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치 못한 것
ajdikiva
불의, 부정한 행위.||#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디키아는 아디코스($94)에서 유래했으며, 무엇보다도 아디키아의 개념은 법률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a) '불의한 행위'나 '불의'를 의미한다.||(b) 이 단어는 '부정(불공정)한 행위'나 '위반, 범죄'를 의미하며, 여기서 절도, 사기, 근친상간 같은 특정 범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c) 이 단어는 또한 '상해'나 '위해'를 의미한다.||(d) 더 나아가 불법의 요소, 의로움에 반대되는 것, 진실, 정직함에 반대된 것으로 그 의미가 정의된다.(참조: G. Schrenk, TDNT)||#2. 70인역본의 용법.||(a) 명사 아디키아는 70인역본에서 약 250회 나오며, 36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아디키아는 아원(위반, 유죄, 징벌)의 역어로 가장 자주 사용되었으나(약 80회) 때때로 아울라(패역, 사악, 예: 호 10:13), 하마스(포악한 행동, 불의, 불공평, 예: 시 7:16[17]), 그리고 셰케르(거짓, 예: 시 119:104)의 역어로 사용되었다.||(b) 아디키아는 70인역본에서 대부분 단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주의가 개별적인 행동이 아닌 범죄 현상 전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죄는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공의의 신성한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 생각되었다(삼상 3:13이하). 따라서 이 죄가 공동체, 곧 그 존재가 하나님의 공의의 보존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부터 죄는 신학적, 사회적 의미의 현상, 즉 공동체를 파괴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언약의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서 악을 추방하라는 요구를 받는다(참조: 레 16:21이하; 17:4, 9). 아원이란 단어가 의식적이며 책임져야 할 행동 뿐 아니라 행동의 결과, 처벌까지 나타낸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이다(레 26:39).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범죄를 초래하는 어떤 위반은 파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만일 행위와 결과의 이 숙명적인 연관성이 파기되지 않는 한 파멸의 영향은 범죄자와 범죄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되돌아 온다(창 4:13; 민 32:23).|첫째로 범죄는 그것이 실수로 저지른 것이었을 때 조차 객관적으로 유해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창 20:3이하; 삼상 14:24이하). 악한 행위가 미치는 이런 유해한 영향은 오로지 범죄자를 징벌하거나 또는 짐승을 대신 죽이거나 기름 부은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만 저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속죄는 형벌이 아니라 구속 사건이다"(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c) 구약성경의 후기 기록들과 후기 유대교에서 아디키아는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개인의 행동에 한정되어 사용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에게 확대되어 적용되었다. 이런 문맥에서 70인역본이 때때로 세케르(거짓말하다)를 아디키아로 번역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예: 시 52:3[5]; 110:29, 69, 104, 163; 144:8, 11).||(d) 후기 유대교의 묵시 사상은 메시야 도래 이전의 모든 시기를 메시야가 멸하실(에스드라하 4:51이하;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91:5이하; 솔로몬의 시 17:29, 36) "불의한 세계"(이디오피아 에녹서 48:7)로 간주했다. 이와 유사한 견해가 랍비 문학에 나타난다(예: San. 97a; Midr. Ps. 92:10, 참조: SB Ⅳ 977이하).|(참조: W. Gunther).||#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디키아는 신약성경에서 25회 중 바울 서신에 12회, 누가복음에 4회, 사도행전과 베드로후서와 요한일서에 각각 2회, 요한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에 각각 1회 사용되었다.|아디키아는 때때로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으며(요 7:18; 살후 2:12), 이런 구절에서 의미는 일반적인 용법의 의미를 따르며 도덕 규범을 따르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인용문에서 이 단어는 구약성경 용법을 따른다(눅 13:27; 행 8:23; 행 8:12=렘 31:34).