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0:5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46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괄호로 묶인 대목은 일부 전승에 빠진 내용입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성경 원본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실되었습니다. 그 원본을 베끼어 쓴 사본은 많습니다. 사본에 따라서 일부 차이가 있습니다. 위 5절의 괄호 부분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첫째 부활’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교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첫째 부활이 있다면 둘째 부활이 있겠지요. 둘째 부활은 그야말로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마지막 때 주어지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활을 첫째와 둘째로 구분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순교자와 일반 그리스도인들을 차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하늘나라 자체가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인데 거기서 황금 면류관을 쓰는 사람이 있고, 개털 모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순교자나 일반 그리스도인, 교황이나 목사나 신학자나 평신도, 교회에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이나 적게 한 사람이나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습니다. 똑같이 죽고, 똑같이 부활합니다.
그런데도 요한이 첫째 부활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가 순교 시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순교자가 나온다는 말은 교회가 백척간두의 처지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말이 순교이지 누가 순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역설적으로 당시에 순교자들이 나오지 않았다면 교회가 로마 제국 안에서 중심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로마 문명권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순교를 보면서 뭔가 영적으로 크게 감동을 하였겠지요. 이런 점에서 순교자들은 교회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최후의 심판을 거쳐야만 부활 생명을 얻을지가 결정 나지만 순교자들은 그런 최후 심판을 거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분명한 생명을 얻은 이들이라고 말입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기계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건 문제가 되겠으나 순교자의 특별한 위치를 강조한다는 뜻이라면 크게 문제는 아닙니다. 어쨌든지 모든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여전히 비밀입니다. 그 비밀 안으로 조금씩이라도 깊이 들어가는 게 최선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