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보기)하나님께서 왜 거짓말을 하실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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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하나님께서 왜 거짓말을 하실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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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서 당신이 그 말씀을 뒤집는 일이 있다. 이런 것을 인간을 대하듯이 생각을 하게 되면 하나님도 거짓말을 잘 하시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으로 보여져서 하나님이 나쁘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는 말씀은 무슨 말씀이던 우리의 구원,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성품이 입어지고, 지혜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런가 하면 성도가 현재 죄를 짓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고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하고 신앙의 차원을 높여주려고 혹독한 고난을 주기도 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기도 한다.

 

믿는 사람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을 알 수도 있고,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훈련과 연단을 받으면서 오각과 오감성이 정화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말씀을 뒤집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마음의 폭이 넓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옹졸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마음이 시원시원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의 말이 일반적으로 들으면 문제될 게 없는 말이지만 이 사람이 성령의 영감으로 들을 때는 사단 마귀가 역사하기에 좋은 말이기 때문에 분노를 하기도 한다. 하나님도 이런 분이다.

 

인간이 듣기에 좋은 말이고, 서로 좋아하고 위해주고, 잘 통하는 말이라고 해도 선악과를 따먹은 데서 하는 말이라면 교회 인도자의 세계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책망이 들어가야 한다. 교회 인도자는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별 분별 명확하게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걸 신앙사상이라고 하고, 옳은 진리이치,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요:에 보면 초막절이 가까울 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왜 숨어서 일을 합니까? 초막절에 올라가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라고 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라고 하셨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서 형제들이 먼저 예루살렘에 올라간 후에 예수님도 비밀리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나중에 이 일을 안 형제들이 ‘왜 거짓말을 했느냐?’ 라고 할 텐데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걸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형제들을 속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서다. 사람들이 이런 장면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하겠지만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뜻으로 그렇게 했다고 보면서 그 뜻을 깨달아야 한다.

 

‘너희들 먼저 예루살렘에 올라가라. 나는 안 올라간다’ 라고 하고서 형제들이 올라간 후에 곧바로 올라가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형제들과는 같이 가기 싫다는 거다. 왜 싫은 거냐? 부모형제라도 안 통하니 그렇다. 이걸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분석을 하면 구원은 인정정실이나 혈통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사단일이라야 된다는 거고, 그래야 주님이 동거 동행을 하신다는 거다.

 

한 집안 식구라도, 형제라도 대화가 안 통하면 불통이 된다. 가족끼리 서로 의사가 잘 통해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대를 위해 주의도 하고, 참기도 해야 하는데 이런 게 없이 자기 마음에 든 대로 막 튀어나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러면 지옥살이가 된다.

 

◆ 고고학적인 증거를 보고 성경을 믿는다면 이건 믿음이 아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믿는다면 아예 예수를 안 믿거나 이종교를 가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물질적 과학적 증거를 근거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화로 역사가 된 것을 성령의 감화를 입은 사람이 기록한 것이니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게 바른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과 의사단일의 신앙이고, 이런 믿음에는 항상 성령님이 같이 하신다. 성령은 항상 진리와 동반한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진리와는 거리가 먼 이상한 말로 떠들고 하는 건 성령이 아니다.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과는 상관이 없이 마귀에게 동원이 되어서 그런 짓을 하는 거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과거적으로 알았던 것을 바탕으로 깔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시나?’ 라고 하면서 진리본질에서 이탈되지 않게 깨달아야 한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지식적으로 잘 써먹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이렇게 살게 하심은 인간들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믿는 우리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만물을 이용 활용해서 이룰구원을 잘 이루라는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밟는 곳을 다 주겠다’ 라고 한 것은 천국 점령법을 말씀하신 거다. 믿는 우리는 지혜롭게 인인관계 연관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을 이용 활용해서 아가페 사랑과 말씀이치 생명이치로 사람의 마음을 점령해 들어가는 거다. 자기만 실력이 있으면 100% 점령이다. 믿는 우리들에게 이 점령이 허락이 되었다. 점령을 하되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으로 점령이 들어가야 한다.

 

자기가 이 점령을 하려고 할 때 말씀을 깨닫고, 옳은 이치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공의성을 가졌다면 여기에는 대적자가 없다. 원수가 없다. 원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가 부족해서 상대와 자꾸 대립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원수가 있느냐? 없다. 모든 것을 성도의 구원에 이용 활용이지 대립과 마찰과 충돌이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는 것은 우리를 이 수준으로 올리려는 거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과거에 타 교회에 다닐 때처럼 그냥 하나의 교인으로 살지 말아라. 예수 믿는 바른 이치와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이단 삼단을 만나도 넘어지지 않고 꾀임을 받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이단은 그 배후에 사단 마귀가 버티고 있으니 성령의 눈으로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 모든 귀신의 활동을 보신다. 주님을 믿는 우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눈으로, 즉 성령의 눈으로 귀신들의 활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인간의 감정을 따라 살면 세상적인 지식과 이방 종교적인 지식에 빠지게 되니 이건 귀신이 들린 거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에서 열심을 부릴수록 귀신들린 짓이 나오게 된다. 성경에 보면 어린아이가 귀신이 들려서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지는 게 나오는데, 우리는 이 아이를 보면서 부모의 교훈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이 아이가 어디서 자랐나?’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을 받았는데 귀신들린 아이는 이게 없이 제 멋대로 자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어린아이를 영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었어도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물불을 가리지 못한다. 구별을 못한다. 그리고 이걸 종교적인 활동에 붙여서 생각을 하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펄펄 뛰고 ‘휙 휙’ 하면서 교회를 혼란과 혼돈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귀신운동을 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구별 분별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 앞에 적중으로 믿는 것은 생명 길 좁은 길인데 왜 좁은 길이라고 하는 거냐? 하나님의 의사단일로만 가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고 한다. 제 멋대로 믿고 세상을 구하는 것은 넓은 길이요, 심판의 길이요, 멸망의 길이다. ‘길’ 또는 ‘노선’이라고 하는 것은 소원 목적적으로 간구하는 간구성을 말한다.

 

세상적인 신앙의 질로 나가면 이것은 세상적인 노선의 신앙이다. 이런 신앙노선으로 나가면 멸망을 당하고 주님으로 닮아지는 온전한 성품이 없으니 이 길로 열심히 가면 갈수록 심판이다. 달려갈 길을 다 가서 보면 빈껍데기뿐이다. 이건 세월이 와서 자기를 다 갉아먹은 거다. 자기의 일생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닮은 게 있어야 하나님께서 이걸 열매로 보시는데 이게 없으니 인생을 헛 산 거다.

 

구약시대의 사람이나, 신약시대의 사람이나, 지금의 우리나 창조 때 만들어진 것을 이용하고 사용하고 활용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주님처럼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매를 들고 오신다. 이 매는 개인적인 사건일 수도 있고, 국가적인 전쟁바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와 깨달음을 가지고 배에 탄 것처럼 물에 안 빠지고 물 위로 잘 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세상만큼, 인간을 인간만큼 볼 줄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되고, 하나님을 하나님만큼 아는 자가 그만큼 정복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몰라서 다른 길로 가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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