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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거짓 것
yeu'do"
거짓말, 거짓 a lie.||#1. 고전 헬라어 문헌||명사 프슈도스(Homer 이래)는 프슈도마이($5574:거짓말하다, 거짓말로 속이다)에서 유래했으며, '거짓말, 거짓, 허위'를 뜻한다. 이 단어는 진실이나 진리를 뜻하는 알레데이아($225)와 반대되는 말이다.|(참조: Plato, Hippras Minor 370e).||#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프슈도스는 70인 역본 구약성경에서 33 여회 나오며, 주로 '사기, 속임수, 거짓'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셰케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슈도스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9회 사용되었으며, 바울 서신과 요한의 기록에만 나타난다.|요한복음은 거짓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 마귀의 극단적인 대립을 보여 준다. 요 8:44은 마귀를 살인자와 거짓말장이로 묘사하고 있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말하는 것과 사망은 계시자의 진리와 생명에 대립한다. 여기에서 거짓말하는 것이란 단순히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한다라는 뜻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려는 의지, 불신앙에서 비롯된 증오, 그리고 거기에서 결과하는 헛된 노력을 함축한다.|불트만(Bultmann)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실존론적인 용어로 해석하였다: '프슈도스가 사람을 죽이는 까닭은 이 무가치함(nothingness)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사람에게서 그의 본래적 성격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The Gospel of John). 또 예수께서 그 적대자들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요 8:41 - 요 8:47을 참조하라.|요한복음에서 프슈도스의 일차적 의미는 도덕적 범죄에 있지 않다. 그것은 불신자가 계시자의 진리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증오심을 함축한다. 이러한 식의 거짓말은 그러한 행위 자체를 무슨 경건의 최고봉이나 되는 듯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이렇게 될 때 거짓말은 가장 무서운 것으로 된다. 이와 같은 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리스도의 계시에 저항하기 위해 장벽을 높이 쌓아 올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요한 문서에서 '거짓'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 대한 증오와 그 결과로 초래되는 미혹과 사망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 없는 삶이라는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에베소서(엡 4:22)에 나오는 훈계인 거짓을 버리고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할 때에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개별적인 단점으로서의 거짓말이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을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참조: 골 3:9). 여기에서 프슈도스는 '거짓말'을 함축한다. 이 계명이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이유는, 기독교인은 "옛 사람"(엡 4:22; 골 3:9)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엡 4:24; 골 3:1O)을 입을 것이며, 따라서 거짓말하기를 그치는 경지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도 거짓말을 특수한 개념으로 이해한다. 거짓말하는 자나 흉악한 행위를 저지른 죄인은 어느 누구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계 21:27; 계 22:15; 참조: 계 21:8). 어린 양에 속한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와는 정반대 이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계 14:5). 요한복음 및 요한일서에서 그러하듯이 요한계시록에서도 거짓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들어있다. 그래서 스스로 유대인임을 내세우면서 거짓말을 하는 빌라델비아의 유대인들은 "사단의 회"라고 묘사되었던 것이다(계 3:9).|(참조: U.Becker; H.G.Link).
재난
wjdivn
해산의 고통 pain of labor.|||#1. 고전 헬라어 문헌||명사 오딘은 후기의 문어체 오디스(%84)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해산의 고통, 진통'을 의미한다. 고전 헬라어 저술가들은 초기형태인 오디스를 인간이나 또는 동물 가운데 출산에 따른 고통을 묘사하는데 사용했으며, 또한 비유적 의미로 어떤 유형의 괴로움이나 또는 진통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하였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오딘은 70인역본에서 33회 나타나며, '산고'의 뜻을 가진 힐, '산고를 경험하다'의 뜻을 가진 훌, '아기를 낳다'의 뜻을 가진 얄라드, '출산의 고통'이란 뜻의 헤벨, '고통'을 뜻하는 할할라, 문자적으로 '자궁 경부'를 뜻하는 마스베르, 그리고 '고통, 경련'이란 뜻의 치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 히브리어들은 가끔 상징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항상 문자적인 해석이 강하게 묘사되었다. 따라서 오딘은 자주 '해산의 고통'에 비유한 '고통'을 묘사하며(사 13:8; 사 37:3; 렘 6:24 등), 때때로 죽음의 고통을 묘사하기도 하나(왕하 22:6; 시 17:4 등), 출산을 나타내는 문맥에서 문자적인 의미로 빈번히 사용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오딘은 신약성경에서 4회 나타난다.||(a) 살전 5:3에 오딘이 나오는데, 임신한 여인이 보통 상황하에서 겪는 필연적인 산고의 사실이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전망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 경우 사건 발생에 있어서 예상하고 있을 때조차도 갑작스러운 일이다. 본문의 요점은 자기 안전감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멸망이 예기치 않게 닥칠 것이라는 사실이다.||(b) 막13:8("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과 마24:8("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에서 오딘은 심한 고통을 나타내는 비유로 나타난다. 재난이 마지막 때를 예고할 것이다. 마태는 "재난의 시작" 을 새로운 시대의 탄생에 앞서서 나타나는 모든 종말론적 재앙과 관련시킨다. 여러 가지 재앙은 구원의 때가 촉박함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여기서 오딘은 그 본래의 의미인 '해산의 고통'이 의미하는 바 새로운 시대의 탄생의 진통인 것이다.||(c) 행2:24에서 오딘도 부활의 신생을 위한 진통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여기에서 해산의 고통을 죽음(다나토스)과 연관시켜 70인역본에 나오는 어구 시 17:5(오디네스 다나투, "사망의 올무")과 시17:6(오디네스 하두, "음부의 줄", 시 18:5)을 반영하고 있다. 임신한 여인이 그녀의 몸 속에 있는 어린 아이를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처럼 음부도 구속자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지하 모태는 구속자를 풀어 놓는다. 하나님이 도우사 그 고통을 종식시킨다.|(참조: G.Bertram; R.K.Harrison).
