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이야기
설교보기 : https://youtu.be/5Y5_DLCK9PU
성경본문 : 마가복음 9:38-48
지옥 이야기
막9:38-48, 창조절 5주, 2024년 9월 29일
게엔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담은 복음서에는 예상외로 읽기에 불편한 내용이 간혹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후반부인 막 9:42절 이하 말씀이 그렇습니다. 43절과 45절과 47절에 각각 ‘지옥’이 언급됩니다. 48절은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여러분은 지옥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옥 표상은 한편으로 사랑과 긍휼을 하나님의 근본 속성으로 보는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되고, 다른 한편으로 정말 반인륜적인 범죄자들이 지옥에 가지 않으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옥 여부에 관한 저의 생각은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전이라도 설교 과정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대답이 주어질지 모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옥은 그리스어 γ?εννα(게엔나)의 번역입니다. 성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게엔나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수 15:8, 18:16)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시절에 고대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이방 사람들과 똑같이 몰록 신에게 자녀들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자녀들을 불 속으로 집어넣는 인신제사 행위입니다.(왕하 16:3, 21:6) 요시야 왕은 이런 일을 금지했습니다.(왕하 23:10) 후기 유대교의 묵시사상은 마지막 때의 심판이 ‘이 저주받은 골짜기’에서 행해지고 지옥의 불이 타오를 것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깊은 골짜기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왕들과 권세자들을 데려다가 이 깊은 골짜기에 던져 넣었다.”(에티오피아 에녹서 54:1-2) 성경에는 지옥과 비슷한 또 다른 개념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 음부로 번역된 하데스(?δη?)입니다. 하데스는 죽은 자들이 가야 할 지하세계를 가리킵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게엔나(지옥)와 하데스(음부)는 개념적으로 다르나 종종 혼용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죽음과 그 이후의 운명에 대해서 누가 딱 떨어지는 대답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근거해서 그 대답에 조금씩 가까이 가는 게 우리에게는 최선입니다. 지옥 개념에 대한 해석학적 역사를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거나 고대인들의 어리석은 세계상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는 태도 역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옳지 않습니다.
지옥은 무엇일까요? 누가 지옥에 갈까요? 지옥을 이야기할 때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단테의 『신곡』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단테는 지옥의 문 위에 쓰인 글귀를 보았습니다. 그중에 이런 문장이 유명합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는 자기가 멘토로 여기는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에게서 지옥의 각 장면을 안내받습니다.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너는 지성의 진리를 상실한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보게 되리라.” 스승은 단테에게 이런 말도 합니다. “저곳에는 하느님을 거역하지도 않고 충실하지도 않으면서,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그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도 섞여 있노라.” 한 구절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저들에게는 죽음의 희망도 없고, 그들의 눈먼 삶은 지극히 낮아서 모든 다른 운명을 부러워한단다. 세상은 그들의 명성을 허용하지 않고, 자비와 정의는 그들을 경멸하니, 그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보고 지나가자.” 단테가 당시 성경과 신학의 세계를 얼마나 깊이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옥 표상을 문학과 철학의 깊이에서 실감 나게 묘사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특히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그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비열하지도 않았고, 난폭하지도 않았는데도 지옥에 떨어진 그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냉소적인 태도로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저런 잣대라면 우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오늘 본문에서 지옥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출발점은 제자들이 서로 잘났다는 문제로 다툰 사건입니다. 그 이야기가 막 9:33절부터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출가하여 예수와 함께 유랑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제자들도 여전히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그리고 우월해야 한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어서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오늘 설교 본문이 시작하는 38절 이하에는 약간 다른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 공동체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에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께서는 막지 말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사용한 행위가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들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배척하려는 제자들의 생각을 책망하신 겁니다. 41절에서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 엄청난 일이 아니라 물 한 그릇같이 사소한 일도 궁극적인 차원에서 헛되지 않다는 뜻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보더라도 물 한 방울이 우주와 같은 무게인 것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에 안주했습니다. 자신들의 인간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막 10:35절 이하에는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나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비중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들이 직접 말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병행구인 마 20:20절 이하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부탁하는 거로 나옵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열망과 소소한 일이나 사람을 낮춰보는 태도가 제자들에게도 여전히 작동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제자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작은 자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지옥에 관련해서 세 가지를 예를 드셨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43절에는 손이 나오고, 45절에는 발이 나오며, 47절에는 눈이 나옵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며, 눈이 죄를 짓게 한다고 말입니다. 손과 발은 그러려니 하나 눈이 죄를 짓게 한다는 표현이 특이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처음 받은 유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는 뱀의 요구였습니다. 그 나무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그들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눈이 밝아진 것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사람은 밝은 눈으로 죄를 행합니다. 여기서 밝은 눈을 전문 지식이라고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도둑질하더라도 전문 지식이 있어야 큰 도둑질을 할 수 있습니다. 47절만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런 말씀이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됩니까?