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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랍들(불타는, 타오르는 자들)은 하나님이 이사야를 예언 사역으로 부르실 때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함께 보았던 천사들입니다(사 6:1-7). 이사야 6장 2-4절은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고 기록합니다. 스랍들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천사들입니다.

이사야 6장은 성경 내에서 유일하게 스랍들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각 스랍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날개는 날기 위해, 다른 두 날개는 발을 가리기 위해, 나머지 두 날개는 얼굴을 가리는데 사용되었습니다(사 6:2). 스랍들은 하나님이 앉으신 보좌 주변을 날며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그분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이 존재들은 이사야가 예언 사역을 시작하려고 하자 그를 깨끗게 하는 일로 봉사했습니다. 한 스랍은 이사야의 입에 뜨거운 숯을 놓으며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라고 말하였습니다. 스랍들은 다른 거룩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완벽하게 순종합니다. 또한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스랍들은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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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들은 천사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 일에 관여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은 성경에서 그룹들에 대해 처음 언급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사탄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그룹이었습니다(겔 28:12-15). 성막과 성전은 그 안에 있는 여러 물건들과 함께 그룹들을 나타냅니다(출 25:17-22, 26:1, 31, 36:8; 왕상 6:23-35, 7:29-36, 8:6-7 대상 28:18; 대하 3:7-14, 대하 3:10-13, 5:7-8; 히 9:5).

에스겔서 1 장과 10 장은 그룹들(겔 10 )과 동일한 존재인 "네 생물"(겔 1:5)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각 그룹은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겔 1:10; 10:14), 각각 네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룹들의 모습은 "사람의 형상”(겔 1:5)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그룹들은 두 날개를 사용하여 날고, 다른 두 날개로는 몸을 가렸습니다(겔 1:6, 11, 23). 그룹들은 날개 아래에 사람의 손의 모양이나 형상을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겔 1:8, 10:7-8, 21).

계시록 4장 6-9절의 이미지도 그룹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을 위해 봉사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볼 때 그들의 주요 책임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그리고 자기의 백성과 함께 하는 그분의 영원한 임재를 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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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며(골 1:15-17), 인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특별한 심부름꾼들입니다(히 1:13-14). 천사가 이전에 사람이었거나 다른 존재였다는 표시는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천사로 창조되었습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마련해 주신 구속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은 복음을 살펴보려는 그들의 욕망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들이 복음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이전에 인간이었다면 친히 구원을 경험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개념은 그들에게 비밀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면 기뻐하지만(눅 15:10),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그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몸은 죽을 것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됩니까? 신자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됩니다(고후 5:8). 신자는 천사가 되지 않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변화산에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천사들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영광 가운데 나타났을지라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4장 13-18절에서 그리스도를 믿던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잔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의 시신은 죽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살아있습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 안에서 잠자던 자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그들의 몸은 부활되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처럼 새롭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데려오시는 자기들의 영혼과 합쳐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살아있는 신자들의 몸은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될 것이며 더 이상 죄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의 영 안에서 완전히 새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영원히 주와 함께 살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가 되어 그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과 함께 그분을 영원히 섬기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산 소망에 대해 주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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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장"이라는 단어는 성경의 두 구절에서만 나타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외칩니다. 유다서 1장 9절은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이라고 선언합니다. “천사장”이라는 말은 천사들의 “대장 천사”를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천사장은 다른 천사들을 지도하는 천사인 것 같습니다.

유대서 1장 9 절은 "천사장 미가엘"이라고 말하며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미가엘만이 유일한 천사장임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 10장 13절은 미가엘을 "군주 중 하나”라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미가엘을 다른 “군주들”과 동등한 위치에 두기 때문에 천사장이 여럿 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천사장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미가엘 천사장 외의 다른 천사장들도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다니엘 10장 21절은 미가엘을 “너희의 군주”라고 하며 천사장으로 묘사하고 다니엘 12장 1절은 미가엘을 “호위하는 큰 군주”라고 알려줍니다. 비록 여러 천사장들이 있더라도 미가엘이 그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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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 모두에게 선택을 제시하기로 택하셨습니다. 성경은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의 반란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지만, 사탄은 아마도 모든 천사 중에서 가장 높은 자 (겔 28:12-18)로서 교만 가운데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사탄(루시퍼)은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사 14:12-14). 계시록 12장 4절은 천사들 중 1/3이 사탄의 반란에 가입함으로 타락한 천사들, 곧 마귀들이 된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사람과는 달리 천사들이 사탄을 따를 것인지 또는 하나님께 충성할 것인지에 대해 내린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었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이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경은 천사들이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남아있던 천사들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딤전 5:21)로 묘사됩니다.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은 완전한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한 것은 악의 극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으십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실지라도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믿을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습니다(벧전 5:8).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의 기회를 사탄과 천사들에게 주셨습니다. 천사들은 자유 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천사라도 죄를 짓도록 강요하거나 장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죄를 지었고, 따라서 불못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하나님은 결과가 어떠할지 아시면서 왜 천사에게 이 선택을 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천사들 중 1/3이 반역할 것이고 따라서 영원한 불에 떨어지는 저주를 받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사탄이 인류를 죄에 빠지게 유혹함으로써 그의 반역을 더 증대시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까?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악한 행동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십니까? 궁극적으로, 그것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문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다”(시 18:30)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도가 완전하다면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허락하시든 그 뜻 역시 완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완전한 계획은 죄를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55장 8-9절에서 주께서 상기시킨 말씀처럼,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며 우리의 길은 그분의 길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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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천사에 대한 모든 언급이 남성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천사"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안젤로스(angelos)인데 남성형입니다. 사실, 여성형의 천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법에는 남성(그, 그를, 그의), 여성(그녀의, 그녀를, 그녀의), 중성(그것, 그것의)의 세 성별이 있습니다. 천사는 남성이 아닌 성별로 언급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서 천사가 출현하면 "그녀"또는 "그것"으로 불리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더욱이 천사가 나타났을 때 항상 남성 복장을 하였습니다(창 18:2, 16; 겔 9:2). 여성 복장을 입은 천사는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있는 천사들의 이름은 미가엘, 가브리엘, 루시퍼가 전부인데 모두가 남자 이름이며 남성 형으로 언급되었습니다.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계 12:7), "마리아가 그[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놀라"(눅 1:29), "오, 루시퍼, 아침의 아들"(사 14:12) 등이 그러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다른 언급들 역시 항상 남성형입니다. 사사기 6장 21절에서 천사는 ‘그의’ 손에 지팡이를 붙잡고 있습니다. 스가랴는 천사에게 질문을 하고 “그”가 대답했다고 보고합니다(슥 1:19). 계시록에 등장하는 천사들은 모두 “그”로 언급되어 있고, 그들의 소유물에 대해서도“그의”로 언급되고 있습니다(계 10:1, 5, 14:19, 16:2, 4, 17, 19:17, 20:1).

어떤 사람들은 스가랴 5장 9절을 여성 천사의 한 예라고 지적합니다. 그 구절은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 예언적 환상에서 그 “여인”은 천사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주리 안에서 나쉬임(nashiym)으로 불리는 여인들은 7절과 8절을 보면 “악”을 나타내고 있고, 반면에 스가랴가 대화하고 있는 천사는 “천사” 또는 “사자”(messenger)를 의미하는 전혀 다른 단어인 말라크(malak)로 되어 있습니다. 스가랴의 환상에서 여자들이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마음에 천사를 암시할 수 있지만 우리는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환상은 반드시 실제 존재 또는 대상을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스가랴가 같은 장 앞에서 거대한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본 것을 고려하십시오(슥 5:1-2).

