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오늘날 세상에서 교회의 의무는 무엇인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오늘날 세상에서 교회의 의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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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2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교회의 목적들/활동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1) 성경의 교리를 가르침, 2) 믿는 자들을 위한 교제의 장소를 제공함, 3) 성찬식을 준수함, 4) 기도

교회가 성경의 교리를 가르침으로 우리가 우리의 믿음가운데 굳건히 설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14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교회는기독교인들이 서로에게 헌신하고 서로를 존중하며(로마서 12:10). 서로를 가르치고(로마서 15:14), 서로에게 친절하고 서로를 측은히 여기며(에베소서 4:32), 서로가 격려하고(데살로니가전서 5:11),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요한일서 3:11) 교제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들 대신해서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믿는 자들이 준수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1:23-26). “떡을 떼며”(사도행전 2:42)라는 개념은 또한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제를 도모한다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사도행전 2:42에 따른 교회가 존재하는 마지막 목적은 기도입니다. 교회는 기도를 도모하고, 기도 하는 사람을 가르치며, 그리고 기도를 수행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7은 우리를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교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충성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님이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지역사회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도모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인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베드로전서 3:15).

교회가 존재하는 최종적인 목적들의 일부는 야고보서 1:27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업무를 가집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공급하는 것입니다(음식, 옷, 쉴 곳). 교회는 또한 믿는 자들이 죄를 극복하고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물들지 않도록 그들에게 필요한 도구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준비시키고 갖춰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2:12-27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훌륭한 예시를 주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 입, 그리고 발입니다 – 그리스도의 몸(고린도전서 12:12-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여기에 육체적으로 계신다면 그분께서 수행할려고 하실 일들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크리스챤”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같아야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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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역사는 실제로 서구 문명의 역사입니다. 기독교는 거의 2천년 동안 전반적으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예술, 언어, 정치, 법률, 가정 생활, 달력, 음악 및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까지 전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야기는 꼭 알아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 교회의 시작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후 50 일째 되는 날에 시작되었습니다(주후 30년).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으며(마 16:18),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오심으로(행 2:1-4) 교회(에클레시아, 부름을 받은 모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에 3 천 명의 사람들이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했습니다.

기독교로의 초기 개종자는 유대인이나 유대교 개종자였으며 교회는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처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또는 에센파와 유사한 유대교 종파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파한 내용은 다른 유대교 종파들과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왕)로서 율법을 성취하시고(마 5:17) 그분의 죽음에 기초한 새 언약을 제정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막 14:24). 하지만 이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메시아를 죽였다고 고발하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격분 시켰고, 다소의 사울과 같은 일부 유대인들은 "그 도"를 근절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였습니다(행 9:1-2).

기독교가 유대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기초를 놓았기 때문에 구약에 대한 실제 지식이 없으면 기독교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마태복음과 히브리서를 참조). 구약은 메시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메시아의 백성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신약은 메시아의 오심과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생애에서 300 개가 넘는 구약의 구체적인 예언을 성취하심으로써 자신이 바로 구약이 예언하였던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초대 교회의 성장

오순절 사건이 발생한지 오래지 않아서 교회의 문이 비 유대인들에게 열렸습니다. 전도자 빌립은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행 8:5),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하자(행 10 장), 그들 역시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전에 교회 박해자)은 그리스-로마 전역과 로마 도시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였고(행 28:16) 아마도 스페인에 이르는 모든 길 상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주후 70년 즈음에는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신약 성서의 대부분이 완성되어 교회들 사이에서 회람되고 있었습니다. 그 후 240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무작위로, 때로는 정부 칙령에 따라 로마에 의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2세기와 3세기에 교회 지도층은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점점 더 계층화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몇몇 이단들이 노출되고 논박되었으며, 신약 정경이 합의되었습니다. 박해는 계속 심화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로마 교회의 부상

312 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는 회심의 체험을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약 70 년 후, 데오도시우스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습니다. 주교들은 정부로부터 명예로운 지위를 얻었으며, 주후 400 년 즈음에는 "로마"와 "기독교"라는 용어는 실제적으로 거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받게 된 자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강제 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마음의 변화가 없는 상태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교도들은 그들에게 익숙했던 우상들과 관행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왔고 이에 교회는 바뀌었습니다. 성화(icons), 정교한 건축, 성지 순례 및 성자 숭배 등이 초대 교회의 단순한 예배 형태에 추가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로마에서 멀리 벗어나 수도사로 고립되어 살기를 택하였고, 유아 세례는 원죄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도입되었습니다.

그 다음 수 세기 동안 교회의 공식 교리를 결정하고, 성직의 남용을 비난하고, 분파간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다양한 교회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로마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교회는 더욱 강해졌으며 서방의 교회들과 동방의 교회 사이에는 많은 불일치가 발생하였습니다. 로마에 기반을 둔 서방(라틴) 교회는 자신들이 다른 모든 교회들 위에 사도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의 주교는 심지어 자신을 "교황"(아버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주장은 콘스탄티노플에 기반을 둔 동방(그리스)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신학적, 정치적, 절차적, 언어적인 차이도 모두 로마 카톨릭( "보편적")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서로 파문을 선포하고 모든 관계를 끊게 만든 1054년의 대분열에 기여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중세 시대

유럽의 중세 시대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권력을 유지하였고 주교들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주장하며 왕처럼 살았습니다. 교회 지도부의 부패와 탐욕은 흔했습니다. 1095년에서 1204년까지 교황은 이슬람의 진보를 격퇴하고 예루살렘을 해방시키기 위해 유혈이 낭자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십자군 전쟁을 지지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종교 개혁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로마 교회의 신학적, 정치적인 남용과 인권 유린에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모양으로 모든 것이 묵인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1517년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 수도사가 교회를 대항하여 섰고 모든 사람이 그의 반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루터로 인하여 개신교 종교 개혁이 발생하였고 중세 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루터, 캘빈, 츠빙글리를 포함한 종교 개혁자들은 신학의 여러 섬세한 핵심 부분에서는 서로 달랐지만, 교회의 전통보다 높은 성경의 최고 권위와 죄인들이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일치하였습니다(엡 2:8-9).

