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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10절은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문맥에서 “이 작은 자”는 주님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거나(6절), 어린 아이들을 의미합니다(3-5절). 이 구절은 수호천사에 대한 핵심 구절입니다. 선한 천사들이 일반적으로 신자들을 보호하고(단 6:20-23; 왕하 6:13-17), 정보를 알려주고(행 7:52-53; 눅 1:11-20), 인도하고(마 1:20-21; 행 8:26), 공급하고(창 21:17-20; 왕상 19:5-7), 섬기는 것(히 1:14)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각 사람(또는 각 신자)에게 천사가 지정되었는지의 여부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 나라를 담당한 천사장(미가엘)이 있었지만(단 10:21, 12:1), 성경 어디에도 천사가 한 개인에게 ‘지정되었다’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천사들은 때로는 개인에게 보내어졌지만, 영구적으로 한 개인을 책임진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사이의 기간 중에 수호천사에 대한 믿음을 충분히 발전시켰습니다. 일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각 사람에게는 선한 천사뿐만 아니라 마귀도 지정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수호천사에 대한 믿음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로 돌아가서, "그들의"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집단 대명사이며 천사들이 일반적으로 신자들을 섬기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천사들은 필요할 때 신자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려고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천사들은 하늘 아버지께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어떤 사람을 수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지켜보거나 수호하는 일은 천사보다는 하나님의 일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그 일이 전지하신 하나님과 완벽하게 맞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순간에 모든 신자들을 보시며 우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천사의 개입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천사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때문에 그들은 주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작은 자들 중의 하나”를 돕습니다.

각 신자가 자신에게 지정된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성경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천사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돕게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듯이 천사들을 사용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물론 주님은 결코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또는 천사들이 필요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천사들을 사용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히 1:7).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보호를 위해 우리에게 지정된 천사가 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며(롬 8:28-30),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히 13:5-6).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이 가득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를 지켜주는 유한한 수호천사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정말로 중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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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타락한 자들, 거인들)은 창세기 6장 1-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성적인 관계로 태어난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마귀들)로서 인간 여성들과 성적으로 교합하거나 또는 인간 남성을 사로잡아 인간 여성과 교합하게 하였다고 봅니다. 이러한 교합은 네피림이라는 자녀를 낳았는데 그들은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창 6:4).

마귀들은 왜 그런 일을 합니까? 성경은 특별히 우리에게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마귀들은 일그러진 사악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행하는 그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을 행한 뚜렷한 동기에 대해서 한 가지 추측은 메시아의 오심을 막기 위해 인간의 혈통을 오염시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메시아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3:15). 창세기 6 장에서 마귀들은 아마도 뱀의 패배를 막고 죄 없는 "여자의 씨"가 태어날 수 없게 하려고 시도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분명하게 명시된 성경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성경적으로 타당합니다.

네피림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히브리 전설 및 여러 다른 전설들(에녹서 및 여러 다른 성경 외 문서들)에 따르면, 그들은 거인족으로서 대단히 영웅적인 큰 악행을 저질렀던 종족이었습니다. 그들의 큰 몸과 힘은 아마도 마귀적인 "DNA"와 인간의 유전이 혼합되면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가 주연 한 영화 '노아’(Noah)에 따르면, 네피림은 바위로 감싸인 타락한 천사들이었습니다. 성경이 그들에 대해 직접 말한 것은 그들은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창 6:4)이었다는 것입니다. 네피림은 외계인, 천사, 감시자 또는 바위 괴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교합으로 생성된 육체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창 6:1-4).

네피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네피림은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발생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네피림이 언급된 직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5-7). 하나님은 온 땅에 홍수를 내시어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방주에 탄 동물들 외에 모든 사람들과 모든 짐승들을 죽이셨습니다. 이때 네피림도 죽었습니다(창 6:11-22).

대홍수 후에 네피림이 있었습니까? 창세기 6장 4절은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귀들이 대홍수 이후에도 때때로 이러한 죄를 반복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대홍수 이전과는 훨씬 적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이 구절은 그곳에 네피림이 정말로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탐꾼의 생각에 자신들이 네피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매우 큰 민족을 보고는 너무나 두려워서 그들이 네피림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는 홍수 이후에 마귀들이 다시 인간 여성들과 교합하여 더 많은 네피림을 생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네피림의 일부 특징이 노아의 며느리들 중에 한 며느리의 유전을 통해 전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이 ‘거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침략하는 동안 멸망하였고(수 11:21-22),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멸망하였습니다(신 3:11, 삼상 17장).

오늘날 마귀들이 네피림을 생산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모든 마귀들을 고립시킴으로써 마귀들과 인간들의 교합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신 것 같습니다. 유다서 1장 6절은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모든 마귀들이 갇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래의 타락을 훨씬 더 넘어서는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마귀들의 무리가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마도 인간 여성들과 교합했던 마귀들이 바로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진” 마귀들일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더 이상 마귀들이 그러한 죄를 저지르게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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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사탄이 떨어진 사건은 이사야 14장 12-14절과 에스겔 28장 12-18절에서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특히 바빌론과 두로의 왕을 언급하는 한편, 그 왕들 배후에 있는 영적인 세력, 곧 사탄을 언급합니다. 이 구절들은 왜 사탄이 타락했는지 묘사하지만, 언제 타락이 발생하였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천사들은 땅보다 먼저 창조되었습니다(욥 38:4-7). 사탄은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기 이전에 타락했습니다(창 3:1-14). 그러므로 사탄의 타락은 천사들이 창조된 후, 그리고 그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시험하기 이전 어느 때인가 발생했음이 틀림 없습니다. 사탄의 타락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기 몇 시간 전인지, 며칠 또는 몇 년 전인지, 성경은 특별히 말하지 않습니다.

욥기서는 적어도 그 당시에 사탄이 여전히 하늘과 하나님의 보좌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6-7). 그 당시 분명히 사탄은 여전히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오고 가며 하나님께 직접 말하고 그의 활동에 대해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접근을 중지시키셨는지에 대해서는 논쟁 거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탄이 하늘에 접근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났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천국에 사탄이 접근하는 것은 종말에 하늘에서 발생하는 마지막 전쟁의 때에 끝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 사탄은 하늘로부터 떨어졌습니까? 교만 때문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사야 14장 12-15절에 나오는 "나는 ~ 할 것이다"라는 진술을 주목하십시오. 에스겔서 28장 12-15절은 사탄을 대단히 아름다운 천사라고 묘사합니다. 사탄은 모든 천사들 중에서 가장 높았던 것 같으며, 기름 부음 받은 그룹이었으며,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사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그분의 보좌로부터 쫓아내고" 우주의 통치권을 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되고자 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되고자 원했고 흥미롭게도 그것은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았습니다(창 3:1-5). 사탄은 어떻게 하늘로부터 떨어졌습니까? 사실,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하늘에서 쫓아내셨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것입니다(사 14:15; 겔 28:16-17). 사탄은 하늘로부터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탄은 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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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해 성경은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책들이 종말과 관련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언들을 모아 정리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종말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매우 간단한 요약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휴거로 알려진 사건을 통해 거듭난 자들 모두를 이 땅으로부터 데려가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3-18; 고린도전서 15:51).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이 믿는 자들은 그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행한 선행과 신실한 봉사에 대한 보상을 받거나, 봉사와 순종의 결여로 말미암아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나, 영생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11-15; 고린도후서 5:10).

적그리스도(짐승)가 정권을 장악하고 이스라엘과 7년동안 조약을 맺을 것입니다(다니엘 9:27). 이 7년 동안의 기간은 “환난”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환난 중에는, 끔찍한 전쟁들, 기근, 전염병들, 그리고 자연 재해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악, 그리고 사악함에 맞서 자신의 진노를 퍼부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네 말 탄 기사들, 일곱 봉인, 나팔, 그리고 대접의 심판들은 환난에 포함될 것입니다.

