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보기)아롱다롱한 야곱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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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아롱다롱한 야곱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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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이 세 분의 믿음이 좋은 것으로만 말을 하려고 하는데, 성경에 이 분들을 기록해 놓은 것은 이 분들이 100% 믿음이 좋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이 세 분이 바로 가다가 실수도 하고 바로 올라오고, 또 실수를 하고 바로 올라오고 했으니 우리로 하여금 이 세 분의 신앙을 보고 , 하나님께서 올라갈 때는 이렇게 역사하시고, 내려갈 때 이렇게 역사하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달아서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고 바로 세우라는 거다. 이 분들이 신앙이 올라가고 내려갈 때의 신앙의 질을 보면 현재 자기의 신앙의 질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보지 않고 이 분들은 신앙이 좋다. 믿음이 좋다라고 하면서 이 분들이 잘못한 것을 보지 않게 되면 비판 판단이 바로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분들로부터 신앙적으로 배울 게 없다. 즉 이 분들의 역사 속에서 나 자신의 믿음의 질은 찾지 못한 채 자기가 하나님처럼 판단자가 되어서 아무개는 믿음이 좋다. 아무개는 믿음이 없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아는 게 성경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면 자기의 신앙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성경을 이렇게 보면 안 된다.

 

야곱을 보면 이름부터가 욕심쟁이라는 뜻이니 사람이 욕심쟁이가 되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술수도 많이 부리게 되고, 꾀도 많이 부리게 되고, 간사도 떨게 된다. 그래서 장자의 복을 받기 위해 변장을 해서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자기의 몸을 만져보라고 했고, 목소리로 형의 흉내를 내기도 했는데, 이게 야곱의 간사성을 나타내는 거다. 마귀도 이런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런 때는 저랬다하는 등의 수법을 쓴다.

 

야곱의 어머니는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물려주고 싶어 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장자든 차자든 신앙의 심성을 보시고 은총을 내려주시는 건데 야곱의 어머니는 인간의 수법을 쓴 거다. 이게 문제다. 인간이 자기가 할 일만 바로 하면 하나님께서 지나가는 것도 붙잡아서 네가 써라하고 주시는 건데 이렇게 하지 않고 자기 머리로 꾀를 쓰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고 나온 꾀를 쓰는 것을 보니 주기가 싫으신 거다. 그럼에도 세상사람들이 자꾸 인간의 수법이 나온다. 어쨌든 야곱의 집안은 하나님을 믿는데도 보면 두 형제나 아내나 신앙의 마음 씀씀이가 각기 다르다.

 

야곱이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갈 때 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너에게 이렇게 이렇게 해 주겠다라고 했고, 야곱은 그 말씀대로 하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도망간 그곳에서도 자기의 꿈은 버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잡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자기의 꿈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에다 하나님의 약속을 덧붙여서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과 짐승을 얻기 위해 살았다.

 

외삼촌의 양과 염소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어떤 양과 염소가 나온다는 것을 알아내서 외삼촌의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그리고 염소 중에도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자기 것으로 삼는 수단을 썼는데, 이건 야곱의 마음 속에 든 교활한 꾀를 표현해 낸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이것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외삼촌의 양을 많이 주셨으니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임시적인 세상 것을 많이 가지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지 않으신다. 물질적인 것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믿는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진 자가 많다. 영원히 가는 게 궁극적인 축복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를 믿어도 잘못 믿으니 덤으로 오는 것도 차단이 되는 일도 많다. 이럴 때 꾀쟁이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뭐가 막혀 있는지는 모른 채 자기의 욕심을 위해 또 다른 머리를 쓴다. 야곱에게서 이런 걸 볼 수 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속을 때마다 자기의 과거가 생각나야 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아내를 취하는 것도 제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취하려다가 삼촌에게 또 속고 말았는데, 알고 보면 야곱의 아내에게도 속임수가 들어 있었다. 야곱은 비열하고 간사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형님은 대장부 같다. 형은 동생과 같은 심성이 아니다. 그러나 동생처럼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야곱의 아내가 된 외삼촌의 두 딸은 언니는 욕심도 별로 없고 신앙심도 좋았지만 동생은 심통이 많았다. 어쨌든 이 형제들에게 경쟁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리가 이런 걸 보면서 누가 믿음이 더 좋고, 누가 믿음이 더 좋지 않다라고 보지만 말고 믿는 자기의 현재의 신앙의 심성을 살펴봐라. 야곱도 사람이요 나도 사람이니 자기에게도 야곱과 같은 신앙의 질이 없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라헬이 깨달았다면 왜 아버지가 섬기는 신을 훔쳐서 가지고 나오겠느냐? 아니라면 도망간 자기를 쫓아왔을 때 그 신을 아버지에게 주었을 거다. 아버지를 속이고 야곱을 따라오면서 끝까지 우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라헬에게도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는 정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겜에 와서 여러 가지 큰 사건을 겪게 된 거다. 우리도 이런 우상을 섬기는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어떤 큰 일을 당할 사건을 앉고 있는 거다. 이런 걸 미리 깨닫고 옳은 것을 깨달아서 피할 줄 알아야지 안 그러면 그냥 당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어리석어서 당하는 것인데도 꼭 남 탓을 한다.

