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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만인 구원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구원을 고수하고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도외시한 채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보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토록 지옥에 거할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천국에서 보내는 시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지옥에서 보내는 시간만큼 지속될 것을 확증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을 보면,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형벌은 의인들의 삶처럼 영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믿지만, 주님께서는 친히 지옥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고 확증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과 마가복음 9장 44절은 지옥을 “영원한 불” 과 “꺼지지 않는 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 “꺼지지 않는 불”을 피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모든 길들, 즉, 모든 종교들과 신앙들이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믿든지, 또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부하시기 때문에 모른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과 자비가 풍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문이십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증거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기로 택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위한 필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됩니다(요 3:16, 18, 36).

이러한 구절들로 인하여 만인 구원설 및 보편적 구원은 비성경적인 믿음인 것이 자명해집니다. 만민 구원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정면으로 모순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은 관용적이지 않고 ‘배타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이런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인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 멋대로 이러한 사상들을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단지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면하는 것과 또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자기 아들을 통해 구원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경시하고 우리 대신에 예수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English  

답변: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알 수도 없고 입증할 수도 없다는 견해입니다. “불가지”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지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가지론은 지적으로 좀 더 정직한 형태의 무신론입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입증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입증될 수도 입증되지 않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불가지론의 주장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경험에 의해서 입증되거나 또는 부정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요 4:24) 그분을 볼 수 없고 또한 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친히 드러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분을 감각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롬 1:20).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가 우주 안에서 분명하게 보이며(시 19:1-4), 자연을 통해 느낄 수 있고(롬 1:18-22), 우리 마음 속에 확증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전 3:11).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의 여부에 대해 어느 쪽으로도 결정 내리기를 꺼려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자세입니다.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존재를 믿어서도 안되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고 믿습니다.

논증의 전개를 위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분명하고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을 곁으로 밀어둡시다. 그리고 유신론과 불가지론을 동등한 입장에 둔다면, 사후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어느 쪽이 더 ‘합리’적 입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유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 모두가 죽음과 함께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유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 모두가 죽음 이후에 직고해야 할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불가지론자보다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두 입장 모두가 입증 및 부정이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어떤 입장이 더 나은 무한하고 영원한 최종 결과를 가져올지 철저히 검토해 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의심을 갖는 것은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과 허락하신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인간의 존재로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33-34절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고 외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믿음으로 그분의 길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을 사람들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9절은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고 선언합니다.

English  

답변: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인데, 최근에 새롭게 제기된 견해가 아닙니다. 대략 주전 1,000년에 다윗에 의해 기록된 시편 14장 1절은 무신론에 대해 언급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최근 통계는 무신론자들이라 증가하는 것을 보여 주는데 세계적으로 10%까지 됩니다. 그렇다면 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들이 되고 있습니까? 무신론은 참으로 그들의 주장처럼 논리적인 입장일까요?

