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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정확히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0: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예로 들어 봅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우리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시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분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장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예수님께서 부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고 선언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한 본성과 한 본질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 다른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신성 모독으로 그분을 죽이려고 돌을 집어 드는 것이었고, 이는 모세의 율법에 그렇게 명해졌기 때문입니다(레위기 24:15).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개념을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한복음 1:1,14)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8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누가 자기 자신의 피로 교회, 즉 하나님의 교회를 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행전 20:28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사셨다고 표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에 관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 공표했습니다(요한복음 20:28). 예수님께서도 도마의 표명를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디도서 2:13은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베드로후서 1:1 또한 참조). 히브리서 1:8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명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며 예수님를 “하나님이여” 라고 언급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한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요한계시록 19:10).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여러 차례 경배를 받으십니다(마태복음 2:11, 14:33, 28:9,17, 요한복음 9:38).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요한 계시록의 그 천사처럼,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배하지 말라고 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논증하는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들과 단락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셔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2).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피조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죄에 요구되는 무한한 형벌의 대가를 치를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런 영원한 형벌의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세상의 죄들을 짊어지고(고린도후서 5:21), 죽고,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입증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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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주 물어보는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과 달리,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여부에 관하여 질문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을 몸소 걸었던 실제 사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의 온전한 정체성이 논의의 주제가 될 때 많은 논쟁이 시작됩니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 종교가 예수님은 선지자,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보다 그 이상인 엄청난 분이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 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하십니까? 성경은 그분이 누구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요한복음 10:3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언뜻 보면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계속되는 구절들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럼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결코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8:59)고 주장하심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이 하나님이라 말씀하고 계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8:58은 또 다른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다시 한번,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치려고 돌을 들었습니다(요한복음 8:59). 예수님께서는 이를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정체 “나는(I am)” 은 구약 성경이 직접적으로 적용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출애굽기 3:14). 예수님께서 무언가 신성을 모독하는, 즉,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면 왜 유대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1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 표명했습니다(요한복음 20:28).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고백을 수정하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디도서 2:13)라고 묘사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똑같이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베드로후서 1:1)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의 온전한 정체를 증언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구약 성경의 예수님께 대한 예언들도 그분의 신성을 표명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그러므로, C.S. 루이스는 예수님을 단지 한 분의 좋은 선생이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선택도 될 수 없다고 논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 부인할 수 없게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거짓말쟁이이므로 선지자나 좋은 선생, 또는 경건한 사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변명하려는 시도에서, 현대 “학자들”은 성경에서 그분이 하셨다고 하는 많은 말씀들을 “실제 역사적 예수님”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반박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했고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그로부터 이 천 년이나 떨어져 사는 “학자들”이 그와 함께 살았고, 섬겼으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보다 어떻게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요한복음 14:26)?

예수님의 실제적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든 아니시든 왜 문제가 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셔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만약 그 분께서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그분의 죽음이 온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2:2).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런 무한한 죄값을 치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로마서 5:8; 고린도후서 5: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빚을 예수님께서 갚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분께서 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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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그분의 제자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가능한 죄사함의 권능을 예수님께서도 가지셨다고 주장했습니다(사도행전 5:31, 골로새서 3:13, 시편 130:4, 예레미야 31:34). 이 주장과 밀접하게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또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디모데후서 4:1).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요한복음 20:28). 바울은 예수님을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디도서 2:13) 라고 불렀고,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셨다고 언급했습니다(빌립보서 2:5-8).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히브리서 1:8). 요한은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 예로써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지만(요한계시록 1:17, 2:8, 22:13, 고린도전서 10:4, 베드로전서 2:6-8, 시편 18:2, 95:1, 베드로전서 5:4, 히브리서 13:20), 이들 중 단 한 구절만으로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간주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구약의 여호와(YHWH, 하나님의 공식 명칭)께만 쓰여졌던 고유한 칭호들이 주어집니다. 구약의 “구원자” 란 명칭(시편 130:7, 호세아 13:14)은 신약의 예수님께도 쓰입니다(디도서 2:13, 요한계시록 5:9). 예수님은 마태복음 1장에서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라 불려집니다. 스가랴 12:10 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나를 바라보고.” 그런데 신약 성경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적용합니다(요한복음 19:37, 요한계시록 1:7). 여호와께서 찔림을 당하셔서 사람들이 바라볼 것이라 했는데, 예수님이 찔림을 당하셨고 사람들에게 보여지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이시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바울은 이사야 45:22-23을 빌립보서의 2:10-11의 예수님께 적용하여 해석합니다. 나아가, 기도문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과 나란히 사용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라디아서 1:3, 에베소서 1:2).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이 기도는 신성모독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형)”(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4) 으로 세례를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과 나란히 나타납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행위들이 예수님께로 돌려집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5:21, 11:38-44), 죄를 용서하였고(사도행전 5:31, 13:38), 온 우주를 창조하였고 지탱하십니다(요한복음 1:2, 골로새서 1:16-17). 이는 여호와께서 창조하는 동안 혼자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고려할 때 더 확실해 집니다(이사야 44:24). 나아가, 하나님께서만이 소유하실 수 있는 속성들을 예수님께서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영원성(요한복음 8:58), 무소 부재하심(마태복음 18:20, 28:20), 전지하심(마태복음 16:21), 전능하심(요한복음 11:38-44) 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입증해 보이는 것과 사람들을 그저 믿게 하려고 속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일부 몇 가지 기적들로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요한복음 2:7), 물 위를 걷고(마태복음 14:25), 보이는 물체들을 배가시키고(요한복음 6:11), 눈먼 자와(요한복음 9:7), 절뚝거리는 자와(마가복음 2:3) 아픈 자를 치유하고(마태복음 9:35, 마가복음 1:40-42), 또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1:43-44, 누가복음 7:11-15, 마가복음 5:35). 게다가,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친히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이교도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죽고 사는 신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부활 같은 것은 다른 종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주장되지 않았고, 그 어떠한 다른 주장도 그렇게 많은 추가적 경전의 인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 기독교적 비판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인정할 것으로 보이는 예수님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이 최소 12가지가 있습니다.

1.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2. 그는 묻혔다.

3. 그의 죽음은 제자들을 절망시켰고, 모든 소망을 잃게 했다.

4. 예수의 무덤은 몇 일 뒤에 빈 채로 발견되었다(또는 발견되었다고 주장되었다).

5.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제 모습을 경험했었다고 믿었다.

6. 이 경험 후에, 제자들은 의심하는 자들에서 담대한 신자들로 변화되었다.

7. 이런 메시지는 초기 교회에 있어 설교의 중심이었다.

8. 이런 메시지는 예루살렘에서 설파되었다.

9. 이 설교의 결과로 교회가 탄생하였고 자라났다.

10. 부활일 즉 일요일이 안식일인 토요일을 대체하여 예배 드리는 주된 날이 되었다.

