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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개념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어려운 점은 충분히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사람도 설명은 고사하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한없이 위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버님,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모두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다른 위격(인격)을 가지신 세 분 간의 관계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라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께서 세 분(세 위격)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제안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주제를 공부할 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 용어는 세 위격(삼위)의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 하나님을 구성하시고, 같이 공존하시며, 같이 영원하신 세 분(세 위격). 진짜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개념은 성경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신명기 6:4; 고린도전서 8:4; 갈라디아서 3:20; 디모데전서 2:5).

삼위일체는 세 분들(세 위격들)로 구성됩니다(창세기 1:1, 26; 3:22; 11:7; 이사야 6:8, 48:16, 61; 마태복음 3:16-17, 28:19; 고린도후서 13:14). 창세기 1:1에서, 복수형의 히브리어 Elohim(하나님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26, 3:22. 11:7 그리고 이사야 6:8에서, 복수 인칭 대명사인 “us(우리들)”가 사용되었습니다. Elohim(하나님들)이라는 단어나 인칭 대명사 “us(우리들)”는 복수 형태인데,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분명하게 지칭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명쾌한 주장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복수적 측면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Elohim은 명확히 삼위일체 개념을 허용합니다. 삼위일체의 구성원은 다양한 구절들에서 서로 구별 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LORD(여호와)”는 “Lord(주)”와 구별됩니다(창세기 19:24; 호세아 1:4). The LORD(여호와)는 한 아들을 가지셨습니다(시편 2:7, 12; 잠언 30:2-4). 성령님은 “LORD(여호와)”(민수기 27:8) 그리고 “God(하나님)(시편 51:10-12)과 구별됩니다.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됩니다(시편 45:6-7; 히브리서 1:8-9).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혜사(도와주시는 분)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시는 것에 관하여 아버님과 이야기하십니다(요한 복음 14:16-17).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아버님이나 성령님으로 간주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께서 아버님과 이야기하시는 모든 경우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분(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계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다른 분이신(다른 위격이신) 아버님께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각 분들께서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 6:27; 로마서 1:7; 베드로전서 1:2). 아들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 1:1, 14; 골로새서 2:9; 히브리서 1:8; 요한일서 5:20).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사도행전 5:3-4; 고린도전서 3:16).

삼위일체에서는 종속의 관계가 있습니다. 성서는, 성령이 아버님과 아들에게 종속되고, 아들은 아버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내부의 관계적인 것으로로, 삼위일체 그 어느 분의 신성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한한 우리의 마음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아들에 관한 참조: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그리고 요한일서 4:14. 성령에 관한 참조: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

삼위일체의 개별 구성원은 서로 다른 과업들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우주 생성의 궁극적 원천 또는 원인(고린도전서 8:6; 요한계시록 4:11); 하나님의 계시(요한계시록 1:1); 구원(요한복음 3:16-17); 그리고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사역들(요한복음 5:17. 14:10)이십니다. 아버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착수하십니다.

아버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대리자이신 아들을 통하여 수행하십니다: 우주의 창조와 유지(고린도전서 8:6; 요한복음 1:3; 골로새서 1:16-17); 하나님의 계시(요한복음 1:1, 16:12-15; 마태복음 11:27; 요한계시록 1:1), 그리고 구원(고린도후서 5:19; 마태복음 1:21; 요한복음 4:42). 아버님께서는 그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아들을 통하여 이런 모든 일들을 수행하십니다.

성령은 아버님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수행하시는 수단입니다: 우주의 창조와 유지(창세게 1:2; 욥기 26:13; 시편 104:30); 하나님의 계시(요한복음 16:12-15; 에베소서 3:5; 베드로후서 1:21); 구원(요한복음 3:6; 디도서 3:5; 베드로전서 1:2); 그리고 예수님의 일들(이사야 61:1; 사도행전 10:38). 따라서 아버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하십니다.

삼위일체를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인 실례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계란(또는 사과)의 예에서, 껍질, 과육, 그리고 씨앗이 사과의 부분들이지 사과 자체가 아닌 사과의 예처럼, 껍질, 흰자, 그리고 노른자는 달걀의 부분들이지 계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정확한 실례가 되지 못합니다. 물의 실례는 다소 나아 보이지만, 여전히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액체, 기체, 그리고 얼음은 물의 형태들입니다. 아버님,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태들이 아닌, 각자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실례들이 삼위일체의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할지는 몰라도, 이런 그림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한정적인 실례를 들어 온전히 묘사될 수 없으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분열을 초래하는 쟁점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핵심적 측면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되어 있지만, 몇 가지 부차적인 쟁점들은 명쾌하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아들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시지만,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만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성경적 교리입니다. 이 사실 외에서의 쟁점들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극히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한정된 생각으로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의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우리에게 더 이로울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로마서 11: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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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분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 세 가지는 피조물, 그분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증거는 그분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로마서 1:20).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편 19:1).

