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1: [복 있는 사람]
주제2: [형통의 길과 멸망의 길]
⭕ 복 있는 사람 - 시편은 이처럼 서두(序頭)를 '복'이라는 말로써 시작한다. 히브리어 '아쉬레이 하이쉬'(*)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복이여'이다. 즉, '아쉬레이'는 '올바르다', '번영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솨르'(*)에서 유래된 복수 명사의 연개형인데, 여기에서는 감탄사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는 어떤 명사가 뒤따르는 단어와 의미상 소유격 관계에 놓일 때 앞의 명사를 연계형으로 만들어 '...의'로 해석한다. 한편 구약 성경에서 '븍'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는 '바라크'(*)와 '아솨르'(*)가 있다. 먼저 '바라크'는 파생어까지 포함하여 415회 정도 나오는데 주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거나(창 1:22;2:3;12:2; 17:16;22:17; 25:11;35:9;민 6:27;대상 13:14;말 3:10), 신적 권위를 가진 대리인에 의한 축복선포 때 사용되었다(창 27:4;47:9;출 39:43;신 1:11;삼화 19:39). 이 단어는 또한 복을 간구하거나 축원할 때에도 사용되었다(3:8;왕상 1:47;잠 3:33). 이처럼 '바라크'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큰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인간의 산업과 후손과 육체에 내려주시는 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바라크'를 '율로기아'(*)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솨르'는 거의 복수 연계형인 '아쉬례이'(*)로 사용되었는뎨 구약에 총 44회 중 시편에 26회, 잠언에 8회가 나오고, 유기와 전도서에서는 각각 1회씩 나온다(욥 5:17;전 10:17). 이 단어는신 33:29에서 맨 처음 나오는데 성문서 외에는 왕상 10:8;대하 9:7;사 30:18;32:20;56:2;단 12:12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아솨르'는 대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하여 인간이 고백 혹은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다(Weiser).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마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이 '마카리오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이다(Kittle). 따라서 구약 지혜 문학의 첫 권인 시편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선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있다. 다음으로 '사람'의 히브리어 '이쉬'(*)는 원래 남성을 뜻하는 단어이다(창 2:23).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인간을 가리키고 있는 바, 여성도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Luther). 특히 사람이란 단어는 그 앞에 정관사 '하'(*, the)가 붙은 단수인 반면 복이란 단어는 복수임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에는 누구든지 야훼의 율법에 따라 사는 그 사람만이 여러 형태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복을 기원하는 큰 탄성으로 시편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열면서 그러한 복을 누릴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사'(*)는 '유죄한 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Kraus, Twot).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차'(*)이다. 이 말은 의도, 도모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임'(*)은 표적을 빗나가거나 또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하타'(*)에서 파생된 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길(율법)을 가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간다.
⭕ 오만(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만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침'(*)은 '조롱하다', '비웃다'는 뜻의 동사 '루츠'(*)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조롱하는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한다(Kraus). 이들이 조롱하는 말들은 73:8-11;사 28:15;말 3:14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세 동사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좇다'(*, 할라크), '서다'(*, 아마드), '앉다'(*, 야솨브)는 말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시사해 주고 있다(Weiser). 다시 말해서 죄의 성질이 점점 더 악화됨을 이 용어들의 배열을 통해 알 수 있다.
성 경: [시1:2]
주제1: [복 있는 사람]
주제2: [형통의 길과 멸망의 길]
1절이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의인의 특성을 묘사했다면, 본절은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의인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 여호와의 율법 -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흔히 모세 오경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의 계시라는 점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교훈 또는 훈계라는 의미를 가지며 아울러 하나님의 교훈은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적어도 본시가 전체 시편의 서문의 성격을 가지므로 이 용어는 모세 오경뿐만 아니라 시편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Kraus, Craigie).
⭕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이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본 의인의 특성이다. 그 특성은 (1)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며 (2) 계속적으로 그 율법과 관계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수 1:8). 여기서 '즐거워하여'라는 말은 의인이 토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뻐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안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은 바로 의인만이 누릴수 있는 행복한 싫의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이다(112:1). 한편, '묵상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는 '묵상하다'는 뜻 이외에 본래 '말하다', '속삭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로 볼 때, 의인은 묵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하게 암송한 듯하다.
성 경: [시1:3]
주제1: [복 있는 사람]
주제2: [형통의 길과 멸망의 길]
⭕ 시냇가에 심은 나무 - 이는 의인의 복된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즉, 의인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항상 기쁨을 공급받는 상태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다 비유한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언제든지 생수를 공급받는다. 여기서 '시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팔라그'(*)는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간헐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로(水路)를 말한다.
⭕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 '시절을 좇아'란 문자적으로 '그의 때에'이며 이는 곧 인생의 추수기를 의미한다. 나무가 추수기에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을 멀리하고(1절)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끊임없이 기쁨을 누리는 의인은 인생의 추수기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열매는 추수기에 맺히는 열매이므로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는 악인들의 열매와는 달리 완전히 익은 열매임에 틀림없다(Calvin). 이처럼 의인의 행복은 인간의 잔재주로 인해 얻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건의 노력을 통해 얻는 완전 무결한 행복인 것이다.
성 경: [시1:4]
주제1: [복 있는 사람]
주제2: [형통의 길과 멸망의 길]
1-3절에 묘사된 의인의 행복과는 대조적으로 악인의 실패 및 불행을 기록한 부분이다.
⭕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 곡식을 까 부를 때 낱알은 지면에 떨어지나, 겨는 가볍기 때문에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따라서 여기서 '겨'란 악인의 사라져 버리고 말 허무성을 비유한 말이다. 이러한 개념은 3절의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의 견고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밖에 겨는 성경에서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는 말로서 많이 언급되어 있다(35:5;욥 21:18;사 5:24;17:13;29:5;33:11;41:15;렘 23:28;단 2:35;호 13:3;습 2:2;눅 3:17).
성 경: [시1:5]
주제1: [복 있는 사람]
주제2: [형통의 길과 멸망의 길]
⭕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 여기서 '심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공의' 또는 '심판'으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또한 '견디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쿰'(*)은 '서다', '일어서다'라는 뜻이다. 이 두 용어에 대해 다음 두 가지의 해석이있다. (1) 혹자는 '미쉬파트'를 공의로 보고 본 구절을 '악인이 공의 가운데 서지 못할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즉, 악인은 의인의 공의로운 일에 동참하지 못하며(Craigie) 또는 의인들의 공의 앞에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다는 해석이다(Calvin). (2) 혹자는 '미쉬파트'를 심판으로 보고 본 구절을 '악인이 이 세상 마지막에 있을 최후 심판 때에 서지 못하는 것, 곧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iggs).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 악인이 하나님의 '율법'(*, 토라)을 대적하는 악인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악인을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쭤겨나는 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쉬파트'를 심판으로 해석한 (2)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최후의 심판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수많은 심판의 사역을 행하시고 있기 때문이다(Kraus).
⭕ 죄인이 의인의 회중(會中)에 들지 못하리도다 - 여기서 '의인의 회중'이란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들의 총회를 말한다. 이들은 곧 1, 2절에 묘사된 바와 같이 소극적으로는 악인의 사상과 행동에서 구별된 자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이를 생활화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모여 하는 일은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111:1;118:19, 20). 그리고 15편은 이 거룩한 곳에 서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밝혀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다'(*)는 '지명하다', '...에서 만나다', '두다'는 뜻의 동사 '야아드'(*)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장소적인 개념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다'는 거룩한 장소, 곧 하나님의 언약궤가 모셔져 있는 성소나 성전을 지시하는 것이며 또한 최종적으로 메시야께서 모든 성도를 불러모으실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지시하는 것이다(Kraus). 의인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회중에 들어가나 죄인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시1:6]
주제1: [복 있는 사람]
주제2: [형통의 길과 멸망의 길]
⭕ 의인의 길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복과 악인의 멸망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의인의 복과 악인의 멸망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의인을 인정하시므로 그가 복을 받는 것이며 반대로 악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멸망을 당한다. 이처럼 시인은 이 시구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Weiser). 한편, 여기서 '망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소멸하다'라는 뜻으로 악인의 최후를 암시한다. 즉,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소멸되어 버리는 존재다.
성 경: [시2:1]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주를 대적하는 열방들]
⭕ 어찌하여 - 이 말은 좌절감을 나타내는 의문사가 아니라 이방 나라들의 반역적 행위에 대해 놀라움과 조소를 나타내는 의문사이다(D. Kidner). 시인의 이러한 놀라움의 표정은 다윗 언약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약속하셨다(삼하 7:8-16). 그러므로 이 약속을 굳게 믿었던 시인의 눈에는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왕에게 지배를 받아왔던 이방의 나라들이 반역을 시도하고 있는 사실이 대단히 의외의 일로 가소롭게 여겨졌던 것이다(Rogerson & Mckay).
⭕ 열방(列邦)이 분노하며 - 여기서 열방은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방 나라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세상적인 사람들을 내포한다고 말할수 있다(Rogerson & Mckay). 한편, '분노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가쉬'(*)는 '음모를 꾸미다'(RSV, conspire)라는 뜻으로 역사적인 반역의 사건을 의미하지는 않으나 반역을 위한 모의, 또는 은밀한 꾀를 나타내는 말이다(TWOT).
⭕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 여기서 '경영하는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는 본래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다'는 뜻이다(TWOT). 이 말이 1:2에서는 '묵상하다'로 번역되었으나 본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반역을 꾀하는 무리들이 자기들끼리 은밀히 속삭이는 것을 나타낸다.
성 경: [시2:2]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주를 대적하는 열방들]
⭕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일에 세상의 주권자들이 앞장섰다는 말이다. 여기서 군왕들이란 암몬, 에돔, 그리고 모압과 같은 나라들의 왕들을 지칭한다(A. A. Anderson).
⭕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 '관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죤'(*)은 주권자, 군주를 의미하는 말로서 위의 군왕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서로 꾀하여'는 문자적으로 '함께 모이다'라는 뜻이다.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 서로 연합하여 모의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 여기서 '기름 받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쉬야'(*)는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란 의미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왕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왕들(특히 다윗 계열의 왕들)은 대관식 때 기름부음을 받았다(왕상 1:45). 이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왕직을 대리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출 28:41;민 3:3;삼상 10:1;16:3). 이방 나라들은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 한편, 본절의 메시야는 궁극적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Alexander, Rawlinson, Rogerson, & Mckay).
성 경: [시2:3]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주를 대적하는 열방들]
⭕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 '맨 것'과 '결박'은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그들의 피지배 상태를 의미하며(Kraus), 간접적으로는 하나님의 지배와 그의 율법을 의미한다(Rawlinson). 그 어떤 것이든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통치자들을 귀찮게 여기고 자기들의 육체적인 자유를 찾아 나서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시2:4]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주를 대적하는 열방들]
⭕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 여기서 '하늘에 계신 자'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자'라는 뜻으로 이는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Kraus, Craigie).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바른 지식으로 말미암아 1절에서 그는 세상 나라들의 반역 행위에 대해 그토록 놀라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표현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anthropomorphic)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역 음모를 결국 이루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37:13:59:8).
⭕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 '주'에 해당하는 히므리어는 '아도나이'(*)로서 아도나이는 만물을 소유하신 분(8:1), 지극히 탁월하신 주, 만물 위의 주를 나타내는 말이다(TWOT). 이러한 분이 그와 그의 통치자들을 반역하는 자들에 대해 비웃으신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은연 중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심을 나타내었다(Kraus).
성 경: [시2:5]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주를 대적하는 열방들]
⭕ 그때에 - 이 말은 본절의 미완료 동사와 연결되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미래의 때를 지시하고 있다(Kraus). 따라서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적들에게 즉시 심판을 선포하지 아니하시고 일정한 기간 동안 방치해 두셨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롬 2:4, 5).
⭕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 혹자는 본 구절을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의 성취로 이해한다(Rawlinson, Dahood). 즉 하나님의 심판이 저들에게 임한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특히 6절)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라 단지 당신의 뜻을 선포하심으로 이방의 왕들을 두렵게 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Craigie, Anderson, Kraus). 하나님께서 다만 선포만 하셨더라도 그 선포는 이방의 왕들이 더 이상 자기들의 꾀를 도모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저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Briggs).
성 경: [시2:6]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주를 대적하는 열방들]
⭕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 '내가'는 히브리 본문에서 강조 어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저자는 다윗 왕조의 왕을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언덕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를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세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케티'(*)는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 '수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Craigie). 이렇게 볼 때, 이 동사는 본 구절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시2:7]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도래할 메시야의 승리]
6절이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의 왕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장면이라면 본절은 세우심을 입은 왕이 하나님에 의해 자신이 기름부음 받아 셰워졌음을 선포하는 장면이다.
⭕ 영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크'(*)는 의정서(議定書)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이는 한 인물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준하는 증빙 문서를 의미한다(Kraus). 이 의정서의 내용은 다음 구절에서 이어진다.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이 의정서의 내용은 다윗 언약인 삼하 7:14의 내용과 일치한다. 다윗 언약에서 다윗과 그의 후손은 여호와의 양자로 선택되었다. 여기서 양자됨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다윗 계열의 왕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땅을 기업으로 받고 아울러 그의 대적들을 심판할 권세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Weiser, Briggs, Rogerson, & Mckay). 한편,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목된 시온의 왕은 신약 시대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께서 대관식을 가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한순간에 인정하셨으나 그 인준의 증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것은 (1) 예수의 침례(마 3:17), (2) 변화 산상에서의 변모하심(마 17:5), 그리고 (3) 예수의 부활 등이다. 이 셋 중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만왕의 왕이심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는 것이다(Craigie).
성 경: [시2:8]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도래할 메시야의 승리]
⭕ 내게 구하라 - 자유로이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선택된 왕의 특징 중 하나였다(20:4;21:2, 4;삼하 24:12;왕상 3:5).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신 사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Lange). 아울러 이는 왕같은 제사장인 신약 성도의 특권이기도 하다(벧전 2:9).
⭕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 선택된 왕의 아버지이신 주 하나님은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온 땅을 물려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여기서 아들은 상속자(相續者)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마 21:38;갈 4:7). 그리고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겠다는 표현은 그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Kraus).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자녀에게 '아낌없이' 무엇이든 주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Perowne). 한편, 이 우주적인 통치는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다. 따라서 본절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Craigie, Rawlinson, Briggs).
성 경: [시2:9]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도래할 메시야의 승리]
⭕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 그릇같이 부수리라 - 애굽의 왕들은 대관식 때에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과시하기 위하여 주변 나라들의 이름을 적은 질그릇들을 깨뜨리곤 하였다(Kraus). 이같이 애굽의 왕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질그릇을 깨뜨렸지만 메시야는 '실제로' 질그릇을 깨뜨림과 같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혹자는 깨뜨린다는 단어가 파괴적인 용어이므로 이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라스도의 통치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Wette, Hupfeld). 그러나 이 구절은 계시록에서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되어 인용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묘사한 구절임에 분명하다(계 2:27;12:5;19:15). 위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에는 평화적인 요소와 아울러 악한자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시는 심판적인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Rawlinson).
성 경: [시2:10]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도래할 메시야의 승리]
⭕ 지혜를 얻으며...교훈을 받을지어다 - 이방의 왕들이 시온의 왕 메시야에게 도전하는것은 아주 무모한 짓이다. 따라서 시인은 저들에게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혜로운 행동에 대해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성 경: [시2:11]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도래할 메시야의 승리]
⭕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 이는 (1) 신앙적인 차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는 뜻이며, (2) 정치적인 차원에서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복종하면서 다윗 왕조의 속국으로 만족하라는 뜻이다(Lange).
성 경: [시2:12]
주제1: [하나님이 세우신 왕]
주제2: [도래할 메시야의 승리]
⭕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 성경에서 발에 입맞추는 행위는 종으로 복종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사 49:23). 또한 손에 입맞추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경배의 표시였다(욥 31:27). 따라서 시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 왕으로 계속 모시겠다는 복종의 표시로 경의를 표하라고 이방의 왕들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아들'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히브리어의 '볜'(*)이 아니고 아람어의 '바르'(*)이다. 이 용어는 잠 31:2에서 세 번 연속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특별한 경의를 내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순전한 아들', 또는 '빛나는 아들'이라고 번역되는 편이 좋다(Kraus).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 이 말은 문자적으로 '그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자로' 해석되는데, 이는 열방의 군왕들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진정한 보호를 받게 됨을 암시한다.
성 경: [시3:1]
주제1: [위기 가운데서의 노래]
주제2: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여호와]
⭕ 여호와여 - 다윗은 초두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기도송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 '어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는 시인의 위기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심각성을 잘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Kraus, Lange). 즉, 이 용어는 원수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 대해 탄식하는 수사 용어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다윗이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본시의 상황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막 빠져나온 때, 곧 요단강을 넘지 못한 때일 것이라고 추측한다(Rawlinson). 그때는 사실상 압살롬의 반란 기간 중에서도 다윗에게 가장 어려웠던 때였기에(삼하 17:1-23) 어느 정도 타당한 해석이다.
⭕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 여기서 '치는'(*, 알)은 '대적하는'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즉,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 비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자가 많음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성 경: [시3:2]
주제1: [위기 가운데서의 노래]
주제2: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여호와]
⭕ 많은 사람이 있어 - 또다시 '많다'는 말이 반복되어 있다. 이 용어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다윗은 자신이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반복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개입의 필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것이다(Kraus).
⭕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 쫓겨다니는 다윗에 대한 당시 백성들의 시선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많은 백성들은 다윗에게 도무지 소생할 길이 보이지 않자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며(삼하 16:5-8) 저주하게 되었던 것이다(Rawlinson). 다윗이 백성들의 이러한 시선을 언급한 이유는 하나님의 개입을 간절히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 셀라 - 이는 39편의 시편에 모두 71회 사용된 음악 용어로서 아마도 노래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지휘자가 지시하는 표시인 듯하다.
성 경: [시3:3]
주제1: [위기 가운데서의 노래]
주제2: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여호와]
⭕ 여호와여 - 개역 성경에는 이 호칭 앞에 '그러나'라는 용어(*, 웨)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란 말은 기도의 노래에서 흔히 시인이 절박감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할때 사용하는 용어이다(Kraus). 이 신뢰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생겨나는 것이며 결코 인간을 의지함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여' 하고 부르짖었다.
⭕ 나의 방패시요 - 방패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말이다. 즉, 방패가 군인의 앞을 둘러싸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시인에계 임재하셔서 둘러싸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방패는 단지 한 면만을 막아주지만 여호와는 모든 면을 다 막아 주신다"고 본 구절을 해석했다(Gunkel).
⭕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 이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회복시켜 주실 줄 확신하는 다윗의 말이다. 이러한 다윗의 확신 속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왕으로서의 영광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믿음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머리를 드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의와 좌절 가운데서 수그러진 다윗의 머리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어올리게 하시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Delitzsch).
성 경: [시3:4]
주제1: [위기 가운데서의 노래]
주제2: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여호와]
⭕ 성산(聖山)에서 응답하시는도다 - 여기서 '성산'이란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시온 곧 다윗 성이 위치한 곳을 의미한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가 시작될 것임을 다윗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성 경: [시3:5]
주제1: [위기 가운데서의 노래]
주제2: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여호와]
⭕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 본절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다윗의 믿음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토록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냉정하게 작전을 지휘할 수 있었다(삼하 15:33-37).
성 경: [시3:6]
주제1: [위기 가운데서의 노래]
주제2: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여호와]
⭕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 천만인은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의미한다. 실제로 당시 거의 모든 백성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을 지지하였으므로(삼하 15:12) 본 구절은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있다(Delitzsch). 그리고 여기서 '둘러치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트'(*)는 본래 '놓다'는 뜻이나 이 문맥에서는 '포위하다'라는 군사적인 개념으로 사용된 것 같다(사 22:7, Kraus). 한편, 다윗이 이처럼 수많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상황 중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3절에 이미 표현된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성 경: [시3:7]
주제1: [위기 가운데서의 노래]
주제2: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여호와]
⭕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나를 구원하소서 - 본 구절은 다윗이 급박한 위기 중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소리이다(7:6;6:19;10:12;17:13;44:26;74:22;렘 2:27). 여기서 '일어나소서'(*, 쿰)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와 관련이 있다. 즉, 통치자가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 활동하듯이 언약궤 위에 강림하여 계신 하나님께서도 일어나시어 고난 중에 있는 다윗 자신을 도와 달라는 부르짖음인 것이다(민 10:35).
⭕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 한 문맥 안에 미완료형과 완료형의 문장이 함께 섞여 있다. 즉, 다윗은 '...일어나소서'라는 동사에는 미완료형을 '...꺾으셨나이다'라는 동사에는 완료형을 각각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시제의 차이는 얼핏보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나 실상은 매우 자연스런 표현이다. 다윗은 여기서 완료형의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과거의 자기 경험을 고백한 것이 분명하다. 즉, 그는 지난날 이방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앞으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Rawlinson, Kraus, Schmidt). 한편 , 구약 성경에서 '뺨을 친다'는 표현은 부끄러운 형벌을 내린다는 의미이다(왕상 22:24;욥 16:10;애 3:30). 이 부끄러운 형벌은 악인들이 의인을 욕보인 데 대한 보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는 표현은 의인에게 아무 해가 없게 하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여기서 '악인의 이'란 사나운 야수와 같이 의인을 괴롭히는 악인의 야비한 행위(Rawlinson), 또는 말로써 의인을 조롱한 악인의 입을 상징하고 있다(Craigie).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 '악인의 이'를 꺾으심으로 의인에게 아무 해가 미치지 않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성 경: [시3:8]
주제1: [위기 가운데서의 노래]
주제2: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여호와]
⭕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 이 확신에 입각하여 그는 위기 중에서도 오직 여호와만 의지한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은 숱한 환난과 전쟁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달은 데서 비롯되었다.
⭕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오히려 그들에게 복을 빌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당시에 당하고 있던 위기와 고난이 순전히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닥쳐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삼하 16:10). 아울러 그를 대적한 백성들에 복을 빌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매우 고상한 성품이기도 하다(눅 23:34, Rawlinson).
성 경: [시4:1]
주제1: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제2: [대적들을 향한 충고]
⭕ 내 의의 하나님이여 - 이는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즉, 다윗의 대적들은 그를 정죄하고 대적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판단하셔서 오해와 누명을 벗기신다(Rawlinson, Kraus, Lange, Briggs).
⭕ 고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 본 구절은 3:7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신앙 체험을 고백하는 말이다. 여기서 '너그럽게 하셨사오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르하베타'(*)는 문자적으로 '넓게 하셨다', '여지를 만들어 주셨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협소'의 개념은 고난과 핍박을 의미하며 반대로 '넓은 공간'은 하나님의 구원과 풍요로움 그리고 안전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풍요로운 복을 받은 사실을 회상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Rawlinson). 다윗은 이러한 은혜의 체험에 근거하여 장래에도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드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며 간구하고 있다. 한편, '곤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르'(*)는 본래 '좁은 해협'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다윗의 삶을 크게 억압하고 있는 고통의 상태를 묘사해 주는 단어로 23:4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유사한 표현이다.
성 경: [시4:2]
주제1: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제2: [대적들을 향한 충고]
⭕ 인생들아 -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들아'(*, 베네 이쉬)로 번역되는 이 말은 매우 영향력있는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애굽과 바벨론에서는 영향력있는 지주(地主)를 가리켜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하였다(Meyer). 이렇게 볼 때, 이는 가난한 자를 짓밟고 악을 행하는 부유층의 사람들을 지시하는 말로 이해된다(Kraus). 또한 이 시가 다윗의 피난 시절에 쓰여진 것이라면 이들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합류한 고위층의 인사들을 가리키거나(Lange), 아니면 짧은 생각으로 다윗을 욕되게한 아비새나 요압 등을 가리킬 것이다(삼하 16:9, 10, Rawlinson).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 나의 영광을 변하여 -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왕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린다는 뜻이다(3:3).
⭕ 허사(虛事)를 좋아하고 - 여기서 허사는 다윗의 왕권에 도전하는 일을 의미할 것이다(Kraus).
⭕ 궤휼을 구하겠는고 - '궤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자브'(*)는 '거짓'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의 대적들이 추구한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폭로하는 말이다(Briggs). 이는 아마 압살롬과 그의 일당들이 거짓말로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것을 가리킬 것이다(삼하 15:6).
성 경: [시4:3]
주제1: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제2: [대적들을 향한 충고]
⭕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 다윗의 왕권은 백성들의 투표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천명하는 구절이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자기에게 대항하는 악한 자들의 행위가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Calvin). 여기서 '경건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시드'(*)는 친절, 자애, 인자, 충성, 등의 의미를 지닌 '헤세드'(*)의 파생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시드'는 능동적인 의미로서 자애로운 자, 충성스러운 자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수동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자애와 인자의 대상이 된 자를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칼빈(Calvin)은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케이(Kay)도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보았다. 한편, 여기서 '택하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플라'(*)는 단순한 선택을 의미하는 '바하르'(*)와는 달리 존귀한 자로 구별하여 세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Delizsch). 여기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 본 구절은 경건한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리라는 확신의 말이다.
성 경: [시4:4]
주제1: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제2: [대적들을 향한 충고]
⭕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 여기서 '떨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가즈'(*)는 '분노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분노함으로 떨 수는 있으나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 범죄하지는 말라'(Craigie, Rawlinson). 이와 유사한 구절을 엡 4:26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 속에 있는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말고 침묵을 지키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악인이 속에 있는 분노를 터뜨림으로 경건한 자가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침묵 자체가 속에 있는 악을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악의 결과를 줄일 수는 있다(Craigie).
성 경: [시4:5]
주제1: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제2: [대적들을 향한 충고]
⭕ 의의 제사를 드리고 - 여기서 '의의 제삭'란 1절의 '의의 하나님'과 관계있는 말이 분명하다. 그렇게 볼 때 의의 제사는 단순히 의식적(儀式的)으로 드리는 제사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의를 인정하며 그동안 의로운 왕을 대적한 데 대해 회개하는 마음의 진정한 제사를 뜻하는 것이다(Craigie, Kraus, Rawlinson). 4절은 단지 대적자들의 분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경고인 반면 본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악을 제거하기 위한 다윗의 권면이라고 볼 수있다.
⭕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 이는 여호와와의 바른 관계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다윗은 대적들의 행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데서 비롯되었음을 확신했다.
성 경: [시4:6]
주제1: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제2: [고난 중에도 누릴 기쁨]
⭕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 다윗을 따르던 자들 중에 자기의 운명에 회의를 품은 자들의 연약한 탄식의 말을 다윗이 인용한 구절이다. 이들은 인생에게 좋은 것(선)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다만 자신들의 절망적인 처지만을 바라보고 탄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 다윗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회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적들의 공격을 피해야 하는 동시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의 생각들을 극복해야만 했었다. 그가 이 의심의 생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본 구절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할 때 하는 말과 유사하다(민 6:25, 26). 이 말씀을 예배시에 누차 들어왔었던 다윗은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의심을 물리치게 되었던 것이다(Craigie). 그리하여 다윗은 주의 얼굴빛이 자기 무리에게 비취기만 하여도 좋은 것이 풍성하게 임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성 경: [시4:7]
주제1: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제2: [고난 중에도 누릴 기쁨]
⭕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더하니이다 - 여호와께로부터 좋은 것(선)을 받은 다윗의 감격을 나타낸 표현이다. 그가 받은 좋은것이란 마음 깊은 곳에까지 미치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사람의 아들들'(2절)이 권세자에게 아부함으로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로움 또는 권세보다 더 영광스럽고 좋은 것이었다. 이 기쁨이 그러한 것들보다 더 좋은 이유는 그것이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안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시4:8]
주제1: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제2: [고난 중에도 누릴 기쁨]
⭕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고위층의 인사들(사람의 아들들)이 누리는 물질적인 축복보다 더 좋다고 한데 대한 다윗의 확증의 말이다(Calvin). 다윗은 이 기쁨으로 인해 극한 환란 가운데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평안히 누워 잘 수 있었던 것이다(3:5).
⭕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 대적의 무서운 공격 앞에서 평안히 누워 잘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총 때문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특히 '오직'이라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의 도움을 바라지 아니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시5:1]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인도와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
⭕ 여호와여 - 시 맨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전형적인 기도시의 문체이다.
⭕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心思)를 통촉하소서 - '기울이사', '통촉하소서'는 모두 명령형이다. 다윗은 명령형을 거듭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자기의 요청을 들어주실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Craigie). 이와 같은 간절한 기도는 응답받는 비결의 한 요소가 될 것이다. 한편, '심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기그'(*)는 '속으로 중얼거림', '속삭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때로는 큰 소리로, 때로는 조용히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5:2]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인도와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
⭕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왕권의 대리자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언약궤 위에 강림하셨고, 또한 이 언약궤는 지성소에 모셔졌던 것이다(출 15:18;사 6장). 한편, 다윗은 기도 중에 어떠한 확신이 생겨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르짖은 듯하다(Craigie). 즉, 그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바로 다윗 자신을 위해 존재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이같이 부르짖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Kraus).
성 경: [시5:3]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인도와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
⭕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여기서 '기도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라크'(*)인데 이 용어는 '희생 제사를 준비하다', '제물을 배열해 놓다'(레 1:8마., 12)라는 의미를 가진다. 간혹 이 용어는 '할 말을 준비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욥 32:14). 즉, 다윗이 매일 아침 정기적으로 드리는 희생 제사 때에 적어도 그는 준비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이다(Craigie). 이러한 점에서 그의 기도는 준비된 희생 제사와도 같은 정성된 것이었다(Rawlinson). 한편, '바라리이다'라는 말은 그가 기도 후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응답해 주시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는 뜻이다(미 7:7;합 2:1, Barnes).
성 경: [시5:4]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인도와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
본절 이하 6절까지는 주의 집에 들어갈수 없는 자들의 영적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 하나님은 이방의 신들과는 대조적으로 죄악과 함께 공존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죄악을 물리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성 경: [시5:5]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인도와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
⭕ 오만한 자 -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악인들 중 한 부류이다(73:3;75:4).
⭕ 모든 행악자 - '행악자'라는 말은 시편에서 악인을 가리키는 가장 보편적인 표현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다윗을 대적한 자들을 가리킨다(Rawlinson).
성 경: [시5:6]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인도와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
⭕ 피 흘리기를 즐기고 - 무고히 의인을 핍박하며 의인을 죽음의 위기 가운데로 몰아넣었으니, 저들은 살인자나 마찬가지였다(Kraus).
⭕ 싫어하시나이다 - 이 말은 악인들이 주의 집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께 혐오의 대상이 됨을 지적해 주고 있다. 히브리시의 대표적인 표현법인 병행 대구법(parallelism)에 따르면 이 단어는 '멸하시리이다'와 같은 표현이다. 따라서 다윗은 저들의 마지막이 파멸뿐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한편, 우리는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악인들이 열거된 문장을 통하여 의인을 핍박하는 자들 가운데 어떤 종류의 악인들이 있을 수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Kraus).
성 경: [시5:7]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유일한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 여기서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당신의 신실한 언약 가운데 끝까지 사랑하시는 불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앞으로 주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 언약적 사랑의 효력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Craigie, Rawlinson).
⭕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 여기서 성전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모셔져 있는 지성소를 가리키는 말이다(Briggs, Craigie, Lange, Kraus). 그러나 지성소가 다윗의 실제적인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계신곳으로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 다윗은 경배드리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경외함으로'라는 말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 앞에 인생(人生)이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자세를 표현한 말이다.
성 경: [시5:8]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유일한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 이 구절은 다윗의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여기서 다윗이 그의 원수들의 성품이 악하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닮게 해달라는 식의 기도를 드린것이라고 해석한다(Rawlinson). 그러나 당시의 위기 상황으로 볼 때, 본 구절은 원수들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인 다윗이 하나님께 구원의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Calvin). 이러한 점에서 '주의 의'란 자기백성을 신실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의의 현실적(現實的)인 나타남, 또는 실제적인 구원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Calvin, Kraus).
⭕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 '주의 길'은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길이며, 또한 미래에 그 앞에 펼쳐질 복된 길을 의미한다. 다윗은 악인들로 인하여 이 길이 구부러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Kraus).
성 경: [시5:9]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유일한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다윗은 또다시 악인의 악한 성품을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그의 원수들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자들인지를 하나님께 고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 그의 기도는 정당성을 얻고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요구할 수 있다.
⭕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 악인들의 이러한 속성은 이미 6절의 '거짓말하는 자'와 '속이는 자'란 거듭된 표현에서 매우 강조되었다.
⭕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 여기서 '악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우오트'(*)는 '파멸'이라는 의미의 명사형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저희의 심중에는 파멸의 세력으로 가득 차 있다'라는 뜻이다(Kraus).
⭕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 '열린 무덤'이란 죽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즉, 그들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은 남을 죽이고자 꾀하는 음모였다는 뜻이다. 또한 '열린 무덤'은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이와같이 악인들의 언어는 윤리적인 면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독한 냄새(혐오감)를 풍긴다(Craigie).
⭕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권세자에게 아첨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성 경: [시5:10]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유일한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 여기서 '정죄하사'란 말은 '심판하시어'란 의미이다. 다윗은 저들의 가증한 성품에 근거하여 감히 저들에게 저주를 내릴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혼란케 하거나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심으로 스스로의 꾀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히도벨의 자살은 바로 이러한 기도의 응답이었다(삼하 17:23, Rawlinson).
⭕ 그 많은 허물 -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솨'(*)는 구약 성경에서 죄의 개념을 밝혀주는 한 단어로, 이는 '반역 행위'를 의미한다. 저들이 무모한 의인들을 중상 모략하여 해치려한 행동은 직접적으로 다윗에 대한 반역이었으나, 결국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던 것이다(출 16:8).
⭕ 배역함이니이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라'(*)는 '완고한 배반'을 뜻하는 단어이다(78:8;애 1:20;3:42;호 13:16).
성 경: [시5:11]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유일한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보호를 간절히 구하는 다윗의 결론적인 기도의 내용이다. 본절과 12절은앞절(9, 10절)과는 대조적인 내용으로, 앞절에서는 악인에게 저주가 임할 것을 간구한 반면 여기서는 의인에게 복이 임하기를 간구하고 있다.
⭕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영영히 기뻐 외치며 - 이 기쁨은 악한 자들이 파멸된 결과에서 온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온전히 하나님께 피한 결과로 온 것이다. 이 기쁨은 환경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쁨은 의인이 살아가는 동안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5:12]
주제1: [악인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
주제2: [유일한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 '의인'은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되게 사는 자를 말한다(1:2). 또한 여기서 '복'은 보다 나아진 생활 형편을 지적하는 말로서 구체적으로는 대적들의 반역행위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의해 더욱 구체화된다.
⭕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 여기서의 '방패'(*, 치나)는 온몸을 다 방어할 수 있는 길고 큰 방패를 의미한다(35:2).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인간의 모든 면을 감싸주고 보호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Rawlinson). 그러므로 의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원히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성 경: [시6:1-10]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본서는 7개 회개의 시(6, 32, 38, 51, 102, 130, 143편) 중 한 편이다. 이 시에는 시인의 극한 고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 극한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과오를 처절하리만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다. '영장'이란 말에 대해서는 4편의 서문을 참조하라. 한편, '스미닛'은 아마도 '8현금'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여덟 번째 줄의 높이로'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Kraus).
성 경: [시6:1]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이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다윗이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하에 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그는 괴로워하고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 주께서 분을 내신다는 다윗의 표현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생으로부터 떠나시고 그를 버리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여기서 '견책하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흐'(*)는 '심판하다', '판단하다'는 뜻이다. 이 심판의 결과로 그는 지금 영혼과 육체에 있어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2, 3절). 이처럼 주께서 다윗을 심판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율법)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 주의 진노는 가공하리만큼 무서운 것이다. 주의 진노 앞에 땅이 혼들리며 산이 무너지며 아무도 그것을 진정시킬 자가 없다(욥 9:5;렘 10:10). 이와같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다윗은 두려워 떨고 있다. 다윗은 병행 대구법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엄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시6:2]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 육신의 병에 걸렸음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구약에서 죄와 질병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다(32:1ff.;38:2ff.; 39:8, 11).
⭕ 긍휼히 여기소서 - 다윗은 이 질병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태에서 여호와의 긍휼에 호소하고 있다. 이 긍휼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조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구한 것이 아니고 다만 자신의 영육간의 고통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구한 것이다(Craigie).
⭕ 나의 뼈가 떨리오니 - '떨리오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발루'(*)는 문자적으로 '부숴지다'(go to pieces)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다윗의 고통이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나를 고치소서 - 죄악으로 인한 질병은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출 15:26;왕하 5:7). 따라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6:3]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이다. 이 용어는 인간 자신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지만(Kraus), 여기서는 2절의 '뼈'(육체)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영혼을 의미한다(Craigie).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병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권태, 의욕 상실, 무력감, 열등 의식, 죄 의식 등이 영혼의 질병에 포함될 것이다(22:14;31:10;38:3; 102:3, Rawlinson).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질병이 참을 수 없는 한도에까지 이르자 다윗은 절규하고 있다. 여기서 '어느 때'란 곧 하나님의 긍휼이 그에게 임하는 때이다(Rawlinson, Craigie).
성 경: [시6:4]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여호와여 돌아와 - 이 말은 질병 중에 있는 다윗이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Lange, Perowne).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다윗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계신다는 생각은 그의 질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 여기서 '영혼'(*, 네페쉬)은 '생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이 영육간에 강건해지기를 간구한 표현이다.
⭕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 여기서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5:7 주석을 참조하라.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근거하여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국가적인 구원이든 개인적인 구원이든 항상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근거하여 성취되었다(Craigie).
성 경: [시6:5]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 다윗은 마지막 원수인 사망에서 구원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사후(死後) 개념은 신약 시대와 같이 분명하지 않았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사후에 의인과 악인이 구분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확실하게 신학적으로 정립하지는 못했다. 다만 인생이 사후에 음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 음부는 일종의 '지하의 세계'(underworld)로 인식 되었다. 이곳에 들어간 사자(死者)들은 무의식 상태에 있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음부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하 12:15-25 강해. '구약의 사후(死後) 개념 - 음부(陰府)'를 참조하라.
성 경: [시6:6]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 이는 탄식함으로 완전히 탈진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다윗이 죄로 인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했는지를 보여준다.
⭕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 이 '눈물'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나오는 눈물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 계신다는 슬픔으로 인해 나오는 눈물이었다(Craigie). 따라서 이 많은 눈물은 그의 육체적, 영적인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Kraus).
성 경: [시6:7]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 눈이...쇠하며...어두웠나이다 - 건강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모세는 죽기 전에 그의 눈이 쇠하지 아니하였는데(신 34:7), 이는 그가 12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이 극도로 쇠약해진 자신의 건강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근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아스'(*)는 '분개', '성냄'을 의미하는 말이다(Rawlinson, Lange, TWOT). 따라서 근심은 '분개'로 개역되어야 합당하다. 그렇다면 다윗을 분개하게 했던 그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 대답은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언급된 '대적'이란 병자인 다윗을 적대시하는 모든 상황을 지시하는 말이다. 즉, 구약 시대에 병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죄인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병자를 적대시하였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적대시하였다(욥 30:1-15). 다윗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대적으로 인하여 분개하게 되었고, 또한 이로 인해 그 눈이 어둡게 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이다(Craigie).
성 경: [시6:8]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본 구절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기도가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즉, 지금까지 자신의 고통을 애절하게 호소해 온 다윗이 본 구절에서부터는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큰 고통 중에서 분개와 실망을 극복할수 있는 믿음을 회복한 듯하다(Perowne).
⭕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 '행악하는 너희'는 7절의 '내 모든 대적'을 지시하는 말이다. 다윗이 이렇게 담대히 외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시금 돌아오셨음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의 질병은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신 결과였다. 하나님께서 떠나심으로 그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적대시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큰 슬픔과 비애 속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돌아오셨으므로 그는 이 모든 대적에게서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Craigie).
성 경: [시6:9]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 본절에 사용된 두 동사는 시제가 서로 다르다. 앞의 '들으셨음이여'는 완료형이며 '받으시리로다'는 미완료형이다. 이 시제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큰 근심 중에 간구했던 다윗이 지금은 확신 중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고통 중에 간구하는 다윗에게 돌아와 그를 다시금 받아주셨다. 그러므로 다윗의 기도가 이미 응답된 것이다(완료). 그러나 지금까지 악화된 다윗의 건강과 그의 명예는 앞으로 회복될 것이다(미완료). 즉, 그의 심령은 이미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나 그의 육체는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곧 하나님의 응답이 그의 육체에까지 미칠 것을 다윗은 확신하고 있다(Craigie).
성 경: [시6:10]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 모든 원수가...심히 떪이여 - 여기서 '떪이여'는 3절의 '심히 떨리나이다'라는 말과 같다. 처음에는 다윗이 떨었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돌아온 이후에는 그의 모든 원수가 떨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남을 비방하는 자는 결국 그 비방의 대상이 된다는 진리를 확신하고 있다(마 7:1, 2).
⭕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 본절의 '물러가리로다'(*, 슈브)는 4절의 '돌아와'와 깊은 연관이 있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돌아오셨을 때 그의 대적은 물러가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인생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질 때 이 대적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윗은 이 구절에서 인생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을 때에만 모든 대적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성 경: [시7:1]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무죄한 자의 탄원]
⭕ 주께 피하오니 - 다윗은 구원을 하나님안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피하리이다"(57:1),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61:4)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 여기서 '나를 쫓는 모든 자'란 문자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한 원수들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비유적으로 다윗의 명성과 사회적인 지위를 떨어뜨리려고 온갖 거짓된 말을 일삼는 모든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섬성 26:1, 19, Rawlinson, Craigie, Kay).
성 경: [시7:2]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무죄한 자의 탄원]
⭕ 사자같이 -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을 성난 사자에다 비유함으로써 그가 처한위험의 심각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이 얼마나 몰인정하며 잔인한 자들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 여기서 '나'에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네페쉬'(*)이다. 이 용어는 '목'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본 문맥에서는 '목'으로 번역하는 것이 다윗을 대적한 원수의 잔인성을 더욱더 잘 드러내 줄 수 있을 것이다(Schmidt).
성 경: [시7:3]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무죄한 자의 탄원]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 다윗은 1절에 이어 또다시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 1절에서는 구원을 호소하기 위해서 불렀으나, 본절에서는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기 위해 부르고 있다.
⭕ 이것 - 이 말은 원수가 다윗을 고소한 내용을 의미한다.
⭕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 여기서 손은 행위를 의미한다(삼상 24:1;26:18). 그래서 손이 깨끗하면 무죄를 나타내며, 더러우면 범죄했음을 의미한다.
성 경: [시7:4]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무죄한 자의 탄원]
⭕ 화친(和親)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 여기서 '화친한 자'란 언약을 맺은 자, 협약을 맺은 자를 뜻한다. 다윗은 이러한 사람에게 배반하는 악을 범하지 않았으며 다만 신실함으로 대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다윗의 원수들이 다윗이 언약을 맺은 자의 재산을 탈취하는등 배반을 일삼았다고 그를 고소한 데 대항하여 다윗은 전혀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 여기서 '빼앗았거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츠'(*)는 (1) '구원하다', (2) '약탈하다'는 뜻을 가지며, 본 문맥에서는 (2)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다윗이 비록 그를 모함하는 대적일지라도 아무런 까닭없이 약탈하지 아니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Kraus). 그런데 혹자는 '내 대적'을 '그(친구, 화친한 자)의 대적'으로 보고, '할라츠'를 '구원하다'라는 뜻으로 보았다(Craigie). 그리하여 본 구절을 '내가 나의 친구의 대적을 까닭없이 구출하였거든'이란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너무나 인위적으로 꿰어 맞춘 듯하여 자연스럽지 못하다.
성 경: [시7:5]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무죄한 자의 탄원]
이 구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유죄로 판명되기만 한다면 그 어떠한 형벌이든지 받겠노라고 맹세하고 있다. 이러한 맹세는 그가 자신의 정직함에 대하여 크게 확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Calvin).
⭕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 즉, 자기에게 죄가 있다면 원수의 핍박을 받아 죽어도 좋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못받아도 좋다는 말이다.
⭕ 내 영광을 진토(塵土)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 여기서 '진토'는 부끄러움과 죽음의 상징이다(욥 31:8, 10, 22, 40, Rawlinson). 따라서 본 구절은 극한 수치와 파멸에 빠져도 좋다는 의미이다.
성 경: [시7:6]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자신의 무고함에 대해 맹세한 다윗은 자연스럽게 원수둘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 여기서 '일어나사'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명령형이다. 다윗은 계속되는 다음 구절에서도 명령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명령형의 사용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을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 특히 '일어나사'라는 표현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앞서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언약궤의 행진을 요청하는 말이다.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서 행진한 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에 개입하심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 말은 대적하는 원수들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달라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이다. 한편 여기서 다윗은 모든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고 있다.
⭕ 깨소서 - 역시 전쟁 용어로 하나님께 전쟁 개입을 요청할때 사용된 말이다. 이와달리 신(神)이 잠잔다는 것은 그 신의 무위 도식을 상징하였다(왕상 18:27, Kraus).
⭕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이 저들에게 임박하였음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본 구절은 보다 구체적으로 '심판의 날이 주님에 의해 확실하게 정해졌나이다'로 해석될 수 있다(A. A. Anderson).
성 경: [시7:7]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심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자적 시각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민족들의 집회'를 '하늘 주권자의 집회'로 해석하여 본 구절이 만유의 심판자로서 여호와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Gunkel, Weiser, Anderson). 그 이유로 '민족들의 집회'란 표현이 앞 구절들의 사상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그런데 원문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바뀌어서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다음 구절에 '민족들의 집회'와 비슷한 '만민'이란 표현이 나오므로 의도적으로 본문을 고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본 구절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서심을 의미한다.
성 경: [시7:8]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 다윗은 모든 백성을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와 성실함을 따라 판단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의 '의'란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의'나 순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를 고소할 악인들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의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Calvin, Craigie, Kraus).
성 경: [시7:9]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 본 구절은 다윗의 기도에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응답하실 줄 믿고 구체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다윗은 이 기도에서 악인의 제거를 간구하지 않고 다만 악인의 악이 제거되기를 간구하였다. 다윗은 분명히 악인이 아니라 오직 악만이 제거되기를 원했을 것이다(Rawlinson).
⭕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 이는 찬송의 형식 중 하나이다. 다윗은 여기서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Kraus). 이 찬송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심장', 곧 마음의 생각을 살펴보심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이었다.
성 경: [시7:10]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나의 방패는...하나님께 있도다 - 여기서 방패는 수비용 무기로서 원수의 공격을 막아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는 3:3 주석을 참조하라. 다윗은 그 마음이 정직한 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성 경: [시7:11]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하나님은...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 역시 9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분노'는 당연히 악인에 대한 분노이다. 다윗은 이 분노가 매일 끊임없이 악인에게 임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상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악인에 대해서는 항상 반대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Lange). 따라서 이 분노는 즉흥적인 것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에서 비롯된 본질적인 것이다.
성 경: [시7:12]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 이 표현은 16절까지의 내용의 대전제이다. 여기서 '사람'은 '악인'을 의미하되 다윗의 개인적인 원수보다는 일반적으로 악을 행하는 모든 악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Lange, Hengstenberg).
⭕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하는 말이다.
⭕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 언제든지 활을 쏠 수 있게끔 당기어 놓으셨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악인에게 명중하도록 과녁이 맞추어져 있다는 말이다(Rawlin- son). 즉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임할 것임을 가리킨다.
성 경: [시7:13]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죽일 기계 - 다음에 이어지는 불화살을 쏘는 기계(틀)을 의미한다.
⭕ 그 만든 살은 화전(火箭)이로다 - '화전'은 '불화살'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상징하고 있다. 이 같은 심판의 불은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해 에덴 동산 주위에 펼쳐 놓은 화염검에서부터 유래했다(창 3:24).
성 경: [시7:14]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 본 구절은 (1) 잉태한 여자가 뱃속의 아이를 사랑하듯 악인은 죄악을 사랑한다는 의미와 함께(Craigie), (2) 그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듯 악인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Barnes). 따라서 본 구절은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제1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죄악을 즐긴 악인 그 자신에게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편,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었으나 원문에는 본 구절 바로 앞에 '보라'(*, 히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악인들이 당할 참을 수 없는 고통은 필연적이며 또한 자연적 결과임을 상기 시켜주기 위한 수식어라고 볼 수 있다.
⭕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 여기서 '잔해'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말' (*)은 '수고'를 의미하나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수고를 뜻하며 본절에서는 특별히 죄악을 행하는 무익한 수고를 뜻한다(TWOT). 그리고 '궤휼'이란 거짓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거짓으로 모함한 대적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다윗은 이와 같은 거짓된 행동이 저들의 우발적인 실수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고 저들이 헛된 일을 사랑한 결과로 빚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성 경: [시7:15]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 다윗은 악인이 결국에 달려갈 파국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함정은 다른 사람을 빠뜨리기 위해 파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악인 자신이 빠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실례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멸시키려 했던 하만에게서 잘 나타난다(에 7:10).
성 경: [시7:16]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그 잔해는...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있으므로 악을 행한 인생은 결국 그 악으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Calvin).
성 경: [시7:17]
주제1: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기도]
주제2: [공의로운 심판]
⭕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 절박함으로 본시를 시작한 다윗은 이제 찬양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의'란 악인의 죄를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의인을 끝까지 보호해 주시는 신실하심을 내포하고 있다(Calvin).
성 경: [시8:1-10]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본서는 찬양의 시이며 특히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노래이다. 본시의 내용은 창세기 1장의 기사와 일치하고 있다. 즉,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전체적인 창조와 함께 인간의 탁월한 위치가 기록된 것과 같이 본시에서도 같은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3절에 '달', '별'과 같은 용어들이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이 시는 밤의 축제에 많이 암송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Kraus). 한편 표제어의 '깃딧'(*)은 아직까지 분명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용어이나 일반적으로 악기의 종류이거나, 멜로디 또는 음조의 스타일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Rawlinson, Craigie, Kraus).
성 경: [시8:1]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여호와 우리 주여 - '우리'라는 말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시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시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의해 암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시를 노래한다하더라도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회원으로서 노래하였던 것이다(Lange). 여기서 본 시의 저자 다윗은 여호와를 가리켜 '주'(*, 아도나이)라고 부르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왕적(王的)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며(왕상 1:11, 43, 47) 아울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나타내는 이름이기도 하다(147:5, Kraus).
⭕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에게 계시된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초이다(Kraus). 그리고 이 하나님의 성호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시며 주인되심(히 2:10)을 계시한다. 그리고 이 계시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고 있으므로 '이름'과 '영광'은 히브리시의 일반적 특징인 대구법의 사용으로 의미를 서로 보완하고 있다.
성 경: [시8:2]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권능을 세우심이여 - 이 구절에서 다윗은 '대적'과 '어린아이'(젖먹이) 대조시키고 있다. 여기서 '대적'은 인간의 힘을 자랑하며 교만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악인들을 상징한다. 반면에 '어린아이'나 '젖먹이'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겸손한 자를 상징한다(Rogerson & Mckay, Craigie). 이중 하나님은 후자를 통하여 그의 권능을 세우신다. 이 권능은 창조 때에 보여졌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게 하심으로 창조주의 이름을 부인하고 교만으로 잘난 체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씀이다(고전 1:26-31). 한편, 이 구절은 예수님에 의해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어린아이들의 찬송에 적용되었다(마 21:16).
성 경: [시8:3]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별들을 - 다윗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노래하고 있다. 그는 다년간의 목자 생활을 통하여 밤의 하늘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관찰에 근거하여 신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토록 감탄적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Rawlinson). 한편, 다윗은 주의 손가락으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다. 즉, 광활한 우주를 하나님께서 간단하게 창조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다윗은 이 은유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과 같이 육체적 존재가 아니시며 영적인 존재이시지만 천지 창조의 생생한 현장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다윗은 이처럼 신인 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을 사용했다.
성 경: [시8:4]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 이 광활한 천체에 비해 인간은 참으로 보잘 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하물며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너무도 보잘것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다윗은 크게 놀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본절에서 주께서 사람을 생각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염려해 주시고 기억해 주셨다는 뜻으로, 이는 구체적으로 인생을 만물 중의 으뜸으로 창조해 주셨다는 다음 구절들(5-8절)의 내용과 관계있다.
⭕ 인자가 무엇이관대...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까 - 여기서 '인자'란 앞절의 '사람'과 동의어로서 그밖의 다른 뜻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Craigie, Kraus, Rawlinson). 한편 '권고하시나이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인데, 여기서는 '주의깊게 돌보다'(attend to with care)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다(TWOT).
성 경: [시8:5]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 여기서 '천사'는 원문상으로 '하나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힘'(*)의 번역이다. 초기의 많은 역본들은 이를 '천사들'로 번역해 놓았다(70인역, 벌게이트역, 시리아역본 등).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70인역(LXX)을 따르고 있다(히 2:7, 9). 혹자는 이 번역을 반대하여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에게 비교하는 것이 신성 모독죄에 해당한다고 여겨 '천사'로 의역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Rawlinson, Kraus, Craigie, Briggs, Weiser, Lange). 그러나 이와 달리 혹자는 본절의 '엘로힘'이 삼상 28:13과 슥 9:7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히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Alexander, Anderson, VanGemeren). 인간이 하나님과 비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견해가 더 타당하다(히 2:9).
⭕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 만물에 대한 인간의 위치와 임무를 규정하는 구절이다. '영화와 존귀'는 왕의 표식(marks)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것들로 인간에게 관을 씌우셨다는 말은 인간을 만물을 다스릴 지배자로 세우셨음을 나타낸다(Craigie, Kraus). 이와같이 만물을 지배하는 지배권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에게 그 지배권의 일부를 할당시켜 주셨다. 따라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듯이 인간은 만물의 지배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앞장서야 할 임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성 경: [시8:6]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다스리게 하시고...발 아래 두셨으니 - 이는 창 1:28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과 유사한 표현이다. 왕에게는 백성이 종속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통치권하에 만물을 종속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의 지배권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으로 상실되어 버렸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와 같은 지배권은 회복되었다(마 28:18).
성 경: [시8:7]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모든 우양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핌'(*)은 본래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는 수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므로 모든 종류의 가축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Kraus). 들짐승 - 이 말은 분명히 집 안에 있는 가축뿐만 아니라 들짐승까지도 인간의 지배권하에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Kraus). 그러나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짐승들의 반역 행위가 나타났으나 (왕하 17:25, 26;욥 40:24;41:1-10). 메시야의 시대에 짐승들은 완전히 인간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다(사 11:6-9;65:25, Rawlinson).
성 경: [시8:8]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공중의 새...다니는 것이니이다 - 여기에는 모든 짐승들(7절) 외의 모든 생물이 포함된다(창1:28). 이처럼 땅과 바다와 공중에 있는 모든 생물이 인간들의 지배하에 있게 된 만큼 인간의 영광은 왕적인 영광이다.
성 경: [시8:9]
주제1: [창조주의 영광을 높임]
주제2: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존귀]
⭕ 여호와 우리 주여...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다윗은 처음에 시작했던(1절) 말로써 본시를 마무리짓고 있다. 이 후렴구에서 다윗은 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9:1-20]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뭇랍벤에 맞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무트 랍벤'(*)은 지금까지도 난해한 용어이지만 아마도 노래의 곡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알무트'튤 분리된 두 용어로 보지 않고 한 단어로 본다면 이 용어는 '여성의 목소리로'라는 뜻이 된다(Craigie).
성 경: [시9:1]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주의 모든 기사 - 이 말은 다윗이 이방의 군대와 싸워 크게 승리한 것을 가리킨다(5, 15절). 혹자는 이 승리가 암몬과 아람 연합군을 물리쳤던 승리(삼하 10:6-10)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Rawlinson). 한편, '기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플레오트' (*)는 '경이로운 일'을 의미하는 용어로 대적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성 경: [시9:2]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 '지극히 높으신 주'란 히브리어로 '엘리욘'(*)인데 이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사 14:!4), 다른 신들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97:9), 그리고 천지의 창조자(창 14:19)를 나타내며, 더 나아가 만물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의 개념으로도 사용되었다(47:2;신 32:8). 이방의 거대한 군대를 물리치게 하신 하나님을 '엘리욘'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다윗은 주의 이름을 찬송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속과 창조의 놀라운 일 가운데 당신의 이름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영광을 나타내셨기 때문이었다(8:1).
성 경: [시9:3]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넘어져 망함이니이다 - 이 구절은 주의 놀라운 일을 증거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물러가다'(*, 슈브 아호르)는 말은 문자적으로 '뒤로 돌아서다', 곧 '후퇴하다'라는 뜻으로 다윗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계획을 포기하고 후퇴하는 대적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넘어져 망하였다'는 표현은 저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 경: [시9:4]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 이는 다윗의 승리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결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표현은 곧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을 하기 위해 강림하시거나 효과적으로 개입하시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Kraus). 본절에 사용된 전치사는 위치를 나타내는데 흔히 사용되는 '알'(*, '위에'라는 뜻)이 아니고 방향을 의미하는 '레'(*)이다. 이 전치사는 주로 '...을 향하여'(for, toward) 또는 '...을 반대하여'(against) 등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향하여 앉으셨다(또는 강림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적 징계를 나타낸다.
성 경: [시9:5]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열방(列邦)을 책하시고 - 여기서 '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은 주변에 위치했던 이방 족속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열방을 책하신 하나님의 행위는 저들이 멸망당한 유일한 원인이 되었다.
⭕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 이는 (1) 저들의 후손이 하나도 없도록 근절하였다는 의미이거나, 적어도 (2) 저들이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6절의 '...기억할 수 없나이다'와 내용상 관계가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Craigie).
성 경: [시9:6]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 이 표현은 5절 하반절과 같은 의미로 다윗의 대적이 완전히 패망하여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엄하게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성 경: [시9:7]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 다윗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내다보고 있다. 여기서 '앉으셨다'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했던 말이다.
⭕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쿠넨'(*)은 '예비하셨도다'라는 의미보다 '세우셨도다'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며 이 문맥에서도 이 의미로 사용되었다(Rawlinson, Kraus).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9:8]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 여기서 '세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벧'(*)은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 (2)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세계, (3) 전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TWOT). 본 문맥에서는 이중 특별히 (3)의 의미가 적절한 듯하다. 왜냐하면 병행 구절인 하반절에 '만민'이라는 동의어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성 경: [시9:9]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산상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스가브'(*)는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를 의미한다. 이곳은 적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시편 전체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한다. 다윗은 본 구절의 내용을 노래함으로써 하나님의 양면성을 표현해 주었다. 즉, 악인에 대하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시는 동시에 당신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에 대하여는 인자하신 보호자가 되신다는 양면적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9:10]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주의 이름을 아는 자 - 이는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사는 자, 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와 동행하는 자를 의미한다(Kraus). 왜냐하면 '알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다'(*)는 체험적 지식을 가리키는 인간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진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 '의지하다', '찾는다'는 말은 특별히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믿음의 행위를 의미한다. 다윗은 사울 왕의 핍박하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았으며, 그러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안전하신 보호를 체험하였다. 이러한 체험에 근거하여 그는 본 구절의 말을 담대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37:28). 그리고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두 동사(의지하다, 찾다)는 앞에서 사용된 '알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성 경: [시9:11]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백성 중에 -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이방 나라들 중에'라는 말이다(Rawlinson, Kraus).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 내에서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에게까지도 알려져야 한다고 믿은 것이 분명하다(18:49;66:4;72:11, 19).
⭕ 선포할지어다 - 다윗은 3-10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를 밝힌 후 자기의 동족들에게 하나님을 함께 찬송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성 경: [시9:12]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 - 피흘림 당한 자들을 위해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생명의 근원인 피를 취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것은 당연하다(창 4:10;9:5). 여기서 '심문하시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라쉬'(*)는 보통 '찾다'라는 뜻이지만, 생명을 취한 자들에게 사용되었을 경우, '보복하다' 또는 '생명을 취한 대가로 생명을 요구하다'라는 뜻을 가진다(TWOT).
⭕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 여기서 '저희'는 환난 때에 여호와를 의지하며 찾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악인에 대해서는 보수(報讐)하시나 겸손히 그를 의지하고 찾는 자들은 환난 중에 기억하셔서 구원하신다. 여기에 하나님의 양면성이 암시되어 있다.
⭕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 '가난한 자'란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으로는 원수들에게 압제당하는 자, 고통당하는 자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Rawlinson, Kay).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 경: [시9:13]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찬송의 분위기에서 기도의 분위기로 바뀌는 전환점이다.
⭕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다윗은 3-6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 곧 원수들을 물리치게 하신 과거의 경험을 노래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은 이 당시 당연히 원수들의 압제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다윗이 과거의 경험으로 되돌아가 그때의 심정으로 이와같이(13-20절)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raus). 하지만 그의 기도의 간절성으로 볼 때 본 기도는 현재의 고통에서 건져달라는 기도인 것으로 보인다(Calvin, Rawlinson). 즉, 다윗은 과거의 놀라온 체험으로 어느 정도 원수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껏 그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그 주변에 잔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위기중에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 사망의 문 - 14절의 '시온의 문'과 대조되는 어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 없는 죽음(음부)의 세계를 의미한다(107:18;욥 38:17). 음부에 대해서는 6:5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9:14]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 '딸 같은 시온'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따라서 이 말은 '시온의 딸'로 번역되어야 자연스럽다. 일반적으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을 의미한다(Craigie, Rawlinson).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예루살렘에서 집회를 열고 주를 찬송하며 경배하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 경: [시9:15]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 이는 기도 응답의 결과에 대한 노래이다. 여호와의 응답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악인들에 대한 재앙으로 실현되었다. 이와같이 열방의 멸망은 하나님의 재앙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또한 자기들이 악을 행한 보응으로써 받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Craigie). 본 구절을 통해 볼 때 다윗을 괴롭힌 대적들은 주위의 이방 나라들이며 이들은 다윗을 대적하여 전쟁을 시도했으나 결국 그 전쟁에 의해 파멸당했음을 알 수 있다.
⭕ 그 숨긴 그물 - '웅덩이'와 마찬가지로 '그물'은 고대인들의 사냥에 쓰인 도구로(Alexander), 본 구절은 의인을 파탄의 지경에 몰아놓기 위해 꾸민 악인들의 계략을 비유한다.
성 경: [시9:16]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자신을 대적한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셨음을 의미하는 말이다(Rawlinson).
⭕ 힉가욘, 셀라 - 내용상 하나의 주제가 끝났음을 알리는 표시로 이해된다(Kraus). '힉가욘'(*)은 '연주 방법'을 지시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묵상하다', '슬퍼하다', '탄식하다'는 뜻의 동사 '하가'(*)에서 파생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엄숙하게', '조용하게', '부드럽게'라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 '하가'라는 단어는 현악기로 반주한 92:3에 사용되었다(Craigie).
성 경: [시9:17]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 음부는 모든 활동이 중지된 곳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6:5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 구절에 사용된 '돌아간다'(*, 슈브)는 표현은 인간이 다시금 죽음, 곧 본래의 존재인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었지만(Kidner), 여기에서는 악인들이 본래 계획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비유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Calvin). 이는 15절과 부합된 해석이다.
⭕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 - 이는 악인과 동의어이며 악인의 성격을 좀더 구체적으로 규정한 말이다.
성 경: [시9:18]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 본절은 17절과 대조되는 구절이다. 여기서 '궁핍한 자'는 17절의 '악인',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으로서 단순히 부요치 못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악인들에게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나 하나님께 소망을 둔 의로운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들은 '가난한 자'로도 표현되며 하나님의 기억의 대상이 되어 악인들로부터 구원받는다.
성 경: [시9:19]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여호와여 일어나사 -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간섭)을 요청하는 말이다. 이에 대한보다 자세한 내용은 7:6 주석을 참조하라.
⭕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 여기서 '인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노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 용어는 아마도 '약하다', '병들다'는 뜻의 동사 '아나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TWOT). 다윗이 일반적으로 '사람' 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어 '아담'(*)이란 말 대신에 이 용어를 본 문맥에서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인간의 연약함을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함이다(Craigie, Kraus). 이와같이 인생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때 여지없이 멸망당할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생이 하나님을 이기려하는 행위는 실로 가증스러운 일이다(Rawl- inson).
성 경: [시9:20]
주제1: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
주제2: [공의로우신 심판주]
⭕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 본 구절을 직역하면, '여호와여 저들에게 두려움을 두시고'이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출애굽과 같은 놀랄 만한 일(신 4:34, '두려운 일')을 의미한다. 대적들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두려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 자기는 인생뿐인줄 알게 하소서 - 여기서 인생은 19절의 인생과 같이 '아노쉬'이다. 다윗이 이 단어를 거듭 사용한 것은 그만큼 인간이 연약하며 제한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성 경: [시10:1]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어찌하여 - 이 첫마디는 본시의 전체적인 분위기, 곧 애가적 성격을 결정하는 표현이다. 다윗이 '어찌하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원수들의 박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강림(역사)하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신앙적인 외침이라기 보다는 하루 속히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신앙적인 외침이라고 볼 수 있다(Lange, Delitzsch).
⭕ 멀리 서시며 - 즉, 거리를 두고 계신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지금 방관자가 되어 계신다는 말이다.
⭕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 이는 하나님께서 비겁하게 몸을 숨기셨다는 말이 아니라 침묵을 지키시며 자기 백성의 위급한 사정을 돌보고 있지 않고 계시다는 말이다(애 3: 56, Delitzsch).
성 경: [시10:2]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窘迫)하오니 - 악한 자의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치 아니함에 있다. 저들은 하나님을 인정치 아니하기에 가련한 자를 심히 괴롭하는 악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즉, 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보복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Craigie). 여기서 '군박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달라크'(*)는 '급히 쫓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용어의 명사형 '달레케트'(*)는 '화병', '열병'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문자 그대로 원수들이 추격해 오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원수들의 박해로 말미암아 열병과도 갈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하소연하는 말이다(Delitzsch).
⭕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 하나님의 보응 원리에 입각한 간구의 내용이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그들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는 것일 따름이다(욥 34:11;잠 24:12;롬 2:6).
성 경: [시10:3]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 의인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과 정반대로 악인은 그 자신의 욕심을 자랑한다(Rawlinson). 여기서 '소욕'이란 악인이 바라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교만을 가리킨다(Alexander). 이는 하나님을 무시한 악인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 여기서 '탐리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체아'(*)는 본래 '자르다', '떼어내다'라는 뜻으로 '부당 이득을 취한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용어이다(Delitzsch). 때로 이 용어는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적인 이익만을 얻으려는 지도자들의 욕망에 적용되어 쓰이기도 하였다(삼상 8:3;사 56:11;렘 22:17, TWOT). 따라서 이는 단순히 치부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권력 등의 수단으로 불의하게 재물을 착취하는 자를 의미한다. 한편, '배반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레크'(*)는 본래 '축복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혹자는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라는 구절을 '축복받을 때마다 멸시한다'라고 해석한다(Kay, Hengstenberg). 그러나 이 용어는 '축복하다'는 의미 이외에 보다 발전된 의미로서 '축복하고 떠나다', 즉 '작별하다', '멀리하다'는 뜻을 가진다(욥 1:5, Delitzsch).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불의로 재물을 착취하는 자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점점 싫어하고 떠나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시10:4]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하며 - 혹자는 '감찰한다'(*, 다라쉬)는 말을 '보응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13절;9:12, Craigie). 물론 '감찰한다'는 말이 악인에게 적용될 때 '보응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전혀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악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감찰하다'를 '보응하다'란 의미로 제한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
⭕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 악인은 하나님의 존재뿐 아니라 그분의 간섭과 심판까지도 부인한다. 이는 악인들이 인간 중심적 사고로 꽉 차 있음을 가리킨다.
성 경: [시10:5]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 이는 악인들이 악을 행함에 있어서 전혀 흔들리지 아니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이나 인간을 두려워함이 없이, 또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대담하게 악을 행했다는 표현이다(Rawlinson, Calvin, Craigie).
⭕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쳐지 못하오며 - 악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와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로써 악인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 악인은 이 땅 위에서 권세를 누리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간들의 위협을 무시해 버린다. 여기서 '멸시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푸아흐'(*)는 본래 '숨쉬다', '불다'(blow)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코방귀를 뀌다', '픽 웃어버리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Calvin).
성 경: [시10:6]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 즉, 많은 사라들이 파멸할지라도 자기는 언제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악인이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자기 스스로 어떠한 재앙도 물리칠 수 있다는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다(49:11;사 56: 12, Calvin).
⭕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 악인은 고통없는 행복만을 꿈꾸고 있다. 심지어 그는 죽음조차도 잊어버린 듯하다(Rawlinson). 이처럼 마땅히 고통을 받아 죽어야 할 자가 고통이나 죽음을 당하지 않고 있음에 대해 시인은 못마땅히 여기며 하나님의 간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0:7]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그 입에는...혀 밑에는 잔해(殘害)와 죄악이 있나이다 - 이는 악인이 그 입술로 의인을 시험에 들게 한 사실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혀 밑'은 맛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이 표현은 악인이 단순히 악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고러한 말 자체를 즐긴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Craigie).
성 경: [시10:8]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 여기서 악인은 산적으로 비유되었다. 산적이 산기슭 으슥한 곳에 숨어 기다리다가 무죄한 자를 죽이고 강탈하듯이 악인은 의인을 해(害)하기 위해 은밀하 음모를 꾸민다. 이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악인의 성격은 교활함이다. 한편, 여기서 '외로운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헬카'(*)는 '권세있는 자' 와 반대되는개념으로 '연약한자', '무력한자', '불행한 자'를 의미하는 발이다. 이와같이 악인은 연약한 자들을 자기의 권세로 강탈한다는 것이다.
성 경: [시10:9]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사자가...가련한 자를...가다리며 - 사자는 난폭한 성질 때문에 종종 행악자에 비유된다. 한편, 난폭한 사자와 같은 악인에 의해 고통받는 '가련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는 '괴롭히다', '압제하다'는 뜻의 동사 '아나'(*)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압제당하는 자', '고통당하는 자'를 의미한다(TWOT). 악인은 이같이 압제당하는 자를 또다시 압제하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 악인은 사자에게 비유되었다가 또다시 사냥꾼에 비유되고 있다. 여기서 '자기 그물을 끌어'란 '자기 그물 안으로 유인하여'라는 뜻이다. 다윗은 앞 구절에서 악인의 광포한 성격을 나타냈으나 본 구절에서는 악인의 교활한 성격을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시10:10]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 이 구절의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혹자는 이 구절의 주어를 악인으로 본다(Ewald, Delitzsch). 그렇다면 이 말은 악인이 의인을 잡기 위해 바싹 엎드린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 구절의 주어는 하반절에 나오는 '외로운 자'인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이 구절은 '외로은 자', 곧 무력한 자가 악인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었다. 즉, 악인은 무력한 자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이로 인해 무력한 자는 악인의 먹이가 되어 엎드려져 있는 것이다(Hengstenberg, Craigie, Wette).
⭕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 이는 앞 구절과 병행 구절로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강포'란 유형적인 폭력뿐 아니라 무형적인 폭력도 가리킨다. 이러한 폭력에 의해 연약한 자는 무력하게 당하고 있다.
성 경: [시10:11]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악인의 잔학상]
⭕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하나이다 - 4절에 이어 또다시 악인의 사상을 소개한 부분이다. 그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사(人間事)에 도무지 관여하지 않는다는 악한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연약한 자들을 괴롭힐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시10:12]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
⭕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 이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간섭을 요청하는 말이다. 시인은 의로운 자를 억압하는 저 악인들의 횡포에 대하여 울분을 품고 하나님께서 인간사에 즉각적으로 개입해 주시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이의 근원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3:7;7:6 주석을 참조하라.
⭕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 하나님께서 손을 드신다는 것은 (1) 하나님께서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2) 대적들에게 보복을 선언하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Craigie).
⭕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 여기서 '가난한 자'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9절의 '가련한 자'와 같이 '아니'로서 '억압당하는 자'를 가리킨다. 한편,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억압당하는 가련한 자를 잊고 계신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성 경: [시10:13]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
⭕ 하나님을 멸시하여 - 하나님께서 이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악인의 사상은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멸시하여'란 표현은 신성 모독 행위와 같이 하나님을 능욕(凌辱)함을 의미한다.
성 경: [시10:14]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
⭕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 하나님의 간섭에 대한 시인의 믿음이 더욱 확고해진 모습이다. 특히 1절의 내용과 비교하여 볼 때 시인이 기도 중에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역사하심에 대한 믿음을 크게 회복한 사실이 역력하다.
⭕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 이는 악인의 사악한 사상과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악인을 감찰하셨음을 확신하는 말이다. 이로써 시인은 악인의 사상이 실로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잔해'와 '원한'은 연약한 자가 악인으로부터 받는 온갖 해(害)와 슬픔을 말하는 것이다.
⭕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 이 구절(*, 레테트 베야데카)을 직역하면, '당신의 손안에 놓여져 있다'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 문제가 주의 손안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인간사(人間事)의 모든 결정권, 또는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만 의지할 뿐이다.
⭕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 외로운 자는 인생 중에 아무도 의지할 자를 찾지 못한 자이므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 여기서 '주'는 문자적으로 '당신' (*, 아타)이다. 히브리 문법에서 2인칭 대명사가 사용되는 경우는 강조형이다. 따라서 시인은 오직 '당신'(주)만이 돕는 자임을 강조한 것이다(Rawlinson). 한편, 여기서 '외로운 자'는 그 형편이 비슷한 고아에 비유되었다. 하나님은 '고아'를 지금까지 돌보아오셨으므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외로운 자'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본절에서 시인은 고통 중에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연약한 자의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아니할 것임을 확신한 것이다(Craigie).
성 경: [시10:15]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
⭕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 이 표현은 저주시의 일반적인 내용 중 하나이다. 곧 악인의 기세 등등한 힘(권세)을 꺾어달라는 요청이다.
⭕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 악인의 사상(4,13절)과는 달리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모든 죄악을 찾으실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없기까지'라는 말은 원문을 정확히 전달해 주지 못하고 있다. 이 용어는 본 구절에서 분리시켜 하나의 독립구로 해석해야 한다. 즉, 본 구절은 '악한 자의 악이 발견되지 않게 하소서'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악의 세력의 완전한 파멸을 요청하는 말로서 그 세력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해 달라는 간구이다(Rawlinson, Craigie, Delitzsch, Lange).
성 경: [시10:16]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
⭕ 여호와께서는 영원 무궁토록 왕이시니 - 이는 악한 자의 허무성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악한자의 권세가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그것은 얼마가지 못하여 파멸하고 만다. 반면, 하나님의 통치는 일시적으로 행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영원히 섭리 가운데 반드시 적기(適期)에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다.
⭕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 '열방'(*, 고임)은 하나님을 대적한 이방 나라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들을 멸망시키심으로 당신의 거룩한 땅(혹은 교회)을 정화(淨化)시키신다.
성 경: [시10:17]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
⭕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 시인은 본 시를 확신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한다. 여기서 '겸손한 자'는 9절의 '가련한 자'와 원문상으로 같은 단어 '아니'이다. 이 표현과 함께 본 시에 언급되는 '가련한 자'(2, 9절), '외로운 자'(10, 14절), '가난한 자'(12절), '압박당하는 자'(18절) 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의인에 대한 동의어이다.
⭕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 '예비하시며'(*, 쿤)는 본 문맥에서 '확고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드셨다는 말로서(51:12;112:7, Lange) 악한 자가 사라졌으므로 겸손한 자는 아무런 두려움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뜻을 암시해 준다(Calvin).
성 경: [시10:18]
주제1: [고통중에 부르는 노래]
주제2: [희생자들을 위한 기도]
⭕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 여기서 '세상에 속한 자'란 히브리어로 '에노쉬 민 하아레츠'(*) 로 직역하면 '땅으로부터 온 인생'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생'(*, 에노쉬)이란 단어는 인간의 연약성을 나타내는 말이다(9:19 주석 참조). 의인을 핍박하는 그 인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정반대로 땅에 속한 인생이기에 무기력한 존재에 불과하다. 한편, 본절의 전체적인 내용은 선지서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묘사와 흡사하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종말론적 시각으로 본다(Kraus).
성 경: [시11:1]
주제1: [여호와의 도움에 대한 신뢰]
주제2: [주는 의인의 피난처]
⭕ 내가 여호와께 피해왔거늘 - '피하였거늘' 의 시제는 완료형으로 다윗이 이미 여호와 안에 피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써 다윗은 산으로 도망가라는 그의 친구들의 권면을 한 마디로 거절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산으로 피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은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엿볼수 있다(Delitzsch).
⭕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 이러한 유흑은 다윗의 친구들이 매우 인간적인 자들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팔레스틴의 산에는 적들을 피할수 있는 안전한 굴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친구들은 다윗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친구들의 말을 불신앙적인 권고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저들은 정말로 안전한 피난처가 산에 있는 굴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새같이'라는 말은 다윗의 위기 상황을 적절히 비유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냥꾼에게 쫓기는 가련한 새와같이 다윗이 적들에게 쫓기고 있음을 보여준다(Lange). 그리고 '도망하라'(*, 누디우)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너는 도망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는 도망하라'는 말이다. 이는 곧 다윗이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도망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Calvin).
성 경: [시11:2]
주제1: [여호와의 도움에 대한 신뢰]
주제2: [주는 의인의 피난처]
⭕ 악인이 활을 당기고...시위에 먹임이여 - 본절은 다윗이 자신의 위험스런 상황을 설명하는 구절(Calvin)이라기 보다는 그의 친구들이 다윗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한 권면의 근거로서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Kraus, Rawlinson). 여기에서 다윗의 대적들은 사냥꾼 또는 무장한 군인에 비유되었다. 그래서 다윗의 친구들은 이 사나운 대적들을 주의하라고 다윗에게 권고해 주고 있다. 본래 원문에는 '보라'(*, 히네)라는 감탄사가 맨 앞에 삽입되어 있다(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아니했음). 여기서 '활'이나 '살'은 의인(다윗)을 파멸에 빠뜨리려는 대적들의 음모를 비유하는 말이다.
⭕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 여기서 '어두운 데서'라 함은 '은밀한 중에'라는 뜻으로 대적들이 아무도 모르게 다윗을 해치려 한 사실을 묘사해 주고있다(Rawlinson).
성 경: [시11:3]
주제1: [여호와의 도움에 대한 신뢰]
주제2: [주는 의인의 피난처]
⭕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알꼬 - 이 역시 다윗의 친구들이 그에게 권고하는 말이다. 여기서 '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트'(*)는 국가의 기강, 곧 법률과 질서(law and order)를 의미한다(Kraus, Delitzsch, Rawlinson, Craigie). 그런데 이 국가의 법률과 질서가 지금 현재로서는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 상황하에서 다윗의 친구들은 다윗이 그곳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지적한다.
성 경: [시11:4]
주제1: [여호와의 도움에 대한 신뢰]
주제2: [주는 의인의 피난처]
⭕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다윗의 말이다. 그의 눈은 공격해오는 적들에게서부터 이 세상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로 향하고 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성전'(*, 헤칼)에 계시는 동시에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 표현을 통해 볼 때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백성 중에 임재하여 계심을 나타낸 것이요 또한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을 나타내는 구절로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보다 위대하시고 초월하여 계신 분임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인식하에서 다윗은 위기중에서도 오직 하나님께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내재하여 계시는 동시에 모든 인간들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으로서 그 어떠한 피난처보다도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심을 깨달았던 것이다(Craigie). 특히 여호와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는 다윗의 인식은 위기 중에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왜냐하면 각 보좌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실 심판의 보좌가 되기 때문이었다(미 1:2;합 2:20, Lange).
⭕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여기서 '감찰하시도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한'(*)은 '시금(試金)하다', '분석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인생의 그 인간됨을 알아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행위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눈으로 살펴보시고 알아보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해치려고 하는 악인들의 행위(2절)를 모르실 리가 없다.
성 경: [시11:5]
주제1: [여호와의 도움에 대한 신뢰]
주제2: [주는 의인의 피난처]
⭕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 '감찰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4절에서와 같이 '바한'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용어는 의인에게만 적용되었으니 마땅히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이 용어가 악인에게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행위를 살펴보시고 그 행위에 대해 심판하신다는 의미이지만(10:13), 의인에게 적용되었을 때에는 의인을 단련하시고 그들을 세심하게 돌보신다는 의미를 갖는다(Rawlinson,Craigie).
⭕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 - 포괄적 의미에서는 율법과 질서를 파괴한 자들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은밀히 죽이려 한 자들이다.
성 경: [시11:6]
주제1: [여호와의 도움에 대한 신뢰]
주제2: [주는 의인의 피난처]
⭕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 이 구절은 '악인에게 비를 내리시리니'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여기에 사용된 동사 '마타르'(*)는 '비가오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비는 하나님의 진노나 은혜의 표현이었다(사 30:23;암 4:7;슥 10:1). 그런데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비의 종류는 내용상 진노의 비를 가리킨다.
⭕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당시의 현장과 유사하다(창19:24).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님의 형벌의 대표적인 모형이므로 그때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Rawlinson).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이 불과 유황을 피하지 못하였듯 이 악인들도 하나님의 형벌의 비를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불과 유황은 하나님의 강림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18:12ff.). 그러나 하나님의 강림을 상징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악인들을 불로써 형벌하기 위한 강림인 것이다. 그리고 '태우는 바람'은 팔레스틴 남동편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가리킨다(Lange, Craigie, Rawlinson). 이는 악인에게는 이와같이 하늘로부터 임한 불에다 자연적인 재앙까지 겹치는 무서운 형벌이 임하게 된다는 뜻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형벌의 참상을 묘사한 것이다.
⭕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 이 '잔'은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다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지는 것은 각기 다르다. 즉, 악인의 잔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져 악인은 그것을 마실 것이나 의인의 잔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져 의인은 그것을 마실 것이다(116:13). 그리고 이 잔은 자유롭게 마시는 연회석의 잔이 아니라 반드시 모두 다 마셔야하는 운명의 잔이다(Calvin).
성 경: [시11:7]
주제1: [여호와의 도움에 대한 신뢰]
주제2: [주는 의인의 피난처]
⭕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 이는 5절 하반절과 대조적인 내용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의로운 일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Calvin). 그러나 이 말은 또한 하나님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Craigie).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욱 자연스럽게 보인다.
⭕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 이는 '정직한 자'(의인)가 생활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거나 아니면 죽음 이후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거나 아니면 죽음 이후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Dahood), 여기에서는 특별히 위기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안전한 보호를 받게될 것을 의미한다(Craigie). 위기 중에 있는 다윗은 바로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께 피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2:1-8]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본시는 애가 형식으로 쓰여진 다윗의 시이다. 이 시도 경건한 자와 충실한 자가 사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반면에 속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시에서는 '우리가 애통하나이다'(We-lament)라는 직접적인 애가 형식은 발견되지 않지만 아마도 다윗은 괴로워하는 당시의 경건한 자들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을 것이다(Kraus). 한편, '스미닛'에 대해서는 6편의 표제어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12:1]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 여호와여 도우소서 -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을 요청하는 말이다(3:7;6:4;7:1, Kraus).
⭕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 혹자는 이 구절을 경건한 자가 악인들에게 멸절당하는 상황으로 해석한다(Kraus). 마치 사울왕이 놉의 제사장들을 도륙한 것과 같이(삼상 22:18, 19) 악인들이 경건한 자들을 살해한 것으로 본다. 이에 반해 혹자는 이 세상에서 경건한 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사회가 극도로 부패해 있었다고 해석한다(Calvin, Craigie, Lange). 아마도 후자의 해석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시를 기록한 당시의 사회상은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와 유사했을 것이다(왕상19:10).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다윗 통치시기 중 어떤 때를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 다윗은 충실한 자를 찾으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당시의 사회는 극도로 부패하여 있었다. 여기서 '충실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모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지키는 자를 가리킨다(Kraus).
성 경: [시12:2]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 '거짓'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웨'(*)는 '공허'(emptiness), '허무'(vanity)를 의미하기도 하나, 회칠한 무덤처럼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허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Rawlinson).
⭕ 아첨하는 입술 - '아첨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코트'(*)는 '미끄럽다', '부드럽다'는 뜻의 동사 '할라크'(*)에서 파생된 형용사형으로이는 남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달콤한 말로 판단을 흐리게 함을 의미한다.
⭕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 심리학적으로 볼 때 악인들의 거짓과 음험(陰險)한 말은 분열된 정신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다(Kraus). '두 마음'이란 저들의 정신이 심히 혼란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 마음'은 통일된 온전한 정신을 의미한다(렘 32:39;겔 11:19;행 4:32, Delitzsch). 이에 반해 혹자는 '두 마음'을 '두 가지의 기준'으로 본다(Craigie). 즉, 악인은 속과 겉이 다른 두 기준을 가지고 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곧 거짓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두 해석을 모두 취할 수 있겠으나 전자의 해석이 더욱 설득력 있다.
성 경: [시12:3]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여호와의 개입을 바라는 구절이다.
⭕ 자랑하는 혀 - 이는 문자적으로 '큰 말'(*, 메다베레트 게돌로트)을 의미하며 의역하면 '위협하는 말'을 가리킨다(Rawlinson). 악인들은 아첨하는 말과 함께 위협하는 말을 한다.
⭕ 끊으시리니 - 이 동사는 다윗의 소원을 나타내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저짓을 말하는 자들을 그 사회에서 완전히 몰아내 달라는 요구이다(창 17:14;출 12:15, 19;레 7:20,27;17:10).
성 경: [시12:4]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 악인들은 그들의 거짓된 말이나 협박의 말을 통하여 자기들의 목적을 이룰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악인이 온 몸을 더럽히고 생(生)의 바퀴를 불사르는 혀에 (약 3:6) 전혀 재갈을 먹이지 않은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 우리의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 이 표현은 악의 극치를 보여 준다. 이 말을 함으로써 저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한 것이다(Rawlinson, Craigie).
성 경: [시12:5]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 여호와의 밀씀에 - 이는 다윗의 간구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혹자의 견해처럼 다윗이 선지자를 통하여 직접적인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을 받았을 것이다(Kraus). 그런데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에 대해서 다윗은 60편 외에 이곳에서만 언급하고 있다.
⭕ 내가 이제 일어나 - 하나님께서 일어나신다는 표현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7:6 주석을 참조하라. '이제'라는 표현은 이전의 상황이 역전됨을 암시하는 말로서 더 이상 악인에 대한 심판을 지체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준다. 즉,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형벌하시고 가련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겠다는 표현이다(Calvin, Buber).
⭕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 가련하고 궁핍한 자를 악인의 횡포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성 경: [시12:6]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다윗은 그 응답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순결함이여'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호로트'(*)는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호와의 말씀은 악인들의 말(2-4절)과는 정반대로 신뢰할 만한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순금 또는 깨끗한 향품(출 30:35) 등에 사용되었다.
⭕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 여기서 '일곱 번'이란 거룩함과 완전성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며 완전한 말씀인 것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또한 이 단어는 '단련한'이란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 찌꺼기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은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찌꺼기가 섞여 있지 않다. 여기서 찌꺼기라 함은 악인들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짓으로 아첨, 헛된 것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런 것들이 전혀 섞여 있지 않으므로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완전한 말씀인 것이다.
성 경: [시12:7]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 여호와여...지키사 이 세대로부터...보존하시리이다 - 이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응답)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뢰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앞으로 곧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 중에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서 '이 세대'란 1절 이하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당시의 악한 전 세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말은 앞으로도 계속 출현될 모든 악한 세대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마 11:16, 17;12:41, 42;23:36;눅 11:29 등, Kraus).
성 경: [시12:8]
주제1: [부패한 사회로 인한 탄식]
주제2: [패역한 세대에 대한 간구]
⭕ 비루(鄙陋)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 '비루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줄루트'(*)는 '무가치함' 또는 경우에 따라 '탐욕스러움'을 가리킨다. 이는 한마디로 악인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악을 자행함을 나타낸다. 당시의 사회는 이러한 자가 인생들 가운데 높임을 받는 불의한 사회였다. 곧 악한 자가 곳곳에서 득세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악한 사회였던 것이다.
⭕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 악인들이 당시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말이다(Calvin). 한편, 본절은 독립절이 아니라 7절에 귀속되는 종속절이다(Kraus, Rawlinson). 따라서 본절은 '비루함...횡행할지라도'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7절과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악인이 처처에 횡행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영토록 보존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성 경: [시13:1]
주제1: [고통중에 그리는 기도]
주제2: [기쁨으로 승화된 메마른 영혼]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다윗은 처음부터 탄식하고 있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본절과 2절에 모두 네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의 실상을 능히 짐작케 해준다(6:3;35:17; 74:10;79:5;80:4;94:3).
⭕ 나를 영영히 잊으시니이까 - 다윗은 그의 대적들이 득세하고 자신은 극심한 질병에 걸린 고통스런 현실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잊으심이 영원히 지속될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며 부르짖은 것이다(Craigie, Rawlinson).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다윗이 탄식했던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느낌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그것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던 것이다(22:1, Kraus).
⭕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 이는 바로 앞구절과 병행구이다. '주의 얼굴'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의 방편으로 의인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다(Kraus). 그러므로 본절에서 주의 얼굴이 숨겨졌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얼굴 빛은 의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한다(4:6;67:1;80:3, 7). 이렇게 보면 본 구절은 저주만이 임한 자신의 고통스런 현실을 탄식하는 내용의 구절이다(Rawlinson).
성 경: [시13:2]
주제1: [고통중에 그리는 기도]
주제2: [기쁨으로 승화된 메마른 영혼]
⭕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 이를 직역하면, '내가 나의 영혼 속에 생각을 두었고'이다. 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깊은 생각에 빠져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 에초트)은 물론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에 대한 잡다한 생각들, 또는 회의(懷疑)를 의미한다(Delitzsch, Kraus). 다윗은 이처럼 자신의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노력이었고 그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다(Rawlinson).
⭕ 종일토록 - 이 말에서 그는 끊임없이 근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딱한 형편을 잘 표현하고 있다.
⭕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 다윗의 비참한 형편을 보고 다윗의 원수는 크게 기뻐한 것이 분명하다. 그 원수는 고통당하는 다윗을 향해 온갖 독설로 비난했을 것이다. 혹자는 이 원수를 사울 왕으로 보았다(Rawlinson).
성 경: [시13:3]
주제1: [고통중에 그리는 기도]
주제2: [기쁨으로 승화된 메마른 영혼]
다윗은 회의와 탄식에서부터 간구로 전환하고 있다.
⭕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낀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동정과 주목을 끌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여기서 '응답하시고'란 '어느때까지니이까'(1, 2절)라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란 질병과 슬픔으로 흐려진 눈을 밝게 해 달라는 간구로서 건강의 회복과 탄식으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말이다. 눈의 밝음은 구약에서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신 34:7, Craigie). 그러나 이 눈의 밝음, 곧 건강의 회복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면에서 볼 때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말은 '나의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보게 하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주께서 얼굴을 숨기셨을 때 그의 건강이 쇠하여졌던 것처럼(1절) 주께서 얼굴을 보여주실 때 그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민 6:25). 그러므로 이를 알기 쉽게 번역하면, '나의 눈으로 당신의 생명의(얼굴의) 빛을 보게 하소서'가 된다(Kraus, Lange),
⭕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하오며 - 다윗의 극도로 악화된 건강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즉, 다윗은 죽음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죽음이 종종 '잠'에 비유되었다(욥 3:13;14:12;렘 51:39, 57;단 12:2). 우리는 '잠'이라는 비유에서 죽음이란 멸절의 상태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깨어나는 상태임을 엿볼 수 있다(요 11: 1-13;고전 11:30;15:51;살전 4:14).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의미로 죽음을 잠에 비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성 경: [시13:4]
주제1: [고통중에 그리는 기도]
주제2: [기쁨으로 승화된 메마른 영혼]
⭕ 나의 원수가...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 여기서 '나의 원수'는 단수형이며, '나의 대적들'은 복수이다. 혹자는 전자와 후자 모두 다윗의 정적들을 가리킨다고 보나(Rawlinson), 여기에서 단수와 복수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단수로 언급된 '나의 원수'는 인생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복수로 언급된 '나의 대적들'은 다윗의 일반적인 정적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Craigie). 한편, '요동될 때에'란 말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본절은 분명히 죽음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혹자는 이를 환난 때에 다윗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나(Barnes) 과연 다윗의 대적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상태만을 보고 기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성 경: [시13:5]
주제1: [고통중에 그리는 기도]
주제2: [기쁨으로 승화된 메마른 영혼]
다윗은 자신의 전형적인 서술 방식을 따라 간구에서 또다시 확신으로 전환하고 있다.
⭕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 여기서 '인자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5장 주제 강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참조하라.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 큰 고통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 이는 다윗의 확고한 소망을 나타낸다. 주의 구원이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너무나도 확고한 소망 가운데 이 구원을 기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롬 4:18)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가졌기에 다윗은 극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성 경: [시13:6]
주제1: [고통중에 그리는 기도]
주제2: [기쁨으로 승화된 메마른 영혼]
⭕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 이 말은 1절 상반절의 '어느 때까지니이까'와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고 탄식에서 찬송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 여기서 '후대하심이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말' (*)은 '보상하다', '갚다'라는 뜻으로 선과 악 모두에 적용되는 말이다. 즉, 선이든 악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선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인간의 어떠한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식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다(Calvin).
성 경: [시14:1]
주제1: [어리석은 자의 실상]
주제2: [우악(愚惡)함의 근원인 무신론]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 '어리석은 자'는 다윗이 본시에서 자세히 규명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발'(*)은 그저 지혜가 부족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서 살펴볼 때, 이는 (1) 외면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의로운 자의 생명을 위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 기준 없이 마음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키며, (2)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를 가리킨다(Craigie).
⭕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 이 표현은 10:4에서도 언급되었다. 그곳에서는 악인들의 말로 진술되었다. 따라서 본절의 '어리석은 자'는 악인,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 부패하고 - 곧 저들의 심령이 부패하여졌다는 말로서(창 6:12;출 32:7;렘 13:7) 영적 생명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 소행(所行)이 가증하여 - 무신론 사상의 결과로 저들의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증오의 대상이 될 만큼 타락하였다.
⭕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인격에서 선한 행위가 나올 리 없다. 여기서 언급된 '선'에 대해 혹자는 구체적으로 이웃에 대한 선행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idner). 그러나 본 시편에는 이러한 해석의 근거가 불명확하다. 따라서 본절의 '선'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시14:1-7]
주제1: [어리석은 자의 실상]
주제2: [우악(愚惡)함의 근원인 무신론]
본 시편과 53편은 내용상 거의 같다. 한편 이 두 시편의 기록 연대의 전후 관계로에 대해서는 53편 주석과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시14:2]
주제1: [어리석은 자의 실상]
주제2: [우악(愚惡)함의 근원인 무신론]
이 부분은 어리석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다루고 있다.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이 세상의 심판자 또는 왕으로서 인생을 살펴보신 것이다(7:6ff.; 11:4). 이는 히브리시의 대표적인 표현 방법인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
⭕ 지각(知覺)이 있어 하나님을 채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여기서 '지각'은 영적인 지각을 가리킨다. 이 지각이 있어야 인간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다. 다윗은 본 구절의 시를 쓸 때, 노아 홍수 때(창 6:1-8)나 소돔과 고모라 당시(창 19:1-29)의 부패상을 상기했을 것으로 짐작되어진다(Kidner).
성 경: [시14:3]
주제1: [어리석은 자의 실상]
주제2: [우악(愚惡)함의 근원인 무신론]
본절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신 후 최종적으로 내리신 판단에 대한 진술이다. 인간의 기준에 따르면 본절에 언급된 인간이 성공적이며 권세있고 부요한 자로 판단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정반대의 판단을 내리신다.
⭕ 다 치우쳤으며 - '치우쳤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는 '제 고집대로 행하다', '완고하고 반항적이다'라는 뜻이다(출 32:8). 저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제 고집대로 행한 것이다.
⭕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 '없다'는 말(*, 엔)이 두 번 반복되어 이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이다.
성 경: [시14:4]
주제1: [어리석은 자의 실상]
주제2: [우악(愚惡)함의 근원인 무신론]
⭕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 이 의문문에는 동사의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기에 무엇에 대한 무지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앤더슨(Anderson)은 이 무지의 목적어가 임박한 징계와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의무라고 주장하며, 알렉산더(J. A. Alexander)는 그들이 부패하여 하나님과 떨어져 있게 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사실을 본 구절의 목적어로 취급한다. 한편, 이 '무지하뇨'라는 동사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악인들의 무지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된 반복적 행위였음을 지적하여 준다(Kraus).
⭕ 내 백성을 먹으면서 - '무지하뇨'란 동사와 마찬가지로 '먹으면서'도 완료형으로 이는 백성들 특히 가련한 자들을 매우 괴롭힌 악인들의 악행이 반복되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이 하나님의 백성을 상품처럼 취급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나(Craigie), 문맥상 그런 암시가 없다. 오히려 본 구절은 떡 먹듯이 백성들에게 악을 행한 것에 대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 연결시켜 고찰해야한다. 즉, 그들은 오직 떡 먹듯이 쉽게, 그리고 항상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해 있기에 하나님을 원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성 경: [시14:5]
주제1: [어리석은 자의 실상]
주제2: [우악(愚惡)함의 근원인 무신론]
12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 이르러 본시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고 있다. 다윗은 아마도 이 순간에 환상을 보았거나 아니면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 같다(Kraus, Jeremias).
⭕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 '거기서'는 본 문맥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혹자는 장소적인 의미로 보아 악인들이 악행하는 '그곳에서'로 해석한다(Rawlinson). 그런가 하면 혹자는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거기서'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그때에'(then)로 해석한다(Delitzsch, Lange). 본래 '거기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쉠'(*)은 시간적인 의미로나 장소적인 의미로나 모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두 해석은 모두 가능하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53:5 주석을 참조하라.
⭕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世代)에 계심이로다 - 여기서 '의인의 세대'란 어느 한 의로운 자의 한 평생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들 전부를 의미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세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도르'(*)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한 인간의 생존기간을 의미하거나 단순히 한 기간, 또는 시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 '집단'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TWOT).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는 심판의 형벌을 내리시지만 당신의 모든 백성들(의인의 세대)에게는 자비로 함께 하신다.
성 경: [시14:6]
주제1: [어리석은 자의 실상]
주제2: [우악(愚惡)함의 근원인 무신론]
⭕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經營)을 부끄럽게 하나 - 여기서 '경영'이란 악인들의 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의인의 의도나 계획을 의미한다. 악인들은 이러한 의도조차 처음부터 방해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서 '부끄럽게 하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쉬'(*)는 '창피를 주다'라는 뜻이나 그밖에도 '박살내다', '분쇄하다'라는 뜻도 있다. 여기서는 아마도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Kraus).
성 경: [시14:7]
주제1: [어리석은 자의 실상]
주제2: [우악(愚惡)함의 근원인 무신론]
12편과 같이 탄식으로 시작한 다윗은 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망으로 본시를 마무리 짓는다.
⭕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 '시온'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소극적으로 시온에 앉아계시지 않고 이제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하실 것이다(Craigie).
⭕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 여기서 '포로된 것'이란 바벨론 유수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인들에게 억압당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말이다(Calvin). 다윗은 이러한 억압의 상태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주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5:1-5]
주제1: [주의 장막에 들어갈 조건]
주제2: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자]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본시는 내용상 예루살렘 성소에 들어갈때 암송한 예배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절기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자가 1절을 암송하면 기다리던 제사장이 2절 이하의 대답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시15:1]
주제1: [주의 장막에 들어갈 조건]
주제2: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자]
⭕ 여호와여 주의 장막(帳幕)에 유할 자 누구오며...누구오니이까 - 다윗은 본시를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는 두 번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으나 내용상으로 이 질문들은 하나이다. '주의 장막'이나 '성산'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시온의 장막이나 시온의 언덕을 의미하는 말로서 공식적인 경배와 제사를 드리는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 영적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Kidner, Rawlinson). 한편, '유할 자', '거할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61: 4),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 안에서의 시민권을 차지할 수 있는 자(엡 2:19;빌 3:20)를 나타낸다(Kraus).
성 경: [시15:2]
주제1: [주의 장막에 들어갈 조건]
주제2: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자]
본절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 중 적극적인 측면 세 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 정직하게 행하며 - 여기서 '정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은 '흠없는'(blameless), '완전한'이란 뜻으로 이는 물론 절대적인 완전성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하나님의 기준에서 인간이 도달해야 할 도덕적 수준을 의미하는 말이다(Rawlinson, TWOT).
⭕ 공의(公義)를 일삼으며 -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디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도덕적인 규범을 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TWOT).
⭕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 이는 인간 내면의 생각들, 곧 마음의 묵상에 관한 구절이다. '진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신뢰성'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로서 여기서는 '믿을 만한 것', '신뢰할 만한 것'이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Kraus). 따라서 본 구절은 '그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을 만하며'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세 가지의 적극적인 조건들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일치하는 성품을 나타낸 것들이다.
성 경: [시15:2-5]
주제1: [주의 장막에 들어갈 조건]
주제2: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자]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10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이 10가지 조건은 또다시 적극적인 측면과 소극적인 측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측면 모두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측면 모두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건이 본시 외에 다른 곳에서는 의전적(儀典的)인 요구로 이루어진 반면(출 19:10-15;삼상 21:4), 여기서는 예배자의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다.
성 경: [시15:3]
주제1: [주의 장막에 들어갈 조건]
주제2: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자]
본절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들 중 세 가지의 소극적 측면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2절에 제시된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들이라고 볼 수 있다.
⭕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 문자적으로 본 구절은 '그 혀로 다니지 아니하며'이다. '참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갈'(*)은 '걸어서 가다', '탐지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기 위해 그 혀를 놀려대는 것을 의미한다(Delitzsch, Kraus, Craigie). 그 마음의 생각이 믿을 만한 의인은 결코 남을 비방하거나 중상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음이 분열된 상태에 있는 악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행위이다. 이에 대해서는 12:2 주석을 참조하라.
⭕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 '벗'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아'(*)는 (1) 가까운 사이든 우연히 만난 사이든 친구, 동료를 의미하기도 하며, (2) 종종 '다른 사람'(another person)을 의미하기도 한다. 혹자는 전자의 의미로 보았으나(Rawlinson) 문맥상 이 말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Kidner).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행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혀로써 타인을 해롭게 하는 내용인 앞 구절과 연결되고 있기에 이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 같다(Craigie).
⭕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 이것은 이웃을 해(害)하기 위해 거짓 증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출 20:16;엡 5:25).
성 경: [시15:4]
주제1: [주의 장막에 들어갈 조건]
주제2: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자]
⭕ 그 눈은...멸시하며 - 이는 일곱 번째 조건으로 사람들에 대한 태도의 내용이다. 여기서 '망령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메아스'(*)는 '거절하다'는 뜻의 동사 '마아스'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이는 '하나님에 의해 거절당한 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멸시하며'라는 표현은 무시한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악한 자들의 소행을 전혀 본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본 구절은 의인이 악한 무리들을 멀리 함으로써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아니함을 의미한다(Kraus, Craigie).
⭕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 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 이 말은 의인이 헛된 맹세를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의인은 한번 맺은 약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이러한 의인의 속성은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데서(2절) 비롯된다.
성 경: [시15:5]
주제1: [주의 장막에 들어갈 조건]
주제2: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자]
본절은 재물에 관한 의인의 태도에 대한 진술이다.
⭕ 변리로 대금(貸金)치 아니하며 -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구약 시대에 완전히 금지되지 않았다. 외국인에게 이자를 받는 것은 허용되었기 때문이다(레 25:36f. ;신 23:20). 그러나 가난한 형제나 동족에게 이자를 취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레 25:35-38;신 23:19). 왜냐하면 이 경우에 이자를 받는 것은 착취의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였다. 바벨론에서는 33.3%가 요구되었고 앗수르에서는 심지어 50%까지 요구되었다(B. Meissner, Babylonien und Assyrien).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있었기에 안식년이나 회년 제도가 생겼다. 따라서 본 구절은 돈 빌려주는 것 자체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에 대해 고리 대금하는 행위에 대한 진술이다.
⭕ 뇌물을 받고 무죄한 죄를 해치 아니하는 자 - 구약 시대에 뇌물을 받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된 사항이다(출 23:8;신 16:19;27:25). 왜냐하면 뇌물에 의해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면 결국 그 사회가 병들어 죽게 되기 때문이다.
⭕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 '이런 일'이란 위에서 언급한 열 가지 조건을 의미한다. 이 열 가지 조건은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등의 의식적인 행동(Ritual conduct)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것은 삶 전체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사는 매일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영원히 요동치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베푸신다. 그렇다면 이 약속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로 복을 받는다거나 재앙을 당할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약속의 의미를 본시 전체 문맥 안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1절에서 '주의 장막에서...누구오며...누구오니이까?'라는 질문이 주어졌고, 이 질문에 대해 2-5절의 대답이 주어졌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이자 답변이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의 약속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요동치 아니하리이다'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한 반석'으로 비유한 데서 비롯된 표현으로 짐작된다(31:3;42:9;사 26:2-4). 그렇다면 의인들은 주의 장막에 들어가 반석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완전히 멸망할지라도 이들은 결코 요동하지 않는다(26:12;61:2-4).
성 경: [시16:1]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 다윗은 보호를 위한 간구로써 본시를 시작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특별한 위기 중에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9-11절에서 죽음(음부)의 위기로 더욱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 주께 피하나이다 -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저자의 확신을 보여준다. 여기서 '피하나이다'는 완료형으로서 이는 그가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여 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Lange).
성 경: [시16:2]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 '내가...아뢰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테'(*)는 문법상 2인칭 동사이다. 그러므로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당신이...아뢰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이 주석가들은 '타우'(*) 뒤에 '요드'(*)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본 동사가 본래 1인칭 형태인 '아마르티'(*)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70인역(LXX)도 이런 동사의 형태로 번역했다.
⭕ 주는 나의 주시오니 - 문자적 으로 이는 '당신은 나의 주시오니'이다. '나의 주'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이며 이는 '주인'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이 말은 종을 부리는 주인을 가리킨다(창24:9). 따라서 이말은 '내가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한편, 본시 저자가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 데는 특별히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저자는 그 주위의 우상을 섬기는 자(4절의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로부터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라는 유혹의 말 또는 혐오스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 우상을 섬기는 자는 여호와를 모르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 여호와를 알면서도 다른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자였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그의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 저자는 참된 행복이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확신했다(Kraus, Hengstenberg). 이러한 확신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9절) 저자는 유혹자들에게 큰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확신의 말은 저자가 십계명 중 제1계명을 굳게 지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불 수도 있다(Kraus, Craigie).
성 경: [시16:3]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 '땅에있는 성도'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 또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를 의미한다(Kidner, Kraus). 그리고 여기서 '존귀한 자'란 이 세상의 권세나 영화를 누리는 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신령한 세계에서 영광과 존귀를 차지하는 자를 말한다(Delitzsch)
성 경: [시16:4]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 혼합주의자들은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에게도 예물을 드렸다. 이것은 제1계명을 범한 행위이므로 형벌이 저들에게 임하여 영육간의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奠祭)를 드리지 아니하며 - 여기서 '피의 전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 구절에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혹자는 이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피 흘리는 살인적 행위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Briggs). 그러나 본 문맥은 분명히 예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피의 전제'는 사실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Calvin). 따라서 이 '피의 전제'는 이방 종교에서 행해진 하나의 제사 의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중에 피를 마시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혹자의 견해대로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아 드린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Baethgen). 왜냐하면 이스라엘 주변 이방국가에서는 국가신에 대한 제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 여기서 이름은 물론 이방신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율법은 우상의 이름만이라도 부르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출23:13;신 12:3). 따라서 다윗은 본 구절을 통해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만 섬기며 그 명령을 준수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성 경: [시16:5]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누리는 기쁨]
⭕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 이는 한마디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다윗의 신앙 고백이다. 이러한 내용의 신앙 고백은 아마도 제사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민 18:20). 다윗은 이 약속대로 오직 하나님만 자기의 기업으로 삼은 것이다(Kidner, Rawlinson). 한편, '잔'이란 인간 누구에게나 주어진 분복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11:6주석을 참조하라.
⭕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 이 말은 다윗에게 주어진 기업과 잔을 다른 사람들이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말이다.
