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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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더 닮아가게 하는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영적 성장은 아마 베드로후서 1:3-8에 제일 잘 묘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적 성장의 목적인 거룩한 삶들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데 있어 핵심인 “하나님께 관한 우리의 지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 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 자신의 교화와 성장을 위해 주어진 말씀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갈라디아서 5:19-23에는 두 가지 목록들이 있습니다. 19-21절들은 ‘육체의 행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의 우리의 삶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행위들은 우리가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할 것들입니다. 영적 성장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삶들에서 ‘육체의 행위들’이 점점 더 감소되는 것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성령의 열매”의 목록입니다(갈라디아서 5:22-23). 이런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경험한 지금의 우리의 삶들을 특징화 시키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한 신자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점점 더 분명 해지는 것에 의해 확인됩니다.

구원으로 인한 변화가 일어날 때, 영적 성장은 시작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요한복음 14:16-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오래 되고, 죄악된 본성은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성품에 자리를 내 주기 시작합니다(로마서 6장-7장). 영적 성장은 평생이 걸리는 과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적용하며(디모데후서 3:16-17),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는(갈라디아서 5:16-26)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신장 시켜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구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며, 영적 성장을 이루는 데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죄를 극복할 수 있고 꾸준하게 우리의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닮아갈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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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6:9-13 과 누가복음 11:2-4에서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9-13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우리가 정확히 글자 그대로 암송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이 그 말들 자체에 어떤 능력이나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마법을 가진 주문처럼 여깁니다.

성경은 그와 상반되게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속에 자신이 언급되는 것 보다는 우리의 마음들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지십니다. 마태복음 6:6-7은 말씀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에서, 우리는 외워두었던 하나님의 말씀들을 단순히 낭송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아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 즉, 기도의 모범으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기도에 포함되어야 하는 ‘요소들’을 제공합니다. 주기도문이 어떻게 나뉘어 지는지 살펴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가 드려질 대상이 하나님 하버지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찬양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는 우리가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들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들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라고 격려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고 죄들로부터 돌아 설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던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 할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주기도문의 결론인,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죄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도록 도움을 구하는 간구이고 악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는 요청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억해서 하나님께 다시 암송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오로지 한 예입니다. 주기도문을 암기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께 주기도문으로 기도 드리는 것이 잘 못된 것입니까? 당신의 마음의 그 안에 담겨 있고 당신이 말하는 그 말이 당신의 뜻이라면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특정한 단어들보다, 우리가 그분과 교통하는 것과 우리 마음들로부터 나오는 말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십니다. 빌립보서 4:6-7은 표명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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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요한복음 14:13-14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어떤 사람들은 기도 끝에 ‘예수님 이름으로’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항상 간구한 것을 허락하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며, 이 구절을 잘못 적용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예수님 이름으로’란 말을 주문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로 기도하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들에 응답해 주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한일서 5:14-15).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예롭고 영화롭게 할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라고 기도 끝에 말하는 것은 주문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구하고 기도 가운데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과 그분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 이름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의 말미에 어떤 단어들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진실하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 안의 단어들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 뒤에 숨어 있는 목적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들을 위한 기도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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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응답 받은 기도는 하나님께 드려진 기도의 간구를 그분께서 허락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기도의 간구가 허락 받지 못하면, “응답 받지 못한 기도”라고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는 기도들 잘 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올려진 모든 기도들을 응답하십니다. 가끔은 하나님께서 “안돼” 또는 기다리라”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간구할 때만 오로지 우리의 기도들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가지는 확신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한일서 5:14-15).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 일까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하거나 성경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히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우리 삶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도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구하면 우리에게 지혜를 허락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야고보서 1:5은 표명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인 많은 것들의 윤곽을 보여주는 데살로니가전서 5:12-24은 우리가 시작하기 좋은 성경 구절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수록, 우리는 무엇을 기도할지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복음 15:7). 우리가 무엇을 기도할 지 더 잘 알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들에 대해 더 자주 “Yes”라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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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1-7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있어 인내의 중요성을 예시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원수에 대한 공의를 찾고자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온 한 과부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간구에 있어 그녀의 지속적인 인내심 때문에, 재판관은 누그러졌습니다. 예수님의 요점은 불의한 재판관이 인내심을 갖고 공의를 요구하는 사람의 탄원을 들어 줄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를 할 때 자신께서 선택하신 자들인(7절) 우리 의 기도를 더 많이 들어 주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잘 못 해석 되듯이, 우리가 어떤 것을 위해 반복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의무를 가지신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원수를 갚고,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며,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그들을 공평히 다루며,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구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공의롭고, 거룩하고, 그리고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에서 있어, 그분께서는 자신의 약속들을 지키며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누가복음 11:5-12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예를 보여주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와 비슷하게, 이 말씀에서의 예수님 메시지는, 사람이 어려운 친구를 위해 자신의 불편을 감수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요청도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한다면, 우리가 그저 계속 요청하기만 하면 우리가 요청하는 무엇이라도 우리가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에 부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게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동일한 약속이 마태복음 7:7-11에서 반복되고 누가복음 11:13에서는, “좋은 것(좋은 선물)”이 성령이라고 덧붙여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두 문장들 모두가 우리에게 기도하고 또 계속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같은 것을 반복해서 요청하는 것은 잘 못 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한(요한일서 5:14-15), 하나님께서 당신의 요청을 들어주시거나 또는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그런 욕구를 지워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간구하십시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을성과 인내심을 가르치기 위해 기도들의 응답을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게 만드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삶들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가 아직 아닌데도 우리는 어떤 것을 간구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어떤 것을 간구하는데, 하나님께서는’no’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 드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속 구하십시오. 계속 두드리십시오. 계속 찾으십시오. 당신이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 혹은 당신이 구하는 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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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 교훈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진실만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결코 속이지 않으십니다. 욥기 34장 12절은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고 선언합니다. 두 번째 교훈은,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헬라 단어 그라페(graphe)는 신약 성경에서 51번 사용되는데 구약의 글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성경의 말씀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호흡"이라고 확증합니다. 또한 그라페라는 단어는 신약에도 적용되는데 특히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3장 16절에서 바울 서신들을 "성경"이라고 부르고 있고, 바울(디모데전서 5장 18절에서)은 누가복음 10장 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성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우리는 신약 성서의 글들이 "성경"이라는 특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이 “모든 성경”에 대하여 언급한 특성을 그 글들에 적용하면 옳습니다.

