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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휘판토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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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서 만든, 짠||#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휘판토스(Homer. 이래)는 휘파이노(%737: 짜다, 천을 짜다)에서 유래했으며, '짜서 만든, 짠' woven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휘판토스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히브리어 하샤브(2803: 공교한, 출 26:31; 출 28:6; 출 35:35; 출 36:35; 출 39:3), 아라크(707: 짜다, 엮다, 출 39:22; 출 39:27)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휘판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요 19:23에 한번 나온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높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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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high, 교만한 proud, 높아진 exalte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휩셀로스(Homer 이래로)는 휩소스($5311: 높음)에서 유래했으며, 원래는 '높은'이란 공간적 의미였다. 예를 들면, 건물, 식물, 지위에 대하여 사용했다.|비유적으로는 '장엄한, 탁월한'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거만한, 과장적'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휩셀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20여회 나오며, 주로 바마의 번역어로 60회, 어근 가바의 파생어의 번역어로 43회, 룸의 번역어로 31회, 나타의 번역어로 19회 사용되었다.|명사로 사용된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휩소스보다 더욱 강조적이어서 하나님의 영역(시 93[70인역 92]:4; 애 1:13),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사 33:5,16; 57:15)를 의미한다. 위로부터 오는 성령(사 32:15)는 하나님의 영(성령)이다.|그러나 이 단어는 현저하게 전도되어 가나안 신당과 이교 신당(렘 19:5; 대하 14;2; 17:6; 겔 6:3)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모트를 번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휩셀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a) 휩셀로스는 본래의 의미로 산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높은 산"(막 9:2; 병행구, 마17:1).||(b) 마 4:8; 병행구 눅 4:5은 약간 다른 의미로 '높은 산'을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계 21:10에서 "[높은] 산", 계 21:12에서 "[높은] 성곽" 묘사한다.||(c) 행 13:17에서 휩셀로스는 "높은" 팔을 묘사한다: 높은 팔은 큰 권능이나 탁월한 능력을 가리킨다.||(d) 히 1:3에서 휩셀로스는 높은 곳, 곧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를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7:26에서 휩셀로스는 하늘보다 높이 된 분을 묘사한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여기서 휩셀로스는 인간과 우주 만물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완전히 대조되는 다른 것을 의미함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높임은 속죄일의 관점에서 묘사되었다(참조: 레 16장과 함께 히 9-10장). 이렇게 높이 오르신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주권을 행사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이렇게 높이 되시어서 그는 고통 가운데에서 순종하심으로 성취를 경험하셨고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십자가 위에서의 자신을 바치는 희생 제사에 관한 교리는 하늘에 올라간 것이 실제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상의 대요와 잘 부합된다. 히브리서에서, 이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과 상응한다. 그러나 이 일은 희생 제물 없이는 전혀 행해질 수 없다. 따라서 십자가상의 희생은 새로운 대제사장에게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E.Schweizer)||(e) 롬 12:16에서 '높은 것들'을 묘사한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휩셀로스로 생각하지 말고(참조: 롬 11:20) 또한 높은 것들, 즉 야심이나 높이 오르려는 욕망을 품지 말고 비천한 자들과 연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높임이 하나님의 역사이므로, 높아지려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은 하나님께 미움 받을 만한 것이다(눅 16:15).|(참조: J. Blunck; J. H. Thayer).
