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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접붙이다
ejgkentrivzw
접붙이다, 이식하다 to graf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엔켄트리조(Aristot.)는 엔($1722: ~안에, 위에, ~와 [함께])와 켄트리조(%104: 접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접목하다, 접붙이다'를 의미하며, 식물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엥켄트리조는 70인역본에서 지혜서 16:1에서 '자극하다, 격려하다'는 의미로 단 한번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나무에 접붙인다는 의미로 쓰인 예가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Yeb.63a). 하나님은 두 개의 가지를 아브라함, 룻 그리고 나아마 에게 접붙이셨다. 따라서 유대교에로의 개종자들은 아브라함을 뿌리로 한 나무에 접붙여진 것으로 여겨졌다(Philo, Exsec.6; 참조: SBⅢ291).||#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엥켄트리조는 신약성경에서 6회, 로마서 11장에만 사용되었다.|롬 11:16이하에서 바울은 엥켄트리조, 즉 접붙인다는 묘사를 사용한다. 여기서 언급된 그 과정은 때때로 실제로 실행되는 접붙이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 되어진다. 실제의 접붙이기에서는 돌감람나무 위에 참감람나무에서 꺽은 가지를 접붙임으로써 그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돌감람나무는 일종의 다른 야생 올리브(oleaster)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감람나무를 다시 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접목을 하는 일은 고대 세계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다(Philo, Exsec.6; 참조: M.Black, op. cit.,145). 이 묘사가 적용되게 하려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자들인 이방인들이 돌감람나무여야한다. 바울의 묘사와 실제로 인정된 원예술간의 긴장은 아마 자연에 모순되는 이 하나님의 일의 기적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의도된 것인 것 같다(파라퓌신, paraphysin, 24절).|바울에게 있어 접붙여진 가지는 유대교로의 개종자가 아니라 하나의 몸으로서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이다. 이 구절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계약의 백성에게로 흡수시킴으로써 이룩하신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또한 이방인들이 거만해지지 않도록 이들에 대해 경고하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겸손히 자손들의 종속됨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뿌리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18절), 주목해 보건대 17절에서,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라는 독본이 더욱 적절한 것으로서 증명되는 것 같다. 이방인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낮게 평가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① 만일 뿌리가 거룩하다면 가지도 그러하듯이(16절), 이스라엘은 그 조상들과의 관련에서 볼 때 신에게 바쳐졌기 때문이다.|② 하나님은 다시 원 가지들을 접붙이시는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참조: Walter Bauer; E.M.Embry).
요단
!Iordavnh"
요단 Jardan.||#1. 구약성경.||(a) 이오르다네스는 히브리어 아르덴(3383)에서 유래했으며, 아르덴의 의미는 그 어원이 인도 아리아어인지 혹은 서부 셈족어인지에 달려 있다. 만일 전자라면 그것은(영구한) 강을 뜻하게 될 것이지만, 후자라면 '내려가다'라는 뜻의 어근 야라드에서 나온 내려가는 자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두가지 의미가 다 언어학상으로 뒷받침될 수 있다. 요단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강이다. 이 강은 안티레바논(Anti-Lebanon) 기슭의 수많은 급류와 작은 시내들에서 발원하여 처음에는 사모코니티스 호수(Lake Samochonitis, 소위 Merom; 현대는 el-Huleh)로 흘러 들어간 후 거기로부터 지상에서 가장 깊은 협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강이며, 디베랴 호수(갈릴리 바다)로 유입된다. 이 호수를 떠난 후 흐르는 도중 보다 작은 다수의 물줄기에 의해 유량이 증대되며 마침내 이 강은 사해로 흘러 든다.||(b) 구약성경에 의하면 요단강은 봄철 및 추수기에는 불어난다(대상 12:15; 수 3:15; 렘 12:5).|롯이 요단 들 소돔 지역에 정착했고(창 13:10-12), 야곱이 건넜으며(창 32:10), 이스라엘이 요단강 모압 평지에 진을 쳤다(민 22:1; 민 26:3, 63).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신 3:27).|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 그곳의 돌 열 두개로 길갈에 기념비를 세웠다(수 1:2; 수 4:2, 3).|에훗이 요단 나루에서 모압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삿 3:28, 29).||기드온이 요단 나루터를 점령하고 미디안을 공격하여 승리를 얻었으며(삿 7:24, 25), 기드온과 삼백명의 용사가 요단을 건넜다(삿 8:4). 입다가 요단 나루터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죽였다(삿 12:6, 7).||다윗이 아람을 물리치기 위해 요단을 건너 진을 쳤다(대상 19:17).||(c) 솔로몬이 요단 평지에 주물 공장을 세웠다(왕상 7:46; 대하 4:17).||(d) 요단강에 관계된 기적으로,|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육지 같이 건너갔다(수 3:14, 17; 시 114:3).|② 엘리야가 요단강을 갈라 엘리사와 함께 건너 갔다(왕하 2:8).|③ 엘리사가 요단강을 갈라지게 하여 건너갔다(왕하 2:14).|④ 나아만이 일곱번 목욕하고 문둥병을 고치었다(왕하 5:14).|⑤ 엘리사가 요단강에 빠진 도끼를 기적적으로 떠오르게 했다(왕하 6:4-6).||(e) 요단의 영적 의미로는|① 요단을 건너 천국으로 가는 것을 나타낸다(왕하 2:8, 11).|② 요단을 건너 복된 곳으로 가는 것을 나타낸다(신 3:35).|③ 요단을 건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가는 것을 나타낸다(신 11:31; 신 12:10).||#2. 신약성경.||(a) 이오르다네스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사복음서에만 사용되었다. 요단강은 주로 침례 요한의 사역이나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신약성경은 대체로 이 용어의 사용을 크게 자제한다. 외경의 복음서들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사도 교부들은 요단강을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증가들 중에서도 저스틴만이 요단강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요단강에 대해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b) 요단강과 세례(침례) 요한.|요단강에서의 세례(침례)는 세례(침례) 요한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강의 동쪽과 서쪽 모두에서 사역한 것으로 사료되지만, 그 정확한 위치를 제시해 주는 자료는 없다. 사실 마태와 마가만이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침례)를 주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한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으며, 다만 세례(침례)는 특별히 요단강물로서가 아니라 물로써 이루어짐을 강조하고자 하였다.||(c) 예수님과 요단강.|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침례) 받은 자들 가운데 하나지만, 요단강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세례(침례)는 세례(침례) 요한의 운동에 밀접히 융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순종적으로 기다리는 것을 표현한다. 요한복음 역시 예수님을 세례(침례) 요한의 운동의 핵심에 두고, 이 사건을 예수님의 선교 및 소명과 관련시킨다. 예수님의 후기의 사역에서 요단강은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단지 요단 지역으로부터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 왔다는 것(마 4:25)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그곳에서 사역하셨다(마 19:1; 참조: 요 3:22 이하; 요 10:40) 기사만 나올 뿐이다. 비록 예수님의 사역을 요한의 사역과 구별하고자 함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지만 눅 19:1 이하의 삭개오 기사에서 요단강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신약성경에서 요단강에 관한 침묵은 분명히 원리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우리를 보다 넓은 결론, 즉 요단에 관한 이 침묵은 복음서 전승 전체를 특징 짓고 예수님의 인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문제의 원리가 '무엇이 기독교적인가'에 대한 특별한 이해에서 나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이 주제가 가능하거나 옳은지 어떤지는 이러한 조사의 자료가 허락하는 한에서는 초대 기독교와 요단강의 관계를 조사함으로서만 증명될 수 있다.||(d) 원시 기독교와 요단강.|사도행전은 초대 세례(침례) 관습을 요단강과 관련시키지 않는다. 행 2:37 이하; 행 8:9 이하; 행 8:26 이하나 행 10:47-행 10:48에서 요단강에서 세례(침례)에 대해 어떠한 문제도 없다. 세례자(침례자)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물과 회개를 언급하나 요단강은 언급하지 않는다.|다른 책들도 요한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세례(침례)와 관련된 어떤 특정 강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세례(침례)에 대한 유일한 요구 사항은 어떤 종류든 이용 가능한 물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행 8:36). 그러한 물은 결코 요단강물과 연관되지 않는다.||(e) 초대 교회에서 세례(침례)의 물과 요단 강물.|저스틴은 요단강을 언급하지만(Dialoque with Trypho) 단지 구원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한 장소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왕하 6:1 이하에서 엘리사의 기적은 물세례(침례)의 한 예표가 된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침례)는 그의 침잠에 의한 물의 성화라는 사상과 결합된다. 물은 중요하지만 특별히 요단강의 물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Did 7.1-2와 달리 저스틴은 흐르는 물의 사용을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의 사람들은 이것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은데, 그들은 유대의 관습을 따르고 요한의 세례(침례)와 더 밀접한 연관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마도 주변적인 집단들일 것이다. 터툴리안은(On Baptism 4) 예수님의 세례(침례)로 말미암아 모든 물이 세례(침례)에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전례들은 모든 성화된 물을 요단강물로 묘사한다. 이것은 만대교(Mandaeans)에 영향을 주어, 그들은 흐르는 물의 사용을 고집하고 요단강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은 요단강에 의해 상징되는 흐르는 물이 기독교인의 세례(침례)에 더 적합한 물이라는 사상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아마도 마지막 문제는 교회가 요한의 세례(침례)의 연속선상에서 세례(침례)를 주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세례(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아니면 예수님이 그의 세례(침례)와 연관하여 사역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세례(침례)를 주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흐르는 물이 중요시되는 곳에서는 요한과, 따라서 요단강과의 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롬 6:3 이하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세례(침례)를 예수님의 세례(침례)와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과 관련시키고,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는 것과 연관시킨다(행 10:44 이하). 세례(침례)를 요단강과 분리시키는 것은 주의 만찬을 유월절로부터 분리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단순히 다른 것이 아닌 새로운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반영한다. 주후 400년경 일부 신자들은 여전히 요단강에서 세례(침례)를 받았지만, 예루살렘에 예수님의 세례(침례) 장면 그림으로 장식된 세례(침례) 장소도 있다. 예수님의 세례(침례) 때에 일어난 것과 동일한 일이 그 때에도 일어난다. 세례(침례)가 요단강 혹은 흐르는 물에서 행해지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모두 예수님의 세례(침례)와 같은 것이다.|(참조: ZTB; K. H. Rengstorf; R. K. Harrison).