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은 시력에 차이가 있긴 하겠으나 두 눈이 다 있을 겁니다. 한 눈이 망가지면 불편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저의 경우에 책을 읽고 텃밭 가꾸는 데는 눈이 하나라도 속도만 늦추면 그런대로 지낼만합니다. 그러나 테니스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없으니까요. 47절 말씀에 따르면 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비장애인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장애는 지금 당장 삶이 불편한 것이고, 비장애인의 문제는 지금의 삶이 끝나고 죽음 이후의 고통이니까 둘을 직접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둘을 비교했다는 말은 비장애인이면서 장애인보다 더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지옥이 단순히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을 때 경험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종말은 이미 선취의 방식으로 지금 여기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천국도 이미 시작되었고, 지옥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은폐의 방식이기에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이라는 42절 말씀을 기억하시겠지요.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이라는 37절 말씀과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이라는 41절 말씀도 함께 말입니다. 더 거슬러가면 ‘누가 크냐’라는 제자들의 다툼도 기억하실 겁니다. 여기에 바로 지옥이 숨어 있습니다. 자기가 더 커야만 합니다. 자기가 더 잘나야만 합니다. 자기는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 가족만은 손해를 보면 안 됩니다. 일례로 교권이 무너졌다는 말을 오래전부터 심심치 않게 우리는 듣습니다. 자기 자녀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이유 없이 불이익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이 부모가 나서서 해결해줘야겠지요. 그것도 한도가 있습니다. 심지어 학교 급식에 관해서도 일일이 시비를 거는 부모들이 있다고 합니다. 믿기 힘든 현상인데, 대학생 자식 문제로 교수에게 학부모가 전화를 걸기도 합니다. 인간의 소유 욕망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막장 자본주의에 떨어진 대한민국은 이미 지옥처럼 작동하는 중이라고 말해도 크게 잘못 본건 아닙니다. 개인과 사회의 삶에 구더기가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잖아요.
어떤 이들은 저의 설교가 공연히 트집을 잡는 거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무한경쟁의 방식으로 우리는 세계 경제 대국이 되었다고, K컬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싶겠지요. 북한을 비롯한 동남아 가난한 나라가 모두 우리를 부러워한다고 말하고 싶겠지요. 중대형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이 자신들의 종교 업적을 자랑하듯이 말입니다. 좋습니다. 1990년대에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에 근거하는 자본주의가 세계 전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니 우리 같은 작은 나라는 그 체제 안에서 생존의 토대를 갖춰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파괴하면서까지 경제성장에 매달려야 할까요? 이런 정치 경제 문제는 제가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여기서 더 깊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손을 잘라내거나 발을 잘라내고, 한쪽 눈을 빼버리는 게 차라리 낫다는 주님의 말씀만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과 대립하는 어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3절에서는 ‘장애인으로 영생(생명)에 들어가는 것’이고, 45절에는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고, 47절에는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애인과 다리를 저는 자와 한 눈만 있는 자는 작은 자이며, 낮은 자이고, 어린아이입니다. 세상이 낮춰보는 이들이고, 우리와 우리 자식이 그런 사람이 될까 하여 노심초사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다고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에게‘도’ 영생과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습니다. 거꾸로 두 손이 있고, 두 발이 있고, 두 눈이 있는 사람에게도 역시 지옥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멀게 느껴지시나요?
옛날이야기입니다. 제가 1978-1980년 어간 이십 대 후반 나이에 명덕성결교회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주로 중고등부 학생들을 맡았습니다. 교회 가까운 마을에 고3, 고1 여학생 자매가 교회에 다녔습니다. 오빠가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가난한 집입니다. 당시 가난한 집은 대개 작은 방 하나에 부엌 하나, 또는 작은 방 두 개에 부엌 하나입니다. 어쩌다가 학생들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철이 없을 나이인데도 두 자매가 얼마나 속이 깊은지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벌써 45년 전이니까 그 자매들도 나이가 환갑이 넘었겠네요. 지금 만나더라도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당시 인상이 깊었던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가난한 집 딸들이지만 신앙과 품성과 생각이 깊어서 삶을 풍성하게 살아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어디선가 잘살고 있겠지요.
저는 가난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만 잘하면 가난과 장애와 질병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가난과 장애와 질병도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가로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아무리 좋은 집에서 호화롭게 살아도 지옥을 면치 못합니다. 부족한 게 전혀 없어서 삶이 권태에 떨어진다면 그게 바로 지옥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혐오해야만 속이 후련하면 그게 지옥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자아 숭배를 반복하는 삶이 지옥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단테의 말을 빌려서 하나님을 부인하지도 않으나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냉소적으로 사는 삶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지금 무한 반복 자기식으로 즐겁게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지옥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옥이 있는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를 외쳐도 되는지에 대한 대답을 이제 찾으셨나요? 지옥은 따로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영생과 하나님 나라가 없는 사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없음이 곧 지옥입니다. 사랑 없음이 지옥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옥도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에서 확장하면 그만큼 지옥의 영역은 줄어들 겁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줄어들면 지옥의 영역은 활개를 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수준에서 살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두십시오. 제자들은 재산과 직업과 가족까지 포기하고 출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목사이고, 교회 지도자들이고, 평생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봉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도 지옥의 문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칼 바르트는 ‘하나님께서는 지옥을 결국에는 비워두신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딤전 2: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지옥을 경험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로 들림을 받았기에 그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은, 즉 예수님과 ‘절친’이 된 사람들은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와 ‘지금 여기서’ 연결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기에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렘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