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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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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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2-24: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2: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구원이시다. 구원 되시는 이 분이 그리스도의 일을 하시는데, 그리스도가 뭐냐?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

 

그 분이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는 우리로 어떤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시는 거냐? 성령의 사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 바로 그 구원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로써 만들어진 하늘나라의 사람이다. 질이 그렇게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성경을 가지고 가르친다면 글자 문자 그대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나가야 된다.

 

예수님께서 각 촌 각 성으로 다니사하는 건 역사적인 것을 갖고 와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계시다. 역사적으로 당시에 예수님께서 각 성 각 촌에 다니며 가르치신 것을 배운 그들은 이미 다 죽었고, 이 말씀을 들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도시에 있던, 시골에 있던, 산골에 있던, 섬에 있던, 어디에 있던 교회라면, 또 성경을 들고 가르친다면, 진짜 하나님의 종이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거다. 이게 하늘나라의 천국복음이다.

 

하늘나라의 말씀을 먹으면 하늘나라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보리밥을 먹으면 보리 똥이 나오고 쌀밥을 먹으면 쌀 똥이 나오듯이 먹은 대로 나오는 거다. 어느 교회에서 건 진리를 먹었다면 진리의 생각, 진리의 행동 활동, 천국복음의 의사가 자기 입으로부터 나가야지 왜 예수 믿어 이 세상에서 잘 살자하느냐? 노아홍수 때도 그랬다. 전부는 홍수에 쓸려 죽었다.

 

롯이 소돔성에 간 것은 잘 살려고 간 것이지 불에 타 죽으러 간 것이 아니다. 소돔 고모라성의 성주노릇을 하러 간 것이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전도도 못하고 어떻게 됐느냐? 자기 집의 종도 전부 소돔 고모라성의 물이 들게 하고, 식구들마저도 소돔 고모라의 정신이 들고. 얼마나 썩었으면 소금기둥으로 만들어 놨을까? 조금만 신경을 쓰면 영적인 이치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오는 건데 오늘날 교회에서 왜 물질축복, 썩어질 축복, 불에 타질 축복으로 사람을 못 쓰게 만들까?

 

이방인들이 물질축복운운 하고, 우상 숭배자들이 물질축복운운 하고, 모든 종교도 물질축복운운 하고 있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다 그렇다. 안 그런 종교가 없다. 대문에, 방문에 부적을 왜 붙이는 것이냐? 재앙은 들어오지 말고 복만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간창조를 한 원인 동기 목적의 눈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보면 그 소원 목적은 쓰레기처럼 사는 거다.

 

1:에 보면 예수님의 머리는 하얗고, 눈을 불꽃같고, 그 다음에 일곱 촛대 사이로 다니신다. 그게 계시의 눈으로 보는 교회다. 교회를 대표적으로 7개로 해서 넣어놓은 것이니 우리교회도 그 일곱 교회 중의 하나에 들어있고, 세상의 모든 교회는 다 그 중에 들어있다. 예수님이 왜 촛대 사이로 다니시느냐? 왜 각 촌 각 성으로 다니시느냐?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예루살렘을 향해서 여행을 한다. 그러면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출발해서 그 다음에 가나안 땅에 순찰을 가서 믿지를 않아 뒤로 돌아온다. 40년 동안을 한 군데서 산 게 아니라 이렇게 뺑뺑이를 돈 것이다. 그렇게 돌리면서 애굽성의 때물을 자꾸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시내산의 말씀성을 자꾸 집어넣는 것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면서 빠꾸를 해도 신앙은 약속의 땅으로 올라간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교훈이 이렇게 들어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의 도성. 하나님과 평화. 그러면 하나님과 평화를 하려면 예수님 오셨습니까하고 악수를 하면 되는 거냐, 아니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천국복음과 의사단일성이 돼야 하는 것이냐?

 

원래부터 인간 자기에게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온 것이 없다. 예수를 믿으면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소원과 뜻과 목적에 맞춰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 악수를 하면 의사단일이 되는 거냐? 안 되는 거다.

