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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많은 구약의 예언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수백 개라고 말합니다. 다음은 가장 명확하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몇 가지 예언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 -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에 관하여 – 스가랴 9장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시편 22:16-18,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에 관한 가장 명확한 예언은 이사야 53장 전체입니다. 이사야 53장 3-7절은 특히 명백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다니엘서 9장의 "칠십 이레" 예언은 메시아 예수님이 "끊어져 없어질" 정확한 날짜를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0장 6절은 예수님이 겪었던 치욕을 정확히 묘사합니다. 스가랴 12장 10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발생하는 메시아의 ‘찌름 받게 됨’을 예언합니다. 더 많은 예들이 제공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구약은 메시아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가장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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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에게 있어, 기도는 호흡과 같아야 하는데,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들로 기도합니다. 우선 한 가지 이유는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고(누가복음 2:36-38) 그분께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기도를 합니다(빌립보서 4:6-7). 기도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와 초대 교회에 의해 예시되고 있습니다(마가복음 1:35; 사도행전 1:14; 2:42; 3:1; 4:23-31; 6:4; 13:1-3). 예수님께서 기도는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우리 또한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에 머물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기도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많은 상황들에 대한 자신이 주시는 해결책을 받는 수단으로 기도를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준비함에 있어 기도하며(누가복음 6:12-13), 마귀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마태복음 17:14-21), 영적인 수확을 위한 일꾼들을 모으기 위해(누가복음 10:2),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능력을 위해(마태복음 26:41),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강화시키는 수단을 얻기 위해(에베소서 6:18-19).

우리는 특정한 요구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 가고, 비록 우리가 요구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기도들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마태복음 6:6; 로마서 8:26-2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어떤 것들을 구할 때, 우리가 간구한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일서 5:14-15). 때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기도의 응답을 늦추십니다. 이런 경우들에 있어, 우리는 기도에 부지런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마태복음 7:7; 누가복음 18:1-8). 기도는 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을 움직이는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모르는 상황에서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도구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딸을 가진 그 시리아 여인이 그리스도께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딸은 온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마가복음 7:26-30). 여리고 성 밖에 있는 장님이 그리스도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장님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누가복음 18:35-4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종종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야고보서 4:2). 어떻게 보면, 기도는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누군가와 나눌 때까지 누가 복음을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응답 받은 기도의 결과들을 우리는 결코 보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가 부족은 믿음의 부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의 부족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약속하셨던 대로 행하시고, 우리가 구하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들을 더 풍성하게 축복하실 것입니다(에베소서 3:20). 기도는 다른 사람들의 삶들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우리의 주요 수단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 되는’ 우리의 수단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자신들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인 사탄과 그의 무리들을 물리치는 우리의 수단이 됩니다. 기도는 다른 사람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수단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접촉되는 수단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역부족인 적군들(사단과 그의 졸개들)을 파멸시키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브리서 4:15-16). 우리에게는 의인의 열심 있는 기도는 많은 것을 성취한다는 약속이 있습니다(야고보서 5:16-18). 우리가 기도로 그분께 자주 나아갈 만큼 그분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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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의 타당성에 관한 논란이 굉장히 많습니다. 창조론은 "우주와 생물체는 진화론과 같은 자연적 과정보다는 성경의 기록대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창조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의됩니다. 창조 과학은 종종 세속 공동체에 의해 묵살되고 과학적 가치가 부족하다고 비난 받습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어떤 주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분명하게 호환됩니다. 창조론은 이 세상의 실제 사건, 장소 및 사물에 대해 진술합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생각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창조론과 일치하는 과학적 사실들이 확립되어 있으며, 그 사실들이 서로 관련되어 창조론자의 해석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다른 광범위한 과학적인 사고들이 일련의 사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창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초자연적 또는 영적인 설명은 배제하거나 거부하고 오직 모든 것이 자연의 속성 및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철학적인 관점”인 ‘자연주의’와 반대되는 창조론이 어떻게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 대답은 “과학적”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과학"과 "자연주의"는 정의에 있어서 창조론적인 견해를 배제하기 때문에 너무나 자주 똑같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의는 자연주의에 대해 불합리한 숭배를 요구합니다. 과학은 "관찰, 식별, 묘사, 실험 조사 및 현상에 대한 이론적 설명"으로 정의됩니다. 과학 그 자체로는 자연주의와 무관합니다. 자연주의는 창조론처럼 실험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닌 일련의 전제 조건들을 요구합니다. 그 전제 조건들은 데이터로부터 추정되거나 시험 결과에서 파생된 것들이 아닙니다. 이러한 철학적인 전제들이 어떤 데이터를 취하기도 전에 받아들여집니다. 자연주의와 창조론은 모두 입증이나 검증이 가능하지 않은 전제들에 의해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사실들을 확인하기도 전에 논쟁에 들어갑니다. 이에 창조론은 적어도 자연주의만큼이나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공평합니다.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창조론은 발견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과 양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상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과학적"으로 여길 수 없는 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과학이 아닙니다. 창조론도, 자연주의도 반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즉, 어느 하나를 확정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실험이 전혀 불가능합니다. 어느 쪽도 예측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두 이론들은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을 생성하거나 향상시키지 못합니다. 이 두 이론만을 근거로 해서 보면,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자들이 창조론을 거부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기적의 개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주의자들은 전형적으로 특별 창조와 같은 기적은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관측되어 오던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몇 가지 점에서 아이러니합니다. 한 예로,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겨난다는 무생기원설(abiogenesis)을 생각해 봅시다. 무생기원설은 과학의 개념에서 철저하게 반박된 개념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연주의적인 관점은 이 땅의 생명, 곧 스스로 복제하고, 자립하고, 복잡한 유기체의 생명이 무생명 물질로부터 우연히 발생했다고 전제합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결코 관찰된 적이 없습니다. 더 유익한 진화적인 변화가 있으려면 피조물이 더 복잡한 형태로 발전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변화는 결코 관찰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창조론은 성경이 기적의 사건들에 대한 문서화된 기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기적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기적 때문에 창조론을 비과학적으로 분류한다면 자연주의도 비슷한 딱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자연주의 대 창조론 논쟁에 있어서 양측이 사용하는 많은 사실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절대적으로 단일 해석을 요구하는 그러한 사실은 없습니다. 창조론과 세속적인 자연주의 사이의 구분은 전적으로 서로 다른 해석에 달려있습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에 대해 찰스 다윈은 친히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의 소개 글에서 "나는 이 책의 그 어떤 한 가지 내용도 거의 사실들로부터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사실로부터 오히려 내가 도달한 것과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윈은 분명히 창조론이 아니라 진화론을 믿었지만 그는 믿음을 택하는데 있어서 해석이 핵심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한 과학자는 어떤 특정 사실을 보면서 자연주의를 지지할 수 있고 다른 과학자는 똑같은 사실을 보면서 창조론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창조론이 진화론과 같은 자연주의적 사상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은, 특히 이 이분법이 과학을 이끄는 사람들에 의해 인정된 후로, 타당한 주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많은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과학자들은 생명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설명은 자연주의적인 진화 또는 특별 창조라고 말합니다. 모든 과학자가 어떤 것이 참인지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둘 중에 하나만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창조론이 배움을 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법인지를 알려주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들 중에는 현실적인 가능성의 개념, 거시적 진화에 대한 증거의 결함, 경험의 증거 등이 있습니다. 자연주의적인 전제를 무작정 받아들이고 창조론적 전제들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데는 논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창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과학적 발견에 장벽이 되지 않습니다. 뉴톤, 파스퇴르, 멘델, 파스칼, 켈빈, 리나우스, 맥스월과 같은 이들의 성취를 검토해 보십시오. 그들 모두가 명확하고 부족함이 없는 창조론자들이었습니다. 창조론은 자연주의가 "과학"이 아니듯이 "과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과학 그 자체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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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의 자녀를 돌 볼 수 없는 부모가 그 아이를 다른 집으로 입양시키는 것은 사랑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자녀를 가질 수 없는 많은 부부를 위한 기도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자녀가 아닌 아이들로 입양함으로써 대가족을 만들기도 합니다. 성경은 입양에 대해 좋게 말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바로 황제가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칙령을 내린 시기에 아들을 낳은 요게벳이라는 히브리 여인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출 1:15-2). 요게벳은 바구니를 가져다가 방수 처리를 한 후에 그 아기를 넣고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바로의 딸 중 한 명이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그 아이를 꺼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그를 왕실에 입양시키고 그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잘 자라나서 충실하고 복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출 2:1-10).

