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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폴로덴
povrjrJwqen
멀리서부터||#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폴로덴(Pla. 이래)은 폴로(%912)에서 유래했으며, '멀리서부터'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폴로덴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만 사용되었다.||(a) 눅 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b)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폴로테로
porjrJwtevrw
더 멀리 further.||폴로테로는 폴로($4206: 멀리 떨어져서)에서 유래한 비교급 부사이며, '더 멀리'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폴로테로는 눅 24:28에 한번 나온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자색 옷
porfuvra
자주빛 의복||#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포르퓌라(Aeschyl., Hdt. 이래)는 아마도 퓌로(%641: 마른 것과 젖은 것을 섞다)의 중복 파생어에서 유래한 듯하며,||(a) 자주빛 물고기, 일종의 갑각류(甲殼類) 또는 마합류, 자주색 물감(Aeschyl., Soph.),|(b) '자주빛 염료로 채색된 직물', '자주빛 (천으로 만든) 의복'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포르퓌라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자주빛 옷, 자주빛 천'에 대해 사용되었다.||(a) 눅 16:19에서 한 부자가 '자주빛(색) 옷'을 입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b) 막 15:17; 막 15:20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자주빛 옷'을 입혔다: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c) 계 18:12에서 상고들이 취급하는 상품의 한 품목으로 '자주빛 옷감(천)'이 포함되어 있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자색
porfuvreo"
자주빛(색)의 purpl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포르퓌레오스(Homer 이래)는 포르퓌라($4209: 자주빛 물고기, 자주빛 물감)에서 유래했으며, '자주빛의' purple, '자주빛으로 염색된', '자주빛 천으로 만든'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프로퓌레오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요 19:2; 요 19:5에서 군병들이 예수님께 '자주빛' 옷을 입혔다: "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b) 계 17:4에서 음녀의 옷을 나타낸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여기서 음녀의 복장은 그의 왕적 통치를 가리키며 그의 간음 행위는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그 음녀는 교회를 핍박함으로 중죄를 자기에게 쌓았다(계 17:6).|계 18:16에서도 같은 의미로 나타난다: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자주 장사
porfurovpwli"
자주빛 옷 장사||#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포르퓌로폴리스는 포르퓌라($4209: 자주빛 물고기, 자주빛 물감)와 폴레오($4453: 교환하다, 팔다)에서 유래했으며, '자주빛으로 염색된 직물을 파는 여자', '자주빛 옷 장사'(Phot., Suid.)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포르퓌로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16:14에 한번 나온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몇 번이나
posavki"
얼마나 자주, 몇번이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의문 부사 포사키스(Pla. 이래)는 포소스($4214: 얼마나 많은, 얼마나 큰)에서 유래했으며, '얼마나 자주', '몇 번이나' how often(Plat. ep., Aristot.)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의문 부사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사용되었다.||(a) 마 18:21에서 용서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b) 마 23:37에서 하나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배려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병행구, 눅 13:34).|(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포시스
povsi"
마심 drinking, 마실 것 a drink.||#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헤 포시스(호머 이후)는,||⒜ '마시는 행위'(Hdt. 1, 172).|⒝ '마실 것', '음료'(요 6:55)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포시스는 70인역본에서 단 1:10에 한번만 나오며, 히브리어 미쉬테(마실 것, 음료, 연희)의 역어로 '마실 것'을 의미한다.(참조: G. Braumann)||#3. 신약성경의 용법||포시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음료, 마실 것'을 의미한다.|요 6:55에서 포시스는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롬 14:17에서 포시스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미래의 왕국이 아니라 현재의 영적 왕국, 곧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외적인 것들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질과 은혜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참조: Robertson).|그리스도인의 특권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란 "성령의 열매"(참조: 갈 5:22, 갈 5:23)를 가져오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W. M. Greathuse)|골 2:16에서 의식적으로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그러한 율법적 항목들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모든 압력에 저항해야 한다. 정죄의 도구인 율법은 십자가에 의해 폐지되었기 때문이다.|(참조: H. M. Carson).