|이 개념들은 디카이오쉬네($1343: 의, 정의; 롬 3:5)와 또는 알레데스($227, 참된) 및 알레데이아($225, 진리; 요 7:18; 롬 1:18; 롬 2:8)와 대조되어 있는 문맥들에서 신학적으로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된다.|아디키아의 속격은 셈어적인 어투에서 형용사 대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예: 눅 13:27; 눅 16:8; 눅 18:6).||(a) 아디키아는 고후 12:13에서 내적 강조없이 사용되었다.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는 예외적인 것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바울이 개인적 필요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는 것을 실제적 불공평한 행위나 그 행위의 불공정성으로 말한 반어적 표현이다.||(b) 아디키아는 디카이오쉬네(1343, 의)의 반의어이다. 롬 1:29에서 하나님의 법과 규범의 위반을 나타내는 범죄 목록에서 첫번째 나온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목록 자체는 새로운 것이다.|롬 9:14에서("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이 단어는 '법적 부정이나 불공평', 또는 '심판에 있어서 편파적임(불공평)'이며, 그러므로 재판(관)에 요구되는 디카이오쉬네의 반대를 나타낸다.|롬 3:5("[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에서 이 단어는 또한 디카오쉬네의 반대이지만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하나님의 불변하는 신실하심인 하나님의 의에 대조하여 불신실의 요소에 특별한 강조를 둠으로 이 시대를 표현한다(롬 3:3). 불의의 기준은 인간의 불의를 드러내는(롬 3:5)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이다(롬 3:5; 롬 3:26; 롬 9:14; 참조: 롬 3:26).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불의의 대조에 의해 벌어진 큰 간격은 의로운 분으로서 우리의 위치에 서신 그리스도에 의해 메워졌다(참조: 롬 3:24; 고후 5:21; 지금 고찰하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한 바울 어감을 풍기는 구절인 벧전 3:18). 의와 불의의 새로운 구분은 진리가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롬 1:18; 롬 2:8).|롬 6:13("불의의 병기"/ "의의 병기")에서 불의는 하나님의 의의 신성한 기본 개념과 대조에서 최고점에 이른다. 아디키아와 디카이오쉬네는 사람을 콘트롤 하는 두 상대적 능력으로서 그들의 도구와 병기를 가지고 사용한다.||(c) 아디키아는 알레데이아($225, 진리)의 반대어이다. 구약성경에서 자주 아디키아가 셰케르(거짓, 허위)의 역어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요한도 아디키아를 알레데이아와 대조적으로 사용한다.|요한 7:18의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는 표현에서 아디키아(불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의 명성을 구할 때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한 편에 진리는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울 역시 이 위대한 대조 용법을 사용하였다. 살후 2:10에서 아폴뤼메노이(멸망하는 자들)가 주제인 아파테 아디키아스(불의의 속임)는 진리의 사랑을 받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대조된다. 살후 2:12에서 대조는 진리, 즉 복음을 믿는 것과 부정한 행위인 아디키아를 즐겨 행하는 것 간의 대조이다. 이 두 경우에서 복음(알레데이아)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디키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는 하나의 힘으로써 죄를 제거하는 것 뿐 아니라 의로운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살후 2:9-살후 2;12).|고전 13: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대조는 알레데이아와 디카이오쉬네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사랑에 의해 통제되며, 사랑은 아디키아의 정반대인 알레데이아(진리)에 순종하며, 따라서 아디키아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찾지 못한다.|또한 롬 2:8의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의 법의 위반인 아디키아는 진리와 강조적으로 대조되어 있다. 진리와 같이(참조: 롬 6:13), 아디키아는 '지배하는 힘'이다. 그 때문에 불의에서 진리는 저지를 받는다(롬 1:18). 또한 딤후 2:19의 "불의에서 떠날찌어다"(사 26:13에서 부분적인 인용)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동일한 대조를 가지는데(참조: 롬 1:18에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와 함께), 곧 아디키아에는 올바른 가르침(교훈)에 대한 거부도 포함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자에게 불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공동체에 경고하고 있다.