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보기)유익이 되는 방언과 손해가 되는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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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유익이 되는 방언과 손해가 되는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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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이 되는 방언과 손해가 되는 방언.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해로워서 하지 말라는 건지, 인간에게 해로워서 하지 말라는 건지? 인간에게 안 좋아서 하지 말라는 거다. 그러면 어떤 면에 해로운 거냐? 세상의 부자가 안 되기 때문이냐?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면에 해롭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목적이나 영능의 실력과 다 연관이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이치 하나가 어그러지면 다 어긋나듯이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목적에서 자기 일생이 다 날아간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을 수 있게 하려고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셨고, 예수님을 주셔서 하나님의 본질로 만들어질 수 있는 교훈을 하셨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사건 환경을 주어서 주님을 닮을 수 있게 해 주셨는데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아예 사람을 안 만드니만도 못하게 된다.

 

고전: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방언하기를 힘쓰는 것보다 예언하기를 더 힘을 쓰라는 뜻인데, 왜 이렇게 말씀을 하는 거냐? 사람들 앞에서 방언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타의 구원 면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면에 손해가 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지 않는 방언도 있다는 거다. 성경에는 이 면으로 말을 하는 방언도 있고, 저 면으로 말을 하는 방언도 있지만 어떤 방언이건 한 마디로 예수님의 구속,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거다.

 

교인들이 닐니리 날나리하는 방언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는다. 그러니까 아무 뜻도 없는 말이 되는 거다. 아무 뜻이 없는 말은 자타에게 덕도 안 되고, 유익도 안 되고, 구원도 안 된다. 그러니 이런 방언은 할 필요가 없는 거다. 또한 성경을 들고 세상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하는 말은 성도의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방언이 된다. 따라서 이런 방언을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읽어놓고 왜 구원이 되지 않는 말을 하느냐?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일만 마디 방언이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하는 방언인데,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라는 것은 교훈 면으로 보면 자타의 구원과 관계가 없는 말 대신 이치적으로 구원도리를 깨닫는 말을 하라는 거다. 성경은 전부가 우리로 하나님의 온전을 이루라는 거다. 성경을 보면서 이 원칙을 놓치면 이유가 많아진다. 이유가 많아지는 것은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예언하기를 원하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어떤 면이든 유익이 되게 하라는 말인데, 방언보다 예언이 성도의 이룰구원에 더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예언이냐?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게 예언이냐? 이건 안 믿는 사람들의 얘기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언제 핵전쟁이 일어나고, 언제 기근이 오고 하는 것을 미리 말할 수 있다. 성경에도 이런 예언이 기록이 되었는데, 이런 것들이 성경에 예언적으로 기록이 된 것은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예언된 일이 닥치기 전에 자타의 구원을 미리 준비하라는 거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는 노아홍수 때와 같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는 우리는 뭘 준비해야 하느냐? 산으로 올라가서 배를 만들어야 하느냐? 노아홍수 때 여호와를 믿는 셋의 후손들이 다 가인의 길로 몰려갔다. 즉 육적 세상적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라 믿기는 믿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시고 선이시고 의이시고 사랑이시니 이 속성으로 닮는 것은 없고 육적인 정신 사상으로 들어갔다. 지금 예수 믿는 자기 속에도 이런 요소가 들어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인 빨리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야 한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설계대로 방주를 지었다. 하나님의 설계대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홍수심판에 방주가 깨지고 떠내려가지 않게 하려는 거다. 그래서 방주는 반드시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어야 한다. 이것을 영적 신앙 면으로 보면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유행바람, 전쟁바람, 정치바람, 물가바람, 문화예술의 바람에 휩쓸려 다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설계를 따라 살아야 세상에 빠지지 않는다는 거다. 즉 말씀의 이치의 설계대로 만들어지라는 거다.

