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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죄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도움이 되는 여러 수단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수명 동안 우리는 죄에 대해 절대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지만(요한일서 1:8),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말씀의 원칙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점진적으로 죄를 극복하고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죄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있어 성경이 언급하는 첫째 방법은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서 5:16-25에서 육체적 행위들을 성령의 열매와 대조하십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영 안에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르면서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 삶 속에서 육체를 따르는 것 보다 성령님의 인도를 지속적으로 따르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께서 만드시는 차이는 성령 충만 하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그리고 그 후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한 베드로의 삶에서 입증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진 후, 그는 오순절 날 유대인들에게 거리낌 없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을 소멸하려 하지 않고(데살로니가전서 5:19) 대신에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구하며(에베소서 5:18-21) 성령 안에서 걷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 집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구약 성경에 나온 것 같이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개인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창세기 41:38, 출애굽기 31:3, 민수기 24:2, 사무엘상 10:10).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증거가 에베소서 5:18-21과 골로새서 3:16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방법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디모데후서 3:16-17). 하나님 말씀은 어떻게 살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잘못된 길을 선택했을 때 우리에게 알려주며, 옳은 길로 다시 돌아와서 그 길에 머물게끔 우리를 도와줍니다. 히브리서 4:12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마음을 관통할 수 있고 마음과 생각의 가장 깊은 죄들을 뿌리 뽑고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저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힘에 대해 시편 119장에서 상세하게 말합니다. 여호수아에게 적들을 극복하기 위한 성공의 열쇠는 이 방법을 잊지 않고 낮과 밤으로 묵상하고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군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을 하셨을 때도 그는 따랐으며, 약속된 땅을 위한 전투들에서 그가 승리한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가볍게 여기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성경을 가지고 간다든지 매일의 종교 의식을 위해 읽거나, 하루에 한 장씩 읽는 식으로 명목상으로만 성경을 취급하고 있지, 그것을 외우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들에 적용하는 데에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일깨워주는 죄들을 고백하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선물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실패합니다. 성경을 비유 하자면, 우리는 종종 거식증이나 폭식증에 걸려있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먹음에 있어 영적으로 그저 살아있을 만큼만 취하든지(그러나 결코 건강하기 위해 충분한 만큼 창성한 기독교인들의 섭취가 아님), 아니면 많이는 먹지만 그것으로부터 영적인 영양분을 취하기에 충분한 명상을 결코 오래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매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 공부하고 외우는 습관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러한 습관을 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문 잡지로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당신이 말씀을 통해 얻은 것들을 적기 전에는 말씀을 떠나지 않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영역에 있어 변화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실 것을 요청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기도들을 기록합니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며(에베소서 6:17),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전신 갑주의 근본적이고 주요한 부분입니다(에베소서 6:12-18).

죄에 대적하는 우리의 싸움에 있어 세 번째 중요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만 사용하고 실제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자원입니다. 우리는 기도 모임 과 기도 시간 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도를 초기 교회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사도행전 3:1, 4:31, 6:4, 13:1-3). 바울은 그가 사역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아주 엄청난 약속들을 주셨으며(마태복음 7:7-11, 누가복음 6:23-27, 요한일서 5:14-15), 바울은 영적 전쟁의 준비를 위한 글들에 기도를 포함시켰습니다(에베소서 6:18).

우리의 삶에 있어 죄를 극복하는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할까요? 베드로가 부인하기 바로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깨우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태복음 26:41). 우리도 베드로처럼 옳은 것을 하고 싶으나 그럴 능력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찾으라, 계속 두드리라, 계속 구하라는 하나님의 권면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마태복음 7:7). 기도는 마법의 공식(주문)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 그분께 의지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5:14-15).

죄를 정복하기 위한 우리의 전쟁에서 네 번째 방법은 교회, 즉, 다른 믿는 자들과의 교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두 명씩 내보내셨습니다(마태복음 10:1). 사도행전에 있는 전도 여행들에서 한 번에 한 사람씩 나가지 않고, 둘 또는 그 이상이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이 함께하는 모임을 폐하지 말고 사랑과 선행들로 서로 격려하는데 모임의 시간을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히브리서 10:24-25). 그분은 우리들의 잘못을 서로에게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야고보서 5:16). 구약 성경의 지혜의 말씀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도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잠언 27:17). 다수는 혼자보다 힘이 있습니다(전도서 4:11-12).