만약 당신이 들판 중앙에서 손목시계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그냥 난데없이 “나타났다”던지 또는 그곳에 그것이 계속 있었다고 추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시계의 디자인에 근거해,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세계에는 더 훌륭한 디자인과 정확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손목시계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을 근거로 합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인 지구의 일정한 자전에 있습니다(또한 세슘-133 원자의 방사능 특성). 우주는 훌륭한 디자인을 펼쳐 보이고, 이는 훌륭한 디자이너가 있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당신이 암호화된 메시지를 발견한다면, 그 암호를 해독하려고 할 것입니다. 암호를 생성했던 똑똑한 누군가, 메시지의 발송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것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 안에 있는 DNA 구조는 얼마나 복잡합니까? DNA의 복잡성과 존재 목적은 그 구조의 지적인 작성자가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조정된 물리적 세상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에 대한 감각을 주입시키셨습니다(전도서 3:11). 삶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과 세상의 일상보다 더 높은 실제가 있음에 대해 인간은 타고난 지각을 가졌습니다. 영원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드러납니다. 입법과 예배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모든 문명은 어떠한 도덕적 법규들을 가치 있게 여겨왔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각 문화 간에 유사합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의 행위는 보편적으로 비난을 받는 반면에 이상적인 사랑은 보편적으로 존중을 받습니다. 이 공통적인 도덕성 - 옳고 그름에 대한 전 세계적인 이해 – 은 우리에게 그러한 분별력을 주신 최고의 도덕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항상 예배의 체계를 배양해 왔습니다. 숭배의 대상은 다양할 수 있으나, “더 높은 능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감각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일부분입니다. 예배하려는 우리의 성향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사실과 일치합니다(창세기 1:27).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존재는 자명한 사실로 다뤄집니다(창세기 1:1, 출애굽기 3:14). 누구나 자서전을 쓸 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간을 낭비 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책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많은 시간을 쓰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있는 삶을 변화시키는 특성, 자체의 진실성, 그리고 글에 수반되는 기적들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셨던 세 번째 방법은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니다(요한복음 14:6-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 14 골로새서 2:9).

예수님께서는 놀라우신 생애를 통해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셨고 메시야(구원자)에 관한 예언들을 성취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그분께서는 자신의 메시지가 진짜임을 증명하고 자신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연민 어린 행위들과 대중 앞에서의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요한복음 21:24-25). 그리고 십자가형을 당한 삼일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이 사실을 목격한 수 백 명의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5:6).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증거”하는 역사적 기록은 아주 풍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사도행전 26:26).

하나님에 관해 자신들만의 생각들을 가지고 그것에 따라 증거를 해석하는 회의론자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증거로도 납득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시편 14:1).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귀결됩니다(히브리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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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인지 어떤 분이 아닌지를 말씀합니다. 성경의 권위 없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부정확한 견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욥기 42:7).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표현도 굉장히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에 반해 거짓 신들을 세우고, 쫓으며, 숭배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20:3-5).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드러내려고 선택하신 부분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또는 특성들 중의 하나는 “빛” 인데, 이는 그분께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이사야 60:19, 야고보서 1:17).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지식을 드러내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히브리서 4:1). 창조, 성경, 그리고 육신이 되신 말씀(예수 그리스도)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의 중의 일부이며(창세기 1:1; 시편 24:1),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봅시다.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들보다 위에 있으며 그것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창세기 1:26-28). 창조는 타락에 의해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창세기 3:17-18, 로마서 1:19-20). 창조의 광대함, 복잡함, 아름다움, 그리고 질서를 깊이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일부를 살펴보는 것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로힘(Elohim) - 강력하신 분, 신성함(창세기 1:1)

아도나이(Adonai) - 주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을 가리킴(출애굽기 4:10, 13)

엘 엘리온(El Elyon) - 가장 높으신 분, 가장 강력하신 분(창세기 14:20)

엘 로이(El Roi) -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강력하신 분(창세기 16:13)

엘 샤다이(El Shaddai) - 전능하신 하나님(창세기 17:1)

엘 올람(El Olam) - 영원하신 하나님(이사야 40:28)