가르치는 말씀
didachv
가르침, 교훈||#1. 헬라어 문헌의 용법||이 명사는 디다스코($1321: 가르치다)에서 유래했으며, 헤로도투스(Herodotus)와 투키디데스(Thucydides) 때부터 헬라어 문헌에서, 가르침에 의해 전달된 '교훈'이나 '교설'이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플라톤과 필로와 요세푸스의 작품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70인역본에서 시 59:1의 에이스 디다켄(훈계를 위하여)라는 구절에서만 그 단어가 나오며, 이 구절은 히브리어 레람메드를 번역한 것이 다.||#3.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서 디다케는 30회 나오는데,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13회, 요한문서에 9회 나온다.||(a)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디다케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청중에 끼친 그 파격적인 영향을 언급하든 아니하든 간에 그것은 특별한 도그마나 윤리체계를 의미하지 않고 그의 가르치신 모든 것, 형태와 내용에 관련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의 선언을 의미한다. 막 1:22; 막 1:27에서 디다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그 내용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은 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마가복음 기자가 이 가르침을 예수님이 베푼 이적(miracles)과 밀접하게 판련된 것으로 본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말하자면, 그 이적들이 그 가르침의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를 입증해 주는 증거자료이기 때문이다. 막 11:18에 그의 권위있는 가르침은 서기관들이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이유로서 제시되는 한편, 막 12:38에 디다케는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논박까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있다.|마 7:28에서 디다케를 앞에서 기록한 구절, 즉 그리스도의 메시지 중에서 율법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진 부분인 산상수훈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였다(참조:마 22:23). 하지만 그는 이 개념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만 국한시켜 사용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사용한다(마 16:12).||(b) 요한복음에서도 디다케는 예수님의 가르치신 모든 것을 의미하며, 단지 그의 개개의 진술에 대한 개설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 7:17이하(참조:요 18: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요한의 메시지는 아버지께로부터 유래한 가르침으로 묘사된다.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요이 1:9 이하에서 디다케 크리스투("그리스도의 교훈")로 된다. 그러나 이 양자의 내용은 같은 것이다.||(c) 사도행전의 용법도 유사하다. 여기에서 디다케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설교나 전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사도의 가르침"(행 2:42), "주의 가르치심"(행 13:12), "새 교"(행 17:19, 새 가르침), "너희 교"(가르침, 행 5:28)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누가의 기록을 살펴 볼 때, 이 모든 표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의미한다(참조: 행 1:21). 마태복음에서 아직도 여전히 디다케로 묘사되기도 했던 율법에 관한 해석이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침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는다.||(d) 바울은 일반적으로 롬 6:17과 또 롬 16:17에서만 디다케를 사용한다. 이 두 경우에 이 단어는 사도로서의 자신의 가르침 전체를 가리킨다. 고전 14:6; 고전 14:26에서 이 단어는 여러 형태의 "덕을 세우는 말" 중의 하나를 가리키며, 이 모든 말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대조된다.||(e) 바울이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사용한 디다케의 용법은 목회서신에서 발견되는 용법과 대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는 이 단어의 범위를 확실하게 규정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목회서신(참조: 딤후 4:2; 딛 1:9)에서는 디다케를 그 모습 그대로 가르쳐 전수되어야 할 일정한 교리의 집합체를 뜻하는 것같다. 이런 사실은 다른 구절에서 `가르침'이 파라데케(:위임된 것, 딤전 6:20; 딤후 1:12; 딤전 1:14)와 디다스칼리아(교리)로 칭해진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같은 사정은 히브리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왜냐하면 히 6:2에 밥티스몬 디다케(세례[침례]에 관한 교훈)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히 13:9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의 적대자들의 가르침을 디다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f) 요한계시록에서 요한도 기독교의 대적자들이나 이단자들의 가르침을 디다케로 묘사한다. 계 2:14에 "발람의 교훈", 계 2:15에 "니골라당의 교훈", 계 2:24에 "이[이세벨] 교훈"에 대해 언급한다.||(g) 이상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디다케는 그리스도의 메시지 (그의 회개와 믿음에의 요청도 포함)와 가장 넓은 의미로서의 초대 기독교인들의 설교를 의미한다. 확정된 교리의 집합체와 어느 정해진 시기에 선포된 메시지 사이에 어떤 분명한 구별이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놀랍다. 초대 교회가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미 다소간 확정된 교리의 집합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인용했던 짤막한 신앙 고백문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비록 자신은 아직 그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산상수훈에 수집된 자료들도 역시 이러한 동향을 보여준다. 이같은 편집 활동은 결국 `12 사도의 가르침'(Did.2:1; 6:1; ll:2) 및 바나바의 디다케(9:9)로 귀결되는데, 이 디다케들은 권위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함께 못 박히다
sustaurovw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다 crucify with.||#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스타우로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쉬스타우로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쉬스타우로오는 마 27:44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병행구 막 15:32; 요 19:32).||(b) 쉬스타우로오는 롬 6:6에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묘사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 옛 사람" 혹은 '우리 옛 자아'가 주님과 함께 못박혀서 "죄의 몸이 파괴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권능이 파괴된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갈 2:2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여기에는 율법주의에 내맡겨진 죄많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 뒤에 있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을 여전히 고찰할 수 있다.|(참조: J. H. Thayer; :Walter Bauer).
더디오
Tevvrtio"
더디오 Tertius (인)||테르티오스/ 더디오는 '제삼'을 뜻하며, 신약성경에서 롬 16:22에 한번 나온다.|더디오는 로마서를 대필하였으며, 그 편지 속에 자신의 문안인사를 삽입한 바울의 비서이다.