성 경: [시16:6]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 혹자는 '아름다운 곳'이 다윗의 거주지였던 예루살렘과 그 근방이라고 주장하나(Rawlinson) 오히려 이는 다윗의 행복한 삶의 경험을 비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Calvin, Craigie). 즉,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자기의 기업을 삼겠다고 이미 선언한 바 있다(5절). 이러한 다윗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떠한 환경적 요인을 아름답게 보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곳'이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땅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신 그의 삶이 행복한 것이었고 이러한 행복한 삶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별하여 정해주신 기업이었다.
⭕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 여기서 '기업'이란 5절에 언급된 산업, 또는 잔의 소득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 기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성 경: [시16:7]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름다운 기업(행복한 삶)을 주신 것에 감사하여 지금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까지 누려온 이 하나님의 기업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훈계'란 말은 바로 하나님의 내적인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이를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로 이것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결코 하나님의 기업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한없이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다 - '심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킬랴' (*)는 본래 콩팥을 의미하며(출 29:13,22;레 3:4, 10, 15;4:9;7:4;8:16, 25;9:10, 19) 구약에서는 이곳에서 인간의 영혼의 내면적인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73:21;렘 17:10).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이 밤마다 영감을 받은 사실을 보여준다(Calvin). 한편, 다윗이 밤마다 받은 영감은 감사의 느낌(Rawlinson)과 영원한 즐거움(11절)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의 허영을 밝혀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영적인 깨우침이었을 것이다(Calvin, Kraus).
성 경: [시16:8]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항상 임재하여 계신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교제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다(119:, Craigie).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은 '항상'이란 표현이다. 이 말은 지금 다윗이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그는 평안할 때뿐 아니라 고난받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할 것이라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Rawlinson, Calvin).
⭕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 본구절은 문자적으로 '나의 오른 손에'로 번역된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도우실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임재하여 계신다는 말이다(Briggs). 특히 우편은 하나님의 권세를 상징한다(110:5;121:5). 따라서 본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강력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Kraus).
⭕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 가까이 계신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 구절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15:5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16:9]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영광도 즐거워하며 - 이는 앞 구절과 평행대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영광은 앞 구절의 '마음'과 동의어이다(Briggs, Rawlinson).
⭕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 영혼(마음)과 육체는 인간의 구성 요소이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이 기쁨과 안전함으로 충만해 있음을 묘사하기위해 마음에 이어 육체에 대한 진술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다윗에게 주어진 기업은 영혼만의 기쁨이 아니고 그 육체까지도 행복한 상태로 사는 것이었다. 한편, 본 구절은 다윗이 이제 막 죽음의 위기로부터 구출받았음을 시사해 준다(Craigie).
성 경: [시16:10]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 '영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생명', '자신'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본시는 죽음의 위기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출해 달라는 간구의 시이므로 우리는 이 용어를 '생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음부'에 대해서는 6:5 주석을 참조하라.
⭕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 베드로와 바울은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 성취의 증거로 인용하였다(행 2:25-29;13:35). 혹자는 이에 근거하여 다윗이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며 이 구절을 노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Kidner, Rawlinson).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다윗은 다만 죽음의 위기로부터 벗어난 그의 경험을 기술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본시가 부활을 주제로 하는 시가 아니고 죽음의 위기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간구의 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Craigie, Kraus). 여기서 어떤 견해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과연 구약에도 부활에 대한 사상이 존재했는가 라는 사실에 달려 있다. 어렴풋이나마 욥 14:14에서 부활 사상이 발견된다. 그렇다고 부활 사상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뚜렷하게 정립된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윗은 부활에 대한 사상이 있었기에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하게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윗은 구약에서 영감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사실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이 유혹자들의 말에 대한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앞 절과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두 가지 해석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 즉, 일차적 의미에서는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부활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시16:11]
주제1: [죽음을 초월한 신앙]
주제2: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기쁨]
⭕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 '생명의 길'이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의미한다. 다윗이 다만 이 땅에서 불과 몇 십년을 살다가 죽는 짧은 생명을 가리켜 '생명의 길'이라고 표현했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다. 그는 궁극적인 구원, 곧 부활을 내다보며 이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Calvin, Kidner, Rawlinson).
⭕ 영원한 즐거움 - 이 즐거움은 세상에서 잠시 잠깐 맛보는 그런 즐거움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궁극적으로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있기에 그 부활시에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 경: [시17:1]
주제1: [경권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악인의 양심 선언]
⭕ 정직함을 들으소서 - 다윗은 먼저 자신의 정직함을 내세워 간구하고 있다. 여기서 정직함이란 '의'(*, 체데크)를 의미한다. 다윗이 여기서 먼저 자신의 의를 언급한 까닭에 대해 다음 두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다. (1) '의의 하나님'(4:1)께서 인생을 공평하고 의롭게 판단하신다는(2절) 사실에 근거해서 그는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Kraus). (2) 다윗이 부당한 핍박을 당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즉, 다윗은 아무런 연고없이 악인들에게 쫓김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다윗은 이러한 부당한 사실을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해 자신의 무죄함을 언급하였다(Rawlnson, Craigie)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자기의 어떠한 의를 자랑하기 위하여 이 말을 언급한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불합리한 환경을 호소하기 위해 언급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 '부르짖음'은 '기도'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기도의 간질성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 - 다윗이 자신의 정직함을 재차 호소하는 말이다. 본 구절은 앞의 두 구절을 합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거짓되지 않은 입술'은 '정직함'과, '내 기도'는 '나의 부르짖음'과 병행대구를 이루고 있다.
성 경: [시17:2]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의인의 양심 선언]
⭕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 이는 자기에 대한 판단, 곧 심판이 주 앞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말이다. 다윗은 악인들에게 그룻된 판단을 받아 지금 계속되는 핍박을 받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으로 자신의 순수성을 입증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 '공평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솨르' (*)는 '진실함', '의로움'을 의미한다. 다윗은 자신의 진실되고 의로운 행위를 근거로 악한 자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자신을 살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한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7:3]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의인의 양심 선언]
⭕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 마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을 이미 시험하셨다. 여기서 '시혐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한' (*)은 본래 사물의 속성이나 순도(純度)를 결정하기 위해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슥 13:9).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시험을 통해 자신의 순수함을 입증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 '권고하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시찰하다', '방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밤중에 다윗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그를 방문하신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은 실제적으로 다윗이 밤에 여러 시간을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성찰한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Craigie).
⭕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 하나님은 다윗의 행동뿐 아니라 그의 마음 가운데서도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정당하여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내가...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 다윗은 자신에게서 허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하나님 앞에서 더욱 온전하기를 힘쓰고 있다. 입술은 사람이 다스리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약 3:2).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온전하기 위해 그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고자 하였다(Rawlinson).
성 경: [시17:4]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의인의 양심 선언]
⭕ 사람의 행사(行事)로 논하면 - '사람의 행사'란 3절의 '마음'과 대조되는 말로서 외적인 행동들. 곧 일상적인 삶을 의미한다(Briggs, Craigie). 마음의 순수함을 호소한 다윗은 이제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순수함을 호소하려고 한다.
⭕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으며 - '강포한 자의 길'은 살인이나 강도등을 지시하는 말이다. 이것들은 가장 일반적인 악으로서 모든 악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창 6:5, 11, Craigie). 다윗은 이러한 모든 악을 피하였는데 이는 '주의 입술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안에서 이룰 수 있었다.
성 경: [시17:5]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악인의 양심 선언]
⭕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 이는 4절의 내용을 보충하는 구절이다. 다윗은 소극적으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의 길을 굳게 지켰다. 여기서 주의 길을 굳게 지킨다는 말은 신명기등에 언급된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가리킨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의 길을 유추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다. 이러한 두 길은 시편의 서론격인 1편에 이미 언급된 것으로 시편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성 경: [시17:6]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내 말을 들으소서 - 다윗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와 같은 다윗의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정직함에 근거하고 있다(Rawlinson).
성 경: [시17:7]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주의 기이한 인자(仁慈)를 나타내소서 -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해세드' (*)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 백성에게 이 사랑을 베푸시되 특별히 핍박하는 악한 자들로부터 구원해내심으로써 이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는 출애굽의 놀라운 기사를 노래한 모세의 노래(출 15 :11-13)와 유사점이 발견된다. 이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이한...나타내소서 - 기이한 일(11절)
인자('헤세드') - 은혜로('헤세드', 13절)
오른손으로 - 오른손을 드신즉(12절)
이렇게 볼 때 본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개인적인 출애굽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Craigie). 다시 말해서 다윗은 언약을 따라 출애굽의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역사를 베풀어주실 것을 확신하는 신앙을 보여준다.
성 경: [시17:8]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 이 표현은 신 32:10의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와 일치하는 구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보호해 주심을 감사하여 드린 모세의 찬양을 자신에게 적응시키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 본 구절 역시 신 32:11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로 볼때 다윗은 신명기의 기록에 근거해 본절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신명기의 기록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의 4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때 다윗은 이 구절에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시17:9]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 - '나'(*, 네페쉬)는 '생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에워쌌다'는 표현은 다윗의 생명을 끝까지 취하려는 원수들의 잔인성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Calvin) 그가 사방에서 생명을 위협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시17:10]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 혹자는 '기름'을 저들의 '교만'으로 해석하며(Calvin), 혹자는 저들의 '무감각함'으로 해석한다(Rawlinson, Briggs, Craigie).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를 택하는 것이 좋을 둣하다. 왜냐하면 저들은 자신의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일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다윗을 핍박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저들의 죄악은 저들의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더욱더 큰 죄악들을 두려움없이 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으로 확신한 데서 그들의 교만이 발동되었으나 그 확신은 착각이었다(Lange).
성 경: [시17:11]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우리의 걸어가는 것 - 이 표현은 주의 길을 걸어간 것을 의미한다(5절).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다윗과 동행한 추종자들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 주목하고 -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자와 같이 다윗의 원수들은 다윗을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 이는 다음 절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할 구절이다. 즉, 본 구절은 사자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한 1차 행동을 가리키며 원수들의 잔인성을 암시한다.
성 경: [시17:12]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사자 같으며...사자 같으니이다 - 다윗의 원수가 사자에 비유되었다. 그 이유는 원수들의 잔인성 때문이다. 다윗은 또한 이러한 비유를 통해 자신이 당하고 있는 위기의 급박성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7:13]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본 구절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 다윗은 원수들의 파멸과 자신의 구원을 간구한다.
⭕ 여호와여 일어나 - 이에 대해 3:7;7:6 주석을 참조하라.
⭕ 주의 칼로...구원하소서 - 하나님께서 악인들과 대항하여 싸워달라는 호소이다. 하나님은 종종 전능하신 군사로 묘사된다. 따라서 '주의 칼'은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항해서 싸우실때 사용하시는 무기로서 심판의 칼을 의미한다.
성 경: [시17:14]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금생(今生)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 - 혹자는 이를 하나님께 복을 받은 의로운 자로 보았으나(Craigie) 지상에서만 복을 누리고 말 이 세상 사람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Lange, Calvin, Rawlinson). 특히 '세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혤레드'(*)는 '생의 기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세상 사람'이란 이 세상에 사는 기간 동안에만 분깃을 누리는 자, 곧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있다. 즉, 저들은 영원한 성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Calvin).
⭕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 이 세상에서 악인이 번영하는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다(73:3-12;욥 12:6;21:7-13).
성 경: [시17:15]
주제1: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고뇌와 믿음]
주제2: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히브리 원문에서 강조형으로 쓰여졌으며 이로써 다윗은 14절에서 묘사한 악인들의 번영과 자신의 형편을 대조시키고 있다.
⭕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 다윗은 악인 들의 번영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좋은 신령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헤요 복 중의 복이었다(민 12:8;신 34:10). 또한 인간이 그러한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여졌음을 의미한다(마 5:8;요일 3:2). 다윗은 이러한 신령한 복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일시적인 복을 이 세상의 악인들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 깰 때에 주의 형상(形像)으로 만족하리이다 - '깰때에'란 단순히 잠에서 깨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Craigie) 부활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된다(사26:19;단 12:2, Kidner, Delitzsch). 혹은 더욱 영안이 밝아진것 을 의미할 것이다.
성 경: [시18:1]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 '사랑하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함'(*)은 주로 하나님이 인생을 사랑하실 때 사용된 용어이지만 본절에서는 아주 예외적으로 사람이 주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다윗과 하나님간의 밀접한 관계를 충분히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본시 전체의 사상을 요약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시18:2]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본절에는 하나님이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그의 생애의 경험, 특히 사울의 핍박으로부터 구원받은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Lange).
⭕ 반석(盤石)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 반석이나 요새는 적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난한 곳로서 피난처로 사용된다. 다윗은 실제로 사울에게 쫓길 때 이러한 곳에 숨어서 연명하곤 했었다. 다윗은 이러한 '경험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피난처가 되셨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 나의 피할 바위시요 - 여기서 '바위'는 위의 반석과 다른 의미를 가지는 용어이다 . 위의 '반석'(*, 셀라)은 그저 몸을 숨길 수 있는 작은 규모의 바위 덩어리를 의미하나 여기의 '바위'(*, 추르)는 큰 산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일찍이 하나님의 별명으로 일컬어졌으며(출 17:6;33:21, 22;신 32:4;삼상 2:2) 큰 산과 같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상징한다(사26:4). 그리고 실제로 지형이 쉽게 변하는 사막지대에서 이 '추르'라고 하는 말은 불변성 또는 견고성을 상징했다.
⭕ 나의 방패시요 - '방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겐'(*)은 조그마한 원형의 방패를 의미한다(TWOT). 방패가 적의 화살과 칼날로부터 몸을 보호하둣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몸을 항상 둘러치셔서 그의 보호자가 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창 15:1), 아론의 집(115:10), 이스라엘 민족(신 33:29), 그를 신뢰하는 모든 자들(잠 2 :7;30:5)의 방패가 되시기도 한다.
⭕ 구원의 뿔 - 뿔은 승리와 권능의 상징이다. 다윗은 모든 싸움에서 승리한 자이며 환난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뿔'로 고백할 수 있었다.
⭕ 나의 산성이시로다 - 여기까지 다윗은 모두 일곱 번에 걸쳐 하나님을 비유적으로 묘사했다. 이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묘사하기 위함일 것이다(Delitzsch, Rawlinson).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비유인 산성은 높고 험한 바위로 구성된 안전한 피난처를 의미한다(9:9}. 그리고 이곳은 적의 침입시 최후의 방어선이기도 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 되시기에 성도는 마침내 승리를 얻게된다.
성 경: [시18:3]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 다윗은 과거의 경험에 근거하며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 이 신뢰는 환란 가운데 기도로 나타난다.
성 경: [시18:4]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 이는 사냥꾼의 그물에 걸려있듯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헤어나오기 힘든 다윗의 급박한 상황을 비유한 구절이다.
⭕ 불의의 창수(漲水)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 '불의의 창수'는 문자적으로 '벧리알의 창수'이다. '벧리알'(*)은 '무익한 것',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나 '파멸', 또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본절이 히브리 시의 특징인 병행 대구법으로 구성되었다면 후자의 해석이 타당하다. 그리고 구약에서 '벧리알'이란 표현은 '사망'의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므로(욥18;13;합2:5). 본 구절에서 '벧리알'은 '죽음'으로 해석되는 편이 타당하다(Briggs).
성 경: [시18:5]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음부의 줄...사망의 올무 - 본절은 히브리 시의 대표적인 특징인 평행 대구법(parallellism)이 사용되어 다윗이 원수들에 의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음부의 줄'과 '사망의 올무'는 동일한 표현으로 다윗이 죽음의 위기에 빠져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 경: [시18:6]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 다윗은 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망의 위기 중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는 그의 믿음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 저가 그 전(殿)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 여기서 '전'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건축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은 여호와께서 우주를 다스리기 위해 앉아 계신 하늘의 거처를 의미할 것이다(Craigie).
성 경: [시18:7]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여호와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강림하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강림은 하나님께서 대적들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종종 묘사되었다(68:7,8;신 33:2,3;삿 5:4,5).
⭕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 이는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의 장면과 유사하다(출 19:18). 이 같은 표현은 대적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두렵고 엄한 분이신지를 암시한다.
성 경: [시18:8]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처럼 숨을 쉴 코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여호와의 진노를 보다 생생하졔 묘사하기 위해 신인 동형 동성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연기'는 명렬히 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창 19:28;출 19:18).
⭕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불은 대적들에 대한 진노의 불로서 이는 실제적으로 뇌성 벼락 또는 지진과 같은 자연의 변화를 초래할수 있다. 또한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라는 표현은 이 진노의 불이 어떤 것도 태울 수 있는 맹렬하고 뜨거운 불임을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시18:9]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 이는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시는 가운데 강림하셔야 했기 때문에 짙은 구름으로 자신을 두르시고 강림하신다(11절;97:2;출 19:16,18;겔 1:4).
⭕ 강림하시니 - 이는 히브리어로 '야라드'(*)인데 '내려가다', '낮추다'는 뜻이다. 이 말이 하나님께 사용될 경우 인류를 위해 낮아지신 하나님의 비하(卑下) 또는 겸손의 의미를 내포하지만(Kraus).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수행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 그 밭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 이러한 현상은 짙은 구름이 깔려있어 해를 가렸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나타낸다(마 24:29).
성 경: [시18:10]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이 그룹 위에 앉아 계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80:1;99:1;삼상 4:4). 또한 그룹은 생명나무(창 3:24), 지성소(출 26:3`,33)의 수호자로 묘사되었다. 여기서 그룹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강림하실 때 타시는 살아있는 수레를 의미한다(겔 1:4-28; 9:3;11:22).
성 경: [시18:11]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 숨으신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죽게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면 악인뿐 아니라 의인들도 죽게 된다.
성 경: [시18:12]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 광채는 구름 속의 번개를 묘사하고있다. 이 번개가 구름 속을 가로지르면서 하나님의 강림을 알린다.
⭕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 번개가 치자마자 우박과 숯불이 내린 것이다. 아마도 번개가 구름을 갈랐을 때에 구름이 우박으로 변했을 것이다(Calvin). 출 9:24에 보면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성 경: [시18:13]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사역]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 이 표현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음성은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되는 것이다.
성 경: [시18:14]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 '그 살'이란 벼락을 의미하며 '저희'는 다윗을 핍박한 모든 대적들이다. 이는 다윗의 대적되이 인간의 손에 의해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멸망당한 사실을 보여준다. 다윗은 자신이 대적들과 싸워 승리를 했으나 그 승리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승리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그 분을 찬양할 수 있었다.
성 경: [시18:15]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 혹자는 '물밑'이나 '세상의 터'를 다윗이 그의 원수들로부터 핍박받는 위기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raigie). 그러나 이 표현은 악한 자들의 기세가 꺾이고 반면에 그들에 의해 고난당하던 다윗이 기세 등등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Alexander). 즉, 다윗과 그의 대적들의 상황이 완전히 반전된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18:16]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 '많은 물'이란 4절의 '불의의 창수'와 비슷한 표현으로 사망의 위기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 사망의 위기에서부터 건져내셨다.
성 경: [시18:17]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는 대표적으로 사울 왕을 지칭하는 듯하다. 사울 왕은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에 의해 전사당함으로써 더 이상 다윗은 쫓겨 다니지 않게 되었다(삼상 31:1-4).
성 경: [시18:18]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여호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 '의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안'(*)은 지팡이와 같은 지주(支柱)를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TWOT). 병자가 지팡이에 자기의 몸을 의지하듯 재앙의 날에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시18:19]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사역]
⭕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 '넓은 곳'이란 안전과 자유와 구원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협착한 장소는 고통과 비애를 상징하고(23:4) 넓은 장소는 기쁨과 자유 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좁은'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차르'(*)는 고통과 재난을 상징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풍요로운 복은 '넓게 하셨다'(*, 히르하베타)는 의미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볼때,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고통에서 구원하여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성 경: [시18:20]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이를 밝히고 있다. 즉, 그는 자기에게 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의(義)라 함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함이 아니다. 이 '의'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가리킨다. 구약에서는 오직 이러한 의인만이 하나님의 보호를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15:1-5).
⭕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 구약에서 '손'은 행위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의 행위의 깨끗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에 상응하는 좋은 것으로 보답해 주셨음을 의미한다.
성 경: [시18:21]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 이는 율법에 기록된 여호와의 명령을 지켰다는 말이다(신 8;6;10:12;11:22;19:9;26:17;28:9;30:16;수 22:5).
⭕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 악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바요 이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자이다(5:5).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악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아니한 것이다.
성 경: [시18:22]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규레...율례 - 이 두 용어는 21절의 '도'와 같은 의미로 보다 구체적으로는'율법'을 가리킨다. 119편에서도 이 용어들은 '율법'이나 '계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
성 경: [시18:23]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완전성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완전성이란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실 만큼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성 경: [시18:24]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내 손의 깨끗한 대로 - 이 표현은 20절의 '내 의를 따라'와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완전한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음을 고백하고 있다.
성 경: [시18:25,26]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위에서 자신의 구원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순진한 마음과 완전함의 결과임을 말한 다윗은 여기서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진술하고 있다. 즉,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상들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가짐과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이러한 원리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 자비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시드'(*)는 인애,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 '헤세드'(*)에서 파생된 말로서 인간사이의 일반적인 사랑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의 사람, 곧 경건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다.
⭕ 완전한 자 - 23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18:26]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깨끗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르'(*)는 '분리시키다', '쪼개다', '선택하다'는 뜻의 동사 '바라르'(*)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분리시켜 날마다 그 순수함을 유지하는 자를 가리킨다(사52:11;단 11:35).
⭕ 사특한 자 - 이는 생각과 행동이 왜곡되고 비뚤어진 자를 말한다(욥 9:20;잠 28:18).
성 경: [시18:27]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 본절에는 곤고한 백성과 교만한 눈이 대조되어 있다. 곤고한 백성은 핍박을 받으나 의롭게 살고자 하는 경건한 무리를, 교만한 눈은 부요하나 경건치 못한 악의 무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그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너무나도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성 경: [시18:28]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 이와 병행 구절인 삼하 22:29에서는 '주님 자신이 나의 등불'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등불은 흑암을 물리친 등불임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을 때 다윗을 괴롭힌 흑암이 물러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등불은 다윗을 건지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Kraus). 그런데 성경에서 등불은 영광과 존귀의 상징이다(삼하 21:17).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깨서 다윗을 영화릅게 하셨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 여기서 흑암은 등불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다윗의 고통을 상징한다(욥29:3). 그리고 '밝히시리이다'는 미완료형으로 미래성, 계속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윗은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한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자기의 편이되어 주셔서 그의 모든 고통을 물리쳐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성 경: [시18:29]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사울을 비롯한 대적들의 핍박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노래한 다윗은 이제 본절에서 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위태로운 전쟁터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노래한다.
⭕ 적군에 달리며 - '적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두드'(*)는 '침략자의 무리', '습격 도당'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이방의 군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윗은 수차례에 걸쳐 이방의 대군과 맞서 싸운 적이 있다. 그때에 다윗은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고 적군을 향해 달려갔다(삼상17:45).
⭕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 혹자는 이 담을 뛰어넘는 행위를 다윗의 용기에 비유하고 있다(Briggs). 그래서 이러한 다윗의 행동이 대단한 용기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이러한 용기를 소유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혹자는 담을 적의 최종적인 수비선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를 취하면 본 구절은 다윗의 완전한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Craigie). 여기서는 앞 구절과 연관지어 볼 때 이 견해가 더 적합하다.
성 경: [시18:30]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의로움에 대한 보상]
⭕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니 - 다윗은 앞에서 자신의 구원받음이 하나님의 도를 순종한 자연스런 결과임을 천명한 바 있다(20,21절). 이에 근거해 볼 때, 다윗은 구원의 조건이 되는 하나님의 도가 얼마나 믿을 만하고 정확한 것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 저는...방패시로다 - 방패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수비용 무기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비유하고 있다.
성 경: [시18:31]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여 - 여기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타내는 호칭이다(50:1;89:6;95:3;창 14:20;28:3).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가운데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 누가 반석이뇨 - 여기서 '반석'(*, 추르)은 하나님의 불변하신 속성을 비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18:32]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 이 구절은 허리띠를 단단하게 찬 전사를 연상하게 한다. 허리띠는 힘을 발휘하기 위해 차는 군장(軍裝)이다. 그런데 다윗의 허리띠는 하나님의 힘으로 채워져 있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이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진술하고 있다.
⭕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 이는 다윗이 나아가는 곳마다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음 구절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성 경: [시18:33]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 암사슴은 민첩하기로 유명한 짐승이다(삼하 2;;대상 12:8). 다윗은 하나님의 힘을 입어 암사슴같이 민첩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는 암사슴 같이 빠른 발로 적의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도망치는 적을 따라가 섬멸할 수 있었다.
⭕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 '나의 높은 곳'은 다윗이 쫓은 적의 요새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다윗이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난 후에 얻은 존귀의 상태를 의미한다(Hengstenberg, lange). 즉, 본 구절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얻은 복된 상태를 일컫는다.
성 경: [시18:34]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 '가르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드'(*)는 '단련시키다', '훈련시키다'는 뜻으로(대상 25:7;렘 31:18;미 4:3)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단련시켜 싸움하기에 적합한 자로 만드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거룩한 용사로서 모든 전술을 다윗에게 가르쳐 주셨다.
⭕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 하나님에 의해 단련된 다윗의 팔은 영웅적인 힘으로 놋활을 당길 수 있었다. 이 놋활은 보통 사람의 힘으로서 당길 수 없는 금속 무기이다.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당길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놀라운 힘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요. 이는 또한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힘은 본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 경: [시18:35]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주의 구원하는 방패 - 이 방패로써 다윗은 대적의 모든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다.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 오른손은 권능을 상징한다(44:3;45:4; 48:10;60:5). 이 능에 사로잡혀 다윗은 모든 대적들을 능히 이길수 있었다.
⭕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 여기서 '온유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세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1) 응답(창 23:14;욥 1:7), (2) 수고(119:107;전 1:13;3:10;사53:7), (3) 낮은 마음 또는 관대함(잠 15:33;습 2:3)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 세 가지 경우 중 어느 것을 택한다 하더라도 해석상 아무 무리가 없지만 전체 문맥을 고려해 볼 때 (1)번의 경우를 택하는 것이 옳을 둣하다(Kraus). 왜냐하면 본시에는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다윗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6절). 사실상 이 부분에 묘사되고 있는 다윗의 승리의 장면은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분의 관대하신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때 우리는 (3)번의 의미를 채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 경: [시18:36]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 '넓게 하셨다'는 말은 자유롭고 안전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다윗은 이전에 대적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대적들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Kraus,Rawlinson, Lange).
⭕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나의 발목이 흔들리지 않았나이다'이다. 이는 다윗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된 동시에 그의 입지(立志)가 견고해졌음을 보여준다. 다윗은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의 대군을 물리침으로써 명실 상부하게 팔레스틴의 실권자로 부상하게 되었다(Briggs).
성 경: [시18:37]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 이제는 대적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다윗의 그칠 줄 모르는 힘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힘을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았다.
성 경: [시18:38]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 본 구절은 원수들의 완전한 파멸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완전한 승리를 부각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을 사용했다.
성 경: [시18:39]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 승리의 원동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32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18:40]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는 문자적으로 '목을 내게로 돌리게 하셨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 앞에서 원수들을 도망치게 하셨음을 보여준다. 다윗은 여기서 원수들의 도망함이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성 경: [시18:41]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여호와께서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 하셨나이다 - 이방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사실이 다소 이상하게 보여지나 저들은 위급한때에 여호와의 명성을 듣고 여호와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우상을 섬기둣이 그룻된 동기로 불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다(잠 1:28-30, Rawlinson). 여기서 다윗은 우상에 대한 이방인들의 신앙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 경: [시18:42]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바람 앞에 티끌같이...거리의 진흙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 '티끌'이나 '진흙'은 허무함과 공허함을 상징하는 비유적 표현이다(창 3:19;욥7:21;16:15 ;20:11;사41:25).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이 그의 원수들을 비참할 정도로 멸망시켰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성 경: [시18:43]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 여기서 '백성의 다툼'이란 다윗이 통일국가의 왕이 되기 전까지의 북왕국(이스보셋 왕조)과 남왕국(유다 왕조) 간의 대치 상황을 의미한다.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된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이스보셋과 대치하였으나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삼하 4;5-7) 전쟁을 치르지 아니하고도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다(삼하 5:1-3).
⭕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 이 구절은 다윗이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이방 나라를 정복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의 모든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고 그들과 종주권(宗主權)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이방의 나라들은 다윗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다윗을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은 이방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언급된 '백성'도 이방 민족을 지칭한다.
성 경: [시18:44]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저희가 내 풍성(風聲)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는 문자적으로 '그 귀로 듣고서'이다. 이는 다윗과 정면으로 싸우지 아니했던 이방 나라들이 연전연승(蓮戰蓮勝)하는 다윗의 명성만을 전해 듣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즉, 다윗 왕이 아람 동맹군인 하닷에셀의 군대를 크게 파하였을 때(삼하 8:9)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하맛 왕과 그밖의 많은 왕들이 다윗 왕에게 항복하고 화친을 도모하였던 것이다(삼하 8;10;10:19).
성 경: [시18:45]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이방인들이 쇠미(衰微)하여 - '쇠미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벧'(*)은 '힘을 잃다'는 뜻으로 이는 이방민족들이 다윗의 세력 앞에서 전의(戰意)를 상실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벧'은 '어리석다', '바보짓을 하다'(잠17:7,21;30:32;렘17:11)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의미를 취할 경우 저들이 다윗왕 앞에서 우둔해지고 바보처럼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와같이 이방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 앞에서는 그 지혜와 힘을 한번도 사용해 보지 못한채 항복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상 숭배 자체가 얼마나 무기력하며 어리석은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 '그 견고한 곳'이란 이방인들의 요새인듯하다. 따라서 저들은 요새에서 나와 다윗 왕에게 항복한 것이다.
성 경: [시18:46]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 본 구절에서 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본시의 종결 부분으로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돌리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살아계심, 곧 자존성(自存性)을 찬양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승리의 원동력이 하나님의 살아계심 때문에 가능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Craigie). 여호와께서 생존하시다는 사실은 본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서 본시에 나타난 다윗의 모든 승리들의 근거요 출발점이다. 또한 하나님의 자존성은 다른 이방신들과 명확한 구분점이기도 하다(왕하 19:4;사37:4,17;단6:26).
⭕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 '반석'에 대해서는 2절의 '바위'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18:47]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이 하나님이 나를위하여 보수(報睡)하시고 - '이 하나님'은 '하나님'(*, 엘)에 정관사 '하'(*)가 붙은 강조형으로 46절의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다윗을 위해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보수하신다'는 말은 곧 다윗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지시하는 말이다(3,6,14,17절, Rawlinson).
성 경: [시18:48]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 여기서 원수들이란 특별히 다윗을 핍박했던 사울왕과 그의 무리들로 이해할 수 있으며(Rawlinson) 또한 다윗에게 대적한 모든 이방 민족을 가리키기도 한다(Anderson).
성 경: [시18:49]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열방의 으뜸으로 삼으셨기 때문에(43절) 다윗은 더 이상 그들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서 마음대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었다. 이는 또한 간접적으로 다윗이 이방인들 중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즉, 다윗은 열방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선포함으로 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을 것이 분명하다(Calvin). 이 해석은 바울 사도가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본 구절을 인용한데서(롬 15:9) 비롯된 것 같다.
성 경: [시18:50]
주제1: [왕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
주제2: [승리의 찬가]
⭕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 다윗은 여기서 자신을 신정 국가의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도우시는 역사가 다윗 개인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다윗이 왕으로 있는 신정 국가를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삼하 5:12). 한편, '큰 구원'(*, 막딜 예슈오트)은 원문상으로 복수 형태이다. 이와 같은 복수 형태는 (1)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베푸신 여러 번의 구원의 역사들을 의미하는 동시에 (2) 그 구원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Lange).
⭕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의 동의어로 다윗 왕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인자'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키는 말로서 구체적으로는 원수로부터 그를 구원하신 사실과 그를 열방의 머리로 삼으신 사실 등을 의미한다.
⭕ 영영토톡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인자 또는 구원의 역사가 자기 당대(當代)로 끝나지 아니하고 앞으로 자기 후손들에게도 계속 이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다윗의 확신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은 것이었다(삼하7:12-16). 즉,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왕조가 앞으로 계속해서 견고할 것이라고 다윗에게 계시해 주셨던것이다. 한편, 여기서 '후손'은 다윗 왕의 후손들, 곧 다윗 왕조의 왕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Kidner, Calvin, Rawlinson). 왜냐하면 본절에 '영영토록'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한다는 사실을 크게 뒷받침해 준다. 그 이유는 다윗 왕조가 사실상 영원토록 보존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영토륵 다윗과 그 후손에게 하나님의 인자가 베풀어진다는 사실은 다윗 왕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할 것이라는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성도들은 영원토록 보호받는다는 사실이 이구절에서 명백해 진다(마 28:20).
성 경: [시19:1]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창조물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시]
⭕ 하늘이...선포하고 궁창이...나타내는도다 - 혹자는 선포하고 나타내는 주체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라고 말하나(Delitzsch) 오히려 하늘이나 궁창이 의인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Lange, Briggs, Craigie). 성경에서 자연 만물이 의인화된 경우들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늘(50:6;97:6)이나 새벽별(욥 38:7), 언덕과 나무들(사55:12), 일반적인 자연(148:3-13;욥 12:7)이 의인화되어 표현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과 궁창이 선포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는 곧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한 광대하면서도 질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하늘은 그것이 아무렇게나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최고의 건축가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임을 공공연히 찬양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무언적(無言的)인 선포이다. 한편, '하늘'과 '궁창'은 동의어로서 굳이 구분하자면 2절에 근거하여 전자는 낮의 하늘을, 후자는 밤의 하늘을 각기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Craigie). 결국 하늘은 낮과 밤의 모든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선포하고'나 '나타내는도다'는 모두 분사형으로 이는 중단 없는 계속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즉, 하늘의 선포 활동은 창조 이래로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Briggs).
성 경: [시19:2]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창조물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
⭕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1절에서와 같이 낮과 밤이 의인화되었으며 1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늘의 사역이 낮과 밤의 두 차원으로 구분되었다. 즉, 낮은 낮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밤은 밤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런데 계속되는 낮과 밤의 하늘은 창조 이래로 변화됨이 없이 그 모습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즉, 조상의 문화를 전수하듯 본래의 하늘이 전승되어 인간에게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Lange). 이와 같은 의미가 '말하고', '전하니'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하늘은 옛날 모습 그대로 전승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늘은 탁월한 계시이다(Craigie). 따라서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고 연구하며 묵상할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실마리를 잡을수 있게 된다(8:1, 3;33:6;95:5).
성 경: [시19:3]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창조물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
⭕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 하늘의 선포나 언어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무언의 계시이며 선포이다(롬 1:19).
성 경: [시19:4]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창조물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
⭕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 '소리'는 원문에 '카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말은 사실상 소리를 의미하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측량하는 줄'을 의미한다(왕상 7:23;욥 38:5;사 28:17;렘 31:39).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본구절이 하늘의 모든 천체들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길을 따라 운행해야 한다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Knight). 하지만 이 주장은 전체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하늘의 무언적 계시의 소리인 것이다. 따라서 '카왐'은 3절의 '소리' (*, 콜람)에서 '라멧'(*)이 빠진 형태인 것이 확실하다(Gesenius, Maurer, Kraus, Craigie, Rawlinson). 70인역(LXX)에서도 목소리나 악기의 소리를 뜻하는 '프동고스'(*)로 번역되었다.
⭕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 '세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인간의 생존이 가능한 모든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TWOT, Kraus). 따라서 본 구절은 지구상에 사는 어떠한 인간도 자연 계시(自然啓示)의 영역안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帳幕)을 베푸셨도다 - 다윗은 갑작스럽게 해를 의인화하여 묘사하고 있다. 해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진 것들 중 하나이며(1절) 특별히 창조된 하늘들, 곧 천체의 면류관이라고 말할수있다(Craigie). 애굽에서는 해가 최고의 신(神)으로 여겨졌으며 그 백성들은 바로 왕을 해가 성육신(成肉身)한 존재로 여겼다. 또한 바벨론에서는 해의 신 '솨마쉬'(*)가 미신적으로 숭배되었다(Kraus). 하지만 다윗에게 있어서 해는 신적 존재가 결코 아니었고 다만 하나님에 의해 운행되는 찬란한 피조물이었다(창 1:17).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해 장막을 베푸셨다. 여기서 장막이란 태양이 운행하는 한정된 장소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Hupfeld). 하지만 이는 밤 동안의 거처로 해석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Geier, Craigie, Kraus).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아침에 해가 그 거처에서 나오는 신랑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합 3:11).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본 문맥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늘은 교회를 상징하고 해는 복음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성 경: [시19:5]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창조물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
⭕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 본 구절은 매일 아침 힘있게 떠오르는 태양의 일출에 대한 시적(詩的) 묘사이다. 아침 해는 인간에게 항상 신선함과 기쁨과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를 신랑에 비유한 것이다(Perowne). 또한 아랍어에서는 해가 여성형이지만 히브리어와 아랍어에서는 남성형이므로 신랑으로 비유된 것 같다(Delitzsch).
⭕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 이는 해가 끊임없이 자기의 길을 운행하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즉, 해는 지칠 줄 모르고 힘있게 운행하기 때문에 장사로 비유된 것 같다. 그런데 이 장사는 기뻐하는 장사이다. 여기서 '기뻐하는'이란 말은 해의 밝음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빛과 기쁨은 서로 연관성이 많기 때문이다(Kraus). 한편, 고대 근동 지방의 신비 종교에서도 해는 장사에 비유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메르의 주술에도 해의 신이 '나아가는 영웅' 으로 묘사되었다(Schroeder).
성 경: [시19:6]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창조물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
⭕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 '하늘 이 끝'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 끝을, '하늘 저 끝'은 해가 지는 서쪽 끝을 의미한다.
⭕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 이 표현은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4절)와 같은 의미이다.
성 경: [시19:7]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율법의 탁월함]
⭕ 여호와 - 본절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바뀌어졌다. '엘'(*)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인 반면(1절),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제 본절 이하에서 언약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율법에 대한 묘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란 이름이 쓰여진 것이다(Lange). 한편, 본절에서부터 시의 내용이 달라지고 있으나 앞에 묘사된 자연 계시와 이제 묘사되는 특별 계시 사이에는 유비 관계(類比關係)가 있다(Rawlinson). 따라서 본시를 두 개의 시편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율법 - 본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 율법은 여섯 가지 이름으로 달리 표현되었다. 그 표현들은 동의어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을 위한 율법의 다양한 기능을 보여 준다(Craigie). 그리고 '율법'(*, 토라)은 넓은 의미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나 특별히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뜻하기도 한다(말 4:4).
⭕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 완전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 (*)은 제사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이 용어는 흠없고 점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의 완전성은 성경의 충족성(充足性)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율법이 인간의 영혼을 소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완전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율법이 영혼을 소성시키기에 충족한 까닭은 그것이 인생의 영혼에게 좋은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Craigie).
⭕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 여기서 '우둔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티'(*)는 일반적으로 무엇이든 믿는 경향이 있는 순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울러 '우둔한 자'는 율법을 받아들일수 있는 겸손한 자. 또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를 의미한다(Briggs). 이러한 자가 율법의 지혜를 배우지 아니한다면 시험에 빠지게 되고 죄를 저지르게 된다(잠 1:10-14;7:7). 그러나 이러한 자가 율법의 지혜를 배우게 되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한편, '증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두트'(*)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범죄한 자에게는 형벌의 증거가 되며 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상급의 증거가 된다. 우둔한 자는 이 증거를 대함으로써 형벌을 피하고 상급을 얻는 지혜를 얻게 된다.
성 경: [시19:8]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율법의 탁월함]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 여기서는 율법이 교훈으로 표현되었다. '교훈' (*, 피쿠딤)은 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들을 의미하는 말이다(TWOT, Knight). 그리고 '정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르'(*)는 옳고 바른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교훈이 옳고 바른 까닭은 (1) 성품이 올바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며, (2) 아울러 인생들을 옳은 목적지로 인도해주기 때문이다(Lange, Delitzsch).
⭕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 '계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츠와'(*)는 '명령하다'는 의미의 동사 '차와'(*)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리고 '순결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는 주로 '깨꿋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때로 '빛나게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아 6:10;사 49:2).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Delitzsch).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에 '밝게 하도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눈을 뜨게 하도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와(Craigie),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를(Calvin) 내포하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계명 이외에 다른것으로는 인간이 참된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며 선악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의 계명은 인간의 영적인 지식을 밝혀 주는 유일한 등불이다(잠 6:23).
성 경: [시19:9]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율법의 탁월함]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 원문에는 '도'라는 말이 없다. 본 구절을 직역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혹자는 이를 '여호와를 경의하는 자에게 베풀어진 교훈'이라고 해석하였으나(Rawlinson), 이 같은 해석은 원문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함'이란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Delitzsch).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율법이 한결같이 선포하는 대주제이기 때문이다(신 17:19;잠 15:33).
⭕ 정결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호르'(*)는 순금과 같이 아무것도 섞이지 아니한 순수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특히 이 용어는 세속적인 것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낸다(레 13:17). 따라서 '정결하여'라는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자체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순수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영원까지 이르고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썩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즉, 세속적인 것은 더러운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라져 버리지만 순전한 경외는 영원토록 보존된다는 의미이다(요일 2:17).
⭕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 '확실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진리'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율법은 이방 종교의 법 조항들과는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유일한 진리의 표준이라는 말이다(Lange, Delitzsch). 또한 '에메트'는 '신뢰성'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인간이 믿고 따르기에 완전한 것이다.
⭕ 다 의로우니 - 이는 율법에 대한 결론적인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율법은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의롭다. (1) 질적인 면에서 율법은 그 기원이 하나님이므로 의로우며 그 목적이 선한 것이므로 의로운 것이다(Craigie). (2) 양적인 면에서 모든 율법의 조항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의로운 것들이다(Barnes).
성 경: [시19:10]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율법의 탁월함]
여기서 다윗은 율법의 가치를 찬양한다.
⭕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것이며 - 정금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재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 '송이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노페트 추핌'(*)이다. 여기서 '추핌'(*)이란 '흘러 넘치다', 또는 '벌집'을 의미하는 '추프'(*)에서 파생한 것으로 '벌집에서 흘러 넘친'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Lange, Delitzsch). 따라서 '송이꿀'이란 벌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친 덩어리 꿀을 의미한다. 이러한 꿀은 팔레스틴 산지에 혼히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꿀은 최고의 즐거움을 상징한다. 다윗이 이처럼 금이나 꿀과 같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 그에게 그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외면적으로는 그의 모든 재산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으로 느껴졌으며 내면적으로는 달콤한 행복이 되었던 것이다(Delitzsch).
성 경: [시19:11]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율법의 탁월함]
⭕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 여기서 '경계를 받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즈하르'(*) '권고하다', '가르치다'는 뜻의 동사 '자하르'(*)의 수동형이다. 이는 율법의 교훈적 기능을 보여준다. 즉, 율법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을 제시하여 주며 아울러 심판받아 마땅한 행위들을 경고함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근신하게 해주는 것이다.
⭕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 이는 시편 전체의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이 표현이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利信稱義) 사상과 모순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이다. 즉, 율법을 지킨 자, 곧 의를 행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 경: [시19:12]
주제1: [자연과 율법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율법의 탁월함]
⭕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기아' (*)는 '길을 잃다', '잘못하다', '정도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의 동사 '솨가'(*)의 명사형이다. 그러나 동사 '솨가'의 일차적 강조점은 비고의적인 범죄라는 사실에 있다. 즉, 이 동사는 부지중에 범한 비고의적 행동, 또는 무의식적인 범죄를 뜻한다(레 4:13;욥 6:24;19:4). 따라서 여기서 '허물'이라는 말은 모르고 지는 죄, 또는 비고의적인 죄를 의미한다(TWOT, Lange, Delitzsch). 흔히 이러한 종류의 죄는 미묘한 것이거나 자신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발견되지 않지만 다윗은 율법의 말씀안에서 이러한 종류의 무수한 죄를 깨달을 수 있었다.
⭕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다윗은 '숨은 허물'이라는 말로 앞에서 언급된 '허물'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벗어나게 하소서'라는 말은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카'는 '깨끗하다', '무죄하다'는 뜻으로 이는 모든 허물을 깨끗이 씻어달라는 기도이다(Calvin, Briggs).
성 경: [시19:13]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율법의 탁월함]
⭕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 '고범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딤'(*)은 '끓다', '완고하게, 또는 건방지게 행동하다'는 뜻의 동사 '지드'(*)에서 파생한 명사형으로 '교만으로 행한 죄', 또는 '완악한 죄'를 뜻한다(TWOT, Calvin). 이러한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없었다(민 15:27-31). 한편, 혹자는 '고범죄'를 인격체로 보고 '교만한 자들', '교만히 행한 자들'로 해석하였으나(Ewald, Briggs), 본 문맥이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다(Delitzsch).
⭕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 이 말은 죄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죄가 한번 행하여지기만 하면 그 죄는 인간을 종으로 삼아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창4:7).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죄가 의인화되어 표현된 것이다(Briggs).
⭕ 내가 정직하여 - '정직하여'는 원어상으로 죄악이 없는 순수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는 점이나 흠없는 희생 제물을 연상케 하며 성도가 힘써야 할 성화의 상태를 암시한다(엡 1:4;5:27;히 9:14).
⭕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 '죄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솨'(*)는 '거역하다'는 의미의 동사 '파솨'(*)의 명사형으로 '반역죄'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에 대한 반역을 가리킨다(TWOT). 이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며 인간 내부에 심각한 부패의 영향을 미친다(Delitzsch). 다윗은 숨은 허물과 고범죄에서 깨끗하게 되면 이러한 죄악의 심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성 경: [시19:14]
주제1: [자연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주제2: [율법의 탁월함]
⭕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 이는 다윗의 기도의 근거를 보여준다. 먼저 '반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는 거대한 산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것의 상징적인 의미는 '힘'이다. 다윗은 모든 죄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여호와께로부터 온다는 믿음으로 이같이 표현했을 것이다. 또한 본절에서 '구속자'는 죄를 깨끗하게 속량해 주시며 그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분을 의미한다. 다윗은 자신의 무수한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분은 여호와 한 분뿐이심을 믿고 이처럼 고백하고 있다. 이와같이 모든 죄의 문제를 여호와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지금까지 기도하였다.
⭕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 - 이는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Lange). 그리고 '말'과 '묵상'은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마음에 묵상한 것이 그대로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 이를 다윗이 기도와 함께 성소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Briggs) 다윗이 기도 자체를 하나의 제사로 인식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Delitzsch, Kraus). 성경에서 기도는 하나의 제사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호 14:2).
성 경: [시20:1]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본절 이하 5절까지는 전쟁에 임할 왕을 위해 온 회중이 도움을 구하는 기도의 장면이다.
⭕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 '환난 날'은 대적들의 공격이 임박한 때를 일컫는다. 이 때는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하는 때이다(18:6).
⭕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 -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은 야곱에게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곱의 하나님'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의미이다(Briggs, Calvin). 또한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 데서 비롯되었다(창28:15, Rawlinson). 한편, '하나님의 이름'은 본시에 모두 세 번 언급되었는데(1,5,7절). 이 이름은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임재하신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셨으며(신 12:5,21;왕상 14:21;대하 12:13), 그 이름은 자신과 다를 바 없이 거룩하고 존귀한 것이다(111 :9;대상 17:24, Lange, Rawlinson).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천상에서보다 지상에로의 임재라는 독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여호와 자신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그의 이름은 지상에서 계시되어진 것이다(신 12:11,21). 특히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궤 위에 임재하신 것으로 나타나며(삼하 6:2) 중앙 성소의 개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Kraus). 한편,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고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구체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었다(44:5;118:10-12;124:8;잠 18:10). 그러나 이는 신(神)의 이름에 대한 미신적인 신앙으로 일관했던 이방 종교(이들은 신의 이름을 맹목적으로 부름으로써 기적적인 현상을 기대했다)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지상, 특별히 성소에 임재하여 계신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신앙의 측면이었다.
성 경: [시20:2]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 성소에서 ... 시온에서 - '성소'는 분명히 시온 산에 세운 성막을 말한다. (Rawlin-son, Kraus) 다윗은 이곳에 언약궤를 안치시켰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이스라엘의 승리의 원동력이었다.(수4:7,11,18; 삼상4:3-5) 그런데 이 언약궤가 시온의 성막에 모셔졌으니 이 성막으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이 왕과 함께 하기를 백성들은 간구하였던 것이다.
성 경: [시20:3]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 소제...번제 - 이 제사들은 전쟁에 나가기 직전에 드린 것으로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를가지고 있다(Hengstenberg, Kraus). 소제는 번제를 드린 후 반드시 드리는 곡물 제사로 번제와 거의 동시적으로 드려졌다(Briggs).
⭕ 셀라 - 이에 대해서는 3: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20:4]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 '마음의 소원'이란 다름 아닌 임박한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다윗은 이 소원을 기도로써 하나님께 아뢰었을 것이다.
성 경: [시20:5]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 너의 승리로 인하여 - '승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슈아'(*)는 '구원'을 의미한다.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은 곧 승리를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측면에서 대적 마귀에 대한 구원도 승리이다.
⭕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 여기서 또다시 '하나님의 이름'이 강조되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거둘 승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얻어질 것이기 때문이다(Kraus).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언급으로써 우리는 이스라엘의 승리의 기쁨이 그저 희희낙락하기만 하는 이방 민족들의 기쁨과는 현저히 구분되는 것으로, 경건에 기초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Calvin). 한편, '기를 세우리니'를 혹자는 적들의 요새나 성(城)에 자기들의 기를 꽂는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Rawlinson). 그러나 이는 승리를 기뻐하며 축하한다는 시적(詩的) 표현으로 상반절의 '개가를 부르며'와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Lange, Calvin).
⭕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이 구절은 4절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로써 다윗왕이 임박한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도는 선택된 왕의 특권으로 그의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는 특성을 가진다(2:8, Kraus).
성 경: [시20:6]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 구원하시는 줄...구원하는 힘으로 - 앞의 '구원하시는'은 문법상 완료 시제이다. 비록 전투는 벌어지지 아니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로써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음을 바라보았으며Craigie), 그 승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성취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본 구절의 '구원'이란 표현은 대적들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 이제 - 기도와 희생 제사를 드린 이후를 가리키며 이때는 염려가 확신으로 변한때이다(Briggs). 이 용어가 사용됨으로써 본시의 상황이 새롭게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내가 아노니 - 본 구절에서만 인칭이 바뀌었다. 즉, 지금까지(1-5절)는 기도의 주제가 1인칭 복수였으나 여기서는 1인칭 단수로 사용되었다. 즉, 복수의 화자(話者)에서 단수의 화자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바뀌어진 화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혹자는 성소에서 회중의 기도를 다 들은 대제사장이라고 주장한다(Tawlinson). 하지만 중간에서 갑자기 대제사장이 출현했다고 하는 것은 의외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보다는 역시 회중의 기도를 다 들은 본시의 저자인 다윗 자신이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지금까지 회중의 기도는 다윗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답을 다윗 왕자신이 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lange). 한편, 그와 백성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즉각적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 다윗이 본절의 화답을 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일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Kraus). 이로써 그는 확신에 찬 화답을 하게 된 것이다.
⭕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 다윗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표현을 사용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전쟁에 개입하실 것이 확실하다.
성 경: [시20:7]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여기서 다시 왕의 말에 대한 회중의 화답으로 내용이 전환되고 있다.
⭕ 혹은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 '병거'와 '말'은 아람 연합군의 병력을 대표한다(삼하8:4;10:18). 이와 달리 이스라엘에는 병거와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주로 산지로 형성되어 말을 사용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보다 중요한 이유로는 신정 국가의 왕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에서 말의 사용을 금하였기 때문이었다(신 17:16). 그러나 다윗 이후 솔로몬과 다른 군주들은 말을 사용하였다.
⭕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 이는 상반절과 대구(對句)를 이룬다. 대적들은 병력을 의지하나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를 의지할 뿐이다. 여호와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병력은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말 것이기 때문이다(사 30:15, 17;31:1;슥 4:6). 이와 같은 백성들의 확신은 저들이 전쟁을 하나님을 위한 성전(聖戰, holy war)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한다(Kraus).
성 경: [시20:8]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서도다 - '저희'(대적)와 '우리'가 서로 대조되어 있다. 그리고 '엎드러진다'는 말은 서 있음을 전재한 말이며, '일어나 선다'는 말은 엎드러져 있음을 전제한 말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전쟁초기의 상황이 대적들에게 훨씬 유리하나 전세가 역전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Delitzsch). 여기서 '굽어 엎드러진다'는 말은 완전한 패망에로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저들은 처음에는 무릎을 꿇지만('굽어') 다음에는 완전히 패망하고 말 것이다(Lange). 반면에 '일어나 바로 선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에로의 진행 과정을 보여준다. 즉, '일어난다'는 말은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말이며, '바로 선다'는 말은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의미이다.
성 경: [시20:9]
주제1: [승리를 위한 기도]
주제2: [승리를 위한 간구]
⭕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 이는 본시의 주제이다. 앞에서 이 주제를 다른 다윗은 결론 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 우리가 부를때에 - 환난 날, 곧 임박한 전쟁의 때이다(1절).
⭕ 왕은 응락하소서 - '왕'은 여기서 하나님이다. 고대 주석가들은 이를 그리스도로 보았다(Lange). 사사 시대 이후 왕정(王政)이 시작되어 명목상으로 다윗 계열이 왕이 되었으나 이스라엘 사회의 실제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왕권을 이 땅에서 직접 행사하셨다.
성 경: [시21:1]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본절에서 7절까지는 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복(福)에 대한 백성들의 감사의 내용이다.
⭕ 주의 힘을 인하여 - `주의 힘'은 전쟁 이전에 다윗 왕이 의지했던 여호와의 `구원하는 힘'이며(20:6),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전쟁에 참전하여 보여 주신 역사를 의미한다. 이러한 `주의 힘'은 성소 가운데 임재하여 계신 `하나님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20;1, 5, 7).
⭕ 기뻐하며...즐거워하리이다 - `기뻐하며'는 문법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기뻐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Rawlinson). 그리고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 왕이 전쟁 이전부터 확신했던 것으로, 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저들은 과거에 믿음으로 소망했던 사실을 즐거움으로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21:2]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은 단순히 승리한 사실만으로 기뻐하지 않고, 보다 신앙적인 이유에서 기뻐하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다는 이 은헤로운 사실에 대해 더욱 감격하며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저들의 기쁨은 육체적인 욕망의 성취에 근거하였다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신앙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본 구절은 20:4의 왕을 위한 백성들의 기원과 연관된 내용으로서 백성들의 기원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주셨으며'는 의미상 `허락하셨으며'로 헤석되어야 할 것이다.
⭕ 입술의 구함 - 마음의 소원이 보다 뚜렷하게 말로써 표현된 기도를 말한다. 시인이 이 같은 점층법을 사용한 것은 자신과 그의 백성이 간절히 기도했음을 암시한다.
⭕ 셀라 - 3: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21:3]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 이는 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복을 묘사한 구절이다. 여기서 `영접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담'(*)은 본래 `앞서가다' 또는 `만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보다 먼저 앞서 가셔서 아름다운 복을 예비하신 후 그를 만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Lange). 여기서 다윗이 얻은 아름다운 복이란 그가 하나님께 요청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아시고 예비하여 두신 것임을 알 수있다(Calvin). 그리고 `아름다운 복'이란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의미하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대적들에 대한 승리를 의미할 것이다. 특히 `아름다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정금'(창 2:12)이나 `고급 향유'(아 1:3)를 묘사할 때 사용된 수식어로서 아주 훌륭한 질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렇게 볼때 `아름다운 복'은 조금도 손색이 없이 만족스러운 복을 의미한다.
⭕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 혹자는 `정금 면류관'을 삼하 12:30과 관련시켜, 이를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암몬 왕의 왕관으로 본다(Delitzsch). 물론 다윗 왕이 역사적으로 암몬을 정복한 후 이 왕관을 빼앗아 머리에 쓴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이 견해를 주장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본시에 있어서 `정금 면류관'을 이에 국한시켜 해석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본시는 메시야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아울러 다윗 왕조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금 면류관'은 다윗 왕이 하나님의 왕권의 대리자로서 인정되었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당신의 대리자로 인준하셨음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Craigie, Hengstenberg, Hupfeld, Rawl- inson). 따라서 본 구절은 역사적인 사건(암몬 왕의 왕관을 빼앗은 정복사건) 보다는 다윗 왕조의 견고성과 영원성이 약속된 다윗 언약과의 관계에서 혜석되어야 한다.
성 경: [시21:4]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저가 성명을 구하매...영영한 장수로소이다 - 여기서 `생명'이란 일차적으로 다윗의 개인적인 생명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Delit-zsch) 왜냐하면 본 구절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감사를 드리는 내용으로서 다윗이 전쟁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사실을 감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이라는 용어가 '영영한'이라는 말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보다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윗이 아무리 장수했다 하더라도 영영한 장수는 아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 '생명'이란 다윗 왕조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Craigie, Rawlinson, Calvin) 이 다윗 왕조의 영원성은 다윗 언약 가운데서 하나님이 의해 이미 보장되었다.(삼하7:16) 또한 다윗왕 자신이 왕조의 영원성을 간구한 사실은 삼하 7:29절에 기록되어 있다.
성 경: [시21:5]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 여기서 `영광'은 대적들에 대한 다윗의 승키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의 통치가 실제로 이방 민족에게까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삼하 10:19; 대상 14:17).
성 경: [시21:6]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 이와 같은 내용은 아브라함 언약인 창12:2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영영토록'이란 말은 다윗 왕조의 견고성을 지시하는 말이며,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를 예시하는 말이기도 하다(Rawlinson).
⭕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 여기서 `기쁘고'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다'(*)는 본절 이외에 출 18:9 에서만 사용된 용어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기쁨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본 구절은 지금까지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의 역사로 인한 기쁨과 즐거음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Briggs , Rawlinson).
성 경: [시21:7]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 이는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진술이다. 신정 국가에서 왕은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 안에서 여호와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에 대한 표본이 바로 다윗이었다.
⭕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 상반절과 연결시켜 볼때 여기서는 분명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관계가 선포되어지고 있다. 즉, `의지하다'(*, 바타)는 말과 `인자함'(*, 헤세드)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 관계를 한마디로 함축시킨 용어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자함)에 대한 언약 백성들의 반응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또다시 은혜로 백성들에게 주어진다(Craigie).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언약 백성들의 신뢰가 계속 유지되는 한, 하나님의 은혜는 불변한다는 사실이다. 다윗 왕조의 견고성은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한편 본 문맥에서는 특별히 왕의 신앙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왕이 언약 공동체의 대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시21:9]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저희로 풀무같게 할 것이라 - 이는 다윗왕이 암몬 자손들에게 행한 처절한 형벌을 연상케하는 구절이다(삼하 12:13). 즉, 다윗은 암몬을 정복한 후 그 백성들을 벽돌 가마에 던져 넣는무서운 형벌을 행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풀무'란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 이외에도 상징적인 의미로서 가혹한 형벌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신 4:20; 왕상 8:51; 사 48:10; 렘 11:4; 겔 22:18, 20, 22; 말 4:1, Rawlin- son). 아무튼 본 구절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다윗이 이방 민족들에게 무서울 정도로 권위있는 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 왕의 권위에 이어 곧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다윗 왕이 독단적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지시하에 행할 것임을 보여 준다(Rawlinson).
성 경: [시21:10]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 본 구절은 다윗이 모압과 에돔 백성들에게 행한 형벌을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삼하 8:2; 왕상 11:16).
성 경: [시21:11]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 여기서 계교란 다윗의 왕권을 무너뜨리려는 이방 군주들의 반란 음모를 의미한다. 그러나 다윗의 왕권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므로 저들의 계교로는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 다윗 왕권에 대한 이방 민족들의 도전과 이에 대한 다윗 왕조의 승리에 대해서는 2편을 참조하라.
성 경: [시21:12]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등을 돌리게 할 것이다'로 해석되며, 그들을 패주시킨다는 뜻이다.
⭕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 활은 이스라엘, 특히 왕의 주요 무기 중 하나로서 왕의 힘을 상징한다(45:5, 6; 삼하 1:18, 22). 그런데 이 구절은 상반절의 종속절로서 문자적으로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길 때'란 의미로 해석된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저희를 패주시키게 한 결정적인 다윗의 행위가 대적들의 얼굴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성 경: [시21:13]
주제1: [승전으로 인한 감사와 찬송]
주제2: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
⭕ 여호와여...칭송하겠나이다 - 마지막으로 본시는 여호와의 능력과 권능에 대한 찬양으로 끝나고 있다. 왜냐하면 다윗 왕이 행한 모든 능력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시는 다윗 왕권의 영화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시의 구조는 20편의 마지막 절에서도 이미 사용된 바 있다(Briggs).
성 경: [시22:1]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 표현은 고통의 심연(深淵)에서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다. `어찌'란 표현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단순히 절망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내 하나님...내 하나님' 이란 표현 자체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내 하나님이여'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다윗 자신에게 적용한 것으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나는 당신의 도움과 구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Kraus, Rawlinson). 그리고 본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인용하신 구절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언약의 하나님의 신실성을 끝까지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Delitzsch). 한편, 본구절의 히브리어는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인데, 주께서 인용하신 구절에는 `아자브타니'(*)가 `솨바크타니'(*)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내용상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신 까닭에 이 같은 차이가 있게 된 것뿐이다.
⭕ 어찌 나를 멀리하여...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원문에는 `어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가 앞의 구절에만 속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개역 성경에서는 두 번의 부정문이 사용되었으나, 원문에는 `아니'에 해당되는 부정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본 구절을 `나의 구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내가 신음하는 소리를 냅니다'로 번역한다(Rawlinson, Briggs, Delitzsch).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 성경이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찌하여' 나 `아니'란 용어가 단순히 앞 구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 구절과도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이 다윗의 탄식을 극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상으로도 적절하다.
성 경: [시22:2]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 본 구절은 끊임없는 부르짖음과 애통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같이 계속적인 탄식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시지 않고 있는 사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여기서 `잠잠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완전한 체념을 상징한다. 그러나 잠잠치 아니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했음을 보여준다(Lange).
성 경: [시22:3]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 여기서 다윗은 고통 중에서도 불평하지 않는 신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설혹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실지라도 역시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이란 80:1; 99:1 의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이란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 다윗은 그룹위에 좌정하셔서 그룹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 위에 계셔서 그 백성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연관지은 것 같다. 또한 `거룩하시니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절대적으로 구별되이 계신 분임을 나타낸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지체 하실지라도 여전히 세속과는 완전히 구별되신 존귀하신 분이다'라는 의미이다(Kraus, Delit- zsch, Rawlinson).
성 경: [시22:4]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건지셨나이다 - 열조들의 신앙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은혜스러운 과거를 회상함으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게 하고 있다(Rawlinson).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 곧 전능하신 능력을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발견한 것이다(Kr aus).
성 경: [시22:5]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 이는 구원의 근거로서 부르짖음에 대한 강조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원의 근거가 부르짖음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재발견했다. 그런데 본 구절이 어떤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진술인지는 분명치 않다.
성 경: [시22:6]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하나님의 잠잠함에 대해 신앙적으로 항의한 다윗이 이제 인간들로부터 받은 수치를 호소하고 있다.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귀함이 짓밟히고 있으므로 다윗은 자신을 벌레에다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벌레'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존엄성의 상실을 상징하며 아울러 죽음 직전의 절박한 상태를 암시하기도 한다(사 14:11).
⭕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한 그리스도께 적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사 49:7; 52:14; 53:3).
성 경: [시22:7]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입술을 비쭉이고 - `비쭉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타르'(*)는 `열다'는 뜻으로 이는 입술을 벌려 조롱한다는 의미이다(35:21; 요 16:10).
⭕ 머리를 흔들며 - 이는 조롱의 몸짓이다(44:14; 64:8). 이러한 조롱의 몸짓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했던 무리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27:39)
성 경: [시22:8]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 여기서 `의탁하니'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골'(*)은 `굴려버리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짐을 맡김을 의미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윗을 조소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악인들은 그들 안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사실은 다윗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Craigie).
성 경: [시22:9]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주께서...의지하게 하셨나이다 - 이 순간에 다윗은 큰 모순을 발견하고서 애통하고 있다. 즉, 출생의 순간부터 다윗은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였으나 지금은 커다란 고난 중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신앙의 경험들은 지금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기에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는 사실 뿐이었다.
성 경: [시22:10]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본절은 9절과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다. 다윗이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런 신앙에 따라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님께서 속히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시22:11]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 다윗은 탄식에서 간구로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바꾸고 있다. 그는 절망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향해 간구할 수 있었다.
성 경: [시22:12]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 악인들이 황소에 비유되고 있다. 팔레스틴의 황소들은 아주 난폭하며 야성적이라고 알려져 있다(Rawlinson).
⭕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 바산은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위치한 광활한 평야로서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목초지였으며 이곳의 소들은 대단히 힘이 세었다. 따라서 바산의 소들은 힘센 자를 상징한다(신 32:14; 암 4:1). 따라서 본절 전체는 다윗의 대적들이 얼마나 난폭하며 강한 자인지를 암시해 준다.
성 경: [시22:13]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부르짖는 사자 - 이에 대해서는 10:9 주석을 참조하라. 사자의 포효(咆哮)가 모든 들짐승에게 두려움을 주듯이 다윗의 대적들도 다윗을 삼키기 위해 큰 위협을 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22:14]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 이는 다윗이 대적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완전히 탈진한 상태를 의미한다(수 7:5; 겔 7:17; 21:12).
⭕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 본 구절은 모든 뼈들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다윗 자신이 대적들의 위협 앞에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육체(뼈)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탈진해 버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속'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아'(*)는 주로 (1) 사람의 내장, (2) 남녀의 생식 기관, (3) 감정의 자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3)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성 경: [시22:15]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 원수들의 위협 앞에서 극도로 허약해진 다윗 자신이 마치 쉽게 부숴지는 질그릇 조각과 같이 회생(回生)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 내 뼈가 잇틀에 불었나이다 - 이런 다윗의 처지는 극도로 피곤함의 결과이다(69:3) 이와같이 `내가 목마르다'(요 19:28)는 그리스도의 외침 역시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 다윗은 자신의 영육간의 상태를 점층법적으로 묘사해 오면서 본 구절에서는 죽음 직전까지 몰린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을 진토에다 비유한 것은 인간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창 3:19).
성 경: [시22:16]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 악인들이 개에 비유되고 있다. 개는 율법에서 금지한 죽은 고기를 먹으며 물고 뜯는 잔인성을 가지고 있기때문에(59:7, 15; 왕하 9:35, 36; 렘 15:3) 속된 자, 또는 악한 자에게 비유되었다.
⭕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 다윗의 대적들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에워 싸고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대적들이 기회만 있으면 그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찔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키푸니 카아리'(*) 어원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즉 `카아리'는 `사자같이'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또한 `히키푸니'는 `에워싸다'란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내 수족을 사자같이 에워쌌나이다'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개들'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사자가 개와 대비되어 여기에 등장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또한 둘러싸는 행동은 사자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개들에 의한 것으로 보여 진다(Briggs). 왜냐하면 사자는 무리를 지어서 먹이를 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번역은 타당치 않다. `카아리'는 `파다', `꿰뚫다'는 뜻의 동사 `카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벌에 적용 될 수 있다. 더욱 이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이 견해를 따라 번역했다. 따라서 이 견해를 취하는 것이 무난하다(Calvin, Delitzsch, Hengstenberg).
성 경: [시22:17]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 내용상 이 구절은 14절의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와 유사한 구절로서 극도로 쇠약해진 다윗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다윗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피골이 상접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Calvin, Delitzs ch ,Lange, Rawlinson).
⭕ 저희가 보고 - 여기서 `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특별히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TWOT). 따라서 이 말은 저희가 다윗의 불행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고 그를 바라보았음을 시사해 준다(Delitzsch).
성 경: [시22:18]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 본 구절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구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생애에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복음서의 저자들은 로마 군인들의 행위를 통해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게 직접 성취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마 27:35; 요 19:24. Rawlinson).
성 경: [시22:19]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본절에서는 다윗의 탄식시에 전형적으로 언급되었듯이 또다시 절박한 상황 중에서 낙심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 나의 힘이시여 - `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얄루트'(*)는 힘의 본질, 또는 힘의 원천을 뜻한다 (Delitzsch). 이처럼 다윗은 극한 상황에서도 힘의 근원이되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찾았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성 경: [시22:20]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 여기서 `칼'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상징적 표헌이다. 이와 흡사한 기도의 내용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마 26:39; 눅 22:42).
⭕ 내 유일한 것 - 이는 영혼을 뜻한다. 이 영혼이 `유일한 것'으로 표현된 까닭은 지금 다윗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형편에 있기 때문이다(Calvin).
⭕ 개의 세력 - 악한 무리들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는 16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22:21]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 여기서 사자는 개와 같이 악인들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 악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Lange, Rawlinson).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에서도 사단이 우는 사자에 비유되었다(벧전 5:8; 계 10:3).
⭕ 들소 뿔에서 - 여기서 `들소' 나 `바산의 힘센 소들'을 가리킨다(12절).
성 경: [시22:22]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로 인한 구원의 역사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형제'는 여호와를 경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한다. 한편, 본절은 히 2:12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구절인데, 이 경우에 형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을 일컫는다.
⭕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할'(*)은 회집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35:18; 출 16:3; 레 4:13-21; 민 10:7; 15: 15; 20:6). 이들의 특성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이다.
성 경: [시22:23]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본절에 언급된 세 구절은 서로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해야 함을 강조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며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 때문이다(21절).
성 경: [시22:24]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 그는...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음을 엿 볼 수 있다. 즉, 전에는 밤낮으로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으나(2절), 이제는 하나님의 응답을 이미 체험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체험이 그에게 찬송의 근거가 되고 있다(Kraus, Craigie). 한편 `곤고한 자의 곤고'에서 `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는 `가난'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용어이다. 하지만 가난의 의미는 본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아니'(*)는 앞에서 다윗의 호소한 바 있는 극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말이다(1, 14-17절).
성 경: [시22:25]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 대회 - 문자적으로는 `큰 회중'(*, 카할 라브)이다. 이는 절기 때에 모인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數)를 가리킨다(Kraus).
⭕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 이는 찬송시 내용을 일일이 하나님께로 부터 계시받아 작성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그의 찬송의 모든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다. 즉,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그의 찬송이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말이다(Briggs, Lange).
⭕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 다윗은 고난 중에 감사제(레 7 :15, 16)를 서원한 것 같다(Lange, Kraus). 이제 모든 고난에서 벗어난 후, 다윗은 이전의 서원을 갚고자 했다. 그런데 혹자는 `서원'을 단순히 헌신과 일치시켜 생각하였으나(Rawlinson), 이는 다음 절에 기록된 감사제의 의식들에 비추어 볼때 비합리적이라고 보여 진다.
성 경: [시22:26]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 `겸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윔'(*)은 24절의 `곤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의 복수형으로 여기서도 `곤고한 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곤고한 자는 악인에게 억압받는 의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후자는 `아나윔'을 `가난한 자'로 번역하여 다윗이 과부나 고아등 가난한 자들을 초청해 이 감사제에 동참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Delitzs ch, Lange). 그러나 본 구절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는 예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 다윗이 의를 끝까지 좇은 자들에게 복을 비는 장면이다. 한 조각의 음식이 저들의 마음을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앞 구절과 함께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향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을 주의 성만찬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희생의 살과 피를 나누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Del- itzsch, Rawlinson). 그러나 본 구절은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의의 원리를 따를 때 영혼이 소생할 것을 예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렘 15:16; 겔 3:1-3, Lange). 이렇게 볼 때 `너희'는 단순히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경건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Kraus). `여호와를 찾는 자'란 표현이 그와 같은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 경: [시22:27]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본절에서 부터 마지막 절 까지의 내용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로써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경험만을 기록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본시에서 예언적으로 기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Delitzsch, Lange, Rawlinson).
⭕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 `땅의 모든 끝'은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구절이며(2:8; 67:7; 72:8; 사 45:22; 52:10), 특별히 이 표현은 이방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세 이방인들은 우상 섬김으로 잊어버렸던 여호와를 기억하고 이전의 무지함에 대해 회개할 것이다. 여기서 `돌아온다'는 말은 곧 회개의 행위를 의미한다(Briggs).
⭕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 위의 구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본 구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창 12:3 ; 28:14).
성 경: [시22:28]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 나라는...열방의 주재 - 여기서 `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루카'(*)는 `왕권'(royalty)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주재'라는 용어가 뒤이어 나오기 때문에 본절에서 `나라'란 표현보다 `왕권'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즉, 이 왕권은 온 세상에 대한 왕권이다. 이는 이방의 나라들이 여호와께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그의 통치하에 있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왕권에 의해 하나님은 `열방의 주재'로 경배 받게 된다. 한편 여기서 `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은 특별히 이방 민족을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이다.
성 경: [시22:29]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 세상의 모든 풍비(豊備)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여 - 이는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풍비한 자'란 세상에서 부요한 자, 또는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나 나라도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제의되지 아니할 것이다(Hengstenber g, Briggs, Lange, Delitzsch). 한편, 여기서 또다시 `먹는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 조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영적인 양식을 먹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Delitzsc h, Lange). 여기서 이들의 먹는 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관련되어 진술되고 있다. 즉, 이 표현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만찬에 초대되어 함께 먹으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을 암시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옴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구원의 양식'(영적인 양식)을 먹은 부요한 자들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구절이다.
⭕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 이에 대해 학자에 따라 견해가 서로 다르다. (1)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Rawlinson) 이 견해에 따르면, 한번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인간들이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보여준다. (2) 이미 죽은 자로 해석 하는 견해이다(Kraus, Knight). 이는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죽은 자들도 죽음의 세계에서라도 그에게 절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죽어가는 나라를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Briggs). (4) 앞의 `풍비한 자'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Delitzsch, Lange). 여기서 (1)의 견해는 `풍비한 자' 에 대한 진술 이후에 모든 사람을 언급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2)의 견해도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사후(死後)의 세계에서는 종교적 활동이 중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6:5; 88:10-12). 따라서 죽음의 세계에 있는 사자(死者)들이 그리스도께 절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생각될 수 없었던 일이었다. (3)의 견해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은 나라에 대한 언급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4)의 견해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본절 전체가 부요한 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진토'는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가장 `천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란 가난과 질병으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 즉 거의 죽어가는 인생을 의미할 것이다(사 9:1-4).
성 경: [시22:30]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 여기서 `후손'은 직접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믿음의 자손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은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바라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구절은 모든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대대로 선포될 것임을 다윗이 깨달았다는 말이다(Craigie).
성 경: [시22:31]
주제1: [비탄을 극복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그리스도의 승리]
⭕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 이는 한 세대가 새로 오는 다른 세대에게 구원의 도(道)를 전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저들이 전하는 `공의' 란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는 자신의 종을 보호하시고 악인들에게서 건지신 의로운 행위를 의미한다(B- riggs).
⭕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 `이를 행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킨다. 즉, 이 구절은 최종적으로 본시를 마무리 짓는 구절로서 고난당하는 다윗을 구원하신 개인적 사건 뿐만 아니라 모든 족속과 나라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전역사(全役事)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Briggs).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역사는 본시에서 예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의 전 역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23:1]
주제1: [영혼의 목자되신 여호와]
주제2: [선한 목자]
⭕ 여호와 - 다윗은 이 하나님의 이름을 본시의 첫머리에 둠으로써 여호와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호와'는 본시의 대주제이기 때문에 앞에 두어졌을 것이다(Craigie, Kidner).
⭕ 나의 목자시니 -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한 표현은 다윗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이미 야곱에 의해 사용되었으며(창 48:15), 근동 지방의 이방 종교에서도 사용되었다(Craigie). 또한 성전 예배에서도 이 비유가 여호와께 적용되었다(80:1).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 유목 사회였던 팔레스틴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이를 다윗은 자신의 시에서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목자의 비유가 나타내는 주요 의미는 인도와 자비로운 돌보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적 속성을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 동안에 구체적으로 잘보여 주셨다. 또한 다윗은 `나의'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한편, `목자'라는 비유는 `바위'나 `방패'와 같이 비인격적인 것도 아니며 `왕'이나 `구원자'와 같이 권위적인 비유도 아니며 상호간의 밀접한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비유로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를 밀도있게 묘사하고 있다(Kidner).
⭕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이는 다윗이 여효와를 목자로 삼은 결과이다. 다윗에게 부족함이 없는 까닭은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충분한 것으로 공급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자기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충분한 공급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중에도 잘 나타난 바 있다(신 2:7; 8:9).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급으로 다윗은 환난 중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시23:2]
주제1: [영혼의 목자되신 여호와]
주제2: [선한 목자]
⭕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 여기서 양을 인도하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초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오트'(*)는 `거처'를 의미한다. 따라서 `푸른 초장' 은 단순히 녹지대를 의미한다기보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열을 피하여 쉴 수 있는 그늘진 곳, 즉 휴식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Calvin). 그러나 `푸른'이란 수식어는 `네오트' 가 `초장'을 가리킴을 강력하게 시사해준다. 한편, 초식 둥물인 양떼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푸른 초장은 절대적인 삶의 토대로서 그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 여기서 `쉴 만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누호트'(*)는 세찬 물결과는 대조적인 개념으로 `잔잔한'이란 의미이다(C- raigie, Kraus, Calvin, Delitzsch). 만일 목자가 급류로 인도하였다면 그 양떼들은 물을 마시기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해(害)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으로써 안전히 쉴 수 있게 한다.
성 경: [시23:3]
주제1: [영혼의 목자되신 여호와]
주제2: [선한 목자]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 목자되신 여호와의 인도하에서 다윗의 영혼이 회복된 것이다. 여기서 `소생하다'(*, 슈브)는 `되돌아오게 하다'는 뜻으로 죄악과 곤경으로 헤메이던 영혼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의미이다(Delitzsch, Lange).
⭕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여기서 `의의 길'이란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의미한다기 보다는(Briggs) 평탄의 길, 형통의 길을 뜻한다(Calvin, Raw- linson).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평탄과 형통의 길로 인도하심으로써 목자로서의 자비하신 성품을 보여주신 것이다. 한편, 이 말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란 표현과 함께 언급되고 있으므로 그 인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시23:4]
주제1: [영혼의 목자되신 여호와]
주제2: [선한 목자]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 `사망의 음침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찰마웨트'(*)는 그림자를 뜻하는 `첼'(*)과 죽음을 의미하는 `무트'(*)의 합성어인 것으로 보인다(TWOT). 그리고 여기서 `무트'는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림자'를 수식하는 최상급 형용사로 사용된 것 같다(Thomas). 이렇게 볼 때 이 말은 `매우 짙은 그늘', 또는 `흑암'(thick darkness)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이 말은 광산 통로의 암흑(욥 28:3), 사자(死者)의 거처의 어두움(욥 10:2 1f.; 38:17), 창조 이전의 어두움(암 5:8)등에 적용되었다. 이와같이 이 말은 어두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중 가장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죽음을 상징한다 한편, 이처럼 어두운 골짜기는 산지가 많이 있는 팔레스틴에서는 쉽게 발견된다. 그러한 곳에서 목자없는 양떼들은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며, 기타 여러 가지 죽음의 위험을 당할 수 밖에 없다.
⭕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양떼 곁에는 항상 목자가 있다. 그래서 그 양떼들은 안전하게 골짜기를 지날 수 있다. 지금 어떠한 해롤 당할지도 모르는 환난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으면서도 다윗이 그 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처럼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지팡이' 와 `막대기'는 목자의 장비이자 무기이다. `지팡이'(*, 미쉬에네트)는 양들을 인도하기 위한 장비이며, `막대기'(*, 쉐베트)는 일종의 무기로서(삼하 23:21) 공격해 오는 맹수들을 방어하는 도구이다.
성 경: [시23:5]
주제1: [영혼의 목자되신 여호와]
주제2: [선한 목자]
목자와 양에 대한 묘사에서 주인과 손님에 대한 묘사로 바뀌고 있다. 다윗은 이 부분에서 현재보다 더욱 안전하고 평안하게 될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복된 미래는 여호와깨서 자신의 목자가 되신 결과로서 주어질 것이다. 한편 주인과 손님의 관계는 상호간의 긴밀한 결속과 언약적 관계를 뜻하므로 앞에서 언급된 목자와 양의 관계보다 발전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Craigie).
⭕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 다윗의 주변에는 그의 생명을 노리는 대적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대접을 받아온 것이다. 여기서 `베푸시고'란 미완료 시재로서 과거로 부터 지금 까지의 계속적인 행동을 시사하고 있다(Calvin). 그리고 `상을 베푸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 관계를 견고히 하셨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구약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베풀어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및 언약 관계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출 24:8-12; 고전 11:25).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험난한 세상 중에서도 하나님은 목자와 같이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하심으로 시종 당신의 언약을 이행하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 여기에서 `기름'은 왕이나 선지자 또는 제사장의 위임식에서 붓는 것이 아니라 잔치 때에 주로 사용되었던 향유를 의미한다. 이것은 필수품은 아니었고 귀족들, 특히 왕실에서 주로 사용한 귀중품이었다. 이들 귀족들은잔치에 참여할 때 이 기름을 머리나 수염 등에 발랐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크게 높이시고 부요하게 하신 데 대한 감사의 노래다. 실제로 다윗의 왕실에는 이 값비싼 기롬이 풍부했었다(대상 27:28, Calvin, Lange).
⭕ 내 잔이 넘치나이다. - `잔'은 기업을 비유한 말이다(16:5). 이러한 잔이 단순히 가득찬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윗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가 차지한 왕실의 재산과 사유 재산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기록듸어 있다(대상 27:25-31; 29:2-5). 그러나 그는 이토록 풍성한 기업을 자기의 쾌락을 위해 사용하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전(殿)을 건축하는 데 아낌없이 바쳤다.
성 경: [시23:6]
주제1: [영혼의 목자되신 여호와]
주제2: [선한 목자]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 다윗은 언약을 지키시고 풍성한 기업을 주신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하여 앞으로 그의 남은 삶도 하나님 안에서 복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인자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여호와의 집'은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소를 가리킨다. 하지만 본 구절에는 이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추가로 담겨져 있다. 그 근거로 전치사 `베'(*)를 들 수 있다. 즉, 단순히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것만을 확신했다면 `베'대신에 방향 전치사 `엘'(*,...으로)을 사용했을 것이나 그는 `...안에'라는 의미를 지닌 `베'를 사용한 것이다. 더욱이 이 말은 `영원히' 라는 말과 어울려 다윗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대한 확신을 표현해 주고 있다. 따라서 본구절은 결코 문자 그대로 영원히 성소에만 앉아 있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다윗이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영적 교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다(Lange, Rawlinson).
성 경: [시24:1]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온 세상의 소유자이며 통치자이신 여호와를 노래함으로 본시가 시작되고 있다.
⭕ 땅과 거기 충만한 것 - `거기 충만한 것'이란 땅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물질 세계를 지시하는 말이다(Kraus). 여기에는 무생물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포함될 것이다.
⭕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 - `세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벧'(*)은 생존가능한 땅, 곧 생산력 있는 토지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는 창조시 혼란한 바다에서부터 육지를 분리시킨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창 1:9). 그리고 `그 중에 거하는 자'는 모든 생물체들을 의미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성 경: [시24:2]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여호와께서 - 원문에는 지시 대명사 `후'(*, 그)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강조형이다. 즉, 다른 존재가 아니고 오직 `그'라는 뜻이다(Briggs). 한편, 이 용어 앞에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히브리어 `키'(*)가 자리잡고 있다. 이로써 본절의 내용이 여호와께서 온 우주의 소유권을 가지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Kraus).
⭕ 그 터를 바다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 여기서 `위에'란 결국 `...에서부터'란 의미로서 땅이 바다에서 부터 나와 견고하게 되었던 창조의 사건(창 1:9 f.; 벧후 3:5)을 지시하고 있다(Kidner). 한편, 혹자는 이 구절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Craigie). 즉, `바다'(*, 얌)나 `강'(*, 나하르)은 가나안의 신비 종교에서는 질서를 파괴하는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진술하면서 이 구절이 여호와께서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와 강을 통제하여 그위에 질서있는 아름다은 세계를 창조하셨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비록 이 견해는 본 구절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창조 당시의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윗이 본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예로 선택했을 뿐이기에 그 이상의 의미로 비약시킬 필요가 없다.
성 경: [시24:3]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 하나님의 창조의 사건에 이어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자의 조건이 질문되고 있다. 이 질문이 창조의 사건 뒤에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께서 흑암과 혼돈 중에서 질서있는(아름다운) 세계를 세우셨으므로 그를 모실 수 있는 자들은 자연히 질서있는, 곧 도덕적으로 선한 자들이어야 한다 해석을 제시한다(Craigie). 그러나 본 구절은 단순히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는 사람의 조건에 대한 물음일 뿐이다.
성 경: [시24:4]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손이 깨끗하며 - 혀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손'은 행실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손은 인간의 의지를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민 15:30; 신 30:9, 10). 따라서 본 구절은 행위에 흠이 없는 자에 대한 묘사이다.
⭕ 마음이 청결하며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는 자의 조건은 마음의 청결함이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모든 행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구절과 앞 구절은 영육간에 흠이 없는 자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 마음이 청결한 자의 정신 상태를 분석한 히브리어 `솨웨'(*)는 일차적으로 `공허', `허무'를 뜻하며 이는 물질적 또는 도덕적으로 비실제적이며 무가치한 어떤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말은 종종 우상과 관련된다(렘18:15; 겔 13:7). 마음이 청결한 자는 우상과 같이 도무지 도움이 되지 못하며 무가치한 것들에 그 영혼을 팔지 않는다.
⭕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 행할 의지가 없으면서도 그것을 행할 것처럼 맹세하는 것은 완전한 거짓이며 마음이 청결한 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한편, 본절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는 자의 조건이 네 가지로 제시되었으나 15 편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제시되어 었다.
성 경: [시24:6]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구하는 자로다 - 여기서 `찾고 구한다' 는 동사는 실제로 성소에 올라오는 행위를 의미한다(삼하 21:1; 호 5:15). 이처럼 참이스라엘은 특성상 여호와를 즐겨 찾는다. 이들에게는 진정으로 여호와를 모시고 그에게 경배드릴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 것이다.
성 경: [시24:7]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 여기서 `문들'은 성소의 문들을 가리키며 장차 건설될 성전의 문들을 예시하는 말이기도 하다(Rawlinson). 그리고 본절에서 이 문들은 `영원한' 문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속에서 허락된 것으로 영원히 존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성전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함락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Calvin).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성소의 문들을 향하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레위인들은 소리치고 있다. 이 표현은 성소의 문지기들에게 문을 열라는 의미이다.
⭕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 신정국가 내에서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5:3; 10:16; 29:10; 44:4; 145:1; 149:2; 행 15:18). 그리고 왕의 특징은 영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지상 군주의 제한된 영광과는 달리 온 땅과 하늘의 끝에 까지 미치는 영광이다(사 6:1-3).
성 경: [시24:8]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영광의 왕이 뉘시뇨 - 이는 일부 찬양대의 질문이다. 7절부터 8절까지 계속 `영광의 왕'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여 오직 그분만이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함을 암시한다.
⭕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 본 구절은 일부 찬양대의 질문에 대한 남은 일부 찬양대의 답변이다. 여기서 `강하고 능한'이란 전사(戰士)에게 어울리는 수식어이다. 여호와는 사실상 이스라엘을위해 싸우시는 용사이시다(출15:2, 3; 민 10:35).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운 전쟁에서 많은 숭리를 경험했으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기적적인 승리들을 목격해 왔다(삼하 5:17 -25; 8:1-14).
성 경: [시24:9]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 7절에서 언급된 말이 본절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같은 표현이 반복된 것은 운율상의 기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문지기들이 신속하게 자신들의 할 일을 수행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성 경: [시24:10]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만군의 여호와 - 역시 하나님에 대한 군사적 표현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상 1:11 주석을 참조하라.
⭕ 영광의 왕이시로다 - 이로써 성소의 문들은 열리고 무사히 언약궤가 성소 안에 모셔졌다. 그런데 이와같이 문들이 열리고 언약궤가 모셔지는 이 순간은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을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Rawlinson). 바로 이러한 생각 속에서 본시는 승천절에 많이 애송되었다.
성 경: [시25:1]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 원문에는 `주'와 `여호와'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뎨 이는 강조형이다. 이 구절을 원문에 맞게 해석하면 `나의 영혼이 여호와 당신만을 우러러 보나이다'라는 뜻이다(Briggs). 즉, 다윗은 지금까지 실제로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 우상이나 인간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바라보았다는 말이다(Perowne).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온전한 인내와 간절한 소망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이러한 그의 순전한 믿음을 본시의 모두(冒頭)에 밝힘으로써 그의 기도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Craigie).
성 경: [시25:2]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 이 부끄러움은 원수들에게 굴복 당함으로 인하여 받을 수치를 가리킨다. 다윗은 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여호와를 의지했으며 또한 지금 확신 가운데서 구원을 간구하고 있다.
성 경: [시25:3]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본절은 기도에서 확신으로 넘어오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다윗은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심에 있어서의 불변하신 속성을 발견한 것이다.
⭕ 주를 바라는 자는...수치를 당하리이다 - `주를 바라는 자'는 원문상으로 `주를 바라는 모든 자'이다. 이에 따라 본절은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함께 곤궁에 처한 공동체를 위한 기도라고 혹자는 주장한다(Rawlinson, Briggs). 그러나 이는 분명히 보편적인 진리를 개인에게 적용시킨 예라고 보아야 한다(Lange, Craigie). 왜냐하면 전체적인 관점에서 본시는 개인적인 기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와'(*)는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는 자, 끈기있게 소망 중에 바라며 참는 자를 의미한다(TWOT). 이러한 기다림의 사람은 언약이 성취되는 날을 맞이하게 되며(37:9; 사 49:23), 기쁨으로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사 2 5:9).
⭕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 `속이는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가드'(*)는 `배반자' 또는 `범죄자'를 의미하는 말로서 `불신앙의 사람', `반역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자는 앞 구절에서 언급된 `주를 바라는 자'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인물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무고히 속이는 자'는 다윗 개인을 괴롭히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거역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은 의인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기를 바라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침묵만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의 근거이기 때문이다(Craigie).
성 경: [시25:5]
주제1: [영광의 왕께 대한 찬양]
주제2: [만유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 이는 마음의 청결과 행위의 순결함으로 인해 받는 복을 말한다. 이 복은 여호와의 보호 안에서 번성하는 복이다. 이에대한 모범적인 실례로서 우리는 오벧에돔의 집에 임한 여호와의 복을 들 수 있을 것이다(삼하 6:11; 대상 2 6:4, 5).
⭕ 구원의 하나님께 의(義)를 얻으리니 - 여기서 말하는 `의'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Craigie).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칭의'를 뜻하는 것이다(Rawlinson, Briggs).
성 경: [시25:6]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어떠한 행위나 공로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께 인정 받을 행위보다는 인정받지 못할 죄악을 더 많이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지라도 한 가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이었다. 여기서 `인자하심'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며 이는 언약적인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이 말이 `영원'이라는 말과 함께 언급되었으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신 언약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다윗은 그에게 임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신 언약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Craigie).
성 경: [시25:7]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내 소시(小時)의 죄와 허물 - 여기서 `내 소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우라이'(*)는 어린 소년 시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청년 시절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유년 또는 소년 시절의 죄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청년 시절의 죄를 의미한다(Craigie).
⭕ 기억지 마시고...기억하시되 - 여기서 사용된 두 동사는 다윗의 이중적인 기도를 보여 준다. 즉, 소극적으로 자신의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실 것을 간구하였으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언약적 사랑)으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적극적인 기도를 위해서 소극적인 기도는 필수적이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것을 회개하지 않는 한 적극적인 기도는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은 먼저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호소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 간구'라는 올바른 기도의 순서를 엿볼 수 있다(Calvin).
성 경: [시25:8]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1-7절에서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던 다윗은 본절에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보다 철저한 신뢰를 보여 주고 있으며 아울러 찬송의 성격을 가미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와 같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에 다윗 자신의 죄악성이 보여지고 있다.
⭕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 여호와의 `선하심'(*, 토브)은 그 안에 악한 것이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구체적으로 범죄한 자기 백성들에게까지라도 좋은 것만을 공급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강조한다. 또한 여호와의 `정직하심'(*, 야쇠르)은 바른 성품, 곧 굽지 않은 공의로운 성품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거짓을 물리치시는 그의 말씀 가운데 잘 나타난다.
⭕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 하나님의 두 성품, 곧 선하심과 정직하심은 죄인을 교훈하시는 데 완전한 조건이 된다. 만일 이 두 성품 중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죄인들은 하나님의 올바른 인도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정직하시기만 하고 선하시지 못하다면 오직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택을 입을 것이며 반대로 하나님이 정직하지(공의롭지) 못하시다면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할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신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다윗의 원수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 바 있기(7절)때문이다. 물론 다윗이나 그의 원수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지만 반면, 그의 원수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교만한 죄인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을 입을 수 있는 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겸소한 죄인이지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하여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죄인이 아니다(Craigie).
성 경: [시25:9]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 여기서 `온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윔'(*)은 `가난한 자', `곤란 당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나, 7절과 연결시켜 볼 때 여기서는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겸손한 자'를 의미한다(Calvin, Rawlinson).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0:12-18 강해 `가난한 자'를 참조하라. 한편,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다스리다'는 의미의 동사 `솨파트'(*)의 파생어로, 이는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의 권위', `하나님의 섭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Calvin, TWOT).
⭕ 그 도를 가르치시로다 - `가르치시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드'(*)는 단순히 교육한다는 의미 외에도 강하게 훈련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TWOT,삿 3 :2; 대상 5:18; 아 3:8; 호 10:11)
성 경: [시25:10]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여호와의 모든 길 - 이는 여호와께서 가시는 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이다(4절). 따라서 이 길은 8 절의 `선하시고 정직하신 도'를 의미한다.
⭕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 본 구절은 언약의 성격을 보여 준다. 모든 언약은 그 언약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그 언약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인간 사이에 체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순종이 없는 한 하나님의 언약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에게 복이 되지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순종할 때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유효하며 그 결과 인간에게 미치는 복은 인자와 진리이다. 여기서 `인자'(*,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말하며, `진리'(*, 에메트)는 한번 약속한 바를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 또는 확실성(certain - ty)을 의미한다(Delitzsch)
성 경: [시25:11]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 다시금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또 다시 회개하게 된 동기는 10절에 기록되어 있다. 즉,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언약의 원리를 기억했을 때 그는 지난날의 중대한 죄악을 회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Craigie). 10 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언약의 복은 순종하는 자에게 임한다. 그러나 그는 순종 대신 죄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지금 큰 곤경에 처해있다. 따라서 그는 이 죄악을 미워하며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죄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온'(*)은 구체적으로 우상 숭배, 간음등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포괄적인 의미로 마음과 행동의 모든 죄를 의미하는 듯하다(Delitzsch).
⭕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 `주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어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주의 자비하신 성품을 인하여 사하소서'란 의미로서 7절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성 경: [시25:12]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 이 질문은 24:3의 `여호와의 산에 오롤 자...누군고'라는 질문과 유사하다. 그러나 24:3의 질문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의 조건에 대한 것인 반면, 본 구절은 지혜있는 삶, 곧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세상의 모든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지혜의 근원인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잠 1:7). 그러나 이 지혜의 근원을 소유한 자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다윗은 이 지혜의 근원을 소유할 수 있는 자,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라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묻고 있는 듯하다(Calvin).
⭕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 여호와를 경의하는 자는 지혜의 영에 의해 감동을 받아 선하고 복된 길을 택하게 된다(Craigie).
성 경: [시25:13]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 `평안히'는 히브리어로 `베토브'(*)인데 이는 `좋은 것 가운뎨', `선한 것 중에'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거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린'(*)은 `숙박하다', `밤을 지내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저희 영혼은 선한 것 중에 밤을 지내며'가 되는데 이는 영적인 행복을 시사하는 말이다(Rawkubsibm, Dekutzscg).
⭕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 앞 구절이 내적인 복을 의지한다면 이 구절은 외적인 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구절은 `약속의 땅'에서 그 자손들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Briggs, Craigie, Delitzsch). 한편, 신약 성경에서 약속의 땅은 영적으로, 즉 하나님 나라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5:5; 계 5:10).
성 경: [시25:14]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여호와의 친밀함 - 여기서 `친밀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는 본래 `비밀 회담'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비밀도 없이 그의 뜻을 보이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Briggs, Craigie, Delitzsch). 따라서 이 말은 `비밀스런 교제 ', `밀접한 관계'를 뜻한다.
⭕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 `보이시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 곧 체험적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비밀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체험하고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Delitzsch).
성 경: [시25:15]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지금까지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의 원리를 충분히 증거했기 때문에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仰望)함은 - 다윗의 눈이 여호와께 고정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다윗의 끈기있는 기도와 그의 인내하는 믿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포수의 그물에 걸린 새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이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10:9)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할 때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성 경: [시25:16]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 이 표현은 죄로 인한 다윗과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에 대한 것이다. 죄로 고민하는 자는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을 그러한 처지에서 구할 수 없음을 알기에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낀다.
⭕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그가 세상에서 위로받지 못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멀리하신 결과이며 이는 다윗의 죄악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이로써 그는 세상에서 당하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종결짓고자 하는 것이다.
성 경: [시25:17]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 `근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르'(*)는 본래 좁은 곳, 협곡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그 마음에 여유가 없는 상태. 곧 고통의 상태를 뜻한다. 이와 같은 고통의 상태는 다윗의 죄악, 또는 원수들의 핍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성 경: [시25:18]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나의 곤고(困苦)와 환난을 보시고 - 여기서 `곤고'는 죄의 결과로 다윗에게 임한 마음의 고통을 의미하며, `환난'은 2절에 언급된 원수들에 의한 고퉁을 의미할 것이다. 이로 보아 다윗이 죄의 결과 안팎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 그의 곤고와 환난은 그의 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므로 다윗은 무엇보다도 본시에서 자신의 죄를 반복적으로 회개하고 있다.
성 경: [시25:19]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 여기에는 원수들의 숫자와 그들의 잔인성이 강조되어 있다. 다윗이 이처럼 많은 원수에계 잔인할 정도로 핍박당하는 현실을 호소한 것은 억압 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기 위함이었다(Calvin). 따라서 본구절에는 끌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윗의 애절한 신뢰가 잘 반영되어 있다. 한편, `심히 미워함이니이다'는 문자적으로 `맹렬한 미움으로 미워하다'이다. 이는 다윗을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분(憤)이 풀리지 않는 원수들의 무서운 증오심을 나타낸 것이다.
성 경: [시25:20]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내가 주께 피하오니 - 이 표현은 15절의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이란 표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돈독한 신앙을 보여 준다.
⭕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 이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25:21]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내가 주를 바라오니 - `바라오니'는 3절의 `바라는 자'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 이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20절에 이어 여기서도 다윗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 여기서 `성실'과 `정직'은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使者)와 같이 의인화 되어 있다. 이 `성실' 과 `정직'은 과연 누구의 성품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주장하고(Dahood), 혹자는 다윗의 성품이라고 주장한다(Craigie, Calivn, Delitzsch). 전자(前者)의 주장에 따르면, 이 성품들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도우시는 근거로서 이는 도저히 다윗의 성품이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시에서 이미 다윗은 성실과 정직과는 거리가 먼 죄인으로 언급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성실과 정직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솔로몬에게 증거하신 바이다(왕상 9:4). 물론 이러한 다윗의 성품들은 하나님의 경우와 같이 완전히 무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려는 다윗의 결의, 또는 범죄하였을지라도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는 그의 결심을 의미하는 것이다(4, 8, 11절).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본 구절에서 다윗의 기도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자만에 근거해 있지 않고 반대로 회개와 경배로 하나님을 향하는 그의 믿음에 근거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Craigie).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25:22]
주제1: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한 탄원]
주제2: [여호와를 앙망함]
⭕ 하나님이여...구속하소서 - 본절은 본시의 특징인 알파벳의 배열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본시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은 개인적인 탄식과 간구를 골조로 하는 본시의 특성과 거리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본절을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 국가적 재난을 당하던 시기인 바벨론 포로 시기에 개인적 탄식시인 본시를 국가적 탄식시로 사용하기 위해 본절을 맨 뒤에 후기(後記)한 것이다(Cr- aigie, Briggs). (2) 자신을 위해 간구했던 다윗이 마지막으로 국가 전체의 위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간구한 것이다(Calvin, Rawlinson, Delitzsch). 이러한 추측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본절에 적합한 해석인지 확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3:8에서도 이와 흡사한 형식이 사용되었으나 다윗의 저작임을 부인할 수 없었듯이, 본구절 역시 다윗이 자기 백성에 대한 관심을 마지막에 언급한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시26:1]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 여기서 `완전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탐'(*)은 여호와의 언약의 말씀에 따라 사는 의인의 순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18: 23). 그렇다고 이 말이 물론 하나님 앞에서 완전 무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만 일반적인 기준에서 윤리적으로 악한 일을 행하는 그의 원수들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보다 완전한 그의 상태를 의미한다. 다윗이 여기서 이처럼 자신의 완전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 당하고 있는 부당함을 하나님께 강하게 호소하기 위함이다. 한편, 본시에서 다윗은 자신의 완전함을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고 있다(11절). 이로써 우리는 그가 교만한 마음으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awlinson).
⭕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 개역 성경에는 `요동치 아니함'이 앞에 기록되어 있지만 맛소라 본문(MT)에서는 `의지하였사오니' 란 동사 뒤에 언급되었다. 이는 다윗이 여호와를 의지한 결과로 요동치않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TWOT).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 구절은 여호와를 의지해온 결과로 다윗의 삶이 윤리.도덕적으로 요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요동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아드'(*)는 본래 `실족하다' , `떨다'는 뜻이며 이 문맥에서는 부정사 `로'(*, 아니)와 함께 사용되어 `범죄하지 않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7:31). 그리고 `의지하였사오니'란 동사가 완료형의 의미로 사용되어 `요동치 아니하고' 란 동사보다 선행(先行)된 사건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본 구절을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범죄치 아니하였사오니'란 의미로 해석된다.
⭕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다윗이 여호와의 공의의 판단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7:8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26:2]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단련하소서 - 여기에 언급된 히브브리어 세 동사, `바한'(*,살피시고), `나사'(*, 시험하사), `차라프'(*,단련하소서)를 구분하자면, `나사'는 `사람이나 물건의 질을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차라프'는 불로써 귀금속올 녹여 찌꺼기를 분리해 낸다는 의미이며(66:10), `바한'은 본성을 알기 위해 시험한다는 의미이다(11:5; 17:3). 이중 `차라프'가 분석적인 의미로서는 가장 강한 의미를 가지지만, 이 세 단어 모두 단지 겉만을 시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히 분석하고 분해하여 그 속의 본질을 알아낸다고 하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다윗이 자신의 `완전함'이 정말로 그러한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시험해 보시도록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공로를 드러낸 것은 아니며 그를 모함한 원수들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완전한 자신의 상태를 호소한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자발적으로' 그의 완전함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사악한 원수들로부터 누명을 받고 있는데 대한 대응으로 이와같이 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Calvin).
성 경: [시26:3]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여기서 다윗은 그의 완전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 `주의 인자하심'(*, 헤세드)이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뜻한다. 그는 삶 가운데서 항상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하며 간직하여 온 것이다(Rawlinson). 따라서 다윗의 `완전함'은 철저히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 `진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되는 단어이다(119:142, 151; 단 10:21). 다윗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그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온 것이다(Delitzsch).
성 경: [시26:4]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다윗의 완전함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그의 신앙적 처세에서도 엿볼 수 있다.
⭕ 허망(虛妄)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 본 구절은 1:1을 기억나게 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허망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웨'(*)는 `공허' , `허무'를 뜻하는 용어로서, `허망한 사람' 이란 그 마음과 행위가 가치없는 자를 의미한다.이러한 자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며 사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Del itzsch).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4:4 주석을 참조하라. 다윗은 비록 그에게 해(害)가 돌아온다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 입각하여 이러한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 `간사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알라밈'(*)은 `숨겨지다'는 의미의 동사 `알람'(*) 에서 파생된 명사로 진리의 탈을 쓴 위선자를 의미한다(TWOT, Delitzsch). 이들은 거짓과 허위를 일삼는다(12:2). 그러나 다윗은 저들의 위선을 따르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행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는 완료 시제(`앉지 아니하였사오니')와 미완료 시제(`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가 함께 사용되었다. 이러한 시제의 변화는 다윗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시간 중에 그의 완전함을 지켰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Kraus).
성 경: [시26:5]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 예배를 위한 `회중'(12절)과 대조적이다. 악인들은 모여서 죄악을 도모하므로 다윗이 이 `집회' 를 미워한다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여호와께 예배 드리고자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을 그가 간절히 사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 4절에서와 같이 완료시제와 미완료시제가 함께 어울려 있다. `악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솨'(*)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종류의 악인들을 다 포함하는 말인 듯하다(Rawlinson). 이에 대해서는 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26:6]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 `손을 씻고'라는 말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행하는 결례(缺禮)를 의미한다(출 40:31; 신 21:6, 7). 그런데 이 구절에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다만 형식적으로만 이 결례를 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무죄하므로'란 말이 바로 이와 같은 의미를 더욱 강조해 주고있다. 즉, 다윗은 위선자들처럼 형식적으로만 결례를 행하지 않았으며 정결한 삶을 유지하면서('무죄하므로')행하였다(Calvin).
⭕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 이 표현은 의미상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단 주위에서 여러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듯하다(Briggs, Calvin).
성 경: [시26:7]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 `감사의 소리'란 감사의 찬송을 뜻한다. 그는 성진 예배를 그저 형식적으로 드리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함께 드린 것이다(Calv- in).
⭕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기적들, 특히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 위대한 일들을 선포한다는 내용이다. 찬송시의 경우 대부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들을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다윗도 그러한 시의 형식을 빌어하나님의 기적들을 선포하고자 했을 것이다.
성 경: [시26:8]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 본 구절은 성전에 대한 다윗의 남다른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집' 과 `거하는 곳' 은 평행 대구를 이루며, 서로 같은 의미로 성전을 가리킨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며 그의 영광이 거하기 때문에 그는 성진을 사랑하였다. 즉,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이 보이는 성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결례를 행하고, 감사의 찬송을 드리고, 주의 기사(奇士)를 선포하는 등 성전 안에서의 그의 모든 행위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 경: [시26:9]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 위에서 다윗은 자신의 완전함을 주장하였다. 즉, 지금까지 그는 신앙적으로 완전한 길, 곧 악인들이나 위선자들의 형식적인 종교적 행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만일 그가 악인들과 함께 형벌에 처해진다면 이는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에 입각해 그는 매우 담대히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거둔다'(*, 아사프)는 말은 형벌하기 위해 추수한다는 뜻을 가진다(욥 5:5; 사 16:9; 렘 5:17; 51:33; 호 6:11; 욥 3:13).
성 경: [시26:10]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 여기서 다윗은 악인의 특성을 거론하며 하나님께 그들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악특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짐마'(*)는 `악한 계획' 또는 `책략'을 의미하는 말이다. 인간은 이것으로 바벨탑을 세우려 하였고(창1 1:6), 거짓 증인은 이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며(신 19:19), 사악한 자는 이것으로 의인을 해하려 한다(31:13; 37:12). 실제로 계획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는 것이나 다윗이 고발하는 죄인들은 그 계획을 수행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묘사했을 것이다(Calvin).
⭕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 저들은 탐욕으로 인해 악한 자를 풀어주고 의로운 자를 정죄한다(15:5; 사 1:23; 렘 22:17; 겔 22:12; 미 3:11, Rawlinson). 다윗은 이러한 자들과 같은 운명에 처해지는 것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시26:12]
주제1: [무죄한 자의 탄식과 기도]
주제2: [경건한 자의 탄원]
⭕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 이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다윗의 확신을 가리킨다 여기서 `평한한 데 섰다'는 말은 `넘어지다' , `그물에 걸리다', `미끄러지다'는 말과 대조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말미암아 안전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31: 8; 40:2; 56:13; 66:9; 121:3).