 

각 성 각 촌으로 다니며 가르치셨다. 각 성 각 촌으로 다니며 가르치려면 하나님과 평화하는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이 평화는 유엔이 부르짖는 평화가 아니다. 유엔이 부르짖는 개념으로 평화를 위해 살면 너의 집안에 각 구석마다 싸움을 붙이겠다.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이고 간에 평화롭게 살자고 악수를 하는데 예수님은 무슨 심통으로 이렇게 하시는 거냐? 그렇게 해서 평화롭게 살아도 결국 심판은 오는 거고, 문제는 그렇게 산다고 해도 너희들의 속성이 마귀처럼 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천국은 가겠지만 영능의 실력자로 성공한 자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형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연습을 하라고 준 것이다. 하나님 섬기는 방법을 이 땅에서 부모형제를 잘 섬기는 방편을 통해서 배우라는 것이다. 자식도 하나님께서 준 것이니 하나님 앞에 합격되도록 기르면 그게 내 복이 된다. 그런데 자식을 내버리는 부모는 하나님의 선물을 버리는 거다. 그 부모 속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입어지는 구원은 없는 거다. 아이를 키우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이루어지는 이룰구원은 없다. 하다못해 자기 자식이 없다면 다른 자식을 통해서 그게 나와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부자 되는 목적으로 가르쳤을까? 가령 예수님께서 시골에 가서 가르치면서 여기에 앞으로 고속도로가 날 것 같으니 딴 데 가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십시오한다면 그게 천국복음이냐? 목사 중에 복덕방 목사가 참 많다.

 

목사가 집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가령 하나님께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보낸다면 그 집을 빨리 팔고 가야 하는데 빨리 팔려니 그만큼 덜 받는 게 있다. 그래도 손해를 보고서라도 빨리 팔고 가는 게 진짜 정신이다. ‘팔려야 가지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딴 사람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는 정신 자체가 세상이다.

 

아브라함은 천막 하나 가지고 이리 가라하면 하고 가고, ‘저리 가라하면 하고 간다. 그런데 롯은 나가라하니까 억지로 억지로 나간다. 뒤를 쳐다보며 머뭇거리니까 천사가 손을 확 잡아 이끈다. 세상 심판 때도 아마 그런 교인들이 있겠다.

 

마지막 날은 얼마나 급한지 시간이 급하다. 그러니까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지붕이라면 집의 맨 위다. 신앙정신을 말한다. 맨 위라 하면 머리 위는 하나님이요, 그 다음에 인간 너다. 네가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온다면 존귀적 순서적 신분적으로 하나님 다음에 너인데 네가 가지려 내려오면 그 신분이 바뀐다. 하나님-->물질-->인간 네가 돼버린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구하는 기도나 설교를 보면 하나님-->인간-->물질이냐? 성경을 축소시키면 십계명이 나오고, 십계명을 축소시키면 하나님-->인간-->물질이 된다. 하나님-->인간-->물질의 이 순서가 정상이요 정확한 건데 안 믿는 사람은 물질-->인간이다. 물질이 최고다. 물질 밑에 자기가 들어있다. 그러니까 항상 물질을 머리 위에 이고 있으니 무겁다. 머리가 아프다. 힘들다. 근심 걱정이 많다.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오늘날 거짓되게 예수 믿는 사람은 물질-->인간-->하나님이 돼 버렸다.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은 없고 물질-->인간이고, 거짓된 교인들은 물질-->인간->하나님으로 돼버렸다. 하나님이 자기 말밑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을 자기 종처럼 부려먹는다. 실지로 하나님이 인간의 종이 돼서 부려먹여지는 건 아닌데 믿는 사람의 정신 사상을 놓고 보면 그런 식이다 그 말이다. ‘예수여, 나 부자 되게 해 달라. 뭐 달라.’ :의 마귀시험의 내용을 확대시키면 이 내용이 들어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영의 눈으로 보는 영적 이치를 모른다. 생각을 못한다. 썩을 것만 알지, 배부른 것만 알지 머리가 영리해지고 똑똑해지는 건 모른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게 이단이 아닌가한다.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는 사람은 배가 부른 사람이냐? 배가 고프면 꼬리가 되느냐? 이건 짐승의 얘기다. 사람은 머리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오셨으니 하늘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목적으로 인간을 만들었으니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품과 인격을 천국의 성질로 천국의 성격으로 만드심이요, 이것이 인간구원이다. 주님처럼 만들어지는 게 인간구원이다. 물에 빠진 걸 건져주면 그게 구원이라는 것은 안 믿는 사람도 아는 거고,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를 온전케 하심이다. 뭘 가지고 온전케 하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가지고 당신처럼 온전케 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듯이 당신의 교훈을 듣고 그 깨달음이 신령한 하늘나라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간다면 깨달은 그 사람은 천국의 사람으로 속성이 변해지고 땅의 소원 목적을 가졌던 것은 버리게 된다. 땅의 소원 목적을 향한 이걸 반대로 바꾸는 것이 회개다. 목적관을 바꾸는 것이 회개다. 그런데 거짓된 교인들은, 교회는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달라고 세상을 좇아가고 있으니 어떻게 회개가 되느냐? 이건 죽을 때까지 해도 회개가 안 된다. 누구 미워하고, 주일 까먹고, 하나님 앞에 바로 못한 걸 회개하는 것은 회개가 아닌 반성이다. 기독교인들이 회개와 반성을 모른다. 가는 길을 안전히 정 반대로 되돌아서는 게 회개다.

