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 있는
yucikov"
프쉬케의, 육적인, 천성적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프쉬키코스(Aristot., Diocles, Ptolem)는 프쉬케($5590: 호흡, 영혼)에서 유래했으며, '프쉬케의, 영혼에 속하는, 육적인, 천성적인'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프쉬키코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프쉬키코스는 프뉴마의 종말론적인 부여가 없이도 살 수 있는 자연적인 인간성을 의미한다. 만일 불신자가 프쉬키코스하다면 진보가 없는 신자는 사르키코스($4559: 육신에 속한) 한 자이다. 프쉬키코스가 됨이 사르키코스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일한 비난을 수반하지도 않는다. 프쉬키코스한 자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지상적인 것, 즉 그 사르크스($4561)에 머물 때 하나의 사르키코스가 된다.||(b)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참조: 고전 15:44-49). 이것은 고전 15:45에서의 바울의 견해이다. 요 3:31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지혜서와 필로의 윤회 사상이 그 배경에 놓여있다. 육적인 것은 그 자체로는 죄악된 것도 아니며 프뉴마로 기우는 경향도 없지만, 부패하기 쉽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바울은 프뉴마 조오포이운으로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것과 대조시킨다. 이것은 부활에서의 하나님의 영(스 37:14)을 창 2:7의 죽어야할 운명의 혼과 대조시키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멸망이 고려된다는 사실로 보아 바울은, 인간의 지상의 부패의 측면을 강조하는 지혜서의 전승과 관련있으며, 또한 순수한 묵시적 사상과 구별된다. 이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담 혹은 새로운 아담에 속하는 인간성에 대한 사상이다. 그러나 바울의 사상이 그의 반대자들의 사상과 확연히 다른 점은 하늘의 영적 존재는 아직 미래의 것이지 육의 껍질 속에 감추어져 있는 씨가 아니라는 종말론적 조건이다. 장차 올 것은 오직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서만 주어지며, 육과 영 사이의 연속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프뉴마 조오포이운 안에서 우리 외부에 놓여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의 지나친 열광과 비교되는 바울의 침착성은 단지 영적인 것의 미래적 속성을 강조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심지어 종말에도 사람은 고전 15:48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동등해지지 않을 것이다. 고전 15:48에 따르면 유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아담과 같은 프쉬케 조사라면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창조적 영인 프뉴마 조포이운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는 단지 소마 프뉴마티콘일 뿐일 것이다.||(c) 약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여기서 하나님과 그의 비밀을 아는 것에 대하여 문제가 제기된다. 프쉬키코스는 세상적인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닫혀진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기서 이 제한은 마귀적인 것이다. 지상 혹은 낮은 영역은 악한 귀신들이 다스리며 따라서 다툼, 요란, 분쟁이 일어난다.||(d) 유 1: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유다서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프뉴마를 떠나 사는 프쉬키코스를 자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불경건한 사람과 동일시한다. 확실히 지상의 것은 그 자체로서는 악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 이미 관찰된 이 충동은 바울의 경우에서보다 여기서 더욱 강력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의 도움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의 정욕과 불신앙의 희생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