왜 무신론이 여전히 존재할까요? 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믿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의 바람은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단지 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분을 믿고(벧후 3:9) 그분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요 3:16).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서 수 차례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창 6-9; 출 14:21-22; 왕상 18:19-31),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악한 길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 들이기를 꺼려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엡 2:8-9).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지, 단지 유신론자들(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신뢰할 때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비논리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많고 좋은 논증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가 우주(시 19:1-4)와 자연(롬 1:18-22)과 우리 자신의 마음(전 3:11) 안에서 분명히 보인다고 가르칩니다. 언급된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존재는 입증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동시에 무신론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만큼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진술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하게 알며, 우주 안의 모든 곳을 가보았으며, 눈에 보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과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그 어떤 무신론자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태양의 중심이나, 목성의 구름 아래나, 머나먼 어떤 성운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우리의 관찰 능력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입증될 수가 없습니다.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유신론자가 되는 만큼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무신론은 입증될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강력하게 믿으며, 하나님의 존재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비논리적이라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히 보여질 수 있다고 믿으며, 또한 뚜렷하게 감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필요하다면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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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영혼절멸설은 불신자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죽음 후에 ‘소멸’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받는다는 생각은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영혼절멸설은 매력적입니다. 영혼절멸설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몇 개의 구절들이 있지만, 사악한 자들의 운명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지옥에서의 형벌은 영원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영혼절멸설을 믿는 것은 1) 죄의 결과들, 2) 하나님의 공의, 3) 지옥의 특성, 이 세 교리 중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영혼절멸론자들은 지옥의 특성과 관련된 불못의 의미를 오해합니다. 분명히 불타는 용암의 못에 사람을 던져 넣으면 그 사람은 거의 즉각적으로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못은 물리적이면서 또한 영적인 영역입니다. 불못에 던져지는 것은 그저 인간의 육체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 혼, 영입니다. 영적인 특성은 물리적인 불에 의해 소멸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원을 위해 준비된 몸으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계 20:13; 행 24:15). 이런 육체들은 영원한 운명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영원은 영혼절멸론자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측면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원’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아이오니온)은 영혼절멸론자들의 주장처럼 그 정의는 영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세대’ 또는 ‘영겁’처럼 어떤 구체적인 기간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아이오니온)은 때때로 영원 기간을 지칭하는데 사용된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은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불못에 던져져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존재는 불못에 던져짐으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이 뭔가 달라야 합니까(계 20:14-15)?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마태복음 25장 46절입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악인들과 의인들의 운명을 지칭하는데 동일한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일 악인들이 어떤 ‘세대’ 동안만 고통을 당한다면, 의인들 역시 어떤 ‘세대’ 동안만 천국에서의 삶을 경험할 것입니다. 만일 신자들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거한다면, 믿지 않는 자들도 영원토록 지옥에 있게 될 것입니다.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영혼절멸론자들의 가장 흔한 또 다른 반대는 하나님께서 유한한 분량의 죄 때문에 불신자들을 영원토록 지옥에서 벌하신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70년을 산 사람에게 영원한 벌을 주는 것이 어떻게 정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죄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저질러졌기 때문에 영원한 결과를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간음과 살인의 죄를 저질렀을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범죄를 저질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께만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모든 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것임을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십니다. 그 결과, 그분을 대적하는 모든 죄는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 시간의 길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짓는 상대인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영혼절멸설에 있어서 좀 더 개인적인 측면은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마도 천국에서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도착하면 우리가 불평할 것이나 슬퍼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천국에 있지 않다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 거부하였기에 정죄 받아 그곳에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100% 완전히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요 3:16; 14:6). 이것을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우리는 그들의 부재로 인해서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곳에 있지 않을 경우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보다는 그들이 천국에 있게 하기 위해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지옥 때문에 우리의 죗값을 치르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죽은 뒤에 ‘소멸’된다면 두려워할 운명이 아니지만, 지옥에서 영원히 거한다면 이는 분명히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무한한 죽음이었고, 우리의 무한한 죄값을 치르신 것이기에, 우리는 영원토록 지옥에서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고후 5:21).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께 둘 때, 우리는 구원받고, 죄 사함 받으며, 정결하게 되고, 천국의 영원한 집을 약속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 결정의 영원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nglish  

답변: 과거주의(Preterism)에 따르면, 성경 속의 모든 예언은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성서에 대한 과거주의 해석은 요한계시록이 종말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1세기 때의 분쟁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과거주의라는 용어는 ‘과거’란 의미의 라틴어 (프래터)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과거주의는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은 과거에 이미 성취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과거주의는 종말적 예언들을 여전히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보는 미래주의(Futurism)와 정반대입니다.

과거주의는 두 유형으로 나뉘어 집니다. 완전 (일관적인) 과거주의와 부분적 과거주의입니다. 이 글은 완전 과거주의(또는 소위 극단적인 과거주의)에 관한 논의로 한정됩니다.

과거주의는 요한계시록에 있는 예언의 미래적 성격을 부인합니다. 과거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신약 성경의 모든 종말적 예언들이 로마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파괴했던 주후 70년에 성취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과거주의는 일반적으로 종말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 즉, 예수님의 재림, 환난, 죽은 자의 부활, 마지막 심판이 이미 발생하였다고 가르칩니다. (마지막 심판의 경우는, 여전히 성취되는 과정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땅으로의 재림은 ‘영적’인 재림이지 육체적인 재림이 아니라고 합니다.

