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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과실
karpov"
열매 frui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칼포스(Homer이래)는 일반 헬라어에서,||(a) 땅의 '열매'(Homer), 동물들의 '새끼'(Xenophon),|(b) 산물, 이익,|(c) 좋든 나쁘든 간에 착수한 일의 결과를 뜻하는 확대된 의미로, '성과', '결과'(Philo, Marcus Aurelius)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칼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나오며, 주로 페리(과일, 열매, 자손, 결과)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칼포스는 식물의 열매(신 1:25; 말 3:11), 몸의 결실이나 후손(창 30:2; 신 7:13; 미 6:7; 시 21:11), 비유적 의미로 행동의 열매(호 10;13; 렘 6:19; 렘 17:10)이며, 후기 유대교에서 의인은 선한 열매를 맺고 악인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상업적 용어로 이익의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칼포스는 신약성경에서 66회 나오며, 대부분 복음서에 사용되었다.||1. 칼포스의 본래의 의미.||(a) 칼포스는 식물들의 열매(마 21:19; 마 13:8; 막 11:14; 눅 12:17 등)나 땅의 소산물(약 5:17, 약 5:18; 눅 20:10)을 의미한다. 야고보서 5장 같은 구절들은 사람이 수고함으로 인하여 열매의 성장을 돕고 촉진할 수 있으나 그 열매를 단지 선물로 기대하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씨와 수확은 사람에게 맡겨져 있다. 어느 정도까지 열매의 성장이 인간의 의지력과 별개의 것인지는 그 열매가 정해진 시기 곧 카이로스에 익는다는 사실로 분명히 보여준다(마 21:34). 열매의 형태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씨앗으로 결정지워지므로(참조: 고전 15:35이하), 그 열매를 보고 그 식물을 판단할 수 있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 마 7:16, 마 7:20). 이 사실은 종(種)에 만이 아니라 질(質)에도 적용된다.|마태복음은 선한 열매와 악한 열매(마 3:10; 마 7:17-마 7:19)나 썩은 열매(마 12:33; 눅 6:43)를 특히 대조시키고 있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열매는 쓸모가 없고 그러한 열매를 맺는 것('나무' 마 7:19; 눅 3:9; 마 13:6이하)은 유용성이 없는 것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 의도가 있다.||(b) 눅 1:42에서 칼포스는 몸의 열매 즉 후손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행 2:30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2. 칼포스의 비유적 의미. 칼포스는 비유적으로부터 생기거나 나오는 것, '효과, 성과, 결과'를 나타낸다.||(a) 칼포스는 '일, 행동, 행위'를 나타낸다.|① 마 3:8(병행구, 눅 3:8)에서 칼포스는 '행위(선행)'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문자적으로 '회개에 대등한 행위'라고 번역할 수 있다.|마 21:43에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라"고 한다. 여기서 칼포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구원의 획득에 요구되는 행위들, 곧 참회, 신앙, 신앙의 행위들을 카리킨다.|② 빌 1:11에서 선행을 의의 열매로 인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약 3:18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엡 5:9에서 "빛의 열매"도 선행을 나타낸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갈 5:22에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가져오는 여러가지 선행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골 1:10에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언급한다. 바울은 그러한 선행을 구원을 이루려는 인간의 열심과 현저하게 구별짓고 있다. 전문 기술계와 공예계에서 나온 용어 에르곤($2041, 일하다)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생산한 것을 암시하며 긍정적 의미로는 비교적 드물게 사용된다. 반면에 자연적인 성장의 영역에서 따온 칼포스는 당연한 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 나무나 토양의 생명 공급력에 의존한 결과이다.|이러한 성장은 막 4:27이하가 지적하여 준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생명의 증거인 이 성장은 사람의 임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져서 이 살아있는 교제의 은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성취-열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 열매가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들의 열매를 하나님께 가져오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만 죄지으려는 욕망의 힘은 죽음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뿐이다(참조: 롬 7:4이하).||(b) 칼포스는 사역의 '결과나 성과'를 나타낸다.|① 롬 1:13; 빌 1:22에서 이 의미를 나타낸다.|② 롬 15:28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한 연보는 하나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는 문자적으로 '이 열매를 저희에게 인친 후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그 연보를 가지고 가서 그곳의 교회에 그것을 넘겨 줌으로서 그 연보 위에 인을 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연보가 이방인 중에서 자기의 사역의 열매, 곧 성과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경우에 칼포스는 또한 '수입이나 수익'이란 의미도 포함한다.||(c) 칼포스는 '유익, 이익, 수익, 유용'을 나타낸다.|① 이 단어는 자신들의 수고로 교회를 세우고 있는 사도들과 특히 복음 전파자들이 "그들이 맺은 열매에 의하여 산다"는 의미에서까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의한 생계 부양의 요구를 할 수 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7).|딤후 2:6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② 빌 4:17에서 바울에 대한 지원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히 12:11에서 "의의 열매"는 의로부터 발생하는 유익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③ 약 3:18에서 "의의 열매"는 의 속에 존재하는 '유익'을 가리킨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d) 히 13:15에서 "입술의 열매"는 하나님께 감사제물로 드리는 찬양을 가리킨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참조: 호 14:2; 잠 12:14; 잠 29:49).||(e) 칼포스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열매 곧 수확'을 나타낸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2이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과 갖는 친밀한 교제는 열매를 맺는 능력의 비결로 보여진다.|요 12:24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풍성한 열매가 거기에서 성장하는 토양인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은 사람들에게 구속을 가져온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즉 여기서는 생명나무)로서 그의 가지들을 통하여 믿음의 필수 조건이자 믿음의 방편인 생명을 주는 힘을 보낸다. 사람은 참으로 그의 천부적 재질을 통해서 도덕적, 전문적 업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열매"-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는 순종의 땅에서만 성장할 수 있으며 그 순종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립된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유대를 인정함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업적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패의 불안에서 해방된 인간은 최상의 노력을 경주할 수 있다("보다 많은 과실"; 요 15:2, 요 15:58). 열매를 맺는 인간 능력의 근원은 그 자신 밖에 있으므로 수확은 확실하다. 이 열매는 영생 부여의 가치가 있으며 영원토록 남아있는다(요 15:16).||(f) 요 4:36에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는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g) 칼포스는 계 22:2에서 2회 나온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매월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의 묘사는 새로운 세상에 하나님의 널리 임재하심의 충만함을 상징한다. 이 신세계에는 수치와 죄악이 극복되며 하나님의 영의 활동하심의 모든 장애물들은 제거되어 진다.|(참조: Walter Bauer; R.Hensel; J.H.Thayer; F.Hauck).
부요
plou'to"
부유함 wealth, 부 riches.||#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플루토스(Homer 이래)와 관련된 어군은 '흘러 넘치다'(flow)를 뜻하는 인도 유럽 어군 펠-(pel-)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은 원래 '가득하다, 충만(분)하다'를 뜻하는 펠-(pel-)과 같은 의미인 듯하다. 따라서 플루토스 어군은 '재물의 풍부'라는 기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에 이 의미는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서 하나의 의미는 전문적이며, 물질적인 의미의 '풍부'였고, 또 다른 전이된 의미는 지혜, 지식, 자비 등의 '풍성함'이었다.|명사 플루토스는 이러한 의미 '소유물의 풍부, 재산, 부요, 풍부'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어군에 속한 다른 단어들도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동사 플루테오는 '부유하다, 부유하게 되다'를, 플루티조는 '부하게 하다'를, 형용사 플루시오스는 '풍부한, 부유한'을, 실명사로는 '부자'를 의미한다(참조: F.Hauck; W.Kasch).||(b) 호머 작품에서 외적인 부와 덕은 구별되지 않는다. 부는 신들에게 축복을 받은 행운의 생활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술어이다. 특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부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그것을 판단한다. 만일 부가 공동체(폴리스)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부는 항상 물질적인 것이며 불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물질적인 부를 지혜와 덕과 문화로 구성되는 참된 부와 구별한다(참조: F.Hauck and W.Kasch).|견유학파는 물질적인 소유물을 완전히 경멸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범죄와 근심을 함께 수반하기 때문이다(참조: Stob., Ecl.). 스토아학파는 부가 가져다 주는 주된 위험은 잘못된 안전감을 만들어내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도 부가 제공하는 인격 발전의 기회들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하였다(Seneca, De vita Beata 22, 1). 