야훼/여호와(Yahweh) - 주 하나님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출애굽기 3:13, 14)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의미는 시작과 끝이 없고,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불멸하고 무한하십니다(신명기 33:27; 시편 90:2; 디모데전서 1:17). 불변하시다는 것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로, 결국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말라기 3:6, 민수기 23:19, 시편 102:26, 27). 하나님께서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역사와 존재에 있어 그분 같은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필적할 것은 없고 그분께서는 완벽하십니다(사무엘하 7:22, 시편 86:8, 이사야 40:25, 마태복음 5:48). 하나님께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경지를 벗어나 계십니다(이사야 40:28, 시편 145:3, 로마서 11:33, 34).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편애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십니다(신명기 32:4, 시편 18:30).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며, 강력하고 기뻐하는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의 행하심은 그의 성품과 일치합니다(요한계시록 19:6, 예레미야 32:17, 27). 하나님께서 편재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의미이지, 모든 것이 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시편 139:7-13, 예레미야 23:23).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십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십니다. 심지어 순간순간 우리가 생각하는 내용까지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의 판단은 공정합니다(시편 139:1-5, 잠언 5:21).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십니다. 그 분 홀로만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필요와 갈망을 만족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만이 우리의 숭배와 헌신의 대상이 되십니다(신명기 6:4).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시다는 것은, 잘못을 간과하거나 지나치지 않으심을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공의로우심 때문인데,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겪으셔야 했던 것입니다(출애굽기 9:27, 마태복음 27:45-46, 로마서 3:21-26).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은 최고 위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분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다 합하여도 그분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시편 93:1, 95:3, 예레미야 23:20).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은,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복음 1:18, 4:24).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일체 속에 삼위(세 위격)이시고, 본질과 권능과 영광에서 동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고, 부패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시편 117:2, 사무엘상 15:29).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도덕적으로 패역하고 훼손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셨으며, 그것들을 적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을 보시며 그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로 묘사 되십니다(이사야 6:3, 하박국 1:13, 출애굽기 3:2,4,5, 히브리서 12:29).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며, 그분의 은혜는 선하심, 다정하심, 인자하심, 그리고 사랑하심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분의 거룩함은 그분의 면전으로부터 우리를 차단시킬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은 것은, 그분께서 우리 각자를 개인적으로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4:6, 시편 31:19, 베드로전서 1:3, 요한복음 3:16, 17:3).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런 하나님에 대한 질문에 온전히 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그리고 어떤 분이신지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기를 기원합니다(예레미야 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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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들 과 회의론자들의 흔한 주장은, 만약 모든 만물들이 어떤 것으로부터 기인했다면, 하나님도 기인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께서 기인한 원인이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도 아니라면, 역시,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나?” 라는 기본적인 질문의 조금 더 세련된 형태입니다. 모든 사람은 무에서 유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이라면, 그는 분명히 기인된 원인을 가져야 합니다. 맞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교묘한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딘가로부터 오셨다는 가정을 몰래 세우고난 뒤 그곳은 어디인가라고 질문을 하기 때문입니다. 답변은 ‘이 질문은 이치에 맞지 않고’ 이는 마치 “파란색의 냄새는 어떠할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파란색은 냄새를 가진 범주에 속하지 않기에, 질문자체에 오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나 기인되는 것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인되지도 창조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저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무에서는 무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면, 어떤 것도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었으며, 무언가가 항상 존재했을 것입니다. 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인으로부터 기인되시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끔 기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 들을 창조하셨던 창조되지 않으신 창조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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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여러번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14; 여호수아 1:1; 사사기 6:18; 사무엘상 3:11; 사무엘하 2:1; 욥기 40:1; 이사야 7:3; 예레미야 1:7; 사도행전 8:26; 9:15- 소수의 예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들리도록 말씀하실 수 없다는 성경적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수백 차례의 말씀들이 인간의 역사 4,00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이지, 원칙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건에서조차, 그것이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는지, 내면의 음성이었는지, 또는 마음의 감동이었는지는 항상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3:16-17). 이사야 55:11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원받고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3-4은 표명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또한 사건들을 통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즉, 그분께서는 우리의 상황들을 처리하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 우리가 잘못된 것으로부터 옳은 것을 분별하는 것을 도우십니다(디모데전서 1:5; 베드로전서 3: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생각에 따르게끔 하시는 중입니다 (로마서 12: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고, 변화시키며,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돕기 위해, 우리의 삶들 가운데 어떤 상황들이 벌어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야고보서 1:2-5; 히브리서 12:5-11). 베드로전서 1:6-7은 우리를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 같이 이것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 안에서조차, 하나님께서 들릴 수 있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외적이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 또는 그녀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면, 항상 들은 것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비교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말씀하신다면, 그분의 말씀은 성경에서 그분이 말씀하셨던 것과 정확히 부합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6-17).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게 모순되시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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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사랑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본질임을 보여주는 몇 가지 방식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4-8a). 이것이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서술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요한일서 4:8),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응하여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입니다. 사랑(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계속 행합니다. 사랑(예수님)은 남들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평 없이 겸손한 삶을 삽니다. 사랑(예수)은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자신이 만났던 누구라도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한복음 14:31). 사랑(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찾았으며,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요한복음 3:16에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8은 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램은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름으로써 그 길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로 자신의 뜻에 따라 선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용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그분의 위격(인격)의 핵심적인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심지어 그의 진노하심과도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공의롭고 옳듯이,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의 완벽한 예시이십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같이 사랑할 능력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2; 요한일서 3:1; 2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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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의 핵심은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 놓여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 생각을 “구약은 분노의 하나님, 신약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은 표현합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들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그분의 점진적 계시라는 사실이 신약 성경과 비교하여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 관한 오해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 모두를 읽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에서 각기 다르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구약과 신약 두 성경 모두에서 똑 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예를 들면, 구약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으로서 공표 됩니다(출애굽기 34:6; 민수기 14:18; 신명기 4:31; 느헤미야 9:17; 시편 86:5; 108:4; 145:8; 요엘 2:13).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는 사실을 통해 아주 더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사랑의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것을 우리는 또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범하고 우상들을 숭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 숭배를 회개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대하시는 방법과 매우 유사합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12:6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비슷하게, 구약 성경 안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는 것”(로마서 1:18)을 봅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하게,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신약에서 보여진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질상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으십니다(불변하심). 우리가 성경의 말씀들에서 그분의 본질의 한 측면이 다른 측면들 보다 더 드러나는 것을 볼 수는 있으나, 하나님 자신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 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에서나 하나님께서는 동일하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성경이 개별적인 66권으로 이루어 졌고, 두 개 혹은 세 개의 대륙에서, 세 가지의 언어로, 약1500여년에 걸쳐, 그리고 40명 이상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성경 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 없이 하나의 통일된 문헌으로 남아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사랑과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상황들 안에서 죄악된 인간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보게 됩니다. 진실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내시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창조하신 것들, 특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반에 걸쳐 분명히 나타납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애정을 기울여 자비롭게 인간들을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로 부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 하심과 진실하심이 풍부한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분을 경배하기를 거부하며, 대신 자기 자신들이 창조한 신들을 숭배하는 모든 사람들의 심판 자이신, 거룩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목격합니다(로마서 1장).