 

세상은 아무리 발달이 되어도 다 이전에 있었던 것들이 돌고 돈다고 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자기의 정신과 마음과 소원 목적을 돌고 도는 세상 것에 맞추지 말고, 시대나 상황이나 사상이나 과학의 바람에 날아가고 움직이는 것을 붙잡지 말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에게 향한 소원 목적을 딱 박아놓고 그 다음에 세상 것은 이를 위해 이용 활용이다. 세상 것은 소원 목적적으로 가질 게 아니라 활용이다. 활용이 아니라 소원 목적을 하게 되면 세상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면 사는 게 무거워진다. 우리는 믿을수록 깨달아서 가벼워져야 하고 쉬워져야 한다. 그러면서 세상에 안 빠져야 한다.

 

예언하기를 힘쓰라는 이 예언은 이룰구원에 관한 것을 말하는 거다. 사건 환경 속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룰구원의 정신으로 거기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사건 환경 속에서 이룰구원을 놓치면 그 사건에 휩쓸리게 되고, 거기에 동화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자기의 본 얼굴이 있는데 요즘은 이런 저런 이유로 얼굴을 뜯어고치는 사람이 많은데, 물론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얼굴에 흉 같은 게 있다면 고칠 수도 있는 거지만 이게 아닌 자기의 기준이 아닌 타의 기준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얼굴을 뜯어고치는 것은 문제다. 한 번 고쳤는데도 다른 사람이 또 다시 못생겼다고 하면 그 사람의 기준에 맞춰서 또 다시 고칠 거냐? 여기서 나오는 부작용이 소돔 고모라다.

 

이렇게 얼굴을 고치는 것은 멀쩡한 얼굴을 건드려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모형을 인간 식으로 뜯어고치는 것이니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이 사람의 정신은 악령의 감화를 입은 거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교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상이 비춰져야 하는데 이건 없이 마귀의 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악령과 사단 마귀는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가지고 와서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

 

요즘 사회적으로 가짜 백수오로 말이 많은데, 모양이나 색깔은 진짜와 비슷한데 효능이 떨어지는 것을 진짜로 판 것인데, 이것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와서 보면 교회 안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세상은 이런 것을 별 게 아닌 것으로 보지만 우리는 이런 것을 영의 눈으로 날카롭게 봐야 한다. 영의 세계는 적당히가 아니라 빈틈이 없이 날카롭게 봐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그런 것에 안 쓸려간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신앙을 바로 지키지 못하면 자기의 생활도 바로 안 되는 거다. 마음이 붕 떠 있고 세상의 바람을 타고 있는데 어떻게 바로 되겠느냐?

 

문명 문화가 개발이 될수록 여러 면에서 편해지고 좋은 점이 있지만 한 편으로는 이로 인해 여기저기서 허점이 생겨서 피해를 보기도 한다. 문명 문화가 발달이 되면 사람이 점점 더 괴물이 된다. 세상은 마귀가 점령을 한 세상이라서 완벽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이 일은 마귀가 터치를 못한다.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는 일도 마귀가 터치를 못한다. 그런데 우리의 이룰구원 면에, 깨닫는 면에 마귀의 터치가 들어간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의 삶 전반에 변장술을 쓰고 파고 들어서 유혹과 미혹을 한다. 여기에 속으면 자기의 구원이 절단난다.

 

우리의 이룰구원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사회 윤리 도덕적 차원의 기준이 아니라 변질이 없는 하나님의 본질에 두고 생활 가운데서 말씀을 따라 사는 거다. 이렇게 믿으면 믿을수록 이게 장차 부활성으로 살아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게 예수 믿는 효력성이다. 그런데 거짓 종에게는 이렇게 되게 하는 교훈이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만을 성경의 방언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방언을 이런 면을 말할 때는 이렇게 쓰기도 하고, 저런 면을 말할 때는 저렇게 쓰기도 하니까 이럴 때는 이렇게 알아들어야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알아들어야 하다. 그런데 오늘날 마지막 때라서 그런지 방언을 못하면 구원을 못 얻는다고 하는 자도 있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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