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그 가족]
(주);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 여호수아서 저자가 그 책의 기록 배경을 밝히기 위해 책의 서두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라는 구절을 기록하여 역사 서술을 했던 것처럼, 그리고 사사기 저자 역시 책의 서두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삿 1:1)라고 기록함으로써 그 역사적 배경을 밝혔던 것처럼, 본서의 저자도 이와 같은 역사서술의 전형적인 형태를 좇아 본 구절을 삽입시켰다. 이처럼 룻기의 저자가 본 구절을 서두에 기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역사적 의미를 일깨워 준다. (1) 저자는 본서가 확실한 역사적 사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명백히 했다.(2) 저자는 본서의 역사적 기록 배경을 제공했다. 이로써 본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교훈만을 주기 위한 허구의 소설(fiction)이 아니라, 엄연히 역사적 사실(fact) 위에 근거하고 있는 구속사적 기록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사(私事)들의 치리하던 때'곧 '사사 시대'란 일반적으로 여호수아 사후(死後), 첫 사사 옷니엘이 등장할 때(삿3:9, B.C. 1367년)로부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왕이 등장할 때(삼상 10:1,B.C.1025년)까지 대략 342년 간의 기간을 말한다(J.P. Free, Archaeolgy and BibleHistory). 그중에서도 특별히 룻기의 배경이 되던 때는 드보라와 바락의 활약상에 힘입어 이스라엘이 누린 40년간의 평화기(삿 5:31)가 끝나고, 미디안 족속의 압제를 받던 12세기 후반 경의 사사 기드온의 시대로 추정된다(Keil), 이러한 연대 추정은 B.C.1010년에 헤브론에서 통치를 시작한 다윗이 바로 룻의 증손(曾孫)이라는 사실(4:17)에근거한다(L.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한편, 본 구절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사사들의 재판하던 날들에'란 의미가 된다. 당시 '사사'(*, 쇼페트)들의 직무란 문자 그대로 주로 백성들의 소송을 '재판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왕이 '다스린다'란 의미를 지닌 '말라크'(*)대신 '재판하다'에 해당하는 '솨파트'(*)란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울러 사사들은 전시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는데,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기도 했다(삿 2:16,18).
(주);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 특히 고대의 농사는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흉년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격에 나타나는 흉년은 대부분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언약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기만 한다면 풍성한 소출이 약속된 반면(레 26:3-5, 10;신 28:1-14).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타락하여 우상을 섬긴다면 온갖 재앙과 아울러 기근과 흉년이 또한 임할 것이라고 경고되어 있기 때문이다(레 26:19,20;신28:23,24). 이런 맥락에서 여기의 흉년도 사사 시대의 타락상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수 있는데, 특히 이때의 흉년은 당시 이스라엘의 소산물을 약탈해 갔을 뿐 아니라 토지를 황폐화시켰던 미디안 족속의 침략(삿 6:2-4)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Schmidt, Patrick).
(주);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 모압지방은 요단 동편에 위치하며, 사사 시대에는 아르논 강을 경계로 르우벤 지파와 인접해 있었다.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서 이지방까지는 그렇게 멀리 않았으므로, 엘리멜렉 가족들이 흉년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가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모압 지방'(*, 세데 모압)이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모압 들판'(field of Moab)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 들판은 바로 아르논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들판이며 초지였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이 모압 땅에 우거하기는 했으나 자기 동족들인 르우벤 지파가 살고 있는 곳에
인접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의 땅을 떠난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기 때문이다(민36:6-9). 뿐만 아니라 이들이 모압 평지에 10년 동안 우거했던 것으로 보아(4절). 흉년으로 인해 모압으로 간 것은
단순히 일시적 이동이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불신앙적 행위로 말미암아 이들 가족은 그곳 모압 땅에서 큰 고초를 겪게 된다(3-5,20절).
성 경: [룻1:2]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그 가족]
(주); 엘리멜렉(*, Elimelech) - '하나님은 왕이시라'란 의미로서, 곧 이 이름은 그의 부모의 신앙을 반영하는 이름이다. 한편 엘리멜렉의 처(妻)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귀환했을 때 온 성읍의 화제가 되었던 일(19절)이나, 그의 친척 보아스의 지위(2:1;4:1)등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엘리멜렉은 성내의 유력인사였던 것 같다(P. Cassel).
(주); 나오미(*, Naomi) - '감미로운 자', '은혜스런 자', '사랑스러운 자'등의의미인데, 이 이름은 특히 자부 룻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말년에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주); 말론과 기룐 - 각각 '병약한(연약한) 자'와 '사모(열망)하는 자'란 뜻으로 순수한 히브리식 이름이다(Keil)
(주);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 -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이름(창48:7)으로, 족장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은
곳이기도 하다(창 35:16-19:48:7).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후일 미가 선지자의 입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으로서(미 5:2),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마 본서의 저자도 이러한 구속사적 통찰에 의해 이곳의 지명을 이처럼 자세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즉
본절은 엘리멜렉 가족의 고향이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수 19:15;삿 12:8)과 분명히 구별했고, 또한
'에브랏 사람들'(Ephrathites)이라고 밝혀줌으로써, 그들이 베들레헴 본토인들이란 사실을 분명히 했다(P.Cassel). 한편 허비(A.C. Hervery)는 여기
'에브랏 사람'과 '에브라임 사람'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잘못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즉 (1) 성경
어느 곳에서도 에브랏과 에브라임을 동일시 하지 않았다. (2)에브라임은 예루살렘 북쪽 20km 지점에 위치한 산악 지대인 반면,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7km 지점의 유다산지에 속해 있다.
성 경: [룻1:3]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그 가족]
(주);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 엘리멜렉은 가족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들어와 그 곳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물론 이때는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장가들기 전이었다. 아마도 나오미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이 사후(死後)에도 계속 모압 땅에 머문 것
같다.
성 경: [룻1:4]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그 가족]
(주);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 페쉬타 역본(the Syriac Peshitta)과 탈굼 역본(the Targums)은 본절에 덧붙여 '그들이 이방인 아내를 취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다'라는 내용을 삽입시켰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은 이 번역에 동의하여 그들의 결혼을 정죄했다(Matthew Henry. Thomas Fuller). 그러나 혹자는 주장하기를, 모세 율법은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만을 금지했지(신 7:3), 모압 여인과의 결혼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결혼 자체를 정죄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Keil,Hervey). 물론 이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모압 족속에 대한 신명기의 규례(신 23:3-6)를 자세히 살펴볼 때 그들의 결혼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화란의 신학자 고스링가(Goslinga)의 말대로, 이들의 결혼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범한 것은 아니지만 율법의 정신을 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율법에서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키신 것은 그곳의 우상 숭배(왕상 11:1,2)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모압 여인과의 결혼도 결국은 우상 숭배의 위험성이 내재해 있으므로,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범한 것이다. 사실 당시 모압과 암몬 족속의 우상 그모스와 몰렉은 다른 여타 우상들보다 더욱 가증스러웠다. 따라서 나오미의 두 아들의 결혼은 잘못된 것인데, 이는 무엇보다도 결혼 후 가정에 임한 환난을 두고 나오미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3절)라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Atkinson). 이처럼 언약의 백성은 실패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그러한 실패를 통해서도 당신의 오묘하신 구속사를 이끌어 나가셨으니, 곧 이때 결혼한 모압 여인 룻을 통해 다윗의 가계를 형성하신 점이다(4:17).
(주); 오르바...룻 - 각각 나오미의 두 아들 기룐과 말론의 아내가 된 이 두 여인의 이름은 전형적인 모압식 이름이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의 이름
뜻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놓고 학자들간에 이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오르바'(Orpah)는 '돌아가는 자', '룻(Ruth)은 '친구'를 뜻한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추론했을 뿐 근거는 없다(Pulpit Commentary). 이에 비해 카젤(P. Cassel)의 추론은 흥미롭다. 즉 그에 따르면,
소녀들의 이름은 흔히 꽃이나 동물의 이름 따위에서 따온다는 전제하에 고대 셈어로부터 그 어근을 유출하여 '오르바'는 '암사슴'을, '룻'은 '붉은
꽃'(장미)를 각각 의미한다고 보았다(J.P. 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하나의 흥미있는 추정일 뿐, 그
언어학적 근거는 희박하다.
성 경: [룻1:5]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그 가족]
(주);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 혹자는 엘리멜렉에 이어 그의 두 아들까지 일찍 죽은 것은 (1) 언약의 땅 가나안을 떠난 죄와(2)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G.Gerleman). 물론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향후 전개되는 구속사적 위치상 나오미 가정이 점하는 비중을 놓고 볼 때 결코 우연의 일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이방의 신실한 여인 룻(Ruth)을 '여호와의 날개 아래'(2:12)로 불러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의 결과로 봄이 타당하다.
(주);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 '뒤에 남았더라'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솨아르'(*)는 '부지하다', '연명하다' 등의 뜻으로,
남편과 두아들을 잃고 홀로 뒤에 쳐져 남아있는 나오미의 모질고 비참한 모습을 풀러(Thomas Fuller)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이다. 여자 중에서도 노년기의 여자는 더욱 약하다. 그중에서도 과부는 더 불쌍하며, 거기에 가난한 과부는 더더욱 측은하다. 나아가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 중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처량하며, 그것도 먼 타국에서 객이된 자식 없는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는 실로 가련하며
불쌍하다. 진정 욥이 남자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면, 나오미는 여자 중 가장 처량한 지경에 빠진 여자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이처럼
나오미는 낯선 이국 땅에서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애써 키운 두 아들마저 잃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깊이 좌절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은 듯 하다. 즉 나오미는 언약의 땅을 쉽게 떠나온 것을 깊이 뉘우치고, 오직 위로자요 구원자되시는 여호와만을 더욱 의지하고자 한
듯하다(6절). 이러한 나오미의 신앙이 마침내는 기쁨의 결실을 보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4:14-17).
성 경: [룻1:6]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두 며느리]
(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 여기서 '권고(勸顧)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계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곧 목자가 양떼를 보살피기 위해 찾아가 양들을 계수하며 모든 환경을 주의깊게 돌아보는 상태를 일컫는다(출 4:31; 렘 23:2). 한편, 본서의 저자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사시대의 형편을 암시해 준다. 즉 사사 시대는 일반적으로 암흑의 시기로 이야기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중 우상 숭배가 극심했으며, 도덕적으로 매우 부패했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에는 반드시 그 백성을 돌보기 위해 찾아가셨다. 즉 이방의 침략하에 고통하며 당신을 향해 부르짖을 때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돌아보사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절에 언급된 나오미 시대의 이 흉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지만(1절의 주석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을 기억하사 그 백성을 찾아가심으로써 그 기근은 해결되었다(6절). 이와 같은 역사는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원리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적용되었다.
(주);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기근이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지난 날을
뉘우침과 동시에 이방 족속의 땅,곧 우상 그모스의 땅을 떠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조차도 다 잃어버리고 비참한 상태에 빠진 나오미가 이전에는 유지 가문으로 지냈던(2절 주석 참조) 고향으로 다시금 돌아가려고 결정한것은
매우 용기있는 결단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깊이 회개하며 뉘우친 신앙의 결단이기도 했다.
성 경: [룻1:7]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두 며느리]
(주); 두 자부도...길을 행하다가 - 두 자부(子婦)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모(시母)를 단순히 배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모와 함께 시모의
고향으로 갈 결심으로 같이 동행했던 것같다. 이로 보아 평소 나오미와 두 자부 사이의 관계는 퍽 애정이 깊었던 것같다. 특별히 나오미의 신앙
인격이 두 자부에게 깊이 영향을 끼친 듯하다. 아마도 길을 행하는 도중 나오미는 한두번 돌아갈 것을 권면했겠지만, 두 자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온 것 같고, 마침내는 모압에서부터 낯익은 유다의 고향 땅으로 통하는대로(大路)에 이르자, 시모 나오미는 젊은 두 자부의 장래를 위해서
그들 역시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낼 결심을 굳힌 것 같다.
