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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ceroubivm
그룹들 cherubim||#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복수형 케루빔은 세속 헬라어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를 음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복수 어미를 가지고 있다(케루베임, 케루베인, 게루빈).||#2. 70인역본의 용법||70인역본에서 단수형 게룹은 18회, 복수형들은 약 75회 나타난다.||(a) 이 단어는 부분적으로는 사람, 부분적으로는 동물로 표시되는 천사와 같은 존재의 다양한 표상에 관한 지칭이다. 이 단어는 보통 '그룹들'(cherubim)이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이 단어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아카드어의 동족어 동사는 '축복하다, 찬양하다, 경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CAD). 그룹의 특성 중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숭배인데, 아마 이러한 기원이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그룹들은 때대로 스랍 또는 불타는 것(사 6:2-사 6:6)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날개달린 천국의 전달자이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받들어 지키고 있다(시 80:1; 시 99:1; 사 37:16). 그들의 신속하게 날음은 바람에 비유된다(삼하 22;11; 시 8:10).|그룹은 잃어버린 낙원 동산을 지키는 천사로서 처음 언급된다. 그들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다(창 3:24). 다음으로, 그룹들은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덮고 있는 순금으로 된 날개 달린 모습으로 나타난다(출 25:20).|또한 이들은 성막의 가장 안쪽에 있는 휘장과 지성소를 분리시키는 휘장을 장식하여(출 26:1, 출 26:13, 출 26:31),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천군 천사들을 상징하였다(삼상 4;4; 삼하 6:2; 왕상 19:15; 대상 13:6). 여기에서 그들이 얼굴, 사람 모양,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출 25:22에서 하나님이 두 그룹(mibbin) 사이의(밉빈[mibbin]) 속죄단 위(메알[me'al])에서 사람과 말씀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민 7:89).|솔로몬의 성전에서 그룹은 장식을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솔로몬 성전의 강조점은 날개를 성소의 넓이만큼 펼친 그룹의 크기에 있었다(왕상 6:23-왕상 6:29; 왕상 7:29; 대하 3:10-대하 3:13).|예언자들 중에서 에스겔만이 이 단어를 언급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던 황금 그룹들은 버림을 당하였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원하는 바를 수행하는 살아있는 그룹 가운데 나타나시게 되었으니 이는 그의 보좌의 위치를 성전으로부터 옮긴 것이다(겔 10장; 참조: 겔 1:5이하). 에스겔서에서 그룹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호위하고 있다(겔 28:14-겔 28:16 RSV).||(b) 후기 유대교는 에스겔서의 병거 보좌를 상당히 명상하였으나 이 명상은 랍비들에 의해 훼방을 당했으며, 병거가 나오는 에스겔서의 장들을 예배시에 사용하는 것은 미쉬나(Mishnah)에서 금지당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그룹들을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선 천군들로 간주하였고, 랍비들은 그룹들은 외형상 소년들과 같은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필로는 그 이름이 지식과 통찰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고, 요세푸스는 날개달린 생물이라고 언급한다. 마법의 파피루스에서는 마법의 효과를 얻으려고 애쓰는 가운데 이 이름을 사용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케루빔은 신약성경에서 히 9:5에 한번 나타난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영광의 그룹들"이라는 문구는 지성소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요한계시록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룹과 스랍을 암시하는(계 4:6-계 4:8) 특유한 표현으로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예배하는 생물들을 묘사한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든지 지상에 있든지 간에 특별히 하나님의 보좌와 관계가 있다. 이들은 보좌를 호위하며 보좌하여 서 있으며 또한 자신들이 예배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신속한 전달자로서 활동한다.|할데만(I.M.Haldeman)은 언약궤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속죄소($2435)가 특별히 우리 주를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심"(롬 3:25)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화목의 수단 혹은 화목의 장소를 의미하는 같은 말, $2435을 발견한다. 화목의 장소는 십자가요, 그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였으므로 그 단어의 두 가지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집중된다. "영광의 그룹들"(하나님의 임재)이 "속죄소"를 덮었으므로(5절), 그 속죄소는 언약궤를 덮어 완전하게 하였다(그것은 꽉 짜여져 정확하게 맞은 언약궤의 뚜껑이었다). 그러므로 거룩한 심령은 속죄소 아래에서만 그 완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속죄소"는 "영광의 그룹들"을 이루고 있는 구조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과 심령의 연합을 뜻하며 거룩한 날개의 그늘 밑으로 심령을 인도하는 것을 뜻한다. 이 연합은 속죄소와의 완전한 연합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령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그늘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일치됨과 동시에 완전히 예속됨으로 오는 것이다(R.S.Taylor).|(참조: J.G.Balawh; E.Lohse).