비록 카톨릭이 유럽에서 복귀하여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에서 일련의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력을 성공적으로 해체시키고 현대 시대의 문호를 여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선교 시대

1790년부터 1900년까지 교회는 선교 사역에 전례 없는 관심을 보였습니다. 신대륙의 식민지화는 선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하였고, 산업화는 사람들에게 선교 기금을 지원할 재정적인 능력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였고, 전 세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현대 교회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카톨릭교와 루터교가 관계 회복을 하는 것처럼 그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여러 조치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개혁 신학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강력하게 홀로 서 있습니다. 교회는 또한 오순절주의, 은사 운동, 에큐메니칼(ecumenicalism) 운동과 다양한 이단들의 등장을 겪어왔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 우리의 역사에서 배우는 것

만일 우리가 교회 역사를 통해 다른 어떤 것도 배우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골 3:16)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성경이 말한 내용을 알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망각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도외시 할 때 혼란이 지배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있지만 오직 단 하나의 복음이 있습니다. 성도들 모두에게 의탁된 것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유 1:3). 우리가 그 믿음을 보존하고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쉬지 않고 성취하실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오늘날 교회 안에서 ‘목회자/설교자로 섬기는 여성’이라는 문제보다 더 뜨겁게 논쟁이 되는 이슈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남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성이 목회자로서 봉사하지 말아야 하며, 성경이 여성의 사역에 규제를 가하고 있다고 믿는 여성들도 있으며, 여성도 설교자로서 봉사할 수 있고 사역에 규제가 없다고 믿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월주의나 차별주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해석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표합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디모데전서 2:11-12).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역할들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창조된 방법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방법의 결과입니다(디모데후서 2:13-14).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여성들이 가르치거나 남성 위에 영적 권위를 갖는 역할들로 봉사하는 것에 제재를 가하십니다. 이는 여성이 목회자로서 봉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인데, 남자들에게 설교하고, 공개적으로 남성을 가르치며, 남성 위에 영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목회 사역에 있어 여성들에 관한 이러한 견해에 대해 많은 반론이 있습니다. 흔한 것으로, 1세기의 여성들은 전형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바울이 여성들이 가르치는 것을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디모데전서 2:11-1의 어디에도 교육적 지위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만일 교육이 사역을 위한 자격조건이었다면, 예수님 제자들의 대부분은 자격 미달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흔한 반론은 바울이 단지 에베소의 여성들만 남성들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 제재를 가했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쓰여졌던 글입니다). 에베소는 거기에 있는 아르테미스 성전으로 알려져 있었고, 해당 이교도의 분파로서 여성에게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단지 에베소의 우상숭배자들의 여성 주도 관습들에 반대하여 대응하였고, 교회는 다른 점이 필요했다는 가설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의 어디에도 아르테미스에 대한 언급이 없고, 바울 역시 디모데전서 2:11-12에서 제재에 대한 이유로서 아르테미스 숭배자들의 표준 관행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 번째 반론은 바울이 단지 남편들과 아내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지, 전반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의 ‘여성’과 ‘남성’의 헬라어 단어들은 남편들과 아내들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기본 뜻은 그보다 더 넓습니다. 더 나아가서, 같은 헬라어 단어들이 8-10 구절들에서도 사용됩니다. 오직 남편들만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합니까(8절)? 오직 아내들만 단정한 옷을 입으며 오직 선행으로 예배 드립니까(9-10절)? 물론 아닙니다. 8-10절은 그저 남편들과 아내들만이 아닌, 분명히 모든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11-14절에서만 남편들과 아내들로 좁혀 지칭한 것 같은 문맥상의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여성의 목회 사역에 관한 해석에 또 다른 반론은 성경에 나오는, 특히 구약 성경의 미리암, 데보라, 훌다같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여성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들이 특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선택되었고, 믿음, 용기, 지도력의 본보기가 되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여성들의 권위는 교회 목회자들의 이슈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의 서신서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패러다임은 이스라엘 국가나 그 외 구약 성경의 독립체가 아닌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권위적 구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논쟁들이 신약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뵈뵈를 인용하여 제시됩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리스도를 위한 충성된 사역자로 나타납니다.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서, 아마 그녀가 사역에 있어 남편보다도 더 중요함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그녀의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볼로에게 가르쳤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집에서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일러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8:26). 브리스길라가 교회를 목회하였거나 공개적으로 가르쳤다거나, 또는 성도들의 집회에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한 번이라도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한, 브리스길라는 디모데전서 2:11-14에 모순되는 사역의 행위에 관여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뵈뵈는 교회에서 ‘집사’ 또는 ‘종’으로 불리며 바울에 의해 깊이 추천이 됩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의 예와 같이, 성경에는 뵈뵈가 교회 안에서 남성들에 대한 목회자였다던가 또는 교사였음을 나타내는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장로들을 위한 자격으로 주어진 것이지, 집사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디모데전서 3:1-13; 디도서 1:6-9).

디모데전서 2:11-14의 구절은 여성들이 목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확실하게 말해줍니다. 13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여 바울이 11절과 12절에 언급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 여성들은 남성들을 가르치거나 그들 위에 권위를 행사하지 말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후에 여성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임을 당한 사람은 아담이 아니고,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13-14절).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이브를 아담을 위한 “돕는 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순서는 가정과(에베소서 5:22-33) 교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됩니다.

이브가 속았다는 사실은 여성들이 남성들 위에 목사로서나 영적 권위를 가지고 봉사하지 못하는 이유로 디모데전서 2:14에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잘 속아 넘어갔다든지 여성 모두가 남성보다 더 쉽게 속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여성이 더 쉽게 속는다면, 왜 그녀들에게 아이들을 가르치고(잘 속아 넘어가는) 다른 여성들(더 잘 속아 넘어간다고 추정되는)을 가르치는 것이 허용되었을까요? 본문은 단순히 여성들이 남성들을 가르칠 수 없고 남성들 위에 영적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브가 속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주된 가르침의 권위를 남성에게 주시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많은 여성들은 친절, 자비, 가르침, 전도, 그리고 돕는 은사에 뛰어납니다. 지역 교회 내의 많은 사역이 여성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나 예언 하는 것에 대해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1:5). 오직 남성들 위에 영적 가르침의 권위를 가지는 것만 제재를 받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여성이 성령의 은사들을 행사하는 것에 제재를 가하고 있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며(갈라디아서 5:22-23),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하나님께서는 오직 남성들만이 교회 안에서 영적 가르침의 권위의 지위를 가지고 섬기도록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남성이 필연적으로 더 나은 선생이기 때문이거나 여성이 열등하다거나 덜 지적이기 때문(말도 안 되는 경우)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교회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설계하셨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과 언행을 통해서 남성들은 영적 지도력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여성들은 덜 권위적인 역할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을 가르치라고 격려 됩니다(디도서 2:3-5). 성경은 또한 여성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있어 제재를 가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성들이 제재를 받는 행위는 남성들을 가르치는 것, 또는 남성들 위에 영적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남성들에 대해 목회자로서 봉사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결코 여성들을 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은사에 따른 여성들의 사역에 더 중점을 두게 만듭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교단들과 비기독교적인 사교들과 거짓 종교를 구별해야 합니다. 장로교와 루터교는 기독교 교단의 예입니다. 몰몬과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기독교라고 주장하지만 신앙의 본질을 하나 이상 부인하는 단체)의 예입니다. 이슬람과 불교는 완전히 별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 내에서 교파가 생겨난 것은 개신교 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개신교 개혁은 16 세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었는데, 그 운동으로부터 개신교의 4개의 주요 교파와 전통이 등장하였습니다. 그것은 루터교, 개혁주의, 재침례교, 성공회입니다. 또한 이 네 교파로부터 수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교단들이 생겨나서 자라났습니다.