많은 기독교인들이 완강한 죄를 극복하는데 책임 있는 동반자가 있음을 엄청난 혜택으로 압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함께 기도하며, 격려해주고, 심지어 꾸짖어 주는 사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유혹은 우리 모두에게 흔한 일 입니다(고린도전서 10:13). 책임 있는 동반자나 집단을 가진다는 것은 가장 완강한 죄들마저도 극복하는데 필요로 하는 격려와 동기의 마지막 보루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죄에 대한 승리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또 다른 때는 승리가 더디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으로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충실하신 분임을 알기에 죄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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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5).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꾸짖습니다; 특히 그들은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마태복음 21:32).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첫 단계를 취하지 않았다면 아직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요한복음 1:12),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그분의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십니다(시편 143: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숨기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아주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선행을 해야 한다(베드로전서 2:15),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데살로니가전서 4:3)와 같은 구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있고 개연성 있는 성격의 것입니다. 로마서 12:2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순서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거부하고 대신 성령으로 변화된 자신을 좋게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마음이 새로워지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성경에서 금하는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훔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표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은행 강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위한 기도를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때로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이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역사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번에 하나씩 보여주시고 – 각각은 믿음의 단계를 움직입니다 -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지속되게 하십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기다리는 동안 선을 행하기에도 바쁘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4:17)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디에서 일해야 하나, 어디에 살아야 하나, 누구와 결혼해야 하나, 어떤 차를 사야 하나 등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선택들을 방지하십니다(사도행전 16:6-7).

어떤 사람을 더 잘 알수록,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것에 더 익숙해지게 됩니다. 예들 들면, 한 아이가 번화한 거리를 가로질러 튕겨 나간 공을 바라볼 수는 있으나 그 공을 쫓아 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나의 아버지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모든 특별한 상황에 대한 조언을 자기 아버지에게 일일이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알기에 자기 아버지가 어떤 조언을 할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지하면서 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음"(고린도전서 2:16)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침을 발견합니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잠언 11:5).

만일 우리가 주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을 진정으로 갈망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바라시는 것을 우리의 심령 안에 두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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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본래 구약성서의 율법이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 중 어떤 율법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시됩니다(예를 들면 십계명). 어떤 율법들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속죄 하는 방법(희생 드리는 제도)에 관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음식과 의복에 관한 규정들). 구약의 율법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구약의 율법을 종식시키셨습니다(로마서 10:4, 갈라디아서 3:23-25, 에베소서 2:15).

우리는 구약의 율법 대신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습니다(갈라디아서 6: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37-39). 우리가 이 두 계명들에 복종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40). 그러나 구약의 율법이 오늘날 우리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의 많은 계명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범주 안에 놓여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좋은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구약의 율법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용 된다고 말 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단일체입니다(야고보서 2:10).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이 적용되거나, 그 어떤 것도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희생 드리는 제도 같이, 그리스도께서 그 일부를 지키셨다면, 그 모두를 지키셨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3).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모든 구약의 율법의 요약이었습니다. 십계명 중에 아홉 가지는 분명하게 신약에서 반복됩니다(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제외한 모든 것).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다른 신들을 숭배하거나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살인하지 않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간통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 속한 것을 탐내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고,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로마서 7:79, 갈라디아서 3:24).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법으로, 결코 의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두 계명을 충실히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받들고 있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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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일조 헌금의 문제로 고민을 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에 관한 성경적 권고를 따르기 꺼려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드리는 것은 기쁨과 축복을 의도한 것입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때때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구약의 개념입니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율법상의 요구였는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들이 기른 작물과 가축들의 10%를 성막/성전에 바쳐야 했습니다(레위기 27:30; 민수기 18:26; 신명기 14:24; 고린도후서 31:5). 사실, 구약의 율법은 복수의 십일조를 요구하였는데(레위인들을 위한 것, 성전과 절기들을 위한 것,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 이는 총 약 23.3%까지 달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희생 제사 제도를 관장하던 대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하나의 세금 걷는 방법으로서 구약의 십일조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기독교인들이 율법적인 십일조 체계를 따라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나, 또는 추천하는 것 조차도 없습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따로 챙길 소득의 일정 비율을 지정하지 않고 있고, 오직 기증은 “수입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할 뿐입니다(고린도전서 16:1-2). 기독교 교회의 일부는 10%의 수치를 구약 성경으로부터 따와서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헌금에 있어 “최소한의 권장”으로 적용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바치는 것의 중요성과 혜택들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드려야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10% 이상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때때로 그보다 덜 드리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인의 능력과 교회의 필요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십일조 헌금에 참여하는 문제나, 그리고/또는 얼만큼 드리느냐의 문제에 있어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야고보서 1:5). 무엇보다도, 모든 십일조나 헌금은 순수한 동기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바쳐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봉사여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린도후서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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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아닌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지인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고, 그 들이 우리와 감정적인 친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어려워 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2:51-53). 그러나, 우리는 복음 전함을 명령 받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데 대한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마태복음 28:19-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그러면 우리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지인들을 어떻게 전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복음의 진리에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고린도후서 4:4).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요한복음 3:16). 그들을 가장 잘 보살필 수 있는 지혜를 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야고보서 1:5).