성별이 없는 천사에 대한 혼동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는 구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천사들처럼 결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천사들은 성별이 없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즉, 성의 목적은 자녀를 낳는 것이고, 이에 결혼이 없으면 자녀가 없을 것이니 성별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에서 입증할 수 없는 논리 도약입니다. 결혼이 없다는 것이 반드시 성별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을 남성으로 언급하는 수많은 구절들은 성별이 없는 천사와 상충됩니다. 천사들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혼이 없으니 성별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언어의 성별을 엄격하게 성과 관련해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성경 전체에 걸쳐 영적 존재들에게 남성형 대명사가 적용되는 것은 성보다는 권위와 좀 더 연관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을 남성형으로 언급하십니다. 성령은 결코 "그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권위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남성형의 인격적 대명사가 쓰이는 것입니다. 하늘의 존재들에 대해 남성형이 아닌 다른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능력을 행사하고(왕하 19:35)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고(눅 2:10) 이 땅에 그분을 대표하도록 권위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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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그) 천사"의 정확한 정체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알려주는 많은 중요한 ‘단서들’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는 "주의 천사들", "주의 천사", "주의 그 천사"와 같은 많은 언급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처럼 정관사가 있는 것은 어떤 유일한 존재를 특정 짓는 것으로서 다른 천사들과 구별됩니다. 주의 (그) 천사는 하나님처럼 말하고 하나님과 동일시되며 하나님의 책임을 수행합니다(창 16:7-12, 21:17-18, 22:11-18; 출 3:2; 삿 2:1- 4, 5:23, 6:11-24, 13:3-22; 삼하 24:16; 슥 1:12, 3:1, 12:8).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주의 천사가 나타날 때 그를 본 자들은 “주를 보았기 때문에” 죽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몇몇 경우에 주의 (그) 천사는 하나님이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분명합니다.

주의 (그) 천사의 등장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에는 없습니다. 천사들은 신약 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신약에서 "주의 (그) 천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절과 관련해서 혼동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습니다. 흠정역은 "주님의 (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의 무덤에서 돌을 굴려 치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서에는 ‘천사’ 앞에 정관사가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 단어는 "그 천사"또는 "어떤 천사"로 번역될 수 있지만 정관사는 번역자가 제공해야만 합니다. 흠정역 외에 다른 번역들은 "어떤 천사"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주의 (그) 천사의 나타남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기 이전에 나타났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하였다고 선언하셨는데(요 8:58), 이는 그분이 세상에 나타나 활동하셨다고 보아야 논리적입니다. 주의 천사가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현현이든, 또는 하나님 아버지의 현현이든, “주의 (그) 천사”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육체로 나타나신 것을 가리키는 표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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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6:1-4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였고 왜 그들이 사람의 딸들과 함께하여 가진 자녀들이 거인 족(네피림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 같음)으로 자랐는지에 관해 여러 제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에 대한 세 가지 주요 견해들이 있습니다. (1) 그들은 타락한 천사들이었다, (2) 그들은 힘있는, 인간 통치자들이었다, (3) 그들은 사악한 카인의 후손들과 결혼한 거룩한 셋의 후손들이었다. 첫 번째 가설에 비중을 두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어구는 항상 천사들을 지칭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욥기 1:6; 2:1; 38:7). 이 견해의 잠재적 문제는 마태복음 22:30의 천사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성경은 천사들이 성별을 지녔거나 자녀를 생산 할 수 있다고 믿을 이유를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두 견해들은 이 문제를 양산하지 않습니다.

(2) 그리고 (3)의 견해의 약점은 평범한 남성들이 평범한 여성들과 결혼하는 경우에 왜 그들의 자손들이 “거인” 혹은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 명성이 있는 자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힘있는 남성들이나 셋의 후손들이 평범한 여성들이나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는데도 왜 이 땅에 홍수를 가져오기로 결정하셨냐는 것입니다. 창세기 6:5-7의 다가오는 심판은 창세기 6:1-4에서 발생하였던 일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직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인 여성들의 음란하고 비뚤어진 결혼만이 그렇게 가혹한 심판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첫 번째 해석의 약점은 마태복음 22:30의 표명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지만, 본문은 “천사들은 결혼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둘째, 마태복음 22:30은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관해 신경 쓰지도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할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는 타락한 천사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이 결혼이나 성적 관계들을 맺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탄과 그의 마귀들도 그렇다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1)의 견해가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사는 성별이 없다고 말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로부터 자식을 얻었던 타락한 천사들이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재미 있는 “모순”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인 반면에(히브리서 1:14), 그들은 인간적, 육체적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마가복음 16:5). 소돔과 고모라의 남성들은 롯과 함께 있었던 두 천사들과 성관계 하기를 원했습니다(창세기 19:1-5). 천사들이 심지어 인간의 성생활까지 그리고 아마도 번식까지 따라서 하는 사람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타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타락한 천사들은 더 이상 자주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이런 악한 죄를 저질렀던 타락한 천사들을 옥에 가두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타락한 천사들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유다서 6절에 묘사된 것처럼). 초기 히브리 해석자들과 외경, 그리고 위서들은 타락한 천사들이 창세기 6:1-4에 묘사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견해를 전원 일치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결코 논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6:1-4이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인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견해는 문맥상의, 문법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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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기독교인이 귀신 들릴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관련된 성경적 진실은 기독교인들은 귀신들릴 수 없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합니다. 귀신들린다는 것과 귀신에게 억눌린다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귀신들리는 것은 귀신이 사람의 생각들 그리고/혹은 행위들에 직접적으로/완전한 조종을 가하는 것과 관련됩니다(마태복음 17:14-18; 누가복음 4:33-35: 8:27-33). 귀신의 억누름이나 영향은 귀신 또는 사람에 대한 귀신의 영적인 공격 그리고/또는 그/그녀를 죄스러운 행동을 하게끔 고무시키는 것과 관련됩니다. 영적 전쟁을 다루고 있는 신약 성경의 모든 본문들 중에는 믿는 자들에게 들린 귀신 쫓음에 대한 가르침들이 없습니다(에베소서 6:10-18). 믿는 자들에게는 귀신을 내쫓으라는 말이 아닌, 대적하라고 말씀 되었습니다(야고보서 4:7; 베드로전서 5:8-9).

