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요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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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요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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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7.

 

지난 설교 보충.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천사가 내려와서 연못의 물을 동하게 할 때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는다고 하는 것은 선착순이라는 말이요 요행을 바라고 있는 거다. 행각에 있는 각종 병자들은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주님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생각과 사고방식으로 하지 않고 말씀으로 하신다. 그런데 많은 기독자들이 주님께서 말씀으로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을 남보다 먼저 물에 뛰어들어서 병이 낫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한다. 목사님이 안수를 해서 병자를 낫게 하는 것과,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안수와 동시에 나으라고 하는 것 중에 어느 게 효과가 더 좋은 거냐? 손만 대는 게 아니라 말씀까지 하면 효과가 더 좋은 거냐? 인간들은 자꾸 눈에 보이는 시감적인 면으로 생각을 한다. 우리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5-9: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께서 38병자를 말씀으로 낫게 하신 것과, 가장 먼저 연못에 뛰어 들어가서 병이 나은 게 같은 거냐? 다르다면 뭔가 다른 거냐? 예수님께서 38병자를 고치신 게 38병자가 스스로 못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고쳐주신 거냐? 즉 예수님께서 38병자를 고치신 게 다른 병자들이 먼저 못에 들어가서 고침을 받는 것과 같은 거냐? 아니다. 예수님은 영 구원, 이룰구원까지 들어 있는 고치심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께서 단순히 38병자의 육신의 병만 고치신 게 아니라 이룰구원의 도리를 넣어서 고치신 것이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시는 것은 이룰구원 면에서 38병자처럼 정신과 사상이 땅에 붙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적인 면의 병에서 일어나라는 거다. 그래서 주님께서 38병자에게 일어나라고 하는 말씀 속에는 사람이 영적인 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가 들어 있는 거다.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땅에 붙어 있는 사람이 진리이치의 말씀을 먹으면 하늘의 정신으로 일어나게 된다. 신적인 도덕성으로 일어나게 된다.

 

세상 땅의 도덕성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지식에서 나온 도덕성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의 모든 소원 목적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는 다 땅에 붙어 있다. 이건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편히 살까?’ 하는 침대사상이다. 이 정신은 예수님의 하늘의 정신과는 정 반대다.

 

예수를 믿는다면 남을 보기 전에 자기부터 봐야 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 놓여 있는 건지? 하나님의 심판의 도마 위에 놓여 있는 건지,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건지, 어떤 사상 어떤 환경이 와서 자기 목을 달아매려고 하는 건지? 가룟유다는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정신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가 죽을 짓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지금의 나도 가룟유다의 정신을 가지면 스스로 죽을 짓을 하게 된다.

 

믿는 사람이 땅에 붙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가 육신에 병이 들면 주님께서 38병자를 고치신 것을 보고 이 38병자가 어떤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른 채 자기의 병도 주님의 만능의 능력으로 고쳐달라고 하게 된다. 만일 주님께서 이런 사람의 병을 고쳐주신다면 이 사람은 자기 속의 정신 사상이 무슨 병이 들었는지 모르게 되고, 고치려고 하지도 않게 된다. 교회는 이걸 깨닫게 해야 한다.

 

주님의 복음은 사람을 천국의 사람으로 만드는 건데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세상을 목적으로 믿게 되면 이 사람은 우상처럼 살다가 죽게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인데도 이걸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모른 채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것을 깨달았다고 하며 이것을 주장하다가 이단이 되는 사람도 있다.

 

우리를 보고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이단인줄을 모른다. 이룰구원의 정신이 아닌 세상적인 생각과 정신에서 나오는 주장은 비진리요, 하나님 앞에 이질이요, 비구원이 되는 거라서 이것은 이단과 통하는 질이 된다. 우리는 진리본질의 적중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 마음 속의 보이지 않는 것을 끄집어내서 이것을 자기의 성품화 시켜야 한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라고 하시니까 빌립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했다. 이 대화를 듣던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듣고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라고 하셨고, 이에 오천쯤 되는 사람들이 잔디에 앉았고,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저희로 원대로 먹게 하셨는데, 저희가 다 배부르게 먹은 후에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했다고 한다.

 

:, :, :에도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오는데, 같은 사건을 약간씩 다르게 기록한 건지, 아니면 전혀 다른 사건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에는 같은 사건을 우리의 다각적인 구원계시를 위해 다르게 기록한 것도 있다. 그런데 오병이어를 먹은 사람의 숫자를 그냥 오천 명이라고 한 곳도 있고, 장정만 오천 명이라고 한 곳도 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라고 하시자 빌립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했는데, 빌립의 생각을 가지면 항상 모자란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빌립의 입을 열어서 온 세상사람들과 육적으로 흐르는 교인들이 인간의 생각으로 얼마가 모자라니 얼마가 더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을 하면 죽을 때까지 항상 모자란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돈이 수십 수백억이 있어도 그 생각이 항상 남는 생각이 아니라 모자라는 생각이다. 물질적인 사고방식의 눈으로 보면 항상 모자란다. 채워지지를 않는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모자라지 않고 실컷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게 안 믿어진다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자기가 가난하면 내가 부자가 되면 돈을 실컷 쓰고 죽을 텐데라고 하지만 아니다. 부자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그 사람 나름대로 항상 돈이 모자란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게 안 믿어지는 거다. 즉 예수님의 계산법이 안 믿어지는 거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에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라고 하는 것은 영 기준으로 살면 모자라는 게 아니라 차고 넘친다는 거다. 주님의 말씀은 일반 도덕성은 물론이고 영적 이치적으로도 100% 틀림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말씀의 기준이 아닌 물질적 기준으로 들어가 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물질적 기준으로 되어 있으니 이건 이방지식이고, 예수 믿는 사람이 물질적 기준으로 되어 있는 것은 신앙지식이 아니라 종교적 지식이다. 종교적 지식은 항상 사람의 눈에 보이는 쪽으로 나간다.