마음을 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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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높다, 거만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휩셀로프로네오(Pollux, Pind.)는 휩셀로스($5308: 높은, 거만한)와 프로네오($5426: 이해하다, 생각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마음이 높다, 거만하다, 교만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휩셀로프로네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6:17에 한번 나온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롬 11:20TR에 휩셀로프로네오가 나온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가장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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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highes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휩시스토스(Pind., Aeschyl. 이래로)는 휩시(높은 곳에)에서 유래했으며, 처음에 순전히 시문에서, 후에 종교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가장 높은, 치솟은'을 뜻한다. 중성 형용사는 '가장 높은 곳'을 뜻하며, 예를 들면, 별들에 가까운 코카서스 산맥의 봉우리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가장 높은 신으로 제우스를, 가장 높은 자로 미드라(Mithra)를 나타낸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휩시스토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4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엘욘(가장 높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휩시스토스는 대부분 하나님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분으로 부른다(창 14:19이하; 삼하 24:17). 시 83:18에서 그의 보편성, 시 21:7에서 그의 불변성, 시 18:13에서 그의 전능성의 개념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휩시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13회 나오며, 장소와 지위에 대하여 사용되었다.||(a) 휩시스토스는 장소에 대하여 '가장 높은 곳'(즉 하늘)을 의미한다(마 21:9; 막 11:10; 눅 2:14; 눅 19:38).||(b) 휩시스토스는 지위에 대하여 '가장 높으신 (이)', 즉 하나님을 의미한다(막 5:7; 눅1:32,35,76;눅 6:35; 행 7:48; 눅 8:28; 행 16:17; 히 7:1).|(참조: G. Bertram; J. H. The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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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음, 높은 곳 hig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휩소스(Aeschl. 이래로)는|(a) 원래는 공간(장소)에서 위쪽으로 확장, '높음, 높이'(다만 사물)를 의미한다. 휩소스는 '높은 곳, 산악지대, 고지, 정상'에 대해 사용하기도 한다.||(b) 비유적으로 휩소스는|① 어떤 사물이나 다른 사람보다 우수함과 높음을 의미한다. 직위(작위)의 '높음'을 의미하거나 '전하(highness)'라는 칭호로 사용되었다.|② '도달하기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사람의 경우에 휩소스는 '교만'이란 부정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휩소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8개 이상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고, 그 중 주로 코마(높이, 높음), 마롬(높음, 높은 곳)을 번역하고 있다. 휩소스는 70인역본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높이'를 나타내거나 '높은 곳', 또는 '높은 지위'에 대하여 사용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높아지는 것, 인간의 자만심, 하늘의 장엄함, 하나님의 높으심이나 숭고함 등을 의미하였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휩소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타난다.||(a) 계 21:16에서 공간이나 간격이란 의미로 새 예루살렘의 측량을 기술하는데 나타난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b) 엡 3:19 이하에서 휩소스는 공간의 "높이"의 치수를 나타낸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모든 성도와 함께 나누는 공동체는(참조: 엡 1:15; 엡 6:18; 엡 4:13; 엡 6:24) 교회와 함께 나누는 공동체 관계이다.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공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공간은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구원의 공간이요, 그의 플레로마(충만)가 되는 것이다.||(c) 엡 4:8에서 휩소스는 그리스도의 높이 오르심(승귀)에 대한 고백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참조: 시 68:18).||(d) 약 1:9에서 휩소스는 타페이노시스(겸손)와 대조적으로 나오며, 따라서 이 단어는 '높임'(참조: '높은 지위' Arndt, 858)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졌고 아직 도래하고 있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 관계는 역설적으로 전도되며 그에 대한 신앙으로 비천한 자들이 높임을 받는다. 가난한 사람(야고보서에서 기독교인과 같은 의미로 쓰인 종교적인 용어)들은 여기서 현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종말론적 높임을 꽉 붙잡아야 한다.||(e) 눅 1:78에서 휩소스는 공간적 의미로 '하늘의 높은 곳'이다: 이 곳은 하나님의 자리이며, 그 곳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휩소스는 거의 하나님을 뜻하는 용어가 된다.|눅 24:49는 같은 의미를 가지며, 눅1:78의 일반적 견해를 확증하는 것 같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참조: J. Blanck; walter Bauer; G. Bertrtram ).