에스더 서에는 에스더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옵니다. 에스더는 부모가 죽은 후 사촌에게 입양되었고, 그 후 여왕이 되었고, 하나님은 유대 백성을 구원하는데 그녀를 사용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씨를 통하는 대신에 성령을 통하여 잉태되었습니다(마1:18).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자녀로 입양한 후 그를 키웠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신뢰함으로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가족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인 잉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입양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마찬가지로, 입양을 수단으로 하여 어떤 사람을 가족으로 삼는 것은 선택과 사랑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을 그분의 영적인 가족으로 입양하듯이 우리는 모두 기도하는 마음으로 육신의 가족에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분명히 육체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 모두에서 입양은 성경에 좋은 것으로 비추어집니다. 입양하는 사람들과 입양된 사람들 모두 엄청난 복을 얻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에 입양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을 예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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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과 관련된 휴거의 시점은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이슈입니다. 세가지 주요 견해들은 환난전휴거(휴거가 환난 전에 일어남), 환난중휴거(휴거가 환난의 중간 또는 중간쯤 일어남), 그리고 환난후휴거(휴거가 칠 년 환난이 끝날 때 일어남)입니다. 일반적으로 진노전휴거(Prewrath Rapture)로 알려진 네 번째 견해는 환난중휴거의 견해를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첫째, 환난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 9:27에 의하면, 아직 다가올 한 이레(7년)가 존재합니다. 칠십 이레(다니엘 9:20-27)에 대한 다니엘의 전체적인 예언은 이스라엘 국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히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주의를 기울이는 기간입니다. 환난의 기간인 칠십 번째 이레(7년) 역시 하나님께서 특히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시간일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꼭 교회가 환난 중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지만, 이 기간 동안에 이 땅에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에 관한 질문을 야기합니다.

휴거에 대한 주요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입니다. 이 구절들은 죽었던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살아있는 모든 믿는 자들이 공중에서 주 예수님을 만날 것이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휴거는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부터 그분의 백성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몇 구절들 뒤, 데살로니가전서 5:9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환난 시기를 주로 다루는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진노를 환난중에 이 땅에 쏟으실 것인지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입니다. 믿는 자들은 진노에 고통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진노의 환난을 통해 고통 받는 이 땅에 그들을 남겨놓으신다는 것은 모순되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부터 자신의 백성들을 제거하신다고 약속 한 바로 후에 기독교인들을 구하신다고 약속하신 사실은 이 두 사건들이 함께 연결된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휴거의 시기에 대한 또 다른 주요 구절은 요한계시록 3:10인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 오게 될 “시험의 시간”으로부터 믿는 자들을 구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의 와중에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것이든지, 아니면 시험 자체로부터 믿는 자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 “부터(from)”로 번역된 그리스어의 유효한 의미들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이 무엇으로부터 지켜지는 것이 약속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지 시험으로부터가 아닌, 시험의 “시간”으로부터 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포함하는 바로 그 시간으로부터, 다시 말해 환난으로부터 믿는 자들을 지키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환난의 목적, 휴거의 목적, 데살로니가전서 5:9의 의미 그리고 요한계시록 3:10의 해석 모두가 환난전휴거의 견해를 분명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문자 그대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해석이 된다면, 환난전휴거의 견해가 가장 성경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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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더하기 위해 또 다른 계시를 주실 것이라고 믿을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시작(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인류의 종말(계시록)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신자인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16-17절로부터 이 사실을 압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성경에 더 많은 책이 추가되어야 한다면, 이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미완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지금 성경은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20절은 오직 계시록에만 직접 적용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추가하는 것에 대해서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는 현재 66 권의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인생 속의 그 어떤 상황이라도 성경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것은 계시록에서 결론을 찾습니다. 성경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더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볼 때 그분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으며, 그분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을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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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침묵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침묵 기도가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보다 덜 타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실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쉽게 들으실 수 있습니다(시 139:23; 렘 12:3).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습니다(마 12:24-26; 눅 11:17). 우리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기 위해 우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말로 들리든 그렇지 않든 그분께 드려진 모든 기도를 아십니다.

성경은 개인적인 기도에 대해 언급합니다(마 6:6). 당신이 혼자 있을 때는 큰 소리로 기도하든 침묵으로 기도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비밀을 기도할 때, 함께 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등, 어떤 상황에서는 침묵으로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이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당혹스러워서 침묵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침묵 기도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무언의 기도의 타당성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구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일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분명히 항상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뜻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상태에 계속 머물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모든 상황, 계획, 두려움, 또는 염려를 그분의 보좌 앞으로 가져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끊임 없는 기도는 찬양과 탄원과 간구와 감사의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상황과 때에 따라 말로, 속삭임으로, 부르짖음으로, 노래로, 침묵으로 기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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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분리란 하나님이 신자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셔서 죄 많은 문화 가운데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정결을 이루도록 하신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분리는 일반적으로 개인과 교회의 두 영역에서 고려됩니다.

개인적인 분리는 경건한 행동 기준을 지키려는 개인적인 헌신과 관련됩니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뜻을 정함으로써 개인적인 분리를 실천했습니다. 그의 기준은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했기 때문에 그의 분리는 성경적인 분리였습니다.

개인적인 분리에 대한 현대적인 사례는 술이 제공되는 파티 초대장을 거부하기로 결정하는 것 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결정은 유혹을 피하거나(롬 13:14), "모든 종류의 악"(살전 5:22)을 피하기 위해, 또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롬 14:5)을 위해 내려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7; 참조, 벧전 1:14-16).