근본적으로 부는 거부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① 헬라 문화에 있어서 부는 다른 문화들에서 소유하고 있던 사회적으로 분열시키는 영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또한 ② 가난한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부가 포기될 수 있다는 사상이 결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플루토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0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오셸(부, 재물)을 번역하며(창 31:16; 삼상 17:25; 왕상 3:11; 대상 29:12; 대하 9:22; 에 5:11; 시 49:6; 잠 3:16; 잠 13:8; 전 5:12, 전 5:18; 렘 17:11; 단 11:2 등), 그 다음으로 하일(재능, 재산, 소유; 욥 20:15; 욥 21:7; 욥 31:25; 시 49:10; 시 52:7; 잠 13:22; 잠 31:29; 사 60:5 등)과 하몬(풍성, 부, 소요, 군중, 사 16:4; 사 29:5, 사 29:7이하; 사 32:14; 사 60:5)을 번역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플루토스는 신약성경에서 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플루토스는 외적 '소유물의 풍부'를 의미한다.|① 공관복음서에서 사용되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병행구, 막 4:19; 눅 8:4). 씨는 염려와 부에 대한 유혹(아파테: 사기, 기만)에 의해 질식된다. NEB는 '유혹'에 해당하는 아파테를 '거짓 매력'이라고 번역했다. 염려는 이 시대의 특징이다(참조: 마 6:25 - 마 6:32).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부는 마음을 끌어당겨 천국의 소식을 듣지 못하도록 막을 때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된다. 대조적으로 8복의 말씀 중에 나오는 가난은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것을 의미한다.|② 딤전 6:17에서도 플루토스는 이 시대의 '외적 재물의 풍부', 곧 '많은 재산'을 의미한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여기서는 이 세상의 재물이 거부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무상한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가 행해지며 그들이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선한 일에 부요한 자가 되라는 권고가 주어진다.|③ 약 5:2에서 플루토스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이기적인 부자들은 거부되고 정죄된다. 그들은 장차 세상이 변화될 때 재앙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불의한 자들이다. 대조적으로 택함 받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며, 믿음에 부요한 자들이다(참조: 약 2:5).|④ 계 18:17에서 플루토스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바벨론의 부자들은 사악에 의해 그들의 부를 획득했기 때문에 그들의 성읍과 함께 망할 것이다(참조: 계 18:3이하).||(b) 플루토스는 '충만, 풍부, 풍성'을 의미한다.|① 롬 2:4에서 플루토스는 참으심의 '풍성'을 나타낸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충만은 영광(롬 23; 엡 3:16)과 은혜(엡 2:7; 엡 1:7)에 있어서 유일하게 참으로 부요하신 분을 특징짓는 말이다. 교회는 이 풍성함에 참여한다(엡 1:7; 엡 1:18, 참조: 고전 1:5). 부요함은 물질적 소유와는 무관한 종말론적 은사이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지나가는 좁은 길은 자신을 비우고 형제들을 돕는 길이 된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마게도냐 교회들은 풍성한 연보로 도왔다.|② 롬 11:12에서 이스라엘의 그리스도를 거부함은 이방인의 풍성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메시지가 이제 그들에게로 향해졌기 때문이다.|③ 골 1:27에서 하나님께서 신앙 공동체에게 비밀(그리스도)의 영광의 충만(풍성)을 나타내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2:2에서 바울은 교인들이 모든 충분한 이해에 이르러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힘쓰고 바란 것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④ 롬 11:33에서는 하나님의 플루토스를 찬송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즉 그의 완전성들의 충만, 그 완전성 중 두가지, "지혜와 지식"이 언급된다. 여기서 "지혜와 지식"은 깊도다(바도스)에 속하고 플루투(충만, "부요")에 속하지 않는다.|계 5:2에서 언약의 부요는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다.|⑤ 빌 4:19에서 하나님은 그의 풍부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준신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c) 히 11:26에서 플루토스는 영적인 '자산'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이 구절은 바울적인 운치를 갖고 있다. 곧 모세에게 있어서 일시적인 능욕은 그가 미래의 보상을 바라본 순간은 풍요한 것이 되었고 백성들을 위한 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유형적인 예상이 되었다는 것이다.|(참조: J.H.Thayer; F.Selter; F.Hauck; W.Kasch).
교만한
uJperhvfano"
거만한, 교만한, 자랑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휘페레파노스는 휘페르($5228: ~위에, ~을 넘어서)와 파이노($5316: 나타내다)의 합성어이며, '남들 위로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이란 의미를 가진다. 휘페레파노스는 헤시오드(Hesiod)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통상적으로 '오만한, 교만한'이라는 뜻을, 때때로는 '방탕한'이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이 형용사는 '빼어난' 이나 '장엄한'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예: Plato. Plut.).||#2. 70인역본의 용법.||휘페레파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회 나오며, 휘페레파노스는 시 119(118):21, 119(118):51, 119(118):69, 119(118):78, 119(118):122에서 제드(오만한, 건방진)의 역어로, 욥 40:12(7); 시 94(93):2; 시 123(122):4; 시 140(139):5에서는 게에(거만한, 오만한)의 역어로, 시 101(100):5에서는 가보아(높은 것, 높임 받는)의 역어로, 잠 3:34; 사 29:20에서는 루츠(비웃다, 놀리다, 경멸하다)의 역어로, 사 13:11에서는 아리츠(주인)의 역어로, 시 89:11(88:10)에서는 라합(오만)의 역어로, 욥 38:15; 시 18(17):27; 사 2:12에서는 룸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외경에서 주로 '거만한'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지혜문학에서 휘페레파노이는 이스라엘 안팎에 있는 의인 및 겸손한 자와 대조되는 한 특징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 휘페레파노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라는 신념이 깔려 있다(잠 3:34).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지혜의 시작인 것과 같이 주님으로부터의 이탈은 교만의 시초이다(시락서 10:12).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교만의 의혹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며(에 4:17[70인역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가운데 자신의 겸손을 나타낸다(유딧 6:19). 한편,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자신의 교만을 질책하며(예: 암 6:8; 암 8:7; 호 5:5; 호 7:10; 렘 13:9; 겔 7:10, 겔 7:20; 겔 16:56; 습 2:10; 참조: 레 26:19), 따라서 이스라엘에 깊이 뿌리 박힌 생각과는 전혀 상반되는 입장을 취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휘페레파노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타나며, 한글개역에 '교만한, 교만한 자'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휘페레파노스는 눅 1:51; 롬 1:30; 딤후 3:2; 약 4:6(잠 3:34의 인용); 벧전 5:5(잠 3:34의 인용)에서 사용되었다.|눅 1:51의 문맥은 시적이다. 즉 이 단어는 눅 1:46-55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의 다음과 같은 싯귀 속에 나온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휘페레파누스])을 흩으셨고". 이 싯귀는 시 89:10의 "주께서 라합을 살륙 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라는 구절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마리아 찬가의 영어 이름인 "the Magnificat"는 이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라틴어 동사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영역판 성서(EVV)는 이 단어를 "Magnifies"(찬양하다)로 번역하였다. "이 시는 구약성경(그리고 쿰란문서?)를 토대로 하여 구성된 서정시로서, 한나의 노래와 특별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삼상 2:1-10; 참조: 눅 1:38; P. Winter, BJRL, 37, 1954,328-47). 이 시는 자기 자신에게 내린 복(46-48절)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든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49-50절), 비천한 자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51-53절),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54절 이하)에 대하여 마리아가 느끼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후반부는 인간의 억압으로부터 한 민족을 구원하셨다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이전의 메시야 사상을 재현하는 시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이러한 메시야 사상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재해석하여 메시야의 파루시아(parousia)에 대한 대망으로 그것을 전이시킨다"(E. E. Ellis, The Gospel of Luke, New Century Bible, 1966, 72).|나머지 용례들은 주로 권면적 기능을 가진 문맥에서 나타난다. 즉, 이 용례들은 초대 기독교의 교리교육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악덕 목록'과 결부되어 있다.|바울은 롬 1:30에서 휘페레파노스를 이방인들의 악덕 중에 하나로 열거한다. 여기서 휘페레파노스는 우상 숭배적인 이교의 부패를 표현한다. 초대교회에 해석에 따르면 이 거만한 자들을 그들이 가지지 않은 것을 자랑하는 자들이다.|딤후 3:2의 악덕의 목록에서 휘페레파노이는 알라조네스("자긍하며") 바로 뒤에 나타난다. 기자에 있어서 이 두 용어는 거만의 서로 다른 두 형태를 의미한다. 이 목록에 표현된 도덕적 무질서는 경건한 겉 모습으로 혐오감을 일으키며, 거짓 교훈에서 생겨나고 말세의 특징이다. 약 4:6과 벧전 5:5는 다같이 잠 3:34의 겸손을 권고하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약 4:6의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는 말씀과, 벧전 5:5의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참조: 민 15:30 LXX)라는 말씀에서 인용되고 있다. 첫 구절은 세상과 벗하여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고, 두 번째 구절은 마지막 때의 삶이라는 보다 넓은 맥락 속에 놓여 있는 교회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참조: E. Guting; C. Brown; G. Bertram).
거짓되게 일컫는
yeudwvnumo"
거짓으로 일컬어 지는 falsely name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프슈도뉘모스(Aeschyl. 이래)는 프슈데스($5571: 거짓말 하는, 그릇된, 거짓의)와 오노마(3686: 이름, 권위, 대의)에서 유래했으며, '거짓 이름을 가진' 혹은 '거짓으로, 부적당하게, 부당하게 불리우는'것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프슈도뉘모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6:20에 한번 나온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여기에서 바울은 거짓된 것으로 일컬어져 신앙에서 떠나서 잘못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운동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참조: 딤전 6:21).|(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Bietenhard).