하나님의 정의롭고 거룩하신 속성 때문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는 심판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인간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셔서, 죄악된 인간이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놀라운 사실을 요한일서 4:10와 같은 구절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 제도를 제공하셨고, 그것에 의하여 죄에 대한 속죄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희생 제사 제도는 오직 일시적이었으며 죄에 대한 완전한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마다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단지 고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약속된 구세주는 신약에서 온전하게 나타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그려만 졌던, 하나님의 사랑의 궁극적 표현인,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이 신약 성경에서 모든 영광 속에 드러났습니다. 구약과 신약성경 둘 다 모두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디모데후서 3:15)를 갖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더 자세히 공부할수록,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처럼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야고보서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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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악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은 바위나 전기처럼 “사물”이 아닙니다. 당신은 악을 한 병 가질 수 없습니다.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선한 것의 부재입니다. 예를 들어, 구멍들은 실제이지만 그것들은 오직 다른 무언가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흙이 없음을 구멍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흙으로부터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창조된 모든 것이 좋았다고 하신 것은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좋은 것들 중 하나는 선을 선택하는 자유를 가진 피조물들입니다.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선을 선택하는 외에 다른 것을 허락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이나 인간들이 선을 선택하거나 거부하는(악) 이런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두 가지 선한 것들 사이에 나쁜 관계가 존재하면 우리는 그것을 악으로 부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꼭 그것을 창조해야 하셨다는 “것(사실)”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추가적 실례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에게 “차가움이 존재하는가?”라고 물으면 대답은 “예”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답은 틀린 것입니다. 차가움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의 부재가 차가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둠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입니다. 악은 선한 것의 부재, 아니, 악은 하나님의 부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할 필요가 있으셨던 것 아니라 단지 선한 것의 부재를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하셨던 것이 아니라 악을 허락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인간과 천사들은 하나님을 자발적 선택이 아닌 의무감에서 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따라 단순하게 수행하는 “로봇”처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의 가능성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었고 우리가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는지 또는 아닌지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로마서 11:33-34).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행하고 계시는 이유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바가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물들을 거룩하고 영원한 시각으로 보십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죄스럽고, 세속적이며, 일시적인 관점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을 것이고, 그로 인해 악, 죽음, 그리고 고통을 모든 인류에게 가져올 것을 아셨음에도 왜 그들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셨을까요? 왜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저 창조하셔서 우리가 완전해지고 고통이 없는 천국에 두지 않으셨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영원의 우리 쪽 측면에서는 충분하게 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그것은 거룩하고 완전하며 궁극적으로 그분께 영광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경배할 것인지에 관한 선택을 주기 위해 악의 가능성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하였던 것이 아니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 의지에 의한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무감으로 인해 그분을 경배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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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모든 신학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전지하시고, 무소 부재하시고, 전능하십니다. 영원하지 않고, 무한하지 않으며, 전지하지도 않고, 무소 부재하거나 전능하지도 않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방법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왜 기대해야 합니까? 욥기는 이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탄이 욥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욥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가 나를 칠지라도, 소망을 그에게 두리라”(욥기 13:15).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기 1:21). 욥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을 계속해서 신뢰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반응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왜 나쁜 일들이 좋은 사람들에게도 일어날까요? 성경적인 답은 이 세상에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에 의해 더럽혀지고 전염되었다고 매우 분명하게 명시합니다(전도서 7:20, 로마서 6:23 요한일서 1:8). 로마서 3:10-18 는 “선한” 사람의 부재를 더 이상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지금 이 순간, 지옥으로 던져져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살아 보내는 모든 순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마저도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 비하면 자비스러운 것입니다.

아마도 보다 더 나은 질문은 “왜 나쁜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일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5:8은 표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세상 인간들의 악하고 못되며 죄를 짓는 인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로마서 6:23).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요한복음 3:16; 로마서 10:9) 우리는 그분의 용서를 받고, 천국의 처소를 약속 받습니다(로마서 8:1). 사실 우리가 받기에 마땅한 것은 지옥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우리에게 천국에서의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끔 나쁜 일들이 그런 일을 겪지 않아야 할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만이 아시는 이유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하든 못하든,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사랑이시고 또한 자비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자주,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그저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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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씀합니다(요한복음 1:18). 출애굽기 33:22에서 하나님께서는 공표하십니다: "너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나를 본 자는 아무도 살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본’ 다양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다른 말씀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33:11은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면 어떻게 모세가 얼굴을 대면하고 하나님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례에서, "얼굴을 대면하여"라는 어구는 모세와 하나님께서 매우 친밀한 교감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모세는 마치 그들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들인 것처럼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2:30에서, 야곱은 천사처럼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진짜로 하나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그들이 하나님을 보았었다고 깨달았을 때 두려움에 떨었으나(사사기 13:22), 그들은 단지 천사처럼 보이는 그분을 보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가운데 거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요한복음 1:1,14), 사람들이 그분을 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여 지실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모든 영광 가운데 드러나신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신다면, 우리는 소멸되고 파멸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우시고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모든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환상과 하나님의 이미지들과 하나님의 모습들을 보았으나, 완전한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출애굽기 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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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해야 하느냐의 여부가 아닌, 어떤 태도로 그리고 무슨 이유로 질문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한다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님의 계획에 대한 시점과 수단에 관련하여 질문하였습니다. 질문 때문에 책망받기 보다는, 하박국은 인내심을 가지고 응답을 기다렸고, 이 선지자는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자신의 책을 마칩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많은 질문이 드려집니다(시편 10, 44, 74, 77).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 다급한 박해 받는 사람들의 절규였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질문에 응답해 주지 않으실지라도, 이러한 말씀들로부터, 진지한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된 질문은 하나님께 환영 받는다는 결론을 우리는 얻습니다.

진지하지 않거나 위선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브리서 11:6).” 사울왕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후로 그의 질문은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했습니다(사무엘상 28:6). 하나님의 선하심을 직접적으로 의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왜 허용하시는 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의문들을 갖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주권에 의문을 품고 그분의 속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정직한 질문은 죄가 되지 않지만, 원통해 하고, 불신하며, 또는 대적하는 마음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질문들로 인해 위협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을 할 때, 그것은 겸손한 영과 열린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으나, 우리가 진심으로 그분의 대답에 관심이 없다면, 답변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시며, 깨우침을 얻기 위해 우리가 진심으로 그분을 찾는지의 여부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의 태도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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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교(monotheism)"라는 단어는 하나라는 의미의 “mono"와 하나님을 믿는다란 의미의”theism”, 이 두 단어들에서 유래합니다. 구체적으로, 유일신교는 유일한 창조자요, 지탱하는 분이며, 모든 피조물의 심판 자이신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유일신교는 모든 것 위의 하나뿐인 최고의 신과 함께 다수의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단일신교”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 이상의 신들의 존재를 믿는 다신교와도 대조됩니다.