호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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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hosanna, "오, 구원하소서" O, Save.||#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호산나는 히브리어 표현인「호쉬아 나」의 음역이며, '우리가 비옵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의미한다. 70인역본은 이것을 번역하는데 헬라어 소손(구원하소서)을 사용하였다(시 118:25).|이 부르짖음은 도움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이며(시 118:25), 할렐(Hallel) 시편(113-118)과 더불어 예배 의식에 사용되는 문구이다. 성막에서 요제 의식이 거행될 때는 이 표현이 번제단 주위의 엄숙한 회중 행렬에서 기쁨의 탄성이 된다. 그리고 시편 118편이 때때로 음악에서처럼 메시야적 연주를 하듯이 이 표현도 메시야적 소망을 반향할 때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호산나는 신약성경에서 마21:9; 마 21:15; 막 11:9; 막 11:10; 요 12:13에 나온다.|신약성경 시대에 호산나는 완전히 '제의적인 외침'이 되었다. 이런 사실은 70인역본이 할렐루이야를 사용한 용법에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마 21:9; 막 11:9; 요 12:13에 나오는 헬라어는 히브리어의 음역어이지 역어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슥 9:9의 왕적 예언을 성취하시고, 그에 결부되어 나오는 가지를 흩뿌리고 흔들어 장막절 절기의 특성을 나타내려고 한 의례적인 잎들을 상기시키는 광경은 그런 경우에 터져나올 법한 외침을 야기시켰고 그들은 모두 부지불식간에 참 다윗을, 다윗을 환영하듯이 환영하였다. 앞에 언급된 신약성경의 "호산나" 구절들은 모두 '다윗의 아들', '다윗의 왕국'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에 그 생각이 집중되어 있다.|(참조: J. H. Thayer; J. A. Motyer; E. Lohse)
애굽
Ai?gupto"
애굽 Egypt.||#1. 헬라어의 의미.||아이귀프토스는 Homer(odyssey)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애굽의 고대 수도인 멤피스(Memphis)의 별칭인 애굽어 하쿠프타(hi-ku Ptah)에서 유래했다. 하쿠프타는 일반적으로 '프타(Ptah)의 '카(ka)의 영혼의 저택'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하쿠프타, 곧 멤피스는 하부 이집트의 수도이고 애굽 전체의 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단어는(헬라인들에 의해?) 수도 뿐 아니라 그 나라까지 포함되도록 그 의미가 확대되었으며, 그것은 현대 아랍어 미츠르(카이로)가 이집트에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애굽은 젖줄인 나일강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고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북동 아프리카에 자리잡은 나라이다. 고대 애굽의 영토는 북쪽으로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으로 나일강 제 4폭포에 이르기까지의 광할한 지역이었다.||#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아이퀴프토스는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미츠라임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창 10:6), '동쪽'이란 의미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애굽의 지리적 이중성(긴 계곡, 넓은 삼각주)과 제도의 이중성(바로 왕조 및 행정부의 두 가지 기원과 형태)을 반영한다고 한다. 미츠라임이 일반적으로 상, 하 애굽 전체를 가리키지만 사 11:11에서는 '바드로스'(상 애굽)과 구분하여 하 애굽만을 가리킨다.|구약성경 및 70인역본에서 애굽의 중요성은 7개 제목으로 살펴볼 수 있다.||(a) 애굽은 하나님의 세계의 일부이다.|① 창 10:6, 13에서 미츠라임은 애굽과 애굽 사람의 조상 또는 그 이름의 시조가 되는 인물로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지상의 종족 중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② 창 15:16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경계가 애굽의 나일강 동편에 있다.|③ 애굽은 문화적으로, 고운 베(잠 7:16; 겔 27:7), 화려한 병거와 군마(왕상 10:28-29; 아 1:9)로 유명했다.|④ 슥 14:18-19에 보면 애굽은 다른 나라들, 앗수르나 바벨론처럼 특별히 월등한 이방 세력이었으나 그들처럼 애굽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하게 되어 있다.|⑤ 암 8:8; 암 9:5에서 나일강 홍수가 연례적으로 휩쓰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서운 심판의 상징이었다.||(b) 애굽은 피난처와 체류지이다.|① 인간적으로 선택하는 곳이다. 창 12:10-13에서 아브라함은 기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에서 구원을 찾았다. 창 16:1에서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하갈을 데리고 왔는데, 아브라함과 사래는 자식이 없자,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인간적으로 하갈에서 찾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여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에 의해 이루어졌다.|②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곳이다.|창 37:29-30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애굽을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피난처로 마련해 주셨고, 거기서 이스라엘은 한 국가로 성장했다.||(c)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셨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종되었던 집"이었으며, 거기서 하나님은 그의 권능과 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하셨다(출 1-15장; 출 20:1 등). 이러한 구출은 광야에서 회상되었고(출 23:32; 레 11:45; 25:38 등) 이스라엘의 적에게 영향을 주었다(수 9:9; 삼상 4:8; 6:6). 그 후 애굽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즉 사사 시대(삿 2:1, 2; 삼상 8:8; 10:18)와 솔로몬(왕상 8)과 그 후의 왕들 치하에서(예: 왕하 17:7), 그리고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에도(느 9:9, 18) 반역의 이스라엘을 끌어내신 중요한 시발점으로서 몇세기동안 되새겨져 내려왔다. 시편 기자들은 그에 관해서 노래했으며(예: 시 78:12, 43, 51; 80:8; 106:7, 21), 선지자들은 소리높이 합창했다(예: 렘 2:6외, 여러곳; 겔 20장; 단 9:15; 호 12:9, 13; 암 2:10; 9:7; 학 2:5). 호 11:1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로 부르며 애굽에서 불러내었다고 한다.||(d) 애굽에서 구원은 후대의 속박과 구원의 척도이다.|미 7: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적은 미래 행동에 대한 척도이다. 애굽은 다시는 전 이스라엘 민족의 망명지가 되지 않았으나(호 11:5), 후에 영적 속박, 예를 들면, 우상 숭배(호 8:13; 호 9:3) 같은 속박의 상징이 되었다. 미래의 이스라엘의 구원은 애굽에서 구원을 상징으로 하여 나타내었다(사 11:11; 호 11:11; 슥 10:10).||(e) 후기 역사의 상황에서 애굽의 역할이 나타난다. 출애굽 시대 이후에 애굽의 역할은 다양하다. 애굽은 때로는 피난처로(왕상 11:40; 렘 26:21 이하), 동맹국으로(왕상 3:1), 때로는 적으로(왕상 14:25 이하; 왕하 23:33-34), 그러나 때로는 도움을 구하는 잘못된 신뢰의 목적을 가진 덫으로(왕하 17:4; 참조: 왕하 18:21 등)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애굽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에, 정치적 속박과 그와 유사한 새로운 형태의 속박에 얽매이게 되었다(사 30:31장; 렘 2:18, 36; 렘 37:5, 7; 렘 41:17; 렘 42-44장; 겔 17:15; 23장; 호 7:11, 16; 호 12:1).||(f) 애굽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하나님은 이사야(사 19:20), 예레미야(렘 46장), 에스겔(겔 29-32장), 요엘(욜 3:19)을 통해 애굽의 자만심과 자기 주장, 언약의 백성을 공격한 것에 대한 심판이 선언되었다.||(g) 애굽은 또한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도 된다. 애굽은 회복과 하나님의 치유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사 19:19-25에서 앗수르, 이스라엘과 더불어 애굽 역사 "그의 백성"이 되어 여호와를 경배하고 치유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겔 29:13-16에 보면 애굽은 과거의 악에서 떠나고 겸손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한다.||#3. 신약성경||아이귀프토스, 즉 애굽이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신약성경에 나타난 애굽의 역할은 구약에 나타난 애굽의 역할과 거의 일치한다.||(a) 애굽은 하나님의 세계의 일부이다. 행 2:10에서 오순절에 애굽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그들 자신의 방언으로 선포되는 것을 들었다: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b) 애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해낸 속박을 나타낸다.|①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권능의 모범이다(행 7:9 이하; 행 13:17).|② 출애굽 사건은 그 후 이스라엘의 불신실함과 죄악의 본보기로서 묘사되었다.|·행 7:39-행 7:40,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히 8: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유 1: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c) 애굽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불러내신 피난처이다.