경외함
fovbo"
공포심, 두려움, 놀람, 경악, 공경, 존경, 경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포보스(Homer 이래로)는 페보마이(: 도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도주, 공표, 경악, 두려움, 경외' 등을 의미한다.|헬라 신화에서 포보스는 실제적인 강력한 신으로, 아레스(Ares)의 아들이며, 전형적인 전쟁의 신이다. 봉헌의 비문에는 포보스가 제우스 다음, 모든 신들 앞에 있다. 알렉산더가 포보스에게 제사를 드렸다. 스파르타에는 포보스를 위한 신전이 있다. 이 신은 공포를 자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형상은 호모가 묘사한 공포의 신을 구체화한 것이다.||#2. 70인역본의 용법||포보스는 70인역본에서 약200회 나오며, 9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 단어는 70인역본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사물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데 대해 사용되어, 경외의 대상이 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창 31:42, 53; 사 8:13).||#3. 신약성경의 용법||포보스는 신약성경에서 47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른다.||(a) 포보스는 천국의 현현과 관련된 `두려움'을 표현한다.|① 예수님의 불가사의한 이적들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눅 1:12에서 포보스는 천사의 출현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눅 2:9; 마 28:4에서도 마찬가지이다.|눅 1:65에서 포보스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을 때의 두려움을 표현한다: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막 4:41에서 포보스는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을 때, 눅 7:16에서 나인성의 청년을 다시 살리셨을 때의 두려움을 표현한다.|② 마 28:8에서 부활의 소식은 두려움과 놀라움을 불려 일으킨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③ 앞에서 언급한 천국의 현현과 관련된 두려움은 환상을 보고 떠는 것과는 다르며(계11:11), 종말 때에 느낀 악한 자들의 공포와도 다르다(눅 21:26). 이는 교회가 구원을 체험하는 가운데 느끼는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행 2:43; 행 5:5; 행 19:17).||(b) ① 행 9:31에서 포보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 존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후 7:1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엡 5:21에서 포보스는 그리스도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② 두려움 및 존경심은 상전(엡 6:5; 벧전 2:18), 남편(벧전 3:2) 그리고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벧전 3:16)에게도 보여야 한다.||(c) 포보스는 믿음과 관련하여 `두려움'을 나타낸다.|고전 2:3이하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 자신의 인간적 연약함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후 7:15에도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빌 2:12에서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러한 두려움에는 걱정이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그들은 고난이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벧전 3:14; 벧후 2:15). 이러한 두려움은 신자들의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다.||(d) 기타 포보스는 훈계와 관련된 `두려움'을 나타낸다.|① 롬 13:3에서 포보스는 위정자들에 의한 징벌의 `두려움'을 나타낸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② 행 9:31에서 포보스는 행위의 기초가 된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③ 벧전 1:17에서 거룩과 기도와 두려움은 헛된 길에서 벗어난 자들의 특징이 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④ 유 1:23에서 타락에 대한 두려움의 필요성을 나타낸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참조: Walter Bauer; H. Balz; W. Mundle).
애굽 사람
Aivguvptio"
애굽 사람 Egyptian.||아이귀프티오스는 국민을 나타내는 형용사로서 '애굽 사람'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회 나오며, 사도행전(4회)과 히브리서(1회)에만 사용되었다.||(a) 애굽 사람은 모세의 행위와 관련하여 나타난다.|① 행 7: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② 행 7:24,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③ 행 7:28,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b) 애굽 사람은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의 수단을 구했던 자로 나타난다: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행 21:38).||(c) 애굽 사람들은 믿음으로 행한 자들과 대조된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히 11:2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임박한
tacinov"
신속한, 임박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타키노스(Theocr. 이래)는 타퀴스($5036: 빠른, 신속한)의 후기형이며, '바른, 신속한, 곧 닥치게 될, 임박한'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타키노스는 신약성경에서 베드로후서에만 2회 나온다.||(a) 벧후 2:1에서 타키노스는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b) 벧후 1:14에서 육체의 장막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무서운 일
fovbhtron
무서운 광경이나 사건(일)||#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포베트론(Hippocr., Morb. Sacr., Axioch.)은 포베오($5399: 무서워하게 하다, 놀라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 무서운 광경이나 사건, 공포나 경악(의 원인)'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포베트론은 신약성경에서 눅 21:11에 한번 나오며, '무서운 일'을 의미한다: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공평치 못한 것
ajdikiva
불의, 부정한 행위.||#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디키아는 아디코스($94)에서 유래했으며, 무엇보다도 아디키아의 개념은 법률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a) '불의한 행위'나 '불의'를 의미한다.||(b) 이 단어는 '부정(불공정)한 행위'나 '위반, 범죄'를 의미하며, 여기서 절도, 사기, 근친상간 같은 특정 범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c) 이 단어는 또한 '상해'나 '위해'를 의미한다.||(d) 더 나아가 불법의 요소, 의로움에 반대되는 것, 진실, 정직함에 반대된 것으로 그 의미가 정의된다.(참조: G. Schrenk, TDNT)||#2. 70인역본의 용법.||(a) 명사 아디키아는 70인역본에서 약 250회 나오며, 36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아디키아는 아원(위반, 유죄, 징벌)의 역어로 가장 자주 사용되었으나(약 80회) 때때로 아울라(패역, 사악, 예: 호 10:13), 하마스(포악한 행동, 불의, 불공평, 예: 시 7:16[17]), 그리고 셰케르(거짓, 예: 시 119:104)의 역어로 사용되었다.||(b) 아디키아는 70인역본에서 대부분 단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주의가 개별적인 행동이 아닌 범죄 현상 전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죄는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공의의 신성한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 생각되었다(삼상 3:13이하). 따라서 이 죄가 공동체, 곧 그 존재가 하나님의 공의의 보존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부터 죄는 신학적, 사회적 의미의 현상, 즉 공동체를 파괴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언약의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서 악을 추방하라는 요구를 받는다(참조: 레 16:21이하; 17:4, 9). 아원이란 단어가 의식적이며 책임져야 할 행동 뿐 아니라 행동의 결과, 처벌까지 나타낸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이다(레 26:39).