서는 '대면하여 보다'로 번역하고 있다. 어떤 베일이나 중간 매개자 없이 가까이서, 공개적으로 또 명백히 보게 되는 사실을 드러낼 때 이 표현이 사용된다.

성 경: [사52:9]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구속하셨음이라 - 여기 '구속'은 1차적으로는 하나님이 행하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그 구원이 암시하는 바, 메시야를 통한 온 인류의 구원까지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구속의 결과를 서술하고 있는 10절에 의하면 온 세상 백성이 그 구속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사52:10]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 전투를 위해 자신의 튼튼한 팔을 과시해 보이는 용사로부터 취한 이미지이다(겔 4:7).

(주); 모든 땅 끝까지도 ... 구원을 보았도다 -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를 인정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66:18-20).

성 경: [사52:11]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 우상을 좋아하는 이방의 습성에서 벗어나 자신들을 성결케 보존하라는 것이다. 야곱은 세겜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기에 앞서 그 모든 우상, 신상 따위를 처분하라는 바자령을 받은 바 있다(창 35:1-5).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준비 조치는 세상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에게 세상으로부터 나와 그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단절될 것을 명령할 때 본 구절을 인용한 바 있고(고후 6:17, 18), 요한도 그리스도인이 '큰 성 바벨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그 죄의 동참자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을 명령할 때 본절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계 18:2,4).

(주); 여호와의 기구(器具)를 메는 자여 ... 할지어다 -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포로를 잡혀갈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성전의 모든 기구들을 함께 운반해 갔고 그것을 자신들의 축제 때 사용했던 사실과(단 5:2-5), 고레스의 명령으로 본국 귀환시 그 기구들도 같이 옮겨 갔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스 1:7-11). 성전의 일을 맡아 보는 제사장과 레위 족속(민 1:50:4:15)은, 일반 백성 그 이상으로 자신들을 성결하고 거룩되이 구별해야 했다.

성 경: [사52:12]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 황급히 나와야 했던 출애굽 때와는 대비를 이루는 상황이 제시된다(출 12:33,39;신 16:3).

성 경: [사52:13]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보라(*, 힌네) - 저자는 본서 곳곳에서 주의를 새롭게 환기시킬 목적이 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무려 70여 회나 된다. 이제 저자가 새롭게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려고 하는 대상은 40장 이후에 계속 나온 '여호와의 종'이다.

(주);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 본 하반절은 상반절에서 진술된 것에 의해서 나타나는 결과를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본 하반절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동사의 의미를 통해 잘 드러난다. 첫 번째 동사는 '야룸'(*)인데 이것은 '그가 일어날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두 번째 동사는 '니사'(*)로서 '그가 자신을 일으킬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마자막 동사는 '가바'(*)로서 하나의 상태를 나타내므로 '그가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로 번역된다. 주목할 점은 이 세 동사가 모두 승귀(昇貴)의 최고 정점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신약 성경을 삽입하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노평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본서 저자와 빌립보서 저자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할 때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분의 승귀라는 위대한 주제를 진술할 수 있었다.

성 경: [사52:14]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이왕에는 ... 놀랐거니와 - 여기 '놀랐다'는 선지자 에스겔이 두로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된 '숌무'(*)인데, 에스겔은 섬들의 거민들이 한때 교만하던 두로가 엄청난 하나님의 응징을 받은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질리는 것을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본 동사를 사용한 바 있다(겔 27:35). 본절에서도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일한 동사가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본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질리듯 놀란 것은 종의 모습이 너무 상하여서 사람의 모습 같지 않을 정도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두로처럼 그 종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성 경: [사52:15]

주제1: [임박한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제2: [구원의 선포]

(주);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 여기 '후에는'은 시간적 경과를 나타내는 부사가 아니라 14절에 나오는 '상하였으므로'와 본절의 동사가 동시 동작임을 암시하는 부사이다. 말하자면 그가 상해 있는 동안에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부사라는 말이다. 한편, '놀랠 것이며'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해당하는 '예제'(*)를 어떤 학자들은 '기뻐 뛰게 할 것이다', '경배할 것이다' 등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전에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매우 오래된 본서 사본에 따르면, 본 동사는 '뿌릴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sprinkle, KJV, NIV). 이 번역은 맛소라 본문의 직역과 동일하다. 더 나아가 뿌린다는 것은 레 4:6;8:11;14:7등에 나오는 것처럼 결례 집행을 암시한다. 결례를 집행하기 위하여 뿌리던 자는 제사장이었다. 그렇다면 본서의 '종'의 사역 역시 제사장의 사역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부사 '후에는'과 연결시켜 보면 그 '종'은 그토록 무섭게 상해 있는 동안 바로 이 결례를 집행하신다는 뜻이 된다. 많은 무리에게 전적으로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 바로 그 분이 오히려 대제사장으로서 물과 피를 뿌릴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열방을 정결케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그분은 너무도 고난을 많이 당하신 수난자로서 그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난들은 속죄적 정결을 위한 것이다.

(주); 입을 봉하리니 - 이 표현은 어떤 소식에 압도되어버린 상태를 나타낼 때 처한 것은 수난과 종의 사역이 성공적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형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 예언을 복음 자체에다 다음과 같이 적용시키고 있다 :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본절을 포함한 13,14절은 53장에서 전개될 위대한 주제의 요약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사53:1]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멸시와 외면을 당하는 메시야]

(주);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 '우리'에 대해서는 (1) '선지자 자신'(Calvin, Oehler, Stier), (2) 52:15의 '열방들'(혹은 이방인들, G.W. Grogan), (3) '이스라엘 백성, 특히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Delitzsch, Leupold)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으나 마지막 견해가 가장 나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들 '우리'는 수난받는 메시야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또 저들의 고백은 거의 회개에 가까운데,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새로운 깨달음을 믿은 유대인들의 심리 상태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성 경: [사53:2]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멸시와 외면을 당하는 메시야]

(주); 주 앞에서 - 여기 '주'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종'의 삶의 과정은 인간들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벧전 2:4).

(주); 자라나기를(*, 야알) - 문자적인 뜻은 '그가 자라나셨다'로, 과거 시제(완료형)로 되어 있다. 본 동사의 시제를 따른다면 본절이 나타내는 인물은 본서 저자 이사야의 과거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세, 욥, 예레미야 등을 거론할 수 있지만 본장이 묘사하는 종과는 비교되 될 수 없다. 결국 이 종은 메시야인신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자가 과거로 시제를 적은 이유는 본서 저자가 미래를 내다볼 때 자신이 예언하는 메시지의 성취를 너무나도 명백히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는 그 일이 이미 발생한 것처럼 확신있게 적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언적 기술법 중의 하나인 '예언적 과거'라 부른다.

(주); 마른 땅 ... 줄기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며, 특히 '마른 땅'이란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처해 있던 비천한 상황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사53:3]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멸시와 외면을 당하는 메시야]

본절에서 저자는 '종'의 비하(卑下)를 좀더 상세히 묘사한다.

(주); 멸시를 받아서 - 여기에는 거절과 배척의 의미가 들어 있다. 그가 고난의 걸미미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를 거절하고 배척 했다. 고난의 '종'에 대한 태도 문제에 있어서 중립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그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그를 높이거나 아니면 그를 배척하고 멸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그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주); 질고를 아는 - 문자적인 뜻은 '병을 잘 아는'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하여 이런 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병'은 '죄'를 묘사하는 비유적 술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육체적 질병을 비유로 해서 유다의 죄악 상태를 드러낸 바 있다(1:5,6). 따라서 성취될 구원은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사53:4]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시야의 대속]

(주); 우리의 질고를 지고 - '종'이 짊어진 질고와 수난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리 개념이다. 의로운 한 분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이 가득한 자들을 대신하셨다는 것이다(롬 5:17-19). 이것은 그 '수난자'가 자기 백성을 죄의 결과뿐 아니라 죄 자체에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함의한다. 왜냐하면 죄와 그 결과는 분리될 수 업슨다 것이기 때문이다. '수난자'께서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성 경: [사53:5]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시야의 대속]

본절은 '종'이 고난받은 참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다. 여기 '허물'이란 단순한 실정법들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법에 대해서 범죄하였다. 그 결과우리는 그의 진노와 그 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었다.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인간이 지불할 사망이란 요구가 '종'에게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볼때 여기 '찔리다', '상하다'등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사실 히브리어에서 이 두단어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시사하는 용어들이다.

(주); 평화 - 이것은 단지 외적인 안녕과 조화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 곧 하나님과의 평화를 뜻한다.

성 경: [사53:6]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시야의 대속]

본절은 신학의 대요이다. 먼저,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은,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상태에 있지 못하다는 전적 부패 교리의 근거가 된다. 둘째로, 본장에서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던 '여호와'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악을 '종'에게 담당시킨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근거가 된다. 셋째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킴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것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구원 교리로 볼 수 있다.

성 경: [사53:7]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시야의 대속]

본절은 고난에 대한 종의 태도를 요약해준다. 먼저 '곤욕을 당하여'는 좀더 풀어보면 '그가 자신을 곤욕당하도록 내맡기셨다'이다. 이것은 종이 고난을 자원하여 받은 것을 가리킨다. 또한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고 참아냈다는 것을 가리킨다. 종은 고난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셨는데,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의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성 경: [사53:8]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시야의 대속]

(주);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 '곤욕'(*, 오체르)은 '강압', '구금자'이 그 문자적인 뜻인데, 따라서 어떤 학자는 이 단어를 '감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때 '체포'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무튼 '종'은 법적인 과정을 밟아 사형 언도를 받기에 이르렀다. 혹자는 이 같은 결과가 단순한 오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종종 무죄한 피고가 부당히 고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기 떠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 같은 결과는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이다. '종'은 빛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러나 죄로 저주 아래 있던 이땅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잔인하게 죽였다.

성 경: [사53:9]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시야의 대속]

그리스도께서 범죄자로 낙인 찍혀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후 부자의 묘실에 장례된 것을 연상케 한다(마 27:32-61).

성 경: [사53:10]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사야의 승리]

(주);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 하나님께서 그를 즐겨 고난당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속건 제물'과 속죄 제물의 차이를 정확히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속건 제물은 부채를 갚거나 또는 부과된 죄값을 만족시켜서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목적으로 드려졌다(레 5:15). 이제 우리는 '종'의 비참한 죽음과 처참한 고난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죽음, 즉 그의 생명의 피를 쏟아 부음은 속죄를 위해 계획되고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이었다. 한편 '종'의 죽음이 희생 제물이었다는 말은, 그 '종'이 제사장의 일을 수행하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종은 다른 제사장과는 달리 기꺼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따라서 그것은 모세 율법의 제사들과는 근본적으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유일 무이(唯一 無二)한 제사로서 다른 제사의 원형이며 실체이다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주); 그 씨를 보게 되며 - 여기 '씨'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영적 후손을 가리킨다(시 22:30). 유대 사회에서 많은 자손은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였다. 물론 살아 생전 누리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종은 죽음으로써, 또 죽어서 그 축복을 누리신다.

(주); 그 날은 길 것이요 - 장수 역시 큰 축복 중의 하나였다. 이제 종 메시야는 죽음에서 일어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신 후 영원히 그의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호 6:2;롬 6:9).

성 경: [사53:11]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사야의 승리]

(주); 자기 지식으로 - 이는 '그(종)의 지식으로'(by his knowledge, KJV, RSV, Hengstenberg, Stier) 혹은 '그(종)에 관한 지식으로'(by knowledge of him, Delitzsch) 등 두 가지로 해석된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문 이해에는 별무리가 없으나,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라는 50:4내용 등을 고려하건대, 첫 번째 견해를 더 지지하고자 한다.

(주);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 이것은,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근거가 된다.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을 짐어지셨다는 말이다. 죄악을 짊어짐으로 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완전한 의를 베푸신다. 이렇게 주어진 '의'는 '법정적 칭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 경: [사53:12]

주제1: [고난의 종]

주제2: [메사야의 승리]

본장은 종의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결론적인 선포롤 끝맺고 있는데, 종이 위대한 승리자로서 전리품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난다. 그 승리는 바로 종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얻은 결과였으며, 이로 인해 범죄자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 :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

성 경: [사54: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예루살렘 회복의 약속]

(주);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 - 본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견해는 여럿이 있으나 바벨론 포로 시대에 그 숫자가 적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특히 이어지는 3절에서는 이방인 성도가 이들에게 포함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는 점에서, 바야흐로 메시야 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에 관한 비전이 강력히 제시된다.

(주); 홀로 된 ... 많음이니라 - 과부의 지식이 남편 있는 여인의 자식보다 그 숫자가 많겠다는 이 표현은 앞에 언급된 남은 자의 후손은 그 숫자가 일반의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물론 이 사실의 성취는 이방인의 회심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앞장에서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묘사한 저자는 그 사역이 낳을 결과의 첫 번째 것으로 믿는 자의 수가 이스라에의 남은 자를 근거로 늘어날 것을 바라다보고 있다.

성 경: [사54: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예루살렘 회복의 약속]

(주); 휘장(*, 아할레크) -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침대나 창문 주위에 혹은 관객들로부터 무대를 숨기기 위하여 극장 객석과 무대 사이에 내리우는 천을 가리킬 때 쓰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주용 천막을 의미한다. 이 천막은 일정 거주자의 거주 영역을 암시하는데, 여기서 그 영역을 확대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 세계에서 돌아오는 개심자의 행렬을 수용하기 위하여 교회의 영역이 매우 넓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표현은 새로운 개심자들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각각의 구성원의 믿음도 더 강해진다는 것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사54: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예루살렘 회복의 약속]

(주); 좌우로 퍼지며 - 이것은 동서남북 그 어느 방향을 가릴 것없이 폭발적으로 퍼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퍼지며'(*, 파라츠)의 원문적 의미는 '터지듯 번성하며'이다. 물론 이는 영토의 확장 혹은 단순한 인구의 폭발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수의 증가를 가리킨다.

(주); 황폐한 성읍들 - 1차적으로는 남북 왕국의 멸망 이후에 근방 민족들의 불법 이주로 훼손되었던 팔레스틴 땅을 가리킨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J. Watts).

성 경: [사54: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영원한 평화의 약속]

(주);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 '청년 때의 수치'란 애굽 치하의 시대 혹은 앗수르 및 바벨론의 포로 시대와 같은 특정한 시대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신실치 못한 아내와 같았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역사 전체를 가르킨다고 봄이 나을 것 같다. 장차 이스라엘이 마주할 백성의 중다함과 그 영광의 찬란함은 그 수욕의 역사를 잊을 만한 정도라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이다. 물론 이 구절의 완성은 주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후 이스라엘은 그 역사 속에서 몇 차례 외적의 침입 및 그로 인한 영광의 함몰을 재차 겪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 과부 때의 치욕 -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른 결과, 예컨대 이 민족의 침탈과 유린 등을 가리킨다(렘 3:24,25;31:19;호 2:2-5 참조).

성 경: [사54: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영원한 평화의 약속]

(주); 이는 ... 남편이시라 - 여기 '남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바알'(*)은 그 문자적인 뜻은 '주인', '제조자', '통치자', '소유자' 등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흔히 '남편'을 뜻하기도 하는데(신 21:13;24:1;말 2:11), 여기서는 바로 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그처럼 크고 세심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태는 흔히 간음으로 묘사되며(대하 21:11;겔 6:9;호 4:12), 신약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된다(요 3:29;엡 5:23,24;계 21:9).

(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혈통적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상 모든 백성에게도 그들을 통치하는 참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실 것을 예언하는 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예언은 하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전파될 시대를 겨냥한 표현이다 :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 3:29). 이 같은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메시야의 대속 사역 때문이었다(53장).

성 경: [사54: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영원한 평화의 약속]

(주); 부르시되(*, 케라아크) - 시제는 완료형이다. 앞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저자는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사실을 그 신실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일단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던 아내가 남편의 용서로 다시 남편에게도 돌아오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일을 이미 완성된 듯이 완료형으로 묘사한 것은 그 성취될 사실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이 같은 표현 방법을 '선지자적 과거'라고 부른다(Fausset). 70인역(LXX)의 경우는 난해하게도 '여호와께서 버려지고 위안을 받지 못한 아내로 그들을 부르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녀의 젊은 시절부터, 미워해 왔던 아내로 부르지도 않으셨다'로 본절은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추측컨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인간 사이의 부부 관계로써 묘사하기를 거절하고자 하는 의도때문인 것으로 보여지나 문맥에 합당하지 않다.

성 경: [사54: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영원한 평화의 약속]

(주); 잠시 - '약간의 분노로'로 번약하는 학자도 있으나(Lowth), 원문은 개역 성경과 동일하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아주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이 표현이 등장한 것은 이후 임할 번영 및 영광의 기간은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과 대조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이다. 신약 성경에도 동일한 사상이 나타나 있다 :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주); 큰 긍휼 - 또 다른 차원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버림받음이 '적은' 것이었다면 긍휼은 '큰(위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큰 '긍휼'의 내용은 오랫동안의 배역(背逆)을 다 품고 해결할 수 있는 위대한 메시야의 대속사역이다.

성 경: [사54: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영원한 평화의 약속]

본절에서 하나님은 노아게게 주신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다시는 이스라엘을 징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그런데 본 약속에 대한 이해의 기초는 노아에게 약속을 주셨던 당시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창 8:21). 노아에게 주셨던 약속은 분명하게 인간의 죄성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인데, 이러한 인생들에 대하여 반복하여 대홍수와 같은 저주를 내린다면 이 땅과 인생들은 잠시도 견디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땅과 인생들은 잠시도 견디지 못할 것이므로 인류 전체를 향한 물심판은 없으리라는 약속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죄성이란 관점에서 본절의 약속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셔서 인간의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본절에서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징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데, 그것은 53장에서 메시야께서 온 인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지실 것이기 때문에 그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심판을 면제해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성 경: [사54:1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영원한 평화의 약속]

(주); 인자(*, 헤세드) - 언약 용어로서 기왕에 주신 약속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불변의 상랑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주);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 베리트 쉘로미) - 문자적인 뜻은 '나의 평화의 언약'이다. 동일한 용어가 사용된 유사 구절에 근거할때 본 언약은 다윗의 위를 이은 한 왕이 통치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관한 약속이다(겔 37:24-26). 이 나라는 혈통적 이스라엘만을 구성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들어올 이방의 택함받은 자까지도 포함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약속으로 보아야 정확하다. 이 나라의 건설은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하나님 언약의 신실성 때문에 가능하다. 견고성, 불변성을 상징하는 산들은 혹시 움직여질 수 있어도 그 나라를 세우기로 한 하나님의 약속 계획은 결코 변경되지 않는다.

성 경: [사54:1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새 예루살렘]

(주); 곤고하며 ... 안위를 받지 못한 자 - 오랫동안의 포로 생활로 광풍에 시달리는 배처럼 그 마음에 평안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저자는 미래의 안정과 영광을 약속함으로 그들을 위로하려고 하고 있다(11-`4절).

(주);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 여기 '화려한 채색'이란 색색의 벽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돌과 돌을 붙이는 색색의 접합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여인들이 눈썹 위에 치장용으로 붙이기도 했던 이 접합체는 벽돌 사이사이에 붙여, 벽돌 건물을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데 사용되었다. '더하며'의 정확한 원문 직역은 '기초를 놓다'이다. 이는 그 기초가 튼튼한, 따라서 미래의 번영과 영광이 보장된 교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된다(계 21:18-21 참조).

(주); 청옥 - 그 단단하기에 있어서는 다이아몬드 다음이고 아름다움과 광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푸른 색, 붉은 색, 흰 색, 자주색 등 다양한 색을 지닌, 우리에게 사파이어로 알려져 있는 보석이다.