 

사람은 각자가 어디서 배웠던, 어디서 살았던, 무슨 생활을 했던 가난이던, 부요던, 어떤 직장을 가졌던 자기 속에 형성된 모든 지식과 성품이 바로 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것을 보면 다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 속에 든 대로 자기를 나타내며 산다. 이치가 그렇다. 각자가 자기를 기준해서 사니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의사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다.

 

사람은 자기의 속이 된 대로 살면서 자기를 나타내는데, 여기에다 자기에게 큰 사건이 닥치면 본성적인 성질까지 팍 드러난다. 이건 , 그게 너였구나하고 자기가 자기를 들어내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들에게 크고 작은 사건을 주시는 것은 네가 네 성질을 모르지?’ 하고서 그 사건을 통해 자기의 성질을 알라는 거다. 그래서 별별 사건을 주시는 거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사람을 보는 것과 다르다. 사람들은 껍데기, 모양새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당신의 백성을 살리려니 사건 환경을 동원해서 그 사람의 중심을 드러내신다. 살리려니 인간의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사건 환경을 주시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거룩하고 장엄하냐? 이 때 모세는 홍해로 가면서 백성들을 길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는데, 그 이유는 잘 아는 길로 인도하면 , 그리로 가는 거다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따라 가게 되니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인간의 지식은 접고 하나님의 인도만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거다.

 

홍해 가운데 길이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군대도 몰랐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해의 물을 갈라서 그 길로 이스라엘이 건너게 했다. 접시에 담긴 물을 칼을 가지고 중간을 가르면 금방 다시 붙어버리는데 하나님께서 홍해 바닷물을 갈라서 바닷물을 벽 같이 세웠는데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마술처럼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내 인격과 성품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거다. 인간이 자기의 앞날을 계획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대로 사는 게 믿음이다. 그런데 이게 아닌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세상은 아무리 발전하고, 잘 살고, 부흥이 되고, 초과학적인 시대가 된다고 해도 666 이상은 못 올라간다. 즉 세상이 아무리 666666......으로 나간다고 해도 그 사상은 세상 물질적인 사상이요 그 질은 땅에 속한다. 666으로는 아무리 올라가도 예수님의 33년의 살으심, 천국의 사상, 천국의 성질, 천국의 이해타산, 천국의 가치판단, 천국의 평가성으로는 못 올라간다. 교회가 아무리 세상적으로 발전이 되어도 그 질은 6이요, 천지창조 속에 들어 있는 6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6이요, 문화 예술이 아무리 천국 같다고 해도 그 질은 6이다.

 

666은 물질계의 수준이다. 그래서 666이 아무리 많이 붙어도 7로는 못 올라간다. 예수님은 모든 사고방식이 6의 수준이 아니라 ‘7’에 속하는 천국의 수준이다. 신령계의 수준이다. ‘6. 7’ 하는 것은 사상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왜 세상사람들처럼 6의 정신으로 사느냐? 이러면 절대로 성경을, 하나님의 뜻을 못 깨닫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출발하면서 각 족속의 숫자를 세었는데, 이건 기본적인 숫자다. 이 기본적인 이스라엘이 광야로 들어가면서도 숫자를 세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숫자를 세었는데, 이 때 전에 숫자를 셀 때는 있었는데 후에 숫자를 셀 때는 빠진 사람도 있다. 이건 우리의 이룰구원 성화구원 면에서 개체 개별적으로 신앙이 얼마나 불어났느냐, 성장이 되었느냐, 아니면 쪼그라졌느냐?’ 하는 것을 점검하라는 거다.

 

수십 년 예수를 믿었어도 성장된 게 없다면 그 수준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안 믿는 사람과 수준이 같으면 그들과 같이 다니게 된다. 이치가 없는 생각은 미련한 생각이다. 미련한 자는 공이로 찧어도 그 미련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교만하고 고집불통인 성질을 사건을 동원해서 벗겨내려고 하시는데 요나는 끝내 안 벗겨졌다. 이런 요나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도 이런 사람이 있다. 목사도 이런 사람이 있다. 교인도 이런 사람이 있다. 그러니 너에게도 요나와 같은 성질이 없는지 살펴봐라하는 거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이, 구원목적이 없이 그 생태로 죽는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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