루터교 교파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그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감리교도들(the Methodists)은 그들의 창립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영적 성장을 위한 ‘방법’(methods)으로 유명하여졌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로교(Presbyterians)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그들의 견해로 인하여 이름 지어졌으며, 장로에 해당하는 헬라어(프레스부테로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침례교회는 침례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각 교단은 다른 교단들과 약간의 다른 교리를 지니거나 강조점이 틀립니다. 예를 들어, 세례의 방법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이 간증을 들어보고 인정받은 사람만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아니면 교인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지에 따라,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는지에 따라, 이스라엘과 교회의 장래에 대한 견해에 따라, 환난 전 휴거인지 환난 후 휴거인지에 따라, 현대 시대에 기적의 은사가 있는지의 견해에 따라 교단들이 발생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의 핵심은 절대로 주이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경건한 신자들이 비록 오류가 있더라도 그들의 양심과 성경 이해에 따라 교리의 순수성을 정직하게 지키려는 서로 다른 의견차이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파는 수없이 많고 다양합니다. 위에 언급된 원래의 "주류" 교파로부터 하나님의 집회, 기독교 선교 연합, 나사렛 교회, 복음주의 자유 교회, 독립 성서 교회 등과 같은 수많은 분파들이 생겨났습니다. 일부 교단들은 경미한 교리상의 차이점을 강조하지만, 수많은 교단들은 기독교인의 다양한 취향과 선호도에 맞는 다양한 예배 스타일을 제공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신자로서 우리가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공동체 내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이 기독교 내에 수많은 교단을 생성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간다에 있는 어떤 장로 교회는 콜로라도에 있는 장로교와는 매우 다른 예배 스타일을 가질 수 있지만 교리적 입장은 거의 동일합니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지만, 불일치는 그릇된 것입니다. 만일 두 교회가 교리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면, 말씀을 둘러싼 논쟁과 대화가 요구될 수 있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잠 27:17)은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스타일과 형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분리된 상태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고(요일 4:11-12)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해야 하는 책임을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요 17:21-22).

기독교 교단의 단점:

교파주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로, 성경 어디에도 교파주의에 대한 명령이 없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연합과 연결을 명령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역사를 보면, 교파주의는 분파와 분열로 이끄는 갈등과 대립의 결과이거나 요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반 원리는 교회에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열과 분리 문제로 고투하였던 고린도교회에서 이 예를 발견합니다. 바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볼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고전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라.” 이 구절만 보더라도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을 분리하고 나누는 교파주의자들 및 이와 유사한 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살펴 봅시다. 바울은 13절에서 매우 예리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이것은 바울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바울)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아니며 그의 메시지는 결코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몇몇 사람들을 이끌어 그리스도 대신에 바울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에 따르면 단 하나의 교회와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있고 이와 다른 교회는 교회를 약화시키고 파괴합니다(17절 참조). 그는 3장 4절에서 바울이나 아볼로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교파주의 및 최근의 역사를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

1. 교단은 성경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에 근거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입니까 아니면 구원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로 인하여 나뉘는 양쪽 교단이 있습니다. 사실, 세례(예식의 의미, 방식,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사람 등등)는 교회 분리와 새로운 교파 형성에 있어서 중심적인 문제였습니다.

2. 성경 해석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개인적으로 이뤄지면서 논란거리가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복음 전파를 무너뜨릴 수 있는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그 차이점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다시 한번 역사는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세속 언론은 우리가 생각이나 목적에 있어서 연합되어 있지 않은 것을 드러내며 우리의 차이점을 이용하여 우리를 반대합니다.

4. 교단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의해 이용됩니다. 오늘날 개인적인 야망을 추진하는 자들에 의해 교단들이 배도로 이끌리는 것처럼 자기 파멸의 상태에 있는 교단들이 있습니다.

5. 연합의 가치는 멸망하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나라를 알리는데 있어서 우리의 은사들과 자원들을 함께 모을 수 있는 능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파주의에 의해 야기된 분열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단을 무시해야 합니까?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개인적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또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경적인 사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중요하며 모든 신자는 위의 기준에 맞는 공동체에 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자들의 공동체에서만 누릴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고 교회만이 제공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며, 우리는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돕는지, 교회 공동체를 얼마나 잘 섬기는지를 근거로 하여 교회를 고르십시오. 목사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선택하고 그렇게 권하는 교회를 택하십시오. 우리는 신자로서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기본적인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우리가 섬기고 예배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자유가 있습니다. 교단을 위한 자유가 있다면 오직 이러한 자유 외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다양성이며 불일치가 아닙니다. 다양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각 개인에게 허용되지만, 불일치는 교회를 분리시키고 멸망시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그저 하나의 건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말은 ‘회중’ 또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정의 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로부터 유래합니다. ‘교회’의 근본적 의미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교회에 출석하냐고 불어보면, 그들은 대개 건물을 가리키는데 자기 모순적입니다. 로마서 16:5는 말씀합니다.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바울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를 언급합니다. 이는 교회 빌딩이 아닌, 일련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22-23은 말씀합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리스도의 몸은 오순절(성령 강림절)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로 구성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두 가지 측면들로 구성됩니다.

1) 일반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3). 이 구절은 믿는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며 그 증거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2) 지역 교회는 갈라디아서 1:1-2에서 묘사됩니다. “사도 된 바울은...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 지역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침례 교회, 루터 교회, 카톨릭 교회 등은 보편적 교회의 의미로는 교회가 아닌, 차라리 지역 교회, 지역의 믿는 자들로 보는 게 맞습니다. 일반적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하고 구원을 위해 그분을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일반적 교회의 이런 회원들은 지역 교회에서 교제와 유대감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요약하면, 교회는 건물이나 교파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둔 모든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16; 고린도전서 12:13). 지역교회들은 일반적 교회 회원들의 모임입니다. 지역교회는 일반적 교회의 회원들이 고린도전서 12장의 ‘몸’의 원칙인 격려하고, 가르치며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과 은혜 안에서 서로 세우기를 온전히 적용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주의만찬을 연구한다는 것은 심금을 울리는 경험일 수 밖에 없는데 그것에 담긴 깊은 의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준수하고 있는 의미 있고 새로운 친교의 성찬을 제정하셨던 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날인 오래된 유월절을 기념하는 중이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게 하고 미래에 있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고대하게 해 줍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한 해의 가장 성스러운 종교적인 축제였습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들이 죽었던 마지막 재앙과 이스라엘 족속들이 그들의 문설주들에 뿌려진 양의 피로 말미암아 보호되었던 일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양은 구워져서 무교병과 함께 먹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모든 세대들에 걸쳐 이 축제가 기념되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유월절 축제) 예수님께서는 한 쪽의 떡을 취하시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쪼개어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에게 주는 나의 몸이니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와 같이, 저녁을 드신 후, 잔을 취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누가복음22:19-21). 예수님께서는 축제를 찬양으로 마치셨고(마태복음 26:30), 그리고 그들은 밤에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데로 유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그 다음날 그분께서는 십자가 형에 처해 지셨습니다.