믿는 자들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십니다(로마서 8:9-11; 고린도전서 3:16; 6:19). 분명히 성령께서는 자신이 거하시는 동일한 사람이 귀신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셨고(베드로전서 1:18-19)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자신의 자녀들 중 한 사람이 귀신들리고 귀신에 의해 조종되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사탄과 그를 따르는 귀신들과 전쟁을 수행하지만, 우리 자신들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선포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한일서 4:4). 우리 안에 계신 이는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사탄과 그를 따르는 귀신들입니다. 믿는 자들은 귀신들의 세계를 극복하였고, 믿는 자에게 있어 귀신들린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귀신들릴 수 없다는 강력한 성경적 증거를 고려하면서, 어떤 성경 교사들은 “demonization(귀신화 되다)” 란 용어를 귀신이 기독교인을 조종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귀신들릴 수는 없지만, 귀신화 될 수는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으로, 귀신화 되다란 묘사는 사실상 귀신들렸다는 묘사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같은 문제 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용어를 바꾸는 것이 귀신이 기독교인에 거하거나 완전히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귀신의 영향이나 억압은 의심의 여지 없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실제적으로 일어나지만, 기독교인이 귀신들릴 수 있다거나 귀신화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귀신들렸다는 개념 뒤에 놓여 있는 추론의 많은 부분은 기독교인이 “분명한” 어떤 사람이 귀신에 의해 조종되는 증거를 드러내는 것을 본 개인적 경험에서 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이 우리의 성경 해석에 영향을 주지 않게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걸러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3:16-17).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생각했던 누군가가 귀신들린 행동을 보이는 것을 목격했다면, 우리는 그/그녀가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이 귀신들릴 수/귀신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달라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기독교인인 사람이지만 아마도 심하게 귀신에게 억압을 당하고/당하거나 심한 심리적 문제들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우리의 경험들은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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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귀신들리거나 귀신에 영향을 받은 몇 가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예들로부터 우리는 귀신의 영향을 받은 어떤 증상들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을 어떻게 귀신이 사로잡는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해당 성경 구절들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9:32-33; 12:22; 17:18; 마가복음 5:1-20; 7:26-30; 누가복음 4:33-36; 22:3; 사도행전 16:16-18. 이 구절들의 일부에서, 귀신들림은 벙어리, 간질 증상, 장님, 등과 같은 육체적 질병들을 일으킵니다. 다른 경우에는, 그것은 개인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하는데, 유다가 가장 큰 예입니다. 사도행전 16:16-18을 보면, 귀신은 분명히 한 노예 소녀에게 그녀 자신이 배운 것을 초월한 것들을 알 수 있는 어떤 능력을 줍니다. 또 가드레나 지역의 귀신 들린 사람은 다수의 귀신들(군대)에 의해 사로잡혔고, 초인간적인 힘을 지녔으며, 무덤들 가운데서 벌거벗은 채로 살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반역한 후 악한 영에 시달렸는데(사무엘상 16:14-15; 18:10-11; 19:9-10), 역력하게 우울한 기분과 다윗을 죽이려는 겉잡을 수 없는 욕구를 동반하였습니다.

이렇게, 귀신 들림에서 올 수 있는 증상들은, 실제 심리적인 문제로 돌릴 수 없는 육체적 장애, 우울증이나 공격성과 같은 인격 변화, 초자연적인 힘, 천박함, 반 사회적 행위, 그리고 아마도 정상적으로는 사람이 알 수 없는 정보를 나누는 능력 같이 매우 다양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증상들의 거의 대부분은(전부가 아니라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에 걸린 모든 사람이나 모든 간질병 환자들을 귀신 들린 것으로 규정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서양 문화는 사람들의 삶들에 있어 사탄의 관여를 충분히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육체적이거나 감정적인 차이들 외에, 귀신의 영향을 보여주는 영적인 특성들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는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것(고린도후서 2:10-11)과 거짓 교리, 특히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대속의 역사에 관한 거짓을 믿고 퍼뜨리는 것이 포함이 됩니다(고린도후서 11:3-4, 13-15; 디모데전서 4:1-5; 요한일서 4:1-3).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귀신의 관여 여부에 대해서는, 사도 베드로가 믿는 자들도 귀신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의 한 사례가 됩니다(마태복음 16:23). 어떤 사람들은 귀신의 강한 영향 아래에 놓인 기독교인들을 “귀신 들렸다(demonized)”고 지칭을 하지만,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가 귀신들렸다는 예가 전혀 없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귀신에 들릴 수 없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2; 5:5; 고린도전서 6:19).

한 사람이 어떻게 귀신들리도록 자신을 방치하는지는 정확히 우리는 모릅니다. 유다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악에게 열었습니다 – 그의 경우, 그의 탐욕에 의해(요한복음 12:6). 그러므로, 어떤 습관적인 죄에 의해 지배당하도록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으면, 그것은 귀신이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는 것이 됩니다. 선교사들의 경험들을 통해 보면, 귀신 들림은 또한 우상 숭배와 주술적인 재료들을 소유하는 것과 관련되어 보입니다. 성경은 되풀이하여 우상 숭배를 귀신들의 숭배와 연관시키고 있으며(레위기 17:7; 신명기 32:17; 시편 106: 37; 고린도전서 10:20), 그래서 우상 숭배와 관련을 맺는 것은 귀신들림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위의 성경 구절들과 선교사들의 경험들의 일부에 근거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죄를 품거나 이단과의 관련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귀신에게 열어 준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본인의 인지 여부를 떠나). 부도덕, 의식 상태를 변하게 하는 약물, 알코올 남용, 반항, 비통함, 그리고 선험적인 명상들도 이런 사례들에 포함이 됩니다.

추가적인 고려사항이 있습니다.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일은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욥기 1-2).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다의 배신의 경우처럼 실제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들을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교나 귀신의 활동에 점차 매혹됩니다. 이것은 현명하지 못하며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그분의 전신갑주를 입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다면(에베소서 6:10-18), 우리는 악한 것들에 대해 두려워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기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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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에 대해 사람들은 아주 어처구니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추상적으로만 생각합니다(예를 들면, 사탄을 당신의 어깨 위에 앉아서 당신이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머리에 뿔이 난 조그맣게 생긴 빨간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악을 인격화 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이라고 여기는 것까지). 그러나, 성경은 사탄이 누구인지 또한 우리의 삶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그에 대한 분명한 묘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사탄을 죄로 말미암아 천국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잃었고 지금은 하나님의 목적을 무산시키기 위해 온갖 힘을 쓰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대적하는 천사의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거룩한 천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사야 14:12은 사탄이 타락하기 전의 이름이 아마 루시퍼였음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 28:12-14은 사탄이 케루빔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과 명백하게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천사였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지위로 말미암아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기로 작정하였습니다(이사야 14:13-14; 에스겔 28:15; 디모데후서 3:6). 사탄의 교만은 그의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이사야 14:12-`5에 있는 많은 “내가...하리라(I will)”의 말들을 주목하십시오. 그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하늘로부터 쫓아버리셨습니다.

사탄은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요한복음 12:31; 고린도후서 4:4; 에베소서 2:2). 그는 고소하는 자(요한계시록 12:12), 꾀는자/ 유혹하는 자(마태복음 4:3; 데살로니가전서 3:5), 그리고 속이는 자(창세기 3장; 고린도후서 4:4; 계시록 20:3)입니다. 사탄의 이름 자체가 “적대자” 또는 “대적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탄의 또 다른 칭호인, 악마(the devil)는 “비방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사탄은 비록 하늘에서 쫓겨 났지만, 여전히 하나님보다 자신의 보좌를 더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따라 하고, 세상으로부터 숭배 받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의 왕국을 대적합니다. 사탄은 모든 거짓 이단과 세상 종교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원천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는 일이라면 있는 힘을 다해 무엇이든지 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불 못 가운데 영원히 처해지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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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은 요한계시록 12:9절이 지적하듯이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사탄의 하늘에서의 타락은 이사야 14:12-15와 에스겔 28:12-15에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타락할 때, 그는 천사들의 일부와 함께 하였는데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천사들의 삼분의 일이었습니다. 유다서 6장 역시 그렇게 죄를 범한 천사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들은 사탄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택한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귀신들 중 일부는 이미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졌습니다”(유다서 1:6). 다른 천사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에베소서 6:12에 묘사된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 묘사됩니다(골로새서 2:15). 귀신들은 여전히 그들의 지도자인 사탄을 따르고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거룩한 천사들과 전투를 벌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방해합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들로서 육체를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귀신 들림은 사람의 몸이 귀신에 의해 완전히 제어될 때 발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일어날 수 가 없는데, 이는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4).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역 동안, 많은 귀신들과 맞닥뜨리셨습니다. 물론 어느 귀신도 그리스도의 능력과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마태복음 8:16).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권능은 그분께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증거들 중 하나였습니다(누가복음 11:20). 예수님과 마주쳤던 귀신들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았고,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소리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태복음 8:29). 귀신들은 자신들의 결국이 고통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궤멸시키려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라도 현혹시키려 하고 있습니다(베드로전서 5:8; 고린도후서 11:14-15). 귀신들은 더러운 영(마가복음 1:27), 거짓말 하는 영(열왕기상 22:23), 그리고 사탄의 천사들(요한계시록 12:9)로 묘사됩니다. 사탄과 그의 귀신들은 세상을 혼미케하고(고린도후서 4:4),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디모데전서 4:1), 기독교인들을 공격하고(고린도후서 12:7; 베드로전서 5:8),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과 싸웁니다(요한계시록 12:4-9).

