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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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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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양식 91-21호                                            1991.05.26.

성서일과 ; 사6:1-8,롬8:12-17, 요3:1-17.

제목 ;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발견




거울이 없던 아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얼굴이 잘 생긴 어느 소년 하나가 산에 사냥을 갔다가, 목이 말라 물을 먹으려고 호수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호수에 이르러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시려는 순간,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소년은 그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잘 생긴 물 속의 소년에서 정신이 빼앗긴 이 사냥꾼 소년은 점점 물 속의 소년에게 이끌려 가다가 그만 그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년의 이름이 ‘나르시스’ 인데, 이 이름을 따서 자기 도취에 빠져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상처를 가리켜 「나르시스즘」이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로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모습보다 우월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열등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만큼, 실제의 모습대로 평가하고 인정하며 산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저는 가끔 거울 앞에 설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평가를 해 봅니다.  “아, 이 정도면 괜찮은 얼굴이야! 어디를 가더라도 기죽지 않을 수 있는 용모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너무 못생겼다 싶을 때가 있어 기분이 나쁩니다.  그래서 저는 거울을 만져 보지요.  혹시 거울이 고르지 못하여 내 얼굴 모습이 일그러지게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아무튼 저는 제가 잘생긴 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  어떤 분이 제 얼굴에서 코가 차지하는 면적이 너무나 많다고 근심하듯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볼품없는 제 얼굴이지만 얼굴에 대하여 책임질 수 밖에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된 것 같습니다.

저 지난주, 토요일입니다.  주보를 하러 제천에 갔다가 스탠드를 사려고 조명기게 가게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교회의 교자도 꺼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의 예자도 말한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계 주인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아니시냐?”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뿔싸, 이제는 정말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함부로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그때에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경험을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겉으로 풍기는 외적인 모습도 참으로 중요합니다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그럴 듯 해 보여도, 속 사람이 온전치 못하면 겉모습까지 구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이 새롭게 거듭나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갈 때에, 우리들 자신이 바라고 다른 사람이 볼 때에도 덕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항상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려고 애쓸 때에,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뵙게 되었을 때에, 이사야는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 고백을 합니다.