고창병 든
uJdrwpikov"
수종에 걸린||#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휘드로피코스(Hippocr. 이래; Polyb.)는 휘드롭스(%654: 수종)에서 유래했으며, '수종의, 수종에 걸린'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휘드로피코스는 신약성경에서 눅 14:2에 한번 나온다: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내어버려두다
paradivdwmi
전수하다, 전달하다, 전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이 동사는 기본 전치사 파라($3844:…곁으로부터, …곁에)와 디도미($1325:주다)에서 유래했으며, 플라톤 때로부터 헬라어 문헌에서 발견되며, '선생으로부터 학생에게 교훈이 전수되다, 전달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Theaet. 36, 198b).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우스, 플루다르크 등등의 작품에서도 이 단어가 '교훈을 전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헬라의 신비종교에서 이 단어는 히에로스 로고스(거룩한 가르침)의 전수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필로가 이 단어를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예: vit. Mos. 1, 23 등등).||#2. 구약시대의 용법.||영웅담, 설화, 법률 및 인명 목록의 전승은 선사시대의 이스라엘에서도 있었지만, 유대교가 자기 용어와 자기 의식을 가진 그러한 '전통'은 주전 마지막 2세기 동안 헬라문화의 침투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주후 1세기에 기독교와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생겨나게 되었다.|파라디도미에 상당하는 히브리어의 주요 단어 마사르가 이같이 새로운 용어로 채택되었으며, 이 단어는 공인된 율법 해석이 엄격하게 규제되어 전수되는 과정을 의미하였다(참조:Aboth 1:l;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그것을 여호수아에게 전수하였다'; 또 Peah 2:6 등등).||#3.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서 동사 파라디도미는 119회 나오는데(그 중에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96회,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에 19회 사용되었다), '넘겨주다' hand over, '인도하다' deliver up, '전통을 전수하다' handing down tradition라는 의미도 지닌다.||1. `넘겨주다'라는 의미,|(a) 이 단어는 수난 기사에서 예수님을 넘겨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예를들어 유다에 의해(막 14:10), 산헤드린에 의해 빌라도에게(막 15:1), 빌라도에 의해 백성들의 뜻에(눅 23:25), 그리고 처형하기 위해 군인들에게(막 15:15 등) 넘겨주는 것이다. 다른 재판들에서도 이와 같은 말이 사용되었다(마 10:17; 행 12:1).||(b) 이 단어는 고전 5:5; 딤전 1:20에 나오는 '사단에게 내어주다'라는 공식 문구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사단에게 내어주는 것은 사단이 "이 세상 신"으로서 다스리는 교회 밖으로 그 범죄자를 내보내어 성도들의 교제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c) 이 단어는 또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롬 1:24이하; 행 7:42; 참조: 엡 4:19).||(d) 어떤 사람의 영(요 19:30), 영혼(행 25:26), 몸(고전 13:3), 혹은 자아를 넘겨주는 것, 즉 포기하는 것(갈 2:20; 엡 5:25)은 기꺼이 죽는 것, 또는 희생적인 사랑을 표현한다(롬 8:32; 롬 4:25). 사도들도 역시 죽음에 넘기운 것이다(고후 4:11).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결코 이런 "죽음에"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다.||(e) 마 11:27; 눅 10:22에서 이 단어는 메시야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는 예수님의 권위있는 지위를 표현해준다. 만물이 아버지에 의해 그에게 넘겨졌다. 고전 15:24에 의하면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아버지께 도로 넘겨준다.||2. `(전통을) 전한다, 위임하다'는 의미,|(a) 막 7:13의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라는 구절에서, 파라디도미의 목적어는 랍비의 할라카(율법에 대한 해석)이다. 즉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 통상적인 유대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이 단어는 행 6:14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모세가 전하여 준 관습을 고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한 스데반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 16:4에서 누가는 파라디도미을 도그마타(결의안) 즉 바울이 루가오니아를 비롯한 여러 교회에 전하여 준 사도회의의 결의사항과 결부시켜 사용한다.||(b) 눅 1:2의 파라디도미의 용법은 중요하다. 여기에서 목적어는 구전된 디에게시스($1335:이야기, "내력")이거나 또는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보고로서, 이 보고는 예수님의 생애 중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보고이다. 이제는 예수의 역사가 율법에 대한 해석을 제치고 전승될 전통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c) 바울서신에서 파라디도미는 이 의미로 4회 나타난다(롬 6:17; 고전 11:2; 고전 11:23; 고전 15:3). 이 구절들 중에서 롬 6:17에서 수동태로 사용되어 있는 파라디도미의 주어는 교훈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대조적으로 일종의 교리를 `위임받은' 사람들이다.|한편, 고전 11:2; 고전 11:23 및 고전 15:3에서 이 동사의 목적어는 기독교의 교리이다. 고전 11:2에는 이전에 바울이 '전해 주었던' 교훈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이 교훈의 내용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바울이, 그 자신이 전해 받았던 교훈을 고린도교회에 전해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생각하기에 특별히 중요하고 구속력있다고 보이는 자기 자신의 명령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후자의 경우가 사실이라면, 바울 자신이 전통의 근원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다음의 다른 두 구절에서, 그는 자신이 그것을 전해주기 이전에 자기도 그 전통을 전해 받았다고 분명하게 언명하고 있다.|고전 11:23에서 바울은 "주"를 복음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여기에서 "주께"라는 말씀은 직접적인 계시를 가리키는 것도, 계속적인 전승과정을 약칭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찬 제정의 말씀이 계속하여 전승되어 온 것으로, 주님 자신이 말씀하셨다는 바울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말씀은 최고의 권위가 있는 것이었다(참조: 고전 9:14). 여기에서 랍비적 의미에서의 전통의 개념을 찾으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어디에서도 그러한 생각을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를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니(갈 1:16 등) 그 당시에 널리 알려진 전통에 호소하는 것이 복음전파를 촉진하거나 또는 복음의 연합을 강조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지속적으로 전승되어온 어떤 전통의 권위에도 호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전 15:3에서 파레도카(파라디도미의 직설 능동 과거)는 전통의 근원을 가리키는 어떤 말도 수식어로 취하지 않지만, 언어학적 자료를 통해서 볼 때, 적어도 3절 이하의 말씀들은 최초의 교회 전통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참조: H.Conzelmann in lntertretation 20, 1966, 15 이하).||(d) 그 목적이 가르치는 것일 때 사용되는 파라두나이(파라디도미의 과거 능동 부정사)는 전문적 용어이다. 예를들어 유대의 전승(행 6:14; 참조: 막 7:13), 기독교 전승(롬 6:17; 고전 11:2), 거룩한 계명(벧후 2:21), 믿음(유 1:3), 복음에 대한 것(눅 1:2), 공회의 명령(행 16:4)이다. 파라두나이는 구두적인 것이다.||3. `맡기다, 위탁하다'라는 의미, 행 14:26; 행 15:40와 벧전 2:23에서 `위탁하다, 맡기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의 경우에 "은혜에" 맡긴다. 베드로전서의 경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신 것이다. 막 4:29에서는 `허락하다'(permit)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소도
#Azwto"
아소도(지)||아조토스는 히브리어 아스돗의 헬라어 명칭이다. 그러나 존슨(S. E. Johnson)은 마카베오일서 9:15의 아소도산이 엘 비레(el-Bireh) 북동쪽 6마일(10㎞) 지점에 있는 엘 아수르(el- 'Asur)라고 추측하는데(Oxford Annotated Apocrypha[1965]), 그 이유는 아스돗은 그 전투 장면에서 너무 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신약성경에서 아조토스는 행 8:40에 한번 나온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참조: ISBE).
고아와
ojrfanov"
고아 orphan.||#1. 고전 헬라어 문헌||세속 일반 헬라어에서 오르파노스는 호머 시대부터 나타나는데, 형용사로서는 '부모 없는, 아비 없는', 혹은 더 일반적으로 '...을 잃은'을 의미이며, 명사로서는 '고아'를 의미한다.|고대 헬라에서는 고아를 위해 따뜻한 배려를 하였다. 보통 가까운 친척이 후견인이 되어 고아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졌다. 그 아이가 상속받은 모든 재산은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엄격하게 보호되었다. 고아들은 정규세금 부과에서 면제되었다. 전사한 병정들의 자녀들의 생계는 국가가 맡았다(Demosthenes).|오르파노스는 비유적으로 선생을 여윈 제자를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참조: Plato, Phaedo I,16a).||#2. 70인역본의 용법.||오르파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8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톰(고아, 아버지가 없는 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고아는 어머니가 죽었든 살아있든 간에(참조: 욥 24:9) 아버지를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 아버지 없이는 가정생활의 기본 단위인 "아버지의 집"은 존재하지 못하며 남은 가족들은 비정상적이며 비극적인 존재가 되는 허약한 개인일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많은 문맥에서 고아와 과부는 같이 언급되고 있다(신 10:18; 시 146:9).|과부와 함께 나오는 고아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어떤 사람의 경건은 그가 과부와 고아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서 측정된다. 공의는 그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신 24:17).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저주가 회중에 임한다(신 24:19). 그들을 착취하거나 악용하는 것보다 사악한 일은 없다(신 27:19; 욥 6:27; 22:9; 24:3,9; 시 1:23; 10:2; 렘 5:28). 타락한 사회는 체류자를 착취하며, 고아와 과부를 부당하게 대하며, 부모를 모욕한다(겔 22:7). 예를 들어 그들은 고아의 당나귀를 쫓아내며, 과부의 소를 저당 잡는다(욥 24:3). 말 3:5에서 고아와 과부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은 간음자, 마술사, 위증자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구약의 율법은 고아의 권리가 보장되며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도록 명하고 있다. 고아는 특별한 십일조의 몫을 받게 되어 있었으며(신 14:28,29; 26:12-15) 연례 절기에 참예하게 되어 있었다(신 16:11,14). 추수 후에 남은 곡식단과 감람나무 열매와 포도들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었다(신 24:17-22). 선지자들이 부르짖었던 회개와 도덕의 쇄신에는 고아를 돌보는 것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사 1:17; 렘 7:6; 22:3; 슥 7:1O).|고아를 위한 배려에 대한 이런 주장의 배후에는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여호와 그분이다는 신앙이 놓여 있다(신 10:18; 참조: 출 22:22-24; 잠23:10-11; 시 146:9; 호 14:3). 여호와께서는 "고아의 아버지"이시다(시 68:5; 참조 :시10:14).||#3. 신약성경의 용법||오르파노스는 신약성경에서 두번 나타난다.||(a) 약 1:27에서 야고보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들, 즉 "고아와 과부"에 대해 실제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명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그는 고아와 과부를 같이 언급하는데 있어서 구약성경의 개념을 따르고 있으며,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정의와 동정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 경건함은 헛된 것이라고 역설한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구약성경를 쫓고 있다(참조: 특히 렘 7장).||(b) 요 14:18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성경에서 오르파노스를 비유로 사용한 일례이다. 세속 헬라어에서 이 용어가 선생을 여윈 제자들의 감정을 묘사하는 용법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가족을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집", 즉 아버지가 그 중심과 근원이 되는 일치단결된 공동생활로 평가한데서 그 이미지의 효과가 비롯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며, 따라서 고아의 외로움은 삶의 모든 근거를 잃었다는 것에 있다.|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표현된다(참조: 요 13:3). 예수님의 죽음은 그 제자들을 '고아들'로 만든 것이다. 그들의 상실의 척도에 대한 이보다 더 강렬한 어떤 상징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가련한 상황에 버려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올 것이다. 신속한 배려가 없이는 "고아들"이 존속할 희망이 적기 때문에, 오르파노스의 비유는 그리스도의 부활 때에(성령의 강림이나 재림 때라기보다도) 이 언약이 이루어지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부활절은 제자들이 선생을 여윈 슬픔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들의 슬픔을 표현하는 바로 그 말은 그들의 아들 됨을 말해주는 것이다'(B.F. westcott).|(참조: Walter Bauer; J.Pridmore; J.E.Hartley).
