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지혜
햇볕같은이야기
12.20 20:34
설교보기 : https://youtu.be/TrdL1gnvVGs
성경본문 : 야고보서 3:13-18
하늘의 지혜
약3:13-18, 창조절 4주, 2024년 9월 22일
야고보서는 종종 구설에 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고, 믿음보다는 행함에 무게를 두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약 2:17절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보다는 믿음에 무게를 두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전통에서 볼 때 야고보서의 주장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변죽을 울리는 문서처럼 어딘가 불편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에서 야고보서는 오랫동안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마틴 루터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처한 상황에서 읽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이끌려고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이 그 이유입니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으니까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일종의 도덕(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이들이 요한계시록에는 니골라당(계 2:6, 15)으로 나옵니다. 니골라당이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교회에 이들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어떤 모범을 보여야 하는지를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서를 도덕, 윤리적 지침서로만 보면 곤란합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한 구원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따라가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혜
야고보는 ‘지혜’라는 단어를 오늘 본문 13절과 15절과 17절에서 언급했고, 이미 1: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하나님께 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지혜는 그리스어 소피아(σοφ?α)의 번역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자리를 잡아갈 때 지중해 연안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언어는 그리스어입니다. 당시에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이 세계를 지배했으나 문화 언어적으로는 그리스 정신이 대세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기원전 3세기 중반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70인역)되었고, 신약성경이 기원후 1세기 중반부터 말과 2세기 초까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글도 대부분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소피아를 최고의 가치라고 여겼습니다. 소피아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서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α)라고 불렀습니다. 그 단어를 영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등, 대다수 유럽 언어가 그대로 빌려서 사용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필로소피아는 어원에서 볼 때 물리학이나 사회학이나 신학처럼 논리적인 학문(로고스)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는 열정이자 사랑(필로스)입니다. 그래서 소피아로지(sophialogy)가 아니라 필로소피(philosophy)가 된 겁니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이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용어는 본래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한 필로소피아에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소피아는 특별해서 어떤 신적인 차원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공부 많이 한 똑똑한 사람이 무조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학력이 낮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사람도 지혜로울 수 있거든요.
오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은 지혜로울까요, 지혜롭지 못할까요? 지식의 양으로만 말하면 지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와 중고교 과정만 하더라도 12년입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은 16년을 공부한 겁니다. 석, 박사도 많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주워듣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옛날보다 똑똑해진 건 사실이나 더 지혜로워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현대인이 지혜를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소유’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만 하지 지혜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관심은 오직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것뿐입니다. 다른 가치 있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만 신뢰하고 아무것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아 과잉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를 가리켜서 한스 큉은 『나는 무엇을 믿는가』에서(56쪽) 니체의 말을 인용해서 ‘허무주의자들’(Nihiliste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현대인들은 겉으로는 삶에 대한 열정이 강한 듯이 보이나 실제로는 허무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하늘의 지혜
야고보는 그리스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땅 위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구분합니다. 15절에 따르면 땅 위의 지혜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행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은 땅에 속한 것이니까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울립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14절에 나오는 항목을 보십시오. 시기, 다툼, 자랑,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그렇게 삽니다. 어떤 때는 거칠게, 또 어떤 때는 교양 있게 자랑질도 심합니다. 야고보는 17절에서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완전히 도덕군자가 되라는 말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높은 가치를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성결은 순수성을 가리킵니다. 삶의 본질을 알고 경험해야만 순수하게 삽니다. 삶의 이상을 추구해야 할 젊은이들이 주식과 부동산에만 마음을 둔다면 순수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17절이 열거한 것들을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야고보가 삶의 높은 가치들을 언급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당시 그리스 사람이나 로마 사람들보다 더 품위 있게 살지는 못하면서 믿음 만능주의에 떨어지는 게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를 강조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산상수훈인 마 5-7장을 읽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마 5:17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20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δικαιοσ?νη)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8절에서는 심지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7:15절 이하에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런 말씀을 전제로 한다면 야고보서는 신약의 전통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존재가 변화된 자들에게 따라오는 삶의 품위를 등한히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이니까 말입니다.