 

양의 털 색깔이 알록달록하면 이걸 쳐다볼 때 사람의 눈이 혼란스럽다. 이건 야곱의 신앙을 말해주는 거다. 신약에 와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한 사마리아 여자가 이런 야곱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자가 조상 야곱이 판 우물을 계속 먹고 있던 게 이걸 계시하는 거다. 이 여자는 하나님도 믿고, 예배도 드리고 했지만 세상에 욕심을 둔 야곱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리 생명수를 먹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먹게 되었다.

 

야곱의 신앙을 이어 받은 야곱의 아들들도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말을 했다.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고서 아버지에게 동생이 짐승에게 찢겨서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야곱은 이렇게 될 때까지도 못 깨달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자기가 어떤 피해를 입었다거나 크고 작은 사건이 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을 더듬어 찾고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 때의 정신이 잘못된 것이 발견이 되면 이건 회고적 영감의 감화의 역사이니 빨리 고쳐야 한다.

 

자기의 과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면 잘못된 줄도 모르게 되고, 바로 잡지도 못한 채 계속 그대로 살게 된다. 성경에는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당할 짐승과 같다고 했다. 우리는 말씀을 깨달아서 다시는 세상을 붙잡으려고 쫓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을 붙잡으려고 하면 마음 속에서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은 배가 고파도 마음이 편하지만 근심 걱정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으니 병이 찾아온다.

 

요셉의 덕으로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 가족 75명이 다 내려갔다. 그러면 내려갈 때 모두가 의사단일성으로 내려갔느냐, 각자 제 마음을 품은대로 내려갔느냐? 각자 다른 마음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애굽에 살면서 이들이 각자가 켜져 나갔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커져나간 것인데, 각자 커지면서 여기에는 전부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테두리가 있다. 그래서 각자가 커졌지만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모두가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 거다.

 

그러면 애굽에서 나올 때는 의사단일의 상태로 나왔느냐? 아니다. 제 멋대로다. 그런데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광야에서 신앙의 훈련과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일성이 되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면 야곱은 신앙이 안 좋은데 이 야곱에게서 어떻게 신앙이 좋은 요셉이 나온 거냐?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신앙이 좋은데 신앙이 안 좋은 자식이 나오기도 하는데, 룻의 경우에 부모 쪽은 신앙이 없는데도 딸인 룻은 신앙이 아주 좋았다. 이런 걸 보면 아버지의 신앙이 좋다고 해서 자식의 신앙이 좋다는 법도 없고, 부모의 신앙이 나쁘다고 해서 자식도 신앙이 나쁘다는 법이 없으니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아버지의 신앙은 안 좋은데 자식이 신앙이 좋다면 누가 정신을 차린 거냐? 자식이 정신을 차린 거다. 그러니까 자식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다면 부모에게 원망을 하지 말고 그 가운데서 깨달아야 한다. 항상 모든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거다. 그래서 부모가 못 산다고 해서 자식에게 좋은 교훈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나는 도둑질을 할지라도 너는 착하게 살아라하는 것은 안 된다. 부모 자기부터 바로 살아야 옳은 교훈이 자식에게 박히게 된다. 우리는 교훈의 상호작용, 환경의 상호작용, 인인간의 상호작용을 생각하면서 아울러 하나님의 주권섭리도 생각을 해야 한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은 게 야곱이 딱 열두 명만 낳겠다고 해서 나은 거냐? 아들 열둘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섭리다. 야곱의 욕심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 야곱은 거짓말쟁이고, 자식들도 거짓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아들들 중에 요셉은 믿음이 좋았는데, 요셉의 좋은 신앙은 아버지 야곱이 아닌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거다. 자식들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의 얘기를 들었을 텐데 요셉만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은 거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나오게 되었으니 야곱이 신앙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안 된다. 요셉이 아들 열둘을 낳은 것은 요셉의 생각대로 낳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된 거다. 야곱은 신앙이 좋은 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교훈적으로 볼 때 회개를 많이 해야 했다.