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범죄를 초래하는 어떤 위반은 파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만일 행위와 결과의 이 숙명적인 연관성이 파기되지 않는 한 파멸의 영향은 범죄자와 범죄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되돌아 온다(창 4:13; 민 32:23).|첫째로 범죄는 그것이 실수로 저지른 것이었을 때 조차 객관적으로 유해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창 20:3이하; 삼상 14:24이하). 악한 행위가 미치는 이런 유해한 영향은 오로지 범죄자를 징벌하거나 또는 짐승을 대신 죽이거나 기름 부은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만 저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속죄는 형벌이 아니라 구속 사건이다"(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c) 구약성경의 후기 기록들과 후기 유대교에서 아디키아는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개인의 행동에 한정되어 사용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에게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이런 문맥에서 70인역본이 때때로 세케르(거짓말하다)를 아디키아로 번역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예: 시 52:3[5]; 110:29, 69, 104, 163; 144:8, 11).||(d) 후기 유대교의 묵시 사상은 메시야 도래 이전의 모든 시기를 메시야가 멸하실(에스드라하 4:51이하;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91:5이하; 솔로몬의 시 17:29, 36) "불의한 세계"(이디오피아 에녹서 48:7)로 간주했다. 이와 유사한 견해가 랍비 문학에 나타난다(예: San. 97a; Midr. Ps. 92:10, 참조: SB Ⅳ 977이하).|(참조: W. Gunther).||#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디키아는 신약성경에서 25회 중 바울 서신에 12회, 누가복음에 4회, 사도행전과 베드로후서와 요한일서에 각각 2회, 요한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에 각각 1회 사용되었다.|아디키아는 때때로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으며(요 7:18; 살후 2:12), 이런 구절에서 의미는 일반적인 용법의 의미를 따르며 도덕 규범을 따르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인용문에서 이 단어는 구약성경 용법을 따른다(눅 13:27; 행 8:23; 행 8:12=렘 31:34).|이 개념들은 디카이오쉬네($1343: 의, 정의; 롬 3:5)와 또는 알레데스($227, 참된) 및 알레데이아($225, 진리; 요 7:18; 롬 1:18; 롬 2:8)와 대조되어 있는 문맥들에서 신학적으로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된다.|아디키아의 속격은 셈어적인 어투에서 형용사 대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예: 눅 13:27; 눅 16:8; 눅 18:6).||(a) 아디키아는 고후 12:13에서 내적 강조없이 사용되었다.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는 예외적인 것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바울이 개인적 필요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는 것을 실제적 불공평한 행위나 그 행위의 불공정성으로 말한 반어적 표현이다.||(b) 아디키아는 디카이오쉬네(1343, 의)의 반의어이다. 롬 1:29에서 하나님의 법과 규범의 위반을 나타내는 범죄 목록에서 첫번째 나온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목록 자체는 새로운 것이다.|롬 9:14에서("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이 단어는 '법적 부정이나 불공평', 또는 '심판에 있어서 편파적임(불공평)'이며, 그러므로 재판(관)에 요구되는 디카이오쉬네의 반대를 나타낸다.|롬 3:5("[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에서 이 단어는 또한 디카오쉬네의 반대이지만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하나님의 불변하는 신실하심인 하나님의 의에 대조하여 불신실의 요소에 특별한 강조를 둠으로 이 시대를 표현한다(롬 3:3). 불의의 기준은 인간의 불의를 드러내는(롬 3:5)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이다(롬 3:5; 롬 3:26; 롬 9:14; 참조: 롬 3:26).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불의의 대조에 의해 벌어진 큰 간격은 의로운 분으로서 우리의 위치에 서신 그리스도에 의해 메워졌다(참조: 롬 3:24; 고후 5:21; 지금 고찰하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한 바울 어감을 풍기는 구절인 벧전 3:18). 의와 불의의 새로운 구분은 진리가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롬 1:18; 롬 2:8).|롬 6:13("불의의 병기"/ "의의 병기")에서 불의는 하나님의 의의 신성한 기본 개념과 대조에서 최고점에 이른다. 아디키아와 디카이오쉬네는 사람을 콘트롤 하는 두 상대적 능력으로서 그들의 도구와 병기를 가지고 사용한다.||(c) 아디키아는 알레데이아($225, 진리)의 반대어이다. 구약성경에서 자주 아디키아가 셰케르(거짓, 허위)의 역어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요한도 아디키아를 알레데이아와 대조적으로 사용한다.|요한 7:18의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는 표현에서 아디키아(불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의 명성을 구할 때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한 편에 진리는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울 역시 이 위대한 대조 용법을 사용하였다. 살후 2:10에서 아폴뤼메노이(멸망하는 자들)가 주제인 아파테 아디키아스(불의의 속임)는 진리의 사랑을 받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대조된다. 살후 2:12에서 대조는 진리, 즉 복음을 믿는 것과 부정한 행위인 아디키아를 즐겨 행하는 것 간의 대조이다. 이 두 경우에서 복음(알레데이아)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디키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는 하나의 힘으로써 죄를 제거하는 것 뿐 아니라 의로운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살후 2:9-살후 2;12).|고전 13: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대조는 알레데이아와 디카이오쉬네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사랑에 의해 통제되며, 사랑은 아디키아의 정반대인 알레데이아(진리)에 순종하며, 따라서 아디키아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찾지 못한다.|또한 롬 2:8의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의 법의 위반인 아디키아는 진리와 강조적으로 대조되어 있다. 진리와 같이(참조: 롬 6:13), 아디키아는 '지배하는 힘'이다. 그 때문에 불의에서 진리는 저지를 받는다(롬 1:18). 또한 딤후 2:19의 "불의에서 떠날찌어다"(사 26:13에서 부분적인 인용)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동일한 대조를 가지는데(참조: 롬 1:18에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와 함께), 곧 아디키아에는 올바른 가르침(교훈)에 대한 거부도 포함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자에게 불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공동체에 경고하고 있다.||(d) 아디키아는 아세베이아(경건치 않음)와 관련되어 있다. 롬 1:18의 바울의 논제, 곧 "하나님의 진노가 …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에서 그것은 두 부분, 롬 1:19-롬 1:23(왜곡된 예배=아세베이아)와 롬 1:24-롬 1:32(성적 오용과 사회의 타락=아디키아)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그러나 전체 문맥은 아디키아가 예배의 왜곡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미 "불의로 진리를 막은"이란 말에서 규범(표준)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본질(nature)이 근본적으로 진리에 대한 저지(suppression)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진술은 도덕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초월한다.||(e) 아디키아는 또한 '하나님께 대적하는 죄'로 정의된다. 행 8:23의 "불의에 매임"(쉰데스몬 아디키아)에서 그것은 분명히 죄로 유혹하는 방법으로 그물을 던진다. 요일 1:9에서 아디키아는 분명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인 하마르티아($266)와 관련된다. 