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친히 부르셨다는 주장이 필수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여러 당파들이 있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12절;9:1-12). 여기에서 '사도'(*,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로 전권(全權)을 위임받은 특사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사도'라는 직분은 원래 오직 그리스도가 임명을 해서 직접 보낸 열 두 제자만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초대 교회에서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Cole).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해서(행9:15) 자신의 사도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명백히 한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이 본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사도라고 밝힌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형제 소스데네 - 헬라어 본문에서 '형제'의 헬라어 '아델포스'(*)앞에 정관사 '호'(*)가 있어서 소스데네가 '형제들'가운데 하나임을 의미한다(Farrar). 그가 바울과 함께 본서신을 집필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나 고린도 교인들이 소스데네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소스데네는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었으며, 유대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송사(訟事)했을 때 바울 대신에 그들에게 매를 맞은 사람이었다(행 18:12-17). 그런데 소스데네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본절의 인물과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Hodge, Alford, Morris).
성 경: [고전1:2]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고린도에 있는 - 고린도는 기원전 146년에 무미우스(Mummi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로부터 80년 후인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복구되었다. 그후 고린도는 급속히 재건되어 아우구스토 황제에 이르러 아가야(Achaia)의 수도가 되고 바울 당시에는 인구 60만을 헤아리는 대도시로 발전했다. 당시에 이 도시는 상업의 도시로 번창했으나 반면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극히 암담하고 무질서하였다. 그 도시인들은 다신교를 숭배했고(행 17:16-22) 그들의 생활은 음란했다. 따라서 '고린도화 하다'라는 말은 '아프로디트(Aphrodite) 여신을 숭배하며 추악한 음행을 행한다'는 의미가 될 정도였다.
⭕ 하나님의 교회 - 바울이 고린도라는 지명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언급한 것은 기독교의 고귀한 이상과 우상 숭배의 허탄함을 극명하게 대조해 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Bengel).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에게 속한 교회임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바울의 겸손함을 잘 드러내 준다.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교회를 헬라 세계의 세속적인 '엑클레시아'(*)와 구별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Mare).당시의 세속적인 세상의 총회(엑클레시아)는 공공, 이익에 관련되는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도시 국가의 시민들이 모이는 집합체였다(행 19:39).
⭕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묘사한다. '거룩하여지고' 의 헬라어 '헤기아스메노이스'(*)는 완료형 분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고 그 결과 이루어진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 유지됨을 의미한다(Grosheide).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 등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거룩하다고 불리워졌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지칭하여 거룩한 자들이라고 불렀다(30절;6:11). 바울이 여기에서 고린도인들을 '성도'와 '거룩하여진' 자들로 칭했다고 해서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참 신자였다고 말할 수 는 없다. 의심할 바 없이 고린도시가 부패했던 것처럼 교회도 교리와 실천에 있어서 상당히 부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있다(Calvin).
⭕ 또 각처에서...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각처에서'라는 말은 이 서신이 고린도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에서도 읽혀진 것을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서와 같은 특정한 내용의 서신 다시 말하면 특정한 교회의 개별적인 문제를 취급한 편지가 일반 교회를 상대로 하여 쓰여졌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한다(Robertson, Plummer). 그러나 본 서신이 비록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교회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배제(排除) 할 수 없다(Lightfoot).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바울의 서신은 하나님의 교회의 근본적인 성격을 원리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1:3]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 이 구절은 전형적인 바울의 인사 형식이다. 당시 헬라 세계의 일반적인 인사말은 삼인칭을 사용했지만 바울은 일인칭이나 이인칭을 사용하여 휠씬 가까운 친밀감을 표현하였다. 한편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본장의 1절부터 9절까지 아홉번이나 반복되었다. 바울의 문체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핵심되는 단어를 계속하여 되풀이하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편 전치사 '좇아(*, 아포)는 하늘의 은사들이 그리스도때문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이런 형식의 인사말은 바울이 자주사용하는 문구이다(롬 1:7;갈 1:3;엡1:2;빌1:2). '은혜'( , 카리스)란 하나님이 인
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값으로 계산 불가한 것을 대가없이 주시는 선물이다.그리고 '평강'(*, 에이레네)은 히브리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 '샬롬'(*, '평화')에서 온말로 분쟁과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축복이 있어서풍요로운 영적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Morris).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고(고후 8:9;엡 2:8,9)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셨기 때문이다(롬 5:1;엡 2:14). 본절에서 바울은 비록 은혜와 평강을 얻는 방편인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믿음을 소유한 모든 자들에게는 이 은사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고전1:4]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그리스도 예수안에서...은혜를 인하여 -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사말에 이어 수신자들을 위한 감사를 드린다(롬 1:8;빌 1:3-7;골 1:3-8). 혹자는 본서에서의 감사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비난한 본서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풍자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격려와 칭찬을 자주 하곤 했다(Morris). 비록 고린도 교인들의 삶에 많은 결함이 나타났을지라도 그들은 다른 고린도 시민들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음이 분명했다(Lightfoot). 따라서 바울은 진정으로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라는 말은 바울의 서신에 164회나 나타나며 옥중 서신(獄中書信)에 특히 많고 본서에서도 11회나 쓰였다(2,4절;3:1;4:10,15,17;15:18,19,22,31).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 안에서 특정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 내가...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항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테'(*)와 '감사하노니'(*, 유카리스토)는 현재형으로 쓰여 바울의 계속적이고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시사한다.바울은 그가 가르쳤던 교회들을 위해 정규적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엡 1:16;빌 1:3). 원문에는 본절의 첫머리에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열거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이 하나님의 선물이자 그분에게서만 유래되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Grosheide).
성 경: [고전1:5]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너희가...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고린도 교회에 내려진 하나님 은혜가 각 방면에서 풍족하게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모든...풍족하므로'(*, 판티 에플루티스데테)는 사실상 양보다 질을 말하고있으며 '하나도 빠짐없이 전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가능성있는 모든 측면에서'라는의미가 더 타당하다. 한편 '구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는 '교리'혹은 '진리'를 의미한다(Calvin, Hodge). 그리고 '지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세이'(*)는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언급하는 감추어진 신비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한다(Mare). 즉 바울이 말하는 '지식'이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 곧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실재 위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하고 있다. 한편 '풍족하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루티스데테'(*)는 '플루티조'(*)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신약 성경에서는 바울 서신에서만 나타난다(고후 6:10,11). '풍족하다'는 말은 본절에서 개종이나 세례가 풍부하다는 말이 아니라(Mare) 그리스도에 대한 일들을 알고 말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풍성히 축복하여 주신 것을 지칭한다. 이 단어가 부정과거 시제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고린도 교인들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가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고전1:6]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그리스도의 증거가...견고케 되어 - '그리스도의 증거'란 바울이 4년 전에 고린도에 머무르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말한다. 그리고 '견고케 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베바이오데'(*)는 '베바이오오'(*)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앞절의 '풍족하다'와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다.
성 경: [고전1:7]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 '은사'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구원(롬5:15), 일반적인 하나님의 선물(롬11:29), 성령의 특별한 능력(12:4)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는 전체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의 증거가 고린도 교회에 좋게 받아 들여져서 나타난 열매를 의미하는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믿음, 지식과 같은 내적인 은사뿐 아니라 이적 행함과 병고침, 방언과 예언같은 외적인 은사들이 풍성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나타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립신'(*)은 문자적으로 '뚜껑을 열다', '수건을 벗긴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감추었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뜻은 현재에는 비밀에 속한 것인데 종말에는 비로소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편 '기다림이라'의 헬라어 '아페크데코메누스'(*)는 바울이 주로 사용한 단어로 초대 교회 교인들의 종말론적 삶을 잘 표현해 준다.본절에서 이 단어는 강하고도 진지하게 기다리며 경성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간절하게 기다리면서'(eagerly waiting for, NIV)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들의 간절한 기대는 주님의 종말(終末)에 관한 말씀(마 24:30,34)에 근거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가능하면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를 바랐다(15:51;살전 1:9,10;약 5:8,9;벧전 4:7;요일2:18;계 22:20).
성 경: [고전1:8]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주께서...그리스도의 날에 - '주께서'라는 인칭관계대명사 '호스'(*)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다. 7절을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인 듯 하지만(Origen,Meyer, Robertson), 9절에서 하나님의 미쁘심을 언급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하나님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Calvin, Alford, Bengel, Hodge,Mare). 만약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견고케 하시리라'고 말하는 격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 '책망할 것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넹클레투스'(*)는 '고소하다', '비난하다'의 '엥칼레오'(*)와 부정 접두어 '아'(*)의 합성어로 아무도 비방할 수 없을만큼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Robertson, Plummer). 이처럼 흠없는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증하는 자들을 고소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롬8:33, Morris). 따라서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한편 '견고케 하시리라'의 헬라어 '베바이오세이'(*)는 6절의 '견고케 되어'와 같은 동사인데 그곳에서는 교리적인 면을 묘사했다면 본절에서는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실천적인 면을 묘사한다(Grosheide).
성 경: [고전1:9]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인사말]
⭕ 너희를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 '미쁘시도다'의 헬라어 '피스토스'(*)가 원문에는 문두에 나와서 강조적으로 쓰였다. 이 말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말로써 그의 자신의 근거가 되는 말이고(고전 10:13;살전 5:24),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히3:2;10:23;벧전 4:19;요일 1:9;요삼1:5;계 1:5;3:14). 바울은 본 서신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밝혔는데 본절에서는 모든 신자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여 그들을 거룩케 하기 위함이었다(롬 3:29). 여기서 '교제'(*, 코이노니안)란 연합과 교통을 포함하는 말로 함께 참여함을 의미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된다.
성 경: [고전1:10]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고린도 교회의 분쟁]
⭕ 형제들아 - 바울은 그의 편지의 서론을 마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기의 집필 목적에 따라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기 시작한다. 본론에 들어가는 첫 부분에 나와 있는 반의어 접속사 '데'(*, '그러나', 개역성경에는 생략됨)는 전체적인 흐름을 잘 표현해 준다. 즉 뒤에 나오는 내용이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과 상당히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로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 담긴 어조이다. 바울은 종종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고 할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고전 7:29;14:20, Meyer).
⭕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주님의 칭호(稱號)를 모두 다 사용한 것은 그의 호소가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지를 보여 준다(Morris). 너희를 권하노니 - '권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는 '격려하다', '권고하다'의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좀더 강조해서 '간청하다', '탄원하다'의 어조를 띨 수도 있다. 이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보이며 강한 권면을 하려는 바울의 심정이 엿보인다.
⭕ 다 같은 말을 하고 - '말을 하고'의 헬라어 '레게테'(*)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엄격하고 고전적인 표현이다. '같은 말을 한다'는 표현은 정치적인 공동체가 분열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고 상호간에 우호적인 관계에 있을 때 사용된다(Lightfoot). 바울이 이처럼 고전적인 헬라어의 분위기를 나타낸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헬라 문화권에 친숙하게 젖어 있음을 알 수 있다(Robertson).
⭕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키스마타'(*)는 (1)갈라진 틈(LXX 욘 2:6;LXX 사 2:19,21) (2) 옷이 찢어짐(마 9:16) (3) 의견의 차이로 일어나는 분쟁(요 7:43; 9:16) (4)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함(고전 12:25)등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본절에서는 각기 다른 지도자를 따름으로 인한 분열을 가리킨다. 즉 같은 교회 내에서 서로 느낌이 달라 당을 짓는 형편을 묘사한다.
⭕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온전히 합하라'의 헬라어 동사 '카테르티스메노이'(*)는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인데, 그물을 수선하거나(마 4:21) 신앙의 부족함을 채운다는 정신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살전 3:10). 본절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의 온전한 통일된 몸을 이루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하는 연합(聯合)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고전1:11]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고린도 교회의 분쟁]
⭕ 내 형제들아 - 이제부터 바울은 자신이 권면을 하게 된 배경을 제시한다. 10절과는 달리 여기에서는 '내 헝제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자비를 보여준다.
⭕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내게 들으니 - '글로에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클로에스'(*)는 문자적으로 '글로에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수 없다. 다만 글로에는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진 상업에 종사하는 여인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Hodge).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그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의 집에 속한 종들이나 가족 중의 한사람이 바울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Grosheide).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면서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데스'(*)는 10절에서 말한 '분쟁'(*, 스키스마타)의 결과로 의견이 분분하게 된 상태를 말하며 '말다툼'(quarrels, NEB, NIV)혹은 '논쟁'(contenti-ons, KJV)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고린도 교회가 분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어도 그들의 견해가 '심각한 차이'(serious differences, JB)를 보이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은 경멸하였다.
성 경: [고전1:12]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고린도 교회의 분쟁]
⭕ 너희가 각각 이르되 - '너희가 각각'의 헬라어 '헤카스토스 휘몬'(*)은 각자가 자기 입장을 취하였음을 시사하는 말로 분쟁의 문제가 얼마나 넓게 확산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들의 문제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몇몇 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 또는 편파심 때문에 조성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분파를 넷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였는지 혹은 그 외에도 더 많은 분파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본문에 소개된 네분파의 내용을 살펴보자.
⭕ 바울에게 - 바울에게 속했다고 하는 자들은 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이방인 개종자들이 모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여튼 그들은 바울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다른 지도자들을 배격(排擊)하면서까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향한 바르지 못한 충성심을 배격하고 비난했다.
⭕ 아볼로에게 -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학자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고 웅변적인 사람(행 18:24-28;딛 3:13)인 것 외에 그를 알 수 있을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고전3:16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라는 말로 보아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그의 풍부한 학식으로 인해 지식층의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을 것이고 그들은 곧 바울을 멀리하고 아볼로를 지도자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가 대립적이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는 없다.
⭕ 게바에게 - '게바'(*, 케파스)는 '바위'(rock)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 '게바'(*)의 음역으로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그가 당시에 고린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혹자는 이 파를 바울에 대항하는 율법주의 부류로 보기도 한다(Baur).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며 단순한 편당 심리에서 발생된 것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파는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에서 지도를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그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모여그를 추종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베드로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부르지않고 아람어로 부른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 그리스도에게 - 이 파가 어떤 성격인지 알기가 매우 곤란하다. 혹자는 고린도 교회내의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한 분파라고 한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설득력이 없다. 추측하건대 이파는 위의 세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당파인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만 속하였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 역시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그 곳에 당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러한 당파를 만든 그 정신을 책망하고 있다.
성 경: [고전1:13]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고린도 교회의 분쟁]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 ' 나뉘었느뇨'의 헬라어 '메메리스타이'(*)는 완료시상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뉘어지셨고 지금도 회중안에서 계속 나뉘어진 상태로 있느냐'라는 뜻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본절을 혹자는 단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다'라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Lachmann, Meyer). 그러나 이 문장은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수사적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아무튼 이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나뉘어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 바울은 인간 지도자를 중심으로 당쟁을 일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값을 무효화(無效化)시키며 그리스도만이 가지는 구주로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 이질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오노마'(*)는 전치사 '에피'(*, 행 2:38)나 '엔'(*, 행 10:48)과 함께 쓰인 용법보다 강한 표현으로 영적인 결합의 상태로 들어감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견준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고전1:14]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고린도 교회의 분쟁]
⭕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그리스보'는 행 18:8에 나타나는 '회당장 그리스보'와 동일한 인물로 보여진다. 그리고 본절의 '가이오'라는 이름은 행 19:29에 나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는 다르지만 롬 16:23에 언급된 모든 고린도 교회를 접대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요삼 1:5, 6에 나오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가이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Robertson). 여하튼 바울은 이 두 사람과 스데바나 집 사람(16절)에게만 예외로 세례를 베풀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때 타당하지 않다(Morris). 바울이 제한적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구태여 밝히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이들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을 '감사한'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는 몇몇 당파의 지도자들이 자기 파의 세력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어 가며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세례의 본래 의미를 잃고 세례를 단순히 당파 확장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세례를 베푸는데 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몇몇 소수의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 사실이 바울 자신이 제자를 만들고 있다는 비방을 막을 수 있어서 그는 기뻐하였다.
성 경: [고전1:15]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고린도 교회의 분쟁]
⭕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당파적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그들은 '바울파'임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세례를 몇 사람에게만 베풀었던 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보아 감사의 제목으로 삼았다(14절). 이렇듯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묶으려는 어떤 시도도 배제하였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자들 사이에 있게 되는 교제와 연대 의식을 중요시했다. 결국 본절에서 바울이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갖도록 성도들에게 말했거나 시도했다는 실마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였다(Morris).
성 경: [고전1:16]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고린도 교회의 분쟁]
⭕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최초의 열매였다(16:15). 당시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에서 바울과 같이 있었다(16:17).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콘'(*)은 거처(居處) 즉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눅12:39) 본절에서는 가족이나 식구를 구성하는 개개 사람들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 말에는 그의 혈육 친척들과 종들까지도 포함된 것 같다(Mare)
⭕ 그외에는...알지 못하노라 - '그 외에는'의 헬라어 '로이폰'(*)은 '그밖의 것에 대해서는' 이란 뜻으로 '알지 못하노라'와 연결되어 바울이 언급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빼놓지 않으려 했음을 시사한다(Robertson).
성 경: [고전1:17]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고린도 교회의 분쟁]
⭕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 바울이 고린도에서 제한적으로 세례를 배푼 이유는 새로 들어온 고린도 교인들이 겨우 교리 문답을 공부해야 할 단계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아볼로(행 19:1)에게 적당한 때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례식을 거행하라고 맡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Mare). 어쨌든 본 구절에서 바울은 그의 본질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진술한다(행 26:17, 18). 여기서 '복음을 전케 하려'의 헬라어 '유앙겔리제스다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의 복음 전하는 행위가 계속적이며 다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 '말의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피아 로구'(*)는 '말의 명석함으로'라고 번역될 수 있다(Mare). 당시 고린도의어떤 신자들은 인간의 지혜와 달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헬라인으로서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가 받은 사명이 아님을 주장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헛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노데'(*)는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해지거나 효력없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바울이 설교하면서 십자가의 도 대신에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人本的)인 철학 따위로 대치하였다면 그의 설교는 무력하고 인간의 지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고전1:18]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 십자가의 도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로고스 호 투스타우루'(*)는 문자적으로 '그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앞절에 있는 '말의 지혜'와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한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 개심자들이 인간의 말과 지혜에 대해서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Lightfoot). 결국 그가 여기에서 언급한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를 의미한다.
⭕ 멸망하는 자들에게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 '멸망하는'의 헬라어 '아폴뤼메노이스'(*)와 '구원을 얻는'의 헬라어 '소조메노이스'(*)는 둘 다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계속적으로 일어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말은 '멸망하고 있는 자에게'와 '구원얻고 있는 우리에게'라고 번역할수 있다(Morris). 이처럼 바울은 구원을 과거의 사건(롬 8:25), 현재의 상태(엡 2:5) 및 과정(고전 15:2), 미래의 결과(롬 1:9) 등으로 묘사함으로써 구원이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과정임을 설명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구원을 멸망과 대조하여 구원얻은 자들이 복음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의 능력이라 - 본 구절은 롬 1:16과 동일한 표현으로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앞의 '미련한 것'과 대조시켜 강조한다(고전 4:20).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미스'(*)는 신체적, 영적, 지적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능력을 가리키며, 헬라 세계에서는 우주의 원리로서의 생명력을 의미하였다(TDNT). 신약성경에서는 '뒤나미스'가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고전1:19]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 기록된바...폐하리라 하였으니 -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를 채택하지 않고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 29:14 (LXX)을 인용하고 있다. 다만 70인역에서 '가리워지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립소'(*)가 본절에서는 '폐하리라'의 헬라어 '아데테소'(*)로 대치되고 있다. 이사야서의 문맥을 살펴보면 인간이 입술로만 경배하고 마음은 멀리 떠났으므로(사 20:13) 인간의 지혜와 총명이 가리워진다고 되어 있다. 바울은 이 사상을 자신의 논쟁에 적용시킴으로써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고 있다. 본문에서 '지혜'와 '총명'은 차이가 별로 없으나, 의미상 전자는 뛰어난 마음 상태를 뜻하며 후자는 어떤 일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적 판단력을 의미한다(Morris). 이것들은 인간이 발휘할수 있는 독특한 능력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인간의 지혜가 상대적이고 의존적(依存的)이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성 경: [고전1:20]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 지혜있는 자가...선비가...변사가 어디있느뇨 - 인간의 지혜가 갖는 한계를 명확히 제시한 후, 본절에서는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한다. 여기서 '지혜 있는 자'란 바울이 헬라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22절). '선비'의 헬라어 '그람마튜스'(*)는 '서기관'을 가리키기도 하지만(막 23:2;눅 20:39;행 19:35), 율법에 능통하여 '율법을 가르치는 자'(teacher of the law, NIV)를 지칭하기도 했다.이 용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가 적절한 단어였다. 또한 '변사'의 헬라어 '쉬제테테스'(*)는 무슨 문제든지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을 가리키며 본절에서는 지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동시에 지칭한다(Mare). 이러한 용어들을 번갈아가며 사용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헬라적 개념과 유대적 개념을 같이 사용해야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세상의'의 헬라어 '코스무'(*)는 앞 구절의 '세대'(*, 아이오노스)와 동의어로 원래질서 정연한 배열을 의미하다가 나중에는 비기독교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Robertson). 또한 '아니뇨'(*, 우키)는 '우'(*, '아니')의 강조형으로 본절에서는 의문문 초두(初頭)에 사용되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수사적 의문문이 되었다.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즉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세상의 지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성 경: [고전1:21]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 이 구절은 해석이 난해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소피아 투 데우'(*)는 '하나님의 지혜로' 혹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등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2) '하나님의 지혜의 드러남 가운데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의 해석을 따르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의 지혜라는 의미이다(Alford, Lightfoot). 또한 (2)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나(롬 1:20) 세상이 알지 못했다는 의미이다(Chrysostom, Meyer). 이 가운데 (2)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데, 이 견해를 따라 해석하면 사람이 비록 창조와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둘러 싸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지식을 얻는데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분명하지만, 인간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인간은 빛 가운데서도 눈이 먼 상태로 있고 자신의 지식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롬 1:28).
⭕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 '전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그마토스'(*)는 선포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선포하는 내용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전하는 행동 자체보다는 그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바울이 전한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었던 바(롬 16:25) 바울은 이러한 복음 전파가 '미련한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기독교의 전도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친다.
성 경: [고전1:22]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 '표적'은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종종 예수께 찾아와 표적을 구하였다(마 12:38;16:1;막 8:11,12;요 6:30). 그들은 항상 증거를 요구했고 현상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할때에도 역사 속에 표적과 큰 능력과 기사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 아래 있게 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이상(理想)은 지혜 곧 철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때로는 무의미한 궤변에 빠지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행 7:21) 지적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성 경: [고전1:23]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본 구절은 앞 구절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Robertson). 헬라어 본문에 있는 '데'(*, '그러나')는 본절이 앞 구절과 대조를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고, 주격 대명사 '헤메이스'(*, '우리')가 사용되어 행위의 주체자를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타우로메논'(*)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단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가리키고 지금도 그 대속적인 효과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란 조국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존재케 할 영광스런 왕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행악자 취급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모욕(侮辱)이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걸림돌만 될 뿐이다(롬 9:33;벧전 2:8).
⭕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당시의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장 비천한 죄인들이나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십자가와 구세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헬라인들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된다 해도 육신의 한계로 인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본 구절을 통해 모든 인류가 빠짐없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거부했음을 말하고 있다.
성 경: [고전1:24]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원어 '클레토이스'(*)는 단순히 외형적으로만 초청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효과적으로 적용된 사람들을 가리킨다(Hodge). 여기서 바울은 '부르심'의 사상을 강조한다. 자연인으로 있을 때는 누구나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이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되며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이해한다(Morris). 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지혜를 헛된 것으로 돌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
성 경: [고전1:25]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지혜와 능력이신 그리스도]
⭕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사람보다 강하니라 - 인간이 교만하여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일축했지만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다. 비록 십자가가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패배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 것이다.
성 경: [고전1:26]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하나님의 선택]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 바울은 앞에서 논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고린도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 한다. '부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신'(*)은 하나님의 주체적이고 동적인 모습이 강조된 말로서 (롬 11:29;엡 1:18) 고린도 교회의 부르심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음을 시사한다. 한편 '보라'의 헬라어 '블레페테'(*)는 문법상 직설법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명령형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Morris, Alford, Meyer).
⭕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능한 자가...문벌 좋은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육체를 따라'의 헬라어 '카타 사르카'(*)는 '육체를 표준으로 삼아'라고 해석되는데, 대개 '육체'는 인성(人性)을 뜻하므로, 세속적인 관점으로 분별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문구는 '지혜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에 모두 적용된다. '지혜 있는 자'(*, 소포이)는 헬라의 철학자들처럼 높은 교육을 받은 지적인 사람들을 가리키고 '능한 자'(*, 뒤나토이)는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를 의미하며, '문벌 좋은 자'(*, 유게네이스)는 사회적으로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바울은 이 세 용어를 사용해서 지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유력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상류 계급에 속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러한 외적인 조건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고전1:27]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하나님의 선택]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 '택하사'의 헬라어 '엑셀렉사토'(*)는 '뽑아내다', '선택하다'라는 뜻의 '에클레고'(*)의 부정과거 중간태형으로 혼자서 스스로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28절까지 반복적으로 제시되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선택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어리석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선택하신 사실은 외적인 조건들이 일시적이며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구원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성 경: [고전1:28]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하나님의 선택]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 '천한 것들'의 헬라어 '아게네'(*)와 '멸시받는 것들'의 헬라어 '엑수데네메나'(*)는 낮은 계급에 처한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로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선택이 적용됨을 강조한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고린도에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처한 특별한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다. 또한 바울은 '없는 것들'(*, 타 메 온타,the things that are not)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회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고 필요가 없는 자들까지도 선택의 대상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 있는 것들을 폐하려 - '있는 것들'의 헬라어 '타 온타'(*)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는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유력한 자일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심'과 '폐하심'의 주체자로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이 대조법을 통해 다시한번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신분은 구원을 얻기위해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Mare).
성 경: [고전1:29]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하나님의 선택]
⭕ 이는 아무 육체라도 - '아무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사륵스'(*)는 문자적으로 '모든 육체'를 가리키며 비유적으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성 경: [고전1:30]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하나님의 선택]
⭕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 '하나님께로 부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스 아우투'(*)에서 전치사 '엑스'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있게 하시는 궁극적인 동인(動因)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에 나와 있는 반의적인 접속사 '데'(*, '그러나')와 강조형 주격 대명사 '너희'(*, 휘메이스)는 본절이 앞절과 강한 대조를 이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묘사한다.
⭕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 '하나님께로서 나와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 데우'(*, '하나님께로 부터')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지시한다.
⭕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 바울은 그의 편지를 읽을 독자들에게 자신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었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본절 초두에 언급한 바 있는 '너희'를 '우리에게'(*, 헤민)라고 바꿔 쓰고 있다. 본절에서 '지혜'라는 개념과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의 개념이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지혜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贖罪)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가 '의, 거룩, 구속'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Alford, Mare, Morris, Meyer). 위에서 '의로움'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해당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은 것, 곧 '칭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이란 그리스도와의 영적 고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자들은 부정과 불법에서 벗어나 의의 종이 되는 것이다(롬 6:19). 마지막으로 '구속함'이란 적당한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자유롭게 한다는 뜻에서 전용(轉用)된 말로(출 21:8),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대가로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놓으셨다는 뜻이다(엡 1:7;골 1:14;히 9:15).
성 경: [고전1:31]
주제1: [분열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
주제2: [하나님의 선택]
⭕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렘 9:24을 인용함으로써 구약의 권위를 빌어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게 되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유래한다. 모든 선(善)은 하나님께만 있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자랑해야 한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속받은 백성임을 인식시킨 후 그의 백성에 합당하게 주님의 영역 안에서 자랑할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결론 짓는다.
성 경: [고전2:1]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전도]
⭕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갔을 때'(WhenI came, NIV)라는 의미로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당시 약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무르면서 전도하였을 때를 가리킨다(행 18:1-17).
⭕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 '증거'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리온'(*)은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 근거한 것이다. 오래된 사본들(P ,,A,C)에는 '뮈스테리온'(*,'비밀')으로 되어 있어서 '비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Aland), 내용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석하든지 별차이가 없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을 내용으로 삼는 증거 곧 복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계시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며 곧 '십자가의 도'(1:8 주석참조)를 전한다는 것이다.
성 경: [고전2:2]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전도]
⭕ 내가...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 헬라어 본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가르'(*)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의 이유가 됨을 보여준다. 본절에서 바울은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다(행 10:37-43).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가고자 했던 유일한 목적이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가르친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Hodge).
⭕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나이'(*)는 경험을 통해 아는 일반적인 용어인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적이며 전문적인 지식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인 '오이다'(*)의 부정사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은 깊은 지식을 가졌고 또 가지기를 원했다. 바울이 이렇게 다짐한 것은 바울이 회심 때에 겪은 체험과 철학적인 지혜를 동원하여 전도하려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행 17:22-34).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참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가장 합당(合當)한 것임을 깨달았다.
성 경: [고전2:3]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전도]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 '거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노멘'(*)은 '갔다'라는 의미로 본문은 문자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갔을 때'의 뜻이다. 바울은 본절 초두에서 '카고'(*, '내가 또한')라는 말로 시작하여 주제를전환하고 있다.
⭕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약함'은 육체적인 허약이 아니다. 그가 비록 이따금 자신의 육체적인 허약을 언급하지만(고후 10:10) 본절에서는 전체 문맥상 육체가 아닌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Hodge). 바울의 마음이 약하고 두려웠던 것은 그가 고린도에 이르기 직전 아덴에서의 전도에 실패한 것이 그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방에서 성행하던 이교도들의 강한 세력들, 철학자들의 사변과 교만한 태도, 그리고 음탕한 도덕적인 타락상 등이 난무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때 느꼈던 인간적인 중압감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비록 강하고 담대한 대사도(고후 4:7-11;엡 6:19,20)이기도 했지만 자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겸비한 인격자였음을 보여준다.
성 경: [고전2:4]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전도]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 '권하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도이 로고이스'(*)는 '유혹하는 말'(enticingwords, KJV), '그럴 듯한 말'(plausible words, RSV)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인간의이성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유혹하는 말, 곧 인간의 지혜가 상상해 낸 설득조의 말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람들을 믿음에 복종하도록 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논쟁이나 설득으로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학문에는 그와 같은 논리와 설득력, 그리고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웅변술과 화려한 말들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지혜가 부각되면 십자가의 도는 헛되게 된다(1:17).
⭕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바울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강한 영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1:18). 여기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헬라어 '아포데익세이 프뉴마토스 카이 뒤나메오스'(*)는 (1)'능력있는 성령의 나타남' 또는 (2)'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이라는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능력'의 헬라어 '뒤나미스'(*)가 종종 이적적인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 (1)의 번역이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께서 능력 있게 나타나심에 근거하여 바울이 복음을 전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성령의 나타나심에 의존하여 설교했으므로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성 경: [고전2:5]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전도]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 본절에서는 바울이 왜 인간의 지혜로 된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이유를 설명한다. 바울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전도하고 가르친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믿음'의 헬라어 '피스티스'(*)는 정관사 '헤'(*)와 함께 사용되어 믿는 행위 그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기초한 믿음의 본질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너희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Mare).
⭕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다만'의 헬라어 '알라'(*)는 본절을 앞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게 하는 접속사로 믿음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근거가 이성에 호소하는 논증(論證)이 아니라 진리와 함께 그리고 진리로 말미암아 심령에 역사(役事)하는 하나님의 권능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는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 믿음의 근거가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서 그들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성 경: [고전2:6]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 바울은 이미 지혜의 부당성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지혜를 언급한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지혜를'(*, 소피안)이 문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바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는 '온전한 자'들이 깨닫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온전한 자'(*, 텔레이오이스)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3:1)와 비교되어 영적인 이해에 있어서 성숙한 자를 가리킨다고 한다(Morris).그러나 본문의 문맥상, 구원받지 못한 자와 대조되는 구원받은 자들 즉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단정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 아이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중생하지 못한 자, 즉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1:20-23)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도를 지혜로 간주하는 자들은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은 모든 믿는 자를 가리킨다(Hodge, Mare). 바울은 본문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을 시사해준다.
⭕ 이 세상의 지혜...없어질 관원의 지혜 - '이 세상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아이오노스 투투'(*)는 보다 정확히는 1:20과 같이 '이 세대'를 뜻한다. 그리고 '관원'(*, 아르콘톤)은 본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 '관원'이 사단이나 악귀 등을 가리킨다고 한다(Origen, Marcion). 그러나 이 견해는 타당성이 희박하다. 비록 바울이 이 단어를 사단의 개념으로 자주 사용하지만(롬 8:38;골 2:15), 모두 단수형을 사용하였다. 더욱이 행 3:17에서는 '관원들'이 무지(無知) 중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음을 언급했고 본장 8절에서도 '이 세대의 관원'(*, 톤 아르콘톤투 아이오노스)이 무지로 인해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음을 언급한다. 또한 앞절에서부터 계속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대조하여 사람의 지혜를 언급하므로 본절에서 갑자기 사단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관원'이란 '이방 세계나 유대 세계의 지도자 일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은 본문에서도 자신이 전파하는 지혜는 세상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성 경: [고전2:7]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는 강한 반의어 접속사로 바울이 언급하는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소피안'(*)에서 하나님(데우)은 강조되어 앞에 위치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 복음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비밀'(*, 뮈스테리오)이란 오랫동안 감취어져 있다가 드러난 것으로(엠 3:3;골 1:26),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엡 5:32). 이 '비밀'은 인간이 전혀 포착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연구해도 그 비밀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도 깨달을 수 없다(Morris).
⭕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 본 구절은 헬라어 '헨'(*, '곧')을 사용하여 앞구절을 설명한다. '영광'(*, 독사)은 백성들과 함께하신 구약의 영광스런 하나님을 회상해 보는 것(출 24:17;40:34;민 14:10)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나눌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것(계 21:10, 11, 22,23)을 의미한다(Mare). 결국 이 말은 구원으로 말미암는 모든 유익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뛰어난 모든 것과 복스러운 모든 것까지도 포함한다(롬 5:2). 바울은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결국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라 할 수 있는 구속 계획(球贖計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만세전에 이미 구상되었고 복음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알려진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Hodge).
⭕ 만세전에(*, 프로 톤 아이오논)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영원 전에'라는 의미로 시간이 발생되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복음이 후대의 고안물(考案物)이 아니었음을 명백히 한다.
성 경: [고전2:8]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이 지혜는...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기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 '영광의'(*, 독세스)라는 형용사는 대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용되었고(행7:2;엡 1:6) 외경 에녹서에서도 '영광의 주'가 하나님을 지시하였다(Morris)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호칭인 '영광의 주'(*, 퀴리온 테스독세스)는 바울 서신에서는 본절에만 나타난다.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을 사용하여 십자가의 수치와 극명(克明)하게 대조를 보이고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하는 이유는 7절에서 언급한대로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이루실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Grosheide).
성 경: [고전2:9]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하나님이...함과 같으니라 - 본 구절의 인용 출처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오리겐(Origen)과 그후 몇몇 주석가들은 지금은 분실된 '엘리야의 외경'이나 또는 '이사야의 승천'이라는 외경에서 인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만 '기록된 바'라고 함으로 이견해는 타당하지 않다(Lightfoot, Hodge). 혹자는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했다고 하며 사 52:15;65:17등에서 인용했다고 하기도 한다(Chrysostom, Hodge).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사 64:4을 대략적으로 언급한듯 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는 말은 구약의 전체적인 사상을 일반적인 의미로 함축시킨 것같다. 한편 '예비하신'이라는 동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7절의 사상을 강조해 주고 있다.
성 경: [고전2:10]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어떤 사본에는(*, A,C,D), '데'(*, '그러나')로 되어있고, 어떤 사본에는(P ,B) '가르'(*, '왜냐하면')로 되어있다(Aland). 개역성경은 '데'를 취하여 본절을 앞 구절과 역접관계로 보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는 '우리에게'(*, 헤민)가 문장의 초두에 나와 특히 강조되고 있다. 이 세상의 관원들이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깊은 지혜가 선지자와 사도들(엡3:5)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시되었다. 바울이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줄곧 '우리'라는 대명사를 주로 사용한 것은 계시가 바울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시사해준다.
성 경: [고전2:11]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사람의 사정을...아우도 알지 못하느니라 - 본절은 인간의 지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영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적인 지혜와 진리를 이해하려면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본절에서 언급된 '영'(*, 프뉴마)은 하나님과 사람의 영을 모두 지칭하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실재적인 인격'을 가리킨다(Mare).
성 경: [고전2:12]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우리가...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 '우리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이스'(*)가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장 초두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알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대상이 다름아닌 그리스도인임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본절에서의 '우리'는 바울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은 자들까지도 포함한다.
⭕ 이는...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는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본절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는 것임을 설명한다. '은혜로 주신 것들'의 헬라어 '카리스덴타'(*)는 부정 과거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사람에게 단번에 주시는 선물을 가리킨다(Edwards).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음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추구하시는 궁극적인 목표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계시하시고,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그 계시를 깨닫게 하신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취약성(脆弱性)과 제한성 때문이다.
성 경: [고전2:13]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 '말하거니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랄루멘'(*)은 '소리 낸다'는 의미를 가진 '랄레오'(*)의 1인칭 복수 현재동사이다. 바울은 현재형을 사용하여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자 하고 있다.
⭕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 이 구절은 해석상 난제를 갖고 있다. '신령한 것으로'(*, 프뉴마티코이스)란 단어의 성(性)에관한 문제이다. 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중성으로 보고 번역했지만 남성형으로도 해석이가능하다. 남성형이 맞다면 '신령한 사람들에게'라고 번역해야 하고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도 다른 해석을 적용해야 어울린다. '슁크리논테스'는 원래 '결합시키다', '조화롭게 하다'등의 의미로 쓰였는데 나중에는 '비교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며(고후 10:12) '가져오다', '주다', '설명하다', '해석하다'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므로 본 구절의 번역은 다음 네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 '신령한 진리에 신령한 형식을 부여한다.' (2) '신령한 진리를 신령한 진리로 비교한다.' (3) '신령한 사람들에게 신령한 것을 해석해 준다.'(4)'신령한 말로 신령한 진리를 설명하거나 표현한다.' 비록 이 네 가지 해석이 모두 타당성이 있기는 하지만 네번째 해석이 문맥에 가장 적절하다. 바울은 영적인 말 즉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성 경: [고전2:14]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는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으로라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 프뉴마)의 부사형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 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원래 '검사한다',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치 기준도 가지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성 경: [고전2:15]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신령한 자'는 분명한 가치 기준이 있어서 판단의 주체자가 될수 있다. '신령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다. '프뉴마티코스'는 성령께서 내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Hodge).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모든 가치 기준이 영적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啓示)에 의존하여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
성 경: [고전2:16]
주제1: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계획]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 헬라어 본문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의 내용을 확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사 40:13을 인용한 것으로서 긍정적인 질문 형식을 취하여 부정적인 답을 유도하는 수사법을 사용하였다. 즉, 주의 마음을 전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의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눈 퀴리우'(*)는 70인역을 따른 것으로 히브리어 본문에서 '여호와의 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 야웨'(*)의 번역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롬 11:34 주석을 보라.
⭕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 바울은 앞 부분에서 인용한 구약의 표현 가운데 '주의 마음'과 관련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용어를 도입한다. 본절은 주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적인 진리와 영적인 지혜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Mare).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모든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깨닫게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 경: [고전3:1]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 할 수 없어서 -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는 2:14, 1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가리킨다. 2:14, 15에서는 이 단어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대조되어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는 '어린아이'(*,네피오이스)와 대조되고 있다. 즉 본절에서 '신령한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숙해 가는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여전히 성숙되지 못하고 정체(停滯)되어 육적인 편견과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수준에 있다고 규정한다.
성 경: [고전3:2]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 '밥'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로마'(*)는 원래 '고기'(meat)라는 의미로서 일반적으로 성인이 먹는 단단한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단단한 음식에 해당되는 형태로 복음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어린 신자로 여겨,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바울의 이러한 화법은 헬라세계에 퍼져있던 밀의 종교의 방식과는 다르다. 밀의 종교에서는 신도의 수준에 따라 일정 수준에 이른 신자들에게만 은밀하게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방식으로 복음의 진리를 단계적으로 구분하여 가르쳤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신앙의 상태에 관계없이 항상 진리이기 때문이다(Calvin). 오히려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형식을 달리하여 가르쳤다고 보는게 더욱 타당하다. 이렇듯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상태에 따라 깊고 넓게 가르쳐야 한다.
⭕ 지금도 못하리라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처음 방문하여 복음을 가르칠 때, 그들은 단순한 믿음의 도리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고린도 교인들이 복의 초보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여 정체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까닭에 다른 형태로 복음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성 경: [고전3:3]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 '육신에 속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키코이'(*)는 1절에서 언급한 '사르키노이스'(*)보다 강한 표현으로 '사르키노이스'는 육신 자체를 가리키는 반면 '사르키코이'는 육신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이 말이 신앙 생활을 적게 한 사람에게는 비난이 되지 않지만 신앙 생활을 오래한 사람에게 사용되면 비난하는 투가 된다(Morris).
⭕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 바울은 본절에서 육신에 속한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스'(*)는 근본적으로 '뜨거움', '열심' 등을 의미하여 헬라의 전통 작가들의 문헌과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덕목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질투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그릇된 경쟁 의식에서 나온 감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대개 '젤로스'를 육에 속한 사람이 갖고있는 정서로 본다(갈 5:20). 한편 '시기'가 외적으로 표출되면 분쟁이 유발되는데, '분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스'(*)가 어떤 헬라어 사본들(P ,D,F,G,TR)에서는 '분열'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코스타시아이'(*)로 되어 있다. '분열'은 '분쟁'의 결과로서 필사자가 좀더 과격하게 고린도 교회의 분열상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고린도 교인들은 여러 파로 나누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각기 독자적인 태도와 노선을 취하였음을 시사한다.
⭕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사람을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안드로폰'(*)은 통상적인 죄인의 삶의 방식인 이기심, 교만, 시기 따위의 정서를 정당하게 여기고 수용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요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린 칭의인(稱義人)으로 살아가야 한다(갈 2:20;5:24).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바울은 이를 염두에 두고 고린도 교인들의 오류를 스스로 시인할 수 밖에 없도록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고 있다.