귀신들/타락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원수지만, 이미 패배한 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무력화시켰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골로새서 2:15). 우리는하나님께 복종하고 두려울 것 없이 마귀를 대적하면 됩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한일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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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인격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서 지성, 감정, 그리고 의지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선한 천사들이나 악한 천사들(마귀들)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천사는 지적이고(마태복음 8:29; 고린도후서 11:3; 베드로전서 1:112), 감정을 표현하며(누가복음 2:13; 야고보서 2:19; 요한계시록 12:17), 의지를 발휘합니다(누가복음 8:28-31; 디모데후서 2:26; 유다서 6절).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들로서(히브리서 1:14) 육체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여전히 인격체들입니다.

천사들도 피조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지식도 한정적입니다. 즉, 천사는 하나님과 같이 전지하지 않습니다(마태복음 24:36). 그러나, 천사들은 인간들보다는 더 많은 지식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이는 아마 세 가지 이유들로부터 기인할 것입니다. 첫째, 천사들은 창조의 질서에 있어 인간들보다 더 높은 위치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천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합니다. 둘째, 천사들은 사람들이 성경과 세상을 공부해서 얻는 지식보다 성경과 세상을 더욱 깊이 공부하고, 알고 있습니다(야고보서 2:19; 요한계시록 12:12). 셋째, 천사들은 인간의 행위들을 오래동안 관찰하여 지식을 습득합니다. 천사는 사람과는 달리 과거를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상황들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했는지를 알고 있으며, 또한 유사한 상황들 안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매우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의지를 가졌다 하더라도, 천사들도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지 아래 종속됩니다. 선한 천사들은 믿는 자들을 돕도록 하나님에 의해 믿는 자들에게 보내집니다(히브리서 1:14). 성경이 천사들의 행위들로 간주하는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시편 148:1,2; 이사야 6:3).

2. 하나님을 예배합니다(히브리서 1:6; 계시록 5:8-13).

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뻐합니다(욥기 38:6-7).

4. 하나님을 섬깁니다(시편 103:20; 계시록 22:9).

5.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욥기 1:6; 2:1).

6.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들입니다(계시록 7:1; 8:2).

7. 기도의 응답들을 가지고 옵니다(사도행전 12:5-10).

8.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을 돕습니다(사도행전 8:26; 10:3).

9. 그리스도인들의 질서, 사역, 고난을 지켜 봅니다(고린도전서 4:9; 11:10; 에베소서 3:10; 베드로전서 1:12).

10. 위험한 시기에 격려합니다(사도행전 27:23, 24).

11. 의로운 자들이 죽을 때 돌봅니다(누가복음 16:22).

천사들은 인간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질서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인간들은 죽은 후에 천사들이 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결코 인간들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인간들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창조하신 것처럼 천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천사들이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창세기 1:26).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들이지만, 어느 정도는 육체적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주로 육체적 존재들이지만, 영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룩한 천사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즉각적이고 의문을 달지 않는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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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창조 하셨습니까?"에 대한 짧은 대답은 "그분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계시록 4장 11절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핵심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재미있게 해 주거나 오락적인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존재이시기에 창조의 즐거움을 누리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기에 다른 존재들과 진정한 관계를 갖게 될 때 즐거워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졌기 때문에(창 1:27)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경배하고 섬기고 그분과 교제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과거의 모든 영원 속에서 그분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친구"를 찾으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이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으로서 변함이 없으신 존재이실 것입니다(말 3:6). “스스로 존재하시는 그분”(출 3:14)은 자신의 영원한 존재에 대해 결코 불만족을 느끼신 때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우주를 만드셨을 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하셨고,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행함은 완전했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또한 하나님은 자신과 동등한 "동료" 또는 존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논리적으로 그분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동등한 능력과 지식과 완전성을 가진 또 다른 존재를 창조하셨다면, 두 신이 존재하게 될 것인데, 그렇다면 단순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이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신 4:35).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보다 부족해야 합니다. 지어진 것은 결코 그것을 지은 존재와 같거나 더 뛰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과 거룩함을 인정할 때 우리는 사람을 취하여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고(시 8:5) 그를 "친구"라고 부르려고(요 15:14-15) 낮아지신 그분으로 인하여 놀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 이에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분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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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창조되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타당한 두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영혼 출생설은 육신의 부모들에 의해 사람의 몸과 영혼이 생성된다는 이론입니다. 영혼 출생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ㄱ)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 행동을 다시 행하시는 기록이 없습니다. (ㄴ) 아담은 자신의 모양과 같은 아들을 낳습니다(창 5:3).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지 않으셔도 "생령"이 되는 것 같습니다. (ㄷ) 창세기 2장 2-3절은 하나님이 창조 활동을 그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ㄹ) 아담의 죄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부모로부터 몸과 영혼을 다 물려 받을 때 이치에 맞습니다. 영혼 출생설의 약점은 육체적인 과정을 통해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혼 출생설은 몸과 영혼이 뗄래야 뗄 수 없게 연결된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영혼 창조론은 인간이 잉태될 때 하나님이 새로운 영혼을 창조한다는 견해입니다. 창조론은 많은 초기 교회 교부들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또한 성경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영혼의 기원을 육신의 기원과 구별합니다(전 12:7; 사 42:5; 슥 12:1; 히 12:9). 둘째, 하나님이 필요한 순간에 각 개인의 영혼을 창조하신다면,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확고해집니다. 창조론의 약점은 창세기 2장 2-3절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멈추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계속 새로운 영혼을 창조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존재, 곧 몸과 혼과 영 전체가 죄에 의해 감염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위해 새로운 영혼을 창조하신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죄에 감염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견해는 성경적인 지지가 결여된 견해인데 하나님은 동시에 모든 인간의 영혼을 창조 하셨으며, 잉태되는 순간에 영혼을 그 사람에게 "붙이는" 개념입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들을 하늘에 저장해 두었다가 사람의 몸이 생겨나면 영혼을 붙여준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견해는 성경적인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며 대개는 "뉴에이지" 또는 환생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지지를 받습니다.