성 경: [룻1:8]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두 며느리]
(주);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 나오미에게 있어 이 말은 결코 쉽게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두 며느리조차 떠나버리면 나오미는 그야말로 의지 할데 없는 홀홀 단신 과부가 되기 때문이다. 노년에 의지할 데가 전혀 없는 과부처럼 비참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자기들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나오미 자신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으니,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가정을 가지고 평안히 살아가라는 의미가 강하게내포되어 있다(9-12절). 뿐만 아니라 향후 닥칠 모든 고통을 나오미 자신이 혼자 짊어지겠다는 자부(子婦)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담겨 있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 '선대'(善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언약적인
사랑을 나타낼때 주로 사용되었다(출 15:13;20:6). 특별히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호(聖號) 중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여호와'가 사용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비록 자기 곁을 떠나 그들의 고향 땅에 갈지라도 모압의 국가 신인 '그모스'를 섬기지 않고, 여호와만
섬기며 그분의 축복 가운데 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던것 같다. 즉 나오미는 이별의 순간에 여호와만이 축복의 근원이시며 참되시고
유일한신이심을 주지(主旨)시켜 주었다. 이것은 비록 나오미가 언약의 땅은 떠났지만 언약의 하나님은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의 모든 국가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 경: [룻1:9]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두 며느리]
(주); 여호와께서 - 본장에서 하나님의 성호가 '여호와'(Jehovah)로 가장 많이 사용된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호가 여러가지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각 문맥에서 특징 지워지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적절히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여기서 나오미가 '여호와'라는 성호를 사용한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언약의 하나님을 상기시킬 때(6, 8, 9절): 6절에는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 곧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찾아가셨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8절과 9절에서는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언약 백성 가운데 포함된 자들에게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복주시기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2)언약을 파기한 백성에 대하여 징계할 때(13,17,21절):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은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 짐승을 잡아 각을 뜨고 피를 사방에 뿌린다. 그것은 그 언약을 범한 자도 반드시 그 같이 될 것이라는 표식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경우에 반드시 '여호와'라는 성호가 사용되었던 것이다(신 4:27,31,40; 호 1:9; 암 3:2).한편, 또한 본장에는 '전능자'(*, 솨다이)란 말이 여호와란 말과 연관되어 동의어 처럼 사용되었다(20,21절). 그런데 '솨다이'라는 하나님의 성호는 족장 시대 이후부터 여호와의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시68:14;91:1;겔 1:24;10:5). 그 이유는 언약을 실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여호와'라는 성호는 당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남편의 집에서 - 전통적으로 과부는 고아와 나그네와 함께 가장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보호받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하셨다(출 22:22,23). 특별히 과부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의 짐을 덜어 줄 것을 가르치셨다(신 14:29;24:19,20;27: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학대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사 1:23; 겔22:7; 말 3:5). 나오미는 이러한 당시 사회 형편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며느리들이 자기와 함께 가는 것을 극구 막고자 했던 것이다. 대신 두 자부가 아직 젊기 때문에, 재혼(再婚)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가지라고 권유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과부가 사회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주); 형안함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누하'(*)는 '안식처', '안식','안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종합적으로 '메누하'는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안식처(安息處)를 찾아 안정을 얻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기거하는 집은 있으나, 보호받을 남편이 없어 진정한 안식 없이 슬픔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과부의 고통이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재혼하여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안식을 누리라고 권면했던 것이다.
(주); 소리를 높여 울며 - 즉 '목 놓아 엉엉 울었다'란 의미인데, 어려운 처지에서 10년동안 동고 동락했던 시모 나오미가 강력히 이별을 권하자,
두 자부가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일시에 터뜨리는 장면이다. 진정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의 장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외로움을 떨치고 극구 보내려
하고, 며느리들은 며느리대로 홀로 남게 될 시모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극구 함께 가겠다고 하면서, 서로 껴앉고 목놓아 우는 이 장면은 물론
처량하기도 하거니와 반면 아름다운 고부(姑婦)의 관계를 보여 준다.
성 경: [룻1:10]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두 며느리]
(주);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 본절은 문맥상 약간 이상한 표현이다. 즉 오르바와 룻은 모압 출신이며 모압에서 자라 그곳에서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겠다'(go)는 말을 하지 않고 '돌아가겠다'(return)고 고집했다. 그래서 이것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단순히 나오미가 돌아가는 길을 자기들이 동행한다는 의미에서 '돌아가겠다'고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 (2)나오미와 자신들이
비록 출신은 다르나 같이 와서 함께 돌아간다는 공동체적 입장에서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시모 나오미의 간곡한 권면에도
불구하고 나오미와 헤어지기 싫어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두번째 해석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분명히 그들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땅에 왔던 것처럼
표현하여, 그와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갈 당위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성 경: [룻1:11]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두 며느리]
(주);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 본절은 나오미가 신 25:5,6에 나타난 바 '계대 결혼'(繼代結婚, Levirate Marriage)의
규례를 고려하여 한 말이다. 즉 남편이 죽고 자식은 없을 때 그 미망인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남편의 대(代)를이을 수 있다는 율법의 계대
결혼법(繼代結婚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신 25:5-10부분 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은 죽은 아들들을 대신하여 대(代)를 이어줄 자식이 이제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오미의 이 말과 관련하여 학자들 간에는 다음 몇가지 해석이 따른다. (1) 나오미가 재혼하더라도 그녀의 아들들이
엘리멜렉의 자녀가 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말론과 기룐의 진짜 형제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오미가 계대
결혼의 의미를 완전히 곡해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J.B.Carpzov). (2)이와 반대로 어떤 학자들은 나오미가 엘리엘렉의 형제와 결혼하게
되면 계대결혼이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Keil). (3)본절이 계대 결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근본 정신은 나오미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David Atkinson). 결론적으로 우리는 두번째와 세번째의 견해에
의거하여 본절을 해석할 수 있는데, 곧 나오미는계대 결혼을 할 수는 있으나 이미 그는 늙었으므로(12절) 자식을 가질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계대 결혼을 염두에 둔 것만은 사실이다. 근본적인 의미는 자기가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과부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 의미는 이하 언급되는 12,13절에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강조한 사실에서
충분히 입증된다<1:6-18강해, 계대 결혼의 성경적 의미>.
성 경: [룻1:12,13]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두 며느리]
(주); 말한다든지...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기다리겠느냐 - 나오미는 자부들이 만일 자신과 함께 가면 끝내 과부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점층적인 표현으로서 설득하고 있다. 즉 (1) 자신의 나이나 처지를 감안할 때 전혀 재혼(계대 결혼)의 가망이나 의사가 없지만, 만일 재혼을 하여 남편이 있다손 치더라도 (2) 자신은 늙었으므로 도저히 자식의 잉태를 기대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백보 가정하여 아이를 낳았다손 치더라도 (3) 그 아이가 계대 결혼법을 이해하고 지킬 정도가 되려면, 최소한 20년이상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그것이 어찌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기냐란 의미를 강력히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당시 나오미는 이들이 모압 여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비록 이들이 이스라엘로 간다고 할지라도 계대 결혼 이외에는 도저히 재혼이 불가능할 것이란 판단을 한 것 같다.
(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실
그녀가 며느리들을 설득시키는 마당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치신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오르바가 돌아간 후
나오미가 룻을 설득할 때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15절)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보아, 분명코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여호와
신앙을 확실히 확인하고자 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풍습과 언어가 다른 먼나라로 간다는 것은,
더군다나 어릴 적부터 섬기던 신을 떠나 여호와의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애정이나 의지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나오미는 자신이 당한 고난과 슬픔의 원인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였다. 만일 나오미가 자기의 가정에 닥친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자연적인 일로 생각했다면, 비록 유다땅에 흉년이 그쳤다는 소문을 들었을지라도(6절) 돌아갈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9가지 재앙을 당한 후에도 그 재앙의 원인을 바로 깨닫지 못했던 애굽 왕 바로와는 좋은 대조가 된다.
성 경: [룻1:14]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두 며느리]
(주);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 고대 근동의 관습상 입맞춤의 포옹은 기쁜 상봉의 순간(창 33:4;45:15;출 18:7)이나 아쉬운 이별의 순간(창 31:55;행 20:37)에 주로 행하던 풍습이었다. 물론 여기서는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를 그 아쉬움 때문에 입맞춤한 것이다.
(주);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 여기서 '붙좇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크'(*)는 '굳게 결합하다'(cleave). 또는 '붙들고 늘어지다'(cling)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에서 주로 사용된 '다바크'란 동산의 용례를 살펴보면, 남녀의 결혼 관계에서(창2:24),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주로 사용되었다(시 63:8). 뿐만 아니라 이 동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구속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하실 때 역시 사용되었다(신 10:20). 이를 통해 볼 때 '다바크'란 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에 사용되었으며, 은총에 대한 충성을
다짐할 때도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룻이 그의 시어머니를 좇아간 것은 북받치는 애정과 충실한 마음으로 결코 이별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에 의해서였다. 아울러 나오미로부터 주로 영향받았을 여호와 신앙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 의해서였다(Driver,Briggs).
성 경: [룻1:15]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동행하려는 룻]
(주);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 이것을 원문대로 문자적으로 옮기면 '그녀의 백성과 그녀의 신들에게로 돌아갔으니'가 된다. 다시 말해 오르바(Orpah)는 자기가 속한 백성에게로 갔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섬기는 신(神)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볼 때 오르바는 단순히 그의 시어머니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삿 11:24) 또는 바알브올(민 25:3,5)신을 섬기는 우상의 땅으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이 말을 한 것은 1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시모(媤母)에 대한 애정을 초월하여,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고대 세계에서는 자기 종족이 섬기는 신을 버리는 것은 본토나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 이상으로 극히 어려웠다. 특히 부족 국가를 이루며 살던 당시에는 부족신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흔하지 않았으므로, 나오미는 이것으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풀러(Thomas Fuller)박사는 야곱의 경우와 비교하여 역설적으로 재미있게 묘사했다. 즉 "마치 하나님이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신앙을 꺾기 위해 애쓰신 것처럼, 여기서 나오미는 자부 룻의 올바른 결심을 좌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Pulpit Commentary).
(주);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 이 말을 풀어 쓰면, 곧 '너도 동서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결단을 내려 너의 백성과 너의 신(神)에게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했듯, 나오미의 이 말속에는 다분히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코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나오미(Naomi)가 오르바(Orpah)의 행동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사실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서 볼 때, 오르바도
나름대로 시모 나오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룻(Ruth)의 각오와 신앙이 더욱 뛰어나고 위대했을 뿐이다. 따라서 나오미가 룻에게
"네 동서(오르바)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라고 말한 것은 다만 그 결과만을 언급한 것 뿐이다. 여하튼, 오르바는 떠나갔고 룻은
남았다. 이것은 마치 이스마엘은 떠나가고 이삭은 남은 것처럼(창 25:6), 그리고 에서는 떠나가고 야곱은 남은 것처럼(창 36:6) 하나님의 심오한
구속사적 경륜과 섭리의 결과였다.
성 경: [룻1:16]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동행하려는 룻]
(주);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러한 룻의 고백은 진실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되신다는
올바른 신앙에 근거해 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재혼하여 남은 여생 동안은 편안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9절) 자기의 부모,
친척, 그리고 신을 떠나 아무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룻의 결심은 단순한 효성이나 애정을 초월하여 완전한 자기 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17절). 한편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또하나의 사실은 나오미가 이방 우상의 나라에서도 그 신앙의 빛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여호와 신앙을 물려 주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며느리들을 교훈시켰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가 없었다면, 이처럼 룻이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롬 10:14,15).