성 경: [고전3:4]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아볼로에게라 하니 - 헬라어 본문에 나오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는 본절이 앞절의 진술에 대한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고린도 교인들이 '시기'와 '분쟁'에 가득한 어린 신자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바울'파와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 있는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당파를 짓고 있는 분열상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본절에서 제시하는 바울파, 아볼로파 외에도 몇몇 분파들이 더 있었다(1:12). 그런데 바울이 본절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모인 바울파와 견주어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던 '아볼로'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특별한 사역이나 어떤 특정한 인물에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돼었음을 설득력있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성 경: [고전3:5]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 '무엇이뇨'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어떤 사본(P , , C,D,TR)에서는 인칭형인 '티스'(*, '누구냐')로 되어 있으나, 고대 사본들( ,A,B)에서는 중성형인 '티'(*, '무엇이냐')라고 되어 있어 바울 자신과 아볼로를 매우 경시하여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음 절에서 언급하려는 하나님의 권위의 절대성과 그분의 사역의 완전성을 두각(頭角)시키고 인간 지도자의 권위의 상대성과 한계성을 대조적으로 약화시키려는 의도이다.
⭕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 앞 구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식을 취하여,'주'와 '사역자'를 대조함으로써 '주'의 우위성을 나타낸다. '사역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이'(*)는 본래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봉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자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되어 '집사'(롬 16:1;빌 1:1)를 의미하기도 한다. 본절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들의 직무가 낮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함이다(Morris). 모든 행위의 주체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사역자인 바울과 아볼로는 도구에 불과하다.
성 경: [고전3:6]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바울은 앞절의 논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물 재배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본절에 나타나는 동사들 가운데 바울과 아볼로를 주체자로 삼는 '심었고'의 헬라어 '에퓌튜사(*)와 '물 주었으되'의 헬라어 '에포티센'(*)은 부정과거인데반해, 하나님을 주체자로 갖는 동사 '자라나게 하셨나니'의 헬라어 '육사넨'(*)은 미완료과거이다. 이는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은 시간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영속적임을 보여준다. 본 구절은 고린도 교회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바울이라는 것과(행 18:1-18) 그의 동반자 아볼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자세하게 해석하여 가르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행 18:24;19:1). 그러나 그들의 사역 배후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항상 있었고 절대적인 역할을 하셨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성 경: [고전3:7]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 본절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앞절에 이어 5절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아무것도 아니로되'의 헬라어 '티 우테'(*)는 심고 물주는 사역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오직...뿐이니라'의 헬라어 '알'(*)은 근본적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고전3:8]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 본절에서는 심는 이와 물주는 이를 접속사 '카이'(*, '그리고','...도')로 연결시켜 바울이 언급하려는 것을 둘 다에게 동일하게 적용시킨다. '일반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헨 에이신'(*)은 '하나이다'라는 의미로 둘 다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즉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역자들이 각기 하는 일은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하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동일한 교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라는 표현은 사역자들이 하나님께 대해 개별적인 책임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역자들이 자신이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진 재능이나 은사조차도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갖고 있는 재능이나 은사에 관계없이 수고에 대한 대가로 상급이 주어진다(Hodge).
성 경: [고전3:9]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육신에 속한 자]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 본절에는 '하나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가 각 구절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바울이 줄곧 하나님을 모든 행위의 주체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역자들'의 헬라어 '쉰에르고이'(*)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의 견해를 따르면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Meyer, Alford, Robertson). (2)혹자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engel, Morris, Vincent).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하다. 그 이유는 본절이 앞 구절에 대한 설명적인 표현이므로 문맥을 떠나 해석할 수 없기때문이다.
⭕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밭'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오르기온'(*)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교회를 가리킨다.바울은 자신이나 아볼로와 같은 사역자들을 경작자로 간주하고 고린도 교회를 밭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집'의 헬라어 '오이코도메'(*) 역시 교회를 가리키는데, 바울은 이런 표현을 신약성경에서 자주 사용했다(롬 15:20;엡 2:20-22;벧전2:5). 바울은 교회를 '밭'으로 비유하다가 갑자기 '집'으로 비유의 소재를 전환하면서 자신의 논증을 다음 절에서도 계속 이끌어나간다.
성 경: [고전3:10]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
⭕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 본절을 통해서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처음으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로 묘사한다. '지혜로운 건축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포스 아르키테크톤'(*)은 '숙련된 건축가'라는 뜻으로 헬라어의 관례에 따르면 다른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을 말한다. 바울이 '집'(*, 오이코도메)이란 말은 곧잘 사용했지만, '건축자'라는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하였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엡 3:7-10)을 알고있는 숙련된 건축자로서 고린도 지역에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실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교리적인 터를 닦아 놓았다(2:2;행 4:11;엡 2:20;벧전 2:6).
⭕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다른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로스'(*)는 단수이지만, '각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카스토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교회의 모든 사역자를 개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새로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이 이미 닦여진 그 터 위에 건물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각자는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를 주의하여야 한다.
성 경: [고전3:11]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
⭕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 본절은 앞절에서 경고했던 이유를 제시한다. 모든 건축에 있어서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도 교회의 터가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터로 삼지 않고서는 세워질 수 없다. 이 터는 바울이 닦았으나 실상은 그가 닦은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사도적 권위를 부여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그 터를 닦으신 것이다(Meyer).
⭕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주인이며 교회의 진정한 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터로 삼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교회라 할 수 없다. 엡 2:20 에서는 사도들을 '터'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이라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궁극적인 기초이심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떠한 인물이나 사상 체계도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성 경: [고전3:12]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 바울은 건축에 사용되는 두 종류의 자재를 예로 들고 있다. 그 하나는 '금, 은, 보석'등 값비싸고 견고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 풀, 짚' 등 값싸고 허술한 것이다. 바울은 순수하며 변치않는 영원한 것과 이에 비해 무미건조하고 일시적인 것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거짓된 가르침은 쉽게 소멸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후자(後者)는 '천한 초등 학문'이며 '철학과 헛된 속임수'이다(갈 4:9;골 2:8).
성 경: [고전3:13]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
⭕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 '그날'은 재난이나 환난의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주의 날'(롬 13:12;살전 5:2-9;히 10:25)이다. '밝히리니'의 헬라어 '델로세이'(*)는 성격의 본질을 드러내어 그것의 실상을 밝힘을 의미한다. 그 날에는 각 사람의 공력에 따른 결과와 성격이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 드러나는 방식이 '불'에의해 결정되어지는데, 이는 '심판의 불'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불'은 크게 두 가지 작용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정화시키는 작용(마 3:11;막 9:49)과 소멸(燒滅)시키는 작용(마 3:12;살후 1:7, 8;히 12:29)이 그것이다. 바울은 '불'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각 사람의 공력이 정당한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나타내고'의 헬라어 '아포칼립데타이'(*)는 '아포칼립토'(*, '드러내다')의 현재 수동태형으로 공력의 드러나는 정도가 완벽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성 경: [고전3:14]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 바울은 본절에서 완벽한 불의 시험을 거친 후에 그 결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을 설명한다(마25:14-30;눅 19:11-27). 이렇듯 바울은 마지막 심판 때 있을 보상과 형벌(形罰)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고 보았다(고후 5:10). 그때 주어질 '상'이 실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이 '상'은 개인적 구원이나 영원한 생명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모든 신자에게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상급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남아 있는 것'(9:18) 자체가 될 수도 있다(Grosheide).
성 경: [고전3:15]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
⭕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것 같으리라 - 공력이 무익하여 없어져 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갖고있지 못하므로 단지 구원만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구원도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아서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 표현은 화염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Morris).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적지않은 해가 있게 된다. 카톨릭에서는 본절을 연옥사상(煉獄思想)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가 타당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본절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교회의 사역자들과 교리와 연관지어서 언급하는 것이지 일반 성도들과 관련된 언급이 아니다. (2) 본절에서 '불'은 심판을 위해 연단받는 상태가 아니라 심판 그 자체를 가리킨다. (3) 이 '불'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운데 나타나실 불이다. 바울은 구원얻는 것이 불로 정화되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불 가운데서'처럼 어렵게 구원얻는다고 한다(Hodge). 그러므로 카톨릭이 불을 통해 구원얻는다고 하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성 경: [고전3:16]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
⭕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는'성전 지역'(temple area)을 가리키는 '히에론'(*)과는 달리 문자적으로 '거룩한 장소' 즉 '성소'(sanctuary)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부른 것처럼(요 2:19-21),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6:19)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다(Mare). 바울은 9절의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에이미(*, 'be') 동사의 복수형 '에스테'(*, '너희는...이다')를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전'(*, 나오스 데우)은 단수형을 사용하여 기독교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보았다.
⭕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 본 구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적성전이라는 근거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있다(엡 2:22;벧전 2:5).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에 '쉐키나'(*, Shechinah, '여호와의 가시적인 임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였지만, 이제는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이 성도들 개인과교회 공동체 안에 항상 임재하신다(Hodge).
성 경: [고전3:17]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
⭕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 본절은 '더럽히면'(*, 프데이레이)이라는 조건문의 동사와 '멸하시리라'(*, 프데레이)는 귀결문의 동사가 동일하게 쓰여 전체적으로 매우 과격하게 표현되어 있다. '프데레이'는 '보다 나쁜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신약성경에서는 70인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망치게 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은 '만약 누구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시킨다면 하나님이 그를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Hodge). 바울은 이러한 보응(報應)의 원칙을 제시하여 하나님의 처분이 불공평하고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공의로운 처사임을 보여준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실제로 분쟁을 일으키는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가 중대한 죄의 행위였음을 전제하고 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히면 사형을 당하거나(레 15:31)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의 축출되었다(민 19:20). 그런데 하나님은 나무와 돌로 지어진 상징적이고 외적인 성전 건물보다는 영적인 성전인 사람과 교회 공동체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교리를 그릇되게 전하면 사람의 영혼을 망하게 하고 교회 공동체를 훼손시키는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가 되므로 하나님은 그에 대해 보응하실 것이다.
⭕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거룩하니'의 헬라어 '하기오스'(*)는 '성별된',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등을 의미한다. '거룩'이란 말은 원래 하나님의 속성에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본래가 거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聖殿)은 더욱 거룩하고 구별되어 있다(사 28:10;계 3:12).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성을 예시하여,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존재임을 인식시키려 하고 있다. '너희도 그러하니라'의 헬라어 '호이티네스 에스테 휘메이스'(*)는 문자적으로 '그게 너희들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호이티네스'가 단수인 '하기오스'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집합명사인 '성전'(*, 나오스)을 가리키는 것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Grosheide).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뜻으로, 결국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므로 너희가 거룩하다'는 의미로 논리적 결론을 내리게 한다(Edwards). 바울이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성을 들어 고린도 교회에 곧바로 적용한 것은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의 분쟁을 그치게 하고 교회의 각 구성원의 책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성 경: [고전3:18]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 바울은 갑자기 주제를 전환하여 앞에서(1:17-2:16)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하면서 줄곧 다루었던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따라서 이 말은 바로 앞 구절의 말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는 주제보다는 뒤따르는 말 '지혜자가 되기 위해 미련한 자가 되라'는 주제와 연결짓는 것이 타당하다(Alford, Findlay). '속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파타토'(*)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고린도 교회 내에 자기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그릇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 현재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를 세상적인 관점으로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불경건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므로 이를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 바울은 세상에 대한 미련함이 진정한 지혜라고 일깨워주고 있다. 이는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헬라인 모두가 갈망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미련함을 인식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지혜'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나(2:14)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1:18-25에서 언급한 대로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나 이것이야말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3:19]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지혜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이라고 강력하게 선언한다(Mare). 이처럼 지혜에 대한 의의와 가치 판단의 기준이 이 세상의 것과 하나님 나라의 것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의 인간적 지혜를 의존하여 서로 분열과 분쟁을 일으킴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본절과 다음절에서 구약성경의 두 부분을 인용한다. 본 구절은 첫번째 부분으로 욥 5:12,13을 약간 자유스럽게 인용했다. 이 구절은 70인역의 번역을 옮기지 않고 바울이 직접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한 듯하다. '궤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누르기아'(*)는 본래 '어떤 일을 민첩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있지만 주로 나쁜 뜻으로 사용되어(Morris), '못된 일이라면 어떻게라도 해낼 태세를 갖춘 상태'를 말한다(Robertson). 한편 '빠지게 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랏소메노스'(*)는 70인역에서의 '카탈람바노'(*, '취하다')보다 강력하고 생생한 표현이다. 이 단어는 '벌린 손'을 의미하는 헬라어 '드락스'(*)와 같은 어군으로 '탈취하다', '붙잡다'등을 의미한다. 바울은 본구절을 통하여 사람들의 궤휼(詭譎)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을 뚜렷하게 표현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들의 구원 계획을 세우나 오히려 그 궤휼이 그들을 얽어매도록 하여 인간의 지혜가 전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 경: [고전3:20]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 본 구절은 구약에서 인용한 두번째 부분으로서 시 94:11의 인용이다.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알로기스무스'(*)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논리 과정까지 포함하고(마 16:7;눅 12:17), 주로 악한 뜻을 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눅 5:22;6:8;롬 1:21;약 2:4). 본절에서는 소위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의 모든 생각이란 주께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의 지혜가 주 앞에서는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헛것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타이오이(*)는 '쓸모없는', '열매없는','공허한', '무익한'이란 뜻으로 본문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계획은 허탄(虛誕)한 것에서 나온 것이므로 아무런 결과도 기대할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들이 아무리 악한 계획을 세운다 해도 영구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없고 비록 그생각이 일시적으로 선한 것이 있다고 해도 결국 무익한 것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것이다.
성 경: [고전3:21]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 '그런즉'의 헬라어 '호스테'(*)는 앞 부분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결론을 맺을 때 사용되곤 한다(3:7;4:5;11:33;14:39;15:58). 본절에서는 명령형 동사 '자랑하지 말라' 와 함께 쓰여 바울이 18-20절의 내용을 권고하며 동시에 요약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를 사모하는 것 때문에 교만해졌고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힘입어 헛된 자랑에 빠졌으나 이제 그러한 현상에 쇄기를 박고 분열을 방지하라는 명령이다.
⭕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 헬라어 본문에 접속사 '가르'(*)를 사용한 것은 앞 구절의 권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이제 바울은 독자로 하여금 시야를 만물에 돌리게 한다. '만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지도자인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 등도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에 지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우주의 대권자까지 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롬 8:17,32;딤전 6:17). 그러므로 어떤 특정인이나 사상을 중심으로 모이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무익하다.
성 경: [고전3:22]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 바울은 앞절에서 언급한 '만물'에 대해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즉 교회의 사역자와 공간과 시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나열한다. 바울과 아볼로나 베드로와 같이 사도적 권위를 갖고 있는 교회의 사역자들도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나 업적을 크게 보고 섬기거나 그런 것들에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구속받은 교회에 속한 것이지 교회가 사역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가시적인 세계인 '코스모스'(*, '우주')나 사람에게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생명이나 사망도 그리고 역사를 종속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흐름도 구원받은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주의 백성들을 위해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결국 본질상 우리에게 속한 것이 된다(Mare).
성 경: [고전3:23]
주제1: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주제2: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 그리스도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속하여졌음을 앞서 언급한 후에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관계라고 말함으로써 긍극적인 통치권자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인간이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치권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의지에 순종하여 그 보상으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Grosheide).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고(약 2:5) 구원얻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요 10:36;17:18).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모든 통치권을 이양(移讓)받으셨다(마 28:18).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되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므로 교회가 한 분 그리스도께속하여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완전한하나됨과 정상적인 질서가 이루어 진다.
성 경: [고전4:1]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그리스도의 일꾼]
⭕ 마땅히...여길지어다 - 바울은 3:23의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후토스'(*, '그와 같이')를 사용하여 '일꾼'이라는 것과 '비밀을 맡은 자'라는 두 가지의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후토스'는 '그러므로', '그런즉', '이와 같이'등의 접속사로 사용되었으며 '로기제스도'(*, '여기다')와 함께 쓰여 '하나님의 것'이라는 결론을 토대로(3:23) 새롭게 판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개역성경은 '마땅히'라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일꾼된 것과 비밀을 맡은 자 된 것의 당연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 그리스도의 일꾼 - 여기서 '일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휘페레타스'(*)는 본래 '노예'에 가까운 신분을 의미한다. 고대 전함에서 노를젓는 가장 하급 노예를 '휘페레테스' (*)라고 불렀는데 바울은 3:5에서 사용한 '디아코노이'(*, '사역자들', ministers)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Barrett). '휘페레타스'는 공관복음서에서도 '일꾼'이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으나(눅 1:2),행 13:5에서는 요한을 칭할 때 '수종자'라는 의미로 번역되기도 하였다.특히 본절에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할 것은 자신의 위치를 보다 겸손하게 나타내려 한것 같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신분적인 지위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노예적 개념은 오히려 바울의 지도자됨을 더 선명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비밀을 맡은 자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천국의 '비밀'(*, 뮈스테리온)을 나타내시고 다른 자들에게는 숨기셨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 13:11).'비밀'이라는 말은 초대 교회 속에서 신성한 의식이나 성례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Barrett)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된 엄밀한 지식이나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뜻하는 의미로 쓰여졌다(골 1:26,27;2:2). 특별히 임무를 받은 자들 외에는 숨겨진 것이기에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비밀을 맡은 자들에게는 '계시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Lightfoot). 이런 의미에서 바울과 같은 당시의 지도자들은 '계시된 진리의 교사들'이라고 칭할 수도 있다. 한편 '맡은 자'를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무스'(*)는 '오이코스'(*,'집')와 '네모'(*, '관리하다')의 합성어로서 한 집안의 행정 관리 및 재정을 맡아 관장하는 지배인 또는 관리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직분의 행정적인 면을 강조하여 마치 바울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교회의 행정관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바울은 교회의 구성원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는 영적 청지기로서의 위치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딛 1:7;벧전 4:10). '일꾼'이라는 단어는 가장 낮은 노예적 신분을 나타내는 반면 '맡은 자'라는 단어는 중간 관리인, 또는 위엄과 권위를 가진 직분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명은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Lenski).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구원의 신비,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아 알수 없는 영적 진리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아 전하는 일을 맡았다는 점에서 같은 직분임을 뜻한다.
성 경: [고전4:2]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그리스도의 일꾼]
⭕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바울은 지도자의 겸손과 권위를 동시에 강조한 후에 이에 덧붙여서 '히나'(*, '...하기 위하여')가 이끄는 또 하나의 목적절을 제시한다. 어떤 사본(*)에는 '구하다'라는 동사가 명령형(*, 제테이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너희는 충성을 구하라'는 뜻을 포함한다. 이렇게 해석하더라도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보다 중요한것은 '충성'이 청지기의 필수 불가결한 자질이라는 점이다. '충성'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문자적으로 '신실성이 발견되는 것'을 뜻한다. 청지기는 주인 앞에서 신실한 자로 인정받아야 하며 완전히 신뢰할 수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된다(Lenski), 특히 '충성이니라'에서 수동형 '휴레데'(*)를 사용하여 나타낸 것은 '충성되다'라는 인정이 개인이나 인간들의 판단에 있지 아니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청지기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뿐이며 자신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실할 따름이다. 칼빈(Calvin)은 이와 같은 삶을 '건전하고 지혜로운 생각으로 양심의 순결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본절에 사용된 충성의의미는 구별된 몇몇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12:28;엡4:11,12;딤후1:11;벧전 2:9).
성 경: [고전4:3]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그리스도의 일꾼]
⭕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주관적인 소욕(所慾)을 따라 함부로 판단했다. 그들의 판단은 마지막 날에 공력을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과(고후 5:10)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판단이다. 바울은 '아나크리노'(*)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판단이 심판이라는 의미보다는 편견에 의한 분별 또는 식별(discern)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당시 교회의 비난과 배척은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심판대의 공정성과 위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매우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설령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칭찬하며 천사와 같이 높였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아무런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주인에게 충성할 자세를 가졌으며 '인간의 판단', '하나님의 판단'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고 자신의 선한 양심조차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판단의 기준이 변할 수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판단은 사도 바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선포한 것이다.
성 경: [고전4:4]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그리스도의 일꾼]
⭕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 한 인간의 업적에 대하여 판단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울은 앞절에서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이후 자신의 허물없음을 스스로 언급한 것이 궁색한 변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롬 7:19에 기록된 바와 같은 죄인의 고백을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원치않는 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책망할수 없다고 말한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칼빈(Calvin)은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전 생애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또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본절을 단순히 가상적인 진술로 취급한다. 바울은 사실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하여 하나의 가정적인 전제를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양자는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지도자의 직분과 권위를 설명하는 본절에서는 전자가 보다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도적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태만이나 과오(過誤)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Lenski).
⭕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칭의'의 개념은 언제나 수동태로 나타난다. 본절의 '의롭다 함을 얻지'의 헬라어 '데디카이오마이'(*) 역시 '디카이오오'(*, '옳게 여기다')의 수동태로서 의롭다고 판결하시는 그리스도의 판단을 시사하고 있다. 사도의 직무에 충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고백은 철두철미하게 '이신 득의'에 근거한 것으로 자신의 충성도를 자랑하거나 비하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이행한 일을 정직한 것으로 판단하지만 심판자는 그 심령을 감찰하시고(잠 21:2) 판단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의'를 인정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이 궁극적인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점검한 것은 복음의 사역자된 모든 시대의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태도이다. 복음의 사역자는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는가를 살피는 삶 가운데서 칭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5절). 따라서 우리는 본절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과 모든 판단의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는 바울의 겸손한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성 경: [고전4:5]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그리스도의 일꾼]
⭕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 바레트(Barrett)는 '판단하다'를 뜻하는 '크리네테'(*)를 궁극적인 최후 심판이 있기 전에 행하는 '예비 심문' 또는 '예비 조사'의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판단을 임시적인 판단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이 최후의 심판에 어떠한 작용을 할 수 있는 예비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위가 위임된 것로써 혐의에 대한 조사도 그리스도께서 하시며 판결도 그분께서 행하신다. 인간 행위에 대한 고발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인을 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판단'은 합당한 이해와 관찰 없이 조급하고 경솔하게 남을 평가하는 죄인의 판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Calvin). 한편 바울은 천사들을 판단할 수도 있는 인간의 권위가(6:3)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는 최후의 날까지 유보되어 있음을 시사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와 그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본절의 '때'를 가리키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일정한 기간(롬 3:26)뿐만 아니라 한 순간의 시각(마 24:45)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약속된 시간'(an appointed time)으로서의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때'는 전장(前章)에 나오는 '그 날'(3:13)과 동일한 말임을 알 수있다. 그런데 이최후 심판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심판하게 될 이 날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도래하기 때문이다(마 25:31-46;요 5:24-30, Harris).
⭕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 본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내용이다. 어두움 속에 숨겨진 악한 세력의 일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모두 드러날 것이다(고후 5:10).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모든 비밀조차도 밝히 드러날 것이다(마 10:26). 어두움 속에 숨겨진 인간 행위의 무질서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에 의하여 모두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설픈 판단은 그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다(요 12:48).
성 경: [고전4:6]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교만함에 대한 책망]
⭕ 너희를 위하여...본을 보였으니 - 바울과 아볼로의 모범은 단순히 개인의 영광과 칭찬만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본을 보였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메테스케마티사'(*)는 '적용하다', '변형시키다'(빌 3:21) 또는 '변장하다'(고후 11:13, 14)의 뜻으로 사용된 '메타스케마티조'(*)의 능동태로서 '의지를 가지고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규범을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에 적용(適用)시켰다는 것이다. 바울이 앞에서 사용한 여러 비유들에 의하면 그들은 때로 심는 자와 물주는 자(3:5-9), 터 닦는 자와 건축자 등과 같은 협력자로서의 공동체적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질 칭찬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수많은 성도들과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판단하실 분은 주님 자신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지도자적 자질을 더욱 빛내준다. 또한 규범을 자신들에게 적용시켰다는 바울의 변호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분쟁이 선한 사도들(예를 들면 구체적인 언급이 생략됨 베드로와 같은자)에 의한 것이 아님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들의 당파 싸움을 부추기는 거짓 교사들이있음을 고발하고 있다(J. Calvin).
⭕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배워...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이 그들의 자화 자찬(自畵自讚)과 교만에 기인한 것이라고 파악한다. 특히 '교만해지다'를 뜻하는 헬라어 '프쉬시오오'(*)는 다른 곳에서 오직 한 번만 사용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골 2:18) 본 서신에서는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18,19절;5:2; 8:1;13:4등). 여기서 교만은 스스로 '자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바울이나 아볼로)를 자랑함으로써 서로 속에서 도무지 발견할 수 없는 분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나를 자랑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또 하나에 대한 시기와 멸시는 스스로도 해결할 수없는 파벌 싸움에 휘말리게 하였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쟁과 파벌을 초래한교만을 말씀 안에서 잘라내는 일뿐이다. 그런데 위에서 '기록한 말씀'(*, 게그랖타이)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관하여 바울 자신이 본 서신 1장에서 부터 지금까지 기록해 모든 교훈(1:10,30,31; 3:16-21)들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교만하지 말며 겸손할 것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는 구약성경 말씀(잠 16:18;22:4;사 57:15)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전자의 견해를 취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교훈한 것 중에 인용한 말씀이 많고(1:19,31;2:9;3:19,20)뿐만 아니라 본절에서는 '우리에게 배워'라는 말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록한 말씀'이란 바울이 본서신 1장에서부터 지금까지 기록해 온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Harris).
성 경: [고전4:7]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교만함에 대한 책망]
바울은 세 가지의 질문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교만을 지적하며 왜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 본절에서 '구별하다'(*, 디아크리노)는 말은 '추려내다' 또는 '다르게 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Lenski, Barrett). 첫번째 질문은 그들 가운데서 다르게 나타나려 하는 자들이 있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 질문 가운데서 두 가지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모두 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근신할 것을 요구한다. (2)또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동일하게 입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앞에서 특혜(特惠)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 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우월감의 근거로 삼음으로 인하여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사들 조차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들의 욕심을 자랑하는거짓 은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것이다. 설령 구별된다 할지라도 그 판단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사도는 첫번째 질문을 통해서 '누가 너희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구분지었느냐'는 반문을 한 것이다(1:12). 사도의 이 같은 질문에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1:13)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동일한 자들이 아니냐'(1:2)라는 책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아무런 정당성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이 가진 지식, 혈통, 재산, 생명, 심지어 신앙까지라도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자랑은 무익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 세번째 질문은 두번째 질문과 유사한 것으로서 '모든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인데 어찌하여 스스로가 잘나서 그와 같은 것을 누리고 있는 양 자랑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점진적인 질문의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교만이 남들과 비교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奪取)하는 오만한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은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와 공로를 자랑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 조차 함께 판단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Calvin)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서 겸손할 수 있는 선한 의지를 발견한다면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 경: [고전4:8]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교만함에 대한 책망]
⭕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 본절은 고린도교인들의 오만 불손한 행동들에 대한 야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실제적인 그들의 삶을 묘사한 내용일 수도 있다. 7절에서의 질문들은 '너희가 정말 그러하냐?'는 반어적인 표현임에 틀림없으나 본절을 역설적인 표현으로 취급하기에는 다소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그들 삶은 모든 면에 있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풍요는 감사와 찬양으로 돌려지지 아니하고 교만의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특별히 주목해야 될 것은 '배부르며'(*, 케코레스메노이)의 완료분사와 '부요하며'(*, 에플루테사테)와 '왕 노릇하였다'(*, 에바실류사테) 등의 부정 과거 동사가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Barrett). 이러한 특징은 '이미' 성취되었음을 시사하는 헬라어 본문의 부사 '에데'(*)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Lightfoot). 그들은 완성될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면서긴장을 가지고 죄악의 요소들과 싸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풍요(豊饒)와 배부름 속에서 즉 영적 교만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에 빠졌고 현재도 계속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벌써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함께 우리도 한번 왕 노릇을 해 볼 것이 아닙니까?',공동번역). 그리고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다'는 구절은 무슨뜻인가?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지니게 된 영적 지식이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인데 이제는 그러한 사도들이 없이도 그들이 모든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지적이다(Harris).
⭕ 우리가 너희와 함께...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을 제외하고 허황된 종말론적 사고 속에서 왕노릇하려 할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시각 속에서 함께 왕 노릇하기를 간구한다. 혹자는 하반절에 쓰인 '왕 노릇하기를'을 전반절의 부정 과거 동사 '에바실류사테'와 서로 구분하여 전반절의 왕노릇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하반절은 장차 올세상에서 왕 노릇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하지만 구태여 구별지을 필요는 없는 것같다(Lenski).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종말론적 시각을 수정하고 장차 올 세상에서왕 노릇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만 속에서 만들어 놓은 스스로의 왕 노릇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종말은 아직 완성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부요와 배부름은 자신의 곤고와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교만 속에서 만들어진 거짓 왕 노릇이 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계 3:17).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고후 5:7) 어떤 불의한 환경 속에서도 자만하지 않는 겸손을 찾는 일뿐이다.
성 경: [고전4:9]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교만함에 대한 책망]
⭕ 하나님이...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방종과 안일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이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회상한다. '미말'(*, 에스카투스)에 두었다는 말은 다스리는 자와 거리가 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비천한 자들의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그리고 '구경거리'를 뜻하는 '데아트'(*)은 '극장'과 같이 구경거리가 있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서(행19:29,31) 당시 원형 경기장(Colosseum)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어간 고난의 삶을 암시한다(행 8:1). 그들은 죽기로 작정되어 십자가 위에서 구속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시대의 고난앞에서 주의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순교의 삶을 살았다. 바울은 자신을 그 순교 대열에 내어 놓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에게 항상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허세를 경고하고 있다.
성 경: [고전4:10]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교만함에 대한 책망]
⭕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 이런 식의 반어적인 대구는 본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미련함', '약함','비천함'을 나열함으로써 앞절에서 말한 구경거리가 구체적으로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연고로' 바보가 되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세상 지혜와 경험을 소유함으로 마치 자기들만 지혜로운 자들인 것처럼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연고로'(*, 디아 크리스톤)라는 말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이다.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토)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라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세상 지혜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자들이 되었으며(1:17,21;3:18)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같이 매맞으며 핍박을 당하는 자(11,12절)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지혜롭고 강하며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굉장한 역설(paradox)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면서도(3:1,2) 서로를 판단하며 사도들 없이 왕 노릇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을 신랄하게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해지고, 약하고, 비천해진 것은 인간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고후 12:9) 또한 영광의 기준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불의한 영광과 세속적 지혜를 비교함에 있어서 자신을 과감하게 낮출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는 인간의 지혜를 고발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성 경: [고전4:11]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교만함에 대한 책망]
⭕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定處)가 없고 - 위에 나타난 사도들의 목마름과 헐벗음, 매맞음은 고린도 교인들의 부요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쪽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배부름과 부요속에서 왕노릇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쪽은 복음을 인하여 고난과 굶주림에서 허덕이고 있다면 참으로 모순된 현상(결과)이 아닐 수 없다.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으로 가르친 사도들의 형편이 이러하다면 그들의 부요와 배부름이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의 현상에서 실제적으로 겪은 고난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서술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강조하려 한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것과는 달리 매맞는 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한 고난으로서 이러한 용어는 노예나 범죄자들에게 행하는 가혹한 행위를 뜻할 때 사용된 것이다(행 14:19). 그들은 신체적 학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난도 동시에 받았다. 유대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다가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때 그가 가졌던 정신적 외로움은 컸을 것이며 특별히 '바로 이시간까지'라는 표현 속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사도들의 고난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까지 외면을 당하므로 그의 고통이 더욱 심했음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자기 도취와 어리석은 영적 교만을 책망하고 있다(고후11:26).
성 경: [고전4:12]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교만함에 대한 책망]
⭕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 '수고하여'(*, 코피오멘)라는 말은 바울이 설교하거나 교회를 관리하는 일들을 시사할 때 자주 사용되었던 단어이며(15:10;16:16;갈 4:11;골 1:29;살전 5:12) '일을 하며'를 뜻하는 분사 '에르가조메노이'(*)는 육체적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들은 서로 중복되어 있으므로 노동을 강조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본절에서는 교회를 돌보는 일과 육체적 노동을 각기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교회를 돌보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으며 자신의 생계를 위한 육체적 노동에도 열심을 다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 의하여 개종한 사람들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직업을 가짐으로써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행 18:3;살후 3:9). 즉 성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쓸 것을 벌어 가면서 전도를 하였다(살전 2:9)는 뜻으로 손수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며 자신의 생활비와 전도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充當)했음을 가리킨다.
성 경: [고전4:13]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교만함에 대한 책망]
⭕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 본문은 앞에서 지금까지 서술해온 고난의 역사를 결론적으로 정리한다. 그들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사람이 됨으로써 십자가의 충실한 종이 될수 있었다. 혹자들은 '페리카다르마타'(*, '더러운 것')라는 단어 속에서 희생의 개념을 찾으려 한다(L. Morris, C.K.Barrett).다시 말해서 '페리카다르마타'는 청소를 깨끗이 한 후에 버리게 되는 오물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오물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을 깨끗게 하는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단어는 종교적 정화를 나타내는 속죄 양의 개념을 선명하게 나타내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 했다는 의미는 충분히 전달한다. 그리고 '만물의 찌끼'에서 '찌끼'(*, 페리프세마)란 말은 물로 닦아내고 문지르면 없어지는 옷이나, 물건, 사람몸의 때(dirt)를 가리킨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사도들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모욕하며 배척했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나타내 준다. 그들은 이 지상의 모든 것들로 부터 소외된 찌꺼기와 폐물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소명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골 1:24).
성 경: [고전4:14]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자비로운 권면]
⭕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 상반부에 나타난 반어적인 풍자와 비유는 사라지고 부드럽고 친근감(親近感) 있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바울의 엄격하고 딱딱한 어조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극한 분노와 책망 속에서도 사랑으로 권면하고자 하는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한편 '부끄럽게 하려고'(*, 엔트레폰)란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었는데(6:5;15:34) 그곳에서는 오히려 부끄럽게 하려고 경고의 말들을 기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절의 문맥은 그것과 다른 의도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격한 분노 속에서도 아버지의 따뜻함과 같은 위로를 나타내려 하였음을 바로 이어지는 후반절에서 명백히 밝히기 때문이다.
⭕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녀에 대한 사랑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랑하는'이라는 말과 '권하려 하는'이라는 말이 결코 그들의 죄악마저도 덮어두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니다. '권한다'는 것은 '권면한다'는 것과 같은 보다 부드러운 해석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아버지의 훈계와 같은(엡 6:4) 보다 준엄하고 권위적인 훈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사랑'과 '훈계'를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여 사용한 부자(父子) 개념은 다음 절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성 경: [고전4:15]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자비로운 권면]
⭕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는 엄격하게 말해서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지위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아들로서의 예의 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보는 노예들이다(slave-guide). 갈라디아서에서는 몽학 선생으로 번역되었는데(갈 3:24) 이들은 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는 수행원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다. 보편적으로 '파이다고구스'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는데 (1)하나는 '가르친다'는 지식적 개념이며 (2) 또 하나는 '지도한다'는 지도권의 개념이다. 로버트슨(A.T.Robrt-son)은 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가정 교사라는 긍정적 개념으로 이해하며, 바레트(Barrett)는 후자의 개념을 강조하여 지도권을 행사하는 하나의 집단이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이해한다. 본절에서는 가르치는 것과 지도권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해석상에 무리는 따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의 의도는 단지 '일만'(*, 뮈리우스)이라는 풍자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의 신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J. Calvin).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하게 된 많은 이방인들에게 영적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생계비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12절) 그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향한 지난날의 해산의 고통을 상기시키면서(10-13절;갈 4:19) 돌아올 것을 강청한다. 바울은 모든 복음의 지도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만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1) 본능적인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다. 즉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및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또한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2)다른 복음 지도자들보다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보다 친숙한 관계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낳았음에고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복음을 통하여'라는 강조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비'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계속해서 그들을 젖과 밥으로(3:2) 양육하는 영적 아버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권면하며 훈계하고 의로 양육하려 한 자들보다는 지도자라는 직책(職責)만을 얻기에 급급한 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1-11), 그 교인들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참된 영적 아비였다(1:3;3:2).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1:11, 12) 심한 책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고전4:16]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자비로운 권면]
⭕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바울은 자주 이와 갈은 성격의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갈 4:12;빌 3:17;살전 1:6;2:14;살후 3:7,9).이것은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일 수도 있으나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 주변에 붙어 다니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절의 의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L. Morris). 바울이 본받으라고 주장한 본받음의 내용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C.K. Barrett). 그러나 설령 바울이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않는 것은 복음을 드러내고자 일평생 고난속에서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11:1). 따라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 되라'는 바울의 이 선언은 단순한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 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1)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과 (2)그의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3)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안에서 화합(和合)하는 것, (4)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고전4:17]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자비로운 권면]
⭕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실라와 함께 제2차전도 여행을 하던 중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할때이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그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충실한 일꾼이었으며 바울의 사역 후반기에는 마가 이상으로 바울의 사역에 참여하였던 동역자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고 디모데를 파송한다. 바울이 지금 디모데와 동행하고 있지 않음에도(디모데는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에서 하역 중)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속에서 디모데를 파송하는 것은 그만큼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신임이 큰 것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본절의 파송은16:10, 11의 기록과 비교해 볼때 약간의 난점이 제기된다. 본절의 '보내었노니'(*, 에펨프사)는 부정 과거 시제로서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으나 16:10,11은 미래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레트(Barrett)는 서신상에 쓰여진 부정 과거는 때로 현재 시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는 현재 파송되지만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 보다는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디모데가 다른 목적지를 경유하여 고린도에 도착하도록 명령된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렌스키(Lenski)는 편지는 배편으로 보내지고 디모데는 육로를 따라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편지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파송하는 것은 그 만큼 (1)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반영하며(2)그의 표현대로 '신실한 아들' 디모데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확신했다는 것을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디모데는 이편지를 고린도에 보낼 즈음에 마게도냐 지방을 통해 고린도로 향하고 있는 도중이었음을 알 수있다(행 19:22).
⭕ 각 교회에서 기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문맥에서 볼때 각처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역적인 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를 특수한 임무로 파송(派送)함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특수한 처방법을 명령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했던 지난 날의 가르침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잊어버린 기억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누렸던 복음의 능력들을 상기시키려고 한다(1:18). 왜냐하면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는 것 중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딤후 3:16, 17).
성 경: [고전4:18]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자비로운 권면]
⭕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특징이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시기인 A.D. 51년 경까지 고린도에 머물렀다고 추정해 볼 때 제 3차 여행 중에 서신을 쓰고 있는 이 시점은(A.D. 53-58) 결코 오랜 시간이 지난 때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불과 몇년 사이에 이토록 교만한 자들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들 중에 일부는 교인들의 방종을 부추기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바울이 차지했던 영적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바울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하며 바울이 이뤄놓은귀한 설교 활동의 열매를 훔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 하며(9:17) '그의 몸은 약하고 그의 말은 시원치 않다'(고후10:10)고 조소(嘲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린도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성 경: [고전4:19]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자비로운 권면]
⭕ 주께서 허락하시면...속히 나아가서 - '주께서 허락하시면'(*, 에안 호 퀴리오스 델레세)이란 말은 조건을 전제로 한 말로서 인간적인 인정과 감정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뜻에 자신의 전도 계획을 맡기는 참된 주의 종의 태도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계획하고 애쓰는 바울 일지라도 그의 계획과 앞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로서의 바울의 모범을 다시 발견한다. 그런데 16:8에서 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러 있겠다고 말하나 본절에서는 '속히 가기를 원한다'고 하여 약간의 모순이 발생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16:8과 본절을 모순된 것으로 생각하여 이들이 서로 다른 서신서 들에 의하여 재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J. Weiss, J. Hering). 그러나 우리는 바울 당시의 여행 문화가 오늘날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역이나 터미날에 나가면 당장 운송 수단을 만날수 있는 오늘날과는 달리 여행을 위하여 오랜 기간 준비해야 하며 때로는 항로를 이용하기 위하여 몇달 몇일씩 항구에 대기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필기 도구나 타자지가 없는 환경 속에서 이 많은 분량의 편지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4장과 16장을 집필하는 사이에 대두될 수 있는 시간의 경과와 환경의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C.K.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가기를 소원하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그들이 더이상 실수하지 않기를 경고하고 있으며 16장에서는 구체적인 시간, 곧 오순절 이후라는 계획(計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났듯이 바울의 여행 계획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16:8에서 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도 에베소에서 전도 활동을 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행 14:27;고후 2:12;골 4:3). 그러므로 바울의 이 같은 표현은 자신의 에베소에서의 복음 전파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특별히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기회가 자기에게 많이 주어졌기 때문에 에베소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너희에게 가겠다는 간절한 심정을 지니고 있다.
성 경: [고전4:20]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자비로운 권면]
⭕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이 있음이라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교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서 공관복음서에서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바울서신 가운데서는 본서에서 제일 많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그리스도의성육신과 재림으로 성취될 메시야 왕국을 의미한다(막 1:15). 즉 대체적으로 다음과같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1)이 세상 끝날에 도래하게 될(마19:28; 25:31) 하나님의 신천 신지(계 21장)이다. (2)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성도들간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눅 17:21),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현재 영적으로 지배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두번째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 본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도입하여 저들을 책망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1:5,6과 본장8절이 시사한 대로 모든 구변과 지식에 풍족한 수준에 있었으나 생활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거리가 먼 시기(猜忌)와 심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 삶(고후 5:17)과 그 능력(요 3:3-8)을 암시한 것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삶의 공동체 곧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말'(*, 로고스)에있지 아니하고 에서 '말'은 '능력'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말에 상응한 내용이 따르지 않는 단순히 '헛된말'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한편 '능력'은 가시적인 것으로서 예수께서 그의 왕국을 선포할 때에 나타났던 기적들(눅 11:20)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본절에서는 인간의 공허한 웅변과 대조를 이루는 능력,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변화된 품성, 새 사람으로서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의와 거룩함과 화평을 이루는 실제적인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보다 타당할 것 같다(L. Morris, J. Calvin). 따라서 바울은 인격과 삶의 변화, 즉 행동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헛된 말과 지식 즉 영적 교만 속의 열매없는 신앙 생활을 고발하고 있다.