영혼 출생설이든 영혼 창조설이든 두 견해 모두 영혼은 수태 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의합니다. 이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잉태의 순간에 하나님이 새 영혼을 창조하시든, 또는 출생 과정에서 영혼을 재생산할 수 있도록 디지인을 하셨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의 각 영혼의 창조를 책임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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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세기 동안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 생명의 기원이 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시계 제조공 없이 시계가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이야기꾼 없이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우리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합니다(창 1:27).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존자로서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십니다(시 104:10-32). 그분은 생명이시며(요 14:6),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함께 유지되고 있습니다(골 1:17).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조차도 그분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사람이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바라기가 빛 없이, 장미가 물 없이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자로서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으며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요 1:4).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여지는 것”(요 10:10)입니다.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는 모든 자들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요 3:15-16). 사람이 참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요 17:3).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육체적인 삶만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 날에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창 2:17).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불순종했으나, 그날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누렸던 영적인 삶, 하나님과의 교제,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는 자유, 영혼의 무죄와 순결 등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교제하도록 지음을 받은 아담은 저주를 받아서 전적으로 육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지로부터 영광으로 옮기려고 의도하셨던 것이 이제는 먼지에서 먼지로 옮겨가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아담처럼 여전히 땅에서 활동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행복해 보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에도 즐거움과 유쾌함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유쾌함 조차도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는 충분하게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기분 전환 및 재미를 찾는 삶을 삽니다. 육체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은 태평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주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죄를 지을 때에도 일종의 낙이 있다고 말합니다(히 11:25). 문제는 그 낙이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짧습니다(시 90:3-12). 조만간, 쾌락주의자는 비유 속의 방탕한 아들처럼 세상적인 기쁨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눅 15:13-15).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허망한 쾌락 구도자는 아닙니다. 구원 받지 못한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절제되고 똑바른 삶을 살면서 심지어 행복과 보람을 누립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충실과 정직, 절제 등, 유익을 주는 어떤 도덕적인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는데, 하나님 없이는 사람은 오직 이 세상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것이 내세를 대비하는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21절에 있는 부유한 농부의 비유와 마태복음 19장 16-23절에 나오는 젊은 부자(그러나 매우 도덕적인)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보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이 없이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화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도 화평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전혀 화평하지 못한 사람은 늘 불안을 느낍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내적으로 혼란하다는 신호입니다. 역사를 보면 쾌락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삶의 일시적인 기분 전환을 맛보기는 하지만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짜증스러운 느낌은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추구해 본 후에 그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전도서에 기록했습니다.

솔로몬은 지식 그 자체는 헛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전 1:12-18). 그는 쾌락과 부의 헛됨을 발견했습니다(전 2:1-11). 물질주의는 어리석은 것이며(전 2:12-23), 재물은 덧없는 것입니다(전도서 6장).

솔로몬은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전 3:12-13), 그리고 지혜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현명한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다른 말로 하면, 삶에는 육체적인 차원 그 이상의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핵심을 강조하십니다. 떡(육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영적인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비참에 대해 우리 자신 안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할 때만 생명과 만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의 운명은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삶이 끝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됩니다. 부자와 나사로(눅 16:19-31)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즐겁고 편한 삶을 누리는 반면, 나사로는 힘든 삶을 살지만 하나님을 압니다. 그 두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각자의 인생에서 택한 선택의 진정한 엄중함을 알게 됩니다. 부자는 삶에 부의 추구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한편, 나사로는 낙원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 땅에서의 짧은 생존 기간은 그들 영혼의 영원한 상태와 비교할 때 희미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 중에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영원한 느낌을 주셨습니다(전 3:11). 영원한 운명에 대한 느낌은 오직 하나님 그분 안에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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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의 영혼은 불멸합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많은 성경 내용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시 22:26, 23:6, 49:7-9; 전 12:7; 단 12:2-3; 마25:46; 고전 15:12-19). 다니엘서 12장 2절은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친히 악한 자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는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벌과 영생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 똑같은 헬라어 단어를 볼 때 악인과 의인 모두 영원한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의 틀림없는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든 잃든, 하늘 또는 지옥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삶과 영적인 삶은 우리의 육체의 몸이 죽더라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 받은 경우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부한 경우에는 지옥의 형벌 가운데 영원히 살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 영혼이 영원히 살뿐만 아니라 우리 몸이 부활할 것을 약속합니다. 육체의 부활에 대한 이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부에 있습니다(고전 15:12-19).

모든 영혼은 불멸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방식으로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시작과 끝이 없는 참으로 유일한 영원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존재해 오셨으며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든 천사든 모든 지각 있는 피조물들은 그들에게 시작이 있다는 점에서 유한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일단 존재하게 되면 영원히 살지만, 성경은 우리의 영혼이 항상 존재하여왔다는 개념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대로 불멸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시작이 있습니다. 즉,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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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모양의 빈 자리"(God-shaped hole) 개념은 모든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영혼(영과 생명)의 공허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모양의 자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그 마음에 존재하는 무엇인가 저 밖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것, 또는 어떤 ‘다른 것’을 향한 갈망을 말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사람을 지으셨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을 향한 우리의 욕구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과 연결되고자 하는 타고난 욕구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 소욕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소욕은 “하나님 모양의 자리”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무시하거나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우리 마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솔로몬은 같은 개념을 반복합니다.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전 9:3). 신약은 다음과 같이 동의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 7). 로마서 1장 18-22절은 사람들이 “하나님 모양의 자리”를 포함하여 하나님에 관해 알려주는 여러 계시들을 무시하고 그 대신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을 숭배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사업, 가족, 스포츠 등 하나님이 아닌 다른 뭔가를 추구하며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하지 않은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면서 결코 만족하지 못하며 왜 그들의 삶이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지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추구하면서 한 동안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모든 재물과 성공과 존경과 능력을 소유하였던 자, 곧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솔로몬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헛되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그가 추구했던 것들이 만족을 주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사각 못이 둥근 구멍을 채울 수 없듯이, 우리 각 사람 안에는 오직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사람 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하나님 모양의 자리”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 모양의 자리”가 채워질 수 있으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만족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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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지"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악 된 현재 상태는 아담과 하와의 선택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 형상에는 선택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는 사람이 무엇이든 그가 기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속성과 일치하는 것에 국한됩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어떤 다리를 건너거나 건너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은 다리 위로 날아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의 속성 때문에 그는 날지 못합니다. 비슷하게, 사람은 자신을 의롭게 만들도록 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죄의 속성으로 인해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롬 3:23). 이처럼 자유 의지는 속성에 의해 제한됩니다.

하지만 이 제한이 우리의 책임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국가(이스라엘)를 택하셨지만 그 나라의 각 개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택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이외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택할 수 있었습니다(즉, 룻과 라합처럼).

신약 성경에서 죄인들은 계속해서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고 명합니다(마 3:2, 4:17; 행 3:19; 요일 3:23). 회개에 대한 부름은 택하라는 부름입니다. 믿으라는 명령으로 청자가 명령에 복종하기를 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몇몇 불신자들을 향해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즉,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올 수 있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오지 않는 것을 택하는데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그러므로 구원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롬 1:20-21).

