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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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way, road, 대도 highway, 생활 방식 way of lif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기본어 호도스는 호머(Homer)로부터 나타나며,||(a) 그 일차적 요소는 동작(action)의 요소이다. 즉 행동으로서 '도보', 육지에서의 '여행'이나 바다에서의 '항해, 출발', 군대의 '행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b) 그리고 지역적, 공간적 의미에서, 이 단어는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거나 행진하는 장소인 '길(way), 작은 길(path), 도로(road)', 강 '줄기(course)', 그리고 또한 배의 '항로'를 의미한다(Homer 이후로, 그리고 비문과 파피루스에 나옴).||(c) 이 단어는 초기에 벌써 회화적이면서 비유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을 이용하거나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호도스는 어떤 것에 도달하거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방책, 절차, 무엇을 행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의미를 얻게 되었다. '삶의 길' 또는 '삶의 양식'이라는 문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삶(인생)은 때때로 길에 비유된다(Democritus, Frag. 230).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옳지 못한 행동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묘사되었다(Thuc., 3, 64, 4). 전문적인 철학적 용법에서 이 단어는 '질문 방법'이나 '인식 방법', '순서나 절차'(method)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d) 헬라 문헌에서 두 길에 대한 묘사가 자주 발견된다. 악으로 가는 길과 선으로 가는 길, 경건한 자를 위한 장소에 이르는 오른편 길과 불의한 자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로 이끄는 길에 대해 언급한다.|호도스가 종교적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의가 깊다. 죽음 이후에 인간이 가는 두 길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상이다.|진리의 길, 지식을 가진 인간을 인도하는 길로서 하늘의 빛에 이르는 길,|길로서 그노시스, 지식 있는 자가 가고 있는 생명의 길 또는 완전한 길에 대한 언급이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호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880회 나오며, 18개의 히브리어 상당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히브리어 데레크(1870: 길, 도로, 거리, 여행, 방식, 방법 등)의 역어로 나타난다(약 600회 이상).||구약성경에서 데레크/ 호도스는,|(a) 걸어다니는 길로서 '생명 나무의 길'(창 3:24), 술로 가는 길(창 16:7), 중요한 대로(민 20:17; 민 21:22), 해변의 길(사 9:1).|(b) '여행'(창 45:23; 수 9:13; 창 24:21).|(c) '활동, 행위'(시 1:6; 창 6:12).|(d) '여호와의 길'(창 18:19; 신 9:16).|(e) '태도, 습관'(창 19:31; 창 31:35).|(f) '창조의 역사'(욥 40:19; 잠 8:22; 욥 26:14)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호도스는 신약성경에서 102회 나오며, 주로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 서신 6회, 히브리서 3회, 야고보서 3회, 베드로후서 4회, 유다서 1회, 요한계시록 2회 사용되었다.||(a) ① 호도스는 문자적 의미로 '다니는 길, 도로'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2:12; 마 7:13 이하; 마 13:4; 마 13:19; 막 4:4; 막 4:15; 막 10:46; 눅 8:5; 눅 8:12; 눅 10:31; 눅 18:35; 눅 19:36; 행 8:26; 행 9:17; 약 2:25 등.|"길에서". '노중에서, 길의 도중에서, 길가면서', 눅 10:4; 행 8:36; 행 25:3; 행 26:13.|② 마 10:5에서 "이방인의 길"(호도스 에드논)은 이방적인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지역 바깥의 이방인 지역으로 통했던 길을 의미한다.|③ 눅 2:44에서 헤메라스 호도스("하룻길")는 사람이 하루에 걸어가는 거리, 즉 하룻길을 말한다.|행 1:12에서 사바투 호도스("가기 알맞은 길")는 출 16:29의 계명(참조: 민 35:5)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안식일에 유대인에게 허락되었던 보행 거리를 의미한다. 이 거리는 약 880미터였다.||(b) 호도스는 문자적 의미에서 '여행의 길, 여정, 노정, 여행'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행 중에, 마 5:25; 마 15:32; 마 20:17; 막 8:27; 막 9:33; 막 10:32; 막 10:52; 눅 12:58; 눅 24:32; 눅 24:35; 행 9:27; "여행 중에"(여행 길로부터), 눅 11:6; "여행을 위하여", 눅 9:3; "길을 가다"(여행하다), 가던 여행길을 계속하다, 행 8:39.||(c) 호도스는 '길'이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용법에서처럼, 일부는 '하나님의 행위와 구원 사역을 뜻하는 말로(예: 롬 11:33; 계 15:3; 히 3:10), 또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예: 마 22:16; 막 12:24; 눅 20:21; 마 21:32) 사용되었다.|구약의 인용구 중에서도 매우 자주 나타나며(행 2:28; 참조: 시 16:11; 시 13:10; 호 14:9; 롬 3:17; 시 36[35]:1; 눅 1:79; 사 9:2),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행 14:16; 롬 3:16; 고전 4:17; 약 1:8; 약 5:20).||(d) 마 3:3과 그 병행구 막 1:3; 눅 3:4(참조: 요 1:23)에서는 주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라는 부름과 아울러 사 40:3을 인용한다. 