높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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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다 exalt, 올리다 rais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동사 휩소오(Hippocr. 이래로)는 성경 밖의 헬라어에서 후기에 드물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들어올리다, 높이 올리다, 높이다, 올리다'를 의미하며, 문자적 의미와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G. Bertram).||(b) 높임이나 오름에 대해 바벨론의 창조 서사시에서 승리한 마르둑이 신들의 회합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 내용이 나온다.|애굽에서 신-왕의 대관식 예식 때에 사용되었던 왕 신화(주전 14세기)에서 바로왕 투트모세(Thut-mose) 3세가 태양신 레(Re)에 의해 스스로 빛의 영역에까지 높여져서 거기에서 즉위하여 신의 아들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있다.(참조: ANET)|바벨론의 아다파(Adapa) 신화에서 아다파는 애써 하늘에 까지 도달했으나 그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 계획은 신들의 인과응보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곧 이 신들은 인간을 그에게 지정된 한계 속으로 몰아넣었다.|에타나(Etana) 신화에서 에타나는 자기 신세를 입은 독수리를 따라 하늘에 있는 아쉬탈 보좌에 도달하려는 헛된 노력을 했다. 그의 목적은 죽음 없는 불멸을 성취하는 것이었다.|이 두 신화들에는 인간 자신의 노력을 통해 높아지려는 시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반해, 바벨론 창조 신화와 애굽 왕 신화에서 높임은 신들의 일이다.|(참조: D. Muller).||#2. 70인역본의 용법||(a) 휩소오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나오며, 16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룸과 그 파생어들(찬양, 칭찬, 높음, 거만함 등)을 번역하고 있다(94회). '높다, 높이다, 일어나다'를 의미한다.||(b) 따라서 휩소오는 '높이다'(시 18:46; 시 27:5,6; 출 15:2; 겔 28:2 등), '높다'(시 89:13;시 61:2), '넓게 펼치다'(사 14:26), '소리를 높이다'(사 37:23), '자라다'(겔 31:4,10), '양육하다, 기르다'(사 23:4), '아름답다'(사 4:2; 시 89:16), '높이다, 칭찬하다, 찬양하다'(시107:32; 118:28), '자랑하다, 건방진, 거만한'(시 37:20; 시 131:1,2; 겔 28:5)는 의미로 사용되었다.||(c) 휩소오는 주로 하나님께서 높이심을 받으시는 것, 하나님에 의해 높임을 받는 것, 무례하게, 거만하게 자기를 높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휩소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온다.||(a) 행 13:17의 바울의 연설문에서 휩소오는 '크게 만들다'를 의미한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b) 휩소오는 낮추는 것에 대조되어 나타난다. 예수님은 공관복음서에서 자기 낮춤과 자기 높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마 23:12; 눅 18:14; 눅 14:11; 눅 1:52; 마 11:23; 눅 10:15). 이 말씀의 배후에는 구약성경의 유대적인 사상이 있다(겔 21:26). '하나님의 구약 계시에 따르면 인간편에서 모든 높아짐은 거부된다. 참으로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다'(Bertram 608).|이와 같은 맥락을 따르는 약 4:10과 벧전 5:6의 권고문에는 하나님(혹은 그의 손)께 복종하여 미래의 영광 때에 높임을 받으라고 기독교인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있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휩소오는 고후 11:7에서 좀 다른 의미에서 낮춤과 함께 사용되었다:"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고린도 교인들의 높아짐은 그들이(값없이) 복음을 받는 한편 바울은 그의 무보수의 전도로 자신을 낮추었다는 사실로 되어 있다.||(c) 휩소오는 기독론에서 특별한 의미, 즉 예수님을 통치자의 지위로 높이는 승귀를 나타낸다(행 2:33; 행 5:31). 최초의 기독론적 언명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과 높임을 동시에 고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주로 임명 받으신 것이 높임으로 묘사된다(참조: 2:36). 이 구절들이 사도행전1장에 나오는 승천에 관한 누가 신학과는 다른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보다 초기의 전통임에 틀림없다. 이 전통에 의하면, 부활절 사건은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주요 그리스도로 임명 받았기 때문이다. 곧 높여졌기 때문이다(행 2:36). 예수님의 높임은 기름부음을 받으심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의 완성이자 교회와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의 시작이요 계속이자 예기된 성취를 뜻한다.||(d) 휩소오는 요한복음에서 5회 나오는데, 명백한 신학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 5개 구절의 실례 모두에서 휩소오는 이중적 의미,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려 올리워진 것은 동시에 그의 (천국으로의) 승귀를 의미한다는 것을 나타낸다(요 3:14; 요 8:28; 요 12:32: 요 12:34).