성 경: [사54:1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새 예루살렘]

(주); 홍보석(*, 카데코드) - '때리다', '가루를 내다' 혹은 '불을 지피다'는 뜻의 '카다드'(*)에서 온 본 용어는 불을 지필 때 나는 섬광, 불꽃과 같이 번쩍이는 보석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주); 성첩(*, 쉼쇼타이크) - '태양'을 뜻하는 '쉐메쉬'(*)에서 온 용어로 의미 규정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성벽위의 반짝이는 피뢰침, 성채 혹은 성(城) 본 건물에 딸린 작은 건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문맥은 그 기초가 든든하고 찬란한 성을 말하고 있으므로, 보석으로 지은 번쩍이는 성 건물의 일부로 보면 적절하겠다.

성 경: [사54:1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새 예루살렘]

(주);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 이것은 미래에 하나님의 참자녀들이 구속주 메시야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을 시사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 아래 있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이 구절과 유사하게 표현한 바 있다 :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3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이끌림을 받은 자만이 그에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 하시면서 본 구절을 인용하셨다 :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성 경: [사54:1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새 예루살렘]

(주); 의로 설 것이며 - 메시야가 다스리는 나라의 특성 중의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시 72:2;계 19:11). 다른 세상 나라는 음모, 약탈, 정복 등으로 세워지므로 통치의 내용이 불의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는 메시야의 왕국은 편만한 공평이 통치의 특징이 될 것이다.

성 경: [사54:1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새 예루살렘]

(주); 그들이 모일지라도(*, 고르) - 주어가 대명사로 되어 있으므로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이 쉽지 않으나 문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의 대적이며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의 대적이다. 세상 나라 군왕들이 연합하여 메시야를 대적할 것을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고 있다 :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아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1,2).

(주);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알라이크 이폴) - 문자적인 뜻은 '너에게 복종케 되리라'이다. 이것은 메시야의 대적이 파멸케 될 것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이들이 오히려 교회으 진영으로 두손들고 들어오게 된 것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교회는 멸망할 듯 보였으나 도리어 세상 나라가 교회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성 경: [사54:1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새 예루살렘]

(주);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 법정의 이미지가 동원되었다. 교회의 대적들은 교회를 고소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도리어 대적들에게 승리할 것이다. 그 이유는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근거로 그의 택한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대적이 고소할 때 교회를 변호하고 대적을 물리치시기 때문이다.

성 경: [사54:1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새 예루살렘]

여기 언급된 기계를 만드는 자와 그 기계를 가지고 파괴를 일삼는 자는 외관상 전쟁을 일삼는 자들로 보여진다. 그러나 다음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이들은 교회를 대적하는 조재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들은 하나님 수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교회를 대적할 수 있을 뿐이다.

성 경: [사54: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

주제2: [영원한 평화의 약속]

(주); 넘치는 진노(*, 베쉐체프 케체프) - '분노의 범람'이 그 문자적 뜻이다(a surge of anger, NIV).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과 회복의 은총을 대조시키는 문맥을 중시할 때, 이는 '적은 분노'(a little wrath, KJV) 혹은 '잠시 동안의 격노'(lverflowing wrath for a moment, RSV) 등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주); 얼굴을 ... 가리웠으나 - 불쾌감의 표현이다(8:17;욥 13:24;34:29;시 30:7).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벨론 포로라는 징벌로 명백히 드러난 하나님의 불쾌감과 노여움을 가리킨다.

(주); 영원한 자비 - 앞의 '넘치는 진노'와 대비를 이룬다. 메시야의 은총 아래 있는 교회와 그 개인이 받을 은총은 엄청나다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주); 구속자 여호와 - 계속해서 '구속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회복될 모든 번영, 영광 등은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하는 것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성 경: [사55:1]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본절은 원문에 의하면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감탄사 '호'(*)로 시작되고 있는데, 본 감탄사는 큰 관심 집중을 요구하는 중대 사안이 뒤에 따를 경우 사용된다.

(주); 너희 목마른 자들아 - 원문 직역은 '목마른 모든 자들아'이다. 여기 '모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칼'(*)은 빈부 귀천 가릴 것 없는, 특히 이방인까지도 포함한 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목마른'은 그 무엇을 강하게 소원하는, 특히 영적 구원을 그렇게 사모하는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시 42:2;63:1;143:6;요 7:37). 아마도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하셨을 때 바로 본 구절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마 5:6).

(주); 물로 나아오라 - 이미 본서는 메시야 시대 이후 존재하게 될 축복, 곧 영생을 암시함에 있어서 시내, 물줄기, 비와 같은 물을 소재로 한 이미지를 사용한 바 있다(35:6;43:20;44:3). 본서가 큰 관심 집중을 요구하는 감탄사 '호'(*)를 사용한 목적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특권이었던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그것도 값없이 확대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같은 결과는 53장에 자세히 언급된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근거를 둔다.

(주); 포도주와 젖 - 생명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물뿐 아니라 활기와 영양을 공급하는 포도주와 우유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 주는 축복의 다양함과 풍성함을 시사한다(아 5:1;요 7:37).

성 경: [사55:2]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양식 아닌 ... 수고하느냐 - 문자적으로는, 인간은 행복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실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풍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빵은 생명을 지탱케 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인간은 빵을 얻기 위해 돈을 버는데, 어리석은 인간은 빵 아닌 것을 사기 위해 헛되이 돈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육신을 살지우는 빵이 아니라 영혼을 살지우는 빵이다. 1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영혼을 살지우는 빵은 인간의 노력으로 번 돈을 지불하여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결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그 대안을 하반절이 제시한다.

(주); 나를 ... 먹을 것이며 - 원문 직역은 '부지런히 나를 들으라 그리고 좋은 것을 먹으라'이다. 동등한 두 개의 명령문으로 보이나, 후자는 전자의 결과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들으면 좋은 것을 먹게 된다는 것이다. 개역성경의 번역이 이 의미를 잘 드러낸 준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깨닫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육의 생명이 아닌 영의 생명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

(주);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여기 '기름진 것'이란 성경에서 최고의 음식을 암시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창 27:28;시 65:11).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구속을 경험한 자가 누리게 되는 부(富)와 풍성한 축복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시 63:5).

성 경: [사55:3]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들으라 ... 영혼이 살리라 -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약속들을 포용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신앙은 흔히 영생을 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요 5:40;6:33;20:31;계 2:8-10).

(주);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 - 다윗을 그 모형으로 하는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상기시킨다. 그 약속은 취소될 수도, 실패하게 될 수도 없는 약속이었다(삼하 7:15,16;시 89:2-4,28,29,34-36;고후 1:8-20). 여기 '은혜'(*, 헤세드)는 언약적 용어로서 인애, 긍휼, 연민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는 메시야의 대속사역, 그중에서도 메시야의 부활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전도 여행 중 안디옥에서 행한 연설 중에서 이것을 증명하였다 :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행 13:34). 다윗이 하나님께 받았던 약속은 메시야가 고난당하여 죽임을 당하실 것이지만 끝내는 부활하여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그것은 결코 변경될 수 없는 약속이었다. 다윗은 이미 그의 시편들에서 메시야의 부활 사상을 암시한 바 있다(시 16편등).

성 경: [사55:4]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그 - 다윗 혹은 메시야로 볼 수 있는데, 문맥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주인공(3절) 되신 메시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속사역을 완성하고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을 제시하실 분이시다. 구약 성경 자체도 이 사실을 증거한다(렘 30:9;겔 34:23,24;37:24,25;호 3:5).

(주); 증거(*, 에드) - 공적으로 충고하거나 증인들 앞에서 변론하는 자(Rosenmuller) 혹은 증인, 왕, 방백, 망령자, 율법 수여자 등을 뜻하기도 한다(잠 19:5-9). 메시야에게 적용되었으니 하나님의 법, 계획 등을 인간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주); 인도자(*, 나기드) - 갈대아역은 '왕'으로 번역한다. 메시야가 가르치고 전하는 분일 뿐 아니라 그 백성과 통치와 피통치의 관계를 맺고 있는 분임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메시야의 직분중 중요한 한 가지는 왕직이다.

(주); 명령자(*, 메차웨) - 원문 직역은 '율법 수여자'이다. 메시야는 율법의 창안자이시기도 하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곧 절대적 규범이요 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사55:5]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네가 - 본 2인칭 주어를 메시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지만(Whybray), 그보다는 영적 이스라엘로 파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Delitzsch, G.W. Grogan). 다윗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의 영토는 역사상 가장 넓게 확장되었다. 이런 측면에서도 다윗은 왕으로 오실 메시야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메시야에 의해 통치될 영적 이스라엘의 영역은 다윗 왕국조차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세계적 차원에 이를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성 경: [사55:6]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 이것은, 지금은 여호와를 만날 수 있을 만한 때임을 암시하는 반면, 때가 오면 그분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공고하고 있다. 영적 축복을 얻는 문제에 따르는 조건과 제한성에 대한 권고이다(시 32:6;마 25:1-13;요 7:34;8:21;고후 6:2;히 2:3;3:13,15). 물론 이 권고를 받을 대상은 포로된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이다.

(주); 부르라 - '하나님의 자비에 너 자신 전체를 던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약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못박고 있다(롬 10:13). 본절은 일종의 동의어 반복이며, 하반절이 상반절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한 표현이다(Fausset).

성 경: [사55:7]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악인 ... 불의한 자 - 이 둘은 그 정체를 규명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동의적 평행구로 사용되고 있고 특히 후자의 경우 그 원어적 의미가 '범죄의 사람'이므로 둘 다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죄인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롬 3:23). 굳이 의미를 구분해보면 전자는 그 '행실'에 있어서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이고, 후자는 스스로는 범죄자로 생각하지 않으나 그 내면적 실상이 죄악된 자를 가리킨다. 회개의 진행은 소극적인 변화인 '그의 행실을 버림으로' 시작되어 적극적인 회개인 '여호와께로 돌아가', '여호와를 그의 하나님으로 섬기는'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성 경: [사55:8]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본절은 여호와의 생각과 길이 우리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실의 의미는 바로 앞절의 '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개역 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본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 '너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풍성히 용서하시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낼 필요가 없다. 악인의 행실과 불의한 자의 생각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방식은 용서받을 악인이나 불의한 자의 상태나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시 25:11;롬 5:19).

성 경: [사55:9]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본절은 앞절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 분명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 만큼이나 하나님과 인간의 계획의 차이가 크다고 덧붙이는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뒷받침된다 :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11),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10),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시 89:2). 이상의 구절들이 취하고 있는 사상은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의 눈에 용서받을 수 없어 보이는 자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사55:10]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저자는 6-9절에 언급한 내용에 확실성을 더하기 위하여 한 비유를 들고 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척박한 토지에 비와 눈이 내려 옥토로 만들면 그 옥토는 열매를 내고 추수꾼은 파종하여 양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본절을 영적으로 고갈되어버린 인간의 마음으로, 비와 눈을 메시야 통치 시대 아래 부어질 성령으로 그리고 열매를 의로 각각 보고 있다. 말하자면 본절은 영적으로 고갈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이제 메시야 시대가 되면 성령을 받아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비유의 경우, 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거리 하나하나의 의미보다는 그 내용 전체가 담고 있는 주제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다. 이 비유가 드러내는 주제는, 하나님은 한번 발설한 말씀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성취를 보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한번 내려진 비나 눈은 반드시 그 열매를 낳는다는 알기 쉬운 자연의 이치를 통해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제는 다음절에 잘 정리되어 있다.

성 경: [사55:11]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내 입에서 나가는 말 - 구체적으로 이 말씀은 앞문맥(7절)에 언급된 '용서'이다. 사막에 내린 비와 눈은 금방 흔적도 찾아보기 힘드나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듯이, 하나님이 한번 약속하신 '용서'는 결국 성취되고 말 것이다. 이제 그 '용서' 사역은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유대인과 더 나아가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돌아올 이방인의 행렬을 통해 그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성 경: [사55:12]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나아가며 ...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 이것은 1차적으로 세계 각처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의 인도를 받아 본토로 귀환할 것을 가리키고, 더 나아가서는 이방인을 포함한 택함받은 모든 백성들이 참지도자되신 메시야의 인도를 받아 영적 본토인 교회로 이끌림을 받을 것을 암시한다 :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人數)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미 2:12,13).

(주); 산들과 ... 손바닥을 칠 것이며 - 하나님의 백성의 기쁨에 대해 자녀의 동일한 기쁨의 환영을 표시하고 있다. 자연이 이 같은 반응을 나타내는 까닭은 인간의 죄가 제거될 때 갱신된 인간 세계와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자연계도 '허무'에서 구원받고 새롭게 갱신될 것이기 때문이다(시 98:8;롬 8:19-22).

성 경: [사55:13]

주제1: [하나님의 위대한 초청]

주제2: [여호와의 초대]

(주); 잣나무 - 경건한 백성들을 가리킨다(60:13).

(주); 가시나무 - 사악한 자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삼하 23:6;미 7:4).

(주); 화석류 - 팔레스틴 지역, 특히 갈릴리 호수 부근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근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상록수로서, 희거나 붉은 꽃은 향기가 짙다. 느헤미야는 초막절 축제를 위해 필요한 초막을 짓는 데 이 나무를 사용했다(느 8:15).

(주); 질려 - 황량한 비경작 지대의 상징으로 쓰였다(5:6).

(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 '이것'이란 자연계의 갱신뿐 아니라 본장에서 다루고 있는 메시야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복음에로의 초대, 용서 등을 가리킨다. 바로 그 같은 결과들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기념비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성 경: [사56:1]

(주);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 본절은 언약적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언약에 근거하여 '구원'과 '의'를 베푸실 것인데, 이제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 역시 '공평'과 '의'를 지키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Delitzsch).여호와측에서 약속하신 바(곧 메시야 시대의 도래)의 성취 시점이 가까울수록, 이스라엘 또한 더욱 신실한 자태로 단장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 세례 요한도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함에 있어서 인간편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르소 유사한 요구를 한 바 있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 본절의 '공평'이나 '의'혹은 세례 요한의 '회개' 등은 메시야의 도래를 맞을 때 요구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자태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하겠다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 4:5,6).

성 경: [사56:2]

(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 본절 전체는 지혜 문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축복 형식(benediction formula)을 보여주며(30:18;32:20;시 1:1;119:1;잠 8:32,34 참조), 안식일을 잘 준행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본절만의 내용을 보면 안식일에 지켜야 할 금지 사항만 언급되고 있으나 문맥상 온전한 예배와 영적, 육체적 회복과 갱신이라고 하는 적극적 측면도 함께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G.W. Grogan). 웨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포로기 동안 안식일 준수는 여호와꼐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의 건실한 일원임을 알리는 결정적인 표시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안식일 못지않게 중요한 전제를 비롯한 여러 희생 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의적(祭儀的) 율법이 폐지되는 메시야 시대에 대한 간접적 암시라고 볼 수 있겠다.

성 경: [사56:3]

(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 - 여기 '연합한'의 히브리어 '라와'(*)는 레위 지파를 가리키는 '레위이'(*)의 어근으로서, 레위지가의 성전 직무를 암시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레위 지파는 거룩한 성전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특별히 구별되었다(신 10:8). 그렇다면 본절은 그 직무가 이방인에 의해서도 수행될 것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본 구절은 참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예배자가 될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주);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 원래 '고자'의 히브리어 '사리스'(*)는 그 당시 궁궐에서 주요 직무를 맡고 있던 고급 관리 곧 '내시'를 뜻하지만(에 1:10, 12, 15;단 1:3;행 8:27), 여기서는 생식기능이 마비된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당시 모세 율법에 의하여 총회의 명부에 기록되지 못했고 총회의 모임에 참석하지도 못하였다(신 23:2). 본 구절은 이제 율법 시대가 지나감으로 그들도 총회에 들 수 있음을 뜻한다. 또한 본 구절은 단지 생식 기능이 마비된 자뿐아니라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총회의 행사, 특히 예배에 참속하지 못했던 자들도 겨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강조점은 고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약하던 율법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사56:4,5]

새롭게 등장할 메시야 왕국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자의 자격은 외형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신실히 좇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밝히는 구절이다(G.W. Grogan, J. Watts).

(주); 내 집 - 교회의 상징으로서의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킨다(딤전 3:15). 모세 율법상으로 이방인은 성전 바깥 뜰에 밖에 들어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성전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도 마음껏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됨으로써 거룩한 자의 반열에 들수 있게 된 것을 가리킨다(히 10:19, 20).

(주); 내 성 안 - 원문 직역은 '나의 성 벽들 안'이다. 고자들도 예루살렘 성벽들 안에로의 출입이 허용될 것이라는 뜻인데, 성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말은 그들도 하나님이 통치를 받게 됨을 뜻한다. 기념물(*, 야드) - '기념비'(삼상 15"12;삼하 18:18), '손' 혹은 '장소' 등을 뜻하는 용어로서, 여기서는 '장소'로 보아도 무방하겠다(KJV). 왜냐하면 본 용어와 연관성이 있는 절 말미의 '끊치지'란 어떤 장소, 공동체와 연관이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사56:6]

7절에 열거된 특권을 누리기 위해 이방인들이 행햐야 할 일들이자세히 열거되고 있다.

(주);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 3절에서 이미 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연합'이란 이스라엘 레위 지파의 제사 직무와 연관된 용어이다. 물론 본 구절에서 말하는 제사란 구약 시대의 제사와는 다른 새로운 예배를 가리키며 이 새로운 예배는 오실 메시야 예수께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요 4:21-23).

(주); 이름을 사랑하며 - 여기 '이름'은 인류를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와 연관성이 있는 하나님을 모르고는 참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주); 종이 되며 - 여기서 '종'이란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이방에게 전하는 자를 뜻한다. 먼저는 그리스도 자신이 종이 되실 것이고 계속해서 그의 교회가 종의 직무를 전수하게 될 것이다.

(주); 안식일 - 구약의 한 절기에 불과한 안식일이 아닌 메시야 도래이후 그 의미가 새롭게 재정립될 모든 종교적 규례들을 함축적으로 가리킨다.

성 경: [사56:7]

(주); 나의 성산 -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영적으로는 메시야 시대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가리킨다(2:2;렘 3:17).

(주);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희생 제사가 이방인에 의해서도 수행될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지금 문맥은 메시야 시대엥 있을 일들을 다루고 있는데 메시야가 자신의 몸을 영단번의 제사로 드림으로 구약의 희생 제사는 폐지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10:11, 12). 핵심은 이스라엘의 특권과 우월성이 사라지게 된다는 점에 있다. 번제와 희생은 이스라엘만의 특권이었고, 그들의 우월성의 근거가 되었다.

(주); 이는 ... 될 것임이라 - 본절 상반절에 기록된 이방인의 특권 수혜의 근거를 적고 있다. 한마디로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국한 하였던 특권을 '만민', 곧 땅 위의 모든 백성에게로 확대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은 온 인류를 상대로 하는 메시야의 대속 사역이다. 이방인까지 성저능마 향하여 기도하게 해달라는 간구가 성전 봉헌 당시 솔로몬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왕상 8:41-43). 그러나 이를 복음의 우주적 성격과 관련지어 명확히 표현한 것은 이시야에 와서이다(Delitzsch). 주님께서도 본 구절을 인용하신 바 있다(마 21:13).

성 경: [사56:8]

(주);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 포로지로부터 모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이방들의 많은 자들을 더 하시겠다는 이 약속은 본장 본절까지와 앞의 몇장들 내용의 결론이 되고 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새로운 주제가 소개되므로 여기서 지금까지 다룬 몇 개의 장들을 정리 요약할 필요가 있다. 요약의 내용은 본 구절을 통해 잘 드러나듯이 메시야 시대 때 이방 세계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특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타민족 사이에 놓여왔던 두터운 장벽은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어느 민족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 놀라운 경륜 아래서 이제 모든 성도는 한때는 낯선 자요 외국이었으나 이제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확신 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엡 2:19). 그 기원에 있어서 온 세계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온 땅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이다(행 17:26).