우리는 실제 복음 전파에 있어 거리낌 없이 과감해야 합니다. 당신의 친구들과 가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시오(로마서 10:9-10). 항상 당신의 믿음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베드로전서 3:15), 온유함과 정중함으로 하십시오.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기도와 우리의 믿음을 전하는 것 외에,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원들 앞에 경건한 기독교적 삶을 또한 살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 3:1-2).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증거하며, 그리고 그들 앞에서 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라나게 하십니다(고린도전서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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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의 금식을 필요로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동시에, 성경은 금식을 좋고, 이익이 되며, 유익한 것으로 제시합니다. 사도행전은 믿는 자들이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기 전에 금식을 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3:4; 14:23). 금식과 기도는 자주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2:37; 5:33). 너무나 자주, 금식의 초점을 음식을 삼가하는데 둡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당신의 눈을 떼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금식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진지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금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통찰과 새로워진 신뢰를 얻는데 도움을 줍니다.

성경에서의 금식은 거의 언제나 음식을 삼가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금식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기 위해 일시적으로 어떤 것을 삼가하는 것도 금식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7:1-5). 금식은, 특히 음식을 삼가 할 때, 일정 기간으로 한정 되어야 합니다. 먹지 않고 오래 동안 지낸다는 것은 신체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금식은 육체를 벌하기 위해 의도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는 것을 의도합니다. 금식은 또한 “살 빼는 방법”으로 간주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인 금식의 목적은 살을 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할 수 있으나, 어떤 다른 사람은 음식을 삼가 할 수 없습니다(예를 들면, 당뇨병 환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일시적으로 삼가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눈을 돌림으로써, 우리는 더욱 더 성공적으로 그리스도께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금식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게끔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금식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으로 보이는 방법이 아닙니다. 금식은 겸허하고 기쁜 심령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6:16-18은 공표하고 있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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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 부당하게 취급 받고, 감정이 상하고, 범죄의 피해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공격적 행위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공표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은 비슷하게 말씀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두 성경 구절들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까? 우리가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회개 속에서 용서를 구하러 온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그것을 오로지 받아 준다면 용서는 간단할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범한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분함과, 쓰라림, 그리고 분노를 나타내는 것인데, 이 것들의 어느 것도 진정한 기독교인의 특성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합니다(마태복음 6:12). 마태복음 6:14-15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용서를 말씀하는 다른 성경 말씀들에 비추어 보면, 마태복음 6:14-15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하셨던 것을 진실로 경험해 보지 못 했음을 말씀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들 중 하나라도 순종하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취급할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또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범죄들을 용서하신 정도를 우리가 고려할 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은혜를 거둬드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그 누구 보다 더 하나님께 무제한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만큼 많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너무나 작은 죄를 지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데 인색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8:23-35에서의 예수님의 비유는 이 진리에 대한 강력한 사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구하며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은 아낌없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요한일서 1:9). 하나님의 용서가 무한한 것 같이, 우리가 베푸는 용서도 제한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누가복음 17:3-4).

-Got Questions Ministries

영적인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더 닮아가게 하는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영적 성장은 아마 베드로후서 1:3-8에 제일 잘 묘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적 성장의 목적인 거룩한 삶들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데 있어 핵심인 “하나님께 관한 우리의 지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 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 자신의 교화와 성장을 위해 주어진 말씀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갈라디아서 5:19-23에는 두 가지 목록들이 있습니다. 19-21절들은 ‘육체의 행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의 우리의 삶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행위들은 우리가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할 것들입니다. 영적 성장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삶들에서 ‘육체의 행위들’이 점점 더 감소되는 것이 분명해 질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성령의 열매”의 목록입니다(갈라디아서 5:22-23). 이런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경험한 지금의 우리의 삶들을 특징화 시키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은 한 신자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점점 더 분명 해지는 것에 의해 확인됩니다.