성 경: [고전4:21]
주제1: [그리스도의 사도가 주는 교훈]
주제2: [자비로운 권면]
⭕ 매...사랑...온유한 마음 -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바울은 14절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 훈계하는 것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 바 있다. 본절에서도 매와 사랑을 대치시키지 않는다. 만약 바울이 매를 가지고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아픈 채찍으로 훈계하든지 사랑과 온유한 마음로 격려하든지 간에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사설(邪說)과 교만으로부터 해방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바울이 매를 택하느냐, 사랑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한편 '매'를 가리키는 '라브도스'(*)는 공관복음서에서 전도자들이 지니는 지팡이를 의미하기도 하였으며(마 10:10;막 6:8) 때로는 지배자의 상징으로서 홀을 의미하기도 하였다(히11:21). 그 외에 '목자의 지팡이' 또는 '스승의 매'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하는(14절)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Lenski).
성 경: [고전5:1]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근친 상간의 죄]
⭕ 너희 중에...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 '음행'(* '포르네이아)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다른 사람의 육욕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를 뜻하지만 보편적인 의미로는 불법적인 성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심지어'(*, 홀로스)가 본문 초두에 나와 있는데 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미 벌어졌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본서에서 두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1)그들 가운데 음행이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2)이 추악한 음행을 그들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부도덕한 성행위가 보편화되지 않고 일부 사람들에게만 행해지는 제한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범죄가 교회로 부터 정죄(定罪)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 속에 음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바울에게까지 소식이 들릴 만큼 그 행위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한편 '들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쿠에타이'(*)는 '아쿠오'(*, 듣다)의 현재수동태로서 '...라는 소문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들었다는것인지, 아니면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글로에의 집 식구들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11, Farrar). 뿐만 아니라 이것은 널리 퍼져 있는 사실이기에 여러 경로(소문)를 통해서 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Lenski).
⭕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 - 유대인의 율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자는 돌로쳐 죽이라고 명시되어 있다(레 18:8;신 22:30). 이러한 율법의 내용을 알고 있는 바울이 구태여 여기서 이방인과 비교한 것은 더 이상 재고의 가치도 필요없는 아주 경멸스런 행위로 취급하기 위함이다. 당시 고린도 지방은 성적 문란과 방종으로 소문난 곳이었으나 바울은 그 이방인의 문란보다 더 큰 죄악이라고 규정함로서 자신의 분노를 반영(反映)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것은 이방인들은 이러한 범죄를 전혀 저지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본절은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죄로 취급하는 추악한 행위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Calvin).
⭕ 그 아비의 이내를 취하였다 - 바울은 이 사건을 '간통'이나 '근친 상간'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고 하여 음행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비의 아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그 음행이 최소한 '그의 어머니'(친모)와의 관계 속에서 빚어진 음행은 아닌것 같다(L. Morris). 사실 본문에는 그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 대상이 '아비의 아내'였다는 점과 '아내'로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카'(*)란 뜻으로 '계모'(*, 메트뤼이아)라는 말과 거의 뜻을 같이 하기 때문에 '아내'는 아버지의 첩이거나 의붓 어머니일 수 있다(Farrar, Calvin).한편 '취하였다'라는 헬라어 본문 '에케인'(*)은 현재 부정사로 이 음행 사건이 단회적이지 않고 지금도 지속적(持續的)인 반복 행위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여기서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말은 계모와의 관계에서 성적 부정이 계속 진행되고있음을 의미한다(Harris).
성 경: [고전5:2]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근친 상간의 죄]
⭕ 그리하고도...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 그들은 도대체 어떤 지식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방인들도 정죄하는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원통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만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이방인의 생활 습관을 미처 다 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괴이한 악행 가운데서도 여전히 회개할줄 몰랐고 버젓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F. W. Farrar). 그들은 음행 사건으로 인하여 적어도 수치스러워하며, 그들의 공동체 속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하여 자신들을 되돌아 보아 최소한 통한히 여기는 모습으로 주의 용서와 은혜를 구했어야 했다. 여기서 '통한히 여기지'의 헬라어 '에펜데사테'(*)는 '죽은 자로 인하여 애통한다'는 의미로 죄에 대한 선 자들의 반응이 어떻게야 되는지를 나타낸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한 자유와 방종으로(6:12;10:23)인하여 죄악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공동체적인 책임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적인 책임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영의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육체적 일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또 다른 교만과 거짓으로 더 큰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이처럼 형제의 죄악을 보고 애통할 수 있는 사랑을 잊어버린 교회가 분열과 분쟁을 격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추악한 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음행한 자에 대해 무관심 내지 방조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 가운데 있던 고린도 교인들을 크게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1)그리스도인들의 연대적(連帶的) 책임성과 지체 의식 (2)무관심과 교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범죄라는 점 (3)어떠한 죄악 가운데서도 회개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수 있다(5절).
성 경: [고전5:3]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근친 상간의 죄]
⭕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 '떠나 있다'(*, 아폰)라는표현은 그 의미가 매우 선명하다. 그는 지금 고린도 지방을 떠나 제3차 전도 여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있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론'(*)은 '곁에 있다', '가까이 있다' 또는 '왔다'라는 뜻을 가진 '파레이미'(*)의 현재 분사형이다. '파레이미'는 공관 복음서에서 '왔다'(눅 11:6)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며, 행 17:6에서는 '이르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본절에서는 몸이 떨어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은 그들과 '함께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골 2:5). 한편 '영'이라는 표현은(*, 토 프뉴마티) 바울에게 있어서 주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롬 8:9;고후 3:17;갈 4:6) 여기서는 바울 자신의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마음'(*, 카르디아)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Farrar). 즉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와 영으로, 곧 마음으로 함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아울러 본절의 심각성을 생각할때 바울이 영으로 그들과 함께 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심정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 거기 있는 것 같이...이미 판단하였노라 - 음행한 자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다. 그는 '에고'(*, '내가')의 강조 용법과 함께 '에데'(*, '이미')라는 부사와 '판단하다', '정죄하다', '심판하다'(*, 크리노)의 완료직설법 능동태인 '케크리카'(*, '판단하였다')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향한 심판이 이미 선고되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헬라어 본몬에서 '함께 있어서'(*, 파론)라는 말에 이어 다시 한번 반복된 '호스 파론'(*, '거기있는 것 같이')이라는 표현은 판결의 순간에 그들과 함께 실제로 있었던 것과 같은 확실성과 자신이 함께 한 심판의 권위가 다시 번복(飜覆)될 수 없다는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고전5:4]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근친 상간의 죄]
⭕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 바울은 자신의 판단이 독단적이거나 판협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그들이 스스로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판단에 의하여 음행한 자들을 징계할 것을 촉구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 속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야 하며 그곳에서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모색 해야한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하였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과 '예수의 능력'은 (1)일차적으로 분열된그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2)이차적으로는 음행하는 자들을 추방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한편 '너희가 함께 모여서'의 헬라어 '쉬나크덴톤'(*)은 부정 과거 분사로서 그 일들의 결정을 위한 단회적 모임을 시사하며, 동사 '쉬나고'(*, '모이다')는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로 이 회집이 그리스도인들만의 회집임을 시사한다.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예수의 이름과 능력(能力)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판단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설명하고 음행한자에 대한 징계가 정당하고 합법적임을 증거하며 나아가 교회의 징계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Harris). 따라서 예수 안에서 자신의 영이 그들과 하나되어 이미 그가 판단한 것과 같은 판단을 내려줄 것을 바울은 기대하였다.
성 경: [고전5:5]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근친 상간의 죄]
⭕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 본절은 3절의 '판단하였노라'(*, 케크리카)와 연결된 것으로서 연결의 엄숙한 조치를 가리킨다(Deissmann). 다이스만은 '내어주다' (*, 파라두나이)라는 단어를 이교도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여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가 저주의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어주다'라는 말을 꼭 이방인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바울은 이 단어를 범죄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으로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Lenski).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책임있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러한 자들을 출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13절). 이러한 표현은 딤전 1:20에도 나타나는데 그들의 출교는 일차적으로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린도 교회의 순결한 영혼들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우리는 본절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보호하심 아래 머물러 있는 반면 교회 밖은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에서 떠난 사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Calvin). 따라서 출교는 사단에게 내어주는 멸망의 극단적인 조치로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큰 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토록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들 가운데 있는 음행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이었는가 하는 것을 반영해 준다.
⭕ 육신은 멸하고 영은...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이와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다 구원받든가 둘다 멸망하든가 해야한다(Lenski). 특히 바울은 다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절의 육신의 멸망과영의 구원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말해서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한편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따라서 본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본절은 특히 (1)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과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성 경: [고전5:6]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근친 상간의 죄]
⭕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 '자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케마'(*)는 자랑하는 표면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내용을 의미한다. 헬라어로 '자랑하는 행위'는 '카우케시스'(*)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그들 교회가 분열과 음행으로 가득찬 교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가졌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그 사랑과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은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은사를 죄악을 묵인하는 곳에 사용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곡해하여 죄악을 용납하고 그들과 더불어 죄악에 빠지는 것에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죄악의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L. Morris).
⭕ 적은 누룩이...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누룩은 (1) 그리스도의 복음(마13:33;눅 13:21).(2) 죄(출 12:15;갈 5:9)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죄악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문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누룩, 즉 죄악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존재임과 죄악의 파급적인 영향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살전 5:22).즉 바울은 그들의 자만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누룩'이라는 하나의 실례를 들어 증명한다. 누룩은 아주 작은 미량의 효소로 그보다 몇 배나 더큰 반죽 덩어리를 발효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은 더욱 왕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회 내의 범법자는 처음에는 그 이웃을 감염시키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갈 5:9).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은사에 비하여 악의 요소인 누룩이 작아 보였기에 자만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닥친 위협은 결코 작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성(純潔性)을 유지하는 일이다(Harris).
성 경: [고전5:7]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근친 상간의 죄]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의 타락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Calvin). 특별히 바울은 '누룩 없는 자이어야 한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누룩 없는 자'(*, 아주모이 온테스)라고 선언하고있다. 그의 표현은 그들이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강조한다(고후5:17).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신분임을 상기시킨다(4:17). 만약 그들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었다면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누룩없는 상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상태로서 그들이 다시 묵은 누룩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분임을 강조한다.
⭕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 하반절은 헬라어 원문에서 '가르'(*)로 시작하는데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가르'는 왜 묵은 누룩을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와 그들이 어떻게 누룩 없는 자가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암시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희생양이 되셔서 그들의 백성의 죄를 다 도말하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이끌어 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셨다. 바울은 누룩으로 시작된 비유를 유월절의 무교병과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또 다른 비유의 의미에 연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성취된 무교병에 참여한 자들은 더 이상 누룩있는 떡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Lenski).
성 경: [고전5:8]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근친 상간의 죄]
⭕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칼빈(Calvin)은 이 구절을 '영적(靈的)인 유월절을 지키자' 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로운 유월절의 개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있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다시 범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새로운 명절에 참여한 자들은 옛 습관의 죄악된 누룩을 가지고 새 덩어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새 명절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룩이 아니라 순전함과 진실함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적인 생활이다. 한편 '순전함'(*, 에일리크리네이아스)은 동기의 순수함을 나타내고 '진실함'(*, 알레데이아스)은 행동의 순수함을 나타낸다. 새로운 명절은 더이상 종교적 의식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누룩없는 새 명절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삶으로 드려져야 할 성도의 순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롬12:1). 그러므로 바울은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버려야 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서 '묵은 누룩'과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죄의 습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진 성도들은 묵은 누룩이 뜻하는 음란과 정욕, 술취함과 방탕,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엡 4:22;벧전 4:3)등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성 경: [고전5:9]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부도덕한 신자들로부터의 분리]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 헬라어 '에그랖사'(*, '내가 쓰다')는 부정과거 능동태로서 (1)이미 그가 썼던 과거의 한 편지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Meyer, Godet). (2)서신서에 등장하는 부정 과거의 특징적인 성격을 생각할 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한 편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와 같은 견해에 반대한다(Lenski, Barrett, Morris). 만약 이 편지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직 받지 않은 편지를 두고 그들이 어떻게 오해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편지는 앞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 편지로서 지금 우리에게는 발견되지 않은 것들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학자들간에 널리 알려진 정설이다(Calvin, Meyer, Godet, Harris).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쓴 서신 중에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성경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했던 영감서인 신.구약 66권으로 된 완전한 성경을 갖고 있다. 그외 성경 기자들의 다른 저작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자연스레 소실(消失)되거나 성경에 수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 의 견해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Robertson).
성 경: [고전5:10]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부도덕한 신자들로부터의 분리]
⭕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 많은 사람들은 본절이 세상과의 분리나 은둔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Barrett, Lenski, L. Morris). 그러나 본절이 세상과의 타협과 동화를 뜻하는 말이 아님도 기억해야만 한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서신들의 전체적인 주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세상의 음행한 것들과 타협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타락한 도시 고린도로부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되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바울의 전체적인 의도를 망각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바울의 훈계가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1) 어떤 자들은 오히려 세상과 하나되어 그리스도를 포기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으며 (2) 또 다른 자들은 아예 세상으로부터 떠나 은둔과 도피적(逃避的)인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 중에 일부는 이세상과의 구별을 단순히 고린도라는 한 도시를 떠나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자들은 세상과의 분리를 은둔이나 수도라는 의미보다 더 가혹한 죽음이라는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오해들이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자체와 그 세상 가운데 있는 추악한 것들을 바로 구별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것임을 발견한다(J.Calvin). 이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분리는 음행하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타락한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악한 본을 보이는 자들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 관계의 포기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온갖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의 악을 미워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Chrysostom). 한편 상반절에 나열된 세상의 추악한 모습은 음행이나 탐심이나 토색이나 우상숭배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행악(行惡)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악한 자, 곧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엡 2:2).
성 경: [고전5:11]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부도덕한 신자들로부터의 분리]
⭕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 바울은 앞절에서 나열한 악의 종류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있는데 하나는 '로이도로스'(*, '후욕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욕설이나 비방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이며(마 5:22) 또하나는 '술 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형제라는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가지고는 있으나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악한 자의 손에 있는 자들임을 강조한다. '사귀지 말라'(*, 토토이우토)는 9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이 그들 가운데 어울리지 말라는 뜻을다시 반복한 것이며(엡 5:11) '메데 쉬네스디에인'(*, '함께 먹지도 말라')과 함께 '철저하게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는 표현이다. 한편 본절에서 '쉬네스디에인'은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물론 그들은 당연히 성만찬에서 제외될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쉬네스디에인'은 보다 일상적인 생활속의 자유스런 식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형제라고 일컫는 자 중에 공공연히 범죄를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할 뿐 아니라 그들을 탈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범죄자에게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5절) 교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5:12]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부도덕한 신자들로부터의 분리]
⭕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 바울은 앞절에서 제시한 자신의 권리가 최선의 방법임을 다시 한번 호소 하면서 자신의 판단 범위의 한계와 고린도 교인들의 의무를 보다 명백하게 기록한다. 그는 교회밖에 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도 교회 밖에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이는 심판의 특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며(13절) 또한 저들이 이웃을 심판하는 일 때문에 그들 역시 범죄하기 쉽기 때문이다(롬 2:1;14:4,10). 그는 성도들의 신앙 규범과 행동 원리를 교회 공동체 내에 한정(限定)시키면서 그들의 동료들 가운데서 발생한 문제들을 스스로 판단함으로써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한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교회 공동체가 범죄자를 판단하는 행위를 그리스도인 개인이 성도의 행위를 판단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Lenski).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를 훈계하고 권징하는 일을 교회적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판단의 권위와 진실성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위에 순종할 때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Barrett).
성 경: [고전5:13]
주제1: [고린도 교회 내의 성적 부도덕]
주제2: [부도덕한 신자들로부터의 분리]
⭕ 이 악한 사람은 너희중에서 내어 쫓으라 - '악한 자'를 뜻하는 헬라어 '호 포네로스'(*)는 한 행악자 개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보다 총체적인 악의 개념으로 앞에서 열거한 모든 행악자들을 의미한다(Calvin). 바울은 이 모든 자들이 교회 공동체로부터 쫓겨나야할 것을 다시 경고한다. 교회는 그들 속에 있는 적은 누룩을 제거하지 못할 때에 결국 그 순결성을 잃게 되어 악의 무리들이 권세를 잡는 타락한 모습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행하는 권징의 의미를 본절에 기록된대로 모든 시대의 교회에 적용한다는 것이 용이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의 교회마다 다른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Mo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대의 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 내의 악의 존재가 묵인(默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형태로든지 악에 대한 권징의 정당한 시행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내어 쫓으라'(*, 엑사라테)는 동사의 주체가 구약의 여러 곳에서는(신 19:19;22:21,24;24:7) 단수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복수로 기록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있는 그들의 판단이 교회 전체에 의하여 행사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성 경: [고전6:1]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너의 중에...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바울의 논지는 형제들 가운데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는 형제들 가운데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 랍비들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는 이방 신에게 소송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Hodge). 그러나고린도 교회는 복음의 역사속에서 새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아직도 율법 아래있는 유대인들보다도 못한 수준에 머물러 었었다. 당시 이방 종교들이나 사회 단체들조차도 스스로 분쟁을 해결하는 관행(慣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가 세상 법정에 송사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Morris,Barrett). 또한 그 송사는 부끄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 법정의 판결에 따라 형제를 멸시(蔑視)하고 괴롭히는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Calvin). 위에서 '불의한 자들'(*, 톤 아디콘)은 그들의 재판 자체가완전히 거짓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상의 재판관'들을 일괄적으로 지칭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인 의와 세상적인 의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볼수 있는데 세상적인 의는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그 기반을 두는 반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롬 1:17). 따라서 본절은 (1) 세상 법에 대한 하나님의 법의 우월성과 (2) 성도간의 문제는 법 이전에 신앙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것임을 교훈해 준다. 한편 칼빈(Calvin)은 본 구절을 성도는 세상 법정에 절대로 설 수 없다는 견해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성도들 역시 불가피한 상황에 따라서는 세상 법정에 송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체한 이후에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사용하는 차선의 방법이다. 또한 성도는 세상 법정으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마땅히 법정의 순서상 절차를 따라 출두하여 해명(解明)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도역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과 동시에 일반 국가 시민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법의 정당한 보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Lenski).
성 경: [고전6:2]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판단할'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크리누신'(*)은 미래 능동태로서 세상 끝날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마지막 심판에 성도들이 참여한다는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마19:28;눅22:30). 이러한 사상은 구약성경에도 등장하는데 단 7:22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성도들의 원한을 들어주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다고 미래 사건을 예언한다. 바울은 미래의 심판 날에 성도가 참여할 재판의 권위와 자랑스러움을 강조함으로써 불의한 이방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고린도 교인의 행위를 책망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미래에 누리게 될 세상에 대한 왕권 행사(벧전 2:9)를 현실에 적용함으로써 그 사소한 일들조차도 심판할 능력이 없겠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판단 한다'(*, 크리노)라는 말은 히브리적 사고에서 '통치한다'라는 의미로서 (1) 현재적으로는 성도들이 빛된 생활로 세상을 교훈하고 복음을 통해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게 되는 것이며(요 3:18-20) (2)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주와 함께 세상을 심판하고 왕 노릇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계 20:4, Morris).
성 경: [고전6:3]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하나의 논지를 향한 그의 수사학적(修辭學的) 질문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는 앞절에서 사용한 수사적 표현보다 더 강조된 부정 의문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논지가 필연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우리를 보좌하는 천사들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신분임을 기억해야 한다(사 24:21;벧후 2:4; 유 1:6). 여기서 '천사'(*, 앙겔루스)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 1:6) 곧 범죄한 천사들(벧후 2:4)을 가리킨다(히 2:14). 그리고 '하물며'(*, 메티게)는 장차 세상과 천사를 판단하게 될 위치에 있는 성도들이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세상 법정에 송사하며 그 권위에 굴복하겠느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세상 일'로 번역된 헬라어 '비오티카'(*)는 법정 용어가 아니라 '일반 생활 습관에서 발생하는 평범한 일' 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평소에 사소한 마찰 정도도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에 소송한 것으로 추측된다(Farrar).
성 경: [고전6:4]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 본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1) '경히 여김을 받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며 (2) '세우느냐'로 번역된 '카디제테'(*)를 직설법으로 쓰인 수사 의문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풍자적 어조를 띤 명령문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카디제테'는 '카디조'(*, '임명하다')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이나 문맥상 그 의미는 의문문과 관계된 직설법 동사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명령형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본절을 다음과 같은 풍자적 의미로 해석한다. 즉 '만일 너희가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할 위치에 있는데도 이러한 세상 사건으로 논쟁해야 한다면 차라리 교회에서 교인들 중에 가장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워 이런 작은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 ! '는 의미로 이해한다(KJV, NIV, Godet, Calvin, Mare, Bengel). 이처럼 명령법으로 받을 경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는 교인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로서 '무시 당하는 자' 또는 '어리석은 자'로 해석한다. 그래야만 풍자적 의미가 강하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카디제테'를 직설법 동사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은 "너희에게 세상 사건으로 인한 논쟁이 있다면 왜 너희는 그 사건을 교회로부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 맡기느냐?"라는 의미로 해석한다(RSV, C.K. Barrett). 이 경우 '경히 여김을받는 자'는 성도들의 송사를 주관하는 '세상 법관'들을 시사한다. 세상 법관들이 아무리 높은 지식과 천성적인 미덕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지못한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Barrett). 우리는 여기서 전자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4:8에서 고린도 교회를 풍자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실과 전자의 해석이 일치할 뿐만 아니라 본문의 문맥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때문이다(Mare, Harris). 후자의 해석을 취할 경우 이 문맥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당시의 재판관들을 경멸히 여겼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본절의 의미를 어느 것으로 취하든 간에 이 말을 한 바울의 근본 의미는 손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말을 한 목적은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려한 데 있었으니 명령적인 어조든 의문문적 어조든 이 말은 교인들간의 사적 문제를 법정으로까지 끌고간 것에 대하여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교훈하는바는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정당한 해결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분쟁의 사건이 사소한 생활의 문제이든지 아니면 큰 분쟁이든지 교회 자체 내에서 공동체(共同體)의 능력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성 경: [고전6:5]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 고린도 교회의 소송 문제에 대한 바울의 솔직한 심정이 토로되어 있는 본절의 뜻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교인 중에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우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E.B. Allo).그것은 본 서신의 전반부에서 자기의 지식을 자랑했던 고린도 교인들의 자만심에 비해 현재 그들의 초라한 상태를 지적하려는 것으로서 '정말 너희 중에 그 분쟁을 해결하거나 중재할 만한 지혜자 하나 없느냐'라는 풍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L.Morris). 한편 바울이 4:14에서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으나 본절에서 그 의도를 바꾼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듯한 심한 풍자를 사용해서라도 법관들에게 양도되어 판단받는 일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다. 사도가 그들을 향한 지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깨닫게 하고 반성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이 면박(面駁)은 결국 그들을 명예롭게 할 것이다(J. Calvin).
⭕ 판단할 만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나이'(*)는 부정 과거부정사로서 재판에 대한 판결이나 결정이라는 의미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여 해결한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Morris). 형제와 형제 사이에 발생한 분쟁은 재판의 판결이라는 것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의지와 조정자의 중재에 의하여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 지혜자 한 사람 찾지 못했다.
성 경: [고전6:6]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 바울은 접속사 '카이'(*, '그리고')를 사용하여 논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의 잘못은 (1)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있을 수 없는 분쟁이 발생했다는 것이며 (2) 그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송사하였다는 것이고 (3) 결정적인 잘못은 그 분쟁을 제소한 법정이 불신자의 법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분쟁이라는 잘못된 행위로부터 출발하여 형제를 이방의 법정에까지 고소하고 이교도로 하여금 성도를 판단하게끔 하는 더 큰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떡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그들 가운데 발생한 작은 악은 점진적(漸進的)으로 성장하여 개인과 이웃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멍들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이라도 악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에서 형제와 형제 사이의 분쟁을 서로간에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다시 말해 분쟁 문제를 꼭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이런 일을 충분히 처리할 만한 지혜를 가진 교인을 찾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하는 것이 세상의 소송을 통하여 서로 다투고 판단받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다(Mare).
성 경: [고전6:7]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송사함으로...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 이들의 송사에 대한 판결은 소송을 제기하기 이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속한 두 형제는 세상 법정에 제소하는 그 순간 모두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허물'이라는 헬라어 '헥테마'(*)는 초대 교부들 가운데서 '패배'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는데(Morris) 본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도덕적 패배이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 즉 한몸 의식(지체 의식)의 패배이기 때문이다(롬 12:5;엡 4:4). 그들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랑의 원리를 저버리고 세상의 법정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영적 패배를 선택하였던 것이다(Harris). 한편 '헥테마'를 '패배'가 아닌 '허물'이나 '결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경우 그 의미는 송사한 사건이 이미 그들의 약점이 되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허물이든지 패배이든지 간에 사랑과 용서를 저버린 그들의 행위가(골 3 :13) 그리스도인의 삶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는 의미를 전하는 데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여기에서 바울의 주장은 절정에 달한다. 교인들 사이의 문제를 법적 소송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악한 일이며 나아가서 완연한 허물이라고 지적한 사도는 이제 교인들이 이런 싸움에 휩쓸려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를 주거나 속이기 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어려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Mare). 그들은 분쟁의 승리를 위해 송사하기 이전에 또다른 방법을 선택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다(마 5:39-42). 그희생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손해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신이 불의한 자가 되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양보이다. '불의를 당하는 것'(*, 아디케이스데)과 '속는 것'(*, 아포스테레이스데)에 해당하는 두 헬라어 동사는 모두 현재 중간태로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허용적 의미를 띠는 수동태에 가깝게 해석되어야 한다. '아디케이스데'는 '부당함을 입는', 또는 '불공평한상태나 모욕을 당하는'을 뜻하는 단어로서 공평하고 평등한 해결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불공평을 감수하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포스테레이스데'는 '강도를 당하다', '빼앗기다'를 뜻하는 단어로서 형제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치 강도에게 약탈당하는 것과 같은 불이익(不利益)을 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양보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자신의 지혜와 의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원리를 기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자들에게는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이기적인 추구보다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삶의 원리와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6:8]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 '저는 너희 형제로다'라는 말은 교인들 상호간에 불의를 행하거나 속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로 형제를 해치고 모욕하는 악을 행하였다. 그들은 약탈과 보복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결국 그들이 한 형제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되었다. '불의를 행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케이테'(*)와 '속이다, 빼앗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테레이테'(*)는 모두 능동태 동사로서 단지 그들의 소송이 '방어적 소송' 이상임을 시사한다. 소송을 제기하는 자나 소송으로 말미암아 고발된 자나이들은 모두 서로를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형제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이교도와 같은 삶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바울이 '서로를 형제라고 판단하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은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 속에서 '형제'(*, 아델포스)라는 단어가 양보와 희생으로 하나된 공동체의 일원(一員)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반증한다.
성 경: [고전6:9]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불의한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남색하는 자나 - 관사없이 사용된 '아디코이'(*, '불의한 자')는 '악을 행하는 집단'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특성', 곧 '악의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와 대적 관계에 놓여진 자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교회 공동체와 같은 또 하나의 집단적 공동체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행하는 악의 성질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동지가 된 자들이다. 그들은 악의 동지 의식에 의해 더욱 하나님의 나라와 강한 대조를 이루는 세력이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로부터 철저하게 배척 되었다. 본절에 기록된 다섯 가지의 악의 형태는 모두 불의한 자들에게 속한 것으로서 성적 타락과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수 있다. (1) '음란'(*, 포르네이아)은 모든 형태의 성적 타락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였으며 자세한내용은 5:1 주석을 참고하라. (2) '우상 숭배'는 당시 이방 신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 특히 성적 타락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이방 신전들은 성적 타락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3) '간음'은 특별히 결혼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성적 타락을 지칭한다. (4) '탐색'(*, 말라코스)은 원래 '유약한', '여자같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이 단어의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남자들과 더불어 음행하는 자들 중에서 수동적 위치에 있는 상대자를 뜻하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Barrett). 여기서 특별히 주색(酒色)에 빠진 것을 뜻하는 말로서 동성 연애자들을 지칭하는 '남색하는 자'(*, 아르세노코이테스)와 같은 부류의 사람, 곧 자기의 몸을 동성 연애자에게 내어 맡기는 부끄러운 악을 행하는 자들을 뜻한다. 미혹을 받지 말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플라나스데'(*)는 갈 6:7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러한 표현은 당시의 논쟁 가운데서 자주 사용되었다(15:33;눅 21:8;약 1:16). 이것은 '외부적인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의미보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유혹을 극복하라는 뜻이 더 강하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만한 지혜로 도덕적 수준을 규정하였으며, 하나님은 거룩한 삶의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이러한 것들이 악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성 경: [고전6:10]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도적이나...하나님의 나라를...받지 못하리라 - 본절에 기록된 악들은 앞절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들이다. 앞절의 행악은 주로 자기의 몸을 더럽히는 특성을 가지고있으나 여기서는 주로 이웃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종류의 악들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이들 역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제외되었음을 강조한다.
⭕ (1) 도적(*, 클레프타이) - 전문적인 강도라기 보다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 (2) 탐람하는 자(*, 플레오네크타이) - '자기 욕심에 의하여 이웃의 것을 탐하는 자'를 의미한다.
⭕ (3) 술 취하는 자(*, 메뒤소이) - '술로 인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자들'을 의미한다.
⭕ (4) 후욕하는 자(*, 로이도로이) - '남을 비방하는 자'를 뜻한다.
⭕ (5) 토색하는 자(*, 하르파게스) - 탐람하는 것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완력뿐만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자'(extortioner)를 의미한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에 만연하던 죄상(罪狀)을 지적하여 그들의 수치를 자각시키고 성도 본연의 사랑과 순결의 중요성을 깨우치며 죄악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음을 명백히 선포하고 있다.
성 경: [고전6:11]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신자들간의 소송 문제]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바울은 고리도 교인들의 옛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 본절은 두 가지 의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있더니'(*, 에테)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다. (1) 미완료 과거로서 지난 날을 회상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지난 날에 너희는 이방인과 같은 죄악에 빠져 있었으나'를 뜻한다. (2)미완료의 반복적 의미라면 그 뜻은 '지난 날에 너희가 죄악 가운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러한 죄악 가운데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후자는 '티네스'(*, '너희 중에')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그들 가운데 있는 '몇 사람' 또는 '일부'(개역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음)가 죄악을 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절은 전체 문맥 속에서 의미를 재고해 볼 때 전자의 의미가 강한 것 같다. 바울은 지금 죄악들을 나열하며 지난날 고린도 교인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살 때의 죄악과 예수 안에서 얻게 된 새로운 삶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너희 중에 이러한 죄에 빠져 있던 자들이 있었으나'라는 뜻에 더 가까운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이는 그리스도의 모든 인격과 사역을 포함한다(Morris). 그리스도의 피는 성도들을 정결케 하였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성화(聖火)의 소망을 갖게 하였다. 특별히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영위하는 성화의 삶의 원동력임을 시사한다(롬 8:4, 14, 17).
⭕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이제는 더 이상 죄악 가운데 묻혀 있지 않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헬라어 원문은 접속사 '알라'(*, '그러나')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을 뜻하는 세 동사 앞에 각각 하나씩 기록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 일어난 세 가지 사실을 열거한다. 먼저, '씻음'에 해당하는 동사 '아펠루사스데'(*)는 부정 과거중간태로서 죄로부터 씻음을 받은 것을 뜻한다(행 22:16;계 1:5). 보통 신약성경에서는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를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에밥티스데산'(*,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을 사용하여(행 19: 5) 그 의미를 전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아펠루사스데'가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함께 기록된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때문이다.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행 2:4;롬 6:3). 혹자는 '아펠루사스데' 를 중간태로 기록한 것은 세례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세례는 세례받는 자의 선택과 고백에 의하여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두 동사와 구분하였다고 한다('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은 모두 부정 과거 수동태로 기록 하고 있다, Bachmann).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보다 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을 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Morris, Barrett). 그러므로 '아펠루사스데'는 중간태로 쓰였으나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는 수동적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Lenski). 다음으로, '헤기아스데테'(*, '거룩함')와 '에디카이오데테'(*, '의롭다 하심')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들이 의롭게 된것과 거룩하게 된 것은 이미 과거의 시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적(主導的)인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본 구절에서 주의할 점은 바울이 세 동사를 사용하여 그들의 현재적 신분을 설명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세 단어는 모두 동일한'의'의 개념 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Calvin). 즉, '죄 씻음'과 '거룩'과 '의'는 그들의 죄가 아무리 컸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들이 새로운 의의 삶을 지향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법정적 선언의 개념을 가진다.
성 경: [고전6:12]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바울은 이 구문을 주로 1인칭으로 사용하며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자유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다(7:17;9:19;10:23).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 격언에 대하여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방종을 정당화시키는 방편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이 이러한 격언을 알게 된 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두 가지의 견해를 주장한다. (1) 바울이 이 서신을 쓰기 전에 보냈던 어떤 그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다른 서신에 대한 것은 5:9 주석 참조). 모리스(Morris)는 바울이 고린도에 일차로 방문하였을 때 이와 같은 사상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적하며, 허드(J.C. Hurd)는 이전 편지의 내용 가운데서 특히 유대주의의 율법적 규제와 대조적으로 표현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이러한 격언이 고린도의 영지주의자들 속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과 육체를 경시함으로써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격언을 육체의 방종과 잘못된 결혼생활에 적용하였던 것이다(Barrett, A. Schlatter). 한편 바레트는 바울이 이미 언급한 자유를 영지주의자들이 도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개연성(蓋然性)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이 격언을 어떤 방편으로 알게 되였든지 간에 그들은 격언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잘못된 곳에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1) 그 일이 과연 내게 유익한가? (2) 일에 이끌려 참여함으로써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3) 그일이 교회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가?
⭕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가 곧 무책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율법은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으나 여전히 존재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규범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범죄한 자들을 내버려둘 수 있는 자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새로운 진리를 가지게 된다. 율법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지만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덕을 세워야 하며(8:1) 자유를 통하여 진실과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방종을 다스리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6:13]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 이것 역시 12절의 격언과 같이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먹는 것은 육체의 본능이기 때문에 앞의 구절과 같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 할지라도 몸을 위하여 또는 식욕의 본능을 채우기 위하여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8:8;10:25).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인 들중에는 이 격언을 엉뚱한 곳에 적용시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식물을 먹는 것이 육체적 본능이듯이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도 육체적 본능의 발로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성적인 타락과 방종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Barrett).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태도와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먹는 것과 성적인 욕구는 잠깐 있다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모두 폐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롭게 태어난 몸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행하며 거룩한 생활 가운데서 주를 영화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도는 자신의 몸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도구임을 자각해야 하며, 또한 그 헌신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적 생활조차도 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 경: [고전6:14]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주를 다시 살리셨고...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 바울은 성도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함께 부활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육체를 경시하여 성적인 방종에 빠진 자들을 경고한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부정 과거 시상으로 기록함으로써(*, 에게이렌, '살리셨고')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미 단회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 반면 성도의 부활사건은 미래 시상으로 기록하여(*, 엑세게레이, '살리시리라')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 사상이 교리화되었으며 고린도 교인들도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하여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 동사(*, 에게이로)로 기록한 반면 성도의 부활은 합성 동사(*, 엑세게이로)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부활의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부패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몸과, 흙으로 돌아가서 무덤 속에서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진 인간의 육신(肉身)을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Lenski). 여기서 전치사인 '에크'(*, '...부터', '...밖으로')는 죽음의 무덤으로부터 우리를 부활시켜 구원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암시한다.
성 경: [고전6:15]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몸을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지체'(*, 멜레)라는 말은 손, 발 등과 같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용어로서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연합체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 되었다(12:12;엡 5:23). 본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일부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창기와 더불어 음란한 육체적 방종에 빠져 스스로 그리스도의 지체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경고를 주고 있다. 이는 13절에서 언급한 '주와 몸'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서 지체된 몸의 일부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주를 위하여 사용되고 움직여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이는 강조 어구(*, 메 게노이토)로서 신약성경에서 주로 바울이 사용하였으나 본서에서는 여기에서만 등장한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창기와 더불어 방탕(放蕩)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지체로부터 제거되기를 거부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두 주인을 섬기려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하다. 결코 그리스도와 창기를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6:16]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창기와 합하는 자는...둘이 한 육체가 된다 - 바울은 창 2 :24에 기록된 부부의 성적 결합에 대한 표현을 인용함으로써 창기와 더불어 음란한 방종에 빠진 자들이 그들과 한 몸이 되어 창기와 같은 신분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합한다'(*, 콜로메노스)와 '한 몸'(*, 헨 소마)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성적 행위를 통하여 '하나의 신분', 또는 '같은 범죄', '더 나아가 동일한 멸망'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타락한 육체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더 이상 그리스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죄악의 종이 되어 버렸다.
성 경: [고전6:17]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 주제는 '몸의 연합'에서 '영의 연합'으로 옮겨진다. 즉 창기와 합한 자는 창기와 한몸이지만 주님과 합한 자는 영적으로 주님과 하나가된 자라는 것이다. 이는 성적 타락으로 더럽혀진 죄악의 상태와 성도의 거룩한 신분을 선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성적 부도덕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성도들의 참된 지향점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 바울은 주와 '합한다'는 것도 앞절과 같은 분사 '콜로메노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영'의 연합을 몸의 연합과 같은 선명한 표현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 성령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몸과 영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신비적 연합을 이룸으로써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을 닮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엡 4:13). 그리고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한 영이 된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그리스도에게 흡수된다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영과 성도의 영이 혼합 내지는 융화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양자(兩者)의 영이 어느 하나의 특성을 무시하지 않는 인격적 연합을 이룸을 의미한다(Lenski).
성 경: [고전6:18]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음행을 피하라 - 바울은 몇 가지의 비유적인 표현을 마무리하면서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명령형을 사용한다. '피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퓨게테'(*)는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한순간의 도피나 연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음행의 유혹으로부터 철저하게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음행으로 가득찬 고린도 도시 속에서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한 순간에 거부했던 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으며 미래의 생활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음행을 피하라'는 것은 그 유혹이 있을때마다 강하게 거부할 수 있는 현재적(現在的)인 행동을 요구한다.
⭕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 바울은 여기서 '몸'(*, 소마)이라는 말과 '죄'(*, 하마르테마)라는 단어를 특이하게 사용하고 있다.여기서 '몸'은 단순한 육체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썩어 없어질 육체' 를 의미하는 '사륵스'(*) 대신 '소마'를 사용하고 있다(Lenski). 이는 음행이 단순히 육체에 행하는 자해적인 것 이상으로 인간의 전인격을 손상시키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반적으로 '죄'는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본절에서 바울은 '하마르테마'를 사용하여 죄의 행위 자체보다는 그 죄로 인하여 초래될 결과, 즉 인간의 생명 작용까지도 악화시키고 타락시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Morris).
성 경: [고전6:19]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너희 몸은...성령의...알지 못하느냐 - 바울은 본장의 논쟁에서 여섯번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3:16에서 복수('너희')를 사용하여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과 그 공동체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점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몸'을 단수로 사용함으로써 성도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과 개인의 인격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으로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 적합하지 않은 행위들을 삼가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음행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적합하지 않은 행동은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인격을 포함해서 자신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處所)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Mare).
성 경: [고전6:20]
주제1: [소송 및 성문제에 관한 성도의 자세]
주제2: [성적 부도덕에 대한 경고]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 이는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19절)고 말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타락시키거나 함부로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산 것이 되었다'(*, 에고라스데테)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장에서 어떤 물건을 사기 위해 그에 맞는 '값(*, 티메스)을 지불했다'는 뜻이나 본절에서는 (1)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저희가 산 바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2) 부정 과거로서 그 행위가 과거의 단회적(單回的)인 사건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바울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고귀한 값을 치르고 죄인들에게 자유를 허락 하셨다. 따라서 구속받은 백성은 이제 그리스도의 소유물로서 그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추구하여야 한다. 한편 '티메스'라는 표현은 본절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1) 그 가치가 비싸다는 것과 (2) 값이 공정한 거래의 대가로서 정당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또 다른 값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이는 18절의 부정적인 명령형과는 달리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성도의 행위를 요구하는 명령이다. 성도는 죄악을 피해다니며 죄를 안짓는 소극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이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긴장된 삶을 통하여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은 '몸'이라는 단어를 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전인격인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성 경: [고전7:1]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 이와 유사한 구절들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도입할 때 사용되었다(25절;8:1;12:1;16:1, 12 등). 또한 이것은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이와 비슷한 주제들에 대하여 질문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5:9 주석 참조). 아마도 사도와 고린도 교인들은 본서신이 씌어지기 전에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는 서신을 교환(交換)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 이 말은 먼저 보낸 서신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썼던 내용일 수도 있고 바울이 언급한 적이 있는 주제일 수도 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금욕주의에 물들어 있거나 이와 반대로 쾌락주의에 빠져 있었을 것인데(Farrar), 만약 금욕주의자라면 그들은 '가까이 하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주장했을 것이며, 쾌락주의자였다면 '가까이 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성적인 방종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본절에서 혼인을 금하는 것과 같은 이단 종파의 교리(딤전 4:3)를 지지하지 않으며 방종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한편 '가까이 함'(*, 하프테스다이)은 '성적 관계를 갖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합법적인 결혼을 뜻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결혼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가까이 하는 결혼그 자체를 나쁘거나 죄악스러운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Calvin).
성 경: [고전7:2]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음행의 연고로 - 앞절이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의 표현이 아님이 곧 증명되었다.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부 고린도 교인들에게 결혼의 합리성을 피력한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타스 포르네이아스'(*)는 문자적으로 '음행하는 일들이 생기게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결혼을 음행(淫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하지만, 이것이 결혼을 권장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다. 바울은 타락하고 음란한 고린도의 일반 생활 문화로부터 어떻게 그들 자신을 거룩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Morris). 따라서 본절은 칼빈(Calvin)의 말대로 결혼이 꼭 필요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 일반적인 원리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이것을 일부 일처제에 대한 규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문맥이 일부 일처제를 설명하기 위한 논지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바울은 타락한 고린도에서 순결을 지키며 도덕적 질서를 유지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뜻이 결코 결혼을 음행이나 간음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욕망 속에 항상 존재하는 정욕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제도 내에서 충족시키지 않으면 불법적인 음행에 빠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 따라서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결혼은 영적 원리에 근거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육체적인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Barrett).