성 경: [사56:9]

(주);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듸하여 소집될 이방 군대를 가리키는데, 본서가 기록된 시점이 아직 갈대아의 침입을 받기 전이므로 갈대아 군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렘 12:7-9;겔 34:5). 바로 앞장에서 메시야 도래의 확신과 그 택함 받은 자의 수가 이방인의 히심으로 더 늘어날 것을 말함으로 그 백성을 위로하였던 저자는, 돌연 그 주제를 바꾸어 이방 군대의 침입을 예언하고 있다. 시간상 순서로 보면 침입에 관한 기사가 먼저이고, 메시야의 도래 및 남은 자 수의 확대는 나중이다. 한 주제를 말하다가 갑자기 상반된 주제로 바꾸는 것은 본서 저자의 기술(記述)상의 특징이다.

성 경: [사56:10]

(주); 파숫군들(*, 초파) - 문자적인 뜻은 '보는 자'이다. 본 용어는 개역 성경의 문자적인 뜻 그대로 성 위 망루에서 망을 보는 자 혹은 영적인 눈을 가지고먼 미래를 예견하는 선지자 둘 중의 하나에 적용된다(21:6-12;52:8;62:6;렘 6:17;겔 3:17). 여기서는 후자와 아울러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을 함께 일컫는 말로 이해된다(G.W. Grogan).

(주); 벙어리 개 - 짖음으로써 사나운 짐승의 접근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목자의 사냥개에서 따온 비유이다.

(주); 꿈꾸는 자 ... 누운 자 ...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 - 세 가지 모두 유사 용어이다. 그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꿈꾸는 자'의 히브리어 '호짐'(*)은 그 문자적 뜻이 '꿈 속에서 말하는 자', '비전을 보는 자' 등인데, 이것은 게을러서 비활동적인 사람뿐 아니라 그릇된 이상, 환상을 보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 경: [사56:11]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부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주); 이 개들은 ... 자요 - 원문 직역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심 많은 개들이요'이다. 이는 당시 지도급 인사들의 물질적인, 육욕적인 탐욕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갤 34:2,3;미 3:11). 이와 같은 자들을 신약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등으로 부르고 있다(빌 3:18, 19).

(주); 몰각한 목자들 - 백성들의 영적 필요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라는 뜻이다(10절).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에 빠져 있는 자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 특히 영적인 필요를 헤아릴 수없는 것은 당연하다.

(주); 어디 있는 자이든지(*, 미카체후) - 문자적인 뜻은 '모든 처소로부터'이지만 '가장 고귀한 자로부터 가장 천한 자에 이르기까지'가 적절한 의미이겠다(Lowth). 창 19:4은 '무론 노소하고', 곧 '나이든 사람, 어린 사람 가릴 것 없이'로 번역한 바 있다. 이로써 파멸의 이유가 밝혀졌는데, 그것은 종교지도자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지도층의 성향은 곧 피지도층의 성향이 되기 쉽다.

성 경: [사56:12]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부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주);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 오리라 - 여기 이르는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들이다. '포도주를 가져 오리라'란 '한 잔 더 마시겠다'란 뜻도 된다. 결국 본 구절은 술을 서로 권하는 대로 받아 마셔 한 테이블에 앉은 자들이 포도주에 취하여 취흥을 즐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그 시대의 지도자들의 육욕적인 상황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주); 내일도 오늘같이 - 이것은 그들의 육욕에로의 탐닉이 일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것, 곧 삶의 주된 관심사였음을 밝혀준다.

성 경: [사56:1]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이방인들의 구원]

(주);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 본절은 언약적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언약에 근거하여 '구원'과 '의'를 베푸실 것인데, 이제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 역시 '공평'과 '의'를 지키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Delitzsch).여호와측에서 약속하신 바(곧 메시야 시대의 도래)의 성취 시점이 가까울수록, 이스라엘 또한 더욱 신실한 자태로 단장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 침례 요한도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함에 있어서 인간편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르소 유사한 요구를 한 바 있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 본절의 '공평'이나 '의' 혹은 침례 요한의 '회개' 등은 메시야의 도래를 맞을 때 요구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자태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하겠다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 4:5,6).

성 경: [사56:2]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이방인들의 구원]

(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 본절 전체는 지혜 문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축복 형식(benediction formula)을 보여주며(30:18;32:20;시 1:1;119:1;잠 8:32,34 참조), 안식일을 잘 준행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본절만의 내용을 보면 안식일에 지켜야 할 금지 사항만 언급되고 있으나 문맥상 온전한 예배와 영적, 육체적 회복과 갱신이라고 하는 적극적 측면도 함께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G.W. Grogan). 웨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포로기 동안 안식일 준수는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의 건실한 일원임을 알리는 결정적인 표시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안식일 못지않게 중요한 전제를 비롯한 여러 희생 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의적(祭儀的) 율법이 폐지되는 메시야 시대에 대한 간접적 암시라고 볼 수 있겠다.

성 경: [사56:3]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이방인들의 구원]

(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 - 여기 '연합한'의 히브리어 '라와'(*)는 레위 지파를 가리키는 '레위이'(*)의 어근으로서, 레위지가의 성전 직무를 암시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레위 지파는 거룩한 성전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특별히 구별되었다(신 10:8). 그렇다면 본절은 그 직무가 이방인에 의해서도 수행될 것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본 구절은 참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예배자가 될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주);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 원래 '고자'의 히브리어 '사리스'(*)는 그 당시 궁궐에서 주요 직무를 맡고 있던 고급 관리 곧 '내시'를 뜻하지만(에 1:10, 12, 15;단 1:3;행 8:27), 여기서는 생식기능이 마비된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당시 모세 율법에 의하여 총회의 명부에 기록되지 못했고 총회의 모임에 참석하지도 못하였다(신 23:2). 본 구절은 이제 율법 시대가 지나감으로 그들도 총회에 들 수 있음을 뜻한다. 또한 본 구절은 단지 생식 기능이 마비된 자뿐 아니라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총회의 행사, 특히 예배에 참속하지 못했던 자들도 겨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강조점은 고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약하던 율법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사56:4,5]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이방인들의 구원]

새롭게 등장할 메시야 왕국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자의 자격은 외형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신실히 좇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밝히는 구절이다(G.W. Grogan, J. Watts).

(주); 내 집 - 교회의 상징으로서의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킨다(딤전 3:15). 모세 율법상으로 이방인은 성전 바깥 뜰에 밖에 들어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성전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도 마음껏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됨으로써 거룩한 자의 반열에 들수 있게 된 것을 가리킨다(히 10:19, 20).

(주); 내 성 안 - 원문 직역은 '나의 성 벽들 안'이다. 고자들도 예루살렘 성 벽들 안에로의 출입이 허용될 것이라는 뜻인데, 성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말은 그들도 하나님이 통치를 받게 됨을 뜻한다.

(주); 기념물(*, 야드) - '기념비'(삼상 15"12;삼하 18:18), '손' 혹은 '장소' 등을 뜻하는 용어로서, 여기서는 '장소'로 보아도 무방하겠다(KJV). 왜냐하면 본 용어와 연관성이 있는 절 말미의 '끊치지'란 어떤 장소, 공동체와 연관이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사56:6]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이방인들의 구원]

7절에 열거된 특권을 누리기 위해 이방인들이 행햐야 할 일들이 자세히 열거되고 있다.

(주);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 3절에서 이미 진술한 바와 마찬가지로 '연합'이란 이스라엘 레위 지파의 제사 직무와 연관된 용어이다. 물론 본 구절에서 말하는 제사란 구약 시대의 제사와는 다른 새로운 예배를 가리키며 이 새로운 예배는 오실 메시야 예수께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요 4:21-23).

(주); 이름을 사랑하며 - 여기 '이름'은 인류를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와 연관성이 있는 하나님을 모르고는 참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주); 종이 되며 - 여기서 '종'이란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이방에게 전하는 자를 뜻한다. 먼저는 그리스도 자신이 종이 되실 것이고 계속해서 그의 교회가 종의 직무를 전수하게 될 것이다.

(주); 안식일 - 구약의 한 절기에 불과한 안식일이 아닌 메시야 도래이후 그 의미가 새롭게 재정립될 모든 종교적 규례들을 함축적으로 가리킨다.

성 경: [사56:7]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이방인들의 구원]

(주); 나의 성산 -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영적으로는 메시야 시대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가리킨다(2:2;렘 3:17).

(주);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희생 제사가 이방인에 의해서도 수행할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지금 문맥은 메시야 시대에 있을 일들을 다루고 있는데 메시야가 자신의 몸을 영단번의 제사로 드림으로 구약의 희생 제사는 폐지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10:11, 12). 핵심은 이스라엘의 특권과 우월성이 사라지게 된다는 점에 있다. 번제와 희생은 이스라엘만의 특권이었고, 그들의 우월성의 근거가 되었다.

(주); 이는 ... 될 것임이라 - 본절 상반절에 기록된 이방인의 특권 수혜의 근거를 적고 있다. 한마디로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국한 하였던 특권을 '만민', 곧 땅 위의 모든 백성에게로 확대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은 온 인류를 상대로 하는 메시야의 대속 사역이다. 이방인까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해달라는 간구가 성전 봉헌 당시 솔로몬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왕상 8:41-43). 그러나 이를 복음의 우주적 성격과 관련지어 명확히 표현한 것은 이시야에 와서이다(Delitzsch). 주님께서도 본 구절을 인용하신 바 있다(마 21:13).

성 경: [사56:8]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이방인들의 구원]

(주);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 포로지로부터 모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이방들의 많은 자들을 더 하시겠다는 이 약속은 본장 본절까지와 앞의 몇장들 내용의 결론이 되고 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새로운 주제가 소개되므로 여기서 지금까지 다룬 몇 개의 장들을 정리 요약할 필요가 있다. 요약의 내용은 본 구절을 통해 잘 드러나듯이 메시야 시대 때 이방 세계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특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타민족 사이에 놓여왔던 두터운 장벽은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어느 민족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 놀라운 경륜 아래서 이제 모든 성도는 한때는 낯선 자요 외국이었으나 이제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확신 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엡 2:19). 그 기원에 있어서 온 세계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온 땅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이다(행 17:26).

성 경: [사56:9]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부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주);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징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소집될 이방 군대를 가리키는데, 본서가 기록된 시점이 아직 갈대아의 침입을 받기 전이므로 갈대아 군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렘 12:7-9;겔 34:5). 바로 앞장에서 메시야 도래의 확신과 그 택함 받은 자의 수가 이방인의 회심으로 더 늘어날 것을 말함으로 그 백성을 위로하였던 저자는, 돌연 그 주제를 바꾸어 이방 군대의 침입을 예언하고 있다. 시간상 순서로 보면 침입에 관한 기사가 먼저이고, 메시야의 도래 및 남은 자 수의 확대는 나중이다. 한 주제를 말하다가 갑자기 상반된 주제로 바꾸는 것은 본서 저자의 기술(記述)상의 특징이다.

성 경: [사56:10]

주제1: [구원의 우주적 성격]

주제2: [부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주); 파숫군들(*, 초파) - 문자적인 뜻은 '보는 자'이다. 본 용어는 개역 성경의 문자적인 뜻 그대로 성 위 망루에서 망을 보는 자 혹은 영적인 눈을 가지고먼 미래를 예견하는 선지자 둘 중의 하나에 적용된다(21:6-12;52:8;62:6;렘 6:17;겔 3:17). 여기서는 후자와 아울러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을 함께 일컫는 말로 이해된다(G.W. Grogan).

(주); 벙어리 개 - 짖음으로써 사나운 짐승의 접근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목자의 사냥개에서 따온 비유이다.

(주); 꿈꾸는 자 ... 누운 자 ...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 - 세 가지 모두 유사 용어이다. 그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꿈꾸는 자'의 히브리어 '호짐'(*)은 그 문자적 뜻이 '꿈 속에서 말하는 자', '비전을 보는 자' 등인데, 이것은 게을러서 비활동적인 사람뿐 아니라 그릇된 이상, 환상을 보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 경: [사56:11]

(주); 이 개들은 ... 자요 - 원문 직역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심 많은 개들이요'이다. 이는 당시 지도급 인사들의 물질적인, 육욕적인 탐욕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갤 34:2,3;미 3:11). 이와 같은 자들을 신약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등으로 부르고 있다(빌 3:18, 19).

(주); 몰각한 목자들 - 백성들의 영적 필요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라는 뜻이다(10절). 자신들의 육적인 욕심에 빠져 있는 자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 특히 영적인 필요를 헤아릴 수없는 것은 당연하다.

(주); 어디 있는 자이든지(*, 미카체후) - 문자적인 뜻은 '모든 처소로부터'이지만 '가장 고귀한 자로부터 가장 천한 자에 이르기까지'가 적절한 의미이겠다(Lowth). 창 19:4은 '무론 노소하고', 곧 '나이든 사람, 어린 사람 가릴 것없이'로 번역한 바 있다. 이로써 파멸의 이유가 밝혀졌는데, 그것은 종교지도자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지도층의 성향은 곧 피지도층의 성향이 되기 쉽다.

성 경: [사56:12]

(주);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 오리라 - 여기 이르는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들이다. '포도주를 가져 오리라'란 '한 잔 더 마시겠다'란 뜻도 된다. 결국 본 구절은 술을 서로 권하는 대로 받아 마셔 한 테이블에 앉은 자들이 포도주에 취하여 취흥을 즐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그 시대의 지도자들의 육욕적인 상황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주); 내일도 오늘같이 - 이것은 그들의 육욕에로의 탐닉이 일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것, 곧 삶의 주된 관심사였음을 밝혀준다.

성 경: [사57:1]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의인이 죽을지라도 ...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 여기 '의인'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자는 자신이 살던 당시에 무고한 자들의 희생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을지라도'로 번역된 '아바드'(*)나 하반절에 '취하여 감'으로 번역된 '네에사핌'(*)은 모두 박해로 죽어가는 상황을 암시하는 용어들이다. 유다에도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왕들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므낫세이다 :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 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차게 하였더라"(왕하 21:16). 유대 전승과 초대 교부들은 본서 저자 이사야가 바로 이 악명 높은 므낫세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주); 화액(禍厄)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 - 원문 직역은 '다가올 악으로부터 취하여진 것'(is taken away from the evil to come, KJV)이다. 사방도처에 만연한 도덕적 악행으로부터, 이방 군대의 침입으로 나타날 민족적 죄악에 대한 징벌로부터 취하여 갔다는 뜻이다. 즉, 의인이 너무 이르게 죽은 이유는 그가 만연한 도덕적 악행을 더 이상 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 이방 군대의 침입으로 인한 쓰라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미리 데려가셨다는 것을(are taken away to be spared from evil, NIV) 가리킨다. 의인 아비야의 죽음을 성경은 그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이 그에게 내린 축복으로 묘사하고 있다(왕상 14:10-13).

성 경: [사57:2]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정로(正路)로 행하는 자 - 여기 '정로로'에 해당하는 '네코호'(*)는 '곧바른', '바른'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용어는 악인이 걷는 '구부러진' 길과 대조할 때 자주 사용되는 형용사이다(59:8;시 125:5;잠 2:15;빌 2:15).

(주); 편히 쉬느니라 - 의인의 몸이 그의 무덤에서 안식을 취하는 듯이 묘사하고 있다. 신약 성경은 재림 때에 성도의 몸이 부활할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죽은 자를 '자는 자'로 부르기도 한다(살전 4:14).

성 경: [사57:3]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무녀의 자식 - 문자적인 뜻은 '마술의 아들들'로, 참신이신 하나님보다 이방인이 추구하던 마술, 마법 등에 탐닉해 있던 이스라엘을 풍자하는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동방의 이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마술, 마법 등에 빠져 있었는데 특히 므낫세 왕 때 아주 심하였다(왕하 21:6).

(주); 간음자와 음녀의 씨 - 1차적으로는 도덕적 기준이 문란해짐에 따른 성적 부패 현상 혹은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 규례까 무시되어 음란함이 이스라엘에 만연하였던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아울러 이 말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좇는 영적 음란함에 대한 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므낫세 통치 때 만연하였던 악하고 부패한 모든 행실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었던 것이 바로 음란함이었다(황하 21장). 어떤 경우에 있어, 이 음란함은 우상 숭배 예식에 필수적인 동반 요소였다. 예수님도 당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함에 있어서 음란함에 대해 반복 언급하셨다(마 12:39;16:4 등).

성 경: [사57:4]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 '희롱하느냐'에 해당하는 '티트아나구'(*)는 '장난치다', '조롱하다' 등을 뜻하는 '아나그'(*)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후자인 '조롱하다'가 문맥과 어울린다. 1절에서 '의인들'에 대한 언급이 나왔기 때문에 '조롱'의 대상은 그들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우상 숭배자들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고 경멸적 제스처를 취한 경우는 많았다(Whybray). 우상 숭배자들의 그 같은 태도는 결국 의로운 자들이 섬기는 하나님 그분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 혀를 내미느냐 - '혀를 감느냐'로도 번역되는데 한마디로 순간적으로 혀를 밖으로 쭉 내밀었다가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작을 가리키며 이는 경멸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사57:5]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상수리나무 사이 ... 음욕을 피우며 - '상수리나무 사이'는 '바엘림'(*)인데 '테레빈나무(팔레스틴에 서식하던 나무의 일종)의 숲 사이'로 보는 견해(Kimchi)와, '우상의 형상들'로 보는 견해(70인역)가 있다. 그 어느 견해를 따르든 간에 분명 놓치지 말아야 할것은, 본 구절은 숲속에서 이방 신을 숭배하던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상은 테레빈나무로 만든 우상일 수도 있다. '푸른 나무 아래'란 표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이방 우상 숭배 의식을 서술하는 대목에 대체로 수반되는 틀에 박힌, 상투적 표현의 의미가 있다(왕하 17:10;대하28:4).

(주); 자녀를 죽이는도다 - 상반절의 우상 숭배 의식에 대한 언급과 유사한 내용으로 인신 희생 제사를 가리킨다. 특히 이는 물록 신에 대한 제사를 연상시킨다. 특히 이는 몰록 신에 대한 제사를 연상시킨다(레 18:21;왕하 23:10). 몰록 신 숭배했던 타락한 이스라엘 부모들은 그 자식을 죽여 불에 태워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정확히 증명해주고 있는데 그 제사가 시행되던 곳은 그악명 높은 힌놈의 골짜기였다(대하 28:3). 이 끔찍스러운 제사는 가나안 민족과 바벨론 민족에 의해서도 수행도이가으며*왕하 17:31), 역사가들에 따르면 페니키아 민족 그리고 카르타고 민족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고 한다(Eusevius, Diodorus Siculus).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때 처음 시작되었고 국가적 위기 때에 가끔씩 자행되다가 아하스와 므낫세 때 널리 유행되었으며 요시야 때 폐지되었다(왕하 23:10).

성 경: [사57:6]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 중에 너희 소득이 있으니 - '매끄러운 돌'에 해당하는 '헬레크'(*)는 단지 한정사일 뿐이며 '돌'은 추측에 의한 번역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물이 흐르는 골짜기에서 발견한 아름답고 맨들맨들한 돌을 가져다가 신적 경의를 표한 사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Kimchi), 그보다는 이스라엘 우상 숭배자들이 숲이 우거진 곳 특히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우상을 세원 호고 숭배하였음을 뜻한다고 봄이 나을 것 같다. '소득'의 히브리어 역시 '매끄러운 돌'과 같은 '헬레크'(*)로서 일종의 언어 유희(word-play)를 보여주며, 그 문자적인 뜻이 '기업'으로도 번역된다. 이는 우상 숭배를 직업처럼 그 일에 몰두하였던 것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주); 전제 -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의 일종으로 포도주와 기름을 제단 위에 부어 드리던 제사(출 29:40;레 23:13;민 15:5-7)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이방 우상 숭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드렸던 동일한 방식을 취하였다.

(주); 예물(*, 민하) - 희생 짐승이 아닌 곡식 및 고운 가루를 제물로 드렸던 것을 가리킨다(레 14:10).

성 경: [사57:7]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 공개적으로 수치심없이 감행되는 음란 행위에서 따온 이미지이다(겔 23:7). '침상'은 우상 숭배에 사용되는 제단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아무튼 본절 전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소위 영적 간음 행위를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겔 16:16,25).