⭕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 혹자는 `회중'을 찬양대라고 보았으나(Briggs), 이는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을 의미하는 말이다(Kraus, Calvin, Rawlins on). 또한 `송축하리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크'(*)는 단지 `감사하다'는 의미(Briggs)가 아니라 `..에게 선포하다', `알게하다'는 뜻으로(Kraus,Calvin)예배하기 위해 모인 회중들에게 여호와의 기이한 일을 알게 하고 그의 위대하심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윗은 이와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을 그의 사명으로 이해하였다(22:22,25; 27:6; 35:18; 40:9,10).
성 경: [시27:1]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1-3절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강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확신이 너무도 강하여 어떠한 두려움도 그를 짓누를 수 없을 정도다.
⭕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 다윗은 여호와를 빛에다 비유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삼하 22:29에서는 하나님이 `흑암을 밝혀주는 등불'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흑암이 대적들의 위협과 그로 인한 수치를 상징한다면 `빛'(등블)은 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한다(Craigie).
⭕ 나의 구원이시니 - `빛'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구원'은 구체적으로 대적들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 다윗은 이 질문으로써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수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를 위협하던 대적들의 힘이 약하여서 그가 이러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대적들의 수는 많고 그 힘은 매우 강하였다(3절).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안에서 이러한 확신을 소유할 수 있었다.
⭕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 여기서 `능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오즈'(*)는 `피난하다'는 의미의 동사 `우즈'(*)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일반적으로 `안전한 장소', `피난처'를 의미한다(18:2; 28:8; 31:21). 그런데 `마오즈'의 어근을 `아자즈'(*, 강하다)로 볼 때 `마오즈'는 개역 성경이나 대부분의 영역 성경처럼 `힘'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즈'가 본서에서 `피난처' 또는 `거처'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으므로 본 구절에서도 `피난처'의 의미가 더 적합하다. 따라서 본 구절은 `내 생명의 피난처이시니'라고 번역되는 편이 좋다. 이와같이 다윗은 여호와를 자신의 생명의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강한 대적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37:39; 느 8:10; 렘 16:19; 나 1:7).
성 경: [시27:2]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2, 3절은 다윗의 원수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에 기록된 동사의 시제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2절은 과거의 승리를, 3절은 미래의 승리를 기룩한 것으로 볼수 있다(Cr aigie). 그리고 과거의 승리는 다윗에게 있어서 확신의 뚜렷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 `내 살을 먹으려고'라는 구절은 다윗이 그의 원수를 사나운 맹수에다 비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7:2; 17:12; 욥 19:22). 즉, 원수들은 사나운 맹수와 같이 그를 삼켜 버리려고 했었다는 것이다(B riggs, Kraus). 이와 달리 혹자는 이 표현을 원수의 `비방하는 말'에 대한 비유라고 해석했으나(Craigie) 지금까지 진술 내용이 생명과 관련된 것이므로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왔다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라브'(*)는 `접근근하다'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전투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으며 아마도 원수들이 다윗을 포위했거나 그를 잡을수 있는 위치에까지 접근했다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Calvin , Briggs). 한편,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라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저들이 패배했거나 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Briggs). 이처럼 원수들은 다윗을 죽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였고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시27:3]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 `군대' 나 `진칠지라도'와 같은 단어에서 우리는 다윗을 위협하는 원수들의 많은 수와 그 세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과거의 놀라운 체험에 근거해 앞으로 벌어질 어떠한 원수들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성 경: [시27:4]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 원문에는 `한가지 일'(*, 아하트)이 맨 앞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본 구절에서 `한가지 일'이란 단어가 강조되어 있음을 뜻한다(Briggs, Rawlinson). 그리고 `청하였던'이란 말은 완료 시제로서 다윗이 이 `한 가지 일'을 과거로부터 계속해서 요구하여 왔음을 의미한다.
⭕ 곧 그것을 구하리니 - 여기서 `구하리니'는 `청하였던'의 완료 시제와는 달리 미완료 시제이나, 따라서 이 두 단어를 연결시켜 해석하면, 다윗은 `한 가지 일'을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구하여 왔으며 아울러 앞으로도 이를 계속해서 구할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Delitzsch, Rawlinson).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끈질긴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Calvin).
⭕ 내 성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 이는 다윗이 끈기있게 소원한 한 가지 일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 `생전에'란 `평생 동안에'를 의미한다. 그는 앞으로 생존할 모든 날 동안에 여호와의 집, 곧 성소에 거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이는 물론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성소에 상주(常住)할 것을 소원 했다는 것은 아니며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겠다는 소원을 의미한다(Delitzsch, Lange, Calvin). 한편, 성소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에서 현재 성소에 돌아올수 없는 그의 어려운 처지를 엿볼 수 있다.
⭕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암'(*)은 `선함', `매력', `아름다운 점', `사랑스러움'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 이 단어를 조금씩 달리 주석한다. (1) 혹자는 이를 영안으로 바라 본 하나님의 `계시'에다 적용했으며(Delitzsch), (2) 또 어떤 학자는 공예배시 경건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다 적용했으며(Briggs, Rawlinson)),(3) 다른 사람은 전쟁을 숭리로 이끌도록 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시로 보았다(Craigie). 여기에서 (3)의 견해는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윗의 앙망함은 평생 동안 지속되는것으로 전쟁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본 구절이 성전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아름다움'은 `계시'의 의미보다 성전 예배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는 (2)의 견해가 가장 적절하다.
⭕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 여기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르'(*)는 본래 `조사하다'(investigate), `숙고하다'는 뜻으로 `여호와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열망은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충족될 수 있다.
성 경: [시27:5]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 원문 서두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가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본절은 다윗이 한 가지 일(4절)을 청하였던 그 실제적인 이유롤 보여준다. 본구절은 물론 문자 그대로 환난 때에 다윗이 성소에 숨으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반면 이는 환난 날에 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이다(Rawlinson, Calvin). 즉, 여기서 `초막', `장막'이라는 말은 다윗과 함께하시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 여기서 `초막'(草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코'(*)는 `덮다'는 의미의 동사 `사카크'(*)에서 파생한 명사형으로 이스라엘이 광야 시절에 나뭇가지로 엮어 지은 집을 말한다(레 23:42). 이는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Lange).
⭕ 바위 위에 높이 두시 리로다 - `바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는 `거대한 산'을 의미하는 말이며 이는 여호와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18:2 주석을 참조 하라. 이 바위는 사막의 모래밭과 같이 변형되지 않으며 어떠한 환난의 폭풍우가 몰아쳐도 언제든지 견고하다. 이는 곧 하나님의 불변성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윗은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 안에서 안전히 거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시27:6]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 승리의 영광에 대한 시적 표현이다.
⭕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 `즐거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루아'(*)는 축제시에 부는 `나팔 소리'를 의미하는 단어로서(TWOT) 여기서는 축제의 기쁨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Kraus). 따라서 `즐거운 제사' 란 축제의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로서 `감사의 제사'(107:22)보다 더 강한 의미를 지닌다(Delitzsch).
⭕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여기서 다윗은 대적에 대한 승리로 인한 축제의 기쁨을 노래와 찬송으로 나타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찬송 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마르'(*)는 `악기를 연주하다'는 의미도 가진다(TWOT). 이로 보아 다윗은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 경: [시27:7]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본절은 다윗의 확신이 탄식으로 바뀌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적의 위험이 크게 증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12절). 하지만 이러한 탄식 가운데서도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수하고 있다(13,14절)
⭕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 이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를 보여준다(Calvin)
성 경: [시27:8]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내 얼굴을 찾으라 - 이는 `나에게 호소하라' , `나를 신뢰하라', 또는 `나를 가까이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시적(詩的)표현이다. 아마도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신 4:29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는 말씀에서 찾았을 것이다(Rawlinson). 그리고 이 명령에 힘입어 다윗은 전심으로 간구하고자 했을 것이다.
⭕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 환난날에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언약)을 따르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순종의 관점에서 다윗은 전심으로 기도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고 있다(Delitzsch).
성 경: [시27:9]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 주의 얼굴을 숨긴다는 표현은 기도를 거절하신다는 것, 또는 진노하신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Kraus). 여호와는 다윗이 신뢰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때문에 만일 여호와께서 거절하신다면 다윗은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
⭕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 이 구절은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여호와는 과거에도 다윗이 의지했던 유일한 대상이시요, 현재에도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둘째, 여호와는 과거에 다윗을 구원하여 주셨다. 그리고 여호와는 불변하시는 분이시므로 과거의 구원의 하나님은 현재에도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성 경: [시27:10]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 이는 문자 그대로 부모를 떠나 살았던 다윗의 개인적인 역사와 관계되는 구절은 아니다. 다윗은 여기서 다만 여호와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에 비교하여 그 탁월함을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즉,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Calvin, Lange).
성 경: [시27:11]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 다윗은 지금 위기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자애로운 목자와 같이 자신을 언도해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여호와의 인도를 받고자 간구하였던 것이다(Delitzsch). 한편, 본 구절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본절 전체에서 `길' 이란 표현이 반복되었으며 다음 구절의 동사가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 여기서 `평탄한 길'이란 꼬불꼬불하거나 울퉁불퉁하지 아니한 `곧은 길'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원수들이 숨어 기다리는 꼴짜기와 반대 개념으로 원수에 대한 염려없이 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지금 원수들이 노리고 있는 험한 길에서 벗어나 어떠한 위협도 도사리고 있지 아니한 평탄한 길로 나아가기를 소원하고 있다(Rawlinson).
성 경: [시27:12]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내 생명을 내 대적(對敵)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영혼'을 의미하는 단어이나 `욕구',`갈망'을 의미하기도 한다(TWOT).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대적의 욕구는 이어지는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 - 여기서 `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마스'(*)는 `폭력', `부당행위'를 의미하며 `극도의 미움'(25:19)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악을 토하는 자'란 `잔인한 말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 또는 `극도의 증오심으로 저주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위중자와 악을 토하는 자'를 압살롬의 일당들이 다윗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거짓 증거하는 사건(삼하15:3)에다 적용시켰다(Rawlinson).
성 경: [시27:13]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내가 산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 이는 지금까지 다윗이 숱한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 받아 현재 지상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이러한 다윗의 강조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환난의 때인 지금 되새기기 위함이다.
⭕ 여호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 이 문장은 귀결문이 생략된 일종의 감탄문 형태의 문장이다. 이를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이다. 따라서 이 문장에는 `내가 멸망하였을 뻔했도다'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Calvin, Rawlinso n). 그런데 다윗은 지금 생존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현재 환난의 때에 또다시 여호와를 굳게 의지함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 경: [시27:14]
주제1: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의 확신]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의 확신]
⭕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바랄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와'(*)는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다', 또는 `소망중에 기기다리'는 뜻이다. 이에 대해 25:3 주석을 참조하라. 혹자는 이 구절을 타인에 대한 다윗의 권고라고 주장하나(Calvin) 오히려 이는 약해진 자아에 대해 낙망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다윗 스스로의 말이다(Rawlinson).
⭕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강하고'는 원문상 명령형이며 `담대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아메츠'(*)는 히필형 단수 3인칭 동사이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강하라,(그리하면) 그가 너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리라'가 된다(Calvin , Rawlinson). 그렇다면 이 구절은 자신이 강해지려고 힘쓰기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대로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이와같이 강해진 마음으로 끝까지 여효와를 바라볼 것을 스스로 권면하고 있다.
성 경: [시28:1]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 이는 27:7과 같은 표현으로서 기도의 간절성을 보여 준다.
⭕ 나의 반석이여 - 여기서 `반석'은 여호와의 불변성과 힘, 그리고 안전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본래 시내산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후에 하나님 언약의 영원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8:2; 27:5주석을 참조하라.
⭕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 다윗은 상당 기간 기도하였지만 이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웅답을 재촉하고 있다(Craigie).
⭕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기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 여기서 `무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르'(*)는 `수렁', `구덩이'를 의미하며, `쉐올'(*)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쉐올'은 죽음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구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죽게 되지 않기를 기도한 내용이다(Kraus, Del itzsch). 그리고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종교적 황동을 행하지 못하고 완전한 무의식 상태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간 자는 절망 중에 있게 되는 것이다(Cra igie).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절망에 들어가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이다(삼하12 :15-25 강해, `구약의 사후개념-음부(陰部)' 참조).
성 경: [시28:2]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 이 표현은 다윗이 피난처에서 예루살렘 성소를 사모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 나의 손을 들고 - 이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하는 습관이다(출 17:11). 여기서 기도시에 손을 드는 행위는 마음을 드는 것을 상징하며(애 3:41),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비는 의미를 지닌다.
성 경: [시28:3]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 여기서 `끌지 마옵소서'란 멸망시키기 위해 끌고 가지 말아 달라는 애원이다(Calvin, Lange). 이러한 그의 애원 가운데는 자신의 무죄함에 대한 변론이 내포되어 있다. 즉, 지금까지 그는 악인이나 행악자들 같이 범죄하며 살아오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저들 악인들에게 형벌하시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을 멸망으로 끌고 가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애원한 것이다(26:9-11).
⭕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 이는 악인들의 위선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선은 다윗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실과 정직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25:21; 왕상 9:4). 따라서 그는 결단코 악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해질 수 없었다.
성 경: [시28:4]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말이다. 공의는 시편 전채의 한 주제이자(1:6)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이며, 사람이 구체적으로 행한 대로 거두게 하는 원리이다. 또한 외견상 이 구절은 악인에 대한 다윗의 저주로 오해받기 쉬우나 실상은 악인들의 오랜 휑포로 인해 무너진 도덕 질서와 체계에 대한 울분이자 의로운 분노였다(Calvin).
성 경: [시28:5]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 여기서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의 의미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D elitzsch). 이는 악인들이 다윗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금 그를 핍박하고 있다는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2) 혹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Craigie). 이같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영원 불변하며 반드시 성취되고야 마는 속성을 지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주목하지 못한 저들이 언약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는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3) 어떤 학자는 인간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사, 또는 공의로운 섭리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awlinson, Lange, Calvin).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역사속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사역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악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였다. 3, 4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요청하고 있기에 (3)의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여기서 `손으로 지으신 것'이란 4절의 `저희 손의 지은 대로'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악인들의 악한 행위와는 반대되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Craigie). 또한 `생각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빈'(*)은 `이해하다', `분별하다'는 의미의 동사이다(73:17; 잠 29:7). 따라서 본구절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대해 전허 관심도 없으며 또한 그 일을 분별할 수 없는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 이는 악인들의 멸망을 확신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있는 한, 저들의 멸망은 불을 보는 듯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 구절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선지자들의 무서운 경고를 기억나게 해준다(사 5:12-15; 렘 45:4, 5).
성 경: [시28:6]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본절에서부터 본시의 분위기는 탄원에서 감사와 찬양과 기도로 바뀌고 있다.
⭕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 본 구절은 탄원하던 다윗이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하게 돤 주된 이유를 나타낸다. 이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응답을 받았음(Ewald)을 의미하지 않고 다만 기도 중에 그 실제적인 응답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표현이다(Hupfeld, Calvin). 다윗은 성소를 향해 부르짖던 중(2절)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성 경: [시28:7]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 `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즈'(*)는 군대 또는 용사들의 군사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자기 백성들을 원수에게서 건지실 때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61:3; 출15:13). 한편, `방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겐'(*)으로 `조그마한 원형의 방패'를 의미한다(18:2 주석 참조).
⭕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이미 받은 것처럼 고백하고 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된 것이다(Rawlinson). 이러한 기도가 바로 믿음의 기도이다.
⭕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 다윗은 아직 실제로 나타나지 아니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하고자 한다. 이러한 다윗의 태도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Rawlinson).
성 경: [시28:8]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분명히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다윗의 군사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alvin) 즉, 다윗의 승리는 곧 그의 군사들의 승리로 말미암았으니 그는 여기서 그의 군사들에게 힘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9절의 `주의 백성'이라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저희'는 `백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본절에서 `저희'와 `기름 부음 받은 자'(왕)가 병행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도 저희가 백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신정(神政) 국가에서 기름 부음 받은 왕은 즉위할 때 백성들과 언약을 맺는데(삼하 5:3),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 왕과 백성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왕의 승리는 백성의 승리가 되고, 왕의 패배는 곧 백성의 패배가 되는 연합 관계에 있게 된다. 이러한 신정국가의 특별한 관계에서 볼 때 다윗 왕의 승리는 개인의 숭리이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승리였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본 구절에서 백성들을 언급하였던 것이다(Rawlinson, Delitzsch, Lange , Briggs, Craigie). 한편, 혹자는 `기름 부음 받은 자'보다 `저희'로 시작된 구절이 먼저 언급된 것은 자기 자신보다 먼저 백성들을 생각하는 다윗의 겸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Delitzsch).
성 경: [시28:9]
주제1: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
주제2: [방패되시는 여호와]
⭕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보다는 백성들을 위해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기원은 그가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福)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음을 잘 보여 준다(Calvin).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위에 앉히신 목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삼하 5:12 주석 참조). 이러한 그가 백성들의 구원과 복을 기원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백성들을 악의 세력에서부터 지키셔서 다윗 왕조가 영원히 지속될 것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산업'이란 표현은 `백성'과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산업'이 `주의 백성' 과 병행 대구를 이루어 의미가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 `목자'에 대해서는 23:1 주석을 참조하라. 다윗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진실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분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참된 왕이신 여호와께서 목자와같이 저들을 인도해 달라고 그는 간구했던 것이다(Calvin). 한편, `드십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는 본래 `들어 올리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목자의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즉, 이는 연약한 자를 들어 품에 안아서 위기에서 구원해 내심을 의미한다(Delitzsch).
성 경: [시29:1]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 `권능 있는 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네엘림'(*)으로 이를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서로 견해가 다르다. (1) 천사들(Delitzsch, Craigie, Kidner, Hengstenberg, Cheyne, Rosenmuller, Anderson). (2) 이방인들(Michaelis, Doderlein, Kay). 이 견해는 `엘림'(*)이 `이방 신'의 의미로 사용된 용례들(95:3; 96:4; 출 15:11; 18:11)에 근거한다. (3) 통치자들(Calvin, 유대 랍비들). 이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 견해들 모두는 성경적인 용례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오묘한 사역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확히 살필 수 있는 존재는 그중에서 천사라고 설명한 델리취(Delitzsch)의 논리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그 어떠한 것이든 본 구절은 평범한 인생들 뿐만 아니라 권세있는 자들까지도 하나님께 경배드려야 한다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시29:2]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을 직역하면, `그의 이름의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라'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보여 주는 계시의 한 방편이며 그의 말씀과 사역 중에 주어졌다. 본절은 바로 그 이름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의미이다(Kidner).
⭕ 거룩한 옷을 입고 - `거룩한 옷'이란 축제 때에 제사장들(또는 악사들)이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 입는 특별한 옷(대하 20:21)을 의미한다(Lange, Delitzsch).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먼저 그 앞에서 거룩해야 한다는 예배의 원리를 강조한 시적(詩的) 표현이다(Craigie).
성 경: [시29:3]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 `여호와의 소리'란 뇌성에 대한 다윗의 독특한 표현이다. 즉, 그는 뇌성 가운데서 하늘의 변화를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권능을 직감하고 이를 `여호와의 소리'로 표현한 깃이다. 일반적으로 뇌성은 하나님의 진노(18:1 3)로 이해되나,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다윗은 이를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의 차원에서 바라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물'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의미한다(Deli- tzsch, Rawlinson).
성 경: [시29:4]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위엄차도다 - 이는 뇌성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묘사한 것으로 뇌성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Rawlinson, Delitzsch).
성 경: [시29:5]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 드디어 뇌성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레바논의 백향목이 꺾여졌다(18:14). `백향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레즈'(*)는 `견고함'이란 의미로 이는 백향목의 특성인 내구성(耐久性)을 암시한다. 이 나무는 대단히 강한 나무로서 해충의 피해를 입지 않으며 아름다운 자태와 함께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나무는 견고성과 향기로 인해 솔로몬의 성전에 사용되었다. 이 나무의 주산지는 팔레스틴 북부의 레바논 산악지역이다. 본 구절에서 다윗은 백향목까지도 꺾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이를 찬송하고 있다. 한편 레바논의 백향목은 교만한 자, 거만한 자(사 2:13), 또는 흥왕하는 자(92:13; 104:16)를 상징한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단순히 자연 현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권세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Kraus). 즉, 본절은 권세있는 교만한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하에 멸망당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시29:6]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 여기서 다윗은 뇌성과 함께 몰아닥친 폭풍우로 인해 산이 마치 지진으로 흔들리는 것과 갈이 요동하는 듯한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Delitzsch).
⭕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 `시룐'은 헤르몬 산의 다른 명칭이다(신 3:9). 레바논 산은 갈릴리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헤르몬 산은 레바논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이 산들은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들이며, 이 산들이 들 송아지 같이 뛰었다는 표현은 하나의 과장법으로서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성 경: [시29:7]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火焰)을 가르시도다 - 이는 벼락에 대한 시적 표현이다(18:8) `화염'은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언급되는 용어로서 여기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 경: [시29:8]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 가데스는 에돔 서쪽에 위치한 오아시스지역으로 시내 산 북쪽에 위치해 있다. 레바논에서 가데스를 연결하면 팔레스틴 전역을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5,6절과 함께 하나님의 소리가 팔레스틴 전역에 걸쳐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Rawlinson).
성 경: [시29:9]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 `낙태케 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훌'(*) 은 `진통을 일으키다', `새끼를 낳다'는 뜻이다. 이에 근거해서 혹자는 뇌성으로 놀란 암사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몸의 일부에 경련을 일으키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elitzsch). 그런데 본 구절에서는 암사슴들이 뇌성에 놀라 분만 예정일보다 빨리 새끼를 낳았다는 의미가 문장 구조상 더 적합하다. 이런 표현은 그 뇌성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반영해 준다.
⭕ 살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 이는 폭풍우로 인해 나뭇잎과 가지들이 꺾이며 심지어 나무들이 뿌리 채 뽑힌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Rawlinson).
⭕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 여기서 `전'(*, 헤칼)이 구체적으로 어느 것을 의미 하는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1) 하늘의 성전이라고 주장하며(Delitzsch, Kraus), (2) 혹자는 지상의 성전이라고 주장한다(Kidner).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본시 자체가 계속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을 하늘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Rawlinson). 이렇게 볼 때, `모든 것'이란 하늘의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을 의미할 것이다(Calvin, Bri- ggs).
성 경: [시29:10]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여호와께서 흥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 여기서 `홍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불'(*)은 창세기 6-11장의 노아 홍수 사건에 유일하게 사용된 용어이다. 따라서 이 홍수는 직접적으로 노아의 홍수를 가리키며, 상징적로는 악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시고 의인들을 구원하시는 심판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좌정하셨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세상의 왕으로 임하셨다는 의미로(Delitzsch, Hengstenberg, Kay),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암시한다.
⭕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 여호와는 노아 시대뿐 아니라 영영토룩 온 세상의 왕이시다. 그리고 이 표현은 단순히 왕으로서 권위만 지녔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왕권을 행사하심을 뜻한다.
성 경: [시29:11]
주제1: [뇌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
주제2: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 홍수는 악인들에게는 형벌이지만, 의인들에게는 구원이다. 하나님은 홍수(심판)로 악인들을 제거함으로써 의인들에게 진정한 평강을 허락해 주신다. 여기서 `힘'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의인들이 그 심판을 벗어날 수있는 용기와 소망을 의미한다. 또한 이 힘은 환난과 핍박 중에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베풀어지는 하늘의 능력을 상징하기도 한다(Calvin, Rawlinson).
⭕ 평강의 복 - 델리취(Delitzsch)는 그의 주석에서 이 말을 가리켜 `전 시편 위에 드리워진 무지개와 같다'고 표현하였다. 다윗은 홍수 이후의 무지개와 같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이후에 있게 될 선택된 백성들의 영원한 복을 미리 내다보고 있다.
성 경: [시30:1]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본절은 여호와께 대한 찬송과 찬송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 구절로서 본시 전체 내용의 주제가 된다.
⭕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 여기에서 `끌어내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달라'(*)는 `우물에서 끌어내다'(출2:16, 19; 잠 20:5)는 뜻으로 다윗이 우물과 같은 깊은 곤경에 처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여호와를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 내 대적 - 혹자는 이를 `국내외의 모든 원수들'로 이해하였으나 문맥을 무시한 해석이다(Calvin).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다음절과 연결시켜 `대적'이란 다윗을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고간 `중병'(重病)이라고 주장한다(Delitzsch, Lange). 그러나 본절의 동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와 연결시켜 볼 때 `중병'이란 견해 역시 타당치 않다. 아마 `대적'은 다윗이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성 경: [시30:2]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 다윗은 `부르짖으매' 라는 말을 사용함로서 자신의 질병이 단순한 의술로써 회복된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회복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Craigie). 그의 병이 의술로는 고치기 매우 힘든 상태였다는 증거가 3절에 나타나 있다. 이처럼 고치기 힘든 중병에서 기적적으로 일어났으니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시30:3]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내 영혼을 음부(陰部)에서 끌어내어 - 이는 곧 죽음에서 건지셨다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죽음은 음부, 곧 `쉐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 되었다. 이 `쉐올'은 무의식 상태로 있는 `지하의 세계'(underworld)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6:5 주석을 참조하라.
⭕ 무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르'(*)는 `쉐올'의 동의어이다(28:1 주석 참조).
성 경: [시30:4]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본절은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에 함께할 것을 다윗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장면이다.
⭕ 주의 성도들아 - `성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시딤'(*)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또는 불변의 사랑, 끊임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헤세드'(*)에서 파생되었다. 이 용어는 (1) 하나님의 불변하신 사랑을 입은 자, (2)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자 등의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TWOT). 이 용어에 대해서는 9:3 주석을 참조하라.
⭕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 `이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케르'(*)는 문자적으로 `기념물'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이름'의 뜻으로도 종종 사용되었다(출3:15).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나타내는 것들이며 또한 그의 거룩성을 기념하는 것들이다(Delitzsch).
성 경: [시30:5]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그 노염(怒焰)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 `노염'이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이며, `은총'이란 하나님의 자비하신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나 인간의 통회함을 보시고 그 분노를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기서 다윗이 증거하고자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나 그 분노를 오래 끌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회개하는 자의 죄를 즉시 도말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은혜로운 진리이다. 한편, `평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임'(*) `생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본 구절이 대구법이 사용된 구문임을 고려해 볼 때 이 해석은 어울리지 않는다. 즉, `잠간'의 대조적인 개념은 `생명'이 아니라 `평생'인 것이다(Lange).
⭕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寄宿) 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 울음은 고통과 환난에 대한 상징이요 기쁨은 구원과 승리에 대한 상징이다. 이 구절은 성도에게 있어서 고통이나 환난은 단지 지나가 버리고 잊혀지고 마는 하나의 짧은 과정임을 말하고 있다. 반면, 깊은 밤이 지나면 곧이어 아침이 오듯이 성도의 구원과 승리는 고난에 바로 뒤이어 따라온다(욥 33:26; 사 26:20; 54:7). 다윗은 고난을 극복한 그의 경험적인 삶을 통해 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성 경: [시30:6]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본절에서부터 12절까지에는 다윗의 실수와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이 고통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그의 삶의 한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 이는 다윗이 한때 자기 자신을 신뢰한 자만심을 고백한 구절이다. 자만은 불경건이며 어리석은 자의 특성이다. 이 자만심은 율법에서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이것의 결과는 멸망이라고 규정되었다(신 8:11-20).
성 경: [시30:7]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 여기서 `산'은 시온 산을 가리킨다(Delitzsch, Briggs, Calvin). 시온 산은 천혜의 요새지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 중의 요새로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이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이 산을 탈환할 수 있었다(삼하 5:7). 그리고 다윗은 이곳에 견고한 성벽을 건설하고(삼하 5:9) 다윗 성을 세움으로써 대국(大國))으로서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가 견고하여지자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하였던 것이었다.
⭕ 주의 엎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잠시 다윗을 떠나 계신 것이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만을 꺾으시기 위해 잠시 진노하신 것을 의미한다(13:1 주석 참조). 그 결과로 다윗에게 임한 것은 평강 대신 `근심'이었으며 건강 대신 `죽음의 질병'이었다(9절).
성 경: [시30:8]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내가 주께 부르짖고 -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을 요청하는 다윗의 간구이다. 다윗은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고통에 처하자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성도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목적이다(Calvin).
성 경: [시30:9]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내가 무덤에 내려같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 이는 논리적인 다윗의 기도이다. 그의 논리는 자신이 일찍 죽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아무런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다음 구절에 구체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 어찌 진토(塵土)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 다윗은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고 주의 진리를 온 세상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왕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그가 죽는다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죽음은 불가(不可)한 것이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다윗의 간구가 단순히 생명의 연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Delitzsch, Calvin, Lange). 한편, 다윗이 자신의 이러한 논리적인 간구 그대로 회복된 이후 임종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였던 사실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대상 22-29).
성 경: [시30:10]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다윗이 하나님께 최종적으로 호소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이다(4:1; 9:13; 23:6,16; 27:7). 그는 자신의 공로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깨달았던 것이다.
성 경: [시30:11]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 진정한 회개를 통해 그의 건강이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단순히 건강의 회복 때문에 춤을 춘 것이 아니라 그간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그의 심령이 회복되었기에 춤을 춘 것이다(Craigie).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을 때(삼상 1 8:6), 또는 축제 때에(출 32:19; 삿 21:21)춤을 추었다. 따라서 이 춤은 극도의 기쁨을 의미한다.
⭕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 `베옷'은 구약 시대의 성도가 회개할 때 자신의 통회하는 마음을 표시하고자 입었던 옷이다(욘 3:5-8).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진정한 통회를 보시고 베옷 대신 기쁨을 베풀어 주셨다(5절).
성 경: [시30:12]
주제1: [탄식을 찬송으로 화하게 하신 은혜]
주제2: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 자만하던 때에 다윗은 주를 찬송하지 아니하고 잠잠했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과 육체가 회복된 이후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전념하고자 한다. 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확고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영광'은 `마음'(Kraus, Calvin, Rawlinson), 또는 `충성'(Kay, Alexander)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16:9 주석을 참조하라.
⭕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 본 구절은 기도 응답을 받은 다윗의 서원을 보여 주고 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대한 서원은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표시였다.
성 경: [시31:1]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 본 구절은 다윗이 그의 유일한 의지의 대상으로서 `여호와'를 강조하는 기도문이다. 다윗은 왼수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요새나 바위 등 팔레스틴의 지형(地形) 지물(地物)을 이용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그러나 몸은 비록 이러한 것들 뒤에 숨겼을지라도 그의 마음은 항상 여호와만을 의지했던 것이다(Kid- ner).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을 다윗이 성소의 보호지역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나(Kraus) 원수에게 쫓겨 유랑하던 시절에 다윗이 성소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본 구절은 여호와를 간절히 의지하는 다윗의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Delitzsch, Rawlinson, Calvin).
⭕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 이는 다윗이 현재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본 구절을 `원수에게 붙잡힘으로 인하여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게 하소서'라는 뜻으로 해석한다(Hengstenberg). 그런데 본시 전체에서 다윗이 대적들에게 사로 잡혔던 사건을 암시하는 구절이 구체적으로 없으므로 이 해석은 타당성이 없다.
⭕ 주의 의(義)로 나를 건지소서 - 여기서 말하는 `의'란 하나님의 언약을 환난 중에서도 순종하며 인내하는 의인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과 그에 따른 보상을 의미한다(Rawlinson, Delitzsch, Kraus). 핍박받는 의로운 다윗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를 기다렸던 것이다. 아울러 `주의 의'라는 표현은, 비록 인생이 연약하여 언약을 어기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오직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의미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 시편에 나오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개념은 로마서의 `의'의 개념(롬 1:16 이하)으로 발전되었으며 개혁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Kraus).
성 경: [시31:2]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속히 건지시고 - 본 구절은 다윗의 위급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다윗의 원수들은 가까운 곳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Briggs).
⭕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保障)이 되소서 - 원수들의 공격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구이다. 여기서 `견고한 바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추르 마오즈'(*)인데 `추르'는 거대한 산을(18:2), `마오즈'는 안전한 장소, 곧 피난처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합성어는 `거대한 산 위에 세워진 피난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어떠한 공격이나 환난도 막아낼 수 있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를 상징한다. 또한 `보장'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베트 메추도트'(*)인데 여기서 `메추도트'는 `높은산', `산 꼭대기'를 의미하며 `베트'는 `거주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합성어 또한 난공불락의 요새를 의미하는 말로서 `견고한 바위'와 유사한 개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처럼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안전한 피난처를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성 경: [시31:3]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 본 구절은 원문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 (*)로 시작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직역하면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기 때문에'이다. 즉, 다윗은 지금까지 `여호와만을 자신의 반석과 산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Rawlinson).
⭕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란 목자의 인도를 나타내는 용어인 듯하다(23:2-4). 맹수를 만난 어린 양이 목자를 의지하듯이 원수들의 추격을 받고 있던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에 대해서는 23: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1:4]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저희가...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 다윗은 원수들을 사냥꾼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저들의 간교성을 시사해 준다(9:15; 25:15; 140:5).
⭕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 원수들은 간교한 궤계로써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반면 , 다윗은 다만 여호와를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의지는 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간교한 인간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고전 1: 25). 여기서 `산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오즈'(*)이다. 이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1:5]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 여기서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시편에서 흔히 사용된 `네페쉬'(*)가 아니고 `루아흐'(*)이다. 이 `루아흐'는 창조주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바로 그 `생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창 2:7 ) 인간 생명의 근원을 의미한다. 다윗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좌우되는 줄로 알고 이것을 주의 손에 맡긴 것이다(Delitzsch). 또한 `부탁하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페키드'(*)는 `...에 두었다'는 뜻으로(렘 37:21) 다윗이 자신의 생명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이양시켰음을 뜻한다(Kraus). 한편, 본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자신에게 인용하신 말씀이기도 하다(눅 23:46). 다윗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소원하며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맡기었으나 그리스도는 죽음을 초월한 부활의 생명을 소원하며 자신의 영혼을 맡기신 것이다.
⭕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 다윗은 자신의 생명 전부를 자신있게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여기서 밝혀고 있다. `진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확실하다', `확증하다'는 의미의 동사 `아만'(*)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참된 것', 또는 `참'을 뜻한다(Twot). 즉, 여호와는 한번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며 실행하시는 참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과거의 개인적인 역사를 통해 체험하였다.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는 구절은 과거에 자신을 실제로 위험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고백하는 구절이다(Calvin).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참되심에 의거하여 다윗은 이 순간에도 자신의 생명 전부를 그분에게 맡길 수 있었다.
성 경: [시31:6]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허탄한 거짓을 숭상(崇尙)하는 자를 미워하고 - 여기서 `허탄한 거짓'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블레 솨웨'(*)인데 `하블레'는 `허무한 것'을 의미하며(왕하 17:15) 렘 2:5) `샤웨'는 `멸망', `황폐'를 의미하는 말이다(잠 1:27). 따라서 이는 `멸망의 허무한 것'이라는 뜻인데, `멸망의 허무한 것'이란, 물론 이방의 우상이나 마술을 의미하나(신 32:21; 왕상 16:13 렘 8:19; 14:22, Delitzsch, Rawlinson, Lange), 보다 포괄적으로 인간이 믿고 의지하다가 멸망당할 이 세상의 모든 헛된 유혹을 포함한다(Calvin). 이러한 것들은 참되신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이 믿는 만큼 참 만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멸망을 초래하는 거짓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거짓된 것과 이 거짓된 것을 숭상하는 자까지도 미워한다. 이렇게 다윗이 강도높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에 있어서 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유혹을 받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Calvin).
성 경: [시31:7]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 다윗은 기도 중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기를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가 기도 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Craigie, Calvin). 한편, 여기서 `인자하심'(*,헤세드)이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곧 자기 백성을 언약하신 대로 끝까지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
⭕ 나의 곤난을 감찰하사 - `감찰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바라보다', `조사하다'는 뜻으로 이는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이 악인에게 사용되면 악인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살펴 보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의 고난을 자세히 살펴보시는 것은 그 고난에서 그를 건지시기 위함이다.
⭕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 여기서 `아셨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 (*)는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포괄적인 지식, 또는 완전한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등의 전문적 지식에도 적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완전히 습득하고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TWOT, Delitzsch). 바로 이와같은 완전한 지식으로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아셨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걸어온 다윗의 여정, 그에게 닥친 모든 역경들, 그리고 이로 인한 그의 영적인 상태를 빠짐없이 살펴보시고 그를 아셨던 것이다.
성 경: [시31:8]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禁錮)치 아니하셨고 - 여기서 `금고치 아니하셨고' 라는 말은 다윗이 원수의 손에 의해 완전히 굴복당하지는 아니했음을 의미한다. 다윗은 지금까지 용케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을 여호와의 인자하심 덕택으로 돌리고 있다.
⭕ 내 발은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 `넓은 곳'은 안전과 구원을 상징하는 말이다(18:19 주석 참조). 다윗이 원수들에게 완전히 굴복당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셨던 것이다. 다윗은 이와 같은 과거의 은혜로운 사건들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고통 역시 그때와 같이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를 할 수 있었다.
성 경: [시31:9]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본절에 이르러 다윗은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탄식한다. 이는 현재 자신의 형편이 극도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 고통은 다윗의 영과 육 모두를 쇠하하게 만들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눈'은 건강의 척도로 여겨졌다. 특히 근심은 눈을 어둡게 하는 원인이다(6:7주석 참조). 한편, `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몸과 대조되는 개념인 영혼을 의미한다. 다가오는 고통에 대한 근심으로 다윗의 영혼까지 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텐'(*)은 하복부(下腹部), 여성의 자궁, 위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여기서는 몸의 내부, 또는 내장을 가리킨다(Delitzsch, Lange). 고통에 대한 근심으로 다윗의 몸의 내부가 크게 상한 것이었다. 또한 이 단어는 `네페쉬'와 함께 사용되어 총체적인 인간, 곧 전인(全人)을 표현하기도 한다(TWOT).
성 경: [시31:10]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며 - 다윗은 슬픔과 탄식으로 인해 자신의 귀중한 생애가 마감되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 여기서 `보내며'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는 `끝내다', `마치다'는 뜻이다(TWOT). 이는 그의 삶이 탄식으로 가득찼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고통이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볼 수 있다.
⭕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여 - `죄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온'(*)은 일반적으로 `죄'를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 이하의 내용은 다윗의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아뢰는 간구이다. 또한 `아온'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의미로도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개념과 매우 밀접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죄악'은 보다 구체적으로 `고통'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 다윗은 자신의 말할 수 없는 `고통'(9절)을 여기서 약간 색다른 의미의 단어로 표현했을 것이다(Calvin, Briggs).
⭕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 이는 말라빠진 다윗의 몰골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기진 맥진하여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다윗의 처절한 모습이 충분히 나타나 있다.
성 경: [시31:11]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맡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히니 - 다윗은 그의 대적들은 물론이요 그의 이웃으로부터도 모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대적으로 부터 받는 모욕보다도 이웃으로 부터 받는 모욕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란 구절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Rawlinson).
⭕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어다 - 다윗이 명성을 날리던 때에 다윗을 가까이 했던 그의 친구들이 그의 영육이 쇠약해지고 가련한 신세가 되자 이제는 그를 수치스럽고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다윗에게 임한 고통이 행여나 자기와 자기 식구들에게 옮겨올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보는 것조차도 피했던 것이다(Calvin).
성 경: [시31:12]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파기와 같으니이다 - 본절은 위의 구절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음으로써 외톨이가 되었다. 마치 죽은 자나 깨진 그릇과 같이 아무도 그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육체와 심령의 고통 위에 사회적 고통이 가중된 것이었다.
성 경: [시31:13]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 여기서 `비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바'(*)는 `중상', `비방', `악평'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사악한 소문', 또는 `나쁜 보도'(창 37:2; 민 13:32)라는 의미도 있다. 랑게(Lange)는 이를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말'로 보았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항간에 떠도는 다윗에 대한 나쁜 소문을 그가 들었음을 나타낸다.
⭕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 이는 나쁜 소문의 내용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소문을 들음으로써 다윗의 고통은 크게 가중되었을 것이다.
성 경: [시31:14]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 `나'(*, 아니)는 히브리 문법상 강조형이다. 여기서 다윗은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라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 하겠다는 그 자신의 확고한 신앙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강조 어법을 구사했다.
⭕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 다윗은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입으로 고백함으로 확증했다. 극한 한난 중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견고한 다윗의 놀라운 신앙이 다른 탄식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어김없이 잘 나타나 있다.
성 경: [시31:15]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본절에서부터 18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다윗의 기도이다. 다윗은 이 기도를 이전에도 드렸으나(1-3절) 자신의 고통을 고백한 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
⭕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 `시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트'(*)는 `정한 때'를 의미하는 말이다. 우주의 만사(萬事)에는 정한 때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정한 때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104:27; 욥 38:32; 렘 8:7). 다윗은 이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 자신에게도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시련의 때와 형통의 때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간들(원수들)에 의해서, 또는 우연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부으심으로 형통과 복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다윗은 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였다.
⭕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 앞 구절에 언급된 주의 `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손'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은 일시적으로 다윗을 핍박할 수는 있어도 약하여지고 맥이 풀리는 힘없는 손이다(삼하 4:1; 렘 50:43). 따라서 그 손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정해 놓으신 형통의 때를 결코 저지할 수 없다.
성 경: [시31:16]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 구약 시대에 주의 얼굴 빛이 사라지는 것은 주의 진노하심으로 이해되었으며(4:6), 반대로 주의 얼굴 빛이 비추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의 상징이었다(민 6:25). 다윗은 자신의 환난을 하나님의 부재(不在)의 결과로 느꼈으나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임하시기만 한다면 지독한 고난에서 즉시 해방될 줄로 믿고 기도한 것이다.
⭕ 주의 인자하심으로 - 이에 대해서는 7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1:17]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 성도의 부끄러움과 악인의 부끄러움이 대조되어 있다. 다윗은 악인들로부터 일시적인 부끄러움을 당하였으나 그는 악인들의 영원한 부끄러움을 간구하고 있다. 이 영원한 부끄러움은 하나님이나 그의 백성들을 반역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미치는 당연한 죄의 결과이다(6:10; 22:6; 40:14; 109 :28; 사 41:11; 렘 51:47).
⭕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 음부는 무의식의 세계이다(6:5 주석 참조). 다윗은 자신을 모욕한 무리들을 이곳에 들어가게 하여 영원토록 입을 다물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성 경: [시31:18]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 - 이는 13절의 비방(악한 소문), 악한 의논과 관련되는 구절이다.
⭕ 벙어리 되게 하소서 - 이는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17절)의 반복적 표현이다.
성 경: [시31:19]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본절에 이르러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 다윗의 찬송이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지금까지의 간구에 대한 응답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 쌓아 두신 은헤 - `쌓아 두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판'(*)은 `숨겨놓다' , `비장(秘藏)하다'는 뜻이므로 본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은밀히 준비해 놓으신 좋은 것을 의미한다.
⭕ 인생 - 이 말은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무능력하여 제한된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서 이 용어는 대적들을 의미한다.
⭕ 어찌 그리 큰지요 - 본절에서 다윗은 두 가지 관점에서 크게 감탄하고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특히 환난의 때에도 그에게 베푸실 은혜를 예비해 오셨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그 은혜가 너무나도 풍성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때문에 그의 감탄은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성 경: [시31:20]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 `주의 은밀한 곳에'(*, 베세테르 파네카)는 직역하면, `주의 얼굴의 은밀한 곳에'이다. 혹자는 이를 여호와의 성소에 숨은 것으로 이해하려 하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 얼굴'은 고난받는 성도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16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급히 강림하사 핍박받는 의로운 자를 아무도 해할수 없는 은밀한 곳에 감추셨다는 의미를 가진다.
⭕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 여기서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케스'(*)는 본절과 사 40:4 `험한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됨)에서만 나오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13절에 언급된 대로 다윗의 생명을 빼앗기로 한 원수들의 공모를 가리키는 듯하다(Walford).
⭕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 `장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카'(*)는 숲과 같은 `잠복처', 덮개로 가리운 `초막'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안전한 피난처를 상징한다(사 4 :6). 따라서 본 구절은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와 내용상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다.
⭕ 구설(口舌)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 여기서 `구설의 다툼' 이란 언어의 폭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18절의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을 말한다(Rawlinson).
성 경: [시31:21]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 본 구절 뒤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찬송이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 여기서 `견고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추르'(*)는 `포위하다'는 의미의 동사 `추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성벽(담)으로 완전히 둘러싸인'이란 의미를 내포한다(Delitzsch). 따라서 `견고한 성'은 성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안전한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상징이다. 한편, 본 구절의 전치사 `베'(*,`...에서')를 학자들은 `...와 같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Calvin, Hengstenberg, Stier). 하나님의 보호는 바로 견고한 성이 놀라운 방어력으로 대적을 물리쳐줌과 같은 것임을 본 구절이 나타낸다는 것이다. 내용상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성 경: [시31:22]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내가 경겁(驚怯)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니 - 이는 다윗이 극한 환난 중에 놀라 말한 것을 가리킨다.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는 그의 중얼거림은, 환난에 처한 성도의 최악의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즉, 극한 환난에 처하여 성도는 먼저 실망을 느껴며, 둘째 하나님의 보호를 의심하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최악의 생각에 빠지게 된다(Briggs). 그리고 이러한 최악의 상태는 `경겁한 중에', 곧 `두려움'에 이르게 한다(Calvin).
⭕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 이는 상반절과 대조적인 내용이다. 즉, 얼마 전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다윗이 좌절에 계속적으로 압도되지는 아니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일시적으로 좌절에 사로잡히기는 했으나 말씀과 기도로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믿음으로 이를 극복한 것이다(Calvin). 한편,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히브리 본문에서 본 구절 맨 앞에는 `아켄'(*)이란 용어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진실로' 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놀라움'을 나타내는 것으로(TWOT) 여기서는 (1) 자신의 일시적인 불신에도 불구하고 응답하신 하나님의 사랑, (2) 믿음으로 간구하였올 때 지체치 않으시고 즉각적으로 응답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다윗의 감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시31:23]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 다윗은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 여호와를 사랑할 것을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있게 권고하고 있다.
⭕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엄중히 갚으시느니라 - 다윗은 여기서 성도가 여호와를 사랑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 구절의 내용은 이미 다윗이 체험한 바이다. 한편 `엄중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테르'(*)는`충분히', 또는 `남김없이'란 의미이다(Kraus). 따라서 이 표현은 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보여 준다.
성 경: [시31:24]
주제1: [곤경 중에 구원이 되시는 주(主)]
주제2: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은 22절의 `경겁한 중에'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모든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확신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의 말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미 경험한 바와 같이 두려움은 불신을 가져다 주고 확신은 응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한편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란 말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아'란 의미를 지닌다(Anderson ). 이런 의미에서 본 구절은 27:14과 같은 내용이다.
성 경: [시32:1,2]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기쁨]
⭕ 허물의 사함을 얻고...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 `복이 있도다'에 해당하는 원어로 `아쉬레이'(*)는 인간이 인간을 축복할 때 사용되는 용어로서 원문상 맨 앞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다윗이 인생들에게 기원하고 있는 복은 사죄함의 복이다. 그가 `사죄의 복'을 말하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죄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Craigie). 즉, 죄없는 인간이란 결단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죄없는 자'의 복을 기원하지 않고 다만 `사죄함을 받은 자'의 복을 기원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다윗은 인간의 죄를 다양한 용어로써 묘사하고 있다. 그 첫째는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폐솨'(*)이다. 이 용어는 본래 `반역하다', `거역하다'는 의미의 동사 `파솨'(*)의 명사형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뜻으로 거역하는 것'(Kohler, Craigi e),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Delitizsch)을 의미한다. 그 둘째는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아'(*)이다. 이 용어는 표적을 빗맞추거나 길을 잃는다는 의미의 동사 `하타'(*)의 파생어로서 참된 길(진리)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Delitzsch, Craigie). 셋째는 2절의 `정죄'에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운'(*)으로 이는 `왜곡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 또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것'(Craigie)을 뜻한다. 이 세가지 용어들은 시편의 독특한 문체 구조상 반복된 동의어들이므로 이들 용어들의 의미를 명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다. 하지만 이 용어들은 적어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의 양상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Briggs, C raigie). 다윗은 이 죄악들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될 수 있다고 선포한다. 그는 죄에 대한 세 용어들과 병행하여 사죄에 대한 세 용어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 첫째는 `사함을 얻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 인데 본래 이 용어는 `짐을 들어 올리다', `나르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용어는 죄를 하나의 무거운 짐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이 죄악의 짐을 치워버리거나 옮겨주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Briggs). 이로써 구원 받은 자는 더 이상 죄의 무거운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가리움을 받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사'(*)는 본래 `덮다'는 의미이다(85:2; 잠 10:12). 즉, 죄인의 죄가 가리워져서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죄가 가리워짐으로 그 죄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말이다(Delitzsch). 셋째는 `정죄를 당치 않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하솨브'(*)이다. 여기서 `하솨브'(*)란 `...의 탓으로 돌리다', `전가하다'는 뜻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을 일체 전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TWOT, Delitzsch). 우리는 이 `사죄'와 관련된 세 용어들의 의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죄는 너무나도 실제적이며 완전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죄인이 이러한 사죄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가지 인간적 요소가 필수적아다. 그 요소는 `마음에 간사가 없고'라는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간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미야'(*)는 `속임'(deceit)을 의미한다. 이는 완전한 사죄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하나라도 속임없이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요일 1:8) 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시32:3]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기쁨]
⭕ 내가 토설(吐設)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 여기서 `토설치 아니할 때에'란 문자적으로 `침묵하였을 때에'로 번역된다. 이는 곧 죄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을 가리키며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다윗이 죄를 고백하지 아니하고 숨겼을 때 가장 먼저 양심의 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체험을 보여 준다. 여기서 `신음하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아그'(*)는 `으르렁거리다', `고함치다'는 뜻으로 이는 고함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의 혹독한 양심적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다(Briggs, Delitzsch). 게다가 그의 신음이 `종일' 계속되었으니 그의 양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양심적 고통은 육체적 질병으로 이어졌다. 특히 질병의 밀접한 관계는 본서에서 기정화된 사실이다. 특히 죄로 인해 발생한 질병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이해된다(6:1, 2, Kraus, Craigie, Delitzsch, Lange, Hitzig). 본 구절에서 `내 뼈가 쇠하였도다'는 말은 바로 죄로 인한, 또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육체적 질병으로 그의 몸이 매우 약해졌음을 의미한다.
성 경: [시32:4]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기쁨]
⭕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 여기서 다윗은 3 절에 언급된 자신의 양심적 고통과 육체적 질병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였음을 밝혀고 있다 본 구절에서 `주의 손'은 회개치 않는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다. 이 진노의 손은 주야로 다윗을 떠나지 않았다.
⭕ 내 진액(津液)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 본 구절은 다윗의 고갈된 심령 상태를 보여 준다. 여기서 `진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솨드'(*)는 체액을 의미하는 말이며, `화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파크'(*)는 `변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 구절을 직역하면, `내 체액이 여름 가뭄과 같이 변했나이다'가 된다. 이러한 말은 근심의 불이 몸 속의 체액을 다 태워버려 마치 여름날의 가뭄과 같이 되어버렸다는 의미이다(Delitzsch).
⭕ 셀라 - 이 용어에 대해서는 3: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2:5]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기쁨]
⭕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 견딜 수 없는 양심적 고통과 육체적 질병, 그리고 심령의 고갈 상태로 인하여 다윗은 자복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여기서 `자복하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데'(*)는 단지 죄에 대한 양심적 가책이나 인정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자백에 대해 설명하기를 `자백은 댐의 수문을 여는 것과 같다. 자백하지 않을 때 댐 뒤에 많은 물이 쌓여서 엄청난 압력을 느끼게 되지만 일단 수문이 열리기만 하면 물이 빠지고 압력이 감해진다'라고 하였다.
⭕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 앞의 구절과 본구절에는 1, 2절에서 언급된 죄에 대한 세 용어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자복하는 문맥에서 이 용어들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은 그의 자백이 모든 죄들을 낱낱이 고백한 철저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Craigie).
⭕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 다윗의 철저한 자백으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그에게 즉각적으로 임한 것이다. 여기서 `사하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2:6]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기쁨]
본절은 경건한 무리들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 이로 인하여 - 위에서 다윗이 말한 내용, 곧 진실로 회개함으로 사죄의 은총을 얻은 그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의미한다. 이 경험에 입각하여 그는 경건한 자들을 권면하려는 하는 것이다.
⭕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기도할지라 - `경건한 자'(*,하 시드)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언약 백성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언제든지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Briggs). 한편, `주를 만날 기회'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1) `오랫동안 구한 끝에 찾은 은혜의 때'(De Wette, Hupfeld) (2) `어려운 때'(a time of stress, Briggs, Craigie), (3) 사 55:6과 `여호와의 응답의 때(Calvin) 등이다. 그런데 이 모든 주장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견해는 70인역(LXX)에서 발견된다. 거기에서는 `주를 만날 기회'란 표현이 `앤카이로 유데토'(*)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직역하면 `적당한 때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순간 순간마다', 곧 `하나님을 반드시 만나야만 될 그때 그때마다'를 의미한다(Kraus, Luther). 이러한 해석은 이어지는 구절의 내용과 연결시켜 볼 때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 진실로 흥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 여기서 `홍수의 범람' 은 갑작스런 재앙에 대한 상징이다(18:4; 사 8:7; 17:12). 그러나 아무리 갑작스런 재앙이 올지라도 여호와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간구하는 자에게는 그 재앙이 감히 미치지 못한다. 이는 곧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Calvin).
성 경: [시32:7]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축복]
⭕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 이 표현은 자신의 죄를 자백한 후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자백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을 느꼈으나(4절) 이제는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 여기서 `노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린나'(*)는 `기쁨의 환성'이란 뜻으로(사 14:7)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의 환호성과 같은 의미이다(TWOT, Craigie). 따라서 `구원의 노래'란 전쟁이나 환난등을 이기고 외치는 승리의 환호성을 의미한다. 또한 `에우시리이다'라는 말은 이러한 승리의 환호성을 외칠 수 있는 조건들이 그 주변에 풍성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Calvin). 다시 말해서 이는 죄를 진실로 자백한 다윗 자신이 수많은 구원과 승리를 체험하며 계속해서 승리의 환호성에 묻혀 살게 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32:8]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기쁨]
⭕ 내가 너의 갈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 여기서 `내가'란 주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Kay, Jerome, Kraus, Craigie). 이 주장은 본 구절이 하나님으로 부터 계시를 받은 내용을 다윗이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서 비롯 되었다. 특히 크라우스(Kraus)는 본 구절의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란 진술과 다음 절의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는 진술이 다윗에 의해 나올 수 있는 성질의 말이 아니며, 또한 16:11; 25:9 등에서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가르쳐 주신다는 내용이 언급된 점을 근거로 본 구절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커다란 문졔점이 있다. 다윗이 주체가 되어 말하고 있는 문맥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쏨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본서 전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기 때문이다(Rawlinson). 사실상, 그는 죄로 인한 혹독한 고통과 자백으로 인한 사죄의 은총 모두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백성들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Delitzsch). 이러한 스승으로서 다윗의 의무 또는 역할은 51:13에 암시되어 있다(Calvin, Delitzsch). 그는 그와 같이 지금 범죄자들을 교훈하고 가르치는 의무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Briggs). 한편, `너를 주목하여'라는 구절은 스승이 학생들을 주목하듯이 친절한 마음으로 죄인들의 생활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참된 길로 안내하기 위혜 죄인들의 생활을 주목하였던 것이다.
성 경: [시32:9]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축복]
⭕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 단수(8절의 `너')에서 복수'(너희')로 바뀌었다. 이는 다윗의 교훈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Ra wlinson). 한편, 본 교훈의 요지는 결코 완고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발이나 노새는 강제적인 구속력이 없이는 다스릴 수 없는 완고한 짐승으로서 미련한 인간에 비유된다(잠 26:3). 완고한 짐숭들에게는 주인의 매가 기다릴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죄인들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뿐이다.
성 경: [시32:10]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축복]
⭕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 다윗은 회개치 않는 자가 받을 많은 슬픔과 회개하는 자가 받을 은총을 대조시킴으로써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악인'이란 완고한 죄인이란 의미이며 보다 직접적인 의미로는 죄를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완고한 자라는 뜻이다(Craigie) 반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악인'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죄를 고백하는자'를 뜻한다. 한편, 70인역(LXX)은 `슬픔'을 말과 노새를 때리는 `채찍'(*,마스티게스)으로 번역함으로써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Rawlinson). `두르리로다'는 7절의 `에우시리이다'와 어근이 같은 동사이다. 이에 대해서는 7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2:11]
주제1: [사죄(赦罪)의 축복]
주제2: [사(赦)함을 받은 자의 축복]
⭕ 너희 의인들아...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 대다수의 많은 시편들과 같이 다윗은 본시의 마지막절을 감사로 장식하고있다. 여기서 그가 권고하고 있는 감사는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그 죄를 옮기우시고 덮어 가리우시고 죄에 대한 책임을 일체 지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의인들'이나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은 처음부터 율법에 완전히 일치되게 산 자들을 의미하기 보다는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회개함으로 다시금 율법에 순종하여 사는 자들을 의미한다(Calvin).
성 경: [시33:1]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 여기서 `의인들', `정직한 자'는 여호와 앞에 서서 경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자들을 의미한다(15편; 24편; 100:4; 118:19f, Kraus). 구약 시대에 성전(또는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를 경배할 수 있는 자격은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부여되었다(Bri-ggs). 물론 이들은 하나님 처럼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들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 가운데서 사는 자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Calvin)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한 불신자들은 결코 마음으로부터 주를 찬양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불신자들의 불경스러운 업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주석하였다. 그러나 경건한 무리들은 여호와를 찬송하는 일에 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들의 삶 속에 여호와를 찬송할 수 있는 조건, 곧 경건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땅히 할 바로다'는 `몰두할 것이로다', 또는 `열중할 것이로다'로 해석할 수 있다(Calvin).
성 경: [시33:2]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 `수금'(*, 킨노르)은 다윗과 레위인 악사들의 악기였고 구약 시대에 모든 악기 중에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겨졌던 현악기이다. 이 악기에는 울림통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현의 숫자는 여러 가지였다. 그리고 `비파'(*, 네벧)는 줄대가 비스듬하게 생긴 현악기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악기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음악에만 연주되었다는 점이다(대상 15:16). 즉, 이 악기들은 예배용 악기들이라 말할 수 있다(92: 1-3; 삼상 10:5; 삼하 6:5; 대상 15:16; 25:1, 3, 6; 대하 512; 29:25; 느 12:27).
성 경: [시33:3]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 여기서 `새 노래'란 특별한 행사를 위하여 새로 작곡된 의미의 `새 노래'가 아니다(Rhodes). `새 노래'는 단지 하나님의 구원과 숭리를 노래하는 찬송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것을 묵상할 때마다 늘 새로운 감동과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Kraus, Craigie, Briggs).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승리를 노래할 때 성도는 늘 새로운 마음이 되어 노래하게 되기 때문에 `새 노래'인 것이다(Rawlinson). 한편, `새 노래'는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최후 승리를 얻는 성도들이 영원한 나라에서 부를 노래이기도 하다(사 42:10; 계 5:9). 그래서 크라우스(Kraus)는 `새 노래'를 가리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궁극적이고도 전(全) 포괄적인 찬양'이라고 표현하였다.
⭕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 `즐거운 소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루아'(*)는 `소리치다', `외치다'는 의미의 동사 `루아'(*)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큰소리'를 의미한다(Briggs, Calvin). 그러나 이 `큰소리'는 단순히 외치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높이는 감사의 소리이다(98:4; 100:1; 150:5; 대하 20:19; 30:21; 스 3:11; 느 12:42, Rawlinson,K- raus). 한편, `공교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티부'(*)는 `바르게', `정확하게'란 뜻이다. 따라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라는 말은 `정확히 연주할지어다'라는 뜻으로 이는 정성을 다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Calvin).
성 경: [시33:4]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여 - 사실상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가 본절 초두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기 시작하는 첫절로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란 그 말씀의 의도와 목적이 모순되지 않으며 아울러 반드시 성취되고야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롬 7:12, Delitzsch).
⭕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 여기서 `진실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무나'(*)는 `확고 부동함', `충실', `성실'을 의미한다. 이는 한마디로 행위에 있어서 전혀 결점 없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함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지키는 데 있어서 확고 부동하시며, 악인에게 형벌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신 32:4, Briggs).
성 경: [시33:5]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 율법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투영되어 있는데, 본 구절은 그 중 `정의와 공의'의 측면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층만하도다 - 본 구절에서 다윗은 율법의 특성 중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근거에는 정의의와 공의뿐만 아니라 그의 인자하심도 포함되며 이 두가지 속성이 합하여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구성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시인은 공의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거룩성을 찬송의 근거로 삼고 있다.
성 경: [시33:6]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다윗은 찬양의 또 다른 근거로서 여호와의 창조를 들고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은 천지 창조시 `...이 있으라'는 명령을 가리키며, `입 기운' 또한 `여호와의 말씀'과 동의어 반복이다(사 11:4). 그리고 `만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바암'(*)은 본래 `군사들'을 의미하는데, `하늘'이라는 의미의 `솨마임'(*)과 함께 언급되면 천사들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하늘의 발광체들, 곧 해와 달과 별들을 의미한다(Brig- gs, Delitzsch, Rawlinson). 그런데 이러한 광대한 하늘과 광체들을 오직 말씀으로써 창조하셨으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능히 합당하신 것이다.
성 경: [시33:7]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 이는 창조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억류되어 있는 물의 모습(창 1:7)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양쪽에 많은 물이 쌓여졌던 홍해 사건과 요단 강 사건에서도 보여 진다(출 15:8; 수 3:13,16). 그런데 홍해 사건과 요단강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이지만 바닷물이 넘치지 않고 한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은 창조시의 놀사운 기적이었다(Delitzsch). 여기서 `무더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드'(*)는 `억류된 물'을 의미하며 특별히 이 단어는 피조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또는 지배)를 암시한다(TWOT).
⭕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 혹자는 이를 궁창 위에 억류된 물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Briggs). 하지만 `깊은 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홈'(*)은 `하늘 아래의 원천(源泉)', `깊은 바다 밑의 물'을 의미하므로(창 49:25; 욘 2:5) 이 해석은 옳지 않다(TWOT). 이 구절은 깊은 바다를 하나님께서 해연(海淵)에 저장해 두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목적에 대해서는 창 7:11; 욥 38 :22, 23을 참조하라. 여기서 `테홈'이란 용어는 창 1:2에서는 최초의 바다, 곧 혼돈의 바다라는 의미로 언급되어 있다. 만일 `테홈'이 이러한 의미로 여기서 사용되었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혼돈의 바다를 진정시키셨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Kra- us).
성 경: [시33:8]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 여기서 `온 땅'은 문자 그대로 무생물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거민'과 같은 온 인류에 대한 시적(詩的) 표현이다. 한편 `세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벧'(*)에 대해서는 24: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3:9]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 여기서 다윗은 온 인류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경외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견고히 섰도다'란 표현은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모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존재하게 되었음(창 1:3-31)을 보여 준다. 이와같은 창조의 사역은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충분히 보여줌과 동시에 그 어느 존재도 그 권능에 도전할수 없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온 인류는 하나님의 권능 앞에 굴복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Rawlinson, Kraus).
성 경: [시33:10]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圖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 여기서 `열방'이나 `민족들'은 12절의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와 대조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 나라와 그 민족을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의 영원성에 비하여 너무나도 일순간적이다.
성 경: [시33:11]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여호와의 도모 - 이 말은 10절의 `열방의 도모'란 표현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도모'란 단순히 마음의 생각 또는 계획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를 가리킨다. 인간의 도모는 불확실하고 불왕전한 계획이지만 하나님의 도모는 완전하여 반드시 성취된다. 본시의 저자는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성과 전능하심을 암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33:12]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백성은 복이 있도다 - 10,11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선민(選民)이 복된 까닭은 (1)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열방의 일시적 계획과는 달리 영원하기 때문이며(Kraus), (2) 선민 스스로가 이 영원한 계획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민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여 영원한 계획 안에 들어오게 하셨기 때문이다(135:4; 출 19:5; 신 4:20; 7:6; 14:2; 왕상 8:53, Rawl- inson, Briggs).
성 경: [시33:13]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또 다른 하나의 근거로서 절대 주권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의 `하늘에서'란 온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앉아계신 하늘 보좌를 가리키는 말이다(9:8; 29:10; 55:20; 102:13; 사 63:15; 66:1). 따라서 이 용어는 온 우주의 왕되신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세상과 무관하게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33:14]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본절은 13절과 병행 대국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를 살피시며 주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시33:15]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 또는 온 우주의 왕이 되실수 밖에 없는 근원적 이유를 말해 주고 있다. 그 이유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지으셨다는사실이다(94:9; 창 2:7, 8; 슥 1 2:1). 즉,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지으셨기 때문에 그 마음의 변화를 모두 알고 계시며 따라서 인간 행동을 정확히 판단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Delitzsch). 한편, `일반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하드'(*)는 `함께', `모두 동시에', `모두 함께'등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용어이다(TWOT). 그래서 혹자는 육체와 더불어 마음도 `함께'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으나(Briggs),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이 용어는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을 `한결같이'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Delitzsch). 즉,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로서, 온 인류를 한 순간에 지으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출생시마다 `한결같이 지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시33:16,17]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많은 군대...말은 헛 것임이여 - `많은 군대'와 `말'은 이방 나라의 왕들이 의지하는 세속적인 권력의 총체를 의미한다(20:7). 이러한 권력들은 인간 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힘으로 작용하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하는 저 이방 세력들이 아무리 크고 엄청날지라도 결코 그 계획을 성취할 수 없으며 아울러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도 없다.
성 경: [시33:18]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주목하라', `보라'는 의미의 동사 `힌네'(*)가 초두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로써 시인은 이제 막 말하려고 하는 중요한 내용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
⭕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 16, 17절의 세속직 권력을 의지하는 이방의 `왕'과 대조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는 커룩한 성도가 `경외하는 자',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자들을 돌보시기 위해 그들을 살펴보신다. 그리고 성도를 향하신 자상한 하나님의 눈은 악한 자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살펴 보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눈과 크게 대조된다(Briggs).
성 경: [시33:19]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 이는 하나님 백성의 복된 사실(12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해 주는 구절이다. 여기서 `사망'이나 `기근시'는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재앙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앙시에 많은 군대나 말의 힘은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지만(16,17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능히 구원하여 주신다(왕상 17:6, 16, Rawlinson)
성 경: [시33:20]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 `우리'가 복수인 반면 `영혼'은 단수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라 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바람이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카'(*)는 `사모하다'는 의미외에도 `기다리다', `기대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Kraus). 그리고 성도들의 기다림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도우심을 받기 위한 것이다. 한편, `방패'(*, 마겐)에 대해서는 18:2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3:21]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 본절 초두와 중간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가 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즉, 여기에서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한 결과가 기쁨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한편, `성호'에 대해서는 20: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3:22]
주제1: [우주적 찬양에의 초대]
주제2: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 이는 결론적인 기도이다. 여기서 `인자하심'(*, 헤세드)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들이 이미 경험한 사랑이기도 하다. 이 사랑에 호소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될 것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성 경: [시34:1]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찬양과 간증]
⭕ 항상 송축함이여 - 삶의 모든 정황 속에서, 즉 번성할 때나 실패해서 곤고함에 빠져 있을 때, 안전할 때나 위험할 때, 그리고 기쁠때나 슬플 때에도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여호와의 자비를 감사한다는 뜻(Barnes)이다. 공개적인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본 34편을 선포적 찬양시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다(A. P. Ross). 본 시편의 저자 다윗이 이 같은 감사의 시를 짓게 되었던 시기는 제목에서 읽을 수 있듯이 사울에게서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으나 거기서도 안전하지 못하여 침을 흘리는 등 미친 체 하여서 그곳을 빠져 나온 후였다(삼상 21:10-15, J. A. Alexand er). 여기서 아기스(삼상 본문에는 아비멜렉이 아니라 아기스가 가드 왕으로 되어 있다)가 아비멜렉으로 읽혀지고 있는 점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은 없다. 왜냐하면 삼상 본문에서는 애굽의 `바로'와 같이 어떤 왕조의 이름이나 왕가의 칭호를 따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J. A. Alexander, Kirkpatrick, Keil & Delitzsch).
성 경: [시34:2]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찬양과 간증]
⭕ 여호와를 자랑하리리 - `자랑'에 해당하는 원어 `할랄'(*)은 `빛내다'. `밝히다', `찬양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인간적 우월함이나 교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을 주(主)로 고벡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한다(렘 9:24). 이러한 시인의 고백은 신약 시대에 있어 성도들이 십자가의 의미와 도리를 자랑하겠다는 의지와 일맥 상통하는 서원이다(갈 6:14).
⭕ 곤고한 자 - 일차적으로는 고통을 통해 인내를 배운 자들을 뜻한다(Keil). 본시가 기록된 배경(1절 주석 참조)을 고려한다면 저자가 의도했던 이 `곤고한 자'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서 고통을 모르는 자들과 대비되는 `사회 하류 계급'으로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인 듯하다. 그러나 이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서 말하는 곤고한 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9:12), 온유한 자(25:9), 어린아이(눅 10:21)등은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로서 유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 등과는 대비되는, 겸손히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들임을 알 필요가 있다.
성 경: [시34:3]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찬양과 간증]
⭕ 광대하시다 하며 - 이에 해당하는 문자적인 뜻은 `위대하게 만들다'인데 이는 하나님을 위대한 분으로 간주하고 대우하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처했었던 것과 유사한 어려운 환경에 처했던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위대한 분으로 여기고 그분을 대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편, 시인의 이와 같은 표현은 최소한 인간의 모습과는 반대인 하나님의 존재를 매우 생동적이고 웅장하게 묘사한다. 이념의 위대성을 드러낸다(A. A. Anderson).
성 경: [시34:4]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찬양과 간증]
⭕ 구하매...응답하시고 - 저자 다윗이 사울의 박해에 직면하고 아비멜렉 혹은 아기스의 땅에서 피난처를 찾았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당시 다윗은 자신의 지혜나 어떤 수단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와 안내를 구하여 위기를 해결하였다. 본시의 저자는 이 사실을 상기함으로 하나님만이 신뢰의 대상이며 그분만이 기도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다.
⭕ 모든 두려움 - 두려움의 구체적인 실체는 다윗을 해하려고 찾아다니던 대적들임에 분명하다. 아울러 여기서는 그러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적들 외에도 그들로부터 쫓기고 핍박 당하는 외로운 종류의 공포와 망상들 곧 보이지 않는 그 무엇도 함께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Kidner).
성 경: [시34:5]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찬양과 간증]
⭕ 저희가 - 어떤 학자는 여기의 `저희'를 본 시편을 읽게 될 청중으로 보기도 한다(J . Stott). 그러나 본 시편이 분명한 역사적인 베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과 본시의 문맥을 중시할때, `저희'란 다윗이 사울과 아비멜렉을 피하여 도망한 후 아들람 굴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로 내려온 `그의 동료들'로 보는 것이 무난한 듯하다. 한편. 그 당시 그에게 모여든 자들은 그의 동료 뿐 아니라 환난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삼상 22:1, 2).
⭕ 앙망하고 광채(光彩)를 입었으니 - `앙망하다'란 바라보다는 뜻이다. 아마도 저자 다윗은 관심을 자신에게로 부터 갑자기 자기와 동일한 운명에 처했던 자에게 돌리면서 그 당시 그들이 근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사실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광채를 입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하르'(*)는 `함께 모여들다', `모이다'(사 2:2; 렘 31:12). `빛나게 되다'의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 `빛나게 되다'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빛이 나도록 한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수동태의 `광채를 입었으니'라는 개역 성경의 번역은 무척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다윗과 동일한 운명에 처한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동시에 그 사실이 그들의 얼굴 빛을 환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 부끄럽지 아니하로다 - 다윗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바라고 의뢰한 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거나 실망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후회하지 않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치 아니하고 도리어 그 결국이 기쁘리라는 사실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22:5; 롬 9:23; 요일 2:28).
성 경: [시34:6]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찬양과 간증]
⭕ 이 곤곤(困苦)한 자 - 저자는 타인의 모습에서부터 다시 자기 자신의 특정한 경험으로 돌아오고 있다. 여기서 강조점은 `곤고한'에 두어져 있는데 2절에서 지적하였듯이 영역본에는 `poor'로 되어 있는 이 말은 영어 표현 그대로의 물질의 빈핍이라는 의미에서의 `가난한'이 아니라 고통당하고, 쫓기고, 버림받았다는 의미에서의 `비참한'을 뜻한다(Anderson, Kidner).
⭕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 단순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간절한 기원에 응답하셨다는 의미이다.
성 경: [시34:7]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찬양과 간증]
⭕ 여호와의 사자 - 이를 여호와 자신으로 보는 견해(Von Rad)도 있으나 이는 여호와께서 보낸, 그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파송받은 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J. A. Alexander, Kidner). 한편, `둘러 진치고'라는 표현이 뒤따르는 것으로 보아 이 천사는 여러명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의 사자는 복수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무리를 집합 단수 명사로 나타낸 듯하다. 물론 천사의 무리를 복수로 표현하는 곳도 성경에는 있다(히 1:14).
⭕ 둘러 진치고- 문자적으로는 `텐트를 세운다'는 뜻이나(창 26:17; 출 13:30; 17:1) `방어하다', `보호하다'의 의미도 갖는다(슥 9:8). 본 시편의 배경이 위경(危境)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편임을 고려할 때, 본절은 `보호하다', `방어하다'로 이해함이 무리가 없는 듯하다(삼상 22:1, 2 참조).
성 경: [시34:8]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맛보아 - 원어는 `타암'(*)으로 `어떤 식물의 맛을 보다'(욥 12:11), `분별하기 위하여 약간 먹다'(삼상 14:24, 29, 43; 욘 3:7), `마음으로 인식하다', `노력하다', `경험하다'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시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생생하게 느껴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이 포함된 문장이 청유형임을 보아 그 대상은 시편 기자와 유사한 환난을 경험하고 있는 어떤 회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그에게 피하는 자 - 영역본에는 각각 `그를 의뢰하는 자'(KJV), `그에게서 피난처를 찾는 자'(NIV, RSV)로 되어 있는데 평행구를 고려할 때 전자가 바람직하다(2:12).
성 경: [시34:9]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성도들아 - 성도들이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사랑하는 자', 즉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을 뜻하는데(잠1:7; 9:10)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특히 본 시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사실들이 진리임을 개인적으로 경험하였었던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명하고 있는 본절의 '경외하라'란 계속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자는 뜻으로 보아야만 한다.(J. A. Alexander)
⭕ 부족함이 없도다 - 성도의 모든 필요가 풍성히 공급되리라는 것, 즉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의 실제적인 모든 필요의 문제가 곧 타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이 언급을 절대적, 보편적 진리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이 언급이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자는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의복과 안락한 집을 보장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에 대한 영적인 그리고 일시적이긴 하지만 물질적인 축복을 보증하고 있다.(사33:16) 그렇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의 뜻은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에 대해 시기적절하게 해결해주심과 아울러 금생과 내생에서 누리게 될 영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딤전4:8)
성 경: [시34:10]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젊은 사자 - 이에 대해서는 (1) 힘센 육신 동물로서 능히 스스로 자신의 먹이를 찾을 수 있는 동물(Kirkpatrick)로, 또는 (2) 어린 사자, 즉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 없어서 어미 사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동물(Keil, Barnes)로 해석하는 두 견해가 있다. 그런데 본 문맥이 여호와에 대한 의존, 의뢰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후자가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어린 새끼 사자가 강한 어미 사자를 의존하듯, 인간적인 강한 그 무엇을 의존하는 자는 잠시 풍족할 수 있으나 그 의존의 대상이 사라지면 곧 궁핍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편, 시편에는 많은 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동의적 개념 대신 반의적 개념이 대비적으로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대구법을 반의적 대구법이라고 부르는데 본절의 경우를 바로 이것이 적용된 예로 볼 수 있다(잠 10:1).
성 경: [시34:11]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소자(小子)들(*, 바님) - 원어는 `아들'이란 뜻. 그런데 본절을 저자가 갑자기 자기 아들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대신 본 용어가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를 고려하여 보면(Jamison, Fausset, Brown) 이러한 말은 이제 들려 주게 될 이야기가 중요하므로 앞으로 진행될 교훈에 바짝 귀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기 위하여 사용한 호칭으로 보인다(잠 1:8, 10).
성 경: [시34:12]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 `생명을 사모하고'가 `살기를 소망하고'를 뜻하고 `장수하여'가 문자 그대로 `오랫동안 사는 것'을 뜻하므로(원래의 문자적 의미는 `많은 날들을 사랑하다'임)이 구절들은 결국 `장수한다'는 뜻의 강조형이라고 할 수 있다(시편에서 유사한 개념의 반복은 강조이다). 사실 땅 위에서 오래 살고 싶은 소망은 인간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그것을 바라는 일은 결코 악이 아니다. 분명 성경은 장수를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엡 6:1-3). 저자는 이 같은 모두의 관심사에 대해 운을 떼므로써 청중으로 하여금 이어질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있다.
성 경: [시34:13]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혀를 악에서 금하며 - 먼저 장수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혀를 악에서 금하고 억제하는 것, 즉 진리가 아닌 헛된 말을 삼가하는 것이다(잠 13:3; 21:23; 약 1:26 ). 이어지는 조건인 `입술에서 궤사한 말을 금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Barnes, Briggs). 13, 14절에서 제시되고 있는 장수의 조건은 말과 행위에 있어서의 악으로부터의 억제, 경계(약 3:2-12)가 장수의 첫 번째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언어 사용 및 억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더 실감케 한다.
성 경: [시34:14]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선을 행하며 - 선을 행위로 나태내는데는 크게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소극적인 의미의 선행은 `윤리적인 악을 범하지 않는 것', 즉 `악을 버리는'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의 선행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의를 행하는 것'(37:27, 28)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적극적인 선행을 정의한다면 이웃과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하여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목, 평화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화평을 찾아 따르는'이다(롬 14:19; 히 12:14).
성 경: [시34:15]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여호와의 눈은...향하시고 - 여호와의 눈이 특정의 대상을 향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보호하고 지켜 준다는 뜻이다(욥 36:7). 그런데 장수하기를 원하는 자를 겨냥하는 권고가 계속되고 있는 본 문맥을 고려할 때 이 대상이란 막연하고 추상적 개념의 그 누구가 아닌 언행에 있어서 소극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12-14절).
⭕ 그 귀는...기울이시는도다 -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어려움과 위험에 처한 자들을 들으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이 모든 진리들은 기자 자신의 경험의 결과로서 진술되고 있는 것 같다. 다윗은 위험속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계시던 하나님의 눈을 목격한 바 있고 그가 불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 귀를 여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6절). 이제 그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서 생명을 보존하고 번영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를 꾸준히 추구하는 일임을 본시의 저자인 다윗은 다른 사람들에게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34:16]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여호와의 얼굴 - 본절은 바로 앞절의 `여호와의 눈'과 유사성이 있다. 말하자면 의인과 악인은 하나님의 눈 아래 동일하게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일한 하나님의 눈이 전자에게는 보호의, 그리고 후자에게는 심판으 의미가 있다. 그 어느 쪽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항상, 그리고 어느 상황에서도 그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보신 바 되고 있는 것이다.
⭕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 의인에 관해 말할 때는 `향하시고'였던 반면 행악하는 자, 즉 악인에 대해서는 `대하사'로 적고 있다. 영역본에서도 이를 각각 `upon'과`again - st'로 구별해서 번역하고 있는데 `대항하다'(against)는 말 속에는 `악인들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Barn es).
⭕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 `자취'에 해당하는 원어 `제케르'(*)가 `기억하다', `회상하다'임을 고려하여 본문을 직역하면 `저희에 대하여 기억하는 바를 땅으로부터 끊으려'가 된다. 그런데 구약에서 어떤 존재에 대한 기억을 땅으로부터 끊는다는 표현은 그 존재가 다른 이웃에게서 `완전히 잊혀진다', 혹은 어떤 공동체에서 `제거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109:13; 잠 10:7). 그런데 이것에 근거하면, 특히 `제거되다', `죽음을 당하다'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보면 13, 14절에 기록된 말과 행실에 있어서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즉 본절의 행악하는 자는 빨리 죽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특히 인간 장수에 대해 논하고 있는 문맥에 비춰 보면 더욱 그러하다(12절에서 시작됨). 그러나 이 결론은 현실에 엄밀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학적으로 보아도 악인으로 장수하는 자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례다면 본절의 `악인이 공동체에서 잊혀지고 제거된다'는 말은 악인의 영적 생명에 관한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장수'란 단순히 땅 위에서 오래 사는 것뿐 아니라 사후에 영원히 사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추가적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성 경: [시34:17]
주제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 의인이 외치매...들으시고 - 의인이 누리는 혜택 혹은 받은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 분께 부르짖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본 시의 기자가 감사의 시 속에서 새삼 강조하는 것은 의인의 간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함인 듯하다(잠 15:29).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윗 자신이 경험한 구원의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인 듯하다.
성 경: [시35:1]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나와 다투는 자 - 제목이 분명히 제시하고 있듯이 본 시의 저자는 다윗이며 그 내용은 다윗이 자신의 대적들에 대하여 읊은 일종의 저주시라고 할 수 있다. 본 시편에 등장하는 가윗의 대적이란 사울이나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압살롬 혹은 그의 음모에 공모하였던 하나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삼상 24:15에 근거하여 여기 나오는 다윗의 대적을 사울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곳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과 사울사이에 재판장이 되셔서 옳고 그름을 판결해 달라고 호소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사용된 `판결하다'는 법정 용어가 본절에 나오는 `다투다'는 단어와 유사하기에 이 사실을 근거로 들어 다윗의 대적을 사술로 보는 것이다(두 용어의 유사 의미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주석을 참조). 그러나 이 견해는 신빙성이 없는 듯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본 시편에는 대적에 대한 다윗의 비통해 함, 원한등을 엿볼수 있게 하는 구절들이 있는데(4, 7, 8절 등)다윗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가 사울에 대해 어떤 비통한 감정을 갖거나 그것을 표출한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에 대한 개인적 악감정을 표출하는 것과 사울을 위시한 불의한 핍박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 이 대적을 사울로 보는 것도 무리는 없을 줄로 생각된다.
⭕ 다투시고...싸우소서 - `다투시고'에 해당하는 원어는 `리바흐'(*)인데 이 말은 법정적 용어이므로 `변론 하시고'로 번역될 수 있다(A. Clarke). 그리고 `싸우소서'를 가리키는 원어 `르함'(*)은 전쟁 용어로 개역 성경을 그대로 따라서 번역하거나 `전투하소서'로 번역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용어는 대체로 수동태로 사용되는 단어이나 여기서는 능동태로 쓰이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Perowne, Delitzsch). 즉, 저자는 마치 자신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탄원하듯 본 시롤 시작하고 있으며 능동태의 은유적인 전쟁의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그의 대적들에 대한 변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되 강한 주도권을 가지고 힘있게 밀어붙여 완승을 거두실 것을 소원하고 있다. 한편, 시(詩)에 있어서의 이러한 표현 기법은 고대(古代) 전승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24:8; cnf 15:3, Weiser).
성 경: [시35:2]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 방패는 `마겐'(*)으로 `작은 방패'를 뜻하고, 손 방패는 `친나'(*)로서 `온몸을 덮을 수 있는 큰 방패'를 뜻한다. 하나님을 인간 장수(將帥)가 사용하는 작고 큰 방패를 사용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신인 동형론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기법은 이미 모세 오경에서 자주 사용되어졌었다. 한편, 이러한 신인 동형론적인 기법은 그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밝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게 하려는 목적 때문에 사용되었다(출 15:3; 신 32:41).
성 경: [시35:3]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길을 막으시고 - 여기의 `길'은 원문에 없는 것이며, `막으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고르'는 문 따위를 `닫다', `걸어 잠그다'를 뜻한다. 본 용어의 용례에 의하면 본 표현의 의미는 박해하는 자들의 방편을 무색케 하며, 효과가 없게 해 달라는 것이다(Barnes).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 너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해 달라는 것, 즉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보증해 달라는 뜻이다. 성도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마음에 평정을 가져다 주는 이와 같은 확신울 원하며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는 자에게 제공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개인에 대한 전 구원 계획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Barnes).
성 경: [시35:4]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 본절에서 부터 8절까지에서 저자는 자신과 이스라엘 전체 운명에 치명타를 가하려고 하는 반역자들 위에 수치스러운 패배가 임하기를 저주하고 있다.
⭕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 저자 자신을 모해(謀害)하려는 반역자들의 계획을 방해하셔서 그 계획을 좌절시킴으로써 그들이 실망하고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미루어볼 때 결국 본절에는 동일 개념의 대구가 반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35:5]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바람 앞에 겨 - 악인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표현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표현은 돕는 자가 없는 상태와 무가치한 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A.A. Anderson, J. A. Alexander). 한편, 1편에서도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였다(1:4).
⭕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 천사로 하여금 그 대적들을 쫓아내고 흩어지게 해달라는 뜻이다(34:7). 성경에서 천사는 흔히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악한 자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고용된 중개자로 묘사되고 있다(삼하 8:16; 왕하 19:35; 대상 21:12,30; 사 37:36).
성 경: [시35:6]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어둡고 - 먼저 저자는 대적의 길이 암흑이 되게 해달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앞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들어 달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앞에 무엇이 있고 어떠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체 밤길을 방황하는 자들의 모습을 연상케 된다(Barnes).
⭕ 미끄럽게 하시고 - `미끄럽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할라코트'(*)인데 여기서는 어미의 중복형인 `할라클라코트'(*)가 쓰여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따라서 `굉장히 미끄럽게 하시고'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충실하다고 하겠다. 앞 구절에서 대적의 운명은 밤길을 헤매는 것에 비유되었는데 이제 그들이 발고 있는 땅의 형편이 굉장히 미끄럽다는 악조건이 하나 더 추가됨으로써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좀더 분명히 실감케 된다.
⭕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다르게 하소서 -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것과 같으며 그 땅이 굉장히 미끄럽기까지 한데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악인들의 파멸 작업을 마무리 하기 위하여 그들을 추격하는 천사의 이미지는 대적의 완전한 멸망을 상상케 한다(J. A. Al exander).
성 경: [시35:7]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무고히...무고히 - `이유없이' 본절에서 두 번 그리고 19절에서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이 단어는. 11-18절에서 좀 더 충분하게 표출되고 있는 다윗의 고통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부당한, 그리고 애매한 고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죄없이 고난 당하신 메시야를 연상케 된다(벧전 2:19). 그렇다면 본 시편을 쓸 때 다윗은 미래에 성육신하실 메시야를 염두에 두지 않았나 하는 추론까지 가능케 되며, 그 경우 본 시도 메시야 시편으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견을 제기해 본다(D. Kidner).
⭕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 `그물을 웅덩이에'(*, 솨하트 리슈탐)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들 그물의 웅덩이'인데 이것은 짐승을 잡기 위하여 그 안에 그물을 깔고 그위에는 무엇으로 살짝 덮은 웅덩이를 가리킨다. `함정' 역시 `솨하트' (*)로 웅덩이와 동일한 것이다(Perowne).
성 경: [시35:8]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졸지에 - `알지 못하는 때에'. 멸망이 생각지도 못했고 예상하지도 못한 때에 대적에게 임하게 해달라는 뜻이다.
⭕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 여기서 다윗은 그의 대적들이 그를 모해하기 위하여 계획했었던 바가 그들에게 임할 것을 기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7:15, 1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35:9]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 4-8절에서 자신을 대적하는 세력의 몰락을 갈구했던 다윗은 돌연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시편 기자를 비롯한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표현하는 시의 독특한 기법으로 그들은 역경으로 인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역경 극복을 간구하는 탄원 중에서도 종국적 구원을 찬앙하곤 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다윗이 경험하였던 것보다 더 큰위기를 만났었던 모세도 `하나님 같은 이가 또 어디 있으리'라는 찬양을 하나님께 올린 바 있고(출 15:11), 신약의 바울 또한 자포자기의 순간에 죽음으로 부터의 부활을 기억함으로써 소망을 회복한 기록이 있다(고후 1:8-10). 한편, `내 영혼이'라는 표현은 `나', `나 자신'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볼 수 있는 표현으로(6:2, 3) `나의 뼈'(10절)와 함께 사용된다. 이것은 진술한 사실에 대한 저자 자신의 확신을 보여주는 시의 표현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D. Kidner).
성 경: [시35:10]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 `벼'를 `영혼'과 동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바 이는 전인(全人)을 강조하는 저자 자신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Briggs, Kidner), 51:8의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를 근거로 해서 볼때 하나님의 구원 하심을 생각하니 고통과 위험 가운데서 부서지고 어그러진 것 같았던 뼈들이 다시 힘이 생기고 기쁘다는 의미의 `내 모든 뼈'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Barnes). 이 두 해석 중 어느 해석을 취해도 무리는 없다. 그것은 두 해석이 다 성경적 근거 구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 진정한 구원자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찬양의 노래이다. 성경 저자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때 선조들의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다윗의 선조인 모세는 이미 총체적인 의미의 구원의 주(主)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만이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밝힌 바 있는데(출 15:11), 본절의 다윗은 이러한 모세의 경험을 기억하면서 본 표현과 같은 찬양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 틀림없다. 또한 다윗의 후대 사람인 이사야의 글(사 40:18)에서도 우리는 그와 유사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성 경: [시35:11]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불의한 증인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마스'(*)로 `사악하고 불법적인 증인'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가 "너는 허망한 풍설(風說)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誣陷)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라는 본문에 동일하게 사용됨을 보아 `불의한 증인'이란 근거도 없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그 대상을 궁지에 몰아넣는 둘 이상의 불법한 거짓 증인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Anderson, Perowne).
⭕ 알지 못하는 일...힐문(詰問)하며 - `알지 못하는 일' 이란 마음에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전혀 지식이 없는 어떤 일을 말한다. 또한`'힐문'은 재판 용어로 검사가 피고인에게 `묻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는 이 표현들에서 다윗의 대적들이 다윗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을 하지 않았느냐고 거칠게 묻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는데 사실 다윗은 그 생애에 있어서 거짓된 고소에 의해 많은 고통을 당했었다(삼상 24:9).
성 경: [시35:12]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자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나의 영혼이 ...을 잃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상 속에서 홀로라는 저자의 외로움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친구 없는 자들을 돕고 고통 당하는 자를 위로하기를 애썼던, 그리고 남을 위하여 진실되게 기도하였던 자신을 모두가 버렸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Perowne).
성 경: [시35:13]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 이에 대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 정도로 나뉜다. 첫째는 `나의 머리를 나의 가슴에 박고 기도하였다'라는 것으로 기도의 자세에 초점을 맡추는 해석인데 이것은 왕상 18:42을 근거로한다(Notscher, Kraus, De Wet te). 둘째는 `자신을 위한 간구와 동일한 내용으로 대적을 위해 간구하였다'라는 해석이다(Jarchi). 셋째는 `대적을 위하여 행한 기도가 결국에는 자신의 유익으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이것은 이웃을 향해 복을 빌었을 때 그 이웃이 그것을 거절하면 기도자에게 그 복이 돌아온다는 신약의 가르침에 그 근거를 둔다(사 10:13; 눅 10:6, Alex ander). 그리고 넷째는 `대적들의 고통을 생각하므로 기도가 고뇌의 짐에 눌리듯 시행되었다'는 해석이다. 이 네 번째 해석이 그 가운데서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Bar nes). 물론 세 번째 해석도 매우 논리적인 설득력이 있으나 기도의 동기가 결국에는 이기적이었다는 인상을 주는 듯하므로 타당치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대적의 아픔, 고통을 자신의 아픔, 고통으로 알고 기도하는 기도자의 마음이 강조되고 있는 문맥을 중시할 때 네 번째 해석은 다윗의 심경을 잘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성 경: [시35:14]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굽히고 슬퍼하기를 - `슬퍼하기를'은 `코테르'(*)로서 슬픔의 외적인 표시 , 예를 들면 깎지 않은 수염, 씻지 않은 얼굴 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것들은 근동 지역에서 애곡하는 모습의 외면적인 특징들이었다(읍 1:20, Perowner).
성 경: [시35:15]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비류 - 70인역(LXX), 시리아역 그리고 벌게이트역(Vulgate)등은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케'(*)를 `저주스러운 것', `두통거리'(*, 마스티게스)로 번역하고있다. 이들 역본을 따르면 이 용어는 `낮은 사람', `천한 사람', `사회의 버림을 받은 자'등이 되겠다(Barnes). 그러나 이러한 번역들은 본 시의 전체 문맥에 어올리지 않아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본 단어는 `나카'(*), 즉 `두들기다', `때리다', `치다'에서 유래한 용어로 `때리는 자', `치는 자'등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번역은 본 문맥과도 잘 어올려 전자의 해석이 타당치 않음을 잘 보여준다(Perowne). 그런데 여기의 때리고, 치는 수단은 `혀'인데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본다면 `비류'란 혀로 남을 중상하고, 욕하고, 모욕하는 자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 마지 아니하도다 - 멈추지 아니하였다는 뜻. 다윗의 대적들의 중상모략 행위는 단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쉬지 않는 계속적 행동이었다.
성 경: [시35:16]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대적들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
⭕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 여기의 `망령되이'에 해당하는 원어 `하네프'(*)는 `불경스러운', `경건하지 못한', `파렴치한'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만취된 술 좌석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조롱하는 자'란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해석할 수 없는 구절이다. `조롱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에그' (*)는 `더듬더듬 하는자', `외국말을 하는자', 더 나아가서 `농담하는 자', `조롱하는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연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마오그'(*)는 원래 `빵, 케이크 한 덩이'의 뜻으로 빵이나 떡 등을 차려 놓은 식탁을 가리킨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서 고려할 때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란 좋은 식사를 돕기 위하여 부자의 식탁 주위를 서성거리며 농담을 들려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의 부자들은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갖기 위하여 돈을 주고 농담꾼, 익살꾼을 고용하여 자신들이 식사하는 동안 식탁주위에서 그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게 하였는데 농담꾼들은 때로 서툰 외국말을 흉내 내거나 저질의 음담 패설(淫談悖說)등으로 부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곤 하였다고 한다(Perowne). 아무튼 이 구절은 다윗의 대적들이 음모를 꾸미는 과정에서 주모자에게 그 음모가 성공하리라는 등의 아부성의 발언을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 그 이를 갈도다 -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분노 혹은 진노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욥 169; 마 8:12; 13:42, 50; 22:13; 24:51; 25:30; 눅 13:28). 즉, 이것은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그 과정에서 때로 분노하기도 하면서 음모의 성공을 기약했던 것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성 경: [시35:17]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유일한 것 - 영역본에는 `사랑하는 것'(KJV, darling; NIV, precious)으로 번역된 동일 구절의 `내 영혼'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이 단어는 22:20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70인역(LXX )에서도 `나의 하나뿐인 것'(*, 텐 모노게네 무)으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고 사랑스러운 딸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11:34) 이 용어를 유일할 뿐 아니라 사랑스럽고 귀한 `생명'으로 번역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성 경: [시35:18]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 이는 9, 10절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구절로 비애의 탄원에 이어 분명한 구원을 내다보고 드리는 감사의 찬양이다. 더구나 여기서는 `교회'(*, 에클레시아) 가운데서 찬양을 드리고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경험을 다수, 단체의 경험으로 확대하는, 즉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경험을 더욱 중시하는 본 시편 저자의 의중을 잘 그리고 있는 표현법이다(18:49; 22:25).
성 경: [시35:19]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 - `무리하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케르'(*)는 `어떤 정당한 이유가 없이'라는 뜻이며 바로 이어지고 있는 `무고히'와 분명한 평행을 이루는 단어이다. 즉, 다윗은 본절에서 그의 대적들이 정당한 이유도 없이 자신을 대적한다고 토로하는 것이다(마 5:11). 다윗은 그가 그들에게 어떤 잘못된 일을 한 적이 없음을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기에 본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기만을 바라는 기도로 볼 수 있다(Barnes).
⭕ 눈짓하지 - 원어의 일차적인 뜻은 `자르다', `산산이 부수다'인데 동일한 표현의 잠 16:30을 고려할 때 이는 남에게 해악, 손해를 끼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Gesenius). 그러나 동일 구절의 `기뻐하지'가 이 단어와 평행임을 생각할 때 대적이 숭리하여 기쁨의 눈짓을 보내는 일이 없도록 그들로 하여금 패배케 해 달라는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 경: [시35:20]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 다윗의 대적들이 이웃과 좋은 말로 대화하는 것을, 혹은 주위의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자들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그들은 싸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오늘날 이런 자들을 싸움장이라고 부른다(Barnes).
⭕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 - `평안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게아'(*)로서 문자적인 뜻으로는 `겁많은', `소심한'이다(사 28:12; 렘 6:16). 따라서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란 일차적으로 소극적이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Barnes). 그러나 본 문맥과 이 원어의 의미 범주(conn otation)를 고려할 때 `다른 사람과 다투고 경쟁하기를 원하지 않는 기질의 사람들'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이런 류의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35:21]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하하 - 원어는 `헤아흐'(*)로서 기쁨의 탄성인데 특히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고 음흉하게 즐거워하는 탄성이다(겔 25:3, Keil & Delitzsch). 뿐만 아니라 이는 사악한 승리자의 탄성이기도 하다(10:13; 28:3). 더 나아가서 이 탄성은 십자가 아래서 예수께 온갖 조롱을 퍼부으며 희희낙락했던 자들의 탄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눅 2 3:35-37).
성 경: [시35:22]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잠잠하지 마옵소서 - 말하자면 대적들을 꾸짖고 징벌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호소라고 볼 수 있다(Jamison, Fausset, Brown).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꼭 개입하셔야 할 고통스러운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개입하지 않으실 때 터뜨릴 수 있는 탄성으로 그 고통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10:1). 주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라고 외치셨는데, 이 탄성은 시편의 예언(22편)을 응하게 하는 탄성일 뿐 아니라 고난의 절정에 신성(神性)을 입으신 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성(人性)을 입으신 인간이셨던 그분이 느끼셨던 절망감, 외로움이 얼마나 심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탄성이기도 한 것이다.
성 경: [시35:23]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떨치고 깨셔서 - 마치 잠에서 깨어 일어나듯 빨리 일어나라는 것,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인간인 양 표현하는 이러한 기법을 신인 동형론이라고 부른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기법을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대개 절박하게 하나님의 구원, 도우심이 요구되는 때에 이러한 표현을 했다(3:7; 44:23).
⭕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頌辭)를 다스리소서 -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셔서 자신의 송사를 처리하여 달라는 청원. 하나님은 당신의 율법을 따라 땅위의 모든 재판관을 공의롭게 다스리겠노라고 선언하신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의(義)의 친구가 되시겠다고도 선언하셨는데 여기서 다윗은 바로 그 선언에 의존하여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7:6; 94:1, 2).
성 경: [시35:24]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주의 공의(公義)대로 - 말하자면 이는 `바르고 의롭게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 혹은 그의 의로우심은 공평과 정의에 대한 최고의 표준인데 본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공격을 일삼는 자들을 억제케 하고 자신을 위해 의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그 품성을 명백히 보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어떤 경우든지 우리가 옳고 바를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의 품성을 따라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에 개입하셔서 판결해 주실 것을 기꺼이 요청할 수 있다. 이와같이 우리와 다론 사람 사이의 문제의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그 문제를 청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인 경우 우리는 그분의 공의에 호소할 수 없고 단지 그의 긍휼을 소망할 따름이다. 따라서 어떤 고통이나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문제인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인지를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다(Barnes).
⭕ 저희로...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 대적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게, 혹은 그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공할 경우 그들은 그 결과가 자신들이 옳았기 때문에 거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19절과 비교하라).
성 경: [시35:25]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 문자적인 뜻은 `우리의 즐거움, 우리의 소망이다' 로 원했던 것을 얻었을 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개역 성경의 번역은 무난한 편이다.
⭕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 여기의 `삼켰다'(*, 발라)는 완전한 멸망, 파멸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제사장도 아니면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행하려 했던 고라, 다단 그리고 아비람은 갈라진 땅의 틈 사이로 빠져 땅에 의해 삼키움을 당하고 말았는데(민 16:31-35) 그때에도 동일하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즉, 여기서 다윗은 자선의 대적이 자신을 완전히 멸망시켰다고 기뻐하지 않게 해달라고 청원하고 있다.
성 경: [시35:26]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 - 여기서 `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체테크'(*)는 일차적으로 `공의', `의로움'으로 해석되나 문맥에 걸맞는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문맥이 대적의 방해로 인한 하나님과 저자 사이의 혼란한 삶, 관계를 다루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방해 받지 않는 삶의 방식으로의 회복'으로 해석함이 바람직하다 하겠다(Kraus). 그러한 회복을 원하는 자라면 그와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던 그의 추종자들임이 분명하다(34:5 주석 참조).
⭕ 기꺼이 부르고 - 문자적인 뜻은 `기쁨으로 인하여 소리를 지르게 해달라'이다. 이제 자신을 구원하셔서 자신의 추종자를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기 편이시며 간섭하셔서 당신의 자비로운 역사를 행하시는 분임을 목도케 하심으로써 기뻐하게 해달라는 말이다(Barnes).
성 경: [시35:27]
주제1: [원수들의 멸망에 대한 호소]
주제2: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함]
⭕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 - 여기서 `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체데크'(*)는 일차적으로 `공의', `의로움'으로 해석되나 문맥에 걸맞는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문맥에 걸맞는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문맥이 대적의 방해로 인한 하나님과 저자 사이의 혼란한 삶,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방해받지 않는 삶의 방식으로의 회복'으로 해석함이 바람직하다 하겠다(Kraus). 그러한 회복을 원하는 자라면 그와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던 그의 추종자들임이 분명하다(34: 5 주석 참조).
⭕ 기꺼이 부르고 - 문자적인 뜻은 `기쁨으로 인하여 소리를 지르게 해 달라'이다. 이제 자신을 구원하셔서 자신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기 편이시며 간섭하셔서 당신의 자비로운 역사를 행하시는 분임을 목도케 하심으로써 기뻐하게 해달라는 말이다(Barnes).
성 경: [시36:1]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인간의 사악함]
⭕ 악인의 죄얼이...이르기를 - 매우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는 이 구절은 그 해석이 크게 둘로 나눠진다. 그 첫째는 문자 그대로 '악인의 죄얼'을 주부(主部)로 보는 견해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창 4:7에서 인격화된 죄(죄얼)는 마치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신탁(紳託)을 주시듯 그 죄 자체가 인간들에게 어떤 신탁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을 인정하는 학자듸은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한 인격화된 죄가 인간 다윗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는 것으로 본절을 해석한다(Briggs). 둘째는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생략된 주어 '하나님'을 살려서'하나님께서 악인의 죄얼에 관해 하신 말씀이 내 마음에 있다'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근거는 여기 '이르기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음'(*)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다'의 뜻으로 항상 신적 존재(Divine being), 즉 하나님이 그 주체로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Barnes, Perowne, Delitzsch).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용례로 드는 성경 구절로는 110:1 ; 민 24:3 ; 삼하 23:2 ; 왕상 19:12 등이있다. 이와 같은 견해들 중에 해석의 핵심이 되는 용어인 히브리어 '네움'의 용례를 정확히 찾아내어 그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다윗은 악인의 죄얼(죄, 범죄)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말씀(oracle)을 받고 그것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 죄얼(*, 페솨). - 이는 일반적으로 공개적이고 공공적인 죄를 가리키는데여기서는 그 구체적인 죄행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죄행은 어떤 한가지 죄가 아니라 악인의 인생관 자체이다. 악인의 인생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데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들은 자신의 결국에 당할 일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악행을 하게 된다(Ross).
성 경: [시36:2]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인간의 사악함]
⭕ 스스로 자긍하가를 - 원문의 뜻은 '저가 자기 자신의 눈 안에서 자신에게 아첨하다'이다. 여기서 '자기'란 악인을 가리키며 그 악인의 '눈 안에서'란 그 악인의 '신념대로', '견해대로'란 의미이다(Perowne). 그리고 '자신에게 아첨하다'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악인)을 부드럽게, 간과하듯(여기의 '아첨하다'는 '할라크'(*)로 '부드럽게 간과하듯 대하다'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대하시리라는 기대의 표현이다. 계속 이어지는
⭕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와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 는 것은 악인의 심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상호 연관성 있는 구절인데 본절은 악인의 그 첫 번째 특성을 말하고 있다. 즉, 악인은 자신의 신념 혹은 견해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악을 징벌하여 그것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의 죄악을 찾아내는 일에 있어서 부드럽게 대하시리라고 착각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악인의 마음의 죄라고 할 수 있다(Perowne).
성 경: [시36:4]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인간의 사악함]
⭕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 원문에는 '헛되이(*, 아웬')가 삽입되어 있다.그래서 악인의 행위가 헛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악인의 특성 중의 하나는 대적을 넘어뜨리는 계획이 달성되지 못하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잠 4:16)라는 말씀이 이를 잘 반증한다. 따라서 잠이 오지 않는 밤, 잠자리에서 그들이 할일이란 사특한 음모롤 꾸미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일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 스스로...서고 - 이것은 분별력 없고 성급한 열정이나 순간적인 흥분에 의해서 오는 영향이 아니라 마치 세상 열왕이 결연히 그리스도를 대적하듯이(2:2) 악인이 분명한 어떤 의지, 목적에 이끌려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나서는 것을 가리킨다(Barnes).
⭕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것은 단순히 어떤 성향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이미 침상에서 꾸민 음모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행위를 가리킨다(Derek Kidner). 즉,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악인의 사악한 계획과 그 의지의 실행을 말한다(Perowne). 그러기에 2-5절은 악인의 특성을 다루되 그 마음의 강퍅함의 정도가 심해져감에 따른그 죄성향의 변화, 즉 소극적인 죄행에서 적극적인 죄행으로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성 경: [시36:5]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 본 시편의 후반부 서두라고 볼 수 있는 이 구절에서는 악인의 성품과 정반대적으로 대비가 되는 하나님의 품성이 묘사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 구절의 참뜻은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하늘에 비견할 만큼 지고하다는 것이다.
⭕ 성실하심(*, 에무나) - 이는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겠으나(40:10 ;왕하 12:15 ; 잠 12:22) 그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암시할 때주로 사용되는 언약 용어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실을 상기할 때 '성실하심' 이란 개역 성경의 번역은 무난하다 하겠다.
⭕ 공중에 사무쳤으며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베하솨마임'(*)이기 때문에 '하늘로부터'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Dahood). 그러나 57:10, 108:4 등과 평행구절임을 고려하여 볼 때, '하늘에 뻗쳐 있고'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다(Anderson).즉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성 경: [시36:6]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의 (*, 체데크) - 어원이나 문맥상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이다.그래서 율법, 섭리 집행, 죄로부터의 인간 구원, 율법을 따른 우주에 대한 상벌(賞罰)의 집행 등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평, 정의로 번역함이 옳다(31:1 ; 33:5,Barnes).
⭕ 하나님의 산들 - 80:10의 '하나님의 백향목'과 유사한 표현이다. 이는 묘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품성의 최고성을 나타내려 할 때, 구약 성경의 저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기법이다. 한편, 80:10의 경우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강하고 위대함을 나타내려 했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의 지속성, 영원성을 나타내고 있다(Barnws,Anderson).
⭕ 주의 판단 - '판단'에 해당하는 원어 '미쉬파트'(*)는 문자적으로 선행(先行)의 관습, 공의에 기초한 판결, 변호, 결정 등을 의미한다(Anderson). 그런데 여기의 '판단'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고려해 볼 때, '구원' 혹은 '도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사 30:18). 본 문맥에서는 문자로 계시화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팜결 사례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에 되어질 어떤 경우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아니라 이미 되어진 하나님의 판결로 모든것이 바람직함을 암시하는 것이다(Barnes).