 

주의만찬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들에서 발견됩니다(마태복음 26:26-29; 마가복음 14:17-25, 누가복음 22:7-22; 그리고 요한복음 13:21-30).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3-29에 주의만찬에 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서들에서 발견되지 않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7-29). 우리는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떡과 잔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하거나 구세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르신 그 엄청난 대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뜻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것은 주의만찬을 단지 형식적인 죽은 의식이 되게 한다거나 고백하지 않은 죄를 지닌 체 주의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전에 우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서 말씀들에 포함되지 않은 또 다른 말씀을 바울이 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6). 이는 이 의식에 대해 시간적 제한을 둡니다(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짧은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두 개의 부서지기 쉬운 것들을 자신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사용하셨고 그것들을 자신의 죽음의 기념비로 삼으셨는지를 배웁니다. 이것은 조각된 대리석이나 성형된 놋쇠가 아닌 떡과 포도주로 된 기념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은 부서지게 될 자신의 몸을 말하였다고 표명하셨습니다. 부서진 뼈는 없었지만, 그분의 몸은 매우 심하게 고문을 받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포도주는 그분의 피를 말씀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곧 당할 끔찍한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인 그분께서는 구세주에 관한 구약 성경의 셀 수 없는 예언들의 성취가 되셨습니다(창세기 3:15; 시편 22; 이사야 53 등등).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이것이 미래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는 의식임을 가리키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양의 희생을 요구하고 세상의 죄를 제거하실 하나님의 양의 오심을 고대하였던 유월절이 주님의 주의만찬에서 완료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유월절의 양(고린도전서 5:7)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을 때 구 언약을 대체하였습니다(히브리서 8:8-13). 희생 제사 제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9:25-28). 주의만찬/주의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을 기념하는 것이며 그분의 희생의 결과로 우리가 받은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디모데전서 3장 2절의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뜻은 적어도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일부다처주의자는 장로, 집사 또는 목사 자격이 없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그 구절을 가장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 일부다처제가 매우 드물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런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 2) 헬라 말 그대로 "한 여인의 남자"로 문자적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즉, 감독은 그가 결혼한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충실해야 합니다. 이 해석은 원문이 혼인 상태가 아니라 도덕적 순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는 해석입니다. 3) 이 구절은 장로/집사/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홀아비가 재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직 한 번만 결혼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는 이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석 2와 3이 오늘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해석입니다. 해석 2는 성경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혼을 허용하는 것을 고려할 때 가장 강력한 해석으로 보입니다(마 19:9; 고전 7:12-16). 여기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혼하고 재혼한 남자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이혼하고 재혼한 남자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기 전에 행하였던 행동 때문에 교회 지도자의 자격이 되는 사람이 제외되어서는 안됩니다. 한편, 디모데전서 3장 2절이 이혼하거나 재혼한 사람이 장로/집사/목사로 섬기는 것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고려해야 할 다른 사안들이 있습니다.

장로/집사/목사의 첫 번째 자격은 "책망할 것이 없는"(딤전 3:2) 것입니다. 성경적인 근거 없이 이혼이나 재혼을 할 경우, 그 사람은 교회와 공동체에서 증거자로서의 역할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는 자격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는 요구 사항보다 그가 목사가 되는 것을 제외시킬 것입니다. 장로/집사/목사는 교회와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경건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며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과거 이혼 및 재혼이 이러한 모범을 보이는데 문제가 된다면 그는 장로/집사/목사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가 장로/집사/목사로 섬기는데 있어서 실격을 당했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의 소중한 구성원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은사를 소유하고 있고(고전 12:4-7), 그 은사로 다른 신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고전 12:7). 장로/집사/목사의 직에 실격을 당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교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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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16-17에서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마찬가지로 로마서 14:5는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이 성경 구절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이 아닌 영적 자유의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선상의 문제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각각의 기독교인이 그/그녀 자신의 마음에 그럴 필요가 있는냐는 확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의 앞 장들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어떤 측면의 모세의 율법과 유대 전통을 이방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따르도록 가르칠 것인가? 사도들은 예루살렘 의회에서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사도행전 15). 결정은,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사도행전 15:19-20)였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사도들이 느끼기에 이방인 신자들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필요가 있는 명령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는데도, 사도들이 안식일 준수를 포함시키는 것을 등한시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식일 준수에 있어 일반적 오류는 안식일이 예배의 날이라는 개념입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집단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예배가 토요일인 안식일 날에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명령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08-11). 성경 어디에도 안식일이 예배의 날로 명령된 곳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신약,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예배의 날을 토요일로 하지만,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명령의 본질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모임이 안식일 날 이루어 졌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의 모임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언제 만났을까요? 사도행전 2:46-47은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기독교인들이 정기적으로 만난 날이 있었다면, 그것은 안식일 날이 아닌 일주일의 첫날(우리의 일요일)이었습니다(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2). 일요일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의 안식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히 예배하는 날로 일요일을 준수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 드리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토요일이나 일요일만이 아닌 모든 날에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예배서비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로마서 8:21; 고린도후서 3:17; 갈라디아서 5:1). 기독교인은 토요일 날 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안식일 준수를 지켜야 합니까? 어떤 기독교인이 그렇게 느낀다면, 전적으로, 그렇습니다(로마서 14:5). 하지만, 안식일 준수를 선택한 사람들은 안식일 준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골로새서 2:16). 더 나아가, 안식일 준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안식일 준수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8:9). 갈라디아서 5:13-15는 이 모든 문제를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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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지역 교회는 정기적으로 특정 장소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보편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교회라는 용어는 함께 모이는 모임이거나 "집회"(살전 2:14; 살후 1:1)와 관련이 있는 헬라어 단어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신자를 “불러내어” 그들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유권을 말하고 문자적으로 "주께 속하여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또 다른 헬라어 단어가 교회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두 번 사용되었고, 결코 교회를 직접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고전 11:20; 계 1:10).

지역 교회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역 모임으로 정의됩니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헬라어(에클레시아)로서 지역 집회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살전 1:1; 고린 4:17; 고후 11:8). 어느 한 지역에 특정 지역 교회가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도시에는 많은 지역 교회가 있습니다.