이 정보는 왜 기도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자, 하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시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논리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신다고 말하기 때문에(시 17:6, 77:1; 사 38:5),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말할 때 하나님이 그의 말을 들으실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서 성경을 읽을 때 그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정상적인 교통을 위해서는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가 필요한데, 그 관계는 세 가지 방법으로 입증됩니다. 첫 번째는 회개, 곧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시편 27편 9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간청을 들으시고 진노 가운데 얼굴을 숨기지 않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서 얼굴을 돌이키시며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통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예는 이사야 59장 2 절인데, 그 구절에서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합니다.

또한 교통에 필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66장 2절에서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의로운 삶입니다. 이것은 죄에서 돌이킨 상태의 적극적인 측면인데 특별히 기도의 효력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음성으로, 마음으로, 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실 것과 또한 성령께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기도하도록 도우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님이 특정한 행동이나 결정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항상 직접 어떤 생각을 마음 속에 넣어주실 것이라고 믿기보다는 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는 모든 혹은 일부 생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삶의 특정 사안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에 성경 외적인 계시를 찾고 싶은 미혹을 받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에 자기 기만에 빠지거나 하나님의 입을 막지 않기 위해서는 주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성경적인 원칙들을 참조로 하여 해답을 얻는 것이 가장 지혜롭습니다.

또한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간절히 지혜를 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기도는 어떻게 하나님과의 교통이 됩니까? 기도는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대답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를 이끄십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서거나 앉거나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우리 손을 펼치거나 접거나 하늘로 올려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할 때 눈을 감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교회 건물이나 밖의 자연에서 기도하는 것이 더 낫습니까? 일어나면 기도해야 하고 잠들기 전에도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할 때 말해야 하는 특정 단어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시작합니까? 기도를 마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들과 여러 다른 질문들이 기도에 대해 묻는 질문들입니다. 기도하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위의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중요합니까?

너무나 자주, 기도가 "마법의 공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거나 올바른 자세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지도 않고 응답하시지도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비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몸의 자세로 기도하는지에 근거하여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요한일서 5장 14-15절에서 기도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이 우리의 말을 들으시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분의 뜻 안에 있다면 허락하실 것을 알고 확신을 가지라는 말을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4장 13-14절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 및 여러 다른 성경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이름으로(예수님께 영광이 되도록) 기도하는지의 여부에 근거하여 우리의 기도 요청에 응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적절한기도 방법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4장 6-7절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그분의 평강의 선물로 그러한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적절한 기도의 방법은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하나님께 부어 정직하고 하나님과 함께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아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요청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명심하면서 요청을 드려야합니다. 기도할 때 올바른 말만 하는 것에 대한 염려없이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와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말의 웅변보다 마음의 내용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13절까지 나오는 주님의 기도는 성경이 기도에 대한 "본보기"를 제시하는 데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암기하고 암송해야 할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로 드려야 할 것들의 예는 예배, 하나님을 신뢰, 요청, 고백 및 복종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말하는 것에 대해 기도하고, 우리 자신의 말을 사용하며, 그것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신의 여정에 맞게 "주문제작"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적절한 기도의 방법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입니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무릎을 꿇거나, 손이 열려 있거나 닫혀있거나, 눈을 뜨거나 감거나, 교회, 집, 외부에서 하든, 아침이나 저녁에 하든, 이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로 개인적인 선호도, 확신, 적정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기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진정하고 개인적인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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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단히 말하면,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행위입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사무엘, 히스기야, 엘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다니엘의 경우를 보면 기도를 통한 중보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는 신약 성경에서 궁극적인 중보기도 자로 묘사되고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에 중보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다른 그리스도인들 및 잃은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간구하며 기도로 중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중보기도의 훌륭한 본은 다니엘서 9장에 있습니다. 이 기도는 참된 중보기도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보 기도는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2절). 열정으로 기도하고(3절) 자기를 부인하며 기도하고(4절)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가 되어 기도하며(5절) 죄악을 자백함으로 힘을 얻고(5-15절)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고(4, 7, 9, 15절) 하나님의 영광을 그 목표로 삼고 기도합니다(16-19절).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처럼 자신을 부인하는 의식 가운데 자기의 무가치함을 인식하면서 상한 심령과 회개하는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다니엘은 "나는 주님의 특별한 택함 받은 중보자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러한 요구를 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고 또한 실제로 “나는 아무 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참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그 기도가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유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참된 중보기도는 우리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다음은 누구를 위해 중보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그 목록 중 일부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자들(딤전 2:2), 사역자들(빌 1:19), 예루살렘(시 122:6), 친구들(욥 42:8), 동족들(롬 10:1), 병든 자들(약 5:14), 원수들(렘 29:7),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마 5:22), 우리를 버린 자들(딤후 4:16), 그리고 모든 사람들(딤전 2:1)입니다.

특별한 중보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수퍼 그리스도인"의 특수 부류만이 중보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그릇된 사상이 현대 기독교 내에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중보 기도자로 부름을 받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 마음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으며,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처럼(롬 8:26-27), 우리는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독점적으로 어떤 엘리트 그리스도인들에게 국한된 특권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리라”(삼상 12:23).

베드로와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할 때, 중보기도를 위해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그들의 요구를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자들은 단지 중보기도의 은사를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기도했음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6-18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 전부에게 그들의 기본적인 삶에 중보기도를 포함할 것을 당부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18절). 분명히 중보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일부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로마서 15장 30절에서 로마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구했습니다. 그는 골로새서 4장 2-3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기를 위해 중보 기도해 줄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성경의 중보기도를 언급하는 그 어디에도 어떤 특정 집단만이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 반대로 누구든지 중보기도를 해 줄 것을 부탁하며 중보기도를 받고자 합니다. 중보기도를 몇몇 그리스도인들 위해 주어진 특권 및 부름이라 보는 사상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사상이 종종 교만과 우월 의식으로 이어지는 파괴적인 사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중보기도자로 부르십니다. 모든 신자가 중보기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간구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 특권입니까!

-Got Questions Ministries

기도 자체에 어떤 능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매우 보편적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도의 능력은 간단히 말해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음을 고려하십시오.

1)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눅 1:37).