몇 개나
povso"
얼마나 큰?, 얼마나 많은?.||포소스(Aeschyl. 이래)는 기본 어근 포스(%637)에서 유래한 의문 형용사이며, '얼마나 큰' how great?, '얼마나 많은' how much?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포소스는 27회 나오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a) "얼마나", 마 6:23; 마 12:12; 눅 12:24; 눅 16:5; 눅 16:7; 롬 11:24; 고후 7:11.|(b) "하물며", 마 7:11; 마 10:25; 눅 11:13; 눅 12:28; 롬 11:12; 몬 1:16; 히 9:14; 히 10:29.|(c) "몇" 또는 "몇 개나", 마 15:34; 막 6:38; 막 8:5; 마 16:9; 마 16:10; 막 8:19; 막 8:20.|(d) "언제부터", 막 9:21.|(e) "얼마나 많은", 막 15:4; 눅 15:17.|(f) "하물며 ... 얼마나", 히 10:2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강
potamov"
강 river, 시냇물 stream.||#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포타모스(Homer이래)는 본래 `빠르게 흘러가는 물', 다음에 `흐르는 물, 강이나 시냇물'을 의미하게 되었다.|포타모이, 즉 강들은 페가이(샘들, Eur., Hercules Fureas 1297)에서부터 생겨난다.||#2. 70인역본의 용법||포타모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40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하르(시냇물, 강)의 역어로 12회, 아람어 느하르(시냇물, 강)의 역어로 14회 등장, 요르(둘 다 강을 뜻함)의 역어로 54회, 원래 계곡 또는 여울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할의 역어로 9회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포타모스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막 1:5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한 무리들이 요단강에서 어떻게 요한에게 세례(침례)를 받았는지 보여준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단강은 이러한 세례(침례)와 관련하여서 뿐만 아니라 역사와 관련된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엔토 요르다비 포타모("요단강에서")라는 표현은 특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교리적 관심이 아니라 개종자 세례(침례)와는 달리 이 세례(침례)가 강에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강만이 세례(침례)를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침례)를 주기에 적합하였다. 그리고 엘리사 때부터 병을 치유하고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된(왕하 5:1-19) 요단강은 또한 세례(침례) 요한의 예언의 상징적인 행동의 장소가 되고(참조: 마3:6),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받는 장면(참조: 마3:13, 막 1:9)과 성령과 말씀으로 하나님의 현시하시는 현장이 된다(참조: 마 3:16=막 1:10이하; 눅 3:22; 요 1:32이하; 시 2:7; 사 42:1).||(b) 행 16:13에서 빌립보에 있는 제방에 기도처가 있는 작은 냇물 안기데스강을 가리킨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c) 고후 11:26에서 바울은 넘치는 강의 위험을 직면했다. 마 7:24이하, 눅 6:47이하에 나오는 비유는 물의 힘에 대해 묘사한다. 우기가 되면 강물이 급류로 흘러내리면서 집들을 쓸어갈 것이다. 이 비유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 지역 및 그 지역의 기후에 대한 실제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종말시의 홍수나 재앙과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d) 요 7:38에서 포타모스는 생수의 "강"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장막절 마지막 날, 물을 분배하는 엄숙한 의식을 행하는 날에 큰소리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기자는 예수님의 이 언급이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고 부언하였다.|이 구절의 구절이 분명하지 않고, 독구, 헤 그라페("성경")라는 문구의 용법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며, 따라서 해석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가장 좋은 해석의 열쇠는 요 7:37이하가 계 22:1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생수의 강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어린양과 연결되어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어린양이 강의 원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요 4:10에서도 예수님은 생명수의 원천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 물을 관리하고 분배하시는 분이시다. 동일한 해석은 요 7:37이하에도 적용된다.|이러한 초청은 유월절의 고대 초청과 유사하다. 요 7:39에서의 해석 또한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들 안에서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성령이시다. 포타모스의 사용은 생명의 힘과 충만함이 무제한적으로 작용할 것임을 시사해준다. 생명수의 강은 제자들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며, 믿음을 가진 목마른 자들이 그 강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향을 따라갈 때 우리는 그 물을 마시는 자들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계속 논쟁의 여지가 있다.|(참조: 사 12:3; 사44:3).||(e) ① 계 8:10이하에 강들의 삼분의 일에 대한 재앙을 언급한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이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포타모이는 쑥이나 피로 변함으로써 황폐된다. 오염되지 않은 강이 없다면 생명은 불가능할 것이다.|계 16:4에서도 강의 재앙을 말한다: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④ 계 22:1에 나오는 생명수의 강은 낙원에 있던 최초의 강(창 2:10이하)과 에스겔에 나오는 종말론적인 성전의 강을 결합시킨다(겔 17:1이하). 여기서는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사상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의 생명 나무는 창 2:9에 나오는 이와 유사한 나무와 연결되고 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역사는 새롭고 무한한 충만함으로 그의 창조 사역을 회복시키고 초월한다. 요 7:38을 제외하고는 생명수의 강이라는 개념과 정확히 유사한 개념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쿰란문헌에서처럼 생명의 원천이나 생명수에 대한 언급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보다 오래된 주제들이 체택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들은 여기서는 완성된 충만함의 개념 속에 통합된다.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의 성소들에는 그 성소 아래로 흐르는 거룩한 샘들이 있다. 따라서 이것을 생명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한 것과 약간의 유사성을 보인다. 우리는 이 강이 낙원의 강처럼 나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회복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철저한 회복이다.|(참조: Walter Bauer; O. Bocher; K. H. Rongstore).