보편 교회는 전세계의 교회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이 경우, 교회의 개념은 모임 자체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자들입니다. 보편 교회는 공식 모임을 갖지 않을 때에도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을 보면, 교인들이 집에 있을 때에도 그들이 여전히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을 보면, 흠정역 성경은 교회라는 단어를 복수 형태로 번역하였는데 사실 단수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단지 지역 교회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보편 교회는 “무형 교회”라고 불립니다. 즉, 거리 주소, GPS 좌표, 또는 물리적 건물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참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점에서 무형 교회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묘사되는 교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처럼 분명히 보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마 5:14). 보편 교회에 관해 언급하는 추가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 15장 9절; 마태복음 16장 18절; 에베소서 1장 22-23절; 골로새서 1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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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교회 성장에 대하여 특별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교회 성장의 원리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그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고 있음을 확언했습니다(고전 3:11).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엡 1:18-23) 교회의 생명입니다(요 10:10). 이 점을 분명히 한 후, 우리는 "성장"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장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으며, 그 중에는 숫자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도 있습니다.

회원 또는 출석하는 사람의 수가 바뀌지 않더라도 교회는 살아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의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주의 뜻에 순복하는 가운데 주 예수님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면, 그 교회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매주 그 수가 늘어나고 거대한 교회가 되더라도 여전히 영적으로 정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성장도 전형적인 패턴을 따릅니다. 성장하는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지역 교회에는 씨를 심는 사람들(복음 전도자), 씨에 물을 주는 사람들(목사/교사), 그리고 지역 교회의 회원들의 성장을 위해 영적인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고전 3:7). 심는 사람들과 물을 주는 사람들은 각각 그들의 수고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전 3:8).

지역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는 일과 물을 주는 일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건강한 교회에서 각 사람은 자신의 은사를 찾아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가장 적절한 봉사를 해야 합니다. 만일 심는 것과 물의 공급이 균형을 잃으면 교회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번영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날마다 성령을 의존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라나게 하시는 역사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서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묘사가 사도행전 2장 42-47절에 있습니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들은 서로 봉사하였으며 주를 알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쳤습니다". 이에 주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에서 있을 때 교회는 수적인 증가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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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과 출애굽기 20:11의 창조 관련 기록과의 연관성을 들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고 종종 주장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다(창세기 2:3)는 것이 미래의 안식일 법을 예시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을 떠나기 전까지 안식일에 대한 성경 기록이 없습니다. 성서의 어디에도 아담에서 모세의 때까지 안식일이 지켜졌다는 암시조차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징표였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합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출애굽기 31:16-17).

신명기 5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다음 세대에게 십계명을 다시 말합니다. 여기 12-14 절에서, 안식일 준수를 명한 뒤, 모세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유를 제시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명기 5:15).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창조를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애굽의 노예였었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을 준수에 대한 요구 사항을 참고하십시오: 안식일 법 안에 놓인 사람은 안식일 날 자신의 집을 떠나면 안되고(출애굽기 16:29), 불을 지펴서도 안되며(출애굽기 35:3),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도 안되었습니다(신명기 5:14). 안식일 법을 어긴 사람은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출애굽기 31:15; 민수기 15:32-35).

신약 성경 구절들을 검토해 보면 네 가지 중요한 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시고 그 날이 언급될 때마다, 그 날은 항상 한 주의 첫 번 째 날입니다(마태복음 28:1, 9, 10; 마가복음 16:9; 누가복음 24:1, 13, 15; 요한복음 20:19, 26). 2) 사도 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통해 안식일이 언급된 유일한 때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있었을 때였고, 그 장소는 항상 회당 안이었습니다(사도행전 13-18장).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썼습니다(고린도전서 9:20). 바울은 성도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회당에 갔습니다. 3) 바울이 “지금부터 나는 이방인들(비유대인들)에게 갈 것이다”라고 한번 말하고 나서(사도행전 18:6), 안식일은 다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4) 안식일 준수를 고수할 것을 제안하는 대신,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를 넌지시 나타냅니다(골로새서 2:16에서 발견되는 위 (3)의 경우의 한 가지 예외를 포함).

좀 더 자세히 위 (4)를 살펴 보면, 신약의 믿는 자에게슨 안식일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일요일인 “기독교 안식일” 발상 또한 비성서적일 수 있습니다. 상술 한 바와 같이, 바울이 이방인에 집중하기 시작한 후 안식일이 한번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로새서 2-16-17). 유대교의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신”(골로새서 2:14)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신약 성경에서 한 번 이상 반복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로마서 14:5-6a).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갈라디아서 4:9-1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A.D.321년 콘스탄틴에 의한 칙령으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초대 교회는 예배하기 위하여 어떤 날 모였을까요? 성서는 믿는 자들이 교제와 예배를 위해 어느 안식일(토요일)에도 모였다고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의 첫날을 언급한 명확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0:7은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믿는 자들에게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라”고 촉구합니다. 고린도 후서 9:12에서 바울이 이 제물을 “봉사”라고 지명했기 때문에, 이 모금은 기독교 집회의 일요일 예배에서의 봉사와 연관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역사적으로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이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이는 정상적인 날이었고, 이런 관행은 1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안식일은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안식일은 여전히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고 바뀐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구약 율법의 일부이고,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갈라디아서 4:1-26; 로마서 6:14). 안식일 준수는 그것이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간에 기독교인에게 요구되지 않습니다. 일주일의 첫날이고 일요일인 주의 날(주일)(요한계시록 1:10)은 우리의 부활이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창조를 기념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안식일의 휴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없고, 오히려 지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자유롭습니다(섬김).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은 제각기 안식일의 안식을 준수 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로마서 14:5). 우리는 그저 토요일이나 일요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에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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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징은 교회를 지키고, 죄를 지은 자를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고, 교회 지체들 사이에 교제를 새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역 교회의 지체들 간에 발생한 죄스러운 행동을 바로 잡는 과정입니다. 어떤 경우, 교회 권징은 한 개인을 향해 교회 회원권에서 공식적으로 제거하는 출교까지의 모든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5-20절은 교회가 권징을 위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 절차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는 피해를 입은 개인이 사적으로 가해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상황의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 2-3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그럼에도 만일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회개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죄를 고집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교회에 알립니다. 이제 가해자는 죄를 회개하고 그의 죄스러운 행동을 버릴 수 있는 세 번째 기회를 갖습니다. 만일 교회의 권징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 때라도 죄 지은 그 사람이 회개한다면 “형제를 얻은 것”(마 18:15)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절차가 진행될 때까지 죄 지은 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 결코 즐겁지 않은 것처럼 교회의 권징 과정은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교회의 권징이 필요합니다. 교회 권징의 목적은 죄 지은 자를 향해 멸시하는 마음 자세를 취하거나 또는 영적인 우월감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권징의 목표는 한 개인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다른 신자들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권징은 사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그 후 점차적으로 공개해야 합니다. 권징은 개인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교회의 다른 지체들을 위하는 경건한 두려움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권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회원제의 필요성을 암시합니다. 교회와 목회자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아닌 특정 그룹의 사람들(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의 영적 안녕을 책임집니다. 바울은 교회 권징의 맥락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고전 5:12)라고 묻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권징을 받아야 하는 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하며 교회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론할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치리를 받게 되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맹백한 죄를 지속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지역 교회인 고린도교회(고전 5:1-13)를 통해 교회 권징의 예를 보여줍니다. 이 경우 치리는 출교에 해당하는데, 사도 바울은 치리를 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죄는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일 죄를 허용되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고전 5:6-7)처럼 죄가 주변으로 퍼질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멀어져서 “누룩 없는 자”가 되거나 또는 영적으로 부패시키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고전 5:7-8). 자기의 신부인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것은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엡 5:25-27). 불신자들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의 결과들 중 하나는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원수들에 의해 모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삼하 12:14).