성 경: [고전7:3]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의무를 다하고 - '의무'의 헬라어 '오페일렌'(*)은 '빚', '채무'를 뜻하며 본절에서는 부부가 서로에게 져야 할 '의무', 특히 성생활에서의 의무를 뜻한다. '다하고'의 헬라어 '아포디도토'(*, '다하라')는 '아포디도미'(*)의 명령형으로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강제적인 명령으로서 충실한 책임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부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비도덕적인 음행을 자행함으로 결혼의 고귀한 가치를 망각한 자들이 많았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고전7:4]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 의무의 이행은 남편과 아내 각자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제시한다. 부부는 상호 책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배우자와의 합당한 관계 속에서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는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자기 의사에 따라 사용할 수 없다. 순결(純潔)한 결혼 생활은 부부의 평등한 의무가 항상 행해질 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며 부부의 권리도 그 의무 속에서 동등하고 상호적으로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고전7:5]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서로 분방하지 말라 - 질서있는 부부 생활에 대한 바울의 염려는 또하나의 명령형으로 표현되었다.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이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여겨 부부 간에 지켜야 할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거나, 사도 바울을 추종하여 결혼은 했어도 혼자 사는 것처럼 절제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분방(奔放)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아포스테레이테'(*)는 '빼앗지 말라' 또는 '강탈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명령형은 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서 부부사이의 권리나, 의무를 빼앗지 말라는 것이다(Farrar). 즉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가지고있는 권리와 의무를 지키라는 것이다. 바울은 때때로 아내가 싫어지는 약점을 간파하여 서로간의 의무를 사려깊게 다루고 있다(Calvin). 결국 본문은 부부 간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라는 명령으로 금욕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이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 부부가 분방할 수 있는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도하는 틈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기도할때는 언제나 분방해야 된다는 것이나 기도하는 동안은 절대로 부부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틈을 얻기 위하여'라고 번역된 '히나 스콜라세테'(*)는 '몰두할 수 있는 여가를 얻기 위하여'라는 뜻이며 이는 일상적인 기도라기 보다는 집중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는 기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러한 기도가 '재난'이나 '진노의 날' 또는 '매우 어려운 문제' 등을 결정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의 기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또한 부부의 합의하에 행해져야 한다.
성 경: [고전7:6]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 '권도'(*, 슁그노멘)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만 나오는 고대 단어로 '용서' 또는 '양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Robertson). 바울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같은 동료로서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 종속 관계 속에서 명령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곧 공동체의 질서를 추구하는 그의 사랑의 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권도'가 무엇에 대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것은 '이 말을 함'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하나는 앞 부분에 서술한 모든 부부 생활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수도 있으며(Barrett),(2) 하나는 다음 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견해일 수도 있다(Farrar).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5절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것이나 또는 잠시 후에 서로 다시 합하는 것이 명령이 아니요 권도라는 것이다. 후자를 주장하는 자는 자신과 같이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하는 바울의 소신(所信)이 권도이지 명령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부부 생활에 대한 명령은 모두 강조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으나 결혼에 대한 견해, 즉 결혼을 할 것이냐 독신으로 살 것이냐에 대한 견해는 권도라는 주장이다. 사실 성경에 제시된 결혼의 질서를 생각해 볼 때 부부에 대한 의무를 단순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본절에 제시된그의 권도는 후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그는 결혼한 사람의 의무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Morris).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겸손의 표현으로 '권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말'은 바울이 제시한 모든 복음적 내용들을 지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 경: [고전7:7]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 이것이야말로 결코 명령이 될 수 없는 '권고'요 '하나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당시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는 심각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구절이다. 본절의 문자적인 뜻은 '나와 같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으로 있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요청이지만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 뜻은 다음 구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각자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은사를 따라 결혼하거나 독신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이는 바울과 같은 독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은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결혼해야 한다. 그렇다고 결혼의 은사를 받은 자만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혼이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각 자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하나님 편에서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은사이다. 결혼이 완전한 결혼으로서 육체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듯이 독신도 완전하고 성결한 삶으로서 영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삶의 형태를 취하든지 음욕의 유혹으로부터 그들의 거룩한 신분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결혼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은 독신이라는 은사를 통해서 순결한 삶을 유지할 때 비로소 '바울과 같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 따라서 독신의 삶이 순결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타락한 고린도의 상황속에서'나와 같기를' 바란다 라고 말한 바울의 표현은 결혼이냐 독신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실제적인 삶에서 음란한 유혹으로부터 순결을 유지했던 삶의 모범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결혼한 자들이 바울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질서한 방종으로부터 결혼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고전7:8]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본절의 '나와 같이'라는 표현은 앞절의 광의적인 의미와는 달리 보다 개인적인 의미로서 독신의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 그의 요구는 앞절과 같은 적극적인 요청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이 현재 있는 상태 그대로 있으라고 충고한다. 혹자는 이와 같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바울의 위치를 홀아비와 같은 상황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이에 대한 근거로는 (1) 결혼이 유대인들에게는 의무적인 규례였다는 것과 (2) 그가 한때 산헤드린의 회원으로서 투표를 하였다는 점이다(행 26:10). 만약 그가 실제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결혼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산헤드린의 회원은 반드시 결혼을 한 자들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또한 본절에서 '혼인하지 아니한 자'(*, 아가모이스)는 남성 복수로서 '과부'(*, 케라이스)라는 말과 동격이며 그 뜻은 '홀아비'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홀아비들과 과부들에게 나와 같이 그냥 있으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결혼한 적이 있는 홀아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가모스'(*)는 헬라어의 관용적인 특성상남녀 모두를 포함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며, 또한 '아가모스'는 32절에서 단순히 '장가가지 아니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홀아비'라는 해석은 더욱 불가능하다. 혹자는 이러한 난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바울이 결혼했으나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Farrar). 그는 바울이 알롄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루터 등과 같이 상처(喪妻)한 이후에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Tertullian, Jerome)과 칼빈은 이와 같은 바울의 결혼설에 대하여 단호히 부정한다. 칼빈(Calvin)은 만약 그가 결혼한 사람이었다면, 아내와 자식들을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고서 어떻게 부부에 대한 의무와 가정에 대한 질서와 사랑을 그토록 고조된 표현으로 강조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며 바울이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스스로는 질 수 없는 법들을 이웃들에게만 강요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성 경: [고전7:9]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 바울은 성적인 욕구 그 자체를 금욕주의자들과 같이 금지하지 않는다(Morris). 그렇다고 해서 결혼 그 자체를 욕망의 도피처로 삼지도 않는다. 그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으로 존중한다.
⭕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나으니라'의 헬라어 '크레잎톤'(*)은 독신보다 결혼이 더 낫다거나 결혼보다 독신이 더 낫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의 분량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의미이다. 한편 '절제한다'는 것과 '불같이 탄다'는 말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절제'(*, 엥크라튜온타이)는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을 의미하며 '불같이 타는 것'은 실제적인 욕망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욕망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바울과 같이 절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성 경: [고전7:10,11]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갈리지 말고...버리지 말라 - 결혼한 자들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명령은 서로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선언 하신 것으로서(마 19:4-9) 음행한 연고 외에는 절대로 이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그 이유가 모세 율법에 기록된 방식을 따른다 할지라도 이혼은 블가능하다. 물론 본절의 배경이 부부가 모두 그리스도인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이 윤리는 창조 질서로서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어야하는 법칙이다. 한편 '갈리지 말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코리스데나이'(*)는 수동태 부정사로서 '분리되어지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혼에 대한 여자의 능동적인 의사를 규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자의 능동적 의지를 규제하는 표현으로 '버리지 말라'(*, 메 아피에나이)고 하고 있어서 이혼에 대한 규제가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중요한 의미로 주어졌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고전7:12,13]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버리지 말라 - 이제 바울은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발생한 문제로서 선교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그가 당시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 음란한 성적 방종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피차'버리지 말라'(*, 메 아피에토)고 명령한다. 이는 10, 11절에 사용된 부정사와 동일한 의미로서 쓰여졌다. 그러나 이교도 배우자에 대한 이혼 문제는 앞의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 있어서 이혼 문제는 이교도인 배우자에게 달려 있는데 만약 그가 결혼 생활을 계속하기를 '좋아하면'(*, 쉬뉴도케이) 믿는 배우자는 능동적인 자세로 이혼을 요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 기꺼이 응해야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15절). 따라서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믿는 배우자들에게 소극적(消極的)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불신 배우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는 의미를 포함한다(16절).
성 경: [고전7:14]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거룩하게 되나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기아스타이'(*)는 완료 수동태로서 그들의 신분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믿는 배우자로 인하여 불신 배우자가 거룩한 신분이 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기오스), '성별하다'(*, 하기아조)등과 같은 단어는 성도의 구별된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얻게 되는 신분이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적 신앙을 근거로 하여 획득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의 거룩한 사귐은 그 이웃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Morris). 칼빈(Calvin)은 이에 대하여 신자의 거룩함은 불신자의 불경건함이 결혼을 더럽히려는 것보다 더 능력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 경: [고전7:15]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 전반절에서 갈리울 것을 용인한 후에 화평(和平)할 것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와 불신 배우자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불신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극단적인 형편이 되었을 경우가 아니면 평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근거로 하여 평화를 위해 이혼을 해도 무방하다고 한다(Barrett).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수동적이어야 하며, 이로 인해 신앙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즉 배우자가 신앙의 문제로 먼저 이혼할 것을 제안하고 떠나간 경우 신자는 그로 인해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성 경: [고전7:16]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결혼에 대한 권고]
⭕ 아내된 자여...어찌 알 수 있으리요 - 성도가 불신 배우자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불신자와 결혼하여 개종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이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은 욕구 불만과 불필요한 긴장감만을 초래할 뿐이다(Morris).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오히려 본절에 나타난 불신 배우자의 구원 가능성을 강조한다. 즉 그들은 14절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며 평화와 인내를 통하여 계속된 결혼 생활이 불신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Barrett, Lenski).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을 기피하는 행위는 선교적 기회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arrett). 그러나 본절의 주제가 이미 '불신자와 결혼한 자들에 대한 충고'라는 것과 불신자가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이라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12절) 염두에 둘때 이와 같은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으로 불신자와의 결혼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성 경: [고전7:17]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그대로 행하라 - 이 구절은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과 소명은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지 또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필요로 하는 사회적인 것이든지 간에 서로의 화평을 도모하는 곳에 사용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 만족하라는 자족의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주권을 중시하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Morris, Barrett).
성 경: [고전7:18,19]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 할례자...무할례자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새 사람이 된 자들에게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대 교회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처사였다. 특히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 바울의 견해는 대부분의 선교지에서 오해의 원인이었으며 교회 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헬라의 생활 방식에 적응한 유대인 중에는 할례의 흔적을 감추려 하거나 없애려 하는 자들도 있었다(Lenski, Farrar).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주장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생활의 이기적 유익을 위하여 할례를 행하기도 하고 없애버리기도 하는 할례의 의미는 더 이상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다. 여기서 '계명'(*, 엔톨라이)은 모세의 율법과 같은 법적 규제가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형편과 처지를 따라 복음에 순종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생활 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안에(요 15:12-14) 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주의적 관행(慣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 경: [고전7:20]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 그 부르심 그대로 - '부르심'(*, 헤 에클레데)은 17절에서 사용된 '소명' 이라는 주제와 다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클레시스'(*, '부르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실제로 부르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롬 11:29;히 3:1), 본절에서는 이 세상에서 처해있는 처지까지도 포함한다(Boice). 또한 앞절들(17, 18절)과 비교해보면 앞 구절에서는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그때의' 상태에 역점을 두고있다(Barrett).
성 경: [고전7:21,22]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 고린도 교인들의 신분이 대부분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다른 진술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26, 27).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교회 내에서 서로 시기하고 무시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신분의 차이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은 더 심화되었다. 그러나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요 더이상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종이나 자유자의 신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특히 22절에 사용된 그의 역설적 표현은 노예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고 자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들 양자 모두는 그리스도안에서 종인 동시에 자유자라는 뜻이다. 그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차라리'(*, 말론)라는 부사가 단순한 반전이나 양자 택일의 유익을 시사하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현실적인 노예 신분을 버리고 자유인이 되라는 표현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자랑스럽게', 또는 '자신있게'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종의 직분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2) '사용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사이'(*)는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노예된 상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에게 유익이 되게 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근거들 때문에 주 안에서 자유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 신분의 종된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종용(慫慂)하는 것이 아니고, 비록 신분이 종이긴 하나 주 안에서 자유자이므로 자유자로서 살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종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다.
성 경: [고전7:23]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 값으로 사신 것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피로써 산 바 되었다(6:20)는 것을 전제하는 구절이다. 당시에는 노예를 값으로 사고 파는 것이 관례였으며 일반적으로 값을 치른 노예는 문서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더 이상 이전 주인의 노예 상태로 있지 않았다. 본절에서는 이러한 사회 상황을 비유로 하여 성도들을 값으로샀다고 말한다. 성도들을 값으로 산 것은 금이나 은과 같은 현실적인 재화로 산 것이 아니라(벧전 1: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이고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아 산 바 된 자들은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 경: [고전7:24]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하나님과 함께'의 헬라어 '파라 데오'(*)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또는 '하나님의 곁에'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의 신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신분이 하나님으로 말미 암아 주어진 것이듯이(갈 1:1) 모든 성도들의 신분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밝히며 그 가운데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Godet). 이것은 단순히 그들로 하여금 노예 신분을 계속 유지하라는 희생의 요구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삶이 질서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과정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성 경: [고전7:25]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
⭕ 처녀에 대하여는...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 처녀의 결혼 문제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매우 신중하다. 그는 사도적 권위나 주께로부터 받은 계명을 강조하지 않고 주의 자비와 자신의 신실한 양심을 앞세운다. 이렇게 하여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중심이 주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Morris). 한편 '처녀'(*, 파르데논)는 때로 '성경험이 없는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였지만(계 14:4), 28절에서 남자의 장가가는 것을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처녀'는 부모의 견해에 따라 결혼 문제가 결정되는 당시의 '미혼여성'을 가리킴이 분명하다(Barrett).
성 경: [고전7:26]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 바울은 종종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살후2:2에서는 임박했다고 하는 주의 강림의 소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재림이 있기 전에 발생할 일들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다(마 24:8). 따라서 환난과 재림은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절의 '환난'(*, 아낭켄)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 관계된 고난이냐 하는 문제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고난이 곧 선취(先就)된 종말론적 재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arrett). 하지만 본절의 '환난'은 바울과 당시의 교인들이 받았던 현실적인 '박해들'로 해석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Morris). 환난은 바울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현재적으로 겪게 된다(Calvin).
성 경: [고전7:27]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매였느냐...놓였느냐 - 두 동사는 완료 수동태로서 그들의 신분이 수동적으로 확장된 상태임을 시사한다. 기혼자는 기혼자의 신분 가운데서 환난을 잘 견뎌야 한다. 고통스런 박해를 피하기 위해 아내를 버리거나 남편을 버리는 일은 합당하지 않다. 이는 미혼자에 대한 그의 충고와(26절)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17, 20, 24절)는 주제를 지지하는 것이며, 또한 결혼 생활에 대한 바울의 견해와(엡 5: 22, 23) 일맥 상통한다.
성 경: [고전7:28]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너희를 아끼노라 - 바울은 비교적 독신 생활을 권장하고 있다. 그는 박해로 인하여 당하게 될 육체의 고난을 상기하며 결혼으로 인하여 가중될 책임과 고난으로부터 보호되길 기대한다(Harrison).
성 경: [고전7:29,30]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없는 자 같이 하며 - '때'(*, 카이로스)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1) '때'는 26절의'환난'과 같이 당시 고린도 교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의미한다(Morris). (2) '때'는 성도의 개인적 종말을 고하는 죽음을 의미한다(Calvin). (3) '때'는 예수 재림 전의 시대를 의미한다(Barrett, Lenski). 본절에서는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 종말과 박해의 시대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의 재림이 불과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위기 의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는 표현 속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는 금욕이나 절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나 재물이나 그 외의 세상 것들이 성도의 궁극적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Grosheide). 성도는 세상에 있으나 세속에 속하지 않은 자이며(5:10), 세상의 자랑거리로 자신을 치부할 수 없는 자들이다(고후 6:10).
성 경: [고전7:31]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지나감'(*, 파라게이)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스쳐 지나간다'는(마 20:30)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 그 의미는 보다 고조되어 '없어지다' 또는 '소멸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 이며 무상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그 형상조차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시 103:15). 한편 혹자는 이것을 사회나 상업 제도 등과 같은 세상의외적 구조가 변화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Barth). 물론 '형적'(*, 스케마)이라는 단어가 세상사에 나타나는 외형적 형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절에서는 종말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타당하다 하겠다.
성 경: [고전7:32,33]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주를 기쁘시게 할꼬...아내를 기쁘게 할꼬 - '기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스코'(*)는 상대방을 향한 헌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즉 기혼자는 아내로 인하여 주께 향한 헌신의 자세를 반감(半減)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염려로부터 자유함을 받아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하여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한 요구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결혼이나 외적인 제도 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으로 참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그가 정욕에 매여 있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잃어버린 자에 불과하다(Calvin). 기혼자이든지 미혼자이든지 간에 그는 주어진 자유를 선용(善用)할 때만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성 경: [고전7:34]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은 고상한 도덕적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Morris).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자세로서 모든 성도들이 결혼을 했건 안 했건 간에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6:13, 15;롬 6: 12; 12:1;고후 4:10; 갈 6:17). 다시 말해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만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적 생활을 삼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의 자세이다.
성 경: [고전7:35]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 바울의 의도는 보다 확실하게 드러났다. 기혼자이든 미혼자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질서 속에서 주를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바울이 의도한 목적이 있었다. 즉 (1) 고린도 교인들의 신실한 신앙과 빛된 생활을 촉구하고 (2)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으로 완전한 헌신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며 (3) 구차한 논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성 경: [고전7:36]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혼인하게 하라 - 본절에서 언급하는 결혼이 어떠한 종류의 결혼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1) 혹자는 당시 고린도 지방의 관습으로 지켜진 '정신적 결혼' 또는 '영적 결혼' 등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 견해에 의하면 성적 결합이 없는 결혼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통상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5절의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설명해 주지 못하고, 이런 정신적인 결혼의 관습은 2세기에 들어서야 생겨난 것으로, 본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Morris). (2) 혹자는 처녀의 보호자된 아버지가 정년기에 접어든 딸의 결혼을 추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3) 혹자는 젊은 과부가 그 형제들에게 시집가는 '수혼'을 권장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Barrett). 그 외에 약혼자가 독신을 서약한 후에 부득이한 일이 생기면 결혼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2)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당시 자녀의 결혼에 대한 결정권(決定權)을 가지고 있었던 보호자에게 자녀의 결혼을 권장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Morris, Lenski).
성 경: [고전7:37,38]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처녀의 결혼에 대한 교훈]
⭕ 부득이한 일 - 결혼을 시켜야만 하는 부득이한 일은 결혼 서약과 같은 대외적인 의무와 책임을 가리킨다(Morris). 이를 보아 결혼에 있어서 쌍방의 서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적인 인정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 본문은 처녀를 가진 부모에대한 권면으로 처녀가 결혼하길 원치 않을 경우에 앞 구절(36절)과는 대조적으로 시집보내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린다. 성도는 창조 질서 속에서 거룩함을 유지해야하며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성도의 삶에 대한 평가 기준은 결혼을 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못했느냐에 달려 있다. 본절의 더 잘하는 것이라고 칭찬하는 말은 바울의 의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죄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순결한 삶을 지킨 성도는 잘하였다는 칭찬을 듣게 되며 그 칭찬은 결혼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지키며 하나님께 헌신한 자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Calvin).
성 경: [고전7:39]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의 재혼에 대한 교훈]
⭕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 과부들의 재혼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원리는 앞절에서 기록된 처녀들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들은 다시 결혼하든지 혼자 그 냥지내든지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또 하나의 조건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주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다. 이는 불신자들과 이미 결혼한 자들에게 '그대로 행하라'고 말한 것과(12, 13절) 달리 새로운 결정을 해야 되는 과부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임을 기억하도록 요구한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정을 최선의 것으로 여겼고, 그 외의 경우에 파생적으로 발생된 문제에 대한 대책만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고전7:40]
주제1: [혼인(婚姻)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의 재혼에 대한 교훈]
⭕ 하나님의 명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사도 바울 자신이 독신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것과 같이 너희도 그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다(Barrett). (2) 비록 주의 계명에 이르지 아니한 내용이라 하더라도(25절)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Morris). 즉 독신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된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부합(符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고전8:1]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우상 제물에 관한 규칙]
⭕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 페리)라는 표현은 7장의 결혼 문제와 마찬가지로(7:1) 고린도 교인들이 서신이나 구전을 통하여 우상 제물에대한 문제를 바울에게 제기했음을 시사한다(Morris). 당시의 고대 도시들에서는 종교적 제의(祭衣)에 사용된 음식물들을 사제들이 처분하였으나 다 처분하지 못하고 남은 제물들은 시장에서 판매하였다. 제의에 사용되지 아니한 고기도 있었으므로 교인들이 거리낌없이 시장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 있었는데 사실 제물과 순수한 음식을 구별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본절에 언급된 음식은 제의에 올랐던 제물들로서 분명하게 논의될 수 있는 성격을 지녔다. 고린도 교회에서 우상의 제물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된 견해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로 인하여 오염된 음식을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또 다른 무리들은 영지 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도살이나 우상 제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Barrett). 바울은 이들 두 주장에 의하여 발생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먼저 그들의 지식이 편견이나 교만에 빠져 분쟁을 유발시키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지적하고 성숙한 인격과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결국 그들의 문제는 사랑이 없는 지식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었다(9-13).
성 경: [고전8:2]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우상 제물에 관한 규칙]
⭕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 바울은 사랑과 지식을 비교하면서 먼저 지식의 불완전함을 증명한다. 본절에서의 '지식'(*, 그노시스)이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을 시사하지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직결되기도 한다(요일 2:4). 즉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호 6:3). 그러나 고린도의 지식있는 자들은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짐으로 인하여 오혀려 자신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그들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 지식을 당면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마땅한 지식' 곧 덕을 세워주는 사랑을 소유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성 경: [고전8:3]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우상 제물에 관한 규칙]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 '사랑하면'(*, 에이 아가파)이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Barrett).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그의 백성을 아신다는 사실이다(딤후 2:1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정하실 때에 그백성의 삶에는 사랑이 나타날 것이며 또한 그 속에서 하나님은 증거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학습의 과정을 통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 속에서 구체적인 전인격적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모든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그것이 고상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무가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Calvin).
성 경: [고전8:4]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우상 제물에 관한 규칙]
⭕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 바울은 여기서 앞절에 비하여 상당한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우상의 실체를 단호하게 규정하고 있다. 즉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 실체가 아니므로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이며 실제적으로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바울은 10:20에서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것' 이라고 규정하여 우상의 배후(背後)에는 정신적인 것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바울이 본절에서 우상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상 그 자체는 허상과 다를 바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Morris).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1)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2) 참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사 41:24;렘 10:14).
성 경: [고전8:5]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우상 제물에 관한 규칙]
⭕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 바울은 계속해서 우상의 허구성에 대해 언급한다. 본절에서 '신이라 칭함을 받는 자'가 있음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신'은 당시의 그리이스 신화에 나타나는 이방 신을 가리키며, 사람들이 신앙하는 대상을 일컫는다. 그런데 여기서의 '주'(*,퀴리오스)는 당시의 여러 종교들이 신앙의 대상에 대하여 사용하던 일반적인 용어이다(Morris). 따라서 '많은 신'(*,데오이 폴로이)과 '많은 주'(*, 퀴리오이 폴로이)사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없으며 많은 우상들이 이방인들의 경배의 대상이 된 것을 풍자적으로 비유한 것에 불과하다. 본 구절은 이러한 풍자(諷刺)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이방신들이 비실재적인 존재임을 지적하고 있다.
성 경: [고전8:6]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우상 제물에 관한 규칙]
⭕ 한 하나님...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그로 말미암았느니라 - 본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며 우리의 기원은 그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Calvin).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자로서의 속성과 유일하심이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이 앞에 언급되어 있는 이방의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하나님께 대하여 '아버지'란 표현을 쓴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권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나타낸다. 더욱이 본 구절에서 중요하게 제시되는 전치사 '에크'(*, '...로부터'), '에이스'(*, '...안으로'), '디아'(*,'...을 통하여')는 롬 11 :36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모든 것'(*, 타 판타)의 기원과 존재 목적과 최종적인 귀결과 중보적 사역이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명백히 하는 표현으로 피조물인 이방의 우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규정한다.
성 경: [고전8:7]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지식은 우상이나 거짓 신들의 존재와 위치에 관해 인식(認識)할 수 있는 지식을 가리킨다. 이 지식은 1절에 따르면 우리가 다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른 사람들에게만 국한된다(Morris). 따라서 이러한 지식은 교회 내에서조차도 보편적인 지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우상을 숭배하며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중에는 고기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음식으로 생각지 않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로만 인식하는 자들이 있었다.
⭕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 '습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데이아'(*)는 시내산 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어떤 사본에는 '쉬네이데세이'(*, '양심')라고 되어 있고 흠정역(KJV)이 이를 따르고 있지만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고린도 교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상이나 우상 제물이 마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짓 신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오늘날에도 샤머니즘적인 신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구복(求福)신앙에 매여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도는 복음의 기본 도리와 그 복음의 능력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롬 1:16;갈1:10-12;엡 3:1-6).
성 경: [고전8:8]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 본절은 식물(食物)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하는 영지주의적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드러내 준다(Hodge). 한편 '세우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스테세이'(*)는 '가까이 나아가다'(행 27:24), '드리다'(롬 6:13)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Morris). 어떤 사본들(*, D, )에서는 이를 미래 시제로 하였다. 이는 장차 있게 될 최후 심판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성 경: [고전8:9]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거치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콤마'(*)의 문자적 의미는 '길에 떨어져 있는 돌'로서 '장애물'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프로스콤마'는 믿음이 약한 형제의 양심에 상처를 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우상과 타협함으로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행위가 나쁘게 생각되지 않더라도 이것이 초신자들의 양심(良心)에 반대된다면 그들을 실족케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을 나쁜 상태로 이끌 수도 있다(D. Thomas).
성 경: [고전8:10]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지식 있는 네가...먹게 되지 않겠느냐 - 믿음이 성숙한 신자는 장소와 음식의 출처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며 정확한 이해 가운데서 자유롭게 행한다. 하지만 믿음이 약한 자는 우상의 집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그 우상과 교제하며 경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Calvin). 결국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로운 행동은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왜냐하면 강한 신자들을 좇아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경우 강한 신자들과는 달리 양심에 거리낌을 느낄 거리낌 때문이다.
성 경: [고전8:11]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 바울은 본 구절에서 자유가 남용되는 경우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의 증표가 되지만 그것이 남용(濫用)될 때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빌미가 됨을 지적하고있다. 한편 본절의 '멸망 하였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타이'(*)는 미래 시제로 볼 수도 있으나 내용상 현재 시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약한 자들은 장차 실족하게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현재에 실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Morris).그리고 이 단어가 문장의 앞 부분에 위치하여 강조되고 있으며, 롬 14:15에서도 본절과 동일한 내용을 언급한다.
성 경: [고전8:12]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 약한 형제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행위로 규정된다(행 9:4). 혹자는 이러한 범죄를 그리스도에 대한 모욕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무효화시키려 하는 행위라고까지 본다(Calvin).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지식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형제에 대한 사랑의 결핍은 그것이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리스도께 대한 행위로 귀결된다(Hendriksen). 주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성 경: [고전8:13]
주제1: [우상 제물에 대한 성도의 태도]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 본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가 바울 자신의 의지 표명(表明)을 통하여 나타난다. 바울의 이러한 결심은 그의 뜨거운 사랑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이것은 (1) 인간적으로 보잘 것없는 형제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그를 통해 당신의 사역과 섭리를 이루어 나가신다는 점과 (2) 그리스도인의 영속적인 생활 원칙을 밝히 제시해 주고 있다(마 25:40,45). 한편 '실족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제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Morris). 이 단어는 '스칸달론'(*)에서 온 것으로 원래 '올가미의 덫을 잠그는 나무'를 가리키며 온갖 고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가 '스칸달론'이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1:18),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스칸달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갈 5:11). 본절에서는 형제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고전9:1]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 여기서의 '자유'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영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으므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8:13에서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형제를 위해 그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 사도가 아니냐 - 이 말 속에는 혹자의 말대로 사도인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Godet). 동시에 바울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였다. 즉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과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 '못하였느냐'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키'(*)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말로서 바울이 본절에서 던진 네 개의 질문 가운데 이 구절에서만 사용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근거로 먼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실을 제시하는데, 이 단어가 그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혹자의 말대로 행 9:3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목격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Godet, Grosheide).
⭕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두번째 근거이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또한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로서의 근거는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3:7의 말씀과 같이 바울 자신이 씨를 뿌렸다해도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없었다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고전9:2]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사도권을 의심할 근거가 적당치 않았다. '인'(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스'(*)는 어떤 일정한 모양을 새기는 도구를 가리키거나 그 도구를 사용하여 진흙이나 밀납 등에 새긴 소유권과 증명의 표시를 말한다. 바울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들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였다. 엄격히 말해 사람들의 회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긴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Hodge).
성 경: [고전9:3]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할 것이 이것이니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앞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고 뒷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다. 혹자는 이를 뒷절에 연결시켜 바울이 자신의 언행을 본으로 보이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 자기 사도권을 변호하는 것이라 한다(Grosheide). 그러나 뒷절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권이 입증된 후에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을 열거한 것이므로 앞 구절에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Morris). '힐문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크리누신'(*)은 '엄밀히 조사하다', 혹은 '심문하다'의 뜻이며 '발명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로기아'(*)는 '답변하다'의 뜻으로서 둘 다 법률 용어이다. 즉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심문하듯이 자신의 사도권을 따진다면 앞에서 말한 내용들, 곧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하였으며, 이방인인 고린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시킨 뚜렷한 사도됨의 증거들을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 증명하듯이 단호하게 답변하겠다는 것이다.
성 경: [고전9:4]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우리가 - 본절에서 복수 1인칭 동사 '에코멘'(*, '우리는 가지고 있다')을 사용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바나바를 의식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6절). 혹은 '우리' 속에 실라와 디모데를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바울과 협력하였으며 바울의 삶의 방식을 따랐었다(Godet).
⭕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권'(權)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안'(*)은 '권리'(right, NIV)를 뜻한다. 이는 바울이 고리도 교인들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물질적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을 뜻한다(고전 9:9-11).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성 경: [고전9:5]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다른 사도들 - 사도행전에서는 사도가 예수의 열 두 제자와 바울과 한 두 사람이 더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행 14:4,14). 본절에서도 사도의 범위가 사도행전의 언급보다 그리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 주의 형제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전처(前妻)에게서부터 태어난 예수의 형들도 포함한다는 것이다(Lightfoot). (2) 예수님의 사촌 형제 즉 마리아의 동생과 남편 알패오의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마 10:3). (3) 가장 분명한 것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로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네 사람들이다(마 12:46;13:55;행1:14;갈 1:19).
⭕ 게바 -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구분하여 '게바' 곧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탁월한 사도이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드러진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탁월한 사도였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게바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1:12). 또한 본절은 베드로가 아내가 있는 자임을 추측케 한다(막 1:30).
⭕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 - '자매된 아내'라는 말은 헬라어의 관용구로서 '자매'와 '아내' 이 두 단어가 서로 동격(同格)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자매'라는 말 속에는 '믿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Lenski). '데리고 다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아게인'(*, '사방으로 데리고 다니다')은 '관례적인 선교 여행'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로 당시의 사도들이 아내를 대동시키면서 도움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나 4세기 로마 교회의부제(副祭)였던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에 의하면 요한과 바울을 제외하고 모든 사도들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딸린 식솔까지 교회로부터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도 역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성 경: [고전9:6]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일하지 아니할 권 - 본절은 사도들이 교회로부터 그들의 생계비를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딤전5:18). 그러나 바울과 그의 제1차 전도 여행시 동역자였던 바나바는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한 기술을 한가지씩 익히는 관습이있었다. 더욱이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은 모두 스스로 생계비를 벌었는데 바울 역시 그리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천하게 생각하였으므로, 혹자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매우 특이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한다(Grosheide).
성 경: [고전9:7]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누가 자비량하고...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군인들이 자신의 비용으로 봉사 하지 않는다는 것과 일꾼들이 포도원이나 목장에서 일을 할 때에 보수를 기대하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신 20:6). 바울은 이같은 실생활의 예를 들어 그들이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한 순리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도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보조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복음의 역군들(딤후 2:3, 4)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3:6) 그리고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요 21:15)들이 보수를 받고 신령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자비량(自備糧) 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옵소니오이스'(*)는 '옵손'(*, '양식')과 '오네오마이'(*, '구입하다')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스스로 구입한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후에 '군인들의 봉급'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바울은 이러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피력한다.
성 경: [고전9:8]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사람의 예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안드로폰'(*)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습(人習)이나 생각에 따라'의 의미이다. 이 말이 때로는 육체의 그릇된 이해를 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롬 3:5), 본절에서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임금 지불의 도리가 당연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6절에서 예를 든 것처럼 사람의 피습을 따른다 할지라도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제시하였다.
⭕ 율법도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모스'(*)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이 서로 일치함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혹자는 인간을 만드신 분과 인간에게 계시를 주시는 분이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Grosheide).
성 경: [고전9:9]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곡식을 밟아 떠는 소 - 본절에서 인용된 구절은 신명기 25:4이다. '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알로온타'(*)로서 '할론'(*, '둥근 모습')에서 파생된 말이다.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를 이용하여 곡식을 터는 방아를 돌리거나,혹은 일정한 반경(半徑) 안에 있는 곡식을 소로 하여금 발로 밟아 떨게 하였다. 혹자는 이 때 이집트나 다른 이방 지역에서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그 입에 망을 씌웠다고 한다(Lenski).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것을 금(禁)하였다. 소가 일을 할동안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과 자연에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을 가르쳐 준다(욥 38:41;시 147:9;마 6:26;눅 12:24).
⭕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염려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마리 새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다(마 6:26). 바울의 의도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하여는 가축도 율법에 의해 보장을 받는데 하물며 인간들이 일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서 달리 인용할 말씀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신 24:15), 굳이 본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일꾼의 품삯을 예로 들지 않고 가축을 예로 든 것은 짐승들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더욱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여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귀중하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Calvin).
성 경: [고전9:10]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전혀 - 이 단어를 '전혀'(altogether, KJV), 혹은 '전적으로'(entirely, RSV)로 번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9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스'(*)는 '확실히'(assuredly, certainly)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Hodge, Goert).
⭕ 소망을 가지고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이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하는 소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이지만 내면적인 뜻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서 밭갈고 씨뿌리는 자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 소망을 갖고 일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성 경: [고전9:11]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권리]
⭕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10절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일한 대가로 그에 상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으로 결론을 맺었다. 이제 본절에서는 앞 구절의 비유들에 빗대어 바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신령한 것'(*, 타 프뉴마티카), 곧 한없이 고귀한 영적인 씨앗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뿌렸으므로 그들에게 '육신의 것'(*, 타 사르키카) 즉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과 비교할 때 지극히 미미한 것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성 경: [고전9:12]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의무]
⭕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 베드로와 아볼로 등 다른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생계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러한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낮은 등급의 사도이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하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Morris).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운 자로서 자신이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 더욱 물질적인 권리를 요구할 권한이있다고 주장한다.
⭕ 범사에 참는 것은 - '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고멘'(*)은 '스테게'(*, '지붕')에서 유래된 말로서 '덮다', '감추다', '참다'의 뜻을 갖는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만이 이 말을 사용한다.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온갖 종류의 곤궁함을 인내로써 참았다.
⭕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 바울은 복음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권한을 행사하려는 자들과 복음 전파를 통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일을 담당한 자가 물질에 얽매여 산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실족함 없이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 스스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4:2에서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Grosheide).
성 경: [고전9:13]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의무]
⭕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 본절에서 바울은 구약에서 언급된 제사 의식과 이방 제사의 실례를 들어, 신약의 교회가 복음 사역자들에게 물질을 공급할 의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드려지고 남은 고기 중 일부를 그들의 몫으로 할당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율범이 규정하는 바였다(레 7:6, 8-10, 14, 18-36).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권한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합법적임을 보여주며 이에 바울이 자신의 권한을 자제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제단'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보모스'(*)가 있음에도 '뒤시아스테리오'(*)을 사용하는 것은 '보모스'라는 용어에 너무 이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W.H. Mare).
성 경: [고전9:14]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의무]
⭕ 이와같이 주께서도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에 관하여 규정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보수에 대해 똑같은 규정을 허락하셨다.
⭕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이것은 마 10:10이나 눅 10:7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 하였던 것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의 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이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명령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증거였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으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성 경: [고전9:15]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의무]
⭕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 바울은 복음 전파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보조를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 죽을지언정... - 바울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짐을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에 있었을 때 겪은 여러가지 생생한 경험들의 기억으로 격한 감정이 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글을 잇지 못하고 파격 구문(破格構文)을 사용했다.
⭕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바울은 아무런 보상없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자신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고 또한 혹자의 말대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축적했다(Hodge). 따라서 물질적인 공급 없이 교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의 순수성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며 바울의 자랑이요 영광이었다.
성 경: [고전9:16]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의무]
⭕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일임이라 - '자랑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케마'(*)는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도덕적인 가치를 느끼고,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즐거운 감정'을 의미한다(Heinrici).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 일을 통해서 갖게 되는 즐거움과 보람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명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일이었고(행 26:16-18;갈 1:1; 빌 1:16) 그가 부득불(不得不)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행 9:1-9)와 성령(행 13:2)에 사로잡혀 있었고 날마다 주의 계시에 민감하였다(행 22:21). 즉 그가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 - 바울은 소명(召命)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12사도들은 자발적인 믿음으로 그들의 소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완악한 불신앙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소명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강압적인 역사였다(행 9: 5,Godet).
성 경: [고전9:17]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의무]
⭕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 바울이 자발적인 선택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요 그에 대한 상이 있을 것이다. '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스'(*)는 '보상'(reward, KJV, NIV)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로부터 강압적으로 복음 전도의 소명을 부여받았으므로 거기에 대해 어떠한 자랑거리나 보상이 있을 수 없다.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행 26:16).
⭕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안 페피스튜마이'(*)의 문자적인 뜻은 '나는 청지기직을 부여받았다'이다. 여기의 '청지기'(steward)는 '자유인'('freeman)과 상반되는 말로서, 청지기들은 노예 계급에 속했었다(눅 12:42, 43).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하여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엄한 처벌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나는 노예로서 일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堅持)하였음을 보여준다(Godet).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눅 17:10).
성 경: [고전9:18]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사도의 의무]
⭕ 값 없이 전하고 - '값없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다파논'(*)은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대가로 아무런 물질적인 부담을 지우지 아니한 것을 뜻한다.
⭕ 다 쓰지 아니하는 것이로라 - '다 쓰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카타크레사스다이'(*)는 '남용하다'나 '오용하다'의 뜻이 아니라 '남김없이 소모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부정은 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체 부정으로 '일체 사용하지 않다'의 뜻이 된다(Lenski). 바울은 청지기, 즉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수 없는 노예로서 복음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노예도 주인으로부터 먹을 것과 입을 것은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 같이 바울도 그러한 권리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것과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 자체를 자랑이며 보상으로 여겼다.
성 경: [고전9:19]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빌 3:12) 그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롬 1:1)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민족이나 종교, 국가, 사상, 인습, 유대교의 율법주의 등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이것은 곧 완전한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다는 뜨거운 사랑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11:24, 25;롬 9:3).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부정하는 원리이며 그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Godet).그가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다(고후 4:5).
⭕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포기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성 경: [고전9:20]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언급했다. 그는 베냐민 출신으로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기하였으며 진정한 유대인, 곧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들이라는확신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자기의 동역자이며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행 16:3) 예루살렘에서는 결례(缺禮)를 행하였다(행 21:17-29).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율법 아래있는 자 같이 -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유대인'을 뜻하는 다른 표현이다(Thomas). (2)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인 자들이다(Hodge, Godet).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매여 있는 자'에 초점이 있으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는 율법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유대인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한 것은 그가 유대인 사이에서 소외(疏外)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나 혹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롬 9 :3;갈 2:7). 이로 보건대 바울은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을 구속할수 있는 자유를 소유한 진정한 자유자였다.
성 경: [고전9:21]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란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성문화(成文化)된 모세의 율법을 갖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법, 곧 양심의 법은 가지고 있었다(롬 2:14, 15).
⭕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는 이방인들처럼, 즉 율법 밖에 있는 것처럼 행동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갈 6:12).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결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였다. 그런 바울이었으나 율법없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들의 문화적인 상황에 자신을 순응시켰다.
성 경: [고전9:22]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여기서 '약한 자'(*, 아스데네이스)란 복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약한 양심의 소유자들로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전 8: 9; 살전 5:14). 바울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로서 믿음이 강한 상태에 있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였으며,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다(19절).
⭕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 '여러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10:32)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Edwards). 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양대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고전9:23]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 '모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가 어떤 사본(*, TR)에서는 '투토'(*, '이것')라고 되어 있다. 즉 앞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상황에 자신을 순응시켜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장애가 없게 했다.
⭕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 '참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코이노노스'(*)는 원문에 '참예자'라는 명사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쉰'(*,'...와 함께')과 '코이노노스'(*, '공유자')의 합성어로서 '...와 함께 공유(共有)한 자' 라는 뜻이다. 이 명사가 '기노마이'(*, '되다')의 부정과거 '게노마이'(*, '되었다')와 함께 사용되어 본 구절의 문자적인 뜻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공유하는 자가 되고자'이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써 전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성 경: [고전9:24]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절제와 노력이 필요함을 권면하기 위하여 운동 경기를 비유로 들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매 2년마다 열렸던 '이스미안 경기'(Isthmian games)가 올림피안 경기(Olympian games), 피티안 경기(Pythian games), 네미안 경기(Nemean games)와 함께 그리스 사대 경기 중 하나이다. 이스미안 경기에는 주로 격투기, 경마 등이 진행되었다.