|마 2:13; 마 2:15; 마 2:19,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옛 족장 이스라엘과 그의 백성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았고(창 45:5, 7)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아들"로서 그곳에서 불러내신 것처럼(호 11:1), 아기 예수님도 하나님의 명에 의해 애굽으로 피하게 되었으며(마 2:13), 호세아의 말을 끝까지 이루기 위해 그곳에서 나왔다(K. A. Kitchen).|마태는 호 11:1 인용절("내가...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에서 그 거룩한 주의 가족이 애굽에서 돌아온 것을 이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성취라는 차원에 있어서 이것을, 장차 올 것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적중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호세아가 분명히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어릴 때에 애굽으로부터 돌아온 것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의 성취인 것이다. 즉 지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 그것도 호세아가 언급하고 유대인들이 역사상의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본래의 출애굽 사건은 외견상 무의미하게 보였으나 사실상 인류를 위하여 가장 뜻깊고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 바로 그 사건의 예시적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Colin Bown).||(d) 애굽은 물질주의와 세속 율법의 상징이다.|① 히 11:26-히 11:27,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여기서 모세는 신앙의 길에서 그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애굽의 지위와 재물을 거절하였다. 우리는 히 11:24-히 11:26에서 '강건한 믿음의 자격'을 발견한다.|첫째로, 이것은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복보다 영적 도덕적 가치의 우월성을 시사하여 주며(히 11:25-히 11:26),|둘째로, 영원한 가치가 그리스도의 편에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음을 확신한다(히 11:24-히 11:25).|셋째로 강건한 믿음의 자격은 영원한 이익을 위하여 일시적인 이익을 버리는 것이다(R. S. Taylor).|②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여기에 하나님과 반대되는 반역적 세속성이 대조되어 있다. 거기에는 신실한 자들의 살해되 시체들이 위선적인 예루살렘과 방탕한 로마에 어울리는 "소돔과 애굽"이라고 불리운 성읍의 거리에 널려 있다.|(참조: ISBE; PEB; K. A. Kitchen).
오네시보로
!Onhsivforo"
오네시보로 Onesiphorus (인)||오네시보로는 '유익을 가져오는 자'를 의미한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쓴 서신 디모데후서에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을 한다(딤후 4:19). 그리고 그는 오네시보로의 집안의 긍휼을 위해 기도했다(딤후 1:16). 이것은 주의 자비가 그곳에 임하고 '주의 날' 곧 심판의 날에 긍휼을 입기를 기도한 것이다.|그는 바울이 두 번째로 로마 감옥에 갇히자 다른 사람들이 모른체 할 때 수감된 바울을 돌보았다(딤후 1:16-18; 딤후 4:19). 오네시보로의 용기 있는 행위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바울을 버리고 가버린 행위와 대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딤후 1:15). 그는 바울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 종종 도와 주었으며, 바울이 현재 옥중에 있는 로마에서 그를 찾기 위해 열심과 열정을 다했다. 오네시보로는 '유익을 가져오는 자'란 뜻을 가진 이름대로 살았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네시보로가 행한 많은 봉사에 대해, 바울 자신보다 디모데가 더 잘 알고 있음을 상기시켰다(딤후 1:16-18).|(참조: NBD; PEB).
용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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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다, 퍼뜨리다, 후회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코레오(Homer 이래)는 코라($5561: 공간, 장소, 지방, 시골나라, 땅)에서 유래되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a) 코레오는 자동사로 '물러서다' 즉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① 사람에게 사용될 때 '전쟁터에서 퇴각하다', 전치사와 함께 확대된 의미로 '달려들어 어떤 일을 수행하다', 즉 '반역하다'(Appian, Bella civilia), '어떤 행동을 후회하게 되다'(De Fluviis).|② 사물들에 사용될 때 '사물들을 움직이다', 신체의 유동성분(Aristot., Problemata), 소식이나 명령을 '퍼뜨리다'(Xen., Plato), 어떤 과정이나 사업의 '방향을 잡다'(Thuc.)를 의미한다.||(b) 코레오는 타동사로|① '들어올릴 수 있다, 잡을 수 있다'(움푹한 것, 그릇들에 대하여, Diod.).|② 확대된 의미로 '~을 참을 수 있다'(도시에 대해, Dem.)를 의미한다.|③ 기독교 후기 시대에 지성적, 영적 수용력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Plut.).||#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코레오는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사(5375), 쿨(3557), 바이트(1004), 하자크(2388)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70인역본에서 코레오는 용기들의 수용 용량(왕상 7:26; 왕상 7:38; 왕상 18:32; 대하 4:5)과 능력의 수용(창 13:6)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코레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코레오는 자동사로 사용되었다.|①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서 코레오는 '어떤 일을 후회하다'를 의미한다. 이 사상은 아마도 있음직한 일회적 행동에 대한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지연시킨다는 데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② 마 15: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배로 들어가서"라는 문구는 의학의 생리적 과정에 대한 묘사와 일치한다. 이 문구는 정신과 의지의 자연스런 작용과는 무관한 것을 나타낸다.|③ 요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여기서 코레오는 '퍼지다, 진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동사는 유대의 반대자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음에 적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엔($1722: ~안에)이 에이스($1519: ~안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갈 통로를 찾지 못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는 가정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리하여 요 8:30의 문맥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고 시인하면서도 아직 효력을 나타내지 않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반면에 요 8:31과 요 8:37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상은 인간이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요 8:32; 요 8:34).||(b) 코레오는 타동사로 사용되었다.|① 코레오는 수용능력에 대해 사용되었다.|·요 2:6에서 항아리들의 용량: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막 2:2에서 한 장소의 수용능력: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요 21:25에서 이 세상의 능력: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② 코레오는 예수님의 묵시적 교훈을 받거나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마 19:11-12; 참조: 마 19:9-10).|그 의미는 비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파악함에 해당한다(참조: 마 13:11; 마 13:16이하, 마 13:19; 마 13:23).|위의 예문들 모두에서 마태는 제자들의 이해를 강조한다. 코레오는 이해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가르침을 받아들여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고 있다.|③ 마 19: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 여기서 초기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묵시적 경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일에 대한 통찰력 또는 은사를 받아 사용하는 한 집단을 훈계하며 이로 인하여 이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부터 구별하고 있다.|④ 고후 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바울의 "우리를 영접하라"라는 청원은 앞에 나오는 마음을 넓히라는 청원의 뒤를 잇는 것이며(참조: 고후 6:13)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스테노코레이스데) 것이라"(참조: 고후 6:12)라는 언급과 일치한다. 고린도인들은, 바울이 그의 사도적 사역에서 자신을 그들이 알도록 내어 주었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주 예수님의 날에 서로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참조: 고후 1:14).|(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P. Schmidt).