2)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기도하라고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닌 마음 상태에서(약 5:16) 감사(빌 4:6)와 믿음(약 1:5)으로 하나님의 뜻(마 6:10)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요 4:13-14) 끊임없이 드려져야 합니다(눅 18:1).

3) 전능하신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 18:6).

4)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시 17:6).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시 34:17).

또 다른 대중적인 사상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는지의 여부가 우리 믿음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주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교회는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고(5절),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7-11절). 베드로는 기도 모임이 있는 집의 문에 다가가서 문을 두드리지만, 기도하고 있는 자들은 처음에는 그가 참으로 베드로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지만 기도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는 데는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우리에게서 흘러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특별한 말이나 특별한 방법 또는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에 따라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능력은 우리가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기도하는지 또는 몸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에 따라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의 능력은 유물이나 아이콘, 양초 또는 구슬을 사용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능력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전능하신 그분으로부터 나옵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과 접하게 하며, 주께서 우리의 청원을 허락하시든 거절하시든 전능한 결과를 기대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무엇이든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하나님이 기도 능력의 근원입니다. 주께서는 그분의 완벽한 뜻과 시기에 따라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모든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 곧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께 드려집니다. 성경은 이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한 분 또는 세 분 모두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와 함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2). 주 예수님과 아버지는 동등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하듯이 주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삼위일체의 한 분에게 드리는 기도는 모든 분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순교 당하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언제나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엡 5:20)고 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에 따라)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받게 될 것을 확신해 주셨습니다(요 15:16; 16:23).

우리는 성령과 그분의 능력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어떻게 또는 무엇을 구해야 할 지 모를 때에도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롬 8:26; 유 1:20). 아마도 기도에 있어서 삼위 일체의 역할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아들을(아들의 이름으로) 통하여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 위격 모두가 신자의 기도에 적극적인 참가자들이십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일부 비 기독교 종교들은 그들의 교도들에게 모든 신들에게, 죽은 친척들에게, 성자들에게, 또는 영들에게 기도하라고 장려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마리아 및 여러 성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기도는 비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 모독이 되는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기도의 속성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기도는 여러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 단지 두가지를 꼽는다면, 찬양과 감사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중심이 예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역사로 인하여 주를 예배합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와 사랑과 친절을 예배합니다. 예배는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기도를 할 때의 문제는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나누려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람이나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회개, 자백, 간청과 같은 기도의 다른 요소들 또한 예배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과 용서가 많으시며 십자가에서 그분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 용서의 수단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회개합니다. 우리는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9)을 알기 때문에 죄를 자백하고 이로 인해 그분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간청과 중보 기도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기꺼이 듣고 응답하시려는 그분의 자비와 인애로 인하여 주를 예배합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예배의 형태이며 예배는 하나님만을 위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합니까? 그 답은 하나님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은 기도를 말할 때 삼위 가운데 어떤 위격에게 드려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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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헷갈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 명령은 하루 종일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은 자세로 있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쉬지 말고 말하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순종하는 자세를 취하라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여하신다는 의식 속에서 깨어 있는 모든 순간들을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이 걱정과 두려움과 낙심과 분노로 돌아설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모든 생각을 기도로, 그리고 모든 기도를 감사로 바꿔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염려하는 대신에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명령합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영적 전쟁을 싸우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여기라고 권고하였습니다(엡 6:18). 우리는 하루를 보내면서 모든 두려운 상황과 염려스러운 생각,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부담되는 일에 대해 가장 먼저 기도로 반응해야 합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계속 아버지를 의지하며 그분과 교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호흡과 같아야 합니다. 대기가 당신의 폐에 압력을 가하고 기본적으로 호흡하도록 하기 때문에 당신은 호흡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쉼을 쉬는 것보다 안 쉬려고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권속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삶에 압력 또는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대기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기도는 그 압력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모두 기도의 공기를 호흡하기 위한 신성한 대기권에 들어갔습니다.

불행히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잠시만 같이 있어도 그들이 생존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영적인 호흡"을 내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인 호흡을 내쉬지 않는 이유는 죄 많은 욕망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신자들은 충분히 자신의 기능을 감당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의 진리 안에서 호흡하며 늘 하나님의 얼굴을 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대신에 그것을 이용하여 안전함을 느끼는 것은 더 쉽습니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육체적인 복에 만족하지만 영적인 복에 대해서는 거의 욕구가 없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방법, 돈이 눈에 띄는 결과를 만들어낼 때 인간적인 성공과 신성한 복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갈망과 그분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속적이고, 끈질긴, 쉬지 않는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며, 이러한 기도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흘러나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기도와 금식 사이의 관계는 성경 안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도와 금식의 사례에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실제 또는 예기된 재앙에 직면하여 필요와 의존 의식, 비참한 무력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도와 금식은 애통과 회개, 깊은 영적 필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뇌 때문에 기도하며 금식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여러 날의 기도는 눈물과 금식, 그의 백성을 대신하는 죄의 자백, 그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간청으로 그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의 걱정이 너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도 중에 먹고 마실 쉼의 시간을 취할 가능성은 거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황폐함을 알게 된 다니엘도 비슷한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 9:3). 다니엘은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옵니다”(5절).

