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홈 > 커뮤니티 > 햇볕같은이야기
햇볕같은이야기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기독정보닷컴

18-10: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8-9: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 있다면 거짓된 빛도 있다는 말인데, 거짓 된 빛은 얼마나 오래 갈까? 아무리 오래 가봐야 세상이 끝나면 끝나는 빛이다. 그러나 참 빛은 영원히 간다. 영원히 가는 빛이라면 영적인 면의 빛이겠구나. 영적인 면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거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거다. 참 빛과 비교를 할 때 세상의 모든 빛은 거짓된 빛인데, 이 빛은 영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을 안 믿어도 알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것, 육신의 오각과 오감성으로 감지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빛이다.

 

철학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적 이치를 깨닫고 나오는 철학이 있는데, 이것은 영원히 간다. 이 철학은 사람을 바로 세우고, 온전케 하고, 죽을 것을 죽지 않게 하고, 죄를 알게 해서 죄에서 건져내는 역할을 한다. 사람을 지극히 존귀 영광스럽게 만든다. 진리 생명과를 먹고 나온 철학은 사람을 바로 세우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게 한다. 그런가 하면 세상 이성적인 철학이 있는데,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나온 철학이기 때문에 전부는 세상에 해당이 되는 거고, 사람이 바로 설 수가 없다. 이런 철학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워지지를 않는다. 사람이 세워지는 바탕이 없다.

 

자기가 진리이치를 많이 깨닫고 바로만 살아간다면 존재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속성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간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신령해져 간다. 그러나 세상 이방종교에서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사람이 신령해지는 것은 없다. 세상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돌리시는데 세상의 지도자들이 이걸 모르고 자기가 뭘 어떻게 하겠다고 장담을 하지만 세상이 인간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거냐? 자기 목숨 하나도 좌우지하지 못하면서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아라.

 

거짓된 빛은 물질세상에서 물질이 있는 동안에 임시적으로 쓰임이 되는 거지만 참 빛은 인간에게 영원히 필요한 거다. 그리고 거짓된 빛은 사물의 형태나 모양이나 활동을 보여주지만 참 빛은 활동 이전에 사람의 마음중심이 어디에 서서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그 활동을 하는 건지 그 원인을 본다. 이건 성령님의 눈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은 생각을 비취고, 마음을 비취고, 생각도, 소원 목적도 비취고, 모든 오각의 오감성에서 나오는 가치판단을 비췬다. 깨닫게 한다. 그리고 참 빛은 세상에 온다. 세상에 안 오면 사람들이 뭐가 참 빛인지를 모른다. 이 참 빛은 무턱대고 단번에 오는 게 아니라 참 빛이 오시기 전에 선지자들로 하여금 참 빛이 올 것을 예언하게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세례요한을 당신보다 먼저 보냈다. 참 빛의 역사가 있기 전에, 사건이 오기 전에 참 빛이 온다고 하는 징조가 미리 있게 한다.

 

방죽의 제방이 터지기 전의 징조는 둑의 아주 작은 구멍이나 틈으로 방죽의 물이 조금씩 샌다. 이건 둑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다. 이런 이치를 보면서 자기 집에서 누가 옳거니 그르거니하며 자주 말다툼이 일어난다면 이건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냐? 가족들이 흩어질 징조다. 아파트에 사는 어느 집에서 밤마다 이웃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싸운다면 이건 나쁘게 말하면 그 집안 식구는 미친 거다. 다른 집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잠을 자는데 자기 집은 밤마다 온 식구가 울고불고 한다면 이게 정상이냐, 정상이 아니냐? 정상이 아니다. 그러니까 미친 거다. 어떻게 말을 해도 정상은 아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라고 하는 것은 참 빛이 온 인류에게 온다는 거다. 이 참 빛은 인류나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언어나 풍습에 구별이 없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구별이 없이 모든 인류를 향해 온다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어느 나라는 어느 종교가 성하고, 어느 나라는 기독교가 성하고 그런 게 아니라 온 인류가 다 믿어야 한다. 세상사람들은 신앙은 자유라고 하지만 나라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피부가 다르고, 골각이 달라도 온 인류를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죄에 빠진 모든 인류를 구원하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아담 타락 이후의 모든 인류는 죄 아래 놓여 있으니 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고 있다. 심지어 어린아이도 그렇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인격성을 가진 자유자로 도덕성자로 지어졌고,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으니, 인간이라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인간 자기를 지으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야 한다.

 

참 빛이 각 사람에게 비췬다 함은 세상의 모든 사람은 참 빛을 받으면 인간 자기의 존귀 영광성을 깨닫게 된다는 거다. 그런데 창세 이후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부터 생명과를 먹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거의가 세상을 탐하고 있다.