교회가 회원에 대해 취하는 징계 조치마다 경건한 슬픔과 진정한 회개를 가져오는데 성공하기를 소망합니다. 회개를 하게 되면, 그 개인은 다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관련된 사람은 회개하였고, 나중에 바울은 교회가 그를 받아들여 교회와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고후 2:5-8). 불행하게도, 치리 조치가 사랑 안에서 올바르게 수행되더라도 사람을 회복시키는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권징이 회개를 이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세상에서 선한 증거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여러 다른 선한 목적들을 성취하기 때문에 치리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일관된 징계 없이 제 멋대로 하도록 방치된 젊은이들의 행동을 목격하곤 합니다. 그 광경은 보기에 흉합니다. 지나치게 관대한 부모의 사랑은 아이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함으로써 그 아이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징계를 받지 않고 자라난 아이는 통제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며 제대로 적응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의 권징은 결코 즐겁거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권징은 때때로 필요합니다. 사실, 권징은 사랑입니다. 권징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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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사전적 정의는 ‘하나님 또는 숭배되는 신들에 대한 믿음, 대개 행위와 의식으로 표현됨, 모든 믿음, 숭배, 등의 특정한 체계, 종종 윤리적 강령에 관련 있음’과 비슷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정의에 비추어, 성경은 조직화된 종교를 말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조직화된 종교”의 목적과 영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1:1-9은, 아마도 조직화된 종교의 첫 번째 사건으로, 노아의 후손들이 온 세상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신 바벨탑을 짓기 위해 자신들을 조직화 하였다는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관계보다 자신들의 단결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셨고, 그리하여 이 조직화된 종교를 분산시키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과 그 다음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국가를 위해 종교를 “조직”하셨습니다. 십계명, 성막에 관한 율법들, 그리고 희생 제사 제도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이스라엘 족속들에 의해 지켜져야 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더 연구하다 보면 이 종교의 의도는 구세주, 즉, 구원자의 필요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로마서 7장).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잘못 이해하였고 하나님보다는 규율과 의식을 더 숭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많은 갈등들은 조직화된 종교들과의 갈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런 예들은 바알 숭배(사사기 6; 역대상 18), 다곤(사무엘상 5), 몰렉(열왕기상 23:10)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종교들을 따르는 자들을 무찔렀으며, 자신의 주권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당시 조직화된 종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들과 위선적인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로 그들과 끊임없이 맞서셨습니다. 서신서들은, 복음을 행위와 의식을 요구하는 어떤 목록들과 썩어버린 조직화된 집단들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또한 이런 “기독교 신앙에 더해지는 것”을 요구하는 종교들을 받아들이도록 믿는 자들이 변화되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는 이러한 종교들에 관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에는, 조직화된 종교가 적그리스도에 의해 단일 세계 종교가 세워질 때 세상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 나와있습니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 조직화된 종교의 마지막 결과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의도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계획의 한 부분인 조직화된 믿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조직화된 믿는 자들의 집단들을 “교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묘사가 된 교회는 조직화 되고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조직은 보호, 생산성, 그리고 전도로 이끌어 줍니다(사도행전 2:41-47). 교회의 경우에는, 이것을 “조직화된 관계”라고 더 좋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인간의 시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획은 없습니다(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 로마서 5:8). 자랑함도 없습니다(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 에베소서 2:8-9). 주도권에 대한 갈등이 있으면 안됩니다(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십니다 – 골로새서 1:18). 편견이 있으면 안됩니다(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 갈라디아서 3:28). 조직화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의 규율과 의식에 중점을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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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가 다른 믿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사도행전 2:42). 우리는 그와 같은 헌신의 예를,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는, 그들에게 지정된 교회 건물은 없었지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사도행전 2:46). 모임을 가질 때마다, 믿는 자들은 다른 믿는 자들과 교제하는 것과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즐겼습니다.

교회 출석은 단지 “좋은 제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히브리서 10:25는 우리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초대 교회에서도, 일부는 다른 믿는 자들과 만나지 않는 나쁜 습관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것이 행해야 할 방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 출석을 위한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교회 출석에 더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요한일서 4:12), 서로 격려할 수 있는(히브리서 3:1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는(히브리서 10:24), 서로에게 봉사할 수 있는(갈라디아서 5:13), 서로 권할 수 있는(로마서 15:14), 서로 존경할 수 있는(로마서 12:10), 그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길 수 있는(에베소서 4:32) 장소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원이 됩니다(고린도전서 12:27). 교회의 몸이 제대로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그 “신체 부위들” 모두가 출석하여 작동되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2:14-20). 그냥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들을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사역에 어떤 유형으로라도 참여해야 합니다(에베소서 4:11-13). 믿는 자는 그가 가진 은사의 발산 없이는 온전한 영적 성숙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 모두는 다른 믿는 자들로부터의 도움과 격려가 필요합니다(고린도전서 12:21-26).

이러한 이유와 그 밖의 많은 이유로, 교회 출석, 참여, 그리고 교제는 믿는 자의 삶에 있어 규칙적인 측면이 되어야 합니다. 매주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이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하며 다른 믿는 자들과의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모퉁잇돌이시고(베드로전서 2:6), 우리도”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 하나님의 “영적인 집”의 건축 자재로서, 우리는 자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연결된 믿는 자들(the Church)이 교회(church)에 갈 때마다 그 연결이 선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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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2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교회의 목적들/활동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1) 성경의 교리를 가르침, 2) 믿는 자들을 위한 교제의 장소를 제공함, 3) 성찬식을 준수함, 4) 기도

교회가 성경의 교리를 가르침으로 우리가 우리의 믿음가운데 굳건히 설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14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교회는기독교인들이 서로에게 헌신하고 서로를 존중하며(로마서 12:10). 서로를 가르치고(로마서 15:14), 서로에게 친절하고 서로를 측은히 여기며(에베소서 4:32), 서로가 격려하고(데살로니가전서 5:11),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요한일서 3:11) 교제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들 대신해서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믿는 자들이 준수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1:23-26). “떡을 떼며”(사도행전 2:42)라는 개념은 또한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제를 도모한다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사도행전 2:42에 따른 교회가 존재하는 마지막 목적은 기도입니다. 교회는 기도를 도모하고, 기도 하는 사람을 가르치며, 그리고 기도를 수행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7은 우리를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교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충성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님이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지역사회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도모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인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베드로전서 3:15).