11. 회의론자 야고보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믿으면서 변화되었다.

12. 기독교도의 적이었던 바울은 그가 믿는바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하였던 것으로 말미암아 변화 되었다.

누군가가 이러한 사실들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부활을 증거하고 복음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몇 가지 항목들만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장사,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고린도전서 15:1-5) 입니다. 위 사실들의 한 두 개를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들이 있을 수 있으나, 오직 부활만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명합니다. 비평가들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보았다는 주장을 인정합니다. 거짓말이나 환영은 부활과 같이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첫째, 그들이 무엇을 얻으려 했겠습니까? 기독교는 인기가 있지 않았고, 돈을 벌게 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둘째, 거짓말쟁이는 진실을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끔찍한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제자들의 의지에 대해 부활보다도 더 나은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거짓들을 위해 죽습니다만,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위해서는 죽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여호와라고 주장하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단지 어떤 ‘하나의 신’이 아닌 유일하신 참 하나님). 그분을 따르는 자들(우상숭배라는 비난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었고 그분을 하나님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바꾼 부활을 포함하는 기적들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주장을 입증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가설도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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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8-19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여기서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대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육체와 성령이 아닌, 그리스도의 육체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분의 영은 산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18-22은 그리스도의 고난(18절)과 그분의 영광(22절) 사이에 필요한 연계를 묘사합니다. 오직 베드로만 이 두 사건들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킹 제임스(KJV) 성경은 예수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말씀합니다(19절). 그러나, 사용된 그리스어는 신약 성경에서 복음을 전파한다고 할 때 흔히 쓰이는 말과 다릅니다. 그것은 단순히 “소식을 알리다”라는 의미입니다;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역 성경은 이것을 “선포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분의 육체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은 살아계셨었고, 그분께서는 그 영을 아버지께 맞기셨습니다 (누가복음 23:46). 베드로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어느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특별한 선포를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영들(spirits)이라는 말은 인간들이 아닌 천사들이나 마귀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을 “혼들-souls(킹 제임스 역, KJV)로 언급합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지옥을 방문하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31은 예수님께서 음부(hades)(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에 가셨다고 말씀하지만, 음부(Hades)는 지옥이 아닙니다. 음부(Hades)는, 넓은 의미로, 죽음의 영역, 즉, 죽은 사람들이 부활을 기다리는 일시적 장소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NASV 및 NIV 성경에서의 요한계시록 20:11-15은 음부(Hades)와 불못을 확연히 구별합니다. 불못은 영구적이며,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마지막 장소입니다. 음부(Hades)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구약의 성도들 둘 모두를 위한 일시적 장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맡겼고, 육체적으로 죽었으며, 그리고 낙원으로 들어가셨습니다(누가복음 23:43). 그분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또한 자신이 영적인 존재들(아마 타락한 천사들; 유다서 1:6 참조)에게 소식을 전해 줄 장소를 방문하셨습니다; 이 영적 존재들은 어떻게든 노아의 홍수 이전과 연관이 있습니다(베드로전서 3:2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옥 안의 영들에게 무엇을 선포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천사들은 구원을 받들 수 없기에(히브리서 2:16) 구원의 소식은 선포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 사탄과 그의 무리들에 대한 승리의 선포였을 것입니다(베드로전서 3:22; 골로새서 2:15).

또한 에베소서 4:8-10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일어났던 그분의 활동들과 관련된 단서를 주는 것 같습니다. 시편 68:18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에베소서 4:8). ESV(English Standard Version) 성경은 이것을 예수님께서 “사로잡힌 무리를 이끌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언급은, 예수님께서 낙원에 있는 모든 구원 받은 자들을 모아서 그들이 영원히 거주할 천국으로 데려가신 것 같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은,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삼일 동안 정확히 무엇을 하셨는지 전적으로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성도들을 위로하셨고, 그들을 그들의 영원한 거처로 데리고 가셨으며, 옥 안에 갇혀있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그분의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도 구원에 대한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구원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완료되었습니다(요한복음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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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으로, 이 질문이 던져질 때, 물은 사람은 이 질문을 ‘성경 밖’에서의 질문으로 한정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의 자료로서 고려될 수 없다는 생각은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수백개의 참고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의 기록을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100년도 넘는, 기원 후 2세기까지로 날짜를 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맞다고 하더라도(우리는 강하게 반박합니다), 고대 증거 자료들의 측면에서, 사건들이 일어났던 때로부터 200년 안에 기록된 것은 매우 믿을 수 있는 증거들로 간주됩니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은 바울의 서신서들(최소한 그 중의 일부라도)이 실제로 1세기 중반, 즉, 예수님의 죽음 후 40년도 안되어 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볼 것입니다. 고대 문서 자료의 측면에서 볼 때, 이 것은 1세기 초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이름의 남자가 존재하였다는 매우 강력한 증거입니다.

서기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역을 침략하여 파괴하였고, 그곳의 거주자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 도시들은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많은 증거가 당연히 파괴되었으리라고 우리는 짐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예수님께 대한 살아남은 목격자들의 증언의 양을 제한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대체로 로마제국의 조그만 구석의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 한정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놀랄만하게 많은 정보가 세속적인 역사적 자료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역사적 증거들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세기의 로마인이었던 타시투스(Tacitus)는 고대 시대의 아주 정확한 역사가들 중의 한 명으로 간주되는데, 그는 티베리우스(Tiberius)의 통치기간 동안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미신을 믿는 ‘기독교인들’(‘Christians’는 라틴어인 ‘Christus’로부터 유래)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수석 장관이었던 수에토니우스는 서기 1세기에 살았던 이름이 크래스투스(Chrestus 또는 Christ)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연대기, Annals 15.44).

조세푸스 플레비우스(Josephus Flavius)는 가장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입니다. 그의 저서 고대사(Antiquities)에서, 야고보를 ‘그리스도라고 불려졌던 예수의 형제’로 언급합니다. 그 중에는 논란이 많은 구절(18:3)도 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그를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합법적이라면)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놀라운 축제들을 있게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경건한 선지자들이 이것들과 그에 관해 일만가지의 다른 놀라운 일들을 미리 예언했던 대로 그는 삼 일째에 다시 살아나 그들에게 나타났다.” 다른 번역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라 불리는 지혜로운 자가 있었다. 그의 행위는 선했고 고결하신 분으로 알려졌다. 많은 유대인들과 다른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해 죽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들은 제자의 신분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지 삼일 후에 그들에게 나타났고 그는 살아있었다고 그들은 보고하였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경이롭다고 말하였던 구세주였을지도 모른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드리워졌던 어둠에 관한 논의에서 역사가 탈루스를 인용합니다(Extant Writings, 18).

플라이니 더 영거(Pliny the Younger)는, Letters 10:96에서,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 경배하였으며 매우 윤리적이었다는 사실을 포함해 초기 기독교 예배 관습을 기록하였고, 애찬식과 성찬식을 언급하였습니다.