구원으로 인한 변화가 일어날 때, 영적 성장은 시작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요한복음 14:16-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오래 되고, 죄악된 본성은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성품에 자리를 내 주기 시작합니다(로마서 6장-7장). 영적 성장은 평생이 걸리는 과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적용하며(디모데후서 3:16-17),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는(갈라디아서 5:16-26)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신장 시켜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구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며, 영적 성장을 이루는 데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죄를 극복할 수 있고 꾸준하게 우리의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닮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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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싸움에 관해 두 가지 주요 오류들이 있습니다. 너무 강조 하는 것과 강조가 부족한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모든 죄, 모든 갈등, 그리고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내쫓아야 하는 마귀들 탓으로 돌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적인 영역과, 우리의 싸움은 영적 권세들과의 싸움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성경적 사실을 무시합니다. 성공적인 영적 싸움의 핵심은 성경적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다른 때에는 귀신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전쟁을 수행하라고 가르치고(로마서 6),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에베소서 6:10-18).

에베소서 6:10-12는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고,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이며, 우리의 씨름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악한 영적인 세력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3-18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갑옷에 대한 묘사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와 함께 굳건히 서야 합니다. 영적 갑옷의 이러한 부분들은 영적 싸움에 있어 무엇을 상징할까요?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진실을 믿어야 하며,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된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는 저항이 아무리 크더라도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하게 공격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들을 붙들고, 믿음이 흔들리면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방어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과 어떤 영적 세력도 그것을 뺏어갈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우리의 공격적 무기는 우리 자신의 의견들과 감정들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뜻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싸움에서 유혹에 저항하는, 우리의 궁극적인 본보기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공격을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주시하시기 바랍니다(마태복음 4:1-11). 각 시험은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방어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의 유혹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 119:11).

영적 싸움에 관한 주의의 말씀은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귀신들을 쫓아 내라든가 또는 심지어 그것들에게 말을 걸으라고 우리에게 지지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귀신들이 우리 앞에서 도망치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 아닙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능을 주제넘게 추정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사도행전 19:13-16). 천사장인 미카엘조차 자신의 능력으로 사탄을 책망하지 않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유다서 1:9). 우리가 마귀와 애기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미혹의 위험을 무릅쓰게 됩니다(창세기 3:1-7). 우리는 마귀들의 아닌,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들이 아닌 하나님께 말합니다.

요약하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열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습니다. 우리는 성서의 권능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인내와 경건함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굳건히 섭니다(에베소서 6:13-14).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합니다; 우리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임을 알고, 마귀를 대적합니다(야고보서 4:7).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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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여러 시대를 걸쳐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엘리가 확인해 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사무엘상 3:1-10). 기드온은 하나님으로부터 물리적인 계시를 받았으나 그가 들은 것을 여전히 의심하였고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표적을 구했습니다(사사기 6:17, 36-40).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을 때, 말씀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신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기드온과 사무엘이 가지지 못했던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읽고, 공부하고, 묵상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완성된 성경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16-17). 우리가 어떤 주제나 우리 삶들에 있어서의 결정에 관한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말씀을 통해 가르치셨던 것과 상반되게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디도서 1:2).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27).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 곧,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알아보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의 목자로서 그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보려면, 우리는 그분께 속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성경 공부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조용한 묵상을 위해서 시간을 쓸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친밀하게 더 많은 시간을 가실 수록, 그분의 음성과 우리 삶들에 있어 그분의 인도하심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은행 직원들은 진짜 돈을 아주 세밀히 공부함으로써 가짜를 찾아 내는 것이 쉽게 훈련이 되어져서 위조지폐들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에게 잘 못된 사실을 말할 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게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주로 그분의 쓰여진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는 성령과, 우리의 양심, 상황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권고를 통해 수행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성경의 진리와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성경에 "율법주의"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는 구원과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규칙과 규정의 체계를 강조하는 교리적인 입장을 묘사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규칙과 규정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엄격한 준수를 믿고 요구합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율법주의는 본질적으로 은혜에 반대되는 입장입니다. 율법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종종 율법의 진정한 목적, 특히 모세의 구약 율법의 목적을 보지 못합니다. 구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또는 "가정 교사"입니다(갈 3:24).