교회가 존재하는 최종적인 목적들의 일부는 야고보서 1:27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업무를 가집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공급하는 것입니다(음식, 옷, 쉴 곳). 교회는 또한 믿는 자들이 죄를 극복하고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물들지 않도록 그들에게 필요한 도구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준비시키고 갖춰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2:12-27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훌륭한 예시를 주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 입, 그리고 발입니다 – 그리스도의 몸(고린도전서 12:12-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여기에 육체적으로 계신다면 그분께서 수행할려고 하실 일들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크리스챤”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같아야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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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분리란 하나님이 신자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셔서 죄 많은 문화 가운데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정결을 이루도록 하신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분리는 일반적으로 개인과 교회의 두 영역에서 고려됩니다.

개인적인 분리는 경건한 행동 기준을 지키려는 개인적인 헌신과 관련됩니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뜻을 정함으로써 개인적인 분리를 실천했습니다. 그의 기준은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했기 때문에 그의 분리는 성경적인 분리였습니다.

개인적인 분리에 대한 현대적인 사례는 술이 제공되는 파티 초대장을 거부하기로 결정하는 것 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결정은 유혹을 피하거나(롬 13:14), "모든 종류의 악"(살전 5:22)을 피하기 위해, 또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롬 14:5)을 위해 내려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7; 참조, 벧전 1:14-16).

교회의 분리는 신학이나 관례에 근거하여 다른 기관과의 관계에 대하여 교회가 내리는 결정과 관련됩니다. 분리주의는 “부름 받은 모임”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에클레시아, ekklesia)에서 유래한 "교회"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를 보면, 주께서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 사람들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계 2:14-15). 교회는 이단과의 관계를 끊고 분리되어야 합니다. 교회 분리의 최근 실례는 교회를 배교자들과 결합시키는 에큐메니칼 연합에 대한 교단의 입장일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접촉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죄인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눅 7:34). 바울은 분리주의에 대한 균형적인 견해를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빛을 약화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Got Questions Ministries

주님은 이 땅에서의 교회가 어떻게 조직되고 관리되기를 바라시는지를 그분의 말씀 안에 분명하게 기록하여 두셨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최고의 권위입니다(엡 1:22; 엡 4:15; 골 118). 둘째, 지역 교회는 자치적이어야 합니다. 즉, 외부의 권위나 통제가 없이 자치권을 가져야 하고, 개인이나 조직의 지배 계층적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딛 1:5). 셋째, 교회는 두 개의 주요 직분, 곧 장로와 집사에 의해 구성되는 영적 지도층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들"은 모세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지도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훗날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고(삼하 5:3; 삼하 17:4, 15), 왕에게 조언을 하고(왕상 20:7),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백성들을 대표하는 것을(출 7:17; 출 24:1, 9; 민 11:16, 24-25)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초기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은 “장로”에 대해 프레스부테로스(presbuteros)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장로”로 번역된 헬라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은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장로들에 관하여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행 14:23, 15:2, 20:17; 딛 1:5; 약 5:14). 장로라는 단어가 보통 복수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각 교회는 한 명 이상의 장로가 있었습니다. 이와는 다른 유일한 예외들은 어떤 이유로 인하여 한 명의 장로가 선출되는 경우입니다(딤전 5:1, 19). 예루살렘 교회에서 장로들은 사도들과 함께 지도층의 일부가 되었습니다(행 15:2-16:4).

장로의 지위가 "감독자"또는 "감독"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포스(episkopos)의 지위와 동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11:30; 딤전 5:17). “감독/감독자”라는 용어는 권위와 의무를 묘사하는 반면, "장로"라는 용어는 직분의 위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벧전 2:25, 5:1-4). 빌립보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안부를 묻지만 장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장로들은 감독들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디모데전서 3장 2, 8절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지만 장로의 자격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디도서 1 장 5-7절은 이 두 용어를 하나로 묶는 것처럼 보입니다.

“흙을 통해”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로부터 유래한 "집사"의 위치는 교회에서 섬기는 지도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집사는 장로와 별개이며, 여러 면에서 장로와 비슷한 자격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딤전 3:8-13). 집사는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대로 교회의 필요를 돕는 일을 합니다.

교회의 인간 지도자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목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포이멘(poimen)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단 한번 발견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대부분의 학자들은 목사와 교사를 하나의 직분과 관련된 용어라고 보고 “목사이며 교사”로 해석합니다. 아마 “목사이며 교사”인 지도자는 어떤 특별한 지역 교회의 영적인 목자였을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서 항상 여러 장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 장로들에게는 가르침의 은사를 주시고, 다른 장로들에게는 행정, 기도 등의 은사를 주신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롬 12:3-8; 엡 4:11). 또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은사를 사용할 사역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습니다(행 13:1). 따라서 한 장로는 "목사"로 등장할 수도 있고, 다른 한 장로는 긍휼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심방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장로는 조직의 세부 사항을 다루는 의미에서 "다스리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명의 목사와 집사회로 조직된 많은 교회들은 사역을 나누고 어떤 결정을 함께 내린다는 점에서 복수 장로들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성경을 보면 결정을 내릴 때 회중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 감독 또는 목사로 불리는) 어떤 ‘독재’ 지도자가 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행 1:23, 26; 6: 3, 5; 15:22, 30; 고후 8:19). 반면, 장로나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에 비중을 두지 않는 회중 통치의 교회 역시 비성경적입니다.

요약하면, 성경은 교회를 섬기는 집사 그룹과 함께 여러 명의 장로들(감독/감독자)로 구성된 지도층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장로들 중 한 명이 주요한 "목회적" 역할로 섬기도록 하는 것이 복수 장로 제도에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목사/ 교사"(심지어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선교사로 부르셨던 것처럼)로 부르시고 그들을 교회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엡 4:11). 따라서 교회는 여러 장로들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장로들이 목회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로들 중 한 사람으로서 목사 또는 "가르치는 장로"는 다른 장로들과 동등한 의사 결정권을 갖지 않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첫째, "그렇게 많은" 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스캔들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스캔들이 엄청난 관심을 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스캔들"에 전혀 연루된 적이 없는 수천 수만의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 목사들, 교수들, 선교사들, 작가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의 배우자와 가족에게 충실한 남성들과 여성들이며, 최대한의 정직과 성실로 그들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몇몇 소수의 실패가 모든 사역자의 인격을 공격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때때로 스캔들을 만드는 문제가 여전히 있습니다.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간통죄 또는 매춘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금 사기 및 기타 재정적인 불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1)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믿음이 없는 엉터리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 복음주의 기독교인 지도자들 중 일부는 그들의 지위로 인해 교만하여지기 때문입니다. 3) 사탄과 마귀들은 교회 지도자와 관련된 스캔들이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집중적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1) 스캔들에 걸린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엉터리 신자들이거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20)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을 경건한 신자로 가장하고 또한 견고한 복음주의 지도자로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매’(스캔들)는 결국 그들이 자기들이 주장하던 바와 정반대의 존재인 것을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사탄의 본을 따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2)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상기시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교만에 대해 경고합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역이 성장하고 번창하여지면 그들은 그 영광의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취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사역을 관리하고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종류의 교만은 타락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고 경고하였습니다.

