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헌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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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헌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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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양식 91-45호                                                    1991.11.10.

성서일과 ; 왕상 17:8-16, 히9:24-28, 막12:38-44.

제목 ;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헌신하라




 우리 교회 두 분 장로님께서는 벌을 키우고 있습니다. 저는 벌에 대해서 자세히 모릅니다만, 두 분 장로님을 통해서 가끔 벌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벌들의 조직적인 활동과 부지런함, 그 지휘 계통에 있어서 우리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특히 별들의 헌신적인 죽음은 많은 감동을 줍니다.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벌 한 마리가 쏠 수 있는 화살은 한 개뿐입니다. 그 화살(침)을 쏘게 되면 그 벌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벌들은 글자 그대로 생명을 바쳐 자기들의 조직사회를 위하여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 낳아 덕보겠다는 생각도 없이, 왕벌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해 준 다음, 수펄은 일생을 마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일벌들은 열심히 일하다가 적이 쳐들어 왔을 때에는 지체없이 나아가서 싸우되, 사람들처럼 전쟁 후 누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싸우면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따질 기회를 갖지 않고, 아예 그 자리에서 자기 몸을 던져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운 벌들의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말로는 애국을 부르짖고 국민들을 위하여 목숨 바치겠다고 하지만 자기 잇속 챙기기에 바쁜 정치꾼들을 비롯하여, 헌신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싶습니다. 때로는 지난주에 소개해 드린 최 무웅씨 같은 분들도 많이 있지만, 벌들처럼 일사불란하게 행동일치를 보이는 경우란 드뭅니다.

 여유가 있고 넉넉할 때에는 그래도 서로 양보도 하고 인심도 쓰지만,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나 먼저 살고 보자!” 는 생각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부산의 어느 지하 홀에서 방화로 불이 났을 때에도, 서로 먼저 나가려다가 연기에 질식사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나는 죽더라도 다른 동료를 살려야겠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벌에 비하면, 너는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벌보다 부족한 것은 틀림없지 않습니까? 내 의견과 좀 다른 말을 했다고 해서 험담을 하고 눈을 흘기는 가하면, 나보다 좀 잘 살거나 잘되면 또 얼마나 깍아 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 인간입니까?

 아무튼 우리에게는 양보하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주를 위해서만 몸바쳐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목회자들도 좀 더 나은 대우받을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가는 형편이니, 우리 인간은 희생보다는 대접받기를 더 원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어려운 형편 속에서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내가 손해를 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사렙다 과부는 칭찬을 많이 해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가뭄이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식량이 떨어져서, 이 여인은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음식을 해 먹은 뒤에 죽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나타나 먹을 음식을 달라고 요청을 할 것입니다. 곳곳마다 양식이 떨어져서 인심이 사나운 줄 엘리야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라서 이 과부댁을 찾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의 요청을 받은 이 과부, 처음에는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거절을 했습니다. “군 떡은 지금 없거니와, 남아 있는 양식으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기로 했노라”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재차 말하기를, “걱정 마시오. 하나님께서 ‘이 집에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을 것’ 이라고 말씀하셨소” 하면서 음식을 청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과연 이 과부의 집에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워낙 사기 사건이 많은지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를 수 있겠는지요? 아니 면장이나 군수의 말이라고 하면 믿고 따를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과연 몇 사람이나 순종하게 될는지요? 더욱이 사렙다 과부에게는 먹을 거라곤 한끼니 거리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정작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부족해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을까요? 오늘 이 세상은 비고 오지 않아서 메마른 세상이 된 것은 아닙니다. 신의와 정직한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도 아모스서 8장 11절에서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1. 말씀에 순종치 못하여 메마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벌들은 벌들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이 나타나면 생명을 바쳐 아군을 지켜야 한다는 법칙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벌들의 세계도 하나님께서 관할하고 있을 텐데, 그 하나님의 섭리를 벌들은 잘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제일 깊은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희생과 봉사와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유지는 신의와 진실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데는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 사회가 유지되려면 사랑이 꼭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인 애국심과 마을을 사랑하는 애향심, 학교를 사랑하는 애교심, 또한 교회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희생과 헌신 봉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 입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바칠 수 있어야 하고 나의 몸과 시간을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내 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자주 찾아가서 대화라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활이 부족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전보다 점점 더 그러한 정신이 희박해져 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전에는 이웃 사람과 어울려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웃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모내기나 김매기, 벼를 벤다든지 타작을 하는 일, 길쌈을 하고 큰 일을 치르더라도 이웃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기계가 대신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이웃간에 서로 도움을 받거나 도와 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이웃간에 오가던 인정이 메말라가고 사람 사는 재미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것은 반목과 질시, 아니면 위선과 허례뿐입니다. 이웃간에 아예 모르고 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되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사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을 하거나 애쓰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거나 억울한 소리를 들으면 참지를 못하고 따지거나 항의를 합니다. 예전에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를 하려고 힘썼습니다만, 요즘에는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지서에다 고발을 한다든지 큰소리 칩니다. 예수님의 크신 희생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믿게 된 우리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죽는 날까지 갚아도 다 갚지 못할텐데, 얼마나 희생을 하고 봉사와 헌신을 했습니까? 좋은 뜻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하자 는데, 얼마나 정성과 마음을 쏟으셨는지요? 믿는 성도가 생각 없이 한 소리, 억울하게 여기기보다는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용서하는 일에 힘쓰셨는지요?

