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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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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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24: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0-21: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는 질적 본질상 영적인 것인고로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지역과 물질세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장소와 시대를 초월한 영적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당신의 주권에 속해있고, 의중에 속해있고, 당신의 계획에 속해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본구원을 생각하면 현재 예수 믿고 있는 자는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기의 영을 하나님의 질적 본질로 언제 살려 주었는지 장소도 모르고 시간도 모른다. 하나님의 주권섭리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의 이룰구원도 자기가 이룰구원을 이루어야지해서 되는 게 아니고 자기를 진리본질로 인격화 실상화 시키고 있으면 언제 어느 때든지 어느 장소에든지 하나님의 역사는 이룰구원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룰구원을 이뤄야지그렇게 인위적으로 들어가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건 환경에서 그런 생각을 굳이 안 한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자체화 되면 그 자기의 움직임이 그냥 이룰구원으로 들어가 있다. 그렇게 살 때 ? 내가 언제 이룰구원을 이뤘지?’ 하는 그걸 모른다. 결과에 가서 보니 , 그렇게 되어있구나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했는데, 그렇게 물은 것은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들과 죽은 자를 살리심과 오병이어로 많은 무리들을 먹이심을 보고 예수님이 능력자가 되심을 알고 그 능력으로 로마를 굴복시키고 유대나라를 독립시켜 주실 것을 생각을 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

 

자유주의 신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자기들 입장에서 말하는 도덕성으로 즉, 일반 도덕성으로 들어가 있는 뜻으로 악한 사람을 돕고 다 부자로 살면 사람 사는 세상이 참 살기가 좋게 될 테니,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늘나라가 아닌가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부터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사람이 다 예수를 믿어서 다 잘 살게 된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냐? ? 땅에 범죄도 없고 행복하게 사니까. 그러나 그래도 예수님은 오시는 거다. 이 땅에서 아무리 행복하게 잘 살아도 말하자면 하늘나라가 그보다 못할 것 같으냐? 그런데 이런 비슷한 생각으로 많은 교인들이 젖어있다. 말은 예수님 오심, 천국하지만 은근히 교인들의 생각이 그렇다.

 

바리새인들이 유대가 독립해서 유대인들만 잘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옵니까?’ 하고 물은 건지, 아니면 자기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면 그냥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거다그렇게 믿은 건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의 교권과 종교적 세력이 예수님의 만능의 능력과 합작을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있겠구나그렇게 생각한 건지?

 

어쨌든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고 장소적이 아니고 사람의 말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장소적으로도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말에도 있지 않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내 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정신 소원 목적이 하나가 된 그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으로 너희 안에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이게 심령천국인데, ‘성도들이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나도 있겠다하셨으니까 성도들이 모인 각 심령 속에 너도 나도 다 같이 심령천국이 이뤄진 그 모두의 하나님의 나라. 그러니 거기는 얼마나 즐겁겠느냐? 그런 뜻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하신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을 모신 너희 가운데 있다.

 

거기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 나라에 실력적으로 당당히 들어갈 사람으로 영능의 실력적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그런 의미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질에 입각해서 진리본질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이 변화되는 그것을 무시하고는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는다. ‘너희 안에 있다하는 걸 분해를 하면 내 속에 진리로 만들어진 내 속의 하나님의 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내 가운데, 우리 가운데 임하옵시며하는 것은 진리주격으로 사는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주님이 왕이라는 말이다. ‘나라라 할 때는 통치가 있으니 주님이 다스리는 이게 하나님의 나라다. 이렇게 되는 게 실속적으로 예수를 믿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마음도 각각이고 소원도 각각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물질적으로 이러쿵저러쿵들어가면 처음에 편안할 때는 별 말이 없으나 시간과 장소와 사람과 사고가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그 성질 위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게 이리저리 움직이면 본의 아니게 거짓이 되고 하니 약속을 안 지키느니하면 싸우게 된다. 하나님의 본질로 되는 변화성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는다.