 

믿는 자기가 어느 일에 일꾼이 되어야 하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해야 창조의 목적대로 존귀 영광자가 될까? 믿는 사람이라면 이 면에 신경을 써야 할 텐데 많은 기독자들이 이 면보다는 신앙정조를 버리고서라도 내가 어디서 일을 해야 죽을 때까지 연금을 타 먹으며 편히 살까?’ 하는 쪽에 더 신경을 쓰면서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까지 그것을 쫓아간다. 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다가 세상역사를 운행하시는 그 분의 눈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창조물들은 햇빛을 받으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서 자기 생을 열매를 남기고 마감을 하는데 믿는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런 믿음의 열매도 맺지 못하고 그 나라에 간다면 그 나라에서 어떤 결과로 나타나겠느냐? 예수 믿는 자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 빛이 필요가 없는 거냐? 예수님 당시에 바리교인들이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못 알아봤다. 즉 자기의 구원을 못 알아봤다. 그러니 구원에 대한 욕심도 없고, 구원에 대해 가르치는 그 분을 죽이려고 항상 눈에 독이 들어 있었다. 결국 이들은 역사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다 깊은 곳에 사는 물고기는 햇빛을 보지 않기 때문에 눈이 멀어 있다. 말하자면 햇빛을 싫어하는 물고기는 소경이 되는 거다. 눈이 멀었으니 물 속에서 헤엄을 쳐서 앞으로 나가면서도 자기가 누워서 가는 건지, 바로 가는 건지를 모른다. 눈을 뜬 인간 편에서 이 물고기를 보니 누워서 가는지 바로 가는지를 아는 거지 눈을 못 보는 물고기 입장에서는 모르는 거다. 참 빛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상태다.

 

참 빛을 싫어하는 자는 인간 자기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는지, 인간이 왜 사는 건지, 왜 죽는 건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건지를 모른다. 인간 자기와 짐승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적인 면에서 어떻게 다른지 분별을 못한 채 짐승처럼 살게 된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의 말이 우연한 게 아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들의 말대로 짐승처럼 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관을 놓고 보면 사람이 아무리 많이 배웠다고 해도 빛을 멀리 하고 사는 자들은 무식한 거고, 짐승처럼 본능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즐겁게만 살면 된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로 닮아간다는 것을 모른다. 이건 미래가 없이 사는 거다. 짐승은 미래가 없지만 사람은 미래가 있다. 자기의 존재가치가 동물과 같다면 뭐 하러 교회에 나와서 이것저것을 배우느냐?

 

일반적으로도 남을 해치는 자에게 미래가 있느냐? 타락된 일반세상에서도 이런 걸 보여주는데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른 채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의 그 무엇을 좇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그 면을 통해서 데려갈 수도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로 인해 재앙이 되게 하실 수도 있다. 세상만사를 자기의 구원에 이용 활용을 해야 하는데 이게 안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만을 좇아가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먹혀 죽게 하실 수도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잘 믿어서 부자로 살게 해 달라느니, 세상의 것을 이뤄 달라느니하는 것은 참 빛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런 가르침은 복음증거도 아니고, 참 빛을 만난 사람도 아닌 멸망 당할 짐승과 같도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라고 한 것처럼 스스로 죽을 짓을 하는 거다. 사람은 이룰구원의 진리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망한다고 하는 것은 사업이 망한다가 아니라 사람 자체가 망한다. 이렇게 되면 육신적으로는 멀쩡하다고 해도 영적인 면에서는 식물인간이다. 이런 사람이 되면 건설도 없고, 개혁도 없고, 전투도 없고, 개척도 없고, 성장도 없이 자꾸 자기 육신이 편할 쪽으로만 나간다. 남이 천국처럼 만들어 놓은 곳에 가서 살려고 하는 것은 본능으로 사는 거고, 미래가 없이 사는 거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만 되면 자기가 백성들을 잘 살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는데, 자기가 만능의 능력자냐? 자기가 세상을 주관하는 전능자냐?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큰소리치는 곳이 세상이다. 남을 무시하고 잡아 뜯고 짓밟아서 자기가 올라가는 곳이 세상이다. 세상은 원래가 그런 곳이니 믿는 사람은 신앙을 가지고 만사를 보고 그런 곳에 끼면 안 된다. 믿는 사람이 자기 손에 성경이 주어져 있는데도 참 빛을 알지 못하고 있으면 여리고 산길에서 숨은 강도들에게 강도를 당하는 나그네와 같은 꼴이 된다.