참된 신자조차도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교훈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슬프게도, 본질적인 부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너무 강한 감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관점이 표현되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으면서 사람들과의 교제를 무너뜨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율법주의입니다. 오늘날 많은 율법주의적인 신자들은 자신들의 성경 해석과 심지어 자신들의 전통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지지를 요구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예를 들어,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단지 담배, 술, 춤, 영화 등을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느끼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것들을 피하는 것이 영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0-23절에서 율법주의에 관해 경고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율법주의자들은 의롭고 영적인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내면의 변화보다 외적인 행위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실패합니다.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사도 요한의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는 말을 굳게 붙들고 은혜로운 사람,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여기에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 불일치를 용인할 수는 있지만, 이단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단번에 영원히 맡겨진 믿음을 위해 싸울 것을 권고 받았습니다(유 3 장). 우리가 이러한 지침들을 기억하고 사랑과 자비 가운데 그 지침들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와 이단으로부터 안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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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인이 육신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육신"이라는 용어를 정의해 봅시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육체"를 뜻하는 헬라어 사르키코스(sarkikos)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납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독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단어는 뚜렷하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에 속할 수 있다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요일 1:8).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육신에 속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인은 잠시 육신에 속할 수는 있지만, 평생 육신에 속한 상태에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거듭남의 증거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증거가 없이(고후 5:17) 남은 삶을 철저하게 육신에 속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함으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상을 남용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개념은 완전히 비 성경적입니다. 야고보서 2장은 진정한 믿음은 언제나 선행을 가져올 것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은 우리가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구원은 행함을 맺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실패 및 반항의 때에 육신에 속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계속 육신에 속한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이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조차 여전히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잃을 수 없으며 하나님은 구원을 다시 취하지 않으십니다(요 10:28; 롬 8:37-39; 요일 5:13).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서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확신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육신에 속한 삶을 살면 구원을 잃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처음부터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요일 2:19).

행동에 있어서 육신에 속한 모습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게 그들을 징계하셔서(히 12:5-11) 하나님과의 교제로 회복시키실 것이며 또한 순종을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가지시는 소원은 우리가 성화라고 알려진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영적으로는 성장하고 육신적으로는 감소하면서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에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롬 12:1-2). 우리가 죄 많은 육체로부터 구출되기까지는 육신의 세력이 발발하는 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진정한 신자는 그러한 발발이 일반적이거나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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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장 14절은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묵상을 해야 합니까? 불행히도, "명상"이라는 단어는 신비주의적인 어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명상이란 특이한 자세로 앉은 상태에서 마음을 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변의 영계와 소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절대로 기독교 묵상의 특징이 아닙니다.

기독교 묵상은 동양 신비주의를 기초로 삼은 관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한 관행으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초월명상,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불리는 것의 많은 형태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그 중심에 주의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상을 통해서 개인적인 계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위험한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종종 서로가 상충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끝없는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6-17). 만일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철저히 준비시키는데 충분하다면 어떻게 그 말씀에 더하거나 그 말씀 대신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묵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서는 것이며 말씀이 그분에 대해 계시하는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발견한 후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라고 묘사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요 16:13) 우리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의 조명하심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적극적인 생각의 과정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성경을 삶과 실천의 규칙으로 삼기로 다짐하고 그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을 따라 배우게 될 때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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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위선자’로 불려지는 것 보다 더 도발적인 비난은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위선자라고 여기며 그러한 견해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선자(hypocrite)"라는 영어 단어는 많은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연극, 가장"을 의미하는 라틴어 히포크리시스(hypocrisies)를 통해 유래되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단어는 고전 헬라어와 신약 헬라어에서 유래하며 그 원어 역시 “연극하다, 가장하다”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이 주 예수께서 그 용어를 사용하신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기도와 금식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선의 중요함을 가르치셨을 때 위선자들의 본을 따르지 않도록 권하셨습니다(마 6:2, 5, 16). 위선자들은 공 기도를 오래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금식하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성전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모습을 과시하며 외적인 모양새를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대중 앞에서 종교적인 덕행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진정한 덕이 자리잡고 있는 마음의 내면 세계에 있어서는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마 23:13-33; 막 7:20-23).

예수님은 결코 그분의 제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위선자라는 이름은 그릇된 종교적 열심을 지닌 자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도리어 주님은 제자들을 “추종자들”, “아이들”, “양들”, 그리고 그분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위선의 죄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벧전 2:1), 베드로는 위선을 외식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위선에 대한 두 가지 노골적인 사례가 교회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도행전 5장 1-10절을 보면 두 제자는 자신들의 원래의 모습을 감추고 더 관대한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는 가혹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들을 대할 때 위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위선을 빠지도록 하였습니다(갈 2:13).

우리는 신약의 가르침으로부터 적어도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위선자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 따르면 위선자들은 처음에도 있었으며, 세상 끝날 때까지 존재할 것이 분명합니다(마 13:18-30). 더욱이 사도마저 위선의 죄를 지을 수 있다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위선의 죄를 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는 위선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고전 10:12).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이 전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명한 위선자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사실 가짜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사기꾼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끔찍한 죄를 짓곤 하였습니다. 횡령 또는 성추문은 때때로 기독교 공동체를 더럽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수의 행동을 취하여 기독교 전체를 모욕하는 대신에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속한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갈 5:22-23). 마태복음 13 장의 씨앗과 토양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진짜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슬프게도, 예수님께 속한다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그분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망연자실할 것입니다(마 7:23).