퀴리오스("주")라는 칭호가 예수께로 전이됨에 따라, 세례(침례) 요한의 사역을 구약성경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어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침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다(참조: 막 1:2에서 인용된 말 3:1; 참조: 마 11:10; 눅 1:17; 눅 1:76; 눅 7:27).|주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눅 1:79의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는 표현에서 호도스는 '방법, 수단'을 의미하기보다 '길'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말하고 있는 사 59:8(참조: 롬 3:17)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의 평강은 메시야적인 '구원'을 일컫는다.||(e) 마 7:13; 마 7:14에서 두 길의 상징을 사용한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첫번째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뒤이어지는 길에 대한 병행 은유법처럼 보인다. 의의 길이 넓은 길이라는 다른 기록들과 대조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협착하다. 여기서는 문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눅 13:24에서 처럼)로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길은 넓은 악의 길과 대조되는 의미로서 경건한 좁은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예수님의 의도하는 바는 그리스도인, 곧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은 좁고 이 길은 어렵다. 그러나 이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은 없다. 이 길에 들어서는 자가 적다면 이 길이 너무 좁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쉬운 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길은 제자들의 삶의 길(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그 무엇이다. "문"과 마찬가지로 "길"도 들어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목적지는 이미 밝혀져 있다. 즉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14절의 "찾는"이라는 문구는 여러 개의 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어려운 형국에서 길을 발견하려고 애쓴다거나 아니면 오랜 탐사 끝에 좁은 문으로 찾아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좁은 길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역사가 없이는 찾을 수 없는 길이며 찾는 자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길이며 이 길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마태복음에서는 특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예: 마 5:20), 생명에 들어가는 것(예: 마 18:8 이하) 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예: 마 25:21; 마 25:23)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마 7:13 이하의 말씀도 이 범주에 속한다.||(f) 히브리서에서 호도스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사용되었다.|-히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위의 두개 구절에서 호도스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 히 9:8의 호도스는 분명히 위치상 성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히 10:19에 비추어 볼 때 '길'이라기보다는 '들어감, 접근, 나아감'이며, 에이소도스($1529)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확실한 언급은 없지만 이 길은 명백히 하나님(과의 교제)께 나아가는 길이다. 이러한 논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신 분(참조: 히 6:20) 또는 인도자(참조: 히 2:10; 히 12:2)로서, 미증유(未曾有)의 살아있는 접근로(living way of access)를 열어 놓으셨다. 이것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구속자에 관한 영지주의적(gnostic) 논재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서의 사상은 희생 제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휘장을 갈라 놓으심으로써 그 길을 예비하셨는데, 이 휘장은 그의 육체이다. 영지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하늘의 세계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물질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성경적 견지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의 살(과 피)을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갈라 놓은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죄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참조: 히 10:22; 롬 5:1; 엡 2:18 이하; 엡 3:11 이하). 히브리서의 배경에 깔려 있는 표상은 속죄제(참조: 레 16장)이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의 피를 가지고 부지중에 지은 백성의 죄들을 속(贖)하였다. 옛 언약 하에서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여호와께 그와 같은 접근을 할 수가 있었다. 벧후 1:11도 이러한 문맥에 속한다.||(g) 요한복음에서 호도스는 예수님의 인격에 적용되었다(요 14:1-6). 이는 신약성경의 독특한 용법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떠나 가시는지 그 장소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그 길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바로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히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곳이다(요 14:6b와 요 20:17). 