바빌론의 탈무드(산헤드린 43a)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유월절 전날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리스도에 대한 혐의는 술법을 쓰고 유대인들의 배교를 고무시킨 것이라 확인시켜줍니다.

사모사타의 루시안은 예수님께서 기독교인들에 의해 경배를 받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소개하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처형되셨다는 것을 인정한 서기 2세기 때의 그리스 작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믿는 자들간의 형제애, 개종의 중요성, 그리고 다른 신들을 부인하는 것의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규율들에 따라 살았고, 자신들이 불멸한다고 믿었으며, 죽음에 대한 경멸, 자발적인 헌신, 그리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금욕으로 특징되었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마라 바 세라피온은 예수님께서 현명하고 고결한 자로 간주되셨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여겨졌으며,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던 그대로 사셨다고 확인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갖 영지주의적인 글들(진리의 복음, 요한의 외경, 도마 복음, 부활에 관한 논문 등 (The Gospel of Truth, The Apocryphon of John, The Gospel of Thomas, The Treatise on Resurrection, etc.)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두가 예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초기 비기독교적 자료들만으로도 우리는 거의 복음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로 불려졌고(조세푸스), ‘마술’을 행하였고, 이스라엘을 새로운 가르침으로 이끌었고, 그들을 위해 유다에서(타시투스) 유월절 날 매달려 죽었으나(바빌론 탈무드), 자신이 하나님이며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고(엘리에 잘),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면서(플라이니 더 영거) 믿었습니다.

세속적 그리고 성경적 역사 모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너무나도 엄청난 증거가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가장 큰 증거는 1세기 때, 열두 사도들을 포함한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들을 기꺼이 바쳐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료들이나 성경의 역사적 자료 양쪽 모두에서 이런 사실을 풍성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위해 죽을 수는 있으나, 아무도 자신들이 거짓인 줄 아는 것을 위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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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셔서 아들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와 함께 하셔서 그녀와 함께 아들을 나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요한복음 1:1, 14).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마리아에게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가복음 1:35은 표명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재판 받으실 동안에, 대제사장이 요구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태복음 26:63). 예수님께서 “네가 말한 대로 그러하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태복음 26:64).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마태복음 26:65-66). 후에,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그들은 고집합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9:7).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신성모독으로 여겨져야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을 만큼의 일이 되어야 합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구로 뜻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사실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기 24:15를 따라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은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또 다른 예를 요한복음 17:12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 6:71은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2에서 유다는 “멸망의 자식” 이라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멸망”이란 말은 “파괴, 파멸, 폐기”를 뜻합니다. 유다가 말 그대로 파멸, 파괴, 그리고 폐기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유다의 삶의 정체였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멸망의 표상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표상이십니다(요한복음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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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아주 중요합니다(이사야 7:14; 마태복음 1:23; 누가복음 1:27, 34). 첫째, 성경이 이 축복된 사건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봅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당혹스러워 할 때, 가브리엘 천사는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엎으시리니”(누가복음 1:35).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라고(마태복음 1:20)” 설명해주면서, 마리아와 결혼해도 된다고 격려합니다. 마태는 처녀가(마태복음 1:18). 갈라디아서 4:4도 처녀를 통한 탄생을 가르칩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예수의 탄생은 마리아의 몸을 통한 성령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물질적인 것(성령)과 물질적인 것(마리아의 자궁) 모두가 관련된 사건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이 임신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면, 그녀는 그저 도구로 쓰인 것 뿐 입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성육신의 기적을 이루십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예수가 혈연 관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육체를 가진 온전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육체는 마리아를 통해 주어진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그리고 죄 없는 온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요한복음 1:14; 디모데전서 3:16; 그리고 히브리서 2:14-17).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니고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분께는 죄의 속성이 없으셨습니다(히브리서 7:26). 죄는 아버지를 통해 세대에서 세대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듯 싶습니다.(로마서 5:12, 17, 19). 그러나, 동정녀를 통한 예수의 탄생은 이렇게 이어지는 죄를 막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죄 없는 온전한 인간이 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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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께서 일주일의 어떤 요일에 십자가 형에 처해 지셨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금요일과 목요일입니다. 그러나, 일부는 금요일과 수요일 논쟁 둘 다를 종합하여 그 날이 목요일이라고 논증합니다.

마태복음 12:4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금요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3일동안 계셨다고 간주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여전히 있다고 말합니다. 1세기 때의 유대인의 생각에는, 하루의 일부분도 온전한 하루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의 일부, 토요일 모두, 그리고 일요일의 일부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삼일 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주장에 대한 주요 논증들 중 하나는 마태복음 16:21과 누가복음 9:22와 같은 구절들이 예수님께서 삼일째 되는 날 부활하셨음을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무덤에서 온전한 세 번의 날들과 밤들 동안 계실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번역들이 이 구절들에 대해 “삼일째(on the third day)”를 사용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고, 또한 모든 사람들이 “삼일째(on the third day)”가 이 구절에 대한 최상의 번역이라고 동의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마가복음 8:31은 예수님께서 삼일 “후(after)”에 부활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의 주장은 금요일 견해에 대해 부연하는 것이고 금요일 저녁의 그리스도의 장사됨과 일요일 아침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어떤 사람들은 20가지나 많은 일들이라 함)이 일어났다고 주로 논증합니다. 목요일 견해 지지자들은 금요일과 일요일 사이에서 오로지 온전한 하루 전체로 볼 수 있는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뿐이라는 것이 특히 문제가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추가적인 하루나 이틀 정도의 시간이 더 있어야 이런 문제를 해결 해 줍니다. 목요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월요일 저녁부터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고 가정합시다. 다음에 당신이 그를 본 때가 목요일 아침이면 당신은, 엄밀히 따지면 오로지 60시간(2.5일)일지라도, “나는 너를 3일 동안 보지 못했어”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요일에 십자가 형에 처해지셨다면, 이 예가 어떻게 3일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수요일이라는 견해는 그 주에 2차례의 안식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첫째 안식일(십자가에 처형되신 저녁 때인 안식일 [마가복음 15:42; 누가복음 23:52-54]) 후에, 여자들은 향유를 구입했습니다 – 그녀들이 안식일이 지난 후에 구입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마가복음 16:1). 그리고, 수요일 견해는 이 “안식일”은 유월절이었다고 봅니다(레위기 16:29-31; 23:24-32; 39를 보면, 한 주의 꼭 일곱 째 날일 필요가 없는 아주 성스러운 날들이 안식일이라고 지칭됩니다). 그 주의 두번째 안식일은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보통의 안식일입니다. 누가복음 23:56에서, 첫 안식일이 지나 향유를 샀었던 여인들은 집에 돌아와 향료를 준비 하였고, “안식일에 쉬었다” 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이 주장은 두 차례의 안식일이 없었다면, 그녀들이 안식일이 지나 향유를 구매하고, 그 향유를 안식일 전에 준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차례의 안식일이 있엇다는 견해로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께서 목요일에 십자가 형에 처해지셨다면, 아주 성스러운 안식일(유월절)은 목요일 해가 질 때부터 시작되어 금요일 해가 질 때 – 매주 한번의 안식일 또는 토요일의 시작 – 까지가 될 것입니다. 첫번째 안식일(유월절)이 지나서 향유를 구입했다는 것은 그녀들이 향유를 토요일에 구입했다는 것이 되고 안식일을 범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수요일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여인들과 향료의 성경적 서술에 위반되지 않고 마태복음 12:40의 문자적 해석을 견지하는 유일한 해명이 될 것입니다. 아주 성스러운 날인 안식일(유월절)은 목요일이었고, 그 후 여자는 금요일에 향유를 구입했고, 같은 날 집에 돌아와 향유를 준비했으며, 그리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쉬었으며, 일요일 이른 아침에 향유를 무덤에 가지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달력으로 목요일이 시작되었던 수요일 해질 무렵에 장사되셨습니다. 유대 달력을 사용하면, 목요일 밤(밤 하나), 목요일 낮(낮 하나), 금요일 밤(밤 둘), 금요일 낮(낮 둘), 토요일 밤(밤 셋), 토요일 낮(낮 셋)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느 시간에 부활하셨는지 모르지만, 일요일 해 뜨기 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께서는 유대인에게 한 주의 첫 째 날이 시작되었던 토요일 저녁 해 진 후 바로 이른 시각에 부활하셨을 것입니다. 빈 무덤의 발견은 아직 어둡지만(요한복음 20:1), 바로 동이 틀 때 이루어졌습니다(마가복음 16:2).

