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편에 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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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편에 서는 일
욥 15:1~16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있습니다. 제도적 민주주의는 시민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장려하고 보호하므로 사회의 통합과 건강한 지향을 추구합니다. 민주 사회에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허락하는 이유는 인간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일탈적 사고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건강하고 합리적 사고를 가진 시민에 의하여 조절되고 진정되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민주제도가 인간의 궁극적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좋고 패배적이지 않다는 면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전체주의 사회는 국가의 목표와 가치를 개인의 사상보다 우선합니다. 공동체가 가진 큰 목표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인의 사상과 추구하는 바를 양보하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시민 대중은 창조와 건설의 주체라기보다 계몽과 관리의 대상이며 길들이고 훈련해야 하는 가축같은 존재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자유혼을 가진 자의 튀는 생각은 찍혀 요주의 인물이 되기 십상입니다. 감시받고 조롱당합니다. 역사의 주체는 시민이 아니라 일부 엘리트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전체주의 사회는 인간의 본성을 불신합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는 나라치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파이프를 그린 작품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적으므로 실재와 이미지가 다르다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나만 옳다’거나 진리를 독점하는 듯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위기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의 선교는 공격형의 전열을 갖춘 전투였습니다. 교회는 개종 전도를 최고의 사명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수비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럽은 교회의 전성기가 지나고 쇠락하면서 다양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교회가 가는 곳에 평화는 사라지고 분쟁이 커지는가? 교회가 세상을 지배할 때 왜 세상은 암흑세상이 되었는가? 죽어서 천당 가는 교회와 죽은 후에 극락 가는 불교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도 같은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내년 9월에 우리나라 송도에서 제4차 로잔대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는 로잔대회(1974)에 실릴 한국교회의 건강한 모습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로잔대회의 존재론적 한계, 즉 WCC 에큐메니칼에 대한 반감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다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로잔대회 이후 마닐라대회(1989)와 케이프타운대회(2010) 등 50년이 흐르면서 이념 논쟁은 더 이상 의미 없어졌습니다. ‘인간화’와 ‘복음화’의 간극, 또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의 구분은 모호해지거나 흐려졌습니다. 이 대회의 지도자였던 빌리 그레이엄은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어 로잔 정신을 스스로 훼손하였고, 이 땅에서 열릴 로잔대회를 준비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로잔의 고민인 ‘사회적 책임’에 무책임한 이들이 다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너 혼자만 알고 있기라도 하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그 무엇을 너 혼자만 깨닫기라도 하였다는 말이냐?”(15:9) 엘리바스의 말은 욥에게 할 말이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이 들어야 할 말 아닐까요? 새겨들을 말입니다.
주님, 저희는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가진 자의 너그러움과 여유로움이 없습니다. 여전히 싸워서 얻는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소유한 진리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능력과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2023. 11. 19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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