과거주의는 율법이 주후 70년에 성취되었고,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언약도 종료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과거주의자들에게는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세상에 대한 묘사입니다. 기독교인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듯이,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세상도 “새 땅”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주의의 이러한 측면은 쉽게 대체 신학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과거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예수님의 감람 산 강화(Olivet Discourse)의 한 구절을 지적합니다. 예수께서 종말에 일어나는 일들을 몇 가지 묘사하신 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 24:34)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과거주의자는 이 구절의 의미를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신 모든 일들이 그 말씀을 하신 때로부터 한 세대 내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주후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은 “심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과거주의는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과거주의는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것이며(렘 31:33-36) 또한 미래에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놓친 점입니다(사 11:12). 사도 바울은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은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의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 세대”는 마태복음 24장에 묘사된 사건들의 시작을 보게 될 세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은 복잡한 주제이며, 많은 예언들과 관련된 성경의 종말적 이미지들의 사용은 종말적 사건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도 일부 이견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과거주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물리적 특성을 부인하고, 또한 환난의 사건을 예루살렘의 멸망에 국한시킴으로써 환난의 끔찍한 성격을 경시하는 심각한 결함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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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은 ‘믿음의 말씀’(Word of Faith)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의 성경적 진리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이 신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의 말씀 또는 번영복음은 성령을 신자가 무엇을 뜻하든 그것을 위해 사용되는 힘으로 여깁니다. 성경은 성령님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번영복음 운동은 초대 교회에 침투했던 일부 파괴적인 탐욕의 종파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런 이단을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수용하거나 회유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을 위험한 거짓 교사들로 여겼고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을 피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5, 9-1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부패한 마음’을 가진 이런 사람들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였고 재물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그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올무였습니다(9절). 부의 추구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위험한 길이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절). 만일 재물이 경건한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타당한 목표였다면, 예수께서는 그것을 추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머리 두실 곳조차 없는 길을 선호하셨으며(마 8:20), 자신의 제자들에게 똑 같이 따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유일한 제자는 유다였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말했으며(엡 5:5), 에베소 사람들에게 부도덕이나 탐욕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피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엡 5:6-7). 번영복음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일하시는 여지를 주지 않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일을 하도록 놓아줄 때까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말씀 교리에 따르면, 믿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뢰가 아닙니다. 번영복음 교사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영적인 법칙들이 있다고 믿는데, 우리가 그 법칙을 조작하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씀”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운동은 믿음은 누구를 신뢰하거나 어떤 진리들을 우리가 포용하고 마음 속에 다지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가의 문제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의 말씀 운동에서 가장 선호하는 용어는 “긍정적인 고백”입니다. 이것은 말 자체가 창조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말씀 교사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고백들, 특히 당신이 하나님께 비는 소원들은 모두 긍정적으로 말해야 하며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 후 하나님께 응답을 요구해야 합니다(마치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것같이!). 이와 같이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야고보서 4장 13-14절은 분명하게 이 가르침을 반박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일은 고사하고 내일이 어떻게 될지 또는 심지어 내일 우리가 살아 있을지 조차 모릅니다.

성경은 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신 그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고합니다. 신자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딤전 3:3)은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히 1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딤전 6:10).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벌고 소유하는 것을 강조하는 믿음의 말씀과는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 6:19)고 말씀하셨습니다. 번영복음의 가르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있는 화합할 수 없는 모순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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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열린신론”(Open Theism)은 “열린신학”(Openness Theology), 또는 “열린 하나님”(Openness of God)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예지를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열린신론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들은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미래를 절대적으로 아신다면 인간들은 참으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열린신론은 미래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알 수 있는 모든 것만을 아시지 미래는 모르십니다.