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의 순종의 최종적인 귀결이자 목표라고 보는 요한의 견해에 기초하여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목적이 십자가에 들어 올리어진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들어올림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그를 자기네의 심판자로 삼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들어올림'의 이중적인 의미는 명백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를 들어 올렸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는 인자로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들이 예수님을 심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그들의 심판자가 된다(Bultmann). 반대로 신자들은 죽음에까지 이른 예수님의 순종 가운데에서 아버지와 그의 완전히 하나됨을 인식하고, 이렇게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아들로 영광을 받게 하고 되돌아옴이요 신자들을 위한 구속이 됨을 깨닫는다(요 12:32). 그러므로 십자가에 들어 올리워짐은 아버지의 영광 속으로의 높임의 시작이다. 높임에 대한 요한의 가르침은 공관복음서에 나와 있는 승천의 실제적인 묘사에 대해 요한이 제시한 것(counterpart)이다.|(참조: G. Bertram; D. Muller; G. Ludemann).
높아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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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음, 높이 height, 높여진 것 exalte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휩소마(plut. 이래로)는 휩소오($5312: 높이 올리다)에서 유래했으며,|(a) '높음, 높이, 높아짐', '높아진 것', '높은 곳'을 의미한다.|(b) 비유적 의미로는 점성술 용어로서 휩소마는 '남중(culmination)'을 의미한다(plul. Sept.).||#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휩소마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해당 히브리어 없이 사용되었다. 휩소마는 욥 24:24에서 '오만'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유딧 10:8; 유딧 13:4; 유딧 15:9에서는 '높임'이란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휩소마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롬 8:39와 고후 10:5에서만 사용되었다.||(a) 롬 8:39에서 휩소마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는 사건들, 세력들, 장소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휩소마는 점성술 용어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창조물에 속하는 높은 곳에 있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별들로 생각된 세력들이(고전 15:24; 골 1:16; 엡 1:21) 흔들리게 되는 영역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승귀(승천)로 하늘과 땅, 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골 2:15)의 장벽인 이 영역을 성공적으로 깨뜨리시고(엡 2:14), 그의 높은 자리를 취하셨으니,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엡 1:20). 따라서 휩소마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창조물들 중에 있다(엡 1:22; 고전 15:25; 고전 15:27; 히 2:8).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물을 관통하고, 따라서 또한 모든 시대에 휩소마를 관통한다.||(b) 고후 10:5에서 휩소마는 '높은 탑이 있는 요새'를 의미한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바울은 이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거절하며, 거만하게 대항하는 태도를 나타낸다.|(참조: G. Bertram; J. H. Thayer).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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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식가, 대식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고스(Zenob. Paroem.)는 파고($5315: 먹다)에서 유래했으며, '폭식하는 자, 대식가'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고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마 11:19(병행구 눅 7:34)에 사용되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먹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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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 eat||동사 파고는 에스디오($2068: 먹다)의 다른 형태이다. 신약성경에서 약 90여회 나오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먹다, 잡숫다, 식사하다, 먹게 하다' 등으로 번역되었다.