성 경: [사57:8]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 여기 '기념포'란 새긴 이방 우가의 신상을 가리킨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가정 수호신인 '라레스'와 '페나테스'의 신상를 집안 곳곳에 놓아 두었듯이 패역한 이스라엘은 이방 신상을 집안에 두었다. 이 행위는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그 신상을 둔 곳은 다름 아닌 문과 문설주였다. 이 두 곳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새겨 두어야 할 곳이었다(신 6:9;11:20). 바로 그곳에 페역한 이스라엘은 신상을 두었다. 이 행위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 "...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를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5).

(주); 다른 자를 위하여 몸을 드러내고 - 음란한 여인의 성교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은 패역한 이스라엘의 이방 신 숭배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주);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 음란 행위를 할 상대를 더 많이 받아들이는 장면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공개적인 위반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과 불변의 언약을 맺은 바 있다(출 19:5;23:32).

성 경: [사57:9]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몰렉(*, 멜레크) - 문자적인 뜻인 '왕'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마치 매춘부가 향수를 바르고 손님을 맞듯이 숭배하기 위해 그 앞으로 나아갔던 우상(렘 4:30;겔 23:40) 혹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더 신뢰했던 앗수르, 애굽 그리고 그 외 이방의 왕들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후자로 보는 것이 더욱 낫다. 왜냐하면 문맥적으로는 '우상'으로 볼 수있으나 용어 자체는 문자 그대로 '왕'을 가리킬 때 쓰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몰렉 우상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몰레크'로 발음됨). '향품'이란 외국 왕들에게 바치던 선물, 조공 등으로 보면 되겠다(호12:1).

(주); 음부까지 스스로 낮추었으며 - 낮출 수있는 최저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의존하기를 버릴 때 그들은 가장 비천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성 경: [사57:10]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네 힘이 ... 아니함이니라 - 문자적인 뜻은 '너는 너의 손의 생명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너는 슬퍼하지 아니하였다'이다. 여기 '생명'(*, 하이트)이란 활력, 원기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본 구절이 뜻하는 바는, 이스라엘은 이방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원기가 그몸에 남아 있는 한 여전히 그 소망 가운데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차례의 이방나라에로의 사신 파송이 아무 소득이 없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이스라엘은 힘이 있는 한 계속해서 사신을 파송하면서 소망을 잃지 않았던 사실을 가리킨다.

성 경: [사57:11]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 - 하나님께 대한 관심조차 없었음을 나타낸다. 거짓 고백으로 아첨하기보다는 차라리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관심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은 양 가장했다. 그 같은 위선은 하나님이 그들을 오랫동안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은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오랜 고통의 침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인케 하기 위함이 아니라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다(롬 2:4,5).

성 경: [사57:12]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본절 원문 직역은 '나는 너희들의 의와 너희들의 행위들을 나타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너희들에게 무익하기 때문이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적인 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겠다는 뜻이며, 그들이 이방의 도움을 요청하고 이방 신상을 숭배하는 행위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공개적으로 나타내시겠다는 것이다.

성 경: [사57:13]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땅을 차지하겠고 - '땅'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가 다시 얻게 될 유다와 시온 산을 가리키지만, 2차적으로는 영적 이스라엘 곧 신약 교회 성도들이 얻을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49:8;시 37:9,11;69:35,36;마 5:5;히 12:22).

성 경: [사57:14]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이는 바벨론 포로니로부터 귀환할 때 그 장애물들이 제거될 것이라는 예언으로도 볼 수 있으나, 특히 거치는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크숄'(*)은 구약 성경(특히 에스겔서)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최촉(催促)하는 우상 숭배 등의 죄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므로 본문은 메시야 시대의 구원과 해방을 암시하는 예언으로도 이해 가능하겠다(Whybray)

성 경: [사57:15]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 - 여기 '통회'란 '다카'(*)로서 '깨어지고, 부숴지고, 잘게 쪼개어진 어떤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자신의 죄성과 무가치성을 철저하게 깨닫는 자를 암시하고 있다. 영적 구원 문제에 관한 한, 바로 이 같은 의식을 갖고 있는 자만이 이제 오실 참구속주인 메시야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이기도 하다(마 5:1-8). 이 의식을 가졌던 세리는 의인이라는 호칭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의를 자랑하며 영적 교만에 싸여 있었던 바리새인은 수치를 당하였다(눅 18:9-14).

성 경: [사57:16]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내가 영원히는 ... 아니할 것은 - 한마디로 이것은 14, 15절에 있는 약속, 곧 통회하는 자를 회복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영원히 그의 백성과 다투지 않으시는 까닭은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만 봐도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애 3:33;미 7:8,9).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필경 파멸에 이르게 하신다(시 7:11;계 14:11).

성 경: [사57:17]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얼굴을 가리우고 - 하나님의 '얼굴'이란 은총의 현시(顯示)를 가리키므로, 얼굴을 가리웠다는 것은 그 반대인 은총의 사라짐을 뜻하겠다.

(주); 오히려 패역하여 - 문자적인 뜻은 '완고함을 계속하여'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고 징계가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죄를 깨닫기는 커녕 도리어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져만 갔다. 그와 같은 자들에게 취하실 하나님의 태도는 두 가지 중 하나였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는 대신 그들의 죄의 문제를 대신 해결할 메시야를 보내시는 쪽을 택하셨다.

성 경: [사57:18]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 여기 '길'이란 악행 혹은 회개 등으로 볼수 있는데, 앞절에 의존할 때 전자가 옳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반복되는 죄악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간구하셨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메시야를 통한 그 백성의 구원이다. 성경은 영적 구원을 암시함에 있어 질병의 치유와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대하 7:14;시 41:4;렘 3:22;호 14:4 등).

성 경: [사57:19]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주);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 - 히 13:15에서 바울이 말한 '찬미의 제사'가 바로 '입술의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입술에서 찬양이 나오게 할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일이란 '평강'에 관한 것이다. 이 '평강'(*, 솰롬)이란 완전한 평화로서(요 14:27), 먼저는 유대인의 포로지에서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관계된다. 그러나 좀더 포괄적으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에도 전파될 복음을 통하여 온 인류 중 택한 자들이 누리게 될 영적 평안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당시로서는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평안의 복음이 이방에게도 퍼질 것을 '먼 데 있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드러내었다(행 2:39;엡 2:17).

성 경: [사57:20]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의인과는 달리 혼란과 불안정 상태에서 벗어날 길 없는 악인을 대비시키고 있다.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 '바다'라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데 히브리 개념에 있어서 '바다'는 결코 안식이 없는 그 무엇의 이미지로 종종 등장한다(43:2).

성 경: [사57:21]

주제1: [회개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주제2: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본절은 19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완고한 악인, 곧 회개치 못하는 자는 19절에 언급된 평화를 나누는 일에서 제외될 것이다. 이 표현은 약속된 영적 화해와 용서에 따른 평안을 회개에는 자에게만 돌아갈 몫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재강조하는 것이다. 48장도 동일한 강조로 마무리되고 있다.

성 경: [사58:1]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외식적 금식과 참된 금식]

(주); 내 백성에게 ... 고하라 - 여기 '백성'이란 선지자 시대의 백성 혹은 바벨론 포로 시대의 백성, 둘 중으 하나이겠다. 우리는 다수 주석가들의 견해에 따라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Delitzsch, Rosenmuller, J. Watts, Whybray). 그 근거로서 성전, 희생 제사, 므낫세 시대에 유행했던 우상 숭배 따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성 경: [사58:2]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외식적 금식과 참된 금식]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기는 하되 그것은 형식적이요 외면적일 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도리어 자기의 뜻을 구했던 사실에 대한 조롱이 담기 다역설적 표현이다. '그들은 나를 날마다 찾으며, 나의 뜻을 몹시도 알고 싶다면서, 마치 옳은 일을 해 온 백성이기나 하듯이, 자기 신의 법을 어기지 않은 백성이기나 하듯이, 무엇이 옳은 법인지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다면서'(공동 번역).

성 경: [사58:3]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외식적 금식과 참된 금식]

본절은 이스라엘이 금식의 본래적 목적과 의의를 외면하고 오히려 현실상의 축복을 비는 수단으로, 단지 종교적 자랑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사실을 계속 책망하는 내용이다. 본래 금식은 회개와 성결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느 9:1,2;시 69:10),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뜻과 정욕을 억누르고 자기를 부인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금식에 대한 언급은 이른 시기부터 보여진다(삼상 31:13;삼하 12:11-23;대하 20:3). 그러나 개인 금식이 경건의 표현으로서 대중화되고 정기적으로 공동 금식이 준행된 것은 포로기 이후의 일이다. 슥 8:19에는 정기 금식의 네 시기가 언급되어 있다. 그중 4월 9일의 금식은 예루살렘 함락을(와하 25:3-21), 5월 10일의 금식은 성전 파괴를(렘 52:12,13), 7월 2일의 금식은 그달리야 살해를(왕하 25:23-25) 그리고 10월 10일의 금식은 예루살렘이 처음 공략된 것을 각각 기억하는 데에 애초의 목적이 있었다(J. Watts).

(주);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 그들의 영혼이 괴로움을 당했다고 자랑하였던 사실이 위선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은 오히려 금식을 즐기고 있었다.

(주);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 여기 '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체브'(*)는 매우 힘들고 고통이 따르는 노동, 땀, 산고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며 또한 '시키는도다'에 해당하는 '나가스'(*)는 '폭정을 가하다', '강제 징수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금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챙기기 위해 그 종이나 일꾼에게 가혹한 일을 강요하는 악덕 주인을 고발하는 내용이 되겠다(느 5:1-5).

성 경: [사58:4]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외식적 금식과 참된 금식]

(주); 다투며 싸우며 -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다투고 싸우는 것을 금식의 목적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금식하는 중에조차 그러한 이욕(利慾)적인 혈기를 부릴 정도로, 그들은 금식의 목적 자체에 대해 무지하였음을 보여준다(Whybray).

성 경: [사58:5]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외식적 금식과 참된 금식]

(주);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 여기 '기뻐하는'의 원문적 의미는 '선택한'이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취하는 형태의 금식은 하나님이 택하신 곧 하나님이 인정하고 명령하신 금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 재를 펴는 것 - 이는 극도의 겸손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형식적 모양만 갖춘다고 하여 다된 걸로 생각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본절의 요지는 금식의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금식의 정신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금식의 참정신이 6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바, 그것은 결국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다(마 6:16-18).

성 경: [사58:6]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외식적 금식과 참된 금식]

(주); 흉악의 결박(*, 하레추보트) - 문자적인 뜻은 '악의 띠'로 불의하고 잔혹한 권위를 가지고 타인의 권리나 유익을 억압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주); 명에의 줄을 끌러 주며 - 여기 '멍에'는 악압 혹은 강제적인 노동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용어로,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 여기 거론되고 있는 상대는 문자 그대로는 '상한 자'이며 폭력, 압제 등의 '부당한 대우를 받고 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실체를 결정적으로 밝혀주는 단서는 '자유케 하며'로 번역된 '하페쉼'(*)이다. 이 용어는 한번 노예가 되었다가 자유를 얻은 자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신 15:12;욥 3:19 등). 이 단서에 근거할 때 본 구절이 서술하려는 존재는 의심의 여지없이 '노예'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사58:7]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외식적 금식과 참된 금식]

(주); 주린 자에게 ... 나눠 주며 - 이것은 한 아비가 그 자녀에게 그렇게 하듯이 가진 자가 그 소유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공급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체로 이 행실은 신앙인의 필수적 의무로 간주되었는데, 고난의 사람 욥은 이러한 선행의 모범을 아름답게 서술한 바 있다(욥 31:16-22).

(주);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 - 원문 직역은 '너 자신의 살(육체)로부터 너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여기 '살(육신)'은 '바사르'(*)로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뼈 중의 뼈 그리고 '살 중의 살'이라 칭할 때(창 2:23), 그리고 라반이 야곱을 그의 '골육'이라 칭할 때(창 29:14), 각각 사용하던 용어이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본 용어는 혈육상 밀접한 관계에 있는 상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보면 되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개역 성경의 번역 '골육'은 적절하다. 골육, 곧 친척에게서 자신을 숨기는 경우란 그 친척의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재물이 없을 때 혹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을 꺼려할 때이겠다. 참신앙인이라면 골육 친척이 어떤 신분이나 처지에 있든 간에 친절과 애정을 갖고 그와 친교를 나누고 그의 필요를 공급하는 데 힘을 써야 함이 마땅하다. 성경은 친척, 곧 가족을 돌보지 않는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약하다고 경고하고 있다(딤전 5:8).

성 경: [사58:8]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의로운 자가 받을 축복]

(주);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서 금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번영의 축복을 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번영'은 흔히 아침에 비치는 찬란한 빛에 비유되고 있다(욥 11:17).

(주);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 원문 직역은 '네 상처는 빨리 치료될 것이다

'이다. 여기 '치료'의 본래 뜻은 상처를 치료할 때 사용되는 '긴 붕대'이다(1:6과 비교하라). 따라서 본 구절은 오랫동안의 정신적, 육체적 상처, 곧 전인적인 상처를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주);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에의 순응은 행복, 번영, 평화의 길로 이끄는 선봉장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주);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 이것은 이스라엘과 그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섰었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연상케 한다(출 14:19, 20).

성 경: [사58:9]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의로운 자가 받을 축복]

(주); 손가락질 - 문자적인 뜻은 '손가락을 뻗치는 것'이다. 이것은 남을 경멸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손가락질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법적 기소(起訴)를 암시하는 말로 쓰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Whybray).

(주); 허망할 말(*, 다베르 아웬) - 이는 무(無), 헛됨, 텅 빈 것(41:29;슥 10:2), 거짓, 속임수(시 36:4;잠 17:4), 무가치한 것, 사악함 , 죄악(1:13;욥 36:21)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인데, 결국 여기서는 당시 사회에 만연하였던 온갖 종류의 거짓, 거친 행동 그리고 불의한 언사 등을 의미하는 것 같다.

성 경: [사58:10]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의로운 자가 받을 축복]

(주);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動)하며 - 원문 직역은 '너의 영혼을 주린 자에게 끄집어 내며'이다. 직역의 내용이 어색하기 때문에 몇 역본들과 사본들은 '너의 빵을 주린 자에게 내밀며'로 번역하고 있다(사해 사본, 시리아역, Noyes, Horsley). 그러나 이 번역은 원문을 크게 수정한 번역으로, 굳이 이렇게 옮길 필연성은 없다. 여기 '영혼'(*, 네페쉬)은 '마음' 혹은 '선행의 마음' 등과 동의어로 보면 된다. 따라서 원문 수정 없이도 본문의 의미는 정확히 드러난다고 본다 : '너의 선행의 마음을 주린 자에게 드러내며.'

(주);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 지금까지 불투명하고 암담했던 삶의 여정이 분명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재앙들 그리고 시련들의 과정이 끝나고 풍성한 번영의 과정이 이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성 경: [사58:11]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의로운 자가 받을 축복]

(주);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 '마른 곳'(*, 차흐차호트)은 태양의 강렬한 햇살에 노출되거나 가뭄 때문에 습기가 완전히 말라버린 곳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이 약속하는 것은 단순한 마른 땅, 가뭄에 내릴 비 정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혜택을 받을 대상이 '영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암시하는 바는 오랜 고통에서 벗어난 자가 얻게 될 마음의 평안,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도래와 그의 사역으로 말미암을 구원의 약속까지로 보아야겠다. 본서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인한 그 택한 백성의 구원을 암시할 때 '마른 땅'의 이미지를 자주 등장시킨 바 있다(41:17 등). 물 댄 동산 - 이는 근동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나타내려 할 때 흔히 사용된 표현이다. 시리아역(Syriac)은 본 구절을 '천국'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천국을 이뤄본 적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표현을 종말론적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이제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의 택함받은 자들은 완성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다.

(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 여기 '끊어지지'로 번역된 '예카제부'(*)는 그 문자적인 뜻이 '속이다', '거짓말하다'이다. 이것은 샘의 근원이 말라 있을 경우 물을 얻기 위해 그곳을 찾은 대상들, 혹은 짐승들의 허탕을 치게 되는 사실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실 샘은 켤코 마르지 않고 항상 풍성한 샘이다. 이 샘은 바로 반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 사역 때문에 그분을 찾는 모든 사람은 항상 영생의 물을 얻게 될 것이다(요 4:13,14;고전 10:4).

성 경: [사58:12]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의로운 자가 받을 축복]

(주); 네게서 날 자들 - '너를 통하여 있게 될 자들'이란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 후손들을 가리킨다.

(주); 오래 황폐된 곳 ... 역대의 파괴된 기초 - 이것은 분명 바벨론 포로 시대 동안 황폐된 상태로 방치되었던 이스라엘 성을 가리킨다. 그 성은, 건물은 물론 그 기초까지도 완전히 파고되었었다. 이 성의 수측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더 나아가서는 이방의 회심이라는 축복을 암시한다(암 9:11,12;행 15:16,17)

성 경: [사58:13]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의로운 자가 받을 축복]

본절의 시점은 포로 귀환 이후의 시대이다. 바로 이 시대에도 안식일 준수는 중요한 의무로 주어지고 있다(느 13:15-22).

(주); 네 발을 금하여 ...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 '발'은 동작을 일으키는 수단이다(잠 4:27). 안식일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따라서 안식일에 회당이나 성전에 가는 일 외에 다른 일에 그 발을 사용하지 않았다(행 1:12 참조).

(주); 성일(聖日) - '나의 거룩한 날'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날을 나의 날이라 부르신다. 따라서 그날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 그분은 소유를 도둑질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 즐거움이 육적인 것이냐 아니면 영적인 것이냐는 것이다. 만일 육적인 즐거움을 취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안식일 규례를 범한 것이 된다.

성 경: [사58:14]

주제1: [참된 신앙에 대한 촉구]

주제2: [의로운 자가 받을 축복]

(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 쉽지 않은 구절로서 해석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이 살던 팔레스틴 땅은 고지대인데 바로 그 고지대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 곧 포로 귀환의 약속으로 보는 견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높은 지대가 상징하는 번영, 안정에 대한 약속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를 연속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포로로부터 귀환시킨 후 번영과 안정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으로 보는 것이다.

(주);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 야곱에게 약속된 땅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 원문 직역은 '왜냐하면 여호와의 입이 그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이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포로 후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땅을 소유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강조할 때 흔히 이 표현이 사용된다.

성 경: [사59:1]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여호와의 손이 짧아 ...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 신인 동형론적 표현을 통하여 본절이 나타내려고 하는 바는, 이스라엘의 포로된 그리고 그들의 오랜 금식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해방을 얻지 못하는 원인이 하나님편에 있지 안혹 이스라엘편에 있다는 사실이다. 본장은 자신들의 오랜 포로 생활 가운데 겪는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듯 하나님께 논쟁하고 따지는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변론을(58:3 참조) 전제로 시작되고 있다.

성 경: [사59:2]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너희 죄악(*, 아온테켐) - '너희들의 죄악들'이란 뜻이다. 복수형으로 된 이 죄악들이란 바로 전장에서 나열하였던 죄악들과 본장 앞부분에서(2-8절) 열거할 죄악들을 가리킨다.

(주); 사이(*, 마브딜림) - 대체로 커튼 혹은 담벽 등으로 인한 영역의 구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출 26:33;32:26)이다. '죄악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는 커튼이나 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같은 상태에서는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성 경: [사59:3]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본절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동의적 개념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하나는 '손'과 '손가락'인데, 전자는 총제척 번죄 행위, 곧 범죄 행각을 가리키는 것 같다. 또 다른 하나는 '입술'과 '혀'인데, 전자는 공개적으로 되어지는 모든 거짓말을, 후자는 은밀하게 되어지는 거짓말을 각각 암시하는 듯하다(렘 6:28;9:4). 당시에는 연령층에 관계없이 행동과 말로 되어지는 각종의 죄악들이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성 경: [사59:4]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 문자적인 뜻은 '공의를 요구하는 자도 없고'이다. 말하자면 공의롭게 재판건을 재판정으로 가지고 나가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당한 유익을 얻는 목적을 위해서만 법정을 이용하던 행태를 꼬집는 표현이다. 이 같은 형태는 법을 집행하는 사법 기관이 썩었기 때문이다.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 하박국 선지가 자신의 국가 유다의 멸망을 하나님께 구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공의가 땅에 떨어졌던 사회상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이니다"(합 1:4).