구약의 여러 경우에서, 금식은 중보기도와 연관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병든 아이를 놓고 주 앞에서 울며 간절하게 중보 기도(삼하 12:21-22)하면서 금식합니다(삼하 12:16). 에스더는 그녀의 남편인 왕에게 나아갈 계획을 한 후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에게 그녀를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에 4:16). 분명히 금식과 간청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기도와 금식이 있지만 회개 및 죄의 자백과 관련되지는 않습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눅 2:37) 섬겼습니다. 그녀는 84 세의 나이에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면서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주를 섬겼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주의 사역을 위임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배와 관련해서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환송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에서 기도와 금식은 주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동반될 때 주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함께 금식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실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중대한 특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할수록 금식과 기도는 더욱 적절하여집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소년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세를 받았지만(마 6:7) 그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왜 자신들은 귀신으로부터 그 아이를 해방시키는데 실패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복음의 기록에는 ‘금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마 17:21). 이 특별한 경우에, 귀신은 예외적으로 악하고 완강했습니다(막 9:21-22). 예수께서는 고집 센 원수는 똑같이 강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 전투를 위해 준비된 무기이며(엡 6:18), 금식은 기도에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금식에 대한 신학은 신자들의 우선 순위에 대한 신학으로서 신자들은 주님께 나뉘지 않은 집중적인 헌신과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헌신은 음식과 음료와 같은 정상적이고 좋은 것들로부터 잠시 동안 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의 중단 없는 교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든 안 하든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히 10:19)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더 나은 것들 중”에 가장 기쁜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짐이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되며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축하가 되어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강력한 기도 생활을 가장 명백하게 방해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자백되지 않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 삶에 자백되지 않은 죄가 있은 채 그분께 나아가면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장벽이 존재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죄를 숨기려 하는 자들로부터 멀리 계시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성경은 효력 있는 기도를 방해하는 몇 가지 죄의 영역을 언급합니다. 첫째, 우리가 성령으로 살지 않고 육체대로 살면 기도하고 싶은 소욕과 효력 있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 방해를 받습니다. 우리는 거듭남과 함께 새로운 본성을 얻지만, 그 새로운 본성은 여전히 부패하고 죄로 가득한 우리의 옛 장막, 곧 육체에 거합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몸의 행실을 죽이고"(롬 8:13)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육체는 우리의 행동, 태도 및 동기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야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은 이기심으로 사는 것이며, 이는 효력 있는 기도에 또 다른 장애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드려질 때,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때 우리의 이기적인 동기는 기도를 방해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은 그분의 뜻이 무엇이든, 우리가 그 뜻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그 뜻에 복종하려는 자세로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예들에 있어서 예수님은 우리 기도의 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이기적인 기도는 항상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도이며,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이기적인 육체의 욕구에 따라 생활하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강팍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이 또한 우리의 기도를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에 무관심해지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그분의 뜻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관심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우리 자신들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배려하는 이해심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더 배려해야 합니다(빌 2:3-4).

효력 있는 기도를 막는 가장 큰 방해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를 거절할 때 쓴 뿌리가 마음 속에 자라나 기도를 질식시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증오와 악독을 품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자격없는 죄인들에게 그분의 복을 부어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원리는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서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를 통해 아름답게 설명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측량할 수 없는 죄의 빚을 용서하시면서 우리가 주께 용서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것을 기대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하기를 거절할 때 우리의 기도는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효력 있는 기도의 또 다른 주요 장애는 불신과 의심입니다. 이것은 몇몇 사람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요청을 허락해야 할 의무가 생기면서 그 요청을 승인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심이 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 본성, 동기를 분명히 알고 믿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과 약속들을 의심하면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이는 하나님을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일치하는 기도에 대해 얼마든지 허락하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확신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마지막으로, 가정에서의 불화는 기도에 있어서 분명한 장애물입니다. 베드로는 특히 아내에 대한 태도가 덜 경건한 남편의 기도에 가정 불화가 방해가 되는 것으로 언급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가족 관계 속에서 심각한 갈등이 있고 가정의 머리가 베드로가 언급한 자세를 보이지 못할 때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 남편의 기도는 지장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자신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면 성경의 원칙에 따라 남편의 인도에 복종해야 합니다(엡 5:22-24).

다행히도, 이 모든 기도의 장애물들은 죄의 자백과 회개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 당장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요한일서 1장 9절의 내용을 확신합니다. 일단 죄를 자백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활짝 열린 교통을 갖게 되면서, 기도는 상달되고 응답될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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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하는 기도는 어떤 위치에서 기도하는 관행으로, 어떤 특정 장소 주변을 걸으며 기도하는 중보 기도의 유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위치의 가까운 곳에 서서 “더 가까울수록 기도가 더 분명하다”고 믿습니다. 걸으며 하는 기도는 개인, 단체, 심지어 교회 전체가 할 수 있습니다. 그 영역은 한 지역이 될 수도 있고 길게는 수 킬로미터 이상 될 수도 있습니다. 중보 기도자가 기도의 필요를 더욱 알 수 있기 위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의 오감을 사용하는 것이 이 기도의 발상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제목을 찾으면서 이웃을 걸어 다니면 지독히 더럽고 황폐한 마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의 육체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떤 단체는 학교를 걸어 다니며 기도를 합니다. 이때 그들은 그 학교 안의 선생들과 학생들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학교 내에서의 마귀의 계략이 좌절되도록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과 장소에 더욱 가까이 가서 걸으며 집중하며 기도할수록 그들의 기도가 더욱 효력을 나타낸다고 느낍니다.

걸으며 하는 기도는 그 기원이 분명하지 않은 최근 현상입니다. 성경 시대에는 주요 교통 수단이 보행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사람들은 걸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걸으며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인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걸으며 기도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명령이 없습니다. 다른 시간이나 다른 방법이 아니라 어떤 위치나 자세로 기도드려야 더욱 효력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비 성경적입니다. 더욱이 어떤 장소나 상황에 가까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기도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무소부재하시고 모든 필요를 정확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완벽한 뜻과 시기에 기도에 응답하시는 사실과 상충됩니다. 그분이 기도를 통해 그분 계획의 일부에 우리를 참여하도록 허락하시는 사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지 그분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기도하라"(살전 5:17)는 명령을 받았고, 걷기는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이기 때문에 분명히 쉬지 말고 기도하려면 걸으면서 기도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와 자세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 드리는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걸으며 기도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이 없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라면 고려해 볼 가치는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걸으며 하는 기도는 어떤 위치에서 기도하는 관행으로, 어떤 특정 장소 주변을 걸으며 기도하는 중보 기도의 유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위치의 가까운 곳에 서서 “더 가까울수록 기도가 더 분명하다”고 믿습니다. 걸으며 하는 기도는 개인, 단체, 심지어 교회 전체가 할 수 있습니다. 그 영역은 한 지역이 될 수도 있고 길게는 수 킬로미터 이상 될 수도 있습니다. 중보 기도자가 기도의 필요를 더욱 알 수 있기 위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의 오감을 사용하는 것이 이 기도의 발상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제목을 찾으면서 이웃을 걸어 다니면 지독히 더럽고 황폐한 마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의 육체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떤 단체는 학교를 걸어 다니며 기도를 합니다. 이때 그들은 그 학교 안의 선생들과 학생들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학교 내에서의 마귀의 계략이 좌절되도록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과 장소에 더욱 가까이 가서 걸으며 집중하며 기도할수록 그들의 기도가 더욱 효력을 나타낸다고 느낍니다.