⭕ 큰 바다 - (*, 테홈). 문자적인 뜻은 '큰 깊음', '심연', '깊은 곳'이란 의미이다. 본 시에는 높은 산이 대구로 제시되었으므로 '깊은 바다'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치 깊은 바다 속 밑을 헤아려 볼 수 없듯이 율법에 따라 선악을 판결하시며 당신의 구원 사역을 이끌어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 보호하시나이다 - 원어는 '토시아'(*)로 그 뜻은 '구원하다'이다.본 구절에서 그 대상이 짐승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임을 고려할 때 여기의 구원은 땅, 우주, 사단적 원수 그리고 고통과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자연의 좋은 환경, 안녕, 내외적(內外的) 번영, 토지의 비옥함, 목축과 토지의 양호한 상태 등까지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원하다'라는 표현보다는 '보존하다', '(인간과 동물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할 수 있다(Mowinckel).
성 경: [시36:7]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 '보배롭다'의 원어 '야카르'(*)는 흔히 '훌륭한' '진귀한' '가치있는' '값비싼'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 용어의 주체가 다른 것과 비교도 안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임을 생각할 때, 그리고 이 용어가 '보석'을 가리키는 문맥에서 사용된 사실 뿐만 아니라 값진 돌을 가리키는 문맥에서 사용된 것을 고려할 때 '진귀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다.(왕상10:2,10; 대하3:6)
⭕ 인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브네이 아담'(*)으로 문자적인 뜻은 '인간의 자식들'이다. 한 계통에서 번식되어 온 바를 중시하는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Ba-rned)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모든 세대의 인류는 하나님의 은총의 그늘 아래서 혜택을 누리고 산다.
⭕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 작고 힘없는 어린 새들이 어미새의 날개 아래 보호처를 찾듯이 안식처를 찾아 거한다는 말이다. 이는 보아스가 룻에 대해 말할 때(룻2:12),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관해 말씀하실 때(마23:37)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성 경: [시36:8]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주의 집 -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Gunkel, Le Mat) 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는 일반적인 의미의 여호와 안에서 피난처, 안식처를 찾는 예배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Anderson, J. A. Alexander).
⭕ 살진 것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데쉔'(*)으로서 '기름'(삿 9:9), '기름진것'(63:5), '풍성한 음식'(욥 36:16) 등을 뜻한다. 이것들은 영적 축복(사 55:2) 그리고 좀더 빈번하게는 물질적 축복(65:11)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었다.
⭕ 풍족할 것이라 - '풍족'의 원어 '라와'(*)는 '충분히 마시다' '만족하게되다' 풍성하게 비가 온 후에 '땅 혹은 밭이 물기로 가득 차다' 등을 뜻한다. 그런데 주의 집이 살진 것으로, 즉 예배 공동체가 영적, 물질적 축복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누리게 되는 영육의 축복이 풍성할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 복락의 강수 - 이것은 '그 물줄기가 하나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강'(46:4)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강수'로 번역된 '나할'(*)은 문자적으로 마른 하천 바닥 혹은 우기(雨期) 동안 그 가장자리가 물기로 채워진 골짜기를 뜻하기도 하고 때때로 샘물로 촉촉해진 강둑을 암시하기도 한다(74:15). 그런데 본 구절에서는 아마도 시편기자가 후자의 의미를 마음에 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추측은 성경의 '강둑'은 '언덕'을 뜻하고 여기의 '복락'으로 번역된 '아덴'(*)은 어원적으로 에덴(동산)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절에서 기자가 바라본 축복은 땅 위에서의 영육간의 축복뿐 아니라 주의 재림 후에 성도가 누리게 될 영적 에덴에서의 영원한 축복이라는 종말론적 축복이 되기도 한다(Anderson). 한편, 어떤 학자는 본 구절이 쿰란 문학과 신약에 자주 등장하는 메시야적 잔치(the messianic banquet)의 배경을 제공한다고 믿으나(Dahood), 이에 대한 자세하고 객관적 자료는 빈약하다.
성 경: [시36:9]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생명의 원천 - 결코 끝나거나 다함이 없는 생명의 근원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잠10:11;13:14;14:27;16:22) 물줄기가 그 근원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하듯이 모든 인간 및 생물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근원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란 무가치할 뿐이다.(Barnes) 그 뜻을 분명히 밝히는 동일한 표현의 좀더 완전한 형태는 렘2:13; 17:13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주의 광명 중에 ... 광명을 보리이다 - 전자의 '광명'은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4:6)로도 표현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89:15)을 가리킨다.(Ander-son) 반면에 후자의 '광명'은 '사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49:19; 욥3:16)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풍성한' '만족스러운 삶',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삶'(Dahood)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사53:11) 즉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리시어 그 은총과 사랑을 내리시는 곳, 바로 그곳에 좀더 풍성한 삶,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삶이 있는 것이다.
성 경: [시36:10]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주를 아는 자 - '아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다'(*)로서 언약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약속 맺은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지속적으로 기대하는 자가 바로 주를 아는 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말을 듣는다(Anderson, Huffmon).
⭕ 마음이 정직한 자 - 이러한 사람은 그 의도나 목적에 있어서 순결하며 '거룩한' 자로서(Barens) 시편에서 자주 표현되는 바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이다(7:10).
⭕ 주의 의 - 언약 용어로서 '구원'의 뜻과 더불어 '신실'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것은 구원이 그 근간인 언약적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암시하는 것 같다(Anderson).
성 경: [시36:11]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여호와 인자하심]
⭕ 교만한 자의 발 - 이와 같은 문학적 양식의 표현은 그 발을 피정복자인 대적의 목위에 올려놓곤 하였던 승리한 왕, 혹은 군대 장관의 고대적 행습(行習)으로부터 따온 은유로 보여진다(Dahood). 그러기에 본절은 결국 대적들이 자신을 정복하여 밟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 '쫓아낸다'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성전의 방어벽 혹은 가택으로부터 사람를 쫓아낸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왕하 21:8 욥15:23 ; 미 2:9, Kraus).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막연하게 대적이 손을 사용하여 자신의 생명을 멸하려는 시도를 막아 달라는 것으로 본 구절을 보는 것(Barnes)은 타당하지 않다. 본 구절에서 저자는 분명히 자신이 거하고 있는 구체적인 처소로부터 대적이 자신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성 경: [시36:12]
주제1: [하나님의 인자와 악인의 패역]
주제2: [여호와의 인자 하심]
⭕ 넘어졌으니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노플루'(*)인데 그 형태가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저자가 그의 기도의 응답을 이미 내다보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의 믿음은 그가 구한 기도의 내용이 성취된 양 마치 그 눈앞에 그 성취가 펼쳐져 있는 양 확신을 갖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다.
⭕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 앞에서 언급된 표현의 재확신으로 악인의 멸망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실패하고 좌절해도 끝내는 다시 일어나 영원한 축복에 들어가는 반면에 악인은 이 세상에서 망해도 다시 일어나기 어렵고 종국(終局)에 가서는 영원한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나 1:15).
성 경: [시37:1]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 행악자...불의를 행하는 자 - '행악자'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상하게 하다', '괴롭히다', '깨뜨리다'라는 의미이고, '불의를 행하는 자'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는 '불쾌하게 하다', '와우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을 사람에 대해 사용할 경우,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는 자'들을 총칭한다(28:3 ; 119:3 ; 습 3:5, 13).
⭕ 불평하지 말며 - 여기서 '불평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라'(*)로서 '불타다', '불타오르다', '뜨거워지다' 등을 뜻한다. 이것은 분노가 그 사람을 점점 달아 오르게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인다(창 31:36 ; 34:7 ; 삼상 15:11 ; 삼하 19:43). 본절은 악인의 번영이나 불의를 행하는 자의 성공을 보고 계속적으로 그 분한 마음을 키우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과 그들의 소유는 머지않아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분한 마음을 갖는 일은 여호와의 공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 것괴 상응한 일이된다(37;3). 본절과 글자까지도 동일한 내용을 잠 24:19에서 찾아볼 수 있다(A. A. Anderson, D. KIDNER).
성 경: [시37:2]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 풀...푸른 채소 - 일시적인 것 특히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일으키지 않으시는 무상한것을 묘사하는 직유(直兪)로 흔히 사용되는 용어들이다(90:5 ; 103:15 : 129: 6 ; 사 40:6 ; 마 6:30 ; 약 1:10, 11).
⭕ 속히 - 문자 그대로'재빨리', '신속히'란 뜻으로 당장 시작하지는 않지만 일단 시작이 되면 신속히, 곧 처리될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부사이다.
성 경: [시37:3]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 땅에 거하여 - 이를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쉐콘 에레츠'(*)로 문자적인 뜻은 '땅에 거하라'늘 명령이다. 그러나 '땅에 거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특별한 축복(25:13 신 33:28)임을 고려할 때 본 표현은 바로 앞 문구에서 주어진 명령에 대한 이행의 결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래서 '그리하면 땅에 거하게 될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의 유언성을 위해서도 좋다(Perowne, Anderson). 그렇다면 이에 이어지는
⭕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 도 동일하게 전제된 명령의 이행에 따른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아주 다양하다. 즉,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르에 에므나'(*)인데 이는 (1)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품다'(합 2:4), (2) 진리와 신실함을 '소중히 여기다' 혹은 '기뻐하다'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3) '안전 보장을 즐거워하다 혹은 기뻐하다', 고(4) 안전 보장 속에서 양육되다' 등으로 해석된다 이중 유력한 혜석은 문맥의 흐름과 타 구절(사 33:6)의 지지를 받는(3)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결국 본 구절은, 여호와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는 행악자와는 달리(1, 2절 주석 참조) 땅 위에서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안전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게 될 것임을 가르쳐 준다.
성 경: [시37:4]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 여호와를 기뻐하라 - '기뻐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그'(*)는 '부드럽다','유연하다', '즐거워하다'란 뜻이다. 그래서 본 표현은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기쁘게 됨'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본 히브리어의 어원을 '분투(奮鬪) 이후에 찾아오는 어떤 기쁨, 희열'로 보는 견해도 있다(D. Kidner). 또한 '너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지는것을 허락하다'를 뜻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VonRad). 이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 하고 기쁨을 발견하는 삶을 살 것을 권하는 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욥 22:26 ; 27:10 ; 사 58:14).
⭕ 네 마음의 소원 - 이러한 사실은 오직 백성의 소망과 기대를 이루시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20:4 ; 21:2 ; 마 5:33 ; 눅 12:31).
성 경: [시37:5]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 '맡기라'는 '갈랄'(*)로서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굴리다', '흘러 내려오다', '신뢰하다' 등이다(22:8 ; 잠 16:3 ; 벧전 5:7). 그리고 '길'은 삶의 모든 여정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 즉 계획들이나 행동들, 그 계획에 따르는 잇슈(issue)들이나 결과들을 가리킨다(10:7) 한편, 세상 사람들은 이것들을 운명이라고 부르지만(Anderson), 신앙인에게는 오직 이것이 여호와께만 있음을올 믿는다.
⭕ 저를 의지하면 -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너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방법들에 맞추면'(잠 16:20 ; 28:26)이다.
⭕ 저가 이루시고 - '이루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아세'(*)로 문자적인 뜻은 '...에게로 돌리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살면 그에 따른 혜택을 그에게 돌리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혜택이란 복된 결과의 보장, 유익을 지켜줌, 해받지 않음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Barnes).
성 경: [시37:6]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 네 의 - '미쉬파테카'(*)로서 문자적인 뜻은 '의', '재판', '정당함' 등이다. 인간의 삶을 살펴볼 때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하여 잠시 동안 진정한 삶의 가치가 불투명해 보일 수있지만, 여호와께서 언약 관계에 있어서 책임을 완수하실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알려진 그분의 약속에 의거한 축복 혹은 저주를 판결 받듯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사 62:1).
⭕ 빛같이 - 하나님의 중재 및 간섭은 어두움 속에서 드러나는 빛의 모습처럼 분명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욥 11:17 ; 사 58:10 ; 렘 51:10).
⭕ 정오의 빛 - 원어는 '차하림(*)으로 '빛'을 뜻하는데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일차적인 뜻은 '이중의 빛'이 되겠다. 그런데 한편으로 히브리어에 있어서 사물의 복수형은 강조 및 그것의 특성의 강력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따라서 '정오의 빛'은 '가장 분명하고 환한 빛'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좀더 가깝다(A. Anderson,J. A. Alexander).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의, 즉 정당함을 밝힘에 있어 완벽하게 분명하면서도 명쾌히 그것이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합 3:4)
성 경: [시37:7]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 이것은 자포자기나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불평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을 뜻한다. 진정 인간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62:1, 5; 사 30:15).
⭕ 자기 길이 형통하며 - 문자적인 뜻은 '그의 방식에 따라 번영하며'이다. 여기서 본 시편 기자는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성공한자를 염두에 두고있다(73:3). 특히 구약 시대에는 물질적인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였다(욥 42:10).
⭕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베이쉬 오세 메지모오트) - 문자적으로는 '목적을 수행하는 자'를 뜻하는데 문맥에 따라 '그 성격이 수상하고 간교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자'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다(Anderson).
성 경: [시37:8]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 분을 그치고 - 악인이 수월하게 악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을 때, 분노하고 불평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께 대하여 중얼거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순간만 악인의 번영과 성공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이다(Bares).
⭕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 일순간적인 악인의 번영과 성공을 볼 때 분을 품고 노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할 까닭을 설명한 문장이다. 즉, 그와 같은 흥분 상태로 말미암아 자신도 동일하게 어느 사이엔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인의 진영에 들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Anderson).
성 경: [시37:9]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 - 행악하는 자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의 가나안 민족들이 맞았던 것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신 12:29:19:1). 즉, 가나안 족속이 멸망한 것처럼 행악자는 파멸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이다. 왜냐하면 '기대하는'에 해당하는 원어 '카와'(*)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 '대망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표현은 경건한 자로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섬기는 자의 신앙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 땅을 차지하리로다 - 원문에는 '땅' 앞에 '그들'(*, 헤마)이라는 강조사가 있다. 따라서 원문의 감각을 살려서 번역하면 '그들 ! 바로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이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즉 그를 경외하는 자들, 그들만이 진정으로 여호와의 땅에 거하는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잠 2:21 ; 10:30 ; 사 57:13 ; 60:21 ; 65:9 ; 마 5:5).
성 경: [시37:10]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살필지라도 - 이에 대한 원어는 '히트보난타'(*)로 가상의 완료 시제로된 전제절이다. 원문상 본절과 11절은 한 덩어리로서 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 그 주제를 서술하는 전제, 즉 도입 부분이 바로 이 구절이다. 더구나 가상의 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미래에 될 그 일의 분명한 성취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해주고 있다. 성취의 내용은 온유한 자(11절)와는 달리 악인은 땅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원어는 '이해하다',' 숙고하다', '생각하다'로 눈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시37:11]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온유한 자 - 문자적인 뜻은 '겸손한 자'이나 문맥으로 보아 고통받고, 눌리고, 궁핍하고 사회적 신분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겸손한 자로서, 자랑하고 묘만한 악인과는 달리 드러나는 품성에 있어서 대비가 되는 자이다. 이런 자를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로 부른다(Barnes). 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자들이 긍정적인 성품을 유지하게 되는 까닭은 언젠가는 도래하게 될 완전한 공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바라고있기 때문이다. 마 5:5에서 주님이 인용한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 풍부한 화평(*, 로브 솰롬) - 문자적인 뜻은 '많은 평강'이다. 이는 물질적인 부요 그 이상의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기초를 둔 일반적인 의미의 안녕을 가리킨다(Anderson).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를 때에만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되기 마련이다. 총체적인 삶의 영역에 있어서 어떤 한 부분이라도 평강이 없다면 틀림없이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 경: [시37:12]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악인이...이를 가는도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9절과 32절을 참조하라. 때로 악인은 자신들의 순조로운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인의 의로움을 질투하여 악행의 음모를 계획한다(Dahood). 더욱이 자신들의 번영이 아직 미래에 있는 것으로 보여질 때 그런 일을 행한다. 분노하는 악인은 혼히 그 이를 갈아보이는 들짐승과 흡사하게 극대의 증오심을 나타낸다(35:16 ; 112:10 ; 욥16:9 ; 애 2:16).
성 경: [시37:13]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 악인의 음모는 결국 열매 없이 끝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계산이 하나님은 인간의 일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가정 위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인의 가정이 잘못된 것이기에 본 시편 기자의 묘사는 는 적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악인의 방자함과 잘못된 음모에 웃으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 날이 이름을 보심이로다 - '그 날'이란 악인의 파멸의 날, 그 행위를 계산받는 죽음의 날이다(삼상 26:10 ; 욥 18:20). 일반적으로 성경은 이때를 종말의 심판때라고 언급하고 있다(행 17:31 ; 롬 3:19 ; 벧후 3:7).
성 경: [시37:14]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칼...활 - 본절은 은유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므로 칼, 활은 폭력과 억압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래서 칼을 빼고 활을 당긴다는 표현을, 의인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준비하는 악인의 모습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Barnes).
⭕ 활을 당기어 - '당기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라크'(*)로 문자적인 뜻이 '짓밟다' '걸다', '시위를 얹다'이다. 이러한 표현은 활을 땅위에 놓고 밟은 후 그 줄을 당기는 악인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겠다. 또한 이것은 의인을 겨누어 죽이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악인의 모습을 엿보게 해준다. 한편 크라우스(Kraus) 같은 학자는 본절 전체의 내용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하여 그 내용의 순서를 바꿔 '악인이 정직한 자를 죽이기 위하여 칼을 빼고 가난한 자를 맞추기 위하여 활을 당기나'라고 읽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본절이 은유적 기법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문장 호응에 있어서 약간 어색한 면이 있다 해도 내용의 순서 변경을 거 치지 않고 그 의미를 그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고 이해된다. 사실 성경의 어떤 부분이 어색해 보이는 이유는 본문에 대한 해박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 행위가 정직한 자(*, 이슈레이 다레크) - 문자적인 뜻은 '그 길이 곧은 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삶의 방식 혹은 행위에 있어서 흠잡을 데가 없는 자이다(잠 29:27). 한편 이러한 유형의 사람을 묘사하는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은 '마음이 정직한 자'이다(7:10 ; 11:2 ; 32:11, Anderson).
성 경: [시37:15]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그 칼은....마음을 찌르고 - 죄는 궁극적으로 죄인을 파멸시키며 악행은 그 행위의 주인공에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에 대한 굳은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7:4 ; 렘 2:19 ; 5:25,A. A. Anderson, Alexander).
⭕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 악인의 음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특히 그들의 음모를 이루는 수단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성 경: [시37:16]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의인의 적은 소유가(*, 토브 므아트 라차디크) - 문자적인 뜻은 '의인의 적음이(...보다) 좋다'이다. 본 구절의 강조점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봐 수 있다. 하나는 흔히 볼 수 있듯이 의인은 이 세상의 부(富)를 조금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의인의 그 적은 소유는 좀더 큰 축복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서 악인이 소유하고 있는 풍성한 소유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의인이 이 세상의 부를 조금만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많은 소유보다 가치가 있는 까닭은, 가진 바 적은 소유로 인하여 하늘 나라의 큰 소유를 대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의 강도만 변하지 않는다면 땅의 소유를 많이 갖는 것도 악하지는 않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듸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본절의 이 주제는 결국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눅 16:19-31 참조).
⭕ 악인의 풍부함 - '풍부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몬'(*)은 비가 내리거나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발생하는 '시끄러운 소음', 어떤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많은 재물, 즉 '부요함'을 뜻한다. 그래서 이 용어는 소유의 획득에 수반되는 소동 혹은 야단법석이나 그 소유를 관리함에 따르는 무질서함, 불안, 고요하지 못함(Alexander)을 의미하기 때문에 앞 문구와 연결시켜 볼 때, 악인의 많은 재물의 가치는 의인의 적은 소유보다 훨씬 저급하다고 이해함이 옳은 듯하다. 즉 악인은 소유 획득에 있어서 야단법석, 소동, 소란, 잡음이 수반되는 것이 사실이며 그 소유를 획득한 자의 마음이 항상 평안과 고요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성 경: [시37:17]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 남을 해롭게하는 악인의 능력의 망실(亡失)에 대한 실감나는 장면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팔'에 해당하는 원어 '제로아'(*)는 흔히 '힘' 혹은 '강함'을 상징하며(77:15 ; 89:10), 그것의 부러짐은 그 '소유주'의 무능력해짐을 상징한다(10:15 ; 욥 38:15 ; 렘 48:25 겔 30:21). 한편 의인은 그 힘이 강하든지 약하든지 결코 요동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그 힘이 꺾이우거나 무력하게 될수 없는 여호와에 의하여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원어에서 이 '팔'이 복수형으로 되어 었기 때문에 '자원들'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Dahood). 그러나 때때로 이 '제로아'는 전체로서의 개인을 암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욥 26:2, Johnson).
성 경: [시37:18]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완전한 자의 날 - (*,예메이 테미멤). 문자적인 뜻은 '곧 은자(隱者)의 날들'이라는 복수형은 여호와께서 곧은 자, 곧 의인의 궁극적인 운명을 보살피실 뿐 아니라 그의 하루하루의 실존에도 관심을 두신다는 것을 암시한다(Anderson).
⭕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 '기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할,(*)로서 문자적인 뜻은 '유산'이며, 이 땅위에서와 영원한 저 세상에서 의인이 누리게 될 포괄적인 의미의 '축복'을 가리킨다.
성 경: [시37:19]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부끄럽지 아니하며 - (*,로 예보슈). 문자적인 뜻은 '시들지 않으리라' 이다. 원래 여기의 '시들다'는 물을 구하기 위하여 샘이나 냇가에 왔다가 그것이 마른 것 을보고 실망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25:2 , 3 ; 욥 6:20).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환난 때 의인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재난이나 고통의 때에도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 분으로부터 필요를 기대하기에 의인은 결코 실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Barnes).
성 경: [시37:20]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어린 양의 기름같이 - (*, 키카르 카림). 문자적인 뜻은 '어린 양들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이란 말이다. 즉, 한때 양들 중의 최고와 같았던 그들은 곧 소멸되리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표현은 악인의 멸망 전후(前後)의 극적인 대비(對比)를 통해 악인의 운명의 급박한 변화를 암시하며 동시에 악인의 멸망의 참담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37:21]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 이것은 악인에게 닥칠 극심한 가난의 상태, 혹은 가난 했을 때 악인이 취하는 태도에 대한 묘사이다(잠 24:16). 한편, 왕하 4:1 ; 느 4 ; 사 50:1 ; 암 2:6 ; 8:6 ; 마 18:25등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채무를 불이행한 채 무자가 받는 징벌은 매우 혹독했다.
⭕ 의인은 은헤를 베풀고 주는도다 - 반면 의인은 스스로의 필요를 채울 충분한 소유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위치에까지 서게 된다는 것이다(신 15: ; 28:12, 44). 이처럼 소유의 유무로 악인과 의인을 비유한 것은 매우 현실성이 있고 실제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37:22]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과 악인의 대조적인 삶]
⭕ 복을 받은 자는 땅을...저주를 받은자는 끊어지리로다 - 본 구절이 제시하는 핵심은 내용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서로 상반된 결과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당하는 것은 인간의 어떤 공로, 즉 의인의 자선,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절대적 은혜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축복과 저주는 언약에 근거하여 빈틈없이 시행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산물이다(대상 29:11 : 28:1, 15).
성 경: [시37:23]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 여기에서 '정하신다 '는 말은 '명하신다', '세우신다' '적절하게 하신다', '지도하신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삶의 여정은 하나님의 안내와 통제 아래 있다는 의미이다. 영역본들은 '사람' 앞에 '선한'을 삽입하여 선한 사람으로 읽고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에는 없는 것이다. 즉, 원문대로 하면 '선한'을 생략하고 '사람'으로만 적고 있는 개역 성경이 옳다. 그러나 문맥이 의미하는 대상이 '선한' 경건한 의인'임이 분명함을 고려할 때 '선한'을 삽입한 영역본도 취할만하다. 하나님은 의인의 인생 여정을 계속해서 지도, 인도하시며 곁길로 나가려고 할때 통제하기도 하신다.
⭕ 기뻐하시나니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페츠'(*)로서 문자적인 뜻은 '유지하다','보존하다', '기울다' 등이다. 이는 의인의 여정에 대한 여호와의 계속된 관심, 지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Anderson).
성 경: [시37:24]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넘어지나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이폴'(*)의 원형 '나팔'(*)은 문자적으로 '한번 넘어지다', '떨어지다', '내동댕이치다' '던지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의인이 죄에 빠져든다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불행해지고 실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 묘사는 여행하는 나그네가 때로 땅위에 넘어지는 모습, 즉 항상 성공적이지만은 않은 인생의 여정을 드러내 주지만 그 넘어짐이 아주 종국적 멸망은 아니다.
⭕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땅에 몸이 닿을 정도로 넘어지지는 않는다'이다. 즉,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의인이 역경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나 그 고통이나 역경이 의인의 종국적 멸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45:14 ; 잠 24:16 ; 미 7:8). 왜냐하면, 여호와의 손이 그와 함께 언제나 계시기 때문이다.
성 경: [시37:25]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내가 어려서부터...보지 못하였도다 - 이제 나이가 든 성인(成人)인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여서 의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거나 그 자식이 구걸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고 확인하고 있다. 이 주장을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본 시편 기자가 의인의 고통에 관한 언급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7, 12, 9, 19, 8, 32, 33, 7, 40절 참조). 그러므로 그가 지적하는 바 핵심은, 경건한 의인은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히 버림받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잠 10:3).
성 경: [시37:26]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종일토록 - 의인의 한 성품을 암시하는 부사이다. 의로운은 사람은 계속해서 자비를 나타내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 습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Bar-nes).
⭕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 의인은 번성할 뿐 아니라 그의 풍성함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이다(Kirkpstrick). 그의 경우, '꾸어 주는 일'은 사업의 수단이 아니라 빈핍한 자를 돕는 방편이다. 한편, 히브리의 율법에 의하면 가난한 자에게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는 받지 않도록 되어 있다(출 22:25).
⭕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 '그 자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라'(*)는'열매 맺다'에서 유래한 한 용어로'열매', '자손', '아이' 등을 뜻한다. 그런데 흑자는 이를 '그의 팔'로 본다(Dahood). 본절에서 그의 팔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팔이 축복이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Anderson). 즉, 이는 팔이 축복의 근원 및 그 중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슥 8:13).
성 경: [시37:27]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악에서 떠나 - 본절 하반절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조건이다. 문장 구조가 34:14과 매우 유사하다(잠 3:7).
⭕ 영영히 거하리니 - 몇몇 주석가들은 본 구절 바로 뒤에 '이 땅에'(29절) 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른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된다 하겠다. 여기서 본 시편 기자는 영원한 생명보다는 조상의 유산을 소유하는 의인의 후손들을 생각하고 있다(102:28).
성 경: [시37:28]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 여호와께서는 공평히 행하시며 당신의 종들에게 동일한 행의를 요구하신다. 문맥에 비추어 좀더 부연 설명하면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고 의로운 자에게는 번영의 상을 내리시지만 악인은 그 땅에서 끊어 버리신다는 것이다(33:5).
⭕ 그 성도(*, 하시다우) - 이에 해당하는 원형'하시드'(*)는 '인자한', '경건한', '거룩한'이란 의미이다. 그러기에 본 표현은 '그의 충성된 성도들'(30:4 ; 86:2)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 저희는...끊어지리로다 - 본 구절은 의미상으로 분명하게 의인과 악인을 대비시키고 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개역 성경의 '저희'를 '의인(the tighteous)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원문이 그것을 분명히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의미상으로는 그것이 옳다 해도 원문 그대로 놓아두고 수정하지 않는 것이 옳은 듯하다.
성 경: [시37:29]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의인의 땅을 차지함이여 - '차지하다'에 해당하는 '야라쉬'(*)는 '차지하다,''점유하다', '상속하다'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상속자로 삼으신다는 것은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취급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자녀로 삼는 상속의 개념은 창 12장에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의 상속자로 인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3, 18, 27절 ; 창 12:1-4).
성 경: [시37:30]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 이것은 의인의 말 속에서 드러나는 진지함, 정직함, 진실됨, 순결함, 그리고 태도의 친절성, 곧음 등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특성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땅 위에서 번영하고 장수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이와 같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 경외에 바탕을 둔 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속에서의 삶의 경험 때문이다(잠 1:7, Anderson).
성 경: [시37:31]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 이것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렘 31:33 ; 겔 36:27 참조)라고 적고 있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 기사를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율법을 돌 위에 새기거나 두루마리 위에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율법은 사람의 마음의 비에 새겨져야만 한다. 그래서 그의 전생애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의 완고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Anderson). 율법이 그 마음의 비에 새겨져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법을 묵상하고 그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일컫는다(Barnes).
⭕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로 티마드 아쉬라이우)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그 가는 것이 미끄러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의인의 여정(旅程)이 분명하고 곧으리라는 것과에 넘어지지 않고 그 삶이 번영하고 행복할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법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하나님과 그분의 법에 인도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 경: [시37:32]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 '엿보아'(*, 초페)의 원형 '차파'(*)는 '면밀히 관찰하다', '뚫어지게 쳐다보다', '먼곳을 응시하다'로서 깊은 탐색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악인이 의인을 깊이 탐색하는 이유는 그의 범죄 행위의 완전성을 위해서 일 것이다. 즉, 악인은 의인의 소유를 빼앗을 목적으로 의인을 살해한 후(왕상 21:8-10) 자신의 범법(犯法)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음모의 과정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의인을 깊이 탐색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절에 분명히 나와 있지 않는 악인의 의인 살해 목적을 소유 획득이라고 보는 이유는 본 시편 전체가 반복적으로 땅의 소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9, 11, 29, 34절). 한편, 12-5절에 이어 본절은 악인의 의인에 대한 핍박이 사실을 반복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악인의 의인 핍박이 성경에서 일반화된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 사실은 선지자들, 사도들, 교회사 속의 많은 순교자들의 경우 그리고 주님의 경우를 통하여 진실로 입증되었다.
성 경: [시37:33]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여호와는 저를 ...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목적을 성취하도록 의인을 그 세력하에 두지 않고 구원하여 내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 시편 기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악인의 악한 의도로부터 구원하는 사실이 금생(今生)에서도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현세에서 항상 이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다. 즉 신적(新的) 간섭및 조정의 경향은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체적으로 신적 간섭 및 조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을 향한 유리한 덕목이 된다. 그것은 금생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특권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사실, 진실이 될 것이다. 의인은 모두 그리고 영원히 악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Barnes).
⭕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리로다 - 문자 그대로 의인이 판결을 받았을 때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동료들에 의하여 의인에게 형(型)의 선고가 내려져서 그가 공적(公的)으로 죄인임이 인정되는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좀더 타당한데, 그것은 문맥의 분의기가 내세보다는 현세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성 경: [시37:35]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큰 세력(*, 아리츠) - 원래의 의미는 '굉장한', '분발케 하는 힘'으로서 하나님이나(렘 20:11) 강한 열방들에 적용되었다(사 25:3). 그러나 이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에는 폭력, 맹렬함, 무법함, 폭정 등의 의미로 나타난다(욥 15:20 ; 27:13 ; 사 13:11 ; 25:4,5). 한편, 여기서 이 단어는 '번영하고 강한 힘을 가진 자'를 말하나 그 영향력이 선을 베푸는 목적보다는 불의, 억압, 그리고 악을 시행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악한자의 세력을 가리킨다.
⭕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 - 원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푸른 월계수 나무'이다. 그러나 '월계수 나무'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즈라'(*)가 문자 그대로의 월계수 나무인지는 원문상 분명하지 않다. 이 용어는 '자라'(*)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일어나다' 혹은 '자라나다'이다. 그리고 명사로 사용되면 '그 토지에서 자라난 나무'를 가리킨다. 특히 명사로 그 의미가 쓰일 경우는 그 본토에서 자라난, 이곳 저곳으로 한번도 옮겨 다닌 적이 없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나무는 본토인(외국인이 아닌)을 가리킬 수도 있다(레 16:29 ; 18:26). 여기 소개된 나무는그 원래의 토양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옮겨 다닌 나무보다 더욱 튼튼하고 큰 성장을 이룰 나무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경우, 번영하고 힘이 강한 자를 가리킬 것이다. 본절에서는 한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모든 세력을 키우되 한번도 좌절하거나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평지 풍파(平地風波)나 실패가 없는 조용한 번성만을 이루어 왔기 때문에 모든것이 안전하고 든든한 것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다음절에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그런 식의 종말이 될것이다. 한편, 맛소라 본문(MT)을 수정한 70인역(lxx)을 따른 RSV, AV 등은 여기 '푸른 월계수 나무'를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평균 키가300미터 이상이며 고급 목재로 인기를 끄는 나무이기 때문에 힘 과 영광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되는 점을 고려하여 이렇게 번역한 것은 문맥이 지시하는 의미와 비교할 때 인정해 줄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수정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는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
성 경: [시37:36]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와야보르에하네예이넨누) - 직역하면 '그가 소멸되었다. 보라 '그가 소멸되었다. 보라 그가 없도다'이다. 물론 본 구절이 가리키는 대상은 문법적으로 따지면 인간과 나무 두 경우에다 적용되지만 여기서는 인간을 가리킨다. 여기서의 인간이란 악인을 가리키는데, 그의 경험과 영예로 미루어 볼 때 영원히 그 땅에서 살 줄 알았으나 결국 그는 죽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원문에 사용된 히브리어 '하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일을 목격했을 때 사용하는 감탄사인데 이것은 여기에서 악인이 그 땅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본절이 의도한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 악인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Barnes).
성 경: [시37:37]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 '곁국 '(*, 아하리트)은 '종말','끝'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의 종말론적 성격은 73:17 ; 창 49:1 ; 민 23:10 ; 24:20; 사 2:2 ; 단 10:14 ; 미 4:1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편안'은 참신앙의 결과를 암시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그분과의 우애, 하늘의 소망으로 야기되는 평온, 정돈됨, 행복 등을 가리키기도 해 참 평안의 의미를 잘 나타내 준다(요 14:27 ; 16:33 ; 롬 5:1 ; 8:6 ; 갈 5:22 ; 빌 4:7). 한편, 이 용어는 특별히 여기에서 신앙의 결과로서 죽을 때 조성되는 의인의 평온, 완전한 평화, 또한 영원한 평화가 있을 미래의 완전한 구원의 모습(상태)을 나타내 준다고 볼수 있다(Barnes). 통상적으로 경건한 자는 소망과 하나님의 임종을 맞으며 그들은 죽음 너머의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
성 경: [시37:38]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함께 멸망하리니 - '함께'(*, 야흐다우)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의 연합체, 공동체'이다. 이것은 어떤 한 목적을 의하여 애쓰는 (신 25:11) 동일한 한 장소(창 18:6), 혹은 한 시간(4:8)에 모인 하나로서의 전체(14:3)를 가리킨다.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악인들 모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함께 멸망할 것이며 그 예외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본절은 그들이 동일한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똑같은 형태의 징벌을 받아 멸망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히 밝히는 것은 악인은 동일하게 그 종국이 멸망이라는 사실이다(Barnes).
⭕ 악인은 결국 - 여기의 '결국'(*,아하리트)의 문자적인 뜻은 '끝'이다. 끝이 끊어진다는 표현에 대한 해석으로는 '미래가 없다'(Weiser), '번영이 사라진다'(Anderson), '그 후손이 없다' 등이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한 가문의 후손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큰 복이었고 따라서 그 후손 전체가 단절되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세 번째 해석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의 종말론적 성격을 감안할 때 미래 세계, 즉 주님 재림 시대에 있어서 악인은 영원히 소망과 행복으로부터 단절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성 경: [시37:39]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대체적으로 둘로 나눠어진다. 첫째, 악인은 끊어지는 반면 의인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악인의 끊어짐에 비교한 의인의 구원에 강조를 두는 것인데 이것은 시편에서 자주 사용하는 대구법 중심의 해석이다. 둘째, 의인의 구원 사실보다는 그 구원의 근원 및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강조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원문에 '여호와 앞에 출처,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 '메'(*)가 사용되었다는 것과 이어서 그 구원의 출처되신 하나님에 대한 부연 설명이 있다는 것을 중시한 해석이다. 문맥을 취하여도 무리는 없으며 이 두 해석 중 어느 해석을 위하여도 무리는 없으며 두 해석은 상호 보완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둘 다를 취하여 사용해도 좋을 듯 싶다.
성 경: [시37:40]
주제1: [악인과 의인의 종국]
주제2: [의인의 번영]
⭕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키 하수보)의 뜻은 '그에게서 피할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이다. 본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피난처를 구하려고 하는 자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증함으로써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거나 듣는 이에게 오직 의의 길로 행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암시해 주고 있다.
성 경: [시38:1]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기념케 하는 시 - 동일한 표제어가 70편에도 나온다. 그러나 다윗에 대한 대적자들의 어떤 시도들과 목적들, 그리고 그들로부터 다윗에계 임했던 다른 형태의 시련들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동질성을 찾을 수 없다. 한편, 라틴 벌게이트역(Vulgate)과 70인역(LXX)은 유사하게 '안식일을 기념하기 위한 다윗의 시'라고 수정 번역된 표제어를 붙이고 있다. 본 표제어의 원어는 '르하즈키르'(*)로서 문자적인 뜻은 '기억케 하기 위하여'이다. 즉, 이 표제어하의 시편 내용은 기억케 하는 목적을 위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 시편 저자 다윗은 자신이 과거에 경험했었던 바 독특한 체험, 본 시편이 밝히고 있는 경험의 기억을 되 살려 전달함으로써 다른 독자들도 유익한 교훈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본 시편을 기록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창 40:14 왕상 17:18 겔 21:24). 그리고 본 표제어에 대한 이와 같은 번역은 다른 학자들의 번역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즉, '하나님과 자신과의 기억을 전하기 위하여'(gesenuius)라는 것과 '본 시편은 다윗과 그의 범죄와, 그리고 용서 구함의 기억이 주는 교훈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Grotus)라는 번역이 이러한 견해를 입증해 주고 있다.
⭕ 주의 노 - '노'는 히브리어로 '케채프'(*)인데 이 단어가 새로 사용된 것 외에는 본절과 6:1은 그 사용된 단어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이와같은 현상은 다윗이 본 시편을 저작함에 있어서 6편의 때와 그 저작 상황이 유사하므로 먼저 저작했었던 6편의 기억을 더듬되 심지어 그때 사용했던 용어까지 회상하면서 본 시편을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시38:2]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주의 살...주의 손 - 비록 화살을 맞는 듯한 아픔과 중한 짐에 눌리는 것과 같은 고통을 묘사하면서 계속 그 아픔의 고통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말없는 호소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Perowne).즉, 이 토로로 보아 본 시편 저자는 비록 고통을 당하고는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감당할 능력밖의 고통을 주시지는 않는 분이라는 사실(저자는 이 사실을 그의 선조들의 경험을 통하여 알았으며,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아왔던 그 경험의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약속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언급 속에는 고통으로부터의 빠른 회복에 대한 기대가 더불어서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의 토로는 불평이라기 보다는 화(禍)를 내리신 하나님의 자비에의 호소이다. 한편 '주의 살'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마치 궁수(弓手)로 묘사하는 듯하다(7:12 ;욥 6:4). 허스트(Horst)에 의하면 고대 근동에 있어서 심한 피부병은 신적인 저주와 사단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으로 흔히 간주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절에서 하나님의 화살을 맞은 저자도 피부병의 일종인 문등병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주의 살이 찌른다고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당시 본 시편 기자가 어떤 구체적인 범죄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그리고 그 고통은 실제적이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성경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어떤 성경 시대 당시의 근동의 역사 및 고증, 그리고 설화도 성경적 권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사실 하나님의 화살, 하나님의 손은 분명히 성경에서 신적 심판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7:12 ; 삼상 63:5 ;욥 19:21). 따라서 우리는 본절을 보면서 그 죄악으로 인해 본 시편 기자에게 분명하고도 실제적인 심판이 임했으며 따라서 저자는 실제적으로 어떤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지나친 상상의 전개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불식시켜야 한다고 본다.
성 경: [시38:3]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 자신이 지금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7절)을 나타낸 언급이다. 사 1:6에서 이 구절은 전 민족 실존의 위태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런데 '살'은 때때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즉, 히브리어로 '바사르' (*)인간과 동물의 신체를 이루는 물질을 의미한다(창 40:19). 그러므로 이 용어는 전체로서의 몸(79:2 ; 109:24)혹은 인간 및 인류를 가리키는 제유법적 용어(136 :25 ; 145:21 ; 창 6:12 ; 사 40:5, '모든육체')이다. 때때로 이 용어는 하나님과 대비되는 관점에서 연약한, 그리고 다양한 한계에 종속되는 인간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78:39 ; 사 31:3). 그리고 가끔 이 '바사르'는 인칭 대명사를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으로 쓰여 혈족을 암시하기도 한다(창 2:23 ; 사 58:7).
성 경: [시38:4]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무거운 짐 같으니 - 죄 및 죄책에 대한 또 다른 적절한 묘사이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의 가인도 이와 유사하게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3)라고 자신의 죄책을 언급한 바 있다.
성 경: [시38:5]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나의 우매 - 이 용어는 잠언서에서 자주 언급된다(22번 정도). 본 문맥에서는 적어도 이'우매'가 어떤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죄'와 동등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3절 하반절 참조). 이와 유사하게 잠언24:9은 미련한 자의 생각은'죄'라고 말함으로써 이 주장을 지지해 준다.
성 경: [시38:6]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짐]
⭕ 구부러졌으며...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 '슬픔 중에 다니다'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슬퍼하면서 가다'이다. 저자는 죄악의 고통으로 인한 아픔 때문에 길을 갈 때에 곧게 펴지 못하고 부정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마치 슬픔을 당한 자기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기 위하여 불결하고 천한 의복을 걸치고 다니듯 말이다(욥 1:20 ; 2:8). 이러한 표현은 전인적인 슬픔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성 경: [시38:7]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 일반적으로 '허리'는 인간의 힘 그리고 자손을 낳는 능력의 근원으로 간주되었다(Johnson). 따라서 그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다는 것, 즉 그 허리가 상처를 입어 고장이 났다는 것은 재난의 심판으로 인하여 그의 모든 힘과 생명력이 박탈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열기(*, 칼라)는 '불타다'의 명사인데 흔히 '질병', '상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 이 '카라'가 수동태로 사용되면 `...부터 멸시를 당하다'의 뜻이 되기도 한다.
성 경: [시38:8]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피곤하고 - 이에 대한 히브리어 원형은 '푸그'(*)로서 문자적인 뜻은 '힘이 없다','연약하다', '기진하다' 등이다. 좀더 구체적로 말하면 열기가 없어 싸늘해 졌다는 것인데 더 나아가 무감각 상태까지를 반영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용어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이 애굽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졸도할 뻔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창45:26).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 용어를 '내가 신경이 마비된 사람과 같다'로 번역하기도 한다(Anderson).
⭕ 심히 상하였으매 - 원래의 뜻은 '산산조각이 났다'이다. 이것은 마음이 상한 상태이거나 고통과 슬픔으로 인하여 마음이 오그라 들었을 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51:8 사 19:10 ; 53 ; 57:15).
⭕ 신음하나이다 - 이 구절을 '내가 사자처럼 포효하나이다'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는 '신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아그'(*)가 흔히 사자들의 신음 소리를 가리킬 때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편, 은유적으로 이 단어는 지성소에서(74:4) 혹은 땅 위에서(렘 2:25) 소동하는 침략군을 묘사할 때, 욕심 많은 관원들(슥3 3) 그리고 포효하는 대적들(22:13)을 사자에 비유할 때에도 사용된다. 또한 심지어 여호와의 음성을 묘사할 때에(렘 25:30 ; 암 1:2),그리고 본절에서처럼 고통자의 고뇌에 찬 신음소리를 묘사할 때에도 사용된다(22:1 ; 욥 3:24).
성 경: [시38:9]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짐]
⭕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 하나님만이 자신의 모든 필요와 요구하는 바를 아신다는 고백이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요구를 반복하지 않는데 이는 자신의 모든 경우를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의 '소원'(*,타아와)은 이와 동일한 단어가 10:17 ; 잠 11:23 ; 19:22 ; 사 26:8)등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용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흔히 '슬픔'으로 번역되기도 한다(G. R. Driver).
⭕ 나의 탄식이...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 하나님께서 자신의 탄식을 확실히 듣고 자신의 모든 경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셨으리라는 기대를 저자 편에서 강조하는 표현(Bar-nes)이다. 이처럼 본 시의 저자 다윗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중재를 해주시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38:10]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내 심장이 뛰고 - '뛰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사하르'(*)로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하다', '여기저기 여행하다', '물건을 팔기위해 여행하다', '헐떡거리다' 등의 뜻이 있다(창 23:16 ; 37:28 ; 42:34). 그런데 여기서와 같이 심장, 즉 마음이 적용될 때에 이 용어는 '심장이 두근거리다', '뛰다', '맥박이 빨라지다'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심장의 고동을 의미하는데 이 점에 치중하여 혹자는 본 구절을 '나의 가슴이 맹렬히 뛰다'(Boylan) 혹은 조금은 지나치게 '마음이 ...에게 흘리다'로 번역하기도 한다(Thomas).
⭕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 이 구절은 '하팍스 레고메논'(ahpax iegomenon), 즉 구약에서 한번밖에 나오지 않는 부분으로서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Anderson). 보통 성경에서 '...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힘이 소생되었다'는 것을 뜻함을 고려할 때(13:3 ; 삼상 14:29), 본절은 저자의 활력과 힘이 사라져 버린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앞 부분의 증상들로 인하여 본 시편 저자의 생명이 거의 꺼져가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다(Barnes).
성 경: [시38:11]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상처 - 원어는 '네가'(*)로서 문자적인 뜻은 '한번 내려치기', '한번 바람이 불기'이다. 여기의 '한번 내려치기'란 하나님이 인간 위에 내리신 재앙이나 심판이란 의미이다(창 12:17 ; 출 11:1). 그래서 여기 일반적인 의미의 재앙이나 심판을 구체화시켜서 '문등병'(레 13:2 ; 신 24:8)혹은 그와 유사한 '피부병'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Jerome, Anderson). 이에 대한 근거로는 그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까지도 그를 멀리했다는 문맥에 의거한다. 그런데 이 주장이 참고는 될 수 있으나 정당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이에 대한 명백한 성경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 경: [시38:12]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 이것은 본 시편 기자가 약해지고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에 의하여 버림을 받아, 도움 받을 사람이 없는 자가 되어 버린 사실을 이용하여 대적들이 자신을 해(害)하려고 했던 것을 가리킨다. 여기의 대적들을 기자의 친구 및 친척들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나(Kraus, Anderson), 이는 문맥상 맞지 않는다.
⭕ 괴악한 일을 말하여 - 문자적인 뜻은 '불행스러운 것들을 말하여'이다. 이것은 기자의 대적들이 그에 대한 증상 모략의 말을 했던 것을 가리킨다. 욥의 세 친구가 그랬듯이 그의 대적들은 기자가 아픈 것은 죄로 인한 징벌이라고 다그쳤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가 만날수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에 대한 헛된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Anderson).
성 경: [시38:13]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짐]
⭕ 듣지 아니하고 - 대적들의 헛된 자극에 반응을 보이거나 분노하지도 않고 그들이 아무 말도 안한 것처럼 조용히 인내했다는 말이다. 이를 좀더 영적으로 말하면 죄를 인식함으로써 변명도, 논쟁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그 처분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무죄성을 주장하였던 욥과 다르다. 즉, 본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난 속에서도 계속 침묵을 유지했는데 그 까닭은 자신이 범한 죄가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르는 상태지만 죄가 있다면 그것을 징벌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Anderson).
성 경: [시38:14]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변박(辨駁)이 없나이다 - 문자적인 뜻은 '반응이 없다'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변호를 위한 변론이 없었다는 것이다(욥 23:4 참조, Perowne). 칼빈(Calvin) 은 본 시편 저자가 자신을 반응이 없는 자에 비유한 이유를 두 가지 드는데. 그 하나는 그의 대적들의 불공정성에 강압을 당하여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자발적 굴복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후자의 경우만을 옳다고 본다(Perowne). 왜냐하면 그가 응답하지 않은 것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롬 12:19 참조). 한편, 여기서 다윗은 고뇌하며 고통당하는 자의 모형으로 나타나 있다(사 53:7 ; 벧전 2:23). 그러나 이 모형론적인 해석은 1-4절의 문맥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죄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위대한 고통 당하는 자이신 그리스도 역시 고통 중에서 침묵하신 것은 사실이나 그분은 죄가 있어서 그 고통을 당하신 것은 아니므로 죄를 언급하고 있는 1-4절은 메시야적 해석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성 경: [시38:15]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 당신에게 내가 소망을 두어왔기 때문입니다'이다. 문장 맨 앞에 놓인 '키'(*,왜냐하면)는 12-14절에 언급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저자가 인내하였던 이유를 밝히는 원인 접속사이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부당하게 모략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실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저자는 그의 대적들로 인한 수모와 억울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 같은 아름답고도 완전한 모범을 벧전 2:2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성 경: [시38:16]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내가 말하기를 - 개역 성경의 번역은 원문 '키 아마르티'(*)를 그대로 직역한 것이다. AV는 이 구절을 쉽게 풀이해 놓았다. '(저희가 네게 대하여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제가 기도하였나이다' 흑은 '(저희가 나로인하여 계속해서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나의 탄원을 아뢰었나이다.'
⭕ 망자 존대(妄自尊大) - '저자에 대항하여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자'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저자의 과거 및 현재의 경험을 언급하는 말이다. 이것은 욥 19:5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로 패역 무도한 자가 스스로 존귀하고 큰 자로 착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 경: [시38:17]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키 아니 레첼라 나콘) - 문자적인 뜻은 '내가 이제 막 중단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무엇을 의지하려고 하면서 (예를 들면 담벽 같은 것) 한편으로는 자꾸 넘어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가면서 자꾸 넘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할수 있다. 본절에서 저자는 자신의 힘이 거의 고갈되어서 계속되는 죄악 속으로 넘어질 위험에 처했든지 아니면 가중되는 짐 때문에 자꾸 가라앉고 있는, 그래서 그의 대적들로 하여금 승리의 쾌재를 부를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Barnes). 그로 인한 고통은 거의 죽음으로 인도하는 고통이기도 하다(Anderson).
성 경: [시38:18]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내 죄막을 고하고 - 본절에서도 역시 '키'(*, 왜냐하면)가 나오므로 15절에서부터 본절 서두까지 계속해서 이 접속사가 나온 셈이된다. 이것은 15-18절의 내용들이 일련의 사상의 흐름을 공유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들 절들은 11-14절에서 계속된 대적들의 음모와 그로 인한 수모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묵묵 부답이었던 이유를 밝힌다(Perowne). 먼저 15절은 하나님께서 저자 자신에게 응답하시리라는 기대를, 16절은 문제를 저자 자신의 수중으로 돌려 해결하려 할때는 대적들이 쾌재를 부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17절은 자신의 연약함을 그리고 본절은 자기 속에 고백해야만 하는 죄가 있음을, 그 각각의 이유로 들고 있다. 한편, 여기의 '키'는 '참으로', '진실로' 등을 뜻하는 강조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 시편 저자는 그의 심각한 상황속에서 그 상황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불행의 원인이기도 했던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선포하는 일임을 강조해서 밝힌다(32:1). 하나님의 자녀들도 땅 위에 살면서 갖가지 역경에 처하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중요한 한가지는 죄가 그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 경: [시38:19]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내 원수가 활발하며 - '활발하며'(*, 하이임)는 '생기있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문자적인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혹자는 본절을 '나의 대적들은 활기차고 강하며'로 잘 번역하고 있다(De Wett).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저자 자신이 연약하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때 그의 대적들은 생기가 왕성하고 육체적으로도 아주 건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적들은 그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추진력 있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저자의 연약함을 그들의 유일한 점으로 삼았으며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저자는 그들과 겨를 수도 없었다. 어떤 면으로 봐도 불리한 그는 이제 하나님의 중재 만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Barnes).
성 경: [시38:20]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 본 구절이 묘사하는 상황의 역설은, 그의 대적은 이방인이 아니라 그가 아주 공평하게 대해 주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유사한 상황이 35:12 ; 109:3 등에 묘사에 묘사되어 있다.
⭕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 '연고'(*, 타하트)의 본래의 뜻은 '아래 부분, 아래, 그리고 기초가 되는 부분' 등이다. 본 구절의 의미는 본 시편 기자의 대적들이 그에게 악행했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의로운 자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대적을 당하거나 고난을 받는 출발이었다. 진정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를의 죄를 고백하고 언행심사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의로운 자가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 악인들이 그들을 미워하고 넘어뜨리게 하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 경: [시38:21]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짐]
⭕ 나를 버리지 마소서 - 11-14절의 상황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은 다음과 같은 말로 풀어볼 수 있겠다. '나를 나의 고통, 아픔, 고뇌 속에 버려 두지 마소서. 죽도록 내버려 두지 마소서. 중얼중얼하고 멸시하는 자들에게 맡겨 두지 마소서. 나의 대적의 비난에 나를 남겨 두지 마소서'(Barnes). 그런데 저자가 이같이 절규하는 이유는 하나님 고통하는 자에 대해 잠정적로 '외면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22:1 ; 27:9 ; 71:9, 18, Anderson ).
성 경: [시38:22]
주제1: [고통 중에 하나님께 간구함]
주제2: [고통의 무거운 짐]
⭕ 속히 나를 도우소서 - 즉각 하나님이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기도로서 저자가 처한 상황의 절박성을 엿볼 수 있다(22:20 ; 40:14 ; 71:12 ; 141:1).
⭕ 주 나의 구원이시여 - 그의 시련은 하나님 앞으로 그를 인도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고통과 시련이 의도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시련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시련은 괴로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시련의 종국적인 목적도 달성치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련과 고통의 본 목적을 상기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여러 종류의 역경들로 인하여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경들로 인해서 죄를 멀리할수 있고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고 하늘에 준비된 것들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시39:1]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허망한 인생]
⭕ 영장 여두둔 - 이는 대상 16:41, 42 그리고 25:1-6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다윗의 세 명의 성가대 지휘자들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다. 대하 5:12에도 언급되어 있고 대하35:15에서는 '왕의 선견자'로 불리우기도 한 그는 대상 15:17의 에단과 동일인인 것 같다(Perowne).이에 대한 언급은 62, 77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내가 말하기를 - (*, 아마르티). 문자적인 뜻은 '내가 말했다'이다. 그러나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생각하였다. 내가 각오를 하게 되었다'(38:16)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의 각오는 개역 성경에서처럼 혀로 범죄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불평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중얼거림으로 잘못 비추어질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오는 그 마음의 슬픔에 압도되고 또한 그 슬픔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2, 3절).
성 경: [시39:2]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허망한 인생]
⭕ 선함 말...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본 구절 해석시 초점을 맞추어야 할 주요 단어 '선한 말도'(*, 미토브)이다.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본절 전체의 의미가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해석가를은 '토브'(*, good)를 시편 저자가 그의 대적들에게 주었던 답변이라는 의미의 '좋은 말', '율법' '찬양' 등으로 해석하여 본 구절 앞 부분을 "나는 심지어 선한 말도 하지 않았다"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설득력이 없다. 여기서는 '메'(*)의 원래의 형태로 문자적인 뜻은 `...로부터'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중의 하나로 번역될 수밖에 없다. (1)위안, 기쁨등이 없다는 의미의 '선으로부터 먼'(욥 28:4) (2)침묵의 부정적 결과라는 의미에서의 '그래서 그것은 나에게 좋지 않았다.' 이 두 번역 중의 후자가 더욱 바람직한 이유는, 이어지고 있는 "그래서 나의 근심(고통)을 더하였다"와 평행을 이루기 때문이다(Perowne).
성 경: [시39:3]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허망한 인생]
⭕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 문자적인 뜻은 '묵상 중에 불이 났다'이다. 이것은 2절에 언급된 주제에 착념했을 때 그 감정의 불꽃이 솟아올라 입으로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던것을 가리킨다(Barnes). 즉, 그는 도저히 그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그 감정을 말로 토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욥 32:18, 19 ; 렘 20:9).
성 경: [시39:4]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허망한 인생]
⭕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하사 - 이 말은 행스텐버그(Hengstenberg)가 주장하는 것처럼 "나는 이 고통에 지쳤습니다. 이제 내가 죽을 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시고 나로 고통이 끝나게 하소서"와 같은 불인내의 토로가 아니다. 또한 이 말은 킴치(Kimchi)나 칼빈(Cal-vin)이 주장하는 것 같은 나의 생애가 얼마나 짧은지 나로 알게 하소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 동안 당신에게 충분히 의뢰하고 의지한 것 아닙니까 ?"와 같은 하나님께 대한 권고도 아니다. 1절의 주석과 같이 이미 저자가 자신의 말이 대적들의 귀에 하나님께 대한 불평으로 늘려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소원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은 인내하지 못함에 대한 토로나 하나님에 대한 권고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나로 인간 수명의 덧없음과 불확실성을 바로 깨닫고 측정하게 하소서 그래서 나를 두르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 인해 내가 당황하게 되는 대신 좀더 전적으로 당신께 나를 의뢰케 하소서"로 해석(Perowen)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 말 뒤에 "이제 제가 기다리겠나이다" 정도를 넣어 해석하는 것도 좋겠다(90:1-4).
성 경: [시39:5]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허망한 인생]
⭕ 손 넓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테파흐'(*)로서 손가락을 가지런히 포갠 한 손바닥 폭의 직선 길이로 10cm 정도이다. 동일한 길이가 예레미야서에서는 사지(四脂)로 불리운다(렘 52:21). 가장 짧은 길이는 손 넓이의 사분지 일인 손가락 폭의 길이며, 이것은 인간의 수명이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몹시 짧다는 것을 가리킨다(90:2, Anderson)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싶로 허사 뿐이니이다. 이에 대한 원어의 문자적 뜻은 '그가 최고로 선 것은 한번의 호흡일 뿐이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번의 호흡은 그 의미가 모호하다. 바이저(Weiser)는 '자기 확신에 찬 채서 있는 모든 사람'이라고 보지만 그가 삽입한' 자기 확신에 찬'이란 표현은 본 구절이 모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쪽의 의미가 강하므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기에 이 구절은 든든히 선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삶은(119:89) 한낱 '호흡'에 불과 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Anderson)그리고 이 구절은 94:11 ; 144:4 ; 욥 7:7등과 매우 유사하다. 한편, 이 구절 뒤에는 '셀라'(*)가 삽입되어 있는데 셀라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74회 출현하고 시편에서만 71번 등장하는 단어로 고대풍의 기술적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Kirkpatrick). 그 의미에 대한 동의는 이루어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항상', '영원히' 혹은 '(목소리, 눈을) 높여서'등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한 듯하다.
성 경: [시39:6]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허망한 인생]
⭕ 그림자(*, 첼렘) - 문자적인 뜻은 '헛된 과시', '환영', '착각' 등이다. 문자 그대로 어떤 실체의 그림자와 같은 이미지 혹은 그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첼렘'은 우상을 뜻하기도 하는데(왕하 11:18 ; 암 5:26), 여기서는 그림자처럼 곧 사라져 버리는 인간의 허무한 실존을 가리킨다.
⭕ 헛된 일에 분요하며 - 문자적인 뜻은 '즉 호흡처럼 동요하며'인데 이것은 소란을 피우거나 야단 법석하는 것을 가리킨다(Perowne). 이것은 재물을 얻거나 명예를 얻기 위하여 팔꿈치로 옆 사람을 밀치듯 애쓰고 소동하나 결국에는 한번의 호흡과 같은 존재 뿐인 인간의 속성을 잘 풍자해 준다(약 4:13, 14).
성 경: [시39:7]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구원의 호소]
⭕ 주여 내가...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 '주여' 앞에 원문에는 '에아타'(*)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 뜻은 '그러므로 이제 나는'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덧없는 인생에 대한 상념으로부터 돌파구를 찾는다는 의미의 분명한 전환인 바 영원히 거사시는 하나님께 그의 마음의 눈을 고정시키는 일을 암시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제 그 소망의 대상이 앞으로 올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의지하려는 그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엿보인다.
성 경: [시39:8]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구원의 호소]
⭕ 모든 죄과(罪過)에서 건지시며 - 이제 저자는 모든 그의 고통과 그의 혼돈의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 앞서 말한 죄과에서 자신을 건지는 일을 행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악인으로 하여금 시편 기자 자신이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은총의 대상임을 목도하게 해달라는 말이다(Barnes).
성 경: [시39:9]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구원의 호소]
⭕ 내가 짐잠하고 - 이것은 분명 1, 2절에 묘사되어 있는 각오 및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 쓴다. 즉, '나는 인간에 대해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는 하나님께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죄악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Sclater).
⭕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 물론 그 원인은 저자의 죄 때문이기는 했으나 그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그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고통 받음이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었고 여호와는 의로우시기 때문에(이 사실이 저자의 전재임에 틀림없다) 그와 논쟁하는 일은 옳지 않다. 그 누구든지 그분과 논쟁하고 어리석은 변론을 행할 때 그의 죄는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Anderson).
성 경: [시39:10]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구원의 호소]
⭕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 '징책'(*, 네가)의 문자적인 뜻은 '한번 내려치기'이나 38:2의 '올무'와 그 의미가 동일하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적들이 본 시편 기자를 넘어뜨리기 위해 설치했던, 그래서 고통을 받았던 그 올무에서 놓여지기를 기자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셨나이다. '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티그라'(*)로 문자적인 뜻은 '공격하다', '내려치다'인데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한번밖에 사용되지 않는 단어이다. 이 단어로서 동의적 평행구를 이룬다. 한편, 구약 경에서 반복은 강조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시 기자가 당하고 있는 '올무'로 인한 고통은 몹시 심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또 강조사로서 저자 자신의 연약함과 그 위에 손을 펼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Perowne). 그리고 본절에서 '쇠망하다'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를 정도로 탈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Barnes). 그러기에 본 구절을 통해 저자는 이제 거의 죽음을 앞둔 고통에 직면한 자신의 처지를 간파하고 그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 강한 능력을 펼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39:11]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구원에의 호소]
⭕ 징계 - 이 용어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1)예시를 통한 책망, (2)논박, 논쟁, (3)말을 통한 책망이나 훈계, (4)징벌을 통한 책망 등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서 여기서는 '징벌을 통한 책망'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편 기자가 이 용어의 사용을 통하여 본 표현에서 밝히려고 한 의미는, 징벌이나 재앙을 수단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행에 대한 그 분의 뜻을 표현하신다는 것이다.
⭕ 좀 먹음같이 - 이것은 나방같이 덧없고 사라져 버리는 인간의 아다움(욥 4:19)이나, 의복을 살살 갉아먹어가는 나방의 영향력처럼 조용히, 은밀히 인간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호 5:12이 지지하듯이 후자가 바람직하다 하겠다(Perowne).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 허사 뿐이니이다 - 이에 대한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호흡과 같나이다'이다. 능력이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없고, 설령 능력이 있더라고 영원하지 않은 인간의 속성을 단적으로 지적해 주는 표현이다(Barnes).
성 경: [시39:12]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구원에의 호소]
⭕ 눈물 흘릴 때에 -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뜻은 '나의 눈물을'이다. 개역 성경의 번역도 좋지만 '나의 울음 소리를 들으실 때'가 좀더 원문의 의미를 살려준다 하겠다. 본절의 울부짖 음은 간절한 소망을 담고 가슴을 쳐서 회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는 기도의 한 특성이다. 비록 그 입을 열어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그의 내적 상태를 아시지만 회개의 뜻을 표현하는 자에 대해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Barnes).
⭕ 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게르'(*)로서 문자적인 뜻은 '지나가는 손님과 같은 자','박방인', '손님' 등이다. 창 23:4에서 빌어온 용어로 대상 29:15의 다윗의 고백에서 그 풍성한 의미를 알 수 있다. 한편, 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요구하기 보다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함을 표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Ander-son).거류자(*, 토솨브). 이는 '게르'의 동의어로 볼 수도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는 '일정 지역에서 얼마 동안 머무는 자'를 가리킬 때 특별히 구별해서 사용되는 용어라 할 수 있다(An-derson).
⭕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 이 구절은 땅 위에는 영원한 집이 없는 자로서, 체류한 곳의 땅을 자기 소유로 삼기 위해 구입할 수도 없었고(레 25:23), 그래서 여행자로서의 삶을 살았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같은 족장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시39:13]
주제1: [무상한 인생]
주제2: [구원에의 호소]
⭕ 용서하사(*, 사아) - 문자적인 뜻은 '응시하다', '조사하다', '인정을 베풀다', '보다' 등인데 문맥을 고려할 때 '눈길을 돌리다'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즉, 본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서 눈길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조로 보아서 하나님이 어떤 상대를 불쾌한 눈으로 주시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징계요, 고통이었다. 바로 그러한 고통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시도록 요청한 것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개역 성경의 '용서하사'를 이해할 수있다.
⭕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 '회복시키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발라그'(*)인데 원래 아라비아어로서 '밝아지다', '비추다', '강하게하다', '슬픔을 이기다' 등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즐거워지다', '표정이 밝아지다'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욥 10:20에서는 '편안해지다', 암 5:9에서는 '(노를) 발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세상을 떠나기전에 '위로를 얻다'', '힘을 얻다', '생기를 되찾다'이다. 본 시편 기자는 그가 잃었었던 활력이 회복되기를, 특히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위로받기를 원했다. 그는 그의 인생 종국의 날들이 구름이 낀 날들이 아니라 좀더 밝고 명랑한 날들이 되기를 소원하였으며 동시에 세상을 뜨기전에 좀더 많은 위안을 받기를 소원하였다. 이것은 우울하고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좀더 밝게 과거를 바라보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긍정적 확신을 가진 나머지 좀더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세상을 떠나기를 원하는 저자의 바람이다(Barnes).
성 경: [시40:1]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카오 키위티) - 문자적인 뜻은 기다림 속에서 기다렸다'이다.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 보여주듯이 시편 기자의 기대와 소망의 행위는 일순간적인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절은 그의 기도가 당장에 그 응답을 보지 못했지만 여러 차례의 반복 끝에 그 응답을 보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성 경: [시40:2]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 하심을 찬양]
⭕ 기가 막힐 웅덩이 - '웅덩이'는 '보르'(*)로서 '감옥', '퇴비 구덩이', '무덤' 등을 뜻하는데 특히 '무덤'이란 의미는 28:1 ; 88:4 ; 사 14:19 ; 38:18등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은 '재앙'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 혹은 '무덤'을 의미하는것 같다(Barnes). 그리고 본절의 또 다른 단어 '기가 막힐'(*, 솨온)의 문자적인 뜻은 '소음', '포효하는 소리', '(특히 파도에서 들을 수 있는, 혹은 전쟁이나 군중의 회집으로 야기되는) 소동' 등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죽음(무멈)에도 적용될 수 있는 바 '황량' 혹은 '멸망'이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하여 어떤 학자는 이곳의 웅덩이를 아비 규환으로 가득찬 동굴 혹은 너무 소란스럽고 야단법석이어서 그곳을 통과할 수 없는 무저갱과 같은 곳으로 이해한다(De wette). 한편, 또 다른 학자들은 그곳에 물이 넘실거려서 으시시함과 공포가 가득한 동굴 혹은 깊은 어두움으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이 전자의 견해보다는 바람직한 것 같다(Rosenmuller). 왜냐하면 70인역(39:3, LXX)이 이 단어를 '랖쿠 탈라이포리아스'(*), 즉 '재앙의 호수'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본 시편 기자는 소망이 없는 깊고 시시한 동굴과 같은 곳, 분명한 멸망과 같은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 수렁에서(*, 미티이트 하야이인) - 문자적인 뜻은 '웅덩이의 밑바닥으로부터'이다. 이곳은 그 위에 설 수 있는 단단한 기초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69:2, 14 ; 렘 38:6), 이 단어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반석'과 대비를 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저자로 하여금 '단단한 땅 위를 걷듯 그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시는 내려가거나 빠지는 웅덩이와 같은 위험한 곳이 없이 안전하게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한편, 이 표현을 구속주(Gedee-mer)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그것이 완전히 성취되는 때는 그분의 속죄 사역이 완성되어 모든 슬픔이 사라진 때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다시는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없고 항상 안전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만을 돌리게 되는 때, 즉 '주의 재림의 때'일 것이다.
성 경: [시40:3]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새노래...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본 표현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찬양할 만한 새로운 경우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에 베푸신 구원은 너무 특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비 행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사의 표현을 매우 적절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구속 행위는 과거의 자비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던 언어로는 불충분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 편에서의 중재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의 구원 사역은 슬픔의 깊음 이후 영광으로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의 사건 때만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불충분할 정도의 위대한 사역이었다는 뜻이다(Barner).
⭕ 많은 사람이...두려워하여...의지하리로다 - 인류의 많은 백성들이 저자가 노래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목도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와하는 것을 배워서 그분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그의 진실된 예배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성 경: [시40:4]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교만한 자 - 원문에 복수형인 '레하빔'(*)으로 되어 있는 이 단어는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단수형 '라하브'(*)는 자기 자신의 힘을 소문내듯 소란스럽게 잰체하듯 의존하는 자를 의미하는 애굽 이름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에는 실망속에 낙담할 힘을 의존하는 교만한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Perowne). 한편, 어떤 학자는 이 '라하브'를 신비스러운 바다 괴물인 라합으로 보고 이를 '이방 우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같은 해석은 70인역(LXX)의 지지를 받는다(Da-hood). 이 두 해석 중 전자가 신뢰할 만한데 그 이유는 전(前) 문맥이 '의존'의 개념을 말하고있기 때문이다.
⭕ 거짓에 치우치는 자 - 문자적인 뜻은 바른 길에서 이탈하는 자, 즉 영적인 의미로는 속임수에 잘 넘어가는 자이다. 그러나 '거짓'으로 번역된 '카자브'(*)가 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임을 고려할 경우(Ander-son)이 단어는 '하나님을 배교하는 자'의 개념으로까지 볼 수 있다(Perowne).
성 경: [시40:5]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 여기에서'생각'이란 성도의 필요를 채우고 유익을 제공하기 위한, 즉 성도의 복지를 위해 하나님 경영하신 계획들, 목적들, 섭리들을 가리킨다(17절).
⭕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 이 구절을 해석하는 관건은 '베풀'로 번역된 '아라크'(*)의 의미 규정에 있다. 그런데 이 '아라크'는 '열을 따라 배열하다', '질서있게 정돈하다'의 뜻을 지닌 군대 용어인 바 '줄을 세우다' 혹은'전투 대형으로 포진하다'(삿20:20, 22)란 말이다. 또한 이 용어는 '논쟁을 위해 개념들을 정리하다' 혹은 '논쟁을 위해 사고를 논리 정연하게 하다'(욥 13:18) 등의 의미와 '재판관 앞에 소송을 제기하다'(욥 13:18)라는 뜻도 더불어 갖고 있다. 그러나 아주 독특하걔 '어떤 것과 함께 배치하다' 혹은 '무엇을 나란히 놓다', 즉 '무엇과 비교하다'의 의미(Gesenius)도 갖고있다. 이러한 게졔니우스(Gesenius)의 견해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서 이미 본절의 전반부에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 그분의 자비로운 그리고 선하신 생각에 관해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시40:6]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으시기를 - 본 구절 해석의 관건인 '들리시기를'(*, 카라)은 그 문자적인 뜻은 '우물을 파다'(창 26:25), '무덤을 파다'(창50:5), '구멍을 뚫다' 등과 같은 '파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난해한 단어롤 포함한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의 여러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1)'주께서 나를 위하여 귀를 건설하셨다'로 번역하는 견해. 이 의견은 제롬(Jerome)과 같은 초대 교부들의 생각인데 이것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것을 들을 수 있는 상태의 귀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들을 수 있는 귀를 부여하셨다는 것인데 이는 사 6:9,10과 신 29:4의 '볼 수있는 눈',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등과 평행구를 이룬다 하겠다. (2)'주께서 귀를 관통하셔서 진리의 계시를 전달하셨다'로 번역하는 견해. 이 의견은 신적 전달, 초자연적인 지식의 전달을 암시하는 많은 구절, 즉 삼상 9:15 ; 20:12, 13 ; 욥 33:16등의 '귀를 열다'와 동일한 의미로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파다'라는 의미의 '카라'를 기준으로 한 해석이 아니라 '카라'의 의미를 유추적으로 해석한 '꿰뚫다', '관통하다'를 기준으로 삼아 석의(釋義)의 논리를 이끌어갔다는 점을 생각할 때 타당한 견해로 보이지는 않는다. (3) '주께서 나로 하여금 순종케 하셨다'로 해석하는 견해. 이 생각은 대부분의 랍비들이 갖는 의견인데 그들은 '순종하는(듣는)것이 희생보다 낫다'고 하는 삼상 15:22을 바탕으로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부여한 나머지 이러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 견해 역시 문법적 근거가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소찰(小察)을 통해 볼 때 그 과정은 분명치 않으나 하나님께서 저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들려주실 계시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어던 영적인 귀를 부여받았던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1)의 견해가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된다(Ba-rnes, Perowne).
⭕ 제사와 예물 - '제사'에 해당하는 원어는 '제바흐'(*)로 속칭 '피 제사'를 뜻하고 '예물은 '미하흐(*)로 피없는 제사, 예를 들면 감사제와 같은 제사를 의미한다(사1:11). 본절에 등장한 네 단어, 제사, 예물, 번제, 석죄제는 히브리 공동체가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희생과 예물을 포함하는 말인데 그들이 드리는데 익숙해져 있덩던 바로 이러한 희생과 예물을 하나님은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본 시편 기자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성 경: [시40:7]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내가 왔나이다 - 쉽게 풀이하면 '당신 앞에 섰나이다'라는 말이다. 이 같은 표현은 열등한 자가 존귀한자 앞에 나아갈 때, 혹은 노예가 그 주인 앞에 설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데(민 22 :38) '보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가까운 마음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다.
⭕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 - '의무로 내게 부과된 것'으로 바꿔 쓸 수도 있는데 이 말은 율법책을 발견한 후 요시야가 그 책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실린 왕하 22:13에 등장하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본절은 저자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제 입을 열어 동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희생이나 예물이 아니라 내적인 순종이며, 그 순종은 하나님이 부여하는 불법의 내용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을 메시야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그는 6절의 '제사'나 '예물'의 무용성에 관한 표현이 있는 사실을 중시하여 본절의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란 이제 완전한 제사와 예물이 되실 메시야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혜석한다. 따라서 후속절의 '두루마리 책'은 시편뿐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Barnes). 그러나 전후 문맥이 외적인 종묘 의식이나 형식 대신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두는 것(8절)을 강조하고 있는 성향을 고려할 때, 후자의 메시야적 해석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느낌이 없잖아 있다.
⭕ 두루마리 책에 - 앞서 하나님께서 그의 귀에 들려주신 혹은 가르쳐 주셨던 내용이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율법책에는 하나님의 영이 저자의 마음에 이미 기록했던 것과 동일한 진리가 있다는 고백 이다. 이 율법책은 모세의 율법책이며 두루마리는 그 율법의 내용이 양피지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사실은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Perowne).
성 경: [시40:8]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 문자적인 뜻은 '주의 기쁨을 행하기 위하여'이다. 이 표현은 선행 구절 '내가 왔나이다'(7절)의 연장선에서 해석되어야 하므로 앞절과 본절을 합쳐 '주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하여 내가 왔나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나의 심중에(*, 베토크 메아이) - 문자적로는 '나의 창자 중간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법이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표현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법이 그의 행동과 자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37:31 ; 신 6:6 ; 렘 31:33).
성 경: [시40:9]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대회 - 이에 대한 원어는 '카할'(*)로 예배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22:25 ; 35:18 ; 89:5). 여호와의 전령과도 같이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 자는(1, 2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구원을 선포하기 마련이다. 한 공동체의 요원이 구원받은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좋은 소식이 되며 그 공동체의 연합과 교제의 분위기를 북돋우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대부분의 현대 교회 공동체 속에서는 드문 일로 여겨긴다.
성 경: [시40:10]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구원하심을 찬양]
⭕ 의 - 이것의 히브리어 '체데크'(*)는 구약 용어들 가운데 가장 해석하 어려운 용어 중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여러 차례 다양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116회 등 장). 따라서 그 문맥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어떤 학자는 본 시편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선포로부터 출발되는 사실을 중시하여 '구원하시는 도움'으로 이 단어를 번역한다(Anderson). 또 다른 학자는 이를 '인간을 의롭게 하는 신적인방법'으로 해석한다. 이 방법이란 '칭의'(秤義)를 가리키는데 이 혜석의 경우 롬 1:17에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Ba-rnes). 그런데 만일 이 해석을 따른다면 본장 1절의 구원 사실은 바로 불신앙 상태로부터 신앙의 상태로의 구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온당치 않다. 왜냐하면 본 시편은 다윗의 것으로 그는 이 시편을 기록하기 훨씬 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은 자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자의 번역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 숨기지 아니하고...선포하였으며...은휘(隱諱)치 아니하였나이다 - 9절 '전하였나이다', '입술을 닫지 아니하였다'등과 의미가 동일한 단어들이 이와 같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음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를 보이기 위해 타오르는 듯한 마음의 의욕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성 경: [시40:11]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 긍휼을...그치지 마시고- 여기서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바꾸어 간절한 탄원을 하고있다. 그렇다면 그는 현제 슬픔 가운데 있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과거의 구원을 회상하면서 과거 자신의 행실을 근거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저자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구원, 성실, 인자, 진리를 입이 닳도록 회중에게 선포하고 선전한 일을 가리킨다(9, 10절).
성 경: [시40:12]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 저자의 죄가 초래한 결과들을 말하고 있다. '재앙'은 고통당하는 자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위협하고 있는 일종의 홍수의 물줄기를 가리키는 표현이다(삼하22:5 ; 욘 2:5).
⭕ 나의 죄막 - 저자가 자기의 불행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징계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32:1 ; 51;2). 그런데 이 구절은 본 시편을 메시야적 시편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에 결정적인 제동을 거는 구실을 하고있다(Perowne). 즉,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는 저자를 죄없이 고통당하셨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 삼상 3:2 ; 4:15) 왕상 14:4등의 용례와 같이 연약함 혹은 노쇠로 인한 시력의 쇠퇴 및 상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앞을 제대로 보고 비전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임한 재앙이 무겁고 혹독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리비 아자바니) - 문자적인 뜻은 '내마음이 나를 버렸다'이다. 그런데 문맥상'마음'을 가리키는 '레브'(*)가 때로는 '용기' 를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고려 할 때 '용기가 사라져 버렸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성 경: [시40:13]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 여호와여...도우소서 - 본절로부터 본 시편 끝절(17절)까지의 내용은 70편과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따라서 70편이 삽입절의 의미로 이곳에 첨가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Hupfeld).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 시편의 후반부는 그 내용에 있어서 전반부의 내용을 사용하는 것이 도무지 적합하지 못하다고 느꼈을 수 있는 어떤 후대 저자에 의하여 분리되었거나 변형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Pero-wne).
⭕ 여호와여 - 원문에는 이 단어 앞에 '라차'(*) 즉, '즐거워하소서', '기쁨을 가지소서'라는 의미의 표현이 있다. 그렇다면 본절 전반부의 의미를 정확히 말하면 '여호와여 은총 베푸시기를 즐거워 하소서'이다. 한편, 이 구절은 분명히 8절의 '즐기오니'(*, 레촌카)와 평행구를 이룬다.
성 경: [시40:14]
주제1: [감사 찬양과 간구]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나의 생명을 파괴하려고 찾는 자'이다. 말하자면 나를'죽이기 위하여 찾는자', '죽이기를 원하는 자'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만일 13-17절을 후대 저자에 의해 삽입 및 변형된 구절로 본다면 이 구절을 메시야적 구절로 간주하여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12절과는 달리 13-17절은 득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12절 주석 참조). 만약, 메시야적 언급으로 볼 경우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거의 임박한 혹은 죽을위기에 처한 시기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겠다(마 26:16 요 7:6,Barnes).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이 당시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예수의 말씀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저지키 위하여 그를 죽이려고 힘썼다.
⭕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예보슈 에야흐페루)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이 수치를 당하고 뒤죽박죽이 되게 하소서' 이지만 이 기도의 실현에 대한 기자의 강력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두 강조 동사가 연결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그들이 수치를 당하고 뒤죽박죽이 될 것을 믿습니다'로 의역하는 것이 좀더 원문에 가깝다. 즉, 이 구절은 소원이나 바램보다는 일종의 확신에 찬 기대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Barnes). 한편, 뒤죽박죽이 된다는 것은 대적의 목적, 의도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므로 대적의 목적이 실패로 돌아는 것을 뜻한다.
성 경: [시40:15]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 하하(*, 헤아흐 헤아흐) - 이것은 비난이나 경멸을 표시하는 의성어로 다른사람에 대한 승리, 특히 다른 사람이 재난 당함을 보고 즐거워하는 태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35:21, 25 ; 겔 25:3).
⭕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 여기 '놀란다'는 말의 뜻은 황폐케 된다는 것, 무용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대적들이 그 목적들, 소원들이 완전하게 성공적이지 못하고 성취되지 못함을 보고 예상 밖의 일이라는 듯 깜짝 놀라는 것을 나타내는말이다. 또한 '수치를 인하여'(*, 알 에케브 바슈탐)는 그 문자적인 뜻이'그들의 수치의 보상 때문에'이다. 여기서 보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 에케브'(*)로'끝', '어떤 것의 마지막', '어떤 행위 과정의 종국', '결과' 등인 바 '배상', '보상', '임금','상급'을 뜻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저자가 대적들에에 대해 기도한 '황폐케 됨'은, 대적들의 목적 혹은 그들이 말했었던 내용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될 것이다.
성 경: [시40:16]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 찾는 자(*, 바케쉬) - '찾다'는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의 렘 50:4, 5의 경우처럼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예배를 암시하는 예식 용어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24:3 ; 69 ; 105:4 ; 호 3:5 ; 말 3:1). 그러나 때때로 이 용어는 호5:15-6:1의 경우처럼 '여호와께로의 귀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는 표현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122:9 ; 느:10).
⭕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 '주의 구원'이란 (1) 하나님의 구원 방법, 혹은 그것을 따라 인간을 구원하기로 약속된 방법,(2) 죄책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에로의 완전하고 영원한 회복(Barnes)을 말한다. 한편,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란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거나 의뢰하지 않는, 오직 여호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자를 가리킨다(62:6, 7).
⭕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 이 구절은 대적들의 조롱하는 외침과 대조를 이루는(15절) 예배자들의 반응이다(Ander-son).
성 경: [시40:17]
주제1: [감사 찬송과 간구]
주제2: [도움을 구하는 기도]
⭕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아니 아니 에브욘) - 문자적인 뜻은 나는 고통당하고 있고 가난하다'이다. 여기서 사용된 용어들은 고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난했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의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Barnes).
⭕ 나를 생각하시오니(*, 야하솨브) - 이와 동일한 단어를 '나에게 속히 임하소서'로 번역하고 있는 70:5에 비추어 볼 때 이 구절과 하반절의 '지체하지 마소서'는 서로 평행구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Anderson). 한편 이 유사한 표현이 욘 1:6에서도 발견된다.
⭕ 나의 도움(*, 에즈라티) - 70인역(LXX은 이용어를 '나의 구원자'와 나란히 사용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나의 도움'은 '나의 구원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
성 경: [시41:1]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빈약한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달'(*)로서 시계추 혹은 나뭇가지들처럼' 매달려 있거나 흔들리는 어떤 물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연약한', '가냘픈', '힘없는' 등의 뜻이 된다. 결국 이 단어는 빈곤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바싹 마르거나 도움받을 곳이 없는 자, 그리고 열등한 환경에 처하여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가리킨다(창 41:19 출 30:15 ; 삼하 13:4).
⭕ 권고하는(*, 마스킬) - 원어의 의미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첫째는 '동정의 눈을 가지고 보다'(느 8:13 ; 잠 16:20 ; 21:12)이며, 둘째는 '의로운지혜를 가지고 의롭게 대하다'(14:2)이다. 우리는 이 두 의미 중에서 70인역의 지지를 받는 전자를 취할 수 있다. 즉 '권고하는 자'란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굳은 마음이나 냉정한 마음이 아닌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빈약한자를 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Barnes, Pero-wne). 한편, 본 시편은 애가(哀歌)가 그 바탕이 되고 있는 일종의 저자의 신앙 고백문이라고 볼수 있다(Anderson).
성 경: [시41:2]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여호와께서...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 이것은 경건한 자의 행위는 부분적으로 땅위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혹은 이웃에게 친절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난다는 신적 통치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법칙이다. 이 법칙에 관해서 성경은 1:3 ; 37:3, 4, 11, 23-26, 37 ; 마 5:5 ; 딤전 4:8 등에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법칙을 본 시편에 적용해 본다면 누구든지 질병으로 연약해진 자를 긍휼로 돌볼 경우 그가 동일한 상황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보존하시고 생명을 유지시키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적용은 일반 원리하에서만 가능한 진술로 보아야 한다.
⭕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 이것은 방금 전에 살펴본 원리와 조화를 이룬다. 시편과 성경 여러 곳은 경건에 기본을 두고 이웃을 돌아보는 행실이 이생에서의 행복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 원수의 뜻에 맡기소서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원수의 욕심에 나를 넘기지 마소서'로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27;12에서 볼 수있다. 이것은 저자를 해롭게 하여 어떤 이익을 보려는 대적의 욕심을 저지해 주기를 원하는 저자의 소원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단순한 소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저자 편에서의 확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40:14 주석 참조).
성 경: [시41:3]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고통의 자리 위에 있는 그를 힘있게 하시고'이다. 여기의 '힘있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사아드'(*) '지지하다', '후원하다', '유지하다', '강하게 하다', '원기를 되찾다' 등을 의미한다. 문맥에서는 저자의 육체가 쇠해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가 병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해주시거나 힘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를 앞서 언급된 바와 연결시켜 볼때 연약하고 병들고 도움없는 자에게 자비(1절)를 베푸는 자는 그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돝아보신다는 좀더 구체적인 적용을 도출해 낼 수 있겠다(18:25).
⭕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저가 병 중에 있는 그의 자리 모두를 바꾸셨다'이다. 여기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자리'인데 상반절의 '병상'이 단순히 침대를 의미하는 반면이 '자리'는 오랫동안 병들어 누운 환자의 상태를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Perowne). 한편, '고치다'(*, 하파크)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 전자는 단지 쿠션이 있는 벼개 같은 것을 환자의 머리 밑에 받쳐 주어 기분전환과 안락함을 공급하는 행위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리고 후자는 하나님이 그 환자의 병을 완전이 고치셨기 때문에 더 이상 환자의 침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는 계속적으로 아파왔던 상황이 완전히 끝났음을 암시하는 바, 원어상 '고치다'의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제는 단순한 어떤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혐을 표현한다. 즉 저자는 본절에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도 보았던,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병든 상태로부터 완전한 고침을 받은 사실들을 회상하며 이 같은 고백을 하고있는 것이다.
성 경: [시41:4]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내가 말하기를(*, 아니아마르티) -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내가 말하였나이다'이다. 여기의 '아니'는 대명사로서 1-3절의 긍율이 넘치는 자에 대한 칭송으로부터 저자 자신의 개인적 감정과 소원에 대한 아룀으로의 전한을 두드러지게 구분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다음절의 '원수'에 대한 대립을 분명히 밝혀주는 강조사이다.
⭕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 나에게 고통이 임한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저자의 회개적인 고백이다. 여기서 저자가'나의 영혼을 제하소서' 즉 '나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역경을 만났을 때 그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가 하여 자신을 살피기 보다는 단지 그 역경이 물러가기만을 기대하고 소원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이 사실은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성 경: [시41:5]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 저자의 대적들이 저자의 슬픔을 더하게 할 목적으로 그의 연약하고 유약한 상태에 대해 악하게 말하기 위하여 자리를 마련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여기 '악담'에 해당하는 원어 '아마르'(*)는 단순히 '말하다', '발언하다'를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대적들의 '중상' 및 '비난'을 의미한다.
⭕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 함축적인 이 표현을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저 사람은 병들어 있소. 그의 죄때문에 병든거요. 저 사람이 죽는 일은 분명한 일일 것이오. 아니 저런 사람은 죽는 것이 낫소. 그러나 저 사람은 죽은 후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 생명이 끊기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것이오'이다. 참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에 대해 이보다 더 신랄하고 혹독한 비난은 없을 것이다(Bar-nes).
⭕ 그 이름이 언제나 언제나 멸망할꼬 - 이것은 한 특정인과 그의 가문의 멸망(109:13 ; 신 14 ; 25:5 ; 삼하 18:18). 또는 본절의 예와 같은 불행한 한 인간의 단순한 죽음(9:5)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본 시편 저자의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기를 원치 않는, 그의 삶의 향력이 더 이상 존재하기를 원치 않는 그의 대적의 바램을 엿볼 수 있다.
성 경: [시41:6]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나를 보러와서는(*, 임 바 리르오트) - 원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만일 그가 보기 위하여 온다면'이다. 유사한 구절인 삼하 13:5 ; 왕하 8:29 등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은 병든 친구나 친척의 방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상기의 구절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병자 방문의 대표적 예는 욥 2:11인데 이 구절에 의하면 방문의 목적은 애도를 표시하고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대화의 문을 열 때까지 위로자는 그 어떤 말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Anderson).
⭕ 거짓을 말하고 - 문자적인 뜻은 '공허한 것으로 말하고'이다. 이것은 방문자가 방문 목적대로 위로하고 위안을 주지 않고 방문 목적과는 상관없는 쓸데없는 공허한 말들을 늘어 놓은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것을 살펴볼 때 결국 방문자의 목적은 위안 주기를 가장하여 피방문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Barnes).
⭕ 그 중심에 간악(奸惡) 쌓았다가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마음은 부정을 모으고'이다. 이것은 악한 위로자가 나쁜 소문을 퍼뜨릴 목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도 이 사악한 방문자인 친구는 피방문자의 질병의 증상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피방문자의 질병의 원인을 그의 죄 때문이라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굳혔을 것같다(8절).
성 경: [시41:7]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수군거리고 - 저자의 대적들이 예정된 악행과 관련된 최근의 정보를 토론하고 서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삼하 12:19).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일삼고 즐거워한다. 마 7:1-4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사실이 진리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한편, '수군거리다'(*, 라하쉬)는 '주문을 걸다', '속삭이다', '중얼거리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대적들이 고통 당하고 있던 시편 기자가 확실히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유치한 행위를 하였던 것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An-derson).
성 경: [시41:8]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 문자적인 뜻은 '벧리야알(*)의 것이 그에게 쏟아 부어졌으니'이다. 우선 악한 병을 가리키는 '벧리야알의 것'은 '어떤 충격적인 것'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육체적인 혹은 도덕적인 악'을 의미한다. 그러나 후자 '도덕적인 악'이 좀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이다. 이와 동일한 형태의 표현이 101:3 ; 신 15:9에서도 등장하는데 그곳에서도 도덕적 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있다. 그러나 '벧리야알의 것'은 어떤 육체적인 악한 결과를 동반한 '도덕적 악에 대한 징벌'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Perowne, Ra-shi). 왜냐하면 문맥이 악 자체보다는 그 악으로 인한 '결과' 혹은 그 악 때문에 임한 '징계'따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쏟아붓다'에 해당하는 ''야차크'(*)는 왕상7:24, 30 ; 욥 41 :15, 16에서도 볼 수 있으며 아마도 렘 42:18에 그것과 동일한 상징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 어떤 녹인 금속이 주조(鑄造)를 속으로 구석 구석 흘러들어 가듯이 인간의 몸전체를 덮고 몸 속으로까지 스며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상의 소찰(小察)을 통해 볼 때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다'는 것은 도덕적인 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몸 외부뿐 아니라 그 피부 속 깊숙한 곳까지 육체적인 질병이 임했다는 말이다.
성 경: [시41:9]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떡을 먹던 - 이것은 주인의 환대를 받았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삼하 9:10 ; 왕 상 18:19). 본 구절의 일부분이 제자 가룟 유다의 반역적인 소행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에서 발견되기 때문에(요 13:18) 본 시편을 메시야 시편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는 본절에 ' 나의 신뢰하는'이라는 중요한 구절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유다가 어떤 자인줄 알았고 따라서 그를 신뢰하지 않으셨다(Pdrowne).
⭕ 나의 가까운 친구(*, 이쉬 쉴로미) - 문자적인 뜻은 '나의 평안의 사람'이다. 이는 서로 가슴으로 안을 수 있는 친구라고 볼 수 있는(Anderson),그리고 서로 항상 평안을 주고 받고 소원(蔬猿)하지 않으며 최고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우정은 언약의 식사(covenant meal)나누고 어떤 약조를 맺음로써 시작되곤 하였다(창 26:28 ; 31:53 ; 삼상 18:3, Pedersen). 그렇다면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란 이 같은 언약의 식사를 나누고 약속을 나눈 언약적 친구라고 볼 수 있다.
⭕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가 그 벌꿈치를 크게 만들었다'이다 이 표현은 말이 그 주인을 차버리고 도망하는 모습에서 따온 것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주석가는 '그가 그 발로 그를 밟았다'라고 본절을 번역하기도 한다 (Lu-ther). 한편, 이 표현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에 대한 예언(요 13:18)으로 신약 이후부터는 이 표현이 주인을 배신하는 행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경: [시41:10]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이 같은 기원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양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소원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윗이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공법(公法)을 집행하는 왕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소원은 정당화될 수 있다. 즉 다윗의 주 관심사는 개인적 앙갚음에 있다기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보는 데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반자들의 반역적 거사에 의해 일단 폐위되었었던 다윗은 이 같은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 당연하였다고 여겨진다.
성 경: [시41:11]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승리치 못하므로 - '숭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로 '소리치다', '소동하다','개가를 울리다', '경종을 울리다'등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편이 지르는 기쁨의 환호를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된다(삼상 17:20).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다윗의 대적이 승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곧 죽으리라는 기대 속에 있었던 다윗의 대적들은 매우 실망하게 될 것이다.
⭕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 좀더 분명하게는 '주께서 다윗의 친구가 되시는 줄을'이라는 뜻이다.
⭕ 내가 아나이다(*, 야다티). - '내가 알았나이다'가 문자적인 뜻인데 번역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다. 이처럼 시제가 과거로 되어있다는 것은 비록 본 시편을 저술하는 시점의 상황은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이지만 저자는 하나님과 친구인 자신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을 미리 알고 확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시41:12]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 '완전'은 '톰'(*)으로서 문자 그대로 '죄없는 완전한 상태' 혹은 '무죄'를 가리킨다(욥 27:5 ; 31:6).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은 4절 상반절의 자신이 죄인이라는 저자의 고백과 모순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의 주석을 통해 보았듯이 저자가 고통을 받았던 이유는 죄악 때문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승리하고 회복될 것을 확신하는 마당에서, 저자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반복적인 고통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성 경: [시41:13]
주제1: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주제2: [빈약하고 소외된 자의 기도]
⭕ 여호와...아멘 아멘 - 원래의 시편에 없던 것으로 시편의 큰 단위 하나가 종결되는 대목에서 결론조로 후대에 첨가된 찬양으로 이 마지막 구절을 보는 일부의 경향이 있다(A. A. Anderson). 이러한 견해는 아멘 찬양(72:19 ; 89:52)이 시편의 큰 다섯 단위(개역 성경엔 제 일권, 제 이권...제 오권 이런 식으로 구분되어 있다)의 종결 부분에 각각 등장함을 볼 때 그럴듯 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된 찬양은 히브리 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강조해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에 꼭 이렇게 볼 수만은 없다.
성 경: [시42:1]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갈망]
⭕ 사슴(*, 아얄) - 직역하면 '숫사슴'이다(신 12:15 ; 14:5 ; 사 35:6).이 단어는 남성이지만 이곳에서는 통성어(通性語)로서 여성 동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으므로 숫사슴이 아닌 '암사슴'을 뜻한다.
⭕ 갈급함같이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아라그'(*)는 이곳과, 지독한 가뭄 때하나님을 향하여 '헐떡거리는' 들짐승들을 묘사하는 욜 1:20 에서만 사용되었다. 욜1:20의 문맥을 고려할 때 이 용어는 `찾기에 갈급함'같이로 번역하기보다는 '울부짖으며 찾음과 같이'로 번역해야 원문의 의미가 살아날 듯싶다(Luther).
성 경: [시42:2]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
⭕ 생존하시는 하나님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다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 모든 생명의 근원 및 기초로서 죽은 추상적 존재와는 대조를 이룬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본절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그분의 성소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Calvin), 이러한 견해는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 의하여 더욱 분명한 지지를 받는다.
⭕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 이 같은 구절은 지성소 및 성전에 나아가게 됨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84:7 ; 출 23:17). 그런데 이러한 의미는 흔히 '하나님의 면전에서'와 같은 식으로 표현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대목을 지성소에서의 갈망을 그리고 있는 구절로 보는 근거는 이곳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이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시42:3]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갈망]
⭕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 이 조소적인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대적들의 입술에서 자주 발견된다(79:10 ;115:2 ; 욜 2:17 ; 미 7:10). 시편 기자의 비탄을 고려할 때 그 대적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그 배후에는, 그의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고, 설령 계시다 하여도 힘이 없거나 그의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라는 우매(愚昧)한 지식이 전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 내 눈물이...내 음식이 되었도다(*, 하이타리 딤아티 레헴). - 이를 단어 배열 순서에 따라 직역하면 '눈물이 나의 빵이 되었다'이다. 즉, 시편 기자의 눈물이 그에게 있어서 마치 매일의 식사처럼 날마다 취하는 몫이 되었다는 것이다(80:5 ; 102:9 ; 욥 3:2, Perowne).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시편 기자가 식사를 하지않고 울기만 했던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본다(Barnes). 물론 심한 심적 아픔이 있을 때 식사를 거른 채 눈물만 흘리며 슬퍼할 수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표현이 지니는 강조점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는 조롱에 대해서 심한 고통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눈물을 매일의 식사로 취했다는 본 구절을 시편 저자의 심한 비통과 고통의 상태를 과장적으로 묘사하는 이중적 어법의 구절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80:5 ).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 기법은 우가릿 바알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데 심한 고통 중에 있던 아낫이라는 신이 '울며 앉아서 포도주를 마시듯 눈물을 삼켰다'는 표현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방 신화와 성경 기사의 유사점을 통해 성경을 하나의 히브리적 신화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성경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그 당시의 특정한 문화를 중시하시고 그 문화권이 반영된 성경 기사를 쓰도록 허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 기자 동시대의 이방 문화와 성경이 그리고있는 문화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는 특별한 차이가있다. 즉, 이방 문화는 문화 그 자체일 뿐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주권하에 되어진 계시이기 때문이다.
성 경: [시42:4]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갈망]
⭕ 성일(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 '성일을 지키는'은 '호게그'(*)로 문자적인 뜻은 '원 안에서 돌다', '성스럽게 행진하다', '춤추다' 등이다. 이것은 뛰고 춤추면서 축제를 지키고 성일을 축하하는 행위을 가리키는 말이다(출 5:1 ; 레 23:41). 또한 '무리'(*, 하몬)의 일반적인 의미는 '많은 수의 군중'을 가리키지만 특히 열방 혹은 군대와 같이 소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군중'을 지시하는 말이다(삿 4:7 ; 왕상 8:41 ; 사 13:4 ; 단 11:11-13). 이와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본 구절은 시편 기자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무리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 기쁨과 찬송의 소리(*, 콜 리나 에토다). - 문자적인 뜻은 '큰 노래의 소리와 감사함'이다. 일련의 순례자의 행렬은 모든 음악과 노래를 돕는 수단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표현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삼하 6:5). 한편, 아름다운 순례자 노래의 가사들이 순례 행렬을 위하여 마련된 영감된 시편이 120-134편에 잘 수록되어 있다.
⭕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 '이 일'이란 기자가 많은 무리와 함께 과거에 경험하였던,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전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온갖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 예배하고 감사하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바로 그와 갈은 기억은 낙담 가운데 있던 당시의 시편 기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자신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했던 무리들이 이제는 도리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더구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조롱의 말을 서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시편 기자는 그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류의 추억을 어떤 학자는 '쓰고도 단 추억'이라 부르고 있다(Delitzsch).
성 경: [시42:5]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
⭕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마흐 티슈토하히). - 문자적인 뜻은 '어찌하여 네가 숙이느냐'이다. 그런데 여기의 '숙인다'는 것은 대중 예배 때에 기도하기 위하여 그 자세를 숙이는 것을 가리키나 문맥을 고려할 때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슬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심히 우울하고 슬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여기서 저자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즉 저자는 영과 육, 고등한 본성과 저등한 본성, 즉 신앙으로부터 온 믿음의 마음과 불신의상태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믿음은 인간 본성적 죄악성 때문에 초래된 우울과 어두운 상태의 또 다른 육적인 상태를 꾸짖기 마련이다(Perowne).
⭕ 불안하여 -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바다의 파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46:3) 시편 기자의 영혼이 성난 파도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요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 그 얼굴의 도우심(*, 예슈오트 파나이우). - 문자적인 뜻은 '그의 얼굴의 구원들'이다. 여기서 '예슈오트'는 그 형태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절대적으로 완벽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값없는 은혜를 베푸심을 나타낼 때 '얼굴의 빛을 비추인다'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의 '얼굴'은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4:6 ; 21:6 ; 44:3 ; 89:15). 결국 그 얼굴의 도우심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낙망과슬픔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슬픔과 역경으로부터 구원하시되 완벽하게 해내실 것을 확실히 기대하는 저자의 믿음이 담겨져 있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42:6]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
⭕ 요단 땅 - 이 언급은 현재 시편 기자가 거하고 있는 장소를 가리키거나 그가 그 장소 밖에 나와서 회상투로 언급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Anderson). 그러나 처소격 조사 '민'(*)이 '요단 땅'에 부착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전자가 옳은 것 같다. 이 요단땅은 당시 잡목과 빽빽한 숲이 우거진 곳으로 동물들이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롑49:19).
⭕ 헤르몬 - 정확하게는 '헤르몬 땅'으로 헤르몬 산이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여기 '헤르몬'은 복수형 '헤르모님'(*)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헤르몬 산이 몇 개의 정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헤르몬이 언급된 이유는 이곳이 팔레스타인 북동쪽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요단 근원 동쪽과 맞닿아 있기때문이다.
⭕ 미살 산(*, 메하르 미츠아르). - 직역하면 '작은 언덕'이다. 이곳은 커다란 헤르몬 산맥의 어느 작은 곳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시편 기자가 도피 중에 거처로 삼았던 특정한 지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요단 땅으로부터 그리 먼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 경: [시42:7]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
⭕ 주의 폭포 소리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바다 회오리 소리'이다. 여기서 '폭포'에 해당하는 '치누르'(*)는 본 용어를 '수구'(水口)로 번역하고 있는 삼하 5:8과 이곳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을 해내기가 어렵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를 대홍수, 폭포, 수로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며 또한 혹자는 하나님의 처소 주위에 있는 두 개의 큰 물줄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Driver). 그러나 바로 앞절에 요단이 나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요단 강물줄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저자가 엄청난 물줄기가 아닌 한낱 작은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대홍수, 폭포, 바다 회오리로 번역이 가능한 용어인 '치누르'를 사용한 것은, 곤경에 처하여 있기 때문에 모든 환경이 자신을 꾸짖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작은 물줄기의 소리'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크게 꾸짖는 큰 소리로 들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물줄기의 근원이나 소속이 주님임을 밝히는 '주의 폭포 소리'라는 표현을 미루어 볼 때 당시 저자는 고통을 허락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테홈 엘 테홈 코레). - 직역하면 '깊음이 깊음을 부르며'이다. 여기에서 '테홈'은 파도, 큰 물덩어리, 홍수 바다등을 의미하는데(36;6 ; 창 7:11 ; 신 8:7 ; 욥 28:14 ;38:16, 30 ; 겔 31:4) '주의 폭포 소리를' 근거로 볼 때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 해변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바위가 많은 요단 강 골짜기에 부딪히며 요란스럽게 내려오는 '요단강의 급류'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바다'의 이미지와 '강'의 이미지와의 조화는 종종 큰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근원인 강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고대 신화에서 간접적인 근거를 찾을 수 있다(Driver). 이 은유는 하반절의 '엄몰하도소이다'를 통해 암시되었듯이 고통과 재해의 묘사인 것 같다. 또한 깊음과 물들은 항상 잠재적 파괴력으로 간주되어 왔음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의 묘사는 아주 적절하다 하겠다(71:20 ; 104:6, Anderson).
성 경: [시42:8]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
⭕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낮에게 여호와는 그의 자비를 명령하실 것이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 혹은 은총을 명령하거나 지시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 언급된 '낮'(*, 요맘)이란 용어는 분병히 번성을 암시하기에 본 구절에는 언젠가 번영의 시기가 돌아올 것이라는 저자의 기대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절대 자포자기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기대는 하반절과 같은 결과, 즉 재앙의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본절의 '낮'과 '밤'을 '낮과 밤'이라는 하나의 합성어로 보아, 즉 '항상'으로 해석하여 본절을 하나님이 항상 그의 인애를 보이시리라는 저자의 확신을 나타내 주는 구절로 보기도 한다(DeWette).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려면 하반절의 '찬송하다'나 '기도하다'를 '하나님이 인애를 보이신다'로 해석해야 하는데 이 같은 견해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 상반절에 비추어 볼 때 '심지어 재앙과 슬픔의 어두운 밤에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비록 역경의 때이지만 마음속에 위안이 있고 위안이 감사로 바뀌고 감사가 찬양으로 바뀔 수 있는 근거는 과거 하나님이 인애를 베푸셨듯이 미래에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욥 35:10 ; 행 16:25, Barnes).
성 경: [시42:9]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
⭕ 내 반석 - 이는 '하나님'과 동격 관계에 있는 명사인데 직접 화법을 시작하는 호격 명사로 볼 수도 있다(나의 반석이시여, 어찌하여...70인역). 이 용어는 시편에서 여호와를 가리킬 때만 사용되고 있다(18:2). 그런데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는 이 용어를 본 문맥에서 특별히 사용한 것은 파도와 물결(7절)과 극명한 대비가 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Driver).
⭕ 어찌하여 - 이것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지금 겪고 있는 혼란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 볼수있다(13:2 ; 22:1 ; 77:9).
⭕ 잊으셨나이까 - 저자는 자신이 마치 하나님으로 부터 잊혀지고 버림을 당한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 중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이와같은 탄식을 내뱉었던 것이다. 이러한 탄식은 시편에서 종종 발견된다. 한편, 22편의 이와 동일한 표현은 메시야적 예언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 슬프게 다니나이까 - 여기서 '슬프게'를 가리키는 '코데르'(*)는 '카다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용어는 탁류처럼 '흙탕물이 된'(욥 6:16), 더럽고 오염된 의복이나 베옷을 걸치고 '이리저리 다니는'(38:6 ; 욥 5:11 ; 렘 14:2), 햇볕에 그슬린 피부처럼 '더럽고 먼지가 낀듯한 색깔의'(욥 30:28), '검은'(왕상 18:45 ; 렘 4:28 ; 14:2)등을 뜻한다. 이상 의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단어는 내적인 상태가 아닌 외적인 상태, 그것도 굉장히 어둡고, 슬프고, 처량한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슬프게 다닌다'는 본 구절은 고통으로 인한 저자의 외적인 슬픈 상태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시42:10]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
⭕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브레차흐 브아츠모타이) - 자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을 해내기는 힘든 구절인데 여기에서 '칼'에 해당하는 원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그런 뉘앙스를 담은 단어가 전혀 없다) 일차적으로 개역 성경의 번역은 원문적이지 못하다. 개역 성경은 여기 '래차흐'(*)를 '칼'로 번역했는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죽이는', '도륙하는', '산산이 쪼개는', '부셔버리는' 등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구약에서 이곳과 겔 21:22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정확히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겔 21:22에서 '도륙'이란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중시하여 70인역(LXX)은 '멍듦'으로, 벌게이트역(Vul-gate)은 쪼개다'로 루터(Luther) '죽음'으로 각각 이 용어를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에 대한 주요 역본 및 주요 주석가들의 이와 같은 번역을 종합하고 이 말뒤에 나오는 '아츠모트'(*)의 뜻이 '뼈들'인 사실을 고려할 때 본 대목의 일차적인 번역은 '나의 뼈들에게 죽을 것같은 상처를 주려는 것 같이'가 무난한 것 같다. 사실 그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조롱하듯 물었을 때 시편 기자는 마치 그 뼈가 쪼개져 그 통중으로 인하여 죽을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었다. 그러기에 이 구절에 나타난 저자의 태도는, 자신의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않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준다.