(주);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 왜곡되고 불합리한 사회 풍조 때문에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는 일이 되지 않고 그래서 온갖 부정한 수단에 의지하게 됨을 나타낸다.

(주); 잔해(殘害)를 잉태하여 - 문자적인 뜻은 '불행을 잉태하여'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불이익, 성처를 낳는 악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사59:5]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독사의 알을 품으며 - '독사'에 해당하는 '치프오니'(*)의 정확한 뜻은 밝히기 어려우나 맹독성을 지닌 뱀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이 같은 뱀음 알 속에 있을 때 밟아 죽여야 옳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도리어 그 동물을 보호하고 키우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그들이 악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주); 거미줄을 짜나니 - 여기 '거미줄'은 다른 곤충을 잡기 위해 치는 함정, 곧 남을 해치기 위해 놓는 덫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곧 망가져 버릴 정도로 얇은 조직으로 된 거미줄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6절에서 이 거미줄은 단단하고 치밀한 조직으로 짠 '옷'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남을 해치고 망치려는 계획과 행위는 헛되면 일순간적인 뿐임을 말하고 있다(욥 8:14;잠 11:18).

성 경: [사59:6]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 거미줄은 옷감 재료로 부적합하다는 것이 문자적인 뜻인데, 여기서는 그와 유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나아가 구원을 보장할 수도 없다는 의미를 암시한다. 거미줄을 짓는 것과 같은 행위에는 기만적인 궤변이 있다. 이것은 참지혜, 경건, 미덕 그리고 그에 따른 구원을 이루지 못하며 허공을 치는 사색에 그치고 만다(Vitringa). 또 다른 예로는 악한 자의 술수, 헛된 형식주의, 거짓된 여론, 간교한 사색, 그리고 생명 없는 전승 등이 있겠다.

성 경: [사59:7]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 문자적인 뜻은 '그들의 발은 악으로 달리며'이다. 악으로 달린다는 것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암시하는 말이다. 3절에서 죄를 짓는 신체 부위로서 손, 손가락, 입술, 혀를 언급했던 저자는 여기서 발을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악이 전인적(全人的)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1:5,6).

(주); 사상은 죄악의 사상 - 죄행의 뿌리가 밝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행동에 있어서만 악했던 것이 아니라 그 의도, 생각에 있어서도 역시 악했는데 사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요소이다.

성 경: [사59:8]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평강 -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화평 혹은 자신의 양심에 있어서의 심적인 평안을 가리킨다.

(주); 굽은 길 - 이는 부정적, 자만, 속임수의 상징인 반면, '곧바른 길'은 성실, 진실, 정직 그리고 곧음의 상징이다(시 125:5;잠 2:15). 여기서는 그들의 계획이나 도모하는 행사 따위가 곡해되고 악하다는 의미이다.

성 경: [사59:9]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우리에게서 - 8절과 그 앞 몇 구절들에서 3인칭(그들)이었던 호칭이 1인칭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이같이 인칭을 바꿈으로써 이제 자신까지를 포함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당할 재앙을 바라보면서 그 죄악을 회개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주); 의 - 문맥상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사59:10]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 시내 광야에서 모세가 예언한 내용을 상기시킨다. 그때 모세는 만일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준행치 않으면 소경이 더듬는 것같이 더듬으리라고 하였던 것이다(신 28:29). 소경처럼 담을 더듬는다는 것은 갑작스런 환난을 당하여 황망해 하는 것, 스스로 참진리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 혹은 스스로는 구원의 길에 들 수 없는 상태에 처한 것을 가리킨다.

(주);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임한 재앙이 그치지 않음을 뜻한다. 안식의 낮을 잠시 기대하여 보지만 여전히 재앙의 밤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 우리는 강장한 자 ... 같은지라 - '강장한 자'(*, 아쉬마님)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이를 '어둠'(Jerome, Luther), '무덤'(탈굼역, D.Kimchi), '황량한 장소'(J. Kimchi)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상 이 말이 '죽은 자'와 반어적 관계에 있는 듯하고, 그 어원으로 추측되는 '솨멘'(*)이 '풍부한', '살진', '무성한' 등의 뜻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비옥한 밭' 혹은 '살지고 강건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나을 것 같다. 또 이 둘 중에서도 어두(語頭)첨가어 '알렙'(*)이 붙은 말은 대체로 명사적 의미보다는 형용사적 의미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후자가 더 자연스럽겠다(Delitzsch). 다른 사람은 번영과 낙을 누릴 때 죽은 자처럼 번영도 없이 기쁨을 모르는 삶을 사는것, 그것이 바로 불신자의 모습이다(26:10;눅 15:17).

성 경: [사59:11]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곰같이 부르짖으며 - '부르짖으며'에 해당한 '네헤메'(*)는 중얼거리는 소리, 혼란하고 시끄러운 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비둘기처럼 '구구'하는 소리(겔 7:16), 모인 무리가 웅성거리고 소동하는 소리 등을 가리킬때 사용되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그 어떤 고통 때문에 울부짖고 신음하는 소리로 보면 되겠다.

(주);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 애조를 띤 소리의 대명사인 비둘기의 우는 소리는 흔히 슬픔을 나타낼때 사용된다(겔 7:16).

성 경: [사59:12]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 원문 직역은 '우리의 죄가 우리를 향해 대답하오니'이다. 이것은 그들의 과거 죄악들이 너무 현저해서 그들이 죄인임을 명백히 증언한다는 뜻이다. 한편 본절에는 '우리'라는 말이 무려 일곱 번이나 등장하는데, 이는 허물진 백성을 대신하여 중보적으 회개 기도를 올리는 이사야의 진정한 동족애를 보여준다.

성 경: [사59:13]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바로 앞절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의 진술없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죄인임을 인정했다면, 본절에서는 죄의 구체적인 내용을 열거하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인 죄행도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배신의 행동, 말 그리고 생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 경: [사59:14]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 여기 '공평'(*, 미쉬파트)이란 재판정의 생명이라 볼 수 있는 '공정성'을 뜻한다. 재판은 바로 이 '공정성'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는 어떤 권력의 배경이나 뇌물 등을 가진 자에게 유리하도록 재판이 진행되곤 하였음을 시사한다.

(주); 거리에 앞드러지고 - 공정성에 의해 진행되는 재판은 거리가 아닌 성문 따위와 같은 사람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곳에서 열렸다. 그런데 그 재판의 생명인 바 '공정성' 곧 '성실'(*, 에메트)이 거리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공정성이 재판정을 떠났음을 뜻한다. '정의'의 상징인 재판정이 정의롭지 못하면 그 나라 전체는 도덕적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성 경: [사59:15]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 문자적인 뜻은 '악으로부터 떠난 자가 먹이가 되다'이다. 범람하고 있는 악의 세태에 물들지 않은 정직하고 경건한 자가, 먹이를 노리른 야수와 같은 악인의 공격 표적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주);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 원문 직역은 '하나님 눈앞에 악이 있었다. 그것은 그분을 고통스럽게 하였다'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악성은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는 그의 품성을 따라 어떤 조치를 취하셔야만 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속성을 예시하는 역할을 위해 선택된 모범적 국가로서의 자태를 만방에 드러내어야 했다.

성 경: [사59:16]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 이스라엘이 징벌을 받는 이유는 죄 때문이었다. 따라서 징벌이 멈추려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한 존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본 구절의 뜻하는 바이다.

(주);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이쉬토멤)의 원문 직역은 '어찌할 바 몰라하셨다'인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같은 태도를 취하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재자,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없음을 크게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 표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주); 자기 팔 - 구원 문제에 있어서 인간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이 해결책을 제시하실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성 경: [사59:17]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이스라엘의 부패상이 너무 심각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마치 무장한 전사처럼 하고서 직접 개입하시는 내용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묘사한 성도의 전신갑주를 연상시킨다(엡 6:13 이하). 에베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여호와의 각종 무장 장비들은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의 다양한 표현들에 다름 아니며, 이들은 당신의 진노와 사랑을 아울러 나타내는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59:18]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본절에서 강조되는 말은 '행위'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물'(*)이 세 차례나 사용되고 있는(개역 성경은 '보응'과 '보복'의 히브리어도 바로 '게물'임) 것만 보아도 강조점은 명백하다. 이제 말씀으로 경고하는 때는 지나갔고 심판의 행동이 개시된다는 것이다(J. Watts). 한편,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세상 열방들에 대해 내려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서 마치 패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숨겨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마 기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까지 세상 만국에 대한 심판 속에 포함시켜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성 경: [사59:19]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본절에 대한 번역은 역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취해질 수 있다 : '하나님을 겨외하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가 대적들을 완전히 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G.W. Grogan).

성 경: [사59:20]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 이 말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하늘로부터 오는 구속자는 배타적으로 유대인에게만, 유대인을 위해서만 오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구속주가 이스라엘 중에서 탄생하시게 된다는 의미에서 우선적 배려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롬 1:16 참조).

성 경: [사59:21]

주제1: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불의]

본절은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20절)를 포함한 구속함 받은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중 첫째는 성령을 그들에게 계속 임하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성령은 계시의 근원이자(욜 2:28), 권능과 은사의 원동력이다(미 3:8).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계속 머물러 하신다는 약속이다. 말씀은 계시의 결정체요, 신령한 은혜의 방편이요, 성도의 행할 바를 일러주는 삶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이 두 약속은 오순절 성령 강림과 신구약 66권의 완성을 통해 1차적으로 성취되었다.

성 경: [사60:1]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주); 일어나라 - 52:1에도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죄악에 따른 심판으로 말미암아 티끌과 폐허 위에 앉아 있던(3:26;52:2) 시온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이 전해진다. 1차적으로 이는 포로 귀환을 겨냥한 것이지만, '치료하는 광선을'발하실 메시야를 통하 교회의 탄생과 확장으 예언하는 내용이기도 하다(말 4:2;엡 5:14).

(주); 네 빛이 이르렀고 - 이제 시온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된다. 죄악으로 인해 황폐해졌던 시온 자체에는 빛이 있을 턱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자체로부터 나오는 치유의 빛, 구원의 빛을 받음로 말미암아 새로이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빛'또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어 온,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빛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성 경: [사60:2]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본절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직전에 애굽에서 일어났던 흑암의 재앙 사건을 연상시킨다(출 10:21-23). 이사야는 '어두움'과 '환난'(45:7), '불의'(45:19)를 상징하는 말로도 사용하였다. 본절은 죄악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온 땅이 캄캄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시온에 비춰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한편, 본절은 빛되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실 때에 이스라엘 외의 세상 나라와 이스라엘 자체를 대비시키고 있다고도 이해된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실 때 세상 다른 곳은 여전히 어두운 상태에 있을 것이다. 물론 빛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도 그 빛을 깨닫지 못했다(요 1:9,10). 그러므로 본문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땅에 먼저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후 온 땅은 이스라엘을 통해 그 빛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9:2).

성 경: [사60:3]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본절은 이스라엘에 임한 빛이 먼 나라 이방에게로 확장되며, 따라서 그들이 이 복음의 축복에 참여케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본장이 보여주려 하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2:3;11:10;49:22;54:3).

성 경: [사60:4]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 여기 '무리'란 세계 각처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몇 선택받은 이방인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제 그들은 뒤엉켜 한 무리를 짓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물을 바치기 위해 몰려올 것이다.

(주); 안기워 올 것이라 - 원문 직역은 '네 곁에 붙들어 매어질 것이라'이다. 이것은 근동의 풍습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근동 사회에서는 부모가 어린 자식을 데리고 다닐 때 허리를 걸치듯 업곤 했다. 이같이 익숙한 풍습과 연관된 표현을 함으로써, 저자는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내용에 애착을 느끼고 또한 반드시 성취될 것을 기대케 하고 있다.

성 경: [사60:5]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주); 희색을 발하며 - 원문 직역은 '(함께)흐르며'이다. 이 동사는 '강'을 뜻하는 '네하르'(*)에서 왔는데 여기서 이 동사가 사용된 것은 강물이 넘실대며 넘쳐 흐르는 이미지를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문맥에서 볼 때 그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려는 바는 '넘치는 기쁨'이겠다.

(주); 네 마음이 놀라고 -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방인 회심자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어쩔줄 몰라하며 크게 감동받은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주);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 여기 '바다의 풍부'는 '하몬 얌'(*)인데, '하몬'(*)은 '군중'(13:4;단 10:6), '많은 군대'(삿 4:7;단 11:11-13), '많은 물'(렘 10:13;51:16), '큰 재물'(시 37:16;전 5:9) 등을 뜻하며 '얌'(*)은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을 뜻하는데 바로 이어지는 구절 '열방의 재물'이 본문의 동의적 병행구임을 고려할 때 '하몬 얌'(*)은 '이방인들의 재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포로 귀환시 이방의 재물이 지원될 것을 시사함과 동시에(스 1:6)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되면 이방인의 소유물들이 시온, 곧 교회에게 바쳐짐을 예언한 것이기도하다. 말하자면 땅의 재물이 기록한 용도에 사용되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성 경: [사60:6]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주); 에바 - 미디안의 장남으로(창 25:4) 아라비아 페트레아(Petrea)에 살았는데 그 이름을 따서 그가 살던 지역을 에바라 불렸다. 사해 동부 해안이었던 그곳은 미디안 땅의 일부이기도 했는데 이곳은 약대가 풍부했다.

(주); 젊은 약대 - 아라비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대의 일종으로 그 특징은 그 등에 낱 혹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Webster). 먼저 언급된 '약대'는 등에 혹이 둘인 약대를 가리킨다.

(주); 스바 - 성경에서 이곳은 솔로몬에게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던 이방 영왕의 나라로 알려진 곳(황상 10:1;대하 9:1), 금과 향이 풍부한 곳으로 언급되어 있다(렘 6:20;겔 27:22). 오늘날의 에디오피아 아비시니아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성 경: [사60:7]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주); 게달 - 주로 아라비아 사막 남부 혹은 아리비아 페트레아 북부에 살았지만 그들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으며 이러한 유목민에게 양이 풍성했으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있다(21:16,17;42:11).

(주); 느바욧 - 이스마엘 아들 중의 한(창 25:13;대상 1:29)로, 그 후손이 아리비아 페트레아에 거주했으며 주로 약탈, 구역 그리고 가축 사육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귀한 소유인 가축도 하나님께 바쳐질 것이다.

성 경: [사60:8]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주); 저 구름같이 - 이방인의 회심을 묘사함에 있어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본 이미지는 히브리서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 수의 많음에 갖오점이 있다 :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 12:1). 그러나 동격으로 사용되고있는 '비둘기의 비행'은 수의 많음보다는 속도의 빠름에 그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Fausset). 이제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 되면 많은 이방인들이 빠른 속도로 예루살렘, 곧 주의 교회로 들어올 것이다.

성 경: [사60:9]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빛과 풍요함]

(주);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 다시스의 배들, 곧 무역선은 가장 먼 지역에까지 무역을 하는 배로 유명했는데 그 배들이 먼저 이른다는 말은, 먼 곳에 있던 자들(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을 포함하여)조차 조속히 몰려들게 될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66:20).

(주); 이름에 드리려 하며 - '이름'이란 어떤 존재의 중요한 속성 혹은 그자체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창 25:19-26 주제 강해, '이름 짓기' 참조). 여기서는 이방까지도 구원 대열에 포함시키신 구원의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성 경: [사60:10]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 이는 포로 귀환시 회심한 이방인들도 예루살렘 성벽 재건 사역에 조력하게 될 것을 뜻함과 아울러 더 나아가서는 이방인들이 영적 예루살렘, 곧 교회를 섬기는 일에 협력할 것을,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특권에 동참할 것을 뜻한다.

성 경: [사60:11]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성문이 항상 열려 - 새로운 예물들과 개심자들을 영접하기 위하여 교회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26:2;행 14:27;계3:8). 평화의 왕 메시야의 완전한 통치가 실현되면 대적들의 위협조차 전혀 없으므로 시온의 그 문에는 침입자를 막기 위한 문빗장도 없을 것이다 :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5, 26).

(주);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 원문 직역은 '그 왕들이 이끌려 올 것이라'이다. 여기 동사 '네후김'(*)은 수동태로서 어떤 영향력 따위의 당기는 힘에 의하여 연약한 물체가 끌려가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 아마도 이것은 세상의 권세잡은 세력들도 결국에는 메시야의 강한 통치력에 굴복하고 말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 경: [사60:12]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었으나 본절 원문 서두에는 원인 접속사 '키'(*)가 놓여 있다. 바로 앞절에 서술된 세상 나라의 왕들과 그 백성들이 교회에 굴복하게 되는 까닭은, 그렇지 않은 경우 저주받아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슥 14:17).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할 때 명심해야 할 점들 중의 하나는, 믿지 않으면 저주받아 멸망하고 말 것을 외쳐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불행히도 이 땅에서 복 받고 잘산다는 것이 복음 증거의 주요 골자인 양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자랑한다고 선포한 후에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상황을 서술함으로써 복음 선포는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무서운 저주와 파멸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에 주요 목적이 있음을 강조한 바있다(롬 1:16,18).

성 경: [사60:13]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레바논의 영광 ... 아름답게 할 것이며 - 여기 열거된 나무들은 레바논 땅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대표적인 수목들이다(Fausset). 그 나무들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알려진 거룩한 곳, 곧 성전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은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 나무들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재목으로 쓰인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Whybray). 그러나 메시야의 통치 이후 이방의 귀중한 물건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바쳐져서 성별되게 쓰일 것을 말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성 경: [사60:14]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 철저한 복중의 자세를 취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그 완전한 성취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메시야의 통치 이후 많은 이방의 선택받은 자들이 교회로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거부하는, 곧 메시야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들은 교회의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며 주의 재림 때에 이르러서야 그 대적들이 사라질 것이다. 한편 '시온'이 '여호와의 성읍'이라 불리운 것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는 성읍'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중요한 개념을 유추해볼 수 있다.

성 경: [사60:15]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네게로 지나는 자가 없었으나 -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하여 황폐화됨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틴 땅은 사막의 대상 심지어 나그네도 그리로 지나가지 않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성 경: [사60:16]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열방의 젖을 빨며 - 앞에서 거듭 언급된 바 이방 세계의 물적 후원과 조력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J.Wstts).

(주); 네 구원자 ... 알리라 -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회심한 이방인 위에 임할 은총은 메시야를 통한 구속 사역에 근거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

성 경: [사60:17]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내가 금을 ... 돌을 대신하며 - 여기서 이사야가 비유로 들고 있는 물질적 풍요는 솔로몬 시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왕상 10:21-27). 본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다음 두 가지가 무난하겠다. (1) 새로이 회복될 시온의 영적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물질적 번영과 아름다움에 비유한 것이다. (2) 다가올 메시야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구원의 복음이 들어간 지역은 대체로 정치, 경제, 문화, 그 외 모든 분야에 있어서 발전하고 복된 곳이 되었다.

성 경: [사60:18]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성벽 -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사용되었으며(삼상 25:16),

(주); 성문(*, 솨아르) - 영광의 왕이 들어가는 문(시 24:7), 혹은 양의 문(요 10:7)이라는 이미지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영광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양이 된 성도들뿐이다.

성 경: [사60:19,20]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가장 밝은 발광체인 낮은 태양과 밤의 달이 그 백성에게 비췰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월등함 때문에 오히려 가리워질 것을 묘사하고 있다(30:26;계 21:23;22:5).

성 경: [사60:22]

주제1: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그 작은 자가 천(千)을 이루겠고 - 본문은 다분히 종말론적 색채를 띠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예수의 겨자씨 비유및 누룩 비유와 연관시켜 보아도 무방하겠다(마 13:31-33). 겨자씨와 누룩은 처음에는 보잘것없이 작게 보이나 나중에는 엄청나게 큰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메시야의 초림 때에는 그가 핍박을 받음으로 교회라는 존재 자체의 존립성조차 위태한 듯이 보였으나,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강력한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급속히 확장되어 간다는 것이다.