교회의 분리는 신학이나 관례에 근거하여 다른 기관과의 관계에 대하여 교회가 내리는 결정과 관련됩니다. 분리주의는 “부름 받은 모임”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에클레시아, ekklesia)에서 유래한 "교회"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를 보면, 주께서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 사람들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계 2:14-15). 교회는 이단과의 관계를 끊고 분리되어야 합니다. 교회 분리의 최근 실례는 교회를 배교자들과 결합시키는 에큐메니칼 연합에 대한 교단의 입장일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접촉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죄인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눅 7:34). 바울은 분리주의에 대한 균형적인 견해를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빛을 약화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Got Questions Ministries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이 배타적인 말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귀에는 거슬리게 들릴 수도 있으나 사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요한복음 14:6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들 가운데 하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평판, 업적, 특별한 지식, 또는 개인적인 경건함에 상관없이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올 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으셨습니다(베드로전서 2:4).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신 유일한 분이십니다(요한복음 3:13). 그분께서는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산 유일한 분이십니다(히브리서 4:15). 그분께서는 죄에 대한 유일한 속죄의 제물이십니다(요한일서 2:2; 히브리서 10:26). 예수님만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멸한 유일한 분이십니다(히브리서 2:14-15).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이십니다(디모데전서 2:5). 그분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신"(빌립보서 2:9)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요한복음 14:6 외에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1-27에서 믿음의 대상으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4-15). 그분께서는 양의 문이고(요한복음 10:7), 생명의 떡이며(요한복음 6:35), 부활이십니다(요한복음 11:25). 그 어떤 다른 누구도 이러한 명칭들을 당연하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는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산 헤드린 공회를 향해 예수님만이 천국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하게 선포하였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 바울은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콕 짚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도행전 13:38-39). 요한은 전반적인 교회들에 글을 쓰면서 우리의 죄 사함의 근거로 유일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명시합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한일서 2:12).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의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으려면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죄에 대한 죄값으로서 죽으신 십자가에서의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로마서 3:22).

예수님 사역의 어느 시점에서 많은 군중들이 그분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구원자를 찾으려는 희망으로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요한복음 6:67) 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정확한 답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한복음 6:68-69). 영생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는 베드로의 믿음을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구체적으로 인간 복제에 관한 주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그 개념에 대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복제를 위해서는 DNA와 배아 세포가 필요합니다. 첫째, DNA는 생물 세포의 핵에서 끄집어 냅니다. 그 후 유전자 정보 암호를 담고 있는 이 물질을 배아 세포의 핵에 놓습니다. 새로운 유전 정보를 받은 세포는 새로운 DNA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미 그 자체의 DNA를 제거한 상태에 있습니다. 만일 세포가 새로운 DNA를 받아들이면 복제된 배아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배아 세포는 새로운 DNA를 거부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배아는 원래의 유전 물질을 그의 핵에서 제거하였기 때문에 생존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많은 경우 복제가 시도될 때 새로운 유전 물질의 성공적인 이식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배아들이 사용됩니다. 이 방법으로 복제된 생물이 만들어질 수는 있지만(예, 복제양 돌리) 변형과 문제가 없이 성공적으로 생물을 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인간 복제의 과정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는 몇 가지 성경적 원리에 따라 서술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유일합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분명히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이에 사고 팔리는 상품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식이 필요하지만 적절한 장기 기증자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대체 장기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 복제를 장려하여 왔습니다. 자신의 DNA를 가지고 그 DNA로 구성된 복제 장기를 만들면 장기 거부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값싸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복제 과정에는 인간 배아들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장기를 만들기 위해 세포들이 생성될 수 있지만, 필요한 DNA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배아들을 죽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질적으로 복제는 인간 배아들이 온전하게 자라날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고 많은 인간 배아들을 ‘쓰레기’처럼 버려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신에 의해 배아(태아)가 형성되는 것을 생명의 시작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태아는 아직 실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르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139장 13-16절은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시의 작가인 다윗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주의 눈이 그를 보셨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그가 잉태되었을 때 이미 하나님이 그를 사람으로 보시고 미래를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이사야 49장 1-5절은 이사야가 그의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선지자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아직 태에 있을 때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눅 1:15). 이 모든 것은 잉태와 함께 생명이 시작된다는 성경의 입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인간 배아를 파괴하면서 만드는 인간 복제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성경의 관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또한 인류가 창조되었다면 창조주가 계신 것이며 이에 인간은 창조주께 복종해야 하고 보고해야 합니다. 세속 심리학과 인본주의적인 대중적인 사고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사람이 절대 권위라고 믿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땅을 다스리라는 책임을 주셨습니다(창 1:28-29, 9:1-2). 사람은 이러한 책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궁극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고귀한 생명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학도 인간의 복제, 낙태 또는 안락사와 같은 윤리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만이 인간 생명에 대한 주권적인 통제권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그러한 문제들을 결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인데, 이런 일은 분명히 사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단지 사람을 유일한 피조물이 아닌 일반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본다면, 사람을 유지 보수가 필요한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보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분자와 화학 물질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각 개인을 창조하시면서 우리 각자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그분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각 개인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를 추구하십니다. 인간 복제는 유익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인류는 복제 기술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전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복제가 좋은 의도만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복제를 통제하기에 필요한 책임이나 판단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은 인간 복제가 어느 날 성공할 것을 전제로 하여 복제된 인간이 영혼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살아있는 영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우리의 존재이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5:45). 문제는 인간 복제에 의해 어떤 종류의 살아있는 영혼이 만들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결론지어진 답변이 없습니다. 아마도 인간 복제가 성공한다면 복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영혼이 있는 것을 포함하여 거의 사람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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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가장 큰 계명은 이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2절로 돌아가면,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신명기 6:5의 다음에서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과 자신들의 영적 성장과 안녕을 위해 주님의 방식과 말씀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에 부지런해야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서의 계명들에 순종하였던 아버지는 그냥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를 잠언 22:6으로 이끕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에게 주는 첫 번째 지시인데, 즉, 조기교육을 가리킵니다.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의도하는 삶의 방식을 자녀들에게 명확하게 하기 위해 계획됩니다. 자녀의 조기 교육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6:4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두 방식 모두로 말하여진, 아버지에 대한 지침을 요약한 것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구절의 부정적인 부분은 아버지가 그의 혹독함, 부당함, 편애, 또는 부당한 권위의 행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자녀들의 부정적 성향을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녀를 향한 거칠고 무리한 행동은 오직 마음에 악을 육성하게 할 것입니다. “노엽게 하다”라는 단어는 “짜증나게 하다, 몹시 화나게 하다, 불쾌하게 만들다, 또는 자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방법에 의해 야기됩니다 – 혹독함, 부당함, 엄격함, 거침, 잔인한 요구들, 불필요한 규제, 그리고 독재적인 권위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고집. 이렇게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들이 어쩌면 그들의 부모들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역반응, 자녀들의 애정을 죽임, 거룩함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감소시키는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현명한 부모는 사랑과 온유로, 순종을 호감이 가고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에베소서 6의 긍정적인 부분은 포괄적인 방향으로 표현됩니다 – 아이들을 교육하고, 양육하며,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발전시키라. 이것은 교육과 훈육의 전 과정입니다. “훈계”란 단어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것들(구체적으로)과 의무들(책임들)을 생각나게 한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아버지는 정말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명령과 훈계의 전 과정은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꾸짖으시는 것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권위가 아이들의 마음, 생각, 그리고 양심에 지속적이고 즉각적으로 와 닿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아버지는 진실과 의무를 결정하는 궁극적 권위로서 자기 자신을 제시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육의 목표들은 모든 것들이 행해지는데 있어 따라야 하는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을 교사로 그리고 지도자로 삼을 때 가장 잘 달성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아이가 잘할 때 주기 위한 사과를 회초리 옆에 두라”고 말했습니다. 훈육은 많은 기도와 함께 주의 깊은 관심과 지속적인 훈련으로 행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한 징벌, 훈육, 그리고 조언은, 책망과 격려 모두를 가져다 주는, “훈계”의 핵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지시는 기독교적 경험의 학교에서 배우게 되고, 부모에 의해 집행됩니다 – 주로 아버지에 의해, 그러나 또한, 어머니의 관리하에. 기독교적 훈육은 아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자라고,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하며, 기독교적 기준을 알고, 자기 절제의 습관을 가지면서 자랄 수 있게 하는데 필요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17). 아버지의 첫 번째 책임은 자기 자녀들이 성경에 익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아버지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과 방법들은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역할 모델에 충실하면서, 아이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배운 것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어디로 가든, 삶의 전반에 걸쳐 그들을 좋은 위치에 처하게 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주님은 이 땅에서의 교회가 어떻게 조직되고 관리되기를 바라시는지를 그분의 말씀 안에 분명하게 기록하여 두셨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최고의 권위입니다(엡 1:22; 엡 4:15; 골 118). 둘째, 지역 교회는 자치적이어야 합니다. 즉, 외부의 권위나 통제가 없이 자치권을 가져야 하고, 개인이나 조직의 지배 계층적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딛 1:5). 셋째, 교회는 두 개의 주요 직분, 곧 장로와 집사에 의해 구성되는 영적 지도층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들"은 모세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지도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훗날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고(삼하 5:3; 삼하 17:4, 15), 왕에게 조언을 하고(왕상 20:7), 영적인 문제에 대하여 백성들을 대표하는 것을(출 7:17; 출 24:1, 9; 민 11:16, 24-25)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초기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은 “장로”에 대해 프레스부테로스(presbuteros)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장로”로 번역된 헬라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은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장로들에 관하여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행 14:23, 15:2, 20:17; 딛 1:5; 약 5:14). 장로라는 단어가 보통 복수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각 교회는 한 명 이상의 장로가 있었습니다. 이와는 다른 유일한 예외들은 어떤 이유로 인하여 한 명의 장로가 선출되는 경우입니다(딤전 5:1, 19). 예루살렘 교회에서 장로들은 사도들과 함께 지도층의 일부가 되었습니다(행 15:2-16:4).

