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맞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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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다 be fond of, 사랑하다 lov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필레오(Homer 이래)는 필로스($5384)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a) 필레오는 흔히 아가파오($25: 사랑하다)와 의미나 용도가 매우 유사하지만 일반 헬라어에서(70인역과 신약은 그렇치 않음) 아가파오보다 더 자주 사용되며 '좋아하다'는 의미보다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더 지니고 있다.||(b) 필레오는 중성 목적어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좋아하다, 중히 여기다'를 의미한다.||(c) 필레오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하기를 좋아하다, ~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는 것이 습관이다'를 의미한다.||(d) 필레오는 '입맞추다'를 의미하며, 아가파오와는 달리 애무나 특히 입맞춤과 같은 애정의 행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필레오는 70인역본에서 30회 나오며, 아헤브(사랑하다, 창 27:4, 9, 14; 창 37:4; 잠 29:3; 전 3:8; 호 3:10; 사 56:10), 나샤크(입맞추다, 창 27:26; 창 27:27; 창 29:11, 13; 창 33:4; 창 48:10; 창 50:1; 욥 3:27; 잠 7:13; 잠 24:26; 아 1:2; 아 8:1), 레아(친구, 애 1: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필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필레오는 마 6:5에서 그 본래 의미로 사용되었다. 거기에 보면 외식하는 자가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사랑한다)고 되어 있다.|마 23:6과 눅 20:46도 유사한 경우들이다. 눅 11:43에서 아가파오가 사용되고 비슷한 내용인 눅 20:46은 그렇지 않다는 점은 의미상의 차이가 항상 지켜진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b) 마 10:37에서는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서 한마디 부언하자면, 이 문장은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단어가 신학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문장의 표현법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인 아가페로 표현되었다. 이 문장의 초두에는 친족간에 서로 나누는 타고난 사랑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이에 끼어 들게 될 때, 보통 가정의 친교의 끈과 고리까지도 하나님의 가족 사이의 새로운 교제를 위해 풀릴 수가 있다는 점이다.||(c) 요 11:3; 요 11:36에서 나사로와의 예수님의 사랑의 결속을 언급한다. 여기서 친구에 대한 사랑이 언급되지만, 나사로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며,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닌 '우리의 친구'라고 불리운다(요 11:11).||(d) 요 15:19에서 '자기의 소유의 것을 사랑한다'는 기본 의미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은 세상(코스모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영역으로도 묘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코스모스 안에(in) 있는 사랑이나 코스모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에 대한 증오와 동일하다(참조: 약 4:4).|요일 2:15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e) 요 16:27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요구에 부응하였으며,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에 답하여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신다. 여기서의 사랑은 요 3:16에서 언급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과는 구별되는 듯하다. 그러나 필레오와 아가파오가 모두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듯이(요 5:20; 요 3:35 등).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아가파오로 표현될 수 있다(참조: 요 14:21, 요 14:23). 하지만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요 13:1)이나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요 13:34),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사랑(요 14:31)을 나타낼 때는 오직 아가파오만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에는 성부에 대한 제자들이 사랑이 아무데서도 언급되지 않는다.||(f) 요 21:15이하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번갈아 나오는데 일부 성경 해석가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에서 필레오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주장하지만(요21:17),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들은 거의 동의어이므로 베드로가 근심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셨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 사람들 보다"(요 21:15)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이 위임도 부인이나 특별한 사랑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세 차례 반복된다. 이 예외적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응되는 것이며, 목회 사역과 죽음이라는 베드로의 이중적 사도 직분의 기초가 된다. 베드로는 '아가파오'라는 사랑은 물론 '필레오' 사랑까지 언급한 것이다.||(g) 고전 16:22에서 바울은 필레오를 단 한번 사용했으며, 또한 중요하기도 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거기에서, 퀴리오스(주)에 대한 사랑은 구원의 조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은혜는 오직 말과 행실로써, 즉 온전히 믿음을 바쳐 주께 사랑을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h) 딛 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믿음 안에서의 사랑으로 이해된 인간적인 사랑을, 아들(Sun)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하여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라는 문구는 그리스도교적 중요성을 나타내며, "우리를"이란 단어는 특정한 배타성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랑은 교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결속이 된다.||(i) 계 3:19에서 승천하신 주님은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잠 3:12). 그리스도의 징계하시는 사랑(참조: 고전 11:32)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다. 이 배경은 공동 식사 안에서 사귐의 성취를 이루는 하나님의 우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잘못하는 아이를 뉘우치도록 교도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이다.|계 22:15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절대적으로 대립을 이루는 명제 가운데 앞의 개념들을 특징지어 주는 결론적 구절을 보게 된다(참조: 요 3:19; 요일 2:15; 약 4:4).||(j) 막 14:44에서 필레오는 '입 맞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참조: C. Brown; G. Stahr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