약 7년의 중반 즈음에,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의 평화의 조약을 깨고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성소를 황폐화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숭배를 받으려고 자신의 우상을 세울 것입니다(다니엘 9:27; 데살로니가후서 2:3-10). 환난의 후반부는 “대환난”(요한계시록 7:14) 그리고 “야곱의 고난의 시기”(예레미야 30:7)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7년 환난의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최후의 공격을 개시할 것이며, 아마겟돈 전쟁으로 절정에 다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들을 파괴하고, 유황불 붙는 못으로 던지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9:11-21). 그리고는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1000년간 무저갱에 결박해 놓으실 것이며, 이 1000년 동안 이 땅 위에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1-6).

1000년이 끝날 때, 사탄은 풀려나서, 다시 패배하고, 불못으로 영원토록 던져질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7-10). 그리고는 그리스도께서는 크고 흰 보좌 앞(백보좌)에서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어(요한계시록 20:10-15) 그들 모두를 불못으로 던지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인 믿는 자들의 영원한 거주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더 이상의 죄도, 눈물도,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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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1000년 동안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주어진 칭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1,000년을 비유적 방식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천 년을 문자 그대로 이 땅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통치가 아닌, 단지 “긴 기간”을 말하는 비유적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20:2-7에서는 천년 왕국은 말 그대로 년 수에 있어 천 년의 시간이라고 여섯 번이나 특별히 언급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저 “긴 기간”을 말씀하고자 하셨다면, 정확한 기간을 명백하게 반복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이 쉽게 긴 기간이라고 표현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왕권을 수립하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2-33). 무조건적 언약들은 왕국을 수립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 재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땅, 번성과 통치자, 그리고 영적 축복을 약속하였습니다(창세기 12:1-3), 팔레스타인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땅으로의 복구와 점령을 약속하였습니다 (신명기 30:1-10). 다윗의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용서를 약속하였습니다. 이 용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국가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31:31-34).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이스라엘이 만국들로부터 다시 모이고 (마태복음 24:31), 개심하며 (스가랴 12:10-14), 그리고 땅을 되찾게 되면서 이 언약들은 성취될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평화의 시기(미가 4:2-4; 이사야 32:17-18), 기쁨의 시기 (이사야 61:7,10); 위로의 시기 (이사야 40:1-2); 그리고 빈곤이나 질병이 없는 시기(아모스 9:13-15; 요엘 2:28-29)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천년 왕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 때문에, 완전한, 정의(마태복음 25:37; 시편 24:3-4), 순종(예레미야 31:33), 거룩함(이사야 35:8), 진리(이사야 65:16), 그리고 성령 충만(요엘 2:28-29)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깨서는 왕으로서 통치하실 것이며 (이사야 9:3-7; 11:1-10), 다윗은 섭정하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33:15, 17, 21; 아모스 9:11). 방백들도 또한 다스릴 것이고 (이사야 32:1; 마태복음 19:28), 예루살렘은 이 세상의 정치적인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스가랴 8:3).

요한 계시록 20:2-7은 천년 왕국의 정확한 기간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들이 없다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의 이 땅에서 구세주의 통치를 가리키는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구절들이 있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언약들과 약속들의 성취가 문자 그대로의, 육체적, 미래의 왕국에 놓여 있습니다. 천년왕국이 존재하고 그 왕국이 천 년 동안 지속된다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부인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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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란 단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용어는 “들림, 이동, 또는 낚아챔”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교회의 들림” 또는 휴거의 개념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휴거는 환난 기간 동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지상에 쏟아지는 길을 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믿는 자들을 “낚아 채시는” 사건입니다. 휴거는 주로 데살로니가전서 4:13-18과 고린도전서 15:50-54에서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영광스러운 몸을 받게 될 모든 살아있는 믿는 자들과 함께, 죽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몸을 주고, 이 땅에서 그들을 취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6-17).

휴거는 우리의 몸이 우리에게 맞는 영원한 몸으로 순간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수반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한일서 3:2). 휴거는 (예수님의) 재림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휴거 때는, 주님이 우리를 “공중”에서 만나시러 “구름 속”에 오십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7). 재림 때는, 하나님의 원수들의 패배가 따르는 큰 지진을 초래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시기 위하여 지상까지 쭉 내려오십니다(스가랴 14:3-4).

휴거의 교리는 구약 성경에서 가르쳐지지 않았는데, 바울이 이것을 지금 드러난 “비밀”이라고 지칭한 이유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린도전서 15:51-52).

휴거는 우리 모두가 갈망해야 하는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할 것입니다. 휴거의 의미와 범위에 관해 너무나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휴거는 소망으로 가득 찬 위로하는 교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기를”(데살로니가전서 4:18)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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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과 관련된 휴거의 시점은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이슈입니다. 세가지 주요 견해들은 환난전휴거(휴거가 환난 전에 일어남), 환난중휴거(휴거가 환난의 중간 또는 중간쯤 일어남), 그리고 환난후휴거(휴거가 칠 년 환난이 끝날 때 일어남)입니다. 일반적으로 진노전휴거(Prewrath Rapture)로 알려진 네 번째 견해는 환난중휴거의 견해를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첫째, 환난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 9:27에 의하면, 아직 다가올 한 이레(7년)가 존재합니다. 칠십 이레(다니엘 9:20-27)에 대한 다니엘의 전체적인 예언은 이스라엘 국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히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주의를 기울이는 기간입니다. 환난의 기간인 칠십 번째 이레(7년) 역시 하나님께서 특히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시간일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꼭 교회가 환난 중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지만, 이 기간 동안에 이 땅에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에 관한 질문을 야기합니다.

휴거에 대한 주요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입니다. 이 구절들은 죽었던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살아있는 모든 믿는 자들이 공중에서 주 예수님을 만날 것이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휴거는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부터 그분의 백성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몇 구절들 뒤, 데살로니가전서 5:9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환난 시기를 주로 다루는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진노를 환난중에 이 땅에 쏟으실 것인지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입니다. 믿는 자들은 진노에 고통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진노의 환난을 통해 고통 받는 이 땅에 그들을 남겨놓으신다는 것은 모순되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부터 자신의 백성들을 제거하신다고 약속 한 바로 후에 기독교인들을 구하신다고 약속하신 사실은 이 두 사건들이 함께 연결된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휴거의 시기에 대한 또 다른 주요 구절은 요한계시록 3:10인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 오게 될 “시험의 시간”으로부터 믿는 자들을 구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의 와중에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것이든지, 아니면 시험 자체로부터 믿는 자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 “부터(from)”로 번역된 그리스어의 유효한 의미들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이 무엇으로부터 지켜지는 것이 약속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지 시험으로부터가 아닌, 시험의 “시간”으로부터 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포함하는 바로 그 시간으로부터, 다시 말해 환난으로부터 믿는 자들을 지키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환난의 목적, 휴거의 목적, 데살로니가전서 5:9의 의미 그리고 요한계시록 3:10의 해석 모두가 환난전휴거의 견해를 분명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문자 그대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해석이 된다면, 환난전휴거의 견해가 가장 성경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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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믿는 자들의 소망인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주관하신다는 것과, 하나님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들과 예언들이 충실하게 성취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처음에 오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언 대로 베를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탄생, 삶,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구세주(메시야)와 관련된 많은 예언들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세주에 관한 예언 중 예수님께서 아직 이루지 않으신 어떤 예언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바로 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남은 예언들을 성취하시기 위한 재림이 될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정복하시는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고 겸손한 환경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자신의 편인 하늘의 군대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은 두 번 오시는 것에 대한 이런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7:14; 9:6-7 과 스가랴 14:4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언들의 결과로,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고난 받는 구원자와 정복하는 구원자 둘 다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오직 한 구원자만이 존재하고 그분이 두 역할들을 성취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처음 오셨을 때 성취하셨습니다(이사야 53장).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오실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와 왕으로서의 역할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스가랴 12:10과 요한계시록 1:7은, 재림을 묘사하면서, 예수님께서 찔리셨던 일을 뒤돌아 봅니다. 이스라엘, 그리고 모든 세상이 그분께서 처음 오셨을 때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던 것을 애통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 천사들은 사도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1). 스가랴 14:4은 재림의 장소가 감람산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0은 공표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디도서 2:13은 재림을 “영광스러운 나타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요한계시록 19:11-16에 가장 자세하게 말씀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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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5-8이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기에 우리는 종말의 다가옴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거짓 구세주들의 증가, 전쟁의 증가, 그리고 기아, 질병들, 자연재해들의 증가 – 이런 것들이 종말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경고가 주어집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오직 해산하는 고통의 시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종말은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모든 지진, 모든 정치적 격변,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공격을 종말이 급격하게 다가오는 확실한 증거로서 지적합니다. 이런 사건들이 마지막 때가 다가온다는 신호는 될 수는 있으나, 꼭 종말이 왔다는 척도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에는 거짓된 가르침이 눈에 띄게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디모데전서 4:1). 마지막 때는, 적극적으로 “진리에 대적”하는 사람들의 갈수록 더하는 악한 성격 때문에, “위험한 때”라고 묘사됩니다(디모데후서 3:1-9; 데살로니가후서 2:3).