둘째,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원래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거의 위선자들로 구성되었다고 결론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 죄 사함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인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죄의 영원한 형량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아직 우리의 삶 속에서 위선의 죄를 포함한 죄의 실재로부터 구원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향해 살아있는 믿음을 행사함으로써 결국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때까지 계속적으로 죄의 세력을 이겨야 합니다(요일 5:4-5).

성경이 가르치는 표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완벽하게 그리스도처럼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추구하면서 책망하시고 변화시키시고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이생에서 그리스도인이 완벽하지 못하고 또한 실수를 하며 완벽에 이르는데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위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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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엡 1:6-8)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 사함은 구원과 관련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취하셔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시 103:13) 멀리 옮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법적인 용서로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주시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법적 근거에 의해 용서함을 받은 것이며 이는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받기 때문에 이 사실을 의심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이 에베소서 1장 6-8절과 다른 것은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관계적인’ 또는 ‘가족적인’ 용서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하면, 즉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규칙을 어기면, 아들과 아버지의 교제가 방해를 받습니다. 그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관계는 불편하게 됩니다. 그들의 관계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주의 자녀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 전까지는 방해가 됩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관계적인 용서입니다.

"신분 변화적인" 용서 또는 법적인 용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신분이 변화되면서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와 저지르게 될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 상에서 지불된 대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켰으며, 더 이상의 희생이나 지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 변화적인 용서는 그때 그곳에서 얻어졌습니다.

죄의 자백은 우리를 주의 징계로부터 보호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죄의 자백이 있을 때까지 주의 징계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죄는 구원 받을 때 사함 받지만(신분 변화적인 죄 사함), 하나님과의 일상적인 교제는 좋은 관계로 유지될 필요가 있습니다(관계적인 용서). 하나님과의 적절한 교제는 우리 삶에서 죄가 자백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 죄를 지었을 때 이를 자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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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1-2절에서 이와 비슷한 질문에 답하였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후 계속 과거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고(갈 5:19-21)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갈 5:22-23)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역시 변화됩니다.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른 점은 기독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신성한 공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세상 종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얻기 위해(인간적인 성취)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얻기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다른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또한 어떤 일을 그만 두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죄의 형벌과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이전처럼 지옥으로 향하는 똑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더러운 죄에서 깨끗해진 사람이 어떻게 과거의 동일한 부패함으로 돌아가기를 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그 고난이 의미 없는 것처럼 계속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6장 11-15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회심한 자에게는 죄악으로 가득한 삶을 계속 사는 것이 선택 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회심은 완전히 새로운 본성을 가져오기 때문에 더 이상 죄 가운데 사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지만, 과거처럼 죄 가운데 뒹구는 대신에 이제는 그것을 미워하고 죄로부터 구출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이용하여 계속 죄에 물든 삶을 지속하겠다는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죄악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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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전신 갑주"라는 표현은 에베소서 6장 13-17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에베소서 6장 12절은 분명히 사탄과의 싸움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와 그 부하들에 대항하여 싸울 어떤 효과적인 유형의 무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사용할 특정 전술 목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6장의 구절들은 우리가 그곳의 모든 지시 사항을 충실히 따르면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며, 사탄의 전략과 상관없이 승리를 얻게 될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갑옷의 첫 번째 요소는 진리입니다(14절). 사탄은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불리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습니다. 기만은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목록 가운데 있습니다. "거짓된 혀"(잠 6:16-17)는 주께서 미워하시는 것들 중에 하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거룩함과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도하는 대상들의 유익을 위해 진리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또한 14절을 보면, 의의 호심경을 입으라고 합니다. 호심경은 막지 못하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 있는 병사의 중요한 기관을 보호해줍니다. 이 의는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가 아닙니다. 이 의는 하나님에 의해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사탄의 고소와 협의로부터 우리 마음을 보호해 주고 그의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15절은 영적 전투를 위한 신발 준비에 대해 말합니다. 전쟁에서 때때로 적군은 병사들이 전진하는 길에 위험한 장애물을 놓습니다. 평화의 복음의 신발을 준비하라는 것은 그 길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은혜의 메시지를 가지고 사탄의 영역으로 전진하여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탄은 복음 전파를 막기 위해 복음의 길에 많은 장애물을 둡니다.

16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방패는 사탄이 하나님의 충실함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뿌리는 의심을 헛되게 만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히 12:2)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마치 소중하고 견고한, 튼튼한 황금 방패와 같습니다.