 영춘교회 성도님들, 다른 교회 성도들보다는 마음이 착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슨 일을 한다든지 하면 열심히 참여하고 일을 잘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적극적인 봉사와 헌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풍성한 삶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은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형편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내 입장 중심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 하기 때문에 문제는 발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이라도 이해하려고 힘썼다면 그런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상대편 입장이 되어서 생각을 한다면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가 말씀에 순종하여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대접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보다는 엘리야의 형편을 먼저 돌아보고 동정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희생정신입니다. 이러한 희생정신이 있어야, 우리 사회의 숱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좀더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의 모범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히브리서 9장 2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죽어야 할 일에 당신의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온갖 욕을 얻어 먹어가면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죽으셨습니다. 정말 애매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억울하고 분통해서라도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죽음의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아무 말씀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면서, 『사람은 한 번 죽게 마련이요, 그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죽고 살겠다는 생각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으려 하고 억울한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데, 그러나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 죽으려고 구차스럽게 행동하기보다는, 멋있게 죽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가 그런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왕 죽을 것, 식사를 한끼 더 먹고 죽으나 덜먹고 죽던지 매한가지이니, 좋은 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판단입니까? 정말 지혜로운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일생, 아주 짧은 생애입니다. 33년밖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삶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까? 그 분의 말씀과 삶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인간이 되셨으나, 다시 그 인간 삶을 인류를 위하여 던지심으로써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위치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여기 구차스럽고 더러운 인생의 표본과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인생의 모델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2:38-44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율법학자들의 삶이요, 다른 하나는 어느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율법학자들은 그 겉에 나타난 모습만을 보면 정말 멋있고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항상 거룩한 자태와 말씨, 그리고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감히 접근하기조차 두려운 위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항상 옳은 말씀, 정의만을 부르짖고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툭하면 희생과 봉사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생활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자기들의 것을 내놓는 경우란 드물었습니다. 자신들의 시간과 물질을 바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치 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는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 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어느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과부는 너무나 가난해서 겨우 두 푼을 헌금궤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이 과부를 칭찬하면서 헌신에 대한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 하건데, 저 가난한 과부가 그 누구보다도 많은 헌금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했지만, 저 과부는 어려운 살림 형편 속에서 있는 것을 다 털어 헌금을 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난한 생활은 탓할게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난을 핑계로 헌신하기를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와 비교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들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한 헌신과 희생이 있을 때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3.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최선을 다한 삶을 삽시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복이 될 줄 알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체면을 생각하고 위신을 내세우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엊그제 일입니다. 아침결에, 제가 식사를 마친 후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한나와 한별이가 서로 먼저 양치질을 하겠노라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제가 욕실에서 나오자 재빨리 한나가 뛰어들었습니다. 한별이는 누나보고 신발을 내놓으라고 떼를 썼습니다. 한나는 나오기는커녕 한별이를 놀려댔습니다. 속이 상한 한별이는 울음보를 터뜨렸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단 1분 정도 뒤졌다고 해서 울음을 터뜨리는 한별이를 보면서, 우리 인간은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자존심을 상하고 억울해 하는 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이고 내용이 있는 삶을 살기보다는, 허례와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위선적인 삶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없는 행동이 위선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헌신은 거짓입니다. 남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체면 때문에 따라서 하는 것은 줏대없는 행동입니다.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십니다. 혹 사람들 앞에서는 위장된 행동이 통할는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복 받고 잘 살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거짓없이 살아야 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헌신은 차라리 않는 게 낫습니다. 많고 적음을 떠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할 때에,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는 한 번 죽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 인생, 살려고 더럽게 애쓰기보다는 깨끗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돈 몇 푼에 양심을 팔아먹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입니다.

 이왕 죽을 바에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멋있게 살다가 죽읍시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 하려고 애쓰고 하나님 앞에 정직 하려고 힘쓰면 멋있게 살수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또는 누구에게나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분명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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