분간하다
diakrivnw
구별하다, 판단하다, 정확하게 분별하다, 결정을 내리다, 의심하다, 흔들리다, 주저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디아크리노는 호머이래로 나타나며, 디아($1223)로 강화된 크리노의 강의형이다.||① 판단하다, 구별하다(Hom., Od., 8, 195). 여기에서 '분리하다, (양떼를)나누다'(Hom., Il., 2, 475)는 의미로 발전되었다.|② 이 동사는 주로 법적 전문용어로 사용되는데, '판결을 내리다, 재판을 실시하다'(Xen., Hel., 5, 2, 10)를 의미한다.|③ 수동태에서 이 동사는 결정이 내려진 문제에 대해 사용되며(Hdt., 9, 58) '분리되다' be separated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Hdt., 7, 206).||#2. 70인역본의 용법.||디아크리노는 70인역본에서 30회 나타나며, 주로 히브리어 샤파트의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도 일반적으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판단하다'는 의미에서 '검사 또는 시험하다, 택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신약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디아크리노는 신약성경에서 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표현한다.||(a) 디아크리노는 '구별하다, 분간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① 행 15:9.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는니라." -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이방인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를,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 혹은 분간하지 않으신다.|② 행 11:12,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사본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는데, 능동태 분사 디아크리난타를 따르면 유대인과 이방인간에 '구별, 혹은 분간'치 말고 가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나 수동태분사 디아크리노메논을 따르면 '의심하다, 망설이다, 주저하다'는 의미를 가진다.||(b) 디아크리노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나머지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혹은 분별)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자를 더 좋아하여 그에게 우선권이나 영예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곧 차별적 평가를 한다는 의미이다.|① 고전 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냐]" -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다른 사람보다 위에 구별했다는 것을 나타낸다.|② 고전 11:29,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주의 몸을(다른 떡으로부터) 구별, 혹은 분별해야 한다. 즉 다른 것들과는 다른 그 어떠한 몸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분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여기에 "죄"라는 말은 크리마로 문자적으로 심판이란 말이다), 곧 심판을 먹고 마신다(정죄된다는 것이다. 롬 3:3).||(c) 디아크리노는 '분별하다, 시험해 보다, 판정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① 마 16:3,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② 고전 11: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 이 구절은 만일 우리가 충분히 판정하였다면 판단, 곧 현재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란 뜻이다. 주의 몸을 충분히 혹은 철저히 혹은 구별하여 알기 위하여는(고전 11:29)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철저히 판정해야 한다.|③ 고전 14:29,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 거짓 예언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말인 듯하다. 예언하는 사람이 실제로 성령의 감화로 말하는지 시험해 보거나 잘 판단하여 결정해야 한다(요일 4:1-3), 특별히 "영 분별하는 능력"으로(고전 12:10).||(d) 디아크리노는 '판결하다, 판결을 내리다, 논쟁을 해결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고전 6:5,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없느냐".||(e) 디아크리노는 '반대하다, 다투다, 싸우다, 논쟁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중간태로 2회 사용되었다.|① 행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란하여] 가로되" - 할례자들이 베드로와 논쟁을 벌였다.|② 유 1:9, "천사장 미가엘과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 하였다.||(f) 디아크리노는 '아무에게서 물러나다, 아무를 버리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참된 그리스도인 사회에서부터 물러난 이단자들에 대해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유 1:22의(LT Tr AW 사본) 신앙을 버리는 어떤 자들을 정죄하라(혹은 징계하라, 책망하라). 또한 '논쟁을 일으키는 어떤 자들을 책망하라'(혹은 징계하라)라고 번역할 경우에 (e)에 해당한다.||(g) 디아크리노는 '자기 자신과 모순(혹은 불화)하여 있다, 주저하다, 의심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는 일반 문헌에서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의심은 믿음의 부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① 롬 14:23, 의심은 믿음의 부족, 곧 죄로 나타난다.|② 약 1:6-8, 본 절은 의심을 기도와 관련시킨다. 즉 믿음으로 구해야 하는데 의심하며 구하는 자는 분열된 자로, 소망의 능력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기도하는 자인 것이다.|[의심은 소심함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③ 마 21:21(마 11:23), 의심하지 않은 믿음은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으로 묘사한다. 예수님께서 마 17:20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와 비교하여 볼 때 의심은 소심함과 유사한 것임을 보여준다. "강하고 담대하라."|[의심은 불신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④ 롬 4:20[아브라함], "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으니"라고 하였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탐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숨겨진 채로 있는 초자연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대체 지식이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역사상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의심은 하나님께서 계속 실행하고 계시며 또한 인간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⑤ 유 1: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 여기서는 교의상의 의심인 것 같다. 공인 본문을 따르면 개역 한글판과 같이 번역될 수 있고, 또한 '신앙을 버리는 어떤 자들(어떤 변절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배교자일지라도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 어떤 사본(LTTrAW)에 따라 "의심하는 자들을 납득(확신)시키라"고 번역할 수 있다.|⑥ 행 10:20,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 또 다른 사본(ReC)의 읽기를 따르면 이와 같이 번역된다. 여기에서 의심은 베드로를 이방인 신자 고넬료에게로 보내고자 하셨던 성령에 대한 신뢰의 부족일 수 있다.|신약성경에서 의심하는 자는 특별히 디아크리노가 의미하는 바, 하나님을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과 그 약속을 거스리는 죄를 짓는 것이다.|의심하는 자는 결국 그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신뢰성을 의심해야 한다(약 2:4; 참조: 1:8, 디프쉬코스: "두 마음을 품어").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에는 동요함이나 모순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자는 아디아크리토스, 즉 흔들리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Arndt, 16), "편벽이 없다"(약 3:17).|만일 약속이 복음의 구조적 요소라면 소망은 믿음의 구조적 요소이다. 엄밀히 말하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의심은 소망과 신뢰에 반대 방향으로 지향한다. 이와 같은 의심은 종말론에 관계되는 문제이다.|그것은 의심의 가능성이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곳에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항상 복음과 마주대하여 일어난다. 왜냐하면, 의심은 복음과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의심이 분명히 불신에 이를 수 있기는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의심은 불신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자의 문제이다.|(참조: J. H. Thayer; B. Gartner; F. Buchsel).