번쩍이다
faivnw
빛나다, 비치다, 나타나다, 명백하게 하다, 보이(게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동사 파이노의 수동태와 능동태는 호머(Homer)에서부터 발견된다. 파이노는 자동사로 '비치다, 빛나다'를(예를 들면, 해, 달, 등불이 비치는 것이다), 타동사로는 '나타나다, 비추다, 보이게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파이노는 70인역본에서 약68회 나오며, 오르(히필형:보이게 하다), 라아(니팔형:보이게 되다, 나타나다) 등, 13개의 히브리어형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a) 파이노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는데 그중 7회가 요한의 기록에서 나타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천체(빌 2:15), 해(계 1:16; 계 21:23; 참조: 계 8:12), 달(계 21:23)과 같은 자연 발광체의 빛이나 등불의 빚이 비취는 것을 의미한다(요 5:35; 벧후 1:19; 계 18:23). 그러나 이 모든 구절들에서 언급된 빛은 빛의 좀 더 강력한 근원과 대조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한 예루살렘을 비출 때(계 21:23), 해와 달은 그 빛을 잃을 것이다. 파이노는 오로지 두 곳에서만 '참' 빛, 즉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한다(요 1:5; 요일 2:8).||(b) 파이노마이는 신약성경에서 22회 나오는데, 그 중 17회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다. 이 단어는 별의 출현(마 2:7), 밀 가운데 가라지가 나타나는 것(마 13:26), 천사들이 꿈에 나타났다는 탄생설화(마 1:20; 마 21:3; 마 21:19), 그리고 엘리야가 출현했다는 소문(눅 9:8)이나 부활한 그리스도의 출현(막 116:9)에 관한 언급에 사용되었다.|유사하게 어떤 특별한 현상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수반될 것이다(마 24:27; 마 24:30). 이러한 '보인다'라는 것에 관한 사상은,|마 9:33에서 그리스도의 행위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약 4:14에서 인간의 짧은 생애를 비유한 안개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벧전 4:18에서 마지막 심판 그때에 경건치 못한 자들에 대하여 나타난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마 6:5; 마 6:16; 마 6:18; 마 23:27 이하는 사람들이 은밀히 행할 것과 이것에 대조하여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외모로 행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훌륭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행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고후 13:7). 막 14:64과 눅 24:11은 어떤 일을 어떤 사람에게 '나타내는' 방법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롬 7:13에서도 이와 유사하다 - 죄의 참 본질은 계명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된다.|히 11:3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보이는 것'의 근본 원인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엑스 니힐로(ex nihilo) , 즉 창조의 교리는 유물론의 오류에 대항하여 안전하게 보존된다. 유물주의는 '영원함'(aeons)이 '나타나는 것들'(화이노메나)로부터 자연스럽게 진화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믿음은 지식의 수단이라는 인식론적 원칙이 여기에 시사되어 있다. 많은 우리의 지식이 개인 현존이나 입증으로 말미암는다기보다는 어떤 믿을 만한 사람이나 보고의 자료 속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확신하지만 보지는 못하였다.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창조의 행위에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왔다'(NEB)고 서술된 형이상학적 사실은 믿음에 대한 저자의 변호에 한층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실재(reality)에 대한 가장 궁극적 의미로 실재하는 세계는 현상적 질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질서이다. 우리의 물리적 감각에 대하여 실재인 듯한 것은 사실상 우리의 감각에 비실재적인 듯한 것으로부터 나온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믿음은 세상을 믿게 하는 아름다운 공상이 아니라 엄격히 그 반대의 것이다. 즉 그것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근본적이고도 영원한 실재를 잡으려고 보이는 표면의 세계로 스며 들어간다. 믿음은 그러므로 신앙의 유치원 정도의 수준에 대한 양여(讓輿)가 아니라 성숙한 신앙에 대한 전체이며 건전한 철학의 한 중심에 있다(R.S.Taylor)].|(참조: R.Bultmann/D.Luhrmann; H.C.Hahn).