걸으며 하는 기도는 그 기원이 분명하지 않은 최근 현상입니다. 성경 시대에는 주요 교통 수단이 보행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사람들은 걸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걸으며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인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걸으며 기도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명령이 없습니다. 다른 시간이나 다른 방법이 아니라 어떤 위치나 자세로 기도드려야 더욱 효력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비 성경적입니다. 더욱이 어떤 장소나 상황에 가까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기도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무소부재하시고 모든 필요를 정확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완벽한 뜻과 시기에 기도에 응답하시는 사실과 상충됩니다. 그분이 기도를 통해 그분 계획의 일부에 우리를 참여하도록 허락하시는 사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지 그분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기도하라"(살전 5:17)는 명령을 받았고, 걷기는 우리가 날마다 하는 일이기 때문에 분명히 쉬지 말고 기도하려면 걸으면서 기도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와 자세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 드리는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걸으며 기도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이 없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라면 고려해 볼 가치는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성경에서 세 번 언급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은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합니다. 유다서 1장 20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의 "~안에서 기도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뜻은 "수단으로", "도움으로", "그 영역 안에서", "연결되어"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기도 방법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들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을 근거로 해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방언기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은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모르는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통역자가 없는 한 아무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고전 14:27-28).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8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지시합니다. 기도하는 그 사람을 포함해서 아무도 그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우리가 성도들을 위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분의 뜻에 맞게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사람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하며(고전 10:31),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첫째, 우리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는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6; 참조, 막 11:24).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지혜를 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기 위해) 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도록 일곱 가지 성경적인 지시가 있습니다.

1) 성경이 기도하라고 명하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마 5:44), 하나님께서 전도자들을 보내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눅 10:2).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마 26:41), 말씀 사역자들을 위해(골 4:3; 살후 3:1), 정부의 집권자들을 위해(딤전 2:1-3),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약 5:13), 동료 신자들의 병 나음을 위해(약 5:16)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기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의 경건한 성품의 모범을 따르십시오.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롬 10:1).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 자비와 용서를 구했습니다(시 51:1-2). 초대 교회는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행 4:29).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비슷한 기도가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 및 초대 교회와 마찬가지로 항상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다윗의 기도처럼 항상 죄를 의식하고, 또한 그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거나 우리의 기도를 좌절시키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가져 가야 합니다.

3)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이기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고상한 기도를 하려고 하지 말고 주로 개인적으로 골방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보시고 공개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마 6:5-6).

4)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의 정신으로 기도하십시오(막 11:25). 악독, 분노, 복수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의 마음은 하나님께 완전하게 복종하며 드리는 기도를 방해합니다. 우리와 다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서는 안 되듯이(마 5:23-24),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화목할 때까지는 우리 기도의 예물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5)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골 4:2; 빌 4:6-7). 우리는 우리의 원함과 필요에 의해 마음이 아무리 부담되더라도 항상 감사할 제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더라도 구속의 사랑을 받은 자와 자기 앞에 천국의 티켓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가 있습니다.

6)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십시오(눅 18:1; 살전 5:17). 우리는 끈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하며 즉각적인 응답을 얻지 못했더라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는 그분의 응답이 ‘좋다’, ‘안된다’, ‘기다려라’이든 간에 그분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순복하고 계속 드리는 기도입니다.

7) 기도로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십시오. 이는 멋진 진리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우리는 기도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도할 수 없다"고 느끼는 때에, 가장 깊은 우울함과 슬픔을 겪을 때, 우리는 성령께서 실제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알고 위로를 받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우신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육체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큰 확신을 갖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뜻과 시기에 따라 우리의 기도를 그분께 드리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성공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위해 모든 것을 합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알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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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침묵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침묵 기도가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보다 덜 타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실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쉽게 들으실 수 있습니다(시 139:23; 렘 12:3).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마 12:24-26; 눅 11:17).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기 위해 우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말로 들리든 그렇지 않든 그분께 드려진 모든 기도를 아십니다.

성경은 개인적인 기도에 대해 언급합니다(마 6:6). 당신이 혼자 있을 때는 큰 소리로 기도하든 침묵으로 기도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비밀을 기도할 때, 함께 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등, 어떤 상황에서는 침묵으로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이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당혹스러워서 침묵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침묵 기도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무언의 기도의 타당성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구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일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분명히 항상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뜻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상태에 계속 머물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모든 상황, 계획, 두려움, 또는 염려를 그분의 보좌 앞으로 가져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끊임 없는 기도는 찬양과 탄원과 간구와 감사의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상황과 때에 따라 말로, 속삭임으로, 부르짖음으로, 노래로, 침묵으로 기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죄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도움이 되는 여러 수단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수명 동안 우리는 죄에 대해 절대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지만(요한일서 1:8),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말씀의 원칙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점진적으로 죄를 극복하고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죄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있어 성경이 언급하는 첫째 방법은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서 5:16-25에서 육체적 행위들을 성령의 열매와 대조하십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영 안에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르면서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 삶 속에서 육체를 따르는 것 보다 성령님의 인도를 지속적으로 따르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께서 만드시는 차이는 성령 충만 하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그리고 그 후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한 베드로의 삶에서 입증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진 후, 그는 오순절 날 유대인들에게 거리낌 없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을 소멸하려 하지 않고(데살로니가전서 5:19) 대신에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구하며(에베소서 5:18-21) 성령 안에서 걷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 집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구약 성경에 나온 것 같이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개인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창세기 41:38, 출애굽기 31:3, 민수기 24:2, 사무엘상 10:10).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증거가 에베소서 5:18-21과 골로새서 3:16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방법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디모데후서 3:16-17). 하나님 말씀은 어떻게 살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 때 우리에게 알려주며, 옳은 길로 다시 돌아와서 그 길에 머물게끔 우리를 도와줍니다. 히브리서 4:12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마음을 관통할 수 있고 마음과 생각의 가장 깊은 죄들을 뿌리 뽑고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저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힘에 대해 시편 119장에서 상세하게 말합니다. 여호수아에게 적들을 극복하기 위한 성공의 열쇠는 이 방법을 잊지 않고 낮과 밤으로 묵상하고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군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하셨을 때도 그는 따랐으며, 약속된 땅을 위한 전투들에서 그가 승리한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가볍게 여기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성경을 가지고 간다든지 매일의 종교 의식을 위해 읽거나, 하루에 한 장씩 읽는 식으로 명목상으로만 성경을 취급하고 있지, 그것을 외우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들에 적용하는 데에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일깨워주는 죄들을 고백하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선물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실패합니다. 성경을 비유 하자면, 우리는 종종 거식증이나 폭식증에 걸려있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먹음에 있어 영적으로 그저 살아있을 만큼만 취하든지(그러나 결코 건강하기 위해 충분한 만큼 창성한 기독교인들의 섭취가 아님), 아니면 많이는 먹지만 그것으로부터 영적인 영양분을 취하기에 충분한 명상을 결코 오래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매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 공부하고 외우는 습관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러한 습관을 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문 잡지로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당신이 말씀을 통해 얻은 것들을 적기 전에는 말씀을 떠나지 않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영역에 있어 변화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실 것을 요청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기도들을 기록합니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며(에베소서 6:17),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전신 갑주의 근본적이고 주요한 부분입니다(에베소서 6:12-18).