사랑 받는
ajgaphtov"
사랑하는, 친애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가페토스는 동사 아가파오($25: 사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사랑하는, 친애하는'을 의미하며, 인사에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가페토스는 약 22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히드(3173: 유일한, 단 하나의, 유일하게 태어난)의 역어로 7회 나온다.|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야히드를 거의 모두 아가페토스(사랑하는 자)로 번역한 것은(창 22:2; 창 22:12; 창 22:16; 삿 11:34; 암 8:10; 슥 12:10; 렘 6:26) 아마도 독자가 부모에게 특별히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독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특별히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자'를 지적하기 위해 그렇게 번역했을 것이다.|그리고 아가페토스는 야디드(3039: 사랑하는, 소중한)의 역어로 5회(시 60:6; 시 84:1; 108:7; 127:2), 도드(1730: 사랑하는)의 역어로 1회(사 5:1), 아헤브(157: 사랑하다, 분사로는 사랑하는 자, 친구)의 역어로 1회(슥 13:6), 악키드(3357: 매우 귀중한, 귀여운)의 역어로 1회(렘 3:20) 나오며, '사랑하는, 사랑하는 자, 친구'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가페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60회 나오며, '사랑하는, 친애하는, 좋아하는'을 나타낸다.|형용사 아가페도스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막 1:11; 눅 9:7; 마 12:6; 마 12:8; 벧후 1:17의 "사랑하는 아들", 고유의 이름과 함께 아델포스와 결합되어 사용되기도 하고(엡 6:21; 골 4:7; 골 4:9; 벧후 3:15; 참조: 골 1:7; 골 4:14; 딤후 1:2) 인사말로 사용되기도 한다("사랑하는 자여": 요삼 1:2; 요삼 1:5; 요삼 1:11; 롬 12:19; 고후 7:1; 고후 12:19 등). 그리스도인들은 롬 1:7에서, 롬 11:28에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로 불리운다. 살전 2:8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아가페토이는 또한 딤전 6:1 이하의 종들에 대한 교훈의 끝에 나타나는데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그리스도인 상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참조: 롬 11:28; Ign. Phld. 9:2)(E. A. van Leeuwen).|(참조: G. Schneider).
전부터 바라다
proelpivzw
미리 바라다, 사전에 바라다 hope in advance.||#1. 일반 헬라어의 용법||동사 프로엘피조는 프로($4253: 전에, 앞에)와 엘피조($1679: 기대하다, 희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전에, 또는 먼저, 최초로 바라다'를 의미한다. 70인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프로엘피조는 신약성경에서 엡 1:12에 한번 나온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프로엘피조의 의미는 "우리"라는 언급에 달려있다. 만약에 "우리"가 유대 기독교인을 가리킨다면, 그 요지는 그들이 이방인들보다 먼저, 혹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소망을 가졌다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면, 그 요지는 종말에 대조하여 현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전부터 바란다' 보다는 '미리 바란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참조: J.H.Thayer; R.Baltman).
케일로스
cei'lo"
입술, 해변, 해안가, 기슭.||#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일로스(Homer 이래)는,||(a) '입술'(Homer, Philo),|(b) '해변, 해안(강, 호수)가, 기슭'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케일로스가 70인역본에서도 고전 헬라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사 29:13; 시 139:4; 시 30:19; 창 22:17).||#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케일로스는 '입술'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마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② 막 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③ 롬 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④ 고전 14:21,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⑤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⑥ 벧전 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b) 케일로스는 히 11:12에서 해변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복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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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하다, 찬양하다, 축복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율로게오는 유($2095: 좋게, 잘)와 로고스($3056: 말, 진술)에서 유래했으며,||(a) '~에 대해 좋게 말하다', 즉 '훌륭하게 말하다'나 어떤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Plat.).||(b) '칭찬하다, 찬양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들이 사람을 칭찬하는 것에도 사용되지만(Eur. Suppl.) 사람이 신들을 찬양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Isis).|단 한번 신들이 율로게인의 주어로 나온다. 신들은 사람들을 그들의 선한 행위로 고찰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재능을 부여하는 신들의 역할을 반영한다. 이 역할은 헬라 종교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참조: Aesch., Eumenides, 997 이하). 그러나 우리는 축복이라고 하는 특별한 활동이 헬라 신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율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처음으로 '축복하다' bless라는 의미로 나온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율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40회 나오며, 몇 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라크(1288: 무릎을 꿇다, 찬양하다, 복주다, 축복하다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아버지는 축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상속자들에게 축복을 전달할 수 있다(창 27:4 이하; 창 48:15; 창 49:25-창 49:26).||(b)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하였다(창 49:25). 창조물은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한다. 하나님은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창 1:22).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축복 받는다(창 1:28). 하나님은 복된 소나기를 보내심으로써 그의 피조물을 유지시키신다(겔 34:26). 그는 농작물과 가축 뿐만 아니라(신 28:1 이하), 안식일도(창 2:3) 축복하신다. 특별한 축복들은 구원사와 관련되어 있다(참조: 창 17:7-8; 창 26:3). 선민의 역사는 축복이나 저주 하에 있다(신 11:26 이하; 30:1 이하).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경우 축복은 저주가 된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하는 의로운 사람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죄인들은 저주를 당한다(렘 17:5, 7; 시 24:4-5).||(c) 하나님의 약속한 복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제의적인 형태를 취한다. 참으로 제의(예배)는 이스라엘의 복 개념의 근원인 것이다. 제의에서 이스라엘은 생명을 구하며(암 5:4 이하), 이 생명은 신탁을 통하여, 제사장의 말을 통하여 그에게 허락된다(삼상 1:17). 축복을 선언한 자들로 멜기세덱(창 14:19), 모세(신 33:1 이하), 여호수아(수 14:13), 엘리(삼상 2:20), 다윗(삼하 6:18), 그리고 솔로몬(왕상 8:14) 등이다. 축복하는 것은 점차 제사장의 특권이 된다(레 9:22-23; 민 6:22 이하; 신 10:8). 시 3:8의 기도는 끊임없이 성전 예배식에서 반향된다.||(d) 이 어군의 중요한 용법은 또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창 24:48; 신 8:10; 삿 5:2, 9; 시 16:7; 시 34:1; 시 67:26 등).||(e) 히브리 동사는 인사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축복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삼상 13:10).||(f) 이 용어는 또한 저주가 의도되는 곳에서 완곡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욥 1:11; 욥 2:5; 욥 1:21; 왕상 21:10, 13).||#3.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서 동사 율로게오는 41회, 명사 율로기아([N]으로 표시됨)는 16회 나온다. 여기서 이 두 단어를 함께 설명한다.||(a)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복의 개념을 많이 이어 받는다. 히 7:1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고 하며(창 14:19 이하), 이로부터 그의 높은 지위나 우월성을 추론하는데, 더 큰 자가 더 작은 자를 축복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히 7:6 이하). 히 11:20 이하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였고(창 27:28 이하),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였으며(창 48:15 이하), 그들이 믿음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신약성경 기자들은 조상으로부터 후손으로의 축복의 전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위대한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신을 가지고 축복하는 자는 그가 축복한 자를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밀어 넣는다.|히브리서가 이 예들을 말하는 목적은 히 6:12에 언급되어 있다. 곧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때때로 이런 구절 들에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다"(히 12:17[N]; 벧전 3:9[N])와 "약속을 기업으로 받다"(참조: 히 6:12; 히 6:15)와 같은 공식 문구가 실리기도 한다. 축복과 약속이 병행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 볼 때 이곳에서 축복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복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참조: 마 25:34과 사 65:23).|에서는 악하게도 장자권을 경시했기 때문에 비록 축복을 구하긴 했지만 거부 당한다(히 11:21).