성 경: [사61:1]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메사야의 사역]

(주);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 이는 바벨론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이사야가 공식적으로 위임받는 대목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Gesenius, Rosemnuller).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께서 본절을 자신에 관한 예언으로 명시하셨다는 사실이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눅 4:18-21).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순간에도 그 사역의 공적 인정을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바 있다(마 3:16;요 1:32).

(주); 기름을 부으사(*, 마솨흐) - 이 용어에서 '메시야'란 단어가 유래된다. 이스라엘의 왕(삼상 16:13), 제사장(출 30:30), 선지자(왕상 19:16) 등은 그들의 중요 직책을 위해 구별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 16:1-5 주제 강해, '기름 부음의 영적 의미'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구별해 세우신 것을 암시하기 위해 본 표현이 사용되었다. 메시야를 언급하려고 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시 45:7;히 1:9 등에도 나온다.

(주); 가난한 자(*, 아나윔) - 원래 이 용어는 상처나 억압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를 뜻하며, 여기서는 1차적으로 낙담 중에 있었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이 용어는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이 보낼 메시야를 고대하며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정확하겠다(마 5:3). 이 말은 시편에서 개인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고대하였던 신실해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종종 사용되었다(시 9:12,18).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신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한 마음이 교만한 자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고 풍자하셨고 반대로 그를 알아본 자들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자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다(눅 10:21).

(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을, 더나아가서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또한 본 표현은 희년의 때에 모든 종된 자에게 선포되는 자유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레 25:10;렘 34:8,9).

(주); 갇힌 자에게 놓임 - 원문상으로는 '갇힌 자의 감옥문을 여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여는 것'이란 메시야의 도래와 연관지어 볼 때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의 해방(롬 6:18;7:24,25;히 2:5) 혹은 영적으로 장님되었던 자가 영의 눈을 뜨는 것을 가리킨다(Ewald). 눅 4:18은 본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본절에는 없는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이란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후자의 뜻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성 경: [사61:2]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메사야의 사역]

(주); 여호와의 은혜의 해(*, 쉐나트 라초 라훼)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해'이다. 이것은 나팔이 올리고 온 이스라엘 땅에 자유가 선포되었던 희년의 때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레 25:9,10). 희년의 때와 마찬가지로 메시야의 때도 '해방'이란 이미지를 내포한다. 메시야의 도래의 때는 온 세계 인류를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때인 것이다. 메시야의 도래로 시작된 해방의 때는 은혜의 때라고 불리기도 한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주); 하나님의 신원의 날 -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이다. 1차적으로 이날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의 날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이날을 '복수의 날'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바로 앞에 언급된 바 '여호와의 은혜의 해'의 대비적 표현으로 본 표현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에게 '은혜의 해'가 되는 때가 그 대적에게는 '복수', 곧 '심판'의 때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이 대적들을 멸하시는 보응은 곧 성도들에게는 영광을 얻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요 12:47;고전 15:52;고후 4:17;계 21,22장).

성 경: [사61:3]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메사야의 사역]

(주);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 원문 직역은 '아름다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이다.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페에르'(*)는 본래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고 화려한 관을 말하며, '희락의 옷', '찬송의 옷'과 함께 즐거운 축제 때를 연상시킨다(G.W. Grogan). 이제 여호와의 구원과 은혜의 때가 이르면 슬픔의 표로 뒤집어 썼던 재를(에 4:1,3;렘 6:26) 털어내고 대신 아름다운 관을 쓰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주); 희락의 기름 - 당시는 기쁨의 축제 때 특히 초청한 귀빈의 머리 위에 향내나는 값비싼 기름을 붓곤 하였다(시 23:5;45:7;암 6:6). 그외 성경은 축제 혹은 기쁨 그 자체를 뜻할 때 '기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57:9). 공적인 재난 혹은 슬픔의 때에는 결코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삼하 14:2).

(주); 찬송의 옷 - 절망에 빠진 자를 삼베옷을 입은 것에 비유하는 대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있는 자는 밝은 채색옷을 입은 것에 비유한다.

(주); 의의 나무(*, 엘레 하체데크) - '나무'에 해당하는 '엘레'(*)는 팔레스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뜻한다. 이 나무는 굵고 튼튼하여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다(이런 맥락에서 탈굼역, 제롬역, 시리아역 등은 이을 '강한 것' 혹은 '힘센 것'으로 번역했음). 본문의 '의의 나무'는 한때 죄악으로 인해 넘어졌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어 굳건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주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은 정원사가 나무를 심듯이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구원하여 세우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영광을 열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세움을 받는 사실은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에도암시도이가 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성 경: [사61:4]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택한 백성이 받을 축복]

(주); 대대로 무녀져 있던 것들 -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유다 본국 팔레스틴 땅과 성읍이 황폐해졌던 사실을 가리키며(렘 20:6;28:6), 나아가서는 본장 전체의 문맥상 메시야의 도래가 있기 전 혹은 메시야를 영접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

성 경: [사61:5,6]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택한 백성이 받을 축복]

이는 새로이 회복될 이스라엘이 이방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서(추 19:6) 우뚝서게 되며 이방인들로부터 물적 조력을 받을 것을(60:10)가리킨다고 해석되기도 하나,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더 나을 것 같다. 즉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된 이방인들 가운데서, 마치 아론의 후손이 이스라엘 중에서 감당했던 것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Delitzsch). 그러나 이방인들 중에서도 제사장과 레위인을 택하리라고 하신 말씀(66:21)이나 특히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질 복음 시대(엡 2:14)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이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사도 바울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겠다 :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은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성 경: [사61:7]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택한 백성이 받을 축복]

(주);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 바벨론에서 당한 고통에 비교해볼 때 메시야 왕국의 도래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은 더욱더 엄청나게 크고 값진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과 메시야 사역으로 인한 축복을 단순히 비교한다는 의미보다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누릴 축복이 그 무엇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1차적으로는 포로지의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를 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주);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 여기 '능욕'에 해당하는 '켈리마'(*)의 문자적인 뜻은 '혼돈', '혼란'이지만 바로 앞 구절과 동의적 평행을 이룸을 고려할 때 '수치', '슬픔' 등으로 번역함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분깃'도 메시야의 구속 사역으로 얻게 될 구원의 축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원문에 보면 앞 구절과는 달리 본절의 주어는 2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어 있는데, 이것은 본서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화법의 일종이므로 큰 의미없이 동일한 주체를 의도하고 있는 화법으로 보면 되겠다.

성 경: [사61:8]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택한 백성이 받을 축복]

(주);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 '대저'는 '키'(*)로서 앞절에 진술된 바벨론 포로 생활로 고통받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사실의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이다. 하나님이 그같이 하실 이유는 그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의 손을 빌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 것도 공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바벨론의 교만과 불의의 강탈에 대한 분노로 나타난다.

(주);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며(*, 세네 가젤 베올라) - 본문에 대한 번역은 구구하지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견해가 이처럼 둘로 나뉘는 것은 '베올라'(*)의 '베'(*)를 그대로 두고 번역하느냐 아니면 '베'를 빼고 대신 접속사 '와우'(*)를 삽입하여 번역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먼저 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강탈(혹은 약탈)과 범죄를 미워한다'가 된다(시리아역, Lowht, Noyes). 그러나 이 번역은 받아들일 수없다. 왜냐하면 본 번역의 경우 필요 이상의 원문 수정을 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자의 경우를 따르면 '나는 번죄에 수반되는 강탈(혹은 약탈)을 미워한다'가 된다. 이는 바벨론이 유다 백성을 압제하고 강탈하는 등 필요 이상으로, 월권 행사를 도모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그 영적 우매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이방이라는 수단을 통해 받았다. 그러나 수단으로 사용된 이방 세력은 본연의 임무인 징벌의 집행 외에 과도한 불의를 저질렀다. 바로 이 사실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의해 체크되었던 것이다.

성 경: [사61:9]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택한 백성이 받을 축복]

(주); 알리리니 - '구별되게 하리니' 혹은 '명예롭게 하리니'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시 67:2;76:1;79:10등의 용례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주);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참자녀들이 세상나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방은 자들임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때는 구원 역사의 종말, 곧 재림의 때이다. 그러나 그때가 이르기 전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인정을 받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진다(마 5:16).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마 5:13-15).

성 경: [사61:10]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선민(選民)의 즐거움]

(주); 의의 겉옷 - '겉옷'은 입은 옷 위에 걸쳐 몸 전체를 가리다시피하는 느순한 망토 따위를 가리킨다(시 132:9;계19:8). 이 망토는 추위 또는 외부로부터의 침해 따위로부터 몸을 보하하는 구실을 한다. 여기서 이 망토가 의미하는 바는 '의'이다. 이 '의'는 이스라엘의 자격, 능력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덧입히신 그 무엇으로 메시야의 구원 사역의 결과로 야기된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스스로 영적 파멸로부터 구원하거나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 메시야를 보내시고 그로 구속 사역을 이루게 하시어서 그 사역을 근거로 그들을 보호하는 영적인 옷을 입히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였다. 따라서 영적 이스라엘, 교회는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사61:11]

주제1: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

주제2: [선민(選民)의 즐거움]

(주); 땅이 싹을 내며 - 본서 저자가 여러 차례 사용한 이미지(45:8;55:10,11)로, 의미하는 바는 적시에 내린 단비로 촉촉해진 땅에서 새싹이 움트듯이, 메시야가 오시면 진리와 의가 돋아 자라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그의 택한 백성을 그곳으로 모으시는 목적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찬양을 받기 위함이다. 본절에서의 찬양은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구별적, 거룩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성 경: [사62:1]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나는...잠잠하지 아니하며 - 본절의 화자(話者)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먼저는 저자인 이사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까지 이사야는 그의 수고와 중보 기도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것이 된다(Calvin, Gesenius). 한편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은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까지는 그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각오를 실은 구절이 된다(Delitzsch, Grotius). 이외에도 유대인, 신약교회 성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유력한 견해는 아니다. 이중에서 본장의 전반적 흐름을 고려할 때, 본 화자는 1차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더 나아가서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영적 회복을 맛볼 때까지 그 백성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보 사역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가 특히 하나님을 향해 중보 기도를 드린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침묵 및 그의 백성의 불평이 전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오랜 포로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시행되지 않자 백성들은 불평을 하고 그 불평을 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대목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64:12; 시 28: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57:11; 65:6등에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응답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주);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 앞의 '공의가 빛같이'의 동의적 평행구이다. '횃불', '빛' 따위는 그 특징이 그 주위를 향해 빛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제 이스라엘에게 비롯된 구원이 마치 아침 태양이 가까운 언덕, 들, 그리고 더 높은 산을 향해 그 빛을 펼쳐 나가듯이 온 세상을 향해 그 영향력을 펼쳐 나갈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나타날 구원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열방에도 미칠 것을 암시하는 셈이다.

성 경: [사62:2]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 - '새 이름'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 후 그곳에서 살게 될 자들을 언급할 때 바로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계 2:17; 3:12).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이 회복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수치와 가난, 압제로 대변되는 삶의 상황 속에 처해 있다. 그러나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번영과 영광으로 삶의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인데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새 이름을 얻을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사62:3]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 원문직역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는 영광의 면류관'이다. 본문은 해석하기 힘든 구절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면류관이란 머리에 쓰는 것이 상식인데 여기서는 그 면류관이 손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면류관'을 축제 혹은 결혼식 따위 때에 손에 들고 행진하던 화환, 꽃다발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절은 면류관 자체보다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내용으로 보고 해석되어야 할 것같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을 가리킨다(신 33:3). 그리고 후 문맥은 하나님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구절로 봄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영광의 '면류관' 혹은 ' 왕관'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될 수는 없다. 특히 '왕관'은 '체니프'(*)로서 '둥글다', '굴곡을 이루다'는 뜻을 내표하는 말이며 가장자리에 보석 따위가 박힌 둥근 면류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왕관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는 영광의 상징이다. 이 사실을 중시할 대 본절은 이스라엘이 이방 세계 앞에 두드러질 것을 암시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앞 문맥은 사실 이것을 지지한다.

성 경: [사62:4]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헵시바(* - , 헤프치 바) - 문자적인 뜻은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이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이 그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자신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한편 히스기야 왕의 아내가 '헵시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에(왕하 21:1) 착안하여, 히스기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32:1 참조).

(주); ꭉ라(*, 베울라) - 문자적인 뜻은 '결혼한 자', '결혼한 부인'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결혼했다가 이혼 당한, 말하자면 버림을 받은 여인에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한번 버림을 받았으나 다시 용서함 받은 이스라엘의 신분을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근동에서는 한 왕이 다른 왕으로부터 왕권, 곧 통치권을 받았으면 그는 그 왕국과 혼인 관계에 들어갔다고 흔히 말한다(Robert). 또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의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곤 한다(요 3:29; 계 21;2,9). 저자는 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로 이 결혼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사62:5]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 한번 버림을 받은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이미지가 소개되는 문맥에서 본 비유는 좀 낯설다. 일반적으로 청년이 과부나 한번 결혼했던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쉽지 않다. 물론 왕실이 또 다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 정략적인 목적 때문에 그 같은 경우가 흔히 생기기는 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한번 버림을 받았던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사실을 청년과 처녀의 재결합 이미지로 묘사하는 저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다는 뜻을 보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 같다.

(주);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본문의 해석은 상당히 난해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1)'아들들'을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나타내는 복수형 칭호로 해석하는 견해. (2)' 네 아들들'에 해당하는 '바나이크'(*)를 '건축자'란 뜻의 '보네크'(*)로 읽어, 예루살렘의 건축자이신 하나님을(시 147:2)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Whybray). (3) '취하겠고'의 히브리어 '바알'(*)이 '결혼하다'는 뜻 외에 '다스리다', '관할하다'(26:13)는 뜻도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본문을 '네 자녀들이 네게 거하겠고'로 해석하는 견해(사해 사본, 벌게이트역, 70인역, 탈굼역), 세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성 경: [사62:6]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파숫군을 세우고 - '파숫군'이란 대적의 침입을 살피거나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을 확인하기 위하여 성벽 망대를 지키던 자이다(52:7,8).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던 자들을 가리킨다(겔 3:17;33:7).

(주); 잠잠치 않게 하였느리라 - 이것은 시간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동방의 파수꾼들이 망대를 순회할 때마다 큰소리를 지르던 관습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백성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하마즈키림 에트 야훼)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를 기억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여기서 '하마즈키림'(*)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 혹은 예배 의식 따위에 적용되는 용어로서(시 45:17; 102:12) '기억하다'로 번역되는 '자카르'(*)에서 온 단어이다. 따라서 본 용어는 여호와를 기억나게 하기 위하여 예배에 봉사하는 자 혹은 여호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백성에게 그의 이름, 곧 그의 전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존재 그 자체를 찬양 및 선포하는 자로 해석될 수 있겠다. 여기서는 후자로 해석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1절에서 암시되었거니와 본절의 종교 지도자들의 임무란 다름 아닌 메시야를 통한 구원 사역을 계획하고 수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사62:7]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 이것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와 이전의 특권을 회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완전한 성취는 주의 재림 때에야 되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본 예언은 영적 예루살렘인 신약 교회에도 적용된다. 신약 시대 성도들 중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교회가 우주적인 존경과 기쁨의 대상이 될 재림의 날을 준비하며, 이스라엘의 국교지도자들이 그랬듯이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눅 18:1,7 참조).

성 경: [사62:8]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여호와께서...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 고대에는 맹세의 방법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하늘을 행해 손을 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신 32:40). 하나님은 그 맹세를 드릴 상대가 없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맹세의 경우 그 자신에게 드려졌다(45:23).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을 들고 맹세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의 오른손은 그의 백성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권능을 나타낸다. 이제 그의 강력한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하나님은 결코 그 백성을 이방에게 다시 넘겨주지 않으실 것이다.

(주); 네 곡식을...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 여기 곡식은 문자적으로 '옥수수', '곡물'을 뜻한다. 오늘날 옥수수는 동물의 먹이로 많이 사용되지만, 당시 팔레스틴에서의 옥수수란 중요한 식물(植物)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단지 옥수수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취하던 모든 양식이 앞으로는 결코 이방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약속하고 계신 셈이다. 그러나 이 약속 후에도 이방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의 양식을 탈취한 바 있다. 그렇다면 본 약속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 약속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주의 재림 이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때 그 백성은 결코 사단의 위험이나 공격으로 인해 탈취당하지 않을 것이다.

성 경: [사62:9]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수고한 것을 즐기게 된다는 말씀인데, 이 같은 결과는 안전의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신의 수고한 것을 먹는다는 것만큼 안정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강력히 암시하는 표현도 드물다(Barnes).

(주);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규례를 따라 성전에서 먹고 마시곤 하였는데(레 6:16; 신 12:17,18; 14:23). 그때 그들이 보여 준 가장 큰 특징은 기쁨이었다. 그들로 기쁨을 느끼게 한 것은 그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자각이었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축복의 결과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기쁨으로 낙을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사62:10]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본절은 본서 저자인 이사야(1절)와 파수꾼들로 호칭된 종교 지도자들(7절)의 중뵈도, 그리고 계속 이어진 하나님의 엄숙한 약속(8,9절)이라는 문맥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선지자 이사야와 종교 지도자들이 중보기도한 내용은 1차적으로 다름 아닌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이었다. 이제 그 귀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될 것인데 그 성취를 묘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본절이다.

(주); 기를 들라 - 이것은 한 군대가 행진을 재개할 때를 연상케 한다. 행진 중 어느 곳에 쉬다가 충분한 휴식 후 행진을 재개할 경우 깃발은 높이 쳐들어서 행렬을 재정비하라는 신호를 내곤 한다. 그와 유사하게 오랜 포로 생활로 이곳 저곳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은 정한 지도자를 앞세우고 전열을 정비하듯 한데 모여 본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성 경: [사62:11]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 여기 '구원'은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뜻한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그리고 보다 먼 조망에서 볼 때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력한 역본들은 본 '구원'을 '구세주'로 번역하고 있다(70인역, 벌게이트역).

(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 여기 '그'란 바로 메시야를 가리키며 '상급이 그에게 있고'란 구원이 그 손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메시야께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사62:12]

주제1: [이스라엘의 영광과 사역자의 의무]

주제2: [시온의 회복과 영광]

4절에 이어 다시 한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 반복 강조되고 있다. 그 같은 결과는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 '여호와의 구속 하신 자'란 '대속적 피에 의해 그 죄를 씻음 받고 죽음에서 해방된 자'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이름만큼 아름다운 이름은 없다.

성 경: [사63:1]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주); 에돔...보스라 - 전자는 근접해 있는 까닭에 유다와 끊임없는 적대감을 가졌던 국가이며 후자는 위치상으로는 모압에 가까우나 이두매, 곧 에돔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이 두 곳은 본서 저자가 세상의 모든 유다의 대적을 의미할 때 언급한 곳이다(34:6).

(주); 홍의를 입고...오는 자 - 여기 '홍의를 입고'는 '하무츠 베가딤'(*)이다. 그런데 '하무츠'(*)는 '(맛이) 신', '(색깔이) 얼룩덜룩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하마츠'(*)에서 유래한 용어로서 자줏빛, 주홍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원래 자줏빛으로 염색한 혹은 피가 그 옷자락에 튀어 피색으로 물든 용사의 망토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절이 묘사하고 있는 어떤 인물은 이 사실과 뒷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에 승리를 쟁취하고 귀환하는 큰 용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용사의 정체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중의 대표적인 두 견해는 메시야 혹은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이다. 62장과의 문맥적 연결 면에서 그리고 본절이 그려내는 용사의 모습이 대적들을 정복한 승리자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많다(Calvin, Delitzsch, Gesenius).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 입각해볼 때, 오히려 전자의 견해가 더 나을 것 같다. (1)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상황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상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마지막 보응의 날과도 관계된다. 이런 점에서 에돔 등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은 물론이고 나아가 메시야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사단의 모든 세력까지 상징한다. (2) 피묻은 옷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을 암시한다(계 19:11-14).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을 파하신 승리의 십자가였다(골 2:15).