케라
chvra
과부 widow.||#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라(Homer이래)는 형용사 케로스(여윈, 사별한)의 여성형이며, 그 본래의 의미는 '남편없이 남겨진 여인'이다. 이 의미에서 '과부' 또는 '남편없이 살아가는 여인'을 의미하게 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케라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한 두 구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알마나(과부)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라는 신약성경에서 2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마가복음의 용법. 막 12:40과 그 병행구에서 예수님은 과부에게 행한 불의에 대해 선지자적인 고발을 하신다. 서기관들은 겉으로만 과부들을 도와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듯하지만, 너무 과중한 짐을 그들에게 지워 과부들의 재산을 잃어 버리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과부들의 진정한 대변자로 등장하신 것이다.|막 12:41이하에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욕심 많은 부자들은,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자기의 전체 생활비를 바침으로써 자신의 헌신적인 신앙심을 보여준 가난한 과부와 대조된다. 이러한 전적인 바침은, 특별히 과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그의 공급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예기한 것이다.||(b)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용법|① 눅 18:3; 눅 18:5의 비유에서 과부의 행동은 끈덕지고 확신에 찬 기도의 예를 보여준다. 문제는 금전적인 문제였는데, 과부는 사법적 판결(결정)없이 세력 있는 상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데 재판관은 이 고소사건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과부는 재판관에게 계속 끈덕지게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 말미암아 승리했다.|② 눅 4:25 - 눅 4:26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택된 한 과부의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의 완고한 백성들에게 보냄받지 않고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사자들을 그들의 인간적 속박들로부터 자유케하고, 그들을 이방인에게 접근하도록 승인하는가를 보여준다.|③ 눅 7:11이하에서는 나인성 과부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보호자가 죽은 것에 초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과부에게 대한 예수님의 동정이 지니는 메시야적인 특성이 강조된다.|④ 눅 2:36(눅 2:36이하)에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보고 감사한 과부 안나는 평생을 재혼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와 금식 생활을 하면서, 여자 선지자로서 아기 예수님에 대한 증인이 되는 특권을 얻고 후에 교회에서 여자 증인들의 본보기 노릇을 한다.|⑤ 행 6:1에서 교회 자체적으로도 과부들에 대한 규정들을 두고 있다. 흩어져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와서는 거기에 과부들을 남겨두었다. 팔레스타인의 신자들은 공동으로 기금을 운영했기 때문에 헬라 세계의 과부들에 대해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본토인들과 흩어져 살던 사람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따라서 사도들이 개입하였고 일곱 집사를 임명하게 되었다.|다비다는 과부들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일례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고, 교회에서 다비다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라면 집단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이라 생각된다. 과부들에 대한 언급이 성도와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행 9:41), 과부들이 이미 특별한 계층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다비다를 다시 살린 것은 이 계층의 호의로 인하여 생긴 일이다(눅 4:26; 눅 7:12).||(c) 바울서신의 용법.|① 과부의 결혼 문제. 고전 7:8(참조: 고전 7:8이하)에서 바울은 처녀들과 과부들에게 충고한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과부들에 관해서 중요한 문제는 재혼이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결정에 맡긴다(참조: 고전 7:39). 바울의 견해에 의하면 만일 그들의 성적 요구가 젊은 과부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강하여 고통없이 재혼하지 않은채 그냥 지내기 불가능하게 한다면 재혼해야 한다(딤전 5:6, 딤전 5:11, 딤전 5:14이하). 