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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55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천년 왕국에 이어서 최후의 심판이 끝나면 사망(θάνατος)과 음부(陰部, ᾅδης)도 끝난다고 합니다. 놀라운 발언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사망과 지옥이라고 번역했고, NIVdeath and Hades라고 번역했으며, 루터 성경은 der Tot und sein Reich(죽음과 죽음의 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스어 타나토스는 사망, 죽음이라는 뜻이니까 번역에서 큰 어려움이 없으나 문제는 하데스입니다. 우리말 <개역개정>이 선택한 음부라는 단어는 불교 색채가 강합니다. 그것보다는 <새번역>지옥이 더 나아 보입니다. 루터는 죽음의 나라라고 번역했는데, 그 의미로 보면 가장 정확하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음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와 대비됩니다. 말하자면 하데스는 하나님이 없는 나라, 또는 죽음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 죽음의 세력에서 건져내지 못합니다. 죽음은 이미 우리의 실존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마치 죽음과 상관없다는 듯이 태평스럽게 일상을 삽니다. 이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긴 합니다. 죽음은 생명과 반대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성령은 생명의 영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 자체입니다. 지옥, 하데스, 또는 스올이라고도 하는 그 죽음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에서 제외된 곳입니다.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우리의 운명은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최후의 심판이 끝나면 그 죽음과 죽음의 나라가 불못에 던져진다고, 즉 더는 세력을 떨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불못은 둘째 사망입니다. 더는 심판받을 기회도 얻지 못하는 운명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죽음이 없는 세계는 어떨까요? 상상이 갑니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다르게 질문합시다. 죽음이 없는 세상은 행복할까요? 사도신경의 마지막 단락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입니다. 영생은 곧 타나토스와 하데스가 없는 세상입니다. 죽음이 없는 세상이니까 몸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은 같은 의미입니다. 몸의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생에 들어갈 수 있고 영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더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최선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도 그 부활의 선물을 약속받았다는 사실 안으로 수행하듯이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읽기도 이런 수행의 한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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