성 경: [시42:11]
주제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주제2: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
⭕ 나는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 본절은 5절과 그 내용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차이가 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5절의 '그 얼굴의 도우심'이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으로 바뀌었고 5절에 없던 '내 하나님'이 내 얼굴을 도우시는 바로 뒤에 첨가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으로 살펴볼 때 결국 차이의 핵심은 '내 얼굴'. '내 하나님'이란 표현이 대변하는 바 5절에서 보다 좀더 명백하게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리라는 확신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5절에서 낙망 중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하시리라는 확신을 일단 피력한 뒤에도 계속해서 낙망하였던 저자는(7-10절)다시 한번 동일한 확신을 본절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43:1]
주제1: [시온을 향한 소망]
주제2: [주는 나의 힘]
⭕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자비하지 않은 민족으로부터'이다. 이것은 시편 저자를 향하여 조그마한 자비심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던 것, 곧 대적들이 저자를 혹독하고 부당하게 다루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황의 묘사는 다윗 그의 집과 권좌 (權座)에서 내어 쫓겼던 압살롬의 반역을 연상시킨다(삼하 15장). 하지만 본 시편이 42편과 연결되는 시편이라는 점에서 42편과 함께 저자는 고라 자손으로 보는 것이 더 무난할 것이다.
성 경: [시43:2]
주제1: [시온을 향한 소망]
주제2: [주는 나의 힘]
⭕ 버리셨나이까 - 42:9에서 ' 으셨나이까'로 표현했던 저자는 이제 '버리셨나이까'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자나'(*)로서 강한 혐오감 내지는 역겨움을 반영하는 말이다. 또한 이 용어는 예수님께서 신약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입에서 토해 내겠다고 하셨는데 바로 이 '토해내다'와 의미가 통하는 말이기도 하다(계 3:16). 이제 '잊으셨느냐'는 표현 대신 입에서 토해내듯 '버리셨느냐'는 좀더 강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대적으로 인한 고난의 강도가 좀더 세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현은 이어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에 대한 짜증, 빈정거림, 자포 자기의 성격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43:3]
주제1: [시온을 향한 소망]
주제2: [주는 나의 힘]
⭕ 빛과...진리를 보내어 - 자주 사용하던 '인애와 진리' 대신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손을 잡고 인도하듯 이끌어서 성소, 제단에까지 이르러 감사제를 드리도록 하게 할 천사들을 기자가 염두에 두었음을 반영한다(Perowne). 성경은 인격체인 천사를 빛, 진리로 부르기도 하는데(91:11) 기자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자신을 이끌어 주시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43:4]
주제1: [시온을 향한 소망]
주제2: [주는 나의 힘]
⭕ 나의 극락(極樂)의 하나님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기쁨중의 기쁨이신 나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최고의 기쁨을 제공하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기자의 고백이다. 더군다나 극한 고통을 당하던 끝에 드디어 하나님 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 기자가 맛보게 될 때 기쁨은 최고의 기쁨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시43:5]
주제1: [시온을 향한 소망]
주제2: [주는 나의 힘]
⭕ 내 영혼아...찬송하리로다 - 42:5, 11과 동일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42, 43편의 후렴구이기도 한 본 시편의 내용은 본 시편의 저자가 동일인임을 간접 증명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Barnes).
성 경: [시44:1]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번창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
⭕ 옛날에 행하신 일 - 이에 대한 히브리 원어는 '파알 파알타 비메이헴'(*)으로 직역하면 '그들의 날들에 당신이 행하셨던 그 일'이다. 여기서 '그 얼'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알'인데 이 말은 강조형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와 동일한 용어가 합 1:5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용어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광야 여정의 인도 그리고 가나안 정착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를 모두 묶어 나타내는 집합 명사로 볼 수 있다.
⭕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 사역을 자손 대대로 전승(傳承)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부모들에게 맡겨졌던 중대한 의무였음을 간접적으로 엿보게 하는 구절이다(출 10:2 ; 12:26 ; 13:8, 14 ; 신 6:20 ; 삿 6:13).
성 경: [시44:2]
주제1: [고문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번창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
⭕ 열조를 심으시며 - 물론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원주민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을 정착케 하셨던 사실을 가리킨다. 즉, 이 말은 하나님꺼서 이스라엘을 위해 어느 한 지역을 정하시고 그곳에 정착케 하시되 영원히 정착케 하심을 가리킬 때 쓰이는 표현이다(Barens). 한편, 포도나무를 심고 자라게 하는 모습으로부터 그 이미지를 따온 이 표현은 출 15:17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그 이후 삼하 7:10 ; 시 80:8 렘 24:6 ; 32:41 ; 암 9:15등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본절에서 '쫓으시고'와 '심으시고'는 시분위기상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낸다.
성 경: [시44:3]
주제1: [고문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번창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
⭕ 저희 팔에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 자신의 팔이 그들에게 승리를 주지 않았다'이다. 그런데 시편 전체적으로 볼 때 여기의 '승리'(*, 야솨)는 대체적으로 '구원', '도움'을 의미하는 것 같다(33:17).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소테리아'(*)인데 벧전 1:5의 경우를 보아도 이 용어를 '구원' 혹은 '승리'로 번역하는 일은 가능하다. 따라서 이어지는 '야곱에게 구원'을 '야곱에게 승리'로 번역하는 일은 무리가 없는 듯하다(53:6).
⭕ 주의 오른손과 팔 - 은 능력, 힘을
⭕ 얼굴의 빛 - 하나님의 자비의 현시(顯示)를 각각 상징한다.
성 경: [시44:4]
주제1: [고문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번창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
⭕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 직역하면 '당신은 그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문맥을 중시하여 본 호칭을 가리키는 의미를 정리하면 '당신은 열조의 때에 간섭하셨던 그 하나님과 동일한 왕, 동일한 하나님으로 당신의 백성의 통치자인, 그리고 나의 왕이신 바로 그분'이다. 특히 여기 '왕'이란 호칭을 저자가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저자의 강한 염원을 반영한다. 한편, 이 표현은 특히 '즉위시'로 불리우는 시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24: 7 ; 68:24 ; 93:1).
⭕ 구원을 베푸소서(*, 차웨 예슈오트). - 문자적인 뜻은 '구원을 명령하소서'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왕적 권위를 인정하는 이 소원적 표현 속에는 땅 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므로 이제 하나님이 한마디 명령만 내리면 저자 자신이 구원받는 일은 문제도 아니라는 기대가 담겨져 있다(Barnes).
성 경: [시44:5]
주제1: [고문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번창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
⭕ 대적을 누르고 - '누르고'(*, 차레이누)의 문자적인 뜻은 '우리가 들이받다'이다. 이것은 뿔을 가진 동물이 그 상대를 듸이받는 모습에서 따온 표현법으로 구약 여러 곳에서 그 예들을 찾을 수 있겠으나 특별히 신33:17을 연상시키고 있다. 한편, 우가릿 사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은유가 등장하는데 바알과 모트 붙이라는 이방신들이 들소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들이다.
⭕ 주의 이름으로 - '이름'은 '하나님 자신'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20:1). 유사 용례를 삼상 17:45 ; 대하 14:11 등에서 발견할수 있다(Anderson). 따라서 본 구절은 '당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께서 우리의 도움자가 되심니이다'로 풀어 볼 수 있겠다.
⭕ 밟으리이다 - 원어는 '카페이누'(*)로서 복적으로 밟는 동작을 의미하는 제1부정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즉, 이 용어는 들소와 같은 거친 짐승이 그 희생물을 계속적으로 밟아대는 모습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한편, 여기서는 밟히는 희생물의 철저한 멸망을 읽을 수 있다(7:5 ; 18:40 ; 12 ; 사 10:6 ; 단 7:23).
성 경: [시44:6]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번창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
⭕ 활 - 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소금물에 담근 목재나 뿔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의 활은 소위 청동 활을 가리키는데 청동 활은 시적인 분위기에 적합한 표현이다(18:34 :40 ; 욥 40:12 ; 사 10:6 ; 단 7:23). 활의 경우 일반적으로 군주 시대에 사용되었고 활과 칼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무기류로 간주되고 있다(창 48:22).
⭕ 칼 - 가장 보편적인 이스라엘의 무기였는데 히브리 세계에서 이 용어는 일종의 전쟁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되었다(렘 14:15 ; 겔 7:15 ; 33:6). 칼은 대체적으로 청동이나 쇠로 만들었는데 크기나 모양은 다양했다. 가장 전형적인 이스라엘형 칼은 아마도 짧고 양면에 날이 섰었던 것 같다(Anderson). 본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는 일상적으로 쓰였던 이와 같은 무기들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쟁취케 될 것을 밝히고 있다(20:7 ;33:16 ; 60:11).
성 경: [시44:7]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번창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
⭕ 구원하시고...당케 하셨나이다 - 여기 원어의 시제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즉 저자는 선조들의 위험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과거의 사건을 드러내어, 동일한 민족으로서 유사한 역경을 겪고 있는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해 달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것이다.
성 경: [시44:8]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번창했던 과거에 대한 감사]
⭕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 즉 우리가 찬양한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찬양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 과거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경험은 그가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했던 근거였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 말하자면 하나님 그분께 감사하겠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예배 공동체는 믿음과 소망뿐 아니라 과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감사를 통하여 자신과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나타내어야 한다(34:1).
성 경: [시44:9]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현실의 고통에 대한 고백]
⭕ 그러나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아프(*)로서 아주 상반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암시하는 접속사이다. 1-4절까지는 든든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은 승리의 과거를 묘사한 반면 본절부터 4절까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진 비극적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 버려...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 원어상으로 볼때 '버려'는 이미 완성된 동작을 의미하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반면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는 완성된 동작의 결과를 의미하는 현재 혹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들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고 그냥 계시거나 나아가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소리를 발하셨기 때문에(과거 동작) 땅이 녹게 되었다(결과)'라는 표현과 유사하다(46:6). 그리고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는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관이 되셨던 것처럼(삿 4:14 ; 삼하 5:24), 또한 사막에서 많은 이스라엘 무리를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고백이다. 본절은 거의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60:10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편 자체도 많은 점에 있어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Pero-wen).
성 경: [시44:10]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현실의 고통에 대한 고백]
⭕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 승리를 주는 대신 대적에게 패배케 하셨다는 것이다.
⭕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 이 표현은 대적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마음껏 이스라엘 성 안에있는 모든 것을 탈취하고 그들의 본토로 옮겨갔던 것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느부갓네살은 유다가 멸망한 때(B.D. 568년)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성전의 기명을 비롯한 유다의 주요한 물품들을 탈취해서 그의 본국으로 가져갔었다(대하 36:7).
성 경: [시44:11]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현실의 고통에 대한 고백]
⭕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 직역하면 '당신은 우리를 식사를 위한 양처럼 만드셨다'이다. 양이 식사용이 된다는 것은 양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죽음에 직면한 포로 시대의 이스라엘의 운명을 엿볼 수 있다.
⭕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J. A. Alexander, A. A. Anderson).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본절과 다음절을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시대 때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애굽으로부터 폭풍처럼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삼일 동안 사만 명의 유대인들을 살륙하고, 포로로 잡은 유대인 중 많은 수를 노예로 팔아넘겼던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보기도 한다(De Wette).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지만 그 어느 시대의 그 어느 사건이었든간에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의 손에 잠시 넘기기로 작심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열방중에 피난민, 포로 혹은 도망병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왕하 24:14 ; 렘 29:1 ; 암 1:6-9).
성 경: [시44:12]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현실의 고통에 대한 고백]
⭕ 주의 백성을...파심이여 - 이것은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화법 중의 하나로(신 32:30 ; 2:14 ; 3:8 ; 4:2, 9 ; 10:7 삼상 12:9) 대적들의 노예가 되어 그 소유물까지도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 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러한 비극적 결과의 이유는 대체적으로 그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었다.
⭕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은 그들의 값으로 증가 되지 않았다'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을 비롯한 많은 역본들이 첨가하고 있는 '이익' 혹은 '부'(영역본의 대부분) 등은 원문적이라 할 수 없으나 문맥을 볼 때 저자가 이 용어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Barnes). 그러므로 직역적 의미는 그 백성을 대적의 손에 맡기셔서 하나님이 얻은 소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동사 '얻다'(증가하다)는 '혼'(*)으로 잠 22:16과 전2:9에서와 동일하게 사역(使役)절대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본 구절은 하나님에 대해 거의 반박하는 듯한 불평조의 문장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세상 통치자는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하여 백성을 가축처럼 팔아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상술로 부자가 되시려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편 저자가 재앙의 원인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듯한 이 표현 속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자신들을 그토록 두들겨 패고 상처를 주고 갈라 놓았었던 바로 그 손길로부터 치유를 추구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 시편 저자의 확신을 읽어내야만 한다(Calvin).
성 경: [시44:13]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현실의 고통에 대한 고백]
⭕ 둘러 있는 자(*, 리스비보테이누). - 문자적인 뜻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들'이다(79:4). 이들은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과 같이 지형적으로 이스라엘의 주변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스라엘을 조롱하였던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들이다. 후기 선지자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이 원수들이 승리를 거두고 비웃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곤 하였다(Perowne).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은 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구원받는 것도 싫어하였다. 그래서 앞에 열거한 열방의 이름들 중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의 원수의 도성인 니느웨로 가서 그곳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도록 명령 받았던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싫어서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바 있다(욘 1, 4장).
성 경: [시44:14]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현실의 고통에 대한 고백]
⭕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말거리'는 '마솰'(*)로 비유' 혹은 '유사한 말', '격언', '금언' 특히 '풍자적이고 조소적인 노래'등을 뜻한다. 결국 이 표현은 대적들이 이스라엘의 멸망, 그에 따른 디아스포라(diaspora)등을 보고 조롱하며 불렀던 것을 가리키는 표현임이 확실하다(민 21:27 ; 신 28:37). 한편 대적들이 불렀던 노래 가사 내용은 이스라엘이 신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 재앙, 심판, 불행, 실패의 표본이되었다는 것 등이었을 것이다(Barnes).
⭕ 머리 흔듦 - 웃음, 조롱거리를 묘사하는 문자적 표현이다. 이것은 비난, 조롱의 모습으로서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다(22:7 ; 64:8 ; 109:25 ; 렘 18:16 ; 애 2:15).
성 경: [시44:15]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현실의 고통에 대한 고백]
⭕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 직역하면 '하루 내내 나의 앞에 혼돈이 있다'이다. 여기 혼돈이라는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은 가시적인 참화의 현장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이곳저곳에 즐비한 시신들, 파괴되고 불타버린 건물들, 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통곡소리들과 같은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 어느 곳도 참화를 겪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비참의 현장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러한 참화의 현장을 '나의 것'이라고 표현하여, 전쟁으로 말미암은 민족적 재앙을 자신의 재앙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 슬픔의 마음을 표하고 있다(Barnes). 이는 저자가 단순히 개인적인 자신의 고통 때문에 호소하며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슬퍼하는 진정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다(느 1:4 ; 단 10:2,3).
⭕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보쉐트 파나이 키사트니). - 이를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거나 '나의 얼굴의 수치가 나를 덮으니'로 번역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좀더 분명하게 본 표현의 강조점을 드러내고 있는 70인역과 대다수의 역본들을 중시할 때, 후자의 번역을 취함이 바람직하다.
성 경: [시44:16]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현실의 고통에 대한 고백]
⭕ 후욕하는 - '후욕' 은 '가프다'(*)로 '말로 난도질하다','헐뜯다','불경스런 말을 하다'인데 뒤에 언급된 '소리'까지 붙으면 좀더 분명히 '비꼬는 말, 비난, 조롱하는 말'을 뜻한다. 이 용어는 인간과 하나님에 적용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이것은 비난, 조롱을 뜻하고 후자의 경우 신성 모독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그 비난의 대상이 백성들뿐 아니라 하나님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자와 후자를 포함하는 양쪽에다 사실을 고려할 때 전자와 후자를 포함하는 양쪽에다 적용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동사로 사용되고 있는 각각의 예는 자신이 하나님을 신성모독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었던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적용하고있는 왕하 19:22 ; 사 37:23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원수와 보수자 - 신 32:35에 의하면 복수와 보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그러한 기능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붙여주셨던 대적들에 의해 찬탈되어졌음을 볼 수 있다.
성 경: [시44:17]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에 호소하는 간구]
⭕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 아마도 과거와 현재에 적용되는 표현인 것 같다.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뜻이다(119:16).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선조들에게 주셨었고 그들이 그 선조들에게서 전수받았던 명령들에 대해 불신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언약이 명시하고 있는 의무 조항들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55:20). 이것은 단지, 언약의 원리들로부터의 보편적인 이탈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일뿐이다. 즉, 이것은 전 국가에 임했던 끔찍하고 독특한 불행 및 재앙이라는 실존적 상황과 민족적 슬픔, 혹은 국가적 종교 상황의 원인이 될만큼 언약을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 표현이다.
성 경: [시44:18]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우리 마음이 퇴축(退縮)지 아니하고 - 문자적인 뜻은 '우리의 마음은 돌이키지 않고'이다. 즉 자신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을 배교하지 않았다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당시 전 국가적인 경향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된 범 국가적인 재난의 원인이 될만큼 그러한 악이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경향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국민 개중에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부류들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지배적인 경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Barnes).
성 경: [시44:19]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 하시고(*, 디키타누빔콤 타님). - 직역하면 '당신이 시랑(혹은 용)의 처소에서 우리를 밟으셨다'이다. 앞절과 연결시켜서 해석해 보면 자신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등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은 무자비하게 짓밟힐 만큼 그에 해당하는 배교나 불충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 표현의 강조점이다. 여기에서 시랑으로 번역된 '타님'은 '커다란 물고기', '바다 괴물', '뱀', '용', '악어', 혹은 '(여우와 이리의 중간형인) 재칼' 등을 의미한다(사 13:22). 그러나 이 '타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동물이냐를 결정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동물들의 서식지로 볼 만큼의 황량하고 폐허가 된 장소, 즉 당시의 국가적인 상황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이유인즉 '재칼(혹은 용)의 처소'라는 표현은 폐허, 황량함을 암시하는 구약의 일상적 표현이기 때문이다(사 34:13 ; 35:7 ; 렘 9:11 ; 10:22 ; 49:33 ; 51:37).
⭕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 여기 '사망의 그늘'은 '찰마웨트'(*)로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거나 '진한 어두움'으로 의역할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가 바람직한 번역으로 보이는데 그 까닭은 히브리어에서 '사망의 그늘'과 같은 복합 명사성은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Anderson). 이제 진한 어두움으로 덮는다는 것은 큰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고통과 절망을 나타내는 비유법의 일종이다(107:10, 14). 따라서 이와 같은 시련의 경험을 하고 있는자는 '돌아오지 못할 땅'(욥 10:21)에 가까이 있거나 이미 죽음의 권세 안에 들어가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의 '깊은 어둠이 덮었다'는 표현을 통해서 당시 저자는 거의 삶을 포기할 정도의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성 경: [시44:20]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 하반절에 암시되어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거역하는 것을 말한다. 예배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63:4 ; 79:6 ; 창 4:26).
⭕ 손을 ...폈더면 - 예배자가 그 손을 신을 향하여(88:9 ; 141:2 ; 143:6 ; 출 9:29, 33 ; 스 9:5 ; 사 1:15), 성전을 향하여(28:2 ; 왕상 8:38), 혹은 하늘을 향하여(왕상 8:22) 펴는 일은 기도 행위로 잘 알려진 자세이다. 이제 저자는 자신들이 이방신에게 예배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성 경: [시44:21]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찾아내지 않았겠습니까?'이다. 하나님의 전지(全知)성을 향한 엄숙한 이 호소는 국가적 순결에 대한 각자의 정직한 확신을 보여준다. 현편, 멸망적 재앙을 받을 정도로 국가가 비교적 죄의 성향을 띄고 있지는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저자로서는 재앙의 원인을 또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했다.
성 경: [시44:22]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종일(*, 콜 하욤). - 문자적인 뜻은 '모든 하루(날)'이다. 이것은 재앙이 한번의 강타 형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 왔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금도 눈으로 목격하고 있음을 뜻한다(Anderson).
⭕ 주을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 본 구절은 하나님의 교회가 항상 박해받는 교회였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는 롬 8:36에서 바울에 의해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어조(語調)와 사도 바울의 어조는 명백한 차이를 드러낸다. 전자는 핍박을 이해할수 없었기 때문에 이유없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그의 백성들 위에 임하고 있다고 믿었던 반면 후자는 그 박해를 기뻐할 뿐 아니라 또한 감격스럽게 외치기까지 하는 것이다.
성 경: [시44:23]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비활동적인 듯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78:65). 즉 이는 수수께끼와 같은 위기 속에서 외치는 당황에 찬 저자의 절규일 것이다.
성 경: [시44:24]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얼굴을 가리우시고 - 문자적인 뜻은'얼굴을 숨기다'이다. 성경의 표현 가운데서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그 상대를 무시한다거나(13:1 ; 22:24 ; 88:14), 불쾌함을 표시한다거나(사 54:8), 징벌을 내리는 것(신 31:17, 18:32:20 ; 욥 13:24 ; 사 57:17)을 뜻한다. 그러나 20, 21절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을 무시했다거나 그분을 불쾌하게 만들 어떤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편 기자는 당혹감 속에서 이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다.
성 경: [시44:25]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진토에 구푸리고...땅에 붙었나이다 - 본절을 현재 국가적 시련과 연관시켜 해석해야 함이 분명한데 세부적인 의미는 명백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예배자가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겸손의 태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흙먼지가 많은 땅바닥에 엎드렸던 사실(신 9:18 ; 대하 20:18) 과 큰 슬픔을 당하였을 때 먼지와 재를 무릅쓰고 땅위에 주저앉던 당시의 관습을 고려할 때(119:25) 본 구절이 묘사하는 바는 처절한 재앙을 당하여 큰 슬픔 가운데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시편 기자의 태도인 것이 분명하다. 한편이 의식적인 자세를 금식일의 전형적인 기도 자세와 연결시키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는 듯하다(수 7:6 ; 사 47:1 ; 렘 6:26 ; 14:2).
성 경: [시44:26]
주제1: [고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탄원]
주제2: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
⭕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 원어를 직역하면 '당신의 인자하심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뜻이다. 즉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인자하심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성의 현시(顯示)는 인간뿐 아니라 우주의 안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것은 죄인인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가 호소하고 소망을 아뢸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Barnes).
성 경: [시45:1]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祝婚歌)]
⭕ 넘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하쉬'(*)로 문자적인 뜻은 '용솟움치다', '끓다', '끓어오르다'이다. 이것은 본 시편 기자의 마음이 자신이 다루려는 주제의 위대성 때문에 자극되고 고무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은유는 끓고 있는 물, 혹은 그 근원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물의 근원에서 그 이미지를 따온 것 같다(Perowne).
⭕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 왕의 신상에 중요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 일을 보고 감동을 받아 창작력을 동원하여 시를 짓겠다는 뜻인데 이러한 표현은 본 시편의 주제를 짐작케 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왕의 신상에 중요한 일, 곧 국가적 대사(大事)로는 대표적으로 즉위식, 결혼식, 전쟁 파병식 등이 있는데, 본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본 시편 저자가 다루는 사건은 왕의 결혼식임이 분명하다(Anderson, Perowne). 그런데 본 시편에 나오는 주인공인 왕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그 견해가 다양하다. 먼저 전통적이며 일반적인 해석은 애굽 왕 바로의 딸과 결혼한 솔로몬 왕 으로 본다. 그러나 혹자는 12절에 언급된 '두로의 딸'이란 표현에 의거하여 여기서 왕비는 애굽인이 아니라 두로 왕 히람의 딸이라고 한다. 한편, 혹자는 8절을 아합의 상아 궁전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 본 시의 왕을 이세벧과 결혼한 아합으로 본다(왕상 22:39, Hitzig). 그러나 이 같은 견해와는 달리 복음주의 학자 중 한 사람인 델리취(Delitzsch)는 그 왕을 요람으로 보고 그 왕비는 아달랴로 간주한다. 사실 아달랴의 엄마인 이세벧은 두로 출생으로 이스라엘 왕실에 들어왔던 여자였다. 만일 본 시편의 왕의 왕비를 아달랴로 본다면 10절의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라는 표현은 이방인이었던 왕비가 자신의 고향에 대한 생각을 하자 왕이 그 향수를 잊게끔하는 말로 이해된다. 더군다나 요람 왕의 부친 여호사밧은 무역에 있어서 솔로몬과 갈은 열정을 보였었는데(물론 그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음), 그 사실은 본 시편에 나오는 황금과 상아 궁전'에 대한 아달랴의 아버지였던 아합의 '상아 궁전'에 대한 언급이라는 사실과도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여진다(왕상 22:39). 이상에서 살핀 왕의 정체 (正體))를 밝히는 견해 가운데서 델리취(Delitz-sch)의 생각이 가장 바람직한 것 같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왕의 칭송에 관한 언급에서 '영영히'(17절)라는 표혐에 적용시킬 분은, 진정 그리스도밖에 없다(벧전1:10-12).
성 경: [시45:2]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祝婚歌)]
⭕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 이에 해당하는 원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당신은 인간의 자녀들보다 아름다워, 아름다워'이다. 특히 본절에 나타난 히브리어 '요프야피타'(*)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 용어로 최고로 아름다운 것을 뜻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용어가 인간 왕의 전인적인 완전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Anderson). 그러나 본절이 나타내는 질적인 아름다움을 고려할 때 인간을 가리킨다는 견혜보다는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표현의 대상을 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겠다.
⭕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후차크 헨베시페토테이카). - 이는 문자적으로 '은혜가 당신의 입술에서 흘러 나오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왕이라면 잔혹한 힘(무력)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은혜롭고 권위 있는 말로써 신하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이다(Caivin). 그리스도의 입에서 은혜로운 말씀이 쏟아져 나올 때 그것을 듣던 청중들이 기이히 여겼던 사실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눅 4:22). 그리고 이미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학자의 혀를 주시어 그분으로 하여금 연약한 자들을 적적히 위로케 하실 것임을 예언자의 입을 빌어 예언하신 바 있다(사 50:4).
성 경: [시45:3]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 '능한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기보르'(*) '용사', '정복','강력한 힘을 가진 거인'' 등을 뜻하는데, 이러한 자가 칼을 허리에 찬다는 것은 군사적 개념을 함축한 말이다. 참으로 왕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말을 들려주실 뿐만 아니라 열방과 싸워 승리하는 용사이시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정복할 용사는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성경은 용사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묘사하고 있다(고전 15:25, 28등).
성 경: [시45:4]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출혼가(祝婚歌)]
⭕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하도르카 츨라흐). - 이는 문자적으로 '위엄 가운데...(말 따위)를 타소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타고' '통과하소서'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포진(布陳)한 대적의 전열(戰列)을 무너뜨리는 것,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것, 즉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개역 성경은 원문에 없는 '승전하소서'라는 구절을 삽입함으로써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보충해준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탄다'는 것은 전차나 전마(戰馬)를 타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Pero-wen).
⭕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 여기서 '왕의 오른손'이란 왕으로서의 어떤 힘이나 왕만이 가짙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신체의 한 부분이 인격화 되었다고 볼 수있다(20:6). 또한 '두려운 일'에 해당하는 원어는 '야레'(* 이는 하나님의 전능적 사역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로써 진리와 의를 위한 싸움에서의 왕의 승리를 암시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르치리이다'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 이 같은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본 구절은 결국한 왕이 큰 능력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묘사하는 대목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묘사는 역대 이스라엘의 훌륭한 왕들을 연상케도 하나, 궁극적으로는 세상 정복을 위하여 오시는 '메시야'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본절 전반부에 언급된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란 말을 중시해 볼 때 그분께서 오셔서 이루실 왕국의 특성을 동시에 엿볼 수도 있겠다. 그 왕국은 빈틈없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둘 능력이 있고, 진리가 그 토대이며, 의가 편만하며, 온유함과 평화를 추구하는 곳일 것이다.
성 경: [시45:5]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출혼가(祝婚歌)]
⭕ 왕의 살이...엎드러지는도다(*, 히체이카 쉬누님 아밈 타흐테이카 이블루 벧레브 오이베이 하멜레크). - 본절은 각 단어의 배열 상태 때문에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당신의 화살들은 날카롭다. 사람들은 당신 아래 넘어진다. 왕의 대적들의 마음에'이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문장들을 다시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당신의 화살들은 날카롭다(당신의 군사력은 막강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신 아래 있다(혹은 당신에게 굴복(복종)한다). 그들(화살들)이 왕의 대적들의 가슴에 쏟아졌기 때문이다'이다. 그리고 본절의 하반절은 '왕의 대적들의 마음(용기,사기)은 사라졌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석하든지간에 본절의 핵심적 의미는 변하지 않는데, 그것은 '왕은 승리한다'는 것이다. 한편'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브'(*)를 번역함에 있어서 왕의 화살이 대적을 꽤뚫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해부학적 용어인 '염통'이라는 말을 사용한 개역 성경의 번역은 큰 오류가 없는 것 같다.
성 경: [시45:6]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縮婚歌)]
⭕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 '왕'이라는 호칭이 갑자기 '하나님'으로 바뀌어 혼동케 만든다. 성경에서 통치자들, 왕들 혹은 사사들을 '신'이라고 언급한 구절들이 나온다(출 7:1). 또한 이 용어는 삼상 28:3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한 인간 인격체에게 적용된 바 있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한 인간에 대하여 '신'이란 용어를 적용하는 것을 배격한다. 그런데 칼빈도 예외적인 경우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며, 본절을 거기에 포함시킨다. 즉, 본 시편 기자가 본절에서 어떤 위대한 왕 그리고 좀더 예시적인 왕국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멀리 본절의 왕에 대한 미래적 인물의 성취를 바라보았는지는 본절을 보아서만은 알아내기 어렵다. 다만 그 완전한 성취, 즉 인간이면서도 왕과 하나님으로서 불리울 인물의 도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히 1:8을 통해 명백히 알 수있다. 그러나 본절을 통해 성육신(Lncarnation)의 신비가 명백히 계시(노출)되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을 통해 본 시편 기자가 밝히려고 했던 것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오실 진정한 왕 메시야 개념에 대한 확신과 진정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사실이었던 듯하다.
성 경: [시45:7]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縮婚歌)]
⭕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 앞절(6절)의 '공평한 흘'과 묶어 생각할 때, 여기서의 '정의'는 모든 미덕들 가운데 가장 왕적인 것으로 영원히 존속될 한 왕권과 왕국의 필수적 기초를 가리킨다.
⭕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 대체적으로 본 구절은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1) 본 표현을 왕의 대관식 때의 '왕직 수임(受任)'으로 보는 견해와,(2)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월등한 축복을 왕에게 인허(認許)하는 사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스라엘 왕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름부음 방았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궁극적으로 그들은 여호와에 의하여 성별되었음, 삼상 10:1 ; 15:17 ; 삼하 12:7 ; 왕하 9:6). 그러나 이와 유사한 사례가 가나안이나 힛타이트에서는 있었으나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없었다고 한다(Krsus).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앞의 두견해 중에서 혹자를 지지한다. 그러나 두 해석을 다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곧 월등한 축복을 받은 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3:5 ; 사 61:3).
성 경: [시45:8]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왕의 모든 옷은...즐겁게 하도다 - 여기서 왕의 결혼식에 바치는 사랑의 노래는 왕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2-7절에서는 왕을 장수로, 통치자 등으로 묘사했는데, 이제는 왕을 결혼식 날의 신랑으로 묘사하고있다. 이것은 계 19:7, 8절 기사와 평행을 이루고있다. 몰약(沒藥). 아라비아에서 서식하는 나무에서 얻었는데 그 나무는 현재 아비시니아(에디오피아)에서 광범위하게 서식한다. 이 액은 나무껍질에 칼자국을 내어 채취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얻어진 것은 상업 물품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 애굽, 유다뿐 아니라 그리이스 및 로마인들도 아주 귀하게 여겼었다(창 43:11). 에 2:12에는 여성 정결품 및 향수로 사용되었던 물품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고체 혹은 액체로 되어 있는데 값비싼 물건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선물로 여겨졌다.
⭕ 침향(沈香)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할림'(*)으로 구약 성경에는 네 번 나온다. 민 24:6에는 '침향목'으로, 본 구절과 잠 7:17 ; 아 4:14에는 '침향'으로 각각 번역되어 있다. 백단향과 같은 나무로부터 추출되는 향기나는 물질로 흔히 향료나 시신(屍身)방부제로 사용된다. 육계(肉桂). 본절 이외에 출 30:23 ; 겔 27:19등에서도 언급된다. 인도 등지에서 산출되며, 그 껍이기가 계피나무와 비슷하나 향기는 덜 난다.
⭕ 상아궁에서 나오는(*, 민 헤이클레이). - 직역하면 '상아궁들로부터'이다. '상아궁'이란 건물 자체는 다른 건물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몇몇 방들과 가구들이 상아로 뒤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왕상 22:39 ; 암 3:15 ; 6:4). 한편 구약 성경에서 아합의 상아궁에 관해서만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예루살렘 궁에는 상아 장식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솔로몬의 보좌도 상아로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왕상 10:18). 한편, '상아궁들' 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은 궁궐안의 다양한 홀들에 대한 암시로 보인다.
성 경: [시45:9]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와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베노트 믈라킴 베이크로테이카).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왕의 딸들은 당신의 사랑받는 자들 중에 있으며'라는 뜻이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마다 다르다. 먼저 극단적인 견허로 '왕의 딸들'을 '왕비'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들은 '베노트'(*, 딸들)를 단수로 변성시키는데 그 근거로는 본절 하반절의 '서도다'가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상반절과 하반절이 평행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는 큰거에 의하여 그 같은 주장을 내놓는다. 이 같은 견해에 의하면 '사랑받는 자들'이란 '왕비'의 가문을 이루는 왕족을 가리키는 것이고 본 구절이 강조하는 의미는 왕족으로 구성된 가문 출신의 신부인 왕비이다(Gunkel). 그러나 이 같은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맛소라 본분(MT)를 변형시켜 얻은 해석을 토대로 얻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사본 시대 이후에 나온 많은 관찰을 통해 얻어진 문법(평행법)이 중요할지라도 원본 자체를 변형시킬 만큼의 위력을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또 다른 견해로는 본 구절을 신부인 교회나 메시야와의 연합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사랑받는 자들'을 '존귀한 자들' 해석하고 ' 딸들'을 왕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본절이 한 왕이 존귀한 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 그리고 있다고 보는데 이 모습은 바로 왕되신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신부로 삼은 존귀한 자들인 성도들과의 연합을 나타낸다고 한다(Barnes ). 이 같은 견해 역시 그 근거가 전혀 없다. 따라서 본시가 소위 '메시야 시'라고 불리는 몇몇 시편들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본절을 메시야와 성도와의 관계라는 측면으로 무리하게 해석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겠다. 한편, 바람직한 견해로 받아들여 지는 것은 본 구절을 왕의 후궁들, 왕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Perowne).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들에게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왕비와 후궁들을 두는 것은 강성한 왕국임을 나타내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이스라엘의 선한 왕들까지도 이러한 관행을 따르곤 했었다. 이와 같이 왕비들과 많은 후궁들을 두는 것이 한 왕권의 강성함을 과시하는 방법이었던 것을 알고 있던 본 시편 저자는 이제 왕의 결혼식에 바치는 노래를 지음에 있어서 그 왕국의 강성함을 칭송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가 바람직한 견해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앞의 두 견해와 비교할 때 사본적으로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시 역사적 배경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왕후 - 문자적인 뜻은 '배우자인 왕비' 인데 왕비의 어머니가 아닌 '왕비'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며(느 2:6 ; 단 5:2, 23), 갓 결혼한 왕비에게 특별히 붙이는 호칭이기도 하다 (Perowen).
⭕ 오빌의 금 - 가장귀한 금을 뜻하는 것 같다(욥 28:16 ; 사 13:12). 한편, 오빌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으나 인디아, 남 아라비아, 서머리랜드(아프리카 동부의 지방 이름)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 왕의 우편 - 영예로운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한편, 왕의 어머니였던 밧세바도 왕 솔로몬의 우편에 좌정했었음을 성경에서 발견할수 있다(왕상 2:9).
성 경: [시45:10]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출혼가 (祝婚歌)]
⭕ 딸이여 - 교훈 서두에 오는 일반적인 동양적 상투어이다. 이렇게 칭한 후 그가 나이든 사람이건, 권위를 지닌 사람이건, 혹은 신적인 위임을 받은 사람이건 간에 교훈자는 아비가 자식을 가르치듯 피교훈자에게 교훈을 시작한다. 지금까지(1-9절) 왕에 대한 묘사를 해왔던 저자는 이제 왕비된 신부에게 권하는 말을 시작하고 있다. 먼저 그는 왕비가 그의 아비의 집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주인인 왕에게 경외의 사랑을 바칠 것을 권하고 있다.
성 경: [시45:11]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 이것은 '왕으로 하여금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케 하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그 근거는 여기'사모하다'(*, 이트와우)가 미래형 이지만 한편으로는 명령형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 결혼이 완성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완성을 본다는 것은 법적으로 혼인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와 더불어 육체적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 저는 너의 주시니(*, 키 후아도나이크).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왜냐하면 그는 너의 주인이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키'(*,왜냐하면)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절 상반절을 앞절(10절) 하반부의 종속절(결과절)로 보는 견해는 잘못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특히 개역 성경의 본절 서두에 '그러하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본절 상반절을 앞절 하반절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원문상 옳지 않다. 따라서 10절의 내용과 상관없이 11절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문적이다. 둘째는 본절 상반절의 왕이 왕비의 아름다움을 사모한다는 사실과 본절 하반절의 후미에 있는 왕비가 왕을 경배해야 할 사실의 근거를 졔공한다는 것이다. 왕비는 왕이 그녀를 사모하도록 애써야 하고 왕을 경배해야 하는 이유는 그 왕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인'이라는 딸은 주종(主從)관계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한 가정의 질서에 있어서 남편이 아내의 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엡 5:22-24). 한편, 본절에서 '남편'(*, 아돈)으로 번역해야 할 용어를 '주'로 번역한 것은 본시를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하려는 의식 때문이었던 것같다(Anderson).
성 경: [시45:12]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 문자적인 뜻은 '두로의 딸, 선물과 함께 '이다. 동사가 생략되었으나 '선물과 함께'라는 단어가 있음을보아 생략된 동사는 '올 것이다'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이 표현은 왕비가 두로로부터 온 여인이라는 것, 즉 왕비의 출신을 밝히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두로 백성 자신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Perowne, Anderson).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낼 때 '시온의 딸'(9:14)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바벨론 백성을 나타낼때 '바벨론의 딸'(137:8)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방 나라들이 왕비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들을 가지고 올 것을 묘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백성 부한 자(*, 아쉬레이 암). - 직역하면 '백성 중의 가장 부요한 자들'이란 말이다. 이와 유사한 문형을 사 29:19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사회 계층의 어떤 특정한 부류를 지칭하는 듯하다.
성 경: [시45:13]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 - 문맥을 고려할 때 이 표현은 왕실 결혼식에서 왕비가 입었던 의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 경: [시45:14]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 9절에서 신부가 이미 왕 우편에 선 것을 묘사한 사실을 고려할 때, 본 시편 기자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 본 시를 묘사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45:15]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한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본 구절은 바로 전절(14절)에 기술된 왕비의 친척들과, 친구들, 또는 신하들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
⭕ 기쁨(*, 심하).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개역 성경에서처럼 '기쁨'이다. 그러나 원문에는 원어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충만하고 풍성한 기쁨'으로 번역됨이 원문적이라 하고다.
성 경: [시45:16]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 지금까지 왕실 결혼식에 관해 묘사해 온 본 시편 기자는 이제 결혼이라는 주제에 관한 어떤 소망을 피력하고 축하함으로써 결론을 지으려 하고 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왕의 후손들이 선왕(先王)보다 잘 될 것이라는 것, 즉 그 후손들은 세계적인 왕들이 될 것이라는 의미인데 이와 같은 표헌을 통해 본 시편 기자는 성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어 왕 노릇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계 5:10 ; 22:5).
성 경: [시45:17]
주제1: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
주제2: [왕을 위한 축혼가 (祝婚歌)]
⭕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 여기서 '찬송하다'(*, 예호두카)의 문자적인 뜻은 '감사하다'이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만민들이 감사를 올리는 왕이 있다면 그 왕은 분명히 그리스도이실 것이다. 그 이유가 구체적이진 않지만 다시 한번 더 본 시편 기자는 영원히 인간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성 경: [시46:1]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 문자적인 뜻은 '고통 중에 도움으로 발견되는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도움이 되시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대하 15:4, 15 ; 렘 29:14). 사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고통의 때에 의지할 만한 도움이되시는 분임을 충분히 입증하셨는데, 이러한 사실은 시편 기자가 취하고 있는 주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22:19 ; 27:9 ; 40:13 ; 44:26 ; 63:7) 이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미래의 소망으로 표현되고 있다.
성 경: [시46:2]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땅이 변하든지 - 이것은 현재의 정돈된 상태로부터 무시무시한 태고 상태의 반복으로의 변화를 묘사하는 표현이다.
⭕ 산이 흔들려 - '산'은 안정적이고 견고한 모든 물체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공포스러운 장면의 강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겠다(사 24:19).
성 경: [시46:3]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산이 요동할지라도 - 이 같은 표현이나 이와 유사한 표현은 창조 기사, 혹은 종말론적인 기대를 담은 선지 기사로부터 유래된 것 같다(렘 4:24 ; 나 1:5).
⭕ 셀라 - 1, 2절과는 달리 본절에는 이 같은 후렴구가 있다. 극단적인 비평가들은 이 사실을 놓고 원래 1, 2절 뒤에도 후렴구가 있었는데 성경을 옮기던 필경사(筆耕師)의 무의식적인 실수에 의해 생략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Anderson).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을 해결하는 원리는 원문의 인정과 전체 문맥의 고려이다. 필경사가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고 믿고 본 문맥을 볼 때1-3절과 4절의 내용은 상호 대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1-4절은 땅의 혼들림, 파도의 흉용함을 다루고 있는 반면, 4절은 한 시내의 부드럽고 평화로운 흐름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상반된 내용을 대비시키기 위하여 저자가 본절에 '셀라'라는 후렴구를 의도적으로 삽입했다고 믿어진다. 성경 원문을 중시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이 같은 견해에 일치를 보이고 있다(Pe-rowne).
성 경: [시46:4]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한 시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하르'(*)로 연중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킨다(74:15 ; 107:33). 그런데 실제적으로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에는 이와 같은 물줄기, 곧 강이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늘 온화할뿐만 아니라 방해받지 않고 언제나 물기로 촉촉한 축복된 하나님의 도성을 묘사하기 위한 이미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성소, 그곳은 평화롭고 늘 물기로 촉촉하고 부족함이 없는 곳과 같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행복하고 풍성하고 평화롭고 유쾌한 곳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1:3 ; 36:8 ; 사 32:3 ; 33:21 ; 41:18 ; 계 22:1). 진정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세상으로 부터의 그 어떤 도움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만으로 충족해지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마치 가느다란 물줄기와 같이 미약하다고 할지라도 당장 자신들에게 뭔가 엄청난 도움을 안겨줄 것 같은 세상의 힘보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평안과 기쁨을 얻는다(Cavin).
성 경: [시46:5]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 문자적인 뜻은 '아침의 기점에서 하나님이 도우시리이다'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침에 임한다는 것은 구약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사상이다(5:3 ; 90;14 ; 143:8). 아침에 임하는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기대는 날마다 뗘오르는 태양, 흑암에서 빛으로의 변화, 공의의 집행, 그리고 동틀 무렵의 위대한 구원 사건의 경험(출 14:30 ; 사 37:36)등과 같은 암시적 평행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신적(新的) 도움을 아침에 임하는 무엇으로 진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Anderson).
성 경: [시46:6]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이방이 훤화(喧樺)하며 왕국이 동(動)하였더니 - 이것은 한마디로 열방들이 파도처럼 요동하고 혼들리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여기 사용된 용어들은 어떤 군대가 한 나라를 쳐들어가고, 침입을 받은 나라는 그것을 막기 위해 충돌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한편,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서 침입한 군대가 앗수르 군이라고 말하나 분명한 근거는 없다. 그 군대의 소속이 어디든지 간에 본 구절이 밝히는 바는 군대의 충돌로 인한 소동, 혼들림이다(사 36:18-20).
⭕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 흔히 '뇌성'(18:13 :29:3-9), '번개 빛'(욥 37:4)이라는 표현이 동반되는 이 대목은 신적(神的) 징벌을 상징한다.
⭕ 땅이 녹았도다 - 모든 것이 조용하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위험은 사라지고 소동하던 세상은 잠잠해 졌다는 것 등을 말한다.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혹은 땅과 바다를 말씀 한마디로 평정케하시는 능력을 보여주는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된다(33:9 ; 107:25, 29 ; 마 8:26).
성 경: [시46:7]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만군의 여호와 - 이 호칭은 한나의 입에서 처음 발설된 것으로 사료된다(삼상 1: 11).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력,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를 창조하셨기에 그분께 순종하는 자는 위대한 왕으로서 갖는 그 능력을 맛볼 수 있다. 이 호칭에 이어 시편 기자는 즉각적으로 또 다른 호칭
⭕ 야곱의 하나님을 -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언약 관계를 상기시키는 호칭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근거로 삼아야하는 두개의 지주(支柱)를 상기케 된다. 그 전자(前者)는, 하나님은 만물(우주)을 당신께 복속시킬 만큼의 무한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며, 후자(後者)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성적(父性的) 사랑을 말씀(언약)과 계시를 통해 드러내신다는 사실이다. 이 두 지주를 연결시켜서 '말씀을 마음속에 든든히 박아 둘 때' 우리의 신앙(믿음)은 모든 대적을 밟고 승리할 수 있다.
성 경: [시46:8]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 땅을 황무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본토, 혹은 이방의 땅을 폐허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등을 돌릴 때는 이방의 무력을 통해, 혹은 재앙을 통해 그 땅을 폐허로 만드셨다. 한편,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징계 도구로 삼았던 이방이 지나친 포악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이방 땅을 폐허로 만들기도 하셨다. 후자의 경우 중에서도 특히 수만의 앗수르 군대를 당신의 천사들을 사용하여 불과 하루 저녁에 전멸하신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왕하 19 :35 ; 대하 32:21 ; 사 37:36). 한편, 본절을 이스라엘 역사중의 어떤 사건 하나만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무리가 있다(Barnes). 또한 본절을 조상들이 경험한 이방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의식(儀式)의 한 장면으로 보려는 자유주의 학자들의 견해 역시 무리가 있다(Wei-ser). 본절의 의도는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7절) 그들을 위기 사왕으로부터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오직 한분만을 믿고 의지하도록 촉구하는 듯하다.
성 경: [시46:9]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전쟁을 쉬게 함심이여 - 여기 '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비트'(*)는 '일을 그만두다', '일에서 손을 놓다'를 뜻하 '솨바트'(*)의 분사형인데, 이러한 형태는 행동(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이러한 모습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평화의 왕국이 온 땅에 정착될 때까지, 즉 미래 그 어느 시점까지 그 섭리는 계속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이곳보다도 사 2:4 ; 미 4:3 등에 더욱 두드러지게 묘사되어 있다. 한편, 이러한 소망 뒤에 메시야의 평화로운 통치에 대한 기대의 묘사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성 경: [시46:10]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너희는 가만히 있어 - '가만히 있다' 의 정확한 의미는 '그만두다', '멈추다'인데, 삼상 15:16의 경우처럼 절대형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문자적 의미의 생략형이다. 즉 '너의 손을 약화시켜라', 곧 '너의 노력을 멈추어라'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유일한 재판관 혹은 조정자로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만물의 통치자, 재판관으로서 세상의 나라들과 군왕들, 그리고 그 군대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얼마나 초조하고 안달겠는가 !
성 경: [시46:11]
주제1: [시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주제2: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 7절과 동일한 내용이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는데 이 말씀은 본 시편의 결론에 해당된다. 이 결론은 본 시편이 저작되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그 시대 이후의 하나님을 경외키하면서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내용은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을 모든 악한 대적들로부터 지켜 보호하시고, 모든 유익들도 그분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이다.
성 경: [시47:1]
주제1: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 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손바닥을 치고...외칠지어다 - 엄숙한 축하 순서 중의 하나로서, 기쁨을 표시하는 방법의 일종이다. 손바닥을 친다는 것은 왕하 11:12에 의하면 새로운 왕의 대관식에서 행해지던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로 보아 모든 열방들이 그들의 새로운 왕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본 시편은 주제별 분류상 찬양시에 속하지만, 모든 열방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기쁘게 맞아들여야 한다는 면에서 볼때 메시야 시편으로 볼 수도 있겠다. 만민, 모든 열방이 공통적으로 그들의 왕으로 인지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인물이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외침'에 대해서는 민 23:21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47:2]
주제1: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자존하신 여호와는 엄위(嚴威)하시고(*, 키 예훼 엘룐노라). -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왜냐하면 여호와, 곧 가장 높으신 이는 무섭기 때문'이다. 즉, 본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민의 기쁨의 대상이 되시는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그분이 가장높으신 분, 곧 모든 피조물보다 월등히 우월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다(95:3 ; 출 18:11 ; 대상 16:25 ; 대하 2:5). 그리고 나서 그분은 무서운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무서운'이란 문자 그대로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문자적인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이 거칠고 엄하고 혹독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억지로 모셔야 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神)에 대해 갖는 태도이다. 따라서 여기서 '무서운'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가져야할 경외와 존경의 태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할 만큼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만민은 그분을 왕으로 섬겨야하는 것이다.
⭕ 큰 임군 - 이는 원래 앗수르 왕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표현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본 시편 기자가 그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월한 왕이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것 같다. 세상의 언어로 하나님의 특성을 완전하게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언어들을 지고 하나님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애쓰는 일은 필요하다. 한편, 하나님께만 진정한 의미의 '큰 임군'이란 표현이 합당한 까닭은 오직 그분만이 온 세상의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24:1 ; 말 1:14)
성 경: [시47:3]
주제1: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 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발 아래 - 이것은 '완전한 정복'에 대한 묘사이다. 이러한 묘사의 기원은 정복자가 자신의 발로 피정복자의 목을 밟았던 고대(古代)의 관행에서 찾아볼 수 있다(수 10:24).
⭕ 복종케 하시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드배르'(*)로서 본절 이외에 18:47에서만 발견되는 동사이다. 이 용어의 원형은 '다바르'(*)인데, 그 의미가 '말하다', '이야기하다','정돈하다' 등인 점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용하시되 말씀 한마디로 이방을 정복하신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한편, 이것이 구체적으로는 다윗에 의한 가나안 정복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Anderson).
성 경: [시47:4]
주제1: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 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사랑하신 야곱 - 여기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닌 야곱이 언급된 것은 가나안 땅이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들을 따서 12지파로 구분,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이 실제로 그 땅을 소유한 것으로 언급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임에 들림없다. 참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땅을 소유하지 못한 채 낯선 순례자로 약속의 땅에 우거하였을 뿐이었다(히 11:9, 10, 13). 그들이 소유한 땅은 그들이 묻힌 자그마한 매장지뿐이었다(창 23:12-16). 이후 그 땅은 실제로 야곱 가족의 소유가 되었다. 영화(榮華)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온'(*)으로 문자적인 뜻은 '자랑하다', '화려하다' 등이나 대부분의 역본들은 '우월하다'로 번역하고 있다.여기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과는 달리 특별히 야곱에게만 특별하고도 우월한 선물을 주셨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135:4 참조). 그 선물이란 다름아닌 '거룩한 땅'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개념을 암 6:8(여기서 '그의 궁궐들'과 '기업'은 평행구를 이루고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거룩한 땅'은 소위 야곱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영광스러운 소유물로 불리우는데 그렇게 지칭되는 까닭은 그땅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시47:5]
주제1: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 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하나님이...올라가심이여 - 본 구절에 대해 흑자는 삼하 6:16의 다윗의 도성으로 법궤가 입성하는 장면을 근거로 삼아 하나님께서 당신의 보좌로 승천하시는 모습으로 해석한다(Perowne). 흑자는 하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기는 하되 승리를 거두신 후에 당신의 나라 보좌로 승천하시는 장면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치르는 그의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강림하셨다가 이제 승리를 거두고 백성들의 승리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승천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적인 표현이며 조금도 실제에 대한 묘사는 아니라고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덧붙인다(Barnes). 그런가 하면 본 구절을 주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어 구원 역사를 완성하시고 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우리는 이들 세 견해 중 어느 것을 배타적으로 취하기보다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1) 본시의 역사적 배경은 본 강해에서도 밝혔듯이 시온 성으로의 법궤 안치(삼하 6:1-19)와 연관된다고 보며 (2) 본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강림하셔서 구원을 성취한 후 다시 올라가시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며 (3)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부활 승천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 경: [시47:6]
주제1: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 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찬양하라 - 본 시편 저자는 이러한 찬양에 대한 명령을 본절과 7절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를 기쁨이 차고 넘칠정도로 찬양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으로 볼 수있다. 한편, 이는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성전의 노래하는 자, 그리고 음악가들이라는 특수 계층에 대한 명령인 듯하다(Kraus).
성 경: [시47:7]
주제1: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 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자므루 마스킬). - 이를 직역하면 '숙련된 곡조로 음률을 만들라'이다. 결국 이는 흘륭한 곡조 혹은 아름다운 음률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시라는 사실은 하나의 지혜(지식)인데 이 지혜를 지닌 자들은 그 사실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라고 본다(Barnes). 물론 하나님이 온땅의 왕이라는 사실은 본 시편이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것이 하나의 지식이며 그 지식을 지닌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라고 볼수는 없다. 그럴 경우 문맥이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문맥의 원활함과 앞절(6절)과 본절의 대비적 호응을 중시한다면 아름다운 음률(멜로디)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로 본 구절을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성 경: [시47:8]
주제1: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 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하나님이 이방을 통치하시며'이다. 즉, 하나님이 땅 위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그분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46:10).
성 경: [시47:9]
주제1: [하나니의 우주적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온 땅 위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
⭕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암 엘로헤이 아브라함) -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다. 본직역에 비추어 볼때 '되도다'라는 동사를 삽입하고 있는 개역 성경은 원문적이지 못함을 알수있다. 그러나 본 구절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다. 이 경우 문맥을 중시하여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도 문맥을 중시하여 개역 성경의 동사 `...되도다'를 생략하고 바로 앞 구절의 동사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을 연결하여 '열방의 방백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모임이여'로 해석하고 있다(Perowne). 즉, 이 말은 열방의 방백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과 섞여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볼 때 하나님께 정복당한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그들의 참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Barnes).
⭕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 여기서 '방패'란 그들 백성의 방어자, 혹은 옹호자임을 자청했던 열방의 방백들을 가리킨다. 본 표현은 그들 마저도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성 경: [시48:1]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 하나님께서는 약하고 무력한 우상과는 달리 자신에게 예배하는 백성들을 대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지니셨음을 선포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대적'이란 구체적으로 히스기야 왕 시대의 앗수르 왕 산헤립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깨서는 산헤립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옐 백성과 예루살렘 성을 보존하셨다(왕하 18:19 ; 사 36장 등)그렇게 보는 근거는, 앗수르의 침공과 관련한 이사야의 예언들과 본 시편이 그 사용된 동사들에 있어서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사 8, 28, 29, 33장).
성 경: [시48:2]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예페노프). - 직역하면 '높음에 있어 아름다운'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있는 도시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본 구절 해석의 핵심적 요소인 '높음' 으로 번역된 '노프'는 여기서만 등장하는 용어로서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까다로우나 히브리어와 동일 어족에 속하는 아랍어의 유사 용어가 '고도'를 뜻하기 때문이다(Perowne). 한편, 예루살렘의 고도가 높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유다의 무수한 언덕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가 그 나라에 있는 가장 높은 고원 중에 하나라는 말이다.
⭕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온 땅의기쁨 인 데 이는 바로 앞 구절 '높음에 있어 아름다운'이란 말의 보어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이 표현은 예루살렘이 온 땅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한편, '온 세계'(온땅)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 전자는 이스라엘 온 땅'을 가리킨다는 의견이고 후자는' 세상의 모든 땅'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본 시편 전체에 풍기는 어감을 볼 때 그 기쁨이 미치기 원하는 범위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인 것이 분명하다(애 2:15). 따라서 여기의 '온 땅'은 개역 성경도 지지하는 후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한편, 사 60:15은 이와 유사하게 '대대의 기쁨'이란 표현을 사용하고있다.
⭕ 북방에 있는 시온 산 - '북방에 있는'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겔 38:6, 15 ;39:2등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땅'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사 14:13에서는 이방 신들의 산, 혹은 앗수르 올림푸스의 위치를 묘사하는 것 같이 보인다 . 일부의 구약 학자들은 시온을 앗수르 신화의 그곳과 같은 위치로 말하기 위해 본 시편기자가 여기서 앗수르 신화로 부터 그 이미지를 따왔다고 가정한다(Ewald, Hitzig, Hengsten-berg).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계시에 의존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시인이 거룩한 사실을 나타내는 일에 신화의 일부를 빌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북방에 있는'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성전의 위치와 관계가 있다. 물론 예루살렘 자체는 북쪽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높은 탁자(tadie) 모양의 고원 지대의 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소로 알려진(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곳인 성전은 북쪽, 좀더 자세히는 도시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기에 저자가 '북방에 있는'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이곳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성전이 있음을 중시하면서, 예루살렘을 지칭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가 '시온 산'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시48:3]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여러 궁중(*, 아르므노 테이하). - 직역하면 '그의 궁중들'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궁전이 여럿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동일한 한 궁궐이 강조점에 따라 다르게 불리울 수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이 궁궐은 '성'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며, 특히 이 말의 원형이 '들어올리다', '높이다'를 뜻하는 '아르몬'(*)임을 고려할 때 높은 곳에있는 '요새'로 부를 수도 있다. 이렇듯 한 장소가 그 특성상 다르게 호칭될 수 있기 때문에 단수가 아닌 복수 형태의 단어가 여기서 사용된 것이다.
⭕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 문자적인 뜻은 '그가 자기 자신을 높은 탑으로 알리셨다'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절 이후에서 묘하되고 있는 반응이, 최근에 하나님께서 이루셨던 위대한 구원 사역의 결과임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높은 탑으로 알려지셨다는 것은 마치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높은 탑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대적의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48:4]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힌네 히믈라킴 노아루 오브루 야흐다우). - 문자적인 뜻은 '보라 ! 왕들이 모였다. 그들이 함께 지나갔다'이다. 여기서 복수인 '왕들'이란 표현 때문에 본 시편의 역사적 배경을 한 명의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한 유다 공격 시대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산헤립은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는 왕들을세웠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갈대아, 페니키아, 블레셋 등을 점령한 후 그곳 왕들을 자신의 수하에 있는 왕으로 삼았던 것이다. 바로 이 왕들과 연합하여 그는 예루살렘을 침공한 바 있다(사 10:8-11). 그리고 왕들이 '모였다'는 것은 가나안 왕들처럼 그들이 공식적인 연합국을 조성했던 것을 가리킨다(수 11:5). 또한 그 연합국이 '함께 지나갔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그 군대가 전투 대형으로 행진했다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사 10:28, 29). 그러나 여기 사용된 동사의 의미는 사 37:36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소멸되었다. 당장 함께 사라졌다'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러한 이유를 고려해 볼 때 본 구절은 두 개의 상황, 즉 많은 군대가 모이고 그리고 바로 멸망한 사실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상술되고 있다.
성 경: [시48:5]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빨리 갔도다(*, 네흐파주). - 직역하면 '그들이 완전히 어리둥절하였다'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대적 연합군들이 하나님의 성(城)을 보고, 느끼고, 취했던 행동의 마지막 단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도망하다'로 번역해도 무리는 없다고 본다(70인역). 그래서 개역 성경도 이와 유사하게 '갔도다'로 번역한 것 같다.
성 경: [시48:6]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 이스라엘의 대적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을 바라보고 가졌던 혼돈과 공포는 성경에서 흔히 가장 심한 고통을 뜻할 때 사용하는 산고(産苦)에 비유되고있다(렘 4:31 ; 6:24 ; 13:21 ; 22:23 ; 30:6 ; 49:24 ; 미 4:9, 10).
성 경: [시48:7]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베루하 카딤 테솨베르 아니오트 타르쉬쉬). - 직역하면 '동풍으로 당신은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신다'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테솨베르'는 2인칭 남성형 혹은 3인칭 여성형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당신 하나님께서 그들 ...를 깨뜨리신다'로 번역되며, 후자의 경우는 '그를'이 주어가되어 '그들은 그들을 깨뜨리는 동풍에 의해 깨어졌다'로 번역된다. 이 둘 중 전자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는 문맥이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적 능력에 의한 이방의 패배와 실패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본절에서는 앞절에 이어 산헤립의 패배를 폭풍우로 인한 해군의 난파 및 와해(瓦解)에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의 언급으로 볼 때 다시스의 배는 가장 튼튼한 큰 배로 알려져 있다(왕상 10:22). 그러나 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사 27:8 ; 렘 18:17 ; 암 4:9 ; 욘 4:8) 막강한 앗수르의 해군력은 무용지물 (無用之物)이 될 수 없다 (사 33장).
성 경: [시48:8]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우리가 들은 대로...보았나니 - 경이로운 구원, 즉 과거 이스라엘 역사속에 흔히 있었던 경이로운 사랑의 구원 역사는 이제 시편 기자의 시대에 생생한 현실로 입증되고 있는 이다(44:1) 따라서 이 사실은 미래 시대에도 당당히 물려줄 불변의 진리가 될 것이다. 한편, 87:5에서 '지존자가 친히...하리로다'라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성 경: [시48:9]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생각하였나이다(*, 데미누). - 문자적으로 직역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본 단어에 대한 번역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떤 사물을 조용히 사려깊게 '고려하다'를 의미하는 '자맘'(*)의 동족어임을 중시할 때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Perowne). 그래서 흑자는 이 단어를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부합되는 어떤 개념을 구체적으로 갖게 되었던 것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추측한다(Hupfeld). 이러한 근거로 볼 때 흔히 알고 있는 '묵상하다'로 이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성 경: [시48:10]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주의 이름과 같이...미쳤으며 -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만하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풀이하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막강한 권능의 행사를 통한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 가운데 알려지게 한 그분의 이름, 그 이름은 찬양을 받으실 만하다'는 것이다.
성 경: [시48:11]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 '유다의 딸들'이란 노래와 춤을 곁들인 승리의 축제를 묘사하는 글에서 흔히 볼 수있는 표현인데, 그럴 경우 이는 문자 그대로 '유다의 딸들'이 아닌 '유다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것이 평행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할때, 이는 평행구인 상반절의 '시온산'의 평행적 개념인 바 적(敵)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했던 '유다의 여러 도시들, 마을들'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은유는 시가(時歌)뿐 아니라 산문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시48:12]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편답(遍踏)하고...순행(巡行)하며 - 여기 두 단어는 공히 어떤 '건물 따위를 둘러본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 전자는 한 개인이 그 일을 수행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과 비교해 후자는 일단의 무리가 공식적인 행렬을 갖추어 엄숙하게 그 일을 수행하는 경우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결국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개인이나 단체가 하나님께서 그 성을 든든히 보존하셨음을 확신하기 위해서 성을 한번 돌아보라는 명령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48:13]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성벽을 자세히 보고 - '성벽'(*, 헤일)은 '무리' 혹은 '군대', 그들이 들어가 있는 '요새' 특히 성벽 울타리 밖에 바짝 붙은 곳에 파놓은 '참호' 따위를 말한다(삼하 20:15 ; 사 26:1). 70인역(LXX)(*, 두나미스)은 '능력'이나 '힘'으로, 벌게이트역(Vulate)은 '용기' 등으로 이것을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때 '성벽'이란 단순한 건축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용을 갖춘 '난공 불락의 수비형 진지(陳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세히 본다'(*, 쉬투)는 어떤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 '면밀히 검토하고 조사하다' 등을 뜻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성벽을 자세히 본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成)의 위용과 그 수비형 진지 상태를 면밀히 검토하고 살펴보라는 것이다.
⭕ 그 궁전을 살펴서 - 여기의'궁전'은 왕가의 처소뿐 아니라 요새화되어 있어 방어벽이 잘 구축되어 있는 성(成)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절은 다음과 같은 뜻이 되겠다. 즉, '그 도성의 힘, 그 방어 능력 또한 외부 위험으로 부터의 안전성들을 살펴서'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리고 '살펴서'로 번역된 '파스구'(*)는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단어로 그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기란 무척이나 어렵지만 어떤 학자에 따르면 이 단어는 '세분화하다', 즉 철저하게 돌아보기 위하여 그 돌아볼 대상을 세분하는 것 혹은 '정확히 자세히 살펴보다'를 의미한다고 본다(Gesenius). 그리고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를 '배분하다', '분배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70인역(LXX)은 보기 위하여 '거리를 잡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 경향과 상반절의 '자세히 보고'의 의미를 고려할 때 이 용어는 '주의 깊게 혹은 사려 깊게 조사하다'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들을 통하여 본 시편 저자는 대적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키시는 성 예루살렘은 그 작은 부분에 있어서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시48:14]
주제1: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영광]
주제2: [하나님의 성 시온]
⭕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 이에 해당하는 원어를 직역하면 '왜냐하면이 같은 이는 영원한 우리 하나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이다. 저자는 성(成)을 자세히 돌아보고 그 결과를 후세에 전해야 하는 목적과 이유를 본절에서 다시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성이 그렇게 든든히 서 있는 근원이 도시 자체의 강함이나 백성들의 재간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는 본 시편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Anderson).
성 경: [시49:1]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
⭕ 세상 - 원어는 '헬레드'(*)인데 '세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곳은 17:14과 사 38:11 두 곳뿐이다.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가 어려우나, 사용된 두 곳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이 '세상'이란 그 '모든 실존이 덧없고 일순간적인 곳'을 말한다. 따라서 본 시편은 일시적인 실존 속에 살고 있는 제한적인 인간들을 수신자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Perowne, Bar-nes, Driver, Gray).
성 경: [시49:2]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지혜의 귀를 기울이라]
⭕ 지혜 - 원어는 '호크모트'(*)로서 복수형으로 언급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어떤학자는 이를 강조형으로 이해하여 '심오한 지혜'로 해석한다(Anderson). 그러나 역시 복수형으로 쓰이면서도 평범한 의미의 지혜를 뜻하고 있는 잠 1:20 ; 9:1 ; 14:1 ; 24:7 등을 고려할 때 그 같은 해석이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문맥상으로 볼 때 이 '지혜'는 모든 사람들이 귀기울여 들어야 하는 중요한 내용의 지혜임은 분명하다(Barnes).
⭕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 문자적인 뜻은 '나의 마음의 묵상은 지혜'이다. 이것은 저자가 입을 벌려 말하려고 하는 어떤 문제에 관한 진정한 지혜(이해)는 저자가 오랫동안 묵상하여 터득한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통찰은 어떤 노력에 의한 것이나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가능하였다.
성 경: [시49:3]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귀를 기울이라]
⭕ 지혜 - 원어는 '호크모트'(*)로서 복수형으로 언급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는 이를 강조형으로 이해하여 '심오한 지혜'로 해석한다(Anderson). 그러나 역시 복수형으로 쓰이면서도 평범한 의미의 지혜를 뜻하고 있는 잠 1:20 ; 9:1 ; 14:1 ; 24:7등을 고려할 때 그 같은 해석이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문맥상으로 볼 때 이 '지혜'는 모든 사람들이 귀기울여 들어야 하는 중요한 내용의 지혜임은 분명하다(Barnes).
⭕ 내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 문자적인 뜻은 '나의 마음의 묵상은 지혜'이다. 이것은 저자가 입을 벌려 말하려고 하는 어떤 문제에 관한 진정한 지혜(이해)는 저자가 오랫동안 묵상하여 터득한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통찰은 어떤 노력에 의한 것이나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가능하였다.
성 경: [시49:4]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지혜의 귀를 기울이라]
⭕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 선지자의 영감뿐 아니라 시인의 영감도 하늘로부터 온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해서는 안되며, 주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귀기울여야 한다. 본절의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 신장한 행동이며, 귀를 연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지식, 하늘의 지혜, 하나님 편에서의 그 무엇의 전달을 암시한다(사 50:5). 본 구절에서 하나님에 관한 것을 전하는 참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하는 자신의 입술을 열어 말하기 전에 먼저 귀를 하나님께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한편, 본절의 '비유'(*, 마솰)는 비중이 실린 그리고 교훈적인 형태를 취한, 어떤 은유법이 가미된 수수께끼와 같은 숨은 진리 를 뜻한다(78:2 ; 잠 1:6).
⭕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에프타 베킨노르 히다티) - 문자적인 뜻은 '수금(하프)으로 나의 어두운 말 을 공개하라'이다. 여기서 '어두운 말'(*, 히다)이 '어려운 담화'(민 12:8, '수수께끼'(삿 14:12, 13 ; 겔 17:2), '어려운 질문들'(왕상 10:1 ; 대하 9:1), '엄한 얼굴' (단 8:23), '잠언'등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애매하면서도 모호한, 그리고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진리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표현으로 판단된다. 이제 그러한 진리를 쉽게 설명하고 풀어냄에 있어서 수금을 사용한다는 말은 그 푸는 과정에 음악을 동반하겠다는 뜻이다. 즉, 시가(詩歌) 형태로 그것을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학자의 반박과 같이 성경에서 문자 그대로 음악을 동반해서 교훈을 베푸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는 곳은 없다(Anderson). 그래서 그는 성경에서 악기를 사용한 음악이란 황홀상태로 이끌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삼상 10:5 ; 왕하 3;15).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시편 자체가 가락을 동반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금으로 그 내용을 들려준다는 은유는 연주 전에 자신의 악기를 조율하기 위하여 귀를 악기 가까이 대는 연주가의 태도로부터 빌어 왔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Dio-dati).
성 경: [시49:5]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 아온 아케비 예수베니). - 직역하면 '나의 발꿈치의 악이 나를 에워싸게 될 때'인데, 개역 성경의 번역은 갈대아역을 풀어쓴 것과 유사한 듯하다. 왜냐하면 갈대아역은 이를 '나의 죄악이 나를 둘러싸는 때'라고 번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루터의번역, 시리아역, 아라비아역 등은 '나의 대적(원수)의 악이 나를 둘러싸는 때'로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해석이 다른 것은 난해한 단어인'아케브'(*) 때문인데 이 용어는 '발꿈치'(창 3:15 ; 욥 18:9), '부대의 후방'(수 8:13)을 의미하며, 복수로 쓰이면 '발자국들'(77:19)을 뜻한다. 그리고 게제니우스(Gesenius) 따르면 '숨어있는 거짓말쟁이', '잠복하고 있는자'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 말의 동사 '아카브'(*)의 경우는 '뒤에 있다', '뒤에서 오다' 혹은 책략을 써서 '어떤 사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다'와 같이 의미의 폭이 넓어진다(호 12:3). 이처럼 다양한 이 용어의 뜻을 고려하여 본 구절 전체의 의미를 규정하면, '나를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자의 교활하고 믿첩한 책략에 노출되어 있어서 언제 갑작스런 공격을 받을지 알수 없는 그러한 때'이다.
성 경: [시49:6]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 이것은 대적들에 대한 세부적 묘사이다. 아마 대적들은 하나님 대신에 자신들의 부(富)를 의존했던 것같다(52:7).
⭕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 그들의 자랑거리는 자기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만 했다(34:2 ; 44:8).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신뢰하고 거기에 만족해 하였다. 한편, 여기서 시편 기자가 지적하는 바는 부 자체가 악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부를 신뢰하고 믿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성 경: [시49:7]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아호 로파도 이프데 이쉬). - 본 구절은 맨 앞에 놓인 '아호'(*)의 격(格)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전체 의미가 달라진다. 먼저 주격으로 보는 경우인데 이때의 의미는 '한 형제(즉, 동일한 육과 혈을 가진 자)는 사람을 구속할 수 없다'가 되겠다(Delitzch). 또 다른 경우는 이를 여격(대격)으로 보는 경우인데 이때의 의미는 '형제에게 구속을 베풀 사람은 없다'가 된다. 이 두 경우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를 결정함에 있어 중시해야 할 것은, 본 구절의 두 번째 단어인'로'(*)와 동일한 단어로 하반절이 시작되고 있는데 그 하반절에는 대격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반절과 하반절로 구성되어 있는 본절은 강조사인 '아흐'를 맨 앞으로 내놓은 경우의 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아흐'를 무리하게 주격으로 보는 것보다는 상.하반절이 공히 강조사로 취하는 대격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호'를 주격으로 보든 또는 대격으로 보든 간에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Perowne).
⭕ 속전 - 사람의 생명을 구속하는 일 외의 합법적 속전 규례에 관해서는 출 21:30 ; 30:12 ; 민 35:31, 32을 참조하라.
성 경: [시49:8]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저희 생명의 구속이...못할 것임이라 - 여기서 '생명'(*, 네페쉬)의 문자적인 뜻은 '혼'이지만 문맥에 비추어 볼때 개역 성경처럼 '생명'으로 번역해도 무난하겠다. 그런데 일부의 시편 독자들이 너무 흔히 본절과 앞절에 대하여 완저히 그롯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즉, 본 구절들이 인생을 구속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자 또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으로 해석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시편에는 이에 대한 털끝만한 암시도 없다. 여기서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한계 상황 앞에서 돈의 무가치함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즉, 부(富)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 경: [시49:9]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저로 영존하여(*, 위히 오드 라네차). - 직역하면 '그가 '계속하여 살 것'이다. 이 구절만 따로 떼어 내어 단독적으로 해석하면 부자가 다른 형제를 위하여 속전을내어 그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에 어긋나기 때문에 본 구절은 7절의 부정사 '로'(*)에 걸려 있는 구절로 해석해야 한다.
성 경: [시49:10]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죽고...망하고 - 각각 '야무투'(*), '요베두'(*)로서 '죽다', '소멸되다'를 뜻한다. 이 단어들은 지혜자와 우둔한 자의 각각의 종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 같다(Perowne).
성 경: [시49:11]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그 전지(田地)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 부자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미래에 전수되리라는 소망 때문에 자기 땅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놓는다는 것이다. 이는 땅 위에서 불멸하리라는 우둔한 부자들의 소망이 엿보이는 표현이다.
성 경: [시49:12]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함]
⭕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長久)못함이여(*, 아담 비카르발 얄린). - 직역하면 '인간은 존귀할지라도 머물지 않는다'이다. 말하자면 그가 어떤 지위를 누리고 있든지, 얼마나 많은 재물을 추적했든지 혹은 그 지위나 재물의 안전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든지 간에 인간은 그것들을 영원히 누릴 수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얄린'(*)은 '밤을 보내다', '밤새 남아 있다', '머물다' 등을 뜻하는데 그 밤 동안도 머물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신속히 머물던 곳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주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아마도 본 구절을 염두에 두셨던 것 같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성 경: [시49:13]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본절은 분명히 11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12절뒤에 삽입하여 해석하기도 한다(Hupfeid). 사실 11절은 본절과 아주 자연스러운 사상의 연결을보이고 있다. 즉 본절은 부자들이 죽은 후에 그들을 모범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임으로써 11절에서 의도한 사상과 아주 적합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희의 이 행위'라는 표현은 11절에서 말했었던 사실의 요약과도 갈은 것이다. 또한 12절 후에 놓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후렴구 '셀라'가 바로 본절 뒤에 놓인 사실은 배열상의 부조화가 있었던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제 다르캄 케셀 라모) - `제 다르캄'(*)의 의미와 문장의 구조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러한 그들의 방식(예을 들면 삶의 방식, 행동의 과정따위)은 그들의 어리석음이다' 혹은 '이러한 그들의 번영 상태는 그들의 열중함(맹목적 확신)을 끌어내고 있다'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케셀'(*)이 '주제넘은 확신', '우매 완고함'뿐아니라 '어리석음'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문장 구조로 볼 때 본 구절은 두 개의 독립 문장들의 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럴 경우 본 표현은 '이것은 그들의 방식이다. 그들은 확신 갖고 있다'로 이해된다(Menderis).그리고 이와는 달리 본 문장을 하나의 관계적 문장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럴 때는 '이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방식이다'(Ewald)라고 해석되어진다.
⭕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 직역하면 '그들의 입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다'이다. 그들의 표본과 말은 그들을 계속 보존시킨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입으로 내놓은 일종의 금언은 세상 속에서 아주 인기있게 퍼져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절 전체를 다시 풀어 번역하면 '이것은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을 좇아 그들이 취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말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의 방식이다'이다.
성 경: [시49:14]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저희 아름다움(*, 치람). - 문자적인 뜻은 '그들의 모습(형태)'이다. 이 '형태'란 인간의 외관 전체를 가리킨다. 이 인간의 외관 전체는 스올(sheol)에서 소멸될 것으로 작정되어 있다(Gersenius).
성 경: [시49:15]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카헤니). - 본 구절은 짧지만 저자의 의도를 읽게 해주는 비중있는 부분이다. 본 구절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다른 곳에 이와 동일한 대목이 있느냐를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73:24 ; 창 5:24 이 두 곳에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로 인간을 취해 가신다는 의미의 '라카'(*)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카헤니'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자가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의 소망을 가졌음을 짐작케 해준다. 한편, 앞절(14절)에서 불경건한 자의 암울한 종말을 묘사했던 시인은 본절에서 음부의 권세로부터 당당히 해방된 경건한 자의 찬란한 영생의 기대를 그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뿐 아니라 구약의 언약 공동체에 힘을 북돋워 주었던 소망이다.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는 비록 교회 속에 있다 할지라도 참성도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한다(고전 15장).
성 경: [시49:16]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영광(*, 카보드). - '영광'보다는 '부'(富)가 적절한 해석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창 31:1 ; 사 10:3 ; 66;12 ; 나 2:9 등에서 이 용어는 '부'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시49:17]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가져 가는 것이 없고 - 10절에 묘사된 대로 이러한 표현은 부자의 비극을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재물을 잃어야만 하기 때문이다(욥 1:21 ; 전 5:15 ; 딤전 6:7).
성 경: [시49:18]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자기를 축하하며(*, 나프쇼 예바레크). - 직역하면 '그의 영혼을 축복하며'이다. 신 29:19의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에 나타난 동일한 동사 '예바레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부자가 자신을 스스로 행복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한편, 이러한 말은 눅 12:19을 연상시킨다.
성 경: [시49:19]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의 선조들의 시대(족보)로 돌아가리니'이다. 좁게는 그 조상들의 묘로 돌아간다는 뜻이지만(창 49:29), 넓게는 그리고 문맥적으로는 죽은 자의 영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Anderson).
⭕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 스올은 끝없는 암흑의 장소이다(88:12 ; 욥 17:13). 따라서 그곳에 머무는 자들은 영원히 암흑 가운데 지낼 수밖에 없다.
성 경: [시49:20]
주제1: [세속적 이익과 번영의 허무]
주제2: [세상의 공허한 영광]
⭕ 깨닫지 못하는(*, 로 야빈). - 직역하면 '이해(지혜)가 없는'이다. 시인은 본 시편을, 12절의 내용과는 유사하지만 후렴구는 다른 단어를 넣어 결론을 짓고 있는데, 그 단어가 바로 '로 야빈'이다. 이 말은 격언적인 말로서 '지혜가 없다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즉, 본절은 일반적으로 말 못하는 소와는 다른 존재인데 본 시편이 가르치는 참지혜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는 소처럼 소멸되어 버리고 말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본 시편의 가르침은 땅 위의 소유물을 믿고 사는 자는 세상을 떠난 후 영원한 암흑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고 사는 자는 하나님 손에 이끌리어 영원한 빛의 안식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시50:1]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 권고]
⭕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엘 엘로힘 예호아). - 문자적인 뜻은 '신들 중의 하나님, 주되신 분'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품성의 각기 다른 면을 암시하는 이름이므로 풀어 번역하면 '전능한 분, 재판관이신 분, 은혜로은 분 하나님'이 된다고 주장하나(Cohen) 많은 지지를 얻지는 못한다. 이 호칭 뒤에 본 시편에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내용이 묘사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 호칭은 참하나님으로서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입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84:3 ; 수 22:22). 온 세상을 그의 심판대 앞에 모으시고 당신의 의지 집행하실 능력을 지닌 분은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Barnes).
성 경: [시50:2]
주제1: [참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 - 원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아름다움의 완벽인 시온'이다. 이는 문자 그대로 시온에 대한 묘사인데 아마도 이 은유는 하나님의 도성으로서의 예루살렘의 영화를 다루고 있는 것 같다(Kraus). 한편, 이 도시는 빼어나게 수려한 곳으로 간주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선택한 곳이기 때문이었다(Rad).
⭕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 때때로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을 빛으로 옷 입으신 분으로(104:2), 혹은 그 빛 속에 거하시는 분으로(딤전 6:16 ; 출 13:21 ; 단 2:22)묘사하였다. 그러기에 이 말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4:6 ; 18:28 ; 27:1 ; 36;9 ; 43:3 ; 미 7:8).
성 경: [시50:3]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잠잠치 아니하시니 -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후대에 삽입된 부분으로 간주하지만(Wel-lhausen, Duaith, Snaith). 이 견해는 타당성이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내용상 21절 상반절의 전제적인 대목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침묵은 악한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악행이 인정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게끔 하였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할 때, 이 구절은 원래 이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불...광풍 - 이 용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시내 산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의 현현(顯現)기사로부터 취한 것이 분명하다(출 19:16, 18). 문맥상 이러한 자연 현상들은 하나님의 집행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집행하실 심판의 상징으로 보여진다(Perowne).
성 경: [시50:4]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위로부터 하늘과 땅에 이르기까지 부르고(소환하고)이다. 즉, 온 우주, 온세상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본 표현의 의미는 그 우주를 심판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심판의 공정성을 목도하는 목격자로, 증인들로 그것들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성 경: [시50:5]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나의 성도(*, 하시다이) - 문자적인 뜻은 '나의 사랑을 받은 자' 혹은 '나의 시야에서 은총, 자비를 얻었던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본 표현은 평행구인 '나와 언약한 자'가 그 의미를 부연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즉, 그분은 백성들에게 당신의 법과 약속을 주셨다. 그리고 이제는 백성들이 자신의 율법을 준수하였는지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는지를 알기 위하여 백성들 심판하시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50:6]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아기두 솨마임 치드코). - 문자적인 뜻은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다'이다. 여기서 동사의 형태는 미래형 혹은 현재형이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과거이다. 이러한 동사를 우리사적(史的) 현재 동사라고 부른다. 즉, 과거의 일을 생생히 묘사하기 위한 현재 시제의 동사라는 말이다. 한편 본절은 연이어 따라올 엄숙한 심판의 서곡으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였던 하늘, 그 하늘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계신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97:6).
성 경: [시50:7]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말하리라...중거하리라(*, 아다베라...아이다). - 둘 다 끝에 '헤'(*)라고 하는 어미가 달려 있는 일종의 어미음 첨가형 동사라고 볼수 있는 이 용어는 어떤 목적을 암시하고 있는 동사이다.
⭕ 하나님 곧 네 하나님(*, 엘로힘 엘로헤이카). - 구약에서 흔히 언급되는 하나님의 호칭 가운데 하나로 '야웨'(yahweh)대신 '엘로힘'이란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이 호칭은 십계명 서론 부분에서 나타나는 언약의 하나님이 자신의 신분을 표출한 그 방식을 상기시킨다(출 20:2 ; 신 5:6). 하나님은 언약의 수여자로서 언약을 파기하였던 그 백성을 바로 잡고 징벌하실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다.
성 경: [시50:8]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내가 너희를 책망하는 것은 너희의 희생 때문이 아니다'로 심판 행위가 있게 된 이유가 설명되고 있다. 그 이유의 첫째는 부정적인 의미의 이유로서 백성들이 율법에 의해 약조된 율법의 외형을 무시했었다거나 희생드리는 일을 잊었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백성들은 희생 제물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행위가 전부라는 식으로 제물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서 의미야 어쨌든 상관하지 않고 제물만 가져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제물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제물 자체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 의지의 표현을 원하셨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은 모든 번제보다 나은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상은 구약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표출된 바 있다(사 1:11, 12 ; 58장 ; 66:3 ; 미 6;6-8등). 그리고 여기에서
⭕ 제물 - 은 일차적으로 화목제를 가리키는데 이 제사는 흔히 번제와 함께 드렸다(51:16). 이 두 제사가 언급될 경우는 아마도 모든 방식의 희생 제사를 함께 의미하는 것 같다(Perowne).
성 경: [시50:9]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내가 네 집에서...취치 아니하리니 - 여기의 '수소'나 '수염소' 등은 히브리 민족의 희생 제사에서 규칙적으로 바쳐지던 동물들이었다(출 29:11, 36 ;레 4:4 ; 왕상 18:23, 33). 율법을 따라 이러한 동물들을 희생으로 바치는 일은 적절하고도 당연한 것 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를 지금 탓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정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특히 본절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 제사의 내용물(제물)에는 관심이 없으시고 필요하게 생각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제물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당신의 것으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시50:10]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생축(*, 헤모트). - 이 단어는 대부분 '길들여진' 동물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나 여기서나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떼를 가리킨다.
성 경: [시50:11]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들의 짐승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들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 구절은 정확한 의미을 규명하기 어려운 구절인데, 혹자는 이를 전혀 이해가 안되는 '들의 열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Ewald). 그러나 일반적이고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번역은 '들에서 방랑하는 것'이다.
성 경: [시50:12]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내가 가령 주려도 - 문맥은 본 조건절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기란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본절과 다음절에서 신(神)은 예배자들의 공궤에 의해 제공된 바 음식과 마실 것을 요구한다는 원시적 개념을 저자는 넌지시 깔고 있는 듯하다(신 32:38). 사실 고대인들은 인간의 중요한 임무 중시 하나가 신들에게 부양물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러한 견해는 '벧과용'(Bel and Dragon)이라는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있다. 그러나 여호와의 경우 그 누구도 그분께 무엇인가를 공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다(24:1 ; 신 10:14).
성 경: [시50:13]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 이 표현은 고대 세계의 명백히 존재했던 신식육(神食肉) 개념을 이스라엘의 백성들도 알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레 3:11은 제단 위에 불사르던 희생 동물들의 일부분을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식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불을 사용하여 바치던 제물이 레 21:6서는 '하나님의 식물'(레 21:8, 17, 21 ; 민 28:2 ;겔 44:7)로 불리우고있다. 그러나 이 같은 용어들이 구약 성경의 저자들에 의하여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취해졌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표현한 것은 그 용어들을 사용해서 시(時)의 독자와 제사에 관한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함인 듯하다(Anderowen).
성 경: [시50:14]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제바흐 렐로힘 토다). - '토다', 즉 '감사의 희생'은 감사제(예배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희생 제사, 레 7:12 ; 22:29 ; 암 4:5)나 감사의 찬양(26:7 ; 42:4 ; 69:30)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도 전자가 좀더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본 구절의 동사 '제바흐'는 그 문자적 의미가 '도륙하다'. '살륙하다'로 이 동사가 사용된 제사는 찬양이나 기도보다는 희생 제사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Kraus). 그런데 바로 앞 부분에서 제사의 무용성을 지적한 바 있기에 다시 제사를 드리라는 본 구절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본 시가 외형적 제사, 특히 하나님의 음식을 공급하기 위한 제사를 거부하는 문맥이기 때문에 본 구절이 지적하는 희생 제사는 여호와가 취하실 음식으로서의 제사가 아니라 그분을 향한 바른 자세의 표현, 예배자를 위한 축복의 수단으로서의 희생 제사임이 분명하다.
⭕ 서원을 갚으며 - 바로 앞에 열거된 제안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예배자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자원 제사를 먼저드려야 한다(de Vaux). 한편, 감사제와 마찬가시로 '서원제'도 함께 나누는 희생 제사에 속한다(22:25) ).
성 경: [시50:15]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네가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감사의 희생 제사와 서원제를 드리라고 명령한 직후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으라는 요구를 연결시키고 계신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어있음이 분명하다. 즉, 그것은 마음을 동반한 진정한 희생 제사와 서원제를 드린 자가 갖는 증표는 환난 날에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참예배자의 의무와 특권을 발견할 수 있다. 참예배자는 환난의 때에 그 환난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자가 하나님 한 분 뿐인 것을 확신하고 그분께 의존한다. 바로 이러한 의존 행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즉 존경하는 일이 된다.이것이야말로 참예배자만이 갖는 특권이라 하겠다.
성 경: [시50:16]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악인에게는 - 원문을 보면 7절의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바로 본 구절 앞에 자음 하나 정도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다. 이것은 7절부터 15절까지가 일정한 주제하의 한 단락이고, 본절부터는 새로운 주제의 단락이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7-15절까지의 단락은 하나님이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자세로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 즉 형식주의자에 관한 언급을 다루었다. 그런데 본절부터 시작되는 단락은 율법을 인정할 뿐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일과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는 부조화를 보였던 지도자들, 선생들이 있었다(Barnes).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런 자들을 가면과 겉옷 아래 죄악을 숨기고 외적인 종교의식 수행에 열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Perowne). 특히 신약은 이러한 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비난하며 롬 2:17-24은 이 주제에 관해 좀더 분명하고도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다.
성 경: [시50:17]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네가 - 이 대명사는 강조사로서 악인의 실제적인 품성과 귀가 알고 있다고 고백하는 율법, 즉 '내 말'과의 강한 대비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사 1:15과 비교하라).
⭕ 교훈을 미워하고 - '교훈'(*, 무사르)은 따끔한 책망을 곁들인 '훈계'를 의미한다. 잠 12:1은 이 '훈계'를 사랑하는 자는 지식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하고 이 '훈계'를 미워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더불어 언급하고 있다(잠 10:17 ; 13: 18 ; 15:5, 32). 한편, '진리의 사람'은 '훈계를 사랑하는 자'라고 불리우기도 한다(Anderson).
⭕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 훈계의 내용은 십계명을 상기시키는 바, 하나님의 말씀이다(출 34:28 ; 신 4:13 ; 10:4). 그리고 무엇을 '뒤로 던진다는 것'은 그것을 배격하거나(왕상 14:9) 무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사 38:17), 이러한 표현은 율법이나 하나님의 규례를 범하는 자의 마음과 태도를 생생히 나타낸다.
성 경: [시50:18]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도둑을 보았을때 그의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고'이다. 이것을 70인역(LXX)은 '도둑을 보았을 때 그와 함께 도망치고'로 번역하고, 또 다른 역본들은 '도둑을 보고 그에게 너의 몫을 다 내던지고'로 번역하고 있다(탈굼역, 시리아역) 이 모든 번역들을 종합하면 악인이 도둑과 교제를 갖는다는 뜻이된다(욥 34:8, 9).
⭕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 직역하면 '간음하는 자와 함께 너의 분깃이며'이다. 결국이 말은 간음하는 자와 가진 것을 나눈다는 것, 곧 그들처럼 간음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본 구절의 핵심은 선생및 종교 지도자들이 경건의 겉옷을 걸치고 이와같은 범죄를 자행하고 모든 의적 종교 의식을 행하면서 이 같은 악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한편, 이 죄악은 유대 사회가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졌을때 일반화되어 있었던 악행이었다(롬 2:22).
성 경: [시50:19]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네 입을 악에게 주고 - '네 입을 악에게 보내고'가 문자적인 뜻이다. 이것은 그 입을 악에게 내어 주었다는 것, 즉 입이 악하게 사용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5:3 ; 34:13). 그러기에 이러한 표현은 결국 그 입이 사악을 내고 속임수와 중상 모략을 베풀었던 것을 가리킨다.
⭕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르손카 타츠미드 미르마 ) - 문자적인 뜻은 '네 혀로 속임수를 짜며'이다. 특히 '지으며'는 '공교하게 엮다', '단단히 하다' 등을 뜻하기 때문에 혀로 속임수를 짠다는 표현은 그저 의식없이 속임수를 생각했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완벽에 가깝게 속임수를 지어냈던 것을 뜻한다.
성 경: [시50:20]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앉아서 - 이것은 남을 헐뜯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을 말하는 자들과 동무가 되어 앉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1:1).
⭕ 네 형제를 공박하며 - 여기의 '형제'는 같은 동네에 사는 고향 친구, 혹은 피를 나눈 형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본 구절과 동의적 대구 상황에 있는 하반절에 '어미의 아들'이 있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혈연 관계에 있는 자를 비방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극악한 중상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악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렘 9:4 ; 미 7:6).
⭕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 문자적인 뜻은 '네 어미의 아들에게 일격을 가하다'이다. 그런데 여기의 '일격을 가하다'에 대한 것을 70인역(*, 에티데이스 스칸다논)은 '거치는 돌을 놓아두다'로 번역한다. 그리고 이와는 달리 문맥을 고려하여 '중상 모략을 하다'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는데 문맥을 고려한 후자의 견해가 무난한 것 같다. 한편, '어미의 아들'이란 표현은 당시 '일부다처제'가 성행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다. 즉, 아버지는 동일하나 어머니가 여럿이었기 때문에 배다른 자식들이 있어서 '어머니 아무개씨의 자식'이란 식의 표현이 일상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Barnes). 배다른 자식들이라고 할지라도 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이 중상 모략을 했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사실 중상 모략은 한 가정을 파멸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지닌 무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16:1-4 ; 왕상 21:8-14).
성 경: [시50:21]
주제1: [참되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 이것은 오랫동안 죄를 처벌하지 않고 두었더니 악인이 그 자신의 죄에 대하여 뻔뻔해져서 악과 선의 차이가 없다고 확신하였던 것을 지적하는 구절이다. 즉, 악과 선의 차이가 없다고 확신했다는 것은 악인이 악을 자행하는 일에 열심이고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구별하는 것에 무지하였음을 가리키는 의미이다(Perowne).
⭕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 직역하면 '내가 네 눈앞에 순서대로 열거할 것이다'이다. 이것은 범죄의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작게 출발한 악행이 그 범위와 영향력에 있어서 얼마나 그 정도를 더해 갔는가를 설명하겠다는 말이다. 악인의 작은 죄악은 뿌리를 내리고 잎새를 내더니 많은 가지들과 더 든든한 줄기를 내고 결국은 독이 가득한 열매들을 내었던 것이다.
성 경: [시50:22]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 -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었던 자들(신 8:19 ; 삿 3:7 ; 욥 8:13)이다. 그러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즉, 그들은 직업적으로 예배 의식에 종사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참품성과 그분의 진정한 요구하심을 전적으로 잊어버린 자들이다(Barnes).
⭕ 찢으리니 - 먹이를 갈기갈기 찢는 몹시 굶주린 야수의 모습으로부터 따온 표현이다.
⭕ 건질 자 없으리라 - 이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사 43:3,11 ; 49:26).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므로 하나님에 의하여 징벌을 받는 자는 소망없는 버린 자이다.
성 경: [시50:23]
주제1: [참된 예배의 본질]
주제2: [참 제사로의 권고]
⭕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조베아흐 토다) - 직역하면 '감사함으로 회생 제사를 드리는 자'이다. 여기서 동사 '조베아흐'는 14절에 사용된 것으로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회생 제사가 무엇인지, 또는 그 제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돼었다. 즉, 그 제사란 어떤 회생 동물을 죽여 끌고오는 그러한 외형적인 행위가 아니라 감사함을 희생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제사에 대해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찬양의 제사로 번역한다. 즉, 본구절의 감사함으로 드리는 제사란 찬양의 제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예배(제사)는 찬양이라는 쪽으로 이끌고 나간다. 그러나 이 근거를 신뢰할 이유는 젼혀 없다. 그리고 동일한 이 표현을 14절에서는 찬양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데, 이곳에서만 찬양의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평행에 어긋난다. 그러기에 본절에서 갑자기 찬양의 개념 쪽으로 나아갈 근거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본절에서 감사함의 개념이 다시 돌출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다시 감사함의 개념이 출현한 것은 예배자들이 감사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설령 감사한다고 해도 감사의 내용을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님은 풍성하게, 또는 값없이 당신의 은총을 인간에게 내리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받아 누린다. 그러나 그것을 내려준 자가 누구인지에 관하여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이 결과 감사할 줄 모르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갈 마땅한 영예를 인간이 빼앗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를 아는 자들은 기도, 자기 부인, 십자가를 지는 것, 모든 경건의 연습, 예배드리는 일 등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조차도 자칫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예배에 관련된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하심, 은혜에 대한 분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참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자는 이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땅 위의 역경도 감사함으로 승리할 수 있다. 참 감사하는 자는 인간의 지고의 목적을 성취해 가고 있을 뿐 아니라 만사에 있어서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그대로 돌려드리는 자이다(PEROWNE).
성 경: [시51:1]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하나님이여...긍휼히 여기시며 - 본 시편의 저자 다윗은 여기서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호칭을 '여호와'가 아닌 '엘로힘'(*)으로 사용하고 있다(54:1;55:1;56:1;57:1;59:1;60:1;61:1;63:1;64:1;65:1).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여호와'가 아니라 '엘로힘'으로 표현한 까닭은, 그 스스로가 자신을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가치도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Rawlinson). 한편 '긍휼히 여기시며'(*, 하난)는 '은혜를 베푸시며'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창 33:5;민 6:25;사 30:18).
⭕ 주의 인자를 좇아 - 문자적으로는 '당신의 인자를 따라서'의 뜻이다. '인자'(*, 헤세드)는 본질적으로 언약 관계를 내포하는 단어이다. 이 말이 사람에게 쓰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뜻하는 반면, 하나님께 쓰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자비롭고 확실한 약속'혹은 '언약적 신실성'(26:3)을 의미한다(A. A. Anderson).
⭕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 이처럼 다윗이 앞에서 '인자'를 언급하고도 다시 '많은 자비'를 말한 것은 자신이 큰 죄인임을 암시적으로 고백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적어도 자신과 같은 큰 죄인은 평범한 종류의 '인자' 혹은 '자비'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Calvin).
⭕ 내 죄과를 도말(途抹)하소서 - 이것은 본절이 두 개의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앞 부분의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죄과'(*, 페솨)는 국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반역'을 뜻하며 특히 종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본연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뜻한다(Delitzsch, Weiser).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죄과'를 복수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구체적으로 (1) 밧세바와의 간통(삼하 11:2-4) (2) 그 남편 우리아 살해(삼하 11:14-17) 등 두가지의 죄를 범했던 사실과 잘 부합된다. 한편 '도말하소서'(*, 므헤)는 '문지르다', '부드럽게 하다', '없애다'는 뜻이며 채무 관계를 청산하는 뜻에서 차용증서를 없앨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범죄 사실을 지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69:28;출 32:32). 한편 고대 바벨론에서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그 범죄 사실을 토판(土版)에 기록했고, 용서를 받았을 경우에는 그 토판을 깨어버렸다고 한다(Kraus).
성 경: [시51:2]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여기서도 1절의 내용과 거의 비슷한 간청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죄의 오점을 여러 번 씻어야 할 만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Calvin).
⭕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 '죄악'(*, 아온)은 '구부리다', '왜곡하다'는 뜻의 '아와'(*)에서 유래한 말로 '사악함', '왜곡'의 의미이다(Delitzsch).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악한 의도'를 가리킨다(L. Kohler). 그리고 '씻기시며'의 '카바스'(*)는 원래 '짓밟다'라는 뜻인데 옷감을 발로 밟아서 씻는다는 의미에서 '씻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출 19:10, 14;삼하 19:24). 상징적으로 렘 2:22에서는 본문에서처럼 죄악을 씻어 없앤다는 뜻으로 쓰였다. 구약의 희생 제사와 정화 의식은 죄악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여기서 '죄'(*, 헤트)는 '빗나가다', '상실하다', '범죄하다'는 뜻의 '하타'(*)에서 유래한 말로 '범죄', '과오' 혹은 '형벌'을 뜻한다. 그리고 '깨끗이 제하소서'(*, 타헤르)는 나병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적으로도 정결하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된 동사이다(레 13:6, 13). 이것은 곧 다윗이 죄의 오염을 나병만큼이나 무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시51:3]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대저(*, 키) - '왜냐하면'의 뜻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절은 다윗이 1,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를 한 까닭을 설명해주는 부분인 셈이다. 즉,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죄의 간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본절과 같은 고백을 함으로써, 1, 2절과 같은 사죄의 간구가 진실되며 또한 간절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동사 '아오니'(*, 에다)가 본 문구의 주어가 1인칭 단수임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별도의 1인칭 단수인칭대명사 '나는'(*, 아니)을 덧붙이고 있다.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A.Cohen). 한편'아오니'의 기본형인 '야다'(*)는 단순한 지적(知的) 앎이 아닌 체험적 앎을 가리킨다(호 6:3주제 강해, '야다'의 개념). 결국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뼈에 사무칠 만큼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사이다.
성 경: [시51:4]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 문자 그대로 사람에게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범죄가 인간에 대한 것이기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는 의미이다(삼하 12:13). 이것은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의 통간(通姦)을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 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수 있다(창 39:9, Rawlinson). 이같이 이웃에 대한 범죄가 곧 하나님께 대한 범죄인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창 1:26;9:6)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래서 그 이웃에 대한 범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범죄인 것이다(Kidner, Keil, Kraus).
⭕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감찰되었다는 다윗의 고백이다. 이는 (1) 밧세바와의 통간 후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애쓰는 등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태도(삼하 11:6-15) (2) 우리아까지 죽이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영적 불감증의 태도(삼하 12:1-6)와 날카롭게 대조된다(Kidner).
⭕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신다고 해도, 그 정죄는 자신의 범죄에 기인한것이므로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롬 3:4). 여기서 '말씀하실'(*, 다바르)은, 본 문구가 다음 구와 쌍을 이루는 동의 대구법적 표현의 한부분이라는 점에서, 다음 문구의 '판단하실'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뜻임이 분명하다. 한편 '의로우시다 하고'(*, 차다크)는 '올바르다', '정결하다' 혹은 '의롭다'의 뜻으로서, 언행이나 생각에 있어서 전혀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143:2;욥 9:15). 결국 본문은 다윗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정죄받아 마땅함을 인정하는 고백적 표현이라 하겠다. 사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을 통한하나님의 정죄를 달게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의로우신 분으로 인정했었다(삼하 12:13).
⭕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 앞의 문구와 거의 비슷한 뜻이다. 여기서 '판단하실'(*, 솨파트)은 '재판하다', '판결하다' 혹은 '징벌하다'등의 뜻(레 19:15;삿 11:27;대하 20:12)을 갖는 법정적 용어로서. 특히 여기서는 죄가있음을 선고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순전하시다'(*, 자카)는 죄나 잘못이 없는 내면적 정결의 상태를 가리킨다(욥 15:14;잠 20:9;미 6:11).
성 경: [시51:5]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본절에서도 1-4절에서처럼 동의적 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같이 하여 다윗은 자신이 죄악된 본성의 소유자임을 강조한다. 한편 본절이 독신주의를 옹호하거나 결혼 생활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본절이 과연 원죄의 교리(a doctrine of original sin)를 명확히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단언을 내리기는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편 기자가 자신의 존재의 시작으로부터 인간의 죄성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자각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기자는 그러한 죄악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죄의 은총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A. A. Anderson).
성 경: [시51:6]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 이는 하나님께서 정결 의식을 통한 깨끗함(레 15:16-18)이나 율법 준수를 통한 외면적 경건(빌 3:6)뿐만 아니라, 마음과 생각의 내면적 깨끗함까지도 성도들에게 요구하신다는 뜻이다(Rawlinson). 여기서 '진실함'(*, 에메트)은 '기대다' 혹은 '양육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하나님께 대한 성실하고 충성된 마음 자세를 가리킨다(대하 31:20;느 7:2;렘 23:28). 그리고 '중심'(*, 투호트)은 '덮다'를 뜻하는 동사 '투아흐'(*)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원래는 '신장'(腎臟)을 의미한다. '신장'이 바로 이 같은 동사에서 유래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장기(臟器)의 윗 부분이 지방질로 덮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이 '신장'을 애정의 좌소(坐所)로 보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신장'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 '속에'(*, 베사툼)는 (1) '비밀하게'(Weiser) (2) '은밀한 곳에서'(Calvin, Rawlinson, Kraus, Keil)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여기의 '속에'는 앞 문구의 '중심에'와 대칭이 되므로 '중심에'와 거의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한편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는 하나의 기원문으로 보아야 한다. 다윗은 죄를 혐오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죄의 특별한 사악성을 깨달을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Weiser). 다윗은 그러한 깨달음은 개인적 묵상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신적인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알고 있었다(Kraus).
성 경: [시51:7]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본절부터 9절까지 다윗은 사죄의 기도를 하고 있다. 이 기도문 속에는 기자가 1,2절에서 사용했던 두 단어('도말하소서', '씻기시며')가 뒤바뀐 순서로 거듭 나타난다.
⭕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소 - 여기서 '우슬초'는 문등병에서 완쾌되어 부정(不淨)의 상태에서 벗어난 자가 자신의 몸에 짐승의 피를 뿌리는 데(레 14:4) 혹은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물을 찍어 뿌렸던 정결 의식과(민 19:18) 관련하여 사용했던 식물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다윗이 (1) 자신의 죄악이 매우 심각한 상태이며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요일 1:9)을 깨닫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 눈보다 희리이다 - 온전한 사죄의 은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사 1:18).
성 경: [시51:8]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 여기서 기자는 기쁨의 회복을 간구한다.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함으로써 생기는 희락을 가리키며(롬 5:1) 그것은 곧 구원의 기쁨을 뜻한다(9:14;13:5;35:9). 그러기에 이 기쁨의 출처는 하나님께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W. A. VanGemeren). '즐겁고 기쁜 소리'는 사죄가 됐다는 하나님의 선포와 그가 바라던 구원의 약속을 가리킨다(Weiser). 그 당시 다윗은 죄책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머지 극심한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 같은 '즐겁고 기쁜 소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었다(사 52:7;롬 10:15).
⭕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주께서 꺾으신 뼈'는 죄책으로 짓눌린 본 시편의 저자 다윗의 영혼을 가리킨다(Weiser). 이와 같은 비유적 표현은 자신의 영적 고통이 지대(至大)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뼈'는 구약 성경에서 인간 신체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으로, 그리고 사람에게서 가장 큰 통점(痛點)이 있는 부분으로시사되고 있기 때문이다(6:2;사 58:11;렘 23:9). 한편 '꺾으신'(*, 다카)은 '짓이김을 당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너뜨려진' 혹은 '죄를 깊이 뉘우치는'의 뜻을 지닌다.
성 경: [시51:9]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 1절의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와 거의 유사한 문구이다. 다윗은 이러한 문구로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사죄를 위한 기도를 마무리 짓게 되며, 이후로부터는 간구의 초점을 '구원'에다 맞춘다.
성 경: [시51:10]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여기서부터 12절까지 다윗은 다윗 자신이 새로운 삶을 사는 데(13절) 반드시 필요한 심령의 갱신을 간구하고 있다. 3-5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된 본성을 심도 깊게 통찰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통찰을 통해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간절히 회복을 간구하고 있다. 여기에 신앙인 다윗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kIDNER).
⭕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 여기서 '정한 마음'은 범죄의 욕구를 물리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성령에 의해서 변화된 심령을 가리킨다. 한편 '창조하시고'(*, 바라)는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를 산출해 내는 경우에 사용된 동사이다(창 1:1). 다윗은 바로 이 같은 동사를 과감히 사용함으로써,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6절) 삶을 사는데 있어서 자신의 타락한 옛성품은 전혀 무의미함을 강력히 시사하며 (2) 아울러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은혜로써만 가능함을 나타낸다(kIDNER).