열린신론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또는 “이제야 아노라”, “그들을 행한 것을 보시고” 등의 성경 구절에 그들의 믿음의 바탕을 둡니다(창 6:6; 22:12; 출 32:14; 욘 3:10).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을 선언하는 여러 많은 성경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묘사하시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 결정이 어떠할 줄 미리 아시지만 우리의 행동에 따른 주의 행동과 관련해서 “주의 뜻을 돌이키사”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악함에 대해 하나님이 실망했다고 해서 미래를 알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시편 139장 4절, 16절은 열린신론과 상충되는 언급을 합니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 미래를 모르신다면 어떻게 구약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잡한 세부 사항들을 예측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궁극적으로 열린신론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 의지 사이의 설명될 수 없는 관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실패합니다. 극단적인 칼뱅주의의 형태들이 인간들을 단지 미리 프로그램된 로봇들에 불과한 것으로 만듦으로 실패한 것처럼 열린신론은 하나님의 참된 전지하심과 주권을 거부함으로써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히 11:6)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린신론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도전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열린신론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되어야 합니다. 열린신론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지만, 성경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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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아리우스주의(Arianism)는 4세기 초의 선생인 아리우스(Arius)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장 일찍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주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육신으로 계신 하나님이셨습니까 아니면 피조물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단지 하나님과 유사합니까?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가장 먼저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의 영광의 관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님은 신성한 속성을 지닌 피조물일 뿐, 그분 자신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견해가 되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님은 피곤함을 느끼셨고(요 4:6) 자신의 재림 날짜도 모르는 것(마 24:36)을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피곤을 느끼고 뭔가를 모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킨다고 해서 답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온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제약을 지니신 사실은 그분의 신성 및 영원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아리우스주의의 두 번째 큰 오해는 "맏아들"의 의미입니다(롬 8:29; 골 1:15-20). 아리우스를 추종하는 자들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창조의 첫 번째 행위에 의해 태어났거나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자존하심과 영원하심을 선포하셨습니다(요 8:58, 10:30).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성경 시대에서 가족의 맏아들은 큰 영예를 받았습니다(창 49:3; 출 11:5, 34:19; 민 3:40; 시 89:27; 렘 31:9).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족 중에 출중한 맏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사 9:6)이십니다.

거의 1 세기 동안 교회 초기의 여러 총회를 거친 논쟁 끝에 기독교 교회는 공식적으로 아리우스주의를 거짓 교리로 선언하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아리우스주의는 기독교의 믿음의 교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수세기 동안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도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거의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공식적으로 거절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주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격하는 모든 견해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절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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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먼저 "관상 기도"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상 기도는 단지 "기도하는 동안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지시합니다(고전 14:15). 따라서 분명히 기도는 묵상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관상 기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상 기도는 많은 비성경적인 사상과 관행을 받아들인 이머징 교회 운동의 부상과 함께 실제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천천히 퍼져나갔습니다. 관상 기도는 그렇게 퍼져나간 실행법입니다.

관상 기도는 실행자가 어떤 단어에 집중한 후 기도를 하는 동안 계속 반복하여 그 단어를 명상하는 "구심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더 쉽게 들을 수 있도록 외부의 관심에 대해 마음을 비우기 위한 것입니다. 구심 기도 후에, 실행자는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임재를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해롭지 않은 방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러한 기도 유형은 성경적인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합니다. 사실, 그것은 성경에서 정의된 기도 방법과 정반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이 구절들 및 여러 다른 구절들은 기도가 비밀스럽고 신비한 명상에 의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의사소통임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그 의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신비 체험에 초점을 둡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순전히 주관적이며 진리나 사실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진리의 기초에 두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딤후 3:16-17).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신자가 성경의 기록을 넘어서는 체험적인 지식을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표준인 성경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관상기도는 동양 종교와 뉴에이지 사교에서 사용되는 명상 훈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구원은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온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요 14:6) 관상 기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들은 모든 종교로부터 지지자들을 얻기 위해 열린 영성을 받아들입니다. 현대 기도 운동 가운데 실행되고 있는 관상 기도는 성경적인 기독교에 반대하는 입장이기에 우리는 그 기도를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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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관상 영성은 성경적이며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위험한 관행입니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으로 가득 차있는 이머징 교회 운동과 가장 일반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관상 영성은 기독교와 연관성이 거의 없는 여러 다른 그룹들에 의해서도 사용됩니다.

