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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mountain, 산맥 혹은 산악지방 mountain chain or reg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오로스는 '산, 산지'를 의미하며, 복수로 '개개의 산, 산지'를 의미한다.||(a) 고대에서 산의 인상적인 자연적 현상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종교적 개념들을 일깨웠다. 첫째로 산의 위력은 강, 샘, 폭포와 함께 신(神)으로 숭배케 하였다.|다음에 산과 높은 곳에는 신령들(spirits)이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높은 지역들에서 산 봉우리는 신들의 거처로 여기거나 그 봉우리에 있는 보다 높은 신들의 제의 예배로 이끌었다. 빛의 신이나 생명의 신은 산의 봉우리와 연관되며, 어두움의 신이나 흑암의 신은 산의 안쪽 부분 또는 산의 나무들이나 광야들과 연관된다. 최초의 산의 개념은 일반적인 신화적 개념이다.||(b) 근동 지방에서 산은 종종 힘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있어서 산은 멀고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동쪽과 서쪽의 산들 위에 하늘이 얹혀 있고, 거기서 태양이 뜨고 진다. 만다야 교도들의 두 개의 순결한 산과 두 개의 어두운 산은 이러한 사상을 반영한다. 신들의 거처인 백향목산, 신들이 태어난 산, 신들이 모이는 회합의 산, 그 꼭대기가 하늘에까지 닿아 있으며, 그 기초가 푸른 바닷물 심연에 있는 바람의 산 등에 대한 다양한 언급들이 있다.|역사시대에서 '큰 산'은 큰 세력, 대주제를 의미하며, '산 당'(mountain house)는 사원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이 용어와, 그리고 지구랫(zigurrat)의 건축은 신의 접근 장소나 신들의 거처로서의 산을 생각 나게 한다. 서쪽에 해지는 언덕과 그 내부는 생의 어두운 면, 죽음과 심판과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서 또한 죽은 자의 심판이 행해질 것이라고 한다.||(c) 헬라인들의 산들에 대한 사상은 바벨론 인들과 다르다. 그리스의 국도는 숲이 울창한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산들이 여행자들에게는 위험할지라도 헬라인들은 그 산들을 그들의 조국의 장식으로 찬양한다. 잘 자란 산림과 만년설 지역으로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은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에게 신의 능력이라는 감각을 준다. 신들과 정령(nymphs)들과 뮤즈신들(muses)이 살고 있는 많은 봉우리들 중에서 올림푸스는 곧 신들의 최고의 집으로 구별되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이 산은 최고 의미로서 자연적, 윤리적 완전의 상징인 것이다.||(d) 소아시아에서 위대한 어머니에 대한 숭배는 산과 연결되어 있다. 자연의 어머니는 산 주위나 숲속에서 몰아치는 폭풍 가운데 감지되며, 밤중에 난무하는 나무들의 춤 속에서 볼 수 있다. 산은 여기서 삶의 어두운 측면에 속한다(참조: 키벨레 산의 동굴들과의 연결).||(e)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는 산에 대하여 신성한 경의를 표하여, 제의적인 예배가 산에서 행해진다. 산은 신들의 거처이자 신들이 회합하는 장소이다. 여기서도 산은 힘의 상징들로 사용된다.||#2. 70인역본의 용법.||오로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타나며, 7개의 히브리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지만 주로 히브리어 하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구약성경은 산이나 작은 산(언덕)에 대해 많이 언급하였다. 산에서 풀이 자라 푸른 초장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하나님이 "산에 풀이 자라게"하신다(시 147:8이하)|팔레스틴에 있는 대부분의 산들은 3000피이트 이상을 넘지 않으며 따라서 봉화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침략의 신호대로 사용된 봉화대는 심판의 신탁에서도 사용되었다(사 13:2; 참조: 사 30:17).|산에서는 멀리 바라볼 수 있다. 모세가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본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실 모든 것에 대한 계시였지만(신 34:1-4) 모세는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 않았다.|음성들이 산들을 가로 지른다. 예언과 비유가 산에서 전달되어(삿 9:7) 백성들이 그곳에서부터 그 말씀을 받기도 하였다(삼하 2:25이하; 대하 13:4).|그러나 산과 협곡은 교통, 곧 여행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다(왕하 19:23; 사 37:24). 산들은 외롭게도(삼상 23:14) 부끄러운 죽음의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Ps. Sol. 2:26),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삼 6:2; 시 11:1).||(b) 예언과 시에 있어서 산은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산을 설정하시고(시 65:6), 산의 무게를 측량하시며(사 40:12), 산을 쳐서 부셔 버리며(사 41:15), 산을 옮겨 놓으시며(욥 9:5), 산을 평탄하게 하신다(사 40:4). 산들은 하나님 앞에서 떨며(삼 5:5), 하나님에 의해서 불살라지고(신 32:22), 하나님 앞에서 녹는다(미 1:4). 산은 또한 정치적 권력을 상징할 수 있다(렘 51:25; 단 2:44).||(c) 산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삭을 산에서 바치도록 하셨고, 하나님은 그 때 거기에 나타나셨다(창 22:2).|모세는 아말렉족과 전쟁하는 동안 산꼭대기에서 기도하였다(출 17:9이하).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기도하러 올라갔다(왕상 18:42). 