⭕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여기서 '정직한 영'(*, 루아흐 나콘)에 대해서는 (1) 다윗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성령'이라는 견해(Cavin) (2) 다윗이 이미 갖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견해(박윤선) (3) 다윗이 지금까지의 변덕스러운 마음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새로 받게 될 '변함없는 마음'이라는 견해(Kraus) (4) 하나님의 은총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심령(마음)을 뜻한다는 견해(A. A. Anderson)등 그 해석이 다양하다. 그러나 첫째, 본절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두 대구(對句)로서 표현되었으며 둘째, 완전한 인격자이신 성령은 갱신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셋째, 본 문구의 '새롭게 하소서'(*, 하다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온전케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삼상 11:14;대하 24:4;사 61:4)는 점 등에서 볼 때, 위의 네 견해 중 (4)의 것이 가장 타당하다. 즉, 여기서 다윗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받은 자신의 '영'이지만, 더욱 새롭게 갱신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안에서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며(57:7;112:7) 또한 굳건해질(78:37) 수 있는 것이다(C. B. Moll).
성 경: [시51:11]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 '주 앞'은 문자적으로 '주의 면전(面前)에서'의 뜻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어 그분의 은총과 얼굴의 빛을 받지도 못하게 되는 일(창 4:14;왕하 13:23)이 없게끔 해달라는 간구이다(Rawlinson) 다윗은 이처럼 자신이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는 형벌만은 내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성신'(*, 루아흐 카도쉬)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사 63:10-14에서처럼 본문에서도 이 말은 여호와의 임재를 뜻하는 일반적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그 즉시 부어주셨던 성령으로 이해함이 더 자연스럽겠다(삼상 16:13). 하나님은 사무엘에 의하여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지명되게 하시고 그가 왕으로서의 내면적 자질을 지닐 수 있게끔 그에게 '성신'을 주셨다. 다윗은 바로 이 '성신'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의 심령을 변화(삼상 10:6-9)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겔 36:27) 더 깊은 영적 교제(엡 6:14)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성신'의 감동을 무시한 채 극악한 죄를 범하고 말았다. 다윗은 자신처럼 하나님의 '성신'을 받았던 사울왕이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그 '성신'을 빼앗기고(삼상16:14) 이에 따라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버림받은 삶을 살았던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 이처럼 '성신'이 떠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다윗에게 본 문구와 같은 간구는 지극히 당연하다. 한편, 계시의 조명이 상대적으로 희미했던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긴 죄사함과 영적 갱신의 확신을 갖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희생 제사등을 통해 나름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는 있었음에 분명하다(W. A. VanGemeren). 영적 갱신은 항상 경건과 신령한 지혜에 이르게 한다(신 5:29;30:6;사 59:21;렘 31:33, 34;겔 36:26, 27).
성 경: [시51:12]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본절의 간구는 11절의 간구보다 더 진전된 것 혹은 보다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사실상 11절의 간구가 응답됐을때만 이러한 간구가 가능하겠기 때문이다.
⭕ 구원의 즐거움을...회복시키고 - '구원의 즐거움'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교제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Calvin, Weiser) 심령의 기쁨이다. 바로 이것은 다윗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원동력이었다(Weiser). 한편 '회복시키고'(*, 하쉬바)의 원형인 '슈브'(*)는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행동을 가리킨다(창 18:33;룻 1:15;삼상 5:11). 따라서 본 단어는 다윗이 이전에 '구원의 즐거움'을 맛본 경험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Alexander).
⭕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 여기서 '자원하는'(*, 네디바)은 '재촉하다', '지원하다', '아낌없이 바치다'를 뜻하는 동사 '나다브'(*)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렘 24:7;31:33;32:39;겔 36:25-27).
성 경: [시51:13]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그러하면 - 엄밀히 말해서 원문에는 없는 말이지만 본절과 14절의 내용이 11, 12절의 간구가 응답됐을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삽입이라 하겠다.
⭕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라 - 이것은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의 감사 행위 그 이상이자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에게서 표출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행 4:20). 이처럼 새로운 삶이란 경건 그 자체를 즐기거나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개인적인 기쁨에 만족하는 이기적 태도가 아니다(Weiser). 오히려 자신처럼 하나님께 범죄하여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죄인들에게,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어야 한다(눅22:32). 여기서 '주의 도'(*, 데라케이카)는 문자적으로 '당신의 도'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25:4) 혹은 그러한 삶의 지침이 되는 교훈(25:8)을 가리킨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말한다(119:33).
⭕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 다윗이 이미 경험한 바 있는 이 같은 결과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돌아오리이다'(*, 야슈부)는 12절의 '회복시키시고'와 그 어근이 동일한 말이다. 이처럼 다윗은 동일한 어근의 두 동사를 나란히 사용함으로써, 먼저 사죄의 은총을 받은자는 필연적으로 다른 죄인으로 하여금 사죄의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행 9:21, 22).
성 경: [시51:14]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건지소서 - 다윗은 앞에서 사죄를 위한 간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하여 애원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것(요일 1:9)을 의심해서 이 같은 모습을 보인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너무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그로 인하여 고통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피 흘린 죄'(*, 다밈)는 문자적으로 '피들'이란 뜻이다. 바로 이와같은 문자적 의미 때문에 학자들은이 '피들'을 (1) 우리아 살해에 따른 복수자들의 다윗 자신에 대한 암살 의도(Hitzig, Weiser, JB, RSV 난하주) (2) 우리아 살해의 죄악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극악한 질병을 주어 그를 죽게하시려는 의도(Kraus) (3) 다윗의 우리아 살해의 죄악 자체(Kidner, Keil, Rawlinson, Calvin)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첫째, 본장의 주요한 분위기는 다윗이 자신의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간절히 몸부림치는 것이며 둘째, 본절의 '구원'과 동일한 어근의 단어가 영적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12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견해 중 (3)의 것이 타당하다(Kidner).
⭕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 '주의 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을 뜻한다(31:1;71:2;창 15:6). 만일 다윗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따라서 징벌을 면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의(義)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롬 3:22) 때문이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사죄의 은총을 받게되었으므로, 그러한 의를 자신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 경: [시51:15]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 '주'(*, 아도나이)는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런데 이 명칭은 그 기본적 의미가 '주'(主) 혹은 '주인'이며 백성에 대해서는 '군주'(삼상 25:19),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창 18:12), 노예에 대해서는 '주인'(출 21:5)을 가리킨다. 이처럼 이 단어에는 위엄과 지배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본 시편의 기자는 바로 이 같은 의미가 담긴 하나님의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적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Kraus, Weiser). 즉, 다윗은 본절에서와 같은 자신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으며,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께서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다만 바라고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는 (1)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찬송할 수 있도록 자신을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구(Rawlinson, Keil, Kidner) (2) 담대하게 찬송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새 마음(10절), 곧 성령의 감동을 허락해달라는 간구(Calvin, C. B. Moll, Kraus, Weiser)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둘 다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나 본장 전체가 참회를 그 주제로 삼고 있으며, 또한 본절의 앞뒤 구절 모두 죄 용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두견해 중 (1)의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듯하다.
성 경: [시51:16]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여기와 다음 절에서는, 언약 백성의 증표라고 할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요소였던 '제사'보다도 더 우선되는 것이 제사드리는 자의 마음 상태임을 선언하고 있다.
⭕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온전치 못하고 의식만을 중시하는 경향을 싫어하셨다는 뜻이다(삼상 15:22;사 1:11-17;렘 7:21-26;호 6:6;암 5:21-24;미 6:6-8). 희생 제사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배경하에서만 그 의의를 발휘할 수있다. 따라서 그 언약적 관계가 인간의 범죄로 인해 깨뜨려진다면 희생 제사나 다른 어떤 의식절차도 그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기자는 자신의 죄악이(살인과 간음) 그것을 속할만한 희생 제사에 관한 규례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임을 깨닫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럴 경우 유일한 방법은 회개밖에 없으며, 이 죄를 용서받는 길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만 달려 있다(A. A. Anderson).
성 경: [시51:17]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 여기서 '상한 심령'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1) 자신이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자임을 절감하며 통회하는 겸손한 마음이라는 견해(Calvin. C. B. Moll. Keil) (2)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은 가운데 과거의 죄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아픔을 간직하는 마음이라는 견해(Hengstenberg, Rawlinson) 등의 해석이 있다. 그러한 본 시편 전체가 사죄를 위한 간구에 해당되며. 특히 본절과 16절은 하나님께 범죄한 다윗이 아직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위의 두 견해 중 (1)의 견해가 타당하다.
성 경: [시51:18]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혹자(Kraus, Weiser)는 본절과 다음절의 내용이 급작스럽게 변화하고 있음을 중시하여 이 부분이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의 어떤 사람에 의하여 덧붙여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같이 무리한 것을 취하기보다는, 다윗이 참회기도 중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거기에 살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했었다고 봄이 더 나을 것이다.
⭕ 주의 은택으로 - '은택'(*, 라촌)은 '기뻐하다' 혹은 '친절하게 받아들이다' 등의 뜻이 있는 동사 '라차'(*)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은택으로'는 '기뻐하시는 뜻대로'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스 10:11;에 1:8;단 11:36).
⭕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 여기서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통및 우리아 살해 등 자신의 죄악의 결과 자신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징벌이 내려지지나 않을지를 염려하고 있다(삼하 12:10). 한편 '시온'은 예루살렘 동쪽의 구릉지대로서, 특히 시편에서 '예루살렘'과 동의어로 많이 사용된다(2:6;9:11;14:7;48:2;87:2;128:5 등).
⭕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포로 후기 시대의 느헤미야에 의한 성벽 재건 사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Kraus, Weiser).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결코 타당치 않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음으로써 다윗의 간절한 소원을 성취했기 때문이다(왕상 3:1). 아무튼 다윗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반드시 필요했던 성벽을 쌓고자 했던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서 좌절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다(Rawlinson).
성 경: [시51:19]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참회(懺悔)의 기도]
⭕ 그 때(*, 아즈) - 이것은 '그 결과로써' 혹은 '그리하여'의 뜻이다(출 15:15;왕상 9:11).
⭕ 주께서...온전한 변제를 기뻐하시리니 - 이것은 다윗이 사죄의 은총을 입은 다음부터는 자신과 백성들의 제사가 '온전해지도록'하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온전한'(*, 칼릴)은 '모두' 혹은 '전부'의 뜻으로서, 빠진 부분이나 결함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출 28:31;39:22;삿 20:40). 보다 구체적으로는 '제물은 물론 제사드리는 자의 마음도 함께 드려지는'이란 의미이다(16, 17절).
⭕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 '수소'는 본절의 '제사'와 '번제'가 구약 제사 형태의 대표적 표현이듯이(16절) 하나님께 드려지던 여러중류의 짐승 모두를 함축적으로 가리킴이 분명하다. 특히 '수소'는 주로 온 회중이 참여하는 귀한 제사의 제물로서 사용되었다(삼하 24:22-25;왕상 8:63;대상 29:21;대하 7:5;스 6:17).
성 경: [시52:1]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강포한 자여 - '강포한'(*, 기보르)은 기본적으로는 '용맹있는' 혹은 '능력있는'등의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무력이나 완력(腕力)을 남용하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창 6:4;10:8, Rawlinson . 여기서 '강포한 자'로 표현되고 있는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으로서(삼상 21:7)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삼상 22:6-19). 그러나 그는 그 권력을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키는 데 사용했었다.
⭕ 네가...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 여기서 '악한 계획'(*, 라아)은 다만 '죄악'의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도엑'이 교활한 혀를 놀려서 제사장들을 다윗의 협조자로 참소한 것(삼상 22:9, 10)과 그 제사장들을 죽인 것을 가리킨다(삼상 22:18). '스스로 자랑하는고'는 자신의 악한 행위를 마치 영웅적인 행위인양 떠벌리고 다닌 것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다윗과 관련한 참소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보고 잠잠했던 사울의 다른 신하들과는 전혀 달랐다(삼상 22:8).
⭕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받고 그들 로부터 해를 받는다고 해서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윗은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바로 이 같은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난관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한편 '인자'(*, 헤세드)에 대해서는 5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52:2]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 죽고 사는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할 만큼(잠 18:21) 혀의 역할이 중차대하며 또한 도엑의 '악한 계획'이 그의 '혀'로써 실행됐다는 점 때문에, 다윗은 도엑의 인격을 '혀'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골리앗의 칼'과 '진설병'을 다윗에게 준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사울에게 고소한 사실을 가리킨다. 도엑은 놉의 성막에 머무는 동안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베푸는 모습을 목격하면서(삼상 21:6-9) 바로 이 같은 마음을 품었을것이다.
⭕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 '날카로운 삭도'는 도엑의 혀가 끼칠 극심한 악영향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악한 말을 즐겨하는 자들에게 임할 극심한 고통을 상징하는 '날카로운 살'을 연상시킨다(120:4). 다시 말해서 다윗은 여기서 도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그리고 확실히 임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간사'(*, 레미야)는 '속이다' 혹은 '기만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도엑이 아히멜렉을 사울에게 고소했던 방법과 매우 잘 부합되는 표현이다. 즉, 도엑은 다윗과 아히멜렉을 극한의 위험에 빠뜨릴 사악한 목적에 따라 아히멜렉이 어떻게 해서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과 '진설병'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다만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그것들을 준 사실에 대해서만 말하였다.
성 경: [시52:3]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34:14)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나타내는 본문은 성도들이 그 연약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롬 7:20). 이것은 가장 극심하게 타락한 인간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모습이다(잠 1:22;미 3:2).
성 경: [시52:4]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잡아먹는 모든 말 - 이는 문자적으로 '삼키는 말'을 뜻하며 여기서는 도엑의 파괴적인 고발을 가리킨다. 원어상의 뜻으로 미루어 볼 때 시편 기자는 도엑의 고발 행위가 더러운 탐욕에 기인한 것임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A. A. Anderson).
성 경: [시52:5]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그런즉(*, 감) -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과 인과(因果)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잘 사용된다(창 20:5;신 12:30;욥 2:10).
⭕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 여기서 '취하여'(*, 하타)는 집게 또는 부삽으로 아궁이 속의 재나 쓰레기를 제거하는 행위(사 30:14)를 가리키는 동사이다. 따라서 이는 도엑이 재나 쓰레기처럼 '장막' 밖으로 치워지게 될 것(겔 26:4)을 시사한다(Kraus). 그리고 '뽑아내며'(*, 나사흐)는 '헐다', '파괴하다', '근절시키다'의 뜻(잠 15:25)이다. 한편 '장막'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성막'(78:60;겔 41:1)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Weiser). 그럴 경우 본 문구는 도엑이 구원받은 백성듈의 집합인 언약 공동체로부터 축출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장막'을 반드시 '성막'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그리고 본절의 내용이 뿌리채 뽑히는 악행자의 삶의 근거에 관한 것인 점으로 보아, 본문의 '장막'은 '거주지' 혹은 '안락한 가정' 등을 포함하는 말로 이해될 수 있겠다(A. A. Anderson).
⭕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 여기서 '생존하는 땅'은 악한 자들이 평안한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장소 혹은 저택(Calvin)을 가리킨다. 한편 '뿌리를 빼시리로다'(*, 솨라쉬)는 여기처럼 강조형(피엘)으로 사용될 경우, 존재 근거까지를 제거하는 파괴 행위를(렘 11:19) 주로 나타낸다(H. J. Austel). 이와는 정반대로 의인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무성해질 것이다(1:3).
성 경: [시52:6]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매 - '의인'이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를 목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더 깊어지게 됨을 의미한다(Rawlinson). 사실 '의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악인들의 번영으로 인하여 때로는 낙심하면서(73:1-3)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보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확인한 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심이 더욱 공고하게 되는 것이다(Calvin). 반면에 악인들은 영적인 눈이 감기워져 있으므로(고후 4:4)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만 우연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Calvin).
⭕ 또 저를 비웃어 - 여기서 '비웃어'(*, 사하크)라는 번역은, 마치 성도들이 악인들의 멸망 자체를 기뻐해야 된다는 암시를 주는 듯하다. 그러나 구약의 윤리도 원수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잠 24:17). 그러므로 여기의 '비웃어'를 '즐거워하며'로 번역하여(삼하 6:21;렘 30:19) '의인'들이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목도하고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있는 사실로 인해 기뻐할 것(욥 22:19)이라는 뜻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Keil).
성 경: [시52:7]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 이 같은 도엑의 모습은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반석과 산성(31:3;37:39)으로 삼았던 것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한편 여기서 '힘'(*, 마오즈)은 구약에서 '견고한 성'(삿 6:26), '산성'(28:8), '피난처'(나 3:11) 등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여 - 도엑은 이처럼 풍부한 재물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재물을 획득하기 위하여 사울에게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포함한 수많은 제사장들을 몰살시켰다. 틀림없이 도엑은 그러한 악행의 대가로 사울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았을 것이다(삼상 22:7).
⭕ 악으로 - 여기서 '악'(*, 하와)은 심각한 재앙을 초래케 하는 악한 행위 혹은 원인을 가리키며(욥 6:2;30:13;잠 19:13) 구체적으로는 '재물'을 의미한다.
성 경: [시52:8]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 '하나님의 집'은 신성한 곳, 곧 성전 지대를 가리키며(A. A. Anderson) '푸른 감람나무'는 황무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나므로 시련 중에서도 낙심치 않고 굳건히 서 있는 성도를 가리킨다는점 등에 근거해 볼 때, 본문은 그 당시 다윗의 영적 형편을 암시한다. 즉 그때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먹을 음식의 해결에 급급해야 하는 등(삼상 21:2, 3) 육신적으로 곤고했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집' 곧 성소에의 출입이 불가능하여 종교적인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었지만, (1) 하나님의 보호 아래 그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으며(삼상 16:13), (2)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부요했었다(계 2:9). 그러나 도엑은 외면적으로는 번성하는 듯했지만,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영육간에 비참한 종국(5절)을 맞이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명명히 의지하리로다 - 이것은 앞 문구의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Kraus). 한편 '인자하심'에 대해서는 5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52:9]
주제1: [강포한 자의 궁극]
주제2: [사악한 자의 운명]
⭕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 하나님께서 도엑 및 사울의 마수로부터 다윗을 보호하신 것을 가리킨다(삼상 23:13, 14, 24-29, Calvin). 그러나 또한 이 문구는, 미래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베푸실 모든 구원과 보호의 은총까지를 포함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로린슨(Rawlinson)은 이 문구의 시제(時制)를 '예언적 확실성의 과거'(54:7)라고 하였다.
⭕ 감사하고(*, 야다) - 이 동사에는 '인정하다' 혹은 '찬송하다'의 뜻도 담겨져 있다(왕상 8:33;대하 6:24;사 25:1;38:18).
⭕ 주의 성도 앞에서...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 여기서 '성도'(*, 하시드)는 '자비를 나타내다'의 뜻이 있는 동사 '하사드'(*, 18:25;삼하 22:26)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성경의 다른 문맥에서는 '거룩한 자' 혹은 '경건한 자'등으로 번역되었다(32:6;신 33:8;삼상 2:9). 이것은 구체적으로 (1)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성전(8절)에 모인 자들(Kraus), (2) 사울의 불의를 싫어하여 다윗 주변에 몰려들었던 자들(삼상 22:1, 2)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의지하리이다'라는 동사가 미래적인 사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뜻함을 볼 때, 그 당시 다윗은 여전히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로서 성전 출입이 불가능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위의 두 가지 정의 중 (2)의 것이 보다 타당한 듯하다. 한편 '의지하리이다'(*, 카와)는 '기다리다' 혹은 '앙망하다'의 뜻이다(40:1;사 33:2). 그런데 혹자는 본절 문맥상 '카와'라는 동사는 적절치 않다고 보고, '표시하다'의 뜻이 있는 '타와'(*, 겔 9:4)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Hupfeld) 또 '전파하다'는 뜻의 '하와'(*)로 대체하려고도 한다(Gunkel, Notscher). 그러나 다윗이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섭리를 굳건히 소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밝히 드러내는 일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히브리 원문대로 '기다리다'의 뜻이 있는 동사 '카와'를 그대로 놓아도 본절의 문맥과 모순되지 않는다.
성 경: [시53:1]
주제1: [어리석은 무신론자]
주제2: [무신론자의 우매함]
본 시편은 14편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1) 하나님의 호칭으로 '엘로힘'(*)과 '야웨'(*)가 14편에서는 각기 3회, 4회 사용된 반면, 본시에서는 '엘로힘'만 7회 사용되었다는 점, (2) 5절의 내용이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면 두 시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첫째, 시편 14편이 먼저 기록되었고, 본 시편은 훗날 어떤 미지(未知)의 인물이 14편을 고친 것이라는 설(Keil, Ewald, Hitzig, Rawlinson, Kidner), 둘째 오히려 14편은 본 시편을 고친 것이라는 설(Hengstenberg), 셋째, 다윗이 14편을 쓴 이후에 굳이 표현을 대체하려 하지 않고 반드시 필요한 어떤 부분만 약간 고쳐 내용을 보다 명확히 한 것이 바로 본 시편이라는 견해(Alexander) 등이 있다. 그러나 (1) 본 시편은 다윗에게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퍼부었던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삼상 25:9-11)을 염두에 두고 지은 시편이라는 점에서 볼 때, 본 시편은 다윗의 작품중 초기의 것임이 분명하며 (2) 본 시편의 전후에 있는 52편과 54편이 그 역사적 배경상으로도 각각 전후에 해당한다는 점, 그리고 (3) 다윗의 시편을 다른 사람이 고치는 따위의 일을 생각하기 힘들며, 설령 이처럼 유사한 작품으로 고쳤다고 하더라도 편집 과정에서 둘 다 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 및 (4) 14편과 본 시편의 제목에서 기자를 공히 다윗으로 명시한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세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여겨진다. 한편 본시편의 표제어 중 '마할라트'(*)는 '병들다', '슬퍼하다'라는 뜻인 '할라'(*)에서 유래한 말로 '고통' 혹은 '슬픔'의 뜻이다(출 15:16). 따라서 '마할랏에 맞춘 노래'라는 말은 '슬픈 운율에 맞춘 노래'의 뜻이 된다(Keil). 한편 본절에 대한 해석은 14: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53:2]
주제1: [어리석은 무신론자]
주제2: [무신론자의 우매함]
본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4: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53:3]
주제1: [어리석은 무신론자]
주제2: [무신론자의 우매함]
⭕ 각기 물러가 - 14:3의 '다 치우쳤으며'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물러가'(*, 수그)는 '뒤로 미끌어지다' 혹은 '떠나다'의 뜻으로서, 본래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Davidson).
성 경: [시53:4]
주제1: [어리석은 무신론자]
주제2: [무신론자의 우매함]
⭕ 무지하뇨 - 14:4의 '다 무지하뇨'와 약간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성 경: [시53:5]
주제1: [어리석은 무신론자]
주제2: [무신론자의 우매함]
⭕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 14:5, 6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 준다. 여기서는 14편에 비해 의미 강화를 위해 표현을 집중시키고 있다. 즉, 14편에서는 하나님의 보호에 관한 일반적 확신(14:5, 6)을 생략하는 대신, 여기서는 악행자의 파멸에 시적(詩的) 묘사를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Alexander). 여기서 '두려움이 없는 곳'은 현상적 혹은 외면적 조건으로 볼 때, 전혀 위험스러운 요소가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Calvin, Hengstenberg, C. B. Moll, Kidner). 즉, 사람의 눈으로는 전혀 위급하지 않게 비춰지는 시기 혹은 장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악인에게 창졸간의 패망이 닥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1)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던 블레셋 군대의 진영에 큰 혼란이 있었던 것(삼상 14:15). (2) 여호사밧 시대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동맹국의 군대들이 몰살을 당한 것(대하 20:22-24). (3)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가 몰살을 당한 것(사 37:36) 등이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대적하던 어리석은 자들을 전멸시키실 것을 가리킨다. 특히 여기의 '뼈를...흩으심'이란 말은, 시신(屍身)이 온전히 매장되지 못한 채 짐승과 맹금(猛禽)의 먹이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같은 최후는 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었다(렘 8:3;9:21;16:4;25:33).
⭕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 여기서 '버리신'(*, 마아스)은 '멸시하다' 혹은 '증오하다'의 뜻(레 26:43, 44)도 내포하는 바, 어떤 대상에 대해서 대단한 혐오감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민 11:20).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대적하는 자들의 멸망에 대해 아무런 안타까움도 갖지 않으심을 밝히 보여 준다(창 19:24-28).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인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보호의 섭리를 펼치려 하시는 것과 뚜렷이 대조된다(창 19:29).
성 경: [시53:6]
주제1: [어리석은 무신론자]
주제2: [무신론자의 우매함]
⭕ 시온에서 이슬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 14:7의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와 원문상 동일하다. 본 문구에 대한 해석은 14:7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54:1]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마음]
주제2: [구원을 확신하는 기도]
⭕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물론이고 고대 중근동 사람들에게 '이름'은 인격 혹은 그 인격에 포함된 총체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으로 여겨졌다(창 25:19-2를 주제 강해, '이름 짓기'참조). 따라서 '이름'은 문맥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능력'(Rawlinson), 특히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킨다(Weiser). 다윗은 십 사람들의 밀고에 따라 자신의 일행을 추격해오던 사울과 그 군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이와같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삼상 23:19-2를;2를:1).
⭕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 여기서 '판단하소서'(*, 딘)는 원래 '재판하다' 혹은 '다투다'의 뜻으로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올바로 가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문맥에서는 '변호하소서' 혹은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등으로 번역할수도 있겠다(창 30:6;렘 22:16;30:13).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던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그를 추격하고 있는 사울의 불의함을 인하여 그를 물리쳐 주시기를 탄원하고 있다.
성 경: [시54:2]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마음]
주제2: [구원을 확신하는 기도]
⭕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 39:12과 55:1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타나며, 본질적 의미상으로는 1절의 반복이다. 다윗은 이러한 의미상의 반복을 통하여 (1)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탄원이 반드시 받아들여 지기를 소원하며, (2) 자신이 대단히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간절히 알리고자 하였다.
성 경: [시54:3]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마음]
주제2: [구원을 확신하는 기도]
⭕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 '외인'(*, 자림)은 '곁길로 들다' 혹은 '관계가 없어지다'의 뜻을 지닌 동사 '주르'(*)에서 파생된 분사형 명사로서, 하나님의 백성과 본질상 어울릴 수 없는 이방인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할때 주로 사용된다(민 3:10;잠 2:16;5:3). 구체적으로는 (1) 다윗이 십 광야에 있음을 사울에게 알려준 십 사람들(삼상 23:19;26:1), (2) 사울과 그의 군대(삼상 26:2) 등으로 볼 수있다. 그러나 본 문구의 '일어나 나를 치며'와 다음 문구의 '수색하며' 등이 본절에서 군사적 용어로 사용된 점에서 볼 때, (2)의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일어나 나를 치며'(*, 카무 알라이)는 문자적으로 '나를 대하여 일어나다'의 뜻이다. 그중 '카무'는 군사적인 행동 혹은 그밖의 중요한 행동을 하기에 앞선 마음의 결단을 가리킬 때 사용되곤 한다(삼하 18:32;렘 49:14).
⭕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 '강포한 자'(*, 아리침)는 '위협하다'혹은 '학대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아라츠'(*)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것은 복수라는 점에서 앞의 '외인'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사울과 그의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울 개인의 포악한 성품을 잘 반영하는 것임도 사실이다(삼상 19:10;22:16,17). 한편 '수색하며'(*, 바카쉬)는 자신의 분명한 목적과 관련하여 무엇을 애써 찾아 해매는 것을 가리킨다(대하 15:15;렘 29:13). 이처럼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십 사람들로 하여금 십 광야를 찾아 헤매게 하였고(삼상 23:22,23), 또한 직접 삼천의 군사를 이끌고 그 지역을 정찰하기도 했다(삼상 23:15, 26;26:2,3).
⭕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 이는 다윗을 해하려고 애썼던 외인, 곧 강포한 자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며 특히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아니했었음을 뜻한다. 사실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자신에게서 떠난 후 악령에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삼상 16:14;18:10, 11). 반면에 다윗은 주를 자기 앞에 모시는 삶을 살아갔었다(16:8).
성 경: [시54:4]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마음]
주제2: [구원을 확신하는 기도]
⭕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 히브리 원문에는 '보라!' 혹은 '여기에'의 뜻이 있는부사 '히네'(*)가 있다.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혹자는 본 문구를 '보라 !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그분은 나의 돕는 자시라'라고 사역(私譯)하였다(Calvin, Weiser). 비록 이러한 사역이 약간 확대적이긴 하지만, 3절까지에 언급된 다윗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었다는 확신을 극명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도움을 주는 자의 입장에서 그의 곁에 계셨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편 '돕는 자'(*, 오제르)는 '구원하시는 자'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수 10:6).
⭕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 이 같은 번역은 하나님의 도움이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었던 것 같은 오해를 하게끔 한다. 따라서 본 문구는 (1)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드는 자 중의 한 분이시다(NIV, Kidner) (2)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드는 분이시다(Kraus, Weiser, Keil, C. B. Moll)로 번역됨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 중에서도, 본 문구의 '붙드는 자'(*, 소므케이)가 복수 분사라는 점에서, (1)의 것이 더 옳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2)와 같은 번역을 고집하는 것은, (1)의 번역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던 모든 자들로 하여금 계속 그를 보호하게끔 하셨으며 그에 관한 주도권을 지니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던 자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다윗의 주변에 모여들었던 '육백 명'(삼상 23:13)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윗의 보호자로 붙여주시지 않았다면, 쫓겨다니던 다윗을 계속적으로 추종하기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성 경: [시54:5]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마음]
주제2: [구원을 확신하는 기도]
⭕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 '갚으시리니'(*, 야슈브)는 원래의 위치대로 되돌려 놓는 행동을 가리키는 동사 '슈브'(*)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문자적으로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을 되돌아가게 하실 것이다'로 번역된다. 결국 본문은 원수들이 저지른 자신들의 악한 행위 그 이상으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확신의 표명(表明)이다(Calvin). 한편 여기서 '악'은 구체적으로 '죽음'(삼상 23:20)을 가리킨다.
⭕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 여기서 '성실'(*, 에메트)은 '확실성' 혹은 '불변성'을 뜻하는 단어이며(19:9;138:2), 이 문맥에서는 구체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킨다(Rawlinson). 그리고 '멸하소서'(*, 차마트)는 '사라지다' 혹은 '파괴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로서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끊는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69:4;애 3:53).
성 경: [시54:6]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마음]
주제2: [구원을 확신하는 기도]
⭕ 내가 낙헌제(樂獻祭)로 구께 제사하리이다 - '낙헌제'(*, 네다바)는 일반적인 감사 예물보다도 훨씬 더 자발적인 성격의 제물이었다(민 15:3;신 16:17;고후 8:10-12). 따라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악인을 멸하시고 자신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다윗의 확신이 드러나 있다. 즉 다윗은 비록 사울에 의해서 쫓기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섭리에 의해 결국 구원될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미리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다윗은 하나님의 성막에 나아가지 못하는,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낙헌제'는 실제적으로 사울이 죽은(삼상 31:4, 5) 후에야 드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다 -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여기서 다윗은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 곧 자신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며 또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주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인격' 혹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킨다.
⭕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 히브리 원문에는 본 문구가 앞 문구의 이유에 해당됨을 보여 주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다. 한편 '선하심이니이다'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보호의 섭리를 펼치실 것을 나타낸다.
성 경: [시54:7]
주제1: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마음]
주제2: [구원을 확신하는 기도]
본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심(6절)을 인정하며, 하나님에 의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던 근거이자 이유이다. 즉, 다윗은 여기서 과거의 체험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베푸실 구원의 역사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 여기의 '건지시고'(*, 히칠라니)는 완료형이므로, 본 문구는 다윗의 과거 경험을 나타냄이 분명하다. 여기의 '건지시고'라는 단어는 다윗의 경험 중 그가 골리앗을 이긴 일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삼상 17:37). 그리고 '환난'(*, 차라)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극한적 상황과 그러한 상황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심신의 고통을 아울러 가리킨다(20:1;잠 1:27;사 30:6;렘 50:43).
⭕ 내 원수가...목도케 하셨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나의 눈이 나의 원수를 구경하였다'의 뜻이다. 따라서 '보응받는 것을'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는 부분으로서, 본 문구의 뜻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삽입이다. 한편 유력한 영역본들은 한글 개역 성경과는 달리 '승히 가운데서'(in triumph)라는 말을 삽입하고 있다(NIV, Weiser). 반면에 크라우스(Kraus)는 본 문구를, 어떤 삽입없이 '나의 눈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로 번역하였다.
성 경: [시55:1]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 이는, 다윗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음을 반영한다. 다윗은 십 사람들의 밀고로 사울에게 쫓기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바로 이 같은 탄식어린 기도를 하였었다(54:2).
⭕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 '내가 간구할 때에'는 문자적으로 '나의 간구를 '이다. 그리고 '숨지'(*, 티트알람)는 '숨다' 혹은 '가리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알람'의 재귀적 사역형(히트파엘)이다. 따라서 여기의 '숨지'는 '스스로 무시하다'로 번역하여 행위 주체의 무관심을 강조함이 타당하다(신 22:1, 3, 4, NIV). 아무튼 본문과 같은 기도는, 기도하는 자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13:1;27:8; 69:17;89:46)
성 경: [시55:2]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 여기서 '편치 못하여'(*, 아리드)는 '슬퍼하다', 방황하다'를 뜻하는 동사 '루드'(*)의 사역형(히필)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방황하게 하였다'의 뜻이 된다. 한편'근심'(*, 시아흐)은 '슬퍼하다' 혹은 '묵상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시하'(*)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억울한 일 등으로 인하여 깊은 시름에 잠기는 것 혹은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는 것(142:2;욥 9:27;잠 23:29)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문은 온갖 염려를 하는 등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Keil).
성 경: [시55:3]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 '원수'는 자신이 특별히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을 위시하여 천재적인 모사 아히도벨(삼하 15:12)과 그들의 군대를 가리킨다. 한편 '소리'는 위의 두 사람이 군대를 모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청적(可聽的)인 소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Calvin). 또한 '악인'은 근본적으로 앞의 '원수'와 동일하며, '압제'(*, 아카트)는 구약 성경 중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로서 '붙들다' 혹은 '억류하다"를 뜻하는 어근 '아카'(*)를 갖지만 이 어근은 구약 성경 중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 단어는 앞의 '소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 '핍박하나이다'(*, 사탐)는 원래 '미워하다' 혹은 '대항하다'의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무력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행동까지를 뜻한다(창 49:23;욥 30:21). 한편 '노'(*, 아프)는 원래 '콧바람을 내뿜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아나프'(*)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성 경: [시55:4]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 '마음'이 인간의 내면을 지칭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속'이라는 내면 개념을 또다시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극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과 중신(重臣)이었던 아히도벨이 자신을 왕에서 제거할 음모 꾸민다는 사실로 인하여 바로 이 같은 내면적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심히 아파하며'(*, 훌)는 원래 '꼬다' 또는 '빙빙 돌리다'는 뜻이며, 여기서 '춤추다', '근심하다', '고통하다'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특히 여기에서처럼 '고통하다'의 뜻으로 쓰일 경우에는, 마치 해산하는 산모가 당하는 진통과 같이 내장이 뒤틀리는 듯 심히 괴로운 상태를 가리킨다(Keil, C. B. Moll).
⭕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 압살롬은 다윗의 왕위를 찬탈할 음모를 약 4년 동안 주도 면밀하게 꾸며 나갔다. 그는 자신의 뜻이 능히 성사될 것으로 믿고 음모를 공공연하게 진행시켜 나갔다(삼하 15:1-6). 따라서 다윗은, 모반자들이 자신들의 목숨 보존을 위해서라도 그 음모를 기필코 행동으로 옮기고만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Rawlinson). 한편 '위험'(*, 에이마)은 '두려움' 혹은 '놀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창 15:12;출 15:16)
성 경: [시55:5]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 '두려움'(*, 이르아)과 '떨림'(*, 라아드)은 모두 공포에 사로잡힌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두려움'은 공포에 사로잡힌 마음의 내면성을 말하고, '떨림'은 그것의 외적 현상을 강조한다. 한편 '이르고'(*, 보)는 '오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졌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타인의 고유한 영역에 침범해 들어오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한다(왕하 11:8;잠 6:29). 영역본 NIV는 본 문맥의 의미를 보다 생생하게 하기 위해서 본 동사를'포위하다'(beset)로 번역하였다.
⭕ 황공(煌恐)함이 나를 덮었도다 - '황공함'(*, 팔라추트)은 '진동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 '팔라츠'(*)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사지가 덜덜 떨릴 정도의 심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나타내는 말이다. 욥 21:6;겔 7:18). 한편 '덮었도다'(*, 카사)는 NIV의 번역처럼 '압도하였다'(overwhelm)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시55:6]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내가...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 '내가...날개가 있으면'은 문자적으로 '누가 나에게...날개를 줄 것인가?'의 뜻이다. 결국 이는 그 당시에 다윗이 어떤 방법으로도 모반의 위험, 즉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화급(火急)한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Calvin). 그는 이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애처러운 신세를 한탄할 뿐만 아니라 오직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피신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비둘기는 팔레스틴에 많이 서식하던 새이다. 다윗이 많은 새 중에서 하필 비둘기가 되고 싶다고 한 까닭은, 그가 자신을 '압살롬'이라는 '매'(hawk)에 쫓기는 신세로 여기고 있었던 때문이었다(Calvin). 뿐만 아니라 비둘기가 멀리 날아갈 수 있고, 사람들에 의해서 쉽사리 잡히지도 않는다는 점 또한 이러한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성 경: [시55:7]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광야에 거하리로다. - '광야'는 핍박을 받는 자들이 핍박을 숨는 곳으로서 흔히 이용되었다(삼상 24:1;렘 9:2). 구체적으로는 '유다 광야'를 가린킨다. '거하리로다'(*, 룬)는 '숙박하다' 혹은 '머무르다'의 뜻으로서, 단기적으로 외지에서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삿 19:13;룻 3:13; 사 21:13).
성 경: [시55:8]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본절은 비둘기가 폭풍우를 피하여 바위 밑의 둥지로 안전하게 숨는 광경을 연상시킨다(Rawlinson).
⭕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 '폭풍'(*, 루아흐 소아)이라는 말 중에서, '루아흐'는 '바람' 혹은 '영'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바람'으로 보아야 하고, '소아'는 '달리다' 혹은 '돌진하다'를 뜻하는 동사 '사아'(*)에서 파생된 형용사적 분사이다. 따라서 여기의 '폭풍'은 그 진행 속도가 대단히 빠른 바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광풍'(*, 사아르)은 '격분하다' 혹은 '격렬해지다'를 뜻하는 동사 '사아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구체적으로 '회오리 바람'을 가리킨다(램 23:19;30:23). 중근동 지방에서는 이 같은 바람들이 빈번히 발생하여, 그 강력한 파괴력 때문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필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압살롬의 모반을 염려하던 다윗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피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성 경: [시55:9]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 이는 압살롬 일당의 음모가 결코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지 않았음을 암시해 준다(Calvin). '강포'(*, 하마스)는 '학대하다', '해를 끼치다' 등을 뜻하는 동사 '하마스'(*)에서 나온 명사로서, '포악 행위', '부정' 등을 가리킨다(출 23:1;욥 15:35). 그리고 '보았사오니'(*, 라아)는 곰곰히 생각하면서 세심하게 주시하는 행위를 뜻한다(왕하 7:13;렘 23:18).
⭕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 '저희를'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그러나 문맥의 의미를 정확히 밝힐 필요성과 관련해서 볼 때, 적절한 삽입이라 하겠다. 여기의 '저희'는 다윗에 대한 모반을 꾀하던 압살롬 일당을 가리킨다(Keil). 한편 '멸하소서'(*, 발라)는 '삼키다'의 뜻(민 16:30;사 28:4)으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상황에 대한 독특한 표현 양식이다(21:9).
⭕ 저희 혀를 나누소서 - 여기서 '나누소서'(*, 팔라그)는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던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됐던 '발랄'(*)과 동의어이다. 특히 다윗은 독자로 하여금 본절에서 그같이 언어가 혼잡케 된 사건을 회상시키기 위하여 앞에서 '발랄'과 비슷한 '발라'라는 동사를 사용한 것 같다(Keil). 그렇다면 다윗은,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모반 계획이, 마치 바벨탑을 쌓던 인류의 계획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무산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다윗의 이러한 기도는 응답되었다. 즉, 모사 아히도벨의 계략이 압살롬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결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압살롬은 다윗의 군대에 의해서 패퇴되고 만 것이다(삼하 15:31;17:1-14).
성 경: [시55:10]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 '두루 다니니'(*, 사바브)는 파수꾼들이 행순(行巡)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왕하 9:18;아 3:3;5:7). 따라서 본 문구는, 압살롬 일당이 파수꾼처럼 성벽 위를 돌면서 간첩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Cheyne, Keil). 결국 다윗은, 왕권(王權)과 국권(國權)을 지킬 목적으로 건축된 성벽을 압살롬 일당이 오히려 그 반대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의 사악성과 부도덕성을 생생하게 고발하려고 한다(Calvin).
⭕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殘害)함이 있으며 - '성중에는'(*, 베키르바)은 문자적으로 '그녀의 안에는'이다. 그런데 여기의 '그녀'에 대한 해석이 (1) 아버지 다윗에 대한 모반을 꾀하던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마음(Calvin, Moll), (2)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성(城)(Rawlinson, keil)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2) 견해가 보다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구의 내용은 압살롬과 같이 불의하게 왕권을 탈취하려던 자들이 성내를 누비고 다님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결과임이 분명하다(Rawlinson). 한편 '잔해함'의 '아말'(*)은 기본적으로 '노동', '수고'를 뜻하며(전 1:3), 사 53:11에서처럼 '고난', '역경'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단어가 '다른 이에게 가해진다'는 문맥에서 사용되면 주로 '재난', '곤경'을 뜻하게 된다(A. A. Anderson).
성 경: [시55:11]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압박과 궤사(詭詐)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 '압박'(*, 토크)은 '끊다'를 뜻하는 아랍어 기원의 동사 '타카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난폭스런 무법 행위를 가리킨다(72:14). 그리고 '궤사'(*, 미르마)는 '속이다' 혹은 '현혹시키다'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타인에게 교묘히 사기를 치는 행위를 가리킨다(창 27:35;호 12:7). 특히 앞의 히브리어 '토크'에도 '기만'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어휘 구사력을 돋보이게 한다. 한편 '거리'(*, 레호바)는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성문 근처의 '광장'을 가리켰다(대하 32:6;스 10:9;에 4:6). 이곳은 시장에(市場)이나 심지어는 법정(法廷)으로도 사용되었다(C. B. Moll). 그런 점에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야 할 곳에 도리어 불의가 판쳤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성 경: [시55:12]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여기서 다윗은, 모반을 꾀한 자가 자신에게 매우 신임 받던 인물이었음으로 인하여더 큰 괴로움을 느껴고 있다(41:9). 다윗은 자신을 해하려는 자가 차라리 그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었다면 그토록 큰 심적(心的) 고통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 책망한(*, 하라프) - '비방하다' 혹은 '훼방하다'의 뜻으로서 상대에 대한 험담 등을 함으로써 그 인격을 깎아내리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7:25;왕하 19:4;느 6:13). 아히도벨과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들에게 향하도록 할 목적으로, 이같은 행각을 벌였을 것이다(삼하15:6, 12, 13).
⭕ 원수가 아니다 - 압살롬이 다윗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압살롬을 도와 모반을 꾀했던 '아히도벨'은, 다윗에게는 훌륭한 조언자였고(삼하 15:12), 한때 그의 말은 거의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삼하 16:23).
⭕ 원수일진대 - 본 문맥의 의미를 잘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일 뿐, 히브리 본문에는 없다.
⭕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 이것은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다윗을 비방함으로써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별도로 자신을 다윗보다 더 나은 자로 인식시키기 위해, 자신들을 공의로운 자로 가장하기도 하였다(삼하 15:2-4).
⭕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 이것은, 모반의 주동자들이 원수였다면 소식을 들은 즉시 도망쳤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윗은 아히도벨이 자신과 너무나도 각별한 사이였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피신을 늦추었다. 다윗은 비록 아히도벨과 압살롬의 반역 음모에 대해서 진작 들었지만, 이같이 자신의 도망을 늦춤으로써 별다른 준비도 못한 채 궁궐을 떠나야만 했다(삼하 15:13)
성 경: [시55:13]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 문자적으로 '너는 나와 같은 반열에 서 있는 자라'로 번역된다. 한편 '동류'의 히브리어 '에레크'(*)는 '가치', '평가', '순서' 등의 뜻으로 쓰인다. 결국 본문은 이전에 다윗이 아히도벨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암시해 준다.
⭕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 여기서 '동무'(*, 알루프)는 '배우다' 혹은 '가르치다'를 뜻하는 동사 '알라프'(*)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다른 사람과 동행하여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Jack Scott). 한편 '가까운 친우' (*, 미이다)는 '동침하다' 혹은 '알다'를 뜻하는 동사 '야다'(*)의 강조적 수동형 분사이다. 이 단어의 어근이 갖는 뜻에서 볼 수있듯이, 상대를 피차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절친한 친구를 뜻한다.
성 경: [시55:14]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 본 문구의 초두에는 우리 말 성경에서 제대로 번역되기 곤란한 관계 대명사 '아쉐르'(*)가 있다. 이것은 곧 본 문구가 앞구절의 '동류'와' 동무' 그리고 '가까운 친우'를 수식하는 절(節)임을 뜻한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함께 달콤한 교제를 나누었던'의 뜻이다. 여기서 '교제'(*, 소드) 는 '의논하기 위하여 함께 앉다' 혹은 '함께 의논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야사드'(*)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어떤 중요한 일을 논의 결정하기 위한 비밀스런 회합을 가리킨다(64:2;잠 20:19:렘 23:22).
⭕ 무리와 함께 하여 - 여기서 '무리'는 '분노하다' 혹은 '소음을 내다'의 뜻을 갖는 동사 '라가쉬'(*)에서 나온 명사로서, '대규모의 군중'을 뜻한다(Davidson). 다윗은 아히도벨을 절기나 기타 국가적인 대규모 행사 때에 항상 대동(帶同)하였음을 암시한다.
⭕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가 개인적이며 은밀한 접촉이었다면, 본 문구는 공개적인 접촉 혹은 친교를 가리킨다(C. B. Moll).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도 아히도벨을 동행시킬 만큼 그와 가까웠음을 시사한다(42:4).
성 경: [시55:15]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배신당한 자의 탄식]
9절에서는 아히도벨의 계략이 무력하게 되기를 간구했으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나아가 그가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다. 간구 뒤에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덧붙이는 것은 9절이나(10,11절) 본절이 동일하다.
⭕ 사망이...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 이것은 아히도벨뿐만 아니라 그와 힘을 합하여 다윗을 대적했던 모든 자들에 대한 저주이다. 여기서 다윗은, 초자연적인 징벌로 말미암아 땅속으로 빠져 들어가 파묻혀버렸던 고라 일당의 사건(민 16:30-35)을 염두에 두고, 바로 이 같은 저주를 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 '음부'에 관해서는 삼상 2:1 -10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 홀연히 -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없는 말이나, 문맥적 의미를 생생히 표현하기 위한 삽입이다. 영역성경 NIV는 '불시에'(by surprise)라는 말을 삽입하였다.
성 경: [시55:16]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구원의 확신]
압살롬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지려는 순간에 처해졌지만, 다윗은 기도를 계속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한다(Calvin).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만 의지했던 모반자들의 자세와 현저하게 대조된다. 시인은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간구에 있음을 확신했다(A. A. Anderson).
⭕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 기도 응답의 확신이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명칭인 '여호와'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강조한다(Alexander).
성 경: [시55:17]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구원의 확신]
⭕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 '저녁과 아침과 정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던 세 번의시간을 의미한다(단 6:10;행 3:1). '탄식하리니'(*, 시아흐)는 원래 '전하다' 혹은 '말하다'의 뜻으로서 상대에게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상세히 알리는 것을 가리킨다(69:12;삿 5:10;대상 16:9). 그리고 '근심하여'(*, 하마)는 '큰소리로 말하다' 혹은 '한탄하다'의 뜻으로서, 대개 불안한 심리 상태를 억제치 못해 크게 소리내어 부르짖는 행위를 가리킨다(59:6;77:3;겔 7:16).
성 경: [시55:18]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구원의 확신]
⭕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 '나를 치는 전쟁'은 문자적으로 '나에 대한 전쟁'으로, 압살롬과 그 모사 아히도벨에 의해 주도된 모반을 가리킨다(삼하 16:15). 한편 '구속하사'(*, 파다)는 완료 시제이다. 이처럼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기는 신세(삼하 16:14-18)이지만, 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확실함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파다'라는 동사는 '되사다' 혹은 '되찾다'의 뜻으로서, 이미 팔려간 사람이나 물건을 어떤 대가의 지불을 통하여 다시 찾아오는 것을 가리킨다(레 27:27; 렘 31:11). 특히 이 동사는,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인간의 능력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구출해내시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기도 한다(삼하 4:9;느 1:10).
성 경: [시55:19]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구원의 확신]
⭕ 태고(太古)부터 계신(*, 야쉐브 케뎀) - 이는 '영원토록 앉아계신'의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항상 공의로운 심판자되시는 분임을 가리킨다(74:12;신 33:27;합 1:12, Keil). 몇몇 학자들은 본문을 '동편에 거하시는 분'(the inhabitant of the East)이라 번역하지만(Gunkel, Kraus),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본절에서 시인은 소망의 근거를 신앙 고백적인 진술로써 표현하고 있다. 위대한 심판주로서 영원토록 좌정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괴롭히거나 당신을 경의하지 않는 자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실 것이다(W. A. VanGemeren).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72:14).
성 경: [시55:20,21]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구원의 확신]
여호와의 신실하심과는 대조적으로, 반역자들은 절친한 친구를 배신하고 그 뒤통수를 치는 계교를 꾸몄다. 한편 여기서 '언약'이란 직접적으로는 다윗과 아히도벨 간에 맺은 굳은 약속이나 맹세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의 배후에 하나님이 증인으로 계셨다는 점에서 그 배반은 곧 하나님께 대한 거역의 의미를 내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A. A. Anderson).
⭕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 아히도벨이 평소에 유순한 말(Calvin) 혹은 아첨하는 말(Keil)을 많이 했었음을 가리킨다. 여기의 '우유 기름'은 '버터'를 뜻한다.
⭕ 그 마음은 전쟁이요 - 겉과는 달리 속에서는 살의(殺意)를 품고 있었음을 말한다.
⭕ 뽑힌 칼 - 사람을 즉각적으로 죽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아히도벨의 내면적 잔악성을 여실히 폭로해 주는 말이다.
성 경: [시55:22]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구원의 확신]
여기서 다윗는 자신을 2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역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결론을 피력하고 있다(W. a. Vangemeren).
⭕ 네 짐(*, 예하브카) - 이는 '주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하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너의 몫'(Rawlinson). 혹은 '네게 주어진 것'(Hupfeld)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짓누르던 '염려' 혹은 '근심'을 가리킨다(Calvin, C. B. Moll, NIV).
⭕ 너를 붙드시고 - 여기서 '붙드시고'(*, 쿨)는 원래 '기르다' 혹은 '먹을 것을 주다'의 뜻(창 47:12;50:21)으로서, 주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성 경: [시55:23]
주제1: [배신당한 자의 기도]
주제2: [구원의 확신]
⭕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 '파멸'(*, 솨하트)은 '부패' 혹은 '멸망'(렘 13:9)의 뜻이며, '파멸의 웅덩이'는 사람의 시체가 부패하는 '무덤'을 뜻한다(Rawlinson, Calvin).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 속이는 자들 - 아히도벨이 다윗에게 겉으로는 유화적(宥和的)이었으면서도 속으로는 살의를 품고 모반 음모를 꾸몄던 사실(21절)과 관계 있다.
⭕ 저희 날이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 이것은 아히도벨 일당이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할 것을 가리킨다. 사실 아히도벨은 자살하였으며(삼하 17 23), 압살롬은 요압의 손에 의해서 살해되었다(삼하 18:14, 15).
⭕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 히브리 원문에만 있는 본 문구 초두의 '웨'(*)는 '그러나'로 번역된다(Weiser, NIV). 여기서 다윗이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악인들에게는 공의의 심판을 내려주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다(Calvin).
성 경: [시56:1]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블레셋 가드 왕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는 다윗의 간구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황망 중에 블레셋 땅으로 피했으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등 자신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던 사실을 아는 아기스 왕의 신하들의 고발로 인하여(삼상 21:11), 감금될 지경에 이르렀었다.
⭕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 히브리 원문에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다. 이것은 본 문구 이하가 다윗이 앞에서 부르짖었던 이유에 해당됨을 말해 준다. 그리고 '삼키려고'(*, 솨아프)는 원래 '헐떡거리다'의 뜻으로서, 먹이를 찾아 덮치는 맹수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동사이다(119:131;렘 14:6). 따라서 본 문구는 다윗을 죽이려는 적극적 살의(殺意)를 뜻함이 분명하다. 한편 '사람'(*, 에노쉬)은 인간의 연약성을 하나님의 전능성과 대조시켜 부각시킬 때 자주 사용된 단어이다(9:19;103:15;욥 4:17;7:17). 어쨌든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다만 '사람'이라고. 함으로써, (1)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연합하여 자신을 대적하고 있으며, (2) 자신에 대한 구원의 손길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뻗쳐져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Calvin).
성 경: [시56:2]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 나의 원수 - '원수'(*, 쇼르르)는 '비틀다' 혹은 '함께 짓누르다'를 뜻하는(Gesenius) 동사 '솨라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대적하는 자'의 의미이다. 구체적으로는 (1) 다윗을 감금해 놓은 블레셋 사람, (2) 다윗으로 하여금 부득불 블레셋 땅으로 도주하게끔 만든 사울(삼상 26:19)을 아울러 가리킬 것이다(Calvin).
⭕ 교만히(*, 마롬) - 이것의 원래적 의미는 '높이'이다. 이에 근거하여 영역 성경 KJV는 이를 '오 지고하신 분이여'(O thou most High)라고 번역하여, 이 말을 하나님께 대한 지칭으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Jerusalem Bible은 이를 3절과 연결시키면서 '나를 높이 드소서'(Raise me up)라는 명령형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특성상 명사가 부사적 의미로 사용될수 있다는 점에서 개역 성경의 번역이 더 자연스럽다 하겠다(Kidner).
성 경: [시56:3,4]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위해(危害)하려는 많은 원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인해서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임을 결심하고 있으며, 이러한 결심은 10, 11절에서도 다시 반복된다(118:6;히 13:6). 시인은 시련이 닥쳐올수록 더욱더 여호와를 의뢰하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이는 곧 고난과 환난을 가장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가는 자세이다. 시인은 하나님과 사람간의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구분을 알고 있었다. 즉, 사람은 불원간(不遠間)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인 반면(38:3;78:39;창 6:3;사 40:6, 7), 주는 전능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인 것이다(W. A. VanGemeren).
⭕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겠다는 언약의 말씀(Calvin), 혹은 본 시편 기자가 곧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볼 수 있다(A. A. Anderson).
⭕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백성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인생들에 의해 결코 해함을 받지 않음을 가리키는 반문(反問)이다(118:6). 이는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과 육을 아울러 죽이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는 주님의 말씀과 상통한다.
성 경: [시56:5]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 '내 말'은 다윗이 블레셋에 대해서 해칠 뜻이 전혀 없었음을 고백하는 변명이다(Calvin). 반면에 혹자는 다윗의 원수가 사울이라고 생각하여, '내 말'이 사울에 대한 다윗의 충성을 다짐하는 고백을 뜻한다고 본다(Keil). 그러나 본 시편의 직접적 배경을 고려할 때 칼빈(Calvin)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 같다. 그러므로 본 문구는, 블레셋의 신하들이 아기스 왕에 대한 다윗의 자기 변호를 제멋대로 나쁜 의미로 해석하며 그릇된 추측을 한 것을 뜻한다.
성 경: [시56:6]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 '엿보던'(*, 카와)은 '바라다' 혹은 '앙망하다'의 뜻으로서, 줄기차게 어떤 일 혹은 어떤 대상을 기대하거나 노리는 것을 가리킨다(욥 6:19;사 8:17, Keil). 한편 '...과 같이'(*, 카아쉐르)는 '...하였으므로'로 이해할 수 있다(삼상 28:18). 따라서 본 문구는 '저희가 내 생명을 노렸으므로'로, 이해하기 쉽게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Kraus).
⭕ 또 모여 숨어 내 종적(踪跡)을 살피나이다 - '모여'(*, 구르)는 원래 '길옆으로 벗어나다', '거주하다' 혹은 '움츠리다'의 뜻으로서 이 문맥에서는 '잠복하다'로 이해할수 있다(Weiser). 그리고 '숨어'(*, 차판)는 '가리다' 혹은 '은폐하다'의 뜻이며, 본질적으로 앞의 '모여'와 거의 같은 뜻을 나타낸다. 이 같은 동의어의 반븍을 통하여 다윗은, 자신을 해하려는 원수들의 준동(蠢動)이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살피나이다'는 다윗에 대해 가드 왕에게 참소할 구실을 찾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56:7]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 이것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필연적임을 말한다(55:23). 즉, 죄악을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보응을 받은 후에야 다윗에 대한 감시의 눈을 거둘 것이라는 뜻이다.
⭕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 '뭇 백성'(*, 아밈)은 다만 '백성들'의 뜻으로서, 블레셋 족속을 가리킨다. 그리고 '낮추소서'는 다윗을 대적하던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이 자신들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다윗을 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등 기고만장(氣高萬丈)했던 것과 관계가 있다(Calvin).
성 경: [시56:8]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 유리함(*, 노드) - '도망하다' 혹은 '애통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누드'(*)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부득불한 사정에 의한 도피 생활을 가리킨다. 영역본 NIV는 이 명사를 '애통'(lament)로 번역하였다.
⭕ 계수하셨으니(*, 사파르) -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죄도 없는 다윗이 얼마나 많은 도피의 걸음을 걸었는지를 세셨음을 가리킨다(욥 31:4;마 10:30). 따라서 이 동사는, 하나님께서 머지않아 다윗을 '유리함'의 생황에서 건져내실 것이라는 뜻을 암시한다.
⭕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 다윗의 '눈물'은 자신의 고통스런 유랑 생활을 지나쳐 버리시지 말라는 뜻의 호소이자(Rawlinson), 고통을 기억하사 공의로운 보응을 내려주십사하는 간구이다. '병'(*, 노드)은 가죽으로 만든 용기(容器) 혹은 가죽 부대를 가리킨다(C. B. Moll). 이처럼 상징적인 은유를 통해, 시인은 하나님이 각 개인의 처지를 일일이 감찰하시며 또 조만간에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A. A. Anderson).
⭕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 '주의 책'은 인간의 언행 심사를 낱낱이 기록한 책으로서 하나님의 상벌의 근거가 된다(말 3:16). 따라서 본 문구는, 다윗에 대한 구원의 섭리와 악인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시56:9]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 내가 아뢰는 날 - '아뢰는'(*, 카라)은 '부르다' 혹은 '부르짖다'의 뜻이다. 그래서 영역본 NIV는 이 문구를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때'(When I call for help)로 번역하였다.
⭕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줄 아나이다 - 만일 '원수'가 자신을 쫓던 데서 물러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인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믿음이 적은 자나 불신자들은 그같은 경우에, 그것을 자신의 능력 혹은 우연 때문으로 돌릴 것이다.
성 경: [시56:10,11]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본 두 절의 내용은 4절에 대한 시적 반복이며(Goldingay). 본절 자체 내에서도 상, 하반절이 반복구 형태를 띤다. 이러한 반복은 시인이 도달한 결론의 의미를 한층 강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편 11절은 4절 후반부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혈육 있는 사람'(*, 바사르)이 '사람'(*, 아담)으로 대체된 점만 다르다. 그러나 '육체', '살' 등으로 번역될수 있는 '바사르'는 썩어 없어지는 몸을 주로 지칭하며, '아담'이라는 단어는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인생의 연약성을 강조한다는 점(8:4;89:47;144:4;창 2:7;전 3:19;사 51:12)에서, 사실상 두 단어는 동의어로 볼 수 있다.
성 경: [시56:12]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주께 드리리니 - 다윗은 9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피력한바 있었다. 이 같은 확신과 아울러 그는 하나님께 기꺼이 감사제를 드리겠노라고 서원했던 것 같다. 본시는 탄식이나 간구 대신 승리에의 확신과 감사로써 끝나고 있다. 기자가 구원을 기대하면서 감사제를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한 것은(50:14;107:22;116:17) 구원에 대한 보답이라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주께 대한 온전한 헌신의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W.A. Van Gemeren).
성 경: [시56:13]
주제1: [어둠 속에서도 비취는 주의 빛]
주제2: [압제받는 자의 기도]
히브리어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다. 따라서 본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갚으려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 '건지셨음이라'(*, 히찰레타)는 '구원하다'를 뜻하는 '나찰'(*)의 환료형으로서 과거 시제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이 본 시편을 기록했을 당시에 그는 여전히 원수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같이 완료형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에 의한 자신의 구원이 완료되기나 한 것처럼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 '하나님 앞'은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성전(聖殿)을 가리킨다. 본 시편을 기록할 당시,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감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거기서 죽임을 당할 위협에 처해 있기까지 했다. 한편 '생명의 빛'은 하나님의 보호와 계시로 부터 격리된 '음부의 밤'과 반대되는 개념이다(Keil). 따라서 '생명의 빛에 다닌다'라는 말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을 가리킨다(116:8, 9;욥 33:30).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앞'과 '생명의 빛'은 의미상 동격(同格)이다.
⭕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붙들어주심(145:14)에 의하여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반문(反問)이다. 한편 '실족지'(*, 데히)는 '밀쳐 넘어뜨리다' 혹은 '쫓아내다'의 뜻이 있는 동사 '다하'(*)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성 경: [시57:1]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도움을 호소]
⭕ 하나님이여...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56편과 같은 시작이다. 이 같은 유사점은, 본 시편도 56편처럼 다윗이 고난을 받던 시절에 저작된 탄원시임을 시사해 준다. 다만 본시에는 '간구와 신앙'이라는 측면이 좀더 강조되어 있다.
⭕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 히브리 원문에는 본 문구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긍휼을 간청한 이유가 설명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영역본 NIV는 본 문구를 '왜냐하면 나의 영혼이 당신 안에서 피난처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for in you my soul takes refuge)로 번역하였다.
⭕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피하리이다 - '주의 날개 그늘'은 시편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보호' 혹은 '하나님의 보호가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7:8;36:7;61:4;63:7;91:4). 이처럼 '주의 날개 그늘'이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하는 까닭은, 닭이나 기타 새들이 그 새끼들에게 자신의 날개를 펴서(마 23:37) 비바람으로부터의 피난처를 마련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Calvin). 한편, 여기의 '재앙'은 다윗의 목숨을 노리기 위한 사울의 추격을 가리킨다. 사울이 수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숨어있던 다윗을 수색하는 동안(삼상 24:1, 2). 다윗은 초긴장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 다윗이 만일 사울의 군대에 발각된다면, 즉시 사울에 의해서 처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 경: [시57:2]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도움을 호소]
⭕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로힘 엘룐)은 하나님의 여러 명칭 중,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 대한 주권자되심을 강조한다(47:2;83:18;89:27;창 14:19;신 32:8;단 7:27). 다윗은 이처럼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을 믿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을 억압하는 자의 굴레로부터 벗어날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소원이 당신의 뜻과 합치되면 무엇이든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한다(Rawlinson). 특히 이 말은 약속하신바를 필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다윗 자신의 이전 체험을 엿보게 한다(Alexander).
성 경: [시57:3]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도움을 호소]
⭕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 여기서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내셨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의 '하늘'은 땅이나 자연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보내주신 것은 초자연적이고도 기적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Calvin). 혹자는 이를 본절 하반절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이해하기도 한다(A. A. Anderson). 이는 43:3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 마치 '하나님의 사자'(the messengers of God)인 것처럼 표현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 이에 해당하는 원문(*, 헤레프 쇼아피)은, '나를 삼키려는 자를 책망하소서'로 번역해야 옳다(rebuking those who hotly pursue me, NIV). 왜냐하면 개역 성경에서 '비방'으로 번역된 단어는 '책망하다'를 뜻하는 강조형 동사이기 때문이다(공동 번역, '망신을 주시고'). 그렇다면 여기서 '책방한다는 것'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대적들의 기대를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Calvin).
⭕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 앞 부분의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에 대한 설명구(說明句)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인자'(*, 헤세드)는 결코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뜻하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본 시편의 저자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킨다. 그리고 '진리'는 구체적으로 다윗의 대적들을 징벌하시기 위한 공의로운 기준을 뜻할 것이다(Rawlinson).물론 하나님의 심판은 당신의 주권적 권능에 따라 행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징벌은 공의로운 판단 기준에 근거하여 시행되는 것이다.
성 경: [시57:4]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도움을 호소]
⭕ 내 혼이 사자 증에 처하며 - 사울의 군대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다윗이 숨어있던 굴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찾아다닌 것을 연상시킨다(삼상 24:2, 3). 이러한 표현은 당시 다윗이 처한 상황의 위급성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구의 간절함을 한층 부각시켜 준다.
⭕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 '불사르는 자'(*, 라하팀)는 다윗을 죽이려 혈안이 된 사울이, 마음속 깊이 맺힌 증오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 곧 인생 중에라(*, 베네 아담) -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자손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1) 앞의 문구와 연결시켜 '인생들을 잡아먹는 그들 중에 누웠으니'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공동 번역, Kraus, Weiser), (2) 뒤의 문구와 연결시켜 '저희는 이가 창과 살이요 혀는 날카로운 칼 같은 인생들이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NIV) 등이 있다. 그러나 여기의 '베네 아담'은 '함아버리다' 혹은 '삼켜버리다'를 뜻하는 동사 '라하트'(*)의 분사인 '라하팀'(불사르는 자)의 목적어로 봄이 보다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1)의 견해가 보다 적절하다.
⭕ 저희 이는...칼 같도다 - 사울의 잔인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삼상 22:17-19).
성 경: [시57:5]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도움을 호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대적하는 등 지극히 교만해 있었던 사울을 징벌하시기를원하는 기도이다. 이 같은 징벌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 다윗을 대적하던 사울의 교만은 꺾일 것이고, 반대로 사울의 교만에 의하여 가리워졌었던 하나님의 영광은 다시 높여질 것이었다. 결국 본절은, 하나님이 그 권능 가운데서 공의를 집행하심으로써 (1) 천상 천하(天上天下)의 모든 인격체들로부터 찬양을 받게 되는 것과(Hengstenberg), 또한 (2) 숭고하심을 스스로 보이시는것(Aben Ezra Kimchi)을 아울러 가리킨다(Rawlinson).
성 경: [시57:6]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도움을 호소]
⭕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障碍)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하여 자기 군사들로 하여금 다윗이 은신했던 산악지대를 이잡듯이 샅샅이 수색케 한 사실과 관련있다(삼상 24:1, 2;26:20). 여기서 다윗은 사울 군대의 수색 및 추격을 '예비된 그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이 사냥꾼에게 쭤기는 동물과 같은 비참한 신세임을 암시한다. 한편 '예비하였으니'(*, 쿤)는 '설치하다' 혹은 '고정시키다'로 번역함이 더 정확하다(Davidson).
⭕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 여기서 '억울하도다'(*, 카파프)는 원래 '빠지다' 혹은 '구부리다'의 뜻이며, 이 동사는 새나 기타 짐승이 사냥꾼의 그물로 말미암아 무서움을 느낀 나머지 땅바닥에 납작 누워버리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Calvin). 따라서 본 문구는, 사울의 수색 작전에 의하여 다윗이 잔뜩 긴장하고 두려워하였던 사실을 암시한다.
⭕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 여기서 '빠졌도다'(*, 나플루)는 완료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사는 미래에 벌어질 일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본 시편 저자가 미래의 일을 완료형으로 표현하는 예언적 과거를 사용한 것은, 자신을 해(害)하고자 술수를 행하고 있는 사울이 결국 그 죄악 때문에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처지에 빠져 멸망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성 경: [시57:7]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온 세계 위에 높으신 주의 영광을 찬양]
⭕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확정되었사오니 - '확정되었고'(*, 나콘)는 '세워지다', '고정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 '쿤'(*)의 수동형으로서, '굳건하게 되었고'로 번역하면 더 좋을 듯하다(Rawlinson). 이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더욱 굳어졌음을 뜻한다. 특히 여기서 다윗은 같은 말의 반복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적 의지를 보다 확고히 나타내고 있다.
⭕ 내가 노래하고...찬송하리이다 - 이는 주께 대한 신뢰가 더욱 굳어진 결과이다. 이같이 다윗의 찬송은 준비된 마음에 의해 불리워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으로만 불리워지는 위선자의 것과는 궤(軌)를 달리한다(Calvin). 그리고 여기서 동의어를 반복 사용한 것은 앞 문구의 '확정되었고'를 반복한것과 표현상의 조화를 보여 준다.
성 경: [시57:8]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온 세계 위에 높으신 주의 영광을 찬양]
⭕ 내 영광아 깰지어다 - 여기서 '영광'(*, 카보드)은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주로 '영광'과 '명예'를 뜻하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영혼'을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7:5;16:9;30:12). 따라서 본 문구는'내 영혼아 깰지어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는 주께 대한 헌신과 진실을 굳게 하려는 다짐으로 볼 수 있다(Rawlinson). 그리고 다음 문구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 간절한 찬양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 사울로부터 쫓기는 동안 잠재워져 있었던 음악적 재능이 되살아나기를 소원하는 기도로 볼수 있다(Rawlinson). 실제로 다윗은 많은 시편을 지었을뿐만 아니라 사울을 괴롭혔던 악신(惡新)을 수금연주로써 쫓아낼 정도로(삼상 16:23) 탁월한 음악적 재질의 소유자였다.
⭕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탈무드의 기록에 따르면, 다윗은 침상위에 걸어놓은 수금이 밤에 불어오는 북풍에 의해서 저절로 소리를 낼 때 깨어나서 새벽이 되기까지 큰 소리로 율법을 낭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결단하는 본 문맥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 단순히, 만물이 고요히 잠든 새벽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뜻으로 봄이 자연스럽다. 한편, 시편을 위시한 구약 성경에서는 '새벽'이라고 하는 자연 현상을 종종 의인화시키거나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하여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110:3;139:9;욥 3:9;아 6:10;사 14:12, Kidner).
성 경: [시57:9]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온 세계 위에 높으신 주의 영광을 찬양]
본절은, 엄청난 위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다윗이 실로 얼마나 큰 기쁨과 감격에 휩싸여 있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다윗은 바로 이 같은 기쁨과 감격을 이스라엘만이 아닌 온 세상에 전하고 싶어 하였다. 결국 본문은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의 주(主)이실 뿐만 아니라 만백성과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다윗의 신앙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18:49과 함께 롬 15:9에서 신약 시대에 보다 온전히 성취된 사실로써 언급된다(Kidner).
성 경: [시57:10]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온 세계 위에 높으신 주의 영광을 찬양]
⭕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 이 시는 우주적인 찬양으로서 끝을 맺는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성실히 지키셨음에 대한 고백이다(3절). 한편, 여기서 '하늘'(*, 솨마임)은 '높다'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아주 높이 그리고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대기권 전체를 가리킨다(욥 서론,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대적했던 원수들에 대한 징벌을 기필코 실현시키심에 대한 증거이다(3절). 한편 '궁창'(*, 쉐하킴)은 '두들겨 잘게 만들다'를 뜻하는 동사 '솨하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구름이 있고 비가 만들어지는 대기 중의 공간을 가리킨다(18:11;77:17;삼하 22:12;잠 3:20;8:28).
성 경: [시57:11]
주제1: [찬양으로 승리하는 신앙]
주제2: [온 세계 위에 높으신 주의 영광을 찬양]
5절과 동일한 내용이다. 그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58:1]
⭕ 인자들아(* , 베데 아담) - 히브리 원문상으로는 본절의 제일 끝에 있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판단하느뇨'의 목적어가 되어야 한다.
⭕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 문자적으로는 '너희들은 진실로 공의롭게 말하느냐?'의 뜻이다(NIV). 아마 이는 압살롬 일당이 기만적으로 백성들을 재판했던 사실에 대한 책망으로 보인다.
⭕ 잠잠하느뇨(* , 엘렘) - 이에 대한 해석은 실로 다양하다. 그것들을 요약 정리해 보면 (1) 맛소라 사본의 독법(讀法)이 맞다고 보고 '침묵하느냐'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Luther, Jay P. Green), (2) '엘림'으로 읽는것이 맞다고 보고 '권력자들'(29:1)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NIV, 공동 번역, Keil), (3) '울람'으로 읽어야 맞다고 보고 재판하는 곳인 '낭실'(왕상 7:7)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70인역, Jerome), (4) '엘로힘'(* )으로 고쳐 읽어야 맞다고 보고 '신들'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Kraus, Weiser), (5) '알롬'으로 읽어야 한다고 보고 재판관들을 가리키는 '인자들아'로 번역해야 하다는 견해(Calvin) 등이 있다. 그러나 본절은, 재판관의 불의한 재판을 책망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위의 여러 견해 중 (1)과 (5)가 보다 타당성이 있다.
⭕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 앞의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의 동의적(同意的)대구이다. 여기서 '판단하느뇨'(* , 솨파트)는 '재판하다'의 뜻이다(출 18:22).
성 경: [시58:2]
⭕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 자신들의 기만적 술책을 공의로운 재판으로 가장하고 있던 사실에 대한 책망이다. 여기서 다윗은, 그들의 마음부터 사악하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백성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베푸는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죄악된 것임을 강조한다.
⭕ 땅에서...강포(强暴)를 달아주는도다 - '강포를 달아주는도다'라는 말은, 저울에 달듯이 정확한 재판에 따라 바른 판정을 내린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모순 어법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특히 '강포'(* , 하마스)는 '헐다' 혹은 '학대하다'를 뜻하는 동사 '하마스'(*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잔학 행위를 가리키며(삿 9:24;렘 51:35), '땅에서'는, 그들의 잔학 행위가 은밀한 가운데가 아닌 공공연하게 거침없이 행해졌었음을 암시한다(Calvin). 한편 재판이나 심판을 (저울에) '다는 것'으로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은 구약 성경에 종종 나타난다(62:10;욥 31:6;잠 16:2;21:2 ;24:12;단 5:27;마 7:2).
성 경: [시58:3]
⭕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 이를 어떤 면에서 인간 누구나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문맥상으로는 인생 일반에게 적용되는 전적 부패의 교리를 나타내기 보다는 죄악의 성향이 매우 강해서 개전(改悛)의 기미마저 찾아보기 힘든 악행자의 부패상을 강조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A. A. Anderson). 한편 '멀어졌음이여' (* ,주르)는 '곁길로 들다'. '(이방인이나)세속인이 되다', '간음하다'등의 뜻으로서, 본래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어떤 것과 절연(絶緣)한 것을 가리킨다.
⭕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 앞의 문구와 동의적 대구(對句)를 형성하고 있다.
성 경: [시58:4]
주제1: [불법자(不法者)들을 고발하는 시]
주제2: [불의한 자들에 대한 탄원]
⭕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 이는 악인들의 사악한 언행 심사(言行心思)에 대한 비유이며, 특히 중상, 거짓 참소, 저주 등과 같은 사악한 말과 관련이 깊다. 여기의 '뱀'(*, 나하쉬)은 '뱀'을 뜻하는 용어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다.
⭕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같으니 - 여기의 '독사'(*, 페텐)는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맹독성(猛毒性)의 작은 독사, 곧 '코브라'를 가리킨다. 그리고 '귀를 막은 귀머거리'는 하나님의 공의나 그 가르침 혹은 기타 진실된 조언이나 충고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악한 뜻만 고집하는 자를 빗댄 표현으로서, '독사'가 술사(術士)에 의해서 쉽게 다루어지지 않는 사실과 관련있는 말이다. 이에 대한 설명 부분이 5절이다.
성 경: [시58:5]
주제1: [불법자(不法者)들을 고발하는 시]
주제2: [불의한 자들에 대한 탄원]
⭕ 술사(*, 멜라하쉼). '속삭이다', '기도하다' 혹은 '마술을 걸다'의 뜻인 동사 '라하쉬'(*)의 분사로서, 마술을 행하거나 그것을 위한 주문을 외는 사람을 가리킨다(전 10:11).
⭕ 공교한 방술(方術)을 행할지라도 - '방술'(*, 하바림)은 '함께 묶다', '주문을 걸다' 혹은 '매혹하다'라는 뜻의 동사 '하바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뱀을 길들여 재주를 부리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뱀을 부리는 것은 전 10:11;사 3:3;렘 8:17 등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고대 세계에서 이는 단순한 여흥을 돋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신탁(神託)을 받는 방법의 일환으로서도 행해졌다고 한다(A. A. Anderson).
성 경: [시58:6]
주제1: [불법자(不法者)들을 고발하는 시]
주제2: [불의한 자들에 대한 탄원]
⭕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 이것은, 술사들이 뱀을 잡았을 경우, 필요에 따라 돌이나 막대기로 그 뱀의 독니를 뽑아버리는 것을 연상시킨다(Rawlinson). 그런데 뱀에게 있어서 '독니'는 사람에게 치명적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독니를 뽑는 일은 곧 뱀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그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 문구는, 압살롬 일당이 공의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성 경: [시58:7]
주제1: [불법자(不法者)들을 고발하는 시]
주제2: [불의한 자들에 대한 탄원]
⭕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 흔적도 없이 신속히 멸절되기를 바라는 간구이다. 아마 시인은 여름에는 메말랐다가 우기(雨期)시에는 급속하게 불어나 맹렬히 흐르는 팔례스틴의 와디(wadi)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욥 6:15f.). 한편 성경에서 '물'은 풍부한 상징적 의미로서 사용되느 다표현이다. 때로는 정결케 하는 것이다(겔 36:25). 저주를 가져다 주는것(민 5:18)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에는 생명의 필수 요소(사 3:1)나 생명에 대한 위협(사 43:2)으로 나타나기도 한다(A. a. Anderson).
성 경: [시58:8]
주제1: [불법자(不法者)들을 고발하는 시]
주제2: [불의한 자들에 대한 탄원]
⭕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 여러 번역본들처럼 '앞으로 나아가다가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로 함이 더 타당한 듯 하다(NIV, Weiser, Kraus). '소멸하여 가는 '은 '달팽이'가 태양 볕에 노출됨으로써 그 표면의 점액이 마르고, 결국에 가서는 그 몸 전체가 녹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달팽이'는 건조한 기후나 강한 햇빛에 심히 약하다. 그래서 팔레스틴의 '달팽이'는 건조한 계절에는 움츠러들어 그 껍질 밖으로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Rawlins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 일당이라는 '달팽이'는 그러한 생존을 위한 기본적 지혜를 무시한 채 껍질에서 나와 태양 빛에 몸을 드러내고 다윗에 대한 모반을 꾀함으로써 '소멸'을 스스로 재촉했던 것이다. 한편 '달팽이'(*, 솨블룰)는 '자라다' 혹은 '흐르다'의 뜻을 갖는 동사 '쇼벧'(*)에서 파생되었다. 달팽이가 이러한 어근에서 파생된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은, 그 표면에 축축하게 항상 점액이 흐르기 때문인 듯하다.
⭕ 만기(滿期)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 네펠 에쉐트)는 문자적으로는 '여자의 유산된 자'이며 '일광을 보지 못함'은 '죽음'을 뜻한다(욥 3:16). 이러한 사산(死産)에 관한 언급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대상을 나타낼 때 가끔 나온다(욥 3:16;10:18, 19;전 6:3). 결국 시인은 모반자들이 원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과 같이 그 영향력을 상실해 버리기를 바라고 있다(A. A. Anderson).
성 경: [시58:9]
주제1: [불법자(不法者)들을 고발하는 시]
주제2: [불의한 자들에 대한 탄원]
7, 8절에 이어 본절에서는 악인들의 신속한 멸망을 예견하고 있다. 본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제안되었다. (1) '너희 가마가 가시덤불의 불을 느끼기 전에 너희 고기가 생 것이든지 불붙은 것이든지 저가 그 고기를 회리바람으로 쓸어버리시리로다'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해석(Keil, Calvin, Cheyne), (2) '너희 가마가 가시나무를 느낄 수 있기 전에 그것이 푸른 것이든지 혹은 불붙고 있는 것이든지 회리바람이 그것을 쓸어버리리로다'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해석(Weiser), (3) '그들의 가시나무가 관목으로 자라기 전에 가시덤불이나 잡초처럼 저가 그것들을 쓸어버리시리로다'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해석(Kraus), (4) '너희 가마가 가시나무의 열을 느끼기 전에, 그것이 푸른 것이든지 혹은 마른 것이든지 간에, 곧 그 사악한 자들이 쓸어버려질 것이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해석(NIV)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해석들도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즉,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악인을 '가시나무'와 '가마에 담겨진 내용물' 중 무엇으로 비유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첫째, 본절의 '불붙는 것'(*, 하론)이라는 단어가 '가마에 담긴 내용물' 곧 '고기'를 가리킨다고 보기는 곤란하며, 둘째, 중근동인들은 여행 중에 '가마'를 걸어놓고 '가시나무'를 땔감 삼아 음식을 만들다가 강한 바람 때무에 그 땔감을 날려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박 윤선)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다윗이 '가시나무'를 악인으로 비유하고 있다고 봄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위의 네 가지 해석 중 (1)을 제외한 (2), (3), (4)의 것이 일단 더 타당성을 확보한다. 그런데 (3)의 해석은, 맛소라 본문을 임의로 변개(變改)시키는 등 많은 무리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그러므로 (2), (4)의 견해가 무난하다.
⭕ 가시나무 - 물가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종류로서 불에 잘 붙고 잘타서 급히 음식을 장만할 때 사용되었던 땔감이다.
성 경: [시58:10]
주제1: [불법자(不法者)들을 고발하는 시]
주제2: [불의한 자들에 대한 탄원]
⭕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기뻐함이여 - 이는 의인이 마치 피에 굶주린 것처럼 악인의 파멸과 고통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 아니라, 악인에 대한 징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사실로 인해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보복'은 차라리 '승리'(triump, LB)로 번역함이 더 나을 것이다.
⭕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 이는 대적들에게 승리했음을 선포하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다(68:23;사 63:3).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원수들의 선혈이 붉게 물든 홍의(紅依)를 입은 전사(戰士)로 비유한 바 있다(사 63:1-6).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성도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승리는 곧 성도들의 승리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본문은 다윗의 신앙적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성 경: [시58:11]
주제1: [불법자(不法者)들을 고발하는 시]
주제2: [불의한 자들에 대한 탄원]
악인들의 멸망으로 인한 의인의 기쁨속에는 악인에 대한 개인적 감정 차원보다는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즐거워하는 신앙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는 구절이다.
⭕ 사람의 말이 진실로...하리로다 - 칼빈(Calvin)은 여기의 '사람'을 성도로 국한시킨다.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는 점에서, 이는 지당한 해석이다. 물론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교도들도 그들에게 어느 정도 남아있는 종교적 능력(전 3:11) 때문에 막연하고 피상적이나마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출 15:14;수 2:9).
⭕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 '갚음'(*, 페리)은 원래 '과일' 혹은 '열매'의 뜻으로서 어떤 원인에 따른 당연스런 결과를 의미한다(104:13;렘 6:19). 따라서 본 문구는 의인들이 그 선한 삶의 자세에 따라서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것(사 3:10)을 가리킬 것이다(Calvin). 물론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악인들이 그 행위에 합당한 보응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성 경: [시59:1]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건지시고 -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아뢰고 거기서 구출되기를 간구하는 문맥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7:1;17:13;22:20;25:20;109:21). 여기서 '원수'로는 사울,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참소했었을 사울의 신하들, 그리고 사울의 명령에 따라 다윗의 집을 포위하려는 자객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일어나 치려는 자 - 여기서 '일어나'(*, 쿰)는 문자적 의미의 '기립'(起立)의 의미보다는 어떤 중요한 행동을 하기에 앞선 마음의 결단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창 19:14;35:1;삼상 16:12;욘 1:2). 그리고 '치려는'은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 중에는 없다. 그러나 문맥의 의미를 살리는 데 있어서 적절한 삽입이다.
⭕ 나를 높이 드소서(*, 사가브) - 이 동사는 '도달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 혹은 '높은 곳으로 올리다'의 뜻으로서, 대적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끔 보호해 달라는 간구이다(Gray G. Cohen).
성 경: [시59:2]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여기와 다음 절에서는 '다윗'의 원수가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이며 어떠한 악행을 도모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다윗은 이같이 원수듸의 잔악함을 말함으로써, 자신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다.
⭕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 - 다윗의 원수들의 잔인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이다. 피흘리기를 즐긴다는 것은 단순한 이해 관계나 원한 관계로 인한 싸움의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다시 말해서 폭력이나 기타 악행이 아예 삶의 방식으로 굳어버린 상태를 시사한다(Kidner). 한편 성경은 한결같이, 피흘리는 데 빠른발을 지닌 자들에게는 파멸이 예비되어 있음을 강변(强辯)하고 있다(잠 1:16-19;롬 3:15, 16).
성 경: [시59:3]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 '엎드려 기다리고'(*, 아라브)는 구약성경에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노리는 일과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10:9;잠 1:11).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사울이 보낸 자객들이 다윗의 집 주변을 포위 매복(埋伏)했던 사실을 가리킨다(삼상 19:11).
⭕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 '강한 자'(*, 아짐)는 복수로서, 능력의 강대함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주로 적용된다(민 13:28;신 28:50;사 19:4;겔 7:24;암 5:9). 그리고 '모여'(*, 구르)는 '(일시적으로) 거주하다' 혹은 '적대 행위를 위해 모으다'라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와 본 문구가 앞의 '엎드려 기다리고'와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 관계라는 사실등에서 볼때, 이 동사 역시 자객들의 매복 행위를 뜻함이 분명하다.
⭕ 나의 범과(犯過)를 인함이 아니요 - 다윗 자신에 대한 사울의 살해 노력이 무고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에 대한 시기 및 질투(삼상 18:6-9)와 자신의 왕위가 빼앗길 것이라는 기우(삼상 18:29)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억울하였다. 그런데 여기의 '범과'(*, 페솨)는 '반역하다' 혹은 '혁명을 일으키다'를 뜻하는 동사 '파솨'에서 나온 명사로서, 국가적, 도덕적 또는 종교적 측면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범죄를 가리킨다(19:13).
⭕ 죄(*, 하타트) - 이는 '길을 잘못 들다', '빗나가다' 혹은 '실족하다'를 뜻하는 동사 '하타'(*)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본적으로 '실수' 혹은 '허물' 등의 뜻을 담고 있다(레 19:17). 비록 이 단어가 앞의 '범과'와 그 의미상의 차이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시59:4]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 '저희가 달려와서'는 악행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다. NIV는 본문을 의역(意譯)하여 '저희가 나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they are ready to attack me)로 번역하였다. 한편, '스스로 준비하오니'로 번역된 '쿤'(*)은 원래 '세우다', '굳건히 하다' 혹은 '정돈하다'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매복 행위를 가리킨다.
⭕ 주여...깨사(*, 우라) - 원래는 '주여'라는 뜻이 들어있지 않으나, 본 단어가 명령형이라는 점 때문에 이같이 적절한 삽입을 하였다. 한편 이 히브리어는 위급한 상황으로부터의 구출을 간청하는 여러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7:6;44:23). 그리고 이는 신인 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표현으로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는 121:4 말씀을 연상시킨다.
⭕ 감찰하소서(*, 라아) - '수색하다' 혹은 '진찰하다' 등의 의미로 번역되며, 사태의 전모(全貌) 파악을 위한 지극히 세심한 관찰 행위를 가리킨다(레 13:3;민 13:18;말 3:18).
성 경: [시59:5]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흔히 '만군의 여호와'로 나타난다(삼상 1:3;삼하 7:27). 구약 성경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은 이와 유사한 호칭을 포함하여 약 279회 나오며, 그중 시편에는 단지 15회 정도만 언급될 뿐이다. 이러한 호칭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자존하신 분이시며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곧 당신의 백성을 언약 관계에 따라 구원하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Alexander, W. A. VanGemeren).
⭕ 이스라엘의 하나님 - 이 명칭은 본절에서처럼 앞의 '만군의 여호와'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69:6;삼하 7:27). 이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셨던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둔 명칭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보호를 강조한다(Calvin).
⭕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 여기서 다윗은 개인적 간구에서 민족적 간구로 그 기도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다(Kidner, Weiser). 한편 '일어나'(*,쿠츠)는 '각성하다' 혹은 '깨우다' 등의 의미가 있는 동사로서 잠에서 갑작스럽게 깨어나는 것을 가리킨다(Wigram). 그리고 '열방'(*, 고임)은 광범위하게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백성을(창 12:2;사 1:4), 좁게는 이방 백성, 즉 이교도들을 뜻한다. 여기서는 좁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논 혈통적이 아닌 사상적인 이교도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비록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역시 이교도나 다름없는 것이다.
⭕ 간사한 악인 - '간사한'(*, 바가드)은 원래 '덮다'는 뜻으로서 '암암리에 행동하다', '약탈하다', '허위로 대하다', '속이는', '불신실한' 등과 같은 다양한 뜻을 나타낸다. 이것은 다윗을 살해하기 위하여 다윗의 집 주변에 잠복해 있던 자객들과 그들을 보낸 사울에게 적용되기에 매우 적절하다(1절).
성 경: [시59:6]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저물게 돌아와서 - 자객들이 다윗의 집을 저녁에 잠복하기 시작한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여기서 다윗은 자객들의 행동을 팔레스틴에 살던 사나운 개들의 야행성(夜行性) 움직임을 묘사하듯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잔악성 혹은 야만성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다.
⭕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 '개'(*, 칼레브)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대단히 불결한 동물로 간주되었다. 물론 '개'들이 제의적(祭儀的)으로도 부정(不淨)했지만 썩은 고기 심지어는 사람의 죽은 시체도 먹었으며(왕하 9:36), 또한 전염병을 옮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를 집에서 키우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개'는 먹을 것을 찾아 시내(市內)를 돌아다니며 반(半)야수처럼 살았다.
성 경: [시59:7]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 이는, 자객들과 그들을 보낸 자들이 밤이 늦도록 다윗에 대한 비방과 저주를 그치지 않았던 사실(삼상 19:11)을 가리킬 것이다(94:4, Rawlinson). '악을 토하며'의 히브리어 '나바'(*)는 '(말을) 발하다', '트림을 하다' 등의 뜻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6절과 연결시켜 '침을 흘리다'(Kruaus, Weiser) 혹은 '으르렁거리다'(RSV, bellowing)로 이해하기도 한다.
⭕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 다윗에 대한 살의(殺意)가 극히 잔악한 말로써 표출된 것을 의미할 것이다(57:4 주석참조).
성 경: [시59:8]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와 계략이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무력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2:4). 즉, 자객들은 자신들의 잠복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고 보고 '누가 들으리요'라고 했었다(7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보호를 위하여 악인들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일일이 감찰하신다(4절). 바로 이 같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 앞에서는 악인들의 교묘한 계략도 일개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것이다.
⭕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 여기서 사울과 그 자객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갖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로 비유되고 있다(5절).
성 경: [시59:9]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 '산성'(*, 미스가브)은 '높다'를 뜻하는 동사 '사가브'(*)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쉽게 오르기 곤란할 만큼의 '높은 망대'(삼하 22:3) 혹은 '높은 곳'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는 '피난처'로 번역되기도 하였다(46:7,11). 특히 이 단어는 1절의 '높이 드소서'의 히브리어와 그 어근이 동일하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보호자가 되심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 '저의 힘을 인하여'(*, 우조)는 단지 '그분의 힘'을 의미할 뿐이다. 이와 같은 맛소라 본문으로는 본절의 뜻이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70인역(LXX)과 다른 고대 역본 등을 근거로 하여, 맛소라 본문의 본 단어 '우조'를 '우지'(*)로 고칠 것을 주장한다(NIV, Weiser, Keil, Rawlinson, Kraus, C. B. Moll). 그럴 경우 '오 나의 힘이시여'로 번역될 수 있어, 매우 자연스럽다(17절). 한편 '바라리이다'(*, 사마르)는 원래 '지키다' 혹은 '보존하다'의 뜻이지만, '굳게 의지하다'의 의미로 이해하면 적절할 것이다.
성 경: [시59:10]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 문자적으로는 '나의 인자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자'는 변함없이 베풀어지는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각양 사랑을 뜻한다. 따라서 본구는 다윗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의 은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 준다.
⭕ 나를 영접하시며 - 여기서 '영접하시며'(*, 카담)는 '고대'(古代), '동편' 혹은 '앞'을 뜻하는 명사 '케뎀'(*)으로부터 유래한 동사이며, (1) '어떤 사람과 만나다' 혹은 (2) '앞서 나가다'의 뜻을 갖는다. (1)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마치 친한 친구와도 같이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며 도와주신다는 뜻이 되고(A. A. Anderson), (2) 의 의미로 해석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즉각적이고 시의(時宜) 적절히 나타나는 것을 강조하는 뜻이 된다(NIV, Calvin, Keil).
⭕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 문자적으로는 '내 원수를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이다. '원수'(*, 쇼르라이)는 '비틀다' 혹은 '함께 짓누르다'라는 기본적 의미를 갖는(Gesenius) 동사 '솨라르'(*)의 명사적 분사로서, '압제하는 자'를 뜻한다. 한편 '목도케 하시리이다'의 원형인 '라아'(*)에 대해서는 4절의 '감찰하소서'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59:11]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 다윗은 원수들의 생명이 창졸간이 아니라 오히려 서서히 무너져가게 함으로써 잠시동안 하나님의 진노의 교훈적 기념비가 되기를 강력히 염원한다(Cheyne, Van Gemeren). 하나님께서도 일찍이 애굽 왕 바로를 멸망시키지 않고 살려두심으로써 당신의 능력을 온 세상에 알리기를 원하셨다(출 9:16).
⭕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 이것은 앞의 '죽이지 마옵소서'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다. 여기서 '흩으시고'(*, 하니에모)는 '누아'(*)의 사역형으로서 '유리하게 하다' 혹은 '방황하게 하다'의 뜻이다. 이 단어는 가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 연관해서도 사용된 바 있다(창 4:12;민 32:1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정처없이 유리, 방황하게 되는 일이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공히 발생될 수 있음을 암시받는다(Alexander). 한편, '낮추소서'(*, 호리데모)는 '야라드'(*)의 사역형으로서 '끌어내리다'의 뜻이다. 즉, 이것은 '영예로운 자리에서 불행과 역경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을 가리킨다(Rawlinson).
성 경: [시59:12]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 본 문구는 저들의 모든 말이 곧 범죄라는 뜻으로서(Hupfeld, Keil, C. B. Moll), 하나님께서 다음 문구와 같이 하셔야 할 이유이다(NIV, Calvin).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그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 양 교만하게 하나님의 백성 곧 다윗을 해하려는 모의를 하였고, 또한 비방, 저주했었다(7절).
⭕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 - 앞 문구의 '저희 입술의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말해 준다. '거짓말'은 무죄한 다윗에게 죄를 덮어씌운 일 그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 그 교만함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 본절에 열거된 죄악들은 개인은 물론이고 한 공동체를 깨뜨리는 치명적 독소로 작용하는 바, 삿 9장에 언급된 세겜 사건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중에서도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 도전 행위로까지 연결되는 죄악이다(Kidner). 한편 '사로잡히게 하소서'는 이방인의 군대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도 이해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윗의 이러한 간구가 응답됐을까? 물론 우리에게는 이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사울은 비록 살아서는 아니었지만 죽어서 시체의 상태로 블레셋 군대에 의해 그들의 점령지였던 벧산의 성벽에 못박혔었다(삼상 31:8-10).
성 경: [시59:13]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 이러한 간구는 11절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 저자 다윗은, 원수들을 죽이지 않은 채 징벌하신 얼마후에는 결국 그들을 멸망시켜 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간구는. 승전(勝戰)한 로마장군들이 잡아두었던 포로들을 성안으로 들여놓아 자신들의 승전을 알린 후, 그들을 목적한 곳에 데리고 간 다음에 그들을 처형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Calvin).
⭕ 하나님이...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 하나님께서 바로의 완악함을 꺾으신 것(출 9:15,16)이 하나님의 능력을 온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사실(출 15:14-16)을 연상시킨다(삼상 17:46).
⭕ 야곱 - 민족으로서 혹은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성 경: [시59:14]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6절과 동일하다. 그러나 6절은 악인들의 악의에 찬 행동을 비난조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본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그들이 취하게 되는 비참한 행동을 보여 준다.
성 경: [시59:15]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악인들의 모든 노력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 것에 대한 묘사이다.
⭕ 식물을 위하여 유리(遊離)하다가 - 자객들이 다윗을 희생 제물로 삼기 위하여 그 집 주변에 잠복하고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6절).
⭕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임로 이스베우) - 문자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면'의 뜻이다. 그러나 이는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 가지가능성 모두를 말하는 미래적 가정이 아니다. 다만, 악인들이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 즉 없음을 말하는 확정적 가정이다(마 4:3, 6, Calvin).
성 경: [시59:16]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15절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악인들의 비참한 결국을 묘사하는 데 반해, 본절은 하나님의 보호로 구출된 의인들의 행복한 결국을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 '주의 힘'은 구체적으로, 다윗이 창문을 통하여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삼상 19:12-17),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 자객들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신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노래하며'는 당연히 그분의 능력이 심히 큼에 대한 찬양이다.
⭕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 다윗은 '아침'이 오기 직전에 자객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며(삼상 19:11), '아침'에는 바로 이같이 '주의 인자'를 찬양할 수 있었다(삼상 19:18-20). 반면에, 악인들은 밤새도록 다윗의 목숨을 노렸으나 결국 실패로 끝남으로써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히 피곤할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 본 문구 앞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다. 한편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59:17]
주제1: [방패와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주제2: [산성과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 나의 힘이시여 - 9절 주석을 보라.
⭕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 이 표현은 9절의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와 동일하며,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구원하신데 대한 찬양이다.
성 경: [시60:1]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본 시편은 다윗이 쓴 것으로 에돔과의 전쟁에서 초반에 패배할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승리를 호소하는 사실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다윗은 이 전쟁에서 대승읕 거둔다(삼하 8:13;대상 18:12).
⭕ 하나님이여 - 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문맥에서 흔히 나타나는 부르짖음이다(51:1;54:1;55:1;56:1;57:1;59:1).
⭕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 다윗이 에돔에 원정을 갔으나 도리어 많은 군사를 잃는 등 패배한 사실을 가리킨다(왕상 11:15, 16). 여기의 '흩으셨고'(*, 파라츠)는 '깨뜨리다' 혹은 '부수다'의 뜻으로서, 구조물(構造物)의 경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시킬 만큼 파괴하는 것을(대하 32:5;잠 25:28), 대열(隊列)의 경우는 적의 일격을받아 갈팡질팡 혼잡케 된 상태(삼하 5:20)를 가리킨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적의 공격으로 다윗의 군대가 사방으로 도망쳤던 사실을 뜻함이 분명하다.
⭕ 분노하셨사오나 - 이것은 다윗이 패전(敗戰)을 죄의 결과로 보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죄가 하나님을 분노케 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패전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재난을 의미한다(44:9, 23;74:1;77:7;89:38).
⭕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 에돔 군대에 의해서 쫓기는 신세에서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상황으로의 반전(反轉)에 대한 간구이다.
성 경: [시60:2]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 '땅을 진동시키사'는, 하나님께서 에돔 백성을 통해 다윗과 그 군대를 패배시키신 사실(Calvin)과 더불어 그로 인한 극도의 두려움을 가리킨다(Rawlinson). 아무튼 이 문구를 여자적(如子的)으로 보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여기서 '진동시키사'(*, 라아쉬)는 동사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데 주로 사용된다는 점(삿 5:4;렘 10:10) 때문이다. 한편 '갈라지게 하였사오니'는 다윗의 군대가 에돔의 반격에 의하여 지리 멸렬(支離滅裂), 그대오(隊伍)를 이탈한 채 사방으로 흩어진데 대한 은유적 묘사이다(1절).
⭕ 그 틈을 기우소서 - 여기의 '기우소서'(*, 라파)는 '풀다','약하게 하다' 그리고 '거두다'의 뜻이며 본질적으로 1절의 '회븍시키소서'와 동일한 의미라 하겠다.
⭕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 '요동함이니이다'(*, 모트)는 신뢰하기 힘든 불안정성을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는 동사이다(대상 16:30;욥 41:23;사 40:20). 이는 다윗이 어느 곳으로 도망을 하더라도 안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를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간곡히 알리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60:3]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마시우셨나이야 - '포도주'는 즐거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전 9:7), 문맥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75:8;사 51:17;렘 25:15-18;51:7).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진노(1절)에 의한 이스라엘의 참상을 보여준다. 다윗과 그의 군대는 에돔군의 공격을 당하여 마치 술취한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시60:4]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군대를 구원하셔야 할(5절) 이유를 말하고 있다.
⭕ 기(旗)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 많은 학자들은 여기의 '진리'(*, 코쉐트)를 히브리어 '케쉐트'(*)의 아람어 형으로 보고 '활'을 뜻한다고 주장한다(NIV, RSV, A. A. Anderson, Ewald, Hitzig, Hupfeld, Vangemeren, Weiser). 그러면서 개역 성경에서 '위하여'로 번역된 단어 '미페네'(*)를 '...에 대하여' 혹은 '...로부터'로 번역한다. 이처럼 '코쉐트'를 '활', 즉 '에돔 군대의 활'로 주장하는 까닭은, 본절의 '기'가 에돔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퇴각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표지(標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가 퇴각을 위한 표지처럼 언급된 증거도 있다(렘 4:6). 그러나 승리를 보장해 주는 혹은 약속해 주는 '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출 17:15). 여기의 '기'는 바로 후자와 같은 것으로서, 적에 의해서 일시 패배한 이스라엘 군대를 재차 소집하는 표지 역할을 할 만한 것이었다고 본다(a banner to rally to, LB). 더구나 여기의 '진리'는 잠 22:21에서 '진리'로 번역된 '코쉐트'와 동족의 단어이다. 한편 본절의 '진리'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곧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일찍이 약속하셨던 승리의 보장을 뜻하는 것 같다(박윤선). 따라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다윗에게 가시적인 '기'를 주셨다고 보기 보다는 승리의 보장 혹은 약속을 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바로 이 같은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에돔으로부터 구출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기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60:5]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 주의 사랑하시는 자 - 3절의 '주의 백성' 및 4절의 '주를 경외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다윗과 그 군대를 가리킨다.
⭕ 오른손(*, 예미네카) - 문자적으로는 '주의 오른손'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한다(사 41:10).
성 경: [시60:6]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 '그 거룩하심으로'(*, 베카드쇼)는 '그분의 거룩하심 가운데서'의 뜻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담보로 하여 다윗에게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였음을 가리킨다(89:35).
⭕ 내가 뛰놀리라 - 여기의 '내가'는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뛰놀리라'(*, 엘로자)는 '알라즈'(*)의 미완료형으로서 미래 시제이다. 이 단어는 승리에 따른 기쁨의 행동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 동사이다(94:3;삼하 1:20;사 23:12).
⭕ 내가 세겜을 나누며 - '나누며'(*, 할라크)는 기업의 분배와 관련하여 사용된 단어이다(수 14:5;22:8). 따라서 본 문구는 다윗이 '세겜' 지역을 차지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세겜'은 '등성이' 혹은 '비탈'의 뜻이며,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요단 골짜기의 서쪽 정상(頂上)이다. 요단강으로부터는 약 25Km 떨어져 있었다(수 13:27).
⭕ 숙곳 골짜기를 척량(尺量)하리라 - '척량하리라'(*, 마다드)는, 본문이 앞 문구의 대구(對句)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앞의 '나누며'와 동일한 뜻임이 분명하다. '숙곳'은 '오두막'이란 뜻이며, 요단 강 동쪽 약 5.5Km 지점의 '골짜기' 지역에 위치했다.
성 경: [시60:7]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 길르앗 - 미솔 평야 북쪽 산기슭에 위치했다. 서쪽으로는 요단 강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야르뭇 강 근처까지 이르며, 동쪽으로는 얍복 강 남북의 두 지류와 남쪽으로는 아르논강과 각각 접해 있었다. 이 지역에 속한 주요 성읍으로는 길르앗 야베스와 마하나임, 그리고 미스바 및 길르앗 라못 등이 있었다. '숙곳'도 바로 이 지역의 한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풀이 많고 숲이 울창한 산악 지대로서(삼하 18:9), 많은 유실수와 좋은 목초(牧草)로고 유명하다.
⭕ 므낫세 -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과 갈릴리 호수의 남서쪽의 양쪽 땅 혹은 거기에 사는 지파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요단 동쪽 지역만을 가리킨다.
⭕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 '에브라임'족속은 대단히 많은 인구를 가졌기 때문에 다윗왕국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본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 유다는 나의 홀이며 - 이것은 '유다' 지파가 다윗의 통치를 가능케 한 족속이라는 뜻이다. 사실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다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창 49:8-10;신 33:7;삼상 16:1), 또한 그가 이스라엘 왕에 오르는 데는 유다 지파의 역할이 매우 컸었다(삼하 2:1-4).
성 경: [시60:8]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7절에서 팔레스틴 땅이 자신에 의해서 완전히 평정될 것에 대해 예언적으로 확신한 다윗은, 이제 본절에서는 팔레스틴 주변 땅도 그같이 정복될 것에 대하여 말한다.
⭕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 '목욕통'은 발을 씻는 데 사용되는 그릇이다(Calvin). 그런데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하는 것이었으므로(창 18:4;요 13:4, 5), 여기의 '목용통'은 종의 지위에 대한 상징임이 분명하다(박윤선). 따라서 본 문구는 모압이 다윗에 의해서 정복되어(민 24:17;삼하 8:2), 종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을 말한다.
⭕ 에돔에는 내신을 던지리라 - '에돔' 족속이 다윗에 의해 정벌되어(민 24:18), 다윗의 신발을 닦는 것과 같은 위치에 처해지게 되리라는 예언이다(Rawlinson). 그런데 (1) 일반적으로 신발은 부정(不淨)하게 간주되었고(출 3:5;수 5:15), (2)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신발을 던지는 행위를 상대에 대한 지배 의지의 표시로 간주했었으며(Keil), (3) 신발과 관계되는 일은 으레 천한 계층의 담당이었다(마 3:11;막 1:7)는 점 등에서 볼때, 본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에돔'도 '모압'처럼 이스라엘의 종이 되리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 불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 블레셋이 다윗의 공격을 받아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르짖으며(삼상 5:12;사 15:4) 탄식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Keil, Ewald). 실제로 다윗은 즉위 직후 블레셋을 패퇴시켰고(삼하 5:17-25). 나중에는 그들을 완전 항복시켰다(삼하 8:1).
성 경: [시60:9]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다윗은 자신의 에돔에 대한 승리를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하고 있었지만(6-8절), 그러한 예언적 확신을 성취할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믿었다.
⭕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 이것은,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한 탄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11절) 자신을 결국 도우실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이다(Calvin). 한편, '견고한 성'(*, 이르 마초르) 중 '견고한'은'포위하다' 혹은 '공격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추르'(*)에서 나온 명사로서 '요새'를 가리킨다. 그런데 '견고한 성'은 구체적으로 바위를 뜻하는 '겔라' 곧 오늘날의 '페트라'이다. 이 '셀라'라는 도성의 이름의 뜻이 시사하듯, 이 도성은 쉽사리 공략되지 않을 만큼의 지리적 호조건(렘 49:16, 17)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성도 다윗 휘하의 요압(왕상 11:14-16)과 아마샤 왕(왕하 14:7)에 의해서 정복되었었다. 특히 그 도성은, 아마샤에 의해서 '셀라'라는 이름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정복된'을 뜻하는 '욕드엘'로 바뀌는 수모를 당하였다.
성 경: [시60:10]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본절은 그 당시 다윗이 처해 있던 상황(1절)에 대한 진술이다. 다윗은 자신의 비참상을 하나님께 알림으로써, 하나님의 도움이 신속히 나타나야 함을 강력히 호소한다.
⭕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는 것(삼상 14:6;삼하 5:24)을 가리킨다.
성 경: [시60:11]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 문자적으로는 '대적에 대항할 도움을 주옵소서'(Give us aid against the enemy, NIV)이다.