실제로, 관상 영성은 주로 명상에 중점을 두지만, 성경적인 관점의 명상은 아닙니다. 여호수아 1장 8절과 같은 구절은 실제로 우리에게 묵상을 권합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명상의 초점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합니다. 관상적인 영성 중심의 명상은 말 그대로 아무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실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그저 "있을" 것을 권고받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더 큰 영적 경험을 가능하게 도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도록 권고받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것은 그러한 적극적이고 의식있는 변화에 반하는 것입니다.

관상 영성은 또한 신과 신비로운 경험을 추구하도록 장려합니다. 신비주의는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영적 진리, 그리고 궁극적인 현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경험 지식에 대한 강조는 성경의 권위를 침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압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정의로 가르치고, 책망하고, 수정하고, 훈련하는데 유용하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할 수 있습니다"(디모데 후서 3:16-17).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합니다. 하나님이 신비한 경험을 통해 그의 말씀에 추가적인 가르침이나 진리를 추가한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관상 영성 센터(Center for Contemplative Spirituality) 웹 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세속적, 종교적 배경에서 왔으며 우리는 영적 연습과 세계의 위대한 영적 전통 연구를 통해 우리의 여행을 풍성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퍼져 나가며 모든 존재에 대한 우리의 연민을 고무시키는 사랑의 성령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목표들은 성경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제외한 모든 영적 전통은 거짓이기 때문에 세계의 "영적 전통"을 연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이 정하신 길, 즉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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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신학에서 이원론의 개념은 동등하게 강한 선과 악, 두 개의 분리된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원론에서는 하나님은 선한 존재를, 사탄은 악한 존재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비록 사탄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반역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천사였기 때문입니다(사 14:12-15; 겔 28:13-17). 성경은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고 말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원론은 없으며,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동등한 반대되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대표되는 선은 틀림없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사탄에 의해 대표되는 악은 선과 상대가 될 수 없는 약한 힘입니다. 악은 선과의 싸움에서 매번 패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의 본체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반면, 사탄에 의해 의해 대표되는 악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리가 선과 악을 두 개의 동등한 반대 세력으로 묘사한다면, 그 교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대표되는 선이 우주를 다스리는 권세라고 가르치는 성경적 입장과 상충됩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으며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교리는 거짓 교리로 표시될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더 높게 올라가려 했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사실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더 우월해지려는 시도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인간 지혜의 철학적인 줄기를 통해 내려온 "이원론"의 기본 교리를 볼 때에 그의 변함없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주의 어떤 구석에도 이원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유일한 힘이 있으며, 그 힘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오직 한 가지 힘이 전능한 것이지 두 가지 힘이 아닙니다. 따라서 서로 반대하는 두 가지 동등한 힘(선과 악)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원론의 교리는 거짓 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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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간단히 말해서, JEDP 이론은 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들,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주전(기원전) 1400년에 죽은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모세 이후의 다른 저자들 및 편집자에 의해 전적으로 쓰였다는 주장입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에 대한 이름이 모세오경의 여러 부분에서 다르게 사용된 사실에 기초를 두고 언어학적 문체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JEDP 이론의 각 문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여호와를 사용하는 저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엘로힘을 사용하는 저자, 신명기의 저자 및 레위기의 제사장 저자인 4명의 작가를 나타냅니다. JEDP 이론은 모세오경의 여러 다른 부분이 기원전 4세기에 아마도 에스라에 의해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 만일 모세오경이 한 명의 작가가 쓴 책이라면 왜 하나님의 이름이 다릅니까?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창세기 2장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와 같은 패턴은 모세오경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중요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강력한 창조주이신 엘로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 곧 인류를 창조하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다른 저자를 가리키지 않고, 한 저자가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여 그분 성품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거나 어떤 면을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른 문체에 관해서는, 저자는 역사(창세기)를 쓰고, 법령을 쓰고(출애굽기, 신명기), 희생 제도의 복잡한 내용(레위기)을 쓸 때에 다른 문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JEDP 이론은 모세오경에서 설명될 수 있는 차이점을 오해하여 사실 및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정교한 이론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J, E, D, P 문서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고대 유대인이나 기독교 학자는 그런 문서가 존재할 것을 암시한 적도 없습니다.