축복과 저주는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선포되었다(신 11:29; 신 27:12이하; 수 8:33). 이스라엘 사람들의 할례는 할례산(Haaraloth)에서 거행되었다(수 5:3).|법궤는 산에 안치되었다(삼상 7:1; 삼하 6:3). 사무엘은 산당에서 희생제사로 드렸다(삼상 9:12이하; 삼상 19:25; 왕상 3:4; 대상 16:39; 대상 21:29; 대하 1:3, 대하 1:13). 산당에서 제사에 대한 선지자들의 반대는 결국 예루살렘을 예배 중심지가 되게 하였는데(신 12:2-9) 그들의 반대는 예배 중심지가 산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중심지가 가난안 사람들의 생각 및 행동과 결부된 것이기 때문이었다(W. Foerster, TDNT 481이하).|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던 여부스 사람들의 성채를 점령하였으며(삼하 5:6-10) 그 후 솔로몬은 높은 곳에 성전을 세웠다. 따라서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이 되며,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유일한 장소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산의 신이 아니라고 강조되어 지며(왕상 10:23, 왕상 10:28-29), 시내산과 시온산은 그러한 의미에서 거룩한 곳들은 아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산이다. 예언들이 산으로부터 발해진다(민 23:7에서의 발람, 그리고 참조: 삼상 10:5).||(d) 산들은 지형학적 변화와 함께 종말론 기대에도 나타난다. 산은 충만의 상징인 포도주로 흠뻑 젖어 들 것이다(암 9:13; 욜 3:18). 산들은 돌아오는 포로들을 위하여 평평해질 것이다. 이는 포로 생활에서 귀환할 때의 하나님의 지배 하심에 대한 상징이다(사 40:4; 사 45:2). 성전을 내려다보고 있는 감람산은 갈라질 것이다(슥 14:4). 시온산은 다른 산들보다 더 높아질 것이며 이방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사 2:2-4; 미 4:1-3). 여기에서 시온은 여호와와 만나는 중심지로 간주된다. 이방인들도 그들이 여호와의 길을 찾으면 이스라엘의 일원이 될 것이며 세상은 평화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e) 구약성경에는 산의 신화가 거의 없다. 신화적인 암시들이나 반향들이 창 49:26; 시 68:15; 시 48:2; 슥 6:1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사 14:12이하와 겔 28:11이하는 이교도 통치자들의 몰락을 조롱하는 노래들에서 신들의 산에 대한 신화를 역설적으로 사용한다.|위경은 신화적인 주제들을 보다 강하게 인용한다. 예를 들면 낙원과 하나님의 산을 동일시 하는 경우이다(Eth. En. 24-25장). 구약에서 신화적인 비유적 표현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구약성경이 영적인 서술과 감각적인 서술을 대립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관심이 역사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 헬라어와 구약성경의 하르와 같이, 단수는 '산'(요 4:20이하; 행 7:30; 히 12:22 등), '산맥이나 산지'(막 5:11 등)에 대해, 그리고 많은 경우에 복수는 '산맥이나 산지'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18:12; 막 13:14 등).||(a) 팔레스타인의 지형은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교훈도 보여준다.|팔레스타인에서 산 위에 세운 도시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이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 바로 뒤에 온다. 이 말씀 뒤에는 등불을 등경위에 둔다는 말씀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권면이 온다 → 소금에 관한 말씀은(마 5:13) 소금의 유용성에 그 초점이 있고 빛과 동네에 관한 말씀들은 제자들의 존재 이유에 그 초점이 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그들의 삶의 특성은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사 2:2, 사 2:5이 암시되어 있다: "만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참조: 미 4:1-3). 종말론적인 약속은 제자들의 무리 안에서 성취될 수 있다. 우리도 여기에서 그를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혹은 축복하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창 12:3; 창 18:8; 창 22:18; 창 26:4; 창 28:14; 참조: 행 3:25; 갈 3:8). 빛이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분명해 지듯이, 열방들도 새 예루살렘인 그들에게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나아올 것이다. 이 마태복음의 말씀은 산 위에 성채와 같이, 교회의 무적성(invincibility)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고 있다.|마 18:12에서 잃은 양 비유에서 목자는 "산에" 곧 위험한 고립 상태에 99마리를 남겨 두었다.|마 17:20(병행구절, 막 11:23)에서 산들을 옮기는 믿음에 관한 말씀은 실제 산 앞에서 언급되었다. 산을 움직인다는 신앙의 위력에 관한 말씀(마 17:20) 배후에는 아마도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속담 투의 말이 있는 것 같다(참조: 사 40:4; 사 49:11; 사 54:10). 그렇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산"은 세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변형의 산을 의미하는 것 같다(마 17:1 병행구. 막 9:2; 눅 9:28; 마 17:9 병행구. 막 9:9; 눅 9:37). 