죄에 대적하는 우리의 싸움에 있어 세 번째 중요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만 사용하고 실제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기도 모임 과 기도 시간 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도를 초기 교회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사도행전 3:1, 4:31, 6:4, 13:1-3). 바울은 그가 사역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아주 엄청난 약속들을 주셨으며(마태복음 7:7-11, 누가복음 6:23-27, 요한일서 5:14-15), 바울은 영적 전쟁의 준비를 위한 글들에 기도를 포함시켰습니다(에베소서 6:18).

우리의 삶에 있어 죄를 극복하는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할까요? 베드로가 부인하기 바로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깨우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태복음 26:41). 우리도 베드로처럼 옳은 것을 하고 싶으나 그럴 능력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찾으라, 계속 두드리라, 계속 구하라는 하나님의 권면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마태복음 7:7). 기도는 마법의 공식(주문)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 그분께 의지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5:14-15).

죄를 정복하기 위한 우리의 전쟁에서 네 번째 방법은 교회, 즉, 다른 믿는 자들과의 교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두 명씩 내보내셨습니다(마태복음 10:1). 사도행전에 있는 전도 여행들에서 한 번에 한 사람씩 나가지 않고, 둘 또는 그 이상이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이 함께하는 모임을 폐하지 말고 사랑과 선행들로 서로 격려하는데 모임의 시간을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히브리서 10:24-25). 그분은 우리들의 잘못을 서로에게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야고보서 5:16). 구약 성경의 지혜의 말씀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도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잠언 27:17). 다수는 혼자보다 힘이 있습니다(전도서 4:11-12).

많은 기독교인들이 완강한 죄를 극복하는데 책임 있는 동반자가 있음을 엄청난 혜택으로 압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함께 기도하며, 격려해주고, 심지어 꾸짖어 주는 사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유혹은 우리 모두에게 흔한 일 입니다(고린도전서 10:13). 책임 있는 동반자나 집단을 가진다는 것은 가장 완강한 죄들마저도 극복하는데 필요로 하는 격려와 동기의 마지막 보루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죄에 대한 승리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또 다른 때는 승리가 더디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으로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충실하신 분임을 알기에 죄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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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5).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꾸짖습니다; 특히 그들은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마태복음 21:32).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첫 단계를 취하지 않았다면 아직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요한복음 1:12),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그분의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십니다(시편 143: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숨기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아주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선행을 해야 한다(베드로전서 2:15),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데살로니가전서 4:3)와 같은 구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있고 개연성 있는 성격의 것입니다. 로마서 12:2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순서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거부하고 대신 성령으로 변화된 자신을 좋게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마음이 새로워지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성경에서 금하는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훔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표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은행 강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위한 기도를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때로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이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역사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번에 하나씩 보여주시고 – 각각은 믿음의 단계를 움직입니다 -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지속되게 하십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기다리는 동안 선을 행하기에도 바쁘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4:17)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디에서 일해야 하나, 어디에 살아야 하나, 누구와 결혼해야 하나, 어떤 차를 사야 하나 등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선택들을 방지하십니다(사도행전 16:6-7).

어떤 사람을 더 잘 알수록,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것에 더 익숙해지게 됩니다. 예들 들면, 한 아이가 번화한 거리를 가로질러 튕겨 나간 공을 바라볼 수는 있으나 그 공을 쫓아 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나의 아버지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모든 특별한 상황에 대한 조언을 자기 아버지에게 일일이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알기에 자기 아버지가 어떤 조언을 할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지하면서 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음"(고린도전서 2:16)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침을 발견합니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잠언 11:5).

만일 우리가 주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을 진정으로 갈망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바라시는 것을 우리의 심령 안에 두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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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본래 구약성서의 율법이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 중 어떤 율법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시됩니다(예를 들면 십계명). 어떤 율법들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속죄 하는 방법(희생 드리는 제도)에 관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음식과 의복에 관한 규정들). 구약의 율법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구약의 율법을 종식시키셨습니다(로마서 10:4, 갈라디아서 3:23-25, 에베소서 2:15).