이 노선을 따른 정의는 요일 5:17에 나타난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따라서 요일 3:7이하에서 "죄를 짓는 것"(포이에인 텐 하마르티안)은 "의를 행하는 것"(포이에인 텐 디카이오쉬넨)의 반대이다.|히 8:12은 새 언약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예레미야 31장의 메시지를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이 메시지에 기독론적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불의한 자에 대한 용서를 가능케 하시지만(요일 1:9) 용서의 가능성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원칙은 나중에는 사망을 초래하지 않는 죄에 국한되어진 것 같다.||(f) 이 용어는 또한 묵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살후 2:10에 적그리스도의 역사(operation)에 대한 묘사에서 "불의의 속임"으로 언급되어 있다. 약 3:6에서 혀는 종말론적으로 생각한 "불의의 세계"와 관련된다.|여기서 "세계"는 단순히 모임의 장소이지만 그 표현은 독특하다. 또 다른 종말론적 개념은 행 1:18에서 발견된다: "불의의 삯(상급)". 벧후 2:13의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는 불의를 위해 지불한 값(보상)에 의해 해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계 2:11:*** ~의 해를 받지). 벧후 2:15의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발람에 관하여)에서 이 용어는 같은 방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g) 눅 16:8에서 "옳지 않은 청지기"는 자질상 불성실한 청지기를 의미한다. 또한 눅 18:6의 "불의한 재판관"은 '정의를 벗어난 불공정한 재판관'이다.|눅 16:9의 "불의의 재물"은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소유물이 필연적으로 도덕적 결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은 오히려 고기(음식물)와 정결의 문제의 취급에서 예수님께서 그 자체 아무런 불결이 없다는 규칙을 세운 목적을 받아들이기 쉬운 천연 그대로의 개념이다. 이 비유는 확실히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눅 16:10), "참된 것"의 반대로(눅 16:11), "남의 것"으로(눅 16:12), 그리고 진실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너희의 것")이 아닌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으로 소유물을 불의한(아디코곤)으로 간주하지 아니한다. 탈검(Targum)은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탈검 합 2:9에 "불의의 재물", 탈검 삼상 12:3과 탈검 호세아 5:11에서 "부정한 소득"(불의의 재물)이란 표현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불의의 재물이란 말에서 자기의 재산을 거짓과 책략으로 모은 시대의 세금 징수인들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은 눅 16장의 문맥과 거의 적합하지 않으나 본래 세리들에 관한 말이 여기서 더 넓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70인역본에서 셰페르의 여러가지 의미의 번역은 - 아디키아가 언어상 거짓과 속임, 또는 불신실함이나 신뢰할 수 없음을 의미한 것과 같이 - 적어도 원 셈어에서 여러가지 의미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원 의미는 자기의 주인을 속인 소유물이나 막 4:19("재리의 유혹")에서와 같이 홀리는 덧없는 소유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참조: Schrenk, TONT).
빼내심을 얻은
ejklevkto"
정선한, 선택된 choice, selecte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에클렉토스(Pla. 이래)는 에클레고($1586: 골라내다, 선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고르고 고른, 정선한, 선택된' choice, selected를 의미한다. 파피루스에서 이 단어는 가장 질이 좋은 것들을 '선택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에클렉토스는 70인역본에서 100회 이상 나오며 20여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70인역본에서 에클렉토스의 일반적 의미는 겔 19:12; 겔 19:14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정선된 산물들, 예를 들면, 식물, 동물, 광물 등에 사용되었으며, 사람에 대해서는 선발된 군대에 대해 사용되었다.||(b) 에클렉토스의 종교적 용법은 세가지 형태를 나타낸다.|① 이 단어는 신성하거나 순수한 것을 나타낸다. 아 6:10에서 사람에 대해 '순결한'을 나타내며, 시 18:26; 삼상 22:27에서 하나님의 '순결'에 대해 사용되었다.|② 이 단어는 제의적으로 '성별된'이란 의미를 지닌다. 출 30:23에서 '순결한' 기름, 신 12:11에서 하나님께 바친 제물, 삼하 21:6에서 심판에 바쳐진 사람들에 대해, 사 28:16; 사 54:12에서 성전을 세우는 돌에 대해 사용되었다.|③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해 사용된 경우에는 땅에 대해서(슥 7:14), 예루살렘 성에 대해서(토빗 13:13)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필로가 사용),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도 사용했다(사 43:20; 시 106:5).||#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에클렉토스는 신약성경에서 22회 나오며, 오직 종교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다.||(a) 공관복음.|① 에클렉토스는 막 13장의 종말론적 설교(막 13:20; 막 13:22; 막 13:27 병행구절 마 24:22; 마 24:24; 마 24:31; 이 본문은 누가복음에는 없다)에서 나타난다.|천사들이 사방에서 모으는 택하신 자들이란 온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다(막 13:27). 주제는 그들이 겪게 될 마지막 위협, 그들의 보존, 그들의 마지막 구원이다. 큰 환란의 묘사 중에 나타나는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막 13:20) 그 날들을 감하신 것은 그들의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이다. 이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단지 모든 육체 뿐만 아니라 택하신 자들의 구원도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만 그 날들을 감함으로 그들이 보존될 수 있다. 이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하여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거짓 메시야들과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막 13:22)는 그 환란의 한 국면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결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 택하심은 여전히 멸망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인자가 오신다는 것(단 7장)과 인자에 의해 택함 받은 자들을 모을 것(에녹일서 62:2)이라는 사상은 있으나 심판의 사상은 분명히 하지 않은(contra 1Enoch 62:2; T. Mos. 10:10) 계시의 전통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여, 기독교의 계시는 인자의 재림(parousia)에 대한 위로의 약속 안에서 그 최고점에 도달하는데, 인자의 천사들은 "사방에서" 택하신 자들을 모은다(막 13:24-27; 참조: 슥 2:10, 70인역본; 에녹일서 57[Greek]; 살전 4:13-18).||② 마 22:14에서 엑클렉토스는 매우 난해하다. 이 말씀은 마 21-22장의 비유들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초대는 많은 사람에게 하였으나 불순종하여 초대에 응하기를 거절한 사람, 초대에 응했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도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택함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으로의 초대를 따르고 믿음의 삶에서 그들의 부르심을 깨달은 자들이다(참조: 계 17: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는 말씀은 아마도 속담적인 표현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들 가운데 생명으로 선택받은 사람은 적었다. 유대 민족의 절대 다수가 악한 죄 가운데 빠졌으며, 그들은 생활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방인들도 구원의 초대를 받았다(사 45:22). 