올리고스
ojlivgw"
겨우, 간신히.||#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올리고스(Hippocr., Aphorisms 2, 7 등)는 올리고스($3641)에서 유래했으며, '조금, 겨우, 간신히'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올리고스는 신약성경에서 벧후 2:18에 한번 나온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동하게 하다
taravssw
함께 뒤흔들다, 분기시키다, 선동하다, 어지럽히다, 불안하게 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타랏소(Homer 이래)는 '함께 흔들다, 분기시키다, 선동하다, 동요시키다, 교란(혼란)시키다, 어지럽히다'. 수동태로는 '혼란(무질서)에 빠뜨리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타랏소는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46개의 히브리어 단어들과 변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은 의미로 나타난다(겔 32:2,13; 시 46:6[45:7]; 사 8:12등).||#3. 신약성경의 용법||타랏소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고전 헬라어의 의미와 동일하다.||(a) 요 5:4, 요 5:7에서 타랏소는 물이 '동요하는 것'을 나타낸다: 5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베데스다(Bethesda) 연못 속에 있는 그 물은 아마도 간헐천으로써 때때로 휘저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물이 동하는 그 시간에 한 천사가 그 물에 치유의 효험을 부여한다고 일반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 분의 비유적 표현에서 인간의 참된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율법(유대교)이 얼마나 부적절한가가 여기에 그려져 있다. 인간의 가장 강렬한 투쟁도, 활동을 마비 불능케 하는 죄에서 그를 구해낼 수 없다'(J.H.Mayfield).||(b) 타랏소는 감정적 흥분이나 혼란 같은 동요를 표현하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행 17:8에서 이 단어는 유대인들이 흥분했을 때, 즉 무리를 내적으로 선동했을 때 사용되었다: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② 행 15:24에서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서 혼란을 야기시키었을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③ 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여기서 분사 호이 타랏손테스는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의 교회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그들의 의식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아마도 단순히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변형된 다른 복음의 결과로 인하여 그들의 이해와 행위들에 있어서 소란을 겪게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교회의 활력적인 조직을 파괴하기 때문에 치명적일 수 있는 혼란이다.|④ 갈 5:10의 총칭 단수는 위와 같은 거짓 교사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서 그들이 뿌린 혼란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⑤ 요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타랏소는 엠브리마오마이와 나란히 사용되어서, 생명 그 자체와 사망을 극복하신 주께서 예수님의 인격 안에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과 소망이 그토록 많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보셨을 때, 그에게 덮쳐왔던 원통하여 일어나는 분하고 노한 분노의 물결을 의미한다.||(c) 타랏소는 수동태에서 항상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어 '두려워하다'와 같은 감정적 동요를 함축하고 있다.|① 마 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여기서 타랏소의 수동 과거가 사용되어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감정적 동요의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정신에 두려움이나 공포로 타격이나 충격을 가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이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야기되는 정신적 충격이라 하겠다.|② 타랏소는 신현현에 관한 이야기들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아무개의 정신에 두려움이나 큰 공포로 타격을 준다.|마 14:26(병행구, 막 6:50)에서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눅 1:12에서 제사장 사가랴가 향단 위편에 나타나 선 천사를 보았을 때, 눅 24:38에서, 제자들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 서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런 타랏소를 경험했다.|③ 타랏소의 다른 뜻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표현에 내포되어 있다.|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여기서 마음이란 '자아'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이제 이 세상의 세력들과 하나님의 계시 사이에 갈등이 야기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고립되어서 내적인 충격과 근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심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써 극복된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야말로 사망을 이긴 집(요 14:1 이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요 14:27에서 신자는 종말론적인 평화에 대한 약속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공포와 근심에 머물 필요가 없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벧전 3:14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④ 요 12:27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경험을 언급하고 있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으신 자인 그리스도께서 두려움과 근심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가 스스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떠맡기 위하여,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이 극도로 겸손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Muller).
히에류스
iJereuv"
제사장 priest.||#1. 고전 헬라어 문헌.||(a) 히에류스는 히에로스($2413: 거룩한)에서 유래했으며, '제사장(priest), 희생 제사를 집전하는 사람(sacrificer), 예언자, 점장이(diviner)'를 의미한다. 호머(Homer)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만티스(%1041: 예언자, 점장이)라는 단어와 병행하여 나타난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을 취급하는데 숙련된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또한 신들에 관련된 일에 관한 지식을 알려줄 수 있는 예언자나 점장이이기도 하였다. 선견자와 제사장은 특별히 내주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특별히 신과의 관계나 중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 희생 제물은 반드시 제사장에 의하여 바쳐질 필요는 없었다. 가족의 희생 제사는 가장이, 부족의 희생 제사는 부족장이, 그리고 시(市)의 희생 제사는 시장이 각각 집전하였다. 예컨대 이소크라테스(Isocrates)는 '그들은 제사장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왕의 신분도 모든 사람에게 속하여 있다고 믿는다'는 이상론을 내세운 바 있다(2, 6).|그러나 대규모의 중요한 제의 장소에서는 지속적으로 일을 돌보아주는 것을 필요로 했으므로 가문의 전통보다는 성전의 전통에 따라 생활하는 전문적인 제사장직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제사장이라는 직업이 있었으며, 뚜렷한 특권 계급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일부 제사장직은 세습적이었다.|제사장이 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 거룩한 물건들을 취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해야 하는 명백하고도 고유한 일은 희생 제물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희생제를 드리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히에류오는 동시에 '살해하다, 죽이다'라는 의미도 가지게 된 것이다(Procopius Gazaeus. 2, 25).||(b) 스토아주의에서의 제사장직에 대한 철학적 고찰. 제논(zeno)에게 있어서 제사장은 지식과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지식과 신앙심은 상호 연관이 있는 것으로, 제사장에게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현자만이 진정으로 제사장이 될 소양을 갖추고 있으며, 현자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에픽테투스는 참된 견유학파의 철학적 사역에 대하여 제사장을 비유로 사용하였다.||(c) 헬라 유대교(필로)의 제사장직에 대한 형태.|① 필로는 스토아 학파의 현자에 대한 이상에 영향을 받았다. 필로에게 있어서 제사장은 로고스나 이성(reason)을 상징한다. 필로는 '히에류스는 로고스이다'라는 말을 매우 좋아하였다. Deus Imm., 131-135에서 히에류스가 호 데이오스 로고스(신의 로고스)라고 우회적으로 해석한다. Som, Ⅰ, 215에서 필로는 영혼의 성전에서 참된 사람은 제사장처럼 자신을 다스린다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이나 '영혼에 투영된 신의 능력'이라고 한다(Congr., 97; agric., 9, 108; Rer. Div. Her., 231).||② 필로는 제사장 직무를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였다(Ebr., 126). 그는 그것을 그의 최고 철학적 이상, 그의 금욕적 개념으로 생각하여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이상화한다(참조: H. Wensckewitz). 제사장은 완전히 무흠한 생활을 솔선 수범해야 한다(Spec, Leg., 1. 102). 육체적으로 무흠한 것은 영적인 완전 무결의 상징이다(Spec, Leg., 1. 80). 레위인들은 그들이 올바른 로고스를 따르고, 타락할 수 있는 영역과 관계를 끊고, 마음의 순결을 지키고, 감각적인 세계와 정욕에 얽혀드는 것을 피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진실한 제사장 상을 대표한다(참조: Det. Pot. Ins., 62ff; Sacr. AC. 128f). 따라서 필로는 이미 죄의 길을 걷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제사장이라고 한다. 필로에게 있어서 모든 의로운 현자는 제사장들이다(Spec, Leg., 1. 243).||③ 유대에는 율법에 따른 제사장 신분이 있었으며, 제사장직을 위한 예비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참된 제사장은 유대인이라기보다는 현자이다(Rer. Div. Her., 82f).||#2. 구약 및 이스라엘 역사의 제사장.||히에류스는 70인역본에서 약 900여회 나오며, 히브리어 코헨(제사장)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코헨은 아람어 카힌(선견자, 점쟁이)의 동족어이다.||(a) 가장 초기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제사장의 직무는 원래 제사라기보다 신탁의 전달이었다. 제사장의 신탁 예언, 제비에 의한 신탁이 모세 시대와 사사 시대에 이미 보여진다(출 17:9; 출 33:7-11; 삿 17:5 이하; 삿 18:30; 삼상 14:41; 삼상 28:6). 신 33:8-11에서 레위인들의 기본 임무는 우림과 둠밈을 관리하는 것이다(참조: Ez 21:21의 활의 신탁). 그 다음으로는 여호와의 정의와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마지막에야 비로소 희생 제사 임무가 언급된다. 모든 가장은 희생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참조: 창 8:20; 창 31:54).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특별한 특권 계급을 나타내지 않는다. 시내산 계시 이전에 제사장이 존재했다(출 19:22; 출 19:24). 모세는 레위인이며 제사장 직무를 이행했다. 아론도 레위인이다(출 4:14).|모세의 장인이자 미디안의 제사장(출 2:18 이하; 출 3:1)인 이드로는 시내산에서 번제와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공동 식사를 나누고 모세에게 율법의 규례에 관하여 조언했다(출 18:12 이하).|레위인 제사장이란 공식적 표현은 신명기에서 처음 발견된다(참조: 신 17:9). 레위인들이 특히 여호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신 10:9; 삿 17:13), 그들만이 진정한 제사장직에 부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출 32:25 이하; 신 33:8 이하).|레위인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으며(신 10:9; 삿 17:7; 삿 19:1). 부족의 조직에 속했으며, 신성한 율법의 전통을 돌보았다(신 27:14-26; 신 31:24 이하; 신 33:10). 모세는 레위 족속에 속한다.|제사장직은 레위 족속에 속한 모세로부터 시작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위임한 권세로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성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웠다(출 28:1). 그리하여 그들은 희생 제사를 관할하는 의무를 맡아 수행했다(레 9장). 오직 아론의 가계와 그 후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출 28:1; 출 28:43; 출 40:12-15; 민 16:40; 민 17장; 민 18:1-8; 신 10:5; 왕상 8:4; 스 2:36). 아론의 자손은 특별한 법적 하자가 없는 한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레 21:16).|아론은 레위인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은 오로지 레위인 안에서 계승되었다. 모든 합법적인 제사장들은 예외 없이 레위인이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취한 후에 전체 레위 지파가 구별되었다. 그들은 장자들을 대신하여 성소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민 3:5 이하). 레위인은 세 그룹으로 구성되었다(게르손 자손, 고핫 자손, 므라리 자손). 그들에게는 각각 특수한 임무가 부여되었다(민 3:14-38).