⭕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 다윗이 전쟁의 승패가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삼상 17:47). 물론, 실제에 있어서 에돔의 공격에 의해 위기에 처했던 다윗을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에돔의 '견고한 성'을 격파한 것은 요압이었다(왕상 11:15, 16). 그러나 요압의 이러한 활동상은, 요압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진 그분의 도구라는 점에서 이는 '사람의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성 경: [시60:12]
주제1: [승리를 탄원하는 기도]
주제2: [승전(勝戰)에의 기원]
⭕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 여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벧로힘)는 '하나님 안에서' 혹은 '하나님과 함께' 혹은 '하나님에 의하여' 등의 뜻이다. 한편 '용감히 행하리니'(*, 나아세하일)라는 말 중 '나아세'는 '행하다'의 뜻을 갖는 '아사'(*)의 미래형이며 '하일'은 '능력' 혹은 '군대' 그리고 '용맹'의 뜻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다윗이 용맹하게 군사적인 반격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 히브리 원문에는 '그'에 해당되는 인칭 대명사 '후'(*)가 있다. '밟으실 자심이로다'(*, 야부스)는 '그분이 밟으실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처럼 다윗은, 이미 동사에 주어 어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 인칭 대명사를 별도로 사용함으로써, 본 문구와 같은 행위의 주체가 철저하게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한편, 히브리 원문상 본 문구 초두에 있는 접속사 '웨'(*)를 '그렇게 하면'의 뜻으로 이해하여, 본 문구가 앞 문구의 결과로 간주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무기력하게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일하지 아니하신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애써 최선을 다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밟으신다'라는 말은, 상대를 완전히 파멸시키거나 정복하는 것을 뜻한다(롬 16:20). 사실 다윗의 이 같은 예언적 믿음은 하나님의 도구, 요압에 의해서 성취되었다(11절).
성 경: [시61:1]
주제1: [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주제2: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간구]
본 시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요단 동편의 마하나임에서 압살롬의 군대를 피하고 있을 때 기록된 듯하다(삼하 17:27-29).
⭕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 여기서 '부르짖음'(*, 리나티)은 '소리치다'를 뜻하는 동사 '라난'(*)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런데 동사'라난'은 기쁨에 겨워 크게 소리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와 같은 몇몇 문맥에서는 죽음의 위협 등 극한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게 울부짖는 것을 뜻하기도한다(17:1; 대하 6:19; 렘 7:16; 11:14, Rawlinson).
⭕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 '유의하소서'(*, 카솨브)는 '귀담아듣다' 혹은'귀기울이다'의 뜻으로서, 깊은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응답하시기를 갈망하는 의미를 나타낸다(55:2; 대하 33:10; 잠 4:1, 렘 18:18). 그리고 '기도'(*, 테필라)는 '엎드려 간절히 구하다'를 뜻하는 동사 '팔랄'(*)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구약성경 중에서 자주 사용되며 기도의 간곡성을 강조하는 단어이다(왕상 8:28,38; 왕하 20:5).
성 경: [시61:2]
주제1: [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주제2: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간구]
⭕ 내 마음이 눌릴 때에 - 여기서 '눌릴'(*, 아타프)은 '상하다' 혹은 '약하다'의 뜻으로서 실신(失神)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73:26;142:3; 사 57:16; 애 2:11,12; 욘 2:7). 물론 다윗이 이같은 심신의 상태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근심 때문이었다.
⭕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 '땅 끝'은 구체적으로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갔던 요단 동편의 땅, 곧 마하나임을 말한다(1절). 물론 요단 동편의 땅은 문자적 의미로서의 '땅 끝'은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인 시온(74:2)을 떠나 철저히 타의(他意)에 의해서 요단 동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그곳이 심정적으로는 '땅 끝'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구는 안타까운 형편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윗의 간절한 간구임이 분명하다.
⭕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 '나보다 높은 바위'는 다윗이 대적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바위' 곧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전한 피난처 혹은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킨다(18:2; 62:2,6,7). 따라서 이것은 다윗 스스로의 힘으로도달할 수 없는 '바위'이다. 왜냐하면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헤어나기 어려운 극한 환난 중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 그곳에로의 인도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61:3]
주제1: [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주제2: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간구]
본절 초두에는,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접속사 '키'(*)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2절) 마지막 문구의 이유에 해당됨을 밝혀준다.
⭕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 '탕대'(*, 마흐세)는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혹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인공적 구조물(構造物)을 뜻한다(창 35:21; 왕하 9:17). 그런데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삼하 22:51).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 즉 위기에서 구출하시는 분이 되신다는 뜻이다(잠 18:10).
성 경: [시61:4]
주제1: [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주제2: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간구]
본절에 대해서는 (1) 다윗이 도피 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하나님께 경배하려는 것(Calvin), (2) 다윗이 도회 생활 중 머지않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에대한 확신을 가졌던 것(Keil), (3) 다윗이 도피 생활 중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한 것(rawlinson, Kidner) 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보여 주지만, 본 문맥에서는 세 번째 견해가 보다 자연스러운 것 같다. 한편, 장막에 거하는 것에 관한 이미지는 광야 경험에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출 33:7-11;민 11:16,17).
⭕ 주의 장막 -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 지는 곳, 혹은 교제 자체를 뜻한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희생 제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했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통하여 영적 교제를 이어갈수 있었다. 본 시편도 그러한 기도이다.
⭕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 닭이나 기타 새들이 날개를 펴서 그 새끼들을 비바람으로 부터 막아주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신32:11; 마 23:37).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겠다는 다윗의 각오를 보여 준다(57:1; 91:4).
성 경: [시61:5]
주제1: [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주제2: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간구]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어서, 본절이 4절의 이유임을 말해 준다.
⭕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 여기서 '들으시고'(*, 솨마타)는 완료형이므로, 본 문구는 과거 시제로 번역해야 적절하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다윗의 과거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awlinson). 한편 '서원'은 하나님께 대한 조건부 약속의 형태로 언급되기도 한다(창 28:20 이하; 삿 11:30,31). 그러나 여기서는 보다 차원 높은 뜻으로 쓰였다. 즉, 이는 기대하는 바 은혜에 대한 조건부적인 약속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자신의 간구를 들으셨다고 확신한 상태에서의 자발적 헌신 표시인 것이다(A.A.Anderson).
⭕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 하나님께서 다윗의 서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들어주셨는지를 말해 준다. 추측컨대,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에 의해 쫓겨다니던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과 동시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 곧 '가나안 땅'을 넘겨주신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처럼, 그 가나안 땅과 거기에 대한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비록 일시적으로는 압살롬의 수중에 있지만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문구는 이스라엘 왕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력히 피력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시61:6]
주제1: [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주제2: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간구]
⭕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 문자적으로는 '당신께서 왕의 날들 위에 날들을 더하사'의 뜻으로서, 다윗이 원수들로부터 보호를 받아 자신의 왕권이 계속 후대에 까지 물려지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따라서 여기의 '왕'(*, 멜레크)은 직접적으로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21:4). 그러나 다윗의 왕권은 그 후대에까지 물려질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되었다는 점(왕상 1:30; 2:4)에서, 여기의 '왕'은 그 후대에까지 계속 물려질 다윗가의 왕권을 뜻함도 분명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왕'은 다윗 왕권의 실체 곧 원형인 메시야의 왕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Calvin, Kidner).
성 경: [시61:7]
주제1: [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주제2: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간구]
⭕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게 하소서'로 번역한다(Weiser, NIV). 한편, 하나님 앞에 거한다는 것은 다윗 및 그 후손 중에서 나올 왕들이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서 그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거하리니'(*, 야솨브)가 왕의 통치 행위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 동사(삼하 7:1; 왕상 1:35; 2:12;왕하 13:13)라는 사실은, 위와 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
⭕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 '인자'(*, 헤세드)와 '진리'(*, 에메트)에 대해서는 57:3 주석을 참조하라. '예비하사'(*, 마나)는 '예비하다','지정하다' 혹은 '알리다' 등의 뜻이다. 여기서 다윗은 이러한 뜻의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인자와 진리'가 마치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수호 천사라도 되는 양 언급하고 있다(40:13; 잠 20:28). 아울러 그는 이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데 필요한 수단을 얼마나 손쉽게 마련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자 하기도 했다(Calvin).
성 경: [시61:8]
주제1: [땅 끝에서의 부르짖음]
주제2: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간구]
⭕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하나님께 나타내야 할 당연하고도 중요한 반응이다(59:17). 한편 '이름'에 대해서는 54:6 주석을 참조하라.
⭕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 앞 문구처럼,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과 7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 앞에 거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물론 보다 확대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51:19; 54:6) 혹은 하나님을 보다 굳게 의지하는 것(52:9; 55:23) 등까지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여기의 '서원'은 5절의 '서원'과는 다르다. 즉, 5절의 '서원'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에 행한 것이지만, 여기의 '서원'은 다윗이 금번 압살롬에게 쫓기면서 하나님께 행했을 것이다. 다윗은 압샅롬에게 쫓기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험에서 구출하시고 또한 자신의 왕권을 회복시켜 주실 것으로 확신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를 구체적으로 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성 경: [시62:1]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이 시편의 저작 배경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본 시편에도 앞 시편들에서 처럼 탄원시의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점에서, 다윗이 대적들에 대해 고난당하던 시절에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표제어 중의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며'라는 말은, '여두둔'이라는 악장(樂長)의 창법에 따라 노래 부르라는 뜻이다(대상 9:16;16:38,41).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 '나의 영혼'(*, 나프쉬)은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만'의 '만'(*, 아크)은 배타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불변화사로서 본 시편에서만 여섯 번 사용되고 있으며(2,4,5.6,9절), '오직' 혹은 '확실히'(진실로)라는 뜻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표현은 불의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데 반해 오직 하나님만 경외의 대상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Anderson). 그리고 '잠잠히...바람이여'(*, 두미야)는 '잠잠하다' 혹은 '고요하다'를 뜻하는 동사 '둠'(*)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잠잠함' 혹은 '침묵'을 뜻한다(22:2;39:2).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께' 혹은 '하나님을 향하여'의뜻이다(Weiser). 따라서 본 문구는 '나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고요하나이다'의 문자적 의미를 갖는다. 이 같은 사실은, 다윗이 조금 전까지 환난으로 인해 극심한 마음의 동요 혹은 불안에 빠져있었음을 암시해 준다(Calvin).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내어 맡김으로써 그분의 은혜에 따라 마음의 평강을 얻은 것이다(빌 4:6,7).
⭕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 본문은 앞 문구처럼, 다윗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했던 이유에 해당될 것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원 그 자체라는 사실(2절)에 근거하여 그분께 의지하였던 것이다(35:3; 37:39; 65:5).
성 경: [시62:2]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 오직 저만 나의 반석(盤石)이시요 - '반석'(*, 추르)은 '큰 바위'를 가리키며, 비나 바람에 의해 그 형태가 쉽게 변하는 모래 언덕과 대조된다. 바로 이 같은 대조점 때문에, '추르'는 하나님의 불변성(사 26:4)을 상징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된다(출 17:6; 신 32:4; 삼상 2:2). 따라서 본 문구는, 오직 하나님만이 신뢰의 대상이 되실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해 준다.
⭕ 나의 산성이시니 - 59:9 주석을 참조하라.
⭕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비록 일시적인 동요는 있겠지만 완전하게 넘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불변하셔서 신뢰의 대상이 되시기에 합당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크신 능력으록 붙드실 것이기 때문이다(Calvin).
성 경: [시62:3]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개역 성경처럼 '넘어지는 담...사람'을 핍박받는 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anderson, Dahood, NIV). 그러나 차라리 '언제까지 한 사람을 박격하려느냐 그를 죽이려는 자는 기울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다'로 번역함이 더 자연스러울 것같다(Weiser, Calvin, 박윤선). 그 까닭은, (1) 본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아닌 악인들의 멸망을 강조하고 있으며(9,10절) (2) '기울어지는 울타리 같다'라는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악인들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되며(사 30:13)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이라는 문구는 원문상 '너희가 일제히'의 다음에 있지 '사람' 다음에 위치해 있지 않다는 점 등 때문이다(박윤선). 결국 본문은 다윗의대적이 끊임없이 다윗을 위해(危害)하려고 하지만, 필경에는 곧 멸망 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 사람(*, 이쉬) - 밭에 정관사가 없으므로, '한 사람'으로 번역될 수 있다.이것은 곧 다윗을 뜻한다. 이 말은 다음의 '일제히'와 날카롭게 대조되어, 수많은 악인들에 둘러싸였던 의인 다윗의 의로움을 잘 시사해 준다. 박격(迫擊)하기를(*, 후트) 구약 성경 중 본절에서만 유일하게 나오는 동사로서 '외치다'의 뜻이며 어떤 사람에게 달려드는 것, 혹은 겁을 주기 위해서 소리지르면서 손을 들고 달려드는 것을 가리킨다(Keil).
성 경: [시62:4]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 '그 높은 위'는 다윗의 '왕위'(王位)를 가리키며 '떨어뜨리기만' 중 '만'(*, 아크)이 여기서는 악인들의 잔악성을 강조하는데 사용되고 있다(1절). 그리고 '꾀하고'(*, 야아츠)는 '모의하다' 혹은 '결의하다'의 뜻이다(대하 30:23; 렘 49:30).
⭕ 거짓을 즐겨하니 -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확실히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으로부터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위선적이며 불의한 재판을 했던 것을 연상시킨다(삼하 15:3-5; 16:7,8).
성 경: [시62:5]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본절과 6절에서는 1,2절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1절의 '구원'이 본절에서 '소망'으로 바뀐 것과 앞에서 보다 시인의 확신이나 위로가 한결 깊어졌다는 점 등이다(Kidner).
성 경: [시62:6]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2절과 거의 동일한 표현이다.
⭕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본절에는 2절과는 달리 '크게'라는 단어가 없다. 2절에서는 조그마한 일시적 요동의 가능성을 남겨두었으나 이제는 보다 발전하여 그러한 조그마한 일시적 요동도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시62:7]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 앞의 5,6절이 1,2절과 대칭되듯이, 본절은 3절과 대칭된다. 그러나 본절은 다윗의 비참상을 언급하는 3절과는 달리 사뭇 소망적이며 확신이 넘치는 내용이다. 그런 점에서, 본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5,6절은 그 내용상 1,2절과 유사하나 그 내적 분위기에 있어서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1,2절이 평강을 얻으려는 다윗의 노력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5,6절은 그 노력(1절)의 결과로서 이미 평강을 얻어 확신에 찬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구원'은 모반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보존하는 것, '영광'은 그 결과 회복될 그의 왕권을 뜻할 것이다.
성 경: [시62:8]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 여기서 '백성들'(*, 암)은 이스라엘 백성전체라기보다는 다만 그때 계속적으로 다윗에게 충성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 같다(삿 3:18; 왕상 19:21; 왕하 4:42 참조). '시시로'(*, 베칼 에트)는 '항상', 보다 구체적으로는 '역경 중에나 순경(順境) 중에도 변함없이'의 뜻이다(살전5:16-18). 또한 '의지하고'(*, 바타흐)는 '믿다' 혹은 '신뢰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삿 20:36; 사 59:4)로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것을 가리킨다.
⭕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 여기서 '토하라'(*, 솨파크)는 '붓다' 혹은 '쏟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물을 받듯이 마음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모두 내어놓는 것을 가리킨다(박윤선).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 이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성 경: [시62:9]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 진실로(*, 아크) - 본 시편의 다른 부분(1,2,4,6절)에서는 '만'으로 번역된단어이다. 여기서도 그 같은 배타적 의미를 살려서 다음에 나오는 '헛되고'라는 단어와 합하여 '헛될 뿐'으로 번역해 볼 수 있다.
⭕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 이것은 모든 인간(49:2)이 부패했다는 사실, 그래서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간이 다른 사람의 신뢰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렘 17:9; 롬 5:12; 엡 2:1). 이것은 영욕(榮辱)이 엇갈리는 삶을 살았던 다윗이 체험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바로 이러한 결론에 따라서, 다윗은 앞 절에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함을 권면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천한 자'(*, 베네 아담)는 문자적으로 다만 '사람의 아들들'의 뜻이다. '아담'은 인간의 연약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므로(민 19:11;23:19; 삿 16:17; 삼상 16:7), 개역 성경의 번역은 적절하다. 그리고 '높은 자'(*, 베네 이쉬)도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들'의 뜻일 뿐이다. 그런데 그중 '이쉬'가 '아담'과는 달리 강건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여기서와 같은 한글 개역은 타당하다(창 39:1; 삿 18:11; 왕상 1:42).
⭕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 문자적으로는 '그들은 저울에 올리면 다만 함께 입김일 뿐이라'의 뜻이다. 여기서는 앞 문구에서보다 더 직접적으로 인간은 결코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입김'(*, 헤벧)이라는 단어는, 앞 문구에서는 '헛되고'로 번역되었다. 또한 70인역(LXX)은 본 문구를 '그들을 저울에 달 때에 거짓되었도다' 저들은 다함께 헛된 것으로 되었도다'라고 번역하였다.
성 경: [시62:10]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 '포학'(*, 오쉐크)은 속임수, 폭력을 아울러 사용하여 상대를 학대하는 것을 가리킨다(73:8; 호 12:7). 압살롬과 그 지지 세력도 바로이 같은 '포학'을 통하여 권력 장악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 여기의 '재물'은 앞의 것들과는 달리 정직하게 취득된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Calvin). 재물이나 권력은 흔히 착취나(73:8; 렘 6:6; 22:17) 속임수 혹은 도적질(레 6:2,4; 겔 22:29)등의 결과로 얻어진다. 그러나 설령 합법적으로, 정직하게 얻은 재물이라 할지라도 신실한 마음을 앗아갈 위험을 항시 내포하고 있다(VanGemeren). 한편, '치심치'(* - ,쉬트 레브)는 '마음을 두다'의 뜻이며, 소망을 두어 그것에 자신의 미래를 전적으로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눅 12:14-21; 딤전 6:7). 이럴 경우 성도들은 필경 자신을 높이며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것이다(마 6:24; 눅 16:19-25).
성 경: [시62:11]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한 가지인데 내가 들은 것은 두 가지이다'로 번역함이 옳다(NIV, RSV, Keil, Weiser, C.b.Moll).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지만 다윗은 그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다음 문구와 다음 절의 두 가지 내용이 바로 다윗이 깨달은 두 가지 진리이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 (1)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과 상관없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은 없으며(마 9:29) (2)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지 않는 일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임을 뜻한다(Keil).
성 경: [시62:12]
주제1: [진정 의지해야 할 대상]
주제2: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고통에서 반드시 건져주시리라는 확신을 반영한다. '주'(*, 아도나이)에 대해서는 51:15 주석을 참조하라.
⭕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함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 '갚으심이니이다'(*, 솰람)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선악간의 보응을 뜻한다(잠 13:21: 렘 25:14). 그러나 이 문맥이 '주의 인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여기서는 의인에 대한 보상을 뜻함이 분명하다.
성 경: [시63:1]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 '엘로힘적' 시편들(Elohistic Psalter,42-83편)에서 '하나님이여'라는 강조적 호명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나타내는 '야웨'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뜻을 시사한다(Vangemeren). 그리고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문자적으로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라'이다. '하나님'(*, 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이처럼 다윗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함으로써,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가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내어 맡기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 '간절히...찾되'(*, 솨하르)는 '날이 새다', '일찍 일어나다', '부지런하게 구하다' 라는 뜻으로서 이 어근에서 '새벽' 혹은 '미명'(未明)을 뜻하는 명사 '솨하르'(*)가 유래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 문구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던 일을 뜻하는 듯하다(57:8).
⭕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당 - 이는 구체적으로 다윗이 피신햇던 유대 광야를 가리키기도 하지만(삼하 15:23; 17:29), 은유적 의미에서 메마른 사막 지대를 방황하는 자가 물을 갈급해 하듯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구하는 시인의 내면 상태를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anderson). 특히 '곤핍한'(*, 아예프)은 피로와 허기에 지친 상태를 가리킨다(창 25:29; 욥 22:7).
⭕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여기서 '영혼'(*, 네페쉬)과 '육체'(*, 바사르)는 별개의 뜻을 나타내기 보다는 둘 다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갈망하며'(*, 차마)는 '목마르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며, '앙모하나이다'(*, 카마)는 구약 성경 중 여기서만 유일하게 나오는 동사로서 마지막 힘까지 쇠잔시켜버리는 열렬한 갈망을 뜻하며 앞의 '갈망하며'와 거의 동일한 뜻이다. '목마름'은 종종 인간의 가장 절박한 결핍 상태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정도의 내면 상태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42:2; 143:6).
성 경: [시63:2]
주제1: [광양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본절과 3절에서 다윗은 그토록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거룩함'(성소에서), '권능'(*, 오즈), '영광'(*, 카보드), 그리고 '인자'(*, 헤세드) 가운데 계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사6:1-3). 특히 본절에서 다윗은 성소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과거사(過去事)를 회상함으로써(출 29:43; 레 9:6; 민 16:19), 다시 그러한 복된 경험을 갖고 싶음을 강력히 암시한다(삼하 15:25).
⭕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기 전, 곧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의 경험이다. 성소 내에서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다(삼상 4:21). 한편 '바라보았나이다'(*, 하자)는 주로 영적 시각(視覺)으로의 관찰 혹은 응시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개시나 환상을 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데 특별히 많이 사용되었다(욥 15:17; 19:26; 애 2:14).
성 경: [시63:3]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 '인자'(*, 헤세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2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각양의 은혜 혹은 변함없는 사랑을 뜻한다(36:7,8). 그리고 '생명'(*, 하임)은 '목숨' 그 자체를 포함하여 인간이 세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울러 가리킨다(Keil, weiser, Calvin). 물론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들임에 분명하다(골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은 까닭은, '주의 인자'가 있을 때 사람은 참된 행복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 4:14).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벗어난 생명은 그 자체가 죽음이나 다름없음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성 경: [시63:4]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이러므로 - 칼빈(Calvin)은 이를 '이와같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여건 속에서도'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압살롬에 의해서 쫓기는 등의 다윗의 곤고한 생활은 결코 계속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다음 문구에 속한 '내 평생'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은, 3절 전반절과 직접 연결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사역, 그분의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창 25:19-26 강해, '이름 짓기'; 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보다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보호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말한다. 한편, '내 손을 들리이다'는 간절한 기도 자세를 보여 준다(28:2; 딤전 2: 8). 이러한 자세는 고양된 심령을 상징한다기 보다는, 높이 든 빈 손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감 섞인 신뢰심을 나타내는것 같다(Anderson).
성 경: [시63:5]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 본시 초두의 극심한 갈증과(1절) 대조되는 본문은, 극심한 환난을 믿음으로 극복해가는 중에 마치 사막에 샘이 솟는 듯한 역설적 체험을 하게 된 시인의 영적 승리의 면모를 보여 준다(Kidner).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은 '영양가 높고 살진 동물을 잡아 잔치를 벌이는 일'을 상기시킨다(Keil, 신 32:2; 렘 31:13). '골수'(*, 혤레브)와 '기름진 것'(*, 데쉔)은 모두 짐승의 살진 부분 혹은 제일 좋은 부분을 가리킨다(73:7; 민 18:29,30; 렘 31:14).
성 경: [시63:6]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 잠을 자야 하는 밤의 대부분을 주님께 대한 묵상의 시간으로 삼았음을 가리킨다(Keil). 사실, 밤중 특히 '침상'위에 있을 때에는, 낮 동안의 모든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경건의 시간이 되기에 적절하다. 여기의 '기억하며'(*, 자카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베푸셨던 은총 및 언약을 되새겨보는 일을 가리킨다(창 9:15; 대하 6:42). 신자들은 이같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된다(욘 2:7).
⭕ 밤중에 주를 묵상할 - 앞의 문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데 '밤중에'(*, 베아쉬무로트)는 '지키다' 혹은 '경계하다'를 뜻하는 동사 '사마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통념적으로 '밤중'은 종종 악령들이 많이 활동하는 위험한 때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는 조용한 밤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와 묵상을 위해 더 없이 좋은 때였다(119:62, Anderson).
성 경: [시63:7]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 '주의 날개 그늘'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보호'를 뜻한다(17:8; 36:7;61:4; 91:4). 그리고 '즐거이 부르리이다'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섭리를 의지하여 압살롬의 반란이 필경 평정될 것이라는 확신을 반영하는 말이다(Calvin).
성 경: [시63:8]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7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 역시 계속적인 보호와 도움을 받기위해서는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기대하신다. 시인이 적극적으로 응답한 것을 나타낸다(신4:4; 10:20; 11:22; 13:4; 30:20). 한편 '따르니'(*, 다바크)는 '불다' 혹은 '연합하다'의 뜻이며(창 2:24; 욥 19:20; 애 4:4), 구체적으로는 본 시편에 계속 나타나 있는 다윗의 모든 경건과 신앙적 행위를 가리킨다.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 '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한다(17:7; 출 15:6; 사 41:10). 그리고 '붙드시거니와'(*, 타마크)는 원래 '받치다' 혹은 '쥐고 있다'의 뜻으로서, '오른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문맥에서 대개 '돕다'의 의미로 사용된다(41:12; 사 41:10).
성 경: [시63:9]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8절이 의인의 축복된 결국을 말하고 있다면, 본절과 다음 절은 악인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 준다.
⭕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 '땅 깊은 곳'은 죽은 자들이 가게 되는 음부 세계를 가리킨다(16:10; 86:13). 따라서 이 구절은 악인들이 그들의 악행에 대한 보응을 받아 육신적으로도 멸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다윗의 예언적 확신은, 압살롬의 죽음과 함께 성취되었다(삼하 8:9-15). 한편 혹자는 다윗의 이러한 표현을 고라 일당의 최후와 연관시키기도 한다(Alexander).
성 경: [시63:10]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칼의 손에 넘겨줄 것이다'로 번역되며, 전투 중에 죽게 됨을 뜻한다(렘 18:21; 겔 35:5).
⭕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 전투중 죽음을 당한 후 들판에 버려질 것을 뜻한다. 이때에 썩은 고기를 주식(主食)으로 하는 동물인 '시랑'은 그 송장을 모두 먹어치울 것이다. 본문은 시체가 고이 안장되지 못하고 훼손되는 것을 큰 수치와 불행으로 여겼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사 18:6; 렘 7:33, Anderson).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의 경우에도, 시체가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것을 대단히 불운하고 끔찍한 심판으로 여겼던 기록의 흔적이 있다(A.Heidel, the gilgamesh epic and Old testament Parallels).
성 경: [시63:11]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히브리 원문상 본절 초두에 있는 접속사 '웨'(*)를 '그러나'로 번역하면, 문맥을 매끄럽게 할 수 있다.
⭕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 '왕'은 다윗 자신을 지칭한다(18:50; 72:1). 이처럼 갑자기 다윗이 자신을 '왕'이라고 한 까닭은, 자신이 백성들의 대표임을 시사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럼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신앙행위로 인한 축복이 신정(神政) 왕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까지 내려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 여기서 '주'는 원문상으로 다만 3인칭 단수대명사일 뿐이다. 혹자는 이를 왕 곧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고, '왕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는 자...'의 뜻으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한다(Anderson). 물론 하나님의 이름으로 뿐 아니라 왕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던 기록이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삼상17:55; 25:26; 삼하 11:11; 15:21). 그러나 이 대명사가 지시하는 말은 '왕'보다 '하나님'이 더가깝고, 또한 본문이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문맥 중에 있다는 점에서'주'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봄이 나을 것 같다Alexander). '주로 맹세하는 것'은하나님을 자신의 신뢰 대상으로 삼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가리킨다(신 6:13; 사 65:16, Calvin).
⭕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 원문에는 본 문구 앞에 접속사 '키'(*)가 있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왜냐하면'의 뜻보다는 '반면에'로 번역함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NIV). 여기서 '거짓말하는 자'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불의한 재판을 일삼았던 압살롬과 그 부하들을 가리킨다(삼하 15:1-6). 그들은 한때 '주로 맹세한'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거역을 통해서 거짓임이 분명해졌다. 바로 이 같은 점에서, 그리고 불의한 재판을 했다는 점에서, 그들이'거짓말하는 자'임은 분명해졌다.
성 경: [시64:1]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 하나님이여 - 이에 대해서는 60:1 주석을 참조하라.
⭕ 너의 근심하는 소리 - '근심하는'(*, 시아호)은 '슬퍼하다' 혹은 '묵상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시아흐'(*)와 형태상 동일한 명사로서 억울한 일 등을 당하여 심히 슬퍼하거나 그것을 불평으로 표출하는 것을 가리킨다(142:2; 욥 9:27; 잠23:29). 보다 자세한 내용은 55:2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소리'는 다윗이 자신의 불편한 심기(心氣)를 드러낸 '말'을 뜻한다.
⭕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 본 구절은 역모자의 반란 목적이 왕위(王位) 찬탈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음을 암시한다(삼하 15:14;17:2).
성 경: [시64:2]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 주는 나를 숨기사 - 이는 안전하게 도피케 해달라는 간구이다(55:6-8).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피난처되심을 믿었기에 이러한 간구를 할 수 있었다.
⭕ 행악자의 비밀한 꾀 - 이는 역모자의 반란이 어떻게 계획되고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측면이다. 압살롬의 경우에서 보여지듯이 반역은 은밀히 진행되었을 것이다(삼하 15:1-12).
⭕ 죄악을 짖는 자의 요란 - 본 구절은 역모자의 반란이 어떻게 계획되고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측면이다. 즉, 처음에는 은밀하게 진행되었으나 결국 공공연히 무력을 동원한 반란이었을 것이다.
성 경: [시64:3]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 이 표현은 역모자들이 상대를 비방하여 곤궁에 빠뜨리기 위해 온갖 궁리를 한 다음 상대를 비방했음을 의미한다(52:2; 57:4; 59:7).
⭕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 본 구절도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압살롬의 경우와 같이 다윗으로부터 백성들을 이간시키기 위한 비방 행위를 뜻한다. 한편, '독한'이란 표현은 역모자들의 '말', 곧 그들의 '비방'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줄지를 시사해 준다(전 7:26). 그런데 여기서 비유로 사용되고 있는 화살은 고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끝부분에 독을 묻혀 적을 향해 쏜 그 화살을 가리킨다. 아라비아나 그리이스 등지에서 특히 많이 사용했던 이 독 화살은 적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처럼 다윗의 대적들은 말로서 다윗에게 치명상을 입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시64:4]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 '완전한 자'(*, 탐)는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대한 모든 의무 이행에 성실한 사람을 가리킨다(37:37; 욥 1:1). 한편, '숨은 곳에서...쏘려 하다가'란 표현은 역모자들이 다윗에 대한 비방을 암암리에 진행했음을 보여준다.
⭕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 본 구절의 '갑자기 쏘고'는 악인들의 악행과 관련한 기민성 혹은 능숙함을 보여준다. '두려워하지 않도다'라는 말은 하나님이나 그 공의로운 심판에 대하여 역모자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55:19). 이는 곧 역모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혀 소유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성 경: [시64:5]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 저희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 '악한 목적'(*, 다바르 라)은 '악한 계획'으로 번역함이 더 나을 것이다. 이 계획은 역모자들이 다윗을 비방하며 그들 백성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삼하 15:1-12) 그런 다음 그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것을 가리킨다(Rawlinson). 한편 '서로 장려하며'라는 말은 역모자들이 다윗을 몰아내려는 자신들의 결의를 날마다 확인하며 굳건히 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다윗이 자신들의 공작에 의하여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잃어가자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더욱 대담해졌을 것이다.
⭕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 '비밀히 올무 놓기'란 표현은 다윗에 대한 역모자들의 계속적인 중상 모략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또한 '함께 의논하고'란 말은 죄악을 향한 그들의 불의한 열심을 보여준다.
⭕ 누가 보리요 -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를 간섭지 않는다는 생각은 본서에서 어리석은 자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10:11; 59:7; 94:7).
성 경: [시64:6]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 다윗을 비방하거나 죽이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궁리하는 것을 뜻한다.
⭕ 우리가 묘책(妙策)을 찾았다 - 역모자들은 다윗을 곤궁에 빠뜨려 왕위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압살롬의 반역 당시 그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은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작전을 완벽하게 짰던 인물이었다(삼하 16:23). 이러한 사람이 반역에 가담했으니 다윗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묘책이 반드시 있었을것이다.
⭕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 공동 번역은 이 구절을 악인들이 자신들의 지혜에 대하여 스스로 감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누가 감히 우리의 비밀을 알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악인들의 교활성에 대한 다윗의 한탄으로 보아야한다. 따라서 '깊도다'(*, 아모크)란 동사는 '교활하도다'(NIV)로 번역함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기본적인 의미가 '깊다'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이처럼 '교활하다'의 뜻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잠 22:14; 23:27).
성 경: [시64:7]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본절은 의인들을 해치려는 악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를 당하는 것은 도리어 악인들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 '홀연히'란 표현은 악인들의 멸망이 (1) 시급하게(잠 24:22), (2) 예기치 않게(잠 6:15) 이루어질 것을 암시한다. 사실 악인들은 다윗을 해하려는 자신들의 음모가 완전할(6절)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비밀 유지가 철저히 이루어졌다(5절)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실패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처럼 '평강하다 평강하다'하다가, 급작스럽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것이다(렘 8:11). 한편, '상하리로다'(*, 나카)는 구약성경의 용례(用例)를 통해서 볼 때, 오히려 '죽임을 당하하리로다'로 번역됨이 더 나을 것이다(민 35:16; 수12:1; 사 37:38).
성 경: [시64:8]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야크쉴루후) - 이는 '넘어지다' 혹은'비틀거리다'를 뜻하는 동사 '카솰'(*)의 3인칭 복수사역형이다. 또한 여기에는 3인칭 단수 목적 어미가 붙어 있다. 따라서 본 단어는 '그들이 그를 넘어뜨렸다'로번역된다. 그래서 혹자는 여기의 3인칭 복수, 곧 '그들'을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힘이라고 보았다(Keil, Kirkpatrick). 그러나 이 견해는 다음 구절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오혀려 본 구절은 '그들이 패망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본 단어의 원형인 '카솰'은 문자적으로 실족(失足)을 뜻하기도 하지만, 악인들의 멸망 혹은 파멸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R.L.Harris).
⭕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 이는 역모자들이 왜 실패하고 말았는지에 대한 최종적 결론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찾았던 묘책에 의해 스스로 망하게 되었다.
⭕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 이러한 행동은 악행을 일삼다가 패망한자들에 대한 조롱의 표시이다(22:7; 렘 48:27). 그런데 흠정역은 '머리를 흔들리로다'(*, 나다드)를 '도망하다'로 번역함으로써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손상시켰다. 물론 '나다드'라는 동사의 주요한 의미가 '도망하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동사에는 '흔들다' 혹은 '움직이다'의 뜻도 있음이 사실이다(Keil).
성 경: [시64:9]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엄한 심판이 악인들에게 내려진 사실을 목격한 자들에게 이러한 반응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수 2:9-11). 그들은 자신들도 패망한 역모자들처럼 악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 '그 행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의인에 대해서는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악인에 대해서는 그의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행하신 사실을 가리킨다. 한편, '깊이 생각하리로다'(*, 사칼)는 '깨닫다' 혹은 '통달하다'의 뜻으로서 어떠한 사물의 본질에 대해 확고하게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느 8:13; 사44:18).
성 경: [시64:10]
주제1: [악행과 그 결과]
주제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탄원함]
⭕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 이러한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환난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음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이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명칭인 '여호와'를 사용함으로써 의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환난에서 구출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곧 '헤세드'(51:1) 때문임을 암시한다.
⭕ 그에게 피하리니 - 이러한 고백은 과거의 체험을 근거로 하여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인정하고 그 분께 자신의 미래를 맡김을 뜻한다(63:7).
⭕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 '마음이 정직한 자'(7:10; 11:2)는 '의인'과 동의어이다. 한편, '자랑하리로다'(*, 보 할랄)는 '그분 안에서 찬양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 행위'는 의인들이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되어질 때 이루어질 것이다(63:11). 따라서 본 구절은, 의인들이 환난을 당하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어 결국에는 그 도우심에 대해 자랑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시65:1]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 '기다리오며'(*, 두미야)는 '침묵'의 뜻일 뿐이다(62:1). 또한 본 단어는 히브리 원문에서는 '찬송'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시온에서 침묵의 찬송이 주께 있사옵니다'의 문자적 뜻을 갖는다(RSV). 이에 대해서 (1)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께 찬송을 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말한다는 해석(Calvin, Weiser) (2)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다는 해석(박윤선). (3)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모두 맡김을 뜻한다는 해석(Keil) (4) 성소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에 의하여 하나님께 조용히 찬송이 드려지는 것을 묘사한다는 해석(rawlinson) 등이 있다. 그런데 본 구절은 대구(對句)를 이루는 다음 구절과 합치되는 뜻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은 결과로서, 하나님께 대한 서원 이행 행위를 묘사함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위의 네 가지 견해 중 (2)의 것이 가장 타당하다. 한편, '시온'은 하나님의 성소가 있던 예루살렘을 지칭하기도 하지만(대하 5:2; 사 10:12; 렘 26:18), 여기서는 하나님의 성소를 가리킨다.
⭕ 사람이 서원을 주게 이행하리이다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이전에 서원했던 바를 실천하겟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61:8). 물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슨 은총을 베풀어 주신 후에만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서는 안 된다(살전5:16-18). 그렇다면 성도들은 본 구절에서 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경우에는 더욱 더 감사하는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한다.
성 경: [시65:2]
주제1: [하나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 다윗이 하나님을 이처럼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실제로 하나님에 의한 기도 응답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울과 압살롬을 비롯한 많은 대적으로부터 쫓길 때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간절히 기도하였으며(54:1;55:1; 56:1; 57:1; 59:1)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매번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밖에 없다라고 하여 기도 응답의 필연성을 강조하였다.
⭕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 여기서 '모든 육체'란 본서가 보편주의 사상을 다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5,8절) 반드시 이스라엘로 제한될 수 없다. 차라리 혈통이나 신분의 구별없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의 총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4절). 한편, '주께 나아오리이다'란 표현은 사람들이 (1) 하나님을 자신들의 구원자로 삼는 것, (2)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기도하는것 등을 가리킬 것이다(22:27; 86:9; 사 66:23; 렘 16:19).
성 경: [시65:3]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 혹자는 본구절을 조건절로 해석하여 '죄악이 나를 이겼다면' 혹은 '죄악이 나에게 벅찬 것이었다면'으로 번역하며, 또 어떤 학자는 시간을 나타내는 종속절로 해석하여 '우리가 죄악에 의해 압도되었을 때'(Kidener) 또는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이겼을 때'(Weiser)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는 독립절이 사용되었으므로 개역 성경처럼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 여기서 '사하시리이다'(*, 카파르)는 원래 '덮다'의 뜻으로서, '죄를 속량하는 것' 혹은 '화해하는 것' 혹은 '죄를 깨끗이 하는 것'을 뜻한다(창 32:20; 출 30:10; 레 4:20; 렘 18:23). 따라서 본 구절은 죄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사죄의 은총을 간구함으로써 모든 죄 문제를 해결받는 것을 뜻한다(요일 1:9).
성 경: [시65:4]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 '택하시고'(*, 바하르)는 '쪼개다'혹은 '통찰하다'의 뜻을 갖는 아랍어 어근 '바하라'와 관련 있다. 즉, 이 동사는 만민들 중 특별히 당신의 백성을 뽑아내신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가리킨다(신 7:6).한편, '가까이 오게 하사'(*, 카라브)는 하나님께 경배 혹은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출 3:5; 신 5:23). 이처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만의 특권이었다. 사실 죄악 투성이의 인간은 본질상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출19: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는 자신에게 담대히 나아올수 있도록 허락하셨다(엡 3:12).
⭕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 '주의 뜰'은 제사장이 아닌 평신도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의 한 구역을 뜻한다(레 6:16). 그리고 '거하게 하신'(*, 사칸)은 친근과 근접의 개념이 강조되는 단어(68:16)이다(V.P.Hamilton). 따라서 '주의 뜰에 거한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의 관계로 들어가게 됨을 뜻한다. 한편, '복이 있나이다'는 사죄의 은총을 받는 일(요일 1:9)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필요 적절한 자비를 얻는 일에 까지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표현이다(Hengstenberg).
⭕ 우리가...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 본 구절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위로부터 주어지는 '아름다움'(*, 투브), 곧 신령한 은혜로 인하여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신자들에게 참된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권세나 명예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진정한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령한 은혜'를 결코 한꺼번에 받을 수는 없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갖는 것이 그 비결이다.
성 경: [시65:5]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본절에서 본시의 저자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의 구원자도 되신다는 보편적 사상을 주장한다.
⭕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 '우리 구원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호칭이다. 다윗은 바로 이 같은 호칭의 사용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게속 펼쳐지기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구원자도 되심을 시사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사실은(출 19:6) 이스라엘 백성들만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오해하여 그들은 단순히 선민사상에 안주했던 것이다.
⭕ 의를 쫓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들을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구원하실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의를 쫓아'(*, 베체데크)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 결과와 수단이 공평 무사(公平無私)할 것을 말해 준다(Kidner). 한편, '엄위하신 일'(*, 노라오트)은 원수들을 징책하기 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심판 뿐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자비로운 행위를 가리킨다(신 8:21; 삼하 7:23; 사 64:2).그리고 '응답하시리이다'(*, 타아네누)는 미완료 시제로서 다윗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했던 바(2절)를 현재 응답받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을 말해 준다(Keil).
성 경: [시65:6]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여기서부터 마지막 절(13절)까지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권능이 이스라엘 땅에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미치고 있음을 진술한다. 그는 이같이 말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손길을 뻗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으신 분임을 확증해 주는 첫 번째 증거이다. 특히 '산'은 하나님의 능력과 확고한 불변성의 상징이다(Rawlinson).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주는 첫 번째의 실례로서 산을 거론한 것은 산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보다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관해 보다더 강력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Calvin).
⭕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 '띠'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한 개인의 인격 및 신분을 대변해 주는 상징물(삼상 18:4)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물, 특히 여기서 '산'을 창조하신 것은 자신이 권능자이심을 보여주는 권능의 띠를 띤 것과 다름없다(93:1).
성 경: [시65:7]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본절에서도 다윗은 6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의 힘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까지도 통제하고 계시는 분임을 진술하고 있다.
⭕ 바다의 흉용(洶湧) - '흉용'(*, 쉬온)이란 말이 '황폐하게 하다'를 뜻하는 동사 '솨아'(*)에서 파생된 명사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 구절은 배를집어 삼켰듯 높은 파도가 큰소리를 내며 몰려드는 것을 가리킨다(사 17:13).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바다의 흉용'을 다스릴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증거한다(욥 38:8;잠 8:29; 사 51:10; 렘 5: 22; 마 8:26,27).
⭕ 물결의 요동 - 문자적으로는 '그것들의 파도들의 흉용'이다. 여기서 '그것들'은 '바다'를 뜻한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앞의 '바다의 흉용'과 동일한 의미이다.
⭕ 만민의 훤화 - 앞의 두 구절은 자연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력을 가리킨다. 반면본 구절은 인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뜻한다. '훤화'(*, 하몬)는 본래 '소동' 혹은 '소란'의 뜻이며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주제넘고 건방진 반역을 가리킨다(사 29:5,7,8). 그리고 '만민'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인간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혹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만민의 '훤화'는 유사(有史) 이래로 잠시도 그치질 않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만민'의 모든 시도를 권능으로 진정시켜 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권능자이심을 만 천하에 여실히 드러내셨다(사 17:12-14).
성 경: [시65:8]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徵兆)를 두려워하나이다 - '땅 끝에 거하는 자'란 팔레스틴 지역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 곧 미지(未知)의 땅에 살았을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의 징조'란 만물에 드러나고있는 하나님의 신성(神性)과 기적적인 역사(役事)를 의미한다. 또한 '두려워하나이다'란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공포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존경 혹은 경외심을 뜻할 것이다(Keil).
⭕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 본 구절(*, 모차에 보케르 오에레브 타르닌)은 '아침이 되는 곳과 저녁이 되는 곳에서도 즐거워하게 하시며'로 번역됨이 더 낫다. 즉, 이는 '아침이 되는 곳' 곧 동쪽 끝의 사람들과 '저녁이 되는 곳' 곧 서쪽 끝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성과 기적적 역사를 인하여 즐거워한다는 뜻이다(사 24:16). 다시 말하면 만민이 하나님께서 대자연의 지배자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에 즐거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 경: [시65:9]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 '권고하사'(*, 파카드)는 '방문하다' 혹은 '감찰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땅의 형편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살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본 구절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친절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물을 대어'는 앞 구절과 연속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즉, 땅의 형편을 살피신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필요 적절한 비를 내려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 심히 윤택케 하시며 - 이는 하나님께서 땅으로 하여금 많은 수확이 가능하게끔 축복하시는 것을 뜻한다.
⭕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 강'(*, 펠레그)은 '원천'(源泉)의뜻이며,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비를 내리시기 위하여 하늘에 물을 모아놓았다고 생각되어졌던 저수지를 가리킨다(Keil). 현대 과학적으로 본다면, 구름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물론 고대인들도 비의 원천을 하늘의 구름으로 생각했었다(왕상 18: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비의 원천을 '하나님의 강'으로 표현한 까닭은 강우(降雨)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서 나타날수 있는 현상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 본 구절에는 인간의 먹는 문제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강조되어 있다. 특히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땅에 필요 적절하게 비를 내리시고 비옥하게 하시어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65:10]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본절에는 우리가 일용할 앙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다윗의 이 같은 반복적 언급은 하나님의 자비를 간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시혜(施惠)를 받고 있음을 일깨우기 위함이다(Calvin). 하나님의 자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연의 일반적 법칙과 자신들의 노력이 합력되어 자신들이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 이것은 산출된 알곡에 의해서 울퉁불퉁한 밭 표면이 덮여진 모양을 연상시킨다(rawlinson).
⭕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 '단비'(*, 레비빔)는 일반적으로 '소나기'를 뜻한다(72:6; 렘 14:22). 그런데 여기서는 식물이 수분을 필요로 할때 내리는비를 가리킨다. 한편, '부드럽게 하시고'는 밭 이랑에 있는 흙의 유실(流失)이 없이 밭이 씨앗의 파종을 위해 부드럽게 되는 것을 뜻한다. 밭에 수분이 없으면 흙이 굳어져 딱딱하게 되어 파종해도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힘들며 또한 파종된 씨앗이 흙 표면에 노출되어 새들에게 먹히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파종 적기(適期)에 비를 주셔서 파종된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다.
⭕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 싹이 잘 돋아날 수 있도록 해주심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께서 싹이 자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만드셨음을 뜻한다.
성 경: [시65:11]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주의 은택으로 연사(年事)에 관 씌우시니 - 이는 하나님께서 그 해 가을에 풍년이 들게 하시어 많은 익은 곡식으로 들을 아름답게 장식하실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연사'(*, 쉐나트)에는 정관사가 없다. 따라서 본 구절은 어떤 특정한 해에만 하나님께서 '관 씌우시는' 은택이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연례적(年例的)으로 항상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 본 구절을 직역하면 '당신의 길은 기름진 것을 떨어뜨리며'이다. 이말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는 뜻이다. 특히 '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갈레카'(*) 지나간 흔적'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강조해 준다.
성 경: [시65:12]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 본 구절은 인공적인 경작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짐을 보여준다(욥 38:26) 특히 '들의 초장'은 소나 양을 먹이기에 적절한 목초지(牧草地)를 뜻하므로 본 구절은 밭의 소산뿐 아니라 가축을 위한 모든 여건도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작은 산들의 기쁨이 스스로를 둘렀나이다'로 해석된다. 이것을 앞 구절과 연결시켜 구체적로 표현하면, 작은 산이 많은 풀로 덮이게 된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65:13]
주제1: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
⭕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 여기의 '초장'(*, 카림)은 12절의 '들의 초장'보다는 좁지만 자연적 조건이 더 나은 출발을 가리킨다. '입혔고'란 표현은 가득한 것을 말한다.
⭕ 골짜기는 곡식이 덮였으매 - '골짜기'는 언덕과 언덕 사이의 밭으로서, 팔레스틴에서는 중요한 경작지로 이용되었다(삼상 6:13). 여기서는 주로 밀이 경작되었다.
⭕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 앞절과 본절에서 '들의 초장'과 '골짜기' 등을 의인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저희'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자연을 의인화시킨 경우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발견된다(사 14:8;35:1; 55:12). 그런데 여기서 '즐거이 외치고'(*, 이트로아우)와 '노래하나이다'(*, 이쉬루)는 모두 미완료 시제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자연의 찬양은 어떤 한 해에 국한되지 않고 해마다 계속될 것(11절)을 시사한다(Calvin).
성 경: [시66:1]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이 시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시로서 그 저작자는 다윗, 여호사밧, 히스기야 등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저작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판명할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시편의 기자를 유다의 한 왕 정도로 추측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이다. 한편, 본 시편은 '나'가 주어인 개인적인 찬양시가 '우리'가 주어인 집단의 찬양시와 조화되어 예배용으로 적합하며, 이에 따라 이 시편은 실제로 예배 때에 사용되어 찬양대와 예배자들에 의해서 공히 불려졌었다고 한다.
⭕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 '온 땅' 곧 '온 세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복에로 초대하는 구절로서(Rawlinson) 하나님께 대한 호칭 외에는 100편 첫 구절과 동일하다. 이같이 함으로써 시인은 하나님께서 만 백성으로부터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나타냄과 아울러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 속에 포함될 것을 암시적으로 예고하는 듯하다(Calvin). 한편,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는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억지로 혹은 형식적으로 해서는 안 됨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온전히 마음을 바치는 자발적이고도 정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성 경: [시66:2]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본절은 예배시 찬양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보여준다. 그중 하반절이 찬양의 자세 혹은 방법에 관한 원칙이라면 본 문구는 찬양의 주된 관심사 혹은 내용에 관한 원칙을 보여준다(Kidner).
⭕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 '이름'은 그분의 '인격'이나 '사역' 등을 뜻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25:19-26 주제 강해, '이름 짓기'를 참조하라. 한편, '영광'(*, 케보드)은 '무겁다'를 뜻하는 상태동사 '카쎄드'(*)에서 온 단어로서, 존엄성 혹은 위대성을 나타낸다(rawlinson). 그리고 '찬양하고'(*, 자마르)라는 동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베푸신 위대한 일을 기념하기 위한 찬양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삿5:3). 그런 점에서 본 동사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앙 행위에 앞서 그분께 대한 분명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칼빈(Calvin)은 본 문구가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과 존귀에 합당하게 찬송하라'는 뜻을 갖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 이 문구(*, 시무 카보드 테힐라토)에 대해서는 (1) '테힐라토'를 목적을 나타내는 대격으로 보고 '그분께 찬송을 영화롭게 드리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해석(Calvin, Aben Ezra, Weiser, 개역 성경) (2) '카보드'를 목적을 나타내는 대격으로 보고 '찬송하여 영광을 돌리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해석(Hengstenberg, Keil) (3) '카보드'와 '테힐라토'를 동격으로 보고 '그분께 영광과 찬송을 높이다' 번역해야 한다는 해석(Hupfeld, NIV) 등이 있다. 그러나 문맥상 찬송의 방법을 잘 보여주는 (1)의 견해가 가장 적절한 듯하다(Kidner). 그렇다고 한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 절대적인 존귀성에 합당한 방식으로 찬양하라는 뜻이 된다(CAlvin).
성 경: [시66:3]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하나님께 고하기를 - '고하기를'(*, 아바르)은 이 문맥에서는 '고백하다', '시인하다' 혹은 '인정하다'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신 26:17,18).
⭕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 '주의 일'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기적적인 역사(役事)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엄위하신지요'(*, 노라)는 '두려운지요'의 뜻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기적적인 역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음은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 백성들에게 까지 크나큰 두려움을 안겨주었었다(출 15:14-16; 수 2:9).
⭕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 '주의 원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려고 하는 개인, 혹은 일단의 세력들을 총칭한다. 사실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경배하지도 않는 이방인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주의 원수'임이 분명하다. 한편, '복종할 것이며'(*, 카하쉬)는 '실패하다' 혹은 '거짓말하다' 등의 뜻을 갖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피할 목적으로 자신의 본심과는 다르게 일시 굴복하는 것을 뜻한다(18:44; 76:12). 예컨대 애굽의 바로 왕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두려운 재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잠정적으로 굴복했었다(출 12:29-33). 그러나 바로 왕은 곧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병거를 동원하여 추격했었다(출 14:5-9).
성 경: [시66:4]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여기서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본 시편의 저자가 한 가지의 일을 거듭 강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저자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합당하게 찬양할 능력조차 제대로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녀무나도 연약한 인간이지만 그들의 주의를 계속 환기(換起)시킴으로써 더 나은 찬양에로 인도하고자 한다(Calvin). 아무튼 본절도 1절처럼 장차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고전 15:24,25).
⭕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 본절은 앞의 '주를 찬양하며'를 반복 강조한 표현이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앞에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언급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그분의 성품 혹은 사역에 주안점을 둔 표현이라는 점이다.
성 경: [시66:5]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 '와서'(*, 레쿠)는 초청이나 도전을 제시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종종 사용되는 단어이다(16절; 사 2:3,5 참조). 그런데 여기서는 이러한 뜻 이상을 내포하는 말로 쓰였다. 즉, 본문에서의 의미는,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를 믿지 못하겠거든 인류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미 밝히 드러난 증거들을 가서 보라'로 이해된다(Alexander). 아울러 본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권능이 크신 손을 간과하고 헛된 것으로 향하려는 우리 인생들을 간접적으로 책망한다(Calvin). 그러면서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성 경: [시66:6]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 이는 바로 왕의 추격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초자연적 역사(役事)였다(출 14:21-25).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갈라진 홍해를 건너 바로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다.
⭕ 무리가 도보(徒步)로 강을 통과하고 - 앞 문구의 마지막 부분인 '하셨으므로'라는 표현은, 본 문구가 앞의 문구에 종속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본 문구는 앞 문구에서 말하는 바, 곧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과는 다른 사건을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즉, 본 문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때로부터 40년 후 여호수와의 인도 아래 요단 강을 건넌 사건을 말하고 있다(수 3:1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이 홍해를 가르신 사건과 요단 강을 마르게 하신 사건을 하나로 말하고 있는 것은, 두 사건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일련의 불가분리적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 '거기서'(*, 쇰)는 저자 자신이 과거로 돌아간 듯한 입장에서 문장을 기록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Keil). 다시 말해서 다윗은 그 조상들이 홍해를 건넌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사람이지만 자신을 홍해를 건넌 조상들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표현한다(출 14:21-25; 수 5:1). 사실 이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스 9:6,7: 느 9:32; 히 7:10)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1) NIV는 본 문구를 '그 분 안에서 기뻐하자'로, (2) 바이저(Weiser)는 '거기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우리'라는 말과, '기뻐하였도다'(*, 니스메하)가 미완료시제라는 점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미완료시제라도 '솽'(*)이나 '아즈'(*) 다음에 나올 때는 부정 과거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Keil).
성 경: [시66:7]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 '능'(*, 기보라)은 '전쟁에서 이기다' 혹은 '능가하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가바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전쟁에서 이길만한 막강한 능력이란 뜻이다(삿 8:21; 왕하 18:20). 그리고 '치리하시며'(*, 마솰)는 어떤 물리적 힘의 행사를 통한 통치 혹은 주관(主管) 행위를 뜻한다(창 3:16; 37:8).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기적적 능력을 동원하사 당신께 반역하는 자들에게 필요 적절한 징벌을 내리심으로써 이 세상을 마지막 날까지 통치하시는 것을 뜻한다(단 4:25). 사실 하나님의 이같은 통치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들은 너무나도 많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학대하였던 이교적(異敎的)인 국가들을 차례로 멸망시키셔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끔 하셨다.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적그리스도 국가에 대해서도 그같이 하시겠다는 분명한 예언도 있다(단 2:43-45). 그런데 칼빈(Calvin)은 '영원히'(*, 올람)를 '세상'으로 보고, 본 문구가 하나님의 세상 국가에 대한 통치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도 다스리고 계심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올람'이라는 단어가 '세상'의 뜻으로 쓰인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개역성경처럼 ''영원히'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까닭에,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의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심과 아울러 이 모든 역사의 흐름을 궁극적으로 당신의 뜻 가운데로 이끄시기 위함(Rawlinson)일 것이다.
⭕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돌보시는 역사 중의 하나를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들이 당신의 백성들을 해하려고 하는지를 살피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주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일, 곧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일은 그러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 백해 무익(百害無益)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에 의해서 도리어 멸절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거역하는 자는 자고(自高)하지 말지어다 - '거역하는 자'(*, 하소르림)는 '완고하다' 혹은 '반항적이다'를 뜻하는 동사 '사라르'(*)의 분사로서, 송아지가 제 고집대로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완강하게 버티거나 저돌적인 몸짓을하듯(사 65:2; 호 4:16),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일에 일단 성공함으로써 '자고하게' 될 것이다(사 10:5-9). 그러나 그러한 거만함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엄중히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철저히 멸망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사 10:12; 말 4:1; 눅 1:52).
성 경: [시66:8]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송축하며(*, 바라크) - '복을 빌다', '찬양하다' 혹은 '무릎을 꿇다'의 뜻까지 내포하는 말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의 동사가 '가볍게 생각하다'는 의미인 '칼랄'(*)이다. 한편, 본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만방의 모든 이들로부터 찬양받기에 합당하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킴으로써 우주적 찬양에로 초대하고 있다(1,4절 참조).
성 경: [시66:9]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두시고 - '영혼'(*, 네페쉬)은 차라리 '생명'으로 번역함이 더 낫다. 한편 '살려 두시고'(*, 하삼...바하임)는 '살려'와 '두시고' 등 두 개의 분사로 이루어진 문구로서 '살아있는 자 가운데 두고'의 뜻이다(has kept us among the living, RSV). 이는 하나님께서 과거의 조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차후에도 당신의 백성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출하실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66:10]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여기서부터 12절까지는 9까지의 언급에서 제기될 수 있는 일말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한 부분이다. 즉,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항상 지켜주신다면, 왜 그들이 때때로 이방인들에 의한 고통을 당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으로부터 일시 고난당했던 일들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여기서 '시험하시되'(*, 바한)는 원래 금속의 속성 및 순도를 측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 '단련하시기를'(*, 차라프)은 금속의 순도 측정을도가니에 집어 넣어 그 금속에 섞여 있는 잡성분을 제거하는 일을 가리킨다. 결국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 의해 잠시 고통을 당한 것은, 그듸을 보다 순수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뜻에 따른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그 같은 일시적 고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히려 커다란 유익이었음이 분명하다(욥23:10; 슥 13:9; 히 12:10).
⭕ 은 - 특히 이 금속은 순수하다고 인정을 받기까지 계속적으로 거듭거듭 연단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한 연단의 과정이 요구되는 '은'으로 비유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연단이 지극히 필요했음을 암시한다(Rawlinson).
성 경: [시66:11]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 본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당한 환난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러한 시험의 목적이 백성들 가운데서 블경건한 악습을 제하고자 하는데 있었음을 말하려고 함은 분명하다(렘 6:29 참조). 한편, 본절의 '그물'(*, 메추다)을 '요새'(Cohen, Delitzsch) 혹은 '광야'(Dahood) 등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본절과 다음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비참상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그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다(KJV, RSV, Anderson). 한편, 겔 12:13; 17:20 등에서는 하나님이 악행자들을 그의 그물에 포획하는 사냥꾼처럼 묘사되고 있다.
성 경: [시66:12]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 '사람'(*, 에노쉬)은 반항적이고 오만하여 자신을 높이려 애쓰지만 결국 소멸되버리는 피조물로서의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69:3; 사 29:3 참조, Keil). 따라서 이 말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압제자들 또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필경 파멸케 되고 만다는 암시를 준다. 한편, '타고'(*, 라카브)는 원래 '말을 타다'의 뜻이다. 결국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말이나 병거를 탄 사람들을 지나가게 한 것과 같은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시련을 겪었다는 뜻이다.
⭕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 '불과 물'은 고통스럽고 위험한 장난을 상징한다(사 43:2).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련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만큼 심각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 주께서...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 '풍부한 곳'(*, 르와야)은 '물릴 정도로 실컷 먹다'는 뜻의 동사 '라와'(*)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먹을 것이 많은 곳, 혹은 마음대로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여건을 뜻한다. 시련을 당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를 속박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한 굼주림의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한편, '끌어내사...들이셨나이다'(*, 토치에누)는 '나가다'를 뜻하는 동사 '야차'(*)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본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 의한 치욕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성 경: [시66:13]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레 1:3-9 주제 강해, '번제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 주의 집 - 본 시편의 저자 유다의 한 왕으로 본다면(1절), 여기의 '주의 집'은 말할 나위도 없이 솔로몬에 의해 건축된 '성전'임이 분명하다.
⭕ 서원을 갚으리니 - 여기서 '서원' (*, 네데르)은 본 시편의 저자가 지난 날에 만났던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했던 서원일 것이다. 그는 그때,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그렇게 해주실 경우 감사의 제사를 드릴 것을 약속했음직하다(61:8).
성 경: [시66:14]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이는(*, 아쉐르) - 앞절의 '서원'을 선행사로 삼는 관계 대명사이다. 즉,이 관계 대명사 이하(以下)는 앞절의 서원이 언제 행해졌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 '발한 것이요'(*, 파차)는 '하품하다', '찢다', '입을 열다'의 뜻으로서 크나큰 시련을 당하여 어쩔 수 없이 특별한 무엇을 약속할 때 사용된 동사이다(삿 11:35, Keil). 그렇지만 이 맹세는 하나님을 일시 기만하여 위기를 모면하려는 얄팍한 목적을 갖지는 않는다. 도리어 자신을 구원할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자신의 마음을 확증키 위한 수단이다(Calvin).
성 경: [시66:15]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서원(13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행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특히 본절은, 본 시편의 기자가 상당히 높은 신분임을 확증해 준다. 즉, 본절에 등장하는 상당한 수량의 제물들은 비천한 사람들에 의해서 결코 드려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컨대 '수양'은 주로 대제사장, 종족의 두령 등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물이다. 한편, '향기'(*, 케토레트)는 제물을 제단 위에서 태움으로서 발생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를 뜻한다.
성 경: [시66:16]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한님의 행하심을 찬양]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 이는 신자들, 혹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지칭하는 일반적 표현이며 시편의 다른 곳에서 '의인'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에 해당한다(1:1). 여기서 본서 기자가 자신의 '선포'를 들은 자를 제한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잇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 만이 기자가 말하지 않고는 배길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잇으며, 위선으로 가득 찬 사람이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러한 '선포'가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Calvin). 아울러 본문은 여호와의 구원의 은총을 다른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 자세를 엿보게 하기도 한다(22:22, Anderson).
⭕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 - 하나님께서 시인을 환난(14절)에서 구출해 주신 것을 뜻한다. 또한 본절 하반절은, 구원을 얻고 또 계속 평안한 가운데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복종하고 헌신하는 것임을 역으로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성 경: [시66:17]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 '부르짖으며'(*, 카라)는 주로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34:6; 81:7). 그리고 '입으로'는 하나님께 열정적인 기도를 했었음을 보여준다.
⭕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 문자적으로는 '찬송이 나의 혀 아래 있도다'의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그에 대한 찬송의 준비를 갖춘 것을 가리킨다(Keil, C.B.Moll, Rawlinson).
성 경: [시66:18]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내가...죄악을 품으면 - 이 같은 가정(假定)은 자신의 결백함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품으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혹은 '눈 앞에 무엇을 그리다'(창 20:10)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기자가 특별한 악행을 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속에서 구체화시키지도 않았음을 보여준다.
성 경: [시66:19]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 저자가 혹 자신에게 은밀하게 행한 죄가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게 될까 염려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완전히 죄와 상관이 없는 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멀리하려고 힘쓰며 애쓰는 사람을 찾으실 뿐이다. '주의하셨도다'(*, 카솨브)는 '자세히 귀담아 듣다'의 뜻이다(10:17; 사 10:30; 28:23).
성 경: [시66:20]
주제1: [만유의 주, 곧 나의 주]
주제2: [하나님의 행하심을 찬양]
⭕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허락하신 데 대한 결론적 다짐이다. 인자하심(*, 헤세드)은 결코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뜻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환난 중에서 구출해 주시는 일을 가리킨다(62:12).
성 경: [시67:1]
주제1: [만방에 선포하는 주의 구원]
주제2: [만방에 하나님을 선포함]
⭕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 본절은 다음 절과 함께 복을 간구하는 기원문의 형태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 되심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축복의 근거요, 그 백성들에게 과분하기까지 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즐거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VanGemeren). 한편, '긍휼히 여기사'(*, 예하네누)는 '하난'(*)의 미완료 시제로서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원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하난'은 원래 '구부리다', '아랫 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는 뜻으로서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겠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반응을 나타낸다(Edwin Yamauchi).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치사 - '그 얼굴빛'(*, 파나이우)은 문자적으로 '그분의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파님)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창 4:16;27:7). 그리고 얼굴이 빛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이며 상대방에 대한 호의의 표현이자(잠 16:15 참조, Anderson) 관계 회복의 표현이기도 하다(Eichrodt).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하사 은택을 베풀어 주시기를 함께 바라는 기도이다.
성 경: [시67:2]
주제1: [만방에 선포하는 주의 구원]
주제2: [만방에 하나님을 선포함]
본절의 내용은, 1절과 갈은 기도가 응답될 때에 성취될 수 있다. 즉, 제사장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출 19:6)이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 아래 있을 때에, 이방인들도 그들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 주의 도를 땅위에...알리소서 - 이것은 억지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구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에 충만하고 넘침으로써, 그 결과 그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이 이스라엘에 충만하게 됨으로써 이를 목도한 이방 민족들마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주권을 인정함과 아울러 동일한 구원의 축복에 동참하기를 갈망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민족적 이기심이나 배타주의적 편견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계에 편만하게 되기를 바라는 탁월한 신앙적 통찰을 보여준다(VanGemerern). 한편, '주의 도'(*, 데레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호의 넘치는 섭리(Alexander)혹은 권능이나 통치(Anderson)를 뜻한다.
성 경: [시67:3]
주제1: [만방에 선포하는 주의 구원]
주제2: [만방에 하나님을 선포함]
⭕ 하나님이여 - 이 표현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출받기 원할 때, 혹은 간절한 소원을 아뢸때 사용된다(51:1;60:1). 그런 점에서 본 시편 기자는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VanGemeren).
⭕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 이방 민족들도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동일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원받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특히 저자는 거의 동일한 문구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방인 구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시67:4]
주제1: [만방에 선포하는 주의 구원]
주제2: [만방에 하나님을 선포함]
앞절에 이어 여기서도 이방인 구원에 대한 비전이 소개된다. 여호와의 왕권을 주제로 삼은 시편들(93-99편 등)에서는 의와 평강과 즐거움으로 특징지워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우주적인 통치가 노래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는 궁극적으로 이방 민족들을 배제하지 않으며 그들 또한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물론 이러한 비전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비로소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을 통해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임하셨고 예수는 하나님의 길과 뜻이 무엇인지를 세계 만방에 밝혀 드러내셨던 것이다(행 4:12;롬 9:5).
성 경: [시67:5]
주제1: [만방에 선포하는 주의 구원]
주제2: [만방에 하나님을 선포함]
3절과 동일하다. 이러한 반복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저자의 기도가 지극히 간절함을 보여준다. 또한, 3절과 본절을 예언으로 볼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예언 성취의 확실성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성 경: [시67:6]
주제1: [만방에 선포하는 주의 구원]
주제2: [만방에 하나님을 선포함]
⭕ 땅이 그 소산(所産)을 내었도다 -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주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는 의미로서,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았다는 고백과 일맥 상통한다. 특히 이는 씨를 뿌림으로써 얻은 결과였으며 지극히 풍성한 축복이었다. 또한 이것은, 앞으로 더욱 큰 축복이 있을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그러면 여기서 본 시편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방인 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연적인 큰 소산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믈론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간 때에도 일반 은총 가운데 있었다. 그들도 자연의 혜택을 받아 결실을 얻었다(행 14:17). 그러나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경우 그분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있게 되며 만물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올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욜 2:14).
⭕ 우리 하나님이...복을 주시리로다 - 전반절이 과거 사실에 대한 언급이 라고 하면, 후반절인 본문은 장래에 베푸어 주실 축복에 대한 기대라 할 수 있다. 7절 상반절에서도 반복되는 본문 내용은 시인의 강한 확신을 저변에 깔고 있다. 시인이 이러한 고백을 담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Kinder). 물론 여기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부여되는 배타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는 결코 보고 있지 않다.
성 경: [시67:7]
주제1: [만방에 선포하는 주의 구원]
주제2: [만방에 하나님을 선포함]
⭕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방인들이 깨닫고 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통치에 기쁨으로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Calvin). 여기서 '땅의 모든 끝'은 2절의 '만방'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2:8;22:27, 28;렘 16:19), 또한 '경외하리로다'는 2절의 '알리소서'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한다(VanGeren).
성 경: [시68:1]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승리]
본시는 다윗이 전쟁에서의 승리, 혹은 위기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을 체험한 후 이러한 역사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이다. 저작 배경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본 시편의 강해를 참조하라.
⭕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앞세워 진군하기 시작하던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와 동일하다(민 10:35). 따라서 본 기도도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와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기 위하여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윗은 그때 이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원수들과 싸워 주시기를 소원하였다. 특히 다윗은 군사적인 행동 혹은 중대한 행동을 취하기에 앞선 마음의 결단(삼하 18:32;렘 49:14)을 촉구하는 표현인 '일어나사'를 사용하여, 원수들을 진멸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이 속히 있어야함을 기원한다. 그러나 이 단어를, 소원을 아뢰는 단순한 기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시편의 대개의 기도 속에는 그 기도들이 이루어질수밖에 없다는 저자들의 강한 확신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편, '원수'(*, 오예바이우)는 문자적으로 '그분의 원수들'이다. 사실 이 원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던 암몬족속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곧 하나님의 원수들이라는 사실은 우리 성도들에게 대단한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핍박을 받을 때 마치 당신이 핍박받으시는 것으로 간주하시어(행 9:4) 그들에게 중한 보응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시68:2]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승리]
⭕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 '연기'는 바람에 의해서 신속히, 그리고 용이하게 이리저리 흩어지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37:20; 102:3;호 13:3 참조). 따라서 본문은 악한 원수들에 대한 징벌을 재촉하는 기도이다.
⭕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 상반절과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여기서 '밀'(*, 도나그)은 그 어원이 불확실한 단어로서 양초의 원료인 파라핀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것은 섭씨 50도가 용해점(溶解點)인 만큼 불에 조금만 가까이 대기만 해도 즉시 녹아내리며 심지어는 웬만큼 뜨거운 물에 집어 넣어도 완전히 녹아 없어진다(97:5;미 1:4 참조). 이처럼 그 원수들은 인간적 안목으로 보면 막강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지극히 연약하고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
성 경: [시68:3]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승리]
의인들의 이 같은 반응은 악인들이 멸망당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다만 의인들은, (1) 자신들이 악인의 위험에서 구원받았으며, (2)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벌하시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공의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사실, 크나큰 환난이나 위경에 직면해 있는 동안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준동(蠢動)을 모른체하신다고 생각하여 낙심에 이를 뻔했을 것이다(73:2, 3). 그러나 드디어 악인들이 징벌당하자 의인들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확인하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52:6;58:10;64:7-10).
⭕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 '뛰놀며'(*, 알라츠)는 원래 '기뻐 날뛰다'의 뜻으로서 대개 승리로 인한 기쁨 혹은 그 기쁨의 외부적 표출 행위를 가리킨다(25:2). 그리고 '앞에서'(*, 리프네)는 '얼굴을 향하여', '얼굴 쪽으로'의 뜻으로서, '얼굴로부터'라는 의미인 2절의 '앞에서'(*, 미프네)와는 반대의 뜻이다.
성 경: [시68:4]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승리]
⭕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 - 여기서 '광야'(*, 아라보트)는 암몬 족속의 용병(傭兵)이었던 아람 사람들이 진을 쳤던 모압의 초원 지대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삼하 10:8, Keil).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마치 마차나 병거를 타고서 당신의 백성들 대신 그 원수들과 싸우기 위하여 백성들보다 앞서 나아가시는 것을 연상시킨다(Keil). 그러나 '아라보트'를 '하늘'혹은 '구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KJV, NIV, RSV). 특히 33절과의 병행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Kidner). 하나님께서는 하늘 병거를 타시고 당신의 백성에게는 보호와 축복을, 그리고 그 대적들에게는 징벌과 저주를 내리기 위해 두루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된 적이 종종 있다(18:10;104:3).
⭕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 '여호와'의 히브리어 '야'(*)에 대해서는 (1) '여호와'(*)의 축약형, (2) '여호와'의 파생형, (3) '여호와'의 고어형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1)의 견해가 그중 제일 무난한 것 같다. 그렇다면 본절의 '여호와'도 '스스로 계신 자',혹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나타낸다(출 3:14). 그러므로 이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 의해서 조작된 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분만이 인간의 궁극적 신뢰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여기에 사용된 축약형 '야'(*)는 이곳 외에 18절과, 하나님의 크신 구원적 권능에 대해서 언급하는 곳(출 15:2) 및 하나님께서만 신뢰와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함을 언급하는 곳(사 26:4)에 나온다. 한편, 원문상에는 '여호와' 앞에 전치사 '베'(*)가 붙어 있는데, 이는 강조를 위한 불변화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그의 이름은 여호와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겠다(Anderson).
성 경: [시68:5]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승리]
⭕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 하나님은 악행자들을 바람이 연기를 흩뜨리듯이 진멸시키시지만(2절) 억울하게 압제 당하는 사죄적 약자들은 보호하신다. 우가릿 문서(예컨대, '케레트의 전설'이나 '아카트의 이야기' 등)에도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는 것은 이상적인 왕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로 나와 있다(Anderson). 성경 역시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임을 명시하고 있다(10:14;신 10:18;사 1:17;약 1:27등). 이는 사람의 외모를 따라 부한 자와 높은 자를 더 중시하고 비천한 자들은 멸시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과 너무나도 대조된다.
성 경: [시68:6]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승리]
⭕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 '고독한 자'(*, 예히딤)에 대해서는 신부를 맞을 지참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Albright). 그러나 그보다는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을 의탁할 가족이나 친족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Anderson, Mowinckel). 아마 이들 역시 고아나 과부처럼 공동체내에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 '수금된 자'는 감옥 생활(창 39:20) 및 포로 생활을 하는자(69:33;사 14:17;애 3:34;슥 9:11)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어쨌든 본문은 이들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속에서 고역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예전의 자유와 번영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형통케 하시느니라'(*, 바코솨로트)는 '정당하고 적절하다' 혹은 '번영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쉐르'(*)에서 파생된 명사 '코솨라'(*)와 '함께'로 번역될 수 있는 전치사 '베'(*)가 합쳐진 단어이다.
⭕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 '거역하는 자'(*, 소라림)는 '완고하다' 혹은 '반항적이다'를 뜻하는 동사 '사라르'(*)에서 파생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제 고집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사 65:2;렘 5:23;슥 7:11). 그리고 '메마른땅'(*, 체히하)은 '눈부시다'를 뜻하는 동사 '차하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지극히 건조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완고한 사람은 사막과 같은 불모지(不毛地)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의미이다(민 14:29-35).
성 경: [시68:7]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신 일을 회고하고 있다.
⭕ 앞서 나가사 -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언약궤(레 16:2)가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선두에 위치했던 사실(민 10:33)을 상기시킨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나아가시면서 그들을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출 13:21, 22) 또한 원수들을 물리치신 사실도 아울러 연관된다. 요컨대 하나님은 십자가 군병들인 당신의 백성들의 앞에 서서 우리를 대신하여 용감하게 싸우며 나아가시는 일선 사령관이시므로(수 5:13-15),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믿음의 행진을 담대히 계속할수 있다(딤후 4:7).
⭕ 광야(*, 예쉬몬). - 지극히 부적절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하여 사람이 전혀 살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신 32:10). 기자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고 있던 '광야'의 황량함과 하나님이 인도하신 이후의 축복된 상태를 날카롭게 대조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Keil).
성 경: [시68:8]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떨어지며 -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시내 산에 임재하셨을 때에 나타났던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출 19:16-25). 그런데 '하늘이...떨어지며'는 어두운 천둥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시내산을 덮은 것을 가리킨다(신 5:22).
⭕ 저 시내 산도...진동 하였나이다 - '저 시내산'은 원어상 (1)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저 시내산' (2) '시내산 자체'(even Sinai itself, KJV), (3) '시내산의 그분'(the One of Sinai, NIV)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중 (3)의 번역은 '저 시내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이해한 것이며 '시내 산의 주님'이라는 의미로 파악한 것이다(Albright).
⭕ 이스라엘의 하나님 - '시내 산의 하나님'이 계시 수여와 주로 연관된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셨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름이다(VanGemeren).
성 경: [시68:9]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 이에 대해서는 (1)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를 위한 비를 풍족히 내리셨던 사실을 가리킨다는 해석(Calvin, Keil, 박윤선), (2)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던 일을 가리킨다는 해석(Rawlinson, C.B. Moll) 등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첫째, 11절 내용이 주로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본절도 광야에서 받은 축복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자연스러우며, 둘째, 출애굽기 등은 만나를 '비'로 말하고 있다(78:23, 24;출 16:4)는 점을 미루어 볼 때, (2)의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향편, '흡족한'(*, 네다보트)의 어근인 '나다브'(*)는 '자원하다' 혹은 '즐거이 드리다'(출 35:21 대상 29:9)의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근거한 아낌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낌없이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배부르기에 충분하였다(출 16:12).
⭕ 주의 산업이 곤핍(困乏)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 '주의 산업'(*, 나할라트카)은 '나누다'나 '차지하다' 혹은 '상속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나할'(*)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여기서는 '주님에 의해서 차지된 백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 곧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신 7:6).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산업'혹은 '기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된다(출 34:9;신 4:20;9:26, 29;왕하 21;14). 한편, '곤핍할 때에'(*, 닐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회로한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 '라아'(*)의 수동형으로서, 주변 여건 혹은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하게 지쳐있는 상태를 가리킨다(잠 26:15;사 16:12).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먼길을 걸었고 또한 먹지 못하여 극도로 지친 상태에 있었다. 또한 '견고케 하셨고'(*, 아타 코난타)는 문자적으로 '당신께서 견고케 하셨고'이다. 이처럼 본 문구에는, 동사에 이미 2인칭 단수 주어 어미(語尾)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도로 2인칭 단수 인칭대명사 '아타'가 있다. 이것은 '견고케 하신' 행동의 행위 주체자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하면 된다. 한편, '견고케 하셨고'의 기본형인 '쿤'(*)은 '준비하다' 혹은 '세우다'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튼튼히하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일을 가리킨다(Keil, NIV).
성 경: [시68:10]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주의 회중(會衆)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 '주의 회중'(*, 하야트카)의 '회중'(*, 하야)은 '살다' 혹은 '강하게 되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하야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살아있는 것', '사람들' 혹은 '군대'를 뜻한다(Davidson). 여기서는 삼하 23:11에서 처럼 '군대'보다는, 차라리 보다 일반적인 의미인 '무리', '집단'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Keil). 한편, '그 가운데'(*, 바)는 문자적으로 '그녀의 가운데'의 뜻이며, '그녀'가 지칭하는 바에 대해서는 가나안 땅과 광야 중 하나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만일 '주의 산업'(9절)이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면, 여기의 '그녀'는 틀림없이 '가나안 땅'일 것이다. 하지만 9절 주석에서 이미 '주의 산업'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가나안 땅'이 아님을 확인했었다. 따라서 본문의 '그 가운데'는 '광야 가운데'를 뜻하는 것 같다(7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핍하였던 곳(9절)이다. 그리고 '거하게 하셨나이다'(*, 야쉬부)는 '쉬다' 혹은 '거주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본 문구는 걷기만 하고 먹지 못하여 곤핍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양식을 공급받은 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쉬다'의 뜻을 갖는다고 볼 필요가있다.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만 하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마 11:28-30).
⭕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 '가난한 자'(*, 아니)는 '괴롭히다', '자기를 낮추다' 혹은 '억지로...을 시키다'의 뜻이 있는 동사 '아나'(*)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1) '압제당하는 자'(욥 36:6;사 49:13), (2)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가난한 자'(신 24:14, 15), (3) '겸손한 자'(잠 16:19), (4) '피곤한 자'(습 3:12)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핍'했었음을 말하는 9절에 근거해 볼 때, (4)의 뜻이 가장 합당한 듯하다. 한편 '준비하셨나이다'(*, 타킨)는 9절 후미의 '견고케 하셨고'와 어근이 동일하다. 본시의 기자가 이같이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 까닭은 동일한 내용을 언어 유희(wordplay)적 표현으로써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 경: [시68:11]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 여기서 '말씀'(*, 오메르)은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필승의 약속(C.B. Moll), (2)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의 노래를 부르도록 한 하나님의 명령(Calvin), (3) 전황(戰況)을 급변케 한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Keil, Rawlinson)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첫째, 7절에서부터 10절까지가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극적으로 은헤를 베푸신 것에 대한 언급이며, 둘째, 다음 문구와 같은 행동(출 15:20)을 실제적으로 촉발시켰던 것(출 15:19)은 곧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이었다(출 14:26)는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위의 세 견해 중 (3)의 것이 보다 합당하다.
⭕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 직접적으로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비롯한 많은 여자들이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과 관계 있다(출 15:20).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에 여인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뛰놀았던 사실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삼상 18:6, 7). 뿐만 아니라, 바락과 드보라가 가나안왕을 이겼을 때, 드보라가 하나님을 찬양한 것도 결코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삿 5:1).
성 경: [시68:12]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 가나안의 여러 왕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패배한 사실들을 가리킨다(수 8:19-22;10:19, 20;11:8, 9;삿 3:10, 29). 그런데 '여러 군대의 왕들'은 이들을 완전 패퇴시키신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패배당한 왕들의 강성함을 이같이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력히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가나안 왕들은 철병거(수 11:4) 등의 우수한 병기와 훌륭한 요새(수 11:2)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자력(自力)만으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강력한 왕들을 이기셨고, 이에 따라 당신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셨던 것이다.
⭕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 이것은 (1) 여자들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능히 적병을 쫓아내고 전리품을 획득했다는 견해(박윤선), (2) 여자들도 남자들이 전쟁 중에 획득하여 집으로 가져온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다는 견해(Valvin, Keil, Kidner, Weiser)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는 없었다는 점에서 볼 때, (1)의 경우는 타당치 못하다. 또한, 가나안 왕인 시스라가 노략물을 취하여 집에 있는 자신의 어미에게 가져다 주려고 했었다는 사실도(삿 5:30) (2)의 견해를 지지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본문은 집에 있는 여인들에게까지 분배 기회가 주어질 정도로 전리품이 많았음을 말해준다.
성 경: [시68:13]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 이는 목자들이 유유 자적(悠悠自適)하게 평안히 쉬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삿 5:16).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 세력들의 위협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서 평안히 정착하는 때를 가리킨다. 그러나 칼빈은 '양 우리'(*, 쉐파타임)를 '항아리'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지저분한 항아리에 누운 듯한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었던 때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쉐파타임'은 '놓다' 혹은 '두다'의 뜻을 갖는 동사 '솨파트'(*)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항아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항상 가축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를 의미한다(창 49:14;삿 5:16).
⭕ 그 날개를 은으로...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 이것은, 날으는 비둘기가 햇빛을 받아 어떤 때는 은빛을, 또 어떤 때는 금빛을 띠는 모습을 연상시키며(Keil),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크신 축복에 따라 대단한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을 시사한다. 사실, 이스라엘은 특히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근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됐었다.
성 경: [시68:14]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전능하신 자(*, 솨다이) - 이것은 '공격하다' 혹은 '파괴시키다'를 뜻하는 동사 '솨다드'(*)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하나님이 자연 법칙을 초월하여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실만큼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강조하는 명칭이다(창 17:1;28:3). 반면에 악인들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악한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측면을 강조하기도 한다(욥 34:12;사 13:6;욜 1:15).
⭕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때에는 - 여기서 '열왕'(*, 멜라킴)은 문자적으로 '왕들'의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을 적극 방해하던 가나안 족속의 여러 왕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흩으실때에는'(*, 베파레스)의 기본형 '파라스'(*)는 '퍼지다' 혹은 '펼치다'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열왕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것을 가리킨다(겔 17:21). 사실 가나안 왕들은 연합 전선을 펴서 이스라옐 백성을 대적했었다(수 10:1-5).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징벌하심으로, 그들은 모두 패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수 10:10, 11).
⭕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 문자적으로는 '살몬에 눈이 날렸도다'이다. 여기에 대한 해석으로는 (1)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에게 대패하여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에 대한 묘사라는 견해(Keil, Cheyne), (2) 죄악된 가나안 족속들에 의해서 더렵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원수들의 멸망으로 정결하게 된 영적모습에 대한 묘사라는 견해(Calvin) 등이 있다. 이중에서 (1)의 견해가 보다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1)의 견해도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중 하나는 본 문구가, 가나안 족속의 도망치는 모습이 마치 바람에 눈이 날려서 흩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는 해석이다(Cheyne). 또 하나는 가나안 족속이 도망치면서 남겨 놓은 전리품들과 그들의 썩은 해골이 눈같이 산을 덮었음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Keil). 그러나 이 두 해석 중에서, 첫 번째 해석이 바로 앞 문구의 '흩으실'이라는 동사의 뜻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더 타당성이 있다. 한편, '살몬'은 '짙은 어두움'의 뜻을 지니며, 실제로 그 이름의 의미처럼 검은색을 띤 산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했고(삿 9:48), 눈으로 덮여있는 때가 많다고 한다.
성 경: [시68:15]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 본 문구는 동의적(同意的) 대구인 다음 문구와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의 산임이여'는 '바산의 산'이 하나님의 임재 장소임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산의 산'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밖에 없다고 할 만큼 특별히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는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36:6). 한편, '바산의 산'은 요단 동편에 있으며 현무암이나 용암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 지역 주위에는 가파르고 탑과 같이 생긴 여러 봉우리들이 중간 중간에 우뚝 우뚝 서 있다(Keil). 이와 반대로 요단 서편의 산들은 대개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낮은 산들이다.
성 경: [시68:16]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너희 높은 산들 - 앞절에 나오는 '바산의 산'이다.
⭕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 '시기하여 보느뇨'(*, 테라츠둔)의 기본형인 '라차드'(*)는 '질투하다', '곁눈으로 보다'의 뜻이며 원래 야수가 엎드려서 먹이를 기다리는 것 혹은 사냥꾼이나 적이 숨어서 사냥감을 기다리는 것 등을 가리키는 아랍어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본 단어는, '바산의 산'이 낮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처소인 '시온산'을 집어 삼킬듯이 내려다보는 형상으로 우뚝서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이 거하시려하는 산'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한 '시온 산'을 가리키며 특히 여기서는 성도(聖都) 예루살렘(느 11:1)을 뜻한다.
⭕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 '바산의 산'이 비록 높아서 외형적으로는 지극히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시온 산을 우습게 내려다 봐서는 안 되는 까닭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은총은 자연보다 나으며 교회는 세상보다 더 강함(Keil)이 분명하다. 한편,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건축될 성전에 친히 임재하시는것(왕상 8:27)이지만,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에 함께하시는 것(마 18:20;계 1:12, 13)과 또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에서 구속받은 백성들과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것(계 21:2, 3)을 아울러 암시한다.
성 경: [시68:17]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16절처럼 본절도 시온 산이 바산의 산에 의해서 업신여김을 받을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 '하나님의 병거'는 하나님을 옹위하는 천군 천사들을 가리키며(왕하 6:17) 이들이 시온 산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옹위를 받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심을 뜻한다. 그리고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말은 수없이 많음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삼상 18:7).
성 경: [시68:18]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 이것은 (1)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펼치게끔 하기 위하여 선택된 신정(神政) 왕 다윗이 시온 곧 예루살렘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 것(Calvin), (2) 언약궤가 시온산이라는 높은 곳으로 옮겨짐에 따라(대상 15:25-29) 하나님께서도 그곳의 성소에 임재하게 되신 것(C.B. Moll, Rawlinson)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문맥들에서도 높은 곳으로서의 시온 산을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장소로서 말한다(렘 31:12;겔 17:23;20:40)는 점에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보다 타당하다. 한편, 우리는 본 문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지금도 성도들과 함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이해해 볼 수 있다(엡 4:8).
⭕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膳物)을...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 일차적으로는, 출애굽, 광야 여정 및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대적들을 정복시켜 포로로 잡고(삿 5:12 참조) 피정복민들로부터 조공을 받으신 사실을(삼하 8:2) 가리킨다(VanGemeren). 그리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고 성도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베푸신 것을 예표한다(엡 4:8). 한편, 본절 하반절과의 문맥 연결을 고려하여, 이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에게서도 경외와 예배의 대상이 되시게끔 하신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겠다.
⭕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 '여호와'는 인간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임을 암시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창 17:1, 2). 그리고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는, 이방 민족, 곧 '패역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크신 위엄을 목격하고 당신의 백성이 될 자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되는 것은 큰 축복임이 분명하다. 원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이 없었으며 세상에서 소방도 없던 자들이었다(엡 2: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당신과 원수되었을 때 그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롬 5:6-8).
성 경: [시68:19]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 하나님이 세상에서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세심하게 돌보아 주심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Anderson).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전혀 환난과 고통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들이 그 어려움들을 능히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의미이다(빌 4:13). 따라서 신자들은, 순경(順境) 중에서 뿐만 아니라 역경 중에서도 결코 슬퍼하거나 낙심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 - '주'(*, 아도나이)에 대해서는 51:15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죽음에 이르는 환난(20절)에서도 건지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여기의 '하나님'(*, 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호칭이다(50:1;욥 32:13;40:9).
성 경: [시68:20]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 여기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가 결코 피상적이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자되심은 '우리' 곧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능히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도 19절의 '하나님'과 동일하게 '엘'이다.
⭕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 '사망에서 피함'은 여기서는 죽음에 이르게 될 만한 극심한 환난(23:4)에서 구출되는 것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육체적으로 죽었으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살림을 받을 것(요 11:43, 44) 혹은 육체적인 죽음후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부활되는 것(고전 12:22, 23)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확대시켜서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성 경: [시68:21]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진실로' 혹은 '그러므로'로 번역될 수 있는 접속사 '아크'(*)가 있다.
⭕ 그 원수의 머리...정수리 - '원수'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 백성을 해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머리'와 '정수리'는 여기서 동격(同格)이다. 그런데 '정수리'(*, 카드코드 세아르)는 문자적으로 '머리털이 있는 정수리'의 뜻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고대 아라비아 무사(武士)들의 경우처럼, 자신들이 무사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을 머리의 다른 부분보다 더 길게 남겨놓았던 것을 연상시킨다. 아무튼 이같은 모양으로 한 정수리는, 거만한 힘이나 회개할 줄 모르는 자만(自慢)을 상징한다(신 32:42).
⭕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 - 이것은 '원수'에 대한 보조 설명이며, 회개를 거부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죄악을 범하는 자를 뜻한다.
⭕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 '쳐서 깨치시리로다'(*, 이므하츠)의 기본형인 '마하츠'(*)는 야엘이 시스라에게 가했던 것처럼, 강타하여 재기 불능의 치명상을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삿 5:26). 특히 다른 문맥에서도 이 단어는, 회개치 않고 계속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신 32:39;33:11).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1)이 세상의 악인들을 반드시 멸망시키시며(73:27), (2)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신(神)인 사단과 그 세력들을 영원한 불못에 넣으실 것이다(계 20:10).
성 경: [시68:22]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본절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21절과 연결시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마치 유대 주석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본절을 하나님의 구원 약속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 멸망 뒤 배에 실려서 로마로 끌려가던 여자 포로들은, 본 구절을 자신들에 대한 약속의 말씀으로 보고 모두 지중해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Keil). 즉, 그 여자 포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 지중해에서 건져내시리라고 오판했던 것이다.
⭕ 저희를 바산에서...바다 깊은 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 하나님의 원수들이 아무리 깊이 숨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산'은 산세가 험하고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어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적절했던 '바산의 산지'를 가리킨다. 그리고 '바다'는, 본 시편 저자 다윗의 활동 지역과 인접해 있었던 사해 바다를 뜻할것이다. 특히 기자는 '바다 깊은 데'라고 표현함으로써. 원수들의 도주 자체가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성 경: [시68:23]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본절 초두에는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단어 곧 '그리하여'로 번역될 수 있는 '르마안'(*)이 있어서(NIV) 본절이 22절과 같은 심판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묘사임을 말해준다.
⭕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 문자적으로는 '너희들이 너희들의 발을 피 안에 세게 찔러넣게 할 것이다'의 뜻이다(you may piunge your feet in the blood of your foce, NIV). 이와 같은 표현은 (1)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며(사 63:1-3), 또한 (2) 하나님의 공의를 목격한 자가 그 공의가 실현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모습의 상징적 묘사이다(58:10).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악인을 멸절시키기 위한 대리적 심판자로 지정하사 원수들을 찌르게 하심을 나타낸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이 관영된 가나안 족속 등을 징벌키 위한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바 있었다(창 15:16;수 10:40-43). 한편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지나치리만큼 잔인하신 분으로 보이게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기의 원수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긍휼을 베푸셔서 인내하실 수 없을 만큼 죄악으로 관영되어 있는 자들이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도 대적들은 철저히 응징하셔야만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잔인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대적들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는 것일 뿐이다.
⭕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 원수들의 육신이 개의 먹이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죽어서조차 무덤에 안장되지 못하고 개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악인에 대한 처절한 심판을 강조하는 말이다(왕하 9:35;렘 15:3).
성 경: [시68:24]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신 후 개선의 행진을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운행하시는 모습이 보일 까닭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악인들에 대한 징치(徵治)를 마친후 크게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모든 이가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는 의인과 악인 모두를 포함한다. 의인들은 '하나님의 행차'를 인하여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며, 악인들은 심히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출 15:14-16).
⭕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 여기서 '성소에'(*, 바코데쉬)는 '거룩하심 가운데서'로 번역함이 더 나을 것 같다(Albright). 그 까닭은 (1) 하나님의 개선 행차가 이교도들에게까지 목격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 행차가 예루살렘의 '성소'에서 있었다고 국한시키기는 어려우며, (2) 여기의 '바코데쉬'라는 단어가 하나님이 이방 원수들을 심판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는 문맥에서 '거룩함에'로 번역되고 있기(77:13;출 15:11)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룩하심 가운데서'라는 말은 '악인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신 공의로운 성품의 소유자이심을 밝히 드러내시면서'라는 정도의 뜻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왕'은, 하나님 앞에서의 다윗의 겸손을 보여준다. 즉, 다윗은 비록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 중 하나일 뿐임을 암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68:25]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본절은 승리와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의식(儀式)을 묘사하고 있다.
⭕ 소고 치는 동녀(童女) - '소고치는' 일은 승리의 기쁨이 있을 때 여자들에 의해서 관례적으로 행해졌었다. '동녀'(*, 알마)는 미혼, 기혼을 막론한 젊은 여성 모두를 가리킨다(창 24:43;잠 30:19).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전쟁에서의 승리 후 미리암과 같은 기혼 여성들도 소고치는 일에 가담했었다(출 15:20). 문자 그대로의 '동녀'를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는 '베툴라'(*)이다.
⭕ 가객(*, 솨림) - 노래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 악사 - 수금과 비파, 제금 그리고 나팔 등을 연주하는 사람을 뜻한다(대상 13:8).
성 경: [시68:26]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 - '근원'(*, 마코르)은 '자손', '근원', '샘'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등과 같은 신앙의 조상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조상 아브라함처럼 언약에의 참여자임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 대회 중에서...주를 송축할지어다 - 여기서 '대회'(*, 카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종교적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주'(*, 예호와)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점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세상에서도 각양(各樣)의 은혜를 받으며 살았다. 그런 점에서 신.구약 시대를 막론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송축하지' 않을 수 없다(엡 1:3, 6).
성 경: [시68:27]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저희 주관자(主管者) 작은 베냐민 - '저희 주관자'(*, 로뎀)의 기본형인 '라다'(*)는 '통치하다' 혹은 '지배하다'의 뜻이다. 베냐민 지파가 이렇게 지칭된 것은 모든 지파중에서 가장 인구가 적었지만(삼상 9:21) (1)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하였으며(삼상 9:1-17), (2) 열 두 지파의 기업 분배 당시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던 예루살렘도 그 땅에 있었다(수 18:28)는 점 등 때문일 것이다(Keil). 그러나 저자 다윗이 자신의 지파도 아니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이 속했던 지파를 첫머리에 놓은 것은, 다윗의 겸허하고도 관대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 사실, 그 당시 이미 왕에 올라 있었던 다윗은 대단히 큰 세력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또한 자신이 속한 지파를 본절의 초두에 놓을 수도 있었다.
⭕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 - '그 무리'(*, 리그마탐)의 어근인 '라감'(*)은 '죽이기 위해 돌을 던지다' 혹은 '돌 무더기를 쌓다'의 뜻을 지니며 본 단어와 동족어인 '마르게마'(*)는 '돌 무더기'를 뜻한다(잠 26:8). 따라서 본 단어는 '돌 무더기의 돌처럼 많은 수'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구는, '많은 수의 유다 방백'으로 번역될 수 있다.
⭕ 스불론...납달리 - 유다와 베냐민 이외에 이처럼 유독 두 지파만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두 지파가 애국적인 용감성으로 인하여 드보라에 의해서 크게 찬송을 받았던 때문일 것이다(Keil, 삿 4:6, 10;5:18). 물론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남쪽 끝에 위치한 지파인 반면,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북쪽끝에 위치한 지파였기 때문에 유독 다른 지파들을 제치고 여기서 언급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VanGemeren).
성 경: [시68:28]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상을 지배할 능력과 그들에 대한 승리의 보장을 주셨음을 말한다(Keil).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방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체험했었다.
⭕ 하나님이여...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는 과정을 통해 당신의 크신 권능과 위엄을 드러내신 바 있다. 이러한 과거 역사에 근거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약속과(22, 23절) 구속자로서의 성품에 따라(5, 6;19, 20절),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계속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68:29]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이방의 왕들이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하게 된다는 예언이다(76:11;사 18:7;60:3-7 ;66:20;학 2:7;슥 2:11-13;6:15;8:21, 22). 이러한 예언은 솔로몬 왕 시절에 스바 여왕에 의하여서도 성취된 바 있다(대하 9:1-12).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것에 대한 예언이다.
⭕ 주의 전을 위하여(*, 메헤칼레카) - 카일(Keil)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주의 전으로부터'라고 보고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어 결국 온 세계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위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 '몌'(*)를 '...때문에'(on behalf of, because of, KJV, RSV, NIV)로 보고, 이방 왕들이 예루살렘의 성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으로 믿고 경배를 드리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
성 경: [시68:30]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 '갈밭의 들짐승'은 원래 나일 강변의 갈대 숲에서 서식하는 하마나 악어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애굽 왕을 상징한다(74:13;사 36:6, 9;겔 29:3, Briggs, Dahood, Kraus). 그리고 '수소의 무리'는 당시 최강국이었던 애굽보다는 못한 나라들의 여러 왕들을 가리킨다. 또한 '송아지'는 애굽 왕을 포함한 열강의 지배 아래 있던 이방 민족들을 뜻한다.
⭕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 여기에 대해서는 (1) 이방 왕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굴복하면서 그 표시로서 '은 조각'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뜻한다는 견해(KJV, NIV, Alexander, Keil, Rawlinson), (2) '은 조각' 곧 전리품이나 공물을 탐하는 열방들을 멸하도록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보는 견해(RSV), (3) 본 분사 구문이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수식한다고 보며, 그들이 왕궁의 마룻 바닥에 깔린 '은 조각'을 발로 밟음으로써 자신들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는 견해(NIV, Calvin, C.B. Moll) 등이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를 확정적으로 취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르지만, 곧바로 뒤따르는 문구와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1)의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다.
⭕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 여기서 '흩으셨도다'(*, 비자르)는 '바자르'(*)의 완료 시제이다. 그러나 다음 절이 미래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원의 문장이라는 점에서 개역 성경과는 달리 '흩으소서'로 번역함이 더 낫다(NIV, Weiser). 이와 같은 기원(祈願)은 1절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전쟁을 즐기는'이라는 말은, 다윗의 원수들이 명분도 없이 무고하게 다윗에 대항하여 싸움과 소동을 일으켰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Calvin). 악인들은 까닭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치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러한 호전성(好戰性)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게 되는것이다.
성 경: [시68:31]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 '방백들'(*, 하쉬마님)은 '살지다' 혹은 '부유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슘'(*)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두드러진 위치에 있는 지도급 인사들을 가리킨다(Keil), '애굽에서 나오고'는 애굽 왕이 이스라엘에게 항복하기 위해 방백들을 사신(使臣)으로 보내는 것을 뜻한다(사 43:3;45:14).
성 경: [시68:32]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31절의 결과이다. 다윗 자신의 예언적 소원대로 열방이 하나님께 굴복하면, 그들은 그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송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방 민족들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로 인하여 기뻐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일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 만방으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본격적으로 성취되어 가고 있으며(고전 15:24, 25) 하나님께서 친정(親政)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계 21:3).
성 경: [시68:33]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 - '옛 적'(*, 케뎀)은 하나님의 초시간적(招時間的) 위대성을 암시하며, '하늘들의 하늘'은 창조된 태초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하늘들의 하늘'(*, 쉐메 쉐메)은 다만 '하늘의 하늘'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비록 여기의 '쉐메'가 복수형이기는 하지만 이 복수형은 그 수(數)의 많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하늘의 광대(廣大)함을 표현하는 장엄 복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늘의 광대 무변함과 장중함, 그리고 지고(至高)함을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수사학적 표현이다(신 10:14;왕상 8:27).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 '종들의 종', '왕 중의 왕', '거룩함중의 거룩함', '노래 중의 노래' 등이 있다.
⭕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 히브리 원문에는 '보라!'로 번역될 수 있는 '헨'(*)이라는 단어가 있다. 본문의 '소리'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증거하는 피조 세계의 웅장한 소리, 예컨대 뇌성 등을 가리키는 것 같다(29:3, 4, Anderson).
성 경: [시68:34]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 이것은, 33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마땅히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라는 뜻이다(29:1).
⭕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뜻이다(Keil). 그리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주적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내재적(內在的) 속성뿐만 아니라 초월적 속성을 잘 드러내 준다.
성 경: [시68:35]
주제1: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주제2: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적 선포]
⭕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 문자적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성소들에서 두렵습니다'의 뜻이다. 본절은 하나님이 이렇듯 엄위하신 분이시면서(47:2 ;65:5;출 15:11;신 10:17:계 15:3, 4). 또한 당신의 백성 가운데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VanGemeren). 여기서 '성소'를 복수로 말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는, (1) 여기의 '성소'가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하늘과 땅(34절)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 (2) '성소'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Calvin), 혹은 (3) '성소'가 거룩의 요소나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Keil)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장엄 복수로 이해하여 다만 성소의 거룩성을 보다 강조하며, 그리하여 그곳이 하나님의 위엄이 충만한 곳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복수형으로 표현되었다고 봄이 무난하겠다(Anderson).
⭕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 여기서는 찬송을 받으실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엘로힘'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19절이 찬송받으실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주'(*, 아도나이)로 말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아도나이'라는 호칭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만 관련된 한정적인 것이지만, '엘로힘'은 전우주적 혹은 보편적인 이름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본 시편 저자는 '엘로힘'이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결국 만인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기를 염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로 만민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69:1]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 자신이 곤궁에 처해 있음을 알리며, 그 곤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을 호소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투적 표현이다(54:1;55:1;56:1;59:1;61:1).
⭕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 이는 물이 자신을 덮고 자신의 목구멍으로 들어가서 숨을 쉬지 못하게 된 것 만큼의 곤궁한 상황에 도달했음을(for the waters have come up to my neck, NIV, RSV)보여주는 상용적 표현이다(18:4;42:7;88:7, 17;욥 22:11;27:20;욘 2:5). 물론 여기서 '물'은 2절의 '수렁'이나 '큰물'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영역이나 그 영향력을 뜻하는 표현이다(Anderson).
성 경: [시69:2]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 - 빠져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 들게 되는 늪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심각한 환난이나 죽음의 위협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는 저자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가중시켜오는 두려운 상황을 가리킨다.
⭕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 사람이 본의 아니게 물에 빠져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거리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큰 물(*, 쉬볼레트)은 '넘치다'는 뜻의 동사 '솨발'(*)에서 나온 단어로서, 정적(靜的)으로 가만히 있는 물이 아니라 동적(動的)으로 거세게 덮쳐오는 물을 가리킨다. 그리고 '넘치나이다'(*, 쉐타파트니)의 기본형인 '솨타프'(*)는 '질주하다', '창궐하다', '휘말아 삼켜버리다'의 뜻으로서, 홍수가 모든 것을 휩쓸어 가 버리듯 환난이 급속도로 몰려오는 까서을 가리킨다(Hamilton, Victor P.).
성 경: [시69:5]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여기서 다윗은 40:12에서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급변하여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이는, 원수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허물많은 인생에 블과함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여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 원문대로 하면 '하나님이여 당신께서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로 번역된다. 그런데 '아시오니'(*, 야다타)라는 동사는 그 자체가 '당신께서 아신다'의 뜻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별도의 2인칭 주어 '아타'(*)를 첨가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우매함을'아시되 분명히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같은 강조는, 다윗이 자신의 '우매함'의 죄를 확실히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한편, '우매함'(*, 이웰레트)은 불분명한 판단력에 따른 '도덕적 결함'(Goldberg)혹은 '죄의 욕구'(Keil)를 뜻한다. 이와 같은 '우매함'은 성경 도처에서 죄로 인정되고 있다(롬 1:21,22;갈 3:1). 그리고 '아시오니'의 기본형 '야다'(*)는 부부가 동침을 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상대에 대해서 잘 파악하듯이 체험적으로 분명하게 아는 것을 가리킨다(겔 15:7).
⭕ 내 죄가 주의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 하나님께서 저자의 '우매함'을 알고 계시되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시므로, 자연스럽게 저자의 '죄' 곧 '우매함'은 숨겨질 까닭이 전혀 없는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하는 그의 또 다른 시편(139:1-4)과 너무나 잘 부합된다.
성 경: [시69:6]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 만군의 주 여호와 - 우주 만물의 주(主) 이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며 또한 크신 능력으로써 대적들을 파하는 왕(王)이신 하나님을 암시하는 이 칭호는(VangEmeren)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보호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7:5).
⭕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 '주를 바라는 자'는, 다른 많은 백성들이 다윗의 대적을 좇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계속 다윗을 추종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곤경에 처해 있었던 다윗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손을 뻗치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주를 바라는 자'로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으실 경우, 그들은 불의한 자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게 되며 또한 그 자신들은 낙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성 경: [시69:7]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 다윗이 원수들로부터 받았던 고난이 그의 개인적 실수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다윗은 다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곧 정도(正道)대로 행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탄식어린 고백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열심이었던가를 잘 드러내어 준다(44:22;렘 15:15 참조).
⭕ 수치가 내 얼굴에 덮었나이다 - 44:15와 83:16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수치'(*, 켈림마)는 '공적인 굴욕으로 인하여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 혹은 '패배와 속박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를 가리킨다.(삼상 20:34;사 50:6).
성 경: [시69:8]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다윗이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되는 처지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혈육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의해서까지 오해를 받았던 것과 같다(마 13:57, 58;눅 2:48;요 7:1-10). 예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오해로 인하여 실로 엄청난 고독을 경험하셔야만 했다(마 8:20).
⭕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되고 - 여기서 '객이 되고'(*, 무자르)의 기본형인 '주르'(*)는 원래 '고개를 돌리다'의 뜻이며(KB) 여기서는 수동형이므로 '고개 돌림을 당한'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 등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다윗은 그 형제들, 특히 장형(長兄) 엘리압으로부터 많은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삼상 16:6-13;17:28).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 특히 그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의존성이 유달리 강했던 고대 사회에서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은 충격적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Anderson).