그렇지만 마가복음에는 이 말씀이 생략되어 있으며 눅 17:6에서는 이 산이 "이 뽕나무"로 바뀌어 진다. 전통적으로 이 산은 다볼산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몇몇 학자들은 헬몬이나 메론산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변형과 연관시켜 볼 때, "이 산"을 움직일만한 신앙의 위력이 더욱 더 인상적이다. 그렇지만 마가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와 기도의 위력과 관련지어 이 말씀을 한다(막 11:20-26). 마가의 문맥은 "이 산"이 감람산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맨슨(W. Manson)은 이 구절이 슥 14:4를 암시하고 있다고 보았다(Jesus the Messiah, 1943, 29이하). 앤더슨(H. Anderson)은 이 말씀의 마가적 형태가 최초에는 생생한 믿음은 인간의 업적이라는 사실, 즉 믿음은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장애물은 극복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 같다고 추측한다(The Gospel of Mark, New Century Bible, 1976, 268). 그러나 그는 그러한 추측이 그가 더 원문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말씀의 마태판에서 거부되긴 하지만 마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믿음은 하찮은 겨자씨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부르심은 보다 더 위대하고 강한 믿음에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고 그 자체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을 약속 받은 믿음" 에로의 부르심이다(E. Schweizer, Jesus, 1971,234). 마가복음에서 무화과 나무는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때문에 말라 죽는다. 믿음은 중보기도와 인간 상호간의 용서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이렇게 해서 죄가 제거되며 이것은 산을 움직이는 것에 비할 수 있다).|눅 23:30(호 10:8)는 유대의 지형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참조: 계 6:15이하).|유사하게 히 11:38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막 13:14에서 예수님의 재난의 때에 예루살렘을 피해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은 산과 거기에 있는 동굴들을 피난처로 삼으라는 말이며, 주후 66년에 펠라(pella)로 도피함으로 성취된 것이다.|막 5:11(눅 8:32)에서 게네사렛 호수 동쪽 해안 이방의 산지에 있는 돼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오직 이 구절에서만 귀신들이 묘지 뿐만 아니라 산지에 거하였다고 말해 준다.||(b) 복음서는 예수님이 산에서 한 일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예수님은 종종 산에 올라 가셨다(마 5:1; 마 8:1; 막 3:13; 눅 6:12; 마 15:29; 요 6:3, 요 6:15; 막 6:46; 마 14:23; 눅 9:28).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셨다(막 6:46; 마 14:23; 눅 6:12; 눅 9:28). 막 1:35에 보면 그가 산으로 들어가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였다. 예수님은 산에서 12제자, 곧 사도들을 선택하셨다: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막 3:13-14).|예수님은 산에서 병자들을 고치셨다(마 15:29이하).|예수님은 산에서 가르치셨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1이하). 예수님께서 베푼 수훈의 산은 바로 가까이 있는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일부 주석가들 관사를 강조하여, '그 산' 곧 '새 시내산'이나 '거룩한 역사의 산'이라고 말하나 이 같은 강조는 본 수훈이 이 산에서 행해졌음을 말한다. 이 연상은 마태가 고의적으로 그의 이야기 안에 출애굽 주제를 확립시킨 것이라는 가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 산은 가버나움 근처인 것 같다. 후기의 전언은 이곳이 '하틴 첨봉'(The Horns of Hattin)이라고 한다.|예수님은 천국의 왕으로서 천국의 최고의 법(헌범)을 제자들에게 주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님께서 산 위로 올라가실 때 그의 올라가심은 하나님 편에서 행하시는 어떤 행동에 대한 전조였다(기도와 가르침과 병고치심과 부르심 등의 실례들, 마 3:16; 막 1:10; 마 5:1; 마 14:23; 마 15:29; 막 3:13; 눅 9:28).|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산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 시험의 산은 그 위치가 정확히 지적되어 있지 않다. 병행구절인 눅 4:5에는 "산"이란 표현이 없다. 실제로 성지(聖地)에서나 세상의 어느 산에서도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한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마귀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나라를 보였다는 표현은 문자에 구애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전시(展市)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특히 그 영광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어떻게 예수님의 눈 앞에 보여졌는지에 대하여는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 있다. 