결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은 바울 자신과 같이 카리스마(은사, 참조: 고전 7:7)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더 나은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고전 7:8) 더욱 복을 받는다(참조: 고전 7:40).|② 딤전 5:3이하에서 과부를 위한 초기의 규정이 발견된다. 이 규정은 과부들이 가정에서 돌보아 줄 사람이 있거나, 집안에서 할 일이 있을 때에는 교회의 보살핌이나 교회에서 봉사를 위해서 과부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주석자들은 자녀들과 손자들을 돌보는 사람이 과부들인지, 과부들을 돌보는 사람이 자녀들과 손자들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두 견해가 다 옳을 것이며, 상호간의 의무가 중요할 것이다. 과부들은 자기들이 당장 해야 할 일들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며 친척들도 과부들에 대한 의무를 교회에 대한 의무처럼 여기고 과부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③ 젊은 과부들. 딤전 5;11이하,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넓은 의미에서 젊은 과부들은 아직 살 날이 많고, 다른 일들이 있다(참조: 딤전 5:13). 그들은 쉽게 경솔한 행동을 하거나 육욕에 빠지게 된다. 만약 젊은 과부들에게 교회의 직분을 맡겼다가 그 후에 재혼하게 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처음의 충성심을 파기하게 될 것이다. 젊은 과부들은 또한 일을 하는 중에 게으르게 되거나 잡담을 하거나 교회에 나쁜 평판을 듣게 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재혼을 해야하고(참조: 딤전 5:14) 그렇게 해서 나쁜 일에 빠져들 기회를 적게 해야 한다.|④ 참과부들 및 과부들에 대한 관리. 딤전 5:3 - 딤전 5:16의 과부에 대한 규범이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서 과부와 참 과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참 과부들은 교회에서 봉사하게 하기 위해서 선발되었다. 이것은 '명부에 올린다'는 말에 내포되어 있다. 명부에 올려진 과부는 교회에서 직책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과부 명부에 올려진 자의 조건을 살펴보면, 참과부는 홀로 남아 있는 사람으로, 가족이 없어야 하며, 교회가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딤전 5:16). 과부의 연령은 60세가 넘어야하며(딤전 5:9), 단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던 자라야 하고(딤전 5:9), 선행의 증거가 있어야 하며(딤전 5:10), 재혼할 생각이 없어야 한다(딤전 5:11). 한 남편에 대한 규정은 첫 남편의 사후에 재혼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지 이혼한 후에 재혼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예수님은 남편의 사후에 재혼하는 것은 허용하셨지만,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다(참조: 막 12:24이하; 롬 10:12). 바울은 전자의 경우를 원칙적으로 자유로운 상태라고 하고 있다(참조: 롬 7:2 - 롬 7:3). 눅 2:36 - 눅 2:37은 단 한 번만 결혼했던 과부를 찬양하고 있다.|그들의 일은 하나님만 믿으며, 밤낮 기도에 힘쓰며(참조: 살전 3:10), 교회를 대신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한다(참조: 딤전 5:10).|친척들은 형편이 닿는대로 과부들을 부양해야 하며, 교회는 다른 아무도 책임질 수 없을 때에 책임을 맡는 것이다(딤전 5:16).||(d) 야고보서의 용법|신약성경 시대의 교회들은 과부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가장 강렬한 표현은 야고보서에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배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외면적 존경은 이런 표현과 대조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과부의 비유적 용법|①눅 18:3, 눅 18:5(참조: 눅 18:2이하)에서 과부는,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이 최후의 설욕을 위해 탄원하는 믿음에 대해 응답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②계 18:7에서 창녀 바벨론(로마를 상징)이 자신을 여왕에 비유하고 과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나 곧 위치가 바뀔 날이 올 것이다. 억압을 당했던 과부가 왕비가 되고(참조: 계 21:2) 거만한 바벨론은 버림받은 과부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신부라고 하고, 도시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두 가지 소재를 비유적으로 결합시킨다. 예루살렘과 바벨론, 두 도시는 두 가지의 인간 유형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은 신부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백성은 과부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교회는 이제 이스라엘이 포로기간 동안에 그랬던 것처럼 남편이 없는 여인과 같은 상태이다. 그러나 주께서 재림하실 때 교회는 하늘의 신랑이신 그 분을 만나는 신부가 될 것이다(참조: 계 22:17).|(참조: Walter Bauer; J.H.Thayer; G.Stahlil; S.Solle).