|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아론의 권위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했을 때(민 16장)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아론의 제사장직은 더욱 확고해졌다. 성막이나 성전의 제단에 봉사하는 자,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는 자는 모두 아론의 가계에 속한 자가 아니면 안되었다. 제사장의 직무는 주로 세가지였다.|(1) 여호와 앞에 있는 성소와 제단에 봉사하는 일(민 16:40; 민 18:5).|(2)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대하 15:3; 렘 18:18; 겔 7:26; 미 3:11),|(3)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우림과 둠밈을 통해, 출 28:30, 스 2:63), 이 밖에도 소송을 취급하고, 전쟁시에는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를 메는 일, 문둥병자를 식별하는 일 등을 임무로 하였다.|제사장들은 지켜야 할 율법이 있었다(레 10:8 이하). 제사장들은 법적으로 순수한 유대 혈통을 이은 처녀라야 하는 엄격한 조건으로만 결혼할 수 있다(레 21:7; 레 21:14; 스 10:18; 스 10:19).|제사장들의 성별도 대제사장의 성별식과 같았으나 그보다 간략했으며(출 29장; 레 8장), 기름을 붓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기름부은 제사장이었다. 제사장들은 몸의 여러 부분에 기름과 피를 뿌렸다(출 29:21; 레 8:30).|예복은 제사를 집행할 때만 입었다. 제사장은 베로 만든 고의를 입고 겉옷에 띠를 띠고 관을 썼다(출 28:42; 출 29:8; 출 29:9; 레 8:13).|제사장직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이 성직 제도에 세 계급 즉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이 있었다. 이 제도는 포로 시대 후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 갔으며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에 걸쳐 있었다.||(b) ① 한편 군주 통치 이전 시대의 제사장들은 에브라임 미가 신당과 같은 성소와 관련해서만 찾을 수 있다(삿 17장). 이 미가의 제사장은 레위인이었으며, 그는 자기의 신상과 함께 단(Dan)으로 이끌려 갔다(삿 18장). 단 지파의 제사장직은 삿 18:30에서 모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합법화되고 있다.|실로(Shiloh)에 있는 언약궤의 성소에서 엘리의 가족은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했으며, 그 직무는 희생과 번제물을 드리고 신탁 예언을 하는 것이었다(삼상 1:3; 삼상 2:27 이하). 실로에 있는 엘리의 가족이 내리막길로 치달은 후 그 가족 구성원에 대한 언급이 놉(Nob)에서 나타난다(삼상 21:27; 삼상 22:9-23).|선지자 사무엘은 제사장의 일을 보았다(삼상 9:13-25). 제사를 드린 성소는 실로, 놉, 기브온, 브엘세바, 헤브론, 단, 아나돋, 벧엘 등이었다.||② 다윗이 여부스족에게서 예루살렘을 빼앗아 수도로 만든 후로 예루살렘은 여러 세기 동안 제사 중심지가 되었다. 제사장들의 수가 증가하여 다윗은 24반으로 편성했다. 큰 절기의 행사에는 전부가 참가하지만, 보통 때는 한 반이 한 주일씩 봉사하고, 안식일 저녁의 희생 제사가 드려지기 전에 교대했다(대상 24:1-19; 왕하 11:19). 솔로몬이 죽고 나라가 남북 왕국으로 분열된(주전 922) 후는 북 왕국의 벧엘이 예루살렘과 대립했으며 왕이 제사장을 겸했다(왕상 12:33; 왕상 13:1-4).||③ 요시야의 개혁과 함께 높은 곳들의 성소(산당)는 없어지고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사의 중앙집중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요구는 622년 요시야의 개혁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모세 전통을 대표하는 레위인들과 선지자들 양자 모두에 의해 옹호되어 온 것, 즉 형상, 제의적 방종, 죽은 자에 대한 제사, 주술의 금지가 근본적으로 요구된다. 해결책은 우상숭배의 완전한 폐지와 산당의 제사장들의 완전한 축출에서 찾아진다. 이 목적을 위해 시온에 있는 여호와의 전이 유일한 합법적인 제사 중심지로 선언된다. 예루살렘 밖의 레위인들은 사독 가문을 옹호하여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그들의 정당성이 도전 받는다. 이후로부터 그들은 성전에서 더 낮은 임무만을 맡게 된다(왕하 23:5-9).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크나큰 위험도 수반한다. 여호와의 율법에 지시되어 있는 교훈은 희생 제사에 의해 무색해진다. 선지자들의 태도는 제사 의식에 대한 비평과 함께 그 지위에 날카로운 빛을 던진다. 하지만 프로페티즘(prophetism)이 이 전반적인 제사 제도의 발달을 저지할 수 없었으며, 다만 이 영역 내에서 여호와의 기본적인 요구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여호와 신앙에 대한 가나안의 영향력을 거부하는 일에 있어서 제사장 직무와 일치한다.||④ 포로기 이후의 재건으로 사독 후손에 대제사장직이, 아론의 후손에 일반 제사장직이, 레위 후손에 성전 지키는 일이 요구되었다(대상 24장).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에스라는 토라에 기초하여 공동체의 확고한 재건을 이룬다. 제사장직의 임무는 여호와의 법령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임무는 또한 서기관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서기관은 제사장과 나란한 지위를 가진다. 서기관은 제사장을 율법의 지배 아래 둔다. 율법은 기록으로 고정되어 있으나 학자들의 해석도 역시 필요로 하는 것이다.|만약에 모든 더 이상의 발달이 히에류스(제사장)와 그람마튜스(서기관)의 제휴로 특징지워진다면 우리는 또한 서기관의 권위가 제사장의 권위를 능가해감을 주목해야 한다. 제사장은 성전 직무의 기관으로서 그 중요성을 유지한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회적으로 높임받는 귀족 신분의 제사장 계급은 산헤드린에서 영향력을 가진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토라를 선포한다. 그들은 종교적 가르침과 감독을 책임진다. 그들은 심지어 제사장들도 가르친다. 제사장들은 단지 제의의 직무자일 뿐이다. 이리하여 서기관들은 제사장들의 경쟁자가 된다. 조만간 제사장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감소된다. 제사장직에 대한 낮은 평판이 이 과정에 기여한다.|이와 같이 에스라가 희생 제사 직무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책임 맡게 됨에 따라 성경 전문가 집단이 대두하여 제사장 직분을 무색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아보스(Aboth) 6:6의 '제사직과 왕직보다 율법을(익히는 것이) 더 위대하다'라는 구절과 '율법에 관심있는 비유대인은 대제사장과 같다'(B. Sanh. 59a)라는 구절에 반영돼 있다.||(c) 예수님 시대에는 사회적인 격차가 대제사장과 일반 제사장으로 양분시켰다. 후자는 포로에서 돌아온 4반열(24반열 중에서)을 다시 24반열로 나누어 편성했다(대상 24장; 눅 1:5; 눅 1:8). 나누어진 반열별로 한 번에 일주일씩 차례로 성전에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나머지 시간동안 제사장들은 주변 땅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제식의 순수성 문제에 대한 전문가적 판단을 내릴 수 있었으며, 회당 예배 시간에 율법을 낭독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일을 자주 행했다. 제사장 직위는 세습적이었다. 성결과 결혼에 대한 엄격한 규례가 그들에게 실행되었다(레 21). 레위인들은 성전 찬양대와 성전 봉사자(대상 6:16-33)로 나뉘었으며, 마찬가지로 24반열로 임무 분할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제단에 접근하지 못했으며(민 18:3), 여호수아 21장에 보면 그들은 레위인들의 성읍들에 살았다.||#3. 신약성경에서 히에류스(제사장).||명사 히에류스는 신약성경에서 31회 나오며, 복음서에서 11회 사용되었다. 대제사장 혹은 대제사장들과 그리고 특히 서기관과 비교할 때 제사장은 신약성경에서 지극히 미미한 역할만 할 뿐이다.|이 단어에 대한 언급은 별문제로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서 제사 의식과 제사장에 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놀랍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참조: 시 110과 마 22:44)이나 제자들을 제사장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의 이미지를 제사장의 직무보다는 오히려 세속 세계에서 취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프로페티즘(prophetism)의 완성을 보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의에 대해 선지자들과 같은 비평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한편 예수님의 말씀 전체는 제사장보다는 선지자적 형태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는 선지자의 영을 받아 그의 말씀을 새로운 고지로 높이신다.||(a) 공관복음의 용례에서는 마 8:4; 막 1:44; 눅 5:14; 눅 17:14(참조: 레 13:49)의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예수님은 모세 율법에 정한 규례를 인정하신다. 그는 공중 보건이나 의식상의 정결의 보호와 관련된 문제에서 제사장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으신다. 그는 규례를 준수하도록 분명히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역시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신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제사장에게 가지는 의의를 나타낸다. 이 사역은 예수님의 권위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제사장 자신이 직접 확인함으로써 이 증거에 참여해야만 한다.||(b) 두 개의 다른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과 관련하여 그의 자유를 얼마나 지지하는지를 토라의 본보기로써 보여준다. 그것들은 족쇄 같은 율법주의의 철폐를 암시한다. 마 12:4과 병행구에서 다윗과 그 일행들이 위급한 때에 제사장의 특권을 위반한다(참조: 레 24:5-9; 삼상 21:7). 마 12:5 이하에서는 성전에서 제사장의 사역은 안식일을 정규적으로 정당하게 위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위의 두 구절은 모두 제의적 율법의 중시와 율법보다 우월한 것 사이에서 전통적인 초기 그리스도교의 종합을 예증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에서 계명의 위반은 성경에 근거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더 크신 분, 즉 신정국의 왕과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 계심을 본다.||(c) 제사장 주제는 누가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눅 10:31 이하에서는 제사장 계급에 대하여 엄중히 비판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이단으로 일컬어지는 사마리아인들이 사랑을 보임으로써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나음을 보여준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밖의 다른 곳에서는 요 1:19에서만 연관되어 나온다. 누가복음의 서두, 눅 1:5에서는 예로부터 행하던 제사 현장에서 새로운 계시를 받는 히에류스가 언급되어 있다. 행 6:7에서는 많은 제사장들이 믿음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바는 복음에 의한 제사장들의 변화를 누가가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d) 계 1:6과 계 5:10; 계 20:6에서 기독교인들은 "왕들과 제사장들"로 불리우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하여 인간에게서 선발되었다. 따라서 출 19:6의 약속은 이행되었으며, 하나님 자신이 성전인 고로 이 새 반열에는 어떤 성전도 더 이상 필요없다(참조: 계 21:22; 계 20:6).(참조: J. Baehr; G. Schrenk).||(e) 기독교의 신앙이 구약의 예배 형식보다 우월하며 사실상 구약의 예배 형식을 대치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열정으로,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결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새롭고, 진정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한다(히 5:5-10).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능가하여(히 7:15-17), 멜기세덱의 제사장직까지 거슬러 올라가며(히 7:15-17), 과거의 제사 체계에서 상실한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히 7:18).||①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하나님 자신의 맹세에 기초한다(히 7:20-22).|②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그리스도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영속적이다(히 7:23-25).|③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자손들이 했던 것처럼 죄의 정화를 받을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공유한다(히 7:26-28).|④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참된 성소(모세의 장막은 이 참된 성소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가 있는 하늘에서 지속된다(히 8:1-7).|⑤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성취이다(히 8:8-13).|⑥ 예수님의 제사장직으로 드리는 제사는 반복할 필요가 없고, '단번에' 드려졌다(히 7:27; 히 9:12).|⑦ 이 제사의 제물은 죄를 제거할 수 없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서, 이 피를 통해 신자들은 거룩함을 얻는다.|⑧ 그 결과는 제사장 계급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온전하게 정상적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히 10:11-22).|⑨ 예수님의 제사장직으로 말미암는 약속들과 소망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에 의해 보장된다(히 9:28; 히 10:23).|⑩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 말미암은 완전한 용서는 우리의 사랑과 의의 역사를 위한 가장 고귀한 동기를 부여한다(히 10:19-25).|⑪ 하나님의 백성의 삶 가운데 예수님의 제사장직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에 의해 보증된다(히 7:25). 비록 바울은 그의 기록에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주된 주제로 삼지 않았지만(아마도 그의 사역이 주로 이방인들 즉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그들의 새로운 위치에 대한 지식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성경 정경이라는 하나님의 선물 중에 히브리서의 풍성한 통찰력이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G. E.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참조: NBD[CLC]).