장로의 지위가 "감독자"또는 "감독"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포스(episkopos)의 지위와 동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11:30; 딤전 5:17). “감독/감독자”라는 용어는 권위와 의무를 묘사하는 반면, "장로"라는 용어는 직분의 위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벧전 2:25, 5:1-4). 빌립보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안부를 묻지만 장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도 장로들은 감독들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디모데전서 3장 2, 8절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지만 장로의 자격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디도서 1 장 5-7절은 이 두 용어를 하나로 묶는 것처럼 보입니다.

“흙을 통해”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로부터 유래한 "집사"의 위치는 교회에서 섬기는 지도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집사는 장로와 별개이며, 여러 면에서 장로와 비슷한 자격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딤전 3:8-13). 집사는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대로 교회의 필요를 돕는 일을 합니다.

교회의 인간 지도자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목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포이멘(poimen)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단 한번 발견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대부분의 학자들은 목사와 교사를 하나의 직분과 관련된 용어라고 보고 “목사이며 교사”로 해석합니다. 아마 “목사이며 교사”인 지도자는 어떤 특별한 지역 교회의 영적인 목자였을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서 항상 여러 장로들이 있었던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 장로들에게는 가르침의 은사를 주시고, 다른 장로들에게는 행정, 기도 등의 은사를 주신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롬 12:3-8; 엡 4:11). 또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은사를 사용할 사역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습니다(행 13:1). 따라서 한 장로는 "목사"로 등장할 수도 있고, 다른 한 장로는 긍휼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심방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장로는 조직의 세부 사항을 다루는 의미에서 "다스리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명의 목사와 집사회로 조직된 많은 교회들은 사역을 나누고 어떤 결정을 함께 내린다는 점에서 복수 장로들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성경을 보면 결정을 내릴 때 회중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 감독 또는 목사로 불리는) 어떤 ‘독재’ 지도자가 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행 1:23, 26; 6: 3, 5; 15:22, 30; 고후 8:19). 반면, 장로나 교회 지도자들의 의견에 비중을 두지 않는 회중 통치의 교회 역시 비성경적입니다.

요약하면, 성경은 교회를 섬기는 집사 그룹과 함께 여러 명의 장로들(감독/감독자)로 구성된 지도층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장로들 중 한 명이 주요한 "목회적" 역할로 섬기도록 하는 것이 복수 장로 제도에 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목사/ 교사"(심지어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선교사로 부르셨던 것처럼)로 부르시고 그들을 교회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엡 4:11). 따라서 교회는 여러 장로들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장로들이 목회적인 역할을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로들 중 한 사람으로서 목사 또는 "가르치는 장로"는 다른 장로들과 동등한 의사 결정권을 갖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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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으며, 특히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 받았습니다. 죄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요일 3:4)과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신 9:7; 수 1:18)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 장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그분의 명령에 반역한 사건을 묘사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에 죄는 그들의 모든 자손들에게 상속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죄가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전달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이 전달된 죄는 유전된 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육체의 특성을 물려받는 것처럼,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죄 많은 본성을 물려받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습니다(창 1:26-27, 9:6). 그러나 우리는 아담의 모양과 형상도 받았습니다(창 5:3). 아담이 죄에 빠졌을 때 그 결과는 그의 자손들도 모두 죄에 감염된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 사실에 대해 애통하였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이것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부정한 방법으로 임신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의 어머니가 부모로부터 죄를 상속 받았고 그 부모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 받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습니다.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삶을 살더라도 우리는 상속받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여전히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모두 죄를 짓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2절의 전개를 주목하십시오. 죄가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 왔고, 죽음은 죄를 따라오고,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모든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롬 3:23) 우리는 죄를 씻어내는, 완전하고 죄가 없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고맙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혔으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엡 1:7). 하나님은 그분의 무한한 지혜로 우리가 물려받은 죄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제책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라”(행 13:38).

-Got Questions Ministries

주님의 징계는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종종 무시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상황들이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은혜로운 징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무지는 신자의 삶에서 습관적인 죄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고 또한 더 큰 징계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징계는 냉담한 처벌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징계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우리 각 사람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반응입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참조, 히 12:5-11). 하나님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여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해 시험과 시련과 여러 가지 곤경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징계의 결과는 특별한 죄가 우리를 붙들고 있었던 진을 파괴시키는 것은 물론, 더 강한 믿음과 하나님과의 새롭게 된 관계입니다(약 1:2-4).