많은 민족들이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임을 보여준 경우는 극히 적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혼인예복이 없이 지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이 아님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마 22:14에 언급된 말씀은 이 비유의 전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이며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단지 부르심만 받았지 선택받지 못했거나 위선자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 당시에 부르심을 받았던 인류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배척했다는 의미이다(반즈 주석, 마태복음).||③ 누가복음에서 에클렉토스는 눅 18:7에서 믿는 자들의 종말론적 칭호로 나타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즉각적으로 옳음을 밝힐 것이라는 약속, 즉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간섭(눅 18:7-8)은 아마도 그 비유의 원래의 의도와 일치한다. 누가복음에서 재림이 지체되는 문제(눅 18:7 하반절)의 극복을 위한 결정적인 것은 택하신 자들에 대한 구원의 약속에 대한 전망(view)이 인자가 오시기 전에 요구되는 시험(testing)과 연결된다(눅 18:8 하반절)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누가복음에서 "택함을 받은" 아들(눅 9:35) 또는 하나님의 매시야(눅 23:35; -->에클레고마이)로 되풀이하여 묘사된다.||(b) 바울 서신.|바울은 에클렉토스를 비교적 드물게 사용한다(롬 8:33; 롬 16:13; 골 3:12; 딤전 5:21; 딤후 2:10; 딛 1:1).|① 롬 8:33 이하의 심판에 대한 종말론적 상황을 표현하는 문맥에서 에클렉토스를 언급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바울은 비록 믿음으로 부르신 은혜로운 성격을 강조하고(참조: 갈 1:6; 갈 4:9; 롬 1:6),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해 이야기 할지라도(롬 8:29 이하; 고전 2:7) 여기(롬 8:33)에서만 믿는 자들을 택하신 자들이라고 부른다. 택하신 자들은 그들에 대한 고소도 비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대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나타났기 때문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롬 8:31-39). 믿는 자들에 대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되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찬송에서 믿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상태는 보이지 않는다.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이는 그들이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시작되고 끝나는 구원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② 롬 16:13의 루포의 믿음을 보여주는 "주 안에서 선택하심"이란 문구에서 선택에 대한 바울 신앙의 토대, 각 신자들이 선택된다는 사상을 보게 된다.||③ 골 3:12에서 에클렉토스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참조: 골 3:1-4; 롬 6:1-11), 새 생명의 실현으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면제된(골 3:6) 자들의 새로운 종말론적 상태와 관련된 권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 옷입고". 이 명령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같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 받는 사람, 새 생명으로 인도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참조: 엡 1:4; 벧전 2:9). 이들은 거룩하고 사랑 받은 자들이니, 이로써 그들도 사랑을 보여야 하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④ 목회 서신에서는 선택의 사상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에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라는 언급이 한번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딤전 5:21).천사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의 동료로 다른 피조물 가운데서 선택한 자들로서, 그리고 우주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사역들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법정을 구성한다(참조: 막 8:38). 이 천사들 앞에서 교회의 직임자들은 자기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딤후 2:10의 에클렉토스는 본문이 사도의 의미를 고난의 본보기로 언급하는 바, 종말론적 기대의 관점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에 정해진 분량의 고난이라는 종말론적 개념이 암시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참조: 계 6:11; 골 1:24).|딛 1:1에서 에클렉토스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관용적 명칭이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c) 베드로전서.|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적대적인 환경의 한 가운데 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선택의 사상은 그 자체 다른 어떤 신약성경의 책들보다 능가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① 바로 서두부터 두 세계의 긴장 속에 놓여 있는 신자들의 특별한 상황이 '택함받은 흩어진 나그네'라는 문구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 원전에는 1절에 '...택함 받은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되어 있고 2절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외인들이라는 신분은 선택의 반대면이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에 기초하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룩한 구원에 순종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벧전 1:2).||② 벧전 2:4-10에서 선택에 대한 언급들은 기독론적으로 닻을 내리고 신령한 봉사의 자리에 서는 것까지 나아가는 것이 지적되어 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에게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와(벧전 2:4)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참조: 에녹일서 53:6) 세워져서 "거룩한 제사장"(벧전 2:5)이 되라는 권면은 시온에 둔 선택된 돌, 즉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돌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벧전 2:6-8; 시 118:22; 사 8:14 이하)이신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거로써 정당성을 인정 받는다.||③ 벧전 2:9에서 원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선택에 관한 말씀이 교회에게로 이전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사 43:20 70인역본)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출 19:6, 70인역본)요, 그의(하나님의) 소유된(RSV 난외주)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참조: 사 43:21)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참조: 호 1:9 이하; 호 2:23; 롬 9:25 이하).||(d) 요한의 기록.|① 요이 1:1에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로 불리우는 요한이서의 수신자는 어떤(혹은 특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이해된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참조: 딛 1:1; 클레멘트일서 1:1).||② 요이 1:13에서 기자가 그의 서신을 끝맺으면서 인사한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도 그가 세운 교회의 신자들을 가리킨다(참조: 벧전 5:13).||③ 계 17:14의 다만 매우 조심스럽게만, 주로 종말론적 문맥에서,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과 함께 교회에 의해 전수된 선택의 신앙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클렉토이(선택한 자들)는 승리한 어린양, 즉 만왕의 왕을 따르는 자들에게 사용되었다: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 이 말씀은 신약성경의 선택의 개념과 일치하며, 선택은 부르심과 자동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는 것, 충성(fidelity)은 선택 사건의 필수적 동기임을 나타낸다(참조: 마 22:14).|(참조: G. Schrenk; L. Coenen; I. Eckert).