JEDP 이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쟁은 성경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2장 26절에서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세가 출애굽기 3장 1-3절의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 사건을 기록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3장 22절에서 신명기 18장 15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세가 그 구절의 저자임을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5절에서 모세가 레위기 18장 5절에서 묘사한 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세가 레위기의 저자임을 말합니다. JEDP 이론이 사실이 되려면 예수님, 누가, 바울은 모두 거짓말쟁이이거나 구약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JEDP 이론보다는 예수님과 성경의 저자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딤후 3:16-17).
답변: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절대주의와 비교하면 더 쉽게 이해됩니다. 절대주의는 도덕성이 보편적인 원칙(자연 법칙, 양심)에 의존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 절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공통적인 도덕성의 궁극적인 근원이며, 그러므로 일반 도덕성은 그분처럼 변함이 없다고 믿습니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은 어떤 절대 표준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윤리적 ‘진리’는 상황, 문화, 사람의 감정 등과 같은 변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호한 특징을 나타내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몇 가지 반론을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상대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된 많은 논점들이 처음에는 맞게 들릴 수는 있지만, 모두가 따라야만 하는 ‘올바른’ 도덕적 방안을 제안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논리적인 모순이 있게 됩니다. 즉, 그 방안 자체가 절대주의인 셈입니다. 둘째, 심지어 소위 상대주의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주의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어떤 살인자 또는 강간범이 자신의 기준을 위반하지 않는 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상대주의자들은 다른 문화들 사이의 다른 가치들을 주장하며 도덕도 사람들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개인의 행동(그들이 행하는 일)과 절대 표준 (그들이 행해야 하는지의 여부) 사이에서 혼동을 빚습니다. 문화가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면 우리는 나치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문화의 도덕을 따랐던 것이 아닙니까? 오직 살인이 보편적으로 잘못이라고 여겨져야만 나치가 틀린 것이 됩니다.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도덕성"을 가졌다는 사실은 그러한 보편적인 잘못을 바꾸어내지 못합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도덕 관행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공통적인 도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낙태 지지자와 반대자는 모두 살인이 잘못이라는 점에 대해 동의하지만 낙태가 살인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절대적 보편적 도덕은 사실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화하는 상황이 변화하는 도덕성을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이 옳지 않아도 다른 상황에서는 그 행동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을 판단하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황, 행동, 그리고 의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실패 (행동)하더라도 살인 미수(의도)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황은 도덕적 결정의 일부가 되는데 그 이유는 상황은 어떤 특정한 도덕적 행위(보편적 원리 적용)를 선택하는 맥락을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주의자들이 외치는 주된 주장은 관용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그들의 도덕성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상대주의는 모든 견해를 용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악은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여성은 학대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성폭행자의 견해를 용인해야 합니까? 둘째, 상대주의자가 무관용 및 절대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셋째, 상대주의는 어떤 사람이 첫 번째로 용납될 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용인해야 한다(비록 동의하지 않더라도)는 바로 그 사실은 우리가 항상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도덕 규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시 절대주의입니다! 사실 보편적 도덕 원칙이 없다면 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우리는 모두 우리가 잘못하였을 때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악한 일을 당할 때 본능적으로 죄를 인식합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 죄 된 행위를 인식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심지어 아이들마저 ‘공평’과 ‘불공평’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편적 도덕성이 틀렸고 도덕적인 상대주의가 맞는다고 주장하는 철학은 잘못된 철학입니다.
답변: 범신론은 하나님이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며,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은 하나님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범신론은 다신론(많은 신을 믿는 신앙)과 유사하지만 다신론을 넘어서서 모든 것이 신이라고 가르칩니다. 나무도 하나님, 바위도 하나님, 동물도 하나님, 하늘도 하나님, 태양도 하나님, 당신도 하나님입니다. 범신론은 많은 사교들과 거짓 종교 배후에 있는 가정입니다(예를 들면, 힌두교와 불교는 어느 정도까지, 다양한 하나됨 및 통일 이교들의 주장들, 그리고 "대자연" 숭배자들).

성경은 범신론을 가르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신론과 혼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편재 교리입니다. 시편 139편 7-8절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편재란 그분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주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범신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지만 모든 것이 그분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무 안에, 사람 안에 계시지만 그 사실이 나무와 사람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범신론은 전혀 성경적 믿음이 아닙니다.