우리는 구약의 율법 대신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습니다(갈라디아서 6: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37-39). 우리가 이 두 계명들에 복종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40). 그러나 구약의 율법이 오늘날 우리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의 많은 계명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범주 안에 놓여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좋은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구약의 율법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용 된다고 말 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단일체입니다(야고보서 2:10).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이 적용되거나, 그 어떤 것도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희생 드리는 제도 같이, 그리스도께서 그 일부를 지키셨다면, 그 모두를 지키셨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3).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모든 구약의 율법의 요약이었습니다. 십계명 중에 아홉 가지는 분명하게 신약에서 반복됩니다(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제외한 모든 것).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다른 신들을 숭배하거나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살인하지 않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간통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 속한 것을 탐내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고,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로마서 7:79, 갈라디아서 3:24).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법으로, 결코 의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두 계명을 충실히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받들고 있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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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일조 헌금의 문제로 고민을 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에 관한 성경적 권고를 따르기 꺼려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드리는 것은 기쁨과 축복을 의도한 것입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때때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구약의 개념입니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율법상의 요구였는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들이 기른 작물과 가축들의 10%를 성막/성전에 바쳐야 했습니다(레위기 27:30; 민수기 18:26; 신명기 14:24; 고린도후서 31:5). 사실, 구약의 율법은 복수의 십일조를 요구하였는데(레위인들을 위한 것, 성전과 절기들을 위한 것,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 이는 총 약 23.3%까지 달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희생 제사 제도를 관장하던 대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하나의 세금 걷는 방법으로서 구약의 십일조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기독교인들이 율법적인 십일조 체계를 따라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나, 또는 추천하는 것 조차도 없습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따로 챙길 소득의 일정 비율을 지정하지 않고 있고, 오직 기증은 “수입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할 뿐입니다(고린도전서 16:1-2). 기독교 교회의 일부는 10%의 수치를 구약 성경으로부터 따와서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헌금에 있어 “최소한의 권장”으로 적용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바치는 것의 중요성과 혜택들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드려야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10% 이상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때때로 그보다 덜 드리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인의 능력과 교회의 필요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십일조 헌금에 참여하는 문제나, 그리고/또는 얼만큼 드리느냐의 문제에 있어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야고보서 1:5). 무엇보다도, 모든 십일조나 헌금은 순수한 동기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바쳐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봉사여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린도후서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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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아닌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지인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고, 그 들이 우리와 감정적인 친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어려워 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2:51-53). 그러나, 우리는 복음 전함을 명령 받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데 대한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마태복음 28:19-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그러면 우리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지인들을 어떻게 전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복음의 진리에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고린도후서 4:4).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요한복음 3:16). 그들을 가장 잘 보살필 수 있는 지혜를 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야고보서 1:5).

우리는 실제 복음 전파에 있어 거리낌 없이 과감해야 합니다. 당신의 친구들과 가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시오(로마서 10:9-10). 항상 당신의 믿음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베드로전서 3:15), 온유함과 정중함으로 하십시오.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기도와 우리의 믿음을 전하는 것 외에,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원들 앞에 경건한 기독교적 삶을 또한 살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 3:1-2).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증거하며, 그리고 그들 앞에서 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라나게 하십니다(고린도전서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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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의 금식을 필요로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동시에, 성경은 금식을 좋고, 이익이 되며, 유익한 것으로 제시합니다. 사도행전은 믿는 자들이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기 전에 금식을 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3:4; 14:23). 금식과 기도는 자주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2:37; 5:33). 너무나 자주, 금식의 초점을 음식을 삼가하는데 둡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당신의 눈을 떼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진지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금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통찰과 새로워진 신뢰를 얻는데 도움을 줍니다.

성경에서의 금식은 거의 언제나 음식을 삼가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금식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기 위해 일시적으로 어떤 것을 삼가하는 것도 금식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7:1-5). 금식은, 특히 음식을 삼가 할 때, 일정 기간으로 한정 되어야 합니다. 먹지 않고 오래 동안 지낸다는 것은 신체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금식은 육체를 벌하기 위해 의도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는 것을 의도합니다. 금식은 또한 “살 빼는 방법”으로 간주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인 금식의 목적은 살을 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할 수 있으나, 어떤 다른 사람은 음식을 삼가 할 수 없습니다(예를 들면, 당뇨병 환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일시적으로 삼가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눈을 돌림으로써, 우리는 더욱 더 성공적으로 그리스도께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금식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게끔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금식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으로 보이는 방법이 아닙니다. 금식은 겸허하고 기쁜 심령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6:16-18은 공표하고 있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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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 부당하게 취급 받고, 감정이 상하고, 범죄의 피해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공격적 행위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공표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은 비슷하게 말씀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두 성경 구절들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까? 우리가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회개 속에서 용서를 구하러 온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그것을 오로지 받아 준다면 용서는 간단할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범한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분함과, 쓰라림, 그리고 분노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 것들의 어느 것도 진정한 기독교인의 특성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합니다(마태복음 6:12). 마태복음 6:14-15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용서를 말씀하는 다른 성경 말씀들에 비추어 보면, 마태복음 6:14-15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하셨던 것을 진실로 경험해 보지 못 했음을 말씀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들 중 하나라도 순종하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취급할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또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범죄들을 용서하신 정도를 우리가 고려할 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은혜를 거둬드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그 누구 보다 더 하나님께 무제한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만큼 많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너무나 작은 죄를 지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데 인색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8:23-35에서의 예수님의 비유는 이 진리에 대한 강력한 사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구하며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은 아낌없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요한일서 1:9). 하나님의 용서가 무한한 것 같이, 우리가 베푸는 용서도 제한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누가복음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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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더 닮아가게 하는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영적 성장은 아마 베드로후서 1:3-8에 제일 잘 묘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적 성장의 목적인 거룩한 삶들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데 있어 핵심인 “하나님께 관한 우리의 지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 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 자신의 교화와 성장을 위해 주어진 말씀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갈라디아서 5:19-23에는 두 가지 목록들이 있습니다. 19-21절들은 ‘육체의 행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의 우리의 삶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행위들은 우리가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할 것들입니다. 영적 성장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삶들에서 ‘육체의 행위들’이 점점 더 감소되는 것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성령의 열매”의 목록입니다(갈라디아서 5:22-23). 이런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경험한 지금의 우리의 삶들을 특징화 시키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한 신자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점점 더 분명 해지는 것에 의해 확인됩니다.

구원으로 인한 변화가 일어날 때, 영적 성장은 시작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요한복음 14:16-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오래 되고, 죄악된 본성은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성품에 자리를 내 주기 시작합니다(로마서 6장-7장). 영적 성장은 평생이 걸리는 과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적용하며(디모데후서 3:16-17),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는(갈라디아서 5:16-26)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신장 시켜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구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며, 영적 성장을 이루는 데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죄를 극복할 수 있고 꾸준하게 우리의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닮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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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싸움에 관해 두 가지 주요 오류들이 있습니다. 너무 강조 하는 것과 강조가 부족한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모든 죄, 모든 갈등, 그리고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내쫓아야 하는 마귀들 탓으로 돌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적인 영역과, 우리의 싸움은 영적 권세들과의 싸움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성경적 사실을 무시합니다. 성공적인 영적 싸움의 핵심은 성경적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다른 때에는 귀신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전쟁을 수행하라고 가르치고(로마서 6),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에베소서 6:10-18).