성 경: [룻1:17]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동행하려는 룻]
(주); 만일...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 룻의 신앙은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즉 룻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서약의 형태로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맹세했다(삼상3:17;25:22;왕상 2:23). 본래 서약에는
일반적으로 어떤 표적이나 의식이 동반되지만, 여기서는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 서약을 범할 경우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엄숙한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여기서 룻이 맹세를 할 때 '여호와'(Jehovah)라는 신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란 성호는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사용하는 고유한 신명칭이었기 때문이다(왕상 19:2). 그런데 이방인이었던 룻이 여기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룻은 나오미의 신앙을 따라 자기 나라 모압의 신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확실히 지니고
있었다. (2) 룻은 자신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성호로 맹세함으로써 이미 언약의 백성에 속해 있음을 고백했다. 이러한 룻의 신앙에
근거해 볼때 진정 그녀는 여기서 언약을 어긴 자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엄숙히 맹세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룻1:18]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나오미와 동행하려는 룻]
(주); 나오미가...말하기를 그치니라 - 사실 홀로 된 나오미인들 그동안 정든 두 며느리를 떠나 보내는 것을 진정 원했겠는가? 다만 두 자부의
형세적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욕심은 일단 접어두고 그들을 돌려보내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시험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결국 룻만이 통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 두 자부는 나오미의 의도를 따라 각자 자신의 행복의 길을 추구했다. 즉 오르바는 모압 땅 자신의 아비
집에서, 룻은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 모두를 기쁘게 인정했다.
성 경: [룻1:19]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베들레헴에 정착한 나오미와 룻]
(주); 온 성읍이...떠들며 이르기를 - 성읍내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2절) 엘리멜렉 가족이 먼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간 사실도 분명 한때의 큰 화제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어언 10년이 지난 후, 낯선 여인과 함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나오미의 등장은 분명 조그마한 성읍 베들레헴을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소동케 하기에 충분히 재미난 화제거리 였음에 틀림없다.
(주); 이가 나오미냐 - 이 말은 단순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놀라움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방
여인인 며느리만을 데리고 빈손으로 처량하게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껴 발한 탄성이다. 따라서 이 말은 10여년 전 고향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르게(21절) 변한 나오미의 모습과 처지를 반영한 말이다.
성 경: [룻1:20]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베들레헴에 정착한 나오미와 룻]
(주);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 '나오미'(*, Naomi)란 이름의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본장의 전후문맥과 어근을 살펴 볼 때 '감미로운 자', '은혜로운 자', '사랑스러운 자'란 의미를 지닌다. 반면에 '마라'(*, Mara)란 단어는 '괴로움', '쓰라림', '씀'을 의미한다(출 15:23). 그러므로 이처럼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 불러 달라고 한 것은 그녀가 모압에서 생활하는 중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고 괴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주); 이는 전능자가...괴롭게 하셨음이니라 - 여기서 나오미가 특별히 하나님의 신명칭을 '전능자'로 부르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전능자'(*,솨다이)란 신명칭은 택한 백성이 순종의 길로 걸어갈 때는 무한히 축복해 주시되, 어그러진 길로 갈 때는 어김없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명칭이다. 나오미도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사용한 듯하다.
성 경: [룻1:21]
주제1: [나오미와 룻의 신앙]
주제2: [베들레헴에 정착한 나오미와 룻]
(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 이 말에 대한 해석으로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1) 혹자는 엘리멜렉의 가정이 지방 귀족 가문으로서, 그들이 모압을 향해 떠나던 당시에는 베들레헴에서 널리 알려질 정도로 부유하였다고 주장한다(David Atkinson, LeonMoris). (2) 어떤 학자는 나오미가 풍족하게 나갔다는 말은 재산이나 명예의 풍부가 아니라, 든든한 남편과 두 아들로 풍족하게 나갔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il,A.C.Hervey). 그런데 본장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내용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나오미가 떠날때 '풍족했다'는 표현을 쓴 것에 초점을 맞추면 분명히 사람 뿐 아니라 재물도 포함된다. 그렇지만 나오미가 돌아올 때 남편과자식들 없이 공수(空輸)로 돌아온 것에 초점을 맞추면 두 번째의 주장도 타당하다. 사실 충족한 재산을 가지고 이방 땅에 가서 흉년이나 기타 재난으로 망하지 않았다면, 비록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을 지라도 재물까지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생활한 형편을 보면(2:2), 남편과 자식들을 잃은 것 외에 재물까지도 잃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나오미가 떠날 때 풍족했다는 표현을 쓴 것은 위의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주); 징벌하셨고...괴롭게 하셨거늘 - 이 두 동사형은 서로 관련이 있다. 즉 '징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눈 밖에 난 자를
비천하게 만들어 결국 괴롭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괴롭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하나님의 징계로 괴로움을 당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한편 나오미가 본절에서 이두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한 것은 (1) 자기의 고통스러움이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과 (2) 그
징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인다는 회개의 의미로 설명될 수 있다.
성 경: [룻1:22]
주제1: [나오니와 룻의 신앙]
주제2: [베들레헴에 정착한 나오미의 룻]
본절은 1장의 요약이자 2장의 서론으로서, 나오미와 룻의 귀환을 역사적 바탕 위에서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주);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 팔레스틴(가나안)지방에서는 일반적으로 보리를 가을에 파종하여 이듬해 봄에 추수한다(2:23). 그리고 보리 추수가
끝날 무렵에는 밀수확을 한다. 팔레스틴의 보리 추수는 보통 4월말 경에 시작되었으나(수 3:15) 고원 지대에서는 5월 또는 6월 초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또한 보리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나는 주산물 중 하나로서 주로 말이나 노새의 먹이로 경작되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양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보리 수확의 첫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고 봉헌하기 위해 '초실절'(初實節)을 절기로
지킨다(레 23:9-14).한편, 본절은 나오미가 자기 고향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6절), 곧바로 모압 땅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룻2:1]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이삭 줍는 룻]
(주); 친족 - 여기서 이 말은 원문상 흔히 '케티브(모음 부호를 붙이기 이전의 원문 그대로의 자음) 독법'(讀法)을 따라 '메우다'(*)로 읽는데, 그 뜻은 '잘 알고 있는(자)', '가까운(자)'라는 의미를 지닌다(시 55:13;88:8,18). 여기서는 특별히 기업 무를 의무를 가진 '혈족 관계'(kinship)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확실치는 않지만 유대 전승에 의하면,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조카라 한다(Keil, Cassel).
(주); 유력한 자 - 이 말은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인데, '깁보르'는 주로 '용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수 1:14;10:2;삼상 2:4). 그리고 '하일'은 '재산이 많은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며(신 33:11), '재물'을 의미하기도 한다(사 8:4). 뿐만 아니라 '현숙하거나 능력있는 사람'에게도 사용되었다(3:11). 따라서 본절에서 보아스(Boaz)를 유력한 자라고 칭한 것은 재물이 많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그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영역본들은 각각 '유력한 자산가'(a mighty man of wealth, KJV),'명망있는 유지'(a man of standing, NIV)등으로 번역했다.
(주); 보아스(*,Boaz) - 히브리 어근상 그 이름의 뜻이 분명치 않다. 따라서 (1)혹자는 '벤 아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힘센(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assel). (2)혹자는 '바아즈'(*)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며, 그 뜻은 곧 '민첩한(활동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il).
(3)그리고 혹자는 이 말의 어근을 산스크리트어(Sanskrit, 梵語)의 '부안티'(bhuvanti)에서 찾아, 그 뜻을 '복된(자)'로 보기도 한다(Raabe).
성 경: [룻2:2]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이삭 줍는 룻]
(주);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 동서 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추수기가 되면 가난한 자들은 추수를 한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했다. 특별히 히브리 사회에서 모세 율법은 이러한 자들을 위해 밭이나 포도원, 그리고 감람원에서 추수하는 자들로 하여금 밭의 가장 자리에 있는 농작물의 일부를 남겨놓도록 규정하고 있다(레19:9,10;23:22;신 24:19). 룻은 이러한 율법의 혜택과 관습을 좇아 자신과 시어머니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밭으로 나갔다.
(주); 뉘게 은혜를 입으면...이삭을 줍겠나이다 - 모세 율법은 분명 가난한 자의 생계를 보장키 위해 추수 후에 그 떨어진 이삭을 줍는 자들의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19:9,10;23:22;신 24:19). 그러나 백성들은 그 규정을 무시했다. 즉 여호수아 사후(死後)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과 번영을 누리게 되자,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사리 사욕을 취하는 사사 시대의 타락상을 연출했다.
따라서 당시 가난한 자들은 율법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밭주인의 냉대와 멸시를 받기 일수였고 심지어 이삭 줍는 일을 금지당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모압 여인 룻(Ruth)으로서는 모압에 대한 이스라엘의 좋지 못한 감정을 고려할 때, 결코 이삭 줍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룻의 이
말은 이방인으로서의 당할지도 모를 온갖 어려움과 냉대를 감수하고, 또한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하루종일 허기를 참아가며 일해야 할 육체적인
고통을 기꺼히 감수하고 '내가 누군가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in whose eyes I shall find favor) 그를 좇아 열심히 이삭을 줍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지극한 효성이 구체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로써 룻은 신실한 신앙을 소유한
여인일 뿐 아니라(1:16,17), 홀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현숙한 여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여인으로 부각된다.
성 경: [룻2:3]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이삭 줍는 룻]
(주); 베는 자를 따라...이삭을 줍는데 - 후대의 유대 랍비들은 '이삭 줍기'에 대해 나름대로의 규정을 정했다. 그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즉 '만일 추수하는 자가 보리나 밀 등을 벨 때 한 줄기나 두 줄기를 놓쳐버리면 그것은 이삭 줍는 자의 몫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줄기 이상 베지 않았다면 그것은 주인에게 다시금 돌려져야 했다'(Pulpit Commentary).
(주); 우연히...이르렀더라 -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 보아스의 밭으로 갔을 때, 그녀는 당시 그 밭의 주인에 대해서나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분명코 이것은 룻의 입장에서는 우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기회였다(Gillis Gerleman). 따라서 본서의 저자가 본절에서이 말을 한 것은 앞으로 발생되는 일이 인간의 계획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성 경: [룻2:4]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보아스와 룻의 조우(遭遇)]
본절은 보아스와 그의 일꾼들간에 인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 히브리인들이 나누었던 인사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이웃의 안부를 물을 때(삼하 8:10;11:7;왕하 4:26) 혹은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나 헤어질 때(삼상1:17) '샬롬'이라는 인사말을 나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평강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가 축약된 인사로서, 히브리인들에게는 가장 보편적인 인사법이다. 그리고 이같은 인사말과
더불어 그들은 서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창27:26;출 18:7;삼상 20:41). (2)존경과 충성을 표시하는 인사로서 땅에 엎드려
절하는 방식(창 50:18;삼하 9:6;14:4;왕하 4:37;대하 20:18)과 무릎을 꿇어 절하는 방식(창42:6)이 있었다. 그런데 본절의 인사법은 이러한
관습적인 것과 퍽 다르다는 인상을준다. 즉 보아스는 자기 일꾼들에게 매우 자상하게 인사했으며, 일꾼들도 그에게 매우 친밀한 말로 화답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아스의 평소 신앙 인격을 잘 증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룻2:5]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보아스와 룻의 조우(遭遇)]
(주); 사환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는 '젊은 사람', '심부름꾼','시종'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아르'는 '노예'나 '종'을 의미하는 '에베드'(*)와는 매우 다르다. 즉, '나아르'는 대체로 독립된 가정을 가지며, '에베드', 즉 '종'들을 관장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도 사용된다(삼하 9:9,10). 본절에서 사용된 '나아르'도 추수하는 일꾼들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아(6절), 단순한 종이나 사환이 아니라 보아스의 가사를 책임맡은 감독관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주); 이는 뉘 소녀냐 - 사실 룻은 그동안 유력한 엘리멜렉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유복하게 생활해 왔기 때문에, 여느 이삭 줍는 가난한 여인네와는
다른 고상한 기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룻은 훌륭한 신앙과 고매한 덕성을 지닌 현숙한 여인으로서 그 단정한 몸가짐으로 다소곳하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금방 보아스의 눈에 띄인것 같다.