수요일 견해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점은 엠마오를 향해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 걷고 있었습니다(누가복음 24:13). 예수님을 알아 차리지 못한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을 예수님께 말씀하고(24:21) “오늘은 이 일이 일어난지 3일 되었다”고 말합니다(24:22). 가능한 해명은 그들이 유대인의 목요일이 시작되는,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수요일 저녁부터 세었을 수도 있으며,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가 3일로 계산되었을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예수께서 무슨 요일에 십자가형을 당하셨는지를 안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날과 시간을 분명하게 전달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똑 같이 중요한 것은 그분께서 죽으셨던 이유입니다 – 모든 죄인들이 받아 마땅할 형벌을 짊어지는 것. 요한복음 3:16과 3:36 모두는 당신이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수요일, 목요일, 혹은 금요일에 받으셨던 여부와 관계없이 한결같은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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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태 복음 28:1-20, 마가복음 16:1-20, 누가 복음 24:1-53, 요한 복음 20:1-21:2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도행전(사도행전 1:1-11)에도 등장하십니다.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당신은 그리스도 부활의 여러 "증거들"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증거들의 첫 번째는 제자들의 극적인 변화입니다. 그들은 겁먹고 숨어 지내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었지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강하고 용감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그리스도외에 그 무엇이 이런 극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의 삶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교회의 박해자에서 교회를 위한 사도로 변화시켰을까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사도행전 9:1-6). 세 번째 확실한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분이 묻힌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돌아 왔을 때, 그리스도의 몸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마태 복음 28:5-7). 네 번째 그리스도 부활의 추가적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많은 사람들입니다(마태 복음 28:5, 9, 16-17; 마가 복음 16:9; 누가 복음 24:13-35; 요한 복음 20:19, 24, 26-29, 21:1-14; 사도행전 1:6-8; 고린도 전서 15:5-7).

예수님 부활의 또 다른 증거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두는 엄청난 비중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핵심 구절은 고린도 전서 15장에 있습니다. 이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왜 중대한지를 설명합니다. 부활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요합니다: 1)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믿는 자들도 역시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12-15). 2)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죄에 대한 그분의 희생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고린도 전서 15:16-19).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들의 죄에 대한 속죄로 하나님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죽어 죽음에 머무셨다면 이는 그분의 희생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믿는 자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그들이 죽은 후에는 죽음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16-19). 요한 복음 3장 16절의 '영생'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 전서 15:20).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처럼 다시 살아 영생을 누린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고린도 전서 15:20-23). 고린도 전서 15장은 계속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증명하고 우리에게 죄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사는 힘을 제공하는지를 설명합니다(고린도 전서 15:24-34). 고린도 전서 15장은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의 영광스러운 특성을 설명하고(고린도 전서 15:35-49),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사망을 이긴 최후의 승리자임을 선포합니다(고린도 전서 15:50-58).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인지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 전서 15:58).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가장 확실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400여 명에 의해 목격되었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 위에 매우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구축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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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관하여 아주 많은 혼란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 뒤에 지옥을 가셨다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씀하는 사도신경으로부터 주로 나옵니다. 또한 어떻게 번역이 되는가에 따라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것을 묘사하는 몇몇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공부하는데 있어, 성경은 죽음의 영역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은 sheol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장소” 혹은 “떠난 영들/혼들의 장소”란 의미입니다. Sheol에 대한 신약성경의 헬라어 동의어는 hades인데, 역시 “죽은 자들의 장소”를 지칭합니다. 신약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sheol/hades가 영들이 마지막 부활과 심판을 기다리는 일시적 장소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은 hades와 불못(lake of fire) 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불못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영원하고 최종적인 장소입니다. 하지만, hades는 일시적인 장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hades와 불못을 “지옥”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것이 혼란을 초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후에 고통의 장소에 갔던 것이 아니라, hades를 가셨습니다.