역사 인류학뿐만 아니라 특수계시(성경), 자연계시(철학)로부터 기인된 것들을 포함한, 유일신교에 대한 많은 논증들이 존재합니다. 이것들은 아래에서 간략하게 설명될 것이지만, 어쨌든 이것이 완전한 목록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됩니다.

유일신교에 대한 성경적 주장들: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4:3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명기 6:4),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라기 2:10a),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린도전서 8: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에베소서 4:6),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야고보서2:19).

명백히,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오직 한 분뿐인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없이는 성경이 그분의 말씀임을 입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신빙성 있는 초자연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일신교가 이러한 근거들로 인해 확증될 수 있다고 누군가는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적적인 출생, 삶, 그리고 부활의 기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임을 입증하셨던(적어도 하나님에 의해 입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그분의 가르침이 그와 같은 논증의 주장이 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할 수도 속을 수도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믿고 가르치셨던 것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믿고 가르치셨던 유일신교는 진실입니다. 이 논증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경우와 그리스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그 능력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좋은 출발점입니다.

유일신교에 대한 역사적인 논증 - 인기에 근거한 논증들은 주지의 사실로 여기기에는 의심스러운 점도 있지만, 그저 유일신교가 세계 종교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종교발전에 대해 인기 있는 진화론적 이론은 실제에 관한 일반적인 진화론적 관점과 "원시” 문화들을 종교발전의 초기 단계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는 진화론적 인류학의 가정으로부터 파생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론적 이론 에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1) 그것이 묘사하는 발전의 종류는 결코 관찰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어떤 문화 안에서도 유일신교를 향한 상향 발전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 실제로는 그 반대 경우인 것처럼 보입니다. 2) "원시적" 이라는 인류학적 방법의 정의는 기술적인 발전과 동일시 되지만, 주어진 문화에는 무척 많은 구성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만족할만한 기준이 된다는 것은 거의 어려워 보입니다. 3) 주장된 단계들이 종종 누락되거나 빠져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다신교 문화들은 그것들의 발달 초기에 유일신교의 흔적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남성적이며, 하늘에 거하고, 엄청난 지식과 능력을 소유했으며, 세상을 창조하셨던 유일신교적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책임이 있는 도덕률의 입안자이고 우리가 불순종했기에 사이가 멀어진 분이며, 그렇지만 또한 화해의 길을 제공하셨던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모든 종교는 다신교의 혼돈으로 빠지기 전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이런 하나님의 변화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들은 유일신교에서 출발하여 다신교, 정령숭배, 그리고 마술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 반대는 아님(이슬람교는 한 바퀴 돌아 다시 유일신교 신앙으로 돌아 온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이런 움직임에서 조차, 다신교는 종종 기능적으로 유일신교적이거나 단일신교적입니다. 이것은 중재자들로서 역할만 하는 하위의 신들과 함께 그들을 지배하는 하나의 신을 고수하지 않는 드문 경우의 다신교적 종교입니다.

유일신교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논증들 – 하나 이상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많은 철학적 논증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논증들은 실제의 본질에 관련된 형이상학적 입장에 크게 의존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짧은 글에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입장을 다룸으로 나아가 유일신교에 대해 그들이 시사하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천 년을 거스르는, 이러한 진리들에 대한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 근거들이 있음을 믿으셔도 됩니다(거의 대부분은 상당히 자명합니다). 그러면, 간략하게, 누구나 탐구할 수 있게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논증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1. 만약 하나 이상의 신들이 존재한다면, 다수의 신들과 권위들로 인해 우주는 무질서 가운데 놓이게 될 것이나, 우주는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합니다.

2.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이므로, 다음 신은 존재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면에서 달라야 하고 완전히 완벽한 것과 다르다는 것은 덜 완벽한 것이기 때문에 신일 수 없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 무한하시므로, 그 분은 부분을 가질 수 없으십니다(왜냐하면, 부분들이 무한에 도달하기 위해 보태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존재가 단순히 그분의 한 부분이 아니라면(존재하거나 또는 존재할 수 없는 모든 부분들), 그분은 무한한 존재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와는 달라야 하기에 두 무한한 존재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런 많은 논증들이 하위 계급의 “신들”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네, 괜찮습니다. 우리가 이것이 성경적으로 사실이 아님을 안다 할지라도, 이론상으로는 잘못된 게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위 계급의 “신들”을 창조할 수도 있으셨지만, 그저 그분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분이 창조 하셨었다면, 그러한 “신들”은 오직 제한적이고, 아마 천사들과 많이 비슷한(시편 82) 피조물들일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떠한 영적 존재들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 유일신교의 경우를 흠집내지 않습니다. 유일신교는 오로지 하나님 이상의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투하는’이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묘사하는 출애굽기 20:5에서의 이 말의 사용은 질투하는 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과 다릅니다(갈라디아서 5:20). 우리가 ‘질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갖지 못한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의미로 그것을 사용합니다. 그 또는 그녀가 멋진 차나 집(소유물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또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가진 어떤 능력이나 기술(운동 능력 같은) 때문에 그 사람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그 또는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할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사례가 될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기 20:5에서는,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질투하거나 부러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0:4-5은 말씀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정당하게 속한 어떤 것을 다른 이에게 줄 때 질투하신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구절들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만 속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대신 우상을 만들어 절하고 그것들을 숭배하는 백성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예배와 의식을 소유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거나 의식을 올린다는 것은 죄입니다. 누군가 우리가 갖지 못한 어떤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그/그녀를 우리가 갈망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혹은 질투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질투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것을 질투하십니다; 예배와 의식은 그분께만 속한 것이므로, 오직 그분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아마도 실질적인 예가 이 차이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편이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에게 장난 삼아 연예거는 것을 본다면 질투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오직 자신만이 자기 아내와 연애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형의 질투는 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적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께 속한 것이라고 선포한 무언가에 대해 질투를 하시는 것은 선하고 적절한 것입니다. 질투는 당신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을 갈망할 때 죄가 됩니다. 예배, 찬양, 영광, 그리고 경배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인데, 이는 그분께서만이 받으셔야만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배, 찬양, 영광 또는 경배가 우상에게 주어질 때 당연히 질투하십니다. 이것이 정확히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1:2에서 묘사하였던 질투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룩한 질투로 질투하나니.”