성 경: [룻2:6]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보아스와 룻의 조우(遭遇)]
(주); 이는...모압 소녀인데 - 주인의 질문에 즉각 응하여 룻을 소개하는 사환의 대답을 볼 때, 그리고 룻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보아스가 한
말(11절)을 볼 때 당시 베들레헴 성내에서는 룻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것 같다. 더욱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룻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과 시모(媤母)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룻2:7]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보아스와 룻의 조우(遭遇)]
(주); 잠시 집에서 쉰 외에 - 커버데일(Coverdale) 역에서는 본절을 '잠간 동안 집에 가곤 했던 것 외에'라고 하여 '집'이란 말이 성읍에 있는
나오미의 주택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본문에 사용된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아트'(*)는 '집'이란 뜻 말고도 '임시적인 오두막',
'장막', '움막'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룻이 점심 식사를 밭에서 한 것으로 보아(14절), 그녀가 쉰 곳은 성읍에 있는 집이 아니라 더위를
피하기 위해 임시로 지은 장막이나 오두막이었을 것이다(JamesMorison). 아무튼 본절에서 저자가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은 그녀가 어디에서 쉬었느냐
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룻이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성 경: [룻2:8]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주); 내 딸아 들으라 - 이 한 마디 말 가운데서 우리는 보아스의 따뜻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는 룻을 단순히 값싼 동정심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룻이 수치심이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매우 친밀한 말로 이야기를 건넸던 것이다. 한편 '내 딸아'(*, 빗티)라고 부르는 관습은 비단 자기 딸 뿐 아니라, 지체 높은 어른이 젊은 여인에게 이야기를 건넬 때나 충고를 할 때도 흔히 사용된다.
(주); 여기서...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 '나의 소녀들'이란 추수하는 자들의 바로 뒤를 따르면서 그 베어 놓은 줄기를 단으로 묶는 여인네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아마도 보아스는 어떤 특정한 위치를 룻에게 지정해 주면서 그 권리를 인정해 준 것 같은데, 바로 단 묶는 여인들 틈에서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했던 것 같다.
성 경: [룻2:9]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주); 소년들의 길어 온 것 -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물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그 지방에서는 우물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
발전되었다. 따라서 들로 일을 하러 갈때에는 성읍 우물에서 하루 종일 마실 물을 길어가야 했다. 그런데 들에 일을 하러 나오는 룻의 입장에서 볼
때 하루 종일 마실 물을 가져오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년들이 성읍까지 가서 애써 길어온 물을 마신다는 것은 이삭 줍는 자의
처지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소년들이 힘들게 길어 온 물을 마실 수 있는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때 소년들이 물을 길어 왔던 우물을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 중 마시기를 원했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삼하 23:14,15)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A.C.Hervey, Dean Stanley)
성 경: [룻2:10]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주);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 전신을 땅에 엎드려 절하는 행동은 원래 하나님 앞에서(수 7:6;삿 13:20), 혹은 왕 앞에서(삼하 14:4,22) 취하던 자세였다. 그러나 단순히 아주 깊은 겸손을 표시하기 위해 그러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여기서 룻은 외모만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 보아스의 사려 깊은 인격에 대해 심심한 존경의 뜻을 표함과 아울러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여 깊은 겸손을 표했던 것이다.
(주);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 전통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이방인들을 천하게 여겼다. 이같은 관습은 율법의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던데서
연유되었다(신 7:3). 그러나 본질적으로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간의 결혼을 금지시킨 것은 종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라,
종교적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즉 이방인과의 결혼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기
때문에'(왕상 11:1,2) 금지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이 정신을 오해하여 나중에는 자기 동족인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후
앗수르인과 혼혈되자 그들(사마리아 사람들)과도 상종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여기서 룻도 아마 이러한 점을 의식하고서, 자신이 히브리인들이
천하게 여기는 이방 여인이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 경: [룻2:11]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본절에 나타난 바, 우리는 존경받는 유력한 인물 보아스의 대답을 통해 룻의 두 가지 뛰어난 품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이란 말을 통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시모(媤母)를 극진히 받들어 섬기는 룻의 '효성'(孝誠)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란 말을 통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향한 순수하고도 충직한
룻의 '신앙'(信仰)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룻이 복을 받아 머지 않아 보아스(Boaz)의 아내가 되고, 후일 성군 다윗(David)의 증조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때문이었지만, 나아가 룻의 고결한 품성도 그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 경: [룻2:12]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주); 여호와께서...보응하시기를 원하며 -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일가 친척, 본토를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나는...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는 말을 연상케하는 보아스의 축복이다. 실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온 이 이방 여인에게 보아스의 이 말은 큰 위로의 말이 되었을 것이다(13절).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이 명칭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언약을 맺은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여기서 보아스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율법을 통해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출 6:2;19:3;20:1-26).
(주);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 이 표현은 출 19:4과 신 32:11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즉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가 마치 어미 독수리가 그 넓고 강한 날개로 새끼를 안전하게 인도하고 보호해 주는 것과 같은 행위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보아스가 룻에게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룻이 언약의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그녀가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시 91:4). 보아스의 이 말은 앞에서 룻이 자신을 가리켜 '이방 여인'으로
말한 것(10절)에 대한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성 경: [룻2:13]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 - 룻은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란 말과 같이 자신에게는 최대의 비하와 겸손으로써,
그리고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란 말같이 보아스에게는 최고의 존경과 감사로써 자신이 받은 큰 위로와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즉 모압 땅을 떠나온 이래로, 이처럼 따뜻한 인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룻은 그 무엇보다도 이방 여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맞이해 주는
보아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어떤 호의보다도 더욱 큰 힘과 위로 및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성 경: [룻2:14]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주); 초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메츠'(*)는 포도주에서 난 '초'(민 6:3)를 의미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빵과 함께 식사할 때 양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근동 지방에서는 갈증을 푸는 음료로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Goslinga).
(주); 볶은 곡식 - 이것은 아직 덜 여문 밀을 모닥불등에 살짝 볶은 것으로(레 2:14), 아직도 근동 지방에서는 빵에 곁들여 사용되거나 빵대신
주식으로 애용되기도 한다.
성 경: [룻2:15]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주);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 여기서 '곡식 단 사이'(between the sheaves)란 말은 분명 곡식 단들을 세워 놓은 바깥과는 구별되는
말로서, 곧 곡식 줄기를 한웅큼씩 모아들인 소녀들이 크게 단(sheaf)으로 묶는 지점일 것이다(J.Morison). 따라서 그곳은 그 묶는 과정에서 자연히
곡식 이삭들이 주변에 많이 널려지는 곳이었다. 따라서 만일 여기서 룻이 이삭을 줍는다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충분한 양을 쉽게 모아들일 수
있었다.
성 경: [룻2:16]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룻을 선대하는 보아스]
(주); 뽑아 버려서 - 이 말을 좀더 정확히 옮기면 '떼어 내어서'가 된다. 즉 단을 묶을 때 그 단에서 흘린 것처럼 떼어 내어 룻으로 하여금 그
곡식을 줍게 하라는 의미이다. 특히 보아스의 이 말 속에는 룻이 곡식을 주울 때, 동정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아무튼 일하는 소년들에게 내린 보아스의 이 지시는 분명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이나 긍휼의 정도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분명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의 효성과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고, 그로 인해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p.480).
성 경: [룻2:17]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나오미에게 고하는 룻]
(주); 그 주운 것을 떠니 - 아마도 룻은 그 주운 보리 이삭을 편편한 바닥이나 또는 멍석 위에 올려 놓은 후 적당한 막대기나 돌로서 두들겨 떨었을 것이다.
(주); 한 에바 - '에바'(Ephah)는 구약 시대 부피의 단위로서 대략 23ℓ즉 약 12되 정도의 분량이다. 이처럼 룻이 하루 동안 23ℓ 정도의 이삭을
주웠다는 것은 보아스가 그녀에게 보여 준 호의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즉 보아스는 룻에게 점심 식사를 줄 때, 그녀가 먹고 남을
만큼 풍족히 제공했을 뿐 아니라(14절), 곡식 단을 묶을때 조금씩 흘리도록 함으로써 그녀가 풍성히 거둘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16절). 그러므로
룻은 이러한 보아스의 호의 때문에 넘치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룻2:18]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나오미에게 고하는 룻]
(주); 보이고...드리매 - 이 한 구절 속에 시모에 대한 룻의 효성이 함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즉 룻은 자신을 보내놓고 걱정하시는 시모를
위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하루동안 한 일을 죄다 보여 드렸을 뿐 아니라, 또한 대접받은 음식을 자기만 배불리 먹은것으로 끝나지 않고(14절) 집에
홀로 있는 시모를 생각하여 정성껏 남겨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룻의 행동은 끝까지 시모를 공경하며 따르겠다고 약속한
것(1:16,17)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룻2:19]
주제1: [보아스와 룻의 만남]
주제2: [나오미에게 고하는 룻]
(주);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 연속되는 나오미의 질문 속에서 나오미의 궁금증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나오미의 생각에 여인이 하루 동안 보리 이삭을 한 에바 정도 줍는다는 것도 예사 일이 아닐뿐더러, 준비해 가지 않은 점심을 먹고 남겨 가져온다는 것도 누구의 호의를 입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젊은 과부인 룻의 신변이 염려되어 그녀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분명 오늘 룻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그 일의 자초 지종을 듣고 또한 알기 원했던 것이다. 이에 룻은 시모의 궁금증을 풀어 드리기 위해 그날 일어났던 일의 자초 지종을 예의 그 자상함으로 이
야기 했을 것이다.
성 경: [룻2:20]
(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 여기서 '생존한 자'란 나오미와 룻을 가리키며, '사망한 자'란 모압 땅에서 죽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말한다. 그런데 본절에는 한 가지의 문제가 내포되어있다. 즉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를 베푼 '그가' 곧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1)혹자는 본절의 주어 '그'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Keil, Goslinga). 이러한주장은 사람이 '사망한 자'에게까지 은혜를 베풀 수 없기 때문이라는 추론에 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영역 성경 중 NIV와 Living Bible에서도 본 구절의 주어를 구체적으로 '하나님'으로 밝히고 있다. (2)그러나 혹자는 본절의 주어를 문장 그 자체에서 보여주는 대로 '보아스'로 주장한다(Matthew Henry, A.C.Hervey). 이 주장을 따라 본절을 해석해 보면, 나오미는 보아스가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이 살아있을 때에도 자신의 가정에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 살아 있는 자신들에게 베풀고 있는 보아스의 호의를 그때의 상황과 연결시켜 말했다는 의미가 된다. 결론적으로무엇보다여기서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好意)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접한 나오미가 보아스의 호의를 칭송하면서 그 호의를 강조하고자 이 말을 사용했다고 볼 때, 본절의 주어는 '보아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주); 기업을 무를 자 -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엘'(* )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그리고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고엘(Goel)이 된 자는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는데, 그것은 곧 (1)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했고(레 25:25,26), (2)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져야 했으며(민 35:12,19,21), (3)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代)를 이어주어야 함은 물론, 심지어 그 친족의 죄값을 대신 받기까지 했다(민 5:8). 그리고 '고엘의 자격'으로서는 (1)혈연적 관계에 있을
것(신 25:5-7), (2)자원해야 할 것(3:13),(3)그리고 고엘로서의 능력을 구비할 것 등을 들 수 있다(레 25:25 주석 참조).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베들레헴성에서 유력한 자(2:1)이며, 친족에게 호의를 베풀 줄 아는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정의 고엘로서 가장 합당하였다<레 25:8-55 강해, 근족의
의무>
성 경: [룻2:21]
(주);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 보아스의 큰 호의에 룻 또한 감격하여 시모 나오미에게보아스가 자신에게 베푼 호의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세히 말해준다.
