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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마시게 하다
potivzw
물을 주다 water, 마실 것을 주다 give to drink.||#1. 고전 헬라어의 용법||동사 포티조(히포크라테스 이후)는 포토스($4224: 술잔치)에서 유래했으며, 타동사의 의미를 지닌다. 즉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마실 수 있게 하다', '마시도록 허락하다', '마실 것을 주다', '(동물에게) 마시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포티조는 70인역본에서 62회 나오며, 히브리어 샤카(마실 것을 주다, 물을 주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포티제인은 창조주로서 그의 계속적인 영광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진노의 증거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포티조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온다.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라는 옛 요구는 기독론적 근거에서 새롭게 된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병행구, 마 10:42; 마 25:35; 마 25:37, 마 25:42; 롬 12:20 = 잠 25:21). 고전 3:2, 고전 3:6이하에 따르면 공동체에게 기본적인 가르침을 주는 것은 자녀들에게 마실 우유를 주는 것이나 식물에게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계 14:8에서 바벨론은 열방들로 하여금 그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한 사람이 마실 물을 주었다: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막 15:36; 병행구, 마 27:48; 참조: 눅 23:36; 시 69:21을 인용한 요 19:29). 고전 12;13에서 한 성령을 마신다는 것은 성만찬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다.|(참조: G. Braumann; L. Goppelt).
보디올
Potivoloi
보디올 Puteoli.||보디올은 나폴리 서쪽 8마일 거리에 위치한 이탈리아 서쪽 해안에 있는 이탈리아 항구 도시이다. 주전 520년경 커메(Cumae)로부터 온 사모스(Samos) 개척자들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오스티아보다 수도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탁월한 정박지가 있었기 때문에 동쪽으로부터 항해하는 선박들에 대해(특히 곡물 운반선들) 로마의 주요한 항구 역할을 하였다.|바울 등이 알렉산드리아 곡물 상선을 타고 로마로 이송되어 가던 도중 브디올에 정박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7일간 대접을 받았다(행 28:11; 행 28:16). 브디올의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베스파시안(주후 70-78년)이 완공한 것인데, 놀랍게도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바울은 아마도 그보다 앞선 더 오래된 구조물(426×138 피트)을 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자취가 오늘날에도 발견된다.|바울이 브디올에 일주일간 머물렀던 경험이 경기와 경주에 관련된 고전 9:24-고전 9:27을 기록하게 하였을 것이다.|브디올은 오늘날 풋주올리(pozzuoli)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연락
povto"
주연 drinking part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포토스(Xenophon에서부터)는 피노($4095: 마시다)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마시기, 주연'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포토스는 70인역본에서 38회 나오며, 주로 마쉬테(마실 것, 음료, 연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포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벧전 4:3에 한번 나오며 '주연'을 의미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푸
pouv
어딘가에, 약, 대략.||#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전접 불변사 푸(Homer 이래)는||(a) '어딘가에' somewhere: 히 2:6; 히 4:4.|(b) '거의', '대략', '약', '~쯤', '~가량'(Hdt.)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전접 불변화사 푸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푸는 롬 4:19에서 (b)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b) 푸는 히 2:6에서 (a)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히 4:4에서도 마찬가지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푸
pou'
어디 where.||푸(Homer 이래)는 의문 부사이며, '어디' where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부사는 49회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부데
Pouvdh"v
부데 Pudens(인)||푸데스는 문자적으로 '수줍어 하는'을 의미한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푸데스를 '부데'라고 음역했다.||(a) 바울에게 끝까지 충성한 기독교인.|로마의 기독교인 중의 하나로, 바울이 로마에서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대부분의 로마 교인들이 "바울을 버렸을 때" 끝까지 그에게 충실했던 사람이다.|네로의 핍박에 뒤이어 즉시로 제국의 최고 법정 앞에서 바울 사도의 마지막 재판이 있었을 때 교인들은 매우 큰 압력 아래서 처신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울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의 결여를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실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과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쳐서 바울에게 충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부데도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b) 부데와 글라우디아.|디모데에게 보내는 두번째 서신 즉 디모데후서를 끝맺음할 때 바울은 그때 그와 함께 있었던 "모든 형제"의 문안 인사를 전하면서 부데를 거명했는데, 부데와 함께 세 명의 다른 이름을 함께 언급하였다. 즉 으불로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이다. 그런데 부데와 글라우디아에 관하여 추측되는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이며, 글라우디아는 영국 출생으로, 코지두누스라 하는 영국왕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코지두누스왕은 로마와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후원자였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랐다. 따라서 딸도 글라우디아라고 명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에게 문안한 글라우디아를 영국 왕실의 공주로 보는 것은 다만 추측일 뿐, 지적·사실적 증거 모두 부족하다(참조: CLAUDIA and Code of Hammuravi(St. P), chapter xxⅶ).|하지만 오늘날 로마에서 여행자들은 "바울이 임대한 집"을 볼 수 있듯이 부데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건물을 아직 볼 수 있다. 그러나 둘 모두 신빙성은 결여되어 있다. 부데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참조: John Rutherfurd).