물에 떠내려 간
potamofovrhto"
강에 의해 휩쓸려간, 강물에 압도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포타모포레토스는 포타모스($4215)와 포레오($5409: 항상 지니다, 입다, 착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강에 의해 휩쓸려간, 강물에 압도된'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포타모포레토스는 신약성경에서 계 12:15에 한번 나온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어찌함인고
potapov"
어떤 종류의, 또는 어떤 특질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의문 형용사 포타포스(Aeschyl., Xen., Pla. 이래)는 헬라 문법학자들에 의하면 '어떤 지역으로부터'와 같다.||(a) '어떤 나라, 인종, 또는 부족으로부터'(Aeschyl. 이래).|(b) '어떤 종류 또는 특질의'(Dionys., Philo.).||#2. 신약성경의 용법.||의문 형용사 포타포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b)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인격에 대하여,|①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②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③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b) 사물에 대하여,|①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② 막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여기서 포타포스는 '얼마나 큰, 얼마나 놀라운'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③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포타포스는 '얼마나 영광스러운'이란 의미를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그때에
potev
~한때, 이전에, 언젠가.||포테(Homer 이래)는 포소스($4214: 얼마나 많은, 얼마나 큰)와 테($5037)에서 유래한 전접 불변화사이며, '한 때, 언젠가, 이전에, 일찍이'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포테는 29회 사용되었으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a) "전에(는)", 요 9:13; 롬 7:9; 롬 11:30; 갈 1:23; 엡 2:3; 엡 2:13; 엡 5:8; 골 1:21; 골 3:7; 딛 3:3; 몬 1:11; 벧전 2:10; 벧전 3:5; 벧전 3:20.|(b) "언제까지", 고전 9:7.|(c) "이전에", 갈 1:13.|(d) "그때에", 엡 2:2; 엡 2:11.|(e) "언제든지", 엡 5:29; 벧후 1:10; 벧후 1:21.|(f) "아무 때에도", 살전 2:5.|(g) "어느 때에", 히 1:5; 히 1:13.|(h) 기타, 눅 22:3; 행 28:27; 롬 1:10; 갈 2:6; 빌 4:10; 히 2:1; 히 4:1.|(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어느 때까지
povte
언제?, 어느 때에?||포테(Homer 이래)는 의문 부사이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언제?', '어느 때에?', 마 25:37-39; 마 25:44; 눅 21:7; 요 6:25; 마 24:3; 막 13:4; 막 13:33; 막 13:35; 눅 12:36: 눅 17:20.||(b) '언제까지', 즉 '얼마나 오랫동안'(에오스 토테), 마 17:17; 막 9:19; 눅 9:41; 요 10:24; 계 6:10.|(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는지
povteron
둘 중 어느 것인지, ~인지 ~인지.||포테론(Homer 이래)은 '둘 중 어느 것인지', '~인지 ~인지'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요 7:17에 한번 나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 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잔
pothvrion
잔 cup.||#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포테리온(Alcaeus, Sappho이후)은 피노($4095: 마시다)에서 유래했으며, '마시는 그릇'의, 즉 '컵', '술잔'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포테리온은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코스(잔 cup)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잔은 주로 술잔을 의미하는데, 대체로 흙으로 만든 사발이다.|포테리온은 성전 예배에서 사용된 그릇을 가리키는 말로는 시 116:13에 단 한번 나온다. 비유적 용법에서 특기할 것은 진노의 잔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 잔을 건네 준다(시 75:8; 사 51:17). 이 잔은 그들의 감각들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을 비틀거레게 하고 넘어지게 한다. 이것은 마비시키거나(겔 23:33) 비틀거리게 하는 잔이다(사 51:17).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이 잔은 운명에 대한 그의 통제를 나타낸다. 진노의 잔인 이 잔은 그의 심판적인 주권을 가리킨다(시 75:7-8). 후기의 유대교도 이와 동일한 비교를 채택한다. 유월절 잔들이 열방에게는 형벌의 잔이나 이스라엘에게는 위안이 잔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구약의 이미지에 대한 독특한 용법을 사용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포테리온은 신약성경에서 31회 나오며, '잔'을 의미한다.||(a) 문자적 의미의 잔. 막 9:41; 병행구, 마 10:42과 마 7:4에서 포테리온은 일상적인 잔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23:25이하; 눅 11:29-눅 11:41의 "예수님께서 바리새주의를 비난하는 말씀에 나타난다. 바리새인들은 불순물로부터 잔의 겉을 깨끗이 하려고 함으로써 율법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위선이다. 왜냐하면 잔의 내용물이 욕심과 탐욕의 결과가 아니기만 하다면 깨끗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순결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잔의 안을 깨끗이 하라는 요구와 생생하게 연관되어 있다(눅 11:39). 따라서 이러한 일상적인 실례는 내적인 회심을 위한 필요를 예리하게 지적해 준다.||(b) 비유적 의미. ① 진노의 잔. 