-Got Questions Ministries

요한복음 9:31절은 표명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인으로부터 들으시는 유일한 기도는 구원을 위한 기도’라고 말해져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또는 결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요한복음 9:31은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를 통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4-15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원칙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하면,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도(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어떤 성경 말씀들은 믿지 않는 자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부분의 경우은 기도하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 두 번의 경우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셨습니다(이러한 부르짖음이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것이었는지의 여부는 언급되어 있지 않음). 이러한 경우 중 일부에서는, 기도가 회개와 함께 수행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서는 기도가 단순히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이나 축복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연민 때문에, 또는 진심으로 구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또는 그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응답하셨습니다. 여기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한 기도를 다루고 있는 몇 가지 말씀들이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니느웨가 보존되기를 기도했습니다(요나3:5-10).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셨고, 니느웨성을 위협하셨었던 데로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갈은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호해주시도록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창세기 21:14-19).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보호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매우 축복하셨습니다.

열왕기상 21:17-29절, 특히 27-29절에서, 아합은 그의 후세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을 놓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시대에 재앙을 불러오지 않음으로 반응하셨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 출신의 이방 여자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딸을 마귀로부터 구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마가복음 7:24-30).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딸로부터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는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베드로가 보내졌습니다. 사도행전 10:2은 고넬료가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9:13같이 모든 사람들에게(구원을 받았건 안 받았건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약속들을 하십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이 사도행전 10:1-6의 고넬료의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말씀들의 문맥을 따르면,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약속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그들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오도록 격려 받습니다(히브리서 4:14-16).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합 니다(요한복음1 5:14-15). 기도와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을 위한 다른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마가복음 21:22; 요한복음 14:13, 15:7). 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의 기도에 응하여 그들의 삶 속에 개입하실 수 있으십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차별은 한 쪽의 성, 일반적으로 남성이 다른 쪽의 성에 대해 우세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볼 때 여성들에 대해 차별적으로 들릴 수 있는 여성들에 대한 많은 언급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어떤 행위를 묘사할 때, 그것이 꼭 성경이 그러한 행동을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여자들을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남자들을 묘사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러한 행위를 승인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사회들보다 우리 영혼들을 개혁하는데 훨씬 더 중점을 둡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마음이 변화된 행위를 가져온다는 것을 아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실상 온 세상의 모든 문화가 구조상 가부장적이었습니다. 역사의 그러한 신분적인 것은 성경에 매우 분명히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회들을 다스렸던 규범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대적 가치체계들과 세상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성차별”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사회의 질서를 세우셨고, 권위의 원칙을 수립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은 이 질서까지도 타락시켰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발견되는 배타성과 차별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과 죄가 유입된 결과입니다. 따라서, “성차별”이라는 용어와 실천이 죄의 결과라고 우리는 올바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점진적 계시는 성차별과 인류의 모든 죄악 된 관습들을 진실로 우리가 고치도록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들 사이의 영적인 균형을 발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성취임으로, 신약 성경 안에서 권위의 올바른 계통과 성을 기반으로 하는 차별을 포함하는 죄와 인간의 질병에 대한 치유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원칙들을 우리는 찾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위대한 평형장치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믿는 자 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적 신분, 지적 능력, 또는 성별에 근거하여 어느 누구도 배제시키지 않는 포괄적인 서술입니다. 우리는 또한 구원에 대해 동등한 기회를 말씀하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6-28). 십자가에는 성차별이 없습니다.