||(b) 신약성경은 또한 하나님을 찬미할(bless) 인간의 의무를 인식한다.|눅 1:64에서 사가랴는 그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즉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고 찬양을 돌린 참된 이스라엘인이다.|눅 2:28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았을 때 구주를 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나오는 복된 나라에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그 늙은 시몬은 아기 예수의 양친을 축복할 수 있었다(눅 2:34).||(c) 마리아는 이미 이런 축복의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마리아는 이미 이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모든 아내가 그의 아기에 대한 축복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메시야의 어머니는 특별히 "여자들 중에 복된" 자인 것이다.|① 눅 1:28; 눅 1:42,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② 눅 1:42, "여인 중에서 네가 복이 있도다." 이 문구에 대해서는 유딧 13:18; 유딧 15:12; 신 28:3 이하; 삿 5:24을 참조하라.|③ 그러나 가장 복된 자는 메시야 자신이다. 백성들은 메시야의 시온 입성을 환성을 지르며 환영하였다(막 11:9 이하; 마 21:9; 눅 19:38; 요 12:13). 요한복음에서는 율로게오만 나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시는 그 분과 그의 나라는 그들이 속하는 하나님에 의해 축복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에게 복종하는 백성들에게 환영받는다.|환영(영접)의 형식은 시 118:26에서 유래하며, 메시야의 구속과 연관되어 있다(Midr. Ps 118). 예수님은 마 23:39; 눅 13:35에서 이 동일한 시편을 그의 재림의 날에 적용 시키신다.||(d) ① 메시야가 지상적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그는 그의 백성 중에 경건한 사람으로 행하신다. 그는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특별히 종교적 관습에서 그리하신다.|그가 식탁에 앉으실 때나 4,000명, 혹 5,000명을 먹이실 때 그는 보통의 유대인 손님, 혹은 집 주인으로 행동하신다. 그는 인정된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신다.|그는 손에 떡을 취하시고 축사하신 후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신다(막 6:41과 병행구; 막 8:7과 병행구).|단 하나 새로운 모습은 기도하실 때 예수께서 예전처럼 아래로 내려다 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우러러 보셨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것의 요점은 그것이 일상의 평범한 식사가 아니라 기적적인 것이요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또한 그의 선교 의식과 이것이 주는 내적 자유에 힘입어 예수님은 이 딱딱한 형식적인 교제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와 같이 그렇게 생명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신적인 그 무엇을 불어넣고 계신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아마도 그는 또 이 감사 기도를, 예컨대 주기도문과 같은 한결 더 자유로운 형태로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관한 어떤 것을, 떡을 축사하고 떼어 주는 그 단순한 매일의 과정에 융합하셨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이 행동으로 주님을 알아보았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유카리스테인이 때때로 율로게인 대신 사용된다면(그리고 막 8:6; 막 8:7에서 둘이 함께 나옴) 이것은 어떤 의미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유카리스테오 역시 히브리어 베레크에 대해 사용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아람어 원어에 대한 헬라어의 오해로, 많은 MSS가 막 8:7에서 대격 목적어(아우타 혹은 타우타)를 추가한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시고 그 기적적인 면을 더하셨을 것이라는 사상을 암시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잊어버린지 오래된 개념으로 거슬러 되돌아 가는 것이다.|눅 9:16에서 유사하게 몇몇 MSS만이 독립형을 가지고 다수는 아우투스를, 그 중 몇몇은 에프 아우투스를 추가한다.|② 주의 만찬에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취하시고 축복을 선언하신 후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막 14:22; 마 26:26), 또 축복의 잔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여기서 그는 해석의 말씀을 덧붙이신다. 축복의 잔은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여전히 행해졌으며, 이에 대해 고전 10:16로부터 알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일반적인 유대적 표현인 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축복의 잔")를 사용한다. 한 가지 새로운 요소는 '호 율로구멘' "우리가 축복하는 바"의 추가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잔을 다른 모든 잔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 잔을 통하여 회중이 축복받기 때문에 그것에 감사 기도가 적용된다. 그것에 의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한다."||(e) 예수님은 또 사람들을 직접 축복하셨다.|① 막 10:16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다(참조: 막 10:13-막 10:16).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 가장이나 랍비가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하셨다(참조: SB). 주목할 요점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활동이 성인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활동은 어린이들까지도 포함하였으니 곧 생의 모든 단계에서 사람을 포용한다. 이 부분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참조: 막 10:15)는 "예수님의 활동과 적극적으로 통합되는 인간의 몸이며 피조적인 실존"이다(C. Westermann).|② 눅 24:50 이하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시 제자들에게 축복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축복 이면에는 제사장적인 축복도(Schenk) 족장 기사에 나오는 기업의 축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축복은 떠날 때 주는 축복의 관습이다. 떠나시는 주님이 자기 교회와 더불어 자기의 축복의 능력을 나누시므로 그는 교회와 결속되게 된다. 축복의 내용은 마태가 자신의 기사에 나오는 이에 상응하는 점에서 분명하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참조: 마 28:20; 창 26:3)고 말한 것처럼, 높이심을 받은 주님이 교회와 더불어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응답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사 복주셨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③ 롬 15:29[N]에서 어구는 축복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전도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곧 이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할 것임을 바울이 확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복에 충만하여 로마로 여행할 수 있었다.|④ 마 25:34에서 이 복은 오래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 안에서의 위대한 분리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복된 자들을 저주 받은 자들로부터 분리하실 마지막 날에 성취될 것이다. 저주 받은 자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반면, 축복 받은 자들은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⑤ 갈 3:8에서 바울은 창 12:3 하반절을 인용한다. "모든 이방(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바울은 이 인용문에 자신의 기독론적 사고 계열과 일치하는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성취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축복의 은사는 이제 더 이상 큰 민족의 은사나 땅의 풍성함의 은사가 아니라 약속된 그리스도의 영(Spirit)이다(갈 4:14[N]). 야훼 기자의 인용문과 이에 대한 바울의 해석 사이의 공통의 근거는 약속된 축복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축복의 성취 모두가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러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갈 4:8; 갈 4:14). 갈 3:8-갈 3:14에서도 바울은 축복과 저주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저주를 스스로 대신하여 단번에 받으심으로써(갈 3:13) 열방의 신자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예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완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갈 3:8 이하; 갈 3:14[N]; 히 6:14), "신령한 복"으로서는 지금 완전하게 이해하였다(엡 1:3; 행 3:25 이하).||(f) 복받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율법이 적용된다(참조: 히 6:7 이하[N]).|땅을 기업으로 받으라고 요청받으며(벧전 3:9),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축복("찬송") 보다 저주하기가 더 쉽다(약 3:9 이하). 구약성경의 의인은 헬라인들처럼 저주에 대한 자연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 저주를 당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이것은 욥 31:30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저주를 완전히 이기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것은 오히려 또다른 문제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그들을 축복하라"(눅 6:28; 마 5:44). 이 명령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롬 12:14; 고전 4:12).|여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들의 저주, 핍박, 욕설 또는 비난을 그와 반대되는 축복으로 대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이곳에서 축복은 단순히 원수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를 의미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보복법(이우스 탈리오니스[ius talionis])을 대신한다(이것은 특히 벧전 3:9에 명확하게 나타남). 축복을 방해하는 것과 저주는 폐지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으므로(갈 3:13), 기독교인들은 무조건적으로 축복하라는 권고만을 받을 뿐이다(롬 12:14). "그리스도의 교회와 각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아무도 저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역사는 또한 그의 대적들에게도 유용하기 때문이다"(Watermann; H.