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보기)교회는 광야생활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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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교회는 광야생활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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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이 광야냐? 일반적으로 집도 절도 없이 풀과 돌과 바위만 있고, 각종 짐승들이 살아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광야다. 신앙 면에서는 세상이 곧 광야다. 왜 세상을 광야라고 하는 거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 신앙의 훈련과 연단을 받던 곳이 광야였듯이 이 세상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훈련장소이기 때문이다.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 년 동안 애굽에 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도시에서 빼내 광야로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인데 왜 광야로 데리고 나가라고 하시느냐? 그것도 길도 없는 홍해로 해서 광야로 나가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는 거냐, 살리려는 거냐? 살리려는 거다. 이 뜻을 아는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첫 마디에 나를 살리려고 하시는구나라고 하면서 얼른 나간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인간이 살 수 없는 광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느냐, 특별한 인도가 있는 거냐? 특별한 인도가 있다. 애굽에서의 생활은 죄짓는 삶을 상징하는데, 애굽의 종살이에서 풀려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세상에서 제일이 되겠다라고 하며 물질을 탐하고 세상의 명예 영광을 탐하는 정신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애굽 왕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 살면서 왕이 되고 부자가 되면 얼마나 오래 살겠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기 위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면 애굽이 받는 열 가지 재앙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가나안, 즉 천국에 들어가서 그 나라를 누리며 살게 하려는 건데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죽으면 이 목적이 없어져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어도 신발도 옷도 해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의미가 뭐냐? 어린아이가 애굽을 출발해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발도 자랐을 텐데 애굽에서 신고 나온 신발이 닳지 않고 발의 길이에 맞게 커졌다는 거냐?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신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게 무슨 의미냐? 주님의 인도로 복음의 신발이 신겨졌으면 이것은 신령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닳아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복음의 신발은 한 번 신으면 죽을 때까지 닳아지지 않고 영원히 간다.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인격화 되고, 자기 성품화 되면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자타의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루기 위해 산 삶의 신발, 그 정신은 닳아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간다. 그러나 애굽은 정신과 사상은 물질의 신발이라서 상황이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꾸 갈아 신어야 한다. 유행을 타는 정신을 말한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보다 좀 못 살아도 하나님의 인도로 애굽의 왕 밑에서 탈출을 해서, 죄에서 탈출을 해서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지으며 사는 게 좋으냐, 애굽으로 들어가서 배부르고 등 따신 게 좋으냐? 자기의 정신이 마귀가 유혹하는 세상 밑으로 들어가서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면 이게 자유냐, 노예냐? 죄의 노예다. 이러면 물질에 코가 꿰여서 살게 된다.

 

사람은 죄에서 자유가 되어야 한다. 잘못된 성격 성질 성분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죄의 노예다. 죄의 노예인지 아닌지가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집안에서나 부부간이나 부자지간이나 모녀지간에 싸울 때, 또는 사회에서 친구끼리, 또는 교회에서 싸웠을 때 드러난다. 한 번 싸워서 생긴 미움의 마음이 일주일도 가고, 한 달도 가고, 또는 죽을 때까지 미움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과, 금방 흘려버린 사람 중에 누가 몸과 마음에 병이 더 잘 걸리겠느냐?

 

하나님은 표면, 껍데기, 외모, 모양, 덩어리 큰 것을 보지 않고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다. 사람의 양심을 보신다는 거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붙잡고 움직인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세상욕심을 이뤄달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거냐?

 

믿는 자기 안에 성령님이 계셔야 하겠는데 악령류가 자기 속에서 살고 있으면 사람 꼴이 뭐가 되겠느냐? 누굴 만날 적마다 자기와 미움의 관계가 아닌데도 틱틱거리고 싸우려고 달려들 거다. 누구와 싸우고 나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싸운 사람에게 하던 말투가 이 사람에게 튀어나온다면 이게 귀신이 들린 거냐, 성령이 들린 거냐? 우리는 이런 마음을 고쳐야 한다. 성령님과 같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속에 주님이 들어있는 사람이,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정신이 인격화로 들어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예수의 사람이요, 이 사람에게서는 어디를 가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 때 애굽의 건설을 위해 일을 부려 먹으려고 애굽인들이 먹을 것은 풍족히 줬지만 군대장관들이 앞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설쳤듯이 오늘날 애굽의 정신을 가진 교회는 교인들에게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라고 말로써 회초리를 휘두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는 것은 죽이려는 게 아니라 주님 당신처럼 참사람으로 만들려는 거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모세로 통해 말씀을 주시고, 말씀으로 인도를 하신 거다.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라는 것은 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참사람으로 만들어지라는 거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거치게 하는 것도 참사람으로 만들어지라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애굽에서 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다 죽었고, 광야생활을 하면서 태어난 사람 중에도 많이 죽었는데,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이 병이 들어서 죽은 사람이 많으냐, 나이가 들어서 죽은 사람이 많으냐, 아니면 하나님의 형벌로 죽은 사람이 많으냐? 사람이 보기에는 어떤 모양으로 죽었건 하나님의 형벌로 죽는구나.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건너편의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느보산에서 죽었는데, 이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모세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갔다고 한다. 지옥에 갔다고 한다. 이러면 우리의 구원관이 어떻게 되는 거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쳐서 물을 낼 때 혈기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혈기나 죄악성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지지 못한 성질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거다.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는데, 모세가 지옥에 갔다면 주님이 지옥에 간 모세를 불러올리겠느냐? 주님이 모세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서로 통한다는 거다.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 네 생각대로의 해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으니 해석도 하나님의 감화 감동으로 해야 바른 하나님의 뜻이 나온다.