⭕ 운동장에서 - '운동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오'(*)는 606.75피트(feet)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이 경기장, 곧 '스타디움'(Stadium)으로 뜻이 굳어졌다. 그 이유는 당시 그리이스 도시들에 있는 경기장들이 한스타디오(약 200m)로 규격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이 말은 문자대로 육상 경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상을 얻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오직 한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에는 운동 경기에서 승리하면 상금을 주지 않고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모든 경주자는 이러한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다. 따라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경기에서 우승자가 질주하는 것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상을 얻겠다는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목표만을 향해 노력하라는 것이다(Godet).
성 경: [고전9:25]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 '이기기를 다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고니조메노스'(*)는 동사 '아고니조마이'(*, '경쟁하다', '격렬히 몸부림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본절에서는 경주에 참가하는 모든 자를 가리킨다.
⭕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크라튜에타이'(*)는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자들이 사용했던 전문 용어였다. 그들은 통상 10개월 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일에 있어서 자신을 절제하여야 했다.
⭕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에서는 승자에게 월계수나 솔잎, 또는 어린 파슬리(parsley) 잎을 엮어 만든 화환(wreath)을 머리에 씌워 주었으며 올림피안 경기에서는 우승자에게 야생 감나무 잎으로 엮은 화환을 씌워 주었다. 이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그런 면류관은 경기자들에게 최고의 영예(榮譽)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쓴 우승자의 영예 역시 덧없는 것이다.
⭕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 운동 경기자가 목표하는 면류관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면류관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성 경: [고전9:26]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 '향방 없는'의 헬라어 '아델로스'(*)는 '목표 없는', '불분명한'의 뜻을 갖는다. 달리기 선수들이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정하고 경기에 임하는 것을 비유로 삼으면서 바울 자신도 목표와 방향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 싸우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크튜오'(*)는 '퓌그메'(*, '주먹')와 '퓌크테스'(*, '권투 선수')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권투시합'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에서 달리기 경주에서 권투 시합으로 비유를 바꾸어 표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 이것은 권투 선수들이 시합을 하기 전에 상대방 없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현한 말로 전문 용어로 '스키 아마키아'(*, '싸움')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싸움이 상대방이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적(對敵)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성 경: [고전9:27]
주제1: [자유에 대한 바울의 모범]
주제2: [바울의 복종과 절제]
⭕ 내가 내 몸을 쳐 - '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피아죠'(*)는 '휘포'(*, '...아래')와 '옵스'(*, '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눈 아래 부위를 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권투 선수들이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투 시합을 연상하면서 자신의 싸울 대상이 자기 몸이 라는 것을 보여준다. '몸'에 해당하는 '소마'(*)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영'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기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 복종하게 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라고고'(*)는 '둘로스'(*, '종', '노예')와 '아고'(*, '데려오다', '끌고 오다')의 합성어로서 전쟁에서 승자가 패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패배시킨 후 이제는 온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바울은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복종시키려고 하였다(Hodge).
⭕ 남에게 전파한 후에 - '전파한'의 헬라어 '케뤽사스'(*)는 헬라어 '케뤽스'(*, '전달자')에서 유래하였다. 운동 경기에서 '케뤽스'의 임무는 경기규칙을 설명하고 선수들을 소집시키며 나팔을 불어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일 등을 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달자인 '케뤽스'에 비유하였다.
⭕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 '버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스'(*)는 '도키마조'(*, '조사하다', '시험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불합격자'의 뜻을 갖는다. 또한 이 단어는 옛날 화폐로 사용된 주화의 무게를 달아서 제 무게를 지닌 주파와 그렇지 못한 불량 주화를 가려내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바울이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 (1)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의미이다(Lenski, Godet). (2)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Morris).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 얻은 자로서 주님을 마땅히 섬기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성 경: [고전10:1]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헬라어 본문에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앞 문단의 내용과 본장의 내용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 형제들아 -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형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교회 전체를 하나의 몸(body)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에 기독교 교회의 근원이 있음을 시사하였다. 롬 4장과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라는 원 줄기에서 교회가 접목되었음을 말하였다. 그러한 영적 관계의 맥락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교회구성원들의 조상이 될 수 있다.
⭕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출애굽 사건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출애굽 사건이 지닌 참된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할까하는 염려 때문이다.
⭕ 우리 조상들이 다 - 여기에서 '다'(*, 판테스)라는 말이 강조되어 2, 3, 4절에서 5번에 걸쳐 반복된다. 이처럼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멸망하였다(5절)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다.
⭕ 구름 아래 있고 - '아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는 공간적으로 구름 아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 출애굽하여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인도를 의미한다(출 13:21, 22;14:19, 24등).
⭕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확실히 체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받았다.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도 끊임없는 경건과 영적인 각성(覺醒) 없이는 멸망받은 이스라엘 조상들과 같은 전철(前轍)을 밟게 될 것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고 있다.
성 경: [고전10:2]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모세에게 속하여 - 홍해를 건너는 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롤 굳게 믿음으로써 모세와 하나로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체를 이루는 것이다(롬 6:3-5).
⭕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 혹자는 구름과 바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인들과 공간적으로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해주는 역할이었고 동시에 모세의 권위를 높여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제자가 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름과 바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의미를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을 통해 인도함을 받고 홍해 바다를 건너는 체험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초자연적 능력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게 해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구름 기둥과 홍해 바다'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곧'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과 바다'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의 '물세례'를 상징한다(롬 6:3).
성 경: [고전10:3]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신령한 식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콘 브로마'(*)에서 '식물'을 뜻하는 '브로마'(*)는 단순히 '고기'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전반적인 음식물을 나타낸다. 본문은 '만나'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출 16:4, 14-18). 그런데 이 '만나'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하다. (1) 유형론적(類型論的, typical) 해석을 하는 자들의 견해로, 이에 따르면 '신령한 식물'은 보다 고상하고 미래적인 것의 모형으로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쓰여진 '신령한'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2) 혹자는 이를 '영혼을 위한 식물'이었다고 해석한다. 즉 만나는 신 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도 주어진 음식이라는 견해이다(Calvin). 이 견해에 따르면 '만나'는 곧 성만찬때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신 떡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만나는 평상적인 주식물(主食物)로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느 9:15). 또한 예수님께서는 만나가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인 효력이 없음을 말씀하시고 예수 자신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참 떡이심을 가르쳤다(요 6:49-58).(3) 혹자는 만나를 '성령으로부터 유래된'(procceding from the Divine Spirit) 것으로 보는데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창 1:2; 시 33:6).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만나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공급된 초자연적인 양식이었다.
성 경: [고전10:4]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 - '따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두세스'(*)는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뒤따랐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몇몇 주석가들은 바울이 랍비들 사이에서 전해져오는 우화를 인용하였다고 주장한다(Ruckert, Baur, de Wette, Meyer). 그 우화에 의하면 14피트 높이의 바위 덩어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니며 물을 뿜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러한 전설을 근거로 해서 교회를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반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트라스'(*)는 움직일 수 있는 바윗 덩어리를 가리키는 '페트로스'(*)와는 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암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물질적인 바위 배후에 그 물의 참된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 마셨으매 - 앞 문장에서의 '마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온'(*)은 부정 과거로 마신 것이 과거 사실이라는 점에 역점을 두는 반면, 본 구절에서의 '마셨으매'(*, 에피논)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마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메마른 광야에서 계속 물을 공급받았으며 그 공급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떡이며 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요 6:31, 32). 주께서는 배고픔과 갈증으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시급했던 음식과 물을 제공 하셨다(요 7:37-39).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신령한 음료'와 '신령한 식물'의 근원이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바울은 주지시킨다.
⭕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바울이 그리스도를 반석에 비유한 것과 같이 신 32 :4, 15, 18등에서는 하나님을 반석에 비유하고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능력의 반석', '영원한 반석' 등으로 표현하는데(사 17:10 ; 26:4) 이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이 분명하고(요 12:41) 본 구절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선재(先在)하셨음을 뒷받침하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백성의 신령한 반석이셨던 여호와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과 동행하셨으며 그들의 구원자였다.
성 경: [고전10:5]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령한 음식인 만나보다는 애굽의 고기를 더 좋아하는 등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민 26:65).
⭕ 멸망을 받았느니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트로데산'(*)은 '카타스트론뉘미'(*)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씨앗 등이 흩뿌려져 '표면을 뒤덮다' 또는 폭풍으로 말미암아 '쓰러지다'의 뜻이 있다. 본절은 민 14:16을 인용한 것으로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비참하게 멸망받은 모습을생생히 표현해 주고 있다. 바울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든 이유는 비록 그들이 성찬에 유추(類推, analogy)될 수 있는 '신령한 식물과 음료'를 먹고 마셨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할 때에는 멸망받았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성찬'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할 때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없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성 경: [고전10:6]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거울이 되어 - '거울'에 해당하는 헬라어 '튀포이'(*)는 '튀프토'(*, '치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타격을 가한 흔적'이라는 뜻이었다가 후에는'표상', '윤곽' 등의 뉘앙스를 가진 '형식'을 의미하였다. 또한 신약에서 이 단어는'표상'(롬 5:14), '식양'(행 7:44), 본받아야 할 '모범'(살전 1:7;살후 3:9;딤전4:12;벧전 5:3) 등의 의미를 가졌다. 본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흔적으로 새겨놓으라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 악을 즐겨하는 자 - '즐겨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뒤메산'(*)은 '뒤모스'(*, '영혼')와 전치사 '에피'(*, '...쪽으로')의 합성어로 사람의 마음이 뭔가를 하고자 하여 한쪽으로 쏠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민 11:4, 5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갈망했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야채를 간절히 사모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시기는 하셨으나 그들의 탐욕에 대해서는 진노로 큰 재앙을 내리셨다(민 11:33, 34).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에 대한 갈망은 곧 그들의 불신앙의 증거였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전제로 고린도 교인들이 이교도들의 희생 제물 축제에 참여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성 경: [고전10:7]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데 에이돌롤라트라이 기네스데'(*)의 문자적인 의미는 '우상 숭배자가 되기를 멈추라'는 뜻으로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이미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우상을 숭배한 것(출 32 :4ff.)같이 이교도들의 관습, 즉 우상의 신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가함으로써 우상 숭배의 행동을 범하였다. 바울은 8장에서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이미 다루었고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고린도 교인의 우상 숭배를 비교하고 있다.
⭕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경배한 후 불경스러운 향연을 벌인 모습을 묘사한다(출 32:6).
⭕ 뛰논다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제인'(*, '어린아이 같이 놀다')은 특별히 춤추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가운데 놓고 놀며 춤추던 것을 묘사할 때로 사용되었다(출 32:6).
성 경: [고전10:8]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또하나의 범죄는 '간음'이었다. '간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뉴오멘'(*)은 일반적으로 성적인 부정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된 용어로서 5장에서 사용된 용어들과 어원이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을 지날 때 그곳에 있는 모압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젊은 청년들이 유혹을 받아 바알브올 우상을 경배하였다.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처녀들과의 음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민 25:1-9). 따라서 우상 숭배와 간음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 당시의 고린도 지역도 종교적인 매춘 행위가 성행하던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신 '비너스'를 섬겼으며 비너스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는 바알브올을 섬길 때 행해지던 음행이 그대로 재현(再現)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의 내용을 통하여 우상 숭배와 간음죄는 하나님께 큰 죄악이므로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다.
⭕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며 그곳 여인들과 음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징벌로 전염병이 돌게 하셨으며 그 일로 이만 삼천 명이나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민 25:1-9). 한편 그 당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민 25:9 (70인역), 필로(Philo), 요세푸스이(Josephus) 등에 의해 2만4천 명으로제시되어 천명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민 25:9의 내용이 환난의 전 기간(이틀) 동안의 희생자를 언급한 데 반하여 본절에서는 당일 하루만 계산한 것으로해석될 수도 있다.
성 경: [고전10:9]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시험하다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페이라조멘'(*)은 하나님의 선하심, 능력, 지혜 등을 그릇된 동기에서 알아보려는 인간의 생각을 가리키는 동사이다(마 4:7;행 5:9;히 3:9).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을 시험하고 구원의 능력을 시험하였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이 범할 수있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였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주를 시험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한계(限界)를 벗어났다. 즉 이교도들의 우상 축제에 참여함으로 주를 시험하였던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시험하였으며 설사 그러한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용서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관용이 있는지를 시험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상태를 경고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의미로 2인칭 복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주를 시험할 가능성이 바울을 포함한 모두에게 있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고전10:10]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원망하다가 - 본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네번째 잘못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었다. 본절은 고라의 반역과 그를 따르는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염병으로 멸망한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민 16:41,49).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 9장에도 나오는데 본절이 가나안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발했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없었으므로 전자의 경우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Godet).
⭕ 멸망시키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올로드류투'(*)는 히브리어 '함마쉬히트'(*)의 인용으로(출 12:23)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위해 온 멸망 시키는 하나님의 '천사'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원망하다가 치명적인 염병(plague)으로 멸망을 받았다(민 16:48). 바울은 이 '염병'을 출 12:23의 내용에 근거하여 '멸망시키는 자'로 해석했을 것이다(Godet).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을 반대하여 우상 축제에 참여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 축세 참여에 반대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불평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들어 경고를 하고 있다.
성 경: [고전10:11]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말세를 만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텔레 톤 아이오논'(*)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끝'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유대인 시대의 끝을 뜻하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기도 한다(Hendriksen, 마 13:39;히 1:2). 또한 '메시야 시대'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Godet). 그러나 바울이 긴 세월의 '완성'을 뜻하는 단어 '운텔레이아'(*)를 사용하지 않고, 한 세월의 '끝'을 뜻하는 '타 텔레'(*)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창조 이래 지나간 모든 시대의'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enski). 즉 그리스도가 이땅에 옴으로써 유대 민족이 율법을 통한 제한적인 구원의 길로 인도되었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시대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히 9:26).
⭕ 우리의 경계로 - '경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누데시안'(*)은 '권고하다' 혹은 '교정하다'는 뜻을 갖는 단어로(살전 5:12, 14)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당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성 경: [고전10:12]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테'(*)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바울이 앞에서 열거한 예증을 근거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충고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 선 줄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타나이'(*)는 현재 서있는 모습을표현하는 말로, 신앙이 아무런 흠없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복음에 대한 지식과 생활이 흠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넘어질까 조심하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며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이방의 침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었다(겔 12:22). 이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 중에도 자신들이 이미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에 우상의 제사에 참석하고 그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형벌로 죽은 사실을 지적하면서(5, 8절) 믿음 가운데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고전10:13]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패역한 이스라엘]
⭕ 시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는 종교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고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주로 '유혹'(temptation)이나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혹'이라는 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고(마 6:13;눅 11:4;계 2:10)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마 5:4, 10;약 1:12;벧전 4:12).
⭕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그들이 자처하는 경건의 생활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Hendriksen).
⭕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서 나오는 '시험 당함'의 의미를 '유혹'(temptation)과 '시련'(trial)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양자 택일의 개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의미가 복합된 일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Grosheide). 약 1:14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고 시련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연단하시고 훈계하신다.
⭕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 이 말씀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시험이 임할 때 우리에게 회할 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시험과는 무관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2)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피할 길도 함께 예비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관자이심을 전제한다(Hendriksen). 그런데 본절에서는 '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와 함께')이 사용되어 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직면한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성 경: [고전10:14]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페르'(*)는 앞구절과 매우 밀접하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서술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지금까지 말한 사실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보기로 고린도 교회의 상황, 즉 우상숭배 축제의 참여에 적용 시킨다.
⭕ 내 사랑하는 자들아 - 바울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뜨거운 애정을 표현하면서 바른태도를 취할 것을 급박하게 권면하고 있다(Lenski, Morris).
⭕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 '피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퓨게테'(*)는 KJV에는 '달아나라'(flee)로 번역되어 있다. 죄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도망하여 멀리 있는 것이다. 희생 제사의 축연이 곧 우상 숭배는 아니었으나 그것은 우상 승배의 경계선까지 가는 행위였으며 또한 충분히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할 가능성이 있었다(Godet). 그러기에 바울은 여기서 단순히 우상 숭배만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일조차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성 경: [고전10:15]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지혜 있는 자들에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니모이스'(*)는 1:19에서 언급된 '지혜있는'(*, 소포스)과는 달리 '지각있는', '총명한'등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지각있고 총명한 자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권면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양심을 속여가며 제물의 고기를 먹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分別)하라고 촉구한다.
⭕ 스스로 판단하라 -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지혜가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가정하였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를 바라는 심정이 포함된다.
성 경: [고전10:16]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본절부터는 '성만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 축복의 잔은 - '축복'(*, 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 우리가 떼는 떡은 - 여기에서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 경: [고전10:17]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떼어 먹는 떡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 한몸이니 -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한 몸'(*, 헨소마)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유기적인 단일체'(theorganic unity of the congregation)를 뜻한다고 한다(Grosheide).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Meyer, Godet, Osiander). 왜냐하면 16, 17절에서 한 떡을 떼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떡을 떼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의 신비한 영체(靈體)를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엡 5:23;골 1:18).
성 경: [고전10:18]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 - 이것은 혈통(血統)에 의한 민족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된 '영적인 이스라엘'(*, 이스라엘 카타 프뉴마)과 상반된다. 이로써 앞구절에서 언급한 성찬의식을 유대인의 의식과 대조하려 하고 있다.
⭕ 제물을 먹는 자들이...아니냐 -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제단 위에 태워서 드리고 남은 고기를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성전 뜰에서 나누어 먹었다(레 7:15).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주의를 다시 구약으로 돌려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물을 먹은 것과 고린도 교인들이 우상 축제에 참여하여 제물을 먹는 것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 - 제물은 제단 위에 드려지는 것이므로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또한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의 행위가 되었다(Hendriksen). 바울은 이에 비추어 이방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 고린도 교인들이 참여하여 같이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이방의 신(神)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 경: [고전10:19]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 어떤 사본에는 '우상의 제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돌로뒤톤'(*)과 '우상'에 해당하는 헬라어'에이돌론'(*)의 위치를 바꾸어 그 강조점에 차이를 두었다. 바울은 이러한질문을 통해 '우상'이든 '우상의 제물'이든 모두가 거짓임을 강조한다. 우상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8:4) 우상의 제물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의 제사는 여전히 우상 숭배였으며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성 경: [고전10:20]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 앞구절에서 우상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본절에서는 그 우상 배후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귀신임을 시사한다. 당시 헬라인들이 섬기던 신들은 쥬피터(Jupiter), 아폴로(Apollo), 비너스(Venus) 등 신화에 근거해 의인화된 신들로 실재(實在)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신화적 존재들의 배후에는 사악한 힘, 곧 사단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바울은 지적한다(Godet). 우상 자체는 결코 신(神)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후에는 살아서 활동하는 영적인 존재들이 있다(엡 2:3 ;6:12). '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이모니오이스'(*)는 '하급의 신', '잡신' 등을 의미하는'다이몬'(*)에서 나온 파생어로서 바울서신에서는 본절과 딤전 4:1에서만 나온다. 본절은 신 32:17을 그대로 바울이 인용한 것이다(시 96:5;106:37).
⭕ 귀신과 교제하는 자 - '교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누스'(*)는 '친교'(communion), 혹은 '협동'(fellowship)의 뜻으로 16절의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문맥에서도 '참예함'이라 번역되어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우상 그 자체와 친교를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둠의 세력과 결탁된 악한 영들과 짝이 된다는 뜻이다(Grosheide).
성 경: [고전10:21]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주의 잔과 귀신의 잔 - 바울이 17절에서는 '떡'을 앞에 두어 강조하고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잔'에 강조를 두어 '잔'을 앞에 두었다. 이렇게 하여 '잔'과 '떡'이 모두 중요함을 균형있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주의 잔'을 '귀신의 잔'과 대비시킴으로 명백하게 구분짓고 있다. 당시에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신전에서 향연을 베풀 때 첫번째 술잔은 '쥬피터'(Jupiter)에게 두번째는 쥬피터와 '님프'(Nymphs)에게, 세번째는'쥬피터 소터'(Jupiter Soter)에게 바쳤다(Godet). 또한 술과 고기 등 모든 음식은 우상의 이름으로 축복되고 봉헌되었다(삼상 9:12, 13). 이러한 술잔을 드는 것은 곧 악령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이고 복의 근원이 우상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그러나 성찬에서 주의 잔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 주의 상과 귀신의 상 - '주의 상'에서는 주님께서 주인이시고 그에 참예한 자들은 그의 손님이 된다. '귀신의 상'에서는 귀신이 주인이 되고 참석자들은 귀신의 객(客)이 된다(Hendriksen).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은 '잔'과 마찬가지로 서로 배타적이다. 그러므로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듯이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동시에 참여할 수 없다(고후 6:14-18).
성 경: [고전10:22]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 '노여워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젤루멘'(*)은 '질투하게 하다'(to provoke to jealousy)는 뜻으로 '질투하다'에 해당하는 '젤로오'(*)와 '곁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파라'(*)의합성어이다. '젤로오'는 좋은 의미로는 '부러워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어서(TDNT)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 묘사하기도 한다(겔 39:25). 이 '질투'는 사랑과 신뢰에 대한 배신을 당하여 유발되는 감정으로 인간이 갖는 분노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분노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다(Hendriksen). 구약 시편에서도 '질투하다'에 해당하는'카나'(*)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며(시78:58), 신 32:16, 21에서는 다른 신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게 하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 본절은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여 반어적 표현으로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이므로 그어떠한 것보다도 강하시고 그 무엇도 그분을 굴복시킬 수 없다. 본절의 질문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단정하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이미 정한 마음을 거슬려서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Grosheide). 바울의 이러한 질문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결정한 것을 확고히 하고 그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성 경: [고전10:23]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모든 것이 가하나 - 본절의 논의는 바울이 이미 6:12에서 언급한 내용의 반복이다. 본절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의 자유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자유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울은 이미 8장에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자유가 교회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게 될 때 그것은 제약(制約)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를 제시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분명한 원칙 가운데 시행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 유익한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페레이'(*)는 개인의 영적인 유익을 말하는 것으로(Godet) '이익이 되는'(beneficial)이라 번역할 수 있다(NIV). 이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6:12을 참조하라.
⭕ 덕을 세우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는 특별히 이웃들의 유익을 위한다는 의미의 '건설적인'(constructive)으로 번역할 수 있다(NIV). 바울은 본절을 통하여 기독교인은 우상의 제물을 능히 먹올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는 자신의 영적인 유익과 이웃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하여 제한되어야함을 가르친다.
성 경: [고전10:24]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남의 유익을 구하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참된 자유와 사랑의 실천 원리를 제시한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가능하며 모든 이기적인 욕심을 배척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삶이다. 타인을 위하여 자유를 사용하는 것(롬 14: 7; 15: 2; 고전 13:5 ;갈 6:2)은 공동체를 위해지켜야 할 원리이자 그리스도인이 덕을 세우는 방법이다. 인간에게 귀중한 자유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며 그러한 유익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는 참으로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요일 1:7).
성 경: [고전10:25]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시장에서 파는 것 - 당시 로마와 소(小) 아시아 지방에서는 '황제 숭배'와 '우상 숭배'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상점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일단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었다. 즉 제사에 사용되었던 제물은 신전(神殿)에 바쳐졌으며 나머지는 제사장이나 예배자들에게 제공되었는데 제사장들은 보통 많은 양의 고기를 할당받았으므로 쓰고 남은 대부분의 음식은 일반인들에게 판매되었다. 따라서 시장에 나와 있는 음식들이 제물로 쓰여졌는지 아닌지를 가리기란 어려웠다.
⭕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여기에서의 '양심'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와 같이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을 말한다는 견해이다. 강한 자는 고기를 먹더라도 자유함으로 인하여 양심의 거리낌을 받지 아니한다. 따라서 이것은 약한 자의 양심을 가리킨 것이다(Holsten, Godet). (2)이 말은 특별히 믿음이 약한 자들을 의식하여 한 말이 아니고 전반적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한 말로서, 일단 시장에 나온 고기는 양심의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으므로 그 고기가 제물인지 아닌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Hendriksen).(3) 나중에 제물인 것을 알게 되더라도 양심의 부담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묻지말고 먹으라는 것이다(Chrysostom, Erasmus). 이와같은 세 가지 견해 중에서 (1)의 견해가 가장 자연스럽게 문맥과 연결된다. 이는 29절의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라는 언급과 잘 연결된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강한 자들은 개의치 않고 사먹을 수 있겠으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우상 제물이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여겨서 사먹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였다.
성 경: [고전10:26]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본절은 시 24:1의 인용으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식사 전에 드리는 감사 기도의 형식이다. 이것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며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임을 인정하는 고백이었다.
⭕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 '충만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마'(*)는 땅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고기도 우상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제물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또한 우상 제물로 쓰여진 고기를 먹는다 해도 그 음식이 본래 의도된 목적대로 사용된 것이므로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
성 경: [고전10:27]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먹으라 - 본절에서는 식사에 초청받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시장에서 팔리게 되는 우상의 제물들은 이미 그 종교적인 의미를 상실한 것이므로 단순한 음식으로서의 의미 밖에는 없다. 따라서 음식을 먹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 없이 자유롭게 먹을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나 이교도들에게 초청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교도의 형제나 친척들이 있을 수 있으며 바울은 그런 자들과의 교제를 금하지 않았다(5: 9, 10).
성 경: [고전10:28]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 그들은 상 위에 놓여진 음식은 어떤 것이든지 양심의 가책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약한 그리스도인이 특정한 음식이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면 성도는 그것을 알게 한 자와 자신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 말을 듣고도 그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이 제물임을 가르쳐준 사람은 그 약한 믿음이 그 일로 인해 성처받아 실족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제물을 먹는 자에게 있다.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보고 우상과 교류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또는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우상 숭배자가 아닌가 하는 등의 오해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10:29]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것은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을 위한 것이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제물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약한 자들이었다.
⭕ 어찌하여 내 자유가...판단을 받으리요 - 이에 대해 혹자는 본절을 '다른 사람들의 판단으로 인해 너희 자유가 제약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너희가 옳다고 생각되는 한 너희의 자유함을 온전히 유지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Meyer, de Wette). 그러나 28절의 문맥과 연결시켜 볼 때 보다 적합한 해석은 '너희의 자유함이 다른 사람들의 비방을 듣는다면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즉 나의 자유가 남을 죄짓게 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Godet, Hendriksen).
성 경: [고전10:30]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비방을 받으리요 - '감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티'(*)는 본래 '은혜'(grace)라는 의미인데 '감사함'의 뜻으로도 쓰인다(딤전 1:12). 본절에서는 음식에 대한 축사로 사용된 용어로 보인다(TDNT). 바울은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집에 초청받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먹는다면 윈리적(原理的)으로는 합당한 것으로 비방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유익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권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최대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롬 14:21).
성 경: [고전10:31]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먹든지 마시든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이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이라는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본절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하는 기본 원리이다(골 3:17). 즉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동은 그것이 먹는 것이든 마시는 것이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4:11).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라는 말 속에는 바울이 이제까지 말하였던 '타인의 유익'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시 133:1-3).
성 경: [고전10:32]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로스코포이...기네스데'(*)는 '거침돌이 되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의 뜻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행동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요 두번째 원리는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다.
성 경: [고전10:33]
주제1: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상 숭배]
주제2: [그리스도인의 자유]
⭕ 나와 같이...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본보기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의 환경에 적응시켰다(9:18-22). 특히 그는 9:22에 기록된 대로 약한 자들을 얻기위하여 스스로 약한 자가 되었다. 바울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 아니었다(갈 1:10). 즉 바울은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전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Grosheide) 스스로를 순응시키는 겸손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아 살면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중심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갈 2:20).
성 경: [고전11:1]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10:33).
성 경: [고전11:2]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개역성경 본문에는 생략되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이제'(*, 데)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를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Meyer).
⭕ 유전 - '유전'(*, 파라도세이스)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가르침으로서, 관습과 교훈은 물론 교리를 포함한다(갈 1:14; 골2:8; 살후 2:15;3:6). 이것은 바울 자신의 교훈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복음과 같은 것이다(Grosheide).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유전'은 교리보다는 구전(口傳)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준 교회의 관습을 의미한다(Godet, Meyer). 왜냐하면 이후의 본문들이 여자가 공예배 때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 너희를 칭찬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경고와 질책의 말을 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과 교훈을 잘 지킨 데 대해 칭찬의 말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깊은 상처없이 자신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일도록 하였다. 이것은 바울서신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를 증거하며 아울러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세심한 배려를 잘 보여준다.
성 경: [고전11:3]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바울이 전한 유전을 지킨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비판받을 점이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공예배 때에 남자와 동등하게 수건을 쓰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졌다 할지라도 이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창조 원리를 통해서 논증한다.
⭕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 바울은 교회에서 공예배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 논증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세 단계의 질서이다. 본절에서 '머리'(*, 케팔레)는 '권위'를 의미하며, '유기체적인 복종'을 암시한다(Edwards, Morris, Meyer). 그리고 각 질서는 연합(union)에 의한 관계성을 나타내는데, 그 관계성은 교회의 질서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질서는 그리스도와 남자의 관계인데,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한 연합에 의해서 남자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와 남자의 연합 관계의 근거이다. 둘째 질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인데, 남자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통해서 여자의 머리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결혼 사상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즉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랑과 복종'의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엡 5:22;골 3:18, 19).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며, 아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속이 남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차이가 없다 할지라도(갈 3:28), 지상의 다른 관계들 즉주인과 종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섭리 아래에서도 여자의 복종의 위치는 지속된다(Godet, Meyer).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존재 자체의 우열이 아니라 사랑과 화합과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녀 관계 (창 3:16)는 지금도 존속(存續)하나 두 개체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격체이다. 그러나 남녀간의 성(性)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눅20:34-36). 셋째 질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부성(Fatherhood)과 그리스도의 아들됨(Sonship)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신인(神人)이며 중보자(요 14:28;고전 3:23;15:24ff.)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머리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셨다(요 5:19;고전3:23;15:28). 특히 본절에서는 세 가지 질서 중 그리스도와 남자와의 관계가 제일 먼저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서로의 관계를 형성시키는 요체가 되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11:4]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 - 본절에 나타난 기도나 예언이 행해지는 장소가 어디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혹자는 가정 예배라고 하며(Bachmann, Hofmann), 혹자는 교회의 공적인 예배라고도 한다(Grosheide, Meyer).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는 그 견해의 근거로서 8:1-11:1에서 가정 문제를 다루었으며 별다른 주제의 전환이없으므로 2절 이후에도 가정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미루어 기도나 예언도 가정 예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2절에서 살핀 바와 같이 '데'(*, '이제')가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또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기도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본절의 기도와 예언은 전체 교회를 위한 활동으로(12:10;14:3, 4,22) 공적인 예배에서 행해진 것이다. 더욱이 5절 이하에 나타난 본장 내용에서도 공적인 예배를 전제로 바울의 권면이 전개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의 공간적 배경은 공적인 교회의 예배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기도와 예언'은 본서 14장에서도 함께 나타나고 있는데, 거기서 기도는 방언을 말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다(14:14-17).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서 말하는 기도를 방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Baur,Edwards).
⭕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 본절에서 '머리'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신체적인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다(Erasmus, Beza, Bengel, Meyer). 본절의 앞에서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라고 말함으로 신체적인 머리를 말하며, 5절에서도 같은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로 해석한다(Hofmann, Maier, Osiander, Ruckert). 3절에서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본절에서 머리를 그리스도로 해석하기 위한 선언이었다고 본다. 이 두 견해는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상징을 헬라 관습처럼 이중적인 알레고리(allegory)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질서 속에서 남자에게 여자에 대한 주권을 부여했는데, 만약 남자가 여자에 대한 순종의 상징인 수건을 머리에 쓴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체적인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머리를 부끄럽게 한 남자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주권을 부여한 영적인 머리 즉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성 경: [고전11:5]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무릇 여자로서...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 바울은 본절에서 여자가 공예배시에 수건을 써야 하는 이유를 당시 관습을 통해서 논증하고 있다. 여자가 공예배에서 머리에 무엇인가를 쓰지 않으면 머리를 민 것과 같다는 것은 당시 헬라 여인들이나 유대 여인들에게 있어서 긴 머리는 여성다움을 표현하는 장식과 같은 것이었으며 짧은 머리는 매춘부와 같은 부도덕한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Grosheide,Meyer). 여기서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과 동일시된다고 본다(15절).
성 경: [고전11:6]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만일 여자가...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서는 '왜냐하면'(*, 가르)이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5절에 대한 원인절로서 여자가 공예배에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본절에서 바울의 권면은 당시 기존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 범주 안에서 공예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당시 기존 관습에서 여자가 머리가 짧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애통이나 슬픔을 표시할 때이다(신 21:12). (2) 조신(操身)하지 않거나 간음의 죄를 범했을 때이다. 그래서 매춘부는 짧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본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짧은 머리는 여자의 수치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사이에서 긴 머리는 여자다운 우아한 장식으로 여겨졌으며(Meyer), 여자의 권위와 명예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바울이 당시의 기존 관습을 인정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한 나라의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을 때 그 관습이 인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고전11:7]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본절에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 써야 하고, 남자가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창조 질서에서 찾고 있다.
⭕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하셨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리는 주권을 주셨다(창 1:26-28).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形狀)'이라 함은 여러 의미를 갖지만 그 중에 하나는 자연에 대한 사람의 '주권'을 포함한다(Edwards,Godet).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의 절정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다(시8편). 또한 남자가 '하나님의 영광'이라 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남자는 창조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위엄을 세상에 드러내며 그를 존귀케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적 지위를 소유하고, 창조주를 세상에 밝히 드러냄으로 존귀케 하는 존재인 남자가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며 '마땅히'라는 말을 사용한다. '마땅히'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레이'(*)는 '의무가 있다', '해야만 한다'는 뜻을 갖는다(ought, NIV).
⭕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 본절은 여자가 당시의 습관대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여자가 수건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절과 순결, 그리고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남자를 존귀케 하며 또한 자신을 성별(聖別)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창 1:26-28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바울은 여자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여자가 남자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한다(De Wette).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8, 9절) 결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다(Edwards.Godet, Meyer).
성 경: [고전11:8]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 본절은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라는 논증에 대한 근거로서, 여자의 기원을 말한다. '...에게서'의 헬라어 '에크'(*)는 '기원'이나 '근원'을 의미하는 전치사로서, 아담의 갈비뼈를 통한 여자의 창조를 암시한다(창 2:21).
성 경: [고전11:9]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 본절은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을 진술하고 있다. 이 진술을 통해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자신의 순결과 사랑의 복종을 표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함을 시사한다. 창 2:20에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한 창 2:18에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되어 있다. 물론 이 말씀들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성(從屬性)이나 여자에 대한 남성 우위론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혼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주권을 발휘할 수 없다(창 1:28). 그 주권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과 복종의 관계에 있을 때 온전하게 행사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고전11:10]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 '이러므로'는 본절이 8, 9절을 전제로 이제까지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임을 나타낸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창조 때에 함께 일하였으며(욥 38:7), 죄인들의 회개와 개종을 기뻐하며(눅 15:7, 10), 성도들을 보호하기도 한다(시 138:1;엡 3:10;히12:22). 또한 천사들은 사람들을 섬겨서(히 1:14) 성도들의 삶과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도록 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천사들을 인하여'(*, 디아 루스 앙겔루스)는 해석이 다양하다. (1)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지켜 보게 하기 위해서 이교도가 보낸 스파이로 생각한다(Storr, Flatt).(2) 교회의 예언자로 해석한다(Beza). (3) 가장 신실(信實)한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본다(Clement). (4) 악한 천사로서(창 6:2) 예배 때 수건을 쓰지 않은 여자를 보고 색욕을 일으킨다고 본다(Tertullian). (5) 선한 천사로서, 예배 때 함께 참석해서 지켜보는 것으로 해석한다(Hodge, Morris, Meyer, Ruckert). 이런 해석들 가운데 가장 타당한 것은 마지막 견해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선한 천사들이 예배를 지켜보기 때문에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권세 아래 있는 표'는 헬라어로 '엑수시아'(*)로서, 본문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엑수시아'가 되는 이유는 당시 헬라의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을 매춘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여자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을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여자가 자신의 머리에 이런 권세있는 표식을 함으로, 창조 때에 함께 사역하고 성도들과 함께 현존하여 예배를 지켜보는 천사들에게 창조 질서에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며, 천사들을 예우(禮遇)함과 동시에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세울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성 경: [고전11:11]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이제까지 바울은 창조 질서를 통해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며, 예배시에도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주 안에서 서로 하나인 것을 밝힘으로 여자의 지위에 대해 변호하고 있다.
⭕ 그러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렌'(*)은 앞서 진술된 내용에도 '불구하고' 라는 의미이다. 비록 본질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순결과 복종을 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이다.
⭕ 주 안에는 - 여기서 '주'(*, 퀴리오)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의미한다(Godet). 왜냐하면 12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그에게 복종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뜻이며(갈 5:6;엡 1:7)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라는 의미이다(갈3:28). 그렇다고해서 바울이 이제까지 논증한 여자의 순종성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본절은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구속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고전11:12]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가르'(*, '왜냐하면')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여자와 남자가 하나이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는 사실의 근거를 제시한다.
⭕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 '남자에게서'(*, 에크 투 안드로스)에서 '에크'는 '...에서 밖으로'라는 의미로, 사물의 기원과 근원을 표시한다. 본문은 여자의 기원이 남자임을 말한다. 이것은 8절의 반복으로서,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되었음을 상기시킨다(창 2:21).
⭕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 '말미암아'는 헬라어 '디아'(*)로서 본절은 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사람의 '일반적인 출생 과정'을 말하고 있다(Morris). 이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에크) 태어났고,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디아) 태어났다고 하는 구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과정과 질서를 바울이 염두에 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설사 바울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본절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서로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여기서 '...에게서' 역시 '에크'(*)라는 의미로서 기원과 원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과정 속에서 창조되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두 존재의 기원은 결국 하나님이다(창 1, 2장).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며, 동등하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
성 경: [고전11:13]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 바울은 이제까지 여자가 하나님께 수건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해야 한다는 논증을 마친 후, 이런 논증들이 틀렸는가를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판단하라고 권면한다. '마땅하냐'(*, 프레폰)의 의미는 바울 자신이 이제까지 논증한 것의 적절성과 타당성에 대한 것으로 당연히 수건을 써야 한다는 호소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음 절에서 여자는 긴 머리를 가지거나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이 말하고 있다고 제시하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11:14]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바울은 앞절의 질문에 대한 반어적인 답을 주고 있다.
⭕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철학자들이 머리를 길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남자들이 긴 머리를 하는 예는 극히 부분적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의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본성'(*, 퓌시스)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본질에 대한 천성적인 감각과 인지를 말한다(Meyer). 그래서 남자는 본성적으로 긴 머리를 갖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안다. (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여자의 본래적인 신체 구조를 암시한다(Godet). 이는 15절에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남자가 긴 머리를 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부끄럽게 느낄 뿐만 아니라 신체 구조상 긴머리는 여자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긴 머리를 소유한다면 그것은 남자의 권위와 명예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나실인(민 6:5;겔 44:20)이다. 그들은 머리에 삭도를 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긴 머리는 하나님에게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행 21:17-16 주제 강해 '나실인<Nazirite>제도' 참조).
성 경: [고전11:15]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 긴 머리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과 동일시되며, 그것은 하나님이 여자에게만 허락하신 권세이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갖는 것은 본성이 아름답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남자와 구별된다. 또한 긴 머리나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여자의 권위와 존엄성을 나타낸다.
성 경: [고전11:16]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예배시 수건을 쓰는 문제]
⭕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 - '변론하려는'(*, 필로네이코스)은'사랑하는'(*, 필로스)과 '싸움'(*, 네이코스)의 합성어로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기 위해서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이 이 말을 언급하는 것은 헬라인들의 국민적 특성인 변론이 무익하며 잘못된 습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 하나님의 모든 교회 - 단순히 '모든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라는 것을 부가하여 수식하는 것은 모든 교회들의 거룩성과 존귀함을 나타낸다. 이는 헬라인들이 교회의 관습에 대해서 경솔하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교회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급례'(規例)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변론하는 것이다(Calvin, De Wette, Edwards, Meyer). (2)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이다(Bengel, Godet, Maier).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의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변론하는 것이 헬라인들의 관습(custom)이라고 하나(Mey-er), 그것은 무익한 습관(habit)에 불과한 것이다(Godet). 더욱이 이제까지 바울이 공예배 때에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의 정당성에 대해 논증해 왔기 때문에 본절은 그런 논증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 경: [고전11:17]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을 우롱하는 문제]
⭕ 내가 명하는 이 일에 - '이 일'(*, 투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2-16절에서 언급한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한 논증 전체를 가리킨다(Grosheide). (2) 바울이 다음 절에 이어서 명령하는 성만찬(聖晩餐)에 대한 것을 가리킨다(Godet).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16절에서 이미 여자가 공예배시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완전한 결론을 맺었다. 따라서 '투토'를 16절 이전의 내용에 연결시킨다는 것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이어서 논할 성만찬에 대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다수의 영역본들은 본절을 '다음의 명령에서'(in thefollowing directives, NIV) 혹은 '이어지는 교훈에서'(in the followinginstructions, RSV)라고 해석하고 있다.
⭕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 본절은 공예배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점을 권하기 전에, 먼저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했던 2절의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 바울은 이제부터 명령할 성만찬의 규례를 고린도 교인들이 경솔히 생각하고 행함으로 범죄하였으며, 교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책망하려고 한다.
⭕ 이는 저희의 모임이...해로움이라 - 본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하지 않은 이유를 드러낸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은 편당(偏黨)을 이루어서(19절)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22절) 주의 만찬에 불경하게 참예하였기 때문에 유익이 되지 못하였다.
성 경: [고전11:18]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을 우롱하는 문제]
⭕ 첫째는 - '첫째'(*, 프로톤)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처망하는 논증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나 '둘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간에 분분하다. (1) '둘째'에 해당되는 사항이 없다(Hofmann, Morris). 따라서 '프로톤'은 '첫째로'(firstl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주로'(principally)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프로톤'만 본문에 사용된다면 타당하지만, 본문에서는 '멘'(*, '진실로')과 더불어 사용되고 있기에 타당치 않다(Godet). (2) 34절 내용으로 이해한다(Edwards, Grosheide). 왜냐하면 34절에서 바울이 더 하고 싶은 말들을 가서 하겠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은 둘째 책망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에는 구체적인 책망의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책망하기를 원했다면 아마도 책망의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이다(Godet). (3) 20절에서 둘째 책망이 시작된다고 본다(De Wette, Olshausen, Ruckert). 그러나 20절의 '그런즉'(*, 운)은 새로운 내용을 말한다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Grosheide), 앞의 내용과 지속적이고 확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 또한 적절치 못하다. (4)12-14장을 둘째 책망으로 이해한다(Heinrici, Meyer, Osiander). 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에 대해 소홀히 하는 문제를 책망하고, 12:1에서부터는 새로운 주제, 곧 은사의 문제에 대해 책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은 12 :1에서 '데'(*, '그러나')를 사용해서 11장과 연결된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주제로 화제를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 진다는 것이다(Meyer). 이상의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 교회에 - '교회에'(*, 엔 테 엑클레시아)에서 관사 '테'(*)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삽입되어 있으나 고대 사본(*, A,B,C,D)에는생략되어 있으므로 관사 '테'는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관사 '테'가 없을 경우, '교회에'는 '모임의 장소'가 아니라 '모임'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장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Edwards, Godet).