계시록에 나타나는 진노의 잔에 대한 용법은 구약성경의 진노의 잔에 대한 용법에서 유래한 것이다(위의 70인역본의 용법).|계 17:4(참조: 렘 51:7)에서 음부 바벨론은 그의 손에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금잔"을 가지고 있었다. 잔은 열방을 지배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영향력을 의미한다. 이 잔 속에 마실 것은 진노의 포도주로서 그 진노가 그것을 마시는 자들을 칠 뿐 아니라(계 14:9이하), 본래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그 마실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계 18:6에서 적그리스도에게 봉사하던 열방이 소환되는데, 그들은 사실상 바벨론을 짓밟을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들이다(계 17:15이하).|이 소환은 계 16:19의 결정에 따른 성취이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그의 진노의 맹렬함이 가득찬 포도주 잔을 주며 최후의 심판시에 바벨론의 통치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즉 최후의 정죄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계 14:10). 포도주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진로를 묘사하며 잔은 역사적인 세력을 통해 일시적으로 행사하든,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든 간에 그의 진노에 찬 심판의 능력을 나타낸다.|② 고난의 잔. 세베대의 아들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특별한 지위를 요구하였을 때 그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 막 10:38; 막 10:39)는 예수님의 대답은 단지 모든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순교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던지 물음은 순교를 받아들일 그들의 준비성에 관한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잔이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마 26:39; 마 26:42; 막 14:36; 눅 22:42). 그러나 몸부림치는 기도가 있은 후, 그는 요 18:11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 잔을 마실 준비를 하게 된다. 이 잔은 단지 잔인한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잔을 멀리하려고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다가갈 때 거룩한 분이 느끼는 두려움이다(막 14:33이하; 마 26:37이하; 눅 22:44이하).||(c) 최후의 만찬. ① 종말론적 말씀에서의 잔. 눅 22:17-눅 22:18에서는 막 14:25의 종말론적 말씀이 잔에 연결된다. 마가복음에서 "포도주의 열매"라는 표현은 그것이 본래 잔의 축복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유월절에 포도주를 마실 때 유대인들의 감사 속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은 첫 번째 유월절 잔과 관련된다. 이것은 하늘의 식사를 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식사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마시지는 않으나 제자들에게 그 잔을 돌렸다. 제자들은 하늘의 식사를 미리 보여주는 식탁 교제의 일치 속에서 이 잔을 모두 마시거나 이 잔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잔을 채워서 마셨을 것이다.|② 해석적인 말씀의 잔. 유대인의 축복의 잔은 이 해석적인 말씀의 잔과 일치한다. 최후의 만찬에 따른 순서와 의식이 유대의 관습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 잔과 말씀이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며 팔레스타인 교회에 의해 전승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막 14:23; 고전 11:25; 눅 22:20에서의 해석적 말씀은 그 내용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붉은) 포도주보다 잔이 항상 사용된 용어이다. 잔은 이 잔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잔을 상기시켜 준다. 이 잔을 제공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役事)를 중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이 잔을 받은 사람들 안에서 심판을 통해 구원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하신다. 신약의 공동체는 축복의 잔과 관계를 보았으며, 실제로 적어도 여호와의 잔에 대한 언급은 주의 잔이라는 개념 배후에 놓여 있다.|③ 주의 잔과 귀신의 잔(고전 10장). 고전 10:16이하에서 바울은 축복의 잔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가 축복하는 바"라는 표현은 이 언급을 우리가 이 잔에서와 이 잔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되게 한다.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참여, 즉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에 대한 참여를 의미한다. 이 잔이 우리를 그의 효험있는 능력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잔은 주님의 잔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동시에 마실 수 없다(고전 10:21).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희생 제물은 귀신들에게 드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이방신들에게 드려진 것을 마시는 자들(고전 8:10; 고전 10:27이하)은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배가 아닌 다른 것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인간이 주님의 잔과 더불어 귀신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없는 이유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마 6:24).|(참조: L. Goppelt; G. Brau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