어제
cqev"
어제 yesterday||#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부사 크데스(Homer. 이래)는 '어제'yesterday를 의미하며, 70인역본에서 테몰(이전에, 최근에, 어제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크데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온다||(a) 크데스는 과거 사건에 관하여 사용되었다.|① 요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② 행 7:28,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b) 크데스는 히 13:8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동일성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천천
ciliav"
일천 a thousand.||#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역본의 용법.||킬리아스(Aeschyl., Hdt. 이래)는 킬리오이($5507: 일천의)에서 유래했으며, '일천' a thousand을 의미한다.|70인역본에서 엘레프(505: 천; 1,000)의 역어로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킬리아스는 신약성경에서23회 나오며, 누가복음에 2회, 사도행전에 1회, 고린도전서에 1회, 나머지는 모두 요한계시록에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수를 나타내는 다른 단어들과 결합되어 사용되었다.||(a) 눅 14:31에서 킬리아스는 에이코스($1501: 이십)와 함께 '이만'을 나타낸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현명한 왕은 전쟁할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는 싸우러 나가지 않을 것이다.|세상 일에 있어서 비용의 계산을 하는 것은 자기가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일에 있어서는 미리 계산하는 목적은 자기가 될 의사가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할 의사만 있다면 할 수 있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b)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어떤 사람들은 오천명 이상의 회심자들이 이 때에 더하여졌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혹자는 총 믿는 사람의 수가 이 때에 오천명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것에는 오순절에 구원 받은 삼천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원어에 의해 이것을 결정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에게네데는 '였다'(was)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되었다'(became)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참조: R. Earle).||(c) 고전 10:8,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이 성적 방종은 민 25장에 나타나며, 그 성적 방종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민수기에는 24,000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23,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 차이점에 대하여 바인은 '사도는 여기서 즉각적인 결과를 말하는 반면, 모세의 기록은 전체 결과를 언급한 것이라고 해설했다.|여기서 교훈의 요점은 영적으로 개화된 사람들 간에 있는 성적 방종은 이교도들 중에 있는 성적 방종보다 더 악한 것이며 따라서 보다 큰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D. S. Metz).||(d) 계 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군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인" 하늘의 천군들에 대한 단 7:10의 묘사를 인용한다. 그러나 이 묘사는 그리스도론적 해석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찬양 대상이 어린 양(Lamb)이기 때문이다(참조: 계 5:12 이하).||(e) 계 7:4에서 인맞은 자의 수를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십 사만 사천"으로 나타낸다. 계 7:5-8은 각 지파의 십이만 명을 열거하여 이름에 따라 지파들을 하나하나 센다. 이 수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개념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마지막 완성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됨을 주장한다. 요한이 이 수를 들을 때 열 두 지파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대략적인 숫자를 들었다는 것이 주목해볼만 한다. 그러나 그가 볼 때 이 숫자들은 모든 백성들로 이루어진 셀 수 없는 천군들로 대치된 것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 7:9).|144,000이란 수는 12(이스라엘을 가리킴)의 제곱수와 10(완전수)의 세제곱수가 곱하여 된 수이다. 그러므로 이 수는 완전, 즉 이스라엘의 완벽한 총체를 가리킨다. 계 17:4의 144,000은 교회이다. 성경에서 교회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로 불리워졌고(약 1:1; 마 19:28; 눅 22:30 참조), 이 사상은 성경이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서신으로 보내어진 그 당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벧전 1:1). 그리스도인은 참 유대인임과 동시에 교회, 즉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표현되어 있다(벧전 2:9 이하; 엡 1:11; 엡 1:14 참조). 교회는 하나님의 '친 백성'(딛 2:14)이요, '아브라함의 씨'(갈 3:29)이며, '할례당'(빌 3:3)으로써 그리스도의 소유물로 표현되었다. 고전 10:18에 있는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이란 말이 내면적으로는 '영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이다.|이 교회, 곧 144,000은 계 7:9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표현한다.|계 7:4에서는 다가올 환란 때문에 교회가 인침을 받지만 계 7:9에서는 교회가 승리와 평화를 누리게 된다.|십사만 사천 명은 계 14:1; 계 14:3에 다시 언급된다.||(f) 계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이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았다. 천사가 그 성을 척량하니 그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12,000 스다디온이었다. 이 형태는 지성소의 형태(왕하 6:20)이며 완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요한이 천성은 그 자체가 지성소와 같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처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갖는 곳이다. 12,000은 12지파의 수에 완전수인 10을 세제곱한 것이다. 그래서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숫자를 나타낸다. 12,000스다디온은 약 1,5000마일이다. 이같이 큰 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큰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처소가 넉넉함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C. Brown; Walter Bauer; J. H. Thayer; Leon Morris).