⭕ 분쟁 - '분쟁'(*, 스키스마타)은 본서 1:10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그것은 본절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음 절에서 '편당이 있어야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의 분쟁은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서 생겨난 대립을 가리킨다.
⭕ 대강 믿노니 - 바울은 들었던 분쟁에 관한 소문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 소문들의 진위(眞僞)를 가려볼 때 분쟁의 사실들이 분명하기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소문의 진위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성 경: [고전11:19]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을 우롱하는 문제]
⭕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 '편당'(*, 하이레세이스)은 어원적으로 '선택'(choice) 혹은 '좋아함'(preference)에서 유래된 것으로, '단체'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차별'(differences, NIV) 혹은 '파벌'(fractions, RSV)을 가리킨다. '있어야'(*, 데이)는 존재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을 의미한다.
⭕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 본절은 교회 내에 편당이 존재하는 목적을 긍정적으로 나타낸다. 교회 내에 존재하는 견해의 차이와 파벌은 때때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지만, 그런 위기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진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며, 그 위기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성 경: [고전11:20]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을 우롱하는 문제]
⭕ 그런즉 - '그런즉'(*, 운)은 앞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 앞절과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앞절의 편당은 주의 만찬에서 비롯된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우크 에스틴 퀴리아콘 데이프논 파게인) -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는 주의 만찬을 먹을 의도가 없이 모였다는 해석이 있다(Alford). 그러나 29, 30절은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해서 함께 모였다"는 것을 암시하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2) "너는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해석이 있다(Meyer).이 해석은 '에스틴'(*, '...이다')에 부정사(infinitive)가 뒤따라 올 때 가능하다. (3) "이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해석이 있다(De Wette, Maier). NIV에서도 "너희가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다"(it is not Lord's Supperyou eat)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세 견해 중 첫째 견해는 본문상의 내증(內證)에 위배되기에 타당치 않지만 나머지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당시 주의 만찬은 '애찬'(love-feast)과 '성만찬'(Eucharist)이 결합된 형태였던 바, 교인들은 집에서 형편에 따라 먹을 것을 싸가지고 교회에 모여서 공동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었다(행 2:46;고후 8:14). 이런 애찬 후에 성만찬이 행해졌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애찬에서부터 교제를 나누지 않고 먼저 먹고 취함으로(21절)애찬과 성만찬을 일반 식사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만찬이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한편 '주의'(*, 퀴리아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만찬을 제정(制定)하고, 만찬에 초대하며 주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 경: [고전11:21]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을 우롱하는 문제]
⭕ 이는 먹을 때에...어떤 이는 취함이라 - '이는'(*, 가르)은 앞절에서 바울이고린도 교인들이 행한 만찬을 부정한 이유를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함께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먹고 마심으로' 만찬을 통해 참된 교제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거룩한 주의 만찬을 무시한 것이었으므로 바울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이 나눈 만찬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책망한 것이다.
성 경: [고전11:22]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을 우롱하는 문제]
⭕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에서 행한 모습들은 마치 집에서 먹는 일반 식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만찬에 그런 식으로 참여할려면 집에 가서 하라고 책망한다.
⭕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의 모임으로서(15: 9;빌 3:6), 그 모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육신적인 만족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에게 있어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 '빈궁한 자'는 단순히 '가난한 자'의 차원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부자들은 보이는 것에만 치중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백성을 분리하고 구별지어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열등감과 굴욕감에 빠지게 하였다.
성 경: [고전11:23]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 본절의 선언을 통해서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성만찬에 대해서 이미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성만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그런 죄를 범하였다고 변명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1) 바울이 성만찬 규례를 그리스도께 받았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성만찬의 규례가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이 성만찬 규례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인가에 대해선 반대 의견이 있어 왔다. 반대의 이유는 본절의 '주께'(*, 아포 투 퀴리우)에서 직접적인 전달을 의미하는 전치사 '파라'(*)를 사용하지 않고 간접적인 전달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바울이 사도 전통(傳統)이나 사도들에게서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Beza, Hofmann).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아포'가 단순히 간접적인 전달의 경우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저에게서 듣고'(*, 앞 아우투)라는 말을 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요일 1:5). 또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아포칼립세오스) 것이라고 말할 때 '아포'를 사용하였다(갈 1: 12). 이로 보아 성만찬의 규례는 바울이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으로서(Bengel, Calvin, Meyer, Olshausen), 바울이 전한 성만찬 규례의 권위의 확고성(確固性)을 내포한다.
⭕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 '잡히시던'(*, 파레디데토)은 예수께서 유다에 의해 배반당한 것을 의미한다. '파레디데토'는 '파라디도미'(*, '내어주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그 배반이 갑작스런 충동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계획의 성취임을 시사한다. 예수는 배반 당하시던 그날 밤에 유다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성만찬 규례를 제정하셨다.
⭕ 떡을 가지사 - '떡'은 성만찬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아니라, 유월절 식사 과정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였기 때문에(마 26:17-19; 눅 22:7-20) 아마도 무교병이었을 것이다(Godet, W.H.Mare).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만찬의 의미는 '떡'이나 '포도주'가 어떤 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Grosheide).
성 경: [고전11:24]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성만찬 규례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본서에 나타난다(23-25절;마26:26-29;막 14:22-25;눅 22:17-20). 본서에 나타난 성만찬 규례는 세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예를 들면, '기념하라'(24절; 눅 22:19), '새언약'(25절;눅22:20) 등이 그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마도 누가가 바울의 추종자였으며,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하였던 때문일 것이다(Edwards).
⭕ 축사하시고(*, 유카리스 테사스) - 본절에서는 누가복음의 경우와같이(눅 22:19) '사례하다'(to give thanks)의 뜻을 가진 '유카리스테오'(*)가 사용되었으나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사용된 것은 '축복 하다' 혹은 '찬양하다'의 뜻을 가진 '율로게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양자가 구분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축복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 관습의 일부인 봉헌(奉獻) 의식을 반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식을 통해서 일반적인 떡을 성만찬의 떡으로 바꾸셨다(Grosheide).
⭕ 떼어(*, 에클라센) - 이는 '떡을 쪼갠다'의 의미로 공동 식사의 한 모습이다. 떡을 떼는 행위는 유월절 식사의 경우 애굽에서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며, 성만찬의 규례에서는 고난을 당해서 찢길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상징한다.
⭕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 개역성경에는 '찢긴'(*,클로메논)이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사본상의 문제이다. 고대 사본(*, A,B,C)에는 이것이 빠져 있기때문에 혹자는 이것을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Hort, Lachmann, Tischendorf). 혹자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이나 비잔틴 사본에 기록 되어 있음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삽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De Wette, Hofmann, Reiche). 문맥상 그것은 '떼어'와 연관되는데 이유는 그리스도의 '찢긴 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찢긴'을 삽입하는 것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너희를 위하는'은 성만찬의 목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직접 행한 것임을 시사한다.
⭕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이것을 행하여'는 성만찬이 영구한 제도로서 사도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까지도 영원히 행하여야 할 규례임을 시사한다. '나를 기념하라'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며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다(눅 22 :19). '기념하라'는 '상기시켜 기억하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이 '유월절 규례를 기념하라'(출 12:14)신 명령을 상기시킨다. 이런 그리스도의 명령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규례를 계속 지켜왔던 것처럼 성만찬 규례를 기억하고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신 명령은 새로운 성만찬 규례를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아마도 "너희가 성만찬을 기념할 때, 어린양의 피로 조상을 구원한 것을 기억하지 말고 너희를 구원할 나와 내 희생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Godet, 눅22:1-23 주제 강해 '성만찬과 성찬식' 참조).
성 경: [고전11:25]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 식후에 - 본절은 만찬이 다 끝난 후가 아니라 떡을 다 먹은 후를 의미한다.
⭕ 이와 같이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잔을 가지사 사례 하시고'로 성만찬의 두번째 의식을 언급한다(마 26:27; 막 14:23). 그러나 누가복음과 본서에서는 '이와 같이'라는 어구로 그와 같은 축사의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 이 잔은 - 혹자는 잔이 없이는 포도주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본문 '잔'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Grosheide). 그러나 본문에서의 '잔'은 잔에 담겨진 '포도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진술함으로 포도주 마시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 본절은 누가복음의 기록과 동일하다(눅 22:20). 단지 누가복음에는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가 부가되어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막 14:24)고 되어 있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혹자는 바울이 원시 사도 교회(Primitive ApostolicalChurch)에서 사용되었던 원형(原形)을 말한다고 주장한다(Holsten).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표현은 유대계 기독 교회에서 사용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Godet). 한편 본절의 '새 언약'은 '모세의 언약'(출 24:8)과 대조된다. 모세의 언약에서는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이 다섯 단계이다(출 24:3-11). (1) 언약 체결을 위한 준비 작업.(2) 여호와의 언약서 낭독. (3) 백성들의 준행 서원. (4) 언약의 피를 뿌림. (5) 70인 장로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체결 완료를 의미하는 공동 식사를 나눔. 이런 과정을 거친 옛 언약은 희생의 피를 필요로 하며 피를 뿌림으로 언약 당사자들간의 책임을 인식하게 하였고 이런 언약 의식은 매년 유월절 만찬 때 상기(想起)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세의 옛 언약은 애레미야에 의하여 선포된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다(렘31:31-34). 예레미야는 모세의 언약을 이스라엘이 파괴하였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계를 맺고, 모든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 죄를 기억지 않게 하겠다는 내용임을 소개한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예수의 '새 언약'에 대한 예표로서, 더 이상 동물의 희생의 피로 맺는 언약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영원히, 단번에 이룬 새 언약임을 암시한다. 본절의 '새 언약'은 바로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새 언약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서 성만찬을 통해 이를 기념한다.
성 경: [고전11:26]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 하면')가 생략되어 있으나 헬라어 사본에는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가르'를 보존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1) 본절이 예수의 강화(講話, discourse)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Ewald). (2) 22절의 '칭찬하지 아니하노라'의 이유로 생각한다(Hofmann). (3) 앞절의 '나를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다(Godet, Hodge). 이런 견해들 중 마지막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이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성만찬을 행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오실 때까지'(*, 아크리스 후 엘데)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기념하는 행위'는 주가 재림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처럼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지칭하는 것이나, 그것은 단순히 기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대한 확신이다(Edwards, Godet). 한편 '전하는 것이니라'(*, 카탕겔레테)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행위'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한다(Edwards). '말'로 알리는 것보다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바울이 역설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2) '카탕겔레테'가 '알리다' 혹은 '선포 하다'라는 뜻으로, '말'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두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인 죽음과 부활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고백과 대중적인 선포는 물론 성만찬 의식을 통해서 증거하고 대대로 전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Godet).
성 경: [고전11:27]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바울의 관심은 성만찬의 규례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는 성만찬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23-25절)과 자신의 견해(26절)를 밝히고, 이런 규례를 고린도 교인이 처했던 상황에 적용시켜 고린도 교인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Grosheide).
⭕ 그러므로(*, 호스테) - 이것은 이제까지 말한 성만찬의 규례를 적용시켜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나타낸다.
⭕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 '이나'(*, 에)는 '그리고'(and)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or)을 의미한다(Godet, Grosheide, Meyer).그것은 떡을 먹거나 잔을 마시는 두 가지 행위 중에 어느 하나라도 합당치 않게 행하면 범죄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당시의 성만찬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식사 동안에 떡을 먹고 그 후에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떡을 합당하게 먹는다 할지라도 잔을 합당치 않게 마실 경우도 있다. 반면에 카톨릭은 본절의 '에'를 근거로 해서 둘 중의 하나만을 행하고도 성만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Godet). '합당치 않게'(*, 아낙시오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회개하지 않은 악한 양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다(Olshausen, Theodoret). (2)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참여하는 것이다(Billroth, Chrysostom). (3)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Luther). (4) 자기 성찰(self-examination))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Bengel). (5)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기념하지도 않고, 그를 경외하지도 않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다(Flatt). (6) 죄인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함과 감사함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Godet). 이런 견해들 중 (5)와 (6)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들간의 교제로 생각지 않고 단지 헬라인의 관습처럼 즐거운 연회로 행하였기때문이다.
⭕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했을 때 범죄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그래서 카톨릭과 루터교는 본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 임재를 의미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상징'에 대한 범죄는 곧 상징이 나타내는 대상에 대한 영적(靈的) 범죄이기에(Godet, Meyer) 그들의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성 경: [고전11:28]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보다 진보된 내용을 다루려고 하는 것을 암시한다. 즉 성만찬을 합당하게 참여하기 원한다면 해야 할일이 있다는 의미이다.
⭕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 '살피고'(*, 도키마제토)는 예수의 인격에 관한 자신의 마음 가짐을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Godet). 그래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감사함으로 기념하며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지에 대해서 스스로 살펴야 함을 의미한다.
성 경: [고전11:29]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앞절에서 밝힌내용, 즉 자기 자신을 살피고 먹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 '분변치'(*, 디아크리논)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혹자는 물질적인 떡과 주의 몸을 구별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한다(Beza,Grosheide, Hofmann). (2) 혹자는 떡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라 주장한다(Godet).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성별된 떡과 포도주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죄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감사하며 동참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만찬의 가치와 의미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마'(*)는 '심판'을 의미한다(Judgment, NIV).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한 심판을 의미할 경우에는 관사 '토'(*)가 부가된다(Godet, Meyer). 더욱이 다음 구절들에서, 바울이 합당치 못한 성만찬의 참여에 대한 결과로서 일시적인 심판을 생각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30, 31절). 그러나 회개와 개종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징계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전조(前兆)이다(32절).
성 경: [고전11:30]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 이러므로 - 이 말은 본절이 앞절에 대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 '약한 자'(*, 아스데네이스), '병든 자'(*, 아르로스토이), '잠자는 자'(*, 코이몬타이)를 이해함에 있어서 혹자는 영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한다(Eichhorn, Krause, Morus).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라면 '약한 자'나 '병든 자'는 의미상 같은 것이기에 꼭 그렇게만 해석되지 않으며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나타내는 용어이다(Edwards). 따라서 오히려 본절은 성만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함이 영적 병약함과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연약함과 죽음까지도 초래하게 됨을 시사한다.
성 경: [고전11:31]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사본에 따라 '데'가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 A,B,D), '가르'(*, '왜냐하면')로 대체(代替)되기도 한다(C 사본). 그러나 '데'가 더 신빙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Godet) 문맥상으로도 알맞다. '데'는 논쟁에 귀한 논리적인 진보롤 나타내는 것으로, 성만찬과 하나님의 징계 문제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살폈으면'(*, 디에크리노멘)은 29절과 상관성을 갖는데, 그것은 주의 몸과 피의 가치를 분명히 이해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가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Godet). '판단을 받지'(*, 에크리노메다)는 29절의 '죄를 먹고 부시느니라'와 연관된다. 29절에서 '죄'가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본절에서도 '판단'은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한다.
성 경: [고전11:32]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에 대한 대조적인 개념을 소개한다.
⭕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 본문에서도 '판단을 받는 것'과 '징계를 받는 것'은 동일시 된다. 본절의 '하나님의 징계'는 잘못한 자식을 회개케 하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수단이다(딤전 1:20 ;딤후 2: 25;딛 2:12;히 12:6).
⭕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징계는 영원한 심판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심판의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Edwards). 한편 바울은 앞절과 본절에서 세 가지 용어를 통해 세단계의 '판단'에 대해 논증한다(Godet). 첫 단계는, '디에크리노멘'(*)으로서(31절)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크리노메노이'(*, '판단을 받는 것')로서(32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세상과 함께 정죄(情罪)받지 않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셋째 단계는, '카타크리도멘'(*, '죄정함을 받은')으로서(32절) 마지막 심판때에 영원한 심판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고전11:33]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 그런즉(*, 호스테) - 이것은 이제까지 성만찬에 대해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임을 시사한다.
⭕ 형제들아 -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권속(眷屬)들을 향해 자주 사용하는 애정어린 표현이다. 바울은 본장 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책망과 유사한 강력한 권면을 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권면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애정어린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Godet).
⭕ 서로 기다리라 - '기다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데케스데'(*)는 두가지로 해석된다. (1) '환영하다'(to welcome) 혹은 '용납하다'(to receive). (2) '기다리다'(to wait). 혹자는 전자로 해석해서 '만찬에 서로 용납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Hofmann, Ruchert). 그러나 본절에서는 후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Edwards, Godet). 왜냐하면 본절은 21절의 '프롤람바네이'(*, '취함이라')와 대조되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11:34]
주제1: [올바른 공적 예배와 성찬]
주제2: [성만찬에 대한 교훈]
⭕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 본절은 22절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것은 어떠한 형편의 사람이든지 간에 먹고 마시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갖고 성만찬에 참여하려면 집에 가서 먹으라는 의미이다.
⭕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허기를 메우려고 성만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잘못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29-32절) 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만찬의 목적을 분명히 이해하고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 '그 남은 것'(*, 타로이파)은 성만찬 외에 다른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에 대해서 지금 말하지 못한 세부적인 사항을 의미한다(Godet, Grosheide). 본절은 성만찬의 규례에 대한 설명을 맺으며 바울이 부언하는 내용이다. '귀정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탁소마이'(*)는 '정돈하다'라는 의미하며(Edwards,Hodge) 아울러 사도 바울의 권위를 암시한다. 바울은 사도로서 모든 규례를 제정하고 정비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성 경: [고전12: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의 헬라어 '페리'(*)는 고린도 교인들의 서면(書面) 질문에 답하는 말이다. 이는 이미 독자들이 제기된 문제점에 관하여 바울이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여기서 바울이 '신령한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신령한 것'의 헬라어 '프뉴마티콘'(*)이란 단어의 성(性)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1) 혹자는 14:37에서 '프뉴마티콘'이 '신령한 자'(*, 에 프뉴마티코스)로 사용되기 때문에 본문의 '프뉴마티콘' 역시 남성 명사로서 '신령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본다(Hofmann, Edwards,Holsten, Heinrici). (2) 혹자는 14:1에서와 같이 '신령한 것'(*, 타 프뉴마티카)이 중성 명사로서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Calvin, Luther, Meyer, Godet, Lenski). 본문의 '신령한 것'에 대한 성(性)이 불확실하며, 또한 (1),(2)의 내용이 서로 일맥 상통하므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 필요는 없으나 본문의 문맥과 주제상 '신령한 것'의 의미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원치 아니하노니 - 본문의 헬라어 '우 델로'(*,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바울적 표현으로 친근한 어구인 '아델포이'(*, '형제들이여')를 수반한다(10:1;살전 4:13). 바울의 희망을 분명히 천명(闡明)하면서도 그 대상에 대하여는 친근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적인 문제로 비화될 여지를 최소화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의 목적과 그 기원에 대하여 그리고 은사의 다양성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 초래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 경: [고전12:2]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 본절의 '이방인'은 '이교도'(Heathen)를 의미한다. 원래 고린도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으로 이방의 우상 종교를 좇아갔던 과거상태를 상기시켜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있는 현재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은 성령의 현현(顯現) 이전과 이후를 이방인이란 단어로 분명히 구별짓고 있다.
⭕ 말 못하는 우상 - 본 구절은 이방 종교의 허구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현으로 우상은 생명이 없어서 사람의 요구에 반응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수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 섬겼던 우상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이런 헛된 우상을 섬긴 것은 우매함과 세속적 탐심의 결과이고, 그 상태는 비극적인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 '끄는 그대로'의 헬라어 '호스 안 에게스데'(*)에서 '호스 안'은 반복의 개념으로 쓰이는 코이네 헬라어의 관용어로서 '끌림을 당할 때마다'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끌려갔느니라'의 헬라어 '아파고메노이'(*)는 아고(*, '내가 인도하다')의 미완료 수동태 분사이다. 이는 과거의 고린도 교인들이 헛된 우상의 요구대로 이끌려 자기의 판단과 결정과는 무관하게 비인격적인 숭배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성 경: [고전12:3]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저주할 자'의 헬라어 '아나데마'(*)는 '신에게 드려진 것'(눅 21:5) 혹은 '신의 저주아래 놓인 것' 등의 의미이다. 본래 이 단어는 신성한 장소에 저축된 것을 의미하였다가 신에게 바쳐진 것을 뜻하게 되었고, 바쳐진 것은 바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잃어진 것이므로 '멸망된 것' 곧 '저주받은 것'의 뜻이 되었다. 바울은 저주의 대상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16:22;롬 9:3;갈 1:8). 본절에서 바울은 '저주받은 예수'(*, 아나데마 예수스)와 '주 예수'(' ,퀴리오스 예수스)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2절에서 이교도에 대하여 언급하고나서 본절에서는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는 부류들과 기독교적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예수를 주 예수로 고백하는 자들을 비교하여 핵심에 접근하고 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예수'라 지칭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인간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후 인류 역사에 종속되어 자발적인 삶을 영위하시다가, 그의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한편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령으로'(*,엔 프뉴마티 하기오)라고 정한 것은 고후 11:3, 4에서 제시한 것처럼 '다른 예수','다른 영' 그리고 '다른 복음'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른 예수'란 바울의 증거에 위배되는 것으로 바울은 예수를 참 하나님(Vere Deus)인 동시에 참 인간(Vere Homo)으로서 이해하였다. 본장 10절에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언급한 것도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다른 신앙 고백 내용을 가진 '다른 영' 때문일 것이다.
성 경: [고전12:4]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은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톤'(*)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바울 서신에 16회 나온다. 바울은 이 단어를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어떤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 여러 가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이레세이스'(*)는 원래 '분배' 혹은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를 여러 갈래 나눈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본장 11절에서는 분사형 '디아이룬'(*)으로 사용되어 '나눠주다'라는 의미로 번역됨으로써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5, 6절의 '여러 가지'에도 이와 동일한 헬라어가 사웅되었다.
⭕ 성령은 같고 -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어떤 특정한 것들 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성 위에 한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분쟁이나 다툼 따위의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성 경: [고전12:5]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직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온'(*)는 '디아코네오'(*, '섬기다', '봉사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한다. (1) 이 말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섬김'을 뜻하고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봉사를 가리킨다. (2) 보다 특별한 의미로는 '어떤 의무의 수행'을 뜻하여 사도들이나 전도인들이나 마가 같은 조력자들이 맡은 책무를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3) 때로는 이 단어가 연보(捐補)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롬15:31; 고후 8:1ff.). 연보는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에서 나오는 참된 활동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의 직임은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염두에 두고 언급된 것이다.
⭕ 주는 같으며 - 직임은 개개인의 공명심으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主)'를 위한 것이다. 성도가 그 직임에 따라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 속에서 봉사하는 것은 곧 주를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임의 열등성 또는 우월성을 따지고 그에 치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잊은 처사이다.
성 경: [고전12:6]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역사는 여러 가지나...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역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게마톤'(*)은 '에네르게오'(*, '활동하게 하다')에서 온 말로 헬라 세계에서는 사람의 사역이나 세상에 감도는 우주적이거나 물리적인 힘을 가리켰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사단적인 힘을 지칭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TDNT).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역하시는 작용을 의미한다. 바울은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은사를 일관성 있게 주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Mare).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성령의 은사는 성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호 은사의 상이성을 인정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은사를 온전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성 경: [고전12:7]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바울은 8-10절에서 은사의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여러 은사를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대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려 하심이라'의 헬라어 '프로스'(*)는 목적이나 의도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본구절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은사의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 성령의 나타남 - '성령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프뉴마토스'(*)는 소유격으로서 본 구절에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주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1) 주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성령께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하고 (2) 목적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사람이 성령의 내주(來週)하심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된다. (2)의 견해는 고후 4:2의 '진리를 나타냄'(*, 파네로세이 테스 알레데이아스)과 연관지어 설명된다(Meyer, Hofmann). 하지만 '성령'은 인격인 반면 '진리'는 비인격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Godet, Edwards). 따라서 (1)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은 인격자로서 은사를 주시고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증거가 은사임을 보여준다.
성 경: [고전12:8]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 바울은 본절에서 성령과 연관지어 전치사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먼저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는 '...에 의해'(by means of)라는 뜻으로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성령의조명(照明)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는 '...의 기준에 따라'(according to the standard of)라는 뜻으로 '지식'과 관계되어 '지식'이 성령의 기준 내지 결정에 좌우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 지혜와 말씀을...지식의 말씀을 - 혹자는 '지혜'(*, 소피아)와 '지식'(*, 그노시스)이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만, 바울은 그들을 구별하고 있다. 본문에서 벵겔(Bengel)에 의하면 '지혜'(소피아)는 이론적인성질을 내포하고 '지식'(그노시스)은 실제적인 성질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는 실제적인 적용을, 후자는 이론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특히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고후 10:5)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이다. 결국 이 은사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결합되어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사용된다(고전 2:6-13; 엡1:8, 17; 골 2:3). 혹자는 '지혜'는 '사도'와 '선지자'를 만들고, '지식'은 '교사'를 만든다고 한다(Godet). 이 점을 수용한다면, '지혜의 말씀'은 본서 28절에 나오는 직임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것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직임과 관련되고, '지식의 말씀'은 그 다음의 직임인 '교사'의 직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견해는 '지혜'와 '지식'을 '실제'와 '이론'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첫번째와 두번째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성령과 연관지어 말한 것은 '구원의 계획'(Heilsplan)이나 '구원의 내용'(Heilsgut)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 이해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고전12:9]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 앞 구절에서는 '성령'을 제한하는 전치사가 '디아'와 '카타'였는데 본절에서는 '엔'(*, '...안에', '...로')이 사용되었다. 전치사 '엔'은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영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어서 '디아'나 '카타'를 사용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성령께서 행동의 주체자임을 표현한다(롬9:1ff).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롬 1:17; 3:22) 본절의 '믿음'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제한된 은사를 의미한다. 이는 바울이 8:2에서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은사로서의 믿음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Godet). 본절에서의 '피스티스'(*, '믿음')는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발휘하는 능력의 개념을 내포한다. 믿음의 능력은 예언하고(히 11:3), 기적을 행하는(마 21: 21; 고전 13:2)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일반적으로 '피스티스'는 모든 은사들의 기본이며, 이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은사는 보다 영향력있게 행사(行使)될 수 있다.
⭕ 병고치는 은사 - '병 고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야마톤'(*)은 복수 명사로서 여러 종류의 질병이 치유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타'(*) 역시 복수 명사로 은사가 각기 다른 종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는 단지 사람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자 마음과 정신의 치료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성 경: [고전12:10]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 능력 행함 - 이 은사는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하여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C.P.Wagner). 이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 더 포괄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행 5:1ff.), 박수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든 일(행 13:11)등과 같이 마귀를 대적하며, 그 추종 세력을 축출하는데 사용되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 행함으로 나타나는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방편이 되며(Calvin)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계시하는 수단이 된다.
⭕ 예언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테이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로 하나님에 의해 수여된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단어는 '말을 토하여 내다', '미리 경고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는 의미를 가진 '프로페튜오'(*)와 같은 어군으로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예측되는 상황과 현재 일어난 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언'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서 베푸신 가장 큰 은사 중의 하나로 보았다. 예언은 교회를 신앙의 기초 위에 세우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을 설명해 준다. 신약 성경에서 '예언'이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계시가 완결된 현재에 있어 '예언'이란,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이해하여 가르치며 현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계 1:3).
⭕ 영들 분별함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톤'(*)은 악한 영들을의미하며, '분별함'의 헬라어 '디아크리세이스'(*)는 '구별', '인식', '가려냄', '심판' 등의 의미를 지닌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가 많았으므로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요일 4:1). 하지만 당시에는 기록된 말씀이 없었으므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했다. 이 은사는 교회를 거짓선지자들의 미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發露)였다.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어떤 현상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인 영향력을 간파하는 능력으로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았고(행 5:1-10), 마술사 시몬의 마음이 '악독하고 불의한 영'에 얽매여 있는 것을 간파하였다(행 8:23). 이러한 은사를 활용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어떤 행위가 신적인 것인지 혹은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단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식별할 수 있다.
⭕ 각종 방언 말함 - '각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는 '혈통', '민족','종류' 등을 의미하므로 방언의 종류가 여러 가지임을 가리키고 각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음을 시사한다. 방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았던 은사 가운데 하나로 교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형태는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였다.
⭕ 방언들 통역함 - '통역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르메네이아'(*)는 '번역', '해석'을 뜻하며, 이 단어는 신약에서 본절과 본서 14:26에만 나온다. 이 특별한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경우에 이 방언에서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이 방언을 통역할 사람이 있도록 성령의 통역 은사를 구해야 할 것이다(14:13). 그런데 바울은 방언이 그 자체로는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으므로 자제할 것을 권면한다(14:28). 본절에서도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함의 은사가 언급되는 것은, 은사가 교회에 유익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성 경: [고전12:1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은사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기원을 가진다. 6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한 데 반해서 여기서는 성령의 행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을 발생(發生) 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은사들을 자기들의 관점에 비추어 비교하여 열등 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질필요가 없다.
성 경: [고전12:12]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 몸은 하나인데...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몸'과 지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비유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기체(有機體)임을 이해시킨다.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다페르'(*,'just as', '꼭...처럼')는 롬 12:4처럼 유사 비교를 이끌어 내고 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크리스토스)는 단지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De Wette) 단순히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Chrysostom, Estius, Meyer).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교회를 몸으로 하는 인격적 주체자로서 간주한다(Edwards). 몸은 단일체이면서도 많은 지체와 더불어 유기적 연관성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완전성과 통일성을 이룬다.
성 경: [고전12:13]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그리스도 안에서 혈통적인 구별이나 신분의 구분에 상관없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성령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됨'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하나되지 못함에 대한 권면일 수도 있다(엡 4:4-6절). 바울은 '성령'(*, 프뉴마)과 '세례'(*, 밥티스마)와 '몸'(*, 소마)을 하나의 관계로 본다. 즉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 곧 하나된 영적 유기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성령으로 세례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어떤 외적인 방법인 물로써 변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적으로 작용하여 변화시키심을 의미한다.
⭕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는전술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설명을 이끄는 접속사로 쓰였다. 즉 성령으로 세례받은 것을 '마시다'는 표현으로 보충한다. 우리의 주 예수께서도 성령을 받아 들이는 것을 가리켜 '생수를 마신다'라고 표현하신 바 있다(요 7:37-39). 이제 성령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모두 다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분열과 다툼 따위를 종식(終熄)시키고, 공동 사역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성 경: [고전12:14]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 12절에서 사용했던 상징적인 표현을 다시 사용하여 교회가 갖는 독특한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비유로 영적인 몸인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기능과 역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12절에서는 지체가 많다는 점에 역점을 두었다면, 본절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고전12:15,16]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바울은 몸의 지체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손과 발을 대비시키고 눈과 귀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비중있고 가치있는 손과 눈에 비해 덜 눈에 띄고 덜 사랑스런 발과 귀가 불평하는 것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으려 한다. '발'과 '손' 그리고 '귀'와 '눈' 등은 은사가 각기 다른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우월 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에 대해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교회의 건덕상 무익한 것이다. 영향력이 적고 보잘것없는 은사라 할지라도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귀중하다.
성 경: [고전12:17]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 만일 온 몸이 눈이면...냄새맡는 곳은 어디뇨 - 본절은 15, 16절에 대한 연속적인 설명으로 교회의 각 구성원의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바울은 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이해를 용이하게 하고 있다. 온 몸은 듣는 곳이 없이 보기만 해서도 안되며, 냄새 맡는 곳이 없이 듣기만 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지체의 다양성은 곧 몸의 효용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지체간의 관계 또한 상호 대립과 불평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성 경: [고전12:18]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원하시는 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델레센'(*)과 '두셨으니'의 헬라어 '에데토'(*)는 부정 과거로서 하나님의 계획과 창조 행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도록 지으셨다. 이렇듯 각 지체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에 근거하는 것으로 바울은 간주한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완전하므로 각 지체들이 존재하는 자리가 완벽한 것이고 각 지체에게 귀중한 역할이 있음을 본 구절은 보여준다. 따라서 누구든 불평하거나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성 경: [고전12:19]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 17절의 내용에 대한 재설명이요 부연이다. 모두들 자기가 좋게 여기는 지체만 된다고 가정하면 몸은 정상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한 불구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은사를 발전하여 전체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갖는 독특한 역할을 잘 수행하여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설 것이다.
성 경: [고전12:20]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 바울은 12절에서 몸의 단일성에서 지체와 다양성으로 전개시켜 나가다가 본절에서는 다시 다양성에게 단일성으로 회귀(回歸)하고 있다. 역시 강조점은 '하나'인 몸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각 지체들의 은사는 다양할 수 있지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통일된 교회로 존재한다.
성 경: [고전12:2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 많은 지체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각 지체는 그 우선 순위나 중요도가 덜하다고 하여 그 존재 가치마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에 붙은 모든 지체는 한 몸을 이루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고 한 지체라도 없으면 다른 지체들이 자신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성 경: [고전12:22]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 더 약하게 보이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테네스테라'(*)는 '약한', '병든' 등을 의미하는 말로 본절에서는 중요도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간주(看做)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은 원문상 강한 부정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지체들이 각각의 고유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성 경: [고전12:23]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그리고 '부족한 지체'(24절)는 앞절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를 다른 표현으로 설명한 동일한 의미들이다.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지체 상호간에는 우열이나 차등이 있다고 간주될 수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지체들을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상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통치 원리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성 경: [고전12:24]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존귀를 더하사 - 바울은 18절에서 언급한 대로 몸의 형성(形成)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되었다고 반복한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몸의 조화도 완벽하다. 따라서 몸과 그 몸에 붙은 모든 지체들은 함께 존귀함을 얻는다.
성 경: [고전12:25]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의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의 지체들이 상호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 관계임을 보여준다. 교회의 통일성이란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성도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한 몸으로 세우신 의도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다.
성 경: [고전12:26]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 지체들은 서로 공동체 의식과 공동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각각 독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체적인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의 유기체로 지음받은 사람의 몸이 갖고 있는 특성을 설명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공동체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성 경: [고전12:27]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직분과 은사]
⭕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본절은 12-26절과 28절 이하의 교량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까지 몸과 지체에 대하여 의인법을 사용해온 바울은 이제 28절 이하에서 다른 교회의 구성원에 대한 본격적인 지칭, 곧 '너희'를 사용한다. '너희는'(*, 휘메이스)은 일반적으로 고린도 교인을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교회에서 은사와 직임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그리스도의 몸'(*, 소마 크리스투)은 교회 전체를 가리키지만, '각 부분'(*, 에크 메루스)은 '부분적으로'(in part)라는 의미로 각각의 구성원이 몸에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몸의 각 지체는 중요한 부분이라 하여 자신이 전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사소한 부분이라고 하여 전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
성 경: [고전12:28]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직분과 은사]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 '몇'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스 멘'(*)은 바울이 자신의 의도(意圖)대로 몇몇 직임과 은사들을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도로부터 방언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과 은사만 언급하고 기타 다양하고 일반적인 은사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다.
⭕ 사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루스'(*)는 '아포스텔로'(*, '보내다')에서 온 말로 초대 교회 당시에 이 직분을 가진 사람은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직분을 맡으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았으며(눅 6:13;롬 1:1), 이 직분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을 살펴보면 이 외에도 4가지 특징을 갖는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갈 1:15), (2) 교회에서 구별하여 따로 세웠고(행 13:1), (3) 전체 교회가 그를 사도로 인정하고(갈 2:7), (4) 사도의 표로 사도직이 확고하게 증명되었다(고후 12:12).
⭕ 선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타스'(*, '대변자', '대리자')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변자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 교사 - 이들은 사도나 목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효과적으로 가르쳐서 교인들을 온전히 세우는 사람들이다(고전 14:30;엡 3:5). 교사의 사역은 사도들이나 예언자들과는 달리 한 지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에는 필사본이 매우 귀중해서 교인들 모두가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교회에서 교사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다(Morris).
⭕ 서로 돕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틸렘프세이스'(*)는 '손을 거들어서 도움'의 의미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도움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교회와 연관지어 교회 안에서 베풀어지는 도움을 시사한다(Grosheide). 이는 포괄적으로 돕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외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은사를 말할 때 집사(執事)들의 직무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Chrysostom, Hodge).
⭕ 다스리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베르네세이스'(*)는 '선장'이라는 의미로(행 27:11; 계 18:17) 배가 항해하기에 휘험한 모래톱 해안을 통과할 수 있도록 조종해 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권위를 가지고 회중을 인도하는 자, 곧 치리하는 사람들(rulers)을 가리킨다. 이들은 고대 교회에서는 '세니오레스 플레비스'(Seniores Plebis, '평민 장로')라고 불리었으며(Hodge), '다스리는 것'은 교회의 감독들이나 장로들에게 필요한 은사로 간주되었다(딤전 5:17).
성 경: [고전12:29,30]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직분과 은사]
⭕ 다 사도겠느냐...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 바울의 이 수사적인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몸에 여러 지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서도 모두가 동일한 은사와 동일한 직임을 가진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 모두 다 동일한 은사를 갖기를 원하는 마음을 억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은사를 감당해야 한다. (3) 은사는 우열을 비교하거나 대립 관계에서가 아니라 협조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교만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들이 시기하고 불만을 갖는 것은 교회의 건덕상 무익하다.
성 경: [고전12:3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직분과 은사]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 '더욱 큰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카리스마타 타 메이조나'(*)는 '더욱 탁월한 은사'라는 의미로 이는 은사들이 서로 상대적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언급한 것과(21절ff.) 약간의 모순이 있는 듯 보일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표준을 가지고 '탁월한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정해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특별히 방언 은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은사는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에 제일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효율성 보다는 매력적이고 대중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으나 바울은 모든 은사보다 뛰어난 은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성 경 [고전13:1-3]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 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1-3은 은사(* )의 목적을 설명하는 의미에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이 존재의 의의(意義)를 가지지 못한다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은사(恩賜)를 오용(誤用)하며 사랑은 없이 그것들 자체를 중대시하며 자랑하였다. 여기 본문에 있는 방언이나 예언 같은 것은 그때 초대 교회에 있었던 초자연적인 은사였다(Grosheide, De Openbaring God In Het Nieuwe Testament, p.186). 그들이 그 은사를 사랑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14장 참조.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그것을 경계한다.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이 말씀엔, 사랑이 없이 그런 은사를 취급하는 자는 (1) 심령과 인격을 결여(缺如)한 도구와 같다는 의미도 있다. 인격적(人格的)인 것은, 사랑을 예상할 수 없는 쓸쓸한 세계에도 사랑을 건설한다. 인격은 미움을 미움으로 갚는 기계적 법칙에 예종(隸從)하지 않고 미움을 사랑으로 대하는 좋은 역리적 행동(逆理的行動)도 취한다. 현대는 기계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인간의 생활이 점점 기계화되고 마는 것은 유감이다. 인간은 기계를 초월하여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은 발달하나 사랑은 식어지고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 심령상 뜨거움이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위에 말한 대로 기계에 반대되는 요소 곧, 인격이라는 것이 자연적 인격(自然的人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으로 거듭나 진정한 사랑을 가진 인격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랑을 소유한 인격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 (2) 아무 의미 없는 소리라는 뜻도 있으니 고,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맹목적(盲目的)인 것이란 뜻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 말씀 역시 위에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말에 비하여 크게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다. 이 말씀도 역시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은사르르 취급하는 자는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도 모두 다 사랑을 가지고서야 그 의의(意義)를 성립시킨다.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선 사업과 같은 선한 일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여질 때에는 그 행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신자는 남을 위하여 희생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올줄 아는 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행하고, 혹은 어떤 명예를 위하여 행하고, 혹은 군중 심리(群衆心理)에 이끌려서 행하기도 한다. 그 행하는 일이 선한 일이지마는 진정한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자 자신은 진정한 유익을 보지 못한다.
성 경 [고전13:4]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이 두가지 덕행은, 공격(攻擊)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여도 보복(報復)하지 않음이다. "오래 참고"란 헬라 원어(* )는 화를 내는 데서 멀리함을 이름이니, 곧, 격동성(激動性)있는 감정을 피함이다. 그리고 "온유"란 말(* )은 친절을 베풀기로 준비된 태도이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이라도 이 두가지 덕을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1) 사랑은 수고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여기 고전 13장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된 사랑이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을 생각하여 어려움을 참게 된다. 그뿐 아니라. (2) 사랑은 소망을 내포(內包)하기 때문에 참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함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망(贖罪的 死亡)은 그의 재림을 성립시켰다. 세상을 이기신 그는 장차 두번째 오신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려 모든 난관을 참게 된다. 약 5:7,8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서 계시니라"고 하였다.