(주); 화려한 의복 - 문자적인 뜻은 '그 의복에 있어 영광스러운'이다. 이것은 고위직에 있는 고대 용사들의 영예롭고 눈부신 군복을 가리킨다.

(주); 큰 능력으로 걷는 자 -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표현은 그의 대적을 완전히 섬멸한 사실을 드러내듯 승리의 정복자로서 당당한 보무로 입성하는 용사에서 따온 이미지이다.

(주);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 지금까지는 제삼자가 화자(話者)였다면 본 구절부터는 메시야 자신이 화자가 되고 있으며, 본 화자는 앞선 화자의 의문에 대답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 '의'는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성 경: [사63:2]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심판]

본절은 메시야가 그 대적을 진멸하신 사실을 포도즙 짜는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당시 포도즙을 짤 때에는 먼저 큰 통에 포도를 넣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밟았다. 한 시간 정도 밟으면 질이 좋지 않은 포도는 맨 위로 떠올랐으며 그후 계속해서 30분 정도를 더 밟으면 향기 좋은 포도즙이 각 송이에서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더 밟으면 신 포도까지 터져 전체 포도즙의 맛은 좋지 않게 된다고 한다(Burder). 본절은 이같이 포도즙을 짤 때 그 즙이 튀어 옷에 뭍은 어떤 사람을 연상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해 언급하곤 한다(신 32:14). 어떤 학자는 여기서 저자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하고 있는 까닭은 1절에 언급된 '보스라'라는 지역이 포도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Calvin). 이 경우 '보스라'가 포도 산지인 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은 더 실감나게 본절의 의미를 파악했을 것이다.

성 경: [사63:3]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주);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 본절은 2절에 묘사된 바 포도즙 틀을 밟다가 그 즙이 옷에 묻은 것과 같은 데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사63:4]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주); 원수 갚는 날 - 여기 '원수 갚는다'는 표현은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돔 혹은 이두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성경은 에돔 자손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까지 파괴할 정도로 악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진술하고 있다(시 137:7). 이 같은 대적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방(사단의 세력)이 징벌받는 이 날은 역으로 이스라엘(모든 성도)의 구원의 날이다(34:8;61:2 참조).

성 경: [사63:5]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주); 도와 주는 자도 없고...없으므로 - 아무도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조력하지 않으며 조력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메시야께서 감당하시는 인류 구원의 대업(大業)은 메시야 자신의 대속 사역으로써 충분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주);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 이 표현은 59:16의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를 연상시킨다.

성 경: [사63:6]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주); 그들을 취케 하고 - 혹자는 본절을 3절 하반절의 반복적 유사 평행구로 보고 본문의 히브리어 '아솨크램'(*)을 '쳐부수다'는 의미의 '아솨브램'(*)으로 수정하고자 한다(탈굼역, Whybray). 그러나 굳이 원문 수정을 하지 않더라도, 본문은 메시야의 진노의 공포 아래 있는 자가 만취한 자처럼 자제력을 잃고 땅 위에 엎드러져 있는 상황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시 75:8 참조).

성 경: [사63:7]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 내가 - 본절에서부터 화자가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1-6절) 화자가 주로 메시야이셨다면 이제부터는 대적의 진멸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이며(7-14절) 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선지자가 직접적 화자로 나서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적의 진멸이란 1-6절에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속에 수차례 반복된 이방으로부터의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가리킨다. 하나님 찬양으로 시작되는 본절로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15절부터 64:12까지의 큰 단락은 이스라엘의 억압과 파멸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탄원하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성 경: [사63:8]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 이것은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킨다.

(주);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 -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기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에 신실할 것을 기대하셨다. 아울러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반역과 거짓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총을 따라 택하신 백성을 회개시켜 새로이 회복시키시리라는 암시도 담겨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구절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 경: [사63:9]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베콜 차라탐 로 차르) - 짧지만 번역하기 난해한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이 아니다'의 뜻을 지닌 '로'(*) 때문이다. '로'를 생략해버릴 경우,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부합하는 번역이 가능하다:'그들의 모든 고통의 때에 하나님도 고통하였다'(In all their affiction he was afflicted, KJV, LB, RSV). 그러나 원문의 단어 자체를 생략하는 이 같은 번역은 수용하기 어렵다. 반면 '로'를 그대로 두고 문자적 번역을 하면 '모든 그들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은 고통하지 않으셨다'라는 다소 애매한 내용이 되어버린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뒷문맥을 고려하고 본 구절 자체에 어떤 용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다. 그 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모든 그들의 빈궁의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그의 선하심에 있어) 빈궁하지 않으셨다'(Houbigant). 여기 '빈궁'은 '고통'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번역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주); 자기 앞의 사자 - 이 사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였던 적이 있다(출 32:34;33:2;민 20:16). 따라서 천사로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구체적으로 가브리엘(눅 1:19), 미가엘(단 10:13-21)로 보는 견해가 있다(Clark, Jarchi). 그런데 이 용어는 오실 메시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실제로 메시야로 보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 부분에서 이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출 14:19;23:20, 21). 따라서 본 용어는 1차적으로는 천사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예표하는 용어로 정리하면 되겠다.

(주); 드시며 - 그의 양떼를 모든 목자 혹은 그의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혹은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독수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출 19:4;신 32:11, 12).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의 연단 중에서 보존하시고 결국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이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사63:10]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 성신(*, 루아흐 카데쇼) - 어떤 학자는 이것을 '선지자들의 말씀'(갈대아역 등) 혹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한다(Grotius, Gesenius, Rosenmuller).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갱신시키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삼위(三位) 중 성령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물론 당시 히브리인들이 이 용어를 하나님에게 적용시켰다는 사실과, 오늘날의 성도들과 달리 삼위의 독립된 존재 양식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용어가 '성령'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동일하게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듯이 성령 하나님도 영원 전부터 계셨다.

성 경: [사63:11]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 백성이 옛적 모세의 말을 추억하여 가로되 - 원문 직역은 '그가 모세와 그의 백성들, 옛날을 기억하셨다'이다. '기억하셨다'는 '이즈코르'(*)로서 3인칭 단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인칭 복수로 바꾸어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는데(NIV),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 시도의 이유는 이어지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원(의문)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백성의 탄원(의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탄원(의문)을 그대로 묘사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의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이즈코르'의 인칭 문제는 해결된다. '이즈코르' 곧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징벌을 받아 마땅한, 심지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으셔도 될 만한 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계속 그 약속에 신실하셨던 것이다. 이 신실함은 모세와 그의 백성의 시대 곧 광야 시대 때 나타났었다. 이제 그 후대 이스라엘은 바로 그 신실하심의 결과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고통의 현실에 대하여 동일한 신실함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본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의문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현실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결과를 알려주고 계신다.

(주); 바다 -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나왔던 애굽을 가리킨다. 홍해 사건은 12절에 나온다.

(주); 성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궁극적 목적은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승한 거룩한 민족이 되게하기 위함이었다(출 19:4-6). 그런데 그 목적에 도달하게끔 역사하는 힘은 그들 가운데 보내신 성신으로 말미암았다.

성 경: [사63:12]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만이 참신이신 것을 이스라엘과 온 세계에 알리는 데 있었다. 애굽은 당시 세계에서 모든 과학, 문명의 중심 국가라 할 만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되어진 혹은 발생되어진 사건, 결과 등을 쉽게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성 경: [사63:13]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 여기 '광야'는 그 여러 특성 중 그 여정에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성 경: [사63:14]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 높은 언덕 위로부터 비옥하고 물이 많은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의 떼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시 23:2). 이들 가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성령은 지친 광야의 방황 이후 이스라엘을 약속하셨던 땅에 들여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셨다. 본절은 과거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 중에 있는 그 후손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사63:15]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 주여 하늘에서...보옵소서 - 본절에서부터 현재의 재난과 역경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시작된다. 그들의 탄원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과 과거 그의 조상들을 동일한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 간곡한 자비(*, 하몬 메에이카) - '하몬'(*)은 빗소리와 같은 소리(왕상 18:41), 노랫소리(겔 26:13), 무리의 떠드는 소리(삼상 4:14;14:19)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풍요', '풍부' 정도의 의미로 보면 무난하겠다. 그리고 '메에이카'(*)는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복부' 혹은 상징적으로 '동정심'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본 구절의 뜻은 '풍부한 자비' 정도가 되겠다.

성 경: [사63:16]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 아브라함은...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대비적 표현이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야곱)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자들이다. 한편, 본문은 49:15을 생각나게 한다:"여인이 어찌 그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성 경: [사63:17]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 어찌하여...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 인간이 냉소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는 일을 멈추고 그들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신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데, 이 경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으로 판단하고 불평하게 된다. 본 구절은 바로 이스라엘의 그 같은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Keil & Delitzsch).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 구속자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사실을 고백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64:5).

성 경: [사63:18]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 주의 거룩한 백성 -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었다(62:12;신 7:6).

성 경: [사63:19]

주제1: [하나님의 진노와 이사야의 기도]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본절은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원문과 문맥에 충실하면 의미 규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핵심은 개역 성경의 '우리는 ...같으며' 부분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인데 원문은 이렇다: '하이누 메올람 로 마솰타 밤'(*).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당신은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읍니다'이다. 바로 앞절에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가나안을 점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언급 후 바로 이어지는 '영원 전부터, 곧 옛적부터 우리는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은 대적이 그들의 본토를 점령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능한 추론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니 그것을 근거로 그 대적을 본토로부터 몰아내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백은 자신들의 본국 귀환의 근거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다'의 '그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본국 귀환의 또 다른 근거로서, 그 대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같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소고를 정리할 때 본 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서인 사실과 그의 대적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민족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본토로의 귀환을 호소하는 탄원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사64:1]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

(주);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 하나님은 폭풍, 불 그리고 구름 가운데 땅 위에 내려오시는 분으로 묘사되어지곤 하는데 그 목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그 백성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대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이다(시 18:9;144:5). 토론의 여지없이 여기서는 후자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사64:2]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

(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 여기 사름을 당하고 끓음을 당하는 것은 '산들'(1절)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임하실 때 그 단단한 산은 불을 받고 그 강한 열기의 작용으로 인해 액체처럼 밑으로 흘러 내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것인데, 특히 화산을 연상케 한다. 저자가 화산 폭발을 보고 그 이미지를 본절에서 인용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리아, 팔레스틴 및 사해 주변에서 당시 화산 분출이 빈번했다는 역사적 고증을 고려할 때(Lyell)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아무튼 저자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학적 혹은 실제적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의 막강한 영향력을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사64:3]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

(주);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 - 이전에 결코 목도하지 못했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을 가리키는데, 그 일이란 출애굽 사건을 뜻한다.

(주);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 이것은 불과 연기 가운데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셨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출 19:18). '진동하였사오니'(*, 나졸루)보다는 '흘러 내렸으니'가 더 원문적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이 역사가 자신들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성 경: [사64:4]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

(주);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 여기 '앙망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인데, 바울은 이 같은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고 있다(고전 2:9).

(주);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 본 구절을 바울은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자'로 적고 있다(고전 2:9). 이 같은 사실 때문에 어떤 학자는 바울이 원문을 오해했거나 원문이 파손되어 이 부분만 외경의 유사 부분에서 인용했다고 주장하거나(Lowth), 혹은 이를 바로 앞의 '들은자도 없고'와 표현만 다른 반복 구절로 보기도 하나 근거없는 주장이다.

성 경: [사64:5]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백성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주);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 - '기쁨으로 기꺼이 의를 행하는 자'란 뜻이다(요 7:17;행 10:35).

(주);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 - 원래 '기억하는 자'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구원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그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 예배, 찬양을 드리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길'이란 율법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주); 선대하시거늘 -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언약 관계를 설정하셔서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에게 평화, 안정을 주시고 계속적으로 우애를 나누시는 것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뜻한다.

(주); 진노하셨사오며 - 이것은 탄원자의 깊은 사색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비가 있으시고 그 언약 백성을 축복하는 분임을 알면서도, 본절의 '우리'는 하나님이 큰 진노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히 그 앞에 나아가시 못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의 죄악과 타락상에 대해 통절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그 마음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이다(눅 18:13, 14).

(주);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바헴 올람) - 여기 '바헴'(*)은 '그들(혹은 그것들) 안에'로 번역될 수 있는데 그 선행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 구절로 만들어버린다. '그들(혹은 그것들)'에 대한 해석으로는, 먼저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가 있다('선대하시거늘').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문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적 자비'를 뜻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원한 언약적 자비 때문에 이스라엘이 구원얻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피력하는 대목이 되어버린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 선행사를 바로 앞구절에 있는 '범죄'로 보는 해석이다.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절 하반절은 그 오랜(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람'(*)은 '영원히'로 주로 번역되나 '옛날', '오랫동안'으로 번역되기도함)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조차도 할 수 없어 애타하는 심정을 묘사하는 대목이 된다. 이 경우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우리는 후자의 해석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중요한 전제인 '바헴'을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로 보는 근거가 타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절 이후 문맥을 고려할 때 후자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범죄한 사실을 들고 있다.

성 경: [사64:6]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백성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주); 부정한 자(*, 타메) - 레위기적 의미의 오염되거나 더러워진 그 무엇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모세의 율법에 따른 오염되거나 혐오스러운 동물(레 11:29, 30), 인간(레 15:2-12) 등에 특히 문둥병자에게 주로 적용되었는데(레 13:3) 이 같은 자는 성도의 회중에서 추방당하였다.

(주); 더러운 옷(*, 이딤) - 문자적인 뜻은 '더러운 걸레'이다. '사용한 생리대'를 뜻하기도 한다(레 15:33;20:18).

성 경: [사64:7]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백성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주); 스스로 분발하여(*, 미트오레르) - 이는 '깨어나다', '일어나다'는 뜻인 '우르'(*)의 히트파엘형(강의 재귀형)으로서 눌려 있던 영적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 전체는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영적 무기력 상태를 깨닫지도 못하였다.

(주); 얼굴을 숨기시며 -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신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 은혜를 중단하자 많은 결과가 발생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 빠졌던 영적 무기력이었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 베풀기를 중단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주);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테무게누) - 문자적인 뜻은 '녹게 하셨나이다'이다. 얼음 따위가 녹아 내리는 모습 따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이스라엘의 대적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초월적인 현상 앞에서 공포로 떨 때의 심적 상태를 묘사할 경우 사용되고 있는데(출 15:15), 여기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

성 경: [사64:8]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백성의 탄원]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자신들을 진흙에 비유하고 있다(45:9;렘 18:6). 토기장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흙을 주무른다. 진흙이 어떤 모양의 용기가 되는 것은 혹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에 달려 있다. 성경에서 본 토기장이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자손들의 운명, 존재 자체가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는 까닭은 구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오직 그들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구원을 호소하려는 것이다.

성 경: [사64:9]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백성의 탄원]

(주);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 여기 '주의 백성'이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읽게 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언약 때문에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징벌에서 놓이고 다시 언약 백성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로 나가는 출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의 호소이다.

성 경: [사64:10]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백성의 탄원]

(주);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 지금 서술된 장면은 그 성취 시점이 미래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시점은 서술된 내용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미 성취된 듯 완료 시제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내용이 미래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거룩한 성읍들'에 대해 어떤 학자는 동일한 예루살렘의 고지대와 저지대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본다(Vitringa). 그러나 성경 다른 부분에서 예루살렘을 고지대, 저지대로 나누고 있는 예가 없으므로 이 견해는 받기 어렵다. 아마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 본토가 쑥밭이 되어버린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복수형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성 경: [사64:11]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백성의 탄원]

(주);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전 - 여기 '찬송하던...전'이란 하나님께 예배하던 성전을 가리킨다. 지금 이스라엘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소는 전토나 가옥의 파괴 및 손실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예배 처소로 삼아왔던 성전의 파손이다. 진지한 회개의 일면이 엿보인다.

(주); 즐거워하던 곳 - 원문 직역은 '소망의 대상들'이다. 성전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살던 가옥들 그리고 온 도성을 가리킨다.

성 경: [사64:12]

주제1: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호소]

주제2: [백성의 탄원]

(주); 일이 이러하거늘 - 여기 '일'이란 '이러한 것들', 곧 지금까지 자세히 열거한 재앙들을 가리킨다(10, 11절). 참회개(5절)와 재앙의 진상을 아뢴 후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성 경: [사65:1]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주);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 바로 앞장 마지막 부분에서 토로된 이스라엘의 탄원에 대한 대답의 첫 성(聲)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본 구절이다.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란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리고 '물음을 받았다'는 '니드라쉬티'(*)인데 이것은 수동태로서 '찾음을 당하였다'가 문자적인 뜻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신학적으로 다소 어폐(語弊)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이 이방인도 부르신 것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보면 된다. 바울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롬 10:20). 그런데 구원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라는 문맥에서 암시된 이방인 구원에의 비전은 구원 역사에 관한 좀더 넓은 시야를 열어준다.

성 경: [사65:2]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주); 내가...불선한 길을 행하는 - 이것은 다음절에서부터 자세하게 열거하게 될 이스라엘의 패역한 행동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배척하셨던 그리고 이방에게 그의 구원을 본격적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하신 전체적인 이유를 담고 있다.

(주); 종일 손을 펴서 - '손을 펼친다'는 것은 초청을 뜻한다(잠 1:24).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은총 속에서 이스라엘을 초청하셨다.

성 경: [사65:3]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주);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 이것은 이방의 우상 숭배와 연관성이 있는 표현이다. 이방인들은 주로 수풀 속에서 제사 의식을 가졌다. 또한 그들은 벽돌 위에 미신적인 상징을 새기기도 하였는데 돌 대신 벽돌을 재료로 취한 까닭은 벽돌이 돌 보다 그 위에 새기기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출 20:25에 보면 제단을 세울 때 다듬은 돌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것도 어떤 면에서는 벽돌 위에 미신적 주문이나 형상 새기는 것을 금하고자 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제사는 그 외형적인 모양도 취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주);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 여기 '항상'의 원문 직역은 '계속적으로'이다. 이것은 2절의 '종일' 곧 '계속적으로'와 적절한 대비를 이룬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초청하셨지만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신 32:21).

성 경: [사65:4]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주); 무덤 사이에 앉으며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1) 영매(靈媒)가 되기 위해 묘지에 왕래했던 사실(8:19)을 가리킨다(Whybray).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생을 떠난 사람의 경우 이생에 관한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죽은 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영매술이 유행했다. (2) 죽은 자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러 무덤으로 간 것을 가리킨다(Vitringa).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단정적으로 취하기는 어렵다.

(주);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 '은밀한 처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추림'(*)의 원형은 '지키다', '숨기다', '숨다' 등을 뜻하는 '나차르'(*)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방의 신상을 안치해 둔 신전(Jerome)이나 지하 토굴(Delitzsch)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지내며'(*, 얄리누)는 '하룻밤을 머물다'는 뜻이다.

(주); 돼지 고기를 먹으며 - 이방인들은 돼지를 대체로 식용이나 제물로도 사용하였던 반면, 이스라엘은 그러한 사용을 일절 금하였다. 이것을 알았던 신 구약 중간 시대의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Antriochus Epiphanes)는 여호와 신앙의 포기 및 배교의 증표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였다. 한편, 돼지가 이방의 희생 제사에 사용되기도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한 식용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즉, 제물로 바쳐진 것을 먹는 것은 그 제물이 바쳐진 대상에 대한 경의를 뜻하는 셈이 되었던 것이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 사실도 넌지시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주);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 여기 '국'(*, 파라크)의 문자적인 뜻은 '조각'이다. 이방 종교 의식에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 동물의 살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드리는 의식이 있었는데, 본 구절은 바로 그 같은 의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앞구절의 '돼지'를 조각내어 드리기도 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기 '가증한 물건'이란 돼지고기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성 경: [사65:5]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말라 - 그 당시 혐오스러운 이방 예식에 종사하던 자들이 영적 오만으로 자신을 구별하였던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주님 시대 당시 위선적인 자기 의로 가득 찼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부류를 연상시킨다(마 9:11;눅 5:30;18:11;유 1:19).