벨렉
Favlek
벨렉 Peleg (인)||팔레크는 히브리어 펄레그(분할)에서 유래했으며, 신약성경에서 눅 3:35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르우의 아버지로 나온다: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나타내는
fanerov"
보이는 visible, 명백한, 분명한 clear, 개방된 open.||#1. 고전 헬라어 문헌||형용사 파네로스는 파이노($5316)에서 유래되었으며, 핀다르의 올림피아와 헤로도토스 문헌에서 나타난다.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보이는, 분명한, 명백한'(보이지 않거나 숨은 것에 반대어)뜻하며, '뚜렷한, 현저한, 뛰어난, 저명한'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파네로스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타난다. 정경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바한(시험하다, 입증하다, 창 42:16), 갈라(나타나다, 자신을 보여주다, 신 29:28), 야다(알다,단 3:18; 사 64:2)의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어 '명백한, 나타난, 알려진'이란 의미를 가진다.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는 경우에도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파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21회 나오며, '보이는, 명백한, 개방된, 분명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신학적인 전문 용어가 아니지만, 어떤 중요한 신학상의 문맥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막 3:12(병행구절인 마 12:16)에서 파네로스는 메시야 비밀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를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막 6:14). 이 말은 사람들이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출 수 없다는 예수님의 선언에서 사용되었다(막 4:22; 눅 8:17).|행 4:16에서 유대의 지도자들은 사도들, 즉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절름발이를 치유하는 기이한 일을 행하였음을, 그리고 이것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에게 알려졌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마찬가지로, 빌 1:13에 의하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옥에 갇히었다는 사실이 시위대를 통하여 알려졌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이 모든 예들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때에 눈에 보이게 되고 명확해지리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는데, 이런 일은 인간이 그것을 촉진시키고자 하든 방해하고자 하든 일어난다.|행 7:13에서 파네로스는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요셉을 언급하는 스데반의 연설에서 비전문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롬 1:19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질 것이 자연 질서 속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언명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2:28에서 표면적(엔 토 파네로) 유대인인 사람, 즉 할례를 행하고 율법에 대해 정식 고백을 함으로써 유대인이 된 사람이 마음에 진정한 영적인 할례를 가진 이면적(엔 토 크륍토) 유대인인 사람(롬 2:29)과 대조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참 백성은 언약 백성의 외적 흔적을 소유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내면적 영적 실재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처럼,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지 않는다(참조: 롬 3:1-4; 시 51:4).|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불신앙까지도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계획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시는데, 이때 하나님은 대규모로 그들을 전향시켜 다시 접붙이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롬 9:1 - 롬 11:36).|주의 날에 만민의 신자들을 포함한 공력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고전 3:13; 고전 14:25; 막 4:22; 눅 8:17). 고전 11:19에서 실로 현재의 교회 내부 분열이 진실된 자를 나타낸다: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갈 5:19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와 대조된, 육체의 일의 명백한 특성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딤전4:15에서 디모데는 사역의 의무를 다하여 자신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마찬가지로, 요일 3:10에서 죄에 대한 신자의 태도가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참조: R.Bultmann; D.Luhrmann; B.Girtner).
