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potamov"
강 river, 시냇물 stream.||#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포타모스(Homer이래)는 본래 `빠르게 흘러가는 물', 다음에 `흐르는 물, 강이나 시냇물'을 의미하게 되었다.|포타모이, 즉 강들은 페가이(샘들, Eur., Hercules Fureas 1297)에서부터 생겨난다.||#2. 70인역본의 용법||포타모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40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하르(시냇물, 강)의 역어로 12회, 아람어 느하르(시냇물, 강)의 역어로 14회 등장, 요르(둘 다 강을 뜻함)의 역어로 54회, 원래 계곡 또는 여울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할의 역어로 9회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포타모스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막 1:5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한 무리들이 요단강에서 어떻게 요한에게 세례(침례)를 받았는지 보여준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단강은 이러한 세례(침례)와 관련하여서 뿐만 아니라 역사와 관련된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엔토 요르다비 포타모("요단강에서")라는 표현은 특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교리적 관심이 아니라 개종자 세례(침례)와는 달리 이 세례(침례)가 강에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강만이 세례(침례)를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침례)를 주기에 적합하였다. 그리고 엘리사 때부터 병을 치유하고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된(왕하 5:1-19) 요단강은 또한 세례(침례) 요한의 예언의 상징적인 행동의 장소가 되고(참조: 마3:6),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받는 장면(참조: 마3:13, 막 1:9)과 성령과 말씀으로 하나님의 현시하시는 현장이 된다(참조: 마 3:16=막 1:10이하; 눅 3:22; 요 1:32이하; 시 2:7; 사 42:1).||(b) 행 16:13에서 빌립보에 있는 제방에 기도처가 있는 작은 냇물 안기데스강을 가리킨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c) 고후 11:26에서 바울은 넘치는 강의 위험을 직면했다. 마 7:24이하, 눅 6:47이하에 나오는 비유는 물의 힘에 대해 묘사한다. 우기가 되면 강물이 급류로 흘러내리면서 집들을 쓸어갈 것이다. 이 비유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 지역 및 그 지역의 기후에 대한 실제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종말시의 홍수나 재앙과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d) 요 7:38에서 포타모스는 생수의 "강"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장막절 마지막 날, 물을 분배하는 엄숙한 의식을 행하는 날에 큰소리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기자는 예수님의 이 언급이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고 부언하였다.|이 구절의 구절이 분명하지 않고, 독구, 헤 그라페("성경")라는 문구의 용법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며, 따라서 해석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가장 좋은 해석의 열쇠는 요 7:37이하가 계 22:1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생수의 강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어린양과 연결되어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어린양이 강의 원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요 4:10에서도 예수님은 생명수의 원천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 물을 관리하고 분배하시는 분이시다. 동일한 해석은 요 7:37이하에도 적용된다.|이러한 초청은 유월절의 고대 초청과 유사하다. 요 7:39에서의 해석 또한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들 안에서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성령이시다. 포타모스의 사용은 생명의 힘과 충만함이 무제한적으로 작용할 것임을 시사해준다. 생명수의 강은 제자들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며, 믿음을 가진 목마른 자들이 그 강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향을 따라갈 때 우리는 그 물을 마시는 자들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계속 논쟁의 여지가 있다.|(참조: 사 12:3; 사44:3).||(e) ① 계 8:10이하에 강들의 삼분의 일에 대한 재앙을 언급한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이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포타모이는 쑥이나 피로 변함으로써 황폐된다. 오염되지 않은 강이 없다면 생명은 불가능할 것이다.|계 16:4에서도 강의 재앙을 말한다: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④ 계 22:1에 나오는 생명수의 강은 낙원에 있던 최초의 강(창 2:10이하)과 에스겔에 나오는 종말론적인 성전의 강을 결합시킨다(겔 17:1이하). 여기서는 생명의 충만함에 대한 사상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의 생명 나무는 창 2:9에 나오는 이와 유사한 나무와 연결되고 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역사는 새롭고 무한한 충만함으로 그의 창조 사역을 회복시키고 초월한다. 요 7:38을 제외하고는 생명수의 강이라는 개념과 정확히 유사한 개념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쿰란문헌에서처럼 생명의 원천이나 생명수에 대한 언급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보다 오래된 주제들이 체택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들은 여기서는 완성된 충만함의 개념 속에 통합된다.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의 성소들에는 그 성소 아래로 흐르는 거룩한 샘들이 있다. 따라서 이것을 생명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한 것과 약간의 유사성을 보인다. 우리는 이 강이 낙원의 강처럼 나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회복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철저한 회복이다.|(참조: Walter Bauer; O. Bocher; K. H. Rong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