문하
pouv"
발 foo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푸스는 기본어이며, '발' foot을 의미한다.||(a) 비종교적인 용법에서 푸스는 인간이나 동물의 '발', 공예품의 '다리', 또는 다리와 같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무엇인가의 '아래쪽 끝'을 의미한다.|이 단어는 피트로서 길이의 단위를, 시적으로 운동을 표현하며, 따라서 참여를 가리키거나 사람들을 평가하는 표현들에 사용된다. 강한 자의 발에 대한 언급은 복종을 표현하는 것이다.||(b) 비교종교에서 신들이나 신적인 사람들의 발자국이 치유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신앙은 능력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사라피스(Sarapis)의 발 숭배가 언급된다. 발은 또한 신의 현현에 나타나며, 승천 시에는 발 밖에 보지 못한다. 예배를 드릴 때 신발을 벗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더렵혀진 덮개들을 벗어버리고, 신의 능력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거나 매듭에 의해 야기되는 주술적인 장애물들을 피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2. 구약성경과 유대교.||(a) 70인역본은 '발바닥, 뒤꿈치, 발굽, 다리, 발걸음, 발 밑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b) 푸스는 한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이 단어는 삶의 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시 57:6).||(c) 수 10:34; 수 14:9; 삼하 22:39; 시 47:3에서 다리는 능력을 상징한다. 삿 3:24에서 완곡어법으로 다리에 대한 경시가 나타난다.||(d) 출 3:5과 수 5:13이하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신발을 벗는다. 구약과 유대교에서 신발을 벗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기 위해서이다.||(e) 하나님의 현현과 관련하여, 시 18:9; 시 77:19; 출 24:10등에서 하나님의 발, 발자국 또는 발등상에 대해, 하박국은 하나님이 발로 밟는 것에 대해, 슥 14:4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오실 때, 그의 발로 감람산을 밟을 것에 대해 언급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a) 사람을 나타냄.|신약성경에서도 역시 사람(서 있거나 걷고 있는 사람)을 나타내기 위해 푸스 또는 포데스를 사용한다. 따라서 행 5:9의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느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는 말씀은 당연히 사람들이 문 앞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 4:6과 병행구절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재촉하면서 시 91:11 상반절과 12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성구를 인용할 때 시 91:11 하반절을 생략한 것은 험하고 거친 돌투성이의 길에 발이 걸려 비틀리는 생생한 이미지는 제거해버리고 그 인용문을 발만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위협하는 상황에 적용시킨 것이다.||(b) 전이된 용법.|구약성경적 기초 및 발걸음과 준비와 각오를 나타내는 호도스의 비유적 용법과 관련하여 푸스는 준비되어 있거나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전이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눅 1:79(사 59:8)의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와 히 12:13(잠 4:26)의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라는 성구를 참조하라. 롬 10:15(사 52:7)에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말씀은 물론 전세계를 두루 여행하는 것을 나타내긴 하지만 발이 아니라 구원의 전도자들과 그들의 일을 칭송하는 것이므로 그 은유는 그것이 묘사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엡 6:15도 마찬가지다. 막 9:45에서 예수님께서 발로 인한 스칸달론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도 역시 반은 문자적으로 반은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본래 스칸달론은 타락한 삶의 방식이나 수치스럽게 행하는 사람에 의해 야기된다. 발은 단지 그의 악한 의도를 실행하는데 이용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c) 힘의 상징으로서의 발.|신약성경은 또한 발을 힘의 상징으로 이용한다. 그러나 이점에서 우리는 구약성경의 신앙과 비교해 볼 때 이 세상 및 그 구성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동체의 관계에서 어떤 변화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메시지에 의해 야기된다. 구약성경에서 발은 종종 압제, 예속, 노예로 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힘의 상징으로 사용되는데, 그 주체와 객체는 사람과 사람이거나 선택된 백성과 다른 민족들이거나 강한 정복자들과 이스라엘 땅이다. 신약성경의 기록에서 그와 같은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만 발견되며 여기서조차도 단지 계 3:9에서의 사 49:23의 인용에서만이 나타날 뿐이다. 그밖의 다른 곳에서는 사람은 더 이상 발로 표현되는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롬 16:20에서 하나님의 공동체에게 주어진 약속은 하나님 자신이 사탄을 그들의 발 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신약성경에서 선포의 완전한 종말론적 성격에서 분명히 찾아진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때에 따라 힘(세력)의 향방이 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지 않다. 역사는 하나님과 이 세상의 군주와 그 종자들 간의 최후의 결투와 함께 끝난다.