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9:13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33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백마를 타고 있는 이가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 자체만 놓고 본다면 기이합니다. 백마를 탄 자는 멋진 혼례복을 입든지 늠름해 보이는 갑옷을 입어야 어울립니다. 피 뿌린 옷은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삼십 대 초반의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그렇게 자연스러운 건 아닙니다. 소위 고등종교의 창시자들은 한결같이 천수를 누렸습니다. 불교의 싯다르타와 이슬람교의 마호메트, 유대교의 모세가 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제자들을 많이 키웠고 나름으로 종교 조직체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공적 활동 기간이 2년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의 메시지와 활동도 역사에 파묻혀야만 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 역사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 실존 인물의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시작된 겁니다. 도대체 십자가 처형 뒤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으며,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을까요? 불가사의입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Ὁ Λόγος τοῦ Θεοῦ)이라고 불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름’이라고 할 때 피 뿌린 옷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예수 자체를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피 뿌린 옷, 즉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가 예수님이니까 결국에는 같은 의미이겠지요. ‘말씀’이라는 단어는 Ὁ Λόγος(호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로고스는 word, saying, message, teiching, talk, conversation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요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 나오는 ‘말씀’도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스토아 철학만이 아니라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 합리성, 진리, 이데아 등등의 의미를 함축합니다. 하나님 개념이나 성령 개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철학이 이런 용어를 붙들고 씨름하는 이유는 궁극적인 진리를 모를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진리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물리학은 이를 불확정성이라고 말합니다. 부분적인 사실과 원리와 진리는 많이 압니다. 우리가 아는 부분이 전체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는, 그래서 어떤 결과를 빚을지는 알지도 못하고 예측하지도 못합니다. 아무리 완벽한 인공지능 컴퓨터를 이용해도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그 결과치를 완벽하게 맞추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리학자들이 모든 걸 다 통합해낼 수 있는 이론을 찾아가고 있으나, 예를 들어서 초끈이론이나 장이론,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인식의 한계라는 임계점을 인간은 영원히 돌파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성경의 관점이 바로 이 사실과 연결됩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가 만물의 근원인 로고스라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