(주);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 여기서는 보리 추수만을 의미하지 않고, 곧바로 이어지는 밀 추수 때까지를 의미한다(23절).
(주);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나 - 여기서 '소년들'(* , 네아림)은 비록 남성형으로 표기되었지만 엄밀히 '소녀들'과 구분하고자 그리 사용된 것은
아니다. 다만 룻으로 하여금 벼 베는 소년들 뒤를 따라가며 단을 묶는 소녀들 틈에서 추수기가 다 끝날 때까지 부담없이 이삭을 주우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8,22,23절).
성 경: [룻2:22]
(주);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 나오미의 이 말 속에는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정의 '고엘'이 될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즉 앞절에서(21절) 룻이 보아스의 말(8절)을 나오미에게 전해 줄 때,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친족의 고엘이 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했고, 따라서 룻에게 다른 사람의 밭으로가서 보아스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을 삼가하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룻이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려다 자칫 거칠게 다루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룻2:23]
(주);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 팔레스틴 지방에서 보리는 밀보다 먼저 익어서 대개 태양력으로 4월 중순경에 거둬들인다. 그리고 약 2주일 후에 밀 추수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내내 룻의 겸손하고 근면한 품행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것이고, 보아스는 이러한 룻의 행동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보아스와 룻의 관계가 점차로 무르익어 가서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Morison, Cassel).
(주);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 이 짧은 한 마디의 말은 곧 시모(媤母)에 대한 룻의 변함없는 효성을 암시해 준다. 즉 18절에서 보여지듯, 그
근면하고 순결한 성품으로 하루 일을 마친 다음 그날의 좋은 것들로 시모를 봉양하고, 아울러 시모에게 하루의 일과를 자상하게 이야기하는 등 물심
양면으로 시모를 편하게 받들어 모시는 룻의 한결같은 모습이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룻3:1]
(주); 안식할 곳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노아흐'(* )는 '안식', '안식처'로 번역되는데, 일반적으로는 '평화스럽고 안정된 생활 여건'을
의미한다(Keil).그런 의미에서 영역본 RSV에서는 이 말을 '한 가정'(a home)으로, 그리고 LivingBible에서는 '남편'으로 각각 번역하였다. 이에
따라 공동 번역에서도 '보금자리'로 의역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사용된 '마노아흐'는 과부가 가정을 가지는것 즉 남편을 얻음으로써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을 암시한 말이다(Rosenmuller). 사실고대 사회에서 가장 소외당했던 계층 중 하나인 과부들은 남편을 얻음으로써 남편의
보호 하에서 평안함과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1:9).
성 경: [룻3:2]
(주); 오늘 밤에...보리를 까불리라 - 당시 팔레스틴의 타작법은 다음과 같았다. 즉 일단 보리단을 편편한 평지(타작 마당)에 펴 놓은 후 도리깨로
골고루 조심스럽게 두들겨 보리나 밀의 낟알들이 떨어지게 한다. 그리고는 낟알에 섞인 지푸라기나 보리 수염 등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바람에
까불리는 작업을 한다. 즉 타작 마당에 떨어진 곡식 낟알들을 대충 주워 모아 공중에 던져서 까불리면 바람에 의해 지푸라기나 보리 수염 등은
날아가고 곡식 낟알들만 마당에 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곡식 낟알들만을 모아 자루에 퍼 담으면 일단 타작 행위는 끝난다. 따라서 당시 타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람이 불어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보리 타작할 즈음인 팔레스틴 지방의 여름은 그 기후상 낮에는 바람이 별로 없고 주로
오후 5시 이후의 밤에 내륙에서 지중해 쪽으로 바람이 불었다. 따라서 타작은 바로 이때 행해졌다. 그리고 타작을 하는 일꾼들은 저녁 내내 일을
하고 나서는 그 타작 마당의 곡식 더미 곁에서 그대로 자는 것이 보통이었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상 여름에는 겉옷만 덮고도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나오미의 말은 당시의 이러한 타작법의 배경 하에서 나온 말이다.
성 경: [룻3:3]
(주); 타작 마당 - 추수한 곡식단을 떠는 장소로 사용되는 '타작 마당' (threshing-floors)은 단단하게 다져진 평지를 가리킨다. 즉 로빈슨(Robinson)의 말에 따르면, 주로 노천에서 발견되는 타작 마당은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대략 그 반경이 15m 가량이라고 한다. 그리고 타작 마당은 대체로 여러 개가 서로 인접해 있다고 한다(Keil&Delitzsch,op.cit.p.484).
(주);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 - 보아스가 타작 마당에서 먹고 마신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 (1)타작이 끝날 때까지 주인인
보아스가 곡식을 지키기 위해 타작 마당에서 밤마다 잠을 잤을 것이다(Hervey, Robinson). (2)보아스는 보리 까불릴때에만 나와서 곡식을 지키기
위해 그 마당에서 잠을 잤을 것이다(Atkinson). (3)모든 추수가 필하였을(2:23) 뿐만 아니라 보리를 전부 까불려 놓았으므로, 그동안 수고한
일꾼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을 것이다(Matthew Henry). 이러한 주장 중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더 정확한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을것이다. 즉 보아스는 베들레헴 성읍에서 유력자이므로(2:1), 긴 추수 기간 동안 밤마다 밖에서 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아스에게는 시종들이 많이 있었으므로(2:8), 굳이 그가 그 타작 마당을 지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나와
먹고 마신 것은 압살롬이 양털을 깎은 후(삼하 13:23) 연회를 베풀었듯이, 추수를 마감하는 보리 까부르기를 필하는 밤에 일꾼들과 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룻3:4]
(주);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 룻에 대한 나오미의 이러한 지시는 일견 부도덕해 보인다. 그러나 '고엘 제도'(2:20)라는 당시의 히브리 율법에 근거할 때 나오미의 이러한 지시는 지혜롭고 당연했다. 왜냐하면 모세 율법에 근거된 바 당시 고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신 25:7). 한편, 이런 점에서 본절에 언급된 나오미의 지시가 반드시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와 동침하도록 권유한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나오미가 자신과 룻의 의사를 적극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보아스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으리라 추측된다. 한편 나오미가 대담하게 이 방법을 룻에게 추천한 것은 (1)평소 추수 기간 동안 보아스와 룻의 관계를 주의깊게 살펴본 결과 어떤 확신이 나오미에게 섰기 때문일 것이다, (2)보아스가 룻에게 상당한 호의와 찬사를 보냈을 뿐 아니라, (3)또한 보아스는 유력자이며 동시에 덕망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 모든 계획을 준비한 것은 나오미이다. 그러므로 룻은 믿는 마음으로 시모의 계획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계획의 결과는 보아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해 달라고 조르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보아스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길 각오였다. 즉 나오미의 의도는 누구 보다도 '고엘 제도'에
관한 모세 율법(레 25:24,25;신 25:5-10)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덕망있는 보아스의 결정에 모든 일을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오미가
룻을 믿듯이, 보아스 또한 믿었다는 뜻이 된다. 결국 나오미의 이러한 믿음의 확신이 조만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성 경: [룻3:5]
(주); 다 행하리이다 -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는 율법으로서 '계대 결혼'(1:11)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었지만, 그러한 규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의 가난한 과부가 베들레헴 성읍에서 소문난 부자인 동시에 덕망있는 보아스에게 밤에 잠자리로 찾아가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풋이 아무리 보아스를 마음속으로 연모했을지라도 여자로서 남자에게 먼저 접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시모의말에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말씀대로 다 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면면(面面)이 곧 평소 시모를 공경하는 룻의 효성의 발로라 볼
수 있다.
성 경: [룻3:6]
(주);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 이 말은 룻이 시모 나오미의 명을 좇아 보아스에게 행한 모든 일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결론을 내려 놓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표현이다.
성 경: [룻3:7]
여기서 보아스가 노적가리(the heap of grain, RSV)곁에 누운 때와 룻이 그의 발치에 들어가 누운 때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보아스가 잠자리에 누워 깊이 잠들지 않았다면 아무리 룻이 가만히 발치에 들어와 누웠을지라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8절을 주목해 볼 때 보아스가 발치에 이상이 있음을 느꼈던 때는 한밤중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므로 수리아역(the Peshitta)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마당에서 상쾌한 잠을 잘 때'라는 말을 첨가시켰던 것이다.
(주);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 - 혹자는 보아스의 이러한 행동이 단지 너무 시간이 늦어 다음날 아침 다시 일하기에 편하도록 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그러나 이 해석은 약간 문제가 있다. 즉 다음날 아침부터 타작 마당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꾼들이지 보아스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일꾼들의 일이 한참일 즈음에 때때로 들에 나왔었던 것이다(2:4). 따라서 보아스가 곡식 단들을 쌓아둔 노적가리
곁에 누운 것은 노적가리를 지키고자 하는 특별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타작이 끝나고 보아스가 그곳에서 잠 잘것을 나오미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주인이 타작 마당에서 잠을 자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Robinson, Thomson).
성 경: [룻3:8]
(주); 밤중에...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 우리는 본절의 장면을 눈에 선연히 그릴 수 있다. 즉 타작 후 베푼 잔치에서 배불리 먹고 마신 결과,
약간의 취기와 더불어 포만감에 젖어 깊이 잠들었던 보아스가 한밤중의 냉기로 인해 약간 몸을 뒤척거렸을 것이고, 그때 그는 발치에서 이상한
감촉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보아스는 놀라는 기색으로 당연히 그 물체를 확인해 보았을 터이고, 그 결과 발치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을
것이다.
성 경: [룻3:9]
(주);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표현을 룻이 보아스의 보호를 받기 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Matthew Henry, Hervey, Atkinson).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보호하심 같이(2:12 주석 참조), 룻은 보아스의 날개 아래서 보호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즉 구체적으로 룻이 보아스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를 받는 길은 결혼을 통해서였다. 후일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겔 16:8). 그런데 결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 관계를 의미한다. 이런 견지에서 여기 룻은 구혼(求婚)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처럼 말했던 것이다.
(주);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 이것을 히브리 원문대로 직역하면 '당신은 기업 무를 자이므로'가 된다. 즉 룻은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정의 '기업을 무를 자'(a kinsman-redeemer, NIV)이기 때문에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 율법에서도(신
25:5-10), 이스라엘 사회의 관습에서도 이 법은 강제성을 띠지는 않았다. 특히 '기업을 무르는 자'(*, 고엘)는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수혼(嫂婚) 제도'(계대 결혼 제도, 1:11 주석 참조)에 의해 얽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보아스에게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단순히 고엘의 의무 외에 그녀 자신이 보아스와 결혼하기를 원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에게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라는 말로 칭찬했던 것이다(10절). 한편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2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룻3:10]
(주);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 이 말은 룻이 매우 젊은 여인이었던 만큼, 자신의 육신의 안목대로 젊은 남자를 좇을 수도 있었으나, 그리하지 아니하고 시모의 뜻을 좇아,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아 희생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보아스가 칭찬하는 말이다. 사실 보아스는 룻의 시부(媤父) 엘리멜렉의 동년배 나이로서, 당시 룻에게는 보아스가 아버지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주);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 룻이 처음 베풀었던 인애는 자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시모를 모시기 위해 베들레헴에
왔던 것이며, 나중에 베풀었던 인애는 시모를 잘 공경할 뿐 아니라 젊은 과부로서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던 것이다(G.Gerleman).