||(d) 아디키아는 아세베이아(경건치 않음)와 관련되어 있다. 롬 1:18의 바울의 논제, 곧 "하나님의 진노가 …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에서 그것은 두 부분, 롬 1:19-롬 1:23(왜곡된 예배=아세베이아)와 롬 1:24-롬 1:32(성적 오용과 사회의 타락=아디키아)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그러나 전체 문맥은 아디키아가 예배의 왜곡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이미 "불의로 진리를 막은"이란 말에서 규범(표준)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본질(nature)이 근본적으로 진리에 대한 저지(suppression)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진술은 도덕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초월한다.||(e) 아디키아는 또한 '하나님께 대적하는 죄'로 정의된다. 행 8:23의 "불의에 매임"(쉰데스몬 아디키아)에서 그것은 분명히 죄로 유혹하는 방법으로 그물을 던진다. 요일 1:9에서 아디키아는 분명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인 하마르티아($266)와 관련된다. 이 노선을 따른 정의는 요일 5:17에 나타난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따라서 요일 3:7이하에서 "죄를 짓는 것"(포이에인 텐 하마르티안)은 "의를 행하는 것"(포이에인 텐 디카이오쉬넨)의 반대이다.|히 8:12은 새 언약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예레미야 31장의 메시지를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이 메시지에 기독론적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불의한 자에 대한 용서를 가능케 하시지만(요일 1:9) 용서의 가능성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원칙은 나중에는 사망을 초래하지 않는 죄에 국한되어진 것 같다.||(f) 이 용어는 또한 묵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살후 2:10에 적그리스도의 역사(operation)에 대한 묘사에서 "불의의 속임"으로 언급되어 있다. 약 3:6에서 혀는 종말론적으로 생각한 "불의의 세계"와 관련된다.|여기서 "세계"는 단순히 모임의 장소이지만 그 표현은 독특하다. 또 다른 종말론적 개념은 행 1:18에서 발견된다: "불의의 삯(상급)". 벧후 2:13의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는 불의를 위해 지불한 값(보상)에 의해 해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계 2:11:*** ~의 해를 받지). 벧후 2:15의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발람에 관하여)에서 이 용어는 같은 방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g) 눅 16:8에서 "옳지 않은 청지기"는 자질상 불성실한 청지기를 의미한다. 또한 눅 18:6의 "불의한 재판관"은 '정의를 벗어난 불공정한 재판관'이다.|눅 16:9의 "불의의 재물"은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소유물이 필연적으로 도덕적 결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은 오히려 고기(음식물)와 정결의 문제의 취급에서 예수님께서 그 자체 아무런 불결이 없다는 규칙을 세운 목적을 받아들이기 쉬운 천연 그대로의 개념이다. 이 비유는 확실히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눅 16:10), "참된 것"의 반대로(눅 16:11), "남의 것"으로(눅 16:12), 그리고 진실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너희의 것")이 아닌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으로 소유물을 불의한(아디코곤)으로 간주하지 아니한다. 탈검(Targum)은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탈검 합 2:9에 "불의의 재물", 탈검 삼상 12:3과 탈검 호세아 5:11에서 "부정한 소득"(불의의 재물)이란 표현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불의의 재물이란 말에서 자기의 재산을 거짓과 책략으로 모은 시대의 세금 징수인들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은 눅 16장의 문맥과 거의 적합하지 않으나 본래 세리들에 관한 말이 여기서 더 넓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70인역본에서 셰페르의 여러가지 의미의 번역은 - 아디키아가 언어상 거짓과 속임, 또는 불신실함이나 신뢰할 수 없음을 의미한 것과 같이 - 적어도 원 셈어에서 여러가지 의미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원 의미는 자기의 주인을 속인 소유물이나 막 4:19("재리의 유혹")에서와 같이 홀리는 덧없는 소유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참조: Schrenk, TO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