장군
cilivarco"
천부장, 군사지휘관||명사 킬리아르코스(Aeschyl., Xen. 이래)는 길리오이($5507: 천)와 아르코($757: 지배하다, 다스리다, 시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신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군사 일천명의 지휘관', '천부장', '천병장', 로마 코홀트(300-600명의 보병대)의 지휘관(군사 호민관)': 요 18:12; 행 21:31-33; 행 21:37; 행 22:24; 행 22:26-29; 행 23:10; 행 23:15; 행 23:17-19; 행 23:22; 행 24:7 Rec., 22; 행 25:23).||(b) '군사 지휘관'(막 6:21; 계 6:15; 계 19:18).|(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일천
civlioi
일천의 a thousand||#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킬리오이(Homer 이래)는 '일천의' a thousand을 의미하며, 70인역본에 자주 나온다.||#2. 신약성경의 용법.||킬리오이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베드로후서에 2회, 요한계시록에 9회 나온다.||(a) 킬리오이는 벧후 3:8에서 시 90:4을 언급하면서 2회 나온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이 구절은 주의 날이 분명히 연기됨에 따른 사람의 무관심과 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다. 시편 기자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난간 어제 같다"고 선언한다. 베드로후서는 이 사상을 한 걸음 더 발전시켜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는 이론을 이끌어 낸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물질 세계의 시간 범위에 얽매이지 않음을 주장한다. 주의 날이 지연되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벧후 3:9).||(b) 계 11:3과 계 12:6은 "일천 이백 육십일"이라는 기간을 언급한다. 이것은 계 11:2; 계 13:5의 마흔 두달, 계 12:14의 한 때, 두 때, 반 때와도 일치한다. 계 11:3의 이 기간은 예언의 기간이고, 계 12:6의 이 기간은 박해의 기간이다. 이 두 구절은 모두 동일한 시기, 곧 선지자의 증거의 시기이며 동시에 박해의 시기인 교회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영원에 비추어 볼 때 이 기간은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날들이란 표현으로 나타낼 때에는 길게 여겨진다. 이 배경은 단 7:25; 단 12:7이다. 곧 이 기간은 완전수인 일곱의 절반 시기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목적을 성취하실 때까지 지속되는 극심한 재앙으로 이루어진다. 이 재앙은 계 11:7 이하에서 묘사된다(참조: 계 12:2-6). 이 재앙은 문명의 심판에서 절정을 이룰 것이다(계 11:3). 지진으로 죽는 칠천명은 불의하고 세속적인 사회를 완전히 심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남은 자들은 그 증거와 하나님의 심판에 응답하는 자들을 나타내는 것이다.||(c) 계 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 거리는 약 이천 마일이다. 여기서 성의 유린이란 표현으로 문명 세계에 대한 심판을 묘사한다. 이 수는 제곱된 수로 십 사만 사천과 예루살렘의 넓이와 맞먹는다(참조: 계 7:4; 계 14:1; 계 21:16). 이것은 땅의 네 지역, 곧 땅 전체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 구절은 최후의 심판을 언급한다(참조: 계 19:11-21). 이와는 대조적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영역도 정사각형으로써, 역시 완전을 나타낸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계 21:16). 이 경우의 열 둘이라는 수는 그 기원이 열 두 지파와 각 지파의 십 이만 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 예루살렘의 완전함은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함과 일치한다.||(d) 계 20장에는 천년이란 기간이 6회 나오며, 그 천년 기간에 있는 사건을 묘사한다(계 20:2; 계 20:3; 계 20:4; 계 20:5; 계 20:6; 계 20:7).|(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Brown).
기오
Civo"
기오 Chios (지)||키오스는 '뱀'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행 20:15에 한번 나온다. 키오스/ 기오는 로마를 향한 바울의 노정에서 서머나의 맞은편,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서 떨어진 에게해의 한 섬이다. 그곳은 호머의 고향이었다고 주장된다. 그곳은 무화과와 유향과 대리석으로 유명하다.|(참조: HBD; Walter Bauer; J. H. Thayer).