⭕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여기 기록된 세 가지 말씀도 서로 연락(連絡)있는 한 뭉치이다. 이 셋은, (1) 자기와 남을 비교하여 경쟁(競爭)하는 심리로 범하는 죄를 범치 않음이고, (2) 명예주의(名譽主義)를 가짖지 않음이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존경하는 것은 옳으나(빌 2:3), 나보다 우월하다고 섭섭히 여김은 투기이다. 의(義)와 선이 결핍(缺乏)한 이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한 의(義)와 선을 남이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것은 기쁜일이지 섭섭한 일은 아니다. 남에게 있는 의(義)와 선도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救贖運動) 곧, 사랑에서 생겼을 것이니,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움직임이다. 그것들을 보는 나로서는 기뻐할 것밖에 없다. 그 뿐 아니라 기독자는 자기 개인 문제(自己個人問題)의 해결을 그리스도 안에서만 기대한다. 그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독립인(獨立人)이니 자타 비교(自他比較) 혹은 경쟁의 의식(意識)부터 가지지 않는다. 기독자인 "나"의 구원 문제 기타 문제 해결이 "나" 자신의 진실한 믿음으로 관계된 그리스도의 힘에만 달렸고, 다른 사람들이 잘 한 일에 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남의 잘한 일에 의뢰(依賴)할 것도 없거니와 간섭할 것도 없다. 투기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죄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는 독립인은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기독자의 별명은 사랑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고, 그는 독생자의 속죄 희생(贖罪犧牲)을 받음에 따라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요일 4:9-11). 이와 같이 주님을 영접한 그는 주로써 자랑하나니,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한다(갈 6:4). 그 자랑이 자기에게만 있다 함은, 자기는 죄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주님으로만 광영(光榮)으로 여김을 이름이다. (1) 이와같은 자랑은 주님만 자랑거리로 아는 심리인 것이니 만큼 그것은 믿음이다. "교만치 아니하며". "교만"은 스스로 높아진 심리이다. 사라이 일단 스스로 높아지면 낮아지는 처세를 못한다. 그가 겸손을 힘씀도 실상은 높아지기 위한 심리로 그리하기 쉽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처음부터 높아지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하나님 아들이 적신(赤身)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낮아지심이니, 이와같은 속죄의 사랑을 받은 기독자로서는 교만할 수 없다. 이렇게 낮아진, 사랑의 소유자가 어찌 교만하랴? 죄는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 예수님은 그것을 씻는 이가 되신 셈이다. 이 사랑이 얼마나 낮아진 처지에서 실현된 사랑인가?
성 경 [고전13:5]
⭕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이 두가지 말씀도 역시 서로 통함이 있는 한 뭉치이다. "무례"란 말(* )은 합당치 안헥 행함이다. 그것은, (1) 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고립(孤立)되어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인(個人)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줄을 알아야 된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인륜상(人倫上) 질서도 더욱 강화(强化)할 지언정 약체화(弱體化)시키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랴?(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6). 사람에게 대한 예의(禮儀)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敬畏)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 18:4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하여, 양자(兩者)의 관련성을 암시한다. (2) 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역시 "무례"에 속한다. 이 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이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 레 19:32에 말하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다. 권위를 존경할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 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킨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유익 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한다(욥 13:15 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 만 행한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自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자아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이다(행 20:35).
⭕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이 두마디 말씀도 서로 유사(類似)한 방면을 가진 한쌍(雙)이다. 성내는 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를 발함이다.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살인독(殺人毒)이다. 분노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이다. (1) 이것은 영생의 생명운동을 방해하며(요일 3:15), (2)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으며(요일 3:17), (3)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간다(요일 3:14). 남을 죽이려다가 먼저 자기를 죽이고 만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요일 3:16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다. 성내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1)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노하나,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것은 이것이다. 곧,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생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그것을 받지 않은자처럼 행하면 안 된다. 말로만 믿는 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러이 받지 않는 불행이다. (2) 분노를 이기는 또 한가지 비결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때에 받아진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였다(엡 5:18).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깨닫고 그것 하나 고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약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기독자가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가해자(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벧전 4: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받은 속죄(贖罪)의 사랑은,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사상(復讐思想)을 가지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음심이었다(롬 5:10). 리차드.윌렘손(Richard Willemson)은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얼음 가운데 피하였다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얼음 가운데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건져주었다.
성 경 [고전13:6]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1) 불의는 하나님의 원수이니,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가 그것을 기뻐할 수 없다. 시 5:4에 말하기를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사 53:4-6) 신자 된 우리가 어찌 불의를 기뻐할 수 있을까? (3)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배척하며 떠날 그때에 바로 참 기쁨은 신자의 마음 속에 온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하반절 (下半節)은 뒤이어 말하기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한다. 이 말씀 뜻은, 복음 진리가 좋아할바(복음 진리가 가르친 선과 의)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진리"는 여기서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골 1:5;엡 1:13;갈 5:7;살후 3:13,14;요 1:17). "함께"란 말은 "진리"란 말을 인격화(人格化)한 경우의 용법(用法)이니, 성령께서 진리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법이 나왔다. 그런데 이 기쁨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1) 그것은 물론 몸의 건강을 위하여도 유익하다. 그러나 (2) 그보다도 그것은 영적(靈的)으로 유익하니, 기쁨이 있어야 믿음과 감사가 증진(增進)되고 또한 모든 덕을 힘있게 피곤함이 없이 실행하게 된다.
성 경 [고전13:7]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1) 기독신자와 모든 것. 여기 "모든"이란 말이 네번 나온다. 속죄함을 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믿는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롬 8:32).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7). "만물이 다 너희(신자들)의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신자들)의 것이요"라고 하였다(고전 3:21,22). 그러면 속죄의 사랑을 입은 사랑의 사람, 곧, 기독 신자는 무엇이든지 결국은 자기에게 복될줄 아는 것인 만큼, 그는 그 모든 일에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딘다. 한 번은 어떤 배가 파선되어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죽고 한사람만 남았다. 그가 바다물 위로 표류(漂流)하다가 필경 한 무인도(無人島)에 상륙하여 조그마한 초막(草幕)을 지어 가지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먹을 것을 잡으려고 섬에 돌아다니던 중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막이 불붙어 버렸다. 그러나 불붙는 연기 때문에 멀리서 다른 배가 그 연기를 신호(信號)로 알고 와서 그 외로운 사람을 건져 주었다. 끄레스 삭스(Grace Saxe) 부인은 외국 선교사로 가기를 작정하고, 타고갈 기선을 정하고 떠날 시간까지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 부인은, 자기 부친이 병들었기 때문에 정한 날자대로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러나 후에 알려진 대로 그 타려던 배가 가다가 파선 당하여 승객(乘客)은 모두 다 죽었다. (2) 저렇게 모든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 기독자는 모든 역경과 고난에 대하여 보는 방법이 불신자와 다르다. 기독자는 평안한 일들에 있어서도 인내와 소망과 신앙을 지키지만, 모든 역경과 고난 그자체도 자기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줄 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 5:3,4). 약 1:2-4참조. 기독자가 역경과 고난을 잘 이기어 지나간 뒤에 하나님의 상급이 오는 것을 믿는다(약 1:12). 그는, 자기를 위하여 독생자의 보혈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든지 실패하지 않을 줄 믿는다. 이 믿음으로 그는 어디까지든지 참으며, 이 믿음으로 바라보며 견딘다. 그의 이 생활은 비상(非常)한 일, 곧, 큰 희생이나 순교 행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만 지향(指向)된 이상(理想)이 아니다. 그의 이 생활은, 여기 "모든 것"이란 말이 보여줌과 같이(고전 13:7), 일상 생활(日常生活)에 실시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 이와 같은 승리 생활을 하면, 비상한 희생이나 순교의 승리는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독자가 일상 생활에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비상한 생활이나 순교의 때가 와도 그 기회에는 참여하지 못한다(Lenski). 일상 생활의 모든 어려움에 있어서, 기독자인 나는 참나니, 그 참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기쁜 맛 있는 일이고, 키니네 교갑을 씹지 않고 그냥 통으로 삼켜 넘김과 같은 지혜있는 일이다. 또 나는 믿나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시어 구원하여 주신 까닭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자로서는 모든 것이 다 자기에게 복이 될줄로 믿는다. 나는 바라본다. 그 이유는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실과 마찬가지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뻐하면서까지 이약속을 바라본다(벧전 1:3,4). 나는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견디라고 명령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인것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동하여 나에게 유익이 될줄을 아시는 주님은,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무거운 짐이 아니고 도리어 복된 소식이다.
성 경 [고전13:8]
⭕ 사랑은 언제가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 여기 이 말씀은, (1) 사랑이 내세에까지 들어가서도 폐지되지 않는다는 것과 (2) 예언, 방언, 지식등(知識等)은 내세에 이르러서는 폐지 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사랑과 내세와의 관련성을 가르친다. 바울이 여기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할때에, 사랑이 이 세상에서도 존속(存續)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캄캄한 세상에도 내세의 요소(要素)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요일 4:8), 그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시어 화목 제물로 삼으신 사건으로 나타내셨다(요일 4:10). 이 속죄의 사랑은 이 세상 어디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기독자의 심령에 움직이고 그 생활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움으로 이 사랑을 체현(體現)한다(골 1:24). 사랑은 수고이다(살전 1: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은 아니다. 대속적 고난은 하나님 아들께서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을 위하여 사람들이 당해야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기독자는 벌써 천국(天國)을 그 심령 속에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랑의 생활을 힘쓸수록 그는 더욱 천국 맛을 보게 된다. 고난에 참예함이 사랑의 생활인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세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이 빌 3:10,11에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다. 또 요일 4:16-18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하였다.
성 경 [고전13:9,10]
⭕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여기서부터 12절까지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받는 하늘 나라의 지식이 부분적(部分的)의 것인 사실을 밝힌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내세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를 이름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내세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곧, (1)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니,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형편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죄는 곧, 어두움이다.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별 수 없이 내세에 대하여 전적 이해(全的理解)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이 어두움의 벌을 받아야 합당하다. 이 어두움은 그의 성결(聖潔)이 진보(進步)함에 따라서 조금씩 벗어진다. 그는 하늘 나라에 대하여 좀 더 알기 위하여 더욱 착한 일을 힘쓰며 성결을 힘쓴다. (2) 죄 있는 인생으로서는 완전한 계시(啓示)의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거네사렛 호수에서 베드로를 지도하시어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눅 5:8).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은 완전한 지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지식으로 인하여 유해 무익(有害無益)한 반응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별세할 날자를 알고 살기가 좋을까? 차라리 그 날자를 모르고 사는 것이 좋다. 하나님에게 속한 높은 지식은 도리어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 밝은 때문에 가리워져 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하였으니(딤전 6:16), 어찌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전체적 나타남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그 사랑의 어떤 방면은 지금 땅위의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렵다. 병아리가 바깥 세상의 공기에 견딜만치 털이 자라나기 전에는 달걀 껍질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것이 바깥 세상에 나온 때엔 물론 바깥 세상이 그에게 유익하고 편리하다. (3) 인생은 현세에서는 믿음을 연습하기 위하여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고 움직인다. 롬 8:24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영원토록 믿음의 관계니(고전 13:13), 신자로서는 땅위에서 믿는 일을 전무(專務)하여야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하고야, 믿음의 연습과 연단은 생긴다. 벧전 1:7에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성 경 [고전13:1]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이 귀절은, 위에 관설된 "부분적"지식이 어떤 것임을 밝혀 준다. 그것은 비유컨대 "어린 아이"의 지식과 같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어린 아이의 지식은, 비판적(批判的)이 못되며, 사색적(思索的)이 못된다. 그들은 감각적(感覺的)이다. 이것은 사람이 현세 생활에서 가지는 지식 방법을 표본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 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하다. 여기 우리 본문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단력이 많아서 주관적 지각(主觀的知覺)보다 객관적 지식을 귀하게 여김이 아이들보다 많다. 이것은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표본적으로 비유한다. 내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주의(主觀主義)를 전연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지식을 실체화(實體化)하여 거기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떠한가? (1) 그것은 참으로 어린 아이들의 놀음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너무도 주관적이고 감각적(感覺的)이다. 과학적 지식(科學的知識)이란 것은, 감각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2) 현대인들은 당면한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지 않고 모스크바와 워싱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뿐이다. 계시록 4-5장에만도 하나님의 "보좌"란 말이 16번이나 나타난다. (3)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모두 상대적 가치(相對的價値)의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저렇게 역사적 원리로만 표준 삼아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역사를 초월한 이적은 부인한다. (4) 이 세상 사람의 과학이, 다른 것은 다 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통솔하는 것만이 세계 평화의 해결책이다. 그것을 통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장 낮추며 업신여긴다. 이것이 유치한 지혜이다. 요컨데 어린아이는 그 현재(現在) 그 현재만 느낄 줄 아나 미래(未來)를 예비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그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 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실유(實有)에 대하여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령한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어른들도 이 세상에선 아이들과 같다. 그들도 신령한 것을 업신여기는 일이 많다.
성 경 [고전13:12]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옛날의 거울은 사람의 얼굴을 희미하게 나타냈다. 이 말씀은, 존재(存在)에 있어서 확실하나 그 정체(正體)는 전적(全的)으로 알기 어려울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 별들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내세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내세를 깨닫고도 또 다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약 1:23,24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데 건망증(健忘症)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더러운 못과 같다. 더러운 못에는 고기는 다 죽어 버리고 개구리만 성한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림에 있어서 셀바리우스(Cervurius)란 짐승과 같이 건망증이 있다. 셀바리우스는, 무엇을 먹다가도 머리를 뒤로 돌이키면 자기 앞에 놓은 식물(食物)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식물을 찾기 위하여 달아난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건망증이 있는 원인은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죄악과 이 세상 생명을 좋아하는 애욕(愛慾)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신자는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힘써야 된다. 그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야 될 것이다(벧전 2:2). 그 이유는, 그는 희미하지만 참된 내세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독자는 캄캄한 때에 더욱 빛을 사모하여야 될 자이다. 잎속에 감추인 꽃을 더욱 보고 싶어함과 같은 심리(心理)로, 그는 희미한 중에 가리운 내세를 사모하여 들어가고자 하여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야 된다. 요일 3:2,3에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나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고후 3:18에 말하기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다. 조금 맛만 보고 전체는 소유되어지지 않는 그 심리는 얼마나 안타까운 심리일까?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 좁은 창문을 통하여 바깥 세계를 내다볼 때에 그 마음이 얼마나 바깥 세계를 사모하게 될까? 진실한 성도들은 모두 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9,10 절의 해석 참조.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하여야 될 일이 있다. 그것은 현세에 우리의 아는 것이 부분적인 것이지만 믿기에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본문에 바울이 "부분적으로 아는것"의 가치(價値)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주석가 슐라테르(A.Schlatt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현세에 우리가 아는 바를 바울이 무가치하고 무용하다고 말함이 아니다. 그것이 멸절된다는 것 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Was wir jetzt erkennen, heisst Paulus nicht und unnutz; es erfallt aber der Verganglichkeit, weil es nie etwas ganzes und vollendetes ist.-Erlauterungen zum Neuen Testament, 1909, Zweiter Band p.117). 우리가 정신만 차리면, 이런 부분적인 진리 지식에 의하여도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부분은 전체를 증거하는 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예화를 하나 들면, 이태리사람 콜룸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역사가 타당할 것같다. 그가 1492년 8월 3일 아침 여덟시에 88명을 실은 세배(Sante Maria,Pinta, Nina)를 가지고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던 중 8월 17일엔 선원들이 콜롬부스를 원망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안정시켜 항해를 계속하던 중, 10월 7일에 철물(鐵物)에 붙였던 작대기 한 개와 판자조각 한개와 또 나뭇가지를 물에서 건졌다. 그것이 그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육지가 가까운 줄 알아 힘을 얻고 기뻐하였다. 과연 그 날 밤 11시에 콜롬부스는 멀리 있는 불빛을 보았고, 12일 오전 2시에 그들은 신대륙(新大陸)을 발견하였다. 그 때에는 전에 콜럼버스의 발 밑에 엎드리어 자복하며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다 흙에 입맞추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한다(Encyclopaedia Britanica VI, 742-743). 그러면 우리는 이들의 여행에 있어서 부분적인 지식, 곧 나무 조각 같은 것을 보고서 전체(곧 大陸)의 존재를 확신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희미하다고 하여, 내세에 대한 확신을 못 가질 수는 없다.
성 경 [고전13:13]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이 말씀은, 신 망 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곧, (1) 소망을 가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약 2:19). 특별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성 경 [고전14:1]
⭕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바울은 사랑이 제일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13:13). 그러므로 모든 다른 은사들도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있는 것 뿐이니, 은사를 구하는 자는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랑을 실시함에 더욱 필요한 은사를 구해야 된다. "구하라"는 말(* )은 붙잡기 위하여 열심으로 좇아 감을 의미한다. 사랑을 실행하려고 전심(專心)함이, 곧, 그 의미이다(Lenski). "예언하려고 하라"함은, 곧 남들을 영적(靈的)으로 유익하게 지도하는데 필요한 성령의 지시하는 말씀을 구하라는 뜻이다. 이 은사는, 더욱 사랑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이 아래 자세히 진술된다.
성 경 [고전14:2]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 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곧, 방언(方言)은 이 세상의 어떤 외국말이라 하고, 그것을 말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 외에는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그 말을 배운 자가 그 말하는 자리에 한 사람도 없는 경우). 그러나 이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 귀절 하반에 있는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말씀을 보니, 그것이 영적 방언이고 외국어를 가리킴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적이 교회 시대에도 있을까? 교회 시대란 것은, 계시시대(啓示時代), 곧, 사도 시대와 구분된 명칭이다. 사도 시대에는, 표준적인 이적과 계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이렇게 터를 닦는 의미의 기본적인 역사(役事)를 하셨다. 그 시대에 있었던 이적과 계시는, 실상 주님 재림 때까지 장성할 교회의 뿌리와 터전을 이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사도의 역사(役事)를 가리켜 터 닦는 일로 비유하였다. 고전 3:10에 말하기를, 교회의 "터를 닦아두었다"하였고, 11절에 말하기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 말씀 뜻은, 사도가 그리스도를 전파할 계시와 능력을 받아 복음을 나타낸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이 터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엡 2:20; 계 21:14).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도적 역사는, 나무에 있어서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는 한번만 일정한 자리에 잡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돋아 나온 줄기가 질적으로는 뿌리와 같은 것이지만, 그 모습에 있어서는 뿌리와 다른 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그 능력도 여전하시지만, 그의 사역의 경륜은, 사도 시대에는 그렇게 나타내셨고, 교회 시대에는 이렇게 나타내신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여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다음에는 만나 내리시기를 그치셨다.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시대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에, 이는 마치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와 같으니, 그 자라나는 도중에 다시금 뿌리의 형태로 자체를 거듭 나타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교회는 그 뿌리를 의미하는 사도적 역사를 거듭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기억할 것은, 교회 시대에는 사도의 증표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다할지라도 특별 섭리는 있다는 것이다(L. Berkhof, systematic Theology,p.68). 특별 섭리란 것이 계시사(啓示史)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하나님의 특수 간섭이기 때문에 그의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면,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과 사도의 행한 이적과는 다르다. 가령, 병 고침 받는 실례를 들어 말하면, (1)에수님과 사도의 이적은, 취급된 병자가 모두 치료되었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神癒)라는 것은 그렇지 못하고,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는 자도 있거니와 치료되지 않는 자도 있다. (2) 그뿐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의 이적으로 고치받은 병은 재발하는 법이 없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 병이 재발되는 경우도 있다. (3) 예수님과 사도들의 고친 병자들의 몸은 당장 완전해졌으나,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다. 위의 세 가지 사실은, 교회 시대의 신유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들이 있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시대에 이르러서 약해지셨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여전히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 사역 경륜의 이와 같은 차이점은, 특별히 교회의 터가 되는 계시 시대(예수님과 사도 시대)의 표준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 신앙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및 사도적 전도 내용(성경)을 표준으로 하고, 거기서 안식해야 되는 것이다. 만일 교회 시대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혹은 사도들과 같이 표준적인 이적을 행한다면, 그들도 역시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 있는 계시(啓示)도 받는다고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 성경만 기초로 한 기독교의 성격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방언을, 사도들의 역사로 나타났던 그 시대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방언 운동에는 많은 그릇된 방언들도 드러난다. 이런 방언들은 물론 금지해야 된다. 다만 방언을 함이 자기에게 유익한 줄 아는 이는, 고전 14장의 교훈을 지켜야 될 줄 생각한다.
성 경 [고전14:3]
⭕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 사도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하였다(행 11:28,21:11). 그러나 그들(혹은 그들 중 어떤 이들)도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계시 역사를 하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신앙에 관한 진리를 해명하기도 하였다(롬 12:6). 그들의 역사도 사도들의 역사와 함께 신약 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엡 2:20;고전 12:28). 이점이 방언하는 자와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고, 은사의 미말(尾末)에 속한다(고전 12:10,28). 그러나 예언 역사는 사도의 역사처럼 계시 시대(사도 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직(單回職)에 속한다. 교회 시대에는, 예언의 후신(後身)으로서 설교가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양자(兩者)의 기능이 같기 때문이다. 예언이 건덕, 권면, 안위를 그 기능으로 한 것처럼(고전 14;3), 설교도 그러하다. 다만 예언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초자연적으로 그에게 찾아 왔으나, 설교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곧, 설교자는, 말씀의 청지기란 말이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를 통하여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다(고전 4:1,2;딛 1:7). 다시 말하면, 설교자는 기독교의 터를 닦는 자가 아니고, 사도와 선지자가 닦아 놓은 터(고전 3:10-11) 곧,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설명(성경)을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 자이다. 설교자는, (1) 맡기운 터와 자재(資材) 곧, 성경을 그대로 보수할 책임이 있고, (2) 또한 그 터와 그 자재를 가지고 집 지을(교회 세울) 책임도 있다. 그가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그는, 말씀을 전파할 때에 자기의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 전부를 전할 책임이 있다. 현대 교회에도 예언이 있다는 이들이 있다. 만일 예언 같은 것이 오늘날도 나타난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될 것인가? (1) 그 예언이 맞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배척하기 쉬운 일이다. 그러나 (2) 그 예언이 사실과 부합할 때에는 우리로서 그것을 거부하기가 곤란할 듯하다. 그 이유는, 그 예언이 맞아도 그것이 거짓된 예언일 수 있으니(신 13:2), 하나님의 명령대로(요일 4:1) 착실히 영들을 시험하며 지내보아야 된다. 그것을 시험하며 지내보는데 오랜 세월이 지날 수도 있다. 신자가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영들을 시험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행동이다. 신 13:1-3에 말하기를,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사단이 사자도 복음을 높이는 체 하며(행 16:16-17), 또한 도덕이 있게 사람을 대할 수도 있다(고후 11:14-15;마 7:15). 그러므로 우리가 현대의 "예언"이란 것을 시험해 봄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현대의 예언보다 성경이 권위 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15:4). "덕을 세움"은 "세워 나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신자들의 산앙 사상을 증진 시킴이다. "권면"은 경계하여 양심과 의지로 옳은 데로 움직이게 함이고, "안위"는 난관과 핍박을 당한 신자들에게 소망을 보여 주어 그들의 정서(情緖)로 하여금 기쁨과 용기를 취하도록 하여 줌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예언"은 하필 성령의 특종 예고(特種豫告)를 전달함에 국한 한 것이 아니고, 광범위의 영적 교훈과 지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 경 [고전14:4]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방언하는 자의 말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인 만큼, 듣는 자들에게는 유익이 없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영적(靈的) 깨달음을 줄 뿐이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온 교회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여 유익을 받도록 한다.
성 경 [고전14:5]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 바울의 논조는 그때의 방언 은사를 전연 불필요하다고 함이 아니고, 다만 그것에 대한 과대 평가(過大評價)를 막는 것 뿐이다. 방언은 통역되지 않으면 남들에게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한다. 방언은 벌써 위에 해석한 바와 같이(2절), 영감(靈感)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감과 동반(同伴)되지 않는 순간부터는 효능을 잃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통역하는 자도 영감 중에서 하여야 된다(Hodge). 방언하는 자신이 통역의 은사까지 겸한 자가 있으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언의 효능에 대하여는 위의 3절에 기록되었다.
성 경 [고전14:6]
바울은 자기로서 방언하는 것으로는 남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고 단언하여, 앞서 말한 논조를 강화시킨다. 이 점에 있어서 그가 남들을 실례(實例)로 드는 것보다 자기자신을 실례로 들어 말한 것은, 그의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고전14:7]
생명 없는 악기(樂器)같은 것들도 곡조의 분별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듣는 사람들에게 그 소리의 뜻을 알려 주지 못한다. 알아 듣게 하기 전에는 듣는 자들에게 무익한 소리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생명 없는 도구들의 소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이것은 차라리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야 된다. 곧, "저를 분 것이 무엇인지 거문고를 탄 것이 무엇인지 어찌 알려지랴?"라고 함이다(Hodge). 이 말씀 뜻은, 곡조를 분변 있게 내지 않은 "저"소리나 "거문고" 소리는 무의미 하다는 뜻이다.
성 경 [고전14:8]
⭕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 전쟁 때엔 나팔 소리로써 군인들에게 경고를 준다. 그것은 곡조로써 뜻을 표시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성 경 [고전14:9]
⭕ "허공에다 말함" - 은, 효과 없이 말한다는 뜻이다.
성 경 [고전14:10]
⭕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 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 여기 "소리"란 말은 헬라 원어로 포네(* )니 목소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의 방언들을 의미한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것을 동물들의 소리로 해석하였으나 문맥으로 보아서 사람들의 언어를 가리킨다(Hodge).
성 경 [고전14:11]
⭕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 곧 피차간 야만의 관계란 뜻이니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성 경 [고전14:12,13]
⭕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 곧, 신령한 은사를 구하여야 되나, 남들에게 유익 끼치기를 목표하라는 뜻이다. 그리하려면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는 은사도 받아야 된다.
성 경 [고전14:14]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가 있다. (1) 방언은 지능(智能)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높은 층계에 속하는 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는 자 자신도 지능으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2) "나의 영"은 정서(情緖)를 가리키는데 지능과는 관계없다. 그러므로 정서에서 되어지는 방언을 인하여 지능면(智能面)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 (3) "나의 영"이란 것은 성령의 지배하(支配下)에 있는 영(인간의 영)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의 영의 방언하는 바를 가지고 나의 지능(나의 영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곳)이 남들에게 유익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적당하다고 하지(Hodge)는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나의 영"과 나의 "마음"을 엄격히 구분하여 이 아래서도 말하고 있다(15절). 그러므로 위의 첫째 해석이 옳은 듯하다.
성 경 [고전14:15]
⭕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 이 말씀 뜻은, 방언(方言)하는 자들이 자기만 알 수 있는 기도나 찬송을 할 것이 아니라 남들도 알아 듣도록 해야 된다는 뜻이다(Hodge). 그러므로 그는 통역하는 은사까지 받아야 된다.
성 경 [고전14:16]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 여기 "축복"이란 말(* 은 하나님께 감사함을 의미한다.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란 말은, 교회의 지도자가 아닌 평신도(平信徒)를 가리킨다(Lenski). "아멘"이란 말은, 여기서는 예배에 참석한 자로서 공석 기도자(公席祈禱者)의 감사에 동조(同調)하여 "그렇습니다"하는 뜻이다(느 8:6). 이 말은 히브리어의 음역(音譯)이다. 그 말은 "진실함", 또는 "그렇습니다" 등을 의미한다. 공석 기도가 끝나자 회중이 "아멘"하는 것은 구약의 예배 풍속에서 왔다(민 5:22; 신 27:15).
성 경 [고전14:17]
⭕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 이것은, 남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기도한 것이, 공동 예배자(共同禮拜者)들에게 유익을 주지못할 것임을 지적한다. 예배는, 단지 신비적(神秘的)인 느낌만 위주하지 않고, 지식 성품을 통하여 받아질 진리에 해한 심령의 반응(反應)을 보다 중요시한다.
성 경 [고전14:18]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신자들 중 받은 은사를 잘못 쓰므로 폐단이 있는 때에, 그것을 교정시킬 만한 자격자는 같은 은사를 받은 자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의 은사를 더 많이 받았으므로, 이 은사를 폐단 있게 사용하는 자들을 경계할 권위(權威)를 가졌다. 오늘날 불건전한 신비주의(神秘主義)의 폐단을 교정시킬 사람은 누군가? 그는 참된 신비주의를 체험한 사람이다. 기독교는 냉랭한 지식 종교(知識宗敎)가 아니고 역시 건전(健全)한 신비주의를 하나의 요소로 가지고 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實感)하게 되나니, 이것이 건전한 신비주의이다. 바울은 방언하는 은사를 그 자신이 받은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은사 자체를 귀히 여긴 것이 분명하다.
성 경 [고전14:19]
남이 아는 말로 가르쳐 남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 남들이 모르는 방언을 말함보다 교회에 유익하다고 바울은 역설(力說)한다. 기독자가 받은 은사는, 자기의 독점 사용(獨占使用)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봉사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교회 앞에서는 언제나 방언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말할 바엔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방언을 위주할 수 없다. (1) 예수님께서도 친히 방언을 하였다는 말이 없을 뿐더러 그들은 물론 방언을 위주하지 않았다. (2) 방언을 위주하면, 결국 성경을 등한히 하는 폐단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기이한 것을 탐한다. 누가 어떤 곳에서 성경을 가지고 기독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친다 할지라도, 그 부근에 이적을 행하는 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의 마음이 거의 전부 그리로 쏠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영혼을 이적으로 먹여 살리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으로 먹여 살리신다. 바울은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다(고전 1:22-23). (3) 방언을 위주하는 곳에는 결국 "예언"(성경 이외의 어떤 예고)도 고조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필경 저마다 계시를 보려고 하여 꿈을 숭상하고, 기타 여러가지로 숨은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할 우려가 있다. 예언을 위주하는 곳에는, 마침내 그릇된 예언들이 많이 터져 나오게 되어 마귀 역사의 온상을 이루게 된다. 마귀는 언제든지 교훈의 불건전한 틈을 타서 역사하는 법이다. 사도 바울은, 교훈의 건전성을 많이 주장하였다(딤전 1:10,6:3; 딤후 1:13,4:3; 딛 1:9,2:1). 이 귀절들 중에서 그가 주장한 "바른 말", 혹은 "바른 교훈"이란 것은, 건전한 교훈을 말함이다. "건전한 교훈"이란 것은, "건강한 교훈"(* )을 말함이다. 사람의 체격이 건전하다고 하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여러 지체들이 제 자리에 있는 질서 정연한 체격이 아니겠는가?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본말(本末)과 선후(先後)가 바뀌지 않고 각기 제 위치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그 교훈이 건전한 교훈이다.
성 경 [고전14:20]
⭕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통역 없이 방언을 회중(會衆)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지혜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하나의 호기심(好奇心)과 자랑거리로 구경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더러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행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뒤이어 어린 아이에게서 본받을 것만은 본받으라고 말한다. 곧, 악에 있어선, 그것을 경험해 본 일이 전연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이다. "어린 아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상반절에 있는 "아이"란 말과 다른 단어이다. 이것은 실상 유아(乳兒)를 의미하는 네피오이이다.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방언하는 자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 지혜이다. 그렇게 행함이 장성한 사람다운 자의 소위(所爲)이다.
성 경 [고전14:21]
⭕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 하리라 하였으니. - 이것은 사28:11,12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에 기록된" 것이라고한 이유는, 그 때에 구약 전서를 가리켜 "율법"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요 20:34;롬 3:20 참조. 그러면 여기 인용된 사 28:11,12의 예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이사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이 장차 외국인들(앗수르 사람들)이 유대를 침략하여 정복하고 지배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여기 이른바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것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이다. 여기 "다른 방언하는 자"란 말은 앗수르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다른 방언하는 자가 유대인에게 온 것은, 그들을 벌하시는 일이었 다. 그렇다면, 이제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일반이 깨닫지 못하는 말로 회중에게 말하면 그것은 그 회중에게 대한 일종의 벌이다. 그것은 유익을 주는 일이 아니다.
성 경 [고전14:22]
⭕ 그러므로 방언을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이 말씀 뜻은, 남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듣는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23절).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침내 다른 방언하는 자(앗수르 민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음과 같은 일이다(21절).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곧, 방언하는 결과는, 그 듣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고쳐 주지 못하고 그냥 믿지 않는 자들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것 뿐이란 뜻이다. 이것은 방언의 결과가 어떠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 이것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을 하면 그 듣는 자들이 회개하고 믿는 데로 나아가진다는 뜻이다.
성 경 [고전14:23]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 신자들이 방언을 통역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에, 그 듣는 불신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방언하는 자들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통역없이 방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바울이 이 말로써 역설(力說)한다.
성 경 [고전14:20]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 "찬송시"란 것은 원시 교회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회원들이 부를 수 있었던 시가(詩歌)였는데(엡 5:19;골 3:16), 구약 시편을 말함이 아니다. 눅 1:46, 68, 2:14 ,29 ;딤전 3:16; 계 4:8, 5:9, 7:10, 11:5, 12:10, 15:3, 19:1, 6 참조. 벤드라드(H.D.Wendland)도 이와같은 뜻으로 해석하였다(Die Briefe an Korinther, p.114). "가르치는 말씀"이란 것은, 교리(敎理)나 도덕면(道德面)에서 교훈을 베푸는 것을 말함이다. "계시도 있으며". 이것은, 그때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있었던 직접 영감(直接靈感)에 의한 진리 섭취를 말함이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신자들은, 위에 열거(列擧)된 무슨 은사든지 오직 건덕(建德)을 위하여 행용(行用)하여야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자도 다만 건덕(남들을 유익하게 함)을 위하여 할 뿐이다.건덕은 결국 사랑을 의미하는 행위이다.
성 경 [고전14:27,28]
방언을 하는 자들은, (1) 공중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씩 차서(次序)있게 할 것이고, (2) 또한 회중이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하는 방언을 통역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시한 것은, 후대 교회보다 그 때 초대 교회의 실정에 맞추어 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이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현대 교회의 방언이 사도들의 역사(役事)로 나타났던 그것과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삼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하나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말하기를, "방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 방언인데(천사의 방언은 아님), 죄악의 영향을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또 말하기를, "방언의 이적이 오순절에는 완전하게 나타났으나 그 후에는 불완전하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 마음에 받는 은혜가 처음엔 중생의 강한 것으로 나타나고, 그 후에는 비교적 현저하지 않은 영력(靈力)만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오순절에는 완전한 방언의 이적이 나타났고, 그 후에 지방 교회에서는 비교적 약한 분량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The Work of the Holy Spirit, pp.134-135). 교회 시대(특별히 현대)의 방언 운동에 대하여 한가지 주의 해야 될 것은, 위에 카이퍼(A.Kuyper)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사도적 역사의 완전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적 이적은, 병자를 고칠 때 그 취급된 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시대의 신유는 그렇지 못하여 어떤 병자는 고치나 어떤 병자는 못고치는 정도이다. 오늘날 참된 방언이 있다면, 그것이 그런 정도의 것이라고 인정해야 된다. 사도의 직접 지도가 없는 지금(교회시대)에 있어서 방언의 성격의 진위(眞僞)를 참으로 알 분이 누구이기에 교회에서 방언을 통역에 의하여 공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성 경 [고전14:29-31]
이 부분의 말씀은,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직접 계시(啓示)를 받은 일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이 예배 석상에서 그 받은 계시를 회중(會衆)에게 전달할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공중 질서(公衆秩序)를 무시하지 않고 전달되도록 할 것이었다. 한 집회에 너무 많은 사람이 예언하지 않도록 할 것과 하나씩 하도록 한 것은, 질서 있게 하므로 유익을 받도록 한 것이다.
성 경 [고전14:32]
⭕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 여기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란 말은, 예언하는 자가 받은 성령의 감화를 말함이다. 이 감화력(感化力)은 그 예언자의 의식(意識)의 자주성(自主性)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언자는 의식 없는 사람처럼 난동(亂動)하게 될 처지에 있지 않다. 그는, 위(29-31)에 기록된 질서를 지킬 수 있는 정상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
성 경 [고전14:33]
⭕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 예언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신 만큼, 예언 자들이 질서를 지켜야 될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성 경 [고전14:34]
⭕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란 말씀은, "모든 교회의 풍속과 같이"란 뜻이다. 이는, 교회의 아름다운 규례를 배경으로 내 세우는 말씀이다. 교회의 규례도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면, 신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된다. 바울은 이 규례가 성경게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율법"의 교훈에서 인용(引用)한다. 그러면,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됨(남자를 지배하는 公敎訓을 하지 못함)은 율법의 말씀(창 3:16)에 근거한 것이다.
성 경 [고전14:35]
⭕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니라. - 여기 이른바 "부끄러운 것"이란 말은, 보기 싫은 것(ugly, deformed)을 의미한다(Hodge). 여기서 여자의 교회에 말하는 것을 금한 것은, 그들이 거기서 무슨 말이든지 금지 당한 것이 아니고, 다만 남자들을 주장하는 의미의 공교훈(公敎訓)에 관한 것이다.
성 경 [고전14:36]
⭕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 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 이것은 일반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꾸짖는 말씀이다. 그 교회는, 그때에 스스로 모든 다른 교회들의 모체(母體)인 듯이 교만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들의 교회에만 임한 듯이 자만하였다. 이런 주제넘는 태도는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도 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저희에게만 전속한 듯이 남들을 무시하며 교만하게 행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는 동안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약 4:6 참조.
성 경 [고전14:37]
⭕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은사(恩賜)를 받은 자들이 바울의 편지를 표준하여 시정(是正)을 받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들이 은사를 받았으나 그것을 오용(誤用)하는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바울의 서신을 보고 고쳐야 할 것이다.
성 경 [고전14:38]
⭕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 이 말을 개역하면,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거든 그는 인정되지 않는 자니라"고 할 것이다. 곧, 바울의 편지를 주님의 명령인 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 곧,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이다.
성 경 [고전14:39,40]
⭕ "예언하기를 사모하라" - 고 하였으니, 이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함이고,
⭕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 고 하였으니, 이는 그것을 그저 용인(容認)하는 정도이다. 이 권면은, 위(6-28)에 기록된 모든 규례에 의하여 교회의 공적 질서(公的秩序)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언(方言)을 할 때에는 금하지 말라는 것 뿐이다. 방언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고 한 말씀을 지켜야 된다. 성경은 성령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존중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화를 참되이 보존하는 길이다. "영들을 시험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인가? 시험해 보기까지 분변하는 행위는, 결단코 불신앙이 아니라 도리어 경건이다. 우리가 방언을 아무 분변 없이 받아 들일 때, 거기에는 마귀의 역사도 받아 들이게 되어지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은혜의 진위(眞僞)를 분변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성경을 표준해야 된다. 성경을 떠나서 그 무엇으로 이런 중대한 일들을 분변할 수 있으랴? 진리 판단의 표준은 오직 성경이다. (1) "이적"을 행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가 반드시 언제나 진리를 바로 분변할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마귀도 어느 정도 이적을 행한다(마 24:24). (2) 누가 병을 고친다고해서 그는 언제나 진리를 옳게 분변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확실히 알기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을 고치셨고, 그들이 전도한 말씀은 진리이다.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도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병 고침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시대에 기도나 안수로 병 고치는 일이 있다고하여, 모두 다 신임할 수는 없다(그 중에 혹시 신임할 것도 있지만).
⭕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 7:6, 17, 25, 35, 36 참조. 공식 예배(公式禮拜)가 어느 시대에나 질서 있게 실행되어야 할 것은, 본장을 읽는 자마다 깨달을 것이다.
성 경 [고전15:1,2]
여기 "복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을 전파하는 "좋은 소식"(* )을 이름이다(롬 1:2-4).
⭕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또 그 사실 위에 확립한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이 신앙을 가졌으면, 필연적(必然的)으로 일반 신자(一般信者)들의 부활도 믿어야 된다. 그 이유는, 신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성립되기 때문이다(요 14:19).
성 경 [고전15:3]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적 진리임. 우리 본문에 "성경대로"란 말이 두번 나온다. 세상 역사상(歷史上)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사실들도 많다. 그러므로 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성경에 예언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음이 무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는가? 사실들이 많은 중에도, 특별히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 하실 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렇게 된 이유는, 인류(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가 부활함이 우주 만물의 고대(苦待)하는 바 목표이기 때문이다(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사 26:19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라 하였고, 단 12:2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라고 하였다. 또 이밖에 구약에 많은 장 절들이 부활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께서 구약을 해석하신 것으로도 알려진다. 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하셨다. 곧,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부활 관계로 여기 있는 예수님의 구약 성경 취급을 보면, 구약 성경에 부활 장 절이 많이 있다. 다만 우리가 무식하여 모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다. 그가 마 22:31,32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로서는 부활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장 절을 그는 부활 관계의 장 절로 생각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곧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하셨다. 그는 여기서 부활 장 절 같이 보이지 않는 장 절을 부활 장 절로 취급하셨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밝히 아시고 이렇게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시기엔 구약이 전체적으로(직접 혹은 간접으로)부활을 가르친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은, 바울의 말로 보아도 확실하다. 바울은 구약 성경의 목표가 부활을 가르치는데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다(행 24:15-16, 26:22-23). 이렇게 구원사(救援史)라고 할 수 있는 구약은, 주로 부활을 내다보고 예언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활이 우주(宇宙)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대성을 띤 것이 저렇게 중점적(重點的)으로 예언되었으니, 우리는 믿기에 용이하다. 우리는 믿어야 된다. 우리가 부활을 못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부활한다면,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부활케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문제성(問題性)을 느끼지 않는다. 없는 데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없으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세상에 늘 있는 이유는, 인간된 저들의 죄악성(罪惡性) 때문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믿는다. 그러므로 부활의 도리를 전할 때에, 믿는 자들이 생기는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도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부활 이외의 다른 교리를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생긴다.
성 경 [고전15:5-8]
그리스도의 부활은, 눈으로 친히 본 자들의 증거에 의하여 확증(確證)된 것임(고전15-5-11).
⭕ "게바". - 그는 다시 사신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하면서(행 10:41), 그가 얼마나 확실성(確實性)있게 주님의 부활한 사실을 안다고 증거하였는가? 음식을 같이먹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그 먹는 동안에 잘 살필 수 있으며, 또한 그 사실로인하여 주님의 몸이 음식을 잡수실 수 있는 구체적(具體的)인 몸이었다는 것이 알려진다.
⭕ "열두 제자" - 란 말은, 그들의 수효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직후(直後)에도 열둘이란 의미에서 여기 관설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유다가 죽은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 직후엔 열한 사도만 남았었다. 여기서 "열둘"을 관설한 목적은, "열둘"이란 제자단(弟子團)의 명칭을 이름이다. 한 사람이 없어졌어도 그들의 단체 이름은 그냥 "열둘"이었다. 이 단체는 신약 교회의 기초(基礎)로서 진리를 바로분변할 수 있는 훈련을 3년동안 받았으며 부활 후의 예수를 잘 식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에 있어서 최고 권위 있는 단체였다. 하나님의 방침은 부활하신 주님을누구에게나 보여주실 방침이 아니었다. 행 10:40,41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흘만에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 "오백"이란 숫자(數字)는 대중(大衆)의 숫자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소수(小數)에게만 아니고 대중에게도 나타나셨다. 이는, 소수에게만 나타나시는 불완전한 사실이 아니고 대중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행 1:3에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라고 하였다.