17절에 나오는 구원의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고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켜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 방식이 보호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머리는 지각이 머무는 자리로서 영생의 분명한 소망의 복음을 붙잡을 때 거짓 교리 및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의 투구가 없고 또한 그의 지각은 영적인 진리와 속임수 사이에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거짓 교리의 타격을 막아낼 가능성이 없습니다.

17절은 성령의 검의 의미에 대해 직접 해석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인 갑옷의 다른 모든 부분들은 방어의 특징을 갖고 있지만,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서 유일한 공격 무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함과 능력에 대해 말합니다. 이 보다 더 큰 영적 무기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막에서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사탄에게 압도적인 답변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니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1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 외에도 성령으로(즉,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그분의 마음과 우선 순위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힘을 얻는 수단이기 때문에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 없이는,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함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우리의 노력은 헛되고 무익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인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고 사탄의 공격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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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으며, 죄의 결과 중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우리는 죄책감이 우리로 하여금 용서를 구하게 하기 때문에 죄책감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에서 돌이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죄를 용서 받습니다. 회개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한 부분입니다(마 3:2, 4:17; 행 3:19).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장 끔찍한 죄조차 지워집니다(용서받을 수 있는 불의한 행위 목록을 위해 고린도전서 6:9-11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고, 은혜는 용서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죄를 지을 것이며, 그러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나 죄로부터의 자유는 언제나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을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그 죄악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실패와 잘못과 죄악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제를 참소하는 자"(계 12:10)라는 영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책감을 느끼면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1) 이전에 자백하지 않은 모든 아는 죄를 자백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는 자백이 필요하기 때문에 죄책감이 타당합니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여러 번 죄책감을 느낍니다!(시 32:3-5, 다윗의 죄책감과 해결의 방법을 참조)

2) 자백해야 할 다른 죄를 알려달라고 주께 기도 드리십시오. 용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주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자백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3)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죄를 사하여 주시고 또한 죄책을 없애 주기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십시오(요일 1:9; 시 85:2, 86:5; 롬 8:1).

4) 이미 자백하고 해결된 죄악에 대해 죄책감이 생기는 경우 그러한 감정을 거짓된 죄책감으로 여기고 거부하십시오. 주님은 용서하기로 하신 약속에 충실하셨습니다. 시편 103장 8-12절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5) 주님께 당신의 고소자인 사탄을 책망하도록 기도하고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누리는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십시오(시 51:12).

시편 32편은 매우 유익한 연구입니다. 다윗은 끔찍한 죄를 저질렀지만 죄와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죄책의 원인과 용서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시편 51편은 연구해 볼 또 하나의 좋은 구절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다윗이 죄책감과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처럼 죄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회복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면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간 우리는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사라진 "옛 것"의 한 부분은 과거의 죄와 그것이 만들어 낸 죄책에 대한 기억입니다. 슬프게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전에 죽어 묻혀져야 했던 이전의 죄 많은 삶에 대한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의미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상반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수구에서 건져내신 후, 그 곳에 다시 들어가 헤엄치지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누군가의 지혜로운 말을 빌려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기쁨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종종 기쁨을 붙드는 것이 어려워 보입니다.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심지어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조차 기쁨이 없는 기간을 경험한다는 것을 압니다. 예를 들어, 욥은 그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습니다(욥기 3:11). 다윗은 현실을 대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옮겨지기를 기도했습니다(시편 55:6-8).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450 명을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여 패배시킨 후에도(왕상 18:16-46) 사막으로 피신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시기를 청하였습니다(왕상 19:3-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우선, 기쁨은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행복은 상황에 따른 것으로서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마음 자세입니다. 헬라어에서 기쁨의 어원은 "은혜"를 뜻하는 헬라어 카리스(charis)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또한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한 반응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은총을 의식할 때 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기쁨을 경험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나 만족을 강탈하는 것들에 마음을 쏟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둘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못마땅함을 부정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꽉 막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시편 기자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것들을 주께 맡기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시편 3편, 13편, 18편, 43편, 103편은 좋은 예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쓴 서신인데 기쁨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빌립보서 4장 4-8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을 경험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우리는 그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염려에 대해 기도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집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뜻을 가지고 찬양할 때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 기쁨이 온다고 기록하였습니다(시 19:8).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과 못마땅한 일들보다 경건한 것에 집중함으로 기쁨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기쁨에 관한 몇 가지 교훈을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9-11). 기쁨을 누리는 비결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공동체를 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안식을 주시고 엘리사를 보내어 그를 돕게 하셨습니다(왕상 19:19-21). 우리 역시 상처와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전 4:9-12). 히브리서 10장 19-25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담대함으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히 10:19). 우리는 우리의 죄가 씻겨진 것을 압니다(히 12:22).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인 신자들의 권속에 속하여졌습니다. 우리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며 믿음을 확고하게 붙듭니다. 또한 서로 격려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여있지 않습니다(요 17:14-16; 빌 3:20).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고대하며, 마침내 원래의 설계대로 회복될 것을 바랍니다. 삶은 고독하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리를 상기시켜주고 우리와 함께 짐을 짊어지며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하여 줄 것입니다(갈 6:10; 골 3:12-14).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진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기도로 그분과 교제하고, 주께서 마련하여 주신 신자들의 공동체를 의지할 때 이 선물을 가장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주님의 징계는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종종 무시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상황들이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은혜로운 징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무지는 신자의 삶에서 습관적인 죄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고 또한 더 큰 징계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징계는 냉담한 처벌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징계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우리 각 사람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반응입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참조, 히 12:5-11). 하나님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여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해 시험과 시련과 여러 가지 곤경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징계의 결과는 특별한 죄가 우리를 붙들고 있었던 진을 파괴시키는 것은 물론, 더 강한 믿음과 하나님과의 새롭게 된 관계입니다(약 1:2-4).