 

주님의 가르침은 누룩의 역사요 성질이다. 사람이 바꿔진다. 옳은 지식이 들어가면 사람 속의 그 옳은 지식이 그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고 자기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니 옳은 사람이 된다. 그 다음에 성격 성질은 믿어가면서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즉 이룰구원은 우리가 신경을 쓰는대로 점차적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건 주님이 맡고 계신다. 이건 우리 책임이 아니다. 이제 일단 예수를 믿었으면 예수님처럼 인격과 성품이 자라야 한다. :5:48내가 온전한즉 너희들도 온전하라.’ 인격이요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의 속성을 닮으라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누룩의 역사요 성령님의 역사다.

 

어느 도시에서건 어느 시골에서건 이것을 한다면 이건 인간을 구원하는 참 구원의 역사다.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다. 이것이 아니면 그 어디서 하건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복음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 구하게 하고 자랑하게 하는 건 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세상복음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저주라 할 때 안 믿는 사람들은 집안이 망하고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지는 것을 말하지만 저주 중에 저주는 사람 머리통이 망하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머리통 속에 들어있는 건 부자, , 먹는 거, 많이 가지는 것. 자고 일어나면 그 사고방식이 지배적이다. 거기서 어떻게 사람이 되는 교훈이 나오겠느냐? 어떻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으로 나오겠느냐? 절대로 안 나온다.

 

예수 믿으면서도 소원 목적이 그렇게 들어가 있다면 죽을 때까지 해도 너는 회개를 못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지옥에 가느냐?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건 주님이 책임을 지고 있고, 그래서 예수를 잘 못 믿어도, 성경을 못 깨달았어도 천국은 가는 거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만들어지고 깨닫고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하고 많은 자기의 시간 세월 노력 활동 젊음이 어디로 갔느냐? 사망으로 다 씻겨 내려가 버렸다. 이걸 사망성공이라고 한다. 사람의 머리통이 잘못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니 그런 앙화가 없다.

 

사람이 망가지는 걸 알아야지 사업이 망하고 집안이 망하고 그것만 알면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이 성공되고 망하는 걸 알아야 한다. 특히 교회 목사님들은 이걸 알아야 한다.

 

성경에 비유로 청소를 깨끗이 해 놓았더니 귀신이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더 악한 귀신을 일곱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어떻겠느냐? 그래놓으면 어찌 될까? 세상에 있는 것으로 구하게 하고 자랑하는 것은 참 복음이 아니고 마귀의 유혹으로 넘어간 거짓된 복음이다. 마귀가 예수님께 그런 시험을 걸었다.

 

23-24: 성경은 거의가 우리의 이룰구원으로 믿음실력 영능의 실력 면으로 명령하고 징계하고 권고하고 권면을 한다. 그래서 본문에도 묻는 자가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것을 물었는지? 단순히 천국과 지옥으로만 되어있다면 이건 기본구원을 말하는 거다. 우리는 중생을 알게 쉽게 하느라고 기본구원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기본구원을 얻었으면 교회에 들어가서 성경을 배우고 깨닫고 성장되고 자라가야 하는데 이건 이룰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본문에 묻는 자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뜻으로 물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뜻이 아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룰구원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이걸 풀어야 한다.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가고 그런 말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길도 좁은 길도 있고 넓은 길도 있듯이 문도 큰 문이 있고 좁은 문이 있다.

 

좁은 문이란 경쟁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니 나도 가 보자가 아니라 가면서 좁은 문이 어딘가하고 찾아서 좁은 문으로 가야 한다. 넓은 문은 별의 별 사람들이 한꺼번에 어깨동무하고 다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좁은 문을 열을 서서 한 사람씩 들어가는 거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으니 좁은 문이 있다면 넓은 문도 있다는 말인데, 그런데 누구든지 힘 안 들이고 쉽게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어느 누가 낑낑 거리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느냐? 그런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어렵게 믿고 싶으냐, 쉽게 믿고 싶으냐? 쉽게. 그런데 자기는 쉽게 믿는다고 하지만 가만 보면 왜 저렇게 어렵게 믿을까하는 게 있다.