비슷한 의미로서, '처음 인애'는 죽은 남편에게 베풀었을 룻의 사랑이며, '나중 인애'는 근족과 결혼함으로써 그 남편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남기고자 하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Keil, Michaelis). 한편, 특별히 본절에서 보아스가 '인애'라는 말로 그녀의 현숙함을 표현했는데, 이 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인애'(仁愛)란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 )는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며, 때로는
인간 관계에서 끊을 수 없는 우정이나 사랑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룻의 행위가 진실된 사랑에 근거했음을 칭찬했던
것이다.
성 경: [룻3:11]
(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 고엘이 되어줄 것을 겸손히 청하는 룻의 요구에 보아스는 일체의 변명이나 망설임 없이 이스라엘 관례에 따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룻의 인격에서 인간적 조건과 이해 타산을 초월한 인애(*, 헤세드)를 발견하고 자신도 이러한 인애로써 응답하였던 것이다.
(주); 현숙한 여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쉐트 하일'(* )은 본래'힘있는 여자', '능력있는 여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신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감화력있고 덕력(德力)있는 여자를 가리킨다. 한편 후일 잠언 기자는 현숙한 여인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즉 (1)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게 하며(잠 31:11-19), (2)가난한 자에게 선을 행하고(잠 31:20), (3)남편을 존귀케 만들며(잠 31:23), (4)모든 언사에 지혜와 규모가 있고(잠 31:26), (5)부지런하며 게으르지 아니하고(잠 31:27), (6)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잠 31:30,31)라 했다. 이처럼 룻도 이 모든 조건을 구비하여 성읍에서 현숙한 여자로 소문이 나있었다(2:11).
(주); 나의 성읍 백성 - 이 말은 문자적으로 '내 백성의 온 문(門)'(all the gate of mypeople)을 의미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로 성문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창19:1;23:10;34:20;삼하 15:2;느 8:1;시 69:12). 특히 성문에서는 그 성읍의 장로들이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재판하던
장소이기도 했다(신 21:19). 그래서 어떤 사람의 행위든지 성문에서 판결되어 사방으로 소문이 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잠 31:31).
성 경: [룻3:12]
여기서 보아스는 자신의 소욕대로 행동하지 아니하고,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있다는 사실을 룻에게 일러줌으로써, 그에게 먼저 '고엘'의 의무를 물어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보아스의 이러한 조치는 율법의 정도(正道)를 따르는 신중하고 분별있는 행동이었다.
(주); 기업 무를 자 - 2:20 주석 참조.
(주);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 기업 무를 자의 우선 순위는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부터시작된다. 그런데 왜 나오미는 더 가까운 친족을 두고
보아스로 하여금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요구했는가 ? 이에 대하여 혹자는 나오미가 오래 동안 타국에가 있었던 관계로 남편의
가계(家系)를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atthewHenry). 그러나 4장에 나타난 바 보아스와 룻의 가까운 친족과의 대화를 살펴볼 때, 그 가까운
친족은 기업을 무를 만큼 덕망이나 재산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4:1-6). 이것을 미리 알았던 나오미는 그 사람 보다는 보아스 쪽이 더 확실히
'고엘'의 의무를 다하리라 확신했고, 따라서 처음부터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다.
성 경: [룻3:13]
(주);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 때는 시간상으로 한밤중이었으므로 이미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룻이 지금 보아스를 떠나가면 그곳은 들판이기에, 그녀가 마땅히 들어가 쉴만한 곳이 없었다. 이러한 룻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보아스는 룻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보아스의 사려깊은 언사는 이미 이삭 줍기의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 바 있었다(2:15,16).
(주); 기업 무를 자의 책임 - 2:20 주석 참조.
(주);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행해지던 일반적인 맹세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맹세하는 것은 맹세한 자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그 맹세한 내용을 반드시 실행할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이맹세 속에는 이를 어긴 자의 증인되신
여호와께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엄숙한 암시도 포함되어 있다<6-13절 강해, 맹세에 대한 바른 이해>.
성 경: [룻3:14]
(주);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 룻은 보아스의 말에 따라 새벽 곧 성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잘 알아볼 수 없는 시간까지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 있었다. 이처럼 룻이 보아스의 발치에서 잠을 잔 것으로 보아 이 두 사람은 순결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보아스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전통을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즉 모리스(Morris)는 탈무드의 주석인 미쉬나(Mishna)를 인용하여 어떤 사람이 이방여인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의심을 받게 되면 그는 그 여인과 수혼(계대 결혼)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보아스는 기업 무르는 모든 절차가 끝날 때까지 매사에 신중을 기하여, 자신과 룻 사이에 부도덕한 일이 발생했다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주);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 모세 율법에 기록된 바(신 25:5,6) 계대 결혼의 권리를 이행코자
취한 룻의 행위는 결코 부도덕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룻이 보아스의 말을 좇아 타인의 눈길을 피해 새벽 미명 어둑어둑할
때에 보아스 곁을 떠난 것은 단지 그녀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룻과 보아스가 함께 밤을 지새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1)변명할 겨를도 없이 이방 여인 룻은 물론이요, 보아스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충분이 있었기 때문이며, (2)무엇보다도 세도있는 보아스의 가까운 친족되는 사람들이 쓰러진 가문의 이방 여인 룻과 보아스의 결합을
극구 방해하게 될 빌미를 주기 때문이었다(Rowley).
성 경: [룻3:15]
(주); 겉옷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테파하트'(* )는 성경에서 사 3:22에 한 번 더 나오는데, 이는 '겉옷'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3절에서 언급된 '옷'(*, 시믈라)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이것이 영역본 KJV에서는 '수건'(veil)으로, NIV 와 Living Bible에서는 '어깨 걸치개'(shawl)로 각각 번역되었다. 이에 따라 혹자는 이 '겉옷'을 '커다란 어깨 걸치개'로 해석한다(Keil). 아무튼 본문에서 이 겉옷으로 보리를 싼 것으로 보아 단순한 겉옷이라기 보다는 외투에 걸쳐 덮는 '커다란 수건'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아마 이것으로써 룻이 어깨를 덮으면서 동시에 얼굴을 가리고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 보리를 여섯 번 되어 - 몇몇 주석가들은 여기 여섯 번 된 것을 '오멜'로 생각한다(Goslinga, Matthew Henry). '오멜'(Omer)은 에바의
1/10로서, 1 오멜은 약 2.3리터에 해당한다. 따라서 6오멜은 약 14리터(약 7되) 정도가 된다. 또 이와 달리 랍비들이나 탈굼역에 따르면, 여섯 번
된 것을 6 '세아'(Seah)로 생각한다. '세아'는 '에바'(Ephah)의1/3로서, 1 세아는 약 7.6리터에 해당한다. 따라서 6세아는 약 46리터(약 24되)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추론이다. 왜냐하면 (1)이것은 룻이 혼자서 들고갈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량이며, (2)또한 그 만큼의
분량은 그녀의 겉옷으로 쌀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 모든 추론과 상관 없이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되어 주었다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다(Cassel). 즉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줌으로써 자신의 말이 헛된 것이 아니라, 참말임을 확증시켜 주고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던 것이다.
아울러 '안식년 규례'(출 23:10,11;레 25:2-7,20-22;신 15:1-15)에 따르면, 6년은 봉사와 수고의 기간이며 7년째는 안식과 해방의 순간이다. 따라서
보아스는 룻에게 6번 보리를 되어 줌으로써, 수고와 노역의 긴 기간이 이제 다 되었음을 암시한 듯하다. 비록 당시 룻은 히브리인들의 관습과
규례에 익숙치 못했으므로 그 의미를 잘 몰랐다고 해도, 룻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나오미는 즉각 그 상징적 의미를 알았던 것같다(18절).
성 경: [룻3:16]
(주); 어떻게 되었느냐 - 본 구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너는 누구인고 ?'(미아트, * )가 된다. 따라서 혹자는 나오미가 자기 집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어두워서 식별하기 어려웠으므로 이렇게 말했다고도 주장한다(Drusius). 그러나 룻이 들어왔을 때 나오미가 '내 딸아'라고 불렀으므로 이
구절은 자기 집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물음이 아님에 틀림없다. 한편 영역본 KJV는 이 말을 문자적으로 '너는 누구인고 ?'(Who art
thou ?)라고 직역했으며 NIV, Living Bible, RSV는 '어떻게 되었느냐 ?'(How did it go ?)로 의역하였다. 그런데 이 말 다음에 바로 이어서 룻이
시모에게 간밤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어떻게 되었느냐'로 의역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성 경: [룻3:17]
(주); 빈 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 보아스도 분명 룻의 행동 배후에는 그녀의 시모나오미의 세심한 배려와 조언이 있었음을 충분히 감지했을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도 나오미의 그러한 계획에 순순히 응할 용의가 있음을 암시해 주려한
것 같다.
성 경: [룻3:18]
룻으로부터 간밤에 일어난 일의 시종을 들은 나오미는 룻에 대한 보아스의 호의와 애정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의 신실한
인격으로 보아 조만간 약속을 이행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은 더이상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안달할 때가 아님을 알았고, 오직 보아스의 조처를
기다리는 것이 최대로 현명한 방법임을 알았다. 따라서 나오미는 확신있는 목소리로 룻에게 가만히 기다리라고 일렀던 것이다. 이는 일의 결국이
하나님께 달렸음을 믿는 히브리적 신앙의 표현이다(잠 16:1,33). 이처럼 인간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최선의 노력으로 다한 후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쓸모없는 염려와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있다(빌 4:6,7;벧전 5:7).
성 경: [룻4:1]
(주); 성문에 올라가서 - 고대의 성문 어귀에는 대체로 넓은 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친구를 만나거나 새로운 소식을 논의했다(창 19:1;23:10;34:20;삼하15:2;느 8:1;시 69:12). 특별히 이곳은 성읍의 대표들, 특히 장로들이 백성들을 만나고 율법상의 판결을 내리던 곳으로 이용되던 장소였다(신 21:19;수 20:4). 때에 따라서는 왕이 이곳에서 직접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다스리기도 했으며(삼하 19:8;왕상22:10;렘 38:7;대하 32:6),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가끔 이곳에서 가르치고 훈계하며 예언하기도 했다(왕하 7:1;느 8:1,3;렘 17:19,20;36:10). 그래서 장로와 함께 성문에 앉는 것은 큰 명예로 여겨졌고(잠 31:23), 또한 성읍의 유력한 자만이 성문 어귀에 있는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아울러 성문에서 압제하는 일은 곧 재판의 부패를 의미하였다(욥 31:21;잠 22:22). 이처럼 성문은 성읍 백성들에게 있어서 사회.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더불어 성문이 성읍의 시장터라는 사실을 근거하여 볼 때(왕하 7:1), 이곳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장소였던 것같다. 따라서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율법상의 판결을 받기 위함이 틀림없다. 한편 여기서 '올라가서'라는 표현은 성문이 있는 높은 장소에 올라갔다기 보다(Pulpit Commentary) 장로들이 모여 판결하는 장소로 나아감을 의미한다(Keil).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어떤 중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나아갈 때, 위치와는 상관 없이 올라간다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왕하 17:3;24:1;스 7:13;사 36:1).