 

신약에서 교회를 광야교회라고 했는데, 이는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스릴 수 있는 훈련과 연단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 교회는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그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고 누릴 수 있는 신앙의 훈련과 연단을 받아야 함을 말하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대로 순종을 하면서 물질선, 인정선, 생명선을 탈출한 아브라함처럼 세상을 등 뒤로 하고 오로지 천국만 바라보며 사건 환경을 이기고, 유혹과 미혹을 이기면서 하나님을 향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구해야 되겠느냐? 세상이라고 하는 애굽을 뛰쳐나온 사람이 애굽을 구해야 되겠느냐, 어떤 사건과 환경을 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지기 위해 지혜도 구하고, 도덕성도 구하고, 능력성도 구해야 되겠느냐?

 

거짓 종들, 이단자들, 마귀의 영을 받은 교회 인도자들은 교인들에게 세상 것을 구하라고 하고, 예수 덕으로 부자로 살라고 하고, 이 면에 응답을 받은 것을 자랑한다.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것은 말세의 교인들이 무엇을 구한다는 거냐? 오늘날 자기는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따라가고, 예수님의 것을 구해야지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은 넓은 길로 가는 거고, 하나님의 형벌에 놓이는 거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맨날 가르치고 구하는 게 세상이다. 신랑 신부감을 구하는 것도 세상성이요,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도 세상성의 마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정신은 어디로 가고 세상을 잡고 세상과 짝짓고 살다가 이 정신으로 죽어가는 것을 수없이 보면서도 자기도 여전히 세상을 구하고 있으니 정신이 있는 거냐?

 

삼손은 나실인인데 이방여자를 구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이게 잘 죽은 거냐, 잘못 죽은 거냐? 창조의 목적대로, 구원목적대로 보면 사사의 역할이 바로 된 거냐? 삼손은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사자를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위주의 생각이 들어가니 이방군대와 이방여자에게 자기 힘을 자랑했다. 오늘날 이런 요소들이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다.

 

가룟유다가 자살을 해서 지옥에 갔다면 삼손은 안 죽을 수도 있었는데 이방인들과 같이 죽겠다는 마음으로 기둥 사이에서 건물을 무너뜨려서 죽었으니 자살을 한 셈인데 이 삼손이 지옥에 갔겠느냐, 천국에 갔겠느냐?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다시 힘을 주신 것은 둘에 깔려 죽으라는 거겠느냐,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거겠느냐? 삼손이 왜 성문을 뜯어서 에담 바위틈에 있었느냐? 이건 힘 자랑이다. 육 자랑이다. 세상 자랑이다. 인간 자랑이다.

 

이런 삼손을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삼손이 여자를 좋아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라고 비난을 하라는 게 아니라 너는 삼손처럼 살다가 삼손처럼 죽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말하는 거다.

 

솔로몬이 말년에 무슨 짓을 했느냐? 이방여자를 데려와서 살다가 우상을 섬기는 자리까지 갔고, 나라가 두 조각이 나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탐을 내지는 않고 솔로몬처럼 많은 여자를 거느리고 제 멋대로 살려고 한다. 즉 자기 머릿속에 주님 한 분만 모신 게 아니라 자기 눈으로 보기에 좋은 세상의 이런 저런 것을 취해서 이 행복으로 살려고 한다. 이것은 음녀요 간음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해서 자기 머릿속에 집어넣고 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정신이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을 사랑하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 세상에 욕심을 내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 우상을 섬기면 저주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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