-G. Link).||(g) 율로기아는 그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솟아나는 것이므로 구약성경에서처럼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으로서 선물에 대해 사용된다: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5; 고후 9:6[N]). 여기서 축복과 은사의 관계(참조: 창 33:11)가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해 모으고 있었던 연보를 율로기아(한글개역 난외 주: "복")라고 부른다. 이 문맥은 율로기아가 인색하지 않은 헌금("억지"와 반대됨)을 의미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린도 교회는 "많이"(엡 율로기아스, 한글개역 난외 주: "복으로"; 반대어는 페이도메노스, "적게") 헌금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이 헌금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예루살렘 교회에 확실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h) 고전 14:16에서 율로게오는 하나님에 대한 무아지경적인 찬양을 표현하는 제의적 행위의 의미에서 사용된다. 저주의 말인 아나데마 예수스와 확연히 구별되는, 고백의 말인 퀴리오스 예수스는 성령에 의해 영감받는 것으로서 참 기독교인의 율로기아이다(참조: 고전 12:3).||(i) 거짓 교사들이 로마 교인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크레스톨로기아와 율로기아("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는 일반 헬라어 용법에 비추어 해석하려고 시도되고 있다(롬 16:18[N]). 한편 아마도 팔레스틴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확신을 주기 위해 약속에 대해 실제보다 부풀리는 듯한 인상을 나타낸다.||(j)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마지막 때의 영원한 말씀이 보좌에 앉으신 그분과 어린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계 5:12; 계 5:13; 계 7:12[N]).|(참조: H. W. Beyer; H. -G.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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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way, road, 대도 highway, 생활 방식 way of lif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기본어 호도스는 호머(Homer)로부터 나타나며,||(a) 그 일차적 요소는 동작(action)의 요소이다. 즉 행동으로서 '도보', 육지에서의 '여행'이나 바다에서의 '항해, 출발', 군대의 '행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b) 그리고 지역적, 공간적 의미에서, 이 단어는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거나 행진하는 장소인 '길(way), 작은 길(path), 도로(road)', 강 '줄기(course)', 그리고 또한 배의 '항로'를 의미한다(Homer 이후로, 그리고 비문과 파피루스에 나옴).||(c) 이 단어는 초기에 벌써 회화적이면서 비유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을 이용하거나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호도스는 어떤 것에 도달하거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방책, 절차, 무엇을 행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의미를 얻게 되었다. '삶의 길' 또는 '삶의 양식'이라는 문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삶(인생)은 때때로 길에 비유된다(Democritus, Frag. 230).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옳지 못한 행동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묘사되었다(Thuc., 3, 64, 4). 전문적인 철학적 용법에서 이 단어는 '질문 방법'이나 '인식 방법', '순서나 절차'(method)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d) 헬라 문헌에서 두 길에 대한 묘사가 자주 발견된다. 악으로 가는 길과 선으로 가는 길, 경건한 자를 위한 장소에 이르는 오른편 길과 불의한 자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로 이끄는 길에 대해 언급한다.|호도스가 종교적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의가 깊다. 죽음 이후에 인간이 가는 두 길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상이다.|진리의 길, 지식을 가진 인간을 인도하는 길로서 하늘의 빛에 이르는 길,|길로서 그노시스, 지식 있는 자가 가고 있는 생명의 길 또는 완전한 길에 대한 언급이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호도스는 70인역본에서 약 880회 나오며, 18개의 히브리어 상당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히브리어 데레크(1870: 길, 도로, 거리, 여행, 방식, 방법 등)의 역어로 나타난다(약 600회 이상).||구약성경에서 데레크/ 호도스는,|(a) 걸어다니는 길로서 '생명 나무의 길'(창 3:24), 술로 가는 길(창 16:7), 중요한 대로(민 20:17; 민 21:22), 해변의 길(사 9:1).|(b) '여행'(창 45:23; 수 9:13; 창 24:21).|(c) '활동, 행위'(시 1:6; 창 6:12).|(d) '여호와의 길'(창 18:19; 신 9:16).|(e) '태도, 습관'(창 19:31; 창 31:35).|(f) '창조의 역사'(욥 40:19; 잠 8:22; 욥 26:14)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호도스는 신약성경에서 102회 나오며, 주로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 서신 6회, 히브리서 3회, 야고보서 3회, 베드로후서 4회, 유다서 1회, 요한계시록 2회 사용되었다.||(a) ① 호도스는 문자적 의미로 '다니는 길, 도로'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2:12; 마 7:13 이하; 마 13:4; 마 13:19; 막 4:4; 막 4:15; 막 10:46; 눅 8:5; 눅 8:12; 눅 10:31; 눅 18:35; 눅 19:36; 행 8:26; 행 9:17; 약 2:25 등.|"길에서". '노중에서, 길의 도중에서, 길가면서', 눅 10:4; 행 8:36; 행 25:3; 행 26:13.|② 마 10:5에서 "이방인의 길"(호도스 에드논)은 이방적인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지역 바깥의 이방인 지역으로 통했던 길을 의미한다.|③ 눅 2:44에서 헤메라스 호도스("하룻길")는 사람이 하루에 걸어가는 거리, 즉 하룻길을 말한다.|행 1:12에서 사바투 호도스("가기 알맞은 길")는 출 16:29의 계명(참조: 민 35:5)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안식일에 유대인에게 허락되었던 보행 거리를 의미한다. 이 거리는 약 880미터였다.||(b) 호도스는 문자적 의미에서 '여행의 길, 여정, 노정, 여행'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행 중에, 마 5:25; 마 15:32; 마 20:17; 막 8:27; 막 9:33; 막 10:32; 막 10:52; 눅 12:58; 눅 24:32; 눅 24:35; 행 9:27; "여행 중에"(여행 길로부터), 눅 11:6; "여행을 위하여", 눅 9:3; "길을 가다"(여행하다), 가던 여행길을 계속하다, 행 8:39.||(c) 호도스는 '길'이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용법에서처럼, 일부는 '하나님의 행위와 구원 사역을 뜻하는 말로(예: 롬 11:33; 계 15:3; 히 3:10), 또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예: 마 22:16; 막 12:24; 눅 20:21; 마 21:32) 사용되었다.|구약의 인용구 중에서도 매우 자주 나타나며(행 2:28; 참조: 시 16:11; 시 13:10; 호 14:9; 롬 3:17; 시 36[35]:1; 눅 1:79; 사 9:2),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행 14:16; 롬 3:16; 고전 4:17; 약 1:8; 약 5:20).||(d) 마 3:3과 그 병행구 막 1:3; 눅 3:4(참조: 요 1:23)에서는 주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라는 부름과 아울러 사 40:3을 인용한다. 퀴리오스("주")라는 칭호가 예수께로 전이됨에 따라, 세례(침례) 요한의 사역을 구약성경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어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침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다(참조: 막 1:2에서 인용된 말 3:1; 참조: 마 11:10; 눅 1:17; 눅 1:76; 눅 7:27).|주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눅 1:79의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는 표현에서 호도스는 '방법, 수단'을 의미하기보다 '길'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말하고 있는 사 59:8(참조: 롬 3:17)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의 평강은 메시야적인 '구원'을 일컫는다.||(e) 마 7:13; 마 7:14에서 두 길의 상징을 사용한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첫번째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뒤이어지는 길에 대한 병행 은유법처럼 보인다. 의의 길이 넓은 길이라는 다른 기록들과 대조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협착하다. 여기서는 문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눅 13:24에서 처럼)로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길은 넓은 악의 길과 대조되는 의미로서 경건한 좁은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예수님의 의도하는 바는 그리스도인, 곧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은 좁고 이 길은 어렵다. 그러나 이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은 없다. 이 길에 들어서는 자가 적다면 이 길이 너무 좁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쉬운 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길은 제자들의 삶의 길(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그 무엇이다. "문"과 마찬가지로 "길"도 들어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목적지는 이미 밝혀져 있다. 즉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14절의 "찾는"이라는 문구는 여러 개의 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어려운 형국에서 길을 발견하려고 애쓴다거나 아니면 오랜 탐사 끝에 좁은 문으로 찾아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좁은 길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역사가 없이는 찾을 수 없는 길이며 찾는 자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길이며 이 길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마태복음에서는 특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예: 마 5:20), 생명에 들어가는 것(예: 마 18:8 이하) 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예: 마 25:21; 마 25:23)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마 7:13 이하의 말씀도 이 범주에 속한다.