 

참 빛은 세상에 온다. 세상이란 자기다. 사람이 있는 곳이 세상이다. 사람이 없는 곳은 세상이 아니다. 세상인간인 나는 참 빛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참 빛은 모든 것을 구별 분별시키고, 무엇이 참인지 선택하여 갖게 한다. ‘예수 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됩시다하는 것은 참 빛이 아니다. 이건 사람을 본능적으로 살게 하는 거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하는 것까지 포함된 말이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참 빛 되는 그 분이 세상에 계셨는데 사람들이 이를 알지를 못했다고 한다. 왜 몰랐을까? 이 빛이 사람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왔기 때문이냐? 화성인처럼 왔기 때문이냐? 문어처럼 왔기 때문이냐? 참 빛이 인간으로 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한 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생명과를 따먹으라는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게 되니 세상을 보는 눈이 비뚤어져서 자기 눈에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면에 두고 행복과 존귀와 영광으로 쫓는 자가 되었다. 이는 영이 죽어 있고, 영의 눈이 어둡고,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창 1장의 첫 날에 빛을 만들기 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혼돈의 상태다. 예수 믿기 전의 나의 상태가 이랬었는데 여기에 빛이 비춰지니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참과 거짓이 구별 분별이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에게 이런 역사가 되어지는 거지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고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랬다. 저랬다하는 걸 모르는 거다. 이런 사람에게는 사건으로 하나님을 보여줄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이게 왜 이러지? 왜 이게 안 되지?’ 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이걸 생각하면 같은 인간이라도 다른 인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뭘 했느냐?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진리본질의 신앙으로 자라라고 이적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고 교훈을 했다. 그런데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이 분에게로 와서 의사단일로 연합하지 않고 환난과 핍박을 하다가 결국은 죽이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냐? 그들처럼 성경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있고,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께서 감화 감동으로 역사를 하시는데도 예수님의 의사와 단일이 안 되고, 동참도 안 되고 따로따로다. 그 증거가 뭐냐?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닌 자기의 세상소원을 구하고 있다.

 

세상은 선악과 따먹은 사망계인데, 믿는 사람들이 이 사망계 안에서 자기 비석(-자기가 이룬 세상의 업적자랑)을 세우겠다고, 그 기도를 들어달라고 얼마나 야단을 하고 있느냐? 이건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와 같은 거다. 그의 이름을 물은즉 군대라고 했다. 그러니까 군대귀신이 공동묘지에 살고 있듯이 사망계에 살고 있는 교인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다.

 

이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했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주님과 인격적 결합적 성품에 관한 게 아닌 세상 것을 구하고 있으니 이건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 말과 같은 거다. 우리는 말씀을 받았으면 그 말씀을 새김질 하면서 깨달아진 그 감화성을 가지고 기도를 하라. 세상을 목적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에 관계된, 성품에 관계된 기도를 하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이 말씀을 보면 세상에는 신령천국에서 오신 분의 지식이 있고, 이 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세상 땅에 속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로부터 오신 이 분의 지식은 신령적인 존재와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의 지식으로서 신령하고 죽지 않는 영생의 지식이다. 살리는 지식이다. 온전케 하는 지식이다. 따라서 이 분의 언행심사는 살아서 역사를 한다. 살아서 역사하는 것은 성역이요, 생명의 말씀이요, 인간이 이것을 영접하면 영원히 자기의 존귀 영광이 된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 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지식은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이요 사망적인 지식이다. 아무리 교회라고 해도 세상을 향하고, 종교적인 업적을 향하고, 종교적인 사업을 향하고, 세상에 속한 것에 목적이 되어 있으면 사망적인 지식이다. 이렇게 살면 백 날 예수를 믿어도 깨닫는 것은 없다. 이런 상태로는 뭘 해도 사람이 죽어 들어가는 건데 이 왕중에 뭘 하겠다는 거냐? 이치가 그렇지 않느냐? 사람이 이룰구원으로 점점 성장이 될 때 일을 하는 거지 사람이 성장이 안 되고, 망가져 들어가고, 죽어져 들어가는데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이치적으로 맞는 거냐?

 

지구상에는 질적으로 세상 땅의 지식과,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천국의 지식 두 가지 지식밖에 없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 세상에 속한 거짓 종이란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성경구절을 이용해서 세상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하는 자를 말한다. 성경은 영생에 속한 거고, 영인성장 면에 속한 건데 예수이름으로 땅의 것을 이루라고 하는 게 거짓이요 거짓 목사다. 이런 면으로 나가면 그 분을 알지 못하게 된다.

 

교회에서는 영과 육을 정확히 가르는 말씀이 나와야 하고, 또 자기 속에서도 영과 육을 정확히 구별 분별해야 한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자고 하는 교회에서는 성경을 끌어다가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는 데 쓰고, 그 목적을 강조하니 이런 교훈을 받는 교인들이 어떻게 자기를 지은 분의 마음을 알겠느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확실히 알고 가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