속옷
citwvn
튜닉, 옷||#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키톤(Homer. 이래)은 히브리어에서 기원하였으며,||(a) '튜닉'(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을 의미하며,|(b) 보편적으로 '옷, 의복'(Aeschyl., plut.)을 뜻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키톤은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사복음서(9회), 사도행전(1회), 유다서(1회)에 나온다.||(a) 튜닉(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 마 10:10; 막 6:9; 눅 3:11; 눅 9:3; 유 1:23; 마 5:40; 눅 6:29; 요 19:23; 행 9:39;|(b) 보편적으로 '옷, 의복', 막 14:6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키온
ciwvn
눈 snow.||#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키온(Homer이래)은 '눈 snow'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키온은 70인역본에서 26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셸렉(눈)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키온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만 깨끗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마 28:3에서 키온은 천사가 입은 옷의 색으로 사용되었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계 1:14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머리털색으로 사용되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참조: Walter Bauer; J.H.Thayer).

clamuv"
클라미스(망토나 짧은 외투)||#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클라뮈스(Aristoph. 이래)는 기본어이며, '클라미스(망토의 일종 혹은 짧은 외투)를 의미하며, 특히 군인, 장교, 행정장관, 왕, 황제 등이 입는 일종의 짧은 외투(마카베오이서 12:35)이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클라뮈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마 27:28; 마 27:31에 나온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마 27:28)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 27:31).|(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기롱하다
cleuavzw
조소하다, 조롱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클류아조(Aristoph., Demosth. 이래)는 클류에 (%741: 농담, 익살)에서 유래했으며, 비웃다, 조소하다, 조롱하다를 의미한다.|70인역본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마카베오이서 7:27; 지혜서 11:15).||#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클류아조는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에만 2회 나온다.||(a) 행 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b) 행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미지근한
cliarov"
미지근한 lukewarm||#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클리아로스(Hdt., Pind., Diod.)는 클리오(%742: 따뜻해지다, 녹다, 용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미지근한, 미온의'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클리아로스는 신약성경에서 계 3:16에 한번 나온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뜨거운 샘이 라오디게아에서 미지근하다는 것은 아마도 비유를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뜨거운 것'과 '미지근한 것' 혹은 죄인과 의인과 미지근한 것 사이의 랍비적 구별이 실질적으로 더욱 적절하다. 복음은 지금 문 앞에서 두드리시는 주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세속적인 관심사에 의해 미지근하게 되어 버린 헌신은 완전한 멀어짐(이탈)보다 더 나쁘고 극복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A. Oepke).
글로에
Clovh
글로에 Chloe (인)||클로에는 '푸른 꽃'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고전 1:11에 한번 나온다. 그는 고린도와 에베소의 한 여자인데 그녀의 종들이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해 말하였다. 그녀 자신은 고린도 교인이었는지 이교도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청황색
clwrov"
푸른, 누른빛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클로로스(Homer. 이래)는 클로에(%743: 연한 푸른 잎이나 풀)에서 유래했으며,||(a) '초록의', 식물들의 '푸른'|(b) '누르스름한, 누른 빛, (건강한 사람과 대조되는) 병든 사람의 색깔'(Hippocr.)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클로로스는 70인역본에서 푸른 풀이나 초목에 대해 사용되었다(창 1:30; 창 2:5; 신 29:22).||#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클로로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클로로스는 초목에 대하여 '푸른'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막 6: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② 계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③ 계 9: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b) 클로로스는 계 6:8에서 말에 대해 '누런 빛을 띤'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병든 자가 누런 빛을 띤 것과 같이 사망이야말로 그러했다: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키크시시그마
cx"
육백 육십 육(666)||키 크시 시그마는 '육백 육십 육'(%841=600, %842=60, %843=6)이며, 신약성경에서 계 13:18에 한번 나온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이 수는 신비한 수로서, 히브리어 문자 rsq nwrn로 표기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즉 이를 판독하면 %844, '네로 가이사' Nero Caesar이다.|n=50, r=200, w=6, n=50, q=100, s=60, r=200이며, 이를 합하면 666이 된다.|이외에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별 지지를 얻지 못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이러한 해석 대신 이 숫자를 단순한 상징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예수'는 헬라어로 이에수스($2424)이며, 이 단어를 숫자 가치로 합산하면 888이 된다. 모든 수가 완전 수인 7을 넣고 있다. 그러나 666은 그 반대로 모든 수가 7에 미달되고 있다. 이 수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의에 부족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본문의 숫자가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면 이 해석은 더욱 합리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요한은 우리에게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항상 악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범사마다 짐승의 표가 붙어 있다. 즉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문화는 불가항력적으로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Leon Mor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