주님의 징계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있으며 주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고자 하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본성을 반영하는 삶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Got Questions Ministries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는 구속의 날을 위해 우리를 인 치시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엡 1:13, 4:30).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요 16:13)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진리의 일부는 하나님의 일들을 취하여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삶에 적용이 되면 신자는 성령께서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선택을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거듭난 신자가 자신의 삶을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에 맡기는 정도에 근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이 구절의 시제는 진행형이기 때문에 “계속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단지 성령님께 통치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술에 취하면 그는 혀가 꼬부라진 말을 하거나, 불안정하게 걷거나, 의사 결정의 장애라는 어떤 특징들을 드러냅니다. 술 취한 사람의 특징 때문에 그가 술에 취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신자는 성령의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그 특성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묘사된 소위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신자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에 의해 맺혀지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신자는 건전한 말과 일관된 영적인 행보를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의사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복종함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상적인 관계에서 ‘알며 성장하기’ 위해 내리는 선택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신자로서 우리가 자백을 통해(요일 1:9) 성령님과의 분명한 소통을 유지하기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성령을 근심하게 할 때(엡 4:30; 요일 1:5-8)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쌓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에 복종할 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가로막히지 않습니다(살전 5:19).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육체와 죄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영과의 교제에 대한 의식입니다. 거듭난 신자가 성령의 사역에 지속적으로 계속 순종하기를 선택할 때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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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새로운’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 단어는 두 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네오스(neos)가 있는데 이 단어는 방금 생겨났지만 비슷한 것들이 이미 있을 때에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 ‘새롭게’로 번역된 헬라 단어는 카이노스(kainos)인데 이는 “이전에 있지 않던 전혀 새로운 것이 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처음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옛 자아를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분의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거주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중생하고 새로워지고 거듭나게 됩니다. 과거의 본성은 육체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새로운 이 피조물은 영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차원의 교제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는데 헌신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순종과 헌신은 옛 속성으로는 행할 수도 없고 심지어 바라지도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옛 속성은 영적인 일들에 죽어 있었고 스스로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옛 속성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엡 2:1)에 있기 때문에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주하실 때에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각성에 의해서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롭고 거룩한 본성과 썩지 않는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해 죽어 있었고 장사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분과 함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롬 6:4).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어 더 이상 죄에 대하여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롬 6:5-6).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납니다(엡 2 : 5).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본 받습니다(롬 8:29). 우리는 정죄로부터 자유하며 이에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합니다(롬 8:1). 우리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몸의 한 부분입니다(롬 12:5). 신자는 이제 새로운 마음을 가졌으며(겔 11:19)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엡 1:3).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삶을 바치고 구원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자주 앞에서 묘사된 방식대로 살지 않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본성이 오래된 육체에 거주함으로써 이 둘이 서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옛 속성은 죽었지만 새 속성은 그것이 머무는 오랜 ‘장막’과 싸워야 합니다. 악과 죄는 여전히 존재하며 신자는 이제 그것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들은 과거처럼 더 이상 신자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옛 속성이 할 수 없었던, 죄에 대한 저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새 속성에 영양분을 공급하거나 또는 그러한 것들을 무시함으로써 육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며”(롬 8:37),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우리 구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빌 4: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고 용서받으며 안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입양되고, 의롭게 되고, 구속함을 받고, 화목되고, 선택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며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며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를 부여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멋진 구세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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