|시 8:6("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과 시 110:1("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의 약속은 예수님에 대한 강력한 종말론적 모습에서 진정으로 성취된다(고전 15:27; 엡 1:22; 히 2:8; 막 12:36과 병행구절; 행 2:35; 고전 15:25; 히 1:13; 히 10:13; Barn., 12. 10). 다른 묵시적 형상들의 경우에 그들의 인격과 힘에 대한 묘사는 힘 또는 통치 방식을 묘사하는 머리에 또는 발과 다리에 국한된다. 따라서 계 10:1에서 선포하는 천사는 땅과 바다 위에 불기둥처럼 서있는, 그래서 전 세계를 다스리는 다리들을 가지고 있다. 또 계 2:1에서 여자의 두 발이 달(moon)의 낫(sickle) 위에 위치하고 있는 모습은 그녀의 우주적인 힘을 나타내는 것이다. 똑같은 것이 계 13:2의 곰의 발을 가진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도 적용된다.||(d) 복종을 표현함.|복종의 표시로 사람의 발 앞에 앉거나 엎드리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오직 그 사람의 특성이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과의 특별한 관계에 의해 묘사될 때에만 발견된다. 행 22:3에서 바울에 대한 언급에서 그런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 엄한 교훈을 받았고". 여기에서 그의 선생의 발 아래 앉아 있는 학생이라는 외면적인 상태를 반영하지만 토라에 대한 존경이 학생들로 하여금 이 자세를 취하도록 강요한다는 사실도 표현한다. 소유를 판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헌물로 두었다고 하는 구절에서 그 사도들은(행 4:35; 행 4:37; 행 5:2) 주님과 하나님을 대표한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삽비라가 속일 때 그녀는 성령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행 5:9). 그래서 그녀가 베드로의 발에 엎드러져 죽을 때에(행 5:10), 그것은 하나님의 재판하시고 벌하시는 권세가 사도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인 것이다.|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막 6:11과 병행구 행 13:51)도 이런 맥락에서 언급되어야 한다. 이것은 명백히 재판하고 벌하는 행위이다. 막 6:11의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에이스 마르튀리온 아우토이스; 눅 9:5은 에이스 마르튀리온 에프 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은 법정의 고소 행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하는 사도의 권능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도들의 능력은 제한된다.|고넬료가 베드로의 발에 절했을 때(행 10:25), 베드로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도 단지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계 19:10; 계 22:8 이하에서, 천사조차도 요한계시록 기자가 경배하기 위해 그의 발에 엎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e) 예수님에 대한 경의(veneration)을 표현함.|다른 한편, 복종과 경배의 표현은 예수님의 발에 무제한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세례(침례) 요한은 굽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가치조차 없다고 고백한다(막 1:7; 참조: 행 13:25). 계 1:17에서 사도는 예수님의 형상의 신성에 압도되어 그의 발에 죽은 자처럼 엎드러진다. 그런 경우의 명백한 신성의 영향이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의 발에 앉거나 엎드리거나 놓여지는 것을, 또는 그의 발을 붙잡는 것을 말할 때에도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이 의문은 퀴리오스라는 칭호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님의 발에 앉는 것이나 엎드리는 것은 있는 그대로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거나 랍비에게 표하거나(예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보았다고 생각한 메시야에게 돌리는(의례) 존경의 표시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대부분 경우에 그것이 뚜렷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을 때조차도, 그 행위는 경배의 행위였을 것으로 정확히 판단한다. 이것은 막 5:22=눅 8:41(야이로); 막 7:25(수로보니게 여인); 마 15:30(예수님의 발 앞에 둔 병자); 요 11:32(베다니의 마리아)에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구절들에서 신에게 행하는 경배가 도움의 요청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위-그는 예수님의 발에 그의 얼굴을 던진다-는 예수님의 위엄을 보았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에서 천사들과 장로들과 생물들에게 경배 받으시는 것처럼(계 7:11과 계 11:16; 참조: 마 17:6; 고전 14:25) 경배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 받은 후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았다고 언급한 눅 8:35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았다고 한 눅 10:39에서 그들의 태도가 감사하는 제자의 자세와 배우고자하는 열심있는 각오 이상을 나타내는지는 거의 말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마 28:9에서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 것은 분명히 신에게 드리는 경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이 모든 것은 눅 7:36-50의 많은 죄를 지은 여자에 대한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단순히, 발과 관련하여 모든 헌신의 행동, 즉 발을 씻고 닦으며 기름을 붓고 입맞추는 행위가 이 기사에서 모두 발견되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단지 눈물이 물을 대신하고, 머리털이 수건을 대신하고, 향유가 값비싼 연고를 대신하고, 얼굴에 입맞추는 대신에 발에 입맞추는(눅 7:45 이하) 독특한 방식 때문도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집주인의 관계-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서기관으로 대우하고 디다스칼레라고 부른다(눅 7:40)-를 그 여자와 예수님과의 관계와 비교할 때 발을 씻는 것과 기름 부음과 입맞춤의 의미는 명백해진다. 