다른 가능한 징조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성전의 재건축, 이스라엘을 향한 적대감의 증가, 그리고 세계가 하나의 정부로 나아감을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징조는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은 서기 70년 이래 실제 처음으로 주권 국가로 인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영원히 소유”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창세기 17:8),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육체적 영적 소생을 예언하였습니다(에스겔 37장). 이스라엘이 자신의 땅에서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은, 종말의 예언에 비추어 중요한데, 이는 종말론에서 차지하는 이스라엘의 중요성 때문입니다(다니엘 10:14; 11:41; 요한계시록 11:8).

이런 징조들을 염두에 두어야만, 우리는 종말을 대비함에 있어 지혜롭게 되고 분별력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의 어떤 한 사건을 두고 종말이 곧 온다는 분명한 표시로 해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렇게 준비되도록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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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훈육을 마치고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심판을 마무리 지으실 미래에 있을 7년 동안의 기간을 말합니다. 자신들을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신 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믿는 모든 자들로 구성된 교회는 환난 기간 동안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휴거로 알려진 사건을 통해 이 땅으로부터 옮겨질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3-18; 고린도전서 15:51-53). 교회는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받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9). 성경 전체에 걸쳐, 다음과 같이 다른 이름들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주의 날(이사야 2:12; 13:6, 9; 요엘 1:15, 2:1,11,31, 3:14; 데살로니가전서 5:2)

2. 고난 또는 환난(신명기 4:30; 스바냐 1:1)

3. 대환난, 더 강렬한 7년의 후반부를 지칭함(마태복음 24:21)

4. 고난의 때 또는 고난의 날(다니엘 12:1; 스바냐 1:15)

5. 야곱의 고난의 시간(예레미야 30:7)

환난의 목적과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니엘 9:24-27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네 백성”에 대하여 선포되었던 “70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니엘의 사람들을 대항해 선포된 70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백성은 유대인들이자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9:24은 이스라엘의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는” 때까지 하나님께서 주셨던 기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칠십 이레 동안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칠십 이레” 동안 이런 모든 것들을 성취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70번의 7년, 또는 490년을 말합니다(어떤 성경 번역본은 칠십 이레로 지칭합니다). 이것은 다니엘서에 있는 이 본문의 다른 부분에서 확인이 됩니다. 25 그리고 26절에서,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총 69) 후에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다니엘에게 말씀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69번의 7년(483년) 후에 메시야가 끊어 없어질 것(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서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떨어진 때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을 받으실 때까지 483년이 흘렀음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종말론적(미래의 것들/사건들) 견해와 상관 없이, 거의 모든 기독교 학자들은 다니엘의 70 번의 일곱(칠십 이레)을 위와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으로부터 메시아가 끊어 없어질 때까지의 483년은 다니엘 9:24에 나오는 것들이 성취되어야 할 7년을 남깁니다: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이 마지막 7년이 환난 기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을 끝내시는 때입니다.

다니엘 9:27은 7년 환난 기간 중의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말하는 한 사람은 마태복음 24:15에서 예수님께서 “황폐케 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라고 부르신 사람이고(마태복음 24:25), 요한 계시록 13장에서는 “짐승”으로도 불려집니다. 다니엘 9:27은 짐승이 한 이레(7년)간의 조약을 체결하지만, 이 7년의 중간(환난이 시작된 지 3년 반이 지나)에, 그 조약을 깨고 제사를 금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13장은 이 짐승이 성전 안에 자신의 형상을 세우고 세상이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3장 5절은 이런 일이 3년 반, 즉 42개월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9:27은 이런 일들이 한 이레(7년)의 중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계시록 13:5은 짐승이 이런 일을 42개월 기간 동안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총 기간이 84개월 또는 칠 년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 7:25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한 때=1년; 두 때=2년; 반 때=1/2년; 총 3 년 6개월) 또한 짐승이 힘을 얻은 7년 환난 기간의 후반부인, “대환난”을 가리킵니다.

환난에 대한 추가적 참조를 위해, 1,260일과 42개월을 말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11:2-3, 그리고1,290일 그리고 1,335일을 말씀하고 있는 다니엘 12:11-12를 참고하십시오. 이런 날들은 환난의 중간 시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니엘 12장의 추가적인 날들은 마지막에 나라들의 심판을 위한 시간(마태복음 25:31-46)과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위한 시간들을 포함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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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언제나 해석자에게 도전을 제시해 왔습니다. 이 책은 생생한 이미지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책 전체에 대한 선입견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네 가지 주요 해석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1) 과거주의(계시록에 있는 모든 또는 대부분의 사건이 이미 1세기 말 전에 발생한 것으로 봄). 2) 역사주의(계시록을 사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교회사의 조망이라고 봄) 3) 이상주의(계시록을 선과 악의 투쟁에 대한 묘사로 봄) 4) 미래주의(미래에 발생할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봄). 네 가지 중에서 미래주의적 접근만이 나머지 성경과 마찬가지로 계시록을 동일한 문법적-역사적 방법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계시록이 스스로를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도 잘 들어맞는 접근법입니다(계 1:3; 22:7, 10, 18, 19).