Sheol/Hades는 두 개로 나눠진 영역입니다 – 축복의 장소 및 심판의 장소(마태복음 11:23; 16:18; 누가복음 10:15; 16:23; 사도행전 2:27-31).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처소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hades”라고 불려집니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는 누가복음 16:22에서 “아브라함의 품”(KJV) 또는 “아브라함 쪽”(NIV)으로, 누가복음 23:43에서는 “낙원”이라고 불려집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처소는 누가복음 16:23에서 “지옥”(KJV) 또는 “Hades”(NIV)라고 불립니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처소들은 “큰 구렁텅이”에 의해 분리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16:26).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축복된 쪽의 sheol로 가서 거기로부터 믿는 자들을 자신과 함께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에베소서 4:8-10). 심판 쪽의 sheol/hades는 변함 없이 남아 있습니다. 죽은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은 거기로 가서 미래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sheol/hades에 가셨습니까? 에베소서 4:8-10과 베드로전서 3:18-20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혼란스러움의 일부는 시편 16:10-11같은 말씀들이 킹 제임스 역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될 때 생깁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hell)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여기서 음부(hell)는 옳은 번역이 아닙니다. 올바른 번역은 “the grave(무덤)”이나 “Sheol”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누가복음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를 지옥에서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분의 영/혼은 sheol/hades에 있는 축복받은 자들과 함께하러 가셨습니다. 불행히도, 성경의 많은 번역본들에 있어, 번역가들은 히브리어 그리고 헬라어인 “sheol,” “hades,’ 그리고 “hell(지옥)”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해 일관적이지 않거나 정확하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들을 위해 더 형벌을 받으려고 “지옥”이나 고통 받는 쪽의 sheol/hades를 가셨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완전히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충분한 죄값을 치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죄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씻게 하는 것은 그분께서 흘리신 보혈이었습니다(요한일서 1:7-9).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시면서, 인간의 모든 죄의 짐을 자신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는 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 이 죄의 전가는 십자가에서 그분께 쏟아질 죄의 잔을 옆에 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의 몸부림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거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고통도 끝이 났습니다. 그분의 영/혼은 hades(죽은 자들의 장소)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hell)”이나 고통 받는 쪽의 hades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 쪽” 또는 축복받은 쪽의 hades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그분께서 죽으신 순간에 끝이 났습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치러졌습니다. 그리고는 그분께서는 몸의 부활과 승천 시 다시 주어질 영광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가셨냐고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sheol/hades를 가셨냐고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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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 질문에는 두가지 측면의 답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죄를 지으셨는지 또는 안 지으셨는지의 여부를 가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히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에는 두 측면 모두 동의합니다(고후 5:21; 벧전 2:22). 지금 질문은 예수께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완전무결’을 주장하는 측은 예수님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믿습니다. ‘죄 지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믿는 측은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 있었지만 짓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견해가 옳을까요?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은 완벽 무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 없으셨던 분입니다. 만일 주께서 죄를 지을 수 있으셨다면 지금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와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죄를 지을 수 있으시다는 말이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며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그 상태로 영원할 것이며, 이에 그분 안에는 완전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지으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지으실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골로새서 2장 9절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덧붙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지만 우리처럼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 당할 때 우리와 똑같이 시험 당하신 것이 틀림없지만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죄는 그분의 속성과 어긋납니다(마 4:1; 히 2:18, 4:15; 약 1:13).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으셨고 율법은 그 속성상 하나님이 행하실 것과 행하지 않으실 것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이 그분의 본성상 행하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살인이나 음행을 행하자고 유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것을 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혀 그런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죄를 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기에 당신은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시험을 받다’라는 뜻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물에 의해, 또는 당신 자신의 죄성에 의해, 죄를 짓자는 제안을 받는 것

2) 실제로 범죄행위에 참여할 것을 고려하면서 그 행위가 가져올 쾌락과 결과를 마음으로 가늠하면서 고민하는 것

첫 번째 정의는 죄의 행위와 생각을 서술하지 않지만, 두 번째 정의는 서술합니다. 당신이 죄의 행위를 생각하며 어떻게 그 죄를 저지를 수 있을지 고민한다면 당신은 이미 죄의 선을 넘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정의에 따라 시험을 받은 것인데 죄성이 전혀 없으셨던 사실이 예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어떤 죄의 행위를 제안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죄에 참여할 마음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를 짓지 않음으로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죄를 지을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만일 예수께서 죄를 지을 수 없으셨다면 참으로 시험 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죄에 대한 우리의 갈등과 시험에 대해 진정으로 동정하실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체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으실 욕망이 전혀 없으시며 당연히 죄를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무엇인지 아시며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며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시험에 동정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처럼 똑같이 모든 것을 ‘경험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를 짓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십니다. 이 사실이 결코 그분이 우리를 돕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겪는 죄의 시험을 당합니다(고전 10:13). 죄는 일반적으로 세 종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하와가 받은 시험 및 죄를 검토해 보고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검토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 시험들이 각각 이 세 종류에 속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 및 영역에서 똑같이 시험 당하셨지만 완전한 거룩함을 지키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부패한 속성 안에는 여전히 몇몇 죄에 참여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롬 6: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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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이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을 “때가 차매” 보내셨다고 선언합니다. 서기 1세기가 되니 적어도 사람이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에 이상적인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1) 그 당시 유대인 사이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큰 기대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 때문에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2) 로마 제국의 통치는 다양한 지역에 일체감을 부여하면서 세계의 많은 부분을 통합시켰습니다. 또한 제국이 비교적 평화로웠고 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한 여행의 자유는 다른 때에는 불가능하였습니다.

3) 로마가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동안,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고전 헬라어와는 다른) ‘공통’ 형태의 헬라어가 무역 언어였고 또한 제국 전역에서 사용됨으로써 하나의 공통 언어를 통해 여러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4) 많은 거짓 우상들이 침략자 로마 제국을 이기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우상 숭배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보다 ‘교양있는’ 도시에서는 마치 오늘날 공산주의 정부의 무신론이 많은 영적인 공허함을 남긴 것처럼 헬라 철학과 그 당시의 과학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공허함을 남겼습니다.

5) 그 당시 비밀스런 종교들은 구세주 신을 강조하면서 숭배자들에게 피의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요구했는데, 이는 궁극적인 희생 제사를 담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또한 영혼의 불멸을 믿었습니다(몸의 불멸은 믿지 않았습니다).