예수님을 그의 신적인 특성에 의해 죄를 용서하시는 자로 이해할 때, 그 인격 전체에서 예수님은 이미 죄 있는 인간을 초월하신다. 신의 현현에서처럼, 그의 발은 여전히 죄많은 세상에 뻗어 있으며, 그러므로 그의 발에 경의를 표하고 경배드려야 하며 희생 제물이 드려져야 한다. 이 누가복음의 기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한편으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다른 한편으로는 요한복음의 베다니의 기름 부음에 대한 기록과 비교할 때 효과적으로 입증된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 반면 요 11:2과 요 12:3에서는 발에 기름을 붓는다. 요한복음에서의 이러한 변화의 이유도 매우 명백하다. 그와 같은 헌신의 행위로 사람은 이 복음서 기자에 의해 묘사된 영광의 그리스도의 발에만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f) 발 씻기심.|마지막으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행위는 언뜻 보아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영광의 주님이 인간의 발을 향해 몸을 굽힌다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요점은 정확히 이 역설 속에 존재한다. 그것의 목적은 병원학적 기초에 근거하여 고정된 씻는 의식을 제정하기 위함도 아니고 잘못된 의식들에 대한 안전 장치를 제공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 행위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설명해준다. 그는 자신을 발을 씻기는 천한 일로 낮추신다. 즉 그는 그의 신적인 영광을 버리고 그렇게 행함으로 그가 위하여 이 봉사를 행한 그 사람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신다.|그러므로 요 13:15에서 발을 씻기시는 행위를 휘데이그마("본")라고 부르고 제자들에게 똑같은 겸손으로 똑같은 봉사를 행할 것을 요청하실 때(요 13:14), 세상으로의 제자들의 파송은 그것에 의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수난의 완전한 존엄성을 부여받는다.|딤전 5:10에서 하기오이("성도")의 발을 씻기는 것은 공동체의 과부들에게 부여되는 임무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3장에서의 행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 행위는 그 전통에 기원할 것이다.||(g) 의식적으로(cultic) 신발을 벗음.|신약성경의 어느 곳에도 이것을 행하라는 명령은 없다. 오직 스데반이 출 3:5을 인용한 행 7:33의 역사의 회상에만 그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참조: K. Weiss).
것
pra'gma
행위, 사물, 사업, 소송.||#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라그마(Pind. 이래)는 프랏소($4238: 하다, 행하다, 실행하다, 성취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행해진 것, 성취된 것, 행위, 행동',|(b) 행하고 있는 것이나 이루어지고 있는 것: ① '임무, 사업', ② '행동, 행위',|(c) '일, 문제, 사건, 소송, 재판',|(d) '있는 것, 존재하는 것, 사물'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프라그마는 70인역본에서 12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다바르(말, 일, 사건), 그리고 헤페츠(기쁨, 즐거움, 전 3:17; 5:7; 8:6)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라그마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마 18:19이 말씀에서 그 말은 기도의 요청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b) 롬 16:2에서 그 말은 뵈뵈의 일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c) 살전 4:6에는 프라그마라는 말의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아마도 사업상의 어떤 계약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d) 고전 6:1에서 그 말은 재판상의 절차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e) 눅 1:1; 행 5:4 그리고 고후 7:11의 말씀들에서는 그 단어가 레스 게스타에(역사적인 사건들)라는 의미에서의 구체적인 범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f) 약 3:16에는 판 프하울론 프라그마(모든 악한 일)는 시기와 다툼 때문에 생겨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g) 히브리서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프라그마라는 단어를 앞에서 언급한 것들과 아주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한다.|① 히 6:18에서 프라그마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언명하시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사실(하나님과의 약속의 맹세)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② 히 10:1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장차 율법으로 받아들여질 선한 일의 그림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상(에이콘 톤 프라그마톤)과 대조시킨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③ 히 11:1에서 신앙은 사물들을 볼 수 없을 때에라도 그 사물들에 연결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C. Hahn).