“주여, 저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잘 구별이 안되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니, 자신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는, 경제성장이 이루어져 나라 형편이 좀 나아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잘 사는 사람들과 못 사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반복이 많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편이 좋아진 사람들은 그 여유분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는 것이 아니고, 그 돈을 가지고 향락을 즐기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사회는 점점 타락해져서 도덕과 윤리가 없는 죄악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세상에 살면서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그러하니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형편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성전에 자주 가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짝하여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적당히 타협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자니, 세상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데, 그럴만한 힘도 없거니와 그 고통을 감당하기도 두렵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하면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던 차에,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바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더럽고 극악한 모습이었습니다.  적당히 평안하게 지내려면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골치 아픈 일이라서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미운지, 어디 숨을 곳이 있으면 숨겠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헛수고로 끝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1. 하나님을 뵙지 못하여 거짓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밝은 대낮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있으니까, 애써 체면을 차리고 사람 구실을 해 보려고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어둠이 짙어지면, 사람들은 몹쓸 짓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거짓을 일삼게 됩니다.  아니, 자기가 하는 짓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죄악이 되는지 깨닫지를 못하고 범죄를 행합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까닭입니다.  옛사람 그대로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관심이 하늘에 있지 아니하고 땅에 있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가 있는 하늘의 것을 찾기보다는 썩어질 땅의 것을 구하여 살다보니, 육체를 떠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인생은 자기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그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혹 희미하게 그 사명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 사명을 감당할만한 용기나 힘이 없기 때문에 일을 회피하거나 멀리하게 됩니다.  억지로라도 일이 주어지면, 어떤 핑계를 대서든지 일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발을 뺍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며, 어느 것을 먼저하고 나중해야 할 지 분명하지 못합니다.  되도록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희생이나 봉사라고 하는 기독교적인 덕목은 그들의 머리속에만 남아있을 뿐, 실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인생은 참고 기다린다는 법이 없습니다.  쉽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어 오해를 잘합니다.  조금만 손해가 나도 억울해 하며 앙갚음을 하려 합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더욱 참지를 못합니다.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끝까지 참으신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할 겨를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왜 그러면, 거듭남의 체험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지 못하여 거듭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자기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죄를 청산하기를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막대한 손해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만 죄를 뉘우쳐서는 안됩니다.  죄의 때가 묻어 있는 습관과 생활양식, 그리고 즐겨하던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거듭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삶은 거짓된 생활입니다.  그 삶 자체가 수정되지 못한 달걀과 같아서, 죽어라고 일평생 애를 써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인생입니다.  몇 수십 년을 수고하고 고생을 해도 진실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은 그런 인생을 값을 쳐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어서 없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진실하게 살 수 있도록 몸부림치는 인생이 됩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진실하게 살아야지, 거짓되게 오래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내가 지금 바른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진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나스리스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 혼자 외로운 양 거룩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자기를 살펴볼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남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그것을 모르고 의인 행세를 하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오늘 아주 복된 시간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기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을 자주 찾아가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의 모습을 대한 것처럼, 성도 여러분들은 늘 주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던 중에 오늘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감사와 찬양을 돌립시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셔서 생명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무의미하고 거짓된 죽음의 늪에서 우리를 건지시사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인 주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무엇이 참된 인간의 길인지 보여 주시고, 그 예수를 따름으로 새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삶이 곧 인간의 본질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진실해야만 그 값어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 진실한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세상 욕심입니다.  곧 육체를 떠나 사는 생활입니다.  주님 예수는 이 육체를 버렸습니다.  육체가 더러워서 버린 것이 아니라, 보다 귀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육신을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수많은 인생들이 육신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주님은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한편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준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을 가기를 원할 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건방지게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고 어떤 선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믿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곧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에게, 오늘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녀에게 주시는 최대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깨끗케 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사야가 가지고 있던 그 입술을 지져서 깨끗하게 하신 성령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케 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과 생활태도까지도 거룩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사,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십니다.

오늘의 세 본문을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성부이신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 주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이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사 인간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말씀을 들려 주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하나님의 말씀, 곧 세상 만물의 근본원리를 모르거나, 알고도 따르지 않으면서, 자기 멋대로 살고 무의미한 인생살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삶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말은, 무의미한 인생에서 의미 있는 생으로 바뀌었다는 말이요, 거짓을 떠나 진실하게 산다는 말이며, 목적 없이 살던 인생이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지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대로 한다면, 육체를 따라 사는 인생은 죄의 삶, 곧 죽은 인생이요,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는 인생을 성령의 삶, 곧 구원받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가 성령의 불로 입술이 깨끗하게 되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사6:8)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육체대로 살 때에는 핑계를 대며 회피하던 하나님의 일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니 그 사명을 깨닫고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여러분,




3.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갑시다.




거짓은 욕심에서 생깁니다.  거짓말은 창조적이며 적극적으로 살기보다는 소극적으로 안일하게 살려고 할 때 하게 되는 말입니다.  거짓은 성령을 거스릅니다.  거짓은 사탄의 본질입니다.  성령은 진실입니다.

진실하신 성령은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어느 것을 선택해야 생명의 삶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거짓과 위선을 벗어 던지려고 애쓸 때, 성령은 오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진실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바울 선생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빚을 진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진 빚을 갚아야 하는데, 그 빚을 갚는 길이란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롬 8:14)에, “성령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어떤 것인지 좀 더 구체적인 것은 앞으로 계속 전해드릴 것입니다.  다만 오늘 결론 삼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에 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뵌 다음에 저기 죄를 뉘우치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고백을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거듭나고 체험을 하게 한 것입니다.

셋째는, 거듭난 체험을 한 사람은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사명감을 깨달아 주의 복된 길을 가시고 축복된 인생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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