6) 로마 군대는 지방에서 병사들을 모집한 후 그들에게 로마 문화뿐만 아니라 변방까지 아직 전파되지 않은 사상들(복음 등)을 소개했습니다. 영국에 가장 처음으로 복음이 소개된 것은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기독교 군인들의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그 당시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왜 역사의 그 특별한 시점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는지를 추측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사 55:8). 따라서 위의 내용들은 하나님이 왜 특정한 그 때에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해 유대인의 율법을 통해 기초를 마련하려고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성의 깊이를 깨닫도록 도와주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한 죄의 치료를 더욱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갈 3:22-23; 롬 3:19-20). 율법은 또한 사람들을 메시아이신 예수께로 인도하시는 ‘초등교사’였습니다(갈 3:24). 율법은 메시아에 관한 많은 예언들을 알려줌으로써 예수께서 그 예언들을 성취하실 때 그분을 알려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율법이 언급하는 희생 제사 제도는(각 제사는 언제나 또 다른 추가 제사를 필요로 하는 점에서) 그 제도 자체의 부적당함을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위한 어떤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시하였습니다. 구약의 역사 또한 여러 사건들과 종교적 절기(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기꺼이 이삭을 바친 의지, 또는 출애굽 기간 동안 유월절에 대한 세부 지시 사항 등)를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묘사하여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구체적인 예언을 성취하시면서 오셨습니다. 다니엘서 9장 24-27절은 “70이레” 또는 70개의 “일곱”을 언급합니다. 문맥에서 보면, 그 “이레” 또는 “일곱”은 칠일 기간이 아니라 칠년 기간을 언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69 이레를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70번째 이레는 미래에 발생할 것입니다). 70이레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시작됩니다. 이 명령은 주전 445년 아닥사스 롱기마누스 왕에 의해 주어졌습니다(느 2:5). 다니엘의 예언은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 이후, 또는 69 x 7 년 이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다스리는 한 왕의 백성이 와서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릴 것이고, “그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심각한 파괴를 의미함)이라고 하였습니다(26절).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구세주의 죽음에 대한 명백한 언급을 보게 됩니다. 약 1세기 전, 로버트 앤더슨 경은 그의 저서 '왕의 오심'에서 윤년, 달력상의 오류, B.C.에서 A.D로의 변화를 고려한 '예언적 연대'를 사용하여 69 이레에 대한 상세한 계산을 했는데 69 이레는 예수께서 죽으시기 5일 전에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그 날에 정확하게 끝난 것을 알아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표를 사용하든 그렇지 않든, 요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시기가 5 백 년 이상 전에 다니엘에 의해 상세하게 예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시기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분의 오심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그러한 때였습니다. 그 이후로 매 세기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그분의 오심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예언하였던 성경의 내용들을 성취하신, 바로 그 약속된 메시아라는 충분한 증거를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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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되 동시에 여전히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계신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셨습니다(요 8:58, 10:30). 그러나 예수님은 성육신 때에 사람이 되셨습니다(요 1:14). 신성에 인성이 더하여진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사람이십니다. 이것이 위격적 연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체이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의 두 본성인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자 사람 이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한 인격 안에는 서로 구분되는 두 가지 본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혼합되지 않으며 각각 서로 구별되는 속성을 유지하면서 그분 안에서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인성의 한계(요 4:6, 19:28)를 보이시지만 또 다른 때에는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요 11:43; 마 14:18-21). 예수님의 인성 및 신성을 나타내는 행동은 모두 그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본성을 지니셨지만, 오직 하나의 인격(위격)을 가지셨습니다.

위격적 연합 교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지를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이 교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눅 1:35). 예수님은 언제나 존재하셨습니다(요 8:58, 10:30). 예수님이 잉태될 때 그분은 하나님이자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요 1:1, 14).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 잉태되기까지는 아직 사람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부림치는 싸움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히 2:17), 더욱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빌 2 : 5-11). 요약하면, 위격적 연합은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각 속성은 전혀 섞이거나 희석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원토록 두 속성이 연합되어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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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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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29절과 요한복음 1장 36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불리는 것은 그분이 죄를 위한 완전하고 궁극의 희생 제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분이 행하신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속건제물”(사 53:10)로 예언하고 있는 구약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구약에서 세워 놓으신 희생 제사 제도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무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마련하신 완벽한 희생 제물입니다(롬 8:3; 히 10 장).

양들의 희생은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과 희생 제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때 그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당장 여러 중요한 희생 제사들 중 어떤 하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월절 축제가 매우 가까워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유월절 양의 희생입니다. 유월절 축제는 유대인의 주요 명절 중에 하나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것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사실, 유월절 양을 죽이고 그 집의 문설주에 그 피를 바르는 것은(출 12 :11-13)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분이 대신 죽으신 대상들은 (영적) 죽음의 천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주님의 피로 덮여 있습니다.

양을 포함한 또 다른 중요한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 드려지는 희생 제사였습니다. 아침과 저녁마다 백성의 죄 때문에 어린 양이 성전에서 희생되었습니다(출 29:38-42). 이러한 매일의 희생은 다른 모든 희생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십자가 상에서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은 성전에서 저녁 희생이 드려지던 시간과 일치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은”(렘 11:19; 사 53:7) 어떤 분의 오심 및 그의 고난과 희생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구속이 임할 것을 예언한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같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희생 제도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지불이나 배상의 개념은 여전히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며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을 압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이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고 가르치는 것을 압니다(롬 3:23).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그분 앞에서 죄수로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화해의 길을 마련해 주시는 것인데, 그분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이때 그리스도는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속죄하고 그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죄를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희생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 및 삼일 후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이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을 마련하셨다는 사실은 베드로전서 1장 18-21절에서 분명하게 선포된 영광스러운 복음의 일부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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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 드리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친히 인간의 형상을 취하기 전에 영원한 아들로서 영원한 아버지와 영원한 관계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5 장 19-27절, 특히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것을 가르치는 23절을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참조, 요 15:10).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늘 하나님의 아들일 것입니다.

이사야 9 장 6 절은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고 그 아기가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령과 함께 삼위 일체에 속하여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삼위 일체로 항상 존재하시는데,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세 인격체(위격)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 10:30). 이는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는 같은 실체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존재하는 동등한 세 인격체(위격)이십니다. 이 세 위격은 서로 영원한 관계를 가졌으며,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죄 없는 인성을 입으셨을 때 그분은 또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빌 2:5-11). 그분은 하나님이자 사람으로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면서, 사람들에 의해 거짓 고발을 당하시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거부 당하시면서,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그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히브리서 5 : 8)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는 권능(요 11:41-42)과 지혜(막 1:35, 6:46)를 구하기 위해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요한복음 17 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입증된 것처럼 구속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인성 가운데 아버지께 의존하셨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그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로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인하여 받을 죗값을 대신 치르시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마 26:31-46). 물론,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을 위한 용서와 영생을 얻어내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말씀하시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기 전에 영원한 관계를 갖고 계셨습니다. 이 관계는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또한 그렇게 행함으로써 자기 자녀들을 위한 구속을 어떻게 얻어내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요 6:38).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 계속해서 복종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 생활을 통해 힘을 얻어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도의 본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죄 없는 인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생동력 있는 기도의 삶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삼위 일체 안에서의 그분의 관계를 보여주신 것이고, 힘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으로서 힘찬 기도의 삶을 가질 필요가 있으셨고,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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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형제들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언급됩니다. 마태복음 12장 46절, 누가복음 8장 19절, 마가복음 3장 31절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보러 왔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게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네 명의 형제가 있다고 알려줍니다(마 13:55). 성경은 또한 예수님은 자매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몇 명인지,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마 13:56). 요한복음 7 장 1-10절을 보면, 예수님이 뒤에 남아 계시는 동안에 그의 형제들은 명절 축제에 갑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9절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형제로 언급되고 있습니다.우리는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예수님은 실제 피로 맺어진 형제 자매들이 있었다고 자연스럽게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일부 로마 카톨릭 사람들은 이러한 “형제들”이 실제로는 예수님의 사촌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각 경우에 있어서 "형제"라는 특정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이 단어는 다른 친척들을 지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는 육체의 형제입니다. 또한 "사촌"이라는 헬라 단어가 따로 있지만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사촌들이라면, 왜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종종 함께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던 것일까요?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보러 간다는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실제 피를 나눈 이복 형제들임을 부인할 만한 아무런 암시가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두 번째 주장은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은 요셉이 이전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 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보다 훨씬 늙었으며, 이전에 이미 결혼한 적이 있었고, 여러 자 녀들을 낳았고, 그 후 홀아비가 되었다가 다시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이론은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이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이론의 문제는 성경은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결혼을 했거나 자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할 때 이미 여섯 자녀가 있었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여행할 때(눅 2:4-7), 애굽으로 여행할 때(마 2:13-15), 또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할 때(마 2:20-23) 왜 그들이 언급되지 않았을까요?