(주); 내 코의 연기요...불이로다 - 여기 '코'(*, 아프)는 문자 그대로의 '코'를 의미하지만(민 11:20;욥 40:24) 때때로 '분노'를 뜻하기도 하는데 분노는 강한 호흡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본 구절은 이방 제사자들의 역겨운 행동이 연기가 코를 찌르고 불쾌하게 하듯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거나, 그들의 행동이 분노의 상징인 하나님의 코에 불을 붙였다는 것, 곧 하나님의 진노케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 경: [사65:6]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 이 표현은 왕의 포고령을 그 백성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서책(書冊)에 혹은 테이블 따위에 기록하여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세워두거나 비치하던 당시의 관습을 연상케 한다. 이방 신 제사 금지와 그 금지를 어길 때에 따를 처벌에 관한 사실은 이미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다.

(주);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 여기 '품'(*, 헤크)이란 '가슴'이라는 뜻 외에 물건 따위를 넉넉히 받기 위하여 길게 늘어뜨린 옷의 앞자락 부분을 가리킨다(출 4:6, 7;잠 6:27). 여기서는 범죄한 이방 제사자들에게 임할 징벌이 크고 심할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 경: [사65:7]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거역에 대한 심판 경고]

(주);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 하리니 -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징벌이 임하기까지 세대에서 세대를 지나면서 축적되어 왔던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사65:8]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주);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 이 구절은 여러 원인 때문에 대부분이 상해버린 포도송이들 중에서 그래도 쓸 만한 송이를 가려내는 작업을 연상케 한다.

(주); 나도...그같이 행하여 - 포도를 수확하는 사람이 상해버린 포도 송이들 중에서 좋은 포도즙을 낼 수 있는 포도 송이를 가려 뽑듯이 하나님이 불경건한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을 명망시키는 중에 경건한 '남은 자'를 아껴 두실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본서에는 이 사상이 반복되고 있다(1:9;6:13; 10:21;11:11-16).

성 경: [사65:9]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주); 씨 - '거룩한 씨'란 뜻으로,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몰수당했던 거룩한 땅을 다시 소유키로 되어 있는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킨다(6:13).

(주); 나의 산들 -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이 지형학적으로 높은 곳이므로 산이라 불리웠다.

성 경: [사65:10]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주); 사론 - 지중해 연안 갈멜 산 남부 지방인데 빼어난 경관과 비옥한 땅으로 유명한 곳이다(35:2).

(주); 아골(*, 아코르) - 문자적인 뜻은 '고통'인데 여리고 가까이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고통'이란 의미가 붙여진 이유는 과거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받았던 곳이기 때문이다(수 7:24). '아골 골짜기'란 호칭은 성경에서 재앙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처소로도 사용된다(호 2:15).

성 경: [사65:11]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주);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 '갓'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여겨졌던 시리아 신(神)으로 이해되며 포에니시아(Phoenicia), 팔미르(Palmyra) 및 팔레스틴 등지에서 숭배되었다(수 11:17;12:7;15:37 참조, J. Watts, Whybray). 이 신을 섬기기 위해 마련된 상 위에는 온갖 음식, 특히 포도주와 꿀을 섞은 술잔 등이 진설되었다고 한다(Jerome).

(주); 므니(*, 메니) - '할당하다', '세다' 등을 뜻하는 '마나'(*)의 변형이 분명한데, 많은 견해가 있지만 운명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것 같다(J. Watts, Whybray).

성 경: [사65:12]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주); 칼에 붙일 것인즉 - 고도의 언어적 유희가 돋보이는 구절이다. 여기 '붙일'에 해당하는 '마니티'(*)는 11절의 '메니'(*)와 그 원형(*, 마나)이 동일하다. 패역한 백성이 그들의 운명을 세듯 좌지 우지할 것으로 믿었던 바로 그 신의 운명을 하나님께서 좌지 우지하신다는 것이 본 언어 유희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헛된 우상 '메니'(*)를 의지한 이스라엘의 불경건한 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성 경: [사65:13]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본절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자와 배척하는 자가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본절이 이스라엘 역사 속의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암시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주릴 것'이란 A.D. 70년 로마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포위로 백십여 만 명이 기근으로 몰살한 역사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불명확하다(Houbigant). 뒷문맥에 근거하여(17-25절) 본절을 다분히 종말론적 상황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좋겠다.

성 경: [사65:14]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주); 심령이 상하므로 - '상하므로'의 히브리어 '솨바르'(*)는 '산산이 부숴지다', '찢어지다'는 뜻으로서 극심한 재앙으로 인해 그 마음이 크게 눌릴 때 사용된다. 하나님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이 제외될 것을 암시하는 대목인 마 8:12에 유사한 뜻의 표현이 사용되었다:"나라의 본(本)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성 경: [사65:15]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주); 너희의...될 것이니라 - 어떤 이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끔찍한 저주의 사례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실례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저주하기 위해 시드기야와 아합의 이름을 사용한 렘 29:22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Whybray).

성 경: [사65:16]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구원과 심판]

(주);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 환난이 잊어졌다는 것은 환난이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말을 바꾸면 하나님의 은총이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상에게 맹세하고 복을 비는 행위는 사라지고 참신이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복을 구하게 될 텐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성 경: [사65:17]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이후 새로이 회복될 공동체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메시야의 통치시대의, 더 이상 고통과 슬픔 따위가 없는 완전한 세계를 바라보게 하고 있다. 갈렙이 그 발로 밟았던 바로 그 땅을 물려받았듯이(신 1:36), 메시야와 그의 백성들은 전혀 새롭게 변화된 새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34:4;66:22;히 12:26-28;벧후 3:13;계 21:1)

성 경: [사65:18]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주);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 새로이 재건될 예루살렘 혹은 새 창조로 말미암은 천성(天城) 예루살렘에 즐거움이 넘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I will create Jerusalem to be a delight, NIV).

성 경: [사65:19]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주); 우는 소리와...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 그리고 2차적으로는 모든 구원받을 자에 대한 예언이다(25:7, 8;35:10;계 7:17;21:4).

성 경: [사65:20]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최소한 100세일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사 종말 이후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 세계는 수명이란 것이 아예 없이 영원히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은 본절의 평균 수명 100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영원히'라는 의미 정도로 해석할 때 해소될 수 있다. 이 해석에 비추어 보건대, 아마도 너무 일찍 죽는 현세대의 상황과 대비시키기 위해 평균 수명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 같다.

성 경: [사65:21]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 역시 포로 귀환 후의 상황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가옥 건축과 과실 재배에 관한 본절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는 새 세계에 가옥이 있고 노동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세계를 좀더 실감나게 상상케 하기 위하여 익히 알고 있는 현세상의 이미지를 끌어들이고 있다고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성 경: [사65:22]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 상반절은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자에게 내려졌던 저주와 정반대되는 내용이다:"...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신 28:30).

(주); 나무 - 자연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것 중의 하나로, 이 역시 영원한 삶을 보다 실감나게 하기 위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61:3;시 92:12).

성 경: [사65:23]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주);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 원문 직역은 '고통을 위하여 낳지 않을 것이며'이다. 이것은 후손의 운명을 암시한다. 당시 산모가 아기를 낳을 경우, 아이는 출산 과정에서 죽기도 하고 분만이 되어도 짧은 생(生)을 살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 경: [사65:24]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64:7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와 대조를 이루는 구절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친밀한 영적 교제를 암시하는 표현이다.

성 경: [사65:25]

주제1: [남은 자의 구원과 종말론적 회복]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인간의 범죄 이후 여러 현상이 발생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연의 조화가 깨어지고 서로 죽이고 죽는 저주가 임했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라고 묘사하고 있다(롬 8:22). 그런데 본절에서 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와 같은 부조화가 사라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육식 동물의 식성이 바뀔 것이며 심지어 저주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 나오는 창 3장을 연상케 하는 뱀까지도 더 이상 파괴자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세계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곧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조성된 적대감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청산될 때에만 가능하다.

성 경: [사66:1]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그릇된 예배에 대한 경고]

(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무슨 집을 지을꼬 - 신령과 진정은 결여된 채(요 4:23 참조)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제사에만 몰두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각시키는 내용이다(대상 28:2;시 11:4;99:5;132:7;애 2:1). 즉, 하나님은 특정한 건물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편재하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로서, 여기서는 성전 건축과 연관되는 내용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히찌히(Hitzig)는, 포로 귀환 후에도 계속 바벨론에 남아 자기들 나름대로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유대인들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움브라이트(Umbreit)는, 성전이나 희생 제사 예식이 도무지 필요없는 새 예루살렘에서의 상황에 대한 묘사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포로 귀환 후 성전 재건에 착수해야 할 유대 공동체에게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를 미리 강력하게 경고하는 내용으로 이해함과 아울러, 더 나아가서는 신약 시대와 새 예루살렘에서의 신령한 예배를 겨낭한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

성 경: [사66:2]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그릇된 예배에 대한 경고]

(주); 마음이 가난하고(*, 아니) - 단순히 재산이 없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줄 구주(救主)를 기다리며 사는 자를 가리킨다. 동일한 용어가 산상 수훈의 한 대목에 나타난다(마 5:3). 바로 이 같은 자의 심령의 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요 14:23).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에 성전이란 없다. 그때에는 주 하나님 그분이 성전 자체이시다(계 21:22).

성 경: [사66: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그릇된 예배에 대한 경고]

유대인에게 있어 '개'란 추잡함이나(신 23:18) 경멸스러움을(삼상 17:43)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는데, 그 목을 꺾어 죽여서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은 지극히 혐오스러운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돼지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일 역시 이방 제사에서나 행해졌던 혐오스러운 것이었다(65:4). 그런데 본절은 율법이 허용하고 있는 소 및 어린 양의 제사를 이방의 제사인 양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절을 고려하면 이 난제는 쉽게 풀린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제사의 바른 정신을 깨닫고 그 정신에 입각해 드리는 제사인데, 그 제사란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바로 이 같은 내면적 자세를 무시한 채 그냥 동물만 잡아 드리는 제사는 이방의 제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성 경: [사66:4]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그릇된 예배에 대한 경고]

(주); 유혹(*, 타알룰레헴) - '악한 행동을 하다', '악하게 대하다'는 뜻인 '알랄'(*)에서 온 용어로서 '안달', '토라짐', '뻔뻔함' 등을 뜻하나 3절의 '자신들이 멋대로 택한 길'(개역 성경에는 '자기의 길'로 나와 있음)과 대비를 이루는 용어로 볼 때 '망상', '잘못된 생각' 정도로 의역함이 가능하겠다. 많은 학자들이 본 용어를 망상, 잘못된 생각이 야기할 수 있는 '재앙'으로 번역하고 있다(Noyes, Lowth).

성 경: [사66:5]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신실한 자들이 받을 위로]

(주);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 공공 예배와 연관된 특권을 박탈당하거나 그 공동체로부터 출교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도 공생애 동안 이것을 참성도에게 닥치는 중요한 시련 가운데 하나로 가르치신 바 있는데(마 10:22), 구체적으로는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했다(요 16:2).

(주); 여호와께서는...원하노라 - 남은 자들을 향한 자신들의 포학이 하나님을 위한 열정 때문에 나온 것인 양 퍼붓는 박해자들의 조롱조의 도전이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한 조롱을 받으셨다(마 27:42, 43).

성 경: [사66:6]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신실한 자들이 받을 위로]

소리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들린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보다는 이스라엘 밖에 있는 대적, 곧 이방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보응을 암시한다(슥 12:2, 3;14:3, 19-21). 논조가 본절에서 급히 바뀌었는데 이것은 이방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복수가 급박하게 이루어질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사66:7]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신실한 자들이 받을 위로]

전혀 고통없이 그것도 순식간에 자녀를 출산한다는 이 비유적 예언은, 1차적으로는 이적적 섭리에 따른 포로들의 귀환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태동과 발전을 암시한다. 본절의 예언처럼 성령 감림으로 교회가 시작된 후 이방의 개심자들과 유대의 개종자들의 수는 급속히 불어났다(행 2장). 특히 교회의 태동과 확장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경우 여기 '남자, 곧 영적 이스라엘이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은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가 한 머리(메시야)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임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영적 이스라엘 복수 공동체를 가리키는 대표 단수를 뜻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성 경: [사66:8]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신실한 자들이 받을 위로]

(주); 나라(*, 에레츠) - 문자적인 뜻은 '땅'이지만 평행구가 '민족'으로 되어 있으므로 개역 성경처럼 '나라'로 의역하는 것이 좋다. 땅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오랜 세월 속에서 그 소산을 내기 마련이다(막 4:28). 이 원리는 세상 나라의 발전 속도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 원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이적적 개입이 있게 될 것이다.

성 경: [사66:9]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신실한 자들이 받을 위로]

(주); 나는 해산케...닫겠느냐 - 8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예언이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 밖에 없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 근거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역사하심이다.

성 경: [사66:10]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과 영광]

본절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 혹은 이방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는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이다. 슬픔으로부터 기쁨으로의 주제의 전환은 본서 하반부(40-66장)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인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므로 본 기쁨의 노래는 '종말론적 찬양의 노래'라고 불리운다(Whybray).

성 경: [사66:11]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과 영광]

(주); 젖을 빠는 것 같이...만족하겠고 - 이사야는 '회복될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1) 회복될 예루살렘이 그들의 본향이며(잠 27:8;히 11:14-16), 거기에는 (2) 신령한 젖이 있으며(벧전 2:2), (3) 모든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생명의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시 73:10;계 22:1, 2).

성 경: [사66:12]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과 영광]

(주); 주리니(*, 노테) - 문자적인 뜻은(주먹이나 텐트 따위를 펼칠 때와 같은) '뻗치다'(창 12:8) 혹은 (강의 범람 따위로 인하여 없었던 지류가 새로 생겨났을 때를 가리키는) '뻗어나다'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강의 범람으로 전에 강이 없던 곳에 새 지류가 생기듯이, 전에 맛보지 못했던 신령한 평안과 번영이 넘치리라는 예언이다.

(주);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 문자 그대로는 49:22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이 이방의 부요를 받아 나누게 될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모든 자가 하나님이 주는 영육간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사66:1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과 영광]

예루살렘이 그 자녀를 돌보는 개념으로부터 여호와께서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하는 개념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여기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구하시는 모든 은총의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상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만이 생모가 자녀를 돌보는 이상으로 그 백성을 돌보신다는 주제가 49:13-15 이후 다시 반복되고 있다.

성 경: [사66:14]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과 영광]

(주);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 문자적인 뜻은 '너희 뼈들이 풀처럼 번성하리라'이다. 인간의 신체 중에 뼈를 소재로 한 이미지는 성경에 자주 나온다. 몸의 활력이 스러질 때, 많은 고통을 받을 때 뼈가 연약해졌다 혹은 말랐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시 6:2;22:14, 17;38:3;51:8;잠 14:30;17:22;애 1:13). 반면 번영, 건강, 혈기 왕성 등을 나타낼 때는 그 뼈가 살진다거나 혹은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58:11).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인해 바짝 타버린 뼈와 같은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은 이제 다시 생기를 회복할 것이다(잠 3:8;15:30).

성 경: [사66:15]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악인에게 임할 심판]

(주); 불에 옹위되어 - '불'은 그의 대적들을 심판하고 징벌하기 위한 주의 강림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되는 이미지이다.

(주);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 여호와를 전사(戰士)로 비유한 본 이미지는 바벨론 군대의 당도를 묘사할 때 사용된 바 있다(렘 4:13).

성 경: [사66:16]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악인에게 임할 심판]

원본에 뚜렷이 나타난 평행법을 살려 상반절을 재번역하면 이와 같다:'불로 여호와께서 심판을, 그의 검으로 (그가 심판하시리라) 모든 육체를.' 심판의 도구인 불과 검이 강조되었다.

(주); 모든 혈육 - 하나님의 진노의 모든 대상자들을 가리킨다. 경건한 자들은 주님에 의해 심판의 장소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숨겨질 것이다(26:20, 21;시 31:20;살전 4:16, 17).

성 경: [사66:17]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악인에게 임할 심판]

(주); 가증한 물건(*, 하쉐케츠) - 식용이 금지된 부정한 짐승들을 기록하고 있는 레위기에 나온 용어이다(레 11:10-45).

(주); 쥐 - 레 11:29에서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었다.

성 경: [사66:18]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만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여호와]

(주); 아노라 - 원문에는 이 단어가 없이 '내가 그들의 일들과 생각들을...'이라고만 되어 있다. 문맥을 고려해서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일들과 생각들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로 번역하는 견해가 있는데(Maurer), 앞절에 '...망하리라'가 있다는 점에서 취해 봄직도 한 번역이다. 하반절과 19절은 심판 이후의 후속 조치를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사66:19]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만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여호와]

(주); 징조(*, 오트) - 문자적인 뜻은 '깃발', '표시', '표적'이다. 본서에서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7:14), 애굽 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해 세워질 제단(19:19, 20) 혹은 잣나무와 화석류가 가시나무와 질려를 각각 대신하게 될 것(55:13) 등을 '오트'라는 말로 표현한바 있다. 여기서 이 말이 지칭하는 것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이곳 저곳 멀리 흩어졌던 유대인들의 귀환의 예비 작업으로, 모임 장소를 알리기 위해 높은 장소에 세울 물건. (2)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마 12:38-40, Kidner). (3) 하나님이 파송하실 자에게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세운 이정표(Westermann). 이중 본문맥에서는 (3)의 견해가 보다 자연스러울 것 같다.

(주); 그들 중 도피한 자 - 이에 관한 해석도 가지가지이다. (1) 유대인들 중 남은 자(Grogan). (2) 열방들에 대한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Westermann). 여기서는 이방인들 중 여호와 신앙에 복종하며 열방에게 임할 심판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주); 다시스 - 오늘날의 유럽 서부 스페인의 어느 지방인데, 여기서는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가장 먼 곳에 있는 항구로 알려진 곳이었기 때문에 거명되고 있다.

(주); 뿔 -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지방으로 애굽과 에디오피아 국경 지방이기도 하다.

(주); 룻 - 소아시아의 리디아 지방을 가리킨다.

(주); 두발 - 흑해와 아락세스 사이코커서스 남부 지역에 위치한 티발레니안스를 가리킨다.

(주); 야완 - 성경에 나오는 야완의 모든 후손들을 포함하는 '이오니아인들'로 불리우는 자들이다.

성 경: [사66:20]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만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여호와]

(주); 그들이...드릴 것이요 - 문자 그대로는 이방인들이 흩어진 이스라엘을 거룩한 땅으로 데려온다는 것인데, 영적으로는 이방 세계로부터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교회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행렬이 이어질 것을 뜻한다.

(주); 교자(轎子) - '마차'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자세하게는 낙타 따위가 이끄는 유개차(有蓋車), 말하자면 바람이나 비를 막기 위하여 마차 위에 덮어 씌운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성 경: [사66:21]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만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여호와]

(주); 그 중에서...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이란 직접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제 메시야의 시대가 오면 이방인들이 직접 하나님을 예배하는 부류에 속하게 될 것이다(벧전 2:9).

성 경: [사66:22]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만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여호와]

(주);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 바로 앞문맥에서 언급된 바, 이방인이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상황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성 경: [사66:2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만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여호와]

(주); 매 안식일에 - '한 안식일에서 또 다른 안식일이 되는 것만큼 자주'란 뜻이다. 이것은 메시야의 시대가 오면 안식일 규례가 영원한 규례로 정착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사66:24]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미래]

주제2: [만민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여호와]

(주); 그들이...볼 것이라 -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진멸당한 애굽 군대의 시체를 목격했듯이(출 14:30)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악인들의 멸망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주);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 예루살렘 남부 힌놈의 골짜기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30:33). 경건한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에 이어지는 불의한 사단의 세력에 대한 심판으로 본서는 끝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