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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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그러나…
마태복음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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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에서 소란을 벌인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아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1:23)는 질문으로 촉발된 주님의 비유는 점점 난해하고 거칠어집니다. 일상을 초월하는 일들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아들의 혼인 잔치에 하객을 초대하는 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작 초청장을 받은 신하들이 잔치 참여를 거부하였습니다. 왕은 다른 종을 보내 오찬에 초대하였지만, 그들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잔치 참석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왕의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보통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왕이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신망을 잃었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왕의 자질과 됨됨이에 문제가 있기보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하들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신하들이 모반을 꾀하고 있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왕의 초대에 불응하는 행위는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권위를 비웃는 행위입니다. 분노한 왕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척결하고 도시를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왕은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네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22:8~9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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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 역시 권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비유의 첫째 아들이나 두 번째 비유의 악한 농부들은 모두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당시 종교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 왕의 잔치에 청함을 받은 이들 역시 동일합니다. 그들은 성전에 기대어 조상 대대로 자기 삶을 유지한 특권층입니다. 전통과 제도에 편승하여 잇속을 챙겨왔습니다. 그들로서는 새로운 질서, 즉 그동안 모형으로 존재하는 성전이 무너지고, 참 성전이신 메시아의 도래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새질서가 마뜩잖았습니다. 지금까지가 좋았고, 이제껏 누려온 기득권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자손만대에 누리는 것이야말로 최선이었습니다. 그 후예들은 지금도 권력의 핵심부에 앉아서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며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정의와 평화의 도래보다 자기 안일과 평안을 우선하는 이런 지도자가 있는 한 하나님 나라의 길은 험하고 가파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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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나 기준은 사라졌습니다. 지위고하와 빈부귀천, 지식 유무나 인종 차별 등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습니다. ‘아무나’ 참석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은총’이라고 표현합니다. 특수한 사람만 구원에 이르지 않고 보편적 구원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올 수 있다고 누구나 환대받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복’입니다. 예복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최선의 반응입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를 막론하고 잔치에 참석할 수 있지만 예복 착용을 거부하는 자는 쫓겨났습니다. 악한 자가 예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복을 거부하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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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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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무나’ 속에 포함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경배하는 믿음과 삶을 살 힘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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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21 다 찬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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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제임스 티소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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