⭕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이니, 그로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의 본래 형이신 사실을 더 잘 식별(識別)할 수 있었겠다. 그는 이렇게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후에 기둥 같이 여김이 된 일군이 되었다(갈 1:19,2:9).
⭕ 모든 사도에게. - 여기서 "모든 사도"라고 한 것은,"열둘"이란 단체에 국한(局限)된 말이 아니겠다. 이것은 "사도"란 명칭을 좀 넓은 뜻으로 써서 다른 사람들, 예컨대 바나나와 같은 사람들도 포함한 말인 듯하다.
⭕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였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 인격이 전적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 증거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원수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사실은 순 객관적 사실(純客觀的事實)인 것이다. 그것은,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원리에 비추어 알려진다. (1)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상대한 사람의 수효가 일정(一定)하지 않아서 어떤 때엔 한 사람을 상대하셨고, 어떤 때엔 십여명, 어떤 때엔 오백명 까지 상대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일정한 수효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졌다고 할 수 없다. 그 만큼 그의 부활 사실을 본 자들의 증거는 일방적(一方的)이 아니고 완전하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주로 그의 제자들(그의 동생 야고보도 포함됨)에게만 나타났으니, 이는, 그들만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전 예수님과 부활하신 후 예수님과의 동일성(同一性)을 식별(識別)하겠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주님을 핍박하던 불신자 바울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 이것도 주님의 부활의 객관적 사실(客觀的事實)됨을 확증한다. 주님의 원수도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4) 어쨋든, 주님의 부활이 무차별(無差別)의 대중 상대로 나타나 보이기를 기필(期必)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주님의 부활 사실은 하나님이 택하신 일군들을 통해서만 증거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며(행 10:41), 둘째로, 주님의 부활을 보지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경륜하셨기 때문이며, 세째로, 주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야 증거되며 또 믿어지는 까닭이다(행 5:32). 5-8절에 있는 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친히 본 자들을 들어서 그 부활의 역사성(歷史性)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칼.바르트(k.Bart)는 이 귀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망이나 어두움이나 신앙도 무덤 앞에는 있을 수 있다"고(TheResurrection of the Dead, translated by H.J.Stenning). 이 말은 그리스도의 비인무덤이, 그의 부활을 증거함의 역사적 증거품으로서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하는 그릇된 말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바울은 왜 이렇게 부활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기사를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부활의 역사적 증거를 들기 위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바르트 말을 보면, 그는(바르트) 확실히 계시(啓示)의 역사적 성격을 부인하고 잘못 말하였다.
성 경 [고전15:9-11]
바울은, 이 부분에 있어서, 자기의 부족을 말하고 자기와 같이 악한 자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보고 변화되고 은혜로 사도가 되어짐을 지적하였다. 즉, 큰 죄인이 변화하여 신앙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가 본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진리이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기에 대하여서도 말하기를 "진리는 보이는 역사적 모습을 취하지 않을 때에 그것은 아무리 초조할지라도 유력하다. 진리는 그것이 인간의 이름을 취하거나 일정한 슬로간에 의하여 학파(學派)나 운동으로 나타날 때는 죽었거나 혹은 치명적(致命的)으로 병든 것이다" 라고 하였다(같은책 p.145-146). 바르트의 이 말은 복음 진리에 대한 역사적 체계가 있을 수 없다는 그릇된 사상이다.
성 경 [고전15:12,13]
이 두 귀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인즉, 일반 신자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은 벌써 된 일이니 앞으로도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곧,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성을 입으셨던 이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은즉, 모든 다른 인간성의 소유자들도 그렇게 될 가능성 아래 있다.
성 경 [고전15:14-15상]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가정(假定)하는 경우에 나올 불행한 일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 가상(假想)되는 불행한 일들은 (1) 사도들의 전도가 헛됨. 이것은 물론 천부당 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가상이다. 사도들의 전파하는 것이 참인 것은,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가 동반(同伴)된 것과 성령의 역사로 증거되었다(히 2:4). (2)믿음도 헛것이 됨. 이것도 이론(理論)을 위하여 가상적으로 말한 것 뿐이고 사실과는 정반대(正反對)이다. 믿음이 헛되어 질 리(理)는 만무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히 11:1-2). (3) 사도들이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됨. 이것도 사실과 정반대 되는 가상이다. 사도들은 거짓 증인들과 정반대되는 성질 있는 사역을 하였다(살전 2:3-6; 고후 2:17).
성 경 [고전15:15하]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 여기에 같은 말씀이 중복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반 신자들의 부활이 서로 서로 일체(一體)되는 원리라는 것을 역설(力說)하려는 데 있다.
성 경 [고전15:17-19]
이 귀절들은, 14,15절의 말씀과 유사(類似)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는 가정(假定) 밑에 나올 불행한 결과들에 대하여 보충한다.
⭕ (1) 믿음도 헛됨. - 14,15절의 같은 말씀 해석을 참조하라.
⭕ (2)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 -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이방인들이 사죄 받은 것은 확실하였다(행 10:43,11:1-18). 그들은 복음을 믿자마자 하나님에게서 사죄 받은 증표를 많이 받았다. 그러면, 신자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사죄 받게 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도 참되다.
⭕ (3)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함. -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은 확실하다(살전 4:14).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되나니, 성령을 받은 자가 부활할 것은 확실하다(롬 8:1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는 가상(假想)은, 어디까지든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지 않다고 할진대 이런 불가능(不可能)한 가상도 성립된다고 하는 셈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 (4) - "우리가 더욱 불쌍"함. 이것도 가상이다. 기독자인 바울은 얼마나 행복스러웠나! (행 26:29;빌 3:7-9). 그러므로 이런 가상은 성립될 수 없다.
성 경 [고전15:20]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잠자는 자"란 말은 죽은 자들을 비유한다. "첫 열매",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면, 수입되는 곡식 전부를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의(意義)를 가진다(롬 11:16; 출 23:19, 34:26; 레 2:12, 23:10, 17, 20;민 15:20, 21).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의 백성의 부활도 얻어진 것이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머리가 부활하였은즉 몸된 교회도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롬 6:5;골 1:18).
성 경 [고전15:21]
⭕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 이 말씀은, 분명히 구주 예수님의 대속적 구원(代贖的救援)의 원칙을 보여준다. 특별히 롬 5:12이하의 말씀이 이 귀절 해석에 적합한 참고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자(代贖者)이신 역사가 윗절에 있는 그의 "첫 열매"된 성질을 설명하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 초두에(헬라 원문대로)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이 있다.
성 경 [고전15:23]
⭕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 "첫 열매"란 말에 대하여 위에 제 20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여라. "강림"이란 말(* )은 왕의 내림(來臨)을 의미할 때 상용되는 말인데 여기서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 "그에게 붙은 자"란 말은, 그리스도의 백성을 가리킨 것이니, 곧, 기독신자 들이다. 고전 12:3, 1:30, 7:23 참조.
성 경 [고전15:24]
⭕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 여기 "나중이니"란 말은, 헬라 원어로 토 텔로스(* )니 세상 끝이란 뜻이고, "마지막 부활"이란 뜻이 아니다.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침". 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모든 악한 권세들을 멸하느라고 잡았던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친다는 뜻이다. 그가 재림하실 때엔 모든 악한 권세들을 멸하신다. 대상 29:11; 시 22:29, 145:13;욥 21장; 욜 3:8; 계 11:15, 20:10 참조.
성 경 [고전15:25,26]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하여는, 모든 원수(사망까지 포함됨)를 완전히 멸절하시는 권세를 가지신다. 이것이 그의 왕권인데,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어 이를 행용(行用)하신다(시 110편). "그 발아래" 둠은 완전한 정복을 이름이다.
성 경 [고전15:27]
⭕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 이것은,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는 시 8:6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메시야께서 구속 사업(救贖事業)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를 가리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이런 권세를 주셨으니, 아버지께서만은 메시야의 권세 아래 들지 않으신 것이 명백하다. 그는 필경 만유의 주가 되신다(28 下半節)
성 경 [고전15:28]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시어 그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바침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는 만유의 주로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재림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복속)하신다 함은, (1) 그의 신성(神性)이 아버지만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그의 역사면(役事面)에 있어서 아버지에게 종속(從屬)하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2) 그것은, 그가 삼위 일체 신(神) 안에서 영원한 왕이심을 부인하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고 또한 (3) 그것은, 그가 그의 구속하신 백성의 영원한 왕이심을 부인함도 아니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왕국은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오는 중에만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같은책 P.17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세상에 이루신 역사적 가치(歷史的價値)를 무시한 말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왕국은 물론 과도적(過渡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천국의 현실이 아닌가? 천국의 종말적(終末的)인 완성은 미래에 속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벌써 와 있는 현실이다.
성 경 [고전15:29]
⭕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 여기 이른 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몇가지 해석을 가진다. (1)어떤 주석가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산 사람으로서 별세(別世)한 사람을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음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대리적(代理的) 세례는 이단에 속하는 것이니, 바울이 그것을 인정하는듯이 여기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이것은, 거의 죽어가는 자가 그의 불신(不信)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더러 예수를 믿고 세례 받으라고 한 부탁대로, 그 부탁받은 자들이 순종하여 세례 받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3) 이것은, 죽은 자들 위해서(=무덤 위에서) 세례 받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위하여"란 말(* )이, 이 해석에 있어선, "위에서"(above)라고 생각되었다. (4) 그리고 또 한가지 해석은, 이러하니, 곧, 여기 "죽은 자들을 위하여"란 말씀이 "죽은 자들(세례받는 자신도 포함시킴)의 부활할 것을 염두에 두고"란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은 "부활할 것"이란 말을 보충(補充)하는 것이나 자연스럽지 않다. 이 밖에도 학자들이 거의 30내지 40여개의 다른 해석을 이 말씀에 붙인다고 한다. 어쨌든, 세례 받는 자들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받는다는 것이 바울의 염두에 있은 것은 사실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이 세례받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세례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
성 경 [고전15:30,31]
신자들이 의(義)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는 것은 장래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같은 모험적 신앙(冒險的信仰)을 가짐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활신앙(復活信仰)을 기뻐하시어 그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 하나님이 부활신앙을 기뻐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15:32]
⭕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 "범인처럼"이란 말은, "부활 소망 없는 사람처럼"이란 뜻이다. 그런 소망 없는 사람으로서야 무슨 유익을 보자고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랴? 바울이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는 것은, 하나의 은유(隱喩)니, 곧, 악인들의 박해를 받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 사 22:13 참조. 여기에 "먹고 마시자"란 말이 인용되었는데, 이것은 에피큐리오 철학(Epicurean philosophy), 곧 쾌락주의 철학의 표어(標語)이다.
성 경 [고전15:33,34]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더러, 회의주의(懷疑主義)로 흐르는 악도(惡徒)들에게 속지말라고 다짐한다. 회의주의자들은 행실이 부패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시 14:1). 진정한 의미에서 의를 행하는 사람일 수록 진리 신앙에 가까워진다.
성 경 [고전15:35]
⭕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 이것은, 신자들의 부활할 몸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물음에 대하여 대답한다.
성 경 [고전15:36,37]
이 말씀은, (1) 현세(現世)의 몸은 죽고야 내세의 부활체(復活體)가 생겨난다는 비유이며 (2) 장래에 부활할 몸이 현세의 썩을 몸과 같지 않다는 비유이다. 뿌리워 썩는 씨가, 그것에서 자라난 줄거리에서 피는 꽃과 같을 수 없다. 부활한 몸도 영 뿐이 아니고 물질적(物質的)이면서도 현세의 인체(人體)와 같지는 않다(charles Hodge).
성 경 [고전15:38]
⭕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여기 "저"란 말(* )은 "그것"(종자를 의미함)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면 심기운 종자에서 그 종자의 모양과는 다른 형체의 줄기와 잎이 나온다. 그것은 또한 씨앗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활하는 때(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나타나는 신자의 몸이 그 본래 무덤에 들어가던 몸과는 다른 것이다.
성 경 [고전15:39]
⭕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창조(創造)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그 몸들의 구조와 모양이 각각 다르게 하셨다. 그렇다면, 그가, 인간들을 부활시키는 사역에 있어선, 땅에 있던 그들의 육체의 모습과 같이 하셔야만 되는 제한을 받을 것인가? 그럴리는 없다.
성 경 [고전15:40]
⭕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 여기 "하늘에 속한 형체"란 것은, 다음 귀절이 명시(明示)한 바와 같이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의미하고, "땅에 속한 형체"는 땅에서 사는 것들의 몸들을 가리킨다. 양자(兩者)의 모습이 서로 다른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은 또다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다양성(多樣性)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다시 살아날 몸을 현세(現世) 사람의 몸과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바울은 여기서 "창조질서 상(創造秩序上)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그의 구속 능력(球束能力)에 대한 비유와 전주곡(前奏曲)으로 생각하였다. 구속의 능력은 결코 창조의 능력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H.D. Wendland, Dies Schopfungswirklcdkeit ist Gleichnis und Vorspiel der Erlosungswirklichkeit. Diese Macht des Gottes der Erlosung ist nicht geringer als die Macht des Gottes der Schopfung. Die Briefe an die Korinther p.134).
성 경 [고전15:41-43]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함을 암시한다. 창조질서(創造秩序)에 있어서도 그 다양성(多樣性)을 성립시키는 그의 능력이(38-41) 오묘하다. 이 능력이 부활시키는 사역에 있어서 역시 오묘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여기서, 현세의 인체(人體)와 내세의 부활체(復活體)와의 대조(對照)를 보여주며, 양자(兩者)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립되며 존재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 둘 사이에 대조는,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약한 것과 강한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 - 의 대조이다. 이것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이 저것도 존재케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여기 말한 각기 대조 중에 한 편만 존재케 할 수 있을가? 하나님은 권능에 제한 받은 신(神)이신가? 결단코 그렇지 않다.
성 경 [고전15:45]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 여기 "기록"이란 것은 창 2:7에 대하여 관설한다. "첫 사람"이란 말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초등 인간(初等人間)을 의미한다. 그에겐, 완성시켜 주시는(살려주시는)사람, 곧, 마지막 아담이 무언중(無言中)에도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산 영"(* )이란 것은, 하나님이 아담의 몸을 지으시고 거기 생기를 불어 넣은 뒤에 된 것이다(창 2:7). 그리하여 그 몸은 영혼이 담기운 그릇과 같이 된 셈이다(Meyer). 그것은 위에 44절에 이른바 "영혼의 몸"(* )이다(한역에서 "육의 몸"이란 것은 誤譯임). 이런 몸은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자체로서는 영생할 번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남을 살리는 영은 못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 이유는, 그가 말세에 나타나서 인생들을 구원하여 완성시키기 때문이다(히 9:25-28上半節). "마지막"이란 것은 말세란 말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때부터는, 성경의 가르친 대로, 말세이다(히 1:1,2). 그리스도가 "살려 주는 영이 되"신 것은 어느 때부터 된 것인가? 여기 "되었"다는 말이 역사상(歷史上)에 이루어진 사건(事件)을 가리키는 것인 만큼, 그것은 그의 부활승천하신 때부터 된 것이다.그의 부활 전(復活前) 몸은 아직 "영혼의 몸"(soulbody), 곧, 영혼만이 지닌 몸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몸은, 남들에게 생명을 교통하여 줄 수 있는 몸이다. 이와 같이 생명을 교통하여 주시는 일은, 그가 하심에 있어서, 물론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하신다.
성 경 [고전15:46]
여기 이 말씀은, "신령한 자와 육 있는자"(헬라 원문엔 (* )이니 "영혼의 사람")의 존재에 대한 시간 순(時間順)을 지적하려는 것보다, 미성품(未成品)과 같은, "육 있는 자"(헬라 원어의 직역대로 "영혼 있는 자"(* )이니 성령으로 다시 살게 함이 된 사람이 아님)를 완성케 하기 위하여 마지막 아담 곧, 신령한 자가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구원에까지 이르도록 완전케 하시는 사역의 단계를 표시하는 말씀이다.
성 경 [고전15:47,48]
이 귀절들은 첫 사람 아담의 근원과 둘째사람 그리스도의 근원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는 흙에서 유래(由來)하였고 다른 한 분은 하늘에서 오셨으니, 양자(兩者)는 천양(天壤)의 차이로 서로 다른 면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성품을 취하셨으니만큼, 그를 믿는 자들이 그의 형상을 입을 소망이 있다. 다음 귀절(49절)이 그것을 지적 한다. 바르트(Barth)는, 이 부분에 있는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하는 문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이 진정한 영은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 이적(絶對的異蹟)이다"라고 하였다(Barth,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ranslated by Stenning. p. 201). 그는 또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사(救援史)와 관련하고 서있다. 그것은 진정한 역사니, 옛것은 망해 가고 새 것이 되어 가는 역사이다. 그것은 시간계에서 연출되는 것이 아니고, 시간과 영항(永恒)의 사이에서 되어지는 것이다"락 하였다(같은 책 p.201-202). 위에 소개한 바르트의 구원사관(救援史觀)은 초월주의(超越主義)가 이니라 초절주의(超絶主義)이다. 구원사 관계에 있어서 성경은, 초월주의를 가르치고 있으나 초절주의를 말하지는 않는다. 초월주의는, 하나님께서 시간 세계에 내재(內在)하시면서 동시에 초월하여 영원계(永遠界)에 계심을 말한다. 이 사실은 고린도 전서 15장 27, 28절이 밝혀준다.
성 경 [고전15:50]
여기 이른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혈육 그대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뿐이다.
⭕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이 말씀도 역시 "썩은 것" 그대로는 "썩지 아니한 것"(천국)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썩은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변화를 받아 부활체(復活體)가 되어서만 천국에 참여한다.
성 경 [고전15:51]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 "비밀"이란 말은, 전에 감취었다가 지금은 계시(啓示)된 진리를 이름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진리를 염두에 둔 말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곧,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재림 때 전에 모두 다 별세하고 없을 것이 아니고, 그 때에 살아 남아 있을 자들도 있겠다는 뜻이다.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그 때에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하여 몸이 변화된다. "마지막 나팔"은 비유니, 주께서 재림하시어 성도들을 모으심을 가리킨다(마 24:31). 사 27:13; 살전 4:16 참조.
성 경 [고전15:52]
⭕ 우리도 변화하리라. - "우리"란 말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살아 남아 있을 자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사도가 자기 당대에 주께서 재림하실 줄 알았던가? 그가 재림이 자기 생전에 될지도 모른다는 신앙은 가졌을 것이다(고전 7:26의 해석 참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재림의 날과 때를 모른다고 하셨으며 또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25:13; 눅 12:40). 그러므로 바울이 자기 당대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지도 모른다는 사상을 가진 경우에도,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성 경 [고전15:53]
⭕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 이 말씀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이 변화하게 될 원인(原因)을 보여준다. 곧, 이 말씀에 "불가불"(* )이란 말이 중요하니, 그것이 원인이다. 그것은, 어떤 추상적(抽象的)인 절대성(絶對性)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필연성(必然性), 곧, 하나님께서 되도록 하셨기 때문에 될 수밖에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구원론적 필연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Lenski).
성 경 [고전15:54]
⭕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용하리라. - 호 13:14 참조. 사망이 이김에게 삼킨 바 된 사실에 대하여는 55-57의 말씀이 잘 보여주었다. 곧, 사망은 죄를 이르며 죄는 율법을 기회로 삼아 성립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수하여 주셨으니만큼 사망은 패배(敗北)를 당하였으며 폐지(廢止)를 당하였다는 것이다.
성 경: [고전16:1-9]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본문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특별한 이유로는 (1) 원래 빈민층이 많았고, (2) 여러 차례에 걸친 팔레스틴 지방의 흉녕으로 인해 기근으로 처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성 경: [고전16:1]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행 11:28에 보면 글라우디오 때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아가보의 예언이 전해지고 있고, 갈 2:10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비참한 빈궁 속에 빠져 있음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도운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 형제들을 도우라고 권면한다.
⭕ 연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게이아'(*)는 여기에서만 쓰였는데 후대에 이 말은 세금과 관련되어 쓰여졌다(Barrett). '로게이아'의 이러한 용법 때문에 혹자는 바울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예루살렘 성전에 비친 유대인들의 세금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한다(J. Jeremias).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세금은 강제성이 부여된 징수인데 반해 연보는 사랑에 기초하여 어려움을 당한 교회를 돕기 위한 자발적인 헌납이기 때문이다(Kittel). 연보는 (1) 대가 없이 주는 '선물'(*, 카리스, '은혜')이며(3절;고후 8:4ff.), (2) 서로 나누는 '교제'(*, 코이노니아, '동정')의 방편이며(롬 15:26). (3) '섬김'(*, 디아코니아)의 진정한 표현이고(롬 15:31;고후 8:4;9:1), (4)다른 사람에게 복을 기원해 주는 것(*, 율로기아, '축복')을 합당하게 구체화 시키는 것이다(고후 9:5).
⭕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권면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본문은 갈 2:10에서 결정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많은 교회들은 예루살렘의 결정에 따라 연보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전체 교회의 전체 운동은 단순한 구제 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1) 교회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고취시켜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연합을 도모하며, (2)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추구하는 사랑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한편 갈라디아는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 당시 개척한 안디옥, 마게도냐 지방을 통틀어 생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Barrett). 여기에 대한 근거는 고후 8:1이하에 마게도냐 교인들이 궁핍한 중에서도 최선을 다해 풍성한 연보를 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한 사실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소개할 때, 마게도냐 지방을 넓은 의미에서 갈라디아 지방으로 해석한 데 있다 하겠다.
성 경: [고전16:2]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 '매주일 첫날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미안 삽바투'(*)는 '매 안식 후 첫날에'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주일'(Lord's day)에 해당한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주로 안식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으나(행 15:21;18:4),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것을 기리며 '안식 후 첫날'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행 20:7). 이처럼 초기에는 주일과 안식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지만 유대교임의 기독교 박해로 두 종교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4세기 초부터 기독교는 주일을 정규적인 교회의 집회일(集會日)로 정했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를 드리는 세 가지 원칙을 말하고 있다. (1) 연보를 드리는 시기가 '주의 날'임을 밝힌다. (2)연보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하도록 하였다. 이는 연보를 하는 사라들이 어떤 특정 부류의 계층에만 제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든 사람이 연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두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3) '이를 얻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오도타이'(*)는 '유오도오'(*)의 현재 수동형으로 '번영된다', '바르게 인도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며(롬 1:10;요삼 2) 모두가 수동태를 취했는데, 이는 70인역(LXX)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TDNT). 이로 보아 이 말이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시는 대로' 또는 '기회 주어지는 대로' 연보하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겠다. 또한 '호 티 에안'(*)은 '...하는 대로'라는 의미로 자신의 수입 정도에 따라서 연보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고전16:3]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도착한 후 연보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갔지만, 바울 자신이 직접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고 고린도 교회에서 추천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교회 재정을 취급함에 있어 호리라도 의심을 살 만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 너희의 은혜를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린'(*)은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 '친절한 호의' 등을 뜻한다. 만약 '카리스'가 죄와 허물과 연관해서 쓰이면 언제나 '공로 없이 받는 은혜'를 뜻한다(TDNT).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보낼 선물로 친절하고 자비로운 '사랑의 연보'를 가리키며(Lenski), 이러한 구제의 연보는 대가를 전혀 생각지 않는 선물이다.
성 경: [고전16:4]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 바울의 계획은 불확실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인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고린도 교회가 드린 연보의 액수가 크면 그 분배(分配)를 위해 전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고 밝힌다. 사실 나중에 살펴보면, 고린도 교회가 연보한 금액은 상당히 많은 것이었으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동행하여 예루살렘에 간 것으로 나타난다(행 20:4;룸 15:25).
성 경: [고전16:5]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
⭕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 바울의 원래 계획은 본서를 쓰고 있던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고린도로 갔다가 마게도냐 지방을 방문하고 난 연후에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이었다(행 19:21;고후 1:16). 하지만 바울은 이 계획을 변경하여 마게도냐를 먼저 방문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부끄러운 사건을 전해듣고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위함이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로는 간음, 음행, 우상숭배 등이 있었는데 교회는 이것을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따라서 교회는 거룩성을 날로 상실해 가고 있었다. 바울은 이것을 바르게 가르쳐주고자 고린도 교회를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칫 감정적인 분노때문에 성도의 덕을 상할까 염려하여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방문을 연기했거나 변경하게 된 것으로 본다(Farrar). 하지만 고린도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모르고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박한 인물이라고 비난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고린도후서에서 변호하고 있다(고후 2:13;8:1;9:2, 4;12:14;13:1).
성 경: [고전16:6]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
⭕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 바울이 과동(過冬)하려는 구체적인 시기는 A.D. 57년 말에서 58년 초까지 약 3개월 간을 가리킨다. 바울은 실제로 고린도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고린도에 체류한 이 기간 동안 로마서를 집필하였다(행 20:1-3). 당시 근동지방에서는 겨울에 여행하는 것을 꺼려하였다. 바다는 얼어서 배를 이용할 수 없게 되고 육지는 추위로 여행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을 이미 세웠지만, 한편으로는 여행할 수 없는 여건을 생각하고 있었다(Morris).
⭕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함이라 -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머무는 목적은 교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전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의 생필품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었다(Barrett, Lenski). 한편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게 하고 그일이 바울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전체 교회가 해야 할 사명임을 시사해준다.
성 경: [고전16:7]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
⭕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가려는 또다른 목적을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잠깐 거쳐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능한 한 일정기간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길 원했다. 본문에서 '이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를 해석함에 있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아르티'를 '팔린'(*, '다시'), 혹은 '아르티팔린'(*, '이제 다시')으로 해석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사실이 두번째임을 주장한다(Reuss). (2)혹자는 '아르티'를 수사(數詞)로 볼 수 없고 단순한 부사에 불과하기에 바울의 두번째 방문을 증거해 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Lenski, Godet). 문맥상 두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전에 계획하기로는 잠시 들렀다 가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어 고린도 교회에 한 동안 머무르길 원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 바울은 주님의 종이라는 인식을 항상 갖고 있다. 본절에서도 바울은 생각과 뜻을 고집하지 않고 그의 삶과 계획 가운데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주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였다.
성 경: [고전16:8]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
⭕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 본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이 본 서신을 오순절이 되기 전, 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Robertson). 바울이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머물러 있으려 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다(행 14:27;고후 2:12;골 4:3). 하지만 예기치 않게 발생된 데메드리오의 소동으로 바울은 급하게 에베소를 떠나게 된다(행 20:1).
성 경: [고전16:9]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
⭕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 - '공효를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게스'(*)는 '활동적인', '효과적인'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라'(*)는 주님께서 널리 사용한 수사법 가운데 하나로서 제자들도 일상적으로 사용하였다(행 14:27;고후 2:12;골 4:3;계 3:8). 이 말이 주는 뉘앙스는 눈에 보이는 형상적인 '문'보다는 '기회', '통로'를 의미한다. 본절에서 이 말은 비유로 사용되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다(Hodge).
⭕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 바울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 어렵다. 다만 행 19장의 내용으로 보아 '대적자'가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이었고, 특히 아데미의 은감실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데메드리오가 주동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고전16:10]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
⭕ 디모데가 이르거든 -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 성(城)의 재무 담당 에라스도와 함께,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 교회로 가서 바울의 방문을 준비하도록 보냈다(행 19:22). 디모데의 임무는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쟁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당시에 고린도 교회는 헬라 철학의 영향이 만연되어 있었고 항구 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세상의 헛된 지혜가 팽배해 있었다. 이에 바울은 데모데를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지혜,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도리를 바르게 가르치고자 하였다.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출발하고 나서 바울은 여행 계획을 바꾸어 직접 방문하는 대신 편지만을 전했다. 한편 디모데는 여러 교회를 들러 고린도 교회로 간데 반해, 바울이 쓴 편지는 해상도를 통해 직접 고린도 교회에 전달되었기 때문에 디모데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것 같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편지를 통해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못하게 되는 경위와 앞서 보낸 디모데를 기쁘게 영접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 두려움이 없이 - 디모데는 이 때에 비교적 젊고 경험이 적은 목회자였다(딤전 4:12). 이에 반해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매우 심각해져서 디모데가 지닌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Lenski). 오만한 궤변가와 논쟁적인 분파주의자들이 연소(年少)한 디모데를 위협하거나 조롱하여 그가 임무를 감당하면서 지극히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특별한 배려로 고린도 교회에 권면한다. 이는 디모데가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Groscheide, De Wette, Alford), 디모데의 소심함 보다는 연소함 때문에 바울이 염려하는 것이다(Meyer). 사실 디모데는 현재와 같은 어려운 직무 외에도, 이후에 아시아 전지역을 전도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할 만큼 대담하고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가 소심하고 유약해서라기보다는 디모데가 연소하다는 빌미로 그가 전하는 복음까지도 그릇되게 받아들여질까봐 이를 경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 중에서도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인물이었다. 디모데만큼 바울과 가까운 사람도 없었고 바울의 칭찬을 들은 사람도 없었다. 아볼로나 디도가 독자적으로 사역하였던 것에 반해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평생을 동역(同役)하였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한 자로서(롬 16:21;빌 2:20ff.)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성 경: [고전16:11]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
⭕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 바울는 자신의 젊은 동역자 디모데를 위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의 연소함과 겸손함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멸시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데네오'(*)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대하다',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삼다'라는 뜻이다(Kittel). 바울이 디모데를 위하여 이처럼 고린도 교회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이유는 바울 자신이 겪었던 고린도인들의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울이 이러한 권면을 고린도 교회 전체 성도들에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중 가운데 몇몇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 그들이 디모데를 함부로 대할까 염려하며 권면하는 것이다(Lenski).
⭕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 '평안히 보내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펨프 사텐 엔 에이레네'(*)는 단순히 관용적인 작별인사가 아니다(Edwards). 문맥상으로 보면 이 말은 '아무런 근심이 없거나 두려움이 없게 하라'는 소극적인 권면이라기 보다는 '위협하지 말고 멸시하지 말라'는 것으로 강조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 되었다.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디모데의 임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가 떠날때에는 어떠한 문제나 분쟁이 없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Lenski).
⭕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 본구절은 자주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즉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테코마이 가르 아우톤 메타 톤 아델폰'(*)에서 '메타 톤 아델폰'('형제들과 함께')이 '아우톤'(*, 저를')을 수식하는지 아니면 '에크 테크 마이'(*, 오기를')를 수식하는지에 대한 계속되는 논란이 있어왔다. 만약 전자의 견해를 따라 해석하면 '바울이 형제들과 함께 디모데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해석상의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지배적이다. 즉 헬라어 어법상 위치하고 있는 그대로의 순서를 우선적으로 따르는 방법으로 '아우톤'과 '메타 톤 아델폰'을 연결시켜 '형제들과 함께 한 디모데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Lenski). 물론 여기서 '형제들'이라고 지칭된 사람들은 에라스도를 비롯하여 고린도 교회의 몇몇 사람을 가리킨다.
성 경: [고전16:12]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
⭕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 '대하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데'(*)는 고린도로부터 보내온 질문에 대해 설명하는 상용구로서 본서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다(7:1,25;8:1;12:1;16:1). 본절의 답변으로 미루어 보아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적지 않은 존경을 받은 듯하고, 그리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아볼로를 초청한것 같다.
⭕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 '권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칼레사'(*)는 원래 '간청하다', '호소하다', '초대하다'라는 의미이며 본절에서는 '권고(勸告)'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 교회에 가길 권유함에 있어서 이 단어를 모르고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바울과 아볼로가 경쟁적이거나 명령적인 관계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바울과, 아볼로파, 베드로파로 나뉘어 분쟁이 성하였기에 자신도 연루된 점을 고려하여 가기를 꺼려했다고 추정한다(Montefiore).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가설에 불과할 뿐 사실을 증명할 근거는 없다(Barrett). 실제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 가지 못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당파 싸움때문이라기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회가 있으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레세'(*)는 동사 '유카이레오'(*)에서 온 것으로 '시간이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이 번역한다면 '시간이 있다'는 의미로 '스콜라조'(*)라는 더 분명한 뜻의 단어가 있는데 왜 바울이 이 단어를 안쓰고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스콜라조'라는 헬라어가 바울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고 A.D. 2C 이후 유세비우스 때에야 비로소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로서는 부득불 '유카이레오'라는 단어로 두 의미를 모두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Edwards, Kittel).
성 경: [고전16:13]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깨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레고레이터'(*)는 현재 명령형으로 일시적인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상태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예수께서 세상의 끝날에 있을 징조를 설명하면서 사용하신 바 있다(마 24:42;25:13).
⭕ 믿음에 굳게 서서 - '굳게 서서'의 헬라어 '스테케테'(*)는 '흔들림 없는', '확실한', '의심없는' 등의 의미로 본절에서는 믿음의 상태가 견고함을 가리킨다. 한편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테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역사적인 객관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fides quae creditur)과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주관적 진리로 확신하는 것(fides que creditur)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권면한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위에 든든히 서라는 것이다(Lenski).
⭕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 '남자답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리제스데'(*)는 '성인 남자' 혹은 '남편'을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르'(*)에서 온 말로 때로는 힘의 상징으로서의 남성을 가리키기도 했다(TDNT). 이 단어는 부사처럼 번역되었으나 동사로 '남자다워라'는 의미이며 본절에서는 동사로 신앙을 지키는 것을 '남성다움', 또한 '강건함'과 연관짓는다. '강건하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타이우스데'(*)는 수동태 명령형으로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의 힘이 타고난 육체적인 힘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것임을 보여준다(Morris).
성 경: [고전16:14]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사랑으로 행하라 - '사랑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가페'(*)는 '사랑을 가지고'(with charity)로 번역하기보다는 '사랑안에서'(in love)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전치사 '엔'(*)이 '도구' 혹은 '기구'의 용법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본절에서는 '범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Lenski, Morris).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그들의 행동을 위한 부수적인 수단이 아니라 행동 그 자체이어야 한다. 바울이 마지막 권면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랑을 최고의 것으로 본 동시에 최종적인 열매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성 경: [고전16:15]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 스데바야의 회심은 바울이 아덴에 복음을 전했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행 17:34). 행 17:34의 누가의 기록이 스데바나의 회심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면 본절과 지명의 차이의 보이는 문제가 생기지만, 본절에서는 스데바나 개인만을 언급하지 않고 그의 가족 전체를 가리켜 아가야의 첫열매로 지칭한다고 보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키안'(*)은 라틴어의 '파밀리아'(familia)와 마찬가지로 '가족들'뿐만 아니라 '노예들'까지도 포함하였다(Boice). 따라서 스데바나가 아덴에서 회심한 이후에 아가야에 돌아와 그의 가족들을 모두 회심시켰다고 볼 수 있다.
⭕ 성도 섬기기로 - 바울이 보다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기 때문에 스데바나의 가족이 어떤 종류의 봉사를 했는지 알 수는 없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둘로 나눌 수 있다. (1)혹자는 병든 자나 가난한 자를 돕는 일,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내어 놓는 일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Godet). (2)혹자는 스데바나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에 많은 연보로 봉사했다고 본다(Edwards, Hofmann).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1)의 견해가 보다 더 옳은것 같다. 왜냐하면 (2)의 견해를 따르면 스데바나가 연보를 시작한 것은 바울이 연보에 대해 가르친 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행했다는 뜻이 되는데 연보를 시작한 것이 시기상 그렇게 이르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작정한 줄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태산 헤아우투스'(*)는 '스스로를 준비시켰다'라는 의미로 스데바나의 가정이 자발적이고도 헌신적으로 봉사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또한 그들이 교회에서 섬기는 직무로 선출(選出)되지도 않았음을 추측케한다(Morris).
성 경: [고전16:16]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복종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탓세스데'(*)는 '휘포탓소'(*)의 명령형으로 '휘포탓소'가 능동태일 경우에는 '밑에 두다', '밑에 첨부하다'등의 의미이지만 본절처럼 중간태로 쓰이면 '자신을 복종시키다', '주(主)로 인식하다'(acknowledge as lord)등의 의미로 쓰인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스데바나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순종을 본받아 자신들을 낯춰 교회와 성도를 섬기기에 힘쓰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서신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권면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나이나 경험이 비슷한 사람들을 존경하는 일을 천성적으로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의 이러한 결점은 바울의 서신보다 약 35년 늦게 보내어진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서신에도 나타난다(Godet).
성 경: [고전16:17]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브드나도와 아가이고 - 이들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등장한다. 브드나도는 바울의 편지가 있은 지 약 35년 뒤에 기록된 로마의 클렌멘트의 편지에는 종종 등장하지만 동일인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런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고, 시간적으로도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아가이고는 다른 곳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노예였거나 노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그들이 스데바나의 노예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고(Godet, Grosheide), 혹자는 1:11을 근거로 하여 글로에의 종들이었다고 추정한다(Edwards, Lenski). 이 견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분명치 않다.
⭕ 너희의 부족한 것 - '너희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메테론'(*)은 공인 본문을 비롯하여 오래된 사본들(P, , A)에서는 '휘몬'(*)으로 되어 있지만 이들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부족한 것'에 해당하는 '휘스테레마'(*)는 적은 재산을 가리키기도 하고(막 12:44) 물질적 궁핍을 의미하기도 한다(고후 8:14). 또한 믿음의 교훈이 부족하다는 것(살전 3:10)과 사랑을 나눔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빌 4:10ff). 본절에서는 물질적인 부족함보다는 사랑의 나눔의 부족함을 가리킨다.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고린도 교인들을 행한 바울의 충고와 애정을 대신 전해 주었고 또한 바울에게도 그를 향한 고린도 교인들의 애정을 전해줌으로 바울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지금은 고린도 교인들과 떨어져 있는 바울에게 그들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다.
성 경: [고전16:18]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뉴마'(*)로 바울이 여기에 '프쉬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스데바나와 함께 온 형제들이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에게 시원함을 준 것은 단지 감정상의 위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혼에까지 영향을 끼쳐 참안위를 주었음을 가리킨다(Godet).
성 경: [고전16:19]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아시아의 교회들 - 바울이 말하는 '아시아'는 현재의 터어키 지역에 위치한 당시의 로마령 아시아를 가리킨다. 바울이 본 서신을 쓴 장소는 에베소였으나 아시아의 교회라고 표현하고 있다. 에베소가 소아시아에 속해 있기는 하나 아시아 지역에는 라오디게아, 골로새, 히에라볼리(골 4:13)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본절에서 아시아 전교회를 대표해서 인사를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한 견해들이 있다. (1) 비록 바울이 소아시아 전지역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지역의 교회 대표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기에 그들을 대표하여 인사했다는 견해이다(Grosheide, Lenski). (2) 에베소가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이고 에베소 교회는 그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교회이기에 대표성을 띠고 인사했다는 견해이다(Godet, Edwards, Robertson, Plummer). 이상의 두 견해는 모두 타당성을 갖는다. 본 구절은 바울이 에베소에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모든 아시아의 모든 지역 교회들을 염두에 두고 사역하였음을 보여준다.
⭕ 아굴라와 브리스가 - 이둘은 부부로서 아굴라가 남편이고 브리스가가 아내이다. '브리스가'(*, 프리스카)는 헬라어 표현이고 라틴어 표현으로는 '브리스길라'(*, 프리스킬라)였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세울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행 18:2) 바울과 함께 고린도를 떠나(행 18:18) 에베소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Boice). 또한 그들은 신앙의 깊이가 있어서 아볼로와 같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였다(행 18:26).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이들 부부에 대한 기록이 신약성경에 6번 정도 나오는데 4번이나 아내인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는 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남편 아굴라보다 아내인 브리스가가 더 열심히였던 것으로 추측된다(Morris).
성 경: [고전16:20]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번역된 헬라어 '필레마티 하기오'(*)는 동양사람들에게 있어서 화합, 애정, 존경의 표시로 이마나 볼에 입맞추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말씀이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 많이 나오고 있다(롬 16:16;고후 13:11;살전 5:26;벧전 5:14). 하지만 '입맞춤'이 단순히 동양의 문화 양식만을 따른 의미로서 행해진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깊고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초대 교회에서 이 의식이 행해지는 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 (1) '평화'의 표시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화해가 이루어졌듯이 교회와 교회, 신자와 신자 사이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Edwards). (2) '하나됨'의 표시로 이제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외인이나, 혹은 비록 복음을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배도한 형제들에 대하여 그들의 회개에 따라 한 형제로 받아들임을 다시금 허락하는 표시였다(Lenski). (3) '부활'의 표시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상기하여 굳세게 믿음을 지켜 나가자는 격려의 표시였다(Robertson, Plummer).
성 경: [고전16:21]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친필로 - 바울은 보통 자신의 편지를 구술하여 대필자로 하여금 적게 한 것이 대부분이다(롬 16:22). 하지만 맨 마지막 문구나 인사말은 친히 바울이 기록하였다(갈5:11;골 4:18;살후 3:17). 바울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이 편지가 바울 자신의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다(Robertson, Plummer, Edwards).
성 경: [고전16:22]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다'(*)는 아랍어 '마라나타'(*)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마란아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 '마란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번역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 '에르쿠퀴리에'(*, '오소서 주여')는 명령형으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본절에서는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고 예언적 과거(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 종식(終熄)시켜 고난을 없애주실 것을 소원하는 의미가 된다(Godet, Lenski).
성 경: [고전16:23]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 '은혜'의 헬라어 '카리스'(*)는 아무런 공로없이 주어진 주님의 선물을 가리킨다. 바울이 이 문구로 고린도 교회에 문안 인사를 끝맺는 것은 고후 13:13에서도 나타난다. 본절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의 미숙한 신앙행동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1:4)가 더욱 깊어지고 계속되길 소원하는 바울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성 경: [고전16:24]
주제1: [헌금에 대한 호소와 마지막 부탁들]
주제2: [마지막 부탁과 작별 인사]
⭕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에 해당하는 '엔 크리스토 예수'(*)가 '나의 사랑'(*, 헤 아가페 무)을 수식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너희 무리와 함께'(*, 메타 판톤 휘몬)를 수식한다고 보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너희 무리'라고 할 수도 있다.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하나, 의미상 '엔 크리스토 예수'는 문장 전체를 수식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이는 헬라어 구분상으로서가 아니라 의미상으로 볼 때 본서 전체에까지 적용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Barrett). 바울은 본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록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사랑을 모든 성도에게 쏟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편 '너희 무리'(*, 판톤 휘몬)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를 대적하고 따르지 않는 모든 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사랑을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Mor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