범신론에 반하는 가장 분명한 성경적 논증은 우상 숭배에 대한 수많은 명령들입니다. 성경은 우상, 천사, 천체, 자연물 등을 숭배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만일 범신론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므로 그러한 대상을 실제로 숭배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범신론이 사실이라면, 바위 나 동물을 숭배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당한 일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고 일관적인 자세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범신론을 반대하는 결정적인 논증입니다.
답변: 펠라기우스(Pelagius)는 서기 300년대 후반과 400 년대 초반에 살았던 수도승이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원래 또는 유전된 죄로 인한 부패가 없이 순수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영혼을 직접 창조하셨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의 영혼은 원래부터 죄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는 미래 세대의 인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 견해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많은 성경 내용 및 성경 원리와 상충합니다. 첫째, 성경은 우리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죄 중에 있다고 말합니다(시 51:5). 더욱이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의 결과로 인하여 죽는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겔 18:20; 롬 6:23).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이 죄에 대한 자연스러운 성향이 없이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롬 3:10-18). 로마서 5장 12절은 아담의 죄가 남은 인류를 감염시킨 사실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한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 바른 행동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죄를 짓는지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펠라기우스주의는 분명히 비성경적이고 거부되어야 하는 사상입니다.

준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는 근본적으로 인류는 죄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가르치지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준펠라기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전적 타락을 반대하는 부분적인 타락을 주장합니다.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박하는 똑같은 성경 구절들이 또한 준펠라기우스주의를 반박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18절은 절대로 인류가 죄에 부분적으로만 오염되어 있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일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펠라기우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준펠라기주의는 비성서적이며 거부되어야 합니다.
답변: 다신론은 많은 신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헬라어 폴리(poly)는 많다는 뜻이며 씨즘(theism)은 신이라는 뜻입니다. 다신론은 아마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신론일 것입니다. 고대에 가장 잘 알려진 다신론의 예는 그리스 로마 신화입니다(제우스, 아폴로, 아프로디테, 포세이돈 등)입니다. 가장 분명한 다신론의 예는 힌두교로서 3억이 넘는 신들이 있습니다. 힌두교는 본질적으로 범신론이지만 많은 신들을 믿는 신앙도 받아들입니다. 다신교에서조차도 한 신이 다른 신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와 힌두교의 브라마 등이 그러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은 구약에서 다신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틀림없이 몇몇 구절들은 복수형의 ‘신들’을 가리킵니다(출 20:3; 신 10:17, 13:2; 시 82:6, 단 2:47). 고대 이스라엘은 오직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였지만, 종종 계속적으로 우상 숭배와 이교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자신들의 믿음대로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러 신들을 말하고 있는 이 구절들과 다른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히브리 단어 엘로힘(elohim)은 한 분의 참 하나님과 거짓 신들 및 우상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과 거의 동일한 기능을 하였습니다.

무언가를 "신"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것을 신의 존재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들을 말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신들이라고 불리지만 신이 아닌 거짓 신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열왕기하 19장 18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시편 82편 6-7절은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다신론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신명기 6장 4절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고 말합니다. 시편 96편 5절은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고 선언합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인 것처럼 가장하는 거짓 신들이 있지만,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답변: 편집비평과 고등비평은 단지 여러 형태의 성경 비평 중 일부입니다. 그러한 비평들의 의도는 성경을 탐구하고 저자, 역사성 및 기록 시기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이러한 비평 방법의 대부분은 성경 본문을 파괴하려는 시도로 종결됩니다.

성경 비평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뉠 수 있는데, 고등비평과 본문비평입니다. 본문비평은 우리에게 더 이상 원본 성경이 없기 때문에 사본들로부터 원본의 원래 문구를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고등비평은 성경 본문의 진정성을 다룹니다.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언제 쓰여졌습니까? 누가 실제로 이 본문을 썼습니까?