그러나 인간이 죄의 본성에 의해 제한을 받으면서 어떻게 선한 것을 택할 수 있습니까? 자유 의지가 진정으로 구원을 택할 수 있도록 ‘자유’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요 15:16). 따라서 성령께서는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요 1:12-1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엡 4:23) 새로운 속성을 그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 그 사람의 의지 안에서나 그 의지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동기, 욕구 및 행동은 자발적이며, 우리는 그러한 자발적인 것들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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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장 14절은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이 구절의 맥락은 우리의 육신의 놀라운 특성입니다. 인간의 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유일한 유기체입니다. 인체의 복잡함과 유일함은 창조주의 생각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말해줍니다.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보이는 가장 작은 미세한 세포에 이르기까지 신체의 모든 면은 심히 기묘하게 지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엔지니어들은 강력한 재료를 횡단면의 바깥 쪽에 붙이고 내부를 가볍고 약한 재료로 채움으로써 강하지만 가벼운 들보를 설계하는 방법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이유는 일반적인 굽힘이나 응력을 다룰 때 구조물의 표면에 가장 많은 양의 응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뼈의 횡단 면은 강한 물질이 바깥 쪽에 있고 내부 쪽은 다양한 종류의 혈액 세포를 위한 제조소로 사용됩니다. 필요한 만큼 빛을 덜 또는 더 들어오게 하는 능력과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자동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복잡한 카메라를 검토해 보면, 우리는 카메라가 인간 눈의 기능을 반복적으로 모방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두 개의 안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어떤 물체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판단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 역시 심히 기묘하게 지어진 놀라운 기관입니다. 그것은 뭔가에 계속 집중하면서도 심장 박동, 혈압, 호흡, 걷고, 달리고, 서고, 앉을 수 있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신체의 많은 자동 기능을 배우고, 추론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순수한 계산 능력에서 인간의 두뇌를 능가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추론 작업을 수행할 때는 원시적입니다. 두뇌는 또한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실험에서 사람들이 세상을 거꾸로 보이게 하는 안경을 착용했을 때 그들의 두뇌는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신속하게 눈을 통해 받은 정보를 재해석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장시간 눈 가리개를 썼는데, 두뇌의 "시각 센터"는 곧바로 다른 기능을 위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철도 근처의 집으로 이사하면 곧 열차의 소리가 뇌에 의해 걸러지기 때문에 그들은 소리에 대한 의식을 잃게 됩니다.

소형화에 있어서도 사람의 몸은 심히 기묘하게 지어진 놀라운 작품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세부 사항을 포함한 몸 전체의 복제에 필요한 정보가 세포의 핵에 이중 나선 조직으로 저장되는데, 인체의 세포의 핵은 수십 억 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경계가 대표하는 정보 및 제어 시스템은 사람들이 개발한 서툰 전선 및 광케이블 발명에 비해 놀랍도록 치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때 "단순 세포”로 불리던 각 세포는 사람이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작은 제조소입니다. 현미경이 점점 더 강력해짐에 따라 인간 세포의 놀라운 경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임신된 인간 생명의 단일 수정 세포를 생각해보십시오. 자궁 내의 하나의 세포로부터 모든 종류의 조직, 기관 및 시스템이 정확한 때에 함께 일하면서 놀랍도록 협조적인 과정을 통해 발달합니다. 한 예가 신생아 심장의 두 심실 사이의 막에 있는 구멍입니다. 이 구멍은 아기가 자궁에 있으면서 탯줄을 통해 산소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열려 있지만 출산 과정의 가장 정확한 시기에 허파로부터 오는 혈액의 산소를 허용하기 위해 닫힙니다.

또한 신체의 면역 체계는 많은 적을 물리치고 가장 작은 문제(심지어 DNA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기도 합니다.)에서부터 가장 큰 문제(뼈를 고치기도 하고 큰 사고에서 회복시키기도 합니다.)까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결국 몸을 무너뜨리는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 동안 우리의 면역 체계가 우리를 어떤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구해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인체의 기능 또한 놀랍습니다. 크고 무거운 물체를 다루기도 하고 섬세한 물건을 깨뜨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루기도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화살로 활을 쏘아 반복적으로 멀리 있는 표적을 맞출 수 있으며, 키보드의 키들을 생각하지 않고 신속하게 타자를 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고, 걷고, 달리고, 돌고, 등반하고, 수영하고 공중제비 및 뒤집기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구를 돌려서 빼거나 이를 닦거나 신발을 묶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들은 생각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직까지 이러한 방대한 범위의 일들과 동작을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을 설계하거나 프로그램화 하지 못하였습니다.

소화관 및 그와 관련한 기관들의 기능들, 심장의 수명, 신경과 혈관의 형성과 기능, 신장을 통한 혈액의 정화, 내이와 중이의 복잡성, 맛과 냄새의 감각, 그리고 우리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수 많은 것들은 인간이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기이한 것들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심히 기묘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주를 알게 될 때, 또한 그분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에 놀라게 될 때 얼마나 감사하게 되는지요(시 139: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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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죽이는" 안락사는 어려운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손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조기에 끝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죽음의 과정을 연장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고 싶지만 죽음을 연장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사람이 죽는 것을 그냥 두고 그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조치를 더 이상 취하지 않아야 합니까?

이와 관련한 문제는 조력 자살입니다. 본질적으로 조력 자살을 찾는 사람은 안락사 하려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고통 없이 신속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살을 돕는 사람은 그 상대가 쉽게 자살할 수 있도록 여러 필요한 준비와 장비를 마련해 줍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과정을 시작하는 사람은 자살하려는 그 사람입니다. 돕는 자는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 죽음 자체에는 ‘손을 떼는’ 접근을 취합니다. 조력 자살을 옹호하는 자들은 “존엄사”와 같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긍정적인 견해를 갖도록 시도합니다. 하지만 “존엄한 죽음”은 여전히 죽음이며 조력 자살 역시 자살이고, 자살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죽음의 문화"로 묘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구에 의한 낙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실행되어 왔습니다. 이제 어떤 이들은 진지하게 영아 살해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안락사는 사회와 경제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수단이라고 장려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죽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모델로부터 철저하게 역행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원수입니다(고전 15:26).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한 선물입니다(창 2:7). 삶과 죽음의 선택이 주어지면 하나님은 "생명을 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30:19). 안락사는 그 선물을 저버리고 저주를 껴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최우선의 진리는 안락사와 조력 자살이 그릇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유한한 인생을 사는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시 89:48; 히 9:27). 그러나 하나님 만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죽게 될지 정하십니다. 욥은 욥기 30장 23절에서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라고 증언합니다. 전도서 8장 8절은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만이 죽음에 대해 최종적인 말씀을 하십니다(고전 15:26, 54-56; 히 2:9, 14-15; 계 21:4). 안락사와 조력 자살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위를 빼앗으려는 인간의 시도입니다.

죽음은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사람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게 하신 후에 죽게 하십니다. 다른 때에는 죽기 전의 고통이 짧습니다. 고통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사람이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종종 하나님의 목적은 고난을 통해 알게 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시느니라”(전 7:14). 로마서 5장 3절은 환난은 인내를 가져온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간절히 바라며 고통을 끝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마지막까지 삶의 목적을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최선이 무엇인지 아시며, 사람의 죽음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의 타이밍은 완벽합니다.