어쨌든 예수님이 실제적인 산정(山頂)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 임금(마귀)이 그의 비법적 능력으로 그가 지배하는 강대한 영역을 바로 예수님의 눈 앞에 순식간에 보여 주었던 것이다(R. C. H. Lenski).|계 21:10에 병행 내용이 있다(참조: 겔 40:2). 여기서 높은 산으로부터 내려다보는 것은 성령 안에서 종말론적인 사건을 살피는 것을 상징한다.|예수님은 산에서 변형되었다. 변형의 산의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변형은 다볼산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다볼산은 요새로 이용되었으며 헬몬 산은 그 기슭에 몇몇 서기관들을 포함한 큰 무리들이 모였다는 것과(막 9:14) "갈릴리를 지나" 되돌아왔다고(막 9:30) 말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갈릴리(그리고 현대 이스라엘의 경계 내에서)에서 가장 높은 산은 메론 산(3,926피이트)인데, 마 17:1; 막 9:2의 묘사는 이 산을 일컫는다. 눅 9:28에 기록되어 있는 정관사 "the"는 특별한 산이나 산맥을 나타내지만 너무나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이 잘 알려진 어떤 지역을 암시해 준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한편 확실히 예수님의 변형은 시내산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즉 모세의 출현, 구름, 초막에 관한 언급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눅 9:31, 직역하면 "출애굽" exodus)이 그러하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산에서 제자들과 만났다(마 28:17). "예수님께서 [가라고] 명하시던 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관한 기사가 누가복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산은 특정한 산의 특정한 장소를 지적한다. 이 지정은 이전에 나타나셨던 때 중의 어느 한 때에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 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난날에 예수님께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신 어느 산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산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중대한 사건을 표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그의 대 설교(마 5~7장)를 하셨고, 산에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셨고, 산에서 변형된 영광 속에서 자기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산정에서는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맞닿는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영화된 구주께서 하늘과 땅에서의 그의 권세를 말씀하셨다. (R. C. H. Lenski).||(c) 신약성경은 산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종말론적인 기사들을 포함한다. 눅 3:4-5은 사 40:3이하에 보다 넣은 영역을 제시한다. 누가가 사 40:3-5를 인용하여 주님이 오실 때 산과 언덕이 평평해지리라고 언급하고(눅 3:4-6) 눅 21:5-7에 감란산이란 말을 생략한 것은 그가 산 없는 종말론적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가 심지어 장엄한 산조차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성경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주님께서 "구원"을 가져오실 때(눅 3:6; 누가 신학의 주요 주제를 강조하고 있음), 모든 것들은 그가 오시는 길을 예비해야 한다.|계 8:8에서 '불 붙는 큰 산 같은 것'은 주후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우스(Vesuvius)산의 분출과 같은 동시대의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산은 능력을 표현한다. 산이 불 붙었다면 그 산의 능력이 파괴적인 힘이라는 의미이다. 렘 51:25은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유사한 묘사를 담고 있다. 거기에서 산은 이교의 세력이며, 여기서 산은 경건치 않은 세상을 형벌하는 도구이다.|계 6:14에서 "산과 섬이 … 옮기우는"(움직이거나 이동하는 것) 것은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린다.|계 16:20에서는 산들과 섬들이 사라지며, 계 20:11에서는 그 절정에서 하늘과 땅이 멸망한다. 섬들은 이방인들을 위한 안전의 장소이며, 산들은 힘의 상징들이다. 따라서 요점은 흔들림이며, 그 다음으로는 이교도의 힘과 안전의 파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사이에 거하시는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성전이나 제단이 없듯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새로운 산이 옛 산들을 대신하지 않는다(계 21:3). 요한계시록은 여인이 앉아있는 일곱 산들에 대하여 $3735를 사용한다. 이 산들은 어떤 구체적인 의미에서 로마의 일곱 언덕들은 아닐 것이다. 바벨론이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세속적인 권력과 문화를 대표하기 때문이며, 그 일곱이라는 수가 이러한 완전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상(참조: 요일 2:16)은 모든 세상 권력들, 즉 산들의 보좌 위에 앉아 있으며, 적그리스도, 즉 짐승은 이러한 권력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계 17:11).|(참조: C. Brown; W. L. Liefeid; W. Foer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