생활
pragmateiva
활동, 일, 사업.||#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라그마테이아(Hippocr., Xen. 이래)는 프라그마튜오마이($4231: 사업하다, 장사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활동, 일, 업무, 직업, 사업'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라그마테이아는 신약성경에서 딤후 2:4에 한번 나온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프라그마테이아는 일상 생활의 일을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C. Hahn).
프라그마튜오마이
pragmateuvomai
사업하다, 장사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프라그마튜오마이(Hdt. 이래)는 프라그마($4229: 행위, 일, 사건, 문제)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일에 종사하다, 사업하다, 장사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프라그마튜오마이는 신약성경에서 눅 19:13에 한번 나온다: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관정
praitwvrion
관저 praetorium||프라이토리온은 라틴어 praetorium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a) 로마 부대(병영)의 '본부, 사령부, 최고 사령관의 막사',||(b) '어떤 속주의 총독 또는 행정 장관이 주재하였던 관저', 로마인들은 이전에 왕이나 군주들이 거주하였던 기존 궁전들(palaces)을 이러한 용도로 충당하곤 하였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그 관저는 헤롯 대왕이 자신을 위해 지은 그 장엄한 궁전이었다. 로마의 행정 장관들이 공무를 처리하기 위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올 때마다 이 곳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마 27:27; 막 15:16; 요 18:28; 요 18:33; 요 19:9.||(c) 디베료에 의해 설치된 '친위대(시위대)의 병영': 빌 1: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관속
pravktwr
행위자, 벌금 징수자, 형집행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라크토르(Aeschyl. 이래)는 프랏소($4238: 하다, 행하다, 실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어떤 것을 행하는 자, 행위자'(Soph.),|(b) '형벌을 가하는 일이나 복수하는 일을 하는 자', 특히 '살인의 복수자'(Aeschyl., Soph.), '벌금 징수자'(Antipho, Dem.), '형벌을 가하는 것이 자기 직무인 하급 사법 공직자'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라크토르는 신약성경에서 눅 12:58에 2회 나온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여기서 프라크토르는 하급 사법 공직자인 '형집행자'를 가리킨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프락시스
pra'xi"
행동, 활동.||#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락시스(Homer 이래)는 프랏소($4238: 하다, 행하다, 실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행함' acting, '활동' activity을 의미하며,||(a) '완성된 어떤 행위(행동, 일)',|(b) '활동을 완성시키는 방법(운영 방법)',|(c) '계획된 행동(목적)', 때로는 구체적으로 거래나 사업,|(d) '상황, 조건, 운명',|(e) '주술적인 행위',|(f) '기만',|(g) '성관계'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프락시스는 70인역본에서 23회 나오며, 히브리어 데레크(인생, 행위, 사업 방식, 대하 13:22; 대하 27:7; 대하 28:26)와 포알(행위, 일, 활동, 작품, 욥 24:5)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락시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온다.||(a) 롬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여기서 프락시스는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 몸의 모든 지체들이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규정되어 있다.||(b)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여기에서 프락시스라는 말은 양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재림 때에 심판받게 될 행위는 선한 것일 수도, 악한 것일 수도 있다.||(c) 프락시스는 다음 구절들에서 악한 행동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① 눅 23:51에서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말과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② 행 19:18에서 전체적으로 개괄된 신자의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골 3:9에서도 마찬가지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③ 롬 8:13에서 결국 죽음을 초래하거나 죽음으로 이끌고 말 "몸의 행실"(프락세이스 투 소마토스)에 대해 사용되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C. Hahn).
온유함
prav/o"
온화한, 온유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프라오스는 어원이 불확실하며, '온화한, 온순한, 온유한'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프라오스는 신약성경에서 마 11:29에 한번 '온유한'이란 의미로 나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온유
pra/ovth"
온화, 온유.||#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프라오테스는 프라우스($4239: 온화한, 온유한, 친절한)에서 유래했으며, '온화, 온순, 온유'를 의미한다(Xen., Pla., Lsocr., Aristot.).||#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라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a) 고전 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b) 고후 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c)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d)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e)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f)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g)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h)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i) 딛 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