 

얍복강에서 기도를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형이 군대를 데리고 온다고 하니까 겁이 나서 한 거다. 사자에게 축복을 해 달라고 한 것도 자기의 육신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한 거다. 그리고 가속과 재산과 재물을 자기보다 앞서서 1, 2, 3차로 보낸 것은 형이 앞의 것을 치면 자기는 뒤에서 도망을 가려고 수단을 쓴 거다.

 

이런 야곱인데도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야곱이 환도 뼈가 부러지도록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았으니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은 억지고 못 쓴다. 패역적인 기도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주려고 했다면 야곱의 환도 뼈를 부러뜨리시겠느냐? 사람은 환도 뼈가 부러지면 못 걷는다. 주저앉게 된다. 그러니까 야곱의 신앙은 절름발이 신앙이라는 거다. 우리도 절름발이 신앙이 많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나 만물을 볼 때 말씀의 정신으로 생각을 해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이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생각을 하면 감당 못할 사건이 오면 주저앉게 된다. 지상교회는 100% 완전은 없으니 부족하고 잘못된 것을 늘 고쳐가야 한다. 안 그러면 고통과 근심과 걱정을 자꾸 만들게 된다. 믿는 우리는 있는 짐을 가볍게 해소시켜야 한다. 깨닫는 사람은 짐이 가벼워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서 광야를 거치면서 의사단일로 만들어서 약속의 땅에 들여보냈더니 얼마 안 가서 또 이방정신에 먹히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의 신앙이 얼마만큼 올라갔다고 해서 거기에 만족해하며 멈춰 있어서는 안 되고 계속 딛으면서 올라가고 올라가고 해야 한다. 깨닫는 면에서 무한으로 치솟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이 초월이 되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신앙이 좋았지만 남방으로 내려갔을 때는 비열하고 처절했다. 이삭도 그랬다. 그런 것처럼 성경을 통해 보면 우리 모두가 어떤 때는 올라가는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내려가는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계속 올라가야 하는데, 자주 넘어지면 얼굴이 깎인다. 이러면 인격에 수치가 들어간다.

 

하늘의 장자권은 하나밖에 없는 건데, 이 말은 본질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본질의 신앙을 가졌으면 그 다음에 본질로 된 여기에서 본질로 더 자라야 한다. 그리고 본질로 자란 것이 믿는 사람 각자가 실력적 능력적으로 차이가 난다. 믿는 우리는 본질을 놓고 이 본질로 올라가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요 진리는 하나이듯이 본질도 하나인데, 야곱은 본질로 자라는 게 아닌 자기 머리로 자기의 세상적인 욕심을 취하려는 수단 방법으로 살아왔다.

 

믿는 사람이 인간의 수단 방법을 쓰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잘 하면, 즉 하나님께 바로 보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섭리도 당신의 뜻대로 이 사람을 운행해 나가시는 건데 야곱은 그러지를 못했다. 야곱의 형은 장자이면서도 사람을 다스릴 머리는 없고 맨날 짐승을 잡으러 다녔으니 사람이 바로 되는 게 없다. 그리고 작은 짐승 대신 큰 짐승을 잡으려고 했다. 이게 세상사람들의 정신이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 속에서 움직이는 게 있으니 우리는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진리도 하나고 본질도 하나인데, 야곱이 자기의 술수를 써서 세상 것을 취하려고 해서 자기 생각대로 취해졌느냐? 야곱이 애굽의 왕 앞에 가서 자기가 살아온 세월이 험난했다고 했는데, 이게 어떤 마음에서 나온 말이냐? 야곱은 자식이 열둘이요, 마누라도 많고, 첩도 많고, 부자인데 왜 살아온 세월이 험난하다고 한 거냐? 사람에게 많이 시달렸다는 거다. 자식에게 시달리고, 삼촌에게 시달리고, 형을 만나면 죽을까 싶어서 벌벌 떨었다.

 

야곱이 이렇게 살아온 것은 신령천국을 주시기로 약속한 하나님께서 야곱을 그 천국에 합당한 자로 만들기 위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때 국물을 빼내기 위한 역사하심이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이런 걸 깨닫고 자기를 살피면서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이게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아롱다롱한 양떼를 많이 주신 것은 야곱의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너는 이런 성질의 신앙이다하는 걸 보여주는 거다. 염소는 아래로 내려가기를 좋아하지 않고 바위 꼭대기에 서기를 좋아한다. 이것도 우리의 신앙 믿음의 성질을 표현해 주는 거다. 만물을 보고 자기의 신앙 믿음의 질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말씀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진리에 순종, 본질에 순종을 해야 본질로 커진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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