주님의 징계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있으며 주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고자 하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본성을 반영하는 삶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태 복음 28:1-20, 마가복음 16:1-20, 누가 복음 24:1-53, 요한 복음 20:1-21:2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도행전(사도행전 1:1-11)에도 등장하십니다.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당신은 그리스도 부활의 여러 "증거들"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증거들의 첫 번째는 제자들의 극적인 변화입니다. 그들은 겁먹고 숨어 지내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었지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강하고 용감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그리스도외에 그 무엇이 이런 극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의 삶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교회의 박해자에서 교회를 위한 사도로 변화시켰을까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사도행전 9:1-6). 세 번째 확실한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분이 묻힌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돌아 왔을 때, 그리스도의 몸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마태 복음 28:5-7). 네 번째 그리스도 부활의 추가적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많은 사람들입니다(마태 복음 28:5, 9, 16-17; 마가 복음 16:9; 누가 복음 24:13-35; 요한 복음 20:19, 24, 26-29, 21:1-14; 사도행전 1:6-8; 고린도 전서 15:5-7).

예수님 부활의 또 다른 증거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두는 엄청난 비중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핵심 구절은 고린도 전서 15장에 있습니다. 이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왜 중대한지를 설명합니다. 부활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요합니다: 1)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믿는 자들도 역시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12-15). 2)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죄에 대한 그분의 희생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고린도 전서 15:16-19).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들의 죄에 대한 속죄로 하나님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죽어 죽음에 머무셨다면 이는 그분의 희생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믿는 자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그들이 죽은 후에는 죽음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16-19). 요한 복음 3장 16절의 '영생'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 전서 15:20).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처럼 다시 살아 영생을 누린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고린도 전서 15:20-23). 고린도 전서 15장은 계속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증명하고 우리에게 죄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사는 힘을 제공하는지를 설명합니다(고린도 전서 15:24-34). 고린도 전서 15장은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의 영광스러운 특성을 설명하고(고린도 전서 15:35-49),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사망을 이긴 최후의 승리자임을 선포합니다(고린도 전서 15:50-58).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인지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 전서 15:58).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가장 확실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400여 명에 의해 목격되었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 위에 매우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구축하게 만듭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세 가지 주요 세계관 중 하나이며, 다른 두 가지는 무신론적 진화론(일반적으로 알려진 다윈주의 진화론과 자연주의 진화론)과 특별 창조론입니다.

무신론적 진화론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생명은 기존의 무 생명체로부터 자연 법칙(중력 등)의 영향을 받아 출현할 수 있고, 출현하였다고 말합니다. 특별 창조는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혹은 기존의 물질로부터 직접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두 가지 중 하나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분은 생명의 기원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셨다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은 아마 큰 무기체 덩어리들을 창조하신 후에 자연의 법칙을 창조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그분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것들을 창조하셨을 수 있고, 어느 시점에서 일찍이 물러서서 피조물들이 알아서 발전하도록 두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한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그냥 두셨고 궁극적으로 생명체가 무생물 물질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이 견해는 자연주의적인 생명의 기원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진화론과 유사합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두 번째 대안은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의 기원을 유발하기 위해 단지 한두 가지 기적만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은 꾸준히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윈의 진화론적 생명 나무(조류와 포유류 등을 낳은 파충류, 파충류를 낳은 양서류, 양서류를 낳은 물고기 등등)와 유사하게, 태고의 단순함에서 동시대의 복잡성에 이르는 단계에 따라 생명을 이끄셨습니다.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진화할 수 없었던 곳(파충류의 다리가 어떻게 자연적으로 새의 날개로 진화했습니까?)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생명을 유발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다고 전제하는 점에서 특별 창조론과 유사합니다.

성경적인 특별 창조론의 관점과 유신론적 진화론의 관점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죽음에 대한 견해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지구가 수십억 년이 되었으며, 화석 기록을 포함하고 있는 지질 주상 단면도는 장구한 시간의 시대를 나타낸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화석 기록에서 후반에 나타나기 때문에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나타나기 오래 전부터 많은 생물들이 살았고, 죽었고, 멸종되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그의 범죄 이전에 죽음이 존재하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적 창조론자들은 지구는 비교적 젊고, 화석 기록은 노아의 홍수 동안과 그 이후에 저장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층들의 계층화는 물의 분류 및 액화로 인해 발생했다고 생각하며, 또한 이 두 현상은 관찰이 가능한 현상들입니다. 그 견해는 화석 기록과 죽음과 모든 아수라장의 대학살은 아담의 범죄 이후 수백 년이 지난 후에 발생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두 견해 사이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창세기를 읽는 방법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주간에 대해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날-시대’ 이론 또는 골격 이론에 동의하는 성향을 지닙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창세기 1 장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하루 24 시간에 동의합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에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동의하는 두 견해 모두가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결함이 있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별이 진화한 후 태양계가, 그 다음은 지구, 그리고 식물과 동물, 그리고 결국 인간이 생겨났다는 다윈의 시나리오를 상상합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이 두 견해는 사건을 전개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일반적으로 다윈의 연대표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다윈의 연대표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상충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 장은 지구가 하루에 창조되었고 태양, 달, 별들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의 표현은 태양, 달, 별들이 실제로는 첫날에 창조되었지만 넷째 날까지는 그것들의 자리로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의 대기를 통해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지구는 둘째 날에 대기를 갖게 된 것을 분명히 하는 창세기의 기사와 부딪히게 됩니다. 만일 태양, 달, 별이 첫째 날에 만들어졌다면, 그 날에 보였어야 합니다.

또한 창세기의 기사에 의하면 조류는 다섯 째 날에 바다 생물과 함께 지어졌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지상 동물은 6 일째에 창조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조류가 지상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주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반대합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새들은 지상 동물보다 앞서 있습니다. 하지만 유신론적 진화론자의 견해는 정반대입니다.

현대 기독교 내에서 가장 큰 불행한 경향 중 하나는 진화론을 수용하기 위해 창세기를 재 해석하는 것입니다. 많은 저명한 성경 교사와 변증론자들이 진화론자들에게 굴복하여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고수하는 것은 어떻게든 기독교의 신빙성에 해가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진화론자들은 성경에 대한 믿음이 약해서 신속하게 타협하려는 자들을 향한 존중을 잃게 됩니다. 진정한 창조론자들의 수가 학계에서 줄어들고 있지만, [창세기의 답변들](Answers in Genesis), [창조 연구 협회](the Creation Research Society), [창조 연구를 위한 기관](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등과 같은 여러 신실한 기관들은 성경이 실제 과학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말씀 하나라도 참된 과학에 의해 반증된 적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며,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주신 계시이고, 그분이 우주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친히 알려주신 설명은 진화론과 맞지 않으며 진화에 대한 "유신론적"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관용’하는 우리 시대에 있어, 도덕적 상대주의는 최고의 미덕으로 칭찬받습니다. 모든 철학, 이상, 그리고 신념 체계는 동등한 미덕을 가지고 있고 동등하게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상대주의자는 말합니다. 한 믿음의 체계를 다른 믿음의 체계보다 선호하는 사람들이나 – 훨씬 더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속이 좁고, 깨어있지 않거나, 아니면 심지어 편견이 아주 심한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다른 종교들도 역시 상호간에 배타적인 주장들을 하고 있는데, 상대주의자는 이 노골적인 모순들을 논리적으로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라고 성경은 주장하지만, 어떤 동양 종교들은 환생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 번 죽는다는 것입니까? 두 가르침 모두가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주의자는 다양하고 모순적인 ‘진리들’이 같이 공존할 수 있는 자기모순적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진리’를 재정립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기독교인은 진리를 개념이 아닌 인격으로서 받아들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소위 오늘날의 ‘열린 마음’으로부터 기독교인을 멀어지게 합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로마서 10:9-10). 사람이 부활을 진정으로 믿고 있다면, 예수는 결코 부활하지 않았다고 믿는 불신자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마음을 열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란 진정으로 하나님을 배역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예들로서 믿음의 근본이 되는 것들을 인용하였습니다. 어떤 것들(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같은)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누가 히브리서를 썼느냐 또는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와 같은 다른 문제들은 논쟁의 여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차적인 문제들에 관한 논쟁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23; 디도서 3:9).