평화의 토대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를 17절에서 열거한 다음에 18절에서 그것을 압축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하늘의 지혜에 붙들려서, 즉 지혜를 사랑하면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겁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 문장에서 키워드는 평화(ε?ρ?ν?)와 의(δικαιοσ?νη)입니다. 평화의 씨를 뿌려서 의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그게 말은 쉬우나 그대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확인하려면 야고보가 살던 시대의 로마 제국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지난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유하게 사는 지금의 시대가 평화 지향적인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핵무기는 지구를 수십 번이나 잿더미로 만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안에서도 무기만 손에 들지 않았지 실제로는 전쟁과 비슷한 일들은 수없이 일어납니다. 야생 사자나 표범은 자기가 배고프거나 굶고 있는 자기 새끼를 먹여 살리려고 초식동물을 잡습니다. 그게 자연의 질서입니다. 배가 고프지만 않으면 포식자들도 평화롭게 삽니다. 그러나 사람은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다투고 전쟁을 벌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평화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 사회에서 평화가 깨진 이유를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진 걸 가리켜서 죄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운명을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죄의 이런 엄중한 사태를 가리켜서 원죄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의 이런 운명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사조가 18세기 유럽 역사에서 출현했었습니다. 계몽주의가 그것입니다. 인간을 계몽시키면, 즉 인간을 가르쳐서 옳고 그름을 깨닫게 하고 생존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재산이 늘어나면 인간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일종의 낙관적 유토피아니즘입니다. 그 유토피아니즘은 세계 1차, 2차 전쟁을 통해서 실패했다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21세기에는 자연과학이 이런 낙관적 유토피아니즘을 부추깁니다. 인공 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고 인간은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 될 듯이 말입니다. 그런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기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기후 위기로 세상이 끝장날 가능성이 훨씬 큰데, 그런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원하는 최고 수준의 삶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행복감이 그리 오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주가 늘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평화의 왕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깨진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었다고 믿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비유적으로 커피 전문가인 바리스타나 포도주 전문가인 소믈리에의 경험을 일반인들이 부정하는 행태와 비슷합니다.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차원을 무조건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깊이를 실제로는 모르면서 무조건 믿는다고 큰소리치는 것도 곤란합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생한 평화의 깊이를 어느 정도나 알고 실제로 경험한 것일까요? 그런 경험이 있어야만 야고보가 17절에서 나열한 하늘의 지혜가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로마 제국이 한창 잘 나갈 때의 정치 슬로건은 ‘팍스 로마나’였습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겁니다. 로마 제국이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로마와 대적하는 이들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과 고급스러운 문명을 무기로 가능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 지배받던 민족들은 로마 황제를 평화의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명령을 잘 따르기만 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 9:6절에 근거해서 ‘팍스 크리스티’, 즉 예수가 바로 평화의 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로마 제국의 형법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평화의 왕이자 그리스도라는 주장이 말입니다. 그 주장이 옳다면 로마 황제는 평화의 왕이 될 수 없겠지요. 오늘날 정치 지도자와 경제 지도자가 우리에게 평화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평화의 왕이라고 생각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이 없어진 겁니다. 담이 없어졌으니 하나님의 평화가 회복된 겁니다. 마치 사이가 나빠서 이혼하려고 별거 중이던 부부가 다시 사랑을 회복한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생명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생하게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잘 살아야만 생명을 얻는다는 선입관에 묶여서 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큰 차이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서른 명 신자가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하든지 삼만 명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듯이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확신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늘 ‘살아있는 자’였습니다. 정말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예수께서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으며, 지금도 살아있다는 겁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의 주장을 언어도단이라고, 일종의 괴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을 이렇게 냉소적으로 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나요? 예수 부활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이 문제에서 핵심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죄와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극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오심과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치유와 치병과 그의 십자가 죽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의 다시 살아나심이라는 그의 운명 전체는 제자들에게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그 화해가 곧 평화의 토대입니다.
야고보는 18절에서 평화를 심어서 의로움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했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곧 17절에 열거된 하늘의 지혜입니다. 그것들은 하늘의 지혜이기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만 우리의 일상에서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억지로 성결하거나 억지로 평화롭거나 억지로 관용하거나 양순하거나 긍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음으로써, 즉 죄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남으로써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 가운에서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갈 때 의로움의 열매, 즉 품격 높은 삶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의(디카이오쉬네)의 열매가 없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위선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값싼 믿음을 야고보는 ‘죽은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