 

너희 안에 있다함은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의 성격과 성질로 성분이 바뀌는 것.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와 장소와 기한은 너희들이 알 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알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건 몰라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질로 준비만 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고 난리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닌데, 그게 뭐하는 짓이냐? 그게 다 귀신들의 장난이다. 준비만 하고 있어라. 그러면 주님 오심이 낮이던 밤이던 아무 때고 상관이 없다. 때와 장소는 너희들이 알 일이 아니다. 준비만 하고 있어라.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은 이런 속성적 변화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자기 몸 밖의 것을 둘러엎고 하는 게 일어나야 하나님의 나라가 오나보다하고 생각을 한 것이다. 사람 속의 변화를 몰랐다. 20-21절 말씀은 단순히 세상 마지막의 재림을 말하는 건 아니다.

 

바리새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심령과 정신적 변화와 양심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한 마디로 사람이 거듭남을 알지를 못했다.

 

기독교 안에서 예수 믿기 전에는 일반사회 윤리 도덕적으로 사람이 악랄했는데 예수 믿고 나서 겉으로 사람이 선해진 그런 걸 보고 그 사람이 거듭났다고 속기 쉽다. 그 이전에 심령의 변화가 진리지식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신앙화 됐느냐하는 그게 문제다. 그 속을 보고 말을 해야 한다. 겉만 보고 단정을 하면 안 된다.

 

사람의 행동 활동 이전에 마음의 변화, 중심의 변화, 하나님의 본질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 들어간 그 인격의 변화. 이렇게 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의 이치로 언행심사가 나오는 거다. 그런데 그거는 못 보고 단순히 술 담배 끊고 욕 안 하고 하면 거듭난 것으로 안다. 물론 그렇게 된 게 좋기는 좋은데 그게 기준이 된다면 예수를 안 믿어도 술 담배를 끊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고 당신 믿음 좋다할 수 있는 거냐?

 

지금 예수 믿는 교인들이 엄밀히 따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즉, 하나님의 본질로 속성이 거듭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진리지식과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본질로, 신령한 성질로 새롭게 바꿔지는 것이 거듭남이다. 단순히 행동 그걸 보고 자꾸 말을 하게 되면 기준이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전도할 때 얼굴이 험악한 사람은 예수 안 믿게 생겼다고 한다. 전해보지도 않고 인간 쪽에서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건 아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기를 힘쓰라하는 것은 낮이고 밤이고 전도를 하라그 말이냐? ‘라는 그 말의 의미가 사람을 가려가며 하라는 말이냐?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사람이 거듭난다는 이걸 몰라서 착하고 선하고 한 행동 활동을 자꾸 요구한다. 말씀을 잘 풀어헤쳐서 깨달으면 거기에는 이해타산이 들어가고 옳은 지식이 들어가는 건데 그건 없고 착하게 살아라. 나눠주며 살아라하고 있으니 이건 세상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하고 착한 행동을 요구하는 건 누가 더 크냐그런 식이 되는 거다. 그래서 큰 교회다. 박사증이 있다. 그래서 유명하다하는 쪽으로 그런 사람을 구세주처럼 생각을 한다. 그러니 가령 예수님이 소리 없이 와서 옷을 허름하게 입고 큰 교회의 목사 옆에 서 있으면 교인들이 누구를 더 구세주처럼 여길까?

 

22: 미래적으로 볼 수 있는 인자의 날. ‘인자의 날할 때는 주님이 주격이 된 날그 말이다. 자기 자식이 부모가 말을 해도 제 멋대로 살면 그 자식은 아버지의 날로 산 것이냐, 자기 날로 산 것이냐? 자기 날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그 자식을 불러서 회초리로 때리게 되면 그건 아버지의 날이다. 인자의 날을 마지막 날 예수님의 재림으로만 보지 말고 그 이전에 주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생각해야 한다.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한다는 것이 마지막 날 보자그 말인지? ‘지구의 종말 그 날에 보자는 말인지? 약속은 저 쪽에서 한 거고 주님이 종종 올 터이니 그 때마다 나가 맞아야지그 말인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을 듣는 내가 보고 싶어도 못 보는 날이 온다. 못 듣는 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못 듣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가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가시기 전에, 예수님이 계실 때 말씀을 듣고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자체화 시키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도 못 본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구나. 어떤 대 사건을 염두에 둔 말씀이구나.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에서 진리의 목사가 살아생전 전할 때 부지런히 빠지지 말고 들어라그게 들어있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그 중에 아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사례도 안 하고 가버렸는데, 이들이 앞으로 어떤 대 사건을 만난다면 과연 믿음생활이 바로 될까? 아니면 아홉 문둥이들이 다 나았으니까 간증하러 돌아다닌다고 얼마나 교회를 어지럽힐지? 오늘날처럼 생각을 한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구나.