나타나게 하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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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하다, 알리다, 보여주다, 나타내다.||#1. 고전 헬라어 문헌||파네로오는 파네로스($5318:보이는, 명백한, 뚜렷한)에서 유래했으며, '보이게하다, 계시하다, 나타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감추어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또는 눈에 보이게, 또는 알려지게 하거나 말이든 행위든 또는 어떤 방식으로 든지 명백히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파네로오는 70인역본에서 렘 33:6에 한번 나타나며, 갈라(나타나다, 보여주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3. 신약성경의 용법||파네로오는 신약성경에서 47회 나타나며, '계시하다, 알게하다, 보이다, 나타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a) 마가복음에서 파네로오는 3회 나타난다. 막 4:22에서 속담에 담긴 비유의 숨은 뜻을 보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막 16:12; 막 16:14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언급한다.||(b) 바울은 파네로오와 아포칼륍토($601)를 동의어로서 사용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롬 1:17과 롬 3:21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롬 1:19과 고전 4:5에서 파네로오는 '보이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전자에서는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의 계시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후자에서는 모든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때 임할 심판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기에는 그가 때가 이르기 전에 심판을 공표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관에 맡긴다는, 아울러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때이른 칭찬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다른 언급들에서 요점은 복음 안에서의 계시이다. 재귀적 용법은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일들은 항상 계시된다. 롬 3:21은 롬 1:17을 되풀이 하는데 현재형 아포칼륍테타이("나타나서")를 완료형 페파네로타이("나타났으니")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특별한 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한 단 한번의 계시를 의미한다(참조: 롬 3:24 - 롬 3:26; 롬 1:3이하).|바울은 파네로오를 고린도후서에서 9회나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논쟁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 단어를 그의 설교를 통하여 임하거나 일어나는 계시에 대해(고후 2:14; 고후 11:6), 바로 그의 생활에 대해 사용했다. 그 자신의 사도적 생활 방식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 자신의 생활 방식과 비교 된다는 데에서 그리스도의 역설적 계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 그의 대적들을 포함하여 - 하나님께서 성공 중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계시는 다르게 임한다. 바울의 사도적 방식은 고난과 고통의 방식이어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 이하).|다른 한편으로, 교회 안에 믿는 남녀가 있다는 사실로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온 편지이며, 바울의 대적들이 자랑하는 신임장과는 다르게 바울의 사도직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임을 알 수 있다. 고후 5:10 이하에서 파네로오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만인이 출두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이 동사는 3회 나타나는데, 우리가 출두할 뿐만 아니라(10절),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께 알리어진다(ll절a). 바울은 여기에 그것이 독자들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덧붙였다(11절b). 고후 7:12에서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의도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 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하고 선언하였다. 비록 바울의 웅변술이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도직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명백해지었다는 소망을 표현한다(고후 11:6).||(c) 그외의 바울 서신에서도 파네로오와 아포칼륍토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골 1:25 이하와 엡 3:5을 비교하면 할 수 있다. 계시는 선포에서 발생한다(골 1:25이하; 골 4:4; 롬 16:25 - 롬 16:27). 엡 5:13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빛의 관점에서 취급되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계시의 사상은 이 세대들에게는 감추어졌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어진 신비라는 관점에서 훨씬 더 발전되었다(골 1:26; 골 3:4; 골 4:4; 참조: 엡 3:5; 엡 6:19).|바울은 딤전 3:16에서 원시 기독교 찬송가를 인용하여 신비의 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여기서 파네로오는 성육신(incarnation)을 말한다(참조: 요 1:31; 히 9:26; 벧전 1:20; 요일 1:2; 요일 3:5; 요일 3:8에서의 예수님 성육신적 사역을 뜻하는 용례). 군드리(Gundry)는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춰볼 때,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적인 지상 사역을 언급한다고 생각한다.|① 인간의 생애를 뜻하는 사르크스($4561)를 사용했다는 점(참조: 갈 2:20; 빌 1:22, 빌 1:24; 히 5:7).|② '태어난다'와 같은 보다 특정한 동사 대신에 '나타난다'라는 일반적인 동사를 사용했다는 점,|③ '영광 중에 받아들여졌다'라는 종합적인 언급을 했다는 점. 이렇게 해서 에파네로데는 행동이 전체로서 생각되었음을 나타내는 단순 과거 수동태이다.|또한 딤후 1:1O에서 화네로오는 성육신의 의미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복음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목회서신들에서 이 동사가 나오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성육신(incarnation)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이제 그것은 선포에 의해 전달된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d) 파네로오는 히브리서 9장에서 2회 나오나 의미는 약간 다르다. 