아주 현저한 교리를 두고 논쟁/대화할 때라도, 기독교인은 절제하며 존중을 나타내야 합니다. 입장을 달리하는 것과 사람을 폄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고수하면서 연민의 정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은혜와 진리로 넘쳐야 합니다(요한복음 1:14). 베드로는 해답을 가지는 것과 온유함을 가지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항상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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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믿는 자들의 소망인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주관하신다는 것과, 하나님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들과 예언들이 충실하게 성취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처음에 오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언 대로 베를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탄생, 삶,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구세주(메시야)와 관련된 많은 예언들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세주에 관한 예언 중 예수님께서 아직 이루지 않으신 어떤 예언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바로 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남은 예언들을 성취하시기 위한 재림이 될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정복하시는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고 겸손한 환경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자신의 편인 하늘의 군대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은 두 번 오시는 것에 대한 이런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7:14; 9:6-7 과 스가랴 14:4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언들의 결과로,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고난 받는 구원자와 정복하는 구원자 둘 다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오직 한 구원자만이 존재하고 그분이 두 역할들을 성취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처음 오셨을 때 성취하셨습니다(이사야 53장).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오실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와 왕으로서의 역할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스가랴 12:10과 요한계시록 1:7은, 재림을 묘사하면서, 예수님께서 찔리셨던 일을 뒤돌아 봅니다. 이스라엘, 그리고 모든 세상이 그분께서 처음 오셨을 때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던 것을 애통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 천사들은 사도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1). 스가랴 14:4은 재림의 장소가 감람산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0은 공표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디도서 2:13은 재림을 “영광스러운 나타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요한계시록 19:11-16에 가장 자세하게 말씀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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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렇게 많은" 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스캔들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스캔들이 엄청난 관심을 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스캔들"에 전혀 연루된 적이 없는 수천 수만의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 목사들, 교수들, 선교사들, 작가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의 배우자와 가족에게 충실한 남성들과 여성들이며, 최대한의 정직과 성실로 그들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몇몇 소수의 실패가 모든 사역자의 인격을 공격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때때로 스캔들을 만드는 문제가 여전히 있습니다.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간통죄 또는 매춘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금 사기 및 기타 재정적인 불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1)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믿음이 없는 엉터리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 복음주의 기독교인 지도자들 중 일부는 그들의 지위로 인해 교만하여지기 때문입니다. 3) 사탄과 마귀들은 교회 지도자와 관련된 스캔들이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집중적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1) 스캔들에 걸린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엉터리 신자들이거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20)고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을 경건한 신자로 가장하고 또한 견고한 복음주의 지도자로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매’(스캔들)는 결국 그들이 자기들이 주장하던 바와 정반대의 존재인 것을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사탄의 본을 따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2)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상기시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교만에 대해 경고합니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역이 성장하고 번창하여지면 그들은 그 영광의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취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사역을 관리하고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종류의 교만은 타락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고 경고하였습니다.