성 경: [시69:9]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는 삼키고 - 여기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협의적으로는 (1)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한 일(삼하 6:12-19) (2) 언약궤를 훌륭하고 영구적인 장소에 안치하려는 염원(132:2-5;삼하 7:2) (3) 성전 건축을 위해서 성심 성의껏 그 재료를 수집한 일(대상 28:11-18;29:2-5) (4)성전 건축과 관련해서까지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긴 일(대상 28:9, 10, 20)등을 뜻한다(Rawlinson). 그러나 광의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 곧 언약 공동체를 성결하게 지키려는 일까지도 포함된다(Calvin). 여기서 '열성'(*, 킨아트)은 '짙거나 붉은 빛으로 되다'라는 뜻이 있는 아랍어 동사에서 유래한 '카나'(*)에서 파생됐으며,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가리킨다(Keil). 따라서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그 뜨거운 열정이 하나의 불꽃이 되어 다윗의 뼈 속에서 타오르는듯 끊임없이 거세게 일었음을 시사한다(렘 20:9;23:9, Keil).
⭕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당신을 훼방하는 자들의 훼방이 나에게 떨어졌나이다'의 뜻이다. 이는 다윗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에 몰두함으로써 불의한 자들로부터 당한 불이익을 가리킨다. 다윗이 이러한 불이익을 예상치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다윗은 다만, 주님의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자신의 마땅한 도리임을 알고 그 결과에 개의치 않은 채 그 길을 행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물욕(物慾)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히 하는 일이 당위적(當爲的)이므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될 것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그 일을 담대히 수행하신 바와 동일하다(요 2:13-16).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그 일에 관한 제자들의 깨달음을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殿)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말하면서, 예수님의 그 열심과 다윗의 열심을 동일시하였다(요 2:17).
성 경: [시69:10]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 다윗은 불의한 핍박자들에게 무자비한 무력 공격을 감행하거나 혹은 무절제한 욕설과 비난을 가하지 않았다. 다윗의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매우 잘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단하기 그지없는 강철이라도 부드럽게 할 수 있었다(Calvin). 다윗은 다만, 하나님의 집이 당하는 불행에 대하여 애통하며 금식하여 기도 했을뿐이다(Keil). 다윗의 금식에 대해서는 35:13과 109:24 그리고 삼하 12:16, 22을 참조하라. 한편,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나프쉬)는 원문상으로 다만 '나의 영혼'의 뜻이다. 따라서 개역 성경은 문맥에 비추어 의역한 것이다. 원문대로 하자면 여기의 '나의 영혼'을 본 문구의 주어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본문은 '나의 영혼이 곡하고 금식하였더니'로 번역될 수 있다(NIV). 이처럼 '나의 영혼'이라는 허다하다(62:1;63:5, 8).
성 경: [시69:11]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 10절의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와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굵은 베'는 금식할 때에 혼히 착용했던 옷이기 때문이다(왕상 21:27;느 9:1;단 9:3).
성 경: [시69:12]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
⭕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 '성문'은 재판관에 의해서 재판이 행하여지던 곳이며(창 19:1;룻 4:1) 또한 상인들과의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담(閑談)이나 잡담을 늘어놓는 곳이었다. 그러나 여기의 '성문에 앉은 자'는 비록 복수(複數)이기는 하지만, 한가하게 앉아있는 일반 서민들을 가리키지 않는 것 같다. 본 문구 중 '앉은 자'(*, 요시베)의 기본형인 '야솨브'(*)가 공직(公職) 수행과 관련한 좌정(座定)을 가라킬 때 사용된다는 점에서(왕상 2:12;왕하 13:13), 백성들의 송사를 담당하는 재판관이나 거기에 버금가는 원로(元老)들을 뜻할 것이다. 한편, '나를 말하며'(*, 야 시후)의 기본형인 '시아흐'(*)는 '되풀이하며 험담하다'의 뜻도 내포한다(Gray G. Cohen). 결국 이는 상류 계급의 인사들이 공무(公務) 중에도 다윗을 험담했음을 가리킨다. 추측컨대, 이같은 상류층의 다윗에 대한 험담은,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압살롬이 불의한 재판을 했던 사실(삼하 15:2- 6)과 일맥 상통할 것이다.
⭕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폭음을 한 자들의 노래가 있나이다'라는 뜻이다. 본문은 심지어 술주정뱅이들의 입에까지 다윗을 조롱하는 말이 오르내리는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불경건한 조롱의 노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거룩한 찬송을 드렸던 다윗 자신의 내면 세계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Briggs).
성 경: [시69:13]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여호와여 열납(悅納)하시는 때에...주제 기도하오니 -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저자는 이 같은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겠다는 언약이 신속히 이해되기를 하나님께 암시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열남하시는 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이때를 현재적으로 보는 해석(Matthew Henry)이며 또 다른 것은, 이를 미래적으로 보는 해석(Calvin)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다윗은 현재 닥친 위기 상황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두해석 중 첫째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다. 사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환난의 때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때'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원수들로 말미암아 고통을 심하게 당하고 있을수록 그 백성에 대하여 더욱 간절한 동정심을 지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고통이 극심하여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기 쉬운 때가 바로 '열납하시는 때'요 그래서 '기도해야만 하는 때'이다.
⭕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 얼핏 생각하기에 본문은 환난을 당하고 있는 지금 당장이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때'임을 말하고 있는 앞 문구와 모순되는 듯하다. 왜냐하면 본 문구는 기도 즉시 그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시사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신자들의 기도를 '열납하시는 때'와 구쳬적으로 응답하시는 때가 동일하다고 봐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기도를 '열납하심'으로써 신자들의 곤고한 형편을 파악하신 다음에는, 당신의 선하신 뜻(롬 12:2)에 따라 적절한 때에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자와...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대표적 동기들이다(57 :3). 그중 '인자'(*,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을 향하여 품고 계시는 결코 변할수 없는 사랑을 뜻한다(51:1). 그리고 '진리'(*, 에메트)는 당신의 원수들을 징벌하게끔 만드는 공의로운 기준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다(57:3).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좀 다른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 앞에 '구원'이라는 한정적 단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시는 공의적 성실성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54:5;91:4).
성 경: [시69:14]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 '수렁'은 2절에서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극한 환난을 가리킨다. 이처럼 기자는 '수렁'이나 '물'(15절)과 갈은 이미지를 거듭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위협의 정도가 매우 심각한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 나를 미워하는 자 - 원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다. 사실,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은 도처에 깔려 있었다(4절).
⭕ 깊은 물 - 이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69:15]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엄몰(淹沒)하거나 - 히브리어상으로 2절의 '넘치나이다'와 동일한 동사이다.
⭕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 여기서 '깊음'은 본절 앞 부분의 '큰 물'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깊음이 나를 삼키지'는 본절 앞부분의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와 거의 동일한 뜻이다. 이처럼 저자는 유사 어구의 반복 사용을 통하여, 당면한 상황의 다급성과 기도의 간절성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 웅덩이로...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 '웅덩이'(*, 베에르)는 파서 만든 우물(창 21:25, 7), 구덩이(창 14:10) 혹은 무덤이나 스올(55:23 참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마치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식욕을 지닌 괴물처럼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Anderson).
성 경: [시69:16]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명칭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키는 '인자'(*)와 대단히 잘 어울린다. 시인은 이러한 적절한 표현을 통해서, 당신의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신속히 이행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특히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절대로 변할 수 없음을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필연적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 긍휼(*,레헴) - '깊이 사랑하다'는 뜻의 '라함'(*)에서 파생된 것으로 자연적인 유대(紐帶)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을 뜻하며 특히 윗 사람의 아랫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심을 가리키는데 주로 사용된다(왕상 8:50;렘 42:12).
성 경: [시69:17]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 '얼굴을 숨기는 것' 혹은 '외면(外面)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미움을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실 뿐더러 곤고한 형편에서 빨리 구출해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 '내게 응답하소서'가 이미 앞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되었다(13, 16절). 저자는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 또한 '속히'라는 단어를 덧불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곤궁한 형편에 처해 있었는지를 알리며 거기로부터의 구원을 강력히 탄원하고 있다.
성 경: [시69:18]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 '가까이 하사'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열남하고 계시다고 느낄 만큼(13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여기서 다윗은 다만 자신의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그 응답을 촉구할 목적으로 이 표현을 쓴 것이다. 한편, '구속하시며'(*, 게알라)의 기본형인 '가알'(*)은 속전(贖錢)을 대신 지불하여 억압의 상태에서 구원해 내는 것을 가리킨다(출 6:6;사 52:3;렘 31:11). 이러한 표현은 본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구속 사역을 예표적으로 보여줌을 암시한다.
⭕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 '내 원수를 인하여'는 '원수들의 음모나 흉계 혹은 비난(13:4) 때문에 '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Rawlinson). 시인은 만일 경건한 성도가 대적들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조차 경멸당할 우려가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Anderson). 한편, '속량하소서'(*, 페데니)의 기본형 '파다'(*)는 앞 문구의 '가알'과 것의 동일한 뜻의 동사이다.
성 경: [시69:19]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나의 훼방 - '훼방'(*, 헤르파)은 '비난하다' 혹은 '조롱하다'를 뜻하는 동사 '하라프'(*)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상대를 얕잡아 보고 도전적인 언사로서 비웃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7:10).
⭕ 수치(*, 보쉐트) - '창피를 주다' 혹은 '부끄러워하다'의 뜻인 동사 '보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외부의 모욕적 언행에 따라 극도로 창피한 마음을 느껴는 것을 가리킨다.
⭕ 능욕(*, 켈림마) - '상처를 입히다'라는 뜻인 동사 '칼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마음의 상처를 입을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20:34).
⭕ 내 대적(對適)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 하나님께서 '대적'들이 본 시편 기자에게 행하는 횡포에 대해서 철저히 알고 게시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대적'의 모든 횡포를 친히 보고 계시므로, 다윗의 고통도 알고 계시는 것이다.
성 경: [시69:20]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 여기서 '훼방'은 대적들이 다윗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아 과장적으로 그에게 인신 공격을 가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 한편, '상하여'(*, 솨브라)의 기본형 '솨바르'(*)는 '산산이 부서지다' 혹은 '산산 조각을 내다'의 뜻이다(출 34:1;신 9:17;10:2;사 21:9). 따라서 본문은 원수들의 '훼방'으로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음을 나타낸다.
⭕ 근심이 충만하니(*, 아누솨) -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동사이다. 기본형 '누쉬'(*)는 '아프다'의 뜻이며, 이 기본형과 직접 관련있는 어떤 단어도 여기의 '아누사'를 제외하고는 성경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본 문맥에서, 마음의 고통으로 인하여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완전히 쇠잔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것이다.
⭕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 '긍휼히 여길'(*, 라누드)의 기본형 '누드'(*)는 '불쌍히 여기다'의 뜻으로서, 다른 사람의 딱한 형편을 동정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가키킨다(Keil). 한편. '바라나'(*, 아카웨)의 기본형 '카와'(*)는,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다'의 뜻으로서, 끈기있게 참으면서 자신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가리킨다(창 49:18;사 40:31). 따라서이는 다윗이 오랫동안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정해줄 친구를 찾아 기다렸으나, 발견치 못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과연 다윗에게는 실제로 그러한 친구가 없었을까 ?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다윗의 휘하에는 적지 않은 충성스런 막료(幕僚)들이 있었다(삼상 22:2;삼하 2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아주 절친했던 자들로부터까지 모욕당한(8절)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줄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일 듯하다. 한편, 본문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한 수난과 고독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Alexander). 예수는 고난당하실 즈음에, 당신을 궁휼히 여길 아무도 없으셨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던 것이다(마 26:56).
성 경: [시69:21]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을 주며 - 이러한 다윗 예언적 묘사는, 예수 그리도의 수난에 의해 그대로 성취되었다(마 27:34). 즉, 무리들은 기진 맥진하신 예수께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이다. '쓸개'(*, 로쉬)는 '독'(毒)을 가리키기도 하지만(호 10:4), 셈어에서는 '독'과 '쓴 것'을 동일한 개념으로 본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쓴 것' 곧 '쓸개'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Keil). 70인역도 '쓸개'(*, 콜렘)로 번역하였다.
⭕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 이 문구도 예수님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목이 마르실 때(요 19:28, 29, 무리들은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한 후 그것을 갈대에 꿰어 예수님의 입에 대어 마시게 하였다(마 27:48). 이 '초'(*, 호메츠)는 중근동에서 노예나 죄수들에게 주었던 시큼한 술로서, 최소의 양(量)으로써 그들의 갈중을 해소키 위해 사용되곤 하였다(James Anderson). 따라서 이처럼 '초'를 마시게 한다는 것은, 예수를 마치 죄수나 노예로 취급한 것과 결코 다를 바 없었다.
성 경: [시69:22]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여기서부터 28절까지는, 다윗의 독특한 시적 표현으로써 악인들을 징벌해 달라고 간구한 내용이다.
⭕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 '저희 앞에 밥상'은 악인들의 부요함을 상징한다(겔 23:41;눅 16:19).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이 그들이 누리는 부요로 인하여 도리어 절망하게 해달하는 간구이다. 추측컨대, 이 악인들은 자신들의 부요를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멸시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도 않고 부요하게 지냄에 따라, 하나님은 인생의 일에 관여치 않으신다고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의인에 대한 훼방을 그치지 않았을 것이나, 그러한 계속적인 훼방은 결국 그들 자신들에게 임할 진노를 쌓는 꼴이었다(롬 12:20).
⭕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 이것도 앞 문구와 동일한 의미이다. 즉, 악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으로 인하여 스스로 교만해졌으니(살전 5:3). 그 결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기에 이르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성 경: [시69:23]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 롬 11:10에 인용된 문구이다. 악인들은 그들의 눈을 악행을 일삼을 대상을 찾는 데 사용 하였다. 이에 따라, 저자는 그들을 소경으로 만들어 그들이 더 이상 악행을 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문구를,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자들에게 각종 질병의 저주가(신 28:27,28) 임하게 해달라는 간구로(Anderson), 혹은 그들의 판단력을 상실케 하여 더 이상 흉계를 꾸미지 못하게(사 6:9, 10) 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Rawlinson).
⭕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 '허리'는 힘이나 능력을 상징한다. 악인들은 그 '힘'을 의인을 핍박하는 데 사용했다. 이에 따라, 저자는 그들이 더이상 그 '힘'을 악용하여 의인들을 못살게 굴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성 경: [시69:24]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 79:6;겔 21:31;22:31;습 3:8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응이 악인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하는 말이다. 한편, 본문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저주를 연상시킨다(신 28:15, 45).
성 경: [시69:25]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 고대 중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파괴당한 사람을 가장 불행한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Keil).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이 의인들을 박해하여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 악인들도 마땅히 보응을 받아 그렇게 되도록(마 23:38)해 달라는 간구이다. 여기서 '거처'(*, 티라)는, '둘러싸다'를 뜻하는 동사 '투르'(*)에서 파생되었으며, 둥그런 모양의 촌락을 이루는 유목민의 천막(창 25:16)을 가리킨다(Keil). 그 천막에 의해서 둘러싸여진 공간에는 가축들이 방목(放牧)되었다(민 31:9, 10).
⭕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 이는 앞 문구와 거의 동일한 뜻이지만, 앞 문구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즉, 여기서는 악인들의 죄에 따른 영향이나 결과가 그 후손들에게까지 미치게 해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주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성 경: [시69:26]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여 - '주의 치신 자'는, 다윗이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하나님의 허용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미 다윗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다는 뜻을 표한 바있다(5, 7절) '주의 치신 자'는 인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대신 형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요 1:29). 아무튼 다윗 시대의 악인들이나,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악인들 모두, 하나님의 징벌을 당해 고통을 당하는 자를 동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애매히 '핍박'함으로써 그 고통을 가중시켰다.
성 경: [시69:27]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 '더 정하사'(*, 테나)의 기본형 '타나'(*)는 단순히 '주다'의 뜻이다. 본 문구는 악인들을 타락한 심령 그대로 방치하여(롬 1:24, 28)). 그들도 하여금 계속적으로 죄악을 범하면서 살게끔 내어버려 두시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그들로 하며금 선을 행치 못하게 하거나 또는 그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조장하시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할 경우, 스스로의 타락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죄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 26:10).
⭕ 주의 의(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셔서 - 악인들이 계속적으로 악행 가운데 있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뜻이다(Anderson).
성 경: [시69:28]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塗抹)하사 - '생명책'이란 의인의 이름이 기록된 천상의 명부를 가리킨다(출 32:32;사 4:3;단 12:1;계 3:5;13:8).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구원과 온갖 축복들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영원히 멸망당하고 만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듸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 백성 중 악인들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바 되고, 이에 따라 그들은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시69:29]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징계를 호소]
여기서 다윗은 악인과는 대조적인 자신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 '가난하고'(*, 아니)는 '괴롭히다' 혹은 '압제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나'(*)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약한', '고생하는', '겸손한' 등의 뜻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결핍 상패를 강조하는 '에브욤'(*)과는 좀 다르다. 즉, '아니'라는 단어에는 자신의 무능과 그로 인한 비통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Leonard J. Coppes). 한편, '슬프오니'(*, 코에브)는 '아프다' 혹은 '슬프다'를 뜻하는 동사 '카아브'(*)에서 파생되었으며, 육신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막룐하고 그로 인하여 느끼게 되는 비통함을 가리킨다(욥 33:19;셀 28:24). 이처럼 다윗은 현저히 낮아져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스스로 자고(自高)하여 의인들을 모해하려는 악인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22절).
⭕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 높아지고자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낮아지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는 주님의 교훈(마 23:12)에 비춰 볼 때 이러한 기도는 지극히 합당하다. 어쨌든 이는 원수들의 훼방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 그들에 의해 짓밟히는 비천한 지경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이다.
성 경: [시69:30]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확신과 찬양]
여기서부터 마지막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리라는 확신과 그에 따른 찬양이 나오고 있다.
⭕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 다윗은 비록 여전히 악인들의 핍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믿음의 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리라는 선취적(先取的)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히 11:1).
성 경: [시69:31]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확신과 찬양]
⭕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서 전혀 흠이 없는 '소'임을 말해준다(레 11:3, 4).
⭕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 하나님께서는 값비싼 제물을 드리는 의식적(儀式的) 제사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를 더 좋아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의식적 제사를 무가치하게 본 것은 결코 아니였다. 다만 그는 만일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아니한 의식적 제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의식이 없되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를 더 기뻐하신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듯하다. 다윗이 환난을 당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행한 서원에서 자주 번제 혹은 감사제를 말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54:6;56:12;68:29). 추측컨대 다윗은 환난에서 구출함을 받았을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의 제사뿐만 아니라 의식적 제사도 함께 드렸을 것이다.
성 경: [시69:32]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확신과 찬양]
⭕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 '온유한 자'(*, 아나윔)는 29절의 '가난하고'와 동족(同族)의 단어로서 복수이다. 이는 다윗과 같이 자신의 무능력을 알며 그럼으로써 애통하는 마음을 소유한 자들을 가리킨다. 한편,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는 '온유한 자'들이 다윗이 구원받은 일로 말미암아 다윗과 함께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 그 일로 인하여 기뻐한 것이다(64:10).
⭕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말고 세상에 대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는 권면이다. 앞 문구는 다윗이 악한 자들의 훼방에서 구출됨을 보고 의인들이 기뻐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반면, 본 문구는 의인들이 그 예인을 실제로 성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예언된 바를 선하게 실현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이다.
성 경: [시69:33]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확신과 찬양]
히브리 원문에는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어서, 본절이 32절의 이유임을 말해준다.
⭕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 '궁핍한 자'(*, 에비오님)는 일반적으로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29절). 여기서는 32절의 '온유한 자'와 동일하게 '의인'(28절)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32절의 '온유한 자'가 심령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여기의 '궁핍한 자'는 삶의 현장에서 당하는 빈곤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 의인들의 이러한 경제적 빈곤은 (1) 권세를 잡은 악인들에 의한 수탈이나 (2) 불의한 방법에 의한 돈 벌기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한편, '들으시며'는, (1) 하나님이 의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며 (2) 더 나아가 그 기도에 응답하며 구원할 채비를 하고 계심을 암시한다.
⭕ 자기를 인하여 수금(囚禁)된 자 -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마 5:10)로 표현될 수 있다.
성 경: [시69:34]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확신과 찬양]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의인들이 그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것을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이다. 즉, 의인들은 구원받은 벅찬 감격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며, 다윗은 그 감격을 나누고 싶어서 심지어는 지각이 없는 자연계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대열에 참여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연 만물은 결코 찬양의 대열에 끼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능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암시적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8편;148:3 등 참조). 결국 본문은 위대하신 하나님께 드이는 찬양은 우주적인 성격을 띠고도 남음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사 44:23;55:12). 만일 이처럼 지각 없는 자연 만물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대열에 끼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창 1:26, 27), 특별히 구원받은 백성 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성 경: [시69:35]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확신과 찬양]
이 예언은 1차적으로는 다윗 당시의 예루살렘 구축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부터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귀환함으로써 성취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적 섭리에 따라 구원받게 됨으로써 성취되어가고 있으며 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 여기의 '시온'은 구약적 관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고 신약적 관점에서는 영적 이스라엘(롬 9:6, 30)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항상 보호하셨고 또한 지금도 보호하고 계신다.
성 경: [시69:36]
주제1: [역경에 대한 탄원]
주제2: [확신과 찬양]
⭕ 그 종들의 후손이...이를 상속하고 -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영원히 소유될 수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팔레스틴을 소유하였으며, 신약 시대에는 그 땅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를 영적 이스라엘이 소유하고 있다. 더구나 영적 이스라엘은, 세상 끝날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자신의 영원한 기업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벧후 3:13).
⭕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 이는 어떤 자가 기업을 누릴 수 있게 될지를 말한다. 즉,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 곧 (1)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마 10:32) (2) 하나님만을 구원자로 의지하는(잠 16:20) 자가 그 기업을 소유하게 된다.
성 경: [시70:1]
주제1: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주제2: [핍박으로부터의 조속한 구원을 호소]
⭕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 다윗의 고매한 신앙 인격을 고려해 볼 때, 그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디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다가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인내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성 경: [시70:2]
주제1: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주제2: [핍박으로부터의 조속한 구원을 호소]
⭕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 시인을 해하려는 악인들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 악인들은 그러한 사악성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음으로써(64:8), '수치와 무안을 당케'될 것이다. 한편, '수치를...당케 하시며'의 기본형인 '보쉬'(*)는 모욕적인 언사로써 상대를 극도로 창피하게 만 드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무안을 당케 하시며' 의 기본형인 '하봐르'(*)는 수치 혹은 부끄러움 때문에 냉정을 잃는 것을 가리키며(미 3:7) 여기에는 실망의 뜻도 함축되어 있다(욥 6:20).
⭕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요을 받게 하소서 - '상함'(*, 라아)은 '나쁘다' 혹은 '악하다'를 뜻하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되었으며, 재앙 혹은 재앙을 만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뻐하는 자'(*, 하페체)의 기본형인 '하페츠'(*)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갖는 것을 뜻한다(Leon Wood).
성 경: [시70:3]
주제1: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주제2: [핍박으로부터의 조속한 구원을 호소]
⭕ 아하, 아하 하는 - 이것은 비웃음 섞인 조롱과 비난의 말을 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 저자는 여기서 자신을 해하려는 악인의 행위에 대하여 사용한 히브리어 '보쉬'(2절)에서 파생된 단어 '보쉐트'(*)를 악인들의 실패에 대하여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실패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한 보응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성 경: [시70:4]
주제1: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주제2: [핍박으로부터의 조속한 구원을 호소]
⭕ 주를 찾는 모든 자로...즐거워하게 하시여 - '주를 찾는 자'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목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그럴 경우, '주를 찾는...자'들은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64:10). '주를 찾는...자'는 뒤이어 나오는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주님만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신실한 믿음을 소유한 자를 가리킨다.
성 경: [시70:5]
주제1: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주제2: [핍박으로부터의 조속한 구원을 호소]
⭕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자임을 드러내는 고백이며,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곤고하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구원은 보다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Calvin). 여기서 '가난하고'(*, 아니)에 대해서 69:29 주석을 참조하고, '궁핍하오니(*, 에비온)에 대해서는 69:3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71:2]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 여기서 '주의 의'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면서 인내하는 의인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과 그에 따른 보상을 가리킨다(Rawlinson, Delitzsch, Kraus). 본 시편 기자는 바로 이와 같은 '주의 의'가 자신에게 베풀어짐 으로써 환난에서 건짐 받기를 원한 것이다.
⭕ 나를 풀어 주시며(*, 테팔르테니) - 기본형 '팔라트'(*)는 '도피하다' 혹은 '벗어나다'의 뜻으로서, 생명 보존을 목적으로 한 신속한 탈출 행위를 가리킨다(창 45:7;스 9:8, 13-15).
⭕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해 달라는 뜻의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성도에게 그 응답을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적절하게 유보시키실 뿐, 성도의 모든 기도를 항상 귀담아 듣고 계신다(66:19).
성 경: [시71:3]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주는...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 '피하여 거할'(*, 마온 라보) 중 '거할'(마온)은 주께서 성전에 임재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26:8),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안전한 '거처'를 가리킨다(90:1;91:9). 그리고 '바위'(*, 추르)는 쉽사리 올라가기 곤란한 대단히 크고 높은 바위를 가리킨다(61:2;출 17:6). 따라서 본 문구는, 저자 자신을 아무도 해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보호해달라는 간구이다.
⭕ 무시로(*, 타미드) - 구약 성경의 대부분에서 '항상'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16:8;72:15).
⭕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명하셨느냐는 것은 별다른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고 특정한 대상없이 명령하기도 하셨기 때문이다(창 1:3). 따라서 '명하셨으니'는 저자를 구원키 위한 하나님의 결단으로 봐야 적절한 것이다(68:28). 그런데 하나님의 결단은 곧 성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성 경: [시71:4]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악인(*, 라솨) - 이것은 단순히 악의(惡意)를 품고 있는 정도를 넘어 실제적으로 의인에 대하여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Herbert Livingston).
⭕ 불의한 자(*, 메아웰) - '벗어나다'를 뜻하는 아랍어 '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한 동사 '울각'(*)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올바른 표준에서 벗어나는 나쁜 행동 혹은 그러한 행동을 일삼는 자를 가리킨다.
⭕ 흉악한 자(*, 호메츠) - '발효되다'를 뜻하는 동사 '하마츠'(*)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마치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에 번지듯이 그 인격이 죄악성에 의해서 뿌리 깊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 혹은 그러한 상태에 놓인 자를 지칭한다(마 16: 6;고전 5:8). 따라서 이 단어는, 죄악된 행동을 하는데 대단히 익숙해 있는 극악한 자들에 대하여 사용되기에 적절하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이 단어를 '난폭한 자'라고 사역(私譯)하였다.
성 경: [시71:5]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히브리 원문에는 본 구절이 앞 구절의 이유임을 말해주는 접속사 '키'(*)가 있다.
⭕ 주 여호와 - '주'(*, 아도나이)는 위엄과 지배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칭이다(16절). 다른 시편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또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맥에서 이러한 명칭이 자주 사용되었다(51:15). 그리고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따라서 본 시편 기자는 당신의 백성을 위험에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히 이행되어 자신이 신속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 이는 시인이 자신에게 '주 여호와'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의지하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바라보았음을 말한다(렘 17: 13;50:7). 여기서 '소망'(*, 티크와)은,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다'는 뜻의 동사 '카와'(*)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믿음과 인내를 갖고 하나님께서 베푸실 은혜를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 '나의 어릴 때부터'(*, 민우라이)의 '어릴 때'(*, 나아르)는 '노년 시기'와 반대되는 폭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문맥에 따라서 '유아'(출 2:6), '소년'(창 21:17), 혹은 '청년'(119:9)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본문맥은, 지극히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다음 구절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유아기'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71:6]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내가 모태에서부터...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성장 과정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태, 태아 발육 그리고 출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가 함께 하셨다는 고백이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전 존재를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기를 소원하는 심령을 반영하며 또한 그가 앞으로도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만일 저자가 자의식이 없었던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의식을 소유한 때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그분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 나를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처음부터 돌보아주셨다는 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시인은 이처럼 처음부터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께서 자기가 죽는 순간까지도 적절히 붙드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9, 18절).
성 경: [시71:7]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상한 눈초리로 본 시편 기자를 보라보았다고 말한 것은, 출생 전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고 고백한 시인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볼 때는 현저한 고통(4절)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 주는 나의 견고함 피난처시오 - 본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당하고 있던 환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면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곧 뻗치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71:8]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주를 존숭(尊崇)함(*, 티프아르테카) - '영화롭게 하다' 혹은 '아름답게 하다'를 뜻하는 동사 '파아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축제나 예식 때에 입는 아름다운 의복(사 52:1), 여인의 장식물(사 3:18), 영광(89:17;삿 4:9) 혹은 명예(신 26:19) 등의 뜻으로 쓰였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 혹은 그 영광을 찬양하는 것(잠 28:12 참조)을 나타낸다(Asderson).
성 경: [시71:9]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 '늙은 때'는, 시인이 본 시편을 저작했을 당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시인은 '모태에서부터 붙들어주신'(6절) 하나넘이 생의 마지막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화목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요, 고통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본문은 태(胎)에서부터 1년에 이르기까지 보호해주시겠다고 하신 사 46:3, 4의 약속을 연상시킨다.
성 경: [시71:10]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 - '엿보는 자'(*, 쇼므레이)는 '지키다' 혹은 '경비하다'를 뜻하는 동사 '솨마르'(*)에서 나온 단어로서, 해칠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모든 동태를 주의 깊게 지켜 살피는 모습을 시사한다. 이는 앞 문구의 '나의 원수들'에 대한 설명적 성격을 지닌다.
성 경: [시71:11]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 본절은 압살롬 일당의 반역이 막바지에 이를 당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했던 말을 연상시킨다(삼하 17:1, 2). 아마 이 시구는 본 시편 기자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 '따라'(*, 리드푸)의 기본형인 '라다프'(*)는 '추적하다' 혹은 '핍박하다'의 뜻이 있으며, 상대를 해칠 목적으로 온갖 열심을 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잡으라'(*, 티프수후)는 후속적 행동 곧 여기서는 죽이는 일을 전제로 하는 포 행위를 가리킨다.
성 경: [시71:12]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원수들은, 핍박하는 자신들에게 아무런 징벌도 내려지지 않자 하나님이 본 시편 기자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으신다고 결론을 내렸다(11절). 그러면서 그들은 기자를 죽여 없애버린다고 해도 아무런 벌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계획을 서서히 실행하려 하고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기자는 자신의 구원을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22:19;35:22;38:21, 22).
성 경: [시71:13]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변함없는 도움 요청]
⭕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 '대적하는 자'(*,사트네이)는 동사 '사탄'(*)에서 파생되었다. 이 동사는 '훼방하다'의 뜻으로서, '원한을 품는 것' 혹은 '악으로 선을 갚는 것'(38:20;109:4)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항상 성도를 파멸케 하려는 사악한 인격적 존재인 마귀 곧 '사탄'(*)이라는 용어도 바로 이 동사에서 나왔다(욥 1:6-12). 따라서 이 '대적하는 자들'이란 말은 본 시편 기자를 까닭없이 그리고 집요하게 해치려고 했던 세력들이었음을 넉넉히 보여준다.
⭕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 '욕'(*, 헤레파)은 69편에서 무려 다섯번씩(69:7,10,10,19,20)이나 사용된 단어이다. 어근인 '하라프'(*)는 '비난하다' 혹은 '도전하다' 등의 뜻을 지니며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 위하여 그에게 허물이나 죄를 돌리는 것을 가리킨다(Thomas E. McComiskey),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조롱을 받아 극도의 수치감을 느껴는 것을 뜻할 것이다. 한편 '수욕'(*, 켈림마)은 '공적인 굴욕으로 인하여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 혹은 '패배와 속박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를 가리킨다(삼상 20:34;사 50:6). 이제까지는 악인들이 시인에게 수치를 안겨주려 하였으나 그들은 실패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그 악인들에게 그 수치가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다(70:2).
성 경: [시71:14]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본절의 다짐은 앞절과 갈은 저자 자신의 간구가 응답될 것을 확신한 결과였다.
⭕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 여기서 '소망을 품고'(*, 아야헬)의 기본형 '야할'(*)은 '기다리다' 혹은 '바라다'의 뜻이 있으며, 특히 짧은 기간 동안의 기다림을 가리킨다(창 8:12).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본 시편을 쓸 당시에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속히 보내줄 것임을 확고히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저자는 본 시편의 초반부인 5절에서는 오랜 기간의 기다림을 뜻하는 '소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반면 여기서는 '야할'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을 일종의 점층법식으로 나타낸다.
성 경: [시71:15]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본절은 다음절과 함께 저자의 서원이다. 다른 시편에서도, 환난에서 구원받은 후에 이행하겠다는 여러 모양의 서원이 나와 있다(51:19;7:9; 54:6; 56:12; 61:5).
⭕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전하리이다 - '측량할 수 없는'(*, 키 로야다으티 세포로토)은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나는 그 측량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의 뜻이다(Weiser). 이것은 저자가 '주의 의와 구원'을 전하려고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즉, 저자는 그 '주의 의와 구원'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에, 그 감격으로 그것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접속사 '키'(*)를 양보의 뜻으로 보고 '비록...을 헤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thourh I know not its measure, NIV). 한편 본 문맥에서 '주의 의와 구우너'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의 의'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거나 '구우너'하실 때에 그들을 향해 드러내시는 신실함을 뜻하기 때문이다(Calvin). 다시 말하여 '주의 의'가 드러내어질 때만 '구원'도 있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시71:17]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 본 시편 기자가 어릴적부터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올 터득했음을 말한다(Cavin). 여기서 '어려서부터'는 5절의 '어릴 Eo부터'와 동일한 단어이다. 한편 '교훈하셨으므로'(*, 리마드타니)의 기본형 '라마드'(*)는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 구약 성경의 12단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동사는 단순히 교육하는 것뿐만 아니라 훈련시킨다는 개념도 내포한다. 이러한 훈련시킨다는 개념은, '소를 모는 막대기'를 뜻하는 본 동사의 파생어 '말메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호 10:11). 저자가 이 문맥에서 바로 이와 갈은 어휘를 사용한 까닭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이 철저하게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히 12:7).
⭕ 주의 기사(*,니플르오티카) - '기이하다' 혹은 '놀랍다'는 뜻의 동사 '팔라'(*)의 수동 분사 복수이다. 그런데 어근 '팔라'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돌보심 혹은 반대로 보응적 심판으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기적적 역사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Eichrodt).
성 경: [시71:18]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 내가...백수(白首)가 될 때에도...버리지 마시며 - 9절에서 거의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으며, 죽움이 가까운 노년에도 자신을 계속 보호해달라는 간구이다. 이것은, 시인이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17절 주석 참조)
⭕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 '주의 힘'(*, 제로아카)의 '힘'(*, 제로아)은 원래 '팔'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하나님의 힘을 의미하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방 열강들을 엄중히 징벌하실 때의 도구로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사 48:14;52:10;겔 30:21). 한편 '후대에 전하고'는 말로써 그렇게 한다는 뜻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즉, 저자가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경우, 그것이 곧 의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는 특별한 존재임을 중명하는 일과 다름없음을 시사하기도 하는 것이다(Calvin).
성 경: [시71:19]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 주의 의가...지극히 높으시니이다 - '주의 의'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거나 구원하실 때에 그들을 향해 드러내시는 신실함을 가리킨다(15절, Anderson). 한편 '지극히 높으시니이다'는 15절의 '측량할 수 없는'과 동일한 뜻이다. 다만 '지극히 높으시니이다'는 하나님의 '의'를 높이로써 표현한 반면, 15절에서는 양으로써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 주께서 대사(大事)를 행하셨사오니 - 이는 앞 문구의 구체적 국면이다. 즉, 여기의 '대사'는 16절의 '능하신 행적', 18절의 '주의 능' 등과 동일한 뜻을 전달하는 말로서 앞 문구의 '주의 의'가 역사 속에서 실현된 구체적 모습인 것이다.
⭕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를 소유하셨고, 그래서 '대사'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반문이다. 또한 이것은 그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극복되지 않을 것이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 경: [시71:20]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 '우리에게...보이신 주께서'(*, 히르이타니우)는 오히려 '주께서 나에게...보이셨다'로 번역해야 한다(C. B. Moll, Delitzsch, NIV). 본 시편이 기자의 개인적 고난과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간구를 묘사하고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편, '심한'(*, 라오트)은, '깨뜨리다' 혹은 '분쇄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됐으며, '고난'(*, 차로트)은 '묶다' 혹은 '고통을 가하다'를 뜻하는 동사 '차라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외부적 압력으로 말미암는 강력한 내적 고통을 가리킨다(25:17).
⭕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 바로 앞의 '다시 살리시며'라는 문구와 같이 마치 죽음에 이른 듯한 위기에서도 하나님이 다시 저자를 구출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런데 '깊은 곳'(*, 테훔)은, 70인역에서는 '심연' 혹은 '무저갱'(계 20:1)을 뜻하는 '아뷔소스'(*)로 번역되었으며, 스올 곧 죽음의 상황과 마찬가지로(9:13) 극도의 고난과 위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Delitzsch, Rawlinson).
성 경: [시71:21]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깊은 곳'으로부터 구출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래 모습 그 이상으로 높아지게 해달라는 간구이다(대상 29:28). 한편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나의 위대함을 중대시켜 주시고'이다. 여기서 '위대함'(*, 게둘라)은 대개 하나님께 적용되는 말로 사용되었다(145:3,6).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사람의 존귀나 영예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보드'(*)와 동의어로 쓰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저자가 지위와 그에 따른 위엄을 가리킨다(delitzsch).
성 경: [시71:22]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 비파...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 '비파'와 '수금'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찬양을 암시한다.
⭕ 주의 성실 - '성실'(*, 에메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온전히 이행하신 일과 관련한 그 신실성을 가리킨다.
⭕ 이스라엘의 거룩 하신 주 - 언약 백성을 구속하시는 과정에서 반역적 태도를 취하는 자들을 엄중히 징계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명칭이다(78:41;89:18;출 15:11;사 1:4;렘 50:29;51:5, VanGemeren).
성 경: [시71:23]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 본 구절은, 시인의 찬양이 전인격적인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시인은 위선이나 거짓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 것이다(Calvin).
성 경: [시71:24]
주제1: [노년의 기도]
주제2: [지속적인 찬양에의 다짐]
⭕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 히브리 원문에는 본 문구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어서, 본 문구가 길 22, 23절 그리고 본절 상반 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본문과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본 시편 기자 '모해하려 하던 자'를 징벌하심으로써 기자가 위기의 상황에서 구출될 때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서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중 '수치'는 13절의 '수욕'에 대한 주석을, 그리고 '무안을 당함이니이다'는 13절의 '욕'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72:1]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 '판단역'(*, 미쉬파팀)은 '다스리다', '재판하다'의 뜻인 동사 '솨파르'(*)에서 파생되었으며, 원래 '공의', '재판' 등을 뜻하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치적인 지혜(C. B. Moll, Rawlinson, Calvin, kidner)로 이해된다. 이는 솔로몬이 집권 초기에 백성들을 정의롭게 잘 다스릴 수 있기 위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바 있었던 점과도 일맥 상통한다(왕상 3:$-12).
⭕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 여기서 '의'(*, 체다카)는 본 문구가 앞 문구와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라는 점에서 앞의 '판단력'과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주들에게는 공평한 통치가 율법에 의해서 특별히 명령이 되었다(출 23:3,6)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율법의 기준에 부합되는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폭넓은 뜻을 아울러 시사한다(Kidner). 한편 '왕의 아들'은 솔로몬을 가리킨다. 이처럼 솔로몬이 자신을 '왕의 아들'로 묘사한 까닭은 자신이 다윗의 후계자임을 암시하기 위함인 듯하다. 즉 솔로몬은 자신이 다윗의 후계자임을 이처럼 암시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시겠다던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며(삼하 7:12, 13). 그래서 그 언약 당사자의 아들인 자신에게 이스라엘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게끔 해주는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72:10]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貢稅)를 바치며 - '다시스'는 스페인의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히브리인들에 의해서 보통 이 세상 최서(最西)의 땅으로 이해되었다(왕상 10:22, Anderson). 금속의 채광과 가공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추측컨대 오늘날의 스페인 남부 지브로울터 해협과 가까운 타르테수스인 듯하다. 한편 '섬'은 지중해의 여러 섬들을 가리킨다(에 10:). 그리고 '공세를 바치며'도 피정복왕의 정복왕에 대한 복종의 외적 표현이다(왕상 4:21).
⭕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 '스바'(*)는 아라비아 남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의 가장 비옥한 곳 중의 하나로서, 댐 등의 건설에 의한 관계 시설이 발달되었었다. 이 나라 혹은 민족은 북쪽의 대제국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침입을 당하지 않아 전반적으로 평화와 안전을 누렸다. 바로 이 같은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로 인하여 '스바'는 고대 중근동 지역의 경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고대시대에는 향료, 금, 보석등의 유통 중심지였으며(욥 6:19;사 60:0;겔 27:22, 23) 솔로몬 당시에 실제로 스바 여왕이 많은 예물을 바친 사례가 있다(왕상 10:1-10). 한편 '시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근방으로 추정된다(Josephus).
성 경: [시72:11]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만왕이 그 앞에 부복(府伏)하여 - 솔로몬이 실제로 정복했던 지역은 만왕이 부복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본절은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관한 예언으로 보아야 한다(사 49:23).
성 경: [시72:12]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다. 따라서 11절에서와 같이 '만왕'과 '열방'이 왕에게 부복하고 그를 섬기는 이유는, 12-14절에서와 같은 공의에 근거한 선정(善政) 때문이다. 물론 온전한 의미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한 나라는 메시야 왕국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 여기서 '궁핍한 자'(*, 에비온)는 일반적으로 물질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부르짖을 때'(*, 메솨웨아)의 기본형인 '솨와'(*)는 고통, 압제, 극한 상황 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이 '솨와'라는 동사는 강조형(피엘)으로만 사용될 만큼 행위의 강렬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출 2:23에서의 용례(用例)를 보더라도, 본 동사의 강렬한 의미는 능히 짐작된다. 우리는 본 동사가 바로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궁핍한 자'의 부르짖음이 무슨 연유인지를 대충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권세 잡은 자들과 부유한 자들로부터 수탈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이다. 한편 '건지며'(*, 야칠)의 기본형 '나찰'(*)은 원래 '구해내다' 혹은 '구출하다'의 뜻으로서, 여기처럼 사역형(히필)으로 사용될 때에는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어디로부터 잡아채거나 혹은 분리해내는 것을 가리킨다(삼하 14:16;20:6).
⭕ 도움이 없는 가난함 자도 건지며 - 여기의 '가난한 자'(*, 아니)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도움'(*, 오제르)은, 군사적 지원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 '아자르'(*)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상당한 부담이나 희생이 동반되는 지원 행위를 뜻함이 분명하다. 이처럼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는, 이 세상의 구조속에서는 계속적으로 소외되고 더 나아가 더 손쉬운 착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비록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질지라도, 그들을 도울 경우 자신들에게 가시적인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돕다가 권세있는 자들이나 부자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게 된 것을 염려하여 그 동정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께서는 그들의 억울함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에서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눈물을 친히 닦아주실 것이다(계 21:4).
성 경: [시72:13]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 '가난한 자'(*, 달)는 '낮아지다'를 뜻하는 동사 '달랄'(*)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상대적 연약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부유한 자에 대립되는 '비한한 자'(잠 10:15), 권세있는 자에 대립되는 '비천한 자'(암 2:7)를 가리키다. 여기서는 두 개념 모두를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며'(*, 야호스)의 기본형인 '후스'(*)는 '불쌍히 여기다'혹은 '아끼다'의 뜻으로서, 애틋한 동정심을 가지고 사려깊게 상대를 돌보아주는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이것은, 보이는 유익만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의 행동 방식과 전혀 다른 것이다.
⭕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 이것은 비천한 자들이 권세자나 부유한 자 등으로부터 핍박받고 학대당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도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메시야 왕국이 완전히 도래한 시대에는 이미 악인들이 완전히 제거된 상황이며, 따라서 악인들에 의해서 압박받는 일도 압박받는 자를 건져낼 일도 없을 것이다.
성 경: [시72:14]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 13절 후반부인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의 구체적 언급이다. '압박'(*,토크)은 사기와 협잡이 동반되는 물리적 핍박을 가리킨다. 그리고 '강포'(*, 하마스)는 '...에게 해를 끼치다'를 뜻하는 동사 '하마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불법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이러한 행위는, 이 세상 전체에 홍수의 심판을 내리게 할 만큼 극악한 성격의 것이다(창 6:11, 13).
⭕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 왕이 그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진정한 복리를 보장하리라는 뜻이다(116:15;삼상 26:21;왕하 1:13, 14). 여기서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한다(13절;창 9:4).
성 경: [시72:15]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저희가 생존하여 - 본문을 14절에 연결시켜 '그들이 생존할 것이며'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본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히'(*)와 '드리며'(*, 이텐)는 모두 3인칭 단수이다. 따라서 본 문구의 '저희가'는 '저가'로 번역해야 옳다. 즉 왕 혹은 메시야가 본 문구의 주체인 것이다. 그리고 '생존하여'는 솔로몬에게는 장수하는 것 그리고 메시야인 그리스도에게는 영원히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특히 영역본 RSV와 NIV는 '만세수를 누리소서'(Long may he live!)라고 번역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왕께 환호하거나 인사 올릴 때 사용했던 공식적인 외침을 상기케 한다(삼상 10:24;삼하 16:16).
성 경: [시72:16]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산꼭대기의 땅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 '풍성하고'(*, 예히 피사트)의 '예히'는 미완료 시제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미래가 아닌 기원의 성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Delitzsch). 그런데 '산 꼭대기의 땅'은 본래 척박(瘠薄)하여 곡식이 잘 안 되는 곳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땅'에서도 곡식의 수확이 풍성할 것을 예언적으로 기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경우 그러한 백성이 현실적으로도 얼마나 형통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7절).
⭕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 '레바논'은 성경에서 굵은 백향목이 우거진 곳으로 특징 지워지고 있다(92:12;104:16;왕상 7:2;아 3:9;호 14:5-7). 따라서 '레바논같이'는 '레바논의 빽빽한 백향목 숲과 같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곡식의 수확이 심히 많을 것이라는 앞 문구를 보다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 '성에 있는 자'(*, 메이르)는 문자적으로 '성으로부터'이다. 그리고 '왕성하리로다'(*, 야치추)는 미완료, 3인칭, 복수, 사역형이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도시로부터 땅의 풀같이 왕성하게 하라'로 번역됨이 옳다(Weiser). 그렇다면 본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상반절은 농산물이 크게 증산될 것에 대한 언급인 반면에 여기서는 인구의 번성을 말하고 있다. 욥 5:25에는 후손의 번성을 '땅에 풀'에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왕상 4:20)라는 사실로써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처럼 인구의 번성은 메시야 시기에 있게될 특징적인 일 중의 하나이다(110:3;사 9:2;49:10;슥 2:8).실제로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가 행해지고 있는 이 신약 시대(빌 2:9-11;계 20:4-6)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효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성 경: [시72:17]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 왕의 통치로 인해 축복된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그 왕권이 요동되지 않게 될 것을 말한다. 이는 온 세상을 불순한 동기에 따라 정복 지배하려던 세속의 왕들과 그 나라가 역사 속에 묻혀버렸던 것과 대조된다(Calvin).
⭕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 이것은 백성들이 공의를 행하는 왕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추복을 받게 될 것을 말한다. 저자는 이미 공의로운 왕으로 인하여 물질의 축복도 있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16절). 사실상 이러한 예언은, 하나님이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바였으며(창 12:3), 이것의 완전한 성취는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성 경: [시72:18]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솔로몬은 본절과 다음절에서, 자신의 예언적 기원들(1-17절)이 성취될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찬송한다.
⭕ 홀로 기사(奇事)를 행하시는...이스라엘의 하나님 -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흔히 사용되는 관용적 표현이다(86:10;136:4;욥 9:8, Delitzsch).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나아가 궁긍적으로는 메시야를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솔로몬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과 관계된다. 한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곧 당신의 백성을 끊임없이 성실하게 돌보시는 분이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 여호와 하나님. - 당신의 백성에 대한 언약의 신실한 이행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사실 솔로몬은 왕의 이상적인 통치와 그로 인한 그 나라의 번성을(17절) 하나님의 언약에근거하여 기원하고 있다. 이처럼 솔로몬은 언약에 근거한 기원과 더블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적 기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신함과 동시에 그 기원의 성취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성 경: [시72:2]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저가...의로 판단하며 - '판단하며'의 히브리어 '야딘'(*)은 이것보다 훨씬 빈번히 사용되는 '솨파트'(*)와 동의어라 할 수 있으며 7:8;9:8에서는 나란히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점을 들자면 '딘'이 주로 '재판하다', '심판하다'의 뜻이라면 '솨파트'는 이 뜻은 물론이고 '통치하다', '다스리다'는 뜻도 내포한다는 것이다(삼상 7:6;잠 8:16). 한편 이 두 단어가 재판관의 역할을 언급하는 문맥에서는 '옹호하다', '구원하다' 혹은 '징벌하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 이는 앞 문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다. 즉,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곧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 아니)는 '괴롭히다'혹은 '압제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나'(*)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약한', '고생하는' 그리고 '겸손한' 등의 뜻도 내포한다. 따라서 이는 단지 경제적인 결핍 상태만을 가리키는 '에비온'(*)과는 어감이 다른 말이다.
성 경: [시72:3]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 '의로 인하여'는, '왕이 백성들에게 온전히 공의를 행하고 그 결과로서'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는, (1) 왕의 백성에 대한 통치가 공의로울 때 그 결과로서 나타날 나라의 평화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Delitzsch) (2)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 오곡이 풍성해지는 등 국가 경제가 형통하는 것(Calvin) 등을 아울러 가리킨다. 사실 여기의 '평강'(*, 솰롬)은 내적, 영적 측면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거나 가시적인 형통까지 포함한다.
⭕ 작은 산(*, 기브아) - 이것은 '언덕'(hill)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KJV, RSV, NIV) 앞 문구의 '산'(*, 하르)과 함께 팔레스틴의 지형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이다.
성 경: [시72:4]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여기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 백성이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 '백성의 가난한 자'는 '백성 중의 가난한 자'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군왕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그들은 권세자나 가진 자들의 착취 대상이 되기 쉬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착취의 결과로써 그처럼 '가난한 자'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느 5:1-13). 한편 '신원하며'(*, 이쉬포트)의 기본형 '솨파트'(*)는 원래 '다스리다' 혹은 '재판하다'의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변호하다' 혹은 '변론하다'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삼상 12:7). 따라서 본 문구는, 솔로몬이 착취당하던 '가난한 자'의 어려운 입장을 동정하며 재판하겠다는 뜻이다.
⭕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 '궁핍한 자의 자손'은 곧 '궁핍한 자'를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구약 성경 안에서 자주 발견된다. 즉 '귀족의 아들'은 곧 '귀족'(전 10:17)을, '사람의 아들'(물론 개역 성경에는 '인생'으로 되어 있지만)은 '사람'을 가리킨다(107:8;전 8:11). 그리고 '구원하며'는 권세자나 부자들에게 착취당하는 상태에서 건져내는 것을 가리킨다.
⭕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 '압박하는 자'(*, 오쉐크)의 기본형 '아솨크'(*)는 '압제하다'의 뜻으로서, 권력이나 권위를 남용하여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는 등 그들을 억누르고 짓밟는 행동을 가리킨다(Ronald B. Allen). 한편 '꺾으리로다'(*, 이드케)의, 기본형 '다카'(*)는 '눌러서 뭉개다'의 뜻으로서, 주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욥 5:4;34:25;사 19:10).
성 경: [시72:5]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이것은 4절의 결과이다. 즉 백성의 지도자인 왕이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등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백성도 왕을 본삼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 해...달이 있을 동안에 - 이것은 여호와께 대한 경외가 항상 동일하게 지속될 것임을 말한다. 한편 '해가 있을 동안에'와 유사한 표현은 하나님이 다윗의 왕위와 그 후손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약속하신 말씀 중에도 나온다(89:36).
성 경: [시72:6]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임하리니 - '벤 풀'(*, 게즈)은 차라리 '풀을 벤 들'(mown field, NIV) 혹은 '풀을 벧 들'로 봐야 한다(Delitzsch). '풀을 베는' 때가 비가 전혀오지 않고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초여름이다. 이때에는 풀 포기의 뿌리조차 말라버릴 만큼 수분을 필요로 한다. 본 문구는, 바로 이같이 대지가 빗물을 고대하고 있듯이, 백성들은 공의로운 왕을 기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성 경: [시72:7]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興旺)하여 - 공의로운 왕의 출현이 있을때 '의인'들이 형통할 수 있는 까닭은, 악인들이 의인듸을 훼방하지 못하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모두 제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인'들은 자신들이 노력하는 만큼의 결과들을 얻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공의로운 왕이 되기를 소원했던 솔로몬은, 본문의 문자 그대로 '의인'들이 '흥왕'하는 세상을 실제로 만들지는 못햇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편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에 대한 예인이며, 솔로몬 자신은 완전한 공의의 왕 그리스도의 예표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 '달이 다할 때까지'는 '영원토록'이라는 의미로 보아도 무난하겠다(to the end of time, lb). 한편 '평강'은 앞 문구의 '흥왕'과 본질상 동일한 뜻을 나타낸다. 3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72:8]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본절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이 팔레스틴 이외의 넓은 지역까지도 정복 통치하게 될 것(왕상 4:21,24)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주적인 통치를 행하시는 것(고전 15:25;빌 2:9-11;계 20:4-6)을 아울러 예언하는 내용이다.
⭕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 - 어느 특정한 '바다'를 지칭한다 보아서는 안 된다. 다만 통치 영역의 광대성을 표현키 위한 시적(詩的)묘사이다(슥 9:10). 한편 이 표현은 츨23:31의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라는 말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으며 더 확장시켜 전 세계적 차원의 '바다'와 연관시킬 수도 있다. 히브리 우주관에 의하면 '깊음의 샘' 곧 바다가 땅 아래와 둘레에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24:2;136:6;욥 26:10;잠 8:27)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는 곧 온 땅을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미 7:12;슥 9:10, Anderson).
성 경: [시72:9]
주제1: [이상적 통치에 대한 간구와 기원]
주제2: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찬양]
⭕ 광야에 거하는 자의 저의 앞에 굽히며 - '광야에 거하는 자'(*,치이임)는 '바싹 말려버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아랍만 좌우의 사막 지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을 가리키는 듯하다(70인역은 '이디오피아인들', 시리아역은 '섬들', 그리고 NIV는 '사막 부족들' 등으로 번역함). 이처럼 저자 솔로몬은, 팔레스틴에서 멀직 떨어져 거주 하던 민족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이 대단히 넓을것을 암시한다. 한편 '저의 앞에 굽히며'는 정복자가 정복자에 대하여 취하는 자세이다.
⭕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 이것도 정복자에게 부복하는 자기 비하의 자세이다. 한편 아랍인들은 높은 사람에게 절을 할 때 머리를 땅에 댄다. 그럴 경우, 얼굴과 입에 사막의 모래가 묻을 것이며, 이것을 달리 생각하면 '티끌을 핥는 것'과 다를 바 없다(사 49:23;미 7:17).
성 경: [시73:1]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본 시편부터 83편까지는 '아삽의 시'이다. '아삽'은 다윗과 동(同)시대의 인물로서, 성전에서 찬송하는 악사(樂士)들의 수석(首席)이었다(대상 25:1).
⭕ 하나님(*, 엘로힘)- 본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엘로힘'이라는 명칭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강조한다. 저자는 바로이 같은 하나님의 명칭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주권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 '참으로'(*, 아크)는 본 문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Calvin). 저자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부정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꼈음에 분명하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부정한 자 곧 압살롬의 득세에 따른 것일 수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불의한 자가 흥왕하고 의로운 자가 오히려 쇠망하는 현실의 모습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갖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신앙적 투쟁(13-16절) 끝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애매히 고난을 받은 동방의 의인 욥이 영적 갈등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발전된 새로운 시각을 소유하게 된 것과 유사하다(욥 42:5).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바는 인간의 외면적인 요소곧 외모가 아니라 내면적 요소 곧 그 중심임을 암시한다(삼상 16:7;왕상 8:39;빌3:3). 사실,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께 패역한 행위를 일삼던 자들이얼마나 많았던가 !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고 교회에 출입하지만, 실제로 구원받을 자는 일부분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마 7:21;눅 13:22-30). 한편 '마음이 정결한 자'는 (1) 마음에서 죄의 추잡함과 불결함을 제해버린 자(Delitzsch), (2) 하나님께 대하여 외식적이지 아니하며 간사함이 없는(요1:47) 참된 예배자(Calvin)등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성 경: [시73:2]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 악인의 형통을 목격하고(3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했던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한 단계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적은 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도 신앙적 갈등을 겪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신앙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결국 저자는 배교(背敎)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성 경: [시73:3]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이는(*, 키) - '왜냐하면'이란 뜻의 접속사로서, 본절이 2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 여기서 '보고'(*, 에르에)의 기본형 '라아'(*)는 세심한 관찰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삼상 17:28;23:23;왕하 7:14;사 63:15). 따라서 본 문구는, 저자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처지를 동경하였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의 '형통'(*, 솰롬)은 보통 '안녕' 혹은 '평강'의 뜻이지만,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까지도 포함된다. 본 문맥에서는, 건강의 축복(4절)과 물질의 축복(7절)을 주로 가리킨다.
⭕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 '질시하였음이로다'(*, 키네티)의 기본형 '카나'(*)는 '질투하다' 혹은 '부러워하다'의 뜻으로서, 소유물이나 세상적 가치들에 대해 파괴적일 만큼 강렬한 시샘을 가리킨다(창 30:1;37:11;잠 27:4). 또 '오만한 자'(*, 흘림)는 '높이다' 혹은 '찬양하다'의 뜻인 동사 '할람'(*)에서 파생된 명사형 분사이다. 따라서 '오만한 자'는 악인이 형통하게 됨에 따라 스스로 지극히 교만해진 마음의 상태를 강조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다. 본절의 '악인'은 처음부터 사악한 성품을 많이 갖고 있기는 했지만 부귀가 없었을 때는 교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재물이 많아지자 그 사악한 성품을 토양으로 하는 교만함의 싹이 트고 결국에 가서는 자신을 지극히 높이려는 자가 된 것이다(6절). 이와는 달리 의로운 자는, 비록 부귀를 누리게 된다 해도, 자신을 높이려는 어리석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의로운 자는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진정한 지혜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잠 1:7).
성 경: [시73:4]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여기서부터 12절까지에서는, 악인의 형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말해 준다.
⭕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 '죽을 때까지 고통이 없고'로 번역함이 더 나으리라 본다(all through life their road is smooth, LB). 즉, 평생 동안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 문구에 대한 바로 이와 같은 해석은, 본 문구의 동의적 대구(對句)인 다음 문구와도 내용상 잘 어울린다. 그런데 여기서 '고통'(*, 하르추보트)은 '족쇄'(사 58:6), '결박'등의 뜻이며, 여기서는 복수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각양의 고난을 가리키는 듯하다. 물론 질병도 포함될 것이다.
⭕ 그 힘이 건강하며 - 평생 동안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이같이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반드시 축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질병이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아야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69:5).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에게 아무런 고난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오히려 재앙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같은 사도에게까지 육체에 가시를 주셨고(고후 12:7), 그 가시를 통하여 바울이 하나님의 일에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후 12:9, 10).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 질병 등과 같은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축복의 하나이며,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은혜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시73:5]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본절은 악인의 형통을 좀 과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 악인들은, 보통 사람들이면 으례 겪게 되는 '고난'에서도 예외라는 말이다. 과연 모든 악인들이 다 이와같이 전혀 '고난'을 당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을까 ? 그렇지는 않다. 다만 시인은, 그토록 악한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가시적인 어떤 징벌을 받지 않고 거만하게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이와같이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난'(*, 아말)은 덧없고 무상한 세상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시련을 가리킨다(90:10, Ronald B. Allen).
⭕ 재앙(*, 예누가우) - 이것은 '만지다' 혹은 '치다'를 뜻하는 '나가'(*,)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런데 이 '나가'라는 동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107:18).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징벌적 성격을 띠는 여러 환난들에 대한 총괄적 용어임이 분명하다.
성 경: [시73:6]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악인들이 형통하게 됨에 따라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갖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악인들은 그 형통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패역을 행하는 것이다.
⭕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 이에 대해서는 (1) '목걸이'를 삶의 모양을 좌우하는 삶의 경향으로 보고, 악인들은 개가 목걸이에 의해서 질질 끌려다니듯이 교만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라는 해석(C.B. Moll, Hengstenberg), (2) '목걸이'를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장식물로 보고, 악인들은 교만한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특별한 인물인 듯이 행세한다는 뜻이라는 해석(Calvin)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본 문구의 동의적 대구(對句)인 다음 문구의 '옷'이 신분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둘째,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목걸이'를 장식을 위한 수단으로 말하고 있다(잠 1:9;아 4:9)는 점 등에서, 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보다 타당하다.
⭕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 악인들이 '강포'를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허무한 탁월성을 과시하려 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 문구의 해석을 참조하라. 한편, 로린슨(Rawlinson)은 본 문구를 사람들이 항상 옷을 입고 다니듯 악인들이 '강포'를 다반사로 행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어느 정도 가능한 해석이다(109:18, 19).
성 경: [시73:7]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살짐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 눈두덩이 불쑥 나와 보일 정도로 피둥피둥하게 살졌다는 의미이다(Their eyes swell out with fatness, RSV). 한편 70인역(LXX)과 시리아역은 '눈'을 '범죄'로 번역하여 본 구절을 '살짐으로부터 그들의 죄악이 나온다'(from fat comes forth their guilt)라고 해석하며, 또 어떤 학자는 '솟아나며'를 '빛나다'는 의미로 보고 '그들의 눈이 번영으로 인해 빛난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Dahood).
성 경: [시73:8]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 여기서 '악하게'(*, 베라)는 '...으로'를 뜻하는 전치사 '베'(*)와 '타인을 해치려는 부도덕한 성품'(잠 15:3) 혹은 '난폭한 행위'(신 17:5;삼상 2:23;왕상 16:7;겔 20:44;30:12)를 뜻하는 '라'(*)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압제'(*, 오쉐크)는 '압박하다' 혹은 '폭력을 행사하다'를 뜻하는 '아솨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권력이나 권위의 남용, 즉 낮은 위치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든지 혹은 억누르고 짓밟는 행위를 가리킨다(Ronald B. Allen). 따라서 본 문구는 극도로 악랄한 언어의 폭력을 통하여 상대방을 모멸하는 것을 뜻한다.
⭕ 거만히(*, 밈마롬) - '...로부터'의 뜻인 '민'(*)과 '높음'을 뜻하는 '마롬'(*)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높은 곳으로부터'의 뜻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자신은 높은 사람인 듯 행세하고 상대는 비천한 존재로 얕잡아 보면서'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73:9]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 이에 대해서는 (1) 악인들이 하나님께도 거만한 말을 하였다고 보는 해석(Calvin, Deltzsch), (2) 악인들이 마치 하늘에라도 올라갔던 사람들이나 되는 양(사 14:13) 그래서 위대한 진리라도 소유하고 있는 듯이 거만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C.B Moll) 등이 있다. 그러나 10, 11절이 악인들을 추종하여 그들의 거짓된 주장에 매혹된 백성들에 관한 지적임을 고려할 때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타당하다.
⭕ 저희 혀는 땅에 두르다니도다 - 앞의 문구가 거만한 마음으로 자기의 주의 주장을 내세우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반면, 여기서는 악인들이 자신들의 주의와 주장을 열심으로 퍼뜨리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시73:10]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그러므로 - 본절이 9절의 결과임을 나타낸다.
⭕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 이것은 '백성'이 악인들의 새로운 주의와 주장에 현혹되어 그들의 추종자가 된 것을 말해 준다. '백성'이 악인들의 주의와 주장을 따르게 된 것은, 그들의 형통(3절)을 부러워하였고, 또한 그 형통의 사실을 그들이 진리를 소유한 자임을 확증해 주는 증거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백성'(*, 암)은 '대단히 큰 무리' 혹은 '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 문구는, 아삽의 시대에 수많은 백성들의 배교(背敎)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날에도 외적인 풍성 혹은 부흥을, 진리를 소유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진리를 가장한 비진리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배교의 현상을 세상 끝날까지 계속 있을 것이다.
⭕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 악인들에게 현혹된 추종자들이 악인들의 행동을 답습하는 것을 가리킨다(욥 15:16). 새로운 추종자들은, 악인들이 내세우는 모든 것들을 마치 참된 생명수라도 되는 양 모두 마시었다. 즉, 그들의 악행을 답습한 것이다.
성 경: [시73:11]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하나님이 어찌 알랴 -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되 하나님을 인간 역사와는 무관한 존재로 생각한다. 물론 그 추종자들이 원래부터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최고의 규범으로 삼는 신정 국가의 백성들인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웠다. 그러나 그 지식을 올바르게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다가 급기야는 회의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배교자들은, 악인들을 좇아 악행을 저지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악행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 '지극히 높은 자'(*, 엘룐)는 세상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적 주권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97:9;창 14:19;신 32:8;단 7:18). 그러나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본 명칭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치 아니하시는 분 곧 인간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말하는 데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님의 명칭을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73:12]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항상 평안하고 - 악인들이 불법을 일삼으며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의 징벌을 받지 않고 아무로부터도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 재물은 더 하도다 - 7절 주석 참조.
성 경: [시73:13]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 저자가 경건한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교만하기 그지없는 악인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 자신이 곧 경건한 삶을 살았는데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고 하는 한탄이다. 악인은 불의한 삶을 사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도 받은 듯이 형통한 반면, 저자 자신은 경건한 삶을 사는데도 현실적인 부귀를 누리기는 커녕 오히려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14절) 이같이 극심한 갈등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손을 씻는다는 것은 죄악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욥 9:30).
성 경: [시73:14]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 저자는 까닭을 알 길 없는 재앙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는 등 신앙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그 신앙 인격을 정금같이 단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편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마치 욥이 죄가 없었음에도 고난을 당한 것과 같다(욥 33:19). 그러나 욥은 이러한 연단을 거침으로써 영육간에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욥 42:5, 6, 12-17).
⭕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 '징책'(*, 토카흐티)은 '책망하다', '교정하다'의 뜻을 갖는 '야카흐'(*)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사랑을 근거로 하여 회개를 촉구키 위한 징벌 행위를 가리킨다(욥 5:17;잠 3:12;사 1:16-20). 비록 저자가 '손을 씻는'등 깨끗하게 살려고 했지만, 그래도 저자는 때때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69:5;욥 9:30,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억울한 듯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큰 죄악을 범해도 형통하지만(12절) 자신은 조그만 허물로 인해서도 툭하면 징계를 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침마다'는 마치 하나님이 저자를 위해 매일 징벌을 준비하신 듯한 느낌을 저자가 받았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저자는 악인의 형통을 목격하면서 당하는 징계였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매일' 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성 경: [시73:15]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본절에서 저자는 (1)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었다는 사실, 그러나 (2) 그 의심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그래서 다른 배교자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는데, '이 의심하던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발설할 마음을 굳혔다면'이라는 가정이다. 따라서 이 가정은, 저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은 했으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심지어 말할 결심까지도 아니했음을 암시한다.
⭕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 저자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을 발설하려는 결심이, 결국 어떤 잘못인지를 말해 준다. '주의 아들들의 시대' 중 '시대'(*, 도르)는 '시간'(時間)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특별한 그러나 유사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민 32:13;신 1:35). 따라서 '주의 아들들의 시대'는, 악인들에 동조하여 배교를 했던 자들(10절)과는 구별되는 의로운 무리들을 가리킨다(14:5;왕상 19:18). 한편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바가드티)의 기본형 '바가드'(*)는 '신의없이 다루다'의 뜻으로서, 잘못된 행동이나 말로써 상대를 실족케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욥 6:15).
성 경: [시73:16]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저자는, 악인을 형통케 하시고 도리어 의인에게는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였으나, 스스로의 고민으로는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전 8:17).
⭕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 '심히 곤란하더니'(*, 아말)는 '노동하다' 혹은 '애쓰다'의 뜻으로서, 노동의 어두운 측면 곧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취가 없다는 측면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따라서 '심히 곤란하더니'는 노력에 따른 수고의 대가가 없음으로 말미암은 극심한 마음의 고통 혹은 슬픔을 의미한다(삿 10:16;욥 16:2;렘 20:18).
성 경: [시73:17]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번영을 누리는 악인의 결국]
여기서는, 한동안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악인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저자가 드디어 거기에 대한 답을 얻었음을 말해 준다.
⭕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깨달았나이다. -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책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저자가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악인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었다. 저자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 실패한 까닭은 (1) 인간의 지혜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할 만한 능력이 없는데도 그러한 지혜를 의지하였으며, (2)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이미 갖고 있음으로 인하여 그와 동시에 그의 영지(靈智)는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계시 의존 사색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저희 결국 - 저자가 깨달은 바가, 악인들의 최종적 운명에 관한 것이었음을 말한다. 사실 저자가 알기 원했던 것도 악인들의 미래사(未來事)였다. 즉, 저자는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악인들을 형통케 하실 것인지를 궁금해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당시 저자의 눈으로는, 그들이 더욱 형통해 갈 것 같았고 끝까지 멸망당하지 않을 듯했었다.
성 경: [시73:18]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여기서부터 20절까지는, 17절에 나오는 '저희 결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말한다.
⭕ 주께서...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 '두시며'(*, 타쉬트)는 '위치시키다' 혹은 '놓다'를 뜻하는 '쉬이트'(*)의 미완료형으로서, 여기서는 현재 진행형의 의미로 번역함이 적절하다(What a slippery path they are on, LB). 그렇다고 한다면, 본 문구는 악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형통이 곧 그들에게는 '미끄러운 곳'에 해당됨을 암시한다. 사실 악인들은 그 형통으로 인하여 극도로 교만하여졌고, 그 교만은 그들을 결국 패망케 할 수밖에 없다는(잠 16:18) 점에서, 그들의 형통은 곧 그들에게 '미끄러운 곳'임에 틀림없다.
⭕ 파멸에 던지시니 - '파멸'(*, 마슈오트)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 단어는 '지옥'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35:8;74:3;욥 30:3;38:27).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주로 사후(死後)에 철저하고도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사실 악인들 중 평생 동안 형통하게 살고 그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물리적 징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반면에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징벌을 받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잠 11:31). 그 실례로 (1) 다윗에게 반역하고서 한동안 흥왕하였던 압살롬은 그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리므로 요압의 군대에 의하여 비참한 죽임을 당했으며(삼하 15:13;18:9-15), (2)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의 두려운 죄 가운데로 빠뜨리면서도 오랫동안 권세를 휘둘렀던 이세벨도 결국 개의 밥이 되었고(왕하 9:30-37). (3)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을 소유한 유다의 왕통을 끊으려 했던 아달랴도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칼에 의하여 응징되었고(왕 11:1, 13-20), 또한 (4) 성전에서 돼지고기로 제물을 삼게 했던 셀류키드 왕조의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는 원정 중 죽임을 당하였다. 사실 그 외에도 악행을 일삼으면서 한때 형통하였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완전하고도 철저한 응징은 사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시행되어질 것이다.
성 경: [시73:19]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 '어찌 그리'(*, 에크)라는 감탄사는, 저자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악인들의 파멸이 이루어짐을 강조하며, '졸지에'(*, 케라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의 뜻이다(잠 12:19). 그리고 '황폐되었는가'(*, 사포)의 기본형 '수프'(*)는 '끝내다' 혹은 '그치다'의 뜻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렘 8:13), 특별히 종말에 있을 여호와의 심판에 대하여(사 66:17;습 1:2 이하) 자주 사용된다.
⭕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 '놀람으로'는 악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응징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예상 밖이었음을 말해 준다(Calvin).
성 경: [시73:20]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 사람들은 꿈을 꾸는 동안에는 꿈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치 사실처럼 여기고 슬퍼하거나 즐거워하지만, 일단 꿈에서 '깬 후에는'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슬퍼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자는 바로 이와 같은 뜻의 비유를 통하여, 저자 자신이 악인의 형통을 목도하고 부러워하며(3절) 심히 고민했었던 것(16절)은 마치 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과 같이 무시해야 할 대상에 불과함을 암시한다(Calvin).
⭕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 '주께서 깨신'은 악인의 횡포에 대하여 인내하기를 그치시고 때가 되매 그들을 심판하실 자리에 좌정하시는 것을 가리킨다(35:23). 한편 '형상'(*, 첼렘)은 '외면적인 것', '환영'(their phantoms, RSV) 혹은 '환상'(fantasies, NIV) 등을 뜻한다. 따라서 본 저자는, 악인들의 형통이 다만 그림자와 같이 헛된 것일 뿐 실체가 아님을 암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1) 세상의 가치들은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보장해 줄 능력이 없으며, 또한 (2) 그것들은 세상 끝날에는 모두 사라져버릴 것들(벧후 3:10)이라는 점에서 타당하다.
성 경: [시73:21]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저자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던 것을 자책하는 모습이 나온다.
⭕ 내 마음이 산란하며 - '산란하며'(*, 이트하메츠)의 기본형인 '하메츠'(*)는 '시어지다' 혹은 '발효하다'의 뜻으로서 떡반죽이 누룩에 의하여 부푸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함으로 말미암은 불평이, 누룩 들어간 반죽이 잔뜩 부풀어 오르듯이 극심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Calvin).
⭕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 '찔렸나이다'(*, 에쉬토난)의 기본형 '솨난'(*)은 '갈다' 혹은 '날카롭게 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심장'이라는 목적어와 합하여져서 마치 예리한 송곳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격심한 마음의 고통을 가리킨다. 한편, '심장'(*, 킬르요트)은 '몹시 간절히 열망하다'는 뜻인 '칼라'(*)에서 파생되었다. 이처럼 '심장'이라는 단어의 언근이 '매우 간절히 열망하다'는 뜻일 수 있는 까닭은, 심장이 인간의 욕망이나 소원의 좌소(座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Calvin).
성 경: [시73:22]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 자신이 왜 하나님의 공의를 잠시 잠깐이나마 의심하고 또 하나님께 불평했었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준다. 그런데 '우매 무지하니'라는 말 중에서 '우매'(*, 바아르)는 '짐승'을 뜻하는 '베이르'(*)에서 파생했으며, 마치 짐승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려 완강히 버티는 완악한 사람을 가리킨다(TDOT). 한편 '무지하니'(*, 로 에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14:4). 이와 같은 몰지각한 상태는 앞의 '우매'와 다음 문구의 '짐승'이라는 단어들의 뜻과 잘 통한다.
⭕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 여기의 '짐승'(*, 베헤모트)은 욥 40:15에서 볼 수 있듯이, 거대한 덩치를 한 동물로서 대단한 어리석음의 상징인 하마나 물소를 뜻한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아무런 이해력도 갖고 있지 못했음을 시인하는 저자의 과장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73:23]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 저자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회의를 품기도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교(10절)에 이르지는 아니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같은 저자가 배교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다음 문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이었다.
⭕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 '오른손'은 '왼손'보다 힘이 더 강한 손(사 41:10)이라는 점에서,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특별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붙드셨나이다'는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된다(18:35;119: 117;사 41:10).
성 경: [시73:24]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하나님께 불평한 일에 대한 회개(21, 22절)을 마친 저자는,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에게 임할 것을 확신한다.
⭕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 '교훈'(*, 아차트)은 '충고하다', '조언하다'의 뜻인 '야아츠'(*)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권고'로도 번역되었다(잠 12:15). 그리고 '인도하시고'(*, 타느헤니)의 기본형인 '나하'(*)는 '안내하다'의 뜻이 있으며, '목적지로 무리를 이끌고 가다'는 뜻인 '나하그'(*)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본문은 성도의 궁극적 구원 혹은 견인(堅忍)을 보장하시기 위한 성도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암시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를 위하여 '교훈'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딤후 3:15, 16). 성도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곁길로 갈 가능성이 많다. 고난을 당한다거나 혹은 유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때때로 신앙의 발걸음을 주춤하거나 심지어 실족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성도의 연약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성도 개개인에 대한 '인도'의 섭리를 펼치고 계신다.
⭕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 '후에는'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싸움을 다 싸운 다음에는'의 뜻이다(딤후 4:7). 그리고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는, 하나님께서 기자에게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암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영접하시리니'(*, 티카헤니)의 기본형 '라카흐'(*)는 창 5:24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에녹을 하나님께서 하늘로 데려가신 사실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성 경: [시73:25]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 오직 하나님만이 저자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되신다는 뜻이다. 물론 '하늘'에는 천사들이 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천사들도 온전한 의뢰의 대상은 못 되며,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영광으로 영접'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 여기서도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뢰의 대상일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모할 자'(*, 하파츠티)의 기본형 '하페츠'(*)는 '...을 기뻐하다'의 뜻으로서, 어떤 상태를 기뻐하며 그에게 큰 호의를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73:26]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 나이가 들거나 혹은 질병으로 말미암아 심신이 쇠약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고난을 받음으로 인하여 지극히 조악한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때에는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지를 절감하게 된다.
⭕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 '반석'(*, 추르)은 쉽사리 오르기 곤란할 정도의 높은 바위를 뜻한다. 따라서 여기의 '반석'은 의인이 원수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만 오를 수 있는 피난처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의 평화와 위로 그리고 소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는 뜻이다. 한편, '분깃'은 인간을 행복하고 풍족하게 살게 해주는 삶의 터전을 의미한다(미 2:4;합 1:16;슥 2:12).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만이 우리를 유복하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또한 하나님만이 행복의 근원이심을 말한다(Calvin). 이처럼 하나님을 우리 성도의 '분깃'으로 말하는 경우는 성경 전체 그리고 특히 시편에 많이 나타난다(16:5;119:57;142:5;애 3: 24).
성 경: [시73:27]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 대저(*, 키) - '왜냐하면'이란 뜻의 접속사로서, 본절과 다음절이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반석'과 '분깃'으로 삼아야(26절)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 주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멀리하는 것은 그분과의 단절 곧 죽음을 택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주를 멀리하는 것'은 본 시편의 문맥상 '배교'를 의미한다(10절).
⭕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 '음녀'는 자신의 본래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정(情)을 통하는 여자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교제 의무를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을 상징한다(106:39). 한편, '멸하셨나이다'(*, 히츠마타)는 완료형이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현재 시제로 번역해도 무난하겠다(NIV, RSV).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 영적 '음녀'에 대한 심판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도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시73:28]
주제1: [악인의 형통에 대한 신앙적 해답]
주제2: [더욱 성숙된 믿음]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결국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27절), 그 반대로 '하나님과 가까이 함' 곧 그 분을 '반석'과 '분깃'으로 인정하는 것(26절)은 '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맥상 여기의 '복'은 다분히 내세적이어서(24절) 사람들에 의해서 선호되지 아니한다. 사람들은 대개 당장 눈에 보이는 형통만을 좋아하며 좇는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배교하기에 이르며, 심지어 본 저자도 그럴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다(15절). 그러나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형통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좇는 자는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금생과 내생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24절).
⭕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 영적 '음녀'들은 우상 혹은 이 세상의 방법을 자신들의 '피난처'로 삼는다. 하지만 본 시편 저자는, 참 하나님을 의지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가시적인 이 세상의 형통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영원한 형통를 맛보기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 여호와'(*, 아도나이 예화) 중 '주'는 하나님의 범우주적 통치 혹은 거기에 대한 주재권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언약의 신실한 이행을 강조한다. 그런점에서 여기의 '주 여호와'란 명칭은, 하나님이 저자의 미래를 온전히 보장하고도 남음이 있으신 분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성 경: [시74:1]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 이러한 탄식조의 기도는, 이스라엘이 이방 대적으로 인해 오랫동안 질곳에 빠뜨려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계가 잠간 동안만 가해질 것으로 보았으나, 그 기간이 오래 지속되자 비탄에 빠져 버리게 된 것이다.
⭕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 '주의 치시는 양'은 특별한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결속을 강조하는 술어로서, 예레미야에 의해서도 잘 사용되었다(렘 23:1, 2). 저자는 이러한 독특한 술어의 사용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암시적으로 간구하고 있다. 한편, '진노'(*, 아프)는 '화를 내다' 혹은 '불쾌하게 여기다'를 뜻하는 '아나프'(*)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콧구멍' 혹은 '화'를 의미한다. 사실 화가 나면 심리적 흥분 현상과 함께 숨을 몰아쉬게 됨으로 말미암아 씩씩거리게 되며 또한 그 결과로서 콧구멍의 팽창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예으솬)는 단지 '연기'를 뜻하는 명사 '아'에서 파생된 동사로서 그 기본형이 '아솬'(*)이며,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80:4;신 29:20;사 65:5). 이처럼 하나님의 분노 행위를 묘사하는 동사가 '연기'를 뜻하는 명사에서 파생된 까닭은, 하나님의 분노는 온 세상을 순식간에 불살라버릴 것같이 너무나도 두렵고 맹렬하게 임하기 때문이다(18:8;104:32;144:5).
성 경: [시74:2]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 '얻으시고'(*, 카니타)는 노예로 팔린 친척을 일정한 대가를 주고 되사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느 5:8). 그리고 '구속하다'(*, 가알타)의 기본형은 '가알'(*)로서, 앞의 '카나'와 비슷하게 노예가 된 친척을 위하여 대신 속전(贖錢)을 지불해 주고 해방시켜주는 행위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의 '카나'와 '가알'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기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고 있는 출 15:13, 16에서도 병행 사용되고 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본 문구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
⭕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민중에서 특별히 구별하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일을 가리킨다(신 7: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같이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자들이었다. 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이러한 각별하신 사랑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어서 그쳐지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파'(*, 쉐베트)는 통치권의 상징인 '홀'(笏)과 '부족'을 아울러 뜻한다. 이는 '지파'가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부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이방 국가나 부족에 대해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회중'(*,예다)은 '지명하다' 혹은 '약혼시키다'를 뜻하는 '야아드'(*)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그 기본 의미는 '모임', '회중' 등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혼자로 지정된 것과 같은 특별히 구별된 신분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기자는 이스라엘을 이러한 독특한 용어로 묘사함으로써, 자신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보호를 간구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1:5;수9:15, 27). 또한 '기억하시며'(*, 제코르)의 기본형 '자카르'는 '생각하다' 혹은'주의를 기울이다'의 뜻이 있으며, 여기서처럼 명령형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는,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강력히 요청하는 기원의 형식이 된다(출 32:13;삿 16:28;왕하 20:3;대하 6:42).
⭕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 '거하신'(*, 솨카느타)의 기본형 '솨칸'은 '임시로 거주하다'의 뜻으로서 주로 하나님의 임재, 특히 성소에의 임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왕상 8:12;대하 6:1). 따라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인 '성막'을, 바로 이 동사 '솨칸'의 파생형인 '미쉬칸'(*)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 '시온산'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 곧 예루살렘을 뜻한다(신12:11).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중 바로 이 한 곳을 택하셔서 당신의 '회중'들의 중심지로 삼으셨고, 그곳에서 그들과 교제를 나누고자 하셨다(78:68;84:7;132:13).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온산은 하나님의 보호가 있을 만한 특별한 곳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 시온산의 특별성을 내세워 시온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해제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74:3]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 '영구히 파멸된 곳'은 바벨론 군대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특히 '영구히'라는 표현은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까지도 '포기케 할 만큼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것을 시사한다(Deltzsch). 그리고 '주의 발을 드십소서'는 천천히 혹은 가만가만히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크고도 당당한 발걸음으로 직접 행차해 주십사하는 간구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곳인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것을 직접 확인하시고(Rawlinson), 그렇게 폐허로 만든 원수들 곧 바벨론을 징벌해 달라는 것이다(Calvin).
⭕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 바벨론 군대가 '성소', 곧 '성전'에서 범한 악행으로는 (1) 성전의 기명(器皿) 및 집기들을 모두 약탈해 간것(왕하25:13-17), (2) 성전을 불태운 것(왕하 25:9), (3) 성전벽을 파괴한 것(왕하 25:10)등이 있다. 사실 바벨론 군대의 이러한 악행은 만군의 여호와를 만홀히 여긴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패역을 일삼았던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깨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이처럼 당신의 임재 장소요, 백성과의 언약적 교제의 장소인 성전을 바벨론 군대를 도구삼아 파괴하신 것이다(애 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을 만홀히 여기고 또한 그 백성을 괴롭게 한 데 대한 징벌로서 결국 그들을 멸망시키셨다(렘 51:24).
성 경: [시74:4]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 '회중'(*, 모에드)은 '지명하다'를 뜻하는 동사 '야아드'(*)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지정된 때', '지정된 장소' 혹은 '지정된 모임' 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지정된 장소'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래서 이 단어는 성경 여러 곳에서 '회막'으로 번역되었다(출 39:32;신 31:14;왕상 8:4). 이러한 번역은 3절의 '성소'와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3-7절은 한결같이 '성전'에 대한 바벨론 군대의 파괴 행위에 대하여 언급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훤화하며'(*, 쇠아구)의 기본형 '솨아그'(*)는 본래 사자가 크게 포효(咆哮)하는 것을 가리키며(104:21;삿 14:5;암 3:4, 8) 여기서는 원수들에게 적용되어, 승리를 기뻐하며 자만하여 크게 부르짖는 것을 의미한다.
⭕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 이스라엘을 정복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던 여호와의 성전을 파괴한 것은, 이스라엘 정복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바벨론 군대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의 신(神)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겼다는 사실을 기념키 위한 오만한 짓이었다.
성 경: [시74:5]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 이것은 바벨론 군대가 성전 안에서 행한 악행이 아무런 두려움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잔인무도하게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렘 46:22, 23).
성 경: [시74:6]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성소의 모든 조각품 - 성전의 내외소(內外所) 사면 벽에 장식됐던 그룹 모양과 종려와 핀 꽃 형상들을 가리킨다(왕상 6:29). 그런데 이 '조각품'은 금으로 도금이 되었기 때문에 전체가 금으로 오인되어 모조리 뜯겨지거나 파괴되어졌다(왕상 6:22,32,35,Rawlinson,).
성 경: [시74:7]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 솔로몬의 성전은 느부갓네살의 신하 느부사라단에 의하여 소화(燒火)되었다(왕하 25:9;대하 36:19). 한편 B.C. 516년에 재건됐던 스룹바벨 성전은 결코 불에 태워진 일이 없다. 바로 이 같은 사실들은, 본 시편이 바벨론 군대의 침공시에 저작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당신이 백성들과 교제하시는 장소 곧 성전을 가리킨다. 물론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이 예루살렘을 의미하기도 한다(신 12:11). 그러나 여기서는, 본 문맥이 성전에 대한 바벨론 군대의 행악(行惡)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가 타당하다. 한편,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는 불에 소화된 성전이 땅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것을 가리킨다(왕하 25:9;렘 19:13;애 2:2). 특히 '더럽혀'는 하나님의 성전에 불을 지르고그 전에 있는 장식물들을 파괴한 일을 말할 것이다(6절).
성 경: [시74:8]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 사실 인간은 대개 개인적으로는 악행을 하기에 앞서 주춤하곤 한다. 하지만 한 집단에 속하여 개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기 불가능한 분위기가 되고, 또한 서로에 의해서 악행이 격려되고 자극받을 때에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극악한 행위도 서슴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진멸하다'의 기본형 '야나'(*)는 '압박하다' 혹은 '부당하게 다루다'는 뜻으로서 관용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상대를 짓밟아 뭉개듯 학대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고 '회당'이라는 점에서 무참하게 파괴하는 것을 나타낸다.
⭕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 '회당'(*, 모에데)은복수이므로, 단수인 4절의 '회중'(*, 모에드)과는 다르다. 즉 4절의 '회중'은'성소'(3절)를 가리키지만 여기의 '회당'은 성소와는 별도로 존재했던 종교적 집회 장소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본 시편을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회당'은 포로 귀환 시대에 에스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존재하게되었다고 생각하는 결과이다. 물론 '회당'이 에스라에 의하여 유대 사회에 본격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회당'은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있었던 지방 주민들에게 종교적 편의를 제공해 줄 목적으로 포로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다(왕하 4:23). 이러한 목적의 '회상'이 남.북 왕국 모두에 있었으며, 특히 이곳은 선지자들의 활동 중심지였던 것같다(Rawlinson). 예레미야도, 바벨론의 공격이 맹렬하게 진행되던 그 시대에 '회당'이 이미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애 2:6). 아무튼 바벨론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벌하면서 그들에게 민족 정기를 일깨워줄 만한 종교적 중심지에 대한 파괴를 병행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보다 완전하게 달성하려고 하였다(83:4)
성 경: [시74:9]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 여기서 '표적'(*, 오토테누)이란 4절의 '표적'과 동일한 단어이다. 하지만 그 쓰임새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총이 임하리라는 것을 예시해 주는 어떤 '징조'를 뜻한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마치 짙은 구름이 두텁게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아서 희망을 줄 만한 단 한 줄기의 빛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통로이자 수단인 성전이나 회당이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문구가 말하고 있는 바 곧 선지자가 없었던 사실도, 백성들의 마음을 암울하게 하였을 것이다.
⭕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 혹자는 본 문구에 근거하여 본 시편의 저작 시기를 마카비시대로 본다. 만일 본 시편이 바벨론 침공시대에 저작되었다고 한다면, 그 시대에는 다니엘과 에스겔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가 엄연히 살아 있었는데 왜 본문과 같은 말을 저자가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바벨론의 마지막 공격이 있었던 때에, 다니엘은 이미 바벨론에 잡혀가 있었으며(단 1:1, 6), 에스겔도 갈대아 땅의 그발강가 언덕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고(겔 1:1), 또한 예레미야는 애굽땅에 들어가있었다(렘 44:1).
⭕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아는 자도 없나이다 -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 지배될 기간이 70년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바 있다(렘25:1-11). 그러나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리 만치 일방적으로 당하고, 또한 그 바벨론은 지극히 강성하여 절대로 멸망할 것 같지 않은 듯 보였기 때문에, 비록 예레미야의 70년에 대한 예언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백성들은 자신의 민족 공동체가 회복 불능의 암울한 미래를 가졌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성 경: [시74:10]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 여기서 대적의 훼방은,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살륙의 대상으로 삼은 것,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전을 훼파한 것등을 가리킨다. '훼방하겠으며'(*, 예하레프)는 '무시하다' 혹은 '비난하다'의 뜻으로서, 상대방에게 인격적 손상을 가하기 위하여 조롱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 능욕하리이까(*, 예나에츠) - 기본형 '나아츠'(*)는 '경멸하다' 혹은'멸시하다'의 뜻으로서, 호의적인 처분이나 봉사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상대방에게 의도적으로 경멸로써 응대하는 것을 가리킨다(신 31:20;32:19).
성 경: [시74:11]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주의 백성이 당하는 슬픔의 호소]
⭕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 이는 일시적이나마 기자가,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 행사를 게을리하고 계신 것처럼 생각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 행사를 결코 게을리하신 것이 아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들의 악행 자체는 결국 스스로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과 같은 결말에로 몰고 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정해진 때까지 죄악을 방치해 두시다가 그것이 관영하면 철저히 심판을 실행하시는 것이다(창 15:16;렘 50:11-16).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공의를 행
사하고 계셨던 셈이다.
성 경: [시74:12]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여기서부터 15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호의 역
사를 펼치셨음을 회고한다. 저자는 이같이 함으로써 앞으로도 그러한 보호의 역사가 다시 펼쳐지기를 염원한다.
⭕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대리자로서, 백성들을 이방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사명의 소유자로 인식되었다(삼상 9:16).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저자가 '우리의 왕'이 아니라 '나의 왕'이라고 한 까닭은, 하나님께 백성의 구원을 인하여 기도하는 기자가 그분께 대한 인격적 신뢰를 갖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 '인간에'(*, 베케레브 하아레츠)는 문자적으로 '세상 가운데서'의 뜻이다. 이것은 '인생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라는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암암리에 되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펼쳐졌다는 뜻이다. 사실 출애굽때의 기적적 사건들은 중근동의 많은 민족들에게 엄염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졌고 그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을 심히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출 15:14-16;수 2:8-11).
성 경: [시74:13]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 하나님께서 홍해를 초자연적 능력에 따라 가르셨던 사건을 가리킨다(출 14;21, 22).
⭕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 '용들'(*, 타니님)은 문맥에 따라 '뱀'(출 7:9) 혹은 '용'(욥 7:12) 등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 단어는, 예언서에서는 주로 애굽 왕 바로 및 그 나라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사 51:9;겔 29:3;32:2). 그런 점에서, 본 문구는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합쳐짐으로써 애굽의 추격대가 모두 수장(水葬)되었던 사실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출 14:27-30). 특히 '머리를 깨뜨리셨으며'는, 애굽이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었음을 시사한다(창 3:15).
성 경: [시74:14]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악어의 머리를 파쇄(破碎)하시고 - 여기서 '악어'는 애굽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절도 하나님께서 애굽을 강력히 심판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던 과거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특히 본절은, '악어'가 물 속에서 헤엄을 치다 물 위로 잠간 머리를 내밀었을 때 몽둥이 등으로 세게 맞아 죽음으로 그 죽은 몸이 뭍으로 던져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Delitzsch).
⭕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 여기서 '사막에 거하는 자'(*, 레암 레치임)는 한글 개역 성경처럼 '사막에 거하는 사람'의 뜻으로 보면 곤란하다. 히브리어 '레암' 중의 '암'이 '백성'이라는 뜻을 갖기도 하지만, 다만 '피조물'이란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 30:25에서는 '개미'를 지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사막에 거하는 자'라는 표현은 동물의 시체를 즐겨 먹는 하이에나 따위의 짐승 혹은 개미를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다.
성 경: [시74:15]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 '큰물'(*, 마으얀 와나할)은 문자적으로 '샘과 개천'을 뜻한다. 아무튼 본 문구는 (1)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호렙 산 반석에서 샘이 터지게 하신 일(출 17:6), (2) 신 광야의 반석에서 많은 물이 나오도록 하신 일(민 20:11) 등을 가리킨다.
⭕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요단 강의 물 흐름을 일시 멈추게 하신 일을 말한다(수 3:13).
성 경: [시74:16]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심지어 자연 만물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말한다(롬 1:19, 20). 특히 저자는 자연 만물속에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깨닫고는, 그 인자와 사랑이 외적의 침공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신들에게 미쳐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 이것은 주야(晝夜)의 반복적 변화가 우연적인 자연 법칙에 따른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오히려 완벽하게 창조하신 우주에 대한 보전적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통제하고 계심을 보여준다(창 1:14-18).
⭕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 여기의 '빛'(*, 마오르)은 '발광체'를 의미하지만, 본 문맥에서는 '달'로 봄이 타당하다(moon, NIV). 왜냐하면 앞 문구에서 하나님이 '낮'과 '밤'을 나누신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며, 또한 '해'는 '달'과 더불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는 두 '광명'으로 대조되기 때문이다.
성 경: [시74:17]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의 일환으로 육지와 바다를 적절하게 분리시키신 것을 뜻한다(33:7;창 1:9;욥 26:10;38:8;잠 8:29;렘 5:22). 한편 칼빈(Calvin) 등은 본 문구를, 하나님께서 각 민족들로 하여금 각각 적절한 지역에서 살아가도록 인자를 베푸신 것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신 32:8;행 17:26). 그러나 16절과 본절의 문맥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주장은 타당치 않다. 하나님께서 각 민족들을 적절한 지역에 흩어져 살게 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는 창조 작업이 끝난 한참 뒤의 일이었다(창 10장).
⭕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 '여름과 겨울'의 반복은 창조 질서 중의 하나였으며, 노아와의 보전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 질서가 계속 지켜질 것임이 확약되었다(창 8:22). 그런데 만일 인간의 타락과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여름'과 '겨울'이 불규칙적으로 찾아오게 되었다면, 인간이 겪는 고통은 극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름과 겨울'이 정확하게 그리고 질서있게 찾아오도록 하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당신의 자비를 극명하게 보여주셨다.
성 경: [시74:18]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여기서부터 23절까지는 본 시편의 결론 부분이다.
⭕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 다음 문구에서 언급되는 '원수'들의 악행을 그냥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한 탄원이다.
⭕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 이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비방하며'는 10절의 '훼방하겠으며'와 같은 동사이다.
⭕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 '능욕하였나이다'도 10절의 '능욕하리이까'와 동일한 동사이다. 본 문구의 의미에 대해서도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저자가 바벨론을 '우매한(*, 나발)의 백성'이라고 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으며, 또한 하나님의 성소를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징벌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백성임이 분명했다.
성 경: [시74:19]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 '멧비둘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들짐승'은 바벨론을 각각 가리킨다. '멧비둘기'는 힘이 없어서 육식 조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데, 바로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면, 멧비둘기인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주의 가난한 자(*, 아니예카) - '괴롭히다' 혹은 '압제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나'(*)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본 문맥에서는 '압제를 당하여 불쌍한'의 뜻으로 이해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군대의 포로가 되어(왕하 25:11) 잔학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성 경: [시74:20]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언약을 돌아보고서 - 여기서 '언약'은 하나님이 대대로 아브라함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언약을 지칭하는 듯하다(창 17:7). 그 언약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살도록 하시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창 17:8).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바벨론, 곧 갈대아 땅으로 끌려갔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께 언약을 생각하시어,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하지만 모세 언약에 따르면, 범죄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레 26:27, 28;신 5:28-33;왕상 8:46, 47).
⭕ 대저(*, 키) - '왜냐하면'이라는 뜻으로 본 접속사에 이어지는 다음 문구는,저자가 '언약을 돌아보소서'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 '땅 흑암한 곳'에 대해서는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 갔던 바벨론 땅을 가리킨다는 견해(Rawlinson),(2)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처하게 된 비참상을 묘사한다는 견해(Calvin), (3)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군대의 학대를 피하여 숨을 만한 은밀한 곳이라는 견해(Delitzsch) 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본 시편의 전체적 분위기를 볼 때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던 곳은 여전히 팔레스틴 땅임이 분명하며, 둘째, '흑암한 곳'(*, 마흐솨크)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난처를 가리킨다고 할 만큼 긍정적인 뜻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등에서, 위의 세 견해 중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성 경: [시74:21]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학대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 '부끄러이 돌아가다'라는 말은, 어떤 상대에게 무엇을 구걸하였으나 그것을 얻지 못하여 빈손으로 돌아갈 때의 처량한 모습을 연상시키며,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 이것도 바벨론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후 그 벅찬 감격 속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궁핍한 자'(*, 에브욘)은 주로 경제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72:4).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침공과 그들의 극심한 수탈(收奪)행위로 말미암아 엄청난 경제적 궁핍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시74:22]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 '하나님이여'는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탄원에 앞서 흔히 나타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일어나사'(*, 쿰)는 실질적인 기립(起立) 행위가 아니라 다만 어떤 중대한 행위에 앞선 마음의 결단을 호소할 때 빈번히 사용된다(7:6등).
⭕ 주의 원통을 푸시고 - '푸시고'(*, 리바)의 기본형 '리브'(*)는 '다투다' 혹은 '논쟁하다'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대적들의 압제로부터 의인을 보호하거나 공의를 세우는 일을 가리킨다(Robert D. Culver). 그리고 '원통'(*, 리브)은 '다툼' 혹은 '대항'의 뜻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함으로써 그분의 권위에 도전한 것을 말한다.
⭕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 - 바벨론이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했었던 사실을 말할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서 승리하였을 경우, 그 패전국의 신(神)을 모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Rawlinson, 왕하 19:10-13;사 10:8-11).
성 경: [시74:23]
주제1: [고난에 처한 성도의 기도]
주제2: [탄원의 근거]
⭕ 주의 대적의 소리 - 이것도 승리의 함성이다. 그런데 이 소리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과 자신들을 높이는 교만한 자화 자찬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 - 문자적 의미로는 '계속 일고 있는 대적의 훤화'인데, 이 상태로는 온전한 문장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앞 문구의 '잊지 마소서'가 두 개의 목적절, 즉 '주의 대적의 소리'와 '계속 일고 있는 대적의 훤화'를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은 '주의 대적의 소리와 계속 일고 있는 대적의 훤화를 잊지 마소서', 혹은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시고 또한 계속 일고 있는 대적의 훤화를 잊지 마소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NIV. Weiser). 특히 후자는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극도로 교만해진 바벨론을 징벌해주기를 바라는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동의적 대구법 방식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성 경: [시75:1]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 '감사하고'(*, 호디누)의 기본형 '야다'(*)는, '경배하다', '고백하다'의 뜻으로서, 특히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공적으로 시인하는 것 혹은 찬양하는 것을 주로 가리킨다. '감사하다'의 의미는, 본 동사에서 다소 부속적인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구약 히브리 단어 중에서 '감사하다'라는 독립적 개념만을 갖고 있는 단어가 없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Ralph, H.Alexander). 한편, 본 문구의 '감사함은'도 앞의 '감사하고'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처럼 저자는, 동일한 단어의 반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자신의 감격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 '주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이나 성품 혹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52:9). 하지만 본 문맥에서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 혹은 하나님의 섭리, 보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의 악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54:1;사30:27). 한편, '가까움이라'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징치하실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며 아울러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던 앗수르의 강력한 군대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하여 순식간에 전멸됨을 목도하고(왕하19:35-37), 이처럼 모든 악한 세력들은 불원간(不遠間)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절되리라는 종말론적인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 앗수르의 대군이 몰살 당한 것은 저자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온 백성에 의해서 확인되었을 것이다. 그 놀라운 사실을 직,간접으로 확인한 그들이 본 문구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79:13;눅8:39).
성 경: [시75:2]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히브리 원문에는 본 문구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어서, 본절이 1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분임을 시사한다.
⭕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 '주의 말씀이'는 그 다음 부분부터 5절까지가 하나님이 직접하신 말씀임을 밝혀주기 위한 삽입이다. 한편,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징벌하시기로 작정하신 시점이 되면'이라는 뜻이다(합 2:3).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즉시 악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정한 기약'을 두시어 뒤로 미루시는 것일까 ? 그것은 (1)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시며(벧후 3:9), (2) 죄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딤전 2:4), (3)의인을 더욱 연단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수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빌 1:10,11)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全知)하신 판단에 따라 가장 합당한 시기를 '정한 기약'으로 삼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말고, 다만 인내로써 그날을 기다려야 한다.
⭕ 정의로 판단하리니 - 원문에는 '내가'를 뜻하는 인칭 대명사 '아니'(*)가 있다. '판단하리니'(*, 에쉬포트)라는 단어가 이미 '내가 판단하리니'를 뜻하는데도 이처럼 '아니'라는 인칭 대명사를 덧붙인 까닭은, 행위 주체자의 결단적 의지를 강조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한편 '정의로'(*, 메솨림)는 '곧다' 혹은 '합법적이다'를 뜻하는 동사 '야솨르'(*)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원리 원칙대로'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재판은 '공평 무사'(公平無私)하여 그 결과로 인하여 불평 불만이 있을 수 없다(9:8;사11:4). 또한 이러한 재판은 지극히 엄정하여, 모든 잘못과 죄악에 대한 죄책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철저히 추궁한다.
성 경: [시75:3]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 '땅의 기둥'은, 히브리인들에 의하여 이 세상의 기초로서 인식되었었다(욥기 서론,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근본적인 창조주요, 또한 이 세상을 요동치 않도록 붙들고 계시는 관리자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는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에 주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한다(삼상 2:8).
⭕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 하나님께서는 '땅의 기둥' 곧 '세상의 기초'를 세우셨을 만큼 세상에 대한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악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전(保全) 역사를 알지 못하고, 과학주의의 허탄한 이론을 좇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다(롬 1:19-21).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반 은총에 따라 당신의 자녀들에게처럼 햇빛을 비춰주시며 비를 내려주심(마 5:45)을 인정치 않고, 모든 소산이 자기들의 능력에 따라 거둬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자연계를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롬 1:22, 23). 따라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신 절대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가하실 것이다(사 24:19;계 6:12-17).
성 경: [시75:4]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본절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입을 빌어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 2:3)라고 하신 것과, 둘째,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교만한 세력들을 초자연적 역사에 따라 만민이 알도록 징벌하신 것 등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최소한 후자(後者)는, 만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높이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하는 충분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이는 자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두려운 심판뿐임이 당연하다.
성 경: [시75:5]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 '뿔'은, 뿔달린 동물이 자신의 머리를 쳐들고 힘을 과시하며 자랑스럽게 다닌다는 점에서, '힘', '능력', '권위', '자부심' 등을 상징한다(신 33:17;삼상 2:1). 따라서 본 문구는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도전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특히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적 태도를 뜻한다.
⭕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 본질적으로 본 문구는 앞의 문구와 동일한 의미이다. 하지만 본 문구는, 특히 앗수르 왕 산헤립의 신하 랍사게가 대군(大軍)으로 예루살렘을 완전 포위한 후 예루살렘 거민을 협박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자신들을 결코 이기지 못하시리라는 허탄한 말을 한 것(왕하 19:10, 11)을 염두에 둔 듯하다.
성 경: [시75:6]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다음절과 더불어 본절은, 한 개인 혹은 한 국가가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은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의 랍사게(5절)는 자신의 국가를 스스로 높이는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 하나님을 낮추려 하였다(왕하 19:10, 11). 따라서 앗수르는 오직 하나님만 높이거나 낮추실 권세가 있다는 지고(至高)의 법칙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두렵고 엄중한 징벌을 받아 완전 전멸당하고 말았다(왕하 19:35-37).
⭕ 동에서나 서에서...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 저자가 이처럼 세상 어디에도 한 개인이나 국가를 높일 자격 혹은 권세를 가진 사람이 없음을 말하면서, 네 방향 중 '북쪽'만을 뺀 까닭은, 자신들을 스스로 높이고 이스라엘을 낮추려 했던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했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북쪽'만을 생략함으로써, 북쪽의 앗수르 역시 결코 자신들을 높이거나 이스라엘을 낮출 수 있는 권세를 갖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75:7]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 재판장이신 하나님 - 이러한 표현은, 한 개인이나 국가를 높이거나 낮추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결코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일일이 굽어 살피시사 그 사람의 행위대로 낮아지려는 자는 높이시고 높아지려는 자는 낮추신다(마 23:12;눅 1:52).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가 이 세상에서 명백하게 가시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 끝날 악의 세력에 대한 최종적 심판이 가해지는 그날에는, 그 원리가 완전하게 적용 시행될 것이다(계 21:8).
성 경: [시75:8]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잔'은 '진노의 잔'이다(사51:17, 22;렘 25:15, 17, 28;49:12;애 4:21;겔 23:31-33;합 2:16).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진노를 퍼부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심을 말한다(마 3:10).
⭕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 '술 거품'은, 포도주에 다른 취제(醉劑)를 섞은 결과이다. 이 '취제'는 빨리 그리고 강하게 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포도주에 집어 넣곤 하였었다(잠 9:2;23:30;아 8:2;사 5:22).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의미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신속하고 극심하게 내려질 것인가를 술이 인체에 퍼지는 힘과 속도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 - '술 거품'이 일어나는 술잔을 가리킨다. 앞 문구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 하나님께서 마침내는 맹렬한 진노로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시기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다(2절).
⭕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 이것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전혀 피할 수 없을 것임을 말한다. 세상 끝날에는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게 된다.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악인들은, 천지 요동의 진노가 임하자 그것을 피하려 무진 애를 쓰지만, 결국 그럴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모두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렘 25:15;계 6:12-17;14:10).
성 경: [시75:9]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저자는 여기서 세상 끝날에 대한 예언적 조망을 그치고 현재의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악인을 철저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적 신실성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57:10, 11;58:10;64:9).
성 경: [시75:10]
주제1: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의로운 심판]
⭕ 악인의 뿔을 다 베고 - 우리는 이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해석들을 접할 수 있다. (1) 저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라 악인들의 권세를 압도하겠다는 결의라는 해석(Calvin), (2)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져서 악인들이 어서 빨리 제거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Rawlinson) 등이다. 그러나 저자가 살았던 히스기야 시대에 어떤 한 개인이 악인 혹은 악한 세력을 징치했던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으며, 그리고 현실적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여전히 득세할 수 밖에 없음을 감안한다면, 위의 두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할 것이다.
⭕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 '악인의 뿔'이 베어짐으로써 나타날 자연스런 귀결이다. 앞 문구가 저자의 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듯, 본 문구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뿔'에 대해서는 5절 주석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