욥바
!Iovpph
욥바 Joppa(지)||#1. 욥바의 역사||(a) 이옵페는 히브리어 야포(3305)에서 유래했으며, '아름다움'을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욥바'라고 번역했다.||(b) 욥바는 아코만(Bay of Acco)과 애굽 국경 사이의 유일한 자연 항구 도시이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욥바가 17세기, 혹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확인되었다. B.C. 15세기와 14세기의 몇몇 애굽 기록들에서도 욥바가 언급되었다. 욥바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한 후에 단과 에브라임 지파의 접경에 위치해 있어 단 지파의 국경 도시였으나(수 19:26), 곧 블레셋의 손으로 넘어갔다.||(c) 두로왕 히람은 솔로몬 왕에게 목재를 보낼 때 뗏목으로하여 욥바항으로 보냈다(대하 2:16),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제 2 성전을 건축할 때도 시돈과 두로에서 수입한 목재를 욥바항에서 인수하였다(스 3:7).||(d)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싫어하여 욥바로 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것이다(욥 1:3).||(e) 헬라 시대에 욥바는 알렉산더 대제나 플레미 1세의 세력권에 있었다. 그리고 마카베오 시대에 유다 마카베오와 요나단 마카베오의 욥바를 취하려는 시도를 거쳐 결국 그들의 형제 시몬 마카베오가 욥바를 정복하여 약 200년 동안 유다의 통치 아래 두었다(Jos. Ant).||#2. 신약성경.||이옵페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모두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다.||(a) 도루가는 욥바에 거주한 그리스도인 중 가장 유명했다. 그녀는 그 교회의 최상의 사회 사업가였다. 베드로는 죽은 도르가를 다시 살리었다(행 9:36-42).||(b) 베드로가 욥바에서 이방인 전도를 위한 환상을 보았다. 베드로는 도르가의 사건 후에 다시 욥바에 거하며 피장 시몬의 집을 방문하고 있을 때에 경쟁 항구 도시인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행 10:1-행 10:48; 행 11:5; 행 11:13).|(참조: PED; NBD, Walter Bauer; J. H. Thayer).
토성
cavrax
뾰족한 말뚝, 울타리, 성벽.||#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카락스(Thu., Aristoph. 이래로)는 카랏소(날카롭게 하다, 새기다)에서 유래했으며 '뾰족한 말뚝' pointed stake, 특히 포도덩쿨을 버티게 하는 나무 말뚝을 의미하였다. 후에는 의미가 확장되어 집합 단수 명사는 도시나 야영지를 둘러싸는 울타리를 짓는데 사용되는 '재목' timber을 의미하게 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카락스는 70인역본에서 15회 나오며, 솔렐라(토성, 흉벽; 사 37:33; 렘 33:4; 겔 4:2; 겔 26:8), 카르(공성회; 겔 21:27), 뭇찹(주둔지; 사 29:3), 마초르(공성루; 신 20:19)를 번역하고 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카락스는 신약성경에서 누가복음에 한번 나온다.|카락스는 눅 19:43에서 원수들의 공격용 흉벽을 묘사한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이 구절에서 예수는 다가올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해 한탄하신다. 예루살렘의 원수들이 그 성을 포위할 것이며, 그 둘레에 카락스를 쌓아,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그곳에서부터 그들의 공격을 개시할 장소로 삼을 것이다.|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예언적인 요소는 그 어휘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어휘들은 어떤 류의 일반적인 포위과정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언적인 요소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적용되었다는 점에 있다. 40년 후에 그 예언은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흉벽을 쌓아 포위하였을 때에 성취되었다(Josephus, War). 이 흉벽은 틀림없이 많은 재목을 들여 만든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를 불로 파괴했기 때문인데(War. 5, 469ff), 로마 장군 티투스(Titus)는 카락스를 하나의 벽으로 대체하여야 했다. 그는 이것을 삼일 안에 급히 지었으므로 도망갈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단절시켰다(N. Hillyer).|(참조: J. H. Thayer; Walter Bauer; N. Hillyer).
깨닫게 하려 함
ejpivgnwsi"
지식 knowledge, 인식 recognit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피그노시스(Polyb., Plut. 등)는 '명확한 지식, 인식'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에피그노시스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오직 히브리어 다아트(1847: 지식)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지식'(왕상 7:14; 호 4:6), 특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타낸다(잠 2:5; 호 4:1; 호 6:6 등).||#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에피그노시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온다.||(a) 에피그노시스는 일관되게 구약성경에서의 의미, 즉 하나님을 아는 자의 행위에 영향을 끼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지식' knowledge의 의미로 사용된다. 지적인 이해와 존재에 관한 인식은 그룹을 이룬다.|그러므로 롬 1:28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이론상의 지식(이방인들 편에서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보존이나 거절에 관한 것이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빌 1:6에서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의 중보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믿음은 '에피그노시스 판토스 아가두'(모든 선한 것을 아는 지식)에서 증명된다. '토 아가돈'(선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빌 1:9에서 에피그노시스는 중보 기도에 나타난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b)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것은 의로운 행위로서 입증되는 것과의 관계는 골 1:9; 골 1:10 이하에서도 나타난다: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에피그노시스는 델레마 데우(하나님의 뜻)로 향하게 된다. 의로운 행위에 "열매를 맺는 것과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에피그노시스)으로 나아가게 된다(참조: 빌 1:10; 엡 1:17; 빌 1:9).|골 3:10도 역시 도덕적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과 의로운 행위로 그를 따르라는 요구와의 결합은 구약의 전제에 의해 결정된다.|골 2:2(골로새의 이단에 대항하는 주장)의 논의는 골 1:9에서처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참조: 골 1:26 이하)에 관한 것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엡 4:13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지식의 내용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c) 목회서신에서 '에피그노시스 테스 알레데이아'("진리를 아는데", 즉 진리에 대한 지식)(참조: Dibelius)라는 문구는 거의 항상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개종을 설명하는 말로 사용되었다.|①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②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③ 딤후 3: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④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⑤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⑥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알레데이아(진리)는 여기에서 "옳은 가르침"을 나타내며, 에피그노시스는 "매우 뚜렷하게 지적인 교리상의 강조점"을 지닌다(Schmitz 405).||(d) 벧후 2:20에서 에피그노시스는 아마도 기자가 그들에 대하여 반대하여 편지를 쓴 적대자들에 대한 표어이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히 10:26에서처럼 벧후 1:2 이하에서도 에피그노시스는 거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부르심에 대한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지식은 또한 의로운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벧후 1:18; 벧후 2:20 이하; 롬 1:28).|(참조: W. Hackenberg).