이 형제 자매들이 요셉과 마리아의 실제 자녀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복형제와 이복 누이들을 가졌다는 사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성경적인 주장인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을 전제로 하여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5)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피를 절반 나눈 형제 자매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약관화하게 가르치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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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88번이나 '인자'로 불립니다. "'자라는 표현의 첫 번째 의미는 다니엘서 7장 13-14절의 예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여기서 ‘인자’라는 표현은 메시아의 칭호였습니다. 예수님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이 표현을 사용하셨을 때 주님은 인자에 대한 예언이 자신에 대한 것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 문구 및 그 문구가 누구를 언급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인자"라는 표현의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아흔 세 번이나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에스겔을 사람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이셨지만(요 1 : 1), 또한 사람이셨습니다(요 1:14). 요한일서 4장 2절은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인자이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사람이셨습니다. 요컨대, "인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며 그분은 참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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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2장 14절은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재판과 고문과 십자가 형을 받으시면서 가장 심하게 고난 당하셨습니다(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9장).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난이 끔찍하였지만 그분이 겪으신 영적 고난에 비교하면 육체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무거운 죄악을 홀로 다 지셨습니다(요일 2:2). 예수님은 그 죄 짐으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난은 혹독하였지만 그 고난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죄 값을 치르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롬 5:8).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을 분명한 언어로 예언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3, 5). 시편 22장 14-18절은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또 다른 강력한 구절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심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어느 정도까지는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당하신 육신의 고통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향한 인류의 증오와 잔인함을 더 많이 말해줍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절대적인 증오는 끊임없는 고문과 학대 뒤에 분명히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겪은 고난은 죄악에 물든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느끼는 증오와 분노의 궁극적인 본보기인 것입니다(롬 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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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많은 구약의 예언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수백 개라고 말합니다. 다음은 가장 명확하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몇 가지 예언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 -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에 관하여 – 스가랴 9장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시편 22:16-18,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에 관한 가장 명확한 예언은 이사야 53장 전체입니다. 이사야 53장 3-7절은 특히 명백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다니엘서 9장의 "칠십 이레" 예언은 메시아 예수님이 "끊어져 없어질" 정확한 날짜를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0장 6절은 예수님이 겪었던 치욕을 정확히 묘사합니다. 스가랴 12장 10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발생하는 메시아의 ‘찌름 받게 됨’을 예언합니다. 더 많은 예들이 제공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구약은 메시아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가장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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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4세기 경에 만들어진 "예수의 아내” 파피루스가 최근에 발견되어 번역되어지자, 예수님이 결혼을 하셨는지 또는 아내가 있었는지에 관한 토론이 재개되었습니다. 예수의 아내 파피루스 안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 아내...’라고 말씀하셨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발견은 예수님이 아내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기록한 최초의 영지주의적인 글이라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영지주의 복음서들 중에 몇 편은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음을 언급하는 반면, 그것들 중에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이 그녀 또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의 아내 파피루스 또는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말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영지주의적인 견해를 만들기 위해 조작된 가짜 문서들로 입증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결혼을 했었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말했을 것이며, 그 사실에 대한 명백한 진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성경이 완전히 침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어머니, 양부모, 이복 형제, 이복 자매에 대해 언급합니다. 예수님께 아내가 있었다면 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것을 믿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분을 ‘인간화’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즉,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요 1:1, 14, 10:30). 그래서 예수님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믿는 것입니다.

그 다음 질문은 보통, "예수님도 결혼하지 않았을까?"로 이어집니다. 결혼을 하는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결혼 안에서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 역시 전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결혼을 하셨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죄가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고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결혼을 해야하는 성경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결혼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분이 죄가 없다거나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말해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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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1세기에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하에 유대 산헤드린의 요청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된 것은 매우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고넬료 타키투스, 사모사타의 루시안, 마이모니데스, 심지어 유대 산헤드린의 비기독교계 역사 기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인 중대한 목격 증언들을 확증해 줍니다.

그분의 부활에 관해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하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습니다. 법조계의 영재이며 국제 정치인인 고(故) 라이오넬 경(그는 전례 없는 245건의 방역 살인죄 재판으로 세계 기네스 북 기록에 오른 명사이다)은 그리스도인의 열정과 부활에 대한 확신 및 자신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나는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피고 측 법정 변호사로 42년 이상을 보냈고 지금도 여전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배심원 재판에서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둘 만큼 운이 좋았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 분명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증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동일한 증거에 대한 세속 단체의 반응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대한 그들의 변함없는 헌신 때문에 예측대로 냉담하였습니다. 부활이라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자연적 원인 및 그 용어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노력일 것입니다. 이에 만일 거론된 역사적 사건이(예를 들어, 기적적인 부활) 자연적인 설명을 거스른다면, 세속적인 학자들은 그 증거가 아무리 훌륭하고 뚜렷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극도의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그 증거를 다룹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반대의 실질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자연적인 원인을 따르는 것은 증거에 대한 공정한 (따라서 적절한) 조사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박사 외 다수의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대중적인 철학의 편견을 가지고 증거를 대하는 것은 증거의 객관성을 방해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폰 브라운 박사는 "오직 한 가지 결론만 믿도록 강요 받는다면 과학의 객관성 그 자체가 침해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 이런 내용을 알고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몇 가지 증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첫번째 증거

우선, 우리는 진실한 목격자의 증언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변증가들은 수백 명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인용했으며 그 중 일부는 그들 자신의 체험을 문서로 남겼습니다. 이 목격자들 중 상당수는 증언을 부인하기보다는 오랜 고문과 죽음을 기꺼이 단호하게 견디어 냈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인 것을 입증합니다. 역사적인 기록(행 4:1-17; 플리니우스의 트라야누스에게 보내는 서신 10편, 97쪽, 등)에 따르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신앙을 포기함으로써 고통을 피할 수 있었지만 기꺼이 고난을 견디기로 택하였고 죽기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순교는 주목할 만하지만 반드시 강요된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순교를 통해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진정함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는 것이지 신앙을 검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초기의 기독교 순교자들로부터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거나 또는 죽음 이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만일 부활이 전부 거짓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부활을 끝까지 증언하였을까요? 누가 과연 박해와 투옥과 고문과 죽음 앞에서 그러한 무익한 거짓말을 고의적으로 고백하겠습니까?