3) 사탄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스캔들을 선동함으로써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통죄를 짓고 우리아를 살해함으로 다윗의 가족과 이스라엘 전체가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교회 지도자의 도덕적인 부패로 인해 많은 교회들과 사역이 훼손되거나 파괴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타락을 보고 신앙이 약해집니다. 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실패를 빌미 삼아 기독교를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이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더욱 시도합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가 스캔들의 혐의를 받거나 잡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1) 근거가 없거나 확인되지 않은 고발을 듣거나 받아들이지 마십시오(잠 18:8, 17; 딤전 5:19). 2) 죄를 범한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해 성경적인 적절한 조치를 취하십시오(마 18:15-17; 딤전 5:20). 만일 죄가 입증되고 심각하다면, 사역의 지도층 자리에서 영구히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딤전 3:1-13). 3)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고(엡 4:32; 골3:13), 회개가 입증되면 그들을 공동체로 회복시키지만(갈 6:1; 벧전 4:8) 지도자로 삼지는 마십시오. 4) 우리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충실하십시오. 그들이 당면한 문제, 그들이 겪는 유혹, 그리고 그들이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를 안다면, 우리는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건하게 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격려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5)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의 실패를 보면서 당신의 궁극적인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시며,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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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자신을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선택권을 주시기 위해서 에덴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셨었다면, 그들은 그저 프로그램 된 것만을 하는, 본질적으로 로봇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들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실제로 “자유로운” 존재들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은 선택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나무나 나무의 실과에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없습니다. 실과 그 자체가 아담과 이브에게 더 많은 어떠한 지식도 가져다 주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즉, 물리적인 실과는 어떤 비타민 C나 유익한 어떤 섬유질을 함유할 수 있으나, 영적으로 영양가가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행위는 영적으로 해로웠습니다. 그 죄는 악에 대해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눈을 뜨게끔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그들은 악하게 되는 것, 수치심을 느끼는 것,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그들의 죄는 자신들의 삶과 세상에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순종의 행위인, 실과를 먹음으로 아담과 이브는 악과 그들의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6-7).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들이 어떠할지를 미리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을 것과 그럼으로써 세상에 악, 고통, 그리고 죽음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도록 사탄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선택을 하도록 힘을 가하는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거역하고 금지된 실과를 먹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결과들인 악, 죄, 고통, 질병, 그리고 죽음이 그 이후로 줄곧 세상을 타락시켰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결정은 모른 사람들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죄를 향한 성향을 가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담과 이브의 결정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를 대신해 흘리시는 그분의 보혈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죄의 결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 죄 자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로마서 7:24-25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되새겨 보기를 기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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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첫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인종만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인류입니다. 백인들, 아프리카인들, 아시아인들, 인도인들, 아랍인들, 유대인들은 다른 인종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보다는, 그들은 인류의 다른 족속들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같은 신체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물론 조금의 차이는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창세기 1:26-27).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던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요한복음 3:16). 이 “세상”은 분명히 모든 민족 집단들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편애나 편파를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신명기 10:17; 사도행전 10:34; 로마서 2:11; 에베소서 6:9), 우리도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4은 차별하는 사람들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야고보서 2:8).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민족” 집단들로 나누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방 나라들을 보살피는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러는 대신에, 자신들의 지위를 자랑하고 이방인들을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대감을 낳는 분리의 벽을 파괴하고 이런 것들을 종식시키셨습니다(에베소서 2:14).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 편견, 그리고 차별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업적에 상처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34). 하나님께서 공정하고 편애함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높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그분께 한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멸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대신해 죽으신 어떤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들과 다양한 정도로 일어나는 인종 차별은 수천년 동안 인간이 지닌 고질병이 되어 왔습니다. 모든 족속들의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이여,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인종 차별, 편견, 그리고 차별의 희생자들은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표명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당신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을 수 있으나, 우리들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훨씬 더 없습니다. 인종차별, 편견, 그리고 차별을 행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당신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로마서 6:13). 갈라디아서 3:28의 말씀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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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6-27은 인간에게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부분 둘 다 모두 갖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물질적인 부분은 분명히 가시적입니다: 신체, 뼈들, 장기들, 등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존재합니다. 비물질적인 측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것들입니다: 혼, 영, 지적 능력, 의지, 양심,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개인의 육체적 수명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모든 인간은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특성들 모두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살, 피, 뼈들, 장기들, 그리고 세포들을 포함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주 논쟁이 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형적 특성들입니다. 이것들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창세기 2:7은 사람이 살아있는 영(생령)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6:22은 모든 인간이 소유한 “영들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명칭하고 있습니다. 잠언 4:23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이 말씀은 마음이 사람의 의지나 감정들의 중심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3:1은 말씀합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케 해주는 마음의 한 부분인 양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2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구절들과, 많은 다른 구절들은 인간의 비 물질적인 부분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물질적인 그리고 비물질적인 특성들 모두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저 혼과 영뿐만이 아닌 더욱더 많은 부분들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혼, 영혼, 가슴, 양심, 그리고 마음들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과 영은 분명히 인간의 주요한 비물질적인 측면들입니다. 이것들이 다른 측면들을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인간은 두 부분(둘로 나뉨, 육체/영혼)으로 이루어 졌습니까, 아니면 세 부분(세 개로 나뉨, 육체/혼/영)으로 이루어 졌습니까? 이에 대해 독단적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두 견해들에 대해 좋은 논증들이 있습니다. 핵심 구절은 히브리서 4:12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구절은 이 논쟁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혼과 영은 쪼개질 수 있다는 것과, 혼과 영의 분할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식별하실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우리를 “기묘하고 놀랍게” 창조하셨던 창조주에게 중점을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시편 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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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아주 중요합니다(이사야 7:14; 마태복음 1:23; 누가복음 1:27, 34). 첫째, 성경이 이 축복된 사건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봅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당혹스러워 할 때, 가브리엘 천사는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엎으시리니”(누가복음 1:35).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라고(마태복음 1:20)” 설명해주면서, 마리아와 결혼해도 된다고 격려합니다. 마태는 처녀가(마태복음 1:18). 갈라디아서 4:4도 처녀를 통한 탄생을 가르칩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예수의 탄생은 마리아의 몸을 통한 성령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물질적인 것(성령)과 물질적인 것(마리아의 자궁) 모두가 관련된 사건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이 임신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면, 그녀는 그저 도구로 쓰인 것 뿐 입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성육신의 기적을 이루십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예수가 혈연 관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육체를 가진 온전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육체는 마리아를 통해 주어진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그리고 죄 없는 온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요한복음 1:14; 디모데전서 3:16; 그리고 히브리서 2:14-17).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분께는 죄의 속성이 없으셨습니다(히브리서 7:26). 죄는 아버지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듯 싶습니다.(로마서 5:12, 17, 19). 그러나, 동정녀를 통한 예수의 탄생은 이렇게 이어지는 죄를 막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죄 없는 온전한 인간이 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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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어떤 사역들은 죄와 위로와 능력에 대한 확신처럼 느낌을 포함할 수 있지만, 성경은 성령과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느낌 및 느낌의 방식에 두지 않도록 교훈합니다. 거듭난 모든 신자에게는 내주하시는 성령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혜사가 오시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자신과 유사한 분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거듭난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께서 내주하시지만 모든 신자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아가면 성령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에 대해 언급하며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사용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고 사도 바울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맥락은 성령 충만한 신자의 삶과 내적 갈등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은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한 경고 외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술을 마시고 취하게 되면 특이한 특성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혀는 꼬부라지며, 판단은 흐려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서 비교를 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에게도 특정한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22-24절에서 성령의 ‘열매’에 관해 읽습니다. 그 열매는 성령의 열매이며, 거듭난 신자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동사 시제는 진행형으로서 성령에 의해 "충만하여지는" 계속적인 과정을 나타냅니다. 한편, 이 말은 권면이기 때문에 신자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거나 또는 성령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에베소서 5장의 나머지 부분은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특권과 자격으로서 성령 충만을 입게 되는 것이지 성령을 느끼기 때문에 충만하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 및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주께 순종하여 행한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은 은혜의 선물이지 감정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은 우리를 속일 수 있고 속일 것이며, 우리는 성령이 아니라 순전히 육체의 욕심에서 나오는 감정적인 열광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갈 5:16, 25).

이렇게 말하였지만,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의해 압도당할 때 우리는 성령을 감정적으로 체험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칩니다. 다윗 왕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면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삼하 6:14). 성령에 의해서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은혜에 의해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기준으로 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확신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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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아닌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지인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고, 그 들이 우리와 감정적인 친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어려워 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2:51-53). 그러나, 우리는 복음 전함을 명령 받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데 대한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마태복음 28:19-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그러면 우리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지인들을 어떻게 전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복음의 진리에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고린도후서 4:4).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요한복음 3:16). 그들을 가장 잘 보살필 수 있는 지혜를 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야고보서 1:5).