||(f) 히브리서에서 호도스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사용되었다.|-히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위의 두개 구절에서 호도스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 히 9:8의 호도스는 분명히 위치상 성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히 10:19에 비추어 볼 때 '길'이라기보다는 '들어감, 접근, 나아감'이며, 에이소도스($1529)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확실한 언급은 없지만 이 길은 명백히 하나님(과의 교제)께 나아가는 길이다. 이러한 논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신 분(참조: 히 6:20) 또는 인도자(참조: 히 2:10; 히 12:2)로서, 미증유(未曾有)의 살아있는 접근로(living way of access)를 열어 놓으셨다. 이것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구속자에 관한 영지주의적(gnostic) 논재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서의 사상은 희생 제물로서의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휘장을 갈라 놓으심으로써 그 길을 예비하셨는데, 이 휘장은 그의 육체이다. 영지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하늘의 세계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물질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성경적 견지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의 살(과 피)을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갈라 놓은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죄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참조: 히 10:22; 롬 5:1; 엡 2:18 이하; 엡 3:11 이하). 히브리서의 배경에 깔려 있는 표상은 속죄제(참조: 레 16장)이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의 피를 가지고 부지중에 지은 백성의 죄들을 속(贖)하였다. 옛 언약 하에서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여호와께 그와 같은 접근을 할 수가 있었다. 벧후 1:11도 이러한 문맥에 속한다.||(g) 요한복음에서 호도스는 예수님의 인격에 적용되었다(요 14:1-6). 이는 신약성경의 독특한 용법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떠나 가시는지 그 장소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그 길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바로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히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곳이다(요 14:6b와 요 20:17). 또한 이를 통하여 그 제자들의 길이 열린다.||(h) 사도행전에서의 호도스.|① 행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여기서 호도스는 '수단, 방법' 혹은 부활의 '가능성'을 가리킨다.|②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여기서도 호도스는 '방법, 수단'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③ 행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여기서 호도스는 '처세'(walk), '행동(위)'을 의미한다.|④ 행 13:10에서 '길'은 그에 병행되는 단 3:27과 호 14:9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역사, 또는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행동의 뜻으로 볼 수도 있다.|⑤ 행 9:2; 행 19:9; 행 19:23; 행 22:4; 행 22:14; 행 22:22 등에서 호도스는 성도의 교제로 표현된 삶의 양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단수형으로 사용된 호도스는 다른 사람들(특히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하이레시스($139, 참조: 행 24:14)라고 부른 것과 동등한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개념이다. 이 길은 다른 사람들은 비난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옳은 길이라고 믿고 있었음을 보여준다.|⑥ 행 16:17("구원의 길")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분명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행 18:25("주의 도")과 행 18:26("하나님의 도")은 예수님에 관한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⑦ 행 22:4에서 바울은 "도"를 핍박하였다고 말한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여기서 "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메시지와 아울러 기독교 공동체까지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길"이, 가르침과 기독교 공동체 중 어느 하나만을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잘못된 양자택일을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용어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두 의미가 함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독립적으로 사용된 "길"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교인의 말씀 선포 및 기독교인들에 대한 칭호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길"은 이러한 말씀 선포가 특별한 생활 양식 또는 삶의 길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괄하고 있다.||(i) 고전 12:31 하반절에서 바울이 말한 "제일 좋은 길"은 사랑(아가페)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의미한다. 이 사랑은 영적 은사들에 대한 모든 열망 위에, 그리고 그에 우선하여 위치한다(참조: 고전 14:1; 빌 2:1 이하). 우리는 고전 12:31 하반적의 "길"(way)을 고전 4:17과 함께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고전 4:17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길들"("그리스도 ... 안에서 나의 행사"-한글판 개역성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조화되는 삶의 길에 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길을 그는 각처에서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도 이것이 뚜렷하게 증거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명사 "나의 길들"("나의 행사"-개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고, 신도들에게 자기를 "본받는 자"되라고, 즉 그리스도와 조화되게 살라고 촉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j) 약 1:8에서 '처세'나 '행동'을 의미한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5:20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k) 베드로후서에서는 거짓 교리와 이단의 교사들을 논박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진리의 도"(벧후 2:2; 참조: 약 5:19 다른 읽기), 그리고 "의의 도"(벧후 2:21)라고 부른다. 이 길은 새로운 도덕성을 가져오며 또한 도덕성을 요구하고(참조: 벧후 2:20 이하, "거룩한 명령"). 나아가서는 그것에 의해 이교 사상과 구별이 된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도덕성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볼 때, 이 "길"의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거짓 교사들은 수치스러운 행위와 함께 "바른" 길(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원하시는 길)에서 떠나 "발람의 길"(벧후 2:15)을 좇음으로써 기독교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발람의 길"과 "가인의 길"(유 1:11; 참조: 창 4:3-8; 민 22-24장)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입장(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에서보다는 후기 유대 전승에 준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후기 유대 전승에서는 구약의 입장을 고수하여 가인과 발람을 모든 방탕자와 이단자들의 조상과 스승으로 보고 있다(참조: Philo, Post.).|(참조: W. Michaelis; G. Ebel; Walter Bauer; J. H. Thayer).
옳게 분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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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베다, 길을 내다(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오르도토메오는 오르도스($3717: 곧은, 똑바른)와 템노(%376: 베다)에서 유래했으며, 이 단어는,||(a) '바르게 베다',|(b) '길을 부설하다, 길을 내다(열다), 도로를 기공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오르도토메오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샤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잠 3:6; 잠 11:5). 여기서 이 단어는 곧은 방향으로 길을 만드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템노(깎다, 자르다)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숲이나 혹은 험한 지역에 길을 만들어 여행자가 자기의 목적지까지 곧장 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Arndt, 584).||#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오르도토메오는 신약성경에서 딤후 2:15에 한번 나온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이 구절은 플라톤의 저서에 나오는 구절과 비교된다. '현재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의하여 명백해진 법률의 길을(테트메멘엔 호돈) 따라 나아가라'(Plato, Laws). 아른트(Arndt)는 디모데후서의 의미가 목표 지점을 향해 똑바로 뚫린 길처럼 똑바른 길을 따라 진리의 말씀을 지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다른 해석들은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 건전하게 설명하는 것, 옳게 주석하는 것, 두려움 없이 전하는 것 등이다(참조: Moulton, Millilgan).|(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Koster; R. Klober).