2001년 9월 11일, 자살 납치범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고백한 바를 믿었지만 (자신이 기꺼이 그것을 위해 죽음으로 입증된 것처럼) 그들은 그들이 믿은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었고 알 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에게 내려온 전통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은 처음 세대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았다고 주장한 것을 참으로 보았거나 또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직접 부활을 목격했다고 주장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중에는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 후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그들은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숨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거리로 나아 갔고, 강력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부활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급작스럽고 극적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변화는 분명히 재정적인 이득을 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두번째 증거

두 번째 선 상의 증거들은 특정 핵심 회의론자들의 변화와 관련합니다. 특히 바울과 야고보의 변화는 가장 주목할 만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초대 교회를 격렬하게 박해하던 자였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바울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교회의 잔인한 박해자로부터 가장 왕성하고 사심 없는 옹호자로 즉각적이고 격렬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수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헌신으로 인하여 가난과 핍박과 구타와 투옥과 처형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바울처럼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회의적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자로 변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들 중의 하나라고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서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보고도 바울처럼 기꺼이 자신의 증언을 위해 고난을 당하였으며 또한 죽음으로 그의 신앙의 진심을 입증했습니다(참조, 사도행전과 요세푸스의 “유대 민족의 유물” 20장, 15과 1절).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세번째와 네번째 증거

세번째와 네번째 증거들은 빈 무덤에 대한 원수들의 증언 사실과 예루살렘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이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여전히 있었다면 산헤드린은 그 시체를 발굴하여 공개적으로 전시함으로써 부활은 사기라고 폭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예루살렘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것(따라서 빈 무덤)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하면서 제자들이 그 몸을 훔쳐갔다는 혐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우리는 빈 무덤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여기에 가장 일반적인 세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시체를 훔친 것입니다. 이 경우에, 제자들은 부활이 사기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활을 위해 기꺼이 고난 받거나 죽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진실된 목격자의 간증에 관한 첫 번째 선 상의 증거를 참조하라). 공언하였던 모든 목격자들은 그들이 실제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고 이에 자신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음모 가담자들 중에는 자기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피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의 친구들이나 가족의 고난을 막기 위해서라도 분명히 몇몇 사람은 사실을 실토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학대를 당하였고 특히 주후 64년에 발생한 로마의 대화제 이후에는 더 심한 학대를 받았습니다(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네로가 그의 궁전을 확장시키려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로마에 불을 지른 후 혐의를 벗으려고 로마 내의 그리스도인들을 탓하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코넬리우스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는 (대화제 이후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출판된) 그의 '로마 제국 연대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네로는 대중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는 죄수들을 포박한 후 가장 혐오하는 부류에게 내리는 가장 끔찍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뿌리가 된 크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통치 기간 동안 우리의 총독들 중에 하나인 본디오 빌라도의 손에서 극도의 형벌을 받았다. 따라서 악마의 첫째 근원인 가장 해로운 이 미신이 한동안 억제되었지만 또 다시 유대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로마에서 발생하더니 온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부끄러운 모든 것들이 이제 자리를 잡고 인기를 얻고 있다. 유죄를 인정한(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 모든 자들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 후 그들이 고백하는 내용에 의해 엄청나게 많은 다른 사람들이 로마에 불을 낸 죄 때문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죄 판결을 선고 받게 되었다. 모든 종류의 조롱이 그들의 죽음에 더하여졌다. 짐승의 가죽으로 덮인 그들은 개에 찢기어 죽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낮이 끝나면 야간 조명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화염에 던져져서 불에 타 죽었다"(연대기, 15장, 44절)

네로 황제는 그의 정원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산채로 불태워 조명을 비췄습니다. 분명히 누군가는 그러한 끔찍한 고통의 위협을 받으면서 진실을 자백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고통을 피하기 위해 믿음을 저버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께서 부활 이후에 보이신 많은 기록들과 부활을 위해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고자 하는 수백 명의 목격자들에 대한 여러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빈 무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죽은 척 한 후에 나중에 무덤에서 도망쳤다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불합리합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온 몸이 찢기고 또한 칼날에 찔렸습니다. 그분은 내부에 손상을 입었고, 엄청난 출혈을 하였으며, 질식을 당하였고, 또한 그의 심장은 창에 찔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또는 이런 일을 당한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가 그러한 수난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죽은 척 하다가, 3일 동안 밤낮으로 아무런 의료 치료를 받지 않고 또한 음식과 물도 없이 무덤에 앉아 있다가, 그 무덤을 봉인하고 있던 거대한 돌을 치운 후 (피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몰래 도망하여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건강한 상태에 있다고 설득하여 믿게 만든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상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다섯번째 증거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증거는 목격자들의 증언의 특이성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주요 부활 이야기에서 여성은 최초의 주요 목격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심하게 천대를 받던 고대 유대인과 로마 문화에서 볼 때는 매우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여성들의 증언은 하찮게 여겨졌기 때문에 일축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1세기에 유대에서 대 사기행각을 벌인 자들이 그들의 주요 증인으로 여성들을 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부활은 사기였다면, 왜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모든 남성 제자들을 제외하고 가장 무시 받고 신뢰를 얻을 수 없는 여성 목격자들을 택하였습니까?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세기 유대인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이해할 때 정말 특이한 것은 빈 무덤 이야기가 여성을 최초의 빈 무덤을 발견 한 자로 특징짓고 있는 점이다. 여성은 1 세기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낮은 사회 계층에 있었다. '법을 여자들에게 전수하기보다는 태워 버려라', ‘남자 아이를 얻은 자는 복이요, 여자 아이를 얻은 자는 저주다’라는 오랜 랍비들의 속담도 있다. 여성의 증언은 전혀 쓸모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유대인 법정에서는 여성이 합법적인 증인으로 설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빈 무덤의 주요 증인들이 여성들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사건 이후 전설적인 기록이 생겨났다면 그 기록은 분명히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남성 제자들이 무덤을 발견한 것으로 묘사하였을 것이다. 여성이 빈 무덤의 첫 번째 증인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이 좋아하든 말든 실제로 그들이 빈 무덤의 발견자인 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이는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하기에는 어색할지라도 사실 그대로 충실하게 기록한 것을 보여준다. 이는 부활 사건의 전설적인 면보다 그 역사성을 입증하고 있다"( Dr. William Lane Craig, quoted by Lee Strobel, The Case For Christ, Grand Rapids: Zondervan, 1998, p. 293).

결론

이러한 여러가지 증거들 : 목격자들이 보여준 진실성, 사도들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하고 분명한 변화, 핵심적인 적대 세력들과 회의론자들의 회심 및 입증 가능한 진실성, 빈 무덤의 증거, 그 사실은 인정한 원수들, 이 모든 일이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시작되고 번영한 사실, 여자의 증언,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중요성, 이 모두가 강력하게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합니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러한 증거를 신중하게 고려할 것을 권합니다. 이런 증거들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제안합니까? 우리는 직접 그 증거들을 따져 본 후 다음과 같은 라이오넬 경의 선언을 굳게 확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 분명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증거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Got Questions Minis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