휘페르볼레
uJperbolhv
능가, 초월, 우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휘페르볼레(Hdt. 이래)는 휘페르발로($5235: 던지다, ~너머로 던지다, 능가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너머로 던짐'|(b) '초과, 한량없음, 최상의 단계, 최상의 양'|(c) '우월, 탁월'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휘페르볼레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바울서신에만 사용되었다. 휘페르볼레는 주로 카드 휘페르볼렌(대단히, 심히, 매우)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난다.||(a) 롬 7:13에서 죄가 율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낳을 때 죄는 "그 최고의 의미에서" 죄임을 드러낸다.||(b) 고후 4:17에서 훨씬 더 강한 이중 어구 카드 휘페르볼렌 에이스 휘페르볼렌("지극히 크고")은 측량할 수 없고 영원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영광을 묘사한다. 그것은 너무나 작고 매우 잠시동안만 지속되는 환난의 일과 비교된다. 하지만 동일한 모든 서신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그에게 지워진 환난의 짐에 대해 보다 정확한 휘페르뒤나민 뿐만 아니라 카드 휘페르볼렌, '모든 크기를 능가하는'을 사용한다.||(c) 고전 12:31 하반절에서는 이 단어가 형용사로 사용되어 고전 13:1-13에 묘사된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은사에 지배되는 삶을 '훨씬 능가하는' 것("제일 좋은 길", 즉 훨씬 우월한 길)이라 부른다(고전 12:28-30).||(d)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자신의 박해 행위를 날카롭게 묘사하는데 이 표현을 사용한다("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갈 1:13; 참조: 고전 15:9; 빌 3:6).||(e) 고후 4:7에서 바울은 이 명사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역사하시는 이는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그것은 후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길(방식)이다- 하나님께만 있다(참조: 고후 12:9).||(f) 고후 12:7에 따르면, 바울은 그에게서 정상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나 그로부터 듣는 것을 넘어서서 그를 판단하지 않도록, 특히 그에게 베푸신 계시의 "풍성함"에 근거해서 그를 판단하지 않도록 제지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거짓 선생
yeudodidavskalo"
거짓 선생 false teacher||명사 프슈도디다스칼로스는 프슈데스($5571: 거짓말 하는, 그릇된, 거짓의)와 디다스칼로스($1320: 교사)에서 유래했으며, '거짓 선생'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프슈도디다스칼로스는 벧후 2:1에 한번 나온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기에서 거짓 교사들은 예전의 거짓 선지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몰래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급속히 멸망을 자초할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Wegenast).
과연
ajlhvqeia
진리||#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알레데이아(Homer 이래)는 어원적으로 '가리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보여지거나, 지적되거나 표현된 정도(범위)의 상태나 사태, 그것도 이러한 보임과 지적과 표현에서 나타내지거나 그 자체 사실 그대로 나타낸 정도의 상태나 사태를 지적하며, 물론 그것은 숨겨지거나 위조되거나 왜곡되거나 생략되거나 은폐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알레데이아는 사건의 진상(full or real stale of affairs)을 의미한다. 이것은||(a) 사법에서 여러가지 진술에 대항하여 지지될 수 있는 사건의 진상,|(b) 역사에서 신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실재적 사건,|(c) 철학에서 절대적 의미의 참된 것 등을 의미한다(R. Bultmann).|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거짓이나 거짓말에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한다.||#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a) 에메트와 의미와 그 역어 알레데이아.|알레데이아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메트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는데, 85회 알레데이아로 번역되었다.|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4941: 공의, 심판)의(6666: 의), 샬롬(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요약하면 알레데이아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에메트의 의미를 따라, '신실(성), 성실(성), 충실, 진리나 진실, 확실한, 정직한, 진실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b)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법률적 용법.||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 알레데이아)..."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삿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삿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창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알레데이아),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렘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알레데이아)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29절)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 알레데이아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사 59:14, 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13절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4절).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1절)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마찬가지로 시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시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그리고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 알레데이아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c) 에메트/ 알레데이아의 종교적 용법.|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10; 61:7; 69:13; 108:4;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105절).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3. 알레데이아의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109회 사용 중, 바울 서신과 요한의 기록에서만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a) 알레데이아는 "확실성과 힘을 지니는"(has certainty and force)"에 대해 사용되었다(에메트의 의미로).|① 타당한 규범. 알레데이아는 엡 4:21; 엡 4:22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진리는 지적 진리에 대한 단순히 이론적인 감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에서 나타날 때는 진리에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와 만남으로써, 결국 삶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 변화를 통해서 신자들은 과거의 속임수에서 벗어나게 된다.|갈 2:5에서도 알레데이아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문제가 된 것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복음을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은 곧 진리(타당한 규범)를 더럽히도록 유혹하는 것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성실의 의미에서나 구원사에서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실제 상황이라는 의미에서도 진리 곧 타당한 규범을 부인하는 것이다.|갈 2:14에서 알레데이아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게바는 복음의 타당한 규범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고후 13:8의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는 바울의 언명에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이 언명은 아마도 진리의 개방에 의해(그 결과야 어쨌든간에) 진리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주의와 복음을 오직 보급시킬 수 있다는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진리는 타당한 규범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롬 2:8과 롬 2:19에서 알레데이아이다.||② 올바름, 정직. 알레데이아는 에메트와 같이 '올바름, 정직'이라는 보다 약한 의미를 가진다. '진리를 좇는 것(행하는 것)'이란 표현에서 나타난다(요 3:21; 요일 1:6). 유사하게 요이 1:4; 요삼 1:1 이하에서 "진리에 행하는 것"은 정직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같은 맥락을 따라 알레데이아는 아디키아($93: 불의)의 반대이다(고전 13:6; 롬 1:18). 이 단어는 또한 디카이오쉬네($1343: 의)와 결합하며(엡 4:24; 엡 5:9; 엡 6:14), 아마도 때때로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약 3:14; 약 5:19).||(b) 알레데이아는 '진술의 사실'(truth of statement)에 대해 사용되었다. 행 26:25에서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참된 ... 말"(레마타 알레데이아스)은 환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엪 알레데이아스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사실과 일치하여'나 '사실대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막 12:32; 눅 4:25; 눅 22:59에 나온다. 따라서 엪 알레데이아스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의 사실을 정확하게, 혹은 바르게 진술하는 것을 의미한다.|특히 눅 4:25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하다. 예레미아스는 주장하기를 이 문구는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강화하고 자기 권세를 나타내고 자기 메시지의 확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라고 한다(J.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c) 알레데이아는 드러난 '사건의 실상이나 진상'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롬 1:18("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서 확신하는 것은 이 경우에서 알레데이아를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으로나 의(디카이오쉬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롬 1:19의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말을 보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revealed reality)"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롬 1:25("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단순히 프슈도스($5579: 거짓, 허위), 즉 우상에 반대되는, 참된 또는 실질적인 하나님을 의미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Bultman).|좀 더 설명하면, 바울은 알레데이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기 의지의 계시나 혹은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든 어느 순간에는 창조를 통해서든 자기 존재의 계시를 나타낸다. 이런 용법은 로마서의 처음 두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사악함으로 인하여 "진리를 막고"(롬 1:18),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롬 1:25). 그러므로 진리에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이다(롬 2:8). 반대로 율법 그 자체는 지식과 진리의 구체화이다(롬 2:19)("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진리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진리가 아니다. 바울은, 요한의 경우와 같이 사람들이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바울은 모든 이방 세계가 고의적으로 복음-진리를 거부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이 세계가 창세로부터 하나님과 그의 주권적인 주장들에 대해서 고려될 수 있는 것, 즉 분명히 보여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롬 1:20)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사실'이다.|유사하게 알레데이아는 다음과 같은 전치사와 함께 '실제적으로(real)'를 의미한다. 골 1:6(엔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행 10:27과 행 10:34(엪 알레데이아)에서 실제적인 행위를 표현한다. 한편 롬 2:2에서 카타 알레데이안을 '사실과 일치하여, 사실대로'를 의미하며, 롬 2:11에 프로소포렘프시아(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되는 것이다.|요일 3:18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대조는 헬라에서는 흔한 표현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실제적 행위로'를 뜻한다.|또한 고전 헬라어의 표현 '진실을 말하다'는 70인역본에서 뿐만 아니라(대하 18:15; 잠 8:7),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막 5:33에서 알레데이아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리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진 혈루증 앓는 여인은 "모든 사실"을 고하였다. 