3) 사탄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스캔들을 선동함으로써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통죄를 짓고 우리아를 살해함으로 다윗의 가족과 이스라엘 전체가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교회 지도자의 도덕적인 부패로 인해 많은 교회들과 사역이 훼손되거나 파괴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타락을 보고 신앙이 약해집니다. 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실패를 빌미 삼아 기독교를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이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더욱 시도합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가 스캔들의 혐의를 받거나 잡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1) 근거가 없거나 확인되지 않은 고발을 듣거나 받아들이지 마십시오(잠 18:8, 17; 딤전 5:19). 2) 죄를 범한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해 성경적인 적절한 조치를 취하십시오(마 18:15-17; 딤전 5:20). 만일 죄가 입증되고 심각하다면, 사역의 지도층 자리에서 영구히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딤전 3:1-13). 3)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고(엡 4:32; 골3:13), 회개가 입증되면 그들을 공동체로 회복시키지만(갈 6:1; 벧전 4:8) 지도자로 삼지는 마십시오. 4) 우리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충실하십시오. 그들이 당면한 문제, 그들이 겪는 유혹, 그리고 그들이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를 안다면, 우리는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건하게 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격려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5)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의 실패를 보면서 당신의 궁극적인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시며,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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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침례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제정하신 두 의식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이 지침들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를 삼으며,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침례를 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곳(“모든 나라들”)에서 “세상 끝날까지 수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별 다른 이유가 없는 한, 침례는 예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침례는 교회가 탄생하기 전부터 행해졌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씻어냄(깨끗이 함)”의 성격을 의미하는 침례를 행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침례를 사용하였고, 비단 이방인들뿐만 모든 사람들에게 침례 받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의미하는 요한의 침례는 사도행전 18:24-26과 19:1-7에서 보여지는 기독교 침례와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침례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침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침례를 “기독교” 침례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의식을 통하여 사람은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성령 침례도 받아 교회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2:13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물에 의한 침례는 성령 침례의 “재연”입니다.

 

기독교 침례는 사람이 자신의 믿음과 제자의 신분임을 공표하는 수단입니다. 침례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나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셔서, 지금 나는 성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고백합니다”라고 침묵으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극적인 방법으로 예시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죄인이 주 예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 그는 죄에 대해서는 죽는 것이고(로마서 6:11)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것(골로새서 2:12)입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구원 뒤에 따르는, 깨끗하게 된, 거룩한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6:4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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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5)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시니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4절). 바울은 3절에서 하나됨을 위해 필요한 겸손, 온유, 인내, 사랑을 호소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13절에 따르면, 성도들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11절)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고(11절) 가르치십니다(13절). 성령의 이러한 활동을 조명이라고 부릅니다.

완전한 세상에서는 모든 신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을 의지하면서 성경 연구에 충실할 것입니다(딤후 2:15).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을 소유한 모든 사람이 전부 실제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엡 4:30). 어떤 교사에게라도 물으십시오. 심지어 최고의 수업 교사라도 그가 무엇을 가르치든 배우기를 거부하는 고집 센 학생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 성경 해석이 다른 이유는 교사이신 성령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이 뚜렷하게 차이가 나게 되는 몇 가지 이유들입니다.

1. 불신앙.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갖고 있지만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불신앙의 상태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그릇된 성경 해석은 이러한 자들로부터 나옵니다.

불신자가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성경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조명이 없습니다. 더욱이 목사나 신학자라 할지라도 신분이 사람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앙에 의해 야기되는 혼란의 예가 요한복음 12장 28-29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늘로부터 들리는 소리로 답변하십니다. 이때 해석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요 12:29). 모든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나오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 똑같은 음성을 들었지만, 그들은 각각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 훈련 부족. 사도 베드로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는 그들이 잘못 가르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벧후 3:16). 디모데는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는 당부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형편없는 해석학. 많은 오류들이 훌륭한 해석학(성경 해석의 과학)을 적용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직접적인 맥락에서 한 구절을 빼내는 것은 그 구절의 의도에 큰 피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장과 책의 더 넓은 맥락을 무시하거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면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대한 무지. 아볼로는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설교자였지만 그는 오직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불완전하였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렀습니다”(행 18:24-28). 그 후에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오늘날 몇몇 그룹과 개인은 어떤 구절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구절들을 배제함으로써 불완전한 메시지를 갖게 됩니다. 그들은 성경으로 성경을 비교하는데 실패합니다.

5. 이기심과 자존심. 슬픈 일이지만, 성경에 대한 많은 해석들이 한 개인의 편견 및 애용하는 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장려함으로써 개인적인 유익을 얻으려는 기회로 삼습니다(유다 서신서의 거짓 교사에 대한 묘사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6. 성숙하지 못함. 마땅한 성숙을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때도 그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 3:2-3).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고기"를 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이 육신에 속하여 있는 증거는 교회의 분열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4절).

7. 전통에 대한 부당한 강조. 어떤 교회는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해석은 언제나 이미 정립된 교회의 전통에 맞추어집니다.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이 상충되는 곳에서는 전통을 우선시 합니다. 이는 말씀의 권위를 효과적으로 무효화시키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최고의 권위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천국과 지옥의 실체,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해서 모호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부 사안들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은 덜 분명합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여러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성만찬의 횟수나 사용할 음악 스타일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정직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서로 다른 해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것에 대해 서는 타협해서는 안되지만,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독단적이 되는 것을 피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를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초대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사도들의 교리에 굳세게 서 있었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교리로 돌아가서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다른 교리들과 유행들과 술책을 버리면 교회 내에 하나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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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은 ‘침례’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발견됩니다. 이 단어는 "물에 잠기다"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물 뿌리거나 붓는 방식은 그 자체로 모순이 됩니다. 세례는 "물을 뿌려서 누군가를 물 속에 담그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례는 그 본래의 정의에 따라 물에 잠기는 행위여야 합니다.

침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 함께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물에 잠기는 행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에서 나오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결과적으로, 침수에 의해 받는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물을 뿌려주거나 붓는 방식은 유아세례라는 비성경적인 실천의 결과로 실행되게 된 것입니다.

침수에 의한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성경적인 방식이지만 구원의 전제 조건은 아닙니다. 순종의 행위,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분과의 하나됨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우리의 옛 삶을 떠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묘사하는 것입니다(고후 5:17). 침수에 의한 침례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