남자 여자 둘 다 모두의 죄의 결과들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묘사에서 성경에는 성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종류의 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노예제도, 노예 신분, 그리고 가장 위대한 영웅들의 실패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과 그분이 구축하셨던 질서를 대적하는 그러한 죄들에 대한 해답과 치유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구약 성경은 최고의 희생물을 고대하고 있었고, 매번 죄에 대한 희생이 드려졌을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태어났고, 죽었으며, 다시 살아 났고, 그리고는 천국에 있는 자신의 처소로 승천했으며, 거기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차별의 죄를 포함한 죄에 대한 치유는 그 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성경에 성차별이 있다는 고발은 성경에 대한 지식의 결핍에 근거합니다. 모든 연령의 남성들과 여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치를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 때, 성별간의 멋진 조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조화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던 것이고, 그분께서 완료하실 것입니다. 지나치게 많은 관심이 죄의 뿌리가 아닌 다양한 죄의 결과들에 쏠려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화해가 있을 때만이 우리는 참된 평등을 찾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성경이 남성들과 여성들에게 부여하는 서로 다른 역할들이 성차별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남성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신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합니다. 이것이 여성들을 열등하게 만듭니까? 전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여성이 덜 지성적이고, 덜 유능하다거나 하나님의 눈에 덜한 존재라는 의미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죄로 얼룩진 세상에는 구조와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권위의 역할들을 세우셨습니다. 성차별은 이러한 역할들에 대한 남용이지, 이러한 역할들 자체가 아닙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왜 하나님은 지진, 토네이도, 허리케인, 쓰나미, 태풍, 사이클론,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를 허락하십니까? 2004년 말 아시아에서의 쓰나미 비극, 2005년 미국 남동부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그리고 2008년 미얀마의 싸이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수 년, 수 십 년 또는 심지어 수 세기에 걸친 평온한 날씨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그 공을 돌리지 않으면서, 자연재해들이 자주 ‘하나님의 행위들’로 치부되는 것은 속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전체와 자연법칙들을 만드셨습니다(창세기 1:1). 대부분의 자연재해들은 이러한 법칙들이 활동한 결과입니다. 허리케인, 태풍, 그리고 토네이도는 서로 다른 날씨 유형들이 충돌한 결과입니다. 지진은 지구의 판 구조가 움직인 결과입니다. 쓰나미는 바다 밑의 지진에 의해 발생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자연을 함께 붙들고 계시다고 선언합니다(골로새서 1:16-17). 하나님께서는 자연재해를 방지할 수 있으셨습니까?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날씨에 영향을 미치십니까? 우리가 신명기 11:17과 야고보서 5:17에서 보듯이 그렇습니다. 민수기 16:30-34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자연재해를 초래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은 확실히 자연재해하고 할 수 있는 많은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6, 8 그리고 16장). 모든 자연재해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처벌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이 악한 행위들을 저지르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과 거의 똑같이, 죄가 피조물에게 가져온 결과를 지구가 반영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로마서 8:19-21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죄로 인한 인류의 타락은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를 포함하여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좌절”과 “썩어짐”의 대상입니다. 죄가 죽음, 질병, 그리고 고통의 원인인 것처럼, 또한 자연재해들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우리는 왜 자연재해가 발생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허용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시아에서 22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도록 쓰나미를 허용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수 천 명이 사는 집들을 파괴하도록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허용하셨습니까? 우선 한 가지 이유는, 그러한 사건들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우리의 자신감을 떨쳐버리고 우리가 영원에 초점을 맞추도록 해 줍니다. 교회들은 자주 재해들이 지나가고 나면 채워지는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이 얼마나 미약하고 삶이 얼마나 순식간에 휩쓸려 갈수 있는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십니다. 자연재해 기간 동안 더 큰 생명의 손실을 방지했던 많은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자연재해들은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삶에 있어 자신들의 우선 순위를 재고하게끔 해줍니다. 수억 달러의 원조가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보내졌습니다. 기독교 사역들은 돕고, 사역하며, 상담하고 기도하며,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구원 받는 믿음으로 이끄는 기회들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비극들로부터 위대한 선을 가져오실 수 있고 또 가져오십니다(로마서 8:28).

-Got Questions Ministries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들을 행하시기를 갈망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기적, 표적, 또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만 한다면, 나는 믿을 텐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성경과 모순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놀랍고도 강력한 기적들을 행하셨을 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게 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든 기적들을 보았지만,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는 것을 보았던 바로 그 동일한 백성이, 후에, 약속의 땅에 거하는 거주민들을 정복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이 진리는 누가복음 16:19-31에서 설명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지옥에 있는 한 남자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경고하도록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돌려보낼 것을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람에게 “ 만약 그들이 모세와 선자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누군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더라도 그들을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다”(누가복음 16:31)라고 알려줬습니다.

예수님께서 셀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과거에 행하였던 것과 같은 기적들을 행하신다 해도, 그 결과는 동일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놀랄 것이고 잠시 동안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은 깊이가 없을 것이고, 예상치 못했거나 두려운 어떤 일이 발생하는 순간 사라질 것입니다. 기적에 근거한 믿음은 성숙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요한복음 3:16)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로마서5:8) 이 땅에 오셨는데, 이는 모든 시대들 통틀어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적들을 행하십니다. 그 중에 많은 것들이 단순히 주목되지 않거나 부인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기적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의 기적을 믿는 것입니다.

기적들의 목적은 그것들을 행하신 분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2은 공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동일한 말씀이 사도들과 관련하여 언급됩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린도후서 12:12). 복음에 대해 말씀하면서, 히브리서 2:4은 공표합니다:“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우리는 지금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은 우리 믿음의 모퉁이 돌이며 기반이 되십니다(에베소서 2:20).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의 메시지가 이미 증명되었고 정확하게 성경에 기록되었기에, 기적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적들을 행하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성경 시대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기적들이 오늘날에도 꼭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을 검토해보면,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고 인간의 특성들이나 한계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십니다. 둘째, 성경이 담고 있는 모든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남성의 형태로 인류에게 계시하셨다는 사실과 일치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참된 속성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이시고, 명백하게 모든 인격적 특성들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의지, 지성, 그리고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고 관계들을 맺으시는 것과, 하나님의 개인적 행위들은 성경 전반에 걸쳐 증거됩니다.