(주); 아무여 - 여기서 '아무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펠로니 알모니'(* )인데 문자적 번역은 힘들다. 영어로는 'such a one'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말은 보아스가 그렇게 불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명 보아스는 그 사람을 지명하여 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인데, 다만 본서의 저자가 이처럼 기록했을 뿐이다(Keil). 이와 같이 본서 저자가 첫 기업 무를자의 이름을 기록치 않은 것은 아마도 (1)룻의 남편이 될 뻔한 그 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였거나 (2)기록상 무심코 그 자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처럼했으리라 추정된다.
(주); 이리로 와서 앉으라 -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통행하는 유일한 출입구였다. 따라서 성문 앞은 늘 일을 보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따라서 만일 원하는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이곳에서 거의 찾을 수 있었다. 보아스도 이곳 성문 어귀에 앉았다가 원하는
사람을 찾았고, 그에게 '와서 앉으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어떤 문제를 놓고 정식 재판을 받자는 일종의 재판 청구의 말이었다.
성 경: [룻4:2]
(주); 장로 - '장로'(長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는 '턱수염'이란 의미를 지닌 '자켄'(* )과 '백발'을 의미하는 '시브'(* )가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장로라 하면 '자켄'이 사용되었으며, 구약에서는 '시브'가 한 번(스 5:5) 언급되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나이 든' 또는 '연장자'를 의미하는 '프레스뷔테로스'(* )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어원적인 의미를 종합해 보면 '장로'는 한 사회의 덕망있는 연장자로서 어떤 친족, 지파, 지역 사회의 생활 가운데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들을 가리킨다<신 21:1-9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 이스라엘 사회에서장로들은 주로 백성들을 치리하는 일을 맡아 백성들간에 다툼이나 법적인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 노릇을 함으로써 공의를 시행했다. 이외에도 지역 사회의 기강을 세우는 제반 업무 및 중요한 정치, 종교, 사법적인 일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했으며 때로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수 8:10;삼상 4:3). 뿐만 아니라 국가의 왕을 선택하는 일에도 참여했다(삼상 8:4,5;삼하 3:17;5:3). 이러한 장로들의 역할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 포로로 잡혀갔던 이방 땅에서도 계속되었다(렘 29:1;겔 8:1).
(주); 십인을 청하여 - 여기서 장로 10인은 재판 사무를 완벽히 처리하기 위한 법적 성원수였던 것 같다(Cassel). 또는 충분한 증인의 수이기도 한데, 여하튼 장로 10인으로 구성된 재판은 전혀 하자가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후일 유대교는 이러한 전통을따라 하나의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회원수를 장로 10인 이상으로 정했다.
(주);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 본절에 이 말이 언급된 것은 보아스가 베들레헴 성읍의 유력자(2:1)임을 실제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다. 즉
보아스가 장로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앉을 자리를 정해 준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가 장로들중의 지도자급임을 추정할수 있다(Matthew Henry).
무엇보다도 보아스는 유다 지파의 족장이었던 나손(민 7:12)의 손자였으므로, 그의 조부가 소유한 재산을 상속받았을 뿐 아니라, 가문의 지위도
물려 받았을 것이다.
성 경: [룻4:3]
(주); 기업 무를 자 - 2:20 주석 참조.
(주); 관할하므로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케라'(* )는 '팔다'(* ,마카르)의 칼(Qal) 완료형이다. 이에 따라 시리아역(the Peshitta)에서는
'팔았다'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계속되는 대화의 내용으로 볼 때 나오미가 그 땅을 팔았다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땅을 팔았다면 이미 모압 땅으로
엘리멜렉 가정이 이주할 때 엘리멜렉이 다른 사람에게 그 땅을 이미 판것이지 나오미가 판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 완료형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히브리어 완료형(Perfect)은 비단 완료된 과거의 일 뿐 아니라, 미래적 의미로서 미래에
완료.성취될 것이 확실한 약속이나 결심 등에 대해서도 사용된다(Driver). 이러한 의미로 '마케라'를 번역해 보면 '팔려고 결심했다'란 의미가
된다(Goslinga). 이에 따라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가까운 미래를 나타내는 진행형 곧 '팔 것이다'(is seling)로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
Living Bible).
성 경: [룻4:4]
(주); 여기 앉은 자들 - 어떤 영역 성경은 이 사람들을 장로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 내지는 장로들과 동일시한다(Living Bible). 그러나 이것은 원문의 의도를 지나치게 의역한 결과이다. 본래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요세빔'(* )은 '거하다', '앉다', '남아 있다'를 의미하는 분사의 복수형으로 '거하는 자들' 또는 '앉아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어떤 영역 성경은 '거민들'(inhabitants, KJV)로, 어떤 영역 성경은 '앉아 있는 자들'(those sitting, RSV, NIV)로 각각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만일 전자의 번역을 따르면 그곳에 있는 자들은 성읍에 사는 자들로서 구경나온 자들이며, 후자의 번역을 따르면 입회인(立會人)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후 판결이 끝났을 때(9절)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이 증인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앉아 있는 자들'보다는 '거민들'로 옮기는 편이 타당할 것같다.
(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 나오미가 그 땅을 아직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았으므로 '무른다'는 것은 나오미가 팔려고 하는 그 땅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오미가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고 친족 구속자(고엘)를 찾은 히브리 율례상 어떤 사람이 가난하여 그 기업의 땅을
팔 경우에 그는 반드시 그 기업의 땅을 친족, 곧 기업 무를 자(고엘)에게 먼저 팔아야 한다는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Aalders, Goslinga).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땅은 계속 가문 중에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룻4:5]
(주); 룻에게서 사서...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 엘리멜렉에게는 본래 두 아들이 있었다(1:1,2). 따라서 엘리멜렉 사후(死後), 그
기업의 땅은 당연히 두 아들의 몫으로 상속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두 아들마저 모두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기업의 땅은 가까운 친족의 순서를
따라 각각 나오미의 두 자부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두 자부 중 하나(오르바)는 모압 땅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제 기업의 땅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는 룻 뿐이었다. 따라서 보아스는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 사실을 고지했고, 아울러 고엘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룻과 계대 결혼하여 룻의 전 남편의 이름으로 그 기업의 땅을 잇게 하여햐 할 것까지 알려 주었다. 한편, 그런데 이전까지는 '기업 무르는 일'에
대한 언급만 있었으나, 이제는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그 형제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계대 결혼'(신 25:5)에 관한 내용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계대 결혼에 관한 율법은 본래 죽은 자의 형제에게 부여된 것이므로, 여기서 친족에까지 확대된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내용을 나오미가 거래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Matthew Henry). 그러나 신명기의 계대 결혼에 관한 조항에서 언급된
'형제'(신 25:5)의 의미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욱 폭넓게 적용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아스가 했던 말은 나오미가
내세운 조건도 아니고, 보아스가 첨가시킨 말도 아니다. 즉 그것은 율법의 확대 적용에 따른 것이다(4:1-12 강해 참조).
성 경: [룻4:6]
(주);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자는 단순히 나오미의 기업만 무르게 되면 자기에게 분명히 유익이 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땅을 팔아도 '희년'이 되면 도로 찾을 수 있었으나(레 25:25-28), 어떤 사람이 상속자가 없는 친족의 땅을 무르게 되면 그것은 무른 자에게 영원히 속하게 되어 무른 자는 그의 기업을 확장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그 자는 처음에는 선뜻 '무르리라'(4절)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런데 5절에서 보아스의 다음 설명을 듣고 난 그 사람은 재빨리 마음을 바꾸게 된다. 왜냐하면 그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사람은, 룻과 계대 결혼하게 되어 아들을 낳게 되면 무른 그 땅이 룻을통해 난 아들에게 상속되어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을 잇게 되므로 자신에게 유익은 커녕 손해만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Keil). 따라서 이 근족이 취한 자세는 하나님의 선한 율법까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태도라 볼 수 있다.
(주);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자가 그 권리를 보아스에게 넘겨 준 이유로 혹자는 룻이 모압 여인이며, 엘리멜렉
가정의 불행이 모압으로 이주한 탓이며, 말론과 기룐의 죽음 역시 모압 여인과 결혼한 탓으로 돌린다(Cassel).이외에 시리아역(the Peshitta)은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자가 아내를 갖고 있었으므로 룻을 자기 아내로 맡게 되면 그들 사이에 논쟁과 싸움이 일고 후에는 재산 상속 문제가
까다롭게 되는것 때문에 그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Matthew Henry).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본문상에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은 사실 무근한 추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충실한 성경적 진술을 따라 그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이유는 재산상의 손해 때문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성 경: [룻4:7]
(주); 옛적 - 이 말이 의미하는 시점(時點)은 본서의 저자가 어느 시대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유대인 전승이나 탈무드에 의하면 사무엘이 본서의 저자라고 되어 있으며, 혹자는 다윗 왕이 직접 본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하지만(Heumann) 어느 것도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본서가 다윗 왕의 동시대 인물 또는 그 직후의 인물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22절). 따라서 본절은 다윗 왕이나 그 후대의 어느 한 시점에서 볼 때 옛날에 해당하는 '사사 시대'를 그 시점으로 언급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말은 저자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이 관습이 사라졌다는것을 암시하기도 한다(Keil).
(주); 확정하기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옘'(* )은 '일어서다'를 의미하는'쿰'(* )의 피엘(Piel)형으로서 '(의무를)다하다'(fulfil), '확정하다'(confirm),'비준하다'(ratify), '(책임을) 지우다'(impose)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볼때 이 단어는 법률상의 어떤 문제가 타협되어서 그것을 공고히 할 때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이 단어는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 즉 율법상의 거래 관계에 있어서 그 거래가 완전히 성립되어 다 끝났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 본래 '신을 벗기는 행위'는 상대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함이었다. 즉 계대 결혼을 거부 당한
과부가 장로들 앞에서 상대편에게 나아가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도록 규정된 신명기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다(신 25:9). 이런
의미에서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보아스가 룻으로 하여금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자의 신발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도록
했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신을 벗었다기 보다는 '땅에대한 소유권을 포기 또는 양도한다는 뜻을 상징하는 행동'으로
나타나 있다. 즉 신발은 땅을 직접 밟을 수 있는 매체이다. 따라서 이것을 벗어 상대방에게 넘겨 준다는 것은 그 땅을 양도 또는 포기한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반대로 땅을 구입한 자는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확인하는 절차로 직접 산 땅을 발로 밟는 공증(公證) 순서를 치렀다 한다(신 25:9
주석 참조). 또한 신발은 힘과 권위의 상징이었으므로(시 60:8) 이것을 벗어 상대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자신이 지닌 권리를 양도한다는
의미이며, 이 신발을 다른 사람에 의해 벗기우는 것은 힘과 권위를 타인에게 빼앗김으로써 수치를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계대 결혼
관습에서 계대 결혼을 거부당한 과부가 장로들 앞에서 상대편을 모욕 주기 위해 신을 벗긴 것(신 25:5-10)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Goslinga,
Patrick), 상징적 의미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룻4:8]
(주);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 이 말 속에는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게 되면 보아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자 자신은 재산상의 손해를 우려하여 그 권리를 포기했으면서, 보아스가 그 권리를 취하게 되면 이익이 될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다소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업 무르는 문제를 보아스가 먼저 제기했으므로, 이 문제에 보아스가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했기에 자기가 포기하는 것이 보아스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표현했던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이로써 이제 보아스와 룻과의 결혼은
율법적으로나, 사회.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모든 일의 진행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룻4:9]
(주);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 - 베들레헴 성읍에 있는 기업 무를 땅은 본래 엘리멜렉의 소유였었다. 그렇지만 본절에서 저자가
그의 아들들까지 언급한 것은 상속에 관한 법적인 절차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즉 엘리멜렉이 죽게 되자 그 땅은 당연히 그의 두 아들들에게
상속되었으며, 이젠 그의 두 아들들조차 죽었으므로 그들의두 미망인들에게 물려질 것이었다. 그런데 그중 오르바는 모압 땅에 남았으므로 룻만이
법적으로는 그 땅의 소유자였던 것 같은데, 실제로 룻 역시 본래 이방 여인이었으므로 그러한 기업의 땅 상속에 관해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여전히 과부로 남아 있는 시모(媤母) 나오미가 실제로 그 땅을 관리했던 것 같다. 그래서 보아스는 법적인 절차를 설명함에 있어서
'나오미의 손', 즉 나오미의 권위 또는 허락하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설명했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에서 나오미가 언급되었다고 하여
그녀가 남편의 소유인 토지권을 양도하고 그 값을 지불받기 위해 성문에 나와 있었다고 주장한다(Hervey). 그러나 룻에게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당부한 나오미가(3:18) 그 자신이 그곳에 나갔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성 경: [룻4:10]
(주); 룻을 사서 - 이 말은 인신(人身) 매매의 의미가 아니다. 당시 기업을 무를 때 돈을주고 물렀을 뿐만 아니라, 계대 결혼까지 이행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아스가 기업을 무름으로해서 룻도 계대 결혼을 통해 보아스에게로 오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주);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 보아스는 죽은 자의 이름, 즉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이름으로 자신이 무른 땅을 상속하겠다고 선포했다. 즉 이것은 룻과 자신 사이에서 나는 아들을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으로 기업을 잇게 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서 보아스는 첫 기업 무를 권리를 가졌던 사람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8절) 자신을 위해 기업을 무른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된 자신의 친족 엘리멜렉의 가문을 위해서 기업 무름을 해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보아스가 율법의 정신을 바로 이해하여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충실히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주);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 - 성문(城門)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장소이다(1절 주석 참조). 그러므로 룻을 통해서 날 아들이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으로 그 땅을 상속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이 성문에서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은 끊어지지 않고 모든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될 것이었다.