히 9:26에서 성육신에 관하여 언급되어 있는데, 성육신의 목적은 구약성경의 희생제사와 속죄(의식)일을 능가하는 속죄 희생제를 드리려 함이었다. 그리스도의 현현은 유일회적이며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5 이하). 역으로, 저자는 앞서 논하기를 법궤의 구조(그리고 암암리에 성전)와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성소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옛 언약의 종교와 의식의 불완전성의 증거라 한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e) 파네로오는 또한 베드로전서에서도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2회 나오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삶에서와 그의 재림에서의 두 가지 현현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벧전 1:20에서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라고 하였고, 벧전 5:4에서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다"고 하였다.|(참조: C.Brown).||(f) 요한의 기록에서 파네로오는 실제로 아포칼륍토($601)의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아포칼륍토는 사 53:1을 인용하고 있는 요 12:38에서만 사용되었다.|요 1:31에서 세례(침례) 요한이 와서 물로 세례(침례)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다. 요 2:11에서 가나의 표적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요 7:4에서 "세상", 곧 모든 사람의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격려하며 말하기를,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믿음의 부족을 드러낸 것이며(요 7:5), 예수님은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을 때에 그들의 권면을 거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때, 그리고 세상을 따르는 그들의 태도는 항상 여기에 있다(요 7:6).|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이름(요 17:6), 하나님의 하시는 일(요 3:21; 요 9:3)을 나타내신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계시라고 부를 수 있다(요 2:11).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실체는 증거에서 계시된다. 예를들면, 세례(침례) 요한의 증거 등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 1:31). 요 21: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과 요 21: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에서 화네로오는 그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 곧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남을 의미한다.|요한일서에서도 화네로오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수님의 사역는 계시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요일 3:5).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요일 3:16). 그 목적이 살리려 한 것이라면 전계시(全啓示)는 역시 생명(조에, 요일 1:2)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 안에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말씀의 내용이다(요일 1:1).|요일 2:19에서 공동체를 떠나는 불신자들의 행동은 그들이 참으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파네로오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계시록에도 2회 나타난다. 계 3:18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여기에는 자기 만족적인 번영에 빠져 결국 교회의 참된 상태에 눈이 멀어버린 그 교회의 미지근한 태도가 언급되어 있다. 계 15:4에서 이긴 자들은 "오직 주만이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는 사실을 찬송하고 있다.|(참조: R.Bultmann/D.Luhrmann; C.Brown).
나타내지
fanerw'"
공공연히 openly.||#1. 고전 헬라어 문헌||파네로스는 파네로스($5318)에서 유래한 부사이며, '눈에 보이게, 뚜렷하게, 공공연히'를 의미한다(헤로도토스와 플라톤에서 나타남).||#2. 70인역본의 용법||70인역본에서 파네로스는 마카베오이서 3:28에서만 나오는데 '분명히'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많은 수행원들과 호위병을 데리고 성전금고에 들어 갔던 그는 이제는 자기 몸도 가눌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의 주권을 [밝히] 깨닫는 사람들에 의해서 운반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파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사용되었다.||(a) 막 1:45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공공연하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요 7:10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그것은 은밀히나 비밀리의 반의어이다.||(b) 행 10:3에서 파네로스는 '명백하게' 를 의미한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참조: C.Brown).
파네로시스
fanevrwsi"
계시, 나타남, 현시, 드러남, 폭로.||#1. 고전 헬라어 문헌||파네로시스는 파네로오($5319:계시하다, 나타내다, 보이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나타남, 계시'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파네로시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계시, 나타남'를 의미한다. 고전 12:7의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에서 성령은 주격 속격이다. 그러므로 파네로시스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유익을 위하여 준 계시이다. 성령은 분명히 여러 가지 역사의 주체이며(고전 12:11), 따라서 파네로시스는 성령이 전해주고 고전 12:8 이하에 열거된 은사들로 되어 있는 계시이다(참조: 롬 12:6). 그렇다면, 계시는 이론적인 지식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성령이 자기 자신을 나타낸 작용(acts)을 수반한다.|고후 4:2 이하에서 파네로시스는 비난에 답변하여 논박하는 바울의 설교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증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바울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는 그의 대적자들의 교활에 대조하여, 진리의 나타남이나 계시로서의 참된 선포를 묘사한다.|(참조: R.Bultmann/D.Luhrmann; B.Girt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