우리는 조기에 일생을 끝내려고 추구해서는 안되지만 예외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생명을 보존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재촉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잠정적으로 치료를 억제하는 것도 잘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기 환자가 자연적으로 죽게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에 직면한 사람은 지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약 1:5).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의료 행위는 치료와 죽이는 일, 이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다”고 말한 전직 의무장관 에버레트 쿱(Everett Koop)의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KOOP, The Memoirs of America’s Family Doctor by C. Everett Koop, M.D., Random House,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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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화장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사람들이 불에 타 죽거나(왕상 16:18; 왕하 21:6) 인간의 뼈가 타 버린 사건들(왕하 23:16-20)이 있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화장의 예가 아닙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열왕기하 23장 16-20절에 인간의 뼈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것이 제단을 더럽힌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구약의 율법은 그 어디에서도 죽은 사람의 몸을 태우지 말라는 명령을 하지 않으며 또한 화장된 사람에 대해 그 어떤 저주나 판단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화장은 성경 시대에 행해졌지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및 신약 신자들은 화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시대의 문화에서는 무덤, 동굴 또는 땅에 장사하는 것이 시신을 처분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창 23:19, 35:19; 대하 16:14, 마 27:60-66). 매장은 일반적인 관행 이었지만,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매장을 시체를 처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화장을 고려해도 되는 것입니까? 거듭 말하지만, 화장을 반대하는 뚜렷한 성경적인 명령은 없습니다. 일부 신자들은 화장은 하나님이 어느 날 우리의 몸을 부활시키시고 우리의 영혼과 다시 연합시키시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관습이라고 하며 반대합니다(고전 15:35-58; 살전 4:16). 그러나 시체가 화장되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그 몸을 부활시키는데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지금 즈음이면 완전히 먼지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결코 하나님이 그들의 몸을 부활시키시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재창조하시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화장은 시체를 먼지로 만드는 과정을 ‘촉진’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화장하지 않은 사람의 유골이나 화장한 사람의 유골을 똑같이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매장이냐 아니면 화장이냐에 대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따른 영역입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나 가족은 지혜를 구한 후(약 1:5) 그에 따른 확신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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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구체적으로 인간 복제에 관한 주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그 개념에 대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복제를 위해서는 DNA와 배아 세포가 필요합니다. 첫째, DNA는 생물 세포의 핵에서 끄집어 냅니다. 그 후 유전자 정보 암호를 담고 있는 이 물질을 배아 세포의 핵에 놓습니다. 새로운 유전 정보를 받은 세포는 새로운 DNA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미 그 자체의 DNA를 제거한 상태에 있습니다. 만일 세포가 새로운 DNA를 받아들이면 복제된 배아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배아 세포는 새로운 DNA를 거부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배아는 원래의 유전 물질을 그의 핵에서 제거하였기 때문에 생존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많은 경우 복제가 시도될 때 새로운 유전 물질의 성공적인 이식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배아들이 사용됩니다. 이 방법으로 복제된 생물이 만들어질 수는 있지만(예, 복제양 돌리) 변형과 문제가 없이 성공적으로 생물을 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인간 복제의 과정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는 몇 가지 성경적 원리에 따라 서술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유일합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분명히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이에 사고 팔리는 상품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식이 필요하지만 적절한 장기 기증자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대체 장기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 복제를 장려하여 왔습니다. 자신의 DNA를 가지고 그 DNA로 구성된 복제 장기를 만들면 장기 거부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값싸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복제 과정에는 인간 배아들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장기를 만들기 위해 세포들이 생성될 수 있지만, 필요한 DNA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배아들을 죽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질적으로 복제는 인간 배아들이 온전하게 자라날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고 많은 인간 배아들을 ‘쓰레기’처럼 버려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신에 의해 배아(태아)가 형성되는 것을 생명의 시작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태아는 아직 실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르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139장 13-16절은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시의 작가인 다윗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주의 눈이 그를 보셨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그가 잉태되었을 때 이미 하나님이 그를 사람으로 보시고 미래를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이사야 49장 1-5절은 이사야가 그의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선지자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아직 태에 있을 때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눅 1:15). 이 모든 것은 잉태와 함께 생명이 시작된다는 성경의 입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인간 배아를 파괴하면서 만드는 인간 복제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성경의 관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또한 인류가 창조되었다면 창조주가 계신 것이며 이에 인간은 창조주께 복종해야 하고 보고해야 합니다. 세속 심리학과 인본주의적인 대중적인 사고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사람이 절대 권위라고 믿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땅을 다스리라는 책임을 주셨습니다(창 1:28-29, 9:1-2). 사람은 이러한 책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궁극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고귀한 생명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학도 인간의 복제, 낙태 또는 안락사와 같은 윤리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만이 인간 생명에 대한 주권적인 통제권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그러한 문제들을 결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인데, 이런 일은 분명히 사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단지 사람을 유일한 피조물이 아닌 일반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본다면, 사람을 유지 보수가 필요한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보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분자와 화학 물질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각 개인을 창조하시면서 우리 각자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그분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각 개인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를 추구하십니다. 인간 복제는 유익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인류는 복제 기술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전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복제가 좋은 의도만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복제를 통제하기에 필요한 책임이나 판단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은 인간 복제가 어느 날 성공할 것을 전제로 하여 복제된 인간이 영혼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살아있는 영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우리의 존재이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5:45). 문제는 인간 복제에 의해 어떤 종류의 살아있는 영혼이 만들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결론지어진 답변이 없습니다. 아마도 인간 복제가 성공한다면 복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영혼이 있는 것을 포함하여 거의 사람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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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골 1:16)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요 3:16)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요 1:12, 11:52; 롬 8:16; 요일 3:1-10).

성경에서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 적은 전혀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은 구원 받기 전의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엡 2:1-3). 로마서 9장 8절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대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과 짝하도록 만드는 죄 가운데서 태어납니다(약 4:4; 요일 3:8).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구절인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은 요한일서 3장 10 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가정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갈 4:5-6; 엡 1:5). 이 사실은 로마서 8장 14-17절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갈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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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초기 이야기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오랫동안 살았는지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성경 학자들에 의해 제시 된 많은 가설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의 계보는 아담의 거룩한 후손들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 계보에서 궁극적으로 구세주가 태어나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들의 거룩함과 순종의 결과로 이 계보를 장수하도록 축복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설명일 수도 있지만, 성경 어디에도 창세기 5장에 언급된 개인들의 긴 수명을 특별히 이 계보에 제한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에녹 외에는, 창세기 5장은 어느 개인들이 특별히 거룩하다고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수백 년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요인들이 이에 기여했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1:6-7은 “궁창 위의 물”, 즉 땅을 둘러싼 물로 된 지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물로 된 지붕이 온실 효과를 만들었고 오늘날 지구에 내리 쬐는 많은 방사선을 차단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는데 있어 이상적인 조건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창세기 7:11은, 홍수 때, 이 물이 지구에 쏟아져 내렸고 사는데 이상적인 상태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홍수 이전(창세기 5:1-32)과 홍수 이후(창세기 11:10-32)의 사람들의 수명을 비교해 보십시오. 홍수 이후에 바로 수명이 극적으로 감소되었습니다.

또 다른 고려할 점은 창조 후 첫 몇 세대 동안에는, 인간의 유전자 코드는 약간의 결함만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질병들을 아주 잘 견뎌냈습니다. 그들의 후손은 약간 낮은 정도라 하더라도, 이러한 이점들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죄의 결과로, 인간의 유전자 코드는 갈수록 더 부패하게 되고, 인간들은 죽음과 질병에 더욱 더 예민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수명을 극적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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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은 이렇게 ‘개인적인 손길’을 주시며 자신의 역사를 마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따라서, 인간은 물질적 육체와 비물질적 영/혼 둘 다를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졌다는 것은, 가장 간단히 말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닮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도 살과 피를 가지셨다는 의미로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담은 육체와 피를 가지게 되었다는 면에서는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요한복음 4:24) 고 말씀하고 있고, 그러므로 육체가 없이 존재하십니다. 그러나, 육체는 완전히 건강하게 창조되었고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반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며,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게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통치에 인간을 맞아 떨어지게 해 줍니다(창세기 1:28).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창조주와 교류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정신적,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인 유사성입니다.