따라서 "144,000명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에 어떤 해석 방법을 취하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미래주의적 해석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해석들은 14만 4천을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즉, 교회를 대표하는 숫자이며 교회의 모든 성도들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계 7:4)라는 구절을 취하면 14만 4천을 “이스라엘의 자손”의 각 지파로부터 1만 2천씩 불러 모은 유대인들의 숫자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분명한 구절을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14만 4천의 유대인들은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인침은 그들이 대환난 기간 동안 사명을 감당할 때에 적그리스도 및 하나님의 모든 심판으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요한계시록 6장 17절을 보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말합니다). 대환난 기간은 장래에 임하는 7년의 기간으로써 하나님은 그 기간에 주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 심판을 행하실 것이며 이스라엘 나라를 위한 구원의 계획을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선지자 다니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것입니다(단 9:24-27). 14만 4천의 유대인들은 이전에 예언되었던(슥 12:10; 롬 11:25-27) 구속 받은 이스라엘의 “첫 열매”(계 14:4)에 속합니다. 그들의 사명은 휴거 후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또한 대환난 기간 동안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역의 결과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계 7:9)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14만 4천명에 관한 많은 혼동은 여호와의 증인의 잘못된 교리의 결과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14만 4천명만이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통치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14만 4천명은 여호와의 증인이 소위 하늘의 소망이라고 부르는 것을 누리게 됩니다. 14만 4천명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상의 소망, 곧 그리스도와 14만 4천명의 통치를 받는 이 땅의 낙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이 사후 세계에서 다스리는 지배층(14만 4천)과 다스림을 받는 피지배층의 카스트 계급 사회(144,000명)를 세우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중 계층" 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따르면 천년왕국 시대에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와 구약 성도들(그리스도의 초림 전에 죽은 신자들), 환난 시대의 성도들(대환난 기간 중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로 구성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그룹에 숫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더욱이 천년 왕국 시대는 천년기가 끝날 때 시작되는 영원한 상태와 다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계 2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성령에 의해 인치신 바 된 기업은(엡 1:13-14) 우리의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롬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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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망의 가증 한 것"이라는 구절은 마태복음 24장 15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이 구절은 다니엘서 9장 27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ies)라는 이름의 그리스 통치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의 번제단 위에 제우스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돼지로 희생 제사를 바쳤습니다. 이 사건은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묘사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진 지 약 200년이 지난 후 마태복음 24장 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장래 언젠가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유대인의 성전에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예언하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예언 해석자들은 예수님은 적그리스도를 언급하시면서 그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행한 것과 매우 유사한 짓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사실은 다니엘서 9장 27절에서 다니엘이 예언한 내용 중에 일부가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함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이스라엘과 7년의 언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7년의 언약을 맺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과 비슷한 일을 행함으로 그 언약을 깨뜨릴 자는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장래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계시록 13장 14절은 그가 어떤 형상을 만든 후 모든 사람에게 숭배를 강요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을 적그리스도를 위한 숭배의 장소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대환난 중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깨어 경성하는 가운데 이러한 사건은 대환난의 최악의 기간인 3 년 반의 시작이라는 것과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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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한 많은 추측이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적그리스도의 대상자들로는 블라디미르 푸틴, 윌리엄 왕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그리고 교황 프란체스코 1세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현재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가장 빈번한 적그리스도의 대상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누구이며,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어디로부터 나올 것인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성경 학자들은 그가 10 개국 및 다시 생성되는 로마 제국의 연방체로부터 등장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단 7:24-25; 계 17:7).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어디로부터 오며 어떤 인종이 될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들은 모두 추측일 뿐입니다. 어느 날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3-4절은 우리가 어떻게 적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그때 살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보고 매우 놀랄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오늘날 살아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 당시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확신했습니다. 1940 년대에 많은 사람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적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지난 수 백 년 동안 살았던 다른 사람들도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똑같이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모두 틀렸습니다. 우리는 추측을 뒤로 하고 성경이 적그리스도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계시록 13장 5-8절은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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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라는 단어는 ‘드러내다, 열다, 뚜껑을 열다’라는 헬라어 아포칼룹시스(apocalupsis)에서 온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때때로 "요한의 묵시록”(Apocalypse of John)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종말에 발생할 일들을 사도 요한에게 묵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아포칼룹시스라는 헬라 단어는 계시록의 헬라 원서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입니다. 묵시 문학이라는 표현은 미래의 사건들을 묘사하기 위해 기호, 이미지 및 숫자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내에서 계시록 외에 묵시 문학을 사용한 예는 다니엘서 7-12장, 이사야 24-27장, 에스겔 37-41장, 스가랴 9-12장입니다.

왜 묵시 문헌은 그러한 상징주의와 이미지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묵시 문학의 책들은 위장된 메시지를 더욱 신중하게 전달하기 위해 평범한 언어보다는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하여 기록되었습니다. 더욱이 상징은 시간, 장소와 같은 세부 내용을 비밀로 만드는데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징들은 혼동을 야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종말”이라는 용어는 구체적인 성경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일반적으로 종말의 때를 가리키거나 또는 구체적으로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가리키는데 자주 사용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아마겟돈의 전쟁과 같은 마지막 때의 사건들도 때로는 종말(Apocalypse)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종말은 하나님, 그분의 진노, 그분의 공의, 궁극적으로 그분의 사랑을 모두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셨듯이(요 14:9; 히 1:2), 그분은 또한 하나님의 최고의 ‘종말’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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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는 히브리 단어 하르마게돈(Har-Magedone)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는 "므깃도 산"을 의미하며, 성경이 예언한 대로 하나님이 적그리스도의 군대에 개입하셔서 멸하시는 미래의 전쟁과 동의어가 되었습니다(계 16:16; 20:1-3).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를 상대로 싸우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므깃도라고 불리는 산이 없기 때문에 아마겟돈의 골짜기가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르"는 언덕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장 가능성이 있는 위치는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지점인 메기도 평야를 둘러싼 언덕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200 회 이상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므깃도 평원과 에스드랠론 평원 근처가 아마겟돈 전쟁의 중심 지역이 될 것이며, 그 전쟁은 이스라엘 전체로 퍼지면서 남쪽으로 에돔의 도시 보스라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사 63:1). 아마겟돈의 골짜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두 번의 위대한 승리로 유명합니다. 1) 바락이 가나안 사람들을 이긴(삿 4:15) 사건과 2)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을 이긴 사건입니다(삿 7 장). 아마겟돈은 또한 1)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삼사 31:8)과 요시야 왕의 죽음(왕하 23:29-30, 대하 35:22)이라는 두 차례의 비극이 발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아마겟돈 골짜기는 하나님과 악의 세력 사이의 최후 전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는 계시록 16장 16절에만 있습니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이는 이스라엘을 향해 최후 공격을 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적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왕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겟돈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한 포도주로 잔"(계 16:19)이 부어질 것이며,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타도되고 패배 할 것입니다. "아마겟돈"은 므깃도 평원에서 일어나는 전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종말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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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해석, 특히 요한계시록의 이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일관적인 성경 해석학을 갖는 것입니다. 해석학은 해석 원리에 관한 연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성경의 일반적인 해석 또는 정상적인 해석은 저자가 어떤 구절이나 문장에서 비유적인 언어를 분명하게 사용하지 않는 한 평범한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장의 자연스러운 의미가 타당하다면 다른 의미를 찾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의 인도 하에 저자가 기록한 내용이 분명히 이해가 될 때 어떤 단어나 문구에 뜻을 부여함으로 영적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예는 요한계시록 20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 년 기간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언어는 천 년에 대한 언급이 천 년의 문자적 기간이 아닌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간단한 개요는 요한계시록 1장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1장을 보면, 부활하셔서 높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이미 본 것들은 1장에 기록되어 습니다. "지금 있는 일은"(요한 시대에 있었던 일들)은 2-3장(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일어날 일들"(장래의 일들)은 4-22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요한계시록 4-18장은 땅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심판은 교회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살전 5:2, 9).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는 휴거라는 사건에 의해 지상에서 옮겨질 것입니다(살전 4:13-18; 고전 15:51-52). 요한계시록 4-18장은 “야곱의 환난”, 곧 이스라엘의 환난을 묘사합니다(렘 30:7; 단 9:12, 12:1). 그 때는 또한 하나님이 그분에 대해 반역한 불신자들을 심판하실 때입니다.

19 장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합니다. 그분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물리쳐 그들을 불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20 장에서 그리스도는 사탄을 묶어 무저갱에 던지십니다. 그 후 그리스도는 천 년 동안 지속될 그분의 지상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천 년이 지난 후에 사탄이 풀려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속하게 패배하고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 후 모든 불신자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있은 후 그들 역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21장과 22장은 영원한 상태에 대해 묘사합니다. 이 장들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 의미가 완전히 비밀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을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열쇠는 가능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의미하는 바를 말하며, 말한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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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역사 끝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나타내며(사 7:18-25), 종종 "그 날"이라는 표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의 날”을 이해하는 열쇠는 하나님이 친히 계획의 어떤 특정한 면을 성취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시는 기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의 날을 이 세상과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실현되는 그 날 또는 특정 기간과 관련시킵니다. 어떤 학자들은 주의 날이 하루보다 긴 기간, 즉 모든 인류의 영원한 상태를 준비하기 위해 하늘과 땅을 깨끗하게 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전세계를 통치하시는 기간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학자들은 주의 날은 그리스도께서 충성된 신자들을 구원하고 불신자들을 영원한 저주에 보내시기 위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발생하는 즉각적인 사건이라고 믿습니다.