즉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롬 9:1에서 참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이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고후 12:6에서 참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 8:40; 요 8:45 이하; 요 16:7에서도 역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듣거나 본 사실들, 곧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할 수 있다.||(e) 알레데이아는 '믿거나 의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① 신뢰성이나 신뢰할만함, 롬 3:3 이하; 롬 15:8.|② 성실, 진실, 진심. 알레데이아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진실' truth이라는 의미를 지니거나 '성실' sincerity의 의미로 나온다. 마 22:15 이하(막 12:14)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질문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알레데스) 참으로써(엔 알레데이아)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고후 7:14("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 11: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고전 5:8에서 에일릭리니아(명확, 순수, 성실)와 연결되어 있으며, 빌 1:18에서 프롭하시스(편파적임, 불공정)와 반대된다. 때때로 헨디아디스의 형태로 친족어와 관계되어 있다: "믿음과 진리"(딤후 2:7). 요이 1:1과 요삼 1:1에서 이 용법이 사용되었다: "참으로 사랑하는 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f) 알레데이아는 복음, '참된 가르침 또는 믿음'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여기서 알레데이아는 (a)①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복음(에테론 유앙겔리온)(참조: 고후 11:4)과 대립되는 참된 교리를 의미한다.||② 이런 이유로 고후 4:2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반적으로 그의 활약으로분명히 나타낸 알레데이아로 부르기도 한다("진리의 나타냄"). 이 경우에 알레데이아는 앞에 나온 말 로고스 투 데우("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포함시킨다(참조: 고후 2:14; 골 4:3 이하; 딛 1:3).||③ 갈 5:7에서 바울은 마치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다고 말한 것처럼(참조: 롬 10:16). "진리를 순종치"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④ 벧전 1:22에 의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진리를 순종함"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참조: 벧전 1:21 이하).||⑤ 또한 복음의 설교(전도)는 진리의 말씀이다(고후 6:7; 골 1:5; 엡 1:13 등).||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며(딤전 2:4; 딤후 3:7; 딤전 4:3; 히 10:26; 요이 1:1).||⑦ 살후 2:10-살후 2:12에서는 알레데이아는 "거짓"($5579)과 "불의"($93)라고 불리는 적그리스도의 계시에 대립되는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⑧ 딤전 3:15에서 에클레시아(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묘사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⑨ 벧후 1:12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이다.||⑩ 알레데이아가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특히 그릇된 교훈과 반대된다.|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알레데이아는 순종할 의향에 의해 결정되는 피스티스의 개념처럼 "권위있는 교훈"이다.|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딛 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g) 알레데이아는 또한 "진짜임", "하나님의 실체", "계시"를 의미한다.|① 계 8:44에서 신적 능력으로서의 알레데이아와 반신적인(anti-divine) 것으로서의 프슈도스(거짓)가 대조되어 있다. 알레데이아와 프슈도스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진정한 가능성들로 이해된다. 이것은 말씀과 말씀의 경청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계시에 의해 보존되므로, 우리는 또 다시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다.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실체,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으로, 즉 죄로 말미암아 구성된 인간 존재와는 반대되고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이며, 계시는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존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사건이다. 계시에서 그의 고유한 존재의 참된 가능성이 그에게 드러나며, 그 때, 그와 만나는 계시의 말씀에 직면하여 그는 항복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이나 비교(esoteric)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각오와 연습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믿음 속에서 일어난다.||② 요 8:44에서 하나님의 실체와 반신적 실체 간의 대조가 나타난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으로 알레데이아가 생명을 주며, 알레데이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것은 죽음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 말씀은 또한 알레데이아가 있을 때에 알레데이아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이루는 결정적인 힘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뒤따르는 말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은 "거짓말" 또는 "허위"라는 첫 번째의 잠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문맥은 명백히 첫째, 신성한 실체와 악마적인 실체가 모두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과, 둘째, 이들 실체들이 존재의 활동 방식인으로서의 현실이라는 것, 또는 역으로 하나님의 또는 악마적인 실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의 모든 활동 방식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요일 1:8과 요일 2:4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실체로 인한 존재의 결정이 지적되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지"(않다). 이것은 또한 그러한 결정이 구체적인 행위로 그 자체를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③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에는 특유의 다의성(ambiguity)이 생겨난다. 예수님께서 알레데이아를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첫 번째로 "진리를 말하다"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또한 "말씀으로 계시하다"를 의미한다(요 8:40; 요 8:45; 요 8:46, 반대의 개념인 프슈도스[$5579] 대신에 더 일반적인 하마르티아[$266]가 사용된 곳, 특히 요 8:47, 알레데이아 대신 하나님의 말씀[타 레마타 투 데우]이 쓰여진 곳).||④ 이 단어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해 말해질 때 같은 이중의 의미가 나타난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 그것은 요 18:37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빌라도의 질문이 그 말씀을 강조하고 계속되는 말씀에서 알레데이아가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라는 것과 그것의 이해는 자유로운 존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말미암은 존재의 결정에 기초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⑤ 계시로서 알레데이아는 기노스케인(아는 것, 요 8:32; 요이 1:1, 요일 2:21)의 대상이다. 첫번째로 표현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과 같은 계시의 결정적인 능력의 특성이다.|알레데이아는 본질적으로 질문한 사실의 표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을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엘류데리아($1657: 자유)가 인간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요 8:34),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지식이다.|요 17:17; 요 17:19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즉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께 위탁된 선언),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계시의 말씀은 말 또는 사상의 집합체도 아니고, 구체적인 마주침으로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 개인과 그의 역사에서 성취하신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요 17:17-요 17:19). 그는 단순히 그의 말씀에 의한 전달로서가 아니라 알레데이아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 알레데이아를 가져오므로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계시는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조에: 생명)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신성이 나타날 때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나타나신다는 것은 요 1:14; 요 1:17에 나오는데, 거기서 "독생자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으로, 즉 하나님의 실체는 그것 안에 나타난다고 묘사되었다.||⑥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대한 요구(요 4:23 이하)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에게는 알레데이아 뿐만 아니라 프뉴마도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신성의 본질과 출현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참된 예배는 영성과 의인화된(anthropomor- phic) 개념이 제거된 하나님의 개념에 기초한 순수한 지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질 즉 프뉴마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난다. 알레데이아가 더해진다면 이것은 그러한 예배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계시(요 4:25)에 의해 결정될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신 계시자(요 1:18; 요 14:6)에 의해 결정될 때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⑦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는 요 14:17; 요 15:26; 요 16:13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해석되며, 이것이 요한복음이 이 공동체에 주어진 "성령"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해하도록 의도한 방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특히 막 13:11; 행 1:8). 바로 그분 자신이 요 14:16에서 보혜사라는 용어를 선택하신다.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진리의 영")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 알레데이아 만큼이나 하기오스에 의해서도 표시되기 때문이다(참조: 요 17:17-요 17:19). 그러나 그 단어가 프뉴마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는 우리에게 요한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항상 계시 안에서 작용하므로, "진리의 영"으로서 역사하시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역할은 공동체에서 계속 역사하는 계시로 묘사되고, 요일 5:6에서 증거하시는 프뉴마는 바로 알레데이아와 같다. 같은 의미로 요일 4:6에서 "미혹의 영"과 대조되는 "진리의 영"에대한 언급이 있으며, 어떤 것이 하나님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불경한 세력에 속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실제적인 행위, 즉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는가 또는 안듣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데이아는, 그것이 선포된 한은, 옳은 교리이며 프슈도스(거짓, 거짓말)는 잘못된 것이다(요일 2:21). 한편 요삼 1:3의 알레데이아가 계시에 의하여 결정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일 1:6의 "진리를 행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반대되는 삶의 방식(-->242)을 나타낸다. 참으로 요삼 1:12에서 어떤 사람이 "뭇 사람에게" 가졌다는 증거는 "진리에게도"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는 공동체를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요삼 1:8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공동체가 훈계,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로 그것의 구체적인 기독교적인 행위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 결정이 개개의 신자들을 결속시킨다. 그 때문에 요한이서의 저자는 편지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1-요이 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 A. C. Thisel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