많은 편집비평가들과 고등비평가들은 성경의 영감을 믿지 않으므로 성경 저자들의 삶에 성령의 역사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 질문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구약은 단지 구술 전통을 종합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주전 586 년에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사로잡혀 갈 때까지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에서 모세가 율법과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오경이라고 불림)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책들이 모세에 의해 실제로 쓰여진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진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쓰여졌다면 비평가들은 기록된 내용의 부정확성을 주장할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논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편집비평은 복음서의 저자들은 구술 전통의 최종 편집자이고 실제로 복음서를 직접 쓴 작가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편집비평가들은 성경 저자들이 기독교 내에서의 전통들 및 다른 서면 자료들 가운데서 어떤 것들을 택하여 편집하게 된 “신학적인 동기”를 찾기 위해 연구합니다.

우리가 모든 형태의 성경 비평을 통해 기본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믿을만하게 기록하는 문서의 제작 과정과 성령의 역사를 분리시키려는 몇몇 비평가들의 시도입니다. 성경 기자들은 성경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하나님은 기록되기를 원하시는 말씀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벧후 1:20, 21)고 썼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 글들이 인간의 생각에서 꾸며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성령께서는 그분이 그들에게 무엇을 쓰길 원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지시하시고 인도하신 사실을 알게 되면 성경의 진위성을 비평할 필요가 사라지게 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은 곧 떠나지만 그가 이 땅에서 가르쳤던 것들을 나중에 그들로 하여금 기록하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셔서 그 말씀을 기억하도록 도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와 보존 배후에 계셨습니다. 편집비평과 고등비평은 제약이 없으신 하나님께 인간의 한계를 강요하려는 시도입니다.
답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처음 세 복음서를 비교하면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 서로 매우 흡사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결과적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공관(共觀) 복음서"로 불립니다. 공관(synoptic)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공통적인 관점으로 함께 보다"라는 뜻을 의미합니다. 공관 복음서들 사이의 이러한 유사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 저자들이 어떤 다른 공통 자료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게 만듭니다. 아마 그런 자료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출생, 삶, 사역, 죽음,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을 것이며, 공관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 자료에서 주요 정보를 얻었을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공관 문제(Synoptic Problem)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 마가, 누가, 모두 비슷해서 그들은 서로의 복음서를 사용했든지 아니면 또 다른 공통된 자료를 사용 했음에 틀림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추정된 ‘자료’는 자료라는 뜻을 지닌 독일어 단어 퀘엘레(quelle)로부터 "Q"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Q" 문서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Q" 문서의 일부 또는 단편 조각조차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초대 교부들 중에 그 누구도 그들의 글에서 복음의 ‘자료’를 언급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Q"는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의 발명품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다른 문학 작품들과 동일하다고 믿으며 다른 문학 작품에 주어지는 것과 같은 비평을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적으로, 신학적 또는 역사적으로 "Q" 문서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만일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Q" 문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왜 그들의 복음서는 그렇게 비슷합니까?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습니다. 어떤 복음서가 가장 먼저 쓰여졌든지 간에 (교부들은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보고하였지만, 아마도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인 것 같습니다.), 다른 복음서 작가들이 그것에 접근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태 그리고 (또는) 누가가 마가의 복음서 일부 내용을 복사하여 그들의 복음서에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접근 할 수 있었고 그들 자신의 복음서에 있는 두 가지 텍스트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서 성취된 일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목격자이자 말씀의 종인 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처럼 말입니다. 나 자신이 근원부터 모든 것을 신중하게 조사했기 때문에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나에게도 좋았습니다. 이로써 당신이 배워온 것들의 확실성을 알 수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공관의 "문제"는 큰 문제가되지 못합니다. 공관 복음서가 왜 그렇게 비슷한지에 대한 설명은 모두 동일한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았으며 동일한 사건에 대해 목격하거나 말한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에 의해 위임된 열두 사도 중 하나인 마태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사도 중 한 사람인 사도 베드로의 친밀한 동반자인 마가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사도 바울의 가까운 동료인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왜 그들의 설명이 서로 매우 유사하지 않을 거라 기대해야 합니까? 각 복음서는 궁극적으로 성령의 감화로 쓰여졌습니다(딤후 3:16-17, 벧후 1:20-21). 그러므로 우리는 일관성과 일치를 기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