에베소서 6:10-12는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고,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이며, 우리의 씨름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악한 영적인 세력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3-18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갑옷에 대한 묘사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와 함께 굳건히 서야 합니다. 영적 갑옷의 이러한 부분들은 영적 싸움에 있어 무엇을 상징할까요?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진실을 믿어야 하며,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된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는 저항이 아무리 크더라도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하게 공격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들을 붙들고, 믿음이 흔들리면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방어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과 어떤 영적 세력도 그것을 뺏어갈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우리의 공격적 무기는 우리 자신의 의견들과 감정들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뜻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싸움에서 유혹에 저항하는, 우리의 궁극적인 본보기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공격을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주시하시기 바랍니다(마태복음 4:1-11). 각 시험은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방어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의 유혹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 119:11).

영적 싸움에 관한 주의의 말씀은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귀신들을 쫓아 내라든가 또는 심지어 그것들에게 말을 걸으라고 우리에게 지지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귀신들이 우리 앞에서 도망치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 아닙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능을 주제넘게 추정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사도행전 19:13-16). 천사장인 미카엘조차 자신의 능력으로 사탄을 책망하지 않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유다서 1:9). 우리가 마귀와 애기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미혹의 위험을 무릅쓰게 됩니다(창세기 3:1-7). 우리는 마귀들의 아닌,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들이 아닌 하나님께 말합니다.

요약하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열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습니다. 우리는 성서의 권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인내와 경건함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굳건히 섭니다(에베소서 6:13-14).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합니다; 우리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임을 알고, 마귀를 대적합니다(야고보서 4:7).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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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여러 시대를 걸쳐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엘리가 확인해 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사무엘상 3:1-10). 기드온은 하나님으로부터 물리적인 계시를 받았으나 그가 들은 것을 여전히 의심하였고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표적을 구했습니다(사사기 6:17, 36-40).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을 때, 말씀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신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기드온과 사무엘이 가지지 못했던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읽고, 공부하고, 묵상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완성된 성경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6-17). 우리가 어떤 주제나 우리 삶들에 있어서의 결정에 관한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말씀을 통해 가르치셨던 것과 상반되게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디도서 1:2).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27).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 곧,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알아보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의 목자로서 그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보려면, 우리는 그분께 속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성경 공부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조용한 묵상을 위해서 시간을 쓸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친밀하게 더 많은 시간을 가실 수록, 그분의 음성과 우리 삶들에 있어 그분의 인도하심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은행 직원들은 진짜 돈을 아주 세밀히 공부함으로써 가짜를 찾아 내는 것이 쉽게 훈련이 되어져서 위조지폐들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에게 잘 못된 사실을 말할 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게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주로 그분의 쓰여진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는 성령과, 우리의 양심, 상황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권고를 통해 수행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성경의 진리와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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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율법주의"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는 구원과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규칙과 규정의 체계를 강조하는 교리적인 입장을 묘사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규칙과 규정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엄격한 준수를 믿고 요구합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율법주의는 본질적으로 은혜에 반대되는 입장입니다. 율법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종종 율법의 진정한 목적, 특히 모세의 구약 율법의 목적을 보지 못합니다. 구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또는 "가정 교사"입니다(갈 3:24).

참된 신자조차도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교훈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슬프게도, 본질적인 부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너무 강한 감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관점이 표현되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으면서 사람들과의 교제를 무너뜨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율법주의입니다. 오늘날 많은 율법주의적인 신자들은 자신들의 성경 해석과 심지어 자신들의 전통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지지를 요구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예를 들어,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단지 담배, 술, 춤, 영화 등을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느끼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것들을 피하는 것이 영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0-23절에서 율법주의에 관해 경고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율법주의자들은 의롭고 영적인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내면의 변화보다 외적인 행위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실패합니다.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사도 요한의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는 말을 굳게 붙들고 은혜로운 사람,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여기에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 불일치를 용인할 수는 있지만, 이단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단번에 영원히 맡겨진 믿음을 위해 싸울 것을 권고 받았습니다(유 3 장). 우리가 이러한 지침들을 기억하고 사랑과 자비 가운데 그 지침들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와 이단으로부터 안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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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인이 육신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육신"이라는 용어를 정의해 봅시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육체"를 뜻하는 헬라어 사르키코스(sarkikos)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납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독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단어는 뚜렷하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에 속할 수 있다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요일 1:8).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육신에 속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인은 잠시 육신에 속할 수는 있지만, 평생 육신에 속한 상태에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거듭남의 증거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증거가 없이(고후 5:17) 남은 삶을 철저하게 육신에 속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함으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상을 남용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개념은 완전히 비 성경적입니다. 야고보서 2장은 진정한 믿음은 언제나 선행을 가져올 것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우리가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구원은 행함을 맺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실패 및 반항의 때에 육신에 속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계속 육신에 속한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이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조차 여전히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잃을 수 없으며 하나님은 구원을 다시 취하지 않으십니다(요 10:28; 롬 8:37-39; 요일 5:13).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서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확신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육신에 속한 삶을 살면 구원을 잃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처음부터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요일 2:19).

행동에 있어서 육신에 속한 모습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게 그들을 징계하셔서(히 12:5-11) 하나님과의 교제로 회복시키실 것이며 또한 순종을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가지시는 소원은 우리가 성화라고 알려진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영적으로는 성장하고 육신적으로는 감소하면서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에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롬 12:1-2). 우리가 죄 많은 육체로부터 구출되기까지는 육신의 세력이 발발하는 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진정한 신자는 그러한 발발이 일반적이거나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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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장 14절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묵상을 해야 합니까? 불행히도, "명상"이라는 단어는 신비주의적인 어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명상이란 특이한 자세로 앉은 상태에서 마음을 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변의 영계와 소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절대로 기독교 묵상의 특징이 아닙니다.

기독교 묵상은 동양 신비주의를 기초로 삼은 관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한 관행으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초월명상,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불리는 것의 많은 형태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그 중심에 주의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 개인적인 계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위험한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종종 서로가 상충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끝없는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6-17). 만일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철저히 준비시키는데 충분하다면 어떻게 그 말씀에 더하거나 그 말씀 대신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묵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서는 것이며 말씀이 그분에 대해 계시하는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발견한 후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라고 묘사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요 16:13) 우리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의 조명하심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적극적인 생각의 과정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성경을 삶과 실천의 규칙으로 삼기로 다짐하고 그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을 따라 배우게 될 때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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