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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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han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이르(Homer 이래)는 '손'을 의미하며, 상징적으로 '쪽, 편, 능력, 손으로 씀, 군대'를 나타내기도 한다.||(a) 손은 사람의 몸의 한 지체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에다 굉장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손은 동작이나 행동의 도구이다. 손은 각종 도구를 다룬다. '손으로 손을 잡다'와 같은 여러 가지 표현들이 손으로 하는 행동을 묘사한다.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악수로) 인사를 한다. 일과 자신의 방어에 손을 사용한다. 인간의 힘과 에네르기는 이 손을 통하여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b) 신들도 손으로 보호하기도 하고 개입하기도 한다. 축복을 하거나 치료, 구원을 할 때도 손을 올려 놓는다. 기적 행사자들은 손을 올려 놓음으로, 안수로 치유의 능력을 전달한다.||#2. 70인역본 용법||명사 케이르는 70인역본에서 아마도 2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야드(손)의 역어로, 그밖에 6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케이르는 70인역본에서 '손, 힘'(창 32:11; 삿 2:14; 렘 27:6이하), '표 기념비'(삼하 18:18)를 나타낸다.||(b) 케이르는 인간의 '힘'이나 '능력'의 상징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손에 떨어지다'라고 할 때에는, 그 사람에게 장악되었음을 의미한다(창 32:11; 삿 2:14; 렘 27:6이하).||(c) 케이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상징이다(대하 20:6; 시 89:21). 하나님의 손은 천지창조, 통치를(사 48:13),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손은 구원과 해방을,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파멸과 멸망을 나타낸다(출 7:4; 출 9:3; 삼상 7:13). 하나님의 손은 그의 의로운 형벌(삼하 5:6, 삼하 5:11), 그의 자애적 돌봄(스 7:6; 욥 5:18; 시 145:16; 사 49:16), 그의 보호(사 51:16)를 표현한다.||(d) 케이르는 기호와 상징 언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손을 펴거나 드는 것은 겸손한 탄원(대하 6:12 이하; 시 28:2)을, 손으로 머리를 싸는 것은 슬픔(렘 2:37)을, 손뼉을 치는 것은(그 감정에 따라) '불쾌, 격렬한 흥분'(민 24:10), '기쁨'(시 47:1; 겔 25:6), '악의에 찬 기쁨'(겔 6:11)을, 손을 뻗는 것은 '결심'(민 15:30)을, 손을 채운다는 것은 '직분을 맡기는 것'(출 28:41, 민 3:3)을, 손을 얹는 것은 능력의 전달(왕하 13:16)이나 죄의 전가(레 1:4; 레 8:22 등)를 표현한다. 손은 엄숙한 서약(창 14:22; 창 24:2, 창 24:9; 창 47:29; 스 10:19), 성실한 시민성(잠 6:1 이하; 잠 22:26)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손의 기호(출 13:9, 출 13:16; 신 6:8; 신 11:18)는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계명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생생하고도 영구적인 수단이었다. 손을 씻는 행위는, 정결하게 하는 것과 관련된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행해졌을 뿐 아니라 결백의 확증 및 깨끗한 양심을 나타내기 위해 시행되었다(신 21:6; 시 26:6; 참조: 욥 17:9; 시 24:4; 마 27:24).||#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이르는 신약성경에서 약176회 나오며, 누가의 기록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구약성경의 손에 대한 표현법에 대한 영향일 것이다(서신에 25회, 공관복음 25회, 요한복음 15회, 사도행전 45회, 요한계시록에 15회).||(a) ① 케이르는 문자적 용법에서 대체로 "물건을 쥐는" 신체의 일부를 가리킨다. 화자의 손을 적절하게 움직임으로써 시작한다(행 12:17; 행 13:16; 행 19:33; 행 21:40; 행 26:1).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적하기 위해(마 12;49), 문둥병자를 만지기 위해(막 1:41 병행구),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붙잡기 위해(마 14:31) 내밀었다.|마 26:51에서 예수님을 방어하기 위해 손을 펴 검을 빼었다. 눅 22:53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한 언급에 나온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베드로는 손을 뻗쳐 다비다를 일으켰다(행 9:41). 언젠가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그의 손을 뻗칠 것이다(요 21:18). 손으로 혹은 손에 사람을 받들고(마 4:6 병행구), 손에 혹은 손에 물건을 쥐며(계 1:16; 계 6:5; 계 7:9; 계 10:2; 계 10:8; 계 14:14; 계 17:4; 계 20:1), 손으로 일을 한다. 따라서 바울은 각기-심지어 바울 사도까지도-자신을 부양하는 사실을 강조한다(행 20:34; 고전 4:12; 엡 4:28; 살전 4:11).|유사한 방식으로 바울은 서신의 결말에서 '그 자신의 손으로' 쓴 자신의 서명을 언급한다(고전 16:21; 갈 6:11; 골 4:18; 살후 3:17; 몬 1:19).||② 손은 행위의 목적어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병든 여인의 손을 잡으시거나 단순히 만지신다(막 1:31 병행구 마 8:15; 참조: 막 5:41 병행구; 막 8:23; 막 9:27; 행 3:7; 행 23:19).|막 3:1-5 병행구도 뻗친(5절bis) 마른 손(막 3:1; 막 3:3)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춘다. 베드로는 "손과 머리"도 씻겨 주기를 원했다(요 13:9). 탕자는 "손에" 가락지를 받는다(눅 15:22).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그 (오른) 손이나 이마에 각인된 표를 가지고 있다(계 13:16; 계 14:9; 계 20:4). 죄수는 "발과 손이" 묶인다(행 21:11; 참조: 마 22:13; 요 11:14; 행 12:7).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의 상한 "손과 발"(눅 24:40; 참조: 눅 24:39) 혹은 "손과 옆구리"(요 20:20; 참조: 요 20:25; 요 20:27)를 보여주신다.||③ 손은 상징적인 행위의 주어나 목적어가 되기도 한다. 손을 하늘을 향해 올리는 것은 축복(눅 24:50), 기도(딤전 2:8), 맹세(계 10:5)를 표현하는 것이다. 손을 씻는 것은 의식적 정결을 가져오거나(막 7:2; 막 7:3; 막 7:5; 마 15:2; 마 15:20)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다(마 27:24). 하나님은 큰 음녀의 손에 있는 종들의 피에 대해 벌하신다(계 19:2).||④ 손은 세개의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행위에 관한 은유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롬 10:21(사 65:2); 히 8:9(렘 31:32); 히 12:12(사 35:3). 손은 심판의 임박성(마 3:12 병행구: "손에 키를 들고")과 제자직의 중대성(눅 9:62: "손에 쟁기를 잡고")에 관한 은유적 관용 표현에서 사용된다.||⑤ 케이르는 구약성경의 용법과 일치하여, 손이 하나님의 행동의 주체가 되는 비유적 용법의 문턱에 선다. 하나님의 손, 즉 그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셨다"(행 7:50=사 66:2[70인역본]). 하늘들은 그의 손의 작품, 즉 그의 제작물이다(히 1:10=시 101:26[70인역본]).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눅 1:66; 행 11:21).||(b) 비유적 용법에서,|① 케이르는 사람 전체가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낸다. 임종시 예수님께서 그의 생명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실 때, 그것은 자신을 아버지의 보호에 맡기시는 것이다(눅 23:46). 아무도 그에게 속한 것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9; 요 10:28). 천부께서는 아들의 손에 모든 것을 주셨다(요 3:35; 요 13:3). 그의 능력 안에서 그는 모든 것을 예정하셨으며(행 4:28), 치료에 그의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다(행 4:30). 우리는 그의 지배 아래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벧전 5:6). 그는 천사의 도움("손으로")으로 모세를 부르셨다(행 7:35). 주의 손이 엘루마 위에 임하실 때(행 13:11), 혹은 사람이 주의 손에 빠질 때(히 10:31)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② 인간의 손은 항상 적대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인자는 "사람들의 손에 넘기울 것이다". 즉 그들의 권한에 넘기울 것이다(막 9:31 병행구; 막 14:41 병행구; 눅 24:7).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교 로마인들의 지배에 넘겨진다(행 21:11; 행 28:17). 반대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요 10:39), 바울이 아레다의 수색에서 도망하고(행 12:11), 이스라엘이 그 원수에게서 벗어난다(눅 1:71; 눅 1:74).||(c) ① 케이르는 종종 포획이나 체포를 상세히 나타내는 약칭(t.t)의 일부분이다: (에피)발로 타스 케이라스, 에피 티나(티니)='어떤 사람에게 손을 대다'. 이 표현은(막 14:46 병행구; 눅 20:19; 요 7:30; 요 7:44)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행 4:3; 행 5:18; 행 12:1), 바울(행 21:27), 일반 그리스도인들(눅 21;12)의 체포를 언급하는 문맥에서 사용된다.||② 예수님은 아이들에게 축복을 수여한다(막 10:16 병행구 마 19:[13]; 마 19:15). 병자는 안수로, 예수님에 의해(막 5:23 병행구; 막 6:5; 막 7:32; 막 8:23; 막 8:25; 눅 4:40; 눅 13:13), 그리스도인들에 의해(막 16:18v.l; 행 9:12; 행 9:17; 행 28:8) 치유 받는다. 세례(침례)시에 안수로 성령을 받는다(행 8:17; 행 8:18; 행 8:19; 행 19:6; 아마도 히 6:2).||③ 바울과 바나바는 안수에 의해 선교에 파송된다(행 13:3). 그리고 다른 이들이 안수로 직무에 세움 받는다(행 6:6에서 7인; 딤전 4:14; 딤후 1:6에서 디모데; 딤전 5:22). 따라서 그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 중재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Brown; W. Radl).
젖먹이
qhlavzw
젖을 주다, 젖을 먹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델라조(Lysias, Aristot. 이래)는 델레(젖가슴)에서 유래했으며,||(a) 타동사로, '젖을 주다, 젖을 먹이다'(Lysias, Aristot.),|(b) 자동사로, '젖을 먹다(빨다)'(Hippocr., Aristot. 등)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델라조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공관복음에만 사용되었다.||(a) 독립적인 의미로, 델라조는 젖먹이는 어머니들에 대한 애가에 사용되었다(막 13:17; 병행구, 마 24:19; 눅 21:23):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b) 마 21:16에서 델라존테스(시 8:3)는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c) 눅 11:27에서 어머니의 태와 "당신이 먹인" 젖에 대한 찬양은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것이다: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수 가운데 참예하다
katariqmevw
~와 함께 수에 넣다, 수 가운데 넣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타리드메오(Eur., Pla. 이래)는 카타($2596)와 아리드메오($705: 세다, 수에 넣다)에서 유래했으며, '~와 함께 수에 넣다, 수 가운데 넣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타리드메오는 신약성경에서 행 1:17에 한번 나온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여기서 카타리드메오는 배반자 유다에 대해 '~와 함께 수에 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