 

그러면 쉽게 믿는 것과 어렵게 믿는 것이 뭘까? 하나님 앞에서는 모세에게도 그랬지만 자기 신발을 벗어야 한다. 자기 신발을 신고 있다는 말은 자기 주관성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라는 의미이다. 신발을 신으면 아무 데고 간다. 그러나 신발을 벗으면 찔릴까봐 조심스럽다. 하나님 뜻과 명령대로 수행하라는 의미에서 네 신발을 벗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쉽게 믿게 하려는 것이냐, 어렵게 믿게 하려는 것이냐? 쉽게.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깨달으라는 것은 쉽게 예수 믿고, 살아생전 하나님의 은복을 받게 하려는 거지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원 마음이 우리로 망해먹고 죽이려는 건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좁은 길로 갈래, 넓은 길로 갈래하고 묻는다면 다 넓은 길로 간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묻는다면? 좁은 길이라고 한다. 말은 그런다. 그런데 소원과 목적이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러 가는 신앙이라면 그 발은 넓은 길로 가는 것이다. 넓은 문 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고 떠드는 게 믿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속한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실 때 웃기는 사람들이다.

 

예수 믿으면서 멍청한 사람은 자기가 길을 가면서 그게 넓은 길인지 좁은 길인지를 모른다. 모르니까 자기가 어느 길로 가는 건지를 모르는 거다. 세상을 소원 목적을 하고 마귀가 끄는 대로 가면서, 그게 넓은 길로 가는 게 분명한데 그 사람에게 물으면 좁은 길을 간다고 한다. 그러니 이게 정신이 없구나. 영적 분별이 없는 사람은 정신이 없는 거다.

 

영분별은 가르치며 나오고, 자기 속에서 기도하며 나오고 그런다. 저 사람의 성질이 뭐냐, 소원 목적이 뭐냐하는 걸 알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이 좁은 길인지 넓은 길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저 사람이 하는 일이 악령의 일인지 성령의 일인지를 뭘 보면 아느냐?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는 목적관을 보면 알 수 있다. 목적관에서 드러난다. 세상이 아니면 천국이고, 천국이라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정신 성품과 인격이 들어있어야 하는 건데 악령의 일에는 그런 건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눈으로 보이는 활동은 활발했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헐벗고 눈멀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실 때 당시의 바리새 지도자들이 그랬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들은 소경이라하니까 그들은 아니라고 했다.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니까 무슨 소리냐?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실 때 겉은 매끄롬한데 속을 들여다보니 평토장한 무덤과 같다고 했다. 평토장한 무덤은 겉을 보면 모르지만 속에는 썩은 시체가 있다.

 

우리 모두 최소한 남 판단보다 자기가 넓은 길을 가고 있는지, 좁은 길을 가고 있는지? 그리고 궁극교회가 좁은 길을 가는 건지, 넓은 길을 가는 건지? 그 가르침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기가 가는 길을 모르겠거든 옆의 사람에게 물어봐라.

 

남에게 좁은 길인지 넓은 길인지를 대답을 해 주려면 그 사람의 소원 목적과 신앙생활을 하는 사상을 들어보면 나온다. 진단해서 좁은 길을 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어느 누구를 향해서 이단이라고 하니까 자기는 자기의 출생과 존재목적도 모르면서 덩달아 그 사람을 이단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말아라. 어떤 교단이나 교파가 누구를 이단이라고 해도 너도 그 이단과 같은 성격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 너도 똑같다. 하나님은 그걸 보신다.

 

네가 하나님 말씀에서 적중성으로 바로 가고 있느냐? 그 정신이 깨닫고 바로 가고 있느냐? 주님이 원하시는 정중성. 적당히가 아니고 적중. 화살이 한 가운데로 적중하듯이. 우리 신앙은 가에 맞으면 안 된다.

 

세상은 가에, 변두리에 가 있어도 몇 점, 몇 점할런지 몰라도 신앙은 적당히가 아닌 적중이라야 한다. 예를 들자면 5+5=10이라냐 100점을 주는 거지 정답을 안 쓴 게 아니라 911을 썼다고 해도 99점이나 101점이 아닌 0점을 주듯이 우리의 신앙사상 정신은 하나님의 뜻과 적중이 돼야 한다. ‘너무했다는 안 통한다. 이면 이고 아니면 아니지, 생명이면 생명이고 사망이면 사망이지 그 중간은 없는 게 신앙의 세계다. 그 두 길, 두 노선밖에 없다. ‘만들어지는 거냐, 안 만들어지는 거냐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너무했다식이다. 산수 셈으로 말하면 5+5=10100점인데 5+5=9 해 놓으면 한 개가 모자란다고 해서 이걸 점수를 99점을 주는 식이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는다. 이건 안 된다.

 

좁은 길, 구원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넓은 길로 가시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고 좁은 길을 가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냐? 좁은 길을 가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염두에 두고 당신이 먼저 모범적으로 그 길로 가시고서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마귀에게 져놓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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