정신적으로, 인간은 이성적, 의지적인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사유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적 능력과 자유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기계를 발명하고, 책을 쓰고, 풍경을 그리고, 교향곡을 즐기고, 총계를 계산하고, 또는 애완 동물에 이름을 지어 줄 때마다, 그 또는 그녀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공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인간은 정의롭고 완전히 결백하게 창조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고 그것들을 “매우 좋다”라고 하셨습니다(창세기 1:31). 우리의 양심이나 “도덕적 잣대”는 이런 처음의 상태의 흔적이고 이렇게 원래 창조된 상태를 반영합니다. 누군가 법을 만들고, 악에 움찔하고, 선한 행위를 칭찬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 진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인간은 교제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속성과 그분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주된 관계는 하나님이셨고(창세기 3:8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았기(창세기 2:18)” 때문에 첫 번째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누군가 결혼하고, 친구를 사귀고, 어린이를 껴안으며, 또는 교회에 참석할 때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일부분은 아담이 자유로운 선택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정의로운 성품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창조주를 대적하는 악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담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켰고, 그 손상된 모양을 자신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로마서 5:12).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만(야고보서 3:9), 우리는 또한 죄의 상처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우리는 죄의 영향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구원하실 때, 그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에베소서 4:24)이 되면서, 하나님의 원래 형상으로 복구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 죄로부터의 이 구속(구원)은 우리를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이 오로지 가능합니다(고린도 후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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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6장 3절을 보고 인류에 대한 나이 제한은 120세라고 이해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창세기 11장은 120세를 넘게 사는 여러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6장 3절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120세를 넘어서 살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홍수 이후에 사람의 수명은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고(창세기 5 장과 11 장 비교) 결국 120세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창 11:24). 그 이후로, 120년을 넘게 사는 사람들은 거의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6장 3절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그 때로부터 120 년 후에 대홍수가 일어날 것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해석이 문맥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인류에게 남은 날들이 홍수에 의해 파멸되는 사람들의 살 날과 같은 셈입니다. 이 해석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노아가 500살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고(창 5:32) 노아가 600세 되던 때에 홍수가 발생하였으니(창 7:6) 그 기간은 120년이 아니라 100년이라고 지적하며 반대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6장 3절에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던 때가 언제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창세기 5장 32절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노아가 세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을 때의 나이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홍수가 120 년 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결정하신 후 수년을 기다리신 다음에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보면 전혀 하자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창세기 5장 32절과 7장 6절 사이의 100년은 창세기 6장 3절에서 언급된 120 년과 결코 상충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홍수가 있은 지 수 백 년 후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창세기 6장 3절과 시편 90장 10절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 나이를 정하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창세기 6장 3절은 홍수에 대한 예상 시간표입니다. 시편 90장 10절은 단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70-80살을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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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첫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인종만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인류입니다. 백인들, 아프리카인들, 아시아인들, 인도인들, 아랍인들, 유대인들은 다른 인종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보다는, 그들은 인류의 다른 족속들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같은 신체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물론 조금의 차이는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창세기 1:26-27).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던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요한복음 3:16). 이 “세상”은 분명히 모든 민족 집단들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편애나 편파를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신명기 10:17; 사도행전 10:34; 로마서 2:11; 에베소서 6:9), 우리도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4은 차별하는 사람들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야고보서 2:8).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민족” 집단들로 나누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방 나라들을 보살피는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러는 대신에, 자신들의 지위를 자랑하고 이방인들을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대감을 낳는 분리의 벽을 파괴하고 이런 것들을 종식시키셨습니다(에베소서 2:14).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 편견, 그리고 차별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업적에 상처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34). 하나님께서 공정하고 편애함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그와 같은 높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그분께 한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멸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대신해 죽으신 어떤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들과 다양한 정도로 일어나는 인종 차별은 수천년 동안 인간이 지닌 고질병이 되어 왔습니다. 모든 족속들의 형제들 그리고 자매들이여,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인종 차별, 편견, 그리고 차별의 희생자들은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표명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당신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을 수 있으나, 우리들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훨씬 더 없습니다. 인종차별, 편견, 그리고 차별을 행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당신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로마서 6:13). 갈라디아서 3:28의 말씀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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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인간의 서로 다른 “인종들” 이나 피부 색깔들의 기원에 대해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직 한 인종, 한 인류만이 있습니다. 한 인류 안에 다양한 피부색과 다른 신체적 특징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바벨탑에서 언어를 혼란케 하실 때, 또한 다양한 인종들을 만드셨다고 짐작합니다(창세기 11:1-9).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의 과도한 열에 생존하기 위해 유전적으로 더 잘 준비된 검은 피부처럼, 인간이 다른 생태계에 살아 남을 수 있도록 유전자를 변화시키셨다는 것은 가능한 추론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동하게 하여, 인간을 언어적으로 분리하셨고, 그리고는 각 인종 집단이 궁극적으로 머물 지역을 근거하여 인종마다 다른 유전적 차이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추론이지만, 이 견해에 대한 명쾌한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홍수 이후, 다른 언어들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들끼리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하여, 한 집단이 같이 썩일 전체 인구가 되지 못하면서, 특정한 집단의 유전자 공급원이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근친상관이 일어났고, 이윽고 이런 서로 다른 집단들 사이에 어떤 특징들이 강조되어 나타났습니다(이런 모든 것은 유전자 코드에서 가능하게 나타납니다). 세대에 걸쳐 근친상관이 더 진행되면서, 유전자 공급원은 같은 한 언어를 사용하는 가족의 사람들이 동일하거나 비슷한 특징들을 가지는 정도까지 점점 작아지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설명은 아담과 이브가 흑인, 황색인 그리고 백인(그리고 이들 사이의 모든 인간)의 자손을 생산하는 유전자들을 보유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종이 썩인 부부가 가끔 피부색이 다양한 자녀들을 가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인간이 그 모습에서 다양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아담과 이브에게 다른 피부 색조를 가진 아이들을 생산하는 능력을 주셨을 것이라는 추론은 일리가 있습니다. 후에, 홍수로부터의 오직 유일한 생존자들은 노아와 그의 아내, 세 명의 노아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 이었습니다– 총 8명(창세기 7:13). 아마 노아의 세 며느리들이 다른 인종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아내가 노아와 다른 인종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 8명 모두가 썩인 인종이었을 수도 있는데, 이는 그들이 다른 인종들의 자녀들을 생산하는 유전자들을 소유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설명이든 간에, 이 질문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우리 모두가 같은 인종이고, 모두가 같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모두가 같은 목적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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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영은 성경이 인간이라고 간주하는 두 개의 주된 무형적 측면들입니다. 이 두 가지의 정확한 차이점들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영”이라는 말은 오직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만을 가리킵니다. 인간들이 영을 가졌으나, 우리는 영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씀하는 반면(에베소서 2:1-5; 골로새서 2:13), 오직 믿는 자들만이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언급됩니다. 바울의 글에서, 영적인 것은 믿는 자들의 삶에 중심이었습니다(고린도전서 2:14; 3:1; 15:45; 에베소서 1:3; 5:19; 골로새서 1:9; 3:16). 영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는 인간적 요소입니다. “영”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마다, 이것은 자신이 영 자체이신 하나님과 “연결” 된 인간의 비물질적 부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요한복음 4:24).

“혼”이라는 말은 인간의 물질적 그리고 비물질적 측면들 둘 다 모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영을 가지고 있다라고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인간들은 혼들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혼”이라는 말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근본적인 의미를 넘어, 성경은 많은 맥락들에서 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 중의 하나는 죄에 대한 인간의 열망입니다(누가복음 12:26). 인간은 원래 악하고, 우리의 혼들은 그 결과 오염되었습니다. 혼의 생명의 원리는 육체적으로 죽을 때 제거됩니다(창세기 35:18; 예레미야 15:2). 영과 함께 혼은 많은 영적 그리고 감정적 경험들의 중심입니다(욥기 30:25; 시편 43:5; 예레미야 13:17). “혼”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 마다, 살아 있든 또는 죽은 후든, 이는 전인적 인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영과 혼은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분리될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4:12). 혼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입니다. 영은 하나님과 연결된 인간의 측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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