"주의 날"이라는 구절은 구약에서 19번 사용되었고(사 2:12, 13:6, 9; 겔 13:5, 30:3; 욜 1:15, 2:1, 11, 31; 3:14; 암 5:18, 20; 옵 15; 습 1:7, 14; 슥 14:1; 말 4:5), 신약에서는 다섯 번(행 2:20; 살전 5:2; 살후 2:2, 벧후 3:10)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구절들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계 6:17; 16:14).

주의 날을 다루는 구약의 구절들은 종종 임박함과 가까움 또는 예상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너희는 애곡할지어다”(사 13:6). “그 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겔 30:3).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욜 2:1).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욜 3:14).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습 1:7). 주의 날을 언급하는 구약의 구절들은 종종 수많은 구약의 예언들처럼 가까운 시기에 또는 먼 훗날에 이루어질 일들을 말합니다. 주의 날을 언급하는 어떤 구약 구절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역사 속에 성취된 심판을 묘사하고 있고(사 13:6-22; 겔 30:2-29; 욜 1:15, 3:14; 암 5:18-20; 습 1:14-18) 다른 구절들은 역사 끝에 발생할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합니다(욜 2:30-32; 슥 14:1; 말 4:1, 5).

신약 성경은 그 날을 "진노의 날", "방문하는 날",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계 16:14)이라고 부르면서 믿지 않는 이스라엘과(사 22; 렘 30:1-17; 욜 1-2; 암 5; 습 1) 불신하는 세상을(겔 38-39; 슥 14) 향해 미래 어느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주의 날”이 밤중의 도둑처럼 속히 올 것을 알려줍니다(습 1:14-15; 살후 2:2).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라도 오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때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는 주의 약속이 성취가 되는 때도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죄 사함을 받고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사 10:27; 렘 30:19-31, 40; 미 4; 슥 13). 주의 날의 최종 결과는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것”(사 2:17)이 될 것입니다. 주의 날에 관한 예언들의 궁극적인 또는 최종적인 성취는 역사의 종말에 있게 될 것인데, 그때에 놀라운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은 악을 벌하시고 그분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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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은 종종 혼동됩니다. 때로는 성경의 어떤 구절이 휴거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종말과 관련된 예언들을 연구할 때에는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휴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교회(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를 하늘로 옮기시려고 오시는 때입니다. 휴거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과 고린도전서 15장 50-54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죽었던 신자들은 이 땅에 아직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부활의 몸을 입고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 간에 발생할 것입니다. 재림은 예수께서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고 악을 파멸시키고 그분의 천년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시는 때입니다. 재림은 계시록 19장 11-16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휴거와 재림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휴거 때에 신자들은 하늘에서 주님을 만납니다(살전 4:17). 재림 때에 신자들은 주님과 함께 이 땅으로 돌아옵니다(계 19:14).

2) 재림은 끔찍한 대환난 후에 발생합니다(계 6-19). 휴거는 환난 전에 발생합니다(살전 5장 9절; 계 3:10).

3) 휴거는 구원의 행위로서 이 땅에서 하늘로 신자들을 옮기는 것입니다(살전 4:13-17, 5:9). 재림은 심판을 통해 불신자들을 제거하는 일을 포함합니다(마 24:40-41).

4) 휴거는 비밀스럽고 즉각적입니다(고전 15:50-54). 재림은 모든 사람에게 보일 것입니다(계 1:7; 마 24:29-30).

5) 그리스도의 재림은 다른 어떤 종말 사건들이 발생할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살후 2:4; 마 24:15-30; 계시록 6-18). 휴거는 임박합니다. 즉,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딛 2:13; 살전 4:13-18; 고전 15:50-54).

휴거와 재림을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1) 휴거와 재림이 같은 사건이라면, 신자들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살전 5:9; 계 3:10).

2) 휴거와 재림이 같은 사건이라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임박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 많은 사건들이 발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마 24:4-30).

3) 환난 기간을 묘사할 때, 계시록 6-19장은 전혀 교회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환난 기간, 곧 "야곱의 환난의 때"(렘 30:7)라고 불리는 기간에는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주요 관심을 보이실 것입니다(롬 11:17-31).

휴거와 재림은 비슷하지만 별개의 사건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관련됩니다. 둘 다 종말의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약하면, 휴거는 하나님의 진노의 때 이전에 모든 신자들을 지상에서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고, 재림은 그리스도께서 땅으로 재림하셔서 대환난을 끝내시고 적그리스도와 그의 사악한 세계 제국을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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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네 기사 (4명의 말 탄 자들)은 계시록 6장 1-8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네 명의 말 탄 자들는 종말에 발생할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입니다. 종말의 첫 번째 기수는 계시록 6장 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이 첫 번째 기수는 적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는 권세를 받아 그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이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백마를 타고 재림하실 참 그리스도를 거짓 모방하는 자입니다(계 19:11-16).

종말의 두 번째 기수는 계시록 6장 4절에 나타납니다.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두 번째 기수는 종말의 때에 발발할 끔찍한 전쟁을 가리킵니다. 세 번째 기수는 계시록 6장 5-6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종말의 세 번째 기수는 두 번째 기수의 전쟁의 결과로 빚어지는 큰 기근을 가리킵니다.

네 번째 기수는 계시록 6장 8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종말의 네 번째 기수는 죽음과 황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이전의 기수들로 인한 결과일 것입니다. 종말의 네 번째 기수는 무서운 전염병과 질병과 함께 더 많은 전쟁과 끔찍한 기근을 가져올 것입니다. 가장 놀랍고 아마도 끔찍한 것은 종말의 네 명의 말 탄 기수들은 단지 나중에 임하게 될 더 끔찍한 심판인 대환난 때의 전조라는 사실입니다(계 8-9장,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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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든지 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즉, 언제든지 그분의 재림 사건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딛 2:13)을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오늘 다시 오실 수 있다고 믿고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멈추고 그저 그분을 ‘기다리기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늘 재림하실 수도 있다고 아는 것과 오늘 오실 것이라고 아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재림의 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계속 주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 달란트 비유를 보면, 멀리 떠나는 왕은 그의 종들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눅 19:13)고 지시합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삶을 멈추게 하는 요인이 아니라 행동하게 하는 큰 동기 부여로 항상 제시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말로 휴거에 대한 가르침을 마무리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훈을 끝마칩니다. 뒤로 물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결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재림 의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동안 일을 해야 합니다.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사도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이 재림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섬기며 살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일을 멈추고 단지 ‘기다리기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었을 것이고 복음은 전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하나님의 일로 바쁘게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매일이 그들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매일 주어지는 하루를 하나님의 선물로 대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 날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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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짐승의 표"를 언급하는 주요 본문은 계시록 13장 15-18절입니다. 다른 참고 구절로는 계시록 14: 9, 11, 15:2, 16:2, 19:20, 20:4가 있습니다. 이 표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적그리스도 대변인)의 추종자들을 인 치는 역할을 합니다. 거짓 선지자(두 번째 짐승)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표를 받게 만드는 자입니다. 이 표는 문자 그대로 손이나 이마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누군가가 휴대하는 카드가 아닙니다.

최근의 의료용 이식 칩 및 전파 식별(RFID) 기술의 도입은 계시록 13장에서 언급된 짐승의 표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기술이 결국 짐승의 표로 사용될 수 있는 시작 단계의 기술이 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의료용 이식 칩이 짐승의 표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짐승의 표는 적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것입니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의료용 또는 금융용 마이크로 칩을 넣는 것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의 표는 사고 파는데 필요한 종말의 신분증으로서 적그리스도가 주는 표입니다. 그 표는 오직 적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질 것입니다.