 

23-24: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고 기다렸으면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며 놀림을 받을까?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놀림을 받을까?

 

또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는 내가 능력자다. 내가 재림예수다. 내가 구세주다하는 자들이 많이 나온다. 자꾸 예수님을 보고자 하니까 이쪽에서 내가 예수다.’ 저 쪽에서 내가 예수다하는 자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 말을 해도 너희들은 그 말을 듣고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입장에서는 진리를 찾기가 참 혼란스럽겠구나. 그러니 이건 종말을 예고하는 심각한 사건들이겠구나. 그럼에도 영의 눈이 어둡고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이걸 못 느낀다. 영적 세계에 대한 것은 못 느낀다.

 

한국만 해도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가 얼마나 많으냐?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게 다 교회거니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다 아닐 수도 있고, 참 본질에 속한 교회가 몇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십자가를 달았다고 다 교회로 볼 수는 없는 거다. 교회의 본질을 모르면 이걸 못 알아듣는다.

 

본질은 무형적이다. 영이 중생되고 거듭난 그게 본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로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이치로 들어가 있다. 우리의 믿음성장도 하나님의 본질로 자꾸 커야 한다.

 

일 크게 많이 하면 상급 준다? 우리교회는 그거 안 통한다. 사람이 바로 안 서고 일 크게 하면 그게 상급이 되겠느냐? 그래서 마지막 날에 불에 태워 보는 것이다. ‘네가 큰 집을 지어놓고 영광이라고 하느냐? 그게 내 영광이 되나 어디 보자하고 불에 태워 보는 거다. 타버리면 하나님의 영광은 없다. 우리는 사람이다. 복음운동은 사람에게 들어있다. 사람과 연관이 들어가야 한다. 사람과 연관적으로 사는 면에서 물질을 이렇게 저렇게 쓰는 것이다.

 

24절에 보니까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이쪽에서 온다. 저쪽에서 온다하는 지역적이 아니다. 이 말씀의 은밀한 뜻을 모르면 성경에 동방에서 온다고 하니까 우리나라인가? 하게 된다. 동쪽으로 가면 계속 동방이다. 나라적으로는 한국보다 동쪽은 날짜 변경선을 갈라놓고 보면 한국 다음이 일본이고, 일본 다음이 하와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는 이쪽에서 온다. 저쪽에서 온다하는 지엽적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순간적이며 우주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교인들이 성경을 깨달으려고 하지를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안전을 원하느라고 교회에 다니고, ‘어느 교회가 더 유명하냐?’ 하며 이방세상에서도 무시 못할 알아주는 사람을 찾는다. 그런 위주로 찾는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지하교회로 오실까, 지상으로 2, 3층이 올라간 교회로 오실까? 우리 입장에서 자기가 간다면 둘 중에 어느 교회로 갈까? 지상교회로 간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정신이 예수님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그 정신과 같이 물고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다면 시골교회로 오시겠느냐, 도시의 큰 건물로 오시겠느냐? 자기가 교회를 찾아간다면 큰 건물을 보고 가겠느냐, 눈에 안 보이는 구석의 골목교회를 찾으려 할까? 교인들이 가난한 교회로 가면 맨날 헌금을 하라고 하니까 그런 교회는 안 가듯이 예수님도 가난한 교회로는 안 오시겠지? 교회 벽을 유리로 해 놓는 교회도 있는데, 예수님이 오실 때 예배당이 다 유리로 돼 있으니까 그런 교회에 쉽게 찾아 가시겠지?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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