요한복음 4:24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에게 나아가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인간의 특성들을 소유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경에 사용되는 비유적인 언어는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 인간의 특성들을 부여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인간의 특성들을 부여하는 것을 신인 동형(의인화)이라 부릅니다. 신인동형은 단순히 육체적 존재인 인간에게 영적 존재인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진리가 소통되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인간은 물질적이기 때문에, 물질계를 초월한 것들을 이해하는데 있어 제한을 받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묘사된 신인동형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몇 가지 어려움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이 지음을 받은 사실을 검토하면서 발생합니다. 창세기 1:26-27은 말씀합니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처럼 마음, 의지, 지성, 감정, 그리고 도덕적 능력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위대합니다. 동물들은 도덕적 능력이 없고 인간에게 있는 것과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의도된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저 본떠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아주 작은 ‘복사물들’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의 특징들을 갖고 계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는다는 것이 육체적 특징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적 존재이시고 육체적 특징들을 갖고 있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하실 방법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인간에게 주셨던 모든 계시를 담고 있고, 하나님께 관한 정보의 유일한 객관적 자료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형태에 관한 증거가 몇 가지 관측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략 170번 정도 언급합니다. 필연적으로, 남성이 아니면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성의 형태로 인간에게 나타나기로 선택하셨었다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라는 말이 이 구절들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있어 남성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들이 거듭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차례 하나님을 아버지로 언급하셨고, 다른 경우들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데 있어 남성 대명사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복음서들 안에서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에서 거의 160회에 걸쳐 ‘아버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십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 10:30에 있는 그리스도의 언급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명백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들을 위한 대속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남성의 형태로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남자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지칭함에 있어 남성 명사들과 대명사들을 활용하시는 많은 다른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서신서들(사도행전부터 계시록까지) 또한 “theos”(그리스어 남성명)라는 말이 하나님을 직접 지칭하는데 사용된 거의 900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지칭에 있어, 하나님의 존재가 남성적 직함들, 명사들, 그리고 대명사들과 함께 언급되는, 명백하게 일관된 패턴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성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남성 형태를 선택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남성 직함들, 명사들, 그리고 대명사들과 함께 끊임없이 언급되는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거하시는 동안 남성 형태를 취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모두를 남성적 명칭들 및 직함들과 함께 지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를 인간이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이러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참작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속성에 적절치 않게 그분을 ‘상자에 가둠’으로써 제한을 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요한복음 3:16; 요1 2:2; 롬5:8). 이러한 사랑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오직 근거합니다(요한복음1 4:8,16).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가 있는 사람들을 즉시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자비를 보여주신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로마서3:23;6:23).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베드로후서 3:9). 그러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못 본 척하시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데살로니가후서 1:6). 죄가 처벌 받지 않고 영원히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로마서 3:25-26).

영원한 최고의 사랑은 로마서 5:8에 묘사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를 거절하며, 대속하신 구세주를 부인하는(베드로후서 2:1) 그 어떤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로마서 6:23)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로마서 1:18).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즉각적으로 인간들을 멸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신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언약의 사랑’을 허락합니다(요한복음 3:36).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님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보다 기독교인들을 더 사랑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시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사랑하십니다.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와 자비 그리고 천국에서의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가진다는 점에서 오직 기독교인들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조건적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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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3:6은 선포합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야고보서 1:17절은 우리에게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민수기 23:19의 의미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절대 바꾸지 않으십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변하지도 변할 수도 없으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창세기 6:6같은 구절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또한 요나 3:10의 말씀: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비슷하게, 출애굽기 32:14은 공표합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러한 구절들은 어떤 것에 대해 “후회하시는” 주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불변성에 관한 교리와 모순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본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절들이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회” 혹은 “(거부하다가 마침내) 동의하다”로 번역된 말은 “유감스럽다”는 원어인 히브리어를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것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6:6을 숙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이 구절은 심지어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 대해 후회하셨다고 표명합니다. 그러나, 명백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노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계속 존속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이 본문의 맥락은 인간이 살아가는 죄악 된 상태에 대한 묘사이며, 하나님의 슬픔을 초래했던 것은 인간의 사악함이지 인간의 존재가 아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나 3:10을 숙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다시, “~에 대해 유감스러운”이라는 의미의 동일한 원어인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계획하셨었던 것을 유감스러워 하셨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마음을 돌이켰고, 그 결과로써 불순종으로부터 순종으로 자신들의 길을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일관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으로 인해 니느웨를 심판하려 하셨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회개하고 그 길을 돌이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자비를 베푸셨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일관됩니다.

로마서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로마서 6:23은 그 결과가 사망(영적 그리고 육체적)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니느웨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와 동일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죄를 인간은 선택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스스로의 곤경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물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계속해서 죄를 저질렀었는데도 니느웨를 벌하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돌이켜 순종하였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원래 의도하셨었던 것과 같은 그들에 대한 심판을 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 쪽에서의 변화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께서 행하셨던 것을 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하였습니까?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무를 갖는 위치에 놓일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의로우셔서, 그들이 마음을 바꾼 결과로서 니느웨 사람들을 벌하지 않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을 보존하지 않으셨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속성에 반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시는 것같이 성경 말씀을 해석하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행위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행하려 하셨었다가, 대신에 다른 어떤 것을 행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변화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을 알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는, 그것이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이 하시려고 했던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행하십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이사야 46:10-11).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위협이 니느웨의 회개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렇게 위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중재에 나설 것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결정들을 후회하지 않으시지만, 자신의 결정에 응하여 인간이 간혹 행하는 행위에 대해 슬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행위들에 대해 반응 하실 때 자신의 말씀과 일관되게 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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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는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히 분리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누가복음 12:5; 히브리서 10:31).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무언가 많이 다른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존경입니다. 히브리서 12:28-29은 이것에 대한 좋은 묘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이런 경건함과 경외감이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주의 창조주를 따르는 동기가 되는 요인입니다.

잠언 1:7은 표명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해하고 그분께 대한 경외의 두려움을 성장시키기 전까지는, 우리는 참된 지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참된 지혜는 오직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의로우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신명기 10:12, 20-21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걸어가고, 그분을 섬기며, 그리고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기반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그분을 ‘존경하는’것으로 다시 정의합니다. 존경심이 분명히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개념에 포함되지만, 그것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성경적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 지에 대한 이해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심지어 믿는 자의 삶에서 조차. 히브리서 12:5-11은 믿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히브리서 12:6), 여전히 그 징계는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로부터 주어지는 징계에 대한 두려움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자녀가 어떤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예방해 줍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징계를 두려워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그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그분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로마서 8:38-39). 우리는 그분이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3:5).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께 대한 그러한 공경심을 가진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그분을 존경하는 것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며, 그분의 징계에 복종하는 것이고, 경외함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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