계시록을 해석하는 훌륭한 많은 학자들 사이에도 짐승의 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크게 다릅니다. 이식된 칩으로 보는 주장도 있고, 신분증 카드를 포함한 여러 추측들, 마이크로 칩, 피부에 새기는 바코드, 또는 단지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충성하는 자들이 지닌 표 등,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견해는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에 아무 것도 추가하지 않으므로 최소한의 추측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모든 견해들은 가능성은 있지만, 동시에 모두 추측일 뿐입니다. 우리는 정확한 세부 사항에 대해 추측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서는 안됩니다.

666의 의미는 신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2006년 6월 6일을 060606과 연관된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계시록 13 장에서 숫자 666은 날짜가 아니라 사람을 나타냅니다. 계시록 13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아무튼 666은 적그리스도를 나타낼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성경 해석가들은 666으로 어떤 특정 개인을 확인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단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계시록 13장 18절은 그 숫자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살후 2:3-4), 그가 누구이며 666이 어떻게 그를 나타내는지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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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인(계 6:1-17, 8:1-5), 일곱 나팔(계 8:6-13, 11:15-19), 일곱 대접(계 16:1-21)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세 번에 걸친 일련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심하고 파괴적입니다. 일곱 인과 나팔과 대접은 서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일곱 째 인은 일곱 나팔(계 8:1-5)을 도입하고, 일곱 째 나팔은 일곱 대접을 도입합니다 (계 11:15-19, 15:1-8).

일곱 인 중 첫 번째 네 개의 인은 종말의 네 명의 말 탄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 번째 인은 적 그리스도를 오게 합니다(계 6:1-2). 두 번째 인은 큰 전쟁을 일으킵니다(계 6:3-4). 일곱 인의 세 번째 인은 기근을 일으킵니다(계 6:5-6). 네 번째 인은 전염병과 더 많은 기근과 더 많은 전쟁을 가져옵니다(계 6:7-8).

다섯 번째 인은 종말의 기간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순교하게 될 사람들을 알려줍니다(계 6:9-11). 하나님은 공의를 외치는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나팔 및 대접 심판과 함께 여섯 째 인의 형태로 공의를 베푸실 것입니다. 일곱 인 중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지면 파괴적인 지진이 발생하면서 비정상적인 천문 현상(계 6:12-14)과 함께 엄청난 대격변 및 끔찍한 파괴가 야기될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6-17)고 말할 것입니다.

일곱 나팔은 계시록 8장 6-13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곱 나팔은 일곱 번째 인의 ‘내용’입니다(계 8:1-5). 첫 번째 나팔은 세상의 많은 식물들을 파괴하는 우박과 불을 일으킵니다 (계 8:7). 두 번째 나팔은 바다에 부딪쳐서 바다 생물을 많이 죽게 하는 운석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입니다(계 8:8-9). 세 번째 나팔은 두 번째 나팔과 유사한데 바다 대신에 온 세상의 호수와 강에 영향을 주는 것이 다릅니다(계 8:10-11).

일곱 나팔 중 네 번째 나팔은 해와 달을 어두워지게 합니다(계 8:12). 다섯 번째 나팔은 “악마적인 황충”이 나타나 인류를 공격하고 큰 고통을 주는 재앙을 가져옵니다(계 9:1-11). 여섯 번째 나팔은 인류의 1/3을 죽이는 악마적인 군대를 풀어줍니다(계 9:12-21). 일곱 번째 나팔은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를 부릅니다(계 11:15-19, 15:1-8).

일곱 대접 심판은 계시록 16장 1-21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곱 대접 심판은 일곱째 나팔에 의해 도입됩니다. 첫 번째 대접은 인류에게 고통스런 염증을 가져옵니다(계 16:2). 두 번째 대접은 바다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을 가져옵니다(계 16:3). 세 번째 대접은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합니다(계 16:4-7). 일곱 대접 중에 네 번째 대접으로 인한 결과는 태양의 열기가 심해져서 큰 고통을 초래합니다(계 16:8-9). 다섯 번째 대접은 큰 어둠을 일으키고 첫 번째 대접으로 인한 종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계 16:10-11). 여섯 번째 대접은 유브라데스 강을 마르게 하여 아마겟돈 전쟁을 치를 적그리스도의 군사들을 모이게 합니다(계 16:12-14). 일곱 번째 대접은 끔찍한 큰 지진과 거대한 우박을 가져옵니다(계 16:15-21).

계시록 16장 5-7절은 하나님에 대해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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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그저 하나의 건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말은 ‘회중’ 또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정의 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로부터 유래합니다. ‘교회’의 근본적 의미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교회에 출석하냐고 불어보면, 그들은 대개 건물을 가리키는데 자기 모순적입니다. 로마서 16:5는 말씀합니다.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바울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를 언급합니다. 이는 교회 빌딩이 아닌, 일련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22-23은 말씀합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리스도의 몸은 오순절(성령 강림절)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로 구성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두 가지 측면들로 구성됩니다.

1) 일반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3). 이 구절은 믿는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며 그 증거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2) 지역 교회는 갈라디아서 1:1-2에서 묘사됩니다. “사도 된 바울은...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 지역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침례 교회, 루터 교회, 카톨릭 교회 등은 보편적 교회의 의미로는 교회가 아닌, 차라리 지역 교회, 지역의 믿는 자들로 보는 게 맞습니다. 일반적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하고 구원을 위해 그분을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일반적 교회의 이런 회원들은 지역 교회에서 교제와 유대감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요약하면, 교회는 건물이나 교파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둔 모든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16; 고린도전서 12:13). 지역교회들은 일반적 교회 회원들의 모임입니다. 지역교회는 일반적 교회의 회원들이 고린도전서 12장의 ‘몸’의 원칙인 격려하고, 가르치며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과 은혜 안에서 서로 세우기를 온전히 적용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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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2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교회의 목적들/활동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1) 성경의 교리를 가르침, 2) 믿는 자들을 위한 교제의 장소를 제공함, 3) 성찬식을 준수함, 4) 기도

교회가 성경의 교리를 가르침으로 우리가 우리의 믿음가운데 굳건히 설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14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교회는기독교인들이 서로에게 헌신하고 서로를 존중하며(로마서 12:10). 서로를 가르치고(로마서 15:14), 서로에게 친절하고 서로를 측은히 여기며(에베소서 4:32), 서로가 격려하고(데살로니가전서 5:11),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요한일서 3:11) 교제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들 대신해서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믿는 자들이 준수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1:23-26). “떡을 떼며”(사도행전 2:42)라는 개념은 또한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제를 도모한다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사도행전 2:42에 따른 교회가 존재하는 마지막 목적은 기도입니다. 교회는 기도를 도모하고, 기도 하는 사람을 가르치며, 그리고 기도를 수행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7은 우리를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교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충성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님이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지역사회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도모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인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베드로전서 3:15).

교회가 존재하는 최종적인 목적들의 일부는 야고보서 1:27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업무를 가집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공급하는 것입니다(음식, 옷, 쉴 곳). 교회는 또한 믿는 자들이 죄를 극복하고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물들지 않도록 그들에게 필요한 도구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준비시키고 갖춰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2:12-27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훌륭한 예시를 주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 입, 그리고 발입니다 – 그리스도의 몸(고린도전서 12:12-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여기에 육체적으로 계신다면 그분께서 수행할려고 하실 일들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크리스챤”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같아야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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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침례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제정하신 두 의식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이 지침들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를 삼으며,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침례를 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곳(“모든 나라들”)에서 “세상 끝날까지 수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별 다른 이유가 없는 한, 침례는 예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침례는 교회가 탄생하기 전부터 행해졌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씻어냄(깨끗이 함)”의 성격을 의미하는 침례를 행하였습니다. 침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침례를 사용하였고, 비단 이방인들뿐만 모든 사람들에게 침례 받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의미하는 요한의 침례는 사도행전 18:24-26과 19:1-7에서 보여지는 기독교 침례와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침례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침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침례를 “기독교” 침례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의식을 통하여 사람은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성령 침례도 받아 교회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2:13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물에 의한 침례는 성령 침례의 “재연”입니다.