우리는 실제 복음 전파에 있어 거리낌 없이 과감해야 합니다. 당신의 친구들과 가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시오(로마서 10:9-10). 항상 당신의 믿음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베드로전서 3:15), 온유함과 정중함으로 하십시오.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기도와 우리의 믿음을 전하는 것 외에,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원들 앞에 경건한 기독교적 삶을 또한 살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 3:1-2).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증거하며, 그리고 그들 앞에서 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라나게 하십니다(고린도전서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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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와 창세기에 나타나는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날"은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날”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욤(yom)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단어는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데 걸리는 24시간의 하루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예, “하루에는 24시간이 있다”). 또한 새벽에서 황혼 사이의 일광의 기간을 나타내는 ‘낮’일 수 있습니다(예, "낮 동안은 꽤 뜨겁지만 밤에는 조금 시원합니다"). 그리고 불특정 기간을 나타내는 ‘때’일 수 있습니다(예, "할아버지 때에"). 창세기 7장 11절에서는 ‘욤’은 24시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창세기 1장 16절에서는 새벽과 황혼 사이의 ‘낮’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창세기 2장 4절에서는 불특정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5절과 2장 2절 사이에서 서수(즉,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그리고 일곱 째날)와 함께 쓰인 ‘욤’은 어떤 의미입니까? 24시간의 기간입니까? 아니면 다른 뜻입니까? 여기서 ‘욤’이 불특정 기간을 의미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창세기 1장 5절과 2장 2절 사이에서 ‘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그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을 검토하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문맥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경이 성경 자체를 해석하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 단어 ‘욤’은 구약에서 2301 번 사용됩니다. 창세기 1장을 빼면 ‘욤’에 숫자가 있는 경우(이런 경우는 410번이 있습니다) 늘 평범한 날, 즉 24 시간을 나타냅니다.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이면(38 번이 있습니다) 늘 평범한 날을 나타냅니다. ‘욤’과 "저녁"또는 "아침"이 사용되면(23 번 있습니다) 항상 평범한 날을 나타냅니다. ‘욤’과 "밤"(52 번 나옵니다)도 항상 평범한 날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 5절과 2장 2절 사이에서 사용되는 ‘욤’의 문맥은 각각의 날이 "저녁과 아침"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창세기의 저자가 24시간을 의미한 것이 분명합니다. "저녁"과 "아침"에 대한 언급이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순이 됩니다. 이것은 1800년 시대에 이르러 과학 공동체 안에서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고 지구의 퇴적 지층이 재해석되기 전까지 창세기 1장 5절에서 2장 2절 사이를 해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암석층이 노아의 홍수에 대한 증거로 해석되었지만, 과학 공동체는 대홍수를 부인하며 내다버렸고 암석층은 대단히 오래된 지구의 증거로 재해석되었습니다. 한편, 의도는 좋지만 큰 착각에 빠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대홍수를 부정하고 성경을 대적하는 과학 공동체의 주장과 창세기 기사를 조화시키기 위해 ‘욤’을 엄청나게 긴 불특정 기간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사실, 오래된 지구를 지지하는 수많은 해석들은 잘못된 가정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몇 꽉 막히고 완고한 과학자들이 우리의 성경 읽는 방법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9-11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의 한 주간의 일의 패턴을 알려주시기 위해 문자 그대로의 6일을 사용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신다면 즉시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6일째 되는 날에)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마음에 두셨으며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제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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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주 물어보는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과 달리,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여부에 관하여 질문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을 몸소 걸었던 실제 사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의 온전한 정체성이 논의의 주제가 될 때 많은 논쟁이 시작됩니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 종교가 예수님은 선지자,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보다 그 이상인 엄청난 분이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 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하십니까? 성경은 그분이 누구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요한복음 10: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언뜻 보면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계속되는 구절들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럼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결코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8:59)고 주장하심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라 말씀하고 계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 다른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다시 한번,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치려고 돌을 들었습니다(요한복음 8:59). 예수님께서는 이를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정체 “나는(I am)” 은 구약 성경이 직접적으로 적용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출애굽기 3:14). 예수님께서 무언가 신성을 모독하는, 즉,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면 왜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1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 표명했습니다(요한복음 20:28).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고백을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디도서 2:13)라고 묘사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똑같이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베드로후서 1:1)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의 온전한 정체를 증언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구약 성경의 예수님께 대한 예언들도 그분의 신성을 표명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그러므로, C.S. 루이스는 예수님을 단지 한 분의 좋은 선생이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선택도 될 수 없다고 논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게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거짓말쟁이이므로 선지자나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변명하려는 시도에서, 현대 “학자들”은 성경에서 그분이 하셨다고 하는 많은 말씀들을 “실제 역사적 예수님”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반박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했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그로부터 이 천 년이나 떨어져 사는 “학자들”이 그와 함께 살았고, 섬겼으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보다 어떻게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요한복음 14:26)?

예수님의 실제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든 아니시든 왜 문제가 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셔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께서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그분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2).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런 무한한 죄값을 치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로마서 5:8; 고린도후서 5: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빚을 예수님께서 갚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분께서 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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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들어 보았든” 안 들어 보았든 간에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하여(로마서 1:20)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전도서 3:11) 자신을 분명히 계시하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류가 죄악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로마서 1:21-23).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스러운 마음의 욕망에 빠질 것이고,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가치 없고 절망스러운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로마서 1:24-32).

사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는 그들이 들었던 것, 그리고 자연 가운데 쉽게 보이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4:29은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라고 선포합니다. 이 구절은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찾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을 찾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알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실 것입니다.

문제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로마서 3:11). 사람들은 자연과 자신들의 마음에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대신에 자신들이 만든 신을 숭배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한 어떤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공정성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알리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이 지식을 거부하고 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으로 벌하심이 정당하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의 운명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확실히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태복음 28:19-20; 사도행전 1:8). 우리는 사람들이 자연에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사람들이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분리된 영원으로부터 구조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우리는 끔찍한 문제에 빠질 것입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가 구원 받는다면, 우리는 누구도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하게끔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우리가 범할지도 모르는 최악의 것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또는 그녀가 그것을 거부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또는 그녀는 정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정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의 동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전에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던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굳이 복음을 듣고 거부하게 만들어 그들 자신들을 정죄받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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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새로운’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 단어는 두 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네오스(neos)가 있는데 이 단어는 방금 생겨났지만 비슷한 것들이 이미 있을 때에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 ‘새롭게’로 번역된 헬라 단어는 카이노스(kainos)인데 이는 “이전에 있지 않던 전혀 새로운 것이 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처음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옛 자아를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분의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거주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중생하고 새로워지고 거듭나게 됩니다. 과거의 본성은 육체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새로운 이 피조물은 영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차원의 교제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는데 헌신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순종과 헌신은 옛 속성으로는 행할 수도 없고 심지어 바라지도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옛 속성은 영적인 일들에 죽어 있었고 스스로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옛 속성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엡 2:1)에 있기 때문에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주하실 때에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각성에 의해서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롭고 거룩한 본성과 썩지 않는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해 죽어 있었고 장사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분과 함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롬 6:4).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어 더 이상 죄에 대하여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롬 6:5-6).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납니다(엡 2 : 5).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본 받습니다(롬 8:29). 우리는 정죄로부터 자유하며 이에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합니다(롬 8:1). 우리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몸의 한 부분입니다(롬 12:5). 신자는 이제 새로운 마음을 가졌으며(겔 11:19)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엡 1:3).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삶을 바치고 구원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자주 앞에서 묘사된 방식대로 살지 않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본성이 오래된 육체에 거주함으로써 이 둘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옛 속성은 죽었지만 새 속성은 그것이 머무는 오랜 ‘장막’과 싸워야 합니다. 악과 죄는 여전히 존재하며 신자는 이제 그것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들은 과거처럼 더 이상 신자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옛 속성이 할 수 없었던, 죄에 대한 저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새 속성에 영양분을 공급하거나 또는 그러한 것들을 무시함으로써 육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며”(롬 8:37),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우리 구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빌 4: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고 용서받으며 안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입양되고, 의롭게 되고, 구속함을 받고, 화목되고, 선택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며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며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를 부여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멋진 구세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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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침례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제정하신 두 의식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이 지침들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를 삼으며,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침례를 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곳(“모든 나라들”)에서 “세상 끝날까지 수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별 다른 이유가 없는 한, 침례는 예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침례는 교회가 탄생하기 전부터 행해졌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씻어냄(깨끗이 함)”의 성격을 의미하는 침례를 행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침례를 사용하였고, 비단 이방인들뿐만 모든 사람들에게 침례 받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의미하는 요한의 침례는 사도행전 18:24-26과 19:1-7에서 보여지는 기독교 침례와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침례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침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침례를 “기독교” 침례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의식을 통하여 사람은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성령 침례도 받아 교회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2:13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물에 의한 침례는 성령 침례의 “재연”입니다.

 

기독교 침례는 사람이 자신의 믿음과 제자의 신분임을 공표하는 수단입니다. 침례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나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셔서, 지금 나는 성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고백합니다”라고 침묵으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극적인 방법으로 예시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죄인이 주 예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 그는 죄에 대해서는 죽는 것이고(로마서 6:11)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것(골로새서 2:12)입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구원 뒤에 따르는, 깨끗하게 된, 거룩한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6:4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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