성 경: [룻4:11]
(주); 여호와께서...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 라헬과 레아는 족장 야곱의 아내로서, 이스라엘 12지파를 형성한 12아들들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장로들과 백성들은룻 역시 여호와께 그러한 풍성한 복을 받아 자녀의 번성은 물론 라헬과 레아와 같이 믿음의 어미가 되도록 해달라고 축복하며, 기원하였다. 한편 여기서 야곱의 아내들 중라헬과 레아만이 언급되고 그들의 여종들인 빌하와 실바의 이름은 제외되었다. 이것은 여종이 낳은 아들은 그 여 주인의 아들로 간주되었던 당시 이스라엘의 풍속을 보여 준다(창 30:1-13).
(주);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이름이다(창 48:7). 따라서 이 축복의 말은 유사한 내용을
시적(時的)으로 반복해서 표현하는 히브리 문학의 동의 대구법(同意對句法)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동의 대구법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재삼 강조할 때 흔히 사용되는 수사법이다. 한편 보아스의 기업 무르는 일에 증인으로 참석한 장로들과 백성들의 이 축복은 보아스를 위하여
비는 축복의 내용으로, 곧 보아스가 근족을 위해 자기 희생적인 정신으로율법의 정도(正道)를 따라 진실되게 행함을 축복하는 내용이다. 사실 당시
사사 시대의 전반적인 타락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보아스의 정신은 실로 높이 살 만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번 일로 인해 보아스의 덕망은 더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성 경: [룻4:12]
(주); 소년 여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라'(* )는 '소녀', '처녀','혼기에 달한 여자', '여자 심부름꾼'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말이 지닌 공통된 점은 '어리거나 젊은' 여자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이 룻에게 사용된 것은 그녀가 아직도 '젊은 과부'였기 때문이다(Driver, Briggs).
(주);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베레스'(pharez)는 다말이 그의시아버지 유다와 부정한 방법으로 동침하여 낳았던 쌍동이
아들, 곧 베레스와 세라 중 차자(次子)였다(창 38:27-30). 그런데 여기서 베레스의 이름만 언급되고 세라의 이름이 빠진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즉 18절 이하에 언급된 족보에서 처럼 보아스가 베레스의 후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베레스는 보아스의 직계
조상이었으므로 여기서 베레스만 언급되고, 보아스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세라의 이름은 생략된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장로들이 특별히
베레스의 집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베레스가 계대 결혼법에 의해 태어나서 유력한 보아스의 조상이 된 것 같이, 장차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도 이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성 경: [룻4:13]
(주);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 이렇게 함으로서 모압 여인 룻은 가나안 여인 라합 및 다말과 더불어 여인 중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마1:5). 그런데 사실 구속 역사 속에서 모압의 인상은 매우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모압 족속은 본래 근친 상간(近親相姦)에 의하여 생겨난 부족이며(창 19:31 이하) 출애굽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대적이었고(민 22:2-6), 바알브올 사건 때에는이스라엘을 범죄케 하는 올무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민 25장). 그래서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율법에 규정되기도 했다(신 23:3). 이처럼 혈통적으로 볼 때 모압의 딸 룻은 마땅히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자기 민족의 신인 그모스를 버리고 온전히 여호와를 신앙함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총을 힘입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으나, 이것은하나님의 은총이 거둔 놀라운 승리였던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아들을 낳게 되는것이 무엇보다 귀중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반대로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으므로(시 127:3) 슬픔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다(삼상 1:11). 따라서 본절은 룻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 가운데서 성읍 장로들의 소원대로 아들을 낳게 된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성 경: [룻4:14]
(주); 찬송할지로다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크'(* )는 '무릎을 꿇다','축복하다', '문안하다'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말이 인간대 인간 사이에 사용될 때에는 주로 '무릎을 꿇다', '축복을 빌다',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 말을 사용할 때에는 '찬양하다'란 의미가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이 말을 사용할 때에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한 감사와 응답으로 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주); 기업 무를 자 - 혹자는 여기 이 말을 '보아스'에게 적용시키고 있으나(CanonCook), 문맥으로나 법적으로 볼 때 분명 룻이 보아스를 통해 낳은 아들을가리킨다(Keil, Cassel, Morison). 왜냐하면 룻이 낳은 아들은 법적으로 엘리멜렉 가문을 이어나갈 자이며(10절), 따라서 나오미에게는 마치 아들처럼 되어 그녀에게 위로와 기쁨을 줌으로써, 결국 나오미의 참 기업 무를 자(고엘 2:20 주석 참조)가 되기 때문이다.
(주); 유명하게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익콰레'(* )는 '부르다', '선포하다', '읽다'를 의미하는 '콰라'(* )의 수동형으로 곧 '불리워지다',
'선포되다'로 옮길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의미로 많이 불리워지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유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룻4:15]
(주); 네 생명의 회복자 - 이 말은 나오미의 생명이 새롭게 된다는 것, 즉 마치 죽은 것과 방불했던 나오미의 가정 엘리멜렉 가문이 룻이 낳은 그 아이로 인해 생기를 되찾게된 것에 대한 표현이다.
(주); 네 노년의 봉양자 - 이것은 나오미에게 손자가 생겼으므로, 그로 인해 그녀가 비록늙더라도 장성한 손자의 봉양을 받게 될것을 일컫는 말이다.
(주);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 - 이 말은 룻이 단순히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나오미에게 있어서 일곱 아들보다 귀하게 여겨진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룻이 시모를 잘 공경하고 헌신하며 순종하였던 사실에 근거하여, 결국 그러한 지극한 효성이 열매를 맺게 된 사실을 칭찬한 말이다.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이나 완전을 상징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자녀의 축복을 풍성히 받았음을 상징할 때도
사용되었다(삼상 2:5). 따라서 본절은 시모에 대한 룻의 공경과 헌신이 많은 아들의 그것보다 더욱 컸다는 것을 생생히 표현한 말이다.
성 경: [룻4:16]
(주);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 혹자는 나오미가 단순히 그 아이의 보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Hervey), 사실상 이것은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난 아이가 엘리멜렉의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나오미가 그 손자를 자신의 양자(養子)로 삼았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Keil).
성 경: [룻4:17]
(주);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은 '계대 결혼'에 의해 태어난 아이이므로, 곧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 가문을 잇게 될 아이였다(10절).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렇게 간주했던 것이다. 한편 이 아이의 이름 '오벳'(* )은 '섬기다'에 해당하는 '아바드'(* )의 분사형으로서 곧 '섬기는 자'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탈굼 역(the Targums)에서는 '오벳'을 '여호와의 종'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히브리어로 '오바댜'(* )가 있으므로 그렇게 의역될 필요는 없다. 단지 여기서 '오벳'이란 이름은 늙은 나오미를 봉양하고 섬기는 자라는 의미에서(15절) 그처럼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Matthew Henry, Hervey).
(주);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 본서의 저자가 다음에 이어지는 다윗의 족보를 열거하기 전, 본서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특별히
본구절을 삽입시킨 것은 저자가 본서를 기록한 목적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Keil).
성 경: [룻4:18]
(주); 세계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톨레도트'(* )는 '낳다'를 의미하는 동사 '얄라드'(* )에서 파생된 것으로 '세대'(generation) 또는
'계보'(gonealogy)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 말은 사람의 족보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물의 계통적 구분이나 사건의 구분에서도 사용되었다(창
2:4). 그러므로 이 말은 구속사에 있어서 역사 흐름을 신학적으로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혹자는 천지가 창조되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구속사를 이 '톨레도트'를 중심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Vanderwaal).
성 경: [룻4:19]
(주); 헤스론 - 유다의 손자이며, 베레스의 장자로서(창 46:12;대상 2:5), 다윗의 조상된 자(마 1:3;눅 3:33).
(주); 람 - 헤스론의 차자로서(대상 2:9), 다윗과 그리스도의 조상된 자(마 1:3,4).
(주); 암미나답 - 유다 지파의 헤스론 자손으로 람의 아들이자(대상 2:10) 족장 나손의 부친(민 1:7;2:3;7:12;10:14). 대제사장 아론의 장인이기도
하다(출 6:23). 신약의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아미나답'으로 표기되었다(마 1:4;눅 3:33).
성 경: [룻4:20]
(주); 나손 -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막 세우기를 마쳤을 때,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성소에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민 7:12).
(주); 살몬 -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시 정탐꾼들을 도와준 기생 라합과 결혼한 자이다(마 1:5).
성 경: [룻4:21]
(주); 보아스 - 2:1 주석 참조.
(주); 오벳 - 17절 주석 참조
성 경: [룻4:22]
(주); 이새 - 룻과 보아스의 손자이며 다윗의 부친(삼상 16:18,19). 베들레헴에 거주했으며 여덟명의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삼상 16:1,10,11). 그리스도의 조상된 자로 일찍이 그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날 것이 예언되었다(사 11:1,10;마 1:5).
(주);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 본서는 다윗의 출생을 밝힘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다윗 왕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가문으로 여겨졌으며, 예수님께서도 '다윗의 자손'이라 불리우신 바 있다(눅 1:27). 이와 같이 빛나는 가문도 실상은 이방 여인 룻에
의해 그 혈통이 이어졌으니 이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만유의 주이시다(롬 3:29;갈 3:14). 그러므로 인간의 재능이나 혈통, 권세등 지위 고하와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겸손히 순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이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본래 저주 받을 모압의 딸이었으나, 그
믿음과 효성으로 인해 마침내 다윗 왕가를 형성한 이방 여인 룻은 바로 그러한 진리를 오늘날 우리들에게 생생히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