 

기독교 침례는 사람이 자신의 믿음과 제자의 신분임을 공표하는 수단입니다. 침례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나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셔서, 지금 나는 성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고백합니다”라고 침묵으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그리고 부활을 극적인 방법으로 예시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죄인이 주 예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 그는 죄에 대해서는 죽는 것이고(로마서 6:11)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것(골로새서 2:12)입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구원 뒤에 따르는, 깨끗하게 된, 거룩한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6:4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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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 안에서 ‘목회자/설교자로 섬기는 여성’이라는 문제보다 더 뜨겁게 논쟁이 되는 이슈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남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성이 목회자로서 봉사하지 말아야 하며, 성경이 여성의 사역에 규제를 가하고 있다고 믿는 여성들도 있으며, 여성도 설교자로서 봉사할 수 있고 사역에 규제가 없다고 믿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월주의나 차별주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해석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표합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디모데전서 2:11-12).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역할들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창조된 방법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방법의 결과입니다(디모데후서 2:13-14).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여성들이 가르치거나 남성 위에 영적 권위를 갖는 역할들로 봉사하는 것에 제재를 가하십니다. 이는 여성이 목회자로서 봉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인데, 남자들에게 설교하고, 공개적으로 남성을 가르치며, 남성 위에 영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목회 사역에 있어 여성들에 관한 이러한 견해에 대해 많은 반론이 있습니다. 흔한 것으로, 1세기의 여성들은 전형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바울이 여성들이 가르치는 것을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디모데전서 2:11-1의 어디에도 교육적 지위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만일 교육이 사역을 위한 자격조건이었다면, 예수님 제자들의 대부분은 자격 미달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흔한 반론은 바울이 단지 에베소의 여성들만 남성들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 제재를 가했다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쓰여졌던 글입니다). 에베소는 거기에 있는 아르테미스 성전으로 알려져 있었고, 해당 이교도의 분파로서 여성에게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단지 에베소의 우상숭배자들의 여성 주도 관습들에 반대하여 대응하였고, 교회는 다른 점이 필요했다는 가설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의 어디에도 아르테미스에 대한 언급이 없고, 바울 역시 디모데전서 2:11-12에서 제재에 대한 이유로서 아르테미스 숭배자들의 표준 관행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 번째 반론은 바울이 단지 남편들과 아내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지, 전반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의 ‘여성’과 ‘남성’의 헬라어 단어들은 남편들과 아내들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기본 뜻은 그보다 더 넓습니다. 더 나아가서, 같은 헬라어 단어들이 8-10 구절들에서도 사용됩니다. 오직 남편들만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합니까(8절)? 오직 아내들만 단정한 옷을 입으며 오직 선행으로 예배 드립니까(9-10절)? 물론 아닙니다. 8-10절은 그저 남편들과 아내들만이 아닌, 분명히 모든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11-14절에서만 남편들과 아내들로 좁혀 지칭한 것 같은 문맥상의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여성의 목회 사역에 관한 해석에 또 다른 반론은 성경에 나오는, 특히 구약 성경의 미리암, 데보라, 훌다같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여성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들이 특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선택되었고, 믿음, 용기, 지도력의 본보기가 되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여성들의 권위는 교회 목회자들의 이슈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의 서신서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패러다임은 이스라엘 국가나 그 외 구약 성경의 독립체가 아닌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권위적 구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논쟁들이 신약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뵈뵈를 인용하여 제시됩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리스도를 위한 충성된 사역자로 나타납니다.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서, 아마 그녀가 사역에 있어 남편보다도 더 중요함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그녀의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볼로에게 가르쳤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집에서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일러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8:26). 브리스길라가 교회를 목회하였거나 공개적으로 가르쳤다거나, 또는 성도들의 집회에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한 번이라도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한, 브리스길라는 디모데전서 2:11-14에 모순되는 사역의 행위에 관여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뵈뵈는 교회에서 ‘집사’ 또는 ‘종’으로 불리며 바울에 의해 깊이 추천이 됩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의 예와 같이, 성경에는 뵈뵈가 교회 안에서 남성들에 대한 목회자였다던가 또는 교사였음을 나타내는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장로들을 위한 자격으로 주어진 것이지, 집사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디모데전서 3:1-13; 디도서 1:6-9).

디모데전서 2:11-14의 구절은 여성들이 목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확실하게 말해줍니다. 13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여 바울이 11절과 12절에 언급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 여성들은 남성들을 가르치거나 그들 위에 권위를 행사하지 말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후에 여성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임을 당한 사람은 아담이 아니고,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13-14절).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이브를 아담을 위한 “돕는 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순서는 가정과(에베소서 5:22-33) 교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됩니다.

이브가 속았다는 사실은 여성들이 남성들 위에 목사로서나 영적 권위를 가지고 봉사하지 못하는 이유로 디모데전서 2:14에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잘 속아 넘어갔다든지 여성 모두가 남성보다 더 쉽게 속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여성이 더 쉽게 속는다면, 왜 그녀들에게 아이들을 가르치고(잘 속아 넘어가는) 다른 여성들(더 잘 속아 넘어간다고 추정되는)을 가르치는 것이 허용되었을까요? 본문은 단순히 여성들이 남성들을 가르칠 수 없고 남성들 위에 영적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브가 속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주된 가르침의 권위를 남성에게 주시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많은 여성들은 친절, 자비, 가르침, 전도, 그리고 돕는 은사에 뛰어납니다. 지역 교회 내의 많은 사역이 여성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나 예언 하는 것에 대해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1:5). 오직 남성들 위에 영적 가르침의 권위를 가지는 것만 제재를 받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여성이 성령의 은사들을 행사하는 것에 제재를 가하고 있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며(갈라디아서 5:22-23),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하나님께서는 오직 남성들만이 교회 안에서 영적 가르침의 권위의 지위를 가지고 섬기도록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남성이 필연적으로 더 나은 선생이기 때문이거나 여성이 열등하다거나 덜 지적이기 때문(말도 안 되는 경우)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교회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설계하셨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과 언행을 통해서 남성들은 영적 지도력에 있어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여성들은 덜 권위적인 역할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을 가르치라고 격려 됩니다(디도서 2:3-5). 성경은 또한 여성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있어 제재를 가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성들이 제재를 받는 행위는 남성들을 가르치는 것, 또는 남성들 위에 영적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남성들에 대해 목회자로서 봉사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결코 여성들을 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은사에 따른 여성들의 사역에 더 중점을 두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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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가 다른 믿는 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사도행전 2:42). 우리는 그와 같은 헌신의 예를,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는, 그들에게 지정된 교회 건물은 없었지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사도행전 2:46). 모임을 가질 때마다, 믿는 자들은 다른 믿는 자들과 교제하는 것과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즐겼습니다.

교회 출석은 단지 “좋은 제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히브리서 10:25는 우리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초대 교회에서도, 일부는 다른 믿는 자들과 만나지 않는 나쁜 습관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것이 행해야 할 방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 출석을 위한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교회 출석에 더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요한일서 4:12), 서로 격려할 수 있는(히브리서 3:1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는(히브리서 10:24), 서로에게 봉사할 수 있는(갈라디아서 5:13), 서로 권할 수 있는(로마서 15:14), 서로 존경할 수 있는(로마서 12:10), 그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길 수 있는(에베소서 4:32) 장소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몸의 한 구성원이 됩니다(고린도전서 12:27). 교회의 몸이 제대로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그 “신체 부위들” 모두가 출석하여 작동되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2:14-20). 그냥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들을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사역에 어떤 유형으로라도 참여해야 합니다(에베소서 4:11-13). 믿는 자는 그가 가진 은사의 발산 없이는 온전한 영적 성숙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 모두는 다른 믿는 자들로부터의 도움과 격려가 필요합니다(고린도전서 12:21-26).