또한 이를 통하여 그 제자들의 길이 열린다.||(h) 사도행전에서의 호도스.|①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여기서 호도스는 '수단, 방법' 혹은 부활의 '가능성'을 가리킨다.|②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여기서도 호도스는 '방법, 수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③ 행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여기서 호도스는 '처세'(walk), '행동(위)'을 의미한다.|④ 행 13:10에서 '길'은 그에 병행되는 단 3:27과 호 14:9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역사, 또는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행동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⑤ 행 9:2; 행 19:9; 행 19:23; 행 22:4; 행 22:14; 행 22:22 등에서 호도스는 성도의 교제로 표현된 삶의 양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단수형으로 사용된 호도스는 다른 사람들(특히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하이레시스($139, 참조: 행 24:14)라고 부른 것과 동등한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개념이다. 이 길은 다른 사람들은 비난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옳은 길이라고 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⑥ 행 16:17("구원의 길")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분명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행 18:25("주의 도")과 행 18:26("하나님의 도")은 예수님에 관한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⑦ 행 22:4에서 바울은 "도"를 핍박하였다고 말한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여기서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메시지와 아울러 기독교 공동체까지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길"이, 가르침과 기독교 공동체 중 어느 하나만을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잘못된 양자택일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용어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두 의미가 함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독립적으로 사용된 "길"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교인의 말씀 선포 및 기독교인들에 대한 칭호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길"은 이러한 말씀 선포가 특별한 생활 양식 또는 삶의 길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괄하고 있다.||(i) 고전 12:31 하반절에서 바울이 말한 "제일 좋은 길"은 사랑(아가페)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의미한다. 이 사랑은 영적 은사들에 대한 모든 열망 위에, 그리고 그에 우선하여 위치한다(참조: 고전 14:1; 빌 2:1 이하). 우리는 고전 12:31 하반적의 "길"(way)을 고전 4:17과 함께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고전 4:17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길들"("그리스도 ... 안에서 나의 행사"-한글판 개역성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조화되는 삶의 길에 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길을 그는 각처에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도 이것이 뚜렷하게 증거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명사 "나의 길들"("나의 행사"-개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신도들에게 자기를 "본받는 자"되라고, 즉 그리스도와 조화되게 살라고 촉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j) 약 1:8에서 '처세'나 '행동'을 의미한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5:20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k) 베드로후서에서는 거짓 교리와 이단의 교사들을 논박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진리의 도"(벧후 2:2; 참조: 약 5:19 다른 읽기), 그리고 "의의 도"(벧후 2:21)라고 부른다. 이 길은 새로운 도덕성을 가져오며 또한 도덕성을 요구하고(참조: 벧후 2:20 이하, "거룩한 명령"). 나아가서는 그것에 의해 이교 사상과 구별이 된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도덕성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볼 때, 이 "길"의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거짓 교사들은 수치스러운 행위와 함께 "바른" 길(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원하시는 길)에서 떠나 "발람의 길"(벧후 2:15)을 좇음으로써 기독교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발람의 길"과 "가인의 길"(유 1:11; 참조: 창 4:3-8; 민 22-24장)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입장(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에서보다는 후기 유대 전승에 준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후기 유대 전승에서는 구약의 입장을 고수하여 가인과 발람을 모든 방탕자와 이단자들의 조상과 스승으로 보고 있다(참조: Philo, Post.).|(참조: W. Michaelis; G. Ebel;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