입맞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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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다 be fond of, 사랑하다 lov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필레오(Homer 이래)는 필로스($5384)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a) 필레오는 흔히 아가파오($25: 사랑하다)와 의미나 용도가 매우 유사하지만 일반 헬라어에서(70인역과 신약은 그렇치 않음) 아가파오보다 더 자주 사용되며 '좋아하다'는 의미보다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더 지니고 있다.||(b) 필레오는 중성 목적어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좋아하다, 중히 여기다'를 의미한다.||(c) 필레오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하기를 좋아하다, ~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는 것이 습관이다'를 의미한다.||(d) 필레오는 '입맞추다'를 의미하며, 아가파오와는 달리 애무나 특히 입맞춤과 같은 애정의 행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필레오는 70인역본에서 30회 나오며, 아헤브(사랑하다, 창 27:4, 9, 14; 창 37:4; 잠 29:3; 전 3:8; 호 3:10; 사 56:10), 나샤크(입맞추다, 창 27:26; 창 27:27; 창 29:11, 13; 창 33:4; 창 48:10; 창 50:1; 욥 3:27; 잠 7:13; 잠 24:26; 아 1:2; 아 8:1), 레아(친구, 애 1: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필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필레오는 마 6:5에서 그 본래 의미로 사용되었다. 거기에 보면 외식하는 자가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사랑한다)고 되어 있다.|마 23:6과 눅 20:46도 유사한 경우들이다. 눅 11:43에서 아가파오가 사용되고 비슷한 내용인 눅 20:46은 그렇지 않다는 점은 의미상의 차이가 항상 지켜진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b) 마 10:37에서는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서 한마디 부언하자면, 이 문장은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단어가 신학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문장의 표현법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인 아가페로 표현되었다. 이 문장의 초두에는 친족간에 서로 나누는 타고난 사랑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이에 끼어 들게 될 때, 보통 가정의 친교의 끈과 고리까지도 하나님의 가족 사이의 새로운 교제를 위해 풀릴 수가 있다는 점이다.||(c) 요 11:3; 요 11:36에서 나사로와의 예수님의 사랑의 결속을 언급한다. 여기서 친구에 대한 사랑이 언급되지만, 나사로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며,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닌 '우리의 친구'라고 불리운다(요 11:11).||(d) 요 15:19에서 '자기의 소유의 것을 사랑한다'는 기본 의미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은 세상(코스모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영역으로도 묘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코스모스 안에(in) 있는 사랑이나 코스모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에 대한 증오와 동일하다(참조: 약 4:4).|요일 2:15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e) 요 16:27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요구에 부응하였으며,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에 답하여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신다. 여기서의 사랑은 요 3:16에서 언급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과는 구별되는 듯하다. 그러나 필레오와 아가파오가 모두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듯이(요 5:20; 요 3:35 등).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아가파오로 표현될 수 있다(참조: 요 14:21, 요 14:23). 하지만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요 13:1)이나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요 13:34),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사랑(요 14:31)을 나타낼 때는 오직 아가파오만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에는 성부에 대한 제자들이 사랑이 아무데서도 언급되지 않는다.||(f) 요 21:15이하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번갈아 나오는데 일부 성경 해석가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에서 필레오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주장하지만(요21:17),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들은 거의 동의어이므로 베드로가 근심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셨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 사람들 보다"(요 21:15)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이 위임도 부인이나 특별한 사랑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세 차례 반복된다. 이 예외적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응되는 것이며, 목회 사역과 죽음이라는 베드로의 이중적 사도 직분의 기초가 된다. 베드로는 '아가파오'라는 사랑은 물론 '필레오' 사랑까지 언급한 것이다.||(g) 고전 16:22에서 바울은 필레오를 단 한번 사용했으며, 또한 중요하기도 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거기에서, 퀴리오스(주)에 대한 사랑은 구원의 조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은혜는 오직 말과 행실로써, 즉 온전히 믿음을 바쳐 주께 사랑을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h) 딛 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믿음 안에서의 사랑으로 이해된 인간적인 사랑을, 아들(Sun)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하여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라는 문구는 그리스도교적 중요성을 나타내며, "우리를"이란 단어는 특정한 배타성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랑은 교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결속이 된다.||(i) 계 3:19에서 승천하신 주님은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잠 3:12). 그리스도의 징계하시는 사랑(참조: 고전 11:32)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다. 이 배경은 공동 식사 안에서 사귐의 성취를 이루는 하나님의 우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잘못하는 아이를 뉘우치도록 교도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이다.|계 22:15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절대적으로 대립을 이루는 명제 가운데 앞의 개념들을 특징지어 주는 결론적 구절을 보게 된다(참조: 요 3:19; 요일 2:15; 약 4:4).||(j) 막 14:44에서 필레오는 '입 맞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참조: C. Brown; G. Stahr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