이러한 이유와 그 밖의 많은 이유로, 교회 출석, 참여, 그리고 교제는 믿는 자의 삶에 있어 규칙적인 측면이 되어야 합니다. 매주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이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하며 다른 믿는 자들과의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모퉁잇돌이시고(베드로전서 2:6), 우리도”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 하나님의 “영적인 집”의 건축 자재로서, 우리는 자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연결된 믿는 자들(the Church)이 교회(church)에 갈 때마다 그 연결이 선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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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만찬을 연구한다는 것은 심금을 울리는 경험일 수 밖에 없는데 그것에 담긴 깊은 의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준수하고 있는 의미 있고 새로운 친교의 성찬을 제정하셨던 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날인 오래된 유월절을 기념하는 중이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게 하고 미래에 있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고대하게 해 줍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한 해의 가장 성스러운 종교적인 축제였습니다.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들이 죽었던 마지막 재앙과 이스라엘 족속들이 그들의 문설주들에 뿌려진 양의 피로 말미암아 보호되었던 일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양은 구워져서 무교병과 함께 먹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모든 세대들에 걸쳐 이 축제가 기념되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유월절 축제) 예수님께서는 한 쪽의 떡을 취하시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쪼개어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에게 주는 나의 몸이니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와 같이, 저녁을 드신 후, 잔을 취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누가복음22:19-21). 예수님께서는 축제를 찬양으로 마치셨고(마태복음 26:30), 그리고 그들은 밤에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데로 유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그 다음날 그분께서는 십자가 형에 처해 지셨습니다.

 

주의만찬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들에서 발견됩니다(마태복음 26:26-29; 마가복음 14:17-25, 누가복음 22:7-22; 그리고 요한복음 13:21-30).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3-29에 주의만찬에 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서들에서 발견되지 않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7-29). 우리는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떡과 잔의 진정한 의미를 무시하거나 구세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르신 그 엄청난 대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뜻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것은 주의만찬을 단지 형식적인 죽은 의식이 되게 한다거나 고백하지 않은 죄를 지닌 체 주의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전에 우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서 말씀들에 포함되지 않은 또 다른 말씀을 바울이 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6). 이는 이 의식에 대해 시간적 제한을 둡니다(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짧은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두 개의 부서지기 쉬운 것들을 자신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사용하셨고 그것들을 자신의 죽음의 기념비로 삼으셨는지를 배웁니다. 이것은 조각된 대리석이나 성형된 놋쇠가 아닌 떡과 포도주로 된 기념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은 부서지게 될 자신의 몸을 말하였다고 표명하셨습니다. 부서진 뼈는 없었지만, 그분의 몸은 매우 심하게 고문을 받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포도주는 그분의 피를 말씀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곧 당할 끔찍한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인 그분께서는 구세주에 관한 구약 성경의 셀 수 없는 예언들의 성취가 되셨습니다(창세기 3:15; 시편 22; 이사야 53 등등).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이것이 미래에서도 계속되어야 하는 의식임을 가리키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양의 희생을 요구하고 세상의 죄를 제거하실 하나님의 양의 오심을 고대하였던 유월절이 주님의 주의만찬에서 완료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유월절의 양(고린도전서 5:7)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을 때 구 언약을 대체하였습니다(히브리서 8:8-13). 희생 제사 제도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9:25-28). 주의만찬/주의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을 기념하는 것이며 그분의 희생의 결과로 우리가 받은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종교’의 사전적 정의는 ‘하나님 또는 숭배되는 신들에 대한 믿음, 대개 행위와 의식으로 표현됨, 모든 믿음, 숭배, 등의 특정한 체계, 종종 윤리적 강령에 관련 있음’과 비슷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정의에 비추어, 성경은 조직화된 종교를 말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조직화된 종교”의 목적과 영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1:1-9은, 아마도 조직화된 종교의 첫 번째 사건으로, 노아의 후손들이 온 세상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신 바벨탑을 짓기 위해 자신들을 조직화 하였다는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관계보다 자신들의 단결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셨고, 그리하여 이 조직화된 종교를 분산시키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과 그 다음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국가를 위해 종교를 “조직”하셨습니다. 십계명, 성막에 관한 율법들, 그리고 희생 제사 제도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이스라엘 족속들에 의해 지켜져야 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더 연구하다 보면 이 종교의 의도는 구세주, 즉, 구원자의 필요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로마서 7장).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잘못 이해하였고 하나님보다는 규율과 의식을 더 숭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많은 갈등들은 조직화된 종교들과의 갈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런 예들은 바알 숭배(사사기 6; 역대상 18), 다곤(사무엘상 5), 몰렉(열왕기상 23:10)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종교들을 따르는 자들을 무찔렀으며, 자신의 주권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당시 조직화된 종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들과 위선적인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로 그들과 끊임없이 맞서셨습니다. 서신서들은, 복음을 행위와 의식을 요구하는 어떤 목록들과 썩어버린 조직화된 집단들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또한 이런 “기독교 신앙에 더해지는 것”을 요구하는 종교들을 받아들이도록 믿는 자들이 변화되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는 이러한 종교들에 관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에는, 조직화된 종교가 적그리스도에 의해 단일 세계 종교가 세워질 때 세상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 나와있습니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 조직화된 종교의 마지막 결과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의도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계획의 한 부분인 조직화된 믿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조직화된 믿는 자들의 집단들을 “교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묘사가 된 교회는 조직화 되고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조직은 보호, 생산성, 그리고 전도로 이끌어 줍니다(사도행전 2:41-47). 교회의 경우에는, 이것을 “조직화된 관계”라고 더 좋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인간의 시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획은 없습니다(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 로마서 5:8). 자랑함도 없습니다(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 에베소서 2:8-9). 주도권에 대한 갈등이 있으면 안됩니다(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십니다 – 골로새서 1:18). 편견이 있으면 안됩니다(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 갈라디아서 3:28). 조직화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의 규율과 의식에 중점을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골로새서 2:16-17에서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마찬가지로 로마서 14:5는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이 성경 구절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이 아닌 영적 자유의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선상의 문제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각각의 기독교인이 그/그녀 자신의 마음에 그럴 필요가 있는냐는 확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의 앞 장들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어떤 측면의 모세의 율법과 유대 전통을 이방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따르도록 가르칠 것인가? 사도들은 예루살렘 의회에서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사도행전 15). 결정은,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사도행전 15:19-20)였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사도들이 느끼기에 이방인 신자들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필요가 있는 명령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는데도, 사도들이 안식일 준수를 포함시키는 것을 등한시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식일 준수에 있어 일반적 오류는 안식일이 예배의 날이라는 개념입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집단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예배가 토요일인 안식일 날에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명령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08-11). 성경 어디에도 안식일이 예배의 날로 명령된 곳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신약,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예배의 날을 토요일로 하지만,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명령의 본질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모임이 안식일 날 이루어 졌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의 모임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언제 만났을까요? 사도행전 2:46-47은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기독교인들이 정기적으로 만난 날이 있었다면, 그것은 안식일 날이 아닌 일주일의 첫날(우리의 일요일)이었습니다(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2). 일요일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의 안식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히 예배하는 날로 일요일을 준수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 드리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토요일이나 일요일만이 아닌 모든 날에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예배서비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로마서 8:21; 고린도후서 3:17; 갈라디아서 5:1). 기독교인은 토요일 날 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안식일 준수를 지켜야 합니까? 어떤 기독교인이 그렇게 느낀다면, 전적으로, 그렇습니다(로마서 14:5). 하지만, 안식일 준수를 선택한 사람들은 안식일 준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골로새서 2:16). 더 나아가, 안식일 준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안식일 준수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8:9). 갈라디아서 5:13-15는 이 모든 문제를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Got Questions Minis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